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제

닫기

불교(佛敎)

《불교佛敎》는 재단법인 조선불교 중앙교무원에서 경영하였던 불교사佛敎社에서 매월 1회의 간행을 원칙으로 펴낸 불교 종합잡지로서, 1924년 7월 15일에 창간호가 나왔으며, 1933년 7월 1일의 108호로 휴간되었다. 이 잡지의 발행소는 불교사(경성부 수송동 44번지)이었으며, 편집 겸 발행의 책임은 권상로權相老(1~83호)와 한용운韓龍雲(84・85합호~108호)이 담당하였다.
《불교佛敎》지의 창간은 1920년대 중반의 불교계의 동향과 연결하여 살펴볼 수 있다. 즉 재단법인 조선불교 중앙교무원은 1922년 12월경 총독부의 인가를 받아 출범하였다. 그러나 당시 불교계에는 일제의 사찰정책을 수용하지 않으면서 불교발전을 독자적으로 추진하였던 총무원이 있었다. 이에 그 교무원과 총무원은 일제 사찰정책 수용이라고 대변되는 현실인식의 문제로 인하여 상호 갈등을 노정하고 있었다. 그 총무원과 교무원이 상호 타협을 하여 당시 불교계의 대표기관으로 등장한 것은 1924년 4월경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 《불교》지였다.
1924년 3월 재단법인 교무원 평의원에서는 《불교》지의 발행을 결의하였는데, 그 간행의 목적은 교리 및 종제 그리고 기타 방면에서도 향상하려는 불교계의 의지를 표출하기 위함이었다. 《불교》지의 편집원칙은 정치에 관련된 문제는 배제하고, 교리 및 신앙에 관한 문제를 중점적으로 편집하였다. 그리고 관보초록과 불교계 동향을 함께 수록하고 있어 당시 불교계 동향을 이해하는 기본적인 자료라 하겠다. 아울러 당시 불교계 인사들의 기고문을 중심으로 편집하였기에 당시 불교계의 현실인식을 살필 수 있는 다수의 내용들이 상당수 있어 우리의 주목을 끌고 있다. 한편 그 이전에 간행된 불교계 잡지가 1~2년, 혹은 3~4년 정도만 간행되었던 현실을 참고하면 이 《불교》지는 이전 불교계 잡지들의 한계를 일정 부분 극복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불교》지는 불교계 동향을 보다 신속하게 보도키 위하여 전국의 주요사찰에 지방통신기자를 배치하였으니, 그곳은 고운사, 법주사, 대흥사, 유점사, 선암사, 마곡사, 건봉사, 석왕사, 화엄사, 해인사, 용주사, 김룡사, 대승사, 신흥사, 남장사, 통도사, 명봉사, 영각사 등이었다. 그리고 일본에도 유학을 하고 있던 재일불교청년을 통신기자로 두었으며(금강저사), 주요사찰에 불교사의 지사支社(분사分社)를 설치하여 불교지 보급에 역점을 두기도 하였다. 불교지 보급의 활성화를 기하려는 노력은 불교지佛敎誌 사우社友의 모집이었다. 독자회원의 개념으로 추진한 불교자의 사우는 그 운영의 규정規程과 특전 등을 두는 등 불교지 대중화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고 이해된다.
그러나 이 불교지는 간행 중간에 적지 않은 우여곡절을 겪었으니, 그는 주로 간행의 재정난과 편집원칙의 문제였다. 우선 재정난을 살펴보면, 1931년경 재단법인 교무원에서 직접 경영하던 불교사를 독립시키는 동시에 교무원에서는 약간의 보조금만을 주기로 하였다고 한다. 그 여파로 편집 책임자이었던 권상로가 퇴진하고 한용운이 편집 및 경영의 책임을 대신하였다. 이에 그 이후 1년 동안은 불교사가 독립되었으나, 그 2년 후에는 교무원 직속으로 경영권이 변동되었다. 한편, 재단법인 교무원이 경영의 책임을 담당하였던 사정도 문제가 있어 1933년경에는 당시 불교계의 행정기관으로 등장한 조선불교선교양종 중앙교무원에 경영권이 이속되었다. 그러나 이 선교양종 교무원은 당시 새로이 등장한 종회宗會와 마찬가지로 그 권한과 실제의 측면에서 불교계에서는 주도적인 권한을 갖지 못하였기에, 자연 《불교》지의 간행도 정상화시키지를 못하였다. 다음의 문제인 편집원칙에 대해서는 한용운이 편집책임을 맡았던 84・85합호 이후에 논란이 적지 않았다. 그 문제는 요컨대 한용운이 불교사의 운영을 담당하면서 불교지의 내용이 혁신되어 단순한 교리선전, 교계 활동 보도뿐만 아니라 정교분립 혹은 불교행정에 대한 비판이 집중 부각되었다. 변동된 편집원칙으로 당시 중앙 불교계의 행정담당자와 친일적인 주지 계층은 자연 불교지의 편집 노선에 이의와 의구심을 가졌다. 곧 일제의 식민통치에 반대하고 있지 않나 하는 우려인 것이다.
《불교》지는 이와 같은 재정난과 편집원칙의 문제로 인하여 1933년 7월호를 내고 휴간에 이르렀던 것이었다. 불교지의 휴간은 비단 위의 두 문제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당시 불교계 통일운동의 산물로 대두된 종회, 교무원이 불교계에서 토착화되지 못하였던 교계 내부사정과 연결되었던 것이었다. 요컨대 불교의 자주화를 지켜 내지 못하였던 불교계의 역량 부족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