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불교문헌

신문新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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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新聞
佛敎時報
彙報 ; 內地 朝鮮佛敎 禪院 創設
『佛敎時報』 3호(1935.10), p.11.
일즉히京城鳳翼洞大覺敎堂內三藏譯會校正師로잇스면서 또한布敎事業에盡心渴力하다가 西으로나려가仁川光明學院南으로 釜山濟衆敎堂及濟靈療病院等을設立經營하든 東萊郡梵魚寺在籍東彊李根雨禪師는昭和九年舊二月十五日九州方面에 遊覽次로갓다가 一般信徒의要請을因하야 昭和九年舊六月一日福岡縣八幡戶畑両市의中央인 入幡市枝光字堂山峙에八戶中央禪院을設置하고 禪理를擧揚한지 一個星霜을經過하엿다는데 禪의名字도未聞者들까지聞熟케되여 修禪에有意한者들이 日加月增한다는데 此는內地朝鮮佛敎禪院의始創이라 一般人士는稱頌이藉藉하다더라
彙報 ; 少年少女 雜誌『悉達』 印刊 發行 計劃
『佛敎時報』 5호(1935.12), p.8.
市內鳳翼洞二番地大覺敎會本部에 布敎師로잇는 宋秉璣氏는 佛敎主義 少年少女雜誌「悉達」을 新年一月부터出版發行코저하야 只今부터 計劃을세우고 原稿蒐集에奔忙하다더라
京鄕各地 成道齋 法要 及 奉祝記念 大盛況 ; 大覺敎堂
『佛敎時報』 7호(1936.1), p.7.
◦市內 鳳翼洞 大覺敎堂
日時 同上
成道奉祝說敎 白龍城氏
彙報 ; 大覺敎堂의 法脈 相續式
『佛敎時報』 8호(1936.3), p.6.
市內 鳳翼洞 大覺敎堂에서는 去 二月 十六日에 觀音齋日을 利用하야 法脈 相續式을 擧行하얏다는데 嗣法 及 號와 傳法偈文은 아레와 갓다

嗣法 及 號

龍城大禪師 嗣 完圭 號 東軒
仝     嗣 禎薰 號 道庵
仝     嗣 德綸 號 雷黙
仝     嗣 月舟 號 鳳庵

傳法偈文

 示 李完圭 東軒 丈室
山水與拄杖  古人曾點得
我也打合睡  淸風過虛庭
 示 柳禎薰 道庵 丈室
覺祖傳法事  掉頭吾不知
雲門胡餠團  鎭州蘿蔔長
 示 崔德綸 雷黙 丈室
聖祖元不會  我亦無所得
午睡方正濃  山鳥又一聲
 示 邊月舟 鳳庵 丈室
山頭石矗矗  岩下水澄澄
讀書又睡眠  花枝鳥聲亂
彙報 ; 大覺敎堂을 海印寺 京城布敎所로 變更
『佛敎時報』 13호(1936.8), p.7.
市內 鳳翼町 二番地에 잇는 大覺敎堂은 白龍城禪師가 創立한 敎堂으로서 禪師는 생각하되 同一한 佛敎를 發展식힐지라도 舊穀을 버서나서 새로운 氣分으로 고처서 名稱도 고치고 制度도 고치고 儀式도 고처서 하는 것이 佛敎를 誤解하는 朝鮮人 頭腦의 惡習을 고치는데 가장 有力하리라 생각하고 佛敎에서 分派 獨立된 大覺敎를 세워서 間島에 支部를 두고 邇來 二十餘 星霜을 大覺敎 本部의 大覺 敎堂이라고 固守하여 왓섯다. 그러나 禪師가 老境에 至하야 此가 本意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朝鮮사람이 佛敎에 對하야 낫비보는 惡習에 對한 感情에서 나온 것인바 至今하야는 心田開發의 秋를 當하야 當局에서도 佛敎를 優遇하고 僧侶의 地位를 向上식히는 中인 고로 事必歸正으로 古來佛敎에 歸屬함이 正當함으로 생각하게 된지라 禪師는 大覺敎를 變更하야 가장 因緣이 깁흔 朝鮮佛敎 禪敎両宗 海印寺 京城 布敎所로 고치고 七月 十六日에 一切 文書 手續을 完了하엿다는데 當 敎堂에는 動不動産의 財産이 相當하게 잇는고로 設立者 代表로서는 禪師 及 門徒 七人의 名義로 하야 當 布敎所를 左右하고 永遠히 佛敎 布敎事業과 慈善事業을 經營하기로 하엿다 한다. 그런데 當敎 敎堂의 設立者 代表의 氏名은 左와 如하다고 한다.
海印寺 京城布敎堂 設立者
代表 白龍城
   柳道庵
   崔昌雲
   金警惺
   表檜庵
   崔雷黙
   邊月舟
彙報 ; 檀庵禪師의 入寂과 靈骨
『佛敎時報』 13호(1936.8), p.9.
李檀庵敦和禪師는 本是 平南江西郡 普林面 棲鶴里 出生으로 일즉히 官路에 出世하야 從事하다가 二十年前에 이 無常함을 깨닷고 市內 鳳翼町 大覺敎堂 白龍城禪師의게 歸依出家하야 禪理參究에 從事하며 午後不食의 苦行을 힘써오드니 今春에 支那를 드러가서 補陀洛迦山을 參拜하고 歸國하든 中 平壤에서 去 七月十日에 五十歲를 一期로 하야 入寂하얏슴으로 茶毘火葬케 하엿는데 頭骨로부터 琉璃가티 透明한 靈骨一片이 發見되야 一般信徒의 驚歎과 慕仰이 자못 크다고 한다
광고
『佛敎時報』 13호(1936.8), p.15.
釋迦史 定價 一圓 送料 四錢
이 冊은 八相錄보다 더 - 자세한 책인데 그 우에 석가여래께서 가섭 존자의게 세 군데서 마음을 전하신 법문해석과 염송에 잇는 불보의 법문을 다 해석하야 부인과 아이들도 잘 알도록 한 것이다. 불교를 찾는 이여 이 冊부터 읽그라.
發行所 京城府鳳益町二 大本山 海印寺 京城布敎所
發賣所 京城府舘洞町ノ三七 振替 京城二三八四三 番 佛敎時報社
彙報 ; 人事消息
『佛敎時報』 17호(1936.12), p.6.
白龍城禪師 大本山梵魚寺 內院庵禪院宗主로 就任
彙報 ; 大覺敎堂이 다시 大本山梵魚寺 京城布敎所로 移轉 手續
『佛敎時報』 17호(1936.12), p.6.
市內 鳳翼町 二 大覺敎堂이 大本山 海印寺 布敎所로 手續케 되엿다고 旣報하엿스나 그간 當敎堂과 海印寺와 相互間에 條件附로 交涉하든 것이 彼此意見相左로 破裂되야 다시 梵魚寺와 交涉을 進行하야 梵魚寺로 移轉手續을 마치게 되엿다 그래서 當敎堂의 基地 建物及土地와 또 咸陽잇는 華果院의 基地及建物果樹園과 間島 龍井村에 잇는 敎堂及不動 林野 土地(以上 現時價 十萬圓假量)를 모다 梵魚寺에 獻納케 되였슴으로 梵魚寺에서는 그 代身 每朔 百圓式 京城布敎所에 支佛하야 經費에 充當케되엿다 한다
彙報 ; 金禹善華氏의 念佛淨行과 齒舍利 獲得
『佛敎時報』 17호(1936.12), p.7.
全北井邑郡七寶面盤谷里金泳燮氏慈堂인金禹善華氏는今年七十二歲의老人으로溫厚貞烈하며當且有德하야慈善事業을만이行한고로鄕里에서活佛로써稱頌하야오든분이다그런데氏는距今十數年前에發心하야佛敎를篤信하면서부터念佛淨行이놀나운中六字呪文을專誦하야오드니今春에偶然히齒牙間으로부터一顆淨珠의齒舍利를엇게되엿다그러나老人은이것이무엇인지아지못해서감추워두고잇섯다그런데마침白龍城禪師가金山寺를經由하야梵魚寺로出發하는途中에井邑新泰仁金迦山居士宅에들느게되매此機會를利用하야禪師說法을듯고저하야모인善男善女가四五十名이모혀서說法을듯게되엿다그런데說法을마친뒤에席으로부터金氏老人이舍利一枚를내노코此物이何物인지알수업스니禪師의鑑定을바란다고함에禪師가보니眞舍利임이틀님이업는지라眞舍利로서公布하얏슴으로五十餘名의大衆이歡喜踊躍하야念佛精進하며金氏의舍利를拜觀하엿다고한다
新刊紹介 ; 白龍城 禪師 譯 신역대장경
『佛敎時報』 17호(1936.12), p.9.
定價七十五錢
述料四錢
이것은선사게서한문을전연아지못하는일반남녀를위하야순언문으로금강반야바라밀경을번역한것임니다
敎界消息 ; 朝鮮佛敎의 戒脈直傳과 白禪師의 傳戒
『佛敎時報』 18호(1937.1) p.13.
白龍城禪師는 朝鮮佛敎固有의 戒脈을 東山慧日師의 게로 傳하엿는데 그 由來한 禪師의 系統를 보면 아래와 갓다고 한다

大隱和尙 錦潭和尙 草衣和尙 梵海和尙 禪谷和尙 龍城和尙 東山和尙
敎界消息 ; 佛敎歌詞 募集
『佛敎時報』 19호(1937.2), pp.11-12.
0001_0008_a_01L市內鳳翼町二梵魚寺京城布敎所에서는 布敎師宋秉機氏發起로去年十二月부터朝鮮佛敎藝術協會를 組織하고在京樂界의權威를請하야會員의게樂理와聲樂과器樂〈P.11〉을敎授식히는一方佛敎音樂을發表하기爲하야歌詞를募集한다는데그種別은아래와갓다고한다.
一, 聖歌
誕生歌, 出家歌, 修道歌, 悟道歌, 涅槃歌, 慶祝歌, 戰法歌, 降魔歌, 敎理歌, 信仰歌, 叅禪歌, 發願歌, 祈禱歌
二, 佛敎童謠
佛陀恩, 國王恩, 父母恩, 兄弟恩, 朋友恩, 師傳恩, 愛動物〈p.12〉
謹賀新年
『佛敎時報』 30호(1938.1), p.7.
京城府 奉翼町二
朝鮮佛敎禪宗叢林
白 龍 城
謹賀新年
『佛敎時報』 54호(1940.1), p.21.
滿洲國 間島城 龍井街
第四敎區 大覺敎
信徒 李貞仁 許花容 羅無念花 韓明新 李春山 崔其正 吳功德花
釋大隱, 故 白龍城大禪師의 追慕
『佛敎時報』 59호(1940.6), pp.3-4, p.12.
0001_0010_a_01L釋大隱
조선불교선학계(禪學界)에서 선지식(善知識)으로 일제의추앙을 밧는이가 만이기시지마는 최근에 와서는 송만공(宋滿空) 방한암(方漢岩) 신혜월(申慧月) 백용성(白龍城) 네분이 사천왕과가튼 존재를가지고 기섯는데 멧해전에 신헤월스님이 열반하서서 선학게에적막한소식을 전하드니 또금년사월일일에 백용성스님이도라가섯다 그런데 백용성스님가치 세상에기실때에 고란이만코구설이만은분도 업지마는 또백용성스님과가치사후라도 업적을 마니남겨노코 가신분도업다 그런고로 사회의일반사람과 불교게의법녀들은 선사를생존시보다 사후에더 애적히여기고 더좀사라기시지못한 것을 유감으로 하는자가마느며 스님을 부처님처럼 또는 부모처럼밋고 법문을듯고단이든 수백명의 남녀신도는 스님의부고를듯고 산천이문어지고 임월이떠리진듯 낙담실신에까지이른이도적지안타 그럼으로 나는 선사의업적과약력이라도소개하야여러분과가치 선사를 추모코저한다
백용성선사는 룡성은당호요 이름은상규(相奎)이신데 갑자년오월팔일에전라북도남원군죽님니(全北南原竹林里)에서 정신재시충숙공제이십세존(靜愼齋諡忠肅公第二十世孫)으로 탄생하섯다 선사에모당(母堂)게서선사를배이실때에꿈가운데 엇던도승의게절을밧고나섯는지라 그부모로부터 이아이는장차중이될 것을 미리짐작할일이잇다고하는데 선사는 어려서부터도 마음이착하고 중을조와하엿다고한다 선사가여섯살때에아버님을따라서 낙수질하는강가에가서 낙수질하는 것을 구경하다가고기를 불상히역이고 그 아버지가 만이낙가가지고오는 고기를모다물가운데 노아준일이엇다고한다 그래서 그아버지가 노하야매로서때리려고한즉 「내가아버님게 매맛고걱정듯는것보다 고기들이 살아가는그것이더유쾌함니다」 하엿다고한다 이것만 보드래도선사의 자비심이 얼마나장한 것을 알수가있다
선사는 여덜살부터 서당에드러가서 한문공부를하엿는데 재조가뛰어나서 선생들의게 층찬을밧는고로 여러아이들의게 싀기를바든일까지잇다고한다 그러다가 열여섯살자시든때에 홀연이 세상이 무상한것을늣기고 경상남도 합천군 해인사(海印寺)를 차저드라가서 화월선사(花月禪師)의게 은사를청하고 중이되엇는데 중된즉시로 경상북도 의성군 고운사(孤雲寺)에가서 당시선지식으로 고명한전수월(水月)스님의게선법(禪法)을듯고발심하야가시고 시심마(是甚麽) 화두를잡아서 공부하다가 다시무융선사(無融禪師)의게가서 또선법을듯고 무자화두(無子話頭)를 들게되였다 그러나공부가잘되지안는고로 수무살되시든때에 경기도양주군고령산보광사도솔암(古靈山普光寺兜率庵)에가서 천수주력십만독을하고 기도정진을하야마친후 무자화두공부를하다가 홀연히 한번웃고깨첫는데 허공이문어지고대지가 흔들니는것갓햇다 그뒤에부터는보림공부를하다가 수물일곱살자시든해에 경상남도양산통도사(通度寺)에 가서선곡율사(禪谷律師)에게 비구계(比丘戒)와 보살계(菩薩戒)를밧고 다시해인사(海印寺)에와서 일대시교의경전(一代時敎經典)을보시고 사십삼세시에 해인사장경판을 수리하고 사십사세시에는 무주덕유산(茂州德裕山)에서 법천암(法泉庵)을창건하시고 그뒤에지나(支那)로가서 여러총님대찰을 유림하고 고승석덕과 십견하고오섯다 그리고 사십구세시에 민중교화의목적을가지고 사동(寺洞)서 조선불교임제선종중앙포교당(朝鮮佛敎禪宗中央布敎堂)에서포교사업에종사하다가기미년의 삼십삼인사건에연좌되야 서대문형무소에서 삼년간…(四頁五段으로속)… 〈p.3〉
…(三頁下段에서續)…
영오의생활까지하엿다그런데 선사는 형무소에서 나온뒤로부터 전비를깨닷고 심기일전하야포교에 노력하며불교서적간행을주력하고 삼장역경회를조직한후 저술에종사하야 각해일륜(覺海日輪), 귀원정종(歸源正宗), 심조만유론(心造萬有論), 청공원일(暗空圓日), 등을짓고 경으로는 금강경 원각경 기신론 능엄경 범망경 화엄경 팔상록 등을 번역하엿다
육십일세시에 갑자년 사월이십팔일에 경전을 열남하다가 왼편치아사이로부터 검불근빗의 사리(舍利) 한개가나왓고 육십이세시에는 양주군도봉산망월사(望月寺)에서만일참선회(萬日參禪會)를조직하엿고 육십삼세시에는 조선불교선종을독닙식혀 달마고조선총독부와일본내지내무성에두번이나건백서(建白書)를올녓스나 뜻과갓치 되지아니하엿슴으로 육십사세시에 대각교당을짓고불교를 사회적으로 향상식히기위하야 또는일반사회사람들의불교에대한 멸시적의낫분관습을 고치기위하야 대각교(大覺敎)를선언하고 불교의이채(異彩)를 내게하엿다
그리해서 함양에는화과원을짓고 간도용정가에도지부를두엇다
그러나 선사의본심은어데까지든지불교의향상을 위함이엿지마는선사의뜻을모르는세상사람은이것때문에선사를야심가라고하야비관하고공격을만이하게되였다 따라서 선사도구설과시비를만이듯게되엿섯다 그러나선사는 자기가조와하는선종을독닙시힌다는의미로대각선종을세운다는 것이 대각교로된것인데시대에맛지안한점도잇고하야칠십오세시에대각교를해체하고 조선불교선종총림(朝鮮佛敎禪宗叢林)을 창설하엿다 그리고 열반하든이날까지 선법을선양하다가 안저서입선한채로 열반하시니법납이육십이세요 형년이칠십칠세이신대도라가시든날까지도 제자를위하야 설법을하엿고병환이위중하심에도불구하고 안저서도라가시엿다 신시의은법상좌와수게재자가칠십여인이요참회제자는승속■에수백명이다
그런데운명하시는순간에제자들이임종게를청한즉내가무슨별다른임종게가잇겟느냐하며임…(一二頁四段으로續)… 〈p.4〉
…(四頁下段에서續)…
종게를외이고가섯스니

七七年間遊幻海
今朝脫骰返初源
廓然空寂元無物
何有菩提生死根

이러한글이다 이것을 번역하면

칠십칠년 헤매다가
오늘날에 고향가네
본시부터 업는자리
보리생사 무슨말가

이러한 것이다

이상에 적어온 것이 선사의약력이어니와 선사는참으로 칠십칠년간을불교를위하야싸와왓고선종을위하야 노력한불교게의은인이라하겟다 때정히국가의비상시를당하야 선사와갓튼신지식을일케된것은조선불교게의큰손실이라선사를추모하는정이더욱히새로움을늣기게된다 〈p.12〉
謹賀新年
『佛敎時報』 66호(1941.1), p.8; 78호(1942.1), p.13; 90호(1943.1), p.6.
0001_0011_b_01L
府內 鳳益町 二
梵魚寺 布敎堂
布敎師 林太虛
院主 新井俊輝
(表檜庵)

京城府鳳翼町二
大本山梵魚寺
京城布敎所

府內鳳翼町二梵魚寺布敎所
布敎師 林太虛
院主 新井俊輝
祝 佛敎時報創刊 第六周年 祝 總本寺太古寺 完成
『佛敎時報』 74호(1941.9), p.6.
滿洲國 龍井市 大覺敎堂 崔其正
每日申報
中央布敎堂의 興學
『每日申報』(1912.4.6), 3면 4단.
중앙포교당의권학
죠선림제죵즁앙포교당쥬(朝鮮臨濟宗中央布敎堂主), 한룡운화상(韓龍雲和尙)은즁부뎐동즁동학교(典洞中東學校)의, 경비곤난을셕이역이어서, 그학교를, 포교당에셔유지기로, 계약고, 그학교위치림시포교쇼로, 용다며, 불교신도로, 포교기에, 열심던, 손완슈(孫完秀)화상의츄도회, 한룡운룡성(白龍城)여러화상의발긔로, 본일하오삼시에즁동학교안에셔, 거다더라
中央布敎堂 開校式
『每日申報』(1912.5.26), 3면 4단.
즁앙포교당의교식
셜비가굉쟝다지오
즁부동(中部寺洞)동디에, 로셜립죠선림제죵즁앙포교당(朝鮮臨濟宗中央布敎堂)에셔, 본일하오삼시에교식을셩대히셜다말은임의긔얏거니와학의챵가와, 한룡운(韓龍雲)화샹의지셜명, 룡성(白龍城)화샹의셜교, 졍운복(鄭雲復)리능화(李能和)량씨의찬연, 빈의츅와, 기타졔반셜비에, 무젼성셩황을, 일울터이라더라
布敎堂의 盛況
『每日申報』(1912.5.28), 3면 4단.
즁앙포교당의성황
임의긔바와치, 작일, 오후삼시브터, 즁부동에잇, 죠선림제종즁앙포교당(中部寺洞朝鮮臨濟宗中央布敎堂)에셔셩대교식을, 셜얏, 한룡운(韓龍雲)화샹의, 지셜명, 룡성(白龍城)화샹의교리셜명, 신졍운복(鄭雲復)리능화(李能和)량씨의연셜, 호동학교도일동의챵가, 음악의주악등이잇셧고, 당일에입교, 남녀가, 팔명에, 달얏스며구경人군이, 일천삼여명이되야, 공젼졀후(空前絶後)의셩황을, 일우엇다더라
新刊紹介
『每日申報』(1913.8.1), 1면 6단.
布敎上指南書籍
中部寺洞에在朝鮮禪宗中央布敎堂에셔歸源正宗과八相錄二種書籍을印行지不過月餘에一般信徒의購覽外地注文은逐日踏至不啻타詃書籍은各宗敎界人士에게寶鑑이된다고稱譽가浪藉다더라
宗敎界 ; 中央布敎堂 經典 講習
『每日申報』(1913.10.1), 2면 7단.
中部寺洞朝鮮禪宗中央布敎堂에셔一般信徒로야금經典을講習케기爲야每火曜金曜兩日下午五時에說敎다며請師開敎師長白龍城和尙으로定얏聽講者가三十餘人에達다더라
宗敎之人 ; 寺洞 禪宗 中央布敎堂 禪師 白龍城 談
『每日申報』(1914.2.1), 1면 4단.
佛道敎海滔々야渺無涯岸으로隨經宗旨가派及百千이나唯我禪宗은是敎外別傳으로世尊이於三處에傳心사以正法眼藏으로付囑摩訶迦葉사不立文字시고直指人心야見性成佛케시니西天二十八代와中華六代와五派分芳과天下禪師가相承不絶是一信禪宗也ㅣ오
本敎中央布敎堂은余가四年前에來京야欲報佛恩야以世尊三處傳心신敎外禪旨와臨濟三玄三要四科棟等으로直指人心신格外禪旨를復興唱道기爲야交通이便利此京城에本部를建設코야各地同宗寺刹에提議러니好事多魔로不正心者ㅣ吾宗을謀害者ㅣ有하야捐義者ㅣ不過七百圓인故로梵魚寺가如初不變으로■■■■을■■야今日에余等의所望을達케야노라
敎內現況으로各地敎徒가一万三千七百十人으로漸次發展니布敎와敎旨에益明努力코져노라
宗敎界 ; 禪宗臨濟派講究所
『每日申報』(1915.5.14), 1면 6단.
京城仁寺洞梵魚寺中央布敎堂에셔布敎에從事던白龍城和尙은近日所感事가有다야中部長沙洞에禪宗臨濟派講究所를設立고每日曜日午前十一時브터修道者爲야臨濟語錄의提唱도고臨濟禪風의振興에熱心中인其第一回講義佛法的々之大意인如左더라
昔에臨濟祖師ㅣ問佛法的々大意이라가被黃檗三度六十賜棒시니大衆은如何會得這棒고是一條白棒麽아是無來處棒麽아是換却眼䝼棒麽아是觸令反玄棒麽아是接掃從正棒麽아是靠玄傷正棒麽아是辨驗虛實棒麽아是指示棒麽아是無指示棒麽아驢年이라始得다當時에若非沒量大力者ㅣ면喝似雷奔고棒似雨滴이라도奈何爾不得리라衆中에還有承當者麽아速々出來看라若欲擬議星飛火散리라黃蘗老婆를大愚橈舌이로다蒼藤六十似嵩技라了知佛法無多子ㅣ로다月照長空고風生万藾로다大愚助下三擧니佛法的々大意로다捋虎鬚를見也麽아眞箇雄々大丈夫로다棒下無生忍은當機不讓師ㅣ니如今에還有臨濟老漢者麽아九包之鄒不在離邊之下고千里之駨不處群半之中이니라我臨濟祖師道出常流라千聖이齊立下風이오니豈可以非小情量으로擬議哉리오打拄杖兩下喝一喝云須知這一喝이야사始得다然雖如是나此是建化門接引之事ㅣ라時淸不要太平歌니라
禪宗 臨濟派 講究所
『每日申報』(1915.5.16), 1면 6단.
本日 午前 十一時브터 白龍城의 提唱이 有다더라.
冥福을 祈禱 션종대표가
『每日申報』(1926.5.2.), 5면 5단.
불교션종대표(禪宗代表) 백상규(白相奎) 외 네명의 승려는 일일 오젼 즁에 재궁 압헤 나아가 고 뎐하의 명복을 비럿다.
宗敎界 ; 禪宗 臨濟派 講究所
『每日申報』(1915.5.23), 1면 6단.
長沙洞講究所에셔午前十一時부터白龍城和尙의禪宗에關講話가有다더라
宗敎界 ; 佛敎兩堂說敎
『每日申報』(1915.5.30), 1면 6단.
壽松洞覺皇敎堂에셔午前十一時브터擎雲師의說法이有고長沙洞臨濟派講習所에셔午前十一時브터白龍城師의說法이有다더라
宗敎界 ; 臨濟派講究所
『每日申報』(1915.6.20), 1면 6단.
禮智洞臨濟派講究所에셔午前十一時브터白龍城師의大覺經提唱이有다더라
寄書 ; 吾宗은 臨濟禪宗
『每日申報』(1915.7.7), 1면 5단.
迦由沙門 白龍城
原夫淸平이如堯天舜風야海晏河淸이라空山에水流花開고家々에純樂無爲러니最初佛威音王이首唱道化시니可謂太平世界에起干戈也ㅣ로다咄不塗紅紛也風流이니라自威音王佛出世以後로滔々敎海가如雲起長空고重々禪林이如淸風明月야傳受無傳受之名과佛法世法之名이燦然興於世시니可謂乱世之奸雄이며治世之良將이로다會麽아掭脂着紛也無妨이니라從此로佛々이授々며祖々相傳라及於釋迦佛야以正法眼藏涅般妙나니라第三句括盡一藏敬海야說佛說法說凡說聖說理說事等無邊法門나니得之於心者出生死苦海어니와擬之於心議之於口者自已生死苦海도未濟온況乎他人乎아此三句臨濟宗之綱領이니一切法門이不出乎此臨濟三句이니是臨濟宗風之由也이라此宗旨를代々相傳사至臨濟下十八代石屋禪師야高麗國太古禪師가入支那明用霞霧山사親見石屋淸琪禪師사得臨濟宗旨시니是海東臨濟宗初也니라此臨濟宗旨傳之幻庵고庵이傳之龜谷而至于淸虛休靜禪師야臨濟宗風이大振이라出四派니曰逍遙曰鞭羊曰無染曰松雲ㅣ라至今釋迦下七十五代오臨濟下三十八代也ㅣ라禪有二種니一日敎外別傳이니釋迦所傳三處傳心臨濟正法眼藏是오二日觀禪이니敎中所謂靜幻寂三觀과空假三觀等이是이니라臨濟得諸佛之骨髓사盡底無遺也ㅣ니余謂朝鮮法脉相傳이唯臨濟而已라노라
唯心學友會 役員
『每日申報』(1921.10.21), 2면 9단.
在京城佛敎徒留學生二百五十餘名으로祖織된唯心學友會에셔旣報와如히十六日下午七時에京城壽松洞覺皇寺敎堂內에셔宋奉瑀氏의司會下에臨時總會를開하고諸般事項과將來維持方針을決議後任員은如左히選定하얏다더라
總務部長鄭樂英
同部員宋奉瑀
經理部長鄭孟逸
同部員申文守
智育部長金相琪
同部員金鳳秀
顧問白龍城
今日의 出版許可(警務局圖書科調)
『每日申報』(1928.1.13), 3면 3단.
同 十二日 朝鮮語楞嚴經 白相奎
 同 大覺敎集      同
國防獻金
『每日申報』(1937.8.5), 3면 5단.
▹鳳翼町 大覺敎 中央本部 五十圓
“許多 農民 속인 大覺敎大敎師 차저주오”(—四十七戶의 代表入城泣訴)
『每日申報』(1939.12.27), 3면 9단.
26일 부내 본정(本町) 삼월(三越) 백화점 경찰 안내소에 『나는 四十七호 三백二十六명을 대표하여 왔는데 촌민이 피와 땀으로 번 돈 一만二천五백二十八원九四전을 도루 찻도록 하여 주오』 라고 말하여 온 사람이 있섯다. 그는 만주국 간도성 연길현 봉령촌 가평둔(滿洲國 間島城 延吉縣 鳳靈村 佳坪屯) 한익선(韓益善, 二一)으로 자세한 내용을 드러보면
가평둔 촌민들은 지난 四월 二일 경성부 봉익정(鳳翼町) 二번지에 원적을 두고 간도에 와서 대각교(大覺敎)란 종교를 만들고 대교사(大敎師)가 되어 우매한 농민들을 속혀오든 백상규(白相奎, 八0)란 사람으로부터 홍두표(洪斗杓)를 대리인으로 하고 자기네들이 몇 해를 두고 한푼 두푼식 모아 온 돈一만二천五백二十八원九四전으로 백상규의 토지라고 하는 헌밧 五十二만二천四十평(坪)을 사들여 가지고 밧부게 농사를 지어 올지음 지난 十二월 초순 룡정 가 강령구 대도로 제일패(龍井 康寧區 大道路 第一牌) 五호 원용호(元容浩)외 네 사람이 차저와서 뜻박게도 그 땅은 자기네 것인데 만약에 이 땅에서 농사를 지을려면 소작료를 내라고 하였다 한다. 그리하야 그들의 기쁨도 오래가지 못하야 깨지고 마럿스니 나종에 알고본 즉 백상규는 땅이 맛치 제것인체 하고 자기네들에게 팔아버린 후 경성으로 자최를 감추어 버린 사실이 판명되었다. 이에 속은 줄을 깨다른 三백여명의 농민은 국무원 정리국(國務院整理局)을 차저가서 자기네 땅인 것을 증명하여 달라고 하엿스나 거절을 당하자 그들은 한익선을 대표로 뽑아서 서울까지 보내어 경성에 탄원하도록 한 것인데 한은 二十六일 종로서에 그를 거러 설유원을 내엇다 한다.
人事
『每日申報』(1940.4.3), 1면 11단.
白相奎氏 二日 府內 鳳翼町 一蕃地 自宅에서 別世
東亞日報
社說 ; 佛敎의 民衆化 運動, 三藏譯會의 出現
『東亞日報』(1921.8.28), 1면.
宗敎가 참으로 生命 있는 宗敎가 되야 그 一般信徒로 하여금 一層 淸淨한 生活을 하게 하며, 一層 聖潔한 生活을 하게 하며, 一層 豊富하고 光明한 生活을 하게 하야, 眞實로 그 生命의 躍動을 期하랴 할진대, 첫째 그 宗敎의 眞理가 生命이 잇서야 할치오. 둘째 그 眞理의 生命을 各 信徒가 마음에 理解하야 人格에 化하여야 할지니 萬若 그 所謂 眞理라 하는 것이 虛慌한 迷信에 不過하거나 또는 그 眞理가 비록 生命이 잇다할지라도 一般信徒가 그 眞理를 理解하야 體得하지 못할 것 같으면 그 宗敎는 結局 根本이 腐染한 종교가 되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結果를 얻지 못하는 宗敎가 될 것이라 이럼으로 宗敎의 貴한 것은 첫째 그 眞理의 生命이오. 둘째 그 傳道方法의 宣을 得함이니 이제 종교의 發達史를 繙하고 그 興亡 浮沈의 跡을 參考하건대 眞理없는 宗敎가 眞理있는 宗敎에게 生命없는 宗敎가 生命있는 宗敎에게 覇逐을 當하야 消滅하고 信徒의 理解없는 形骸의 宗敎가 信徒의 理解있는 實質의 宗敎에게 信徒의 信仰이 流露하야 善行美德을 이루지 못하는 宗敎 그 能히 이를 이루는 宗敎에게 淘汰를 當하야 滅亡한 것을 吾人은 昭昭히 알지니 元來 宗敎敎理의 生命이 있고 없는 것을 判斷하는 것이 勿論 그 敎理 自體에 就하야서도 可히 云할 것이나 그러나 그 實은 信徒의 理解 與否와 實行 與否로써 알 것이니라. 이에 敎理의 生命은 그 信徒의 理解와 體現과 合하야 비로소 完全한 生命을 이루는 것이니 信徒의 理解와 體現을 離한 宗敎敎理 自體의 生命이 그 무슨 所用이 有하리오. 맛치 大氣와 水分과 地味와 光線의 適當한 機會를 얻지 못하고 地下에 埋葬된 花草의 種子와 다름이 無하야 結局은 腐敗에 終하고 말 것이라. 儒敎에 生命과 價値가 存하는가. 萬若 그러하면 그는 儒敎信者에게 그 生命과 價値를 理解하는 者가 有한 까닭이오. 基督敎에 또한 生命과 價値가 存하는가 그러하다하면 그는 또한 그 信徒에게 基督敎의 眞理를 體得한 者가 有한 까닭이라. 이제 朝鮮佛敎의 現狀을 觀察하건대 그 曾往에 偉大한 文明을 成하야 개인에게는 繁榮한 希望의 源泉이 되고 社會에는 無窮한 福樂의 根本이 되든 것과 天壤의 差異가 有하야 衰沈에 衰沈을 加하며 墮落에 墮落을 加하야 人生苦惱에 何等의 慰安을 與치 못하며 社會向上에 何等의 貢獻을 有치 못하니 此는 吾人의 佛敎를 爲하야 痛歎하는 바일 뿐만 아니라 實로 朝鮮民族 全體의 文明을 爲하야 그 損失의 莫大함을 可惜히 아는 바이로다. 그러면 曾往 佛敎에는 價値와 生命이 有하고 現在 佛敎에는 그것이 缺乏하냐하면 此는 必히 그러하지 아니하니 曾往 佛敎의 經典이 今日의 經典이오 曾往 佛敎의 敎理가 또한 今日의 그것이리, 그 敎理 自體에 엇지 古今의 別이 有하리오. 오즉 佛敎를 理解하고 그 眞理를 體得하는 사람에게 古今의 別과 深淺의 差異가 存하나니 此 信者의 別과 差異는 곳 佛敎의 興亡을 決한 絶大의 原因이 되얏도다. 元來 宗敎의 生命은 그 信徒의 理解와 合하야 비로소 完全한 生命을 이루는 것이라. 이엇지 當然한 바 아니리오. 그러므로 이제 불교를 다시 振興하야 法界衆生으로 하여금 無明癡暗을 打破하고 淸淨覺性에 大慧를 開發케 하랴 함은 그 교리의 宣傳方法을 改革하야써 모든 民衆으로 하야금 親히 그 敎理를 理解하며 體得케 하여야 할지니 이곳 佛敎를 民衆化하는 것이며 그 生命을 發하야 幸福의 源泉을 作하는 所以이라. 在來佛敎의 宣傳方法을 觀察하면 첫재 그 經典이 純漢文이라 一般信徒가 此를 理解하기 困難할 뿐만 아니라 그 學得하기 또한 容易하지 아니하며, 둘재 그 解讀과 講義가 亦 純漢文이 아니면 純漢文式이라 이럼으로 一般民衆은 그 入門의 不便 感하야 結局 그 全生命을 까지 閉却함에 至하나니 이엇지 佛敎界를 爲하야 痛歎할 바 아니며 朝鮮文明을 爲하야 可惜할바-아니리오. 吾人은 此에 鑑하야 佛敎의 諸經律論等을 朝鮮文으로 或 飜譯하며 講義하며 或 著述 編述 造論하야서 佛敎의 民衆化를 目的하고 白相奎氏를 中心하야 起한 三藏譯會의 事業을 贊成하는 同時에 그 前途를 祝福하야 玆에 歎言을 發하노니 願컨대 一般社會는 此에 對하야 多大한 同情을 與하며 同會는 萬難을 排하고 勇往猛進할지어다.
모임 ; 불교진리 선전
『東亞日報』(1921.9.18), 3면 9-10단.
금일 하오 팔시에 인사동 불교청년회관에서 백룡성(白龍城)씨가 강연.
기미독립운동과 조선의 48인, 최근 소식의 片片
『東亞日報』(1925.10.1), 2면 4단.
백상규선생 ; 삼십삼인 사건 때에 불교측으로 선언하신 두분 중의 한 분이 룡성(龍城)스님이라고 부르는 백상규(白相奎) 선생은 고금이 일반으로 시내 봉익동(鳳翼洞) 일번지에서 부처님을 모시고 계신데 미신인지는 모르되 선생이 지어 파시는 백고약(白膏藥)은 부처님의 령험이 부르섯다고 짓치가 돗친 것처럼 불교신자들에 팔립답니다. 환갑은 마즈신지도 이미 이년 전이나 속은 아직 팔팔하지마는 덧업시 흐르는 세월에 퇴침을 자주 차즈시게 되었담다.
百餘 僧侶連名으로 犯戒生活 禁止 陳情
『東亞日報』(1926.5.19), 2면.
일부주지와 전국각사 승려의 연명으로 파계생활을 금지하라고 당국에 진정해
「肉食帶妻는 佛敎滅亡의 張本」
홍진만장의 세상을 등지고 물 맑고 경개 조흔 깁흔 산 속에다가 몸을 두고 산채를 먹어가며 풍진세상의 온갖 잡된 것을 눈으로 보지 아니하며 귀로 듯지 아니하야 순전한 금욕생활을 해가며 불경을 외우는 것으로 일생을 불도를 닥기에 맛치어 오든 승려들이 삼사십년 이래로 야소교 텬주교 등 새로운 종교가 들이 오고 는 인문이 발던됨에 러 조선의 승려들도 차차로 교지에 버스러진 일을 하기 시작하야 이즈음에 일으러서는 남녀승려들을 물론하고 세속사람들과 어울려서 도회살림을 하며 또는 조흔 비단옷과 맛잇는 육식을 마음것하며 남자승려들은 장가를 들어 정욕생활을 하는 중, 더욱이 작첩지 하는 중들도 생기고 녀승들은 싀집가며 는 남자들과 성뎍생활지 하게 되엿스며 그것도 유의부족한지 아조 펄처노코 그와 가튼 생활을 헤보겟다는 생각으로 취처육식하는 것을 크게 선뎐하는 승려들지 만케되엇다는 바 이는 불교교지에 버스러진일로 조선불교를 망케할 장본이라하야 수일전에 동래범어사(東萊梵魚寺) 주지 백용성(白龍城), 함경도석왕사(咸鏡道釋王寺) 주지 이대전(李大典) 합천해인사(陜川海印寺) 주지 오회진(吳會眞) 등 일백이십칠명의 련서로선 조선 사천중생을 위하야 불교의 장래를 위하야 취처(娶妻) 육식(肉食) 등의 생활을 금하야 달라는 의 장문진정서를 총독부 당국에 뎨출하엿다더라.
社說 ; 僧侶의 「肉食 娶妻 禁止」에 對하여
『東亞日報』(1926.5.20), 1면.
昨日 本誌에 報道한 바와 如히 一部 佛敎 敎徒間에는 總督府 當局者에게 새로운 請願을 提出하엿다는대 다른 것이 아니라 佛敎를 밋는 승려들에게 肉食과 娶妻를 禁하여 달나고 한 것이다. 그 理由는 肉食과 娶妻를 하는 것은 佛敎가 滅亡하는 張本이 된다는 것이니 그네들은 오늘날 佛敎가 朝鮮에서 不振하는 것은 肉食과 娶妻를 하는 者가 잇서 온데에 잇는 줄로 생각을 하거나 또는 今後 佛敎가 盛旺하게 함에는 肉食과 娶妻를 禁함으로써 有力한 動機가 될줄로 밋는 模樣이다.(하략)
衣服 千餘件을 同情한 大覺敎
『東亞日報』(1928.9.15), 2면.
시내 봉익동(鳳翼洞)에 본부를 둔 대각교(大覺敎)에서는 관북 리재 동포들의 가련한 정경을 동정하야 다수한 남녀 교도들이 각각 옷을 거두어 천여 벌을 본사에 의뢰하야 추위에 헐벗고 떨고 잇는 그들을 구제케 하얏더라.
會合
『東亞日報』(1930.2.23), 3면.
延邊 消費組合 創立大會 去十六日 大覺敎堂에서 開催
龍井 大覺敎會에 突然 解散 通告
『東亞日報』(1938.4.3), 4면 5단.
龍井 大覺敎會에 突然 解散 通告, 기부금 만오천원도 반환 요구에 대한, 信徒會서 對策講究.
간도 용정에 잇는 대각교회(龍井 大覺敎會)에는 경성부 봉익정 이번지(京城府鳳翼町二番地)에 거주하는 동 교회 창설자이며 현재 고문격인 백상규 대사(白相奎 大師)(67)로부터 돌연히 지난 25일에 대각교회 해산 통고문이 도착하였는데 그 내용은 (昭和 11년 10월 20일에 中央本部 大覺敎會가 解散한바 支部인 龍井 大覺敎會도 時速히 解散하라)는 것이며 동 교회 운전기관인 간사회(幹事會)원 중 안용호, 강재덕, 방태용(安容浩 姜在德 方泰容) 三氏가 지난 二十二日 상경시에 역시 해산하라는 말과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에 기부한 토지 시가(時價 一萬五千圓)을 반환하라 함으로 동 교회에서는 四월 三일에 신도대회(信徒大會)를 개최하고 대책을 강구하리라는바 이제 탐문한 바에 의하면 그 리면에는 복잡한 관계가 있다 한다.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에 경성에 있는 백상규, 고봉운, 최창운(白相奎 高鳳雲 崔昌雲) 三氏가 三萬 三千圓의 대금으로 명월구 급 용정에 토지 건물을 매입하여 용정 대각교회를 창설하고 백씨 외 二인을 일방으로 용정 대각교 대표간사 김중권, 안용호(金重權 安容浩) 씨외 十二인을 일방으로 하여 기부 서약서(寄附誓約書)까지 작성하여 백씨가 보관하고 다만 토지 건물 집조(土地建物執照)만 백씨의 명의로 하여 보관할 따름이였다 한다. (保管方法도 寄與人 三人중 二人 別世時는 大覺敎會에서 保管한다는 條件이 添附) 이리하야 백씨의 요구한 바대로 기부한 재산을 반환만 한다면 현재 교당(敎堂)은 없게 되므로 본 문제는 용정 대각교회 백여 신도에게 중대한 문제이므로 금번 신도대회와 백씨의 태도에 대하여는 자못 주목된다 한다.
中外日報
大覺敎 設法會 성황리에 폐회
『中外日報』(1928.1.12), 2면.
시내 봉익동(市內 鳳翼洞) 이번디에 주소를 둔 대각교 대교사 백상규(白相奎)씨는 거년 사월에 간도 룡정시(間島龍井市)에다가 교당을 설립하고 수백명의 교도를 어덧스며 그 교당 안에 소년 소녀회가 조직되얏다 하며 또 룡정에서 오륙십리 되는 운■나자■■■■라는 곳에다가 수만평의 토지를 사서 동포들을 위하야 오년간 무료로 지어먹게 한다하며 금번 대각교 교수사 석시경(釋時鏡)씨 인솔노 남녀소년대 일동이 귀국하야 소년회 주최로 세배 겸 일월 팔일 오후 두시에 시내 봉익동 대각교당에서 설교회와 소년회 시무식을 개최하얏엇는데 대성황을 일우다더라.
新韓民報
민족대표 四十八인의 략력
『新韓民報』(1922.3.9), 4면.
불교 승려
상규(룡셩)
경셩 봉익동
五十八 八月 八日

강원도에서 성하다 오동안 불교에 귀의하여 불학을 연구하고 금강산듕에 잇다가 융희 四년경에 경셩에 와서 중앙포교당을 셜하고 선사가 엿다가 슈년후에 뎡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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間島新報
龍井 大覺敎に 對し 京城 本部から 解散命令
『間島新報』(1938.4.12)
龍井朝鮮人側佛敎團體大覺敎に過日京城本部の大敎師である白相奎氏(一名龍城)から大覺敎中央本部は昭和十年七月二十日解散した旨の通告といもに支部なる龍井大覺敎も卽時解散すべしとの所謂解散命令書が倒着したので信徒間にセンセ-ションを捲き起し去る三日午前十時龍井 大覺敎では信徒大會を催した所信徒數百名集まり協議の結果龍井大覺敎は京城の大覺敎本部とは何等直接的關係がないのに拘らず解散命令を下した事は全く脫線的行動なりとし長時間に亘つてこれが對策につき熟議の結果龍井信徒大會の名により左の決議文を作成し白相奎大敎師の 解決命令を一蹴してこれを白氏宛發送した
▷ 信徒大會決議文◁
一, 龍井大覺敎は京城と別個團體で何等本部と支部の關係なきにつき龍井大覺敎は解散理由を認めず乃て永久に解散せず
二, 龍井大覺敎は信仰を中心とせる信徒の集合團體なるが解散を命ずる權利なきものと認む
三, 解散理由が或は大覺敎が類似宗敎團體に編入された關係なれは滿洲國に於て佛敎團體としての適宜な名稱に變更はするが信徒の信仰的集團を解散する理由は決してなきものと認む
四, 龍井大覺敎解散命令の書信は龍井大覺敎に寄附したる基本財産中の不動産を回收せんとする意圖であるかは知らねども信徒一般は當時契約文に依り斷然拒絶ず
五, 龍井大覺敎も滿洲國當局より類似宗敎團體に編入の指令がある場合は卽時滿洲國に適宜な佛敎團體表示の名稱に變更す(以上)
龍井大覺敎理事長安容浩氏は解決問題につき左の如く語つた
我等佛寺團體の內部的問題が社會一部の輿論とまで擴大した事は甚だ申譯ないのです, 然し旣に表面に展開された以上は賢明なる社會的批判と法的裁斷を仰ぎ我等信徒は淸淨なる氣持で邁進します大覺敎が龍井に設立したのは今より十一年前の昭和二年二月に京城の白相奎, 高鳳雲, 崔昌雲三氏が來龍して本佛寺事業を永久堅固にすべく土地よをび山林, 家屋等を寄與して右三氏と信徒代表者間に誓約書を作成して今日に至つたのです, 同年四月八日に奉佛開敎式を擧行し白相奎は施主高鳳雲崔昌雲兩女士より喜捨金一萬餘圓を得て明月溝と太平洞に土地を買收して龍井大覺敎に寄附したもので龍井大覺敎では邇來該土地を管理し稅金を納めて敎堂の經營を行ひつい萬難を克復し信徒の熱意につて內外不利な諸情勢を乘り越へ, 今日に至つたのですがこれからは新興滿洲國宗敎統制機構內にをいて本佛寺龍井大覺敎の發展策を講究中突飛に財産寄與者中の白相奎氏から何等根據なき脫線的な解散通告文を受けたので全く保れざるを得ないのです, 白氏今回の行爲は全く無知なるがための脫線的盲動で施主一個人が解散命令を下す權限は度を越へたものと思はれ取敢へず信徒大會まで開いて決議したのです
朝鮮日報
李鍾模, 韓國佛敎와 國難
『朝鮮日報』(1959.2.18)
己未년 三月 一日 獨立萬歲運動이 일어나게 되자 佛敎 代表로 韓龍雲 白龍城 두 大禪師를 爲始한 三十三人이 宣言文을 宣布하므로 말미암아 全國 數百萬 敎徒는 擧國的으로 總蹶起하였다. 義士 烈士 愛國志士들이 或은 銃殺되고 或은 他殺되었다. 돌아오지 못할 이슬로 化한 愛國鬪士가 五萬七千七十四名이나 되었다. 그 中의 多數가 佛敎徒이었다.(중략)
그 길로 韓國 比丘僧에 대한 彈壓은 날로 極甚하여 걸망짐진 首座는 警察官 駐在所를 通하여 하루도 몇 번씩이나 보따리를 풀고 싸는 調査에 걸리어 하루 몇 리길도 못간 것이 그 當時의 實情이었다. 그래도 倭僧들은 서울에 당당히 博文寺를 세우고 日本佛敎에 韓國佛敎를 附屬시키려고 猛烈한 活動을 露骨化하여 比丘僧에게 대한 虐待는 깊어져 갔다.
이들의 日本支配者들의 宗敎政策에 對抗하기 위해서 서울 安國洞 四十番地에 『財團法人 朝鮮佛敎 禪理探究院』을 設置하게 되었다. 一九二六年 十二月 五日에 總督의 認可를 얻어 首都地區를 死守하자는 뜻으로 比丘 修道院까지 創設하게 되었다. 比丘 最高 領導者인 宋滿空 白龍城 申雲月 方漢岩 韓龍雲 吳惺月 金南泉 姜道峰 等 大禪師가 一致團結하여 比丘育成을 圖謀하고 『中央禪學院』을 세우게 된 것이다.
每日經濟新聞
이청담, 나의 遍歷 ; 佛家入門을 포기
『每日經濟新聞』(1969.8.20), 3면.
그토록 굳센 각오속에서 떠난 먼 여로였건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세속의 塵界에서 번뇌해야만 했다.
그 당시 실의에 찬 나에게 용기를 준 사람은 부인이었다. 몇 차례 해인사에 가서 중이 되려다가 실패하고 돌아올 때마다 위로의 말을 하여 가면서 부디 成佛하여 자기도 구해 달라는 부탁까지 하는 것이었다. 마음씨 고운 그 부인을 나는 다른 곳으로 재가(再嫁)를 시키려고 온갖 감언이설을 섞어가면서 권유했으나 듣지 않고 오히려 내 걱정을 하면서 빨리 중이 되어 성불하라는 것이다. 정말 고마웠다.
부모님의 충고로 다시 학교에 다녔다. 그 당시는 지금과 같이 이발관이 그리 흔하지 않은 때인지라 나는 이발기계를 사가지고 다니면서 학생들의 머리를 깍아주었으며 또 晉州의 변두리 골목길에서 놀고 있는 어린아이들의 머리를 깍아주기도 하였다. 常備藥을 가지고 다니면서 상처와 부스럼이 난 어린아이들에게 발라주기도 하였다. 나는 학교 공부보다는 그런 일이 더 보람 있을 것 같이 생각되었고 틈만 있으면 이 세속을 벗어나려고 하던 때였기 때문이었다.
내가 農業學校에 입학한지 1년이 지난 2학년 여름 학교에서 도난 사건이 발생하였다. 나는 전교생을 모아 놓고 이는 우리 학교의 수치이니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니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범인(?)을 붙잡아야 되지 않겠느냐고 하면서 내가 책임을 지고 잡을 터이니 나에게 모든 수사권(?)을 위임해 달라고 호소하며 위임을 받았다. 며칠 동안을 공부는 뒤로 미루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여 수사(?)한 결과 범인 색출에 성공하여 민완형사(?)로서 이름을 떨쳐 그후부터 農業學校의 도난사건이 발생하지 않게 되었다.
그해 겨울 나는 또 다시 이 세속을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이젠 海印寺와는 인연이 없는 곳이니 全羅道 長城에 있는 白羊寺 雲門庵으로 행로를 돌렸다. 그곳엔 민족대표 33인중의 한 분이신 白龍城스님이 계셨고 평소에 존경하던 스님이라 난 담담히 흐르는 가야산의 홍류동계곡은 단념해버리고 雲門庵을 찾기로 한 것이다. 龍城스님은 얼마나 法力이 출중했던지 諸邦의 佛子들이 인산인해를 이룬다는 소식을 나는 고향 晉州의 護國寺 老僧에게서 들어왔던 것이다.
며칠 동안 걸어서 長城에 닿으니 발은 부르트고 몸은 피곤에 지쳐 있었다. 가사(法服)를 얻어 입기가 이처럼 어려운 것인가.
天下叢林이 飯似山 하니 鉢孟到處에 任君餐이로다. 黃金白壁이 非爲貴라 惟有袈裟를 被最難이로다. 每日淸閑을 自家知라. 紅塵世界에 苦相離로다. 口中吃的 淸和味요 身上願被 白衲衣로다.(곳곳이 총림이요 쌓인 것이 밥이니 대장부 어딘 간들 밥 세 그릇 걱정하랴. 황금과 백옥만이 귀한 줄 아지마소. 가사옷(僧服) 얻어 입기 무엇보다 어려워라. 나날이 한가로움 내 스스로 알 것이라. 이 풍진세상 속에 온갖 고통여일세라. 입으로 맛들임은 시원한 선열미(禪悅味)요 몸 위에 있는 것은 가사장삼 원이로다.)
나는 海印寺의 석별은 오히려 龍城스님을 親見할 수 있고 내가 그토록 원하는 大法理의 창문을 두들일 지름길을 얻고자 이렇게 부처님께서 가져다 준 袈裟라고 스스로 자위하니 오히려 더 기쁘기만 하였다.
우주의 삼라만상이 고요히 잠들고 있는 白羊寺의 계곡에 울려퍼지고 있는 범종(梵鐘) 소리를 들을 때, 허기진 배와 피곤에 지친 다리이건만 내 면계(面界)가 바뀌어지고 시공을 초월한 자리가 펼쳐지는데 조그만 파로에 머물러 있을 수 없음을 알고 은은히 들려오는 범종소리를 들으며 운문암에 도착하니 모진 풍상에 시달려 온 古塔이 그림자를 길게 끌고 서 있다.
속히 法衣(가사)를 입고 장엄한 부처님 앞에 無上正道를 證得하고픈 마음은 어디다 비유할 수가 있으랴. 이 조급한 마음은 줄줄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마냥 걷잡을 수가 없어 바쁘기만 했다. 스님은 어디에 계시며 또 어느 누구에게 물어야 내 그토록 바라고 온 염원의 소산이 알차게 결실을 맺을까! 대웅전 앞을 지나가는 어느 스님을 붙잡고 침착하고 조용하고 기대에 찬 音色으로 龍城스님의 거처를 물었다. 아니 어찌된 일인가. 스님께서는 오늘 아침 급한 寺務로 서울로 가셨다는 것이다.
울어야 할까, 웃어야 할까. 먼 하늘 흰구름만을 쳐다보고 한참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물은 흐르고 바람은 불고 나면 죽고 만나면 헤어지고, 이게 모두 인연의 철칙이라면 내 또한 龍城스님을 못 만남도 인연이 없기 때문이라 생각하니 차라리 평안하였다.
번민과 고뇌의 불연속선이 내 주위에 등온선 마냥 엄습을 해 온다. 난 한번 또 한번 수십번 생각에 생각을 하였다. 龍城스님을 꼭 親見하여야 한다는 집념은 용광로의 불길마냥 훨훨 타고 있었다. 어떤 스님의 안내로 雲門庵 객실로 가서 그 동안의 노독을 풀고 요기를 하였다.
龍城스님께서 서울에 가시면서 그 동안 사람이 오거든 받지 말라는 말씀도 있었지만 그대로 객실에서 공부나 하라고 있으라고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그런데 객실에는 폐결핵에 걸려 있는 스님 한 분이 같이 있었는데 그곳 雲門庵 대중스님들이 다른 곳으로 나가달라 하니 조금도 거리낌 없이 걸망을 싸매고 유유히 떠나는 모습을 볼 때에 정말 측은하기보다 오히려 나에게 용기를 불러 일으켜 주는 것이 아닌가. 내가 그처럼 희원하는 승려들의 출입하는 모습과 선방에서 참선하는 스님들의 졸고 있는 모습은 중이 되겠다고 그처럼 동경하던 나에게 환멸감을 가져다 주었다.
그리하여 하루라도 그런 곳에서 지체할 수 없어 모멸한 세파 속으로 다시 되돌아왔다. 그리하여 한국에서 중 되는 것은 완전히 포기하고 다시 학업을 계속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하나 아무리 나의 부풀은 靑雲의 꿈(중이 되겠다는 꿈)이 비극의 흙탕물 속을 걸어왔다고 하더라도 영원히 반짝이는 별은 언제나 꺼지지 않고 빛나고 있으리라.
佛敎新聞(구 『大韓佛敎』)
산 觀音이란 別稱 듣던 李朝의 마지막 별 大智月·尹皇后의 生涯
『大韓佛敎』(1966.2.13), 3면 1-8단.
이씨왕조 5백19년 17대 순종황후인 윤비는(향년 73세) 3일 하오 7시 10분 창덕궁 낙선재 서온돌 침실에서 심장마비로 급서, 주변의 낙수(落穗)를 주워 모았다. 윤비는 구한말 명문인 윤택영(尹澤榮)대감의 맏딸로 태어나 13세에(1906년) 순종의 두 번째 비로 간택되었다. 남달리 아름답고 두뇌가 명석하며 음덕을 갖추었던 탓으로 4백여 명의 대갓집 규수 중에서 뽑힌 것이다. 고종황제의 폐위로부터 일제의 악랄한 침략을 통분해하면서 마침내는 한일합방이 되자 옥새를 가슴에 감추고 내놓을 수 없다고 버티던 우국황후이기도 하다. 망국의 한세월을 설움으로 보내다가 33세 되던 1926년 53세로 순종마저 서거하자 고요히 불문(佛門)을 두드리게 되었다. 기미운동 33인의 한분인 백용성(白龍城) 화상으로부터 대지월(大智月)이란 불명을 지어 받고는 계행을 지켜 수도에 전념하였다. 관세음보살을 모시고 천염주(千念珠)를 굴리며 정근하였으며 법화, 화엄, 금강 등 이름만 경전으로서 보지 않는 불서가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영어, 일어(쓰지는 않았음)에도 능통했고 피아노연주와 서예(書藝), 작시(作詩)에도 조예가 깊었다.
측근 김·박·성 상궁을 비롯하여 세 명의 새앙각시(새앙머리 땋은 어린궁녀)와 비자(심부름 드는 여인) 세 잡과부들을 대함에도 언제나 궁중의 법도와 어버이의 인자를 잃지 않았다. 특히 6·25가 났을 때 윤비는 끝까지 지키겠다고 대조전에 불 밝히고 분향하며 기도를 드리다가 수모를 당하기도 하였다. 1·4후퇴로 남하하여 동래, 구포 등으로 전전 무를 삶아 끼니를 이으면서도 국운의 기원과 상락아정(常樂我淨)의 불도 정진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환도하여서는 정든 낙석재 거주마저 금지되어 정능 골짜기에서 6년간을 보냈었다. 평시에는 노래의 변두(邊頭)는 있었으나 건강한 편이였으며 아침 7시 기침으로부터 밤 10시 취침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독실한 수도자의 일과였다. 돌아간 3일 낮에도 간단한 수라(진지)를 들고 나서 우리말 八만대장경을 계속 읽다가 목욕까지 하시고 고이 가셨으니, 이미 마련한 길이였다고 찬사로써 평한다. 불경이외의 읽기로는 서너 가지 신문과 여원 잡지이며 특히 텔레비전의 뉴스에 귀를 기우렸다. 개인적인 희, 노, 애, 락을 얼굴에 비치지 않았으나 나라에 관한 괴로운 뉴스라도 흘러나오면 고요히 눈을 감은 기원에 잠긴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가장 기뻐했던 때는 이은씨가 일본에서 환국하였던 때라고 관음보살은 설(說)함이 없이 이야기한다고 언제나 고요히 모신 관음보살의 무언법문을 들으면서 1일 천수경을 20독 하였다니 측근으로부터 「산관음」이란 별명까지 들었다. 언제나 세속 5계를 지키고 6바라밀의 행자가 되었으며 비단 사람에 한하지 않고 연꽃과 작약 모란을 귀여워하며 가꾸었다고 한다. 피난 시에는 동산, 효봉, 자운, 청담스님들로부터 법문을 들은 일이 있지만 그 후로는 독자적으로 불경공부와 참선에 전심하였다. 특히 보료(寶료-좌복)를 깔지 않고 장시간 맨 온돌에서 참선하는 고행을 하였으며 족건(足巾-보선)은 진솔(새것)로만 신지 않고 손수기우셨으며 남달리 화장품을 모르고 지냈다. 순종 대다례(大茶禮-조상제)에는 소복으로 경건히 제사를 모셨으며 역대 왕의 봉제사에도 지극지성이었다.
언젠가는 가야 하는 인생이므로 부처님의 뜻과 같이 자타가 둘이 아닌 인생관을 피력하면서 낙선재 대문에도 한글로 「귀의불, 귀의법, 귀의승」이라고 써 놓았음이 그대로 남아있다. 수라방에도 보게(寶偈-불교의 시사)-看間秋水無心事, 林亭以外無俗情)가 붙여 있어 고인이 된 윤비의 말씀을 전해주는 듯하다. 「80이 가까웠으니 폐라도 될까봐 장례는 불식으로 간단히 할 것과 낙선재에서는 고연을 말고 남은 재물이 있으면 수족같이 부리던 상궁들 조반석죽이라도 마련해 주고 사후에 욕됨이 없게 해 달라」고 신신 부탁하는 유서를 남겼다.
지효, 향복, 석주, 경산, 행원 등 스님들을 비롯하여 연이은 조문객은 수만에 달했으며 정성어린 조화들로 재들을 메웠다. 철야 독경소리는 더욱 구슬프게 들리며 김상궁을 비롯한 세 상궁의 적셔있는 눈시울에서는 대지월 보살인 윤황후의 명복을 비는 지성과 못잊을 정의를 읽을 수 있었다. 5백년 왕업의 마지막 남은 희미한 별이었던 해평 윤씨 대지월보살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는 유언대로 고요한 염불소리와 함께 갔다.
在家信徒에서 舍利.(洪仁杓 居士, 一心華淸信女)
『大韓佛敎』(1967.1.29), 2면 10-13단.
洪居士極小한 것 1백여개法證받아

오늘날에도 부처님의 혜명을 받아 수도에 출중한 재가신도들이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일들을하고 입적할 때 신행의 표증으로 사리를 보이고 있다. 지난 1월13일 오후3시 용산구 한강로1가 2백3의1소재 자택에서 향년 86세를 일기로 입적한 洪仁杓(懷西) 居士의 몸에서 사리(小) 백50여개가 나와 50여년의 구도행각을 후인에게 보여주고 있다.
洪居士는 입적전까지 현재 大同念佛會(七寶寺) 法主로서 「미타정토 왕생극락」을 세인에게 교화하고 있었다. 居士는 일직이(1881년) 서울 내수동에서 출생하여 15歲시 구한말 고종황제의 칙명으로 일본「慶應義塾」 「東京工業學校」에 국비생으로 선발 유학길에 나선 수재이다. 그의 경력이 말하듯 귀국후 各學校의 敎官으로서 활약 內部書記官으로부터 正六品 承訓部까지 지낸 분이다.
佛道에 귀의하기는 29歲時(1910年) 나라의 주권이 빼앗김을 개탄하고자 일본의 깊은 회의와 자각을 통해 당시 고승인 白象圭(龍城) 스님에게 참선을 수행 사사로 신행을 닥었다.
三藏을 통독하고 그이외 유서를 회통한 洪씨는 뜻한바 있어 40여세부터 「中國佛學書院」에 淨土經典을 일체구입하고 염불에 전염하는 한편 66세시 「불도실천궁행법」을 저술 전국사암에서 포교에 응해 수많은 신도들을 발심시겼다. 대동염불회가 정식 발족됨과 동시 「蓮宗集要」 「念佛往生法」이라는 불서를 간행 말세중생의 생활신앙으로 미타신앙을 권장했다.
洪居士는 30세부터 육식과 술 담배를 일체 끊고 一종식(아침 한 때)을 해가며 30여년을 신행했다. 2, 3년전부터 하루 3시간 수면 저술과 동회 法교시로 일상수행을 바쳤다.
香山禪師 入寂
『大韓佛敎』(1967.11.5), 1면 11-12단.
香山대선사는 69세를 일기로 10월 29일 오후 3시 서울 鳳翼동 大覺寺에서 조용히 열반하여 31일 大覺寺에서 여러 스님과 大覺寺 신도가 참석한 가운데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香山스님의 속성명은 金在昊로서 10세때 전라도 扶安 來蘇寺에서 입산하여 白龍城 선사의 법제자로 일찍이 승려가 되어 서울 普成중학교를 졸업하고 白羊寺 講院에서의 이력을 마치고 回龍寺 등 주지를 역임하고 여생을 수도에 정진하였다.
두 元老스님 入寂, 靑岩寺 조실 古峰스님
『大韓佛敎』(1968.1.28), 3면 7-12단.
靑岩寺(慶北 金陵郡 甑山면) 조실인 古峰스님이 1월 18일 오전 9시 향년 64세를 일기로 입적했다.
古峰스님은 서울 望月寺에 입산 故龍城스님한테 득도를 했다. 스님의 법납은 43년, 그간 海印寺 강원의 강사와 銀海寺에서 수많은 제자를 키웠다.
선교 양종에 투철했던 古峰스님은 평소 건강한 몸으로 이날 입적한 시간 전까지 제자들과 바둑을 두고 난 후 평안히 누운 뒤 숨을 거두었다.
古峰스님의 영결식은 1월 22일 靑岩寺에서 수많은 대중 참집하에 법요식을 엄수하고 다비를 했다.
田岡스님 禪法門 ; 滿空·龍城 高峰法談
『大韓佛敎』(1968.5.19), 2면 9-10단.
지금으로부터 약 45년 전에 道峰山 望月寺에 龍城스님이 祖室로 계시었다. 그때 龍城스님께서는 전국의 선지식 스님들에게 묻기를
『藤나무 넝출에 매달려 꿀방울을 먹던 그 사람이 어떻게 하였으면 살아나겠느냐』 하는 물음이다.
滿空스님의 答은 『昨夜夢中事니라』
慧峰스님의 答은 『佛不能更作佛이니라』
慧月스님의 答은 『알래야 알 수 없고 모를래야 모를 수 없고 念得不明이니라』
龍城스님의 自答은 『瓢花가 微籬出 臥在麻田上이니라』
寶月스님의 答은 『何是入井가』
古峰스님의 答은 『아야 아야』
나 田岡은 答하되 『달다』
言下에 大悟할지어다.
昨夜三更月滿樓
古家窓外蘆花秋
佛祖到此喪身命
岩下流水過橋來
今週의 說法 ; 田岡스님 禪法門
『大韓佛敎』(1968.8.4), 2면 3단.
요즈음 首座들이 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그 前에 龍城스님께서 滿空스님에게 묻기를 語黙動靜을 여이고 이르라고 하였는데 滿空스님께서는 良久하셨다. 龍城스님은 滿空스님에게 良久를 하시는 것인가고 물으니 滿空스님은 아니요 라고 하신 法談이 있는데 그후 滿空스님은 나에게 묻기를 『자네는 어떻게 이르겠는가?』 내가 곧 答하기를 『語黙動靜을 여이고 무엇을 이르라는 것입니까?』 라고 하였다.
그런데 數日 前 惠庵스님은 『왜 語黙動靜을 여이고 이르는 法이 없단 말인가?』 하고 「破器成鼎」이라고 하였다 하니 즉 깨어진 그릇으로 솥을 이루었다 하니 좋은 말이다. 그러나 어찌 破器成鼎으로 生死解脫하는 大事를 마쳤다 하겠는가?
내가 學人들을 위하여 今日 惠庵스님에게 묻겠으니 『깨어진 그릇으로 솥을 이루었다 하니 무슨 솥을 이루었는가?』 혜암스님께서는 곧 答이 있기를 바란다.
今週의 說法(惠庵스님 答) ; 龍城·滿空 등 祖師의 禪答
『大韓佛敎』(1968.8.11), 2면 1-10단.
如何是第一句? 何不問第一句인고
지난 8월 4일자(불교신문 259호) 今週의 說法欄에 田岡스님이 惠庵스님 법문에 대한 답을 들었다. 田岡스님 물음에 對하여 惠庵스님은 다음과 같이 答하였다.(編輯者 註)
答 龍城스님이 滿空스님에게 묻기를 여이고 법을 일러보라고 하니 滿空스님께서 말이 없이 가만히 있었다.(良久) 이때 龍城스님이 滿空스님을 보고 良久(그냥 가만히 있는 것)를 하시는 것이냐고 물으니 만공스님이 아니요, 지금은 뜻이 다른데 있다고 하였다.
이 法談에 田岡스님은 「語黙動靜을 여이고 무엇을 이르라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語黙動靜을 여이고 이르라면 惠庵은 破器相從이라고 答하겠다.
또한 불교신문 5월 20일자 田岡스님 法門(言下의 大悟)中에 慧月스님이 問하기를 『靈智에 空寂靈智를 일러라』 하였다. 이 法問에 田岡스님 答하기를 『안 볼래야 안 볼 수 없고 볼래야 볼 수 없습니다』 하였다.
만일 惠庵이 答한다면 空寂靈智이라 그런고로 靈不離智하고 智不離靈이라 필경에 如何오 無脚鐵牛大王(다리없는 철소가 큰 하늘을 달리노라)
또한 慧月스님이 問하기를 『空寂靈智等持를 일러라』 하였다.
이 法問에 田岡스님 答하기를 『落霞는 如枯木霽飛하고 秋水는 共長天日色입니다』라고 答하였다.
만일 惠庵이 答한다면 『穿市過 한다(복잡한 시장을 뚫고 지나갔다)』고 答한다.
이때 田岡스님 答하기를 『日落西山에 月出東이라』 하였다.
만일 惠庵이 答한다면 『風動에 心搖樹이니라(마음나무가 흔들린다)』고 하겠다.
또 龍城스님이 묻기는 『如何是第一句냐』 하였다. 田岡스님이 答하기를 高聲으로 『예?』 하였다. 龍城스님이 또 묻기를 『如何是第一句냐』 田岡스님이 또 答하기를 『拍掌大笑라』 하였다. 이때 龍城스님이 『아니다』 하였다.
田岡스님이 『그럼 어떤 것이 第一句입니까?』 하였다. 여기에 對하여 惠庵은 田岡스님과 같이 『어떤 것이 第一句입니까』 하고 묻지 않고 惠庵은 龍城스님께서 자과를 부지하시고 무엇을 또 다시 이르라고 하시는고 하며 龍城스님이 如何是第一句냐고 물으면 惠庵은 答하기를 『何不問第一句이니고』라고 答한다.
또 漢岩스님이 묻기를 六祖께서 本來無一物이라 일컬었지만 나는 本來無一物이라 하여도 인가를 못하겠으니 자네는 어떻게 하였으면 인가를 받겠는냐고 田岡스님을 보고 물었다.
田岡스님 答하기를 『合笑三下』 하고 便去하였다. 만일 惠庵이 答한다면 『如何守持이니고』라고 다시 묻겠노라.
田岡스님 묻기를 『趙州無子意旨는 天下善知議이 半도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慧峰스님께서는 無子意旨를 半만 일러주십시오』 하였다. 慧峰스님이 答하기를 『無』라고 하였다. 田岡스님이 다시 묻기를 그것이 어째 半이 됩니까 하였다.
다시 慧峰스님이 田岡스님 보고 묻기를 『어떻게 일르면 半이 되는가』고 물었다. 田岡스님이 答하기를 『無』라고 答하였다.
만일 惠庵이 答하면 田岡스님이 『無』한대 對하여 『慧峰老師가 도적에게 失命하였다』고 答하며 無子意旨를 半만 일르라고 하면 惠庵은 『兩片成이라』 하겠노라.
今日 學人을 위하여 說하노라. (惠庵 修德寺 祖室)
雪峰大禪師 영결식
『大韓佛敎』(1969.4.27), 1면 11단.
스님은 八道강산을 집으로 삼고 竹杖망혜를 벗을 삼아 천하 선지식을 찾으며 도를 찾았는데 30세에 滿空선사한테 사사했으며 그뒤 白龍城스님을 친견하고 참구(參究)에 애써 법인을 체득했다. (중략)
▲ 1925년 = 36세 시에 道峰山 望月寺 活句參禪萬日法會에 白龍城和尙을 稱비하고 令充 首座하며 제휴납자 그후 스님은 二十餘載를 五台, 金剛, 雪岳, 太白 等 名小 大刹을 주유행각하며 隨緣度生 하며 韓國佛敎 선풍을 진작하다.
정광호, 龍城스님의 淨化 建白書
『大韓佛敎』(1969.8.24), 2면 7-12단.
일제가 이 땅을 침략하기 시작한 뒤로부터 한국 敎團에서 점차로 帶妻食肉을 하는 승려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日本유학생들 간에는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지게 보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 중에는 “帶妻 여부는 개인에 관한 문제이니 公認하는 것은 불가하나, 그렇다고 지나치게 擧論할 必要는 없지 아니한가”라는 논설을 폄으로써 이 문제를 호도 내지는 合理化까지 하려는 승려가 발생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자 아직까지 시세만을 관망하고 있던 순수 比丘는 드디어 反旗를 들고 일어났다. 33人中의 하나였던 白龍城을 중심으로 일어나 청년 比丘들이 곧 이 淨化派 比丘였다.
즉 이들은 1926년 5월 朝鮮總督과 日本내무성으로 要旨 아래와 같은 犯戒生活禁止에 관한 建白書를 제출하고 있는 것이다.

建白書
… 近者 無恥魔屬의 輩가 心을 五欲에 染하고 佛의 正法을 멸하여 감히 帶妻食肉을 행하여 淸淨寺院을 魔窟로 化하여 參禪·염불·看經 등을 전폐하니 諸天이 泣淚하고 土地神지가 皆發怒케 하는도다.
四部로 分하되 그中 出家의 比丘와 比丘尼의 二部衆은 法海中의 一區分 宗派를 成함으로써 帶妻食肉을 엄금하여 專혀 道業衆에 勤務하여 諸佛者 法을 掌理케 하고 天下後世에 傳授함으로써 等等相續케 하며…… 次에 在家二部衆은 소위 淸信士 淸信女로 하여 此는 男婚女嫁로서 子女를 生養하고 孝로써 父母에게 承事하며 祖先에게 奉祠하면서 産業을 治하되…
보살계를 수지케하나니 즉 帶妻를 許함은 世에 處하여 敎를 信하는 者라 하고 帶妻食肉을 엄금함은 比丘의 大衆이어늘 今에 出家의 大衆으로서 淸淨한 寺院에 處하여 妻를 帶하며 肉을 食하며 子女를 生養하여 淸淨道場을 오염케 하며 參禪·念佛·講堂 등을 全廢함은 吾家의 大賊이라 謂치 아니치 못할지로다. 穀으로부터 生하여 穀을 害함은 虫이요. 佛法으로 生하여 佛을 害하는 者는 僧이니 獅子身中虫이 獅子肉을 食하는 것과 여하도다. 僧된 者의 持戒修道함은 당연한 本分이어늘 어찌 寺法을 개정하여 帶妻者로서 住持되기를 당국에 희망하리요. 其 羞恥됨은 舌端으로 掛키 不能하도다…
마땅히 절대로 帶妻僧侶와 帶妻住持를 금하여 현금에 폐해를 察하여 後日에 歎이 無하도록 할 것이요. 佛敎中에 在家佛子가 無하다면 比丘의 畜處를 論할 것이 無하거니와 旣히 在家의 佛子가 有할진대 畜處啖肉은 甚히 不可함이니 伏願 特히 明鑑을 垂하소서.
佛紀 二九五三年 丙寅 歎願人 白龍城 이하 127명.


다시 말해서 佛敎에서는 엄연히 在家信者와 出嫁大衆(比丘)의 구별이 있는데 近者 出家大衆 가운데 함부로 帶妻食肉 魔屬이 발생, 淸淨道場을 더럽히고 있으니 하루 속히 시정토록 해달라는 탄원서다.
그리고 이 가운데 “어찌 寺法을 改正하여… 희망하리오” 云云의 구절이 있음을 보면 이때 승단에서는 寺法중에 있는 帶妻禁止에 관한 조항을 삭제해 버리려는 움직임이 한편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이에 대해 日帝당국은 아무런 反應을 보이지 않았고, 그리하여 白龍城 스님 등은 다시금 2次 建白書를 제출하였는데 내용은 물론 前者와 大同小異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의 建白書는 前者보다 좀더 論理的이며 特히 아래와 같은 구체적인 제안까지 하고 있어 매우 주목을 끈다.

① 現今 朝鮮僧侶가 帶妻食肉을 감행하여 淸淨寺院을 汚예不淨한 魔窟營을 作하고 僧체를 不顧하니 泣血痛恨이외다. 僧侶의 帶妻食肉을 허가할진댄 별로이 在家二衆 구별을 置할 必要가 無할 것이외다. 帶妻食肉을 엄금하여 주시기를 千萬仰祝하옵나이다. 若 不然이면 帶妻僧侶는 比丘戒를 취소하고 환속하여 在家 二衆의 지위에 처케 하여 주시옵소서.
② 현금 조선 승려의 畜妻啖肉者가 寺院을 掌理하므로 修行납자와 年高납승은 자연 驅逐되어 泣淚 방황케 되니 此 수천 大衆이 何處에 安住乎잇가. 자연 안심되지 못하외다.
③ 築妻啖肉을 엄금하시든지 不然이면 持戒衲僧에게 幾個 本山을 割給하여 淸淨寺院을 복구하여 持戒僧侶로 安心修道케 하여 주시고 有妻僧侶와 無妻僧侶의 구별을 朝野大衆이 共知케 하여 주심을 全心 建白하나이다.
佛紀 2千9百53年 丙寅 9月 日
建白人 白龍城

龍城스님의 양 차례 걸친 淨化建白書는 대개 위와 같다. 얼마나 뼈저린 호소였던가를 독자들도 짐작할 수 있을게다. 淨化佛事의 가장 原初的인 형태로 나타난, 그리고 순수 比丘들의 불만이 남김없이 반영된 탄원서라 해서 무방하다,
특히 다만 몇 개의 사찰이라도 좋으니 순수 比丘들에게 「절」을 달라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가슴이 뭉클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때(1926년대) 이미 각 寺刹의 영도권은 帶妻僧이 장악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인 듯하다. 아무리 佛敎의 本領을 고수하려던 순수 比丘들의 외침에 다시금 옷깃을 여민다.
신간소개 ; 용성스님 저 수심정로, 대각회서 발간
『大韓佛敎』(1970.2.1), 4면 10-11단.
재단법인 大覺會에서는 지난 30일 재단법인 1차 사업의 일환으로 용성스님 저 「修心正路」를 발간했다.
이 책은 大覺會가 용성스님의 유지를 받들어 大覺사상을 현양시키고 오늘날 사찰운영 일변도에 기운 한국불교를 修心하는 불교로 전환시킬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우주 인간 불교의 핵심을 개발하여 見性悟道 自他一時 成佛道하게 하자는 뜻에서 소요자금 40만원을 들여 발간한 것이다.
책의 내용은 出家者나 在家者를 막론하고 인간의 마음을 가다듬어 바른 길로 나아갈 길을 가리킨 것으로 이 책을 발간하는데 경주시 노동동 共進건축설계사무소 사장 金玉培씨(38)와 李德浪(30) 부부가 30만원을 희사했다.
大覺會에서는 앞으로 이 책을 전국 1천 3백개 사찰과 정치·경제·교육계의 주요 인사에게도 송포하여 三寶 공양 예불찬탄이 바탕이 되게 함으로써 일각중생이 모든 불사의 궁극적 경지로 회향케 하겠다고 한다.
冊樣은 4×6배판 2백20페이지에 고급 모조 양장으로 되어 있다.
林道文, 잊을 수 없는 스님 ; 白龍城스님
『大韓佛敎』 (1979.3.25), 1면 5-11단.
기미년을 맞이하여 특히 龍城 큰스님을 잊을 수 없어 이 붓을 들게 되었다. 기미년 三·一운동 33인 민족 대표중 불교계의 참여, 白龍城·韓龍雲 二인중 불교 대표가 용성대사이시다. 뿐만 아니라 용성큰스님께서는 근세에 있어서 譯經에 初祖이시고, 海東佛敎의 정통 律脈을 이으시었고, 禪과 敎에 가장 밝으신 大善知識이시고, 衆生敎化에 있어 중생이 울 때에는 같이 울고 중생이 웃으면 같이 웃으신 同體대비보살이시고 저 인도에는 용수대사, 중국의 혜능대사가 계시었으니, 용성대사께서는 肉身보살로써 이 海東佛敎를 중흥하시고저 강림하신 것이라 확신하는 바이다.
나는 어린시절 할아버지 할머니 베갯머리 위에서 용성대사께서 저술하신 「覺海日輪」·「修心論」·「八相錄」·「歸源正宗」·「禪門撮要」·「발보리심」·「大覺敎儀式」 등과 용성대사께서 역경하신 「조선글 화엄경」·「金毗羅經」·「覺頂心觀音正士摠持經」·「大乘起信論」·「신역대장경」·「조선어능엄경」·「원각경」·「금강경」·「법화경」·「열반경」·「금강삼매경」 등등 많은 저술과 번역하신 경 등을 할아버지 할머니 등을 통해 숙독하게 되었고, 할머니에게서는 「九雲夢」·「사씨남정기」·「옥루몽」·「조옹전」 등 고대소설을 배웠고, 할아버지에게는 용성대사의 저술하신 서책과 번역하신 경전 봉독은 물론이요, 中學校 3학년 때에 儒家의 「대학」·「중용」·「논어」·「맹자」인 四書와 「시경」·「서경」·「주역」인 三經과 「禮記」까지 부지런히 배워 마쳤다. 유가의 四書三經과 용성대사께서 손대놓으신 불경과 논과 저술을 비교해 볼 때 나의 마음이 쏠리는 곳은 말할 것이 없게 되었다.
그 일찍이 나의 종조부 조부께서 용성대사와의 世交하는 사이이었기에 나의 先親께서 독립운동 사건으로 3년간 옥고를 치르고 석방된 뒤 나를 낳게 되었는데 마침 감옥생활 여독을 치료하고 있었는데 용성대사께서 우리집을 방문하셨을 때 번역하신 경전과 저술하신 책자를 전해주시고 그 후에도 종종 인편을 통하여 보내주시곤 하였다 한다.
그리고 나의 先親은 용성대사로부터 三歸依戒를 받고 哲生居士라고 佛名을 받았을때 아들을 낳게 되면 진실로 윤(允), 빛날 화(華) 允華라고 하시어서 나의 호적상 姓名이 林允華로 되어 있다.
그러기에 나는 용성대사와 관계를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시작하여 어린 시절에 할아버지 할머니 베갯머리에서 용성대사의 저술하신 책자와 번역하신 경전의 봉독을 들었고, 또 철이 들어 내 스스로 봉독하였고, 이제에 이르러서는 용성대사께서 번역하신 「금강삼매경」 9천권, 「修心正路」 5천권, 「약사여래본원경」·「대보부모은중경」·「능엄신주」 3천권, 「무량수경」 5백권, 「대방광원각경」 6천권을 상세히 번역하고 과해하여 해석한 「금강경」 2만권의 재발간에 이어 이번 기미년 三·一독립운동 60주년 기념으로써 미력하고 약소하오나 용성대사께서 저술하신 「覺海日輪」 1만권을 용성대사의 유업 계승을 위한 대중불교장학회 회원 등의 정성어린 동참 시주로써 재발간하여 용성대사 제116회 생신 법회일인 5월 8일에 유포하기로 결정하였다.
저 통일 신라의 얼은 圓光法師 세속오계이셨으니 이제의 통일조국의 얼이 龍城大師께서 마련하신 世間五戒로 되었으면 하고 갈망하는 바이다,
용성대사의 원하신 바는 온 겨레 전 인류와 만 중생들에게 佛恩을 갚게 하고자 함이셨으니 이 뜻을 받들어 가고자 한다면 온 겨레에게 전 인류에게 佛法을 전함에 있을 것이다. 온 겨레 전 인류를 교화할 수 있는 원력과 신심이 견고한 눈푸른 出家僧과 후덕한 在家信徒가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는데 나의 願力과 福田이 한없이 부족하여 우리 겨레와 전 인류의 잠을 깨우게 하려는 人材의 지혜종자를 뿌릴 땅이 부족함을 절실히 느끼곤 한다. 뒷날 통일조국의 성업주가 佛法 중흥을 도모하고자 中興方策을 나에게 물으러 온다면 그때 서슴지 않고 용성대사의 교훈의 지침을 제시하려 한다.
나는 在家의 理事修行을 마치고 出家의 理事修行中이니 이 理事修行을 게을리 하지 않고 불보살님과 용성대사님은 나와 온 겨레와 전 인류와 만 중생의 신앙의 대상이고 수도의 표본이고 교화의 지침이고 수도의 복전이시니, 저 허공달이 부처님이시고 참마음이라 비유한다면 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용성대사의 교훈이시겠기에, 먼저 용성대사의 교훈을 통하여 佛法의 最高理想의 진리를 터득하는 것이 지름길이겠기에, 먼저 이 도리를 온 겨레에 펼쳐 볼 조사의 교훈에 의지하여 사는 眞理의 祖國을 이룩하여 만방에 佛音을 펴나가는 것이, 용성대사의 가르치심을 천억만분의 일이라도 갚아 나아가는 것으로 자위해 보려 한다. 〈前 총무원 교무부장〉
尹禪曉, 華果院과 龍城스님의 抗日운동
『佛敎新聞』(1983.3.6), 3면.
1. 인간적인 선각자의 길
함양읍에서 서북쪽으로 白雲山의 계류(溪流)를 따라 50여 분쯤 달렸을까 운산리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산촌의 착 가라앉은 山寺의 오후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白雲山 정상을 경계로 道와 郡의 이름이 나뉘고 해발 1천2백79m 정상을 못 미쳐 6백 고지쯤 禪農一致 사상을 제창한 화과원 옛터가 나온다.
역경(譯經)과 저술(著述)의 산실들은 공비(共匪) 출몰로 인한 전쟁으로 모두 화를 입고 지금은 빈터만 남아 쑥대와 억새풀들만 세월의 무상을 읊고 있었다.
그 아래로 1km 내려와 백운암이 있는데 용성스님께서 화과원을 오르기 전 쉬어 간 곳이다. 법상좌 성암스님이 큰스님을 위해 창건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다시 개울을 건너 150m쯤 아래로 옛날의 영은사지에 화과원을 관리하는 관리소 겸 농막이 있다. 지금은 폐가가 되고 없지만 용성스님이 계모(繼母)와 형제들을 위해 과원(果園)으로 조성하여 살게 한 곳이다.
농막 왼쪽 동산 가까운 곳에 계모의 무덤이 있고 건너편에 형과 형수의 무덤이 돌보아 주는 이 없어 적막을 이어가고 있었다.
남원 아니면 장수에서 살다가 출가했는지 ■山에 있다가 출가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하여간 용성스님이 출가하기 전 계모의 학대와 구박을 많이 받었다는 촌노들의 증언이다.
그러나 효성이 지극했던 용성스님은 가난한 어머니와 형제들을 위해 과원을 조성하여 살게 하고 철따라 좋은 의복을 마련해 드렸다 한다.
화과원이 소진된 후 평소 스님이 공부를 점검하고 반조하시던 대형의 원경(遠境)은 지금 해인사 용탑선원(龍塔禪院)에 곱게 모셔져 있다.
2. 正法守護의 旗幟
스님은 전라도 장수군 하반암면 취조서(取調書)의 검·경 심문조서에 이렇게 나와 있고 三·一 독립운동 공판 기록서에도 같다.
어떠한 연고로 화과원을 고향 땅과 연한 백운산에 자리를 잡았는지 모르겠으나 밤, 감, 배 등을 생산하는 과원을 조성하였으며 지금도 가꾸지 않아 돌배가 되어 고목으로 서 있는 나무가 있다.
지금 거의 망실되었으나 실제로 화과원 소속 전답이 많았던 것으로 보아 대중들의 공부에 모자라지 않을 만큼 식량 조달이 가능했던 것 같다. 또 간도(間島) 용정(龍井)에 농장을 개설하여 선농(禪農)의 작무를 겸할 수 있게 권면하여 승려의 자급 자족과 생산 불교를 지향하도록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방법을 고양했던 것이다. 『불법을 지키는 것은 곧 민족정신을 지키는 것이다』 당시 왜색 불교화로 치달리려는 흐름을 바로 잡기 위해 진력하였다. 이것은 현금 조계종의 3대 강령의 불사로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소위 종단 최고 지도자급 선지식 스님들이 시대적인 사상에 젖어 있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한 채 가장 민중적인 민중을 위한 한글과 우리말 법어를 도외시하고 한문권을 맴돌고 있는 마당에 용성스님은 일찍이 한문권의 벽을 허물지 않고서는 민중불교를 실현하기 어려운 것을 알고 온갖 비난을 무릅쓰고 경전 번역의 기치를 드셨으니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후 언해본 다음으로 처음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뿐아니라 정법수호를 위해 왜정당국에 건백서를 올림은 물론 의식의 한글화와 일요 어린이 학교 개설, 설법 포교사 양성, 불교의 노래 제정 보급 등 우리나라 불교 천육백년사에 대전환점을 찍을 만한 일을 하였던 것이다.
농경시대(農耕時代)를 배경으로 전개된 불교의 불공시식 등 제례의 일에 치중하는 불교에서 산업체 경영에 참여하는 생산 지향의 불교로 전향하여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는 역군을 길러내기 위해 농장과 광산 운영의 본을 보인 것은 오직 정법수호를 위한 일념에서였다.
무릇 국가나 사회단체나 개인이나 에너지로 움직인다. 에너지 없는 교단의 에너지 없는 성직자가 아무리 훌륭한 말을 외쳐도 빈소리로 들리고 마는 것은 경제 자립의 에너지가 없기 때문이다.
용성스님은 가장 민중을 위한 종교가 민중에 기생(寄生)하여 성인의 말을 빌린 사기적 수법으로 흡혈(吸血)하는 생활을 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였던 것이다.
3. 민족 자주정신과 抗日운동
용성스님은 만해스님과 마찬가지로 평생을 무호적(無戶籍)으로 생을 마쳤다.
이것은 필자가 십여 년 전에 3·1독립운동으로 인한 스님의 신문 조서의 기록대로 全北 長水郡 下磻岩面 竹林里의 출생 흔적을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 호적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참으로 전통을 잇는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폐습에 젖어 있는 교단 성직자들의 악의에 찬 반대의 소리에 곁들여 왜정(倭政) 당시의 과도한 간섭은 역경, 포교, 도제양성, 생산불교 이 네 가지 기치를 든 대각교의 존립을 더 이상 허용치 않았다. 그뿐 아니라 스님이 느낀 것은 서양에서 이미 사양길에 접어든 야소교(耶蘇敎)의 유입이었다. 그들은 남의 나라 토속사서(土俗史書)를 성경(聖經)으로 받들고 그 나라 토속신(土俗神)을 하느님 아버지로 떠받들면서 5천년 전통의 국조신(國祖神)과 조상을 송두리째 부정, 맹렬한 기세로 그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한문 경전의 한글화와 납자들의 전문 수행인 선(禪)을 대중화시키는 일에 주력하는 한편 한글대장경 발행과 보다 쉽게 풀어 쓴 불교 교리서를 발간하고 자주정신의 함양을 위해 산업을 장려하였다.
불교계 대표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스님의 민족운동은 그야말로 목숨과 맞바꾼다는 대용단을 무릅쓰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이었다.
스님은 독립운동을 꾀한 국사범으로 저들의 옥중에서 3년간 생활하는 동안 많은 것을 느꼈다. 남은 생애를 불교 대중화와 민족 자주의식을 고취하고 생산 장려운동을 하거나 가다듬고 1921년 3월 출옥(出獄) 후 1940년 2월 2일 77세 원적에 들 때까지 앞에서 결심한 바 일을 만들어 하였다.
일이란 일단 만들기 시작하면 한 없이 있는 법이다. 1921년이 되기 이전의 십수년을 보탠 40여년이라는 긴 생애가 항일(抗日) 운동과 대승 보살행 운동으로 일관하였기 때문에 늘 요시찰인물(要視察人物)로서 행동의 제약 속에서 살았다.
서울의 봉익동 대각사에서 함양의 화과원(華果院)에 내려가 경전 번역과 저술을 하고 있을 때에도 저들의 감시의 눈초리는 조금도 늦춰지지 않았다고 운산의 촌노들은 그때를 회상했다.
용성스님의 위대성은 오도(悟道)의 경계를 즐겨 거기 안주하지 않고 부처님이 그러했듯 한국불교·한국민족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 고뇌의 현장에서 실천 궁행한 보살의 삶에 있는 것이다.
역사의 증인, 마지막 상궁 成古佛華 보살
『佛敎新聞』(1992.8.19), 7면.
조선왕조 5백년의 마지막 상궁 成玉艶보살(73·古佛華) 서울 보문동 보문사의 施慈院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는 역사의 증인 성옥렴 상궁은 47년 전 8월 15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내가 거처하던 별궁에서 해방 소식을 들었지요. 여기저기 쑤군쑤군 하기에 그런가 보다 했더니 해방이 됐다고 하더군요. 대궐에서는 궐내 사람이 빨갱이 될까봐 애쓰셨다군요. 또 예금한 돈 찾느라 분주한 사람도 있었구요. 우리나라 태극기가 밖으로 나왔으니까 좋았지요.』
「감격의 그날」을 되돌아보는 成상궁의 말꼬리는 영화 「마지막 황제」를 연상시켰다. 15살에 별궁에 들어가 침방 상궁으로 해방을 맞은 성고불화 보살은 상궁 신분을 놓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성상궁은 해방 후 오늘까지 상궁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때문에 조선왕조의 최후를 지켜본 老상궁은 남의 나라를 침략한 일제의 만행이 한없이 원망 또 원망스럽기만 하다.
성상궁이 살던 별궁이란 태자비로 간택된 예비 신부가 3개월간 대궐 예절을 익히던 곳으로 지금의 풍문여고 자리에 있었다.
진골(운니동)에 살면서 경성사범부속 여자보통학교를 졸업한 성보살이 별궁에 들어가게 된 인연은 대각사에서 맺어졌다. 그는 용성스님이 운영한 대각사 일요학교 학생이었다. 古佛華도 용성스님에게 받은 불명이다. 용성스님이 쓴 찬불가를 풍금반주에 맞춰 배우며 열심히 일요학교에 나온 소녀 고불화는 대각사를 세운 화주 보살 최상궁 눈에 들었다. 최상궁은 고상궁과 함께 대각사 창건의 화주로서 지밀내인이었다. 별궁의 「애기 항아님」이 되어서도 성상궁은 침방 상궁들과 대각사에 다녔다.
『옛날엔 상궁들이 다 불교 믿었죠. 그 당시 별궁 상궁들은 가까운 선학원에 많이 나갔어요.』
성보살은 용성 문하의 동산·고암·자운스님의 법문도 듣고, 참선도 했다. 대각사에는 최상궁이 만든 부인 선방이 있었다.
「주인공아 잠을 깨라… 우리들은 무슨 일로 삼계고에 빠져 있어 벗어날 줄을 모르나뇨…」 나라의 독립과 무명중생의 눈을 열어주려고 용성스님이 만든 찬불가를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는 古佛華 보살. 3년 전 백내장 수술을 하기 전까지는 음 2월 24일 용성스님 추모법회에 빠지지 않았다.
윤황후의 의대를 만들어 온 성상궁은 해방 후 별궁 한쪽에서 다른 상궁들과 함께 살다가 6·25가 일어나자 몇몇 지밀상궁과 함께 윤비를 모시고 피난에 나섰다.
『피난 때는 물론 환도 후에도 이리저리 전전하다 5·16 후 낙선재로 환궁하셨어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변하는 인심을 바라보면서 왕비를 모신 성상궁은 가슴이 아팠다.
『생전의 마마께서는 불심이 돈독하셨어요. 방에서 꼭 예불하고 불경을 읽으셨죠. 불교 정화 때 원을 하셔서 효봉·동산·청담·금오스님을 낙선재에서 친견하였는데, 마마께서는 오체투지하여 큰절을 올리셨어요.』
윤비의 3년상을 마친 3명의 상궁은 낙선재를 내주고 쇠주방으로 나갔다.
지밀내인이였던 박·김상궁과 성상궁은 궁 밖으로 나가자고 논의했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었지만 죽기 전에 대궐에서 나가는 관례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성상궁은 17년이나 연장자인 박상궁과 함께 궁에 있을 때 인연 맺은 보문사 시자원으로 왔다. 박상궁·김상궁도 다 별세했고 이제 혼자 남은 성상궁.
『해방이 됐지만 지금도 미국이 자기네 물건 억지로 한국에 팔려고 하니…』
오늘도 금강경을 독송하며 손수 자신의 식사를 해결하는 성보살은 국민 모두가 해방의 참뜻을 되새겨야 함을 은근히 강조한다.
백용성 대종사 각령전에 대참회합니다
『佛敎新聞』(1993.9.1), 3면.
불기2537년(1993) 5월 25일 이전에 홍법원에서 발행 배포한 〈경허선사 법어: 진흙소의 울음〉가운데 「벌집을 건드린 아이가 오히려 천당에 간다」는 내용을 통해 백용성 대종사께서 경허 대선사 제자인 음관 수월(1856~1928)선사로부터 천주주력 지도를 받고, 경허선사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것처럼, 역사적 사실과 전혀 다른 잘못된 글을 출판한 것에 대하여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이처럼 잘못된 글을 출판하게된 원인은 1981년 11월 20일 도서출판 인물연구소(대표 임중빈)가 발행하고 수덕사 조실이신 김진성(원담)스님이 번역 편찬한 〈경허법어〉 5백85쪽의 「벌집을 건드린 아이가 오히려 천당에 간다」편을 확인 없이 그대로 인용한 데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해인사 시절의 어느날이었다. 당시 24세의 젊은 용성스님이 조실에 들어가 경허스님께 말씀을 올렸다. …운운」의 잘못된 글을 人物史的 문헌 검토 없이 책을 만든 점입니다.
대각사 주지이신 도문스님에 의하면, 그 당시 경허스님과 용성스님은 쌍벽을 이룬 대선지식이었지만 공교롭게도 평생 동안 단 한번도 상봉한 일이 없었고, 법을 論한 일이 없었다 합니다. 그런데 하물며 경허스님의 제자인 음관 수월에게 지도를 받았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망발이라 합니다. 자기 스승의 법을 높이기 위해 다른 큰스님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일은 절대 삼가야 할 일입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은 경북 의성군 고운사 입구에 세워진 영민수월(1817~1893) 대선사 비문 기록에 의해서 명백히 밝혀졌습니다. 석가 여래부촉법 제68세이시며, 3·1독립선언서 민족대표이시고, 삼장법사이시며, 근세 한국불교의 큰 스승이신 높으신 덕을 크게 손상하였음을 자각하고 백용성 대종사님 각령전에 대참회하고 아울러 일생 동안 오로지 용성 대종사님의 위대한 업적과 얼을 계승하고 선양하는 일에 헌신하고 계시는 석가여래 부촉법 제70세이신 도문 큰스님께도 진심으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홍법원은 앞으로 용성 대종사님의 얼과 부처님 법을 펴는 경율론 삼장 十二分敎 팔만사천 무진법문, 대장경 내지 역대조사의 어록발간 유포에 심혈을 경주할 것을 제불보살님전에 서원하고, 천룡팔부 신중님전에 가호있으시기를 기원합니다.
불기2537년(1993) 8월 26일
홍법원
대표 김정길 합장
임시정부 요인 대각사 감사 인사차 방문
『佛敎新聞』(1998.3.10), 2면.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용성 대종사 창건도량인 대각사를 방문 독립자금 지원과 민족의식 개혁에 앞장서준 데 대해 감사 뜻을 전하는 봉영회 모임의 사진(본지 1420호)이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1945년 9월초 김구 선생을 비롯한 황학수, 이시영, 김창숙 선생 등 임시정부 요인 30여 명이 대각사를 방문 용성스님께서 독립자금을 지원해준 대한 감사의 뜻을 당시 대각사에 주석하던 동헌, 회암 선사께 전한 것으로 당시 자리에 함께 했던 김홍업 보살이 증언했다.

당시 자리에 참석했던 김홍업 보살
- 용성스님 뜻 숭고, 백범도 강조
“용성스님의 항일 독립운동 정신과 불교개혁 중흥사상이 알려지고 그 빛을 보게 돼 기쁠 뿐입니다.”
임시정부 요인 30여 명이 용성스님의 창건도량인 대각사를 방문 독립자금 지원에 대한 감사 뜻을 전할 당시 그 자리에 참석했던 김홍업(84, 법왕심) 보살은 당시 30세였으나 이제 백발이 성성한 노파가 돼 있었다.
“그날이 용성스님을 음양으로 도왔던 최상궁 생일이었어요. 그래서 대각사를 찾아 부처님께 참배하러 갔는데 임시정부 요원 30여 명이 와 있었어요. 그래서 공양을 준비하고 그 자리에 참석하게 됐지요.”
남편이 용성스님의 유발상좌인 관계로 스님을 친견하게 됐다는 법왕심 보살은 독립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여러차례 자신의 집을 방문한 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 자리에는 용성스님의 상좌였던 회암스님이 배석했고 동헌스님은 손님 접대를 하느라 바빠서 밖에 계셨어요. 김구선생은 용성스님은 이미 열반해 아쉽지만 스님의 크고 깊은 뜻을 우리 동지들은 잊지 말아야 된다고 말했어요.”
용성스님 유고 詩
『佛敎新聞』(1999.3.10), 7면.
“백두산이 아빠되어 단군겨레 이루었고 / 한라산이 엄마되어 단일기백 이루었네 / … / 만세 만세 만만세는 단군겨레 만만세요 / 만세 만세 억만세는 우리 겨레 억만세라.”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분인 백용성 스님(1864~1940)의 유고시에 ‘그리운 금강산’의 작곡가 최영섭씨가 곡을 붙인 ‘온겨레의 노래’가 1일 삼일절 기념식장에서 불려져 화제를 모았다.
용성스님은 ‘온겨레의 노래’를 지은 때는 30년대로 당시 독립운동지사들의 모든 시와 글들은 일제에 의해 압수대상으로 분류, 금지목록에 올랐고 해방 후에는 남북 분단의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제대로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91년 용성스님의 유고시집들을 보관하고 있던 도문스님(대각사 주지)이 직접 최영섭씨를 찾아가 곡을 의뢰 95년 노래가 만들어졌으며 이번에 삼일절 기념곡으로 불리게 돼 용성스님의 업적을 한층 추모하게 되었다.
‘온겨레의 노래’는 힘차고 역동적인 선율로 자주 독립정신을 잘 표현해 준다는 평을 얻고 있다. 직접 풍금을 연주하며 찬불가를 지어 포교하였다고 전해지는 용성스님은 우리나라 창작 찬불가의 시조로 알려지고 있다.
배재수, 대각사서 법문 즐겨 들어 ; 마지막 상궁 성옥염보살
『佛敎新聞』(2001.5.22), 18면.
조선시대 상궁들과 불교는 어떤 관계를 맺었을까? 지난 4일 82세를 일기로 별세한 조선왕조의 마지막 상궁 성옥염(고불화)씨가 불교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고인은 제조상궁 고상궁(대일화)과 침방 나인의 우두머리였던 최상궁(선광명), 유상궁, 김상궁, 박상궁 등과 함께 용성스님이 있던 대각사를 다니며 중창불사를 위한 시주금과 상해 임시정부 독립운동을 위한 돈을 기탁하기도 했다. 이 같은 사실은 고상궁의 질부인 고법왕심(87)씨의 기억에 따른 것, 고법왕심 보살은 “최상궁은 용성스님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면서 전국신도회장까지 지냈다. 최상궁 밑에서 바느질을 배웠던 성상궁도 대각사를 다니며 큰스님의 법문을 즐겨 듣고 시주도 많이 했다”고 말했다.
70년대 초부터 조카인 명오스님이 주지로 있던 서울 보문사의 노인복지 시설인 시자원(施慈院)에서 자신과 같은 처지의 노인들을 돌봐온 성상궁은 평소 염불 정진수행에 전념했다고 한다. 보문사 인태스님은 “매년 윤비의 위패가 있는 강릉의 백운사를 찾아 불공을 드렸습니다”고 회고했다.
궁녀의 역사가 끊어짐으로 인해 학계의 관심도 크다. 조계종 불학연구소 한상길 연구원은 “구한말의 시기에 왕실 상궁들이 불교에 기여한 공로는 크다. 상궁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된 소요산 자재암의 염불계, 법주사의 팔상계 등에는 항상 왕실 상궁들의 경제적 뒷받침과 신앙심이 있었고 이것이 불교 위상 강화에도 한 몫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불교 100년 발자취를 찾아서 ; 순정효황후
『佛敎新聞』(2016.2.17), 14면.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 ‘윤비(尹妃)마마’라고도 불린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는 망국의 비운을 지켜보며 불문(佛門)에 귀의한 후 일생을 수행자처럼 살았다. 올해는 순정효황후가 서거한 지 50년이 되는 해이다. 1966년 2월 3일 향년 73세를 일기로 별세한 순정효황후는 용성ㆍ향봉 스님과 인연이 깊었으며, 서울 대각사 창건을 비롯해 불교계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황후의 위패와 영정은 강릉 백운사(주지 법안스님)에 봉안돼 있다.
파란만장한 삶을 보냈지만 국모의 기품이 느껴지는 순정효황후의 말년 모습. 언론에 처음 공개되는 사진이다. 1966년 2월 13일 순정효황후 장례식이 30여 만명의 애도 속에 엄수됐다. 장례기간 내내 빈소에 머물며 고인을 추도한 향봉스님을 비롯해 추담스님, 동헌스님 등 스님들이 운구행렬의 뒤를 따르고 있다.
“… 남은 여생을 오직 불전(佛前)에 귀의하며 세월을 보내던 중 뜻하지 않은 6ㆍ25동란을 당하자, 한층 더 세상이 허망함을 느꼈던 중, 내 나이 70여 세 되오니, 불(佛)세계로 갈 것 밖에는 없어, 내 뜻을 표하노니…” 사바세계와 이별을 직감한 순정효황후가 미리 써 놓은 유서로 불교와의 깊은 인연을 짐작하게 한다.
말년을 창덕궁 낙선재에 머물렀던 황후는 매일 두 차례 좌선(坐禪)을 하고, 독경(讀經)을 하며 일과를 보냈다고 한다. 처소에는 용성스님이 저술한 한글번역본 경전과 작은 탱화가 모셔져 있었다. 강릉 백운사 주지 법안스님은 “순정효황후가 낙선재 내부에 ‘나무 불, 나무 법, 나무 승’ 글씨를 붙여놓고 드나들 때마다 염송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전했다.
불가와 인연을 맺은 것은 한일강제병합으로 망국(亡國)의 운명을 맞이하면서였다. 특히 독립운동에 깊이 간여하고 있던 용성(龍城)스님의 영향을 받았다. 이런 기록이 전한다. “(1921년) 윤비 마마와 최상궁 마마와 고 대일화 상궁마마께서 서울 봉익동 3번지 민가(民家)를 구입해서 긴급히 개조하고 수리하여 … 대각사의 문호(門戶)를 다시 열고 용성 진종 조사를 모시고 …” 창덕궁에서 멀지 않은 곳에 대각사를 창건하도록 후원했음을 알 수 있다. 용성스님이 3·1운동에 참여해 투옥됐다가 출옥할 때는 일제의 감시에도 서대문 감옥으로 최상광명 상궁을 보냈다. 또한 용성스님이 만주 봉녕촌에 선농당화과원(禪農堂花果院)을 설립할 때 7백 정보 가량의 농토를 구입하도록 후원했다.
순정효황후는 독립에 대한 의지와 원력을 지니고 있었다. 1906년 권력을 거머쥔 파평 윤씨 집안의 후원으로 13세의 어린 나이에 왕비로 책봉됐지만, 나라를 지키려는 마음만은 누구보다 간절했다. 1910년 어전회의에서 한일강제병합에 대해 논의하는 것을 병풍 뒤에서 듣고, 국새(國璽)를 치마폭에 감춘 일화는 유명하다. 비록 숙부 윤덕영에게 국새를 빼앗겼지만 황후의 강단을 짐작하게 한다. 이후 황후는 독립운동에 참여한 용성스님과 인연이 닿았으며, 총독부의 눈을 피해 은밀히 지원했다. 일생은 검소했다. 왕비가 된 후 친정아버지가 궁궐에 들어오자, 은그릇으로 12첩 반상(飯床)을 올리게 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자 빈 그릇이었다. 소박하고 검소한 마음을 엿볼 수 있으며, “허울만 좋은 세상”이라는 메시지를 전했던 것이다.
대한제국(조선)이 망한 후 이왕비(李王妃)로 격하된 순정효황후는 불교에 귀의했다. 지금까지 각종 자료에는 법명이 대지월(大地月)로 나오는데, 사실은 ‘땅 지(地)’가 아닌 ‘지혜 지(智)’이다. 황후 서거 당시 한 언론에서 잘못 표기한 한자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강릉 백운사에 봉안된 위패도 지혜 지를 쓰고 있으며, 황후와 인연이 깊은 향봉(香峰)스님이 1960년 저술한 〈수양(修養)의 다화(茶話)〉의 시주질(施主秩)에 실린 ‘尹大智月陛下(윤대지월폐하) 聖壽萬歲(성수만세)’라는 대목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1945년 해방을 맞이했지만 황후의 생활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구황실의 재건을 바라지 않은 정부의 견제를 받아야 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미처 피난가지 못했다. 미아리를 통해 서울에 진입한 인민군 기마병들이 다발총으로 무장한 채 들이닥쳤지만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상궁들이 “이 분이 조선의 왕비마마”라고 만류하고, 황후의 위엄을 보이자 인민군들이 물러났다고 한다.
인민군 점령하에서 서울에 머물던 황후는 1951년 1·4후퇴 때는 부산으로 피난했다. 처음에는 경남도지사 관사에 머물렀지만, 며칠 되지 않아 범어사 동래포교당(부산 법륜사)으로 거처를 옮겼다. 동산스님을 비롯한 용성스님의 제자들이 신경을 썼다고 한다. 하지만 의친왕이 동래포교당에 오면서 그마저 내줄 수밖에 없었다. 황후를 모시던 김명길 상궁은 생전에 부산 피난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동래로 내려갔다. 동래에 있는 경남지사 사택에 있었다. 황후는 그곳에서 오래 누를 끼치기를 바라지 않아 동래포교당이란 묵은 사찰로 옮겼다. 황후의 노후가 불행했다면서 그 적빈(赤貧)과 괴로움 속에서도 한 번도 얼굴을 흐리지 않았다. 포교당에서는 승려가 시주든 것과 불교도의 도움으로 연명할 수 있었다. 황후는 어느 시민의 친절을 끝내 잊지 못했다. 사찰 생활의 어려움을 본 어떤 이가 구포(龜浦)에 집 하나를 소개했다. 그곳에서 정부가 환도하는 날까지 서민과 같은 생활을 했다.”
서울로 돌아온 황후는 창덕궁에 머물지 못하고, 한 독지가의 별장인 수인재(修仁齊)에서 생활하다 1960년 4ㆍ19이후에야 창덕궁 낙선재에 돌아갈 수 있었다. 순정효황후는 향봉(香峰)스님과 교유하며 신행 생활을 했다. 황후는 “향봉스님은 청렴결백하고 누구보다 수행을 잘 하는 분”이라면서 신뢰했다고 한다. 불교정화운동에 참여한 향봉스님이 상경하면, 조계사나 선학원으로 상궁을 보내 보시금과 담요 등 물품을 전하기도 했다. 향봉스님은 순정효황후 서거후 9일장 기간 내내 빈소를 지키며 만장 제작을 지휘하는 등 장례의식을 면밀히 살폈다. 황후의 49재를 강릉 백운사에서 지낸 것도 향봉스님과의 깊은 인연 때문이다.
한편 황후는 김명길 상궁을 통해 한국의 전통 다도(茶道)를 명원 김미희 선생에게 전하도록 했다. 명원의 다맥(茶麥)은 김의정 명원문화재단 이사장을 통해 전승되고 있다. 별세 이후 ‘마지막 황후 윤비’라는 영화가 개봉해 세인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당대 최고의 인기 배우인 김지미, 이예춘, 조미령, 한은진, 황정순 씨 등이 출연했다. 황후 역은 김지미 씨가 맡았고, 메가폰은 이규웅 감독이 잡았다. 서울에서 1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는데, 당시 10만 명을 넘어서는 영화는 1년에 1, 2편 나오기가 어려웠음을 감안할 때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불교에 귀의해 평정심을 잃지 않고 살았던 순정효황후는 1966년 2월 3일(음력 1월 13일) 향년 73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사바와의 인연이 다했음을 직감한 황후는 목욕재계 후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윤비로 불리던 황후는 그해 2월 7일 순정효황후로 시호(諡號)가 결정됐고, 2월 13일 순종이 잠든 유릉(裕陵)에 안장됐다. 그 후 위패와 영정은 강릉 백운사에 모셔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49재는 향봉스님이 주관하고, 오대산 상원사 선원 수좌와 신도들이 참석한 가운데 백운사에서 봉행됐다. 비록 서거 50년이란 반백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순정효황후의 불연(佛緣)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京鄕新聞
보살 10年의 마지막 尙宮
『京鄕新聞』(1986.5.10), 7면 1-5단.
석탄일을 앞둔 백발 보살 成玉艶 할머니(69, 서울 城北區 普門洞 普門寺 施慈院 302호실)는 마음만이 설렌다. 成할머니는 바로 李朝왕실의 마지막 상궁이기 때문이다.
76년 가을 구왕실 낙선재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지가 10년째. 그때 할머니와 함께 나왔던 朴상궁과 金상궁은 각각 친척집으로 갈 수 있었지만 아무 곳도 갈 곳 없었던 成상궁은 여승방 普門寺로 들어온 것.
언니 상궁이던 朴상궁은 82년도에, 金상궁은 84년도에 모두 세상을 뜨고 成보살만이 홀로 李朝 왕실의 마지막 상궁으로 유일하게 생존하고 있다. 成玉艶 보살이 상궁이 된 것은 1933년 15세 때. 大覺寺란 절에 자주 다닌 것이 인연이 됐다. 당시 大覺寺 주지는 3·1운동 때 33인의 한 사람이었던 白龍城스님.
成玉艶을 상궁으로 발탁케 한 사람은 高宗 임금의 배속상궁이었던 高운봉상궁과 崔창문상궁. 純宗妃인 順貞왕후에게 배속됐다. 초봉 30원이었다.
광복후 6·25동란이 터지자 왕실 상궁들은 모두 흩어져 순정왕후를 모시고 피난길에 오른 사람은 成상궁 혼자뿐이었다.
부산으로 내려가 경남도지사 관사에 들었으나 천도간 임시관저로 李承晩대통령이 들게 돼 1주일 만에 東萊 어느 포교당 방 1칸을 빌어 살았다.
뒤따라 내려온 의친왕에게 포교당마저 다시 내어준 뒤 순정왕후를 모신 成상궁은 묘터 묘지기방 등으로 전전해야 하는 고난을 겪기도 했다.
수복 후 낙선재로 돌아온 왕후마저 1966년 세상을 뜨자 주인 잃은 成상궁은 갈 곳이 없었다. “어전에서 죽어나가는 불충을 할 수 없으니 더 늙기 전에 나가겠다”며 10년 전 낙선재를 떠나온 게 상궁의 신분으로서 왕실 하직의 마지막이었다.
무의무탁한 독신 할머니들끼리만 모여 사는 보문사 시자원. 왕조의 마지막과 함께 점철된 인고의 세월을 상궁이 아닌 보살로서 되돌아보고 있다.
大韓佛敎(부산)
講伯 白雲스님의 중국방문기, 6 ; 龍城큰스님의 발자취
『大韓佛敎(부산)』(1994.9.3), 10면.
도문시에 포교당을 개원하는 일이 대강 마무리되자 나는 두 번째 일인 용성스님의 발자취를 찾아 나서기로 했다.
용성 큰스님은 기미년(己未年) 三·一운동 당시 三十三인의 한 분으로 독립운동을 시작한 이래 줄곧 국민계몽운동에 앞장 서서 크게 활약하였다. 용성큰스님이 일생을 두고 역경사업(譯經事業)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것도 국민을 계몽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라를 왜인들에게 잃은 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 국민이 깨어나지 못한 탓이었다.
그래서 나라를 다시 찾는 지름길은 곧 국민을 깨우쳐야 한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하기야 한문 경전을 한글 경전으로 바꾸는 것은 불교의 현대화, 내지는 불교중흥에 크게 기여하므로 일석이조(一石二鳥)의 득이 필연적으로 올 것이다.
아무튼 용성 큰스님은 계몽운동을 통하여 나라를 되찾는 광복운동을 끊임없이 계속하였던 것이다.
헌데 이 무렵의 왜인들 정책은 우리 국민을 만주 등지로 내보내고 한반도를 왜인의 낙원으로 만들려는 음흉한 계획하에 우리 동포를 갖은 이유를 붙여 간도지방(間島地方)으로 내몰았다.
그러나 간도지방으로 나간 동포들은 그 누가 따듯이 맞이해 주던가? 그들의 눈 앞에는 잡초만 무성한 황무지만이 끊임없이 펼쳐져 있을 따름이었다.
당장 조석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이주민들에게 황무지를 개간하여 생계를 해결하라니 그들의 굶주림이 어떠 했겠느냐가 불을 보듯 환하다.
게다가 개간할만한 황무지가 무한정 널려 있는 것도 아니요, 아무 땅이나 마음대로 일굴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아무튼 피와 땀으로 신천지를 개간하는 우리 동포들이 차츰 늘어나자 교육기관이 필요했고 이들에게 불법을 심어줄 포교당도 있어야 했다.
이런 상황에 눈을 돌린 용성 큰스님은 곧 북간도 용정(龍井)으로 들어가서 먼저 포교당을 개설하니 대각교당(大覺敎堂)이 그것이다.
용성 큰스님은 대처(帶妻)한 왜색승(倭色僧)이 종권(宗權)을 쥐고 좌지우지하자 그게 싫어서 불교를 대각교(大覺敎)로 개칭하고 보살(菩薩)을 정사(正士)로 번역하는 등, 철저하게 왜인(倭人)들, 내지는 왜인들과 결탁한 무리들을 배격하였다.
용성 큰스님은 이어 용정 근처 두 곳에 각각 七十만 평의 땅을 사서 이주해 온 동포들에게 무상으로 경작토록 하였다.
그런데 이런한 소문이 국내에 공공연히 널리 퍼지자 왜인들이 촉각을 세우고 살피기 시작했다.
三·一 독립만세 사건의 주역인 용성 큰스님인지라 왜인들은 더 놀라서 독립운동에 결부시켜 큰 사건으로 확대하여 큰스님을 체포하려 했던 것이다.
큰스님은 순수한 불교 포교 활동인 것을 적극 주장하였지만 독립군 양성을 위해 토지를 사들인 것이라고 덮어 씌우자 용성 큰스님은 왜인들과 대결하기 싫어서 대각교당은 폐쇄하고 백사십여만 평의 토지는 경작인들에게 헐값으로 매각하기도 하고 무상으로 양도하고 말았다.
사실 용성 큰스님의 꿈은 컸다. 용정을 중심으로 모인 동포들의 계몽을 통해 조국 광복을 앞당기려는 비원(悲願)의 꿈은 컸던 것이다.
그 당시 북간도나 만주의 여러 지방으로 넘어온 동포들은 거의가 왜인들에게 모진 박해를 받다가 고향산천을 버리고 낯선 만주 벌판으로 피신해온 독립운동가요 애국지사이자 그 가족들이었다.
이러한 애국동포들이 집단으로 모여 사는 것을 용성큰스님은 그냥 지나치지 않았던 것이다.
필자는 이번에 용성 큰스님의 북간도에 서린 빛나는 발자취를 취재하는 것이 중국 방문의 큰 과제 중의 하나였다.
헌데 대각교당이 있던 자리는 주정부(州政府)에서 아파트 단지를 조성하느라 작년에 정지 작업을 끝낸 터라 광활한 빈터로 변해 있었다.
용정시 종교국을 방문했더니 종교국장이 매우 반갑게 맞아 주어서 고마웠다.
2년 전에 서울 대각사의 도문(道文)스님이 다녀갔노라며 그 당시는 사찰을 창건할 법적 여건이 갖춰지지 않았지만 금년 一월부터는 창건이 가능해졌으니 다시 방문해 준다면 최대한 협조해드리겠다는 약속도 해주었다.
종교국장은 용성 큰스님에 대해 놀랍게도 많이 알고 있었으며 큰스님의 유지(遺志)를 살려서 용정에 불교 사원이 하루 속히 들어서기를 바란다며 재삼 적극 협조해 주겠노라고 다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종교국장의 말을 굳게 믿고 싶었다. 그렇게 되어지는 것이 사필귀정(事必歸正)이 아니겠냐 해서였다.
여기 북간도(北間島) 즉 현재의 길림성 일대(吉林省 一帶)는 단군(檀君) 이래로 고려시대까지 우리 민족이 주인 노릇을 해 왔다.
고려 말 최영 장군(崔瑩將軍)이 옛 고구려 땅을 수복하려고 대군을 몰고 압록강을 건너려 했을 때 두만강 건너는 우리 민족이 고려의 백성으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았고 오직 심양(瀋陽) 이서(以西)인 요동(遼東) 요서(遼西)에만 진군하려 했던 것이다.
아무튼 해방 후 압록강 두만강 건너의 일부만이라도 조선족 자치주(朝鮮族自治州)로 된 것은 천만다행이거니와 역사적인 필연의 결과라 하겠다.
용성 큰스님이 토지를 사들여서 농토를 만들려 한 것은 헐벗은 우리 동포들을 구휼하기 위함이었고 나아가서 우리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함이었음을 간도 주민들로서는 모르는 이가 거의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현재 용정에 살고 있는 노인층이나 유지급 인사들은 용성 큰스님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두 군데의 농장이었던 현장은 한 군데는 넓은 저수지로 변했고 한 군데는 동포들이 농사 짓고 살고 있었다.
저수지가 된 명월진(明月鎭)은 마침 안도(安道)에서 백두산으로 가는 길목에 있으며 큰 저수지를 옆에 끼고 버스는 이십여 분을 달려도 끝이 나타나지 않으리 만큼 큰 댐이라고 한다.
이 댐은 조선족 자치주의 수도인 연길(延吉)에서 가장 가깝고 드넓은 호수여서 유원지로서도 각광을 받는, 미래가 촉망되는(?) 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근방은 문자 그대로 허허 벌판이요 구릉지대여서 삭막한 감이 없지 않은데 널따란 호수가 들어섰으니 이 얼마나 시원, 상쾌한가 말이다.
現代佛敎
법현, 선곡스님 이야기(下)
『現代佛敎』(2004.11.3), 25면.
선곡스님은 선암사에 내려와 있다가 용성스님이 함양에 농원을 내서 선농일치(禪農一致)의 청정수행을 한다는 말을 듣고 함양으로 갔다. 농원에서는 백장의 선원청규를 따라 ‘하루 한 때라도 일하지 않으면 한 끼도 먹지 않는(一日不作 一日不食)’ 살림을 살았다. 스님도 3년간 농사짓고 좌선하며 용성스님을 시봉했다. 그뒤 지리산 칠불선원(七佛禪院)에서 조실을 살았다.
이때 순천 선암사 칠전선원에는 선곡스님의 은법사인 선파스님이 서울 대각사에서 용성스님을 모시다가 칠전선원에 내려와 조실을 살다가 열반하셨다. (중략)
선암사 스님들은 선파스님의 다비를 모시고 얼마 안 있어 칠불선원으로 선곡스님을 찾아와 칠전선원에 머무르면서 납자들을 지도해줄 것을 요청해 스님은 본사인 선암사로 향했다. 그러다가 여순반란 사건이 일어나서 절이 어려워지자 주지까지 맡아 살림을 살았다. 선암사는 산이 깊어서 낮에는 경찰이 무대로 삼고 밤에는 반란군이 무대로 삼아서 대중들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대중들은 피란을 가고자 하였지만 스님은 대중들만 보내고는 혼자서 선암사를 지켰다.
그러자니 밤낮으로 당하는 고생이 이루 말로 다할 수가 없었다. 낮에는 경찰이나 군인들이 와서 밥달라고 하면 내주고, 밤에는 빨치산이 그러면 또 내주고는 하였다. 그런데 고마워해야 할 그들이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경찰에게는 빨치산에게 밥을 해준 사실이 밀고되고, 빨치산에게는 경찰에게 도움을 준 일이 고변되어서 양쪽에서 선곡스님을 못살게 군 것이다. 낮에는 경찰이 닥달을 하고 밤에는 빨치산이 매질을 하였다. 사정없이 쏟아지는 뭇매를 맞으면서 스님은 다짐했다.
부처님 당시 포교제일 부루나 존자는 수로나 지방의 험악한 사람들이 불교를 전파하는 것에 거부감을 갖고 돌과 나무로 때려도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무상한 인생을 중단하고 평안한 세상을 가게 하기 위해 때리는 것’으로 받아들여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나도 부루나 존자처럼 하리라. 아니 경허스님처럼 매를 맞으면서도 좌선하는 자세를 풀지 않으리라. 수행자는 앉으나 서나 어떠한 경계가 오더라도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내 그것을 제자들에게 늘 말해 왔는데 이번에 내 스스로 그것을 시험해 보리라.
그리고는 몽둥이질에 밀려서 이리저리 구르면서도 가부좌한 다리를 풀지 않았다. 도망간 상대편들의 간 곳을 대라고 매질해도 아무 말 없이 좌선만 하고 있자 매질하던 사람들이 오히려 미안해 할 지경에 이르렀고, 결국은 그 불평부당한 마음에 감동해서 풀어주었다.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지고 상황이 좋아지자 선암사에는 다시 대중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사상 초유의 승단 분규 즉 법란을 겪으면서 수행자연 하는 이들을 엄하게 꾸짖고 초연하게 도량을 지키면서 납자들을 제접하기 시작했다. 1968년 제자들에게 “해가 뜨니 서방을 비추고, 달이 떨어지니 서방을 떠나는구나(日出照西方 月落離西方)”라는 마지막 가르침을 남기고 열반에 들었다.
中央日報
뉴스 속으로 ; 독립운동 자금줄, 함양 ‘화과원’
『中央日報』(2015.8.15), 19면.
스님들 과수원 일궈 돈 마련 … 불상·쪽박에 숨겨 임정 전달
경남 함양군 백전면 백운산(해발 1278m) 8부 능선인 해발 1000m 지점엔 배나무와 밤나무가 우거져 있다. 산에 많은 밤나무는 몰라도 배나무는 의외다. 여기엔 역사가 서려 있다. 이곳에선 일제 강점기에 한 스님이 과수원을 일궈 독립운동 자금을 댔다.
주인공은 백용성(白龍城·1864~1940) 선사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다. 그는 1927년 이곳에 ‘화과원(華果院)’을 세웠다. 스님들이 참선하는 선방(禪房)을 짓고 과수원을 일궜다. ‘화과원’은 용성 선사가 존경한 중국 육조 혜능대사(638~713)가 한때 머물렀던 중국의 산골짜기 이름이다.
선방은 16개였고, 148만7600m2 규모의 과수원에서는 감나무·배나무·밤나무 1만여 그루를 가꿨다. 과수원은 용성 선사의 제자 스님 37명이 일궜다. 용성 선사는 제자들에게 “신도들의 봉양에만 의지하면 순수한 의미의 수도가 불가능하다. 그러니 승려도 일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 가르침에 따라 스님들은 낮엔 과수원을 돌보고 밤에는 참선하는 ‘선농일치(禪農一致)’의 수도생활을 이어갔다. 가마에서 그릇을 구워 내다 팔기도 했다.
사실 ‘선농일치’는 일종의 눈가림이었다. 애초부터 용성 선사는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할 목적으로 과수원을 운영했다. 혹시 모를 일제의 방해공작을 피하기 위해 제자들에게까지 이런 사실을 철저히 숨겼던 것이다.
당시 화과원에서 생활했던 용성 선사의 최측근 표회암 선사(탄생연도 불명~1981)는 나중에 자신의 제자들에게 “시간이 흐르면서 스님들 사이에 스승님을 의심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했다”고 전했다. 과일 팔아 버는 막대한 돈이 온데간데 없어서였다. 돈은 대체로 용성 선사가 갖고 나가 국내 또는 중국에서 독립운동가들에게 전했다. 용성 선사가 자주 중국을 오가자 일부 스님은 “중국에 살림 차리고 돈을 쓰는 것 아니냐”고 오해도 했다고 한다.
용성 선사는 주로 거지로 위장해 역시 거지로 변장한 독립운동가를 만났다. 돈은 구걸할 때 쓰는 바가지 아래쪽에 넣고 그 위를 식은 밥으로 덮었다. 용성 선사가 “옴마니반메훔”이라고 진언(眞言)을 외면 상대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고 답하는 식으로 암호를 주고받았다. 이렇게 신원을 확인한 뒤에는 바가지를 바꿔 자금을 전달했다. 화과원에서 벌어들인 돈을 불상 안에 넣어 상해 임시정부에 전하기도 했다.
일제의 감시를 피하려 “선농일치를 위해 과수원을 꾸린다”고 제자들까지 속였지만 일제가 아예 의심을 푼 것은 아니었다. 주로 서울에서 활동하던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 갑자기 산골에 둥지를 틀었기 때문이다. 때론 일본 경찰이 갑자기 새벽에 화과원에 들어와 이곳저곳을 뒤지고 용성 선사가 적어놓은 기록들을 검열하기도 했다. 하지만 용의주도한 용성 선사는 일본 경찰에 꼬리를 밟히지 않았다.
이런 비밀은 광복 직후에 일부가 드러났다. 45년 12월 12일 백범 김구 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 30여 명이 5년 전 입적한 용성 선사를 모신 서울 종로구 대각사를 방문하면서였다. 김구 선생은 그날 밤 봉영회 만찬 자리에서 “선사께서 독립자금을 보내주지 않았던들 임시정부를 운영하지 못할 뻔했다. 이뿐만 아니라 만주에 대각사와 선농당을 지어 독립운동하는 분들을 사찰에 숨겨주고, 그 가족들이 농사 짓고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준 공로는 독립운동사에서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때부터 용성 선사의 활동이 일부 알려졌고, 측근인 표회암 선사와 동헌 스님, 현 화과원장인 혜원 스님 등을 통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미스터리 하나는 용성 선사가 화과원을 지을 돈을 어떻게 마련했느냐다. 이와 관련해서는 “왕실이 돈을 보냈다”는 설이 있다. 동국대 총장인 한보광(65) 정토사 주지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선사께서는 1911년 서울 종로구 대각사를 창건했다. 대각사에는 왕실에서 나온 상궁 서너 분이 돌아가실 때까지 머물렀다. 이분들을 통해 선사께 왕실 자금이 흘러들어갔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수리할 때도 왕실에서 이분 상궁들을 통해 선사께 자금을 전했다는 기록이 있다.”
독립운동의 역사가 서린 화과원은 지금 숲으로 변했다. 선방은 거의 모두 사라졌다. ‘봉류대’란 이름의 132m2 크기 선방 하나만 복원했고, 그 옆에 조립식 패널 숙소(52.8m2)와 화장실 건물(13.2m2)이 현재 있는 전부다. 2000년 8월 경남도 기념물로 지정됐지만 거의 폐허와 같다. 화과원장 혜원 스님은 “독립운동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화과원이 한국전쟁 후 공비토벌 과정에서 불탄 뒤 지금까지 이렇게 방치돼 있다”고 말했다.
올 5월 들어서야 진종삼 전 경남도의회 의장과 이성애 도의원 등이 중심이 돼 ‘화과원 국가사적 지정 추진위원회’를 꾸려 복원 운동을 하고 있다. 진종삼 추진위원장은 “올해가 광복 70주년인데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던 곳이 폐허처럼 버려져 있다는 것은 후손들로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며 “하루빨리 국가 사적지로 지정해 용성 선사의 독립운동 정신을 이어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백용성 선사는 만해 한용운(韓龍雲·1879~1944)과 함께 한국 근대불교의 새벽을 연 선각자로 꼽힌다. 1864년 5월 8일 전북 장수군 번암면에서 태어났다. 9세 때 한시를 지어 신동으로 불렸고, 16세에 출가해 해인사·보광사·송광사 등에서 정진했다.
만해에 비견되는 선각자
경술국치 이듬해인 1911년 서울 종로3가에 대각사를 창건했다. 대각(大覺)은 ‘나 스스로 깨닫고 남도 깨닫게 한다’는 뜻이다. 선사는 생전에 제자들에게 “어떤 사람은 독립운동을 하고 어떤 사람은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을 고발하는 일본의 첩자 노릇을 하는 현재의 상황에서는 진정한 독립을 할 수 없다.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깨달아 모든 민중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진정한 독립을 이룰 수 있다”고 대각사를 세운 뜻을 설명했다. 그의 정신은 성철(1912~93) 스님 등 수많은 제자에게 이어졌다. 선사는 불경의 한글화에도 힘썼다. 90년 한글날에 은관문화훈장을 받은 이유다.
선사는 40년 2월 24일 목욕재계를 한 뒤 제자들을 불러 “그동안 수고했다. 나는 간다”는 말을 남기고 입적했다. 22년 뒤인 62년 독립에 이바지한 공로로 건국공로훈장을 받았다.
불교저널
용성스님이 부인선방 지도하던 대중 포교도량, 무주 향산사
『불교저널』(2016.3.17)
0001_0039_b_01L무주는 인구 2만 5천 명 규모의 작은 군이지만 내로라하는 명승지인 구천동33경은 말할 것도 없고 스키장과 골프장이 들어선 무주 덕유산 리조트나 여름 한때 열리는 반딧불축제가 뭇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동네다. 스키장은 폐장을 하고 반딧불이 나오기에는 아직 이른 초봄의 언저리에 무주를 찾은 것은 향산사(주지 성본 스님)에 가기 위함이었다.
1918년 백용성 스님이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향산사는 용성 스님 그 자체보다도 용성 스님의 지도 아래 여성재가불자들이 정진한 신행도량이었다는 점에서 특히 의미가 깊다. 서울 안국동의 선학원 중앙선원에서 선우부인회(禪友婦人會)를 조직하고 부인회관을 개방한 것이 1924년이었으니, 무주에서는 이 시기와 비슷하거나 이른 때부터 부인선원이 운영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1936년 선파 스님의 중건과 1975년 비구니 혜안 스님의 대웅전 중창불사가 이뤄졌다. 대웅전과 나한전, 산신각, 선원, 공양간 등이 들어서 있고 2004년 전통사찰로 지정됐다.
“용성 스님은 도심포교를 위해서 부인선원에 보살들을 모아 선(禪)을 가르치고 불교를 공부시켰다고 해요. 대개 지방 유지의 부인이었답니다. ‘지장회’를 결성한 보살들이 용성 스님을 모시기 위해 법당을 지은 것이 향산사의 시작이죠.”
향산사 주지 소임을 맡고 있는 성본 스님은 사찰의 역사를 이렇게 설명했다. 인천 용화사에서 출가한 성본 스님은 용화선원에 대중공양을 온 혜안 스님을 따라 향산사로 왔다. 혜안 스님의 은사가 바로 부인선원 지장회 회원으로 향산사를 창건한 유법 스님이었다. 인연이라는 것이 묘하다. 재가불자로서 스님들을 외호하던 우바이는 전강 스님과의 인연으로 비로소 무명초를 깎고 ‘유법’이라는 불명을 얻었고, 전강 스님은 혜안 스님을 삭발시켜 유법 스님의 상좌로 인연을 맺어주었다. 성본 스님은 1978년 혜안 스님이 입적한 후에도 선방을 다니며 화두 참구를 하다가 1990년대에 향산사에 완전히 정착했다.
향산사에 자리를 잡은 성본 스님이 법당을 청소하다가 발견한 것이 바로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203호로 지정된 ‘향산사 소장 불서’다. 대웅전 탁자 밑에 방치되어 있던 불서 총 43종 97책 가운데 1474년 궁실의 극락왕생과 장수를 기원할 목적으로 간행된 〈상교정본자비도량참법詳校正本慈悲道場懺法〉과 〈운수단雲水壇〉 2종, 1568년 경상도 상주 보문사에서 간행된 〈천지명양수륙재의찬요天地冥陽水陸齋儀纂要〉 등 17책, 19권은 불서 중에서도 매우 희귀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지금이야 향산사까지 오지 않아도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시대가 되어 객스님조차 보기 힘들지만, 사방팔방으로 고속도로가 나기 전 무주는 정거장처럼 왕래가 많은 곳이었다. 구천동 백련사, 안국사와도 그렇다. 아스팔트 도로도 튼튼한 사륜구동 자동차도 없었던 시절, 겨울이 오고 눈이 내리면 백련사와 안국사로 오르는 길은 속절없이 끊기고 눈이 녹도록 왕래를 할 수 없었다. 향산사 불서는 이런저런 연유로 향산사에 다녀간 어른 스님들의 흔적이자 불교 교류의 역사를 품고 있는 셈이다. 산문과 대웅전 편액은 통도사 경봉 스님의 작품이다. 혜안 스님이 중창불사를 할 당시 선방을 다니던 성본 스님은 산문 글씨를 얻는 것으로 제 몫을 더했다. 선원인 ‘선화당’과 공양간인 ‘설봉요’ 이름과 편액은 송담 스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작지만 기라성 같은 시대의 큰 어른들이 다녀갔던 이곳 향산사에서 또 한 가지 눈길을 끄는 곳은 바로 나한전이다. 향산사 나한전은 ‘나한선방’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독특한 분위기를 풍긴다. 사찰에서 흔히들 만날 수 있는 익살스러운 나한 대신 16나한 모두가 가부좌를 틀거나 죽비를 들고 좌정에 들어 있다. 나한들은 원래 안국사에 있던 것으로 6·25전쟁 당시 향산사로 피난을 왔다. 조성 연대는 정확하지 않지만 조성기법 등을 고려할 때 조선시대 말로 추정된다.
재가불자들의 공간, 포교의 산실로 출발한 향산사인 만큼 성본 스님의 화두는 늘 포교로 귀결된다. 한때는 시민선방을 개원하기도 했으나 현재는 운영이 요원한 실정이다. 젊은이든 노인이든, 한가한 사람이 없다. 모두가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한다. 처음 마을에 왔을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자본 중심적이지는 않았다고 말하는 성본 스님의 목소리가 씁쓸한 기색을 띠었다.
그러나 성본 스님은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포교를 꾸준히 하고 있다. 스님은 2007년 장학 사업을 시작했다. 크고 번듯한 포교까지는 아니더라도, 아이들에게 ‘절’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스님’의 존재를 알려야 한다는 마음에서 매년 중·고등학생 9명에게 300만 원의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2009년부터는 음성포교에 원력을 세우고 40~60대로 이뤄진 부루나합창단을 창단했다. 젊은 사람들이 절에 오는 환경을 만들어 부처님과의 인연을 맺어주기 위함이었다. 낮에는 모두가 일을 하니 밤에라도 모여 찬불가를 부르도록 멍석을 깔았다. 지휘자는 멀리 대전에서 초빙했다. 현재 향산사에서는 22명의 우바이가 불전에 음성공양을 올리고 있다. 이 외에도 초하루법회에 법화경 강의를, 매월 첫째주 일요일에는 금강경 독송 법회를 봉행한다.
“우리 절 뿐만 아니라 많은 시골 절들이 어려울 거예요. 그나마 향산사는 용성 스님이 뿌려놓은 씨앗이 있기 때문에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포교의 처음은 수행이라는 마음을 잊지 않고 정진하려고 합니다. 스님이 정진하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이면 도량도 달라져요. 사람을 오라고 해서 오기는 굉장히 어려워도 스님이 맑게 살면 신도 스스로가 절로 걸음을 하게 되지요. 부처님 말씀을 전하는 것이 내 임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