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본업경소 권하 병서(本業經疏 卷下 幷序) / 本業經疏卷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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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업경소 하권(本業經疏 卷下)
석원효 지음(釋元曉 撰)
(3. 현성학관품賢聖學觀品)1)
(9) 십지심의 관법 중 제9
“불자여, 아홉째, 입법제지入法際智는 말하자면 40가지 변재辯才로 일체의 공덕행이 모두 성취되어 마음의 습기가 이미 소멸되었고 무명 역시 제거되었느니라. 일체의 불장佛藏과 일체의 변통장變通藏이 이미 일심一心에서 일시에 행해져 무량한 대천세계에서 부처의 모습을 하거나 중생의 모습을 하면서 무량한 중생을 교화하는 법이기 때문이니라.”2)

“아홉째,3) 입법제지入法際智는 말하자면 40가지 변재辯才로”는 모든 변재를 써서 제법의 차별 경계에 오묘하게 들어가기 때문에 ‘입법제지’라고 하였다. ‘40가지 변재’라고 한 것은 사무애지四無礙智에 열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십지론十地論』에서 말하였다.
사무애지에 열 가지 차별이 있다. 첫째는 자상自相에 의지하는 것이고, 둘째는 동상同相에 의지하는 것이며, 셋째는 행상行相이고, 넷째는 설상說相이며, 다섯째는 지상智相이고, 여섯째는 무아만상無我慢相이며, 일곱째는 소승대승상小乘大乘相이고, 여덟째는 보살지상菩薩地相이며, 아홉째는 여래지상如來地相이고, 열째는 작주지상作住持相이다. 자상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생법자상生法自相이고, 둘째는 차별자상差別自相이며, 셋째는 상견고자상想堅固自相이고, 넷째는 피상차별자상彼想差別自相이다. 예를 들면 경에서, “이 보살은 법무애지法無礙智로써 모든 법의 자상을 알기 때문이고, 의무애지義無礙智로써 모든 법의 차별상을 알기 때문이며, 사무애지辭無礙智로써 모든 법을 온전하게 설할 줄 알기 때문이고, 낙설무애지樂說無礙智로써 모든 법이 차례에 맞게 끊어지지 않게 할 줄 알기 때문이니라.”4)라고 하였다. 동상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일체법동상一切法同相이고, 둘째는 일체유위동상一切有爲同相이며, 셋째는 일체법가명동상一切法假名同相이고, 넷째는 가명가명동상假名假名同相이다. 예를 들면 경에서, “또 법에 걸림 없는 지혜로써 모든 법에 체성體性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고, 의미에 걸림 없는 지혜로써 모든 법의 생멸상을 알기 때문이며, 말에 걸림 없는 지혜로써 모든 법이 임시 이름임을 알아 끊임없이 임시 이름인 법을 설하기 때문이고,

001_0498_c_02L1)本業經疏卷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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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498_c_04L2)釋元曉撰

001_0498_c_05L[賢聖學觀品]
[十地心觀法 第九]
九入法際智所謂四十辨才者以諸辨
001_0498_c_06L巧入諸法差別邊際故言入法際智
001_0498_c_07L四十辨才者四無礙智有十種故如十
001_0498_c_08L地論云是四無礙智十種差別一依自
001_0498_c_09L二依同相三行相四說相五智相
001_0498_c_10L六無我慢相七小乘大乘相八菩薩地
001_0498_c_11L九如來地相十作3) [2] 自相者
001_0498_c_12L有四一生法自相二差別自相三想
001_0498_c_13L堅固自相四彼想差別自相如經
001_0498_c_14L菩薩用法無礙智知諸法自相故以義
001_0498_c_15L無礙智知諸法差別相故以辭無礙智
001_0498_c_16L知不壞說諸法故以樂說無礙智知諸
001_0498_c_17L法次第不斷故同相者有四種一者一
001_0498_c_18L切法同相二者一切有爲同相三者一
001_0498_c_19L切法假名同相四者假名假名同相
001_0498_c_20L復次以法無礙智知諸法無體性故
001_0498_c_21L以義無礙智知諸法生義 [3] 相故以辭無
001_0498_c_22L礙智知諸法假名而不斷假名法說故
001_0498_c_23L{底}續藏經第一編六十一套三册底本無撰
001_0498_c_24L者名以書入{編}
「住」上一有「十」

001_0499_a_01L설법으로 기쁘게 하는 데에 걸림 없는 지혜로써 임시 이름을 무너뜨리지 않으면서도 끝없는 법을 따라서 설하기 때문이니라.”5)라고 하였다.6)

이어서 자세하게 설명하였다.7)
다음으로 “일체의 공덕행이 모두 성취되어”라고 말한 것은, 이 40가지 변재의 문에 일체 공덕행이 포섭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마음의 습기가 이미 소멸되었고 무명 역시 제거되었느니라.”라고 한 것은, 이 (제9)지를 심자재지心自在地라고 하니 집착하는 마음의 무거운 습기가 이미 끊어져 없어졌기 때문이고, 무명 안에 머물게 만드는 미혹한 마음은 공한 것이어서 역시 이미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일체의 불장佛藏”은 모든 다라니로써 모든 부처님의 법장法藏을 얻는 것이다. 예를 들면 저 『(십지)경』에서, “제9 보살지는 모든 부처님의 법장을 얻는다고 하느니라. 대법사가 되어서 중의衆義의 다라니와 중법衆法의 다라니와……십 아승기의 백천 다라니문을 갖추느니라.”8)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일체의 변통장變通藏”은 법명法明(진리에 대한 지혜)의 자재한 힘을 얻은 덕분에 시방에 두루 변화의 신통을 부리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저 『(십지)경』에서, “이 보살은 불가설불가설 세계에 두루두루 다 있어서 (중생의) 마음과 근기와 신심에 따라 법명을 얻었기 때문에, 여래의 힘을 구하여 불사를 완성하고 일체중생을 위해 설법하여 주어 의지하게 하느니라.”9)라고 하였다.
“무량한” 이후는 앞의 구절을 중복해서 표현한 것이다.

(10) 십지심의 관법 중 제10
“불자여, 열째, 무애지관無礙智觀은 말하자면 무량한 법운法雲에서 비가 내려 일체중생에게 미치고 두 가지 습기와 무명이 여기에서는 이미 사라져 대직위大職位를 받느니라. 신통 변화의 무량함은 말로 다 할 수 없고 부처님과 똑같이 형상이 없는 작용을 나타내기 때문이니라. 불자여, 이와 같이 일체 현인이 함께 이 문에 들어와 수행하여 깨달음을 이룬다. 불자여, 내가 먼저 제6천第六天(他化自在天)에서 십지를 설하여 천인을 교화한 적이 있는데, 지금은 간략하게 설명하므로 그대들은 배워서 실천하라.”10)

“열째, 무애지관無礙智觀은 말하자면 무량한 법운法雲에서 비가 내려 일체중생에게 미치고”에서, 법운에는 간략하게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모든 부처님의 무량한 법우法雨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중생에게 무량한 법우를 내려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뒤의 뜻에 근거하여 법운을 표현하였다. 예를 들면 저 『(십지)경』에서, “불자여, 이 법운지法雲地에 머무는 보살은 스스로 원력에 따라 대자비의 구름을 일으키고 대법大法의 천둥을 치느니라. 신통과 삼명三明과 무외無畏로 번갯불을 삼고 대지혜의 광명으로 거친 바람을 삼느니라. 대복덕大福德의 선근으로 두텁고 빽빽한 구름을 삼고 온갖 색신을 나타내어

001_0499_a_01L1) [3] 說無礙智隨假名不壞無邊法說
001_0499_a_02L乃至廣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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次言一切功德行皆成就者此四十辨
001_0499_a_04L才門中一切德行無不攝故心習已滅
001_0499_a_05L無明亦除者此地名爲心自在地著心
001_0499_a_06L重習已斷滅故作得住地無明之內
001_0499_a_07L心空者亦已除故一切佛藏者以諸多
001_0499_a_08L羅尼得諸佛法藏如彼經言第九菩
001_0499_a_09L薩地名爲得諸佛法藏能作大法師
001_0499_a_10L得衆義多羅尼衆法多羅尼乃至滿足
001_0499_a_11L十阿僧祇百千多羅尼門故一切變通
001_0499_a_12L藏者以得法明自在力故遍於十方作
001_0499_a_13L變作故如彼經言是菩薩於不可說不
001_0499_a_14L可說世界遍滿其中隨心隨根隨信 [4]
001_0499_a_15L說法得法明故求如來力滿足佛事
001_0499_a_16L與一切衆生而作依止故
001_0499_a_17L無量以下重顯上句 [5] 十無礙智觀所謂
001_0499_a_18L無量法雲雨澍及一切衆生者法雲之
001_0499_a_19L略有二種一能受諸佛無量法雨
001_0499_a_20L二能注衆生無量法雨今約後義以顯
001_0499_a_21L法雲如彼經言佛子是菩薩住此法雲
001_0499_a_22L自從願力起大慈雲震大法雷音
001_0499_a_23L通明無畏以爲電光大智慧光以爲疾
001_0499_a_24L大福德善根以爲2)原密 [4] 現種種

001_0499_b_01L색색의 구름을 삼느니라. 정법을 설하는 비로 모든 마구니를 무찌르고, 한 순간에 무량하고 무변한 백천만억 나유타 세계를 두루 뒤덮을 만큼 큰 감로 같은 선근의 법우를 내려 중생의 마음이 좋아하는 것을 따라서 무명에서 생겨나는 번뇌의 불꽃을 없애느니라. 그러므로 이 (제10)지를 법운이라고 한 것이니라.”11)라고 하였다.
“두 가지 습기와 무명이 여기에서는 이미 사라져”는 몸과 마음의 자재함이 이 (법운)지에서 더욱 늘어나 미세한 두 가지 습기가 이미 없어졌기 때문이고, 그 근본인 무명 역시 소멸했기 때문이다.
“대직위大職位를 받느니라.”는 예를 들면 저 『(십지)경』에서, “보살이 이와 같은 지혜를 따르고 수행하면 (부처의) 지위를 받는 자리로 들어갈 수 있느니라. 곧 보살이 더러움을 벗어나는 삼매를 얻어 앞에 나타나고……십 아승기 백천 삼매(를 얻어 앞에 나타나고) 최후의 삼매인 일체지의 지혜로 수승한 지위를 받는 삼매가 앞에 나타나면 커다란 보배 연꽃이 나타나는데, 둘레가 십 아승기 백천 삼천 대천세계만큼이니라.”12)라고 하고 이어서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신통 변화의 무량함은 말로 다 할 수 없고 부처님과 똑같이 형상이 없는 작용을 나타내기 때문이니라.”는 예를 들면 저 『(십지)경』에서, “이 보살의 법운지에 머물면 어느 세계의 도솔천에서 물러나와 태로 들어가서 태에 머물고……대열반(을 보이는) 일체 불사에서 제도하는 중생을 따라서 지혜의 자재함을 얻으며,……백천 아승기 세계에서도”13)라고 하고 이어서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이와 같이” 이하는 두 번째 총괄적으로 맺은 것이다. 『화엄경華嚴經』 「십지품十地品」을 가리킨다.14)

(11) 무구지無垢地
“불자여, 제41지심을 입법계심入法界心이라고 하느니라. 다음으로 그 마음이 닦을 법은 용복정勇伏定으로 법광삼매法光三昧에 들어가는 것이니라. 이 정에 들어가 열 가지 법을 닦느니라. 첫째는 부처님의 불가사의한 신통 변화를 배우고, 둘째는 보살의 권속을 모으고, 셋째는 앞서 닦은 법문을 거듭 닦고, 넷째는 일체 불국토를 따라 일체 부처님을 찾아 묻고, 다섯째는 무명의 부모와 헤어지고, 여섯째는 중현문重玄門에 들어가고, 일곱째는 부처님과 똑같이 일체의 형상을 나타내고, 여덟째는 두 가지 법신을 갖추고, 아홉째는 두 가지 습기가 없고, 열째는 중도제일의제의 산꼭대기에 오르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무구의 보살은 발심주부터 시작해서 지금 이 일지一地에 이르기까지 무량겁을 지나며 40심心의 무량한 공덕 법문을 닦느니라. 또 희지喜地(환희지)부터 두 가지 법신의 무량한 공덕을 수행하여 백천 겁을 지나며 법장이 비로소 가득해지고 상진삼매相盡三昧에 들어가 일체지의 지위를 성취하여 항상 부처님 행을 하기 때문이니라. 불자여, 내가 먼저 제3선第三禪에서 팔선八禪의 무리를 모아 일생보처一生補處보살이 불화삼매정佛華三昧定에 들어가는 것을 백만억 게송으로 설한 적이 있느니라. 이제 간략하게 한 게송의 뜻을 설하여 중생의 마음을 열었으니 그대들은 받아 지니라.”15)

무구지의 문장에 세 가지 구분이 있다. 처음은 마음(心)이고, 다음은 닦음(行)이며, 나중은 바로 총결總結이다.
처음에 “입법계심入法界心이라고 하느니라.”는 일법계一法界에 들어가는 첫 문이기 때문이며, 완전한 도의 방편이 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닦음(行)을 밝히는 부분은 두 가지이다. 먼저는 (닦음의) 근거가 되는 정定을 나타내고, 다음은 (정을) 의지하여 닦음을 밝힌다.

001_0499_b_01L色身爲障 [6] 色雲說正法雨破諸魔怨
001_0499_b_02L於一念間無量無邊百千萬億那由他
001_0499_b_03L世界皆亦遍覆 [7] 法甘露善根法雨
001_0499_b_04L滅除衆生隨心所樂無明所起煩惱塵炎
001_0499_b_05L是故此地名爲法雲故二習無明今已
001_0499_b_06L盡滅者色心自在此地轉增微細二習
001_0499_b_07L已盡故其本無明亦得滅故受大職位
001_0499_b_08L如彼經言菩薩隨順行如是智
001_0499_b_09L入受位地卽得菩薩名離垢三昧而現
001_0499_b_10L在前乃至十阿僧祗百千三昧最後三
001_0499_b_11L名一切智智受勝位三昧而現在前
001_0499_b_12L卽有大寶蓮華王出周圓如十阿僧祗
001_0499_b_13L百千三干大千世界乃至廣說故神通 [8]
001_0499_b_14L無量不可具說現同如佛無相用故者
001_0499_b_15L如彼經言住此菩薩法雲地於一切 [9]
001_0499_b_16L從兜率天退入胎3) [5]
001_0499_b_17L涅槃一切佛事隨所度衆生得智自
001_0499_b_18L乃至百千阿僧祗世界乃至廣說
001_0499_b_19L
001_0499_b_20L如是以下第二總結指華嚴經十地品
001_0499_b_21L [11] 無垢地中文有三分先心次行
001_0499_b_22L卽總結初名入法界心者入一法界之
001_0499_b_23L初門故爲究竟道之方便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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次明行中有二先顯所依定後明能依

001_0499_c_01L처음에 “용복정勇伏定”이라고 한 것은 불지에서 끊어지는 장애를 굴복시킬 수 있기 때문이고, 이 정을 따라 법광삼매에 들어가면 법계의 산꼭대기에 올라 모든 법계를 비추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정을) 의지하여 닦음을 전체적으로 나타내고 개별적으로 드러내었다. 앞에서 설한 세 가지 자리의 모습16)에 배당하면, 이 중에 근거가 되는 정을 밝힌 부분은 백 겁의 자리이다. 저기 (『보살영락본업경』)에서 “수명이 백 겁을 머무는 동안 천 삼매를 닦느니라.”17)라고 했기 때문이다. 개별적으로 열 가지 (닦음을) 밝힌 부분18)에서 앞의 네 가지 법은 천 겁의 자리이다. 저기 (『보살영락본업경』)에서 “목숨이 천 겁을 머무는 동안 부처님의 위의를 배우고……신통으로 교화하는 법을 (닦느니라).”19)라고 했기 때문이다. 뒤의 여섯 가지 법은 만 겁의 자리이다. 저기 (『보살영락본업경』)에서 “목숨이 만 겁을 머무는 동안 성불을 화현하고 대적정에 들어가 모든 부처님의 이제二諦의 경계 밖에 비유비무非有非無와 무심무색無心無色과 인과因果의 이습二習을 똑같이 깨달아 남음이 없으나, 예전 부처님과 동등한 것만 나타내어 다만 응신의 이름이 있느니라. 모든 색심을 나타내어 중생을 교화하고 항상 중도를 행하며 무위를 대단히 즐겨 생멸하는 것과는 다르니라.”20)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제 앞의 네 가지 가운데 세 번째 “앞서 닦은 법문을 거듭 닦고”는 그 앞의 두 가지 문21)에서 부처님 덕을 우러러 닦을 때에 한꺼번에 이루기가 어렵기 때문에 거듭 닦는 것이다. 네 번째 “찾아 묻고”는 역시 부처님의 위의가 포섭하는 것을 배우기 위한 것이다. 다섯 번째 “무명의 부모와 헤어지고”는 불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먼저 헤어지는 것이다. 이 자리는 아직 무명과 함께하기 때문이다. 여섯 번째 “중현문重玄門에 들어가고”는 공마저 공한 문을 중현이라고 하는데, 이 공마저 공한 문은 오직 부처님만 도달하는 것이고 지금은 조금 얻었기 때문에 “들어가고”라고 한 것이다. 일곱 번째 “부처님과 똑같이 일체의 형상을 나타내고”는 예전 부처님과 동등한 것을 나타내고 모든 색심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여덟 번째 “두 가지 법신을 갖추고”는 인행因行에서도 (결과를)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001_0499_c_01L初中言勇伏定者能伏佛地所斷障
001_0499_c_02L從此定入法光三昧登法界山頂
001_0499_c_03L照諸法界故次能依行總標別顯
001_0499_c_04L依前說說三地相配者此中明所依定
001_0499_c_05L百刧位彼言住壽百刧脩千三昧故
001_0499_c_06L明十中前之四法在千刧位彼言住
001_0499_c_07L壽千劫學佛威儀乃至神通化導之法故
001_0499_c_08L後之六法在萬刧位彼言住壽萬劫
001_0499_c_09L化現成佛入大寂定等覺諸佛二諦界
001_0499_c_10L外非有非無無心無色因果二習無習 [6]
001_0499_c_11L無有遺餘現同古佛但有應名現諸
001_0499_c_12L色心敎化衆生常行中道大樂無爲
001_0499_c_13L而生滅爲異故今前四中第三重5) [7]
001_0499_c_14L所行法門者謂前二門仰脩佛德
001_0499_c_15L成爲難所以重習第四問訊亦爲學
001_0499_c_16L佛威儀所攝五與無明父母別者6) [8]
001_0499_c_17L佛地故今先別此位猶與無明俱故
001_0499_c_18L入重玄門者謂空空門名爲重玄此空
001_0499_c_19L空門唯佛所窮今得少分故名爲入
001_0499_c_20L七現同如佛現一切形相者現同古佛
001_0499_c_21L現諸色心故八二種法身具足者於因
001_0499_c_22L「隨」一作「樂」「原密」一作「厚察」「住」
001_0499_c_23L一作「出」
「無習」疑剩「習」經作「修」
001_0499_c_24L
「生」一作「至」

001_0500_a_01L아홉 번째 “두 가지 습기가 없고”는 인과의 두 가지 습기가 남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법집은 인이고 인집은 과인데, 이 두 가지 훈습이 모두 끊어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최후의 일념에 근거해서 설명한 것인데 그 이전은 아직 남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열 번째 “중도제일의제의 산꼭대기에 오르는 것이니라.”는 이전의 네 가지 문으로 드러낸 중도가 이 자리에서 꼭대기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하는 세 번째인 총결이다. 여기에는 네 구절이 있는데, 첫째는 이전에 닦은 것을 들었고, 둘째는 현재의 공덕을 나타냈으며, 셋째는 앞에서 자세하게 설명해 보였고, 넷째는 지금의 간략한 설명으로 끝을 맺었다. 첫째에 두 가지가 있다. 먼저 40심心을 통틀어 거론하였고, 나중에 십지신十地身을 개별적으로 거론하였다. 40심 안의 제40이 바로 성위聖位이고 여기에 이신二身이 있기 때문이다. “백천 겁을 지나며” 이하는 현재의 공덕 역시 만 겁을 지난 것이지만 간략히 거론한 것뿐이다. 셋째 자세하게 설명해 보인 부분에서 “제3선第三禪”은 (현존하는) 『화엄경』에서는 이 회會가 보이지 않으나 대본大本 『화엄경』 문장에는 있을 것이다. 넷째 간략한 설명이니 문장의 모습22)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2) 묘각지妙覺地
“불자여, 제42지를 적멸심寂滅心이라고 하느니라. 묘각지는 항상 한 가지 모습에 머물고 제일의 무극無極이며 맑기가 허공과 같으니라. 일체종지로 무생無生을 비추어 통달하시느니라. 유제有諦의 시작과 끝은 오직 부처님만 완전히 궁구하시느니라. 중생의 근본에도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데, 부처님은 이것도 모두 비추어 보시느니라. 일체 번뇌와 일체중생의 과보에 이르기까지를 일심으로 그 근원을 완전히 헤아리시느니라. 모든 불국토와 모든 부처의 인과와 모든 보살의 신통 변화 역시 한 생각 한 순간에 아시고는 불가사의에 머무시느니라. 이제의 바깥에 홀로 존재하시며 둘이 없느니라. 불자여, 내가 전에 이 나무 아래에서 법계해法界海를 설할 때 8만의 무구보살이 그 몸 그대로 부처가 되었으므로 이제 이 대중을 위하여 간략히 불과佛果의 행처行處를 펼치니 그대들은 받들어 배워야 할 것이니라.”23)

묘각지에도 세 가지 구분이 있다. 우선은 마음(心)이요, 다음은 덕德이며, 셋째는 끝을 맺어 밝혔다.
처음에 “적멸심寂滅心”이라고 한 것은 적조寂照의 지혜이기 때문이다.
“묘각지” 이하는 둘째인 덕을 나타내는 부분인데, 간략하게 네 가지 덕을 들었다. 첫째, 항상한 덕(常德), 둘째, 지혜의 덕(智德), 셋째, 불가사의한 덕, 넷째, 홀로 있어서 둘이 없는 덕이다.
처음 (항상한 덕)에서 “묘각지”라고 한 것은 더러운 모든 티끌을 멀리 여의고 모든 무명의 수면睡眠도 벗어났기 때문이다. “항상 한 가지 모습에 머물고”는 모든 생멸을 떠나서 전후가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제일의 무극無極”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중中도 없고 극단도 없으며, 세로든 가로든 한계와 경계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뜻에서 “맑기가 허공과 같다.”
둘째 (지혜의 덕)에서 “일체종지”라고 한 것은 여래가 (세상을) 비추는 지혜를 총체적으로 거론했기 때문이다. 그 이하에서 개별적으로 드러내는데,

001_0500_a_01L行中得具足故九無有二習者因果二
001_0500_a_02L習無有餘故法執爲因人執爲果
001_0500_a_03L二熏習皆斷故是約最後一念而說
001_0500_a_04L此已前猶有餘故十登中道第一義諦
001_0500_a_05L山頂者謂前四門所顯中道於此位
001_0500_a_06L中得到頂故

001_0500_a_07L
是故以下第1) [9] 總結於中四句一擧
001_0500_a_08L先行二顯今德三示前廣說四結今
001_0500_a_09L略說初中有二先通擧四十心後別
001_0500_a_10L擧十地身四十心內之第四十此是聖
001_0500_a_11L有二身故經百千刧以下今德亦
001_0500_a_12L經萬刧但略擧耳第三示廣說中
001_0500_a_13L三禪者華嚴經中不現此會應在彼
001_0500_a_14L經大本文也第四略說文相可知

001_0500_a_15L妙覺地
中亦有三分先心次德第三
001_0500_a_16L結明初中言寂滅心者寂照慧故妙覺
001_0500_a_17L地下第二顯德略擧四德一常德二智
001_0500_a_18L三不可思議德四獨在無二德初中
001_0500_a_19L言妙覺地者遠離一切雜染之2) [10]
001_0500_a_20L離一切無明3) [11] 眠故常住一相者
001_0500_a_21L諸生滅無前後異故第一無極者
001_0500_a_22L始無終無中無邊若縱若橫無窮際故
001_0500_a_23L卽由是義湛若虗空第二中言一切種
001_0500_a_24L智者總擧如來能照智故下卽別顯

001_0500_b_01L여기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 이제의 문, 둘째, 시작과 끝의 문, 셋째, 더러워지는 인과의 문, 넷째, 청정의 인과의 문이다. 처음 (이제의 문)에서 “무생無生”은 무제無諦를 통달했기 때문이다. “유제有諦의 시작과 끝”은 유제를 비추기 때문인데, 시작이 없는 것이 시작이고 끝이 없는 것이 끝이니 (부처님께서) 끝까지 비추셨음을 나타내려고 시작과 끝을 임시로 설정하였기 때문이다. 둘째 (시작과 끝의 문)에서 “중생의 근본”이라고 한 것은 사주지四住地를 가리킨다.24) “시작이 있고”는 여래장이 그 근본이 되기 때문이며, “끝이 있는데”는 두 가지 생사가 그 말단이 되기 때문인데, 나중에 문장이 있는 곳에서 다시 설명하겠다. 셋째 (더러워지는 인과의 문)과 넷째 (청정의 인과의 문)에서 “한 생각에 아신다”고 한 것은 여래는 실제로 전후 생각이 다를 것이 없지만 보살의 무상無常한 지혜와 비교하여 (보살의) 한 생각 사이에 부처님은 두루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불가사의한) 덕에서 “불가사의에 머무시느니라.”라고 한 것은 부처님이 머무는 무상보리에는 다섯 가지 부사의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무상의경無上依經』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모든 여래가 머무는 무상보리처無上菩提處에는 다섯 가지 인연의 불가사의가 있느니라. 무엇이 다섯인가. 첫째, 자성自性, 둘째, 처소(處), 셋째, 자리(住), 넷째, 하나(一)와 다름(異), 다섯째, 이익이니라. 어째서 여래는 보리의 자성이 불가사의하다 하는가. 색에 나아가서는 여래를 얻지 못하며, 색을 떠나서도 여래를 얻지 못하느니라. 수상행식도 마찬가지이니라. 사대와 육근도 이와 같으니라.25) 유의 법에 나아가서는 여래를 얻지 못하며, 무의 법도 마찬가지이니라. 이것을 보리의 자성이 불가사의하다고 하느니라. 어째서 여래는 보리의 처소가 불가사의하다고 하는가. 여래는 욕계에 있으면 불가사의하며, 욕계를 떠나도 불가사의하니라. 색계와 무색계도 마찬가지이니라. 육도와 시방도 이와 같으니라.26) 이것을 처소가 불가사의하다고 하느니라. 무엇이 자리가 불가사의함인가. 안락한 자리는 여래의 자리가 불가사의함이니라. 적정한 자리는 여래의 자리가 불가사의함이니라.

001_0500_b_01L於中有四一二諦門二始終門三雜
001_0500_b_02L染因果門四淸淨因果門初中無生者
001_0500_b_03L達無諦故有諦始終者照有諦故
001_0500_b_04L始爲始無終爲終欲顯照窮假說始
001_0500_b_05L終故第二中言衆生根本者謂四住地
001_0500_b_06L有始者以如來藏爲其本故有終者
001_0500_b_07L二種生死爲其末故至後文處當更分
001_0500_b_08L第三第四中言一念知者如來實無
001_0500_b_09L前後念異4) [12] 菩薩無常之智如彼
001_0500_b_10L一念頃佛能遍知故第三德中言住不
001_0500_b_11L可思議者佛住無上菩提有五不思議
001_0500_b_12L如無上依經言一切如來住無上菩
001_0500_b_13L提處有五種因緣不可思議何等爲五
001_0500_b_14L一者自性二者處三者住四者爲一
001_0500_b_15L五者爲利益云何如來爲菩提自性
001_0500_b_16L不可思議卽色是如來不可得離色是
001_0500_b_17L如來不可得受想行識亦如是四大六
001_0500_b_18L根亦如是卽有法是如來不可得無法
001_0500_b_19L亦如是是名菩提自性不可思議云何
001_0500_b_20L如來爲菩提處不可思議如來在欲界
001_0500_b_21L不可思議離欲界不可思議色無色界
001_0500_b_22L亦如是六道十方亦如是是名處不可
001_0500_b_23L思議何者住不可思議安樂住如來
001_0500_b_24L住不可思議寂靜住如來住不可思議

001_0500_c_01L마찬가지로 유심의 자리, 무심의 자리, 범천의 자리는 여래의 자리가 불가사의함이니라. 어째서 하나와 다름의 불가사의라 하는가. 삼세의 여래는 한자리에 머무시느니라. 무엇이 한자리인가. 자성이 청정한 무루의 법계이니라. 이것이 모든 여래가 하나이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불가사의이니라. 어째서 이익 되는 일의 불가사의라고 하는가. 여래는 일법계와 동등한 지혜와 신통력이 모두 평등하여 무루의 청정한 법계에 머물면서도 중생에게 무량한 이익이 될 수 있느니라. 이것을 이익의 불가사의라고 하느니라. 또 불가사의에 두 가지가 있느니라. 첫째는 하나는 말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니 언어의 경계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둘째는 일체의 세간을 벗어난다는 것이니 세간에는 비교하거나 비슷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불가사의라고 하느니라.27)

넷째 (홀로 있어서 둘이 없는) 덕에서 “이제의 바깥에 홀로 존재하시며 둘이 없느니라.”라고 한 것은, 예를 들면 『인왕경』에서 “세제와 제일의제의 바깥으로 뛰어넘으면 제11지의 살운야薩云若(一切智)이니라. 있지 않음(非有)과 없지 않음(非無)을 깨달아 맑고 청정하니라.”28)라고 하였다. (『인왕경』에서) ‘세제’라는 말은 의타성과 분별성에서 유와 무의 이제를 합하여 세제라 하고, 의타성에서 분별성의 무가 나타난 진여를 제일의제라고 한다. 여래는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갔으므로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니며, 빈 것도 아니고 실제도 아니며, 유위도 아니고 무위도 아니며, 차별도 아니고 평등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제의 바깥”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제3제第三諦가 비교할 것도 없고 상대될 것도 없음을 무이제無二諦라고 하고 무진제無盡諦라고 한다. 그러므로 “홀로 존재하시며 둘이 없느니라.”라고 한 것이다. 예를 들면 『화엄경』에서 “신해력信解力 때문에 무진제의 지혜를 얻지 않음을 압니다.”29)라고 하였다.
“내가 전에” 이하는

001_0500_c_01L如是有心住無心住梵住如來住不
001_0500_c_02L可思議云何爲一異不可思議三世如
001_0500_c_03L來在一處住何者一處自性淸淨無
001_0500_c_04L漏法界是諸如來若一若異不可思議
001_0500_c_05L5) [13] 爲利益事不可思議如來等一法
001_0500_c_06L界智慧神力皆悉平等住於無漏淸淨
001_0500_c_07L法界能爲衆生無量利益是名利益不
001_0500_c_08L可思議復次不可思議有二種一者不
001_0500_c_09L可言說過語言境界故二者出一切
001_0500_c_10L世於世間中無譬類故是名不可思議
001_0500_c_11L第四德中言二諦6)之) [14] 外獨在無二者
001_0500_c_12L7) [15] 王經言超度世諦第一義之外
001_0500_c_13L第十一地薩云若覺有非無 [12] 然淸淨
001_0500_c_14L言世諦者謂依他性及分別性有無二
001_0500_c_15L此中合爲世諦依他性中分別性無
001_0500_c_16L所顯眞如名第一義8) [16] 如來歸於一
001_0500_c_17L心之原非有非無非虗非實非有爲
001_0500_c_18L非無爲非差別非平等故言二諦之外
001_0500_c_19L是第三諦無比無對名無二諦名無盡
001_0500_c_20L故言獨在無二如華嚴言由信解
001_0500_c_21L力故知非得無盡諦智故吾先以下
001_0500_c_22L「二」疑「三」「麤」一作「塵」「亦」疑「睡」
001_0500_c_23L
「此」一作「比」「何」下一有「如來」「之」
001_0500_c_24L經作「界」
「人」通「仁」下同「諦」一無

001_0501_a_01L셋째 끝을 맺어 밝힌 부분인데, 먼저는 자세한 설명을 가리킨 것이고 뒤는 간략한 설명으로 끝을 맺었다.

2) 여러 부문으로 설명함
(1) 질문
경수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초지부터 마지막 일지一地까지 과보와 신통 변화에 두 가지 법신이 있습니다. 첫째는 법성신法性身이고, 둘째는 응화법신應化法身입니다. 어떤 겉모습(色相)을 하고 있으며, 어떤 마음(心相)을 하고 있습니까?”30)

이제까지는 첫 번째인 닦음과 덕을 직접 밝힌 부분이고, 지금부터는 두 번째인 여러 부문으로 설명하는 부분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먼저는 질문이고, 뒤는 답변이다.
(경문의) 질문에서 “마지막 일지一地”는 여래지如來地를 가리킨다. “법성신法性身”은 법성에 의지하여 실제 지혜가 생겨나므로 의지하는 대상을 따라서 법성이라고 한 것이다. 아래의 (경전) 문장에서 “진실한 지혜의 법신”이라고 한 것이 바로 이 (법성)신이다.

(2) 답변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불자여, 출세간의 과果는 초지에서 불지에 이르기까지 각각 두 가지 법신이 있느니라. 제일의제의 법이 흐르는 물속에서 진실한 성품을 따라 생기는 지혜이기 때문에 진실한 지혜를 법신이라고 하는데, 법은 자체를 말하고 모아 저장한 것이 신이니라. 일체중생의 선근이 이 진실한 지혜의 법신에 닿기 때문에 법신이 무량한 법신으로 나타나 감응할 수 있느니라. 말하자면 일체 세계의 국토신·일체중생신·일체 불신佛身·일체 보살신의 모든 불가사의한 몸으로 나타나시니 국토도 마찬가지이니라.
불자여, 국토는 일체 현성이 머무는 곳을 말하느니라. 그러므로 일체 중생과 현성에게는 각자 과보의 국토가 있느니라. 범부 중생이라면 오음五陰에 머무는 것을 정보의 국토라 하고, 산림과 대지를 공유하는 것을 의보의 국토라 하느니라. 초지의 성인에게도 두 국토가 있느니라. 첫째는 진실한 지혜의 국토이니 앞의 지혜가 뒤의 지혜에 머무는 것을 국토로 삼은 것이니라. 둘째는 더러움을 깨끗하게 변화(시킨 국토)이니 수많은 겁을 지나면서 감응하여 나타나는 국토이니라. 무구지까지의 국토도 이와 같으니라. 일체중생부터 무구지까지는 모두 정토가 아니니 과보에 머물기 때문이니라. 오직 부처님만 중도제일법성의 국토에 계시느니라. 이런 까닭에 내가 옛날에 (『화엄경』의) 보광당普光堂에서 일체중생을 위하여 정토의 문을 자세하게 설하였느니라.”31)

(경전의) 답변에 여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세계를 벗어나는 문, 둘째는 세간의 결과인 문, 셋째는 치유하는 (수행의) 문, 넷째는 치유되는 (어리석음의) 문, 다섯째는 두 가지 태어남의 문, 여섯째는 두 가지 업의 문이다.

① 세계를 벗어나는 문

첫째 (세계를 벗어나는 문)에 세 가지가 있다. 먼저 두 가지 몸을 나타냈고, 다음에 두 가지 국토를 나타냈으며, 세 번째는 몸과 국토를 거듭 나타냈다.

ㄱ. 두 가지 몸

처음 (두 가지 몸)에 두 가지가 있으니 전체적으로 내세우는 것과 개별적으로 풀이한 것이다. 의미는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으니 문장의 모습은 알 수 있을 것이다.

ㄴ. 두 가지 국토

(두 번째) 두 가지 국토의 문장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표방·해석·맺음이다. 해석에 두 가지가 있다. 먼저 범부의 국토를 함께 나타내고 뒤에는 성인의 국토만 밝혔다. 여기 (성인의 국토)에 둘이 있으니 먼저는 보살의 국토이고 나중은 여래의 국토이다. “이런 까닭에” 이하는 (두 가지 국토의) 세 번째인 맺음이다.

ㄷ. 몸과 국토를 거듭 나타냄

“불자여, 초지의 일념무상一念無相의 법신지신法身智身은 백만 아승기 공덕의 법을 성취하고 이제를 다 비추어 마음마다 적멸하여 법이 흐르는 물속에 있느니라. 범부의 심식心識으로는 (초지의) 두 가지 법신을 헤아릴 수 없는데, 더욱이 이지二地·삼지三地부터 묘각지에 이르기까지를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는가? 다만 응화하는 도중을 취하여 초지에 백 가지 몸·천 가지 몸·만 가지 몸, 나아가 수없는 몸이 있으므로 얽매임이 있고 벗어남이 있을 수 있느니라. 그 법신이 있는 곳은 마음마다 적멸하여 법이 흐르는 물속이어서 위로는 일체 불법과 일체 과보를 구할 만하다고 보지 않고, 아래로는 무명의 모든 견해를 끊을 만하며 중생은 교화할 만하다고 보지 않느니라. 다만 세속제의 응화법 때문에 부처를 구할 만하고 모든 견해를 끊을 만하며 중생을 교화할 만하다고 보느니라. 불자여, 세 가지 견고한 법을 닦아서 성인의 지위에 들어간다는 말도 할 수 있느니라. 법이 흐르는 물속에서 마음마다 적멸하기만 하면 자연히 묘각의 큰 바다에 흘러드느니라. 불자여, 삼현십지三賢十地의 이름까지도 이름이 없고 모양이 없으니 그저 응화이기 때문이니라. 옛 부처님의 도법道法에 십지의 이름이 있느니라. 불자여, 그대는 받아 지녀야 하느니라. 일체 불법은 평등하여 다름이 없느니라.”32)

“초지의 일념一念” 이하는 (첫째 세계를 벗어나는 문의) 세 번째 (몸과 국토의) 깊고 깊음을 거듭 나타냈는데, 여기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두 가지 몸의 깊고 깊음, 둘째는 법신의 깊고 깊음, 셋째는 인과의 깊고 깊음이다.
첫째 (두 가지 몸의 깊고 깊음)에 둘이 있다. 먼저 헤아리기 어려움을 밝히고, 뒤에 임시로 한 설명을 나타냈다. 임시로 한 설명에서 “초지에 백 가지 몸·천 가지 몸·만 가지 몸” 등이라고 한 것은 이지二地에는 천 가지 몸, 삼지三地에는 만 가지 몸과 같은 식이다. “얽매임이 있고 벗어남이 있다.”는 그 (각 지위에) 해당하는 과보가 100수로 제한되기 때문에 ‘얽매임이 있다’고 하였고, 그 원願과 지혜의 결과가 수량을 벗어나기 때문에 ‘벗어남이 있다’고 한 것이다. 또 아직 끊어지지 않음을 상대하였으므로 ‘얽매임이 있다’고 하였고, 이미 끊어짐을 상대하였으므로 ‘벗어남이 있다’고 한 것이다.
“그 법신이 있는 곳은” 이하는 둘째인 법신의 깊고 깊음인데, 여기에 둘이 있다. 먼저 이지理智와 볼 것 없음을 밝히고, 뒤에 양지量智와 볼 것 있음을 나타내었다.33)
“(성인의 지위에 들어간다는) 말도 할 수 있느니라.” 이하는 셋째인 인과의 깊고 깊음인데,

001_0501_a_01L第三結明先指廣說後結略說

001_0501_a_02L[諸門分別]
[問]
上來第一正明行德此下第二諸門分
001_0501_a_03L於中有二先問後答問中言後一
001_0501_a_04L地者謂如來地法性身者以依法性
001_0501_a_05L而生實智故從所依名爲法性下文言
001_0501_a_06L實智法身卽此身也

001_0501_a_07L[答]
答中有六一出世界門二世間果門
001_0501_a_08L三能治門四所治門五二生門六二
001_0501_a_09L業門初中有三先顯二身次顯二土
001_0501_a_10L第二重顯身土初中有二總標別解
001_0501_a_11L義如前說文相可知二土中文有三
001_0501_a_12L標釋結釋中有二先兼顯凡夫土
001_0501_a_13L正明聖人士此中有二先菩薩土
001_0501_a_14L如來土是故以下第三結也初地一念
001_0501_a_15L以下第三重顯甚深於中有三一者二
001_0501_a_16L身甚深二者法身甚深三者因果甚深
001_0501_a_17L初中有二先明難量後顯假說假說
001_0501_a_18L中言初地百身千身萬身等者二地千
001_0501_a_19L身三地萬身等有縛有解者其攝報果
001_0501_a_20L限在百數故言有縛其願智果出數量
001_0501_a_21L故言有解又望未斷故言有縛
001_0501_a_22L其已斷故言有解其法身處以下第二
001_0501_a_23L法身甚深於中有二先明理智無見
001_0501_a_24L後顯量智有見亦可得言以下第三因

001_0501_b_01L여기에 셋이 있다. 첫째는 임시 설명으로 인이 있고 과가 있음을 밝혔는데, 삼현三賢은 인이고 묘각은 과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인과는 말이 끊어졌지만 교화 면에서 임시로 설명한 것임을 밝혔다.
“그대는 (받아 지녀야) 하느니라.” 이하는 셋째인 맺으면서 권하는 것이다.

② 세간의 결과인 문

“불자여, 세간의 과보란 말하자면 십주의 동보영락銅寶瓔珞 동륜왕銅輪王이 백 명의 복자福子를 권속으로 하고 불국토 한 곳에 태어나 부처님의 학행學行을 받아서 두 천하를 교화하는 것이니라. 은보영락銀寶瓔珞 은륜왕銀輪王이 오백 명의 복자를 권속으로 하고 불국토 두 곳에 태어나 부처님의 교행敎行을 받아서 세 천하를 교화하는 것이니라. 금강보영락金剛寶瓔珞 금륜왕金輪王이 천 명의 복자를 권속으로 하고 시방 불국토에 들어가 일체 중생을 교화하며 네 천하에 머무는 것이니라.
환희지歡喜地의 백보영락百寶瓔珞 칠보상륜七寶相輪의 사천왕이 만 명의 자식을 권속으로 하고 백 가지 법신이 백 불국토가 되어 시방의 천하를 교화하는 것이니라. 천보영락千寶瓔珞 팔만상륜八萬相輪의 도리왕忉利王은 이만 명의 자식을 권속으로 하느니라. 만보영락萬寶瓔珞 구보상륜九寶相輪의 염천왕焰天王의 권속도 그와 같아서 수를 말할 수 없느니라. 억보영락億寶瓔珞 십보상륜十寶相輪의 도솔타천왕兜率陀天王의 권속도 그러하여 수를 말할 수 없느니라. 천광보영락天光寶瓔珞 십일보상륜十一寶相輪의 화락천왕化樂天王의 권속도 그러하며, 마니보광영락摩尼寶光瓔珞 십이보상륜十二寶相輪의 타화천왕他化天王의 권속도 그러하며, 천색용보광혜영락千色龍寶光慧瓔珞 십삼보상륜十三寶相輪의 범천왕梵天王의 권속도 그러하며, 범사자보광영락梵師子寶光瓔珞 대응보상륜大應寶相輪의 광음천왕光音天王의 권속도 그러하며, 불가사의보광영락不可思議寶光瓔珞 백운광보상륜白雲光寶相輪의 정천왕淨天王의 권속도 그러하며, 백만신통보광영락百萬神通寶光瓔珞 무외주보상륜無畏珠寶相輪의 정거천왕淨居天王의 권속도 그러하느니라. 천만천색보광영락千萬天色寶光瓔珞 각덕보광상륜覺德寶光相輪의 삼계왕三界王은 일체 보살을 권속으로 하며, 무량공덕장보광영락無量功德藏寶光瓔珞 천복상륜千福相輪의 법계왕法界王은 일생보처보살을 권속으로 하느니라.
불자여, 이들 위의 영락瓔珞 상륜相輪은 일체 부처와 보살이 움직이거나 머물거나 함께 노닐며 항상 그 몸을 따르고 일체중생을 교화하느니라. 그러므로 이와 같은 과보의 이름과 숫자의 법이 있느니라.”34)

둘째, 세간의 결과(인 문)에 세 가지가 있으니 표방·해석·맺음이다.
두 번째 해석에 열다섯 계위가 있다. 앞의 네 계위는 모두 다섯 구절로 되어 있다. 첫째는 장엄, 둘째는 왕위, 셋째는 권속, 넷째는 가르침을 받는 곳, 다섯째는 교화하는 곳이다. 뒤의 열한 계위는 네 구절로만 되어 있다. 처음 계위에서 “동보영락銅寶瓔珞”은 십주의 행으로 그 몸을 장엄했음을 비유했기 때문이고, “동륜왕銅輪王”은 왕위를 받을 때에 동륜이 와서 맞이하기 때문이며, “백 명의 복자福子”는 왕에게 백 명의 자식이 있는데 모두에게 복덕이 있기 때문이다. “불국토 한 곳에 태어나 부처님의 학행學行을 받아서”는 한 번에 한 곳의 부처님 세계에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고, “두 천하를 교화하는 것이니라.”는 두 천하에서 왕이 되기 때문이다. 아래에 계속되는 다섯 구절도 이것을 기준으로 알면 될 것이다. 세 번째 (계위)에서 “시방 불국토에 들어가”라고 한 것은 한 번에 열 부처님 세계에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환희지歡喜地” (부분)에서 “사천왕”은, 『화엄경』에서는 “대개 염부왕閻浮王이 된다.”35)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곳에 불법을 세우려고 했기 때문에 태어난 것이고, 지금 여기에서 말한 ‘사천왕’은 위아래의 계위에서 내려와 이곳에 이르렀으므로, 두 글에 모두 도리가 있다. 나머지 서로 다른 설명도 이것을 기준으로 알면 될 것이다.
“천보영락千寶瓔珞” 이하인 (제)2지와 “만보영락萬寶瓔珞” 이하인 (제)3지부터 등각인 “삼계왕三界王”까지도 역시 무색계의 중생을 교화하기 때문에 비상비비상처에 태어난다. 예를 들면 『십주단결경十住斷結經』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무색정無色定을 설명하겠느니라. 사대로 만든 물질이 색인데, 저기에는 이런 물질이 없으므로 무색이라 하느니라. 색에는 다섯 가지가 있어야 비로소 사대가 이루어지는데, 다만 모양이 있는 색이 없기 때문에 무색이라 말하느니라. (나머지 네 가지인) 감각의 색(痛色)과 연상의 색(想色)과 의지의 색(行色)과 마음의 색(識色)은

001_0501_b_01L果甚深於中有三先明假說有因有
001_0501_b_02L三賢爲因妙覺爲果故次明因果
001_0501_b_03L絕言化道假說汝應以下第三結勸

001_0501_b_04L
第二世間果中有1) [17] 謂牒釋結第二
001_0501_b_05L釋中有十五階前四階中皆有五句
001_0501_b_06L莊嚴二王位三眷屬四受敎處五敎
001_0501_b_07L化處後十一中唯有四句初階中銅寶
001_0501_b_08L瓔珞者喩十住行莊嚴其身故銅輪王
001_0501_b_09L者受王位時銅輪來應故2) [18] 福子者王
001_0501_b_10L有百子皆有福德故生一佛土受佛敎
001_0501_b_11L行者一時得生一佛世界故敎二天下
001_0501_b_12L於二天下而作王故下下五句准此
001_0501_b_13L應知第三中言入十方佛國中者一時
001_0501_b_14L得生十佛世界故歡喜地中四天王者
001_0501_b_15L華嚴經說多作閻浮王者此是佛成道
001_0501_b_16L爲欲建立佛法故生今此中言四天
001_0501_b_17L王者上下階降當此處故是故二文皆
001_0501_b_18L有道理諸餘異說准此應知千寶瓔珞
001_0501_b_19L以下二地萬寶瓔珞以下三地乃至等
001_0501_b_20L覺三界王者亦化無色界衆生故生在
001_0501_b_21L非想非非想處故如十住斷結經言
001_0501_b_22L言與汝說無色定四大造色所謂爲色
001_0501_b_23L彼無此色乃謂無色夫色有五乃成四
001_0501_b_24L唯無形色故謂無色3) [19] 行色識

001_0501_c_01L범부의 다섯 가지 신통으로는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여래나 아유안阿維顔보살(일생보처보살)36)이라야 그 색을 보느니라. 불퇴전보살은 저울 같은 방편을 가지고 유상천有想天 위에 가서 노닐며 그 미세한 식에게 미묘한 법을 설하느니라.’”37)라고 하였다.
묘각에서 “법계왕法界王”은 끝없는 법계의 중생을 두루 교화하기 때문이다.
“불자여” 이하는 세 번째인 맺음인데, “움직이거나 머물거나 함께 노닐며”는 밖으로 나타난 보륜이 왕을 따르며 함께 실천하기 때문이고, “항상 그 몸을 따르고”는 안으로 실천하는 영락이 항상 두 몸을 따르기 때문이다.

③ 치유하는 문

“불자여, 삼현三賢의 보살은 삼계 번뇌의 거친 것과 업도業道의 거친 것을 조복하여 상속하는 과果도 거친 것을 일으키지 않느니라. 견도見道의 희인喜忍은 삼도三道의 업도를 조복하고, 이인離忍은 인도人道의 업도를 조복하고, 명인明忍은 육천六天의 업도를 조복하고, 염인焰忍은 모든 견해의 업도를 조복하고, 승인勝忍은 의심하는 견해의 업도를 조복하고, 현인現忍은 인의 업도를 조복하고, 무생인無生忍은 과의 업도를 조복하고, 부동인不動忍은 색인色因의 업도를 조복하고, 광인光忍은 심인心因의 업도를 조복하고, 적멸인寂滅忍은 심과 색의 두 습기의 업도를 조복하고, 무구인無垢忍은 습기의 과도果道를 조복하느니라. 습기는 앞에서 이미 없앴지만 과는 없어지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불자여, 삼현은 조복하여 끊는다고 하고, 희인 이상은 조복하기도 하고 끊기도 하느니라. 일체 번뇌는 각인覺忍이 나타날 때 법계의 모든 무명이 순식간에 끊어져 남을 것도 없느니라.”38)

셋째, 치유하는 문에 둘이 있으니 개별적으로 밝힘과 총체적으로 드러냄이다.

ㄱ. 개별적으로 밝힘

“삼현三賢의 보살은 삼계 번뇌의 거친 것과 업도業道의 거친 것을 조복하여”라고 한 것은 이미 삼계의 분별로 일어나는 미혹을 조복하였고 악도의 불선업도 조복하였기 때문이다. “상속하는 과果도 거친 것을 일으키(지 않)느니라.”는 팔난八難의 과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견도見道의 희인喜忍39)은 삼도三道의 업도를 조복하고”는 삼악도의 업종자를 끊기는 했지만 아직 근본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조복이라고 한 것이다. 이보다 높은 자리(의 설명)에서 조복했다는 말은 모두 이런 말이다. 초지의 장애인 두 무명 중에 둘째인 악도업惡道業의 무명(을 고치는 것)이다.40)
“이인離忍은 인도人道의 업도를 조복하고”는 미세하게 계를 범하여 갖가지 업행이 인도에서 많이 일어나기 때문에 인도의 업도라고 하였다. 제2지의 장애인 두 무명 중에 둘째인 갖가지 업행의 무명(을 고치는 것)이다.
“명인明忍은 육천六天의 업도를 조복하고”는 육욕천에서는 오욕의 분별로 제3지의 승정행勝定行을 방해하기 때문이며, 이 아래의 모든 장애에서 마음 작용이 상응하는 것을 통칭하여 업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제3지의 장애인 두 무명 중에 첫째인 욕탐과 우치愚癡(를 고치는 것)이다.
“염인焰忍은 모든 견해의 업도를 조복하고”는 모든 교법에 대해서 말대로 의미를 취한 것인데,

001_0501_c_01L色非是凡夫五通所覩唯有如來阿維
001_0501_c_02L顏菩薩乃見彼色不退菩薩執權方便
001_0501_c_03L往遊有想天上與彼微識說微妙法
001_0501_c_04L覺中言法界王者通化無邊法界衆生
001_0501_c_05L佛子以下第三總結動止俱遊者
001_0501_c_06L外相寶輪隨王俱行故常隨其身者
001_0501_c_07L行瓔珞常隨二身故

001_0501_c_08L
第三能治門中有二別明總顯言三
001_0501_c_09L賢菩薩伏三界煩惱麤業道麤者已伏
001_0501_c_10L三界分別起惑亦伏惡道不善業故
001_0501_c_11L續果4) [20] 超麤者八難之果亦不超故
001_0501_c_12L是見道喜忍伏三道業道者斷三惡道
001_0501_c_13L業種子故而未能離根本無明故名爲
001_0501_c_14L上地諸伏皆作是說也初地障有二
001_0501_c_15L無明中第二惡道業無明也離忍伏
001_0501_c_16L人中業道者微細犯戒種種業行人道
001_0501_c_17L多起故名人中業第二地障有二之中
001_0501_c_18L第二種種業行無明也明忍伏六天業
001_0501_c_19L道者六欲天中五欲分別障第三地勝
001_0501_c_20L定行故此下諸障思數相應通名業故
001_0501_c_21L第三地障有二之中第一欲貪愚癡也
001_0501_c_22L炎忍伏諸見業道者於諸敎法如言取
001_0501_c_23L「二」疑「三」「有」一作「百」「色」下一
001_0501_c_24L有「想色」
「亦」下一有「不」

001_0502_a_01L제4지의 도품행道品行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제4지의 장애인 두 무명 중에 둘째인 미묘한 청정법에 애욕이 원인이 된 무명(을 고치는 것)이다.
“승인勝忍은 의심하는 견해의 업도를 조복하고”는 생사에 들어갈지 열반에 들어갈지 머뭇거리기 때문에 의심하는 견해라고 한 것이다. 제5지의 장애인 두 무명 중에 첫째인 한 가지 생각으로 열반에 들어가려 하면서 또 한 가지 생각으로 생사에 들어가려는 사유思惟 무명(을 고치는 것)이다.
“현인現忍은 인의 업도를 조복하고”는 십이인연의 행상行相을 분별한 것이다. 제6지의 장애인 두 무명 중에 첫째인 행법이 이어져 나타나는 무명(을 고치는 것)이다.
“무생인無生忍은 과의 업도를 조복하고”는 과법果法의 찰나 삼상三相을 분별한 것이다. 제7지의 (장애인) 두 (무명) 중에 첫째인 미세한 모든 상이 나타나기도 하고 나타나지 않기도 하는 무명(을 고치는 것)이다.
“부동인不動忍은 색인色因의 업도를 조복하고, 광인光忍은 심인心因의 업도를 조복하고”는 색을 집착하고 마음을 집착하는 (각각의) 현행을 분별하여 (그 각각의 현행으로) 훈습된 종자를 기대하고 (색인과 심인의) 인이라고 설했기 때문이며, 영원히 현행하지 않기 때문에 “조복”이라고 하였다. 제8지와 제9지의 두 지에 있는 두 (무명) 중에 모두 둘째 무명 장애를 다루고 있다.
“적멸인寂滅忍은 심과 색의 두 습기의 업도를 조복하고, 무구인無垢忍은 습기의 과도果道를 조복하느니라.”는 제10지에서 (색과 심의) 두 가지 집착의 훈습을 끊을 수 있기 때문이며, 무구지에서 두 가지 집착의 거친 것을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현행인 원인과 훈습으로 생긴 거친 것은 상속하며 끊어지지 않기 때문에 거친 것을 그 과라고 하였다.
실제를 말하자면 보살지 하나하나에서 모두 (인과 습과 과의) 삼종을 끊지만 (번뇌를) 고치는 것이 점점 깊어지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먼저 인을 말하고, 다음에 습을 말하며, 나중에 과를 말한 것이다.
또 거친 것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번뇌가 거친 경우는 종자가 끊어질 때에 따라서 끊어져 없어지고, 이숙異熟(인 과)가 거친 경우는 (거친) 그런 종류이기는 하지만 미세하고 가벼워서 종자가 없어진 다음에도 상속하여 끊어지지 않기 때문에 “습기는 앞에서 이미 없앴지만 과는 없어지지 않느니라.”라고 하였다. 지금 여기에서 이것을 버리기 때문에 습과習果를 조복한 것이다.


001_0502_a_01L障第四地道品行故第四地障有二
001_0502_a_02L之中第二微妙淨法愛因無明也勝忍
001_0502_a_03L伏疑見業道者爲入生死爲入涅槃
001_0502_a_04L如是猶預故名疑見第五地障有二之
001_0502_a_05L第一一意欲入涅槃一意欲入生死
001_0502_a_06L思惟無明也現忍伏因1) [21] 道者分別
001_0502_a_07L十二因緣行相第六地障有二之中
001_0502_a_08L一行法相續顯現無明也無生忍伏果
001_0502_a_09L業道者分別果法刹那三相七地二中
001_0502_a_10L第一微細諸相或現不現無明也不動
001_0502_a_11L忍伏色因業道光忍伏心因業道者
001_0502_a_12L色著心現行分別2) [22] 熏種說名因
001_0502_a_13L永不現行故名爲伏八九二地有
001_0502_a_14L二之中皆取第二無明障也寂滅忍伏
001_0502_a_15L心色二習業道無垢忍伏道果習 [13]
001_0502_a_16L十地中能斷二著之熏習故無垢地中
001_0502_a_17L能捨二著之麤重故依彼現因及與熏
001_0502_a_18L習所生麤重相續不斷故說麤重名爲
001_0502_a_19L彼果就實而言一一地中皆斷三種
001_0502_a_20L但爲顯其能治轉深故說先因次習後
001_0502_a_21L又麤重有二種若煩惱品麤重
001_0502_a_22L子斷時亦隨斷滅若異熟品麤重是彼
001_0502_a_23L種類而微薄者種子滅後相續不絕
001_0502_a_24L言習先已滅而果不敗亡今捨此故爲

001_0502_b_01L
ㄴ. 총체적으로 드러냄

“그러므로” 이하는 두 번째인 총체적으로 드러냄인데, 총체적으로 (삼현三賢과 희인喜忍 이상과 각인覺忍의) 세 자리로 조복과 끊음을 밝혔다. 삼현에서 조복뿐인 것은 아직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제11지에서 조복하기도 하고 끊기도 한다고 한 것은 아직 근본을 뽑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조복한다고 한 것)이고 이미 종자를 끊었기 때문(에 끊는다고 한 것)이다. 묘각인妙覺忍에서 끊기만 하고 조복이 아니라고 한 것은 근본무명이 이미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다.
“법계의 모든 무명”이라고 한 것은 이숙식에서 생겨난 무명이다. 여기에서 불지를 얻어야 순식간에 끊어지기 때문에 “순식간에 끊어져”라고 하였다. 자세한 것은 다음 문장에서 설명할 것이다.

④ 치유되는 어리석음의 문

“불자여, 무명이란 일체법을 깨닫지 못하는 것을 말하니 법계에 미혹하여 삼계의 업과를 일으킨다. 그러므로 나는 무명장無明藏에서 열세 가지 번뇌를 일으킨다고 말하느니라. 말하자면, 사견邪見·아견我見·상견常見·단견斷見·계도견戒盜見·과도견果盜見·의견疑見의 칠견인데, 일체처를 보고 구하기 때문에 견이라 하느니라. 이 견에서 다시 여섯 가지 집착하는 마음을 일으키니 탐貪·애愛·진瞋·치癡·욕欲·만慢인데, 법계에서 모든 때에 일어나느니라. 불자여, 일체 번뇌는 이 열셋을 근본으로 하고, 무명도 이 열셋과 함께 근본이 되느니라.
이것으로 법계를 구별하여 삼계의 과보를 삼느니라. 불자여, 견해와 집착의 두 가지 업이 법계 중에 일체 색욕심色欲心에 미혹하여 일어난 과보이므로 구별하여 욕계의 과보라고 하느니라. 불자여, 견해와 집착의 두 가지 업이 법계 중에 일체 색심에 미혹하여 색심에서 일어난 과보를 구별하여 색계의 과보라고 하느니라. 불자여, 견해와 집착의 두 가지 업이 법계 중에서 일체 정심定心에 미혹하여 정심에서 일어난 과보를 구별하여 무색계의 과보라고 하느니라.
그러므로 하나의 법계에 삼계의 과보가 있으니 일체 유위법은 범부이든 성인이든 견해와 집착이든 인과법이든 법계를 벗어나지 않느니라. 오직 부처님 한 분만 법계 밖에 계시는데, 그런 뒤에 다시 오셔서 법계장法界藏 안으로 들어가 무명 중생을 위하여 일체 선악도의 과보에 차별이 무량함을 나타내시느니라.”41)

그다음 넷째, 치유되는 어리석음의 문으로 문장에 둘이 있다. 먼저는 원인이고 다음은 결과이다.

ㄱ. 원인인 어리석음

원인인 어리석음에 개별적으로 밝힘과 총체적으로 맺음이 있다.

ㄱ) 개별적으로 밝힘

개별(적으로 밝힘)에서 먼저 근본무명을 밝혔다.
“일체법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니 법계에 미혹하여 삼계의 업과를 일으킨다.”라고 한 것은 일체법이 바로 하나의 법계임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기신론』에서, “하나의 법계에 통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이 상응하지 못하여 홀연히 생각이 일어나니 무명이라고 한다.”42)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지말(번뇌)를 드러내었다.
여기에서 “계도견戒盜見”은 바로 계취戒取이니 삿된 원인을 헤아리기 때문이다. “과도견果盜見”은 바로 견취見取이니 삿된 결과를 판단하기 때문이다. 생사에 대해서 즐겁고 청정한 것이라고 하(는 독두獨頭의 견취)이거나 또 족상足上의 것이 있기 때문에 과견果見이라고 하였다.43) 이런 두 가지를 도견盜見이라고 한 것은 삿되고 집착한다는 의미를 도盜라고 하기 때문이다.
“의견疑見”은 도리를 추구하면서 망설이고 분별하는 것인데, (마음 작용인) 혜慧의 분별이기 때문에 견이라고 하였다. 망설이는 혜(의 작용)은 의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를 드러내려고 “칠견인데, 일체처를 보고 구하기 때문에 견이라 하느니라.”라고 하였다.
“여섯 가지 집착”은 탐貪을 펼쳐서 셋으로 한 것이니 (탐이) 출리出離의 도를 방해하는 최승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음욕을 욕欲이라고 하고 나머지를 탐애貪愛라고 한 것인데, 눈앞의 경계에 집착하는 것을 탐이라고 하고 과거를 돌아보고 아쉬워하며 미래를 희구하는 것을 총체적으로 애라고 하거나, 욕계의 외문外門에서 일어나는 것을 탐이라고 하고 색계와 무색계의 내문內門에서 일어나는 것을 애라고 한다.

001_0502_b_01L伏習果也是故以下第二總明總作三
001_0502_b_02L位以明伏斷三賢唯伏未能見故十一
001_0502_b_03L地中亦伏亦斷未拔根本故已斷種
001_0502_b_04L子故妙覺忍中唯斷非伏根本無明
001_0502_b_05L已永盡故法界中一切無明者異熟識
001_0502_b_06L中所起無明於中生得佛地頓斷3)
001_0502_b_07L言頓斷 [23] 於中委悉後文當說

001_0502_b_08L
此下第四所治愚門在文有二先因後
001_0502_b_09L因愚之中別明總結別中先明根本
001_0502_b_10L無明不了一切法迷法界而起三界業
001_0502_b_11L果者不了一切法卽是一法界如起信
001_0502_b_12L論云不達一法界故心不相應忽然
001_0502_b_13L念起名爲無明故次顯技末於中言
001_0502_b_14L戒盜見者卽是戒取計邪因故果盜
001_0502_b_15L見者卽是見取計邪果故謂於生死
001_0502_b_16L計樂淨等又有足上故名果見如是二
001_0502_b_17L種名盜見者邪取之義名爲盜故疑見
001_0502_b_18L推求道理猶預分別是慧分別
001_0502_b_19L名爲見猶預之慧以爲疑故爲顯是義
001_0502_b_20L故言七見見一切處求故見言六著者
001_0502_b_21L開貪爲三障出離道最勝因故淫欲名
001_0502_b_22L餘名貪愛著現前境名貪顧戀過
001_0502_b_23L希求未來總名爲愛又於欲界外
001_0502_b_24L門所起名貪色無色界內門所起名愛

001_0502_c_01L
“법계에서 모든 때에 일어나느니라.”라고 한 것은 13훈습을 설명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숙식에서 항상 흘러서 끊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 식을 법계라고 한 까닭은 삼계의 제법 종자를 가지기 때문이고, 계界가 가진다(持)는 뜻과 원인(因)의 뜻이기 때문이다.

ㄴ) 총체적으로 맺음

“불자여” 이하는 두 번째인 총체적으로 맺음이다.
“일체 번뇌는 이 열셋을 근본으로 하고”는 수번뇌의 대·중·소44)가 모두 열셋을 근본으로 삼기 때문이고, 무명주지(번뇌)가 이 열셋과 함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ㄴ. 결과인 어리석음

“이것으로” 이하는 다음의 결과인 어리석음을 밝혔다. 여기에 셋이 있으니 총체적으로 드러내고, 개별적으로 해석하고, 뒤에는 서로 포함됨을 밝혔다.
(두 번째) 개별적으로 해석하면서 “견해와 집착의 두 가지 업”이라고 한 것은 견해와 집착의 두 가지 미혹에서 발생한 업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혹업이 이숙식에 포함된 모든 색욕심에 미혹하여 일어난 과보를 구별하여 욕계라고 하고, 음욕은 벗어나고 색심에만 미혹하여 일어난 과보이면 구별하여 색계라고 하며, 색에 대한 애욕은 벗어나고 정심定心에만 미혹하여 일어난 과보이면 무색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하는 (세 번째) 영역이 서로 포함된 것이니 여기에 둘이 있다. 먼저 서로 포함됨을 밝히고, 뒤에는 포함되지 않음을 나타내었다. 먼저 (서로 포함됨)에서 “법계를 벗어나지 않느니라.”라고 한 것은 모두 이숙식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포함되지 않음)에서 “오직 부처님 한 분만 법계 밖에 계시는데”라고 한 것은 오직 부처님만 이숙식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고, “오셔서 법계장法界藏 (안으로) 들어가”라고 한 것은 응화신應化身으로 삼계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인왕경』에서 삼계장三界藏이라고 하였는데, “일체중생의 번뇌가 삼계장에서 벗어나지 않고 일체중생의 과보인 이십이근二十二根45)이 삼계를 벗어나지 않으며, 모든 부처님의 응신·화신·법신도 삼계를 벗어나지 않느니라. 삼계 밖에 중생이 없는데 부처님께서 누구를 교화하시리오. 그러므로 나는, 삼계 밖에

001_0502_c_01L於法界中一切時起者謂如說十三熏
001_0502_c_02L異熟識中恒流不絕故所以是識名
001_0502_c_03L法界者能持三界諸法種子故界是持
001_0502_c_04L義及因義故佛子以下第二總結一切
001_0502_c_05L煩惱以十三爲本者隨煩惱中大中及
001_0502_c_06L皆以十三爲根本故無明住地
001_0502_c_07L此十三而作本故是以已下次明果愚
001_0502_c_08L於中有三總標別釋後明相攝別釋
001_0502_c_09L中言見著二業者見著二惑所發業故
001_0502_c_10L如是惑業迷異熟識之所攝持諸色欲
001_0502_c_11L心所起之報分爲欲界若離淫欲
001_0502_c_12L迷色心所起之報分爲色界若離色愛
001_0502_c_13L但迷定心所起之報爲無色界故是故
001_0502_c_14L以下相攝分齊於中有二先明相攝
001_0502_c_15L後顯不攝初中言不出法界者皆爲異
001_0502_c_16L熟識所攝故第二中言唯佛一人出 [14]
001_0502_c_17L界外者唯佛能離異熟識故來入法界
001_0502_c_18L藏者以應化身入於三界故人王經中
001_0502_c_19L名三界藏彼言一切衆生煩惱4)不生 [24]
001_0502_c_20L出三界藏一切衆生果報二十二根
001_0502_c_21L出三界諸佛應化法身亦不出三界
001_0502_c_22L界外無衆生佛何所化是故我言三界
001_0502_c_23L「果」經作「業」「可」一作「所」「故言頓
001_0502_c_24L斷」一無
「不生」經無

001_0503_a_01L따로 중생계장이 하나 있다는 것은 외도의 『대유경大有經』에서 설한 것이지 (우리 불교의) 칠불께서 설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느니라.”46)라고 하였다. 이 의미는 『일도장一道章』47)에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⑤ 두 가지 태어남의 문

“불자여, 앞의 삼현에서는 삼계의 무명을 조복하지만 거친 업은 작용하느니라. 왜냐하면 장차 (새로운) 생을 받을 때 선이 인연의 종자가 되고 애욕(愛)이 윤업潤業이 되어 미래과를 받기 때문에 작용이 끊어졌다고는 하지만 애욕의 작용이 끊어진 것은 아니니라. 또 제11(지)의 사람도 법계에서 삼계의 업과를 조복하기 때문이니 초지부터 제7지까지는 삼계의 업의 과보를 모두 조복하여 남음이 없고 제8지에서야 완전히 사라지기 때문이니라. (제8지인) 이것 이상은 부처가 됨을 나타내어, 왕궁에 태어나 출가하고 득도하며 법륜을 굴리고 멸도하며 또 모든 부처 세계를 드러내느니라. 그러므로 (인연의) 종자와 애욕과 (그에 따른) 삼계의 과보가 없고 오직 무명의 습기만 남아 있을 뿐이어서 커다란 원력 때문에 변화로 태어나느니라. 이와 같이 내가 옛날에 천상에서, 태어남과 태어나지 않음의 뜻과 업으로 태어남과 변화로 태어남을 설하였느니라.”48)

그다음으로 다섯째, 두 가지 태어남의 문을 밝힘 가운데 둘이 있으니 개별적으로 밝힘과 총체적으로 맺음이다.

ㄱ. 개별적으로 밝힘

개별(적으로 밝힘)에 둘이 있으니 먼저 업으로 태어남을 밝히고 뒤에 변화로 태어남을 드러내었다.

ㄱ) 업으로 태어남

업으로 태어남에도 두 가지 구별이 있다.
삼현위三賢位에서는 거친 무명을 조복하여 업에 얽매임을 벗어나고 미세한 애욕의 작용이 있어서 업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이다. “선이 인연의 종자가 되고”라고 한 것은 과보의 인인 종자가 증상연增上緣이 되기 때문이며, “애욕(愛)이 윤업潤業이 되어”라고 한 것은 현행하는 애욕이 윤업의 종자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작용이 끊어졌다고는 하지만 애욕의 작용이 끊어진 것은 아니니라.”라고 한 것은 업에 얽매이는 작용을 쉬었기 때문에 이전 (단계인) 범부와는 다르고, 애욕이 윤업의 작용을 하기 때문에 뒤의 (단계인) 성인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제11(지)의 사람도 법계에서 삼계의 업과를 조복하기 때문이니”라고 한 것은 총체적으로 성위聖位를 거론한 것이고, “초지부터 제7지까지는 삼계의 업의 과보를 모두 조복하여 남음이 없고 제8지에서야 완전히 사라지기 때문이니라.”라고 한 것은 이 지위에서는 이치로는 업으로 태어나지만 발원과 지혜의 힘을 써서 자재하게 태어남을 밝힌 것이다. 그러므로 일으키지 않은 애욕이 윤업이 되어 제7지의 애욕까지는 최후의 몸이어서 또다시 다른 몸을 받지 않기 때문에 “남음이 없고”라고 하였고, 제8지는 (아예) 받지 않기 때문에 “(제8지)에서야 완전히 사라지기 (때문이니라)”라고 하였다.

ㄴ) 변화로 태어남

“(제8지인) 이것 이상은 부처가 됨을 나타내어” 이하는 두 번째 변화로 태어남을 드러낸 것이다.
제8지 이상의 (제8지·제9지·제10지·불지) 네 지위는 삼계 업종자의 과보를 받지 않는다고 하기 때문에 “(인연의) 종자와 애욕과 (그에 따른) 삼계의 과보가 없고”라고 하였고, 삼계의 번뇌를 모두 조복하여 없앴지만 법집의 무명은 아직 조복하여 없애지 못하였기 때문에 “오직 무명의 습기만 남아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이 법집 무명의 힘 때문에 무루의 업을 일으키고 변역變易의 과보를 받으며 그 삼계의 훈습종자가 금강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어져 끊어지지 않으니 그러므로 삼계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001_0503_a_01L外別有一衆生界藏者外道大有經中
001_0503_a_02L非七佛之所說此義具如一道章
001_0503_a_03L

001_0503_a_04L
此下第五明二生門於中有二別明
001_0503_a_05L總結別中有二先明業生後顯變生
001_0503_a_06L業生之內亦有二別三賢位中伏麤無
001_0503_a_07L離於繫業而有細愛用不繫業故
001_0503_a_08L善爲緣子者報因種子爲增上緣故
001_0503_a_09L爲潤業者以現行愛潤業種子故故名
001_0503_a_10L息用而不斷愛用者息繫業用故異前
001_0503_a_11L凡夫愛用潤業故異後聖人也次言
001_0503_a_12L十一人亦伏法界中三界業果者總擧
001_0503_a_13L聖位初地乃至七地三界果俱伏盡無
001_0503_a_14L餘八地乃盡者明此位中理以業生
001_0503_a_15L願智力自在生故故不起愛以爲潤業
001_0503_a_16L乃至七地愛最後身復不更受故言無
001_0503_a_17L八地不受故言乃盡也從此以上
001_0503_a_18L示現作佛此下第二顯變化生謂從八
001_0503_a_19L地以上四地不受三界業種子報故言
001_0503_a_20L無子愛三界之報以三界煩惱皆伏盡
001_0503_a_21L法執無明未能伏盡故言唯有無明
001_0503_a_22L習在以是法執無明力故發無漏業
001_0503_a_23L受變易報而其三界熏習種子乃至金
001_0503_a_24L相續不絕是故說爲不出三界

001_0503_b_01L또 정토의 의지依止인 묘색妙色은 비록 무루의 법처法處에 속하지만 모두 이숙식을 의지하기 때문에 정토라고 이름하지 않는다.
“커다란 원력 때문에 변화로 태어나느니라.”라고 한 것은 예토의 왕궁에서 태어나거나 육도에서 온갖 (것으로) 태어나는 것이 모두 변화(로 태어나는 것)이며, 업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ㄴ. 총체적으로 맺음

“이와 같이 내가 옛날에” 이하는 총체적으로 맺음이다. “천상에서……설하였느니라.”라고 한 것은 제6천에서 이런 의미를 설명했기 때문이다. “업으로 태어남”은 제7지 이하이기 때문이고, “변화로 태어남”은 제8지 이상이기 때문이다.
⑥ 두 가지 업의 문

“불자여, 성위聖位에 두 가지 업이 있느니라. 첫째는 혜업慧業이니 무상무생無相無生의 지혜가 마음마다 법성法性을 연하여 생기지만 비추는 일이 없어서 혜업이라고 하느니라. 둘째는 공덕업功德業이니 실지實智가 유제有諦의 유위무루有爲無漏에서 (생겨) 나와 백만 아승기의 공덕을 쌓았기 때문에 공덕업이라고 하느니라. 초(지의) 성위부터는 태어남을 드러내기는 하지만 변역(으로 태어남)이므로 (과거 생을) 마쳤다고 새로 만들지 않으며, 원력(으로 태어남)이므로 백 겁 천 겁 머물며 변화하여 일체로 태어나느니라.”49)

그다음 여섯째, 두 가지 업을 밝히는 문 가운데 둘이 있으니 개별적으로 밝힘과 총체적으로 맺음이다.
먼저 혜업에서 “무상무생無相無生의 지혜가”라고 한 것은 분별상分別相과 의타생依他生을 없앴기 때문이고, “마음마다 법성法性을 연하여”라고 한 것은 실성을 증득했기 때문이며, “생기지만 비추는 일이 없어서”라고 한 것은 능취와 소취의 분별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조복(伏)하고 끊는(斷) 등의 업도 혜업이지만 앞에서 이미 드러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설명하지 않을 뿐이다.
“지智가 유제有諦의 유위무루有爲無漏에서 (생겨) 나와” 등은 본래의 지혜에 의지하여 나온 후득지에 자비 등의 덕을 갖추어 위로는 불도를 넓히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기 때문에 보통 공덕업이라고 한다. “초(지의) 성위” 이하는 거듭 공덕업을 나타낸 것이다.
“변역(으로 태어남)이므로 (과거 생을) 마쳤다고 새로 만들지 않으며”라고 한 것은 공덕이 더욱 늘어날수록 전후가 바뀌기 때문에 생사라는 유루의 업에서 마칠 줄만 아는 것이고 새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변화하여 일체로 태어나느니라.”라고 한 것은 제7지 이하에서는 업으로 태어나면서도 변화로 태어나는 것도 겸하기 때문이다.

4. 석의품釋義品
육입六入50)을 직접 밝힘51)의 세 가지 갈래에서 처음(「현성명자품」)은 (현성의) 이름을 열거하였고, 다음(「현성학관품」)은 (현성이) 관법하는 모습을 분별하였다. 이와 같이 두 가지 갈래는 앞에서 마쳤고, 이것은 세 번째 (갈래인) 행상行相을 관찰함에 의거함이다. 앞에 나온 이름과 의미를 풀이하여 모든 이름과 의미를 해석하므로 “석의품釋義品”이라고 하였다.

001_0503_b_01L其淨土依止妙色雖是無漏法處所攝
001_0503_b_02L而皆依止於異熟識是故不名爲淨土
001_0503_b_03L以大願力故變化生者謂於穢土王
001_0503_b_04L宮受生及與六道受種種生皆是變化
001_0503_b_05L不由業生故以是故我昔 [15] 以下總結
001_0503_b_06L中說者第六天中說是義故業生者
001_0503_b_07L七地已還故變生者八地已上故

001_0503_b_08L
此下第六明二業門於中有二別明總
001_0503_b_09L初慧業中言無相無生智者忘分別
001_0503_b_10L相及依他生故心心緣法性者證實性
001_0503_b_11L而生無照者以離能取所取分別故
001_0503_b_12L伏斷等業亦是慧業但前已顯故今不
001_0503_b_13L說耳智出有諦中有爲無漏等者依正
001_0503_b_14L體智出後得智於中俱有慈悲等德
001_0503_b_15L弘佛道下化衆生所以通名爲功德業
001_0503_b_16L從初聖以下重顯功德業以變易故
001_0503_b_17L畢故不造新者功德轉增前變後易
001_0503_b_18L於生死有漏之業但能畢故而不造新
001_0503_b_19L變化生一切者七地以下雖有業生
001_0503_b_20L而亦兼有變化生故

001_0503_b_21L1)釋義品

001_0503_b_22L
正明六入有三分中初列名字次辨觀
001_0503_b_23L如是二分竟在於前此第三依觀行
001_0503_b_24L釋前名義訓釋諸名義故名釋義

001_0503_c_01L(「석의품」) 문장에 넷(의 구분)이 있으니 표방하여 물음, 설하기로 약속함, 총괄적으로 드러냄, 개별적으로 풀이함이다.

1) 표방하여 물음
부처님께서 경수보살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앞에서 의미(義)와 모습(相)이 무엇이냐고 한 것은, 말하자면 십주·십행·십회향·십지·무구지·묘각지의 의미와 모습이니 이제 설하리라.
불자여, 그것은 금강의 바다에 담긴 『영락경』에서 해석하는 현성賢聖의 모습과 의미이니라. 의미는 체體에서 나오는데, 체는 보살의 체이며 의미는 공덕이라 하느니라. 이와 같은 두 법은 일체 보살이 체로 삼고 의미로 삼기 때문에 체의體義라고 하느니라.”52)

먼저 표방하여 물음은 「학관품」의 처음에 (경수보살이) “보살이 배우고 관하는 이름의 의미와 모습은 무엇입니까? 마음으로 수행하는 법은 또 무엇입니까?”53)라고 여쭌 것이다. 이 두 가지 질문 중에 뒤의 질문은 이미 (「현성학관품」에서) 대답하였지만 앞의 이름과 의미에 대한 질문은 저 「(현성학관)품」에서 간략하게만 대답하고 자세하게 풀이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거듭 “그대가 앞에서 의미(義)와 모습(相)이 무엇이냐고 한 것은”이라고 표방하여 말하였다.

2) 설하기로 약속함
“말하자면” 이하는 두 번째인 (십주·십행·십회향·십지·무구지·묘각지의) 육위六位의 의미와 모습을 설하기로 약속한 것이다.

3) 총괄적으로 드러냄
“불자여” 이하는 세 번째인 풀이할 체의體義를 총괄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보살의 체이며”라고 한 것은 종성의 체의를 말한 것이고, “공덕이라 하느니라.”라고 한 것은 종성에 의지하여 일체 공덕을 일으켜 크게 의로움과 이익이 있기 때문이며 깊은 까닭이 있기 때문이다.

4) 개별적으로 풀이함
“불자여, 발심주發心住란, 이 사람이 처음에는 완전히 속박된 범부에서 시작하여 아직 삼보와 성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아직 좋고 나쁜 인과 그 과도 알아보지 못하며, 일체를 알아보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며 알지 못하느니라. 불자여, 알아보지 못하는 처음 범부의 지위에서 불보살의 교법을 만나 일념의 믿음을 일으켜 곧 보리심을 일으키면 이 사람은 이때가 (발심)주의 전前이고 신상信想보살 또는 가명假名보살 또는 명자名字보살이라고 하느니라. 그 사람은 대략 십심十心을 행하니, 말하자면 신심信心·진심進心·염심念心·혜심慧心·정심定心·계심戒心·회향심廻向心·호법심護法心·사심捨心·원심願心이니라. 다시 십심을 행하니, 말하자면 십선법十善法·오계·팔계·십계·육바라밀계이니라. 이 사람이 다시 십선을 행하면서 일 겁이나 이 겁이나 삼 겁 동안 십신十信을 닦으면 (욕계의) 육천의 과보를 받느니라. 상선上善에 삼품이 있으니 상품은 철륜왕鐵輪王이 (되어) 천하 하나를 교화하고, 중품은 속산왕粟散王이 (되며), 하품은 사람 사이의 왕이 (되어) 일체 번뇌를 갖추고도 무량한 선업을 모으며 (진리에서) 물러가기도 하고 나아가기도 하지만, 선지식을 만나서 불법 배우기를 일 겁이나 이 겁 동안 하면 그제야 (발심)주의 지위에 들어가느니라. 그렇지 않으면 항상 (삼계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니 물러나는 자리에 머무는 선근에 대해서는 위에서 말한 것과 같으니라.”54)

“불(자여)” 이하는 네 번째인 개별적으로 풀이한 것이다. 육위의 의미를 해석하면서 두 부분으로 하였는데, 앞의 셋과 뒤의 셋의 두 부분으로 하였기 때문이다.

(1) 앞의 셋, 삼현三賢
(앞의 셋인) 삼현을 풀이하면서 개별적으로 밝히고 총괄적으로 맺는다.

① 개별적으로 밝힘

ㄱ. 십주

처음 십주에는 풀이에 두 가지가 있다. 먼저 (십)주에 들어가는 방편을 밝히고, 나중에는 직접 들어간 (십)주의 모습을 풀이하였다.

ㄱ) 십주에 들어가는 방편

먼저 (십주에 들어가는) 방편은 여덟 구절로 드러내보였다. 첫째는 들어갈 자리를 표방하였고, 둘째는 들어가는 사람을 거론하였으며, 셋째는 발심, 넷째는 이름을 세웠고, 다섯째는 수행, 여섯째는 받는 과보, 일곱째는 득실, 여덟째는 진퇴이다.
“발심주發心住란”이라고 한 것이 (첫째인) 들어갈 (자리를) 표방한 것이고, “이 사람이” 이하가 (둘째인) 들어가는 사람을 거론한 것이다. “완전히 속박된”이라고 한 것은 (불교) 바깥의 범부 지위에 있다는 것이고, “알아보지 못하고”라고 한 것은 삼보를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며, “이해하지 못하며”라고 한 것은 성인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지혜롭지 못하고”라고 한 것은 좋고 나쁜 인因에 미혹하기 때문이며, “알지 못하느니라.”라고 한 것은 괴롭고 즐거운 과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알아보지 못하는” 이하가 (여덟 구절의) 셋째인 발심을 밝힌 것이다. “불보살의 교법을 만나”라고 한 것은 부처님을 만나기도 하고 보살을 만나기도 하며 부처님과 보살의 교법을 만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001_0503_c_01L品也在文有四牒問許說總標別釋

001_0503_c_02L[牒問]
初牒問者學觀品初問言云何菩薩
001_0503_c_03L學觀名字義相及心所行法復當云
001_0503_c_04L此二問中後問已答前義相問
001_0503_c_05L品略答而未廣釋故今重牒言汝先言
001_0503_c_06L義相云何者也
[許說]
所謂以下第二許說六
001_0503_c_07L位義相
[總標]
佛子以下第三總標所釋體義
001_0503_c_08L菩薩體著 [16] 謂種性體義名功德者
001_0503_c_09L種性起一切2) [25] 有大義利故有深
001_0503_c_10L所以故 [17] 別釋釋六位義
001_0503_c_11L卽爲二分前三後三爲二分故

001_0503_c_12L[三賢]
釋三賢中別明總結初十住內釋初有
001_0503_c_13L先明入住方便後釋正入住相
001_0503_c_14L方便中八句示現一牒所入位二擧
001_0503_c_15L能入人三者發心四者立名五者修
001_0503_c_16L六者受報七者得失八者進退
001_0503_c_17L心住者是牒所入是人以下擧能入人
001_0503_c_18L言具縛者在外凡位不識者不識三
001_0503_c_19L寶故不解者不解1) [26]
001_0503_c_20L迷好惡因故不知者不了苦樂果故
001_0503_c_21L從不識以下第三明發心値佛菩薩敎
001_0503_c_22L法者謂或値佛或値菩薩或値佛及
001_0503_c_23L經卷下「功」一作「行」「二」疑「四」
001_0503_c_24L
「望」疑「聖」

001_0504_a_01L“일념의 믿음을 일으켜”라고 한 것은 삼경三境55)에 대해서 확고한 믿음을 일으키는 것인데, 그 믿음은 불도를 수행하면 증득이 있으리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신심을 일으키고 나면 (불교) 안으로 들어온 범부라고 한다. “보리심을 일으키면”이라고 한 것은 대보리에 대하여 확고한 원願을 내는 것인데, 그 원은 내가 장차 무상의 보리를 성취하여 모든 중생에게 일체 의리가 있게 하리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이하가 (여덟 구절의) 넷째인 이름을 세운 것이다. “이때가”라고 한 것은 발심 이후라는 것이고, “(발심)주의 전前이고”라고 한 것은 초주 이전이라는 것이다. 이때 “신상信想보살”이라고 한 것은 십신의 마음을 수행할 줄 알기 때문이고, “가명假名보살”이라고 한 것은 마음이 아직 견실하지 못하여 가벼운 털과 같기 때문이며, “명자名字보살”이라고 한 것은 행동이 이름에 걸맞지 않아 아직 의미와 모습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이하는 다섯째인 수행이다. 여기에 둘이 있으니 먼저 (신심·진심·염심·혜심·정심·계심·회향심·호법심·사심·원심의) 십심을 밝히고 나중에 십계를 드러냈다. (십계 중에서) “십선十善”은 십악을 막는 것을 말하고, “오계·팔계·십계”는 섭률의계攝律儀戒이며, “육바라밀계”는 섭선법계攝善法戒이다.
“다시 (십선을) 행하면서” 이하는 여섯째인 받는 과보이다. 여기에도 둘이 있으니 먼저 십선과 십신의 인因을 표방하였고, 나중에 천보와 인왕보를 나타내었다. “철륜왕鐵輪王”은 세상(州) 하나를 통괄적으로 다스리는 것이 색온色蘊의 문이 모든 색을 총섭하는 것과 같은 것이고, “속산왕粟散王”은 개별적으로 여러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계문界門에서 (안이비설신과 색성향미촉의) 열 가지 색계가 개별적으로 동등한 것과 같기 때문이어서 ‘곡식(粟)’이 개별적이기 때문에 ‘산散’이라고 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 의거한다면 나머지 모든 왕은 각각 개별적으로 나라를 다스리므로 모두 ‘속산’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인왕경』에서 “상품의 십선은 철륜왕이고 중품과 하품의 십선은 속산왕이다.”56)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지금 이 『(보살영락본업)경』에서는 속산왕을 나누어 두 품으로 구별하였는데, 중품인 자가 본래 이름(인 속산왕)을 이어받고 하품의 왕은 따로 인왕人王이라고 하였다. 큰 마음을 내기 때문에 왕이 될 수 있는 것이고, 선근의 차이 때문에 (철륜왕과 속산왕과 인왕의) 세 가지 구별이 있다.
“(일체 번뇌를) 갖추고도” 이하는 일곱째인 득실이니 비록 모든 미혹함을 갖추었지만 모든 선근을 모은 것이다.

001_0504_a_01L菩薩敎法故中起一念信者於三境起
001_0504_a_02L決定信信有佛道修行可得故發是信
001_0504_a_03L已名入內凡發菩提心者於大菩提發
001_0504_a_04L決定願願我當成無上菩提作諸衆生
001_0504_a_05L一切義利故此人 [18] 以下第四立名言爾
001_0504_a_06L時者發心已後言住前者初住已前
001_0504_a_07L是時名爲信想菩薩以能修行十信心
001_0504_a_08L假名菩薩者心未堅實故猶如輕
001_0504_a_09L毛故名字菩薩者行不稱名故未得
001_0504_a_10L義相故其人以下第五修行於中有二
001_0504_a_11L先明十信 [27] 後顯十戒言十善者謂遮
001_0504_a_12L十惡五八十戒者是攝律儀戒六波
001_0504_a_13L羅蜜戒者是攝善法戒也復行以下第
001_0504_a_14L六受報於中亦二先牒十善及十信因
001_0504_a_15L後顯天報及人王報鐵輪王者統領一
001_0504_a_16L如色蘊門總攝諸色粟散王者
001_0504_a_17L領諸國如界門中十色界別等故如粟
001_0504_a_18L別故曰散若依是義自餘諸王各領
001_0504_a_19L別國皆名粟散如仁王經言上品十
001_0504_a_20L善鐵輪王中下品十善粟散王故今此
001_0504_a_21L經中分粟散王以別二品其中品者仍
001_0504_a_22L受本名下品王者別名人王由發大
001_0504_a_23L故得爲王善根差別故有三別也
001_0504_a_24L具足以下第七得失雖具諸惑而集諸

001_0504_b_01L
“(진리에서) 물러가기도 하고” 이하는 여덟째인 진퇴이니 먼저 표방하고 나중에 풀이하였으니 문장의 모습을 알 수 있을 것이다.

ㄴ) 십주의 모습

“불자여, 발심주란 위로 나아가는 선근의 사람이 일 겁이나 이 겁 동안 일 항하사나 이 항하사나 삼 항하사의 부처님 처소에서 십신심十信心을 행하며 삼보를 믿고, 항상 팔만 사천의 반야바라밀에 머물러 일체 행과 일체 법문을 모두 익히고 받아들여 실천하며, 항상 신심을 일으켜 사견과 십중十重과 오역과 팔도八倒57)를 저지르지 않으면, 힘든 곳에 태어나지 않고 항상 불법을 만나 많이 들어 생기는 지혜가 넓어지고 다양한 방편을 구하느니라. 비로소 공계空界에 들어가 공성空性의 지위에 머물기 때문에 주住라고 하느니라. (주는) 공의 이치(를 알게 된) 지혜의 마음으로 예전 부처님의 법과 일체 공덕을 익히고 (지地는) 자신의 마음을 쓰지 않고 일체 공덕을 생겨나게 하기 때문에 지라고 하지 않고 주라고만 할 수 있느니라.”58)

“불자여” 이하는 초주의 모습을 밝혔다. 여기에 둘이 있으니 먼저 (초주에 들어가는) 방편을 표방하였고 “비로소 (공계空界에) 들어가” 이하는 (초)주의 모습을 직접 밝혔다. 인공人空이 다한 문에 의지하여 종성種性을 드러낼 수 있으므로 “비로소 공계에 들어가 공성의 지위에 머문다”고 하였다. “비로소 공계에 들어간다”는 것은 발심한다는 의미이니 인공의 문에 의지하여 처음으로 발심하기 때문이다. 인공의 지혜에 의지하여 (삼계의) 존재(有)에서 수행(의 마음을) 내고 부처님의 교법에 의지하여 일체 공덕을 닦고 익힐 마음을 먹는 것이 주住의 의미이다. 모든 분별에서 벗어나 자신의 마음을 쓰지 않고 자유롭게 일체 공덕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 지地의 의미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직 얻지 못했기 때문에 지라고 하지 않고 주라고만 하였다. 이것은 간략하게 주와 지의 차이를 구별한 것이다.

“불자여, 치지주治地住란 항상 공의 마음을 따르며 팔만 사천의 법문을 정화시켜 깨끗하기 때문에 치지주라고 하느니라. 불자여, 일체 수행을 길러 내기 때문에 수행주修行住라고 하느니라. 불자여, 부처님 가문에 태어나면 종성이 청정하기 때문에 생귀주生貴住라고 하느니라. 불자여, 무량한 선근을 잘 익히기 때문에 방편구족주方便具足住라고 하느니라. 불자여, 여섯 번째 반야(바라밀)을 성취하기 때문에 정심주正心住라고 하느니라. 불자여, 생겨날 것이 없는 필경의 공계에 들어가 마음마다 항상 공空·무상無相·무원無願을 수행하기 때문에 불퇴주不退住라고 하느니라. 불자여, 발심(주) 이래로 전도된 생각을 내지 않고 삿된 마군의 마음을 일으켜 보리심을 파괴하지 않기 때문에 동진주童眞住라고 하느니라. 불자여, 불왕佛王의 가르침에서 (공)해(空)解를 낸 이래로 장차 부처 지위를 잇기 때문에 법왕자주法王子住라고 하느니라. 불자여, 위의 아홉 가지에서 공을 관찰하여 무생심無生心을 얻는 최상이기 때문에 관정주灌頂住라고 하느니라.”59)

“치지(주)”에서 “항상 공의 마음을 따르며 팔만 사천의 법문을 정화시켜”라고 한 것은 육바라밀의 법에 의지하여 이와 같은 (온갖) 문을 정화시킨다는 것이니 이 의미는 『현겁경賢劫經』에서 자세하게 설명하였다.60)
경전에는 희왕喜王이라는 보살이 참선하며 7일을 앉아 ‘보살은 무슨 삼매를 수행해야 속히 팔만 사천의 모든 바라밀 법문다라니문 등을 이룰까?’ 사유하다가 7일이 지나서 부처님 계신 곳에 나아가 앞에서 생각한 것을 여쭈었다. 부처님께서 그때 대답하셨다. “이 의미를 잘 물었다. 모든 법의 근본을 깨달음이라는 삼매가 있다. 이 삼매를 수행하면 속히 팔만 사천의 모든 바라밀문 등을 이룬다.”
무엇이 그 팔만 사천인지에 대해서 저 『(현겁)경』은 이렇게 설명한다. 모든 부처님의 공덕이 모두 350가지이고, 그 350가지 (공)덕으로 각각 육바라밀을 닦아 인因을 삼으면 모두 2천백 개의 바라밀이 있으며, 사대와 육쇠六衰의 어리석음을 상대하여 치유하면 2만 천 개의 바라밀이 있다. 사대는 내부의 사대를 말하고 육쇠는 외부의 육진六塵을 말하니

001_0504_b_01L善根亦根以下第八進退先標後釋
001_0504_b_02L相可知

001_0504_b_03L
佛子以下明初住相於中有二先牒方
001_0504_b_04L便始入以下正明住相依人空盡門
001_0504_b_05L得顯種性故言始入空界住空性位
001_0504_b_06L入空界是發心義依人空門初發心故
001_0504_b_07L依人空智發有中行依佛敎法作意脩
001_0504_b_08L習一切功德是爲住義離諸分別不自
001_0504_b_09L造心任運生起一切功德是爲地義
001_0504_b_10L而今未得是故不名爲地但得名住
001_0504_b_11L此是簡別住與地別也治地中言常隨
001_0504_b_12L空心淨八萬四千法門者依六度法淨
001_0504_b_13L爾許門是義廣說如賢刧經彼有菩薩
001_0504_b_14L名曰喜王晏坐七日作是思惟菩薩
001_0504_b_15L行何三昧便速逮致八萬四千諸度法
001_0504_b_16L門陀羅尼門等過七日已往詣佛所
001_0504_b_17L請前所念佛時對曰快問是義有三
001_0504_b_18L昧門名了諸法本行是三昧便速逮
001_0504_b_19L致八萬四千諸度門等何者是其八萬
001_0504_b_20L四千彼經中說諸佛功德凡有三百
001_0504_b_21L五十種門於彼三百五十種德各修六
001_0504_b_22L度以之爲因便有二千一百諸度對治
001_0504_b_23L四大六衰之愚便有二萬一千諸度
001_0504_b_24L四大者謂內四大言六衰者謂外六

001_0504_c_01L육진이라는 도적이 선법을 쇠퇴시키기 때문에 쇠衰라고 한다. 조금 전의 2만 천 개 바라밀이 각각 중생의 네 가지 마음 근심을 상대하면 팔만 사천의 바라밀이 있으니 네 가지 근심은 탐·진·치, 그리고 (탐진치와) 같은 수준의 행동이다.61) 이것을 팔만사천법문이라고 하였다.
다음으로 “깨끗하기 때문에 치지주라고 하느니라.”라고 한 것은 앞의 팔만사천법문에 의지하여 사대와 육쇠와 사환四患을 치유하여 심지心地를 맑고 깨끗하게 하기 때문에 (제2주인) 치지주라고 한 것이다.
“수행(주)”에서 “일체 수행을 길러 낸다”고 한 것은 앞에서 치유한 맑고 깨끗한 심지에 의지하여 모든 수행을 기르기 때문에 (제3주인) “수행(주)”라고 한 것이다. “생귀(주)”에서 “부처님 가문에 태어나면 종성이 청정하다”고 한 것은 닦아 온 수행으로 부처님 가문에 태어나면 부처님 가르침의 힘으로 공에 대한 이해가 점점 늘어나기 때문에 (제4주인) “생귀(주)”라고 한 것이다. “무량한 선근을 잘 익힌다”는 것은 교묘한 방편으로 많은 선근을 닦아 익히기 때문에 (제5주인) “방편구족(주)”라고 한 것이다. “여섯 번째 반야(바라밀)을 성취한다”는 사집邪執을 상대하여 치유하기 때문에 (제6주인) “정심(주)”라고 한 것이다. “생겨날 것이 없는 필경의 공계에 들어간다”는 반야의 힘에 의지하여 (공空·무상無相·무원無願의) 삼공三空62)에 점차 들어가 나아가기만 하고 물러남이 없기 때문에 (제7주인) “불퇴(주)”라고 한 것이다.
“발심(주) 이래로 전도된 생각을 내지 않고”는 발심(주) 이래로 전도(된 생각)을 멀리 벗어나 보리심을 파괴할 수 있는 번뇌와 삿된 마군(의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런 의미 때문에 (제8주인) “동진(주)”라고 한 것이다. 마치 어린 나이에 사미가 된 이래 색욕(의 계)를 범하지 않는 것과 같으니 예를 들면 『앙굴마라경央掘魔羅經』에서 “그때에 세존께서 앙굴마(라)에게 ‘너는 앞으로 동진의 청정한 계를 수지해야 한다’고 하셨다.”63)라고 하고 작은 글씨로 주석하여 “ ‘동진’은 ‘사미’의 다른 이름이다. 서역 책에서는 ‘식차式叉’라고 하였고, 번역하여 ‘배우다(學)’라고도 하고, ‘따라 익히는 데에 어김이 없다’고도 한다.”64)라고 하였다. 지금 이 (제8주) 지위에서 “동진”이라고 한 것은 발심(주) 이래로 이치와 가르침을 따라 익히는 데에 어김이 없다는 의미이다. “장차 부처 지위를 잇는다”는 것은 앞의 동진(주)에서 따라 익히는 힘 덕분에 가르침에서 (공)해(空)解를 내는 것을

001_0504_c_01L六塵之賊衰耗善法故名爲衰
001_0504_c_02L前二萬一千諸度各對衆生四種心患
001_0504_c_03L便有八萬四千諸度言四患者多貪瞋
001_0504_c_04L癡及等分行是謂八萬四千法門次言
001_0504_c_05L淸淨鮮白 [19] 故名治地者依前八萬四千
001_0504_c_06L法門能治四大六衰四患所以心地淸
001_0504_c_07L故名治地住也修行中言長養一切
001_0504_c_08L行者依前所治淸白心地長養諸行
001_0504_c_09L故名修行也生貴中言生在佛家種子
001_0504_c_10L性淸淨者依所修行得生佛家由佛敎
001_0504_c_11L力空解轉增故名生貴也多習無量善
001_0504_c_12L根者巧便修習衆多善根以之故名方
001_0504_c_13L便具足也成就第六般若者對治邪執
001_0504_c_14L故名正心也入無生畢竟空界者
001_0504_c_15L般若力轉入三空有進無退名不退也
001_0504_c_16L從發心不生倒者從發心來遠離顚倒
001_0504_c_17L不起煩惱邪魔可以破菩提心以是
001_0504_c_18L義故名爲童眞猶如年少沙彌生來不
001_0504_c_19L犯色欲如央掘魔羅經言爾時世尊
001_0504_c_20L告央掘魔汝當受持童眞淨戒子注
001_0504_c_21L中言童眞是沙彌別名胡本云式叉
001_0504_c_22L宋言學亦言隨順無違今此位中名童
001_0504_c_23L眞者從發心來隨順理敎而無違義
001_0504_c_24L當紹佛位者由前童眞隨順力故

001_0505_a_01L(제9주인) “법왕자(주)”라고 한 것이다. “무생심無生心을 얻는 최상”이라는 것은 공해를 내는 데는 이것이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제10주인) “관정(주)”라고 한 것이다.

ㄴ. 십행

“그러므로 불자여, 관정심灌頂心에서 더 나아가 오음의 법성이 공한 지위에 들어가 다시 팔만 사천의 반야바라밀을 행하기 때문에 중십행中十行이라고 하느니라. 불자여, 그중에 비로소 법공法空에 들어가 외도의 삿된 논리에 전도되지 않고 정위正位에 들어가므로 환희행歡喜行이라고 하느니라. 불자여, 항상 일체중생을 교화하고 모든 법의 이익을 중생이 얻게 하므로 요익행饒益行이라고 하느니라. 불자여, 법의 실(성)에 대하여 법인심法忍心을 얻어 아我가 없고 아소我所가 없으므로 무진한행無瞋恨行이라고 하느니라. 불자여, 항상 공덕에 머물러 중생을 교화하므로 무진행無盡行이라고 하느니라. 불자여, 목숨을 마칠 때에 무명의 귀신에게 어지럽히거나 혼탁하게 되지 않고 바른 생각을 잃지 않으므로 이치란행離癡亂行이라고 하느니라. 불자여, 태어날 때마다 항상 불국토에 태어나므로 선현행善現行이라고 하느니라. 불자여, 아에 대하여 아가 없고(無我) 일체법에 이르기까지 공하므로 무착행無著行이라고 하느니라. 불자여, 삼세의 불법에 항상 공경하여 따르므로 존중행尊重行이라고 하느니라. 불자여, 설법하여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면 변하여 사물의 법칙이 되므로 선법행善法行이라고 하느니라. 불자여, 이제二諦가 같지 않아서 상相도 아니고 상 아님도 아니므로 진실행眞實行이라고 하느니라.”65)

ㄱ) 총체적으로 밝힘

십행에서 먼저 총체적으로 밝혔다. “오음의 법성이 공한”은 앞의 십주에서 안으로 인공을 얻었고 이 십행의 지위에서는 안으로 법공을 얻어 법의 공해에 의지하여 또 팔만사천법문을 수행하기 때문에 통틀어서 “중십행中十行”이라고 하였다.

ㄴ) 개별적으로 밝힘

다음으로 개별적으로 밝힌 것에 “비로소 법공法空에 들어가”는 앞에서 인공을 얻었지만 아직 법이 남아 있었는데 이제 법공을 얻어 안에 남음이 없으므로 비로소 환희심을 낸다. 두 번째(인 요익행)에서 “항상 일체중생을 교화하고”라고 한 것은 안으로 계행을 지키고 밖으로 중생을 제도하므로 “요익(행)”이라고 한 것이다. “법의 실(성)에 대하여 법인심法忍心을 얻어”는 법의 실성에 대해서 법인심을 얻고 법인에 의지하기 때문에 중생인衆生忍도 얻어 “아我가 없고 아소我所가 없으므로” (제3행인) “무진한(행)”이라고 한 것이다. “항상 공덕에 머물러”는 정진에 쉼이 없기 때문에 항상 머무르고, 항상 머물러 그만두지 않으므로 (제4행인) “무진(행)”이라고 한 것이다. “바른 생각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선정(바라밀)의 힘에 의하여 치란癡亂을 깊이 조복시키기 때문에 임종에도 혼탁하지 않으므로 (제5행인) “이치란(행)”이라고 한 것이다. “태어날 때마다 항상”은 반야(바라밀)의 힘 덕분에 깨달은 이를 따르며 항상 불국토에 현생하므로 (제6행인) “선현(행)”이라고 한 것이다. “아에 대하여 아가 없고(無我)”는 방편(바라밀)의 힘에 의지하여 두 극단은 물론 모든 법에 염착染著되는 일까지 벗어나므로 (제7행인) “무착(행)”이라고 한 것이다. “항상 공경하여 따른다”는 원(바라밀)의 힘에 의지하여 항상 삼세 부처님의 법을 따를 줄 알기 때문에 (제8행인) “존중(행)”이라고 한 것이다. “설법하여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면”은 역力(바라밀)에 의지하여 변하여 사물의 법칙이 되며 악을 벗어나고 선을 행하므로 (제9행인) “선법(행)”이라고 한 것이다. “이제二諦가 같지 않아서”는 둘이 아니라고 말하면 둘이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같지 않아서”라고 한 것이다. 그 이유는 상相도 아니고 상 아님도 아니기 때문이다. 상도 아니기 때문에 유제有諦라는 말과 같지 않고,

001_0505_a_01L從敎生解名法王子也得無生心最上
001_0505_a_02L生空解中此最勝故故名灌頂也

001_0505_a_03L
十行中先總明進入五陰法性空者
001_0505_a_04L十住中得內人空此十行位得內法空
001_0505_a_05L依法空解亦行八萬四千法門是故通
001_0505_a_06L名爲中十行次別明中始入法空者
001_0505_a_07L得人空而猶存法今得法空於內無
001_0505_a_08L是故始生歡喜心也第二中言常化
001_0505_a_09L衆生者內持戒行外導衆生故名饒
001_0505_a_10L益也 [20] 實得法忍心者於法實性得法
001_0505_a_11L忍心依法忍故得衆生忍無我我所
001_0505_a_12L無瞋恨也常住功德者精進無息
001_0505_a_13L以常住常住不廢故名無盡也不失
001_0505_a_14L正念者依禪定力深伏癡亂所以臨
001_0505_a_15L終不濁是故名爲離癡亂也生生常在
001_0505_a_16L由般若力隨順覺者所以常在佛土
001_0505_a_17L現生故名善現也於我無我者依方
001_0505_a_18L便力巧離二邊乃至諸法無所染著
001_0505_a_19L故名無著也常順敬者依願度力
001_0505_a_20L能隨順三世佛法故名尊重也說法
001_0505_a_21L1) [28] 人者依力度動成物軌離惡行善
001_0505_a_22L故名善法也二諦非如者非二言下如
001_0505_a_23L言有二故曰非如所以然者以非相
001_0505_a_24L非非相故以非相故非如有諦之言

001_0505_b_01L상 아님도 아니기 때문에 무제無諦라는 호칭과 같지 않다. 이렇게 알면 허망한 말에서 벗어난다. 이러한 의미 때문에 (제10행인) “진실행”이라고 한 것이다. (제10행인) 이것은 지智바라밀에 의거하여 이름을 내세웠는데 앞의 (제6행이 의거한 반야바라밀인) 혜慧바라밀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면, 저기에서는 상을 없애고 공에 들어가서 부처님 법신을 따른다는 의미를 밝혔고, 여기에서는 상 아님도 없애고 속俗을 건너 허망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를 드러냈다. 이러한 도리 때문에 두 가지 바라밀이 차별이 있다.

ㄷ. 십회향

ㄱ) 총괄적으로 밝힘

“그러므로 불자여, 진실심眞實心에서 중생공衆生空과 무아공無我空에 들어가지만 두 가지 공이 평등하여 다름이 없어서 하나로 관찰하는 모습이 하나로 합한 모습이니라. 백만억 반야바라밀의 공관을 학습하므로 앞뒤를 되돌려 바꾸고 마음마음에 밝고 밝음과 적멸함만을 관찰하며 위 단계인 지地의 밝음을 관찰하는 법을 기르므로 인을 되돌려서 과로 향하게 하느니라. 또 무량한 마음으로 버리지도 않고 받지도 않으니 십회향법이 이와 같으니라.”66)

십회향에서도 먼저 총괄적으로 밝혔다. “중생공衆生空”은 임시 이름인 사람이 공하다는 것이고 “무아공無我空”은 오음의 법이 공하다는 것이니 무아의 법도 본성이 공하기 때문이다. “두 가지 공이 평등하여 다름이 없어서”는 그 인공의 관찰이 자타와 친소의 본성을 완전히 없애므로 “평등하다”고 한 것이고, 그 법공의 관찰이 내외와 차별의 모습을 모두 없애므로 “다름이 없다”고 한 것이다. “하나로 관찰하는 모습”은 평등하게 관찰하기 때문이고, “하나로 합한 모습”은 다름이 없이 보기 때문이다. 위에서 “(중생공衆生空과 무아공無我空에) 들어간다”고 한 것은 한 번에 안팎의 인법人法 두 공관에 단박에 들어가기 때문이니 이것을 (인공관人空觀과 법공관法空觀에 대해서) 제3인 평등관平等觀이라고 한다. (이 세 가지가 십주·십행·십회향의) 견도의 서른 가지 마음의 방편이 되니 유정이 임시(라는 견해)를 안에서 없애서 생기는 지혜는 십주의 인공이 방편이 되기 때문이고, 제법이 임시(라는 견해)를 안에서 없애서 생기는 지혜는 십행의 법공이 방편이 되기 때문이며, 일체 유정과 제법이 임시(라는 견해)를 모두 없애서 생긴 지혜는 십회향의 평등공관이 방편이 되기 때문이다.67) 이 방편에 따라 저 (십주·십행·십회향의) 서른 가지 마음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백만억……공관을 학습하므로 앞뒤를 되돌려 바꾸고”는 앞 (단계)의 팔만사천법문을 늘려 백만억의 모든 법문까지 이르기 때문이고, 앞의 공관을 되돌리고 뒤의 공관을 바꾸기를 계속 늘려서 서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마음에 (밝고 밝음과 적멸함)만을 관찰하며”는 앞의 마음에서 모든 대상이 마음뿐임을 관찰하고 뒤의 마음에서도 모든 대상이 마음뿐임을 관찰하기 때문이다. “밝고 밝음과 적멸함”은 앞의 밝음이 (모든 것이) 생겨나는 모습을 취하지 않고 뒤의 밝음도

001_0505_b_01L非非相故非如無諦之稱作如是解
001_0505_b_02L離虗妄言以是義故名眞實行是依智
001_0505_b_03L度以立其名與前慧度有何異者彼明
001_0505_b_04L遣相入空以順佛法身義此顯亦遣非
001_0505_b_05L相涉俗離虗妄義由是道理二度差別
001_0505_b_06L

001_0505_b_07L
十迴向中亦先總明衆生空者假名人
001_0505_b_08L無我空者五陰法空無我之法亦性
001_0505_b_09L空故二空平等無別者其人空觀通遣
001_0505_b_10L自他親疎之性故言平等其法空觀遍
001_0505_b_11L遣內外差別之相故言無別一觀相者
001_0505_b_12L平等觀故一合相者無別見故上言入
001_0505_b_13L一時頓入內外人法二空觀故是名
001_0505_b_14L第三平等空觀卽爲見道三心方便
001_0505_b_15L內遣有情假緣智者十住人空爲方便
001_0505_b_16L內遣諸法假緣智者十行法空爲方
001_0505_b_17L便故遍遣一切有情諸法假緣智者
001_0505_b_18L十迴向平等空觀爲方便故從此方便
001_0505_b_19L立彼三心故學習百萬億乃至空觀故
001_0505_b_20L迴易前後者增前八萬四千法門以至
001_0505_b_21L百萬億諸法門故迴前空觀易後空觀
001_0505_b_22L展轉增進不相離故心心觀唯者前心
001_0505_b_23L觀其諸境唯心後心亦觀諸境唯心故
001_0505_b_24L明明寂滅者前明不取生起之相後明

001_0505_c_01L(모든 것이) 움직이는 모습을 없애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마음의 밝음이 지地 위의 참으로 밝음을 관찰하는 법을 기르기 때문에 “위 단계인 지地의 밝음을 관찰하는 법을 기르므로”라고 하였다. “인을 되돌려서 과로 향하게 하느니라.”에서 인은 지地 전의 방편이고 과는 지 위의 바른 관찰부터 불지의 일체 공덕까지를 가리키니 이런 의미 때문에 “되돌려서 향한다(迴向)”고 하였다.
“또 무량한 마음으로”는 사무량심으로 삼계에 태어나기 때문에 “버리지도 않고”라고 한 것이고, 취착이 없기 때문에 “받지도 않으니”라고 한 것이다. “십회향법이 이와 같으니라.”는 총체적으로 결론지은 것이다.

ㄴ) 개별적으로 밝힘

“불자여, 항상 무상심無相心으로 항상 육도를 수행하면서 과보에 들어가 받음이 없이 온갖 감수를 받아 되돌려 바꾸고 변화시켜 교화하므로 구호일체중생이중생상회향救護一切衆生離衆生相迴向이라고 하느니라. 불자여, 일체법에 대하여 감수만 있고 용用만 있으며 이름만 있다고 관찰하여 순간순간에 머물지 않으므로 불괴회향不壞迴向이라고 하느니라. 불자여, 삼세제불의 법을 언제나 실천하므로 등일체불회향等一切佛迴向이라고 하느니라. 불자여, 대원력으로 일체 불국에 들어가 일체불께 공양하므로 지일체처회향至一切處迴向이라고 하느니라. 불자여, 상주하는 삼보를 앞 사람에게 주기 때문에 무진공덕장회향無盡功德藏迴向이라고 하느니라. 불자여, 상선相善과 무루선無漏善을 익히고 실천하지만 둘이 아니므로 수순평등선근회향隨順平等善根迴向이라고 하느니라. 불자여, 선악과 부모에 둘이 없어 하나의 모습이 하나로 합한 모습이라고 관찰하므로 수순등관일체중생회향隨順等觀一切衆生迴向이라고 하느니라. 불자여, 항상 유무의 이제二諦와 일체법이 하나로 합한 모습임을 비추어 보므로 여상회향如相迴向이라고 하느니라. 불자여, 제법이 둘이 아니고 반야는 무생無生이며 이제가 평등하여 과거에도 하나로 합한 모습이고 현재에도 하나로 합한 모습이며 미래에도 하나로 합한 모습이므로 무박해탈회향無縛解脫迴向이라고 하느니라. 불자여, 일체법은 제일의제이고 중도무상中道無相이어서 일체법이 모두 한결같이 비추는 모습임을 깨닫기 때문에 법계무량회향法界無量迴向이라고 하느니라.”68)

“항상” 이하는 두 번째 개별적으로 밝힘이다.
“항상 무상심無相心으로”는 (제1회향의) ‘이중생상離衆生相’의 의미이고, “항상 육도를 수행하면서”는 (제1회향의) ‘구호중생救護衆生’의 의미이다.
“일체법에 대하여 감수만 있고” 등은 (제2회향인) ‘불괴不壞(회향)’의 의미를 해석한 것이다. 임시 명칭을 싫어하지도 않고 머물지도 않기 때문이니 “감수만 있고”는 감수를 임시라고 관찰하는 것이고, “용用만 있으며”는 법을 임시라고 관찰하는 것이며, “이름만 있다”는 명칭을 임시라고 관찰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임시의 의미는 뒤의 문장에서 설명할 것이다.
“삼세제불의 법을 언제나 실천한다”는 가르침에 의지하여 (중생이 윤회하는 곳에) 두루 나아가기 때문에 “평등하게 실천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제3회향인) ‘등일체불等一切佛(회향)’의 의미를 해석한 것이다.
“일체 불국토에 들어가”는 (제4회향인) ‘지일체처至一切處(회향)’의 의미이다.
“상주하는 삼보를 앞 사람에게 준다”는 한 마음 안에 삼보의 덕을 쌓아서 항상 다른 사람에게 주고도 다하여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니 (제5회향인) ‘무진공덕장無盡功德藏(회향)’의 의미이다.
“상선相善”은 세상 속에서 만물을 교화하는 실천이고 “무루선無漏善”은 모습을 없애고 공을 관찰하는 이해인데, 이해할 때에는 임시 명칭을 허물지 않고 실천할 때는 공에 대한 이해를 잃지 않으니 이와 같이 익히고 실천하는 것이 서로 위배하지 않기 때문에 (제6회향인) “수순평등선근隨順平等善根(회향)”이라고 한 것이다.
“일체법”은 제諦에 차별이 있다는 것이고 “하나로 합한 모습”은 모습이 없어 평등하다는 것이니 평등이 이렇게 같기 때문에 (제8회향인) “여상如相(회향)”이라고 한 것이다.

001_0505_c_01L亦遣暄動相故如是心明長養地上眞
001_0505_c_02L明觀法故言長養上地明觀法故
001_0505_c_03L因向果此中因者地前方便果者卽指
001_0505_c_04L地上正觀乃至佛地一切功德卽以是
001_0505_c_05L義名爲迴向復以無量心者以四無量
001_0505_c_06L受生三界故言不捨而無取著
001_0505_c_07L言不受故十向法如是者是總結也

001_0505_c_08L
常以已下第二別明常以無相心者
001_0505_c_09L衆生相義常行六道者救護衆生義也
001_0505_c_10L觀一切法但有受等者釋不壞義
001_0505_c_11L2) [29] 假名而不住故但有受者是觀受
001_0505_c_12L但有用者是觀法假但有名是觀
001_0505_c_13L名假是三假義後文當說也三世諸
001_0505_c_14L佛法一切時行者依敎遍趣故言等行
001_0505_c_15L是釋等一切佛義也入一切佛國土 [21]
001_0505_c_16L卽是至一切處義也以常住三寶授與
001_0505_c_17L前人者於一心內蘊三寶德恒授與人
001_0505_c_18L而無窮盡卽是無盡功德藏義也言相
001_0505_c_19L善者涉事化物之行無漏善者忘相
001_0505_c_20L觀空之解解時不壞假名行時不失空
001_0505_c_21L如是習行不相違背故言隨順平等
001_0505_c_22L善根也一切法者有諦差別一合相
001_0505_c_23L無相平等平等是知故曰如相也
001_0505_c_24L「度」經作「授」「增」疑「憎」

001_0506_a_01L
“제법이 둘이 아니고”는 인식되는 대상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반야는 무생無生이며”는 인식하는 지혜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주관과 대상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제9회향의) ‘무박無縛’의 의미이고, 유무(의 이제二諦)가 평등하고 삼세가 하나로 합한 것이 (제9회향의) ‘해탈解脫’의 의미이다.
“일체법은 제일의제이고”는 (제10회향의) ‘법계’의 의미를 해석한 것이고, “중도무상中道無相이어서 일체법이 모두 한결같이 비추는 모습”은 (제10회향의) ‘무량無量’의 의미를 해석한 것이다.

② 총결

“불자여, 이 (십주·십행·십회향의) 서른 가지 마음의 의미와 해석이 한량없고 끝없으니 일체 범부의 지혜로는 생각하고 헤아릴 수 없으며 시방의 제불과 일체 보살이 노니는 길이니라.”69)

“이 (십주·십행·십회향의) 서른 가지 마음” 이하는 두 번째인 삼현위를 총괄적으로 맺은 것이다.
(2) 뒤의 셋, 삼성三聖
① 총괄적으로 밝힘

“불자여, 그대는 앞에서 무엇을 지地라고 하느냐고 했느니라. 불자여, 지地는 지닌다(持)는 말이니 일체 백만 아승기의 공덕을 지니느니라. 또 생성한다(生)는 말이니 일체 인과를 생성하기 때문에 지地라고 하느니라.”70)

이제부터는 두 번째 (십지·무구지·묘각지의) 십이지를 해석한 것이다. 여기에 둘이 있으니 총괄적으로 밝힘과 개별적으로 풀이함이다.

먼저 (총괄적으로 밝힘에) “그대는 앞에서 무엇을 지地라고 하느냐고 했느니라.”는 (「석의품」의) 앞에서 (닦아야 할) 이름의 의미와 모습을 총괄적으로 물은 것인데, 지금 여기에서는 그중에 지地를 별도로 표방한 것뿐이다. “일체 (백만 아승기의) 공덕을 지니느니라.”는 법계의 본체가 일체 공덕을 두루 포섭하여 지니는 것을 말하니 마치 대지가 산과 바다 등을 지니는 것과 같다. “일체 인과를 생성한다”는 일체 선인善因을 내고 일체 선과善果를 성숙시키는 것이니 마치 대지가 싹 등을 내고 꽃과 열매 등을 성숙시키는 것과 같다. 이 두 가지 의미 때문에 지地라고 한 것이다.

② 개별적으로 풀이함

ㄱ. 십지

ㄱ) 제1 환희지歡喜地

“불자여, 범부행을 버리고 부처님 가문에 태어나면 보살의 지위를 잇고 성중聖衆에 들어가니 네 가지 마군이 이르지 못하고 유무의 양 끝을 평등하게 함께 비추어 커다란 신심이 비로소 가득하여 무생중도無生中道 제일의제관第一義諦觀을 배워 익히느니라. 그 위로 이지二地와 삼지三地 나아가 십일지十一地에 이르러 법문을 밝음으로 관찰하고 마음마음이 적멸하여 법이 흐르는 물속에서 한 가지 모습이어서 모습이 없고 두 가지 몸에 방향이 없어 불토佛土와 동등하게 통하므로 환희지라고 하느니라.”71)

이제부터는 개별적으로 밝힘이다.
초지에서 “범부행을 버리고”는 성(인의) 법을 얻었기 때문에 범부의 본성을 버리는 것이다. ‘버린다’는 것은 ‘범부를 넘어선다’는 의미이니 아래에서 열 구절로 넘어서는 의미를 드러낸다. 첫째는 집안으로 넘어서니(家過) 『(보살영락본업)경』에서는 “부처님 가문에 태어나면”이라고 하였는데, 청정한 법계가 부처님 가문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지위로 넘어서니(位過) 경에서는 “보살의 지위를 잇고”라고 하였는데, 얻을 것 없는 마음이 보살의 지위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성중으로 넘어서니(聖衆過) 경에서는 “성중聖衆에 들어가니”라고 하였는데, 이미 모든 대보살의 수數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넷째는 삿됨을 벗어나 넘어서니(離邪過) 경에서는 “네 가지 마군(四魔)72)이 이르지 못하고”라고 하였는데, 모든 마군과 삿된 장애가 파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바른 관찰로 넘어서니(正觀過) 경에서는 “유무의 양 끝을 평등하게 함께 비추어”라고 하였는데, 유무를 모두 융합하여 함께 비추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뛰어난 곳으로 나아가 넘어서니(勝進過) 경에서는

001_0506_a_01L諸法無二者不著所取之境般若無生
001_0506_a_02L不著能取之智不著能所是無縛
001_0506_a_03L有無平等三世一合是解脫義也
001_0506_a_04L覺一切法第一義諦者是釋法界義
001_0506_a_05L道無相一切法皆一照相者釋無量義
001_0506_a_06L是三十心以下第二總結三賢位也

001_0506_a_07L[三聖]
此下第二釋十二地於中有二總明
001_0506_a_08L別釋初中言汝先言云何名地者先總
001_0506_a_09L問名字義相今於其中別牒地耳持一
001_0506_a_10L切功德者謂法界體周遍攝持一切功
001_0506_a_11L猶如大地持山海等生成一切因果
001_0506_a_12L能生一切善因成熟一切善果
001_0506_a_13L如大地能生牙等成花菓等以是二義
001_0506_a_14L名爲地故

001_0506_a_15L
此下別明初地中言捨凡夫行者得聖
001_0506_a_16L法故捨凡夫性捨者卽是過凡夫義
001_0506_a_17L下以十句顯是過義一者家過如經生
001_0506_a_18L在佛家故淸淨法界爲佛家故二者位
001_0506_a_19L如經紹菩薩位故無所得心爲菩薩
001_0506_a_20L位故三者聖衆過如經入聖衆中故
001_0506_a_21L入諸大菩薩數故四者離邪過如經四
001_0506_a_22L魔不1) [30] 諸魔邪障不能壞故五者
001_0506_a_23L正觀過如經2) [31] 二邊平等雙照故
001_0506_a_24L融有無而雙照故六者勝進過如經

001_0506_b_01L“커다란 신심이 비로소 가득하여 무생중도無生中道 제일의제관第一義諦觀을 배워 익히느니라.”라고 하였는데, 불지의 중도관을 신심으로 배우기 때문이다. 일곱째는 같이 비추어 넘어서니(兼照過) 경에서는 “그 위로 이지二地와 삼지三地 나아가 십일지十一地에 이르러”라고 하였는데, 가장 뛰어난 곳과 동등하게 나머지 법계를 같이 비추기 때문이다. 여덟째는 분수에 맞추어 넘어서니(當分過) 경에서는 “마음마음이 적멸하여 법이 흐르는 물속에서 한 가지 모습이어서 모습이 없고”라고 하였는데, 두루 가득 찬 법계에 마음마음이 항상 흐르기 때문이다. 아홉째는 법신으로 넘어서니(法身過) 경에서는 “두 가지 몸에 방향이 없어”라고 하였다. 열째는 불토로 넘어서니(佛土過) 경에서는 “불토佛土와 동등하게 통하므로”라고 하였다. 열 가지 뛰어난 공덕으로 환희하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환희지”라고 한 것이다.

ㄴ) 제2 이구지離垢地

“불자여, 바른 무상無相으로 중생공衆生空에 잘 들어가 만불萬佛의 세계를 나타내고 여섯 가지 신통으로 변화하여 공함이 무위와 같으므로 이구지라 하느니라.”73)

“바른 무상無相으로”는 바른 계를 갖추어 삿되고 잘못된 것을 멀리 벗어나지만 계와 (계를) 지키고 어기는 모습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생계衆生界에 잘 들어가 만불萬佛의 세계를 나타내고”는 중생의 성품을 따라 모든 불토를 나타내기 때문이며, “여섯 가지 신통으로 변화하여 공함이 무위와 같다”고 한 것은 비록 작위할 것이 있어도 그 작위는 없기 때문이다. 안으로는 삼륜三輪74)의 탁함을 버리고 밖으로는 이변二邊의 더러움을 벗어난다. 이러한 뜻이 있으므로 “이구지”라고 한 것이다.

ㄷ) 제3 명지明地

“불자여, 광혜光慧의 신인信忍으로 옛 부처님의 도를 닦으니 말하자면 십이부경이니라. 수다라修多羅(ⓢ sūtra, 계경契經)·기야祇夜(ⓢ geya, 응송應頌)·비가라나毘伽羅那(ⓢ vyākaraṇa, 기별記別)·가타伽陀(ⓢ gāthā, 풍송諷頌)·우다나憂陀那(ⓢ udāna, 자설自說)·니다나尼陀那(ⓢ nidāna, 인연因緣)·아바다나阿波陀那(ⓢ avadāna, 비유譬喩)·이제목다가伊帝目多伽(ⓢ itivṛttaka, 본사本事)·사타가闍陀伽(ⓢ jātaka, 본생本生)·비불략毘佛略(ⓢ vaipulya, 방광方廣)·아부타달마阿浮陀達摩(ⓢ adbhuta-dharma, 미증유법未曾有法)·우바제사憂波提舍(ⓢ upadeśa, 논의論議)의 법으로 중생을 제도하여 광명이 빛나고 변화와 신통이 있으므로 명지라 하느니라.”75)

“광혜光慧의 신인信忍”은 이 제3지의 인忍이 증상만을 제도하는 것이니 (초지와 제2지와 제3지의) 세 가지 신인 중에서 상품에 있기 때문이다. 우러러 여래의 십이부의 광명에 의지하여 모든 중생의 십이지근十二支根을 비추어 “광명이 빛나고 변화와 신통이 있으므로 명지라고 한” 것이다.

ㄹ) 제4 염지焰地

“불자여, 생기함이 없는 인忍을 대략 따라 일체법의 이제의 상을 관하고 위로는 부처님의 공덕을 관하며 아래로는 육도 중생을 관한다. 대자大慈의 관으로는 법을 설하여 기쁨을 주고, 대비大悲의 관으로는 삼고三苦의 중생을 구제하고, 대희大喜의 관으로는 앞에 있는 사람이 기쁨 얻음을 기뻐하고, 대사大捨의 관으로는 일체중생이 모두 평등에 들어가게 하느니라. 일곱 가지 관법에 들어가므로 염지라 하느니라.”76)

“생기함이 없는 인忍을 대략 따라”는 (제4지·제5지·제6지의) 세 가지 순인順忍 가운데 비로소 하품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일체법의 이제의 상을 관하고”는 비록 생기함이 없는 인을 다시 대략 따른다 하더라도 항상 유무의 상을 관찰하기 때문이다. “위로는 (부처님의 공덕을) 관하며”는 위로는 불도를 넓힌다는 것이고, “아래로는 (육도 중생을) 관한다.”는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세 번째 관이다. 자비희사에 세 가지를 더하여 일곱 가지가 되고, 일곱 가지 관이 밝게 빛나기 때문에 “염지”라고 하였다.


001_0506_b_01L大信始滿習學無生中道第一義諦觀故
001_0506_b_02L信學佛地中道觀故七者兼照過如經
001_0506_b_03L3) [32] 至二地三地乃至十一地故兼照最
001_0506_b_04L勝等餘門法界故八者當分過如經心
001_0506_b_05L心寂滅法流水中一相無相故遍滿法
001_0506_b_06L中界心心恒流故九者法身過如經二
001_0506_b_07L身無方故十者佛土過如經通同佛土
001_0506_b_08L依十種殊勝功德無不歡喜故名
001_0506_b_09L歡喜地也

001_0506_b_10L
以正無相者具足正戒遠離邪非
001_0506_b_11L不取戒及持犯相故善入衆生界 [22]
001_0506_b_12L佛世界者隨順衆生性現諸佛土故
001_0506_b_13L六通變化空同無爲者5) [33] 所爲而無
001_0506_b_14L所爲故內捨三輪之濁外離二邊之垢
001_0506_b_15L以是義故名離垢地也

001_0506_b_16L
光慧信忍者此第三地忍度增上信忍
001_0506_b_17L三中居上品故仰依如來十二部光
001_0506_b_18L諸衆生十二支根光光變通故名明地
001_0506_b_19L

001_0506_b_20L
大順無生起忍者順忍三中始入下品
001_0506_b_21L觀一切法二諦相者雖復大順無生
001_0506_b_22L起忍而恒觀察有無相故上觀者上弘
001_0506_b_23L佛道下觀者下化衆生故是第三觀
001_0506_b_24L悲喜捨加三爲七七觀照耀故名炎

001_0506_c_01L
ㅁ) 제5 난승지難勝地

“불자여, 순인으로 도를 닦아 삼계의 무명·의疑·견見의 일체가 모두 공 아님이 없으므로 팔변八辯의 공덕으로 오명론五明論에 들어가느니라. 말하자면 (팔변은) 사변四辯과 인因·과果·내도內道·외도변外道辯이며, 오명론이란 내·외·방도方道·인과·귀사鬼師이니 이 모두를 통달하지 않음이 없으므로 난승지라고 이름하느니라.”77)

“순인으로 도를 닦아”라는 것은 순인의 (제4지·제5지·제6지의) 셋 가운데에서 중품(인 제5지)를 닦기 때문이다. “삼계의 무명·의疑·견見의 일체가 모두 공 아님이 없으므로”라고 한 것은 모든 제관諦觀에 의지하여 번뇌를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팔변八辯의 공덕으로 오명론五明論에 들어가느니라.”라고 한 것은 이러한 팔(변과) 오(명론의) 기술이 모든 세간(의 것)을 이기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팔변은) 사변四辯과 인因·과果·내도內道·외도변外道辯이며”라고 한 것은 팔변을 나타낸 것이니 인과 과에 각각 넷이 있기 때문이요, 이 팔변이 내외에서 이기기 때문이다. 인의 넷은 보살지에 의거한 사변이 있기 때문이요, 과의 넷은 여래지에 의거한 것도 넷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십지경』에서 “또 법에 걸림 없는 지혜로써 일체 보살행의 법의 행(法行)과 지혜의 행(智行)과 지혜를 따라 들어감을 알며, 뜻에 걸림 없는 지혜로써 십지의 뜻의 차별로 들어감을 분별하여 설할 줄 알며, 말에 걸림 없는 지혜로써 모든 지의 도에 수순함을 무너지지 않고 설하며, 이를 기꺼이 설하는 데 걸림 없는 지혜로써 하나하나의 지의 한량없는 모습을 설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을 『십지경론』에서 설명하였다.

여기에서 보살지의 모습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지혜의 모습이고, 둘째는 설하는 모습이며, 셋째는 방편을 주는 모습이고, 넷째는 한량없는 문에 들어가는 모습이다. 여기서 ‘일체 보살행’이란 법의 행과 지혜의 행이니 현관지現觀智로 설법하는 것을 나타낸다. ‘십지의 차별’이란 마음이고, ‘설한다’는 것은 입으로 하는 말이다. ‘모든 지의 도에 수순함을 무너지지 않고 설하며’는 전도되지 않고 가르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무엇이 여래지의 모습인가? 경에서 ‘또 법에 걸림 없는 지혜로써 모든 부처님께서 한 생각 사이에 정각을 얻은 줄을 알며, 뜻에 걸림 없는 지혜로써 갖가지 때와 일의 모습의 차별을 알며, 말에 걸림 없는 지혜로써 정각의 차별에 따라 설하며, 이를 기꺼이 설하는 데 걸림 없는 지혜로써 하나하나의 구절의 법을

001_0506_c_01L地也

001_0506_c_02L
順忍脩道者順忍三中修中品故三界
001_0506_c_03L無明疑見一切無不皆空者依諸諦觀
001_0506_c_04L能勝煩惱故八辨功德入五明論者
001_0506_c_05L是八五術勝諸世間故所謂四辨因果
001_0506_c_06L內道外道辨者是顯八辨於因於果各
001_0506_c_07L有四故以是八辨勝內外故因中四者
001_0506_c_08L依菩薩地有四辨故果中四者依如來
001_0506_c_09L地亦有四故如十地經言復次法無碍
001_0506_c_10L知一切菩薩行法行智行隨順入
001_0506_c_11L義無碍智知分別說十地義差別入
001_0506_c_12L辭無碍智不壞說與隨順諸地道以樂
001_0506_c_13L說無碍智說一一地無量相論曰是中
001_0506_c_14L菩薩地相者有四種一智相二說相
001_0506_c_15L三與方便相四入無量門相是中故 [23]
001_0506_c_16L切菩薩行者法行智行示現觀智說故
001_0506_c_17L十地差別者謂心說者口言應知不壞
001_0506_c_18L說與隨順諸地道者不顚倒敎授故
001_0506_c_19L何如來地相經曰復次以法無碍智
001_0506_c_20L一切佛於一念間得正覺以義無碍智
001_0506_c_21L知種種時事相差別以辭無碍智隨正
001_0506_c_22L覺差別說以樂說無碍智於一一句法
001_0506_c_23L「到」經作「倒」「無」經作「有」「常」經
001_0506_c_24L作「上」
「萬」經作「千」「無」疑「有」

001_0507_a_01L한량없는 겁 동안 설하여도 이루 다하지 않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여래지의 모습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법신의 모습이고, 둘째는 색신의 모습이며, 셋째는 정각의 모습이고, 넷째는 설하는 모습이다. 여기에서 ‘때(時)’란 어느 겁에 어떠한 부처님을 성취했는가 하는 것이다. ‘일(事)’이란 어떠한 불국토에 따르고 어떠한 부처님을 따랐는가 하는 것이다. ‘모습(相)’이란 기억하는 이름에 따라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정각의 (차별에) 따라’는 열 가지 부처님께 의지하는 것이 정각과 같은 것임을 알아야 한다.78)
이와 같이 이문二門에 각각 사변이 있기 때문에 “팔변의 공덕”이라고 한 것이다. “내·외”라고 한 것은 내명內明과 외명外明이고, “방도方道”는 의방醫方이며, “인과”는 인명론因明論이니 주장이 결과를 이름짓는 것이기 때문이다. “귀사鬼師”는 갖가지 주문과 저주이니 성명론聲明論이다. 이런 이유로 세간의 모든 도를 이기니 총체적으로 말하면 안으로는 모든 번뇌를 이기고 밖으로는 모든 세간을 이기는 것이어서 그쪽은 이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난승”이라고 하였다.

ㅂ) 제6 현전지現前地

“불자여, 상품의 순인으로 제법을 관찰하여 과거의 일체법과 일합상이며, 현재의 일체법과 일합상이며, 미래의 일체법과 일합상이어서 법계 인연의 적멸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현전지라고 이름하느니라.”79)

“상품의 순인으로 제법을 관찰하여”라고 한 것은 순인의 상품(인 제6지)이기 때문이다. 삼세가 하나로 합하고 적멸이 둘이 아니며 이것이 현행을 관찰하는 것이기 때문에 “현전지”라고 하였다.

ㅅ) 제7 원행지遠行地

“불자여, 무생인으로 제법을 관찰하여, 번뇌가 있는 것도 아니고 번뇌가 없는 것도 아니며, 일생一生·일멸一滅·일과一果와 삼계 최후의 일신一身이라도 한 번 들어가고 한 번 나옴에 무량 공덕을 모으고, 항상 상지上地를 향하면서도 생각생각이 적멸하기 때문에 원행지라고 이름하느니라.”80)

“무생인으로 제법을 관찰하여”라는 것은 무생의 삼인 가운데 비로소 하품에 들었기 때문이다. “번뇌가 있는 것도 아니고 번뇌가 없는 것도 아니며”라는 것은 『십지경론』에서 “보살의 원행지에 머물 때는 번뇌가 있는 이라고 이름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번뇌가 없는 이라고 이름하지도 않습니다. 무슨 까닭인가? 일체 번뇌가 행해지지 않기 때문이고, 여래의 지혜를 탐구하는 마음이 아직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81)라고 하였다.
“일생一生·일멸一滅·일과一果와 삼계 최후의 일신一身이라도”라고 한 것은 멀리 분단의 후변後邊에 이르는 것을 밝힌 것이고, “한 번 들어가고 한 번 나옴에 무량 공덕을 모으고……적멸하기”라고 한 것은 오랜 시간 동안 관법에 들어가 수행하는 것을 밝힌 것이다. 이 두 가지 뜻이 있기 때문에 “원행”이라고 하였다.

ㅇ) 제8 부동지不動地

“불자여, 이러한 까닭에 보살은 무생인으로 관찰하여 삼계의 과보를 버리고 변역의 과가 작용하고, 중인中忍의 무상無相의 지혜에 들어가며, 유에서 나와 무에 들어가 화현이 무상無常하니라. 모든 부처님께서 이마를 만지며 설법해 주시는 자기 몸의 미래의 과보를 스스로 볼 것이니라. 몸과 마음이 따로 행하여 불가사의하기 때문에 부동지라 하느니라.”82)

“이러한 까닭에”라고 말한 것은 앞에서 이미 최후의 몸을 받았기 때문이다. 제8지에서

001_0507_a_01L無量劫說而不窮盡論曰是中如來地
001_0507_a_02L相者有四種一法身相二色身相
001_0507_a_03L正覺相四者說相是中時者隨何刧
001_0507_a_04L中成何等佛事者以何等佛土隨何等
001_0507_a_05L佛身相者隨名所記可得見聞故隨正
001_0507_a_06L覺者依十種佛如正覺說 [24] 應知故如是
001_0507_a_07L二門各有四辨是故名爲八辨功德
001_0507_a_08L外者內明外明也方道者醫方也因果
001_0507_a_09L者因明論也宗名果故鬼師者種種呪
001_0507_a_10L是聲明論由是能勝世間諸道
001_0507_a_11L而言之內卽勝諸煩惱外卽勝諸世間
001_0507_a_12L非彼所勝故名難勝也

001_0507_a_13L
上順諸法觀者順忍上品故三世一合
001_0507_a_14L2) [34] 無二是觀現行故名現前地也

001_0507_a_15L
無生忍諸法觀者無生三忍中始入下
001_0507_a_16L品故非有煩惱非無煩惱者十地經言
001_0507_a_17L住此菩薩遠行地中不名有煩惱者
001_0507_a_18L名無煩惱者何以故一切煩惱不現行
001_0507_a_19L貪求如來智慧未滿足故一生一滅
001_0507_a_20L一果三界最後一身者是明遠至分段
001_0507_a_21L後邊故一入一出集無量功德乃至寂
001_0507_a_22L滅者是明長時入觀脩行以是二義
001_0507_a_23L故名遠行也

001_0507_a_24L
言是故者是前已受最後身故此第八

001_0507_b_01L삼계의 과보를 버려 이미 분단의 삼계를 버렸기 때문에 “변역의 과가 작용하고”라고 말한 것이니 세 가지 의생신 중에 대력보살의 의생신이다. “중인中忍의 무상無相의 지혜에 들어가며”라고 한 것은 무생인의 셋(인 제7지·제8지·제9지) 가운데에 비로소 중품(인 제8지)에 있기 때문이다. “유에서 나와 무에 들어가 화현이 무상無常하고”라고 한 것은 항상 유제有諦에서 나가고 무제無諦로 들어가는 것을 마음대로 하고 관찰과 화현을 자재하게 하여 모두 비상非常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들어가고 나옴이 다름이 없다는 뜻에 의지하여 부동을 해석한 것이다. 예를 들면 『인왕경』의 제8지에서 “항상 공을 닦으면 허공에서 항상 만 가지로 화현한다.”83)라고 하였다.
“모든 부처님께서 이마를 만지며 설법해 주시는 자기 몸의 미래의 과보를 스스로 볼 것이니라.”라고 한 것은 내 몸의 상속이 이루어야 할 미래의 과보이다. 두 가지 법신 중에 과극果極의 법신은 둘이 없고 차별도 없으며 응화한 법신은 인연을 따라 매우 많다. 보살이 스스로 응화한 법신을 본 것이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께서”라고 말한 것이다. 지금 이 보살이 많은 몸으로 모든 부처님의 회상에 화현하기 때문에 저 모든 부처님께서 각각 설법하시고, 이 보살의 마음이 그 모든 몸에 두루하여 듣는 설법에 따라 각각 수행하기 때문에 “몸과 마음이 따로 행하여”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도리는 사량할 경계가 아니기 때문에 “불가사의”라고 말하였으니 이것은 미래의 과보가 결정되었다는 뜻에 의지하여 부동을 해석한 것이다. 이 두 가지 뜻에서 “부동지”라고 하였다.

ㅈ) 제9 묘혜지妙慧地

“불자여, 다시 위로 들어가 부처님의 화현을 온갖 빛으로 드러내고 무생인無生忍의 도에 들어가 일체 불신佛身을 나투기 때문에 묘혜지라고 이름하느니라.”84)

“다시 위로 들어가 부처님의 화현을 온갖 빛으로 드러내고”라고 한 것은 무생의 삼인 가운데 다시 상품(인 제9지)에 들어간 것이다. (부처님의) 지혜의 광명과 색신의 광명이 오묘하지 않음이 없음을 관찰하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뜻에서 “묘혜지”라고 하였다.

ㅊ) 제10 법운지法雲地

“불자여, 보살이 이때 중도제일의제에 들어가 대적인大寂忍의 하품의 행을 부처님의 행처行處에서 행하고, 천보千寶 모양의 연꽃 위에 앉아 부처님의 수기를 받으며, 부처님의 교화 공덕을 배우고, 두 가지 습기를 끊고 조복하여 큰 믿음을 성취하느니라. 진제眞際와 같고 법계와 평등하여 이제가 한 가지 모습이며, 일체 공덕을 갖추고 중생의 근기에 들어가 무량한 영락의 공덕을 일시에 평등하게 일체 형상으로 화현하기 때문에 법운지라고 이름하느니라.”85)

“보살이 이때 중도제일의제에 들어가”라고 한 것은 열 번째 법계에 들어감을 밝힌 것이다. 이것은 총괄하는 문장이고 아래에 개별의 의미를 열 구절로 나타내었다.
첫째는 행입行入이니 경에서 “대적인大寂忍의 하품의 행을 부처님의 행처行處에서 행하고”라고 하였다. 둘째는 수입受入이니 경에서

001_0507_b_01L地捨三界報旣捨分段三界故言變易
001_0507_b_02L果用此是三種意生身中大力菩薩意
001_0507_b_03L生身也入中忍無相慧者無生忍三中
001_0507_b_04L始居中品故出有入無化現無常者
001_0507_b_05L出有諦常入無諦任運並觀化現自在
001_0507_b_06L皆非常故是依出入無異之義以釋不
001_0507_b_07L如人王經八地中言在有常脩空
001_0507_b_08L處空常萬化故自見己身當果諸佛摩
001_0507_b_09L頂說法者己身相續所成當果有二法
001_0507_b_10L身之中果極法身無二無別應化法身
001_0507_b_11L隨緣衆多菩薩自見應化法身故言諸
001_0507_b_12L今此菩薩以衆多身現諸佛會故彼
001_0507_b_13L諸佛各爲說法此菩薩心遍彼諸身
001_0507_b_14L聞說法各別脩行故言身心別行如是
001_0507_b_15L道理非思量境故言不可思議是依當
001_0507_b_16L果決定之義以釋不動以是二義名不
001_0507_b_17L動地也

001_0507_b_18L
復入上觀光光佛化者無生三忍中
001_0507_b_19L入上品觀智光色光無不妙故以是二
001_0507_b_20L義名妙慧地

001_0507_b_21L
菩薩爾時入中道第一義諦觀者是明
001_0507_b_22L能入第十法界此是總句下出別義
001_0507_b_23L十句示現一者行入如經大寂忍下品
001_0507_b_24L中行行佛行處故二者受入如經坐

001_0507_c_01L“천보千寶 모양의 연꽃 위에 앉아 부처님의 수기를 받으며”라고 하였다. 셋째는 학입學入이니 경에서 “부처님의 교화 공덕을 배우고”라고 하였다. 넷째는 단입斷入이니 경에서 “두 가지 습기를 끊고 조복하여”라고 하였다. 다섯째는 신입信入이니 부처님의 지혜를 신앙하는 것이다. 경에서 “큰 믿음을 성취하느니라.”라고 하였다. 여섯째는 증입證入이니 자신의 경계를 통달하는 것이다. 경에서 “진제眞際와 같고 법계와 평등하여”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같다’는 것은 주관과 대상의 두 가지 분별을 벗어났기 때문이고 ‘평등하다’는 것은 삼세가 평등한 성품이기 때문이니 『인왕경』에서 “지혜가 비록 일어났다 사라져도 생멸이 없기 때문이다.”86)라고 하였다. 일곱째는 평등입平等入이니 안으로 증득한 지혜에 의하여 일미一味의 덕을 성취하는 것이다. 경에서 “이제가 한 가지 모습이며, 일체 공덕을 갖추고”라고 하였다. 여덟째는 차별입差別入이니 바깥으로 교화하는 지혜를 써서 근기에 통달하는 것이다. 경에서 “중생의 근기에 들어가”라고 하였다. 아홉째는 내교입內敎入이니 경에서 “무량한 영락의 공덕을”이라고 하였다. 열째는 외형입外形入이니 경에서 “일시에 평등하게 일체 형상으로 화현하기”라고 하였다. 이러한 열 가지 공덕의 법에 의지하여 육도 중생의 선근을 윤택하게 하기 때문에 “법운지”라고 하였다.

ㄴ. 무구지無垢地

“불자여, 보살이 이때 대적문大寂門의 중품인관中品忍觀에 머물러 공행이 만족하고, 큰 산의 누대에 올라 백천 삼매에 들어가 부처님의 의용儀用을 모으지만, 다만 누적된 과보의 무상한 생멸만은 있느니라. 마음마음이 무위이고 그 행이 십지를 지나치며 요해하는 것이 부처님과 마찬가지여서 부처의 자리에 앉느니라. 그 지혜는 두 가지의 상常·무상無常과 일체의 법의 경계를 보느니라. 알아야 한다. 부처님과 같이 되는 것을 부처님을 배운다고 하느니라. 아래 지地의 일체 보살은 이 보살에 대해 따로 알 수가 없으니 부처에 대하여 보살이라고 이름하는 것이고, 아래 지의 보살에 대하여는 부처라고 이름하느니라. 왜냐하면 이 보살은 대변력大變力으로써 백 겁 만 겁의 수명을 사는 동안에 부처님의 교화를 나타내면서 태어나고 도를 얻고 법륜을 굴리고 무여멸도無餘滅度에 들어가고 팔법륜八法輪을 설하는 것이 부처를 닮았지만 부처가 아니니 모든 부처가 평등하기 때문이니라. 나아가고 멈추는 위의가 일체법과 같으니 백천 삼매에 머물러 이와 같은 부처의 행을 하기 때문에 금강삼매에 들어가 일상一相이 무상無相하고 적멸무위가 되느니라. 그러므로 무구지라고 이름하느니라.”87)

무구지에서 문장이 세 가지이니 첫째는 덕을 나타낸 것이고, 둘째는 사람의 명칭을 건립한 것이며, 셋째는 지地의 이름을 해석한 것이다.
첫째 (덕을 나타낸 것)에서 “대적문大寂門의 중품인관中品忍觀에 머물러”라고 말한 것은 (복인伏忍·신인信忍·순인順忍·무생인無生忍·적멸인寂滅忍 중에서) 제5인 대적인大寂忍의 (십지·등각위·묘각위의) 삼품 중에 지금 계위는 중품에 머물기 때문이다. 이것은 총괄적인 문구이다. 여기에 머무는 데에 열 가지가 있다. 첫째는 만주滿住이니 인행因行이 원만한 것이다. 경에서 “공행이 만족하고”라고 하였다. 둘째는 등주登住이니 중도의 정상에 오르는 것이다. 경에서 “큰 산의 누대에 올라”라고 하였다. 셋째는 심주心住이니 경에서 “백천 삼매에 들어가”라고 하였다. 넷째는 신주身住이니 경에서 “부처님의 의용儀用을 모으지만”이라고 하였다. 다섯째는 유위주有爲住이니 이숙식이 있어 고제가 생멸하는 것이다. 경에서 “다만 누적된 과보의 무상한 생멸만은 있느니라.”라고 하였다.

001_0507_c_01L千寶相蓮華受佛記位故三者學入
001_0507_c_02L如經學佛化功故四者斷入如經二習
001_0507_c_03L伏斷故五者信入仰信佛智如經大
001_0507_c_04L信成故六者證入通達自境如經同眞
001_0507_c_05L際等法性 [25] 同者以離能所二分別故
001_0507_c_06L等者其三世平等性故如仁王經言智
001_0507_c_07L慧雖起滅以能無生無滅故七者平等
001_0507_c_08L依內證智成一味德如經二諦一
001_0507_c_09L [26] 切功德故八者差別入以外化
001_0507_c_10L善達機根如經入衆生根故九者
001_0507_c_11L內敎入如經無量瓔珞功德故十者外
001_0507_c_12L形入如經一時等2) [35] 一切形相故
001_0507_c_13L此十種功德之法潤彼六道衆生善根
001_0507_c_14L故名法雲地也

001_0507_c_15L
無垢地中在文有三一者顯德二立
001_0507_c_16L人稱三釋地名初中言住大寂門中品
001_0507_c_17L忍觀者第五大寂忍有三品之中今此
001_0507_c_18L位中住中品故此是總句此住有十種
001_0507_c_19L一者滿住因行圓滿如經功行滿足故
001_0507_c_20L二者登住登中道頂如經登大山臺故
001_0507_c_21L三者心住如經入百千三昧故四者身
001_0507_c_22L如經集佛儀用故五者有爲住
001_0507_c_23L異熟識苦諦生滅如經唯有累果無常
001_0507_c_24L「照」一作「滅」「示」經作「現」

001_0508_a_01L여섯째는 무위주無爲住이니 일체의 분별 조작을 멀리 벗어난 것이다. 경에서 “마음마음이 무위이고”라고 하였다. 일곱째는 과하주過下住이니 아래의 십지는 인행이 아직 만족하지 못한 것이다. 경에서 “그 행이 십지를 지나치며”라고 하였다. 여덟째는 동상주同上住이니 중도의 정상을 비추는 부처님의 지혜가 지나치지 않는 것이다. 경에서 “요해하는 것이 부처님과 마찬가지여서”라고 하였다. 아홉째는 좌처주坐處住이니 항상 여래의 자리에 앉아서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는 것이다. 경에서 “부처의 자리에 앉느니라.”라고 하였다. 열째는 경계주境界住이니 이제二諦의 일체법을 두 가지 지혜로 보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경에서 “그 지혜는 두 가지의 상常·무상無常과 일체의 법의 경계를 보느니라.”라고 하였다. ‘두 가지를 본다’고 한 것은 지금은 아직 이제의 밖으로 나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알아야 한다.” 이하는 모습으로 이름을 건립한 것이니 이 가운데에 두 가지가 있어 먼저는 건립하고 뒤에는 해석하였다.
“왜냐하면” 이하는 두 번째인 해석이다. “대변력大變力”은 신통력이고, “백 겁 만 겁”은 천 겁을 간략히 말한 것이며, “팔법륜八法輪”은 이승을 위해서는 유작사제有作四諦의 법륜을 굴리고 보살을 위해서는 무작사제의 법륜을 굴리는 것이다. “나아가고 멈추는 위의가 일체법과 같으니”까지는 이러한 의미가 있기 때문에 부처님을 배운다고 한 것이다.
“(백천 삼매에) 머물러” 이하는 지地의 이름을 해석한 것이다. “이와 (같은)”이라고 말한 것은 앞의 설명을 가리키고, “금강삼매에 들어가”라고 한 것은 앞에서 머문 백천 삼매에 의지하여 최후로 금강삼매에 들어간 것이다. 이때는 모든 상이 무너지지 않기 때문에 “일상一相이 무상無相하고”라고 하였고, 또한 모든 더러움에 방해되지 되지 않기 때문에 “적멸무위”라고 하였다. 이러한 의미가 있기 때문에 “무구지”라고 하였다.

ㄷ. 묘각지妙覺地

“불자여, 묘관상인妙觀上忍은 매우 고요하고 무상無相인데 다만 일체중생의 연으로 선법을 생기게 하고 또한 스스로 일체 공덕을 가지기 때문에 불장佛藏이라고 이름하느니라. 일체법을 고요히 비추지만(寂照) 부처 이하의 일체 보살은 비추면서 고요하니(照寂), 이런 까닭에 불자여, 내가 옛날에 제4선 속에서 팔억의 범천왕을 위하여 고요히 비추는 여래는 무심무색無心無色이어서 일체법을 고요히 비춘다고 설하였느니라.
불자여, 내가 이제 간략히 의미를 설하고 이 대중을 위하여 선법행善法行을 여노라.”88)

묘각지에서도 또한 세 가지 구분이 있으니 총표와 별석과 제3의 총결이다.
먼저 총표에서 “묘관상인妙觀上忍은 매우 고요하고 무상無相인데”라고 한 것은 대적인의 삼품 중에 묘각은 상품에 있기 때문이다.
별석에 두 가지 구절이 있으니 먼저 구절은 덕을 나타내었고 다음 구절은 이름을 해석하였다.

001_0508_a_01L生滅故六者無爲住遠離一切分別造
001_0508_a_02L如經心心無爲故七者過下住
001_0508_a_03L十地中因行未滿如經行過十地故
001_0508_a_04L者同上住照中道頂佛智不過如經
001_0508_a_05L解與佛同故九坐處住恒坐如來座
001_0508_a_06L爲衆生說法如經坐佛座處故十境界
001_0508_a_07L二諦一切法二智無不見如經其
001_0508_a_08L智見二常無常一切法境故言見二者
001_0508_a_09L今猶未出二諦外故當知以下相形立
001_0508_a_10L於中有二先立後釋所以已下是
001_0508_a_11L第二釋大變力者神通力故百劫萬
001_0508_a_12L劫者略千劫故八法輪者爲二乘轉
001_0508_a_13L有作四諦法輪爲菩薩轉無作四諦法
001_0508_a_14L輪故乃至進止一切法同者以是義故
001_0508_a_15L名爲學佛也住是以下正釋地名所言
001_0508_a_16L是者指前說故入金剛三昧者依前所
001_0508_a_17L住百千三昧乘入最後金剛三昧此時
001_0508_a_18L不爲諸相所壞故言一相無相亦復不
001_0508_a_19L爲諸垢所礙故言寂滅無爲以是義故
001_0508_a_20L名無垢地

001_0508_a_21L
妙覺地中亦有三分總標別釋第三
001_0508_a_22L總結初總標言妙覺 [27]
001_0508_a_23L大寂忍三品中妙覺在上品故
001_0508_a_24L釋之中有其二句初句顯德後句釋名

001_0508_b_01L덕을 나타내는 것에 두 개의 자구가 있으니 먼저는 이타의 공덕이 두루함을 나타내었고 다음은 자리의 공덕이 원만함을 나타내었다. “다만 일체중생의 연으로 선법을 생기게 하고”라고 한 것은 여래의 원만한 지혜에는 공용심功用心이 없지만 다만 일체중생의 기연으로 일체의 선법을 마음대로 두루 생기게 하니 이것이 이타의 공덕이 두루함이다. “또한 스스로 일체 공덕을 가진다”는 것은 비록 항상 다른 이와 일체 선법을 함께한다 하더라도 항상 안으로부터 원만함을 잃지 않으니 이것을 자리의 공덕이 원만하다고 하고, 이 두 가지 의미 때문에 “불장佛藏”이라고 하였다.
그 아래는 (별석의) 두 번째인 묘각의 이름을 해석한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 구절이 있으니 곧장 풀이함과 다름을 가려냄이다. “일체법을 고요히 비추지만(寂照)”이라고 한 것은 비록 공용이 없다고 하더라도 두루 비춤은 있다. 여기에서 ‘고요함’은 오묘하다는 뜻이니 생겨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움직이는 어지러움을 멀리 벗어났기 때문이며, ‘비춤’은 깨달음의 뜻이니 무명의 어두움에 있는 눈을 영원히 끊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두 가지 의미 때문에 “묘각”이라고 하였다. 그 아래는 다름을 가려냄이다. “부처 이하의 일체 보살은 비추면서 고요하니(照寂)”라고 한 것은 본래의 적멸의 이치만을 비추기 때문에 “비추면서 고요하다”고 한 것이다. 그 내심은 아직 생멸을 벗어나지 못하고 비추는 지혜도 무명을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고요히 비추지 못하였으므로 묘각이라고 하지 않았다.
제3의 총결에 둘이 있으니 먼저 자세한 설명을 가리키고 뒤에 간략한 설명으로 끝맺었다.

5. 불모품佛母品

자세하게 펼치는 문에 의지하여 경의 종취를 드러내면서 (「현성명자품」, 「현성학관품」, 「석의품」, 「불모품」의) 네 품을 분류하여 두 가지로 나눈 것 중에 (첫째인) 육입을 바로 밝힘은 앞에서 마쳤고, 아래의 한 품은 (둘째인) 육입의 대상을 드러냄이다.
“불모佛母”라고 한 것에서 ‘모母’는 생장의 뜻이니 삼세제불의 일체종지가 모두 이제중도二諦中道에 의지하여 생긴다. 여기에서는 이 의미를 나타내기 때문에 “불모품”이라고 하였다.

1) 불모를 바로 밝힘
(1) 물음
이때 경수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처와 보살, 그 둘의 처음 비추는 지혜는 무엇으로부터 생깁니까? 고요히 비춤(寂照)과 비추어 고요함(照寂)의 뜻은 또 무엇입니까? 이제와 법성은 하나입니까, 둘입니까? 유입니까, 무입니까? 제일의제는 또 무엇입니까?”89)

“이때” 이하는 문장에 둘이 있으니 첫째는 불모를 바로 밝힘이고

001_0508_b_01L顯德之內有二子句初顯利他功德周
001_0508_b_02L後顯自利功德圓滿唯以一切衆生
001_0508_b_03L緣生善法者如來圓智無功用心但由
001_0508_b_04L一切衆生機緣任運遍生一切善法
001_0508_b_05L爲利他功德周遍亦自持一切功德者
001_0508_b_06L雖恒與他一切善法而常不失自內圓
001_0508_b_07L是爲自利功德圓滿以是二義故名
001_0508_b_08L佛藏此下第二釋妙覺名於中二句
001_0508_b_09L正釋簡別而寂照一切法者雖無功
001_0508_b_10L而有遍照寂者妙義遠離生滅起
001_0508_b_11L動之亂故照者覺義永斷無明闇昧之
001_0508_b_12L眼故以是二義故名妙覺下簡別言
001_0508_b_13L自佛以下一切菩薩照寂者但照本來
001_0508_b_14L寂滅之理故名照寂而其內心未離生
001_0508_b_15L其能照智不離無明是故未能寂照
001_0508_b_16L不名妙覺者也第三總結之中有二
001_0508_b_17L指廣說後結略說

001_0508_b_18L佛母品

001_0508_b_19L
依廣開門顯經宗內科其四品爲二分
001_0508_b_20L正明六入竟在於前此下一品顯六
001_0508_b_21L入境言佛母者母是生長之義三世
001_0508_b_22L諸佛一切種智皆依二諦中道而生
001_0508_b_23L處顯是義故名佛母品

001_0508_b_24L[正明佛母]
[問]
爾時以下在文有二一者正明佛母

001_0508_c_01L둘째는 여러 부문으로 설명함이다. 처음에 또 둘이 있으니 먼저는 물음이고 나중은 대답이다. 물음에 둘이 있으니 먼저는 지혜를 거론하여 묻고 나중은 경계에 대하여 물었다.
처음에 “그 둘의 처음 비추는 지혜”라고 한 것은 부처님의 처음 지혜와 보살의 처음 지혜를 말한다. (지혜가) 생기는 의미를 묻기 위한 것이므로 처음 지혜를 거론하였다.
“고요히 비춤(寂照)과 비추어 고요함(照寂)의 뜻은 또 무엇입니까?”라고 한 것은 고요히 비추는 지혜가 무엇을 의지하여 일어나(고 비추어 고요한 지혜는 무엇을 의지하여 일어나)는가이니 이것은 처음과 나중의 두 가지 지혜를 통틀어 물었다.
경계에 대한 물음에도 두 구절이 있으니 먼저는 이제의 법성을 묻고 나중에는 제일의제를 물었다.

(2) 대답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불자여, 유제·무제·중도제일의제는 모든 불보살의 지혜의 어머니이니라. 나아가 일체법도 모든 불보살의 지혜의 어머니이니라. 왜냐하면 모든 불보살은 법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니라. 불자여, 이제二諦에서 세제世諦는 유이므로 불공不空이며, 무제는 공이므로 불유不有이니라. 이제는 항상 그러하기 때문에 불일不一이고, 성인이 비추면 공이므로 불이不二이며, 부처가 있거나 부처가 없어도 법계는 변하지 않기 때문에 불공이고, 제일第一은 둘이 없으므로 불유이며, 부처가 없음과 부처가 있음이 법계의 두 가지 모습이므로 불일이고, 제법은 항상 청정하므로 불이이며, 제불은 다시 범부를 위하므로 불공이고, 무가 없기 때문에 불유이며, 공은 진실이기 때문에 불일이고, 본제本際는 불생不生이기 때문에 불이이며, 제법의 모습은 임시 이름에 불과하여 파괴되지 않으므로 불공이고, 제법은 곧 제법이 아니므로 불유이며, 법이 법이 아니므로 불이이고, 법이 아닌 것도 아니므로 불일이니라.
불자여, 이제의 뜻은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며, 항상하지도 않고 단멸하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며,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 이러한 두 가지 모습이 바로 성인의 지혜에 둘이 없다는 것이니 둘이 없기 때문에 모든 불보살의 지혜의 어머니이니라.
불자여, 시방의 무극찰토無極刹土에 있는 모든 부처님께서도 ‘내가 이제 이 대중을 위하여 『명월영락경明月瓔珞經』 중에 이제의 중요한 뜻을 간략히 설하느니라’라고 하셨느니라.”90)

① 지혜를 거론한 물음에 답함

대답은 차례로 앞의 두 질문에 답하였다.
(두 질문 중) 먼저 질문(에 답하는 데)에 곧바로 대답함과 거듭 해석함이 있다. 곧바로 대답함에 두 구절이 있으니 먼저는 삼제三諦가 어머니임을 밝혔고 나중에는 여러 분야가 어머니임을 나타내었다. “나아가”라고 한 것은 십육제十六諦 중에 먼저 삼제를 거론하고 나중에 십삼제의 문과 나아가 일체 법문까지도 지혜의 어머니가 되지 않음이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

② 경계에 대한 물음에 답함

ㄱ. 개별적으로 이제를 해석함

“이제二諦에서” 이하는 (두 질문 중) 나중 질문에 대답한 것이다. 문장에 셋이 있으니 표방과 해석과 맺음이다. 해석에 둘이 있으니 개별적으로 해석함과 총괄적으로 밝힘이다. 이제를 개별적으로 해석함에 네 가지 문이 있으니 첫째는 유有와 무유無有의 문이고, 둘째는 이二와 무이無二의 문이며, 셋째는 인연의 문이고, 넷째는 임시 이름의 문이다.
‘유와 무유의 문’은 분별하는 특성으로는 도리(理)가 있고 사법(事)이 있다는 것이다. 도리는 가유假有이니 가유는 공이 아니므로 유제有諦라고 하고, 사법事法은 실무實無이니 실무는 공이므로 무제無諦라고 한다.
경에서 “세제世諦는 유이므로 불공不空이며, 무제는 공이므로 불유不有이니라.”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이제는 항상 그렇지 않음이 아니기 때문에 불일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불이이다.
경에서 “이제는 항상 그러하기 때문에 불일不一이고, 성인이 비추면 공이므로 불이不二이며”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이제는 항상 그러하다’는 것은 가유는 가무假無가 되지 않고 실무는 실유實有가 되지 않기 때문이며, 이것은 여량지如量智로 분별한 것이다.

001_0508_c_01L者諸門分別初中亦二先問後答
001_0508_c_02L中有二先擧智問後就境問初中言
001_0508_c_03L二初照智者謂佛初智菩薩初智
001_0508_c_04L問生義故擧初智寂照照寂之義復云
001_0508_c_05L何者寂照慧依何2) [36] 此是通問初後
001_0508_c_06L二智就境問中亦有二句先問二諦
001_0508_c_07L法性後問第一義諦
[答]
答中次第答前二
001_0508_c_08L3) [37] 問中正答重釋正答二句
001_0508_c_09L明三諦爲母後顯諸門爲母言乃至者
001_0508_c_10L十六諦中先擧三諦後顯十三諦門
001_0508_c_11L乃至一切法門無有不爲智之母故
001_0508_c_12L諦以下是答後問在文有二謂牒釋結
001_0508_c_13L釋中有二別釋總明別釋二諦卽有
001_0508_c_14L四門一有無有門二二無二門三因
001_0508_c_15L緣門四假名門有無有門者謂分別
001_0508_c_16L性有理有事道理假有假有非空名爲
001_0508_c_17L有諦事法實無實無是空名爲無諦
001_0508_c_18L經世諦有故不空無諦空故不有故
001_0508_c_19L是二諦常非不爾故不一而實非然故
001_0508_c_20L不二如經二諦常爾故不一聖照空故
001_0508_c_21L不二故此中二諦常爾者假有不成假
001_0508_c_22L實無不成實有故此是如量智所分
001_0508_c_23L「觀」一無「起」下一有「照寂慧依何超」
001_0508_c_24L「前」上一有「答」

001_0509_a_01L‘성인이 비추면 공이다’라는 것은 가유는 가유가 되지 않고 실무는 실무가 되지 않기 때문이며, 이것은 여리지如理智로 통달한 것이다. 가유가 가유가 되지 않는 까닭은, 이름에 의지하여 임시로 건립한 것을 가유라고 한 것이어서 의지하는 대상인 이름도 성립할 수 없기 때문에 의지하는 주관인 가유가 성립할 수 없다. 실무가 실무가 되지 않는 까닭은, 계탁한 유를 버리고 실무를 건립한 것이어서 버려진 대상인 실유도 성립할 수 없기 때문에 버리는 주관인 실무가 성립할 수 없다. 여리지로는 이와 같이 통달하기 때문에 “성인이 비추면 공이므로 불이不二이며”라고 하였다.
이것이 초문(인 유와 무유의 문)의 이제 도리이다. 여기에서 “불이”는 진여가 바로 중도제일의제임을 곧바로 나타낸 것이다.
둘째 ‘이二와 무이無二의 문’은 앞에서 설명한 일제一諦의 유무 차별이 항상 그러하여 변하지 않으므로 세제라고 하고, 유무가 함께 공하여 평등한 일미이기 때문에 제일의제라고 하였다.
경에서 “부처가 있거나 부처가 없어도 법계는 변하지 않기 때문에 불공이고, 제일第一은 둘이 없으므로 불유이며”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법계’는 가유와 실무의 영역(分齊)이 섞이지 않기 때문에 법계라고 한다.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셨을 때 이 유무의 영역(分界)을 설하셨고, 부처님이 멸도하신 후에도 유무의 영역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먼저 ‘부처가 있거나’라고 하고 뒤에 ‘부처가 없어도’라고 하였다. ‘제일第一은 둘이 없으므로’라고 한 것은 제일의第一義에는 두 가지 상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세제는 유무의 차별이기 때문에 제일의제와 불일이고, 유무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제일의제와 불이인 것이다.
경에서 “부처가 없음과 부처가 있음이 법계의 두 가지 모습이므로 불일이고, 제법은 항상 청정하므로 불이이며”라고 하였다.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지 않으셨을 때 유무의 영역(分齊)은 섞이지 않았고,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셨을 때라도 유무는 본래와 같이 섞이지 않았다. 부처님이 나오셔서 무이無二를 비추는 것에 연유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유무의 영역에 그 차별이 생긴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부처가 없음’을 말하고 연후에 ‘부처가 있음’을 말하였다.

001_0509_a_01L聖照空者假有不成假有實無不
001_0509_a_02L成實無故此是如理智所通達所以假
001_0509_a_03L有不成假有者依名假立是爲假有
001_0509_a_04L所依名言不可得故能依假有不得成
001_0509_a_05L所以實無不成實無者1) [38] 所計有
001_0509_a_06L以立實無所遣實有不可得故能遣實
001_0509_a_07L無不得成立其如理智如是通達故言
001_0509_a_08L聖照空故不二是爲初門二諦道理
001_0509_a_09L中不二正顯眞如卽是中道第一義諦
001_0509_a_10L第二二與不二門者前說一諦有無
001_0509_a_11L差別常爾不變名爲世諦有無俱空平
001_0509_a_12L等一味是故名爲第一義諦如經有佛
001_0509_a_13L無佛法界不變故不空第一無二故不
001_0509_a_14L有故此中法界者假有實無分齊不亂
001_0509_a_15L故名法界佛出世時說是有無分界
001_0509_a_16L滅度後有無分界不變是故先言有佛
001_0509_a_17L2) [39] 言無佛也第一無二者是第一義
001_0509_a_18L無二相故如是世諦有無差別故與第
001_0509_a_19L一義諦不一有無不成故與第一義諦
001_0509_a_20L不二如經無佛有佛法界二相故不一
001_0509_a_21L諸法常淸淨故不二故佛不出世之時
001_0509_a_22L有無分齊不亂若佛出世之時有無如
001_0509_a_23L本無亂不由3) [40] 出照無二故有無分
001_0509_a_24L界生其差別是故先言無佛然後言有

001_0509_b_01L‘제법은 항상 청정하므로 불이이며’는 말과 모습을 따르는 것은 모두 성취되지 않기 때문에 무상無相과 불이임을 말한다.
셋째 ‘인연의 이제문二諦門’은 모든 부처님이 이미 삼계의 제행에서 벗어났으나 기연機緣을 만나면 육도로 다시 들어가니 이와 같이 인연이 모인 것에 감응하는 일이 불무不無임을 알기 때문에 유제라고 하는 것이다. 비록 무는 아니지만 유일 수 없고 유일 수 없기 때문에 또 무라고 말하는 것이며, 비록 무라고 말하더라도 무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유무가 함께 무이므로 이름을 무제라고 하는 것이다.
경에서 “제불은 다시 범부를 위하므로 불공이고, 무가 없기 때문에 불유이며”라고 하였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인연이 모이기 때문에 유라고 말을 하고 유가 바로 유라고 말하지 않으며, 인연이 흩어지기 때문에 무라고 말을 하고 유가 바로 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이 이 (셋째의 인연의) 문의 이제를 곧바로 말한 것이다.
『인왕경』에서 “무제가 없음이 실무이고 적멸이 제일의 공이다. 모든 법은 인연으로 유이니 유무의 의미가 이와 같다.”91)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무제의 공이 진실하기 때문에 유제와 하나가 되지 않고, 유제의 법은 본래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무제와 둘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공은 진실이기 때문에 불일이고, 본제本際는 불생不生이기 때문에 불이이며”라고 하였다.
이 (셋째의 인연의) 문의 이제가 바로 중도제일의제이다. 왜냐하면 유가 생기지 않기 때문에 곧 무제이고 무도 공하기 때문에 곧 유제이니 이제가 곧 중도이기 때문에 위에서 이제와 일제一諦가 일합상一合相이라고 하였다.
넷째 ‘임시 이름의 이제문二諦門’은 세 가지 임시가 모인 유를 세제라고 하고 실상을 제일의제라고 한다. 경에서 “제법의 모습은 임시 이름에 불과하여 파괴되지 않으므로 불공이고, 제법은 곧 제법이 아니므로 불유이며”라고 하였다. 『인왕경』에서는 “법성에는 본래 성품이 없으니 제일의는 공여空如하며 모든 유는 본래 유법有法이지만 세 가지 임시가 모인 가유이다.”92)라고 하였는데, 이 (넷째) 문의 이제의 모습을 곧바로 말한 것이다. ‘세 가지 임시’는 말하자면 법의 임시·

001_0509_b_01L佛也言諸法常淸淨者謂隨言相皆不
001_0509_b_02L成就故與無相而不二也第三因緣二
001_0509_b_03L諦門者諸佛已出三界諸行而赴機緣
001_0509_b_04L還入六道如是感應因緣集會以知不
001_0509_b_05L無名爲有諦雖不是無而不得有
001_0509_b_06L得有故且謂之無雖謂之無而不存無
001_0509_b_07L有無俱無名爲無諦如經諸佛還爲凡
001_0509_b_08L夫故不空無無故不有故如上文言
001_0509_b_09L因緣集故謂之有非曰有是有因緣散
001_0509_b_10L故謂之無非曰有是無者正謂此門之
001_0509_b_11L二諦也人王經言無無諦實無寂滅
001_0509_b_12L第一空諸法因緣有有無義如是故
001_0509_b_13L此中無諦之空是眞實故不與有諦爲
001_0509_b_14L有諦之法本不生故不與無諦爲二
001_0509_b_15L故言空實故不一本際不生故不二
001_0509_b_16L門二諦卽是中道第一義所以然者
001_0509_b_17L不生故卽爲無諦無亦空故卽爲有諦
001_0509_b_18L所以二諦卽爲中道如上文言二諦一
001_0509_b_19L諦一合相故第四假名二諦門者三假
001_0509_b_20L集有名爲世諦實相名爲4) [41] 義諦
001_0509_b_21L經不壞假名諸法相故不空諸法卽非
001_0509_b_22L諸法故不有故人王經言法性本無性
001_0509_b_23L第一義空如諸有本有法三假集假有
001_0509_b_24L正謂此門之二諦相言三假者所謂法

001_0509_c_01L감수의 임시·이름의 임시이다. 여기에서 이름의 임시는 분별성이니 이름의 임시에 의지하여 제법의 모습을 건립하기 때문이다. 감수의 임시와 법의 임시는 의타성이니 (감수하는) 사람과 비슷하고 (감수되는) 법과 비슷하지만 둘 다 실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 임시의 법은 법이 아니어서 제일의제와 둘이 되지 않고, 법이 아니라 하더라도 법이 아닌 것도 아니기 때문에 제일의제와 하나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경에서) “법이 법이 아니므로 불이이고, 법이 아닌 것도 아니므로 불일이니라.”라고 하였다.
(첫 번째인) 개별적으로 이제를 밝힘은 여기에서 마쳤다.

ㄴ. 총괄적으로 팔불을 밝힘

그다음은 두 번째로 총괄적으로 팔불八不을 밝힘이다. 이 문장의 의미를 해석하는 데에 간략하게 두 가지 문이 있으니 첫째는 통문通門이고 둘째는 별문別門이다.
‘통문’은 앞에서 설명한 이제의 네 가지 문처럼 각각 네 쌍의 팔불이 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첫째 쌍인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며”는 네 가지 문의 불일과 불이를 총괄적으로 해석한 것이니 그 말과 의미가 앞의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쌍인 “항상하지도 않고 단멸하지도 않으며”는 네 가지 문의 불공不空과 불유不有를 통괄적으로 해석한 것이니 유는 곧 항상(常)이고 무는 곧 단멸(斷)이기 때문이다. 셋째인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며”는 첫째 쌍인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며”를 거듭 나타낸 것이니 유와 공이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유는 공을 따라오는 것이 아니고, 공과 유는 둘이 아니기 때문에 공이 유를 버리지 않는다. 넷째인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는 둘째인 “항상하지도 않고 단멸하지도 않으며”를 거듭 나타낸 것이니 생기지 않기 때문에 불유이고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불무이며, 무는 단斷의 뜻이고 유는 곧 상변常邊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팔불은 네 가지 문에 통한다.
개별적인 의미에서 이 네 쌍을 해석하여 차례로 드러내면 저 앞의 네 가지 문이다.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며”는

001_0509_c_01L假受假名假此中名假是分別性依名
001_0509_c_02L假立諸法相故受法二假是依他性
001_0509_c_03L人似法皆非實故此三假法非是法故
001_0509_c_04L不與第一義諦爲二雖非是法非非法
001_0509_c_05L不與第一義爲一故言法非法故不
001_0509_c_06L非非法故不一別明二諦竟在於
001_0509_c_07L

001_0509_c_08L
此下第二總明八不釋此文意略有二
001_0509_c_09L一者通門二者別門言通門者
001_0509_c_10L如前說二諦四門各有此中四雙八不
001_0509_c_11L是義云何此初一雙不一不二總釋四
001_0509_c_12L門不一不二言之與義不異前故其第
001_0509_c_13L二雙不常不斷通釋四門不空不有
001_0509_c_14L卽爲常無便斷故第三不來亦不去者
001_0509_c_15L重顯初雙不一不二有空不一故有不
001_0509_c_16L從空來空有不二故空不5) [42] 有去也
001_0509_c_17L第四不生亦不滅者重顯第二不常不
001_0509_c_18L不生故不有不滅故不無無是斷
001_0509_c_19L有卽是常邊故是故八不通於四門
001_0509_c_20L若就別義釋此四雙次第示現
001_0509_c_21L前四門是義云何此中不一亦不二者
001_0509_c_22L「遣」一作「違」「後」上一有「然」「佛」
001_0509_c_23L下一有「佛」
「一」上疑脫「第」「遣」一作
001_0509_c_24L「違」

001_0510_a_01L첫째 쌍의 이제가 극단(邊)에서 벗어났음을 나타낸 것이니 유무는 항상 그러하기 때문에 하나가 아니고 성인의 지혜가 비추면 공이므로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인 “항상하지도 않고 단멸하지도 않으며”는 두 번째 문의 이제가 극단에서 벗어났음을 나타낸 것이니 법계는 변하지 않기 때문에 단멸하지 않고 제일(의제)는 둘이 없으므로 항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인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며”는 세 번째 문의 이제가 중도임을 나타낸 것이니 인연이 화합하였으니 온 곳이 없고 인연이 흩어졌으니 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넷째인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는 네 번째 문의 이제가 중도임을 나타낸 것이니 임시 이름을 파괴하지 않으므로 생기지 않고 실상을 활용하여 드러낸 것이니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별문別門’ 팔불의 의미이다.
(경에서) “이러한 두 가지 모습이 바로 성인의 지혜에 둘이 없다는 것이니”라고 한 것은 앞에서 설명한 네 쌍이 모두 서로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모든 극단에서 벗어났으면서도 중中을 따르지 않으니 하나가 아님이 바로 둘이 아니라고 하고 나아가 없어지지 않음이 바로 생기지 않음이라고 말하였다. 이와 같이 상즉相卽하여 모든 극단에서 멀리 벗어나고 이와 같이 이제가 상즉하여 벗어나지 않으니 두 지혜가 경계를 따라 둘이 되지 않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둘이 없는 이제의 경계가 둘이 없는 두 지혜의 어머니가 될 수 있고 이러한 까닭에 (경에서) “둘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이것이 모든 불보살의 지혜의 어머니이다.
그런데 지혜의 어머니의 뜻에는 간략하게 세 종류가 있다.
첫째, 일체중생의 본각의 성품은 시각의 의지처이므로 지혜의 어머니라고 한다. 시각에 대하여 본체를 설명한 것이다.
둘째, 일체 보살이 앞으로 맞이할 불과佛果는 현재의 지혜의 의지처이므로 지혜의 어머니라고 한다. 아직 얻지 못할 때에는 (지혜를) 불성이라고 하고 이미 얻었을 때에는 살바야薩婆若라고 한다. 예를 들면 『인왕경』에서 “일체중생의 성품의 근본은 지혜의 어머니이니 곧 살바야(일체지)의 체이다. 모든 부처가 아직 부처가 되지 못했으면 장차 부처의 지혜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어서, 아직 얻지 못했으면 성품이고 이미 얻었으면 살바야이다. 삼승의 반야는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아 자성이 상주하니 일체중생은 이것을 깨달음의 성품으로 삼는다.”93)라고 하였다.

001_0510_a_01L顯彼初雙二諦離邊以有無常爾故不
001_0510_a_02L聖智照空故不二故第二不常亦不
001_0510_a_03L斷者顯第二門二諦離邊以法界不變
001_0510_a_04L故不斷第一無二故不常故第三不來
001_0510_a_05L亦不去者顯第三門二諦中道以因緣
001_0510_a_06L和合而無從來因緣破散而無所去故
001_0510_a_07L第四不生亦不滅者顯第四門二諦中
001_0510_a_08L以不壞假名而非有生用顯實相
001_0510_a_09L而非有滅故是謂別門八不義也而二
001_0510_a_10L相卽聖智無二者前說四雙皆不相離
001_0510_a_11L故離諸邊而不隨中謂如不一卽是不
001_0510_a_12L乃至不滅卽是不生如是相卽遠離
001_0510_a_13L諸邊如是二諦相卽不離所以二智隨
001_0510_a_14L境無二是故無二之二諦境能爲無二
001_0510_a_15L之二智母以之故言無二故是諸佛菩
001_0510_a_16L薩智母然智母之義略有三種一者
001_0510_a_17L一切衆生本覺之性始覺所依故名智
001_0510_a_18L能與始覺而作本體二者一切菩薩
001_0510_a_19L當來佛果現智所依故名智母未得之
001_0510_a_20L時彼名佛性已得之時名薩婆若如人
001_0510_a_21L王經言一切衆生性根本智母卽爲薩
001_0510_a_22L婆若體諸佛未來 [28] 以當佛爲智母未得
001_0510_a_23L爲性已得薩婆若三乘般若不生不滅
001_0510_a_24L自性常住一切衆生以此爲覺性故

001_0510_b_01L살펴보면, 삼승 이하는 제일인 본각의 성품을 거듭 나타내었기 때문에 ‘상주’라고 하고 ‘깨달음의 성품’이라고 한 것이다.
셋째, 이제 중도는 본래도 아니고 장차의 것도 아니어서 성인의 지혜를 생겨나게 하므로 지혜의 어머니라고 한다. 지금 여기의 문장은 셋째 의미를 나타내었다.
(경에서) “시방의” 이하는 (두 질문 중 나중 질문에 대답함에서 표방과 해석과 맺음의 셋 중에) 세 번째인 총결이다.
불모를 바로 밝힘은 여기에서 마쳤다.

2) 여러 부문으로 설명함
(1) 질문

그때 경수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모든 불보살의 대방편과 평등한 지혜로 모든 법계를 비추는 것은 돈등각頓等覺입니까? 점점각漸漸覺입니까? 무명장無明藏과 마음은 하나입니까? 다른 것입니까? 겁량劫量의 멀고 가까움은 또 어떤 것입니까?”94)

다음은 두 번째인 여러 부문으로 설명함이다. 여기에 둘이 있으니 먼저는 물음이고 나중은 대답이다.
물음에서 세 가지를 물었으니 먼저 깨달음의 돈점을 묻고, 다음에는 끊는 것의 하나와 다름을 물었으며, 나중에는 닦을 때에 겁수의 멀고 가까움을 물었다.

(2) 대답

① 깨달음의 돈점에 답함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불자여, 그대는 과거칠불의 법에 대하여 이미 하나하나 물었는데, 그것은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여기의 대중인 십사억 사람이 이 법에 대하여 다시 결정요의決定了義를 얻을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물었느니라.
불자여, 내가 이제 십사억 대중을 위하여 금강의 입으로 결정요의를 설하리라. 불자여, 나의 과거 법회에 일억 팔천의 무구無垢 대사大士가 있었느니라. 앉은 자리에서 법성의 근원을 통달하고 단번에 둘이 없는 일체법의 일합상을 깨달았으며 법회에서 나와서는 각각 시방세계에 앉아 보살영락대장菩薩瓔珞大藏을 설하였느니라. 그때에 앉아 있던 대중은 일억 팔천의 세존을 뵈었는데, 이름이 돈각여래頓覺如來이니라. 각각 백 가지 보배로 장엄한 사자후 자리에 앉으시니 그때 무량한 대중들도 한 곳에 앉아서 등각여래等覺如來께서 영락법장瓔珞法藏을 설하심을 들었느니라. 그러므로 점각의 세존은 없고 돈각여래만 있느니라. 삼세제불이 설하신 것처럼 지금 나도 그러하니라.”95)

대답에 둘이 있으니 하나는 물음을 칭찬하며 주장을 인정하는 것이고 둘은 물음에 대하여 곧바로 답한 것이다. 여기에서 차례로 앞의 세 가지 물음에 답하였다. 먼저 첫 질문에 답하는 데에 둘이 있으니 곧바로 답함과 결론적으로 답함이다.
처음에 이것이 단박이고 점차가 아님을 곧바로 밝혔다. 그런데 이 점돈에 두 가지 의미가 있으니 하나는 의지하는 사람의 점돈이고 둘은 상대하는 경계의 점돈이다.
‘의지하는 사람의 점돈’은 만약 한 사람을 의지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하면 모든 번뇌를 점점 깨끗하게 하고 그 지혜도 점점 늘어날 것이고, 만약 여러 사람을 의지하여 많은 수로 계속하면 모든 번뇌를 단박에 깨끗이 하고 정각을 단박에 이룰 것이다. 예를 들면 『능가경』에서 “비유하자면 암마라 열매처럼 점차로 성취하는 것이지 일시에 되는 것이 아니다. 대혜여, 중생의 청정한 마음이 현행하여 흘러나오는 것도 마찬가지여서 점차로 청정해지는 것이지 일시에 되는 것이 아니다.”96)라고 하였다. 또 “대혜여, 비유하자면 아리야식이 현경現境을 분별하여 자신의 몸을 의지하여 기세간 등을 생기게 하는 것처럼 일시에 아는 것이지 전후가 (있는 것이) 아니다. 보불報佛 여래도 마찬가지여서 일시에 모든 중생계를 성취시켜 구경천의 청정하고 오묘한 궁전의 수행하기에 청정한 곳에 둔다.”97)라고 하고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두 번째로 ‘상대하는 경계의 점돈을 밝힘’은 만약 십중의 법계를 상대하여 열 가지 장애 등을 조복하고 제거하려면 점점 제거하고

001_0510_b_01L云三乘以下重顯第一本覺之性故言
001_0510_b_02L常住亦名覺性也三者二諦中道非本
001_0510_b_03L非當能生聖智故名智母今此文中
001_0510_b_04L顯第三義也十方以下第三總結正明
001_0510_b_05L智母竟在於前

001_0510_b_06L[諸門分別]
[問]
此下第二諸門分別於中有二先問
001_0510_b_07L後答初問之中卽發三問先問能覺之
001_0510_b_08L頓漸次問所斷之一異後問脩時刧數
001_0510_b_09L久近
[答]
答中有二一者讚問許說二者
001_0510_b_10L對問正答此中次第答前三問先答初
001_0510_b_11L於中有二正答結答初中正明是
001_0510_b_12L頓非漸然此漸頓有二義一者依人漸
001_0510_b_13L二者對境漸頓依人漸頓者若依
001_0510_b_14L一人相續始終卽漸淨諸漏其智漸增
001_0510_b_15L若依諸人衆多相續卽頓淨諸漏頓成
001_0510_b_16L正覺如楞伽經言譬如奄摩羅菓
001_0510_b_17L次成就 [29] 非爲一時大慧衆生淸淨自
001_0510_b_18L心現流亦復如是漸次淸淨非爲一時
001_0510_b_19L又言大慧譬如阿梨耶識分別現境
001_0510_b_20L身資生器世間等一時而知非是前後
001_0510_b_21L報佛如來亦復如是一時成就 [30] 諸衆生
001_0510_b_22L置竟天淨妙宮殿脩行淸淨之處
001_0510_b_23L至廣說故第二對境明漸頓者若對十
001_0510_b_24L重法界伏除十種鄣等卽須漸除

001_0510_c_01L그 지혜도 점점 늘어날 것이고, 만약 하나의 법계문만을 상대하면 태어나면서 얻은 무명을 영원히 끊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단번에 깨달음이고 단박에 끊음이니 금강(지) 이전은 우러러 믿기만 할 뿐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인왕경』에서 “습인習忍에서 정삼매頂三昧까지는 모두 일체 번뇌를 조복한다고는 하지만, 무상신無相信으로 일체 번뇌를 소멸시키고 해탈지解脫智가 생겨서 제일의제를 비추어도 본다(見)고 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본다는 것(見)은 살바야이다. 이런 까닭에 나는 예로부터 항상 오직 부처님만이 보고 깨닫는다고 설하여 정삼매 이하 신인信忍까지는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며, 오직 부처님만 단박에 아시기에 믿음(信)이라고 하지 않는다. 점점 조복한다는 것은 지혜는 (일어났다가) 소멸하여도 생겨남도 없고 소멸함도 없으므로 이 마음이 만약 소멸하면 쌓인 것도 소멸하지 않는 것이 없어 생겨남도 없고 소멸함도 없다.”98)라고 하고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지금 (경전의) 문장은 (사람과 경계의) 두 가지 문을 통틀어서 단박의 의미를 나타내었다. 처음에 “일억 팔천의 무구無垢 대사大士가 있었느니라. 앉은 자리에서 법성의 근원을 통달하고”라고 한 것은 모든 사람에 의지하여 일시에 일심의 근원을 통달하여 묘각을 이루었음을 나타낸 것이다. 다음에 “단번에 둘이 없는 일체법의 일합상을 깨달았으며”라고 한 것은 경계에 대하여 단박에 깨달음을 밝힌 것이다. ‘일합상’은 일법계이다. 이 두 구절은 자각의 의미를 밝혔고, “법회에서 나와서는” 다음은 각타의 의미를 나타냈다.
“그러므로” 이하는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두 번째의 답(인 결론적으로 답함)이다. 여기에 둘이 있으니 단박을 결론지음과 같음을 결론지음이다. 먼저 단박을 결론지음에 두 구절이 있으니 “점각의 세존은 없고”는 많은 사람들이 일시에 통달한다는 의미를 결론지은 것이고, “돈각여래만 있느니라.”는 단박에 일합상을 깨달았다는 의미를 결론지은 것이다.
“삼세” 이하는 같은 설명임을 결론지은 것이다.

② 끊는 것의 하나와 다름에 답함

ㄱ. 하나를 부정함

“불자여, 그대가 앞에서 ‘무명과 마음은 하나입니까?’라고 한 말은 그렇지 않느니라. 만약 명료한 이해와 무명인 모든 견이 하나의 모습이라면 당연히 속박과 해탈이 없고 범부와 부처가 둘이 아니리라. 왜냐하면 번뇌가 동일한 체상體相이기 때문이니라. 어째서인가? 일심과 함께 한꺼번에 생기고 소멸하는 것은 별개가 아니고 다름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불자여, 만약 속박과 해탈이 하나의 모습이라면 사대가 하나일 것이고 육미六味가 다르지 않을 것이니라. 그러나 (사)대가 다르고 (육)미가 다르기 때문에 속박과 해탈도 마찬가지이니라.
불자여, 일체 보살이 범부일 때에는 일체 번뇌를 갖고 있었으나 끊을 때는 거친 부분이 먼저 없어지고 미세한 부분이 나중에 없어지느니라. 만약 일심과 번뇌가 하나라면 밝음과 어두움의 둘이 있을 수 없느니라. 불자여, 다시 가까운 것으로 먼 것을 비교하자면, 범부의 착한 마음에도 불선不善이 없는데 더욱이 무상無相한 마음에 무명이 있겠는가? 불자여, ‘선악이 한 마음’이라는 말은 병사왕洴沙王(ⓢ Bimbisāra, 빔비사라) 나라의 외도外道 안다安陀(ⓢ Anda)99)들의 스승의 게송 ‘밝음과 어둠은 하나의 모습이고 선과 악은 한 마음이다’이니라.”100)

그다음은 두 번째인 (끊는 것의) 하나와 다름에 답함이다. 여기에 둘이 있으니 먼저는 하나를 부정하고 뒤에는 다름을 인정하였다. 처음 (하나를 부정함)에 셋이 있으니 첫째는 총괄적으로 부정함이고,

001_0510_c_01L智漸增若對一法界門永斷生得無明
001_0510_c_02L直是頓覺亦爲頓斷以金剛以還唯是
001_0510_c_03L仰信未能見故如仁王經言從習忍至
001_0510_c_04L頂三昧皆名爲伏一切煩惱而無相信
001_0510_c_05L滅一切煩惱生解脫智照第一義諦
001_0510_c_06L名爲見所謂見者是薩婆若是故我
001_0510_c_07L [31] 以來常說唯佛所知見覺頂三昧以
001_0510_c_08L下至於信 [32] 所不知不見不覺唯佛頓
001_0510_c_09L不名爲信漸漸伏者慧雖1) [43] 以能
001_0510_c_10L無生無滅此心若滅卽累無不滅無生
001_0510_c_11L無滅乃至廣說故今此文中通就二
001_0510_c_12L門以顯頓義初言一億八千無垢大士
001_0510_c_13L卽坐達法性原者是依諸人顯一時
001_0510_c_14L一心原而成妙覺也次言頓覺無二一
001_0510_c_15L切法一合相者是對境界以明頓覺
001_0510_c_16L合相者一法界故是前二句明自覺義
001_0510_c_17L從法會下顯覺他義是故以下第二就 [33]
001_0510_c_18L於中有二結頓結同先結頓中卽
001_0510_c_19L有二句無漸覺世尊者是結衆人一時
001_0510_c_20L達義唯有頓覺如來者是結頓覺一合
001_0510_c_21L相義三世以下結同說也

001_0510_c_22L
此下第二答一異問於中有二先遮其
001_0510_c_23L2) [44] 後許其義異初中有三一者總
001_0510_c_24L「滅」上一有「起」「義」一無次同

001_0511_a_01L둘째는 하나의 잘못을 개별적으로 해석함이며, 셋째는 사람을 거론하여 잘못을 결론 맺음이다.
처음에 “무명”이라고 한 것은, 무명장無明藏을 말하니 바로 시작도 없는 무명주지無明住地이다. “마음”이라고 한 것은, 자신의 마음이 신해神解를 본성으로 삼는 것을 말한다. 자세한 것은 아래의 문장에서 설명할 것이다. 자신의 마음의 신(해)는 최종적으로 불지에 이르면 그 무명은 끊어질 법이기 때문에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하나의) 잘못을 개별적으로 해석하면서 네 가지 잘못을 나타내었으니 첫째는 범부와 성인이 둘이 아니라는 허물이고, 둘째는 사대와 육미가 다르지 않다는 허물이며, 셋째는 바름을 거론하여 삿됨을 나타낸 것이고, 넷째는 가까운 것으로 먼 것을 비유한 것이다.
첫째, (범부와 성인이 둘이 아니라는 허물)에 둘이 있으니 곧바로 드러냄과 거듭 해석함이다. 곧바로 드러냄에서 “명료한 이해”라고 한 것은 몸에 대한 신해부터 이치를 증득한 혜해慧解까지이다. “무명”이라고 한 것은 근본무명이고, “모든 견”이라고 한 것은 일곱 가지 견101) 등이다. 만약 신해가 무명과 하나라면 혜해도 모든 견과 하나일 것이기에 속박과 해탈이 없고 범부와 성인이 하나일 것이다. (거듭) 해석에는 둘이 있으니 직접 해석함과 에둘러 해석함이다. 여기에서 “일심과 함께”라고 한 것은 무명인 모든 견이 하나의 이해하는 마음과 함께하기 때문이고, “한꺼번에 생기고 소멸하는 것은”이라고 한 것은 전후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일찰나이기 때문이다. “별개가 아니고”라고 한 것은 앞의 ‘일심一心’을 결론 맺은 것이고, “다름이 아니”라고 한 것은 앞의 ‘한꺼번에’를 결론 맺은 것이다.
(둘째인) 사대와 육미가 다르지 않다는 과실의 모습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일체 보살이” 이하는 셋째인 바름을 거론하여 삿됨을 나타낸 것이다.
“다시” 이하는 넷째인 가까운 것으로 먼 것을 비유한 것이다. “무상無相한 마음에 무명이 있겠는가.”라고 한 것은 저 (외도의) 스승이 말에 집착한 것이다. 일체법은 옳고 그름이 정해지지 않아서 선이 있는 것에는 반드시 불선이 있고 아는 것이 있는 것에는 반드시 알지 못하는 것이 있다. 예를 들면 하나의 성인의 지혜가 아래를 바라보아 알면 지혜라고 하고 위를 바라보아 알지 못하면 무명이다. 이와 같은 집착을 하기 때문에 큰 잘못이다.
“(‘선악이 한 마음’이라는) 말은” 이하는 셋째인 (사람을 거론하여) 잘못을 결론 맺음이다.

ㄴ. 다름을 인정함

“불자여, 내 법의 바른 뜻은 ‘선악이 동일한 행자는 속박이 있고 해탈이 있으며 범부가 있고 부처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느니라. 백 겁 동안 상속하는 동일한 행자라도 선악이 동일한 마음이 될 수 없으니 옛 부처님께서도 ‘모습이 없는 지혜의 불이 무명의 어둠을 소멸한다’고 항상 말씀하셨느니라. 또한 선악의 둘은 별개인데 동일한 과보를 말하는 것 역시 옳지 않느니라. 일체의 선은 불과佛果를 받고 무명은 유위 생멸의 과보를 받으니 그러므로 선과는 선인에서 생기고 악과는 악인에서 생기기 때문에 선은 생멸의 과보를 받지 않고 항상 불과를 받는다고 하느니라.
불자여, 만약 범부와 성인의 일체 선善이 모두 무루無漏라고 한다면 누과漏果를 받지 않을 것이니라. 그런데 누과를 받는다는 것은 부처님께서 중생을 교화하여 선을 행하고 악을 등지게 하기 위하여 간접적인 인(緣因)으로 유위의 과보를 발생하게 하신 것이다. 무루인이 아닌 것은 무명의 업으로 과보를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삼수삼고三受三苦라 하니 고고苦苦·행고行苦·괴고壞苦와 고수苦受·낙수樂受·사수捨受이니라. 두 가지 수는 선인을 연한 과보이고 고수는 악인을 연한 과보이니 일체가 모두 고이며 무명을 근본으로 하느니라.”102)

“내 법의” 이하는 두 번째인 다름을 인정함이다. 여기에 둘이 있으니 하나는 옳고 그름을 간략하게 가려냄이고,

001_0511_a_01L二者別釋一過三者擧人結過
001_0511_a_02L中言無明者謂無明藏卽是無始無明
001_0511_a_03L住地所言心者謂自1)相心 [45] 神解爲性
001_0511_a_04L於中委悉後文當說自相心神終至佛
001_0511_a_05L其無明者是所斷法是故不可以爲
001_0511_a_06L一也別顯過中卽顯四過一凡聖非
001_0511_a_07L二過二大味不異過三者擧正顯邪
001_0511_a_08L四者以近況遠初中有二正顯重釋
001_0511_a_09L正顯中言解者身相神解乃至證理慧
001_0511_a_10L言無明者根本無明言諸見者
001_0511_a_11L種見等若使神解與無明一卽其慧解
001_0511_a_12L與諸見一故無縛解凡聖爲一也
001_0511_a_13L中有二直釋轉釋中言而共一心者
001_0511_a_14L無明諸見共一解心故生滅一時者
001_0511_a_15L前後共是一刹那故不別者結前一
001_0511_a_16L不異者結前一時大味不異過相
001_0511_a_17L可知一切菩薩已下第三擧正顯邪
001_0511_a_18L以已下第四以近況遠無相心中有無
001_0511_a_19L明者彼師執言凡一切法是非無定
001_0511_a_20L有所善者必有不善有所知者必有不
001_0511_a_21L如一聖智望下爲知名爲智慧
001_0511_a_22L上不知卽是無明作如是執故成大過
001_0511_a_23L而言以下第三結過也

001_0511_a_24L
我法以下第二許異於中有二一者略

001_0511_b_01L둘은 다른 모습을 자세하게 드러냄이다.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데에 네 구절이 있다. 첫 구절은 동일한 행자를 인정한 것이다. “행자”는 임시 이름이 중생이다. 중생의 움직임(用)은 제법을 총괄하여 다스리고 중생의 의미(義)는 곳곳에서 생을 받는 것이니 종으로 삼세에 걸치고 횡으로 오음에 모인다. 오음에 모이기 때문에 선악이 모두 한 사람에게 속하고 삼세에 걸치기 때문에 전후로 백 겁을 상속하나니 이것이 불법의 바른 뜻이다. 둘째 구절은 동일한 마음이라는 뜻을 부정하였다. 마음은 (오)음법(의 하나)이고 법은 차별이라는 뜻이니 선악이 같지 않고 전후가 하나이지 않다. 그러므로 동일한 마음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셋째 구절은 부처님을 예로 들어 따로 증명하였다. 넷째 구절은 과보를 거론하여 하나임을 비판하였다.
옳고 그름을 간략하게 가려냄을 여기에서 마쳤다.
“그러므로” 이하는 다른 모습을 자세하게 드러냄이다.103) 여기에 넷이 있으니 하나는 선악의 인과를 가려내어 구별하였고, 둘은 선인과 선과를 거듭 드러냈으며, 셋은 교리가 어긋나지 않음을 회통하였고, 넷은 과와 인에 차이가 없음을 자세하게 해석하였다.
처음에 “일체의 선은 불과佛果를 받고”라고 한 것은 원래 가진 선(生得善)과 새로 지은 선(作得善) 모두가 정인正因이 되어 불과를 받기 때문이고, “무명은 유위 생멸의 과보를 받으니”라고 한 것은 원래 가진 무명과 새로 지은 무명 모두가 정인이 되어 생멸의 과보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하는 과를 거론하여 인을 결론 맺은 것이니 이치를 따르는 인과를 통틀어 선이라고 하고 이치를 거스르는 인과를 통틀어 악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하는 두 번째인 선인과 선과를 거듭 드러냄이다. 여기에 두 구절이 있으니 첫 구절은 직접 밝힘이고 다음 구절은 거듭 해석함이다.
첫 구절에서 “선은 생멸의 과보를 받지 않고”라고 한 것은 선은 무명이 아니어서 적정寂靜하기 때문이고, “항상 불과를 받는다고 하느니라.”라고 한 것은 선은 적정한 본성을 따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거듭 해석함에서 “범부와 성인의 일체 선이 모두 무루無漏라고 한다면”이라고 한 것은 항상 (머무는) 과보를 받는 연유를 해석한 것이다. (선은) 적정한 본성을 따르기 때문에

001_0511_b_01L簡是非二者廣顯異相簡是非中卽有
001_0511_b_02L四句初句許其同一行者行者卽是假
001_0511_b_03L名衆生衆生之用總御諸法衆生之義
001_0511_b_04L處處受生縱卽逕於三世橫卽攬於五
001_0511_b_05L攬五陰故善惡皆屬一人逕三世
001_0511_b_06L前後相續百劫是爲佛法之正義也
001_0511_b_07L第二句遮同一心義心是陰法法是差
001_0511_b_08L善惡不同前後不一是故不得同
001_0511_b_09L一心也第三句者引佛證別第四句
001_0511_b_10L擧果責一略簡是非竟在於前

001_0511_b_11L
是故以下廣顯異相於中有四一者簡
001_0511_b_12L別善惡因果二者重顯善因善果三者
001_0511_b_13L會通敎理不違四者精釋果因無差
001_0511_b_14L中言一切善受佛果者謂生得善及作
001_0511_b_15L得善皆爲正因受佛果故無明受有
001_0511_b_16L爲生滅之果者生得無明作得無明
001_0511_b_17L爲正因受生滅果故是故以下擧果結
001_0511_b_18L順理因果通名爲善違理因果通名
001_0511_b_19L惡故也故名以下第二重顯善因善果
001_0511_b_20L於中二句初句直明後句重釋初中
001_0511_b_21L言善不受生滅之果者善非無明亦寂
001_0511_b_22L靜故唯受常佛之果者善是隨順寂靜
001_0511_b_23L性故重釋中言凡聖一切善皆名無漏
001_0511_b_24L是釋唯受常果之由由其隨順寂靜

001_0511_c_01L모든 번뇌를 거스르므로 무루라고 한다. 왜냐하면 인과 연에 연유하기 때문이다. ‘인因에 연유한다’고 한 것은 원래 가진 선은 본각을 따름을 말하니 본성이 청정한 본각을 직접 따라서 오고 이것을 따라 모든 새로 지은 선으로 바뀌는 것이다. 범부의 일체 선법은 모두 본각의 적정한 본성을 따르고 모든 번뇌를 거스르므로 무루라고 한다. 이 의미는 「수학품受學品」에 분명하게 나온다. ‘연緣에 연유한다’고 한 것은 세간에 있는 모든 선근은 모든 부처님의 무연대비無緣大悲와 평등복전平等福田에 의지하여 모두 생장하는 것이니 여래의 복전을 따르고 모든 번뇌를 거스르므로 무루라고 한다. 두 가지 인연에 연유하여 본성이 무루이기 때문에 적정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고 적정으로 되돌아가기 때문에 항상 머무는 과보를 받는다.
예를 들면 『대비경大悲經』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만약 어떤 사람이 삼유三有의 과보에 낙착樂著하여 부처님 복전에 나머지 모든 선근을 보시하고도 세세世世로 열반에 들지 않겠다고 발원한다면, 이러한 선근으로 열반에 들지 않는 일은 있을 수 없느니라. 이 사람이 비록 열반 구하기를 즐거워하지 않지만 부처님 계신 곳에서 모든 선근을 심었으므로, 나는 이 사람은 반드시 열반에 들 것이라 말하느니라.’ ”104)라고 하였다. 생각해 보면, 여기에서 ‘열반에 든다’고 한 것은 여래의 대반열반에 드는 것을 말하니 부처님의 복전이 이끌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보살영락본업)경』의 ‘항상 (머무는) 부처님의 과보’와 같고, (『대비경』의) 다른 곳에서 설한 유루선有漏善은 부차적인 연(傍緣)을 바라보고 설한 것이므로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하는 셋째인 (교리가 어긋나지 않음을) 회통함이다. 여기에서 먼저 방편의 가르침을 회통하고 나중에 실제 이치를 회통하였다.
먼저 (방편의 가르침을 회통함에서) “누과를 받는다”고 한 것은 (다른) 경전에서 오계와 십선은 인천과人天果를 받는다고 한 것을 말한다. 여래께서 하열한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악도惡途인) 삼도의 고통을 두려워하고 인천의 즐거움을 구하며 삼악업을 등지고

001_0511_c_01L之性違逆諸漏故名無漏所以然者
001_0511_c_02L由因緣故言由因者謂生得善隨順本
001_0511_c_03L正從性淨本覺而來從是轉成諸作
001_0511_c_04L得善所以凡夫一切善法皆順本覺寂
001_0511_c_05L靜之性違返諸漏故名無漏是義分明
001_0511_c_06L出受2) [46] 覺品也言由緣者凡諸世間
001_0511_c_07L所有善根皆依諸佛無緣大悲平等福
001_0511_c_08L田而生長所以隨順如來福田違逆諸
001_0511_c_09L故名無漏由是二緣性是無漏故
001_0511_c_10L不得已還歸寂靜歸寂靜故受常住果
001_0511_c_11L如大悲經言佛言阿難若人樂著三有
001_0511_c_12L果報於佛福田若行布施諸餘善根
001_0511_c_13L我世世莫入涅槃以此善根不入涅槃
001_0511_c_14L無有是處是人雖不樂求涅槃然於佛
001_0511_c_15L所種諸善根我說是人必入涅槃
001_0511_c_16L云此中入涅槃者謂入如來大般涅槃
001_0511_c_17L由佛福田之所引故還同此經常佛之
001_0511_c_18L而餘處說有漏善者望傍緣說
001_0511_c_19L不相違也而言以下第三會通於中先
001_0511_c_20L會權敎後通實理初中而言受漏果者
001_0511_c_21L3) [47] 說五戒十善受人天果如來爲化
001_0511_c_22L下劣衆生畏三途苦求人天樂背三業
001_0511_c_23L「相心」一作「心想」「學」一無「經」上
001_0511_c_24L一有「餘」

001_0512_a_01L모든 선법을 행하게 하셨기 때문에 ‘간접적인 인(緣因)’에 의거하여 이와 같이 설하셨다. “간접적인 인으로”라고 한 것은 십선 등이 만약 불과를 바라보면 정인이 되고 인천의 과보를 바라보면 다만 간접적인 인이 되는 것을 말하니 과보의 인이 바로 증상연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가르침을 회통함이고 다음은 도리를 회통함이다. “무루인이 아닌 것은 무명의 업으로 과보를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은, 앞에서 ‘모든 선은 누과漏果를 받지 않는다’고 하여서 세간에 있는 생멸의 누과가 바로 무명의 업으로 받는 것이기 때문에 선업의 정과正果가 되지 않는다. 여기에서 “무명의 업으로 과보를 받는 것”이라고 한 것은 무명의 힘으로 말미암아 깨닫지 못하는 마음이 움직이니 마음이 움직이는 모습을 업식業識이라고 한다. 무명이 업과 함께 정인이 되어 두루 일체 생사의 과보가 생기게 한다. 이것을 여실한 인과의 도리라고 한다. 교리를 회통함을 여기에서 마쳤다.
다음은 넷째인 과와 인(에 차이가 없음)을 자세하게 해석함이다. 여기에 둘이 있으니 먼저는 과(를 해석함)이고 나중은 인(을 해석함)이다. 과(를 해석함)에서 “이것을 삼수삼고三受三苦라 하니”라고 한 것은 무명의 업으로 받는 과보가 바로 이 삼수이고 삼고라고도 한다는 것이다. 고수는 악취惡趣에 있고 (나머지) 둘은 선도善道에 있는데, 이 (둘) 중에 낙수는 삼선三禪 이하이고 사수는 사선四禪 이상이다. 고수는 고고苦苦라고 하고 낙수는 괴고壞苦라고 하며, 세 번째인 사수는 행고行苦라고 하는데, 통틀어 말하면 삼수 모두가 행고이다. 여기까지는 과의 차별을 나타낸 것이다.
다음은 인에 대한 분별이다. “두 가지 수受는 선인善因을 연한 과보이고”라고 한 것은 낙수와 사수의 두 가지 수는 선업이 증상연을 인으로 한 과보이고, “고고는 악인惡因을 연한 과보이니”라고 한 것은 삼도(의 과보를 받는) 고고는 악업의 인연으로 생긴 과보라는 것이다. “일체가 모두 고이며 무명을 근본으로 하느니라.”라고 한 것은 일체의 삼수가 모두 행고이고 모두 무명에서 연유하여 근본 원인이기 때문이다.
좋고 나쁨에 가볍고 무거운 세 부류가 있어서 과보에도 삼도의 고통에 구별이 있다. 선善에 거칠고 정밀한 두 가지 구별이 있기 때문에 과보인 낙수와 사수가 같지 않다. 거친 선에는 산란심과 선정이 있기 때문에

001_0512_a_01L惡行諸善法故約緣因作如是說言緣
001_0512_a_02L因者謂十善等若望佛果卽爲正因
001_0512_a_03L人天報但爲緣因報因直是增上緣故
001_0512_a_04L此是會敎次通道理言非1) [48] 漏因者
001_0512_a_05L無明業受果故者前說諸善不受漏果
001_0512_a_06L世間所有生滅漏果正是無明業所受
001_0512_a_07L所以不爲善業正果此中無明業受
001_0512_a_08L果者由無明力不覺心動心動之相名
001_0512_a_09L爲業識無明與業以爲正因遍生一切
001_0512_a_10L生死之果是謂如實因果道理也會通
001_0512_a_11L敎理竟在於前此下第四精釋果因
001_0512_a_12L中有二先果後因果中言是名三受
001_0512_a_13L三苦者謂無明業之所受果卽是三受
001_0512_a_14L亦名三苦苦受在於惡趣二在於善道
001_0512_a_15L於中樂受三禪以下其捨受者四禪已
001_0512_a_16L苦受說名苦苦樂受說名壞苦
001_0512_a_17L三捨受名爲行苦通卽三受皆是行苦
001_0512_a_18L此是顯果差別下卽對因分別二受善
001_0512_a_19L緣因果者樂捨二受善業增上緣因之
001_0512_a_20L苦苦 [34] 惡因果者三途苦苦惡業因緣
001_0512_a_21L所生之果一切皆苦無明爲本者一切
001_0512_a_22L三受皆是行苦齊由無明爲本因故
001_0512_a_23L惡有輕重三品故果有三途苦別善有
001_0512_a_24L粗精二別故果有樂捨不同粗善有散

001_0512_b_01L낙수는 욕계와 색계의 두 과보에 통하고, 정밀한 선은 마음을 좋아하기 때문에 사수는 색계와 무색계를 관통한다. 이와 같은 선악의 가볍고 무거움과 삼계의 정밀하고 거침은 모두 무명의 업식을 근본으로 한다. 그러므로 삼도의 모든 고와 삼계의 모든 수 등이 찰나의 행고를 체體로 삼는 것이다. 그 인인 무명에는 두텁고 얇음이 없고 업상業相에는 거칠고 미세함이 없기 때문에 그 과인 행고에도 가볍고 무거움이 없고 찰나에도 느림과 빠름이 없다. 그러므로 “일체가 모두 고이며 무명을 근본으로 하느니라.”라고 하였다.
인과의 도리가 털끝만큼도 다름이 없음을 알 것이다.

③ 닦을 때에 겁수의 멀고 가까움에 답함

“불자여, 그대는 앞에서 일체 보살이 도를 닦는 겁수劫數의 멀고 가까움을 말하였느니라. 비유하자면 (길이가) 1리, 2리, 나아가 10리 되는 돌이 있는데 사방 길이도 마찬가지이니라. 무게가 3수銖인 천계의 옷으로 인간계의 일월의 햇수로 하여 삼 년에 한 번씩 스쳐서 이 돌이 다 없어지는 것을 1소겁小劫이라고 하느니라. 만약 1리, 2리, 나아가 40리인 것도 소겁이라 하느니라. 80리인 돌이 사방 길이도 마찬가지인데 무게가 3수인 범천의 옷으로 범천계의 백보광명주百寶光明珠를 일월의 햇수로 하여 삼 년에 한 번씩 스쳐서 이 돌이 다 없어지는 것을 중겁中劫이라 하느니라. 또 800리인 돌이 사방 길이도 마찬가지인데 무게가 3수인 정거천淨居天의 옷으로 정거천의 천보광명경千寶光明鏡을 일월의 햇수로 하여 삼 년에 한 번씩 스쳐서 이 돌이 다 없어지는 것을 일대아승기겁一大阿僧祇劫이라 하느니라. 불자여, 겁수는 말하자면 1리, 2리, 나아가 10리인 돌이 다 없어지면 1리 겁, 2리 겁이라 하고, 50리의 돌이 다 없어지면 50리 겁이라 하며, 백 리의 돌이 다 없어지면 백 리 겁이라 하느니라. 천 리의 돌이 다 없어지면 천 리 겁이라 하고 만 리의 돌이 다 없어지면 만 리 겁이라 하느니라.
불자여, 일체 현성이 이 수량에 들어가 일체 법문을 닦고 시절이 멀고 가까움에 따라 불과를 얻으며 그 수가 백 겁이 되면 등각을 얻느니라. 만약 일체중생이 이 수에 들어간다면 불과를 얻음이 멀지 않을 것이니 만약 들어가지 않으면 보살이라 하지 않느니라. 불자여, 법문이란 말하자면 십신심十信心이니 이것이 일체 행의 근본이니라. 그러므로 십신심 중에 하나의 신심에 십품十品의 신심이 있으면 백법명문百法明門이 되고, 다시 이 백법명심百法明心 중에 하나의 마음에 백 마음이 있으므로 천법명문이 되며, 다시 천법명심 중에 하나의 마음에 천 마음이 있으므로 만법명문이 되니 이와 같이 늘여 나가면 무량명문이 되고 더욱 상상법上上法까지 올라가면 명명법문明明法門이 되느니라. 백만 아승기 공덕과 일체 행은 모두 이 명문에 들어가느니라.”105)

ㄱ. 겁수의 많고 적음을 밝힘

다음은 세 번째인 (닦을 때에 겁수의 멀고 가까움에 대한) 세 번째 물음에 답함이다. 여기에 둘이 있으니 질문을 표방함과 질문에 답함이다. 질문에 답함에도 둘이 있으니 먼저 겁수의 많고 적음을 밝히고 뒤에는 도를 닦을 때에 멀고 가까움을 나타내었다. 처음 (겁수의 많고 적음을 밝힘)에도 둘이 있으니 먼저 세 부류로 겁의 양을 판별하였고 뒤에는 여러 가지 겁의 이름을 구별하였다.
처음에 “3수銖”라고 한 것은 6수가 1분이니 3수는 1분의 반이다.106)

ㄴ. 도를 닦을 때에 멀고 가까움을 나타냄

“일체 현성이” 이하는 그다음인 도를 닦을 때에 멀고 가까움을 밝힘이다. 여기에 둘이 있으니 먼저는 닦는 시간의 멀고 가까움을 밝히고 뒤에는 닦는 법의 많고 적음을 나타내었다. 처음(인 시간의 멀고 가까움을 밝힘)에도 곧바로 밝힘과 개별적으로 드러냄이다.
곧바로 밝힘에서 “일체 현성이 이 수량에 들어가”라고 한 것은 삼현이 처음으로 수량의 이치에 들어가기 시작하여 등각에 이르면 그 마지막이 된다는 것이다. 중간에 “백 겁”까지 걸린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만 리의 겁을 하나의 수로 삼아서 백 겁에 이르기 때문에 백만 아승기겁이라고 하였다.
다음으로 개별적으로 가려냄이다. “이 수에 들어간다면 불과를 얻음이 멀지 않을 것이니”라고 한 것은 비록 백만이 걸리더라도 오래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고, 또한 처음 발심한 때가 바로 정각을 이룬 것이기 때문이며, 백만이 바로 일념으로 들어가는 것을 이미 알았기 때문이다. “만약 들어가지 않으면 보살이라 하지 않느니라.”라고 한 것은 불퇴를 얻지 못하면 진실로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법문이란” 이하는 닦는 법의 많고 적음을 밝힌 것이다.

001_0512_b_01L有定故樂通欲色二果精善愛心故
001_0512_b_02L捨貫色無色界如是善惡輕重三界精
001_0512_b_03L齊以無明業識爲本是故三途諸苦
001_0512_b_04L三界諸受等以刹那行苦爲體以其因
001_0512_b_05L中無明無厚薄業相無麤細是故其果
001_0512_b_06L行苦無輕重刹那無奢促故言一切皆
001_0512_b_07L苦無明爲本當知因果道理毫釐無差
001_0512_b_08L違耶

001_0512_b_09L
此下第三答第三問於中有二牒問答
001_0512_b_10L答問之中亦有其二先明劫數多少
001_0512_b_11L後顯行道久近初中亦二先判三品劫
001_0512_b_12L2) [49] 衆多劫名初中言三銖者
001_0512_b_13L銖爲一分三銖卽分半也一切賢聖以
001_0512_b_14L次明行道久近於中有二先明行
001_0512_b_15L時久近後顯行法多少初中亦二
001_0512_b_16L明別顯正明中言一切賢聖入數量者
001_0512_b_17L謂三賢初始入量理乃至等覺爲其後
001_0512_b_18L於其中間逕於百劫者謂如前說萬
001_0512_b_19L里之劫以爲一數至於百劫故名百萬
001_0512_b_20L阿僧祗劫次簡別言若入是數得佛不
001_0512_b_21L久者雖逕百萬不以爲久故又初發心
001_0512_b_22L時便成正覺故已知百萬卽入一念故
001_0512_b_23L若不入者不名菩薩者未得不退非實
001_0512_b_24L菩薩故法門者以下明行法多少於中

001_0512_c_01L여기에 둘이 있으니 먼저 점차 늘어남을 밝히고 나중에는 총괄적으로 아우르며 결론지었다.

6. 인과품因果品

‘인과품’은, 여래께서 (중생을) 위해 설하신 두 부분 중에 처음인 자세하게 펼치는 문은 앞에서 마쳤고, 지금부터는 두 번째인 간략하게 아우르는 문으로 경의 종취를 판별한 것이다. 여기에서 간략하게 인과 과의 두 가지 문을 세우니 육위六位의 행덕行德과 42현성을 모두 아우르기 때문이다. 연유가 인이 되고 일어남이 과가 되어 연유와 일어남이 서로 만나 통한 것이 인과이다. 여기에서 이런 의미를 나타내었기 때문에 “인과품”이라고 하였다.

1) 질문
경수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현성의 정법正法은 이미 충분히 설하셨습니다. 인·과 두 가지의 모습은 어떻습니까?”107)

문장에 둘이 있으니 먼저는 물음이고 뒤는 대답이다. 물음의 두 구절은 앞엣것을 받은 것과 뒤엣것을 물은 것이다.

2) 대답
(1) 인에 대한 개별적인 대답 1 : 생기게 하는 근본을 밝힘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불자여, 삼세의 모든 부처님께서 닦으신 인은 말하자면 십반야바라밀이니 이것이 백만 아승기 공덕의 근본이어서 부처님과 보살도 그 안에 계시느니라. 그러므로 십법을 금강지혜해장金剛智慧海藏이라고 하니 일체 광명공덕光明功德의 행을 나오게 하느니라.
불자여, 십반야바라밀에서 보시를 행하는 데에 세 가지 연이 있으니 첫째는 재물이고, 둘째는 법이며, 셋째는 중생에게 무외無畏를 보시하는 것이니라. 계에 세 가지 연이 있으니 첫째는 자성계自性戒이고, 둘째는 수선법계受善法戒이며, 셋째는 이익중생계利益衆生戒이니라. 인忍에 세 가지 연이 있으니 첫째는 고행을 참고, 둘째는 외악外惡을 참으며, 셋째는 제일의제인第一義諦忍이니라. 정진精進에 세 가지 연이 있으니 첫째는 큰 서원의 마음을 일으키고, 둘째는 방편으로 나아가며, 셋째는 부지런히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니라. 선정에 세 가지 연이 있으니 첫째, 선정은 어지러운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둘째, 선정은 일체 공덕을 생기게 하며, 셋째, 선정은 중생을 이롭게 하느니라. 지혜에 세 가지 연이 있으니 첫째는 유제를 비추고, 둘째는 무제를 비추며, 셋째는 중도제일의제를 비추느니라. 원願에 세 가지 연이 있으니 첫째는 자행自行의 원이고, 둘째는 신통의 원이며, 셋째는 바깥으로 교화하는 원이니라. 방편에 세 가지 연이 있으니 첫째는 향과向果에 나아가고, 둘째는 유무를 잘 회통시키며, 셋째는 일체법을 버리지도 않고 받지도 않느니라. 신통력에 세 가지 연이 있으니 첫째는 과보의 신통이고, 둘째는 선정을 닦는 신통이며, 셋째는 변화의 신통이니라. 무구혜無垢慧에 세 가지 연이 있으니 첫째는 무상지無相智이고, 둘째는 일체종지一切種智이며, 셋째는 변화지變化智이니라.”108)

대답에도 둘이 있으니 개별적인 대답과 대답을 결론 맺음이다. 개별적인 대답에도 둘이 있으니 먼저는 인이고 나중은 과이다. 인에 둘이 있으니 먼저는 생기게 하는 근본을 밝힘이고 나중은 생겨나는 덕행을 드러냄이다.
처음 (생기게 하는 근본을 밝힘)에도 둘이 있으니 총괄적으로 밝힘과 개별적으로 해석함이다. 총괄적으로 밝힘에 세 구절이 있다. 첫째는 사람을 거론하여 행을 드러냄이다. “십반야”라고 한 것은 십도十度(십바라밀)가 모두 혜慧를 으뜸으로 삼기 때문이고, 혜를 떠나서는 삼륜三輪을 없앨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근본을 해석함이고, 셋째는 근본을 결론지음이다.
개별적으로 해석함에는 먼저 표방하고 나중에 해석하였다. 『화엄경』에서는 “십도에 각각 열 가지가 있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이 경에서는 간략하게 세 가지를 내세워서 저 경의 열 가지를 아울렀다. 그중에 앞부분의 일곱 (바라밀)은 문장에 환히 드러나 있으므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여덟 번째인) 방편의 세 가지 중에 “유무를 잘 회통시키며”라고 한 것은 인연으로 합하기 때문에 ‘있다’고 하는 것이지 ‘있는 것이 있다’고 하지 않고, 인연으로 흩어지기 때문에 ‘없다’고 하는 것이지 ‘있는 것이 없다’고 하지 않는다. 만약 이와 같다면 일체 어려운 질문이 회통하지 않을 것이 없기 때문에 “잘 회통시키며”라고 하였다. “버리지도 않고 받지도 않느니라.”라고 한 것은 생사와 열반의 모든 법에 꿈처럼 통달하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니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버리지 않는 것이고

001_0512_c_01L有二先明轉增後結總攝

001_0512_c_02L困/因果品

001_0512_c_03L
因果品者如來爲說有二分中初廣開
001_0512_c_04L門竟在於前此下第二就略攝門以辨
001_0512_c_05L經宗此中略立因果二門總攝六位行
001_0512_c_06L四十二賢聖故所由爲因所起爲
001_0512_c_07L由起相待通爲因果此中顯是義
001_0512_c_08L故名因果品也
[問]
在文有二先問後答
001_0512_c_09L問中二句領前問後
[答]
[明能生根本]
答中亦二別答
001_0512_c_10L結答別中亦二先因後果因中有二
001_0512_c_11L先明能生根本後顯所出德行初中亦
001_0512_c_12L總明別釋總明之中有其三句
001_0512_c_13L者擧人標行言十般若者十度皆以慧
001_0512_c_14L爲首故離慧不能忘三輪故二者釋本
001_0512_c_15L三者結本也別釋之中先牒後釋
001_0512_c_16L嚴經說十度之中各有十種今此經中
001_0512_c_17L略立三三攝彼十十 [50] 於中前七文顯可
001_0512_c_18L方便三中巧會有無者因緣合故謂
001_0512_c_19L之有非曰有是有因緣散故謂之無
001_0512_c_20L非曰有是無若如是一5) [51] 切難問無不
001_0512_c_21L會通故曰巧會不捨不受者謂於生死
001_0512_c_22L涅槃諸法達如夢非有非6) [52] 故不捨
001_0512_c_23L「爲」經作「無」「別」疑「列」揷入一行
001_0512_c_24L
「十」一無「一」疑剩「無」下一有「非無」

001_0513_a_01L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받지 않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일체에 장애될 것이 없다.
신통력에서 “과보의 신통”이라고 한 것은 무분별지의 힘에 의지하여 마음대로 자재하기 때문이고, “선정을 닦는 신통”이라고 한 것은 극한의 선정을 닦은 힘에 의지하여 의지가 자재하기 때문이며, “변화의 신통”이라고 한 것은 신통 지혜의 힘에 의지하여 열네 가지로 변화하기 때문이니 그 앞의 두 신통력과는 다르다.
열 번째(인 무구혜바라밀)에서 “무상지無相智”라고 한 것은 분별지로 무상의 이치를 보기 때문이다. 여섯 번째인 혜도慧度(반야바라밀)는 무분별이기 때문이다.

(2) 인에 대한 개별적인 대답 2 : 생겨나는 덕행을 드러냄
“불자여, 십지十智에서 일체 공덕행이 생겨나느니라. 일곱 가지 재물은 신信·시施·계戒·문聞·혜慧·참慚·괴愧이니 (이것을) 바탕으로 써서 성불하기 때문에 재물이라고 하느니라. 사섭四攝은 이익利益·부드러운 말(濡語)·시법施法·동사同事이다. 법변法辯·의변義辯·어변語辯·요설변樂說辯의 네 가지 변재법에는 걸림이 없고 막힘이 없기 때문에 무애無礙라고 하느니라. 걸림이 없는 지혜에서 지혜가 생겨나기 때문에 요의경에 의지하고 불요의경에 의지하지 않으며,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않으며, 의미에 의지하고 말에 의지하지 않으며, 지혜에 의지하고 아는 것에 의지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니라. 지혜에서 십력·사무외·육통六通·삼명三明의 백만억 아승기 공덕이 생겨나느니라.”109)

그다음은 생겨나는 덕행을 밝힘이다. 여기에 셋이 있으니 표방·해석·결론 맺음이다. 표방에서 “십지十智”라고 한 것은 앞에서 말한 십바라밀이다. 열 가지를 모두 지혜라고 한다는 것은 앞에서 해석하였다. 여기에서는 생기게 하는 근본을 거론하여 생겨나는 덕행을 총체적으로 표방하였다.
“일곱 가지 재물은” 이하는 생겨난 것을 개별적으로 해석함이다. 여기에 셋이 있으니 첫째는 생겨나는 덕행을 곧바로 밝힘이고, 둘째는 비치는 경계를 보임이며, 셋째는 제거되는 장애를 나타냄이다.

① 생겨나는 덕행을 곧바로 밝힘

처음 (생겨나는 덕행을 곧바로 밝힘)에 둘이 있으니 개별적으로 밝힘과 총괄적으로 거론함이다. 개별적으로 밝힘에서 간략하게 여덟 가지 문으로 나타내었다.
첫째, 일곱 가지 재물을 밝혔다. 일체 현성이 이 일곱 가지 덕을 이용하여 오래도록 법신을 기르고 혜명慧命을 풍요롭게 하며 성불하는 데에 써도 끝까지 없어지지 않으니 이런 의미에서 성재聖財라고 하였고, 현인들이 성불하는 데에 쓴다고 하여 재물이라고 말한 것이다. 현성이 쓰는 덕행이 다양하지만 일곱 가지를 성재로 삼은 이유는 진실로 ‘신信’을 모든 덕의 밑천으로 삼고, ‘시施’로 몇 배의 이익을 내며, ‘계戒’로 재난財難을 제거하고, ‘문聞’으로 모든 진귀한 것을 채집하며, ‘참慚’으로 선을 숭상하여 증장시키고, ‘괴愧’로 악을 막아 멀리 벗어나며, ‘혜慧’로 (나머지) 여섯 재물을 거느리고 이끌어서 증진시켜 (십주·십행·십회향·십지·무구지·묘각지의) 육입六入의 현성들이 풍요로워진다. 이 일곱 가지가 요긴한 것이기 때문에 이를 “일곱 가지 재물”이라고 한 것이다.
총괄적으로 설명하면 그렇고 구체적으로 나누어서 설명하면, 일곱 가지 재물이 십도十度에서 생겨났지만

001_0513_a_01L非有故不受故於一切無所障礙也
001_0513_a_02L力中言報通者依無分別智力任運自
001_0513_a_03L在故脩定通者依脩邊際定力作意
001_0513_a_04L自在故變化通者依通慧力十四變化
001_0513_a_05L不同其前二力也第十中言無相智
001_0513_a_06L以分別智觀無相理故第六慧度
001_0513_a_07L是無分別故

001_0513_a_08L[顯所出德行]
此下明其所出德行於中有三謂標釋
001_0513_a_09L標中言十智者卽是前說十波羅蜜
001_0513_a_10L十皆名智如前釋故此擧能生根本
001_0513_a_11L總標所出德行七財以下別釋所生
001_0513_a_12L中有三一者正明所生德行二者示彼
001_0513_a_13L所照之境三者顯其所除之障初中有
001_0513_a_14L別明總擧別明之內略顯八門
001_0513_a_15L一明七聖財一切賢聖用此七德
001_0513_a_16L養法身資益慧命用之成佛終無窮
001_0513_a_17L以是義故名爲聖財故言賢用成佛
001_0513_a_18L故說財賢聖所用德行衆多所以取七
001_0513_a_19L爲聖財者良由信爲衆德之基施爲出
001_0513_a_20L1) [53] 之利戒能除劫財難聞能採集諸
001_0513_a_21L慚崇善而增長愧拒惡而遠離慧能
001_0513_a_22L將導六財令其增進六入賢聖豊饒
001_0513_a_23L七爲要是故說此名爲七財總說雖然
001_0513_a_24L於中分別者此中七財十度所生所以

001_0513_b_01L수승한 신信 등(의 일곱 가지)만을 취한 까닭은 이와 같은 일곱에 모두 열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화엄경』) 「십무진장품十無盡藏品」에서 자세하게 설하였다. 거기에서 “어떠한 것을 보살의 믿음의 (무진)장이라고 하는가? 이 보살은 일체법이 공하여 진실됨이 없음을 믿고 일체법에는 모양이 없음(無相)을 믿으며, 일체법에는 원이 없음(無願)을 믿고 일체법은 지은 이가 없음(無作者)을 믿으며, 일체법은 진실이 아님을 믿고 일체법에는 견고함이 없음을 믿으며, 일체법은 한량이 없음을 믿고 일체법은 위가 없음을 믿으며, 일체법은 헤아릴 수 없음을 믿고 일체법은 생겨나지 않음을 믿는다.”110)라고 하고는 자세하게 설하였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깊은 법공法空을 깊이 믿음을 밝힌 것이다. 첫째, ‘공하여 진실됨이 없음을 믿음’은 제불 여래의 진실한 공덕이 무소유이기 때문이고, 둘째, ‘모양이 없음’은 제불의 상호는 얻을 수 없기 때문이며, 셋째, ‘원이 없음’은 대원大願으로 제도할 중생이 공하기 때문이고, 넷째, ‘지은 이가 없음’은 법성의 연기는 지을 수가 없기 때문이며, 다섯째, ‘진실이 아님’은 허공은 무위여서 진실이 되지 않기 때문이고, 여섯째, ‘견고함이 없음’은 열반은 견고함과 진실함이 없는 데에 상주하기 때문이며, 일곱째, ‘한량이 없음’은 과거세는 공하여 사량법으로 구할 수 없기 때문이고, 여덟째, ‘위가 없음’은 미래세는 공하여 증상법으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며, 아홉째, ‘헤아릴 수 없음’은 현재의 시방세계도 공하여 가깝다 멀다 등으로 생각하여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고, 열째, ‘생겨나지 않음’은 삼세의 겁은 공하여 과거·현재·미래의 (법이) 생겨남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열 가지를 믿음은 (일체법을) 얻을 수는 없지만 일체 제법을 없다고 버리지도 않는 것이다. 예를 들면 (「무진장품」의) 다음 문장에서도 “모든 불법은 불가사의하다고 (듣고도) 마음으로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고……일체 겁에 들어감이 불가사의하다고 (듣고도) 마음으로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111)라고 하였다.
신재信財를 예로 들어 열 가지가 있음을 이렇게 설명하였으니 나머지 여섯 가지 (재물도) 마찬가지이다.
둘째, 사섭四攝을 밝혔다. 『유가론』 보살지菩薩地의 설명이 있다.

어떤 것이 보살이 방편으로 신업·어업·의업을 섭수하는 것인가? 사섭의 일을 말한다. 또 무슨 인연으로

001_0513_b_01L但取殊勝信等如是七中皆有十種
001_0513_b_02L十無盡藏品廣說彼言何等爲菩薩信
001_0513_b_03L此菩薩信一切法空無眞實信一切
001_0513_b_04L法無相信一切法無願信一切法無作
001_0513_b_05L信一切法不實信一切法無堅固
001_0513_b_06L信一切法無量信一切法無上信一切
001_0513_b_07L法不可度信一切法不生乃至廣說
001_0513_b_08L案云是明深信2) [54] 深法空一信空無眞
001_0513_b_09L實者諸佛如來眞實功德無所有故
001_0513_b_10L無相者諸佛相好不可得故三無願者
001_0513_b_11L大願所度衆生空故四無作者者法性
001_0513_b_12L緣起無能作故五不實者虗空無爲不
001_0513_b_13L成實故六無堅固者涅槃常住無堅實
001_0513_b_14L七無量者過去世空無可3) [55] 求思
001_0513_b_15L量法故八無上者未來世空無應當
001_0513_b_16L得增上法故九不可度者現在十方世
001_0513_b_17L界亦空不可圖度遠近等故十不生者
001_0513_b_18L三世劫空曾今當生不可得故能信十
001_0513_b_19L種皆不可得而不撥無一切諸法如彼
001_0513_b_20L下文言皆 [35] 諸佛法不可思議心不驚怖
001_0513_b_21L乃至皆 [36] 入一切劫不可思議心不驚怖
001_0513_b_22L如說信財有十如是後六亦爾

001_0513_b_23L
第二明四攝者瑜伽論菩薩地云何菩
001_0513_b_24L薩方便所攝身語意業謂四攝事復何

001_0513_c_01L사섭의 일만 방편이라고 하는가? 모든 보살이 이 네 가지를 연유하여 모든 중생을 두루 섭수하고 조복·성숙시키니 이것 말고는 지나치거나 더해 보이는 것도 없다.
무엇을 네 가지 방편이라고 하는가? 첫째는 수순방편隨順方便(ⓢ anugrāhaka upāya)이고, 둘째는 능섭방편能攝方便(ⓢ grāhaka upāya)이며, 셋째는 영입방편令入方便(ⓢ avatāraka upāya)이고, 넷째는 수전방편隨轉方便(ⓢ anuvarttaka upāya)이다.
(먼저 모든 보살이 보시를 행하면 이것을 수순방편이라고 한다.) 무슨 까닭인가? 먼저 갖가지 재물을 보시하여 유정을 이익되게 하고서 설하는 것을 받아서 가르침을 받들어 행하게 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애어愛語를 행하여 여러 곳에서 어리석은 이가 있으면 그 어리석음을 제거하여 남음이 없게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를 섭수하여 바른 이치를 관찰하게 하니 이와 같은 것을 능섭방편이라고 한다. 모든 보살이 그 유정을 섭수하여 바른 이치를 관찰하게 하고 나면 다음으로는 이행利行을 행하여 그 유정을 선하지 않은 곳에서 나오게 하고 선한 곳으로 이끌고 조복시켜 평안한 곳에 있게 하고 서게 하니 이와 같은 이행을 영입방편이라고 한다. 모든 보살이 이와 같은 방편으로 모든 유정을 (좋은 곳으로) 들어가게 하고 나면 최후에 가서는 그와 함께 바른 일에 대해서 같이 수행하여 그가 변하게 한다. 이러한 인연으로 교화받은 이가 ‘그대 스스로가 원만한 청정한 믿음과 (원만한) 시라尸羅(계)와 (원만한) 보시와 (원만한) 지혜가 없는데 어떻게 선에 의지하여 다른 사람을 이끌고 잘못된 것을 지적하여 뉘우치게 하고 꾸짖어 이끌어서 기억시키겠는가?’ 하는 말을 하게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보살이 동사同事로 일을 섭수함을 수전방편이라 함을 알아야 한다.112)

논서의 설명은 이와 같다. 지금 이 『(보살영락본업)경』에서 말한 “이익·부드러운 말·시법·동사”는 차례는 비록 다르지만 행실은 같은 것이다.
셋째, 사변四辯을 밝혔다. 이것은 사무애이니 의미는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001_0513_c_01L因緣唯四攝事說名方便謂諸菩薩由
001_0513_c_02L是四種於諸衆生普能攝受調伏成
001_0513_c_03L除此無有若過若增何等名爲四種
001_0513_c_04L方便一隨順方便二能攝方便三令
001_0513_c_05L入方便四隨轉方便何以故先以種
001_0513_c_06L種財物布施饒益有情爲欲令彼聽受
001_0513_c_07L所說奉敎行故次行愛語於彼彼處有
001_0513_c_08L愚癡者爲欲除彼所有愚癡令無餘故
001_0513_c_09L令其攝受瞻察正理如是名爲能攝方
001_0513_c_10L便若諸菩薩如彼有情4) [56] 瞻察正道理
001_0513_c_11L次行利行拔彼有情出不善處
001_0513_c_12L其善處勸導調伏安處建立如是利行
001_0513_c_13L名令入方便若諸菩薩如是方便令諸
001_0513_c_14L有情得趣入已最後與其於正事業同
001_0513_c_15L共脩行令彼隨轉由是因緣令所化
001_0513_c_16L者不作是念 [37] 汝自無有圓滿淨信尸羅
001_0513_c_17L施惠何賴於善勸導於他諫悔呵擯
001_0513_c_18L與作憶念是故菩薩同事攝事當知是
001_0513_c_19L名隨轉方便論說如是今此經言利益
001_0513_c_20L濡語施法同事次第雖異行實應同
001_0513_c_21L

001_0513_c_22L
第三明四辨者是四無礙義如上說
001_0513_c_23L「信」一作「倍」「其」疑「甚」「進」疑「追」
001_0513_c_24L
「受」上疑脫「攝」

001_0514_a_01L
넷째, 사의四依를 밝혔다. 처음은 세간 중생이 의지하는 행을 버리는 것이고, 다음은 세간에 꾸미는 말과 문장을 버리는 것이며, 셋째는 부처님이 가르치신 불요의경을 버리는 것이고, 넷째는 요의경의 문혜聞慧의 분별을 버리는 것이니 이와 같은 차례로 점차 들어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현양론』에서 이렇게 설명하였다.

의지처(所依)는 네 가지 의지를 말하니 자세한 설명은 경전에서와 같다. 첫째는 법에 의지하고 중생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어느 법이 여래께서 말씀하신 것이거나 혹은 제자가 말한 십이분교이면 따라서 배우고 따라서 나아가지만, 중생이 행한 것을 (따라서) 배우지 않고 따라서 나아가지 않는 것이다. 둘째는 뜻에 의지하고 글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어느 법이 만들고 꾸미는 문장이나 자구字句를 수식하는 말이 아니고 오직 원만하고 청정하며 깨끗한 범행梵行을 드러내는 것이면, 이 법에 대해서 공경하고 믿고 이해해야 할 것이고, 뒤바뀐 범행을 나타냈거나 나아가 범행을 드러낸 것이 아니고 다만 만들고 꾸미는 문장이나 자구를 수식하는 말에는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셋째는 요의경에 의지하고 불요의경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여래께서 말씀하신 것과 비슷하고 매우 심오한 공성空性에 상응하고 온갖 연을 따르는 연기법에 대하여 말의 얕은 뜻에 망령되게 집착하지 않고, 스스로 내면적으로 보고 취한 마음에도 머물지 않으며, 오직 요의를 나타내는 경전을 부지런히 찾고 연구하는 것이다. 넷째는 지혜에 의지하고 아는 것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듣기만 하여도 지식의 만족을 일으키고 곧장 법을 따르고 법을 닦으며 모든 번뇌를 없애기 위해서 스스로 내면적으로 진제眞諦의 지혜를 부지런히 구하여 증득하는 것이다.113)

다섯째 십력과 여섯째 사무외와 일곱째 육통六通과 여덟째 삼명三明의 네 문은 다음 문장에서 설명할 것이다.
여기까지가 개별적으로 밝힘이다. 다음으로 “백만억 아승기 공덕”이라고 한 것은 둘째 총괄적으로 거론함이다.

② 비치는 경계를 보임

“차례로 생긴 지혜는 여덟 가지 세제世諦의 일체법을 연하느니라. 사제와 이제와 십이연의 제법은 인연으로 성립하여 임시법이고 무아인 유법有法이니라. 상대相待여서 일체상은 공허하고 상속하여 하나라고 하여도 공하여 얻을 수 없느니라. 인으로 생겨나 (조건이) 모여서 일어나는 것이니 법은 연이 아니어서 실제와 실제가 모여 유有인 것을 생겨나는 법이라고 하느니라. 법이 임시인 것은 만들어진 법이어서 그런 이름을 받으며 작용을 일으키면 모여 있는 법이라고 하느니라. 그러므로 여덟 가지 유위법은 일체법의 근본 지혜가 비추는 곳이니라.”114)

여기까지는 첫째인 생겨나는 덕행을 곧바로 밝힘이었고, 다음은 둘째인 대상 경계를 보임이다. 여기에 셋이 있으니 표방·해석·결론 맺음이다.

001_0514_a_01L第四明四依者初捨世間衆生所依行
001_0514_a_02L次捨世間飾詞文句三捨佛敎不了義
001_0514_a_03L四捨了經聞慧分別如其次第漸趣
001_0514_a_04L入故如顯揚論云所依者謂四種依
001_0514_a_05L廣說如經一依法不依衆生謂若法是
001_0514_a_06L如來所說或弟子說十二分敎隨學
001_0514_a_07L隨聽 [38] 衆生所行行學亦不隨轉二依
001_0514_a_08L義不依文謂若法非1) [57] 詞者所造綺
001_0514_a_09L文字句唯能顯了獨法淸淨鮮白梵行
001_0514_a_10L於此法中恭敬信解非於能顯顚倒梵
001_0514_a_11L及不顯了梵行但飾詞者所造綺
001_0514_a_12L文字句三依了義經不依不了義經
001_0514_a_13L於如來所說相似甚深空性相應隨順諸
001_0514_a_14L緣緣起法中不妄執著如言淺義亦不
001_0514_a_15L住自內見取心唯勸 [39] 尋究顯了義經
001_0514_a_16L依智不依識謂不唯聽聞而生知足便
001_0514_a_17L不進脩法隨法行然爲盡諸漏 [40] 求自
001_0514_a_18L內證眞諦智故

001_0514_a_19L
第五十力第六四無畏第七六通
001_0514_a_20L八三明如是四門後文當說此是別
001_0514_a_21L次言百萬億阿僧祗功德者第二總
001_0514_a_22L

001_0514_a_23L
上來第一正明所生一切德行此下第
001_0514_a_24L二示所緣境於中有三謂標釋結

001_0514_b_01L
처음 (표방)에 “차례로 생긴 지혜는 여덟 가지 세제世諦의 일체법을 연하느니라.”라고 한 것은 비추는 지혜를 거론하여 대상인 경계를 표방한 것이다. 제일의제는 모습이 없지만 널리 비추므로 지금은 다만 세제의 차별을 드러내었다.
두 번째는 여덟 가지 세제법을 개별적으로 나타내었다. 첫째는 사제四諦이니 오염된 법과 청정한 법 두 가지에 각각 과와 인이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이제二諦이니 첫째 문의 이제가 모두 세제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십이연十二緣이니 의미는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넷째는 연으로 이루어진 임시이니 예를 들면 (다섯 가지) 음陰이 연하여 임시로 사람 하나를 이루거나 또 사진四塵이 연하여 임시로 기둥 하나를 이루는 등이다. 경에서 “인연으로 성립하여 임시법이고 무아인 유법有法이니라.”라고 하였다. 다섯째는 상대相待의 임시이니 상대에 셋이 있다. 첫째는 서로 빼앗는 것이니 예를 들면 길고 짧음 등이다. 둘째는 서로 피하는 것이니 예를 들면 청색과 황색 등이다. 셋째는 서로 마주하는 것이니 예를 들면 있음과 없음이다. 경에서 “상대相待여서 일체상은 공허하고”라고 하였다. 여섯째는 상속하는 임시이니 전후의 생각에 의지하여 임시 하나를 이루고 앞에서 뒤로 이어져 끊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경에서 “상속하여 하나라고 하여도 공하여 얻을 수 없느니라.”라고 하였다. 일곱째는 법의 임시이니 한 찰나 무렵의 마음·심소법과 모든 사진의 극미 등의 법은 인을 따라 생겨나고 서로 모여서 일어나며 연을 떠나면 법이 아니니 곧 법은 연이 아니므로 인에서 생겨난 임시라고 하고 법의 임시라고도 한다. 경에서 “인으로 생겨나 (조건이) 모여서 일어나는 것이니 법은 연이 아니어서 실제와 실제가 모여 유有인 것을 생겨나는 법이라고 하느니라.”라고 하였다. ‘실제와 실제가 모여 유有인 것’이라고 한 것은, 일극미는 연으로 이루어진 임시 실제이고 찰나도 상속하는 임시 실제이니 이와 같이 모든 실제의 모습이 모인 것이기 때문에 “실제와 실제가 모여 유有인 것”이라고 하였다. 곧 모든 극미를 법의 임시라고 한다. 여덟째는 감수의 임시이니 극미를 감촉할 때에는 거친 감촉이 된 그 감수를 본래 감촉이라고 해야 하지만 그 감촉의 대상의 작용을 보고 감촉과 대상이 같은 종류여서 서로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나머지 색향미色香味의 경우도 당연히 그렇다. 앞에서 설명한 연으로 이루어진 임시법과 달리 다른 종류의 연을 근거로 연으로 이루어진 임시라고 한다. 경에서 “법이 임시인 것은

001_0514_b_01L言次第生智能緣八世諦一切法者
001_0514_b_02L能照智標所緣境第一義諦無相易照
001_0514_b_03L今但顯世諦差別第二別顯八世諦
001_0514_b_04L一者四諦染淨二法各有果因故
001_0514_b_05L二者二諦初門二諦皆是世諦故三者
001_0514_b_06L十二緣義如前說故四者緣成假
001_0514_b_07L陰緣成一假人又四塵緣成一假柱等
001_0514_b_08L如經緣成假法無我有法故五者相待
001_0514_b_09L相待有三一相2) [58] 相待如長短等
001_0514_b_10L二相避相待如靑黃等三相對相待
001_0514_b_11L如有無如經相待一切相虗故六者相
001_0514_b_12L續假依前後念以成一假從前至後不
001_0514_b_13L斷絕故如經相續名一空不可得故
001_0514_b_14L者法假一刹那頃心心所法及諸四塵
001_0514_b_15L極微等法從因而生相集而起離緣
001_0514_b_16L非法卽法非緣名因生假亦名法假
001_0514_b_17L如經因生集起卽法非緣實實集有
001_0514_b_18L名生成法故實實集有者如一極微是
001_0514_b_19L緣成假之實3) [59] 刹那是相續假之實
001_0514_b_20L是諸實相聚故言實實集有卽諸極微
001_0514_b_21L名爲法假八者受假如極微觸以成
001_0514_b_22L麤觸受本觸名起觸對用如說觸塵同
001_0514_b_23L類相成餘色香味當亦爾不同前說緣
001_0514_b_24L成假法攬異類緣名緣成假如經法假

001_0514_c_01L만들어진 법이어서 그런 이름을 받으며 작용을 일으키면 모여 있는 법이라고 하느니라.”라고 하였다. 같은 법이 서로 모였기 때문에 ‘모여 있는 법’이라고 하였고, 극미가 거친 것이 되기 때문에 ‘만들어진 법’이라고 하였다.
(법의 임시·감수의 임시·이름의 임시의) 세 가지 임시 문에서 셋째인 이름의 임시는 이미 앞에서 나타내었기 때문에 거듭 말하지 않는다. 앞에서 (「불모품」의) 두 번째 (대답에서) 모든 이제의 유(를 설명한 곳)에서 중제中諦가 바로 이름의 임시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하는 셋째인 총체적으로 결론 맺음이니 이와 같은 여덟 가지 문에 모두 유위가 있기 때문에 “여덟 가지 유위법은”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제 중에 멸제滅諦와 이제 안의 무제無諦와 상대相待의 임시 중에 무위의 셋은 유위는 아니지만 많은 의견을 따라서 유위로 통칭하였다.
“근본 지혜가”라고 한 것은 관찰에 들어갈 때에 쌍으로 비추는 지혜를 말하니 관찰에서 나올 때의 지혜를 상대하여 근본 지혜라고 한 것인데, 쌍으로 비추는 (지혜인 여리지와 여량지) 중에 여량지가 끝까지 비추는 것이다. 이 여덟 가지를 모두 세제법世諦法이라고 했기 때문에 관찰에서 나올 때의 지혜도 이 여덟 가지를 비추지만 (이 지혜만) 장애를 다스릴 수 있기 때문에 근본 지혜라고 설하였다. 관찰에서 나올 때의 지혜는 장애를 끊지 못하기 때문이다.

③ 제거되는 장애를 나타냄

“다시 이 지혜에서 제거하는 것은 오개五蓋인 탐貪·진瞋·수睡·도掉·의疑와 사식四食인 촉觸·식識·사思·단식段食과 사생四生인 난생·태생·습생·화생과 십악·오역·팔도·삼장三障·팔난·십삼번뇌·육도·삼계·육십이견六十二見·사류四流·사박四縛·사취四取·구뇌九惱·칠식주七識住·사결四結인데, 제거되는 모든 것은 불선不善이니라. 불자여, 십지十智의 경계가 없어지는 일체 공덕을 불인佛因이라고 하니 그대는 받아서 닦아야 하느니라.”115)

다음은 셋째인 제거되는 장애를 나타냄이다. 여기에 셋이 있으니 표방·해석·결론 맺음이다.
처음 (표방)에 “다시 이 지혜에서 제거하는 것은”이라고 한 것은 앞의 근본 지혜가 장애를 제거하기 때문이다.
“오개五蓋인” 이하는 모든 장애의 인과와 모든 근심을 통틀어 제거함을 개별적으로 나타낸 것이니, 여기에서 간략하게 열여덟 가지를 거론하였다. “팔도”라고 한 것은 유위의 사도四倒와 무위의 사도가 있기 때문이다.116) “구뇌九惱”라고 한 것은 아홉 가지 괴로움이 있는 곳(九惱處)을 말한다. 아홉 가지 괴로움이 있는 곳은 셋 곱하기 셋으로 아홉이니 첫째는 내가 원망하는 집을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는 내가 친애하는 이를 미워하는 것이며, 셋째는 곧바로 나를 괴롭히는 것이다. 이것이 삼세에 통하기 때문에 아홉 가지 괴로움이 된다. 나머지 여러 가지는 보통 설명하는 것과 같다. “사결四結”이라고 한 것은 사계四繫이니 아비달마(對法)에서 뇌惱와 결結을 설명하는 것과 같다.117) “모든 것은 불선不善이니라.”라고 한 것은 모두가 열반의 진실한 선과 다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생겨나는 덕행을 곧바로 밝힘과 비치는 경계를 보임과 제거되는 장애를 나타냄의) 세 부분을 합하여 (인에 대한 개별적인 대답의 두 번째인 생겨나는 덕행을 드러냄의 표방·해석·결론 맺음 중)

001_0514_c_01L造法受名起用名聚法故同法相集故
001_0514_c_02L名聚法以微成麤故言造法三假門內
001_0514_c_03L第三名假已顯4) [60] 故不重說諸前第二
001_0514_c_04L二諦之有中諦正是名假義故是故以
001_0514_c_05L下第三總結如是八門皆有有爲
001_0514_c_06L言八有爲法然四諦之中滅諦二諦之
001_0514_c_07L內無諦相待假中無爲此三雖非有爲
001_0514_c_08L從多通名有爲言本智者謂入觀時
001_0514_c_09L雙照之智對出觀智名爲本智雙照之
001_0514_c_10L內量智邊照是八皆名世諦法故其出
001_0514_c_11L觀智亦照此八但爲乘顯能治障故說
001_0514_c_12L其本智以出觀智不斷障故

001_0514_c_13L
此下第三顯所除障於中有三謂標釋
001_0514_c_14L初言復從是智能除者謂前本智除
001_0514_c_15L障故五葢以下別顯諸障因果諸患通
001_0514_c_16L爲所除此中略擧十八種法言八倒者
001_0514_c_17L有爲四倒無爲四倒故九惱者謂九惱
001_0514_c_18L九惱處者三三爲九一愛我怨家
001_0514_c_19L二憎我親愛三正來惱我此通三世故
001_0514_c_20L成九惱其餘諸門如常所說言四結者
001_0514_c_21L卽是四繫如對法說惱結中言皆名不
001_0514_c_22L善者皆違涅槃眞實善故上來三分合
001_0514_c_23L「餘」疑「飾」「集」一作「奪」「又」下一
001_0514_c_24L有「一」
「於」下疑脫「前」

001_0515_a_01L두 번째인 생겨나는 것을 개별적으로 밝힘이다.
“십지十智의” 이하는 세 번째인 결론을 맺어 권함이다. “십지十智의 경계가 없어지는”이라고 한 것은 십지의 경계인 여덟 가지 세제법이 십지로 없애는 열여덟 가지 불선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인을 거론한 것은 아니다. 일체 공덕을 가진 나머지는 모두 불인佛因이라고 하기 때문에 받아서 닦아야 한다. 여덟 가지 세제법을 인이라고 하지 않는 것은 이 경계의 문은 인의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3) 과에 대한 개별적인 대답 1 : 체體의 과를 드러냄
① 한 가지 체의 모습을 밝힘

“불자여, 그대가 앞에서 말한 과는, 오현五賢의 보살이 모든 도법道法을 닦아 법성法性의 체體인 일대과一大果를 증득한 것이니라. 그 (법성의) 체는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으며,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으며, 몸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며, 모습도 아니고 삼세도 아니며, 하늘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며, 이름도 아니고 상락아정도 아니며, 육도도 아니고 육식六識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며, 일체의 법상法相을 초월하는 수량의 법도 아니며, 복전福田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며, 동정動靜도 아니고 생멸도 아니며, 제일第一도 아니고 오색五色도 아니며, 육대六大도 아니고 토전土田도 아니며, 법계도 아니고 삼계도 아니며, 결박과 해탈도 아니고 명암도 아니며, 득법得法도 아니어서 적연寂然하여 무위이니라. 일체법의 바깥이어서 마음이 움직일 자리가 없으므로 이 자리는 헤아리기 어려우니라. 유제有諦에 대하여 겁량劫量의 수행을 닦아 과보가 있느니라.”118)

“그대가 앞에서” 이하는 두 번째인 과를 드러냄이다. 문장에 셋이 있으니 표방하여 물음·해석·결론 맺음이다. 두 번째인 해석에도 세 부분이 있으니 처음은 체體의 과를 드러냄이고, 다음은 의義의 과를 해석함이며, 셋째는 체와 의의 두 과를 거듭 밝힘이다.
처음 (체의 과를 드러냄)에 둘이 있으니 먼저 한 가지 체의 모습을 밝히고 나중에 두 가지 몸의 문을 나타내었다. 처음 (한 가지 체의 모습을 밝힘)에도 둘이 있으니 첫째는 인을 거론하여 과를 표방함이고 둘째는 과의 체를 곧바로 밝힘이다.
처음 (인을 거론하여 과를 표방함)에 “법성法性의 체體인”이라고 한 것은 이것이 일법계一法界이기 때문이다. “그 (법성의) 체는” 이하는 두 모습 없음을 곧바로 드러냄이다. 여기에도 둘이 있으니 개별적으로 드러냄과 총괄적으로 밝힘이다.
첫째인 개별적으로 드러냄에 이중의 일곱 가지 상대相待가 있다.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으며”라고 한 것은 하나의 과체果體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하나의 과체가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고,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으며”라고 한 것은 하나의 극미에 들어가고도 남은 것이 없고 시방계를 싸고도 남기 때문이며, “몸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며”라고 한 것은 길고 짧음 등의 물질적인 모양을 벗어나고 있음과 없음 등의 (대상을) 반연하는 생각을 벗어났기 때문이고, “모습도 아니고 삼세도 아니며”라고 한 것은 이곳저곳의 모습을 벗어나고 전후의 시간을 벗어났기 때문이며, “하늘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며”라고 한 것은 높은 허공에 있지도 않고 사람 세상에 있지도 않기 때문이고, “이름도 아니고 상락아정도 아니며”라고 한 것은 찬탄할 만한 아름다운 이름도 아니고 돌아갈 만한 묘덕妙德도 아니기 때문이며, “육도도 아니고 육식六識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며”라고 한 것은 선악으로 생기는 것도 아니고 명색名色으로 취할 만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고, “일체의 법상法相을 초월하는 수량의 법도 아니며”라고 한 것은 앞의 일곱 가지 상대를 총괄적으로 결론 맺은 것이다.
“복전福田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며”라고 한 것은

001_0515_a_01L爲第二別明所生十智以下第三結勸
001_0515_a_02L言十智境所除者謂十智之境八世諦
001_0515_a_03L十智所除十八不善是擧非因
001_0515_a_04L餘所有一切功德皆名佛因故應受行
001_0515_a_05L八世諦法不名因者彼境界門非因義
001_0515_a_06L

001_0515_a_07L[顯體果]
汝先以下第二顯果在文有三牒問釋
001_0515_a_08L第二釋中亦有三分初顯體果
001_0515_a_09L釋義果三者重明體義二果初中有二
001_0515_a_10L先明一體之相後顯二身之門初中亦
001_0515_a_11L一者擧因標果二者正明果體
001_0515_a_12L中言1) [61] 性體者是一法界故其體者
001_0515_a_13L以下正顯無二相於中亦二別顯總
001_0515_a_14L初別顯中有二七對非有非無者
001_0515_a_15L非有一果體非無一果體故非大非小
001_0515_a_16L入一極微而無遺包十方界2) [62]
001_0515_a_17L3) [63] 非心者離長短等形質離有
001_0515_a_18L無等緣慮故非相非三世者離此彼處
001_0515_a_19L離前後時謝故非天非人者不在
001_0515_a_20L高空不在下地故非名字非常樂我淨
001_0515_a_21L非芳名之可讚非妙德之可歸故
001_0515_a_22L非六道非六識入者非善惡之所生
001_0515_a_23L名色之可取故非數量法過一切法相
001_0515_a_24L總結前七對也非福田非鬼神者

001_0515_b_01L복도 없고 죄도 없기 때문이고, “동정動靜도 아니고”라고 한 것은 산란도 없고 선정도 없기 때문이며, “생멸도 아니며 제일第一도 아니고”라고 한 것은 속俗도 아니고 진眞도 아니기 때문이고, “오색五色도 아니며 육대六大도 아니고 토전土田도 아니며”라고 한 것은 개별도 아니고 총괄도 없기 때문이며, “법계도 아니고 삼계도 아니며”라고 한 것은 근본도 아니고 지말도 아니기 때문이고, “결박과 해탈도 아니고”라고 한 것은 더럽지도 않고 청정하지도 않기 때문이며, “명암도 아니며”라고 한 것은 지혜롭지도 않고 어리석지도 않기 때문이고, “득법得法도 아니어서 적연寂然하여 무위이니라.”라고 한 것은 앞의 일곱 가지 상대를 총괄적으로 결론 맺은 것이다. ‘적연寂然하여’라고 한 것은 일곱 가지 상대와 두 가지 극단의 모습을 멀리 벗어났기 때문이고, ‘무위이니라’라고 한 것은 두 가지 극단은 벗어났지만 중中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런 도리 때문에 득법得法도 아닌 것이다.
“일체” 이하는 둘째인 총괄적으로 밝힘이다. 여기에 둘이 있으니 곧바로 밝힘과 의심을 없앰이다.
처음 (곧바로 밝힘)에 “일체법의 바깥이어서”라고 한 것은 앞과 같은 이중의 일곱 가지 상대인 모든 법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마음이 움직일 자리가 없으므로”라고 한 것은 벗어난 모든 법도 그 벗어난 곳을 벗어나 의거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 자리는 헤아리기 어려우니라.”라고 한 것은 얻을 것이 없으면서 얻을 것이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의심을 없앰은, 어떤 중생이 의심하며 “만약 과가 이와 같아서 마음과 말이 끊어졌다면 무슨 이유로 여래께서 보살에게 수기하시며 ‘그대가 수 겁의 수행과 온갖 수행을 하면 아무 세계에서 부처가 되리라’ 하시며 이러이러한 미래의 결과를 보이시는가?” 하고 말하는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이니 그러므로 “유제有諦에 대하여 겁량劫量의 수행을 닦아 과보가 있느니라.”라고 한 것이다. ‘과보’라고 한 것은 정토의 색신色身 상호相好의 과보이니 이러한 것들은 모두 유제에 대해서 설한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이제의 바깥이라는 설명은 이러한 도리 때문에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② 두 가지 몸의 문을 나타냄

“불자여, 두 가지 법신이 있으니 첫째는 과극果極 법신이고 둘째는 응화應化 법신이니라. 응화가 법신임은 그림자가 형상을 따르는 것과 같고, 과신果身이 항상하므로 응신도 항상하니라. 불자여, 옛날의 모든 부처님은 두 가지 몸의 길이 하나였느니라. 불자여, 일체 보살에게는 두 가지 몸이 모두 무상無常인 몸이니라. 불자여, 모든 범부에게도 두 가지 몸이 있으니 첫째는 보신이고 둘째는 방편신이니라. 보신은 (중생에게) 공통인 것은 아니고, 방편신은 모든 중생에게 공통이니라. 불자여, 모든 보살과 모든 중생에게 두 가지 몸이 있다는 것은 모든 여래께서 항상 말씀하시므로 결정된 요의了義라고 하느니라.”119)

다음은 둘째인 두 가지 몸의 문을 밝힘이다. 여기에 둘이 있으니 첫째는 여래의 두 가지 몸을 곧바로 밝힘이고, 둘째는 사람 세상의 두 가지 몸을 헤아려 나타냄이다.
처음 (여래의 두 가지 몸을 곧바로 밝힘)에 네 구절이 있으니 첫째는 총괄이고, 둘째는 개별적으로 나타냄이며, 셋째는 두 가지 몸의 상주를 밝힘이고, 넷째는 모든 부처의 길이 같음을 결론 맺음이다. 셋째 (두 가지 몸의 상주를 밝힘)에서 “그림자가 형상을 따르는 것과 같고”라고 한 것은

001_0515_b_01L無福無罪故非動非靜者無散無定故
001_0515_b_02L非生滅非第一者非俗非眞故非五色
001_0515_b_03L非六大非土田者非別非總故非法界
001_0515_b_04L非三界者非本非末故非縛解者
001_0515_b_05L染不淨故非明闇者不智不愚故
001_0515_b_06L得法寂然無爲者總結前七對也言寂
001_0515_b_07L然者遠離七對二邊相故言無爲者
001_0515_b_08L雖離二邊不爲中故由是道理故非得
001_0515_b_09L法也一切以下第二總明於中有二
001_0515_b_10L正明遣疑初中言一切法外者出離
001_0515_b_11L如前二重七對一切法故心行處滅者
001_0515_b_12L出離諸法亦離其離無所據故其處難
001_0515_b_13L量者雖非有得而非無得故次遣疑者
001_0515_b_14L有衆疑云若果如是心言絕者何故如
001_0515_b_15L來記菩薩言於爾許劫行種種行於某
001_0515_b_16L世界當得作佛如是如是示當果耶
001_0515_b_17L遣是疑故言就有諦中脩劫量行而有
001_0515_b_18L果報果報者淨士色身相好果報此等
001_0515_b_19L皆就有諦中說今此中說二諦之外
001_0515_b_20L是道理不相違也

001_0515_b_21L
此下第二明二身門於中有二一者正
001_0515_b_22L明如來二身二者乘顯下地二身初中
001_0515_b_23L四句一者總二者別顯三明二身常
001_0515_b_24L四結諸佛道同第三中言如影隨形

001_0515_c_01L결과인 몸이 상주常住함을 밝힌 것이니 생멸을 벗어났기 때문이고, 응신도 항상 생멸을 벗어나서 보살의 두 가지 몸이 무상한 것과는 같지 않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사람 세상의 두 가지 몸을 밝힘에도 둘이 있으니 곧바로 밝힘과 총괄적으로 맺음이다. 처음에도 둘이니 먼저 보살의 두 가지 몸을 밝혔고 나중에는 범부의 두 가지 몸이 같지 않음을 나타내었다. “불자여” 이하는 둘째인 총괄적으로 맺음이다.

(4) 과에 대한 개별적인 대답 2 : 의義의 과를 해석함
“불자여, 부처님의 의공덕신義功德身은 모든 부처님의 길이 같아서 과법果法도 다르지 않으니라. 말하자면 십호十號이니 첫째 여래, 둘째 응공, 셋째 정변지, 넷째 명행족, 다섯째 선서, 여섯째 세간해, 일곱째 무상사, 여덟째 조어장부, 아홉째 천인사, 열째 불타이니라. 모두 십덕十德을 향하므로 일체중생이 공양하는 대상이 되느니라. 또 십팔불공법이 있으니 말하자면 몸에 잘못이 없고, 생각에 잘못이 없으며, 입에 잘못이 없고, 다른 생각이 없으며, 정定이 아닌 마음이 없고, 알지 못하여 버리는 마음이 없으며, 염念이 줄어듦이 없고, 욕欲이 줄어듦이 없으며, 정진이 줄어듦이 없고, 혜慧가 줄어듦이 없으며, 해탈이 줄어듦이 없고, 해탈지견이 줄어듦이 없으며, 신업이 지혜를 따라 행하고, 구업이 지혜를 따라 행하며, 의업이 지혜를 따라 행하고, 지혜가 과거와 미래와 현재를 아는 데에 걸림이 없고 장애가 없느니라. 또 십력十力이 있으니 처비처력·업력·정력·근력·욕력·성력·과력·천안력·숙명력·결진력이니라. 자慈·비悲·희喜·사捨이니라. 나는 일체지인一切智人이며, 나는 번뇌가 모두 사라졌으며, 무루로 번뇌도를 벗어나고 (무루로) 번뇌장도煩惱障道를 벗어났느니라. 천신·천안·천이·누진·숙명·타심, 오안五眼, 오분법신五分法身, 무죄삼업無罪三業, 불보법승佛寶法僧, 멸제, 해탈, 영지靈智, 일승, 금강보장, 법신장法身藏, 자성청정묘장自性淸淨妙藏, 삼달三達, 삼무위三無爲, 삼명, 일제一諦, 일도一道, 독법獨法, 대락무위大樂無爲이니라.
불자여, 모든 성인의 결과인 무량공덕장無量功德藏에는 불가설불가설의 과가 있으니 이 과는 하나의 길이니라.”120)

“불자여” 이하는 다음으로 의義의 과를 밝힘이다. 여기에 셋이 있으니 총괄적으로 표방함과 개별적으로 해석함과 셋째는 총결이다.
처음 (총괄적으로 표방함)에 “의공덕義功德”이라고 한 것은 체의 과는 오묘하여 상相과 성性을 완전히 벗어나므로 하는 것도 없고 만드는 것도 없지만 (의의 과는) 하는 것의 대상이 없는 것뿐이기 때문에 하지 못할 것이 없어서 모든 중생을 위하여 모든 의리를 만든다. 그러므로 한 가지 체에서 무량한 의와 무량한 공덕이 나온다. 덕과 의가 모여 쌓이기 때문에 “신身”이라고 한 것이니 이것이 응화한 법신의 몸이다. 예를 들면 아래의 (경전) 문장에서 “묘각지에 머물러야 응화應化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으니 헤아릴 수 없는 의미가 있고 헤아릴 수 없는 이름이 있지만 그것은 하나의 체에서 나오느니라. 말하자면 묘과妙果는 항상 청정함에 머무르기 때문에 허공과 같아서 생각할 수 없고 말할 수 없으며 이름으로 헤아릴 수 없고 이름으로 들어갈 수 없으며 한계 지을 수도 없는 데에까지 이르느니라.”121)라고 하였다.
“모든 부처님의 길이 같아서 과법果法도 다르지 않으니라.”라고 한 것은 십호 등의 덕은 모든 부처님이 같기 때문이다.

① 88종의 덕을 개별적으로 밝힘 1 : 십호

“말하자면” 이하는 둘째인 개별적으로 밝힘이니 여기에서 88종의 덕을 간략하게 드러내었다.
먼저 십호十號를 밝혔다. 그러나 이 십호는 경과 논이 같지 않아 어떤 곳에는 ‘불佛’이 열 번째가 된다고 하였고, 어떤 곳에는 ‘불’이 아홉 번째가 된다고 하였는데 이 경에서는 앞의 설명에 의거하였다.
“첫째 여래”는 『십호경十號經』에서 “내가 곧 다른 사람임을 ‘여如’라고 하고 다른 사람이 곧 나임을 ‘래來’라고 한다.”라고 하였고, 『열반경』에서 “모든 불세존은 육바라밀·삼십칠품·십일공을 따라와서

001_0515_c_01L是明果身常住離生滅故應身亦
001_0515_c_02L常離生滅不同菩薩二身無常也次明
001_0515_c_03L下地皆有二身於中有二正明總結
001_0515_c_04L初中亦二先明菩薩二身無常後顯凡
001_0515_c_05L夫二身不同佛子以下第二總結

001_0515_c_06L[釋義果]
佛子以下次明義果於中有三總標
001_0515_c_07L別釋第三總結初中言義功德者
001_0515_c_08L果妙絕離相性無爲無作但無所爲故
001_0515_c_09L無所不爲爲諸衆生作諸義利故於一
001_0515_c_10L體出無量義無量功德德義積聚故名
001_0515_c_11L爲身卽是應化法身之身如下文言
001_0515_c_12L住是妙覺地中唯現作 [41] 可名有無量義
001_0515_c_13L有無量名其出一體所謂妙果常住淸
001_0515_c_14L至若虗空不可思議不可說不可
001_0515_c_15L名數不可名入界分可得故諸佛道
001_0515_c_16L同果法不異者十號等德諸佛同故
001_0515_c_17L謂以下第二別明於中略顯八十八德

001_0515_c_18L
先明十號然此十號經論不同或有處
001_0515_c_19L說佛爲第十或有處說佛爲第九今此
001_0515_c_20L經中依前門說一如來者十號經言
001_0515_c_21L我卽他曰如他卽我曰來涅槃經言
001_0515_c_22L諸佛世尊從六波羅蜜三十七品十一
001_0515_c_23L「爲」下一有「法」「而」下疑脫「無」「身」
001_0515_c_24L經作「色」

001_0516_a_01L대열반에 이르니 여래도 또한 이러하다. 그러므로 부처를 여래라고 한다.”122)라고 하였으며, 『유가론』에서 “말에 허망함이 없으므로 여래라고 한다.”123)라고 하였고, 『불성론』에서 “자성으로부터 와서 지극한 것을 얻는 데에 이르기 때문에 여래라고 한다.”124)라고 하였다.
“둘째 응공”은 『유가론』에서 “이미 일체에 얻어야 할 의미를 얻었고 세간의 무상無上의 복전이 될 만하며 일체에게 공경과 법양法養이 되기 때문에 ‘응應’이라고 한다.”125)라고 하였다.
“셋째 정변지”는 (같은) 논에서 “수승한 의미 그대로 모든 법을 깨달았기 때문에 정등각正等覺이라고 한다.”126)라고 하였다.
“넷째 명행족”은 (같은) 논에서 “ ‘명明’은 삼명三明을 말하고 ‘행行’은 경전에서 설한 것처럼 지관止觀의 두 가지가 지극히 선하고 원만한 것이다. 그러므로 명행이 원만하다고 한다.”127)라고 하였다.
“다섯째 선서”는 (같은) 논에서 “가장 끝까지 올라가 영원히 물러나거나 되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선서라고 한다.”128)라고 하였다.
“여섯째 세간해”는 (같은) 논에서 “세계와 유정계의 모든 종류의 더럽고 청정한 모습을 잘 알기 때문에 세간해라고 한다.”129)라고 하였다.
“일곱째 무상사”는 『열반경』에서 “ ‘상사上士’는 ‘끊음(斷)’을 말하니 끊을 것이 없음을 ‘무상사’라 한다. 모든 불세존에게는 번뇌가 없기 때문에 끊을 것도 없다. 그러므로 부처를 무상사라고 한다. 또 ‘상사’는 ‘다툼(諍訟)’을 말하니 ‘무상사’는 다툼이 없다는 것이다. 여래에게는 다툼이 없기 때문에 부처를 무상사라고 한다.”130)라고 하고 자세히 설명하였다.
“여덟째 조어장부”는 『열반경』에서 “스스로가 이미 장부인데 다시 장부를 이끄는 것이다. 선남자야, 여래가 실제로는 장부도 아니고 장부가 아닌 것도 아니지만, 장부를 이끌기 때문에 여래를 장부라고 한다. 선남자야, 모든 남자나 여인이 네 가지 법을 갖추면 장부라고 한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선지식이고, 둘째는 법을 들을 줄 알며, 셋째는 의미를 생각하고, 넷째는 말한 대로 수행하는 것이다. 남자나 여인이나 이 네 가지 법을 갖추면 장부라고 한다.

001_0516_a_01L空來至大涅槃如來亦爾是故號佛
001_0516_a_02L爲如來也瑜伽論云言無虗妄故名如
001_0516_a_03L佛性論云從自性住來至至得
001_0516_a_04L名如來也二應供者瑜伽論云已得
001_0516_a_05L一切所應得義應作世間無上福田
001_0516_a_06L爲一切恭敬法養是故名應三正遍知
001_0516_a_07L論云如其勝義覺諸供 [42] 故名正等覺
001_0516_a_08L四明行足者論云明謂三明行如經說
001_0516_a_09L止觀二品極善圓滿是故說名明行圓
001_0516_a_10L滿五善逝者論云上升最極永不退還
001_0516_a_11L故名善逝六世間解者論云善知世界
001_0516_a_12L及有情界一切1) [64] 染淨相故名世間解
001_0516_a_13L七無上士者涅槃經言上士者名之爲
001_0516_a_14L無所斷者名無上士諸佛世尊無
001_0516_a_15L有煩惱故無所斷是故號佛爲無上士
001_0516_a_16L又上士者名爲諍訟無上士者無有諍
001_0516_a_17L如來無諍是故號佛爲無上士
001_0516_a_18L至廣說八調御丈夫者涅槃經言
001_0516_a_19L旣丈夫復調丈夫復善男子言如來
001_0516_a_20L者實非丈夫非不丈夫因調丈夫2) [65]
001_0516_a_21L如來爲丈夫也善男子一切男女
001_0516_a_22L具四法卽名丈夫何等爲四一善知
001_0516_a_23L二能聽法三思惟義四如說脩行
001_0516_a_24L若男若女具足四法卽名丈夫若有

001_0516_b_01L남자라도 이 네 가지 법이 없으면 장부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몸은 비록 장부이나 행동은 축생과 같기 때문이다. 여래는 남자와 여인을 조복시키므로 부처를 조어장부라고 한다.”131)라고 하고 자세히 설명하였다.
『유가론』에서는 이 두 호칭을 합하여 한마디로 하는데, “일체 세간에 오직 한 사람의 장부이자 가장 수승하게 마음을 조복시키는 방편을 잘 알기 때문에 무상장부無上丈夫 조어사調御士라고 한다.”132)라고 하였다.
“아홉째 천인사”는 (같은) 논에서 “진실한 눈이 되기 때문이고, 진실한 지혜가 되기 때문이며, 진실한 의미가 되기 때문이고, 진실한 법이 되기 때문이다. 분명한 의미를 열어 주어 이끄는 자가 되기 때문이고, 일체 의미의 의지가 되기 때문이며, 분명하지 않은 의미를 깨닫게 하기 때문이고, 생기는 의심을 끊기 때문이며, 매우 깊은 곳을 드러나게 하기 때문이다. 밝고 깨끗하게 하기 때문이고, 일체법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며, 열어 주어 이끌기 때문이고, 의지가 되기 때문이다. 바르게 하늘과 사람을 이끌어서 경계하고 가르쳐서 온갖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기 때문에 부처의 이름을 천인사라고 한다.”133)라고 하였다. 생각해 보면, ‘진실한 눈이 된다’는 것은 도를 증득하는 지혜가 있어 의義를 나타내어 보일 수 있기 때문이고, ‘진실한 지혜가 된다’는 것은 도를 가르치는 지혜가 있어 결단할 수 있기 때문이며, ‘진실한 의미가 된다’는 것은 모든 법을 펼쳐 알려 주지만 말의 의미를 벗어났기 때문이고, ‘진실한 법이 된다’는 것은 편안히 서서 뒤집어지지 않고 교법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다음의 여섯 구절은 돌이켜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열 가지 법을 갖추면 ‘사師’라고 한다.
“열째 불타”는 (같은) 논에서 “의리의 법을 끌어 모아 거두고, 의리가 아닌 법을 끌어 모아 거두며, 의리가 아니고 의리가 아닌 것도 아닌 법을 끌어 모아 거두어 모든 종류에 두루하는 등각을 나타냈기 때문에 ‘불佛’이라 한다.”134)라고 하였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일체지를 갖추었음을 나타낸 것이다. 세 가지 (끌어 모은 법의) 덩어리는 하나하나 선과 악과 무기에 통하지만 그것에 대해 완전하게 아는 것은 오직 부처님의 깨달음뿐이기 때문이다.
그다음은 (셋째인) 총결이니 “모두 십덕十德을 향하므로 일체중생이 공양하는 대상이 되느니라.”라고 한 것은 총괄적인 이름인

001_0516_b_01L男子無此四法卽不得名爲丈夫也
001_0516_b_02L何以故身雖丈夫行同畜生如來調
001_0516_b_03L伏若男若女是故號佛調御丈夫乃至
001_0516_b_04L廣說瑜伽論中合此二號以爲一言
001_0516_b_05L一切世間唯一丈夫善知最勝調心方
001_0516_b_06L便故名無上丈夫調御士九天人師者
001_0516_b_07L論云爲實眼故爲實智故爲實義故
001_0516_b_08L爲實法故與顯了義爲開導故與一切
001_0516_b_09L義爲所依故與不了義爲能了故與所
001_0516_b_10L生疑爲能斷故與甚深處爲能顯故
001_0516_b_11L明淨故與一切法爲根本故爲開導故
001_0516_b_12L爲所依故能正敎誡敎授天人令其出
001_0516_b_13L離一切衆苦是故說佛名天人師案云
001_0516_b_14L爲實眼者有證道慧現見義故爲實智
001_0516_b_15L有敎道智能決斷故爲實義者
001_0516_b_16L示諸法離言義故爲實法者安立無倒
001_0516_b_17L言敎法故下之六句反之可知具此十
001_0516_b_18L名之爲師十佛陀者論云於能引
001_0516_b_19L攝義利法聚於能引攝非義利法聚
001_0516_b_20L能引攝非義利非非義利法聚遍一切
001_0516_b_21L種現前等覺故名爲佛案云是顯具一
001_0516_b_22L切智以是三聚一一通於善惡無記
001_0516_b_23L於中委悉唯佛覺故下總結言具向十
001_0516_b_24L故爲一切衆生所供養者此是總名

001_0516_c_01L세존世尊의 의미이다. 이 이름을 열 번째로 삼으면 『유가론』에서 “모든 마군의 큰 힘이 있는 군대를 무찌르고 공덕을 갖추었기 때문에 박가범(ⓢ bhagavat, 世尊)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② 88종의 덕을 개별적으로 밝힘 2 : 십팔불공법

다음은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을 밝혔다. 이것은 3종의 6법이니 아라한과는 같지 않기 때문에 ‘불공不共’이라고 한다.135)
첫 번째 여섯 가지 잘못이 없는 불공이다. 아라한은 모든 번뇌가 영원히 사라졌지만 마을에 들어가서 유행하고 걸식하다가 어떤 때에는 나쁜 코끼리부터 나쁜 개에 이르기까지 함께 길을 가거나 어떤 때에는 아란야에서 바른 길을 버리고 사악한 길을 가기도 하는데, 이와 같은 종류는 아라한이 잘못하는 것이다. 여래는 이러한 일이 전혀 없으므로136) “몸에 잘못이 없고”라고 하였다. 또 아라한은 어떤 때에는 생각을 잊기 때문에 하는 일에서 잃어버림이 있는데, 이와 같이 생각을 잊는 일이 여래에게는 전혀 없으므로137) “생각에 잘못이 없으며”라고 하였다. 또 아라한은 어떤 때에는 아란야에 유행하다가 길을 잃고 혹은 빈 곳에 들어가 소리를 지르고 크게 부르짖으면서 그 시끄러운 소리가 멀리 들리게 하거나 혹은 습관 때문에 오염된 마음이 없이 입술을 찡그리고 이빨을 드러내면서 웃거나 하는 종류의 큰 소리를 낸다. 여래에게는 이런 것이 전혀 없으므로138) “입에 잘못이 없고”라고 하였다.
“다른 생각이 없으며”라고 한 것은, 아라한은 유여의有餘依의 생사계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싫어하는 마음을 내고 무여의無餘依의 열반계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적정寂靜한 생각을 내지만, 여래는 저런 차별된 생각이 없고 제일 평등함에 안주하기 때문이다.139) “정定이 아닌 마음이 없고”라고 한 것은, 아라한은 등지等至에 들어가면 ‘정’이라고 하고 등지에서 나오면 ‘정’이라고 하지 않지만,

001_0516_c_01L爲世尊義若以此名爲第十者如瑜伽
001_0516_c_02L能破諸魔大力軍衆具足功德名薄
001_0516_c_03L伽梵

001_0516_c_04L
次明十八不共法者此三六法不與阿
001_0516_c_05L羅漢人共同故名不共初六無失不共
001_0516_c_06L同者謂阿羅漢諸漏永盡方入聚落遊
001_0516_c_07L行乞食或於一時與諸惡象及惡狗等
001_0516_c_08L共路而行或阿練若棄捨正路行邪惡
001_0516_c_09L如是等類羅漢誤失如來於此一向
001_0516_c_10L永無是故言身無失也又阿羅漢
001_0516_c_11L於一時由忘念故於所作事而有喪失
001_0516_c_12L如是忘念如來永無是故言念無失也
001_0516_c_13L又阿羅漢或於一3) [66] 練若迷失
001_0516_c_14L道路或入空 [43] 揚聲大叫呼噪遠聞或因
001_0516_c_15L習氣無染汙心騫脣露齒逌爾而咲
001_0516_c_16L如是等類所有暴音如來於此永無所
001_0516_c_17L是故言口無失也無異想者如阿
001_0516_c_18L羅漢於有餘依生死界中一向發起猒
001_0516_c_19L背之心於無餘依涅槃界中一向發起
001_0516_c_20L寂靜之想如來於彼無差別想安住第
001_0516_c_21L一平等捨故無不定心者如阿羅漢
001_0516_c_22L入等至卽名爲定若出等至卽不名定
001_0516_c_23L「品」下一有「類」「故」上一有「名」「切」
001_0516_c_24L疑剩
「阿」上一有「遊」

001_0517_a_01L여래는 모든 자리에서 정이 아닌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140) “알지 못하여 버리는 마음이 없으며”라고 한 것은 아라한은 잘 생각하여 선택하지 못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을 버리지만 여래에게는 이런 일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141)
다음은 여섯 가지 줄어듦이 없음이다. 아라한이 소지장이 청정해짐에 의지하여 아직은 얻지 못하였으므로 염念과 욕欲과 (정진과 혜慧와 해탈과 해탈)지견까지 (여섯 가지를) 물러나 잃는다. 이와 같은 물러나는 법이 여래에게는 전혀 없기142) 때문에 “염念이 줄어듦이 없고” 등이라고 한 것이다. 이 중에 앞의 넷(염·욕·정진·혜)은 소지장을 상대하여 치유하는 길이고 뒤의 두 가지 줄어듦이 없음(해탈·해탈지견)은 그것을 통해 얻은 결과이니 여래는 이에 대하여 인과가 원만하기 때문에 줄어듦이 없다.
마지막의 육법은, 아라한은 어떤 때에는 선한 신업身業의 결과가 있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무기無記의 결과가 있기도 하며, (신업처럼) 어업語業과 의업意業도 마찬가지인 줄 알아야 한다. 여래의 세 가지 업은 지혜가 앞서 행하기 때문에 지혜를 따라 결과가 있기 때문에 무기가 없다.143) 또 아라한은 두루 알아야 할 삼세의 일에 대해서 갑자기 마음 작용이 일어나도 곧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들의) 지견을 집착이 있다고 하고 모든 것을 남김없이 바르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지견을 걸림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여래는 삼세의 경계 모두에 대해서 갑자기 마음 작용이 일어나도 알아야 할 모든 경계의 차별을 곧바로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144) 지금 이 경에서 “신업이 지혜를 따라 행하고” 등이라고 한 것은 앞서 행한 지혜를 따르고 함께 행하는 지혜를 따르기 때문이다. 삼세를 안다고 하는 대목에서 “걸림이 없고”라고 한 것은 남김없이 바르게 알지 못하는 걸림을 벗어났기 때문이고, “장애가 없느니라.”라고 한 것은 갑자기 곧바로 알지 못하는 집착을 벗어난 것이다.
이들 (십팔불공법)은 『유가론』에서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유가론』에서 “이 중에 처음 넷(몸에 잘못이 없음·생각에 잘못이 없음·입에 잘못이 없음·다른 생각이 없음)은 잃어버림이 없는 법과 습기를 뽑아냄에 포섭되고, 다음의 한 가지(정이 아닌 마음이 없음)는 대비에 포섭되며, 나머지(열세 가지)는 온갖 종류의 미묘한 지혜에 포섭됨을 알아야 할 것이다.”145)라고 하였다.

③ 88종의 덕을 개별적으로 밝힘 3 : 십력

다음은 십력十力을 밝혔다. 이 열 가지 지혜에 의지하여 열 가지 일이 있어 삿된 주장을 굴복시키기 때문에 ‘역力’이라고 하였다.
“처비처력”이라고 한 것은

001_0517_a_01L如來遍於一切位中無不定心故無不
001_0517_a_02L知已捨心者如阿羅漢不善思擇而便
001_0517_a_03L棄捨利衆生事如來於此永無所有故

001_0517_a_04L
次六無減者如阿羅漢依所知障淨
001_0517_a_05L未得退退失念欲乃至知見如是退
001_0517_a_06L如來永無故言念無減等此中前
001_0517_a_07L四取所知鄣能對治道後二無減彼所
001_0517_a_08L得果如來於此因滿果圓故無減也

001_0517_a_09L
後六法者如阿羅漢或於一時善身業
001_0517_a_10L或無記轉語業意業當知亦爾
001_0517_a_11L來三業智前行故智隨轉故無無記也
001_0517_a_12L又阿羅漢遍於三世所知事中不能率
001_0517_a_13L爾作意便解是故知見說名有著不能
001_0517_a_14L一切無餘正解故名有礙如來遍於三
001_0517_a_15L世境界率爾作意便能正解一切所知
001_0517_a_16L境事差別今此經言身業隨智慧行等
001_0517_a_17L隨前行智慧及俱行智慧故知三世
001_0517_a_18L中言有礙者離彼不能無餘正解之礙
001_0517_a_19L無障者離彼不能率爾便解之著
001_0517_a_20L此等具如瑜伽論說彼云此中初四是
001_0517_a_21L無忘失法及拔習氣所攝次一是大悲
001_0517_a_22L所攝所餘當知是一切種妙智所攝

001_0517_a_23L
次明十力依此十智有十種事能伏邪
001_0517_a_24L故名爲力是處非處力者如理通

001_0517_b_01L일체 인과의 옳음과 그름을 이치대로 통달한다는 것이니 사문이나 바라문이 인과가 없다고 하거나 불평등한 인과의 법을 설하면 곧바로 굴복시켜 패배의 자리로 떨어지게 하는 일은 첫 번째 힘으로 이루어진다.146)
“업력”이라고 한 것은, 여래의 지견은 자기의 업은 자기가 받는 것이고 자기가 지은 것을 다른 사람이 과보로서 받는 일은 없다는 것이니 사문이나 바라문이 삿된 주장이나 삿된 가르침으로 업을 헤아리고 (과보) 받음을 헤아리면 곧바로 굴복시켜 패배의 자리로 떨어지게 하는 일은 업에 대한 지혜의 힘으로 이루어진다.147)
“정력”이라고 한 것은, 여래의 교화는 세 가지 바퀴를 나타내니 하나는 신통의 바퀴이고, 둘은 마음을 일으키는 바퀴이며, 셋은 가르침을 드러내는 바퀴인데, (이것으로) 제자를 가르치고 이끌어 성중聖衆이 되게 한다. 만약 사문이나 바라문이 승부의 마음이 있어서 거스르고 어긋나는 법을 설하면 바른 경전으로 대응하여 다스려 곧바로 굴복시켜 패배의 자리로 떨어지게 한다. 이런 일은 선정의 지혜의 힘으로 이루어진다.148)
“근력”이라고 한 것은, 여래는 상·중·하 근기를 잘 알기 때문에 여래는 그 낮은 (근기의) 종자가 성숙하여 해탈할 수 있도록 한다. 이런 일은 근기에 대한 지혜의 힘으로 이루어진다.149)
“욕력”이라고 한 것은, 여래의 지견은 세 가지 성품의 중생의 바르고 삿된 욕락欲樂을 여실하게 보고 나서 악한 욕망을 뽑아 끊고 착한 욕망을 증장시킨다. 이런 일은 욕망에 대한 지혜의 힘으로 이루어진다.150)
“성력”이라고 한 것은, 여래는 중생의 종성에 거칠고 중간이며 오묘함이 있음을 관찰하여 알고 이 세 종류 사람이 이치대로 온갖 법문에 들 수 있게 한다. 이런 일은 성품에 대한 지혜의 힘으로 이루어진다.151)
“과력”이라고 한 것은 다른 곳에서는 지처도력至處道力이라고 한다.152) 여래는 벗어나는 도법道法이 해탈의 결과를 얻게 하고 장애하는 도법이 생사의 결과를 얻게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고서 장애하는 도를 없애고 벗어나는 도를 닦게 한다.153) 이것은 결과에 대한 (지혜의) 힘으로 이루어진다.
“천안력”이라고 한 것은 다른 곳에서는 생사지력生死智力이라고도 한다.154) 여래는 일체중생이 여기에서 죽고 저기에서 나는 것을 분명하게 보고 이치대로 수기한다. 만약 단견에 집착하는 사문이나 바라문이 있으면 곧바로 굴복시켜 패배의 자리로 떨어지게 한다.155)

001_0517_b_01L達一切因果是處非處若沙門婆羅門
001_0517_b_02L說無因果及不平等因果之法卽能制
001_0517_b_03L伏令墮負處此事因彼初力得成也
001_0517_b_04L力者如來知見自業自受無有自作他
001_0517_b_05L受果者若沙門婆羅門邪說邪敎度業
001_0517_b_06L度受便能制伏令隨負處此事因業智
001_0517_b_07L力得成也定力者如來敎化顯三種輪
001_0517_b_08L一神通輪二記心輪三示敎輪訓導
001_0517_b_09L弟子以成聖衆若沙門婆羅門有勝負
001_0517_b_10L說違逆法對治正典便能制伏令
001_0517_b_11L墮負處此事因定智力得成也根力者
001_0517_b_12L如來了達上中下根如來 [44] 爲說令其下
001_0517_b_13L種成熟解脫此事因根智力得成也
001_0517_b_14L力者如來知見三品衆生邪正欲樂如
001_0517_b_15L實見已拔斷惡欲增長善欲此事因
001_0517_b_16L欲智力得成也性力者如來觀知衆生
001_0517_b_17L種性有麤中妙今此三人如理得入種
001_0517_b_18L種法門此事因性智力得成也果力者
001_0517_b_19L餘處名至處道力如來明見出離道法
001_0517_b_20L得解脫果障礙道法得生死果令滅障
001_0517_b_21L道脩出離道此是果力所成事也天眼
001_0517_b_22L力者餘處亦名生死智力如來明見一
001_0517_b_23L切衆生死此生彼如理授記若執斷見
001_0517_b_24L沙門婆羅門便能制伏令墮負處此是

001_0517_c_02L이것은 천안의 지혜의 힘으로 이루어진다.
“숙명력”이라고 한 것은, 여래는 숙명의 일을 명료하게 보고서 과거의 일을 설하여 중생이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 만약 상견에 집착하는 사문이나 바라문이 있으면 곧바로 굴복시켜 패배의 자리로 떨어지게 한다.156) 이것은 숙명에 대한 지혜의 힘으로 이루어진다.
“결진력”이라고 한 것은, 여래는 스스로 해탈을 알고 통달하여 걸림이 없다. 만약 증상만의 사문이나 바라문이 아직 나한을 얻지 못하고서도 이미 얻었다고 말하면 곧바로 굴복시켜 패배의 자리로 떨어지게 한다. 이것은 번뇌를 다 없앤 (지혜의) 힘으로 이루어진다.157)
자세한 것은 『무상의경』에서 설하였다.

④ 88종의 덕을 개별적으로 밝힘 4 : 사무량·사무외·육통·오안·오분법신

다음은 사무량四無量을 밝혔으니 “자慈·비悲·희喜·사捨이니라.”라고 하였다. 의미는 위에서 설명하였다.
다음은 사무외四無畏이다. “나는 일체지인一切智人이며”라고 한 것은 일체지여서 두려움 없음이고, “나는 번뇌가 모두 사라졌으며”라고 한 것은 번뇌가 사라져 두려움 없음이며, “무루로 번뇌도를 벗어나고”라고 한 것은 괴로움의 길이 사라짐을 설하여 두려움 없음이고, “(무루로) 번뇌장도煩惱障道를 벗어났느니라.”라고 한 것은 장애의 길을 설할 줄 알아 두려움 없음이다. 이 중에 앞의 둘은 자신이 지혜로 끊음(智斷)을 갖춘 것이고 뒤의 둘은 다른 사람이 지혜로 끊음을 갖추게 한 것이다. 예를 들면 논에서 “스승과 제자가 지혜로 끊음을 갖춘다.”158)라고 한 것은 이것을 말한 것이다.
다음은 육통六通을 밝혔는데 이것도 앞에서 설명하였다.
다음은 오안五眼과 오분법신五分法身을 밝혔는데 의미는 보통 설명하는 것과 같다.

⑤ 88종의 덕을 개별적으로 밝힘 5 : 무죄삼업

다음은 “무죄삼업無罪三業”을 밝혔다. 말하자면 여래는 세 가지가 청정하기 때문에 “무죄”라고 하였다. 예를 들면 『화엄경』에서 “여래 (등)정각이 보리를 이룰 때에는 부처의 방편에 머물러 일체중생과 같은 몸을 얻고 일체법과 같은 몸을 얻으며, 일체 세계와 같은 몸을 얻고 일체 삼세와 같은 몸을 얻으며, 일체 여래와 같은 몸을 얻고 일체 부처와 같은 몸을 얻으며, 일체 언어와 같은 몸을 얻고 일체 법계와 같은 몸을 얻으며,

001_0517_c_01L天眼智力所成也宿命力者如來明了
001_0517_c_02L見宿命事說過去事爲令衆生起猒畏
001_0517_c_03L若執常見沙門婆羅門便能制伏令
001_0517_c_04L墮負處此是宿命智力所成也結盡力
001_0517_c_05L如來自知解脫通達無礙若增上慢
001_0517_c_06L沙門婆羅門未得羅漢謂言已得
001_0517_c_07L能制伏令墮負處此是漏盡力所成事
001_0517_c_08L具如無上依經說也

001_0517_c_09L
次明四無量謂慈悲喜捨義如上說也

001_0517_c_10L
次四無畏言我是一切智人者是一切
001_0517_c_11L智無畏我漏已盡者是漏盡無畏
001_0517_c_12L漏出煩惱道者是說盡苦道無畏煩惱
001_0517_c_13L障道者是能說障道無畏此中前二自
001_0517_c_14L具智斷後二令他智斷具足如論說言
001_0517_c_15L師及弟子智斷具足此之謂也

001_0517_c_16L
次明六通亦如前說次明五眼五分
001_0517_c_17L法身義如常說

001_0517_c_18L
次明無罪三業者所謂如來三種淸淨
001_0517_c_19L故言無罪如華嚴經言如來正覺成菩
001_0517_c_20L提時住佛方便得一切衆生等身
001_0517_c_21L一切法等身得一切刹等身得一切三
001_0517_c_22L世等身得一切如來等身得一切諸佛
001_0517_c_23L等身1) [67] 切語言等身得一切法界等
001_0517_c_24L「一」上一有「得」

001_0518_a_01L허공계와 같은 몸을 얻고 걸림 없는 법계와 같은 몸을 얻으며, (모든 것을) 내는 무량계와 같은 몸을 얻고 일체 행계行界와 같은 몸을 얻으며, 적멸한 열반계와 같은 몸을 얻는다. 불자들이여, 여래가 얻은 몸을 따라 그 음성과 걸림 없는 마음도 그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여래는 이와 같이 세 가지의 청정함과 무량함을 완전히 갖춘다.”159)라고 하였다.
생각해 보면, 이 중에 열세 가지의 같은 몸은 무죄의 신업身業이고, 열세 가지의 같은 음성은 무죄의 구업口業이며, 열세 가지의 같은 마음은 무죄의 의업意業이다. 무죄이기 때문에 장애가 없고 장애가 없기 때문에 한계와 끝이 없다.

⑥ 88종의 덕을 개별적으로 밝힘 6 : 삼보·멸제·해탈

다음은 삼보三寶를 밝혔다. 드러내 보이는 곳마다 현묘한 법칙이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고 육도에 두루 미치면서 항상 함께 화합하기 때문이다. 앞의 보살의 삼보와 의미가 같은데,160) 다만 저 (보살의 삼보)는 원만하지 못하고 상주常住도 아니었지만 지금 (부처님의 삼보)는 원만하고 구극究極이며 상주인 삼보이다. 『방광경方廣經』에서 “하나의 불보에 곧 법과 승이 있다.”161)라고 한 것이 이것을 말한 것이다.
다음에 “멸제滅諦”라고 한 것은 무작사제문無作四諦門162)의 멸제이다. 무명주지가 끊어져 없어진 것으로 나타나니 이것이 대정바라밀大淨波羅蜜이다.163)
다음으로 “해탈”이라고 한 것은 걸림 없는 해탈이니 여기에 열 가지가 있다. 예를 들면 대경大經(『화엄경』)에서 말하였다.
모든 부처님에게는 열 가지 걸림 없는 해탈이 있으니 그 열 가지란 무엇인가? 첫째, 한 티끌 속에 불가설불가설의 모든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심을 널리 나타내고, 둘째, 한 티끌 속에 불가설불가설의 모든 부처님이 깨끗한 법륜을 굴리심을 널리 나타내며, 셋째, 한 티끌 속에 불가설불가설의 중생들을 교화하고 조복하고, 넷째, 한 티끌 속에 불가설불가설의 모든 부처 세계를 널리 나타내며, 다섯째, 한 티끌 속에 불가설불가설의 화현한 보살에게 수기를 주고,

001_0518_a_01L得虗空界等身得無閡 [45] 法界等身
001_0518_a_02L得出生無1) [68] 等身得一切行界等身
001_0518_a_03L得寂靜涅槃界等身佛子隨如來所得
001_0518_a_04L當知音聲及無礙心亦復如是
001_0518_a_05L來具足如是等三種淸淨無量案云
001_0518_a_06L中十三等身卽是無罪身業十三等音
001_0518_a_07L卽是無罪口業十三等心卽是無罪意
001_0518_a_08L以無罪故無障礙無障礙故無邊際
001_0518_a_09L

001_0518_a_10L
次明三寶隨所示現無不玄則故遍涉
001_0518_a_11L六道恒與和合故如前菩薩三寶義同
001_0518_a_12L但彼未圓滿亦非常住今是圓極常住
001_0518_a_13L三寶方廣經言於一佛寶卽有法僧
001_0518_a_14L此之謂也

001_0518_a_15L
次滅諦者2) [69] 四諦四諦門中滅諦無明
001_0518_a_16L住地斷滅所顯卽是大淨彼 [46] 羅蜜也

001_0518_a_17L
次解脫者無礙解脫此有十種如大
001_0518_a_18L經言一切諸佛有十種無閡解脫何等
001_0518_a_19L爲十一於一微塵中悉能普現不可說
001_0518_a_20L不可說諸佛出世二於一微塵中悉能
001_0518_a_21L普現不可說不可說諸佛轉淨法輪
001_0518_a_22L於一微塵中敎化調伏不可銳不可說
001_0518_a_23L衆生四於一微塵中普現不可說不可
001_0518_a_24L說佛刹五於一微塵中授不可說不可

001_0518_b_01L여섯째, 한 티끌 속에 삼세의 모든 부처가 세상에 나옴을 널리 나타내며, 일곱째, 한 티끌 속에 삼세의 모든 부처 세계를 널리 나타내고, 여덟째, 한 티끌 속에 삼세의 모든 부처의 자재한 위신력을 널리 나타내며, 아홉째, 한 티끌 속에 삼세의 일체중생을 널리 나타내고, 열째, 한 티끌 속에 삼세의 모든 부처의 불사를 널리 나타내니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열 가지 걸림 없는 해탈이다.164)

⑦ 88종의 덕을 개별적으로 밝힘 7 : 영지

다음으로 “영지靈智”라고 한 것은, 깊고 현묘하여 헤아리기 어려움이 영지의 뜻이고 생겨나는 것이 무궁함이 영지의 뜻이다. 여기에 열 가지가 있으니 예를 들면 대경大經(『화엄경』)에서 말하였다.
모든 부처님은 열 가지 지혜를 나오게 하여 머무니 무엇이 열 가지인가? 첫째, 모든 법에는 향해 나아가는 일이 없지만 청정한 발원에 대한 지혜를 내고, 둘째, 모든 법에는 몸이 없지만 법신에 대한 지혜를 내며, 셋째, 모든 법에는 둘이 없지만 바른 깨달음을 내어 모든 법을 깨치고, 넷째, 모든 법에는 나도 없고 중생도 없지만 중생을 교화하는 지혜를 내며, 다섯째, 모든 법에는 모양이 없지만 갖가지 모양에 대한 지혜를 내고, 여섯째, 모든 세계에는 이루어지고 무너짐이 없지만 세계가 이루어지고 무너짐에 대한 지혜를 내며, 일곱째, 모든 법에는 만드는 이가 없지만 업보에 대한 지혜를 내고, 여덟째, 모든 법은 말할 수 없지만 법계를 말하는 지혜를 내며, 아홉째, 모든 법에는 더럽고 깨끗함이 없지만 더럽고 깨끗함에 대한 지혜를 내고, 열째, 모든 법에는 생기고 사라짐이 없지만 연기에 대한 지혜를 낸다. 이것이 열 가지 생겨나는 지혜이다.165)

⑧ 88종의 덕을 개별적으로 밝힘 8 : 일승

다음에 “일승一乘”이라고 한 것은 부처님에 대한 선근을 심은 사람이라면 모두 다른 길(趣)로 가는 일 없이

001_0518_b_01L說化 [47] 菩薩記六於一微塵中普現三世
001_0518_b_02L諸佛出世七於一微塵中普現三世一
001_0518_b_03L切佛刹八於一微塵中普現三世諸佛
001_0518_b_04L自在神力九於一微塵中普現三世一
001_0518_b_05L切衆生十於一微塵中普現三世一切
001_0518_b_06L諸佛佛事是爲一切諸佛十種無閡解
001_0518_b_07L脫也

001_0518_b_08L
次靈智者深玄難測是靈智義出生無
001_0518_b_09L窮是靈智義此有十種如大經言
001_0518_b_10L切諸佛有十種出生住持智慧何等爲
001_0518_b_11L一一切說 [48] 法無所趣向而能出生淸
001_0518_b_12L淨願智二一切法無身而能出生法身
001_0518_b_13L智慧三一切諸佛 [49] 悉無有二而生正覺
001_0518_b_14L悟一切法四一切諸法悉無有我無有
001_0518_b_15L衆生而能出生化衆生智五一切諸法
001_0518_b_16L悉無有相而能出生種種相智六一切
001_0518_b_17L世界悉無成敗而能出生世成敗智
001_0518_b_18L一切諸法無有造者而能出生業報智
001_0518_b_19L八一切諸法無可言說而能出生說
001_0518_b_20L法界智九一切諸法無有垢淨而能出
001_0518_b_21L生垢淨智慧十一切諸法無有生滅
001_0518_b_22L能出生緣起智慧是爲十種出生智慧
001_0518_b_23L

001_0518_b_24L
次一乘者謂於佛所種善根者皆無異

001_0518_c_01L대열반과에 이르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부처님의 덕을 일승이라고 하였다. 이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세 가지 비유를 말하니 예를 들면 대경에서 말하였다.
비유하자면 장부가 조금만 먹은 금강이 끝내 소화되지 않고 몸에서 나와 금강륜金剛輪에 이르러서야 머무는 것과 같으니, 왜냐하면 금강은 녹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불자들이여, 여래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선근을 심으면 일체 유위의 번뇌를 무너뜨릴 수 있고 구경에는 여래 열반의 지혜에 이르러야 머무니, 왜냐하면 여래에 대하여 심은 모든 선근은 없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불자여, 비유하자면 수미산과 같은 크기의 건초 더미에 어떤 사람이 겨자씨만 한 불을 가지고도 다 태울 수 있는 것과 같으니, 왜냐하면 불의 성질은 태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래에 대하여 심은 조그마한 선근도 그와 같아서 일체 번뇌를 남김없이 모조리 태워 없애고 구경의 열반일 것이니, 왜냐하면 여래에 대하여 심은 모든 선근의 성질은 구경이기 때문이다.
불자여, 비유하자면 설산에 선현善現이라는 대약왕大藥王이 있어서 보는 이는 눈이 청정해지고, 듣는 이는 귀가 청정해지며, 향기를 맡는 이는 코가 청정해지고, 맛보는 이는 혀가 청정해지며, 닿는 이는 몸이 청정해지고, 심어진 땅의 흙을 가지면 한량없는 온갖 병이 없어지고 안온하고 쾌락해지는 것과 같다. 여래·정각·무상의 약왕도 그와 같아서 항상 일체 방편행으로 중생들을 이롭게 하니 여래의 색신을 보는 이는 눈이 청정해지고, 여래의 명호를 듣는 이는 귀가 청정해지며, 여래의 계향을 맡는 이는 코가 청정해지고, 여래의 법미法味를 맛보는 이는

001_0518_c_01L莫不同到大涅槃果故說佛德名爲
001_0518_c_02L一乘爲顯是義而說三喩如大經言
001_0518_c_03L譬如丈夫食少金剛終竟不消要從身
001_0518_c_04L過至金剛輪然後乃住所以者何以彼
001_0518_c_05L金剛不可消故如是佛子於如來所少
001_0518_c_06L殖善根能壞一切有爲煩惱乃至究竟
001_0518_c_07L如來涅槃智慧然後乃住所以者何
001_0518_c_08L於如來所種諸善根不可盡故佛子譬
001_0518_c_09L如須彌山等大乾草聚若有人持如芥
001_0518_c_10L子火悉能燒盡何以故火性悉能燒故
001_0518_c_11L於如來所種少善根亦復如是悉能燒
001_0518_c_12L滅一切煩惱無有遺餘究竟涅槃何以
001_0518_c_13L於如來所種諸善根性究竟故佛子
001_0518_c_14L譬如雪山有大藥王名曰善現若有見
001_0518_c_15L者眼得淸淨若有聞者耳得淸淨若聞
001_0518_c_16L香者鼻得淸淨若嘗味者舌得淸淨
001_0518_c_17L有觸者身得淸淨若取彼地土悉能除
001_0518_c_18L滅無量衆病安隱快樂如來正覺無上
001_0518_c_19L藥王亦復如是常以一切諸方便行饒
001_0518_c_20L益衆生若有得見如來色身眼得淸淨
001_0518_c_21L若有得聞如來名號耳得淸淨若有得
001_0518_c_22L聞如來戒香鼻得淸淨若有得味如來
001_0518_c_23L「量」下一有「界」「仰」疑「作」

001_0519_a_01L혀가 청정해져서 금강의 넓고 길고 청정한 혀로 일체의 언어와 음성으로 법을 설할 수 있으며, 여래의 광명에 닿는 이는 청정한 색신을 얻어 구경에는 위없는 법신을 얻고, 여래를 생각하는 이는 염불삼매를 얻어 바른 생각이 산란해지지 않으며, 경행지經行地나 여래의 탑묘에 예배하고 공양하면 그 중생들은 선근을 모두 갖추어 번뇌의 근심을 없애고 현성賢聖의 즐거움을 얻는다.
불자여, 심지어는 신심이 없고 그릇된 견해를 가진 중생이라도 부처님을 보거나 그 명호를 들으면 보고 듣는 동안에 심은 선근으로 과보가 헛되지 않아 구경에는 열반을 얻어 일체의 악을 끊고 선근을 모두 갖춘다.166)

그리고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이것을 여래의 일승공덕이라고 한다.

⑨ 88종의 덕을 개별적으로 밝힘 9 : 금강보장

다음에 “금강보장金剛寶藏”이라고 한 것은, 부처님에게는 열 가지 견고한 법보가 있으며, 그것이 모인 것을 장藏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대경에서 말하였다.
모든 부처님에게는 열 가지 견고한 보살의 법이 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첫째, 모든 서원이 견고하여 막거나 깨뜨릴 수 없고 설한 대로 수행하여 말과 행동이 상응하고, 둘째, 미래겁이 다하도록 보살행을 닦고 그 공덕으로 장엄하여 두려워한 적이 없으며, 셋째, 일체중생을 교화하려 하기 때문에 불가설불가설의 모든 세계에 나아가서 중생을 교화하면서도 어려움이 없고, 넷째, 믿거나 믿지 않는 중생에 대해 대비大悲로 평등하게 보아 차별이 없으며, 다섯째, 처음 발심하여 정각을 이룰 때까지 중간에 보리심에서 물러나 잃어버린 적이 없고, 여섯째, 모든 공덕을 닦아서 모두 일체종지에 회향하여 세상에서 행해지기를 구하지 않으며, 일곱째, 모든 부처님에게 신구의身口意의 업을 따르며 닦고 배워서 영원히 성문과 독각의 마음에서 벗어나고, 여덟째, 한량없고 끝없는 모든 부처님의 바른 법과 청정한 보살의 마음을 평등하게 두루 비추어 구경에는 일체종지를 모두 갖추며, 아홉째, 일체 세간을 버릴 줄 알아 모든 중생의

001_0519_a_01L法味舌得淸淨得金剛廣長淸淨舌根
001_0519_a_02L悉能演說一切言音若有得觸如來光
001_0519_a_03L彼人卽得淸淨色身究竟逮得無上
001_0519_a_04L法身若有念如來者得念佛三昧正念
001_0519_a_05L不亂若有得經卷 [50] 地如來塔廟禮拜供
001_0519_a_06L彼衆生等具足善根滅煩惱患
001_0519_a_07L賢聖果 [51] 佛子乃至不信邪見衆生見聞
001_0519_a_08L佛者於見聞中所種善根果報不虗
001_0519_a_09L乃至究竟涅槃斷一切惡具足善根
001_0519_a_10L乃至廣說是名如來一乘功德也

001_0519_a_11L
次金剛寶藏者佛有十種堅固法寶
001_0519_a_12L集名藏如大經言一切諸佛有十種堅
001_0519_a_13L固士法何等爲十一諸願堅固不可沮
001_0519_a_14L如說脩行言行相應二盡未來劫脩
001_0519_a_15L菩薩行功德莊嚴未曾恐怖三爲化一
001_0519_a_16L切衆生故悉詣不可說不可說世界
001_0519_a_17L化衆生無有留難四於信不信衆生
001_0519_a_18L悲等觀而無有異五從初發心乃至正
001_0519_a_19L於其中間未曾退失菩提之心
001_0519_a_20L脩諸功德皆悉迴向一切種智不求世
001_0519_a_21L七於諸佛隨順脩學身口意業永離
001_0519_a_22L聲聞獨覺之心八平等普照無量無邊
001_0519_a_23L諸佛正法淨得 [52] 菩薩心究竟具足一切
001_0519_a_24L種智九悉能捨離一切世間令諸衆生

001_0519_b_01L괴로움을 없애 주고 적멸하고 평등한 즐거움을 얻게 하고, 열째, 일체중생을 위하여 한량없는 고통을 받으면서도 모든 부처의 종성種姓을 건립하여 (중생들이) 생사를 뛰어넘어 십력의 지위를 얻게 하려고 한다.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열 가지 견고한 보살의 법이다.167)

이와 같은 것을 금강보장이라고 한다.

⑩ 88종의 덕을 개별적으로 밝힘 10 : 법신장·자성청정묘장

다음으로 “법신장法身藏”이라고 한 것은 응화한 법신의 많은 덕이 모인 것을 법신장이라고 하였다. 또는 다음으로 법신장이라고 한 것은 오상五相과 오덕五德이 모인 것을 장이라고 한다고도 하였다. 예를 들면 『무상의경』에서 말하였다.
(보리가 행해지는 곳은 세 가지 도리로 세 가지 몸을 나타내는데) 제일신第一身은 다섯 가지 상과 다섯 가지 공덕과 상응한다. 무엇이 다섯 가지 상인가? 첫째는 무위이고, 둘째는 서로 떨어지지 않음이며, 셋째는 두 극단을 벗어남이고, 넷째는 일체의 장애를 벗어남이며, 다섯째는 자성이 청정함이다. 무엇이 다섯 가지 공덕인가? 첫째는 헤아릴 수 없음이고, 둘째는 셀 수 없음이며, 셋째는 생각하기 어려움이고, 넷째는 함께하지 않음이며, 다섯째는 구경의 청정함이다.168)

이와 같이 열 가지 법이 상응하며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법신장이라고 한다.
다음에 “자성청정묘장自性淸淨妙藏”이라고 한 것은 모든 여래의 가없는 공덕은 통하지 않음이 없음을 말하니 더러움과 깨끗함에 통하기 때문에 미혹한 자리에 있으면서도 물들지 않음을 ‘청淸’이라고 하고, 청정한 자리에 있으면서도 청정하지 않음을 ‘묘妙’라고 한다. 그러므로 자성이 청묘한 장이라고 하였다. 예를 들면 『무상의경』에서 “무엇을 여래의 공덕이 불가사의하다고 하는가? 일체 여래는 항하사겁의 가없는 공덕으로 미혹한 자리와 청정한 자리에 있으면서도 서로 받아들이고 상응하여 더러움도 없고 청정함도 없이 불가사의하다.”169)라고 하였다.

⑪ 88종의 덕을 개별적으로 밝힘 11 : 삼달·삼무위·일제·일도

다음에 “삼달三達”이라고 한 것은 시작도 없는 과거에 남김없이 통달하고 끝도 없는 미래에 남김없이 통달하며 현재의 가없는 시방법계에 구경토록 통달함을 말한다. 그러므로 ‘삼달’이라고 한 것이다. 또는 염법念法 하나하나가 세 가지 삼세를 갖추고 있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삼달’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예를 들면 대경大經(『화엄경』)의 구세九世 설명과 같다.

001_0519_b_01L悉滅諸苦逮得寂滅平等快樂十爲諸
001_0519_b_02L衆生受無量苦皆欲建立諸佛種姓
001_0519_b_03L出生死得十力地是爲一切諸佛十種
001_0519_b_04L堅固士法如是名爲金剛寶藏也

001_0519_b_05L
次法身藏者應化法身衆德積集名法
001_0519_b_06L身藏一云次法身藏者五相五德積集
001_0519_b_07L名藏如無上依經言第一身者與五
001_0519_b_08L種相五種功德相應何者五種相一者
001_0519_b_09L無爲二者不相離三者離二邊四者
001_0519_b_10L脫一切障五者自性淸淨何者五種功
001_0519_b_11L一者不可量二者不可數三者難
001_0519_b_12L四者不共五者究竟淸淨如是十
001_0519_b_13L法相應不離故名法身藏也

001_0519_b_14L
次自性淸1) [70] 妙藏者謂諸如來無邊功
001_0519_b_15L德無所不通通於染淨在於惑地不染
001_0519_b_16L曰淸在於淨地不淨曰妙故名自性淸
001_0519_b_17L妙之藏如無上依經言云何如來爲功
001_0519_b_18L德不可思議一切如來恒河沙劫無邊
001_0519_b_19L功德在於惑地及於淨地相攝相應
001_0519_b_20L未曾相離無垢無淨不可思議故

001_0519_b_21L
次三達者謂無始過去通達無餘無邊
001_0519_b_22L未來通達無餘現在無邊十方法界究
001_0519_b_23L竟通達故名三達又復通達一一念法
001_0519_b_24L無不具有三種三世故名三達如大經

001_0519_c_01L
다음으로 “삼무위三無爲”라고 한 것은, 『인왕경』에서 “제일의제가 둘이 아님에 대하여 법성인 무위이고, 이치에 반연하여 일체의 모양을 멸하므로 지혜를 반연하여 모양을 없애는 무위이며, 초인初忍에 머물 때에는 미래에 한량없는 생사가 지혜를 반연하지 않고 없어지기 때문에 지혜를 반연하지 않고 모양을 없애는 무위이다.”170)라고 하였다. 생각해 보면 저 『(인왕)경』에서는 초지에 근거하여 설명하기 때문에 부분적인 삼무위三無爲의 덕이지만 이 『(본업)경』에서는 불덕佛德에 대해서 설명하기 때문에 원만한 삼무위이다.
다음에 “삼명三明”이라고 한 것은 『열반경』에서 “보살의 명明은 모든 반야바라밀이고, 모든 부처님의 명은 불안佛眼이며, 무명의 명은 필경공을 말한다.”171)라고 하였다. 자리의 구별을 논하여 생각해 보면, 처음 (보살의) 명은 원인의 자리에 있고, 둘째(인 부처님의 명)은 결과의 자리에 있으며, 세 번째 (무명의) 명은 원인과 결과에 통한다. (자리를) 통합하여 보면 (세 가지) 모두 부처의 자리에 있다. 왜냐하면 대원경지로 온 법계의 불성의 문을 비추는 것을 불안이라 하니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명이고, 묘관찰지로 두루 완전하고 평등하게 비추니 이것이 보살의 명이며, 통달한 공의 이치는 밝음도 없고 어두움도 없으니 이것이 무명의 명이다. 이와 같은 것을 여래의 삼명이라고 한다.
다음에 “일제一諦”와 “일도一道”라고 한 것은 무작사제문無作四諦門의 도제道諦이다. (등각인) 금강심金剛心일 때는 고제와 집제가 함께 있기 때문에 삼제三諦가 있지만 지금은 불지에 이르러 둘을 벗어나 오직 하나이다. (이러한) 하나를 “일도”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일제가 크게 통하여 막힘이 없고 모든 부처님의 도가 같기 때문에 “일도”라고 하였다. 예를 들면 『(화엄)경』의 게송에서 “문수의 법은 항상하고 법왕은 한 가지 법뿐이다. 일체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일도로 생사에서 벗어난다.”172)라고 하였다.


001_0519_c_01L中九世中說也

001_0519_c_02L
次三無爲者仁王經言於第一義諦而
001_0519_c_03L不二爲法性無爲緣理而滅一切相故
001_0519_c_04L爲智緣滅無相無爲住初忍時未來無
001_0519_c_05L量生死不由智緣而滅故非智緣滅無
001_0519_c_06L相無爲案云彼經約初地說卽是少分
001_0519_c_07L三無爲德今此經中說於佛德卽是
001_0519_c_08L圓滿三無爲也

001_0519_c_09L
次三明者如涅槃經言菩薩明者諸般
001_0519_c_10L若波羅蜜諸佛明者所謂佛眼無明明
001_0519_c_11L者謂畢竟空案云若論位別初明在因
001_0519_c_12L第二在果地第三明者通於因果
001_0519_c_13L就其通門皆在佛地何者大圓鏡智
001_0519_c_14L照一法界佛性之門名爲佛眼是諸佛
001_0519_c_15L妙觀察智照遍滿等是菩薩明
001_0519_c_16L達空理無明無闇是無明明如是名爲
001_0519_c_17L如來三明也

001_0519_c_18L
次一諦一道者無作四諦門中道諦
001_0519_c_19L剛心時與苦集俱故有三諦今至佛
001_0519_c_20L地離二唯一一謂一道如是一諦通泰
001_0519_c_21L無閡諸佛道同故名一道如經頌言
001_0519_c_22L文殊法常爾法王唯一法一切無礙人
001_0519_c_23L一道出生死也

001_0519_c_24L「淨」一無

001_0520_a_01L
⑫ 88종의 덕을 개별적으로 밝힘 12 : 독법

다음에 “독법獨法”이라고 한 것은 대아大我의 덕은 둘과 함께함이 없기 때문이다. ‘대정大淨의 덕’을 말하는 것은 의미가 비슷함을 따른 것뿐이니 앞에서 ‘정덕淨德’을 말한 것은 ‘멸제’와 ‘정淨’의 의미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지금 “일도一道”를 따라 “독법”이라고 말한 것은 ‘일一’과 ‘독獨’의 의미가 비슷하기 때문이니 네 가지 장애를 없애고 이 네 가지 덕을 드러낸 것이다. 예를 들면 『무상의경』에서 말하였다.
일체의 아라한과 벽지불과 대지大地의 보살은 네 가지 장애 때문에 여래 법신의 네 가지 덕을 얻지 못한다.173) 무엇을 넷이라 하는가? 하나는 생겨나는 연에 미혹함이고, 둘은 생겨나는 인에 미혹함이며, 셋은 (남아 있는) 삶이 있음이고, 넷은 (남아 있는) 삶이 없음이다.174) 무엇이 생겨나는 연에 미혹함인가 하면 무명주지가 일체의 행을 낳게 하는 것이니 (십이연기에서 중생의) 무명이 업을 생기게 하는 경우와 같다. 무엇이 생겨나는 인에 미혹함인가 하면 무명주지가 생기게 한 모든 행이니 비유하자면 (십이연기에서 중생의) 무명이 생기게 한 모든 업과 같다. 무엇이 삶이 있음인가 하면 무명주지를 연으로 하고 무명주지가 생기게 한 무루의 행을 인으로 한 (아라한과 벽지불과 대지보살의) 세 가지 의생신이니 비유하자면 (십이연기에서 중생이) 네 가지 취取를 연으로 하고 세 가지 유루有漏의 업을 인으로 하여 세 가지 유有를 일으킴과 같다. 무엇이 삶이 없음인가 하면 세 가지 의생신을 연으로 하여 지각할 수 없이 미세함을 따라 멸함이니 비유하자면 (십이연기에서 중생이) 세 가지 유를 연으로 하여 생각마다 노사老死를 생기게 하는 것과 같다.
무명주지는 일체 번뇌가 의지하는 곳인데, 아직 끊어 없애지 못했기 때문에 모든 아라한과 벽지불과 자재보살은 대정바라밀大淨波羅蜜을 보는 데에 이르지 못한다. 무명주지가 생기게 한 가벼운 모습의 (미세한) 미혹을 인으로 한 허망한 행을 아직 없애지 못했기 때문에 대아바라밀大我波羅蜜을 보는 데에 이르지 못한다. 무명주지를 연으로 하고 미세한 허망이 생기게 한 무루의 업을 인으로 한 의생意生의 모든 몸(陰)을 아직 완전히 없애지 못했기 때문에 대락바라밀大樂波羅蜜을 보는 데에 이르지 못한다. 만약 일체 번뇌와 업으로 태어나는 어려움을 남김없이 완전히 없애지 못하여 변역 생사의 한없는 흐름을 없앤 모든 여래의 감로 세계를 얻지 못하면

001_0520_a_01L
次獨法者是大我德無與二故言大淨
001_0520_a_02L但從義類前說淨德滅諦淨類義
001_0520_a_03L相近故今從一道方說獨法一之與獨
001_0520_a_04L義相類故滅際四障顯此四德如無
001_0520_a_05L上依經言一切阿羅漢辟支佛大地菩
001_0520_a_06L爲四種障不得如來法身四德
001_0520_a_07L者爲四一者生緣惑二者生因惑
001_0520_a_08L者有有四者無有何者生緣惑卽是
001_0520_a_09L無明住地生一切行如無明生業
001_0520_a_10L者生因惑是無明住地所生諸行譬如
001_0520_a_11L無明所生諸業何者有有緣無明住地
001_0520_a_12L因無明住地所起無漏行三種意生身
001_0520_a_13L譬如四取爲緣三有漏業爲因起三種
001_0520_a_14L何者無有緣三種意生身不可覺
001_0520_a_15L知微細隨滅1) [71] 譬如緣三有中生念
001_0520_a_16L念老死無明住地一切煩惱是其依處
001_0520_a_17L未斷除故諸阿羅漢及辟支佛自在菩
001_0520_a_18L不得至見大淨波羅蜜因無明住地
001_0520_a_19L起輕相惑有虗妄行未滅除故不得至
001_0520_a_20L見大我波羅蜜緣無明住地因微細虗
001_0520_a_21L妄起無漏業意生諸陰未除盡故
001_0520_a_22L得至見大樂波羅蜜若未能得一切煩
001_0520_a_23L惱諸業生難永盡無餘是諸如來爲甘
001_0520_a_24L露界卽變易死斷流滅無量不得不 [53]

001_0520_b_01L절대로 변이變異가 없는 대상바라밀大常波羅蜜을 보는 데에 이르지 못한다.175)

그리고는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이제 따지는 것은 그만두고 다시 본문을 해석한다.
(과에 대한 개별적인 대답의 두 번째인) 의義의 과를 해석함의 세 가지 구분 중에서 두 번째인 개별적으로 해석함은 여기에서 마쳤다.
“모든 (성인의)” 이하는 세 번째인 총결이다. 여기에 두 구절이 있으니 먼저는 의義의 과를 거론하였고 나중에는 도가 같음으로 결론지었다.

(5) 과果에 대한 개별적인 대답 3 : 체體와 의義의 두 과를 거듭 밝힘
“불자여, 과果의 체體는 원만하여 덕을 갖추지 않음이 없고 이치가 두루하지 않음이 없으며, 중도제일의제의 청정 국토에 머물러 다함이 없고 이름도 없고 형상도 없느니라. 일체법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체가 없는 것도 아니어서 그것이 일조상一照相·일합상一合相·일체상一體相·일각상一覺相이며 밝음과 청정에는 둘이 없느니라.
불자여, 이 과는 독법獨法이고 완전하게 밝으며 항상 머무니 하나의 과의 체상에 헤아릴 수 없는 의미가 있고, 그 의미에 헤아릴 수 없는 덕德이 있으며, 그 덕에 헤아릴 수 없는 이름이 있느니라. 의義의 과는 말하자면 멸제의 상락아정과 열여덟 가지 함께하지 않는 일체 공덕을 모두 의의 과라고 하기 때문에 과과果果라 하기도 하느니라.
불자여, 의미와 덕과 이름의 세 가지는 모두 교화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이와 같이 세 가지 구절의 뜻이 있느니라. 만약 현인과 일체중생이 이 세 구절을 이해하면 이 사람은 이미 삼세의 제불에게 부처님의 직위를 받은 것이니라.
불자여, 그 과는 말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으나 이름과 형상의 법 안에서 이름과 형상의 법으로 설한 것이니라. 그러므로 하나의 과를 체라고 하고 의를 과과라고 하느니라. 이 의의 과가 원과圓果를 나오게 하므로 과과라 하느니라.
불자여, 내가 이러한 인과를 백천 겁 동안 설한다 하더라도 다할 수 없으니 너희들 모든 대중은 스스로 잘 수지하여야 하느니라.”176)

개별적으로 과를 해석하는 세 부분 중에서 처음에 체의 과를 해석함과 다음으로 의의 과를 해석함의 두 부분은 앞에서 마쳤다.
“과果의 체體는” 이하는 세 번째로 체와 의의 두 과를 거듭 나타냄이다. 여기에 둘이 있으니 개별적으로 나타냄과 총결이다.
처음 개별적으로 나타냄에서 먼저 체의 과를 밝혔는데, 여기에 열 가지 구절이 있다. 앞의 다섯은 곧바로 밝힘이고 뒤의 다섯은 마무리 지음이다.
처음 (곧바로 밝힘에서) “과果의 체體는 원만하여 덕을 갖추지 않음이 없고 이치가 두루하지 않음이 없으며”라고 한 것은 과의 궁극인 법신法身의 문을 거론한 것이고, 두 번째 구절에서 “중도제일의제의 청정 국토에 머물러”라고 한 것은 자수용토自受用土의 문을 거론한 것이다. 세 번째 구절에서 “다함이 없고 이름도 없고 형상도 없느니라.”라고 한 것은, 법신 정토는 유일한 법계여서 서로 융통하여 끝과 한계가 없기 때문에 ‘다함이 없고’라고 하였고, 언어의 길이 끊어졌기 때문에 ‘이름도 없고’라고 하였으며, 마음이 움직이는 자리가 없어졌기 때문에 ‘형상도 없느니라’라고 하였다. 네 번째 구절에서 “일체법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라고 한 것은 일체 공덕을 갖추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그 모든 공덕을 얻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 구절에 “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체가 없는 것도 아니어서”라고 한 것은, 비록 하나의 과체果體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과체가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며 그 (일)법계가 있음과 없음의 성품에서 벗어나 일체 공덕이 서로 들어맞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무상의경』에서 “일체의 불토에는 걸림이 없고 일체의 여래는 과거에 만든 경계에 수순하고 평등하여 분별하는 모습이 없으니 허공처럼 분별이 없어 법계와 서로 들어맞기 때문이다.”177)라고 하였다.
“그것이 일” 이하는 두 번째인 앞을 마무리 지음이다. 여기의 다섯 구절을

001_0520_b_01L見極無變異大常波羅蜜乃至廣說故
001_0520_b_02L且止乘論還釋本文釋義果內有三分
001_0520_b_03L第二別釋竟在於前

001_0520_b_04L
一切以下第三總結於中二句先擧義
001_0520_b_05L後結道同

001_0520_b_06L[重明體義二果]
別釋果內有三分中初釋體果次釋義
001_0520_b_07L如是二分竟在於前果體以下第三
001_0520_b_08L重顯體義二果於中有二別顯總結
001_0520_b_09L初別顯中先明體果此中十句先五
001_0520_b_10L正明後五結成初中言果體圓滿無德
001_0520_b_11L不脩理無不周者是擧果極法身之門
001_0520_b_12L第二句言居中道第一義諦淸淨國土者
001_0520_b_13L是擧自受用土之門第三句言無極無
001_0520_b_14L名無相者法身淨土唯一法界互相融
001_0520_b_15L無有邊際故言無極言語路絕
001_0520_b_16L言無名心行處滅故言無相第四句言
001_0520_b_17L非一切法可得者一切功德無所不備
001_0520_b_18L而諸功德皆不可得故第五句言非有
001_0520_b_19L體非無體者雖非有一果體而非無一
001_0520_b_20L果體故2) [72] 法界離有無性一切功德
001_0520_b_21L皆相稱故如無上依經言一切佛土更 [54]
001_0520_b_22L無所礙一切如來隨順平等過作 [55]
001_0520_b_23L無分別相猶如虗空無有分別與法界
001_0520_b_24L相稱故其一以下第三 [56] 結前於中五句

001_0520_c_01L세 가지로 마무리 지었으니 처음의 두 구절은 앞의 두 구절을 그대로 마무리 지은 것이고, 다음의 두 구절은 뒤의 두 구절을 반대로 마무리 지은 것이며, 세 번째인 한 구절은 중간 구절을 마무리 지은 것이다. “일조상一照相”이라고 한 것은 “덕을 갖추지 않음이 없고 이치가 두루하지 않음이 없으며”라고 한 구절을 마무리 지은 것이니 하나의 공덕이 일조一照하지 않음이 없고 이치도 지혜와 합하여 일조가 되기 때문이다. “일합상一合相”이라고 한 것은 “중도제일(의)제의 청정 국토에 머물러”라고 한 구절을 마무리 지은 것이니 부처와 정토는 서로 회통하여 둘이 아니므로 중도 국토에 머문다고 하기 때문이다. “일체상一體相”이라고 한 것은 다섯 번째 구절인 “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체가 없는 것도 아니어서”를 마무리 지은 것이니 체가 없는 것이 아니라고 해서 당연히 체가 있는 것이 아닌 이유가 바로 ‘일체상’이기 때문이다. “일각상一覺相이며”라고 한 것은 네 번째 구절(인 “일체법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를 마무리 지은 것이니 일체법은 동일하여 얻을 것이 없음을 깨닫는 것이 ‘일각상’이기 때문이다. “밝음과 청정에는 둘이 없느니라.”라고 한 것은 중간의 “다함이 없고 이름도 없고 형상도 없느니라.”라고 한 구절을 마무리 지은 것이니 정토와 부처의 밝음은 동일하여 다함이 없고 이름과 형상을 벗어났기 때문에 둘이 없는 것이다.
“이 과는” 이하는 (처음 개별적으로 나타냄에서 먼저 체의 과를 밝히고) 다음으로 의의 과를 드러낸 것이다. 여기에 넷이 있으니 첫째, 체과體果를 거론하여 의과義果를 드러내고, 둘째, 의과에 대하여 그 차별을 드러내며, 셋째, 의과를 건립한 의도를 밝히고, 넷째, 의과를 이해하는 이로움을 보인다.
처음 (체과를 거론하여 의과를 드러내면서) “이 과는 독법獨法이고 완전하게 밝으며 항상 머무니”라고 한 것은 거듭 과체果體를 거론한 것이고, “하나의 과의 체상에 헤아릴 수 없는 의미가 있고”라고 한 것은 체에 의거하여 의미를 세운 것이며, “의미에 헤아릴 수 없는 덕德이 있으며 덕에 헤아릴 수 없는 이름이 있느니라.”라고 한 것은 낱낱의 의미 안에 헤아릴 수 없는 덕이 있고 덕 안에도 헤아릴 수 없는 이름이 있다는 것이다.
“의義의 과는” 이하는 두 번째인 (의과의) 차별을 드러낸 것이다. “멸제”라고 한 것은 정덕淨德을 거론한 것이고, “낙樂”이라고 한 것은 대락大樂이며, “상常”이라고 한 것은 무위이고, “아법我法”이라고 한 것은 앞의 독법이다. 이것은 (앞의) 88종(의 덕)에서 거론한 것이다. 마지막에 “열여덟 가지 함께하지 않는 일체 공덕을”이라고 한 것은

001_0520_c_01L作三分結初二順結前之二句次二逆
001_0520_c_02L結後之二句第三一句結中間句一照
001_0520_c_03L相者是結無德不備理無不周之句
001_0520_c_04L一功德無不一照理與智冥亦爲一照
001_0520_c_05L一合相者結居中道第一諦淸淨國
001_0520_c_06L土之句佛與淨土相會無二乃名爲居
001_0520_c_07L中道國士故一體相者結第五句
001_0520_c_08L非有體不墮無體其非無體不當有體
001_0520_c_09L所以直是一體相故一覺相者結第四
001_0520_c_10L覺一切法同無所得是一覺相故
001_0520_c_11L淨明無二者是結中間無極無名無相
001_0520_c_12L之句淨土佛明同一無極又離名相爲
001_0520_c_13L無二故

001_0520_c_14L
是果以下次顯義果於中有四一擧體
001_0520_c_15L果以標義果二就義果顯其差別三明
001_0520_c_16L建立義果之意四示能解義果之利
001_0520_c_17L中言是果獨法圓明常住者重擧體果
001_0520_c_18L一果體相有無量義者依體立義也
001_0520_c_19L義有無量德德有無量名者一一義中
001_0520_c_20L有無量德德中亦有無量名也義果者
001_0520_c_21L以下第二顯差別滅諦者是擧淨德樂
001_0520_c_22L者大樂常者無爲我法者前獨法是擧
001_0520_c_23L八十八中最後十八不共一切功德
001_0520_c_24L「眠」一無「其」下一有「一」

001_0521_a_01L앞에서 말한 (88종의 덕 가운데 상락아정의 넷을 제외한) 84문을 통틀어서 거론한 것이다. “과과果果”라고 한 것은 체과를 따라 의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의미와 덕과 이름의” 이하는 세 번째인 (의과를) 건립한 의도이다. “모두 교화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이와 같이 세 가지 구절의 뜻이) 있느니라.”라고 한 것은 이것이 모두 응신·화신·법신의 의미에 근거하여 중생을 교화하는 문이기 때문에 이와 같이 의미와 덕과 이름을 건립한 것이다.
“만약 현인과” 이하는 네 번째인 수승한 이로움을 보인 것이다. ‘현인’이라고 한 것은 모든 삼현三賢이고 “일체중생”이라고 한 것은 (초)주 이전의 범부이다. 이 세 구절의 의도인 교화문의 설명이 말이 있는 것과 같지 않음을 이해한 사람은 이미 성불의 첫 싹이 되는 조짐을 얻었기 때문에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수기한다고 하였다.
거듭 (체와 의의) 두 과를 나타냄에서 두 가지 구분 중에 첫 번째인 개별적으로 나타냄은 앞에서 마쳤다. “그 과는” 이하는 두 번째인 총결이다. “그 과는 말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으나”라고 한 것은 체과와 의과 모두 이름과 말이 끊어졌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것이고 말을 따르는 지혜도 알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중생의 이름과 형상의 법을 따라서 말에 의지하여 체와 의의 모습을 임시로 설하였기 때문에 “이름과 형상의 법 안에서 이름과 형상의 법으로 설한 것이니라.”라고 하였다. 그 아래는 임시로 설한 두 과의 차별을 드러내었다.
(「인과품」 전체의) 부처님 대답의 두 가지 구분에서 첫 번째인 인과의 의미를 개별적으로 답합을 마쳤다. “내가 (이러한 인과를 백천 겁 동안) 설한다” 이하는 두 번째인 대답을 결론 맺음이다.

7. 대중수학품大衆受學品

정설분正說分의 두 가지 부분 중에 첫 번째인 여래께서 (중생을) 위해 설하신 부분은 마쳤고, 지금부터는 두 번째인 대중이 받아 배우는 부분이다. ‘수受’는 계를 받는 것이고 ‘학學’은 배워서 행한다는 것이니 한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십계十戒를 받고 이어서 육입을 배워 처음부터 끝까지 이른다. 여기에서 이런 의미를 나타내기 때문에 “수학품”이라고 하였다.

1) 질문
이때 경수보살이 모든 부처님께 예경하고 대중의 가르침을 받들어 7회會에서 설법하신 핵심 의미를 간략하게 물어서, 삼보장三寶藏을 믿고 따라 법과 법이 끊어지지 않게 하고 세간의 명리名利가 되지 않아 법이 오래도록 머물게 하고자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위에서 이미 인因·과果·현賢·성聖의 일체 공덕장을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이 대중에 14나유타의 사람이 있으나, 누가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서도 받아 배우고 수도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하나 모두 실천하여 차례로 보살위에 들어가는 이입니까?”178)

문장에 둘이 있으니 먼저는 물음이고 나중은 대답이다. 물음에도 둘이 있으니 먼저 의례의 의도를 서술하고 다음으로 곧장 질문을 하였다. 질문에서는 앞의 내용을 받아들이고 뒤의 내용을 물었다.

2) 대답
그때에 석가모니불께서는 정수리의 육계에서 일체 부처님의 광명과 일체 보살의 광명을 놓으시고, 다시 시방으로 각각 백억 불국토에 계신 부처님과 보살들을 모으셨다. 모두 다 모이고 나자 이 대중 속에 있는 문수사리보살·보현보살·법혜法慧보살·공덕림功德林보살·금강당金剛幢보살·금강장金剛藏보살·선재동자 보살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들은 이 대중의 경수보살이 삼관三觀과 법계의 모든 부처님의 자성청정도自性淸淨道와 일체 보살이 닦는 명관법문明觀法門을 묻는 것을 보았느냐? 그대들 일곱 보살은 각각 백만의 대중을 거느리고 이와 같은 법문을 받아서 관찰하고 배워야 하느니라. 불자여, 내가 이제 다시 이와 같은 명관법을 거듭 설하니 말하자면 육입 차제의 도이니라.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여 모든 도를 닦으며 대중에게 경계하고 타일러서 수용하게 하고 조복하여 행하게 하여야 할 것이다.”179)

대답에 넷이 있다. 첫째는 광명을 놓아서 대중을 모은 것이니 한자리에 앉아서 받아 배우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고,

001_0521_a_01L擧前說八十四門言果果者以從體果
001_0521_a_02L出義果故義德名以下第三建立意
001_0521_a_03L敎化故有者皆約應化法身之義敎化
001_0521_a_04L衆生門以立如是義德名也若賢人下
001_0521_a_05L第四示勝利賢人者諸三賢也一切衆
001_0521_a_06L生者住前凡夫也若能解是三句之意
001_0521_a_07L敎化門說非如言有者已得成佛之初
001_0521_a_08L萌兆故爲三世諸佛所記也

001_0521_a_09L
重顯二果有二分中第一別顯竟在於
001_0521_a_10L其果以下第二總結其果不可說不
001_0521_a_11L可知者體果義果皆絕名言故不可說
001_0521_a_12L隨言之智亦不能知但隨衆生名相之
001_0521_a_13L寄言假說體義之相故言而就名相
001_0521_a_14L法中說名相法下顯假說二果差別

001_0521_a_15L
佛答之內有二分第一別答因果義竟
001_0521_a_16L吾說以下第二結答

001_0521_a_17L大衆受學品

001_0521_a_18L
正說分內有二分中第一如來爲說分
001_0521_a_19L此下第二大衆受學受者受戒
001_0521_a_20L者學行不起一坐而受十戒仍學六入
001_0521_a_21L從始至終此中顯是義故言受學品

001_0521_a_22L[問]
在文有二先問後答問中亦二先序
001_0521_a_23L儀意次正發問發問之中領前問後

001_0521_a_24L[答]
答中有四一者放光集衆爲欲證明一

001_0521_b_01L둘째는 물음을 찬탄하고 배우기를 권한 것이다.
여기에서 일곱 보살에게 말씀하신 것은 『화엄경』의 일곱 법회의 주인이기 때문이다.180) “삼관三觀을 물었다”고 한 것은 (경수보살의) 물음에서 “받아 배우고 수도하여”라고 한 것을 보인 것이니 ‘수도’라는 말은 삼관을 닦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다음에 “법계의 모든 부처님의 자성청정도自性淸淨道와”라고 한 것은 물음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하나 모두 실천하여”라는 구절을 보인 것이다. 다음에 “일체 보살이 닦는 명관법문明觀法門”이라고 한 것은 “차례로 보살위에 들어가는 이”를 묻는 구절을 보인 것이다.
또 이 3구는 처음은 총괄이고 뒤는 개별이다. ‘처음은 총괄’이라고 한 것은 삼관을 말하니 “받아 배우고 수도하여”라는 말을 총괄적으로 거론한 것이고, ‘뒤는 개별’이라고 한 것은 제2구에서 “도道”라는 말을 개별적으로 나타내고, 제3구에서 “수修”라는 말을 개별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대들” 이하는 (대답의 둘째인) 배움을 권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불자여, 내가 이제 다시 (이와 같은 명관법을) 거듭 설하니” 이하는 (대답의) 셋째인 설하기로 약속함이다.

(1) 받음에 대하여 답함
“불자여, 만약 일체중생이 처음으로 삼보의 바다로 들어가는 데에는 믿음이 근본이고, 부처님 가문에 머물러 사는 데에는 계가 근본이니라. 불자여, 처음 수행하는 보살은 믿음이 있는 남자와 믿음이 있는 여자 중에 모든 근이 갖추어지지 않은 황문黃門·음남婬男·음녀婬女·노비奴婢·변화變化의 사람이라도 계를 받게 해야 하니 모두 마음이 있어서 진리의 길로 향할 수 있기 때문이니라. 처음으로 발심 출가하여 보살의 자리를 잇기를 원하는 이는 먼저 정법계正法戒를 받아야 하느니라. 계는 일체 행의 공덕장의 근본이며 곧장 불과의 길로 향하는 일체 행의 근본이니라. 이 계는 모든 대악大惡, 말하자면 일곱 가지 (잘못된) 견해181)와 여섯 가지 집착182)을 없애서 정법을 밝히는 거울이니라.
불자여, 이제 모든 보살을 위하여 모든 계의 근본에 대해 결론을 내리자면 삼수문三受門이니 섭선법계는 팔만사천법문이고, 섭중생계는 자비희사의 교화가 일체중생에게 미치어 모두 안락을 얻게 하는 것이며, 섭률의계는 십바라이十波羅夷니라.
불자여, 수계에는 세 가지 받음이 있느니라. 첫째, 모든 불보살이 현재하는 앞에서 받음이니 진실한 상품의 계를 얻느니라. 둘째, 모든 불보살이 멸도한 후에 천 리 안에 먼저 수계한 보살이 있으면 법사가 되어 나에게 계를 교수해 주시기를 청하고서 먼저 발에 절을 하고 ‘청하오니 대존자께서는 스승이 되시어 저에게 계를 내리소서.’라고 하면 그 제자는 정법계를 얻으니 이것이 중품의 계이니라. 셋째, 부처님이 멸도한 후에 천 리 안에 법사가 없을 때에는 모든 불보살의 형상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합장하여 스스로 서원하며 수계해야 하니 이렇게 말해야 하느니라. ‘저 아무개는 시방의 부처님과 대지보살들께 아룁니다. 저는 일체 보살의 계를 배우겠습니다.’ 이것이 하품의 계이니라. 두 번 세 번 이와 같이 설하느니라.
불자여, 이 세 가지는 세 종류의 수계를 섭수하니 과거불이 이미 설하셨고 미래불이 앞으로 설할 것이며 현재불이 지금 설하시며, 과거 모든 보살이 이미 배웠고 미래의 모든 보살이 앞으로 배울 것이며 현재의 모든 보살이 지금 배우느니라.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정법계이니라. 만약 모든 부처님과 모든 보살이 이 법계의 문에 들어가지 않고 무상의 도과道果인 허공처럼 평등한 경지를 얻는 이치는 없느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불자여, 이제 곧바로 정계正戒를 설하느니라. 선남자와 선여인이 수계를 하려고 할 때는 먼저 과거세의 과거제가 다할 때까지의 모든 부처님께 예경하고, 미래세와 미래제가 다할 때까지의 모든 부처님께 예경하며, 현재세와 현재제가 다할 때까지의 모든 부처님께 예경하느니라. 이와 같이 세 번 예경하고 나서 법과 승에도 마찬가지로 하느니라.
불자여, 다시 네 가지 무너지지 않는 믿음을 공경하여 받으니 ‘사의법四依法에 의지하여 지금부터 미래제가 다할 때까지 이 몸으로 부처님께 귀의하고 법에 귀의하며 현성승賢聖僧에 귀의하고 법계에 귀의합니다.’라고 세 번 말하느니라.
불자여, 다음은 삼세의 죄에 대해 잘못을 참회함을 가르치느니라. ‘현재의 신구의身口意의 십악죄라면 끝끝내 미래제가 다하도록 일으키지 않기를 바라오며, 미래의 신구의의 십악죄라면 끝끝내 미래제가 다하도록 일으키지 않기를 바라오며, 과거의 신구의의 십악죄라면 끝끝내 미래제가 다하도록 일으키지 않기를 바라옵니다.’라고 하느니라.”183)

“만약 일체중생이” 이하는 (대답의) 네 번째인 곧바로 답함이다. 여기에 둘이 있으니 개별적으로 답함과 총괄적으로 답함이다. 처음 (개별적으로 답함)에도 둘이니 먼저는 받음이고 뒤에는 배움이다. 받음에 셋이 있으니 표방·해석·마무리이다. 표방은 믿음을 거론하여 계를 표방한 것이니 먼저 믿음을 일으켜야 수계를 받기 때문이다.
“처음 수행하는” 이하는 두 번째인 자세하게 해석함이다. 여기에 넷이 있다. 첫째는 수계법의 쓰임이고, 둘째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하의 수계의 방편이다. 여기에 셋이 있으니 먼저는 삼보에 세 번 예경하는 것이고, 다음은 사의四依를 공경하여 받는 것이며, 뒤는 잘못을 참회하는 것이다. 소승의 수계갈마에 준한다면 여기에서 사귀四歸를 공경하여 받으면 바르게 계를 준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이 경문의 형세를 살펴보면 이 ‘공경하여 받는’ 문장은 바르게 계를 준 것이 아니니, 먼저 수계하고 나중에 참회하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문장을 방편이라고 판단하였다.

“이와 같이 참회하여 삼업이 청정하기가 깨끗한 유리의 안팎이 밝게 비치듯 하면 십무진계十無盡戒를 주니 그대들은 잘 들어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불자여, 지금의 몸으로부터 부처의 몸이 될 때까지 미래제가 다하도록 그 중간에 고의로 살생해서는 안 되느니라. 만약 범하면 보살행이 아니며 42현성법賢聖法을 잃어버리니 범하지 않고 지킬 수 있겠는가?’ 하면, 수계자는 ‘지키겠습니다.’ 하고 답하느니라.
‘불자여, 지금의 이 몸으로부터 부처의 몸이 될 때까지 미래제가 다하도록 그 중간에 고의로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느니라. 만약 범하면 보살행이 아니며 42현성법을 잃어버리니 범하지 않고 지킬 수 있겠는가?’ 하면, 수계자는 ‘지키겠습니다.’ 하고 답하느니라.
‘불자여, 지금의 이 몸으로부터 부처의 몸이 될 때까지 미래제가 다하도록 그 중간에 고의로 음행을 해서는 안 되느니라. 만약 범하면 보살행이 아니며 42현성법을 잃어버리니 범하지 않고 지킬 수 있겠는가?’ 하면, 수계자는 ‘지키겠습니다.’ 하고 답하느니라.
‘불자여, 지금의 이 몸으로부터 부처의 몸이 될 때까지 미래제가 다하도록 그 중간에 고의로 훔쳐서는 안 되느니라. 만약 범하면 보살행이 아니며 42현성법을 잃어버리니 범하지 않고 지킬 수 있겠는가?’ 하면, 수계자는 ‘지키겠습니다.’ 하고 답하느니라.
‘불자여, 지금의 이 몸으로부터 부처의 몸이 될 때까지 미래제가 다하도록 그 중간에 고의로 술을 팔아서는 안 되느니라. 만약 범하면 보살행이 아니며 42현성법을 잃어버리니 범하지 않고 지킬 수 있겠는가?’ 하면, 수계자는 ‘지키겠습니다.’ 하고 답하느니라.
‘불자여, 지금의 이 몸으로부터 부처의 몸이 될 때까지 미래제가 다하도록 그 중간에 고의로 재가와 출가의 보살의 잘못을 말해서는 안 되느니라. 만약 범하면 보살행이 아니며 42현성법을 잃어버리니 범하지 않고 지킬 수 있겠는가?’ 하면, 수계자는 ‘지키겠습니다.’ 하고 답하느니라.
‘불자여, 지금의 이 몸으로부터 부처의 몸이 될 때까지 미래제가 다하도록 그 중간에 고의로 인색해서는 안 되느니라. 만약 범하면 보살행이 아니며 42현성법을 잃어버리니 범하지 않고 지킬 수 있겠는가?’ 하면, 수계자는 ‘지키겠습니다.’ 하고 답하느니라.
‘불자여, 지금의 이 몸으로부터 부처의 몸이 될 때까지 미래제가 다하도록 그 중간에 고의로 화를 내어서는 안 되느니라. 만약 범하면 보살행이 아니며 42현성법을 잃어버리니 범하지 않고 지킬 수 있겠는가?’ 하면, 수계자는 ‘지키겠습니다.’ 하고 답하느니라.
‘불자여, 지금의 이 몸으로부터 부처의 몸이 될 때까지 미래제가 다하도록 그 중간에 고의로 자기를 칭찬하면서 남을 헐뜯어서는 안 되느니라. 만약 범하면 보살행이 아니며 42현성법을 잃어버리니 범하지 않고 지킬 수 있겠는가?’ 하면, 수계자는 ‘지키겠습니다.’ 하고 답하느니라.
‘불자여, 지금의 이 몸으로부터 부처의 몸이 될 때까지 미래제가 다하도록 그 중간에 고의로 삼보장三寶藏을 비방해서는 안 되느니라. 만약 범하면 보살행이 아니며 42현성법을 잃어버리니 범하지 않고 지킬 수 있겠는가?’ 하면, 수계자는 ‘지키겠습니다.’ 하고 답하느니라.
불자여, 십무진계十無盡戒를 받고 나면 그 수계자는 네 가지 마군을 통과하여 건너고 삼계의 고통을 뛰어넘으니 세세생생 이 계를 잃지 않으면 항상 수행하는 사람을 따라서 성불에 이르니라.”184)

“이와 같이” 이하는 (자세하게 해석함의) 세 번째인 곧바로 수계를 밝힘이니 여기에 셋이 있다. 첫째는 앞의 잘못을 참회함을 드러내어 곧바로 주고받음을 표방함이고, 둘째는 곧바로 십계를 줌이며, 셋째는 계의 덕을 마무리 지어 찬탄함이다. 이 셋을 합하여 세 번째인 곧바로 수계를 밝힘을 마친다.


001_0521_b_01L坐受學故二者歎問勸學此中告七菩
001_0521_b_02L薩者華嚴會中七會主故能問三觀者
001_0521_b_03L是示問中言受學脩道脩道之言顯三
001_0521_b_04L觀修故次言法界諸佛自性淸淨道者
001_0521_b_05L是示問中從始至終一一具行之句
001_0521_b_06L言一切菩薩所脩明觀法門者是示問
001_0521_b_07L次第入菩薩位者之句又此三句初總
001_0521_b_08L後別言初總者所謂三觀總擧受學
001_0521_b_09L脩道之言言後別者等二句別顯道言
001_0521_b_10L第三句別顯脩言汝等以下勸學可知
001_0521_b_11L佛子我今1) [73] 若一
001_0521_b_12L切衆生以下第四正答此中有二別答
001_0521_b_13L總答初中亦二先受後學受中有三
001_0521_b_14L謂標釋結標者擧信標戒要先起信方
001_0521_b_15L受戒故始行以下第二廣釋於中有四
001_0521_b_16L一者受戒法用二者佛告以下受戒方
001_0521_b_17L便此中有三先三禮三寶次敬受四
001_0521_b_18L後卽悔過若准小乘受戒羯磨
001_0521_b_19L中敬受四歸應是正爲授戒但尋此中
001_0521_b_20L經文之勢此敬受文非正授戒以先
001_0521_b_21L受後悔不應理故故判此文爲方便也
001_0521_b_22L如是以下第三明正授戒於中有三
001_0521_b_23L者牒前悔過標正與受二者正授十戒
001_0521_b_24L三者結歎戒德此三合爲第三明正授

001_0521_c_01L
“불자여, 과거·미래·현재의 일체중생이 이 보살계를 받지 않으면 유정의 마음이라고 하지 않으며, 축생과 다를 바가 없으니 사람이라고 하지 않으며, 삼보의 바다에서 늘 벗어나니 보살·남자·여자·귀신 등의 사람이 아닌 존재가 아니라 축생이라고 하고 사견邪見이라고 하며 외도라고 하니 인정人情에 가깝지 않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보살계에는 받는 법(受法)은 있으나 버리는 법(捨法)은 없으니 범하더라도 미래제가 다하도록 없어지지는 않음을 알아야 하느니라.
어떤 사람이 받고자 하면 보살 법사는 먼저 그를 위하여 해설하고 독송해 주어 그 사람의 마음이 열리고 생각으로 이해하여 즐거워하는 마음을 내게 한 후에 받게 하느니라. 또 법사가 일체 국토에서 한 사람을 교화하고 출가시켜 보살계를 받게 할 수 있으면 이 법사의 복은 팔만 사천의 탑을 만드는 것보다 뛰어나니라. 더욱이 두 사람이나 세 사람 나아가 백천에 이르면 복의 과보는 헤아릴 수 없느니라.
(법)사는 부부나 육친六親(부·모·형·제·처·자)이 서로 (법)사가 되어 (계를) 줄 수 있고, 수계자는 모든 부처님 세계의 보살의 수數 안에 들어가 삼겁의 생사 고통을 뛰어넘으니 그러므로 마땅히 받아야 하느니라. 있으면서 범하는 것이 없으면서 범하지 않는 것보다 나으니 범함이 있으면 보살이라 하고 범함이 없으면 외도라 하느니라. 그러므로 1할이라도 계를 받은 것이 있으면 1할의 보살이라 하고, 2할·3할·4할에 이어져 완전히 받으면 구족한 수계라고 하느니라. 그러므로 보살에게는 십중과 팔만의 위의계威儀戒가 있느니라. 십중은 범하면 참회할 수가 없으나 거듭 계를 받게 할 수는 있느니라. 팔만의 위의계는 모두 경계輕戒라고 하고 범하면 상좌 스님에게 잘못을 참회하여 잘못을 소멸시킬 수 있느니라.
모든 보살의 범성계凡聖戒는 모두 마음을 체로 하느니라. 그러므로 마음이 다하면 계도 다하고 마음이 다하지 않으면 계도 다하는 일이 없으므로 육도 중생이 얻은 계를 받을 수 있으며 다만 말을 알아듣기만 하면 얻은 계를 잃지 않느니라.
불자여, 삼세의 겁 동안 모든 부처님께서는 항상 ‘내가 이제 이 나무 아래에서 14억 사람을 위하여 (십)주 이전의 신상보살이 처음 수계하는 법을 설하느니라. 불자여, 신상보살은 십천 겁 동안 십계법十戒法을 행하여 앞으로 십주심十住心에 들어갈 예정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
불자여, 먼저 모든 대중을 위하여 보살계를 받게 한 후에 『영락경』을 설하여 함께 보고 함께 실천하게 해야 하느니라.”
이때 대중에 있던 백억 사람이 곧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 계율을 받아 지녔다.185)

“과거·미래” 이하는 (자세하게 해석함의) 네 번째인 모든 방면의 분별이다. “받는 법(受法)은 있으나 버리는 법(捨法)은 없으니 범하더라도 미래제가 다하도록 없어지지는 않음”이라고 한 것은, 예를 들어 (『유가사지론』의) 보살지의 결택분決擇分에서 이렇게 설하였다.
만약 이와 같은 율의律儀를 버리지 않는 것이 있으면 다른 생으로 윤회하더라도 (율의를) 버리지 않은 줄 알 것이다. 또 버리는 인연에 간략히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받겠다는 마음과 동분同分이 아닌 마음을 결정코 일으키는 것이고, 둘째는 (율의를) 식별하는 대장부 앞에서 고의로 버리겠다는 말을 하는 것이며, 셋째는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 네 가지 뛰어난 법(他所勝法 : 바라이)186)을 범하는 것이며, 넷째는 더욱 늘어나는 번뇌 때문에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 네 가지 뛰어난 법에 따르는 것들을 범하는 것이다. 이런 인연으로 보살의 율의를 버리는 줄 알아야 한다. 만약 받으려는 맑고 깨끗한 마음이 다시 생기면 후에 도로 받아야 한다.187)

이와 같이 논서의 문장과 이 경의 차이를 어떻게 회통하여야 할까? 해석하자면, 논서는 삼승교의 의도에서 서술한 것이기 때문에 버리는 법이 있고 계를 범하면 없어진다. 삼승교에 의지하여 발심한 보살의 마음은 완전하지 않고 견고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이 경은 일승교이기 때문에 버리는 법이 없고 범하여도 없어지지 않으니 이에 의지하여 발심하면 앞에 주어도 도리어 가진다.
이제 따지는 것은 그만두고 다시 본문을 해석한다.
“이때 대중에” 이하는 (개별적으로 답함의 첫째인 받음에 대한 대답의) 세 번째인 수계를 총체적으로 마무리함이다. “곧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 계율을 받아 지녔다.”라고 한 것은 곧 이곳 한자리에서 비로소 일어나 수계함을 말하니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도 육입六入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2) 배움에 대하여 답함
그 이름은 범타수왕梵陀首王이며 무수한 천자와 함께 수행하여 십계를 만족滿足하고 초주위初住位에 들어갔다.
“불자여, 다시 이 주住에서 백법관문百法觀門을 수행하니 말하자면 십신·십진·십발취·십승·십금강·십수희·십계·십원·십호·십회향이니라. 이 백법관으로 삼계는 공하고 거짓 이름일 뿐이니 모두가 공하기에 일체법은 나와 남이 없고 받음이 없고 인이 없어서 모두 정해진 성품이 없음을 통달하면 곧 열세 가지 결박을 소멸시키니 말하자면 일곱 가지 (잘못된) 견해와 여섯 가지 집착이니라. 여실상如實相으로 초행위初行位에 들어가느니라.
불자여, 다시 이 행行에서 천법명문千法明門을 관찰하여 닦으니 말하자면 십신부터 십향까지 점차로 발전하여 법에 들어가느니라. 법은 무아여서 법의 집集·법의 기起·법의 도道·법의 멸滅에 대해서 모두 법을 받는 사람이란 없으니 법은 허공과 같고 환幻과 같으며 건달바성乾達婆城과 같고 불꽃과 같아서 일체법이 형상이 없어 백천의 생멸이 모두 있을 수 없으므로 초회향위初廻向位에 들어가느니라.
불자여, 다시 이 (회)향에서 밝음이 밝게 점점 비추고 (그) 비추는 지혜로 모습이 비슷한 평등관을 배우느니라. 이름(과 모양)을 관찰하여도 얻을 수 없으니 얻을 수 없음은 거짓으로 얻음이니라. 비유하자면 심지에 불을 붙이는 것은 처음의 불꽃이 아니니 처음의 불꽃이 있다는 상황 안에 탄다는 사실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심지에 불을 붙이는 것은) 처음의 불꽃을 벗어난 것도 아니니 처음의 불꽃이 없다는 상황 안에 탄다는 사실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이어지는) 다음 (불꽃)도 (처음의 불꽃과) 마찬가지이니라. 바로 유위의 모든 법은 이제二諦가 변화한 것이므로 거짓으로 탄다고 이름을 붙이느니라. 그러므로 알아야 하니 시작하는 불꽃은 지금이 아니고 지금 타는 것이 시작이 아니니라. 지금 타는 것이 시작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에서야 있는 것이고 시작하는 불꽃이 지금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 타는 것은 없느니라. 지금 타는 것이 없으니 지금 타는 것은 거짓으로 타는 것이니라.
평등관을 얻음도 이와 같으니 초심이 있다는 상황 안에 얻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초심이 없다는 상황 안에 얻음이 있는 것도 아니니라. (이어지는) 다음 마음도 마찬가지이니라. 그러므로 시작하는 마음은 지금의 마음이 아니고 지금 일어남은 시작하는 일어남이 아니니라. 지금 일어남은 시작하는 일어남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에서야 있는 것이고 시작하는 마음이 지금의 마음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 얻을 것이 없느니라. 지금 얻을 것이 없으므로 지금 얻는다는 것은 거짓으로 얻는 것이니라.
중도제일의제의 마음은 생각마다 적멸하여 만법명문萬法明門에 들어가느니라. 십신부터 십향까지 자연스럽게 평등의 도에 흘러들지만 한 가지 모습도 얻을 것이 없어 진실하게 일조상一照相을 관찰하고 초지初地의 도에 들어가느니라.”188)

“그 이름은” 이하는 (개별적으로 답함의) 두 번째인 배움을 밝힘이다. 여기에 둘이 있으니 개별적으로 밝힘과 총괄적으로 밝힘이다. 개별적으로 밝힘은 곧 육입을 밝힌 것이다. 육입(을 밝힌) 문장에 모두 두 구절이 있으니 먼저는 들어가는 자리를 밝히고 나중은 배우는 수행을 드러내었다.
먼저 “수행하여

001_0521_c_01L戒文2) [74] 若過去未來以下第四諸門分
001_0521_c_02L言有受法而無捨法有犯不失盡未
001_0521_c_03L來際者如菩薩地決擇中言若有不捨
001_0521_c_04L如是律儀當知餘生亦得隨轉非彼捨
001_0521_c_05L又捨因緣略有四種一者決定發起
001_0521_c_06L受心不同分心二者若於有識別大丈
001_0521_c_07L夫前故意發起棄捨語言三者總別毁
001_0521_c_08L犯四種他所勝法四者若以增上品纏
001_0521_c_09L總別毁犯隨順四種他所勝法由此因
001_0521_c_10L當知棄捨菩薩律儀若有還得淸淨
001_0521_c_11L受心 [58] 應還受如是論文與此經違
001_0521_c_12L如何和會解云彼論述於三乘敎意
001_0521_c_13L有捨法犯戒有失依三乘敎發心菩薩
001_0521_c_14L心不全故不堅固故今此經者是一乘
001_0521_c_15L故無捨法犯而不失依是發心與前
001_0521_c_16L返持且止乘論還釋本文爾時衆中
001_0521_c_17L以下第三總結受戒卽從坐起受持佛
001_0521_c_18L戒者3) [75] 一坐始起受戒不起此坐入
001_0521_c_19L六入故

001_0521_c_20L[明學]
其名以下第二明學於中有二別明總
001_0521_c_21L別明之中卽明六入六入文中皆有
001_0521_c_22L二句先明入位後顯學行初中言脩
001_0521_c_23L「更」經作「便」「意」一作「竟」「此」上
001_0521_c_24L一有「謂即於」

001_0522_a_01L십계를 만족滿足하고 초주위初住位에 들어갔다.”라고 한 것이 들어가는 자리를 밝힘이고, “다시 (이 주住)에서” 이하는 다음으로 (배우는) 수행을 드러냄이다. “십신”이라고 한 것은 예를 들면 대경大經(『화엄경』)에서, “보살에게는 열 가지 파괴되지 않은 믿음이 있으니 무엇이 열인가. 일체 부처님에 대한 파괴되지 않는 믿음이고, 일체 불법에 대한 파괴되지 않는 믿음이며, 일체 성승聖僧에 대한 파괴되지 않는 믿음이고, 일체 보살에 대한 파괴되지 않는 믿음이며, 일체 선지식에 대한 파괴되지 않는 믿음이고, 일체중생에 대한 파괴되지 않는 믿음이며, 일체 보살의 대원大願에 대한 파괴되지 않는 믿음이고, 일체 보살행에 대한 파괴되지 않는 믿음이며, 일체 모든 부처님을 공경하고 공양함에 대한 파괴되지 않는 믿음이고, 일체중생을 교화하여 성취시키는 보살의 교묘한 방편에 대한 파괴되지 않는 믿음이다. 이것이 열 가지이다.”189)라고 하였다.
“십진”이라고 한 것은, 보살에게는 열 가지 정진이 있다. 신업身業의 정진이니 모든 부처님을 공경하고 공양하며 물러서지 않기 때문이고, 구업口業의 정진이니 들은 법을 남에게 널리 설명하며 고달파하지 않기 때문이며, 의업意業의 정진이니 오묘한 방편으로 자비희사·선정·해탈·삼매에 들어가 계속하며 물러서지 않기 때문이고, 곧은 마음의 정진이니 아첨과 왜곡에서 멀리 벗어나 정직한 일체 방편에서 끝내 물러서지 않기 때문이며, 깊은 마음의 정진이니 항상 훌륭한 세계에 나아가 위없는 지혜와 흰 법을 쌓아 모으기 때문이고, 행이 허망하지 않은 정진이니 보시·지계·인욕·다문多聞 등과 방일하지 않음을 거두어 지니고 도량에 이를 때까지 중도에 쉬지 않기 때문이며, 모든 악마와 원수를 항복 받는 정진이니 삼독 번뇌와 사견과 모든 얽맴과 장애를 완전히 없앨 수 있기 때문이고, 지혜 광명을 완성한 정진이니 보시한 일이 모두 선한 생각이어서 마음에 후회가 없이 온갖 일을 구경까지 하기 때문이며, 물들어 집착함이 없는 정진이니 마음의 경계와 신구의의 모양과 모양 아님을 벗어난 매우 깊은 법문이기 때문이고, 법명法明을 원만히 성취한 정진이니

001_0522_a_01L十戒滿足入初住位者是明入位復從
001_0522_a_02L以下次顯脩行言十信者如大經言
001_0522_a_03L菩薩有十種不壞信何等爲十所謂於
001_0522_a_04L一切佛不壞信於一切佛法不壞信
001_0522_a_05L一切聖僧不壞信於一切菩薩不壞信
001_0522_a_06L於一切善知識不壞信於一切衆生不
001_0522_a_07L壞信於一切菩薩大願不壞信於一
001_0522_a_08L切菩薩行不壞信於恭敬供養一切諸
001_0522_a_09L佛不壞信於敎化一切衆生成就菩薩
001_0522_a_10L巧妙方便不壞信是爲十種言十進
001_0522_a_11L菩薩有十種精進所謂淨身業精進
001_0522_a_12L恭敬供養諸佛不退轉故口業精進
001_0522_a_13L所聞法廣爲人說無疲倦故意業精進
001_0522_a_14L巧方便入慈悲喜捨禪定解脫三昧
001_0522_a_15L續無退轉故直心精進遠離諂曲正直
001_0522_a_16L一切方便究意無退轉故深心精進
001_0522_a_17L常趣勝趣積集無上智慧白法故行不
001_0522_a_18L虗妄精進攝取施戒忍多聞等及不放
001_0522_a_19L乃至道場不中息故除伏一切魔
001_0522_a_20L怨精進悉能除滅三毒煩惱邪見諸纏
001_0522_a_21L障葢故滿足慧光精進有所施作悉
001_0522_a_22L善思惟心不中悔究竟衆事故無所
001_0522_a_23L染著精進離心境界身口意相非相
001_0522_a_24L甚深法門故具足成就法明精進

001_0522_b_01L차례로 모든 지위에 들어가 천수天壽를 버리고 세간에 내려와서는 집을 떠나 도를 이루어 법륜을 굴리다가 열반에 들어감을 보여 주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열 가지이다.190)
“십발취”라고 한 것은 십념十念191)을 말하니 불법 등을 생각하여 저쪽으로 나아가기 때문이고, “십승”이라고 한 것은 십혜十慧192)를 말하니 장애를 제거하고 움직여 나아가는 데에는 지혜가 뛰어나기 때문이며, “십금강”이라고 한 것은 십선十禪193)을 말하니 경계의 적정寂定함을 지켜 파괴됨이 없기 때문이고, “십수희”라고 한 것은 십시十施194)를 말하니 받는 자와 함께 기뻐하며 이익을 얻기 때문이며, “십호”라고 한 것은 마업魔業을 버리는 열 가지195)이니 마업을 버림으로써 불법을 수호하기 때문이다.
이 (십신·십진·십발취·십승·십금강·십수희·십계·십원·십호·십회향의) 열 가지에서 (십발취로 설명한) 십념과 십원十願196)은 「십지품十地品」에 나오고 나머지 여덟은 「이세간품離世間品」에 나오니197) 행을 갖추려는 이는 찾아보면 이와 같은 차례로 (십)행에 들어가고 (십회)향에 들어가며 (십)지에 들어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불자여, 다시 이 (초)지에서 바르게 일조지一照智를 관하며 백만 아승기의 공덕문에 들어가 일상관一相觀을 일시에 행하여 제10지에 이르고 온갖 마음이 적멸하여 자연히 무구지로 흘러 들어가느니라.
불자여, 다시 이 (무구)지에서 일조지로써 일체의 업인과 업과를 완전히 알아 관찰하지 않는 법계가 하나도 없느니라. (이것은) 지혜로써 일체중생의 식識이 처음 일상一相을 일으켜 연緣에 머무는 것을 아는 것이니 제일의제를 따라서 일어남을 선善이라 하고 제일의제를 등지고 일어남을 번뇌라고 하느니라.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주지住地로 삼기 때문에 태어나면서 얻은 선이라고 하고 태어나면서 얻은 번뇌라고 하며, 이 두 가지 선과 번뇌를 근본으로 하여 이후의 일체 선악을 일으키느니라. 일체법의 연에 따라서 선과 번뇌라는 이름이 생기고, 행위함으로써 선을 얻고 행위함으로써 번뇌를 얻지만 마음은 선도 아니고 번뇌도 아니니라. 이 두 가지를 따라 이름을 얻기 때문에 선과 번뇌의 두 가지 마음이 있느니라. 욕계의 번뇌를 일으키는 것을 욕계주지라고 하고, 색계의 번뇌를 일으키는 것을 색계주지라고 하며, 마음의 번뇌를 일으키므로 무색계주지라고 하느니라. 이 네 가지 주지가 일체 번뇌를 일으키므로 처음 일어나는 사주지四住地라고 하고 이 사주지 앞에 다시 일어나는 법이 없기 때문에 무시無始의 무명주지라고 하느니라. 금강지金剛智는 처음으로 일어나는 이 일상一相에 끝이 있음을 알지만 그 최초의 앞에 법이 있는지 없는지는 알지 못하느니라. 어떻게 태어나면서 얻은 한 가지 주지와 행위함으로써 얻은 세 가지 주지를 알 수 있겠는가? 오직 부처님만이 시작을 알고 끝을 알 수 있느니라. 무구(지의) 보살은 일체지로써 자신의 지위를 모두 알고 항상 제일의제에 머물면서 자연히 묘각해지妙覺海地로 흘러 들어가느니라.
불자여, 묘각지에 머물러야 응화應化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으니 헤아릴 수 없는 의미가 있고 헤아릴 수 없는 이름이 있지만 그것은 하나의 체에서 나오느니라. 말하자면 묘과妙果는 항상 청정함에 머무르기 때문에 허공과 같아서 생각할 수 없고 말할 수 없으며 이름으로 헤아릴 수 없고 이름으로 들어갈 수 없으며 한계 지을 수도 없는 데에까지 이르느니라.”198)

무구지에서 “일체중생의 식識이 처음 일상一相을 일으켜 연緣에 머무는 것”이라고 한 것은 거친 모습으로 말한 것이다. 식에 세 종류가 있다. 가장 거친 끄트머리는 육식六識이라고 하고 중간은 말나末那라고 하며 미세한 종류의 식은 본식本識이니 모든 식의 으뜸이기 때문에 처음 일어난다고 한다. 처음 (일어나는) 식에 세 가지 미세한 모습이 있으니 말하자면 업상業相·전상轉相·현상現相이다. 이 세 가지 모습은 『기신론』에 나온다.199) “처음 일상一相을 일으켜”라고 한 것이 바로 업상이다. 본성이 청정한 마음이 무명의 바람을 원인으로 움직이니 이것이 처음의 업상이기 때문에 “일상一相”이라고 하였고, 일상이 이미 움직였으면 반드시 인연을 의지하기 때문에 “연緣에 머무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일상에는 두 가지 작용이 있다. 첫째는 청정한 이해의 작용이고, 둘째는 어두운 미혹의 작용이다. 바닷물에 물결이 일어날 때에 (물결이) 청정한 성질을 잃지 않는 것은 본래의 (바닷물의) 청정함을 따르는 것처럼 식에 있는 이해의 작용도 마찬가지임을 알아야 하니 (식이) 움직일 때에 본각의 성품을 잃지 않는 것이 바로 본각의 의미를 따라 물든 것이다. 예를 들면 『(본업)경』에서 “제일의제를 따라서 일어남을 선善이라 하고”라고 하였다.

001_0522_b_01L第進入一切諸地乃至現捨天壽降神
001_0522_b_02L世間出家成道轉法輪入涅槃故
001_0522_b_03L爲十種十發趣者所謂十念念佛法
001_0522_b_04L等進趣彼故言十乘者所謂十慧除障
001_0522_b_05L運出慧爲勝故十金剛者所謂十禪
001_0522_b_06L守境寂定不有壞故十隨喜者所謂十
001_0522_b_07L隨喜受者得利益故言十護者
001_0522_b_08L謂十種捨離魔業以離魔業爲護佛法
001_0522_b_09L此十十中十念十願出十地品
001_0522_b_10L八門出離世間品欲具行者於彼尋
001_0522_b_11L如是次第入行入向入地可知無垢
001_0522_b_12L地中言一切衆生識始起一相住於緣
001_0522_b_13L麤相而言識有三品最麤末者所
001_0522_b_14L謂六識其中品者名爲末那細品識者
001_0522_b_15L1) [76] 本識爲諸識元故名始起始識內
001_0522_b_16L有三細相所謂業相轉相現相是三種
001_0522_b_17L相出起信論今言始起一相者正是業
001_0522_b_18L以性淸淨心因無明風動是初業
001_0522_b_19L故言一相一相旣動必依因緣2) [77]
001_0522_b_20L之故言住於緣也此一3) [78] 卽有二用
001_0522_b_21L一淸解之用二昏迷之用如大海水起
001_0522_b_22L波之時不失淸性是順本淸識中解用
001_0522_b_23L當知亦爾動時不失本覺之性卽是隨
001_0522_b_24L染本覺之義如經順第一義諦起名善

001_0522_c_01L또 (바닷)물이 움직일 때에 혼탁한 작용이 있으니 식에 있는 미혹의 작용도 마찬가지임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면 『(본업)경』에서 “제일의제를 등지고 일어남을 번뇌라고 하느니라.”라고 하였다. 이 두 가지가 근본이 되기 때문에 ‘태어나면서 얻음(生得)’이라고 하였고, 여기에서 일어나는 것이 모두 태어나면서 얻음에 의지한 ‘행위함으로써 얻음(作得)’이다.
혹 (욕계·색계·무색계의) 삼유三有의 마음을 일으켜 ‘태어나면서 얻음’ 위에 다시 미혹의 작용이 있어서 일어난 삼유의 마음이 공함을 깨닫지 못하여 이 세 가지 (삼유의) 미혹의 작용이 마치 본식本識에 있는 것 같기 때문에 이것을 ‘행위함으로써 얻은 주지’라고 한다. 앞에서 말한 ‘태어나면서 얻은 (주지)’ 하나와 지금 이야기한 ‘행위함으로써 얻은 (주지)’ 셋의 네 가지가 근본이 되어 모든 번뇌를 일으키니 『(본업)경』에서 “이 네 가지 주지가 일체 번뇌를 일으키므로 처음 일어나는 사주지四住地”라고 하였다. 이 네 가지 주지가 (미혹의) 작용이 됨을 깨닫지 못하면 거칠고 미세한 행상의 차별이 없으므로 총괄적으로 ‘무시無始의 무명주지’라고 하니 『(본업)경』에서 “이 사주지 앞에 다시 일어나는 법이 없기 때문에 무시無始의 무명주지라고 하느니라.”라고 하였다.
이 네 가지 주지는 일심을 근본으로 삼고 이종二種의 생사를 지말로 삼았으니 금강심일 때에 그 지말의 끝은 알지만 그 근본인 일심의 도리는 깨닫지 못한다. 그러므로 “처음으로 일어나는 이 일상一相에 끝이 있음을 알지만 그 최초의 앞에 법이 있는지 없는지는 알지 못하느니라.……오직 부처님만이 시작을 알고 끝을 알 수 있느니라.”라고 하였다. 나머지 문장은 이것에 준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불자여, 나는 보살의 차제인 육입법문六入法門의 무량한 공덕을 설하였노라. 이와 같은 육입법문에는 일체 보살이라면 들어가지 않는 이가 없으니 내가 있는 이 자리에 십사억의 사람이 있지만 모두 본래의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이 육입법문에 들어갔느니라.
불자여, 내가 본래 처음으로 득도하고 이 나무 사이에서 십세계해十世界海의 법문을 설할 때에 있던 구십억의 사람도 이 육입명문六入明門에 들어갔느니라. 다시 보광당普光堂에 이르러 십 불국토를 설할 때에 있던 백만억의 사람이 이 육입명문에 들어갔느니라. 다시 제석당帝釋堂에 이르러 십주를 설할 때에 있던 오백만의 사람이 이 육입명문에 들어갔느니라. 다시 염보당焰寶堂에 이르러 십행을 설할 때에 있던 천만의 사람이 이 육입명문에 들어갔느니라. 다시 제사천법광당第四天法光堂에 이르러 십회향을 설할 때에 있던 십 항하사의 사람이 이 육입명문에 들어갔느니라. 다시 제육마니당第六摩尼堂에 이르러 십지를 설할 때에 있던 백만 항하사의 사람이 이 육입명문에 들어갔느니라. 다시 기원림祇洹林에 이르러 입법계품入法界品을 설할 때에 있던 십이 항하사의 사람이 이 육입명문에 들어갔느니라. 이제 다시 이 제팔회第八會의 자리에 이르러 시방의 끝없는 대중과 경수보살의 모든 대중을 위하여 육입명문을 설하였는데 모든 대중이 받아 지니는 것이 하나이어서 둘도 없고 다름도 없듯이 하느니라.”200)

“불자여, 나는 (보살의 차제인 육입법문六入法門의 무량한 공덕을) 설하였노라.” 이하는 (개별적으로 답함의 두 번째인 배움을 밝힘의) 두 번째인 육입을 총결함이다. 여기에 넷이 있으니 첫째는 육입에 들어가지 않는 이가 없음을 총결하였고, 둘째는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들어감을 개별적으로 결론지었다. “내가 본래” 이하는 셋째인 화엄의 칠처七處로 들어감을 총결한 것이고, “이제 다시” 이하는 넷째인 이 (『본업경』) 법회에 들어감을 거듭 결론지은 것이다.
한 부의 경전을 셋으로 구분할 때에 두 번째인 정설은 이제 앞에서 마쳤다.


001_0522_c_01L又水動時有渾濁用識中迷用當知
001_0522_c_02L亦爾如經背第一義諦起名惑故此二
001_0522_c_03L爲本故名生得其所起者皆作得依生
001_0522_c_04L或起三有心於生得上更有迷用
001_0522_c_05L不了所起三有心空此三迷用猶在本
001_0522_c_06L故說此爲作得住地彼生得一
001_0522_c_07L作得三是四爲本起諸煩惱如經以此
001_0522_c_08L四住地起一切煩惱故爲始起四住地
001_0522_c_09L此四住地不了爲用而無麤細行相差
001_0522_c_10L總名無始無明住地如經其四4) [79]
001_0522_c_11L5)使 [80] 無法起故名無始無明住地故
001_0522_c_12L此四住地一心爲本二種生死以爲其
001_0522_c_13L金剛心時知其末終末達其本一
001_0522_c_14L心道理故言知此始起一相有終而不
001_0522_c_15L知其始前有法無法乃至唯佛知始終
001_0522_c_16L此餘諸文准之可得

001_0522_c_17L
佛子我說以下第二總結六入於中有
001_0522_c_18L一者總結六入無不入者二者別結
001_0522_c_19L不起此坐入者我本以下第三總結華
001_0522_c_20L嚴七處入者今復以下第四還結此會
001_0522_c_21L入者一部之經有三分內第二正說竟
001_0522_c_22L在於前

001_0522_c_23L「是」下一有「爲」「爲」一作「以」「相」下
001_0522_c_24L有「中」
「住」經作「地」「使」作「更」

001_0523_a_01L
8. 집산품集散品
이 아래는 (경전의 세 가지 구분의) 세 번째인 유통분流通分이다.

1) 수지受持와 유통流通을 권함
부처님께서 경수보살과 이 법회의 십사억 나유타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들은 위에서 42현성賢聖의 인과명관법문因果明觀法門을 들었으니 일체 대중이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켜야 하느니라. 이와 같이 세 번 말하니 불자여, 받아야 하고 지녀야 하며 발심해야 하느니라.”
그때에 모든 대중 가운데 백천의 천자가 있었는데 이 법문을 듣고 초주심初住心을 일으켜 범부의 법을 버리고 (삼현보살의) 복인伏忍을 수행하여 십주명관十住明觀의 법에 들어갈 수 있었다. 다시 십천의 신남신녀가 있었는데 청정십행법문淸淨十行法門에 들어갔다. 다시 팔만의 대범천왕이 있었는데 초지명관初地明觀의 법을 얻었다. 다시 팔부八部의 아수륜왕阿須輪王이 있었는데 각각 본래의 모습을 버리고 십신심十信心에 들어가 십선행十善行을 행하였다. 다시 팔만의 제10지의 사람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정각을 이루었다.
이때 시방의 무극의 불국토에 있는 일체 대중이 부처님께서 설하시는 『영락(경)』의 육입六入 법문, 즉 십주·십행·십(회)향·십지·무구지·묘각지를 듣고 각각 무상보리심을 일으키고 본래의 국토로 돌아갔다. 다시 색계와 무색계의 (사람이) 있었는데 각각 다시 신통을 닦으며 본래 머물던 곳으로 돌아가 보살영락법문을 펼치며 천인을 교화하였다. 다시 육욕천의 사람이 있었는데 본래 하늘로 돌아가 널리 모든 천인을 위하여 본행本行의 무량함을 설하였다. 그때에 모든 대중들도 각각 수지하고 독송하며 그 의미를 이해하여 본래의 국토로 돌아가 보살의 본행을 설하고 모든 부처의 본업佛本業을 완전히 수지하였다.
이때에 부처님께서 문수사리·혜해慧海·금강장金剛藏·도화道華 등 팔천 보살에게 말씀하셨는데, 이들은 모든 시방세계의 여러 불국토에서 으뜸가는 제자였다.
“그대들은 시방의 무명 중생을 위하여 수지하고 독송하며 그 의미를 이해하여 과거·미래·현재의 모든 중생을 위하여 공혜도空慧道와 입법명문入法明門을 열어야 하느니라.”
이때 오십만의 대보살이 있었는데 모두 일생보처一生補處였다. 이들이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말씀을 수지하여 겁이 지나도록 소멸되지 않았다. 다시 만萬의 범천왕이 있었는데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말씀을 수지하였다. 다시 헤아릴 수 없는 천녀가 있었는데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말씀을 수지하였다. 이때 타방의 무극의 불국토에 있는 보살과 이 국토의 보살들이 신통 변화로 여환삼매如幻三昧에 들어가 허공에서 뛰어오르는 환희가 헤아릴 수 없었으니 영락공덕경瓔珞功德經을 듣고 수지하여 마음으로 받아 수행하여 성불하고 온갖 현성문賢聖門을 버리지 않았다.
그때에 부처님께서 다시 백만의 신통 변화와 한량없는 광명과 한량없는 청정신淸淨身을 나타내시며 거듭 이 금강장해金剛藏海의 『영락경瓔珞經』을 부촉하셨다.
“그대들 모든 대중은 이 경의 법을 수지해야 하느니라. 이 경은 과거 한량없는 백천의 부처님께서 마음으로 행하신 법이므로 그대들은 수지하고 공양해야 하느니라.”
그때에 일체 대중이 한꺼번에 자리에서 천 가지 광명을 놓아 삼천대천세계를 비추고 보살의 불가사의한 『영락경』을 환희하며 수지하고 이마로 받들어 공양하며 부처님께 예경하고 물러갔다. 다시 육욕천자와 십천十千의 국왕이 있었는데 부처님의 법좌가 해산했음을 듣고 한꺼번에 눈물을 흘리며 큰소리로 슬피 우니 그 소리가 삼천세계에 가득 찼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울면서 가지 않는 이가 없었다. 다시 팔십억의 대보살이 있었는데 모두 사무량심四無量心으로 유와 무가 동일하게 평등하며 무위無爲이고 무상無相이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수지하고 각각 무진법화삼매無盡法化三昧에 들어가 환희하며 물러갔다. 다시 십천의 시행현자始行賢者가 있었는데 모두 구관정九觀定의 사선四禪·사공정四空定·멸진정滅盡定과, 칠정七淨의 십계·심입정心入定·견도·도의度疑·정도·행지견行知見·행단지견行斷知見에 들어가 법에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부처님께 예경하고 물러갔다.201)

문장에 둘이 있다. 먼저 수지와 유통을 권하고 뒤에 유통의 방법을 보였다. 처음에도 둘이니 첫째는 가르침을 수지하고 유통하기를 권함이고, 둘째는 광명을 나타내어 거듭 유통을 권함이다.
두 번째에서 “시행현자始行賢者가……모두 구관정九觀定……에 들어가”라고 한 것은 제3과(인 불환과)와 무학(인 아라한) 이래로 비로소 대(승)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칠정七淨”이라고 한 것은 『유가론瑜伽論』에서 말한, “무엇을 일곱 가지 청정함이라고 하는가? 첫째는 계가 청정함이고, 둘째는 마음(이 청정함)이며, 셋째는 견(이 청정함)이고, 넷째는 도의度疑(가 청정함)이며, 다섯째는 도와 비도非道의 지견(이 청정함)이고, 여섯째는 행의 지견(이 청정함)이며, 일곱째는 행단行斷의 지견(이 청정함)이다.”202)라고 한 것이다. 여기에서 ‘도와 비도非道’라고 한 것은, 정견은 앞으로 행할 도이고 사견은 앞으로 행하지 않아야 하는 도이다. ‘행과 행단行斷을 여실하게 깨쳐 안다’는 것은 네 가지 행적을 여실하게 깨쳐 아는 것이니 “무엇이 넷인가 하면, 첫째는 고통에 천천히 통하는 행적이고, 둘째는 고통에 빨리 통하는 행적이며, 셋째는 즐거움에 천천히 통하는 행적이고, 넷째는 즐거움에 빨리 통하는 행적이다. 여기에서 첫 번째의 (고통에 천천히 통하는) 행적을 깨쳐 알면 일체를 끊게 될 것이니 초월한다는 뜻이기 때문이고 번뇌를 말미암지 않을 것이니 얽매임을 벗어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여실하게 깨쳐 알면 두 번째(인 고통에 빨리 통하는 행적)과 세 번째(인 즐거움에 천천히 통하는 행적)의 일부분을 끊게 될 것이고, 이와 같이 깨쳐 알면 첫 번째의 전부와 두 번째의 일부분을 완전히 끊어 버리고 (네 번째인) 즐거움에 빨리 통하는 행적에 의지하여 바르고 부지런히 닦아 모아서 이로부터 간단없이 모든 번뇌를 영원히 없애는 것”203)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경)문에서 “십계”라고 한 것은 (『유가사지론』의) 첫 번째(인 계가) 청정함이고, “심입정心入定”이라고 한 것은 두 번째(인 마음이) 청정함이며, “견도”라고 한 것은 세 번째(인 견이) 청정함이고, “도의度疑”라고 한 것은 네 번째(인 도의가) 청정함이며, “정도”라고 한 것은 다섯 번째(인 도와 비도의 지견이) 청정함이고, “행지견行知見”이라고 한 것은 여섯 번째(인 행의 지견이) 청정함이며, “행단지견行斷知見”이라고 한 것은 일곱 번째(인 행단의 지견이) 청정함이다. 이 일곱 가지 청정으로 대승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법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하였다.

2) 유통의 방법
이때 자리에 있던 팔천 보살이 각각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금강화金剛華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미래세에 경을 설하는 보살의 법륜 아래에서 그 법을 듣는 이가 교화를 받아 받들어 행하게 하려면 법용法用을 다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불자여, 잘 물었다. 불자여, 먼저 법을 듣는 자를 위하여 보살의 법계를 수여하고 그런 후에 보살의 본행인 육입법문을 설해야 하느니라. 불자여, 차례로 사귀법四歸法을 수여하여, 부처님께 귀의하고 법에 귀의하며 승에 귀의하고 계에 귀의하는 네 가지 파괴할 수 없는 신심을 얻게 해야 하느니라. 그러고 나서 십계를 주어, 살생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으며 거짓말하지 않고 음행하지 않으며 술을 팔지 않고 재가와 출가 보살의 허물을 말하지 않으며 인색하지 않고 화내지 않으며 자기를 칭찬하고 남을 헐뜯지 않으며 삼보를 비방하지 않게 해야 하느니라. 이것이 십바라이로서 참회할 수 없는 법이니라.
불자여, 십계를 받고 나면 다시 법을 듣는 이를 위하여 법사를 공양함을 가르치느니라. 항상 천상의 헤아릴 수 없는 꽃과 향과 백천 가지 등불과 백천 가지 하늘 옷과 영락, 그리고 백천 가지의 기악과 백 가지 맛의 음식·집·경서經書와 모든 필수품으로 다 공양해야 할 것을 가르쳐야 하느니라. 널리 통달한 법사는, 부처님을 공경하듯이, 부모를 모시듯이, 불을 섬기는 바라문법에서 하듯이, 제석을 모시듯이, 스승과 스님에게 날마다 세 번 예경하고 법을 위하여 몸을 버리고 목숨을 다하여야 하느니라. 이에 불자여, 이와 같이 법을 구하는 사람이라야 보살의 본행本行과 백천만 부처님께서 대대로 주신 영락법문을 설해야 하느니라.”
그때 십억 대중이 찬탄하여 말하였다.
“미래세에는 법이 없고 삼보가 없고 현인이 없을 때여서 겁이 악세惡世를 따라서 일어나므로 법을 설하거나 법을 듣는 것이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각각 슬피 울고 통곡하니 땅이 바다와 파도로 변했고 삼천세계가 뒤집히고 엎어졌으며 스물여덟 가지 별자리와 해와 달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때에 대중이 다시 신통력으로 장엄하고 공경하여 “수지하고 독송하며 문구의 의미를 해설하면 십 겁에도 소멸하지 않고 무궁무진하리라.” 하니 각각 기뻐하고 받들어 행하며 예를 올리고 물러났다.204)

“이때” 이하는 두 번째인 유통의 방법이다. 여기에 넷이 있으니 첫째는 질문이고, 둘째는 대답이며, 셋째는 슬픔으로 한탄함이고, 넷째는 선善을 받듦이다. 문장의 모습은 알 수 있을 것이다.

『본업경소』 권하(本業經疏 卷下)

001_0523_a_01L集散品

001_0523_a_02L
此下第三流通分
[勸持流通]
在文有二先明勸持
001_0523_a_03L流通後示流通方法初中亦二一者
001_0523_a_04L勸持受敎流通二者現光重勸流通
001_0523_a_05L二中言始行賢者入九觀定者從第三
001_0523_a_06L果及無學來始入大故言七淨者
001_0523_a_07L伽論云云何名爲七種淸淨一戒淸淨
001_0523_a_08L二心三見四度疑五道非道知 [59]
001_0523_a_09L行知 [60] 此中道非道者
001_0523_a_10L正見前行之道邪見前行非道如實了
001_0523_a_11L知行及行斷者四種行迹如實了知
001_0523_a_12L等爲四一苦遲通行1) [81] 速通行
001_0523_a_13L樂遲通行四樂速通行於此了知最初
001_0523_a_14L中迹一切應斷超越義故非由煩惱離
001_0523_a_15L繫義故如實了知第二第三一分應斷
001_0523_a_16L如是了知初全及二一分應當斷已
001_0523_a_17L依樂速通正勤脩集從此無間永盡諸
001_0523_a_18L漏故今此文言十戒者是第一淨也
001_0523_a_19L入定者第二淨也見道者第三淨也
001_0523_a_20L疑者第四淨也正道者第五淨也行知
001_0523_a_21L見者第六淨也行斷知見者第七淨也
001_0523_a_22L以此七淨得入大乘故言得入法也

001_0523_a_23L2) 流通方法
爾時以下第二流通方法於中有四
001_0523_a_24L二答三者歎悲四者奉行文相可

001_0523_b_01L

001_0523_b_02L
本業經疏卷下

001_0523_b_03L
  1. 1)현재 전하는 『本業經疏』 권하는 『菩薩瓔珞本業經』 권상의 「賢聖學觀品」을 주석하는 내용으로 시작하고 있다.
  2. 2)『菩薩瓔珞本業經』 권상 「賢聖學觀品」(T24, 1015b).
  3. 3)「賢聖學觀品」(T24, 1013a~1015b)에서는 보살의 계위를 보살의 마음이라고 표현하면서 각 마음마다 열 가지 관법을 제시하고 있다.
       마음  관법 
     십주  발심주發心住  후집일체선근厚集一切善根
     즉 사홍서원四弘誓願 
     치지심주治地心住  수습무량선행修習無量善行
     즉 사념처관四念處觀 
     수행심주修行心住  선습불도법善習佛道法
     즉 관십일체입觀十一切入 
     생귀심주生貴心住  일체불전수법이행一切佛前受法而行
     즉 팔승처八勝處 
     방편심주方便心住  수제청백법修諸淸白法
     즉 팔대인각八大人覺 
     정심주正心住  위제불소호爲諸佛所護
     즉 팔해탈관八解脫觀 
     불퇴심주不退心住  광정법廣正法
     즉 육화경六和敬 
     동진심주童眞心住  신희대법信喜大法
     즉 삼공三空 
     법왕자심주法王子心住  심주사등법心住四等法
     즉 사제법四諦法으로 중생을 교화함 
     관정심주灌頂心住  호구불공덕好求佛功德
     즉 육념六念 
     십행  환희심행歡喜心行  위자득일체종지고爲自得一切種智故
     즉 사정근四正勤 
     요익심행饒益心行  위득자신유대력고爲得自身有大力故
     즉 사여의족四如意足 
     무진한심행無瞋恨心行  원무외구족고願無畏具足故
     즉 오근五根 
     무진심행無盡心行  구구족삼보고求具足三寶故
     즉 오분법신五分法身 
     이치란심행離癡亂心行  위화일체중생고爲化一切衆生故
     즉 팔정도八正道 
     선현심행善現心行  득대자비고得大慈悲故
     즉 칠관七觀 
     무착심행無著心行  위득사무애고爲得四無礙故
     즉 오선근五善根 
     존중심행尊重心行  입일체불국중행고入一切佛國中行故
     즉 사화법四化法 
     선법심행善法心行  위어일념중조일체법고爲於一念中照一切法故
     즉 삼세십이인연三世十二因緣 
     진실심행眞實心行  위자재전대법륜고爲自在轉大法輪故
     즉 보살삼보菩薩三寶 
     십회향  구호일체중생이상회향심
     救護一切衆生離相廻向心 
     이제정직二諦正直
     즉 학습제일의제學習第一義諦 
     불괴회향심
     不壞廻向心 
     심제일의지深第一義智
     즉 오신통五神通 
     등일체불회향심
     等一切佛廻向心 
     순지淳至
     즉 무생혜無生慧 중 사불괴정四不壞淨 
     지일체처회향심
     至一切處廻向心 
     양동불력量同佛力
     즉 삼상三相 
     무진공덕장회향심
     無盡功德藏廻向心 
     선계량중생력善計量衆生力
     즉 오음五陰 
     수순평등선근회향심
     隨順平等善根廻向心 
     불교화력佛敎化力
     즉 십이입十二入 
     수순등관일체중생회향심
     隨順等觀一切衆生廻向心 
     취향무애지趣向無礙智
     즉 십팔계十八界 
     여상회향심
     如相廻向心 
     수순자연지隨順自然智
     즉 인과因果 
     무박해탈회향심
     無縛解脫廻向心 
     능수불법승고能受佛法僧故
     즉 이제공二諦空 
     법계무량회향심
     法界無量廻向心 
     이자재혜화일체중생以自在慧化一切衆生
     즉 중도제일의제中道第一義諦 
     십지  사무량심四無量心  환희지주중도제일의제혜歡喜地住中道第一議諦慧
     즉 이십환희심二十歡喜心과 십무진원十無盡願 
     십선심十善心  금강해장법보金剛海藏法寶
     즉 스스로 십선十善을 행하고 다른 이도 행하게 함 
     명광심明光心  입여환삼매入如幻三昧
     즉 십이문선十二門禪 
     염혜심焰慧心  변행법보장遍行法寶藏
     즉 신수심법身受心法·정진正進·여의족如意足·근根·역力·팔정八正·칠각七覺 
     대승심大勝心  입법계지관入法界智觀
     즉 십육제十六諦 
     현전심現前心  달유법연고기지達有法緣故起智
     즉 십이인연十二因緣과 십종조十種照 
     무생심無生心  진과보무장무애지盡果報無障無礙智
     즉 삼공지三空智로 삼계三界의 이습二習을 관찰함 
     부사의심不思議心  부사의무공용관不思議無功用觀
     즉 무상대혜방편대용無相大慧方便大用 
     혜광심慧光心  입법제지入法際智
     즉 사십변재四十辯才와 일체동덕행을 모두 성취 
     수위심受位心  무애지관無礙智觀
     즉 무량한 법운法雲에서 비가 내려 일체 중생에게 미침 
     무구지  입법계심入法界心  용복정입법광삼매勇伏定入法光三昧 
     묘각지  적멸심寂滅心   
    『本業經疏』에서 “아홉째”라고 한 것은 십지의 열 가지 관법 중에 ‘입법제지入法際智’부터 주석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4. 4)『十住經』 권4 「妙善地」(T10, 525b).
  5. 5)『十住經』 권4 「妙善地」(T10, 525b).
  6. 6)『十地經論』 권11 「善慧地」(T26, 190bc).
  7. 7)『十地經論』(T26, 190c~192a)에서는 네 가지 걸림 없는 지혜와 연관지어 자상自相과 동상同相을 설명한 데 이어서 나머지 여덟 가지 구별을 설명한다.
  8. 8)『十住經』 권4 「妙善地」(T10, 525c~526a); 『十地經論』 권11 「善慧地」(T26, 192a).
  9. 9)『本業經疏』가 인용하고 있는 경전 구절과 일치하는 것은 『大正新脩大藏經』에 전하는 『十地經論』에서 “經曰”의 형태로 인용한 부분[『十地經論』 권11 「善慧地」(T26, 192c)]이다. 그러나 이 부분을 『大正新脩大藏經』에 전하는 『十住經』과 비교하면 내용은 상통하지만 문장은 차이가 많다. “不可說不可說。 三千大千世界滿中衆生廣爲說法時。 承佛神力。 能爲衆生廣作佛事。 倍復精勤。 攝取如是智明。”[『十住經』 권4 「妙善地」(T10, 526b)].
  10. 10)『菩薩瓔珞本業經』 권상 「賢聖學觀品」(T24, 1015b).
  11. 11)『十住經』 권4 「法雲地」(T10, 530ab); 『十地經論』 권12 「法雲地」(T26, 197c).
  12. 12)『十住經』 권4 「法雲地」(T10, 528b); 『十地經論』 권12 「法雲地」(T26, 194ab).
  13. 13)『十住經』 권4 「法雲地」(T10, 530b); 『十地經論』 권12 「法雲地」(T26, 197c).
  14. 14)60권본 『華嚴經』의 「十地品」은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에서 설해지기 때문에 『菩薩瓔珞本業經』의 “제6천에서 십지를 설하여 천인을 교화했다.”라는 구절을 두고 『華嚴經』 「十地品」이라고 하고 있다.
  15. 15)『菩薩瓔珞本業經』 권상 「賢聖學觀品」(T24, 1015bc).
  16. 16)『菩薩瓔珞本業經』 권상 「賢聖學觀品」의 앞 부분에서 등각성等覺性인 마니보영락摩尼寶瓔珞보살에 대하여 “정적정頂寂定에 머물러 대원력으로 수명이 백 겁을 머무는 동안 천 가지 삼매를 닦고”, “또 수명이 천 겁을 머무는 동안 부처님의 위의를 배우고 상왕象王과 같이 바라보고 사자와 같이 걸으며”, “다시 수명이 만 겁을 머무는 동안 성불을 화현하고 대적정大寂定에 들어간다.”라고 하여 세 가지 겁으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T24, 1012c~1013a)
  17. 17)『菩薩瓔珞本業經』 권상 「賢聖學觀品」(T24, 1012c).
  18. 18)『菩薩瓔珞本業經』에서 ‘용복정勇伏定’에 들어가 닦는 열 가지 법을 설명하는 부분(T24, 1015bc)을 가리킨다.
  19. 19)『菩薩瓔珞本業經』 권상 「賢聖學觀品」(T24, 1012c~1013a).
  20. 20)『菩薩瓔珞本業經』 권상 「賢聖學觀品」(T24, 1013a).
  21. 21)두 가지 문 : ‘용복정’에 들어가 닦는 열 가지 법 중에 첫째 부처님의 불가사의한 신통 변화를 배움과 둘째 보살의 권속을 모음의 두 가지 법을 가리킨다.
  22. 22)『菩薩瓔珞本業經』에서 “이제 간략하게 한 게송의 뜻을 설하여”라고 한 부분을 가리킨다.
  23. 23)『菩薩瓔珞本業經』 권상 「賢聖學觀品」(T24, 1015c).
  24. 24)『菩薩瓔珞本業經』 권하 「大衆受學品」(T24, 1021c~1022a)에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오주지번뇌五住地煩惱 중에서 욕계주지欲界住地·색계주지色界住地·무색계주지無色界住地·무명주지無明住地의 이름이 보인다.
  25. 25)실제 경문은 사대와 육근 각각을 통해서는 여래를 얻을 수 없음을 설명하지만 『本業經疏』는 간략히 인용하고 있다.
  26. 26)실제 경문은 육도를 대표하여 인간계를 예로 들고 시방을 대표하여 동방을 예로 들어 육도와 시방 각각을 통해서는 여래를 얻을 수 없음을 설명하지만 『本業經疏』는 간략히 인용하고 있다.
  27. 27)『佛說無上依經』 권상 「菩提品」(T16, 473bc).
  28. 28)『佛說仁王般若波羅蜜經』 권상 「菩薩敎化品」(T08, 826c).
  29. 29)『大方廣佛華嚴經』 권25 「十地品」(T9, 556a).
  30. 30)『菩薩瓔珞本業經』 권상 「賢聖學觀品」(T24, 1015c).
  31. 31)『菩薩瓔珞本業經』 권상 「賢聖學觀品」(T24, 1015c~1016a).
  32. 32)『菩薩瓔珞本業經』 권상 「賢聖學觀品」(T24, 1016a).
  33. 33)『十八空論』에는 진여眞如가 최승最勝이고 최극最極인 것은 두 가지 지혜의 경계이기 때문이라면서 여리지如理智와 여량지如量智를 거론한다. 먼저 진여가 최승인 것은 여여한 제일의제第一義諦라는 것인데 이 제일의제가 여리지의 대상이며, 진여가 최극인 것은 속제俗諦라는 것인데 이 속제가 여량지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여리지와 같은 말로 무분별지無分別智와 일체종지一切種智, 여량지와 같은 말로 무분별후지無分別後智와 일체지一切智라고 한다.(T31, 864b)
  34. 34)『菩薩瓔珞本業經』 권상 「賢聖學觀品」(T24, 1016ab).
  35. 35)“(보살이) 이 초지初地(환희지)에 있을 때는 대개 염부왕이 되어 제법을 잘 알고 언제나 자비스런 마음을 쓴다.(住是初地中。 多作閻浮王。 善知於諸法。 常行慈悲心。)” 『大方廣佛華嚴經』 권23 「十地品」(T9, 548b).
  36. 36)『一切經音義』는 아유안阿維顔보살을 일생보처一生補處보살로 풀이하였다. 『一切經音義』 권9(T54, 358b2); 『一切經音義』 권34(T54, 537c).
  37. 37)『最勝問菩薩十住除垢斷結經』 권10 「菩薩證品」(T10, 1043a).
  38. 38)『菩薩瓔珞本業經』 권상 「賢聖學觀品」(T24, 1016b).
  39. 39)『菩薩瓔珞本業經』에서는 보살이 단계별로 조복하는 번뇌를 설명하면서 보살의 계위에 ‘인忍’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진리를 받아들인 지혜의 측면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경의 설명에 보이는 ‘인’의 명칭이 경에서 거론하는 십지의 이름과 유사함을 볼 수 있다. 희인喜忍-환희지歡喜地(제1지), 이인離忍-이구지離垢地(제2지), 명인明忍-명지明地(제3지), 염인焰忍-염지焰地(제4지), 승인勝忍-난승지難勝地(제5지), 현인現忍-현전지現前地(제6지), 무생인無生忍-원행지遠行地(제7지), 부동인不動忍-부동지不動地(제8지), 광인光忍-묘혜지妙慧地(제9지), 적멸인寂滅忍-법운지法雲地(제10지), 무구인無垢忍-무구지無垢地.
  40. 40)보살 계위 중 십지와 불지에서 끊어지는 무명을 정리하여 보통 ‘22장障’ 또는 ‘22우치愚癡’라고 한다. 원효(617~686)의 생몰 연대를 고려하면 진제眞諦(499~569) 번역의 『攝大乘論釋』이나 수隋의 석보귀釋寶貴가 597년에 편집한 『合部金光明經』을 들 수 있는데, 두 문헌이 설명하는 22우치는 각각 다음과 같다. 진하게 표시한 것은 원효의 『本業經疏』에 활용된 무명 이름이다.
       『攝大乘論釋』의 설명  『合部金光明經』의 설명 
     보살 제1지  法我分別無明  欲行有相道是無明障礙 
     惡道業無明  生死怖畏是無明 
     보살 제2지  微細犯過無明  微細罪過因無明  
     種種相業行無明  種種業行相因無明 
     보살 제3지  欲愛無明  昔所未得勝利得故動涌因無明 
     具足聞持陀羅尼無明  不具聞持陀羅尼因無明 
     보살 제4지  三摩跋提愛無明  味禪定樂生愛著心因無明 
     行法愛無明  微妙淨法愛因無明 
     보살 제5지  生死涅槃一向背取思惟無明  一意欲入涅槃思惟 一意欲入生死思惟
     是涅槃思惟 是生死思惟 無明爲因 
     二方便所攝修習道品無明  生死涅槃不平等思惟無明爲因 
     보살 제6지  證諸行法生起相續無明  行法相續了了顯現無明爲因 
     相想數起無明  法相數數行至於心無明爲因 
     보살 제7지  微細相行起無明  微細諸相或現不現無明 
     一向無相思惟方便無明  一味熟思惟欲斷未得方便無明 
     보살 제8지  於無相觀作功用無明  於無相法多用功力無明 
     於相行自在無明  執相自在難可得度無明 
     보살 제9지  無量正說法 無量名句味
     難答巧言 自在陀羅尼無明 
     說法無量名味句 無量智慧分別
     無量未能攝持無明 
     依四無礙解決疑生解無明  四無礙辯未得自在無明 
     보살 제10지  六神通慧無明  最大神通未得如意無明 
     入微細祕密佛法無明  微妙祕密之藏修行未足無明 
     불지(여래지)  於一切應知境微細著無明  一切境界微細智礙無明爲因 
     於一切應知境微細礙無明  未來是礙不更生未得不更生智無明爲因 
  41. 41)『菩薩瓔珞本業經』 권상 「賢聖學觀品」(T24, 1016bc).
  42. 42)『大乘起信論』(T32, 577c).
  43. 43)혜원慧遠(523~592)의 『大乘義章』 권6(T44, 582bc)에서 견취見取는 어떤 견해에 집착하여 그것을 제일이라고 여기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견취에는 독두獨頭와 족상足上의 두 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독두는 여러 가지 견해에 의지하지 않고 하열한 유루법을 곧장 집착하여 제일이라고 여기는 것인데, 부정한 것을 청정하다고 생각하거나 괴로운 것을 즐겁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족상은 잘못된 다른 견해를 의지해서 생기는 것인데, 근본이 되는 그 다른 견해가 다리와 발이 되어 그 위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족상이라고 한다.
  44. 44)『成唯識論』 권6(T31, 33b)에서 20종의 수번뇌를 대·중·소로 구분하고 분忿·한恨·부覆·뇌惱·간慳·질嫉·광誑·첨諂·해害·교憍의 10종은 소수번뇌小隨煩惱, 무참無慚·무괴無愧의 2종은 중수번뇌中隨煩惱, 도거掉擧·혼침惛沈·불신不信·해태懈怠·방일放逸·실념失念·산란散亂·부정지不正知의 8종은 대수번뇌大隨煩惱라고 한다.
  45. 45)이십이근二十二根 : 근根은 일반적으로 ‘작용이 두드러진다’는 의미로 이해한다. 중생이 갖추고 있는 중생으로서의 두드러진 기능을 가리킨다. 22종의 근은 안근眼根·이근耳根·비근鼻根·설근舌根·신근身根·의근意根의 육근六根, 남근男根·여근女根·명근命根, 고苦·낙樂·희喜·우憂·사捨의 오수근五受根, 신信·근勤·염念·정定·혜慧의 오선근五善根, 미지당지근未知當知根·이지근已知根·구지근具知根의 삼무루근三無漏根을 말한다. 좀 더 이해하기 쉬운 표현으로 하자면, 눈의 기능(眼根)·귀의 기능(耳根)·코의 기능(鼻根)·혀의 기능(舌根)·몸의 기능(身根)·생각의 기능(意根), 여자의 기능(女根)·남자의 기능(男根)·생명 기능(命根), 즐거움의 기능(樂根)·괴로움의 기능(苦根)·기쁨의 기능(喜根)·불만족의 기능(優根)·평온의 기능(捨根), 확신의 기능(信根)·정진의 기능(勤根)·마음챙김의 기능(念根)·삼매의 기능(定根)·통찰지의 기능(慧根), 구경의 지혜를 가지려는 기능(未知當知根)·구경의 지혜의 기능(已知根)·구경의 지혜를 구족한 기능(具知根)이다. 이미 초기 경전에서도 등장하는 개념이며 부파 논서에서 자세하게 정리하고 있다.
  46. 46)『佛說仁王般若波羅蜜經』 권상 「菩薩敎化品」(T8, 826c~827a).
  47. 47)『일도장一道章』 : 1090년에 편찬된 의천義天(1055~1101)의 『新編諸宗敎藏總錄』(T55, 1167a)이나 1094년에 간행된 일본 에이초(永超, 1014~1096)의 『東域傳燈目錄』(T55, 1161c7) 등에 원효의 저술로 “『一道章』 1卷”이 기록되어 있으나 지금 전해지지는 않는다.
  48. 48)『菩薩瓔珞本業經』 권상 「賢聖學觀品」(T24, 1016c).
  49. 49)『菩薩瓔珞本業經』 권상 「賢聖學觀品」(T24, 1016c).
  50. 50)육입六入 : 『本業經疏』에 계속 등장하는 이 말은 깨달음으로 들어가는 여섯 종류의 현성賢聖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즉 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廻向·십지十地·무구지無垢地·묘각지妙覺地의 여섯을 가리킨다.
  51. 51)육입六入을 직접 밝힘(正明六入) : 『本業經疏』가 온전히 남아 있지 않아 분과分科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으나 정명육입正明六入은 『菩薩瓔珞本業經』의 「賢聖名字品」, 「賢聖學觀品」, 「釋義品」의 내용으로 원효가 분과한 것이다. 『本業經疏』의 다른 부분을 참조하여 『本業經』을 분과한 전체 내용을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서분 
     序分 
     집중품 
     集衆品 
     정설분 
     正說分 
     여래위설분 
     如來爲說分 
     광개문 
     廣開門 
     정명육입 
     正明六入 
     현성명자품 
     賢聖名字品 
     현성학관품 
     賢聖學觀品 
     석의품 
     釋義品 
     현육입경 
     顯六入境 
     불모품 
     佛母品 
     약섭문 
     略攝門 
     인과품 
     因果品 
     대중수학분 
     大衆受學分 
     대중수학품 
     大衆受學品 
     유통분 
     流通分 
     집산품 
     集散品 
  52. 52)『菩薩瓔珞本業經』 권하 「釋義品」(T24, 1017a).
  53. 53)『菩薩瓔珞本業經』 권상 「賢聖學觀品」(T24, 1012b).
  54. 54)『菩薩瓔珞本業經』 권하 「釋義品」(T24, 1017a).
  55. 55)삼경三境 : 보통 중국 법상종法相宗에서 우리의 인식 대상을 세 가지로 구별한 것을 가리킨다. 첫째, ‘성경性境’은 전오식前五識이 작용하여 대상의 특성이 그대로 유지된 상태로 인식한 것을 말한다. 둘째, ‘독영경獨影境’은 대상과 관계없이 제6식이 단독으로 만들어 낸 대상을 말하는데, 눈병 난 사람이 보는 환영이나 실제로는 없는 토끼 뿔이나 거북 털 같은 것을 말한다. 셋째, ‘대질경帶質境’은 대상의 본질은 가지고 있으나 대상 그대로 인식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데, 노끈을 뱀으로 잘못 아는 경우를 예로 들 수 있다.
  56. 56)『佛說仁王般若波羅蜜經』 권상 「菩薩敎化品」(T8, 827b). 『大正新脩大蔵經』에 전하는 경문은 “中下品善粟散王。 上品十善鐵輪王。”으로 되어 있다.
  57. 57)팔도八倒 : 여덟 가지 잘못된 생각이란 뜻인데, 주로 『大般涅槃經』에 근거를 둔다. 『大般涅槃經』 권2 「壽命品」에서 “고苦를 낙樂으로 알고 낙을 고로 알면 전도법顚倒法이다. 무상無常을 상常으로 알고 상을 무상으로 알면 전도법이다. 무아無我를 아我로 알고 아를 무아로 알면 전도법이다. 부정不淨을 정淨으로 알고 정을 부정으로 알면 전도법이다.(苦者計樂。 樂者計苦。 是顚倒法。 無常計常。 常計無常。 是顚倒法。 無我計我。 我計無我。 是顚倒法。 不淨計淨。 淨計不淨。 是顚倒法。)”(T12, 377b)라고 하였는데, 혜원慧遠(523~592)의 『大般涅槃經義記』 권2에서 “생사는 사실 고인데 낙으로 잘못 생각하고 열반은 사실 낙인데 고라고 잘못 생각한다.(生死實苦。 妄計爲樂。 涅槃實樂。 橫計爲苦。)”(T37, 647c~648a)라는 주석에 바탕을 두고, 흔히 생멸하는 법을 상常·낙樂·아我·정淨이라고 고집하고, 열반의 법을 무상無常·무락無樂·무아無我·부정不淨이라고 고집하는 견해라고 풀이한다.
  58. 58)『菩薩瓔珞本業經』 권하 「釋義品」(T24, 1017ab).
  59. 59)『菩薩瓔珞本業經』 권하 「釋義品」(T24, 1017b).
  60. 60)전반적으로는 『賢劫經』 권2 「諸度無極品」(T14, 11b~13a)의 내용을 발췌하고 있으나, “모든 법의 근본을 깨달음(了諸法本)이라는 삼매”와 관련한 문답은 『賢劫經』 권1 「問三昧品」(T14, 2a)에 보인다.
  61. 61)실제 『賢劫經』에서 거론하는 네 가지는 탐貪·음婬·노怒·치癡이다.
  62. 62)삼공三空 : 『菩薩瓔珞本業經』에서도 거론한 공空·무상無相·무원無願의 세 가지 삼매를 가리킨다. 삼해탈三解脫이라고도 한다.
  63. 63)『央掘魔羅經』 권2(T2, 530a).
  64. 64)『央掘魔羅經』 본문(T2, 530a)에 작은 글자로 주석이 붙어 있다.
  65. 65)『菩薩瓔珞本業經』 권하 「釋義品」(T24, 1017b).
  66. 66)『菩薩瓔珞本業經』 권하 「釋義品」(T24, 1017bc).
  67. 67)이처럼 모든 것을 임시(假)로 보는 견해를 없앰으로써 생기는 세 가지 지혜를 견도의 마음과 관련짓는 설명은 현장玄奘(622~664)이 번역한 『成唯識論』 권9(T31, 50a)나 『顯揚聖敎論』 권17 「成現觀品」(T31, 562ab)에서도 볼 수 있다.
  68. 68)『菩薩瓔珞本業經』 권하 「釋義品」(T24, 1017c).
  69. 69)『菩薩瓔珞本業經』 권하 「釋義品」(T24, 1017c).
  70. 70)『菩薩瓔珞本業經』 권하 「釋義品」(T24, 1017c).
  71. 71)『菩薩瓔珞本業經』 권하 「釋義品」(T24, 1017c).
  72. 72)네 가지 마군(四魔) : 사람의 목숨과 지혜를 뺏는 네 가지 장애를 가리킨다. 많은 경론에서 언급하며 제거 방법을 함께 거론하는 경우도 많다. 『一切經音義』 권25(T54, 466a)에 따르면, 네 가지 마군은 첫째, 번뇌마煩惱魔, 둘째, 음마陰魔 즉 오온五蘊, 셋째, 사마死魔, 넷째, 천마天魔 즉 욕계의 타화자재천왕他化自在天王이다.
  73. 73)『菩薩瓔珞本業經』 권하 「釋義品」(T24, 1017c).
  74. 74)삼륜三輪 : 세간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무상無常·부정不淨·고苦의 세 가지를 가리킨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무한하므로 바퀴에 비유하여 무상륜無常輪·부정륜不淨輪·고륜苦輪이라고 한다. 규기窺基(632~682)의 「阿彌陀經通贊疏序』(T37, 329b)에 “이 『(아미타)경』은 삼륜을 부수기 위한 것이다. 삼륜의 첫째는 무상륜無常輪인데 유정과 무정이 모두 무상이니 중생들을 깨닫게 하여 무상을 버리게 하기 위해서이다. 둘째는 부정륜不淨輪인데 유정과 무정이 모두 부정하니 중생들이 정토로 돌아가 연화세계에 태어나게 하여 유정의 부정을 부수고 정토세계에 머물게 하여 세간의 부정을 부수어 부정륜을 부수기 위한 것이다. 셋째는 고륜苦輪을 부수기 위한 것인데 중생들이 고통으로 핍박을 받으니 정토에 돌아가게 하여 이 고통을 없애 주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75. 75)『菩薩瓔珞本業經』 권하 「釋義品」(T24, 1017c~1018a).
  76. 76)『菩薩瓔珞本業經』 권하 「釋義品」(T24, 1018a).
  77. 77)『菩薩瓔珞本業經』 권하 「釋義品」(T24, 1018a).
  78. 78)『十地經論』 권11 「善慧地」(T26, 191bc).
  79. 79)『菩薩瓔珞本業經』 권하 「釋義品」(T24, 1018a).
  80. 80)『菩薩瓔珞本業經』 권하 「釋義品」(T24, 1018a).
  81. 81)『十地經論』 권9 「遠行地」(T26, 176b).
  82. 82)『菩薩瓔珞本業經』 권하 「釋義品」(T24, 1018a).
  83. 83)『佛說仁王般若波羅蜜經』 권2 「受持品」(T8, 832a).
  84. 84)『菩薩瓔珞本業經』 권하 「釋義品」(T24, 1018a).
  85. 85)『菩薩瓔珞本業經』 권하 「釋義品」(T24, 1018a).
  86. 86)『佛說仁王般若波羅蜜經』 권2 「受持品」(T8, 832b).
  87. 87)『菩薩瓔珞本業經』 권하 「釋義品」(T24, 1018ab).
  88. 88)『菩薩瓔珞本業經』 권하 「釋義品」(T24, 1018b).
  89. 89)『菩薩瓔珞本業經』 권하 「佛母品」(T24, 1018b).
  90. 90)『菩薩瓔珞本業經』 권하 「佛母品」(T24, 1018bc).
  91. 91)『佛說仁王般若波羅蜜經』 권1 「二諦品」(T8, 829a).
  92. 92)『佛說仁王般若波羅蜜經』 권1 「二諦品」(T8, 829a).
  93. 93)『佛說仁王般若波羅蜜經』 권1 「二諦品」(T8, 829b).
  94. 94)『菩薩瓔珞本業經』 권하 「佛母品」(T24, 1018c).
  95. 95)『菩薩瓔珞本業經』 권하 「佛母品」(T24, 1018c).
  96. 96)『入楞伽經』 권2 「集一切佛法品」(T16, 525a).
  97. 97)『入楞伽經』 卷2 「集一切佛法品」(T16, 525b).
  98. 98)『佛說仁王般若波羅蜜經』 권2 「受持品」(T8, 832b).
  99. 99)안다安陀 : 범천梵天에서 생겨난 안다安茶(ⓢ Anda : 알)를 세계의 근본 원인으로 주장하는 외도.
  100. 100)『菩薩瓔珞本業經』 권하 「佛母品」(T24, 1018c~1019a).
  101. 101)일곱 가지 견 : 사견邪見·아견我見·상견常見·단견斷見·계도견戒盜見·과도견果盜見·의견疑見을 말한다.
  102. 102)『菩薩瓔珞本業經』 권하 「佛母品」(T24, 1019a).
  103. 103)『本業經疏』는 두 번째인 다른 모습을 자세하게 드러냄(廣顯異相)이 “그러므로” 이하라고 하였지만, 여기에 해당한 부분으로 인용하는 경문이 “그러므로” 앞부분이므로 여기에는 오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104. 104)『大悲經』 권3 「布施福德品」(T12, 959c).
  105. 105)『菩薩瓔珞本業經』 권하 「佛母品」(T24, 1019ab).
  106. 106)『菩薩瓔珞本業經』의 ‘3수’에 대해서 『一切經音義』 권45(T54, 608a)에서는 “허숙중許叔重의 『淮南子』 주석에서는 ‘12속粟의 무게가 1분分이고 12분의 무게가 1수銖이다’라고 하였다. 『說文』에서는 ‘10서黍의 무게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107. 107)『菩薩瓔珞本業經』 권하 「因果品」(T24, 1019b).
  108. 108)『菩薩瓔珞本業經』 권하 「因果品」(T24, 1019b).
  109. 109)『菩薩瓔珞本業經』 권하 「因果品」(T24, 1019bc).
  110. 110)『大方廣佛華嚴經』 권12 「菩薩十無盡藏品」(T9, 475a).
  111. 111)『大方廣佛華嚴經』 권12 「菩薩十無盡藏品」(T9, 475a).
  112. 112)『瑜伽師地論』 권38 「力種姓品」(T30, 504c~505a).
  113. 113)『顯揚聖敎論」 권2 「攝事品」(T31, 490c).
  114. 114)『菩薩瓔珞本業經』 권하 「因果品」(T24, 1019c).
  115. 115)『菩薩瓔珞本業經』 권하 「因果品」(T24, 1019c).
  116. 116)팔도八倒는 여덟 가지 잘못된 견해를 말한다. 유위의 법을 상常·낙樂·아我·정淨으로 고집하는 네 가지와, 무위의 법을 무상無常·무락無樂·무아無我·부정不淨으로 고집하는 네 가지가 있다.
  117. 117)사결四結은 네 가지 번뇌를 말한다. ① 욕애신결欲愛身結 : 욕계의 중생이 오욕 경계에 집착하여 삼계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함. ② 진에신결瞋恚身結 : 욕계의 중생이 제 뜻에 만족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화를 내어 삼계에서 벗어나지 못함. ③ 계도신결戒盜身結 : 계율이 아닌 것을 계율이라 여겨서 삼계에서 벗어나지 못함. ④ 아견신결我見身結 : 아견으로 번뇌 악업을 더하여 삼계에서 벗어나지 못함.
  118. 118)『菩薩瓔珞本業經』 권하 「因果品」(T24, 1019c).
  119. 119)『菩薩瓔珞本業經』 권하 「因果品」(T24, 1019c~1020a).
  120. 120)『菩薩瓔珞本業經』 권하 「因果品」(T24, 1020a).
  121. 121)『菩薩瓔珞本業經』 권하 「大衆受學品」(T24, 1022a).
  122. 122)『大般涅槃經』 권18 「梵行品」(T12, 468b).
  123. 123)『瑜伽師地論』 권38 「菩提品」(T30, 499b).
  124. 124)『佛性論」 권2 「如來藏品」(T31, 795c). “ ‘일체중생은 여래장이다’에서 ‘여如’라는 말에 두 가지 의미가 있으니 첫째는 있는 그대로의 지혜이고, 둘째는 있는 그대로의 경계이다. 이 두 가지가 전도되지 않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라고 말하는 것이다. ‘래來’라는 말은 자성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와서 지극한 것을 얻는 데에 이르는 것, 이것을 여래라고 한다. 그러므로 여래의 성품이란, 비록 원인을 얻는다고 하고 결과에 이르러 얻는다고 하더라도 그 체는 다르지 않다.(一切衆生是如來藏。 言如者。 有二義。 一如如智。 二如如境。 並不倒故名如如。 言來者。 約從自性來。 來至至得。 是名如來。 故如來性。 雖因名應得。 果名至得。 其體不二。)”
  125. 125)『瑜伽師地論』 권38 「菩提品」(T30, 499b).
  126. 126)『瑜伽師地論』 권38 「菩提品」(T30, 499b).
  127. 127)『瑜伽師地論』 권38 「菩提品」(T30, 499b).
  128. 128)『瑜伽師地論』 권38 「菩提品」(T30, 499b).
  129. 129)『瑜伽師地論』 권38 「菩提品」(T30, 499b).
  130. 130)『大般涅槃經』 권18 「梵行品」(T12, 469a).
  131. 131)『大般涅槃經』 권18 「梵行品」(T12, 469ab).
  132. 132)『瑜伽師地論』 권38 「菩提品」(T30, 499b).
  133. 133)『瑜伽師地論』 권38 「菩提品」(T30, 499bc).
  134. 134)『瑜伽師地論』 권38 「菩提品」(T30, 499c).
  135. 135)일반적으로 부처님의 고유한 특성으로 말하는 십팔불공법과는 다른 내용을 전한다. 일반적인 십팔불공법은 부처님뿐만 아니라 아라한에게도 있는 특성이기 때문에 대승에서 따로 십팔불공법을 내세워 아라한과 구별되는 부처님만의 특성을 제시한다. 『大智度論』 권26 「十八不共法釋論」(T25, 247b 이하)이나 『瑜伽師地論』 권79 「攝決擇分中菩薩地」(T30, 738b 이하)에서 자세하게 설명한다. 『菩薩瓔珞本業經疏』는 『瑜伽師地論』을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136. 136)『瑜伽師地論』 권79 「攝決擇分中菩薩地」(T30, 738b).
  137. 137)『瑜伽師地論』 권79 「攝決擇分中菩薩地」(T30, 738c).
  138. 138)『瑜伽師地論』 권79 「攝決擇分中菩薩地」(T30, 738bc).
  139. 139)『瑜伽師地論』 권79 「攝決擇分中菩薩地」(T30, 738c).
  140. 140)『瑜伽師地論』 권79 「攝決擇分中菩薩地」(T30, 738c).
  141. 141)『瑜伽師地論』 권79 「攝決擇分中菩薩地」(T30, 738c).
  142. 142)『瑜伽師地論』 권79 「攝決擇分中菩薩地」(T30, 738c).
  143. 143)『瑜伽師地論』 권79 「攝決擇分中菩薩地」(T30, 738c).
  144. 144)『瑜伽師地論』 권79 「攝決擇分中菩薩地」(T30, 738c).
  145. 145)『瑜伽師地論』 권79 「攝決擇分中菩薩地」(T30, 738c).
  146. 146)『佛說無上依經』 권하 「如來事品」(T16, 476a).
  147. 147)『佛說無上依經』 권하 「如來事品」(T16, 476a).
  148. 148)『佛說無上依經』 권하 「如來事品」(T16, 476a).
  149. 149)『佛說無上依經』 권하 「如來事品」(T16, 476a).
  150. 150)『佛說無上依經』 권하 「如來事品」(T16, 476a).
  151. 151)『佛說無上依經』 권하 「如來事品」(T16, 476a).
  152. 152)예를 들면 『大乘義章』 권20(T44, 865a)에서는 십력을 여래시처비처지력如來是處非處智力, 자업지력自業智力, 정력定力, 제근이둔지력諸根利鈍智力, 욕력欲力, 성력性力, 지처도력至處道力, 숙명지력宿命智力, 천안지력天眼智力, 누진지력漏盡智力으로 들고 있다.
  153. 153)『佛說無上依經』 권하 「如來事品」(T16, 476a)에서는 이 힘을 ‘지일체처지력至一切處智力’이라고 하였다.
  154. 154)『本業經疏』가 인용하고 있는 『佛說無上依經』에서도 ‘생사지력生死智力’이라고 하였다.
  155. 155)『佛說無上依經』 권하 「如來事品」(T16, 476a).
  156. 156)『佛說無上依經』 권하 「如來事品」(T16, 476a).
  157. 157)『佛說無上依經』 권하 「如來事品」(T16, 476ab).
  158. 158)『成實論』 권1 「四無畏品」(T32, 241c).
  159. 159)『大方廣佛華嚴經』 권35 「寶王如來性起品」(T9, 626c~627a).
  160. 160)『菩薩瓔珞本業經』 권상 「賢聖學觀品」(T24, 1014a)에서 보살의 십행심十行心 중의 마지막 진실심행眞實心行에서 보살의 삼보를 설명하는데, “보살의 제일의第一義 중도中道에 대한 지혜를 깨달음의 보배(覺寶)라고 하고, 일체법이 생겨남이 없이(無生) 움직이므로 그 작용을 법보法寶라고 하며, 항상 육도六道에 행하여 육도의 중생과 화합하므로 승보僧寶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161. 161)『大通方廣懺悔滅罪莊嚴成佛經』 권중(T85, 1345a).
  162. 162)무작사제문無作四諦門 : 천태종에서 장통별원藏通別圓의 교판에 맞추어 사제四諦를 재해석하여 배분하였는데, 장교藏敎의 사제는 생멸사제生滅四諦, 통교通敎의 사제는 무생사제無生四諦, 별교別敎의 사제는 무량사제無量四諦, 원교圓敎의 사제는 무작사제無作四諦라고 하였다. 생사가 열반이라는 견지에서 보면 고苦를 멸하고 멸滅을 증득할 필요가 없고, 번뇌가 보리라는 견지에서 보면 집集을 끊고 과果에 이를 도를 닦을 필요가 없으므로 무작無作이라 한다고 하였다.
  163. 163)『佛說無上依經』 권상 「菩提品」(T16, 472ab)에서 부처님의 법신 사덕을 바라밀로 표현하여 대상바라밀大常波羅蜜, 대락바라밀大樂波羅蜜, 대아바라밀大我波羅蜜, 대정바라밀大淨波羅蜜로 설명하고 있다.
  164. 164)『大方廣佛華嚴經』 권31 「佛不思議法品」(T9, 600c~601a).
  165. 165)『大方廣佛華嚴經』 권30 「佛不思議法品」(T9, 591b).
  166. 166)『大方廣佛華嚴經』 권36 「寶王如來性起品」(T9, 629bc).
  167. 167)『大方廣佛華嚴經』 권30 「佛不思議法品」(T9, 592c~593a).
  168. 168)『佛說無上依經』 권상 「菩提品」(T16, 473a).
  169. 169)『佛說無上依經』 권하 「如來功德品」(T16, 475c).
  170. 170)『佛說仁王般若波羅蜜經』 권하 「受持品」 제7(T8, 831bc).
  171. 171)『大般涅槃經』 권18 「梵行品」(T12, 468c).
  172. 172)『大方廣佛華嚴經』 권5 「菩薩明難品」(T9, 429b).
  173. 173)성인의 의생신意生身이 네 가지 장애가 있어서 여래의 네 가지 공덕을 갖추지 못함을 설명하는 『佛說無上依經』의 내용은 『勝鬘經』·『寶性論』·『佛性論』에도 보인다. 다른 경론에서는 ‘아라한과 벽지불과 대력보살’을 성인으로 들고 있다.
  174. 174)『寶性論』 권3 「一切衆生有如來藏品」(T31, 830b)에서는 연상緣相·인상因相·생상生相·괴상壞相의 네 가지를 들고, 『佛性論』 권2 「顯果品」(T31, 799a)에서는 방편생사方便生死·인연생사因緣生死·유유생사有有生死·무유생사無有生死의 네 가지를 든다.
  175. 175)『佛說無上依經』 권상 「菩提品」(T16, 472ab). 『寶性論』 권3 「一切衆生有如來藏品」(T31, 830ab)과 『佛性論』 권2 「顯果品」(T31, 799ab)에서도 표현과 용어는 다르지만 같은 내용을 볼 수 있다.
  176. 176)『菩薩瓔珞本業經』 권하 「因果品」(T24, 1020ab).
  177. 177)『佛說無上依經』 권하 「如來事品」(T16, 476b).
  178. 178)『菩薩瓔珞本業經』 권하 「大衆受學品」(T24, 1020b).
  179. 179)『菩薩瓔珞本業經』 권하 「大衆受學品」(T24, 1020b).
  180. 180)60권본 『華嚴經』은 칠처팔회七處八會 34품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처處’는 경을 설한 장소를 말하고, ‘회會’는 경을 설한 모임을 말한다. 경을 설한 곳은 지상에 적멸도량寂滅道場·보광당普光堂·급고독원給孤獨園의 세 곳이고, 천상에 도리천忉利天·야마천夜摩天·도솔천兜率天·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네 곳이다. 보광당에서 두 번 설하기 때문에 칠처팔회이다. 제1회 적멸도량회寂滅道場會 2품의 설주說主는 보현보살, 제2회 보광당회普光堂會 6품의 설주는 문수보살, 제3회 도리천궁회忉利天宮會 6품의 설주는 법혜보살, 제4회 야마천궁회夜摩天宮會 4품의 설주는 공덕림보살, 제5회 도솔천궁회兜率天宮會 3품의 설주는 금강당보살, 제6회 타화자재천궁회他化自在天宮會 11품의 설주는 금강장보살, 제7회 보광법당중회普光法堂重會 1품의 설주는 보현보살, 제8회 급고독원회級孤獨園會 1품은 선재동자가 주인공이므로 『本業經』에서 “문수사리文殊師利보살·보현普賢보살·법혜法慧보살·공덕림功德林보살·금강당金剛幢보살·금강장金剛藏보살·선재동자善才童子 보살에게 말씀하셨다.”라고 하였고, 『本業經疏』는 “일곱 보살에게 말씀하신 것은 『화엄경』의 일곱 법회의 주인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181. 181)일곱 가지 잘못된 견해 : ① 선악이나 인과 등의 도리를 무시하는 사견邪見, ② 상일常一·주재主宰하는 아我가 있다고 고집하는 아견我見, ③ 자기 몸과 물건들이 변하여 없어지는 것을 믿지 않는 상견常見, ④ 다시 태어나는 것을 믿지 않고 아주 없어진다고 생각하는 단견斷見, ⑤ 그릇된 계를 올바른 계라고 믿고 닦는 계도견戒盜見, ⑥ 바른 인과를 알지 못하여 불선不善이나 고행을 바른 수행법이라 생각하여 작은 결과를 얻고는 가장 큰 과보로 잘못 아는 과도견果盜見, ⑦ 아我와 무아無我·상常과 무상無常 등의 도리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의심하는 의견疑見 등을 말한다.
  182. 182)여섯 가지 집착 : 탐착貪著·애착愛著·진착瞋著·치착癡著·욕착欲著·만착慢著을 일컫는다.
  183. 183)『菩薩瓔珞本業經』 권하 「大衆受學品」(T24, 1020bc).
  184. 184)『菩薩瓔珞本業經』 권하 「大衆受學品」(T24, 1020c~1021b).
  185. 185)『菩薩瓔珞本業經』 권하 「大衆受學品」(T24, 1021b).
  186. 186)뛰어난 법(他所勝法) : 일반적으로 바라이波羅夷로 음사하는 ⓢ pārājika의 의역어이다. 『一切經音義』 권47(T54, 620c)에는 ‘바라자이카波羅闍已迦’에 대해 “중국어로 타승他勝으로 번역한다. 파계하면 번뇌가 선법善法보다 수승해진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187. 187)『瑜伽師地論』 권75 「攝決擇分中菩薩地」(T30, 711c).
  188. 188)『菩薩瓔珞本業經』 권하 「大衆受學品」(T24, 1021bc).
  189. 189)『大方廣佛華嚴經』 권39 「離世間品」(T9, 646bc).
  190. 190)『大方廣佛華嚴經』 권41 「離世間品」(T9, 660ab).
  191. 191)십념十念 : 『大方廣佛華嚴經』 권23 「十地品」(T9, 544c~545a)에는 ‘환희지歡喜地’에 머무는 보살은 십념이 있기 때문에 환희심을 낸다고 하면서 모든 부처를 생각함(念諸佛), 모든 불법을 생각함(念諸佛法), 모든 보살마하살을 생각함(念諸菩薩摩訶薩), 모든 보살이 행한 것을 생각함(念諸菩薩所行), 모든 바라밀의 청정한 모습을 생각함(念諸波羅蜜淸淨相), 모든 보살이 온갖 수승함을 주심을 생각함(念諸菩薩與衆殊勝), 모든 보살의 힘을 파괴할 수 없음을 생각함(念諸菩薩力不可壞), 모든 여래의 교화법을 생각함(念諸如來敎化法), 중생을 이롭게 할 수 있음을 생각함(念能爲利益衆生), 모든 부처와 보살의 들어간 지혜방편문을 생각함(念一切佛一切菩薩所入智慧方便門)의 열 가지를 든다.
  192. 192)십혜十慧 : 『大方廣佛華嚴經』 권41 「離世間品」(T9, 660c)에는 보살의 열 가지 지혜로, 인을 아는 지혜(知因慧), 모든 연을 이해하는 지혜(解一切緣慧), 일체법이 항상하지도 않고 단멸하지도 않음을 이해하는 지혜(解一切法不常不斷慧), 일체 사견을 뽑아내는 지혜(拔出一切邪見慧), 일체중생의 마음과 마음 작용의 움직임을 이해하는 지혜(解一切衆生心心所行慧), 모든 뛰어난 지혜를 분별하는 지혜(諸辯勝智慧), 온갖 마군과 외도를 항복시키고 성문과 연각을 뛰어넘는 지혜(降伏衆魔及諸外道出過聲聞緣覺慧), 모든 부처의 청정법신을 보고(見一切佛淸淨法身) 일체중생이 모두 청정함을 보며(見一切衆生皆悉淸淨) 일체법이 모두 적멸함을 보고(見一切法皆悉寂滅) 일체 세계가 모두 허공임을 보는 지혜(見一切世界皆悉虛空淨慧), 일체 다라니를 모두 받아들여(攝取一切陀羅尼) 모든 바라밀과 오묘한 방편을 분별하는 지혜(辯諸波羅蜜巧方便淨慧), 일념에 금강지와 상응하여(一念相應金剛智) 일체법이 평등함을 깨닫는 지혜(覺一切法平等淨慧)를 든다.
  193. 193)십선十禪 : 『大方廣佛華嚴經』 권41 「離世間品」(T9, 660bc)에는 보살의 열 가지 선정으로, 상락출가선常樂出家禪, 친근선지식선親近善知識禪, 낙아련야처선樂阿練若處禪, 이언희궤요처선離言戲憒閙處禪, 심유연선心柔軟禪, 지혜적정선智慧寂靜禪, 칠각팔도선七覺八道禪, 이미선등제번뇌구선離味禪等諸煩惱垢禪, 제통명내선諸通明內禪, 이소방편현전유희신통선以少方便現前遊戲神通禪을 든다.
  194. 194)십시十施 : 『大方廣佛華嚴經』 권41 「離世間品」(T9, 659c~660a)에는 보살의 열 가지 보시로, 평등심시平等心施, 수의시隨意施, 무난심시無亂心施, 수응공시隨應供施, 불선택시不選擇施, 일향시一向施, 내외일체시內外一切施, 회향보리시迴向菩提施, 교화성숙중생시敎化成熟衆生施, 삼종원만청정시三種圓滿淸淨施를 든다.
  195. 195)마업魔業을 버리는 열 가지 : 『大方廣佛華嚴經』 권41 「離世間品」(T9, 663b)에는 선지식을 가까이하여 마업을 버리고(親近善知識捨離魔業), 스스로 잘난 체하지 않고 스스로 찬탄하지 않아 마업을 버리며(不自尊擧不自讚歎捨離魔業), 부처와 깊은 불법을 믿어 비방하지 않아서 마업을 버리고(信佛深法不生誹謗捨離魔業), 일체지의 마음을 잃지 않아 마업을 버리며(未曾忘失一切智心捨離魔業), 방종하지 않는 데에 편히 머물면서 깊은 법을 닦아 익혀 마업을 버리고(安住不放逸修習甚深法捨離魔業), 보살장에 편히 머무르면서 곧장 모든 법을 구해 마업을 버리며(安住菩薩藏正求一切法捨離魔業), 항상 법을 청하고 싶어하고 깊은 의미를 기쁘게 들어 마음에 피로함이 없어 마업을 버리고(常欲聽法樂聞深義心無疲倦捨離魔業), 시방의 일체 부처님께 귀의하여 마업을 버리며(歸依十方一切諸佛捨離魔業), 믿는 마음으로 일체 부처님의 보리수를 곧장 생각해 마업을 버리고(信心正念一切諸佛菩提樹捨離魔業), 일체 보살이 둘이 아닌 모든 선근을 내어 마업을 버린다(一切菩薩出生善根皆悉不二捨離魔業)고 하였다.
  196. 196)십원十願 : 『大方廣佛華嚴經』 권23 「十地品」(T9, 545b~546a)에서 모든 부처님께 공양함, 부처님의 법을 받들고 수호함, 부처님이 현세에 몸을 나투시는 순간마다 공양하고 법을 지님, 광대한 보살행으로 중생을 교화하는 마음을 왕성하게 함, 모든 중생을 불법에 머물게 함, 모든 세계에 들어갈 지혜를 갖춤, 모든 불국토에 들어가 중생들 마음에 나타나게 함, 보살과 똑같은 경계를 얻어 보살행을 완전히 갖춤, 물러나지 않는 법의 수레를 타고 보살도를 행함, 일체 세계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 지혜와 신통으로 변화를 내어 법계에 가득 차게 함의 열 가지 발원을 거론한다.
  197. 197)『本業經疏』가 설명을 하지 않고 있는 나머지 두 가지는 십계十戒와 십회향十迴向이다. 십계는 『大方廣佛華嚴經』 권41 「離世間品」(T9, 660a)에서 신계身戒, 구계口戒, 심계心戒, 구일체계具一切戒, 수호보리심계守護菩提心戒, 수호여래소설계守護如來所說戒, 미밀계微密戒, 부작일체악계不作一切惡戒, 원리일체유견계遠離一切有見戒, 수호일체중생계守護一切衆生戒를 든다. 십회향은 『大方廣佛華嚴經』 권39 「離世間品」(T9, 646c)에서 회향동선지식원迴向同善知識願, 회향동선지식정직심迴向同善知識正直心, 회향동선지식행迴向同善知識行, 회향동선지식선근迴向同善知識善根, 회향수순선지식선근迴向隨順善知識善根, 회향동선지식정념迴向同善知識正念, 회향동선지식청정迴向同善知識淸淨, 회향동선지식주迴向同善知識住, 회향동선지식입성만평등迴向同善知識入成滿平等, 회향동선지식불괴심심迴向同善知識不壞深心을 든다.
  198. 198)『菩薩瓔珞本業經』 권하 「大衆受學品」(T24, 1021c~1022a).
  199. 199)‘세 가지 모습’이란 『大乘起信論』(T32, 577a)에서 일심진여一心眞如의 불각不覺의 측면으로 세상이 펼쳐지는 모습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세 가지 미세한 마음 작용을 말한다. 『本業經疏』에서는 업상業相·전상轉相·현상現相이라고 표현하는데 『起信論』에서는 무명업상無明業相·능견상能見相·경계상境界相이라고 하였다.
  200. 200)『菩薩瓔珞本業經』 권하 「大衆受學品」(T24, 1022ab).
  201. 201)『菩薩瓔珞本業經』 권하 「集散品」(T24, 1022bc).
  202. 202)『瑜伽師地論』 권94(T30, 838a).
  203. 203)『瑜伽師地論』 권94(T30, 838b).
  204. 204)『菩薩瓔珞本業經』 권하 「集散品」(T24, 1022c~1023a).
  1. 1){底}續藏經。第一編六十一套三册。
  2. 2)底本無撰者名以書入{編}。
  3. 3)「住」上一有「十」。
  4. 1)「隨」一作「樂」。
  5. 2)「原密」一作「厚察」。
  6. 3)「住」一作「出」。
  7. 4)「無習」疑剩。
  8. 5)「習」經作「修」。
  9. 6)「生」一作「至」。
  10. 1)「二」疑「三」。
  11. 2)「麤」一作「塵」。
  12. 3)「亦」疑「睡」。
  13. 4)「此」一作「比」。
  14. 5)「何」下一有「如來」。
  15. 6)「之」經作「界」。
  16. 7)「人」通「仁」下同。
  17. 8)「諦」一無。
  18. 1)「二」疑「三」。
  19. 2)「有」一作「百」。
  20. 3)「色」下一。有「想色」。
  21. 4)「亦」下一有「不」。
  22. 1)「果」經作「業」。
  23. 2)「可」一作「所」。
  24. 3)「故言頓斷」一無。
  25. 4)「不生」經無。
  26. 1)經卷下。
  27. 2)「功」一作「行」。
  28. 3)「二」疑「四」。
  29. 4)「望」疑「聖」。
  30. 1)「度」經作「授」。
  31. 2)「增」疑「憎」。
  32. 1)「到」經作「倒」。
  33. 2)「無」經作「有」。
  34. 3)「常」經作「上」。
  35. 4)「萬」經作「千」。
  36. 5)「無」疑「有」。
  37. 1)「照」一作「滅」。
  38. 2)「示」經作「現」。
  39. 1)「觀」一無。
  40. 2)「起」下一有「照寂慧依何超」。
  41. 3)「前」上一有「答」。
  42. 1)「遣」一作「違」。
  43. 2)「後」上一有「然」。
  44. 3)「佛」下一有「佛」。
  45. 4)「一」上疑脫「第」。
  46. 5)「遣」一作「違」。
  47. 1)「滅」上一有「起」。
  48. 2)「義」一無次同。
  49. 1)「相心」一作「心想」。
  50. 2)「學」一無。
  51. 3)「經」上一有「餘」。
  52. 1)「爲」經作「無」。
  53. 2)「別」疑「列」。
  54. 3)揷入一行。
  55. 4)「十」一無。
  56. 5)「一」疑剩。
  57. 6)「無」下一有「非無」。
  58. 1)「信」一作「倍」。
  59. 2)「其」疑「甚」。
  60. 3)「進」疑「追」。
  61. 4)「受」上疑脫「攝」。
  62. 1)「餘」疑「飾」。
  63. 2)「集」一作「奪」。
  64. 3)「又」下一有「一」。
  65. 4)「於」下疑脫「前」。
  66. 1)「爲」下一有「法」。
  67. 2)「而」下疑脫「無」。
  68. 3)「身」經作「色」。
  69. 1)「品」下一有「類」。
  70. 2)「故」上一有「名」。
  71. 3)「切」疑剩。
  72. 4)「阿」上一有「遊」。
  73. 1)「一」上一有「得」。
  74. 1)「量」下一有「界」。
  75. 2)「仰」疑「作」。
  76. 1)「淨」一無。
  77. 1)「眠」一無。
  78. 2)「其」下一有「一」。
  79. 1)「更」經作「便」。
  80. 2)「意」一作「竟」。
  81. 3)「此」上一有「謂即於」。
  82. 1)「是」下一有「爲」。
  83. 2)「爲」一作「以」。
  84. 3)「相」下有「中」。
  85. 4)「住」經作「地」。
  86. 5)「使」作「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