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 金剛三昧經論卷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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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삼매경론 중권(金剛三昧經論 卷中)

신라국 사문 원효가 서술하다(新羅國 沙門 元曉 述)
2) 「무생행품無生行品」

보살이 관행을 성취할 때 스스로 마음을 관觀할 줄 알아서 이치에 따라 수행하니, 유생有生의 마음도 아니고 무생無生의 마음도 아니며 또한 유행有行도 아니고 또한 무행無行도 아니다. 다만 증익변增益邊을 벗어나기 위하여 무생無生을 가설한 것이니, 유생에 대해서도 마음을 내지 않고 무생에 대해서도 마음을 내지 않는다. 그리고 손감변損減邊을 벗어나기 위하여 또한 유행有行을 가설한 것이니, 비록 유행의 행은 있지 않지만 무행의 행까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런 까닭에 「무생행품無生行品」이라는 명칭을 내세운다.

일미관행을 개별적으로 드러내면 여섯 가지 부분이 있다.1)
첫째는 모든 경계상을 없애고 무상관을 드러내는 것이니, 이미 앞에서 마쳤다. 이하는 둘째로서 그 발생하는 마음을 부정하는 것이니, 무생행을 설명한다.
경문에 세 부분이 있다. 첫째는 본격적으로 설법한(正說) 부분이다. 둘째는 설법을 찬탄한(讚說) 부분이다. 셋째는 설법을 듣고 얻은 이익(聞說得益)을 설명한 부분이다.

(1) 본격적으로 설법함(正說)

첫째의 정설에도 네 부분이 있다. 첫째는 주고받는 문답이고, 둘째는 부정하여 따지는 문답이며, 셋째는 보살이 이해하는 부분이고, 넷째는 여래가 확정하여 서술하는 부분이다.

① 주고받는 문답

첫째의 주고받는 문답에 여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묻고, 둘째는 답하며, 셋째는 따지고, 넷째는 부정하며, 다섯째는 청하고, 여섯째는 해석한다.

가. 질문

첫째의 묻는 것에 두 가지가 있다.

가) 경문의 서문

이때 심왕보살은 부처님의 설법이 삼계의 밖을 벗어나 불가사의함을 알아듣고 자리에서 일어나 차수하고 합장하며 게송으로 여쭈었다.

이 대목은 그 첫째로서 경문(經家)의 서문이다.

001_0623_c_02L金剛三昧經論卷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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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23_c_04L新羅國沙門元曉述

001_0623_c_05L
無生行品1)第三 [10]

001_0623_c_06L
菩薩觀行成就之時知自觀心
001_0623_c_07L理修行非有生心非無生心亦非
001_0623_c_08L有行亦非無行但爲離增益邊故
001_0623_c_09L假說爲無生不於有生生心不於無
001_0623_c_10L生生心故爲離損減邊亦假說爲行
001_0623_c_11L雖非有有行之行而非無無行之行
001_0623_c_12L是故立名無生行品

001_0623_c_13L
爾時心王菩薩聞佛說法出三界外
001_0623_c_14L不可思議從座而起叉手合掌以偈
001_0623_c_15L問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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別顯觀行有六分中第一遣諸境相
001_0623_c_17L顯無相觀竟在於前此下第二泯
001_0623_c_18L其生心明無生行就文有三一者
001_0623_c_19L正說二者讃說其第三明聞說得益
001_0623_c_20L初正說中有其四分一者往復問答
001_0623_c_21L二者反徵問答三者菩薩領解四者
001_0623_c_22L如來述成初中有六一問二答三難
001_0623_c_23L四拒五請六釋初中有二先經家序
001_0623_c_24L「第三」無{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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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왕보살”은 본체의 측면에서 내세운 명칭이다. 그러나 심왕의 뜻에도 간략하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8식의 심心으로서 모든 심수心數를 제어하므로 심왕이라 하고, 둘째는 일심의 법으로서 모든 덕을 총체적으로 제어하므로 심왕이라 한다. 지금 심왕보살이 무생행에 들어가 일심왕을 증득하기 때문에 본체의 측면에서 내세운 명칭이다. 지금 이 「무생행품」에서는 무생행을 설명한다. 그러므로 심왕보살이 질문을 한다.
“삼계의 밖을 벗어나 불가사의하다.”는 것은 들은 설법을 내세워 질문의 근본으로 삼은 것이다. 그런데 심왕보살이 들은 것은 위의 「무상법품」의 설법이다. 그런데도 지금 뒤의 「무생행품」을 들어서 앞의 「무상법품」을 섭수한 것은 「무상법품」의 마지막 게송이 “초연히 삼계를 벗어남은 …… 이룬 것이라네.”이기 때문이다.

나) 질문하는 말


如來所說義    여래께서 말씀하신 그 뜻은
出世無有相    세간을 떠나 집착이 없으니
可有一切生    곧 존재하는 일체의 중생이
皆得盡有漏    다 누혹을 남김없이 없애네

斷結空心我    번뇌 끊어 심아가 공적하니
是卽無有生    이것이 곧 그대로 무생이네
云何無有生    이와 같은 유생이 없을진댄
而有無生忍    무생의 법인이 어찌 있으랴

이 두 게송은 묻는 말이다.
이 가운데 첫째 게송은 부처님께서 앞에서 말한 것을 이해하여 요약한 것이니, 제1구와 제2구는 먼저 일미의 법인法印을 요약하고, 제3구와 제4구는 다음으로 일승으로 성취된 것을 요약하였다.
뒤의 둘째 게송은 본격적으로 질문한 것이다. 이 가운데 제1구와 제2구는 무생의 뜻을 이어받았고, 제3구와 제4구는 무생법인에 대하여 물었다. 이미 유생有生이 없으므로 마땅히 무생법인無生法忍의 마음도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 답변

그때 부처님께서 심왕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무생법인은 법이 본래 무생하다는 것이다. 제유위행은 무생이지만 무생이라는 행도 없어야 한다. 그러므로 무생법인을 터득한다는 것도 곧 허망이다.”

이것은 둘째로 답한 부분이다.2) 답변의 뜻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무생법인의 모습을 보이고, 둘째는 무생법인을 터득했다는 것에 대하여 그 과실을 드러낸다.
“무생법인”이란 제법이 본래 무생임을 통달하는 것이다. 그런즉 정과 혜의 제유위행도 또한 유생이 없다.

001_0624_a_01L心王菩薩者從體立名然心王之義
001_0624_a_02L略有二種一者八識之心御諸心數
001_0624_a_03L故名心王二者一心之法摠御衆德
001_0624_a_04L故名心王今此菩薩入無生行
001_0624_a_05L一心王故從所軆以立名也今此品
001_0624_a_06L明無生行所以心王菩薩發問
001_0624_a_07L出三界外不可思議者是出所聞之
001_0624_a_08L以爲發問之本其所聞者謂前
001_0624_a_09L品說今且擧後以攝其前謂最後頌
001_0624_a_10L超然出三界乃至所成故

001_0624_a_11L
如來所說義出世無有相可有一切生
001_0624_a_12L皆得盡有漏斷結空心我是卽無有生
001_0624_a_13L云何無有生而有無生忍

001_0624_a_14L
此二頌是問辭於中初頌領前所
001_0624_a_15L上半領前一味法印下半領次
001_0624_a_16L一乘所成後一頌正發問於中上
001_0624_a_17L半牒無生義下半問無生忍旣無
001_0624_a_18L有生應無忍心故

001_0624_a_19L
爾時佛告心王菩薩言善男子無生
001_0624_a_20L法忍法本無生諸行無生非無生行
001_0624_a_21L得無生忍卽爲虛妄

001_0624_a_22L
是第二答答意有二先示無生忍相
001_0624_a_23L後顯有得過失無生法忍者達法本
001_0624_a_24L無生是則定慧諸行亦無有生

001_0624_b_01L따라서 무생이 아니라면 그것은 능인행能忍行(무생법인을 터득했다는 생각이 남아 있는 것)이 있는 꼴이다. 그러므로 “무생이라는 행도 없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여기에 능인행이 있다면 곧 진정한 무생법인인 무주와 무행에 어그러진다. 그러므로 “무생법인을 터득한다는 것도 곧 허망이다.”라고 하였다.

다. 따짐

심왕보살이 여쭈었다.
“존자이시여, 무생법인을 터득한다는 것이 곧 허망이라면 터득함도 없고 법인도 없어야 마땅히 허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셋째로 따지는 부분이다.3) 따지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약 터득함(得)과 법인(忍)이 허망하다고 말한다면 곧 터득함도 없다는 것(無得)과 법인도 없다는 것(無忍)은 마땅히 허망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허망과 반대이기 때문이다.”
대승의 무소득을 수행하는 모든 사람들은 이와 같이 계탁하면서도 자신들의 경우는 허망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허망임을 드러내기 위하여 이와 같이 따지는 것이다.

라. 부정함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왜냐하면 터득함도 없고 법인도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곧 (터득함도 없고 법인도 없다는) 터득함(有得)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터득함이 있고(有得) 머묾이 있으면(有住) 그것이 곧 발생이다(有生). 이처럼 터득했다는 마음이 발생하면 그것은 터득한 법이 있다(有所得)는 것이 되므로 또한 허망이 된다.”

이것은 넷째로 부정하는 것이다.4) 여기에 두 부분이 있다.

가) 직접적으로 부정함

첫째로 “아니다.”라는 것은 직접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나) 부정한 이유

둘째로 “왜냐하면……”은 부정한 이유를 해석한 것이다. 부정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약 저들의 생각이 터득 없음(無得)과 법인 없음(無忍)을 일컫는 것이라면, 비록 터득 있음(有得)과 법인 있음(有忍)의 유有를 터득한 것은 아닐지라도 오히려 터득함이 없고 법인이 없다는 그 무無를 터득한 것이 되어 버린다. 이미 무를 터득했다면 곧 마음이 무에 머무는 것이다. 마음이 이미 무에 머물면 그것은 곧 발생(有生)이다. 말하자면 터득한 것이 있다는 마음이 발생한 셈이므로 그것 또한 발생 없음(無生)과 터득 없음(無得)에 어긋난다. 이런 까닭에 허망한 것이 된다.”

마. 청함

심왕보살이 여쭈었다.
“존자이시여, 법인도 없고 발생도 없는 그 마음은 어째서 허망이 아닙니까?”

이것은 다섯째로 청하는 부분이다.5) 따질 길이 막혀서 뜻을 전개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마땅히 따르면서 자문하여 이끌어 주기를 청하는 것이다.


001_0624_b_01L於無生有能忍行故言非無生行
001_0624_b_02L於中有得能忍之行則乖眞忍無住
001_0624_b_03L無行故言卽爲虛妄

001_0624_b_04L
心王菩薩言尊者得無生忍卽爲虛
001_0624_b_05L無得無忍應非虛妄

001_0624_b_06L
是第三難難意而言若謂有得有忍
001_0624_b_07L是虛妄者則謂無得無忍應非虛妄
001_0624_b_08L反虛妄故諸學大乘無所得者作如
001_0624_b_09L是計自謂非妄爲顯彼妄故作是
001_0624_b_10L

001_0624_b_11L
佛言不也何以故無得無忍是則有
001_0624_b_12L有得有住一本住
作忍
[23] 是則有生有生於
001_0624_b_13L有所得法幷爲虛妄

001_0624_b_14L
是第四拒於中有二不者直拒
001_0624_b_15L以故下第二釋拒拒意而言若彼
001_0624_b_16L意謂無得無忍則雖不得有得有忍
001_0624_b_17L之有而猶得其無得無忍之無旣得
001_0624_b_18L於無者則心住於無心旣有住
001_0624_b_19L是有生謂有心生於有所得故亦違
001_0624_b_20L於無生無得是故說言并爲虛妄

001_0624_b_21L
心王菩薩言尊者云何無忍無生心
001_0624_b_22L而非虛妄

001_0624_b_23L
是第五請追難路窮意不能詣
001_0624_b_24L須仰諮請爲將導

001_0624_c_01L
바. 해석함

이하는 여섯째로 해석하는 부분이다.6) 여기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무득의 도리를 열고, 둘째는 무생의 도리를 보이고, 셋째는 그렇지 않다(非)는 것을 언급하고, 넷째는 옳다는 것(是)을 설명한다.

가) 무득의 도리를 열어 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법인도 없고 발생도 없는 그 마음이란 형단形段이 없는 마음이다. 마치 불의 자성이 비록 나무속에 들어 있지만 그 소재가 없는 경우와 같다. 결정성이기 때문이다. 단지 명칭일 뿐이고 글자일 뿐으로 그 자성은 불가득이다. 그래서 그 도리를 설명하려고 명칭을 가설하지만 명칭도 불가득이다. 그리고 마음의 모습도 또한 불가득이어서 처소를 볼 수가 없다. 마음의 이런 이치를 알면 그것이 곧 발생이 없는 마음이다.

첫째에 세 가지가 있으니, 법法·비유(喩)·합合이다.

(가) 법法

처음에 말한 “법인도 없고 발생도 없는 그 마음”이란 바로 법인에 들어 있는 마음을 가리킨다.
그 다음의 “형단이 없는 마음”이란 무소득의 마음을 드러낸다. ‘형’은 자체(體)를 말하고 ‘단’은 분단(分)을 말한다. 모든 반연에서 마음의 자체와 분단을 추구해 보면 즉卽의 상태나 이離의 상태에서도 모두 무소득이다. 이런 이치를 말미암은 까닭에 형단이 없다는 것이지 색이 지니고 있는 형단의 모습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나) 비유(喩)

비유 부분에서 “마치 불의 자성이 비록 나무속에 들어 있지만”이란 법인의 마음이 이치상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그 소재가 없는 경우와 같다.”는 것은 나무속에 모든 극미가 들어 있지만 그 가운데 불의 자성이 소재하는 곳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치상으로는 항하의 모래 수만큼의 법문이 있지만 그 가운데 마음을 찾아보아도 영원히 소재가 없다. 이것은 불의 자성이 소재처가 없는 이치와 같다.

(다) 합合

부처가 있거나 없거나 간에 법성은 항상 그렇기 때문에 “결정성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불의 자성이라는 명칭에 대응하는 뜻은 불가득이다. 이와 같이 불의 자성은 비록 불가득이지만 그 나무속에 불의 자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 도리를 드러내고자 불의 자성이라는 명칭을 말하였다. 그 명칭을 분석하면 단지 글자만 있고, 여러 글자를 더욱 더 추구해도 모두 무소득이다. 법인의 마음이라는 명칭과 모습도 당연히 그런 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다음으로 합合 부분에서 “그리고 마음의 모습도 또한 불가득이다.”라고 하였다.
법인을 터득한 보살로서 마음이 그런 줄을 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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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言無忍無生心者心無形段猶如
001_0624_c_02L火性雖處木中其在無所決定性故
001_0624_c_03L但名但字性不可得欲詮其理假說
001_0624_c_04L爲名名不可得心相亦爾不見處所
001_0624_c_05L知心如是則無生心

001_0624_c_06L
此下第六爲釋於中有四先開無得
001_0624_c_07L道理次示無生道理三者擧非
001_0624_c_08L者明是初中有三謂法喩合初言
001_0624_c_09L無忍無生心者是牒正在法忍之心
001_0624_c_10L言心無形段者顯心無所得形之言
001_0624_c_11L段之言分就諸緣中求心軆分
001_0624_c_12L若卽若離皆無所得由是道理
001_0624_c_13L無形段非謂無色形段相也喩中火
001_0624_c_14L性雖處木中者喩於忍心雖處理
001_0624_c_15L其在無所者就此木中有諸極
001_0624_c_16L於中都無火性所在如是理中
001_0624_c_17L有恒沙法門於中求心永無所在
001_0624_c_18L如是火性無處道理有佛無佛法性
001_0624_c_19L常爾故言決定性故火性名下
001_0624_c_20L不可得如是火性雖不可得而其
001_0624_c_21L木中非無火性欲詮此理說火性
001_0624_c_22L推析此名但有諸字轉求諸字
001_0624_c_23L皆無所得忍心名相當知亦爾
001_0624_c_24L次合言心相亦爾得忍菩薩知心

001_0625_a_01L어찌 거기에서 능취심이 발생할 수 있겠는가. 이런 까닭에 “그것이 곧 발생이 없는 마음이다.”라고 하였다.

나) 무생의 도리를 보임

이하는 둘째로 무생의 도리를 설명하는 것이다. 여기에 두 부분이 있다. 첫째는 비유이고, 둘째는 합이다.

(가) 비유

선남자여, 이 무생심의 자성(性)과 바탕(相)은 또한 마치 아마륵의 과실처럼 본래 자생自生도 아니고, 타생他生도 아니며, 공생共生도 아니고, 인생因生도 아닌 것으로서 곧 무생이다.7) 왜냐하면 연의 대사代謝8)이기 때문에 연이 기동해도 발생이 없고, 연이 사라져도 소멸이 없으며, 숨어 있거나 나타나 있거나 모습이 없고, 뿌리를 살펴보아도 적멸하다. 그래서 처하는 곳이 없어서 머무는 것을 볼 수가 없으니, 결정성이기 때문이다.

비유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사불四不9)을 설명하고, 둘째는 팔불八不10)을 드러낸다.

㉮ 사불四不을 설명함

첫째의 사불四不이라는 말은 연에 의지하므로 자생自生이 아니고, 자체가 종자이므로 타생他生도 아니며, 작作이 없으므로 공생共生도 아니고, 용用이 있으므로 무생無生도 아니다. 또한 아직 발생하기 전에는 자체가 없으므로 자체로부터 발생한 것이 아니고, 이미 발행한 후에는 벌써 존재하기 때문에 자체를 기다려 발생한 것이 아니다. 자체가 이미 성립하지 않는데 무엇을 기다려 타생이 있고, 자체와 타생이 없는데 어찌 공생이 있으며, 유인有因으로 발생한 것도 이미 불가득인데 하물며 무인無因으로 발생할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발생을 추구해도 모두 무소득이다.
“인생도 아닌 것으로서 곧 무생이다.”라는 말은 인因 없이 발생한 것이 아님을 설명한다. 말하자면 인이 없이 과가 발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11)

“왜냐하면”부터는 계속하여 감추어져 있는 의심(伏疑)을 해석한 것이다.12) 의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불 가운데 세 번째인 불공생不共生은 그렇지 않다. 세 번째가 그렇지 않은 이유에 대하여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과실이 맺히는 경우 종자는 친인親因이 되고 흙과 물은 소연疏緣이 된다. 친인과 소연이 함께 합해지므로 과실이 맺힌다. 그런데 어째서 불공생이라 말하는가.”
이런 까닭에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물은 것이다.
“연의 대사代謝이기 때문에”는 친인과 소연이 선·후를 대사하면서 잠시도 멎지 않는다. 대사가 멎은 경우는 이미 과실이 없어 곧 공용도 없다. 공용이 없으므로 친인과 소인의 과실이 맺히지 않는다.

001_0625_a_01L如是何得於中能取心生以之故
001_0625_a_02L言則無生心

001_0625_a_03L
善男子是心性相又如阿摩勒菓
001_0625_a_04L不自生不從他生不共生不因生一本有
不字

001_0625_a_05L無生 [24] 何以故緣代謝故緣起非生
001_0625_a_06L謝非滅隱顯無相根理寂滅在無有
001_0625_a_07L不見所 [25] 決定性故

001_0625_a_08L
此下第二明無生理於中有二先喩
001_0625_a_09L次合喩中有二先明四不後顯八
001_0625_a_10L言四不者待緣故不自生自種
001_0625_a_11L故不他生無作故不共生有用故不
001_0625_a_12L無生又復未生時無自故不從自生
001_0625_a_13L已生時已有故不須自生自旣不成
001_0625_a_14L待誰有他自他旣無何得有共
001_0625_a_15L因而生旣不可得何況得有無因而
001_0625_a_16L如是求生皆無所得言不因生
001_0625_a_17L無生者明不無因而生謂不能生因
001_0625_a_18L無而果得生也何以故下次釋伏疑
001_0625_a_19L疑者意曰三不可爾第三云何
001_0625_a_20L謂菓生種子爲親因地水爲疎緣
001_0625_a_21L二共合故有菓生云何而言不共生
001_0625_a_22L是故問言何以故也緣代謝故者
001_0625_a_23L明彼二緣先代後謝不得暫停
001_0625_a_24L時旣無則無功用功用無故俱不

001_0625_b_01L(『유가사지론』의) 게송에서 “일체의 유위행은 모두가 찰나로다. 머묾도 없을진댄 하물며 작용이랴.”13)라고 말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또 대사를 추구해도 발생도 없고 소멸도 없다. 왜냐하면 이미 잠시도 머묾이 없은즉 발생도 없고, 발생이 없은즉 소멸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이 기동해도 발생이 없고 연이 사라져도 소멸이 없다.”고 말한다. 이와 같아서 추구해 보아도 숨음과 나타남이 모두 없다.
“숨어 있는 것”은 종자가 흙 속에 있고, “나타나 있는 것”은 싹과 줄기가 흙 위로 솟아나 있기 때문이다.
“뿌리를 살펴보아도 적멸하다.”는 것은 나무의 뿌리와 나무의 줄기를 통하여 살펴보고 과실이 맺히는 원인을 찾아보아도 필경에 과실이 맺히는 도리는 기동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적멸하다.”고 하였다.
“처하는 곳이 없어서 머무는 것을 볼 수가 없다.”고 하였는데, 어째서 그러한가. 결정성이기 때문이다. 결정성의 뜻은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 팔불八不을 설명함

이 결정성은 일一도 아니고 이異도 아니며, 단斷도 아니고 상常도 아니며, 입入도 아니고 출出도 아니며, 생生도 아니고 멸滅도 아니다. 모든 네 가지 비방14)을 떠나 있어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다.

001_0625_b_01L生果如偈說言諸行皆刹那住尙
001_0625_b_02L無況用故又求代謝無生無滅
001_0625_b_03L以然者旣無暫住則無有生生無有
001_0625_b_04L則無有滅故言緣起非生緣謝
001_0625_b_05L非滅如是推求隱顯皆無隱者
001_0625_b_06L子在士下故顯者芽莖出地上故
001_0625_b_07L根理寂滅者推其樹根及樹幹理求
001_0625_b_08L生菓因畢竟無起故言寂滅在無
001_0625_b_09L有處不見所住所以然者決定性故
001_0625_b_10L決定性義如前所說

001_0625_b_11L
是決定性亦不一不異不斷不常
001_0625_b_12L入不出不生不滅離諸四謗言語道
001_0625_b_13L無生心性亦復如是云何說生不
001_0625_b_14L有忍無忍

001_0625_b_15L
次明八不非直法爾唯前四不
001_0625_b_16L乃具絕一異等八所以然者菓種不
001_0625_b_17L其相不同故而亦不異離種無
001_0625_b_18L菓故又種菓不斷菓續種生故
001_0625_b_19L亦不常菓生種滅故種不入菓
001_0625_b_20L時無種故菓不出種種時無菓故
001_0625_b_21L不入不出故不生不常不斷故不滅
001_0625_b_22L不滅故不可說無不生故不可說有
001_0625_b_23L遠離二邊故不可說爲亦有亦無
001_0625_b_24L當一中故不可說非有非無故言離

001_0625_c_01L무생한 마음의 자성도 또한 그와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어떻게 생과 불생과 유인과 무인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위의 사불에 이어서 둘째로 팔불을 설명하는 대목이다. 비단 법이法爾하여 위의 사불의 경우뿐만 아니라 일一·이異 등 여덟 가지의 경우도 역시 모두 단절한다. 왜냐하면 과실과 종자가 동일하지 않은 것은 그 모습이 같지 않기 때문이고, 그렇다고 또 다르지도 않은 것은 종자를 떠나서는 과실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종자와 과실이 단절된 것이 아닌 것은 과실은 종자를 이어서 발생하기 때문이고, 그렇다고 또한 불변하는 것도 아닌 것은 과실이 발생하면 종자는 소멸되기 때문이다. 또한 종자가 과실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닌 것은 과실이 되었을 때 종자가 없기 때문이고, 그렇다고 과실이 종자를 벗어나는 것도 아닌 것은 종자로 있을 때 과실이 없기 때문이다.
들어 있는 경우도 없고 벗어나 있는 경우도 없으므로 불생이고, 불변하는 것도 아니고 단절된 것도 아니므로 불멸이다. 불멸이므로 무無라 말할 수 없고, 불생이므로 유有라 말할 수 없으며, 양변을 멀리 떠나 있으므로 역유역무亦有亦無라고도 말할 수 없고, 한가운데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에 비유비무非有非無라고도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네 가지 비방을 떠나 있어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아마륵의 과실은 이와 같이 언설을 단절해 있다. 법인의 마음도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무생한 마음의 자성도 또한 그와 마찬가지이다.”라고 하였다.

(나) 합合

만약 마음에 대하여 소득이 있고 머묾도 있으며 볼 수도 있다고 말한다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반야를 터득할 수가 없다. 그것은 곧 장야長夜의 상태이다.

다) 그렇지 않다(非)는 것을 언급함

이하는 셋째로 그렇지 않다(非)는 것을 언급하는 것이다.15) 즉 어떤 사람이 무생법인심에 대하여 그 심체를 터득할 수 있고 그 무생법인에 머물 수 있으며 그 무생법인의 도리를 볼 수가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마음의 자성을 모르고 곧 허망한 집착으로 보리 및 그 반야를 장애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성청정한 보리 및 능증의 반야를 터득하지 못한 것을 설명한 것이다.
또한 “보리”는 처음부터 기동해 있는 보리이고, “반야”는 보리의 인因이다. 깨침의 인을 터득하지 못하므로 “장야의 상태”가 되는데, 그것은 무시이래의 망상으로서 대몽大夢16)이기 때문이다.

라) 옳다(是)는 것을 설명함

그러나 마음의 자성을 분명하게 터득한 사람은 마음의 자성이 여여함을 알고 그 자성의 작용도 역시 여여함을 아는데, 그것이 곧 무생행이다.”

이것은 넷째로 옳다(是)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17)
“마음의 자성을 분명하게 터득한 사람”이란 자심으로써 자심의 자성을 터득한 것이니, 『경』에서 “만약 능취의 작의로써 도리어 능취의 작의에 통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바야흐로 이에 능연과 소연이 절대평등이 되어 무루지가 발생하여 성제에 통달한다.”18)고 한 것과 같다.
“마음의 자성이 여여함을 안다.”는 것은 자기 관심의 체성이 평등함을 아는 것이다.
“그 자성의 작용 역시 여여함을 안다.”는 것은 능지의 작용을 가리키는데, 그 작용하는 자성이 평등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마음을 관찰해 보면 그 본체와 작용이 평등하여 발생이 없고 소멸이 없으며 시작이 없고 종말이 없기 때문에 “이것이 무생의 행이다.”라고 하였다.
위의 사불四不에서 설명한 무생이란 ‘무생의 도리’를 드러낸 것으로

001_0625_c_01L諸四謗言語道斷阿摩勒菓如是
001_0625_c_02L絕言法忍之心亦不異此故言無
001_0625_c_03L生心性亦如是等也

001_0625_c_04L
若有說心有得有住及以見者卽爲不
001_0625_c_05L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般若一本無般
若二字
[26]
001_0625_c_06L爲長夜

001_0625_c_07L
此是第三擧非謂有說言無生忍心
001_0625_c_08L心體可得住於無生及與能見無生
001_0625_c_09L理者不了心性直是妄執能障菩
001_0625_c_10L提及其般若是明不得性淨菩提
001_0625_c_11L能證般若又菩提者始起菩提
001_0625_c_12L般若者菩提之因不得覺因故爲
001_0625_c_13L長夜無始妄想是大夢故

001_0625_c_14L
了別心性者知心性如是性亦如
001_0625_c_15L無生行 [27]

001_0625_c_16L
此是第四顯是言了別心性者卽以
001_0625_c_17L自心了自心性如經言若能以其能
001_0625_c_18L取作意還能通達能取作意如是方
001_0625_c_19L乃能緣所緣平等平等無漏智生
001_0625_c_20L通達聖諦故知心性如者知自觀心
001_0625_c_21L體性平等故是性亦如者是能知用
001_0625_c_22L用性平等故如是觀心軆用平等
001_0625_c_23L生無滅無始無終以之故言是無生
001_0625_c_24L上明四不之無生者顯無生理

001_0626_a_01L그 도리가 범凡과 성聖에 통한다. 그러나 지금 여기 팔불八不에서 마음의 자성이 여여함을 안다는 것으로 설명한 ‘무생’이란 ‘무생의 행’을 설명한 것이다. 무생의 행은 사불의 경우에서 설명한 무생의 도리와는 달리 성聖에만 해당한다. 성聖에만 해당하는 무생의 행은 이理에 계합된 일미이고, 널리 통하는 그 일미의 도리는 곧 지智에 계합된 평등平等이다. 평등하고 일미라는 점에서는 범부와 성인이 다르지 않고 무생이 도리에는 통함이 있지만 무생의 행은 차별이 있다는 점에서는 범부와 성인이 같지 않다.
‘같지 않다’는 것은 같지만 다르다는 것이고, ‘다르지 않다’는 것은 다르지만 같다는 것이다. ‘같다’는 것은 다른 것에서 같다는 것을 변별한 것이고, ‘다르다’는 것은 같은 것에서 다르다는 것을 설명한 것이다. ‘같은 것에서 다르다는 것을 설명한 것’은 같은 것이 나뉘어 달라진다는 것이 아니고, ‘다른 것에서 같다는 것을 변별한 것’은 다른 것이 없어져 같아진다는 것이 아니다. 진실로 ‘같다는 것’은 다른 것을 없앤 것이 아니므로 같다고 말할 수 없고, ‘다르다는 것’은 같은 것을 나눈 것이 아니므로 다르다고 말할 수 없다. 다만 ‘다르다’고 말할 수 없으므로 그것을 ‘같다’고 말할 수 있고, ‘같다’고 말할 수 없으므로 그것을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이처럼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은 다름도 없고 차별도 없다.

② 부정하여 따지는 문답

아래는 둘째 부정하여 따지는 문답이다.19) 여기에 여덟 가지가 있다. 첫째는 행을 들어 도리를 따진다. 둘째는 유증有證인가 하고 부정하여 따진다. 셋째는 무증無證이라고 사뢰어 말씀드린다. 넷째는 유득有得을 부정하여 따진다. 다섯째는 무득無得이라고 사뢰어 말씀드린다. 여섯째는 증득이 없다고 서술한다. 일곱째는 의문점을 거듭 진술한다. 여덟째는 그 의문점을 해결해 준다.

가. 행을 들어 도리를 따짐

심왕보살이 여쭈었다.
“존자이시여, 만약 마음이 본래 여여하여 행20)이 무생이라면, 제행이 무생이므로 유생행도 불생이고 불생행도 무행으로서 곧 그대로 무생의 행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부분은 첫째로 행을 들어 도리를 따진 것이다.
“만약 마음이 본래 여여하여 행이 무생이라면”은 위에서 들었던 ‘행이 곧 무생이라는 뜻’을 언급한 것이다. 위에서 말한 “마음의 자성이 여여함을 알고 그 자성의 작용도 역시 여여함을 아는데, 그것이 곧 무생행이다.”라는 것으로, 생멸의 행이 발생하지 않음을 말한다. 곧 이것은 무생행의 모습을 바로 언급한 것이다.

001_0626_a_01L理通凡聖今明知如之無生者明無
001_0626_a_02L生行行別在聖在聖之行與理一
001_0626_a_03L遍通之理與智平等平等一味
001_0626_a_04L故聖人所不能異也有通有別故
001_0626_a_05L聖人所不能同也不能同者卽同而
001_0626_a_06L異也不能異者卽異而同也同者
001_0626_a_07L辨同於異異者明異於同明異於
001_0626_a_08L同者非分同爲異也辨同於異者
001_0626_a_09L非銷異爲同也良由同非銷異故不
001_0626_a_10L可說是同異非分同故不可說是異
001_0626_a_11L但以不可說異故可得說是同不可
001_0626_a_12L說同故可得說是異耳說與不說無
001_0626_a_13L二無別矣

001_0626_a_14L
心王菩薩言尊者心若本如無生於
001_0626_a_15L諸行無生生行不生不生無行
001_0626_a_16L無生行也

001_0626_a_17L
此下第二反詰問答於中有八一擧
001_0626_a_18L行難理二反詰有證三仰報無證
001_0626_a_19L四反詰有得五仰報無得六述無證
001_0626_a_20L七更陳所疑八決其所疑此卽第
001_0626_a_21L一擧行難理言心若本如無生於行
001_0626_a_22L擧前所說行無生義謂卽前言
001_0626_a_23L知心性如是性亦如是無生行謂無
001_0626_a_24L生於生滅之行卽是正擧無生行相

001_0626_b_01L
“제행이 무생이므로”라는 것은 도리가 무생임을 언급한 것이니, 모든 중생의 오음인 제행이 본래 무생이라는 것이다.
“유생행도 불생이고”라는 것은 무생의 도리는 무생의 행과 다름을 설명한 것이니, 생기한 행이 그대로 공하여 불생이지, 도리를 증득하여 소멸된 마음의 불생을 말미암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불생행도 무행으로서”라는 것은 불생의 도리가 무생의 행과 같음을 드러낸 것이니, 불생의 문도 역시 무심의 행이라는 것이다. 곧 무생법인이 무분별행인 것과 마찬가지로 마땅히 이 불생의 행도 무생의 행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이와 같을진댄 일체의 범부도 무생법인을 증득하지 못할 것이 없다.

나. 유증有證인가 하고 부정하며 따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그대는 무생으로써 무생의 행을 증득했는가?”

이는 둘째로 유증有證인가 하고 부정하며 따지는 것이다. 따지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대가 무생법인의 관찰에 들어갔을 경우, 제행이 무생이라는 도리에 의하여 무생의 행을 터득하였는가.”
이와 같이 부정하며 따져서 묻고 있는 까닭은, 심왕보살이 무생의 도리가 무생의 행과는 다르다고 간주하고 있지만 그 무생의 도리도 역시 무생의 행임을 따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그대가 무생법인의 관찰에 들어갔을 경우, 무생의 도리가 무생의 행과 달리 능·소가 있던가.”라고 따진 것이다.

다. 무증無證이라고 받들어 답변함

심왕보살이 여쭈었다.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여한 무생행은 성과 상이 공적하기 때문에 견見도 없고 문聞도 없으며, 득得도 없고 실失도 없으며, 언言도 없고 설說도 없으며, 지知도 없고 상相도 없으며, 취取도 없고 사捨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증득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증득을 취한 것이 있다면 곧 쟁과 논이 될 것입니다. 쟁도 없고 논도 없어야 이에 무생행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셋째로 무증無證이라고 받들어 답변한 것이다. 여기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증득이 없음(無證)을 설명하고, 둘째는 그렇지 않음(非)을 언급하고, 셋째는 그렇다(是)는 것을 드러낸다.

가) 증득이 없음(無證)을 설명함

첫째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대강을 드러내고, 나중에 자세하게 해석한다.
“여여한 무생행은 성과 상이 공적하다.”는 것은 전체적인 대강(摠標)의 구절이다. ‘성이 공적하다.’는 말은 소위 관찰하는 심체가 생멸의 모습을 떠나 있다는 것인데,

001_0626_b_01L言諸行無生者擧理無生謂諸衆生
001_0626_b_02L五陰諸行本來無生生行不生者
001_0626_b_03L明理無生異行無生謂生起行
001_0626_b_04L空不生非由證理滅心不生言不
001_0626_b_05L生無行者顯理不生類行無生
001_0626_b_06L不生門亦無心行如無生忍無分
001_0626_b_07L別行故應卽是無生行耶若如是者
001_0626_b_08L一切凡夫莫不證得無生忍矣

001_0626_b_09L
佛言善男子汝以無生而證無生行耶

001_0626_b_10L
此是第二反詰有證詰意而言汝於
001_0626_b_11L入觀無生忍時以依諸行無生之理
001_0626_b_12L而得無生行耶所以如是反詰問者
001_0626_b_13L彼以理無生別異行無生而難理無
001_0626_b_14L亦是行無生故今詰言汝入觀
001_0626_b_15L理行別異有能所耶

001_0626_b_16L
心王菩薩言不也何以故如無生行
001_0626_b_17L性相空寂無見無聞無得無失無言
001_0626_b_18L無說無知無相無取無捨云何取證
001_0626_b_19L若取證者卽爲諍論無諍無論乃無
001_0626_b_20L生行

001_0626_b_21L
此是第三奉答無證於中有三初明
001_0626_b_22L無證二者擧非三者顯是初中亦
001_0626_b_23L前標後釋如無生行性相空寂者
001_0626_b_24L是摠標句言性空寂謂觀心軆性

001_0626_c_01L곧 위에서 설한 “마음의 자성이 여여함을 안다.”는 것이다. ‘상이 공적하다.’는 말은 관찰하는 마음을 아는 작용은 그 작용의 상相도 역시 여여하다는 것인데, 곧 위에서 말한 “그 자성 역시 여여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하는 열 가지가 없다(十無)21)는 것으로써 전체적인 대강(摠標)의 구절을 해석한 것이다.
“견도 없고 문도 없다.”는 것은 마음의 자성은 들을 수도 없고(希) 볼 수도 없다(夷)는 것이다. 곧 이夷이므로 색이 단절되어 형상으로 드러낼 수가 없고, 희希이므로 소리가 단절되어 설명으로 가르칠 수가 없다.

나) 그렇지 않다(非)는 것을 언급함

“득도 없고 실도 없다.”는 것은 공을 드러냈지만 무소득이고, 생을 없앴지만 소실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네 가지가 없다(四無)는 것은 자성이 공적함을 해석한 것이다.
“언도 없고 설도 없다.”는 것은 마음의 작용이 적멸하고 언설도 기동하지 못한 것이다.
“지도 없고 상도 없다.”는 것은 마음의 작용이 적멸하여 멀리 분별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
“취도 없고 사도 없다.”는 것은 이미 분별이 없어 취할 성이 없고 버릴 상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여섯 가지가 없다(六無)는 것은 상이 공적함을 해석한 것이다. 무생행은 이처럼 공적한데 어찌 거기에 증득을 취함이 있겠는가.

다) 그렇다(是)는 것을 드러냄

이렇게 답변할 때 앞에서 따졌던 것이 더 이상 따질 수 없게 되었음을 스스로 안 것이다. 잘못(非)을 언급하여 옳음(是)을 드러낸 것이므로 살펴보면 곧 알 수 있을 것이다.

라. 유득有得을 부정하여 따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터득하였는가?”

이는 넷째로 유득有得을 부정하여 따진 것이다.

보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터득하지 못했는데, 여래는 무슨 까닭에 “그대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터득하였는가.”라고 묻는가?
그것은 보살이 비록 구경의 보리(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터득하지 못하였지만 이미 초지의 보리는 증득하였기 때문이다. 『법화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팔생 내지 일생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터득한다는 것은 초지의 보리를 증득한다는 것이다. …… 삼계의 분단생사를 떠나 분수에 따라서 진여불성 곧 법성을 볼 수 있으므로 보리를 터득한다고 말하는 것이지 구경에 만족한 여래의 방편열반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22)
생각해 보면

001_0626_c_01L離生滅相卽前所說知心性如也
001_0626_c_02L空寂者觀心知用用相亦如卽前
001_0626_c_03L是性亦如之謂也下以十無釋此摠
001_0626_c_04L無見無聞者心性希夷夷故絕
001_0626_c_05L非像所表希故絕聲非敎所詮
001_0626_c_06L無得無失者顯空而無所得
001_0626_c_07L生而無所失故如是四無釋性空寂
001_0626_c_08L無言無說者心行旣寂不起言
001_0626_c_09L說故無知無相者心行寂滅遠離
001_0626_c_10L二分故無取無捨者旣無分別
001_0626_c_11L性可取無相可捨故如是六無
001_0626_c_12L相空寂也無生行中如是空寂
001_0626_c_13L何於中而有取證作是答時自知
001_0626_c_14L前難不成難也擧非顯是攻卽可
001_0626_c_15L

001_0626_c_16L
佛言汝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耶

001_0626_c_17L
此是第四反詰有得問曰菩薩末
001_0626_c_18L得阿耨菩提如來何故問汝得耶
001_0626_c_19L解云此雖未得究竟菩提而已證得
001_0626_c_20L初地菩提如法華論曰八生乃至一
001_0626_c_21L生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者謂證
001_0626_c_22L初地菩提故以離三界中分段生死
001_0626_c_23L隨分能見眞如佛性 [28] 名得菩提非謂
001_0626_c_24L究竟滿足如來方便涅槃故案云

001_0627_a_01L이것은 진여불성(법성)에 의거하여 설하므로 “보리”라 말하는 것이고, 증득하여 보기 때문에 “보리를 터득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경에서 “모든 법성이 공한즉 그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마. 무득無得이라고 사뢰어 말씀드림

심왕보살이 여쭈었다.
“존자이시여, 저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터득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보리의 자성에는 득得도 없고 실失도 없으며 각覺도 없고 지知도 없어 분별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분별이 없는 것이야말로 곧 청정한 자성입니다. 그 자성에는 간間도 없고 잡雜도 없으며, 언言도 없고 설說도 없으며, 유有도 없고 무無도 없으며, 지知도 없고 부지不知도 없습니다. 본받을 만한 모든 행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본받을 만한 행에 처소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은 결정성이기 때문입니다. 본래 터득함(得)도 없고 터득하지 못함(不得)도 없는데23) 어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터득한다고 말하겠습니까.”

이는 다섯째로 무득無得이라고 사뢰어 말씀드린 것이다. 여기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대강(標)이고, 둘째는 해석(釋)이며, 셋째는 결론(結)이다.

(가) 대강(標))

나) 해석(釋)

둘째, 해석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소득의 보리에도 소득의 자성은 없음을 설명하고,24) 둘째는 능득의 제행에도 능득의 모습이 없음을 드러낸다.25)

(가) 소득의 보리에 소득의 자성이 없음

첫째 가운데서 말한 “보리의 자성”이란, 진여자성은 텅 비고 걸림이 없으며 그 자성이 어둠을 떠나 있으므로 보리라고 한 것이다. 여기에는 남겨둘 만한 진성도 본래 없고 또한 없앨 만한 망상도 본래 없으므로 “득도 없고 실도 없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본각은 사려분별로 아는 것도 멀리 떠나 있고, 또한 솔이심率爾心26)으로 아는 것도 없으므로 “각도 없고 지도 없다.”고 하였다.
이미 분별하는 견분도 없고 또한 작용되는 상분도 떠나 있기 때문에 “분별상이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까닭으로 미혹에 흐려짐이 없고 본래 자성이 염오를 떠나 있으므로 “즉 청정한 자성입니다.”라고 하였다.
종으로는 생과 멸에 간극이 없고, 횡으로는 능과 소에 잡염雜染이 없으므로 “그 자성에는 간도 없고 잡도 없다.”고 하였다.
“언도 없고 설도 없다.”는 것은 능언과 소언이 단절되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다.

001_0627_a_01L約眞如佛性說名菩提能證見故
001_0627_a_02L名得菩提如經言諸法性空卽是菩
001_0627_a_03L此之謂也

001_0627_a_04L
心王菩薩言尊者我無得阿耨多羅三
001_0627_a_05L藐三菩提何以故菩提性中無得無
001_0627_a_06L無覺無知無分別相無分別中
001_0627_a_07L淸淨性性無間雜無有言說非有非
001_0627_a_08L非知非不知諸可法行亦復如是
001_0627_a_09L何以故一切法行不見處所決定性
001_0627_a_10L本無有得不得云何得阿耨多羅三
001_0627_a_11L藐三菩提

001_0627_a_12L
此是第五仰報無得於中有三謂標
001_0627_a_13L釋結釋中有二先明所得菩提無
001_0627_a_14L所得性後顯能得諸行無能得相
001_0627_a_15L初中言菩提性者謂眞如性虛通無
001_0627_a_16L性離闇弊故名菩提於中本無
001_0627_a_17L眞性可存亦乃本無妄想可亡故言
001_0627_a_18L無得無失如是本覺遠離思搆之覺
001_0627_a_19L亦亡率爾之知故言無覺無知旣無
001_0627_a_20L分別之見亦離所行之相故言無分
001_0627_a_21L別相由如是故非惑相濁本性離
001_0627_a_22L染故言卽淸淨性縱非生滅所間
001_0627_a_23L橫非能所所雜故言性無閒雜無有
001_0627_a_24L言說者能言所言無不絕故非有

001_0627_b_01L
“유도 없고 무도 없다.”는 것은 비록 진여는 형상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또 진여는 자성이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지도 없고 부지도 없습니다.”라는 것은 비록 본각도 아니지만 또 불각도 아니기 때문이다. 보리의 자성도 그러하여 터득한다고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나) 능득의 제행에도 능득의 모습이 없음

“본받을 만한 모든 행도” 이하는 그 다음으로 능득能得의 제행도 없음을 드러낸 것이다. 「무상법품」에서 말한 육바라밀의 수행은 진실한 궤칙 아님이 없기 때문이다.
“본받을 만한 모든 행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라는 것은 앞의 설명과 마찬가지로 터득한다고 말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본받을 만한 행”은 육바라밀 등의 수행이다.
“처소를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득·실·각·지 내지 유·무·지·부지 등 능득의 제행의 처소를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저 보리처럼 절대평등(平等平等)하기 때문에 본래 능득能得도 없고 불능득不能得도 없다.

다) 결론(結)

“어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터득한다고 하겠습니까.”라는 것은 터득함이 없다는 것을 총결한 것이다.

바. 여래께서 증득이 없다고 서술함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래, 그렇다. 그대의 말처럼 일체의 마음작용(心行)은 무상無相(무분별상)을 벗어나지 않아서 자체가 적멸한 무생이다.

이하는 여섯째로 여래께서 증득이 없다고 서술한 것이다. 여기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 본격적으로 서술하고, 둘째 그렇지 않다는 것을 언급하며, 셋째 그렇다는 것을 드러낸다.

가) 본격적으로 서술함(正述)

첫째에도 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총체적으로 서술하고, 둘째는 개별적으로 서술하고, 셋째는 결론을 맺는다.

(가) 총체적으로 서술함

첫째의 총체적인 서술 가운데 “그래, 그렇다.”에서 앞의 ‘그래’는 증득함(能證得)이 없다는 것을 서술한 것이고, 뒤의 ‘그렇다’는 것은 터득함(所得)이 없다는 것을 서술한 것이다.

(나) 개별적으로 서술함

“일체의 마음작용은 무분별상(無相)을 벗어나지 않아서 자체가 적멸한 무생이다.”라는 것은 개별적인 서술이다. 첫째는 무생을 서술하고, 둘째는 적멸을 서술한다.

㉮ 무생을 서술함

“무생”이란 무생행으로 능증能證과 능득能得이 없음을 서술한 것이다.
“적멸”이란 적멸한 도리로서 소증所證이 없고 소득所得도 없음을 서술한 것이다.
첫째 가운데 “일체의 마음작용”이란 출세의 무분별지에 상응하는 모든 마음작용이다.
제상에 집착하지 않고 무분별상을 증득(證會)하기 때문에 “무분별상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자체가 공적하여 명연冥然한 무생이므로 “자체가 적멸한 무생이다.”라고 하였다.

㉯ 적멸을 서술함

모든 식들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001_0627_b_01L非無者雖非有如而非無如故
001_0627_b_02L知非不知者雖非本覺而非不覺故
001_0627_b_03L菩提性然無可得義諸可法行已下
001_0627_b_04L次顯無能得行如前品說六度之行
001_0627_b_05L無非實軌故言可法亦如是者同前
001_0627_b_06L無得故一切法行者六度等行
001_0627_b_07L見處所者不見得失覺知乃至有無
001_0627_b_08L知不知等所可行處故與菩提平等
001_0627_b_09L平等所以本無有能得不能得也
001_0627_b_10L何已下摠結無得

001_0627_b_11L
佛言如是如是如汝所言一切心行
001_0627_b_12L不過無相軆寂無生

001_0627_b_13L
此下第六如來述成於中有三一者
001_0627_b_14L正述二者擧非三者顯是初中亦
001_0627_b_15L摠述別述後還結成初言如是
001_0627_b_16L如是者述前無證及後無得一切已
001_0627_b_17L第二別述先述無生後述寂滅
001_0627_b_18L言無生者是無生行述無能證能得
001_0627_b_19L言寂滅者是寂滅理述無所證所得
001_0627_b_20L初言一切心行者所有出世無分別
001_0627_b_21L智相應心行不取諸相證會無相故
001_0627_b_22L言不過無相軆於空寂冥然無生
001_0627_b_23L言軆寂無生

001_0627_b_24L
可有識識一本云
有諸識
[29] 亦復如是何以故

001_0627_c_01L왜냐하면 안眼과 안촉眼觸(眼境)이 모두 공적하고 안식도 또한 공적하여 동상動相도 없고 부동상不動相도 없으며, 안으로 삼수三受27)가 없어 삼수도 역시 적멸하다. 이·비·설·신·심·의·의식28) 및 말나·아리야도 또한 마찬가지로서 그 모두 역시 불생으로서 적멸심이고 무생심이다.

이는 둘째로 적멸의 뜻을 서술한 것이니, 모든 세간의 팔식이 공적하다는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앞의 것을 예로 들고, 둘째는 자세하게 해석한다.

a. 앞의 것을 예로 듦

처음 말한 “모든 식들”은 모든 세간의 팔식을 총섭한 것이다. 마치 ‘모든 곳’이라는 말이 일체처를 섭수하는 것과 같다.
“또한 마찬가지이다.”라는 것은 공적한 도리가 위에서 출세심이 무생인 것과 똑같기 때문이다.

b. 적멸의 뜻을 자세하게 해석함

“왜냐하면” 이하는 둘째로 자세하게 해석한 부분이다. 안眼은 안근眼根이고, 안촉眼觸은 곧 변행遍行29) 가운데 촉변행이다. 세 가지 화합(三和 : 根·境·識의 화합)에 의하여 발생하지만 그 세 가지를 화합시켜서 그것이 산공散空임을 설명하려는 까닭에 촉에 대해서만 언급한 것이다.
“안식도 또한 공적하다.”는 것은 안촉이 이미 공하여 안식이 불생하기 때문이다.
상속됨도 없고 변하거나 움직임도 없지만 또한 찰나도 변하지 않음이 없으므로 “동상動相도 없고 부동상不動相도 없다.”고 하였다.
“안으로 삼수가 없다.”는 것은 삼수가 생기하는 것도 본래 적멸하기 때문이다. 모든 심수분별(心數) 가운데 촉觸과 수受가 서로 가깝고 크고 뛰어난 공능이 있으므로 촉법과 수법만 들고 나머지 법은 모두 제쳐 둔 것이다.
“이·비·설·신”은 이근耳根과 이촉耳觸과 이식耳識 등이다.30)
“심·의·의식”은 곧 제6식인데, 미래를 ‘심’이라 하고, 과거를 ‘의’라 말하며, 현재를 ‘의식’이라 한다. 수전문隨轉門31)에 의하여 이 세 가지 명칭을 들어서 삼세가 모두 공적함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말나·아리야”는 제7식과 제8식인데, 안식과 마찬가지로 이것 역시 불생이다. 자세하게 해석하는 글은 이것으로 마친다.
다음으로 말한 “적멸심”이란 가까이로는 팔식이 공적하다는 것을 결론지은 경문이고,

001_0627_c_01L眼眼觸悉皆空寂識亦空寂無有動
001_0627_c_02L不動相內無三受三受寂滅耳鼻舌
001_0627_c_03L身心意意識及以末那阿梨耶 [30] 亦復
001_0627_c_04L如是皆亦不生寂滅心 [31] 及無生心

001_0627_c_05L
此是第二述寂滅義謂諸世間八識
001_0627_c_06L空寂於中有1) [11] 一者例前二者廣
001_0627_c_07L初言可有識識摠攝所有世間八
001_0627_c_08L如言處處攝一切處故亦如是
001_0627_c_09L空寂之理同前出世心之無生故
001_0627_c_10L何以故下第二廣釋眼者眼根
001_0627_c_11L卽是遍行中觸依三和生令三
001_0627_c_12L和合欲明散空故偏擧之識亦空
001_0627_c_13L眼觸旣空眼識不生故無有相
001_0627_c_14L續遷動亦無刹那不遷故言無有動
001_0627_c_15L不動相言內無三受者三受生起
001_0627_c_16L本來寂滅故諸心數中觸受相近
001_0627_c_17L有大勝能故擧此二通遣餘法也
001_0627_c_18L耳鼻舌身者謂耳耳觸耳識等也
001_0627_c_19L意意識者是第六識未來名心
001_0627_c_20L去名意現名意識依隨轉門擧此
001_0627_c_21L三名爲顯三世皆空寂故末那梨耶
001_0627_c_22L第七第八皆同眼識故亦不生也
001_0627_c_23L廣釋文竟次言寂滅心者近結八識
001_0627_c_24L「二」作「一」{甲}

001_0628_a_01L“무생심이다.”라는 것은 멀리로는 자체가 적멸하여 무생임을 결론지은 경문이다.

나) 그렇지 않다는 것을 언급함

만약 적멸심이 발생하거나 만약 무생심이 발생하면 그것은 유생행이지 무생행이 아니다. 그래서 안으로 삼수三受와 삼행三行과 삼계三戒가 발생한다.

이는 둘째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언급한(擧非) 것이다.32)
소득이 있다고 간주하는 대승의 수행자는 팔식을 비우지 못하여 그 적멸심에 어긋난다.33) 그러므로 “적멸심이 발생한다.”고 하였다.
출세간심이 무생인 줄을 모르고 소위 유심생으로 무상의 도리를 증득했다고 간주한다. 그러므로 “무생심이 발생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곧 세간의 유전행으로 출세간의 무생법인의 수행에 어긋난다. 그러므로 “그것은 유생행이지 무생행이 아니다. 그래서 안으로 삼수와 삼행과 삼계가 발생한다.”고 하였다.
“삼행”이란 몸·입·생각으로 짓는 것으로서, 선한 행위가 되기도 하고 불선의 행위가 되기도 한다.
“삼계”란 몸·입·생각으로 그치는 것으로, 오직 선한 행위만 된다. 이 삼행과 삼계가 발생시키는 것이 인이 되어 삼유三有(欲界有·色界有·無色界有)에 태어나 삼수三受(苦受·樂受·不苦不樂受)를 다 받는다. 이와 같이 유전하므로 해탈을 터득하지 못한다.

다) 그렇다는 것을 드러냄

그러나 만약 적멸생심조차 불생이 되면34) 마음이 항상 적멸하여 공능도 없고 작용도 없으며, 적멸의 증득상도 없고 또한 적멸의 증득상이 없다는 것에도 머물지 않는다. 이처럼 모든 처소에 머묾이 없어 무상無相을 총지하면 곧 삼수가 없다. 이에 삼수 등의 세 가지가 모두 적멸하고, 청정에도 머묾이 없어 삼매에 들어가지도 않으며, 좌선에도 머물지 않는다. 이것이 곧 무생이고 무행이다.”

이는 셋째로 그렇다는 것을 드러낸(顯是) 것이다.35)
“만약 적멸생심조차 불생이 되면” 앞의 “만약 적멸심이 발생하거나”라는 구절에 대한 반대로서, 발생하는 모든 마음을 버리고 발생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마음이 항상 적멸하면 공능도 없고 작용도 없다.”는 것은 앞의 “만약 무생심이 발생하면”이라는 구절에 대한 반대로서, 모든 생·멸·기·동의 모습을 떠나 있고, 또한 작의·분별·공능·작용도 없다는 것이다.
“적멸의 증득상도 없다.”는 것은 비록 생기하는 마음을 버렸지만 적멸상조차 남겨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적멸의 증득상이 없다는 것에도 머물지 않는다.”는 것은

001_0628_a_01L空寂之文及無生心者遠結軆寂
001_0628_a_02L生之文

001_0628_a_03L
若生寂滅心若生無生心是有生行
001_0628_a_04L非無生行內生 [32] 三受三行三戒

001_0628_a_05L
此是第二擧非謂有所得大乘學者
001_0628_a_06L不空八識違其寂滅故言生寂滅心
001_0628_a_07L不知出世心之無生謂有心生證無
001_0628_a_08L相理故言生無生心直是世間流轉
001_0628_a_09L之行而乖出世無生忍行故言是有
001_0628_a_10L生行等也言三行者身口意作通善
001_0628_a_11L不善言三戒者身口意止唯取其
001_0628_a_12L生此三行三戒爲因而生三有
001_0628_a_13L具受三受如是流轉不得解脫

001_0628_a_14L
[33] 寂滅生心則不生心常寂滅無功
001_0628_a_15L無用不證寂滅相亦不住於無證
001_0628_a_16L處無住總持無相卽無三受三受等
001_0628_a_17L1) [34] 悉皆寂滅淸淨無住不入三昧
001_0628_a_18L不住坐禪無生無行

001_0628_a_19L
此是第三顯是言若寂滅生心不生
001_0628_a_20L反前若生寂滅心句遣諸生心
001_0628_a_21L不取生故心常寂滅無功無用者
001_0628_a_22L前若生無生句離諸生滅起動之相
001_0628_a_23L亦無作意分別功用故不證寂滅相
001_0628_a_24L雖遺生起之心不存寂滅相故

001_0628_b_01L비록 적멸상에 집착이 없지만 증득이 없다는 허물에도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모든 처소에 머묾이 없다.”는 것은 주착住著의 허물을 떠나 있음을 총체적으로 설명한 것으로 모든 주처에 전혀 집착이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처소라는 것은 만약 발생과 기동을 부정하면 적멸에 집착하는 꼴이 되고, 만약 증득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면 증득이 없다는 것에 집착하는 꼴이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처소에도 모두 집착이 없다는 것이다.
“무상을 총지한다.”는 것은 갖추고 있는 공덕을 총체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무생심에는 모든 수행의 공덕이 보존되어 있는데 다 같이 일미이고 무차별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에 삼수 등 세 가지가 없다.”는 것은 앞의 “안으로 삼수와 삼행과 삼계가 발생한다.”라는 구절에 대한 반대로서 유전하는 인·과의 모습을 멀리 떠나 있기 때문이다.
“모두 적멸하다.”는 것은 삼수·삼행·삼계가 본래 공적한 줄을 통달했기 때문이다.
“청정에도 머묾이 없다.”는 것은 능달심은 공에도 집착이 없기 때문이다.
“삼매에도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은 세간에서 선정에 들어간 마음까지도 잊는 것이다.
“좌선에도 머물지 않는다.”는 것도 역시 세간에서 선의 고요함(禪靜)에 집착하는 것까지도 부정하는 것이다.
만약 이러할진댄 곧 생기심도 없고 또한 분별행도 없으므로 “이것이 곧 무생이고 무행이다.”라고 말한다.

사. 의문점을 거듭 진술함

심왕보살이 여쭈었다.
“좌선은 들뜨고 움직이는 마음을 섭수하여 미혹하고 어지러운 모든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인데, 어찌하여 좌선하지 말라는 것입니까?”

이는 일곱째로 의문점을 거듭 진술한 것이다. 의문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무릇 모든 선정은 들뜨고 움직이는 생각을 섭수하여 산란한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 출세간의 무생행과 무생심에서도 역시 선정에 들어가 머물지 말라고 하는가. 만약 좌선을 하지 않으면 반드시 요동치고 말 것이다.” 이와 같은 의문이 들기 때문에 앞의 부처님 말씀을 이어받아 질문한 것이다.

아. 의문점을 해결해 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여, 좌선을 한다고 하면 곧 움직임이 된다. 그래서 움직임도 없어야 하고 좌선을 한다는 것이 없어야 곧 무생선이다. 좌선의 자성은 무생으로서 유생을 떠나 있는데, 이것이 좌선의 진정한 모습이다. 좌선의 자성은 무집착(無住)으로서

001_0628_b_01L亦不住於無證者雖無取寂滅相不
001_0628_b_02L墮無證過故可處無住者摠明離住
001_0628_b_03L着過諸可住處皆無所住故可住
001_0628_b_04L處者若遣生起則可住寂滅若遣
001_0628_b_05L有證則可住無證如是可處皆無
001_0628_b_06L住故摠持無相者摠顯具功德
001_0628_b_07L無生心持諸行德而同一味無差別
001_0628_b_08L相故則無三受等三者反前內生三
001_0628_b_09L受等句遠離流轉因果相故悉皆寂
001_0628_b_10L滅者達三受等本來空故淸淨無
001_0628_b_11L住者能達之心無住空故不入三
001_0628_b_12L昧者能亡世間入定心故不住坐禪
001_0628_b_13L亦遣世間住禪靜故若能如是
001_0628_b_14L則無生起之心亦無分別之行故言
001_0628_b_15L無生無行也

001_0628_b_16L
心王菩薩言禪能攝動定諸幻亂
001_0628_b_17L何不禪

001_0628_b_18L
此是第七陳疑疑意而言凡諸禪定
001_0628_b_19L能攝掉動之念令定散亂之心云何
001_0628_b_20L出世無生行心亦不入住於禪定耶
001_0628_b_21L如其不禪則應是動有如是疑故乘
001_0628_b_22L彼問也

001_0628_b_23L
佛言菩薩禪卽是動不動不禪是無
001_0628_b_24L生禪禪性無生離生禪相禪性無住

001_0628_c_01L집착(住)을 떠나 있는데, 이것이 좌선의 작동이다. 만약 좌선의 자성에는 움직임(動)과 고요함(靜)이 없음을 안다면 그것이 곧 무생법인의 터득이다. 그래서 무생법인의 반야도 또한 집착에 의지하지 않고, 무생법인의 마음도 또한 움직임에 의지하지 않는다. 좌선은 바로 이러한 지혜이기 때문에 무생법인의 반야바라밀을 터득한다.”

이는 여덟째로 의문점을 해결해 준 것이다.
“좌선을 한다면 곧 움직임이 된다.”고 한 것은 소위 세간의 좌선은 비록 산란하지는 않지만 경계상에 집착하고, 경계상에 집착하는 마음이 발생하면 기동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기동이 발생되는 선을 벗어나야 이정理定(무루의 선정)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곧 무생선이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이정理定의 자성은 무생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좌선의 자성은 무생이다.”라고 하고, 또 그대로 무생일 뿐만 아니라 적멸에도 집착이 없으므로 “좌선의 자성은 무집착이다.”라고 한다.
만약 발생이 있으면(有生) 그것은 곧 분별상이고, 집착(住著)이 있으면 그것은 곧 요동이다. 그러나 지금은 곧 그와는 반대이기 때문에 “유생을 떠나 있는데 이것이 진정한 좌선의 모습이다. 집착을 떠나 있는 것이 좌선의 작동이다.”라고 한 것이다.
지금까지의 여러 구절은 이정理定의 모습을 설명한 것이다. “만약 좌선의 자성에는 움직임과 고요함이 없음을 안다면” 이하부터는 이지理智(무루지혜)의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것은 단지 동일한 자체에 대하여 두 가지 뜻으로 나눈 것일 뿐이다.36)
“좌선의 자성에는 움직임이 없음을 안다면”이란 좌선의 자성이 무생인 줄을 알기 때문이고, “좌선의 자성에는 고요함(靜)이 없음을 안다면”이란 좌선의 자성이 무주인 줄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이 곧 무생법인의 터득이다.”라는 것은 좌선의 도리가 무생인 줄을 터득하기 때문이다.
“무생법인의 반야”라는 것은 좌선의 수행이 무생인 줄을 터득하기 때문이다.
“또한 집착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생지無生智는 도리(理)에 의지하지도 않고 집착(住)에 의지하지도 않아 능과 소를 떠나 있기 때문이다.
“무생법인의 마음도 또한 움직임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비록 도리와 집착에 의지하지 않을지라도 유생심이 작동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무생법인의 반야를 말미암아 피안에 도달하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이라 하였다.
지금까지 위의 여덟 부분의 전체는 둘째로 부정하여 따지는 문답에 해당한다.37)

③ 보살이 이해함

심왕보살이 여쭈었다.
“존자이시여, 무생법인의 반야는 일체처에 머묾도 없고, 일체처에서 떠나 있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무생법인의 마음에는 머무는 처소도 없고, 처소에 머무는 마음도 없으며,

001_0628_c_01L離住禪動若知禪性無有動靜卽得無
001_0628_c_02L無生般若亦不依住心亦不動
001_0628_c_03L是智故故得無生般若波羅密

001_0628_c_04L
此是第八決疑言禪卽是動者謂世
001_0628_c_05L間禪雖非散亂而取境相取相心
001_0628_c_06L生起動故能離如是生動之禪
001_0628_c_07L能得入理定故言是無生禪如是理
001_0628_c_08L性無生動故言禪性無生非直
001_0628_c_09L無生亦無住寂故言禪性無住若有
001_0628_c_10L生則是相有住着則是動今卽反
001_0628_c_11L故言離生禪相離住禪動上來
001_0628_c_12L諸句明理定相知禪性下顯理智
001_0628_c_13L唯就一體義分爲二知禪性無
001_0628_c_14L有動者知禪性無生故無有靜者
001_0628_c_15L知禪性無住故卽得無生者得理無
001_0628_c_16L生故無生般若者得行無生故
001_0628_c_17L不依住者謂無生智不依理住
001_0628_c_18L能所故心亦不動者雖不依理住
001_0628_c_19L而非生心動故由如是智能到彼岸
001_0628_c_20L故言般若波羅密也上來八分合爲
001_0628_c_21L第二反詰問答

001_0628_c_22L
心王菩薩言尊者無生般若於一切
001_0628_c_23L處無住於一切處無離心無住處
001_0628_c_24L「三」作「二」{甲}

001_0629_a_01L집착하는 대상도 없고, 집착하는 마음도 없으므로 그 마음은 무생이고 무주입니다.38) 이와 같이 머무는 마음이 곧 무생의 머묾입니다.
존자이시여, 무생심과 무생행39)은 불가사의합니다. 따라서 불가사의 가운데서 가설可說이기도 하고 불가설不可說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셋째로 보살이 이해하는 대목이다.40)
“일체처”는 일체의 진眞·속俗·동動·적寂 등을 가리킨다.
“머묾도 없다.”는 것은 이 일체처에서 무소득이기 때문이다.
“떠나 있지도 않습니다.”라는 것은 이 일체처에서 터득하지 못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저 일체처는 모두가 긍정하는 것도 아니고(不然) 부정하는 것도 아니기(非不然) 때문이다.
“그 마음에는 머무는 처소도 없다.”는 것은 주처의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처소에 머무는 마음도 없다.”는 것은 머무는 주체인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집착하는 대상도 없고 집착하는 마음도 없다.”는 것은 앞의 두 구절41)을 합한 것인데, 집착의 대상(有處)도 없고 집착하는 마음(有住心)도 없기 때문이다.
“마음은 무생이고 무주입니다.”라는 것은 무생과 무주의 마음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머무는 마음”이란 앞의 “일체처에 머묾도 없고 일체처에서 떠나 있지도 않습니다.”라는 대목을 결론맺은 것인데, “떠나 있지도 않다.”라는 뜻은 머묾에 의탁하여 시설(假設)한 것이다.
“곧 무생의 머묾입니다.”라는 것은 앞의 “그 마음은 소주처도 없고 능주처의 마음도 없으며 집착하는 대상도 없고 집착하는 마음도 없으므로 그 마음은 무생이고 무주입니다.”의 대목을 결론맺은 것인데, 곧 주住가 그대로 무주無住이고 무주無住가 그대로 주住이기 때문이다.
“무생심과 무생행은 불가사의합니다.”는 것은 언설을 떠나 있고 사려를 단절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불가사의 가운데서 가설이기도 하고 불가설이기도 합니다.”라는 것은 언설을 떠나 있고, 또한 언설을 떠나 있다는 것도 떠나 있는 것이다. 언설을 떠나 있기 때문에 불가설이라 말하고, 언설을 떠나 있다는 것도 떠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또한 가설이라 말한다.
“가설이기도 하다.”는 것은 부정하는 것도 아닌 것(非不然)이고, “불가설이기도 합니다.”라는 것은 긍정하는 것도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총설로서 “가설이기도 하고 불가설이기도 합니다.”라고 말한다. 언설에 가설可說과 불가설不可說이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사유에도 또한 가사의可思議와 불가사의不可思議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언설의 측면만 들어서 드러냈을 뿐이다.

④ 여래가 확정하여 서술함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래, 그렇다.”

이는 넷째로 여래가 확정하여 서술하는 것이다.42) 위에서 이해한 것이 도리에 계합할 뿐만 아니라,

001_0629_a_01L處住心無住無心心無生住如此住
001_0629_a_02L卽無生住尊者心無生行 [35] 不可思
001_0629_a_03L不思議中可不可說

001_0629_a_04L
此是第三領解一切處者一切眞俗
001_0629_a_05L動寂等處言無住者於此一切
001_0629_a_06L所得故言無離者於此一切無
001_0629_a_07L不得故所以然者彼一切處悉皆
001_0629_a_08L非然非不然故心無住處者無所住
001_0629_a_09L處故無處住心者無能住心故
001_0629_a_10L住無心者合前二句以無有處有住
001_0629_a_11L之心故心無生住者不無無生無住
001_0629_a_12L之心故如此住心者結前於一切處
001_0629_a_13L無住乃至無離無離之義1) [12]
001_0629_a_14L卽無生住者結前心無住處
001_0629_a_15L至心無生住住卽無住無住卽住故
001_0629_a_16L心無生行不可思議者離言絕慮故
001_0629_a_17L不思議中可不可說者以離言亦離
001_0629_a_18L離言故以離言故言不可說離離言
001_0629_a_19L亦可得說言可說者非不然故
001_0629_a_20L不可說者非是然故故摠說言可不
001_0629_a_21L可說如說言說有可不可當知其
001_0629_a_22L亦有可不可但擧一邊影顯之耳

001_0629_a_23L
佛言如是如是

001_0629_a_24L
此是第四述成如前領解非直2) [13]

001_0629_b_01L또한 우러러보아도 부처님의 설법에 칭합하기 때문에 거듭해서 “그래, 그렇다.”고 말한다.
「무생행품」에 대한 산문의 정설 부분은 이상으로 마친다.

(2) 설법을 찬탄함(讚說)

이하는 둘째로 게송으로 설법을 찬탄한 것이다.43) 여기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산문으로 서술하는 것이고, 둘째는 게송이다.

① 산문으로 서술함

심왕보살이 이와 같은 말씀을 듣고 나서 미증유한 것이라 찬탄하였다. 그리고 게송을 설하여 말씀드렸다.

“이와 같은 말씀을 듣고 나서”는 이 「무생행품」에 들어 있는 부처님의 말씀을 들은 것이다.

② 게송

이하 세 게송은 개별적인 송문頌文이 아니라 다만 총체적으로 찬탄한 것이다. 여기에 네 가지가 있으니, 법法·비유(喩)·합合·결結이다.

가. 법


滿足大智尊    위대한 지혜 다 갖춘 존자께서
廣說無生法    무생행법을 광대하게 설하시네
聞所未曾聞    일찍이 듣지 못한 설법을 듣고
未說而今說    듣지 못한 설법 지금 설하시네

이것은 첫째 법法을 설하는 것이다.
“듣지 못한 설법 지금 설하시네.”라고 찬탄한 것은 비록 이전에 자세하게 설법했지만, 지금 이 경문은 말은 간략하지만 뜻은 풍부하고 문장은 간략하지만 도리는 자세하니, 이와 같이 오묘한 법은 일찍이 설해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猶如淨甘露    마치 맑고 깨끗한 감로법 같아
時時乃一出    어쩌다가 단 한 번 출현한다네
難遇難思議    만나기도 어렵고 불가사의하며
聞者亦復難    설법을 듣는 것도 또 어렵다네

無上良福田    그 무엇보다 가장 좋은 복전과
最上勝妙藥    제일 높고 훌륭한 묘약 가지고
爲度衆生故    일체중생을 제도하려는 까닭에
而今爲宣說    지금 여기 베풀어 널리 설하네

나. 비유

여기의 두 구절은 둘째 비유(喩)이다.
“감로법”은 불사의 약이니, 이 『경』으로 생사를 벗어날 수 있음을 비유한 것이다.

다. 합合

그 다음 네 구절은 셋째 합合이다.
“그 무엇보다 가장 좋은 복전”은 설법을 듣는 자를 찬탄한 것이다.
“제일 높고 훌륭한 묘약 가지고”란 사람들이 듣는 설법에 계합된 것이다.

라. 결結

마지막 두 구절은 넷째 결結이다.

(3) 설법을 듣고 얻은 이익을 설명함

그때 대중들이 이 설법을 듣고 나서 모두 무생과 무생의 반야를 터득하였다.44)


001_0629_b_01L當道理亦乃仰稱佛說所以重言如
001_0629_b_02L是如是長行正說竟在於前

001_0629_b_03L
心王菩薩聞如是言歎未曾有而說
001_0629_b_04L偈言

001_0629_b_05L
此下第二以偈讃說於中有二
001_0629_b_06L序後頌聞如是言者聞此一品之內
001_0629_b_07L佛言也

001_0629_b_08L
滿足大智尊廣說無生法聞所未曾聞
001_0629_b_09L未說而今說

001_0629_b_10L
此下三頌非別頌文但是摠歎
001_0629_b_11L中有四法喩合結此是第一法說
001_0629_b_12L讃歎未說而今說者雖前廣說而今
001_0629_b_13L此經言略義豊文省理詳若斯之
001_0629_b_14L未先說故

001_0629_b_15L
猶如淨甘露時時乃一出難遇難思議
001_0629_b_16L聞者亦復難無上良福田最上勝妙藥
001_0629_b_17L爲度衆生故而今爲 [36] 宣說

001_0629_b_18L
此下二句是第二喩言甘露者
001_0629_b_19L死之藥以喩此經能出生死次有
001_0629_b_20L四句是第三合無上良福田者
001_0629_b_21L能聞者最上勝妙藥者合所聞法
001_0629_b_22L下之二句第四結也

001_0629_b_23L
爾時衆中聞設此已皆得無生無生
001_0629_b_24L般若

001_0629_c_01L
이는 셋째 당시의 대중이 얻은 이익이다.45) 지전地前의 범부가 이 「무생행품」의 설법을 듣고서 초지의 무생법인을 터득한 것이다.

3) 「본각리품本覺利品」

일체의 유정은 시작이 없는 이래부터 무명의 장야長夜에 빠져 망상의 대몽을 꾼다. 이에 보살은 일미관행을 닦아서 무생법인을 터득하였다. 그때 보살은 중생이 본래 적정하여 그대로 본각인 줄을 통달하고서 일미의 침상에 누워 본각의 이익으로 중생을 제도하였다. 본 품에서는 이러한 도리를 드러내므로 「본각리품」46)이라 한다.
일미관행을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이하는 그 가운데 셋째로 본각의 이익에 대하여 설명한다. 무생행에 의해서 본각을 알아야 바야흐로 일체중생을 널리 교화하고 또한 그들에게 이익을 베풀어 줄 수가 있다. 이런 뜻을 말미암아 다음으로 본각에 대하여 연설한다.
경문에 세 부분이 있다. 첫째는 본각의 이익에 대하여 널리 설명하고, 둘째는 게송으로 찬탄하고, 셋째는 그 당시의 대중이 이익을 터득한다.

(1) 본각의 이익에 대하여 널리 설명함

첫째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기동을 인유하여 적정을 설명함으로써 본각의 이익의 종지를 간략하게 표한 것이다. 둘째는 숨어 있는 것(微)으로부터 드러난 것(著)에 이르기까지 본각의 이익의 의의를 널리 설명한 것이다.

① 본각의 이익의 종지를 간략하게 표함

다시 첫째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신체의 이동에 의지하여 본각의 이익을 드러내고, 둘째는 문답으로 본각의 이익을 드러내고, 셋째는 광명을 내어 본각의 이익을 찬송한다.

가. 신체의 이동에 의지하여 본각의 이익을 드러냄

그때 무주보살이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일미진실의 불가사의함을 듣고서, 멀리에서 다가와 부처님 자리 곁에서 전념으로 경청하여 청정하고 명백한 경지에 들어 몸과 마음이 부동하였다.

처음에 “무주보살”이라고 한 것은, 이 사람이 비록 본각에는 본래 기동이 없음을 통달했지만 적정에도 집착하지 않으면서

001_0629_c_01L
此是第三時衆得益地前凡夫聞說
001_0629_c_02L此品能得初地無生忍故

001_0629_c_03L
本覺利品3)第四 [14]

001_0629_c_04L
一切有情無始已來入無明長夜
001_0629_c_05L作妄想大夢菩薩修觀獲無生時
001_0629_c_06L通達衆生本來寂靜直是本覺臥一
001_0629_c_07L如床以是本利利益衆生此品顯
001_0629_c_08L是道理故名本覺利品

001_0629_c_09L
爾時無住菩薩聞佛所說一味眞實
001_0629_c_10L不可思議從遠近來親如來座專念
001_0629_c_11L諦聽入淸白處身心不動

001_0629_c_12L
別明觀行六分之中此下第三明本
001_0629_c_13L覺利依無生行能會本覺方得普
001_0629_c_14L饒益一切由是義故次演說之
001_0629_c_15L就文有三一者廣明本覺利益
001_0629_c_16L以偈讃頌三者時衆得益初中
001_0629_c_17L有二一者因動明靜略標本利之
001_0629_c_18L二者從微至著廣說本利之義
001_0629_c_19L初中有三一者寄身移動以標本
001_0629_c_20L二者因言往復以標本利三者
001_0629_c_21L放光讃頌本利初中言無住菩薩
001_0629_c_22L此人雖達本覺本無起動而不
001_0629_c_23L「設」作「說」{甲}「契」作「▼(㓞/廾)甲}「第四」
001_0629_c_24L無{甲}

001_0630_a_01L항상 널리 교화하기 때문에 그 덕에 의하여 명호를 내세워 무주라 한 것이다. 무주의 덕은 본각의 이익(本利)47)에 계합된다. 그러므로 이 사람을 인유하여 그 종지를 표한 것이다.
“일미진실의 불가사의”라는 것은 곧 앞의 「무생행품」에서 “무생심과 무생행48)은 불가사의합니다.”라고 말한 것을 가리킨다.
“멀리에서 다가와 부처님 자리 곁에서”란 이전의 자리는 부처님 자리에서 멀었지만, 「무생행품」을 듣고서 부처님 근처로 다가가 앉은 것이다. 이것은 곧 이전에는 심오한 설법을 듣지 못하여 그 지위가 범부로서 불과佛果에서 멀었지만, 지금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서 본각의 이익을 터득하였으므로 자신은 반드시 불과를 터득할 근처에 있음을 안다는 것을 드러낸다.
“전념으로 경청하여 청정하고 명백한 경지에 들어 몸과 마음이 부동하였다.”는 것은 이미 부처님 자리 곁에서 전념하여 법을 잘 듣고서 본래청정하고 본래 명백한 경지에 들어가 본각의 적정을 따라서 몸과 마음이 부동한 것이다. 이것을 인유하여 곧 본각에 들어갔을 경우에는 본래 기동이 없음을 통달하여 무소득을 터득했음을 나타낸다.

나. 문답으로 본각의 이익을 드러냄

그때 부처님께서 무주보살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어디에서 왔고, 지금 어느 경지에 도달했는가?”
무주보살이 여쭈었다.
“저는 근본이 없는 경지에서 왔고, 지금 근본이 없는 경지에 도달했습니다.”49)

이하는 둘째 문답으로 본의 이익을 드러낸다. 여기에 세 가지가 있으니, 질문과 답변과 서술하여 마무리 짓는 것이다.

( 가) 질문)

나) 답변

둘째의 답변 내용은 범부의 지위로부터 와서 성인의 지위에 도달한 것을 설명한 것이다. 성인의 지위에 도달했을 때에 예전과 지금을 되돌아보니 다음과 같다.
예전 범부의 지위에서 처음으로 발심했을 때는 스스로의 마음은 본래 기동이 없다고 믿었으니, 기동의 근본이 불가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성인의 지위에서 무생을 터득하고 보니 스스로의 마음은 본래 무생임을 깨쳐 알았으니, 생기의 근본이 무소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처음 근본이 없는 곳으로부터 와서 지금 도달한 경지도 또한 근본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이미 근본이 없음을 언급하였으므로 지말도 없는 줄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001_0630_a_01L住寂靜恒起普化依德立號名曰
001_0630_a_02L無住無住之德契合本利故因此
001_0630_a_03L以表其宗言一味眞實不可思議
001_0630_a_04L則前品說心無生不可思議等也
001_0630_a_05L從遠近來親如來座者其先座處
001_0630_a_06L佛座遠聞前品已遷至近處表其
001_0630_a_07L先時未聞深法位在凡愚去佛果
001_0630_a_08L今聞佛說得本覺利自知當得
001_0630_a_09L佛果在近也專念諦聽入淸白處身
001_0630_a_10L心不動者已近佛座時專念於諦聽
001_0630_a_11L入本淸淨明白之處隨本覺靜身心
001_0630_a_12L不動因此卽表入本覺時達本無動
001_0630_a_13L得無所得也

001_0630_a_14L
爾時佛告無住菩薩言汝從何來
001_0630_a_15L至何所無住菩薩言尊者我從無本
001_0630_a_16L今至無本所

001_0630_a_17L
此下第二因言往復於中有三
001_0630_a_18L述成第二答意明從凡位來至
001_0630_a_19L聖位至聖位時顧尋古今古在凡
001_0630_a_20L始發趣時自信己心本無起動
001_0630_a_21L起動之本不可得故今至聖位得無
001_0630_a_22L生時證知自心本來無生生起之本
001_0630_a_23L無所得故故知始從無本處來今所
001_0630_a_24L至處亦無本所旣擧無本當知無

001_0630_b_01L지말도 없고 근본도 없으니, 온 곳 없고 도달하는 곳도 없다. 다만 부처님께서 질문하신 말씀을 받들고 따르는 입장에서 ‘온다’거나 ‘도달한다’는 말을 가탁(假寄)한 것이다. 비록 온 곳도 없고 도달한 곳도 없지만, 온 곳과 도달한 곳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온 곳과 도달한 곳을 인유하여 온 곳도 없고 도달한 곳도 없음을 드러내었으니, 도달한 곳과 온 곳이 모두 근본이 없기 때문이다.

다) 서술하여 마무리 지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는 본래 온 곳이 없고 지금 또한 도달한 곳도 없다.50) 그대가 터득한 본각의 이익은 불가사의하니, 곧 대보살마하살이다.”

이는 서술하여 마무리를 짓는 것이다. 서술하여 마무리를 짓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온 곳과 도달한 곳이 이미 똑같이 근본이 없다. 근본이 없다는 점이 똑같은즉 온 것도 없고 도달한 것도 없다. 왜냐하면 온 곳이 도달한 곳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본래 온 곳이 없고, 도달한 곳이 이미 온 곳과 똑같기 때문에 지금 바야흐로 도달한 곳도 없다. 또한 온 곳이 이미 근본이 없기 때문에 온다는 것이 없고 오지 않는다는 것도 없으며, 지금 도달한 곳도 또한 근본이 없기 때문에 도달한 것이 없고 도달하지 않은 것도 없다.
이미 온 바도 없고 도달한 바도 없어서 본래 적정하기 때문에 “그대가 터득한 본각의 이익은 불가사의하다.”고 하였고, 이미 본각의 이익을 터득하여 스스로도 이롭게 하고 남도 이롭게 하므로 “곧 대보살마하살이다.”라고 하였다.

다. 광명을 내어 보살을 칭찬함

이에 대광명을 내어 삼천대천세계를 널리 비추고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大哉菩薩     참으로 훌륭하다 보살이여
智慧滿足     지혜를 빠짐없이 갖추고서
常以本利     언제나 본각의 이익으로써
利益衆生     중생에게 이익을 베풀도다

於四威儀     행주좌와 일체의 행위에도
常住本利     항상 본각의 이익에 머물러서
導諸群庶     일체의 중생을 이끌어들여
不來去去     거듭하여 오감을 없앤다네51)

이하는 셋째 여래께서 광명을 내어 보살을 칭찬함을 드러낸 것이다.52)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가) 경문(經家)의 설명

첫째는 경문(經家)의 설명이다. “대광명을 내어 삼천대천세계를 널리 비춘다.”고 한 이유는 터득한 대지혜의 광명으로 세간의 어둠을 비추어 세간으로 하여금 광명을 얻도록 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이것은 여래께서 위에서 칭찬하신 것53)을 증성證成한 것이다.

나) 게송으로 무주보살을 칭찬함

“참으로 훌륭하다 보살이여”라는 것은 무주보살을 특별히 칭찬한 것이다.

001_0630_b_01L無末無本者無來無至矣但仰順
001_0630_b_02L佛問之辭假寄來至之言雖復不有
001_0630_b_03L來至而非都無來至故故因來至
001_0630_b_04L無來至至所來處同無本故

001_0630_b_05L
佛言汝本不從來今亦 [37] 不至所汝得
001_0630_b_06L本利不可思議是大菩薩摩訶薩

001_0630_b_07L
此是述成述成意言來處至處
001_0630_b_08L同無本無本處同則無來至所以
001_0630_b_09L然者來處不異於至處故本無從來
001_0630_b_10L至處旣同於來處故今無所至又復
001_0630_b_11L來處旣無本故無來不來今所至處
001_0630_b_12L亦無本故無至不至旣無來無至
001_0630_b_13L本來寂靜故言汝得本利不可思議
001_0630_b_14L旣得本利自利利他故言是大菩薩
001_0630_b_15L摩訶薩也

001_0630_b_16L
卽放大光遍照大 [38] 千界而說偈言

001_0630_b_17L
大哉菩薩智慧滿足常以本利利益
001_0630_b_18L衆生於四威儀常住本利導諸羣庶
001_0630_b_19L不來去去 [39] 不去

001_0630_b_20L
此下第三如來放光表讃菩薩於中
001_0630_b_21L有二先經家序所以放大光明 [40]
001_0630_b_22L大千界者爲表得大智慧光明照世
001_0630_b_23L間闇令得光明故證成如來前所讃
001_0630_b_24L大哉菩薩者別讃無住菩薩

001_0630_c_01L
“지혜를 빠짐없이 갖추고서”라는 것은 안다는 것에 집착이 없어서 모르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행주좌와 일체의 행위에도 항상 본각의 이익에 머물러서”라는 것은 위에서 서술한 “멀리에서 다가와 부처님 자리 곁에서”라는 것처럼 이를 인유하여 본각의 이익을 시현한 것이다.
“거듭하여 오감을 없앤다네.”라는 것은 적정하면서도 항상 교화작용을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옴을 없앤다.’는 것은 이끌어 교화함을 따라 출세간을 터득케 하여 다시는 세간에 떨어져 돌아오지 않게 하는 것이고, ‘감을 없앤다.’는 것은 터득한 불퇴전의 경지를 따라서 세간을 벗어나 출세간으로 잘 가게(善逝)하는 것이다.

② 본각의 이익의 의의를 널리 연설함

아래는 둘째 본각의 이익의 의의를 널리 연설하는 것이다.54) 여기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그대로 널리 연설하고, 둘째는 거듭하여 연설한다.

가. 그대로 널리 연설함

첫째의 그대로 널리 연설한 것에서 첫째는 질문이고, 둘째는 답변이다.

가) 질문

그때 무주보살이 부처님께 사뢰어 여쭈었다.
“존자이시여, 어떤 이익을 베풀어서 중생의 일체정식을 전변시켜 암마라식55)에 들게 하는 것입니까?”56)

“어떤 이익을 베풀어서”라는 것은 교화하는 사람이 베푸는 이익의 뜻을 질문한 것이다. 곧 위의 게송에서 “일체의 중생을 이끌어 들여”라는 구절에 대하여 물은 것이다.
“중생의 일체정식을 전변시켜 암마라에 들게 하는 것입니까.”라는 것은 교화받는 사람의 모든 정식이 전변되는 뜻을 질문한 것이다. 곧 위의 게송에서 “거듭하여 오감을 없앤다네.”라는 구절에 대하여 물은 것이다.
“일체정식”은 곧 팔식을 가리킨다.
“암마라식”은 제9식을 가리킨다. 진제 삼장이 말한 구식九識에 대한 뜻은 바로 이 경문에 의거하여 제기한 것이다. 자세한 것은 진제삼장의 『결정장론』의 설명과 같다.57)

나) 답변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제불여래는 항상 일본각一本覺으로 제식을 전변시켜 암마라식에 들어가게 한다. 왜냐하면 일체중생의 본각에 대하여 항상 일본각으로써 모든 중생을 일깨워 저 중생으로 하여금 다 본각을 터득케 하고 모든 정식이 공적하여 무생임을 일깨워 주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결정본성58)으로서 본래 기동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둘째 답변이니, 본각의 이익의 의의를 곧장 펼친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표방이고 둘째는 해석이다.

(가) 표방

“제불여래는 항상 일본각으로”라는 것은 교화하는 사람의 본원을 표방하였다.
“제식을 전변시켜 암마라식에 들어가게 한다.”는 것은

001_0630_c_01L慧滿足者以無所知無所不知故
001_0630_c_02L四威儀常住本利者如前所序從遠
001_0630_c_03L近來親如來座因此示現本覺利故
001_0630_c_04L不來去去者寂而恒化故言不來者
001_0630_c_05L隨所導化令得出世不退還故言去
001_0630_c_06L去者隨得不退展轉出離而善逝故

001_0630_c_07L
爾時無住菩薩而白佛言尊者以何
001_0630_c_08L利轉而轉衆生一切情識入唵摩羅

001_0630_c_09L
此下第二廣演本利之義於中有二
001_0630_c_10L一者直廣二者重演初直廣中
001_0630_c_11L問後答以何利轉者是問能化轉利
001_0630_c_12L問前導諸之句而轉衆生等者
001_0630_c_13L是問所化轉諸識義問前去去之句
001_0630_c_14L一切情識卽是八識唵摩羅者
001_0630_c_15L第九識眞諦三藏九識之義依是
001_0630_c_16L文起如彼章說

001_0630_c_17L
佛言諸佛如來常以一覺而轉諸識
001_0630_c_18L入唵 [41] 摩羅何以故一切衆生本覺
001_0630_c_19L以一覺覺諸衆生令彼衆生皆得本
001_0630_c_20L覺諸情識空寂無生何以故決定
001_0630_c_21L本性本無有動

001_0630_c_22L
是答正廣本利之義於中有二
001_0630_c_23L標後釋諸佛如來常以一覺者
001_0630_c_24L標能化之本而轉諸識入唵摩羅者

001_0631_a_01L교화받는 사람의 전변을 표방하였다.

(나) 해석

해석에 두 가지가 있으니, 곧장 해석하는 것과 전변하여 해석하는 것이다.

㉮ 곧장 해석함

곧장 해석하는 것 가운데서 “왜냐하면 일체중생의 본각”이라고 한 것은 앞의 교화하는 사람의 본원이 일본각임을 해석한 것이다. 일체중생은 동일한 본각이기 때문에 일본각이라 한다.
제불은 이것을 체득하여 이에 널리 교화하기 때문에 “항상”이라 한다. 그래서 이 본각으로써 남을 일깨워 주기 때문에 “항상 일본각으로써 모든 중생을 일깨운다.”고 한다.
“저 중생으로 하여금 다 본각을 터득케 한다.”는 것은 교화받는 사람이 전변되어 암마라에 들어간다는 구절을 해석한 것이다. ‘본각’은 암마라식을 가리킨다. ‘본각을 터득케 한다.’는 것은 암마라식에 들어간다는 뜻을 해석한 것으로, 본각에 들어갈 때 모든 팔식이 본래 적멸함을 깨친다는 것이다.
구경을 깨치기 때문에 제식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정식은 공적하여 무생이다.”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제식을 전변시켜”라는 구절을 그대로 해석한 것이다.
이 경문은 본각과 시각을 모두 드러낸 것이니, “일체중생의 본각에 대하여 항상 일본각으로써 모든 중생을 일깨워 저 중생으로 하여금 다 본각을 터득케 한다.”는 것은 본각의 뜻이고, “모든 정식은 공적하여 무생임을 일깨워 주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시각의 뜻이다. 이것은 시각이 곧 본각과 똑같음을 드러낸 것이다.

㉯ 전변하여 해석함

“왜냐하면 결정본성으로서 본래 기동이 없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둘째 전변하여 해석하는 것이니, 앞의 시각에서 깨친 바59)가 적멸함을 해석한 것이다. 비록 팔식 모두가 수연으로 기동하여 전변되지만, 그 결정성을 찾고 나면 모두 무소득이기 때문에 “결정본성으로서 본래 기동이 없다.”고 한다. 본래 기동이 없으므로 본래 적멸하다.

나. 거듭하여 연설함

이하는 둘째로 본각의 이익의 의의를 거듭하여 연설하는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시각을 연설하고, 둘째는 본각을 연설한다.

가) 시각을 연설함

첫째 시각을 연설하는 것에도 또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제식이 공적함을 연설하고, 둘째는 제식이 무생임을 연설한다. 첫째 제식이 공적하다는 것은 곧 소각所覺으로서의 시각이고, 둘째 제식이 무생이라는 것은 능각能覺으로서의 시각을 말한다.

(가) 제식諸識이 공적함을 연설함

첫째의 제식이 공적하다는 것에는 여섯 차례의 문답이 있다.

001_0631_a_01L是標所化之轉釋中有二正釋轉釋
001_0631_a_02L正釋中言一切衆生本覺者釋前能
001_0631_a_03L化之本一覺一切衆生同一本覺
001_0631_a_04L言一覺諸佛體此乃能普化故言
001_0631_a_05L常以以此本覺令他覺故故言常
001_0631_a_06L以一覺覺諸衆生令彼衆生皆得
001_0631_a_07L本覺者是釋所化轉入之句本覺
001_0631_a_08L正是唵摩羅識得本覺者是釋入義
001_0631_a_09L入本覺時覺諸八識本來寂滅
001_0631_a_10L究竟故諸識不生故言諸識寂滅無
001_0631_a_11L是句正釋轉諸識句此文具顯
001_0631_a_12L本始二覺謂一切衆生本覺等者
001_0631_a_13L本覺義覺諸情識寂滅無生者是始
001_0631_a_14L覺義是顯始覺卽同本覺也何以
001_0631_a_15L故下第二轉釋釋前始覺所覺寂
001_0631_a_16L雖諸八識隨緣動轉而求定性
001_0631_a_17L皆無所得故言決定本性本無有動
001_0631_a_18L本無動故本寂滅也

001_0631_a_19L
無住菩薩言可一八 [42] 皆緣境起
001_0631_a_20L如何不動

001_0631_a_21L
此下第二重演於中有二先演始覺
001_0631_a_22L後演本覺初中亦二一演諸識空寂
001_0631_a_23L二演諸識無生前是始覺之所覺
001_0631_a_24L是能覺之始覺初中卽有六番問答

001_0631_b_01L여섯 가지의 문답에도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제1과 제2의 문답은 공적함을 그대로 설명한다. 둘째, 제3의 문답은 제식은 본각과 동일한 모습이 아님을 설명한다. 셋째, 제4·제5·제6의 문답은 제식은 본각과 다른 모습이 아님을 설명한다.

㉮ 공적함을 그대로 설명함

a. 제1의 문답 : 기동起動이 없음을 설명함

무주보살이 여쭈었다.
“일체(可一)의 팔식60)은 모두 경계를 반연하여 기동하는데, 어째서 암마라식은 기동하지 않습니까?”

이 대목은 제1의 문답으로 기동이 없음을 설명한 것이다.
“가일可一”이란 일체를 말하니, 일체중생이 소유하고 있는 팔식이다.
“모두 경계를 반연하여 기동한다.”는 것은 사연四緣61) 가운데 소연연을 언급하여 기동하지 않는 점을 따진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일체의 경계가 본래 공적하고, 일체의 식도 본래 공적하다. 공적하여 반연의 자성이 없는데 어찌 반연하여 기동하겠는가?”

이것은 경계의 반연이 없어져서 모든 식이 기동하지 않음을 드러낸 것이다.

b. 제2의 문답 : 견見은 허망임을 설명함

무주보살이 여쭈었다.
“일체의 경계가 공적한데 어떻게 본다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본다는 것은 허망이다. 왜냐하면 일체의 만유는 무생無生이고 무상無相으로서 본래 자체의 명칭도 없이 다 공적하다. 일체의 법상도 또한 그와 같고, 일체중생의 몸도 또한 그와 같다. 몸조차 없는데 어찌 본다는 것인가.”

이하는 제2의 문답으로 견見은 곧 허망이고 허망하기 때문에 진정한 공적임을 설명한 것이다. 경계가 공적하기 때문에 경계가 있다고 보는 것은 곧 허망하다. 본다는 것 또한 공적하기 때문에 본다는 것이 있다고 계탁하는 것도 또한 허망하다. 이것을 해석하는 것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총체적으로 설명하고, 둘째는 개별적으로 드러낸다.

a) 총체적으로 설명함

첫째, 총체적으로 설명한 것은 다음과 같다. 오음과 십팔계 등의 존재는 본래 자체적으로 “나는 색 등이다.”라고 하지 않는다. 다만 망심을 말미암아 색 등이라 말할 뿐이다. 이런 까닭에 일체의 모든 것은 다 공적하다.

b) 개별적으로 설명함

둘째, 개별적으로 드러낸 것에서 말한 “일체의 법상도 또한 그와 같다.”는 것은 외부의 산·하·대지와 같은 육진의 법상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일체중생의 몸도 또한 그와 같다.”는 것은 내부의 색·수·상·행·식과 같은 오음의 몸을 가리킨다. 신체조차 없는데 어찌 본다는 작용이 있을 것인가.

㉯ 제3의 문답 : 제식이 본각과 같은 모습이 아님을 설명함

무주보살이 여쭈었다.
“일체의 경계가 공적하고, 일체의 몸이 공적하며, 일체의 식이 공적하니,

001_0631_b_01L於中有三一者前二問答正明空
001_0631_b_02L二者第三問答明不同相三者
001_0631_b_03L後三問答明不異相此初問答
001_0631_b_04L無起動言可一者一切之謂謂一
001_0631_b_05L切衆生所有八識皆緣境起者
001_0631_b_06L緣之中且擧緣緣以難不動

001_0631_b_07L
佛言一切境本空一切識本空空無
001_0631_b_08L緣性如何緣起

001_0631_b_09L
且遣境緣顯識無起

001_0631_b_10L
無住菩薩言一切境空如何見一本如何
有見
001_0631_b_11L本如何
言見
[43] 佛言見卽爲妄何以故一切萬
001_0631_b_12L無生無相本不自名悉皆空寂
001_0631_b_13L切法相亦復如是一切衆生身亦如
001_0631_b_14L身尙不有云何 [44]

001_0631_b_15L
此下第二問答明見是妄妄故眞
001_0631_b_16L謂境空故見有境卽是妄見亦
001_0631_b_17L空故計有見亦是妄釋中有二
001_0631_b_18L明別顯摠明者陰界等有本不自
001_0631_b_19L我爲色等但由妄心名爲色等
001_0631_b_20L是故一切悉皆空寂也別顯中言
001_0631_b_21L切法相亦如是者謂外山河等六塵
001_0631_b_22L法相一切衆生身亦如是者內色受
001_0631_b_23L等五陰之身身體尙無何有見用故

001_0631_b_24L
無住菩薩言一切境空一切身空

001_0631_c_01L본각도 또한 공적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일체의 본각은 훼손되지도 않고 괴멸되지도 않는 결정성으로서 공도 아니고 불공도 아니며 공이라 말할 수도 없고 불공이라 말할 수도 없다.”

이하는 제3의 문답으로 (제식이) 본각과 같은 모습이 아님을 설명한 것이다.
질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본각도 또한 공적할 것입니다.’라는 것은 반연으로 발생한 식이 이미 공적하듯이 반연으로 기동한 본각도 또한 공적하다는 것이다. 식이 이미 공적하기 때문에 공적한 식으로 보는 것도 허망하고, 본각 또한 공적하기 때문에 공적한 본각으로 깨친 것도 또한 허망하다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답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체의 본각’이란 말은 훼손되지도 않고 괴멸되지도 않기 때문에 공이 아니고, 자성이 남아 있지도 않기 때문에 또한 불공도 아니다. 이런 까닭에 본각에 대해서는 공이라 말할 수도 없고 불공이라 말할 수도 없다. 그러나 제식은 그렇지 않다. 허망하게 제법에 집착하여 진리에 위반되므로 공空이 되고 또한 없앨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서로 본각과 제식이 같지 않은데 어찌 비슷하다고 하겠는가.”
“결정성”이란 진여자성은 파괴되지 않는데 자성이 본래 그렇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훼손되지도 않는다.”는 것은 유상有相에 집착하여 공이 훼상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고, “괴멸되지도 않는다.”는 것은 무성無性에 계탁하여 진이 훼손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훼손되지도 않고 괴멸되지도 않는 결정성이다.”라고 하였다.

㉰ 제식이 본각과 다른 모습이 아님을 설명함

이하의 세 가지 문답62)은 제식이 각과 다른 모습이 아님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제4·제5의 두 가지 문답은 본각과 경계가 같은 모습임을 설명하고, 제6의 한 가지 문답은 본각과 제식이 같은 모습임을 드러낸다.

a. 제4, 5의 문답 : 본각과 경계가 같은 모습임을 설명함

무주보살이 여쭈었다.
“그렇다면 모든 경계도 또한 그러하여 공상空相도 아니고 무공상無空相도 아니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저 모든 경계의 경우 그 자성은 본래 결정되어 있고, 그 결정은 자성의 근원으로서 처소가 없다.”
무주보살이 여쭈었다.
“그러면 본각도 또한 그와 같아서 처소가 없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본각은 처소가 없으므로 청정하고, 청정하므로 본각이 없으며, 만물은 처소가 없으므로 청정하고, 청정하므로 색이 없다.63)

그 처음에 해당하는 제4의 문답은 경계가 본각과 같음을 설명한 것이다. 즉 모든 허망의 경계가 본래 없었다.

001_0631_c_01L切識空覺亦應空佛言可一覺者
001_0631_c_02L毁不壞決定性 [45] 非空非不空無空不
001_0631_c_03L

001_0631_c_04L
此下第三番明覺不覺之不同相
001_0631_c_05L意言覺亦應空者從緣生識旣空
001_0631_c_06L從緣起覺亦空識旣空故其見是妄
001_0631_c_07L覺亦空故其覺亦妄也佛答意言
001_0631_c_08L一切覺者不壞道理故非可空
001_0631_c_09L存自性亦非不空是故覺中無空
001_0631_c_10L不空諸識不爾妄取諸法違反眞
001_0631_c_11L可空可遣如是不同何得相類
001_0631_c_12L決定性者謂眞如性不可破壞
001_0631_c_13L性自爾故言不毁者不取有相
001_0631_c_14L傷空故言不壞者不計無性以損
001_0631_c_15L眞故謂不毁壞於決定性也

001_0631_c_16L
無住菩薩言諸境亦然非空相非無
001_0631_c_17L空相佛言如是彼可境者性本決定
001_0631_c_18L決定性根無有處所無住菩薩言
001_0631_c_19L亦如是無有處所佛言如是覺無處
001_0631_c_20L故淸淨淸淨無覺物無處 [46] 故淸淨
001_0631_c_21L淸淨無色

001_0631_c_22L
此下三番明不異相於中前二番
001_0631_c_23L覺與境同相後一問答顯覺與識同
001_0631_c_24L初中前番明境同覺謂諸妄境

001_0632_a_01L이미 그와 같은 허망의 경계가 없는데 어찌 공상空相이 있을 것이며, 이미 공조차 없는데 어찌 공을 없앨 수 있는가. 그러므로 “공상도 아니고 무공상도 아니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것으로써 곧 경계가 본각과 다르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답변 가운데 “자성이 본래 결정되어 있다.”는 것은 근본은 존재가 아니기(不有) 때문에 공상空相이 아님을 설명하고, “처소가 없다.”는 것은 존재하는 공(有空)이 아니기 때문에 무공상無空相도 아님을 설명한 것이다.
그 뒤에 해당하는 제5의 문답은 본각이 경계와 같음을 설명한 것이다.
“본각도 또한 그와 같다.”는 것은 본각도 또한 반연으로 발생한 것으로 본성이 공하기 때문이다. 답변 가운데 “청정하므로 본각이 없다.”는 말은 공의 도리를 깨쳐 일체상을 떠나 있으므로 청정하다고 말한 것이다. 곧 본각의 자성이 이미 공하여 공 가운데는 본각이 없다는 것이다. 마치 색이 공하면 색상이 없는 경우와 같다.
앞의 제4의 문답에서 경계가 본각과 같다고 설명한 것은 “경계의 경우 공도 아니고 불공도 아니다.”라는 뜻이 곧 제5의 “본각도 또한 공도 아니고 비공도 아니다.”라는 뜻과 같다는 것이다.
지금 제5의 문답에서 본각이 경계와 같다고 설명한 것은 “각의 경우에 자성이 공하여 무상無相하다는 도리야말로 경계가 공하여 무상無相하다.”는 뜻과 같음을 설명한 것이다. 이처럼 제4의 문답과 제5의 문답이 같지 않으니, 이와 같이 알아야 할 것이다.

b. 제6의 문답 : 제식이 본각과 같은 모습임을 드러냄

무주보살이 여쭈었다.
“심과 안식도 또한 그와 같이 불가사의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심과 안식도 또한 그와 같이 불가사의하다. 왜냐하면 색色은 처소가 없어 청정하고 명칭이 없으므로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안眼은 처소가 없어 청정하고 견해가 없으므로 밖으로 떠나지 않으며, 심心은 처소가 없어 청정하고 위가 없으므로 발기하는 처소가 없고, 식識은 처소가 없어 청정하고 작동이 없으므로 반연함(緣)과 요별함(別)이 없다. 이처럼 자성은 모두 공적하다.

이는 셋째로 제식이 본각과 같음을 설명하는 것이다.64)
“심과 안식”이란 안식의 종자가 적집된 ‘심’과 그 종자가 발기된 ‘안식’이다. 곧 간략하게 심과 안식의 두 가지를 들어 그 자성이 공한 것을 나타낸 것이다. 이하 경문에서는 사연四緣으로

001_0632_a_01L本來不有旣無其有何有空相
001_0632_a_02L非有空何得無空故言非空相
001_0632_a_03L無空相以此而言則不異覺答中
001_0632_a_04L言性本決定者明本不有故非空相
001_0632_a_05L無有處所者明非有空故非無空也
001_0632_a_06L後番問答明覺同境覺亦如是者
001_0632_a_07L覺亦緣生本性空故答中言淸淨
001_0632_a_08L無覺者覺空之理離一切相故曰
001_0632_a_09L淸淨覺性旣空空中無覺如色空
001_0632_a_10L無色相故前明境同覺者以境
001_0632_a_11L非空非不空義同於前覺非空非不
001_0632_a_12L空義今明覺同境者以覺性空無相
001_0632_a_13L之理同於境空無相之義二文不同
001_0632_a_14L應如是知

001_0632_a_15L
無住菩薩言心眼識亦復如是不可
001_0632_a_16L思議佛言心眼識亦復如是不可思
001_0632_a_17L何以故色無處所淸淨無名不入
001_0632_a_18L於內眼無處所淸淨無見不出於外
001_0632_a_19L心無處所淸淨無上 [47] 無有起處
001_0632_a_20L無處所淸淨無動無有緣別性皆空
001_0632_a_21L

001_0632_a_22L
此第三番明識同覺心眼識者
001_0632_a_23L眼識種子積集之心及此種子所起
001_0632_a_24L眼識略擧此二標其性空下就四

001_0632_b_01L 안식이 공적한 것을 설명한다.
“색은 처소가 없다.”는 것은 색의 자성이 애초에 공하기 때문이다.
“청정하고 명칭이 없다.”는 것은 공 가운데는 색이 없기 때문이다.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은 안근에 상응하여 경계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소연연의 공적을 설명한 것이다.
“안은 처소가 없어 청정하고 견해가 없다.”는 것은 안의 자성이 공하여 그 가운데 안근이 없기 때문이다.
“밖으로 떠나지 않는다.”는 것은 색의 경계에 작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증상연의 공적을 설명한 것이다.
“심은 처소가 없어 청정하고 위가 없다.”는 것은 종자가 공하여 그 가운데 종자가 없기 때문이고, 또한 사연 가운데 으뜸이기 때문이다.
“발기하는 처소가 없다.”는 것은 직접 식을 발기하는 처소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연의 공적을 설명한 것이다.
“식은 처소가 없어 청정하다.”는 것은 이미 삼연三緣(근根·경境·식識)이 없어 안식이 발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연함과 요별함이 없다.”는 것은 반연하는 색도 없고 요별하는 제식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등무간연의 공적과 안식의 공적을 설명한 것이다. ‘반연’은 이전에 소멸한 반연이고, ‘요별’은 이후에 발생하는 요별인데, 이 반연과 요별이 모두 공적하기 때문에 ‘없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사연四緣과 제식이 모두 공적하기 때문에 “이처럼 자성은 모두 공적하다.”는 말로 총결하였다.
안식의 경우 사연이 모두 공적하다고 설명한 것처럼, 내지 의식의 경우에도 당연히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법法65)에는 처소가 없어 청정하고 명칭이 없으므로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의意에는 처소가 없어 청정하고 견해가 없으므로 밖으로 떠나지 않으며, 심心에는 처소가 없어 청정하고 위가 없으므로 발기하는 모습이 없고, 식識에는 처소가 없어 청정하고 작동이 없으므로 반연함과 요별함이 없다. 이처럼 자성은 모두 공적하다.”
여기서 의意는 제7식이고, 여기서 심心은 제8식이다. 이것은 팔식이 모두 공적한 것을 설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의 본각이 공적하다는 경우와 동일하다.

(나) 제식이 무생임을 설명함

자성에는 본각이 없지만 그 도리를 깨치면 본각이 된다. 선남자여, 본각이 없음을 깨치고 알면

001_0632_b_01L明眼識空色無處所者色性自
001_0632_b_02L空故淸淨無名者空中無色故
001_0632_b_03L入於內者不與眼根作境界故是明
001_0632_b_04L所緣緣空也眼無處所淸淨無見者
001_0632_b_05L眼性空中無眼根故不出於外者
001_0632_b_06L無能行於色境界故是明增上緣空
001_0632_b_07L心無處所淸淨無上者種子空中
001_0632_b_08L無種子故四緣之內爲上首故
001_0632_b_09L有起處者無親起識之處所故是明
001_0632_b_10L因緣空也識無處所淸淨無動者
001_0632_b_11L無三緣眼識不起故無有緣別者
001_0632_b_12L以無緣色了別識故是明等無間緣
001_0632_b_13L及眼識空緣者前滅之緣別者
001_0632_b_14L生了別此二皆空故言無有如是
001_0632_b_15L四緣及識皆空故摠結言性皆空寂
001_0632_b_16L如說眼識四緣皆空乃至意識應如
001_0632_b_17L是說謂法無處所淸淨無名不入
001_0632_b_18L於內意無處所淸淨無見不出於
001_0632_b_19L心無處所淸淨無上無有起處
001_0632_b_20L識無處所清淨無動無有緣別
001_0632_b_21L皆空寂此中意者是第七識此中
001_0632_b_22L心者是第八識是明八識皆悉空
001_0632_b_23L所以同於一切覺空也

001_0632_b_24L
性無有覺覺則爲覺善男子覺知無

001_0632_c_01L제식이 그대로 공적에 들어간다. 왜냐하면 금강지혜의 경지에서 해탈도로 끊고, 해탈도로 끊은 이후에는 무주의 경지에 들어가 출·입이 없고 마음의 처소가 없으니, 그것은 결정자성의 경지이기 때문이다. 그 경지는 청정하여 마치 유리처럼 맑고, 자성은 항상 평등하여 마치 저 대지와 같으며, 본각으로 미묘하게 관찰함은 마치 지혜의 햇살과 같고, 이타행을 성취하여 본각을 터득함은 마치 대법우大法雨와 같다.66) 이 사지四智의 경지에 드는 것이야말로 곧 부처님 지혜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지혜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야말로 제식의 불생이다.”

이는 둘째로 제식이 불생임을 설명하는 것이니,67) “본래 무명을 따라 제식이 생기하였는데 지금은 시각을 따라 다시 심원으로 돌아간다. 심원으로 돌아갈 때 제식이 일어나지 않고 제식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시각이 원만해진다.”는 것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으니, 간략하게 드러내는 것과 자세하게 해석하는 것이다.

㉮ 간략하게 드러냄(略標)

간략하게 드러내는 것에도 두 가지가 있다.

a. 시각이 원만함

처음에 말한 “자성에는 본각이 없지만 그 도리를 깨치면 본각이 된다.”는 것은 시각이 원만함을 나타낸 경문이고, “본각이 없음을 깨치고 알면 제식이 그대로 공적에 들어간다.”는 것은 제식이 불생임을 나타내는 경문이다.
“자성에는 본각이 없다.”는 것은 공한 자성에는 제식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시각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각이 없다는 이치를 깨치고 알면 시각의 지혜가 된다. 그러므로 “그 도리를 깨치면 본각이 된다.”고 하였다.

b. 제식은 불생임

“본각이 없음을 깨치고 안다.”는 말은 앞의 시각을 이어받은 것이다. 시각이 원만한 경우에는 팔식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본각이 없다는 이치를 깨침에 따라 제식도 없어지고, 구경을 깨침에 따라 심원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식이 그대로 공적에 들어간다.”고 하였다.

㉯ 자세하게 해석함(廣釋)

“왜냐하면” 이하는 자세하게 해석하는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인이 원만함(因滿)을 설명하고, 둘째는 과가 원만함(果圓)을 설명한다.

a. 인이 원만함을 설명함

“금강지혜의 경지”는 등각위로서 시각의 인이 원만한 금강유정金剛喩定을 말한다. 이것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68) 지금은 본각의 인因의 측면에서 금강지혜라고 하였다.
“해탈도로 끊는다.”는 것은 불생의 인이 원만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끊음’에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만약 생득生得의 무명주지無明住地69)에 상대시키면 곧 금강심은 무간도無間道70)가 되고,

001_0632_c_01L諸識則入何以故金剛智地解脫
001_0632_c_02L道斷斷已入無住地無有出入心處
001_0632_c_03L無在決定性地其地淸淨如淨琉璃
001_0632_c_04L性常平等如彼大地覺妙觀察如慧
001_0632_c_05L日光利成得本如大法雨入是智者
001_0632_c_06L是入佛智地入智地者諸識不生

001_0632_c_07L
是第二明諸識不生欲明本隨無明
001_0632_c_08L諸識生起今隨始覺還歸心源
001_0632_c_09L心源時諸識不起識不起故始覺
001_0632_c_10L圓滿於中有二略標廣釋標中亦
001_0632_c_11L初言性無有覺覺卽爲覺者是標
001_0632_c_12L始覺圓滿章覺知無覺諸識則入者
001_0632_c_13L是標諸識不生章言性無有覺者
001_0632_c_14L空性中非但無識亦無始覺覺知
001_0632_c_15L無覺之理則爲始覺之智故言覺則
001_0632_c_16L爲覺言覺知無覺者牒前始覺
001_0632_c_17L覺圓時八識不起隨覺無覺無諸
001_0632_c_18L識故隨覺究竟歸心源故故言諸
001_0632_c_19L識則入何以故下釋中有二先明
001_0632_c_20L因滿後顯果圓金剛智地者謂等
001_0632_c_21L覺位始覺因滿金剛喩定義如前
001_0632_c_22L今約覺因名金剛智解脫道斷
001_0632_c_23L不生因滿然此中斷有其二義
001_0632_c_24L若對生得無明住地卽金剛心爲無

001_0633_a_01L묘각의 초심이 해탈도解脫道가 된다. 무간도는 무명과 함께하지만, 해탈도가 일어날 때 그것을 곧장 끊는다.
둘은 만약 제식의 희론종자에 상대시킨다면 곧 그 이전의 마음은 무간도로서 저 종자와 더불어 같이 생기하고 같이 소멸하지만, 최후의 일념인 금강유정은 해탈도로서 그대로 종자를 끊는다.
지금은 그 종자를 끊는다는 뜻에 의거하기 때문에 “금강지의 경지에서 해탈도로 끊는다.”라고 하였다. 이때 이숙식異熟識이 나타나 있는 것은 전 찰나의 종자로부터 생겨난 것이니, (이숙異熟이란) 생기하는 인因과 과果가 동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후에는 이숙이 다시는 생기하지 않는데, 그때는 이미 일체의 종자가 끊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해탈도로 끊는다.”고 말한 것이 바로 제식이 불생하는 인因임을 알아야 한다.

b. 과가 원만함을 드러냄

다음으로 그 과를 드러낸다.71) 여기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각이 원만함을 설명하고, 둘째는 제식의 불생을 드러낸다.

a) 각이 원만함을 설명함

그 첫째 가운데서 “해탈도로 끊은 이후에는 무주의 경지에 들어간다.”는 것은 금강지혜의 해탈도에서 종자를 끊고 묘각의 무주의 경지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제二諦를 벗어나 홀로 존재하여 둘이 없으므로 ‘무주’라 말한다.
무주심은 이제를 모두 초월했기 때문에 세제世諦를 벗어나고 진제眞諦에 들어가는 것에 차이가 없다. 이미 벗어나고 들어가는 것도 없고 공과 유도 남겨두지 않기 때문에 “마음의 처소가 없다.”고 하였다.
이처럼 처소가 없는 도리는 오직 일심이니, 일심의 자체는 본래 적정하기 때문에 “그것은 결정자성의 경지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일심이 현현할 때 팔식이 모두 전의轉依하기 때문에 이 경우 사지四智가 원만해진다. 왜냐하면 곧 이 일심은 어둠을 떠나 있고 광명이 성취되어 있는 것으로 명백하고 청정하여 비추지 못하는 영상이 없기 때문이다. 이에 “그 경지는 청정하여 마치 유리처럼 맑다.”고 하였으니, 이는 대원경지大圓鏡智의 뜻을 드러낸 것이다.
이와 같은 일심은 양변을 떠나 있고 자타에 통달해 있어 평등무이平等無二하다. 그래서 “자성은 항상 평등하여 마치 저 대지와 같다.”고 하였으니,

001_0633_a_01L間道妙覺初心爲解脫道無間道
001_0633_a_02L與無明俱解脫道起方能正斷
001_0633_a_03L若對諸識戱論種子則其前心爲無
001_0633_a_04L間道與彼種子俱起俱滅最後一念
001_0633_a_05L金剛喩定是解脫道正斷種子
001_0633_a_06L約斷其種子義門故言金剛解脫道
001_0633_a_07L此時現有異熟識者由其前念種
001_0633_a_08L子所生生起因果不同時故此後異
001_0633_a_09L熟不更生者此時已斷一切種故
001_0633_a_10L知此言解脫道斷正是諸識不生之
001_0633_a_11L次顯其果於中有二先明覺圓滿
001_0633_a_12L後顯識不生初中言斷已入無住地
001_0633_a_13L金剛解脫斷種子已卽入妙覺
001_0633_a_14L無住之地二諦之外獨在無二
001_0633_a_15L言無住無住之心雙泯二諦故無
001_0633_a_16L出俗入眞之異旣無出入不在空有
001_0633_a_17L故言心處無在無在之處唯是一心
001_0633_a_18L一心之體本來寂靜故言決定性地
001_0633_a_19L一心顯時八識皆轉故於是時
001_0633_a_20L智圓滿所以然者卽此一心離闇
001_0633_a_21L成明明白清淨無影不照故言其
001_0633_a_22L地清淨如淨瑠璃是顯大圓鏡智之
001_0633_a_23L卽此一心遠離二邊通達自他
001_0633_a_24L平等無二故言性常平等如彼大地

001_0633_b_01L이는 평등성지平等性智의 뜻을 드러낸 것이다.
이와 같은 일심은 관찰할 대상이 없기 때문에 제법의 문을 관찰하지 못함이 없다. 그래서 “본각으로 미묘하게 관찰함은 마치 지혜의 햇살과 같다.”고 하였으니, 이는 묘관찰지妙觀察智의 뜻을 설명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일심은 작위가 아니기 때문에 이타의 행위를 하지 못함이 없다. 그래서 “이타행을 성취하여 본각을 터득함은 마치 대법우와 같다.”고 하였다. 비가 만물을 적셔 과실을 성숙시키는 것처럼 이 묘관찰지도 또한 그와 똑같이 이타행으로 본각을 터득토록 한다. 이는 성소작지成所作智의 뜻을 설명한 것이다.
이처럼 사지四智가 이미 원만한 것이 곧 시각始覺의 원만이다.

b) 제식의 불생을 드러냄

“이 사지의 경지에 드는 것” 이하는 제식諸識의 불생不生을 드러낸 것이다. 이 사지를 터득하는 것이 바로 묘각의 지위이다. 그러므로 “부처님 지혜의 경지에 드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때는 이미 일심의 본원에 돌아가 있으므로 팔식의 모든 풍랑이 다시는 기동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지혜에 드는 것이야말로 제식의 불생이다.”라고 하였다.
이상 둘로 나누어72) 시각에 대한 설명을 마친다.

나) 본각의 뜻을 연설함

이하는 둘째로 본각의 뜻을 연설하는 것이다.73)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곧장 설명하고, 둘째는 집착을 없애 준다.

(가) 곧장 설명함(正明)

첫째 곧장 설명하는 것에도 다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본각에 둘이 없는 도리를 설명하고, 둘째는 장애를 없애고 깨침에 드는 문을 보여 준다.

㉮ 본각에 둘이 없는 도리를 설명함

첫째의 본각에 둘이 없는 도리를 설명함에도 다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질문하는 것이고,74) 둘째는 답변하는 것이다.

a. 질문

무주보살이 여쭈었다.
“여래께서 설하신 일본각一本覺의 성지력聖智力 및 네 가지 큰 지혜의 경지(四弘智地)는 일체중생에게 본각의 근원이고 시각의 이익입니다. 왜냐하면 일체중생은 바로 자신의 몸속에 본래 원만하게 구족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75)

질문에서 말한 “일본각의 성지력聖智力 및 네 가지 큰 지혜의 경지(四弘智地)”는 앞에서 설한 사지四智의 뜻을 순차적으로 나열한 것이다. 시각이 원만해지면 곧 본각과 똑같아져 본각과 시각이 둘이 아니므로 ‘일본각’이라 한다. 하지 못하는 것이 없으므로 ‘성지력聖智力’이라 하고, 일각 안에 사홍서원의 큰 지혜를 갖추고 모든 공덕을 지니고 있으므로 ‘지지智地’라 하며,

001_0633_b_01L是顯平等性智之義如是一心無所
001_0633_b_02L觀故於諸法門無不觀察故言覺
001_0633_b_03L妙觀察如慧日光是明妙觀察智之
001_0633_b_04L如是一心無所作故於利他事
001_0633_b_05L無所不作故言利成得本如大法雨
001_0633_b_06L雨潤萬物令成菓實此智亦爾
001_0633_b_07L他事成令得本覺是明成所作智之
001_0633_b_08L四智旣圓是始覺滿也入是智
001_0633_b_09L者已下次顯諸識不生得是四智
001_0633_b_10L正是妙覺之位故言是入佛智地
001_0633_b_11L時旣歸一心之源八識諸浪不更起
001_0633_b_12L動故 [48] 入智地者諸識不生也上來
001_0633_b_13L二分演始覺竟

001_0633_b_14L
無住菩薩言如來所說一覺聖力四弘
001_0633_b_15L智地卽一切生 [49] 本根覺利何以故
001_0633_b_16L切衆生卽此身中本來滿足

001_0633_b_17L
此下第二演本覺義於中有二一者
001_0633_b_18L正明二者遣著初中亦二先明本
001_0633_b_19L覺無二之理後示除障入證之門
001_0633_b_20L中亦二先問後答問中言一覺聖
001_0633_b_21L力四弘智地者領次前說四智之義
001_0633_b_22L始覺圓滿卽同本覺本始無二
001_0633_b_23L名一覺無所不爲故言聖力一覺
001_0633_b_24L之內1) [15] 四大智持諸功德故言智

001_0633_c_01L이와 같이 사지는 일심의 역량과 동일하여 모두 두루하지 않음이 없으므로 ‘큰 지혜(弘智)’라 한다.
이와 같이 일각은 곧 법신이고, 법신은 곧 중생의 본각이다. 그러므로 “곧 일체중생의 본각의 근원이고 시각의 이익입니다.”라고 하였다. 본래 구비되어 있는 무량한 자성의 공덕이 중생심을 훈습하여 진여와 생멸의 두 가지 업을 일으키기 때문에 “본각의 이익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일본각一本覺의 둘이 없는 뜻을 말미암아 어떤 중생도 법신을 벗어나 있는 경우는 없기 때문에 “바로 자신의 몸속에 본래 원만하게 구족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b. 답변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왜냐하면 일체중생은 본래 무루로서 모든 선법과 이익의 근본이지만, 지금은 욕망의 가시를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답변으로 질문을 인정하는 것이니, 본각 속의 무량한 자성공덕은 삼루三漏76)에 물들거나 요동치지 않음을 설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본래 무루이다.”라고 한다. 이것이 근본이 되어 모든 선법과 이익을 발생하므로 “모든 선법과 이익의 근본이다.”라고 한다. 비록 본각을 지니고 있지만 객진번뇌인 욕망의 가시에 휩싸여 있기 때문에 현재는 자신이 본각을 터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 장애를 없애고 깨침에 드는 문을 보여 줌

무주보살이 여쭈었다.
“만약 어떤 중생이 본각의 이익을 터득하지 못하여 지금도 채집採集77)하고 있다면, 그 다스리기 어려운 것을 어떻게 다스려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채집하는 것도 그리고 독행78)하는 것도 분별로써 오염이 된다.79) 그러므로 중생의 마음을 돌이켜서 공적한 이치(空窟)80)에 거주하면 다스리기 어려운 것을 다스리고, 번뇌의 속박에서 해탈하여 초연히 노지露地에 앉으며, 식음識陰(心識과 覺知)은 반열반이 된다.”

이하는 둘째로 그 장애를 없애고 깨침에 드는 문을 보여 주는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질문하고, 둘째는 답변한다.

a. 질문

질문에서 “채집한다.”라고 한 것은 삼유三有(三界)의 탐욕으로 생사의 과를 취하므로 ‘채採’라 하고, 이 모든 번뇌가 마음에 상응하기 때문에 ‘집集’이라 한다.
무시이래로 끊임없이 현행하기 때문에

001_0633_c_01L如是四智同一心量皆無不周
001_0633_c_02L故名弘智如是一覺卽是法身
001_0633_c_03L卽是衆生本覺故言卽一切2)
001_0633_c_04L本根覺利本來具有無量性德
001_0633_c_05L熏衆生心作二種業故名本利
001_0633_c_06L是本覺無二義故無一衆生出法身
001_0633_c_07L故言卽此身中本來滿足

001_0633_c_08L
佛言如是何以故一切衆生本來無
001_0633_c_09L諸善利本今有欲3) [16] 爲未降伏

001_0633_c_10L
是答述許所問明本覺中無量性德
001_0633_c_11L不爲三漏之所染動故言本來無漏
001_0633_c_12L以此爲本生諸善利故言諸善利本
001_0633_c_13L雖有本覺而由客塵欲㓨所覆故
001_0633_c_14L未得自本覺耳

001_0633_c_15L
無住菩薩言若有衆生未得本利
001_0633_c_16L有採集云何降伏難伏佛言若集若
001_0633_c_17L獨行分別及與 [50] [51] 神住空窟降伏
001_0633_c_18L難調伏 [52] 解脫魔所縛超然露地坐
001_0633_c_19L陰般涅槃

001_0633_c_20L
此下第二示其除障入證之門於中
001_0633_c_21L有二先問後答問中言採集者
001_0633_c_22L三有欲取生死果故言採此諸煩
001_0633_c_23L惱與心相應故言集從無始來
001_0633_c_24L「俱」作「具」{甲}「衆」無{甲}「刺」作「㓨」{甲}

001_0634_a_01L“그 다스리기 어려운 것”이라 한다. 채집을 대치하는 방법이 생겼지만 그 힘이 미열하기 때문에 어떻게 다스릴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의심하는 것이다.

b. 답변

답변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다스려지는 것을 드러내고, 둘째는 다스리는 것을 설명하며, 셋째는 다스림으로 터득되는 뛰어난 이익을 드러낸다.

a) 다스려지는 것을 드러냄

“채집하는 것도 그리고 독행하는 것도”라는 것은 중생의 심행은 추행과 세행이 정해져 있지 않아서 어떤 때는 번뇌와 상응하므로 집集(번뇌의 쌓임)이고, 어떤 때는 번뇌를 떠나 있는 심행이므로 독獨(번뇌의 초월)이다. 번뇌를 떠나 있는 경우에도 아직 법집의 분별은 남아 있고, 번뇌와 함께할 경우에는 곧 번뇌에 오염되기 때문에 “분별로써 오염이 된다.”고 하였다.

b) 다스리는 것을 설명함

다음으로 다스리는 것을 설명한다. 즉 불경에 의하여 그 중생심(心)과 중생신(神)을 돌이켜 인상과 법상을 없애고 인공과 법공의 도리에 거주하기 때문에 “마음을 돌이켜서 공적한 이치에 거주한다.”고 하였다.
이 중생심이 바야흐로 기동하여 도리에 순응하면 뛰어난 다스림이 되지만 저 번뇌가 무시로부터 도리에 역행하면 대적할 수가 없기 때문에 “다스리기 어려운 것을 다스린다.”고 하였다. 이것은 지전地前에서 다스리는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을 설명한 것이다.
이 복도伏道81)를 말미암아 단도斷道82)의 지위에 들어가 점차 종자를 없애 가면서 마침내 완전히 없앤다. 종자가 완전히 사라질 경우 사마四魔83) 를 완전히 떠나기 때문에 “번뇌의 속박에서 해탈한다.”고 한다.

c) 다스림으로 터득되는 뛰어난 이익을 설명함

다음으로 다스림으로써 터득되는 뛰어난 이익을 설명한다. 뛰어난 이익에는 보리과菩提果와 과과果果의 두 가지가 있다. 보리과는 유루인 오음의 취락을 초출하여 도량에 앉아 위없는 깨달음을 터득하기 때문에 “초연히 노지에 앉는다.”고 한다. 과과라는 말은 위없는 깨달음으로써 대열반을 증득하는 것인데, 각覺이 없음을 느끼고 알면84) 제식諸識이 모두 대열반에 들어가기 때문에 “식음은 반열반이 된다.”고 한다.

(나) 집착을 없애 줌(遣著)

이하는 둘째로 집착을 없애는 것이다.85)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무주로써 유주의 집착(著)을 없앰을 설명하고,

001_0634_a_01L行不絕故言難伏治道方生其力
001_0634_a_02L微劣云何能伏如是疑也答中有
001_0634_a_03L先出所伏次明能伏後顯降伏所
001_0634_a_04L得勝利若集若獨行者衆生心行
001_0634_a_05L細不定或時煩惱相應故集或時離
001_0634_a_06L惑心行故獨離煩惱時猶有法執分
001_0634_a_07L煩惱俱時卽爲煩惱所染故言
001_0634_a_08L分別及與染也次明能伏謂依佛經
001_0634_a_09L廻其心神遣人法相住二空理
001_0634_a_10L言廻神住空窟此心方起而順道理
001_0634_a_11L故有勝能彼惑無始而逆道理故不
001_0634_a_12L能敵故言降伏難調伏是明地前伏
001_0634_a_13L除二障由是伏道入斷道位漸拔
001_0634_a_14L種子乃至永盡永盡之時遠離四
001_0634_a_15L故言解脫魔所縛次明降伏所得
001_0634_a_16L勝利勝利有二謂菩提果及與果
001_0634_a_17L菩提果者超出有漏五陰聚落
001_0634_a_18L坐於道場得無上覺故言超然露地
001_0634_a_19L言果果者以無上覺證大涅槃
001_0634_a_20L覺知無覺諸識皆入故言識陰般涅
001_0634_a_21L槃也

001_0634_a_22L
無住菩薩言心得涅槃獨一無伴
001_0634_a_23L住涅槃應當解脫

001_0634_a_24L
此下第二遣著於中有二先明無住

001_0634_b_01L둘째는 무득으로써 유득의 집착(執)을 단제함을 보여 준다.

㉮ 무주로써 유주의 집착(著)을 없앰을 설명함

첫째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질문이고, 둘째는 답변이다.

a. 질문

무주보살이 여쭈었다.
“마음으로 열반을 터득하고 나면 오직 일본각뿐으로서86) 번뇌가 수반되지 않고 열반에 상주하므로 그것은 마땅히 해탈일 것입니다.”

질문 가운데 “오직 일본각(獨一)”이란 팔식이 전의轉依될 때 일본각이 성취되기 때문이다. “번뇌가 수반되지 않는다.”는 것은 인집과 법집이 곧 멀리 떠나 있는 것이다.
(무주보살은) “번뇌가 수반되지 않는 일본각은 열반에 상주하니, 상주하는 지혜로 일체의 속박을 해탈한다.”는 데 집착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질문한 것이다.

b. 답변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반에 상주한다는 것은 곧 열반에 속박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열반은 본래 본각의 이익이고 본각의 이익은 본래 열반이므로, 열반의 각분이 곧 본각의 각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각의 자성은 (열반의 자성과) 다르지 않고, 열반의 (바탕은 본각의 바탕과) 다름이 없으며, 본각은 본래 무생인데 열반도 무생이고, 본각은 본래 무멸인데 열반도 무멸이어서, 열반과 본각은 본래 다름이 없다. 이런 까닭에 무소득이 열반이고 열반이 무소득인데, 어찌 유주이겠는가.
선남자여, 깨달으면 열반에 머물지 않는다. 왜냐하면 본래 발생함이 없음을 깨달아 중생의 번뇌를 떠나고, 본래 적정이 없음을 깨달아 열반의 기동을 떠나기 때문이다. 바로 이와 같은 경지에 머물면 마음에 집착이 없고 출입이 없어 암마라식에 들어간다.”

이는 답변으로, 유주의 집착을 곧장 없애는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간략하게 집착을 타파하고, 둘째는 자세하게 도리를 드러낸다.

a) 간략하게 집착을 타파함

첫째에서 “열반에 상주한다는 것은 곧 열반에 속박되는 것이다.”라는 것은 설령 영원한 깨침이라 할지라도 열반에 집착한다면 곧 그것은 집착으로서 열반에 속박되는데, 어떻게 상주하는 것을 해탈이라 할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다.

b) 자세하게 도리를 드러냄

“왜냐하면” 이하는 둘째로 자세하게 도리를 드러내는 것이다. 뜻을 해석하면, “본각의 도리는 무주이기 때문에 유주라면 도리에 어긋난다. 도리에 어긋나는 마음은 속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라는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본각에 의거하여 무주를 설명하고, 둘째는 시각에 의거하여 무주를 드러낸다.

(a) 본각에 의거하여 무주를 설명함

첫째 본각에 의거하여 무주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다름이 없다.(無異)”라는 뜻으로 무득과 무주를 설명한다. 이 다름이 없다는 뜻에 네 가지가 있다.


001_0634_b_01L以遣有住之著後示無得以除有得
001_0634_b_02L之執初中有二先問後答問中言
001_0634_b_03L獨一者八識轉時成一覺故言無
001_0634_b_04L伴者人法二執斯遠離故無伴之
001_0634_b_05L常住於涅槃常住之智解脫一
001_0634_b_06L切縛有作是執故作是問也

001_0634_b_07L
佛言常住涅槃是涅槃縛何以故
001_0634_b_08L槃本覺利覺利本涅槃 [53] 涅槃覺分
001_0634_b_09L本覺分覺性不異涅槃無異覺本無
001_0634_b_10L涅槃無生覺本無滅涅槃無滅
001_0634_b_11L槃覺本無異故 [54] 無得涅槃涅槃無得
001_0634_b_12L云何有住善男子覺者不住涅槃
001_0634_b_13L以故覺本無生離衆生垢覺本無寂
001_0634_b_14L離涅槃動住如是地心無所住無有
001_0634_b_15L出入入唵摩羅識

001_0634_b_16L
是答正遣有住之執於中有二
001_0634_b_17L略破執後廣顯理初中言常住涅
001_0634_b_18L槃是涅槃縛者設有常覺住於涅槃
001_0634_b_19L卽是執著縛於涅槃云何常住是解
001_0634_b_20L脫耶何以故下廣顯道理理無住故
001_0634_b_21L有住違理違理之心非縛是何
001_0634_b_22L意如是於中有二先約本覺以明
001_0634_b_23L無住後約始覺以顯無住初中約
001_0634_b_24L無異義以明無得無住此無異義

001_0634_c_01L
ⓐ 본각의 도리에 다름이 없음(本理無異)

첫째는 본각의 도리에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경문의 “열반은 본래 본각의 이익이고 본각의 이익은 본래 열반이므로”라는 부분이다. 이것은 열반이 곧 본각의 이익으로서 그 본각의 이익은 본래 열반이고, 그 시각은 본각과 같음을 설명한 것이다. 다름이 없기 때문에 무득無得이라는 것이다.

ⓑ 각분에 다름이 없음(覺分無異)

둘째는 각분에 다름이 없다(覺分無異)는 것이다. 경문의 “열반의 각분이 곧 본각의 각분이기 때문이다.”라는 부분이다. 이것은 열반의 중덕衆德87)이 곧 본각의 덕임을 설명한 것이다. 다름이 없기 때문에 무득이라는 것은 위의 첫째의 설명과 마찬가지이다.

ⓒ 일미로서 다름이 없음(一味無異)

셋째는 일미로서 다름이 없다(一味無異)는 것이다. 경문의 “본각의 자성은 (열반의 자성과) 다르지 않고, 열반의 (바탕은 본각의 바탕과) 다름이 없으며”라는 부분이다. 이것은 본각의 자성은 일미로서 차별상이 없는데, 그것이 곧 열반에 차별이 없는 것과 같음을 설명한 것이다.

ⓓ 둘이 아니므로 다름이 없음(無二無異)

넷째는 둘이 아니므로 다름이 없다(無二無異)는 것이다. 경문의 “본각은 본래 무생인데 열반도 무생이고, 본각은 본래 무멸인데 열반도 무멸이어서, 열반과 본각은 본래 다름이 없다.”는 부분이다. 이것은 본각에는 본래 발생과 소멸이 없는데 그것이 곧 열반에 발생과 소멸이 없는 것과 같음을 설명한 것이다.
이 네 가지의 다름이 없는 도리를 말미암아서 본래 다름이 없기 때문에 “무소득이 열반이고”는 곧 열반과 본각에 능득能得이 없음을 설명한 것이고, 다음으로 말한 “열반이 무소득인데”는 열반은 소득所得이 없음을 설명한 것이다.
이미 능득과 소득이 없거늘 어찌 능주能住와 소주所住가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어찌 유주이겠는가.”라고 하였다. 곧 이것은 상주한다는 것이 도리에 맞지 않음을 드러낸 것이다.

(b) 시각에 의거하여 무주를 설명함

다음은 둘째 시각에 의하여 무주를 설명하는 것이다. 첫째는 무주를 나타나고, 둘째는 무주를 해석한다.
“깨달으면(覺者)”이란 시각始覺을 말한다.
해석하는 말 가운데 “본래 발생함이 없음을 깨닫는다.”는 것은 생과 사가 본래 발생함이 없는 줄을 깨쳐서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사에 집착하는 허물을 떠난다.
“본래 적정이 없음을 깨닫는다.”는 것은 열반도 본래 적정이 아닌 줄을 깨쳐서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열반에 들어간다는 기동을 떠난다.
“마음에 집착이 없다.”는 것은 생사 및 열반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출입이 없다.”는 것은 속제의 유(俗有)와 진제의 공(眞空)을 분별하여 보지 않는 것이다.
“암마라식에 들어간다.”는 것은

001_0634_c_01L有其四種一者本理無異如經涅槃
001_0634_c_02L本覺利利本涅槃 [55] 是明涅槃
001_0634_c_03L本覺利此本覺利是本涅槃其始
001_0634_c_04L覺者卽同本覺所以無異故無得也
001_0634_c_05L二者覺分無異如經涅槃覺分卽本
001_0634_c_06L覺分是明涅槃衆德卽是本覺之德
001_0634_c_07L無異無得如前說也三者一味無
001_0634_c_08L如經覺性不異涅槃無異是明
001_0634_c_09L覺性一味無差別相卽是涅槃之無
001_0634_c_10L差別四者無二無異如經覺本無
001_0634_c_11L涅槃無生覺本無滅涅槃無滅
001_0634_c_12L是明本覺本無生滅卽是涅槃之無
001_0634_c_13L生滅由是四種無異道理本無異故
001_0634_c_14L無得涅槃是明無能得涅槃覺次言
001_0634_c_15L涅槃無得者是明涅槃無所得義
001_0634_c_16L無能得所得何有能住所住以之故
001_0634_c_17L云何有住卽顯常住不應道理
001_0634_c_18L次約始覺以明無住先標後釋
001_0634_c_19L覺者者謂始覺者釋中言覺本無生
001_0634_c_20L覺知生死本來無生所以離着生
001_0634_c_21L死之垢也言覺本無寂者覺知涅槃
001_0634_c_22L本無寂靜所以離入涅槃之動心無
001_0634_c_23L所住者不住生死及涅槃故無有出
001_0634_c_24L入者不見俗有及眞空故入唵摩羅

001_0635_a_01L일심의 자체는 양변을 떠나 있는데 그 심원에 돌아가기 때문에 ‘들어간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무주가 되어야만 바야흐로 해탈을 터득한다. 그러므로 열반에 상주하면 열반의 속박을 떠나지 못한다.

c. 무득으로써 유득의 집착을 단제함을 보여 줌

이하는 둘째로 무득으로써 유득의 집착을 단제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 여기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무득을 곧장 설명하고, 둘째는 의정을 거듭 없애며, 셋째는 이해시키고, 넷째는 마무리를 짓는다.

a) 무득을 곧장 설명함

첫째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질문이고, 둘째는 답변이다.

(a) 질문

무주보살이 여쭈었다.
“만약 암마라식이라면 그것은 들어간 경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들어간 경지가 있다는 것은 유소득이라는 것이므로 법을 터득했다는 것이 될 것입니다.”

위에서 “암마라에 들어간다.”는 말에 의거하여 들어간다는 말의 뜻을 곧이곧대로 취한 것이다. 즉 무구식無垢識에 들어갔다고 하는데, 그처럼 들어간 경우에는 증득했다는 것이므로 유소득이라는 것이다. 이런 의심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질문하였다.

(b) 답변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비유가 있다. 미혹한 아들이 돈을 갖고 있으면서도 있는 줄을 모른다. 시방으로 떠돌다가 오십 년이 흐른다. 그 동안 빈·궁·곤·고하여 오로지 일거리만 찾아다니는 것으로 육신을 건사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부족하다. 그 아버지가 아들의 그와 같은 사정을 보고 아들에게 말한다. ‘너는 돈을 가지고 있는데, 어째서 그것을 사용하지 않느냐. 네 마음대로 쓰면 모두 충족할 것이다.’ 이에 그 아들은 정신 차리고 돈의 덕택으로 마음으로 크게 기뻐하며 돈을 벌었다고 말한다. 그러자 그 아버지가 말한다. ‘불쌍한 아들아! 기뻐할 것 없다. 네가 번 돈은 본래 네 것이었다. 네가 번 것이 아닌데, 어찌 기뻐한단 말이냐.’

이것은 답변이니, 무득의 뜻을 곧장 설명하는 것이다. 여기에 세 가지가 있으니, 법法과 비유(喩)와 합合이다.

ⓐ 법

처음에 말한 “그렇지 않다.”는 것은 유소득이 아님을 총론한 것이다.

ⓑ 비유

“왜냐하면” 이하는 비유로써 무소득을 드러낸다. 여기에 네 가지의 비유가 있다. 첫째는 미혹한 아들이 금전을 갖고 있는 줄 모르고 빈고貧苦하게 떠돈다는 비유이고,

001_0635_a_01L一心之體離二邊故歸此心源
001_0635_a_02L故名爲入如是無住方得解脫
001_0635_a_03L住涅槃不離縛也

001_0635_a_04L
無住菩薩言唵摩羅識是有入處
001_0635_a_05L有所得是得法也

001_0635_a_06L
此下第二遣有得執於中有四
001_0635_a_07L者正明無得二者重遣疑情三者領
001_0635_a_08L四者述成初中有二先問後答
001_0635_a_09L依前入言如言取義謂無垢識
001_0635_a_10L所入處入時證得故有所得有作
001_0635_a_11L是疑故作是問

001_0635_a_12L
佛言 何以故譬如迷子手執金
001_0635_a_13L錢而不知有遊行十方經五十年
001_0635_a_14L窮困苦專事求索而以養身而不充
001_0635_a_15L其父見子有如是事而謂子言
001_0635_a_16L執金錢何不取用隨意所須皆得充
001_0635_a_17L其子醒已而得金錢心大歡喜
001_0635_a_18L謂得錢其父謂言迷子汝勿欣懌
001_0635_a_19L得金錢是汝本物汝非有得云何可
001_0635_a_20L

001_0635_a_21L
是答正明無得之義於中有三
001_0635_a_22L初言不者摠非有得
001_0635_a_23L以故下喩顯無得於中有四種喩
001_0635_a_24L一者迷子不知有金錢遊行貧苦喩

001_0635_b_01L둘째는 그 아버지가 아들에게 금전이 있음을 알려 주고 충족케 한다는 비유이며, 셋째는 금전을 얻고 기뻐하는 비유이고, 넷째는 번 것이 아님을 알려 주는 비유이다.

ㄱ. 첫째 비유

첫째 비유에서 “미혹한 아들”이란 모든 중생이 자기의 본래마음에 미혹한 것을 말한 것이다. 여래께서 대비로 마치 외아들을 보듯이 간주하기 때문에 미혹한 아들에 비유한 것이다. 『법화경』에서는 궁자를 성문聲聞에 국한시켜 비유한다.88) 여기에서 미혹한 아들은 전체의 군생에 비유된다.
“돈을 갖고 있다.”는 것은 모든 망식의 다섯 가지 번뇌로 집착하고 분별하여 자기의 청정한 마음을 덮어 모르게 한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시방으로 떠돌다가”라는 것은 널리 오상五相89)과 오사五事90)를 계탁하는 것이다.
“오십 년이 흐른다.”는 것은 오음五陰을 받아 오십 가지 악을 발생하는 것이다. “빈貧”은 세간의 좋은 것을 적게 가진다는 것이고, “궁窮”은 출세간의 재량이 전혀 없는 것이며, “곤困”은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져 극고를 받는 것이고, “고苦”는 인간 및 천상에 태어나 가벼운 고통을 받는 것이다.
“오로지 일거리만 찾아다닌다.”는 것은 세간의 낙을 추구하여 복업을 쌓는 것이다.
“육신을 건사한다.”는 것은 인간 및 천상의 낙을 받아 수용하는 것이다.
“그것으로 부족하다.”는 것은 세간의 낙을 받을수록 갈애가 더욱 증장되어 번성하지만 결국 쇠퇴하여 진정한 이익이 안 되는 것이다.

ㄴ. 둘째 비유

둘째 비유에서 “그 아버지가 아들을 본다.”는 것은 부처님께서 본래마음으로 돌아가 동체대비로 모든 중생의 자부慈父가 된 것이다.
“그와 같은 사정”은 저 첫째의 비유에서 말한 사정과 같다.
“아들에게 말한다.”는 것은 중생에게 대승의 가르침을 설하는 것이다.
“너는 돈을 가지고 있는데, 어째서 그것을 사용하지 않느냐.”는 것은 청정심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 준 것이니, 마땅히 믿고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네 마음대로 쓰면 모두 충족할 것이다.”라는 것은 만약 청정심을 쓰면 본각의 뛰어난 이익과 법신의 혜명이 원만해지는 것이다.

ㄷ. 셋째 비유

셋째 비유에서 “그 아들은 정신 차리고”는 대승의 가르침을 듣고 믿음과 이해를 발생하여 그 지위가 지전地前의 경지에 올랐다는 것이다.

001_0635_b_01L二者其父示子有金錢令得充足喩
001_0635_b_02L三者喜得金錢喩四者告非有得
001_0635_b_03L初喩中言迷子者謂諸衆生
001_0635_b_04L自心源如來大悲如視一子故喩
001_0635_b_05L迷子法華窮子局喩聲聞此中迷
001_0635_b_06L通喩群生手執金錢者喩諸妄
001_0635_b_07L五縛煩惱執着分別覆自淨心
001_0635_b_08L不知有故遊行十方者遍計五相及
001_0635_b_09L五事故經五十年者受五陰生五十
001_0635_b_10L惡故貧者少有世間善故窮者都
001_0635_b_11L無出世財故困者或墮三途受劇苦
001_0635_b_12L苦者或生人天受輕苦故專事
001_0635_b_13L求索者求世間樂作福業故而以
001_0635_b_14L養身者受人天樂而受用故而不充
001_0635_b_15L足者受世間樂彌增渴愛盛必有
001_0635_b_16L無義利故第二喩中其父見子
001_0635_b_17L佛歸心源同軆大悲爲諸衆生
001_0635_b_18L作慈父故有如是事者有如初喩所
001_0635_b_19L說事故而謂子言者爲衆生說大乘
001_0635_b_20L敎故汝執金錢何不取用者示有淨
001_0635_b_21L應信解故隨意所須皆得充足者
001_0635_b_22L若用淨心本覺勝利法身慧命
001_0635_b_23L圓滿故第三喩中其子醒已者
001_0635_b_24L大乘敎而生信解位在地前故

001_0635_c_01L
“돈의 덕택”은 초지를 터득하여 바로 통달위通達位91)에서 불성과 본각의 이익을 증견證見하는 것이다.
“마음으로 크게 기뻐한다.”는 것은 후득지後得智92)에서 미래와 현재에서 발생하는 지극한 환희를 생각하는 것이다.
“돈을 벌었다고 말한다.”는 것은 관법을 떠나 정념正念을 잃고 유루심에서 법집을 일으켜 유소득이라고 자랑하는 것이다.

ㄹ. 넷째 비유

넷째 비유에서 “네가 번 돈은 본래 네 것이다.”라는 것은 그 증득한 본각의 이익이 본래 아들에게 속해 있던 것이지 지금에야 소유한 것이 아님을 보여 주는 것이다.
“네가 번 것이 아닌데, 어찌 기뻐한단 말이냐.”라는 것은 이미 본래 아들한테 속해 있던 것이지 지금에야 번 것이 아니므로 벌었다고 집착심을 내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기뻐할 것 없다.”라는 것은 유소득에서 집착을 내어 기뻐하는 분별심을 방지한 것이다.

ⓒ 합

선남자여, 암마라도 그와 마찬가지이다. 본래 떠나 있는 모습도 없고, 지금 들어간 것도 아니다. 옛적부터 미혹하다고 해서 없던 것도 아니고, 지금 깨쳤다고 해서 들어간 것도 아니다.”

이는 셋째로 합合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으니, 총론적인 합과 개별적인 합이다.

ㄱ. 총론적인 합

총론적인 합에서 말한 “암마라”는 번역하면 무구無垢이다. 본각은 본래 청정한 자성으로 개전改轉이 없으니, 마치 저 돈의 자성에 개전이 없는 것과 같다. 또한 금에는 네 가지 뜻이 있어 본각의 상·낙·아·정을 비유하였으니, (위의) 네 가지 비유에서 말한 금전과 완전히 합치된다.

ㄴ. 개별적인 합

개별적인 합에는 네 구절이 있다.
“본래 떠나 있는 모습도 없다.”는 것은 위의 첫째 비유로서 손에 돈을 갖고 있는 것에 합치된다.
“지금 들어간 것도 아니다.”라는 것은 위의 셋째 비유로서 돈을 얻은 것93)에 합치된다.
“옛적부터 미혹하다고 해서 없던 것도 아니다.”라는 것은 위의 둘째 비유로서 “너는 돈이 있는데도, 어째서 그것을 사용하지 않느냐.”라는 것에 합치된다. 곧 옛적에는 미혹한 까닭에 사용하지 못했지만 손에 갖고 있으므로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지금 깨쳤다고 해서 들어간 것도 아니다.”라는 것은 위의 넷째의 비유로서 “본래 네 것이다. 네가 번 것이 아니다.”라는 것에 합치된다. 지금 이 본각도 본래적인 것으로 자심에서 떠나 있는 것이 아니다.

001_0635_c_01L得金錢者得入初地正通達位證見
001_0635_c_02L佛性本覺利故心大歡喜者後得智
001_0635_c_03L念當現得生極喜故而謂得錢
001_0635_c_04L出觀失念有漏心中故起法執
001_0635_c_05L謂有得故第四喩中所得金錢是汝
001_0635_c_06L本物者示其所證本覺之利本來屬
001_0635_c_07L非始有故汝非有得云何可喜
001_0635_c_08L旣本屬汝非今始得不宜於得
001_0635_c_09L生着心故汝勿欣懌者遮其分別
001_0635_c_10L謂有所得於中生着而欣懌故

001_0635_c_11L
善男子唵摩羅者亦復如是本無出
001_0635_c_12L今則非入昔迷故非無今覺故非
001_0635_c_13L

001_0635_c_14L
是第三合於中有二摠合別合
001_0635_c_15L合中言唵摩羅者此云無垢本覺
001_0635_c_16L本淨性無改轉似彼金錢性無改故
001_0635_c_17L又金有四義喩本覺中常樂我淨
001_0635_c_18L合四喩中金錢也別合中有四句
001_0635_c_19L無出相者合初喩中手執金錢故
001_0635_c_20L卽非入者合第三喩而得金錢昔迷
001_0635_c_21L故非無者合第二喩汝執金錢何不
001_0635_c_22L取用是昔迷故不用而手執故非無
001_0635_c_23L今覺故非入者合第四喩是汝
001_0635_c_24L本物汝非有得今覺本物不出自

001_0636_a_01L이미 본래부터 떠나 있던 적이 없는데, 어찌 들어간다고 하는가. 들어간 것이 아니므로 유소득이 아니다.

b) 의정을 거듭 없앰

이하는 의정을 거듭 없앤 것으로, 세 차례의 문답을 통하여 차례로 의정을 없애 준다.

(a) 첫째 문답

무주보살이 여쭈었다.
“저 아버지가 아들의 미혹을 알고 있었다면 어째서 오십 년 동안 시방을 떠돌면서 빈·궁·곤·고하도록 내버려 둔 후에야 비로소 알려 준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오십 년이 지난 것은 일념지간一念之間(찰나)에 일심이 기동한 것이고, 시방을 떠돈 것은 원행으로 널리 계탁한 것이다.”

이것은 그 첫째의 문답이다. 곧 비유로써 질문한 의정에 대하여 법을 가지고 없애 준 대목이다. 답변의 뜻은 다음과 같다. “‘오십 년이 지난 것’은 일념에 마음이 기동한 것을 비유한 것이다. ‘시방을 떠돈 것’은 원행으로 널리 계탁한 것을 비유한 것이다. 이것은 곧 일념지간에 널리 제법을 계탁한 것으로, 이 일념지간에 그 아버지가 알려 준 것에 계합된 것이다. 알려 준 바로 그때는 깨침을 터득한 것이고, 망념이 모두 사라진 그 때는 무소득을 터득한 것이다.94) 마치 금전을 알아차린 것일 뿐이지 새삼스레 획득한 바가 아닌 것과 같다. 때문에 아버지가 알려 준 것은 오십 년의 오랜 세월이 경과했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일념지간에 오십 가지 악을 모두 갖추었다는 것을 드러낸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비유에서 ‘오십 년이 지난 것’이라 하였다.”
답변의 뜻이 이와 같은데, 도대체 이것은 무엇을 설명하고 있는가. 말하자면 무명의 힘을 말미암아 사상四相(生相·住相·異相·滅相)을 일으킨다. 이 사상과 무명이 화합된 힘은 일심에 생·주·이·멸을 기동한다. 일심이 이미 기동되면 이 사상이 수반된다. 이런 까닭에 “일념지간에 일심이 기동한다.”고 말한다. 마치 『기신론』에서 “자성청정심이 무명의 바람을 인유하여 기동한다. ……”라고 설한 바와 같다.95) 자세한 것은 저 『기신론별기』의 설명과 같다.96)

(b) 둘째 문답

무주보살이 여쭈었다.
“일념지간에 일심이 기동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일념지간에 일심이 기동하면 오음이 모두 발생하고, 오음이 발생하면 그 가운데 오십 가지 악이 모두 구비된다.”


001_0636_a_01L旣本不出何得有入非有入故
001_0636_a_02L非有得也

001_0636_a_03L
無住菩薩言彼父知其子迷云何經五
001_0636_a_04L十年十方遊歷貧窮困苦方始告言
001_0636_a_05L佛言經五十年者一念心動十方遊
001_0636_a_06L遠行遍計

001_0636_a_07L
此下重遣疑情三番問答次第遣
001_0636_a_08L此初番者問依喩疑答就法遣
001_0636_a_09L答意而言經五十年喩於一念心動
001_0636_a_10L十方遊歷喩於遠行遍計斯則一
001_0636_a_11L念之頃遍計諸法卽於此念其父告
001_0636_a_12L告言之時卽得醒悟念究竟時
001_0636_a_13L無所得如覺金錢而無所得所以父
001_0636_a_14L非爲經久但爲顯一念具五十惡
001_0636_a_15L喩中說經五十年耳答意如是
001_0636_a_16L是義云何謂由無明力而起四相
001_0636_a_17L相無明和合力故能動一心生住異
001_0636_a_18L一心旣動帶此四相是故說名
001_0636_a_19L念心動如起信論云自性淸淨心
001_0636_a_20L因無明風動乃至廣說於中委悉
001_0636_a_21L彼記說

001_0636_a_22L
無住菩薩言云何一念心動佛言
001_0636_a_23L念心動五陰具生五陰生中具五十
001_0636_a_24L

001_0636_b_01L
이는 둘째의 문답으로 둘째의 의정을 없애는 것으로, 소치所治의 악을 드러낸 것이다. 일념의 사상四相에 모든 생사가 섭수되어 있어서 오음과 오십 가지 악이 구비되어 있음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오음에 오십 가지 악이 구비되어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식음識陰에 여덟 가지가 있으니, 그것이 팔식이다. 그리고 수음受陰과 상음想陰에도 식음과 마찬가지로 여덟 가지가 있다. 행음行陰에는 아홉 가지가 있으니, 여덟 가지는 일심과 상응하고 한 가지는 일심과 상응하지 않는다. 색음色陰에는 열일곱 가지가 있다. 이들을 합치면 오십 가지가 된다. 열일곱 가지란 능조能造의 네 가지(四大)와 소조所造의 열세 가지이다. 말하자면 오근五根과 오진五塵과 법처에 섭수되는 세 가지 색, 곧 『현양성교론』에서 말하는 율의색律儀色, 불률의색不律儀色, 정자재소생색定自在所生色이다.97) 이것은 일문에 오십 가지를 내세운 것이다. 이와 같은 오십 가지는 순전한 악으로서 모두 유전하여 열반에 어긋난다. 그러므로 저 열반의 순전한 선에 상대된다.

(c) 셋째 문답

무주보살이 여쭈었다.
“중생은 원행으로 널리 계탁하며 시방을 떠돌아다니다가 일념지간에 마음이 발생하여 오십 가지 악을 구비하였습니다. 이에 어떻게 하면 저 중생으로 하여금 일념지간에 오십 가지 악을 발생시키지 않도록 할 수가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저 중생에게 마음과 정신을 안좌시키고 금강지에 거주토록 하며, 적정하여 망념의 기동이 없게 하고 심원을 늘상 편안하고 태연하게 하면, 그것이 곧 일념지간에 사상四相이 발생하지 않는 것이다.”98)

이것은 셋째의 문답으로 셋째의 의정을 없애는 것이니, 능치能治의 도를 설명한 것이다.
“저 중생”이란 십신 이전의 일체중생이다.
“마음과 정신을 안좌시킨다.”는 것은 십주 이후 마음을 삼공에 안주시켜 결정코 불퇴하므로 안좌라 말한다.
“금강지에 거주한다.”는 것은 초지 이상에서 법신을 증득하여 모든 멸괴를 떠나 있는 것이 금강과 같은 것이다.
“적정하여 망념의 기동이 없다.”는 것은 등각위의 경지에서 그 동념이 본래 적정한 줄을 깨쳐 다시는 동념이 기동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심원을 늘상 편안하고 태연하게 한다.”는 것은

001_0636_b_01L
是第二番遣第二疑顯所治惡欲明
001_0636_b_02L一念四相攝諸生死故具五陰有五
001_0636_b_03L十惡云何五陰具五十惡謂識陰有
001_0636_b_04L卽是八識受想二陰隨識各八
001_0636_b_05L行陰有九八是相應一不相應
001_0636_b_06L陰十七合爲五十言十七者能造
001_0636_b_07L四大所造十三謂五根五塵法處
001_0636_b_08L所攝有三種色如顯揚說謂律儀
001_0636_b_09L不律儀色及定自在所生色故
001_0636_b_10L且就一門立爲五十如是五十
001_0636_b_11L眞實惡皆是流轉違涅槃故對彼涅
001_0636_b_12L槃眞實善故

001_0636_b_13L
無住菩薩言遠行遍計遊歷十方
001_0636_b_14L念心生具五十惡云何令彼衆生
001_0636_b_15L生一念佛言令彼衆生安坐心神
001_0636_b_16L金剛地靜念無起心常安泰卽無生
001_0636_b_17L一念

001_0636_b_18L
是第三番遣第三疑明能治道
001_0636_b_19L彼衆生者十信已前一切衆生故
001_0636_b_20L坐心神者十住已去安心三空
001_0636_b_21L定不退名安坐故住金剛地者初地
001_0636_b_22L已上證得法身離諸滅壞如金剛
001_0636_b_23L靜念無起者等覺位中覺其動
001_0636_b_24L本來寂靜令不起故心常安泰

001_0636_c_01L묘각위의 경지에 도달하여 본래 마음에 기동과 소멸이 없고, 본래 동념이 없어 시작과 종말도 없음을 보는 것이다. 기동과 소멸이 없으므로 항상하고 동념이 없으며 편안하고, 시작과 종말이 없으므로 태연하지 않음이 없다.
이와 같이 수행하여 구경각을 터득하면 곧 생과 사가 없어 일념지간에 사상四相이 없기 때문에 “일념지간에 사상이 발생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런 뜻을 드러내기 위하여 『기신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초발의보살初發意菩薩 등은 동념의 이상異相99)을 깨달아 동념에서도 이상이 없다. 이로써 추분별집착상麤分別執着相(異相)을 벗어나 있기 때문에 상사각相似覺100)이라 말하고, 법신보살法身菩薩(地上菩薩) 등은 동념의 주상住相을 깨달아 동념에서도 주상이 없다. 이로써 분별추념상分別麤念相101)을 떠나 있기 때문에 수분각隨分覺이라 말하며, 보살지를 마친(菩薩地盡)102) 자는 방편을 완성하여 일념에 상응한다.103) 말하자면 일심이 처음 기동하는 것(生相)을 깨쳐 일심에 처음 기동하는 모습이 없어서 미세념微細念(生相)을 멀리 떠나 있기 때문에 일심의 자성을 본다.104) 이에 일심이 상주하기 때문에 구경각究竟覺(佛果)이라 말한다.105)

생각해 보면 『기신론』에서 “일심의 자성을 보아 일심이 곧 상주한다.”는 것은 『금강삼매경』의 “심원을 늘상 편안하고 태연하게 한다.”는 구절을 해석한 것이다.106) 그 밖의 구절도 『기신론』의 해석에 의거하면 위의 내용처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상으로 크게 나누어 본 일본각에 대한 연설을 마친다.

c) 이해시킴

무주보살이 여쭈었다.
“참으로 불가사의합니다. 일념이 불생임을 깨쳐 그 일심이 편안하고 태연한 것이야말로 곧 본각의 이익입니다. 본각의 이익에는 사상四相의 동념이 없고 항상 (시각과 본각이) 존재하여 없지 않으므로, 시각이 없다고 해서 본각조차 없는 것은 아니고, 본각이 없다고 해서 시각조차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에 시각이 없음을 깨치고 알면 그것이 곧 본각의 이익이고 본각입니다. 본각은 청정하고 무염이며 불변이고 불역입이다. 이처럼 결정자성인 까닭에 참으로 불가사의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바로 그렇다.”

이는 셋째로 이해시키고, 넷째로 마무리를 짓는 것이다.107)
“참으로 불가사의합니다.”라는 것은 총론적으로 이해하고 그 심오함을 찬탄한 것이고, 이하는 개별적으로 이해한 대목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001_0636_c_01L至妙覺位得見心源無起無滅
001_0636_c_02L本無動念無始無終無起滅故
001_0636_c_03L無動念故安無始終故無不泰然
001_0636_c_04L如是修行得究竟覺卽無生死一念
001_0636_c_05L四相以之故言卽無一念爲顯是
001_0636_c_06L義故起信論說言初發意菩薩等
001_0636_c_07L覺於念異念無異相以捨麁分別執
001_0636_c_08L着相故名相似覺如法身菩薩等
001_0636_c_09L覺於念住念無住相以離分別麁念
001_0636_c_10L相故名隨分覺如菩薩地盡滿足
001_0636_c_11L方便一念相應覺心初起心無初
001_0636_c_12L以遠離微細念故得見心性
001_0636_c_13L卽常住名究竟覺案云此中得見
001_0636_c_14L心性心卽常住卽釋此經心常安泰
001_0636_c_15L之句餘句1) [17] 如前應知上來大
001_0636_c_16L演本覺竟

001_0636_c_17L
無住菩薩言不可思議覺念不生
001_0636_c_18L心安泰卽本覺利利無有動常在不
001_0636_c_19L無有不無不無不覺覺知無覺
001_0636_c_20L利本覺覺者淸淨無染 [56] 不變不易
001_0636_c_21L定性故不可思議佛言如是

001_0636_c_22L
此是第三領解第四述成不可思議
001_0636_c_23L摠領歎深下別領解於中有二
001_0636_c_24L「淮」作「准」{甲}

001_0637_a_01L첫째는 이해한 언구言句에 대한 것이고, 둘째는 이해한 의리義理에 대한 것이다.

(a) 이해한 언구

“일념이 불생임을 깨쳐 그 일심이 편안하고 태연한 것”이란 위에서 “적정하여 망념의 기동이 없게 하고 심원을 늘상 편안하고 태연하게 한다.”는 구절을 이해한 것인데, 이것은 곧 시각의 구경처를 가리킨다.

(b) 이해한 의리

이하는 이해한 의리에 해당한다.
“곧 본각의 이익입니다.”라는 것은 시각이 본각과 다름이 없다는 뜻을 이해한 것이다. 『기신론』의 다음 설명과 같다.

만약 무념을 터득한 자는 곧 마음의 생상·주상·이상·멸상을 안다. 그래서 무념과 동등하기 때문에 실로 시각과 차이가 없다. 이에 사상이 동시에 존재하더라도 모두 독자적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그것은 본래 평등하여 본각과 동일하기 때문이다.108)

생각해 보면 “실로 시각과 차이가 없다.”는 것은 경문의 “곧 본각의 이익입니다.”라는 구절을 해석한 것이다.
“이에 사상이 동시에 존재하여 모두 독자적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그것은 본래 평등하다.”는 것은 경문의 “본각의 이익에는 사상四相의 동념이 없다.”는 구절을 해석한 것이다.
이와 같이 시각이 본각과 다름이 없는 줄을 알기 때문에 “항상 존재하여 없지도 않다.”는 것을 터득한다.
“항상 존재한다.”는 것은 그대로 없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항상’이라고 했지만 정녕 존재(有)에 해당하는 것은 없기 때문에 “시각이 없다고 해서 본각조차 없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미 시각이 존재한다는 것에는 해당되지 않기 때문에 비록 본각이 없지 않지만 시각이 있는 것은 아니므로 “본각이 없다고 해서 시각조차 없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시각이 없는 도리를 깨치고 알면 곧 시각이 본각과 다르지 않음을 알기 때문에 “이에 시각이 없음을 깨치고 알면 그것이 곧 본각의 이익이고 본각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구경에 깨쳐서 아는 자는 무명에 휩싸이는 것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기 때문에 “청정하고 무염하다.”고 하였다. ‘청정하다.’는 것은 본래 청정한 것이고, ‘무염이다.’라는 것은 지금 오염에서 떠나 있다는 것이다.
영원히 생·주·이·멸이 없으므로 “불변이고 불역입니다.”라고 하였다. ‘불역’은 생상과 주상이 없는 것이고, ‘불변’은 이상과 멸상이 없는 것이다.
만약 이러할진댄 곧 진리의 경계(眞際)와 동일하고 법성과 평등하므로 “이처럼 결정자성이다.”라고 하였다.
이미 진리의 경계와 동일하고 법성과 평등하여 언설문자를 떠나 있고 사려분별을 단절해 있기 때문에 “참으로 불가사의합니다.”라고 하였다.
앞에서 이미 “참으로 불가사의합니다.”라고 했는데,

001_0637_a_01L先領言句後領義理言覺念不生
001_0637_a_02L其心安泰者領前靜念無起心常安
001_0637_a_03L泰之句此是始覺之究竟處下領義
001_0637_a_04L理云卽本覺利者領無始覺異本覺
001_0637_a_05L如論說云若得無念者卽知心
001_0637_a_06L相生住異滅以無念等故而實無有
001_0637_a_07L始覺之異以四相俱時而有皆無自
001_0637_a_08L本來平等同一覺故案云實無
001_0637_a_09L始覺之異者是釋經中卽本覺利之
001_0637_a_10L四相俱時而有皆無自立本來
001_0637_a_11L平等者是釋經中利無有動如是
001_0637_a_12L始覺覺知無異故以能得常在不無
001_0637_a_13L言常在者直謂不無然此中言常
001_0637_a_14L而無當有故言無有不無旣無當於
001_0637_a_15L有始覺故雖不無覺而不有覺故言
001_0637_a_16L不無不覺覺知如是無覺道理卽知
001_0637_a_17L始覺不異本覺故覺知無覺本利本
001_0637_a_18L如是究竟覺知之者遠離無明所
001_0637_a_19L故淸淨無染淸淨者本來淨故
001_0637_a_20L無染者今離染故永無生住異滅
001_0637_a_21L不變不易不易者無生住故不變
001_0637_a_22L無異滅故若如是者卽同眞際
001_0637_a_23L等於法性故言決定性故旣同平等
001_0637_a_24L離言絕慮故言不可思議前已言不

001_0637_b_01L지금 거듭하여 “참으로 불가사의합니다.”라고 한 것은 불가사의한 것에 대해서도 또한 불가사의하기 때문이다.

d) 마무리를 지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로 그렇다.”는 것은 넷째로 마무리를 짓는 것이다. 위에서 무주보살이 이해한 바와 마찬가지로 도리에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다.

(2) 게송으로 찬탄함

무주보살이 그 설법을 듣고 나서 미증유한 것을 터득하였다. 이에 게송을 설하여 말씀드렸다.

尊者大覺尊    존자이시여, 훌륭하신 대각세존께서는
說生無念法    중생에게 무념의 법을 설해 주셨다네
無念無生心    분별념도 없고 생멸도 없는 마음 되니
心常生不滅    그 마음 항상 살아 있어 소멸 없다네
一覺本覺利    일본각 및 본각의 이익을 얻음으로써
利諸本覺者    모든 본각의 중생들을 이롭게 해 주네
如彼得金錢    마치 궁자가 금덩어리 획득한 것처럼
所得卽非得    터득한 것이 본래 터득함 아니었다네

이는 둘째로 게송으로 찬탄하는 것이다.109) 게송에 세 부분이 있다. 첫째, 제1·제2의 두 구는 총론적으로 능설을 찬탄한다. 둘째, 제3·제4·제5·제6의 네 구는 위의 법에 대한 설명을 찬송한다. 셋째, 제7·제8의 두 구는 저 비유로 한 설법을 찬송한다.

① 총론적으로 능설을 찬탄함

처음에 “중생에게 무념의 법을 설해 주셨다네.”라는 것은 모든 중생에게 무념법과 구경각의 성취에 대하여 설한 것이다.

② 법에 대한 설명을 찬송함

“분별념도 없고 생멸도 없는 마음 되니”는 생과 사의 분별념이 없어져 무생심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 마음 항상 살아 있어 소멸 없다네.”는 연설한 법문을 간략하게 찬탄한 것이다. 곧 위에서 “본래의 마음을 항상 편안하고 태연하게 하면” 내지 “항상 존재하여 없지 않으므로”를 가리킨다. ‘살아 있어’는 존재한다는 것이고, ‘소멸’은 없어진다는 것이다.
“일본각 및 본각의 이익을 얻음으로써 모든 본각의 중생들을 이롭게 해 주네.”라는 것은 저 모든 중생에게는 본각이 구비되지 않음이 없다. 이런 까닭에 “모든 본각의 중생들을”이라고 하였다.

③ 비유로 한 설법을 찬송함

아래의 두 구절은 위의 네 가지 비유를 찬탄한 것이다. 이것이 총론적으로 찬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3) 설법을 듣고 이익을 터득함

그때 대중은 이렇게 설하신 말씀을 듣고 나서 모두 본각의 이익과 반야바라밀을 터득하였다.

이것은 셋째로 설법을 듣고 터득한 이익에 대한 대목이다.110) 설법한 뜻을 따라서 각각 이익을 터득하였기 때문이다. 터득한 본각의 이익과 시각의 반야는 평등하여 다름이 없다. 이것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001_0637_b_01L思議今重言不思議者亦不可思議
001_0637_b_02L於不可思議故佛言如是者第四述
001_0637_b_03L成文如前所領解不違道理故

001_0637_b_04L
無住菩薩聞是語已得未曾有而說
001_0637_b_05L偈言

001_0637_b_06L
尊者大覺尊說生無念法無念無生心
001_0637_b_07L心常生不滅一覺本覺利利諸本覺者
001_0637_b_08L如彼得金錢所得卽非得

001_0637_b_09L
此是第二以偈讃頌頌中有三初之
001_0637_b_10L二句摠讃能說次有四句頌前法
001_0637_b_11L後有二句頌彼喩說初言說生
001_0637_b_12L無念法者說諸衆生成無念法
001_0637_b_13L竟覺故無念無生心者無生死念
001_0637_b_14L成無生心故言心常生不滅者略頌
001_0637_b_15L演文彼言心常安泰乃至常在不無
001_0637_b_16L生之言在滅之言無故一覺本
001_0637_b_17L覺利利諸本覺者者彼諸衆生
001_0637_b_18L無本覺是故說言諸本覺者下之二
001_0637_b_19L句頌前四喩摠頌可知

001_0637_b_20L
爾時大衆聞說是語皆得本覺利
001_0637_b_21L若波羅蜜

001_0637_b_22L
此是第三聞法得利隨所說義隨得
001_0637_b_23L利故得本覺利始覺般若平等無
001_0637_b_24L如前說故

001_0637_c_01L
4) 「입실제품入實際品」

“실제”란 허환虛幻을 떠나 있음을 지칭한 것으로 구경의 뜻이다. 허환을 떠나 있는 구경이기 때문에 실제라 한다. 곧 교학에 의거하여 이치를 닦아서 이입理入하고 행입行入하기 때문에 입入이라 말한다.111) 그러나 실제는 경계가 없음(無際)을 실제의 경계로 삼고, 이입理入과 행입行入은 깨달음에 들어감이 없음(無入)을 가지고 깨달음에 들어가기 때문에 입실제품이라 하였다.
개별적으로 관행을 설명하는 여섯 가지 품 가운데 셋째로 본각의 이익에 의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는 부분을 마쳤다. 이하는 그 넷째로 허환으로부터 실제에 들어가는 대목이다.112) 또한 앞의 「본각리품」에서는 심생멸문心生滅門을 설명하였지만, 여기 「입실제품」에서는 심진여문心眞如門을 드러낸다.
경문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대의를 간략하게 표방하고, 둘째는 도리를 자세하게 드러내며, 셋째는 사리불(身子)이 이해하고, 넷째는 당시의 대중이 획득한 이익이다.

(1) 대의를 간략하게 표방함

첫째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실제에 들어가는 방편을 열어 주고, 둘째는 이미 들어간 실제를 드러낸다.

① 실제에 들어가는 방편을 열어 줌

방편을 열어 주는 것에 두 가지가 있으니, 총론적으로 표방하고, 개별적으로 열어 준다.

가. 총론적으로 표방함

이에 여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모든 보살들은 본각의 이익(本利)과 깊은 깨달음(深入)으로 중생을 제도한다.

위의 경문은 총론적으로 표방하여 대의에 들어가게 한 것이다.

나. 개별적으로 열어 줌

만약 후대 비시非時113)에 진여에 대응하여 설법을 한다면 시절의 이익과 설법의 이익에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릇 순順 혹은 불순不順의 입장에서 설법하고, 동同도 아니고 혹은 이異도 아닌 입장에서 상응하여 그렇게 설법한다. 이리하여 모든 중생의 정情과 모든 중생의 지智114)를 이끌어 살반야薩般若115)의 바다에 유입시켜 그 중생으로 하여금 허환의 바람을 맞지 않게 하여 그들에게 일미의 신선굴(神孔)을 희망하도록 한다.

이는 둘째로 개별적으로 방편을 열어 주는 것이다. 여기에서 곧 네 가지 방편을 연다. 첫째는 시절을 아는 방편이고, 둘째는 근기를 아는 방편이며, 셋째는 끌어들이는 방편이고, 넷째는 벗어나게 하는 방편이다.

가) 시절을 아는 방편

첫째의 시절을 아는 방편이란 경문의 “만약 후대 비시非時에 진여에 대응하여 설법을 한다면

001_0637_c_01L
入實際品1)第五 [18]

001_0637_c_02L
言實際者離虛之稱究竟之義
001_0637_c_03L幻究竟故名實際依敎修理理入
001_0637_c_04L行入故名爲入然實際以無際爲
001_0637_c_05L二入是無入之入故名入實際品

001_0637_c_06L
於是如來作如是言諸菩薩等本利
001_0637_c_07L深入可度衆生

001_0637_c_08L
別明觀行六分之中第三依本利物
001_0637_c_09L分竟此下第四從虛入實又前品明
001_0637_c_10L心生滅門今此品顯心眞如門
001_0637_c_11L文有四一者略標大意二者廣顯道
001_0637_c_12L三者身子領解四者時衆得益
001_0637_c_13L初中有二先開令入方便後示所入
001_0637_c_14L實際開方便中摠標別開此文摠
001_0637_c_15L標令入大意

001_0637_c_16L
若後非時應如說法 [57] 利不俱 [58] [59]
001_0637_c_17L順不順說非同非異相應如說引諸
001_0637_c_18L情智流入薩般若海無令可衆挹彼
001_0637_c_19L虛風悉令彼庶一味神孔孔字諸本
作乳字
[60]

001_0637_c_20L
此是第二別開方便於中卽開四種
001_0637_c_21L方便一者知時方便二者識機方
001_0637_c_22L便三者引入方便四者出離方便
001_0637_c_23L知時方便者如經若後非時應如說
001_0637_c_24L「第五」無{甲}

001_0638_a_01L시절의 이익과 설법의 이익에 맞지 않는다.”는 부분이다.
‘후대’에 세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이후이고, 둘째는 정법이 소멸한 이후이며, 셋째는 오중오백세五重五百歲116) 가운데 마지막에 해당하는 오백세이다.
‘비시非時’는 중생의 인연이 순숙하지 않은 시절이고, 쉽게 깨치지 못하는 시절이며, 이견이 흥성하여 서로 비방하는 시절을 말한다. 만약 이와 같이 비시에 그대로 진여에 대응하는 설법을 하면 저 시절에 맞지 않아 이익이 없다. 시절과 설법의 수준에 이익이 병행되지 않기 때문에 ‘맞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것이 곧 시절을 아는 방편이다.

나) 근기를 아는 방편

둘째의 근기를 아는 방편이란 경문의 “그러므로 무릇 순順 혹은 불순不順의 입장에서 설법하고, 동同도 아니고 혹은 이異도 아닌 입장에서 상응하여 설한다.”는 부분이다.
“순順으로 혹은 불순不順의 입장에서 설법한다.”는 것은 만약 그대로 그들 마음에 순順하여 설하면 그들의 잘못된 집착을 흔들어 줄 수가 없고, 설령 오직 그들 마음에 불순不順해서 설하면 그들의 바른 믿음을 일으켜 줄 수가 없다.117) 그러므로 그들로 하여금 바른 믿음을 획득케 하고, 그들 마음에 본래의 잘못된 집착을 없애도록 해 주려고 모름지기 순의 입장에서 혹은 불순의 입장에서 설하는 것이다.
또한 그대로 순리順理로만 설하면 바른 믿음을 일으켜 줄 수가 없다. 그것은 중생의 뜻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불순리不順理로만 설하면 어찌 바른 이해를 발생시킬 수가 있겠는가. 그것은 도리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이에 신해를 획득토록 하기 위하여 경우에 따라서 순과 불순으로 설하는 것이다.
모든 이견과 쟁론이 흥성할 경우에 유견有見에 동조하여 설하면 그것은 공견空見과 달라지고, 공집空執에 동조하여 설하면 그것은 유집有執과 달라져서 동同이다 이異다 하는 쟁론을 더욱더 부추길 뿐이다. 또한 둘 모두를 동同이라 하면 그 둘은 곧 자기 내부에서 서로 다투고, 둘 모두를 이異라 하면 곧 그 둘 사이에 서로 다툰다. 이런 까닭에 동同도 아니고 이異도 아닌 입장에서 설한다.
“동同도 아니다.”라는 것은 언설의 측면을 든 것으로 말은 모두 취하지만 뜻은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이異도 아니다.”라는 것은 뜻의 측면을 든 것으로 말을 모두 인정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다르지 않음(非異)을 말미암은 까닭에 그들의 견해에 어긋나지 않고, 같지 않음(非同)을 말미암은 까닭에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다. 이처럼 견해와 도리가 서로 응하여(相望) 어긋나지 않기 때문에 “상응하여 그렇게 설한다.”고 말한다.
“상응여설相應如說”에서 ‘여如’는 ‘이而’로서 ‘그렇게’의 뜻이다.

다) 끌어들이는 방편

셋째의 끌어들이는 방편이란 경문의 “이리하여 모든 중생의 정情과 지智를 이끌어 살반야薩般若의 바다에 유입시킨다.”는 부분이다.

001_0638_a_01L時利不俱故後有三義佛滅度
001_0638_a_02L後故正法滅後故五重五百中後五
001_0638_a_03L百歲故言非時者非純熟時故
001_0638_a_04L易悟時故異見盛興相非時故若於
001_0638_a_05L如是非時直應眞如說法不當彼時
001_0638_a_06L無所利益時利不並故言不俱是爲
001_0638_a_07L知時方便識機方便者如經順不順
001_0638_a_08L非同非異相應如說故順不順
001_0638_a_09L說者若直順彼心說則不動邪執
001_0638_a_10L唯不順說者則不起正信爲欲令彼
001_0638_a_11L得正信心除本邪執故須或順或不
001_0638_a_12L順說又復直順理說不起正信乖彼
001_0638_a_13L意故不順理說豈生正解違道理
001_0638_a_14L爲得信解故順不順說也若諸
001_0638_a_15L異見諍論興時若同有見而說則異
001_0638_a_16L空見若同空執而說則異有執
001_0638_a_17L同所異彌興其諍又復兩同彼二則
001_0638_a_18L自內相諍若異彼二則與二相諍
001_0638_a_19L故非同非異而說非同者如言而取
001_0638_a_20L皆不許故非異者得意而言無不
001_0638_a_21L許故由非異故不違彼情由非同
001_0638_a_22L不違道理於情於理相望不違
001_0638_a_23L故言相應如說如者而也引入方
001_0638_a_24L便者如經引諸情智流入薩般若海

001_0638_b_01L
‘모든 중생의 정情’은 크고 작은 욕망을 지닌 근기의 차별이다.
‘모든 중생의 지智’는 공과 유에 대한 지견의 차별이다. 이와 같은 무리를 이끌어 모두 수행을 좇아 일각 및 일체지해라는 무상보리의 깊고 넓은 뜻에 들어가도록 한다. 마치 온갖 강물이 다 대해에 들어가면 깊고 넓은 대해가 똑같은 일미인 것과 같다. 이것을 끌어들이는 방편이라 한다.

라) 벗어나게 하는 방편

넷째의 벗어나게 하는 방편이란 경문의 “중생으로 하여금 허환의 바람을 맞지 않게 하여 그들 모두에게 일미의 신선굴을 희망하도록 한다.”는 부분이다.
‘맞다(挹)’118)는 것은 짐斟의 뜻으로 취하여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허환의 바람’은 떠다니는 허공의 바람이 모든 파랑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모든 외부의 경계가 모든 내부의 식랑識浪을 기동시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제도해야 할 중생이 경계의 바람을 맞은 까닭에 종전부터 모든 분별식의 파도에 전변되었다가 지금에야 그것을 맞지 않게끔 되어 그 분별식의 파도가 고요하게 멎은 것이다.
‘희망(庶)’은 서기庶幾로서 희망한다는 뜻이다.
‘신선굴(神孔)’은 신선이 거주하는 곳으로, 성읍을 멀리 떠나 있어 번뇌가 없이 고요하여 장생하는 곳이니, 대열반의 불사不死의 집을 비유한다. 이는 원만하고 적정하며 평등하기 때문에 ‘일미’라 하니, 저 중생으로 하여금 대열반을 희망하여 모든 분별식이 파도를 그치고 생사유전에서 벗어나게 한다. 이를 벗어나게 하는 방편이라 한다.

② 이미 들어간 실제를 보여 줌

세간은 세간이 아니고 주처는 주처가 아니므로 곧 오공五空119)의 경우 그것은 벗어나고 들어가지만 집착함과 버림이 없다. 왜냐하면 제법은 공상이지만 제법의 자성이 없는 것이 아니고,120) 무無도 아니며 불무不無도 아니기 때문이다.121) 곧 무無도 아니고 유有도 아니기 때문에 결정자성이 없어서 유에도 집착이 없고 무에도 집착이 없다. 그러므로 저 유有와 무無와 범凡과 성聖의 분별지혜로는 안은한 법성의 도리를 헤아릴 수가 없다. 모든 보살이 만약 이와 같은 본각의 이익을 안다면 곧 보리를 터득한다.”

이는 들어간 실제의 도리를 보여 주는 것이다. 여기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간략하게 설명하는 것이고, 둘째는 거듭 해석하는 것이며, 셋째는 편집은 옳지 않다는 것이고, 넷째는 달자의 승리에 대한 것이다.


001_0638_b_01L諸情者大小情欲差別故諸智
001_0638_b_02L空有知見差別故引接此輩
001_0638_b_03L順道流令入一覺一切智海無上菩
001_0638_b_04L提深廣義故如百川流同入大海
001_0638_b_05L大海深廣同一味故如是名爲引入
001_0638_b_06L方便出離方便者如經無令可衆
001_0638_b_07L挹彼虛風悉令彼庶一味神孔故
001_0638_b_08L者斟也是取納義言虛風者謂遊
001_0638_b_09L空風能起諸浪喩諸境界動諸識
001_0638_b_10L可度衆生挹境界風故從前來
001_0638_b_11L諸識浪轉今無令挹識浪靜息也
001_0638_b_12L庶者庶幾是希望義言神孔者
001_0638_b_13L1) [19] 遠離城邑無事閑靜長生之
001_0638_b_14L喩大涅槃不死之宅圓寂平等
001_0638_b_15L名一味令彼衆生希大涅槃止諸
001_0638_b_16L識浪出離流轉如是名爲出離方便

001_0638_b_17L
世間非世住非住處五空出入無有
001_0638_b_18L取捨何以故諸法空相法性非無
001_0638_b_19L法性非無一本
性非有無
[61] 非無不無不無不有無決
001_0638_b_20L定性不住有無非彼有無凡聖之智
001_0638_b_21L而能測 [62] 諸菩薩等若知是利卽得
001_0638_b_22L菩提

001_0638_b_23L
是示所入道理於中有四一者略明
001_0638_b_24L二者重釋三者偏執不當四者達者

001_0638_c_01L
가. 간략하게 설명함

첫째의 간략하게 설명하는 부분에서 “세간은 세간이 아니다.”는 말은 세간의 오법五法122)이 존재가 없다(無所有)는 것이다.
“주처는 주처가 아니다.”라는 것은 상주열반은 무소득이므로 관행을 닦는 자가 오온이 공한(五空) 줄을 터득했을 경우에 유를 떠나 공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벗어나고 들어간다.”고 하였다.
공에 들어갈 경우에는 공성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비록 공에 집착하지 않을지라도 공을 버리지도 않는다. 이로써 “집착함과 버림이 없다.”고 하였다.
이미 오공에 들어갔다면 무슨 까닭에 집착하지 않게 되고, 만약 집착이 없는 사람이라면 어째서 버리지 않게 된단 말인가.

나. 거듭 해석함

이와 같은 질문에 답변하려고 둘째로 그에 대하여 거듭 해석한다.
“제법은 공상이지만 제법의 자성이 없는 것이 아닌” 까닭에 공에 들어간다(入空)123)고 설한다.
“무無도 아니며 불무不無도 아니기 때문이다. 곧 무無도 아니고 유有도 아닌” 까닭에 집착함과 버림이 없다.
‘무無도 아니다.’라는 것은 법성의 도리는 토끼의 뿔과 같지 않다는 것이다.
‘불무不無도 아니다.’라는 것은 관찰수행자가 없애지 않는 것이니, 없애지 않는 것은 도리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
‘유有도 아니다.’라는 것은 관찰수행자 자신도 또한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은 유有의 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제법의 자성은 이와 같이 유·무가 결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달자는 양변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래서 “결정자성이 없어서 유有에도 집착이 없고 무無에도 집착이 없다.”고 말한다.
이런 도리를 말미암은 까닭에 집착하고 버림이 없다.

다. 치우친 집착은 옳지 않음

셋째에서 말한 “그러므로 저 유有와 무無와 범凡과 성聖의 분별지혜로는 은밀한 법성의 도리를 헤아릴 수가 없다.”에서 범부는 유有를 보존하여 공을 어기고, 이승은 유를 버리고 공적에 나아가니, 이와 같이 유·무의 분별을 벗어나지 못한 지혜로써 안은한 법성을 헤아릴 수 있다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할 수가 없다(非).”고 하였다.

라. 달자達者의 승리

넷째에서 말한 “모든 보살”은 지전보살地前菩薩이다. 만약 법성이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님을 알면, 처음 발심할 때 곧 정각을 성취하게 된다.124) 이런 까닭에 “곧 보리를 터득한다.”고 간절하게 말한다. 즉 발심하여 법성을 알아차렸을 경우 바로 그때가 곧 무상보리를 터득하는 것이다.

001_0638_c_01L勝利初中言世間非世者世間五法
001_0638_c_02L無所有故住非住處者常住涅槃
001_0638_c_03L無所得故修觀行者達五空時
001_0638_c_04L有入空故言出入入空之時不取
001_0638_c_05L空性雖不取空而不捨空以之故言
001_0638_c_06L無有取捨旣入五空何故不取
001_0638_c_07L無取者如何不捨爲答是問故第
001_0638_c_08L二釋諸法空相法性非無故說入空
001_0638_c_09L非無不無不無不有故無取捨
001_0638_c_10L非無者謂法性理不同兎角故
001_0638_c_11L不無者謂觀行者而不遣故不遣之
001_0638_c_12L非無理故言不有者謂觀行者
001_0638_c_13L亦不存故不存之者非有理故
001_0638_c_14L性如是非定有無是故達者不住
001_0638_c_15L二邊故言無決定性不住有無
001_0638_c_16L是道理故無取捨第三中言非彼有
001_0638_c_17L無凡聖之智者凡夫存有而背於
001_0638_c_18L2) [20] 乘背有而趣空寂如是不離
001_0638_c_19L有無之智而能測量安隱法性者
001_0638_c_20L有是處故言非也第四中言諸菩薩
001_0638_c_21L地前菩薩若知法性不有不無者
001_0638_c_22L初發心時便成正覺是故切言卽得
001_0638_c_23L菩提謂卽發心知法性時是時卽得
001_0638_c_24L「仙」作「屳」{甲}「空二」作「二空」{甲}

001_0639_a_01L이 뜻은 『화엄경』 「발심공덕품」에 나온다.125)

위의 여러 경문에서는 “결정자성”이라고 말했는데, 무슨 까닭에 여기에서는 “결정자성이 없다.”고 말하는가?
그것은 서로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결정자성이 없다는 말은 결코 개정되지 않는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2) 도리를 자세하게 드러냄

그때 대중 가운데 한 보살이 있었는데 이름이 대력이었다. 곧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와 부처님께 사뢰어 말씀드렸다.
“존자이시여, 참으로 여여하게 설하셨듯이 오공의 경우는 벗어나서 들어가지만 집착함과 버림이 없습니다. 그러면 오공의 경우에 집착함과 버림이 없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하는 둘째로 도리를 자세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여기에서 네 가지 문으로 분별한다. 첫째는 실제의 뜻을 드러내고, 둘째는 실제에 들어가는 뜻을 설명하며, 셋째는 실제에 들어가는 계위를 열고, 넷째는 실제에 들어가는 방편을 보인다.

① 실제의 뜻을 드러냄

첫째에도 다시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오공을 설명하고, 둘째는 삼공을 설명하며, 셋째는 공이 곧 진眞임을 설명하고, 넷째는 진眞이 곧 여如임을 설명한다.

가. 오공五空을 설명함

첫째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질문이고, 둘째는 답변이다.

가) 질문

질문하는 이의 이름을 “대력”이라 한 것은, 이 사람이 실제의 법문에 들어가 온 법계에서 하지 못하는 것이 없이 대자재를 터득하였기 때문에 대력이라 한 것이다. 그러므로 「입실제품」의 문에서 개발하여 현양한다.
“참으로 여여하게(如如)”라는 것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말씀이 진여 도리에 계합하는 것이니, 앞의 여如는 계합의 뜻이고, 뒤의 여如는 도리이다.
먼저 이해를 하고 연후에 질문을 하였다. 질문에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오공의 법문을 물었고, 둘째는 취와 사의 뜻이 없음을 물었다.

나) 답변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여, 오공이란 삼유가 공한 것이고, 육도의 모습이 공한 것이며, 법상이 공한 것이고, 명상이 공한 것이며, 심식의 뜻이 공한 것이다. 보살이여, 이와 같은 공은 공이면서 공에 집착하지 않고 공이면서 공상空相이 없다. 이처럼 무상無相한 법에 어찌 집착함과 버림이 있겠는가. 집착함이 없는 경지에 들어가면 곧 삼공에 들어간다.”


001_0639_a_01L無上菩提是義出華嚴經發心功德
001_0639_a_02L品也上來諸文每言決定性故
001_0639_a_03L故此中乃言無決定性是不相違
001_0639_a_04L所以然者無決定義無改定故

001_0639_a_05L
爾時衆中有一菩薩名曰大力卽從
001_0639_a_06L座起前白佛言尊者如如一本
如佛
所說 [63]
001_0639_a_07L五空出入無有取捨云何五空而不
001_0639_a_08L取捨

001_0639_a_09L
此下第二廣顯道理於中卽以四門
001_0639_a_10L分別一顯實際義二明趣入義
001_0639_a_11L開入之階位四示入之方便初中亦
001_0639_a_12L1) [21] 五空二明三空三明空是
001_0639_a_13L四明眞是如初中有二先問後
001_0639_a_14L問者名大力者此人得入實際
001_0639_a_15L法門遍周法界無所不爲得大自
001_0639_a_16L故名大力故於是門開發顯揚
001_0639_a_17L言如如者佛所說言契當如理故
001_0639_a_18L前如是當義後如是道理先領後問
001_0639_a_19L2) [22] 二義一問五空法門二問無
001_0639_a_20L取捨義

001_0639_a_21L
佛言菩薩五空者三有是空六道影
001_0639_a_22L是空法相是空名相是空心識義是
001_0639_a_23L菩薩如是等空空不住空空無空
001_0639_a_24L無相之法有何取捨入無取地

001_0639_b_01L
이것은 차례에 따라 앞의 두 가지 질문에 답변한 대목이다.

(가) 첫째의 질문에 대한 답변

“오공五空”은 곧 세 가지 진여를 드러낸 것이다.126) 그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유전진여流轉眞如이고, 둘째는 실상진여實相眞如이고, 셋째는 유식진여唯識眞如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뜻은 『현양성교론』에 설해져 있다.127) 오공 가운데 앞의 첫째와 둘째의 두 가지 공은 곧 앞의 (유전과 실상의) 두 가지 진여에 해당하고, 뒤의 세 가지 공은 곧 (유식의) 세 번째 진여에 해당한다.128) 이들은 무슨 뜻인가.
첫째 “삼유가 공하다.”는 것은 삼유의 애착을 말미암아 삼계에 유전하는데, 삼계에 유전해도 전·후에 자성이 없고 찰나도 집착이 없는 공으로서 무소득이다. 이것이 유전진여문이다.
둘째 “육도의 모습이 공하다.”는 것은 선업과 악업이라는 각각 두 가지 품을 말미암은 까닭에 육도의 과보가 본체와 비슷하게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모습은 본체에서 떠나 있지 않는 공으로서 무소득이다. 이것이 실상진여문이다.
셋째 (법상이 공한 것과 명상이 공한 것과 심식의 뜻이 공한 것의) 세 가지는 유식진여이다. 여기에서 앞의 두 가지에 해당하는 법상과 명상은 집착의 대상(所取)인 의義와 명名을 없앤 것인데, 명과 의는 서로 객체의 입장으로 실제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 심식은 능취能取인 심식을 없앤 것인데, 능과 소가 서로 대비되어 독립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유식의 도리는 들어가기가 가장 어렵기 때문에 우선 삼공을 열어 그 능·소를 없애는데, 능·소가 공해져야 비로소 무분별을 터득할 수가 있다.

(나) 둘째의 질문에 대한 답변

“보살이여” 이하는 두 번째 질문에 대하여 답변한 것이다.
“이와 같은 공”은 오공을 총체적으로 들어서 그 이理와 지智를 변별한 것이다.
“공이면서 공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은 공의 지智는 집착이 없어서 이理와 평등하다는 것이다.
“공이면서 공상이 없다.”는 것은 공의 이치는 무상無相하여 지智와 평등한 것이다. 이처럼 이와 지가 평등하여 능상과 소상이 없는데 어찌 그간에 집착함과 버림을 담고 있겠는가. 그러므로 중도에 들어가는 것은 곧 삼공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집착함이 없는 경지”란 곧 십지十地를 가리킨다.

나. 삼공三空을 설명함

대력보살이 여쭈었다.
“그러면 삼공三空이란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삼공이란 공상空相도 또한 공한 것이고,

001_0639_b_01L入三空

001_0639_b_02L
如其次第答前二問五空卽顯三
001_0639_b_03L種眞如何等爲三一流轉眞如
001_0639_b_04L實相眞如三唯識眞如是義具如顯
001_0639_b_05L揚論說此中前二空卽前二眞如
001_0639_b_06L後三空是第三眞如是義云何
001_0639_b_07L三有是空者由三有愛流轉三界
001_0639_b_08L三界流轉無前後性刹那無住
001_0639_b_09L無所得卽是流轉眞如門也第二六
001_0639_b_10L道影是空者由善惡業各二品故
001_0639_b_11L六道果報似本現影影無離本
001_0639_b_12L無所得卽是實相眞如門也後三唯
001_0639_b_13L識眞如門者前二是遣所取義名
001_0639_b_14L義互客不成實故後一是遣能取心
001_0639_b_15L能所相待不獨立故唯識道理
001_0639_b_16L最難可入故開三空遣其能所
001_0639_b_17L所空故得無分別菩薩已下答第
001_0639_b_18L二問如是等空者摠擧五空辨其
001_0639_b_19L理智空不住空者空智無住與理
001_0639_b_20L平等故空無空相者空理無相
001_0639_b_21L智平等故理智平等無能所相
001_0639_b_22L容取捨於其間哉所以入中卽入三
001_0639_b_23L無取地者謂十地也

001_0639_b_24L
大力菩薩言云何三空佛言三空者

001_0639_c_01L공공空空도 또한 공한 것이며, 소공所空도 또한 공한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공은 공상·공공·소공의 세 가지 모습에 집착이 없어서 진실하지 않음이 없다. 그래서 글과 말로 표현할 수가 없고 또 불가사의하다.”129)

이 하나의 문답은 삼공에 대하여 설명한 것이다.
“공상도 또한 공한 것이다.”에서 ‘공상’은 속제를 없애고 진제를 드러낸 것으로 평등한 상이고, ‘또한 공한 것이다.’는 진제를 융합하여 속제로 삼은 것이다.
“공공”의 뜻은 마치 진금을 녹여서 장엄구를 만드는 경우와 같다. 『열반경』에서 “유이기도 하고 무이기도 한 것을 공공이라 말하고, 옳기도 하고 옳지 않기도 한 것을 공공이라 말한다.”130)라고 말한 것과 같다. 이것은 속제의 유무·시비의 차별상이 곧 공공의 뜻임을 설명한 것이다. 평등공을 공하다고 한 것은 속제의 차별을 드러낸 것이므로 그 차별을 공공이라 말한다.
“공공도 또한 공한 것이다.”라는 것에서 ‘공공’은 곧 속제의 차별이고, ‘또한 공한 것이다.’는 다시 속제를 융합하여 진제로 삼은 것이니, 마치 장엄구를 녹여 다시 금덩어리로 만드는 것과 같다.
셋째에서 말한 “소공所空도 또한 공하다.”는 것은 첫째 공문 안에서의 공은 속제를 드러낸 것이고, 둘째 공 가운데서의 공은 진제를 드러낸 것인데, 이 둘은 무이無二이기 때문에 ‘또한 공하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이제를 융합하여 일법계를 드러낸 것이니, 일법계란 일심이다. 그러나 첫째의 공문 안에서 없앤 속제는 곧 변계소집상이고, 둘째의 공 가운데서 융합한 속제는 의타기상이다.131) 속제에 두 가지 상이 있으므로 없애는 것과 융합하는 것은 하나가 아니다.
또한 첫째의 공문 안에서 속제를 없애고 드러낸 진제, 그리고 둘째의 공 가운데서 속제를 융합하여 드러낸 진제의 경우, 이 두 문의 진제는 오직 하나뿐이고 둘은 없으니, 진제는 오직 한 가지 곧 원성실성뿐이다.

001_0639_c_01L空相亦空空空亦空所空亦空如是
001_0639_c_02L等空不住三相不無眞實文言道斷
001_0639_c_03L不可思議

001_0639_c_04L
此一問答是明3) [23] [64] 空相亦空者
001_0639_c_05L空相卽是遣俗顯眞平等之相亦空
001_0639_c_06L卽是融眞爲俗空空之義如銷眞金
001_0639_c_07L作莊嚴具如涅槃經言是有是無
001_0639_c_08L是名空空是是非是是名空空
001_0639_c_09L明俗諦有無是非差別之相是空空
001_0639_c_10L空於平等空顯俗差別故故此
001_0639_c_11L差別名爲空空空空亦空者空空
001_0639_c_12L卽是俗諦差別亦空 [65] 還是融俗爲眞
001_0639_c_13L如銷嚴具還爲金缾第三中
001_0639_c_14L所空亦空者謂初空中空所顯俗
001_0639_c_15L第二空中空所顯眞此二無二
001_0639_c_16L言亦空是融一諦顯一法界
001_0639_c_17L法界者所謂一心然初空門內
001_0639_c_18L遣俗者是所執相第二空中所融
001_0639_c_19L俗者是依他相俗有4) [24] 種相故
001_0639_c_20L所遣所融非一也又初門內遣俗
001_0639_c_21L所顯之眞第二空中融俗所顯之
001_0639_c_22L此二門眞唯一無二眞唯一
001_0639_c_23L「明」作「名」{甲}「有」作「其」{甲}「二」疑
001_0639_c_24L「三」{編}
「二」作「一」{甲}

001_0640_a_01L그러므로 없애고 융합하여 드러낸 것은 오직 하나일 뿐이다. 셋째 공은 진제도 아니고 속제도 아니며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니다.
또한 이 삼공에서 첫째의 공은 속제의 중도를 드러내고, 둘째의 공은 진제의 중도를 드러내며, 셋째의 공은 진제도 아니고 속제도 아니며 변邊도 없고 중中도 없는 중도의 뜻이다.
“이와 같은 공”이란 말은 삼공을 총체적으로 든 것이다. 곧 속제의 상에도 집착하지 않고 진제의 상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또한 속제와 진제가 없는 곳에도 집착하지 않는 상이기 때문에 “공상·공공·소공의 세 가지 모습에 집착이 없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집착이 없어 구경에 실제를 드러내므로 “진실하지 않음이 없다.”고 하였다. 비록 진실하지 않음이 없을지라도 실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와 같기 때문에 “글과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표현할 수 없다는 말도 또한 어디에 의지할 곳이 없기 때문에 또 “불가사의하다.”고 하였다.

다. 공空이 진眞임을 설명함

대력보살이 여쭈었다.
“그처럼 진실이 없지 않다면 그것은 곧 유에 상응할 것입니다.”

이하는 셋째로132) 공에는 진실이 없지 않지만 진실이 있는 것도 아니라는 뜻을 설명한 것이다. 첫째는 질문이고, 둘째는 답변이다.

가) 질문

질문한 뜻은 다음과 같다. “무릇 유라든가 무라는 말에는 반드시 상대성이 있다. 그래서 유가 아니라면 반드시 무이고 무가 아니라면 반드시 유이다. 그러므로 만약 진실의 도리가 없지 않다고 말한다면 곧 마땅히 그것은 진실의 도리가 있다는 말일 것이다.”
무릇 모든 수행자가 매양 이와 같이 계탁하기 때문에 그 집착을 없애 주기 위하여 이런 질문을 한 것이다.

나) 답변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무라 해도 무에 집착이 없어서 무도 아니고 유도 아니다. 유의 법이 아니라고 해서 무에 집착하는 것도 아니고, 무라는 분별상이 아니라고 해서 유에 집착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유·무를 가지고 설명하거나 도리를 터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보살이여, 명칭(名相)도 없고 뜻(義相)도 없어서 불가사의하다. 왜냐하면 명칭이 없는 명칭이지만 명칭 아님이 없고, 뜻이 없는 뜻이지만 뜻 아님이 없기 때문이다.”

답변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곧장 답변하고, 둘째는 심오함을 찬탄한다.


001_0640_a_01L種圓成實性所以遣融所顯唯一
001_0640_a_02L三空者非眞非俗非二非一又此
001_0640_a_03L1) [25] 初空顯俗諦中道次空顯眞
001_0640_a_04L諦中道第三空顯非眞非俗無邊無
001_0640_a_05L中之中道義言如是等空者摠擧三
001_0640_a_06L不住俗相不住眞相亦不住於
001_0640_a_07L無二之相故言不住三相如是不住
001_0640_a_08L究竟顯實故言不無眞實雖不無實
001_0640_a_09L而非有實由如是故文言道斷
001_0640_a_10L斷之言亦不可寄故亦說言不可思
001_0640_a_11L

001_0640_a_12L
大力菩薩言不無眞實是相應有

001_0640_a_13L
此下第三明空不無眞而不有眞義
001_0640_a_14L先問後答問意而言凡言有無
001_0640_a_15L也相對不有必無不無卽有若言
001_0640_a_16L不無眞實之理則應是有眞實之理
001_0640_a_17L凡諸學者每作是計爲遣彼執
001_0640_a_18L作是問

001_0640_a_19L
佛言無不住無不無不有不無不有一本
有不住有
[66]
001_0640_a_20L不有之法不卽住無不無之相不卽
001_0640_a_21L住有非以有無而詮得理菩薩無名
001_0640_a_22L義相不可思議何以故無名之名
001_0640_a_23L無於名無義之義不無於義

001_0640_a_24L
答中有二一者正答二者歎深初中

001_0640_b_01L
(가) 곧장 답변함

첫째에서 “무라 해도 무에 집착이 없어서”라는 것은 앞서 말한 “진실이 없지 않다.”는 구절 중의 ‘없다(無)’는 명칭이 없다는 것에도 집착하지 않음을 가리킨다. 이런 까닭에 없지 않다는 명칭이 있다는 뜻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이로써 “무도 아니고 유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명칭이 없는 명칭을 뜻이 있다는 뜻에 해당시킬 수 없음을 설명한 것이다.
“유의 법이 아니라고 해서 무에 집착하는 것도 아니다.”라는 것은 비록 속제를 융합하여 진제로 삼았지만 진제가 없다는 법을 고수하지 않는 것이다.
“무라는 분별상이 아니라고 해서 유에 집착하는 것도 아니다.”라는 것은 비록 진제를 융합하여 속제로 삼았지만 속제가 있다는 모습을 고수하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진제와 속제는 유·무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입장에서는 진실의 무이도리無二道理가 없지 않고, 진제와 속제는 이제가 없지 않다는 입장에서는 진실의 무이도리가 있지 않다. 그러므로 “유·무를 가지고 설명하거나 도리를 터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뜻이 없는 뜻은 명칭이 있는 명칭에 칭합할 수 없음을 설명한 것이다.

(나) 심오함을 찬탄함

“보살이여” 이하는 둘째의 심오함을 찬탄한 대목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그대로 찬탄하고,133) 둘째는 찬탄을 해석한다.134)

㉮ 그대로 찬탄함

“명칭이 없는 명칭이지만 명칭 아님이 없다.”는 것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명칭은 뜻이 있다는 뜻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에 ‘명칭이 없는 명칭’이 되지만, 뜻이 없는 뜻에 해당하기 때문에 ‘명칭 아님이 없다.’고 하였다.

㉯ 찬탄을 해석함

“뜻이 없는 뜻이지만 뜻 아님이 없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부처님께서 체득하신 뜻은 명칭이 있다는 명칭에 칭합되지 않기 때문에 ‘뜻이 없는 뜻’이 되지만, 명칭이 없다는 명칭에 칭합되기 때문에 ‘뜻 아님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명칭과 뜻이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또한 명칭과 뜻이 그대로 없다는 것은 아니다. 이런 도리로 인해 불가사의한 것이다.

라. 진眞이 여如임을 설명함

이하는 넷째로 진眞은 여如가 아니지만 여의 뜻 아님이 없음을 설명하는 것이다.135)

001_0640_b_01L言無不住無者先言不無眞實句中
001_0640_b_02L謂無之名不住無義是故不無之名
001_0640_b_03L亦不當於有義以之故言不無不有
001_0640_b_04L是明無名之名不當有義之義不有
001_0640_b_05L之法不卽住無者雖融俗爲眞而不
001_0640_b_06L守眞無之法故不無之相不卽住有
001_0640_b_07L雖融眞爲俗而不守俗有之相故
001_0640_b_08L以眞俗不住有無故不無眞實無二
001_0640_b_09L之理眞俗不無二諦故不有眞實無
001_0640_b_10L二之理故言非以有無而詮得理
001_0640_b_11L明無義之義不稱有名之名菩薩已
001_0640_b_12L第二歎深於中有二直歎釋歎
001_0640_b_13L無名之名不無於名者佛所說名
001_0640_b_14L不當有義之義故爲無名之名而當
001_0640_b_15L無義之義故言不無於名也無義之
001_0640_b_16L義不無於義者佛所體義不稱有名
001_0640_b_17L之名故爲無義之義而稱無名之名
001_0640_b_18L故言不無於義也如是不有名義而
001_0640_b_19L亦不無名義由是道理不可思議也

001_0640_b_20L
大力菩薩言如是名義眞實如相
001_0640_b_21L來如相如不住如如無如相相無如
001_0640_b_22L非不如來衆生心相相亦如來
001_0640_b_23L生之心應無別境

001_0640_b_24L
此下第四明眞不有如而無不如義

001_0640_c_01L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질문이고, 둘째는 답변이다.

가) 질문

대력보살이 여쭈었다.
“그와 같은 명칭과 뜻은 진실여眞實如이고 진실상眞實相이며, 여래여如來如이고 여래상如來相으로서 그 여如는 여如 자체에도 집착이 없습니다. 이에 여에는 여라는 상이 없고, 상에는 여가 없기 때문에 여래 아님이 없습니다. 중생심과 중생상의 경우에도 그 상이 또한 여래이듯이 중생의 마음도 여래와 다른 경계가 아니어야 합니다.”

질문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도리를 내세우고, 둘째는 의심나는 바를 묻는다.

(가) 도리를 내세움

“그와 같은 명칭과 뜻”이란 저 앞에서 설한 불가사의한 명칭(名相)과 뜻(義相)을 가리킨다. 명칭과 뜻이 서로 칭합되어 전도顚倒가 없고 전변轉變이 없으므로 ‘진실’이라 한다.
이와 같이 명칭과 뜻이 능과 소를 멀리 떠나 있어 일미평등하기 때문에 “진실여眞實如의 모습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명칭과 뜻이 평등여平等如이고 평등상平等相으로서 제불여래께서 체득한 것이기 때문에 “여래여如來如이고 여래상如來相이다.”라고 하였다.
“여如는 여如 자체에도 집착이 없다.”는 것은 명칭을 붙일 수 없는 여의 명칭은 그러한 것이 없다는 여의 뜻에 해당함을 설명한 것이다.
“여에는 여라는 상이 없고, 상에는 여가 없다.”는 것은 여如와 상相이 없는 여와 상이어야 명칭이 없는 여의 명칭에 칭합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칭합되고 해당되어 능과 소가 평등하기 때문에 명칭과 뜻은 여래 아님이 없다.
“상에는 여가 없다.”는 것은 여如와 상相에는 여와 상과 같음이 없다는 것인데, 이것은 모습 없음(無相)을 모습(相)으로 삼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여에는 여라는 상이 없다.”는 것은 여의 무상無相이란 있을 수가 없음을 설명한 것이고, “상에는 여가 없다.”는 것은 무상의 여란 있을 수가 없음을 설명한 것인 줄 알아야 한다. 여의 자체(體)와 모습(相)은 비록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또한 여의 자체와 모습이 없지는 않다. 이와 같이 여와 상이 없는 여이고 상이어야 비로소 명칭이 없는 명칭에 칭합된다.
“중생심과 중생상의 경우에도 그 상이 또한 여래이다.”라는 것은 모든 중생의 분별심과 분별상에서 분별심과 분별상이 곧 분별심과 분별상이 아니므로 평등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까닭에 저 중생의 분별심과 분별상 또한 여래이다. 이상은 첫째의 평등의 도리를 바로 내세운 것에 해당한다.

(나) 의심나는 것을 물음

다음으로 “중생의 마음도 마땅히 여래와 다른 경계가 아닙니다.”라는 것은 둘째의 의심나는 것을 물은 것이다. 곧 중생심과 중생상이 이미 여래라면 중생심은 다른 경계가 아니어야 한다.
“다른 경계가 아니다.”라는 것은 곧 분별이 없는 것이다. 분별이 없으므로 염오가 없어야 하고, 염오가 없기 때문에 삼계가 없다.

001_0640_c_01L於中有二先問後答問中亦二
001_0640_c_02L立道理後問所疑言如是名義者
001_0640_c_03L如前所說不可思議之名義相名義
001_0640_c_04L相稱無倒無變故名眞實如是名義
001_0640_c_05L遠離能所一味平等故名如相
001_0640_c_06L是名義平等如相諸佛如來所體
001_0640_c_07L故言如來如相如不住如者是明無
001_0640_c_08L名之如名當於無如之如義如無如
001_0640_c_09L相相無如故者無如相之如相稱於
001_0640_c_10L無名之如名如是稱當能所平等故
001_0640_c_11L若名若義非不如來也相無如者
001_0640_c_12L如相無如如相正是無相爲相
001_0640_c_13L知如無如相是明不有如之無相
001_0640_c_14L無如者是明不有無相之如如之體
001_0640_c_15L相雖是不有而亦不無如之體相
001_0640_c_16L如是無如相之如相方稱無名之如
001_0640_c_17L名也衆生心相相亦如來者謂諸衆
001_0640_c_18L生分別心相相卽非相無不平等
001_0640_c_19L是故彼相亦是如來上來正立平等
001_0640_c_20L道理次言衆生之心應無別境者
001_0640_c_21L問所疑衆生心相旣是如來則衆
001_0640_c_22L生心應無別境無別境者卽無分
001_0640_c_23L無分別故應無染汚無染汚故
001_0640_c_24L「三」作「一」{甲}

001_0641_a_01L
이런 의심이 일어나는 까닭에 이러한 질문을 한 것이다.

나) 답변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중생의 마음은 실로 여래와 다른 경계가 아니다. 왜냐하면 마음은 본래 청정하기 때문이고, 그 도리로 보면 더러움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번뇌에 오염되므로 삼계라 말하는데, 그 삼계의 마음을 여래와 다른 경계라 말한다. 그 경계는 허망한데 마음에서 변화하여 발생한다. 그러므로 만약 마음에 허망함이 없으면 곧 여래와 다른 경계가 아니다.”

이것은 의심에 답변한 것이다. 먼저 인정하고, 나중에 그것을 부정한다.

(가) 인정함

대력보살의 말을 인정한 것은 자성이 청정한 것에 따르면 본래 오염이 없기 때문이고, 부정한 것은 외부의 오염을 따르면 여래와 다른 경계가 있기 때문이다.
“자성이 청정하다.”고 인정하는 것은 『보성론』에서 경전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 것과 같다.

선심도 찰나찰나 소멸하여 머물지 않으므로 번뇌에 물들지 않는다. 불선심도 찰나찰나 소멸하여 머물지 않으므로 번뇌에 머물지 않는다. 번뇌가 마음에 닿지 않고 마음도 번뇌에 닿지 않는데 어떻게 법에 닿지 않고서 마음을 오염시킬 수 있겠는가. …….136)

이것이 바로 오염되었으되 오염되지 않는 문이다.
그리고 “외부의(他) 오염을 따른다.”는 것에 대해서는 『승만부인경』에서 “자성청정심은 요지하기 어렵다. 저 자성청정심이 번뇌에 오염되는 것도 또한 요지하기 어렵다.”137)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오염되지 않았으되 오염되는 문이다.
“마음은 본래 청정하기 때문이고, 그 도리로 보면 더러움이 없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자성청정심과 본각의 도리는 모든 번뇌가 끼어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 부정함

“그러나 번뇌에 오염되므로 …….” 이하는 그 질문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첫째는 번뇌에 오염된 불각을 드러내고, 둘째는 불각에 상대하여 시각을 간략하게 보여 준다.

㉮ 번뇌에 오염된 불각을 드러냄

불각을 말한 가운데 “그러나 번뇌에 오염되므로 삼계라 말한다.”는 것에서 주지번뇌住持煩惱는 대략 세 가지가 있으니, 욕애주지欲愛住地·색애주지色愛住地·유애주지有愛住地138)이다. 이 주지번뇌 때문에 삼계의 애착을 일으키고, 삼계의 애착 때문에 삼계의 망심이 발생하며, 이 망심을 말미암아 허망한 경계를 변작變作한다. 이런 까닭에 “마음에서 변화하여 발생한다.”고 하였다.

㉯ 불각에 상대하여 시각을 간략하게 보여 줌

다음으로 시각을 설명한다.
“그러므로 만약 마음에 허망함이 없으면”이란 도리에 의거하여 관觀을 행하면

001_0641_a_01L卽無三界有作是疑故作是問

001_0641_a_02L
佛言如是衆生之心實無別境何以
001_0641_a_03L心本淨故理無穢故以染塵故
001_0641_a_04L爲三界三界之心名爲別境是境虛
001_0641_a_05L從心化生心若無妄卽無別境

001_0641_a_06L
是答所疑先與後奪與者就自性
001_0641_a_07L本無染故奪者約隨他染有別
001_0641_a_08L境故自性淨者如寶性論引經說言
001_0641_a_09L善心念念滅不住非煩惱所染不善
001_0641_a_10L心念念滅不住非煩惱所染煩惱不
001_0641_a_11L觸心心不觸煩惱云何不觸法
001_0641_a_12L能得染心乃至廣說故卽是染而不
001_0641_a_13L染門也隨他染者夫人經言自性
001_0641_a_14L淸淨心難可了知彼心爲煩惱所染
001_0641_a_15L亦難可了知卽是不染而染門也
001_0641_a_16L本淨故理無穢故者自性淨心本覺
001_0641_a_17L之理非諸塵穢之所入故以染塵下
001_0641_a_18L奪其所問於中先顯不覺染塵後對
001_0641_a_19L不覺略示始覺不覺中言以染塵
001_0641_a_20L故名爲三界者住地煩惱略有三種
001_0641_a_21L謂欲愛住地色愛住地有愛住地
001_0641_a_22L以此住地起三界愛三界愛故
001_0641_a_23L界心生由是妄心變作虛境以之故
001_0641_a_24L言從心化生次明始覺心若無妄者

001_0641_b_01L망심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곧 여래와 다른 경계가 아니다.”라는 것은 허망하게 일어난 경계는 마음을 따라 소멸되기 때문이다.
이상의 네 가지 문을 합하면 ‘첫째 실제의 뜻을 널리 펼친 것’에 해당한다.139)

② 실제에 들어가는 뜻을 널리 펼침

대력보살이 여쭈었다.
“만약 마음이 청정하여 모든 경계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그 마음이 청정해졌을 경우에는 마땅히 삼계도 없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보살이여. 마음도 경계를 발생하지 않고 경계도 마음을 발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경계는 오직 마음이 나타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음에 환화가 없으면 곧 나타나는 경계도 없다.

이하는 둘째140)로 실제에 들어가는 뜻을 널리 펼친 것이다. 여기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실제에 들어가는 것을 총론적으로 설명하고, 둘째는 실제에 들어가는 것을 개별적으로 드러내며, 셋째는 실제에 들어가는 주체가 허물(過)을 떠나 있다는 것이고, 넷째는 실제에 들어가는 객체가 변견(邊)을 떠나 있다는 것이다.

가. 실제에 들어감을 총론적으로 설명함

첫째의 총론적으로 설명하는 것에도 두 부분이 있다. 첫째는 질문이고, 둘째는 답변이다.

가) 질문

질문에서 “그 마음이 청정해졌을 경우에는 마땅히 삼계도 없겠습니다.”라는 것은 초지 이상에서는 본래 청정을 증견證見하기 때문에 그에 상응하는 대로 삼계가 소멸하여 없다는 것이다. 삼계의 현상(事相)은 초지나 제8지에서 소멸하여 없어지고, 삼계의 자성은 등각위等覺位에서 소멸하여 없어지며, 삼계의 습기는 묘각위妙覺位에 도달해야 비로소 소멸하여 없어진다. 이에 대한 자세한 뜻은 『이장장』에서 설한 것과 같다.141)

나) 답변

답변에서 총론적으로 긍정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였다. 삼계가 소멸하여 없어질 때에는 마음과 경계가 모두 발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오직 마음이 망견으로 경계를 만들어 낸 것일 뿐, 마음에 망견이 없을 때에는 경계를 만들어 내지 않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경계가 없으므로 마음이 발생하지 않는다.

나. 실제에 들어감을 개별적으로 드러냄

그러므로 보살이여, 마음속에 중생이 없어야 삼성이 공적해진다. 그러면 자기의 중생도 없고, 타인의 중생도 없으며, 내지 이입二入142)도 또한 발생하지 않는다. 마음에 이와 같은 본각의 이익(本利)을 터득해야 곧 삼계가 없다.”

이하는 둘째로 실제에 들어가는 것을 개별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여기에 두 부분이 있다.

001_0641_b_01L依理觀行妄心不生故卽無別境者
001_0641_b_02L妄作境界隨心滅故上來四門
001_0641_b_03L爲第一廣實際義

001_0641_b_04L
大力菩薩言心若在淨諸境不生
001_0641_b_05L心淨時應無三界佛言如是菩薩
001_0641_b_06L不生境境不生心何以故所見諸境
001_0641_b_07L唯所見心心不幻化卽無所見

001_0641_b_08L
此下第二廣趣入義於中有四一者
001_0641_b_09L摠明趣入二者別顯趣入三者入之
001_0641_b_10L離過四者入之離邊初中有二
001_0641_b_11L後答問中言此心淨時應無三界
001_0641_b_12L初地已上證見本淨故隨所應
001_0641_b_13L三界滅無三界事相者或於初
001_0641_b_14L或第八地而得滅無三界自性
001_0641_b_15L等覺位中而得滅無三界習氣
001_0641_b_16L至妙覺位方得滅無此義具如二障
001_0641_b_17L章說答中摠許故言如是三界滅
001_0641_b_18L無時心境不相生所以然者唯心
001_0641_b_19L妄見變作境界心無妄時則不作
001_0641_b_20L境界無故不生心也

001_0641_b_21L
菩薩內無衆生三性空寂則無己衆
001_0641_b_22L亦無他衆乃至二入亦不生心得如
001_0641_b_23L是利卽無三界

001_0641_b_24L
此下第二別明趣入於中有二

001_0641_c_01L첫째는 총론적으로 법수를 들어 설명하고, 둘째는 문답을 통해 개별적으로 드러낸다.

가) 총론적으로 법수를 들어 설명함

이는 첫째의 총론적으로 법수를 들어 설명하는 것이다.
“마음속에 중생이 없다.”는 것은 십주위十住位에서 안으로 인공을 터득한 것이다.
“삼성이 공적해진다.”는 것은 십행위十行位에서 안으로 법공法空을 터득한 것이다.
“그러면 자기의 중생도 없고 타인의 중생도 없어진다.”는 것은 십회향위十廻向位에서 평등공平等空을 터득하여 널리 자타自他·인법人法의 모든 것(衆)을 없앤 것이다. ‘모든 것(衆)’은 중생은 중衆이라 하고, 오음의 법은 또한 오중五衆이라고 한다. 이런 것들143)은 모두 상사공相似空으로 아직은 진정한 증득이 아니다.
“내지 이입二入”은 지전위地前位와 지상위地上位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법수를 통틀어 열거한 것이다.

나) 문답을 통해 개별적으로 드러냄

대력보살이 여쭈었다.
“이입二入이 마음에서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마음도 본래 발생하지 않는 것인데, 어찌 입入이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입이란, 첫째는 이입理入이고, 둘째는 행입行入이다. 이입理入은 다음과 같다.
곧 중생이 지니고 있는 진성은 여래와 다르지 않아서 이에 동일하지 않고(不一) 같지도 않지만(不共) 단지 객진번뇌에 휩싸여 있을 뿐임을 깊이 믿는 것이고, 또한 감도 없고 옴도 없는 각覺·관觀(麤煩惱와 細煩惱)을 응주하며, 또한 불성은 유도 아니고(不有) 무도 아니며(不無), 또한 자기도 없고(無己) 남도 없으며(無他), 범과 성이 불이不二임을 금강심지에 견주堅住하여 불이不移임을 제대로 관찰한다. 이와 같이 적정한 무위가 되어 분별이 없게 되는 것을 이입이라 말한다.

이하는 문답을 통해 개별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144)

(가) 질문

질문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묻고, 나중에 따진다.

(나) 답변

답변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답변하고, 나중에 회통시킨다.

㉮ 답변

답변에는 다시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법수를 표시하고, 둘째는 명칭을 나열하며, 셋째는 차례대로 법상을 변별한다.

a. 법수를 표시함

이 가운데 “이입”은 도리에 따라 신해信解하지만 아직 증득한 수행(證行)을 터득하지 못한 것이므로 이입이라 한다. 이것은 지전위地前位에 해당한다. “행입”은 도리를 증득한 뒤 수행하여 무생행에 들어가기 때문에 행입이라 한다. 이것은 지상위地上位에 해당한다.

b. 명칭을 나열함

a) 이입理入

이입理入에 대한 경문에 네 구절이 있다.
“중생이 지니고 있는 …… 깊이 믿는 것이다.”라는 것은 십신위十信位에 들어간 것이다. “동일하지 않다.”는 것은 중생상이 진성과 다르지 않지만 동일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001_0641_c_01L者摠標擧數二者問答別顯此是初
001_0641_c_02L內無衆生者謂十住位得內人
001_0641_c_03L空故三性空寂者十行位中得內
001_0641_c_04L法空故則無己衆亦無他衆者十廻
001_0641_c_05L向位得平等空遍遣自他人法衆故
001_0641_c_06L所言衆者衆生名衆五陰之法
001_0641_c_07L名五衆故是相似空未得眞證
001_0641_c_08L至二入者通擧地前地上入數

001_0641_c_09L
大力菩薩言云何二入不生於心
001_0641_c_10L本不生云何有入佛言二入者一謂
001_0641_c_11L理入二謂行入理入者深信衆生不
001_0641_c_12L異眞性不一不共但以客塵之所翳障
001_0641_c_13L不去不來凝住覺觀諦觀佛性不有
001_0641_c_14L不無無己無他凡聖不二金剛心地
001_0641_c_15L堅住不移寂靜無爲無有分別是名
001_0641_c_16L理入

001_0641_c_17L
此下問答別顯問中有二先問後難
001_0641_c_18L答中亦二先答後通答中有三
001_0641_c_19L列名次第辨相此中理入者
001_0641_c_20L理信解未得證行故名理入位在
001_0641_c_21L地前行入者證理修行入無生行
001_0641_c_22L故名行入位在地上理入文中
001_0641_c_23L其四句深信已下乃至翳障是十
001_0641_c_24L信入不一者謂衆生相不異眞性

001_0642_a_01L“같지도 않다.”는 것은 같지도 않고 또한 다르지도 않다는 것이다.
“감도 없고 옴도 없는 각·관을 응주한다.”는 것은 십주위十住位에 들어간 것이다. 중생이 공하다는 것을 깨쳤기 때문에 오거나 감이 없다. 곧 인공문에 들어가서 그 마음을 고요하게 머물러서 불성에는 오고 감이 없음을 알아서 살피는 것이다.
“불성은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님을 제대로 관찰한다.”는 것은 십행위十行位에 들어간 것이다. 곧 이미 법공을 터득하고 그 법공문에 의하여 불성에는 법상이 없고 공성이 없지 않음을 제대로 살피는 것이다.
“자기도 없고 남도 없으며, 범과 성이 불이임을 ……”이라는 것은 십회향위十廻向位를 설명한 것이다.
이처럼 이입은 이미 자타가 평등한 공을 터득했기 때문에 마음이 금강처럼 굳게 머물러 물러남이 없다. 『범망경』에서 말한 십금강十金剛145)과 『인왕경』에서 말한 십견심十堅心146)은 곧 십회향의 다른 명칭이다.

b) 행입行入

행입은 다음과 같다.
마음은 기울거나 치우치지 않고, 마음의 모습은 흐르거나 변역되지 않는다. 따라서 존재하는 모든 곳에서 망념이 고요해지고 추구함이 없어서 팔풍에 흔들리지 않으니, 마치 대지와 같다. 분별심(心)을 없애고 망아妄我를 떠나 있으므로, 중생을 제도하되 마음도 발생하지 않고(無生) 경계의 모습도 없으며(無相) 집착(取)도 없고 저버림(捨)도 없다.

이는 지상地上에서 증입하는 수행을 설명하는 것이다.
“마음은 기울거나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은 여리지如理智의 마음은 대상이 없으므로 대상에 집착하는 마음이 생기하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마음의 모습은 흐르거나 변역되지 않는다.”는 것은 여리지의 경계가 삼제三際를 떠나 있으므로 흐르거나 변역의 경계상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일체세간의 복락 내지 보리의 대열반과大涅槃果 등 일체에 대하여 다 원구願求가 없고 평등平等에 통달하여 피·차가 없기147) 때문에 경계의 팔풍八風148)에 흔들림이 없는 것은 자리의 행입을 설명한 것이다.
“분별심을 없애고 아를 떠나 있으므로 ……”는 남으로 하여금 수행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이로써 아공과 법공을 증득하여

001_0642_a_01L而非一故不共者非亦一亦異故
001_0642_a_02L第二句言不去不來凝住覺觀者
001_0642_a_03L十住入悟衆生空故不來去於人空
001_0642_a_04L靜住其心覺察佛性無去來故
001_0642_a_05L第三句言諦觀佛性不有不無者
001_0642_a_06L十行入已得法空依法空門諦觀
001_0642_a_07L佛性不有法相不無空性故第四
001_0642_a_08L句言無己無他凡聖不二等者是明
001_0642_a_09L十廻向位理入已得自他平等空故
001_0642_a_10L心如金剛堅住不退梵網經中
001_0642_a_11L十金剛仁王經中名十堅心是十
001_0642_a_12L廻向之異名也

001_0642_a_13L
行入者心不傾倚影無流易於所有
001_0642_a_14L靜念無求風鼓不動猶如大地
001_0642_a_15L離心我救度衆生無生無相不取不
001_0642_a_16L

001_0642_a_17L
是明地上證入之行心不傾倚者
001_0642_a_18L理智心不攀緣故攀緣之心不生起
001_0642_a_19L影無流易者如理之境離三際
001_0642_a_20L流變境像不復現故所有一切
001_0642_a_21L世間福樂乃至菩提大涅槃果於是
001_0642_a_22L一切皆無願求通達平等無此彼
001_0642_a_23L故非境界風所鼓動是明自利行
001_0642_a_24L捐離己下令他入行以證二空

001_0642_b_01L인상과 법상을 떠나 있는 까닭에 널리 일체를 제도할 수가 있다. 비록 마음도 발생하지 않고 경계의 모습도 없지만 그 적멸149)한 자성에 집착하지도 않고 늘상 일체중생을 저버리지도 않는다. 이런 까닭에 “집착도 없고 저버림도 없다.”고 하였다.

c. 차례대로 법상을 변별함

이와 같은 자리행과 이타행을 행입이라 한다.

㉯ 힐난을 회통함

보살이여, 마음에는 나고 듦이 없다. 나고 듦이 사라진 마음이라야 비로소 나고 듦이 없는 마음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입入150)이라 한다.

이는 둘째로 저 힐난한 바를 회통시키는 것이다.
도리를 증득한 마음은 생멸을 멀리 떠나 시작도 없고 끝도 없기 때문에 마음에 나고 듦이 없다. 나고 듦이 없으면 또한 옛적에 나고 들었던 마음도 없기 때문에 나고 듦이 사라진 마음이 된다. 옛적에 있던 나고 듦의 마음을 제거해야만 그 나고 듦이 없는 마음에 들어가기 때문에 “비로소 나고 듦이 없는 마음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입入151)이라 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앞의 힐난을 잘 회통시킨다.

다. 실제에 들어가는 주체가 허물을 떠나 있음

보살이여, 이와 같이 실제에 들어간 법은 그 법상이 텅 비어 있지 않다. 텅 비어 있지 않는 법이야말로 그 법은 허망하게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허망하게 없어지지 않는 법에는 공덕이 구족되어 있어 주체의 마음도 아니고 대상의 모습도 아니어서 법이法爾하게 청정하기 때문이다.”

이하는 셋째로 실제에 들어가는 주체가 허물(過)을 떠나 있다는 것이다.152) 여기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간략하게 설명하고, 둘째는 자세하게 해석한다.

가) 간략하게 설명함

이는 첫째로 간략하게 설명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실제에 들어간 법”은 실제에 들어가 나고 듦이 없는 법을 말한다.
이 “허망하게 없어지지 않는 법”은 주체(能)와 대상(所)에 평등하고, 모든 근심과 걱정을 떠나 있으며, 모든 공덕을 구족하고 있다.
“주체의 마음도 아니고 대상의 모습도 아니다.”라는 것은 마음과 경계가 평등하여 주체와 대상의 분별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
“법이法爾하게 청정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모든 분별상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

나) 자세하게 해석함

대력보살이 여쭈었다.
“주체의 마음도 아니고 대상의 모습도 아니어서 법이하게 청정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공적하고 여여한 법은 심식의 법도 아니고 마음으로 만들어진 법도 아니며, 공상의 법도 아니고 색상의 법도 아니며, 심불상응의 법도 아니고

001_0642_b_01L離人法相故能普遍救度一切雖心
001_0642_b_02L無生亦無境相而不取其寂滅之性
001_0642_b_03L恒不捨於一切衆生以之故言不取
001_0642_b_04L不捨如是二行名爲行入

001_0642_b_05L
菩薩心無出入無出入心入不入故
001_0642_b_06L故名爲入

001_0642_b_07L
此是第二通彼所難證理之心遠離
001_0642_b_08L生滅無始無終故心無出入無出
001_0642_b_09L入已亦無昔日出入之心故無出入
001_0642_b_10L去昔有出入心入此不出入心故
001_0642_b_11L言入不入故故名爲入如是前難得
001_0642_b_12L善通也

001_0642_b_13L
菩薩如是入法法相不空不空之法
001_0642_b_14L法不虛1) [26] 何以故不無之法具足功
001_0642_b_15L非心非影法爾淸淨

001_0642_b_16L
此下第三能入離過於中有二略明
001_0642_b_17L廣釋此卽略明如是入法者謂入
001_0642_b_18L實際無出入法是不無法能所平等
001_0642_b_19L離諸過患具諸功德非心非影者
001_0642_b_20L心境平等離能所故法爾淸淨者
001_0642_b_21L無始無終離諸相故

001_0642_b_22L
大力菩薩言云何非心非影法爾淸淨
001_0642_b_23L佛言空如之法非心識法非心使所
001_0642_b_24L有法非空相法非色相法非心不相

001_0642_c_01L심무위상응의 법도 아니며, 나타나는 모습도 아니고 드러내어 보이는 것도 아니며, 자성도 아니고 차별도 아니며, 명칭도 아니고 형상도 아니며 뜻도 아니다. 왜냐하면 뜻(義相)153)에는 진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여 아닌 법이 없고, 또한 진여 없는 곳이 없다. 진여 없는 곳(無如)이 없으므로(無有) 모든 존재는 진여의 존재(如有) 아님이 없다. 왜냐하면 뿌리(根)와 줄기(理)의 법은 뿌리도 아니고 줄기도 아니어서 모든 쟁론을 떠나 있으므로 그 모습을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154)
보살이여, 이와 같이 법이하게 청정한 법은 생에 의해 생기는 생도 아니고, 멸에 의해 소멸되는 멸도 아니다.”

이하는 둘째로 과過를 떠나 있음을 자세하게 해석하는 것이다. 첫째는 질문이고, 둘째는 답변이며, 셋째는 이해이고, 넷째는 서술하여 마침이다.

((가) 질문)

(나) 답변

답변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주체의 마음도 없고 대상의 모습도 없다.”는 구절을 해석하고, 둘째는 “법이法爾하게 청정하다.”는 구절을 해석한다.

㉮ 주체의 마음도 없고 대상의 모습도 없다는 구절을 해석함

첫째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실제에 들어간 법은 모든 마음과 모습을 떠나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둘째는 마음과 모습은 진여의 도리 아님이 없음을 설명한다.

a. 실제에 들어간 법은 모든 마음과 모습을 떠나 있음을 설명함

첫째에서 “공적하고 여여한 법”이란, 실제에 들어갈 때 모든 분별상을 떠나는 것을 공空이라 하고, 능과 소가 평등한 것을 여如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실제에 들어간 법은 모든 마음(心)과 마음의 모습(影)을 떠나 있다.
마음과 마음의 모습의 차별에 대략 여섯 가지 짝이 있다. 첫째는 심과 심소가 짝이 되고, 둘째는 허공과 색이 짝이 되며, 셋째는 불상응행과 여러 무위無爲가 짝이 되고, 넷째는 영상影像과 본질本質이 짝이 되며, 다섯째는 자성과 차별이 짝이 되고, 여섯째는 명언名言과 상의相義가 짝이 된다. 이 여섯 가지 짝 가운데 첫째의 한 짝은 능연심能緣心의 부류이고, 뒤의 다섯 가지 짝은 소연영所緣影의 부류이다. 이 여섯 가지 짝을 떠나 있기 때문에 주체의 마음(心)도 아니고 대상의 모습(影)도 아니니, 차례대로 여섯 가지 짝의 구절이 있다.
“심식의 법도 아니다.”라는 것은 여덟 가지 분별식의 마음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
“마음으로 만들어진 법도 아니다.”라는 것은 여섯 가지의 심소유법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

001_0642_c_01L應法非心無爲相應法一本云非心有爲不
[67] 相應法非心無爲是
001_0642_c_02L相應
非所現影非所顯示非自性
001_0642_c_03L差別非名非相何以故義無 [68]
001_0642_c_04L非如之法 [69] 亦無無如無有無如
001_0642_c_05L無如有何以故根理之法非理非根
001_0642_c_06L離諸諍論不見其相善薩如是淨法
001_0642_c_07L非生之所生生非滅之所滅滅

001_0642_c_08L
此下第一 [70] 廣釋離過先問次答三領
001_0642_c_09L四述答中有二先釋非心非影之句
001_0642_c_10L後釋法爾淸淨之句初中亦二先明
001_0642_c_11L入法離諸心影後明心影無非如
001_0642_c_12L初中言空如之法者入實際時
001_0642_c_13L遠離諸相曰空能所平等曰如如是
001_0642_c_14L入法離諸心影心影差別略有六
001_0642_c_15L一者心及心所爲雙二者虛空
001_0642_c_16L與色爲雙三者不相應行及諸無爲
001_0642_c_17L爲雙四者影像及與本質爲雙
001_0642_c_18L自性差別爲雙六者名言及與
001_0642_c_19L相義爲雙此六雙中初之一雙
001_0642_c_20L緣心類後五雙者所緣影類離此
001_0642_c_21L六雙故非心影如其次第有六雙句
001_0642_c_22L非心識法者以離八識心故非心使
001_0642_c_23L所有法者以離六位心所有法故
001_0642_c_24L「棄」作「弃」{甲}

001_0643_a_01L
“공상의 법도 아니다.”라는 것은 색상이 없는 허공법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
“색상의 법도 아니다.”라는 것은 현색顯色·형색形色·표색表色의 세 가지 색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
“심유위불상응의 법도 아니다.”라는 것은 스물네 가지 불상응행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
“심무위불상응의 법도 아니다.”라는 것은 그 밖의 일곱 가지 무위법을 떠나 있기 때문인데, 이것도 결국 심에 의하여 드러난 것이므로 ‘심무위’라 하고, 세 가지 무위의 모습과 상응하는 법이므로 ‘상응법’이라 한다. 또한 세 가지 진여법155)을 떠나 있는 것이 깨달음의 문에 들어가면 세 가지 차별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나타나는 모습도 아니다.”라는 것은 방편관으로 나타나는 본법本法(本質) 및 동분同分156)의 영상影像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
“드러내어 보이는 것도 아니다.”라는 것은 또한 영상으로 드러내어 보인 본질의 법 곧 뼈대(骨鎖) 등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
“자성도 아니다.”라는 것은 색色과 심心 등의 자성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
“차별도 아니다.”라는 것은 무상無常 등의 차별상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
“명칭도 아니다.”라는 것은 명名·구句·문文 같은 능전能詮의 모습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
“형상도 아니고 뜻도 아니다.”라는 것은 명名에 의해 나타나는 형상(相)과 명칭에 해당하는 뜻(義)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
(공적하고 여여한 법은) 무슨 까닭에 이 여섯 가지 짝의 모습을 떠나 있는 것인가. 그것은 능과 소가 평등하여 무차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여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b. 마음과 모습은 진여의 도리 아님이 없음을 설명함

“진여 아닌 법이 없고” 이하는 둘째로 마음(心)과 마음의 모습(影)의 법은 진여의 도리 아님이 없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여 아닌 법”은 앞에서 부정했던 여섯 가지 짝의 법상이다.
“또한 진여 아님이 없다.”는 것은 진여의 도리가 두루 통하기 때문이다.
“진여 없는 곳이 없다.”는 것은 그 어떤 한 가지 존재(一有相)의 법이라도 진여의 도리 아님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는 진여의 존재 아님이 없다.”는 것은 설령 진여가 아닌 법이 있다면 존재가 가능하겠지만 이미 진여 아닌 법이 없으므로 존재(有)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뜻을 해석하는 것이다.
“뿌리(根)”는 나무의 뿌리로서 감추어진 종자에 비유된다.
“줄기(理)”는 나무의 줄기로서 나타난 법에 비유된다. 마치 저 위에서 암마라의 과실을 비유한 설명과 같다.
“모든 쟁론을 떠나 있으므로 그 모습을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001_0643_a_01L空相法者離無色相虛空法故非色
001_0643_a_02L相法者離顯形表三種色故非心不
001_0643_a_03L相應法者離二十四不相應行故
001_0643_a_04L心無爲相應法者離餘七種無爲法
001_0643_a_05L依心所顯故名心無爲三種無
001_0643_a_06L爲之相相應法故名相應法亦離
001_0643_a_07L三種眞如法者入證門中無三別故
001_0643_a_08L非所現影者離方便觀之所顯現本
001_0643_a_09L法同分之影像故非所顯示者亦離
001_0643_a_10L影像之所顯示本質之法骨鏁等故
001_0643_a_11L非自性者離色心等之自性故非差
001_0643_a_12L別者離無常等差別相故非名者
001_0643_a_13L離名句文能詮相故非相義者離名
001_0643_a_14L所詮相當名之義故何故離此六
001_0643_a_15L雙相者能所平等無差別故故言如
001_0643_a_16L非如之法已下第二明心影法
001_0643_a_17L無不如理非如法者 [71] 謂前所非六雙
001_0643_a_18L法相亦無無如者如理遍通故
001_0643_a_19L有無如者無一有相之法而無如理
001_0643_a_20L者故非無如有者設有無如之法
001_0643_a_21L可得爲有旣非非如之法不得爲有
001_0643_a_22L何以故下釋非有義根者樹根
001_0643_a_23L喩於種子理者木理喩於現法
001_0643_a_24L前菴羅果喩中說離諸諍論不見其

001_0643_b_01L각혜覺慧로 추구해도 얻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상의 두 부분은 주체의 마음도 아니고 대상의 모습도 아님을 펼친 것이다.

㉯ 법이法爾하게 청정하다는 구절을 해석함

“이와 같이 법이法爾하게 청정한 법은” 이하는 그 다음으로 법이하게 청정한 법을 펼친 것이다.
“생에 의해 생기는 생도 아니다.”라는 것은 생상生相을 떠나 있으므로 자체가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멸에 의해 소멸되는 멸도 아니다.”라는 구절도 또한 그처럼 멸상滅相을 떠나 있으므로 자체가 소멸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청정한 법은 유위의 상을 떠나 있어서 생도 없고 멸도 없으며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이런 뜻으로 “법이法爾하게 청정하다.”고 한다.

(다) 이해

대력보살이 여쭈었다.
“불가사의합니다. 이와 같이 (공적하고 여여한) 법상은 합하여 성취된 것도 아니고 홀로 성취된 것도 아니며, 구속되는 것도 아니고 얽매이는 것도 아니며, 모이는 것도 아니고 흩어지는 것도 아니며, 발생하는 것도 아니고 소멸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오는 모습도 아니고 또 가는 모습도 아니니, 불가사의합니다.”157)

이는 셋째로 이해한 것이다.158)
“합하여 성취된 것도 아니다.”라는 것은 심心도 아니고 심소心所도 아니니, 심과 심소는 별체로 상응하기 때문이다.
“홀로 성취된 것도 아니다.”라는 것은 자성도 아니고 차별도 아니니, 이 두 가지 뜻은 따로 두 가지 체가 없기 때문이다.
“구속되는 것도 아니다.”라는 것은 명칭도 없고 뜻도 아니기 때문이니, 명칭과 뜻은 서로 의지하기 때문이다.
“얽매이는 것도 아니다.”라는 것은 영상과 본질이 아니기 때문이니, 영상과 본질은 서로 견주어 수반되기 때문이다.
“모이는 것도 아니고 흩어지는 것도 아니다.”라는 것은 공도 아니고 색도 아니기 때문이니, 모여서 집성되면(聚集) 색이 되고 흩어져서 괴멸되면(散壞) 공이 되기 때문이다.
“발생하는 것도 아니고 소멸하는 것도 아니다.”라는 것은 불상응도 아니고 무위도 아니기 때문이니, 불상응행은 생기하고 모든 무위법은 멸滅에 의해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앞에서 설한 여섯 가지 짝의 뜻을 떠나 있음을 이해시킨 것이다.
“또한 오는 모습도 아니다.”라는 것은 생에 의해 생기는 생이 아니기 때문이고, “또 가는 모습도 아니다.”라는 것은 멸에 의해 소멸되는 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앞의 경문에서 말한 “법이法爾하게 청정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처음에 “불가사의합니다.”라고 한 것은 진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여로서 마음과 언설을 떠나 있기 때문이고,

001_0643_b_01L相者覺慧求之無所得故上來二
001_0643_b_02L廣非心影如是淨法已下次廣
001_0643_b_03L法爾淸淨非生之所生生者離生相
001_0643_b_04L體非生故下句亦爾離滅相故
001_0643_b_05L體非滅故如是淨法離有爲相
001_0643_b_06L生無滅無始無終由是義故法爾
001_0643_b_07L淸淨也

001_0643_b_08L
大力菩薩言不可思議如是法相
001_0643_b_09L合成不獨成不羈不伴不聚不散
001_0643_b_10L生不滅亦無來相及以去相 [72] 不可思
001_0643_b_11L

001_0643_b_12L
此是第三領解不合成者非心非心
001_0643_b_13L心與心所別體相應故不獨成
001_0643_b_14L非自性非差別是二義別無二
001_0643_b_15L體故不羈者非名非義故名義互
001_0643_b_16L爲客故不伴者非影質故影質相
001_0643_b_17L類而爲伴故不聚散者非空非色故
001_0643_b_18L聚集爲色散壞爲空故不生滅者
001_0643_b_19L非不相應非無爲故不相應行
001_0643_b_20L生起故諸無爲法滅所顯故此領
001_0643_b_21L前說離六雙義亦無來相者非生之
001_0643_b_22L所生生故及以去相者非滅之所滅
001_0643_b_23L滅故是領後說法爾淸淨初言不可
001_0643_b_24L思議者非如之如離心言故後言

001_0643_c_01L마지막에 “불가사의합니다.”라고 한 것은 공적한 마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마음으로서 또한 마음과 언설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

(라) 서술하여 마침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 말처럼 불가사의하다. 불가사의한 마음, 그 마음도 또한 마찬가지이다.159) 왜냐하면 여여는 공적한 일심과 다르지 않은데, 공적한 일심은 본래 여여하기 때문이다.

이는 넷째로 서술하여 마치는 것이니,160) 차례대로 두 종류의 “불가사의하다.”라는 구절을 서술하였다.
“마음”이란 깨침에 들어간 마음을 말한다. 곧 무분별심의 마음은 실제에 들어감이 없는 경지에 들어가기 때문에 불가사의하다.
“여여는 공적한 일심과 다르지 않다.”는 것은 앞의 불가사의를 해석한 것이다.
“공적한 일심은 본래 여여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뒤의 불가사의를 해석한 것이다.

라. 실제에 들어가는 객체가 변견을 떠나 있음

중생과 불성은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왜냐하면 중생의 자성은 본래 생멸이 없기 때문이고, 생멸의 자성은 그 자성이 본래 열반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중생자성과 생멸법상이 본래 여여하고, 여여하므로 기동이 없다.

이는 넷째로 실제에 들어가는 객체가 변견을 떠나 있다는 것이다.161)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불성이 같다·다르다 하는 변견을 떠나 있음을 설명하고, 둘째는 여여함이 있다·없다 하는 변견을 떠나 있음을 드러낸다.

가) 불성이 같다·다르다 하는 변견을 떠나 있음을 설명함

첫째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간략하게 설명하고, 둘째는 자세하게 드러낸다.

(가) 간략하게 설명함

이는 첫째로 간략하게 설명하는 것이다. 여기에 또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같다·다르다를 떠나 있는 것이고, 둘째는 다르다는 것을 떠나 있음을 해석한다.

㉮ 같다·다르다를 떠나 있음

첫째에서 같다·다르다를 떠나 있다는 것은 중생과 불성은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기 때문이다.
“불성”이라는 말은 진여불성이다. 『열반경』에서는 “불성이란 제일의공第一義空을 말한다.”162)고 하였다. 그러므로 같다고 한다든가 다르다고 하면 모두 허물이다.

㉯ 다르다는 것을 떠나 있음을 해석함

“왜냐하면 중생의 자성은 본래 생멸이 없기 때문이고” 이하는 둘째로서 다르다는 것을 떠나 있음을 해석하는 것이니, 같지 않다는 뜻은 쉽게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중생이 불성과 다르지 않음을 설명한 것이다.
“생멸의 자성은 그 자성이 본래 열반이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생사가 열반과 다르지 않음을 설명한 것이다.
“이처럼 자성과 법상이 본래 여여하고, 여여하므로 기동이 없다.”는 것은 중생 곧 사람의 자성과 생멸 곧 법의 모습이 본래 여여하여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001_0643_c_01L不可思議者離心之心亦離二故

001_0643_c_02L
佛言如是不可思議不思議心心亦
001_0643_c_03L如是何以故如不異心心本如故

001_0643_c_04L
此是第四述成如其次第述彼二種
001_0643_c_05L不思議句所言心者謂入證心
001_0643_c_06L心之心入於不入故不思議如不
001_0643_c_07L異心者釋前不思議心本如故者
001_0643_c_08L釋後不思議也

001_0643_c_09L
衆生佛性不一不異衆生之性本無
001_0643_c_10L生滅生滅之性性本涅槃性相本如
001_0643_c_11L如無動故

001_0643_c_12L
此下第四所入離邊於中有二
001_0643_c_13L明佛性離一異邊後顯如如離有無
001_0643_c_14L初中有二略明廣顯此卽略明
001_0643_c_15L此中亦二先離一異後釋離異
001_0643_c_16L一異者謂衆生與佛性不一亦不異
001_0643_c_17L言佛性者眞如佛性如涅槃經
001_0643_c_18L佛性者名第一義空故若一若異
001_0643_c_19L皆有過故衆生之性本無生滅者
001_0643_c_20L此下釋離異義不一之義易可見故
001_0643_c_21L此句明人不異佛性生滅之性性本
001_0643_c_22L涅槃者是明生死不異涅槃故性相
001_0643_c_23L本如如無動故者衆生人性生滅法
001_0643_c_24L本來是如故不異也

001_0644_a_01L
(나) 자세하게 드러냄

일체의 유위법상은 연을 따라 생겨난 것이지 본래 생기해 있는 것이 아니다. 본래 생기해 있는 무위법상과 불성은 여여하고 여여하여 기동하는 바가 없다. 유위의 인연에 해당하는 불성과 법상은 그 모습이 본래 공하여 없고, 소연연所緣緣은 공공으로서 연기하는 바가 없다. 그러므로 일체의 인연법은 미혹한 마음에 허망하게 보이는 것일 뿐이다. 이에 지금 나타나 있는 것은 본래부터 불생이니 인연이 본래 없기 때문이다. 공적한 일심법과 여여법의 도리는 자체가 공하여 없다. 마치 저 공왕처럼 본래 주처가 없다는 것인데 범부의 마음으로 허망하게 분별하여 본다.

이하는 둘째로 자세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오직 다르다는 변견을 떠나 있다는 뜻만을 펼친 것이다. 일체의 유위법상은 연으로부터 생겨나고, 일체의 과법도 연으로부터 존재하기 때문에 곧 새롭게 생기하는 것이 없다. 그래서 이미 생기해 있는 무위법상과 불성은 여여하여 기동하는 바가 없다. 이하는 능기能起하는 모든 인연도 역시 공하다는 것을 설명한다.
“인연에 해당하는 불성과 법상은 그 모습이 본래 공하여 없다.”는 것은 종자로서의 인연은 존재하지 않기(無所有) 때문이다.
“소연연은 공공으로서 연기하는 바가 없다.”는 것은 소연연所緣緣의 법은 하나가 아닌 다양한 것이지만 모두 공하지 않음이 없으므로 ‘공공’이라 한다. 이런 까닭에 연이 없이 능기能起한다.
“그러므로 일체의 인연법은 미혹한 마음에 허망하게 보이는 것일 뿐이다.”라는 것은 증상연增上緣과 등무간연等無間緣은 미혹한 마음에 허망하게 보이는 것일 뿐이므로 그것 또한 공이라는 것이다.
“이에 지금 나타나 있는 것은 본래부터 불생인데 그것은 인연이 본래 없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두 가지 공163)을 결론지어 마무리한 것이다. 곧 인연으로 나타난 과果는 본래 불생으로서 공하고, 능기能起하는 모든 인연은 본래 없으므로 공하다.
“공적한 일심법과 여여법의 도리는 자체가 공하여 없다.”는 것은 앞에서 설한 인과 과는 곧 집착의 대상인데, 집착의 대상이 없으므로 집착하는 주체도 또한 공하다는 것이다. 곧 집착의 대상을 공의 도리라고 설하는 것처럼 집착하는 주체도 또한 그와 같기 때문이다.
이상은 법을 가지고 설명하였다. 이하에서는 비유를 인용하였다.
“공왕”이라 한 것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공계空界이니, 명암색明暗色을 말한다. 둘째는 공왕空王이니, 허공법이 일체색의 의지처가 되기 때문이다. 마치 왕이 모든 백성의 소의가 되는 것과 같기 때문에

001_0644_a_01L
一切法相從緣無起起相性如如無
001_0644_a_02L所動因緣性相相本空無緣緣空空
001_0644_a_03L無有緣起一切緣法惑心妄見現本
001_0644_a_04L不生緣本無故心如法理自體空無
001_0644_a_05L如彼空王本無住處凡夫之心妄分
001_0644_a_06L別見

001_0644_a_07L
此下第二廣顯此中唯廣離異邊義
001_0644_a_08L一切法相從緣所生一切果法
001_0644_a_09L緣有故卽無生起起相性如如無
001_0644_a_10L所動也下明能起諸緣亦空因緣性
001_0644_a_11L相本空無者種子因緣無所有
001_0644_a_12L緣緣空空無有緣起者所緣緣
001_0644_a_13L非一衆多莫不皆空故曰空空
001_0644_a_14L是故無緣之能起也一切緣法惑心
001_0644_a_15L妄見者謂增上緣等無間緣唯心
001_0644_a_16L妄見故亦空也現本不生緣本無
001_0644_a_17L故者結成二空緣所現果本來不
001_0644_a_18L能起諸緣本來無故心如法理
001_0644_a_19L自體空無者前說因果是所取法
001_0644_a_20L所取法無故能取心亦空如說所取
001_0644_a_21L法空道理能取心體亦如是故上來
001_0644_a_22L法說下引譬喩言空王者空有二
001_0644_a_23L一者空界謂明暗色二者空王
001_0644_a_24L虛空法爲一切色之所依故如王爲

001_0644_b_01L허공을 공왕이라 한다. 이와 같이 공왕은 본래 주처가 없다. 그런데도 범부의 마음으로 허망하게 계탁하고 분별하여 이곳을 허공이라 하고 저곳도 허공이라 하는 것은 오직 허망한 견해일 뿐으로, 이곳이라는 것도 없고 저곳이라는 것도 없다. 인과 과의 제법도 또한 그와 같아서 망심으로 집착한 것일 뿐이지 인도 없고 과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변계소집偏計所執의 인과 과에 의거해서 이와 같이 비유하였으니, 허망하게 보는 곳이기 때문이다.

나) 여여가 있다·없다 하는 변견을 떠나 있음을 드러냄

여여한 모습은 본래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다. 유나 무의 모습은 오직 분별의 심·식으로 본 것에 불과하다.
보살이여, 마음의 자성과 같이 자체가 없지는 않지만 자체가 있는 것도 아니므로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다.
보살이여, (여여한 마음의 자성은) 무이지만 무의 모습이란 없으므로 언설의 경지가 아니다. 왜냐하면 진여법은 텅 비고 밝아 형상이 없어서 두 가지로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둘째로 여여법은 유나 무의 변견을 떠나 있음을 설명하는 것이다.164) 여기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 구절은 여여가 변견을 떠나 있음을 곧장 설명하고, 둘째 구절은 변견이 있으면 허망하다는 것을 반증하며, 셋째는 공적심을 인용하여 여여가 변견을 떠나 있음을 예로 삼고, 넷째는 여여는 언설을 떠나 있음을 다시 설명한다.165)

((가) 여여가 변견을 떠나 있음을 곧장 설명함)

((나) 변견이 있으면 허망하다는 것을 반증함)

(다) 공적심을 인용하여 여여가 변견을 떠나 있음을 예로 삼음

셋째에서 “마음의 자성과 같이”란 일심의 체성과 같다는 말이다.
“자체가 없지는 않다.”는 것은 자체가 없다는 변견을 떠나 있다는 것으로 마치 토끼의 뿔과 같다.
“자체가 있는 것도 아니다.”라는 것은 자체가 있다는 변견을 떠나 있다는 것으로 마치 소의 뿔과 같다. 곧 다른 모습이 없는 까닭에 있지 않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그냥 자체가 있지 않을 뿐임을 말한 것이다.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다.”라는 것은 유가 아니라고 해서 곧 무가 되는 것이 아니고 무가 아니라고 해서 곧 유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런 뜻으로 말미암은 까닭에 다시 합해서 설명한 것이다.
저 일심의 도리가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것처럼 여여의 도리도 또한 같으므로 이렇게 설한다. 이런 까닭에 셋째 구절의 처음 부분에서 “여여한 마음”이라고 하였다.

(라) 여여는 언설을 떠나 있음을 다시 설명함

“보살이여, 무이지만 무가 아닌 모습은 언설의 경지가 아니다.” 이하는 넷째, 여여가 언설을 떠난 도리를 다시 설명하는 것이다.

001_0644_b_01L諸民之所依故說虛空名爲空王
001_0644_b_02L如是空王本無住處而凡夫心
001_0644_b_03L計分別此處虛空彼處虛空唯是
001_0644_b_04L妄見無此無彼因果諸法當知亦
001_0644_b_05L妄心所取無因無果是約遍計
001_0644_b_06L所執因果而作是喩妄見處故

001_0644_b_07L
如如之相本不有無有無之相見唯
001_0644_b_08L心識菩薩如心之性一本云
是心法
[73] 不無自
001_0644_b_09L自體不有不有不無菩薩無不無
001_0644_b_10L非言說地何以故眞如之法虛曠
001_0644_b_11L無相非二 [74] 所及

001_0644_b_12L
此是第二明如如法離有無邊於中
001_0644_b_13L有四初句正明如如離邊次句反
001_0644_b_14L擧有邊是妄三者引心離邊爲例
001_0644_b_15L四者還明如如離言第三中言如心
001_0644_b_16L之性者猶如一心之體性也不無自
001_0644_b_17L體者謂離無自體邊如兎角故自體
001_0644_b_18L不有者謂離有自體邊如牛角故
001_0644_b_19L謂他相無故不有故言自體不有而
001_0644_b_20L不有不無者不有卽是不無
001_0644_b_21L無卽是不有由是義故更合明也
001_0644_b_22L如一心法不有不無如如之理
001_0644_b_23L同是說是故句首曰如心也無不無
001_0644_b_24L非言說地已下第四還明如如離

001_0644_c_01L
“무이지만 무의 모습이 없으므로”는 위의 첫째 구절에서 말한 “본래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다.”라는 것을 설명하였으니, 모든 언담言談으로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도리(安足處)가 아니라는 것이다.
“두 가지로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심尋과 사伺 두 가지의 작용으로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심과 사의 두 가지 법은 언설을 바탕으로 한 것이니, (여여에는) 이 두 가지 작용이 미칠 수 없으므로 여여는 언설의 경지가 아니다.

③ 실제에 들어가는 계위

마치 허공의 경계는 내도와 외도들이 헤아릴 수가 없는 것과 같다. 육행六行의 보살이어야 여여의 경지를 알 수가 있다.”

이하는 크게 분류한 과목에서 셋째로 실제에 들어가는 계위이다.166) 여기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실제에 들어간 경지가 깊고 깊음을 설명하고, 둘째는 실제에 능입하는 계위와 수행을 언급하며, 셋째는 계위를 개별적으로 드러내고, 넷째는 실제에 들어가는 마음을 엄밀하게 설명한다.

가. 실제에 들어간 경지가 깊고 깊음을 설명함

첫째에서 “허공의 경계”라는 것은 여여법이 텅 비고 밝아 형상이 없기 때문에 허공이라 일컫는다는 것이다.
“내도와 외도들이 헤아릴 수가 없다.”는 것은 내도內道(불교의 가르침) 가운데 스물여덟 종류의 성스러운 가르침167)과 외도外道(불교 이외의 가르침) 가운데 아흔다섯 종류의 가르침이 있는데,168) 이들 범부와 성인들이 (허공과 같은 여여법을) 측량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나. 실제에 능입하는 계위와 수행을 언급함

둘째 부분에서 “육행의 보살이어야 여여의 경지를 안다.”는 것은 곧 보살의 이입二入(理入과 行入)의 계위를 언급한 것이다.

다. 계위를 개별적으로 드러냄

대력보살이 여쭈었다.
“육행의 보살이란 무엇입니까? 바라건대 그것을 설해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첫째는 십신행을 닦는 보살이고, 둘째는 십주행을 닦는 보살이며, 셋째는 십행행을 닦는 보살이고, 넷째는 십회향행을 닦는 보살이며, 다섯째는 십지행을 닦는 보살이고, 여섯째는 등각행을 닦는 보살이다. 이와 같이 닦는 자라야 여여법의 경지를 알 수가 있다.”

이는 셋째로 계위를 개별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니, 단지 수행의 계위만을 드러내고 그에 따른 과위는 제외하였다. 그러므로 묘각의 경지는 취하지 않았다. 이 육행 가운데 앞의 네 가지 계위는 이입理入의 계위이고, 뒤의 두 가지 계위는 행입行入의 차별이다. 이에 대한 간략한 뜻은 『본업경』에 있고,169) 자세하게 분별한 뜻은

001_0644_c_01L言道理無不無相者明初句中本不
001_0644_c_02L有無非諸言談安足處故非二所及
001_0644_c_03L非尋伺二之所行故尋伺二法
001_0644_c_04L是語言足非此二所行故非言說之
001_0644_c_05L地也

001_0644_c_06L
虛空境界內外不測六行之士乃能
001_0644_c_07L知之

001_0644_c_08L
此下大分第三入之階位於中有四
001_0644_c_09L一明所入甚深二擧能入位行三者
001_0644_c_10L別顯階位四者覈明入心初中言虛
001_0644_c_11L空境界者謂如如之法虛曠無相
001_0644_c_12L故名虛空內外不測者謂內道中
001_0644_c_13L二十八聖及外道中九十五種此等
001_0644_c_14L凡聖不能測量也第二中言六行
001_0644_c_15L之士乃能知之者是擧菩薩二入階
001_0644_c_16L位也

001_0644_c_17L
大力菩薩言云何六行願爲說之
001_0644_c_18L一者十信行二者十住行三者十
001_0644_c_19L行行四者十廻向行五者十地行
001_0644_c_20L者等覺行如是行者乃能知之

001_0644_c_21L
此是第三別顯階位唯顯行位除其
001_0644_c_22L果位所以不取妙覺之地此六行中
001_0644_c_23L前四位是理入階降後二位者行入
001_0644_c_24L差別於中略義在本業經廣分別

001_0645_a_01L『화엄경』170)에 나온다.

라. 실제에 들어가는 마음을 엄밀하게 설명함

대력보살이 여쭈었다.
“실제인 본각의 이익171)에는 나고 듦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법과 마음으로 실제에 들어가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실제의 법은 그 법에 끝이 없다. 그러므로 끝이 없는 그 마음이어야 곧 실제에 들어갈 수가 있다.”

이는 넷째로 실제에 들어가는 마음을 엄밀하게 설명하는 것이다.

가) 질문

질문에서 “실제인 본각의 이익에는 나고 듦이 없습니다.”라는 것은 뒤의 두 가지 계위 곧 십지위와 등각위에서 자리행과 이타행을 얻어 도리에 계합하여 나고 듦이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어떤 법과 마음으로 실제에 들어가는 것입니까?”라는 것은 실제에 들어가는 법과 마음은 어떤 것인가를 곧장 물은 것이다.

나) 답변

답변에서 “실제의 법은 그 법에 끝이 없다.”라고 한 것은 들어갈 바의 법(所入法)이 본래(法爾) 끝이 없음을 언급한 것이다. 곧 시간적으로는 전제가 없고 후제가 없어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므로 삼세의 시제를 떠나 있고, 공간적으로는 이곳이 없고 저곳이 없어 중앙도 없고 가(邊)도 없으며, 육방의 처소를 떠나 있고, 심심하여 떠나 있지 않은 변견이 없으며, 광대하여 두루하지 않은 처소가 없다.
이 네 가지 뜻172)을 모두 갖추고 있으므로 “그러므로 끝이 없다.”고 하였다.
들어가는 주체의 마음에도 또한 네 가지 뜻을 갖추고 있으므로 실제에 들어가지 못함이 없다. 실제는 주체와 객체의 변견을 떠나 있고, 마음도 또한 실제와 마찬가지로 주체와 객체의 변견을 떠나 있어서 들어가는 것이 없어야 실제에 들어갈 수 있음을 알아야 하니, 이를 불가사의不可思議한 뜻이라고 한다.

④ 실제에 들어가는 방편

이하의 크게 분류한 과목에서 넷째로 실제에 들어가는 방편이다.173)
실제에 들어가는 방편의 계위는 지전의 네 계위174)로서 곧 이입문理入門 안의 방편관에 해당한다.

001_0645_a_01L出華嚴敎

001_0645_a_02L
大力菩薩言實際覺利無有出入
001_0645_a_03L等法心得入實際佛言實際之法
001_0645_a_04L無有際無際之心則入實際

001_0645_a_05L
此是第四覈明入心問中言實際覺
001_0645_a_06L利無有出入者擧後二位得二利行
001_0645_a_07L與理相稱無出入義何等法心得入
001_0645_a_08L實際者正問於中能入心法答中言
001_0645_a_09L實際之法法無有際者擧所入法
001_0645_a_10L爾無際縱無前後際無始無終故
001_0645_a_11L離三世時故橫無此彼際無中無邊
001_0645_a_12L離六方所故甚深無際無邊不
001_0645_a_13L離故廣大無際無所不遍故具此
001_0645_a_14L四義故言無際能入之心亦具四
001_0645_a_15L故於實際無所不入當知實際
001_0645_a_16L離能所邊心亦如是離能所際
001_0645_a_17L無其入乃能得入是謂不可思議義
001_0645_a_18L

001_0645_a_19L
大力菩薩言無際心智其智無涯 [75]
001_0645_a_20L [76] 之心心得自在自在之智得入實
001_0645_a_21L如彼凡夫軟心衆生其心多喘
001_0645_a_22L何法御令得堅心得入實際

001_0645_a_23L
此下大分第四入之方便入方便者
001_0645_a_24L位在地前四位理入門內方便觀也

001_0645_b_01L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능입의 방편을 설명하고, 둘째는 방편의 뛰어난 이익을 드러낸다.

가. 능입의 방편을 설명함

첫째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대략적인 것이고, 둘째는 자세한 것이다.

가) 대략적으로 드러냄

대략적인 것 가운데 먼저 질문이다.

(가) 질문

대력보살이 여쭈었다.
“여여한 마음과 지혜(心智)에는 변제가 없습니다. 그 지혜는 끝이 없고, 끝이 없는 마음은 그 마음에 자재를 터득하며, 자재를 터득한 지혜는 실제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저 범부의 경우처럼 중생은 마음이 유약하여 그 마음은 항상 들떠 있는데, 어떤 법으로 다스려야 견고한 마음을 터득하여 실제에 들어가도록 할 수가 있습니까?”

질문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앞의 내용을 이해시키고, 둘째는 뒤의 내용을 질문한다.
이해시키는 가운데서 말한 “변제가 없습니다.”라는 것은 마음의 체體가 끝이 없기 때문이다.
“끝이 없다.”는 것은 지혜의 작용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

(나) 답변

부처님께서 대력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저들 중생의 마음이 들떠 있는 것은 안팎의 번뇌와 수번뇌175)가 유주流注하기 때문이다. 마치 물방울이 모여 바다를 이루고 대풍이 불어 물결을 일으키면 대룡이 놀라는데 마음이 놀란 까닭에 많이 들떠 있는 것과 같다.
보살이여, 그들 중생으로 하여금 세 가지에 통하고 하나를 유지하여(存三守一) 여래선에 들도록 하면 그 선정으로 인하여 들뜬 마음이 곧 사라진다.”

답변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다스려야 하는 장애의 모습을 보여 주고, 둘째는 능치의 방편을 보여 준다.

㉮ 다스려야 하는 장애의 모습을 보여 줌

첫째에서 “마음이 들떠 있다.”는 것은 놀란 마음이 불안하여 그 날숨과 들숨이 다급해지는 것을 들떠 있다고 한다. 곧 육식六識이 뒤흔들려 멈추지 않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안팎의 번뇌”176)란 말나식末那識의 네 가지 번뇌177)는 안으로 자아를 반연하고, 의식의 여섯 가지 번뇌는 밖으로 모든 경계를 반연함을 말한다.
“수번뇌가 유주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분忿과 한恨 등은 작은 수번뇌이고, 그 혼침과 도거 등은 큰 수번뇌이며, 무참無慚과 무괴無愧 등은 중간 수번뇌인데, 이런 수번뇌들이 함께 흘러서 현식現識에 모여들기 때문이다.
“물방울이 모여 바다를 이룬다.”는 것은 근본혹根本惑과 수혹隨惑 등 일체의 현행은 모두 근본식根本識(阿賴耶識)에 훈습되어 깊고 넓게 적집되기 때문이다.
“대풍이 불어 물결을 일으킨다.”는 것은 업력으로 미혹한 육진의 경계가 제멋대로 현행하기 때문에 ‘대풍이 분다.’고 하고, 수면해隨眠海(잠재되어 있는 번뇌)를 두드려 제7식을 기동시키므로 ‘물결을 일으킨다.’고 한다.
“대룡이 놀란다.”는 것은 무명주지無明住地는 가장 큰 세력으로 근본식의 수면隨眠의 해저海底에 있으므로 ‘대룡’이라 하였고, 이와 같은 무명은 적정에 위반하여

001_0645_b_01L於中有二先明能入方便後顯方便
001_0645_b_02L勝利初中亦二先略後廣略中先
001_0645_b_03L問中亦二一領於前二問於後
001_0645_b_04L領中言無際者心體無際故無涯者
001_0645_b_05L智用無涯故

001_0645_b_06L
佛言菩薩彼心喘者以內外使隨使
001_0645_b_07L流注滴瀝成海 [77] 風鼓浪大龍驚
001_0645_b_08L驚駭之心故令多喘菩薩令彼衆
001_0645_b_09L存三守一入如來禪以禪定故
001_0645_b_10L則無喘

001_0645_b_11L
答中有二先出所治障相後示能治
001_0645_b_12L方便初中言心喘者驚心不安
001_0645_b_13L出入息急速曰喘以喩六識掉動
001_0645_b_14L不停內外使者末那四使內緣自
001_0645_b_15L我故意識六使外緣諸境故隨使
001_0645_b_16L流注者謂忿恨等小隨煩惱其沉掉
001_0645_b_17L等大隨煩惱及無慚愧中隨煩惱
001_0645_b_18L使等流集注現識故滴瀝成海者
001_0645_b_19L使隨惑一切現行皆熏本識積集
001_0645_b_20L深廣故天風鼓浪者業力所感
001_0645_b_21L塵境界任運現行故名天風鼓隨
001_0645_b_22L眠海起七識浪故曰鼓浪大龍驚
001_0645_b_23L駭者無明住地其力最大住在本
001_0645_b_24L識隨眠海底故名大龍如是無明

001_0645_c_01L늘상 추동심麤動心을 증장하므로 ‘놀란다.’고 하였다. 이런 모든 반연으로 말미암아 중생의 마음이 들떠 있다. 이는 다스려야 할 장애의 모습을 알도록 한 것이다.

㉯ 능치의 방편을 보여 줌

이하는 능치能治의 방편을 보여 준 것이다.
“세 가지에 통한다.”는 것은 대풍을 막아내는 방편이고, “하나를 유지한다.”는 것은 대룡을 조복받는 방편이며, “여래선에 들도록 한다.”는 것은 들떠 있는 마음을 바로 다스리는 방편이다.

나) 방편을 자세하게 드러냄

이하는 둘째로 방편을 자세하게 드러낸 것이다.178) 여기에 세 가지 문답이 있다.

(가) 법수를 들어 총체적으로 설명함

대력보살이 여쭈었다.
“세 가지에 통하고 하나를 유지하여 여래선에 들어간다179)는 것은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세 가지에 통한다는 것은 세 가지 해탈을 통한다는 것이고, 하나를 유지한다는 것은 일심의 여여함을 유지하는 것이며, 여래선에 들어간다는 것은 일심의 진여를 이관理觀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 곧 실제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는 첫째 문답으로 법수를 들어 총체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하나를 유지한다는 것은 일심의 여여함을 유지하는 것이다.”라는 것은 일심법에 두 가지 문(心眞如門과 心生滅門)이 있는데, 지금은 먼저 그 심진여문을 유지하여 무명의 대룡의 세력을 다스리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명이 바로 일심의 여여함을 미혹시키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지한다(守).”는 것은 관행에 들어 있을 경우는 고요히 일여의 경지를 유지하고, 관행에서 나와 있을 경우는 일미의 관행심을 잃지 않기 때문에 “하나를 유지한다(守一).”고 하였다. 『본업경』에서는 십행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열 번째 진실심행은 대법륜을 자재하게 굴리는데, 그것이 소위 보살의 삼보이다. 보살은 그 경우 제일의중도第一義中道의 지혜로 각보覺寶(佛寶)를 삼고, 일체법에 발생과 움직임이 없으면서 작용에 즉한 것으로 법보를 삼으며, 항상 육도에 다니면서 육도중생과 화합하므로 승보라 말한다. 이것이 곧 일체중생을 전변시켜 불해佛海에 유입시키는 진실심행이다.180)

생각해 보면, 과거·현재·미래에 중도일미를 잃지 않는 것이 바로 이 관행이 일심을 유지하는 작용이다. 이 관행은 십행위에 있다. 그 밖의 문은 나중에 드러내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논하지 않는다.


001_0645_c_01L違反寂靜常能增長麁動之心故曰
001_0645_c_02L驚駭由是諸緣令心多喘此是令
001_0645_c_03L知所治障相自下示其能治方便
001_0645_c_04L三者能遮天風方便守一者能伏
001_0645_c_05L大龍方便入如來禪者正治多喘之
001_0645_c_06L方便也

001_0645_c_07L
大力菩薩言何謂存三守一入如來禪
001_0645_c_08L佛言存三者存三解脫守一者守一
001_0645_c_09L心如入如來禪者理觀心如 [78] 入如是
001_0645_c_10L [79] 卽入實際

001_0645_c_11L
此下第二廣顯方便有三問答此初
001_0645_c_12L番中擧數摠標守一心如者一心
001_0645_c_13L法中有二種門今先守其心眞如門
001_0645_c_14L爲伏無明大龍勢故無明正迷一心
001_0645_c_15L如故此中守者入時靜守一如之境
001_0645_c_16L出時不失一味之心故言守一如本
001_0645_c_17L業經十行中言十爲自在轉大法輪
001_0645_c_18L所謂菩薩三寶菩薩爾時於第
001_0645_c_19L一中道 [80] 智爲覺寶一切法無生動與
001_0645_c_20L則爲法寶 [81] 常行六道與六道衆生
001_0645_c_21L和合名僧寶轉一切衆生流入佛
001_0645_c_22L海故案云三時不失中道一味
001_0645_c_23L是此觀守一之用此觀在於十行位
001_0645_c_24L餘門後顯此中不論

001_0646_a_01L
(나) 일미관행을 개별적으로 드러냄

대력보살이 여쭈었다.
“세 가지 해탈법은 어떤 것들이고, 이관理觀의 삼매는 어떤 법을 통해서 들어가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세 가지 해탈은 허공해탈·금강해탈·반야해탈이다.181) 그리고 이관理觀이란 그 마음이 진여의 도리처럼 본래청정하여 긍정과 부정의 분별이 없는 마음이다.”
대력보살이 여쭈었다.
“그러면 세 가지에 통하는 집중작용(存用)은 무엇이고, 실상을 관찰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음과 현상에 차별을 두지 않는 것을 세 가지에 통하는 작용이라 말한다. 그리고 실상을 관찰한다는 것은 안의 관행과 밖의 관행에서 나고 듦이 다르지 않고, 중도제일의제의 모습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마음에 얻음과 잃음이 없고, 같은 경지와 다른 경지에도 모두 청정심으로 유입된다. 그러므로 그것을 가리켜 실상을 관찰한다고 말한다.

이 두 가지 문답은 일미관행을 개별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182)
첫 번째 답변183)에서 “세 가지 해탈”이라 한 것은 삼혜三慧가 팔해탈八解脫을 섭수하므로 해탈이라 한 것이다. 『본업경』에서는 십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섯째는 제불의 보호를 받는 것으로 소위 팔해탈관이다. 문혜로써 내가內假와 외가外假의 두 모습은 불가득임을 터득하는 것이 첫째 해탈이다. 사혜로써 안의 오음법과 밖의 일체법이 불가득임을 터득하는 것이 둘째 해탈이다. 수혜로써 육관六觀184)을 구족하여 색계의 오음이 공해지는 것이 셋째 해탈이다. 그리고 사공四空185)의 오음과 멸정관滅定觀(滅盡定)이 모두 불가득하게 된 것이 뒤의 다섯 가지 해탈이다. 이 팔해탈은 모두 여여한 모습이다.186)

생각해 보면 팔해탈관은 간략하게 두 문이 있다. 첫째, 만약 사상事相으로 보면 오직 수혜관修慧觀일 뿐이다. 이것은 이승에 공통하는 것으로 그 밖의 여러 곳에서 설한 바와 같다. 둘째, 만약 문혜와 사혜와 수혜의 삼혜로써 인공과 법공을 관찰하자면 곧 그것은 대승관大乘觀이다. 이것은 본 경문의 설과 같다.
첫째의 해탈은 안으로는 색상을 두고 밖으로는 색 등을 관찰하는 것이니, 안에 색·수·상·행·식의 오음법상을 두고서 안으로 아공을 관찰하고, 밖에 색·성·향·미·촉·법을 두고 중생공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러한 공은 쉽게 들어갈 수 있어서 문혜聞慧만으로도 터득할 수 있는 것이므로 『본업경』에서 “문혜로 내가內假와 외가外假의 두 모습이 불가득임을 터득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곧 색 등을 그대로 두고(不遣) 공을 관찰하는 것이

001_0646_a_01L
大力菩薩言三解脫法是何等事
001_0646_a_02L觀三昧從何法入佛言三解脫者
001_0646_a_03L空解脫金剛解脫般若解脫理觀心
001_0646_a_04L [82] 心如理淨無可不 [83] 大力菩薩言
001_0646_a_05L云何存用云何觀之佛言心事不二
001_0646_a_06L是名存用內行外行出入不二不住一
001_0646_a_07L心無得失一不一地淨心流入
001_0646_a_08L名觀之

001_0646_a_09L
此二問答別顯觀行初答中言三解
001_0646_a_10L脫者則是三慧攝八解脫故名解脫
001_0646_a_11L如本業經十住中言六爲諸佛所護
001_0646_a_12L所謂八解脫觀聞慧得內假外假
001_0646_a_13L相不可得故一解脫思慧 [84] 五陰法
001_0646_a_14L一切法不可得故二解脫修慧
001_0646_a_15L六觀具足色界五陰空三解脫四空
001_0646_a_16L五陰及滅定觀皆不可得故五解脫
001_0646_a_17L如相故案云八解脫觀略有二門
001_0646_a_18L就事相唯修慧觀是共二乘如餘處
001_0646_a_19L若就三慧觀人法空是大乘觀
001_0646_a_20L此文說初解脫者內有色相外觀色
001_0646_a_21L謂內存色等五陰法相觀內我
001_0646_a_22L外存色等觀衆生空是空易入
001_0646_a_23L聞慧所得故言聞慧得內假外假
001_0646_a_24L相不可得故不遣色等以觀空故

001_0646_b_01L마치 허공이 색상을 그대로 두고 있는 경우와 같기 때문에 이것을 ‘허공해탈’이라 한다.
둘째의 해탈은 안의 색상은 없애고 밖의 색·성·향·미·촉·법을 관찰하는 것이니, 안으로 색·수·상·행·식의 오음법상을 없애고 밖으로 일체의 산·하·대지 등이 공하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곧 욕계의 제법은 공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은 난해하여 사혜思慧를 통해야 관찰되므로 『본업경』에서 “사혜로 안의 오음법과 밖의 일체법이 불가득임을 터득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곧 안팎의 제법을 추구하여 쳐부수는 것이 마치 금강으로 모든 색법을 타파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금강해탈’이라 한다.
뒤의 여섯 가지 해탈은 모두 수혜修慧이다. 위의 색계와 무색계의 일체법이 공하다고 관찰하므로 수혜라 말한다. 육관은 모두 수혜로서 선정에 의하여 발생된다. 이런 까닭에 여섯 가지 해탈을 모두 ‘반야해탈’이라 말한다. 그런데 거기에는 여섯 가지 차별상이 있다.
셋째의 명칭은 정해탈淨解脫이다. 곧 색계의 오음이 밝고 깨끗하며 적정寂靜한 줄을 몸소 증득하여 그것이 모두 공하다고 관찰하기 때문에 정해탈이라 한다. 이것은 자내증自內證을 몸소(名身) 증득하는 것이므로 『본업경』에서 “육관을 구족하여 색계의 오음이 공해지는 것이 셋째 해탈이다.”라고 하였다.
넷째의 명칭은 공처해탈空處解脫(空無邊處定을 터득하는 것)이다. 곧 공무변처에서 오음이 공한 줄을 관찰하는 것이다. 내지 비상해탈非想解脫(非想非非想處定을 터득하는 해탈)도 그와 같아서 멸정법도 또한 불가득임을 관찰하기 때문에 멸진해탈滅盡解脫이라 한다. 이것은 모두 번뇌를 없앤다는 것으로부터 내세운 명칭이다. 그러므로 『본업경』에서 “사공四空187)과 오음五陰과 멸정관滅定觀이 모두 불가득하게 된 것이 뒤의 다섯 가지 해탈이다. 이 팔해탈은 모두 여여한 모습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삼혜는 인공과 법공을 관찰하여 인집人執과 법집法執 및 현행하는 상응박相應縛과 능연박能緣縛을 다스려 그로부터 떠나 있기 때문에 해탈이라 말한다. 곧 이미 안과 밖에 있는 일체의 가법假法을 없애고 모든 경계에서 천풍天風(大風)이 불어 오는 것을 방지한다(能遮)는 것이다.
실상을 관찰하는 마음(理觀) 부분에서 말한 “그 마음이 진여의 도리처럼 본래청정하여 긍정과 부정의 분별이 없는 마음이다.”라는 것은 분별상이 없는 도리에 따라 마음에 분별이 없기 때문이다.
뒤의 답변188)에서 말한 “마음과 현상에 차별을 두지 않는 것을 세 가지에 통하는 작용이라 말한다.”는 것은

001_0646_b_01L似虛空不遣色相故說是爲虛空解
001_0646_b_02L第二解脫者內無色相外觀色等
001_0646_b_03L內遣色等五陰法相外觀一切山河
001_0646_b_04L等空欲界諸法無所不空是空難解
001_0646_b_05L思慧所觀故言思慧內五陰法外一
001_0646_b_06L切法不可得故推求析破內外諸法
001_0646_b_07L如似金剛破諸色法是故名爲金剛
001_0646_b_08L解脫後六解脫皆是修慧觀上二
001_0646_b_09L界一切法空故言修慧六觀皆是
001_0646_b_10L修慧依定所發是故摠名般若解脫
001_0646_b_11L於中六種差別相者第三名淨解脫
001_0646_b_12L身作證色界五陰光潔寂靜觀悉
001_0646_b_13L故名淨解脫自內所證名身作
001_0646_b_14L證故言具足色界五陰空三解脫
001_0646_b_15L四名空處解脫觀空處五陰空故
001_0646_b_16L至非想解脫亦爾觀滅定法亦不可
001_0646_b_17L故名滅盡解脫皆從所遣以立
001_0646_b_18L其名故言四空五陰及滅定觀皆不
001_0646_b_19L可得故五解脫如相故如是三慧
001_0646_b_20L觀人法空伏離二執現行二縛
001_0646_b_21L名解脫旣遣內外一切假法能遮諸
001_0646_b_22L天風吹鼓也理觀中言心如理淨
001_0646_b_23L無可不心者順理無相心無分別故
001_0646_b_24L後答中言心事不二是名存用者

001_0646_c_01L세 가지에 통한 작용의 뛰어난 공능을 말한다.
어떤 사람이 세 가지에 통하는 작용을 터득하지 못하면 설령 고요한 마음으로 공을 관찰하더라도 현상을 마주하면 정념을 잃고서 아와 아소에 집착하고 역경계(違)와 순경계(順)에 집착하며 천풍 곧 대풍에 요동되어 마음과 현실(心事)이 각각 달라져 버린다. 그러나 만약 세 가지 해탈을 능숙하게 닦으면 관행에서 나와 현상을 마주해도 아직 관행의 세력이 남아 있어 나와 남에 집착하지 않고, 좋아하는 경계(好)와 싫어하는 경계(惡)에 집착하지 않는다. 이로 말미암아 천풍 곧 대풍에도 휩쓸리지 않고, 나고 듦도 모두 잊어 마음과 현실이 결코 달라지지 않는다. 이와 같아야 이에 세 가지에 통한 작용이라 말할 수 있다.
이 이관理觀은 처음 십신위十信位에서 닦고, 세 가지에 통하는 작용은 십주위十住位에서 완성된다. 저 『본업경』에서 십주위를 설명하는 가운데 이 이관理觀을 내세우는 것과 같다.189)

“안의 관행과” 이하는 둘째의 질문에 답변한 것으로 이관의 모습을 설명한다. ‘안의 관행’은 관행에 들어가 공적하게 비추는 수행이고, ‘밖의 관행’은 관행을 나와서 중생을 교화하는 수행이다. 관행에서 나오거나 관행으로 들어가거나 중도를 잃지 않기 때문에 “다르지 않고”라고 한다. 『본업경』의 십회향十廻向의 대목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열째는 자재한 지혜로 일체중생을 교화하는 것으로 소위 중도제일의제이다. 곧 반야로써 중도의 입장에서 일체법이 다르지 않음을 관찰하여 통달하는 것이다. 그 관찰하는 지혜가 전전하여 성인의 경지에 들어가기 때문에 제일의제관과 비슷하다고 말하는 것이지 진정한 중도제일의제관은 아니다. …….190)

“중도제일의제의 모습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제관二諦觀이고, “마음에 얻음과 잃음이 없다.”는 것은 평등관平等觀이다. 이제의 방편관과 평등의 방편관에 의하여 초지初地의 가르침인 흐르는 물에 진입하기 때문에 “같은 경지와 다른 경지에도 모두 청정심으로 유입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본업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 가지 관행이란 다음과 같다. 가명으로부터 공에 들어가는 것을 이제관이라 하고, 공으로부터 가명에 들어가는 것을 평등관이라 하는데, 이 두 가지 관행은 방편도方便道이다. 이 두 가지 공관을 말미암아

001_0646_c_01L是名存三之用勝能若人未得存三
001_0646_c_02L之用靜心觀空步事失念取我我
001_0646_c_03L着違順境天風所動心事各異
001_0646_c_04L若能熟修三解脫者出觀涉事觀勢
001_0646_c_05L猶存不取我他之相不着好惡之境
001_0646_c_06L由是不爲天風所鼓入出同忘心事
001_0646_c_07L不二如是乃名存三之用也是觀
001_0646_c_08L1) [27] 修在十信位存用得成在十住
001_0646_c_09L如本業經十住位中立此觀故
001_0646_c_10L內行已下答第二問以明觀相
001_0646_c_11L行者入觀寂照行外行者出觀化
001_0646_c_12L物行若出若入不失中道故言不
001_0646_c_13L如本業經十向中言十以自在慧
001_0646_c_14L化一切衆生所謂中道第一義諦
001_0646_c_15L若處中而觀達一切法而無二其慧 [85]
001_0646_c_16L轉轉入聖地故名相似第一義諦觀
001_0646_c_17L而非眞中道第一義諦觀乃至廣說
001_0646_c_18L不住一相者二諦觀故心無得
001_0646_c_19L失者平等觀故依此二種方便觀故
001_0646_c_20L進入初地法流水中故言一不一地
001_0646_c_21L淨心流入如彼經言三觀者從假
001_0646_c_22L2)入空名 [28] 二諦觀從空入假名平等
001_0646_c_23L是二觀方便道因是二空觀
001_0646_c_24L「如」作「始」{甲}「入空名」作「名入空」{甲}

001_0647_a_01L중도제일의제관에 들어간다. 이것은 이제를 쌍조雙照하여 진심眞心과 속심俗心이 적멸하여 초지의 진리가 흐르는 물에 진입한다. …….191)

생각해 보면 여기에서 ‘이제관’은 속제를 없애고 진제를 관찰하는 것으로 곧 정체지正體智(本分의 입장으로 後得智의 상대)의 방편이다. 평등관은 진제를 융합하여 속제를 관찰하는 것으로 후득지後得智(新熏의 입장으로 正體智의 상대)의 방편이다. 곧 세속에 대하여 그것이 환화幻化와 같다고 관찰하여 득과 실에 집착하지 않고 따르고 거부함이 없기 때문에 평등이라 말한다.
“같은 경지와 다른 경지”는 초지의 다른 명칭(異名)이다. 왜냐하면 초지가 곧 그대로 십지로서 일시에 십중법계에 들어가고, 십지가 곧 그대로 초지로서 직접 편만으로 초문의 입문(入)을 삼기 때문이다. 진실로 십지 그대로 초지임을 말미암기 때문에 같은 경지(一)라 하고, 초지가 그대로 십지를 말미암기 때문에 다른 경지(不一)라 한다. 이런 까닭에 ‘같은 경지와 다른 경지’라 한 것이다.
이처럼 이제관의 방편과 평등관의 방편에 의하여 그 일심을 청정케 한다. 이를 말미암아 같은 경지와 다른 경지에 유입한다. 이런 이유에서 “모두 청정심으로 유입된다.”고 하였다.
여기에서는 오직 이제관과 평등관에 대해서만 자세하게 펼쳤을 뿐이므로 그 사이의 중도제일의제관에 대해서는 이에 준거하여 알 수가 있다.

나. 방편의 뛰어난 이익을 드러냄

이하는 크게 분류한 과목 중 둘째로 방편의 뛰어난 이익을 드러내는 것이다.192) 여기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터득한 과보의 뛰어난 이익이고, 둘째는 받는 공양의 뛰어난 이익이며, 셋째는 허물이 없는 뛰어난 이익이고, 넷째는 집착이 없는 뛰어난 이익이다.

가) 터득한 과보의 뛰어난 이익

이것은 첫째로 터득한 과보의 뛰어난 이익에 대한 대목이다.

보살이여, 이와 같은 사람193)은 분별상(二相)에 머물지 않는다. 그래서 비록 출가하지는 않을지라도 재가에만 머물지 않는다. 때문에 비록 법복을 걸치지 않고, 계율을 갖추어 수지하지 않으며, 포살布薩에 참여하지는 않을지라도 자기의 마음에 방자함(自恣)이 없어 성과聖果를 획득한다. 이승에 머물지 않고 보살도에 들어가 훗날 반드시 과만果滿하여 불보리를 성취한다.”

첫째에도 네 가지의 뛰어난 이익이 있다.


001_0647_a_01L入中道第一義諦觀雙照二諦心心
001_0647_a_02L寂滅進入初地法流水中乃至廣說
001_0647_a_03L案云此中二諦觀者遣俗觀眞故
001_0647_a_04L卽是正體智之方便平等觀者融眞
001_0647_a_05L觀俗卽是後得智之方便觀俗如幻
001_0647_a_06L不取得失無適無莫故名平等
001_0647_a_07L一不一地者初地之異名所以然者
001_0647_a_08L初地卽是十地一時頓入十重法界
001_0647_a_09L十地卽是初地直以遍滿爲初門
001_0647_a_10L入故良由十地卽初地故名一
001_0647_a_11L地卽十地故不一是故名爲一不一
001_0647_a_12L依二方便以淨其心由是流入
001_0647_a_13L一不一地以之故言淨心流入
001_0647_a_14L中唯廣初後二觀中間一觀准可知
001_0647_a_15L

001_0647_a_16L
菩薩如是之人不在 [86] 二相雖不出
001_0647_a_17L不住在家 [87] 雖無法服不具持波
001_0647_a_18L羅提木叉戒不入布薩能以自心
001_0647_a_19L爲自恣而獲聖果不住二乘入菩薩
001_0647_a_20L後當滿地成佛菩提

001_0647_a_21L
此下大分第二方便勝利於中有四
001_0647_a_22L一者得果勝利二者得供勝利三者
001_0647_a_23L無患勝利四者無住勝利此卽第一
001_0647_a_24L得果勝利初中亦有四種勝利一者

001_0647_b_01L
(가) 변견을 떠나는 뛰어난 이익

첫째는 변견을 떠나는 뛰어난 이익이다. 세간과 출세간의 양변에 빠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이와 같은 사람은 분별상에 머물지 않는다. 그래서 비록 출가하지는 않을지라도 재가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대목에 해당한다.

(나) 자재한 뛰어난 이익

둘째는 자재한 뛰어난 이익이다. 교문敎文의 계율에 얽매이지 않고 자심으로 도리를 결판하여 삼가하여 하지 않으면서도 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비록 법복을 걸치지 않고, 계율을 갖추어 수지하지 않으며, 포살에 참여하지는 않을지라도 자기의 마음에 방자함이 없어 성과聖果를 획득한다.”는 대목에 해당한다.

(다) 깨달음에 들어가는 뛰어난 이익

셋째는 깨달음에 들어가는 뛰어난 이익이다. 이는 “이승에 머물지 않고 보살도에 들어간다.”는 대목에 해당한다.

(라) 터득한 과보의 뛰어난 이익

넷째는 터득한 과보의 뛰어난 이익이다. 이것은 “훗날 반드시 과만하여 불보리를 성취한다.”는 대목에 해당한다.

나) 받는 공양의 뛰어난 이익

이하는 둘째로 받는 공양의 뛰어난 이익에 대한 것이니, 세 가지 뛰어난 공덕을 터득하여 복전의 자격이 되어 일체의 세간과 출세간이 반드시 공양하기 때문이다.
경문에 세 부분이 있다. 첫째는 보살이 복전임을 설명하고, 둘째는 이승은 그 경지를 보지 못함을 드러내며, 셋째는 보살은 그 경지를 본다는 것을 드러낸다.

(가) 보살이 복전임을 설명함

대력보살이 여쭈었다.
“참으로 불가사의합니다. 그와 같은 사람은 출가한 것은 아니지만 출가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열반의 집에 들어가서 여래의 가사를 수하고 보리좌에 앉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와 같은 사람이라면 사문들조차도 마땅히 존경하고 공경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바로 그렇다. 왜냐하면 열반의 집에 들어가서도 마음은 삼계에 대한 연민을 일으켜 여래의 가사를 수하고 법공처에 들어가 보리좌에 앉아서 정각의 일지一地에 올라 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사람이야말로 인아와 법아를 초월한 것이다. 하물며 사문인들 어찌 존경하고 공양하지 않겠는가.”

첫째 부분에는 세 가지 복전이 나타나 있다.
“열반의 집에 들어가서도 마음은 삼계에 대한 연민을 일으킨다.”는 것은 삼해탈이니, 세 가지에 통하는 작용이다. 삼계가 공적한 것을 열반의 집이라 하니, 편안한 마음으로 깃들 수 있는 청정한 처소이기 때문이다. 삼해탈관으로 삼계의 공적한 경지에 들어 있으면서도 깨침에 집착이 없어 다시 세속에 대한 연민을 일으켜 널리 삼계를 교화하기 때문에

001_0647_b_01L離邊勝利不墮道俗二邊相故如經
001_0647_b_02L如是之人不在二相雖不出家
001_0647_b_03L住在家故二者自在勝利不爲敎
001_0647_b_04L門戒律所制能以自心決判道理
001_0647_b_05L蕭然無爲而無不爲故如經雖無法
001_0647_b_06L乃至而獲聖果故三者入道勝
001_0647_b_07L如經不住二乘入菩薩道故
001_0647_b_08L者得果勝利如經後當滿地成佛
001_0647_b_09L菩提故

001_0647_b_10L
大力菩薩言不可思議如是之人
001_0647_b_11L出家非不出家何以故入涅槃宅
001_0647_b_12L如來衣坐菩提座如是之人乃至沙
001_0647_b_13L宜應敬養佛言如是何以故入涅
001_0647_b_14L槃宅心起 [88] 三界着如來衣入法空
001_0647_b_15L坐菩提座登正覺一 [89] 如是之人
001_0647_b_16L心超二我 [90] 何况沙門而不敬養

001_0647_b_17L
此下第二得供勝利得三勝德堪作
001_0647_b_18L福田一切道俗所應供故就文有
001_0647_b_19L先明菩薩福田次顯二乘不見
001_0647_b_20L後顯菩薩能見初中卽現三種福田
001_0647_b_21L入涅槃宅心起三界者是三解脫存
001_0647_b_22L三之用三界空寂名涅槃宅安心
001_0647_b_23L1) [29] 託之淨處故三解脫觀入三界
001_0647_b_24L而不取證還起俗心普化三界

001_0647_c_01L“마음은 삼계에 들어가서도 삼계에 대한 연민을 일으킨다.”고 한다. 삼계에 대하여 연민심을 일으키지만 거기에 오염되지 않는 것이 곧 ‘세 가지에 통하는 작용’이다.
“여래의 가사를 수하여 법공처에 들어 있다.”는 것은 곧 일심의 여여를 유지하는 관행이다. 말하자면 삼계에 노닐면서 널리 교화할 경우 인욕의 가사를 수하고, 피로하거나 싫어하지 않으며, 다시 법공에 들어가 일심의 여여를 유지한다. 『법화경』에서는 “유화와 인욕을 가사로 삼는다.”194)고 하였다.
“보리좌에 앉아 정각의 일지에 올라 있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여래선으로 이관理觀의 마음이다. 말하자면 법공에 앉아서 지속적으로 방편을 닦아 초지에서 정각의 참된 관행을 터득하는 것이다. 『법화경』에서는 “제법이 공적함을 자리로 삼는다.”195)고 하였다.
이와 같은 세 가지 계위에서는 모두 인공과 법공을 관찰하여 인아와 법아의 두 가지 집착을 소멸하기 때문에 “인아와 법아를 초월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인아와 법아를 초월한 까닭에 단덕斷德을 구족하고, 삼해탈관을 닦은 까닭에 지덕智德도 또한 갖춘다. 그러므로 보살은 출가인과 재가인의 복전이 된다.

(나) 이승은 그 경지를 보지 못함을 드러냄

대력보살이 여쭈었다.
“저 일지一地 및 공해空海는 이승인이 볼 수 있는 경지가 아니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바로 그렇다. 저 이승인은 삼매의 맛에 집착하여 삼매의 몸을 터득하므로 저 공해와 일지를 마주하면 마치 술에 취한 사람이 혼미하고 깨지 못한 것과 같다. 여러 겁이 지나도록 깨지 못하다가 문득 술기운이 소멸된 후에야 비로소 깨어난다. 이에 바야흐로 일지와 공해를 수행한 연후에 불신佛身을 터득한다.196)

이하는 둘째로 이승은 그 경지를 보지 못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질문이고, 둘째는 답변이다.

㉮ 질문

질문에서 “일지一地”라고 한 것은 십지에 오른 것이다. 여기에서 십지는 곧 초지이므로 ‘일지’라 한다.
“공해空海”는 앞의 세 가지 관행197)을 통하여 들어간 공이니, 그 경지가 심심하고 광대하기 때문에 바다라고 한다.

㉯ 답변

답변에서 “바로 그렇다.”라고 한 것은 볼 수 없음을 긍정한 것이다.198)
이하에서는 이승이 볼 수 없는 이유를 해석한다.

001_0647_c_01L言心起三界起三界心而不染着
001_0647_c_02L卽是存用着如來衣入法空處
001_0647_c_03L是守一心如之觀謂涉三界普化之
001_0647_c_04L着忍辱衣而不疲倦還入法空
001_0647_c_05L守一心如如法華經言柔和忍辱衣
001_0647_c_06L坐菩提座登正覺一地者是如
001_0647_c_07L來禪理觀之心謂坐法空進修方
001_0647_c_08L便得登初地正覺眞觀如法華經言
001_0647_c_09L諸法空爲座故如是三位皆觀二空
001_0647_c_10L人我法我二執伏滅故言心超二我
001_0647_c_11L超二我故斷德具足修三觀故
001_0647_c_12L德亦備故能堪作道俗福田也

001_0647_c_13L
大力菩薩言如彼一地及與空海
001_0647_c_14L乘之人爲不見也佛言如是彼二乘
001_0647_c_15L味着三昧得三昧身於彼空海一
001_0647_c_16L如得酒病惛醉不醒乃至數劫
001_0647_c_17L不得覺酒消始悟方修是行後得佛
001_0647_c_18L

001_0647_c_19L
此下第二二乘不見於中有二先問
001_0647_c_20L後答問中言一地者謂所登地
001_0647_c_21L地卽初地名爲一地空海者謂前
001_0647_c_22L三觀所入之空甚深廣大故名爲海
001_0647_c_23L答中言如是者許不見也下釋二乘
001_0647_c_24L「栖」作「拪」{甲}

001_0648_a_01L
“삼매의 맛에 집착한다.”는 것은 고요한 선정을 좋아하는 까닭에 적정에 나아가는 것이다.199)
“삼매의 몸을 터득한다.”는 것은 좋아하는 바를 추구하여 마음이 소멸되는 선정(滅心定)에 들어가 그로 인하여 열반에 들어가 회신멸지灰身滅智(無餘涅槃)가 되지만, 지智와 심心이 소멸된 경지에서 오히려 멸정의 자체가 발생하여 심心과 심법(智)을 방해하는데, 이것을 “삼매의 몸을 터득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적정을 좋아하는 훈습이 아직 근본식에 남아 있어서 그로 인하여 공해와 일지의 경지를 터득하지 못한다.
“마치 술에 취한 사람이 혼미하고 깨지 못한 것과 같다. 내지 여러 겁이 지나도록 깨지 못한다.”는 것은 수다원須陀洹의 사람은 팔만 겁 동안 머무르고, 내지 아라한阿羅漢의 경우는 이만 겁 동안 머무르며, 벽지불辟支佛의 경우는 만 겁 동안 열반에 머물러도 깨어나지 못하는 것을 나타낸다. 이제 그것을 전체적인 모습으로 “여러 겁이 지나도록”이라고 설한다.
“문득 술기운이 소멸된 후에야 비로소 깨어난다. 이에 바야흐로 일지와 공해를 수행한다.”는 것은 좋아하는 것에 집착하는 훈습의 두텁고 얕은 정도를 따라서 집착의 기운이 사라지고 다시 마음을 일으키는데, 마음을 일으켰을 때 비로소 회심하여 대승에 들어가서 바야흐로 앞에서 말한 세 가지 관행을 닦는다. 『능가경』의 게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譬如惛醉人    비유하면 술에 몹시 취했던 사람이
酒消然後悟    술기운이 사라진 후에야 곧 깨어나
得佛無上體    부처님이 지니고 계신 무상의 몸이
是我眞法身    자신의 진법신인 줄 깨친 격이라네200)

(다) 보살종성은 그 경지를 봄을 드러냄

바로 그와 같은 사람은 일천제의 종성을 벗어나서 곧 육행에 들어간다. 수행자리에서 찰나에 마음이 청정하여 결정적으로 명백해져서201) 금강의 지혜력으로 아비발치阿鞞跋致202)의 경지에서 중생을 도탈度脫시키는데, 그 자비가 끝없다.”

이는 보살종성을 지닌 사람을 설명하는 것이다. 일천제의 속성인 불신의 장애를 벗어나는 것으로부터 곧 육행의 처음인 십신위에 들어가는 것이다. 수행자리에서 그대로 찰나에 청정심을 발생하는 것은 곧 십주위의 처음인 발심주에 해당한다.
“결정적으로 명백해진다.”는 것은 십행위의 온갖 수행이 명정明淨한 것이다.
“금강의 지혜력”은 십회향위의 견고한 지력智力에 해당한다.
“아비발치의 경지”는 초지 이상에서 터득하는 진정한 깨침으로서 물러남이 없는 경지이기 때문이다.

001_0648_a_01L不見所由味着三昧者樂着靜定
001_0648_a_02L而趣寂故得三昧身者如所樂趣
001_0648_a_03L入滅心定因入涅槃灰身滅智
001_0648_a_04L心滅處滅定軆生遮心心法如是
001_0648_a_05L名爲得三昧身故樂寂熏習在本識
001_0648_a_06L因是不悟空海一地如得酒病
001_0648_a_07L惛醉不醒乃至數劫猶不覺者須陁
001_0648_a_08L洹人八萬劫住乃至羅漢二萬劫
001_0648_a_09L辟支佛者十千劫住住於涅槃而
001_0648_a_10L不覺悟今摠相說乃至數劫酒消
001_0648_a_11L始悟方修是行者隨其樂着熏習厚
001_0648_a_12L着氣消息得還起心起心之時
001_0648_a_13L廻心入大方修如前三種觀行如楞
001_0648_a_14L伽經頌曰譬如惛醉人酒消然後悟
001_0648_a_15L得佛無上軆是我眞法身乃至廣說

001_0648_a_16L
如彼人者從捨闡提卽入六行於行
001_0648_a_17L地所一念淨心決定明白金剛智力
001_0648_a_18L阿鞞跋致度脫衆生慈悲無盡

001_0648_a_19L
是明菩薩種性之人從捨闡提不信
001_0648_a_20L之障卽入六行之初十信於修行地
001_0648_a_21L之所卽發一念淨心卽是十住之初
001_0648_a_22L發心決定明白者謂十行位衆行
001_0648_a_23L明淨故金剛智力者謂十廻向堅固
001_0648_a_24L智力故阿鞞跋致者謂初地已上

001_0648_b_01L
“중생을 도탈度脫시키는데, 자비가 끝없다.”는 것은 곧 앞의 계위는203) 이타행이므로 이승의 경우 이타행이 불가능하다는 것과 구별하기 위한 것이다.

다) 허물이 없는 뛰어난 이익

대력보살이 여쭈었다.
“그와 같은 사람의 경우 반드시 계율을 갖추어 수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저 사문(성문승)들을 마땅히 존경할 수는 없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계율을 받은 자(성문승)는 불선으로 교만해지기 때문에204) 바다에 파랑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들(六行의 菩薩乘)의 심지는 팔식의 바다가 명징하고 구식의 흐름이 청정하여 천풍天風(壞劫 때에 부는 바람)조차도 흔들지 못하여 파랑이 일어나지 않는다. 본래 계의 자성은 허공과 같기 때문에 계를 지닌다는 것은 미혹한 전도이다. 그러나 앞의 그와 같은 사람은 칠식과 육식이 발생하지 않아 모두 멸정滅定을 모아서 삼불三佛을 본래 떠나 있지 않기 때문에 보리심을 내고, 삼해탈의 무분별상(三無相)에서 일심의 깊은 도리를 따라 들어가고, 또 깊이 삼보를 공경하여 위의를 상실하지 않으므로 그들 사문들(육행의 보살)을 공경하지 않을 수가 없다.
보살이여, 저 사람들은 세간의 동법動法과 부동법不動法에 집착이 없어 삼공취三空聚205)에 들어가 삼유심三有心(삼계의 중생심)을 소멸시킨다.”

이는 셋째로 허물이 없는 뛰어난 이익에 대한 것이니, 인과에 대한 범부의 오해를 떠나게 해 주기 때문이다.

(가) 질문

여기의 먼저 질문206) 가운데서 “반드시 계율을 갖추어 수지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은 위에서 설한 “계율을 갖추어 수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 사문들(성문승)을 마땅히 존경할 수는 없겠습니다.”라는 것은 저들의 경우 이미 계를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에 굳이 지계자持戒者처럼 공경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나) 답변

답변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앞의 대력보살의 질문에 대해서는 일단 긍정하고, 둘째는 뒤의 질문에 대해서 부정한다.

㉮ 앞의 질문에 대하여 긍정함

첫째에서 “계율을 받은 자”는 계율을 받은 사람은 곧 모든 성문들이다.207) 곧 자신의 지계를 믿고 모든 파계를 업신여기므로 “불선으로 교만해진다.”고 한다. 이런 사람은 아직 제법이 공한 줄을 터득하지 못하여 수면隨眠의 바다에서 제7식의 파랑이 전전展轉하기 때문에 “바다에 파랑이 인다.”고 한다. 이것은 소승 지계인의 과실을 언급한 것이다.
“그들의 심지”는 보살의 마음은 제법이 공한 줄을 증득하여 대지(본각)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001_0648_b_01L眞證無退故度脫衆生慈悲無盡者
001_0648_b_02L卽於前位利他行故爲別二乘不能
001_0648_b_03L行故

001_0648_b_04L
大力菩薩言如是之人應不持戒
001_0648_b_05L彼沙門應不敬仰佛言爲說戒者
001_0648_b_06L1) [30] 海波浪故如彼心地八識海
001_0648_b_07L九識流淨風不能動波浪不起
001_0648_b_08L戒性等空持者迷倒如彼之人七六
001_0648_b_09L不生諸集滅定不離三佛而發菩提
001_0648_b_10L三無相中順心玄入深敬三寶不失
001_0648_b_11L威儀於彼沙門不無恭敬菩薩彼仁
001_0648_b_12L不住世間動不動法入三空聚
001_0648_b_13L三有心

001_0648_b_14L
此是第三離患勝利謂離凡夫因果
001_0648_b_15L患故於中先問應不持戒者如前說
001_0648_b_16L言不具持波羅提木叉戒故於彼沙
001_0648_b_17L應不敬仰者旣不持戒故不須
001_0648_b_18L敬持戒者故答中有二先許前問
001_0648_b_19L2) [31] 後問初中言爲說戒者者所爲
001_0648_b_20L說戒之人卽是諸聲聞也恃自持戒
001_0648_b_21L懱諸破戒故言不善慢故是人未得
001_0648_b_22L諸法空故隨眠海中七識浪轉
001_0648_b_23L言海波浪故是擧持戒之人過失
001_0648_b_24L彼心地者謂菩薩心證諸法空入大

001_0648_c_01L제8식 안에 인집人執과 법집法執 및 수면隨眠과 분별기分別起가 이미 모두 사라졌기 때문에 “제8식의 바다가 명징하다.”고 한다.【징澂은 징澄을 뜻한다.】
무분별지無分別智로 본각에 증입하여 모든 경지가 증장되고 모든 잡염雜染을 떠나 있으므로 “구식의 흐름이 청정하다.”고 한다. 본각은 곧 제9식이기 때문이다.
마음에 분별이 없어 경계에 기동되지 않기 때문에 “천풍조차도 흔들지 못한다.”고 말한다.
흔들지 못하여 모든 7식에 염오가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파랑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사람은 이미 일체법공의 경지를 증득하여 일곱 가지 계208)의 자성이 모두 공적하기 때문에 “본래 계의 자성은 허공과 같다.”고 한다.
그러나 성문인은 법공을 통달하지 못하고, 계의 자성이 있는 것으로 집착하여 자신의 지계를 믿기 때문에 “계를 지닌다는 것은 미혹한 전도이다.”라고 한다.
이상은 대력보살의 앞의 질문에 답변한 것이다. 곧 계를 수지하지 않는 것은 과실이 아님을 설명한 것이다.
“그러나 앞의 그와 같은” 이하는 대력보살의 나중 질문에 답변한 것으로 저들에게는 아만이 없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칠식과 육식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나의 사혹思惑이 현행하지 않고, 견혹見惑의 종자가 이미 단멸된 것이다.
“모두 멸정滅定을 모은다.”는 것은 모든 것을 생기하는 식(前六識인 分別事識)의 심과 심소의 번뇌가 다 멸진되고 나서 이정理定에 들어가는 것이다.
“삼보리를 본래 떠나 있지 않기 때문에 보리심을 낸다.”는 것은 발심한 이래로 여래장불인 모든 중생에 대하여 널리 공경심을 발생하고 또 그 발심에 의하여 경만하지 않음을 설명한다.
“삼해탈의 무분별상에서 일심의 깊은 도리를 따라 들어간다.”는 것은 행입行入을 터득할 경우 무명의 뿌리를 없애고, 저 앞에서 설한 삼해탈 가운데서 일심법을 따라 깊이 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뜻으로 인해 “또 깊이 삼보를 공경한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형상의 불보와 종이와 비단(紙素)의 법보와 네 종류의 승보 등으로서 공경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그들 사문들을 공경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은 삼불三佛에 의하여 발심한 까닭에 교만의 뿌리와 무명종자를 없앤 것이다.

001_0648_c_01L地故第八識內二執隨眠分別起者
001_0648_c_02L皆已滅盡故言八識海澂澂者澄也
001_0648_c_03L無分別智證入本覺地地增長
001_0648_c_04L諸雜染故言九識流淨本覺正是
001_0648_c_05L第九識故心無分別非境所動
001_0648_c_06L風不能動不能動故染七不生
001_0648_c_07L言波浪不起是人旣證一切法空
001_0648_c_08L支戒性達皆空寂故言戒性等空
001_0648_c_09L聲聞人不達法空執有戒性恃自
001_0648_c_10L能持故言持者迷倒是答初問
001_0648_c_11L不持戒而非過失如彼已下次答後
001_0648_c_12L以明無慢七六不生者末那四
001_0648_c_13L不現行故見惑種子已斷滅故
001_0648_c_14L諸集滅定者諸生起識心心所集
001_0648_c_15L皆滅盡已入理定故不離三佛而發
001_0648_c_16L菩提者明發心來普敬心生如來
001_0648_c_17L藏佛是諸衆生依彼發心不輕慢
001_0648_c_18L三無相中順心玄入者得行入
001_0648_c_19L拔無明根如前所說三解脫中
001_0648_c_20L順一心法而深入故由是義故深敬
001_0648_c_21L三寶謂形像佛紙素等法四種僧
001_0648_c_22L無所不敬故於沙門不無恭敬
001_0648_c_23L以依三佛而發心故拔憍慢根無明
001_0648_c_24L「慢」作「▼(忄+㬅)」{甲}「奪」作「▼(大/集)」{甲}

001_0649_a_01L
이상은 허물의 모든 원인을 떠나 있음을 설명한 것이다.

㉯ 뒤의 질문에 대하여 부정함

이하부터는 허물의 모든 결과를 떠나 있음을 드러낸다.
“세간의 동법과 부동법에 집착이 없다.”는 것은 욕계의 인간과 천상에서 누리는 부와 즐거움을 동법動法이라 말하는데 이것은 산선散善의 과보이고, 색계와 무색계에서 누리는 적정의 과보를 부동법不動法이라 말하는데 이것은 정선定善의 과보이다. 바로 그것에도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집착이 없다.”고 하였다.
“삼공취에 들어간다.”는 것은 앞에서 설한 바처럼 전전展轉하여 증입하기 때문에 ‘취’라 하였다.
집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발생하지도 않기 때문에 “삼유심을 소멸시킨다.”고 하였다.

라) 집착이 없는 뛰어난 이익

대력보살이 여쭈었다.
“저 사람들은 과만족덕불과 여래장불과 형상불 등의 처소에서 보리심을 내고 삼취정계三聚淨戒209)에 들어가지만 그 상에 집착이 없습니다. 그리고 삼유심을 소멸하지만 적멸의 경지에도 머물지 않고, 중생을 저버리지도 않으며, 부조지不調地210)에 기꺼이 들어가기 때문에 불가사의하겠습니다.”

이것은 넷째로 집착이 없는 뛰어난 이익에 대한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위에서 설한 것을 이해하고, 둘째는 집착이 없음을 드러낸다.

(가) 위에서 설한 것을 이해함

먼저 첫째는 삼불을 본래 떠나 있지 않음을 이해한 것이다.
“과만족덕불”은 시각이 완성되어 만덕이 원만해진 것이다.
“여래장불”은 일체중생이 본래 본각이라는 것이다.
“형상불”은 금·동·진흙·나무로써 존상을 드러낸 것이다. 곧 이것은 인因·과果·이理·사事가 결여되지 않기 때문이다.
“삼취정계에 들어가지만 그 상에 집착이 없습니다.”라는 것은 앞에서 “계의 자성은 허공과 같다.”는 구절을 이해한 것이다. 왜냐하면 곧 삼취정계에 들어가는 네 가지 연은 계상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삼취정계의 네 가지 연에 대해서는 뒤의 「진성공품」에서 설한다.

(나) 집착이 없는 뛰어난 이익을 드러냄

이하 둘째는 집착이 없는 뛰어난 이익을 그대로 드러낸다. 비록 다시 삼공취에 들어가 삼유심을 없앴을지라도 적멸의 경지에 머물지도 않고 널리 육바라밀을 닦는다.
마음이 산란한(多喘) 중생이 거주하는 곳을 “부조지”라 한다.

001_0649_a_01L種故上來明其離諸因患自下顯其
001_0649_a_02L離諸果患不住世間動不動法者
001_0649_a_03L界人天富樂之果名爲動法散善果
001_0649_a_04L色無色界寂靜之果名不動法
001_0649_a_05L定善果故於彼不着故曰不住入三
001_0649_a_06L空聚者如前所說展轉增入故名
001_0649_a_07L爲聚非直不着亦令不生以之故
001_0649_a_08L言滅三有心

001_0649_a_09L
大力菩薩言彼仁者於果滿足德佛 [91]
001_0649_a_10L如來藏佛形像佛如是佛所而發菩
001_0649_a_11L提心入三聚戒不住其相滅三有心
001_0649_a_12L不居寂地不捨可衆入不調地不可
001_0649_a_13L思議

001_0649_a_14L
此是第四無住勝利於中有二先領
001_0649_a_15L上說後顯無住領中二句先領不
001_0649_a_16L離三佛之句果滿足德佛者始覺究
001_0649_a_17L萬德圓滿故如來藏佛者一切
001_0649_a_18L衆生本來本覺故形像佛者金銅泥
001_0649_a_19L木能表尊像故因果理事無所遺故
001_0649_a_20L入三聚戒不住其相者是領前戒性
001_0649_a_21L等空之句入戒四緣不着戒相故
001_0649_a_22L三聚四緣後品當說自下正顯無住
001_0649_a_23L勝利雖復入三空聚滅三有心
001_0649_a_24L不住寂地普涉六度多喘衆生所居

001_0649_b_01L
번뇌가 남아 있지만 무루업(不繫業)에 의하여 피안에 태어나기 때문에 “기꺼이 들어간다.”고 말한다.
번뇌가 남아 있다는 것은 말하자면 속히 없어지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왜냐하면 저 소승인의 경우 삼무수대겁三無數大劫(三大阿僧祗劫)에 걸쳐 점차 단제하여 보리를 터득할 경우에야 바야흐로 완전히 소멸되기 때문이지, 금강지 이후에도 내내 없어지지 않은 것을 가리켜 남아 있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211)

(3) 사리불(身子)이 이해함

그때 사리불이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와 게송을 설하여 말씀드렸다.

具足般若海    반야의 바다를 갖추었건만
不住涅槃城    열반성에도 머무르지 않네
如彼妙蓮華    그것은 미상불 묘련화처럼
高原非所出    고원에는 피어나지 않는다네

諸佛無量劫    제불께서는 무량한 겁토록
不捨諸煩惱    제번뇌 버리지도 않으면서
度世然後得    세간제도 마치고 터득하니
如泥華所出    마치 진흙 속의 연꽃 같네

如彼六行地    저 여섯 가지 수행의 길은
菩薩之所修    보살이 닦아 가는 수행이고
如彼三空聚    저 세 가지 삼매의 수행은
菩提之直道    보리에 이르는 지름길이네212)

이하는 셋째로 사리불(身子)이 이해하는 것으로213) 소승의 대중에게 대승심을 내도록 하는 대목이다. 여기에 두 부분이 있다. 첫째는 이해하는 것이고, 둘째는 서술하여 마치는 것이다.

① 이해함

첫째에 다시 두 가지가 있다. 앞의 세 게송은 위에서 설한 것을 찬송하고, 뒤의 두 게송은 사리불 자신이 발심한 바를 진술한다.

가. 위에서 설한 것을 찬송

첫째에도 세 부분이 있다. 첫째로 앞의 두 게송은 집착이 없는 도를 찬송한다. 그 다음의 2구는 육행의 계위를 찬송한다. 마지막의 2구는 삼공취를 찬송한다.
처음에 말한 “반야의 바다를 갖추었건만”은 삼해탈로 삼혜를 갖춘 것이다.
“열반성에도 머무르지 않네.”는 삼유심이 소멸되었지만 적정의 경지에도 머물지 않는 것이다.
“고원에는 피어나지 않는다네.”는 저 이승의 경우 번뇌의 늪을 떠나 있지만 팔만 겁 동안에도 발심하지 못한 것이다.
“제번뇌 버리지도 않으면서”는 저 이승이 사생四生214) 동안에 속히 번뇌를 단제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는 것이다.
“마치 진흙 속의 연꽃 같네.”는 아직 남아 있는 번뇌를 말미암아 부조지不調地에 들어갔지만, 거기에서 보살행을 모두 닦기 때문에 그로 인하여 보리과를 증득한다는 것이다.

001_0649_b_01L之處名不調地由所留惑依不繫
001_0649_b_02L業於彼受生故名爲入言留惑者
001_0649_b_03L謂不速盡如小乘人於三無數大劫
001_0649_b_04L時中漸次而斷得菩提時方滅盡
001_0649_b_05L不謂金剛已還一向不斷故名
001_0649_b_06L爲留

001_0649_b_07L
爾時舍利弗從座而起前說偈言
001_0649_b_08L具足般若海不住涅槃城如彼妙蓮華
001_0649_b_09L高原非所出諸佛無量劫不捨諸煩惱
001_0649_b_10L度世然後得如泥華所出如彼六行地
001_0649_b_11L菩薩之所修如彼三空聚菩提之直道

001_0649_b_12L
此下第三身子領解爲令小衆
001_0649_b_13L大心故於中有二一者領解二者
001_0649_b_14L述成初中亦二在前三頌頌前所
001_0649_b_15L其後二頌陳自發心初中有三
001_0649_b_16L一前二頌頌無住道次有二句
001_0649_b_17L六行位後之二句頌三空聚初中
001_0649_b_18L言具足般若海者謂三解脫具三慧
001_0649_b_19L不住涅槃城者滅三有心不居
001_0649_b_20L寂地故高原非所出者如彼二乘
001_0649_b_21L離煩惱泥八萬劫等不發心故
001_0649_b_22L捨諸煩惱者不如二乘二二生中
001_0649_b_23L速斷盡故如泥華所出者由所留惑
001_0649_b_24L入不調地於中具修菩薩行故因是

001_0649_c_01L
삼취정계의 수행에 대해서는 경문에 있으므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나. 사리불 자신이 발심한 것을 진술함


我今住不住    제 머묾 및 머물지 않음은215)
如佛之所說    부처님의 말씀과 똑같으니
來所還復來    온 곳으로 다시 또 돌아가
具足然後出    구족한 연후에 나오려 하네216)

復令諸衆生    그리고 다시금 제중생에게
如我一無二    나와 똑같이 둘 없게 하여
前來後來者    먼저 오고 나중에 오는 자
悉令登正覺    모두 다 정각을 터득하리라217)

이것은 둘째로 사리불 자신이 발심한 것을 진술한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처음의 2구는 지금 발심한 계위를 진술하고, 나머지 한 게송 반은 이후에 닦아 나갈 수행을 드러낸다.
“제 머묾 및 머물지 않음은”은 지금 부처님 설법을 듣고 나서 대승심을 발한즉 적멸의 경지에도 집착하지 않는 마음에 머무는 것이다.
“온 곳으로 다시 또 돌아가”라는 것은 무시이래로 유전해 온 곳을 나는 일찍이 떠나 있었지만 지금 다시 돌아와서 삼계에 들어가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변제정邊際定218)의 힘에 의해서 받은 몸으로 그 적절한 곳을 따라 시현하는 것이다.
“구족한 연후에 나오려 하네.”는 보살의 일체행을 구족한 연후에야 그 보살의 몸을 벗어나 불신佛身을 터득하는 것이다.
“먼저 오고”라는 것은 과거에 이미 선근이 성숙한 자이고, “나중에 오는 자”라는 것은 미래세에 바야흐로 성숙하게 될 자이므로, 미래제가 다하도록 쉬지 않는다는 것이다.

② 서술하여 마침

그때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불가사의하도다. 그대는 반드시 후세에 보살도를 성취하여 무량한 중생을 생사의 바다에서 건져줄 것이다.”

이것은 둘째로 서술하여 마친 대목으로서, 사리불이 말한 것을 인가하는 것이다.

(4) 대중이 획득한 이익

그때 대승의 대중은 모두 보리를 깨치고, 모든 소승의 대중들도 오공五空의 바다에 들어갔다.

이것은 크게 분류한 가운데 넷째로 당시의 대중이 획득한 이익에 대한 것이다.219)
“대중”은 곧 대승의 무리이다.

001_0649_c_01L能證菩提果故云行1) [32] 在文可
001_0649_c_02L

001_0649_c_03L
我今住不住如佛之所說來所還復來
001_0649_c_04L具足然後出復令諸衆生如我一無二
001_0649_c_05L前來後來者悉令登正覺

001_0649_c_06L
此是第二陳自發心於中有二初之
001_0649_c_07L二句陳今發心之位後一頌半
001_0649_c_08L其後修之行我今住不住者今聞佛
001_0649_c_09L說已發大心卽住不住寂地之心故
001_0649_c_10L來所還復來者無始流轉之來之處
001_0649_c_11L我先所離今還復來來入三界
001_0649_c_12L衆生故邊際定力延所受身隨其
001_0649_c_13L所宜而示現故具足然後出者
001_0649_c_14L足菩薩一切行後出離此身得佛身
001_0649_c_15L言前來者過去善根已成熟者也
001_0649_c_16L言後來者於未來世方成熟者也
001_0649_c_17L未來際不休息故

001_0649_c_18L
爾時佛告舍利弗言不可思議汝當於
001_0649_c_19L成菩薩 [92] 無量衆生超生死海 [93]

001_0649_c_20L
第二述成印其所說

001_0649_c_21L
爾時大衆皆悟菩提諸小衆等入五
001_0649_c_22L空海

001_0649_c_23L
此是大分第四時衆得益言大衆者
001_0649_c_24L「三」作「二」{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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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를 깨친다.”는 것은 일지一地의 보리심에 오입悟入한 것이다.
“모든 소승의 대중”은 성문중으로 곧 세 가지 진여문220)에 들어간 것이다.

『금강삼매경론』 중권


001_0650_a_01L是大乘衆悟菩提者悟入一地菩提
001_0650_a_02L心故諸小衆者謂聲聞衆得入三
001_0650_a_03L種眞如門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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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剛三昧經論卷中

001_0650_b_01L
  1. 1)『金剛三昧經』의 정설분은 일미관행에 대하여 설명한다. 그에 해당하는 「無相法品」·「無生行品」·「本覺利品」·「入實際品」·「眞性空品」·「如來藏品」의 여섯 품목을 가리킨다.
  2. 2)주고받는 여섯 가지 문답 가운데 둘째에 해당하는 것으로 답변 부분이다.
  3. 3)주고받는 여섯 가지 문답 가운데 셋째에 해당한다.
  4. 4)주고받는 여섯 가지 문답 가운데 넷째에 해당한다.
  5. 5)주고받는 여섯 가지 문답 가운데 다섯째에 해당한다.
  6. 6)주고받는 여섯 가지 문답 가운데 여섯째에 해당한다.
  7. 7)이 대목을 풀어서 말하면, “본래 스스로 발생한 것(自生)도 아니고, 다른 것으로부터 발생한 것(從他生)도 아니며, 자타가 함께하여 발생한 것(共生)도 아니고, 인을 통해서 발생한 것(因生)도 아닌 것으로서 곧 발생이 없는 것(無生)이다.”라는 뜻이다.
  8. 8)연의 대사代謝 : 낙사落謝와 같이 늘 맞물려서 변천하는 것이다.
  9. 9)사불四不 : 부자생不自生·불타생不他生·불공생不共生·불인생不因生을 가리킨다.
  10. 10)팔불八不 : 본 『金剛三昧經論』에서 말한 불일不一·불이不異·부단不斷·불상不常·불입不入·불출不出·불생不生·불멸不滅을 가리킨다.
  11. 11)원문의 “善男子。 是心性相。 又如阿摩勒果。 本不自生·不從他生·不共生·不因生·無生”에서 마지막의 ‘무생無生’의 대목이 『金剛三昧經註解』와 『金剛三昧經通宗記』의 경우 ‘불무생不無生’인 것과 비교하면 다음과 같은 해석이 가능하다. ‘무생無生’인 경우는 “심성의 바탕은 자생도 아니고, 타생도 아니며, 공생도 아니고, 인생도 아닌 것으로 곧 무생이다.”이고, ‘불무생不無生’인 경우는 “심성의 바탕은 자생도 아니고, 타생도 아니며, 공생도 아니고, 인생도 아니며, 무생도 아니다.” 또는 “심성의 바탕은 자생도 아니고, 타생도 아니며, 공생도 아니고, 인생도 아니며, 불무생이다.”이다. 또한 경문과는 달리 본 『金剛三昧經論』에서 원효는 사불四不을 언급하면서 ‘불인생不因生’을 빼고 ‘불무생不無生’을 넣어서 설명하고 있다. 이 점은 ‘本不自生·不從他生·不共生·不因生·無生’이 『金剛三昧經註解』와 『金剛三昧經通宗記』의 ‘本不自生·不從他生·不共生·不因生·不無生’처럼 무생을 불무생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보여 주고 있다.
  12. 12)왜냐하면 : 이전 대목이 현의顯疑에 대한 직접적인 해석이라면, “왜냐하면” 이후 대목은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으로 간접적인 해석에 해당한다.
  13. 13)『瑜伽師地論』 권16(T30, 363a).
  14. 14)네 가지 비방 : 일이一異·단상斷常·입출入出·생멸生滅의 네 가지 분별의 속성을 말한다.
  15. 15)여섯째로 해석하는 부분 가운데 셋째에 해당한다.
  16. 16)대몽大夢 : 중생이 미혹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17. 17)여섯째로 해석하는 부분 가운데 네 가지가 있다. 그 넷째로서 옳다(是)는 것을 설명하는 것에 해당한다.
  18. 18)『瑜伽師地論』 권95(T30, 844c20~22).
  19. 19)첫째의 정설 부분의 네 가지 가운데 둘째 부정하여 따지는 문답이다.
  20. 20)위에서 언급한 일一·이異·단斷·상常·입入·출出·생生·멸滅’의 여덟 가지를 가리킨다.
  21. 21)열 가지가 없다(十無) : 견見·문聞·득得·실失·언言·설說·지知·상相·취取·사捨가 없는 것이다.
  22. 22)『妙法蓮華經憂波提舍』 권하(T26, 9c~10a)에 의하여 생략된 내용을 보충하면 다음과 같다. “팔생 내지 일생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터득한다는 것은 초지의 보리를 증득한다는 것이다. 팔생과 일생이란 모든 범부가 결정코 초지에서 증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각자의 역량 내지 분수에 따라서 팔생 내지 일생에 모두 초지를 증득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란 삼계의 분단생사를 떠나 분수에 따라서 진여법성을 볼 수 있으므로 보리를 터득한다고 말하는 것이지 구경에 만족한 여래의 방편열반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八生乃至一生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者。 謂證初地菩提法故。 八生一生者。 謂諸凡夫決定能證初地故。 隨力隨分。 八生乃至一生皆證初地故。 此言阿耨多羅三藐三菩提者。 以離三界分段生死。 隨分能見眞如法性名得菩提。 非謂究竟滿足如來方便涅槃也。)”
  23. 23)“본래 득得도 없고 부득不得도 없는데”에 해당하는 말은 ‘본무유득부득本無有得不得’이다. 이 대목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는 득得의 부정과 그 득의 부정인 부득不得에 대한 부정으로서 곧 이중의 부정이다. 둘째는 능能과 소所에 대한 분별의 부정이다. 득은 능득能得이고 부득은 불소득不所得으로서 능득의 부정과 소득所得의 부정으로서 양자의 부정이다. 여기에서는 전자의 경우처럼 이중 부정의 의미로 해석된다.
  24. 24)이에 해당하는 경문은 다음과 같다. “존자시여, 저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터득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보리의 자성에는 득得도 없고 실失도 없으며 각覺도 없고 지知도 없어 분별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분별이 없은즉 청정한 자성입니다. 그 자성에는 간間도 없고 잡雜도 없고 언言도 없고 설說도 없으며 유有도 없고 무無도 없으며 지知도 없고 부지不知도 없습니다.”
  25. 25)이에 해당하는 경문은 다음과 같다. “제법과 제행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왜냐하면 일체법과 일체행에 처소가 없는 것은 결정자성이기 때문입니다. 본래 터득도 없고 터득하지 못함도 없는데, 어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터득한다고 하겠습니까.”
  26. 26)솔이심率爾心 : 졸이심卒爾心이라고도 한다. 전5식의 감각과 의식의 관계에 대하여 졸이심卒爾心·심구심尋求心·결정심決定心·염정심染淨心·등류심等流心의 오심五心을 말하는데, 이 가운데 졸이심은 대상을 향한 찰나의 마음을 가리킨다.
  27. 27)삼수三受 : 고수苦受·낙수樂受·사수捨受이다.
  28. 28)심·의·의식 : 초기경전에서는 모두 제6식으로 간주하였지만, 후에 유식학에서는 각각 제6식과 제7식과 제8식으로 분별하였다. 원효는 본 『金剛三昧經論』에서 이들에 대하여 모두 제6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서 심心은 미래에 해당하고, 의意는 과거에 해당하며, 의식意識은 현재에 해당하는 것으로 간주하는데, 그것은 삼세가 모두 공적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파악된다.
  29. 29)변행遍行 : 오변행五遍行을 가리킨다. 오변행은 온갖 마음의 형상에 반드시 따라 일어나는 다섯 가지 심리작용으로서 작의作意·촉觸·수受·상想·사思를 가리킨다.
  30. 30)구체적으로는 ‘이근과 이촉과 이식, 비근과 비촉과 비식, 설근과 설촉과 설식, 신근과 신촉과 신식’을 가리킨다.
  31. 31)수전문隨轉門 : 수전리문隨轉理門으로서 진실리문眞實理門에 상대되는 개념으로서 방편으로 제도하는 것이다.
  32. 32)부정하여 따지는 문답 중 여섯째 증득이 없다고 서술한 세 가지 가운데 둘째에 해당한다.
  33. 33)일체의 마음 작용은 무상에 불과하여 자체가 적멸한 무생이다. 그런데도 적멸심이 발생하거나 무생심이 발생하면 그것은 유소득에 해당하는 것이라 하여 무생행에 어긋난다는 것을 말하는 대목이다.
  34. 34)실제로 적멸이 발생했으면서 발생했다는 그 마음조차 불생이 되는 것을 가리킨다.
  35. 35)부정하여 따지는 문답 중 여섯째 증득이 없다고 서술한 세 가지 가운데 셋째에 해당한다.
  36. 36)이정理定에 대하여 그 모습을 설명한 것과 이지理智에 대하여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을 가리킨다.
  37. 37)「無生行品」의 정설正說에 네 부분이 있다. 그 가운데 둘째가 부정하여 따지는 문답인데, 지금까지 설명한 여덟 가지 부분이 이에 해당한다.
  38. 38)이것은 “그 무생법인의 마음에는 주처되는 경계(所)가 없고 주처하려는 마음(能)도 없어서 집착하는 대상도 없고 집착하려는 마음도 없으므로 그 무생법인의 마음이야말로 곧 무생이고 무주입니다.”라는 뜻이다.
  39. 39)무생심과 무생행(心無生行) : 무생법인의 마음이 무생이고 또한 무행인 모습을 가리킨다.
  40. 40)「無生行品」의 정설正說에 네 부분이 있다. 그 가운데 셋째에 해당한다.
  41. 41)“그 마음에는 소주처도 없고, 능주처의 마음도 없다.”는 것을 가리킨다.
  42. 42)「無生行品」의 정설正說에 네 부분이 있다. 그 가운데 넷째에 해당한다.
  43. 43)「無生行品」의 세 부분 가운데 둘째에 해당한다.
  44. 44)원징圓澄의 견해에 의하면 여기에 나오는 두 가지 무생에서 앞의 무생은 무생선정無生禪定을 의미하고, 뒤의 무생은 무생반야無生般若를 의미한다. 『金剛三昧經註解』 권2 「無生行品」(X35, 229c), “兩無生者。 上句是禪定。 下句是般若。”
  45. 45)「無生行品」의 세 부분 가운데 셋째에 해당한다.
  46. 46)「本覺利品」에서는 본각의 이익에 대하여 설하고 있는데, 보다 구체적으로는 본각本覺과 이행利行에 대하여 설하고 있다. 이 품의 대의에 대하여 원징은 “본각이란 곧 모든 사람들의 법신이고, 이행이란 곧 모든 사람들의 법성이다. 법성은 생·멸하지 않지만 또한 생멸의 작용이 없지 않으니, 이로써 무생의 뜻을 드러내고, 법신은 상이 없지만 상의 작용이 없지 않으니, 이로써 무상의 뜻을 드러낸다.(本覺者。 即人人之法身。 利行者。 即人人之法性。 法性。 非生滅。 而亦非不生滅用。 顯無生義。 法身。 無相。 而靡所不相用。 顯無相義。 )”고 설명한다. 『金剛三昧經註解』 권2(X35, 229c).
  47. 47)본각의 이익(本利) : ‘본本’은 무생법인의 터득으로서 본각이고, ‘이利’는 무량한 차별지혜로서 분별사식分別事識의 전환이다. 『金剛三昧經通宗記』 권6(X35, 289a)에서 “本利二字。 本即所得法忍。 即是本覺。 利即無量差別智。 即是轉識。”이라고 하였다.
  48. 48)무생심과 무생행 : 이 번역문의 원문은 ‘심무생心無生’에 해당한다. 이에 대하여 원효는 앞에 있는 「無生行品」의 해당 대목에서 ‘심무생행心無生行’의 의미로 설명하였다.
  49. 49)보살이 부동지不動地에 도달했음을 가리킨다. 『金剛三昧經通宗記』 권6(X35, 288b).
  50. 50)『宗鏡錄』 권83(T48, 875a)에서는 이어서 주처住處까지도 없다고 부연하여 설명한다. “내지 색은 처소가 없고 청정하고 이름이 없어서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눈은 처소가 없고 청정하고 보는 작용이 없어서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마음도 처소가 없고 기동하는 곳이 없고, 청정하고 움직임이 없어서 반연을 분별함도 없다. 이에 자성이 모두 공적하다. 나아가 저 심왕도 본래 머무는 곳이 없다.(乃至色無處所。 清淨無名。 不入於內。 眼無處所。 清淨無見。 不出於外。 心無處所。 清淨無上。 無有起處。 清淨無動。 無有緣別。 性皆空寂。 乃至如彼心王。 本無住處。)”
  51. 51)여기 두 개의 게송은 이미 부동지에 들어간 보살이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오고 감이 없는 부동지에 머물게 해 준다는 것이다. 『金剛三昧經通宗記』 권6(X35, 289b).
  52. 52)셋째로 여래께서 광명을 내어 무주보살의 본각이행本覺利行에 대하여 게송으로 칭찬한 대목이다.
  53. 53)여래께서 위에서 칭찬하신 것 : 위에서 말한 “그대는 본래 온 곳이 없고 지금 또한 도달한 곳도 없다. 그대가 터득한 본각의 이익은 불가사의하니, 곧 대보살마하살이다.”를 가리킨다.
  54. 54)둘째로 숨어 있는 것(微)으로부터 드러난 것(著)에 이르기까지 본각의 이익의 의의를 광설廣說하는 것에 해당한다.
  55. 55)암마라식唵摩羅識 : 암마라는 번역하면 백정식白淨識인데, 곧 제9식이다. 전5식과 제6식과 제7식은 세간상이고, 지금의 정식情識은 제8식으로서 세간과 출세간을 모두 포함한다. 그러나 제9식은 오직 출세간뿐이다. 소위 저 세간의 정식을 굴려서 출세간의 청정자성으로 들어가게 한다. 『金剛三昧經註解』 권2(X35, 230b).
  56. 56)“어떤 이익을 베풀어서(轉) 중생의 일체정식을 전변시켜(轉)”의 대목에서 앞의 전轉은 전법轉法이고, 뒤의 전轉은 전식轉識이다. 『金剛三昧經通宗記』 권6(X35, 289b).
  57. 57)『決定藏論』 권상(T30, 1020b) 참조.
  58. 58)결정본성決定本性 : 결정적으로 본각의 자성을 스스로 아는 것이다. 곧 본각의 자성은 그 바탕(體)에 기동起動이 없고 또한 불래不來·불거不去의 경지에 도달한 것을 가리킨다. 이것이야말로 종문에서 명심견성明心見性하는 지결旨訣이다. 『金剛三昧經通宗記』 권6(X35, 289b~c).
  59. 59)이에 해당하는 대목은 “모든 정식은 공적하여 무생임을 일깨워 주기 때문이다.”이다.
  60. 60)일체(可一)의 팔식 : ‘가일可一’을 원효는 ‘일체一切’의 뜻으로 파악하였다. 하지만 원징은 『金剛三昧經註解』 권2(X35, 230c)에서 ‘여일체식如一切識’으로 간주하여 ‘저 일체의 식’으로 주석하고 있다. 그리고 적진寂震은 『金剛三昧經通宗記』 권6(X35, 289c)에서 ‘가可’는 뒤의 ‘일체식一切識’과 독립된 용어로서 자각각타自覺覺他의 행行을 터득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가可’는 하나의 구절로 보아야 한다. 그 다음의 ‘일체식一切識’의 세 글자와 연결해서 읽어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 ‘가可’는 무주보살이 자각각타의 무생행을 마음으로 깨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可)’라고 말한 것이다.(可字。 當作一句。 勿連下三字讀。 此可者。 乃無住菩薩。 心領意會於自覺覺他之行。 故曰可。)”
  61. 61)사연四緣 : 인연因緣·등무간연等無間緣·소연연所緣緣·증상연增上緣을 가리킨다.
  62. 62)이하의 세 가지 문답 : 여섯 가지 문답 가운데 제4·제5·제6의 문답을 가리킨다.
  63. 63)“청정하므로 색이 없다.”에 해당하는 원문 ‘淸淨無色’은 ‘淸淨故無色’의 뜻으로 해석된다.
  64. 64)제식은 본각과 다른 모습이 아님을 설명한 셋째에는 다시 제4·제5·제6의 문답이 있는데, 그 가운데 셋째에 해당하는 제6의 문답이다.
  65. 65)법法 : 의근意根의 소연이 되는 법경法境을 뜻한다.
  66. 66)“그 경지는 청정하여 마치 유리처럼 맑고, 자성은 항상 평등하여 마치 저 대지와 같으며, 본각으로 미묘하게 관찰함은 마치 지혜의 햇살과 같고, 이타행을 성취하여 본각을 터득함은 마치 대법우와 같다.”는 대목을 원효는 대원경지大圓鏡智, 평등성지平等性智, 묘관찰지妙觀察智, 성소작지成所作智의 사지四智에 배대하여 해석하였다. 그러나 『金剛三昧經通宗記』 권6(X35, 290c~291a)에서는 이들 각각의 구절에 대하여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에 배대하여 사홍서원四弘誓願으로 해석하고 있다.
  67. 67)시각을 연설하는 것에 대하여 첫째로 제식이 공적함을 연설하고, 둘째로 제식이 무생임을 연설한다. 이 가운데 그 둘째에 해당한다.
  68. 68)『金剛三昧經』의 제목 가운데 ‘금강’에 대한 설명이 이에 해당한다.
  69. 69)무명주지無明住地 : 오주五住 곧 견일처주지見一處住地·욕애주지欲愛住地·유애주지有愛住地·무애주지無愛住地·무명주지無明住地 가운데 하나로 잠재적인 미세번뇌 및 소지장을 가리킨다. 나머지 사주四住는 현행번뇌 및 번뇌장을 가리킨다.
  70. 70)무간도無間道 : 무애도無碍道라고도 한다. 지말번뇌에 장애받지 않는 금강지金剛智의 경지를 통하여 해탈도에 나아간다.
  71. 71)둘째로 과가 원만함(果圓)을 설명하는 대목이다.
  72. 72)시각을 두 가지, 곧 첫째는 제식이 공적함을 연설하고, 둘째는 제식이 무생임을 연설한 것을 가리킨다.
  73. 73)본각의 이익의 의의에 대해 거듭하여 연설한 것으로, 첫째는 시각을 연설하고, 둘째는 본각을 연설한다. 이 가운데 그 둘째인 본각을 연설하는 부분이다.
  74. 74)원효는 위의 경문을 질문으로 간주하고 있다. “왜냐하면 일체중생은 바로 자신의 법신 속에 본래 원만하게 구족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라는 말을 부처님께 다짐받고 싶어 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75. 75)이 경문은 일체중생의 경우 바로 자신의 법신 속에 부처님과 동일하게 본리本利 곧 일본각一本覺의 성력聖力과 사지四智를 본래 원만하게 구족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金剛三昧經通宗記』 권6(X35, 291a)에서는 “여래께서 설하신 일각一覺의 성지력聖智力 및 네 가지 큰 지혜의 경지(四弘智地)는 곧 일체중생의 본각의 근원이고 시각의 이익입니다.”라는 대목에 대하여 “여래가 설한 일각은 성지지력聖智之力 및 사홍지원지지四弘智願之地로서 자성법문을 닦아서 자성중생을 이롭게 하고 자성번뇌를 단절하여 자성불도를 성취하는 것에 해당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일체중생의 본각의 근원이고 시각의 이익이다.”라고 해석한다.
  76. 76)삼루三漏 : 무루無漏의 상대 개념인 욕루欲漏·유루有漏·무명루無明漏를 가리킨다.
  77. 77)채집採集 : 『金剛三昧經通宗記』 권6(X35, 291a)에서는 『楞伽經』을 인용하여 “심心은 채집하는 행위이고, 의意는 널리 모으는 것이다.(心名採集業。 意名廣採集。)”라고 하였다.
  78. 78)채집하는 것은 번뇌와 더불어 뒤섞이는 것이고, 독행은 번뇌를 벗어나 초월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함께 한다 혹은 홀로 한다는 것으로 그 자체가 집착이다.
  79. 79)『金剛三昧經註解』 권2(X35, 232a) 및 『金剛三昧經通宗記』 권6(X35, 291c)에서는 채집과 독행에 대하여 각각 상분相分과 견분見分에 배대하여 제8 장식의 소변所變으로 간주하고 있다.
  80. 80)공적한 이치(空窟) : 공굴空窟은 상분과 견분을 초월한 것으로서 곧 공적한 이치를 뜻한다.
  81. 81)복도伏道 : 견도見道에서 견혹見惑을 다스리고 수도修道에서 수혹修惑을 다스리는 것이다.
  82. 82)단도斷道 : 견도見道에서 견혹見惑을 완전히 단제하고 수도修道에서 수혹修惑을 완전히 단제하는 것이다.
  83. 83)사마四魔 : 수도에 장애가 되는 오음마五陰魔·번뇌마煩惱魔·천마天魔·사마死魔를 가리킨다.
  84. 84)각覺이 없음을 느끼고 알면 : 본래부터 깨달음 그것이었을 뿐이지 새삼스럽게 깨달음이 발생한 것이 아님을 느끼고 아는 행위로서 곧 일본각一本覺에 해당된다.
  85. 85)본각의 뜻을 연설한 대목 가운데 첫째는 곧장 설명하는(正明) 부분이고, 둘째는 집착을 없애는(遣著) 부분이다. 이는 둘째에 해당한다.
  86. 86)오직 일본각뿐 : 마음에 열반이 터득되어 청정한 일본각의 자성만 독존하고 제식諸識은 모두 소멸된 상태를 가리킨다. 『金剛三昧經通宗記』 권6(X35, 292a).
  87. 87)중덕衆德 : 법신法身·해탈解脫·반야般若의 열반의 삼덕을 가리킨다.
  88. 88)『妙法蓮華經』 권2(T9, 16b) 참조.
  89. 89)오상五相 : 소전상所詮相·능전상能詮相·상속상相續相·집착상執着相·부집착상不執着相으로 미迷·오悟의 다섯 가지 법상法相을 가리킨다.
  90. 90)오사五事 : 명名·상相·분별分別·정지正智·여여如如의 다섯 가지 미迷·오悟의 법을 가리킨다.
  91. 91)통달위通達位 : 자량위資糧位·가행위加行位·수습위修習位·통달위通達位·구경위究竟位의 오위五位 가운데 하나이다.
  92. 92)후득지後得智 : 후득무분별지後得無分別智로서 근본무분별지根本無分別智에 상대되는 지혜이다. 근본지가 분별의 주체와 대상이 없음에 비하여 후득지는 분별의 주체와 대상이 있다.
  93. 93)돈을 얻은 것 : 아버지의 가르침을 통해서 본래 금전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에 해당한다.
  94. 94)알려 준 바로~터득한 것이다 : 이 대목에 대하여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는 “알려 준(告言) 바로 그때는 깨침을 터득한 것이고, 망념이 모두 사라진(究竟) 그때는 무소득을 터득한 것이다.”라는 것으로 ‘알려 준 바로 그때는 깨침을 터득한 것’은 돈오에 해당하고, ‘망념이 모두 사라진 그때는 무소득을 터득한 것’은 점수에 해당한다. 둘째는 “알려 준 바로 그때 깨침을 터득한 것이지, 후에 망념이 모두 사라진 그때에야 비로소 터득한다는 것은 소득이 아니다.”라는 것으로 돈오돈수의 입장에 해당한다. 둘째의 해석은 바로 뒤에 이어지는 금전의 비유 곧 “마치 금전을 알아차린 것일 뿐이지 새삼스레 획득한 바가 아닌 것과 같다.”에 합치된다. 금전의 비유와 관련하여 첫째에 대한 해석은 다음과 같다. ‘알려 준 바로 그때는 깨침을 터득한 것’이란 일념지간에 알아차린 것에 해당하고, ‘망념이 모두 사라진 그때는 무소득을 터득한 것이다.’라는 것은 오십 년 동안 떠돈 것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하에서 “그러므로 아버지가 알려 준 것은 오십 년의 오랜 세월이 경과했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일념지간에 오십 가지 악을 모두 갖추었다는 것을 드러낸 것일 뿐이다.”라는 대목으로 보면 일념과 오십 년이 시간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더불어 수행의 완성을 의미한다. 때문에 금전의 비유와 관련해도 첫째의 경우 하등의 모순이 아니다. 다만 일념이라는 대목과 오십 년 동안이라는 대목의 어디에 중점을 두고 해석하는가, 일념과 오십 년을 수행의 과정 내지 완성의 어디에 중점을 두고 해석하는가의 문제로서 모순 대립의 문제로 볼 필요는 없다. 여기에서는 첫째의 입장으로 해석한다.
  95. 95)『大乘起信論』(T32, 576c).
  96. 96)『大乘起信論別記』(T44, 228a).
  97. 97)『顯揚聖敎論』 권1(T31, 484a).
  98. 98)마음과 정신을 안좌시키고, 금강지에 거주토록 하며, 적정하여 망념의 기동이 없게 하고, 심원을 항상 편안하고 태연하게 하는 네 가지 수행에 대하여 『金剛三昧經註解』 권2(X35, 234ab)에서는 『圓覺經』(T17, 920b)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작作·임任·지止·멸滅의 사병四病, 곧 사상四相을 다스리는 수행법으로 해석하였다.
  99. 99)이상異相 : 생상生相·주상住相·이상異相·멸상滅相의 사상四相 가운데 하나이다.
  100. 100)상사각相似覺 : 아공我空은 깨쳤지만 법공法空은 깨치지 못한 상태이다. 초지初地 이상의 수분각隨分覺과 유사하므로 상사각相似覺이라 한다.
  101. 101)분별추념상分別麤念相 : 분별分別 곧 아공我空을 깨치고 또 추념麤念 곧 법공法空을 깨친 상태이다.
  102. 102)보살지를 마친(菩薩地盡) : 십주十住로부터 십지十地까지 모든 보살행을 완성한 무구지無垢地 이전의 경지이다.
  103. 103)일념에 상응한다 : 해탈도를 완성한다는 의미이다.
  104. 104)일심의 자성을 본다 : 생상生相이 없으므로 멸상滅相도 없고, 멸상滅相이 없으므로 생상生相이 없어서 생멸상生滅相을 초월한다는 뜻이다.
  105. 105)『大乘起信論』(T32, 576b) 참조.
  106. 106)이 대목은 『大乘起信論』이 『金剛三昧經』을 인용했다는 뉘앙스로 비친다. 이하의 몇 가지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107. 107)무득으로써 유득의 집착(執)을 없애 주는 것에 첫째는 무득을 그대로 설명하고, 둘째는 의정을 거듭 없애며, 셋째는 이해를 시키고, 넷째는 마무리를 짓는 등 네 가지가 있다. 이 가운데 셋째와 넷째가 여기에 해당한다.
  108. 108)『大乘起信論』(T32, 576c).
  109. 109)위에서 「本覺利品」을 첫째는 본각의 이익을 널리 설명하고, 둘째는 게송으로 찬탄하며, 셋째는 그 당시의 대중이 이익을 터득하는 것으로 분류하였다. 이 가운데 그 둘째인 게송으로 찬탄하는 대목에 해당한다.
  110. 110)「本覺利品」의 내용을 세 부분으로 나눈 것 가운데 셋째로서 그 당시의 대중이 이익을 터득하는 것에 해당한다.
  111. 111)『達磨語錄』에 의하면, 이입理入은 일체중생이 부처님과 동일한 진성眞性의 소유자임을 경전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심신深信하는 것을 가리키고, 행입行入은 이입의 실천으로서 보원행報怨行·수연행隨緣行·무소구행無所求行·칭법행稱法行의 사행四行을 가리킨다. 『少室六門集』 「二種入」(T48, 369c)에서 이입理入의 경우 입入은 깨달음에 들어감이고 행입行入의 경우 입入은 이미 깨달음에 들어가 그것을 실천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본 『金剛三昧經論』에서 원효는 행입의 경우에 대하여 자리의 행입과 이타의 행입의 이행二行으로 설명을 한다.
  112. 112)「入實際品」은 정설분의 일곱 가지 품 가운데 그 넷째에 해당한다.
  113. 113)비시非時 : 본래 율장에서는 ‘율로 정해 놓은 시간을 벗어난 때’의 의미로서 율에 어긋나는 것을 가리켰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정법正法의 시대가 아닌 상법像法 내지 말법末法의 시대로서 불법의 유통 여건이 불리한 시대를 가리킨다. 『金剛三昧經註解』 권3(X35, 235a~b)에서는 특히 오탁악세五濁惡世의 투쟁견고시대鬪諍堅固時代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114. 114)모든 중생의 정情과 지智 : 둔근중생의 정식情識과 이근중생의 심지心智를 가리킨다. 『金剛三昧經通宗記』 권7(X35, 295a) “引一切邪見。 鈍根衆生之情識。 與利根衆生之心智。” 참조.
  115. 115)살반야薩般若 : 일체종지一切種智이다. 곧 반야般若는 인因이고 살바야薩婆若는 과果이다. 중생으로 하여금 이 일체종지라는 과를 얻도록 하는 것이다. 『金剛三昧經通宗記』 권7(X35, 295a) 참조.
  116. 116)오중오백세五重五百歲 : 제1오백세의 해탈견고시대解脫堅固時代, 제2오백세의 선정견고시대禪定堅固時代, 제3오백세의 다문견소시대多聞堅固時代, 제4오백세의 탑사견고시대塔寺堅固時代, 제5오백세의 투쟁견고시대鬪爭堅固時代를 가리킨다.
  117. 117)순順은 설법을 듣는 대상인 중생의 깜냥에만 맞추어 설하는 것으로 중생의 입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불순不順은 설법을 하는 주체인 보살의 입장에서만 설하는 것으로 중생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바른 믿음을 일으킬 인연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므로 때로는 순의 입장으로 설하고, 때로는 불순의 입장으로 설하는 방편을 구사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118. 118)‘맞다’는 것은 중생으로 하여금 허공의 바람에 흩날리지 않게 하거나 내지 허공의 바람을 맞아 휘말리지 않도록 한다는 뜻이다.
  119. 119)오공五空 : 삼유三有가 공한 것이고, 육도六道의 모습이 공한 것이며, 법상法相이 공한 것이고, 명상名相이 공한 것이며, 심식心識의 뜻이 공한 것을 가리킨다.
  120. 120)제법의 자성이~것이 아니고 : 어떤 본에는 “제법의 자성은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다.”로 되어 있다.
  121. 121)무無도 아니며~아니기 때문이다 : 『大正新修大藏經』에 수록된 『金剛三昧經』을 비롯하여 『金剛三昧經註解』, 『金剛三昧經通宗記』의 경우처럼 ‘성비유무性非有無’의 경우로 해석하면 ‘제법의 자성은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며’라는 뜻이 된다. 이하 이 대목에 해당하는 『金剛三昧經論』의 해석에서도 마찬가지이다.
  122. 122)세간의 오법五法 : 삼유三有·육도령六道靈·법상法相·명상名相·심식心識을 가리킨다.
  123. 123)공에 들어간다(入空) : 오법이 모두 공하다는 경지에 들어간다는 것을 가리킨다.
  124. 124)『大方廣佛華嚴經』 권8(T9, 449c).
  125. 125)『大方廣佛華嚴經』 권17(T10, 89a). 60권본 『大方廣佛華嚴經』의 경우 권8(T9, 449c)에 나온다.
  126. 126)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 가운데 첫 번째 답변이다.
  127. 127)『顯揚聖敎論』 권3(T31, 493b).
  128. 128)삼유가 공한 것은 유전진여이고, 육도의 모습이 공한 것은 실상진여이며, 법상이 공한 것과 명상이 공한 것과 심식이 공한 것의 세 가지 공은 유식진여이다.
  129. 129)여기에서 말하는 세 가지 공에 대하여 『金剛三昧經通宗記』 권7(X35, 295c)에서는 “오직 제9지, 제10지, 등각, 묘각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 이해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은 이해하지 못한다.(唯九地十地。 與等玅二覺所知。 他不能解。)”라고 말한다.
  130. 130)남본 『大般涅槃經』 권15(T12, 704a).
  131. 131)첫째의 공문 안이란 삼공 가운데 “공상도 또한 공한 것”이고, 둘째의 공 가운데란 “공공도 또한 공한 것”을 가리킨다.
  132. 132)대력보살이 질문한 세 번째에 해당한다.
  133. 133)이에 해당하는 경문은 다음과 같다. “보살이여, 명칭(名)과 뜻(義)이라는 모습도 없고 불가사의하다.”
  134. 134)이에 해당하는 경문은 다음과 같다. “왜냐하면 명칭이 없는 명칭이지만 명칭 아님이 없고 뜻이 없는 뜻이지만 뜻 아님이 없기 때문이다.”
  135. 135)실제의 뜻을 드러내는 가운데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오공을 설명하고, 둘째는 삼공을 설명하며, 셋째는 공이 곧 진眞임을 설명하고, 넷째는 진眞이 곧 여如임을 설명한다. 이 가운데 그 넷째에 해당한다.
  136. 136)『究竟一乘寶性論』 권2(T31, 824c)에서는 『勝鬘獅子吼一乘大方便方廣經』(T12, 22b)의 내용을 인용하여 요약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찰나도 선심은 번뇌에 오염된 바가 없다. 찰나도 불선심 또한 번뇌에 오염된 바가 없다. 번뇌가 마음에 닿지 않고, 마음도 번뇌에 닿지 않는데 어떻게 법에 닿지도 않고 마음을 오염시킬 수 있겠는가.(刹那善心非煩惱所染。 刹那不善心亦非煩惱所染。 煩惱不觸心。 心不觸煩惱。 云何不觸法。 而能得染心。)”
  137. 137)『勝鬘獅子吼一乘大方便方廣經』(T12, 22b).
  138. 138)욕애주지欲愛住地는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의 오욕에 집착하는 번뇌로서 욕계의 사혹思惑이고, 색애주지色愛住地는 색신色身에 집착하는 번뇌로서 색계의 사혹思惑이고, 유애주지有愛住地는 무색계의 사혹이다.
  139. 139)도리를 자세하게 드러내는 대목에 네 부문이 있는데, 그 첫째가 실제의 뜻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여기에서 합한 네 부문이란 첫째는 오공을 설명하고, 둘째는 삼공을 설명하며, 셋째는 공이 곧 진眞임을 설명하고, 넷째는 진이 곧 여如임을 설명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140. 140)도리를 자세하게 드러내는 네 가지 문 가운데 둘째에 해당한다.
  141. 141)『二障義』(H1, 811c~812a).
  142. 142)이입二入 : 이입理入 곧 지전위地前位와 행입行入 곧 지상위地上位를 가리킨다.
  143. 143)이런 것들 : 십주위와 십행위와 십회향위에서 각각 인공人空과 법공法空과 평등공平等空을 터득한 것을 가리킨다.
  144. 144)실제에 들어가는 뜻을 널리 펼친 네 부분 가운데, 둘째에 해당한다.
  145. 145)『梵網經』 권상(T24, 997c).
  146. 146)『佛說仁王般若波羅蜜經』 권상(T8, 826c).
  147. 147)원구願求가 없고 평등平等에 통달하여 피차가 없다 : 원구願求가 없는 것은 무원삼매無願三昧의 터득이고, 평등에 통달하여 피차가 없다는 것은 무상삼매無相三昧의 터득을 가리킨다.
  148. 148)팔풍八風 : 마음을 흔드는 이利·쇠衰·훼毁·예譽·칭稱·기譏·고苦·낙樂을 가리킨다.
  149. 149)적멸 : 여기에서는 “마음도 발생하지 않고 경계의 모습도 없는 것”을 가리킨다.
  150. 150)입入 : 『金剛三昧經通宗記』 권7(X35, 297a~b)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은 입入이라는 글자의 뜻을 설명한 대목이다. 이성理性은 본래 무생이고, 심행心行은 본래 무상無相이다. 그러므로 일법도 취함이 없고 일법도 버림이 없다. 무릇 진성의 도리는 취할 수 없기 때문이고 진심은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행心行은 무상無相하여 본래 나옴도 없고, 이성理性은 무생無生하여 본래 들어감도 없다. 이것은 보살이 중생을 이롭게 하려는 마음에는 본래 나옴도 없고 들어감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나옴과 들어감이 없는 마음을 터득한즉 들어가도 들어감이 아닌 줄을 안다. 들어감도 들어감이 아니지만 억지로 그것을 들어감이라 말한다.(此明入字之義。 言理性本自無生。 心行本自無相。 故不取一法。 亦不捨一法。 葢以眞性之理。 不可取故。 眞心之行。 不可捨故。 然心行無相。 本無所出。 理性無生。 本無所入。 是以菩薩利生之心。 本無出入。 然得此無出無入之心。 則知入而不入。 以入而不入。 故強名之曰入。)”
  151. 151)입入 : 구체적으로는 이입理入과 행입行入의 입을 가리키고, 넓게는 실제에 들어가는 경우의 입을 가리킨다.
  152. 152)실제에 들어가는 뜻을 널리 펼친 네 부분 가운데 셋째에 해당한다.
  153. 153)뜻(義相) : 위에서 실제의 뜻을 드러내는 가운데 네 가지, 곧 첫째는 오공을 설명하고, 둘째는 삼공을 설명하며, 셋째는 공이 곧 진眞임을 설명하고, 넷째는 진이 곧 여如임을 설명하는 가운데서 그 넷째 부분에서 언급했던 명칭(名相)과 뜻(義相) 가운데 뜻(義相)에 해당한다.
  154. 154)왜냐하면 뿌리(根)와~없기 때문이다 : 『金剛三昧經註解』 권3(X35, 237a)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왜냐하면 오직 명칭뿐이므로 근根·이理의 법으로 말하면 이理도 없고 근根도 없다. 근根은 곧 근경根境을 말하고, 이理는 곧 의리義理이다. 근경은 비상非相이고 의리는 무생無生이므로 모두 유有가 아니다. 근根과 이理의 두 가지는 이미 쟁론의 상대가 아닌데 그것이 어찌 유有이겠는가.(何以惟名。 根理之法。 非理非根。 根即根境。 理即義理。 根境非相。 義理無生。 故皆不有。 二者既非諍論何有。)”
  155. 155)세 가지 진여법 : 선법진여善法眞如·불선법진여不善法眞如·무기법진여無記法眞如를 가리킨다.
  156. 156)동분同分 : 『俱舍論』에서 말하는 75법에서 14가지 심불상응행법心不相應行法 가운데 셋째에 해당한다. 모든 법상法相으로 하여금 동일하게 만드는 인이 되기 때문에 동분同分이라 말한다. 여기에 중생동분衆生同分 곧 유정동분有情同分과 법동분法同分의 두 가지가 있다.
  157. 157)이 경문의 대목에 대하여 『金剛三昧經通宗記』 권7(X35, 298b)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은 대력보살이 법法과 의義를 깊이 이해한 것이다. 또한 먼저 불가사의함을 찬탄하고 나중에 그 불가사의함을 자세하게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이 공적하고 여여한 법상에 대하여 저는 지금 그것이 다음과 같은 줄을 알았습니다. 곧 온갖 법이 모여서 성취된 것이 아니고, 또한 한 가지 법으로 홀로 성취된 것도 아니며, 일체의 유위법에 구속되는 것이 아니고, 일체의 무위법에 얽매이는 것도 아니며, 그것이 적취된 것이라 말할 수가 없고, 그것이 흩어진 것이라 말할 수도 없으며, 한 가지도 발생함을 볼 수가 없고, 한 가지도 소멸함을 볼 수가 없으며, 또한 오고 가는 모습으로 터득되는 것도 아니므로 본체가 본래부터 여여한 까닭입니다.’ 말을 마치고 나서 다시 그것을 ‘불가사의합니다.’라고 찬탄한 것은 부처님의 뜻을 깊이 이해한 것임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此乃深領法義。 亦先歎不可思議。 而後言之曰。 如是法相。 吾今已知。 其不爲衆法所合成。 亦不可言一法之所獨成。 不爲一切有法所羈。 不爲一切無法所絆。 不可言其有所積聚。 不可言其有所散失。 不見有一法可生。 不見有一法可滅。 亦無來去之相可得。 體本如故。 言已。 復歎之曰。 不可思議。 其深領佛意。 可知矣。)”
  158. 158)셋째로 허물(過)을 떠나 있음을 자세하게 해석한 네 부분 가운데 셋째에 해당한다.
  159. 159)『金剛三昧經註解』 권3(X35, 237b)에 의하면 ‘불사의심不思議心’은 여래의 공적한 일심과 여여한 마음이고, ‘심역여시心亦如是’는 일체중생의 마음을 가리킨다.
  160. 160)셋째로 허물을 떠나 있음을 자세하게 해석한 네 부분 가운데 넷째에 해당한다.
  161. 161)실제에 들어가는 뜻을 널리 펼친 네 부분 가운데 넷째에 해당한다.
  162. 162)『大般涅槃經』 권25(T12, 767c).
  163. 163)두 가지 공 : 소연연所緣緣이 공하다는 것과 증상연增上緣·등무간연等無間緣이 공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164. 164)실제에 들어간 객체가 변견을 떠나 있다는 두 부분 가운데 둘째에 해당한다.
  165. 165)네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부분은 “여여한 모습은 본래 유나 무가 아니다.”이고, 둘째 부분은 “유나 무의 모습은 오직 분별의 심·식으로 본 것에 불과하다.”이며, 셋째 부분은 “보살이여, 여여한 마음의 자성은 자체가 없지는 않지만 자체가 있는 것도 아니므로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다.”이고, 넷째 부분은 “보살이여, 무이지만 무가 아닌 모습으로서 언설의 경지가 아니다. 왜냐하면 진여법은 텅 비고 밝아 모습이 없어서 심尋과 사伺의 언설로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이다. 이하에서 첫째 경우와 둘째 경우를 생략하고 셋째 경우부터 설명을 가한 것은 첫째와 둘째의 경우는 경문을 보면 그대로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166. 166)「入實際品」의 경문은 크게 넷으로 나뉜다. 그중 둘째가 도리를 자세하게 드러내는 문단인데, 여기에 다시 네 가지 문이 있다. 본문은 이 네 가지 문 중 셋째에 해당한다.
  167. 167)스물여덟 종류의 성스러운 가르침 : 28견見 혹은 28부정견不正見으로서 『大乘阿毘達磨雜集論』 권12(T31, 751a~c) 참조.
  168. 168)『大般涅槃經』 권10(T12, 668a), “세존은 항상 설한다. 일체의 외학에 속하는 95종은 모두 악도에 나아가지만, 성문제자는 모두 바른 길을 향한다.(世尊常說。 一切外學。 九十五種。 皆趣惡道。 聲聞弟子。 皆向正路。)”
  169. 169)『菩薩瓔珞本業經』 권2(T24, 1010b~1023a).
  170. 170)『大方廣佛華嚴經』 권15~권39(T10, 83c~210c).
  171. 171)본각의 이익 : 실제에 들어가 있는 본각과 그것을 실천하는 이행利行을 가리킨다.
  172. 172)네 가지 뜻 : 현상적인 두 가지 모습 곧 삼세三世의 시간時間과 육방六方의 공간空間, 그리고 본질적인 두 가지 속성 곧 심심甚深한 변제邊際와 광대廣大한 소제所際를 가리킨다.
  173. 173)「入實際品」의 경문은 크게 넷으로 나뉜다. 그 중 둘째로 입실제의 도리를 자세하게 드러내는 데 다시 네 가지 문이 있다. 이 문단은 그 네 가지 문 중에서 넷째에 해당한다.
  174. 174)네 계위 : 지전의 네 계위는 십신十信·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廻向을 가리킨다.
  175. 175)수번뇌 : 근본무명번뇌根本無明煩惱를 따라서 발생하는 지말번뇌枝末煩惱를 가리킨다.
  176. 176)안팎의 번뇌 : 『金剛三昧經註解』에서는 51가지 마음을 얽어매는 것으로 유식수도오위唯識修道五位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을 한다. 첫째의 자량위資糧位는 지전地前의 주住·행行·향向의 30심으로서 불도의 자량을 저장하는 지위이다. 둘째의 가행위加行位는 30심의 끝으로 장차 견도見道에 들어가는 것인데, 난煖·정頂·인忍·세제일법世第一法의 사선근四善根을 방편으로 삼아 가행加行하는 지위이다. 셋째의 통달위通達位는 초지의 입심入心(地마다 각각 入·住·出의 三心이 있다)으로서 이공무아二空無我의 도리에 통달하는 지위인데, 곧 견도見道이다. 넷째의 수습위修習位는 초지의 주심住心부터 제10지의 출심出心 곧 등각 사이에서 거듭 묘관을 수습함으로써 나머지 장애를 단제하는 지위인데, 곧 수도修道이다. 다섯째의 구경위究竟位는 구경에 단혹증리斷惑證理하는 지위인데, 곧 무학도無學道이다. 이것은 법상종法相宗에서 내세운 것이다. 그 인·과를 합하여 41위인데, 여기에다 십주十住 이전인 십신위十信位를 열면 곧 51위이고, 제10지의 끝에다 등각等覺을 열면 곧 52위가 된다. 법상종의 41위와 천태종의 52위는 개開·합合이 다를 뿐이다.
  177. 177)말나식末那識의 네 가지 번뇌 : 제7식에 해당하는 말나식의 네 가지 번뇌는 아치我癡·아견我見·아애我愛·아만我慢이다. 심心·의意·식識에서 심은 제8 아뢰야식阿賴耶識이고, 의는 제7 말나식末那識이며, 식은 제6 의식意識이다. 이처럼 제7의 말나末那는 의意로 번역된다.
  178. 178)능입의 방편에 두 가지가 있는데, 그 가운데 둘째인 자세한 것에 해당한다.
  179. 179)세 가지에~여래선에 들어간다 : 『金剛三昧經通宗記』 권8(X35, 301c)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존存은 마음을 집중하는 것(注念)이고, 수守는 마음을 보호 유지하는 것이며, 여래선如來禪은 자성청정의 본체로 돌아가는 것이고, 관觀은 마음을 섭수하여 돌이켜보는 것이다. 따라서 이관심여理觀心如는 자성의 진리로써 일심진여의 본체를 돌이켜서 관찰하는 것이다.(注念曰存。 護念曰守。 如來禪。 返於自性清淨之體。 攝心返視曰觀。 理觀心如。 以自性眞理。 返觀一心眞如之體也。)”
  180. 180)『菩薩瓔珞本業經』 권상(T24, 1014a), “十爲自在轉大法輪故。 所謂菩薩三寶。 菩薩爾時於第一義中道智爲覺寶。 一切法無生動與則用爲法寶。 常行六道與六道衆生和合故名僧寶。 轉一切衆生流入佛海故。” 참조.
  181. 181)세 가지~금강해탈·반야해탈이다 : 『金剛三昧經通宗記』 권8(X35, 302a)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기에서 보여 주는 세 가지 해탈상은 각각 허공해탈문·무상해탈문·무작해탈문이다. 또한 허공은 곧 법신의 뜻이고, 금강은 곧 법신해탈의 몸이며, 반야는 곧 법신해탈의 작용이다. 그런즉 법신과 반야는 모두 해탈법상이 되므로 셋이 곧 하나이고 하나가 곧 셋으로서 열반의 삼덕을 성취하는 비장祕藏이다.(此示三解脫相。 即是空無相無作三解脫門。 又虗空即是法身義。 金剛即法身解脫之體。 般若即法身解脫之用。 然法身般若。 摠成解脫法相。 三即是一。 一即是三。 以成涅槃三德祕藏也。)” 『金剛三昧經註解』 권3(X35, 239a)에서는 허공해탈은 법신法身이고, 금강해탈은 진공眞空이며, 반야해탈은 묘유妙有라고 해석한다.
  182. 182)방편을 자세하게 드러낸 대목 가운데, 첫째 문답은 법수를 들어 총체적으로 설명한 것에 상대하여, 둘째 및 셋째 문답은 개별적으로 설명한 것에 해당한다.
  183. 183)일미관행을 개별적으로 드러낸 문답 가운데 첫째 답변을 가리킨다.
  184. 184)육관六觀 : 주관住觀·행관行觀·향관向觀·지관地觀·무상관無相觀·일체종지관一切種智觀을 가리킨다.
  185. 185)사공四空 : 사공정四空定으로 무색계의 식무변처공識無邊處空·공무변처공空無邊處空·무소유처공無所有處空·비상비비상처공非想非非想處空을 가리킨다.
  186. 186)『菩薩瓔珞本業經』 권상(T24, 1013b).
  187. 187)사공四空 : 사공정四空定 또는 사무색정四無色定이라고 한다. 무색계에서 터득하는 네 가지 정定으로서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을 가리킨다.
  188. 188)일미관행을 개별적으로 드러낸 대목 가운데 둘째 답변을 가리킨다.
  189. 189)『菩薩瓔珞本業經』 권상(T24, 1013a).
  190. 190)『菩薩瓔珞本業經』 권상(T24, 1014b).
  191. 191)『菩薩瓔珞本業經』 권상(T24, 1014b).
  192. 192)실제에 들어가는 방편을 보이는 두 가지 부분 가운데 둘째에 해당한다.
  193. 193)이와 같은 사람 : 그 중생으로 하여금 세 가지에 통하고 하나를 유지하여(存三守一) 여래선에 들어가 그 선정으로 인하여 들뜬 마음이 곧 사라지게 된 사람을 가리킨다.
  194. 194)『妙法蓮華經』 권4(T9, 32a).
  195. 195)『妙法蓮華經』 권4(T9, 32a).
  196. 196)이 경문에 대하여 『金剛三昧經註解』 권3(X35, 239c)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 일지는 곧 초심에 정각하는 경지이고, 또한 진여의 자성이 공한 바다는 실로 대심의 경계로서 이승이 터득하는 견해가 아니다. 여래의 삼매(印解)는 이승에게는 전무할 뿐만 아니라 또한 삼매를 만나면 그 삼매에 취해 버리고 만다. 그리하여 잠시 미몽에 빠지지만 삼매에서 깨어나 발심하면 다시 불지를 터득한다.(彼一地者。 即初心正覺之地。 及與眞如性空之海。 實大心境界。 非二乘所得見也。 如來印解。 非二乘全無。 但爲三昧所醉。 暫時迷失。 定醒發心。 還得佛地。)”
  197. 197)세 가지 관행 : 이제관二諦觀·평등관平等觀·중도제일의제관中道第一義諦觀을 가리킨다.
  198. 198)이승인의 경우에는 일지一地와 공해空海의 경지를 볼 수 없다는 대력보살의 말에 긍정해 준 것이다.
  199. 199)궁극적인 깨침보다는 오히려 현재 눈앞에 전개되는 선정의 공능을 좋아한다는 이유 때문에 적정을 추구하여 선정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金剛三昧經通宗記』 권8(X35, 302c)에서는 이승의 경우 사선四禪 및 사공정四空定의 선적禪寂에 탐착하는 것이라 말한다.
  200. 200)『入楞伽經』 권4(T16, 540b).
  201. 201)수행자리에서 찰나에~결정적으로 명백해져서 : 『金剛三昧經註解』 권3(X35, 239c~ 240a), “이와 같이 또한 점수를 말미암아 들어가는데, 어찌 돈교대심이라 하는가.(如斯亦由漸而入。 何稱頓教大心。)”에서는 돈교대심頓敎大心이라 말하고, 『金剛三昧經通宗記』 권8(X35, 303c), “이것은 곧 모든 경지를 한꺼번에 초월하는 것을 보여 준 것으로서 무공용의 대행이다.(此直示頓超諸地。 無功用大行。)”에서는 모든 수행이 지위를 돈초頓超하여 공용功用이 없는 대행大行을 보여 주는 대목이라고 설명한다.
  202. 202)아비발치阿鞞跋致 : 십지十地 가운데 제8 불퇴전지不退轉地를 말하지만 십지 전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203. 203)앞의 계위 : 육행六行 가운데 앞에서 말한 십신·십주·십행·십회향·십지를 가리킨다.
  204. 204)계율을 받은~교만해지기 때문에 : 분별이 없는 그와 같은 사람이 가령 계율을 받으면 계를 받았다는 사실에 아만심이 높아졌을 거라는 내용이다.
  205. 205)삼공취三空聚 : 삼삼매三三昧인 공삼매空三昧·무상삼매無相三昧·무원삼매無願三昧를 말한다. 한편 『金剛三昧經通宗記』 권8(X35, 303c)에서는 공상역공空相亦空, 공공역공空空亦空, 소공역공所空亦空으로 해석하고 있다.
  206. 206)먼저 질문 : 대력보살의 질문은 하나이지만 내용으로는 두 가지에 해당한다. 그 두 가지 내용 가운데 첫째를 가리킨다.
  207. 207)소승계의 경우 바라제목차를 중시하여 지악止惡이 목표이므로 계의 결과를 중시한다. 이에 반하여 대승계는 심지계心地戒로서 작선作善이 목표이므로 원인을 중시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바라제목차(계의 조항)를 받는다는 것은 소승의 경우를 가리킨다.
  208. 208)일곱 가지 계 : 신업身業의 세 가지 계와 구업口業의 네 가지 계를 가리킨다.
  209. 209)삼취정계三聚淨戒 : 섭선법계攝善法戒·섭률의계攝律儀戒·섭중생계攝衆生戒를 가리킨다.
  210. 210)부조지不調地 : 무학지無學地로서 아라한의 경지이다. 『金剛三昧經通宗記』 권8(X35, 304a), “『文殊般若經』에서 말한다. 번뇌를 다한 아라한을 부조不調라 말한다. 왜냐하면 모든 번뇌가 다하여 다시는 번뇌에 길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다.(文殊般若經云。 漏盡阿羅漢。 是名不調。 以諸結已盡。 更無所調故。)” ; 『金剛三昧經註解』 권3(X35, 240b), “부조지란 곧 무조지無調地인데, 부조란 곧 공용이 없고 분별이 없는 자연의 무위행인 무공용행無功用行으로서 삼승이 헤아릴 수 있는 경계가 아니다.(不調地者無調。 不調即無功用行。 非三乘思議之境也。)”
  211. 211)삼무수대겁三無數大劫에 걸쳐 점차 단제된다는 것이 전제된 의미의 ‘남아 있는 번뇌’이지 아직 단제하지 못했다는 의미의 ‘남아 있는 번뇌’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곧 여기에서는 차전遮詮이 아닌 표전表詮의 방식으로 설명한 것이다.
  212. 212)『金剛三昧經通宗記』 권8(X35, 304b)에서는 이상의 세 게송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대목은 수증修證의 요체로서 육행六行은 보살이 닦는 수행이고, 삼공三空은 이에 보살이 증득한 진보리도眞菩提道이다.(此明修證之要。 六行爲菩薩所修之行。 三空乃菩薩所證之眞菩提道也。)”
  213. 213)「入實際品」에서는 심진여문을 드러내는 네 부분 가운데 그 셋째인 사리불(身子)이 이해하는 부분에 해당한다.
  214. 214)사생四生 : 네 차례의 생사生死로서 제1생에는 성문의 자량위資糧位를 닦고, 제2생에는 성문의 가행위加行位를 닦으며, 제3생에는 연각의 자량위와 가행위를 닦고, 제4생에는 성위聖位에 들어가 과보를 획득한다.
  215. 215)제 머묾~머물지 않음은 : 『金剛三昧經通宗記』 권8(X35, 304b)에서는 중생의 이익을 위하여 생사의 세계에 머무는 것이지 스스로 적멸의 세계에 머무는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216. 216)구족한 연후에 나오려 하네 : 중생이 반야해般若海를 다 구족한 연후에야 내가 중생의 세계에서 떠난다는 말이다.
  217. 217)여기 두 게송에 대하여 『金剛三昧經通宗記』 권8(X35, 304b)에서는 중생의 이익을 위한 원력이 큰 것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218. 218)변제정邊際定 : 사념청정捨念淸淨이 성취되는 제4선으로 불고불락不苦不樂의 경지를 가리킨다.
  219. 219)「入實際品」에서는 심진여문을 드러내는 네 부분 가운데 그 넷째인 당시의 대중이 획득한 이익에 해당한다.
  220. 220)‘세 가지 진여문’은 첫째는 무상진여無相眞如인데 제법의 본체로서 변계소집의 허상이 없다는 것이고, 둘째는 무생진여無生眞如인데 제법은 인연의 소생으로 실생實生이 없다는 것이며, 셋째는 무성진여無性眞如인데 제법의 진체眞體는 언망여절言亡慮絶이므로 망정妄情에 집착되지 않는 실성實性이라는 것이다.
  1. 1)「第三」無{甲}。
  2. 1)「二」作「一」{甲}。
  3. 1)「三」作「二」{甲}。
  4. 1)「設」作「說」{甲}。
  5. 2)「契」作「▼(㓞/廾)甲}。
  6. 3)「第四」無{甲}。
  7. 1)「俱」作「具」{甲}。
  8. 2)「衆」無{甲}。
  9. 3)「刺」作「㓨」{甲}。
  10. 1)「淮」作「准」{甲}。
  11. 1)「第五」無{甲}。
  12. 1)「仙」作「屳」{甲}。
  13. 2)「空二」作「二空」{甲}。
  14. 1)「明」作「名」{甲}。
  15. 2)「有」作「其」{甲}。
  16. 3)「二」疑「三」{編}。
  17. 4)「二」作「一」{甲}。
  18. 1)「三」作「一」{甲}。
  19. 1)「棄」作「弃」{甲}。
  20. 1)「如」作「始」{甲}。
  21. 2)「入空名」作「名入空」{甲}。
  22. 1)「栖」作「拪」{甲}。
  23. 1)「慢」作「▼(忄+㬅)」{甲}。
  24. 2)「奪」作「▼(大/集)」{甲}。
  25. 1)「三」作「二」{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