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불교문헌

신역대장경新譯大藏經 금강경강의金剛經講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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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역대장경新譯大藏經 금강경강의金剛經講義
[표지]
신역대장경新譯大藏經 금강경강의金剛經講義
삼장역회 용성당 백상규 강의
김호귀* 옮김
서문
0001_0002_b_01L대저 이 경전은 일체중생의 본원각성本源覺性(모든 사람에게 본래부터 부처의 성품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에 청정한 금강의 무위불심無爲佛心(본래적인 것으로 불생불멸하는 불심을 가리킨다.)을 드러내어 견성성불見性成佛(견불성의 작용을 통하여 깨침을 성취하는 것을 가리킨다.)하도록 해 주는데, 그 본체는 집착이 없어 허공과 같고 그 지혜는 해와 달보다 밝다. 불타께서는 일체중생이 자기의 청정심에 어두워서 무량겁 동안 생사에 윤회하는 것을 보시고 불쌍하게 여겨 수보리와 더불어 묻고 대답하여 낱낱이 그 의심을 모두 풀어 주셨다.
처음에 수보리가 이 몸과 마음인 색·성·향·미·촉·법에 잔뜩 집착하여 보시함으로써 부처님의 복덕을 추구하려고 하자 세존께서 무주로써 타파하시고, 또 보시에 집착하여 불국토 장엄을 질문하자 세존께서 불국토는 장엄할 것이 없다는 답변으로써 타파하시며, 또 복덕으로 삼십이상과 팔십종호를 받는 것에 집착하자 세존께서 구족색신이 아닌 것으로써 타파하시고, 또 여래에게는 반드시 삼십이상이 있다고 집착하자 세존께서 응신과 화신은 참된 것이 아니고 보신은 상을 벗어난 것으로써 타파하시며, 또 법신에 상이 있는 것으로 집착하자 세존께서 법신은 상이 아니라는 것으로써 타파하시고, 또 법신에 진실한 아我가 있다는 것에 집착하자 세존께서 일체법에 아가 없다는 것으로써 타파하시며, 또 여래에게 반드시 삼십이상이 있다고 집착하자 세존께서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는 것으로써 타파하셨다. 이처럼 수보리의 질문에 따라서 일체를 모두 타파하시니 모든 상이 다 공하고 마음에 때가 털끝만치도 없어 일념도 붙일 곳이 없고 그 이치가 모두 소멸되어 망정을 잊게 되었다. 보는 대상인 망상이 이미 공하므로 보는 주체인 망견이 없다. 이 진실한 반야는 끝에서 끝까지 극칙하여 바로 법신행상의 한길을 뚫어 벗어나 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보리심을 일으킨 자는 저 일체법에 대하여 마땅히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며 이와 같이 믿어서 길이 법상을 일으키지 말라. 이와 같은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그것이 진실로 아는 것이고 진실로 보는 것이며 진실로 믿는 것으로서 길이 일체 법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곧 사람(人)과 법法을 다 잊고 범부와 성현이 더불어 말로 표현할 수가 없고 분별심으로도 어쩔 수가 없는 경지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일으키면 곧 어그러지고 생각을 움직여도 곧 어그러지고 만다.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른바 법상은 법상이 아니다. 이 진실한 상은 망령된 소견으로 알 바가 아니다. 반야의 진공묘지가 이에 다하였도다.

불기 2948년(1921) 10월 25일
삼장역회 백용성이 쓰다

또다시 한 말로 우리 불교 믿는 사람에게 선전코자 합니다. 우리는 오직 불심만 믿어 나의 억천 겁에 어두운 마음을 타파하고 청정도덕과 마음이 편안하고 참 즐거움을 수용합시다. 빈도가 재주가 없고 지혜가 얕으며 눈이 어둡고 손이 떨리지만 오는 세상이 다하도록 모든 중생이 정법을 깨달아 함께 성불하기를 원하며 이 경전을 번역합니다.
『금강반야바라밀경』의 제목을 해석하다
0001_0004_b_01L(의문) 금강은 견고하고 예리하여 만물을 파괴하는데 그것이 중생의 번뇌를 단절하는 비유가 아닌가.
(결답) 부처님이 최초에 『화엄경』을 설하고 만법을 거느려 일심을 해명하시니 상덕성문上德聲聞(덕행이 높은 성문) 및 적행보살積行菩薩(오랜 수행을 쌓은 보살)이 아무도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부처님이 자세하고 곡진하게 자비를 베풀어서 고상한 향상법向上法(바로 깨침으로 이르게 하는 가르침)을 버리고 얕은 법을 설하여 고구정녕하게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20년 동안에 모든 제자에게 아함부와 방등부를 설하여 근기가 점점 성숙하게 하였다. 그런 연후에 이 『금강경』을 설하여 모든 제자들에게 금강불성을 바로 가르쳐서 의심을 단절하고 믿음을 일으키게 한 것이지 모든 중생의 번뇌를 단절한다는 말씀이 아니다.
이 금강진심은 세간중생의 상정常情이 아닌 까닭에 온 세상에 부처를 아는 자가 없다. 부처님은 하늘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며 귀신도 아니고 오직 청정대원각진성淸淨大圓覺眞性이므로 그 체성을 사의思議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천상이나 인간이나 귀신이나 그 부처님의 지혜와 신통을 아무도 아는 자가 없고 대적할 자가 없다. 그 부처님은 불생불멸의 원성圓性이므로 그 성품을 깨치지 못한 자는 부처님을 알지 못한다. 부사의대용不思議大用으로써 세간에 출현하니 그 일용행사와 그 법률의 규칙과 사사법법事事法法이 세간 사람들의 상정常情으로는 측량하기 어렵다. 때문에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내가 세상에 출현하매 천상의 모든 천신들과 인간의 모든 사람들과 일체 아수라의 무리와 외도의 무리와 마왕의 무리가 모두 마땅히 놀라고 의심한다.”
무릇 천상과 인간만이 의심할 뿐만 아니라 당시의 모든 제자들도 의심하였는데 왜 그런가. 그것은 부처님이 설법을 하시되 비어 있는 것을 말씀하시다가도 홀연히 실제로 있는 것을 말씀하시며, 옳은 것을 말씀하시다가도 홀연히 그른 것을 말씀하시며, 혹 칭찬하다가 혹 배척하다가 혹 권장하다가 혹 꾸짖으시니 그 언사가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 모든 제자가 의심을 일으켜 “마왕이 부처님으로 나타나서 우리의 마음을 혼란시키는 것이 아닌가.”라고 말했다. 곧 상수제자도 의심을 냈는데 초학자가 어찌 의심을 일으키지 않겠는가. 참으로 부처님의 말씀은 믿기 어렵고 알기 어렵다.
부처님이 20년 동안 모든 제자를 가르쳐도 오히려 믿지 못하더니 오늘날에 와서 수보리가 처음으로 조금 깨달아 홀연히 세존을 찬탄하였다. 이에 부처님이 여래의 금강진심불성을 드러내어 제자들로 하여금 모든 의심을 단절하고 천진면목을 분명하게 드러내도록 한 것이지 중생의 번뇌를 단절한다는 말씀이 아니다. 저 『금강경』의 대의를 자세하게 살펴보라. 혹 어떤 사람이 그렇지 않다고 반대하는 자가 있거든 경전의 대목을 자세하게 살펴보라. 모든 대목이 수보리가 의심하는 곳에 대하여 부처님이 낱낱이 그 의심을 타파해 주어 금강불성을 바로 가르쳐 주시니 이 경전의 제목이 무릇 그 가르침이지 비유가 아니다. 이 『금강경』은 의심을 단절하고 믿음을 일으키도록 주장하는 것이다. 때문에 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믿음으로써 근본을 삼아야지 의심하면 스스로 장애만 되고 만다. 이 『금강경』은 무릇 금강불심을 바로 드러내어 모든 제자로 하여금 의심을 단절하고 진성을 깨닫게 한 것이다.
반야는 우리 조선말로 번역하면 지혜라는 말이다. 무엇을 지혜라 말하는가. 허공이 법을 설하지 못하고 법을 듣지도 못하며 지·수·화·풍으로 이루어진 육체는 원래 무정한 것으로 마치 목석과 같아서 법을 설하지도 못하고 법을 듣지도 못한다. 지금 우리의 목전에 역력하게 밝아 모든 형상이 없는 것이 법을 설하고 법을 듣는다. 이 형상이 없는 일물一物〔열반이나 진여나 깨침과 같이 언설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을 일컫는 말로서 此事, 거시기(渠), 一着子, 一圓相 등과 같은 뜻이다.〕이 진공의 하늘에 빛나며 묘유의 땅을 비추어 내·외에 한 줄기 광명이 분명하게 밝으며 행·주·좌·와 및 어·묵·동·정에 분명히 밝아서 항상 알기 때문에 반야라고 말한다.반야는 지혜이다.
무엇을 금강이라 말하는가. 이들 형상이 없는 모든 일물이 만 가지로 변화하는 곳에서 한결같이 움직이지 않고 영겁에 걸쳐서도 완연하게 늘상 존재하는 것은 금강과 같이 견고하고 죽목정령竹木精靈(대나무에 들러붙어 있는 도깨비라는 뜻으로 미혹한 존재를 일컫는 말이다.)을 베어 버리고 모든 미세한 갈등까지도 모두 단절하는 것이 마치 금강과 같이 날카롭다.
또한 이 경전의 이름을 『마하반야바라밀』이라 한다.
마하는 우리말로 번역하면 한없이 크다는 말이다. 우리의 마음이 형상은 없지만 그 밝기로는 해와 달로 비유할 수 없고 그 덕성의 크기로는 하늘과 땅보다도 넓으며 그 광대하기로는 허공을 집어삼키고 그 체는 일체에 두루하여 없는 곳이 없으며 삼세에 간단間斷이 없고 시방에 빈틈이 없다. 그러므로 마하라 말한다.
바라밀은 우리말로 번역하면 중생의 생사바다를 건너가서 무상진정도無上眞正道의 언덕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깨치면 부처님으로서 구름이 걷히고 비가 개이며 바다가 맑고 허공이 더욱 푸르며 제월광풍霽月光風이 서로 화和하고 산 빛과 물빛이 서로 비추는데 이것이 깨친 사람의 경계 된 것이다. 이와는 달리 안개가 잔뜩 끼고 구름이 가득히 몽롱하여 위는 밝고 아래는 어두우며 해와 달이 빛을 차단당하고 산과 물의 영상이 숨어드는데 이것은 미혹한 중생의 경계에 비유된 것이다. 미혹하면 생·사의 언덕에 있고 깨치면 생과 사가 없는 도를 증득한다. 그러므로 바라밀이라 말한다.
경이란 말은 길게 가르친 말씀으로 금강불성의 미묘한 진심의 오묘한 지취旨趣를 가지고 후대의 중생에게 길을 열어 주는 까닭에 경이라 말한다.
대저 이 『금강경』을 설할 때에 세 가지 의심이 있었다. 하나는 부처님이 형상 있는 색신과 형상 없는 법신을 말하시며 큰 몸과 작은 몸을 말하셨는데 제자들은 어떤 것이 진정한 부처님인 줄을 알지 못한 것을 의심한 것이다. 둘은 있음(有)을 말하시다가 홀연히 텅 빈 것(空)을 말하시며 또 텅 빈 것을 말하시다가 홀연히 있지 않음(非有)을 말하시니 이것을 의심한 것이다. 셋은 법은 알아듣지만 그 법이 하도 엄청나게 크고 자기의 근기는 미약하여 그것을 감당하지 못할까 의심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부처님이 수보리의 질문에 따라서 의심을 결단해 주신 것이다. 이로써 의심의 구름이 타파되면 자연히 금강진심이 드러날 것이다.
금강반야바라밀경또한 마하반야바라밀경이라고도 한다.
1. 청정한 대중이 법회에 모인 이유
1) 부처님께서는 설하시지만 아난은 설하지 못함을 증거로 삼다
0001_0007_b_01L이와 같음을 내1)가 듣사오니, 한때에 부처님께서 사위나라 기수급고독원2)에 계셨는데 대중 천이백오십 인3)과 같이하셨다.4)아난이 말하는 것. 이것은 아난이 부처님께 들음을 증거함이다.

용성해 내가 본래 비어서 없고 그 본래 없는 법도 곧 비어서 없다. 그러므로 그 내가 공하고, 그 법이 공한 것과, 두 가지 공한 것도 모두 비어 있으며, 모두 공한 것도 또한 비어 있는 금강불심에 큰 지혜가 원만한 이와 같은 대법을 내가 들었다. 곧 금강불심이 청정하여 천상과 인간에 길고 짧은 시간이 없는 그 일시에 또 무량원겁無量遠劫이 찰나와 무애한 그 일시에 또 스승과 제자가 그 깨침에 합치되는 그 일시에

[내가 듣는다는 인유] 아난이 세 가지5)를 묻는데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내가 열반뚜렷이 고요한 것이다.한 이후에 사념처를 의지하여 수행해야 한다. 하나는 부정을 관찰본다는 뜻이다.하여이 몸이 삼십육물의 부정으로 합해져 있음 그 애착을 벗어나야 한다. 둘은 눈과 귀와 코와 입의 혀와 몸과 뜻의 여섯 가지로 받아들임이 다 괴로운 것을 관찰하여 그 즐거운 생각을 벗어나야 한다. 셋은 마음이 생·멸하여 찰나찰나 무상함을 관찰해야 한다. 넷은 제법에 내가 없음을 관찰해야 한다. 이와 같은 네 가지 법에 의지하여 수행할 것이다.
둘째는 내가 그대들을 항상 경계했던 가르침을 경전으로 삼고 또 그것을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
셋째는 일체 경전의 첫머리에 ‘이와 같음을 내가 듣사오니, 한때에 부처님께서 어느 곳에 계셨는데 어떤 대중과 같이하셨다’는 말을 내놓아야 한다.
이와 같은 부촉을 받았을 때 아난이 ‘이와 같은 법을 내가 부처님께 들었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부처님께서 친설하신 것이지 아난이 내 뜻으로 설한 것이 아님을 확실하게 증거로 제시한 것이다. 의심을 끊은 아난존자가 항하수 물가에서 일주일 동안 교족6)을 하고 공부를 하여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성취하고 삼십이상과 팔십종호인 대인상大人相을 드러내어 대광명을 비추고 사자좌에 앉으니 그 당시의 대중이 다음과 같이 의심하였다.
‘진정으로 아난이 성불한 것인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다시 오셨는가. 타방의 부처님께서 오셨는가.’
이처럼 세 가지로 의심을 하자 아난이 청정한 범음성梵音聲으로 대중에게 ‘이와 같은 법은 내가 석가모니부처님으로부터 들은 것이다’라고 말하자 대중들은 그 세 가지 의심이 일시에 사라졌다.

[내가 들었다는 근본] 내가 들었다고 말하는데 들은 그 사람은 누구인가. 아난의 육신이 들었다면 그 육신은 지·수·화·풍의 사대로 구성되어 있어서 그 바탕이 목석과 같기 때문에 아난이 어찌 보고 듣고 느끼고 알겠는가. 그러므로 육신이 듣는다고 하면 죽은 송장도 듣는단 말인가. 그렇다면 귀가 듣는 것이 아니다. 귀가 아는 것은 그 이식耳識이 듣는 것이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 이식은 어디서 생기는가를 궁구해 보아야 한다. 우리의 동작은 모두 자성을 말미암아 응용되므로 그 자성을 자세하게 궁구해 보아야 한다.
부처님이라는 말은 우리 조선의 이상한 방언이다. 이것은 인도의 말도 아니고 중국의 말도 아니며 조선말도 아니다. 나 용성이 어렸을 때 한 노사에게 그 까닭을 물었더니 그 노사는 다음과 같이 말해 주셨다. “나도 어렸을 때 한문학자에게 그 부처라는 의미를 알 수가 없다고 물었는데 그 한문학자가 답했다. ‘우리나라 상고시대에 중국에 들어간 사신이 고승전高僧殿에 들어가서 왼쪽에 앉아 계신 부처님을 묻자 고승이 보처불補處佛이라 말하였다는 것이다.’ 이후로 그 사신이 우리나라에 돌아와서 전파한 것이 와전되어 부처라는 명사가 되었다.” 이것은 나 용성에게도 오래된 이야기로서 그 사신의 이름도 아주 잊어버렸다. 내 우치한 소견으로 생각해 보면 부처님이라는 명칭은 그 어떤 것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불佛을 온전하게 말하면 불타佛陀라 하는데 조선말로 하면 크게 깨친다는 말이다.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시는 처소는 사위국 곧 풍덕성豊德成이고 그 임금은 파사익왕이다.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의 기는 태자의 이름이고, 수는 태자의 숲이며, 급고독은 수달타 장자가 환·과·고·독(환鰥은 늙은 홀아비, 과寡는 늙은 홀어미, 고孤는 부모가 없는 어린아이, 독獨은 자식이 없는 늙은이)의 사람들을 구제한 까닭에 붙은 이름이다. 태자와 장자의 두 사람이 합쳐서 부처님께서 계시는 기원정사祇園精舍를 건설하였기 때문에 기수급고독원이라 말한다.
0001_0009_a_01L그때 세존께서 식시食時7)에 가사를 입고 발우를 가지고 사위대성에 들어가서 그 성중에서 차례로 걸식을 마치고 본래의 처소로 돌아와서

용성해 정해진 규칙으로 사시巳時(9시~11시)에 항상 재식하는 시간이 다가오면 빈·부·귀·천이 없이 아침 공양을 하려고 진시辰時(7시~9시)쯤에 석존이 가사를 걸치고 발우를 지니고 사위대성에 들어가신다. 성안에서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차례로 일곱 집을 거쳐서 걸식을 마치고 본래의 처소인 기수급고독원의 정사에 돌아오신다.
그런데 다음과 같이 의심하여 묻는다 : 부처님께서는 위엄과 복덕이 높고 높아서 천상과 인간 가운데 제일이시다. 그와 같은 복덕을 지니고 있으면서 어찌하여 걸식을 한단 말인가.
답한다 : 출가한 제자들로 하여금 만세에 모범을 보이고자 일부러 걸식을 하신다. 대저 출가인은 부모의 애정을 여의었으며, 세상의 오욕락다섯 가지 욕심으로 즐기는 것을 다 버리고 입산출가하였는데, 그것은 죽을 각오로써 대도를 깨치고자 한 것이다. 그러므로 천하를 위하는 자일지라도 집을 돌아볼 여가가 없는데, 하물며 대도를 깨치고자 하여 출가한 사람이겠는가. 비유하면 꽃을 따는 벌과 같아서 꽃은 손해가 없지만 벌의 생활은 충족되는 것과 같다. 하나의 바릿대에 일천 집의 밥이 담겨 있고, 하나의 몸으로 천하에 노니는 것이다. 푸른 하늘을 날아다니는 학이 사해와 팔방에 걸림이 없는 것처럼, 출가비구(비구比丘는 걸식을 하는 사람이란 뜻으로 스님을 일컫는다.)도 또한 그와 같음을 드러내고자 세존께서 친히 걸식하신 것이다. 색계천色界天(삼계 가운데 둘째에 해당하는 세계로서 모두 18세계로 구성되어 있다. 색계천의 경지는 초선부터 제4선까지 禪을 터득하는 단계이다.)의 사람들도 선열식禪悅食8)(선정의 기쁨으로 몸과 마음을 건전하게 하고 지혜를 얻는 일을 음식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이 충만하여 거칠고 혼탁한 음식을 먹지 않는데 하물며 생장과 숙장이 없는 부처님께서 어찌 거칠고 혼탁한 음식을 얻어 잡수시겠는가. 때문에 부처님께서 걸식하는 이유가 한편으로는 출가인에게 생활 규칙을 보이고자 한 것이고, 한편으로는 중생으로 하여금 인연복덕을 맺도록 해 주기 위함이다.
2) 금강대정金剛大定에 들어 있음을 드러내기 위하여 보이시다
0001_0010_a_01L공양을 마치고 가사와 발우를 거두고 발을 씻고 나서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9)

용성해 공양을 마치고 장차 금강반야의 대정大定에 들어가려고반야는 지혜이다. 걸치고 있던 이십오조 가사와 바릿대를 거두고 발을 씻고 자리를 펴고 몸을 단정히 하여 앉으셨다.
의심하여 묻다 : 부처님께서는 금강진신으로서 생장과 숙장이 없어 본래 공양을 하지 않으신데도 그 걸식을 하신 일이 의심되고, 또 하나는 천상과 인간을 찰나간에 왕래하고 매양 길을 가실 때는 연꽃이 발밑을 떠받치고 그 위에 네 치 정도 떠서 다니시는데 무슨 때가 묻어서 발을 씻으시는가 의심되고, 또 하나는 부처님의 마음은 항상 적연부동하여 동·정이 없는데 무슨 까닭에 새로 선정에 들어가시는가 의심된다.
답변한다 : 그 실상은 그대의 말과 같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세상에 출현하시어 만사에 모두 법칙을 두고서 온전히 만세의 모범을 보여 주고자 하신 것이다. 공양에는 네 가지 차등이 있다. 하나는 덩어리로 뚝뚝 떠서 먹는 조각밥인데 우리네 인간계에서 사람들이 공양하는 것이다. 둘은 음식에 손을 대고 그 기운만 흠향歆饗하는 것인데 귀신들이 공양하는 것이다. 셋은 음식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른 것인데 색계의 모든 천인들이 공양하는 것이다. 넷은 음식을 보기만 하면 그것이 먹는 것이 되는데 이것은 부처님께서 공양하는 것으로서 영겁에 먹고 안 먹는 것이 없는 금강마하반야金剛摩訶般若 무위진심無爲眞心 청정불타淸淨佛陀께서 무슨 걸식을 하겠냐마는 이것은 출가승려에게만 한정된 규범이다. 부처님께서는 전신이 청정하여 마치 유리에 보배달이 와서 비추는 것과 같은데 무슨 더러운 때가 부처님의 발을 더럽히겠느냐마는 후대에 참선하는 사람들에게 수신修身하는 행동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
부처님의 금강대증金剛大證은 출입이 없는데 어찌 부처님께서 선정에 들어가고 나오는 것이 있겠는가. 『보적경』에서는 ‘내가 불상과 사리탑을 세간 만세에 머물러 두는 것은 만세천하 민족으로 하여금 인연을 맺어서 장차 제도하고자 함이지 출가한 비구와 최상승법을 닦아 가는 사람을 위함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이로써 보자면 만세의 인민으로 하여금 예배하는 사람이든지 혹 공양하는 사람이든지 혹 찬탄하는 사람이든지 만세에 인연을 지어 그로부터 해탈을 얻게 하고 필경에 부처님을 친견하여 도성득입道成得入케 한 것이다. 항상 불심이 충만하여 지혜의 달빛이 대광명을 비추는 그러한 사람에게는 사리탑과 불상에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인연이 없는 중생은 제도하기 어렵기 때문에 인연을 맺어 장래에 제도하려는 까닭에 사리탑과 불상을 건설하였던 것이다. 세간법이거나 출세간법이거나 모두 인연이 없이 되는 법은 하나도 없다.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차례로 걸식을 하는 것은 부처님께서 중생과 평등하게 인연을 맺어 제도하려는 것이고, 일곱 집을 넘지 않는 것은 모든 비구들로 하여금 만족을 알도록 하기 위함이다.
2. 수보리가 일어나 설법을 청하다
0001_0011_b_01L그때 장로 수보리10)가 대중 가운데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합장하고 공경하는 자세로 부처님께 사뢰어 말씀드렸다. 희유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모든 보살을 잘 호념하시고 모든 보살을 잘 부촉하십니다.11)

용성해 그때 덕이 높고 연령이 높은 장로 수보리가 대중 가운데 있다가 먼저 다섯 가지 점잖은 위의를 보였다. 곧 자리에서 일어나서,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합장하여 공경하는 자세로, 부처님께 다음과 같이 사뢰어 여쭙는 것이다.
“금륜왕의 지위를 내버리시니 참으로 희유하십니다. 몸의 크기가 10장 6척(4미터 80센티미터)이고, 전신의 몸빛이 자금색이고, 그 신체에 나타난 32가지의 기이한 특징과 80가지의 훌륭한 신체적인 특징은 천상과 천하에 다시는 볼 수가 없는 까닭에 참으로 희유한 것입니다. 팔만사천 가지 끝없는 법문을 가졌고, 법신과 보신과 화신을 뚜렷하게 갖춘 까닭에 참으로 희유한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모든 보살을 잘 보살펴 주시고 모든 보살을 잘 부촉하십니다.”

[또 한 가지 뜻] 부처님께서 모든 제자들에게 20여 년 동안 설법하셨으나 부처님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사람이 없었는데 오늘 처음으로 수보리가 부처님의 마음을 누설한 것이다. 이에 수보리가 없었더라면 부처님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사람이 없었을 뻔했다는 것인가. 부처님께서 반야바라밀법으로 모든 보살을 잘 보살피시고 모든 보살을 잘 부촉하신 것이다. 반야는 지혜이다. 곧 밝은 지혜로써 잘 관찰하여 내·외가 항상 밝아서 삿된 것이라곤 터럭의 끄트머리만 한 것도 없고 자성여래를 잘 보살펴서 영겁에 생·사관을 타파하고 무상도無上道의 진정한 즐거움을 터득하고 그것을 수용하기 위하여 여래가 모든 보살을 보살피고 늘상 청정케 할 것을 부촉하신 것이다.

[뜻을 거슬러 보여 주다] 희유하다는 말씀에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교화에 나서서 모든 어두운 마음을 밝혀 주신 것이 희유하다는 것이다. 둘은 모든 사람에게 다 지혜가 본래 구족되어 그것이 청천백일과 같이 밝지만 부처님께서 조용하게 그것을 누설한 것이 마치 평지에 풍파를 일으키려고 한 것과 같으니 그것이야말로 수치를 모르는 부처님이시기에 참으로 희유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의 본분을 곧바로 가리킨 것으로서 사람에게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비춰 줄 수도 없으며 단절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그 모양을 말씀하신 것인데, 그 모양도 어떻게 표현할 수조차 없는 것이다. 세존께서 가부좌를 하시고 단정하게 앉아 계셨을 때에 최초의 한마디(最初句)를 누설하였는데 수보리가 아니면 그 누가 부처님의 의도를 알아차렸을 것인가. 그러고 보면 수보리도 또한 참으로 희유하다.
0001_0012_b_01L세존이시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선남자·선여인은 마땅히 어떻게 안주하고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용성해 여래법신이 청정하여 불생불멸하며 진공지혜와 묘유지혜가 뚜렷이 밝아 진정한 정각심이란 것을 수보리가 깨치고 물었다 : 금은 본래 금일지라도 풀무에 넣어서 백 번이나 단련해야 비로소 진정한 금이 됩니다. 세존이시여. 선남자·선여인으로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자는 마땅히 어떻게 그 마음을 안주하고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중생 제도의 근본적인 연유] 수보리가 소승과를 증득하였던 시대에는 자기 몸만 제도할 생각으로 천하에 덕을 펼쳐서 널리 중생을 제도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20년을 고구정녕하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眞·망妄을 가려 주고 또 널리 중생을 제도하고 천하에 덕을 펼칠 마음을 일으키니 수보리가 오늘에야 비로소 보살심을 일으켜서 위로는 부처님의 지혜를 추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할 마음을 불현듯 일으키고는 소승과 대승의 두 길을 살펴보았다. 소승의 경우는 한편에 치우쳐서 아我가 공한 것만 깨달아 그 마음을 안주하였다. 그런데 오늘 부처님께서 제자들이 편공에 집착함을 배척하시니 한편에 치우쳐 공한 법에 집착함을 버렸지만 대승진공의 지혜는 아직 확실하게 증득하지 못하고 있는 까닭에 모든 대중들의 경우 그 마음이 안정하지 못함을 보고 수보리가 그 마음을 안주하는 방법과 다스리는 방법을 물은 것이다. 또 하나는 중생의 마음이 어지러워 안주하지 못함이 마치 햇살이 비친 빈틈에 티끌이 휘날리는 것과 같고 나붓거리는 마음이 마치 바람과 같음을 보고 그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물었다.
0001_0013_a_01L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잘했다. 참으로 잘했다. 수보리여, 그대가 말한 것처럼 여래는 모든 보살을 잘 보살펴 주고 모든 보살을 잘 부촉해 준다. 그대는 이제 잘 듣거라. 마땅히 그대한테 말해 주겠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선남자·선여인은 마땅히 다음과 같이 안주하고 다음과 같이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용성해 부처님께서 가부좌를 맺고 앉아 계신 모습을 보고 수보리가 본래면목을 불현듯 깨달아 주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며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말로 “희유하십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말씀드렸다. 이 말은 겉으로 보면 부처님을 경대하여 찬탄한 듯이 보이지만 실상은 웃음 속에 칼이 있고 반죽된 흙 속에 가시가 있다는 경우와 같다. 수보리가 깨닫지 못했다면 어찌 역기逆機·순기順機, 사死·활活, 기機·용用이 구족된 말을 할 수가 있었겠는가.
수보리가 부처님과 더불어 깨닫고도 추호도 자족한 마음을 담아 두지 않고서 다시 여쭌 것은 마치 『화엄경』에서 선재동자가 오십삼 선지식을 친견할 때에 낱낱의 선지식에게 물은 경우와 같다. 곧 선재동자 자신이 먼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켜서 어떻게 보살도를 배우고 어떻게 보살행을 배워야 하는가를 물은 것이다. 이처럼 수보리도 선남자·선여인으로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자는 어떻게 마음을 안주하고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가를 물었다. 이 말은 당시의 대중과 미래의 대중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아가서 신훈新熏(후천적으로 새롭게 성취해 나아가는 모습) 및 본本·말末까지도 빠뜨리지 않고 모두 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그 질문에 답변하기를 허락하고 또 칭찬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래, 그렇다. 그대는 내 마음을 잘 터득하였고 잘 이해하였다. 여래가 어떤 법으로써 호념하고 부촉하는지 알겠느냐. 여래는 무상청정한 반야바라밀이다. 이와 같은 여래의 마음을 그대가 이미 알고 있듯이 그대의 말처럼 여래는 모든 보살을 잘 호념하고 잘 부촉한다. 그대는 이제 자세히 듣거라. 마땅히 그대를 위하여 설해 주겠다. 선남자·선여인은 그대로 위없는 청정법성에 정견심과 일체 지혜심을 구족한 청정반야바라밀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이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마음을 일으킨 사람은 다음과 같이 안주하고 다음과 같이 무상청정한 반야바라밀법으로써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0001_0014_a_01L예, 그리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원컨대 기꺼이 듣고자 합니다.12)

용성해 네, 옳습니다. 저희들이 목이 마를 경우에 시원한 물을 생각하듯이 그리고 배가 고플 때에 밥을 생각하듯이 그리고 중병에 걸렸을 때에 좋은 약을 생각하듯이 그 감로와 같은 법을 즐겁게 듣기를 원하옵니다.
3. 대승의 근본 종지
0001_0014_b_01L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보살은 반드시 다음과 같이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용성해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모든 보살마하살이 다음과 같이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별다른 뜻이 없고 부처님께서 안심하는 방법을 가르친 것이다. 위에서 그 마음을 안주하고 다스리는 두 가지 방법을 묻자 부처님께서는 소승들의 경우 항상 그 아상이 텅 빈 곳에 집착하는 까닭에 그 습기를 버리게 하려고 무릇 그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말씀하셨다. 그처럼 망상심만 그친다면 보리성품이 청정하여 저절로 안락하게 된다는 것이다.
무엇을 보살이라 말하는 것인가. 비유하면 연꽃은 더러운 곳에 있어도 항상 청정한 것과 마찬가지로 세간의 번뇌 더미 속에 있더라도 그 도심道心이 항상 청정한 까닭에 큰보살이라 말한 것이다. 널리 중생을 제도하고 세계에 널리 덕을 베풂에 있어 허공이 다할지라도 중생을 제도하는 마음은 끝이 없는 까닭에 보살이라 말한다.
그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은 여시如是라는 두 글자에 달려 있으니 그 뜻을 통달하여 이치(理)가 사事와 같고 사事가 이치(理)와 같아서 안으로 머묾이 없고 밖으로 염착이 없으며 또 중간에도 마음을 집착하지 않으면 자연히 여여한 성리性理에 부합하는 까닭에 여如라고 말하고 일념도 어기지 않는 까닭에 시是라고 말하는데 이 두 글자를 합하여 여시如是라 말한다.
0001_0015_a_01L‘존재하는 일체중생의 부류로서 알로 낳은 것이든지 태로 낳은 것이든지 습기로 낳은 것이든지 변화해서 낳은 것이든지, 색계에서 낳은 것이든지 무색계에서 낳은 것이든지, 식무변처에서 낳은 것이든지 무소유처에서 낳은 것이든지 비유상비무상처에서 낳은 것이든지 간에 내가 모두 무여열반에 들어가게 하여 멸도시켰지만,멸도라는 말은 중생의 색상을 소멸하고 모든 불조의 청정각성의 언덕에 건너가는 것이다.

용성해 내가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하나도 남김없이 열반에 들어가도록 하여 멸도시켰다고 말씀하셨다. 중생이 비록 많다고 할지라도 12종류를 벗어나지 않는다. 열두 가지를 낱낱이 자세하게 열거하자면 태·난·습·화의 사생을 벗어나지 않고, 태·난·습·화의 네 가지를 넉넉하게 궁구하여 보자면 색과 마음의 두 가지를 벗어나지 않고, 색을 가지고 말하자면 색과 무색의 두 가지를 벗어나지 않고, 마음을 가지고 말하자면 유상有想과 무상無想의 두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설령 극정極定에 이르는 것을 가지고 말하자면 상想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상想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것도 또한 12종류의 생生을 벗어나지 않는다. 남김이 없다는 것은 모든 습기와 번뇌가 없다는 말씀이고 열반이란 것은 뚜렷이 밝고 고요히 비추어 원만청정하다는 말씀이다.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더불어 생사대해를 건너서 청정무여의 열반에 들어가는 까닭에 아상과 인상과 중생상과 수자상이 소멸하고 법상도 소멸하여 천상과 인간에 자유와 쾌락을 얻어서 중생계를 멸도시킨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량하고 무수하며 무변한 중생을 멸도시켜도 실로 중생은 멸도를 얻은 자가 없다.’

용성해 이와 같이 한량이 없고 수가 없고 끝이 없는 중생을 멸도하여 하나의 원융하고 청정한 반야바라밀을 얻어서 대해탈문에 들어가도록 한다. 대해탈문이란 번뇌와 모든 습기와 모든 업장이 소멸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중생이 본래 없는 까닭에 제도할 것이 없고 부처도 본래 없는 까닭에 부처도 성취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중생을 제도하되 진실로 멸도를 얻은 중생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런 까닭에 범부의 망정이 모두 소멸하여 공할지언정 특별히 성현이라 할 것조차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0001_0016_a_01L왜냐하면 수보리여, 만약 보살에게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13)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용성해 어째서 그런가. 본디 아我가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만약 아我가 있다면 사람(人)이라고 간주할 것이 있고 아我가 인人이라고 간주한즉 중생이라고 간주하는 생각(衆生相)이 있고, 수자라고 간주하는 상(壽者相)이 있다. 이처럼 사상四相이 있은즉 진정한 보살이 아니므로 어찌 중생을 제도할 수 있겠는가. 아我가 없음을 깨달은즉 인人이 없고 아와 인이 없은즉 중생의 경계가 자연히 적멸하여 성불하기가 멀지 않을 것인데 무엇을 근심하겠는가.
일반의 범부인에게 사상은 자신에게 재물이든지 학문이든지 있으면 일체사람들을 업신여기는데 이것이 아상이 되는 것이다. 자신이 인·의·예·지·신을 행하면 나 혼자만 인人인 척하는데 이것이 인상이 되는 것이다. 좋은 것은 자기에게 돌리고 나쁜 것은 남에게 베푸는 것은 이것이 중생상이 되는 것이다. 모든 경계를 마주하여 취사심이 있으면 이것이 수자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공부하는 사람에게 사상은 아소심我所心(내 것이라는 생각)이 있는 것이 아상이다. 계행을 지닌다는 상이 있어서 파계한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이 인상이다. 삼악도를 싫어하여 천상에 태어나기를 좋아하는 것이 중생상이다. 오래 살기를 좋아하는 목적으로 복을 부지런히 닦는 것이 수자상이다. 이 사상이 없어야 비로소 부처님이다.
4. 보시(妙行)에 집착이 없다
0001_0017_a_01L또한 수보리여, 보살이 저 법에 마땅히 집착이 없이 보시를 실천해야 한다. 이른바 색에 집착이 없이 보시하고, 소리와 향기와 맛과 부딪쳐 느끼는 것과 법에 집착이 없이 보시해야 한다. 수보리여, 보살이 마땅히 이와 같이 보시하되 상에 집착이 없어야 한다.

용성해 수보리가 마음속으로 다음과 같이 의심하였다. “보살이 중생을 제도하는 것은 모든 도덕에 진리 또는 재물로 빈궁한 사람에게 베풀어 주는 것이 근본이다. 그런데 오늘 세존께서는 중생이 텅 비어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보시할 자는 누구이고 보시를 받을 자는 누구인가.”
이에 부처님께서 수보리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대답하셨다. “수보리여, 보살은 제법에 마음을 집착하여 보시하지 않는다. 눈으로 보는 것에 마음을 집착하여 보시하지 않고 귀로 듣는 소리와 코로 냄새를 맡는 향내와 입으로 맛보는 맛과 몸에 부딪쳐 느끼는 것과 뜻으로 모든 것을 분별하는 법에 마음을 집착하여 보시하지 않는다.(결론)
범부는 비록 보시를 하더라도 오역의 쾌락을 받기 위한 것인데, 그 복을 모두 받으면 다시 삼악도에 떨어지는 까닭에 세존께서 대자비로 위없는 보시를 가르쳐 주신다. 그 보시는 위없는 청정한 지혜와 더불어 합치된 것으로서 중생이 공하다는 말씀은 무명업식無明業識(근본번뇌인 무명으로 형성된 업식)이 공하다는 것이고, 오욕의 탐貪·진瞋이 공하다는 말씀이며, 눈과 코와 귀와 입과 몸과 뜻이 공하다는 말씀이고, 색과 소리와 향기와 맛과 몸에 부딪치는 것과 뜻으로 분별하는 법이 공하다는 것이며, 불법과 세간법이 모두 공하다는 말씀이다. 그렇지만 무정한 목·석과 아무것도 없는 허공과 같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법이 다 공한 곳에 자성이 싱그러워 그 밝고 밝은 것을 비교할 것이 없다. 비유하면 대단히 밝고 큰 거울이 청靑·황黃·적赤·백白·방方·원圓·장長·단短이 모두 거울 속에 나타나더라도 거울은 무심히 비추는 것과 같다. 이처럼 보살은 보시를 하지만 항상 무심하여 상에 집착하지 않는다. 중생이 공하다는 말씀을 목·석과 다름없는 줄로 알다니 그것은 참으로 애달픈 일이다. 이에 수보리가 후래의 중생을 위하여 이와 같은 의심을 일으킨 것이다.

0001_0017_b_01L왜냐하면 만약 보살이 상에 집착이 없이 보시하면 그 복덕이 불가사량하기 때문이다.

용성해 수보리가 마음속으로 조용히 다음과 같이 의심하였다. “부처님께서 상에 집착하여 보시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상이 없으면 무슨 복덕이 있겠는가.”
이에 부처님께서는 벌써 수보리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만약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은 가히 사량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0001_0018_a_01L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동방의 허공을 사량할 수 있겠느냐. 사량할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여, 남방·서방·북방·사유·상하의 허공을 사량할 수 있겠느냐. 사량할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여, 보살이 상에 머묾이 없이 보시하는 복덕도 또한 그와 같이 불가사량하다.

용성해 수보리가 마음속으로 ‘상이 없으면 무슨 복덕을 받는단 말인가’라고 하는 의심을 부처님께서 알아차리고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상이 없는 보시가 제일 크다. 왜냐하면 이 본원불성本源佛性은 광대하기로는 천·지와 허공과 만류를 집어삼키고, 그 밝기로는 일·월의 광명으로도 비유할 수가 없고, 그 시始·종終·생生·멸滅이 공하여 청정한 무루생의 지혜이다. 이에 도인이 하는 모든 행위가 다 이 자성에 계합되어 보시하는 까닭에 주는 자와 받는 자가 모두 공하고, 보시하는 가운데도 지계와 인욕과 정진과 선정과 지혜 등 일체의 백·천·만행이 다 구족되어 그 광대하기가 허공과 같다. 때문에 그 보시하는 복덕이야말로 시방허공의 변제邊際·상上·하下를 가히 헤아릴 수가 없는 것과 같다.”
수보리여, 보살은 무릇 가르쳐 준 대로 안주해야 한다.

용성해 세존께서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는데 그것은 아我가 없음을 관찰한 것으로부터 주장한 것이다. 아我가 없은즉 인人이 없고 아我와 인人의 둘을 모두 잊은즉 마음이 자연히 적멸하고 자연히 안락하고 자연히 허령虛靈하여 취하고 버리는 분별심이 없는데 이와 같이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다.
5. 여래의 참모습을 여실하게 보다
0001_0018_b_01L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가히 신상身相을 통하여 여래를 볼 수가 있겠느냐. 볼 수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가히 신상을 통해서는 여래를 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신상은 곧 신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용성해 수보리가 마음속으로 다음과 같이 의심하였다. “이전에는 부처님의 말씀이 한편으로는 보시하고 복덕을 쌓는 것으로써 중생을 교화하고 또 한편으로는 불과佛果를 부지런히 추구하라고 하셨다. 그런데 지금은 돌연히 중생의 상이 공하여 주는 자와 받는 자가 모두 공하다고 말씀하신다. 만약 상이 없으면 삼십이상과 팔십종호14)의 자금진신紫金眞身(부처님의 相好에서 몸빛을 표현한 용어)을 어떻게 얻은 것인가.”
이에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삼십이상의 몸과 팔십종호의 자금진신 및 광명체상光明體相(佛身이 광명으로 빛나는 모습)으로써 여래를 볼 수가 있겠느냐.”여래는 佛의 眞體를 가리킨다.
수보리는 영리하였기 때문에 벌써 알아듣고 말씀드렸다. “여래의 형상(身相)을 통해서는 여래의 진실한 모습(眞相)을 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신상은 곧 진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0001_0019_a_01L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무릇 모든 상은 다 허망하다. 만약 모든 형상은 진상이 아님을 본다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

용성해 수보리가 보신불과 화신불에 집착하여 불과를 추구하여 진정한 법신의 본연성품을 깨닫지 못한 까닭에 부처님께서 “신상을 통하여 진정한 여래를 볼 수가 있겠느냐.”라고 물으셨다. 그리고는 게송으로 또 말씀하셨다.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다.”
그러나 형상을 모두 부정하고 여래를 보려고 한다면 어찌 소승이나 외도와 다르겠는가. 그러나 여래는 일체의 모든 법상 곧 형상을 벗어나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곧 일체의 제법 그 당체가 그대로 공한 여래이고 또 제법은 항상 공하여 발생하지 않고 항상 머물러 소멸하지 않는다. 때문에 모든 형상이 진상이 아님을 본다면 곧 진정한 여래를 볼 것이다.

[중역重譯] 모든 형상이 다 허망하다고 하시니, 밖으로 하늘의 삼라 및 땅의 만상 내지 허공까지도 모두 그와 같은 상이므로 그것이 허망하다는 것이다. 안으로 사대로 이루어진 육신(四大肉身)이 모두 허망하다는 말씀이다. 곧 눈으로 보는 알음알이의 견해와 귀와 코와 입과 몸과 뜻으로 존재하는 일체의 알음알이의 견해가 모두 허망하다는 것이다. 육근에는 감각으로 작용하는 알음알이의 견해에 분별하는 가지가지의 현상을 받아들이고, 안으로 팔식에는 알음알이의 견해가 현상을 받아들여서 육근에 감각으로 작용하는 알음알이의 견해에다가 전달해 주는 제7식의 알음알이의 견해가 곧 허망한 것이다. 이 몸이 크고 커서 허공과 같은 팔식의 알음알이 견해가 곧 허망한 것이다. 이 모든 상이 다 허망한 것이므로 아상이 공하고, 법상이 공하고, 아상과 법상이 함께 공하고, 함께 공하다는 것도 또한 공한 것이 곧 진정한 여래라는 말씀이다. 이것은 소승의 법상에 집착함을 배척하고 대승의 초입문으로 인도하는 법이다. 그러나 백척간두百尺竿頭(극한의 경계를 가리키는 말)에 앉아 있는 사람은 참이 되지 못하는 까닭에 법안 선사가 말했다. “만약 모든 형상을 진상이 아니라고 본다면 여래를 보지 못한다.”15)
6. 깊은 믿음(正信)은 희유하다
0001_0020_a_01L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대부분의 중생들이 이와 같은 언설과 장구章句를 듣고 진실한 믿음을 내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런 말 하지 말라. 여래가 입멸한 이후 후오백세16)에도 계를 지니고 복덕을 닦는 자는 그 장구에 믿음을 내고 진실한 말씀으로 삼을 것이다. 이 사람은 일불이나 이불이나 삼·사·오불께 선근을 심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한량없는 천만 부처님 처소에서 모든 선근을 심었으므로 이 장구를 듣고 잠깐이라도 청정한 믿음을 내는 자임을 알아야 한다.

용성해 수보리가 다음과 같이 의심이 가득하였다. “만약 모든 형상이 없는 것으로써 모든 형상이 없는 결과에 계합된다면 그 뜻이 대단히 깊어서 정말로 믿기가 어렵고 알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말세중생이 어떻게 그 도를 믿을 수 있겠는가.”
이에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모든 형상을 지니고 있는 것은 다 허망하다는 사구게四句偈17)를 듣고서 중생으로서 실답게 깊이 믿는 마음을 낼 수가 있습니까.”

[의심을 단절해 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런 말을 하지 말라. 내가 세상을 떠난 이후 제1의 오백세 시대에는 해탈의 자유를 얻어 도성득입道成得入하는 자가 무수히 많고, 제2의 오백세 시대에는 선정의 수행에 힘쓰는 사람이 많아서 도를 깨치는 자가 무수히 많으며, 제3의 오백세 시대에는 『팔만대장경』을 널리 배우고 많이 듣기에 힘쓰는 사람이 많고, 제4의 오백세 시대에는 사찰을 짓고 탑을 쌓기에만 힘쓰는 사람이 많으며, 제5의 오백세 시대에는 출가한 승려들이 서로 투쟁만 하여 시是·비非로써 업을 삼는다. 이 마지막 제5의 오백세, 곧 후오백세 시대일지라도 만약 계를 잘 지키고 복덕을 닦는 자가 있다면 그는 이 경전의 가르침에 대하여 깊이 믿는 마음을 일으켜서 진실을 삼을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법을 믿는 자는 한 부처님, 두 부처님, 셋·넷·다섯 부처님에게만 선근을 심은 것이 아니라 이미 무량한 천·만의 부처님 처소에서 선근을 심었기 때문에 이에 찰나만이라도 청정한 믿음을 일으킬 수가 있다.”
수보리여, 여래는 이러한 중생들이 얻는 한량없는 복덕을 다 알고 다 본다.

용성해 청정한 마하반야바라밀의 자성을 깨쳐서 깊은 믿음을 일으킨 사람은 여래께서 그를 다 알고 다 본다. 그래서 그 모든 중생에게 한량이 없는 복덕을 성취시켜 주신다.
0001_0021_a_01L왜냐하면 이러한 중생들에게 다시는 아상과 인상과 중생상과 수자상이 없고, 법상이 없고 비법상도 없기 때문이다.

용성해 묻는다 : 어떻게 여래께서는 다 알고 다 보시는 것입니까.
답한다 :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가 열반한 후에 반야바라밀심을 일으키고 반야바라밀행을 실천하며 부처님의 깊은 뜻을 얻으면 모든 여래는 그것을 다 안다. 육근으로 받는 모든 것과 생각하는 것과 생각이 변해 가는 것과 항상 분별하는 알음알이의 견해의 네 가지가 본래 없음을 깨달아서 그 본원성품에 계합하여 다시는 아我라는 상이 없고 안·팎의 몸이 견실하지 못하여 필경에는 흩어져서 지·수·화·풍으로 모두 돌아가는 줄을 깨닫는다. 이런 까닭에 다시는 인人이라는 상이 없고 생멸심이 없는 까닭에 중생상이 없고 내 몸이 본래 없는 까닭에 수자상이 없다. 그 금강진심에 대하여 마하반야바라밀을 깨친 까닭에 생·사의 분별관을 타파하고 무량한 복락을 수용한다. 법상이 없다(無法相)는 말은 자성에 모든 명名·상相이 없다는 것이고 또한 비법상이 없다(無非法相)는 말은 청정한 대지혜광명이 없다는 말이다.
0001_0021_b_01L왜냐하면 이러한 중생들이 만약 마음으로 상에 집착하면 곧 아와 인과 중생과 수자에 집착하는 것이고, 만약 법상에 집착해도 아와 인과 중생과 수자에 집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만약 비법상에 집착해도 곧 아와 인과 중생과 수자에 집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용성해 이것은 부처님께서 미세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 것에 대하여 가르쳐 주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모든 중생이 만약 마음에 상을 취하면 곧 아상과 인상과 중생상과 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고, 만약 모든 법에 그 법상이 공하다는 것을 취하여도 곧 아상과 인상과 중생상과 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고, 만약 비법상을 위하여도 아상과 인상과 중생상과 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다. 때문에 세존께서 중생의 미세한 집착을 단절토록 한 것이다.
0001_0022_a_01L그러므로 법에 집착해도 안 되고 비법에 집착해도 안 된다.

용성해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이 저 치우친 소견에 집착할 것을 염려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법에도 집착하지 말고, 비법에도 집착하지 말라.”
이 말씀은 법과 비법이 둘이 아니고 또한 일진법계一眞法界에는 시是·비非가 없는데 어찌 법이니 비법이니 하는 두 가지 분별의 소견을 두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에 여래는 늘 말했다. 그대 비구들이여, 내 설법은 뗏목과 같은 줄 알아야 한다. 법도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비법이겠는가.

용성해 물物과 아我가 모두 없고 마음과 경계가 모두 텅 빔이여!
단절하고 잡아들이기가 어렵다.

고인이 말하였다.
“사람과 소가 모두 보이지 않으니 정히 달이 밝은 때이다.”18)
이런 까닭에 여래께서는 항상 다음과 같이 설하셨다. “그대 비구들은 내가 법을 설함에 있어 뗏목에 비유한 것처럼 수행을 해야 한다. 법도 오히려 놓아 버리는데 하물며 비법일까 보냐.”
이것이 어찌 인법因法과 과법果法이 공하고 사람과 법의 둘을 잊어버림이 아니겠는가.
7. 깨침도 없고 설법도 없다
0001_0022_b_01L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터득했느냐. 여래가 설법을 했느냐.

용성해 수보리가 마음속으로 다음과 같이 의심하였다. “부처님께서는 부처도 없고 법도 없다고 말씀하신다. 과연 부처가 없으면 여래가 어찌 성불하였고 과연 법이 없으면 여래가 어찌 법을 설하였는가.”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수보리가 말하기도 전에 알아차리고 수보리를 불러서 되물으셨다. “그대는 어째서 분별심을 일으키느냐. 여래가 과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느냐. 과연 여래가 설법을 한 것이 있느냐.” 이에 수보리가 영리한 까닭에 곧 그 뜻을 알아차렸다.
0001_0023_a_01L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제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뜻을 이해하기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할 만한 정해진 법이 없고, 또한 여래께서 설한 정해진 설법도 없습니다.

용성해 수보리가 다음과 같이 말씀드렸다. “제가 부처님께서 설하신 뜻을 이해하기로는 가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터득한 것이 없고 설법한 것도 없으며 법도 없고 비법도 없습니다. 그리고 정해진 법이 없는 것을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말하고 또 정해진 법이 없는 것을 여래께서는 설하셨습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우리말로 번역하면 ‘아뇩다라’는 이보다 높은 것이 없다는 것이므로 향상적인 자성이 가장 높아서 그 위에는 더 높은 것이 없다는 것이고, ‘삼’은 정正이므로 바르고 근본적인 지혜로 그 이치를 통달하는 것이며, ‘먁’은 바르게 얻은 후득지혜로써 만유의 현상에 통달하는 것으로 비유하면 청정허공에 해와 달처럼 밝은 것이고, ‘삼보리’는 바르게 깨달은 각覺으로 그 각성覺性이 항상 뚜렷이 밝고 고요하게 비추어 그 고요함과 밝게 비춤이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중생에게 병을 따라서 약을 주는 것과 같거늘 그 어디에 일정하게 정해진 법으로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있겠는가.
0001_0023_b_01L왜냐하면 여래의 설법은 모두 취할 수가 없고 설할 수도 없으며 법도 아니고 비법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용성해 왜냐하면 여래께서는 형상이 있는 법을 말씀하시건 형상이 없는 법을 말씀하시건 간에 일체법을 설하심에 있어서, 비유하면 연 잎사귀 위의 물방울과 같아서 그 물방울이 구르되 조금도 연잎에는 묻지 않은 것과 같다. 여래의 말씀은 이와 같아서 다 취할 수가 없고 설할 수가 없으며 일체법에 그 체상이 없는 까닭에 법이 아니고(非法) 또 저 진여자성이 청정하여 항상 실상에 머무는 까닭에 비법도 아니다(非非法). 만약 비법非法이라고 정해져 있다 하더라도 물을 건너가려면 배를 타야 할 것이고, 만약 법法이라 정해져 있다 하더라도 물을 다 건너간 사람이 배를 등에 짊어지고 가는 사람이 없듯이 부처님의 일체 말씀이 모두 도리를 따라서 정해진 법이 없으므로 법도 아니고 비법도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0001_0024_a_01L왜냐하면 모든 성현들은 다 무위법無爲法19)에서 차별이 있기 때문입니다.

용성해 본디 청정한 무위법이 성문에 있으면 고·집·멸·도의 사제법이 되고, 연각에 있으면 십이연기법이 되고, 보살에 있으면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의 육도만행이 된다. 사람의 근기에 높고 낮음과 법에 깊고 얕음은 있을지라도 그 무위법은 동일한 까닭에 “모든 성현들은 다 무위법에서 차별이 있다.”라고 말한다. 육조 대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무위법은 곧 무주無住이고 무주는 곧 무상無相이며 무상은 곧 무기無起이고 무기는 곧 무별無別이다. 그래서 탕연공적蕩然空寂하여 조照와 용用을 가득히 거두고 감각에 걸림이 없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해탈성불이다. 불佛은 곧 깨치는 것이고 깨치는 것은 곧 관조觀照하는 것이고 관조는 곧 지혜智慧이고 지혜는 곧 이 반야바라밀이다.”20)
8. 법에서 부처와 깨달음이 출생하다
0001_0024_b_01L[대의] 수보리가 마음속으로 다음과 같이 의심하였다. “내가 부처도 없고 법도 없다는 뜻은 알았지만 도저히 알 수가 없다. 단지 무위법에 계합하면 어찌 뛰어난 복을 얻겠는가.” 이런 까닭에 여래께서 상이 없는 것으로써 타파해 주셨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를 가득 채워서 보시한다면 그 사람의 복덕이 얼마나 많겠느냐.

용성해 부처님께서 수보리가 마음속으로 의심하는 것을 아시고 형상이 있는 유루복을 들어서 그 뜻을 되물으셨다.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칠보를 가지고 보시한다면 그 사람이 얻는 복덕은 얼마나 많겠느냐.”
이것은 중생이 탐·진·치로 복을 쌓으면 제아무리 많더라도 그 복에는 한정이 있어서 필경에는 무너지고 만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구족하고 있는 본성을 깨달으면 그 복은 한량이 없다는 뜻으로 물으신 것이다.
0001_0025_a_01L수보리가 말씀드렸다. 대단히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그 복덕은 복덕성이 아닌 까닭에 여래께서는 복덕이 많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용성해 수보리가 상이 곧 무상인 줄을 깨닫고서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복덕이 대단히 많습니다. 왜냐하면 이 복덕이 곧 복덕성이 아닌 까닭에 여래께서는 복덕이 많다고 말씀하십니다.”
육조가 말했다. “한량이 없는 칠보로써 보시하여도 자성에는 아무런 이익도 없다. 그러나 마하반야바라밀을 의지하여 수행하면 자성으로 하여금 모든 천당·지옥 및 육도에 떨어지지 않는 까닭에 이름이 복덕성이고 마음에 능能·소所(주관과 객관으로서 분별심을 가리킨다.)가 있으면 곧 복덕성이 아니다.”21)

[또 다른 해설] 칠보로써 보시하는 복덕이 대단히 많다. 왜냐하면 칠보로 보시하는 그 복덕은 곧 진정한 복덕성이 아닌 까닭에 여래께서는 복덕이 많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다 진정한 복덕의 경우에 많다거나 적다거나 말할 것이 없다는 것을 가리킨다. 또 복덕성이라 말한 것은 마하반야바라밀이고, 복덕성이 아니라고 말한 것은 세간진로世間塵勞의 생·멸의 마음이다.
0001_0025_b_01L만약 또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의 사구게만이라도 받고 지니며 다른 사람에게 설해 준다고 하자. 그러면 이 복덕이 저 복덕보다 뛰어나다.

용성해 상에 집착하여 보시하는 복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삼계에 윤회하는 것을 벗어나지 못하고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라는 사구게를 수지하는 복덕이 제상에 집착하여 보시하는 복덕보다 훌륭하다는 것을 비유하는데 그것은 산술로는 헤아릴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 사구게의 뜻은 곧 금강마하반야바라밀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금강’은 우리의 금강불심으로서 무위의 진여자성이 견고하고 또 날카롭고 또 밝아서 이 금강불심은 본디 생·사가 없어 불생불멸한 것이다.
‘마하반야’는 큰 지혜가 뚜렷이 밝아서 천·지의 만유와 허공을 모두 집어삼키는 것으로 그 진심의 광대한 공덕이 무량한 까닭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한편으로는 저 『금강경』 내지 그 가운데 사구게 등을 선지식으로부터 그 뜻을 배워서 그 금강불심의 진리와 도덕을 항상 마음에 지녀서 자기의 무상도덕의 진리를 견고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널리 중생을 제도하고 널리 천하에 덕을 펼치는 까닭에 타인을 위하여 설해 주면 그 복덕이 참으로 어리석은 복덕을 닦는 것보다 뛰어나다. 왜냐하면 그 복덕은 능能·소所의 분별심을 벗어났고 시是·비非의 분별심을 단절하였고 존存·망亡도 없고 득得·실實도 없기 때문에 복덕을 다·소의 기준으로 말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0001_0026_a_01L왜냐하면 수보리여, 모든 부처님과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가르침은 다 이 경전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용성해 수보리여, 왜냐하면 일체의 제불과 제불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 모두 이 경전에서 나왔기 때문이라는 이 대목에서 이 경전으로부터 나왔다는 말은 이 경전이 붓과 먹으로 쓴 경전이 아니라 금강불심의 무위진경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심경』에서는 금강불성이 허령불매虛靈不昧하여 온갖 이치를 갖추어 만사에 응하되 묘리가 무궁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반야’는 지혜智慧인데 ‘지’는 방편으로 공功을 삼고 ‘혜’는 결단으로 용用을 삼아서 일체시에 각조覺照하는 마음이다. 그리하여 일체의 제불과 제불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모두 각조覺照하는 가운데서 나온다는 것이다.
수보리여, 소위 부처님의 가르침은 곧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다.

용성해 함허 스님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진성은 연기에 걸림이 없는 까닭에 불법을 출생하고 연기는 진성에 걸림이 없는 까닭에 불법이 곧 불법이 경우 불법은 연기를 가리킨다.이 아니다.”22)
일체의 글자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으므로 무릇 경전을 의지하여 그 뜻만 취해야 한다. ‘반야’는 불법을 출생하지만 그 반야는 본디 불법이 아니므로 “소위 부처님의 가르침은 곧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9. 관념(一相)과 비관념(無相)
0001_0026_b_01L[대의] 이 관념(一相)과 비관념(無相)의 대의는 수보리가 다음과 같이 의심한다. “법도 설할 것이 없고 부처도 성취할 것이 없으며, 또 모든 것을 가히 하나도 얻을 것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세존께서 옛날 우리 성문들을 위하여 고·집·멸·도의 사제법을 말씀해 주신 것은 법이 아니었던가. 우리가 의지하여 각각 그 결과를 얻었는데 그것은 모두 법이 아니란 말인가. 우리가 열반에 의지하여 머무는 것이 아닌가. 어째서 세존께서는 일체가 모두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인가.”
이에 세존께서는 수보리를 비롯하여 천이백 명의 대중에게 도과道果를 얻은 제자들의 마음을 거슬러서 다음과 같이 물으신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수다원이 ‘나는 수다원과를 얻었다’고 생각하겠느냐.

용성해 그대들이 수다원과를 얻었으면 얻은 상이 있느냐. 비유하면 꿈을 깨달은 사람에게 그 꿈을 얻은 것이 있겠느냐.수보리가 사실대로 대답한다.
0001_0027_a_01L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수다원은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 자’라고 불리지만 들어간 것이 없는데, 색·성·향·미·촉·법에 들어간 것이 없는 것을 수다원이라 말하기 때문입니다.

용성해 수보리는 왕년에 자신이 얻은 소승과를 사실대로 드러내어 대답하였다. “세존이시여. 아닙니다. 수다원에게는 비록 생·사를 거슬러 성현의 부류에 들어갔지만 들어갔다는 상이 없습니다. 그래서 보는 모든 색상과 듣는 모든 소리와 냄새 맡는 모든 향기와 먹는 모든 맛과 닿는 모든 촉과 분별하는 모든 법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수다원이라 말합니다. 수다원이 이미 거친 번뇌를 벗어나서 성현의 부류에 들어갔지만 그 과果를 얻었다는 마음이 없는 까닭에 소승과를 초과한 것입니다.”
0001_0027_b_01L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사다함이 ‘나는 사다함과를 얻었다’고 생각하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사다함은 ‘한번 왕래할 자’라고 불리지만 실로 한번 왕래함이 없는 것을 사다함이라 말하기 때문입니다.

용성해 수보리여, 수다원은 그대의 말과 같다. 또 사다함의 경우에 자신이 사다함을 얻었다고 생각하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없습니다. 사다함의 경우 이름을 일왕래라 하는데 실로 왕래가 없으므로 사다함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사다함은 우리말로 번역하면 ‘한번 온다’는 뜻인데 욕계에서 미혹을 단절하고 수명이 다한 이후에 다시 한번 천상세계에 갔다가 다시 인간계에 와서 아나함을 성취하는 까닭에 일래과一來果라고 말한다.
0001_0028_a_01L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나함이 ‘나는 아나함과를 얻었다’고 생각하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아나함은 ‘되돌아오지 않는 자’라 불리지만 실로 되돌아오지 않음이 없는 것을 아나함이라 말하기 때문입니다.(아나함은 욕계의 구품혹九品惑을 단절하고 한번 천상에 가면 다시는 오지 않는다는 경지이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라한이 ‘나는 아라한도를 얻었다’고 생각하겠느냐.


용성해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나함23)은 그대의 말과 같다. 그리고 아라한의 경우 자신이 아라한도를 얻었다고 생각하겠느냐.아라한은 그 신통이 천지를 움직이고 날아다니고 그 변화를 헤아릴 수가 없다. 또 아라한의 경우 번뇌가 영원히 소멸되어 어떤 것과도 다툼이 없다. 욕망의 마음이 없으므로 무명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모든 것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자를 아라한이라 말한다.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실제로 아라한이라 할 만한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아라한이 ‘나는 아라한도를 얻었다’고 생각한다면 아·인·중생·수자에 집착하는 것입니다.24)

용성해 수보리가 취할 것이 없는 것으로 대답하여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실로 아라한이라 할 만한 법이 없음을 일컬어 아라한이라 합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아라한 자신이 아라한도를 얻었다고 한다면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을 다투는 것이 됩니다.”아라한의 경우 가히 번뇌를 단절할 것이 남아 있지 않고 탐·진을 벗어날 것이 없으며 마음에 받아들임과 거부함이 없고 마음과 경계가 함께 공하고 내·외가 항상 고요하므로 아라한이라 말한다.
0001_0028_b_01L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저를 다툼이 없는 삼매(無諍三昧)25)를 얻은 사람 가운데 제일이고 욕망을 벗어난 사람 가운데 제일가는 아라한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용성해 수보리는 자기가 증득한 도를 인증하여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저를 가리켜 다툼이 없는 삼매를 얻은 사람 가운데 가장 제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욕심을 벗어난 것으로 제일가는 아라한이라 말씀하십니다.”
육조가 말했다. “아라한은 마음에 생·멸·거·래가 없고 오직 본각本覺만이 항상 밝게 비추기 때문에 무쟁삼매라 말한다.”26)
삼매는 우리말로 번역하면 정수正受라 말하기도 하고 정견正見이라 말하기도 한다. 멀리 95종의 사견邪見(부처님 당시에 불교를 제외한 인도의 사상계를 총칭하는 말이다.)을 벗어나 있는 까닭에 정견이라 말한다. 허공 가운데는 밝음과 어둠이 서로 다투고 자성 가운데는 사邪와 정正이 서로 다투는데 일념도 사심이 없어야 바로 무쟁삼매의 경지가 된다.
세존이시여.27) 그러나 저는 제가 욕망을 벗어난 아라한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용성해 수보리는 자신이 모든 상을 취하지 않은 것을 드러내어 말씀드렸다. “저는 제가 욕심을 벗어난 아라한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0001_0029_a_01L세존이시여, 제가 아라한도를 얻었다고 생각한다면 세존께서는 ‘수보리는 아란나행(寂靜行)을 누리는 사람이다. 수보리는 실로 아란나행을 한 것이 없으므로 수보리야말로 적정행을 누리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용성해 수보리는 세존이 묻는 곳에 앉아서 답변으로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제가 아라한도를 얻었다고 하면 세존께서는 저한테 아란나행을 누린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실로 아란나행이 없기 때문에 세존께서는 저한테 아란나행을 누린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관념(一相)과 비관념(無相) 분의 대의가 집착이 없는 진정한 종지(無住眞宗)를 보여 주는 것인데 대중은 다음과 같이 의심한다. “부처도 추구하지 말고 법도 취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런즉 지취旨趣는 도무지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면 어째서 세존께서는 옛날에 우리 성문들에게 생사를 벗어나서 열반에 안주하라고 가르치셨는가.”
소승들은 오로지 공하고 적적한 곳에 탐착해 있다가 오늘 세존께서 금강의 망치로써 소승에 집착해 있던 마음의 굴레를 타파해 주셨지만 아직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는 미처 깨달아 들어가지 못하고 어떻게 수행해야 할지를 모르고 의심한 것이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수보리가 깨친 경지를 붙잡아서 되물으셨다. “그대들이 수다원과·사다함과·아나함과·아라한도를 얻었을 때에 그것을 얻었다는 어떤 상이 있었느냐. 오욕의 번뇌경계에 들어가면 범부와 같고, 또 얻은 것이 있으면 아상과 인상과 중생상과 수자상을 드러내는 것이 되는데 그대들은 얻은 것이 있느냐.”
수보리가 그 경지에 이르러 아我가 없고 상相이 없는 말씀으로 대답하였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그렇다면 이제 그대들은 여래에게는 보리에도 집착이 없다는 것을 다시는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10. 정토를 장엄하다
0001_0030_a_01L[대의] 수보리가 위에서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서 불과佛果에 집착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 그러고 보면 불과를 성취하지 못할 터인데도 불구하고 부처님께서는 연등불에게서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았고 또 오늘날 성불하시어 삼십이상과 팔십종호에 자금진신의 대인상을 갖추셨으니 이것이야말로 결정코 불과를 성취한 것이 아니겠는가. 수보리가 이와 같이 마음속으로 의심하자 부처님께서는 무득無得의 가르침으로 그 의심을 타파해 주시는데 이하의 내용을 보기로 한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옛적에 연등불 처소에서 법을 얻은 것이 있느냐. 없습니다.28)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연등불 처소에서 실제로 법을 얻은 것이 없습니다.

용성해 수보리가 머묾 없는 법을 듣고서 머묾이 없는 마음의 바탕이 영지불매靈知不昧함을 깨쳤지만 또다시 의심하였다. “비록 보리는 머묾이 없을지라도 불과는 결정이 있는 것이 아닌가. 만약 성불이 없다고 한다면 세존께서는 어째서 연등불에게서 수기를 받아 오늘날 성불하셨는가.”
세존께서 수보리에게 되물어서 그 의심을 해결해 주셨다. “비록 연등불이 여래에게 수기를 주었을지라도 무릇 여래의 마음을 인가했지만 실로 얻은 것이 없다. 만약 얻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증상만이므로 연등불이 여래에게 수기를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뜻으로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연등불 처소에서 얻은 법이 있느냐.” 그러자 수보리가 재빨리 깨닫고 말씀드렸다. “없습니다. 여래께서는 연등불 처소에서 실로 얻은 법이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무릇 자성이 본디 청정한 줄을 깨닫고 본래 번뇌가 없는 줄을 깨달아서 항상 고요하고 항상 비춰서 정각을 성취한 것인데, 비유하면 햇빛이 밝게 비추지만 그 광명을 취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0001_0031_a_01L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보살이 불국토를 장엄했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곧 장엄하는 것이 아니므로 장엄한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용성해 부처님께서 바로 본연의 자성이 광대하고 청정하여 불佛의 형상과 법法의 형상과 마음의 형상과 모든 형상이 다 단절되어 법성의 불국토를 나타내고자 물으셨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보살이 불국토를 장엄했느냐.”
여기에서 부처님께서 물으신 뜻은 ‘형상이 있는 것을 가지고 불국토를 장엄했느냐. 뚜렷이 밝고 고요히 비추어 무위의 청정한 불국토는 모든 형상으로 장엄할 수 없는 것을 누설한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대저 수행하는 수도인에게는 자기가 자기를 장엄하는 것에 세 가지가 있다.
먼저 하나는 세간에서 불국토를 장엄하는 것이다. 입을 청정하게 하여 거짓으로 하는 말과 모질게 하는 말과 이간하는 말과 억지로 꾸미는 말과 모든 불결한 말을 하지 않고 청정한 덕음德音을 내는 것이 향기롭게 입을 장엄하는 것이다. 몸으로 인자한 행동을 하여 중생이 따르는 덕을 좋아하여 만물에 손해를 입히지 않고 몸을 청정하게 지녀 음탕하고 무례함을 행하지 않고 예법을 행하며 추호도 타인의 물건을 훔치지 않는데 이것이 향기롭게 내 몸을 장엄하는 것이다. 마음을 청정히 하여 탐욕을 부리는 마음과 성내는 마음과 어리석은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향기롭게 마음을 장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밖에 별도로 불국토를 장엄하고자 하는가.
또 둘은 자비를 실천하여 널리 중생을 제도하고 널리 천하에 덕을 펼치는 것이 불국토를 장엄하는 것이다. 곧 일체의 모든 곳에서 아만심을 두지 않는 것이 불국토를 장엄하는 것이다.
또 셋은 모든 상이 공한 것이 불국토를 장엄하는 것이다. 곧 마음이 청정하면 국토가 저절로 청정해지는 것이다.
그런데도 세간에서는 오욕을 부리고 탐·진을 부리면서 별도로 천당과 극락을 추구하는구나. 미신은 자기의 사상四相에서 생겨나는 것이지 부처님의 허물이 아니다.
0001_0031_b_01L이런 까닭에 수보리여, 모든 보살은 이와 같이 반드시 청정한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결코 색에 집착하지 않고 마음을 일으켜야 하고, 성·향·미·촉·법에 집착하지 않고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마땅히 집착이 없이 그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용성해 보살이 불국토를 장엄하는 것은 밖으로 금·은·유리 등 칠보로 장엄하는 것이 아니라 무릇 그 마음을 청정히 하는 것이다. 마음이 청정한즉 국토가 저절로 청정해진다. 때문에 청정한 마음만 일으키고 별도로 국토장엄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중생은 눈에 보이는 경계에 가지가지로 취하고 버리는 분별심을 일으키고, 색·성·향·미·촉·법에도 또한 그와 같이 분별심을 일으키는데 그것에 마음을 집착해서는 안 된다. 그 마음이 허공과 같이 집착이 없어야 하고 해와 달이 밝게 비추는 것처럼 해서 염染·정淨의 만법에 염착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모든 분별에 마음을 집착하지 말고, 분별이 없는 곳에도 마음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안심하는 묘법이 그 속에 있다.
0001_0032_a_01L수보리여, 비유해서 어떤 사람의 몸이 수미산왕만큼 크다고 하자. 그러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몸이 크다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매우 큽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몸이 아닌 것을 말씀하셨는데 그것을 큰 몸이라 말하기 때문입니다.

용성해 수보리가 또 다음과 같이 의심하였다. “부처님께서 불국토를 장엄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불국토가 없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천장대화신불千丈大化身佛께서는 또 어디에 계신단 말인가.”
이것은 보신불이 실토實土에 머무시는 것을 의심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그와 같은 수보리의 의심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그대가 천장대화신불을 크다고 생각할 경우에 어떤 사람의 몸이 수미산만 하다면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런 몸을 크다고 말하겠느냐.”
이것은 법신을 가지고 보신과 화신에 집착하는 것을 타파해 준 것이다. 곧 법신은 천·지와 세계와 허공과 만유에 그 상相이 공하기 때문에 허공이 두루하지 않음이 없는 것처럼 그 광대한 법신성法身性이 천·지와 세계와 만유를 통체적으로 집어삼키고 있는 그 원만한 자성이 작은 줄로 아는 것이냐. 천장대화신이면 어떻고 수미산이면 또 어떻다는 말이냐. 그대는 그와 같이 집착하는 소견을 놓아 버려야 한다.
11. 무위법은 복덕이 뛰어나다
수보리여, 항하의 모래 수만큼 항하가 있다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모든 항하의 모래 수는 얼마나 많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대단히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무릇 항하만 해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하물며 그들의 모래 수이겠습니까.29)

용성해 항하는 인도국의 설산 높은 곳에 있는 아뇩달지阿耨達池라는 곳에서 동쪽으로 흘러내려 이루어진 물 이름이다. 그 폭은 40리이고 물속의 모래는 매우 미세하여 금사金沙가 섞여 흘러간다. 부처님께서는 항하의 가까운 곳에 계시면서 자주 설법을 하신 까닭에 항하의 모래를 가지고 많은 비유를 하셨다. 폭이 40리에 걸친 모래의 숫자만 해도 무량한데 그 모래 숫자만큼의 항하가 있으면 항하의 수는 얼마나 많을 것이며 또 그 모든 모래의 수는 얼마나 많다고 해야 하겠는가. 때문에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항하의 모래 수만큼의 항하도 무량한데 그 낱낱 항하의 모래 수만큼의 모래 수를 어찌 헤아릴 수가 있겠습니까.”
12. 올바른 가르침을 존중하다
또한 수보리여, 이 경전의 사구게만이라도 설해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모든 세상의 천신·인간·아수라가 마땅히 공양하는 여래의 탑묘(佛塔)임을 알아야 한다.

용성해 이 경전은 금강불심이다. 이 금강불심에 대한 진리를 잘 연설하여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분명하고 확실하게 이해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만약 무소득의 깨달음과 무소득의 설법을 통달하여 금강반야바라밀법을 선전하고 유포하면 그 사람의 몸이 그대로 금강사리탑이기 때문에 천룡팔부30)가 모두 찾아와서 그것을 수용하게 된다.
하물며 이 경전 전체를 받고 지니며 읽고 외우는 사람이겠는가. 수보리여, 이 사람은 최상이고 제일가며 희유한 법을 성취할 것임을 알아야 한다.

용성해 위에서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다고 말씀하신 사구게도 복덕이 뛰어난데 하물며 경전 전체를 무수하게 받고 지니는 것이겠는가.
0001_0033_b_01L이와 같이 경전이 있는 곳이라면 곧 여래와 존경받는 제자들이 계시는 곳이다.

용성해 부처님께서 비유를 들어서 뛰어난 법을 보여 주신다. 곧 사구게를 연설하는 복덕이 항하의 모래 수만큼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를 가득 채워서 보시하는 것보다 뛰어나다는 그 법이야말로 최상이고 희유하다는 것이다. 이 사구게는 그대로 법신 전체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세간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평등하게 선전하셨다. 또 세간의 사람들은 성현을 존경하는데 성현을 따르는 자는 부처님이고 부처님을 따른 것은 경전이다. 때문에 경전은 무위의 금강불성이다. 이런 까닭에 경전이 있는 곳이라면 곧 부처님이 계시는 곳이고 또 부처님의 존경받는 제자가 있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13. 경전을 여법하게 수지하다
그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이 경전을 무엇이라 불러야 하고 저희들이 어떻게 받들어 지녀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경전의 제명은 ‘금강반야바라밀’이다. 이 제명으로 너희들은 받들어 지녀야 한다.

용성해 반야의 실제를 바로 가르쳐 주시니 수보리가 부처님의 뜻을 깨닫고 반야 전체가 드러나서 감추어진 것이 없는 까닭에 경전의 제명題名에 대하여 물었다. 이에 세존께서 ‘금강반야바라밀’이라는 제명으로 받고 지니라고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왜냐하면 여래(佛)31)가 반야바라밀을 말씀하신 것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명칭이 반야바라밀이기 때문이다.32)

용성해 대저 법당法幢을 건립하고 종지를 세우는 것은 만세에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법을 건립하고 법을 파하는 것은 모두 법왕의 법령이 자재한 까닭이다. 반야바라밀을 말씀하신 것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에 깊은 뜻이 깃들어 있다. 이 경전의 제명이 ‘금강반야바라밀’인데 이 법은 명名·상相이 없지만 짐짓 그 명·상을 내세워서 중생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이 본래 마음이 아니고 법도 또한 본래 법이 아니므로 반야바라밀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또 다른 경본에는 이 제명이 ‘반야바라밀’이라는 글귀로 되어 있는데 알겠는가.
즉금에 그 면목이 분명하구나.
0001_0034_b_01L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설법한 것이 있느냐.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설법하신 것이 없습니다.

용성해 수보리는 이미 법신의 이치를 깨달았는데도 다음과 같이 의심하였다. “법신에 상이 없으면 마땅히 그 누가 설법을 하였는가.”
이것은 법에 대하여 언설로 말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한 것이다.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힐난하여 “법신의 경우 이미 몸이 아닌 것을 깨쳤을 것인데 법의 경우도 또한 말할 것이 없다.” 이 뜻은 무릇 법신에 대하여 궁극을 보여 준 것이다. 이것은 이른바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을 더 나아가는 도리이므로 금강의 안목을 갖추어야 궁극의 경지에서 서로 상응할 것이다.
0001_0035_a_01L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삼천대천세계를 이루고 있는 미진이 많다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대단히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여, 모든 미진에 대하여 여래는 미진을 말한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미진이며 세계에 대하여 여래는 세계를 말한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세계이다.

용성해 수보리가 마음속으로 다음과 같이 의심하였다. “형상이 없다고 하면 곧 단멸에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만약 단멸하여 상이 없다면 마땅히 어디에서 법신을 볼 수가 있겠는가.”
세존께서 말씀하여 다음과 같이 그 의심을 타파해 주셨다. “비록 모든 법이 공하지만 단멸에 들어간 것이 아니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미진이 얼마나 많겠느냐.”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여래는 미진과 세계를 말한 것이 정녕 미진과 세계를 말한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미진과 세계이다.”
이 뜻은 모든 미진과 모든 세계가 온전히 그대로 법신임을 보여 준 것이다. 만약 미진과 세계를 곧이곧대로 미진과 세계로 간주한다면 눈에 가득한 미진의 경계와 삼라만상이 분연히 일어날 것이고, 만약 미진과 세계를 미진과 세계가 아닌 것으로 간주한다면 진정으로 텅 빈 자성이 고요할 것이다. 이른바 적적하게 소멸하고 신령스럽게 텅 비어 하나의 자성으로 융통될 것이다. 이로써 보자면 청청한 푸른 대나무가 그대로 진여이고 울울한 누런 꽃이 다 반야 아님이 없다. 산·하와 대지가 온전히 법왕신이 나타난 것인데 무슨 단멸이 있겠는가. 이런 까닭에 세계를 전부 말씀하신 것은 세계가 아니라 이름이 세계이다.
0001_0035_b_01L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삼십이상을 통해서 여래를 볼 수가 있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삼십이상을 통해서는 여래를 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삼십이상을 말씀하신 것은 곧 그 상이 아니라 이름이 삼십이상이기 때문입니다.

용성해 수보리가 마음속으로 다음과 같이 의심하였다. “법신은 상이 아니어야 부처가 된다고 하면 여래께서는 지금 삼십이상을 보여 주시는데 어찌 이것이 부처님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화신불을 잘못 알아서 진불로 간주한 것이므로 법신불과 화신불이 둘이 아니라는 것으로 수보리의 의심을 타파해 주신 것이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삼십이상을 설한 것은 곧 삼십이상이 아니라 이름이 삼십이상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이 뜻은 법신불과 화신불이 하나임을 보여 준 것이다. 그러므로 유상불有相佛을 부처님이 아니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지금 보고 있는 여래의 삼십이상은 곧 삼십이상이 아니라 화신이 곧 법신이므로 법신과 보신과 화신의 삼신불이 일체一體로서 그 몸과 그 국토가 없는데 어디에서 그것을 만나고 몸과 국토가 없는데 어디에서 그것을 만나지 못할 것인가. 이치가 극진하면 분별의 마음을 잊게 되니 언설의 사상四相은 자연히 적멸하게 된다.
0001_0036_a_01L수보리여, 만약 어떤 선남자·선여인은 항하의 모래 수만큼의 신명으로써 보시한다. 만약 또 어떤 사람은 이 경전의 사구게만이라도 받고 지니며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한다. 그러면 이 복덕이 저 복덕보다 대단히 많다.

용성해 이 대목은 재물로 보시하는 것은 오히려 가볍고 세세생생에 걸쳐서 항하의 모래 수만큼의 몸과 목숨을 바쳐서 보시하는 것은 그보다 더 어려운 것임을 보여 준다. 그렇지만 지혜가 없이 몸과 목숨만 버려서 보시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올바른 도리가 아니라 도리어 점점 생·사의 고통만 더할 뿐이다. 그러나 사구게를 받고 지니는 것은 지혜로운 안목을 얻어서 진정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로 나아가는 길이므로 그 복덕은 저 몸과 목숨을 바쳐서 보시하는 것보다 많다고 말한다.
14. 관념(相)을 벗어나야 열반이다
0001_0036_b_01L그때 수보리가 이 경전 설하심을 듣고서 깊이 뜻을 이해하여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희유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옛적부터 지금까지 얻은 혜안33)으로는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대단히 깊은 경전 설하심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용성해 이 대목은 수보리가 부처님의 마음에 계합하여 부처님의 진경에 들어간 것이다. 수보리를 비롯하여 모든 소승과 모든 중생은 다 상에만 집착하는 무리들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출세하여 20년 동안에 걸쳐 설법한 것은 일찍이 상을 여의지 못한 까닭에 놀라고 의심할까 염려하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다양한 가르침을 보여 주셨다. 그러나 이제야 비로소 부처님의 본심이 드러나자 여러 가지 의심이 다 단절되고 청정한 믿음을 일으키는 까닭에 이 반야의 대승법문에 처음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수보리는 과거부터 수많은 부처님을 받들어 섬겼는데 아직까지 이와 같이 깊은 대승법을 듣지 못하다가 이제야 처음으로 듣게 되었다. 그 까닭은 옛적에 들었던 법문은 소승 및 성문의 지혜로서 대승법이 아니었고 지금에야 대승의 깊은 경전을 듣고서 비로소 대승법을 깨친 까닭에 “이와 같은 경전은 처음으로 들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곧 소승들은 20년 동안에 걸쳐서 오직 상에만 집착하고 본심을 깨닫지 못했다가 이제야 깨쳤기 때문에 홀연히 감격의 눈물을 흘린 것이다.
또 하나는 무량겁 동안 탐욕과 질투로 자심에 미혹하여 삼계와 육도에 윤회했음을 생각하고는 홀연히 감격의 눈물을 흘린 것이다.
또 하나는 무량겁에 걸쳐 몸과 목숨을 바쳐서 보시해도 본성을 깨닫는 복덕에 비교하면 그 백·천·만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함을 생각하고는 감격의 눈물을 흘린 것이다.
또 하나는 수보리가 이 경전에 대하여 처음에는 상상근기의 경우만 깨칠 수 있음을 드러낸 까닭에 ‘희유하십니다’라고 찬탄했지만 여기에서는 중·하근기의 경우에도 깨치는 길을 보여 준 까닭에 한편으로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한편으로는 기뻐서 ‘희유하십니다’34)라고 말한 것이다.
세존이시여.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듣고 믿음이 청정해지면 실상이 발생할 것인데 그 사람은 반드시 가장 희유한 공덕을 성취한 줄 알겠습니다.

용성해 수보리는 자신이 깨달은 경지를 진정으로 드러내고 또 같은 벗으로서 그 뜻에 동조하는 까닭에 자신이 듣고 깨친 것이 참으로 희유하다고 말한 것이다. 또 재차 어떤 사람이 자심이 청정한 줄을 믿어서 실상의 자성이 현전하고 모든 망상심이 소멸하면 그 사람의 경우도 또한 희유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명·상이 없는 법은 받기도 제일 어렵고 알기도 제일 어렵기 때문이다.
0001_0037_b_01L세존이시여. 이 실상이란 곧 실상이 아니므로 여래께서 이름을 실상이라 말씀하십니다.

용성해 진상의 묘체가 드러나 있는 까닭에 이 경전을 듣고서 믿음을 일으키면 신심이 청정하여 곧 실상이 발생한다. 이 실상의 자성은 보고(見) 듣고(聞) 느끼고(覺) 이해하는(知) 것으로 추구할 수가 없고, 색·성·향·미·촉·법으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실상이라 말한 것이며, 유상도 아니고 무상도 아니며 비유상도 아니고 비무상도 아니므로 여래께서는 실상이라 말씀하신 것이다.
세존이시여. 제가 지금 이 경전을 믿고 이해하며 받고 지니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용성해 수보리 저희들이 친히 여래로부터 이 경전의 형태로 듣고서 믿는 것은 어렵지만 부처님의 육성법문을 듣고서 믿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0001_0038_a_01L그러나 만약 미래세 후오백세에 어떤 중생이 이 경전을 믿고 이해하며 받고 지닌다면 그 사람은 곧 제일 희유할 것입니다.

용성해 그러나 만약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이후 2천5백 년에 해당하는 후오백세에 어떤 중생이 이 경전에 대하여 듣고 믿고 받고 지닌다면 그것은 참으로 희유한 경우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성현이 떠나간 지가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후오백세의 오탁악세에는 사마외도邪魔外道의 법이 세간에 충만하여 마구니의 법이 강성하고 정법이 미약해지는 시대로서 이 대승법을 믿는 자가 대단히 드물기 때문에 희유한 사람이라고 말한 것이다.
0001_0038_b_01L왜냐하면 그 사람은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아상은 곧 아상이 아니고 인상·중생상·수자상들도 곧 그 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일체의 상을 벗어난 사람을 제불이라 말하기 때문입니다.

용성해 사상四相을 벗어난 자는 물외物外에 초연히 벗어나서 지혜의 안목을 열고 사상이 본래 공한 줄을 요달한다. 그러나 사상이 본래 여여한 이치를 알면 곧 법신을 볼 것이다. 때문에 아상이 상이 아니고 인상·중생상·수자상이 곧 상이 아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일체의 상을 벗어난 사람을 제불이라 말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참으로 희유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래, 바로 그렇다.

용성해 세존께서 수보리의 말을 듣고서 이에 수보리가 이해한 내용을 인가하여 “그래, 바로 그렇다. 진실로 그대가 말한 바와 같다.”라고 칭찬하셨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듣고 놀라지 않고 겁내지 않으며 두려워하지도 않는다면 그 사람은 매우 희유한 사람인 줄을 알아야 한다.

용성해 이 대승법은 크고 사람의 근기는 미약하기 때문에 마땅히 놀라고 의심하고 두려워하고 무서워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참으로 희유하다.
0001_0039_a_01L수보리여, 왜냐하면 여래가 말한 제일바라밀은 제일바라밀이 아니라 이름이 제일바라밀이기 때문이다.

용성해 부처님의 말씀은 언설에 있지 않으므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여래가 말한 제일반야바라밀은 곧 제일반야바라밀이 아니라 이름이 제일반야바라밀이다.”
그러나 삼구의 면목이 완연하구나!
0001_0039_b_01L수보리여, 인욕바라밀을 여래는 인욕바라밀이 아니라고 설하였다. 수보리여, 왜냐하면 내가 옛적에 가리왕에게 신체가 베이고 단절되었을 때 나에게는 아상이 없었으며, 인상이 없었고, 중생상이 없었고, 수자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옛적에 마디마디 사지가 베이고 잘렸을 때 나에게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었다면 성내고 원망하는 마음이 생겼을 것이다.

용성해 가리왕은 우리말로 번역하면 지극히 악하다는 말이다. 부처님께서 과거겁에 수행자로 있었을 때 산중에서 수도를 하고 있었다. 그 나라의 국왕이 사냥을 나갔는데 수행자가 있다는 말을 듣고는 그 왕비와 더불어 수행자에게 예배하고 물었다. “어떤 깨침을 얻었습니까.” “사괴법35)을 증득하였습니까.” 수행자가 대답하였다. “얻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에 왕이 크게 노하여 날카로운 칼로 수·족과 온몸을 오려 내고 잘랐다. 그때 수행자는 추호도 성내는 마음이 없었다. 때문에 그 왕을 벌하기 위하여 허공에서 돌비(石雨)가 내렸다. 왕이 크게 놀라서 참회하였다. 그때 제석천왕은 전단의 흙으로 수행자의 몸을 붙여서 찰나에 원래의 모습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래도 그 수행자는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수행자가 이처럼 희·로·애·락에 흔들리지 않은 것이 마치 수미산과 같았다.
수보리여, 또한 생각하면 과거 오백세 동안에 인욕선인이었는데 그때 아상과 인상이 없었고 중생상과 수자상이 없었다.

용성해 이 대목은 과거로부터 다생에 걸쳐서 인욕수행을 실천해 온 모습을 인증하여 후세의 수행자들에게 경계시킨 것이다. 아我라는 상과 인人이라는 상과 자·타의 차별상을 일으키는 중생衆生이라는 상과 수壽라는 상을 남겨두지 말고 원怨·친親 및 물物·아我에 평등하여 진정으로 영원하고 진정으로 묘락이 되는 상태를 깨침이라 말한다.
0001_0040_a_01L수보리여, 이런 까닭에 보살은 모든 상을 벗어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켜야 한다.

용성해 비록 자신의 마음이 부처님의 마음과 같음을 깨쳤을지라도 일체의 만경萬境과 일체의 만상萬象과 내·외의 제법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마치 연잎에 물이 젖지 않는 것과 같고, 또 마음씀씀이가 마치 태허공과 같게 해야 한다.
반드시 형색에 집착이 없이 보리심을 일으켜야 하고, 소리·향기·맛·촉·법에 집착이 없이 보리심을 일으켜야 한다. 반드시 집착이 없이 보리심을 일으켜야 한다.

용성해 육조가 말했다. “마음을 법에 집착하지 않으면 도가 곧 통하여 흐르지만 마음이 법에 집착하면 자기를 스스로 옭아매는 것이다.”36) 그러므로 일체처 및 일체시에 자기의 본래면목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그러고 보면 일체의 내·외 공간이 없는 무주심체가 영지불매하여 상에 집착한다든가 집착하지 않는다든가 하는 것이 없다.
만약 마음에 집착이 있으면 곧 올바른 머묾(安住)이 아니다.

용성해 만약 마음이 열반에 집착하면 그것은 곧 보살이 아니다. 그러므로 일체 내·외의 제법에 마음이 집착하지 않아야 그것이 곧 보살의 머묾(安住)이 된다.
0001_0040_b_01L그러므로 여래가 보살은 형색에 집착이 없는 마음으로 보시해야 한다고 설하였다. 수보리여, 보살은 일체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 반드시 이와 같이 보시해야 한다. 여래는 일체의 제상을 곧 상이 아니라고 설하였고, 또 일체의 중생을 곧 중생이 아니라고 설하였다.

용성해 이 관념(相)을 벗어나야 열반이라는 대목의 대의는 색·수·상·행·식 등 오온을 타파하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 수보리가 마음을 어떻게 안주하고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를 물었는데, 이제 여기 대목에서 그 질문에 대하여 답변한 것이다.
수보리가 한번 몸과 목숨을 바쳐 보시함을 듣고 오온이 공한 줄을 통달하지 못하고 마침내 다음과 같이 의심하였다. “몸과 목숨을 바쳐서 보시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밖으로 칠보를 가지고 보시하되 마음이 상에 집착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쉽지만 몸과 목숨을 버리는 것은 할 수가 없다.” 이처럼 수보리는 상相이라는 견해에 집착하므로 법공진여를 깨치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세존께서 특별히 인욕행을 말씀하셨다.
만약 오온의 본성이 공한 줄을 깨친다면 칼로 물을 베는 것과 같고 햇빛을 입으로 불어서 없애려는 것과 같이 담연부동하다. 또 일체상을 여의고 보리심을 일으킨 사람은 육진에 집착하지 말고 보리심을 일으키라고 말씀하신다. 또 만약 마음에 집착이 있으면 마음과 경계가 모두 망령되어 참된 곳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또 모든 색상·성상·향상·미상·촉상·법상에 집착이 없이 보시하는 것은 일체중생에게 이익을 주려는 것이고, 또 일체의 제상이 다 진여이고 일체의 중생이 곧 진여이지만 만약 제상이 공하면 그 상은 곧 여래임을 깨달을 것이다.
수보리여, 여래는 참된 말을 하는 자이고 실다운 말을 하는 자이며 여여한 말을 하는 자이고 헛된 말을 하지 않는 자이며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자이다.

용성해 육조가 말했다. “참된 말은 일체의 유정·무정에게 모두 불성이 있다는 말이고, 실다운 말은 중생이 악업을 지으면 반드시 고苦를 받는다는 말이며, 여여한 말은 중생이 선법을 닦으면 반드시 낙보樂報를 받는다는 말이고, 헛된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반야바라밀법은 삼세제불을 출생하되 반드시 허망하지 않는다는 말이며, 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여래의 모든 언설은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며 끝도 훌륭하여 그 지의旨意가 미묘하여 일체의 천마·외도가 이것을 능가하지도 못하고 불어佛語를 파괴하지도 못하는 것이다.”37)
0001_0041_b_01L수보리여, 여래가 얻은 법에는 실다운 것도 없고 헛된 것도 없다.

용성해 수보리가 다음과 같이 의심하였다. “일체상이 모두 공하다면 증득한 지혜도 또한 공하므로 체가 없는 법이 어찌 인을 지어 과를 얻겠는가.”
이에 부처님께서는 여래가 증득한 경계는 결코 허망하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이 방方·원圓·장長·단短 및 청靑·황黃·적赤·백白 등 모든 형상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고 목석과 같지도 않다. 만약 목석과 같다면 어찌 보고 들으며 느끼고 이해하겠는가. 여래께서 얻은 법은 결코 헛되지도 않고 결코 진실하지도 않다.
0001_0042_a_01L수보리여, 만약 보살이 법에 집착하는 마음으로 보시하면 마치 사람이 어두운 곳에 들어가면 아무것도 볼 수가 없는 것과 같고, 보살이 법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으로 보시하면 마치 눈 있는 사람이 햇빛이 빛나면 갖가지 모습을 볼 수가 있는 것과 같다.

용성해 대저 마음을 허공과 같이 한다면 마음이 허공이라는 상에 걸리는 것이 되고, 마음을 청정한 물과 같이 한다면 청정하다는 상에 걸리는 것이 되며, 마음을 금강과 같이 한다면 견고하다는 상에 걸리는 것이 되고, 갖가지 법에 집착하면 갖가지 법에 걸리는 것이 되며, 또 마음을 무위無爲하고 무사無事하게 두면 무위하고 무사한 상에 걸리는 것이 된다. 그러나 그 모두를 다 놓아버리면 무주심체無住心體가 허령불매虛靈不昧하게 된다.38) 이 마음에 항상 집착이 있으면 구름이 하늘을 가리는 것과 같고, 물物·아我를 모두 잊으면 해가 하늘에 떠오르는 것과 같다.
수보리여, 만약 미래세에 어떤 선남자·선여인이 이 경전을 받고 지니며 읽고 외운다면 곧 여래는 부처의 지혜로 그 사람이 모두 한량없는 공덕을 성취할 것을 다 알고 다 본다.
금강반야바라밀경 하
15. 경전을 수지하는 공덕
0001_0043_a_01L수보리여, 만약 어떤 선남자·선여인이 아침나절에 항하의 모래 수만큼의 몸으로 보시하고, 점심나절에 다시 항하의 모래 수만큼의 몸으로 보시하며, 저녁나절에 또 항하의 모래 수만큼의 몸으로 보시하여, 이와 같이 무량 백·천·만·억 겁에 몸으로 보시한다고 하자. 만약 다시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듣고 신심으로 거스르지 않는다고 하자. 그러면 이 복덕이 저 복덕보다 뛰어나다. 하물며 이 경전을 기록하고 베껴 쓰고 받고 지니며 읽고 외우며 다른 사람을 위해 해설해 주는 것이겠는가.

용성해 경전을 수지하는 공덕에 대한 대의는 마음과 부처가 평등함을 보여 준 것이다. 수보리가 마음속으로 다음과 같이 의심하였다. “내 지혜로는 부처님의 지혜에 계합할 수가 없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경전을 받고 지니는 공덕에 대하여 찬탄하셨다. 곧 반야에는 문자가 없는 까닭에 문자가 곧 반야이다. 나 여래가 이 경전을 설하는 것은 곧 온몸이 그대로 반야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이 뜻을 믿는다면 그는 온전하게 이 경전을 받고 지니는 것이다. 가령 무량겁에 걸쳐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보시할지라도 경전을 믿고 지니는 공덕에 비하면 그 극히 적은 일부분에도 미치지 못한다. 왜냐하면 상에 집착한 보시는 생·사에 윤회하는 과보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마하반야바라밀을 받고 지니는 공덕은 불가사의하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요약해서 말하면 이 경전에는 사량할 수가 없고 헤아릴 수도 없으며 끝없는 공덕이 있다.

용성해 이 경전의 공덕은 분별지로 알 수가 없고 분별사로 알 수가 없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허공을 헤아리고 바람을 얽어매고 대해의 바닷물을 다 들이마신다 할지라도 반야의 공덕은 극히 일부분도 헤아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반야의 자성은 허공이 아니라 허공과 평등한 자성이고 항상 변하지 않으며 여래장은 발생과 소멸이 없고 사의思議와 부사의不思議가 없기 때문이다.
0001_0043_b_01L여래는 대승심을 발생한 자를 위하여 설하고 최상승심을 발생한 자를 위하여 설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받고 지니며 읽고 외워서 널리 다른 사람을 위해 해설해 주면 여래는 그 사람이 헤아릴 수 없고 말할 수 없으며 끝없는 공덕을 성취할 줄을 다 알고 다 본다. 그와 같은 사람들은 여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감당(荷擔 : 어깨에 짊어진다는 말이다.)하게 될 것이다. 수보리여, 왜냐하면 만약 소승법을 좋아하는 자는 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에 집착하므로 이 경전을 듣고 받으며 읽고 외우며 다른 사람을 위해 설명해 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용성해 이에 대한 뜻은 위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서 칭찬하였지만 사상四相에 집착한 경우에 대해서만 말씀하셨기 때문에 미세하지 못하였다. 이제 여기에서는 오직 상상의 근기만을 위한 까닭에 사견四見을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지극히 미세하여 위에서 했던 설명과 같지 않다.
0001_0044_a_01L또 수보리여, 만약 이 경전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일체 세간의 천상·인간·아수라가 반드시 공양할 것이다. 그곳은 곧 탑묘가 될 것이니 모두 공경하여 예를 갖추고 돌면서 여러 가지 꽃과 향을 뿌리는 줄을 반드시 알아라.

용성해 이 경전은 항상 반야법신에 머묾을 찬탄한 것이다. 반야법신은 상주불생이고 상주불멸이지만 세간의 사람들이 오음에 묻혀서 자기의 천성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만약 번뇌의 굴레에서 반야보주를 얻는다면 그것은 무량한 바라밀로 장엄한 것이므로 무량한 인·천의 중생에게 대법광명을 비추고 제천의 팔부신중이 용약환희踊躍歡喜하여 공경·예배·공양을 한다. 이와 같이 『반야경』을 받고 지니는 자에게는 곧 그대로 부처님이므로 무량하고 무변한 복덕이 있다.
16. 반야는 업장을 맑혀 준다
수보리여, 선남자·선여인이 이 경전을 받고 지니며 읽고 외웠는데도 남한테 천대와 멸시를 받는다면 그 사람은 전생에 죄업으로 악도에 떨어져야 했지만, 금생에 남에게 천대와 멸시를 받는 것으로 전생의 죄업이 소멸되고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다.

용성해 이 대목의 뜻은 반야의 높은 위신력이 업장을 녹여 주고 번뇌에 얽힘을 벗어나게 해 주는 것을 찬탄한 것이다. 그러나 죄업만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서 무상도과無上道果까지 성취하는 것이다.
0001_0045_a_01L수보리여, 기억해 보면 연등불을 만나기 전 과거 무량한 아승지겁 동안에 팔백사천만억 나유타의 제불을 만나서 모두 공양하고 섬기며 그냥 지나친 적이 없었다.(나유타에 대하여 말하면 십억이 일낙차이고 십낙차가 일구지가 되고 십구지가 일나유타가 된다.) 만약 또 어떤 사람이 후말세에 이 경전을 받고 지니며 읽고 외워서 얻은 공덕과 비교하면 내가 제불께 공양한 공덕은 그 백분의 일도 안 되고, 천·만·억분의 일도 안 되며, 나아가서 산수와 비유로도 미치지 못한다. 수보리여, 만약 선남자·선여인이 후말세에 이 경전을 받고 지니며 읽고 외워서 얻는 공덕을 내가 자세하게 말한다면 혹 그것을 듣는 사람은 곧 마음이 미쳐버리고 의심하여 믿지 못할 것이다. 수보리여, 이 경전의 뜻이 불가사의하고 그 과보도 또한 불가사의한 줄을 알아야 한다.

용성해 이 대목의 뜻은 깨달은 사람의 경우에 자연히 업장이 소멸되고 일념에 부처님의 지혜에 계합되어 무상정진의 도를 성취하는 까닭에 반야공덕이 불가사의하다는 것이다. 이 경전의 초두에서 수보리가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가를 질문하였다. 그래서 여기에 이르기까지 범부 및 중생의 집착을 타파하고 바로 불성을 드러내 보였다. 그러나 아집과 법집에도 거칠고 미세함이 있다. 이에 이미 거친 것에 대해서는 타파했지만 이하부터는 미세한 아집과 법집을 타파해 준다. 그러나 증득한 지혜가 아상我相이 되고, 증득한 경계가 인상人相이 되고, 깨달은 것이 중생상衆生相이 되고, 깨달음을 잊지 못하여 상속되는 것이 수자상壽者相이 되는데 이 사상은 지극히 미세하다. 만약 이 아집이 타파되면 상相을 통해서 불과를 추구할 것이 없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경멸과 모욕을 준다 할지라도 아상에 대한 집착을 벗어났기 때문에 추호도 경계의 바람에 움직이지 않는다.
17. 궁극의 가르침은 무아이다
0001_0045_b_01L그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선남자·선여인은 마땅히 어떻게 안주하고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약 선남자·선여인으로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39)을 일으킨 사람은 마땅히 다음과 같이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나는 반드시 일체중생을 멸도하리라. 일체중생을 멸도시켰지만 실제로는 어떤 중생도 멸도를 얻은 자가 없다.’

용성해 이 대목의 뜻은 어떤 법에 의탁하여 안주하고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가를 질문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께서는 다시 대답하셨다. “마땅히 일체중생을 제도할 마음을 일으키고 또한 일체중생을 보살 자신이 제도했음을 보지 말아야 한다.”
0001_0046_a_01L수보리여,40) 왜냐하면 만약 보살에게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왜냐하면 실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41)을 일으킬 만한 법은 없기 때문이다.

용성해 이 대목의 이하부터는 바로 미세한 아집과 법집을 타파해 준다. 아상과 인상이 있어서 능能·소所의 분별심이 단절되지 않으면 그는 진정한 보살이 아니다.
0001_0046_b_01L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연등불 처소에서 터득한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있었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부처님께서 설하신 뜻을 이해하기로는 부처님께서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터득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할 법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래, 그렇다. 수보리여,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터득한 법은 없다. 수보리여,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터득한 법이 있었다면 연등불은 나한테 그대는 내세에 석가모니라는 이름의 부처가 될 것이라고 수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터득한 법이 실제로 없었으므로 연등불은 나한테 그대는 내세에 반드시 석가모니라는 이름의 부처가 될 것이라고 수기하였다.

용성해 이 대목의 뜻은 가히 얻을 만한 보리가 없음을 보여서 깨달음에 집착하는 것을 타파해 준 것이다. 수보리가 다음과 같이 의심하였다. “여래께서는 연등불 처소에서 법을 깨친 것이 아닌가.”
이에 세존께서는 그 허망한 계탁을 곧 타파해 주시고 실로 깨친 법이 없음을 보여 주셨다.
0001_0047_a_01L왜냐하면 여래란 제법의 진여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터득하였다고 말한다 해도 여래에게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터득한 법이 실제로 없다. 수보리여, 여래가 터득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는 실다움도 없고 허망함도 없다. 그러므로 여래는 일체법을 모두 불법이라고 설한다. 수보리여, 일체법이라 말한 것은 곧 일체법이 아니므로 일체법이라 말한 것이다. 수보리여, 비유하면 사람의 몸이 장대한 경우와 같다.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사람의 몸이 장대하다고 말씀하신 것은 곧 장대한 몸이 아니라 그 이름이 장대한 몸입니다.

용성해 수보리가 마음속으로 다음과 같이 의심하였다. “반야법은 성불하는 가르침인데 그것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반야가 없다면 성불의 인因이 없는 것 아닌가.”
이에 여래께서는 법신은 인因·과果가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을 깨닫지 못할까 염려되어 무슨 까닭에 보살에게 얻은 것이 없느냐고 되물었다. 여래란 형상을 통하여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일체법의 당체가 여여한 뜻이다. 또한 제법은 본디 여여한데 그것을 어찌 닦고 어찌 증득할 수 있겠는가. 때문에 조사문중에서는 “그 도리는 삼세제불도 알지 못한다.”라고 말한다. 이런 까닭에 여래 및 보리는 하나도 취할 것이 없다. 그러면서도 무릇 제법에 대하여 단견과 상견의 두 가지 소견에 전도되지 않는다.단견은 모든 것이 없다는 것에 집착하는 것이고, 상견은 모든 것이 있다는 것에 집착하는 것이다.
0001_0047_b_01L수보리여, 보살도 또한 그와 같다. 만약 보살 자신이 반드시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할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보살이 아니다. 수보리여, 왜냐하면 실로 보살이라 할 만한 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여래는 일체법에 내가 없고 사람이 없으며 중생이 없고 수자가 없다고 설한다. 수보리여, 만약 보살 자신이 반드시 불국토를 장엄할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보살이라 말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여래가 불국토를 장엄한다고 말하는 것은 곧 장엄이 아니라 이름이 장엄이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만약 보살이 무아법에 통달한다면 여래는 그를 진정한 보살이라 일컫는다.

용성해 이 대목은 법신에 아我가 없음을 보여서 지극히 미세한 아견我見과 법견法見에 집착하는 것을 타파해 준 것이다. 수보리가 다음과 같이 의심하였다. “법으로 중생을 제도하지 않으면 무엇으로 불국토를 장엄한단 말인가.”
이에 세존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자성은 항상 고요하고 항상 광명이 밝아서 불생불멸의 자성에 안락하는 것이 진정한 불국토이지 별도로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없다. 진정한 법계진성을 깨닫지 못하고 밖을 향해서 중생을 제도하려고 생각한다든가 청정한 불국토에 태어나려는 마음에 집착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보살이라 말할 수가 없다.”
또한 수보리가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에 대하여 질문한 것에 대하여 세존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인상과 아상이 없는 것으로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또 색·성·향·미·촉·법과 내·외에 집착이 없는 것으로 마음을 다스려야 하고 안주해야 한다.”
또한 세존께서는 “실로 여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없다.” 내지 “일체법이 곧 법이 아니다.” 내지 “큰 몸이 곧 큰 몸이 아니다.” 내지 “그러한 보살에게는 불佛과 법法과 승僧의 세 가지가 모두 공하여 실이 없다.”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까닭에 일체법에 아가 없고 인이 없고 중생이 없고 수자가 없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무아無我에 통달하면 그를 일컬어 진정한 보살이라 말한다.”라고 하셨다.
18. 분별이 없이 통째로 관찰하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육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에게는 육안이 있습니다.

용성해 육체의 눈에 청정한 색근色根이 있어서 막혀 있는 안쪽만 보는 것을 육안이라 한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제근諸根이 구족되어 있다고 말씀하신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천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에게는 천안이 있습니다.

용성해 천안은 막혀 있는 물건을 모두 보는 것이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모든 허공과 모든 세계를 마치 손바닥에 있는 작은 앵두 하나 정도로 보신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혜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에게는 혜안이 있습니다.42)

용성해 청정한 대지혜로 무상진리를 비추어 꿰뚫어보는 것을 혜안이라 말한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법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에게는 법안이 있습니다.

용성해 여래께서는 후득지혜가 있어서 만사를 명철하게 비추어 보고 모든 대·소의 근기를 따라서 그에 상응하는 설법을 해 주는 까닭에 법안이라 말한다.
0001_0049_a_01L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불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에게는 불안이 있습니다.43)

용성해 위에서는 집착이 없고 아我가 없다는 뜻을 설명하였다. 이제 여기에서는 오안을 들어서 여래의 지견이 광대하여 진사세계塵沙世界(무수히 많은 세계)에 있는 중생들의 인·연과 선·악과 그들 마음에 들어 있는 차별을 하나도 남김없이 알아서 중생으로 하여금 전도견顚倒見(도리에 어긋난 잘못된 견해)을 버리고 무주대도에 계합하도록 해 준다는 것을 설명한다. 위의 육안·천안·혜안·법안은 모두 불안에 구족되어 있다. 또 불성은 원만하고 지극하므로 불안이라 말한다. 또 색신 가운데 법신이 있는데 그것이 곧 육안이다. 자성을 명철하게 보아 능·소의 분별심이 없는 것이 천안이다. 큰 지혜광명으로써 일체중생이 각각 반야자성을 구비하고 있는 줄을 보는 것이 혜안이다. 일체의 불법이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음을 보는 것이 법안이다. 반야바라밀로 일체법을 발생하는 것이 불안이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는 항하의 모든 모래에 대하여 그 모래를 설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모래에 대하여 설하셨습니다.

용성해 항하의 모래알 수효로써 항하의 수효를 헤아린 것이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한 항하의 모래가 있고 그 모래 수만큼의 항하가 있는데 저 모든 모래 수만큼의 불세계가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많겠느냐. 대단히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용성해 항하는 인도국 가운데 부처님께서 계셨던 기원정사 옆의 길가에 있는 물 이름인데 그 넓이가 무려 40리에 이른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 국토에 있는 중생의 갖가지 마음(若干種心)을 여래는 다 안다.

용성해 약간若干이란 말은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더러운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청정한 마음이다. 고인(己和得通)이 말했다.

“여래께서 지닌 마음의 달이
모든 찰해를 비추어 주도다
찰해가 모두 하나로 모이니
모든 마음 한 점 구름이로다”44)
0001_0050_a_01L왜냐하면 여래가 말한 모든 마음은 곧 마음이 아니라 이름이 마음이기 때문이다.

용성해 육조가 말했다. “그 국토 가운데 사는 모든 중생들의 낱낱 중생심에는 모두 갖가지 차별하는 마음이 있다. 비록 그 차별하는 마음이 다양할지라도 그것은 모두 허망심이다. 허망심이 진심이 아님을 알면 그 이름이 곧 본디마음이다. 그 본디마음이야말로 곧 진심眞心이고 상심常心이고 불심이고 반야바라밀심이고 청정한 보리의 열반심이다.”45)

수보리여, 왜냐하면 과거의 마음도 없고 현재의 마음도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없기 때문이다.

용성해 이 대목은 마음과 부처와 중생의 세 가지에 차별이 없음을 보여 준 것이다. 수보리가 다음과 같이 의심하였다. “부처님에게는 오안이 두루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장차 법을 볼 것이다. 그리고 세계의 중생은 모두 마음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세존께서는 이미 갖추고 있는 육안과 천안과 혜안과 법안과 불안에 대하여 그것은 다 눈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무릇 중생의 마음을 보는 것이 곧 여래의 마음이라는 말씀이다. 또 항하의 모래 수효만큼의 세계에 있는 그 모든 모래 수효처럼 한량이 없는 중생의 갖가지 마음을 여래께서는 다 알고 다 본다는 것은 여래의 자심自心이 곧 중생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중생에게 일념이 일어나는 것은 곧 여래의 자심이 일어나는 것이므로 어찌 그것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겠는가.”
수보리는 또 다음과 같이 의심하였다. “중생의 마음에 생·멸이 있으면 여래의 마음에도 생·멸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이에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중생의 마음은 본래 여여하여 생·멸이 없으므로 여래의 마음과 더불어 평등하고 적멸하다. 때문에 여래와 중생이 담연부동하여 나고 죽고 가고 오는 일체의 상이 없으므로 마음과 부처와 중생의 세 가지는 차별이 없다. 이에 과거나 현재나 미래에서 마음을 찾아보아도 결코 찾을 수가 없다. 또 이것은 상주묘원진심常住妙圓眞心을 나타낸 것이다. 만약 모든 마음이 허망한 마음으로 참마음이 아니라면 어떤 것이 과거의 마음이고 어떤 것이 현재의 마음이고 어떤 것이 미래의 마음인가. 과거의 마음과 현재의 마음과 미래의 마음을 찾을 수가 없으므로 삼세의 마음은 모두 찾을 수가 없다. 그러고 보면 삼세의 마음은 전체적으로 묘원진심이다. 그래서 그 광명이 삼세에 통하고 그 체가 시방에 두루하고 모래 수효만큼의 중생의 차별하는 마음이 곧 그대로 여래의 묘원진심이므로 차별이란 전혀 없다.”
19. 복덕이 아닌 복덕이 법계에 통한다
0001_0051_a_01L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를 가득히 채워서 보시한다면 이 사람이 그 인연으로 얻는 복덕이 많겠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사람이 그 인연으로 얻는 복덕은 대단히 많을 것입니다. 수보리여, 복덕이 실로 있다면 여래는 얻는 복덕이 많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복덕이 없기 때문에 여래는 얻는 복덕이 많다고 말한 것이다.

용성해 수보리가 다음과 같이 의심하였다. “세존께서는 이왕에 집착을 타파하였기 때문에 가히 장엄할 불국토가 없고 가히 제도할 중생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이처럼 중생과 국토가 모두 공하다면 보시를 해도 복덕이 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또 수행할 것도 없을 것이다.”
이에 세존께서는 복덕 없는 그 복덕이야말로 대단히 큰 복덕이라고 말씀하셨다.
20. 색과 상을 초월하다
0001_0051_b_01L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를 구족색신을 통해서 볼 수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를 구족색신을 통해서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구족색신은 곧 구족색신이 아니라 이름이 구족색신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를 구족제상을 통해서 볼 수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를 구족제상을 통해서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구족제상은 곧 구족제상이 아니라 이름이 구족제상이기 때문입니다.

용성해 부처님의 삼십이상과 팔십종호는 거울 속의 형상과 같아서 본디 상호가 없지만 상호를 나타낸 것이다. 부처님의 진상은 법신인 줄을 보지 못하고 무릇 삼십이상과 팔십종호의 자마금색신을 여래의 진신이라고 집착하는 까닭에 여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구족색신이 곧 구족색신이 아니고 구족제상이 곧 구족제상이 아니라 그 이름이 구족제상이다. 또 구족색신은 만덕으로 보신을 장엄한 여래로서 온갖 중생을 제도하여 불국토를 장엄하는 까닭에 이 삼십이상과 팔십종호의 과보를 감득하였다. 때문에 여래가 구족색신을 말하지만 그 보신불의 근본이 법신불인 까닭에 구족색신이 아니라고 말한다. 또 법신과 보신이 하나이지 둘이 아닌 까닭에 그 이름이 구족색신이다.”
여기에서 보는 것처럼 먼저 상의 경계를 타파하고 나중에 상을 보는 주체 곧 지혜를 타파하고 있다. 이에 보신이 곧 법신이므로 상의 경계를 볼 것이 없고, 지혜의 체가 여여한 까닭에 보는 병이 녹는다. 이처럼 지혜와 경계가 둘이 아닌 까닭에 법신이 스스로 드러난다. 부처님께서 “…이 아니다.”라고 부정하는 표현은 모두 한편으로는 다 막아서 일물도 용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고, 한편으로는 다 터놓고 모든 것을 구원한 것이다. 이것은 곧 시·비의 구렁텅이에 빠질까 염려하신 까닭에 여래께서 중생의 마음병을 막아서 보살피고 분별의 소견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하여 허망한 생각을 아주 버려서 집착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21. 설법하되 설법이 아니다
0001_0052_b_01L수보리여, 그대는 여래 자신이 설법한 적이 없다고 말하지 말고, 또 그런 생각도 하지 말라.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여래가 설법을 하였다고 말한다면 곧 여래를 비방하는 것으로 내가 설한 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설법이란 설할 만한 법이 없으므로 설법한다고 말한다.

용성해 신체의 형상을 통해서는 진정한 여래를 보지 못한다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수보리가 다음과 같이 마음속으로 의심하였다. “신체의 형상이 없다면 도대체 그 누가 설법을 하는 것인가.”
이에 부처님께서 가히 설할 법이 없다는 것으로써 그 의심을 타파해 주셨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무릇 중생의 허망한 마음을 따라서 방편으로 타파해 주기 때문에 경문의 여러 대목에 비非 내지 불不이라는 부정의 말씀이 등장한다. 이것은 곧 중생의 망상을 막아서 단절시켜 주어 올바르게 살펴 주고 호념하는 것에 해당한다. 때문에 “설법이란 설할 만한 법이 없으므로 설법이라 말한다.”라고 하셨다.
0001_0053_a_01L그때 혜명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미래세46)에 이 설법을 듣고 신심을 일으킬 중생이 조금이라도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저들은 중생이 아니고 비중생도 아니다. 수보리여, 왜냐하면 중생중생이란 여래가 중생이라 말한 것이 아니라 곧 이름이 중생이기 때문이다.47)

용성해 이 대목의 뜻은 수보리가 법신의 자성은 말이 없고 보일 것이 없어서 그 법이 대단히 심오함을 깨달았지만 무릇 미래의 중생이 그것을 믿지 못할까 의심한 것이다. 이것은 수보리가 생·멸의 소견을 벗어나지 못하는 까닭에 미래세상의 중생이라는 집착을 일으킨 것이다.
여기에서 세존께서 답변하신 뜻은 중생이 본디 여여하여 법과 평등한데 어째서 미래라는 상이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중생이 본디 여여하기 때문에 그것을 중생이 아니라고 말씀하시고, 진여가 인연을 따라서 모든 것을 성취하는 까닭에 중생도 아니고 비중생도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22. 법은 얻을 것이 없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얻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무소득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48) 그래, 그렇다. 수보리여, 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내지 소소한 어떤 법도 얻은 것이 없었으므로 곧 이름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다.

용성해 육조가 말했다. “집착심이 사라지면 그것이 곧 깨침이다.”49)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래, 그렇다. 저 보리에는 실로 희구심이 없고 또 보리를 얻었다는 마음도 없다. 이런 까닭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말한다.”
23. 집착이 없어야 선행이다
0001_0053_b_01L수보리여, 또한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으니 곧 이름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다. 아가 없고 인이 없고 중생이 없고 수자가 없이 일체의 선법을 닦음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 수보리여, 여래가 설한 선법이란 선법이 아니므로 곧 이름이 선법일 뿐이다.

용성해 수보리가 마음속으로 다음과 같이 의심하였다. “법신에는 상이 없고 법도 없다. 그런데 법신은 어떻게 선법을 닦아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는 것인가.”
이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실로 얻는 법이 없는 까닭에 중생과 제불이 평등하여 둘이 없고 다름이 없다. 그것이 보리인데 어찌 실로 증득한 법이 있겠는가. 그러나 여래가 그대들에게 일체의 선법을 닦아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말한 것은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의 사상이 없이 닦는 것을 가리킨다. 때문에 보살은 무량겁 동안 닦아도 닦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24. 경전을 수지하는 것이 최고의 복덕이고 지혜이다
0001_0054_a_01L수보리여,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모든 수미산왕만큼의 칠보 무더기를 가지고 보시한다고 하자. 어떤 사람이 이 반야바라밀경 내지 사구게 등을 받고 지니며 읽고 외워서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해 준다고 하자. 그러면 앞의 복덕은 이 복덕의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천분의 일, 만분의 일, 억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며, 내지 산수나 비유로도 미치지 못한다.

용성해 수보리가 마음속으로 다음과 같이 의심하였다. “선법을 닦아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하는데 도대체 어떤 법이 제일 뛰어나다는 것인가.”
이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반야바라밀에 통달하면 그것이 가장 뛰어나다.”
25. 분별이 없이 교화하다
0001_0054_b_01L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대들은 여래 자신이 중생을 제도하리라는 생각을 한다고 말하지 말라. 수보리여, 그런 생각도 하지 말라. 왜냐하면 여래가 제도한 중생은 실제로 없기 때문이다. 만약 여래가 제도한 중생이 있다면 여래에게도 아·인·중생·수자라는 집착이 있는 것이다. 수보리여, 여래는 아에 대한 집착은 곧 아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고 설하였다. 그런데도 범부는 아에 집착을 한다. 수보리여, 범부라는 것도 여래가 범부라 말한 것이 아니라 이름이 범부일 뿐이다.50)

용성해 수보리가 다음과 같이 의심하였다. “위에서 중생과 제불이 없다고 말했다면 여기에서 중생이 없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도 어째서 여래께서는 중생을 제도한다고 말씀하시는가. 이것은 여래에게 아상과 인상과 중생상과 수자상이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이에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여래에게는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생각이 있다는 그런 생각을 하지 말라. 여래에게 그와 같은 생각이 있다면 곧 범부일 것이다. 여래가 말한 범부조차 범부가 아니거늘 어찌 여래에게 아상과 인상과 중생상과 수자상이 있겠는가. 성현과 범부가 모두 없는 까닭에 대도大道가 평등하다. 이에 여래가 아我라고 말한 것은 자성이 청정한 상常·락樂·아我·정淨에서 말하는 아我이지 범부의 입장에서 말하는 탐진·무명·허망한 아我가 아니다.”
26. 법신은 형상이 아니다
0001_0055_a_01L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삼십이상을 통해서 여래를 볼 수가 있느냐. 예, 그렇습니다. 삼십이상을 통하여 여래를 볼 수가 있습니다.

용성해 싹을 보면 그 뿌리를 안다. 법신으로부터 형상이 나왔다면 그 형상을 벗어나야 무상법신을 증득한다. 그렇지만 수보리가 중생을 위하여 짐짓 미혹하다는 태도를 취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만약 삼십이상을 통해서 여래를 볼 수가 있다면 전륜성왕도 여래이겠구나.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제가 부처님께서 설하신 뜻을 이해하기로는 결코 삼십이상을 통하여 여래를 볼 수는 없습니다. 그때 세존께서 게송을 설하여 말씀하셨다.

색으로 나를 보려 한다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려 하면
이 사람은 사도를 행함이니
결코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
51)


용성해 수보리가 다음과 같이 의심하였다. “법신에는 아상이 없고, 보신의 경우도 형상을 통해서는 볼 수가 없다면 지금 내가 친견하고 있는 여래의 삼십이상이야말로 화신불이 아니겠는가.” 세존께서는 수보리의 의심을 알아차리고 짐짓 다음과 같이 따져 물으셨다. “삼십이상을 통해서 진정한 여래를 볼 수가 있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삼십이상을 통해서 여래를 볼 수가 있습니다.” 이에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그대의 말대로라면 전륜성왕도 여래이겠구나.” 그리고는 그것을 일깨워 주려고 게송을 말씀하신 것이다.
27. 단절과 소멸을 초월하다
0001_0055_b_01L수보리여, 그대가 만약 여래는 구족상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수보리여, 여래가 구족상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생각하지 말라. 수보리여, 그대가52)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자가 제법의 단멸53)을 설한다고 생각이 들더라도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54)을 일으킨 자는 제법에 대하여 단멸상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28. 보살은 복덕에 탐착이 없다
0001_0056_a_01L수보리여, 어떤 보살은 항하의 모래 수만큼 세계에 칠보를 가득 채워서 그것을 가지고 보시한다.55) 또 어떤 사람은 일체법이 무아임을 알아서 인욕을 성취한다. 그러면 이 사람의 공덕이 저 보살의 공덕보다 뛰어나다. 수보리여, 왜냐하면56) 모든 보살은 복덕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어째서 보살은 복덕을 받지 않습니까. 수보리여, 보살은 자신이 지은 복덕에 탐착이 없으므로 복덕을 받지 않는다고 말한다.

용성해 이 대목은 단멸이라는 소견을 없애 주는 것에 대한 설명이다. 수보리는 법신과 보신에 상이 없고 응신과 화신은 진정한 여래가 아니라는 말을 듣고서 단멸의 소견단멸은 없다는 것에 집착한 것이다. 이에 영원히 단절되어 나무와 돌과 같다고 간주하는 것이다.을 일으켜서 법신에도 참다운 아我가 없음을 통달하지 못하였다. 이에 부처님께서 단멸이 아닌 것으로 수보리의 소견을 타파해 주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여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여래는 모든 상을 구족하지 않은 까닭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터득하였는가 하는 그런 생각을 하지 말라. 만약 그런 생각을 한다면 제법에 대하여 단멸의 소견이 일어날 것이다. 진정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자는 제법에 대하여 단멸의 소견을 일으키지 않고 무릇 일체법에 대하여 아我가 없는 줄을 안다.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일체법에 대하여 아我가 없는 줄을 알아서 인욕을 성취하면 그 복덕은 무량한 칠보로써 보시하는 것보다 뛰어나다. 보살이 복덕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복덕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무릇 복덕에 대하여 염착심이 없다는 뜻이다. 천상세계에서나 인간세계에서나 항상 아我에 집착하는 까닭에 여래는 그 집착을 제거해 주고 무상대도無上大道로 나아가게 해 준다.”
29. 여래는 오고 감이 없다
0001_0056_b_01L수보리여,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는 오고 가며 앉고 눕는다고 말하면 그 사람은 내 설법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여래란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으므로 이름이 여래이기 때문이다.57)

용성해 수보리가 다음과 같이 의심하였다. “아我가 없으면 복덕을 받는 자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여래께서 행行·주住·좌坐·와臥한다는 것은 여래의 아我가 아닐까.”
이것은 삼신이 하나라든가 다르다든가 하는 분별의 소견을 벗어나지 못한 까닭에 평등법신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30. 부분과 전체는 참모습이다
수보리여, 어떤 선남자·선여인이 삼천대천세계를 부수어 미진을 만든다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미진들이 얼마나 많겠느냐. 대단히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만약 미진들이 실제로 있다면 여래께서는 곧 미진들이라고 말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미진들은 곧 미진들이 아니라 곧 이름이 미진들이기 때문입니다.

용성해 하나라든가 다르다든가 하는 분별의 소견을 벗어나지 못하여 삼신이 일체一體임을 모르기 때문에 미진세계를 비유로 들어서 그것을 타파해 준다.
0001_0057_b_01L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설하신 삼천대천세계는 곧 세계가 아니라 곧 이름이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세계가 실로 있다면 곧 일합상이겠지만 여래가 말한 일합상은 곧 일합상이 아니라 이름이 일합상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여, 일합상이란 말할 수가 없는 것인데 무릇 범부들이 그것에 탐착할 따름이다.

용성해 수보리가 삼신이 곧 일체인 줄을 알지 못하는 까닭에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미진으로 말하면 하나가 아니고, 세계로 말하면 다른 것이 아니다. 미진이 모여서 세계가 된 것이므로 다르지만 다르지 않고 세계가 흩어져 미진이 된 것이므로 곧 하나이지만 하나가 아니다. 이런 뜻으로 보자면 하나이다, 다르다 할 것이 없다. 만약 실로 하나라든가 다르다든가 하는 상이 있다면 단변견單邊見에 치우친 것이다. 하나로써 합하면 다를 수가 없고 다른 것으로써 합하면 하나일 수가 없다. 또 만약 미진이 실로 있다면 그것이 모여서 세계가 될 수가 없고 만약 세계가 실로 있다면 흩어져서 미진이 될 수가 없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사람은 이것으로 일합상을 삼는다. 여래가 말한 일합상은 그와는 달리 양변견兩邊見을 여읜 까닭에 한 덩어리(一合相)라 말한다. 양변을 여의면 말할 것이 없지만 범부의 입장으로는 있다든가 없다든가 하나라든가 다르다든가하는 두 가지 분별소견을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탐착하는 까닭에 삼신이 일체一體인 평등법신을 통달하지 못한 것이다.”
31. 분별지견을 내지 말아야 한다
0001_0058_a_01L수보리여, 어떤 사람은 여래가 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을 설했다고 말한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사람이 내가 설한 뜻을 이해했다 할 것인가. 아닙니다.58) 세존이시여. 그 사람은 여래께서 설한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존께서 설한 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은 곧 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이 아니라 이름이 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자는 일체법에 대하여 반드시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며 이와 같이 믿고 이해하여 법상法相을 발생하지 않아야 한다. 수보리여, 법상에 대하여 여래는 곧 법상이 아니라고 말하였는데 이름이 법상이다.

용성해 수보리는 이미 평등법신을 깨달았다. 그러나 다시 “법신은 본디 상이 없다. 그런데 어째서 세존께서는 사상四相을 여의라고 하는가.”라고 의심할까 염려하여 세존께서는 다음과 같이 따져서 물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여래에게는 사상의 소견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여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냐.”
이 대목에서 부정을 표시하는 비非라는 글자는 위에서 말해 온 모든 비非라는 글자와는 다르다. 이 대목에서 말한 비非라는 글자는 아주 단절해 버리라는 글자이다. 곧 일체중생은 견고한 집착을 타파하여 버리기가 어려운 까닭에 부처님의 금강지혜로써 타파해 준 것이다.
32. 응화신은 법신이 아니다
0001_0058_b_01L수보리여, 만약 어떤 사람은 무량한 아승지 세계에 칠보를 가득 채워서 그것을 가지고 보시한다. 만약 어떤 선남자·선여인은 보리심59)을 일으켜서 이 경전을 지니고 내지 사구게 등을 받고 지니며 읽고 외워서 다른 사람을 위하여 연설해 준다. 그러면 이 선남자·선여인의 복덕이 앞사람의 복덕보다 뛰어나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을 위하여 어떻게 연설해야 하겠는가. 상에 집착하지 말고 여여하고 부동해야 한다.
용성해 수보리는 이미 법신의 전체를 깨달았지만 다시 다음과 같이 의심하였다. “법신은 법을 설하지 않는다. 법을 설하는 것은 화신이다. 화신이 법을 설하는 것은 법신의 경계를 통달하지 못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법을 가지고 복덕을 얻을 것인가.”
이에 부처님께서는 화신이 설한 법은 진실로 동일한 법인데 삼신이 일체一體인 줄을 수보리 그대가 모르고 있을 뿐이라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일체의 유위법은
마치 꿈과 꼭두각시와 물거품과 그림자와 같고
이슬과 같고 또 번개와 같으니
반드시 이와 같이 관찰해야 한다.
60)

용성해 이것은 반야의 진공묘지眞空妙智에 들어간 것을 설명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 경전을 모두 설하고 나니 장로 수보리와 모든 비구·비구니·우바새(청신사)·우바이(청신녀) 및 일체 세간의 천·인·아수라들이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모두 크게 환희하여 믿고 받으며 받들고 실천하였다.61)
  1. 1) 내 : 부처님으로부터 친히 곁에서 설법을 들은 아난을 가리킨다. 이하 백용성 번역본의 텍스트는 척사대장경본에 의거하였기 때문에 원문 및 해석은 그에 따른다. 척사대장경본은 오늘날 불광대장경본의 모본이 되었다.
  2. 2)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 : 기수급고독원은 『금강경』을 비롯한 수많은 경전을 설한 지역으로 사위국의 서울에 있다. 곧 급고독 장자와 기타 태자가 각각 동산과 나무를 보시하여 지은 기원정사祇園精舍가 있는 곳이다.
  3. 3) 천이백오십 인 : 항상 부처님 곁에 머물면서 불법을 실천하는 1,250명의 상수대중常隨大衆을 가리킨다.
  4. 4) 경전의 일반적인 삼단 구성으로 보면 이 대목은 「서분序分」에 해당한다. 「서분」 가운데서도 신信·문聞·시時·주主·처處·중衆의 육성취六成就가 갖추어진 ≺증신서證信序≻에 해당한다.
  5. 5) 세 가지 : 용성본에는 원래 ‘네 가지’라고 말했는데 아래 설명에는 세 가지에 대해서만 설명되어 있기 때문에 ‘세 가지’로 표기한다.
  6. 6) 교족蹻足 : ‘정진’의 뜻. 석가가 과거세에 불사불을 보고 환희의 염이 생겨 한 발을 발돋움한 채로 7일7야 동안 게를 설하며 찬탄한 옛일에서 온 것이다.
  7. 7) 식시食時 : 하루에 일식一食을 하는 당시 승가의 관례로 보면 사시巳時(9시~11시)에 해당하지만 사시공양을 하기 위하여 먼저 걸식을 해야 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식시는 걸식하러 나가는 시간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8시 전후에 해당한다.
  8. 8) 선열식禪悅食 : 『선문촬요禪門撮要』에 의하면 여래의 바른 법에 의지하여 기쁜 마음으로 받들어 행하는 것을 법희식法喜食이라 하고, 안팎에 밝고 고요하여 몸과 마음이 즐거운 것이 선열식이다.
  9. 9) 앞의 “그때 세존께서”부터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라는 대목까지는 「서분」 가운데 ≺별서別序≻로서 이 『금강경』에만 해당하는 내용이다. 위의 ≺증신서≻와 여기의 ≺별서≻는 모두 「서분」에 해당한다.
  10. 10) 수보리 : 수보리는 선현善現·선길善吉·길상吉祥·공생空生·선실善實 등으로 번역되어 불린다.
  11. 11) 본 대목부터 이하는 일반적인 경전의 삼단 분류 가운데 「정종분正宗分」에 해당한다.
  12. 12) 예, 그리하겠습니다~듣고자 합니다 : 다음과 같이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는 “예, 그리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기꺼이 듣고자 하였다. 둘째는 “예, 그리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 기꺼이 듣고자 합니다.” 현재 조계종 표준 『금강경』에서는 전자의 해석 방식을 따르고 있다.
  13. 13) 아상我相(ātman-saṃjñā : 자아가 있다는 관념), 인상人相(pudgala-saṃjñā : 개아가 있다는 관념), 중생상衆生相(sattva-saṃjñā : 끊임이 없이 지속적인 중생이 있다는 관념), 수자상壽者相(jīva-saṃjñā : 영혼이 있다는 관념)은 인人의 사상四相이고, 이하에 등장하는 유상有相·무상無相·법상法相·비법상非法相은 법法의 사상四相이다. 그러나 경문에는 유상有相과 무상無相은 생략된 모습이다. 이로써 대승경전으로서 『금강경』에는 인人의 사상四相이 공하고 법法의 사상四相이 공하다는 팔상八相의 구공俱空인 대승교리가 드러나 있다.
  14. 14) 삼십이상三十二相과 팔십종호八十種好 : 여래의 신체에 나타나 있는 특징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이와 같은 모습은 형상에 불과하므로 집착할 것이 못된다고 설명한다.
  15. 15) 『굉지광록宏智廣錄』 卷3, p.28下. “擧經云。若見諸相非相。卽見如來。法眼云。若見諸相非相。卽不見如來。”
  16. 16) 후오백세 : 오오백세五五百歲는 부처님께서 입멸하신 이후 불법의 미래를 각각 5백 년씩 다섯 단계로 나눈 것이다. 제1 오백세는 해탈견고解脫堅固 시대이고, 제2 오백세는 선정견고禪定堅固 시대이며, 제3 오백세는 다문견고多聞堅固 시대이고, 제4 오백세는 탑사견고塔寺堅固 시대이며, 제5 오백세는 투쟁견고鬪諍堅固 시대이다. 후오백세는 이 가운데 제5 오백세를 가리킨다.
  17. 17) 사구게四句偈 : 사구게는 첫째는 사구四句의 정형화된 형식으로 설해진 부처님의 설법을 의미하고, 둘째는 일정한 의미를 담고 있는 구절을 의미하며, 셋째는 경전의 전체를 의미하는 등 세 가지 뜻이 있다.
  18. 18) 『종용록從容錄』 第77則(『大正新脩大藏經』 48, p.276下). “道環之虛靡盈。 此人牛不見處。 正是月明時。”
  19. 19) 무위법無爲法 : 깨침과 열반과 진여 등의 경우처럼 인과의 법칙에 따라서 변하는 것이 아닌 경우를 말한다.
  20. 20) 홍련洪蓮, 『금강경주해金剛經註解』 卷2(『卍續藏』 24, p.773上). “六祖曰。三乘根性。所解不同。見有淺深。故言差別。佛說無爲說者。卽是無住。無住卽無相。無相卽無起。無起卽無滅。蕩然空寂。照用齊施。鑒覺無礙。乃眞是解脫佛性。佛卽是覺。覺卽是觀照。觀照卽是智慧。智慧卽是般若波羅蜜多也。” 참조. CBETA 자료에 근거함.
  21. 21) 혜능慧能, 『금강경해의金剛經解義』(『卍續藏』 24, p.522上). “三千大千世界七寶。以用布施。得福雖多。於性上一無利益。依摩訶般若波羅蜜多修行。令自性不墮諸有。是名福德性。心有能所。卽非福德性。能所心滅。是名福德性。心依佛敎。行同佛行。是名福德性。不依佛敎。不能踐履佛行。卽非福德性。” 참조. CBETA자료에 의함.
  22. 22) 기화己和, 『금강반야바라밀경오가해설의金剛般若波羅蜜經五家解說誼』 卷上(『韓國佛敎全書』 7, p.46下). “眞性不礙緣起。經能出生佛法。緣起不礙眞性。佛法卽非佛法。”
  23. 23) 아나함 : 용성 선사의 해설에서는 아라한이라 했는데 문맥의 흐름에 맞추어서 아나함으로 정정한다.
  24. 24) 이상 수다원·사다함·아나함·아라한을 사과四果라 말한다. 사과四果는 소승의 교리에서 말하는 성인의 부류를 네 단계로 나눈 것이다. 수다원은 처음으로 성인의 대열에 합류한다는 뜻에서 입류入流(入類), 예류預流(預類)라 말했고, 사다함은 욕계에 한번 다녀와서 수행을 더 닦아야 한다는 뜻에서 일왕래一往來라 말했고, 아나함은 욕계에는 다시 돌아올 필요가 없다는 뜻에서 불래不來라 말했고, 아라한과는 모든 번뇌를 초월하였다는 뜻에서 무학도無學道라 말하였다.
  25. 25) 다툼이 없는 삼매(無諍三昧) : 다툼이 없이 머무는 자, 내지 다툼이 없이 도 닦는 경지를 증득한 자로서 부처님이 수보리를 칭찬한 말이다. 아란나행阿蘭那行과 무쟁삼매無諍三昧와 적정행寂靜行은 동일한 뜻을 다르게 표현한 말이다.
  26. 26) 기화己和, 『금강반야바라밀경오가해설의金剛般若波羅蜜經五家解說誼』 卷上(『韓國佛敎全書』 7, p.49上). “謂阿羅漢。心無生滅去來。唯有本覺常照。故云無諍三昧。”
  27. 27) 용성 선사의 『상역과해』를 포함한 다른 3종 번역본과는 달리 본 번역본에만 “세존이시여.”에 해당하는 말이 누락되어 있다. 그러나 용성 선사가 의거한 것은 척사판대장경본이므로 여기에서는 보충하여 해석한다. 그러나 구마라집 번역본에도 “세존이시여.”에 해당하는 말이 없다.
  28. 28) 구마라집본에는 ‘없습니다’에 해당하는 ‘불야不也’가 없다.
  29. 29) 용성 번역본에는 “수보리여, 나는 지금 진실한 말로 그대에게 말한다. 만약 어떤 선남자·선여인이 그들 항하의 모래 수만큼의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를 가득 채워서 보시한다면 그 복덕이 많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대단히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선남자·선여인이 이 경전의 사구게만이라도 받고 지니며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해 준다면 이 복덕이 저 복덕보다 더 뛰어나다.”라는 경문의 대목이 생략되어 있다. 때문에 여기에 주석으로 보충해 둔다.
  30. 30) 천룡팔부 : 일반적으로 팔부중八部衆을 일컫는 말이다. 『사리불문경舍利弗問經』의 설은 다음과 같다. 천중天衆은 욕계육천·색계사선천·무색계사공처천으로서 몸에 광명을 갖추고 있으므로 천天이라 말한다. 용중龍衆은 축류畜類인데 물속의 왕이다. 야차夜叉는 약차藥叉라고도 하는데 허공을 나는 귀신이다. 건달바乾闥婆는 향음香陰이라 번역하는데 음陰은 오음五陰의 색신이다. 그 오음에는 향취를 맡음으로써 장양되기 때문에 향음이라 한다. 제석천의 악신이다. 아수라阿修羅는 구역에서는 무주無酒이고, 신역에서는 비천非天이라 하였다. 또한 무단정無端正이라 하였는데 과보가 비록 천과 비슷하지만 천부天部는 아니므로 비천非天이라 한다. 또한 용모가 추악하여 무단정이라고도 한다. 그 과보로는 미녀는 있지만 술이 없으므로 무주無酒라 한다. 늘상 제석과 더불어 다투는 신이다. 가루라迦樓羅는 금시조金翅鳥라 번역한다. 두 날개 사이의 거리가 336만 리로서 용을 잡아먹는다. 긴나라緊那羅는 비인非人이라 번역하는데, 신역에서는 가신歌神이라 한다. 사람과 비슷하지만 머리에 뿔이 있으므로 인비인人非人이라 말하는데 제석천의 악신이므로 가신이라 말한다. 제석에게 있는 두 종류의 악신 가운데 전자 건달바는 속악俗樂을 연주하고, 긴나라는 법악法樂을 연주하는 천신이다. 마후라가摩睺羅迦는 대망신大蟒神이라 번역하는데 긴 배로 기어 다니는 지룡地龍이다. 이 팔부중은 사람의 육안에는 보이지 않으므로 명중팔부冥衆八部라고도 하는데, 팔부 가운데 천·룡의 영험이 뛰어나므로 천·룡팔부 또는 용신팔부라 말한다.
  31. 31) 여래(佛) : 여기에서 불佛을 부처님이라 하지 않고 여래라고 한 것은 『금강경』의 설법에서 석가모니부처님이 자신을 포함한 일반적인 부처님을 호칭할 경우에 여래라는 말로 일컬었기 때문이다.
  32. 32) 구마라집본에는 ‘시명반야바라밀是名般若波羅蜜’이 없다.
  33. 33) 혜안慧眼 : 사성제의 도리를 통하여 수보리 자신이 이전에 터득한 소승법을 가리킨다.
  34. 34) 이전에 ‘희유하십니다’라고 말했던 것은 경전의 서두 부분에서 수보리가 부처님에게 찬탄했던 “희유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모든 보살을 잘 두호하여 보살펴 주시고 모든 보살을 잘 부촉해 주십니다.”라는 대목을 가리킨다.
  35. 35) 사괴법四壞法 : 지·수·화·풍의 사대로 이루어진 신체가 공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36. 36) 『육조대사법보단경六祖大師法寶壇經』(『大正新脩大藏經』 48, pp.352下~353上). “善知識。道須通流。何以却滯。心不住法。道卽通流。心若住法。名爲自縛。” 참조.
  37. 37) 기화己和, 『금강반야바라밀경오가해설의金剛般若波羅蜜經五家解說誼』 卷上(『韓國佛敎全書』 7, p.66上). “眞語者。說一切有情無情皆有佛性。實語者。說衆生造惡業。定受苦報。如語者。說衆生修善法。定受樂報。不誑語者。說般若波羅蜜法。出生三世諸佛。決定不虛。不異語者。如來所有言說。初善中善後善。旨意微妙。一切天魔外道。無有能超勝。及破壞佛語者也。”
  38. 38) 무주심체無住心體가 허령불매虛靈不昧하다는 말은 본래청정한 우리의 심성 내지 불성은 본래부터 적멸의 모습임을 가리킨다.
  39. 39) 구마라집본에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의 ‘心’이 없다.
  40. 40) 용성 번역본 원문에는 ‘수보리須菩提’가 누락되어 있으므로 보입한다.
  41. 41) 구마라집본에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의 ‘心’이 없다.
  42. 42) 용성 번역본에는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에게는 혜안이 있습니다.”라는 대목이 누락되어 있어서 여기에 보충해 둔다.
  43. 43) 여기에서 말하는 오안五眼은 마음 내지 깨침의 경지를 다섯으로 나눈 것이다. 육안은 현재의 색을 보는 눈이고, 천안은 미래와 과거의 시간을 보는 눈이고, 혜안은 사성제의 도리를 깨치고 공을 터득한 눈이고, 법안은 제법무아의 도리를 깨쳐 평등을 터득한 눈이고, 불안은 일체의 번뇌를 영원히 단절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터득한 눈이다.
  44. 44) 기화己和, 『금강반야바라밀경오가해설의金剛般若波羅蜜經五家解說誼』 卷下(『韓國佛敎全書』 7, p.82上). “如來心地月。 照臨諸刹海。 刹海都一撮。 諸心一點雲。”
  45. 45) 기화己和, 『금강반야바라밀경오가해설의金剛般若波羅蜜經五家解說誼』 卷下(『韓國佛敎全書』 7, p.82中~下). “爾所國土中。 所有衆生。 一一衆生。 皆有若干差別心數。 心數雖多。 摠名妄心。 識得妄心非心。 是名爲心。 此心卽是眞心常心佛心般若波羅蜜心淸淨菩提涅槃心也。”
  46. 46) 미래세 : 후오백세로서 투쟁견고의 시대로 대표되는 말법시대를 가리킨다.
  47. 47) 그때 혜명 수보리가~중생이기 때문이다 : 이 대목은 호주濠洲 종리사鐘離寺 석비石碑에 의하면 822년에 유명幽冥 선사가 구마라집본에는 없는 내용을 보리유지본에 의거하여 보충한 것이라 한다.
  48. 48)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佛言) : 『상역과해 금강경』에는 들어 있지만 여기 『신역금강경』 용성 번역본에는 누락되어 있어서 여기에 보충해 둔다. 참고로 구마라집본에는 이에 해당하는 ‘佛言’이 없다.
  49. 49) 기화己和, 『금강반야바라밀경오가해설의金剛般若波羅蜜經五家解說誼』 卷下(『韓國佛敎全書』 7, p.87中). “所得心盡。 卽是菩提。”
  50. 50) 이름이 범부일 뿐이다 : 이 대목의 원문은 ‘시명범부是名凡夫’이다. 구마라집본 『금강경』에는 이 대목이 없다.
  51. 51) 현장 번역본에는 게송이 두 개인데 생략된 한 게송은 다음과 같다. “마땅히 불을 법성으로 보라 / 부처님은 법으로 된 몸이다 / 법성은 분별의 대상 아니니 / 그것은 분별로 알지 못하네”
  52. 52) 구마라집본에는 ‘그대’에 해당하는 ‘汝’가 없다.
  53. 53) 구마라집본에는 ‘단멸斷滅’이 ‘단멸상斷滅相’이다.
  54. 54) 구마라집본에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의 ‘心’이 없다.
  55. 55) 그것을 가지고 보시한다 : 구마라집본에는 ‘지용보시持用布施’가 ‘보시布施’이다.
  56. 56) 구마라집본에는 ‘수보리須菩提’ 앞에 ‘하이고何以故’가 없다.
  57. 57) 『금강경』에서 여래에 대하여 정의한 대목은 세 군데가 있다. 첫째는 “왜냐하면 일체의 상을 벗어난 사람을 제불이라 말하기 때문입니다.”이고, 둘째는 “왜냐하면 여래는 제법의 진여라는 뜻이기 때문이다.”이며, 셋째는 “왜냐하면 여래란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으므로 명칭이 여래이기 때문이다.”이다.
  58. 58) 구마라집본에는 ‘불야不也’가 없다.
  59. 59) 구마라집본에는 ‘菩提心’이 ‘菩薩心’이다.
  60. 60) 여기까지가 경전의 삼단 구성에서 「정종분正宗分」에 해당한다. 이하부터는 「유통분流通分」에 해당한다.
  61. 61) 이 대목은 경전의 삼단 분류 가운데 「유통분流通分」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