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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저(金剛杵)

   
《금강저金剛杵》는 일제하 재일在日 불교청년들이 불교의 혁신 및 중흥을 기하기 위해 펴낸 잡지이다. 개항기 이래 한국불교계에서는 일본 불교를 배워야 하겠다는 현실인식하에서 일본의 불교계를 시찰하였으며, 다수의 불교청년들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에 유학하였던 불교청년들은 유학을 하면서도 친목도모 및 불교의 혁신을 기하기 위한 목적에서 불교청년단체를 결성하였으니, 조선불교유학생학우회(1920), 재일불교청년회(1921), 조선불교청년총동맹 동경동맹 (1931), 조선불교동경유학생학우회(1936) 등이었다. 《금강저》는 재일불교청년회의 기관지로 간행된 이래, 이후 동경동맹과 유학생학우회에서도 기관지로 계승되었다.
《금강저》는 1924년 5월에 창간되었는데 창간호는 등사판騰寫版으로, 2~14호는 석판인쇄石版印刷로 간행되었으며 15호부터는 활판인쇄로 간행되었다. 그 중 1~14호는 현재 전하지 않으며, 이번에 15~26호를 영인하는 것이지만 그 중 18호는 그 소재를 알 수 없어 포함시키지 못하였다. 이 잡지의 발행소는 금강저사金剛杵社(1~17호), 조선불교청년동맹 동경동맹(19~21호), 조선불교동경유학생회(22~26호) 등 이었다. 그리고 편집 겸 발행인은 이영재李英宰(1~6호), 김태흡金泰洽(7~15호), 곽중곤郭重坤(16호), 오관수吳官守(17호), 허영호許永鎬(18호), 강유문姜裕文(19, 21호), 박윤진朴允進(20호), 김삼도金三道(22호), 장원규張元圭(23호), 곽서순郭西淳(24, 25호), 홍영의洪永義(26호) 등이었다. 그러나 청년총동맹 동경동맹에서 1932년 12월의 21호를 낸 이후 청년총동맹이 내분을 겪게 되자 그 영향으로 청년총동맹 동경동맹이 해체되고 재정난 등으로 인하여 《금강저》도 휴간되었다. 이후 1936년에 조선불교동경유학생회가 재조직되면서 1937년 1월에 22호가 속간되기도 하였다.
재일불교청년 단체에서 이 잡지를 펴낸 것은 조선불교의 시대상을 ‘토구討究’하며, ‘사정邪正’을 비판하고, 방황하는 ‘교도敎徒’에게 희망을 주어 ‘새 불교’를 건설하려는 데에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그 새 불교 건설의 ‘준비군準備軍’의 역할을 다하겠다는 사명의식이 작용하였다고 이해된다. 그러므로 《금강저》에는 당시 한국불교계의 여러 실상에 대한 분석 및 그 비판에 관한 다수의 글이 실려 있어, 당시 불교사를 이해함에 있어서는 필독서라고 칭할 만큼 그 사료 가치가 매우 높다.
《금강저》의 편집의 성격이 그러하였기에 당시 국내 불교계, 특히 주지층에서는 이 잡지에 대한 비판이 적지 않았다. 예컨대 그 잡지의 ‘업경대業鏡臺’는 국내 불교계를 풍자식으로 비판하면서 불교계의 이면裏面을 전하고 있어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한편, 재일불교청년들은 유학생활을 하면서 잡지를 간행하였기에 각자의 ‘주머니를 털어 그 간행 경비를 충당하였다. 그러나 절대 부족한 그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방학에는 전국 사찰을 순행하면서 간행비의 모금활동을 하였다. 국내 주지층이 잡지에 대한 비판의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불교계의 대다수의 사찰 및 불교 단체 그리고 승려들은 그 간행비의 대부분을 지원하였음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이렇듯이 간행비가 문제시 되어, 잡지의 발간은 격월, 3~4개월 등의 불규칙한 간격으로 나오다가 중간에는 연 2회의 간행을 고수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