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plete Works of Korean Buddhism

열반종요(涅槃宗要) / 涅槃宗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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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종요涅槃宗要
열반종요涅槃宗要
원효 스님 지음

이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Mahāparinirvāṇasūtra)을 해석하는 데 두 부문이 있다. 첫 번째는 대체적 의의를 서술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분석적 전개를 하는 것이다.

제1편 대체적 의의1)
대체적 의의를 서술하겠다. 본디 열반涅槃,2) 이것을 도道라고 할 경우, 도가 아니면서 도가 아닌 것이 없으며, 안주하지 않으면서 안주하지 않음이 없다. 이것은 그 도가 지극히 가깝고도 지극히 먼 것임을 알게 한다. 따라서 그 도를 깨달은 이는, 도가 아주 고요하기도 하고 아주 우렁차기도 하다는 것을 안다. 아주 우렁차기 때문에 두루 여덟 가지의 훌륭한 소리(八音)3)를 내어서 허공을 두루하여도 그치지 아니하며, 아주 고요하기 때문에 열 가지의 모습(十相)4)을 떨쳐 버려서 진제眞際5)와 합쳐 담연하다. 지극히 멀기 때문에 가르침을 따라서 그쪽으로 가면 천겁千劫6)이나 되는 긴 세월이 지나도 이르지 못하고, 지극히 가깝기 때문에 말을 버리고 그것을 찾으면 한 생각도 지나지 않은 사이에 스스로 알게 된다.
『대반열반경』은 불법의 큰 바다이고 방등方等7)의 비장이어서, 그 가르침을 헤아려 알기 어렵다. 그것은 참으로 너무나 넓고 넓어서 가가 없으며, 너무나 깊고 깊어서 밑바닥을 모른다. 밑바닥을 모르기 때문에 다하지 않음이 없고, 가가 없기 때문에 해당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여러 경전들의 부분들을 통합하여 온갖 흐름을 한맛으로 귀납시키고, 부처님이 지닌 뜻을 지극히 공정하게 전개하여 모든 사상가들(百家)8)의 서로 다른 쟁론을 화합시킨다.
드디어는 아주 시끄러운 사생四生9)으로 하여금 모두 ‘둘이 아닌 참된 성품’으로 돌아오게 하고, 꿈만 꾸는 긴 잠에서 깨어나 다 함께 ‘큰 깨달음의 극과極果’10)에 이르게 한다. ‘극과의 큰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참된 성품을 체험하면서도 체험한다는 마음조차 깨뜨려 버리는 것이요, ‘참된 성품은 둘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은 진실과 거짓이 혼융하여 하나로 되는 것이다. 벌써 진실과 거짓이 혼융하여 하나로 되어 둘이 아니라고 하니, 어찌 하나인들 있을 수 있으며, 진실과 거짓이 혼융하여 하나로 되니 무엇을 그 참된 성품이라 하겠는가.

이것은 이理11)와 지智12)에 상즉하여 명칭(名)13)과 의의(義)14)를 모두 끊었으므로, 이것을 ‘열반의 현묘한 종지’라고 이른다. 다만 모든 부처님은 이 열반의 현묘한 종지를 깨달아서 안주하지 아니하여,

001_0524_a_01L[涅槃宗要]

001_0524_a_02L1)涅槃宗要

001_0524_a_03L

001_0524_a_04L元曉師撰

001_0524_a_05L
[1] 經有其二門一者略述大意二者廣
001_0524_a_06L開分別

001_0524_a_07L述大意者
原夫涅槃之爲道也無道而
001_0524_a_08L無非道無住而無2) [1] 是知其道
001_0524_a_09L近至遠證斯道者彌寂彌暄彌暄之故
001_0524_a_10L普震八3) [2] 4) [3] 虛空而不息彌寂之故
001_0524_a_11L遠離十相同眞際而湛然由至遠故
001_0524_a_12L敎逝之5)綿 [4] [2] 歷千劫而不臻由至近故
001_0524_a_13L言尋之不過一念而自會也今是經者
001_0524_a_14L斯乃佛法之大海方等之祕藏其爲敎
001_0524_a_15L難可測量6)由良 [5] 7) [6] 蕩無8) [7] 甚深無
001_0524_a_16L以無底故無所不窮以無*崖 [8]
001_0524_a_17L所不該統衆典之部分歸萬流之一味
001_0524_a_18L開佛意之至公和百家之異諍遂使擾
001_0524_a_19L擾四生僉歸無二之實性夢夢長睡
001_0524_a_20L到大覺之極果極果之大覺也體實性
001_0524_a_21L9) [9] 實性之無10) [10] 混眞11) [11]
001_0524_a_22L爲一旣無二也何得有一眞*忘 [12] 混也
001_0524_a_23L熟爲其實斯卽理智都*忘 [13] 名義斯絕
001_0524_a_24L是謂涅槃之玄旨也但以諸佛證而不

001_0524_b_01L응하지 않는 데가 없고, 말씀하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이것을 열반의 지극한 가르침이라고 이른다. ‘현묘한 종지’를 이루었으면서도 아직 고요하지 아니하며, 지극한 가르침을 말씀하셨으면서도 아직 말씀하지 않으므로, 이것을 이법理法과 교법敎法의 한맛(一味)이라고 이른다.
이와 같이 완전한 가르침(滿字)15)을 들은 이는 모두 다 털구멍이 많은 것처럼 그렇게 많은 이익을 얻을 것이고, 반구半句의 게송16)만을 구하는 이는 골수骨髓가 부서짐을 돌보지 않을 것이며, 오역죄五逆罪17)를 지은 이가 이 경을 믿으면 틀림없이 (오역죄를) 없애게 될 것이며, 선근을 끊어 버린 일천제一闡提18)가 이 경의 가르침을 의지하면 (선근이) 되살아나게 될 것이다.

대반열반大般涅槃19)이라고 하는 것은, 만일 그것을 인도의 발음으로 모두 갖추어 보면, 마땅히 마하반열반나摩訶般涅槃那(ⓢ Mahā-pari-nirvāṇa)라고 해야 한다. 이 나라에서는 이것을 번역하여 대멸도大滅度라고 한다. 여래가 깨달은 바의 도道를 증명하려고 하면, 체體20)는 겉이 없는 데까지 두루 미치고, 용用21)은 유정에까지 두루 미치므로, 널리 포섭하고 멀리 제도하는 데에는 이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 그래서 모든 것 가운데에서 이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는 뜻을 근거로 하여 대大(ⓢ mahā)라고 말씀하신다. 대체大體와 대용大用은 둘이 아니며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건너야 할 피안彼岸22)이 없는데 어찌 떠나야 할 차안이 있겠는가? 떠나야 할 것이 없으므로 떠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이것을 대멸大滅이라고 한다. 건너야 할 것이 없으므로 건너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이것을 대도大度라고 한다. 이러한 뜻을 가지므로 대멸도大滅度라고 한다.
경經23)이라는 것은, 위대한 성인의 격언은 시방十方을 꿰뚫으면서도 그것은 한 법도이며, 천대千代를 거치면서도 둘이 아니다. 법다우면서도 언제나 그대로이기 때문에 ‘경’이라고 부른다.
본론을 설하기에 앞서 먼저 당시의 일을 서술한다. 그러한 까닭에 ‘「서품」 제일’이라고 말하였다. 이런 것들을 이유로 해서 ‘『대반열반경』24) 「서품」 제일’이라고 한 것이다.

제2편 분석적 전개
두 번째, 분석적 전개를 하는 것에 네 가지 부분이 있다.
첫째는 『대반열반경』을 말씀하신 까닭을 논설하고, 둘째는 가르침의 종지를 구명究明하고, 셋째는 경의 교체敎體를 드러내고, 넷째는 교판(敎迹)을 논술한다.

제1장 『대반열반경』을 말씀하신 까닭
첫째는 『대반열반경』을 말씀하시게 된 까닭을 논설하는 것이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려고 할 때에 이 경을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 경을 말씀하시게 된 까닭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까닭이 없었다면 마땅히 이 경을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이며 까닭이 있었다면 몇 가지가 있었는가?

1. 까닭이 없다는 학설
부처님이 이 경을 말씀하실 때는 그럴 만한 원인도 없었고 그럴 만한 조건도 없었다. 그러한 까닭은, 말씀하신 취지가 명언을 초월해서 까닭을 일부러 전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001_0524_b_01L12) [14] 無所不應無所不說是謂涅槃之
001_0524_b_02L至敎也玄旨13) [15] [3] 14) [16] 嘗寂至敎說而
001_0524_b_03L未嘗言是謂理敎之一味也爾乃聽滿
001_0524_b_04L字者咸蒙毛孔之益求半偈者15) [17]
001_0524_b_05L髓之摧造逆罪者信是經而能滅16) [18]
001_0524_b_06L17) [19] 依玆敎而還生之矣

001_0524_b_07L
所言大般涅槃18) [20] 19) [21] 具存西域
001_0524_b_08L之音應謂摩訶般涅槃那此土譯之20) [22]
001_0524_b_09L大滅度欲明如來所21) [23] 體周無外
001_0524_b_10L22) [24] [4] 遍有情23) [25] 遠濟莫是爲先依莫
001_0524_b_11L先義故名爲大 24) [26] 大用無二無別
001_0524_b_12L無彼25) [27] 可到何有此*崖 [28] 可離無所
001_0524_b_13L離故無所不離乃爲大滅無所到故
001_0524_b_14L所不到方是大度以是義故名大滅度
001_0524_b_15L所言經者大聖格言26) [29] [5] 方而一揆
001_0524_b_16L千代而莫二法而且常故名爲經
001_0524_b_17L說之前先27) [30] 時事以之故言序品第
001_0524_b_18L故導大般涅槃經序品第一

001_0524_b_19L二者廣開
之內有其四門初說因緣
001_0524_b_20L明敎宗三出經體四辨敎迹

001_0524_b_21L第一說經因緣門者
佛臨涅槃而說
001_0524_b_22L是經爲有因緣爲無因緣若無因緣
001_0524_b_23L應無說若有因緣有爲 [6] 幾種佛說是
001_0524_b_24L無因無緣所以然者所說之旨絕於

001_0524_c_01L이 경을 말씀하신 부처님은 모든 분별을 여의어서 그러한 까닭을 생각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까닭이 없는데도 어쩔 수 없이 이 경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 『대반열반경』의 다음 글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따일라(ⓢ taila, 拉羅婆夷)를 먹는 기름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먹는 기름이 아니며, 어쩔 수 없이 이름을 붙여 먹는 기름이라고 한다.25)

『대반열반경』도 역시 그와 같아서 까닭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다. 또 진제眞諦가 번역한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에서 논술한다.

부처님이라는 과보, 이것이 무분별지無分別智26)의 나타남이라면, 중생을 분별하는 일을 벗어난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중생에게 이익이 되는 일을 할 수 있는가?

이치에 맞아 어긋남이 없으니, 공용 없이 일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거듭하여 게송으로 말씀하신다.

譬摩尼天鼓  예를 들면 마니摩尼27)와 하늘 북은
無思成自事  생각이 없이 스스로의 일을 한다.
如是不分別  이와 같이 아무런 분별도 없이
種種佛事成  여러 가지 부처님의 일을 한다.28)

이 뜻에 따르면, 까닭이 없으면서 말씀하신 것이 있다고 할 수도 있으며, 또 까닭이 없으므로 역시 말씀하신 것이 없다고 할 수도 있다. 이 『대반열반경』의 다음 글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여래가 언제나 법을 말씀하시지 않는 것을 알면, 이것은 보살29)이 다문多聞을 구족한 것이라고 부른다.30)

또 『이야경二夜經』에서 말씀하신다.

부처님이 처음으로 도를 깨달으신 밤으로부터 열반에 드시는 밤에 이르기까지, 이 두 밤 사이에 한마디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31)

이러한 논증으로써 까닭도 없고 말씀하신 것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001_0524_c_01L名言不開因緣故能說之人離諸分別
001_0524_c_02L不思因緣故無因强說是經如此下文
001_0524_c_03L如拉 [7] 羅婆夷名爲食油實不食油
001_0524_c_04L爲立名字爲食油是大涅槃亦復如是
001_0524_c_05L無有因緣强立名字又攝論云若佛果
001_0524_c_06L是無分別智所顯離分別衆生云何得
001_0524_c_07L作衆生利益事如理無 [8] 爲顯無功用
001_0524_c_08L作事故重說偈言譬摩尼天鼓無思成
001_0524_c_09L自事如是不分別種種佛事成解云
001_0524_c_10L若依是義無因緣而有所說又復得言
001_0524_c_11L無因緣故亦無所說如是經下文言
001_0524_c_12L知如來常不說法是名菩薩具足多聞
001_0524_c_13L二夜經云從初得道夜乃至涅槃夜
001_0524_c_14L二夜中間不說一言字以是證知無因
001_0524_c_15L{底}新修大藏經第三十八卷 {甲}東文選第八十
001_0524_c_16L三卷所載涅槃經宗要序
「非」作「不」{甲}
001_0524_c_17L「聲」作「音」{甲}
「通」作「遍」{甲}「綿」作「縣」
001_0524_c_18L{甲}
「由良」作「良由」{甲}「廣」作「矌」{甲}
001_0524_c_19L
「崖」作「涯」次同{甲}「忘」作「亡」{甲}「二」
001_0524_c_20L下有「也」{甲}
「忘」作「妄」次同{甲}「位」作
001_0524_c_21L「住」{甲}
「已」作「亡」{甲}「不」作「未」{甲}
001_0524_c_22L
「傾」作「顧」{甲}「燋」作「斷」{甲}「種」作
001_0524_c_23L「根」{甲}
「經」無{甲}「也」作「其」{甲}「言」
001_0524_c_24L作「云」{甲}
「證」下有「之」{甲}「用」作「周」
001_0524_c_25L{甲}
「苞」作「包」{甲}「體」上有「大」{甲}
001_0524_c_26L「崖」作「岸」次同{甲}
「十」作「千」{甲}「序」
001_0524_c_27L作「敍」{甲}

001_0525_a_01L
2. 까닭이 있다는 학설
어떤 스승은, 큰 까닭이 있어서 부처님이 이 경을 말씀하셨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어리석은 사람은 도무지 까닭이 없으므로 일을 하지 않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그렇지 않아 깊은 까닭이 있어야 일을 한다는 것이다.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논술하는 것과 같다.

예를 들면 수미산왕須彌山王32)은 까닭이 없거나 까닭이 작으면 스스로 동작하지 않는 것과 같다.33)

모든 부처님도 그와 같으므로 까닭이 없이는 경을 말씀하시지 않는다. 이 글의 뜻을 근거로 하여 보면 까닭이 있으므로 말씀하신 것이 된다.

이 뜻을 근거로 하여 보면 이 경을 말씀하신 까닭에는 총체적인 것이 있고 개별적인 것이 있다.
개별적으로 이것을 논술하면 까닭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왜 그런가 하면, 위대한 사람이 발언을 할 때에는 부질없이 말하는 것이 아니므로 한 게송·한 구절에도 각각 까닭이 있으며, 한 말씀 속에도 또한 여러 가지 까닭이 있다. 이 경의 범본梵本(Sanskrit)에는 2만 5천의 게송이 있으므로, 이것은 곧 2만 5천의 까닭이 있는 것이고, 그 한 게송마다 네 구절이 있으므로 곧 10만의 구절에 그만큼의 까닭이 있는 것이며, 또 하나하나의 구절마다 각각 여러 까닭이 있는 것이다. 이것을 근거로 하여 말하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까닭이 있다. 개별적인 까닭은 이와 같으므로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총체적인 까닭으로 이것을 논술하면, 여래는 마땅히 커다란 까닭이 있으므로 이 경을 말씀하셨다. 말하자면 모든 부처님은 세상에 출현한 큰 뜻을 나타내려고 하셨기 때문이다.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모든 부처님은 오직 한 가지 커다란 일을 하겠다는 까닭을 가지고 이 세상에 출현하였다. ……34)

또 이 『대반열반경』 「보살품」 제16에서 말씀하신다.

어떤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처님을 공경하며 공양하면 틀림없이 곧 『대반열반경』을 듣게 될 것이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큰 공덕을 쌓은 사람이라야 이와 같이 큰 것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크다고 하는가? 모든 부처님의 아주 깊이 비장한 여래의 성품을 말씀하신 것이므로, 이런 뜻으로 큰일이라 한다.35)

이제 이 경을 말씀하실 때는, 부처님이 바로 일생의 교화를 마치는 마지막 날이었으며, 마침내 모든 부처님의 큰 뜻을 나타내 보이려는 참이었다. 말하자면 부처님이 성도한 다음부터 중생의 근기根機36)를 따라 말씀하신 모든 언교言敎를 총괄하여, 모두 한맛이면서 평등한 도라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널리 중생들로 하여금 둘이 아닌 성품으로 돌아가게 하려는 것이다.

001_0525_a_01L無說或有說者有大因緣佛說是經
001_0525_a_02L所以然者如愚癡人都無因緣有無 [9]
001_0525_a_03L智者不爾有深所以乃有所作
001_0525_a_04L智度論云譬如須彌山王不以無因緣
001_0525_a_05L及小因緣而自動作諸佛亦爾不無因
001_0525_a_06L而有所說依是文意有因有說若依
001_0525_a_07L是意說此經因有總有別別而論之
001_0525_a_08L緣無量所以然者大人發言必不徒說
001_0525_a_09L一偈一句各有因緣一言之內亦有衆
001_0525_a_10L此經梵本有二萬五千偈則有二萬
001_0525_a_11L五千因緣隨其一偈皆有四句則十萬
001_0525_a_12L有爾許因緣又一一句各有諸緣
001_0525_a_13L是言之有無量緣別緣如是不可具陳
001_0525_a_14L總因緣者如來宜以大因緣而說是經
001_0525_a_15L所謂欲顯諸佛出世之大意故如法花
001_0525_a_16L經言諸佛如來唯以一 [10] 事因緣故出現
001_0525_a_17L於世乃至廣說又此經菩薩品云若有
001_0525_a_18L人能供養恭敬無量諸佛方乃得聞大
001_0525_a_19L涅槃經所以者何大德之人乃能得聞
001_0525_a_20L如是大事何等爲大所謂諸佛甚深祕
001_0525_a_21L藏如來之性以是義故名爲大事解云
001_0525_a_22L今說是經之時正臨一化之終日究意 [11]
001_0525_a_23L示諸佛大意所謂總括成道以來隨機
001_0525_a_24L所說一切言敎悉爲示一味之道普今 [12]

001_0525_b_01L이것은 시방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모두 이 뜻과 같으므로 둘이 아니며 차별도 없는 것이다. 이것을 모든 부처님이 세상에 나온 뜻이라고 하며 여래가 매우 깊이 간직한 비장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와 같은 하나의 커다란 까닭이 있음을 근거로 하여 여래는 이 『대반열반경』을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이 총체문에서 말하는 하나의 큰 까닭은 곧 개별문에서 말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까닭들을 포섭한다. 그것은 개별문의 여러 까닭이 총체문의 하나의 뜻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3. 회통
저 먼저 스승은 이 경을 말씀하실 까닭이 없었으므로 말씀하신 것이 없다고 하였으며, 이 뒤의 스승은 이 경을 말씀하실 까닭이 있었으므로 말씀하신 것이 있다고 하였으니, 이와 같은 두 학설은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르다고 하겠는가?
() 어떤 스승은 말하기를 두 학설이 모두 옳다고 한다. 그것은 모두 경전을 근거로 한 것이므로 서로 방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상대방의 주장이 그렇지 않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 경을 말씀하실 까닭이 있었는가 없었는가라고 말하지만, 그렇다고 자기의 주장이 결코 그런 것도 아니므로, 두 학설이 서로 틀리는 것이 아니다.
이 경을 말씀하실 까닭이 마땅히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제2장 『대반열반경』의 근본종지
둘째는 『대반열반경』의 종지를 구명究明하는 것이다.

1. 총체적 구명究明
이 경의 종지에 대하여는 말하는 사람마다 그 주장이 같지 않다.

1) 서른여섯 가지의 뜻을 종지로 삼음
어떤 스승은, 이 경의 처음부터 끝까지 전표詮表된 여러 가지 뜻을 가지고 이 경의 종지로 삼는다고 말씀하신다. 질문에 대답하여 말한 것이 곧 6×6=3637)의 뜻이 있으니, 이른바 첫 번째의 장수長壽의 인과로부터 최후의 모든 구성 요소(陰)38)에 관한 법문에 이르기까지이다.

2) 네 가지의 큰 뜻을 종지로 삼음
어떤 스승은, 네 가지의 큰 뜻을 이 경의 종지로 삼는다고 말씀하신다. 네 가지란 무엇들인가? 첫째, 대열반이라고 하는 원만하고 지극한 묘과妙果는 (법신法身·반야般若·해탈解脫의) 삼사三事와 (상常·낙樂·아我·정淨의) 네 가지 덕을 두루 갖추고 있는 것이다. 둘째, 모든 중생은 모두 부처님의 마음자리(佛性)39)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번뇌에 뒤덮여서 볼 수 없는 것이다. 셋째, 삼보와 부처님의 마음자리는 동체이므로 둘이 아니다. 넷째, 불법을 비방하는 일천제一闡提나 성품에 집착하는 이승二乘40)까지도 모두 장래에 부처님이 된다. 이와 같은 네 가지 뜻을 가지고 그 종지로 삼는다.

3) 출세간의 인과를 종지로 삼음
어떤 스승은 ‘출세간出世間41)의 인과’를 가지고 그 종지로 삼는다고 말씀하신다. 과보는 곧 보리菩提와 열반을 말하며, 원인은 곧 부처님의 마음자리와 성스러운 행위를 말씀하신다. 이 경의 「순타품」 제2에서는 보리菩提라는 과보를 전개하며, 「애탄품」 제3에서는 열반이라는 과보를 전개하고, 「여래성품」 제12에서는 부처님의 마음자리라는 원인을 나타내며, 「성행품」 제19에서는 행덕行德이라는 원인을 말씀하고, 그 나머지의 모든 품에서도 거듭하여 원인과 과보를 드러내 보인다. 그러므로 이 경은 ‘무상無上의 인과’를 종지로 삼는다.


001_0525_b_01L歸趣無二之性十方 [13] 世一切諸佛悉同
001_0525_b_02L是意無二無別是謂諸佛出世大意
001_0525_b_03L名如來甚深祕藏由有如是一大因緣
001_0525_b_04L是故如來說是大經如是總門一大因
001_0525_b_05L卽攝別門無量因緣以其衆緣不出
001_0525_b_06L一意彼初師義無因無說此後師意
001_0525_b_07L有因有說如是二說何得何失 [14] 有說
001_0525_b_08L二說悉得皆依經典不相妨故
001_0525_b_09L非不然故說有無無 [15] 而非定然故不相違
001_0525_b_10L說經因緣應如是知

001_0525_b_11L第二辨敎宗者
[總體究明]
此經宗旨說者不同
001_0525_b_12L師說言經文始終所詮衆義以爲經宗
001_0525_b_13L對問而言卽有六六三十六義所謂第
001_0525_b_14L一長壽因果乃至最後諸陰法門或有
001_0525_b_15L說者四種大義爲此經宗何等爲四
001_0525_b_16L一者大涅槃圓極妙果具足三事及與四
001_0525_b_17L二者一切衆生悉有佛性煩惱覆故
001_0525_b_18L不能見三者三寶佛性同體無二四者
001_0525_b_19L闡提謗法執性二乘悉當作佛如是四
001_0525_b_20L以爲其宗或有說者出世因果以其
001_0525_b_21L [16] 果卽菩提涅槃因卽佛性聖行
001_0525_b_22L如能 [17] 陀章開菩提果▼(冖/罒/衣)歎章中開涅槃
001_0525_b_23L如來性品顯佛性因聖行品中說行
001_0525_b_24L德因其餘諸品重顯因果故知無上因

001_0525_c_01L
4) 미래의 상덕常德과 현재의 상덕을 종지로 삼음
어떤 스승은, 이 경은 미래의 상덕常德과 현재의 상덕의 두 과보를 종지로 삼는다고 말씀하신다. 이른바 모든 중생은 모두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가지고 있다고 한 것은 미래의 상덕을 나타낸 것이며, 여래가 깨달은 대반열반大般涅槃은 현재의 상덕을 밝혀 말한 것이다. 성행聖行 등의 원인은 곧 미래의 상덕과 현재의 상덕의 과보를 도와서 드러내지만, 순정한 종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의 뜻에 근거하여 보면, 중생으로 하여금 각각 미래의 상덕의 과보를 깨닫게 하고 싶지만, 다만 미래의 상덕의 과보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아서, 다분히 중생이 믿음을 얻기 어려울까 하여, 이 때문에 자신이 깨달은 대반열반의 현재의 상덕을 말해서 중생으로 하여금 믿음을 이루어 보려고 한 것이다. 이런 뜻을 가지기 때문에 (미래의 상덕과 현재의 상덕의) 두 과보를 종지로 삼는다. 다만 여기서는 현재의 상덕인 대반열반을 쫓아 이 경의 제목을 붙였기 때문에 ‘열반’이라고 말씀하셨다.

5) 원만하고 지극한 일과를 종지로 삼음
어떤 스승은 원만하고 지극한 일과一果를 이 경의 종지로 삼는다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이 원만하고 지극한 일과는) 곧 모든 부처님의 대반열반大般涅槃이다. 그러므로 이 종지를 따라서 이 경의 제목을 붙였다. 『보살영락본업경菩薩瓔珞本業經』은 여섯 가지의 영락42)을 종지로 삼고, 『대반야경』은 세 가지 반야(三種般若)43)를 종지로 삼는다. 그러므로 마땅히 이 『대반열반경』은 ‘하나의 대열반’을 종지로 삼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6) 모든 부처님이 비장한 둘도 없는 실성을 종지로 삼음
어떤 스승은, 모든 부처님이 비장秘藏한 둘도 없는 참된 성품을 이 경의 종지로 삼는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실성實性은 상相을 여의고 성性을 여의었으므로 모든 부문에 있어서 장애가 없다. 그것은 상相을 여의었으므로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또 인도 아니고 과도 아니며, 또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성性을 여의었으므로 더럽기도 하고 깨끗하기도 하며, 또 인이기도 하고 과이기도 하며, 또 동일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며,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또 더럽기도 하고 깨끗하기도 하기 때문에 중생이라고도 하며, 생사라고도 하고, 여래라고도 하며, 법신이라고도 한다. 그것은 인도 되고 과도 되기 때문에 부처님의 마음자리라고도 하고, 여래장이라고도 하고, 보리菩提라고도 하며, 대열반大涅槃이라고도 한다. 또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기 때문에 진제眞諦·속제俗諦라고도 한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중도라고도 한다.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아주 잘 모든 부문에 해당하며, 다르지 않기 때문에 모든 부문이 한맛이다. 이와 같은 둘도 없는 비장을 이 경의 종지로 삼는다. 다만 그 제목 속에 전적으로 모든 이름을 다 둘 수 없으므로, (부처님이 반열반에 들려 하실) 때의 일을 따라서 ‘열반’이라는 이름을 세운 것이다.

7) 회통
여섯 스승의 학설 가운데에서 어느 것이 진실인가?
어떤 스승은, 모든 학설이 두루 진실하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뜻은 모나지 않으므로 해당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001_0525_c_01L果爲宗或有說者當常現常二果爲宗
001_0525_c_02L所謂一切衆生悉有佛性是顯當常
001_0525_c_03L來所證大般涅槃是明現常聖行等因
001_0525_c_04L卽助顯於果非爲正宗若據佛意欲使
001_0525_c_05L衆生各證當果但當果未非恐難取信
001_0525_c_06L是故自說所證將成物信以是義故
001_0525_c_07L果爲宗但從現立題故名涅槃也或有
001_0525_c_08L說者圓極一果爲是經宗所謂諸佛大
001_0525_c_09L般涅槃所以從宗而立題名瓔珞經
001_0525_c_10L種瓔珞爲宗大般若經三種般若爲宗
001_0525_c_11L當知是涅槃經一大涅槃爲宗或有說
001_0525_c_12L諸佛祕藏無二實性以爲經宗如是
001_0525_c_13L實性離相離性故於諸門無障無礙
001_0525_c_14L相故不垢不淨非因非果不一不異非有
001_0525_c_15L非無以離性故亦染亦淨爲因爲果
001_0525_c_16L一亦異爲有爲無爲染淨故或名衆生
001_0525_c_17L或名生死亦名如來亦名法身爲因果
001_0525_c_18L或名佛性名如來藏或名菩提名大涅
001_0525_c_19L乃至爲有無故名爲二諦非有無故
001_0525_c_20L名爲中道由非一故能當諸門由非異
001_0525_c_21L諸門一味如是無二祕藏以爲是經
001_0525_c_22L宗旨但其題目之中不能並偏存諸名
001_0525_c_23L且隨時事立涅槃名六師所說何者
001_0525_c_24L爲實或有說者諸說悉實佛意無

001_0526_a_01L또 어떤 스승은, 여섯 번째 학설을 진실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여래의 모나지 않은 뜻을 아주 잘 얻었으므로, 앞에서 말한 모든 스승의 뜻을 모두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마땅히 이 두 스승의 학설(여섯 스승의 학설이 모두 옳다는 설과 여섯 번째 학설이 옳다는 설)이 또한 서로 위배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통틀어 말하면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가운데서도 분별하면 또 두 문에 의거하여 그 실상을 드러낸다. 두 문이란 ‘열반문涅槃門’과 ‘부처님의 마음자리문(佛性門)’을 말씀하신다.

2. 분석적 구명
1) 열반을 해석하는 부문
열반涅槃의 뜻은 여섯 가지 부문으로 나누어 논술한다.

첫째는 이름과 의의를 해석하고, 둘째는 체상體相을 해석하고, 셋째는 통체적인 것과 한정적인 것을 해석하고, 넷째는 두 가지 열반을 해석하고, 다섯째는 삼사三事를 해석하고, 여섯째는 네 가지 공덕을 해석하는 부문이다.

(1) 이름과 의의를 해석함

명의문名義門 안에는 첫째는 이름의 번역, 둘째는 뜻의 해석이 있다.

① 이름의 번역

먼저 이름을 번역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학설이 동일하지 않다. 어떤 스승은 열반이라는 이름을 번역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어떤 스승은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 열반이라는 이름을 번역해야 함

번역해야 한다고 말하는 학설에도 여러 가지 주장이 있지만, 지금 한 가지 뜻을 끌어내어 번역하면 ‘멸도滅度’라고 한다. 그러한 문서의 증거로는 『묘법연화경』의 산문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여래는 오늘 밤중에 무여열반無餘涅槃(ⓢ nirupadhiśeṣam nirvāṇa)에 들어갈 것이니라.44)

또 『묘법연화경』에 있는 아래의 게송에서 말씀하신다.

부처님이 오늘밤에 멸도하시는 것은

마치 섶이 다 타서 불이 꺼지는 것과 같으니라.45)
또 이 『대반열반경』 제1권의 「서품」 제1에서 말씀하신다.

그 부류의 음성에 따라서 중생들에게 널리 외치노라. 오늘 여래께서 곧 열반에 들려고 하신다.46)

여섯 권으로 된 『불설대반니원경佛說大般泥洹經(ⓢ Mahāparinirvāṇasūtra)』의 이곳에 해당하는 글에서 말씀하신다.

아주 고요하고 맑은 적멸寂滅, 대모니 존자(大牟尼尊)께서는, 모든 중생들에게 이제 멸도하려고 한다고 이르신다.47)

이들 경의 문장을 근거로 하여 마땅히, ‘멸도’는 바로 ‘열반’을 번역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 열반이라는 이름을 번역해서는 안 됨

또한 ‘열반’을 번역해서는 안 된다는 학설에도 여러 가지 주장이 있지만, 다만 한 가지 주장만을 끌어낸다. 그 스승은, 외국의 말은 포용적이어서 많은 뜻을 내포하지만, 이 나라의 말은 치우쳐서 그 말에 상당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 때문에 하나의 이름으로 번역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글의 증거로는 『대반열반경』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품」 제22에 있는 제7공덕문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선남자여, 열涅(ⓢ nir)은 불不이라는 말이며, 반槃(ⓢ vāṇa)은 멸滅이라는 말이니, 불멸不滅이라는 뜻으로 열반涅槃(ⓢ nirvāṇa)이라고 말씀하셨다. 반槃은 또 복覆이라는 말이니, 불복不覆이라는 뜻으로 열반이라고 말씀하셨다. 반槃은 또 거래去來라는 말이니, 불거불래不去不來라는 뜻으로 열반이라고 말씀하셨다. 반槃은 취取라는 말이니, 불취不取라는 뜻으로 열반이라고 말씀하셨다. 반槃은 부정不定이라는 말이니, 틀림없이 부정이 아니라는 뜻으로 열반이라고 말씀하셨다. 반槃은 신고新故(새로운 것과 옛것)라는 말이니,

001_0526_a_01L無不當故或有說者後說爲實
001_0526_a_02L得如來無方意故並容前說諸師義故
001_0526_a_03L當知是二說亦不相違也

001_0526_a_04L
總說雖然於中分別且依二門以示其
001_0526_a_05L謂涅槃門及佛性門
分析究明
涅槃之義六門
001_0526_a_06L分別一名義門二體相門三通局門
001_0526_a_07L四二滅門五三事門六四德門名義
001_0526_a_08L門內翻名釋義初翻名者諸說不同
001_0526_a_09L說無翻或說有翻有翻之說雖有諸宗
001_0526_a_10L今出一義翻爲滅度其文證者如法花
001_0526_a_11L經長行言如來於今日中夜入當 [18] 無餘
001_0526_a_12L涅槃下偈頌曰佛此夜滅度如薪盡
001_0526_a_13L火滅又此大經第一卷云隨其類音
001_0526_a_14L告衆生今日如來將欲涅槃六卷泥洹
001_0526_a_15L此處文言悟惔寂滅大牟尼尊告諸衆
001_0526_a_16L今當滅度以是等文當知滅度正翻
001_0526_a_17L涅槃也無翻之說亦有諸宗且出一義
001_0526_a_18L彼師說言外國語容含多名訓此土語
001_0526_a_19L不能相當是故不可一名而翻其文
001_0526_a_20L證者如德王品第七功德文言涅者不
001_0526_a_21L槃者識不識之義名爲涅槃槃言覆
001_0526_a_22L覆之義乃名涅槃槃言去來不去不來
001_0526_a_23L乃名涅槃槃者言取不取之義乃名涅
001_0526_a_24L槃者不定無不定義乃名涅槃

001_0526_b_01L신고가 없다는 뜻으로 열반이라고 말씀하셨다. 반槃은 장애라는 말이니, 장애가 아니라는 뜻으로 열반이라고 말씀하셨다.48)

또 『대반열반경』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품」 제22에 있는 아래의 글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선남자여, 반槃은 유有라는 말이니, 유가 아니라는 뜻으로 열반涅槃이라고 말씀하셨다. 반槃은 화합和合이라는 말이니, 화합和合이 아니라는 뜻으로 열반이라고 말씀하셨다. 반槃은 괴로움이라는 말이니, 괴로움이 없다는 뜻으로 열반이라고 말씀하셨다.49)

이곳에 대략 열 가지 뜻이 나타나 있다. 위아래의 모든 글들은 (그 뜻이) 아주 많다. 그러므로 용어를 하나로 하여 번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다. 문답

만일 나중 스승(無飜之說)이 세운 뜻을 따르면, 이 어려운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 어떤 어려움인가 하면, ‘경에서는 열반(ⓢ nirvāṇa)을 번역할 수 있다고 했는데, 어째서 번역할 수 없다는 것인가?’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 부류의 음성에 따라서 중생들에게 널리 외치노라. 오늘 여래께서 곧 열반에 들려고 한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벌·개미 등의 육도중생의 음성에 따라서 열반이라는 이름을 번역할 수 있는데, 어째서 홀로 이 나라의 말로는 번역할 수 없다고 말하느냐? 또 이것에 해당하는 이 경의 글에서는 이미 이것을 번역하여 ‘멸도’라고 하였다. 그런데 어찌하여 번역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 그 스승은, 열반이라는 이름은 여러 가지 뜻을 가지고 있는 가운데에서 다만 한 가지만을 골라서 번역하여 ‘멸도’라 한다고 풀어서 주장한다. 그러기에 멸도라는 뜻을 근거로 하여 두루 중생들에게 외친 것이지, 열반이라는 그 이름이 오직 멸도로만 번역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뜻을 가지므로 그 사람의 어려움은 잘 풀린다.

만일 먼저 스승(有飜之說)이 세운 뜻을 따르면 이 글은 어떻게 풀 것인가? 이는 『대반열반경』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품」 제22에서 보살이 질문(難)하는 것과 같다.

멸도가 열반이 아니라면 왜 여래는 스스로 석 달 뒤에 반열반般涅槃(ⓢ pari-nirvāṇa)에 든다고 하셨습니까?50)

『대반열반경』 「사자후보살품」 제23에서 말씀하신다.

모든 번뇌의 불이 꺼졌으므로 멸도滅度라 하고 각관覺觀51)을 여의었으므로 열반涅槃이라고 말씀하신다.52)

이 글을 가지고 증명하면 ‘멸도’는 ‘열반’이라는 이름을 바르게 번역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 그 스승은, 이러한 경문들은, 이것을 번역하는 사람들이 싼쓰끄리뜨(Sanskrit, 梵語)53)와 한문漢文을 모두 들고서 그 문장을 꾸민 것이라고 풀어서 주장한다. 외국어인 싼쓰끄리뜨를 그대로 남겨 두기로 한다면, 위의 경문에서 ‘열반이 열반이 아니라면’이라고 하거나, 또한 ‘모든 번뇌의 불이 꺼졌으므로 열반이라 하고 각관을 여의었으므로 열반이라고 부른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만일 이 나라의 말인 한문을 그대로 남겨 두기로 한다면, 위의 경문들에서 곧장 ‘멸도가 멸도가 아니라면’이라고 말했어야 한다.

001_0526_b_01L言新故無新故義乃名涅槃槃言障礙
001_0526_b_02L無障礙義乃名涅槃又下文言善男子
001_0526_b_03L槃者言有無有之義乃名涅槃槃者名
001_0526_b_04L爲和合無和合義乃名涅槃槃者言苦
001_0526_b_05L無苦之義乃名涅槃此處略出是十種
001_0526_b_06L上下諸文乃衆多故知不可一語而
001_0526_b_07L若立後師義是難云何通謂有難
001_0526_b_08L經說有翻耶 [19] 得無翻如言隨其類音
001_0526_b_09L普告衆生今日如來將欲涅槃豈隨蜂
001_0526_b_10L蟻六道之音得翻涅槃之名而獨不得
001_0526_b_11L此國語翻又當此處經文旣翻云之滅
001_0526_b_12L豈可得云不能翻耶 [20] 師通曰
001_0526_b_13L槃之名多訓之內且取一義翻爲滅度
001_0526_b_14L卽依此訓普告衆生非謂其名只翻滅
001_0526_b_15L以是義故彼難善通若立初師義
001_0526_b_16L是文云何通如德王品菩薩難言若使
001_0526_b_17L滅度非涅槃者何故如來自期三月
001_0526_b_18L般涅槃師子孔 [21] 品云諸結火滅故名滅
001_0526_b_19L離覺觀故故名涅槃以是文證明知
001_0526_b_20L滅度非正翻於涅槃名也 [22] 師通曰
001_0526_b_21L等經文是翻譯家 [23] 漢互擧綺飾其文
001_0526_b_22L若使令存外國語者 [24] 言若使涅槃非
001_0526_b_23L涅槃者又諸結火滅故名涅槃離覺觀
001_0526_b_24L故名涅槃如其令存此土語者旣云

001_0526_c_01L아래 나오는 경문의 예도 그러하다.54) 이러한 뜻으로 보면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라. 회통

두 스승이 말한 것 가운데에서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른가?
어떤 사람은 두 학설이 모두 옳다고 말한다. 그것은 모두 이 경문에 의하여 성립하였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열반이란 이름에는 두 뜻이 포함되어 있는데, 은밀어隱密語와 현료어顯了語이다. 현료어를 근거로 하여 보면 열반을 바로 멸도라고 번역하게 되는데, 먼저 스승(有飜之說)의 학설과 같다. 그러나 은밀어를 근거로 하여 보면 열반에는 여러 가지 뜻이 포함되어 있으니, 나중 스승(無飜之說)의 학설과 같다. 이러한 도리에서 보면 두 학설이 모두 옳다.
만일 이런 뜻을 근거로 하여 저 어려움을 풀면, 현료어의 뜻에 의하여 열반을 바로 번역할 때는 “그 부류의 음성에 따라서 중생들에게 널리 외치노라.”라고 말하고, 은밀어의 뜻에 의하면 (열반은) 여러 가지 뜻을 포함하기 때문에 뒤의 문장도 잘 풀릴 수 있다는 것이다. 위에서 “멸도는 열반이 아니다.”라고 말한 경우의 멸도는 현료어를 든 것이니 죽음을 멸도라고 한 것이고, “멸도는 열반이 아니다.”라고 말한 경우의 열반은 은밀어의 여러 가지 뜻 속에서 취한 것이니, 불멸이란 뜻이다.
(고귀덕왕보살의) 질문의 뜻(難意)을 곧장 말하면, 만일 죽음을 멸도라고 말한 멸도의 뜻이 불멸인 열반의 뜻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불멸이라는 이름으로 ‘여래는 스스로 석 달 뒤에 반열반般涅槃에 든다고 하였는가?’ 왜냐하면 부처님은 보리수 아래에서 성도하였을 때에 이미 불멸인 열반을 얻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번뇌가 있어야 그것을 조건으로 수행하여 생사를 소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에서 벌써 예증한) 『대반열반경』 「사자후보살품」 제23의, “모든 번뇌의 불이 꺼졌으므로 멸도라 한다.”55)라는 말은 현료어의 뜻인 죽음을 멸도라고 말한 것이며, 또한 『대반열반경』 「사자후보살품」 제23의, “각관을 여의었으므로 열반이라고 말씀하신다.”56)라는 말은 은밀어의 (여러 가지 뜻) 속에서 괴로움이 없다는 뜻을 취하여 그렇게 말한 것이다. 무여열반에 들어갔을 때에는 고苦의 과보가 모두 없어져서 각관인 분별심을 여의기 때문이다. 이러한 도리에서 보면 모든 사람의 학설이 잘 풀린다고 말할 수 있다.

② 의의를 해석함

가. 의의를 명료하게 드러냄

다음에 열반의 뜻을 해석한다는 것은 우선 현료어顯了語에 근거해서 한문으로 번역된 뜻을 해석하려는 것이다. 이 나라에서 이것을 해석하면 ‘대멸도大滅度’라고 한다.

가) 대大

‘대大’라고 하는 것은, 고인古人57)이 말하기를, “이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는 뜻이다.”라고 한다. 말하자면 거룩함을 해석할 때에 이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는 뜻이지, 시간의 전후를 가지고 따져서 앞서는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아래의 경에 나타난 글에 의하면 ‘대大’에는 여섯 가지 뜻이 있다.

(가) 넓기로는 이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음

첫째, 넓기로는 이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기 때문에 부르기를 ‘대大’라고 한다. 『대반열반경』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001_0526_c_01L若使滅度非滅度者下文例爾由是義
001_0526_c_02L不相違也二師所說何是何非
001_0526_c_03L或有說者二說俱是悉依經文而成立
001_0526_c_04L是義云何涅槃之名卽含二義
001_0526_c_05L謂密語及顯了語依顯了語正翻滅度
001_0526_c_06L如初師說若依密語卽含多訓如後師
001_0526_c_07L由是道理二說悉得若依是意通彼
001_0526_c_08L難者就顯了義有正翻故隨其類音
001_0526_c_09L告衆生就其密語含多義訓是故後文
001_0526_c_10L亦得善通說言若使滅度者擧顯了語
001_0526_c_11L死滅度也非涅槃者取密語內不識 [25]
001_0526_c_12L難意正言若使死滅之滅度義非不
001_0526_c_13L滅之涅槃義者何故以是不識 [26] 之名
001_0526_c_14L期三月當般涅槃以先樹下成道之時
001_0526_c_15L已得不識 [27] 之涅槃故要有煩惱乃識 [28]
001_0526_c_16L故師子吼 [29] 諸結火滅名滅度者
001_0526_c_17L是顯了語之滅度離覺 [30] 名涅槃者
001_0526_c_18L密語內無苦之義入無餘時苦報滅已
001_0526_c_19L方離覺覺 [31] 分別心故由是道理諸善說 [32]
001_0526_c_20L通也次釋義者且依顯了之語以釋有
001_0526_c_21L翻之義此土釋之言大滅度所言大者
001_0526_c_22L古人釋云莫先爲義謂釋勝之時莫是
001_0526_c_23L爲先非約時前後言無先也依下經文
001_0526_c_24L大有六義一者廣之莫先故名爲大

001_0527_a_01L
대大란 그 성품이 광박廣博한 것이다.58)

이는 허공이 다다르지 못하는 것이 없는 것과 같다. 열반도 이와 같아서 부르기를 ‘대大’라고 하였다.

(나) 길기로는 이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음
둘째, 길기로는 이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기 때문에 부르기를 ‘대大’라고 한다. 『대반열반경』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말하자면 대大란, 이것을 부르기를 ‘길다’라고 한다. 예를 들면 사람이 있는데 수명이 무량한 것을 대세부大歲夫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59)

(다) 깊기로는 이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음

셋째, 깊기로는 이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기 때문에 ‘대大’라고 부른다. 『대반열반경』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대大란 불가사의라고 부른다. 모든 세간의 성문이나 연각은 열반의 뜻을 측량할 수 없기 때문에 ‘대大’라고 부르는 것이다.60)

(라) 높기로는 이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음

넷째, 높기로는 이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기 때문에 ‘대大’라고 부른다. 『대반열반경』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예를 들면 큰 산은 모든 세상 사람들이 오를 수 없기 때문에 ‘대大’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열반도 이와 같으므로 범부·이승 및 모든 보살들이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대大’라고 부르는 것이다.61)

(마) 많기로는 이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음

다섯째, 많기로는 이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기 때문에 부르기를 ‘대大’라고 한다. 『대반열반경』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예를 들면, 큰 저장고에는 모든 진보珍寶가 많은 것과 같다. 열반도 이와 같아 모든 묘법妙法의 진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대大’라고 한다.62)

(바) 훌륭하기로는 이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음

여섯째, 훌륭하기로는 이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기 때문에 부르기를 ‘대大’라고 한다. 경전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주인을 대인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열반도 이와 같아 모든 법 가운데서 가장 훌륭하기 때문에 ‘대大’라고 한다.

‘대大’의 뜻은 이와 같다.

나) 멸滅

‘멸滅’이라고 말하는 것은 대략 네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사멸事滅, 둘째는 이멸理滅, 셋째는 덕멸德滅, 넷째는 택멸擇滅이다.

(가) 사멸事滅

사멸事滅이라고 하는 것은 무위無爲63)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이것은 응신應身64)이나 화신에 해당하는 것이며 정지正智마저 없어져 버렸기 때문에 ‘멸滅’이라고 한다. 『묘법연화경』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부처님이 오늘밤에 멸도滅度65)하는 것은, 마치 섶이 다 타서 불이 꺼지는 것과 같으니라.66)

이와 같이 사멸은 체體에 맞춰서 이름을 붙인 것이다.

(나) 이멸理滅

이멸理滅이라고 하는 것은 적막寂漠을 뜻한다. 말하자면 본디부터 움직임도 없으며 일어남도 없기 때문에 부르기를 ‘멸滅’이라고 한다. 『해심밀경解深密經』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모든 사물은 나지도 않고 소멸하는 것도 아니며, 본디부터 적정한 자성自性67)이 열반이다.68)

이와 같이 이멸은 온전함에 기대어 이름을 붙인 것이다.

(다) 덕멸德滅

덕멸德滅이라고 하는 것은 번뇌를 영원히 여읜 것을 뜻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모든 공덕은 상相을 여의고 성性을 여의어, 자성을 지키지 않고 서로 한맛(一味)이 되기 때문에 ‘멸滅’이라고 한다. 『대반열반경』에 있는 아래의 글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001_0527_a_01L經言大者其性廣博猶如虛空無所不
001_0527_a_02L涅槃如是故名爲大二者長之莫先
001_0527_a_03L故名爲大如經言所言大者名之爲長
001_0527_a_04L譬如有人壽命無量名大歲夫三者
001_0527_a_05L之莫先故名爲大如經言大者名爲不
001_0527_a_06L可思議一切世間聲聞緣覺不能測量
001_0527_a_07L涅槃之義故名爲大四者高之莫先 [33]
001_0527_a_08L爲大如經言譬如大山一切世人不能
001_0527_a_09L得上故名爲大涅槃如是凡夫二乘及
001_0527_a_10L諸菩薩不能窮到故名爲大五者多之
001_0527_a_11L莫先故名爲大如經言譬如大藏多諸
001_0527_a_12L珍實涅槃如是多有種種妙法珍實
001_0527_a_13L [34] 六者勝之莫先故名爲大如經言
001_0527_a_14L如世間中勝上主人名爲大人涅槃如
001_0527_a_15L諸法中勝故名爲大大義如是所言
001_0527_a_16L滅者略有四義事滅理滅德滅擇滅
001_0527_a_17L事滅者還無爲義義當應化身正智
001_0527_a_18L亦亡故名爲滅如經言佛此夜滅度
001_0527_a_19L如薪盡火滅如是事滅當體立名言理
001_0527_a_20L滅者寂漠爲義謂從本來無動無起
001_0527_a_21L名爲滅如經言一切諸法不生不滅
001_0527_a_22L來寂靜自性涅槃如是理滅寄全 [35]
001_0527_a_23L德滅者永離爲義謂諸功德離相離性
001_0527_a_24L不守自性互相一味故名爲滅如下文

001_0527_b_01L
안락을 받는 것이 곧 해탈解脫69)이고, 참으로 해탈한 이가 여래이고, 여래가 곧 열반이다.70)

이와 같이 덕멸은 뜻을 따라 이름을 붙인 것이다.

(라) 택멸擇滅

택멸擇滅(ⓢ pratisaṃkhyā-nirodha)이라고 하는 것은 번뇌를 끊어 버린다는 것을 뜻한다. 부처님의 지혜는 모든 번뇌를 잘 끊기 때문에 ‘멸滅’이라고 한다. 이런 뜻으로 보면 열반은 멸滅을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이름을 받는 데는 대략 세 가지 뜻이 있다.

㉮ 곳에 따라서 이름을 얻음

첫째, 곳에 따라서 그 이름을 얻었다. 말하자면 부처님은 구경에는 머무름이 없는 근원에 도달하여, 이곳에서 모든 번뇌를 끊었으며, 또 번뇌가 생겨나는 곳을 끊었기 때문에 부르기를 ‘멸’이라고 한다. 『대반열반경』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열반도 또한 그러하다. 머무르는 곳이 있는 것이 아니며, 이런 모든 부처님은 번뇌가 생겨나는 곳을 끊었기 때문에 열반이라고 한다.71)

㉯ 원인에 따라서 이름을 얻음

둘째, 원인에 따라서 그 이름을 얻었다. 말하자면 지혜로써 번뇌를 소멸하면 이치(理)는 잘 드러난다. 이치가 드러난 것이 과果이며, 지혜로써 번뇌를 소멸하는 것이 원인이 된다. 원인을 따라서 이름을 세워 ‘멸滅’이라고 한다. 이 『대반열반경』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번뇌를 섶으로 삼고 지혜를 불로 삼아, 이런 인연으로 열반이라는 밥을 지어 내 제자들로 하여금 모두 다 맛있게 먹게 한다.72)

㉰ 결과에 따라서 이름을 얻음

셋째, 결과에 따라서 그 이름을 얻었다. 말하자면 지혜는 이치에 따라서 번뇌를 잘 멸滅하는데, 이理를 멸滅의 원인으로 삼고 지智를 멸滅의 결과로 삼는다. 결과를 따라서 이름을 세워 ‘멸滅’이라고 한다. 『불성론佛性論』에서 논술하는 것과 같다.

( 왜 부처님은 무생멸진無生滅盡을 열반이라고 하였는가?)
() 도道는 열반에 의해서 번뇌가 미래에 생겨나지 않게 하며 현재에는 소멸하게 한다. 원인 가운데에서 결과를 말하기 때문에 열반을 부르기를 무생멸진이라고 한다.73)

멸滅의 뜻은 이와 같다.

다) 도度

‘도度’란 간략하게 두 가지 뜻이 있으니, 구경究竟의 뜻과 도안到岸의 뜻이다.
도안到岸의 뜻은 번뇌를 끊어 없애는 뜻을 나타낸다. 번뇌가 없어졌다는 것은 상주가 아닌 뜻을 밝힌 것이니, 번뇌를 벗어나 없어지게 하면 중생이 제도를 얻는 것이다. 이와 같이 번뇌를 끊어 없애므로 상주도 아니며 단멸도 아니기 때문에 멸도라고 한다.
구경究竟의 뜻은 번뇌를 소멸하여 없앤 덕이 구경이기 때문에 멸도라고 부른다.
도度의 뜻은 이와 같다.

나. 문답

번뇌를 끊는 것이 열반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대반열반경』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품」 제22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가?

부처님의 마음자리는 보지 못하면서 번뇌를 끊으면, 이것을 열반涅槃이라고는 하지만 대반열반大般涅槃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보기 때문에 상·낙·아·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001_0527_b_01L受安樂者卽解脫眞解脫者卽是如
001_0527_b_02L如來卽涅槃乃至廣說如是德滅
001_0527_b_03L義受名言擇滅者斷除爲義佛智能
001_0527_b_04L斷一切煩惱故名爲滅若依是義涅槃
001_0527_b_05L非滅而受名者略有三義一者從處得
001_0527_b_06L謂佛窮到無住之原是處能斷一切
001_0527_b_07L煩惱斷煩惱處故名爲滅如經言
001_0527_b_08L槃亦爾無有住處宜是諸佛斷煩惱處
001_0527_b_09L故名涅槃二者從因受名謂智滅或能
001_0527_b_10L顯於理理顯是果智滅爲因從因立
001_0527_b_11L名理爲滅如此經言煩惱爲薪智惠
001_0527_b_12L爲火以是因緣成涅槃食令我諸弟子
001_0527_b_13L皆悉甘嗜三者從果受名謂智依理
001_0527_b_14L滅煩惱理爲滅因智是滅果從果立
001_0527_b_15L名理爲滅如佛性論云道依涅槃
001_0527_b_16L使煩惱未來不生現在不滅因中說果
001_0527_b_17L名涅槃爲無生滅 [36] 滅義如是所言度
001_0527_b_18L略有二義謂究竟義及到岸義到岸
001_0527_b_19L義者顯顯斷義煩惱滅者明非常義
001_0527_b_20L惱離滅衆生得度非常非斷故名滅度
001_0527_b_21L究竟義者滅德究竟故名滅度度義如
001_0527_b_22L若斷煩惱非涅槃者何故德王菩
001_0527_b_23L薩品云不見佛性而斷煩惱是名涅槃
001_0527_b_24L [37] 涅槃以見佛性故得名爲常樂我淨

001_0527_c_01L그러므로 번뇌를 끊은 것도 또한 대반열반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74)

그런데 거꾸로, 번뇌를 끊어 없앤 것을 열반이라고 한다면, 무엇 때문에 저것과 같은 품인 『대반열반경』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품」 제22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가?

번뇌를 끊어 없앤 것을 열반이라고 부르지 않고, 번뇌가 생겨나지 않아야 열반이라고 부른다. 선남자야, 모든 부처님은 번뇌가 일어나지 않으므로 이를 열반이라고 부른다.75)

앞에서 인용한 글들은 ‘열반’과 ‘대열반’의 차이를 가르기 위해서 두 가지 끊음을 들어 끊는 곳을 드러낸 것이며, 끊는 주체와 관련하여 열반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뒤에 인용한 글은 부처님과 보살의 차이를 가르기 위해서이다. 보살이 끊는 곳에는 아직 번뇌가 남아 있기 때문에 열반이란 이름을 얻을 수 없고, 모든 부처님이 끊은 곳에는 필경 번뇌가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열반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이것은 부처님이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의 난해한 질의에 대하여 대답한 것이다. 그는 앞에서 다음과 같이 난해한 질의를 하였다.

번뇌가 없어진 곳을 열반이라고 한다면, 모든 보살은 무량한 겁 이전에 벌써 번뇌를 끊었는데, 왜 열반이라 부르지 않습니까? 부처님과 보살이 다 같이 번뇌를 끊었는데, 무슨 까닭으로 독단적으로 모든 부처님은 열반이 있고, 보살은 없다고 하십니까?76)

이러한 난해한 질의에 대답하기 위하여, 부처님은 번뇌를 끊어 없애는 것과 번뇌가 생겨나지 않는 것을 분별한 것이다.
그러나 통틀어서 이것을 말하면, 보살도 번뇌가 생겨나는 것이 아니며, 모든 부처님도 번뇌를 끊어 없앤 것이다. 그렇지만 부문별로 나누어서 말하면, 끊어서 제거한다는 말은 벌써 생겨난 (번뇌를) 제거한다는 것이며, 생겨나지 않게 한다는 말은 아직 생겨나지 않은 번뇌를 생겨나지 않게 막는다는 것이다. 벌써 생겨난 번뇌를 제거한다는 것은 앞의 것을 바라보고 말하는 뜻이므로, 그 뜻에 부족함이 있기 때문에 보살이 하는 일이라고 말하며, 아직 생겨나지 않은 번뇌를 생겨나지 않게 막는다는 것은 뒤의 것을 바라고 하는 뜻이므로, 그 뜻에 구경함이 있기 때문에 부처님이 하는 일이라고 한다. 이러한 도리에 따라서 자세하게 분별하여 말하면, 번뇌를 끊어 없애는 일을 열반이라 말하지 않으며, 번뇌가 생겨나지 않는 것을 열반이라고 한다. 이런 뜻을 가지므로 위의 두 글은 서로 틀린 것이 아니다.
열반의 이름과 뜻에 관한 해석을 마친다.

(2) 체상을 해석함

체상을 해석하는 부문에는 첫째는 체성體性의 증명, 둘째는 허실虛實의 간별이 있다.

① 체성의 증명

체성을 증명하는 모든 학설이 동일하지 않다.

가. 때가 끼지 않은 진여가 열반의 체성임

어떤 학자는, 때가 끼지 않은 진여眞如,77) 이것이 열반의 체성이라고 주장한다. 비로소 공덕을 일으키는 것, 이것은 열반이 아니며,

001_0527_c_01L故斷煩惱亦得稱爲大般涅槃若斷煩
001_0527_c_02L稱涅槃者何故彼品下文說言斷煩
001_0527_c_03L惱者不名涅槃 [38] 煩惱乃名涅槃
001_0527_c_04L男子諸佛如來煩惱不起是名涅槃
001_0527_c_05L前所引文爲簡涅槃大涅槃異故
001_0527_c_06L二斷以顯斷處非約能斷名爲涅槃
001_0527_c_07L所引文爲簡諸佛與菩薩異菩薩斷處
001_0527_c_08L猶有餘惑故不得受涅槃之名諸佛斷
001_0527_c_09L畢竟不生所以得立涅槃之稱是答
001_0527_c_10L德王菩薩難意彼前難言若言煩惱滅
001_0527_c_11L之處是涅槃者諸菩薩等於無量劫
001_0527_c_12L斷煩惱何故不得稱爲涅槃俱是斷處
001_0527_c_13L何緣獨稱諸佛有之菩薩無耶爲答是
001_0527_c_14L故依斷與不生簡別通而言之菩薩
001_0527_c_15L亦不生諸佛亦是斷別門而言斷除
001_0527_c_16L之稱遣於已生 [39] 遮於未起遣已生
001_0527_c_17L望前之義義在不足故說菩薩遮未
001_0527_c_18L起者望後之義義在究竟故說諸佛
001_0527_c_19L是道理精別而言斷煩惱者不名涅槃
001_0527_c_20L不生煩惱乃名涅槃以是義故不相違
001_0527_c_21L名義門竟

001_0527_c_22L
第二出體於中有二先出體性後簡
001_0527_c_23L虛實出體性者諸說不同或有說者
001_0527_c_24L無垢眞如是涅槃體始起功德非是涅

001_0528_a_01L곧 지혜를 증득하는 것, 이것이 보리菩提이기 때문이다. 『대반열반경』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열반이라고 하는 뜻은 곧 모든 부처님의 법성이다.78)

또 『대반열반경』에 있는 아래의 글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열반의 체성은 본디부터 스스로 있었던 것이므로 지금에 와서 있는 것이 아니다.79)

그리고 『마하반야바라밀경摩訶般若波羅蜜經』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모든 법의 성품은 공空하다는 것이 곧 열반이다.80)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번뇌와 생사는 마침내는 그 체가 없으므로, 구하여도 얻을 수 없다. 본디 생겨나지도 않았으므로 실로 다시 소멸할 것도 없다. 자성이 적정한 것이 곧 열반이다.81)

이와 같이 예증할 수 있는 경문들은 이루 다 들 수가 없다. 그러므로 진여에 대한 바른 앎이 곧 열반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번뇌를 끊어 없애고 뜻을 나타내는 바의 부문은 곧 진여를 논설하여 수멸數滅이 된다고 말씀하신다. 수멸은 곧 때가 끼지 않은 진여이다.

나. 과지果地의 모든 덕이 열반의 체성임

어떤 학자는, 과지果地의 온갖 덕(萬德)은 본각·시각을 묻지 않고 전부 묶어서 하나의 대열반의 체로 삼는다고 주장한다. 이 『대반열반경』 가운데에서 통틀어 삼사三事가 열반이 된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82) 그리고 또 이 『대반열반경』 아래의 글에서는 다시 ‘여덟 가지의 자재’83)를 말씀하시고 나서, 전체적인 결론을 지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이와 같이 대아大我를 부르기를 대열반이라 한다.84)

『묘법연화경우바제사妙法蓮華經優波提舍』에서 말씀하였다.

오직 부처님만이 대보리大菩提를 증득하시어, 구경에는 일체의 지혜를 만족하니, 이를 대열반이라 부른다.85)

또 진제가 번역한 『섭대승론석』에서 말씀하셨다.

삼세 불신(三身)은 무상無上의 보리菩提를 나타낸 것이다.

여기서 벌써 세 불신(三身)은 모두 이것이 보리菩提(깨달음)라 하였으니, 마땅히 세 불신이 모두 열반의 체성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 회통

이와 같이 두 학설은 모두 도리가 있다. 그러한 까닭은 열반과 보리菩提는 공통되는 점과 구별되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 구별되는 부문에서 말하면, 보리는 과지果地로서, 능증能證의 덕에 있으며, (사성제 가운데에서) 도성제에 포섭되는 것이고, 열반이란 과보, 이것은 소증所證의 법이며, (사성제 가운데에서) 멸성제에 포섭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공통되는 부문에서 말하면, 과지인 도성제에 포섭되는 보리도 역시 열반이며 소증의 진여인 열반도 역시 보리인 것이다. 예를 들면 생사에도 공통되는 점과 구별되는 점이 있는 것과 같다. 구별되는 점에서 말하면 내근內根이 시작될 때를 출생이라 하고 내근이 끝나는 때를 사망이라고 한다. 어느 경經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태어남이란 모든 근이 새로 생겨나는 것이며 죽음이란 것은 모든 근이 소멸하여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통틀어 논술하면, 모든 더럽게 물든 것들은 모두 생겨나고 죽는다. 『대반열반경』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공空86)이란 모든 삶과 죽음이며 불공이란 열반을 가리킨다.

001_0528_a_01L卽能證智是菩提故如經云涅槃
001_0528_a_02L義者卽是諸佛之法性也又下文言
001_0528_a_03L槃之體本自有之非適今也大品經云
001_0528_a_04L諸法性空卽是涅槃1) [31] [40] 經云煩惱
001_0528_a_05L生死畢竟無體求不可得本來不生
001_0528_a_06L實更不滅自性寂靜卽是涅槃如是等
001_0528_a_07L不可具陳故知眞如正知其是涅槃
001_0528_a_08L斷滅煩惱所顯義門卽說眞如名爲數滅
001_0528_a_09L數滅卽是無垢眞如或有說者果地
001_0528_a_10L萬德不問本始總束爲一大涅槃體
001_0528_a_11L此經中總說三事卽爲涅槃又下文說
001_0528_a_12L八自在已總結而言如是大我名大涅
001_0528_a_13L法花論云唯佛如來證大菩提
001_0528_a_14L竟滿足一切智惠名大涅槃攝大乘論
001_0528_a_15L三身所顯無上菩提旣說三身
001_0528_a_16L是菩提當知皆爲大涅槃體如是二說
001_0528_a_17L皆有道理所以然者涅槃菩提有通別
001_0528_a_18L別門而說菩提是果在能證德道諦所
001_0528_a_19L涅槃果之 [41] 是所證法滅諦所攝通門
001_0528_a_20L而言果地道諦亦是涅槃所證眞如
001_0528_a_21L是菩提例如生死有通有別別而言之
001_0528_a_22L內根始終名爲生死如經言生者新諸
001_0528_a_23L根起死者諸根滅盡通而論之諸雜
001_0528_a_24L染法皆是生死如經言空者一切生死

001_0528_b_01L내지 무아인 것은 생겨나고 죽는다.87)

이러한 삶과 죽음에 대대待對하여 열반을 논설한 것이다. 그러므로 열반에도 또한 공통되는 점과 구별되는 점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시각始覺에 공덕이 있는 것이 또한 열반이라면, 이는 곧 열반에도 또한 생인生因88)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대반열반경』 「가섭보살품」 제24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가?

삼해탈문三解脫門89)과 삼십칠조도품三十七助道品90)은, 모든 번뇌에 대해서는 번뇌를 생겨나지 않게 하는 생인生因이 되지만, 또한 열반을 위해서는 요인了因91)도 된다. 선남자야, 번뇌를 여의면 곧 명료하게 열반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까닭에 열반에는 오로지 요인만 있으며 생인이 있는 것은 아니다.92)

위아래의 모든 글 가운데에서 모두 오직 요인了因만 있으며, 생인生因이 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시각에 공덕이 있다면, 비록 이것이 열반이라 하더라도 열반의 뜻은 적멸에 있으며, 적멸의 덕은 요득了得된 것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오직 요인만 있다고 말한 것이다. 이는 보리菩提가 생인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또한 요인에 의거해서 요득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곧 이러한 뜻에 준하여, 열반은 요인에 의거하여 나타나게 된 것이면서 또한 생인에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은 도리로 말미암아 서로 틀리는 것이 아니다.
열반의 체상은 이와 같다.

② 허망과 진실을 가림

다음으로 허망과 진실을 가린다.

삶과 죽음의 법은 허망하고, 허망하기 때문에 공하니, 이는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열반이라는 과지果地는 진여를 체성으로 삼는데, 이를 허망하다고 해야 하는가, 진실하다고 해야 하는가? 공空이라고 해야 하는가, 불공不空이라고 해야 하는가?

가. 진실하고 불공不空임

어떤 스승은 열반의 체성, 이것은 진실하므로 틀림없이 불공이라고 한다. 이 『대반열반경』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참으로 해탈한 이가 곧 여래이다. 여래는 곧 결정決定적인 것이다.93)

또 『대반열반경』에 있는 아래의 글에서 말씀하신다.

공이란 모든 삶과 죽음이며, 불공이란 대열반을 가리킨다. ……94)

또 『승만경勝鬘經』에서 말씀하신다.

(사제四諦 가운데에서 고·집·도의) 삼제三諦는 유위이고 허망하며, 고멸성제苦滅聖諦의 한 가지는 진실이다. ……95)

이와 같이 예증할 수 있는 경문들은 이루 다 들 수가 없다. 그러므로 열반, 이는 진실하여 불공不空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다른 곳에서는 열반이 모두 다 공이라고 말하는 것은 허망한 마음으로 취하는 바의 열반을 버리고, 참된 지혜로 증득하는 바의 열반을 말하려는 것이다.

001_0528_b_01L廣說乃至無我一切生死對此生死
001_0528_b_02L說涅槃故知涅槃亦有通別若始有
001_0528_b_03L功德亦是涅槃2) [32] 是卽涅槃亦有生因
001_0528_b_04L若爾何故迦葉品云三十七 [42] 解脫門三
001_0528_b_05L十七品能爲涅槃能爲涅槃 [43] [44] 生因作生因 [45] 亦爲
001_0528_b_06L涅槃而作了因善男子遠離煩惱卽得
001_0528_b_07L了了見於涅槃是故涅槃唯有了因
001_0528_b_08L有生因上下諸文之中皆說唯有了因
001_0528_b_09L未曾言亦有生因始有功德雖是涅
001_0528_b_10L涅槃之義存於寂滅寂滅之德合於
001_0528_b_11L所了是故說言唯有了因如說菩提
001_0528_b_12L因所生而亦有說了因所了卽是義准
001_0528_b_13L當知涅槃了因所顯而亦得言生因所起
001_0528_b_14L由是道理故不相違也體相如是次簡
001_0528_b_15L虛實生死之法是虛妄虛妄故空
001_0528_b_16L是事可爾涅槃之果眞如爲體爲虛爲
001_0528_b_17L爲空 [46] 不空或有說者涅槃之體性
001_0528_b_18L是眞決定不空如此經云眞解脫者
001_0528_b_19L卽是如來如來者卽是決定又下文言
001_0528_b_20L空者一切生死不空者謂大涅槃乃至
001_0528_b_21L廣說勝鬘經說三諦是有爲是虛妄
001_0528_b_22L苦滅諦是實乃至廣說如是等交不可
001_0528_b_23L具陳故知涅槃是實不空而餘處說
001_0528_b_24L悉空者是遣妄心所取涅槃說眞智所

001_0528_c_01L열반이 공이라면, 이는 곧 여래·불성도 모두 공이 된다. 그렇다면 열한 가지의 공96) 속에서 어느 공에 해당하는가? 벌써 어느 공에도 포섭되지 않는다면 열반은 불공이라고 알아야 한다.

나. 허망하고 공空임

어떤 스승은, 삶과 죽음 그리고 열반은 모두 다 허망한 것이므로, 공이며 얻을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보면 부처님의 법의 뜻은 한 법도 공이 아닌 것이 없다. 『대반열반경』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품」 제22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반야바라밀도 공이고, 내지 단바라밀檀波羅蜜(ⓢ dāna-pāramitā, 보시)도 또한 공이고, 여래도 또한 공이고, 대반열반(ⓢ mahāparinirvāṇa)도 또한 공이다. 그러므로 보살菩薩은 모든 법이 다 공이라고 본다.97)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에서 말씀하신다.

생사와 열반은 모두 허망하다. 어리석음과 지혜도 역시 이와 같아 둘 다 진실이 아니다.98)

이와 같이 예증할 수 있는 경문들은 이루 다 들 수가 없다. 그러므로 (모든 법이) 공이라야 평등이라고 부름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다른 곳에서 “생사는 허망하지만 열반은 불공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얕은 지식을 가지고 막 발심한 이를 보호하기 위해서이니, 이들이 “열반은 공이다.”라는 말을 듣고서 놀라고 두려워할까 하여 방편으로 말한 것이다. 『마하반야바라밀경』에 있는 「여화품如化品」 제87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법이 생겨나고 소멸하는 모습이 있으면, 이것은 모두 변화하느니라. 법이 생겨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으면, 이것은 변화하지 않느니라. 이른바 광상誑相이 아닌 열반, 이것은 변화하지 않느니라.
수보리가 여쭈었다. “부처님이 스스로 말씀하신 것처럼, 모든 법은 평등하여 성문이 지은 것이 아니며, 내지 모든 부처님이 지은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이 계시든 안 계시든 모든 법의 성품은 늘 공이며 성품이 공인 것이 곧 열반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제 열반이라는 한 법만은 환화幻化와 같지 않다고 말씀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고 그러하다. 모든 법은 평등한 것이며, 내지 성품이 공인 것이 곧 열반이니라. 그런데 새로 발심한 보살들은 ‘일체의 법이 모두 필경에는 공한 것이고 내지 열반까지도 또한 환화와 같다’라고 들으면, 마음이 곧 놀라고 두려워할 것이니라. 이렇게 새로 발심한 보살들을 염려하고 보호하려는 까닭에, 생겨나고 소멸하는 것은 모두 환화와 같으며, 생겨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 것은 환화와 같은 것이 아니라고 분별하느니라.”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새로 발심한 보살들을 가르쳐서, 모든 법의 성품이 공인 것을 알게 할 수 있습니까?”

001_0528_c_01L證涅槃若使涅槃亦是空者是卽如來
001_0528_c_02L佛性皆空十一空內入於何空旣非空
001_0528_c_03L當知不空或有說者生死涅槃皆是
001_0528_c_04L虛妄空無所得佛法之義無有一法
001_0528_c_05L不空者如德王品云般若波羅蜜亦空
001_0528_c_06L乃至檀波羅蜜亦空如來亦空大般
001_0528_c_07L涅槃亦空是故菩薩見一切法皆悉是
001_0528_c_08L花嚴經言生死及涅槃是二悉虛妄
001_0528_c_09L愚智亦如是二皆無眞實如是等文
001_0528_c_10L可具陳當知悉空乃名平等而餘處說
001_0528_c_11L生死虛妄涅槃不空等者爲護淺識
001_0528_c_12L發意者生驚怖故作方便說如大品經
001_0528_c_13L化品言若法有生滅相者皆是變化
001_0528_c_14L法無生無滅是非變化所謂無誑相涅
001_0528_c_15L是法非變化須菩提言如佛自說
001_0528_c_16L法平等非聲聞作乃至非諸佛作有佛
001_0528_c_17L無佛諸法性常空性空卽是涅槃云何
001_0528_c_18L言涅槃一法不如化佛言如是如是
001_0528_c_19L法平等乃至性空卽是涅槃若新發意
001_0528_c_20L菩薩聞一切皆畢竟空乃至涅槃亦皆如
001_0528_c_21L心卽驚怖爲是新發意菩薩故分別
001_0528_c_22L生滅者如化不生滅者不如化須菩提
001_0528_c_23L世尊云何令新發意菩薩知是性空
001_0528_c_24L「密」疑「察」{編}「是」疑剩{編}

001_0529_a_01L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법은 본디 있었다가 지금 없어지는 것인가?”99)

이러한 글을 증거로 하여 보면, 다른 곳에서 열반이 불공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두 방편의 말씀이므로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열반의 공과 ‘부처님의 마음자리’의 공은 열한 가지 공 가운데서 어디에 포섭되는가? 그것은 공공空空(ⓢ śūnyatā-śūnyatā)에 포섭된다. 그러므로 이 공은 오직 부처님만이 온전히 아신다고 한다. 그리고 열여덟 가지 공100) 가운데에서 필경공이기 때문에, 앞에서 인용한 『마하반야바라밀경』의 말씀과 같다.
만약 여러 경에서 설해진 “열반이 공이다.”라는 말씀이 ‘허망한 마음으로 집착하는 모습(妄心所取相)을 없애려는 것’이라면, 여러 경에서 설해진 “생사의 법이 공이다.”라는 말씀은 ‘편견으로 집착하는 생사(遍計所執生死)를 없애려는 것’이 된다. 이것(생사)이 그렇지 않다면 저것(열반)도 또한 그렇지 않다.
또한 열반을 실제로 있는 것(實有)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곧 실제로 있다는 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실제로 있다는 말을 벗어나는 것이 실제로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참으로 망어이다. 그러므로 그가 실제로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오직 자기의 마음으로 허망하게 집착하는 경계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 회통

이와 같이 두 스승이 말한 것 가운데에서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른가?
말에만 집착하면 두 학설이 모두 다 그르다. 서로 대립하고 다투면 부처님의 뜻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코 집착하지 않으면 두 학설이 모두 다 맞는 것이다. 법문이 걸림 없어 서로 방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 그러한가? 공덕과 환난患難이 상대相對하는 입장에서 보면 곧 생사는 공空이요, 열반은 불공不空이다. 허망한 마음으로 취한 것(所取)은 경계가 없기 때문에 공空이라고 말씀하셨고, 취하는(能取) 허망한 마음은 자재를 얻지 못하므로 무아無我라고 말씀하셨다. 진실한 지혜로 증득하게 된(所證) 도리는 마음과 어울리기 때문에 불공이라고 말씀하셨고, 증득하는 진실한 지혜는 걸림이 없이 자재하기 때문에 대아大我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은 입장에 근거하여 본다면, 앞의 스승이 정립한 주장이 옳다. 그가 인용한 글은 모두 요의설了義說이기 때문이다.
상대相待하여 자상自相이 없는 부문에서 보면 생사와 열반은 똑같이 자성이 없다. 불공으로써 공空을 상대하고, 아我로써 무아를 상대하고, 무대無待로써 유대有待를 상대하기 때문이다.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 논술하는 것과 같다.

또 다음에 더럽게 물든 현상세계와 맑고 깨끗한 부처님의 나라는 서로 기대어서 이루어지는 것이니, 그렇게 이루어진 것은 그 자신의 고유한 특질(自相)을 말할 수 없다.101)

이와 같은 입장에 근거하여 본다면 뒤의 스승이 정립한 주장이 옳다.

001_0529_a_01L佛告須菩提諸法先 [47] 有今無耶依是文
001_0529_a_02L當知餘處說不空者皆是方便語不盡
001_0529_a_03L道理也是涅槃空及佛性空十一空內
001_0529_a_04L何所攝者空空所攝故說是空唯佛所
001_0529_a_05L十八空中畢竟空故如前所引1) [33]
001_0529_a_06L經說若使諸經所說涅槃皆空是遣妄
001_0529_a_07L心所取相者是卽諸經所說生死法空
001_0529_a_08L是遣遍計所執生死若此不爾彼亦不
001_0529_a_09L又若涅槃是實有者卽不能離實有
001_0529_a_10L之言其能離實有言者卽謂實有宜是
001_0529_a_11L妄語是故當知彼說實有唯說自心妄
001_0529_a_12L2) [34] 境界耳如是二說何得何失
001_0529_a_13L故若如言取二說皆失互相異諍失佛
001_0529_a_14L若非定執二說俱得法門無礙不相
001_0529_a_15L妨故是義云何若就德患相對之門
001_0529_a_16L生死是空涅槃不空以妄心所取無境
001_0529_a_17L當知故說爲空能取妄心不得自在
001_0529_a_18L說無我眞智所證道理稱心故說不空
001_0529_a_19L能證眞智無礙自在故名大我依如是
001_0529_a_20L前師爲得彼所引文是了義說若就
001_0529_a_21L相待無自相門則生死涅槃等無自性
001_0529_a_22L以不空待空我待無我乃至無待待於有
001_0529_a_23L待故如起信論云復次一切染法淨法
001_0529_a_24L皆是相待無有自相可說依如是文

001_0529_b_01L그가 인용한 글은 모두 요의설이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열반은 상相도 떨쳐 버리고 성性도 떨쳐 버렸으며, 공도 아니며 불공도 아니고, 아我도 아니고 무아無我도 아니다. 그런데 왜 공이 아니라고 하는가 하면 무성無性을 떨쳐 버렸기 때문이며, 왜 또 불공이 아니라고 하는가 하면 유성有性을 떨쳐 버렸기 때문이다. 또는 유상有相을 떨쳐 버렸기 때문에 아我가 아니라고 말하며, 무상無相을 떨쳐 버렸기 때문에 무아도 아니라고 말하며, 무아가 아니기 때문에 대아大我라고 말할 수 있으며, 아我가 아니기 때문에 또한 무아라고 말씀하셨다. 또는 공空이 아니기 때문에 실유實有라고 말하며, 불공이 아니기 때문에 허망하다고 말할 수 있다. 여래가 몰래 깊숙이 간직한 뜻이 이와 같다. 그러니 어찌 비밀리에 그 사이에 대립적인 쟁론을 두겠는가?
체상문體相門을 마친다.

(3) 통체성과 한정성을 해석함

셋째는 (열반의) 공통적인 것과 국한적인 것을 증명하는 부문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소승에 관한 논술이고 둘째는 대승에 관한 논술이다.

① 소승에 관한 논술

소승 안에는 독자부犢子部(ⓢ Vātsīputrīya)와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Sarvāstivādin)의 두 부파의 학설이 있다.

가. 범부와 성인에 공통임

독자부에서는 열반이 범부나 성인에게 모두 공통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열반에 세 가지 명칭이 있다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유학有學·무학無學102)·비학비무학非學非無學103)이다.104) 범부들의 지혜로 번뇌를 끊어 없애고 얻은 열반을 비학비무학이라고 한다. 유학이 성위聖位에서 얻는 것은 무위라고 하고, 무학은 열반이라고 한다.

나. 무학에만 해당함

설일체유부에서 논설하는 바에 따르면 열반이라는 이름은 오직 무학에만 있다고 한다. 무학의 계위에 있는 사람이 번뇌를 끊어 없애고 얻은 무위, 오직 이것만을 멸滅이라고 한다. 멸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은 열반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공무변처의 욕망 내지 비상비비상처지의 여덟 가지 욕망을 떨쳐 버린 것, 그것을 단斷이라고 하며, 멸滅이라고 하고, 무욕無欲이라고 하며, 진리(諦)라고 한다. 그러나 끊는 지혜(斷智)라고 하지 않으며, 사문과라고 하지 않고, 유여열반이라고 하지 않으며, 무여열반이라고 하지 않는다. 무생지無生智를 다하여서 비상비비상처지의 아홉 가지 번뇌를 끊어 버린 것, 그것을 단斷이라고 하며, 멸滅이라고 하고, 무욕無欲이라고 하며, 진리(諦)라고 하고, 끊은 지혜라고 하며, 사문과라고 하고, 유여열반이라고 하지만, 무여열반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아라한阿羅漢의 오온·십이처·십팔계가 서로 이어지지 않는 것, 그것을 단斷이라고 하며, 무욕이라고 하고, 진리라고 하며, 끊는 지혜라고 하며, 사문과라고 하고, 무여열반이라고 하지만, 유여열반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② 대승에 관하여 논술함

만일 대승에 의거하여 보면 곧 열반에 대하여 네 구절이 있다.


001_0529_b_01L說爲得其所引文非不了說又大涅槃
001_0529_b_02L離相離性非空不非 [48] 非我非無我
001_0529_b_03L故非空離無性故何非不空離有性故
001_0529_b_04L又離有相故說非我離無相故說非無
001_0529_b_05L非無我故得說大我而非我故亦說
001_0529_b_06L無我又非空故得言實有非不空故
001_0529_b_07L說虛妄如來祕藏其義如是何蜜 [49] 異諍
001_0529_b_08L於其間哉 [50] 門竟

001_0529_b_09L
第三明通局門者於中有二先小後大
001_0529_b_10L小乘之內二部異說犢子部說通於凡
001_0529_b_11L彼說涅槃有其三稱謂學無學
001_0529_b_12L學非無學凡夫等智斷結所得涅槃
001_0529_b_13L非學非無學有學聖位所得無爲無學
001_0529_b_14L涅槃若依薩婆多部所說涅槃之名
001_0529_b_15L在無學無學人斷結所得無爲唯名滅
001_0529_b_16L不名滅等不名涅槃如智度論云
001_0529_b_17L離空處欲乃至非想地八種欲彼名斷名
001_0529_b_18L滅名無欲名諦不名斷智不名沙門果
001_0529_b_19L不名有餘涅槃不名無餘涅槃盡無生
001_0529_b_20L非想九種結斷彼名斷名滅名無欲名
001_0529_b_21L諦名斷智名沙門果名有餘涅槃不名
001_0529_b_22L無餘涅槃阿羅漢陰界入 [51] 不相續 [52]
001_0529_b_23L名滅名無欲名諦名斷智名沙門果名無
001_0529_b_24L餘涅槃不名有餘涅槃若依大乘卽有

001_0529_c_01L
가. 완전히 공통되는 부문

첫째, 범부와 성인에게 완전히 공통되는 부문이다. 범부·이승·보살·부처님에게 모두 열반이 있다는 것이다. 이 『대반열반경』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모든 범부들이 세속의 도리에 의지하여 번뇌를 끊어 없애는 수행을 행하는 것을 ‘열반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한다.105)

또 『대반열반경』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사람이 배가 고플 때) 조그만 음식을 얻어도 “열반을 얻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106)

성인聖人의 열반에 대하여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나. 범부와 성인을 가리는 부문

둘째 범부와 성인을 구별하여 보는 부문에서는, 성인에게는 열반이 있고 범부에게는 없다고 한다. 『보살지지경菩薩地持經』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삼승의 성인에게는 틀림없이 열반이 있으므로 이를 정정취正定聚107)라고 한다. 외범外凡에게는 틀림없이 없으므로 이를 사정취邪定聚108)라고 한다. 내범內凡109)에게는 (열반이 있고 없음을) 결정할 수 없으므로 이를 부정취不定聚110)라고 한다.

다. 대승과 소승을 가리는 부문

셋째, 대승과 소승을 구별하여 보는 부문에서는, 대승에는 열반이 있고 소승에는 열반이 없다고 한다. 『묘법연화경우바제사』에서 말한다.

이승에는 없다고 하는 것은, 이승이 얻는 열반은 없다는 말이다.111)

지금 이 『대반열반경』에서는 “보살마하살이 대열반에 안주한다.”112)라고 하였으니, 모든 부처님도 또한 그렇기 때문이다.

라. 원인과 결과를 가리는 부문

넷째, 인위와 과위를 구별하는 부문에서는, 인위에는 열반이 없고 과위에는 열반이 있다고 한다. 오직 부처님 한 분만이 열반을 증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뜻은 『대반열반경』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품」에서 갖추어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열반의 공통되는 점과 국한되는 점에 대한 증명을 마친다.

(4) 두 가지 열반을 해석함

넷째, 두 가지 열반을 증명하는 부문이다. 여기에도 또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자성청정열반 및 방편파괴열반을 밝히고, 둘째는 유여 및 무여 열반에 관해 드러낸다.

① 자성청정열반 및 방편파괴열반

첫째 자성청정열반 및 방편파괴열반을 밝힌다.
자성청정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진여의 법성은 본디부터 더럽게 물들지 않았기 때문에 자성청정열반이라고 하며, 또는 본디부터 청정한 열반이라고도 한다. 또한 여여한 이 법은 범부와 성인이 다 같이 한맛(一味)이기 때문에 또한 동상同相열반이라고도 한다.
방편파괴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지혜와 자비가 교묘하게 두 가지의 극단적인 집착을 깨뜨리고, 이러한 전의轉依113)로 말미암아 진여가 나타나는데, 원인을 따라서 이름을 세워 방편파괴열반이라고 한다. 두 가지의 극단적인 집착을 버려서 두 가지의 극단적인 견해에 머무르지 않으므로 또한 무주처無住處열반114)이라고도 한다. 진제가 번역한 『섭대승론석』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모든 보살의 미혹이 소멸된 것을 무주처열반이라고 한다.115)

그런데 이 방편파괴열반은 범부의 계위에는 통하지 않기 때문에 또한 부동상不同相열반이라고도 한다. 『십지경론十地經論』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001_0529_c_01L四句一極通門凡夫二乘菩薩與佛
001_0529_c_02L3) [35] 有涅槃如此經言諸凡夫人依世
001_0529_c_03L俗道行斷結行名入涅槃又言得少飮
001_0529_c_04L亦名得涅槃乃至廣說聖人涅槃
001_0529_c_05L待言論二簡凡聖門聖有凡無如地持
001_0529_c_06L經說三乘聖人定有涅槃名爲正定
001_0529_c_07L凡定無名爲邪定內凡不定名不定聚
001_0529_c_08L三簡大小門大有小無法花論云
001_0529_c_09L二乘者謂無二乘所謂 [53] 涅槃今此經云
001_0529_c_10L菩薩摩訶薩住大涅槃諸佛亦爾故
001_0529_c_11L者簡因果門因無果有唯佛一人證得
001_0529_c_12L涅槃是義具如德王 [54] 通局門竟

001_0529_c_13L
第四明二滅門者亦有二種先明性淨
001_0529_c_14L及方便壞後顯有餘無餘涅槃初明性
001_0529_c_15L淨方便壞者眞如法性本來無染故曰
001_0529_c_16L性淨亦名本來淸淨涅槃卽如如理
001_0529_c_17L聖一味是故亦名同相涅槃方便壞者
001_0529_c_18L智悲善巧壞二邊著由是轉依眞如顯
001_0529_c_19L從因立名名方便壞由轉二著不住
001_0529_c_20L二邊故亦名無住處涅槃如攝論云
001_0529_c_21L煩惱惑滅名無住處涅槃故卽此涅槃
001_0529_c_22L不通凡住 [36] 故亦名不同相涅槃如地論
001_0529_c_23L「槃」疑「般」{編}「耶」疑「取」{編}「音」疑
001_0529_c_24L「皆」{編}

001_0530_a_01L
정定이란 동상同相열반을 이룬다. 그것은 자성이 적멸하기 때문이다. 멸滅이란 부동상不同相·방편파괴 열반을 이룬다. 그것은 지혜를 시현示現하고 인연이 소멸하기 때문이다.116)

이 두 가지 열반은 동일한 진여이지만 다만 내용의 뜻을 따라서 두 가지 부문을 건립하는 것뿐이다.

자성청정열반이 열반이라는 명칭을 얻는 것은, 범부의 계위에 있을 때에도 역시 열반이라 할 수 있는가, 아니면 성인이 증득했을 때 열반이라 할 수 있는가? 나중의 것과 같다면 (열반이) 방편으로 증득하는 것이기 때문에 방편파괴열반의 뜻과 같다. 만일 앞의 것과 같다면 저절로 열반을 얻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범부들이 벌써 열반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또한 범부가 벌써 열반에 들어가 있다면, 이는 곧 성인이므로 열반에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 이와 같은 착란을 어떻게 가려서 구별할 것인가?
자성청정열반이라는 이름을 얻는 데는 두 가지의 이유가 있다.
차별되는 부문으로 말하면, 나중의 물음과 뜻이 같으므로 성인이 증득했을 때에 있는 것이다. 성인의 증득에는 두 가지의 뜻이 있으니, 하나는 분별하는 성품을 대치하는 것으로서 본디 청정한 열반을 증득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다른 것에 의지하여 생기는 성품을 대치한 것으로서 전의轉依하여 청정한 열반을 증득하는 것이다. 이러한 도리를 근거로 하면, 증득되는 열반은 동일하지만, 두 가지의 구별되는 다른 뜻이 있으므로 서로 혼란스러운 것이 아니다.
공통되는 부문으로 말하면, 앞의 물음과 뜻이 같으므로 또한 범부의 계위에도 있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뜻을 근거로 하면, 범부들은 벌써 열반에 들어갔다고 말할 수 있고, 또한 성인은 열반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뜻을 근거로 하기 때문에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모든 중생들이 열반의 모습과 같아 다시 더 없어지지 않는다.117)

『대승기신론』에서 논술한다.

모든 중생들은 시작이 없는 옛적부터 열반에 들어가 있고, 깨달음의 지혜라고 하는 것도 실천 수행에 의하여 비로소 본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며, 행위를 지어 새로이 만들어 내는 것도 아니다.118)

『입릉가경入楞伽經』에서 말씀하신다.

보살일천제菩薩一闡提는 늘 열반에 들어가지 않는다. 일체의 모든 법이 본디부터 열반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119)

모든 부처님의 법문은 하나가 아니며, 그 말씀한 것을 따르면서도 장애가 없으면 착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한 까닭은 보살이 열반에는 들어가지 않았지만, 범부들이 벌써 열반에 들어간 것보다 더 훌륭하며, 그것은 모든 법이 본디 열반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범부가 벌써 열반에 들어간 것은 성인이 열반에 들어가지 않은 것보다 못하다. 그것은 스스로가 열반에 들어가 있음을 아직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도리로 말미암아 조금도 혼란스러움이 없는 것이다.

001_0530_a_01L定者成同相涅槃自性寂滅故
001_0530_a_02L者成不同相方便壞涅槃 [55] 現智緣滅
001_0530_a_03L是二涅槃同一眞如但依義門建立
001_0530_a_04L二種門耳性淨涅槃得涅槃名爲在
001_0530_a_05L凡住 [56] 亦名涅槃爲聖所證乃名涅槃
001_0530_a_06L如後者方便所證卽同方便壞涅槃義
001_0530_a_07L若如前者自然所得諸凡夫人已入涅槃
001_0530_a_08L又若凡夫已入涅槃卽應聖入 [57] 不入泥洹
001_0530_a_09L如是錯亂云何簡別性淨涅槃得名
001_0530_a_10L有二別門而說如後問意在聖所證
001_0530_a_11L證之 [58] 有其二義對分別性證本來淨
001_0530_a_12L依他性證轉依淨由是道理同是所證
001_0530_a_13L二種別義不相雜亂通相而論如前問
001_0530_a_14L亦在凡位若依是義得言凡夫已入
001_0530_a_15L涅槃又得說言聖人不入依是義故
001_0530_a_16L名經言一切衆生同涅槃相不復更滅
001_0530_a_17L起信論言一切衆生從本已來入於涅
001_0530_a_18L菩提之法非可修相非可作相楞伽
001_0530_a_19L經言菩薩一闡提常不入涅槃以能善
001_0530_a_20L知一切諸法本來涅槃故當知諸佛法
001_0530_a_21L門非一隨其所說而無障礙而不錯亂
001_0530_a_22L所以然者菩薩不入勝於凡夫已 [59] 以其
001_0530_a_23L善知本來涅槃故凡夫已入不如聖人
001_0530_a_24L不入未能知自入涅槃故由是道理

001_0530_b_01L
비록 혼란스러움이 없다고 하더라도 가려서 분별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한 까닭은 보살이 열반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범부가 벌써 열반에 들어간 것과 같은 것이며, 범부가 벌써 열반에 들어갔다고 하더라도 보살이 열반에 들어가지 않은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명明과 무명을, 어리석은 이는 둘이라고 생각지만, 지혜로운 이는 그 성품이 둘이 아니라고 요달了達하기 때문이다. 비록 또한 범부와 성인은 그 성품이 둘이 아니지만, 그러나 범부와 성인은 동일한 성품도 아니다. 어리석은 이는 (성품이) 둘이라고 생각하지만, 지혜로운 이는 성품이 둘이 아니라고 요달하므로, 범부와 성인, 생사와 열반은 동일한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며,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며, 들어간 것도 아니고 들어가지 않은 것도 아니며, 나온 것도 아니고 나오지 않은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모든 부처님의 뜻이 오직 이런 것에 있지만, 다만 얕은 지식을 따라서 저 학설을 논설했을 뿐이다.

② 유여열반 및 무여열반

다음으로 유여열반과 무여열반을 밝히겠다.

가. 소승의 학설

가) 설일체유부의 학설

만일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120)에서 주장하는 것을 근거로 하면, 열반의 본체는 하나이지만 몸으로 볼 때는 둘이라고 하니, 이는 『아비담비바사론阿毘曇毘婆沙論』 제17권에서 주장하는 것과 같다.

() 왜 유여신열반계有餘身涅槃界라고 하는가?
어떤 사람은, 몸(身)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번뇌가 있는 몸이요 다른 하나는 타고난 몸(生身)이라고 한다. 아라한은 번뇌가 있는 몸은 없지만 타고난 몸은 남아 있다. 이 타고난 몸에 의지하여 열반을 증득하기 때문에 유여신열반계라고 부른다.
() 왜 무여신열반계無餘身涅槃界라고 하는가?
아라한이 이미 사대를 소멸하고 모든 근根을 소진消盡하여 열반에 들어갔기 때문이다.121)

이 글은 아직 뜻이 분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음에 이와 같이 말하였다.

이 글에 대해서는 “몸에 있는 모든 근根의 각성覺性이 소멸하여 없어진 것을 무여신열반계라 한다.”라고 말해서는 안 되고, “아라한이 모든 번뇌를 다 끊고 나서 열반에 들어간 것을 무여신열반계라 한다.”라고 말해야 한다. 여기서 그렇게 말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저 존자는 세속적인 말을 의지하여 경을 믿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였다.122)

『잡심론雜心論』 가운데에서도 또한 이와 같이 설한다.

몸과 지혜가 소멸하여 없어진 자리를 왜 열반이라 하지 않는가?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주장에 따라서 해명하면, 수멸무위數滅無爲123)의 본체는 선이기 때문에 열반이라고 하며, 몸과 지혜가 현재 없어진 것은 무상이고 유위법이 소멸하는 것이기 때문에 열반이 아니라고 한다. 현재에 원인을 끊어서 미래에 생겨난 뒤에

001_0530_b_01L雜亂也雖無雜亂而非簡別所以然者
001_0530_b_02L菩薩不入還同凡 [60] 1) [37] [61] 已入
001_0530_b_03L不入以明與無明愚者謂二智者了達
001_0530_b_04L其性無二故雖復凡聖其性無二而是
001_0530_b_05L凡聖不爲一性以愚諸謂二智者了
001_0530_b_06L2) [38] 當知凡聖生死涅槃不一不異
001_0530_b_07L有非無非入非不入非出非不出諸佛
001_0530_b_08L之意唯在於此但隨淺識顯設 [62] 彼說耳
001_0530_b_09L次明有餘無餘滅者若依薩婆多宗義
001_0530_b_10L涅槃體一約身說二如智度 [63] 論說
001_0530_b_11L何有餘身界涅槃 [64] 或有說者身有二
001_0530_b_12L一者有煩惱身二者生身阿羅漢
001_0530_b_13L無煩惱身而有餘生身依此生身得涅
001_0530_b_14L槃故名有餘身界涅槃云何無餘身界
001_0530_b_15L涅槃 [65] 阿羅漢已滅四大諸根盡而入
001_0530_b_16L涅槃此文未分明故下卽問曰此文不
001_0530_b_17L應作是說身諸根覺性滅名無餘身界
001_0530_b_18L涅槃應作是說阿羅漢斷一切結盡入
001_0530_b_19L於涅槃是名無餘身涅槃界此不說者
001_0530_b_20L有何意耶彼尊者依世俗言信經故
001_0530_b_21L而作是說雜心論中亦同是說身智
001_0530_b_22L滅處何故非涅槃依此宗明數滅無
001_0530_b_23L體是善故名涅槃身智現亡是無常
001_0530_b_24L滅有爲故非涅槃現在斷因未來生後

001_0530_c_01L과보의 법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수멸이 아니라 무기이므로 열반이 아니다. 지혜로써 과보를 쫓는 것도 이 학설과 같다.

나) 성실론종의 학설

만일 성실론종의 학설을 근거로 하면, 가명假名(ⓢ upacāra)과 실법實法의 두 가지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경지가 유여열반이고, 마음이 공하고 또한 몸이 미래에 생겨나지 않는 것이 무여열반이며, 몸과 지혜가 현재에 없어진 것은 열반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므로 그 논論에서 논술한다.

두 가지 공空한 마음의 경지가 멸진정이며 또한 무여열반이다.

이 성실론종에서 논술하는 무여열반은 수멸인가 수멸이 아닌가?
저 성실론종에서는 집集이라는 고의 원인을 끊어 버렸기 때문에 고라는 과보가 일어나지 않는 것도 또한 수멸의 지혜라고 한다. 비록 그 과보가 무상변행고에는 포섭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과보가 일어나는 것도 또한 멸제에 들어간다고 한다.

다) 비유부의 학설

만일 비유부의 학설을 근거로 하여 보면, 집集이라는 원인을 끊어 버렸기 때문에 고苦라는 과보는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열반이라고는 하더라도 수멸數滅이 아니며, 수멸이 아니기 때문에 무기성이라고 한다. 『아비담비바사론阿毘曇毘婆沙論』에서 서술하는 것과 같다.

어떤 사람은, 유여신열반계는 선善이고 도과道果이고 진리(諦)에 포섭되는 것이지만, 무여신열반계는 무기이고 도과가 아니고 진리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124)

나. 대승에서의 학설

만일 대승의 학설을 근거로 하여 보면 이것을 네 가지 부문으로 나누어 논술할 수 있다. 첫째는 화현化現에 관한 논리, 둘째는 실의實義에 관한 논리, 셋째는 대승과 소승에 관한 논리, 넷째는 세 불신(三身)에 관한 논리이다.

가) 화현에 관한 논리

화현에 관한 부문이란 소승의 두 가지 열반과 같으므로 그 내용은 앞의 두 종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다만 그들은 열반을 진실이라고 생각하는데 여기서는 화현일 뿐이다.

나) 실의에 관한 논리

둘째 실의에 관한 부문이란, 실의를 근거로 하여 말하면, 유여와 무여, 이 두 가지 열반은 다 같이 전의된 진여로써 본체를 삼는다. 다만 원인을 끊고서 나타나는 바의 뜻으로 말할 때는 유여열반이라고 하며, 결과가 이미 나타나 버린 바의 뜻으로 말할 때에는 무여열반이라고 한다. 『섭대승론석』에서 말씀하신다.

번뇌의 업을 소멸하였기 때문에 종자가 없어졌다고 말하는 것이니, 이는 유여열반을 나타낸 것이다. 과보가 다 없어졌기 때문에 일체가 다 없어졌다고 말하는 것이니, 이는 무여열반을 나타낸 것이다.125)

또 『유가사지론』 「섭결택분」에서 서술한다.

만일 아라한이 이전에 있었던 육처六處가 생기生起하는 것처럼,

001_0530_c_01L報法不起是非數滅無記故非涅槃
001_0530_c_02L智從報亦同此說若依成實論宗假名
001_0530_c_03L實法二心無處是有餘涅槃心空及身
001_0530_c_04L未來不起是無餘泥洹身智現滅亦非
001_0530_c_05L涅槃故彼論云二空心處滅定及無餘
001_0530_c_06L泥洹此論宗無餘泥洹爲是數滅
001_0530_c_07L非數滅彼論宗說斷集因故苦果不
001_0530_c_08L亦是數滅智雖非報其 [66] 無常邊行苦
001_0530_c_09L所攝故其報起亦入滅諦若依譬喩部
001_0530_c_10L斷集因故苦報不起雖是涅槃而非
001_0530_c_11L [67] 非非 [68] 是無記性如婆娑云或有
001_0530_c_12L說者有餘身涅槃界是善是道果是諦
001_0530_c_13L無餘身涅槃界是無記非道果非諦
001_0530_c_14L若就大乘卽有四門一就化現
001_0530_c_15L約實義三對大小四依三身化現門
001_0530_c_16L同小乘二種涅槃其義同前二宗所
001_0530_c_17L但彼謂實此似 [69] 現耳第二約實義者
001_0530_c_18L就實言之是二涅槃同以轉依眞如爲
001_0530_c_19L但斷因所顯義門名爲有餘果已所
001_0530_c_20L顯義門說名無餘如攝論云煩惱業滅
001_0530_c_21L言卽無種子此顯有餘涅槃果報悉
001_0530_c_22L故言一切皆盡此顯無餘涅槃又瑜
001_0530_c_23L伽論決擇分說若阿羅漢 [70] 六處生起
001_0530_c_24L「已」下疑脫「入」{編}「達」下疑脫「一」{編}

001_0531_a_01L곧 이와 같이 안주하여 상속하면서 소멸하지 아니하고 아무런 변이가 없다면, 다시 어떠한 다른 전의성轉依性이 있어서 육처가 상속하지 않으면서 일어나는가? 만일 다른 전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무슨 인연으로 앞(arhan의 因位)·뒤(arhan의 果位) 두 가지의 의지依止가 서로 닮아 있는데도 지금(今)과 후시後時에 번뇌가 일어나지 않고 성도聖道가 일어나는가?
모든 아라한에게는 실제로 전의가 있다. (그러나 이 전의와 육처는 다름과 다르지 않음을 함께 말할 수 없다. 왜 그런가?) 이 전의는 청정한 진여에 의해 나타난 것이므로 저 진여와 육처의 다름과 다르지 않음을 함께 말할 수 없는 것이다.126)

또 그 아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무여의열반계無餘依涅槃界 가운데에서 (반열반하고 나서) 얻은 전의轉依, 이것을 상주常住라고 해야 하는가 무상無常이라고 해야 하는가?
마땅히 상주라고 해야 한다. 청정한 진여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고, 인연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고 생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여의열반계 가운데에서 반열반하는 이는 색·수·상·행·식 등의 법에 있어서 자재를 얻었다고 말해야 하는가 자재를 얻지 못했다고 말해야 하는가?
( 자재를 얻었다고 말해야 한다.)
() 여기서 얻은 바의 자재는 눈앞에 있다(現在前)고 말해야 하는가 눈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가?
일부는 눈앞에 있다(現在前)고 말하고 일부는 눈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말하자면 모든 여래는 무여의열반계 가운데에서 반열반에 들고 난 뒤 눈앞에 있도록 할 수 있지만 그 나머지는 눈앞에 있도록 할 수 없다. ……127)

다) 대승과 소승에 관한 논리

셋째, 대승과 소승을 상대하는 부문이란, 이승의 열반을 유여열반이라고 하며, 여래가 증득한 바의 열반을 무여열반이라고 한다. 『승만경勝鬘經』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열반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유여열반과 무여열반이다.128)

유위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생사가 다 소멸한 경지에서 얻어지는 열반은 유여열반이며, 무위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생사가 다 소멸한 경지에서 얻어지는 열반은 무여열반이다.

라) 세 불신에 관한 논리

넷째, 세 불신佛身을 근거로 하는 두 가지 열반을 논술하면, 응신·화신의 두 가지 불신은 몸과 마음이 아직 남아 있으므로 유여有餘라고 하고, 생사와 모든 과실·환난患難을 여의었으므로 열반이라고 한다. 이 경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이제 나의 이 몸이 곧 그대로 열반이다.

법신 가운데에서는 몸과 지혜가 평등하므로 무여無餘라고 하고, 모든 상相을 여의어서 드디어는 적멸하므로 열반이라고 한다. 『합부금광명경合部金光明經』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001_0531_a_01L卽如是住相續不滅無有變異更有何
001_0531_a_02L等異轉依性而非六處相續而轉若更
001_0531_a_03L無有異轉依者何因緣故前後二種依
001_0531_a_04L止相以 [71] 而今後時煩惱不轉聖道轉耶
001_0531_a_05L諸阿羅漢實有轉依 [72] [73] 此依 [74] 轉依淸
001_0531_a_06L淨眞如所顯 [75] 而彼眞如與其六處異不異
001_0531_a_07L俱不可說問又下言 [76] 無餘依 [77] [78] 所得
001_0531_a_08L轉依當言是常當言無常當言是常
001_0531_a_09L淸淨眞如之所顯故非緣生無生滅故
001_0531_a_10L又問於無餘依 [79] 般涅槃者於色等法當言
001_0531_a_11L得自在當言不得 [80] [81] 當言能現在前 [82]
001_0531_a_12L當言不現在前 [83] 當言得一分能現在前
001_0531_a_13L分不 [84] 現在前謂諸如來於無餘 [85] 般涅槃
001_0531_a_14L能現在前所餘不能令現在前乃至
001_0531_a_15L廣說第三大小相對門者二乘涅槃
001_0531_a_16L爲有餘如來所證名曰無餘如勝鬘說
001_0531_a_17L涅槃亦二種有餘及無餘有爲生死
001_0531_a_18L滅之處所得涅槃名曰有餘無爲生死
001_0531_a_19L盡滅之處所得涅槃名曰無餘故第四
001_0531_a_20L依三身說二涅槃者應化二身身智猶
001_0531_a_21L名曰有餘卽離生死一切過患故名
001_0531_a_22L涅槃如此經言今我此身卽是涅槃故
001_0531_a_23L於法身中身智平等名爲無餘離一切
001_0531_a_24L畢竟寂滅故名涅槃如金鼓經言

001_0531_b_01L
(응신·화신의) 두 가지 불신을 의지하여 모든 부처님이 유여열반을 말씀하시고, 이 법신에 의지하여 무여열반을 말씀하신다. 무슨 까닭인가? 남은 것이 드디어는 다 없어지기 때문이다.129)

만일 이 뜻을 근거로 하면, 바로 세 불신을 취하여 열반의 체로 삼는 것이다.

또 하나의 주장이 있는데 그것은 무구진여無垢眞如가 바로 열반이라는 것이다. 다만 응신·화신의 두 가지 불신을 바라볼 때에는, 이 진여는 유여라고 하는데, 그것은 별도로 남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법신을 바라볼 때에는, 이 진여는 무여라고 하는데, 그것은 별도로 남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진제眞諦가 번역한 『섭대승론석』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연각은 중생들을 이익이 되게 하는 일을 관조하지 않고 무여열반에 안주해 버린다. 보살은 그렇지 않다.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에 안주하면서도 중생을 이익 되게 하는 일을 버리지 않는다. 그리고 반열반般涅槃에 드는 것은 유여이기도 하고 무여이기도 하다. 법신에 있어서는 그것이 무여가 되며, 응신에 있어서는 그것이 유여가 되기 때문이다. 안주함을 여의면 무여열반이라고 하는데, 그 자리에만 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130)

또는 이 전의轉依한 진여열반은 세 불신을 바라볼 때에는 무주처無住處라고 말씀하신다. 그러한 까닭은, 두 가지 불신의 생멸은 진여와 같지 않으므로 저 열반에 안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신은 상相을 여의어서 진여와 다르지 않으므로 저 열반에 안주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이 세 불신에 대하여 무주처라고 한다. 『합부금광명경』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이 삼신을 의지하여 모든 부처님은 무주처열반을 말씀하신다. 무슨 까닭인가? 두 불신 때문에 열반에 안주하지 않는다. 그러나 법신을 떠나서 따로 부처님이 있는 것이 아니다. 무슨 까닭으로 두 불신은 열반에 안주하지 않는가? 두 불신은 가명假名(ⓢ upacāra)이며 실체가 아니고, 아주 순간순간 소멸하여 안주하지 않으며, 또한 아주 자주 출현하여 일정하지 않지만, 법신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두 불신은 열반에 안주하지 않으며 법신과 둘이 아니다. 그러므로 대열반에 안주하지 않는다.131)

두 가지 열반에 관한 부문을 마친다.

(5) 삼사三事를 해석함

다섯째, 삼사三事132)를 증명하는 부문에 또한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삼사의 체상體相을 밝히고, 둘째는 삼사를 건립하는 이유를 밝히고, 셋째는 삼사의 총·별을 밝히고, 넷째는 왕복하면서 결택하는 것에 관한 논술이다.

① 삼사의 체상을 밝힘

삼사의 체상을 밝히려고 한다.


001_0531_b_01L此二身一切諸佛說有餘涅槃依法身
001_0531_b_02L說無餘涅槃何以故一切餘究竟盡
001_0531_b_03L若依此義卽取三身爲涅槃體又有
001_0531_b_04L一義無垢眞如正是涅槃但望二身
001_0531_b_05L此眞如名爲有餘別餘故若望法身
001_0531_b_06L此眞如名曰無餘無別餘故如攝論云
001_0531_b_07L如緣覺不觀衆生利益事住無餘涅槃
001_0531_b_08L菩薩卽不如是住波 [86] 若波羅蜜不捨衆
001_0531_b_09L生利益事般涅槃亦有餘亦無餘於法
001_0531_b_10L身是無餘於應身是有餘故言離住無
001_0531_b_11L餘涅槃以不應彼處故又復卽此轉依
001_0531_b_12L眞如涅槃望於三身說無住處所以然
001_0531_b_13L二身生滅不同眞如是故不住於彼
001_0531_b_14L涅槃法身離相無異眞如故非能住於
001_0531_b_15L其涅槃故對三身說爲無住如經說言
001_0531_b_16L依此三身一切諸佛說無住處涅槃
001_0531_b_17L以故爲二身故不住涅槃離於法身
001_0531_b_18L無有別佛何故二身不住涅槃二身假
001_0531_b_19L名不實念念滅不住故數數出現以不
001_0531_b_20L定故法身不爾是故二身不住涅槃
001_0531_b_21L法身不二是故不住於般涅槃二滅門
001_0531_b_22L

001_0531_b_23L
第五明三事門者四句分別初出體相
001_0531_b_24L次明建立三明總別四往復出體相

001_0531_c_01L
가. 법신

법신法身(dharmakāya)의 본체는 부처님의 경지에서 가지고 있는 모든 공덕이다. 그 본체는 둘이 아니고 오직 한 법계일 뿐이다. 법계 전체가 만덕을 이루므로 만덕의 모습은 그대로 법계와 같고, 법계의 성품은 만덕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한 공덕을 들면 두루하지 않는 데가 없다. 이와 같이 모든 깨끗한 법이 원만하여 자체에 쌓여 있기 때문에 법신이라고 한다. 그 뜻은 이 경의 「금강신품金剛身品」에 잘 나타나 있다.

나. 지혜

지혜(般若)의 본체란, 곧 이 법신의 성품이 스스로 밝고 통달하여서 비추지 않는 데가 없으므로 지혜라고 하는 것이다.

다. 해탈

해탈解脫의 본체란, 곧 이 법신이 모든 얽매임에서 벗어나 아무런 장애도 없으므로 해탈이라고 하는 것이다.

세 덕(三德)은 실제로 특수해서 동일하다고 말할 수가 없다. 그러나 세 덕의 모습은 한맛(一味)이기 때문에 서로 다르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런 까닭으로 여래의 비장이라고 한다. 이것을 삼사의 체상이라고 말한다.

② 삼사를 건립하는 이유를 밝힘

다음으로 삼사를 건립하게 된 까닭을 밝히려고 한다. 하나의 본체와 온갖 공덕은 열반이 아닌 것이 없다. 그런데 오로지 이 세 가지를 들어 논술하는 까닭은 생사의 세 가지 근심을 대치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생사의 온갖 장애는 세 가지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고뇌의 과보인 다섯 가지 구성 요소로 이루어진 몸(五薀身)을 대치하기 위하여 법신을 건립하는 것이고, 번뇌에 미혹된 법을 제거하기 위하여 지혜를 건립하는 것이고, 모든 업장에 얽매이는 원인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해탈을 건립하는 것이다.
또한 저 소승의, ‘열반에 들어갈 때에는 몸은 재가 되고 지혜는 소멸한다’라는 견해를 대치하려고, 법신은 늘 존재하고 대지大智는 소멸하지 않는다고 한다. 또 저 소승의, ‘몸과 지혜가 남아 있을 때에는 고뇌의 과보와 습기習氣의 얽매임을 면하지 못한다’라는 견해를 대치하려고, 몸과 지혜를 들어서 참된 해탈을 건립하는 것이다.
열반의 삼사를 건립하는 이유를 간단하게 말하면 이와 같다.

③ 삼사의 총·별을 밝힘

셋째, (법신·지혜·해탈의) 삼사三事의 총체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을 밝히려고 한다. (세 가지를) 한 성품으로 말하면 열반은 총체적인 것으로서 ∵(इ, 伊, 이) 자字로 비유되고, 법신·지혜·해탈의 세 가지 법은 개별적인 것으로서 ∵ 자의 세 점으로 비유할 수 있다. 이렇게 총체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을 말하려는 까닭은 네 가지 뜻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 꼭 세 가지를 갖추어야 바른 열반을 이루게 되며, 홀로 하나씩 따로 들면 열반을 이루지 못한다. 이는 마치 세 점을 하나씩 따로 떼어 놓으면 ∵ 자를 이루지 못하는 것과 같다. 『대반열반경』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해탈의 법은 열반이 아니고, 마하반야도 또한 열반이 아니다.133)


001_0531_c_01L法身體者佛地所有一切功德其體
001_0531_c_02L無二唯一法界法界擧體以成萬德
001_0531_c_03L德之相還同法界法界之性不異萬德
001_0531_c_04L隨擧一德無所不遍如是一切白法圓
001_0531_c_05L滿自體積集故名法身其義具顯金剛
001_0531_c_06L身品般若體者卽此法身性自明達
001_0531_c_07L所不照故名般若解脫體者卽此法身
001_0531_c_08L離諸繫縛無所障礙故名解脫三德實
001_0531_c_09L不可說一 [87] 相一味 [88] 說異以之故
001_0531_c_10L名如來祕藏是謂三法 [89] 之體相也次明
001_0531_c_11L建立三事所由一體萬德無非涅槃
001_0531_c_12L以偏說此三法者以對生死三種患故
001_0531_c_13L何者生死萬累不出三種所謂 [90] 苦果五
001_0531_c_14L陰身故建立法身以除煩惱迷惑法故
001_0531_c_15L建立般若離諸葉 [91] 障繫縛因故建立解
001_0531_c_16L又復對彼小乘入涅槃時灰身滅智
001_0531_c_17L故說法身常存大智不滅對彼小乘
001_0531_c_18L智存時未免苦報習氣繫縛故就身智
001_0531_c_19L眞解脫建立之由略說如是第三明總
001_0531_c_20L別者一性而言涅槃是總況於伊字
001_0531_c_21L法是別喩對以三點 [92] 別成總其義有
001_0531_c_22L一者要具三法方成涅槃獨擧一一
001_0531_c_23L卽不得成如一一點不成伊字如經言
001_0531_c_24L解脫之法亦非涅槃摩訶般若亦非涅

001_0532_a_01L
둘째, 세 가지가 평등하고 원융해야 열반을 이룬다. 비록 세 가지를 갖추었을지라도 만일 어느 것은 수승하고 어느 것은 열등하면 열반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 자의 세 점을 나란히 늘어놓으면, 반드시 좌우가 있는 것과 같다. 『대반열반경』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세 점을 나란히 늘어놓으면 ∵ 자를 이루지 못한다.134)

셋째, 세 가지가 일시에 있어야 열반을 이룬다. 세 가지가 비록 수승한 것과 열등한 것이 없어도 만일 먼저 되고 뒤에 되는 것이 있으면 열반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 자의 세 점을 세로로 늘어놓으면 반드시 남과 북이 있는 것과 같다. 『대반열반경』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세 점을 세로로 늘어놓으면 ∵ 자를 이루지 못한다.135)

넷째, 세 가지가 동체가 되어야 열반을 이룬다. 허공은 움직이지 않고 걸림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비록 세 가지는 먼저 되고 뒤에 되는 것이 없지만, 각각 별체로 있으면 총체적인 것을 이루지 못한다. 이는 마치 ∵ 자의 세 점을 비록 가로로 늘어놓지도 않고 세로로 늘어놓지도 않는다고 하더라도 각각 따로 다른 곳에 흩어져 있으면 ∵ 자의 한 글자를 이루지 못하는 것과 같다. 『대반열반경』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세 점이 만일 각각 따로 있으면 ∵ 자를 이루지 못한다.136)

이와 같이 세 가지는 이러한 네 가지의 뜻을 갖추어야 열반을 이룬다. 마치 세간의 ∵ 자와 같으므로 세 가지는 개별적인 것이며, 열반은 총체적인 것이다.

하나의 성품으로 보면 그렇지만 다시 따져 보면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어째서 그러한가? 이치를 다하여 말하면 (열반·법신·지혜·해탈의) 네 가지의 공덕은 모두 다 총체적인 것도 되고 개별적인 것도 되기 때문이다.
네 가지 공덕이 모두 다 개별적이라는 뜻은, 열반은 적정寂靜하다는 뜻이며, 법신은 적집積集이라는 뜻이고, 지혜는 조달照達이라는 뜻이며, 해탈은 계박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네 가지 공덕은 개별적이 아닌 것이 없다.
네 가지 공덕이 모두 다 총체적이라는 것은 경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만일 법신이 없다면 고의 과보를 다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열반을 이룰 것인가? 만일 지혜가 없다면 어두운 미혹을 제거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열반을 이룰 것인가? 만일 해탈이 없다면 업의 얽매임을 면하지 못하므로 열반이 아니다. 이와 같이 나머지의 세 가지도 그 뜻이 이와 똑같다. 왜냐하면 만일 열반이 없다면 생사를 소멸시키지 못하는데 어떻게 법신을 이룰 것인가? 만일 지혜가 없다면 번뇌에 얽혀 버리게 될 것인데, 어떻게 법신이라고 말할 것인가? 만일 해탈이 없다면 모든 업에 얽혀 버리게 될 것이므로 법신이 되지 못한다. 법신·지혜·해탈의 세 가지를 갖추어야 열반을 이룬다는 것은 앞의 논술을 근거로 하여 알 수 있다.137)
그러므로 네 가지 공덕의 총체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의 뜻과 마찬가지로 일체의 공덕도 모두 이와 같아서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하나임을 알아야 한다.

001_0532_a_01L槃故二者三法等圓乃成涅槃雖具三
001_0532_a_02L若有勝劣不得成故如三點並必有
001_0532_a_03L右左如經說言三點若並卽不成伊
001_0532_a_04L三者三法一時乃成涅槃雖無勝劣
001_0532_a_05L若有前後不得成故如三點縱必有南
001_0532_a_06L如經言縱亦不成故四者三法同
001_0532_a_07L乃成涅槃如說虛空不動無礙雖非
001_0532_a_08L前後而各別體不成總故如彼三點
001_0532_a_09L非並縱各宜別處不成一字如經言
001_0532_a_10L點若別亦不成伊故如是三法具此四
001_0532_a_11L乃成涅槃如世伊字故 [93] 是別涅槃
001_0532_a_12L是總一性雖然再論未必然所以足 [94]
001_0532_a_13L盡理而言四種功德皆總皆別皆別義
001_0532_a_14L涅槃是寂寂 [95] 法是積集義
001_0532_a_15L若是照達義解脫是離縛義故知四種
001_0532_a_16L無非別也皆總義者如經言若無法
001_0532_a_17L苦報不盡何成涅槃若無般若闇感 [96]
001_0532_a_18L不除豈得涅槃若無解脫不免業繫
001_0532_a_19L故非涅槃如是餘三基義同爾何者
001_0532_a_20L若無涅槃生死未滅何爲法身若無般
001_0532_a_21L煩惱所纏何名法身若無解脫諸業
001_0532_a_22L所縛故非法身法身般若解脫具三
001_0532_a_23L涅槃成准前可解故知總 [97] 如說四種總
001_0532_a_24L別之義一切功德皆亦如是一卽一切

001_0532_b_01L
그러므로 총체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은 아무런 걸림이 없기 때문에, ∵ 자가 총체적인 것이고 개별적인 것이 아니며, 그 속에 있는 세 점은 개별적인 것이며 총체적인 것과는 같지 않다. 다만 조금 비슷한 점을 취하여 비유로 삼았을 뿐이다.

④ 왕복하면서 결택함

넷째, (삼사三事에 관하여) 왕복하면서 결정하여 선택하는 부문이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진실한 공덕인 법신은 색상色相이 있다고 해야 하는가 색상이 없다고 해야 하는가?

가. 색상이 있음

어떤 스승은, 법신은 색상色相은 없지만 다만 기연機緣에 따라서 화현하는 색상은 있다고 한다. 그러한 까닭은, 색상이란 질애質碍·추형麤形의 법이므로 전도된 분별에 의해 변작變作된 것이지만, 모든 부처님은 영원히 분별을 벗어나서 진리의 근원으로 돌아와 법계로써 몸을 삼기 때문이다. 이러한 도리를 근거로 하므로 색상을 반드시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내지 범부가 무색계에 이르면 색신의 분별을 벗어나기 때문에 (그들도) 색상이 없다. 그런데 어찌 여래에게 도리어 색상이 있다고 하겠는가? 『합부금광명경』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법의 여여如如함을 벗어나고 분별이 없는 지혜마저 벗어난다. 모든 부처님은 따로 법을 가지고 있지 않다. 무슨 까닭인가? 모든 부처님은 지혜를 구족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온갖 번뇌가 필경에는 다 없어져서 부처님의 청정한 경지를 얻는다. 그러므로 법이 여여하고 지혜도 여여하여 모든 부처님의 법을 포섭한다.138)

또 『합부금광명경』에서 말씀하신다.

이와 같이 법이 여여하고 여여한 지혜도 또한 분별이 없다. 원력이 자재하고 중생이 감응하기 때문에 응신과 화신의 두 불신은 해와 달의 그림자처럼 화합하여 생겨난다.139)

또 『대승기신론』에서 논술한다.

모든 부처님은 법신法身이면서 동시에 지신智身이며, 제일의제第一義諦140)이니 세속제世俗諦141)의 경계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베풀고 짓는 것(施作)을 떠나 있지만, 중생들이 보고 듣는 것에 따라 이익을 주기 때문에, 이것을 ‘대승, 그 작용의 위대함(用)’이라고 한다. 이 작용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범부와 이승二乘의 마음에 보이는 것을 응신應身이라고 한다. 둘째, 보살에게 보이는 것을 보신報身이라고 한다.142)

이러한 글들을 근거로 하면 진실한 공덕은 영원히 색상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오직 근기를 따라서 나타내는 바의 색상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대반열반경』에서 “여래의 해탈은 색상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지혜의 눈에 대하여 색상이라고 말한 것이지 실색實色은 아니다. 이는 마치 지혜는 눈이 아니지만 지혜의 눈이라 말하는 것과 같다.

001_0532_b_01L一切卽一是故總別無所障礙不同伊
001_0532_b_02L字是總非別其中三點是別非總唯取
001_0532_b_03L小分以爲譬耳第四往復決擇門
001_0532_b_04L如是如來實德法身當言有色當言無色
001_0532_b_05L或有說者法身無色但有隨機化現
001_0532_b_06L色相所以然者色是質礙麁形之法
001_0532_b_07L顚倒分 [98] 之所變作諸佛如來永離分別
001_0532_b_08L歸於理原法界爲身由是道理不須色 [99]
001_0532_b_09L乃至凡夫至無色界離色分別故無色身
001_0532_b_10L豈說如來還有色身如金鼓經言離法
001_0532_b_11L如如離無分別智一切諸佛無有別法
001_0532_b_12L何以故一切諸佛智惠 [100] 具足故一切煩
001_0532_b_13L畢竟滅盡得佛淨地以是法如如
001_0532_b_14L如智攝一切佛法又言如是法如如
001_0532_b_15L如智亦無分別以願自在故衆生有感
001_0532_b_16L應化二身如日月影和合出生起信
001_0532_b_17L論云諸佛如來唯是法身智相之身
001_0532_b_18L一義諦無有世諦境界離於施作但隨
001_0532_b_19L施衆生見聞得益故說爲用此用有二
001_0532_b_20L一凡夫二乘心所見者爲應身二菩
001_0532_b_21L薩所見者名爲報身乃至廣說依此等
001_0532_b_22L當知實德永無色身唯有隨根所現
001_0532_b_23L色耳而此經說如來解脫是色等者
001_0532_b_24L [101] 眼根說色非實色如智惠非眼而說

001_0532_c_01L비록 눈이라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색상의 감각적인 눈이 아니다. 이와 같이 법신은 색상이 아니지만 미묘한 색상이라고 한다. 비록 색상이라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색진色塵이 아니다. 이러한 도리에서 보면 색상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른 곳에서 법신에 관한 색상을 말한 것은 모두 이와 같이 회통해야 한다.

나. 색상이 없음

어떤 스승은, 법신의 진실한 공덕에는 장애가 없는 색상이 있다고 한다. 이는 비록 질애의 뜻으로 말하는 색상은 없다고 하더라도, 방소方所로써 시현하는 색상은 있다고 한다. 비록 분별하여 만든 추잡한 색상에서는 벗어났다고 하더라도, 만행을 닦아 감응한 것은 있으므로 미묘한 색상은 있다고 한다. 비록 분별식은 없다고 하더라도, 분별이 없는 의식(無分別識)은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비록 장애가 되는 색상은 없다고 하더라도, 장애가 없는 색상은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 『대반열반경』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무상한 색을 버림으로써 상주하는 색을 얻는다. 수·상·행·식도 또한 이와 같다.143)

그러나 색음色陰의 색에는 통틀어 십입十入이 있는데, 안근을 대하는 색에는 오직 일입一入이 있다. 그러므로 저것은 이 경의 글을 회통할 수 없다. 또 『불설대반니원경』에서 순타純陀가 부처님을 찬탄하여 말한다.

미묘한 색신은 담연하여 체가 늘 안온하므로 시절과 겁에 얽매이지 않나이다. 대성께서는 오랜 겁에 걸쳐서 자비를 베푸시어 금강과 같은 무너지지 않는 몸을 얻었나이다.144)

또 『대살차니건자소설경大薩遮尼乾子所說經』에서 말씀하신다.

고따마(ⓢ Gotama, 瞿曇)의 법성신은 미묘한 색신이므로 늘 담연하다. 그리고 청정하며 늘 적멸하여 그 모습이 허공과 같다. 이와 같은 법성신은 중생과 평등하여 차별이 없다.145)

『섭대승론석』에서 논설한다.

다른 사람의 공덕을 나타내기 위하여 자성신自性身을 내세운다. 이 자성신을 의지하여 복덕과 지혜의 두 가지 행을 일으키니, 이 두 가지 행에서 얻어지는 과보를 정토淨土와 법락法樂이라 한다. 이 두 가지 과보를 잘 수용하기 때문에 수용신受用身146)이라고 한다.147)

이러한 경전들의 글을 근거로 하면, 두 가지 행으로 감응하여 얻게 되는 진실한 과보에는 자수용신自受用身과 자수용정토自受用淨土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다른 곳에서 법신은 색상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자성신을 들어서 색상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세 불신문(三身門)에서 말하는 법신의 뜻은 이제 삼사문三事門에서 말하는 법신을 모두 취하여야만 비로소 온갖 공덕을 가지고 체로 삼게 된다. 그러므로 법신은 색상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다. 회통

두 스승이 말한 것 가운데에서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른가?

001_0532_c_01L [102] 雖名爲眼實非色根如是法身非
001_0532_c_02L而說妙色雖名爲色實非色塵由是
001_0532_c_03L道理當知無色餘處說色皆作是通
001_0532_c_04L有說者法身實德有無障礙色雖無
001_0532_c_05L質礙之義說色而以方所示現說色
001_0532_c_06L離分別所作麁色而有萬行所惑 [103] 而得
001_0532_c_07L妙色如說雖無分別識而得有於無分
001_0532_c_08L別識如是雖無障礙之色而亦得有無
001_0532_c_09L障礙色如此經言捨無常色獲得常色
001_0532_c_10L受想行識亦復如是然色陰之色通有
001_0532_c_11L十入對眼之色唯是一入故彼不能會
001_0532_c_12L通此文又小泥洹中麁陀歎佛言妙色
001_0532_c_13L湛然體常安隱 [104] 不爲時節劫所還大聖
001_0532_c_14L廣劫行慈悲獲得金剛不壞身薩遮尼
001_0532_c_15L揵子經言瞿曇法身妙色常湛然體
001_0532_c_16L是法性身衆生等無差別攝大乘 [105]
001_0532_c_17L顯異人功德故立自性身依止自性身
001_0532_c_18L起福德智惠 [106] 二行二行所得之果謂淨
001_0532_c_19L土及法樂能受用二果故名受用身
001_0532_c_20L此等文當知二行所感實報有自受用身
001_0532_c_21L及自受用淨土而餘處說法身無色者
001_0532_c_22L約自性身說爲無色是三身門之法身
001_0532_c_23L [107] 三事門所說法身總取始有萬德爲
001_0532_c_24L是故說爲法身有色二師所報 [108]

001_0533_a_01L
어떤 스승은, 결코 한쪽만을 취하면 두 학설이 다 틀리지만, 만일 진실로 집착하지 않으면 두 학설이 모두 맞는다고 한다. 무슨 뜻인가? 부처님의 경지에서 볼 수 있는 온갖 공덕에는 대략 두 가지 부문이 있다. 만일 상相을 버리고 일심으로 돌아오는 부문에서 보면, 모든 덕상德相은 법계와 동일하므로 오직 제일의신第一義身에는 색상의 차별된 경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만일 성性을 따라 온갖 공덕을 이루는 부문에서 보면, 몸과 마음(色心)이 공덕을 갖추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한량없는 상相·호好가 장엄하다고 말씀하신다. 비록 두 가지 부문이 있다고 하더라도 서로 다른 모습은 없다. 그러므로 위의 모든 학설이 다 걸림이 없으며, 이와 같이 걸림이 없는 법문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대반열반경』 「금강신품」 제5에서 자세하게 말씀하신다.

여래의 몸은 몸이 아니면서 몸이며, 식이 아니면서 식이다. 마음을 여의었으면서 또한 마음을 여읜 것이 아니다. 처소가 아니면서 또한 처소이다. 집이 아니면서 또한 집이다. 상像도 아니며 상相도 아니면서 모든 상相을 장엄한다. ……148)

여래가 비장秘藏한 법문法門은 유를 말씀하시고 무를 말씀하시는 것에 모두 도리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삼사三事를 증명하는 부문에 대한 논술을 모두 마친다.

(6) 네 가지 공덕을 해석함

여섯째, 네 가지 덕(常·樂·我·淨)을 분석적으로 논구하는 부문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네 가지 덕의) 모습을 나타내는 부문이고, 둘째는 의의를 건립하는 부문이고, 셋째는 차별을 해석하는 부문이고, 넷째는 화쟁和諍을 해석하는 부문이다.

① 모습을 나타냄

(네 가지 덕의) 모습을 나타내는 부문이란, 법신이 곧 네 가지 덕을 갖추고 있는 것을 말씀하신다. 이 네 가지 덕의 뜻에는 공통되는 점과 구별되는 점이 있다.

가. 총체적으로 통·별을 설명함

구별되는 점에서 말하면 상常(ⓢ nitya)은 법신의 뜻이니, 저 색신은 무상하다는 것에 대대하기 때문이다. 낙樂(ⓢ sukha)은 열반의 뜻이니, 저 생사가 고해라는 것에 대대하기 때문이다. 아我(ⓢ ātman)는 붓다라는 뜻이니, 중생들이 자유자재하지 못한 것에 대대하기 때문이다. 정淨(ⓢ śubha)은 법이라는 뜻이니, 비법非法은 더럽고 혼탁하다는 것에 대대하기 때문이다. 『대반열반경』 「애탄품」 제3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아我는 곧 부처님이라는 뜻이며, 상常은 곧 법신이라는 뜻이고, 낙樂은 곧 열반이라는 뜻이며, 정淨은 곧 법이라는 뜻이다.149)

이는 한 측면에 의거하여 이와 같이 배당하였지만 실제로 공통적인 점을 논하면 네 가지 덕이 서로 해당하지 않는 데가 없다. 마치 앞에서 삼사를 총·별로 나누어서 논술한 것과 같이, 네 가지 덕이 바로 법신의 뜻이라고 말할 수 있고, 또한 이 네 가지 덕이 열반의 뜻이라고 할 수도 있다. 나머지의 다른 것(지혜·해탈)도 모두 이와 같다.

001_0533_a_01L失何得或有說者定取一邊二說皆
001_0533_a_02L若非實報 [109] 二義俱得是義云何佛地
001_0533_a_03L萬德略有二門若就捨相歸一心門
001_0533_a_04L切德相同法界故說唯是第一義身無有
001_0533_a_05L色相差別境界若依從性成萬德門
001_0533_a_06L色心功德無所不備故說無量相好莊嚴
001_0533_a_07L雖有二門而無異相是故諸說皆無障
001_0533_a_08L爲顯如是無礙法門金剛身品廣說
001_0533_a_09L之言如來之身非身是身無識是識
001_0533_a_10L心亦不離心無處亦處無宅亦宅非像非
001_0533_a_11L諸相莊嚴乃至說廣 [110] 當知如來祕藏
001_0533_a_12L法門說有說無皆有道理1) [39] [111] 門竟

001_0533_a_13L
第六四德分別略有四門一顯相門
001_0533_a_14L立意門三差別門四和諍門顯相門
001_0533_a_15L問說法身卽備四德四德之義有通
001_0533_a_16L有別別而言之常是法身之義對彼
001_0533_a_17L2) [40] [112] 身是無常故樂是涅槃之義對彼
001_0533_a_18L生死是苦海故我是佛義以對衆生不
001_0533_a_19L自故淨是法義以對非法是染濁故
001_0533_a_20L哀歎品云我者卽是佛義常者是法身
001_0533_a_21L樂者是涅槃義淨者是法身義樂者
001_0533_a_22L是涅槃義 [113] 淨者是法義且約一邊如是
001_0533_a_23L配當就實通論無所不當如前三事總
001_0533_a_24L別門說是卽四德是法身義又此四德

001_0533_b_01L이 『대반열반경』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품」 제22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봄으로써 열반을 얻었으니 상·낙·아·정을 대열반이라 한다.150)

나. 나누어서 설명함

총체적인 설명은 비록 그렇지만 이 가운데에서 나누어서 설명해 보면 네 가지 덕의 모습에는 각각 두 가지 뜻이 있다.

가) 상덕常德의 두 가지 뜻

상덕常德의 두 가지 뜻이란, 여래는 둘도 없는 성품을 통달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위의 생사를 버리지 않으니 생사와 열반이 다르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며, 무위의 열반도 취하지 않으니 열반과 생사가 다르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두 가지 뜻에 의지하여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을 여읜 것이 곧 법신의 상덕이다. 『구경일승보성론究竟一乘寶性論』151)에서 논술한다.

이 두 가지 법에 의지하여 여래의 법신에는 상바라밀常波羅蜜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두 가지란 무엇인가? 첫째는 모든 유위의 행을 없애지 않는 것이니, 단견의 치우침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둘째는 무위의 열반을 취하지 않는 것이니, 상견의 치우침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뜻을 가지므로, 『성자승만경聖者勝鬘經』 가운데에서 말씀하신다. “세존이시여, 모든 행이 무상하다고 보는 것은 단견이며 정견이 아니고, 열반이 상주라고 보는 것은 상견이며 정견이 아니오이다.152)153)

나) 낙덕樂德의 두 가지 뜻

낙덕樂德의 두 가지 뜻이란, 모든 의생신意生身154)이 지닌 고뇌를 벗어나며 그리고 모든 번뇌·습기를 소멸하는 것을 말씀하신다. 의생신이 지닌 고뇌를 벗어난다는 것은 적정寂靜의 낙을 나타내는 것이며, 번뇌·습기를 소멸한다는 것은 각지覺智의 낙덕을 나타내는 것이다. 『구경일승보성론』에서 논술하고 있는 것과 같다.

두 가지의 법에 의지하여 여래의 법신에는 낙바라밀樂波羅蜜(ⓢ sukha-pāramitā)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두 가지란 무엇인가? 하나는 모든 고에서 벗어나 모든 의생신을 소멸하기 때문이며, 또 하나는 모든 번뇌·습기에서 벗어나 모든 법을 증득하기 때문이다.155)

다) 아덕我德의 두 가지 뜻

아덕我德의 두 가지 뜻이란, 아견의 치우침에서 벗어나며 그리고 무아견의 치우침에서도 벗어나는 것을 말씀하신다. 아我도 아니고 무아도 아닐 때 드디어 대아大我를 얻기 때문이다. 『구경일승보성론』에서 논술하고 있는 것과 같다.

두 가지 법에 의지하여 여래의 법신에는 아바라밀我波羅蜜(ⓢ ātman-pāramitā)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두 가지 법이란 무엇인가? 하나는 모든 외도들의 변견에서 멀리 벗어나 허망한 나에 집착하는 희론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며, 또 하나는 모든 성문들의 변견에서 벗어나 무아에 집착하는 희론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156)

이러한 뜻을 가지므로 『입릉가경』 가운데에서 말씀하신다.


001_0533_b_01L是涅槃義望餘諸皆亦如是如德王品
001_0533_b_02L以見佛性而得涅槃常樂我淨名大
001_0533_b_03L涅槃總說雖然於中分別者四德之相
001_0533_b_04L各有二義常德二義者如來通達無二
001_0533_b_05L之性不捨有爲生死以不見生死異涅
001_0533_b_06L槃故不取無爲涅槃以不見涅槃異生
001_0533_b_07L死故依是二義離斷常乃法身常德義
001_0533_b_08L寶性論云依二種法如來法身有常
001_0533_b_09L波羅蜜應知何等爲二一者不滅一切
001_0533_b_10L諸有爲行以離斷見邊故二者不取無
001_0533_b_11L爲涅槃離常見邊故以是義故聖者勝
001_0533_b_12L鬘經說言世尊見諸行無常是斷見非
001_0533_b_13L正見見涅槃常住是常見非正見故樂
001_0533_b_14L德二義者謂離一切意生身苦及滅一
001_0533_b_15L切煩惱習氣離意生身苦顯寂靜樂
001_0533_b_16L煩惱習氣顯覺智樂如論說云依二種
001_0533_b_17L如來法身有樂波羅蜜何等爲二
001_0533_b_18L者遠離一切苦以滅一切意生身故
001_0533_b_19L者遠離一切煩惱習氣 [114] 證一切法故
001_0533_b_20L德二義是 [115] 謂離我見邊及無我見邊
001_0533_b_21L我非無我乃得大我故如論說云依二
001_0533_b_22L種法 [116] 身有我波羅蜜何等爲二一者遠
001_0533_b_23L離諸外道邊 [117] 離虛妄我戲論故二者遠
001_0533_b_24L離諸聲聞邊以離無我戲論故以是義

001_0533_c_01L
모든 외도가 지닌 변견을 벗어나 아가 없다는 사견邪見을 불태워 버린다. 아견으로 하여금 활활 타게 하여 겁이 다할 때에 타 없어지게 하는 것과 같다.157)

라) 정덕淨德의 두 가지 뜻

정덕淨德의 두 가지 뜻이란, 분별하는 성품을 통달하여 의타하는 성품을 없애는 것을 말씀하신다. 분별하는 성품을 통달하여 자성의 청정함을 나타내며, 의타하는 성품을 소멸하여 방편의 청정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구경일승보성론』에서 논술하고 있는 것과 같다.

두 가지 법에 의지하여 여래의 법신에는 정바라밀淨波羅蜜(ⓢ śubha-pāramitā)이 있다. 두 가지 법이란 무엇인가? 하나는 본래 자성이 청정하여 모습이 같기 때문이며, 또 하나는 더러운 때를 벗어 청정하여 모습이 수승하기 때문이다.158)

마) 문답

왜 상덕常德과 아덕我德에서는 두 가지 변견을 대치하여 하나를 나타내고, 낙덕樂德과 정덕淨德에서는 하나의 변견을 버리고 둘을 말하는가?
하나는 현략문顯略門이며 또 다른 하나는 영론문影論門인데 그것은 논문을 지은이의 선교방편에 따른 진술이기 때문이다.

② 의의를 건립함

둘째, (네 가지 덕을) 세우는 뜻을 증명하려고 한다.
() 열반은 온갖 공덕이 벌써 원만하게 갖추어져 있는데 왜 홀로 네 가지 덕을 세우는가?
() 네 가지 덕을 세우는 까닭에는 대략 네 가지 뜻이 있다. 그 첫째는 네 가지 장애를 제거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네 가지 환난을 뒤엎기 때문이고, 셋째는 네 가지 전도를 대치하기 때문이고, 넷째는 네 가지 상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가. 네 가지 장애를 제거함

“네 가지 장애를 제거한다.”라고 하는 것은, 범부와 성인 등 네 부류의 사람들에게 각각 한 가지씩의 장애가 있기 때문이다. 첫째, 일천제一闡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비방하여 정덕淨德을 가로막고 생사를 탐착하여 그것을 정법淨法으로 삼기 때문이다. 둘째, 외도는 아를 집착하여 아덕我德을 가로막고 진아를 알지 못하여 허망한 나를 집착하기 때문이다. 셋째, 성문은 고뇌를 두려워하여 낙덕樂德을 가로막고 그것이 고뇌라는 것을 알지 못하여 도리어 큰 즐거움(大樂)으로 삼기 때문이다. 넷째, 연각은 마음을 버려 상덕常德을 가로막고 상덕의 이익을 버려서 단멸을 취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네 가지 장애를 없애기 위하여 보살은 네 가지 수승한 인행을 닦는다. 그것은 말하자면 신심信心·반야般若·삼매三昧·대비大悲를 가리키는데, 이들을 차례로 닦아 정·아·낙·상을 증득하게 된다. 『구경일승보성론』의 게송에서 읊는 것과 같다.

有四種障礙  네 가지 장애가 있느니라.
謗法     부처님의 가르침을 비방하는 것,
及著我    아我에 집착하는 것,
怖畏世間苦  세간의 고를 두려워하는 것,
捨離諸衆生  모든 중생을 버리는 것이다.

闡提及外道  일천제·외도,
聲聞及緣覺  성문·연각들아,
信等四種法  신심 등 네 가지 법이야말로
淸淨因應知  청정한 원인임을 알아야 한다.159)


001_0533_c_01L楞伽經云離諸外道邊 [118] 燒無我見
001_0533_c_02L令我見熾燃如劫盡火燃淨德二義者 [119]
001_0533_c_03L通達分別性除滅依他性故通達分別 [120]
001_0533_c_04L顯自性淨滅依他性顯方便淨如論言
001_0533_c_05L依二種法如來法身有淨波羅蜜何等
001_0533_c_06L爲二一者本來自性淸淨以同相故
001_0533_c_07L者離垢淸淨以勝相故何故常與我
001_0533_c_08L對二邊顯一而於樂淨德遣一邊說二
001_0533_c_09L是顯略門及影論門其作論者以巧
001_0533_c_10L便術也第二明其立四意者萬德旣圓
001_0533_c_11L何獨立四立四之由略有四義除四障
001_0533_c_12L翻四患故對四倒故離四於 [121]
001_0533_c_13L四障者凡聖四人各有一障一者闡提
001_0533_c_14L謗法障於淨德貪生死爲淨法故二者
001_0533_c_15L外道著我障於我德不了眞我執虛妄 [122]
001_0533_c_16L三者聲聞畏苦障於樂德不知彼苦
001_0533_c_17L卽是大樂故四者緣覺捨心障於常德
001_0533_c_18L捨於常利而取斷滅故爲除如是四種
001_0533_c_19L障故菩薩修習四種勝因所謂信心般
001_0533_c_20L若三昧大悲次第得證淨我樂常如寶
001_0533_c_21L性論偈云有四種障礙謗法及著我
001_0533_c_22L畏世間苦捨離諸衆生闡提及外道聲
001_0533_c_23L聞及緣覺信等四種法淸淨因應知
001_0533_c_24L「身」疑「事」{編}「完」更勘{編}

001_0534_a_01L
나. 네 가지 환난을 뒤엎음

“네 가지 환난患難을 뒤엎는다.”라고 하는 것은, 분단생사分段生死160)에는 네 가지 환난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무상·고·무아·부정’을 가리킨다. 이러한 네 가지 환난을 뒤엎기 위하여 열반에 네 가지 덕을 건립하는 것이다. 이 뜻은 알 수 있기 때문에 헛되이 경에 있는 글을 인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사성제문에서는 공과 무아를 내세우는데, 이 가운데에서는 공을 폐지하고 대신 부정不淨을 내세우는가? 사성제의 도리는 정관의 경계이기 때문에 이理를 더욱 수승하게 여기므로 공을 내세운다. 그러나 이 네 가지 환난의 문은 염처念處161)의 경계이기 때문에 네 가지 전도를 대치하므로 부정을 내세운다.

다. 네 가지 전도를 대치함

“네 가지 전도를 대치한다.”라고 하는 것은, 성문의 네 가지 전도가 없는 행이 비록 범부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유위의 네 가지 전도를 대치한다고 하더라도, 법신이 지닌 무위의 네 가지 덕을 뒤엎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섯 가지 구성 요소(五蘊)가 바로 법신인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위에 대한 네 가지 전도를 대치하려고 법신의 네 가지 덕을 건립하는 것이다. 『구경일승보성론』에서 논술하고 있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네 가지 전도를 대치하지만, 여래의 법신에 의지하면 다시 이것도 전도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게송에서 “법신에 대해 전도 되었기 때문에”라고 하였으니, 이러한 전도를 대치하려고 네 가지 여래 법신의 공덕이 있다고 설하였다.162)

라. 네 가지 상에서 벗어남

“네 가지 상相에서 벗어난다.”라고 하는 것은, 변역생사變易生死163)에는 네 가지 상이 있는데, 연상緣相에서부터 괴상壞相에 이르기까지 네 가지를 말씀하신다. 이러한 네 가지 상을 벗어나기 위하여 네 가지 덕을 건립한다. 왜냐하면 연상의 상태인 무명의 염법染法에서 벗어나려고 정덕淨德을 세우고, 인상因相의 상태인 업의 얽매임에서 벗어나려고 아덕我德을 세우며, 생상生相의 상태인 미세한 고에서 벗어나려고 낙덕樂德을 세우고, 괴상의 상태인 무상의 소멸을 벗어나려고 상덕常德을 세우는 것이다. 『구경일승보성론』에서 논술하고 있는 것과 같다.

이 네 가지 바라밀 등은 무루계 가운데에 안주하는 성문·벽지불, 그리고 큰 힘을 얻은 자재한 보살조차 여래의 공덕·법신인 제일바라밀第一波羅蜜(ⓢ parama-pāramitā)을 증득하려는 데에 네 가지 장애가 있다. 첫째는 연상緣相(ⓢ pratyaya-lakṣaṇa)이며, 둘째는 인상因相(ⓢ hetu-lakṣaṇa)이고, 셋째는 생상生相(ⓢ saṃbhava-lakṣaṇa)이며, 넷째는 괴상壞相(ⓢ vibhava-lakṣaṇa)이다. 연상이라는 것은 무명주지를 말하며, 바로 이 무명주지는 행行 때문에 연이 된다. 무명이 행을 연하는 것처럼 무명주지도 또한 이와 같이 연하기 때문이다. 인상이라는 것은,

001_0534_a_01L四患者分段生死有四種患謂無常苦
001_0534_a_02L無我不淨爲翻如是四種患法故於涅
001_0534_a_03L槃建立四德此義可見不勞引文
001_0534_a_04L何故四 [123] 開空無我此中廢空立不淨
001_0534_a_05L四諦道理是正觀境以理爲勝所以
001_0534_a_06L開空今四患門是念處境爲對四倒故
001_0534_a_07L立不淨也對四倒者謂聲聞四無倒行
001_0534_a_08L雖對治凡夫有爲四倒而翻法身無爲
001_0534_a_09L四德以不了五陰卽是法身故爲對治
001_0534_a_10L此無爲四倒是故建立法身四德如寶
001_0534_a_11L性論云如是四種顚倒對治若依如來
001_0534_a_12L法身復是顚倒應知偈言於法身中倒
001_0534_a_13L對治此例 [124] 說有四種法身功德乃至
001_0534_a_14L廣說離四相者變易生死有四種相
001_0534_a_15L所謂緣相乃至壞相離此四相故建立
001_0534_a_16L四德何者以離 [125] 相無明染故立於淨德
001_0534_a_17L以離因相業所繫故立於我德離於生
001_0534_a_18L相微細苦故立其樂德離於壞相無常
001_0534_a_19L滅故立其常德如論說言住無漏界中
001_0534_a_20L聲聞辟支佛得大力自在菩薩爲證如
001_0534_a_21L來功德法身有四種障何等爲四一者
001_0534_a_22L緣相二者因相三者生相四者壞相
001_0534_a_23L緣相者謂無明住地與行作緣如無明
001_0534_a_24L緣行無明倒 [126] 緣亦如是故因相者

001_0534_b_01L무명주지가 연하는 행을 말하며, 바로 이 무명주지가 연하는 행을 인으로 삼는다. 행이 식을 연하는 것처럼 무루업도 또한 이와 같이 연하기 때문이다. 생상이라는 것은, 무명주지가 연이 되고 무루업이 인이 되어서 세 가지 의생신(성문·벽지불·대력 보살)을 낳는 것을 말씀하신다. 네 가지의 취(欲·見·戒禁·我語)가 연이 되고 유루업이 인이 되어서 삼계를 낳는 것처럼 세 가지 의생신도 또한 이와 같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괴상이라는 것은, 세 가지 의생신이 연이 되어 불가사의한 변역생사가 있는 것을 말씀하신다. 생이 연이 되므로 노사가 있는 것과 같다. ……164)

마. 문답

모든 성문이 네 가지 전도를 일으키는 것은 정관正觀에 들어 있을 때인가 그렇지 않으면 정관에서 나왔을 때인가?
정관에 들어 있을 때에는 바로 인공人空을 증득하여 모든 이름과 말의 분별을 벗어나기 때문에, 그때에는 네 가지 전도가 일어나지 않지만, 정관에서 나온 뒤에는 네 가지 전도가 일어난다. 네 가지 전도의 상에는 총체적으로 일으키는 상이 있고 개별적으로 일으키는 상이 있다. 개별적으로 일으키는 상이란, 그들은 보리수菩提樹 아래에서 성도한 몸을 실제로는 혹업惑業에서 얻은 과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상·고·무아 등이라 여기므로, 이 화신이 곧 진신임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이것이 바로 법신의 네 가지 덕을 전도시키는 것이다. 총체적으로 일으키는 상이란, 통틀어 오온을 고·무상 등으로 보지만, 오온이 곧 법신임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이것이 바로 법신의 네 가지 덕을 전도시키는 것이다.
네 가지 덕을 건립하는 뜻을 증명하려는 부문을 마친다.

③ 차별을 해석함

셋째, (네 가지 덕의) 차별을 논술하는 부문이라는 것은, 네 가지 덕의 차별되는 점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여기서는 한 문(一門)에 의지하여 간추려서 두 가지 덕(二德)과 네 가지 덕(四德)으로 나타내려고 한다. 말하자면 상常·아我에서 각각 두 가지를 말하며, 낙樂·정淨 가운데에서 각각 네 가지의 차별을 전개하려고 한다.

가. 상常

두 가지 상常이란, 법의 상주와 부처님의 상주이다. 법의 상주라는 뜻은,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소멸하는 것도 아니므로, 이것은 상주하는 법신이라는 뜻이다. 부처님의 상주라는 뜻은, 늙는 것도 아니고 죽는 것도 아니므로, 이것은 상주하는 수명이라는 뜻이다. 이 『대반열반경』 아래의 글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여래의 장수는 모든 장수 가운데서 최상最上·최승最勝이다. 그리고 여래가 얻은 상주하는 법法은 모든 법 가운데에서 첫째이다.165)

여기서 말하는 상주하는 법은 바로 법신의 법이며, 장수는 보신의 수명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법이 상주하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도 상주한다. 법은 바로 법신불이며, 부처님은 보신불이고, 또 모든 부처님은 화신불이다. 이러한 뜻에 의지하므로, 진제가 번역한 『섭대승론석』에서 논술한다.


001_0534_b_01L謂無明住地緣行此以爲因如行緣識
001_0534_b_02L無漏業緣亦如是故生相者謂無明住
001_0534_b_03L地緣無漏業因生三種意生身亦如是
001_0534_b_04L壞相者謂三種意生身緣不可思議
001_0534_b_05L變易生死如依生緣故有老死此亦如
001_0534_b_06L是故乃至廣說諸聲聞起四顚倒
001_0534_b_07L在正觀時爲在出觀時正入觀時
001_0534_b_08L證人空遠離一切名言分別故於彼時
001_0534_b_09L不其四倒 [127] 觀後起此四倒四倒之相
001_0534_b_10L總有別別起相者彼計樹下成道之身
001_0534_b_11L實是惑業所感之報故謂無常苦無我
001_0534_b_12L不了是化卽眞是卽倒於法身四德
001_0534_b_13L總起相者總觀五陰苦無常等不達五
001_0534_b_14L陰卽是法身是卽倒於法身四德建立
001_0534_b_15L門竟次第三明差別門者四德差別
001_0534_b_16L有衆多且依一 [128] 略顯二四謂於常我
001_0534_b_17L說二種樂淨之中各開四別二種常者
001_0534_b_18L法常佛常法常義者無生無滅是常身
001_0534_b_19L佛常義者不老不死是常壽義如下
001_0534_b_20L文言如來長壽於諸壽中最上最勝
001_0534_b_21L得常法於諸法中最爲第一此言常法
001_0534_b_22L卽是法法 [129] 言長壽者是報身壽又言
001_0534_b_23L法常故諸佛亦常法卽法身佛是報佛
001_0534_b_24L又諸佛者亦是化佛依是義故攝大乘 [130]

001_0534_c_01L
법신은 응신·화신의 두 불신의 근본根本으로, 근본은 본디 상주한다. 지말枝末은 근본에 의지하면서 상속하여 늘 존재한다. 그러므로 지말도 또한 상주한다. …… 늘 안락을 받는 것과 같고 늘 먹을 것을 베풀어 주는 것과 같다.166)

보신·화신의 두 불신이 상주하는 것도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구경일승보성론』167) 가운데에서 일곱 가지 인연에 의지하여 상주하는 수명의 뜻을 이루고, 또한 세 가지 비유로써 상주하는 불신佛身을 나타낸다. 먼저 일곱 가지 인연이란 다음과 같다.

첫째, 인연은 끝이 없으므로 상주하는 수명을 얻는다. 말하자면 한량없는 겁으로부터 신身·명命·재財를 희사하여 정법을 섭취한다. 정법은 본디 다함이 없고 끝이 없으며, 벌써 다함이 없는 인을 닦았으므로 끝이 없는 과보를 얻는다.168)

그리고 게송으로 읊는다.

신身·명命·재財 버려,
모든 부처님의 법을 섭취하노라.169)

둘째, 중생은 끝이 없으므로 상주를 얻는다. 말하자면 처음으로 발심을 하였을 때에 네 가지 서원을 맺어 중생이 모두 제도되면 나의 서원이 끝날 것이다. 그런데 중생이 끝이 없기 때문에 나의 서원도 또한 끝이 없다. 이러한 본원本願을 완전하게 원만성취해야 하기 때문에 미래제가 다하도록 상주하여 다함이 없다.170)
그리고 게송으로 읊는다.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본원을 완전하게 원만성취해야 하느니라.171)

셋째, 대비가 원만하므로 상주를 얻는다. 모든 보살은 소분으로 대비를 가지고도 오히려 생사에 오래 머물면서 열반에 들어가지 않는다. 하물며 여래는 순수하게 청정한 대비의 원만함을 얻었는데, 어찌 얽매임을 버리고 멸진에 들어가겠는가.172)
그리고 게송으로 읊는다.

청정한 불신을 얻어
대비심을 일으키느니라.173)

넷째, 신족이 원만하므로 상주를 얻는다. 세간에서 신족의 힘을 얻은 이도 오히려 수명이 40겁을 살게 된다. 하물며 여래는 네 가지 신족을 갖추었는데, 어찌 수명이 무량한 겁을 살지 못하겠는가.174)
그리고 게송으로 읊는다.

네 가지 여의신족을 닦아
그 힘에 의지하여 세상에 머무느니라.175)

다섯째, 미묘한 지혜를 성취하므로 상주를 얻는다. 그것은 생사라거나 열반이라거나 하는 분별을 벗어나서 둘도 없는 평등을 몸소 증득하여 부동·불출하므로 드디어는 멸진이 없다.176)
그리고 게송으로 읊는다.

미묘한 지혜를 성취해서
열반을 이루려는 마음마저 벗어나 있느니라.177)

여섯째, 삼매三昧를 성취하므로 상주를 얻는다. 세간의 사람들도 청정한 선정을 얻으면 오히려 물·불·칼·화살에 상해를 입지 않는다.

001_0534_c_01L法身爲二身本本覺常住 [131] 來依於
001_0534_c_02L相續恒在如恒受樂如恒施食二身
001_0534_c_03L常住應如是知寶性論中依七種因
001_0534_c_04L常命義復以三譬顯常身義七種因者
001_0534_c_05L一因緣無邊故得常命謂無量劫來
001_0534_c_06L身命財攝取正法無窮無盡旣修無窮
001_0534_c_07L之因還得無盡之果偈云棄捨身命財
001_0534_c_08L攝取諸佛法故二衆生無邊故得常住
001_0534_c_09L謂初發心時結四弘誓衆生若盡我願
001_0534_c_10L乃盡衆生無盡我願亦無盡爲究竟滿
001_0534_c_11L是本願故窮未來際常住不盡偈曰
001_0534_c_12L利益衆生究竟滿本願故三大悲圓滿
001_0534_c_13L故常者若諸菩薩分有大悲尙能久住
001_0534_c_14L生死不入涅槃何況如來純得淸淨大
001_0534_c_15L悲圓滿豈能繫捨入滅盡耶偈言得淸
001_0534_c_16L淨佛身起大悲心故四神足圓滿故常
001_0534_c_17L世間有得神足力者尙能住壽四十
001_0534_c_18L小劫豈況如來具四神足而不能住壽
001_0534_c_19L無量劫耶偈言修四如意足依彼力住
001_0534_c_20L世故五妙智成就故常者遠離生死涅
001_0534_c_21L槃分別體證無二不動不出是故畢竟
001_0534_c_22L無有滅盡偈言以成就妙智離有涅槃
001_0534_c_23L心故六三昧成就故常者世間有人淨
001_0534_c_24L得禪定者尙能不爲水火刀箭所傷

001_0535_a_01L하물며 여래는 늘 깊은 선정에 들어 있는데 외연外緣으로써 그를 파괴할 수 있겠는가.178)
그리고 게송으로 읊는다.

늘 마음에 삼매를 얻느니라.179)

일곱째, 안락을 성취하므로 상주를 얻는다. 벌써 이치의 근원으로 돌아와서 큰 안락을 얻는다. 안락과 서로 어울리기 때문에 상주를 얻는다.180)
그리고 게송으로 읊는다.

안락을 성취하여 서로 어울리노라.181)

이 일곱 가지 인연에 의지하므로 상주하는 수명을 얻는다.

또한 세 가지 비유로써 상주하는 불신佛身을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세간의 법에 물들지 않으므로 상주한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법신은 늘 세간에 있지만 네 가지 더러움이 이를 더럽히지 못하고 네 가지 모습(相)이 이를 모습으로 드러내지 못한다.182)

그리고 게송으로 읊는다.

늘 세간에 있지만
세간의 법에 더럽혀지지 않느니라.183)

둘째, 사마死魔에서 벗어나므로 상주한다는 것이다. 세간에서 감로가 사람으로 하여금 오래 살게 하듯, 금강삼매金剛三昧(ⓢ vajrasamādhi)는 번뇌의 악마를 소멸시켜 버린다. 그러므로 상주하는 과보를 증득하여 사마死魔에서 벗어난다.184)
그리고 게송으로 읊는다.

청정한 감로의 경지를 얻으므로
모든 악마에서 벗어났느니라.185)

셋째, 본디 생겨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주한다는 것이다. 법신의 체는 본디부터 담연하여 본디 없었던 것이 이제 와서 있는 것이 아니며, 먼저 있었던 것이 뒤에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186)
그리고 게송으로 읊는다.

모든 부처님은 본디 생겨나는 것이 아니며,
본디 적정하기 때문이니라.187)

그러므로 저 『구경일승보성론』의 게송을 총체적으로 결론지으면, 처음 일곱 가지 비유는 여래의 색신이 상주하는 것을 말하며, 뒤의 세 가지 비유는 선서善逝의 법신이 상주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것을 개별적으로 보면, 상주하는 수명은 바로 보리菩提(깨달음)의 공덕이며, 상주하는 불신은 바로 열반의 공덕이다. 그러나 이것을 다시 총체적으로 보면, 상주하는 불신이든 상주하는 수명이든 모두 열반이다. 그 이유는 앞의 체상을 나타내는 부문에서 말한 것과 같다.

나. 낙樂

네 종류의 낙樂188)이라고 하는 것은 첫째, 수受를 끊는 낙(斷受樂)이니, 세 가지 분별하는 수를 벗어나서 고도 없고 낙도 없으므로 대락大樂이라 한다. 둘째, 적정의 낙(寂靜樂)이니, 모든 행이 유전하여 일어나는 행고行苦(ⓢ saṃskāra-duḥkha)를 벗어나서 큰 적정을 얻으므로 대락이라 한다. 셋째, 각지의 낙(覺知樂)이니, 무지하여 받게 되는 고고苦苦(ⓢ duḥkha-duḥkhatā)를 벗어나 알지 못하는 것이 없으므로 대락이라 한다. 넷째, 불괴의 낙(不壞樂)이니, 무상하여 일어나는 노쇠의 괴고壞苦를 벗어나서 금강신을 얻으므로 대락이라 한다.
개별적으로 이것을 논술하면 앞의 두 가지 낙은 열반의 낙을 말하는 것이며,

001_0535_a_01L況如來常在深定而以外緣可得壞耶
001_0535_a_02L偈言常得心三昧故七成就安樂故常
001_0535_a_03L旣歸理原得大安樂安樂相應故得
001_0535_a_04L常住偈言成就安樂相應故依此七
001_0535_a_05L故得常壽復以三喩顯常身者一世
001_0535_a_06L法不染故常住者如來法身常在世間
001_0535_a_07L四染不能染四相不能相偈言常在於
001_0535_a_08L世間不爲世法染故二遠離死魔故常
001_0535_a_09L住者如世門 [132] 甘露令人久長生金剛三
001_0535_a_10L昧滅煩惱魔故證常果遠離死魔偈言
001_0535_a_11L得淨甘露處故離一切魔故三本來不
001_0535_a_12L生故常住者法身之體本來湛然以非
001_0535_a_13L本無今有故非先有後無偈言諸佛本
001_0535_a_14L不生本來寂靜故故彼論偈總結而言
001_0535_a_15L初七種譬喩如來色身常後三種譬喩
001_0535_a_16L善逝法身常若依別門常命是菩提德
001_0535_a_17L常身是涅槃德就通相門常身常命皆
001_0535_a_18L是涅槃其義如前出體門說四種樂者
001_0535_a_19L一斷樂受 [133] 以離三種分別受 [134] 二寂靜
001_0535_a_20L樂遠離 [135] 故無苦無樂乃爲大樂諸行流
001_0535_a_21L轉行苦得大寂靜故爲大樂三覺知樂
001_0535_a_22L以離無知所受苦苦無所不知故爲大樂
001_0535_a_23L四壞不 [136] 遠離無常衰老壞苦得金剛
001_0535_a_24L故爲大樂別而論之前之二種是涅

001_0535_b_01L뒤의 두 가지 낙은 보리의 낙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이를 다시 총체적으로 논술하면 아무런 차별이 없으므로 보리와 열반은 평등하여 둘이 아니고 차별도 없다. 이 『대반열반경』 아래의 글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대락大樂이 있기 때문에 열반이라고 한다. 열반은 따로 낙이 없다. 이 네 가지 낙을 가지므로 열반이라고 한다. ……189)

다. 아我

두 가지 아我라는 것은 법아法我와 인아人我이다. 법아라고 하는 것은 본체가 진실하다는 뜻이다. 이 『대반열반경』 「애탄품」 제3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만일 법이 실제·진실·상주·주재·의성依性이므로 변역하지 않으면, 이것을 아我라고 한다.190)

인아라고 하는 것은 자재自在라는 뜻이니 『대반열반경』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품」 제22에 있는 게송 가운데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191) 자재에 여덟 가지가 있다.
첫째, 많음과 적음의 자재(多少自在)이다. 『대반열반경』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능히 한 몸을 가지고 많은 몸으로 보이게 한다. 몸의 수가 많고 적음이 마치 미진과 같으므로 시방의 한량없는 세계를 가득 채운다. 여래의 몸은 실제로는 미진이 아니지만 자재하기 때문에 미진같이 많은 몸을 드러낸다.192)

둘째, 크고 작음의 자재(大小自在)이다. 『대반열반경』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하나의 미진과 같은 몸으로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차게 함을 보인다. 부처님의 몸이 가없다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차지는 못한다. 그러나 자재하기 때문에 삼천대천세계를 가득 채운다.193)

셋째, 가벼움과 무거움의 자재(輕重自在)이다. 『대반열반경』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삼천대천세계를 가득 채운 몸으로 가볍게 들어 공중을 날아서 스무 개의 갠지스 강(ⓢ Ganges)의 모래알처럼 많은 부처님의 세계를 지나가도 아무런 장애가 없다. 여래의 몸은 실제로는 경중이 없지만 자재하기 때문에 가볍게도 되고 무겁게도 된다.194)

넷째, 같음과 다름의 자재(一異自在)이다. 『대반열반경』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여래는 한마음으로 안주하여 동요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량없는 형류形類들을 각각 마음이 있도록 변화시켜 보이게 한다. 여래는 어느 때에 한 가지 일을 지으면서 중생도 각각 일을 이루게 한다. 여래의 몸은 한국토에 상주하지만, 다른 국토의 중생도 다 보게 한다.195)

다섯째, 경계를 대하는 자재이다. 『대반열반경』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여래는 하나의 감관을 가지고도 색도 보고 소리도 들으며 내지 법도 안다. 그리고 여래는 여섯 감관을 가지고도 또한 색도 보지 않고 소리도 듣지 않으며 내지 법도 인지하지 않는다. (자재하므로) 감관으로 하여금 자유자재하게 한다. (이와 같은 자재를 대아大我라고 부른다.)196)

여섯째, 법을 얻는 자재이다. 『대반열반경』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001_0535_b_01L槃樂後二種者是菩提樂通相而言
001_0535_b_02L卽無別異以菩提涅槃無二無別故
001_0535_b_03L下文云有大樂故名大涅槃大涅槃無
001_0535_b_04L以四樂故名大涅槃乃至廣說二種
001_0535_b_05L我者法我人我言法我者是體實義
001_0535_b_06L如哀歎品云是眞是實是依是常不變
001_0535_b_07L [137] 是自在義如德王品初偈中說
001_0535_b_08L在有八一多少自在如經言能示一
001_0535_b_09L身以爲多身身數多少猶如微塵充滿
001_0535_b_10L十方無量世界如來之身實非微塵
001_0535_b_11L自在故現微塵身二大小自在如經言
001_0535_b_12L示一塵身滿三千界佛身無邊實不滿
001_0535_b_13L於大千世界以自在故滿大千界故
001_0535_b_14L輕重自在如經言以滿大千世界之身
001_0535_b_15L輕擧飛空過恒沙等諸佛世界而無障礙
001_0535_b_16L如來之身實無輕重以自在故能爲輕
001_0535_b_17L重故四一異自在如經言如來一心
001_0535_b_18L安住不動所可示化無量形類各令有
001_0535_b_19L如來有時成 [138] 造一事而亦 [139] 衆生各各
001_0535_b_20L成辨如來之身常住一立 [140] 而令他立一
001_0535_b_21L切悉見故五者對境自在故如經言
001_0535_b_22L如來一根亦能見色聞聲乃至知以自
001_0535_b_23L [141] 如來六根亦不見色不聞聲乃至不
001_0535_b_24L知法 [142] 根自在六者得法自在如經

001_0535_c_01L
자재하기 때문에 모든 법을 얻으면서도 여래의 마음에는 또한 얻는다는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얻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이것이 실제로 있다면 얻는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얻는다고 말하겠는가? 만일 여래로 하여금 얻는다고 하는 생각을 하면, 그렇다면 곧 모든 부처님은 열반을 얻지 못할 것이다. 얻을 것이 없기 때문에 열반을 얻는다고 말하고, 자재하기 때문에 모든 법을 얻는다. 모든 법을 얻기 때문에 대아라고 한다.197)

이 뜻은 바로 모든 법이 그러한 것이 아니면서 그러한 것이 아닌 것도 아님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영원히 얻을 것이 없으며, 그러한 것이 아닌 것도 아니기 때문에 얻지 못하는 것이 없다. 이와 같이 아무런 장애가 없으므로 대자재라고 한다.
일곱째, 연설을 하는 것의 자재이다. 『대반열반경』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여래가 한 게송의 뜻을 연설하여 한량없는 겁(ⓢ kalpa, 劫波)을 경과하더라도 그 뜻은 다할 수 없다. 그렇지만 나는 법을 말하고 그들은 법을 듣는다는 생각을 내지 아니하며, 또한 한 게송에 대한 생각도 내지 않는다. 세간에서 사는 사람은 네 구절을 한 게송으로 삼는다. 세속에 따르기 때문에 게송이라고 한다. 모든 법성은 하나도 말하는 것이 없다. 자재하기 때문에 여래는 연설하며 연설하기 때문에 이를 대아라고 한다.198)

여덟째, 두루 드러내는 자재이다. 『대반열반경』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여래는 모든 곳에 두루 가득한 것이 마치 허공과 같다. 허공의 성품을 볼 수 없는 것처럼 여래도 또한 그러하므로 실제로 볼 수 없다. 그렇지만 자재하기 때문에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보게 한다.199)

이것은 나타내는 것이 있으면 곧 나타내지 못하는 것이 있지만, 여래는 모든 것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이것을 개별적으로 논술하면, 진실한 아我는 열반의 아我를 말하며, 자재한 아我는 깨달음의 아我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총체적으로 논술하면, 열반의 아我와 깨달음의 아我는 평등하므로 아무런 차별이 없다. 그러므로 『대반열반경』 속에서 통틀어 이것을 결론지어, “이와 같은 대아를 대열반이라고 한다.”200)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라. 정淨

네 가지 정淨이라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과정果淨이라고 한다. 또한 이것을 유정有淨이라고도 하는데 이십오유二十五有의 과보를 벗어나기 때문이다. 둘째, 업정業淨이라고 한다. 또한 이것을 인정因淨이라고도 하는데 범부의 모든 업인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셋째, 신정身淨이라고 한다. 불신은 상주하기 때문이다. 넷째, 심정心淨이라고 한다. 부처님의 마음에는 번뇌가 없기 때문이다. 앞의 두 가지 과정과 업정은 이덕離德이며, 뒤의 두 가지 정인 신정과 심정은 수덕修德이다. 이덕離德과 수덕修德은 서로 다른 것 같지만 다 같은 열반이다. 『대반열반경』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순정純淨이기 때문에 대열반이라고 한다.

001_0535_c_01L以自在故得一切如來之心亦無得
001_0535_c_02L何以故若是有者可知爲得實無
001_0535_c_03L所有云何名得若使如來計有得想
001_0535_c_04L卽諸佛不得涅槃以無得故名得涅槃
001_0535_c_05L以自在故得一切法得諸法故名爲大
001_0535_c_06L是意正顯諸法非然而非不然而不
001_0535_c_07L然故永無所得非不然故無所不得
001_0535_c_08L是無障礙故名大自在七者演說自在
001_0535_c_09L如經言如來宣說一偈之義過無量劫
001_0535_c_10L義亦不盡而不生念我說彼聽一切法
001_0535_c_11L亦無有說以自在故如來演說以名大
001_0535_c_12L我故八者普現自在 [143] 如來遍滿
001_0535_c_13L一切諸處猶如虛空虛空之性不可得
001_0535_c_14L如來亦爾實不可見以自在故令
001_0535_c_15L一切見是明有所現者卽當有所不現
001_0535_c_16L如來都無所不現也別門而言眞實我
001_0535_c_17L者是涅槃我自在我者是菩提我就實
001_0535_c_18L通論卽無別異是故經中總結之言
001_0535_c_19L是大我名大涅槃四種淨者一名果淨
001_0535_c_20L亦是有淨以離二十五有果故二名業
001_0535_c_21L亦是因淨以離凡夫諸業因故三名
001_0535_c_22L身淨佛身常住故四名心淨佛心無
001_0535_c_23L漏故前二離德後二修德離修雖異
001_0535_c_24L是涅槃如經言以純淨故名大涅槃

001_0536_a_01L왜 순정이라고 하는가? 정淨에는 네 가지가 있다. ……201)

이것을 총체적으로 논술하면, 이와 같은 네 가지 덕은 삼사三事를 벗어나지 않으며, 삼사三事는 바로 두 가지 아我에 들어오고, 두 가지 아我는 하나의 열반이다. 일一은 바로 일체一切이며 일체一切는 바로 일一이므로, 이것을 여래의 비장秘藏이라고 한다.

④ 화쟁을 해석함

다음으로 넷째, 이론적 다툼을 화회和會함을 밝히는 부문이다.
이론적 다툼이 일어나는 데에는 여러 실마리가 있지만, 지금 치우쳐서 이론적 다툼을 일으키는 문제는 ‘법신法身은 상주常住하고 화신化身은 기멸起滅한다’라는 내용이다. 이 두 가지 불신에 대해서는 여러 스승들의 주장이 같지 않다.
오직 보신報身에 대해서만 두 가지 집착하는 견해가 따로 일어난다. 그 따로 일어나는 이론적 다툼은 두 가지 견해에 지나지 않으니, ‘보신은 상주이다’라고 집착하는 것과 ‘보신은 무상이다’라고 집착하는 것이다.202)

가. 보신은 상주라고 집착함

보신은 상주라고 집착하는 것에도 또한 두 학설이 있다.

가) 보신의 공덕은 생겨나지만 소멸하지는 않음

첫째 학설은, 보신의 공덕은 생겨나기는 하지만 소멸하지는 않는다고 논술한다. 그것은 생인生因이 소멸하기 때문에 생겨나지 않을 수 없다. 이理를 증득하는 것이 구경이기 때문에 상相을 벗어나며, 상을 벗어나기 때문에 상주하여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 보신의 공덕은 생인生因에서 얻지만 생상生相을 벗어남

둘째 학설은, 보신의 공덕은 비록 생인生因에서 얻지만 생상生相을 벗어난다고 논술한다. 비록 본디 없었던 것이 비로소 있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본디 없었던 것이 이제 있게 된 것은 아니다. 본디 이제 있게 된 것이 아니라면 또한 뒤에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도리로 말미암아 삼제三際를 벗어나며, 삼제를 벗어나므로 틀림없이 상주한다. 그러나 도를 깨달은 뒤에야 비로소 (보신의 공덕이) 성취되므로, 본디 시초가 있는 것이 아니다. 삼제를 벗어나기 때문에 또한 생겨나는 것도 아니며, 생겨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또한 소멸하는 것도 아니다.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소멸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틀림없이 이것은 무위이며 상주하여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일 이와 같은 정견을 얻을 수 없다면 틀림없이 유위이다, 무위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 『대반열반경』 「순타품」 제2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오직 내가 이제 우치하여서 지혜의 눈이 없음을 스스로 꾸짖어야 한다. 여래의 정법은 불가사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여래는 틀림없이 유위라든지 또는 무위라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만일 정견을 가진 이라면 여래는 틀림없이 무위라고 주장할 것이다.203)

『대반열반경』 「장수품」 제3에서 말씀하신다.

늘 마음을 집중하여 상주常住라는 이 두 글자를 닦으면 부처님은 상주하느니라. 만약 이 두 글자를 닦는 사람이 있으면 이 사람은 나의 소행을 따라서 내가 다다른 경지에 이를 것임을 알아야 하느니라.204)


001_0536_a_01L云何純淨淨有四種乃至廣說故總而
001_0536_a_02L言之如是四德不出三事三事卽入於
001_0536_a_03L二種我二種我者一大涅槃一卽一切
001_0536_a_04L一切卽一是名如來祕密藏也次第四
001_0536_a_05L明和相諍論諍論之興乃有多端而於
001_0536_a_06L當偏起異諍法身常住化身起滅於此
001_0536_a_07L二身諸說不同唯於報身二執別起
001_0536_a_08L起之諍不過二途謂執常住及執無常
001_0536_a_09L執常之內亦有二家一家說云報佛功
001_0536_a_10L有生無滅生因所滅故不得無生
001_0536_a_11L理究竟故離相離相故常住不變第二
001_0536_a_12L家云報佛功德雖生因得而離生相
001_0536_a_13L是本無始有而非本無今有旣非今有
001_0536_a_14L亦非後無由是道理遠離三際離三
001_0536_a_15L際故凝然常住然道後始成故非本有
001_0536_a_16L離三際故 [144] 有生非有生故亦得
001_0536_a_17L無滅無生滅故定是無爲常住不變
001_0536_a_18L未能得如是正見不應定說有爲無爲
001_0536_a_19L如純陀章云唯當嘖自 [145] 我今愚癡未有
001_0536_a_20L [146] 如來正法不可思議是故不應宣
001_0536_a_21L說如來定是有爲定是無爲若正見者
001_0536_a_22L應說如來定是無爲長壽品云常當繫
001_0536_a_23L修心 [147] 是二字佛常住若有修習此二
001_0536_a_24L [148] 當知是人隨我所行至我至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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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다른 곳에서 상주가 아니라고 말한 것은, 이는 다 부처님의 상相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지 보신에 대하여 말한 것은 아니다. 『대반열반경』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품」 제22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여래는 상주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몸에 분수(分)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주하는 것이 아니다. 왜 상주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가? 알음알이(知)가 있기 때문이다. 상주하는 법은 알음알이가 없음이 마치 허공과 같다. 그런데 여래는 알음알이가 있으므로 상주하는 것이 아니다. 왜 상주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가? 언설이 있기 때문이고, 내지는 성씨가 있기 때문이고, 부모가 있기 때문이고, 네 가지 위의가 있기 때문이고, 방소方所가 있기 때문이다.205)

이런 일곱 가지 뜻206)에 의거하여 상주하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다 부처님의 변화하는 모습에 의거하여 주장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만일 사람들이 이와 같은 의미를 알지 못하고 또한 보신도 똑같이 무상이라고 주장하면, 바로 이것은 사견邪見이므로 반드시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대반열반경』 「순타품」 제2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외도의 사견으로는 여래도 유위有爲에 있어서는 똑같다고 말할 것이다. 계율을 잘 지키는 비구는, 이와 같이 여래가 있는 곳에 유위라는 생각이 생겨난다는 주장을 따라서는 안 된다. 만일 여래가 유위라고 말하면 이는 곧 망어妄語이다. 이런 사람은 죽어서 지옥에 들어가는 것이, 마치 사람이 스스로 자기 집에 들어가는 것과 같음을 알아야 한다. ……207)

그러므로 보신은 무상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상주를 주장하는 스승들은 이와 같은 학설을 말씀하신다.

나. 보신은 무상이라고 집착함

보신은 무상無常이라고 집착하는 학설에서, 보신은 생인生因에서 생겨나는 것이므로 소멸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생겨난 것은 반드시 소멸한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네 가지 문답법 속의 하나인 일향기一向記208)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신은) 법신을 의지하여 상속하면서 늘 존재하므로 미래제가 다하도록 길이 다하는 일이 없다. 생사가 순간순간 마멸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 이러한 도리이므로 상주라고 한다. 그래서 늙고 죽음이 없으므로 변역하지 않는다고 한다. 『대반열반경』 「사상품」 제7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여래는 이와 같은 공덕을 성취하였는데 어떻게 여래를 무상이라고 하겠는가. 만일 여래를 무상이라고 한다면 그런 도리는 있을 수 없다. 여래는 금강신인데 어떻게 무상이라고 하겠는가. 그러므로 여래는 수명이 끝났다고 말할 수 없다.209)

또 『대반열반경』 「여래성품」 제12에서 말씀하신다.

만일 “해탈이 환화幻化와 같다.”라고 말한다면, 범부는 ‘해탈을 얻은 자도 곧 마멸磨滅될 것이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지혜가 있는 이는, 사람 가운데 사자師子인 (여래는) 비록 오고 가는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상주하여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틀림없이 분별해야 할 것이다.210)


001_0536_b_01L餘處說非常住者皆就佛 [149] 非說報身
001_0536_b_02L如德王品云如來非常何以故身有
001_0536_b_03L分故是故非常云何非常以有智 [150]
001_0536_b_04L常法無知猶如虛空如來有心 [151] 是故
001_0536_b_05L非常云何非常有言說乃至有姓此 [152]
001_0536_b_06L故有父母故有四儀故有方所依是
001_0536_b_07L七義說非常住當知皆此 [153] 就化相說
001_0536_b_08L人不知如是之意亦說報佛同是無常
001_0536_b_09L卽是邪見必墮地獄如純陀言外道邪
001_0536_b_10L可說如來同於有爲持惑 [154] 比丘不應
001_0536_b_11L如是於如來所生有爲想若言如來
001_0536_b_12L有爲者卽是妄語當知是人死入地獄
001_0536_b_13L如人自處於己舍宅乃至廣說故不應
001_0536_b_14L說報佛無常執常之家作如是說也
001_0536_b_15L無常者說言報佛生因所生不得無滅
001_0536_b_16L生者必滅一向記故然依法身相續恒
001_0536_b_17L窮未來際永無終盡不同生死念念
001_0536_b_18L磨滅由是道理說爲常住無老死故
001_0536_b_19L不變易如四相品云如來成就如是功
001_0536_b_20L云何當言如來無常若言無常無有
001_0536_b_21L是處是金剛身云何無常是故如來
001_0536_b_22L不名命終如來性品云若言解脫猶如
001_0536_b_23L幻化凡夫當謂得解脫者卽是磨滅
001_0536_b_24L智之人應當分別人中師子雖有去來

001_0536_c_01L
또 『대반열반경』 「성행품」 제9에서 말씀하신다.

선남자야, 심성心性이 다르므로 무상無常이라고 한다. 성문의 심성이 다르며 연각의 심성이 다르고 모든 부처님의 심성이 다르다.211)

이러한 경의 글들을 근거로 하면, 보신불(報佛)의 마음은 유위이며, 이것은 생겨나고 소멸하는 것임을 알 것이다.

그런데 첫 부문에서는 틀림없이 무위無爲라고 하였고, 또한 (『열반경』에서) “상주常住라는 두 글자를 닦으면 나의 소행을 따라서 내가 다다른 경지에 이를 것이다.”212)라는 등의 경문을 말씀하신 것은 성문聲聞이 지닌 무위無爲에 대한 네 가지 전도를 대치하기 위해 진여·법신에 의거하여 상주라고 설한 것이다. 저 성문은 법공法空을 통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여래의 법신이 모든 처소에 두루하여 무위·상주이지만 중생의 기연을 따라서 이러한 색신을 나타내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여래의 색신은 혹업惑業으로 감득한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마멸하게 된다고 생각하고, 부처님의 오분법신五分法身도 비록 유루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색신을 의지하므로 역시 단멸된다고 여긴다. 이와 같은 병을 대치하기 위하여 법신의 무위·상주를 말한 것이다. 이는 『청승복전경請僧福田經』 가운데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과 같다.

월덕 거사는 여래의 열반을 탄식하면서, 또한 오래지 않아 법도 멸망할 것 같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여래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희 거사들은 여래께서 상주하신다고 하는 두 글자를 닦아야 하느니라. 이 상주한다는 법은 모든 중생·이승·육도·일천제·오역죄를 지은 사람들의 법성이니라. 그러므로 법성을 보는 이는 나의 몸이 현재와 같이 둘이 아님을 깨닫게 될 것이니라.

그리고 이것은 이 『대반열반경』 「장수품」 제3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과 같다.

(상주常住라는) 두 글자를 닦으면 나의 소행을 따라서 내가 다다른 경지에 이를 것이다.213)

그러므로 이 글은 바로 법신을 나타낸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자비심·불살생 등과 같은 원인에 의해 얻어졌다.”라고 설한 것, 이것은 요인了因에 의해 나타나고 증득된 것임을 밝힌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의취意趣를 알지 못하고 보신도 또한 생멸이 없다고 헛되게 고집하여 마침내 허공과 똑같이 무위인 줄로 안다.
또한 이 『대반열반경』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품」 제22에서 말씀하시기를, “여래는 상주하는 것이 아니다. 일곱 가지 인연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214)라고 한 것, 이것은 모두 화신에 의거하여 상주가 아니라고 말한 것이지 보신불 역시 상주라고 말한 것은 아니다.

그런즉 저 경문에서 또한 “일곱 가지 원인(因)으로 이루어졌으므로 무상이 아니다.”라고 한 것,

001_0536_c_01L住不變又聖行品云復次善男子心性
001_0536_c_02L異故名爲無常所謂聲聞心性異緣覺
001_0536_c_03L心性異諸佛心性異依此等文當知報
001_0536_c_04L佛心是有爲是生滅法而初分說定是
001_0536_c_05L無爲又言修習常住二字隨我所行
001_0536_c_06L至我至處等文者爲對聲聞無爲四倒故
001_0536_c_07L約眞如法身而說爲常住以彼聲聞不
001_0536_c_08L達法空不知如來法身遍一切處無爲
001_0536_c_09L常住隨於物機現此色身是故彼計如
001_0536_c_10L來色身惑業所感必歸磨滅五分法身
001_0536_c_11L雖非有漏而依色身亦是斷滅爲欲對
001_0536_c_12L治如是病故故說法身無爲常住
001_0536_c_13L請僧福田經中月德居士歎佛如來涅槃
001_0536_c_14L以復法滅不久如來告言汝等居士
001_0536_c_15L修如來常住二字是常住法者是一切
001_0536_c_16L衆生二乘六道闡提五逆人之法性
001_0536_c_17L法性者當得吾身如今無二如此經言
001_0536_c_18L修此二字隨我所行至我至處故知是
001_0536_c_19L文正顯法身而說慈心不殺等因之所
001_0536_c_20L得者是明了因之所顯證有人不知是
001_0536_c_21L意趣妄執報佛亦無生滅遂同虛空知
001_0536_c_22L無爲又若德王品說如來非常住七種
001_0536_c_23L因緣皆就化身說非常住非說報佛亦
001_0536_c_24L常者是卽彼文亦以七因成非無常

001_0537_a_01L이것은 모두 법신에 의거하여 무상이 아니라고 말한 것이지 보신불 또한 무상이 아니라고 펼친 것은 아니다. 『대반열반경』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품」 제22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생겨나는 법을 무상無常이라고 한다. 여래는 생겨남이 없으므로 상주常住가 된다. 성품이 있는 법은 무상이라고 한다. 여래는 생겨남도 없고 성품도 없으므로 상주이다. 상주하는 법은 모든 곳에 두루한다. 무상한 법은 혹은 이곳에는 있으나 저곳에는 없다. 여래는 그렇지 않으므로 상주가 된다. 무상한 법은 어느 때는 있으나 어느 때는 없다. 여래는 그렇지 않으므로 상주가 된다. 상주하는 법은 이름(名)도 없고 색色도 없다. 허공은 상주하므로 이름도 없고 색도 없다. 여래도 그와 같으므로 상주가 된다. 상주하는 법은 원인도 없고 결과도 없다. 허공은 상주하므로 이름도 없고 색도 없다. 여래도 그와 같으므로 상주가 된다. 상주하는 법은 삼세三世에 포섭되지 않는다. 여래도 그와 같으므로 상주가 된다.215)

이와 같은 일곱 가지 원인216)은 모두 법신에 해당한다. 어째서 그러한가? 저들은 “보신불은 생인生因에서 얻어진다.”라고 말하였으니, 이는 곧 인과가 있는 것이므로 (상주하는) 허공과 같지 않다.

만일 저들이 구제하여 말하기를(救言), “법신에 수순隨順하면 생겨나는 것이 없으므로 상주라고 한다. 보신불도 또한 그와 같아서 생겨나는 것이 없으므로 상주이다. 그러므로 이 원인의 뜻은 (법신·보신의) 두 불신에 통한다.”라고 한다면, (반대하는) 다른 스승도 또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화신은 알음알이가 있으므로 상주하는 것이 아니다. 보신불도 알음알이가 있으므로 또한 상주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원인의 뜻은 (보신·화신의) 두 불신에 통한다.” 이 주장(반대하는 스승)이 만일 통하지 않는다면, 저 주장(救言)이 어찌 통하겠는가?
또 저들이 억지로 주장하기를(强言), “비록 이것은 ‘본디 없던 것이 비로소 있게 된 것(本無始有)’이지만 ‘본디 없던 것이 현재 있는 것(本無今有)’은 아니다.”라고 한다면, 그런 것은 다만 말만 있는 것이지 실제로는 있을 수 없다. 어째서 그러한가?
만일 그가 주장한 대로 이것이 비록 ‘먼저는 있던 것이 뒤에 없어지는 것(先有後無)’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것은 바로 ‘먼저는 있던 것이 나중에는 없어지게 된다(先有終無)’라는 말과 같다. 그러므로 ‘나중에는 없어지게 된다(終無)’라는 것을 인정하면 ‘나중에는 없어지게 된다(終無)’라는 말은 곧 소멸을 의미한다.
만일 그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미 ‘뒤에 없어지는 것(後無)’이 아닌데 어떻게 ‘나중에는 없어지게 된다(終無)’라고 하겠으며, 이미 ‘현재 있는 것(今有)’이 아닌데 어떻게 ‘비로소 있게 된다(始有)’라고 하겠는가? 또한 만일 ‘뒤에 없어지는 것(後無)’이 아니기 때문에 소멸하여 없어진다고 하면, ‘본디 없던 것(本無)’이기 때문에 생겨나는 일이 있다고 말해야 된다. 이와 같이 (쟁론이) 오간다면 영원히 구제할 수가 없다.

001_0537_a_01L就法身說非無常不開報佛亦非無常
001_0537_a_02L如彼文言有生之法名曰無常如來無
001_0537_a_03L是故爲常有限 [155] 之法名曰無常
001_0537_a_04L來無生無姓 [156] 故常有常之法遍一切處
001_0537_a_05L無常之法或言是處有彼處無如來不
001_0537_a_06L是故爲常無常之法有時是有 [157]
001_0537_a_07L時爲無如來不爾是故爲常常住之
001_0537_a_08L無名無色虛空常故無名無色如來
001_0537_a_09L亦爾是故爲常常住之法無因無果
001_0537_a_10L虛空常故無因無果如來亦爾是故爲
001_0537_a_11L常住之法三世不攝如來亦爾
001_0537_a_12L故爲常如是七因皆當法身所以然者
001_0537_a_13L彼說報佛生因所得卽有因果非如虛空
001_0537_a_14L若彼救言隨順法身無生故常報佛亦
001_0537_a_15L無生故常是故此因義通二身者
001_0537_a_16L亦爾可言化身有知故非常報佛有知
001_0537_a_17L亦非常住是故此因義通二身此若不
001_0537_a_18L彼何得通又彼强言雖是本無始有
001_0537_a_19L而非本無今有者但有其言都無其實
001_0537_a_20L所以然者若如所言是卽雖非先有後
001_0537_a_21L而是先有終無若許終無終無卽滅
001_0537_a_22L若不許言旣非後無何爲終無旣非今
001_0537_a_23L何爲始有又若非後無故滅盡者
001_0537_a_24L應是本無故有生起也如是進退永不

001_0537_b_01L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그러한 주장을 하지 않는다.
무상을 집착하는 사람은 이와 같이 주장한다.

다. 회통

두 스승이 말한 것 가운데서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른가?
어떤 스승은, 모두 옳기도 하고 모두 그르기도 하다고 한다. 그러한 까닭은 무엇인가? 만일 꼭 한쪽만을 고집하면 모두 과실이 있지만 만일 장애 없이 말해 보면 모두 도리가 있기 때문이다. 『입릉가경』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대혜보살이 여쭈었다.) “여래·응공·정변지는 상주입니까, 무상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상주도 아니고 무상도 아니니라. 왜냐하면 두 가지 극단(二邊)을 집착하면 과실이 있기 때문이니라.” ……217)

이제 보신은 비록 상주하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순간순간 소멸하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이와 같은 내용의 글들은 그 치우친 집착을 깨뜨리려는 것이니, 오로지 한쪽에만 치우치면 도리에 맞지 않는다.
“장애 없이 말해 보면 두 주장이 모두 맞다.”라는 것은, 보신의 공덕은 상相을 벗어나고 성性을 벗어난 것이라는 뜻이다. 상을 벗어나기 때문에 생멸하는 상을 벗어나서, 드디어는 적정하여 작위함이 없으므로 상주라고 한다. 성을 벗어나기 때문에 상주성을 벗어나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여 작위하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무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을 벗어나거나 상을 벗어난 것은 둘이 아니고 차별이 없다. 상을 벗어난 것(離相)은 성을 벗어난 것(離性)과 다르지 않으므로 상주하는 것이 생멸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성을 벗어난 것은 상을 벗어난 것과 다르지 않으므로 생멸하는 것이 상주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이러한 도리에서 보면 두 스승의 주장이 모두 맞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에서 이것을 더 자세히 말하려면 많은 부문이 있으니, 자세한 것은 『능가경종요楞伽經宗要』218) 가운데에서 말한 것과 같다.

그러나 무상을 집착하는 학자들의 주장에는 미진한 뜻이 있다. 말하자면 법신을 틀림없이 상주하는 것으로만 주장하기 때문이다. 만일 법신을 틀림없이 상주하는 것으로만 본다면 이것은 바로 작위하는 법이 아니다. 작위하는 법이 아니므로 (보신·화신의) 두 불신을 지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법신도 또한 무위만은 아니다. 『입릉가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만일 여래의 법신은 작위라는 법이 아니라고 하면 (바로 이것은 몸이 없는 것이 된다.) 그런데 한량없는 공덕과 모든 행을 닦음이 있다고 하면 바로 이것은 허망한 것이 된다.219)

『섭대승론석』에서 법신에 관한 다섯 가지 가운데에서 세 번째로 다음과 같이 논술한다.

유위와 무위는 둘이 아닌 것(無二)으로 상을 삼는다. 혹업惑業이 모여서 생겨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재함을 얻음으로 말미암아 유위의 상을 잘 나타내기 때문이다.

모든 유위법은 모두 혹업에서 생겨난다.

001_0537_b_01L可救是故彼義智者不用執無常者
001_0537_b_02L如是說二師所說何得何失或有
001_0537_b_03L說者皆得皆失所以然者若決定執一
001_0537_b_04L皆有過失如其無障礙說俱有道理
001_0537_b_05L如楞伽經云如來應 [158] 正遍知爲是常耶
001_0537_b_06L爲無常耶佛言非常非無常二邊有過
001_0537_b_07L乃至廣說今此言雖不常性非念念
001_0537_b_08L如是等文破其偏執定取一邊不當
001_0537_b_09L道理無障礙說二義皆得者報佛功德
001_0537_b_10L離相離性以離相故離生滅相究竟寂
001_0537_b_11L靜無作無爲故說常住以離性故離常
001_0537_b_12L住性最極暄動無所不爲故說無常
001_0537_b_13L離性無二無別離相不異於離性故常
001_0537_b_14L住不妨於生滅也離性不異於離相
001_0537_b_15L生滅不礙於常住也由是道理二說皆
001_0537_b_16L於中委悉亦有多門具如楞伽經宗
001_0537_b_17L要中說然執無常家義有未盡意謂說
001_0537_b_18L法身定是常故若定常住卽非作法
001_0537_b_19L作法故不作二身是故法身亦非無爲
001_0537_b_20L楞伽經言若如來法身非作法者言有
001_0537_b_21L修行無量功德一切行者卽爲虛妄
001_0537_b_22L大乘 [159] 法身五於中言第三有爲無爲
001_0537_b_23L無二爲相非惑業雜 [160] 所生故由得自在
001_0537_b_24L能顯有爲相故釋曰一切有爲法皆從

001_0537_c_01L법신은 혹업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므로 유위가 아니다. 법신은 자재함을 얻음으로 말미암아 마음대로 언제나 유위의 상을 나타낸다. 말하자면 응신·화신의 두 불신을 말하므로 무위가 아니다.220)

이것은 법신이 비록 혹업에서 생겨난 유위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변화가 없고(凝然) 동작이 없는 것은 아님을 밝힌 것이다.

또 상주를 집착하는 학자들은 비록 상주를 원한다고 하더라도 그 상주한다고 하는 주장에도 또한 부족한 뜻이 있다. 말하자면 비로소 있게 되는 공덕(始有功德)은 그 앞의 계위에까지 두루 미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이 공덕이 두루 미치지 못한 데가 있다면 이것은 바로 법계를 증득하지 못한 곳이 있게 되는 것이다. 법계를 증득하지 못한 데가 없어야 바로 법성이 평등하게 되어 두루 미치지 못하는 데가 없을 것이다. 『대방광불화엄경』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여래가 정각正覺하여 보리菩提를 성취할 때에, 부처님의 방편에 안주하여 모든 중생등신衆生等身을 얻으며, 모든 법등신法等身을 얻고, 모든 찰등신刹等身을 얻으며, 모든 삼세등신三世等身을 얻고, 모든 법계등신法界等身을 얻으며, 허공계등신虛空界等身을 얻고 내지 적정열반계등신寂靜涅槃界等身을 얻느니라. 불자여, 여래를 따라서 얻은 바의 몸은, 음성과 무애심도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여래는 이와 같은 세 가지의 청정무량을 구족하느니라.221)

이것은 여래가 성도한 뒤에 얻은 색신과 음성과 무애심은 평등하지 않은 것이 없고 두루 미치지 못한 데가 없음을 밝힌 것이다. 이미 모든 삼세에 평등하다고 하였으니, 어찌 금강 이전에만은 두루 미치지 못하겠는가? 그러나 이 도리는 모든 부처님의 비장이므로 사량思量하는 이들이 헤아려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다만 부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우러러 믿음을 일으킬 뿐이다.
열반의 뜻을 이와 같이 간략하게 판별한다.

2)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해석하는 부문
둘째, 부처님의 마음자리(佛性)의 뜻을 설명한다.
부처님의 마음자리의 뜻은 여섯 부문으로 나누어 논설한다. 첫째, 본체를 나타내고, 둘째, 인과因果를 밝히고, 셋째, 견성見性에 관하여 해석하고, 넷째, 부처님의 마음자리가 있고 없음을 해석하고, 다섯째, 삼세三世를 해석하고, 여섯째, 회통會通에 관하여 논설한다.

(1) 본체를 나타냄

출체문出體門 안에는 또한 두 가지가 있으니,

001_0537_c_01L惑業生法身不從惑業生故非有爲
001_0537_c_02L身由得自在能數數顯有爲相謂應化
001_0537_c_03L二身故非無爲是明法身雖非惑業所
001_0537_c_04L生有爲而非凝然無動作物也又報 [161]
001_0537_c_05L雖樂常住而其常義亦有不足意
001_0537_c_06L始有功德不遍於前位故若此功德有
001_0537_c_07L所不遍卽於法界有所不證若於法界
001_0537_c_08L無所不證卽等法性無所不遍如花嚴
001_0537_c_09L經言如來正覺成菩提時住佛方便
001_0537_c_10L一切衆生等身得一切法等身得一切
001_0537_c_11L [162] 等身得一切三世等身得一切法界
001_0537_c_12L等身得虛空界等身乃至得寂靜涅槃
001_0537_c_13L界等身佛子隨如來所得身當知音聲
001_0537_c_14L及無礙心 [163] 如是如來具足如是三種
001_0537_c_15L淸淨無量是明如來成道後所得色身
001_0537_c_16L音聲及無礙心無所不等無所不遍
001_0537_c_17L言等於一切三世豈不遍金剛以前
001_0537_c_18L此道理諸佛祕藏非思量者之所 1) [41]
001_0537_c_19L但依佛言起起作 [164] 信耳涅槃之義略判
001_0537_c_20L如是

001_0537_c_21L
第二明佛性義佛性之義六門分別
001_0537_c_22L出體門二因果門三見性門四有無
001_0537_c_23L五三世門六會通門出體門內
001_0537_c_24L「不」疑剩{編}

001_0538_a_01L첫째, 여러 학설을 서술하고, 둘째, 여러 학설의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이다.

① 여러 학설을 서술함

예로부터 이 학설을 논한 학자들이 많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뜻의 부류에 따라 서로 묶으면 여섯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가. 내세의 불과를 부처님의 마음자리의 본체로 삼음

첫째 학자의 주장은, 내세의 불과를 가지고 부처님의 마음자리의 본체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 『대반열반경』 「사자후보살품」 제23에 있는 아래의 글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일천제一闡提 등은 착한 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부처님은 또한 그들도 내세에는 반드시 있을 것이므로, 모두 다 부처님의 마음자리가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222)

또 「가섭보살품」 제12에서 말씀하신다.

현재 세상에서는 번뇌의 인연으로 선근이 끊기지만, 미래에는 부처님의 마음자리란 힘의 인연 때문에 드디어 선근이 생겨나게 한다.223)

그러므로 내세의 불과가 곧 부처님의 마음자리의 정인正因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한 까닭은, 무명의 첫 생각에는 불성佛性이 없지만, 마음이 있는 이는 곧 내세의 불과를 받을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온갖 선행을 닦아 현재의 불과를 온전히 이루게 된다. 현재의 불과를 이루는 데에는 내세의 불과를 근본으로 삼는다. 그래서 내세의 불과를 논설하여 부처님의 마음자리의 정인으로 삼는다. 이는 백마사白馬寺의 담애曇愛 법사가 도생道生224) 공公의 뜻을 서술한 것이다.225)

나. 현세의 중생을 부처님의 마음자리의 본체로 삼음

둘째 학자의 주장은, 현세에 있는 중생을 가지고 부처님의 마음자리의 본체로 삼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중생의 작용은 통틀어 심법을 다스리며, 중생의 의의는 어디에서나 생명을 받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마음을 조어하는 주인은 내세에 반드시 대각을 이룰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을 정인의 본체로 삼는다고 설한 것이다. 이 『대반열반경』 「사자후보살품」 제23 가운데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중생이 지닌 부처님의 마음자리는 또한 두 가지 인因이 있다. 첫째는 정인正因이며 둘째는 연인緣因이다. 정인이란 모든 중생을 말하며 연인이란 여섯 가지 바라밀을 말하느니라.226)

장엄사의 승민僧旻227) 법사의 뜻이다.

다. 중생의 심성을 정인의 본체로 삼음

셋째 학자의 주장은, 중생의 마음은 목석과 달라서 반드시 고뇌를 싫어하고 열락悅樂을 구하는 성품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품이 있기 때문에 온갖 선행을 닦아서 마침내는 가장 높은 보리菩提의 낙과樂果에 돌아오게 된다. 그러므로 심성心性을 논설하여 정인의 본체로 삼는다. 이 『대반열반경』 「사자후보살품」 제23에 있는 아래의 글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모든 중생은 모두 다 마음이 있다. 무릇 마음이 있다는 것은 반드시 내세에 안웃따라쌈약쌍보디(阿耨多羅三藐三菩提)228)를 이룰 것이니라.229)

또 『승만경』에서 말씀하신다.

세존이시여, 만일 여래장이 없으면 고뇌를 싫어하여 열반을 간절히 구하지 않을 것입니다.230)

이러한 주장은 광택사의 법운法雲231) 법사의 뜻이다.

라. 마음에 있는 신령을 정인의 본체로 삼음

넷째 학자의 주장은, 마음은 신령을 가지고 있어 그 본성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마음의 신령스러움이 벌써 내 몸 안에 있으므로, 곧 목석 등의 감정이 없는 사물과는 다르다.

001_0538_a_01L有二重先序諸說後判是非昔來說
001_0538_a_02L雖有百家義類相攝不出六種第一師
001_0538_a_03L當有佛果爲佛性體如下師子吼中
001_0538_a_04L說言一闡提等無有善法佛亦言
001_0538_a_05L未來有故悉有佛性又言以現在世煩
001_0538_a_06L惱因緣能斷善根未來佛性力因緣故
001_0538_a_07L [165] 生善根故知當果卽是正因所以然
001_0538_a_08L無明初念不有而已有心卽有當果
001_0538_a_09L之性故修萬行以剋現果現果卽成當
001_0538_a_10L果爲本故說當果而爲正因此是白馬
001_0538_a_11L寺愛 [166] 法師述生 [167] 公義也第二師云現有
001_0538_a_12L衆生爲佛性體何者衆生之用總御心
001_0538_a_13L衆生之義處處受生如是御心之主
001_0538_a_14L必當能成大覺故說衆生爲正因體
001_0538_a_15L師子吼中言衆生佛性亦二種因 [168]
001_0538_a_16L諸衆生也莊嚴寺是 [169] 法師義也第三師
001_0538_a_17L衆生之心異乎木石必有厭苦求樂
001_0538_a_18L之性由有此性故修萬行終歸無上菩
001_0538_a_19L提樂果故說心性爲正因體如下文言
001_0538_a_20L一切衆生悉皆有心凡有心者必當得
001_0538_a_21L成阿耨菩提夫人經言若無如來藏
001_0538_a_22L1) [42] [170] 得厭苦樂求涅槃故此是光宅寺雲 [171]
001_0538_a_23L師義也第四師云心有神靈不失之性
001_0538_a_24L如是心神已在身內卽異木石等非情

001_0538_b_01L이 때문에 능히 대각의 과보를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마음의 신령스러움을 정인의 본체로 삼는다고 설한다. 이 『대반열반경』 「여래성품」 제12에서 말씀하신다.

아我라는 것은 곧 여래장의 뜻이다. 모든 중생들이 모두 다 부처님의 마음자리가 있으므로 이것이 곧 아라는 뜻이다.232)

이 『대반열반경』 「사자후보살품」 제23 가운데에서 말씀하신다.

부처님의 마음자리가 아닌 것은 곧 담장·담벽·기와·돌 등의 무정물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무정물이 아닌 것을 부처님의 마음자리라고 부른다.233)

이러한 주장은 양梁 나라의 무왕武王 소연簫衍234) 천자天子의 뜻이다.

마. 아뢰야식의 본디 종자를 부처님의 마음자리의 본체로 삼음
다섯째 학자의 주장은, 아뢰야식阿賴耶識235)의 본디 종자(法爾種子)를 부처님의 마음자리의 본체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 『대반열반경』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부처님의 마음자리라는 것은 모든 부처님의 안웃따라쌈약쌍보디(阿耨多羅三藐三菩提)의 중도 종자이다.236)

또 『유가사지론』에서 말씀하신다.

본성주종성(性種性)이라는 것은, 모든 보살의 육처가 수승한 것을 말하며, 이와 같은 상이 있으므로, 시작이 없는 세계로부터 전전하여 전하여 오면서 법답게 얻어진다.237)

이러한 주장은 신사新師238)들의 뜻이다.

바. 아마라식인 진여의 깨달은 성품을 부처님의 마음자리의 본체로 삼음

여섯째 학자의 주장은, 아마라식阿摩羅識239)인 진여의 깨달은 성품을 부처님의 마음자리의 본체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 『대반열반경』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부처님의 마음자리라는 것은 제일의공第一義空을 말하며, 제일의공을 지혜라 한다.240)

또 『구경일승보성론』에서 논술한다.

저 진여의 깨달은 성품이라는 것은 이 뜻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육근취경六根聚經』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육근은 이와 같이 무시로부터 그 이래로 드디어는 구경의 모든 법의 체이다.”241)

여러 학자의 주장은 이와 같다.

② 여러 학설의 옳고 그름을 가림

다음으로 여러 학설의 옳고 그름을 가리겠다. 위의 여러 학자의 주장은 모두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하다. 그러한 까닭은, 부처님의 마음자리는 그런 것도 아니며, 그렇지 않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것도 아니기 때문에 여러 학설이 모두 그르다고 생각하며, 그렇지 않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여러 학설이 다 옳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여섯 학자의 학설이 두 가지 길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의 한 학자는 내세에 있을 불과를 가리키는 것이고, 뒤의 다섯 학자는 모두 지금 가지고 있는 인因을 근거로 한 것이다. 뒤의 다섯 학자 가운데에는 또한 두 가지 대립되는 견해가 있으니, 뒤의 한 학자는 진제眞諦를 중심으로 한 것이고, 앞의 네 학자는 속제俗諦를 따른 것이다. 속제를 따르는 네 학자의 학설은 인人과 법法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앞의 한 학자는 인人을 근거로 하여 논술하고 있으며, 뒤의 세 학자는 법法을 근거로 하여 논술하고 있는 것이다. 법을 근거로 한 세 학자의 주장은 기起242)와 복伏243)에 지나지 않으니, 뒤의 한 학자의 주장은 종자를 들어 말한 것이요, 앞의 두 학자의 주장은 상심上心을 들어 말한 것이다. 상심上心을 들어 말한 주장에는 뜻을 따라 학설을 달리한 것뿐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마음자리의 체는 바로 한마음(一心)이며,

001_0538_b_01L由此能成大覺之果故說心神爲正
001_0538_b_02L因體如來性品云我者卽是如來藏
001_0538_b_03L一切衆生悉有佛性卽是我義師子
001_0538_b_04L吼中言非佛性者謂瓦石等無情之物
001_0538_b_05L離如是等無情之物是名佛性故此是
001_0538_b_06L梁武簫焉 [172] 天子義也第五師言阿賴耶
001_0538_b_07L識法爾種子爲佛性體如此經言佛性
001_0538_b_08L者一切諸阿耨菩提中道種子瑜伽論
001_0538_b_09L性種性者六處殊勝有如是相從無
001_0538_b_10L始世展轉傳來法爾所得此意新師等
001_0538_b_11L第六師云阿摩羅識眞如解性爲佛
001_0538_b_12L性體如經言佛性者名第一義空
001_0538_b_13L一義空名爲智愚 [173] 寶性論云及彼眞如
001_0538_b_14L性者如六根聚經說六根如是從無始
001_0538_b_15L來畢竟究竟諸法體故諸說如是次判
001_0538_b_16L是非者此諸師說皆是非所以然者
001_0538_b_17L佛性非然非不然故以非然故諸說悉
001_0538_b_18L非不然故諸義悉是是義志 [174] 云何
001_0538_b_19L六師所說不出二途初一指於當有之
001_0538_b_20L後五同據今有之因此後五中亦爲
001_0538_b_21L二倒 [175] 後一在於眞諦前四隨於俗諦
001_0538_b_22L俗諦四說不出人法前一擧人後三據
001_0538_b_23L據法三義不過起伏後一種子前二
001_0538_b_24L上心上心之內隨義異說耳然佛性之

001_0538_c_01L한마음의 성품은 모든 극단적 견해를 초월한 것이다. 모든 극단적 견해를 초월하였기 때문에 도무지 해당되는 것이 없다. 해당되는 것이 없기 때문에 해당되지 않는 것도 없다. 그러므로 마음을 근거로 하여 논술하면, 마음은 인因도 아니고 과果도 아니며, 진제도 아니고 속제도 아니며, 인人도 아니고 법法도 아니며, 기起도 아니고 복伏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연緣을 근거로 하여 논술하면, 마음은 기起도 되고 복伏도 되며, 법法도 되고 인人도 되며, 속제도 되고 진제도 되며, 인因도 되고 과果도 된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런 것도 아니며, 그렇지 않은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학자의 주장이 모두 그르기도 하고 모두 옳기도 하다는 것이다.

총체적으로 논술하면 그렇지만 그 가운데에서 분별하여 논술하면, 한마음(一心)의 법에 두 가지 뜻이 있으니, 하나는 더럽게 물이 들지 않으면서 더럽게 물이 드는 것이며, 또 하나는 더럽게 물이 들면서 더럽게 물이 들지 않는 것이다.
더럽게 물이 들면서 더럽게 물이 들지 않는 것이라는 말은, 한맛(一味)이며 적정하다는 뜻이고, 더럽게 물이 들지 않으면서 더럽게 물이 드는 것이라는 말은, 육도에 유전한다는 뜻이다. 이 『대반열반경』에 있는 아래의 글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한맛인 약이 그 흘러가는 곳을 따라 여러 가지로 다르다. 그러나 이 약의 참맛은 그것이 흘러나온 산에 머물러 있다.244)

또 『승만경』에서 말씀하신다.

자성이 청정한 마음은 분명히 알기 어려우니라. 그러나 그 마음이 번뇌 때문에 더럽게 물들게 되는 것도 또한 분명히 알기 어려우니라.245)

『대승기신론』 가운데에서 이 뜻을 자세히 풀이하고 있다.
이 학설은 진제眞諦 삼장의 주장으로, 위에 든 여섯째 학자가 논술한 진여·부처님의 마음자리이며, 더럽게 물이 들면서 더럽게 물이 들지 않는다는 부분에 해당한다. 그리고 앞의 다섯 학자의 주장은, 모두 더럽게 물이 들지 않으면서 더럽게 물이 든다는 부분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염오染汚를 따르는 마음은 한 가지 성품을 지키지 못하고 인연을 대하여 과보를 바라보면 반드시 생겨나게 된다. 이렇게 생겨나는 것의 성품은 훈습으로 인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본디 종자’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니, 이는 다섯째 분의 주장이 이 부분에 해당한다.
또는 이와 같이 염오를 따르는 마음이 전전하여 생멸하는 식의 계위를 짓지만, 그러나 늘 ‘신령스럽게 깨닫는 성품’을 잃지 아니한다. 이 ‘신령스럽게 깨닫는 성품’을 잃지 않기 때문에 마침내는 마음의 근원에 돌아온다는 것이니, 이는 넷째 분의 주장이 이 부분에 해당된다.
또는 염오를 따라 생겨나고 소멸하는 마음이 안에서 훈습하는 힘을 의지하여 두 가지 업을 일으킨다. 말하자면 고를 싫어하는 것과 낙을 구하는 능인能因이다. 이것이 근본이 되어 내세에는 극과에 이르는 것이니, 이는 셋째 분의 주장이 이 부분에 해당된다.

001_0538_c_01L正是一心一心之性遠離諸邊遠離
001_0538_c_02L諸邊故都無所當無所當故無所不當
001_0538_c_03L所以就心論心非因非果非眞非俗非
001_0538_c_04L人非法非起非伏如其約緣論心爲起
001_0538_c_05L爲伏作法作人爲俗爲眞作因作果
001_0538_c_06L謂非然非不然義所以諸說皆非皆是
001_0538_c_07L總說雖然於中分別者於一心法有二
001_0538_c_08L種義一者不染而染二者染而不染
001_0538_c_09L染而不染一味寂靜不染而染流轉六
001_0538_c_10L如下文言一味 [176] 藥隨其流處有種種
001_0538_c_11L而其眞味停留在山夫人經言
001_0538_c_12L性淸淨心難可了知彼心爲煩惱所染
001_0538_c_13L此亦難可了知起信論中廣顯是義
001_0538_c_14L者眞諦三藏之義第六師說眞如佛性
001_0538_c_15L得於染而不染門也前之五義皆在染
001_0538_c_16L何者隨染之心不守一性對緣望
001_0538_c_17L果必有可生可生之性不由熏成是故
001_0538_c_18L說名法爾種子第五師義得此門也
001_0538_c_19L卽如是隨染之心乃至轉作生滅識位
001_0538_c_20L而恒不失神解之性由不失故終歸心
001_0538_c_21L第四師義亦當此門也又若隨染生
001_0538_c_22L滅之心依內熏力起二種業所謂厭苦
001_0538_c_23L求樂之能因此爲本當至極果第三師
001_0538_c_24L「下」疑「不」{編}

001_0539_a_01L
이와 같은 일심이 염오를 따라 전전할 때에 이르는 곳을 따르면서 모든 법을 통틀어 제어하여 곳곳에서 생명을 받으니 이것을 ‘중생’이라고 부른다. 이는 둘째 분의 주장이 이 부분에 해당된다.
이와 같은 중생의 본각이 전전하는바, 반드시 미래에는 대각의 과위에 이르게 되지만, 그러나 지금은 아직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미래의 불과’라고 부른다. 이는 첫째 분의 주장이 이 부분에 해당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여섯 분의 말씀이 비록 다 부처님의 마음자리의 실체를 완전하게 설명하지는 못하였지만, 각기 부분적으로 말씀하였으므로 일리는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대반열반경』에 있는 아래의 글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저 눈먼 사람이 각기 코끼리에 대하여 말하는 것과 같으므로, 비록 코끼리의 실체를 얻지는 못하였지만, 그렇다고 코끼리를 말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부처님의 마음자리라고 말하는 것도 이와 같다. 여섯 가지 법에 상즉한 것도 아니며 여섯 가지 법을 벗어난 것도 아니다.246)

이 가운데에서 여섯 분의 학설도 또한 그러한 줄을 알아야 한다.
부처님의 마음자리의 체를 나타내는 부문을 마친다.

(2) 인과를 밝힘

① 통틀어 논설함

둘째, 인과의 문을 밝힌다. 부처님의 마음자리의 체는 인도 아니며 과도 아니다. 그렇지만 또 인위와 과위의 성품이 아닌 것도 아니다. 그러한 까닭은 체를 들어서 인으로 삼고 과로 삼기 때문이다. 과위의 부처님의 마음자리란 붓다의 체성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마음자리라고 부른다. 이 『대반열반경』 「가섭보살품」 제24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부처님의 십력十力247)과 사무외四無畏248) 등의 한량이 없는 모든 법이 부처님의 성품이다.249)

또 이 『대반열반경』에 있는 아래의 글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부처님은 벌써 안웃따라쌈약쌍보디(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얻었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의 마음자리와 모든 부처님의 법은 언제나 변하거나 바뀌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삼세三世가 없는 것이 마치 허공과 같다.250)

이런 것들과 같은 경의 글은 모두 과위의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증명하는 것이다. 인위의 부처님의 마음자리란 붓다를 만드는 성품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마음자리라고 부른다. 이 『대반열반경』 「사자후보살품」 제23 가운데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이것은 인위이며 과위가 아니기 때문에, 부르기를 부처님의 마음자리라고 한다. 이것은 인생因生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인因이며 과果가 아니다.251)

또 이 『대반열반경』에 있는 아래의 글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중생의 부처님의 마음자리에도 또 두 가지의 인因이 있다. 첫째는 정인正因이며, 둘째는 연인緣因이다. 정인이란 모든 중생을 말하며, 연인이란 여섯 가지 바라밀을 말씀하신다.252)

이런 것들과 같은 경의 글은 모두 인위의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논설하는 것이다.

② 분석하여 논설함

통틀어 말하면 그렇다고 말할 수 있지만, 이 가운데서 분별하면 과위의 부처님의 마음자리에 두 가지가 있는데, 생겨나는 바의 과果와 깨달은 바의 과果이다. 깨달은 바의 과는 열반의 과위를 가리키며 이는 곧 법신불이다. 생겨나는 바의 과는 깨달음의 과위를 가리키며 이는 곧 보신불이다.

001_0539_a_01L義當此門也如是一心隨染轉時隨所
001_0539_a_02L至處總御諸法處處受生說名受 [177]
001_0539_a_03L二師義合於是門也如是衆生本覺所
001_0539_a_04L轉必當得至大覺之果而今來 [178] 現說名
001_0539_a_05L當果第一師義合於是門也由是義故
001_0539_a_06L六師所說雖皆未盡佛性實體隨門而說
001_0539_a_07L各得其義故下文說如彼盲人各各說
001_0539_a_08L雖不得實非不說象說佛性者亦復
001_0539_a_09L如是不卽六法不離六法當知此中六
001_0539_a_10L說亦爾出體門竟

001_0539_a_11L
第二明因果門佛性之體非因非果
001_0539_a_12L亦不非因果性所以擧體作因作果
001_0539_a_13L佛性者佛之體性故名佛性如迦葉品
001_0539_a_14L如來十力四無畏等無量諸法是佛
001_0539_a_15L之性又下文言如來已得阿耨菩提
001_0539_a_16L有佛性一切佛法常無變易故無三世
001_0539_a_17L猶如虛空如是等文明果佛性因佛性
001_0539_a_18L作佛之性故名佛性如師子吼中言
001_0539_a_19L是因非果名爲佛性非因生故是因非
001_0539_a_20L又下文言衆生佛性亦二種因
001_0539_a_21L因者謂諸衆生緣因者謂六波羅蜜
001_0539_a_22L是等文說因佛性總說雖然於中分別
001_0539_a_23L果有二種所生所了所了果謂涅槃
001_0539_a_24L果卽是法身所生果者謂菩提果卽是

001_0539_b_01L이 두 가지의 과위에 대하여 두 가지의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논설한다. 법신불의 성품은 본성이 청정한 부문에 있으며 보신불의 성품은 염을 따라서 작용한 부문에 있다. 이 『대반열반경』 「사자후보살품」 제23 가운데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선남자야, 내가 말하는 바의 열반의 인이란, 말하자면 부처님의 마음자리이다. 부처님의 마음자리란 성품은 열반을 낳지 않으므로, 나는 열반은 인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번뇌를 아주 잘 깨뜨리므로 커다란 과라고 부른다. 이 과는 도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므로 과가 아니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열반은 인도 아니고 과도 아니다.253)

이런 것들과 같은 경의 말씀은 법신불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다. 다만 숨은 뜻을 나타내어 인과 과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대반열반경』 「가섭보살품」 제24에서 말씀하신다.

부처님의 마음자리란 일법一法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십법十法이라고 말할 수도 없으며, 백법百法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천법千法이라고 말할 수도 없으며, 만법萬法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아직 안웃따라쌈약쌍보디(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얻지 못하였을 때, 온갖 선·불선·무기를 모두 부처님의 마음자리라고 부르기 때문이다.254)

부처님의 마음자리가 아닌 것이란, 말하자면 온갖 담·벽·기와·돌 등의 정이 없는 사물을 가리킨다. 이들과 같은 정이 없는 사물을 제외하고는, 이것을 부처님의 마음자리라고 부른다.255)

이런 것들과 같은 경의 말씀은 보신불의 성품을 밝힌 것이다. 그것은 염을 따라서 움직이는 마음으로서, 비록 삼성三性에 공통이라고 하지만, 그러나 또한 신령스러운 깨달음의 성품을 잃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보신불의 성품이라고 말씀하신다.

다만 간별簡別하기 위하여, 법신불의 본성을 드러내는 부문에서는 모든 유정·무정을 두루하며, 그러므로 보신불의 본성을 드러내는 부문에서는 무정의 사물은 취하지 않는다.

③ 공통점을 논설함

분별하는 부분에서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실제에 나아가서 공통되는 점을 논설하면 본성이 청정한 본각(性淨本覺)도 또한 보신과 응신의 두 불신의 성품이 되며, 염을 따르는 깨달은 성품(隨染解性)도 또한 법신法身256)의 인이 되는 것이다. 무엇을 가지고 그런 줄 아는가? 『구경일승보성론』에서 논술한다.

두 가지 부처님의 마음자리(佛性)에 의지하여 세 가지 불신을 나타낼 수 있다.257)

『불성론佛性論』 가운데서도 이런 뜻을 나타내어 논설한다.

부처님의 마음자리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자성에 안주하는 부처님의 마음자리이며, 둘째는 이끌어 내는 부처님 마음자리이다. 이 두 부처님의 마음자리로 인하여 성취를 이룬다. 자성에 안주하는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나타내려고 하기 때문에 땅속의 보장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이끌어 내는 부처님 마음자리를 나타내려고 하기 때문에 암라수의 싹을 비유로 삼아 말씀하신다. 이 두 가지의 인을 근거로 하기 때문에 세 가지 불신의 과위를 말씀하신다. 첫째는 자성에 안주하는 부처님의 마음자리로 인하여 법신을 말씀하시며, 법신에는 네 가지 공덕이 있다. 그러므로 부패한 누더기 속의 진금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001_0539_b_01L報佛對此二果說二佛性法佛性者
001_0539_b_02L性淨門報佛性者在隨染門如師子吼
001_0539_b_03L中言善男子我所宣說涅槃因者所謂
001_0539_b_04L佛性之性不生涅槃是故無因能破煩
001_0539_b_05L故名大果不從道生故名無果是故
001_0539_b_06L涅槃無因無果是文正顯法佛之性
001_0539_b_07L約隱顯說爲因果也迦葉品云夫佛性
001_0539_b_08L不名一法不名萬法未得阿耨菩提
001_0539_b_09L之時一切善不善無記法盡名佛性
001_0539_b_10L佛性者所謂一切牆壁瓦石無情之物
001_0539_b_11L離如是等無情之物是名佛性是文正
001_0539_b_12L明報佛之性以隨染動心雖通三性
001_0539_b_13L亦不失神解之性故說此爲報佛性
001_0539_b_14L爲簡別1) [43] 佛性門遍一切有情無情
001_0539_b_15L故於報佛性不取無情物也別門雖然
001_0539_b_16L就實通論者性淨本覺亦爲二身之性
001_0539_b_17L隨染解性亦作法身之因何以知其然
001_0539_b_18L2) [44] [179] 性論言依二種佛性得出三種
001_0539_b_19L佛性論中顯是意言佛性有二種
001_0539_b_20L者住自性性二者引出佛性爲顯住自
001_0539_b_21L性性故說地中寶藏爲譬爲顯引出佛
001_0539_b_22L性故說掩羅樹芽爲譬約此3) [45] 因故
001_0539_b_23L說三身果一者因住自性佛性故說法
001_0539_b_24L法身有四種功德是故說毁敗布裏

001_0539_c_01L둘째는 이끌어 내는 부처님 마음자리로 인하여 응신을 말씀하시며, 응신에는 네 가지 공덕이 있다. 그러므로 가난하고 미천한 여인이 전륜성왕을 잉태한 비유를 말씀하신다. 셋째는 이끌어 내는 부처님 마음자리로 인하여 다시 화신을 낳으며, 화신에는 세 가지 일이 있다. 그러므로 아라한 가운데의 불상을 말씀하여 비유로 삼는다. ……258)

이 논의 뜻은, 틀림없이 얻은 인因 속에 세 가지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틀림없이 얻은 인은 이理를 본체로 삼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마치 자성이 청정한 부문 가운데의 진여라는 부처님의 마음자리가 공통으로 세 가지 불신이 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정인正因이 되는 것이다. 위에서 벌써 자성이 청정한 본각은 생겨나고 소멸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그러나 두 가지 불신이 될 수 있는 정인이 되는 것이라고 논설한다.
그러므로 염染을 따르는 깨달은 성품이 비록 상주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법신을 이루는 정인의 성품이 되는 것임을 꼭 알아야 한다. 『부증불감경不增不減經』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곧 이 법신은 번뇌에 얽혀서 시작을 모르는 과거로부터 그 이래로 세간을 수순隨順하고, 물결에 표류하면서 가고 오며 생겨나고 죽는 이를 부르기를 중생이라고 하며, 온갖 더러움을 벗어나 피안彼岸259)에 머물고, 온갖 법에서 무애 자재한 힘을 얻은 이를 부르기를 여래·응공260)·정변지라고 한다. 내지 자세하게 말씀하신다.261)

『대승기신론』 가운데에서도 이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비유를 들어 논술한다.

예를 들면 큰 바다의 물이 바람으로 말미암아 큰 물결을 일으키고 있을 때에는 물결의 출렁거리는 모습과 바람결의 움직이는 모습은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으므로, 이것을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물 자체는 움직이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므로 만일에 바람이 멈추게 되면 물결의 출렁거리는 모습만 멈출 뿐이며, 본디의 축축한 성질은 파괴되는 것이 아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들이 본디 갖추고 있는 자성이 맑고 깨끗한 마음이 무명이란 바람으로 말미암아 큰 물결을 일으키고 있을 때에는, 자성이 맑고 깨끗한 마음과 무명은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으므로, 이것을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262)

이 뜻은, 법신이 비록 움직이는 모습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러나 고요한 성품도 벗어난 것을 밝히려는 것이다. 무명의 바람을 따라 온몸을 걸고 뒹굴어도 뒹구는 마음은 신령스러운 성품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뒤에 다시 무명을 되돌려 근본으로 되돌아오게 하며, 근본에 되돌아올 때, 다시 법신을 이룬다. 그러므로 염染을 따라서 움직이는 마음이 바로 고요한 법신으로 되돌아오는 인이 되는 것임을 꼭 알아야 한다.
만일 이 부문에 의하면 법신도 또한 법을 만든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모든 행을 닦음으로써 비로소 고요함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입릉가경』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만일 여래의 법신이 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면 곧 이것은 몸이 아니다.

001_0539_c_01L眞金譬二者因引 [180] 佛性故說應身是故
001_0539_c_02L說貧女如壞輪王譬三者因引出佛性
001_0539_c_03L故復出化身故說羅漢中佛像爲譬
001_0539_c_04L至廣說此論意者應得因中具三佛性
001_0539_c_05L彼應得因如理爲體故如性淨門中眞
001_0539_c_06L如佛性通爲三身而作正因旣說性淨
001_0539_c_07L本覺雖非生滅而得與二身作正因
001_0539_c_08L知隨染解性雖非常住而與法身作正因
001_0539_c_09L如不增不減經言卽此法身煩惱纏
001_0539_c_10L無始世來隨順世間波浪漂流去來生死
001_0539_c_11L名爲衆生離一切垢住於彼岸於一切
001_0539_c_12L得自在力名爲如來應正遍知乃至廣
001_0539_c_13L起信論中爲顯是意故引喩言如海
001_0539_c_14L水因風波動水相風相不相捨離
001_0539_c_15L是衆生自性淸淨心因無明風動心與無
001_0539_c_16L不相捨離乃至廣說是意欲明法身
001_0539_c_17L雖非動相而離靜性隨無明風擧體動
001_0539_c_18L動轉之心不失解性後復無明還至
001_0539_c_19L歸本歸本之時還成法身是故當知隨
001_0539_c_20L染動心正爲還靜法身之因若依是門
001_0539_c_21L得說法身亦是作法以修諸行始得成
001_0539_c_22L靜故如楞伽經言若如來法身非作法
001_0539_c_23L「怯」疑「法」{編}「實」疑「寶」{編}「雨」疑
001_0539_c_24L「兩」{編}

001_0540_a_01L헤아릴 수 없는 공덕을 수행한 일이 있다고 말씀하신다면 온갖 행은 곧 허망한 것이기 때문이다.263)

부처님의 마음자리의 인위와 과위에 관한 부문의 논설을 마친다.

(3) 견성見性에 관하여 해석함

다음으로 셋째,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보는 것을 밝히는 부문이다. 말하자면 어느 계위에 이르러야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볼 수 있는가를 논설하는 것이다. 어떤 분은, 부처님의 마음자리(佛性)와 법계法界는 비록 다른 몸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뜻이 같지 않으므로 보는 계위도 또한 다르다. 그러므로 초지初地264)에서 진여·법계를 증득하여 보지만, 그러나 아직 부처님의 마음자리의 뜻은 볼 수 없다, 이어서 제10지第十地265)에 이르러서도 아직 귀로 들어 보며, 묘각위妙覺位266)에 이르러서야 바야흐로 눈으로 볼 수 있다고 증언하였다.
그러나 이 학설은 요달한 것이 아니니 글의 뜻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하면, 경전의 곳곳에서 모두 초지 보살初地菩薩이 법계를 증득하여 본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법계와 부처님의 마음자리(佛性)는 이름은 다르지만 뜻은 같다. 그래서 비록 법계를 증득한다고 하더라도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보지 못한다고 논술하는 것은 마땅히 도리에 맞지 않으며, 모든 경전의 글에 어긋나는 것이다.

다음으로 자세하게 논설하려고 한다. 진실 그대로의 뜻은, 만일 초지에서 법계를 증득할 수 있다고 하면 이 계위에 닿자마자 벌써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보는 것이며, 만일 제10지에서도 아직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보지 못한다면 또한 그 계위에서도 아직 법계를 보지 못하는 것이 된다. 이런 뜻을 나타내려고 하여 삼중三重으로 나누어 논설한다. 첫째는 구경인가 구경이 아닌가를 분석하여 보는 부문이며, 둘째는 보편인가 보편이 아닌가를 분석하여 보는 부문이고, 셋째는 증득인가 증득이 아닌가를 분석하여 보는 부문이다.

만일 구경인가 구경이 아닌가를 분석하여 보는 부문에서 본다면, 오로지 부처님의 경지에서만 눈으로 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때에 구경을 이루어 한마음의 근원으로 돌아와서 부처님의 마음자리의 전분全分의 체體를 증득하여 보기 때문이다. 금강유정金剛有情267) 이전에는 아직 눈으로 볼 수 없으며 오로지 우러러 믿을 뿐이므로 다만 귀로 들어서 본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아직 한마음의 근원에 이르지 못하였으므로 부처님의 마음자리의 전분의 체를 증득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마음자리에 관해서 말한 것처럼 법계도 또한 그러하며 그 밖의 일체의 경계도 또한 모두 그와 같은 것이다.

만일 둘째는 보편인가 보편이 아닌가를 분석하여 보는 부문에서 본다면, 초지 이상에서는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눈으로 보는데, 그것은 두루 모든 변계소집遍計所執268)을 버리고, 두루 모든 꽉 찬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보기 때문이다. 초지 이전의 범부나 이승의 성인은 믿음이 있든 믿음이 없든 모두 그것을 볼 수 없는데, 그것은 아직 모든 분별을 벗어나지 못하여 꽉 찬 법계를 증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001_0540_a_01L言有修行無量功德一切行者皆是
001_0540_a_02L虛妄故因果門竟

001_0540_a_03L
次第三明見性門者謂至何位得見佛
001_0540_a_04L有人證言佛性法界雖無二體而義
001_0540_a_05L不同見位亦異是故初地證見眞如法
001_0540_a_06L界而未能見佛性之義乃至十地猶是
001_0540_a_07L聞見至妙覺位方得眼見是說不了
001_0540_a_08L違文義故何者處處皆說初地菩薩證
001_0540_a_09L見法身法身佛性名異義一而言雖證
001_0540_a_10L法身不見佛性者不應道理違諸文
001_0540_a_11L當廣說如實義者若於初地得證法界
001_0540_a_12L卽於此位已見佛性若第十地未見佛
001_0540_a_13L亦於彼位未見法界欲顯是義三重
001_0540_a_14L分別一者究竟不究竟門二者遍不遍
001_0540_a_15L三者證不證門若就究竟不究竟門
001_0540_a_16L唯於佛地得名眠見此時究竟歸一心
001_0540_a_17L證見佛性之全分體故金剛以還
001_0540_a_18L得眼見宜是仰信但名聞見以其未至
001_0540_a_19L一心之原不證佛性全分體故如說佛
001_0540_a_20L法界亦爾餘一切境皆亦如是若就
001_0540_a_21L第二遍不遍門初地以上眼見佛性
001_0540_a_22L遣一切遍計所執遍見一切遍滿佛性故
001_0540_a_23L地前凡夫二乘聖人有信不信齊未能見
001_0540_a_24L以未能離一切分別不能證得遍滿法界

001_0540_b_01L
만일 셋째는 증득인가 증득이 아닌가를 분석하여 보는 부문에서 본다면, 이승의 성인은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볼 수 있지만 모든 범부는 아직 볼 수 없다. 그러한 까닭은, 두 가지 공(二空)269)을 이룬 진여가 곧 부처님의 마음자리인데, 이승의 성인은 비록 두루 보지는 못하지만 인공人空을 이룬 부문을 의지해서 진여를 증득한다. 그러므로 또한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눈으로 본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대반열반경』 「장수품」 가운데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만일 세 가지 법이 다르다는 상(異相)을 닦으면 청정한 삼귀명三歸命은 곧 의지할 곳이 없고, 모든 금계禁戒를 두루 구족하지 못하여 오히려 성문·연각·보리의 과도 얻을 수 없는데, 하물며 가장 높은 보리를 얻을 수 있겠는가?270)

이 글은 ‘만일 이승二乘의 사람이 관觀271)에 들었을 때, 오로지 삼보三寶에서 인·법이 다른 상(異相)만을 취한다면, 삼보의 체가 같은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라는 것을 밝히려는 것이다. 인공人空으로는 곧 무루無漏272)의 성스러운 계율을 갖출 수 없고, 또한 무생지無生智273)도 다 얻을 수 없다. 이것은 곧 ‘그들이 삼보가 한 몸인 것을 증견證見할 수 있기 때문에, 또한 이승二乘의 보리菩提를 얻을 수 있다’라는 것을 거꾸로 나타내는 것이다. 삼보가 한 몸인 것이 곧 부처님의 마음자리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또한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볼 수 있다고 논설하게 되는 것이다.
다만 그 사람은 비록 실제로는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볼 수 있다고 하더라도 아직 그것이 부처님의 마음자리라고 알 수 없을 뿐이다. 마치 그것은 안식眼識274)이 푸른빛을 보면서도 그것이 푸른빛임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비록 아직 그것이 푸른빛임을 알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이 안식은 실제로는 푸른빛을 보고 있다. 이승이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보는 것도 또한 이와 같음을 꼭 알아야 한다. 증득인가 증득이 아닌가, 이렇게 분석하여 보는 부문의 글의 뜻은 이와 같다.

보편인가 보편이 아닌가를 분석하여 보는 부문에 관한 글의 뜻이란, 이 『대반열반경』 「사자후보살품」 제23 가운데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부처님의 마음자리에 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색色이라는 것이며, 둘째는 색이 아니라는 것이다. 색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부처님과 보살을 가리키며, 색이 아닌 것이란 모든 중생을 가리키고, 색이라는 것은 눈으로 보는 이를 말하며, 색이 아닌 것이란 들어서 보는 이를 말씀하신다.275)

『묘법연화경우바제사』에서 논설한다.

팔생八生에서 일생一生276)에 이르기까지 모두 초지를 증득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안웃따라쌈약쌍보디(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고 말하는 것은 삼계의 분단생사를 벗어남으로써, 분수를 따라서 진여인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볼 수 있는 것을 가리켜 보리菩提를 얻었다고 말씀하신다.277)

『구경일승보성론』의 「승보품」에서 논설한다.

또 두 가지 수행이 있으니, 말하자면 여실수행如實修行과 변수행遍修行을 가리킨다. 여실수행이란,

001_0540_b_01L若依第三證不證門二乘聖人得見
001_0540_b_02L佛性一切凡夫未能得見所以然者
001_0540_b_03L二空眞如卽是佛性二乘聖人雖非遍
001_0540_b_04L依人空門證得眞如故亦得說眼見
001_0540_b_05L佛性如長壽品言若於三法修異相者
001_0540_b_06L淸淨三歸卽無依處所有禁戒皆不具
001_0540_b_07L尙不能得聲聞緣覺菩提之果何況
001_0540_b_08L能得無上菩提是文欲明若二乘人
001_0540_b_09L觀之時唯取三寶人法異相不證三寶同
001_0540_b_10L人空卽不能具無漏聖戒亦不能得
001_0540_b_11L盡無生智是卽反顯彼能證見三寶一
001_0540_b_12L體故亦能得二乘菩提三寶一體卽是
001_0540_b_13L佛性准知亦說得見佛性唯彼人雖實
001_0540_b_14L得見佛性而未能知謂是佛性如說眼
001_0540_b_15L識見靑不知靑雖未能知謂是靑色
001_0540_b_16L是眼識實見靑色二乘者見佛性當知
001_0540_b_17L亦爾證不證門文義如是遍不遍門之
001_0540_b_18L文義者如師子吼中言復次色者謂佛
001_0540_b_19L菩薩非色者一切衆生色者名爲眼見
001_0540_b_20L非色者名爲聞見法花論云八生乃
001_0540_b_21L至一生得阿耨菩提者證初地得菩提故
001_0540_b_22L以離三界分段生死隨分能見眞如佛性
001_0540_b_23L名得菩提寶性論僧寶品云有二種修
001_0540_b_24L謂如實修行及遍修行如實修行者

001_0540_c_01L말하자면 중생의 자성을 청정한 부처님의 마음자리의 경계로 보는 것을 가리킨다. 가타278)로 읊는다.

無障淨智者  장애가 없는 깨끗한 슬기로운 이,
如實見衆生  진실 그대로 중생을 보니,
自性淸淨佛  자성은 맑고 깨끗한 성품,
法身境界故  불법신의 경계로구나.

변수행遍修行이란, 말하자면 십지의 모든 경계를 두루하기 때문이다. 모든 중생이 모든 지혜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또 모든 경계를 두루함이란, 모든 경계를 두루함으로써 출세간의 지혜에 의지하여, 모든 중생에서 축생에 이르기까지 여래장如來藏279)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는 것이다. 꼭 알아야 한다. 그는, 모든 중생이 진여인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는 줄을 알라. 초지 보살마하살도 두루 모든 진여·법계를 증득하기 때문이다. 가타로 읊는다.

無礙淨智眼  장애가 없는 깨끗한 슬기로운 눈,
見諸衆生性  저 모든 중생의 성품을 보니,
遍無量境界  무량한 경계를 두루하였네.
故我今敬禮  나 이제 공경하고 예배하노라.280)

그러므로 해석하여 논술한다. 이 가운데에서, 여실수행이란 것은 곧 정체지正體智이며, 변수행遍修行이란 것은 곧 후득지이다. 이로써 초지 보살의 두 지智도 다 진여인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증득하여 볼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다만 정체지는 온전히 진여인 부처님의 마음자리의 실체를 증득하므로 여실수행이라고 부르며, 그 후득지는 모든 중생에 다 부처님의 마음자리가 있다는 것을 보기 때문에 변행遍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보편인가 보편이 아닌가, 이렇게 분석하여 보는 부문에 관한 글의 뜻은 이와 같다.

구경인가 구경이 아닌가를 분석하여 보는 부문에 관한 문증文證이란, 이 『대반열반경』 「사자후보살품」 제23 가운데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부처님의 마음자리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색이라는 것이며, 둘째는 색이 아니라는 것이다.) 색色이라는 것은 안웃따라쌈약쌍보디를 말하며, 색이 아닌 것은 범부에서 십주 보살에 이르기까지이다. 십주 보살도 보아서 요요了了하지 못하므로 색이 아니라고 부른다. 색이라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을 말하고, 색이 아닌 것이란 들어서 보는 것을 말한다.281)

『유가사지론』에서 논설한다.

모든 구경의 자리에 이르러 안주하는 보살의 지혜와 여래의 지혜는 어떻게 다릅니까?

눈 밝은 사람이 얇은 껍질을 사이에 두고 온갖 빛깔의 상像을 보는 것과 같이, 모든 구경의 자리에 이르러 안주하는 보살의 미묘한 지혜도 온갖 경계를 대하는 것이 그와 같다는 것을 꼭 알아야 한다.
눈 밝은 사람이 사이에 장애를 받지 않고 온갖 빛깔의 상像을 보는 것과 같이, 여래의 미묘한 지혜도 온갖 경계를 대하는 것이 그와 같다는 것을 꼭 알아야 한다. 그림을 그리는 사업이 원숙하여 여러 가지 채색을 하되 오직 뒤의 미묘한 빛깔만을 아직 깨끗이 마무리하지 못한 것과 같이, 구경의 자리에 이른 보살의 미묘한 지혜도 그와 같다는 것을 꼭 알아야 한다. 그림을 그리는 사업이 원숙하여 여러 가지 채색을 하되 최후에 미묘한 빛깔로 벌써 깨끗이 마무리하는 것과 같이, 여래의 미묘한 지혜도 그와 같다는 것을 꼭 알아야 한다.

001_0540_c_01L謂見衆生自性淸淨佛性境界故偈言
001_0540_c_02L無障淨智者如實見衆生自性淸淨佛
001_0540_c_03L身境界故遍修行者謂遍十地一切境
001_0540_c_04L界故見一切衆生有一切智故又遍一
001_0540_c_05L切境界者以遍一切境界依出世惠 [181]
001_0540_c_06L見一切衆生乃至畜生有如來藏應知
001_0540_c_07L彼見一切衆生皆有眞如佛性初地菩
001_0540_c_08L薩摩訶薩以遍證一切眞如法界故
001_0540_c_09L無礙淨智眼見諸衆生性遍無量境
001_0540_c_10L故我今敬禮故解言此中如實修行
001_0540_c_11L卽正體智遍修行者是後得智是知初
001_0540_c_12L地菩薩二智皆能證見眞如佛性但正
001_0540_c_13L體智宜證眞如佛性實體名如實行
001_0540_c_14L後得智見諸衆生悉有佛性故遍 [182]
001_0540_c_15L遍不遍門文義如是究竟不究竟門文
001_0540_c_16L證者師子吼中言佛性亦二言色者阿
001_0540_c_17L耨菩提非色者凡夫乃至十住菩薩
001_0540_c_18L不了不了故名非色色者名爲眼見
001_0540_c_19L色者名爲聞見瑜伽論云一切安住
001_0540_c_20L到究竟地菩薩智等如來智等有何差別
001_0540_c_21L如明眼人隔於輕繫覩衆色像到究
001_0540_c_22L竟地菩薩妙智於一切境當知亦爾
001_0540_c_23L知盡事業圓布衆采唯後妙色未淨修
001_0540_c_24L已淨修治菩薩如來二智亦爾如明

001_0541_a_01L눈 밝은 사람이 희미한 속에서 온갖 빛깔을 보는 것과 같이, 구경의 자리에 이른 보살의 미묘한 지혜도 그와 같다는 것을 꼭 알아야 한다. 눈 밝은 사람이 모든 어두움을 벗어나서 온갖 빛깔을 보는 것과 같이, 여래의 미묘한 지혜도 그와 같다는 것을 꼭 알아야 한다. 눈 밝은 사람이 멀리서 온갖 빛깔을 보는 것과 같이, 구경의 자리에 이른 보살의 미묘한 지혜도 그와 같다는 것을 꼭 알아야 한다. 눈 밝은 사람이 가까이서 온갖 빛깔을 보는 것과 같이, 여래의 미묘한 지혜도 그와 같다는 것을 꼭 알아야 한다. 조금 흐린 눈으로 온갖 빛깔을 보는 것과 같이, 구경의 자리에 이른 보살의 미묘한 지혜도 그와 같다는 것을 꼭 알아야 한다. 아주 맑은 눈으로 온갖 빛깔을 보는 것과 같이, 여래의 미묘한 지혜도 그와 같다는 것을 꼭 알아야 한다.282)

이런 글의 증명을 근거로 하여, 보살은 부처님의 마음자리의 경계를 아직 다 알지 못하고 온갖 경계를 다 알지 못함을 알아야 한다. 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통틀어 귀로 들어서 본다고 말씀하셨고, 인因을 얻은 것이 원만해졌기 때문에 또한 눈으로 본다고 말씀하셨다.

아직 온전히 알지 못하는 이유에는 간략히 다섯 가지 뜻이 있다.
첫째, 본식本識이 가장 미세한 망상과 서로 어울려서 무명의 알음알이가 금강의 눈을 가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얇은 껍질을 사이에 둔 것과 닮은 것이다.
둘째, 만행萬行을 벌써 갖추고 또 삼지三智283)를 벌써 얻었지만, 다만 아직 대원경지大圓鏡智284)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마치 가장 미묘한 빛깔만을 아직 깨끗이 마무리하지 못한 것과 같은 것이다.
셋째, 두 가지 장애를 해탈하였으므로 맑고 깨끗함을 얻었지만 아직 가장 미세한 무명주지가 가벼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희미한 어둠 속에서 빛깔을 보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넷째, 혹장의 습기는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가까이서 법공을 관찰하는 지혜를 장애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마치 멀리 떨어져 있는 빛깔을 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다섯째, 그 앎을 장애(智障)하는285) 기운이 비록 미세하고 얇다고는 하더라도 가까이서 지혜의 눈을 가리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것은 얇은 껍질을 사이에 두고 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런 다섯 가지 뜻을 근거로 하여 보면 아직 온전히 관조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다섯 가지 비유를 들어서 논설하는 것이다. 그 가운데서 어려운 것을 잘 회통해서 서로 어긋나는 경전의 글을 화회和會한 것은 『이장의二障義』286) 가운데에서 자세하게 논설한 것과 같다. 세 번째 문(第三重)에 나온 글의 뜻은 이와 같다.
만일 이와 같이 삼중三重으로 분별하는 뜻을 안다면, 여러 경문들에서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들에 대해 통하지 않는 바가 없을 것이다.

(4) 부처님의 마음자리가 있고 없음을 해석함

부처님의 마음자리가 있고 없음의 다른 점은 대략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성인의 계위에 의거하는 것이고, 둘째는 범부의 계위에 의거하는 것이다.

① 성인의 계위에 의거함

성인의 계위에서 부처님의 마음자리가 있고 없음에 대하여 먼저 다섯 단계를 만든다. 말하자면, 앞의 5지 보살까지를 첫째 단계로 삼으니, 열 가지 바라밀287)의 행위를 가지고 10지문에 짝을 지어 보면,288) 아직 반야般若를 얻지 못하여 형상이 범부의 계위와 같기 때문이다. 6·7·8지를 둘째 단계로 삼으니, 비록 출입出入이 있고 들고 남이 없다는 차이는 있지만, 한결같이 속제에서는 공용이 있기 때문이다. 제9지를 셋째 단계로 삼으니, 이 단계에서는 진제眞諦289)와 속제俗諦290)에서 모두 공용이 없기 때문이다.

001_0541_a_01L眼人微闇見色離闇見色二智亦爾
001_0541_a_02L遠見色如近見色猶如輕翳眼觀極淨
001_0541_a_03L眼觀二智差別當知亦爾依此文證
001_0541_a_04L知佛性境界菩薩未究竟於一切境
001_0541_a_05L未究盡未究盡故通名聞見得因滿故
001_0541_a_06L亦名眼見所以未窮知者略有五義
001_0541_a_07L者本識相應最綱妄想無明所識金剛眼
001_0541_a_08L是故似隔輕繫也二者萬行已備三智
001_0541_a_09L已得而唯未得大圓鏡智如最妙色
001_0541_a_10L淨修治三者解脫二障故得淨未輕極
001_0541_a_11L微無明住地是故不異微闇見色四者
001_0541_a_12L有惑障習而非親障法空觀智故如遠
001_0541_a_13L五者其知障氣雖是微薄近曉惠眼
001_0541_a_14L事同輕繫依是五義未能窮照故說如
001_0541_a_15L是五種譬喩於中通難會相違文具如
001_0541_a_16L二障義中廣說第三重內文義如是
001_0541_a_17L知如是三重別義諸文進退無所不通
001_0541_a_18L

001_0541_a_19L
第四明有無者有無差別略有二句
001_0541_a_20L就聖位二約凡位聖位有無先作五階
001_0541_a_21L謂前五地爲第一位以十度行配十地
001_0541_a_22L未得波若相同凡位故六七八地
001_0541_a_23L爲第二位雖有出入無出入異齊於俗
001_0541_a_24L有功用故第九地爲第三位以於眞

001_0541_b_01L제10지를 넷째 단계로 삼으니, 십바라밀十波羅蜜을 구족하여 인위因位의 행위를 완전하게 만족하기 때문이다. 여래지如來地를 다섯째 단계로 삼는다. 이 다섯 단계에 의거하여 부처님의 마음자리의 작용이 있고 없음을 논설하려고 한다. 이 『대반열반경』 「가섭보살품」 제24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부처님의 십력十力291)과 사무외四無畏 등 한량없는 모든 법이 부처님이며 부처님의 마음자리이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마음자리에 곧 일곱 가지 작용이 있으니, 첫째는 상常이며, 둘째는 낙樂이고, 셋째는 아我이며, 넷째는 정淨이고, 다섯째는 진眞이며, 여섯째는 실實이고, 일곱째는 선善이다. 후신 보살後身菩薩의 부처님의 마음자리에는 여섯 가지 작용이 있으니, 첫째는 상常이며, 둘째는 정淨이고, 셋째는 진眞이며, 넷째는 실實이고, 다섯째는 선善이며, 여섯째는 소견少見이다. 구지 보살의 부처님의 마음자리에 여섯 가지 작용이 있으니, 첫째는 상常이며, 둘째는 선善이고, 셋째는 진眞이며, 넷째는 실實이고, 다섯째는 정淨이며, 여섯째는 가견可見이다. 8지 보살부터 6지 보살까지의 부처님의 마음자리에 다섯 가지 작용이 있으니, 첫째는 진眞이며, 둘째는 실實이고, 셋째는 정淨이며, 넷째는 선善이고, 다섯째는 가견可見이다. 5지 보살로부터 초지 보살까지의 부처님의 마음자리에 다섯 가지 작용이 있으니, 첫째는 진眞이며, 둘째는 실實이고, 셋째는 정淨이며, 넷째는 가견可見이고, 다섯째는 선善·불선不善이다.292)

이 다섯 단계 가운데에 통틀어 열 가지 작용이 있다. 첫째는 선善·불선不善이고, 둘째는 가견可見이고, 셋째는 소견少見 및 부처님 계위에 있는 일곱 가지 작용(常·樂·我·淨·眞·實·善)이다. 이 열 가지 작용은 보신 부처님의 인위와 과위에 있는 것이지, 법신法身 부처님293)의 진여로서의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저곳의 글의 짜임새(文相)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열 가지 작용으로 부처님의 마음자리에 있고 없음을 모두 묶으면 다섯 가지로 짝을 짓는다. 첫째, 진眞·실實·정淨의 세 가지 작용은 다섯 단계에 공통된다. 둘째, 선善의 한 가지 작용은 상위의 네 단계에 있고, 셋째, 가견可見의 한 가지 작용은 하위의 세 단계에 있다. 넷째, 상常의 한 가지 작용은 상위의 세 단계에 있다. 다섯째, 아我·낙樂·소견少見·선불선善不善의 네 가지 작용은 그에 해당되는 데에 따라서 한 단계에만 국한되어 있는데, 그러한 까닭은 다음과 같다. 아我는 곧 부처님의 뜻이고 낙樂은 곧 열반의 뜻이므로, 부처님과 열반은 모두 구경을 드러내는 이름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는 오로지 과지果地에만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소견少見은 앞에서 설했던 다섯 가지 짝에서 나타나듯이 오로지 십지十地에만 있다. 선·불선은 형상이 범부와 같으므로 아직 순수한 선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001_0541_b_01L俱無功用故第十地爲第四位具足
001_0541_b_02L十度因行窮滿因 [183] 如來地者爲第五
001_0541_b_03L就此五位說事有無如迦葉品說
001_0541_b_04L如來十力四無畏等無量諸法足佛 [184] 是佛
001_0541_b_05L之性 [185] 如是佛性卽有七事一常二樂
001_0541_b_06L三我四淨五眞六實七善後身菩薩佛
001_0541_b_07L性有六一常二淨三眞四實五善六可 [186]
001_0541_b_08L九地菩薩佛性有六一常二善三眞
001_0541_b_09L四實五淨六可見八住菩薩下至六地
001_0541_b_10L佛性有五事一眞二實三淨四善五可
001_0541_b_11L五住菩薩下至初地佛性有五事
001_0541_b_12L眞二實三淨四可見五善不善解言
001_0541_b_13L五位中通有十事一善不善二者 [187] 可見
001_0541_b_14L三少見幷佛地七是十法 [188] 在報佛因果
001_0541_b_15L非就法身眞如佛性以彼處文相不得
001_0541_b_16L爾故然此十事有無總束以爲五倒 [189] [190]
001_0541_b_17L眞實淨三貫通五位二者善之一事
001_0541_b_18L上四位三者可見一事在下三位四者
001_0541_b_19L常之一事在上三位五者我樂少見善
001_0541_b_20L不善四隨其所應局在一位所以然者
001_0541_b_21L我者卽是佛義樂者是涅槃義佛與涅
001_0541_b_22L究竟之名故說此二唯在果地言少
001_0541_b_23L見者爲前所說五對所顯故此一事唯
001_0541_b_24L在十地善不善者相同凡夫未得純善

001_0541_c_01L이 한 가지 작용은 하위의 첫째 단계에 있다. 하나의 단계에만 있는 네 가지 작용을 세우는 뜻은 이와 같다.294)
상常의 작용이 상위의 세 단계에 있는 까닭은, 마음대로 앞에 나타나는 것이 상의 뜻이므로 9지九地 이상의 세 단계는 비록 인위와 과위는 다르다고 할지라도, 다 같이 진제와 속제에서 공용功用이 없음을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상의 작용은 상위의 세 단계에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가견可見이 하위의 세 단계에 있는 까닭은, 10지는 인지因地를 완성시키고 불지佛地는 과지를 완성시킨 것이기 때문에, 비록 인지와 과지가 다르다고 할지라도 똑같이 원만하기 때문에 말씀하지 않으셨고, 9지 이하는 모두 아직 원만하지는 못하지만 앞으로 원만함을 갖출 수 있기 때문에 가견을 말씀하신 것이다.
선善의 작용이 상위의 네 단계에 있는 까닭은, 6지 이상은 벌써 반야를 얻어서 선교로 중생들을 이롭게 하기 때문에 선의 작용을 얻은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정淨·진眞·실實이 다섯 단계에 공통되는 까닭은, 이 가운데의 정淨은 무루의 뜻이니, 초지 이상은 참다운 무루를 얻기 때문에 정덕淨德이 다섯 단계에 공통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허망함을 벗어난 것이 진眞의 뜻이므로 견분見分에 있으며, 허망하지 않음이 실實의 뜻이므로 상분相分에 해당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무루의 견분과 상분은 헛된 것도 아니며 망령스런 것도 아니기 때문에 진眞과 실實, 이 두 가지는 역시 다섯 단계에 공통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295)
그러나 이 열 가지 작용이 있다거나 없다는 뜻은 다만 한쪽만을 붙잡고서 그 계급階級을 나타낸 것이므로, 반드시 한결같이 꼭 그렇게 된다는 것은 아니다.

② 범부의 계위에 의거함

다음으로 범부의 계위에 의거하여 부처님의 마음자리(佛性)가 있고 없음을 논설하면, 이 『대반열반경』 「가섭보살품」 제24의 네 글귀 가운데의 말씀과 같다.

어떤 부처님의 마음자리(佛性)는 일천제一闡提(icchantika)에게는 있으며 선근善根을 가진 사람에게는 없다.
어떤 부처님의 마음자리는 선근을 가진 사람에게는 있으며 일천제에게는 없다.
어떤 부처님의 마음자리는 일천제와 선근을 가진 사람 모두에게 있다.
어떤 부처님의 마음자리는 일천제와 선근을 가진 사람 모두에게 없다.296)

이와 같은 네 글귀는 보신報身297)의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드러내는 것이지 법신의 진여인 부처님의 마음자리에 의거한 것이 아니다. 이 경의 글의 짜임새가 꼭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네 글귀로 차별된 말씀에는 대략 네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두 문을 나타내기 때문이고, 둘째는 인과를 구별하기 때문이고, 셋째는 네 가지 의미를 전개하기 때문이며, 넷째는 두 가지 치우침을 막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가. 두 문을 나타냄

첫째로 두 문을 나타내기 때문에 네 글귀를 말씀하신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앞의 두 글귀는 의지문依持門을 들어서 다섯 종성種性298)을 말씀하시는 것이며, 뒤의 두 글귀는 연기문緣起門을 들어서 인위와 과위의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나타내려는 것이다.

001_0541_c_01L故此一事在一位一位四事立意如是
001_0541_c_02L所以常事在上三位者任運現前是其
001_0541_c_03L常義九地以上三位雖因果殊俱於眞
001_0541_c_04L俗得無功用故說常事在上三位所以
001_0541_c_05L可見在下三位者十地因滿佛地果員 [191]
001_0541_c_06L因果雖殊同員 [192] 滿故九地以下齊未圓
001_0541_c_07L [193] 足應滿故說可見所以善事在上四
001_0541_c_08L位者六地已上已得般若善巧利物故
001_0541_c_09L得善事所以淨與眞實通於五位者
001_0541_c_10L中淨者是無漏義初地以上得眞無漏
001_0541_c_11L故說淨德通於五位離妄爲眞義在見
001_0541_c_12L不虛爲實義當相分無漏見相非
001_0541_c_13L妄非虛故說此二亦通五位然此十事
001_0541_c_14L有無之義但約一邊顯其階級未必一
001_0541_c_15L向定爲然也次約凡夫位說有無者
001_0541_c_16L迦葉品四句中說或有佛性一闡提有
001_0541_c_17L善根人無或有佛性善根人有一闇提
001_0541_c_18L或有佛性二人俱有或有佛性
001_0541_c_19L人俱無解云如是四句顯報佛 [194] 非就
001_0541_c_20L法身眞如佛 [195] 彼處文勢必應爾故四句
001_0541_c_21L差別略有四義顯二門故別因果故
001_0541_c_22L開四意故遮二邊故第一義者爲顯二
001_0541_c_23L門故說四句何者前之二句約依持門
001_0541_c_24L說五種性其後二句就緣起門顯因果

001_0542_a_01L
첫째 글귀에서 부처님의 마음자리가 일천제에게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부정성不定性인 사람이 선근을 끊었을 때조차도 오히려 부처님이 될 진실한 종자를 가지고 있다는 말씀이다. 또한 부처님의 마음자리가 선근을 가진 사람에게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종성이 결정된 이승(決定二乘)299)에게 선근이 있을 때에는 앞에서 말씀했던 부처님이 될 종자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씀이다.
둘째 글귀 가운데에서 선근을 가진 사람에게 부처님의 마음자리가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보살종성은 선근을 끊지 않고 본래부터 부처님이 될 종자를 가지고 있다는 말씀이다. 또한 일천제에게 부처님의 마음자리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부처님의 마음자리가 없는 중생이 선근을 끊었을 때에는 영원히 앞의 보살과 같은 종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꼭 알아 두어라. 이 두 글귀는 다섯 종성을 나타내려는 것이다.
셋째 글귀에서 부처님의 마음자리가 일천제와 선근을 가진 사람 모두에게 있다고 하는 말씀은, 앞의 두 글귀 안의 서로 겹치는 두 사람은 모두 연기문緣起門 가운데의 인성因性을 가지고 있으며, 무릇 마음이 있는 이는 깨달음(菩提, bodhi)300)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이다.
넷째 글귀에서 부처님의 마음자리가 일천제와 선근을 가진 사람 모두에게 없다고 하는 말씀은, 이는 곧 셋째 글귀에서 말씀한 두 사람은 모두 연기문 가운데의 과지果地의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씀이며, 당시에는 아직 가장 높은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꼭 알아 두어라. 이 두 글귀는 인과의 성품을 나타낸 것이다.
이와 같이 경經의 뜻이 넓고 크기 때문에 포용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통틀어 두 문을 가지고 네 글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첫째 뜻은 이와 같다.

나. 인과를 구별함

둘째로 인과因果를 구별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연기의 한 문에 의거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앞에 내세운 세 글귀는 인因의 차별을 설명하는 것이고, 마지막 한 글귀는 과果가 둘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려는 것이다. 이는 무슨 뜻인가?
첫째 글귀 가운데에서 부처님의 마음자리가 일천제一闡提에게는 있으며 선근을 가진 사람에게는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모든 선근을 끊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불선不善한 오온이라도 보신이 될 부처님의 마음자리임을 밝히려는 것이다.
둘째 글귀에서 부처님의 마음자리가 선근을 가진 사람에게는 있으며 일천제에게는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모든 선근을 가지고 있는 이가 소유한 선한 오온도 역시 보신이 될 부처님의 마음자리임을 밝히려는 것이다.
셋째 글귀에서 부처님의 마음자리가 일천제와 선근을 가진 사람 모두에게 있다고 말씀하신 것은, 앞의 두 사람이 가지고 있는 네 가지 무기無記인 오온이 모두 보신이 될 수 있는 정인正因이라는 말씀이다. 그것은 저 모든 (선善·악惡·무기無記의) 삼성三性의 오음이 모두 한 마음(一心)이 일어나 지은 것이기 때문이다. 삼성三性이 모두 다 부처님의 마음자리가 되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세 글귀를 지어서 인因의 차별을 밝힌 것이다.

001_0542_a_01L謂初句言闡提人有者不定性人斷
001_0542_a_02L善根時猶有作佛法爾種子故善根人
001_0542_a_03L無者決定二來 [196] 有善根時無如前說作
001_0542_a_04L佛種子故第二句中善根人有者
001_0542_a_05L薩種性無斷善根本來具有作佛種子
001_0542_a_06L闡提人無者無性衆生斷善根時
001_0542_a_07L無如前菩薩種性故故知此二句顯五
001_0542_a_08L種性也第三句言二人俱有者前二句
001_0542_a_09L內兩重二人皆有緣起門中因性凡有
001_0542_a_10L心者當得菩提故第四句言二人俱無
001_0542_a_11L卽第三句所說二人齊無緣起門中
001_0542_a_12L果性當時未得無上菩提故故知此二
001_0542_a_13L句顯二 [197] 果性如此經意寬無所不苞
001_0542_a_14L取二門以說四句初義如是第二義者
001_0542_a_15L宜就緣起一門而說前立三句明因差
001_0542_a_16L最後一句顯果無二何者初句中
001_0542_a_17L闡提人有善根人無者是明一切斷
001_0542_a_18L善根人所有不善五陰亦作報佛之性
001_0542_a_19L第二句言善根人有闡提人無者是明
001_0542_a_20L一切有善根者所有善五陰亦爲報佛
001_0542_a_21L第三句二人俱有者謂前二人所有四
001_0542_a_22L種無記五陰皆能得作報佛正因以彼
001_0542_a_23L一切三性五陰皆爲一心轉所作故
001_0542_a_24L顯三性皆爲佛性故作三句明因差別

001_0542_b_01L
넷째 글귀에서 부처님의 마음자리가 일천제와 선근을 가진 사람 모두에게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앞의 두 사람이 비록 선·악·무기의 세 가지 인因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아직 보신의 결과로서의 부처님의 마음자리(果佛性)를 얻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극과極果인 순일純一하고 착한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나타내려고 한 글귀를 내세워 둘이 아님을 나타내는 것이다. 둘째 뜻은 이와 같다.

다. 네 가지 의미를 전개함

셋째로 네 가지 의미를 전개하기 위하여 네 글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첫째 글귀는 억누르고 이끌어 준다는 의미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선근을 끊는 사람을 이끌어 줌으로써 절망하는 마음을 제거하여 주기 때문이며, 또한 선근을 가진 사람이 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악을 꿈꾸는 것을 억누르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둘째 글귀는 권청하는 의미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벌써 악을 꿈꾸는 것을 억눌러 버렸으므로, 온갖 선을 닦기를 권청하는 것이며, 손을 들거나 머리를 숙이는 것이 모두 불도佛道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벌써 절망하는 마음을 제거하여 주었기 때문에, 모든 악에서 벗어날 것을 권청하는 것이니, 악이란 화禍의 근본이 되어서 아주 심하게 불도를 장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글귀는 널리 공경하는 뜻을 내게 하려는 의미에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한 중생이라도 미래의 불과를 품고 있지 않는 이가 없는데, 미래의 불과를 품고 있는 이는 반드시 대각을 성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넷째 글귀는 널리 제도하는 일을 하자는 의미에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비록 미래의 불과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보고 깨닫지 못하는데, 보고 깨닫지 못하는 이는 오래도록 고해에 빠지기 때문이다.
이 네 가지 의미 속에서 드러내 보이는 것은, 첫째 글귀 가운데에서는 사견邪見을 들어서 말씀하신 것이고, 둘째 글귀 가운데에서는 신심信心을 들어서 말씀하신 것이고, 셋째 글귀와 넷째 글귀는 똑같이 미래의 불과를 희망하는 것이니, 미래에 있는 것(當有)을 가리키므로 두 사람이 다 있다고 말씀하셨고, 현재 없는 것(現無)을 근거로 하므로 또한 두 사람이 다 없다고 말씀하셨다. 셋째 뜻은 이와 같다.

라. 두 가지 치우침을 막음

넷째로 두 가지 치우침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네 글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앞의 두 글귀는 분석적으로 치우침에서 벗어나는 것을 나타내려고 하며, 뒤의 두 글귀는 종합적으로 치우침에서 벗어나는 것을 나타내려고 한다.
분석적으로 치우침에서 벗어나는 것을 나타내려고 한다는 말씀은, 첫째 글귀에서 부처님의 마음자리가 일천제一闡提에게는 있다고 말씀하신 것은 부처님의 마음자리가 일천제에게는 결정코 없다고 하는 치우침을 막는 것일 뿐, 부처님의 마음자리가 일천제에게 결정코 있다고 하는 치우침을 따르려는 것은 아니며, 둘째 글귀에서 부처님의 마음자리가 일천제에게는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부처님의 마음자리가 일천제에게는 결정코 있다고 하는 치우침을 막는 것일 뿐, 부처님의 마음자리가 일천제에게는 결정코 없다고 하는 치우침에 집착하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이 『대반열반경』의 아래 글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만일 어떤 이가 선근을 끊은 이는 틀림없이 부처님의 마음자리가 있기도 하고 틀림없이 부처님의 마음자리가 없기도 하다고 말씀하신다면, 이것을 치답置答301)이라고 한다.
(마하가섭이 말하기를, 세존이시여, 제가 듣고서 대답하지 않으면 바로 치답이라고 하나이다. 여래께서는 이제 무슨 인연으로 대답을 하시면서도 치답이라고 하시나이까?)
선남자여, 나도 또한 말하지 않고 그대로 두고서 대답하지 않으면 치답이라고 하느니라. 이와 같이 치답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사견邪見을 막아서 그치게 하는 것이며, 둘째는 사견에 집착하지 않게 하는 것이니라. 이러한 뜻을 가지므로 치답이라고 할 수 있느니라.302)

일천제에 대하여 두 가지 치우침을 막으려고 하는 것처럼,

001_0542_b_01L第四句言二人俱無者謂前二人
001_0542_b_02L有三因而皆未得報佛果性爲顯極果
001_0542_b_03L純一善性故立一句顯無二也二義如
001_0542_b_04L第三意者爲四種意故說四句
001_0542_b_05L一句者抑引意說引斷善根者除絕望
001_0542_b_06L心故抑善根人持善夢惡故第二句者
001_0542_b_07L勸請意說旣除夢惡勸修衆善擧手低
001_0542_b_08L頭皆成佛道故旣除絕望心 [198] 離諸惡
001_0542_b_09L惡爲禍本能障佛道故第三句者生普
001_0542_b_10L敬意無一有情不含當果含當果者必
001_0542_b_11L成大覺故第四句者起廣度意雖有當
001_0542_b_12L果而無觀覺無觀覺者長沒苦海故
001_0542_b_13L四意內所詮義者第一句中約邪見說
001_0542_b_14L第二句中約信心說 [199] 四同望當果
001_0542_b_15L當有義說爲俱有據現無義亦說俱無
001_0542_b_16L三義如是第四義者爲離二邊故說四
001_0542_b_17L謂前二句別顯離邊後之二句總顯
001_0542_b_18L離邊言別顯者謂初句言闡提人有
001_0542_b_19L遮定無邊非據定有第二句言闡提人
001_0542_b_20L止定有邊不著定無如下文言若有
001_0542_b_21L說言斷善根者定有佛性定無佛性
001_0542_b_22L名置答善男子我亦不說置而不答乃
001_0542_b_23L說置答如是置答復有二種一者遮
001_0542_b_24L二者莫著以是義故得名置答如就

001_0542_c_01L선근을 가진 사람에 대하여도 마땅히 그러함을 알아야 한다.
뒤의 두 글귀는 종합적으로 치우침에서 벗어나는 것을 나타내려고 하는 것으로, 셋째 글귀에서 부처님의 마음자리가 일천제와 선근을 가진 사람 모두에게 있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마음자리는 토끼의 뿔과 같지 않으므로, 없는 것이 아니라는 뜻에 의지하여 밝히려고 부처님의 마음자리가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며, 넷째 글귀에서 부처님의 마음자리가 일천제와 선근을 가진 사람 모두에게 없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마음자리는 허공과 같지 않으므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을 들어서 드러내려고 부처님의 마음자리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대반열반경』의 아래 글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중생에게 부처님의 마음자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까닭이 무엇이냐. 부처님의 마음자리가 비록 있다고 하더라도 허공과 같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허공은 볼 수 없지만 부처님의 마음자리는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마음자리가 비록 없다고 하더라도 토끼의 뿔과 같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토끼의 뿔은 생겨나지 못하지만 부처님의 마음자리는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마음자리는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고 또한 있기도 하고 또는 없기도 하다.
왜 있다고 말하는가? 모든 중생이 모두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어서, 모든 중생이 끊어 없어지지 않는 것이 마치 등불의 불꽃과 같은 것이며 내지 가장 높은 깨달음을 이루기 때문에 부처님의 마음자리가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왜 없다고 말하는가? 모든 중생이 현재는 아직 모든 불법(의 상·락·아·정)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부처님의 마음자리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부처님의 마음자리의 있음과 없음이 합일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중도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중생에게 부처님의 마음자리가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303)

만일 이와 같이 치우침을 벗어난다는 뜻에 의하면, 이 네 글귀는 모두 미래의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바라보고 하시는 말씀이다.
만일 네 글귀를 모두 하나의 과위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라면, 종합적인 것과 분석적인 것의 두 가지 뜻은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앞의 두 사람이 말하는 두 글귀는 차전遮詮280의 뜻에 의지하여 두 가지 치우침을 없애려는 것이고,304)뒤의 두 사람이 주장하는 두 글귀는 표전表詮305)의 뜻에 의지하여 중도를 보이려는 것이다. 중도의 뜻은 두 사람에게 공통이기 때문에 통합하여 논설하며, 두 가지 치우침에의 집착은 사람에 따라서 각각 다르게 일어나기 때문에 따로따로 논설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이 네 글귀를 말씀하신 의취意趣는 참으로 많지만, 이제 잠시 간략하게 네 가지 뜻으로 추려서 보려고 하는 것뿐이다.
부처님의 마음자리가 있고 없음을 논설하는 글을 마친다.

(5) 삼세三世를 해석함

다섯째, 삼세三世에 걸치느냐와 삼세에 걸치지 않느냐에 관하여 밝히려고 하는 부문에는 대략 두 가지 뜻이 있다. 먼저는 법신 부처님에 의거하여 해석하고, 뒤에는 보신 부처님에 의거하여 해석하려고 한다.

① 법신 부처님에 의거함

만일 이것을 따로따로 나누어서 해석하면, 법신 부처님의 성품은 비록 인위因位의 이름이라고 하더라도 틀림없이 과위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 본체를 얻어 평등성에 도달하면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소멸하는 것도 아니다.

001_0542_c_01L闡提遮止二邊對善根人當知亦爾
001_0542_c_02L後二句總顯離邊者第三句言二人俱
001_0542_c_03L是明佛性不同菟 [200] 角依非無義說名
001_0542_c_04L爲有第四句言二人俱無是顯佛性不
001_0542_c_05L同虛空約不有義說名爲無如下文言
001_0542_c_06L衆生佛性非有非無所以者何佛性雖
001_0542_c_07L非如虛空虛空不可見佛性可見故
001_0542_c_08L佛性雖無不同菟 [201] [202] 角不可生佛性
001_0542_c_09L可生故是故佛性非有非無亦有亦無
001_0542_c_10L云何名有一切悉有是諸衆生不斷滅
001_0542_c_11L猶如燈炎 [203] 乃至菩提 [204] 名有云何 [205]
001_0542_c_12L一切衆生現在未有一切佛法是故名
001_0542_c_13L有無合故是名中道是故佛性非有
001_0542_c_14L非無乃至廣說若依如是離邊之意
001_0542_c_15L句皆望當果佛性若使四句齊望一果
001_0542_c_16L總別二意有何異者前二人說二句者
001_0542_c_17L依遮詮義以遣二邊後總 [206] 二人立 [207] 句者
001_0542_c_18L依表詮門以示中道中道之義通於二
001_0542_c_19L是故合說二邊之執隨人各起
001_0542_c_20L以別說然佛說四句意趣衆多今且略
001_0542_c_21L爾四種義耳有無門竟

001_0542_c_22L
第五明三世非三世略有二義先就法
001_0542_c_23L後約報佛若就別門法身佛性雖復
001_0542_c_24L因名應得果名至得其體平等無生無

001_0543_a_01L그러므로 한결같이 삼세에 포섭되지 않는다. 이러한 뜻은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구태여 경의 말씀으로 인증引證할 필요가 없다.

② 보신 부처님에 의거함

다음에는 보신 부처님의 인위의 성품과 과위의 성품에 의거하여 해석하려고 하는데, 아래 글의 학설에 의하면 바로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여래는 과위果位306)를 원만하게 이루신 것이며, 보살은 인위因位307)를 원만하게 이룬 것이다. 이 둘을 서로 비교하여 같지 않음을 나타내려고 한다. 여래의 원만한 지혜는 이치의 근원을 완전히 다 이루어, 한 법계와 평등하며 삼세의 끝까지 두루하고 있으므로, 과거도 아니며 현재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것이다. 그런데 후신 보살後身菩薩308)은 아직 이치의 근원을 다 이루지 못하였으므로, 비록 벌써 원만한 인위를 이루어 부처님의 성품을 조금은 본다고 하더라도, 아직 부처님의 최후의 과위를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골고루 다 보지를 못한다. 아직 끝까지 골고루 다 보지 못하는 것을 미래라고 말하니, 아직 원만한 과위를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벌써 끝까지 조금 보는 것을 현재라고 말하니, 원만한 인위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는 아직 사라져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과거는 아니다. 이 『대반열반경』의 아래 글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여래의 부처님의 마음자리(如來佛性)는 과거도 아니며 현재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다. 후신 보살의 부처님의 마음자리는 현재이기도 하며 미래이기도 하다. 그것은 부처님의 성품을 조금 볼 수 있기 때문에 현재라 말할 수 있으며, 아직 끝까지 골고루 다 보지 못하기 때문에 미래라고 말씀하신다.309)

후신 보살은 부처님의 성품을 아직 끝까지 골고루 다 보지 못한다는 뜻은, 아직 이것은 현재에 있는 것인데 어찌하여 이것을 미래의 것이라 이르는가? 또는 후신 보살이 부처님의 성품을 조금 볼 수 있는 것을 현재라 말씀하신다면, 이는 곧 여래도 현재 그것을 볼 수 있기 때문에 현재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여래가 현재 부처님의 성품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삼세에 두루할 수 있다는 것이므로 필경 시절을 따라 변천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비록 현재 부처님의 성품을 볼 수 있다고 하더라도 현세에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후신 보살이 부처님의 성품을 조금 본다고 하더라도 아직 삶과 죽음을 면하지 못하여서 시절에 떨어지게 되므로 현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뒤에 나오는 어려운 질문에 통하는 대답이다.
앞의 물음에 관하여 대답하면, 후신 보살이 부처님의 성품을 아직 끝까지 골고루 다 보지 못한다는 뜻은, 비록 현재 있다고 하더라도 골고루 갖추어 볼 수 있는 종자는 숨어서 아직 생겨나지 않은 상태이지만, 현재로부터 생겨날 것이므로 미래라고 한다. 『유가사지론』에서 논설하는 것과 같다.

아직 과위를 부여한 것은 아니지만 미래의 종자와 상속하므로 미래의 과위라고 한다.310)

이 가운데의 도리도 또한 이와 같다는 것을 꼭 알아 두어야 한다.

둘째, 여래의 인위와 과위를 서로 대대待對하여 그 다른 점을 밝히려고 한다. 과위를 내세워서 인위를 바라보면 인위는 모두 아직 구경의 자리가 아니므로 생겨나고 소멸함을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삼세에 떨어진다.
그렇지만 과위를 근거로 하여 과보를 담론하면 곧 두 가지 뜻이 있다. 첫 번째, 생인生因311)으로 생겨나는 것은

001_0543_a_01L是故一向非三世攝是義灼然不勞
001_0543_a_02L引證也次約報佛因果性者依下文說
001_0543_a_03L卽有三句一者如來圓果菩薩滿因
001_0543_a_04L二相對以顯不同如來圓智窮於理原
001_0543_a_05L等一法界遍三世際故非過去現在未
001_0543_a_06L後身菩薩未至理原雖復已得滿因
001_0543_a_07L故已少見未至極果故未具見未具見
001_0543_a_08L名爲未來未成圓果故已少見邊
001_0543_a_09L爲現在現得滿因故猶未謝故非過去
001_0543_a_10L如經言如來佛性非過去非現在 [208] 未來
001_0543_a_11L後身菩薩佛性現在未來少可見故
001_0543_a_12L名現在未具見故名爲未來故未具
001_0543_a_13L見義猶是現在有何得說是名爲未來
001_0543_a_14L又若菩薩現得少見故名現在者是卽
001_0543_a_15L如來現得其見應名現在如來現得
001_0543_a_16L得遍三世畢竟不爲時節所遷故雖現
001_0543_a_17L不在現世菩薩少見未免生死猶墮
001_0543_a_18L時節故爲現在是通後難答前問者
001_0543_a_19L未具見義雖是現有具見種子猶伏未起
001_0543_a_20L由現起故名未來如瑜伽說未與果
001_0543_a_21L來種子相續名未來果當知此中道理
001_0543_a_22L亦爾第二句者宜就如來因果相對
001_0543_a_23L明差別立果望因因皆未極不離生滅
001_0543_a_24L故隨三世就果談果卽有二義 [209] 生因

001_0543_b_01L반드시 소멸하여 찰나刹那도 머무르지 않으므로 이것은 삼세에 걸치는 것이다. 두 번째, 벌써 이치의 근원에 이르러 본체가 한 법계法界이므로 두루하지 않는 데가 없기 때문에 삼세에 걸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생겨나고 소멸하는 성질은 이치를 본체로 삼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한 순간 한 순간이 모두 삼세에 두루 미치는 것이다. 삼세에 두루 미치는 성질은 모두 생인을 따르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삼세에 두루 미치는 것은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찰나를 물리치면 삼세에 두루하며, 삼세에 두루하는 이치를 따르지 않으면 한 순간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한 순간이 되어 버리므로 삼세를 따르는 것이며, 삼세三世에 두루하므로 과거도 아니며 현재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것이다. 이것은 부처님의 공덕이 불가사의함을 말하는 것인데, 다만 우러러 믿을 뿐이지 생각하고 헤아릴 것이 아니다. 이 『대반열반경』 「가섭보살품」 제24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여래가 아직 안웃따라쌈약쌍보디를 얻지 못하였을 때, 부처님의 마음자리는 인위이므로 과거이기도 하며 현재이기도 하고 미래이기도 하다. 그러나 부처님이 된 과위에서는 그렇지 않으므로 삼세이기도 하고 삼세가 아니기도 하다.312)

이 경의 글에서 ‘삼세이기도 하고 삼세가 아니기도 하다는 것’은 곧 둘로 분석하여 보아야지, 하나의 성질로만 말씀한 것이 아니다. 이것이 ‘삼세이기도 하다는 것’은 화신 부처님313)의 형색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삼세가 아니기도 하다는 것’은 보신 부처님의 내덕內德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와 같이 두 가지 뜻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데, 어찌하여 하나의 실덕만을 가지고 알기 어려운 설명을 하는가?
그대가 보는 것도 또한 일리는 있다. 그것은 새로 배우는 이를 위해서는 이렇게 말씀을 해야 하지만, 그러나 만일 새로 배우는 이가 아니고 결정적인 집착이 없는 이라면, 이들을 위해서는 앞의 말씀과 같이 해야 한다. 이러한 뜻을 나타내려고 이 『대반열반경』 「가섭보살품」 제24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가섭보살이 부처님께 사뢰어 말씀하셨다.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인위가 또한 과거이기도 하고 현재이기도 하며 미래이기도 하다고 말씀하시는지요? 그리고 과위가 또한 과거이기도 하고 현재이기도 하며 미래이기도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과거도 아니고 현재도 아니며 미래도 아니라고 말씀하시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오음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인因이고 둘째는 과果이다. 이 인의 오음은 과거이기도 하고 현재이기도 하며 미래이기도 하다. 이 과의 오음은 또한 과거이기도 하고 현재이기도 하며 미래이기도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과거도 아니고 현재도 아니며 미래도 아니다.”314)

이러한 경의 예증을 근거로 하여 보면, 한 과(一果)의 오음은 삼세이기도 하며 또한 삼세가 아니기도 하다는 것을 꼭 알아 두어야 한다.

셋째, 보살의 인위와 과위를 서로 대대시켜서 삼세三世를 논술한다는 것은,

001_0543_b_01L所生者必滅刹那不住故是三世二者
001_0543_b_02L已至理原體一法界無所不遍故非三
001_0543_b_03L然其生滅德無不體理故一一念
001_0543_b_04L遍三世遍三世德莫不從因故其周遍
001_0543_b_05L不過刹那爾退刹那而遍三世不從周
001_0543_b_06L而爲一念爲一念故隨於三世遍三
001_0543_b_07L世故非過現未是謂佛德不可思議
001_0543_b_08L應仰信非思量流如經言如來未得阿
001_0543_b_09L耨菩提時佛性因故亦是過去現在未來
001_0543_b_10L果卽不爾有是三世有非三世故問者
001_0543_b_11L是經文有是有非卽應二別不就一德
001_0543_b_12L有是三世者化身色形是有非三世者
001_0543_b_13L報佛內德是亦如是二義灼然可見
001_0543_b_14L勞宜就實德而作難解之說如汝所
001_0543_b_15L亦有道理爲新學者應作是說若非
001_0543_b_16L新學無定執者爲是等人應如前說
001_0543_b_17L顯是義故彼下文言迦葉菩薩白佛言
001_0543_b_18L世尊云何名因亦是過去現在未來
001_0543_b_19L亦過去現在未來非是過去現在未來
001_0543_b_20L佛言五陰二種一者因二者果是因五
001_0543_b_21L陰是過現未是果五陰亦是過去現在
001_0543_b_22L未來亦非過去現在未來依是文證
001_0543_b_23L知宜就一果五陰亦是三世亦非三世
001_0543_b_24L第三句者宜就菩薩因果相對以辨三世

001_0543_c_01L보살의 부처님 마음자리는 아직 생겨나고 죽는 것을 면하지 못한 것이므로, 먼 훗날 올 것을 바라보면 인위가 되며 앞에 지나간 날을 바라보면 과위가 된다. 그것은 종자는 인위가 되고 현행現行은 과위가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보살의 인위와 과위는 모두 삼세를 따르므로 아직 이치의 근원에 이르지 못하여 삼세가 아닌 것이 없다. 이 『대반열반경』 「가섭보살품」 제24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후신 보살은 부처님의 마음자리가 인위이기 때문에 또한 이것은 과거이기도 하고 현재이기도 하며 미래이기도 하다. 그 보살의 과위도 이와 같으므로 이것을 분별답291이라고 한다. 구지九地 보살은 부처님의 마음자리가 인위이기 때문에315)또한 이것은 과거이기도 하고 현재이기도 하며 미래이기도 하다. 그 보살의 과위도 이와 같다. ……316)

둘째 내용에서는 여래의 인위를 밝히면서, 아직 부처님을 이루지 못하였을 때의 인위의 성품에 관하여 취급한 것이다. 그런데 이제 셋째 내용에서는 보살의 과위를 밝히면서, 널리 미래의 부처님을 이룰 때의 과위의 성품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 가운데에서 미래의 부처님이 될 과위에 관하여 말하지 않는가?
과위를 내세워서 인위를 바라보는 것을 예로 삼아서는 안 된다. 보살의 인위는 벌써 닦았기 때문에 인위에 관하여 취급한 것이다. 그 인위의 수행은 과위를 바라보고 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과위를 아직 깨달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과위에 관하여 취급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살의 지위 안에서 과거와 미래를 서로 바라보면서 인위와 과위의 삼세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마음자리의 삼세三世에 관한 해설을 마친다.

(6) 회통에 관하여 논설함

경전의 서로 다른 말씀을 회통하는 가운데에는 두 가지가 있다. 앞에서는 경전의 말씀이 서로 다른 것을 회통하며, 뒤에서는 같은 뜻으로 분류되어도 경전에는 서로 다른 말씀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을 회통한다.

① 경전의 서로 다른 말씀을 회통함

이는 경전의 서로 다른 말씀을 회통하는 것이다.
앞의 인과 과를 밝히는 부문(因果門)에서 인용한 『대반열반경』 「가섭보살품」 제24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부처님의 마음자리란, 한 가지 법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열 가지 법이라고 말할 수도 없으며, 백 가지 법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천 가지 법이라고 말할 수도 없으며, 만 가지 법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아직 안웃따라쌈약쌍보디를 얻지 못하였을 때, 온갖 선·불선·무기를 모두 부처님의 마음자리라고 부른다.317)

만일 이 경전의 말씀을 근거로 하면 안웃따라쌈약쌍보디와 육바라밀318)의 실행이 모두 부처님의 마음자리이다. 그런데 왜 이 『대반열반경』 「사자후보살품」 제23 가운데에서는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는가?

정인正因319)은 부처님의 성품을 말하는 것이며, 그것을 도와주는 조건(緣因)320)은 안웃따라쌈약쌍보디를 일으키는 것이다.321)

이와 같이 서로 다른 것을 어떻게 회통하려고 하는가?
회통하려고 하는 학자는 해석하여 논술한다. 인과 과를 밝히는 부문(因果門)에서 인용한 경전의 말씀은 성품을 가지고는 포섭하지만 실행을 가지고는 포섭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품으로는 모든 것을 다 부처님의 성품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사자후보살품」 제23 가운데에서 인용한 경전의 말씀은 실행을 가지고 성품을 바라보면, 성품은 있으나 실행은 아직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성품과 실행으로 나누어서 두 가지 인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또한 다시 성품에 두 가지 뜻이 있는데, 하나는 인이라는 뜻이며 다른 하나는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인이라는 뜻으로 보기 때문에 모두 부처님의 성품이라고 불리는 것이지만,

001_0543_c_01L菩薩佛性未免生死望後爲因望前
001_0543_c_02L爲果種子爲因現行爲果如是因 [210] 皆隨
001_0543_c_03L三世未至理原無非三世如經云後身
001_0543_c_04L菩薩佛性因故亦是過去現在未來
001_0543_c_05L亦如是九地菩薩佛性因故亦是過去
001_0543_c_06L現在未來果亦如是 [211] 九地菩薩佛性
001_0543_c_07L因故亦是過去現在未來果亦如是
001_0543_c_08L至廣說故第二句中明如來因乃取
001_0543_c_09L未成佛時因性今第三句明菩薩果廣
001_0543_c_10L當成時果性何故此中不取當果
001_0543_c_11L不例立果望因因是已修故得取
001_0543_c_12L因在望果果非已證所以不取是故
001_0543_c_13L宜就菩薩位內前後相望而說因果三世
001_0543_c_14L三世門竟

001_0543_c_15L
第六會通於中有二初通文異後會
001_0543_c_16L義同通異文者如因果門所引文云
001_0543_c_17L未得阿耨菩提之約一切善不善無記法
001_0543_c_18L盡名佛性若依是文菩提之心六度等
001_0543_c_19L行皆是佛性何故師子吼中言正因者
001_0543_c_20L名爲佛性緣因者發菩提心如是相違
001_0543_c_21L云何會通通者解云以性攝行不攝故
001_0543_c_22L說一切盡名佛性以行望性有性非行
001_0543_c_23L故分性行以說二因又復性有二義
001_0543_c_24L是因義二非作義就因義故盡名佛性

001_0544_a_01L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보면 실행은 성품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도리로 말미암아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앞의 체상문에서 인용한 『대반열반경』 「가섭보살품」 제24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부처님의 마음자리가 아닌 것이란, 말하자면 온갖 담·벽·기와·돌 등의 감정이 없는 사물을 가리킨다. 이들과 같은 감정이 없는 사물을 제외하고는 이것을 부처님의 마음자리라고 부른다.322)

또한 『대반열반경』 「가섭보살품」 제24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범부인 중생에게는, 혹은 부처님의 성품이 색·수·상·행·식인 오음 속에 안주하는 것이 마치 그릇 속에 과일이 있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시고, 혹은 부처님의 성품이 오음을 떠나서 있는 것이 마치 허공과 같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여래는 중도를 말씀하시기를, 중생의 부처님의 마음자리는 안·이·비·설·신·의인 안의 육입도 아니며 색·성·향·미·촉·법인 밖의 육입도 아니고, 안의 육입과 밖의 육입을 합한 것이므로 중도라고 부른다고 하신다.323)

만일 뒤의 글에 의하면, 기와나 돌과 같은 물건은 밖의 육입에 포섭되므로 부처님의 마음자리가 된다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서로 다른 것을 어떻게 회통하려고 하는가?
회통하려고 하는 학자는 해석하여 논술한다. 만일 유정과 무정이 서로 다르다는 입장에서 보면, 기와나 돌과 같은 물건은 부처님의 마음자리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유식이 변하여 나타나는 바의 입장에서 보면 안의 육입과 밖의 육입은 둘이 아니며, 화합하여 부처님의 마음자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오로지 보신 부처님의 성품에 관련해서만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앞에서 말씀하신 글은 보신 부처님의 성품을 말씀하신 것이며, 뒤에서 인용한 글은 법신 부처님의 성품을 말씀하신 것이다. 만일 이렇게 말씀하신다면 또한 서로 틀리는 것이 아니다.

앞의 견성문 안에서 『구경일승보성론』의 「승보품」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논설한다.

초지 보살마하살도 두루 모든 진여·법계를 증득하기 때문이다. 가타로 읊는다.

無礙淨智眼  장애가 없는 깨끗한 슬기로운 눈,
見諸衆生性  저 모든 중생의 성품을 보니,
遍無量境界  무량한 경계를 두루하였네.
故我今敬禮  나 이제 공경하고 예배하노라.324)

그런데 왜 이 경전에서는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가? 『대반열반경』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품」 제22 아홉 번째 공덕 가운데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선남자여, 모든 보살이 9지九地에서 안주하면 법에 성품이 있음을 보지만, 부처님의 마음자리는 보지 못한다.325)

십지에서 안주하면 법에 성품이 없음을 보기 때문에 틀림없이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본다. 또한 이 『대반열반경』 「사자후보살품」 제23 가운데에서 말씀하신다.

십주 보살은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듣고서 보기 때문에 명료하지 못하며, 또 십주 보살은 오로지 스스로가 틀림없이 안웃따라쌈약쌍보디를 얻으리라는 것만은 알 수 있지만, 모든 중생이 모두 다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없다.326)

또 같은 『대반열반경』 「사자후보살품」 제23 가운데에서 말씀하신다.

십주 보살은 다만 그 마지막을 보지만 그 처음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모든 부처님께서는 처음도 보고 마지막도 보신다. 이런 뜻을 가지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은 명료하게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볼 수 있다.327)

또한 이 『대반열반경』 「사자후보살품」 제23 가운데에서 말씀하신다.

십주 보살은 일승을 볼 수 있다고 하더라도 여래께서 상주하신다는 법은 알지 못한다. 이런 뜻을 가지기 때문에 십주 보살은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본다고 하더라도 명료하지 못하다고 말씀하신다.328)

또한 이 『대반열반경』 「사자후보살품」 제23 가운데에서 말씀하신다.


001_0544_a_01L約非作義行卽非性由是道理故不相
001_0544_a_02L違也如體相門所引文言非佛性者
001_0544_a_03L所謂一切牆壁瓦石無情之物又復迦
001_0544_a_04L葉品中說云或云佛性住五陰中果
001_0544_a_05L言佛性性離陰而有猶如虛空是故如
001_0544_a_06L來說於中道衆生佛性非內六入非外
001_0544_a_07L六入內外合故名爲中道若依後文瓦
001_0544_a_08L石等物外六入所攝而爲佛性如是相
001_0544_a_09L違云何會通通者解云若依有情無情
001_0544_a_10L異門瓦石等物不名佛性若就唯識所
001_0544_a_11L變現門內外無二合爲佛性此是唯約
001_0544_a_12L報佛性說又復前說文說報佛性後所
001_0544_a_13L引文說法佛性若作是說亦不相違也
001_0544_a_14L見性門內所引論說初地菩薩無礙智
001_0544_a_15L眠見諸衆生悉有佛性何故是經不能
001_0544_a_16L如德王品第九功德中言住九地者
001_0544_a_17L見法有性不見佛性住十住者見法無
001_0544_a_18L性方見佛性又師子吼中言十住菩薩
001_0544_a_19L唯能自知當得菩提而未能知一切衆
001_0544_a_20L生悉有佛性又言十住菩薩唯見其終
001_0544_a_21L不見其始諸佛世尊見始見終以是義
001_0544_a_22L故諸佛了了得佛性又言十住菩薩唯
001_0544_a_23L見一乘不知如來是常住法以是義故
001_0544_a_24L十住菩薩雖見佛性而不明了又言

001_0544_b_01L
모든 깨달은 이를 부처님의 마음자리라고 한다. 십주 보살은 모든 깨달은 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본다고 하더라도 명료한 것이 아니다.329)

이들과 같은 경전의 말씀을 어떻게 회통하려고 하는가?
회통하려고 하는 학자는 해석하여 논술한다. 통틀어서 논술하면 구경문과 구경문이 아닌 것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하기 때문에, 십지 보살은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보기는 하지만 명료한 것이 아니라고 서술한다. 그러나 이것을 분수에 따라서 증득하여 보는 부문을 근거로 하여 본다면, 초지 보살도 또한 눈으로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나머지의 경전의 말씀은 앞으로 나아가기도 하며 뒤로 물러서기도 하고 숨기기도 하며 드러내기도 하는 입장에서 논설한 것이다.
왜냐하면 십지 보살은 인행因行을 원만하게 성취한 자리임을 나타내려고 하므로, 부처님의 성품을 볼 수 있다고 논설한 것이며, 9지九地 이하의 보살은 인행을 아직 원만하게 성취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부처님의 성품을 보지 못한다고 논설한 것이다.
그리고 또 『대승기신론』에서 여섯 가지 더럽게 물든 마음 가운데에서 다음과 같이 논술한다.

다섯째는 능견심불상응염이다. 이와 같이 더럽게 물든 마음은 10지의 제9지인 심자재지心自在地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330)

이것은 구지 보살의 장애가 되므로, 구지 보살은 이 장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9지에서는 법에 성품이 있음을 본다고 논설하는 것이다. 제10지에 들어가면 벌써 이 장애에서 벗어나므로, 십지 보살은 법法에 성품이 없음을 본다고 논설하는 것이다. 그러나 때에 따라서 한쪽만을 지나치게 드러내면 계위는 내려간다.
또한 십지 보살만 오로지 마지막을 본다고 논설한 것은, 중생의 마지막은 육식에서 끝이 나며, 유정의 근본은 한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보살은 육식의 현상적인 모습을 통달한 것이지만, 아직 한마음의 근본을 증견하지는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마지막은 보지만 처음은 보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스스로는 미래에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러나 아직 중생이 부처님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시간적으로 멀고 가까움을 들어서 어려움과 쉬움을 논설한 것이다.
말하자면 스스로의 미래의 과위는 바로 다음 생각에 있어 가깝기 때문에 알기 쉽지만, 중생의 미래의 과위는 저 끝에 있어 멀기 때문에 알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것은 미래의 과위로서의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두고 논설한 것이다.
또한 십지 보살은 비록 일승을 본다고 하더라도, 여래께서 상주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논설하는 것은, 인위와 과위를 들어서 어려움과 쉬움을 나타낸 것이다. 일승一乘이라고 말한 것은 정인正因으로서의 부처님의 마음자리이며, 여래께서 상주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은 과위의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논설한 것이다. 십지 보살은 인행의 지위를 원만하게 성취하였기 때문에 인위의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보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부처님의 원만한 과위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과위의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뜻에 근거하기 때문에 뒤의 경전의 말씀에서, 보살은 아직 모든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니며, 그러므로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본다고 하더라도 밝고 뚜렷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 나머지 다른 경전의 말씀이 서로 맞지 않는 것은 이것을 기준으로 하여 회통해야 한다.


001_0544_b_01L一切覺者名爲佛性菩薩不得名一切
001_0544_b_02L是故雖見而不明了如是等文云何
001_0544_b_03L會通通者解云通相而言爲顯究竟
001_0544_b_04L不究竟異故說十地見不明了若依隨
001_0544_b_05L分證見門者初地菩薩亦得眼見餘文
001_0544_b_06L進退隱顯門說何者爲顯十地是因滿
001_0544_b_07L故說得見九地以還因未圓滿故說
001_0544_b_08L不見又復起信論說六種染中第五能
001_0544_b_09L見心不相應染是九地障未出此障
001_0544_b_10L說九地見法有性入第十地已出彼障
001_0544_b_11L是故說言見法無性且時一邊顯位階
001_0544_b_12L又說十住唯見終者衆生之未 [212] 終乎
001_0544_b_13L六識有情之本始於一心菩薩通達六
001_0544_b_14L識之相而末證見一心之原故言見終
001_0544_b_15L而不見始又言自知當得菩提未知衆
001_0544_b_16L生有佛性者是約遠近以說難易謂自
001_0544_b_17L當果在第二念近故易知衆生當果
001_0544_b_18L1) [46] 後邊遠故難知是望當果佛性說也
001_0544_b_19L又言十住雖見一乘不知如來是常住
001_0544_b_20L法者是約因果顯其難易言一乘者
001_0544_b_21L因佛性如來常者是果佛性十住因滿
001_0544_b_22L故見因性未得圓果不見果性卽依是
001_0544_b_23L義故後文說言菩薩未得名一切覺
001_0544_b_24L故雖見而不明了也餘文相違准此可

001_0544_c_01L
② 같은 뜻으로 분류되어도 경전에는 서로 다른 말씀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을 회통함

다음으로 같은 뜻으로 분류되어도 경전에는 서로 다른 말씀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은, 같은 뜻끼리 분류하여 여러 경전의 서로 다른 말씀을 회통하려는 것이다. 부처님의 마음자리라는 뜻에는 한량이 없는 부문이 있지만, 그것을 뜻이 서로 같은 부류로 묶어서 보면 다섯 가지를 벗어나지 아니한다.
첫째, 자성이 청정하다는 부문으로서, 부처님의 마음자리는 늘 존재한다는 것이다.
둘째, 염오를 따른다는 부문으로서, 부처님의 마음자리는 무상하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부문은 모두 인위의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논설하는 것이다.
셋째, 현재의 과위果位는 모든 부처님이 얻은 것이다.
넷째, 미래의 과위는 중생이 모두 다 함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부문은 모두 과위의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논설하는 것이다.)
다섯째, 부처님의 마음자리로서의 한마음은 인위도 아니며 과위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 부문을 근거로 하여 여러 경전의 말씀을 포섭하려고 한다.

가. 자성이 청정한 부문

첫째, 부처님의 마음자리(佛性)는 늘 존재한다는 부문은, 이 『대반열반경』 「사상품」 제7 가운데에서 말씀하신다.

오직 집착만을 끊을 뿐이며 아견我見은 끊은 것이 아니다. 아견을 부처님의 성품이라고 하니 부처님의 성품이 바로 참된 해탈이니라.331)

또 이 『대반열반경』 「여래성품」 제12 가운데에서 말씀하신다.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선남자여, 아我라고 하는 것은 바로 여래장이라는 뜻이다. 모든 중생들이 모두 다 부처님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는 것, 바로 이것이 아我라는 뜻이다.332)

또 이 『대반열반경』 「사자후보살품」 제23 가운데에서 말씀하신다.

부처님의 성품이란 제일의공을 말하며 제일의공을 지혜라고 한다. 말하자면 공이란 공空과 불공不空을 보지 못하지만, 지혜로운 이는 공과 불공, 상주와 무상, 고뇌와 안락, 아와 무아를 보느니라.333)

또 이 『대반열반경』 「사자후보살품」 제23 가운데에서 말씀하신다.

십이인연十二因緣을 관조하는 지혜에는 무릇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하근기의 지혜, 둘째는 중근기의 지혜, 셋째는 상근기의 지혜, 넷째는 상상근기의 지혜이다.) 하근기와 중근기의 지혜로 관조하는 이는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보지 못하니, 바로 (성문과 연각의) 이승二乘이다. 상근기의 지혜로 관조하는 이는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보기는 하지만 명료하지 못하며, 명료하지 못하기 때문에 십지의 경지에 안주한다. 상상근기의 지혜로 관조하는 이는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봄이 명료하기 때문에 안웃따라쌈약쌍보디의 깨달음을 얻는다. 이러한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십이인연을 부처님의 마음자리라고 한다. 부처님의 마음자리란 바로 제일의공이고, 제일의공을 중도라 하고, 중도를 바로 부처님이라 하고, 부처님을 열반이라 하느니라.334)

또 이 『대반열반경』 「사자후보살품」 제23 가운데에서 구경究竟에 대해 말씀하신다.

구경究竟이란 모든 중생이 얻은 일승一乘이고, 일승은 부처님의 마음자리이다. 모든 중생이 모두 일승을 가지고 있지만 무명으로 가려져 있기 때문에 볼 수 없다.335)

이들과 같은 경전의 말씀은 여러 가지 다른 이름을 쓰고 있지만 모두 다 자성이 청정한 진여인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드러내는 것이다. 삼승이 한군데로 돌아오므로 일승一乘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001_0544_c_01L次會義同者於同類義有異文句
001_0544_c_02L以義類而會諸文佛性之義有無量門
001_0544_c_03L以類相攝不出五種一性淨門常住佛
001_0544_c_04L二隨染門無常佛性是二種門皆說
001_0544_c_05L因性三者現果諸佛所得四者當果
001_0544_c_06L生所含五者一心非因非果依是五門
001_0544_c_07L以攝諸文第一常住佛性門者四相品
001_0544_c_08L唯斷取著不斷我見我見者名爲佛
001_0544_c_09L佛性者卽眞解脫如來性品云我者卽
001_0544_c_10L是如來藏一切衆生悉有佛性卽是我
001_0544_c_11L師子吼中言佛性者名第一義空
001_0544_c_12L第一義空名爲智惠智者見空及與不
001_0544_c_13L愚者不見空與不空又言觀十二
001_0544_c_14L緣智凡有二 [213] 下中智者不見佛性
001_0544_c_15L是二乘上智觀者不見 [214] 了了不了了見
001_0544_c_16L故住十住地上上智者卽了了見了了
001_0544_c_17L見故得阿耨菩提以是義故十二因緣
001_0544_c_18L名爲佛性佛性者名第一義空第一義
001_0544_c_19L空名爲中道中道者名爲佛性佛性者
001_0544_c_20L名爲涅槃又言究竟究竟者一切衆生
001_0544_c_21L所得一乘一乘者名爲佛性一切衆生
001_0544_c_22L皆有一乘無明覆故不能得見如是等
001_0544_c_23L擧諸異名同顯性淨眞如佛性三乘
001_0544_c_24L「天」疑「在」{編}

001_0545_a_01L열두 가지의 근본이 되므로 인연因緣이라고 부르는 것이고,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버리므로 공空이라고 하며, 성품에 본각을 지니고 있으므로 지혜라고 부르는 것이고, 중생 가운데에서 진실하므로 정의(義)라고 부르는 것이며, 자기의 몸을 스스로 비추므로 아견我見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고 하더라도 결국 본체는 하나이다. 그런데 이렇게 여러 가지 많은 이름을 말씀하시는 까닭은, 여러 경전들의 말씀이 오직 한맛임을 나타내려고 하시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아견我見이라고 부르거나 여래장如來藏336)이라고 부르는 것은 『승만경』과 『능가경』 등의 취지와 회통하는 것이며, 또는 공空이라고 하거나 지혜라고 부르는 것은 여러 부류의 『반야경』 교의를 회통하는 것이고, 또는 일승一乘이라고 부르는 것은 『묘법연화경』 등의 뜻을 회통하는 것이며, 또는 참다운 해탈이라고 부르는 것은 『유마힐경』 등의 뜻을 회통하는 것이다. 이러한 여러 경전에는 서로 다른 말씀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취지가 같은 것을 나타내려는 까닭에 하나의 부처님의 마음자리에 여러 가지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나. 염오를 따르는 부문

둘째, 염오를 따른다는 부문 가운데에서 보신 부처님의 성품이라고 하는 것을 이 『대반열반경』 「사자후보살품」 제23 가운데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부처님의 마음자리란 커다란 신심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신심을 가지고 있으므로 보살은 육바라밀을 잘 갖추는 것이다.337)

또는 이를 『대반열반경』 「사자후보살품」 제23 가운데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대자·대비를 부처님의 마음자리라고 한다. …… 대희大喜·대사大捨를 부처님의 마음자리라고 한다. …… 부처님의 마음자리란 네 가지 무애지를 말씀하신다. …… 부처님의 마음자리란 관정삼매灌頂三昧를 말씀하신다.338)

또는 이 『대반열반경』 「가섭보살품」 제24 가운데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후신 보살後身菩薩의 부처님의 마음자리에는 여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상, 둘째는 정, 셋째는 진, 넷째는 실, 다섯째는 선, 여섯째는 소견이다. 이것을 분별답이라고 한다.) 내지 초지 보살의 부처님의 마음자리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진, 둘째는 실, 셋째는 정, 넷째는 가견, 다섯째는 선·불선이다.) 모두 과거도 되며 현재도 되고 미래도 된다.339)

또는 이 『대반열반경』 「가섭보살품」 제24 가운데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보살이 아직 안웃따라쌈약쌍보디를 얻지 못하였을 때, 모든 선과 불선 그리고 무기를 다 부처님의 마음자리라고 부른다.340)

이들과 같은 경전의 말씀은 같은 뜻으로서, 염오를 따르는 부문 가운데에서 보신 부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다.

다. 현재의 과위

셋째, 현재의 과위는 모든 부처님이 얻은 것이라는 것은, 이 『대반열반경』 「사자후보살품」 제23 가운데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부처님의 마음자리는 색色이기도 하고 색이 아니기도 하며, 색이 아니기도 하고 색이 아닌 것도 아니며, 또는 상相이기도 하고 상이 아니기도 하며, 상이 아니기도 하고 상이 아닌 것도 아니다. 왜 색色이라고 하는가? 금강신이기 때문이다. 왜 색이 아니라고 하는가. 열여덟 가지 불공법은 색법色法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 색色이 아니기도 하고 색色 아닌 것도 아니라고 하는가? 색이기도 하고 색이 아니기도 한 것은 일정한 모양이 없기 때문이다. 왜 상相이라고 하는가? 서른두 가지 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왜 상이 아니라고 하는가? 모든 중생의 상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왜 상이 아니기도 하고 상이 아닌 것도 아니라 하는가? 결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341)


001_0545_a_01L同歸名一乘十二之本故名因緣離一
001_0545_a_02L故名爲空性有本覺名爲智惠衆生
001_0545_a_03L中實故名爲義自體自照故名我見
001_0545_a_04L名雖異所詮體一所以說是衆多名者
001_0545_a_05L爲顯諸經唯一味故謂名我見名如來
001_0545_a_06L藏者是會勝鬘楞伽等旨又名爲空
001_0545_a_07L智惠者是會諸部般若敎意又名一乘
001_0545_a_08L是會法花經等又名眞解脫者是會
001_0545_a_09L維摩經等爲顯是等諸經異文同旨故
001_0545_a_10L於一佛性立是諸名也第二隨染門中
001_0545_a_11L報佛性者師子吼中言佛性者名大信
001_0545_a_12L何以 [215] 信心故菩薩能具六波羅蜜
001_0545_a_13L佛性者名慈悲喜捨佛性者名四無
001_0545_a_14L礙知乃至佛性者名灌頂三昧迦葉品
001_0545_a_15L後身菩薩佛性有六乃至初地佛性
001_0545_a_16L有五皆是過去現在未來又言未得菩
001_0545_a_17L提之時善不善等盡名佛性如是等文
001_0545_a_18L同顯隨染門內報佛性也第三明現果
001_0545_a_19L佛性者師子吼中言佛性者亦色非色
001_0545_a_20L非色非非色亦相非相非相非非相
001_0545_a_21L何爲色金剛身故云何非色十八不
001_0545_a_22L共非色法故云何非色非非色無定相
001_0545_a_23L云何爲相三十二 [216] 云何非相
001_0545_a_24L切衆生相不現故云何非相非非相

001_0545_b_01L
이 『대반열반경』 「가섭보살품」 제24 가운데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여래의 부처님의 마음자리에는 바로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있다는 것이며 둘째는 없다는 것이다. 있다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삼십이상·팔십종호·십력·사무외와 내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삼매를 말씀하신다. 이것을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없다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여래는 과거의 온갖 선·불선·무기와 내지 오음·십이인연을 말씀하신다. 이것을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여래의 부처님의 마음자리가 있고 없음이라고 말하는 것이니라.342)

이들과 같은 경전의 말씀은 똑같이 부처님의 현재의 과위를 밝히는 것이다.

라. 미래의 과위

넷째, 미래의 과위는 중생이 모두 다 함유하고 있다는 것은, 이 『대반열반경』 「사자후보살품」 제23 가운데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집에 유락乳酪343)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누가 묻기를 너는 소酥(ⓢ Navanīta, fresh butter)를 가지고 있느냐고 한다. 대답하기를 나는 유락은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 소酥가 아니라고 한다. 그렇지만 미묘한 방편으로 틀림없이 소酥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소酥를 가지고 있다고 대답하는 것이다. 중생도 또한 그러하여 모두 다 마음을 가지고 있다. 무릇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틀림없이 안웃따라쌈약쌍보디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뜻으로 나는 언제나 모든 중생들이 모두 다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가지고 있다고 연설하느니라.344)

이 『대반열반경』 「가섭보살품」 제24 가운데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너는 먼저 “선근이 끊긴 이에게도 부처님의 마음자리가 있습니까?”라고 물은 적이 있다. 이 사람은 여래의 부처님의 마음자리도 가지고 있고, 후신 보살의 부처님의 마음자리도 가지고 있다. 이 두 가지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가지고는 있지만 미래를 장애하기 때문에 부처님의 마음자리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드디어는 미래에 과위의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부처님의 마음자리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345)

이들과 같은 경전의 말씀은 중생들이 미래에 과위의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해명하는 것이다.

마. 인위도 아니고 과위도 아님
다섯째, 부처님의 마음자리로서의 한마음은 인위因位도 아니며 과위果位도 아니고, 상주도 아니며 상주가 아닌 것도 아니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이 『대반열반경』 「덕왕보살품」 제22 가운데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선근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유루有漏이고 둘째는 무루無漏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마음자리는 유루도 아니며 무루도 아니다. 그러므로 단멸하는 것이 아니다. 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상주常住이고 둘째는 무상無常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마음자리는 상주도 아니고 무상도 아니다. 그러므로 단멸하는 것이 아니다.346)

이 『대반열반경』 「사자후보살품」 제23 가운데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부처님의 마음자리란 인因이기도 하며 인의 인(因因)이기도 하고, 과果이기도 하며 과의 과(果果)이기도 하느니라. 인이기도 하다는 것은 십이인연이며, 인의 인이기도 하다는 것은 지혜이니라. 과이기도 하다는 것은 아뇩보리阿耨菩提이며, 과의 과이기도 하다는 것은 무상無上의 대반열반이니라.347)

이들과 같은 경전의 말씀은 똑같이 한가지로 한마음(一心)은 인위의 부처님의 마음자리도 과위의 부처님의 마음자리도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한 까닭은

001_0545_b_01L決定故迦葉品云如來佛性卽有二種
001_0545_b_02L一者有二者無有者所謂三十二相八
001_0545_b_03L十種好十力四無畏乃至無量三昧是名
001_0545_b_04L爲有無者如來過去諸善不善無記
001_0545_b_05L至五陰十二因緣是名爲無是名如來
001_0545_b_06L佛性有無如是等文同明現果第四說
001_0545_b_07L當果佛性者師子吼中言譬如有人
001_0545_b_08L有乳酪有人問言汝有蘇 [217] 答我有酪
001_0545_b_09L實非蘇 [218] 以巧方便決定當得故言有蘇 [219]
001_0545_b_10L衆生亦爾悉皆有心凡有心者定當得
001_0545_b_11L成阿耨菩提以是義故我常宣說一切
001_0545_b_12L衆生悉有佛性迦葉品云如汝先問
001_0545_b_13L斷善根人有佛性者亦有如來佛性亦有
001_0545_b_14L後身佛性是二佛性障未來故得名爲
001_0545_b_15L畢竟得故得名爲有如是等文明當
001_0545_b_16L果佛性第五明非因非果非常非無常
001_0545_b_17L性者如德王品云 [220] 有二種有漏無
001_0545_b_18L是佛性非有漏非無漏是故不斷
001_0545_b_19L復有二種一者常二者無常佛性非常
001_0545_b_20L非無常是故不斷師子吼中言佛性
001_0545_b_21L有因有因因有果有果果有因者卽
001_0545_b_22L十二因緣因因者卽是智惠有果者卽
001_0545_b_23L是阿耨菩提果果者卽是無上大般涅
001_0545_b_24L [221] 等文同顯一心非因果性所以然

001_0545_c_01L자성이 청정한 본각은 무루의 선이며, 염오를 따르는 여러 가지 선은 유루의 선이기 때문이다.

한마음의 본체는 두 부문에 상주하는 것이 아니므로 유루도 아니며 무루도 아니다. 또한 부처님의 과위는 상주하는 선이며 인위는 상주하지 않는 선이다. 그런데 한마음의 본체는 인위도 아니며 과위도 아니므로 상주도 아니고 무상도 아니다. 만일 마음이 인위라면 과위를 지을 수 없을 것이며, 그와 같이 이것이 과위를 지을 수 없다면, 한마음은 인위도 아니며 과위도 아니다. 그러므로 인위가 되기도 하며 과위가 될 수도 있고, 또는 인의 인(因因)이 되기도 하며 과의 과(果果)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마음자리란 인이기도 하며 인의 인이기도 하고, 과이기도 하며 과의 과이기도 하다.
그러한 까닭으로 앞의 네 가지 부문에서 논설한 염오와 청정에서의 두 가지 인위와 미래와 현재現在에서의 두 가지 과위는 그 성품이 둘이 아니며 오로지 한마음일 뿐이라는 것을 꼭 알아 두어야 한다. 한마음의 성품은 오로지 부처님만이 몸소 깨달은 것이기 때문에, 이 마음을 부처님의 마음자리라고 하는 것이다. 다만 여러 부문을 근거로 하여 한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며, 다른 부문을 따라서 따로따로의 성품이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다른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하나일 수 있는가?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여러 부문에 해당하는 것이며, 다르지 않기 때문에 여러 부문이 모두 한맛이다.
부처님의 마음자리의 뜻을 이와 같이 간략하게 판별한다.

위로부터 이제까지 열반문과 부처님의 마음자리문에 관하여 논술함으로써, 두 번째 『대반열반경』의 근본이 되는 가르침의 종지宗旨를 정밀하게 구명究明하는 것을 마친다.

3. 『대반열반경』의 교체를 논술함
세 번째로 『대반열반경』의 교체敎體를 논술하겠다. 먼저 서로 다른 부파에 관하여 서술하고 다음에 대승의 학설을 드러내려고 한다.

1) 서로 다른 부파에 관하여 서술함
『가퇴론迦退論』348)에서는 명신名身·구신句身·미신味身을 가지고 경전의 체로 삼는다. 그러므로 그 논論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 십이부경十二部經349)은 어떤 법인가?
명신名身과 어신語身이 차례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350)

만일 『잡아비담심론雜阿毘曇心論』에 의하면 두 스승의 학설이 있으니, 「서품」 제1에서와 같다.

팔만 가지 법음法陰은 모두 색음色陰에 포섭되니 부처님의 말씀에 속하는 성품이기 때문이다. 또 한 스승의 학설은 명신名身의 성질은 행음行陰에 포섭된다고 한다.351)

만일 『아비담비바사론阿毘曇毘婆沙論』 제40권352)에 준하면, 음성을 교체敎體로 삼는 것은 불타제바佛陀提婆(ⓢ Buddhadeva,, 覺天)의 주장이고, 명신名身과 구신句身 그리고 미신味身을 교체로 삼는 것은 화수밀和須蜜(Vasumitra, 世友)의 주장이다.
『아비달마구사석론阿毘達磨俱舍釋論』353) 「분별계품」 제1 가운데에서 또 이에 대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학설을 내세운다.

어떤 스승들은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은

001_0545_c_01L性淨本覺是無漏善隨染衆善是有
001_0545_c_02L漏善一心之體不常二門故非有漏非
001_0545_c_03L無漏又佛果是常善因是無常善
001_0545_c_04L心之體非因果 [222] 非果故非常非無常
001_0545_c_05L心是因不能作果如其是不能作果
001_0545_c_06L由一心非因非果故得作因亦能爲果
001_0545_c_07L亦作因因及爲果果故言佛性者有因
001_0545_c_08L有因因有果有果果是故當知前說四
001_0545_c_09L染淨二因當現二果其性無二唯是一
001_0545_c_10L一心之性唯佛所體故說是心名爲
001_0545_c_11L佛性但依諸門顯此一性非隨異門
001_0545_c_12L有別性卽無有異何得有一由非一故
001_0545_c_13L能當諸門由非異故諸門一味佛性之
001_0545_c_14L義略判如是上來所說涅槃佛性全爲
001_0545_c_15L第二廣經宗竟

001_0545_c_16L第三明敎體者
先除異部後顯大乘
001_0545_c_17L退論 [223] 以名句味以爲經體故彼論說
001_0545_c_18L十二部經名何等法答曰名身語身
001_0545_c_19L第住故若依雜心有二師說如界 [224]
001_0545_c_20L八萬法陰皆色陰攝以佛語之性故
001_0545_c_21L名性者行陰攝若准婆沙第四十卷
001_0545_c_22L以音聲爲敎體者是佛陀提婆義以名
001_0545_c_23L句味爲敎體者是和須蜜義俱舍論中
001_0545_c_24L又出是二如界品云有諸師執佛正敎

001_0546_a_01L말소리를 성품으로 삼으므로 그 스승에게 있어서는 색음에 포섭된다고 주장하고, 어떤 스승들은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은 문구를 그 성품으로 삼으므로 그 스승에게 있어서는 행음에 포섭된다고 주장한다.354)


그런데 또 어떤 학자는 말하기를, 『아비달마구사석론』 가운데에 세 스승의 학설이 있는데, 셋째 스승의 주장은 음성音聲과 명신名身·구신句身을 모두 취하여 교체로 삼는다고 논술하는 것이다. 이는 『아비달마구사석론』 「분별계품」 제1 아래에서 논술하는 것과 같다.

여러 스승들이 실제로 이와 같이 판단하는 것은 중생에게 팔만 가지나 되는 번뇌행상이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탐욕·성냄·어리석음·아만 등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행상들을 대치對治하려고 부처님·세존께서는 팔만 가지나 되는 법음法陰을 바르게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팔만 가지나 되는 법음은 오음 가운데에서 색음色陰과 행음行陰에 포섭되는 것이다.355)

이러한 논문의 논증으로 보아서 비평가는 셋째 스승의 학설을 채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학설이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그러한 까닭은, 그는 논문의 분제를 드러낼 수 없기 때문에 함부로 다른 경론의 글을 채택하여 이와 같이 헛된 학설을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앞의 글을 논술할 때, 벌써 두 스승의 학설(색음에 관한 학설·행음에 관한 학설)을 내세워서 색음과 행음이 포섭된다고 매듭을 짓는다. 그리고 다음에는 팔만 가지나 되는 법음을 헤아릴 수 있다고 논설하면서, 한꺼번에 세 스승의 학설을 내세우고, 여기서는 여러 스승의 판단의 다름이 이와 같다고 논술하고 나서, 아래에서 정론으로 세 번째 스승의 학설을 성립시키면서, 팔만 가지나 되는 법음을 헤아릴 수 있다고 논설하고 나서 매듭을 짓는다. 그리고 또 다음에는 다시 오분법신五分法身356)과 십일체입十一切入357) 등의 여러 부문을 포섭하는 주장을 하려고 한다.334
358)그러므로 앞의 논술은 조목별로 분별하고, 뒤의 논술은 팔만 가지 법음의 행상을 오음 가운데의 색음과 행음의 두 가지에 포섭하는 것이다. 이것은 통틀어 앞의 두 스승의 주장을 조목별로 논술한 것이므로 저 학설은 옳지 않음을 꼭 알아 두어야 한다. 소승의 여러 부파 안에서 교체의 성품을 내세우는 것은 오로지 두 스승의 학설뿐이며 다시 세 번째 학설은 없다는 것을 꼭 알아 두어야 한다.

만일 『성실론成實論』359)을 근거로 하면 상속하는 가상의 음성으로 교체를 삼는다. 『성실론』 「불상응행품」 제94에서 논술하는 것과 같다.

어떤 학자는 명중名衆·구중句衆·자중字衆이 심불상응행이라고 논술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지 않다. 이 법의 이름은 음성을 성품으로 하므로 법입法入에 포섭되는 것이다.360)
이 논사의 의중을 종합하면, 임시로 건립한 음성의 전용詮用은 다시 ▣▣▣▣ 음성의 성품이 없으므로 색음色陰에 포섭되는 것이며, 전표詮表의 작용은 의식으로 얻는 것이므로 오로지 ▣▣▣ 행음行陰에 포섭되는 것이다.


001_0546_a_01L言音爲性於彼入色陰攝有諸師執
001_0546_a_02L句爲性於彼師入行陰攝有人說言
001_0546_a_03L俱舍論中有三師說第三師義通取音
001_0546_a_04L聲名句爲體 [225] 法界品下文說言諸師
001_0546_a_05L異判如是衆生有八萬煩惱行相謂欲
001_0546_a_06L瞋癡慢等差別故爲對治此行佛世尊
001_0546_a_07L正說八萬法陰如八萬法陰相五陰中
001_0546_a_08L色行二陰攝以是文證得知評家取此
001_0546_a_09L第三也雖有是說而實不然所以然者
001_0546_a_10L彼不能顯論文分齊監取異文作是妄
001_0546_a_11L彼論前文已出二師說攝陰竟次說
001_0546_a_12L八萬法陰之量一出三師義此言諸師
001_0546_a_13L異判如是已下正成第三評家之說
001_0546_a_14L法陰量已竟次欲更說五分法身十一
001_0546_a_15L切入等諸門攝義是故條前成後之言
001_0546_a_16L八萬法陰相五陰中色行二陰攝此言
001_0546_a_17L總條前二師義是故當知彼說謬異
001_0546_a_18L知小乘諸部之內出敎體性唯有二說
001_0546_a_19L無第三也若依成實相續假聲以爲敎
001_0546_a_20L如彼論不相應行品云有人言名句
001_0546_a_21L應是心不相應行此事不然▣▣▣
001_0546_a_22L [226] 法入所攝解云此論師意假聲詮用
001_0546_a_23L更無▣▣▣▣聲性色陰所攝詮表之
001_0546_a_24L意識所得唯▣▣▣▣▣所 [227] 攝也

001_0546_b_01L
2) 대승의 학설을 드러냄
대승 가운데에서는 음성·명신名身·구신句身 및 소전所詮의 뜻은 ▣▣▣▣▣ 비록 별체別體의 불상응행은 없다고 하더라도, 임시로 건립한 불상응행이 있으므로 (성聲·명名·) 구句는 행음行陰에 포섭되는 것이다. 이러한 도리를 근거로 하여 보면 저 소승의 두 종지와 다르다. 이러한 뜻은 모두 『유가사지론』에서 논설하는 것과 같다. 『유가사지론』 「섭석분攝釋分」에서 언설하는 것과 같다.

어떻게 본체로 삼는가? 말하자면 계경契經361)에서의 교체는 줄여서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문文이고 둘째는 의義이다. 문은 소의所依가 되고 의는 능의能依가 된다.
어떤 것이 문文인가? 말하자면 여섯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명신名身이며 둘째는 구신句身이고, 셋째는 자신字身이며 넷째는 언어이고, 다섯째는 행상行相이며 여섯째는 기청機請이다. …… 362)

이 『유가사지론』의 의취는, 교체가 따로 자성自性을 가지고 있지 않고 여러 가지 연緣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사물에 대한 이해를 생겨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한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연緣이 교체가 된다고 논설할 뿐이다. 이 가운데에서 나머지 ▣▣▣▣▣ 것은 『능가경소楞伽經疏』 가운데에서 논술하는 것과 같다.

4. 『대반열반경』의 교판을 논술함
네 번째 『대반열반경』의 교판(敎迹)을 논술한다.

1) 남쪽 지방 스승들의 학설
예로부터 ▣▣▣▣ 남쪽 지방의 여러 스승들은 대부분이 무도산武都山의 은사隱士 류규劉虯363)의 주장에 근거를 두고 다음과 같이 논술하고 있다.

여래께서 일대에 걸쳐 교화하시면서 하신 말씀364)은 돈교365)와 점교366)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대방광불화엄경』 등의 경전은 돈교이고 그 나머지는 점교라고 한다. 점교 안에 오시五時367)가 있다. 첫째 시기는 부처님이 처음 성도하시고 나서 제위提胃(ⓢ Trapusa) 등을 위하여 오계五戒·십선十善368)·인천人天369)의 교문을 말씀하셨다. 둘째 시기는 부처님이 성도하시고 나서 12년 동안에 삼승三乘370)차별의 교문을 말씀하셨지만, 아직 공空의 이치를 말씀하지 않으셨다. 셋째 시기는 부처님이 성도하시고 나서 30년 중에 공·무상·『반야경』371)·『유마힐경』·『사익범천소문경』372) 등의 경전을 말씀하셨다. 그렇지만 비록 삼승이 한 가지로 공을 관조한다고 말씀하더라도, 아직 일승이 삼승을 깨뜨리고 일승에 돌아온다고 말씀한 것은 아니다. 넷째 시기는 부처님이 성도하시고 나서 40년 뒤에 8년 동안 『묘법연화경』373)을 말씀하시어 널리 일승이 삼승을 깨뜨리고 일승에 돌아오는 것을 천명하신다. 그렇지만 아직 중생이 모두 부처님이 될 성품이 있다고는 말씀하지 않으신다. 다만 여래의 수명이 미진의 수량보다 더 많아서 미래에 머무르시는 것이 다시 위의 수량을 배가할 것이라고 말씀하시지만, 부처님이 상주하신다고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이는 불료의不了義의 가르침이다. 다섯째 시기는 부처님이 열반을 맞이하실 무렵에 『대반열반경』을 말씀하시어,

001_0546_b_01L乘之中音聲名句及所詮義▣▣▣▣▣
001_0546_b_02L雖無別體不相應行而有假立不相應行
001_0546_b_03L▣▣句 [228] [229] ▣所攝由是道理異彼二宗
001_0546_b_04L是義具如瑜伽論說又彼論攝決擇 [230]
001_0546_b_05L云何爲體謂契經體略有二種一文
001_0546_b_06L二義文是所依義是能依云何爲文
001_0546_b_07L謂有六種一者名身二者句身三者語
001_0546_b_08L四者字身五者行相 [231] 者機請
001_0546_b_09L至廣說是論意者欲顯敎體無別自 [232]
001_0546_b_10L▣▣緣含能生物解故說諸緣爲敎體耳
001_0546_b_11L於中餘▣▣▣▣▣如楞伽經疏中說

001_0546_b_12L第四明敎迹者
昔來▣▣▣▣南土諸
001_0546_b_13L多依武都山隱士㔁▼((強-弓)+刂) [233] 義云如▣▣
001_0546_b_14L▣▣ [234] 無出頓漸花嚴等經是其頓敎
001_0546_b_15L餘名漸▣▣▣ [235] 內有其五時一佛初成
001_0546_b_16L道已爲提胃等說五戒十善人天敎門
001_0546_b_17L二佛成道已十二年中宣說三乘差別敎
001_0546_b_18L未說空理三佛成道已三十年中
001_0546_b_19L空無相波若維摩思益等經雖說三乘
001_0546_b_20L同觀於空未說一乘破三歸一四佛成
001_0546_b_21L道已四十年後於八年中說法花經廣明
001_0546_b_22L一乘破三歸一未說衆生皆有佛性
001_0546_b_23L彰如來壽過塵數未來所住復倍上數
001_0546_b_24L不明佛常是不了敎五佛臨涅槃

001_0546_c_01L모든 중생이 모두 부처님이 될 성품이 있으므로 법신374)이 상주하신다고 천명하신다. 그러므로 이는 요의경了義經이다.375)

남쪽 지방의 여러 스승들은 많이 이러한 주장을 전하고 있다.

2) 북쪽 지방 스승들의 학설
북쪽 지방 스승들의 학설은 『반야경』 등의 경전도 모두 요의교라고 하는데, 다만 그 주장하는 것이 각각 같지 않을 뿐이다. 『반야경』 등은 지혜를 종지로 삼으며, 『유마힐경』 등은 해탈을 종지로 삼고, 『묘법연화경』 등은 일승을 종지로 삼으며, 『대반열반경』은 묘과를 종지로 삼는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학설은 모두 이러한 대승·해탈·연기·행덕구경行德究竟에 관한 대승요의大乘了義의 학설이라는 것이다.376) 바로 이와 같은 학설들은 앞의 남쪽 지방의 학설인 오시교의 논술을 논파하는 것이다. 『마하반야바라밀경』 「왕생품」 제4 가운데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모든 비구가 반야般若에서 보시布施를 찬탄하시는 말씀을 듣고, 드디어 삼의三衣를 벗어, 그것을 가지고 보시한다.377)

이에 대해 『대지도론』 「석왕생품」 가운데에서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부처님은 세 벌 옷을 간직하지 않으면 죄를 짓는 것이라고 제정하신다. 무엇 때문에 지계持戒를 중요하게 다루지 않고 지계를 범하면서 보시를 실행하는가? 이것은 12년 전에 있었던 것으로, 부처님이 아직 지계를 제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계를 범한 것이 아니라고 하신다. 이와 같이 증명하는 경전의 말씀을 가지고 보면 국한하여 30년 가운데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378)

또 『대지도론』 「석필정품」 제83의 잔여분殘餘分 가운데에서 다음과 같이 논술한다.

수보리가 『묘법연화경』379) 가운데에서 “손을 들어 합장을 하거나 머리를 숙여 예배를 하는 것이 모두 부처님의 도道를 이룬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그러므로 이제 퇴전·불퇴전의 뜻을 묻는다.380)

이 경전의 말씀을 가지고 증명하건대, 반야경의 가르침이 아직 반드시 『묘법연화경』 이전에 국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381) 그러므로 오시五時를 논파하여 잘라 버리는 것은 바로 오류가 되는 것이다.

또 다시 만일 『반야경』의 가르침 가운데에서는 삼승을 논파하지 않았기 때문에 『묘법연화경』보다 천박한 것이라고 논술한다면, 『마하반야바라밀경』 「대여품」 제54 가운데에서, “사리불舍利弗이 묻는다. 만일 전혀 퇴전하지 않으며, 공과 또한 다르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삼승의 차별이 있어서 오로지 일승만은 안 되는가? 수보리가 대답한다. 이승도 없으며 삼승도 없고, 만일 이 도리를 듣고 놀라서 두려워하지 않으면 보리菩提를 얻을 수 있다.”382)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묘법연화경』의 이승도 없으며 삼승도 없다고 하는 것과 그 말은 어떤 차별이 있어서 『반야경』은 천박하며 『묘법연화경』은 심오하다고 분별하는가? 이것은 삼승을 논파하고 일승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고 논술하는 것이다.
또는 만일 『반야경』에서는 부처님의 성품을 말씀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반열반경』보다 천박한 것이라고 논술한다면, 『대반열반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부처님의 성품을 또는 반야바라밀이라고도 하고 또한 제일의공이라고도 한다.”383)라고 하셨으니, 『대품경』에서 말씀하시는 바의 반야 및 제일의공은 바로 이 부처님의 성품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반야경』에서는 부처님의 성품을 밝히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또 『대품경』 가운데에서는 진여·법성을 말씀하신다.384) 『대지도론』 「석초품중사연의」 제49의 잔여분殘餘分 가운데에서 『대품경大品經』을 해석하여 다음과 같이 논술한다.

법을 열반이라고 부르는 것은 희론이 아니다.

001_0546_c_01L大涅槃明諸衆生皆有佛性法身常住
001_0546_c_02L是了義經南土諸師多傳是義北方師
001_0546_c_03L般若等經皆了義但其所宗各不同
001_0546_c_04L如般若經等智惠爲宗維摩經等
001_0546_c_05L脫爲宗法花經者一乘爲宗大涅槃經
001_0546_c_06L妙果爲宗皆是大解起行德究竟大乘
001_0546_c_07L了義之說卽破前說五時敎言如大
001_0546_c_08L品經往生品中諸比丘聞說般若讚歎
001_0546_c_09L檀度遂脫三衣以用布施論中釋言
001_0546_c_10L制三衣不畜得罪何犯戒爲行施耶
001_0546_c_11L此在於十二年前佛未制戒是故不犯
001_0546_c_12L是以文證非局在於十二年後又彼論
001_0546_c_13L須菩提聞說法花擧手低頭皆成佛道
001_0546_c_14L是故今問退不退義以是文證般若之
001_0546_c_15L未必局在於法花已前破斷五時
001_0546_c_16L爲謬異又復若言般若敎中不破三乘
001_0546_c_17L淺化 [236] 大品經中舍利弗問若都不退
001_0546_c_18L [237] 復不異何故得有三乘差別不唯一
001_0546_c_19L須菩提答無二無三若聞不怖能得
001_0546_c_20L菩提此與法花無三言何別而分淺深
001_0546_c_21L又若般若不說佛性淺者涅槃經說
001_0546_c_22L佛性亦名般若波羅蜜亦名第一義空 [238]
001_0546_c_23L般若及空卽是佛性何得說云不明佛
001_0546_c_24L又大品說眞如法性論主釋云

001_0547_a_01L법성은 본분本分의 종자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황석黃石에는 금의 성품, 백석白石에는 은의 성품이 있는 것과 같이, 모든 중생에게는 열반의 성품이 있는 것이다.385)

여기서 논술하는 법성이 부처님의 성품과 어떤 차별이 있는가?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말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을 천박하다고 하겠는가?
또 『묘법연화경우바제사』 권하 「비유품」 제3 아래에서 논술하였다.

내가 본디 보살의 도를 닦아서 이룬 바의 수명은, 이제도 더욱 아직 다하지 않아서 위의 수량의 수배가 되느니라. 이 말씀은 부처님의 상주하는 수명을 드러내 보이면서, 아주 미묘한 방편으로 부처님의 수명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량이므로 그 수량을 세어도 알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하기 때문이다.386)

또 (같은 책에서) 다음과 같이 논술하였다.

나의 정토는 훼손되는 것이 아니니라. 그렇지만 중생들은 다 불타서 없어질 것이므로, 근심·걱정·고뇌가 많아 이와 같이 모두 충만하다고 보느니라. 이 말씀은 보신 부처님의 진실한 정토淨土가 제일의제에 포섭되기 때문이다.387)

『묘법연화경』에서는 벌써 부처님의 상주하는 수명과 진실한 정토를 드러낸 것이다. 그런데도 이것을 불요의설이라고 논술한다면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3) 회통
남쪽 지방과 북쪽 지방 스승들의 두 학설은 어느 것이 맞고 어느 것이 그른가?
만일 꼭 한쪽만을 집착해서 한결같이 그러하다고 생각한다면 두 학설이 모두 그른 것이 된다. 그러나 만일 분수를 따르고 그러한 편견을 따르는 주장이 없다면 두 학설이 모두 맞는 것이 된다. 그러한 까닭은, 부처님께서 『반야경』 등을 말씀하신 뜻은 넓고 크며 매우 깊어서 얕은 가르침에도 잘 통하므로 이를 다시 어느 한쪽에만 꼭 한정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다음의 얘기와 같다.) 수나라 때에 천태 지자가 신인神人에게 물었다. “북쪽 지방에서 사종四宗388)을 내세우는 것이 경의 뜻에 맞느냐 그렇지 않느냐?” 신인이 대답했다. “잃는 것은 많고 얻는 것은 적다.” 천태 지자가 다시 물었다. “성실론종의 스승들이 오시교五時敎389)를 내세운 것은 부처님의 뜻에 맞느냐 그렇지 않느냐?” 신인神人이 대답했다. “북쪽 지방에서 사종四宗을 내세우는 것보다는 조금 괜찮지만 그래도 과실이 많다.”
그런데 천태 지자天台智者는 선정과 지혜를 모두 통달하였으므로 온 세상이 그를 존중하였고, 범부와 성인도 (그의 경지를) 헤아리기 어려워했다.
그러므로 알라. 부처님의 뜻은 심원하여 헤아릴 수 없는데도, 사종四宗으로 경의 종지를 과분科分하고, 또한 오시교五時敎로 부처님의 뜻을 한정하려고 하였으니, 이것은 마치 소라고둥으로 바닷물을 퍼내고, 대롱을 가지고 하늘을 엿보려고 하는 짓이나 마찬가지일 뿐이다.
교판(敎迹)의 얕고 깊음을 이와 같이 간략하게 판별한다.

『열반경종요』

천치天治 원년(1124)390) 5월 24일 이 글을 베껴 쓰다.

001_0547_a_01L名涅槃不戲論法性名本分種如黃石
001_0547_a_02L金性白石銀性一切衆生有涅槃性
001_0547_a_03L與佛性有何差別而不說故是淺耶
001_0547_a_04L法花論云所成壽命復倍上數者
001_0547_a_05L文示現如來常命以巧方便顯多數量
001_0547_a_06L不可數知故又言我淨土不毁而衆
001_0547_a_07L生見燒盡者報佛如來眞淨土第一義
001_0547_a_08L諦之所攝故旣顯常命及眞淨土
001_0547_a_09L言是不了說者不應道理南北二說
001_0547_a_10L何者爲得爲失若執一邊謂一向爾
001_0547_a_11L二說皆失若就隨分無其義者
001_0547_a_12L說俱得所以然者佛說般若等諸敎意
001_0547_a_13L廣大甚深淺通復不可定限於一邊故
001_0547_a_14L又如隨 [239] 天台智者問神人言北立四
001_0547_a_15L會經意不神人答言失多得少又問
001_0547_a_16L成實論師立五敎稱佛意不神人答曰
001_0547_a_17L小勝四宗猶多過失然天台智者禪惠
001_0547_a_18L俱通擧世所重凡聖難測是知佛意深
001_0547_a_19L遠無限而欲以四宗科於經旨亦以五
001_0547_a_20L時限於佛意是猶以螺酌海用管闚天
001_0547_a_21L者耳敎迹淺深略判如是

001_0547_a_22L
涅槃經宗要

001_0547_a_23L
天治元年五月廿四日書之
  1. 1)대체적 의의, 곧 약술대의略述大意의 교감은 『東文選』 제83권의 「涅槃經宗要序」를 따른다.
  2. 2)열반涅槃 : ⓢ nirvāṇa. 열반涅槃, 열반나涅槃那, 니원泥洹이라고 음사하며, 멸滅, 적멸寂滅, 멸도滅度, 원적圓寂, 무위無爲, 무생無生, 무작無作 등으로 번역한다. nirvāṇa라는 용어를 분해하여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nir는 ~로부터, 밖으로, 사라진, 無, 離, vā는 (바람이) 불다, ṇa는 것, 일, 그러므로 nirvāṇa는 본디 사라져 버리는 것, 생명의 빛이 꺼져 버리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이 불교 사상을 드러내는 용어로 수용되면서 완전한 해탈을 의미하게 되었다. 탐욕(ⓢ rāga)·성냄(ⓢ dveṣa)·어리석음(ⓢ mohā)의 삼독(ⓢ tri-viṣaṃ)을 소멸하여 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진리를 체득한 경지를 의미하는 말이다.
  3. 3)여덟 가지의 훌륭한 소리(八音) : 부처님의 음성에 여덟 가지의 훌륭한 특질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① 극호음極好音‒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불도로 끌려들게 하는 미묘한 음성. ② 유여음柔軟音‒부드럽고 친절한 음성. ③ 화적음和適音‒조화가 있는 상냥하고 우아한 음성. ④ 존혜음尊慧音‒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지혜를 체득하게 하는 음성. ⑤ 불녀음不女音‒남성적으로 외경畏敬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는 음성. ⑥ 불오음不誤音‒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바른 견해를 품게 하는 틀림이 없는 음성. ⑦ 심원음深遠音‒심원한 도리를 깨닫게 하는 음성. ⑧ 불갈음不竭音‒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빠짐없이 모든 것을 깨닫게 하는 명료한 음성.
  4. 4)열 가지의 모습(十相) : 십계十界, 십법계十法界, 십법계상十法界相. 미혹과 깨달음의 세계를 열 가지로 나누어 놓은 모습. 지옥계地獄界·아귀계餓鬼界·축생계畜生界·아수라계阿修羅界·인간계人間界·천상계天上界·성문계聲聞界·연각계緣覺界·보살계菩薩界·불계佛界. 지옥계로부터 천상계까지의 여섯 개의 세계는 범부가 방황하는 미혹의 세계이며, 그 나머지의 네 개의 세계는 성자의 안온한 깨달음의 세계이다. 육범사성六凡四聖이라고도 한다.
  5. 5)진제眞際 : 실제實際, 진실제眞實際. 제는 구경을 의미하며, 진리의 경지, 절대적인 경지를 가리킨다.
  6. 6)천겁千劫 : 겁劫은 ⓢ kalpa를 음사하여 겁파劫波라고 하며, 줄여서 겁劫이라고 한다. 분별시분分別時分·분별시절分別時節·장시長時·대시大時라고 번역하며, 오랜 세월을 의미한다.
  7. 7)방등方等 : ⓢ vaipulya. 비불략毘佛略이라고 음사하고, 방등方等, 방광方廣, 증광增廣, 발전發展 등으로 번역하며, 대승을 의미한다.
  8. 8)모든 사상가들(百家) : 모든 사상가·종교가, 말하자면 불교 이외의 외도들의 모든 학설을 통칭하는 말이다.
  9. 9)사생四生 : 생물이 태어나는 형식에 따라서 분류한 것으로, 태생胎生·난생卵生·습생濕生·화생化生을 가리킨다.
  10. 10)극과極果 : 최상의 깨달음. 대승에서는 부처님의 과위果位를 말하며, 소승에서는 아라한과를 말한다.
  11. 11)이理 : ⓢ yoga, yukti, yukta. 이치, 조리條理. 사실을 사실이게 하는 이유. 사事의 반대. 진리, 근본 도리, 우주를 관통하는 진리.
  12. 12)지智 : ⓢ jñāna. 이해, 지식. 깨달음, 완전히 아는 것. 근본지와 무분별지를 통하여 모든 인人과 법法의 의의를 분별하는 능력의 모든 것을 가리킨다.
  13. 13)명칭(名) : ⓢ nāman. 사물의 이름으로, 단어를 가리킨다. 명名이 조합되어 구句가 된다. 문文은 음소이다. 예를 들어 단어를 모아 제행무상諸行無常과 같은 구를 만드는 것이다. 신身(ⓢ kāya)은 집합의 뜻이다.
  14. 14)의의(義) : ⓢ artha. 문장이 지니고 있는 사상의 내용.
  15. 15)완전한 가르침(滿字) : 만자滿字는 반자半字의 상대어이며, 완전한 가르침을 의미한다. 천태종에서 만자교滿字敎란 통通·별別·원圓의 대승교를 가리킨다. 자세한 것은 『妙法蓮華經文句』(T34, 39c)에 실려 있다.
  16. 16)반구半句의 게송 : 『大般涅槃經』(T12, 692a~693a), “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 이것을 무상無常 가타, 설산동자雪山童子 이야기, 설산반雪山半 가타, 설산팔자雪山八字 가타, 사신捨身 가타라고 한다. 아함(ⓢ Āgama) 경전에 있는 『大般涅槃經』(T1, 204c)에서는, ‘무상 가타’는 제석천이 부처님의 입멸을 애도하여 제창한 게송이라고 말하고 있다. 한편 대승경전에 있는 『大般涅槃經』(T12, 692a~693a)에서는 무상 가타가 보살 시대의 부처님의 수행하는 자세를 시험하기 위한 게송이라고 말하고 있다. 『大般涅槃經』(T12, 692a~693a)에 있는 설산동자 이야기의 내용을 간추려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부처님이 전생의 보살이었던 시대에 브라흐마나(Brāhmāṇa) 선인仙人이 되어 설산 속에서 수행을 하고 있었다. 이 선인을 설산동자라고 한다. 부처님이 없는 시대였으므로 부처님의 설법이나 경전을 구하여도 구할 수 없는 때이다. 그때, 제석천은 이 청년이 신명을 버릴 각오로 법을 구하고 있는가, 어떤가를 시험하기 위하여 무서운 나찰羅刹(ⓢ ākṣasa)로 모습을 바꾸었다. 청년이 있는 곳으로 가까이 가서 무상 가타의 전반(諸行無常。 是生滅法。)을 제창하였다. 미묘한 음성으로 이제까지 들은 일이 없는 거룩한 가타(偈頌, ⓢ Gāthā)가 들려왔기 때문에, 청년은 어디서 누가 이렇게 노래를 잘 부를까라고 생각하면서 사면을 두리번거렸다. 아주 무서운 모습을 한 나찰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청년은 무서움도 잊어버리고 나찰 가까이 가서, 지금 제창한 거룩한 절반의 게송은 당신이 말했느냐? 나는 처음으로 이것을 들었는데, 바로 이 가르침을 듣기 위하여 수행하고 있다. 만일 무상 가타의 후반을 알고 있으면, 부디 꼭 들려 다오. 나는 죽을 때까지 당신의 제자가 되겠다고 간청하였다. 나찰은, 자신은 사람의 따뜻한 피와 살을 음식으로 삼고 있는데, 오랫동안 굶주려서 어떻게 할 수도 없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청년은, 만일 나의 피와 살을 네가 좋다면 바칠 터이니 부디 꼭 후반을 들려달라고 했다. 그래서 나찰은 무상 가타의 후반(生滅滅已。 寂滅爲樂。)을 제창했다. 노래를 들은 청년은 대단히 크게 기뻐하면서, 이 무상게를 자신의 사후에 남기고 싶어 부근에 있는 돌·벽·나무·도로에 이것을 서사하고 나서, 나무 위로 올라가서 땅으로 뛰어내려 나찰에게 몸을 던졌다. 그런데 그 몸은 공중에서 살며시 안겨지고, 나찰은 제석천의 모습으로 되돌아와 청년에게 예배를 하였다. 그는 신명을 아끼지 않는 참된 보살이라고 찬탄하고 청년을 시험한 죄를 참회하면서, 당신은 장래에 틀림없이 성불하여 세상 사람을 구제할 붓다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17. 17)오역죄五逆罪 : ⓢ pañcānantariyāṇi. 오역중죄五逆重罪, 오무간업五無間業. 다섯 가지 무거운 죄. 무간지옥에 떨어지는 가장 무거운 대역죄. ① 어머니를 살해한 죄. ② 아버지를 살해한 죄. ③ 아라한을 살해한 죄. ④ 부처님의 몸에 상처를 입혀 피가 흐르게 한 죄. ⑤ 교단의 화합과 일치를 파괴하고 분열시킨 죄.
  18. 18)일천제一闡提 : ⓢ icchantika. 일천제라고 음사하며, 단선근斷善根 또는 신불구족信不具足 등으로 번역한다.
  19. 19)대반열반大般涅槃 : ⓢ mahā-pari-nirvāṇa. 대반열반이라고 음사하며, 거룩한 부처님의 위대하고 완전한 열반을 의미한다. mahā는 마하摩訶라고 음사하며, 대大라고 번역하고, pari는 반般이라고 음사하며, 완전하다는 뜻이고, nirvāṇa는 열반涅槃, 열반나涅槃那, 니원泥洹이라고 음사하며, 멸滅, 적멸寂滅, 멸도滅度, 원적圓寂, 무위無爲, 무생無生, 무작無作이라고 번역한다.
  20. 20)체體 : 자체, 주체. 용用의 반대. 본체. 실체, 근본적인 것.
  21. 21)용用 : 작용, 활동.
  22. 22)피안彼岸 : ⓢ paryavasāna, ⓟ pārimaṃ tīraṃ. 강 저쪽 언덕, 이상세계, 이상의 경지, 생사의 고해를 초월한 깨달음의 세계.
  23. 23)경經 : ⓢ sūtra. 수다라修多羅라고 음사하며, 경經이라고 번역한다.
  24. 24)여기서 말하는 『大般涅槃經』은 남본南本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6권 『泥洹經』과 36권 『大般涅槃經(南本)』에는 「序品」이 들어 있으나 40권 『涅槃經(北本)』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효의 『涅槃宗要』는 남본을 중심으로 한 연구임을 알 수 있다.
  25. 25)『大般涅槃經』(T12, 747b).
  26. 26)무분별지無分別智 : ⓢ nirvikalpa-jñāna. 주관과 객관의 상을 벗어나서 평등하게 작용하는 진실한 지혜. 식별·변별하기 이전의 지혜.
  27. 27)마니摩尼 : ⓢ maṇi. 마니라고 음사하며, 주珠·보寶·이구離垢·여의如意라고 번역한다. 주옥珠玉의 총칭이다.
  28. 28)『攝大乘論釋』(T31, 243a).
  29. 29)보살菩薩 : ⓢ bodhisattva. 보리살타菩提薩埵라고 음사하며, 줄여서 보살이라고 한다. 각유정覺有情이라고 번역하며, 구법자求法者 또는 구도자求道者를 의미한다.
  30. 30)『大般涅槃經』(T12, 764c).
  31. 31)『大智度論』(T25, 59c)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又佛二夜經中說。 佛從得道夜。 至般涅槃夜。 是夜中間所說經敎。 一切皆實不顚倒。” 이 글은 두 가지로 읽을 수 있다. 첫째, ‘佛二夜經中說’의 ‘二夜經’을 경전의 이름으로 보려고 할 경우에는 다음과 같이 번역된다. “또한 부처님은 『二夜經』 가운데에서 말씀하신다. 부처님은 도를 깨달으신 밤으로부터 반열반에 드시는 밤에 이르기까지, 이 밤의 중간에 말씀하신 경의 가르침은 모두가 다 진실하여 전도되는 것이 아니다.” 둘째, ‘佛二夜經中說’의 ‘經’을 동사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또한 부처님은 두 밤을 거치는 가운데에 말씀하셨느니라. 부처님은 도를 깨달으신 밤으로부터 반열반에 드시는 밤에 이르기까지, 이 밤의 중간에 말씀하신 경의 가르침은 모두가 다 진실하여 전도되는 것이 아니다.” 첫째 경우에는 원효가 재세할 때는 『二夜經』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이고, 둘째의 경우에는 ‘二夜經’이라는 경전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大智度論』에서는 부처님은 말씀을 하신 것으로 되어 있는데, 원효는 자신의 의도를 펴기 위하여 부정적으로 활용한 것을 우리는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와 관련하여 『楞伽阿跋多羅寶經』(T16, 498c)에 다음과 같이 우리들의 주목을 끄는 글이 실려 있다. “나는 어느 날 밤에 최고의 정각을 얻고 나서부터 내지 어느 날 밤에 반열반에 들기에 이르기까지, 그 중간에는 한 글자도 말하지 않았느니라. 또 과거에도 말하지 않았으며, 미래에도 말하지 않을 것이니라. 말하지 않는 것, 이것이 거룩한 붓다의 말씀이니라.(我從某夜得最正覺。 乃至某夜入般涅槃。 於其中間。 乃至不說一字。 亦不已說當說。 不說是佛說。)”
  32. 32)수미산왕須彌山王 : ⓢ Sumeru. 수미로須彌盧라고 음사하며, 줄여서 수미須彌라고 한다. 묘고妙高·묘광妙光·안명安明·선적善積이라고 번역한다. 불교의 우주관에 의하면 사주세계四洲世界의 중앙에 우뚝 솟은 가장 높은 산을 가리킨다. 큰 바다 가운데에 있으며, 금륜金輪의 위에 있고, 그 높이는 수면에서 8만 요자나(ⓢ yojana)이며, 그 둘레에는 9산·8해가 둘러싸고 있다고 한다. 이 산의 주위를 해와 달이 돌며, 이 산의 중턱에는 동방에 지국천持國天, 남방에 증장천增長天, 서방에 광목천廣目天, 북방에 다문천多聞天의 사천왕四天王이 있고, 이 산의 꼭대기에는 뜨라야쓰뜨림싸뜨(ⓢ Trāyastriṃsat, ⓟ Tāvatiṃsa, 忉利天, 33天)가 있으며, 그 중앙에 ‘샤끄라 데와남 인드라(ⓢ Śakra devānaṃ indra, ⓟ Sakka devānaṃ īndra, 釋提桓因)’가 사는 희견성喜見城이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희견성에 살고 있는 ‘샤끄라 데와남 인드라’를 수미산왕이라고 한다.
  33. 33)『大智度論』(T25, 57c).
  34. 34)『妙法蓮華經』(T9, 7a).
  35. 35)『大般涅槃經』(T12, 658c).
  36. 36)근기根機 : ⓢ indriya. 사람의 종교적 소질·활력·능력을 말한다.
  37. 37)이는 『涅槃經』에서 전표된 여러 가지 뜻을 모두 종지로 삼는다는 견해이다. 그런데 이를 질문과 그것에 대한 대답으로 나눌 경우, 서른여섯 가지의 뜻이 바로 종지가 된다는 것이다. 그 서른여섯 가지란 처음의 장수인과長壽因果에서 시작하여 마지막에 제음법문諸陰法門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보량寶亮 등의 『大般涅槃經集解』(T37)를 보면,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에 대한 여러 견해가 나오지만, 여기서 원효가 말하는 ‘六六三十六義’와 동일한 내용은 발견되지 않는다. 참고로 『雜阿含經』에 『六六法經』(T2, 86c~87a)이란 경명이 수록되어 있다. 이는 송宋 천축天竺 구나바드라(Guṇabhadra, 求那跋陀羅) 삼장이 번역하였다. 내용을 보면, 이는 육내처六內處·육외처六外處·육식신六識身·육촉신六觸身·육수신六受身·육애신六愛身을 가리키며, 이와 같은 것들이 아소我所가 아니고 아我가 아니며 아체我體가 아니라고 있는 그대로 관조하여 알면 열반에 이르는 것이라고 한다.
  38. 38)구성 요소(陰) : ⓢ skandha. 신역에서는 온蘊이라고 번역한다. 쌓아 올려 모은 것을 의미하며, 불교에서는 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요소를 가리킨다.
  39. 39)부처님의 마음자리(佛性) : ⓢ buddha-dhātu, buddhatā, buddhatva. 부처님이 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 대승불교에서는 이것이 모든 인간 또는 존재에게 갖추어져 있다고 한다. 그래서 『大般涅槃經』에서는 모든 중생이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다섯 가지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역자는 이것을 ‘부처님의 마음자리’라고 번역한다. ① 가난한 여인의 집의 땅속에 진금장眞金藏이 묻혀 있다. 가난한 여인의 집안에 진금장이 묻혀 있어도 그녀는 그것을 모른다. 그것을 다른 사람이 파내어서 보여 주니까 그때서야 비로소 그 여인은 마음에 기쁨이 생겼다. 중생에게 부처님의 마음자리가 갖추어져 있어도, 그것이 번뇌로 뒤덮여 있기 때문에 중생은 그것을 보지 못하며, 알지 못하고, 이제 여래에 의하여 그것이 개시開示된다고 하는 의미로 풀이할 수 있다. 여기서 가난한 여인이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일체의 중생을 가리키며, 진금장이란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지시하는 것이다.(T12, 648b) ② 쓰디쓴 약을 어머니의 젖에 바르다. 어떤 여인이 아기를 하나 키우는데, 그 아이가 병에 걸렸기 때문에, 그 아기의 어머니는 의사에게 아기를 데리고 가서 진찰을 받고 약을 받아 왔다. 의사는 소酥(cheese)·유乳(milk)·석밀石蜜(honey)의 세 가지를 섞어 약을 지어 주면서, 이 약이 완전히 소화가 될 때까지는 젖을 주지 말도록 설명했다. 어머니는 아이에게 방편으로 젖꼭지에 독을 발랐기 때문에 빨아먹거나 만져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약이 모두 소화가 된 것을 보고서, 어머니는 젖몸을 깨끗이 씻고, 아이에게 ‘이리 와! 이리 와! 젖을 줄 테니까’라고 불렀지만, 그 아이는 아까 독기毒氣에 관한 말을 들었기 때문에 어머니를 피하였다. 어머니는 약을 먹이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것을 아이에게 설명하고, 아이는 그 까닭을 알고서 점차로 젖을 먹기 시작했다. 여래도 일체를 제도하기 위하여 세속의 법에 대하여 무아의 법을 수행할 것을 가르쳐, 세간출과世間出過의 법을 말씀하셨다. 부처님은 이렇게 해서 수행인의 공空을 실천함에 의하여 마침내 여래장을 말씀하신다고 하는 가르침이다.(T12, 648b) ③ 역사力士의 미간에 금강주金剛珠가 박히다. 이 역사는 미간에 금강주가 있었는데, 다른 역사와 씨름을 하다가 서로 머리를 부딪쳤기 때문에, 그 이마에 있던 구슬이 피부 속으로 함몰하여 버렸다. 역사는 스스로는 그 구슬의 행방을 모르고, 그곳에 부스럼이 났기 때문에 의사에게 치료를 받으러 갔다. 의사는 너의 이마에 있던 구슬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자기 자신은 그 구슬의 행방을 모르고 있던 역사는, 내 이마의 구슬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환화幻化했을까라고 탄식하면서 울었다. 그때 의사는 역사를 달래면서 그렇게 몹시 슬퍼하거나 괴로워하지 말라고 했다. 네가 씨름을 할 때 분노심이 강성했기 때문에 그때 구슬은 살 속으로 함몰하여 버리고 스스로는 그것을 모르고 있다고 일러 주었다. 역사는 의사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의사는 거울을 가져다 보여 주면서 함몰한 구슬을 비쳐 확인시켰다. 구슬이 똑똑하게 현현하는 것을 보고, 그때서야 기특奇特한 상념이 떠올랐다. 일체중생도 이와 마찬가지로 선 지식에게 친근할 수가 없기 때문에 부처님의 마음자리가 있어도 볼 수가 없다. 더구나 탐·진·치 삼독에 휩싸여서, 여러 종류의 가계에 태어나 이십오유二十五有를 받아 부처님의 마음자리가 있는 것을 모른다. 무아를 닦아도 참된 무아를 모르며, 더구나 유아有我를 모른다. 여래는, 일체는 모두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지니고 있다고 말씀하지만, 중생은 무량한 번뇌에 뒤덮여 있어서 부처님의 마음자리가 있는 것을 모른다. 만일 번뇌를 소멸시켜 버리면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증지證知하는 것은 요요了了하다고 교시하고 있다.(T12, 649a) ④ 설산雪山에 일미一味의 약이 있다. 그 약을 약미樂味라고 부르며, 그 맛은 대단히 달다. 깊은 숲속에 있으므로 사람은 향기에 의해서 그 존재를 알 수 있을 뿐이다. 아주 옛날에 전륜성왕이 있었는데 설산에 있는 이 약을 구하기 위하여 목통木筒을 만들었다. 이 약이 성숙할 때는 땅으로부터 유출하여 목통에 모이는 것이다. 그 맛은 진정眞正이었다. 그런데 그 왕이 죽고 난 뒤에 그 약의 맛이 그 유처流處에 따라서, 시기도(酢)·짜기도(鹹)·달기도(甘)·쓰기도(苦)·맵기도(辛)·싱겁기도(淡) 하여 여러 가지 맛으로 나누어졌다. 이와 같이 일미가 그 유처에 따라서 여러 가지 다른 맛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약의 진미는 산에 머물러 있어 마치 보름달 같았다. 박덕한 사람들이 약을 얻으려고 공을 들여 땅을 파도 얻지 못하더니, 다른 전륜성왕이 세상에 나와 그의 복력의 인연으로 약의 진정한 맛을 얻었다. 이와 같이 여래가 말씀하시는 비장의 부처님의 마음자리의 맛도 그와 같아서 모든 번뇌의 숲속에 묻혀 있으므로 무명이 두터운 중생은 맛이 좋은 약을 보지 못한다. 일미란 부처님의 마음자리가 번뇌 때문에 여러 가지 맛을 내는데, 드디어 인연을 얻어서 본래의 제 맛인 일미를 얻는다고 하는 가르침이다.(T12, 649b) ⑤ 날카로운 괭이로 땅을 파서 금강에 다다르다. 어떤 사람이 땅속에 있는 보물이 든 독을 잘 알고 괭이로 땅을 파는데 모래·자갈·반석은 무난하게 파 내려갈 수 있었지만, 금강에 이르면 뚫을 수 없다. 금강은 창이나 괭이로 깨뜨릴 수 없다. 중생의 부처님의 마음자리도 그와 같아서 누구도 깨뜨릴 수 없으며, 중생의 오온五蘊은 만들어진 것이니, 만들어진 것은 모래나 돌과 같아서 뚫을 수 있고 깨뜨릴 수 있지만 부처님의 마음자리인 진아眞我는 금강과 같아서 깨뜨릴 수 없다고 하는 가르침이다.(T12, 649c)
  40. 40)이승二乘 : ⓢ yāna-dvaya. 성문승과 연각승을 말한다. yāna는 수레라는 뜻이며, 승乘이라고 번역한다. 성문승이란, 스승의 가르침에 의하여 깨닫는 사람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직접 듣고 사성제의 도리에 의하여 깨닫는 사람, 또는 그와 같은 입장을 따르는 사람들을 말한다. 연각승이란, 이법을 체득하여 스스로 깨닫는 사람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기대지 않고 홀로 십이인연의 도리를 관찰하여 깨닫는 사람, 또는 그와 같은 입장을 따르는 사람들을 말한다.
  41. 41)출세간出世間 : ⓢ loka-uttara. ‘세世’는 천류遷流한다는 뜻으로 시간성을 말하며, ‘간間’은 간격이라는 뜻으로 공간성을 말한다. 곧 생성·소멸하는 변화의 세계를 세간이라고 한다. 출세간이란 이와 같은 생성·소멸하는 변화의 세계에서 벗어난 세간을 말한다. 삼계의 번뇌를 벗어나서 깨달음의 경지로 들어간 세계.
  42. 42)여섯 가지의 영락 : 동보영락銅寶瓔珞·은보영락銀寶瓔珞·금보영락金寶瓔珞·유리보영락琉璃寶瓔珞·마니보영락摩尼寶瓔珞·금강보영락金剛寶瓔珞을 가리킨다.
  43. 43)세 가지 반야(三種般若) : 문자반야文字般若·관조반야觀照般若·실상반야實相般若를 가리킨다.
  44. 44)『妙法蓮華經』(T9, 4b).
  45. 45)『妙法蓮華經』(T9, 5a).
  46. 46)『大般涅槃經』(T12, 605a).
  47. 47)『佛說大般泥洹經』(T12, 853a).
  48. 48)『大般涅槃經』(T12, 758c).
  49. 49)『大般涅槃經』(T12, 758c).
  50. 50)『大般涅槃經』(T12, 757c).
  51. 51)각관覺觀 : 각관은 vitarka와 vicāra의 구역으로, 신역에서는 심사尋伺라고 번역한다. vitarka(覺, 尋)는 사물의 이치를 추리하여 헤아리는 마음의 거친 작용을 가리키며, vicāra(觀, 伺)는 사물의 이치를 추리하여 헤아리는 마음의 미세한 작용을 가리킨다. 거친 마음과 미세한 마음.
  52. 52)『大般涅槃經』(T12, 794b).
  53. 53)싼쓰끄리뜨(Sanskrit) : 싼쓰끄리뜨는 본디 원어인 saṃskṛta를 영어로 바꿔서 표기한 것을 다시 한글로 음사한 것이다. saṃskṛta는 성어聖語라는 뜻이며, 한문경전에서는 일반적으로 범어梵語라고 부른다.
  54. 54)이는 질문에 나온 『涅槃經』 인용문 중 두 번째 경문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다. 즉 한문으로 표기하는 경우라면 “각관을 여의었으므로 멸도라고 한다.”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55. 55)『大般涅槃經』(T12, 794b).
  56. 56)『大般涅槃經』(T12, 794b).
  57. 57)여기서 말하는 고인古人은 누구일까? 고인으로는 정영사淨影寺 혜원慧遠(513~592)·천태 지의天台智顗(538~597)·가상 길장嘉祥吉藏(549~623)의 세 스님을 생각할 수 있다. 혜원의 저술인 『大乘義章』(T44, 813c), 지의의 저술인 『妙法蓮華經文句』(T34, 6a) 및 길장의 저술인 『涅槃遊意』(T38, 232b) 속에 이와 비견할 만한 내용의 글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장을 자세히 비교하여 보면 지의의 『妙法蓮華經文句』와 길장의 『涅槃遊意』보다는 혜원의 『大乘義章』으로부터 더욱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내용을 비교·참고하기 위하여 혜원의 『大乘義章』과 길장의 『涅槃遊意』 가운데에서 ‘大’의 육의六義를 함께 인용하여 싣기로 한다. 혜원, 『大乘義章』(T44, 813c), “大義有六。 一者常義。 故涅槃云。 所言大者名之爲常。 譬如有人壽命無量名大丈夫。 故涅槃云。 所言大者其性廣博。 猶如虛空無所不至。 涅槃如是。 故名爲廣。 三者多義。 能別非一。 故涅槃云。 譬如大藏多諸珍異。 涅槃如是。 多有種種妙法珍寶。 故名爲大。 四者深義。 淵奧難測。 故涅槃云。 大者名爲不可思議。 一切世間聲聞緣覺不能測量涅槃之義。 故名爲大。 五者高義。 位分高出餘人不至。 故涅槃云。 譬如大山一切世人不能得上。 故名爲大。 涅槃如是。 凡夫二乘及諸菩薩不能窮到。 故名爲大。 六者勝義。 如世間中勝上之人。 名爲大人。 涅槃如是。 諸法中勝。 故名爲大。 ” 길장, 『涅槃遊義』(T38, 233a), “但大有多義。 依此經凡有六義。 一者常故大。 所言大者。 名之爲常。 然無常二得名大而終不及 常大薪大火。 大薪不及火。 常無常亦爾也。 二者廣故大。 所以然者。 經云。 所言大者。 其性廣博廣。 博故大也。 三者高故名大。 經云。 譬如大山。 一切世人所不能上。 故名大山。 涅槃亦爾。 聲聞緣覺及諸菩薩所不能上。 是故名大。 四者深故大。 經云。 大名不可思議。 一切世人所不能測。 是故名大也。 五者多故名大。 經云。 譬如大城。 多諸珍寶故名大城。 涅槃亦爾。 多諸法寶故名爲大。 六者勝故名大。 譬如有人。 於人中勝故名大。 涅槃亦爾。 勝於一切故名爲大也。 ”
  58. 58)『大般涅槃經』(T12, 631c).
  59. 59)『大般涅槃經』(T12, 631c).
  60. 60)『大般涅槃經』(T12, 746b).
  61. 61)『大般涅槃經』(T12, 746b).
  62. 62)『大般涅槃經』(T12, 747a).
  63. 63)무위無爲 : 모든 법의 진실제를 말한다. 위爲는 조작造作이라는 뜻이다.
  64. 64)응신應身 : 삼신三身의 하나. 중생을 교화하려는 부처님이 중생과 같은 몸을 나타내는 몸.
  65. 65)멸도滅度 : ⓢ nirvāṇa. 나고 죽는 큰 환난을 없애어 번뇌의 바다를 건넜다는 뜻이다.
  66. 66)『妙法蓮華經』(T9, 5a).
  67. 67)자성自性 : ⓢ svabhāva. 그 자체의 정해진 본질. 사물로 하여금 그것이 그것이게 하는 소이所以. 진실하여 불변하는 본성.
  68. 68)『解深密經』(T16, 693c).
  69. 69)해탈解脫 : ⓢ mokṣa. 번뇌나 속박을 벗어나서 정신이 자유롭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깨달음.
  70. 70)『大般涅槃經』(T12, 636a).
  71. 71)『大般涅槃經』(T12, 757b).
  72. 72)『大般涅槃經』(T12, 625c).
  73. 73)『佛性論』(T30, 805a).
  74. 74)『大般涅槃經』(T12, 758c).
  75. 75)『大般涅槃經』(T12, 758c).
  76. 76)『大般涅槃經』(T12, 757b).
  77. 77)진여眞如 : ⓢ tathatā. 여여如如 또는 진여眞如라고 번역한다. 진실 그대로임, 사실 그대로임, 있는 그대로임, 보태거나 뺄 것이 없이 있는 그대로의 상태. 현대의 언어로는 진리라고 번역하여도 괜찮을 것이라고 본다.
  78. 78)『大般涅槃經』(T.12, 622a).
  79. 79)『大般涅槃經』(T12, 735b).
  80. 80)『摩訶般若波羅蜜經』(T8, 401b).
  81. 81)『占察善惡業報經』(T17, 909c).
  82. 82)『大般涅槃經』(T12, 616b).
  83. 83)『大般涅槃經』(T12, 746c~747a).
  84. 84)『大般涅槃經』(T12, 747a), “如是大我。 名大涅槃。”
  85. 85)『妙法蓮華經優波提舍』(T26, 17a).
  86. 86)공空 : ⓢ śūnyatā. 공空, 공성空性이라고 번역한다. 십진법으로 표현하면 ‘0’을 가리킨다.
  87. 87)『大般涅槃經』(T12, 767c).
  88. 88)생인生因 : ⓢ kāraka-hetu. 결과를 생성시키는 원인, 사물을 생성시키는 원인, 실재 근거 그 자체. 싹에 대한 종자. 서양의 ratio essendi에 해당한다. 객관적 자연계에 있어서, 갑甲이라고 하는 것이 원인이 되어 을乙이라고 하는 것을 생기·존재시키는 것이라면, 갑은 을의 생인이다. 요인了因(ⓢ jñāpaka-hetu)의 반대말.
  89. 89)삼해탈문三解脫門 : ⓢ tri-samādhi. 삼삼매三三昧라고도 하며, 세 가지의 선정, 깨달음으로 통하는 세 가지의 길, 무루인 해탈에 들어가는 문을 뜻한다. ① 공삼매空三昧-모든 존재는 공空·무아無我라고 관조하는 삼매. ② 무상삼매無相三昧-nirvāṇa는 색·성·향·미·촉·법의 상 또는 남·녀 등의 차별상을 여읜 것이라고 관조하는 삼매. ③ 무원삼매無願三昧-무작삼매無作三昧. 삼계에서는 원구願求할 만한 것이 없다고 관조하는 삼매.
  90. 90)삼십칠조도품三十七助道品 : ⓢ sapta-triṃśad-bodhipakṣa. 삼십칠도품三十七道品, 삼십칠각분三十七覺分, 삼십칠보리분법三十七菩提分法이라고도 하며, 깨달음의 지혜를 얻기 위한 실천수행의 방법. 열반에 도달하기 위한 서른일곱 가지 수행 방법. 사념처四念處, 사정근四正勤(四正斷), 사신족四神足(四如意足), 오근五根, 오력五力, 칠각지七覺支, 팔정도八正道를 합한 것.
  91. 91)요인了因 : ⓢ jñāpaka-hetu. 인식 근거 그 자체, 서양의 ratio cognoscendi에 해당한다. 갑甲을 근거로 하여 을乙의 존재를 추론할 경우에, 갑은 을의 요인이다. 생인生因(ⓢ kāraka-hetu)의 반대말.
  92. 92)『大般涅槃經』(T12, 827b).
  93. 93)『大般涅槃經』(T12, 636a). 경에서는 결정決定에 대해 “決定者。 卽是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고 설명하였다.
  94. 94)『大般涅槃經』(T12, 767c).
  95. 95)『勝鬘師子吼一乘大方便方廣經』(T12, 221c).
  96. 96)열한 가지의 공 : 내공內空·외공外空·내외공內外空·유위공有爲空·무위공無爲空·무시공無始空·성공性空·무소유공無所有空·제일의공第一義空·공공空空·대공大空.
  97. 97)『大般涅槃經』(T12, 765c).
  98. 98)『大方廣佛華嚴經』(T9, 464c).
  99. 99)『摩訶般若波羅蜜經』(T8, 416a).
  100. 100)열여덟 가지 공 : 『大智度論』(T25, 285a)에서 공을 열여덟 가지로 나누어 관찰한 것이다. 대승에서 실천해야 할 공을 열여덟 가지로 분류하여 관찰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내공內空·외공外空·내외공內外空·공공空空·대공大空·제일의공第一義空·유위공有爲空·무위공無爲空·필경공畢竟空·무시공無始空·산공散空·성공性空·자상공自相空·제법공諸法空·불가득공不可得空·무법공無法空·유법공有法空·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
  101. 101)『大乘起信論』(T32, 580b).
  102. 102)무학無學 : ⓢ aśaikṣa, ⓟ asekha. 이미 배울 것을 다 배워서 더 이상 배워야 할 것이 남아 있지 않은 깨달음의 경지. 모든 이론적 미혹(見惑)과 정의적 미혹(思惑)을 모두 끊은 사람을 말하며, 전자를 성취한 것을 혜해탈慧解脫, 후자를 성취한 것을 심해탈心解脫이라고 한다.
  103. 103)비학비무학非學非無學 : ⓢ naiva śaikṣā nāśaikṣā. 사향사과 이전의 유루, 곧 일반적으로 말하는 학문이 없는 사람을 말한다.
  104. 104)『大智度論』(T25, 191a).
  105. 105)『大般涅槃經』(T12, 746a).
  106. 106)『大般涅槃經』(T12, 746a).
  107. 107)정정취正定聚 : ⓢ niyata-rāṣi. 모든 존재의 장래 운명을 세 가지로 분류(三聚)하여 놓은 것 가운데의 하나로, 틀림없이 부처님이 된다고 결정되어 있는 성자. 구사교학에서는 고법지인苦法智忍을 얻은 계위에 들어간 성자를 말하며, 대승에서는 깨달음을 이룰 때까지 물러남이 없이 꾸준히 진보하여 보살(bodhisattva)의 계위에 들어간 성자를 가리킨다.
  108. 108)사정취邪定聚 : ⓢ mithyā-niyata-rāṣi. 깨달을 수 없는 중생을 말한다. 구체적으로는 오무간업五無間業을 저지른 중생. 이것은 최악의 행위로 죽고 나면 바로 무간지옥에 떨어진다.
  109. 109)내범內凡 : 외범外凡의 반대말. 불교 안의 범부. 소승에서는 칠방편위 가운데의 난위煖位·정위頂位·인위忍位·세제일위世第一位인 사선근위四善根位를 말하며, 대승에서는 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回向의 삼현위三賢位를 말씀하신다. 그러나 『大乘起信論』에서는 십신十信을 내범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외범外凡은 십신에도 들어오지 못한 외도를 말씀하신다.
  110. 110)부정취不定聚 : ⓢ aniyato-rāṣi. 정正으로도 사邪로도 결정되어 있지 않은 중생.
  111. 111)『妙法蓮華經優波提舍』(T26, 7b).
  112. 112)『大般涅槃經』(T12, 388a).
  113. 113)전의轉依 : ⓢ āśraya-parāvṛtti. 사람들의 미혹한 존재의 근거의 전환. 번뇌를 바꾸어서 열반을 얻는 것. 소의所依의 전轉. 의지依止를 전轉하는 것. 소의라는 것은 모든 종자를 지니고 있는 알라야식이며, 알라야식이 바뀌어 열반을 얻는 것을 전의라고 한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전轉에는 전사轉捨와 전득轉得의 두 가지 뜻이 있다. 의依는 소의所依를 말한다. 알라야식은 타를 의지하여 일어나는 것으로서 원성실성을 실성으로 하며, 그 속에 번뇌장과 소지장 및 무루종자를 함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전사라고 할 때는 번뇌장과 소지장을 전사한다는 말이며, 전득이라고 할 때는 무루종자가 그 실성을 드러내어 보리와 열반을 전득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알라야식 가운데에 있는 번뇌장을 전사하여 그 실성인 열반을 전득하고, 소지장을 전사하여 진여를 전득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114. 114)무주처無住處열반 : ⓢ apratiṣṭhita-nirvāṇa. 생사에도 열반에도 안주하는 일이 없는 열반. 미혹한 세계에도 안주하지 않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대비를 가지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미혹한 세계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열반의 경지에도 안주하지 않는 자세를 말한다.
  115. 115)『攝大乘論釋』(T31, 247a).
  116. 116)『十地經論』(T26, 133b).
  117. 117)『維摩詰所說經』(T14, 542b).
  118. 118)『大乘起信論』(T32, 577a).
  119. 119)『入楞伽經』(T16, 527b).
  120. 120)이와 관련된 내용은 『大乘義章』(T44, 817b)을 참조하기를 권장한다.
  121. 121)『阿毘曇毘婆沙論』(T28, 126ab).
  122. 122)『阿毘曇毘婆沙論』(T28, 126b).
  123. 123)수멸무위數滅無爲 : 택멸무위澤滅無爲. 지혜를 의지하여 번뇌를 소멸시키는 것. 무루의 지혜에 의지하여 얻는 수멸數滅을 택멸澤滅이라고 한다.
  124. 124)『阿毘曇毘婆沙論』(T28, 126a).
  125. 125)『攝大乘論釋』(T31, 175a).
  126. 126)『瑜伽師地論』(T30, 747c). 이 부분은 『유가사지론』 「섭결택분」 중 ‘有餘依及無餘依’의 이지二地에 대한 내용에 해당한다.
  127. 127)『瑜伽師地論』(T30, 748bc).
  128. 128)『勝鬘師子吼一乘大方便方廣經』(T12, 221b).
  129. 129)『合部金光明經』(T16, 363b).
  130. 130)『攝大乘論釋』(T31, 245b).
  131. 131)『合部金光明經』(T16, 363b).
  132. 132)삼사三事 : 법신法身(ⓢ dharmakāya)과 반야般若(ⓢ prajñā)와 해탈解脫(ⓢ mokṣa)을 가리킨다.
  133. 133)『大般涅槃經』(T12, 616b).
  134. 134)『大般涅槃經』(T12, 616b).
  135. 135)『大般涅槃經』(T12, 616b).
  136. 136)『大般涅槃經』(T12, 616b).
  137. 137)만일 법신이~수 있다 : 이는 『大乘義章』 권18 「涅槃義五門分別」 가운데 ‘攝三事約對涅槃分定總別’(T44, 822b)의 논의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138. 138)『合部金光明經』(T16, 363a).
  139. 139)『合部金光明經』(T16, 363ab).
  140. 140)제일의제第一義諦 : ⓢ paramārtha-satya. 승의제勝義諦, 진제眞諦. 훌륭한 의의를 지니고 있는 진리. 최고의 진리. 완전한 진리. 훌륭한 깨달음의 지혜를 완성한 경지.
  141. 141)세속제世俗諦 : ⓢ lokasaṃvṛti-satya. 속제俗諦, 세제世諦. 세간 일반에서 승인하고 있는 진리. 세속의 입장에서의 진리. 세간에 따라서 가설한 여러 가지 가르침. 낮은 차원의 진리.
  142. 142)『大乘起信論』(T32, 579b).
  143. 143)『大般涅槃經』(T12, 838bc).
  144. 144)『佛說大般泥洹經』(T12, 859b). 그러나 원효는 실제로 이 글을 혜원의 『대승의장』(T44, 815a)에서 직접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妙色湛默常安穩。 不隨時節劫數遷。 大聖曠劫行慈悲。 獲得金剛不壞身。”
  145. 145)『大薩遮尼乾子所說經』(T9, 359b).
  146. 146)수용신受用身 : ⓢ sāṃbhogikaḥ-kāyaḥ. 깨달음의 결과, 법을 향수하며 또 다른 사람들로 하여 금 향수하게 하는 이. 부처님의 신체의 하나로 보신이라고도 한다. 수용신에는 자수용신自受用身과 타수용신他受用身의 두 가지가 있다. ① 자수용신은 다른 보살이 보고 들을 수 없는 불신으로서 자기가 얻은 법락을 자기 자신만이 즐길 수 있는 불신. 스스로 혼자서 법락을 즐기는 불신. ② 타수용신은 십지 이상의 보살들은 볼 수 있으며 또는 자기가 받은 법락을 다른 보살들에게도 돌려주는 불신.
  147. 147)『攝大乘論釋』(T31, 249c).
  148. 148)『大般涅槃經』(T12, 622c).
  149. 149)『大般涅槃經』(T12, 617a).
  150. 150)『大般涅槃經』(T12, 758c).
  151. 151)『구경일승보성론究竟一乘寶性論』 : 인도의 대승불교를 논설하는 가운데에서 여래장如來藏 사상을 조직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대표적인 논서이다. 이 책은 일곱 가지의 금강구金剛句로서, 불·법·승의 삼보, 여래성如來性·보리菩提·불공덕佛功德·불업佛業을 설명하고 있다. 이 중 보리·불공덕·불업 등은 여래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래성은 부처님의 마음자리 곧 붓다로서의 성질이며, 그것이 원인이 되어 삼보가 있게 되므로 보성寶性이라고 한다. 이 여래성如來性이 번뇌에 싸여 있을 때를 가리켜 여래장이라고 한다. 또한 이 여래성이 더러움을 떠난 청정해진 상태를 보리라고 하며, 이것을 법신의 완전한 나타남이라는 의미에서 전의라 한다. 그리고 이 전의에 의하여 부처님의 덕성德性과 자비慈悲가 나타나는 것이라고 한다. 이 논서의 저술 목적은 반야경의 공설空說을 비판하고 불성의 실재를 밝히려는 것으로서 유식설唯識說과 관련하여 인도의 여래장 사상의 발전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이다.
  152. 152)『勝鬘師子吼一乘大方便方廣經』(T12, 222a).
  153. 153)『究竟一乘寶性論』(T31, 830c).
  154. 154)의생신意生身 : ⓢ mano-maya-kāya. 의성신意成身. 마음만 있는 신체. 의지에 의하여 생겨난 신체. 마음에 의하여 만들어진 신체. 성인들의 몸은 오온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다만 의온만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정精·혈血 등의 연을 빌리지 않고 다만 마음에 의하여 생겨난 신체. 초지 이상의 보살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마음대로 수생受生하는 신체가 있다고 한다. 죽은 뒤에 생명을 받기 전까지의 중유신을 말하기도 한다.
  155. 155)『究竟一乘寶性論』(T31, 830c).
  156. 156)『究竟一乘寶性論』(T31, 830c).
  157. 157)『入楞伽經』(T16, 583b).
  158. 158)『究竟一乘寶性論』(T31, 830c).
  159. 159)『究竟一乘寶性論』(T31, 828c).
  160. 160)분단생사分段生死 : 유위생사有爲生死. 미혹한 세계에서 방황하는 범부가 받는 생사. 한정된 수명·신체가 주어져서 윤회하는 것. 수명의 장단이나 육체의 대소 등의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는 분단신을 받아서 윤회하는 것. 견혹·사혹을 지니고 있는 범부의 생사.
  161. 161)염처念處 : ⓢ smṛty-upasthāna. 염주念住. 마음을 고요하게 하여 관상하는 것. 염은 관조하는 지혜와 함께 일어나는 염의 심소이며, 처는 관조하는 대상의 경계이므로, 이는 곧 신身·수受·심心·법法의 네 가지 대상을 향하여 부정不淨·고苦·무상無常·무아無我로 관하는 지혜를 일으킬 때에 염으로 하여금 그 경계에 머물게 하기 때문에 염처라고 한다.
  162. 162)『究竟一乘寶性論』(T31, 829b).
  163. 163)변역생사變易生死 : ① 미혹한 세계를 벗어나서 윤회를 초월하여 성자가 받는 생사. 욕·색·무색계의 삼계를 초월한 모든 성인의 생사. ② 변역신을 받는 생사, 변역신을 받는 신체의 상태라는 의미. 두 가지 생사 가운데의 하나로 보살이 받는 생사.
  164. 164)『究竟一乘寶性論』(T31, 830a).
  165. 165)『大般涅槃經』(T12, 621b).
  166. 166)『攝大乘論釋』(T31, 269b).
  167. 167)원효는 『究竟一乘寶性論』(T31, 843b)으로부터는 게송만을 인용하고, 산문은 『佛性論』(T31, 811a)으로부터 인용하고 있다.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혼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佛性論』으로부터 인용한 산문과 『究竟一乘寶性論』으로부터 인용한 게송의 하나하나에 각주를 달아 근거를 밝힌다. 그리고 『佛性論』(T31, 811a)과 『究竟一乘寶性論』(T31, 843b)의 원문을 함께 실어 연구자에게 도움을 주려고 한다. 『佛性論』(T31, 811a), “依十種因緣。 十者。 一因緣無邊。 二衆生界無邊。 三大悲無邊。 四如意足無邊。 五無分別智無邊。 六恒在禪定無散。 七安樂淸凉。 八行於世間八法不染。 九甘露寂靜遠離死魔。 十本性法然無生無滅。 一因緣無邊故常者。 無量劫來。 捨身命財。 爲攝正法。 正法旣無邊際無窮無盡。 還以無窮之人感無窮果。 果卽三身。 故得是常。 二衆生無邊故常者。 初發心時。 結四弘誓。 起十無盡大願。 若衆生不可盡。 我願無盡。 衆生若盡。 我願乃盡。 衆生旣其無盡。 是故化身常在世間。 敎導衆生無有窮盡。 三大悲無邊故常者。 若諸菩薩分有大悲。 尙能恒救衆生。 心無齊限。 久住生死。 不入涅槃。 何況如來。 衆德圓滿。 常在大悲。 救拔恒恩。 豈有邊際。 是故言常。 四四如意無邊故常者。 世間有得四神足者。 尙能住壽四十小劫。 何況如來爲大神足師而當不能住壽自在億百千劫廣化衆生。 是故名常。 五無分別慧無邊故常者。 遠離生死涅槃二執。 一向與第一義諦相應。 不動不出故知是常。 六恒在禪定故常者。 世間有人得禪定者。 尙能不爲水火燼溺刀箭所傷。 何況如來。 常在禪定。 而應可壞。 是故名常。 七安樂淸凉故常者。 安樂卽是金剛心。 能除無明住地最後念無常苦。 以無苦故。 故名安樂。 佛果顯成。 故名淸凉。 是解脫道。 故名爲常。 八行於世間八法不染故常者。 佛身雖復在於道前。 生死相應而不爲彼煩惱所染無妄想緣。 故是常住。 九甘露寂靜遠離死魔故常者。 甘露令人長仙不死。 金剛之心。 能除無明最後念惑故。 得佛果常樂。 常樂故寂靜。 寂靜故遠離死魔。 離死魔故是常住法。 十性無生滅故是常者。 法身非本無今有。 本有今無。 雖行三世。 非三世法。 何以故。 此是本有。 非始今有。 過三世法。 是故名常。 ”; 『究竟一乘寶性論』(T31, 843b), “棄捨身命財。 攝取諸佛法。 爲利益衆生。 究竟滿本願。 得淸淨佛身。 起大慈悲心。 修行四如意。 依彼力住世。 以成就妙智。 離有涅槃心。 常得心三昧。 成就樂相應。 常在於世間。 不爲世法染。 得淨甘露處。 故離一切魔。 諸佛本不生。 本來寂靜故。 以常可歸依。 故言歸依我。 初七種譬喩。 如來色身常。 後三種譬喩。 善逝法身常。 ”
  168. 168)『佛性論』(T31, 811a).
  169. 169)『究竟一乘寶性論』(T31, 843b).
  170. 170)『佛性論』(T31, 811a).
  171. 171)『究竟一乘寶性論』(T31, 843b).
  172. 172)『佛性論』(T31, 811a).
  173. 173)『究竟一乘寶性論』(T31, 843b).
  174. 174)『佛性論』(T31, 811a).
  175. 175)『究竟一乘寶性論』(T31, 843b).
  176. 176)『佛性論』(T31, 811a).
  177. 177)『究竟一乘寶性論』(T31, 843c).
  178. 178)『佛性論』(T31, 811a).
  179. 179)『究竟一乘寶性論』(T31, 843c).
  180. 180)『佛性論』(T31, 811a).
  181. 181)『究竟一乘寶性論』(T31, 843c).
  182. 182)『佛性論』(T31, 811a).
  183. 183)『究竟一乘寶性論』(T31, 843c).
  184. 184)『佛性論』(T31, 811a).
  185. 185)『究竟一乘寶性論』(T31, 843c).
  186. 186)『佛性論』(T31, 811a).
  187. 187)『究竟一乘寶性論』(T31, 843c).
  188. 188)이 내용은 『大般涅槃經』 「光明遍照高貴德王菩薩品」 제22(T12, 747ab)에 실려 있는 사락四樂을 전거로 하여 서술한 글이다. “何等爲四。 一者斷諸樂故。 不斷樂者則名爲苦。 …… 二者大寂靜故名爲大樂。 …… 三者一切知故名爲大樂。 …… 四者身不壞故名爲大樂。 ……”
  189. 189)『大般涅槃經』(T12, 747a), “復次善男子。 有大樂故。 名爲大涅槃。 涅槃無樂。 以四樂故。 名大涅槃。 ”
  190. 190)『大般涅槃經』(T12, 618c), “若法是實是眞是常是主是依。 性不變易。 是名爲我。”
  191. 191)『大般涅槃經』의 「光明遍照高貴德王菩薩品」 제22(T12, 746c)에서 여덟 가지 자재를 산문으로는 말씀하시지만, 게송으로는 말씀하시지 않는다. “云何名爲大自在也。 有八自在則名爲我。”
  192. 192)『大般涅槃經』(T12, 746c).
  193. 193)『大般涅槃經』(T12, 746c).
  194. 194)『大般涅槃經』(T12, 746c).
  195. 195)『大般涅槃經』(T12, 746c).
  196. 196)『大般涅槃經』(T12, 746c).
  197. 197)『大般涅槃經』(T12, 746c).
  198. 198)『大般涅槃經』(T12, 746c).
  199. 199)『大般涅槃經』(T12, 747a).
  200. 200)『大般涅槃經』(T12, 747a).
  201. 201)『大般涅槃經』(T12, 747b).
  202. 202)불신佛身의 상常·무상無常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원효가 활동하던 시기 당의 불교계에서 널리 보이던 모습이다. 가령 법장의 『華嚴一乘敎義分齊章』 권3(T45, 496c 이하)을 보면 ‘佛果義相’을 설명함에 있어 먼저 상·무상의 문제를 오교五敎에 대비시켜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이 『涅槃宗要』의 문맥에 따르면, 원효는 법신法身과 화신化身의 상·무상의 문제는 다루지 않고, 오직 보신報身의 상주常住와 무상無常에 대해서만 상세히 언급한 뒤 이를 화쟁和諍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3. 203)『大般涅槃經』(T12, 613c).
  204. 204)『大般涅槃經』(T12, 622a).
  205. 205)『大般涅槃經』(T12, 738bc).
  206. 206)일곱 가지 뜻 : 『涅槃經』에 나오는 분수, 알음알이, 언설, 성씨, 부모, 네 가지 위의, 방소의 일곱 가지를 말한다. 이런 것이 있으므로 여래가 상주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207. 207)『大般涅槃經』(T12, 614a).
  208. 208)일향기一向記 : ⓢ ekaṃśa-vyākaraṇa. 일향기란 사기답四記答 가운데의 하나이다. 그렇다면 사기답이란 무엇인가. 부처님의 화법을 넷으로 분류하여 설명한 것으로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응일향기문應一向記問-ⓢ ekaṃśa-vyākaraṇa. 일향기一向記, 결정답決定答. “살아 있는 것은 모두 죽는가?”라는 물음에 “반드시 죽는다.”라고 단정적인 회답을 하는 경우이다. ② 응분별기문應分別記問-ⓢ vibhajya-vyākaraṇa. 분별기分別記, 해의답解義答. “죽은 이는 모두 윤회하는가?”라는 물음에 “번뇌가 있는 이는 윤회하며, 없는 이는 재생하지 않는다.”라고 조건에 따라서 대답하는 경우이다. ③ 응반힐기문應反詰記問-ⓢ paripṛcchā-vyākaraṇa. 반문기反問記, 반문답反問答. “인간은 뛰어난 존재인가?”라는 물음에 “무엇과 비교해서 그런가?”라고 반문한 뒤에, 천신과 비교할 경우에는 “아니다.”라고 대답하며, 축생과 비교할 경우에는 “그렇다.”라고 물음에 따라서 대답하는 경우이다. ④ 응사치기문應捨置記問-ⓢ sthāpanīya-vyākaraṇa. 사치기捨置記, 치답置答 또는 무기無記(avyākṛta). “독화살의 비유”에서 부처님과 만동자鬘童子 (ⓢ Maluṅkyaputta)의 대화와 같은 내용으로, 사류십난四類十難 또는 사류십사난四類十四難과 같은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는 방식이다. 사류십사난은 다음과 같다. 󰂛 세계는 시간적으로 ㉮ 상주인가, ㉯ 무상인가, ㉰ 상주이면서 무상인가, ㉱ 상주도 아니고 무상도 아닌가? 󰂜 세계는 공간적으로 ㉮ 유변인가, ㉯ 무변인가, ㉰ 유변이면서 무변인가, ㉱ 유변도 아니고 무변도 아닌가? 󰂝 몸과 마음은 ㉮ 같은가, ㉯ 다른가? 󰂞 여래는 사후에 ㉮ 존재하는가, ㉯ 존재하지 않는가, ㉰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가, ㉱ 존재하지 않으면서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가?
  209. 209)『大般涅槃經』(T12, 632b).
  210. 210)『大般涅槃經』(T12, 651b).
  211. 211)『大般涅槃經』(T12, 687c).
  212. 212)『大般涅槃經』(T12, 622a).
  213. 213)『大般涅槃經』(T12, 622a).
  214. 214)『大般涅槃經』(T12, 738bc).
  215. 215)『大般涅槃經』(T12, 738c).
  216. 216)일곱 가지 원인 : 경문에 나온 무생無生·무성無性·변일체처遍一切處·변일체시遍一切時·무명무색無名無色·무인무과無因無果·삼세불섭三世不攝의 일곱 가지를 말한다.
  217. 217)『入楞伽經』(T16, 555c).
  218. 218)『楞伽經宗要』를 참고하라는 데서, 이것을 저술하기 전에 벌써 『楞伽經宗要』가 세상에 유포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219. 219)『入楞伽經』(T16, 550a).
  220. 220)『攝大乘論釋』(T31, 251b).
  221. 221)『大方廣佛華嚴經』(T9, 626c~627a).
  222. 222)『大般涅槃經』(T12, 524c).
  223. 223)『大般涅槃經』(T12, 571c19).
  224. 224)도생道生(355~434) : 동진東晋에서 유송劉宋 시대에 걸쳐 활약한 스님으로, 속성은 위魏 씨이며, 하북성河北省 거록현鋸鹿縣 출신이다. 구마라집(ⓢ Kumārajīva) 문하의 사걸四傑 가운데 한 사람이고, 여산廬山 백련사白蓮社의 18현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축법태竺法太를 따라서 출가하였으며, 열다섯 살 때 강좌에 올랐기 때문에 당시의 명사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스무 살에 구족계를 받은 뒤에 명성이 더욱 높아져 귀족과 명사들이 줄을 이어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하여 몰려들었다. 융안隆安 연간(397~401)에 여산廬山에 들어가 혜원慧遠에게 사사師事하고, 7년에 걸쳐서 경론을 연구하다가 뒤에 혜원의 제자인 혜예慧叡·혜엄慧嚴·혜관慧觀과 함께 장안長安으로 가서 구마라집의 문하생이 되었다. 의희義熙 5년(409)에 건강建康으로 돌아와 음원사音園寺에서 수행하였으며, 경평景平 1년(423)에는 불대집佛大什과 지승智勝에게 간청하여 『五分律』 34권을 역출하도록 하였다. 경을 강의할 때를 보면 경문을 해석하는 데에 머무르지 않고, 경의 진의를 캐는 데에 주력하여, 선불수보의善不受報義 및 돈오성불의頓悟成佛義 등의 새로운 학설을 제창하면서, 『二諦論』·『佛性當有論』·『法身無色論』·『佛無淨土論』·『應有緣論』 등을 저술하여 찬부양론贊否兩論을 일으켰다. 또 6권 『泥洹經』이 건강에 전래되었을 때에는, 아직 경에서는 말씀하고 있지 않은 일천제 성불설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이단사설異端邪說이라고 하여 맹렬한 비난을 받고, 호구산虎丘山에 한때 은거하다가 원가元嘉 7년(430)에 다시 여산으로 되돌아왔다. 鎌田茂雄, 『中國佛敎史辭典』, 東京堂出版, 1981, p.278.
  225. 225)본문에는 “此是白馬寺愛法師述生公義也”라고 되어 있다. 布施浩岳, 『涅槃宗之硏究』 後篇, 國書刊行會, 1973, pp.245~246. 布施浩岳 선생은, 백마사白馬寺 애 법사愛法師의 ‘애愛’를 담애曇愛라고, 생 공生公의 ‘생生’을 도생道生이라고 논증하고 있으므로, 이를 따르기로 한다.
  226. 226)『大般涅槃經』(T12, 775b).
  227. 227)승민僧旻(467~527) : 속성은 손孫 씨이며, 양梁 삼대법사三大法師의 한 사람으로, 오군吳郡(江蘇省 蘇州) 부춘富春 출신이다. 7세에 출가하여 호구虎丘의 서산사西山寺에서 수행하면서 승회僧回의 제자가 되었다. 13세에 승회를 따라서 양도楊都로 가서 백마사白馬寺에서 수행을 하는 도중, 16세 때에 스승을 잃고, 장엄사莊嚴寺로 이주하여 담경曇景에게 의탁해서 수행하였다. 승유僧柔·혜차慧次 등에게 의탁하여 경론을 모두 통달하였다. 영명永明 7년(489) 보홍사普弘寺에서 승유·혜차가 『成實論』을 강론할 때에 서로 논의하였는데, 이때 혜차를 경탄하게 하였다. 영명 10년 26세 때 처음으로 흥복사興福寺에서 『成實論』을 강의하여 크게 이름을 날렸다. 양무제梁武帝의 신임을 얻어, 칙명으로 혜륜전慧輪殿에서 『勝鬘師子吼一乘大方便方廣經』을 강의하였으며, 상정림사上定林寺에서는 석학 30인의 수장이 되어서 일체경一切經을 초출하여 80권으로 묶어 냈다. 鎌田茂雄, 『中國佛敎史辭典』, 東京堂出版, 1981, p.217.
  228. 228)안웃따라쌈약쌍보디(阿耨多羅三藐三菩提) : ⓢ anuttara-samyak-saṃbodhi.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고 음사하며,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이라고 번역한다.
  229. 229)『大般涅槃經』(T12, 769a).
  230. 230)『勝鬘師子吼一乘大方便方廣經』(T12, 222b).
  231. 231)법운法雲(467~529) : 속성은 주周 씨이며, 양梁 삼대법사三大法師의 한 사람으로, 의흥義興 양선陽羨(河北省 鎭江 宜興) 출신이다. 7세에 출가하여 건강建康 장엄사莊嚴寺에서 수행하면서, 승성僧成·현취玄趣·보량寶亮의 제자가 되고, 13세 때에 비로소 수업하기 시작하였다. 중흥사中興寺 승인僧印에게서 『妙法蓮華經』을 배웠다. 남제南齊 영명永明 연간(483~493)에 승유僧柔가 도림사道林寺에서 강의를 할 때에 수학하면서 동학인 승민僧旻과 함께 이름을 날렸다. 건무建武 4년(497) 여름 묘음사妙音寺에서 처음으로 『法華經』·『淨名經』을 개강하여 당시 아주 우수한 스님으로 이름을 날렸다. 양무제梁武帝로부터 융숭한 대우를 받아 칙명에 따라서 광택사光宅寺로 들어갔다. 鎌田茂雄, 『中國佛敎史辭典』, 東京堂出版, 1981, p.341.
  232. 232)『大般涅槃經』(T12, 648b).
  233. 233)『大般涅槃經』(T12, 828b).
  234. 234)무왕武王 소연簫衍 : 재위 502~549. 소연은 양무제梁武帝의 이름이다. 그의 자는 숙달叔達이다. 남조 문화의 최고의 번성기를 출현시켰으며, 남조의 불교도 정점에 이르도록 한 임금이다. 유학·문학을 깊이 연구하고, 불교를 돈독하게 신봉하였다. 달마 대사와의 일화는 불교사에서 대단히 유명하다. 천감 3년(504)에는 도교를 버리고 불교에 귀의하여야 한다고 선언하였으며, 동 10년에는 스스로 단주육문斷酒肉文을 공표하고 불교도로서의 계율생활에 들어갔으며, 더욱이 동 16년 3월에는 제례에 있어서 동물 등을 바치는 희생犧牲 폐지廢止의 명령을 내렸다. 鎌田茂雄, 『中國佛敎史辭典』, 東京堂出版, 1981, p.332.
  235. 235)아뢰야식阿賴耶識 : ⓢ ālaya-vijñāna. 여래장 계통에서는 아리야식阿梨耶識, 유식 계통에서는 아뢰야식이라고 음역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장식藏識이라고 한역한다. 유식설에서의 아뢰야식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구조적으로 설명하면 아래와 같다.
    識 vijñāna境(對象) viṣayāḥ根(所依處) indriya能變
    제1식眼識色境眼根意識, manas, ālaya識第三能變감각
    제2식耳識聲境耳根意識, manas, ālaya識第三能變감각
    제3식鼻識香境鼻根意識, manas, ālaya識第三能變감각
    제4식舌識味境舌根意識, manas, ālaya識第三能變감각
    제5식身識觸境身根意識, manas, ālaya識第三能變감각
    제6식意識mano-vijñāna法境dharmāḥmana-indriya(前滅의 의식·manas) ālaya識第三能變대상의식
    제7식manas識ālaya識의 見分ālaya識第二能變자아의식
    제8식ālaya識有根身 種子 器界그 자체이므로 근이없다고 말함第一能變근본식/종자식이숙식/장식
  236. 236)『大般涅槃經』(T12, 523c).
  237. 237)『瑜伽師地論』(T30, 478c).
  238. 238)신사新師 : 현장으로부터 시작하는 유식학을 신유식이라고 하며, 그 이전의 유식을 구유식이라고 한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신사新師는 현장을 개조로 하는 중국의 법상종을 가리킨다. 深浦正文, 『唯識學硏究』 上卷, p.290, 永田文昌堂, 1954.
  239. 239)아마라식阿摩羅識 : ⓢ amala-vijñāna. 무구식無垢識 또는 청정식淸淨識이라고 한역한다.
  240. 240)『大般涅槃經』(T12, 767c).
  241. 241)『究竟一乘寶性論』(T31, 835b).
  242. 242)기起 : ⓢ utpāda. 나타나는 것.
  243. 243)복伏 : ⓢ nigraha. 아직 그 종자를 잃어버리기까지에는 미치지 않은 상태로서, 종자는 아직 있어도 지혜의 힘으로 말미암아 현행이 일어나지 못한 것을 말한다.
  244. 244)『大般涅槃經』(T12, 649b).
  245. 245)『勝鬘師子吼一乘大方便方廣經』(T12, 222c).
  246. 246)『大般涅槃經』(T12, 802b).
  247. 247)십력十力 : ⓢ Daśa balāni. ① 처비처지력處非處智力-도리에 맞는가 맞지 않는가를 변별하는 지혜의 힘. ② 업이숙지력業異熟智力-하나하나의 업인業因과 그 과보果報와의 관계를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 ③ 정려해탈등지등지지력靜慮解脫等持等至智力 -사선四禪·팔해탈八解脫·삼삼매三三昧 등의 선정을 아는 지혜의 힘. ④ 근상하지력根上下智力-중생의 근기의 상하우열上下優劣을 아는 지혜의 힘. ⑤ 종종승해지력種種勝解智力-중생의 여러 가지 바람을 아는 지혜의 힘. ⑥ 종종계지력種種界智力-중생이나 제법의 본성을 아는 지혜의 힘. ⑦ 변취행지력遍趣行智力-중생이 지옥·열반 등 어느 곳으로 갈 것인가를 아는 지혜의 힘. ⑧ 숙주수념지력宿住隨念智力-자타의 과거세의 것을 생각해 내는 지혜의 힘. ⑨ 사생지력死生智力-중생이 이 세상에서 죽은 다음 저 세상에 태어나는 것을 아는 지혜의 힘. ⑩ 누진지력漏盡智力-번뇌를 끊은 경지와 그곳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을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
  248. 248)사무외四無畏 : 부처님이 가지는 두려움이 없는 지혜를 말한다. ① 정등각무외正等覺無畏-모든 법을 평등하게 깨달아서 다른 사람의 힐난詰難을 두려워하지 아니함. ② 누영진무외漏永盡無畏-번뇌를 다 끊어서 외난外難을 두려워하지 아니함. ③ 설장법무외說障法無畏-악법惡法이 보리에 장애가 됨을 말하여 다른 사람의 비난을 두려워하지 아니함. ④ 설출도무외說出道無畏-고苦의 세계를 벗어나는 도리를 말하여 어떠한 비난도 두려워하지 아니함.
  249. 249)『大般涅槃經』(T12, 818a).
  250. 250)『大般涅槃經』(T12, 828b).
  251. 251)『大般涅槃經』(T12, 774c).
  252. 252)『大般涅槃經』(T12, 775b).
  253. 253)『大般涅槃經』(T12, 784a).
  254. 254)『大般涅槃經』(T12, 828a).
  255. 255)『大般涅槃經』(T12, 828b).
  256. 256)법신法身 : ⓢ dharma-kāya. 삼신三身의 하나로서, 법신法身·법신불法身佛·자성신自性身·법성신法性身·보불寶佛 등이라고 한다. 설일체유부에서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정법, 혹은 십력十力 등의 공덕법을 말한다. 법의 집회. 대승에서는 구극究極·절대絶對의 존재를 말하고, 일체의 존재는 그것의 나타남이라고 풀이한다. 진리를 몸으로 하고 있다는 뜻이다. 진리 그 자체. 영원의 이법으로서의 부처님. 본체로서의 신체. 그것은 순수하여 차별하는 성질이 없으며, 공과 같은 것이다.
  257. 257)『究竟一乘寶性論』(T31, 839a).
  258. 258)『佛性論』(T31, 808b~809a).
  259. 259)피안彼岸 : 미혹의 생존인 이쪽을 차안此岸이라고 하고 이에 대해서 깨달음의 세계인 저쪽을 피안彼岸이라고 한다. 바라밀다波羅蜜多(ⓢ pāramitā)의 번역, 자세히 말하면 도피안到彼岸이라 번역한다. 곧 미혹의 이 세상에서 깨달음의 피안彼岸에 도달하는 것.
  260. 260)응공 : 부처님의 십호十號 가운데 하나이며, 부처님은 일체의 악을 끊어 없앤 분이기에 모든 과오가 없어 헤아릴 수 없는 복전이 청정하므로 인간이나 천상 등 모든 중생들의 공양을 받으실 분이기에 응공應供이라 한다. 이는 위대한 지도자라는 뜻이다.
  261. 261)『不增不減經』(T16, 467b).
  262. 262)『大乘起信論』(T32, 576c).
  263. 263)『入楞伽經』(T16, 550a).
  264. 264)초지初地 : 대승불교에서 보살이 닦아 행하는 52계위 가운데 41위에 해당하는 환희지歡喜地를 말한다. 이 계위에 이르면 진여의 이치를 밝게 관조하여 어떠한 역경에도 참고 견디어 밝은 지혜로써 상대를 감화시키므로 환희지라고 한다. 환희지는 가장 관후한 공덕을 갖추어 아무리 나쁜 동물이나 식물을 가리지 않고 포용하므로, 환희지에 이른 보살의 공덕을 그에 견주어 지상地上보살이라고 한다. 이 지상에 열 단계가 있는데, 그 첫째 단계의 보살이다.
  265. 265)제10지第十地 : 보살이 수행하는 52위五十二位 가운데 50위인 제10지로서 법운지法雲地를 말한다. 이 지위는 보살의 인위因位가 완성되어 만족하게 되었으므로 대법大法의 지혜와 자비의 구름으로 감로의 비를 내려서 모든 중생들을 이익이 되게 하는 수행의 계위이다.
  266. 266)묘각위妙覺位 : 대승불교에서 수행하여 붓다를 이루는 52위의 마지막 지위를 말한다. 이 지위에 이르면 스스로 깨닫고 남을 깨닫게 하여 깨달음이 원만하여 가히 사의思議할 수 없으므로 묘각妙覺이라 한다. 이는 곧 완전한 깨달음을 이룬 부처님의 지위인 안웃따라쌈약쌍보디(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말한다.
  267. 267)금강유정金剛有情 : 대승불교에서 수행하여 묘각妙覺의 지위인 붓다를 이루기 전인 제10지의 지위를 말한다. 이 지위에 이르면 수행의 인위因位는 끝났으나 아직 붓다의 지위에는 이르지 못한 상태이다.
  268. 268)변계소집遍計所執 : 이리저리 억측하여 주변계탁周遍計度한다는 뜻이며, 계탁計度이란 자기의 의식의 작용으로써 시·비와 선·악의 여러 가지 사물을 헤아리고 분별하는 차별적 집착을 일으키는 것이다. 또 이 집착은 일체 사물에 대하여 주관적 색채를 띠고 보는 것이므로 주변周遍이라 한다. 소집所執은 변계遍計에 의하여 잘못 보이는 대상, 곧 주관의 눈으로 대상을 바르게 보지 못하고, 항상 잘못 분별하는 것을 변계소집성이라고 한다.
  269. 269)두 가지 공(二空) : 아공我空(人無我)과 법공法空(法無我)을 말한다. 중생은 오온이 가화합假和合한 것을 아라 하지만, 아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다고 보는 것을 아공이라고 하며, 또는 오온의 자성도 공하다고 보는 것을 법공이라고 한다.
  270. 270)『大般涅槃經』의 인용 가운데 “若於三法修異相者。 淸淨三歸卽無依處。 所有禁戒皆不具足。”은 「長壽品」(T12, 622b)에서 인용된 것으로 보이고, “尙不能得聲聞緣覺菩提之果。 何況能得無上菩提。”는 「師子吼菩薩品」(T12, 529a)에서 인용된 것으로 보인다.
  271. 271)관觀 : ⓢ vipassana. 불교 수행의 한 방법으로서 망혹妄惑을 관찰하여 끊고 진리의 세계를 달관達觀하는 것으로 지혜를 말한다. 관에는 대승적인 수행법으로서의 오정심관五停心觀 등이 있다. 지止를 정定이라 하고, 혜慧를 관觀이라 하여 예로부터 불교의 2대 수행법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272. 272)무루無漏 : ⓢ anasrava. 누漏(ⓢ asrava)는 누설·누락의 뜻으로 모든 번뇌를 말한다. 즉 안·이·비·설·신·의의 육근에서 허물을 항상 만들어 누출한다는 뜻이다. 이런 번뇌에서 이탈하여 그것이 없어지고 증가함이 없음을 무루라 하며 사성제 가운데의 도성제에서 주장하는 것이다.
  273. 273)무생지無生智 : ① 이미 미래의 고과苦果를 받지 않음을 확실히 자각하는 지혜이다. 이미 사성제를 체득했기 때문에 다시 체득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아는 지혜로서 곧 아라한阿羅漢의 최극지最極智를 말한다. ② 일체법의 생멸이 없는 실체를 아는 지혜 또는 번뇌의 더러움을 멸진하여 거기에 이끌리지 않는 궁극의 지혜를 말한다. 생겨나고 소멸하는 변화를 여읜 영원한 지혜이다.
  274. 274)안식眼識 : 사람이 가지는 육식의 하나로서 안근을 소의로 하여 색경을 요별하는 식을 말한다. 능생能生의 안근을 따라서 안식이라고 부른다. 안식으로부터 의식에 이르기까지 근을 따라 이름을 세워서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식이라고 하며, 이들을 모두 합쳐서 육식六識이라고 통칭한다.
  275. 275)『大般涅槃經』(T12, 775a).
  276. 276)일생一生 : 생을 한 번만 지내면서 보처존補處尊이 되어야 부처님의 지위에 오를 자격이 됨을 말씀하신다. 예를 들면 보명보살과 미륵보살과 같은 분을 일생보처一生補處라고 한다.
  277. 277)『妙法蓮華經優波提舍』(T26, 10a).
  278. 278)가타 : ⓢ gāthā. 게偈 또는 게타偈陀라고 음사하며, 게송偈頌, 송頌, 시詩라고 번역하고, 시구의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279. 279)여래장如來藏 : ⓢ tathāgatagarbha. 미혹한 세계에 있는 진여를 말한다. 미혹한 세계의 사물은 모두 진여에 섭수되었으므로 여래장이라고 한다. 진여가 바뀌어 미혹한 세계의 사물이 될 때에는 그 본성인 여래의 덕이 번뇌 망상에 덮이게 된 점에서 여래장이라고 한다. 또 미혹한 세계의 진여는 그 덕이 숨겨져 있을지라도 아주 없어진 것이 아니고 중생이 여래의 성덕性德을 함장含藏하고 있으므로 여래장이라고 한다.
  280. 280)『究竟一乘寶性論』(T31, 825a).
  281. 281)『大般涅槃經』(T12, 775a).
  282. 282)『瑜伽師地論』(T30, 574bc).
  283. 283)삼지三智 : 여기서 말하는 삼지는 성소작지成所作智·묘관찰지妙觀察智·평등성지平等性智의 세 가지 지혜를 가리킨다. ① 성소작지成所作智-네 지혜의 하나이며, 불과에 이르러 유루의 전5식과 그 상응심相應心을 전사轉捨하고 얻은 지혜이다. ② 묘관찰지妙觀察智-네 지혜의 하나이며, 제6식을 바꾸어 얻은 지혜이다. 묘妙는 불가사의한 힘의 자재를 말하며, 모든 법을 관찰하여 정통하고, 중생의 근기를 알아서 불가사의 자재한 힘을 나타내며, 공교롭게 법을 말씀하여 여러 가지 의심을 끊게 하는 지혜이다. ③ 평등성지平等性智-네 지혜의 하나이며, 제7식을 전사하여 얻은 무루의 지혜이다. 일체 모든 법과 자기나 다른 유정들을 반연하여 평등·일여한 이성理性을 관조하고 자타自他의 차별심을 여의어 대자대비심을 일으키며, 보살을 위하여 여러 가지로 교화하여 이익이 되게 하는 지혜이다.
  284. 284)대원경지大圓鏡智 : 성소작지成所作智·묘관찰지妙觀察智·평등성지平等性智·대원경지의 네 지혜의 하나이며, 유루의 제8식을 뒤집어서 얻은 무루의 지혜이다. 이것은 거울에 한 점의 티끌도 없이 삼라만상이 그대로 비추어 모자람이 없는 것과 같이, 원만하고 분명한 지혜이므로 대원경지라고 한다. 불과에서 얻는 지혜를 가리킨다.
  285. 285)앎을 장애함(智障) : 두 장애 가운데의 하나로 소지장所知障·지애智碍라고도 한다. 탐·진·치 등의 번뇌가 알아야 할 진상眞相을 그대로 알지 못하게 하므로, 이들 번뇌를 소지장所知障이라고 하며, 진지眞智의 발현發顯을 장애하는 점에서 지장智障이라고 한다.
  286. 286)『二障義』를 참고하도록 서술한 것을 보면, 이 글을 저술하기 이전에 벌써 『二障義』를 세상에 유포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87. 287)열 가지 바라밀 : ⓢ daśa pāramitā. 보시(ⓢ dāna), 지계(ⓢ śīla), 인욕(ⓢ kṣānti), 정진(ⓢ vīrya), 선정(ⓢ dhyāna), 지혜(ⓢ prajñā), 방편(ⓢ upāya), 원願(ⓢ praṇidhāna), 역力(ⓢ bala), 지智(ⓢ jñāna)의 바라밀을 가리키며, 『華嚴經』에서의 수행의 덕목이다.
  288. 288)십지(ⓢ daśa-bhūmi)와 십바라밀(ⓢ daśa-pāramitā)을 서로 짝지으면 아래와 같다. ① 환희지歡喜地(ⓢ pramuditā bhūmi)-단나檀那·보시布施(ⓢ dāna-pāramitā), ② 이구지離垢地(ⓢ vimalā bhūmi)-시라尸羅·지계持戒(ⓢ śīla-pāramitā), ③ 발광지發光地(ⓢ prabhākarī bhūmi)-찬제羼提·인욕忍辱(ⓢ kṣanti-pāramitā), ④ 염혜지焰慧地(ⓢ arcismatī bhūmi)-비리야毘梨耶·정진精進(ⓢ vīrya-pāramitā), ⑤ 난승지難勝地(ⓢ sudurjayā bhūmi)-선나禪那·선정禪定(ⓢ dhyāna-pāramitā), ⑥ 현전지現前地(ⓢ abhimukhī bhūmi)-반야般若·지혜智慧(ⓢ prajñā-pāramitā), ⑦ 원행지遠行地(ⓢ dūraṅgamā bhūmi)-방편方便(ⓢ upāya-pāramitā), ⑧ 부동지不動地(ⓢ acalā bhūmi)-원願·서원誓願(ⓢ praṇidhāna-pāramitā), ⑨ 선혜지善慧地(ⓢ sādhumatī bhūmi)-역力(ⓢ bala-pāramitā), ⑩ 법운지法雲地(ⓢ dharmameghā bhūmi)-지智(ⓢ jñāna-pāramitā).
  289. 289)진제眞諦 : ⓢ paramārtha-satya. 승의제, 제일의제, 최고의 진리 또는 궁극적 진리.
  290. 290)속제俗諦 : ⓢ saṃvṛti-satya, loka-saṃvṛti-satya. 세제, 세속제, 세간에서의 진리 또는 세속적인 진리.
  291. 291)십력十力 : ⓢ Daśa balāni. 앞의 주석 223 참조.
  292. 292)『大般涅槃經』(T12, 818a).
  293. 293)법신法身 부처님 : ⓢ dharmakāya-buddha. 법불法佛, 자성신自性身, 법성신法性身. 우주의 보편적인 진리를 신체로 하고 있는 부처님. 우주에 편만하는 절대적인 진리를 인격화하고, 진리의 체현자로서 이상화한 불신을 법신이라고 한다.
  294. 294)뒤의 표에서도 나타나듯, 여기서 설명하는 아我·낙樂·소견少見·선불선善不善의 네 가지는 다섯 단계 중 하나의 단계에만 속하고 있다. 즉 아·낙은 다섯째 단계에만 있고, 소견은 넷째 단계에만 있고, 선불선은 첫째 단계에만 있다. 본문은 이것의 이유를 설명한 것이다.
  295. 295)연구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표를 만들면 아래와 같다.
    첫째 단계둘째 단계셋째 단계넷째 단계다섯째 단계
    상常
    아我
    낙樂
    정淨
    진眞
    실實
    선善
    소견少見
    가견可見
    선불선善不善
  296. 296)『大般涅槃經』(T12, 818a).
  297. 297)보신報身 : ⓢ sambhoga-kāya. 수용신, 등류신. 보살로서의 바라밀의 수행과 서원이 완성되어, 그 과보로서 얻게 된 완전하고도 원만한 이상적인 부처님이다. 삼신불의 인위에서 지은 한량없는 원력의 과보로 얻게 된 만덕이 원만한 불신으로서, 깨달은 법열을 자기 혼자서만 누리고 다른 이와 함께 나누려고 하지 않는 자수용보신과, 다른 이와 같이 이 법열을 받을 수 있는 몸을 나타내어 중생을 제도하려고 적극적으로 자비를 실천하는 타수용보신으로 나누어진다.
  298. 298)『瓔珞經』에서 말씀하신 여섯 종성 가운데에서, 여섯 번째의 묘각성妙覺性은 과성果性이므로 이것을 빼고, 인위因位에 속하는 종성을 따로 분별하여 다섯 종성이라고 한다. ① 습종성習種性 : 십주十住의 계위로 공관을 연구하고 닦아 견사見思의 번뇌를 부순다. ② 성종성性種性 : 십행十行의 계위로 공에 주住하지 않으며 능히 중생을 교화해 일체 법성을 분별한다. ③ 도종성道種性 : 십회향十廻向의 계위로 중도의 묘관을 닦음으로 인해 일체의 불법에 통달한다. ④ 성종성聖種性 : 십지十地로 이 앞의 주住, 행行, 회향廻向을 모두 현賢이라 하며, 이 십지의 보살이 중도의 묘관에 의해 무명의 일분一分을 논파하고 성위聖位를 증입하므로 성종성聖種性이라 함. ⑤ 등각성等覺性 : 이 계위의 보살이 뒤의 묘각을 바라보면 오히려 일등一等이 있으나 앞의 모든 위치보다 수승하므로 등각성等覺性이라 한다.
  299. 299)종성이 결정된 이승(決定二乘) : 성문과 연각의 이승 가운데, 오직 아라한과를 증득할 무루종자를 지닌 자를 결정성문決定聲聞이라고 하고, 오직 벽지불과를 증득할 무루종자를 지닌 자를 연각정성緣覺定性이라고 한다. 이들은 비록 선근을 지니고 있지만, 부처님이 될 종자는 지니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300. 300)깨달음(菩提) : ⓢ bodhi. 보리菩提라고 음사한다.
  301. 301)치답置答 : 사기답四記答 가운데의 하나이다. 독화살의 비유에서 부처님께서 사류십난四類十難 또는 사류십사난四類十四難과 같은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은 방식이다. 앞의 주석 184 참조.
  302. 302)『大般涅槃經』(T12, 818b).
  303. 303)『大般涅槃經』(T12, 819b).
  304. 304)차전遮詮 : 차전遮詮에서의 전詮은 표현하여 드러낸다는 뜻이며, 차전은 사물을 간접적으로 드러내어 표현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면 소금은 싱겁지 않다, 물은 마르지 않는다, 마음이 기쁘지 않다 등이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방법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불생불멸不生不滅, 부증불감不增不減, 불구부정不垢不淨 등도 그러한 것이다.
  305. 305)표전表詮 : 표전이란 사물에 대하여 직접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소금은 짜다, 물은 적신다, 마음이 슬프다 등이 그러한 것이다.
  306. 306)과위果位 : 인행因行이 성취되어 증득하는 불과의 자리, 깨달은 지위.
  307. 307)인위因位 : 부처님이 되려고 수행하는 기간.
  308. 308)후신 보살後身菩薩 : 이 생애에서 성불하기 때문에 보살로서의 마지막 몸이라는 의미이다.
  309. 309)『大般涅槃經』(T12, 818a).
  310. 310)『瑜伽師地論』(T30, 585c).
  311. 311)생인生因 : 과보를 낳게 하는 원인으로서의 종자. 마치 초목의 씨앗을 초목의 인因이라 하는 것과 같은 말이다.
  312. 312)『大般涅槃經』(T12, 818b).
  313. 313)화신 부처님 : ⓢ nirmāṇa-kāya-buddha. 응신, 응화신. 교화의 대상에 맞춰서 임시로 어느 자태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불신이라는 뜻이다. 이 부처님은 보신처럼 시방 삼세에 걸쳐서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완전하고도 원만한 이상적인 부처님이 아니라, 특정한 시대나 특정한 지역에서 구제해야 할 대상에 맞춰서 모습을 드러내는 부처님을 가리킨다.
  314. 314)『大般涅槃經』(T12, 818b).
  315. 315)분별답 : 응분별기문應分別記問, 분별기分別記, 분별답分別答, 해의답解義答. 분별답이란 사기답四記答 가운데의 하나이다. 그에 관한 내용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죽은 이는 모두 윤회하는가?”라는 물음에, “번뇌가 있는 이는 윤회하며, 없는 이는 재생하지 않는다.”라고 조건에 따라서 대답하는 경우이다.
  316. 316)『大般涅槃經』(T12, 818b).
  317. 317)『大般涅槃經』(T12, 828a).
  318. 318)육바라밀은 다음과 같다. ① 보시바라밀이며, 보시에는 재시財施와 법시法施와 무외시無畏施의 세 가지 대행大行이 있다. ② 지계바라밀이며, 소승의 계율을 비롯하여 대승의 계율과 출가자의 계율과 재가자의 계율을 분수에 맞게 행하는 모든 계를 가리킨다. ③ 인욕바라밀이며, 인욕이라 함은 매욕罵辱, 구타毆打, 한서寒暑, 기갈飢渴 등 모든 역경은 말할 것도 없고 부귀와 호사 등 온갖 순경順境에도 자신의 수행 목표에 흔들리지 않고 꾸준히 실행하는 대원大願·대행大行을 가리킨다. ④ 정진바라밀이며, 어떠한 환경이나 조건에도 항상 자기의 몸과 마음을 정려精勵하여 앞과 뒤의 다섯 바라밀행을 진수進修하는 것을 가리킨다. ⑤ 선정바라밀이며, 수행하는 사람은 항상 번뇌를 비우고 진리를 사유하여 산란한 마음을 쉬고 혼침昏沈하는 마음을 일깨워 성성적적惺惺寂寂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⑥ 지혜바라밀이며, 모든 법성을 관통하는 것을 지智라 하고, 미혹을 끊어 이치를 증득한 것을 혜慧라 한다.
  319. 319)정인正因 : 정인이란 사물이나 마음의 모든 법을 내는 데 주체가 되는 인자因子를 말한다. 불교에서는 극락세계의 왕생이나 또는 성불하는 결과를 얻는 데 정당한 인자가 되는 것을 말한다. 이 능생의 힘을 정인이라고 한다.
  320. 320)도와주는 조건(緣因) : 사물이나 마음의 모든 법을 내는 정인을 도와서 그를 생성하게 하는 힘을 연인緣因이라 한다.
  321. 321)『大般涅槃經』(T12, 778a).
  322. 322)『大般涅槃經』(T12, 828b).
  323. 323)『大般涅槃經』(T12, 819a).
  324. 324)『究竟一乘寶性論』(T31, 825a).
  325. 325)『大般涅槃經』(T12, 765c).
  326. 326)『大般涅槃經』(T12, 772b).
  327. 327)『大般涅槃經』(T12, 768c).
  328. 328)『大般涅槃經』(T12, 769b).
  329. 329)『大般涅槃經』(T12, 772b).
  330. 330)『大乘起信論』(T32, 577c).
  331. 331)『大般涅槃經』(T12, 635c).
  332. 332)『大般涅槃經』(T12, 648b).
  333. 333)『大般涅槃經』(T12, 767c).
  334. 334)『大般涅槃經』(T12, 768c).
  335. 335)『大般涅槃經』(T12, 769a).
  336. 336)여래장如來藏 : 모든 중생의 번뇌 가운데에 감추어져 있는 본래의 밝고 맑은 여래법신을 가리킨다. 여래장은 번뇌 가운데에 있어도 번뇌에 더러워짐이 없으며, 본래부터 절대로 청정하여 영원히 변함이 없는 깨달음의 본성이다. 더러운 것과 맑고 깨끗한 것(染淨) 등 모든 현상이 여래장에서 연기했다고 논설하는 것을 여래장 연기라 한다.
  337. 337)『大般涅槃經』(T12, 802c).
  338. 338)『大般涅槃經』(T12, 802c~803a).
  339. 339)『大般涅槃經』(T12, 818ab).
  340. 340)『大般涅槃經』(T12, 828a).
  341. 341)『大般涅槃經』(T12, 770b).
  342. 342)『大般涅槃經』(T12, 821b).
  343. 343)유락乳酪 : 유목민들은 우유牛乳 또는 양유羊乳 등을 발효·가공하여 여러 가지 유제품을 만들어 생활하였다. 이것을 다섯 단계로 가공한 것을 불교경전에서는 오미五味라고 하는데, 제호醍醐를 최고의 제품으로 치며, 이를 수행의 완성 단계로 비유하고 있다. 오미는 다음과 같다. 제1미-우유牛乳(ⓢ Kṣīra, milk). 제2미-낙酪(ⓢ Dadhi, Yogurt, Yoghurt, 凝乳). 제3미-생소生酥(ⓢNavanīta, fresh butter), 제4미-숙소熟酥(ⓢ sarpis, ghee). 제5미-제호醍醐(ⓢ maṇḑa).
  344. 344)『大般涅槃經』(T12, 769a).
  345. 345)『大般涅槃經』(T12, 818a).
  346. 346)『大般涅槃經』(T12, 737a).
  347. 347)『大般涅槃經』(T12, 768b).
  348. 348)『가퇴론迦退論』 : 현존하는 『涅槃經宗要』에는 『迦退論』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大正新脩大藏經』에는 이와 같은 이름을 가진 경전이 없다. 인용한 경전의 내용을 근거로 하여 추론하면, 가퇴迦退는 ‘가전연자迦旃延子(ⓢ Kātyāyanīputra)’를 잘못 표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전연자는 기원전 2세기 무렵의 설일체유부에 소속하는 인도의 논사이다. 현장의 『西域記』에 의하면 찌나북티(ⓢ Cīnabhukti, 至那僕底)의 따마싸와나쌍가라마(ⓢ Tamasāvana-saṃghaārāma)에서 불멸 300년경에 『阿毘曇八犍度論』을 저술하였고, 이 논서에 의하여 설일체유부의 교리가 독립하였다고 한다. 초기의 유부에는 이밖에도 『集異門足論』, 『法蘊足論』, 『施設足論』, 『識身足論』, 『界身足論』, 『品類足論』의 여섯 가지 논서가 있다. 이것들을 육족론六足論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하여, 『阿毘達磨發智論』을 신론身論이라고 부른다. 내용은 잡雜·결結·지智·업業·대종大種·근根·정定·견見의 8온 44납식(8장 44절)으로 나뉘어 있으며, 교법의 연구를 새로운 방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초기불교보다 일보 진전된 새로운 교학을 개척한 것으로 유부교학의 기초를 형성한 것이라고 본다. 『阿毘曇八犍度論』은 『阿毘達磨發智論』의 이역본이며, 후자보다 먼저 한역되었다. 『阿毘曇八犍度論』이 중국에서 번역된 것은 부진건원符秦建元 19년(383)으로, 진秦 계빈삼장罽賓三藏 승가제바僧伽提婆(東晋孝武帝代, 373~396)가 축불념竺佛念(東晋, 永和~義熙, 345~419)과 함께 역경하였다. 원효는 동아시아의 대승불교권에서 활동하였기 때문에 아비달마에 관한 논서의 형성 시기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여 그렇게 표기한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349. 349)십이부경十二部經 : ① 계경契經-ⓢ sūtta. 석존의 가르침을 간결하게 정리한 산문. ② 응송應頌 또는 중송重頌-ⓢ geya. 계경의 내용을 시로 반복하는 형식. ③ 기설記說 또는 수기授記-ⓢ vyākaraṇa. 간결한 문답 형식. ④ 게송偈頌-ⓢ gāthā. 시구詩句 형식. ⑤ 자설自說 또는 감흥어感興語-ⓢ udāna. 석존이 감응적으로 설한 시. ⑥ 여시어如是語-ⓢ itivṛttaka. 게야의 특수한 형식. ⑦ 본생本生-ⓢ jātaka. 석가모니의 전생 이야기. ⑧ 비타라毘陀羅-ⓢ vaipulya. 방광方廣. 중층적인 교리문답. ⑨ 미증유법未曾有法-(ⓢ adbhūta-dhamma)희유한 공덕·기적에 관한 교설. ⑩ 인연因緣-ⓢ nidāna. 계율 조문의 성립 사정에 관한 이야기. ⑪ 비유譬喩-ⓢ avadāna. 거룩한 부처님 제자의 과거세 이야기. ⑫ 논의論議-ⓢ upadeśa. 교리에 대한 설명이나 해석.
  350. 350)『阿毘曇八犍度論』(T26, 853c).
  351. 351)『雜阿毘曇心論』(T28, 872a).
  352. 352)여기서 “婆沙第四十卷”을 200권 『阿毘達磨大毘婆沙論』으로 보지 않고, 60권 『阿毘曇毘婆沙論(ⓢ Abhidharma-vibhāṣā-śāstra)』으로 볼 수 있는 근거를 몇 가지 제시하여 연구자를 도우려고 한다. 앞서 나온 『阿毘曇八犍度論』과 『阿毘達磨發智論』의 경우를 먼저 살펴보자. 이 두 논서는 이름은 서로 달라도, 모두 가전연자迦旃延子(ⓢ Kātyāyanīputra)가 저술한 것으로 그 내용은 동일하다. 가전연자가 저술한 동일한 논서를 번역자의 의도에 따라서 이와 같이 다르게 불렀다. 말하자면 부진符秦 계빈罽賓 승가제바僧伽提婆 삼장이 축불념竺佛念과 함께 번역한 것은 『阿毘曇八犍度論』이라 부르고, 현장 삼장이 번역한 것은 『阿毘達磨發智論』이라고 불렀다. 저자인 Kātyāyanīputra를 한자로 음사하는 것도 서로 다른데, 전자는 가전연자迦旃延子로, 후자는 가다니연자迦多衍尼子로 표기하고 있다. 현존하는 자료를 근거로 하여 보면, 『阿毘曇八犍度論』을 중심으로 하여 해석한 것이 『阿毘達磨發智論』 60권이며, 『阿毘達磨發智論』을 중심으로 해석한 것이 『阿毘達磨大毘婆沙論』 200권이라고 인식된다. 이에 따라 양자의 차이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본론의 저자를 한자로 표기하는 태도를 보면 전자는 가전연자迦旃延子로 되어 있으며, 후자는 가다니연자迦多衍尼子로 되어 있다. 둘째, 본론을 주석하는 태도를 보면, 전자는 “迦旃延子造 五百羅漢釋”이라고 밝힘으로써, 『阿毘曇八犍度論』을 중심으로 한 해석이라는 것을 말하여 주고 있으나, 후자는 본론의 저자의 이름을 기술하지 않고, “五百大阿羅漢等造”라고만 기술함으로써, 『阿毘達磨大毘婆沙論』이 『阿毘達磨發智論』을 중심으로 한 해석이라기보다는 “五百大阿羅漢等造”라고 하여 오백대아라한五百大阿羅漢들의 순수한 저술로도 볼 수 있도록 애매하게 표현하고 있다. 셋째, 번역상의 용어를 중심으로 하여 보면, ‘迦旃延子造 符秦罽賓三藏僧伽提婆共竺佛念譯 『阿毘曇八犍度論』’은 ‘迦旃延子造 五百羅漢釋 北天竺沙門浮陀跋摩共道泰等譯 『阿毘曇毘婆沙論』’과 일치하며, ‘尊者迦多衍尼子造 三藏法師玄奘譯 『阿毘達磨發智論』’은 ‘五百大阿羅漢等造 三藏法師玄奘譯 『阿毘達磨大毘婆沙論』’과 일치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전자는 한결같이 명신名身·구신句身·미신味身이라고 표기하며, 후자는 명신名身·구신句身·문신文身이라고 표기한다. 넷째, 전자는 붓다데와(ⓢ Buddhadeva)를 각천覺天이라고 하지 않고 한결같이 본명인 불타제바佛陀提婆라고 음사하고 있으며, 와쑤미뜨라(ⓢ Vasumitra)를 세우世友라고 하지 않고 한결같이 본명인 화수밀和須蜜이라고만 음사하고 있다. 그러나 후자는 붓다데와(ⓢ Buddhadeva)를 주로 각천覺天이라고 번역하여 쓰고, 200권 속에서 꼭 두 번 불타제바佛陀提婆라고 음사하고 있을 뿐이며, 와쑤미뜨라(ⓢ Vasumitra)는 오로지 세우世友라고만 번역하여 기술하고 있다. 다섯째, ‘『阿毘曇毘婆沙論』 第四十卷 使揵度十門品之四’에는 불타제바佛陀提婆와 화수밀和須蜜이 모두 등장하지만, ‘『阿毘達磨大毘婆沙論』 卷第四十 雜蘊第一中無義納息第七之二’에는 불타제바佛陀提婆 또는 각천覺天과 화수밀和須蜜 또는 세우世友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353. 353)이는 세친世親(ⓢ Vasubandhu, 婆藪盤豆)이 짓고, 진제眞諦(ⓢ Paramārtha) 삼장이 번역하였다.
  354. 354)『阿毘達磨俱舍釋論』(T29, 166b).
  355. 355)『阿毘達磨俱舍釋論』(T29, 166c).
  356. 356)오분법신五分法身 : 계戒·정定·혜慧·해탈解脫·해탈지견解脫知見이라고 하는 다섯 가지 덕성을 신체로 삼아서 표현하는 최고의 깨달음. 최고의 깨달음에 오른 부처님과 성자(무학위)가 갖추고 있는 다섯 가지 공덕.
  357. 357)십일체입十一切入 : 십일체처十一切處, 십변입十遍入, 십변처十遍處(ⓢ daśa-kṛtsna-āyatanāni)라고도 한다. 삼계의 번뇌를 벗어나야 한다고 하는 한 가지 선관禪觀이다. 지地·수水·화火·풍風·청靑·황黃·적赤·백白·공空·식識의 열 가지를 그냥 그대로 무변무이無邊無二의 관법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욕계·색계·무색계의 삼계가 이들 열 가지 가운데의 어느 하나로 두루 가득 차 있다고 관조하기를 차례차례로 실천한다.
  358. 358)『阿毘達磨俱舍釋論』(T29, 166c).
  359. 359)이 논은 하리발마訶梨跋摩(ⓢ Harivarman)가 짓고, 진제 삼장이 번역하였다.
  360. 360)『成實論』(T32, 289c).
  361. 361)계경契經 : 여기서는 sūtta를 계경이라고 번역한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간결하게 정리한 산문.
  362. 362)『瑜伽師地論』(T30, 750a).
  363. 363)류규劉虯(438~495) : 남제南齊의 은사로서 자는 영여靈予 또는 덕명德明이다. 30세 전후에 사관으로 생활을 하다가 뒤에 관직을 그만두고 소박한 생활을 보내면서 불교를 배운다. 도생道生의 선불수보善不受報·돈오성불론頓悟成佛論을 조술하였으며, 당시 그를 굴복시킬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의 저술인 『無量義經序』에 의하면 영명3년(485) 9월 18일 무당산에서 혜표慧表로부터 이 경의 전수를 받았다고 하는데, 이 기술은 의심스러운 것이 많다. 『無量義經』은 중국에서 성립된 경전으로 알려지고 있고, 『法華經』에 의거하여 돈오론을 선양한 것이기 때문에, 류규 스스로가 이 『無量義經』을 저술한 것으로 보는 학설도 있다. 『注法華經』 7권을 저술하였다고 하나 현재는 전하여지고 있지 않다.
  364. 364)원효는 이 글을 정영사 혜원(523~592)의 『大乘義章』에서 인용하여 자료로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혜원의 『大乘義章』으로부터 인용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원효가 서술하고 있는 글의 내용을 자세하게 검토하여 보면 바로 혜원의 글에서 류규의 학설을 빌려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如▣▣▣▣說無出頓漸’은 ‘如來一化所說無出頓漸’으로 보는 것이 문장의 취지를 잘 살릴 수 있다고 본다.
  365. 365)돈교 : ① 오교의 하나. 화엄종에서 『維摩詰經』과 같이 문자나 언어를 여의고 수행의 차례를 말하지 않고, 말이 끊어진 진여를 가리킨 교법. ② 화의化儀 사교의 하나. 천태종에서 소승·대승의 차례에 따르지 않고, 바로 처음부터 대승 일불승一佛乘의 법을 말한 것. 석존이 성도한 뒤에 곧 설하신 『華嚴經』의 설법.
  366. 366)점교 : ① 화엄종에서 오교 가운데 시교始敎와 종교終敎를 말한다. 이것은 문자로 이치를 나타내고 수행하는 계급을 세워, 점차로 증과함을 말한 법문이므로 점교라고 한다. ② 화의化儀 사교의 하나. 천태종의 말. 소승에서 대승으로 정칙적인 점차의 순서를 밟아서 순서를 밟아 설한 교.
  367. 367)오시五時 : ① 인천교人天敎, ② 유상교有相敎, ③ 무상교無相敎, ④ 동귀교同歸敎, ⑤ 상주교常住敎.
  368. 368)십선十善 : 십선도十善道 또는 십선계十善戒라고도 함. 몸(動作)·입(言語)·뜻(意念)으로 십악을 범하지 않는 계제制戒. 불살생不殺生·불투도不偸盜·불사음不邪淫·불망어不妄語·불양설不兩舌·불악구不惡口·불기어不綺語·불탐욕不貪慾·불진에不瞋恚·불사견不邪見의 열 가지.
  369. 369)인천人天 : 오교의 하나. 부처님이 성도하신 처음에 제위提胃(ⓢ Trapusa, 帝梨富娑) 장자를 위하여 오계와 중품中品의 십선을 행하면 인간에 나고, 상품의 십선을 행하면 천상에 난다고 가르친 교법.
  370. 370)삼승三乘 : 성문·연각·보살에 대한 세 가지 교법. 승은 물건을 실어 옮기는 것을 목표로 하므로, 부처님의 교법도, 중생을 실어 열반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 것에 비유함.
  371. 371)『반야경』 : 불교의 소극적 제법실상론을 말한 경의 총칭. 지혜로 관조하는 대상인 만유는 우리가 실물처럼 보는 것과 같은 존재가 아니고, 다 공하여 모양이 없는 것임을 말씀하신다. 이 경은 여러 종류가 있으나, 이것을 집성한 것은 당나라 현장이 번역한 『大般若經』 16회 600권으로, 여러 가지 『般若經』은 모두 이 경의 일부에 해당한다.
  372. 372)『사익범천소문경』 : 구마라집이 번역하였으며, 망명網明과 사익범천 등을 위하여 만유제법의 공적한 이유를 말씀한 경전이다.
  373. 373)『묘법연화경』 : 대승 경전을 대표하는 것 가운데의 하나이며, 7권 28품으로 되어 있고, 일불승一佛乘·회삼귀일會三歸一·제법실상諸法實相을 말한 경전이다. 조선 세조 때 간경도감에서 번역 출판하였다. 천태 지자는 『妙法蓮華經』을 불교의 중심으로 하여 천태사상을 집대성하였다. 천태종·법상종의 소의 경전.
  374. 374)법신法身 : ⓢ Dharma-kāya. 삼신불의 하나. 법은 진여, 법계의 이理와 일치한 부처님의 진신. 빛깔도 형상도 없는 본체신. 현실로 인간에 출현한 부처님 이상으로 영원한 불의 본체, 부처님이 말씀하신 교법, 혹은 부처님이 얻은 계戒·정定·혜慧·해탈解脫·해탈지견解脫知見을 법신이라 하기도 하나 일반으로 대승에서 본체론적으로 우주의 본체인 진여실상 등의 법法, 또는 그와 일치한 불신을 법신이라고 한다.
  375. 375)『大乘義章』(T44, 465a).
  376. 376)『大乘義章』(T44, 466c~467a), “顯法之德門。 別無量。 故使諸經宗趣各異。 如彼發菩提心經等。 發心爲宗。 溫室經等。 以施爲宗。 淸淨毘尼優婆塞戒。 如是等經。 以戒爲宗。 華嚴法華無量義等。 三昧爲宗。 般若經等。 以慧爲宗。 維摩經等。 解脫爲宗。 金光明等。 法身爲宗。 方等如門。 如是經等。 陀羅尼爲宗。 勝鬘師子吼一乘大方便方廣經等。 一乘爲宗。 涅槃經等。 以佛圓寂妙果爲宗。 如是等經。 所明各異。 然其所說。 皆是大乘緣起行德究竟了義。” 혜원의 『大乘義章』으로부터 인용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원효가 서술하고 있는 글의 내용을 자세하게 검토하여 보면 바로 혜원의 글을 빌려서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77. 377)『摩訶般若波羅蜜經』(T8, 229b), “說是般若波羅蜜品時。 三百比丘從座起。 以所著衣上佛。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그러나 원효가 서술하고 있는 문장과 대조하여 보면, 실제로는 『摩訶般若波羅蜜經』으로부터 바로 인용한 것이 아니라, 아래의 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혜원의 『大乘義章』으로부터 글을 빌려서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大乘義章』(T44, 465c), “又大品經往生品中。 諸比丘等。 聞說般若讚歎檀度。 遂脫三衣。 以用布施。”
  378. 378)『大智度論』(T25, 353c~354a). 그러나 원효가 서술하고 있는 문장과 대조하여 보면, 실제로는 『大智度論』으로부터 바로 인용한 것이 아니라, 아래의 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혜원의 『大乘義章』으로부터 글을 빌려서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大乘義章』(T44, 465c), “龍樹釋言。 佛制三衣。 不畜得罪。 何故不重尸波羅蜜。 犯戒行施。 以此在於十二年前佛未制戒。 是故不犯以是證文。 非局在於三十年中。”
  379. 379)『妙法蓮華經』(T9, 9a), “乃至擧一手。 或復小低頭。 以此供養像。 漸見無量佛。”
  380. 380)『大智度論』(T25, 713b25). 그러나 원효가 서술하고 있는 문장과 대조하여 보면, 실제로는 『大智度論』으로부터 바로 인용한 것이 아니라, 아래의 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혜원의 『大乘義章』으로부터 글을 빌려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大乘義章』(T44, 466a), “龍樹菩薩釋大品經云。 須菩提聞說法華。 擧手低頭。 皆成佛道。 是故今問退不退義。”
  381. 381)그러나 원효가 서술하고 있는 문장과 대조하여 보면, 실제로는 혜원의 『大乘義章』으로부터 글을 빌려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大乘義章』(T44, 466ab), “龍樹菩薩釋大品經云。 須菩提聞說法華。 擧手低頭。 皆成佛道。 是故今問退不退義。 以此文證。 前後不定。 若言法華破三歸一深於大品。 此如前破。 若言法華未說佛性淺於涅槃。 是義不然。”
  382. 382)『摩訶般若波羅蜜經』(T8, 334c), “是深般若波羅蜜中如是說。 色卽是薩婆若。 薩婆若卽是色。 乃至一切種智卽是薩婆若。 薩婆若卽是一切種智。 色如相薩婆若如相。 是一如無二無別。 乃至一切種智如相薩婆若如相。 一如無二無別。” 그러나 원효가 서술하고 있는 문장과 대조하여 보면, 실제로는 혜원의 『大乘義章』으로부터 글을 빌려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大乘義章』(T44, 466a), “大品經中舍利弗問。 若都不退。 空復不異。 何故得有三乘差別。 不唯一乘。 須菩提答。 無二無三。 若聞不怖。 能得菩提。”
  383. 383)『大般涅槃經』(T12, 767c), “佛性者名第一義空。 第一義空名爲智慧。” 그러나 원효가 서술하고 있는 문장과 대조하여 보면, 실제로는 혜원의 『大乘義章』으로부터 글을 빌려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大乘義章』(T44, 466a), “經說佛性。 亦名般若波羅蜜。 亦名第一義空。”
  384. 384)『摩訶般若波羅蜜經』(T8, 219c), “復次舍利弗。 菩薩摩訶薩欲知諸法如法性實際。”
  385. 385)『大智度論』(T25, 298b), “法性者法名涅槃。 不可壞不可戲論。 法性名爲本分種。 如黃石中有金性白石中有銀性。 如是一切世間法中皆有涅槃性。 諸佛賢聖以智慧方便持戒禪定。 敎化引導令得是涅槃法性。 利根者卽知是諸法皆是法性。 譬如神通人能變瓦石皆使爲金。 鈍根者方便分別求之乃得法性。 譬如大冶鼓石然後得金。 是法性。 譬如神通人能變瓦石皆使爲金。 鈍根者方便分別求之乃得法性。 如大冶鼓石然後得金。”
  386. 386)『妙法蓮華經優波提舍』(T26, 9bc), “我本行菩薩道今猶未滿者。 以本願故。 衆生界未盡願非究竟故。 言未滿非謂菩提不滿足也。 所成壽命復倍上數者。 此文示現如來命常善巧方便顯多數故。 過上數量不可數知。” 한편 이에 해당하는 『妙法蓮華經』(T9, 42c)에서의 본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我本行菩薩道所成壽命。 今猶未盡。 復倍上數。”
  387. 387)『妙法蓮華經優波提舍』(T26, 9c), “我淨土不毁而衆見燒盡者。 報佛如來眞實淨土。 第一義諦之所攝故。” 한편 이에 해당하는 『妙法蓮華經』(T9, 43c)에서의 본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我淨土不毁。 而衆見燒盡。 憂怖諸苦惱。 如是悉充滿。”
  388. 388)사종四宗 :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인명因明의 종법宗法에 4종이 있음을 사종이라 한다. 둘째 제齊의 대행사大行寺 담은曇隱이 그의 교판에서 4종을 세운 것이다. ① 보파다부菩婆多部·설산부雪山部 등은 인연종因緣宗이 되고(立性宗), ② 경량부經量部·성실론成實論 등은 가명종假名宗(破性宗)이 되고, ③ 『般若經』은 부진종不眞宗(破相宗)이 되며, ④ 『涅槃經』·『華嚴經』은 진종眞宗(顯實宗)이 된다.
  389. 389)오시교五時敎 : 부처님의 일대 교설을 시간의 차례에 따라서 다섯 단계로 설정하여 제시한 학설로서, 아래와 같이 세 가지 학설이 있다. 첫째는 유송劉宋 도량사道場寺 혜관慧觀의 학설로서 부처님의 일대교설一代敎說을 구분하여 돈교頓敎와 점교漸敎로 나누고, 점교 가운데에 다시 시간의 차례에 따라 다섯 가지 구별이 있다는 것이다. ① 삼승별교三乘別敎-삼승인들을 위하여 따로따로 말한 교법. ② 삼승통교三乘通敎 -삼승이 함께 듣는 교법. ③ 억양교抑揚敎-보살을 찬양하고 명예를 억제한 교법. ④ 동귀교同歸敎-삼승을 회동會同하여 일승에 돌아가게 하는 교법. ⑤ 상주교常住敎-불성이 상주하다는 교법. 둘째는 천태종 개조 지의의 학설로서 부처님의 일대 교설을 구분하여 시간의 차례에 따라 다섯 단계가 있다는 것이다. ① 화엄시華嚴時-성도하신 바로 다음 최초의 21일 동안에 『華嚴經』을 말씀한 시기. ② 아함시阿含時-그 다음 12년 동안 녹야원에서 『阿含經』을 말씀한 시기. ③ 방등시方等時-그 다음 8년 동안 『維摩經』·『金光明經』·『楞伽經』·『勝鬘經』·『無量壽經』 등 방등부의 여러 경을 말씀한 시기. ④ 반야시般若時-그 다음 22년 동안 제부의 『般若經』을 말씀한 시기. ⑤ 법화열반시法華涅槃時-최후의 8년 동안 『法華經』과 『大般涅槃經』을 말씀한 시기. 셋째는 『大方廣佛華嚴經』 「如來性起品」에 아침에 해가 뜨면 제일 먼저 고산高山, 다음에 골짜기, 평지를 차례로 비춘다는 말씀을 근거로 하여, 고산高山·유곡幽谷·식시食時·우중禺中·정중正中의 5시로 구분한다는 것이다. 천태종에서도 이것을 차례로 앞에 말씀한 5시에 배당하여 천태오시교를 제시하였다.
  390. 390)천치天治 원년元年은 일본의 왕 조우鳥羽의 연호로서 서력 1124년이다.
  1. 1){底}新修大藏經。第三十八卷 {甲}東文選。第八十三卷所載涅槃經宗要序。
  2. 2)「非」作「不」{甲}。
  3. 3)「聲」作「音」{甲}。
  4. 4)「通」作「遍」{甲}。
  5. 5)「綿」作「縣」{甲}。
  6. 6)「由良」作「良由」{甲}。
  7. 7)「廣」作「矌」{甲}。
  8. 8)「崖」作「涯」次同{甲}。
  9. 9)「忘」作「亡」{甲}。
  10. 10)「二」下有「也」{甲}。
  11. 11)「忘」作「妄」次同{甲}。
  12. 12)「位」作「住」{甲}。
  13. 13)「已」作「亡」{甲}。
  14. 14)「不」作「未」{甲}。
  15. 15)「傾」作「顧」{甲}。
  16. 16)「燋」作「斷」{甲}。
  17. 17)「種」作「根」{甲}。
  18. 18)「經」無{甲}。
  19. 19)「也」作「其」{甲}。
  20. 20)「言」作「云」{甲}。
  21. 21)「證」下有「之」{甲}。
  22. 22)「用」作「周」{甲}。
  23. 23)「苞」作「包」{甲}。
  24. 24)「體」上有「大」{甲}。
  25. 25)「崖」作「岸」次同{甲}。
  26. 26)「十」作「千」{甲}。
  27. 27)「序」作「敍」{甲}。
  28. 1)「密」疑「察」{編}。
  29. 2)「是」疑剩{編}。
  30. 1)「槃」疑「般」{編}。
  31. 2)「耶」疑「取」{編}。
  32. 3)「音」疑「皆」{編}。
  33. 1)「已」下疑脫「入」{編}。
  34. 2)「達」下疑脫「一」{編}。
  35. 1)「身」疑「事」{編}。
  36. 2)「完」更勘{編}。
  37. 1)「不」疑剩{編}。
  38. 1)「下」疑「不」{編}。
  39. 1)「怯」疑「法」{編}。
  40. 2)「實」疑「寶」{編}。
  41. 3)「雨」疑「兩」{編}。
  42. 1)「天」疑「在」{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