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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불교계(朝鮮佛敎界)

《조선불교계朝鮮佛敎界》는 1916년 4월 5일에 창간되어, 동년 6월 5일의 통권 3호까지 불교진흥회佛敎振興會에서 펴낸 불교 종합잡지이다. 이 잡지의 편집 겸 발행인은 李能和였다. 불교진흥회에서는 회의 기관지로서 《불교진흥회월보佛敎振興會月報》를 1915년 12월호인 제9호까지 펴낸 바 있다. 그런데 이처럼 9호가 나온 6개월 이후에 다시 불교진흥회에서 《조선불교계》라는 명칭으로 잡지명을 전환한 이유가 문제시된다.
본래 불교진흥회는 ‘도속道俗’ 즉 승려와 일반 신도가 함께 불교중흥을 추진하는 단체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1916년 1월 2일에 개최된 선교양종 30본산연합사무소의 제5회 주지총회의 회록을 참고하면, ‘불교진흥회 사건’(그 내용은 현재 알 수 없음)으로 인하여 진흥회의 부회주 강대련이 임시사무를 ‘대변代辯’케 한다는 사정이 전하고 있다. 즉, 어떤 ‘사건’으로 불교진흥회 내에 문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당시 그 총회에 참석한 주지들은 1월 5일 일제의 우좌미宇佐美 내무부 장관의 초청을 받고 그로부터 ‘훈유訓諭’를 들었다. 그 훈유에는 불교진흥회에 대한 일제 당국의 방침이 전하고 있다. 그는 불교진흥회의 규칙을 변경하기 전에는 부회주로 하여금 일체一切 회무會務를 임시 대변하게 하고, 추후의 운용의 요체에 대하여 ‘승려僧侶와 신사信士’(재가신도在家信徒)가 연합함은 인정할 수 없다고 천명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자기의 세력이나 사리私利를 도모하고자 하는 자는 배제한다면서, 회의목적도 단순히 일편단심으로 ‘도덕사업道德事業’을 성취하여 정부의 원조가 되고, 사회의 모범이 되고, 인민의 이익이 되도록 조직해야 함을 강조 하였다. 또한 회의 재정도 절대 승려들이 담당하지 않도록 지시하였다.
바로 이러한 사정에서 불교진흥회의 그 내적인 문제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인데, 그로부터 일제 당국자에게 회의 운용방침의 조정에 대한 지시를 받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불교계》는 승려가 배제된 신사信士, 즉 일반 신도중심의 단체로 전환된 진흥회에서 펴낸 회보지인 것이다. 따라서 《조선불교계》의 발행인 겸 편집인은 이전 《불교진흥회월보》처럼 이능화가 계속 담당하였지만 그 집필진의 대부분은 일반 신도 및 ‘居士’들이 중심이 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편집의 개요는 논설論說, 강연講演, 교리敎理, 사전史傳, 문예文藝, 잡찬雜纂, 연구硏究, 소설小說, 관보官報, 휘보彙報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편집은 이전 《불교진흥회월보》 및 《조선불교계》와 거의 같다고 하겠다. 이 내용 중 특기할 것은 尙玄 居士(이능화)가 2호에 기고한 〈조선불교朝鮮佛敎와 사부대중四部大衆〉과 3호에 기고한 〈불교佛敎와 타교他敎와의 경쟁競爭〉의 글이다. 그 전자에는 당시 불교계의 사찰통계와 승려 및 신도들의 통계가 전하고, 당시 승려들을 사상 및 현실인식에 의거하여 분류한 내용이 담겨 있어 당시 불교계의 현황을 잘 전해 주고 있다. 그리고 그 후자는 당시 불교계의 도교, 유교, 기독교 등과의 상호 관련을 서술하면서 진화론적인 경쟁사회에서 그 종교들보다 불교가 사상적으로 우월하다는 입장을 개진하고 있어 역시 당시 불교계의 현실인식을 이해하는 데에 귀중한 자료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