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대승기신론소기회본(大乘起信論疏記會本) / 大乘起信論疏記會本卷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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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기신론소기회본 제2권(大乘起信論疏記會本 卷二)

마명보살이 논을 지음(馬鳴菩薩造論)
양나라 천축삼장 진제가 한역함(梁天竺三藏眞諦譯)
해동사문 원효가 소를 지음【『별기』를 병기하였다.】(唐海東沙門元曉疏【幷別記】)

(나) 각각 해석함
이 아래는 위에서 (법을) 세운 것을 각각 해석하는 것이다. 따로 두 문(진여ㆍ생멸)을 해석하며 곧 둘로 나누겠다. 진여문에도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처음에는 진여를 해석하고 뒤에는 진여의 상을 해석한 것이다. 또한 처음은 전체적으로 해석하는 것이고, 뒤에는 각각 해석한 것이다. 또 처음 글은 설명할 수 없음을 밝혔으니 이理가 말을 끊었음을 나타냈고, 뒤의 글은 설명할 수 있음을 밝혔으니 (이理가) 말을 끊지 않았음을 나타냈다.

별기 처음의 글 중에서 “언설상을 여의었으며 명자상을 여의었으며”라고 하며, 이어서 “진여라 말한 것도……말에 의하여 말을 버리는 것”이라 하고, 뒤의 글에서는 “언설에 의하여 분별함에 있어 두 가지 뜻이 있으니……여실공如實空1)과 여실불공如實不空2)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뒤의 글에서 또한 “일체의 (중생이 망심이 있음으로 해서 생각할 때마다) 분별하여 다 (진여와)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3)라고 하였으니, 일체의 언설도 또한 상응하지 않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理가 말을 여의고 생각을 끊었음을 나타낸 것이다. 또 처음 글 중에 ‘말에 의하여 말을 버린다’라는 말에 의해서야 그 이理가 말을 끊었음을 나타낼 수 있으니, 이것은 또한 이理가 언설상을 여의지 않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말로써 이理가 실로 말을 끊었음을 설명할 수 있다고 한다면, 자종상위自宗相違4)의 허물에 떨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앞서는 말을 끊었다는 말이 끊어지지 않았는데 이理는 실제로 말을 끊었기 때문이다. 만약 말을 끊는다는 말이 또한 끊음을 말한다면 이는 자어상위自語相違5)의 허물에 떨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먼저는 말을 끊었다는 말도 끊어졌다고 하면서 말로써 그 말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001_0743_a_02L大乘起信論疏記會本卷二

001_0743_a_03L

001_0743_a_04L馬鳴菩薩造論

001_0743_a_05L梁天竺三藏眞諦譯

001_0743_a_06L1)海東沙門元曉疏幷別

001_0743_a_07L
以下釋上別立別釋二門卽爲二分
001_0743_a_08L眞如門中亦有二意初釋眞如
001_0743_a_09L釋如相又復初是總釋後是別解
001_0743_a_10L又初文明不可說顯理絶言後文明
001_0743_a_11L可得說顯不絶言

001_0743_a_12L

初文中言離言說相離名字相
001_0743_a_13L乃至言眞如者因言遣言後文中
001_0743_a_14L言依言說分別有二種義謂如實
001_0743_a_15L空如實不空然後文亦說一切分
001_0743_a_16L別皆不相應當知一切言說亦不相
001_0743_a_17L此卽顯理離言絶慮又初文中
001_0743_a_18L要依因言遣言之言乃得顯其理
001_0743_a_19L之絶言此亦顯理不離言說相
001_0743_a_20L言得說理實絶言者則墮自宗相
001_0743_a_21L違過先以絶言之言不絶而理實
001_0743_a_22L絶言故若使絶言之言亦言絶者
001_0743_a_23L則墮自語相違過先以絶言之言
001_0743_a_24L亦絶而言得說言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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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理는 실제로 말한다면 말을 끊은 것인가, 끊지 않은 것인가?
만약 말을 끊지 않은 것이라면 정체지正體智는 말을 끊은 것이므로 곧 이理에 어긋나며, 만약 실로 말을 끊은 것이라면 후득지後得智는 말을 지니므로 곧 이에 거슬리는 것이다. 또 만약 말을 끊지 않은 것이라면 『기신론』의 초단初段의 글6)이 바로 부질없는 말이 되며, 만약 실로 말을 끊은 것이라면 『기신론』의 후단後段의 글7)이 한갓 헛된 설명이 될 것이니 이는 마치 허공을 금은金銀 등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理는 말을 끊은 것이 아니며 끊지 않은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할 것이며, 이런 뜻에 의하므로 이理는 말을 끊기도 하며 말을 끊지 않기도 하는 것이니, 이렇다면 저 질문이 합당하지 않은 바가 없을 것이다.

별기 이와 같은 말들이 합당치 않는 바가 없기 때문에 합당한 바가 없으며, 합당한 바가 없기 때문에 합당하지 않는 바가 없는 것이다. 진여문 중에서의 끊음과 끊지 않음의 뜻을 이미 이같이 말하였고, 생멸문 중에서도 이 설명과 같다.
우선 방론傍論을 그치고 다시 본문을 해석하겠다.

㉮ 진여문

ㄱ. 진여를 해석함

심진여란 바로 일법계一法界의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인 체體이니, 이른바 심성이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지만 일체의 모든 법이 오직 망념에 의하여 차별이 있으니, 만약 망념을 여의면 일체의 경계상境界相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의 법이 본래부터 언설상을 여의었으며 명자상을 여의었으며8) 심연상心緣相을 여의어서9) 결국 평등하게 되고, 변하거나 달라지는 것도 없으며 파괴할 수도 없는 것이어서 오직 일심뿐인 것이니, 그러므로 진여라 이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체의 언설은 임시적인 이름일 뿐 실체가 없는 것이요, 다만 망념을 따른 것이어서 (그 실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처음 글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간략히 표시하는 것이고, 둘째는 자세히 해석하는 것이며, 셋째는 문답하여 의심을 제거하는 것이다.

ㄱ) 간략히 표시함

간략히 표시하는 중에 “바로 일법계”라고 한 것은 진여문이 의지하는 체를 든 것이니, 일심이 바로 일법계이기 때문이다.

001_0743_b_01L
理實而言爲絶爲不絶若不絶
001_0743_b_02L言者正體離言2) [4] 於理若實絶
001_0743_b_03L後智帶言卽倒於理又若不絶
001_0743_b_04L則初段論文斯爲漫語若實絶言
001_0743_b_05L後段論文徒爲虛設如說虛空爲金
001_0743_b_06L銀等解云是故當知理非絶言
001_0743_b_07L不絶言以是義故理亦絶言亦不
001_0743_b_08L言絶是則彼難無所不3) [5]

001_0743_b_09L

如是等言無所不當故無所當
001_0743_b_10L由無所當故無所不當也眞如門
001_0743_b_11L中絶不絶義旣如是說生滅門中
001_0743_b_12L亦同此說

001_0743_b_13L
且止傍論還釋本文

001_0743_b_14L
心眞如者卽是一法界大總相法門體
001_0743_b_15L所謂心性不生不滅一切諸法唯依妄
001_0743_b_16L念而有差別若離心念則無一切境界
001_0743_b_17L之相是故一切法從本已來離言說相
001_0743_b_18L離名字相離心緣相畢竟平等無有
001_0743_b_19L變異不可破壞唯是一心故名眞如
001_0743_b_20L以一切言說假名無實但隨妄念
001_0743_b_21L可得故

001_0743_b_22L
初文有三一者略標二者廣釋
001_0743_b_23L第三者往復除疑略標中言卽是一
001_0743_b_24L法界者是擧眞如門所依之體一心

001_0743_c_01L이 일법계가 진여ㆍ생멸의 두 문을 통틀어 포괄하지만 지금은 별상의 문을 취하지 않고, 이 중에 다만 총상법문만을 취하였다. 그러나 총상에 사품四品10)이 있으며 이 사품 중에서 삼무성三無性11)이 나타내는 진여를 설명하고 있으므로 “대총상”이라고 한 것이다. 궤범으로서 참된 이해를 내기 때문에 “법”이라 이름하며, 통틀어 열반에 들어가기 때문에 “문”이라 이름한다. 이는 일법계 전체가 생멸문이 되는 것과 같이 이처럼 일법계 전체가 진여문이 되는 것이다. 이런 뜻을 나타내기 때문에 “체”라고 하는 것이다.

ㄴ) 자세히 해석함

이 아래는 자세히 해석하는 것이니 이 중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진여의 체를 나타냈으며, 둘째는 진여의 이름을 해석하였다.

(ㄱ) 진여의 체를 나타냄

처음 중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진실성眞實性12)으로 진여를 나타내며, 둘째는 분별성分別性13)에 대하여 진여의 절상絶相을 밝히며, 셋째는 의타성依他性에 나아가 진여의 이언離言을 나타내는 것이다.

㉠ 진실성으로 진여를 나타냄

처음 중에 “심성心性”이라고 한 것은 진여문에 의하여 그 심성을 논하는 것이니, 심성이 평등하여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삼제三際를 멀리 여의었기 때문에 “심성이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지만”이라고 말한다.

㉡ 분별성에 대하여 진여의 절상을 밝힘

두 번째 중에 두 구절이 있으니, 처음에 “일체의 모든 법이 오직 망념에 의하여 차별이 있으니”라고 한 것은 변계소집상徧計所執相을 든 것이요, 다음에 “만약 망념을 여의면 일체의 경계상이 없을 것이다.”라고 한 것은 변계소집상에 대하여 무상성無相性을 나타낸 것이니, 이는 마치 공화空華14)가 오직 눈병에 의해서만 그 꽃의 모양이 있으니, 눈병이 없어지면 곧 꽃의 모양도 없어지고 오직 공성空性만 있는 것과 같다. 그러니 이 중의 도리도 또한 그와 같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 의타성에 나아가 진여의 이언을 나타냄

세 번째에 세 구절이 있으니, 먼저는 의타성법依他性法에 의하여 말을 여의고 생각을 끊은 것을 밝혔고, 다음은 말을 여의고 생각을 끊은 뜻에 의하여 평등진여를 나타냈으며, 마지막에는 평등하여 말을 여의고 생각을 끊은 까닭을 해석하였다.

A. 의타성법에 의해 말을 여의고 생각을 끊은 것을 밝힘


001_0743_c_01L卽是一法界故此一法界通攝二門
001_0743_c_02L而今不取別相之門於中但取總相
001_0743_c_03L法門然於總相有四品中說三無性
001_0743_c_04L所顯眞如故言大總相軌生眞解
001_0743_c_05L故名爲法通入涅槃故名爲門
001_0743_c_06L一法界擧體作生滅門如是擧體爲
001_0743_c_07L眞如門爲顯是義故言體也此下
001_0743_c_08L廣釋於中有二一者顯眞如體
001_0743_c_09L者釋眞如名初中有三一者當眞實
001_0743_c_10L性以顯眞如二者對分別性而明眞
001_0743_c_11L如絶相三者就依他性以顯眞如離
001_0743_c_12L初中言心性者約眞如門論其心
001_0743_c_13L心性平等遠離三際故言心性不
001_0743_c_14L生不滅也等二中有二句初言一切
001_0743_c_15L諸法唯依妄念而有差別者是擧徧
001_0743_c_16L計所執之相次言若離心念卽無一
001_0743_c_17L切境界相者對所執相顯無相性
001_0743_c_18L如空華唯依眼病而有華相若離眼
001_0743_c_19L卽無華相唯有空性當知此中
001_0743_c_20L道理亦爾第三中有三句先約依他
001_0743_c_21L性法以明離言絶慮次依離絶之義
001_0743_c_22L以顯平等眞如後釋平等離絶所以
001_0743_c_23L「海」上有「唐」{甲}「違」作「通」{甲}「當」
001_0743_c_24L作「審」{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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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그러므로 일체의 법이”라고 한 것은 연을 따라 의타기법依他起法을 내는 것을 말하며, “언설상을 여의었으며”라는 것은 음성으로 말하는 것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명자상을 여의었으며”라는 것은 명구名句로 설명하는 것과 같지 않기 때문이며, “심연상을 여의어서”라는 것은 명언의 분별15)로 반연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허공에 새의 자취가 차별을 짓는 것과 같은 것이니, 새의 모양을 따라서 허공의 모양이 나타나는 것이므로 나타나는 모양이 실로 차별이 있지만 볼 만한 모양의 차별을 여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의타기법依他起法도 또한 그러함을 알아야 할 것이니, 모든 훈습熏習을 따라서 차별이 나타나지만 말할 만한 본성의 차별을 떠난 것이다.

B. 말을 여의고 생각을 끊은 뜻에 의해 평등진여를 나타냄

이미 말할 만하고 반연할 만한 차별을 떠났다면 바로 이것은 평등한 진여의 도리이므로, “결국 평등하게 되고” 이어서 “그러므로 진여라 이름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것은 두 번째 진여의 평등을 밝힌 것이다.

C. 평등하여 말을 여의고 생각을 끊은 까닭을 해석함

“왜냐하면 일체의” 이하는 그 까닭을 풀이한 것이다. 진여가 평등하여 말을 여읜 까닭은 모든 언설이 오직 임시로 지은 이름에 불과하기 때문에 실성實性에 있어서는 끊어 버리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며, 또 저 언설이 단지 망념에 따라 생긴 것이므로 진지眞智에 있어서는 여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도리에 연유하기 때문에 말을 여의고 생각을 끊었음을 설명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그 실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이다.
(진여의) 체를 나타내는 글을 마친다.

(ㄴ) 진여의 이름을 해석함

진여라 말한 것도 상相이 없으니 이는 언설의 궁극은 말에 의하여 말을 버리는 것임을 이르는 것이다. 이 진여의 체는 버릴 만한 것이 없으니 일체의 법이 모두 다 참이기 때문이며, 또한 주장할 만한 것이 없으니 일체의 법이 모두 똑같기 때문이다. 그러니 일체의 법은 말할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기 때문에 진여라고 이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진여라는) 이름을 풀이하는 중에 또한 세 부분이 있다.

㉠ 이름을 세운 뜻을 나타냄

첫째는 이름을 세운 뜻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른바 말에 의하여 말을 버리는 것은 마치 소리로써 소리를 그치게 하는 것과 같다.

㉡ 바로 이름을 풀이함

다음에는 바로 이름을 풀이하는 것이니, “이 진여의 체는 버릴 만한 것이 없으니”라는 것은 진여의 체라 하여 속법俗法을 버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001_0744_a_01L初中言是故一切法者謂從緣生依
001_0744_a_02L他起法離言說相者非如音聲之所
001_0744_a_03L說故離名字相者非如名句之所詮
001_0744_a_04L離心緣相者名言分別所不能緣
001_0744_a_05L如虛空中鳥迹差別謂隨鳥形空
001_0744_a_06L相顯現顯現之相實有差別而離可
001_0744_a_07L見之相差別依他起法當知亦爾
001_0744_a_08L諸熏習差別顯現而離可言之性差
001_0744_a_09L旣離可言可緣差別卽是平等眞
001_0744_a_10L如道理故言畢竟平等乃至故名眞
001_0744_a_11L此是第二顯眞如平等以一切下
001_0744_a_12L釋其所以所以眞如平等離言者
001_0744_a_13L諸言說唯是假名故於實性不得不
001_0744_a_14L又彼言說但隨妄念故於眞智不
001_0744_a_15L可不離由是道理故說離絶故言乃
001_0744_a_16L至不可得故顯體文竟

001_0744_a_17L
言眞如者亦無有相謂言說之極因言
001_0744_a_18L遣言此眞如體無有可遣以一切法悉
001_0744_a_19L皆眞故亦無可立以一切法皆同如故
001_0744_a_20L當知一切法不可說不可念故名爲眞
001_0744_a_21L

001_0744_a_22L
釋名中亦三初標立名之意所謂因
001_0744_a_23L言遣言猶如以聲止聲也次正釋名
001_0744_a_24L此眞如體無有可遣者非以眞體遣

001_0744_b_01L“일체의 법이 모두 다 참이기 때문이며”라는 것은 의타기성依他起性의 일체의 모든 법이 허망한 언설을 여읜 것을 뜻하며, 그러므로 다 참된 것(眞)이다. ‘다 참’이라는 것은 차별을 파괴함이 없이 바로 평등이라는 뜻이며, 이처럼 평등하기 때문에 따로 세울 만한 것이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체의 법이 모두 똑같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이다.

㉢ 이름을 맺음

“알아야 한다.(當知)” 이하는 세 번째 이름을 맺은 것이다. 이상으로 바로 진여를 나타낸 것을 마친다.

ㄷ) 문답하여 의심을 제거함


만약 이와 같은 뜻이라면 모든 중생이 어떻게 수순隨順16)하여야 (정관正觀17)에) 들어갈 수 있는가?

만약 일체의 법이 설명되기는 하나 설명할 수도 설명할 만한 것도 없으며, 생각되기는 하나 역시 생각할 수도 생각할 만한 것도 없는 줄 안다면 이를 수순이라고 하며, 만약 생각을 여읜다면 (정관에) 들어가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

문답하여 의심하고 묻는 중에 “어떻게 수순하여야”라고 한 것은 방편을 물은 것이며, “(정관에) 들어갈 수 있는가.”라는 것은 정관을 물은 것이다.
답에서 차례로 이 두 가지 물음에 답하였다. 처음 중에 “설명되기는 하나”, “생각되기는 하나”라고 한 것은 법이 없는 것이 아님을 밝힌 것이니, 이는 공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소견(惡取空見)을 떠났기 때문이다. “설명할 수도 설명할 만한 것도 없으며”, “생각할 수도 생각할 만한 것도 없는 줄”이라는 것은 법이 있는 것이 아님을 나타낸 것이니, 이는 유有에 집착하는 소견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알 수 있다면 중도관中道觀18)을 따르는 것이므로 ‘수순’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두 번째에 “생각을 여읜다면”이라는 것은 분별하는 생각을 여의는 것이며, “(정관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은 관지觀智19)에 들어감을 나타내는 것이다.

ㄴ. 진여의 상을 해석함

ㄱ) 수를 들어 전체적으로 나타냄

ㄴ) 수에 의하여 장을 엶

ㄷ) 장에 의하여 각각 해석함

다시 이 진여란 언설에 의하여 분별함에 있어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여실공이니 필경에는 실체를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요, 둘째는 여실불공이니 그 자체에 번뇌 없는 본성의 공덕을 구족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진여의 상을 밝혔으니, 글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수를 들어 전체적으로 나타내었고, 둘째는 수에 의하여 장章을 열었으며, 셋째는 장에 의하여 각각 해석하였다.

001_0744_b_01L俗法故以一切法悉皆眞故者依他
001_0744_b_02L性一切諸法離假言說故悉是眞
001_0744_b_03L悉是眞者不壞差別卽是平等是平
001_0744_b_04L等故無別可立故言一切皆同如故
001_0744_b_05L當知以下第三結名直顯眞如竟在
001_0744_b_06L於前

001_0744_b_07L
問曰若如是義者諸衆生等云何隨
001_0744_b_08L順而能得入答曰若知一切法雖說無
001_0744_b_09L有能說可說雖念亦無能念可念是名
001_0744_b_10L隨順若離於念名爲得入

001_0744_b_11L
往復疑問中言云何隨順者是問方
001_0744_b_12L便而能得入者是問正觀答中次
001_0744_b_13L第答此二問初中言雖說雖念者
001_0744_b_14L法非無以離惡取空見故無有能說
001_0744_b_15L可說等者顯法非有離執著有見故
001_0744_b_16L能如是知順中道觀故名隨順
001_0744_b_17L二中言離於念者離分別念名得入
001_0744_b_18L顯入觀智也

001_0744_b_19L
復次此眞如者依言說分別有二種義
001_0744_b_20L云何爲二一者如實空以能究竟顯實
001_0744_b_21L二者如實不空以有自體具足無漏
001_0744_b_22L性功德故

001_0744_b_23L
第二明眞如相在文有三一者擧數
001_0744_b_24L總標二者依數開章三者依章別解

001_0744_c_01L각각 해석하는 중에 두 가지가 있다.

(ㄱ) 공을 해석함

공이라고 말하는 것은 본래부터 일체의 염법染法20)과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니, 이는 일체법의 차별상을 여읨을 말한 것이다. 왜냐하면 허망한 심념心念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여의 자성은 유를 특징(相)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무를 특징으로 하는 것도 아니며, 비유를 특징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비무를 특징으로 하는 것도 아니며, 유와 무를 함께 특징으로 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일一을 특징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이異를 특징으로 하는 것도 아니며, 비일을 특징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일과 이를 함께 특징으로 하는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리하여 전체적으로 말하자면 일체의 중생이 망심妄心21)이 있음으로 해서 생각할 때마다 분별하여 다 진여와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공이라 말하지만, 만약 망심을 떠나면 실로 공이라 할 것도 없기 때문이다.

먼저 공을 밝힌 중에 바로 세 구절이 있으니, 간략히 설명하는 것과 자세히 풀이하는 것, 세 번째는 총결하는 것이다.

㉠ 간략히 설명함

처음에 “일체의 염법과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니”라고 한 것은 진여는 능能ㆍ소所의 분별과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체법의 차별상을 여읨을”이라는 것은 소취상所取相22)을 여의었기 때문이며, “허망한 심념이 없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능취견能取見23)을 여의었기 때문이니, 곧 여읜다는 뜻을 가지고 공을 풀이한 것이다.

㉡ 자세히 풀이함

자세히 풀이하는 중에 절사구絶四句를 밝혔다. 사구가 많으나 그 요점은 두 가지가 있으니, 유ㆍ무 등과 일ㆍ이 등이다. 이 두 가지의 네 구절을 가지고 모든 허망된 집착을 포괄하였기 때문에 이 두 가지에 의하여 진공眞空을 나타내었다.

이는 『광백론廣百論』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과 같다.

“또한 세간에서 집착하는 모든 법이 다 진실이 아님을 나타내며, 외도들이 집착한 것도 다 같지 않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다음 게송에서 말한다. ‘유有와 비유非有와 구俱와 비非는 일一과 비일非一과 쌍雙과 민泯에 차례대로 배속시켜야 할 것이니 지혜 있는 자는 참되지 아니함을 안다.’ 이를 풀이하여 말한다. 일체 세간의 색色 등의 구의句義24)는 언설言說로 나타내는 것이고 심혜心慧25)로 아는 것인데, 정집情執이 같지 아니하여 대략 네 가지가 있으니, 유有와 비유非有와 구허俱許와 구비俱非이다. 이를 차례대로 네 가지 사집邪執에 배속시킨다면

001_0744_c_01L別解中卽有二

001_0744_c_02L
所言空者從本已來一切染法不相應
001_0744_c_03L謂離一切法差別之相以無虛妄心
001_0744_c_04L念故當知眞如自性非有相非無相
001_0744_c_05L非非有相非非無相非有無俱相
001_0744_c_06L一相非異相非非一相非非異相
001_0744_c_07L一異俱相乃至總說依一切衆生以有
001_0744_c_08L妄心念念分別皆不相應故說爲空
001_0744_c_09L若離妄心實無可空故

001_0744_c_10L
先明空中卽有三句略明廣釋
001_0744_c_11L三總結初中言一切染法不相應者
001_0744_c_12L能所分別不相應故離一切法差別
001_0744_c_13L相者離所取相故以無虛妄心念故
001_0744_c_14L離能取見故卽以離義而釋空也
001_0744_c_15L廣釋之中明絶四句四句雖多
001_0744_c_16L要有二謂有無等及一異等以此二
001_0744_c_17L四句攝諸妄執故對此二以顯眞空
001_0744_c_18L如廣百論云復次爲顯世間所執諸
001_0744_c_19L法皆非眞實及顯外道所執不同
001_0744_c_20L故說頌曰有非有俱非一非一雙泯
001_0744_c_21L隨次應配屬智者達非眞釋曰
001_0744_c_22L切世間色等句義言說所表心慧所
001_0744_c_23L情執不同略有四種謂有非有
001_0744_c_24L俱許俱非隨次如應配四邪執

001_0745_a_01L일一과 비일非一과 쌍허雙許와 쌍비雙非가 이에 해당한다.
수론외도數論外道26)가 유有 등의 성性이 모든 법과 같은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은 바로 유구有句에 해당한다. 이러한 집착은 참이 아니니 그 이유가 무엇인가? 만약 청靑 등의 색이 색성色性과 같은 것이라면 마땅히 색성과 같이 그 청 등의 체가 다 같아야 할 것이며, 오악五樂27) 등의 소리가 소리의 본성과 같은 것이라면 마땅히 소리의 본성과 같이 그 오악의 체가 다 같아야 할 것이며, 눈(眼) 등의 모든 근根(감각기관)이 근의 본성과 같은 것이라면 마땅히 근의 본성과 같이 그 눈의 체가 다 같아야 할 것이니, 하나하나의 근은 모든 경계를 취하여야 하며 하나하나의 경계가 모든 근을 상대해야 할 것이다.28) 또한 일체의 법이 유성有性과 같은 것이라면 마땅히 유성과 같이 그 체가 모두 같아야 할 것이다.
승론외도勝論外道29)가 유 등의 본성이 모든 법과 같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비유구非有句에 해당하니, 이것도 참이 아니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만약 청 등의 색이 색의 본성과 다르다면 마땅히 소리 등이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소리 등도 그러할 것이다(귀로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30) 또한 일체법이 유의 본성과 다른 것이라면 마땅히 토끼뿔처럼 그 체가 본래 없어야 될 것이다.”라고 하며 이밖에도 자세히 논파하였다.

(또 말하기를) “무참외도無慙外道31)가 유 등의 본성이 저 모든 법과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고 집착하는 것은 역유역비유구亦有亦非有句에 해당하니, 이것도 참이 아니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만약 유 등의 본성이 색 등과 같은 것이라면 수론의 잘못과 같은 것이고, 색 등과 다른 것이라면 승론의 잘못과 같다. 같음과 다름(一異)의 두 가지가 성상性相은 서로 어긋나는데도 무참외도는 그 체가 같다고 하니, 이는 이치가 성립되지 않는다. 같은 것은 마땅히 같은 것이 아니어야 하니 이는 곧 다른 것이므로 다른 것과 같으며, 다른 것은 마땅히 다른 것이 아니어야 하니 이는 곧 같은 것이므로 같은 것과 같다.”라고 하며 이밖에도 자세히 논파하였다.32)

(또 말하기를) “사명외도邪命外道33)가 유 등의 성이 저 모든 법과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라고 집착하는 것은 비유비비유구非有非非有句에 해당하니, 이 또한 참이 아니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네가 여기서 주장한 같음과 다름이 아니라는 것은 다만 가리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두루 나타내기 위한 것인가? 만일 두루 나타내는 것이라면 마땅히 둘 다 부정하는 것이 아닐 것이요, 만일 다만 가리는 것이라면 마땅히 집착할 바가 없을 것이다.

001_0745_a_01L非一雙許雙非數論外道執有
001_0745_a_02L等性與諸法一卽當有句此執非眞
001_0745_a_03L所以者何若靑等色與色性一應如
001_0745_a_04L色性其體皆同五樂等聲與聲性一
001_0745_a_05L應如聲性其體皆同眼等諸根與根
001_0745_a_06L性一應如根性其體皆同應一一根
001_0745_a_07L取一切境應一一境對一切根又一
001_0745_a_08L切法與有性一應如有性其體皆同
001_0745_a_09L勝論外道說有等性與諸法非一
001_0745_a_10L當非有句此亦非眞所以者何若靑
001_0745_a_11L等色與色性異應如聲等非眼所行
001_0745_a_12L聲等亦爾又一切法異有性者應如
001_0745_a_13L1) [6] [7] 角其體本無乃至廣破無慙外
001_0745_a_14L道執有等性與彼諸法亦一亦異
001_0745_a_15L於亦有亦非有句此亦非眞所以者
001_0745_a_16L若有性等 [8] 與色等一同數論過
001_0745_a_17L色等異同勝論失一異二種性相相
001_0745_a_18L而言體同理不成立一應非一
001_0745_a_19L以卽異故如異異應非異以卽一故
001_0745_a_20L如一乃至廣破邪命外道執有性等
001_0745_a_21L與彼諸法非一非異當於非有非非
001_0745_a_22L有句此亦非眞所以者何汝此所
001_0745_a_23L說非一異者爲俱 [9] 是遮爲偏 [10] 有表
001_0745_a_24L偏有表應不雙非若俱 [11] 是遮應無

001_0745_b_01L가리기도 하고 또 나타내기도 하는 것은 이치가 서로 어긋나며, 가리는 것도 없고 나타내는 것도 없는 것은 그 말이 희론을 이루는 것이다.”라고 하며 이밖에도 자세히 논파하였다.

(또 말하기를) “또 이와 같이 세간에 네 가지 비방의 말을 일으켰으니, 유有와 비유非有와 쌍허雙許와 쌍비雙非를 말하며 이는 차례대로 증익增益ㆍ손감損減ㆍ상위相違ㆍ희론戱論이니, 그러므로 세간에서 집착하는 것이 진실이 아닌 것이다.”34)라고 하였다.

이제 이 『기신론』의 글에서 “유를 특징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는 처음 구절을 버리는 것이고, “무를 특징으로 하는 것도 아니며”는 두 번째 구절을 버리는 것이고, “비유를 특징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비무를 특징으로 하는 것도 아니며”란 네 번째 구절을 버린 것이고, “유와 무를 함께 특징으로 하는 것도 아니며”란 세 번째 구절을 버린 것이다. 둘(세 번째와 네 번째)의 차례가 앞뒤로 바뀐 것은 『기신론』을 쓴 사람의 의도에 따른 것이며, 모두 도리가 있으니 서로 방해가 되지 아니한다. 같고(一) 다름(異)의 사구四句는 (유무구有無句에) 준하여 해석하면 알 수 있다.

㉢ 총결함

“이리하여” 아래는 세 번째로 총결하는 것이니, 이 중에 두 구절이 있다. 여기서부터35) “공이라 (말하지만)”까지는 순결順結이고, “만약 망심을 떠나면” 아래는 반결反結이다.

(ㄴ) 불공을 해석함

불공이라 말하는 것은 이미 법체가 공하여 허망함이 없음을 나타냈기 때문에 바로 이는 진심眞心이며, 이 진심은 항상하여 변하지 않고 정법淨法이 만족하기 때문에 불공이라 이름한다. 그러나 또한 취할 만한 상이 없으니, 망념을 여읜 경계는 오직 증득함으로써만 상응하기 때문이다.

불공을 풀이하는 중에 또한 세 구절이 있다.

㉠ 공문을 표시함

처음은 공문空門을 표시한 것이니, “이미 법체가 공하여 허망함이 없음을 나타냈기 때문에”라고 말한 것이다.

㉡ 불공을 나타냄

다음은 불공을 나타내는 것이니, “바로 이는 진심이며……불공이라 이름한다.”라고 말한 것이다.

㉢ 공과 불공이 차이가 없음을 밝힘

“또한 취할 만한 상이 없으니” 아래는 세 번째 공과 불공, 그 둘의 차이가 없음을 밝혔다. 불공이라고 말했지만 상이 없기 때문에 불공이 공과 다르지 않으며, 분별하여 반연하는 바를 여읜 경계는 오직 무분별지로 증득함으로써만 상응하기 때문이다.

㉯ 생멸문

이 아래는 두 번째 생멸문을 풀이한 것이니, 이 중에 두 가지가 있다.

001_0745_b_01L所執有遮有表理互相違無遮無
001_0745_b_02L言成戱論乃至廣破如是世間
001_0745_b_03L起四種謗謂有非有雙許雙非
001_0745_b_04L如次增益損減相違戱論是故世
001_0745_b_05L間所執非實今此文中非有相
001_0745_b_06L遣初句非無相者遣第二句非非
001_0745_b_07L有相非非無相者遣第四句非有無
001_0745_b_08L俱者遣第三句二句前後隨論者
001_0745_b_09L皆有道理不相傷也一異四句
001_0745_b_10L準釋可知乃至以下第三總結
001_0745_b_11L中二句從此以下乃至曰爲空
001_0745_b_12L順結也若離以下是反結也

001_0745_b_13L
所言不空者已顯法體空無妄故卽是
001_0745_b_14L眞心常恒不變淨法滿足則名不空
001_0745_b_15L亦無有相可取以離念境界唯證相應
001_0745_b_16L

001_0745_b_17L
釋不空中亦有三句初牒空門
001_0745_b_18L言已顯法體空無妄故次顯不空
001_0745_b_19L是眞心乃至則名不空故亦無有相
001_0745_b_20L以下第三明空不空無二差別雖曰
001_0745_b_21L不空而無有相是故不空不異於空
001_0745_b_22L以離分別所緣境界唯無分別所證
001_0745_b_23L相應故也

001_0745_b_24L
此下第二釋生滅門於中有二初正

001_0745_c_01L처음은 바로 자세히 풀이한 것이며, “다시 네 가지 법의 훈습하는 뜻이 있기 때문에” 아래는 말에 의하여 거듭 나타내는 것이다.

ㄱ. 바로 자세히 풀이함

처음 중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위의 입의분 중의 “이 심생멸”36)을 해석한 것이며, 둘째 “다음 생멸인연이라는 것은”37) 아래는 위 (입의분 중)의 “생멸인연”을 해석한 것이며, 셋째 “다시 생멸상(을 분별한다는 것은)”38)의 아래는 위 (입의분 중)의 “생멸상”을 해석한 것이다.

ㄱ) 심생멸

처음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체라는 점에서 전체적으로 밝혔고, 둘째는 뜻에 의하여 하나씩 풀이하였다.

심생멸이란 여래장에 의하므로 생멸심이 있는 것이니, 이른바 불생불멸不生不滅이 생멸과 화합하여,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닌 것을 이름하여 알라야식(阿黎耶識)39)이라고 하는 것이다.

(ㄱ) 체라는 점에서 전체적으로 밝힘

처음 중에 세 구절이 있으니, 첫째는 체를 나타냈고, 둘째는 상을 분별하였으며, 셋째는 이름을 세웠다.

㉠ 체를 나타냄

처음 중에 “여래장에 의하므로 생멸심이 있는 것이니”라고 한 것은 (체라는 측면에서) 자성청정심을 여래장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무명의 바람이 움직임에 의하여 생멸을 일으키므로 생멸이 여래장에 의지한다고 말한 것이다.

별기 그러나 불생멸심이 생멸심과 심체心體가 둘이 아니며 다만 두 가지 뜻을 가지고 마음을 취하여 둘(불생멸심과 생멸심)이 되는 것이므로, 이를 “(여래장에) 의하므로”라고 말할 뿐이다. 이는 마치 움직이지 아니하는 바닷물이 바람에 불리어 움직이는 물결을 일으키는 것이니, 동動ㆍ정靜은 다르지만 바닷물의 체는 하나이므로, 정수靜水에 의하여 동수動水가 있다고 말하게 되는 것과 같다. 이 중의 도리도 또한 그러함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는 『사권능가경』에서 “여래장이 무시악습無始惡習에 훈습된 것을 식장識藏(장식)이라 이름한다.”40)라고 하고, 또 “찰나刹那41)란 식장이라 이름한다.”42)라고 한 것과 같다.


001_0745_c_01L廣釋復次有四種熏習以下因言重
001_0745_c_02L初中有三一者釋上立義分中是
001_0745_c_03L心生滅二者復次生滅因緣以下
001_0745_c_04L上生滅因緣三者復次生滅相以下
001_0745_c_05L釋上生滅相初中有二一者就體總
001_0745_c_06L二者依義別解

001_0745_c_07L
心生滅者依如來藏故有生滅心所謂
001_0745_c_08L不生不滅與生滅和合非一非異
001_0745_c_09L爲阿黎耶識

001_0745_c_10L
初中三句一者標體二者辯相
001_0745_c_11L者立名初中言依如來藏故有生滅
001_0745_c_12L心者自性淸淨心名爲如來藏
001_0745_c_13L無明風動作生滅故說生滅依如來
001_0745_c_14L

001_0745_c_15L

然不生滅心與生滅心心體無
001_0745_c_16L但將二義取心爲二以說依耳
001_0745_c_17L如不動水爲風所吹而作動水
001_0745_c_18L靜雖異水體是一而得說言依靜
001_0745_c_19L水故有其動水當知此中道理亦
001_0745_c_20L

001_0745_c_21L
如四卷經言如來藏爲無始惡習所
001_0745_c_22L名爲識藏又言刹那者名爲識藏
001_0745_c_23L

001_0745_c_24L「免」作「兎」{甲}

001_0746_a_01L
별기 이 『기신론』에서 생멸심이 있다고 한 것은 바로 식장을 말하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제 소의所依인 여래장과 능의能依인 생멸심을 통틀어 취하여, 합해서 심생멸문을 삼기 때문에, “심생멸이란 여래장에 의하므로 생멸심이 있는 것이니”라고 말하였으니, 이는 여래장을 버리고 생멸심을 취하여 생멸문을 삼은 것이 아니다. 이것은 아랫글에서 “이 식에 두 가지 뜻이 있어서”43)라고 한 것과 같으니, 두 가지 뜻이 모두 생멸문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 상을 분별함

“이른바” 아래는 두 번째로 상을 분별하는 것이다. “불생불멸”이란 위에서의 여래장을 말하며, 이 생멸하지 않는 마음이 움직여서 생멸을 일으켜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않음을 “(생멸)과 화합하여”라고 이름하니, 이는 아랫글에서 “마치 큰 바다의 물이 바람에 의하여 물결이 움직일 때, 물의 특징(水相)과 바람의 특징(風相)이 서로 떨어지지 않지만”44)이라고 하고 이어서 자세히 설한 것과 같다. 이 중에서 바닷물의 움직임은 바람의 특징이요, 움직일 때의 젖어 있는 것은 물의 특징이다. 바닷물 전체가 움직이므로 바닷물이 바람의 특징을 여의지 않았고, 움직이는 것마다 젖어 있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움직이는 물결이 물의 특징을 여의지 않는다. 마음도 이와 같아서 생멸하지 않는 마음 전체가 움직이기 때문에 마음이 생멸상을 여의지 않고, 생멸의 상이 영묘한 알음알이(神解)가 아닌 것이 없기 때문에 생멸이 심상心相을 여의지 아니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서로 여의지 않기 때문에 ‘(생멸)과 화합하여’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별기 마음의 생멸은 무명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생멸의 마음은 본각에서 이루어져 두 가지 체가 없으며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않기 때문에 화합이 되는 것이다.

이는 생멸하지 않는 마음이 생멸과 화합하는 것이지 생멸이 생멸하지 않는 마음과 화합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닌 것”이란 생멸하지 않는 마음이 그 전체가 움직이기 때문에 마음(생멸하지 않는)이 생멸과 다르지 않은 것이요, 늘 불생불멸을 잃지 않기 때문에 생멸이 그 불생멸심과 같지 않은 것이다. 또 만약 같은 것이라면 생멸식상生滅識相이 다 없어질 때 심신心神의 체도 또한 따라서 없어지게 되니 이는 단변斷邊45)에 떨어질 것이고, 만약 다른 것이라면 무명의 바람에 의하여 훈습되어 움직일 때

001_0746_a_01L

當知此云有生滅心正謂識藏
001_0746_a_02L今通取所依如來藏與能依生滅
001_0746_a_03L合爲心生滅門故言心生滅者
001_0746_a_04L依如來藏故有生滅心非棄如來
001_0746_a_05L藏而取生滅心爲生滅門也如下
001_0746_a_06L文云此識有二種義故知二義皆
001_0746_a_07L在生滅門也

001_0746_a_08L
所謂以下第二辯相不生不滅者
001_0746_a_09L是上如來藏不生滅心動作生滅
001_0746_a_10L相捨離名與和合如下文言如大
001_0746_a_11L海水因風波動水相風相不相捨離
001_0746_a_12L乃至廣說此中水之動是風相動之
001_0746_a_13L溼是水相水擧體動故水不離風相
001_0746_a_14L無動非溼故動不離水相心亦如是
001_0746_a_15L不生滅心擧體動故心不離生滅相
001_0746_a_16L生滅之相莫非神解故生滅不離心
001_0746_a_17L如是不相離故名與和合別記云
心之生滅
001_0746_a_18L依無明成生滅之心從本覺成
而無二體不相捨離故爲和合
此是不生滅
001_0746_a_19L心與生滅和合非謂生滅與不生滅
001_0746_a_20L和合也非一非異者不生滅心擧體
001_0746_a_21L而動故心與生滅非異而恒不失不
001_0746_a_22L生滅性故生滅與心非一又若是一
001_0746_a_23L生滅識相滅盡之時心神之體亦
001_0746_a_24L應隨滅墮於斷邊若是異者依無

001_0746_b_01L정심靜心의 체가 연을 따르지 않게 되니 이는 상변常邊46)에 떨어질 것이다. 이 두 변을 여의었기 때문에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닌 것이다.

별기 두 가지 뜻이 있지만 심체가 둘이 없으니, 여기서는 두 가지 뜻(각과 불각)이 합해져서 둘이 아닌 심체를 알라야식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이것은 『사권능가경』에서 “비유하자면 흙덩이와 티끌이 다른 것도 아니요,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닌 것과 같으니, 금과 장엄구(금으로 장식한 물건)47)도 이와 같다. 만약 흙덩이와 티끌이 다른 것이라면 흙덩이는 저 티끌로 이루어진 것이 아닐 것이나, 실로 저 티끌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다른 것이 아니고, 만약 다르지 않은 것이라면 흙덩이와 티끌이 차이가 없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전식轉識48)과 장식의 진상眞相이 만약 다르다면 장식은 인이 아닐 것이고, 만약 다르지 않다면 전식이 없어질 때 장식도 없어져야 할 것이지만 자진상自眞相은 실로 없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진상식自眞相識49)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요, 다만 업상業相이 없어지는 것이다.”50)라고 한 것과 같다.
이제 이 『기신론』의 저자가 바로 저 (『능가경』의) 글을 풀이하였기 때문에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이 중에서 업식業識이란 무명의 힘에 의하여 불각심不覺心이 움직이기 때문에 업식이라 이름하며, 또 동심動心에 의하여 굴러서 능견能見을 이루기 때문에 전식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알라야식 자리에 있다.

별기 알라야식 내에 생멸하는 견상見相을 전식이라 이름하고 이 중 체를 장식이라 이름한다.

이것은 『십권능가경』에서 “여래장 곧 알라야식이 칠식七識과 함께 생겨나는 것을 전멸상轉滅相이라 한다.”51)는 말과 같다. 따라서 전상轉相이 알라야식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사권능가경』에서의) ‘자진상’이라는 것은 『십권능가경』에서는 “자상自相”52)이라 하였다. 본각심本覺心이 허망한 연緣에 의뢰하지 않고 본성이 스스로 신해神解함을 자진상이라 하는 것이며, 이는 불일의문不一義門53)에 의하여 말한 것이다. 또 무명의 바람에 따라서 생멸을 일으킬 때 신해한 성질이 본심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또한 자진상이라 이름하게 된 것이니, 이는 불이의문不異義門54)에 의하여 말한 것이다.

별기 ‘자진自眞’이란 이름은 불생멸에만 치우치게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 중에 자세한 것은 『별기』에서 말한 것과 같다.


001_0746_b_01L明風熏動之時靜心之體不應隨緣
001_0746_b_02L卽墮常邊離此二邊故非一非異
001_0746_b_03L別記云雖有二義心體無二
合二義不二之心名爲棃耶識也
如四卷經
001_0746_b_04L譬如泥團微塵非異非不異
001_0746_b_05L莊嚴具亦如是若泥團微塵異者
001_0746_b_06L彼所成而實彼成是故非異若不
001_0746_b_07L異者泥團微塵應無差別如是轉識
001_0746_b_08L藏識眞相若異者藏識非因若不異
001_0746_b_09L轉識滅藏識亦應滅而自眞相實
001_0746_b_10L不滅是故非自眞相識滅但業相滅
001_0746_b_11L今此論主正釋彼文故言非一非異
001_0746_b_12L此中業識者因無明力不覺心動
001_0746_b_13L名業識又依動心轉成能見故名轉
001_0746_b_14L此二皆在梨耶識位別記云梨耶識
內生滅見相
001_0746_b_15L爲轉識於中
名爲藏識
如十卷經言如來藏卽阿
001_0746_b_16L梨耶識共七識生名轉滅相故知
001_0746_b_17L轉相在梨耶識自眞相者十卷經云
001_0746_b_18L中眞名 [12] 自相本覺之心不藉妄緣
001_0746_b_19L性自神解名自眞相是約不一義門
001_0746_b_20L說也又隨無明風作生滅時神解之
001_0746_b_21L性與本不異故亦得名爲自眞相
001_0746_b_22L依不異義門說也別記云當知自眞
不偏在不生滅
於中
001_0746_b_23L委悉如別記說也

001_0746_b_24L

如瑜伽論等說阿梨耶識

001_0746_c_01L
별기
『유가사지론』 등과 같은 데서는 알라야식이 이숙식異熟識55)으로서 한결같이 생멸만 한다고 말하였는데, 무슨 까닭으로 이 『기신론』에서는 이 알라야식이 불생멸과 생멸의 두 가지 뜻을 갖추어 함유하고 있다고 말하는가?

각각 설명하는 바가 있어서 서로 위배되지 않는다. 어째서인가? 이 미세한 마음에 대략 두 가지 뜻이 있으니, 만약 업번뇌業煩惱에 의하여 감응되는 뜻으로 본다면 무無를 조작하여 유有가 되게 하므로 한결같이 생멸하기만 할 것이며, 만약 근본무명根本無明에 의하여 움직여지는 뜻으로 논한다면 정靜을 훈습하여 동動하게 하는 것이므로 동정動靜이 일체가 될 것이다. 저 『유가사지론』에서 논한 것들은 『해심밀경』56)에 의하여 일一이거나 상常이라고 하는 견해들57)을 제거하기 위하여, 업번뇌에 감응되는 뜻의 문에 의하기 때문에 이 알라야식이 한결같이 생멸하기만 하여 심왕心王ㆍ심소법心所法58)이 차별되어 전변한다고 말한 것이다.59)
이제 이 『기신론』에서는 『능가경』에 의하여 진과 속을 별체로 보는 집착을 다스리기 위하여, 무명에 의하여 동하여지는 뜻의 문에 의하기 때문에 불생멸이 생멸과 화합하여 다르지 않다고 말한 것이다.60) 그러나 이 무명에 의하여 움직여진 상相도 바로 저 업번뇌에 의하여 감응되는 것이기 때문에 두 뜻(불생불멸과 생멸심)이 다르지만 알라야식의 체는 둘이 없는 것이다.

심체心體가 상주하고 심상心相은 생멸하지만, 체와 상이 떨어지지 아니하여 합해서 일식一識이 된다고 해야 되는가, 심체는 상주하기도 하고 또한 곧 심체는 생멸하기도 한다고 해야 되는가?

만일 (묻는) 뜻을 체득한 사람이라면 두 뜻을 모두 인정할 것이니, 어째서인가? 만약 그 상주를 논한다면 다른 것을 따라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체라 하고, 그 무상無常을 논한다면 다른 것을 따라서 생멸하는 것을 상相이라 하는 것이니, 체는 상常이요, 상相은 무상無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생멸이라고 하는 것은 생이 아닌 생이요, 멸이 아닌 멸이므로 생멸이라 이름하며, 이는 심의 생이며 심의 멸이기 때문에 생멸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심체가 생멸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바닷물이 움직이는 것을 물결이라 이름하지만,

001_0746_c_01L是異熟識一向生滅何故此論乃
001_0746_c_02L說此識具含二義各有所述
001_0746_c_03L相違背何者此微細心略有二義
001_0746_c_04L若其爲業煩惱所感義邊辨無令
001_0746_c_05L一向生滅若論根本無明所
001_0746_c_06L1) [7] 義邊熏靜令動動靜一體
001_0746_c_07L所論等依深密經爲除是一是常
001_0746_c_08L之見約業煩惱所感義門故說此
001_0746_c_09L識一向生滅心心數法差別而轉
001_0746_c_10L今此論者依楞伽經爲治眞俗別
001_0746_c_11L體之執就其無明所動義門故說
001_0746_c_12L不生滅與生滅和合不異然此無
001_0746_c_13L明所動之相亦卽爲彼業感所感
001_0746_c_14L故二意雖異識體無二也
001_0746_c_15L當心體常住心相生滅體相不離
001_0746_c_16L合爲一識爲當心體常住亦卽心
001_0746_c_17L體生滅耶若得意者二義俱
001_0746_c_18L何者若論其常住不隨他成
001_0746_c_19L曰體論其無常隨他生滅曰相
001_0746_c_20L得言體常相是無常然言生滅者
001_0746_c_21L非生之生非滅之滅故名生滅
001_0746_c_22L心之生心之滅故乃名生滅故得
001_0746_c_23L言心體生滅如似水之動名爲波
001_0746_c_24L「動」作「感」{甲}

001_0747_a_01L끝내 이 물결의 움직임이 바닷물의 움직임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음과 같은 것이다. 이 중의 도리도 또한 그러함을 알아야 할 것이다. 설사 심체는 움직이지 않으나 다만 무명상無明相이 움직이는 것이라면 범부를 전변시켜 성인을 이루는 이치가 없을 것이니, 그것은 무명상은 한결같이 멸하기만 하고 심체는 본래 범부를 짓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심체가 생멸한다면 진심眞心이 다 없어질 것이니, 왜냐하면 생멸할 때에는 상주함이 없기 때문이다. 또 만일 심체는 본래 고요한 것이나 연을 따라 움직인다면 생사가 시작이 있을 것이니, 이는 큰 잘못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본래 고요한 때에는 생사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만일 마음이 연을 따라 변하여 생멸을 일으킨다고 한다면 또한 일심一心이 연을 따라 변하여 다심多心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세 가지 힐난61)을 떨칠 수가 없기 때문에 이 뜻62)이 성립될 수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뜻이 방해됨이 없으니 이제 뒤의 것으로부터 답할 것이다.
마치 상심常心이 무명의 연을 따라서 변하여 무상심無常心을 일으키지만, 그 상성常性은 항상 스스로 변하지 않는다고 말함과 같으니, 이처럼 일심이 무명의 연을 따라 변하여 많은 중생심을 일으키지만 그 일심은 항상 스스로 둘이 없는 것이다. 이는 『대반열반경』에서 “한 가지 맛의 약이 그 옮겨가는 곳에 따라서 여러 가지 다름이 있으나, 이 약의 참된 맛은 산에 머물러 있다.”63)라고 한 것과 같으니,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또 본래 고요한 것이 연을 따라 움직인다고 하지만 생사에 시작이 있다는 과오는 없으니, 이와 같이 전전展轉하는 동정動靜이 모두 시작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논에서 “앞서는 과보果報였던 것이 뒤에서는 도리어 원인을 이루어서 항상 전전하는 인과因果가 다 시작이 없기 때문”64)이라 한 것과 같으니, 이 중의 도리도 또한 그러함을 알아야 할 것이다.
또 심체가 생멸하지만 항상 심체는 상주하는 것이니, 왜냐하면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이른바 심체가 둘도 아니면서 하나도 아닌 성질이며,

001_0747_a_01L終不可說是動非水之動當知此
001_0747_a_02L中道理亦爾設使心體不動但無
001_0747_a_03L明相動者則無轉凡成聖之理以無
001_0747_a_04L明相一向滅故心體本來不作凡
001_0747_a_05L難曰若使心體生滅則眞心
001_0747_a_06L有盡以生滅時無常住故又若心
001_0747_a_07L體本靜而隨緣動則生死有始
001_0747_a_08L爲大過以本靜時無生死故又若
001_0747_a_09L心隨緣變作生滅亦可一心隨緣
001_0747_a_10L變作多心是三難不能得離故知
001_0747_a_11L此義不可立也解云此義無妨
001_0747_a_12L今從後而答如說常心隨無明緣
001_0747_a_13L變作無常之心而其常性恒自不
001_0747_a_14L如是一心隨無明緣變作多衆
001_0747_a_15L生心而其一心常自無二如涅槃
001_0747_a_16L經云一味之藥隨其流處有種種
001_0747_a_17L是藥眞味停留在山正謂此也
001_0747_a_18L又雖曰本靜隨緣而動而無生死
001_0747_a_19L有始之過以如是展轉動靜皆無
001_0747_a_20L始故如論說云先是果報後反
001_0747_a_21L成因而恒展轉因果皆無始故
001_0747_a_22L當知此中道理亦爾又雖心體生
001_0747_a_23L而恒心體常住以不一不異故
001_0747_a_24L所謂心體不二而無一性動靜非

001_0747_b_01L동정이 같지도 않으면서 다른 것도 없는 성질인 것이다. 그러므로 마치 바닷물이 상속문相續門65)에 의하더라도 곧 유동流動함이 있고, 생멸문에 의하더라도 항상 움직이지 않음과 같으니,66) 항상되는 것도 아니고 단절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요, 이른바 (메아리가) 건너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기 때문이다.67) 이 중의 도리도 그러함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앞에서 설정한 세 가지 힐난이 해결되지 않은 것이 없는 것이다.

㉢ 이름을 세움

세 번째는 이름을 세운 것이니, “이름하여 알라야식이라고 하는 것이다.”라는 것은 불생멸이 생멸과 화합하여 같은 것도 아니요 다른 것도 아니므로 이를 모두 알라야식이라고 이름하였으니, 이름을 번역하고 뜻을 풀이한 것은 『능가경종요楞伽經宗要』68) 중에서 말한 것과 같다.
이상으로 체에 대해서 전체적으로 밝히는 것을 마친다.

(ㄴ) 뜻에 의하여 각각 풀이함

이 아래는 두 번째로 뜻에 의하여 개별적으로 풀이하는 것이니, 이 중에 세 부분이 있다. 첫째는 뜻을 열어 전체적으로 나타내어 간략히 공능功能을 밝혔고, 둘째는 뜻에 의하여 개별적으로 풀이하여 자세히 체상體相을 나타냈으며, 셋째는 동이同異를 밝혔다.

이 식에 두 가지 뜻이 있어서69) 일체법을 포괄하며, 일체법을 낼 수 있는 것이다.

㉠ 간략히 공능을 밝힘

처음에 “이 식에 두 가지 뜻이 있어서 일체법을 포괄하며, 일체법을 낼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포괄할 수 있다는 뜻은 앞에서70) 자세히 말한 것과 같다. 그러나 위에서는 진여ㆍ생멸 두 문이 각각 일체법을 포괄한다고 하였고, 이제 여기서는 하나의 식識이 두 뜻을 함유하기 때문에 이 하나의 식이 일체법을 포괄한다고 밝히고, 두 뜻이 각각 일체법을 포괄한다고 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이 두 뜻은 오직 생멸문 내에서만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이와 같은 두 뜻이 각각 일체법을 포섭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 위의 두 문門에서는 다만 ‘섭의攝義’만을 말하였으니, 왜냐하면 진여문에는 ‘생의生義’가 없기 때문이며, 이제는 이 식에서 또한 ‘생의’를 말하였으니 생멸문 중에는 ‘생의’가 있기 때문이다. 이 뜻이 무엇인가? 불각의不覺義가 본각本覺을 훈습하기 때문에 모든 염법染法을 내며, 또 본각이 불각을 훈습하기 때문에 모든 정법淨法을 내는 것이니, 이 두 뜻에 의하여 일체법을 다 내기 때문에,

001_0747_b_01L一而無異性故如水依相續門則
001_0747_b_02L有流動依生滅門而恒不動以不
001_0747_b_03L常不斷故所謂不度亦不滅故
001_0747_b_04L知此中道理亦爾是故所設三難
001_0747_b_05L無不消也

001_0747_b_06L
第三立名名爲阿梨耶識者不生滅
001_0747_b_07L與生滅和合非一非異故總名爲阿
001_0747_b_08L梨耶識翻名釋義是如楞伽宗要中
001_0747_b_09L就體總明竟在於前

001_0747_b_10L
此下第二依義別解此中有三一開
001_0747_b_11L義總標略明功能二依義別釋廣顯
001_0747_b_12L體相三明同異

001_0747_b_13L
此識有二種義能攝一切法生一切法

001_0747_b_14L
初中言此識有二種義能攝一切法生
001_0747_b_15L一切法者能攝之義如前廣說然上
001_0747_b_16L說二門各攝一切今此明一識含有
001_0747_b_17L二義故此一識能攝一切不言二
001_0747_b_18L義各攝一切以此二義唯在生滅門
001_0747_b_19L內說故如是二義不能各攝一切法
001_0747_b_20L又上二門但說攝義以眞如門無
001_0747_b_21L能生義故今於此識亦說生義
001_0747_b_22L滅門中有能生義故此義云何
001_0747_b_23L不覺義熏本覺故生諸染法又由本
001_0747_b_24L覺熏不覺故生諸淨法依此二義通

001_0747_c_01L‘식에 두 가지 뜻이 있어서……일체법을 낼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한 것이며, 이 문장은 곧 아래에 “네 가지 (법의) 훈습(하는 뜻이) 있기 때문에”71) 이하의 글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니 일심의 뜻은 넓어서 이 문을 총괄하며, 이 식의 뜻은 좁아서 생멸문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 식의 두 가지 뜻이 이미 한쪽의 문에 있기 때문에, 문은 넓고 뜻(義)은 좁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경(『능가경』)을 인용하여 뜻을 풀이한 것은 『별기』와 같다.

별기
위에서는 일심에 두 가지 문이 있다고 하고, 여기서는 이 식에 두 가지 뜻이 있다고 하니, 저 심과 이 식이 무슨 차별이 있는가?

위에서는 이체理體에 나아가 일심이라 이름하였으니, 일심의 체가 절상絶相72)과 수연隨緣73)이라는 두 가지 뜻의 문을 포함하기 때문에 일심에 두 가지 문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경본(『능가경』)에서 “적멸이라는 것은 일심이라 이름하고, 일심이란 여래장이라 이름한다.”74)라고 한 것과 같으니, 뜻은 위에서75) 말한 것과 같다. 이제 여기서 식이란, 다만 일심의 수연문隨緣門 내에 이理ㆍ사事가 둘이 아니고 오직 하나의 신려神慮인 점에서 일식一識이라고 이름한 것이니, 이 알라야식의 체에 각과 불각의 두 뜻이 함유되어 있기 때문에 “이 식에 두 가지 뜻이 있어서”라고 한 것이다. 이리하여 심은 넓고 식은 좁은 것이니 심이 이문 내의 식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며, 또 문은 넓고 뜻(각의와 불각의)은 좁으니 생멸문이 두 뜻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사권능가경』에서 “(칠식의 파도를) 여의지도 않고 (칠식의 파도로) 전변하지도 않는 것을 여래장식장이라 이름한다. 칠식은 유전하여 멸하지 않는다. 어째서인가? 저것(알라야식)을 원인으로 하고 (저것을) 반연하는 여러 식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문ㆍ연각의 수행 경계가 아니다.”76)라고 하고, 『십권능가경』에서 “여래장식은 알라야식 중에 있지 아니한 것이니, 그러므로 칠식은 생과 멸이 있지만 여래장식은 생멸하지 아니한다. 어째서인가? 저 칠식은 (장식이) 모든 경계를 염관함에 의하여 생기기 때문이며,

001_0747_c_01L生一切故言識有二義生一切法
001_0747_c_02L文卽起下有四種熏習以下文也
001_0747_c_03L知一心義寬總攝二門此識義狹
001_0747_c_04L在生滅門此識二義旣在一門
001_0747_c_05L知門寬而義狹也引經釋義如別記
001_0747_c_06L

001_0747_c_07L

上言一心有二種門今云此
001_0747_c_08L識有二種義彼心此識有何差別
001_0747_c_09L解云上就理體名爲一心體含
001_0747_c_10L絶相隨緣二義門故言一心有二
001_0747_c_11L種門如經本言寂滅者名爲一心
001_0747_c_12L一心者名如來藏義如上說今此
001_0747_c_13L中識者但就一心隨緣門內理事
001_0747_c_14L無二唯一神慮名爲一識體含
001_0747_c_15L覺與不覺二義故言此識有二種
001_0747_c_16L是故心寬識狹以心含二門識
001_0747_c_17L又門寬義狹以生滅門含二義
001_0747_c_18L如四卷經云不離不轉名如來
001_0747_c_19L藏識藏七識流轉不滅所以者何
001_0747_c_20L彼因攀緣諸識生故非聲聞緣覺
001_0747_c_21L修行境界十卷經云如來藏識不
001_0747_c_22L在阿梨耶識中是故七種識有生
001_0747_c_23L有滅如來藏識不生不滅何以故
001_0747_c_24L彼七種識依諸境界念觀而生

001_0748_a_01L이 같은 칠식의 경계는 모든 성문, 벽지불 및 외도의 수행자들이 알 수 없는 것이다.”77)라고 한 것과 같다.

이 두 가지 글이 똑같이 이 알라야식의 생멸하지 않는 뜻을 밝힌 것이니, 왜인가? 경계의 바람에 의하여 움직이기 때문에 장식의 바다 중에 칠식의 파도가 전전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칠식은 생멸이 있는 것이며, 한편 여래장이란 바로 장식이니, (장식이 칠식의 파도를) 여의지도 않고 (칠식의 파도로) 전변하지도 않지만, 그 체는 전변하지 않기 때문에 여래장은 생멸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사권능가경』에서) ‘(칠식의 파도를) 여의지도 않고 (칠식의 파도로) 전변하지도 않는 것을 여래장식장이라 이름한다.’ 등이라고 말하였다.
『십권능가경』의 의도는 칠식은 파도이지 바다가 아니지만 (파도의) 모양은 알라야식78) 바다 중에 있기 때문에 생멸이 있고, 여래장이란 바다이지 파도가 아니므로 (생멸하는) 알라야식 바다 중에 있지 않기 때문에 생멸이 없는 것이니, 그러므로 여래장은 알라야식 중에 있지 않다고 말하였다. 이리하여 칠식은 생멸이 있지만 여래장은 바로 (불생멸의) 알라야식79)이기 때문에 ‘(생멸하는 알라야식에) 있지 아니한 것이니’라고 말하였다. 만약 여래장이 생멸하는 알라야식에 있지 않다면 바로 아래에서 ‘그러므로 팔종식은 생멸이 있지만’이라고 말해야 할 터인데, 어째서 다만 ‘그러므로 칠식은 생과 멸이 있지만’이라고만 말했겠는가? 이것은 이 『사권능가경』과 『십권능가경』의 글이 본래의 산스크리트 문의 원본은 같지만 다만 번역자가 다르기 때문에 말이 달라진 것일 뿐임을 알아야 한다.

또 『사권능가경』에서 “알라야식을 여래장이라고 이름하니, 무명ㆍ칠식과 함께하지만 무상無常의 허물을 여의어 자성自性이 청정한 것이요, 나머지 칠식은 찰나찰나 유전하여 생멸법生滅法이다.”80)라고 하였으니, 이러한 말은 앞서와 같이 알라야의 본각ㆍ불생멸의 뜻을 밝힌 것이다. 또 『사권능가경』에서 “찰나란 식장이라 이름하는 (여래장이)……”81)라고 하고 『십권능가경』에서 “알라야식(이란) 여래장(이라고도 이름하고) 칠종식과 함께 생하니 이를 전멸상轉滅相이라 한다.”82)라고 한 말들은 알라야의 생멸ㆍ불각의 뜻을 나타낸 것이다.

001_0748_a_01L七識境界一切聲聞辟支佛外道
001_0748_a_02L修行者不能覺知此之二文同明
001_0748_a_03L此識不生滅義何者欲明境界風
001_0748_a_04L所動故藏海中七識浪轉是故七
001_0748_a_05L識有生有滅如來藏者卽是藏識
001_0748_a_06L雖不離轉而體不轉故如來藏不
001_0748_a_07L生不滅故言不離不轉名如來藏
001_0748_a_08L識等十卷意者欲明七識是浪非
001_0748_a_09L相在梨耶識海中故有生滅
001_0748_a_10L如來藏者是海非浪不在阿梨耶
001_0748_a_11L識中 [13] [14] 是故七識有生有滅等以如
001_0748_a_12L來藏卽是阿梨耶識故言不在
001_0748_a_13L使如來藏不在生滅梨耶識中者
001_0748_a_14L應下云是故八種識有生有滅
001_0748_a_15L故但言是故七識有生滅耶當知
001_0748_a_16L此二經文其本是一但翻譯者異
001_0748_a_17L故致使語有不同耳又四卷經云
001_0748_a_18L阿梨耶識名如來藏而與無明七
001_0748_a_19L識共俱離無常過自性淸淨
001_0748_a_20L七識者念念不住是生滅法
001_0748_a_21L是等文同明梨耶本覺不生滅義
001_0748_a_22L又四卷經云刹那者名爲識藏
001_0748_a_23L卷云如來藏阿梨耶識共七種
001_0748_a_24L識生名轉滅相如是等文是顯

001_0748_b_01L여기에서 이제 『기신론』의 저자가 저 경(『능가경』)의 종요宗要를 총괄하였기 때문에 이 알라야식에 두 가지의 뜻이 있다고 말한 것이다.

㉡ 자세히 체상을 나타냄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각의 뜻이고, 둘째는 불각의 뜻이다.

두 번째 자세히 해석하는 중에 세 가지가 있다.

A. 수를 물어 문제를 제기함

처음에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라는 것은 수를 물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B. 수에 의하여 이름을 열거함

다음에 “각의 뜻이고 불각의 뜻”이라고 한 것은 수에 의하여 이름을 열거한 것이다.

C. 각각 풀이함

“(각의 뜻)이라고 하는 것은(所言)” 이하는 세 번째로 각각 풀이한 것이니, 앞서는 각의 뜻을 풀이하고 뒤에서는 불각을 풀이하였다.

A) 각의 뜻을 풀이함

각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는 간략히 하고 뒤는 자세히 풀었다.

각의 뜻이라고 하는 것은 심체가 망념을 여읜 것을 말함이다. 망념을 여읜 상相이란 허공계虛空界와 같아서 두루하지 않는 바가 없어 법계가 하나인 모습(法界一相)이며 바로 여래의 평등한 법신이니, 이 법신에 의하여 본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째서인가? 본각의 뜻이란 시각始覺의 뜻에 대하여 말한 것이니 시각이란 바로 본각과 같기 때문이며, 시각의 뜻은 본각에 의하기 때문에 불각이 있으며 불각에 의하므로 시각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A) 간략히 풀이함

간략히 풀이하는 중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는 본각이요 뒤에는 시각이다.

Ⓐ 본각을 밝힘

본각을 밝히는 중에도 두 구절이 있으니, 먼저는 본각의 체를 밝혔고 뒤에서는 본각의 뜻을 풀이하였다.

a. 본각의 체를 밝힘

처음 중에 “심체가 망념을 여읜 것을 말함이다.”라고 한 것은 망념을 여읜 것을 말하며, 이는 불각이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 “허공계와 같아서”라는 것은 다만 어두움이 없을 뿐 아니라 지혜의 광명이 법계에 두루 비쳐 평등하여 둘이 없는 것이다. 이는 아랫글에서 “대지혜광명의 뜻이 있기 때문이며, 법계를 두루 비치는 뜻이 있기 때문”83)이라는 말과 같다.

b. 본각의 뜻을 풀이함

“어째서인가?” 이하는 두 번째로 뜻을 풀이한 것이니, 이는 시각에 대하여 본각의 뜻을 풀이한 것이다. 본각을 밝힘을 마친다.

Ⓑ 시각을 풀이함

다음은 시각을 풀이하였으니 이 중에 두 가지가 있다. 먼저는 또한 본각을 상대하여 불각이 일어나는 뜻을 나타냈고, 뒤에서는 불각에 대하여 시각의 뜻을 풀이하였다. 이 중의 대의는 시각은 불각에 의지하고

001_0748_b_01L梨耶生滅不覺之義此今論主總
001_0748_b_02L括彼經始終之意故言噵此識有
001_0748_b_03L二種義也

001_0748_b_04L
云何爲二一者覺義二者不覺義

001_0748_b_05L
第二廣中有三初言云何爲二者
001_0748_b_06L數發起次言覺義不覺義者依數列
001_0748_b_07L所言以下第三別解先釋覺義
001_0748_b_08L後解不覺覺中有二先略後廣

001_0748_b_09L
所言覺義者謂心體離念離念相者
001_0748_b_10L等虛空界無所不徧法界一相卽是
001_0748_b_11L如來平等法身依此法身說名本覺
001_0748_b_12L以故本覺義者對始覺義說以始覺
001_0748_b_13L卽同本覺始覺義者依本覺故而
001_0748_b_14L有不覺依不覺故說有始覺

001_0748_b_15L
略中亦二先本後始明本覺中
001_0748_b_16L有二句先明本覺體後釋本覺義
001_0748_b_17L初中言心體離念者謂離妄念顯無
001_0748_b_18L不覺也等虛空界者非唯無闇有慧
001_0748_b_19L光明徧照法界平等無二如下文云
001_0748_b_20L有大智慧光明義故徧照法界義故
001_0748_b_21L何以故下第二釋義是對始覺釋本
001_0748_b_22L覺義明本覺竟次釋始覺於中有
001_0748_b_23L先顯亦對本覺不覺起義後對不
001_0748_b_24L覺釋始覺義此中大意欲明始覺待

001_0748_c_01L불각은 본각에 의지하며 본각은 시각에 의지하는 것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이미 서로 의지하는 것이라면 자성이 없는 것이다. 자성이 없다면 각이 있지 않을 것이요, 각이 있지 않은 것은 서로 상대하기 때문이다. 상대하여서 이루어진다면 각이 없지 않을 것이요, 각이 없지 않기 때문에 ‘각’이라 말하는 것이지 자성이 있어서 ‘각’이라 하는 것은 아니다.
이상으로 이각二覺을 간략히 밝히는 것을 마친다.

별기 ‘각의 뜻’이라 하는 것은 곧 두 가지가 있으니, 본각과 시각을 말한다. 본각이란 이 심성이 불각상을 여읜 것을 말하니, 이 각조覺照의 성질을 본각이라 하는 것이다. 이는 아랫글에서 “이른바 자체에 대지혜광명의 뜻이 있기 때문이며”84)라고 한 것과 같다. 시각이란 바로 이 심체가 무명의 연을 따라 움직여서 망념을 일으키지만, 본각의 훈습의 힘에 의하여 차츰 각의 작용이 있으며 구경에 가서는 다시 본각과 같아지는 것이니, 이를 시각이라 말하는 것이다.

‘불각의 뜻’을 말하는 것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근본불각根本不覺이며, 둘째는 지말불각枝末不覺이다. 근본불각이란 알라야식 내의 근본무명을 불각이라 이름하는 것을 말하며, 이는 아랫글에서 “알라야식에 의하여 무명이 있다고 말하니 불각하여 일어나서”85)라고 한 말과 같기 때문이다. 지말불각이라고 하는 것은 무명에서 일어난 일체의 염법을 모두 불각이라 이름하는 것을 말하며, 이는 아랫글에서 “일체의 염법이 모두 불각상이기 때문이다.”86)라고 한 말과 같다. 만약 식상識相의 차별로 근본이 지말과 다름을 간별하는 문에 의한다면 알라야식 중에 오직 본각과 본불각本不覺이 있을 뿐이며, 만약 식체識體가 둘이 없어 지말을 포괄하여 근본에 돌아가게 하는 문에 의한다면 저 시각과 지말불각도 또한 알라야식 내의 뜻이다.

001_0748_c_01L於不覺不覺待於本覺本覺待於始
001_0748_c_02L旣互相待則無自性無自性者
001_0748_c_03L則非有覺非有覺者由互相待
001_0748_c_04L待而成則非無覺非無覺故說名
001_0748_c_05L爲覺非有自性名爲覺也略明二覺
001_0748_c_06L竟在於前

001_0748_c_07L

言覺義者卽有二種謂本覺
001_0748_c_08L始覺言本覺者謂此心性離不覺
001_0748_c_09L是覺照性名爲本覺如下文
001_0748_c_10L云所謂自體有大智慧光明義故
001_0748_c_11L始覺者卽此心體隨無明緣
001_0748_c_12L作妄念而以本覺熏習力故稍有
001_0748_c_13L覺用乃至究竟還同本覺是名
001_0748_c_14L始覺言不覺義亦有二種一者
001_0748_c_15L根本不覺二者枝末不覺根本不
001_0748_c_16L覺者謂梨耶識內根本無明名爲
001_0748_c_17L不覺如下文云依阿梨耶識說有
001_0748_c_18L無明不覺而起故言枝末不覺者
001_0748_c_19L謂無明所起一切染法皆名不覺
001_0748_c_20L如下文云一切染法皆是不覺相故
001_0748_c_21L若依識相差別簡本異末義門
001_0748_c_22L梨耶識中唯有本覺及本不覺
001_0748_c_23L就識體無二攝末歸本義門則彼
001_0748_c_24L始覺及末不覺亦是梨耶識內之義

001_0749_a_01L그리하여 위에서 “이 식에 두 가지 뜻이 있어서”라고 한 것은 이와 같은 두 가지 종류의 뜻을 통틀어 다 포함한 것이며, 따라서 아래에서 해석하는 중에 본각과 시각의 두 각과 두 불각의 뜻을 모두 든 것이다.

심체가 다만 불각이 없기 때문에 본각이라 해야 하는가, 심체에 각조의 작용이 있음을 본각이라 이름해야 하는가? 만약 다만 불각이 없음을 본각이라고 하는 것이라면 또한 각조가 없을 수도 있으니, 그렇다면 이는 불각일 것이고, 만일 각조의 작용이 있기 때문에 본각이라 하는 것이라면 이 각이 번뇌를 끊은 것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만약 번뇌를 끊지 못했다면 각조의 작용이 없는 것이요, 만약 번뇌를 끊음이 있다면 범부가 없을 것이다.

비단 어두움(불각)이 없을 뿐만 아니라87) 또한 명조明照(즉 각조)의 작용도 있는 것이니, 이 각조의 작용이 있기 때문에 또한 번뇌를 끊음도 있는 것이다. 이 뜻이 무엇인가? 만약 먼저 미혹했다가 뒤에 깨닫는 것을 각이라고 하는 입장에 선다면 시각에 각이 있는 것이지 본각에는 각이 없을 것이다. 만약 본래 미혹하지 않음을 각이라 하는 입장에 선다면 본각은 각이고 시각은 각이 아닐 것이다. 번뇌를 끊는 뜻도 또한 이와 같아서, 앞서는 번뇌가 있었으나 뒤에 번뇌가 없어진 것을 끊음이라 한다면 시각은 끊음이 있고 본각은 끊음이 없으며, 본래부터 번뇌를 여읜 것을 끊음이라 한다면 본각은 끊은 것이고 시각은 끊은 것이 아니다. 만약 이런 뜻88)에 의한다면 본래 끊었기 때문에 본래 범부가 없는 것이니, 이는 아랫글에서 “일체의 중생은 본래 열반ㆍ보리의 법에 상주하여 들어가 있으니”89)라고 한 말과 같다. 그러나 본각이 있기 때문에 본래 범부가 없다고 말하지만, 시각이 아직 있지 않기 때문에 본래 범부가 있는 것이니, 그러므로 잘못이 없는 것이다. 만약 네가 본각이 있기 때문에 본래 범부가 없다고 말한다면 끝내 시각이 없을 것이니, 무슨 시각 작용을 할 범부가 있겠는가? 그 범부도 또한 끝내 시각이 없다면 본각이 없는 것이니, 무슨 본각에 의하여 범부가 없다고 말하겠는가?

001_0749_a_01L故上云此識有二義者通含如是
001_0749_a_02L二種之意故下釋中通擧本始二
001_0749_a_03L覺及二不覺義也爲當心體只
001_0749_a_04L無不覺故名本覺爲當心體有覺
001_0749_a_05L照用名爲本覺若言只無不覺名
001_0749_a_06L本覺者可亦無覺照故是不覺
001_0749_a_07L言有覺照故名本覺者未知此覺
001_0749_a_08L爲斷惑不若不斷惑則無照用
001_0749_a_09L如其有斷則無凡夫非但無
001_0749_a_10L亦有明照以有照故亦有斷
001_0749_a_11L此義云何若就先眠後覺名爲
001_0749_a_12L覺者始覺有覺本覺中無若論
001_0749_a_13L本來不眠名爲覺者本覺是覺
001_0749_a_14L覺則非覺斷義亦爾先有後無名
001_0749_a_15L爲斷者始覺有斷本覺無斷
001_0749_a_16L來離惑名爲斷者本覺是斷始覺
001_0749_a_17L非斷若依是義本來斷故本來
001_0749_a_18L無凡如下文云一切衆生本來常
001_0749_a_19L住入於涅槃菩提之法然雖曰有
001_0749_a_20L本覺故本來無凡而未有始覺故
001_0749_a_21L本來有凡是故無過若汝言由有
001_0749_a_22L本覺本來無凡則終無始覺望何
001_0749_a_23L有凡者他亦終無始覺則無本覺
001_0749_a_24L依何本覺以說無凡當知由有本

001_0749_b_01L본각이 있기 때문에 본래 불각이 없고, 불각이 없기 때문에 끝내 시각이 없는 것이며, 시각이 없기 때문에 본래 본각이 없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본각이 없음에 이른 것은 그 비롯됨이 본각이 있기 때문이요,90) 본각이 있는 것은 시각이 있기 때문이며 시각이 있는 것은 불각이 있기 때문이며 불각이 있는 것은 본각에 의하기 때문이다. 이는 윗글의 “본각의 뜻이란 시각의 뜻에 대하여 말한 것이니, 시각이란 바로 본각과 같기 때문이며, 시각의 뜻은 본각에 의하기 때문에 불각이 있으며, 불각에 의하므로 시각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91)라는 말과 같다. 이와 같이 전전展轉하여 서로 의지하니, 바로 모든 법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있는 것도 아니며, 있는 것이 아니지만 없는 것도 아님을 나타내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 본각성本覺性이 통틀어 염ㆍ정의 인성因性이 되어야 하는가, 다만 모든 정법의 본성이기만 해야 하는가? 만약 다만 정법의 인이라고만 말한다면 무슨 까닭으로 경(『능가경』)에서 “여래장은 선ㆍ불선의 인이라”92)하여 이밖에도 자세히 설명하였으며, 만약 통틀어 염정을 일으키는 것이라면, 무슨 까닭으로 (『기신론』에서) “성공덕을 구족한다.”라고만 말하고, ‘성염환性染患을 구족한다.’라고는 말하지 않았는가?

이 이理는 통틀어 염ㆍ정과 함께 성性이 되는 것이니, 그러므로 오직 ‘성공덕을 구족한다’고 말한 것이다. 이 뜻이 무엇인가? 이理가 정성淨性을 여의었기 때문에 연을 따라 모든 염법을 일으킬 수 있으며, 또 염성染性을 여의었기 때문에 연을 따라 모든 정법淨法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염ㆍ정법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통틀어 염ㆍ정의 본성이 되는 것이며, 염ㆍ정성染淨性을 여의었기 때문에 오직 성공덕이 되는 것이니, 어째서 염ㆍ정성을 여의어야만 모든 공덕을 이루게 되는가? 염ㆍ정성을 집착하는 것은 모두 망상이기 때문이다.

(B) 자세히 풀이함

이 아래는 두 번째로 본각과 시각의 두 각을 자세히 풀이하였으니, 이 중 먼저 시각을 풀이하였고 뒤에서는 본각을 자세히 풀었다.

Ⓐ 시각을 풀이함

처음 중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전체적으로 ‘만滿’과 ‘불만不滿’의 뜻을 나타냈고,

001_0749_b_01L覺故本無不覺無不覺故終無始
001_0749_b_02L無始覺故本無本覺至於無本
001_0749_b_03L覺者源由有本覺有本覺者由有
001_0749_b_04L始覺有始覺者由有不覺有不覺
001_0749_b_05L者由依本覺如下 [15] 文云本覺義者
001_0749_b_06L對始覺義說以始覺者卽同本覺
001_0749_b_07L始覺義者依本覺故而有不覺
001_0749_b_08L不覺故說有始覺當知如是展轉
001_0749_b_09L相依卽顯諸法非無而非有非有
001_0749_b_10L而非無也此本覺性爲當通
001_0749_b_11L爲染淨因性爲當但是諸淨法性
001_0749_b_12L若言但是淨法因者何故經云如
001_0749_b_13L來之藏是善不善因乃至廣說
001_0749_b_14L通作染淨者何故唯說具足性功
001_0749_b_15L不說具足性染患耶此理
001_0749_b_16L通與染淨作性是故唯說具性功
001_0749_b_17L是義云何以理離淨性故能
001_0749_b_18L隨緣作諸染法又離染性故能隨
001_0749_b_19L緣作諸淨法以能作染淨法故通
001_0749_b_20L爲染淨性由離染淨性故唯是性
001_0749_b_21L功德何以得離染淨性乃成諸功
001_0749_b_22L取著染淨性皆是妄想故

001_0749_b_23L
此下第二廣釋二覺於中先釋始覺
001_0749_b_24L後廣本覺初中有三一者總標滿不

001_0749_c_01L둘째는 따로 시각의 차별을 풀이하였고, 셋째는 (시각이) 본각과 다르지 않음을 전체적으로 밝혔다.

a. 전체적으로 ‘만’과 ‘불만’의 뜻을 나타냄

또 심원心源을 깨달았기 때문에 구경각究竟覺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며, 심원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구경각이 아닌 것이다.

전체적으로 표시하는 중에 “심원을 깨달았기 때문에 구경각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며”라고 한 것은 불지佛地93)에 있는 것이요, “심원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구경각이 아닌 것이다.”라는 것은 금강유정金剛喩定94) 이하이다.

b. 따로 시각의 차별을 풀이함

이 뜻이 무엇인가? 범부 정도의 사람은 먼저의 생각에 악이 일어난 것을 알기 때문에 뒤에 일어나는 생각을 그치게 하여 그 (악의 생각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니, 이는 또한 각이라고 이름을 붙이지만 바로 불각이기 때문이다. 이승二乘의 관지觀智와 초발의보살初發意菩薩95) 정도의 사람 등은 생각의 이상異相을 깨달아 생각에 이상이 없으니, 이는 추분별집착상麤分別執著相96)을 버렸기 때문이며, 따라서 상사각相似覺이라 이름한다. 법신보살法身菩薩97) 정도의 사람 등은 생각의 주상住相을 깨달아 생각에 주상이 없으니, 이는 분별추념상分別麤念相을 여의었기 때문이며, 따라서 수분각隨分覺이라 이름한다. 보살지菩薩地가 다한 정도의 사람은 방편을 만족시켜서 일념一念이 상응하고 마음의 처음 일어나는 상相을 깨달아 마음에 초상初相이 없으니, 이는 미세념微細念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이며, 심성心性을 보게 되어 마음이 곧 상주하니, 이를 구경각이라고 이름한다. 그러므로 경에서 “만약 어떤 중생이 무념無念을 볼 수 있다면 곧 불지佛智에 향함이 된다.”98)고 말하였다.

다음 따로 풀이하는 중에 사상四相99)에 의하여 설명하였으니, 이 중에서 먼저 사상四相을 밝히고, 다음에 글을 풀이하겠다.

a) 사상을 밝힘

이 중에 사상이 동시에 있다고 해야 하는가, 전후의 순서가 있다고 해야 하는가? 이는 어째서 의심하는 것인가? 만약 동시라고 한다면 반대로 『기신론』에서는 사상이 깨달을 때에는 차별됨을 말하였고, 만약 전후의 순서가 있는 것이라면 반대로 아래에서100) 사상이 동시에 있다고 말하였다.

어떤 이의 설은, 이는 살바다종薩婆多宗101)의 사상에 의하여

001_0749_c_01L滿義二者別解始覺差別三者總明
001_0749_c_02L不異本覺

001_0749_c_03L
又以覺心源故名究竟覺不覺心源故
001_0749_c_04L非究竟覺

001_0749_c_05L
總標中言覺心源故名究竟覺者
001_0749_c_06L於佛地不覺心源故非究竟覺者
001_0749_c_07L剛已還也

001_0749_c_08L
此義云何如凡夫人覺知前念起惡故
001_0749_c_09L能止後念令其不起雖復名覺卽是不
001_0749_c_10L覺故如二乘觀智初發意菩薩等
001_0749_c_11L於念異念無異相以捨麤分別執著相
001_0749_c_12L名相似覺如法身菩薩等覺於念
001_0749_c_13L念無住相以離分別麤念相故
001_0749_c_14L隨分覺如菩薩地盡滿足方便一念
001_0749_c_15L相應覺心初起心無初相以遠離微細
001_0749_c_16L念故得見心性心卽常住名究竟覺
001_0749_c_17L是故脩多羅說若有衆生能觀無念者
001_0749_c_18L則爲向佛智故

001_0749_c_19L
次別解中約四相說此中先1) [8]
001_0749_c_20L然後消文此中四相爲當同
001_0749_c_21L爲是前後此何所疑若同時那
001_0749_c_22L論說四相覺時差別若前後那下言
001_0749_c_23L四相俱時而有或有說者此依薩婆
001_0749_c_24L「明」作「時」{甲}

001_0750_a_01L사상의 체는 동시이지만 사상의 용은 전후라 하니, 작용이 전후이기 때문에 깨달을 때에 차별을 지으며 본체는 동시이므로 동시에 있는 것이라 한다고 하였다. 어떤 이의 설은 성실종成實宗102)의 전후사상前後四相(사상에 전후의 차별이 있음)에 의하면서도 동시에 있다고 하였으니, 본각에서 사상을 바라본다면 사상의 전후 차별이 없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동시에 있다고 한 것이요, 따라서 사상이 모두 자립함이 없다고 하였다. 어떤 이의 설은 이것은 대승비밀사상大乘秘密四相103)이니, 사상을 깨달을 때에는 전후가 심천深淺이 있으나 깨달은 사상은 동시에 있다고 하였다.
이 뜻이 무엇인가? 저 심성이 본래 생멸상을 여의었으나 무명이 있어서 자기의 심성을 모르는 것이며, 심성을 어김에 의하여 적정을 여의기 때문에 동념動念의 사상을 일으켜 내는 것이니, 사상은 무명과 화합하는 힘에 의하여 심체로 하여금 생주이멸케 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소승의 논의 중에 “마음이 미래에 있을 때는 아직 생멸을 하지 않다가 업력業力에 의하여 사상을 끌어서 심법心法으로 하여금 생주이멸하게 한다.”104)라고 하는 것과 같다. 대승의 사상도 또한 그러함을 알아야 할 것이니, 이는 경(『부증불감경』)에서 “곧 이 법신이 모든 번뇌에 의하여 요동하게 되어 생사에 왕래함을 중생이라 이름한다.”105)라고 한 말과 같으며, 이 논의 아랫글에서 “자성청정심도 무명의 바람에 의하여 움직일 때”106)라고 한 말도 바로 이를 이르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설명하면 그러하나, 이 중에서 분별한다면 사상 안에 각각 차별이 있으니, 생삼生三, 주사住四, 이륙異六, 멸칠滅七을 말한다.
생상生相이 셋이라는 것은, 첫째 업상業相을 말하니, 무명에 의하여 불각의 망념이 움직여 비록 생멸이 있지만 견분見分107)과 상분相分108)이 아직 나뉘지 않은 것이니, 이는 마치 아직 오지 않은 생상이 장차 곧 작용하려는 때에 이른 것과 같다. 둘째는 전상轉相이니, 동념動念에 의하여 다음에 능견能見을 이루는 것을 말함이니, 이는 마치 아직 오지 않은 생상이 막 작용하는 때에 이른 것과 같다. 셋째는 현상現相이니, 능견에 의하여 경상境相을 나타내는 것을 이름하니,

001_0750_a_01L多宗四相四體同時四用前後
001_0750_a_02L前後故覺時差別體同時故名俱
001_0750_a_03L時而有或有說者是依成實前後四
001_0750_a_04L而言俱時而有者以本覺望四相
001_0750_a_05L則無四相前後差別故言俱時而有
001_0750_a_06L皆無自立或有說者此是大乘秘密
001_0750_a_07L四相覺四相時前後淺深所覺四
001_0750_a_08L俱時而有是義云何夫心性本來
001_0750_a_09L離生滅相而有無明迷自心性由違
001_0750_a_10L心性離於寂靜故能生起動念四相
001_0750_a_11L四相無明和合力故能令心體生住
001_0750_a_12L異滅如似小乘論義之中心在未來
001_0750_a_13L未逕生滅而由業力引於四相能令
001_0750_a_14L心法生住異滅大乘四相當知亦爾
001_0750_a_15L如經言卽此法身爲諸煩惱之所漂
001_0750_a_16L往來生死名爲衆生此論下文
001_0750_a_17L自性淸淨心因無明風動正謂此
001_0750_a_18L總說雖然於中分別者四相之
001_0750_a_19L內各有差別謂生三住四異六
001_0750_a_20L生相三者一名業相謂由無明
001_0750_a_21L不覺念動雖有起滅見相未分
001_0750_a_22L如未來生相將至正用之時二者轉
001_0750_a_23L謂依動念轉成能見如未來生至
001_0750_a_24L正用時三者現相謂依能見現於境

001_0750_b_01L이는 마치 아직 오지 않은 생상이 현재시現在時에 이른 것과 같다. 무명이 이 삼상三相과 화합하여 일심의 체를 움직여 전상轉相을 따라 현상現相에 이르는 것이, 마치 소승의 미래장심未來藏心109)이 그 생상을 따라서 전전하여 현재에 이른 것과 같으며, 이제 대승 중에서 여래장심如來藏心이 생상을 따라 현재에 이르는 것 또한 그 뜻이 이와 같다. 이 셋은 모두 알라야식 자리에서 가지는 차별이며, 이 중에 자세한 말은 아래 문장에서 하겠다. 이를 매우 깊은 세 가지 생상이라 이름한다.

주상住相이 넷이라 함은, 이 무명이 생상과 화합함에 의하여 주상을 내는 마음에 아我와 아소我所110)가 없는 것임을 모르기 때문에 네 가지의 주상을 일으켜 내는 것이니, 이른바 아치我癡와 아견我見과 아애我愛와 아만我慢111)이다. 이러한 네 가지가 생상에 의하여 능상能相인 심체心體를 일으켜, 주상의 자리에 이르게 하여 안으로 반연하여 머물게 하기 때문에 주상이라 이름하며, 이 넷은 모두 제7식의 자리에 있다.

이상異相이 여섯이라 함은, 무명이 저 주상과 화합하여 계탁하는 바의 아我ㆍ아소我所가 공한 것임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이로 말미암아 여섯 가지의 이상異相을 일으키니, 이른바 탐貪ㆍ진瞋ㆍ치癡ㆍ만慢ㆍ의疑ㆍ견見112)이다. 이는 『신론新論』113)에서 “번뇌의 자성이 오직 여섯 가지가 있다.”114)라고 한 말과 같으니, 이를 두고 한 말이다. 무명이 이 여섯 가지와 화합하여 능상能相인 주심住心을 이상異相의 자리에 이르게 하여 밖으로 향하여 반연케 하기 때문에 이상이라 이름하니, 이 여섯은 생기식生起識115)의 자리에 있다.

멸상滅相이 일곱이라 함은 무명이 이상異相과 화합하여, 바깥 경계는 위違ㆍ순順의 성격을 떠난 것임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이로 말미암아 일곱 가지의 멸상을 일으키니, 이른바 신身ㆍ구口 일곱 가지의 악업116)이다. 이러한 악업이 이심異心을 없애 악취惡趣에 떨어지게 하기 때문에 멸상이라 이름하며, 이는 마치 소승의 멸상이 현재심現在心을 없애 과거에 들어가게 함과 같으니 대승의 멸상도 그러함을 알아야 한다.

이리하여 사상의 일어남은 일심이 유전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은 다 근본무명을 원인으로 하는 것이다.

001_0750_b_01L如未來生至現在時無明與此三
001_0750_b_02L相和合動一心體隨轉至現猶如小
001_0750_b_03L乘未來藏心隨其生相轉至現在
001_0750_b_04L大乘中如來藏心隨生至現義亦如
001_0750_b_05L此三皆是阿梨耶識位所有差別
001_0750_b_06L於中委悉下文當說是名甚深三種
001_0750_b_07L生相住相四者由此無明與生和合
001_0750_b_08L迷所生心無我我所故能生起四種
001_0750_b_09L住相所謂我癡我見我愛我慢如是
001_0750_b_10L四種依生相起能相心體令至住位
001_0750_b_11L內緣而住故名住相此四皆在第七
001_0750_b_12L識位異相六者無明與彼住相和合
001_0750_b_13L不覺所計我我所空由是能起六種
001_0750_b_14L異相所謂貪瞋癡慢疑見如新論云
001_0750_b_15L煩惱自性唯有六種此之謂也無明
001_0750_b_16L與此六種和合能相住心令至異位
001_0750_b_17L外向攀緣故名異相此六在於生起
001_0750_b_18L識位滅相七者無明與此異相和合
001_0750_b_19L不覺外塵違順性離由此發起七種
001_0750_b_20L滅相所謂身口七支惡業如是惡業
001_0750_b_21L能滅異心令墮惡趣故名滅相猶如
001_0750_b_22L小乘滅相滅現在心令入過去
001_0750_b_23L乘滅相當知亦爾由是義故四相生
001_0750_b_24L一心流轉一切皆因根本無明

001_0750_c_01L이는 경(『승만경』)에서 “무명주지無明住地117)가 그 힘이 가장 크다.”118)라고 하고, 이 논(『기신론』)에서 “무명이 모든 염법을 내고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하니”119)라고 한 말과 같다. 또 소상所相의 심120)은 일심에서 오는 것이며, 능상能相의 상121)은 무명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일어난 상이 그것이 이르는 곳에 따라서 그 작용에 차별이 있어서 경계의 별상을 취하는 것을 수법數法122)이라 이름하니, 이는 참으로 그 근본무명이 평등성을 어겼기 때문이다. 그 소상所相의 심이 이르는 곳마다 총괄하는 주인이 되어 경계의 통상通相을 요달함을 심왕心王123)이라 말하니 그 본래의 일심이 모든 법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이는 『중변분별론』124)에서 “오직 경계만을 아는 것을 심心이라 하고, 차별하는 것을 심법心法이라 한다.”125)라고 하고, 장항長行에서 이를 해석하여 “만약 경계의 통상을 요달한다면 이를 심心이라 하며, 경계의 별상을 취하는 것을 심법心法이라 한다.”126)라고 한 말과 같다. 『유가사지론』에서도 이 설과 똑같다.127) 이리하여 모든 외도가 흔히 심왕을 재주宰主니 짓는 자니 받는 자니라고 계탁하는데 이는 그것(심왕)이 자성이 없이 연을 따라 유전하는 것임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이 사상을 총괄하여 일념이라 하며, 이 일념ㆍ사상에 의하여 사위四位의 단계적인 강하를 밝혔다. 이는 본래 무명불각의 힘에 의하여 생상 등 여러 가지 몽념夢念128)을 일으켜 그 심원心源을 움직여 점차로 멸상滅相에 이르며, 오래도록 삼계에 잠들어 육취六趣에 유전하다가, 이제 본각의 부사의훈不思議熏129)에 의하여 생사를 싫어하고 열반을 즐겨 찾는 마음을 일으켜 점점 본원으로 향하여 비로소 멸상 내지 생상을 쉬고 환하게 크게 깨달아 자심自心이 본래 동요한 바가 없음을 깨닫고, 이제는 고요한 바도 없으며 본래 평등하여 일여一如130)의 자리에 머물게 됨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니, 이는 경(『금광명경』)에서 말한 꿈에 하수河水를 건너는 비유와도 같은 것이다.131) 이 중에서 자세히 설명한 대의도 이와 같다.

b) 글을 풀이함

다음은 그 글을 해석하는 것이니, 사상에 의하여 사위四位를 분별하는 것이며, 사위에는 네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깨닫는 사람(能覺人)이요,

001_0750_c_01L如經言無明住地其力最大此論云
001_0750_c_02L當知無明力能生一切染法也又所
001_0750_c_03L相之心一心而來能相之相無明
001_0750_c_04L所起所起之相隨其所至其用有
001_0750_c_05L差別取塵別相名爲數法良由其
001_0750_c_06L根本無明違平等性故也其所相心
001_0750_c_07L隨所至處每作總主了塵通相
001_0750_c_08L名心王由其本一心是諸法之總源
001_0750_c_09L故也如中邊論云唯塵智名心
001_0750_c_10L別名心法長行釋云若了塵通相名
001_0750_c_11L取塵別相名爲心法瑜伽論中亦
001_0750_c_12L同是說以是義故諸外道等多於心
001_0750_c_13L王計爲宰主作者受者由不能知其
001_0750_c_14L無自性隨緣流轉故也總此四相名
001_0750_c_15L爲一念約此一念四相以明四位階
001_0750_c_16L欲明本依無明不覺之力起生相
001_0750_c_17L等種種夢念動其心源轉至滅相
001_0750_c_18L長眠三界流轉六趣今因本覺不思
001_0750_c_19L議熏起厭樂心漸向本源始息滅
001_0750_c_20L相乃至生相朗然大悟覺了自心本
001_0750_c_21L無所動今無所靜本來平等住一
001_0750_c_22L如牀如經所說夢度河喩此中應廣
001_0750_c_23L說大意如是次消其文約於四相以
001_0750_c_24L別四位四位之中各有四義一能覺

001_0751_a_01L둘째는 깨달음의 대상(所覺相)이요, 셋째는 깨달음의 이익(覺利益)이요, 넷째는 깨달음의 범위(覺分齊)이다.

(a) 첫 번째 위:불각

처음의 위位에 “범부 정도의 사람”이라고 한 것은 깨닫는 사람이니, 지위가 십신十信132)에 있다. “먼저의 생각에 악이 일어난 것을 알기 때문에”라는 것은 깨달음의 대상을 나타냄이니 아직 십신에 들어가기 전에는 신身ㆍ구口의 일곱 가지 악업을 갖추어 일으켰다가 이제 신위信位에 들어가서는 일곱 가지 악업이 실로 나쁜 것임을 잘 알게 되기 때문에 ‘먼저의 생각에 악이 일어난 것을 알기 때문에’라고 말한 것이며, 이는 멸상滅相을 깨달은 뜻을 밝힌 것이다. “뒤에 일어나는 생각을 그치게 하여 (그 악의 생각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니”라는 것은 깨달음의 이익이니, 앞에서는 불각으로 인하여 일곱 가지 악념을 일으켰다가 이제는 이미 깨달았기 때문에 멸상을 그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각이라고 이름을 붙이지만 바로 불각이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은 깨달음의 범위를 밝힌 것이니, 멸상이 실로 나쁜 것임을 알았지만 멸상이 꿈이라는 것은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이다.

(b) 두 번째 위:상사각

두 번째 위에 “이승의 관지와 초발의보살 정도의 사람”이라 한 것은 십해十解133) 이상의 삼현보살三賢菩薩134)이며, 십해의 초심初心을 발심주發心住라 한다. 이 발심주의 사람을 들어서 겸하여 후위後位까지 취하므로 초발의보살 등이라 말한 것이니 이는 깨닫는 사람을 밝혔다. “생각의 이상을 깨달아”라는 것은 깨달음의 대상을 밝힌 것이니, 앞서 말한 여섯 가지의 이상異相과 같으며 이는 내외를 분별하여 아我와 아소我所라고 계탁하는 것이다. 이 삼승인三乘人135)은 아我가 없음을 분명히 알기 때문에 생각의 이상을 깨달았다고 한 것이다. 이는 소상所相인 심체가 무명에 의해 잠들게 되어 이상을 꿈꾸어서 모든 번뇌를 일으키다가 이제 점차 지혜와 상응하여 이상의 꿈으로부터 조금 깨닫게 됨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생각에 이상이 없으니”라는 것은 깨달음의 이익이니, 이미 이상의 꿈에서 깨어났기 때문에 저 여섯 가지 이상이 영구히 없어진 것이며 그러므로 생각에 이상이 없다고 한 것이다. “추분별집착상을 버렸기 때문이며 따라서 상사각이라 이름한다.”는 것은 깨달음의 범위이니, 역경계逆境界와 순경계順境界를 분별하여 탐貪ㆍ진瞋 등을 일으킴을

001_0751_a_01L二所覺相三覺利益四覺分齊
001_0751_a_02L初位中言如凡夫人者是能覺人
001_0751_a_03L在十信也覺知前念起惡者顯所覺
001_0751_a_04L未入十信之前具起七支惡業
001_0751_a_05L今入信位能知七支實爲不善故言
001_0751_a_06L覺知前念起惡此明覺於滅相義也
001_0751_a_07L能止後念令不起者是覺利益前由
001_0751_a_08L不覺起七支惡念今旣覺故能止
001_0751_a_09L滅相也言雖復名覺卽是不覺者
001_0751_a_10L覺分齊雖知滅相實是不善而猶未
001_0751_a_11L覺滅相是夢也第二位中言如二乘
001_0751_a_12L觀智初發意菩薩等者十解以上三
001_0751_a_13L賢菩薩十解初心名發心住擧此
001_0751_a_14L初人兼取後位故言初發意菩薩等
001_0751_a_15L是明能覺人也覺於念異者明所覺
001_0751_a_16L如前所說六種異相分別內外計
001_0751_a_17L我我所此三乘人了知無我以之故
001_0751_a_18L言覺於念異欲明所相心體無明所
001_0751_a_19L夢於異相起諸煩惱而今漸與
001_0751_a_20L智慧相應從異相夢而得微覺也
001_0751_a_21L無異相者是覺利益旣能覺於異相
001_0751_a_22L之夢故彼六種異相永滅以之故言
001_0751_a_23L念無異相也捨麤分別執著相故名
001_0751_a_24L相似覺者是覺分齊分別違順起貪

001_0751_b_01L추분별집착상이라 이름하며, 이러한 추한 집착상을 버리긴 했으나 아직 무분별의 깨달음을 얻지 못했으므로 상사각이라 하는 것이다.

(c) 세 번째 위:수분각

세 번째 위에 “법신보살” 등이라 한 것은 초지 이상 십지十地136)의 보살이니, 이는 깨닫는 사람이다. “생각의 주상을 깨달아”라는 것은 주상에서는 마음 밖에 경계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인人ㆍ법法137)을 고집하여 안으로 반연하여 머무르다가 법신보살이 되어서는 이공二空138)을 통달하게 된 것이다. 이는 소상所相의 심체가 이미 이상을 깨달았으나 아직도 주상의 꿈에 잠들어 있다가, 이제 무분별지와 상응하여 주상의 꿈으로부터 깨닫게 되었음을 밝히려 하기 때문에 ‘생각의 주상을 깨달아’라고 말하는 것이니, 이는 깨달음의 대상이다. “생각에 주상이 없으니”라는 것은 네 가지 주상이 없어져서 일어나지 않는 것이니, 이는 깨달음의 이익이다. “분별추념상을 여의었기 때문이며”라는 것은 인人ㆍ아我의 집착을 분별이라 한 것이니, 앞서의 이상의 추분별과 구별하기 위하여 ‘추麤’라 이름하지 않은 것이며, 법아집法我執을 추념이라 하였으니, 뒤에 생상의 미세념微細念139)과 다르기 때문에 추념이라 한 것이다. 비록 이미 무분별각無分別覺을 얻었지만 아직도 생상의 꿈에 잠들어 있기 때문에 수분각이라 이름하니, 이는 깨달음의 범위이다.

(d) 네 번째 위:구경각

네 번째 위에 “보살지가 다한 정도의 사람”이란 무구지無垢地140)를 말하는 것이니, 이는 전체적으로 든 것이다. 아래 두 구절은 따로 이도二道를 밝혔다. “방편을 만족시켜서”라는 것은 방편도方便道141)이며, “일념이 상응하고”라는 것은 무간도無間道142)이다. 이는 『대법론』에서 “구경도究竟道143)란 금강유정을 말하며, 여기에 두 종류가 있으니 방편도섭方便道攝과 무간도섭無間道攝144)이다.”145)라고 한 말과 같으니, 이는 깨닫는 사람을 밝힌 것이다.
“마음의 처음 일어나는 상을 깨달아”라는 것은 깨달음의 대상을 밝힌 것이니, 마음이 처음 일어난다는 것은 무명에 의하여 생상이 있어 심체를 미혹하여 생각을 움직이게 하다가, 이제 본각을 떠나서는 불각이 없으며

001_0751_b_01L瞋等是名麤分別執著相雖捨如是
001_0751_b_02L麤執著想而猶未得無分別覺故名
001_0751_b_03L相似覺也第三位中法身菩薩等者
001_0751_b_04L初地以上十地菩薩是能覺人也
001_0751_b_05L於念住者住相之中雖不能計心外
001_0751_b_06L有塵而執人法內緣而住法身菩薩
001_0751_b_07L通達二空欲明所相心體前覺異相
001_0751_b_08L而猶眠於住相之夢今與無分別智
001_0751_b_09L相應從住相夢而得覺悟故言覺於
001_0751_b_10L念住是所覺相也念無住相者
001_0751_b_11L種住相滅而不起是覺利益也以離
001_0751_b_12L分別麤念相者人我執名分別
001_0751_b_13L前異相之麤分別故不名麤法我執
001_0751_b_14L名爲麤念異後生相之微細念故名
001_0751_b_15L麤念雖復已得無分別覺而猶眠於
001_0751_b_16L生相之夢故名隨分覺是覺分齊也
001_0751_b_17L第四位中如菩薩盡地者謂無垢地
001_0751_b_18L此是總擧下之二句別明二道滿
001_0751_b_19L足方便者是方便道一念相應者
001_0751_b_20L是無間道如對法論云究竟道者
001_0751_b_21L謂金剛喩定此有二種謂方便道攝
001_0751_b_22L無間道攝是明能覺人也覺心初起
001_0751_b_23L是明所覺相心初起者依無明
001_0751_b_24L有生相迷心體令動念今乃證知離

001_0751_c_01L바로 동념動念이 정심靜心임을 증득하여 알기 때문에, 마음이 처음 일어나는 것을 깨닫는다고 한 것이다. 이것은 마치 방향을 모를 때에는 동쪽을 서쪽이라고 하다가 방향을 알았을 때 서쪽이 곧 동쪽임을 아는 것과 같으니, 이 중에 있는 각의 뜻도 그와 같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마음에 초상이 없으니”라는 것은 깨달음의 이익을 밝힌 것이니, 본래 불각에 의하여 마음이 원래 일어난 것인데, 이제는 이미 깨달았기 때문에 마음에 일어나는 바가 없으니, 그러므로 마음에 초상이 없다고 한 것이다. 앞의 세 가지 지위에서는 여읜 바가 있기는 하나 그 동념이 여전히 일어나 아직 다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생각에 주상 등이 없다고 말하였고 이제 구경위究竟位에서는 동념이 모두 없어지고 오직 일심만이 있기 때문에 마음에 초상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미세념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이며” 이하는 깨달음의 범위를 밝힌 것이니 이 중에 두 구절이 있다. 첫째는 바로 깨달음의 범위를 밝혔고, “그러므로” 이하는 경전을 인용하여 이론이 성립됨을 증명하였다. 업상의 동하는 생각은 생각들 중에서도 가장 미세하므로 미세념이라 하였으며, 이 상이 모두 없어져서 영구히 남는 바가 없기 때문에 멀리 여의었다고 말하였다. 멀리 여의었을 때가 바로 불지佛地에 있는 것이니, 앞의 세 자리에서는 심원心源에 아직 이르지 못하여 생상이 아직 다 없어지지 않아서 마음이 여전히 무상無常하였으나, 이제 이 구경위의 자리에 와서는 무명이 영구히 없어지고 일심의 근원에 돌아가 다시는 동념을 일으킴이 없게 되었으므로 “심성을 보게 되어 마음이 곧 상주하니”라고 말하며, 다시 나아갈 바가 없는 것을 구경각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또한 아직 심원에 이르지 못하여 몽념이 다 없어지지 않았으므로 이러한 마음의 움직임을 없애려고 피안彼岸에 이르기를 바랐으나, 이제는 이미 심성을 보아서 몽상이 다 없어지고 자심이 본래 유전함이 없는 줄 깨달아 이제 고요히 쉬는 것도 없어지고 항상 스스로 일심이 일여一如의 자리에 머무르기 때문에 ‘심성을 보게 되어 마음이 곧 상주하니’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시각이 본각과 다르지 아니하므로, 이런 도리에 의하여 구경각이라 이름한다. 이는 바로 깨달음의 범위를 밝힌 것이다.

별기
만약 시각이 본각과 같아서 생멸을 여의었다고 말한다면

001_0751_c_01L本覺無不覺卽動念是靜心故言覺
001_0751_c_02L心初起如迷方時謂東爲西悟時乃
001_0751_c_03L知西卽是東當知此中覺義亦爾也
001_0751_c_04L心無初相者是明覺利益本由不覺
001_0751_c_05L有心元起今旣覺故心無所起
001_0751_c_06L言心無初相前三位中雖有所離
001_0751_c_07L其動念猶起未盡故言念無住相等
001_0751_c_08L今究竟位動念都盡唯一心在
001_0751_c_09L言心無初相也遠離以下明覺分齊
001_0751_c_10L於中二句初正明覺分齊是故以下
001_0751_c_11L引經證成業相動念念中最細
001_0751_c_12L微細念此相都盡永無所餘故言
001_0751_c_13L遠離遠離之時正在佛地前來三
001_0751_c_14L未至心源生相未盡心猶無常
001_0751_c_15L今至此位無明永盡歸一心源
001_0751_c_16L無起動故言得見心性心卽常住
001_0751_c_17L更無所進名究竟覺又復未至心源
001_0751_c_18L夢念未盡欲滅此動望到彼岸
001_0751_c_19L今旣見心性夢想都盡覺知自心本
001_0751_c_20L無流轉今無靜息常自一心住一
001_0751_c_21L如牀故言得見心性心卽常住
001_0751_c_22L是始覺不異本覺由是道理名究竟
001_0751_c_23L此是正明覺分齊也

001_0751_c_24L

若言始覺同於本覺離生滅

001_0752_a_01L이 말이 어떻게 통할 것인가? 『섭대승론』에서는 “본(법신)은 이미 상주하지만, 말(응신과 화신)이 본을 의지해서 상속하여 항상 있다.”146)라고 하고 이어서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다.

두 논서(『기신론』과 『섭대승론』)에서 나타내려는 뜻이 다르므로 이치가 서로 어긋나지 아니하니, 왜인가? 이 (『기신론』) 논주의 뜻은 본래 불각에 의하여 정심靜心을 동요시키지만 이제 불각을 그쳐서 다시 본래의 고요함에 돌아가게 됨을 나타내려 했기 때문에 ‘상주’라고 하였다. 한편 저 『섭대승론』의 뜻은 법신은 본래 상주하여 움직이지 않지만 저 법신에 의하여 복福ㆍ혜慧의 두 가지 행동을 일으켜 만덕萬德의 과보를 감득할 수 있게 됨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이미 인연에 의하여 일어났기 때문에 생멸을 여의지 않으며,147) 그러므로 ‘상속’이라 말하였다. 뜻을 갖추어서 설명하자면 비로소 만덕을 이루는 것에는 두 뜻을 갖추어야 한다.148) 앞의 뜻(『기신론』의 뜻)에 의하므로 상주하며 뒤의 뜻(『섭대승론』의 뜻)에 의하므로 생멸하는 것이니 생멸과 상주가 서로 방해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하나의 생각이 미혹하여 삼세를 두루하지만 일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하나하나의 털구멍이 모두 시방十方에 두루함과 같으니, 비록 시방에 두루하지만 한 털구멍도 더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리하여 부처와 부처가 이처럼 장애가 없는 것이니, 어찌 그 사이에 치우치게 집착하는 것을 용납하겠는가? 이는 『화엄경』의 게송에서 “모니牟尼가 삼세를 초월하셨으나 상호相好149)는 구족하시네. 무소주無所住에 머무르시어 법계가 다 청정하네. 인연 때문에 법이 생기고 인연 때문에 법이 없어지네. 이와 같이 여래를 볼 줄 알면 구경에 치혹癡惑을 멀리 여의리.”150)라고 한 것과 같다. 이제 두 논주가 각각 하나의 뜻을 서술하였으니 어찌 서로 방해됨이 있겠는가?

인용하여 증명하는 중에 “무념을 볼 수 있다면 곧 불지佛智에 향함이 된다.”라고 한 것은 인지因地에 있을 때 비록 미세념은 아직 여의지 못했으나 무념의 도리를 잘 보는 것이니, 이 잘 보는 것이 불지佛地에 향함이 된다고 하는 것이며, 이로써 불지에는 망념이 없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이는 인因을 들어 과果를 증명한 것이다.

001_0752_a_01L此說云何通如攝論云本旣
001_0752_a_02L常住末依於本相續恒在乃至
001_0752_a_03L廣說二意異故理不相違
001_0752_a_04L此論主意欲顯本由不覺動於
001_0752_a_05L靜心今息不覺還歸本靜故成常
001_0752_a_06L彼攝論意欲明法身本來常住
001_0752_a_07L不動依彼法身起福慧二行能感
001_0752_a_08L萬德報果旣爲因緣所起是故不
001_0752_a_09L離生滅故說相續具義而說
001_0752_a_10L成萬德要具二義依前義故常住
001_0752_a_11L依後義故生滅生滅常住不相妨
001_0752_a_12L以一一念迷徧三世不過一念
001_0752_a_13L如似一一毛孔皆徧十方雖徧
001_0752_a_14L十方不增毛孔佛佛如是無障無
001_0752_a_15L豈容偏執於其間哉如華嚴經
001_0752_a_16L偈云牟尼離三世相好悉具足
001_0752_a_17L住於無所住法界悉淸淨因緣故
001_0752_a_18L法生因緣故法滅如是觀如來
001_0752_a_19L究竟離癡惑今二論主各述一義
001_0752_a_20L有何相妨耶

001_0752_a_21L
引證中言能觀無念者則爲向佛智故
001_0752_a_22L在因地時雖未離念而能觀於
001_0752_a_23L無念道理說此能觀爲向佛地以是
001_0752_a_24L證知佛地無念此是擧因而證果也

001_0752_b_01L만일 인과를 통틀어 설명한 글을 인용하여 증명한다면, 『금고경』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들 수 있다. 즉, “모든 복도伏道151)에 의하여 기사심起事心152)이 멸하고, 법단도法斷道153)에 의하여 근본에 의지하는 마음(依根本心)154)이 멸하며, 승발도勝拔道155)에 의하여 근본심根本心156)이 다 없어진다.”157)는 것이다. 여기에서 ‘모든 복도’는 30심三十心을 말하며, 기사심起事心이 멸한다는 것은 『기신론』 중의 추분별집착상을 버리는 것과 같으니 바로 이상異相이 멸하는 것이다. ‘법단도’는 법신의 자리에 있는 것이며, ‘근본에 의지하는 마음이 멸하며’라는 것은 이 『기신론』 중의 분별추념상을 버린다는 말과 같으니 이는 바로 주상住相이 멸하는 것이다. ‘승발도’란 금강유정이며 ‘근본심이 다 없어진다’는 것은 『기신론』 중의 미세념을 멀리 여읜다는 말과 같으니 이는 생상生相이 다 없어진 것을 말한다. 이상으로 시각의 차별을 하나씩 밝혔다.

c. 시각이 본각과 다르지 않음을 전체적으로 밝힘

또 마음이 일어난다는 것은 알 만한 초상初相이 없는 것이며, 그런데도 초상을 안다고 하는 것은 곧 무념無念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 중생을 깨달았다고 이름하지 못하는 것은 본래부터 생각마다 상속하여 아직 망념을 떠나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니, 이를 무시무명無始無明이라 한다. 만약 망념이 없게 되면 심상心相의 생주이멸을 알게 되니 무념과 같아지기 때문이며 실로 시각의 차별이 없어지게 되니, 왜냐하면 사상四相이 동시에 있어서 모두 자립함이 없으며 본래 평등하여 각과 같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시각이 본각과 다르지 않음을 전체적으로 밝혔으니, 이 중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구경각상究竟覺相을 거듭 밝혔고, 둘째는 바로 시각이 본각과 다르지 않음을 밝혔다.

a) 구경각상을 거듭 밝힘

처음에 셋이 있으니, 첫째는 바로 구경상究竟相을 나타냈고, 둘째는 각이 아닌 것을 들어서 각인 것을 나타냈으며, 셋째는 경계에 대하여 지혜가 만족함158)을 자세히 나타내었다.

(a) 바로 구경상을 나타냄

처음에 “또 마음이 일어난다는 것은”이라 함은 위에서의 “마음의 처음 일어나는 상을 깨달아”라는 말을 나타낸 것이지, 깨달았을 때 초상이 있음을 안다는 뜻이 아니다. 그래서 “알 만한 초상이 없는 것이며”라고 말한 것인데, 그러면서도 마음에 처음 일어나는 상을 깨달았다고 한 것은

001_0752_b_01L若引通說因果文證者金鼓經言
001_0752_b_02L諸伏道起事心滅依法斷道依根本
001_0752_b_03L心滅依勝拔道根本心盡此言諸伏
001_0752_b_04L道者謂三十心起事心滅者猶此
001_0752_b_05L論中捨麤分別執著想卽是異相滅
001_0752_b_06L法斷道者在法身位位根本心滅
001_0752_b_07L猶此中說捨分別麤念相卽是住
001_0752_b_08L相滅也勝拔道者金剛喩定根本
001_0752_b_09L心盡者猶此中說遠離微細念是謂
001_0752_b_10L生相盡也上來別明始覺差別

001_0752_b_11L
又心起者無有初相可知而言知初相
001_0752_b_12L卽謂無念是故一切衆生不名爲覺
001_0752_b_13L以從本來念念相續未曾離念故說無
001_0752_b_14L始無明若得無念者則知心相生住異
001_0752_b_15L以無念等故而實無有始覺之異
001_0752_b_16L以四相俱時而有皆無自立本來平等
001_0752_b_17L同一覺故

001_0752_b_18L
第三總明始覺不異本覺此中有二
001_0752_b_19L一者重明究竟覺相二者正明不異
001_0752_b_20L本覺初中有三一者直顯究竟相
001_0752_b_21L二者擧非覺顯是覺三者對境廣顯
001_0752_b_22L智滿初中言又心起者者牒上覺心
001_0752_b_23L初起之言非謂覺時知有初相故言
001_0752_b_24L無有初相可知而說覺心初起相者

001_0752_c_01L마치 방향을 알았을 때 서쪽이 동쪽인 줄 아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이와 같이 여래가 마음을 깨달았을 때 처음의 동상動相이 바로 본래 고요한 것인 줄 아는 것이기 때문에 “곧 무념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b) 각이 아닌 것을 들어서 각인 것을 나타냄

“그러므로” 이하는 각이 아닌 것을 들어서 각인 것을 나타낸 것이니, 앞서 말한 것처럼 망념이 없는 것이 바로 각이므로 망념이 있는 것은 각이라 이름할 수 없다. 이것은 곧 금강심金剛心159) 이하의 일체 중생이 아직 무시무명의 망념을 여의지 못한 것이며, 그런 뜻에서 각이라고 이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는 사상의 꿈의 차별에 대하기 때문에 점차 깨닫는 것(漸覺)160)이라 말했지만 이제는 무명의 잠이 차이가 없는 점에 의하여 불각이라 말하니, 이는 『인왕경仁王經』161)에서 “처음 복인伏忍162)으로부터 정삼매頂三味에 이르기까지 제일의제第一義諦를 비추는 것은 견見이라 이름하지 못하니 이른바 견이란 살바야薩婆若163)이기 때문이다.”164)라고 말한 것과 같다.

(c) 경계에 대하여 지혜를 나타냄

“만약 망념이 없게 되면” 이하는 경계에 대하여 지혜를 나타내는 것이니, 만약 심원心源에 이르러 무념을 얻으면 곧 일체 중생은 일심이 동요하여 사상으로 차별된 것임을 두루 잘 알 수 있기 때문에 “심상心相의 생주이멸을 알게 되니”라고 하였다. 다음에 “무념과 같아지기 때문이며”라는 것은 위의 뜻을 해석한 것이다. 이 중에 의심을 두어 말하기를 “부처는 무념을 얻고 중생은 망념이 있어 유ㆍ무가 현격하게 구별되는데, 어떻게 무념이 유념을 알 수 있느냐?”라고 하니, 이러한 의심을 짓기 때문에 이 의심을 제거하여 “중생의 유념이 본래 무념이니, 무념을 얻어서 저것과 평등하게 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무념과 같아지기 때문이며’라고 말한 것이다. 이는 이미 무념과 평등하게 되었기 때문에 모든 생각의 사상四相을 두루 알게 되었음을 밝힌 것이다.

b) 시각이 본각과 다르지 않음을 밝힘

이 아래는 두 번째 바로 차별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비로소 망념이 없음을 깨달았다고 말하나 실은 사상이 본래 일어남이 없음을 깨달은 것이니 무슨 불각을 기다려 시각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실로 시각의 차별이 없어지게 되니”라고 하였으며, 아래는 이 뜻을 해석한 것이다.

별기 사상의 일어남이 뜻으로는 전후가 있으나 본래부터 동시에 서로 의지하는 것이다.

사상이 동시에 있으니 이는 일심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며, 일심을 떠난 밖에는 따로 자체가 없기 때문에

001_0752_c_01L如覺方時知西是東如是如來覺心
001_0752_c_02L之時知初動相卽本來靜是故說言
001_0752_c_03L卽謂無念也是故以下擧非顯是
001_0752_c_04L如前所說無念是覺是故有念不得
001_0752_c_05L名覺是卽金剛心以還一切衆生未
001_0752_c_06L離無始無明之念依是義故不得名
001_0752_c_07L然前對四相之夢差別故說漸覺
001_0752_c_08L今約無明之眠無異故說不覺如仁
001_0752_c_09L王經言始從伏忍至頂三昧照第一
001_0752_c_10L義諦不名爲見所謂見者是薩婆
001_0752_c_11L若故若得以下對境顯智若至心
001_0752_c_12L原得於無念卽能徧知一切衆生一
001_0752_c_13L心動轉四相差別故言卽知心相生
001_0752_c_14L住異滅次言以無念等故者釋成上
001_0752_c_15L此中有疑云佛得無念衆生有
001_0752_c_16L有無隔別云何無念能知有念
001_0752_c_17L作如是疑故遣之云衆生有念本來
001_0752_c_18L無念得無念與彼平等故言以無念
001_0752_c_19L等故是明旣得平等無念故能徧知
001_0752_c_20L諸念四相也此下第二正明無異
001_0752_c_21L曰始得無念之覺而覺四相本來無
001_0752_c_22L待何不覺而有始覺故言實無始
001_0752_c_23L覺之異下釋此義別記云以四相生起
有前後而從本已來
001_0752_c_24L時相
四相俱有爲心所成離一心外無

001_0753_a_01L“동시에 있어서 모두 자립함이 없으며 모두 자립함이 없기 때문에 본래 평등하여 각과 같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별기 마치 바닷물의 움직임을 파도라고 말하지만 파도는 자체가 없기 때문에 파도의 움직임은 없는 것이고, 바닷물은 자체가 있으므로 바닷물의 움직임이 있는 것과 같이, 마음과 사상도 그 뜻이 또한 이와 같다. 이런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권능가경』에서 “대혜야, 칠식은 유전하지 않아서 고락苦樂을 받지 않으니 열반의 인因이 아니나, 여래장이란 고락을 받기를 인과 함께하여 생하기도 하고 멸하기도 한다.”165)라고 말하고, 또 『부인경夫人經』(『승만경』)에서 “이 육식과 심법지心法智166)의 이 칠법七法167)이 찰나 동안도 머무르지 않아서 여러 고통을 심지 않으니,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즐겨 구할 수도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장이란 전제前際168)가 없으며,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법이며, 모든 고통을 심으며,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즐겨 구할 수 있습니다.”169)라고 하고 또 “생사란 이 두 법이 바로 여래장이니, 세간에서 쓰는 말에 따라 사死가 있고 생生이 있는 것이지 여래장에 생사가 있는 것이 아니다.”170)라고 하니 이 두 경이 똑같이 여래장이 생사에 유전하나 생사의 근본이 자체가 없음을 밝힌 것이다. 자체가 없기 때문에 따로 유전함이 없으며, 상相이 이미 유전함이 없다면, 체體가 무엇에 의하여 움직이겠는가? 그러므로 여래장에 생사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으니 이러한 뜻에 의하므로 사상이 오직 일심이며, 불각이 바로 본각과 같은 것이니, 그러므로 ‘본래 평등하여 각과 같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대승기신론소기회본 제2권


001_0753_a_01L別自體故言俱時而有皆無自立
001_0753_a_02L無自立故本來平等同一本覺也

001_0753_a_03L

猶如海水之動說名爲波波無
001_0753_a_04L自體故無波之動水有自體
001_0753_a_05L有水之動心與四相義亦如是
001_0753_a_06L顯是義故四卷經云大慧七識
001_0753_a_07L不流轉不受苦樂非涅槃因
001_0753_a_08L來藏者受苦樂與因俱若生若
001_0753_a_09L又夫人經云於此六識及心法
001_0753_a_10L此七法刹那不住不種衆苦
001_0753_a_11L不得厭苦樂求涅槃世尊如來藏
001_0753_a_12L無前際不起不滅法種諸苦
001_0753_a_13L得厭苦樂求涅槃又云生死者
001_0753_a_14L此二法是如來藏世間言說故有
001_0753_a_15L死有生非如來藏有生有死此二
001_0753_a_16L經意同明卽如來藏流轉生死
001_0753_a_17L死根本無自體無自體故無別流
001_0753_a_18L相旣無轉體何由動故言非
001_0753_a_19L如來藏有生有死由是義故四相
001_0753_a_20L唯是一心不覺卽同本覺故言本
001_0753_a_21L來平等同一覺也

001_0753_a_22L
大乘起信論疏記會本卷二

001_0753_b_01L
  1. 1)여실공如實空 : 진여의 자체 내용을 표현하는 말. 진여의 체성은 온갖 사상을 초월하여 절대적인 것이므로 일체의 언설ㆍ사려를 부정해 버렸다는 뜻으로 공이라 한다. 이 공이란 뜻이 진여의 진실한 내용을 표시하므로 여실한 공이라 한다.
  2. 2)여실불공如實不空 : 여실은 진여의 다른 이름이니, 여실불공이란 진여는 참으로 실재實在이며 그 자체에는 온갖 무루 청정한 공능을 구비한 것이란 뜻이다.
  3. 3)『大乘起信論疏記會本』 권2(H1, 744c).
  4. 4)자종상위自宗相違 : 인명론因明論의 종법宗法 9과九過 중 하나. 자교상위自敎相違라고도 한다. 자기가 속한 교파의 의견을 말할 때 도리어 여기에 상위하는 종宗을 세우는 것이다. 예컨대 승론勝論(ⓢ Vaiśeṣika)에서는 소리는 무상하다고 하는데, 그 파에 속하는 사람이 소리가 상주한다고 주장하는 경우이다. 여기서는 “이치는 말을 떠난 것이다.”라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말을 떠난 이치를 말로 설명할 수 있다.”라고 주장하는 경우이다.
  5. 5)자어상위自語相違 : 인명론의 종법 9과 중 하나. 자기의 언어에 모순이 있는 오류를 말한다. 예를 들면 “나의 어머니는 석녀石女이다.”라고 주장하는 경우이다. 여기서는 “‘진여는 말을 끊었다’는 나의 말은 그 사실이 드러난 순간 없어진 것이다.”라고 주장하면서, 또한 말로써 자기의 주장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자어상위의 과실에 빠진 것이다.
  6. 6)초단初段의 글 : 곧 이언진여離言眞如에 대한 말이다.
  7. 7)후단後段의 글 : 곧 의언진여依言眞如에 대한 말이다.
  8. 8)“언설상을 여의었으며”라고 한 것은 음성 따위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요, “명자상을 여의었으며”라고 한 것은 명구名句 따위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니,(원효의 설명에 의한다.) 이 둘은 언설의 길이 끊어져 문혜聞慧(보고 듣고서 얻는 지혜)의 경계가 아니다.(법장의 설명에 의한다. 『大乘起信論疏記會本』 권중[T44, 252b] 참조.)
  9. 9)심연상心緣相을 여의어서 : ‘심연’이란 마음을 일으켜 외경外境을 반연하는 것이다. 마음으로 외경을 반연한다는 것은 이미 명언名言으로 분별한다는 뜻이다. 법장은 의언분별依言分別이라 하였으니 같은 뜻이다. “심연상을 여의어서”란 명언의 분별로 반연할 수 없다는 뜻이며(원효의 설명에 의한다.) 심행처心行處가 멸하여 사혜思慧(고찰하여 얻는 지혜)의 경계가 아닌 것이다.(법장의 설명에 의한다.)
  10. 10)사품四品 : 각체상覺體相의 네 가지 대의大義다. 즉, 여실공경如實空鏡, 인훈습경因薰習鏡, 법출리경法出離鏡, 연훈습경緣薰習鏡을 말한다. 이 네 가지는 삼무성三無性이 나타내는 진여를 설명한다.
  11. 11)삼무성三無性 : 미迷ㆍ오悟의 모든 법을 유有의 관점에서 변계소집성ㆍ의타기성ㆍ원성실성의 삼성으로 나눔에 대하여 공空의 관점에서 삼무성을 세운다. ① 상무성相無性이란 변계소집성(분별성)의 것은 미정迷情의 앞에 나타나는 한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니 노끈을 잘못 보아 뱀으로 여기지만 뱀의 자성이 없는 것이다. ② 생무성生無性이란 여러 가지 인연에 의하여 성립되는 의타기성의 것은 일시적 가현假現한 모양에 불과하여 실성實性이 없으니 노끈은 삼(麻)과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노끈의 실체가 없는 것이다. ③ 승의무성勝義無性이란 진여는 원만 상주하는 것으로 만유의 근원인 원성실성(진실성), 곧 절대법이므로 아무런 모양도 없음을 말한다. 삼에서 노끈과 뱀의 모양을 인정하기 어려움에 비유한 것이다.
  12. 12)진실성眞實性 : 삼성三性 중 원성실성을 말한다.
  13. 13)분별성分別性 : 삼성 중 변계소집성을 말한다. 진제 역 『攝大乘論釋』 권5 「釋應知勝相」(T31, 181b) 참조.
  14. 14)공화空華 : 공중의 꽃이란 뜻. 허공에는 본래 꽃이 없지만 눈병이 있는 사람들이 때로는 이를 보는 일이 있다. 본래 실재하지 않는 것을 실재하는 것이라고 잘못 아는 것을 비유한다.
  15. 15)명언의 분별 : 명자名字와 언설言說의 분별이다.
  16. 16)수순隨順 : 먼저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교계敎誡하여 신심을 일으키게 하고, 다음에 깊은 법문을 말하여 알기 쉽게 하는 것이다.
  17. 17)정관正觀 : 사관邪觀의 상대어. 관상觀想하려는 경계를 여실하게 관하는 것이니, 정견正見과 같다. 『觀無量壽佛經』(T12, 344a)에 “손 안의 것을 보듯이 모두 분명하게 아니 이와 같이 관하는 것을 정관이라 하고, 이와 다르게 관한다면 사관이라 한다.(悉令明了如觀掌中。 作是觀者名爲正觀。 若他觀者名爲邪觀。)”라고 하였다.
  18. 18)중도관中道觀 : 중도는 편사偏邪한 미망迷妄을 여읜 법의 실리實理인 절대이성絶對理性을 말한다. 이 중도를 믿고 이것을 직접 체험하기 위한 실천 수행을 중도관이라 한다.
  19. 19)관지觀智 : 사리事理를 관견觀見하는 정지正智.
  20. 20)염법染法 : 정법淨法의 상대어. 번뇌와 수번뇌隨煩惱이니, 그 대상으로 반연하는 물物ㆍ심心의 제법, 악성惡性ㆍ유부무기성有覆無記性의 법을 말한다. 이것은 착하고 깨끗한 마음을 물들이는 것이므로 염법이라 한다.
  21. 21)망심妄心 : 진심眞心의 상대어. 허망하게 분별하는 마음이니, 무명 번뇌이다.
  22. 22)소취상所取相 : 인식 주관이 반연하는 대상이다.
  23. 23)능취견能取見 : 외경外境을 반연하는 인식 주체이다.
  24. 24)구의句義 : ⓢ padārtha. 원래는 말의 의미라는 뜻. 전轉하여 그 말에 상당하는 물物ㆍ인人을 의미하고 또 범주(승론의 六句義 등)ㆍ원칙ㆍ원리 등을 말한다.
  25. 25)심혜心慧 : 두 가지 뜻이 있다. ① 신계身戒에 대하여 심혜라 하니, 몸에 계戒를 지키고 마음에 혜慧를 닦는 것이다. ② 심수心數ㆍ심소心所와 같은 뜻이다. 여기서는 두 번째 뜻이다.
  26. 26)수론외도數論外道 : ⓢ Sāṃkhya. 인도 6파 철학의 하나. 카필라(ⓢ Kapila) 선인이 처음 주장하였다. 25제諦를 세워 본체 만법의 생기生起로부터 유정윤회有情輪廻의 시종始終과 해탈하는 일을 말하였다. 『金七十論』이 전하는데, 여기서 일체 만법은 인因과 과果이니 불과 뜨거운 것의 관계와 같이 인을 여의고 과가 없으며 과를 여의고 인이 없어서 차별할 수 없으므로 일一이라 주장한다.
  27. 27)오악五樂 : 다섯 가지 악기의 음악. 금슬琴瑟ㆍ생우笙竽ㆍ고鼓ㆍ종鍾ㆍ경죽磬竹 또는 고鼓ㆍ종鍾ㆍ탁鐸ㆍ경磬ㆍ도鞀를 말한다.
  28. 28)“하나하나의 근은 모든 경계를 취하여야 하며”란 안근眼根으로 색色을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소리(聲)도 들을 수 있어야 하고 냄새(香)도 맡을 수 있어야 하며 맛(味)도 알 수 있어야 하고 촉각(觸)도 감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또 “하나하나의 경계로 모든 근을 상대해야 할 것이다.”란 색경계를 볼 수 있는 것은 안근뿐 아니라 이근耳根이나 비근鼻根, 설근舌根 또는 신근身根으로도 가능해야 한다는 뜻이다.
  29. 29)승론외도勝論外道 : ⓢ Vaiśeṣika. 인도 6파 철학의 하나. 이異를 고집하는 학파. 일체 만법은 인因은 인이고 과果는 과여서 다르다고 주장한다.
  30. 30)청ㆍ황ㆍ적ㆍ백 등의 색이 색성과 다르다면 이는 소리나 냄새ㆍ맛 등과 같을 것이므로 그 청ㆍ황 등의 색은 눈으로 볼 수 없을 것이라는 뜻이다.
  31. 31)무참외도無慙外道 : 역일역이亦一亦異를 고집하는 학파. 일체법의 인과는 인이 없으면 과가 없고 인이 있으면 과가 있으므로 ‘일’이라 할 수 있고, 또 인은 인, 과는 과여서 다른 것이므로 ‘이’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마치 등燈이 없으면 밝음이 없고 등이 있으면 밝음이 있으므로 같다고 할 수 있고, 등과 밝음과는 같은 곳을 점령한 것이 아니므로 다르다고 할 수 있다고 하는 것과 같다.
  32. 32)여기에 생략된 부분을 『大乘廣百論釋論』 권8(T30, 235a)에 의하여 보충하면 다음과 같다. “일一과 이異가 이미 성립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유와 비유를 세우겠는가? 즉 일一과 이異는 상相은 다른데 체體가 같다고 말한다면 일체의 법은 모두 다름이 없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상異相이 이미 없으니 일상一相이 어떻게 있겠는가? 왜냐하면 일이一異의 두 상은 상대하여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一異既不成。 有非有焉立。 一異相異而言體同。 則一切法皆應無異。 異相既無。 一相何有。 一異二相相待立故。)”
  33. 33)사명외도邪命外道 : ⓢ Ajīvika. 비일비이非一非異를 고집하는 학파. 일체법의 인ㆍ과가 만일 인을 여의고서 과가 없을진댄 인이 없어지는 동시에 과도 없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인은 없어지고도 과는 있으므로 비일非一이고, 또 인과 과가 다르다면 인이 있어도 과는 없을 수 있고, 과가 있어도 인은 없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터인즉 ‘비이非異’라고 주장한다.
  34. 34)『大乘廣百論釋論』 권8(T30, 234c~235b).
  35. 35)바로 위 논의 “일체의 중생이 망심이 있음으로 해서”부터이다.
  36. 36)『大乘起信論疏記會本』 권1(H1, 739c).
  37. 37)『大乘起信論疏記會本』 권3(H1, 759a).
  38. 38)『大乘起信論疏記會本』 권4(H1, 765a).
  39. 39)알라야식(阿黎耶識) : ⓢ ālaya-vijñāna. 8식 또는 9식의 하나. 불교 유심론의 하나인 알라야연기(賴耶緣起)의 근본되는 식. 진제 등은 무몰식無沒識이라 번역하고 현장은 장식藏識이라 번역한다. 앞의 것은 아阿를 짧은 음으로 읽어 ‘아’는 무無, ‘뢰야’는 멸진, 몰실沒失이라 번역하여 멸진ㆍ몰실하지 않는 식이라 하는 것이요, 뒤의 것은 아를 긴 음으로 읽어 가家, 주소住所, 저장소貯藏所의 뜻이 있으므로 장식이라 한 것이다. 『成唯識論』 권2(T31, 7c)에 의하면 ‘장藏’에 세 가지 뜻이 있다. ① 능장能藏은 만유를 내는 친인親因인 종자를 간직해 두는 식이란 뜻이다. ② 소장所藏은 8식 중 다른 7식에 의하여 염법의 종자를 훈습하여 간직하는 식이란 뜻이다. ③ 집장執藏은 제8식은 오래전부터 없어지지 않고 상주하므로 자아인 듯이 제7식에게 집착되는 식이란 뜻이다. 그러나 이 가운데서 주로 집장의 의미로 장식이라 하므로 아애집我愛執이 일어나지 않을 때에 이르면 알라야란 이름이 없어진다. 또 다른 이름으로 법상종에서는 불도 수행의 도정을 삼분하여 아뢰야ㆍ비파가毘播迦(ⓢ vipāka : 異熟)ㆍ아다나阿陀那(ⓢ ādāna : 我執)란 이름을 붙인다. ① 아뢰야는 제7말나末那(ⓢ manas : 意, 思量)가 제8식을 자아의 존재처럼 집착하는 자리에서의 제8식의 이름이다. ② 비파가는 이숙異熟이라 번역하니 선악의 업으로 인하여 받은 자리에서의 제8식의 이름이다. ③ 아다나는 부처님 지위에서의 제8식의 이름이다. 이미 자아의 집착이 없어지고 또 업으로 받은 것도 아니고 물질과 마음의 여러 법을 발현케 하는 종자와 오근을 집지執持ㆍ상속相續하는 자리의 제8식이므로 아다나라 한다. 이 식은 종자(이 식 속에 간직하는 깨끗하거나 더러운 세계를 발현할 수 있는 세력)ㆍ오근ㆍ기세간器世間을 소연所緣으로 하기 때문에 각자의 아뢰야로써 우주 만유를 전개하는 근본이라 한다. 『大乘起信論』에서의 알라야식은 유식의 알라야식과는 달리 진망화합식眞妄和合識으로, 이에는 각의覺義와 불각의不覺義가 있다.
  40. 40)『楞伽阿跋多羅寶經』 권4(T16, 510b).
  41. 41)찰나刹那 : ⓢ kṣaṇa의 음사어. 일념一念으로 의역한다. 지극히 짧은 시간을 말하니, 『仁王經』 권상(T8, 826a)에 의하면 90찰나를 일념이라 하고 이 일념 중의 1찰나에 900번 생멸을 한다고 한다.
  42. 42)『楞伽阿跋多羅寶經』 권4(T16, 512b)에 “여래의 장은 선ㆍ불선의 인이니,……무시의 허망한 악습에 훈습된 것을 식장이라 이름한다.(如來之藏。 是善不善因。……爲無始虛僞惡習所薰。 名爲識藏。)”라고 하였다. 이 경의 이역본인 『大乘入楞伽經』 권5(T16, 621b)에 따르면, “오취온법은 심ㆍ의ㆍ의식의 습기가 인이 되어 증장되는데, 범우들은 여기에서 선ㆍ불선의 분별이 나오지만 성인들은 삼매를 현증하여 낙주하니 이것이 선무루법이다. 대혜야, 선ㆍ불선이란 8식을 말하니 무엇이 여덟 가지인가? 곧 식장이라고 이름하는 여래장과 의와 의식 및 오식신이다. 저 오식신은 의식과 함께한다. 선ㆍ불선은 서로 전전 차별 상속 부단하여 체를 달리하여 생겨남(異體生)이 없으며 생하면 바로 멸하여 이것은 경境이 자심소연임을 모른다. 또한 선ㆍ불선법은 차례로 멸할 때 각각 식이 바로 생기는데 의식은 저 오식과 함께하며 여러 가지 차별형상을 취하여 찰나도 머물지 아니하니 이를 찰나법이라 한다. 식장이라고도 하는 여래장은 의, 의식 등의 여러 습기와 함께하니 이것이 찰나법이다. 무루습기는 찰나법이 아니다.(五取蘊法以心意意識習氣爲因而得增長。 凡愚於此而生分別謂善不善。 聖人現證三昧樂住。 是則名爲善無漏法。 復次大慧。 善不善者。 所謂八識。 何等爲八。 謂如來藏名藏識。 意及意識并五識身。 大慧。 彼五識身與意識俱。 善不善相展轉差別相續不斷。 無異體生生已即滅。 不了於境自心所現。 次第滅時別識生起。 意識與彼五識共俱。 取於種種差別形相。 剎那不住。 我說此等名剎那法。 大慧。 如來藏名藏識。 所與意等諸習氣俱。 是剎那法。 無漏習氣非剎那法。)”라고 하였다.
  43. 43)『大乘起信論疏記會本』 권2(H1, 747b).
  44. 44)『大乘起信論疏記會本』 권3(H1, 753b).
  45. 45)단변斷邊 : 단견斷見(ⓢ uccheda-dṛṣṭi)과 같다. 만유는 무상한 것이어서 실재하지 않는 것과 같이 사람도 죽으면 몸과 마음이 모두 없어져서 공무空無에 돌아간다고 고집하는 그릇된 소견이다.
  46. 46)상변常邊 : 상견常見(ⓢ śāśvata-dṛṣṭi)과 같다. 사람은 죽으나 자아는 없어지지 않으며 오온은 과거나 미래에 상주 불변하여 간단間斷하는 일이 없다고 고집하는 그릇된 견해이다.
  47. 47)금과 장엄구 : 원효가 본 『四卷楞伽經』(『楞伽阿跋多羅寶經』) 권1(T16, 483a)에는 “금장엄구金莊嚴具”로 되어 있으나, 『大乘入楞伽經』 권1(T16, 593b)에 “금과 장엄구(金與莊嚴具)”로 되어 있다.
  48. 48)전식轉識 : 능견상(능견식)을 말한다.
  49. 49)자진상식自眞相識 : 업식과 전식의 진상으로 이는 장식을 말한다. 원효는 이 자진상식을 알라야식으로 본다.
  50. 50)『楞伽阿跋多羅寶經』 권1(T16, 483a).
  51. 51)『入楞伽經』 권7(T16, 557a).
  52. 52)『入楞伽經』 권2(T16, 522a).
  53. 53)불일의문不一義門 : 본각심이 망연妄緣에 의뢰하지 않아 진과 망이 구분되고 있으므로 자진상自眞相의 ‘불일의’이다.
  54. 54)불이의문不異義門 : 본각심이 무명에 훈습되어 생멸을 일으키면 이때는 진과 망이 구분되지 않으므로 자진상의 ‘불이의’이다.
  55. 55)이숙식異熟識 : ⓢ vipāka-vijñāna. 알라야식의 다른 이름. 이숙이란 과果는 인因과 별류別類로 성숙된다는 뜻이다. 즉, 선악의 인에서 선도 악도 아닌 무기無記의 과를 낳는 것이다. 제8식을 이숙 또는 진이숙眞異熟이라 하고, 제8식으로부터 생긴 제6식의 이숙과異熟果인 부귀ㆍ현우賢愚ㆍ미추 등을 이숙생이라 한다. 유식에서 선악업의 과보로서의 제8식이 상속되는 기간 중의 제8식을 특히 이숙이라 한다.
  56. 56)『해심밀경解深密經』 : 당나라 현장 한역. 5권. 법상종의 근본 경전으로 8품에 나누어 유식의 깊은 뜻을 말한다. 특히 제2 「勝義諸相品」에서는 객관의 사상事相을 논술하고 제3 「心意識相品」에서는 주관의 정신 활동, 곧 알라야식에 대하여 논술하고 제4 「一切法相品」에서는 삼성三性을 논술하며 제5 「無自性相品」에서는 삼무자성三無自性과 삼시교三時敎를 말한다.
  57. 57)일一이거나 상常이라고 하는 견해들 : 정심淨心의 체는 무명으로 훈습되어도 수연隨緣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解深密經』에서는 이러한 상견常見을 타파하기 위하여 무無,즉 진여가 업번뇌에 감촉되어 유有로 일향생멸一向生滅한다고 하였으니, 이는 위의 상견을 극복한 것이다.
  58. 58)심왕心王ㆍ심소법心所法 : 심왕은 의식 작용의 본체로 객관 대상에 향하여 그 일반상(總相)을 인식하는 정신 작용이다. 여기에 6식ㆍ8식ㆍ9식의 구별이 있다. 심소는 갖추어서는 심소유법心所有法이라 한다. 객관 대상을 인식할 때 그 일반상을 인식하는 심왕의 종속으로 일어나는 정신 작용이다. 구사종에서는 46법, 유식종에서는 51법을 세운다.
  59. 59)생멸식에서는 심왕과 심소가 구분되어 전변해 나간다. 한편 『大乘起信論』에서 미세심인 제8식을 진망화합식이라 하여 심왕과 심소가 미분된 상태로 있다.
  60. 60)『大乘起信論』에서의 알라야식은 불생멸과 생멸의 화합식이라는 의미를 강조한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진망화합식은 유식의 일향생멸식一向生滅識과 다른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치료 목적이 다른 데서 강조점이 다르게 표현된 것일 뿐이다.
  61. 61)세 가지 힐난 : 진심이 다 없어짐(眞心有盡), 생사에 시작이 있음(生死有始), 일심이 다심을 일으킴(變作多心)을 말한다.
  62. 62)이 뜻 : ① 심체가 생멸함(心體生滅). ② 심체는 본래 고요한데 연을 따라 움직임(心體本靜而隨緣動). ③ 일심이 연을 따라 변하여 생멸을 일으킴(一心隨緣變作生滅).
  63. 63)남본 『大般涅槃經』 권8(T12, 649b).
  64. 64)『三無性論』 권상(T31, 871b).
  65. 65)상속문相續門 : 여기서는 생멸문의 상대가 되는 상속문의 본체를 뜻한다. 즉, 알라야식의 본체이다.
  66. 66)바닷물은 항상 상속하는 본체가 있지만 유동, 즉 물결이 일게 되며 또한 생멸하지만 바닷물의 본체는 증감이 없으므로 언제나 움직임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67. 67)“항상되는 것도 아니고”라 한 것은 유동함을 뜻하며 “단절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라 한 것은 움직임이 없음을 뜻한다. 부도不度는 불상不常과 같은 뜻이며, 불멸不滅은 부단不斷과 같은 뜻이다. 『合部金光明經』 권3(T16, 376c)에 “세간은 같지도 다르지도 않다. 비유하면 텅 빈 골짜기에 메아리가 건너지도 멸하지도 않는 것과 같으니, 오직 부처님만이 알 수 있다.(世間不一異。 譬如空谷響。 不度亦不滅。 唯佛能了知。)”라고 하였다.
  68. 68)『능가경종요楞伽經宗要』 : 원효 지음. 1권. 현존하지 않는다.
  69. 69)“이 식에 두 가지 뜻이 있어서”란 알라야식의 각의覺義와 불각의不覺義를 말한다.
  70. 70)『大乘起信論疏記會本』 권1(H1, 740c).
  71. 71)『大乘起信論疏記會本』 권4(H1, 767c).
  72. 72)절상絶相 : 불변의 진여를 말하니, 즉 진여문이다.
  73. 73)수연隨緣 : 물이 바람이란 연을 따라 물결이 일어남과 같이 진여가 무명의 훈습을 받아서 생멸을 일으킴을 이르니, 즉 생멸문이다.
  74. 74)『入楞伽經』 권1(T16, 519a).
  75. 75)『大乘起信論疏記會本』 권1(H1, 741a).
  76. 76)『楞伽阿跋多羅寶經』 권4(T16, 510b), 『入楞伽經』 권7(T16, 556c), 『大乘入楞伽經』 권5(T16, 619c) 참조. 이 구절을 『楞伽阿跋多羅寶經』(『四卷楞伽經』)에 따라 해석하면 “제4선에서 진제해탈에 들어간 수행자는 해탈상을 짓고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여래장이라 이름하는 식장(알라야식)을 전의시키지 않으면 칠식은 유전하여 멸하지 않는다. 어째서인가? 저것(알라야식)을 원인으로 하고 (저것을) 반연하는 여러 식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문ㆍ연각의 수행 경계가 아니다.(第四禪。 善眞諦解脫修行者。 作解脫想不離。 不轉名如來藏識藏。 七識流轉不滅。 所以者何。 彼因攀緣諸識生故。 非聲聞緣覺修行境界。)”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원효는 산스크리트문의 원본은 동일하나 역자에 따라 그 해석이 다르다고 하면서 자신의 의도대로 경의 구절을 인용하여 해석하고 있는 것 같다.
  77. 77)『入楞伽經』 권11(T16, 556c).
  78. 78)이 알라야식은 생멸하는 쪽의 알라야식을 뜻한다. 『楞伽經』에서는 알라야식을 때로는 생멸하지 않는 여래장과 동일한 뜻으로, 때로는 생멸식으로 보았으며, 그렇기 때문에 알라야식에 각의와 불각의 두 가지 뜻이 있게 된 것이다.
  79. 79)여기서는 알라야식을 생멸하지 않는 여래장과 같은 뜻으로 보아, 이러한 알라야식은 결국 생멸하는 알라야식과는 다르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한 것 같다.
  80. 80)『楞伽阿跋多羅寶經』 권4(T16, 510b).
  81. 81)『楞伽阿跋多羅寶經』 권4(T16, 512b).
  82. 82)『入楞伽經』 권7(T16, 556b).
  83. 83)『大乘起信論疏記會本』 권5(H1, 771b).
  84. 84)『大乘起信論疏記會本』 권5(H1, 771b).
  85. 85)『大乘起信論疏記會本』 권5(H1, 759b).
  86. 86)『大乘起信論疏記會本』 권5(H1, 758b).
  87. 87)“비단 어두움이 없을 뿐만 아니라”라는 것은 불각이 없음을 의미하니, 이 답에서는 위의 물음의 불각이 없음과 각조의 작용이 있음의 두 가지를 모두 본각의 요건으로 긍정하는 것이다.
  88. 88)“이러 뜻”이란 본래부터 번뇌를 여읜 것을 끊음이라 보는 것(本來離惑名爲斷者)을 말한다.
  89. 89)『大乘起信論疏記會本』 권3(H1, 758b).
  90. 90)이를 자세히 풀이하면 위에서처럼 “본각이 있기 때문에 본래 불각이 없고, 불각이 없기 때문에 끝내 시각이 없는 것이며, 시각이 없기 때문에 본래 본각이 없다.”가 된다.
  91. 91)『大乘起信論疏記會本』 권2(H1, 748b).
  92. 92) 『楞伽阿跋多羅寶經』 권4(T16, 510b).
  93. 93)불지佛地 : 통교通敎 십지의 제10지, 제9지 보살이 최후에 번뇌장ㆍ소지장所知障의 습기를 끊고 성도하는 지위. 유식에서는 제10지 보살이 금강유정金剛喩定을 해탈하면 불지에 이른다고 한다.
  94. 94)금강유정金剛喩定 : 금강이 견고하여 다른 것을 깨뜨리는 것과 같이 모든 번뇌를 끊어 없애는 선정을 말한다. 대승에서는 제10지 보살이 소지장과 번뇌장의 종자를 한꺼번에 끊고 불지에 들어가기 위하여 드는 선정이다.
  95. 95)초발의보살初發意菩薩 : 십신十信의 종가입공관從假入空觀의 관법이 완성되어 진무루지眞無漏智를 내고 마음이 진제眞諦의 이치에 안주하는 지위인 초주初住, 즉 발심주發心住의 보살을 말한다.
  96. 96)추분별집착상麤分別執著相 : 역경계와 순경계를 분별하여 탐ㆍ진 등을 일으킴. 이것은 상사각에서 버리는 것이다.
  97. 97)법신보살 : 초지初地 이상 십지十地까지의 보살을 뜻한다.
  98. 98)『大方等大集經』 권19(T13, 131c)에 “……생각생각의 생멸이 없는 것이 불지이다.(……無念念滅即是佛智。)”라고 한 것을 참조.
  99. 99)사상四相 : 제법의 생멸변천을 나타내는 생주이멸生住異滅 등 사상을 말한다. 사유위상四有爲相이라고도 한다.
  100. 100)『大乘起信論疏記會本』 권2(H1, 752b).
  101. 101)살바다종薩婆多宗 : 소승 20부의 하나. 설일체유부를 말한다. 이 부는 아공법유我空法有, 삼세실유三世實有, 법체항유法體恒有를 주장하며, 또 일체 만법을 5위 75법으로 분류한다. 『大毘婆沙論』, 『六足論』, 『發智論』 등은 모두 이 부의 교리를 서술한 것이며, 『俱舍論』도 주로 이 교리를 밝혔다.
  102. 102)성실종成實宗 : 인도 하리발마訶梨跋摩가 지은 『成實論』을 근본 성전으로 삼는 종파. 이 종의 교의는 소승 비담毘曇의 일파로부터 다시 한걸음 나아가 아공我空 밖의 법공法空을 말한다. 그 실천문에서는 이공관二空觀을 철저히 하고, 삼종심三種心을 멸하는 동시에 삼계를 여읜다고 하며, 향상수행의 과정을 27위로 나눈다.
  103. 103)대승비밀사상大乘秘密四相 : 『大乘起信論』에서 말하는 사상四相을 뜻한다. 즉, 심성은 본래 사상이 없으나 무명의 훈습력에 의하여 생ㆍ주ㆍ이ㆍ멸의 사상을 내는 것이므로 사상을 깨달을 때는 전후 차별이 있으나 깨달은 바의 사상은 동시에 있는 것이다. 비밀이라 함은 심오하여 잘 알기 어렵다는 뜻에서 쓴 말이다.
  104. 104)전거 미상.
  105. 105)『不增不減經』(T16, 467b).
  106. 106)『大乘起信論疏記會本』 권3(H1, 753b).
  107. 107)견분見分 : 객관의 사물이 인식하기에 적합하도록 주관에 나타나는 영상인 상분相分을 인식하는 작용이다.
  108. 108)상분相分 : 심식이 인식 작용을 일으킬 때 그와 동시에 인지할 그림자를 마음 가운데 떠오르게 하여 대상을 삼는다. 이것을 상분이라 한다.
  109. 109)미래장심未來藏心 : 미래장심이란 아직 현재시에 이르지 않은 마음을 말한다. 미래장이란 독자부犢子部에서 우주 만유를 과거장ㆍ현재장ㆍ미래장ㆍ무위장ㆍ불가설장 다섯 가지로 분류하는 중 앞의 3장은 유위법의 집합에 속하여 삼세장ㆍ유위취有爲聚라 하고, 뒤의 2장은 비유위비무위취 또는 비이취非二聚라 한다.
  110. 110)아我와 아소我所 : ① 아(ⓢ ātman)란 주재主宰, 자아自我, 신체身體의 뜻이다. 자기의 자체, 곧 자기 주관의 중심으로 일반 불교에서는 이것을 나누어 실아實我ㆍ가아假我ㆍ진아眞我 3종으로 분별한다. 실아는 인도 재래의 외도가 주장하는 것으로 범부의 망정妄情에 스스로 존재한 아의 사상을 말한다. 이 아는 무상無常이 아니고 상주하여 독존하는 것으로 그 능동能動은 국왕ㆍ재상과 같이 자재한 것이다. 가아는 실제로 나라고 할 것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오온이 화합하여 인과가 상속하는 몸이기 때문에 다른 것과 구별하여 아라고 이름한 것이다. 진아는 대승에서만 말하는 것으로 열반의 사덕인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 중 아덕我德을 말한다. 진眞으로써 성품을 삼는 뜻으로 진아라 한다. ② 아소란 아소유我所有의 약어로 자신을 아라 하며 자신 이외의 만물을 아소유라 말한다. 아의 정情이 있는 자는 자신 이외의 사물을 모두 나의 소유라 생각한다. 『注維摩詰經』 권5(T38, 376c) 참조.
  111. 111)① 아견我見은 신견身見이라고도 한다. 보통으로 ‘아’라 함은 오온이 화합한 것으로서 참으로 ‘아’라 할 것이 없는데 ‘아’가 있는 줄로 잘못 아는 견해이다. ② 아치我癡는 ‘아’의 진상을 알지 못하고 무아無我의 도리에 미혹한 번뇌이다. ③ 아애我愛는 나라고 애착하는 번뇌이니 이른바 자애심自愛心이다. ④ 아만我慢은 나를 믿으며 스스로 높이는 교만이다.
  112. 112)탐貪ㆍ진瞋ㆍ치癡ㆍ만慢ㆍ의疑ㆍ견見 : 유식학의 오위 백법五位百法 중 51심소유법五十一心所有法에서 근본번뇌에 해당하는 여섯 가지이다. ① 탐(ⓢ rāga)은 자기의 뜻에 잘 맞는 사물에 대하여 마음으로 애착케 하는 정신 작용, 탐욕이다. ② 진(ⓢ dveṣa)은 진에瞋恚이다.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경계에 대하여 미워하고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을 편안치 못하게 하는 심리 작용이다. ③ 치(ⓢ moha)는 고통의 근원과 모든 번뇌의 근본을 말하며 사물의 진상을 밝히 알지 못하므로 혼미함이 있다고 한다. ④ 만(ⓢ māna)은 자기의 용모ㆍ재력ㆍ지위 등을 믿고 다른 이에 대해서 높은 체 뽐내는 번뇌이다. ⑤ 의(ⓢ vicikitsā)는 미迷의 인과나 오悟의 인과의 도리에 대하여 유예猶豫하고 결정치 못하는 정신 작용이다. ⑥ 견(ⓢ dṛṣṭi)은 악견惡見을 말한다. 모든 법의 진리에 대하여 가지는 잘못된 견해이다.
  113. 113)『신론新論』 : 『瑜伽師地論』의 현장 역을 말한다.
  114. 114)『瑜伽師地論』 권55(T30, 603a), 같은 책 권8(T30, 313b) 참조.
  115. 115)생기식生起識 : 전육식前六識을 말한다. 이를 분별사식分別事識이라고도 하니, 육근六根에 의하여 그 대경對境인 육진六塵을 대하며 과거ㆍ현재ㆍ미래에 걸쳐 자타의 여러 가지 사상事相을 분별하고 사려하는 뜻으로 이렇게 이른다. 『楞伽經』에서는 알라야식을 제외한 나머지 말나末那 등의 칠식을 총칭하나, 『大乘起信論』에서는 전육식을 가리킨다. 『楞伽阿跋多羅寶經』 권1(T16, 483a) 참조.
  116. 116)신身ㆍ구口 일곱 가지의 악업 : 신삼구사身三口四를 말한다. ① 신삼身三은 살생, 투도偸盜(남의 것을 훔치는 것), 사음邪婬(자기 처첩이 아닌 다른 여자와 사음하는 것)이다. ② 구사口四는 망어妄語(거짓말), 기어綺語(교묘하게 꾸미는 말), 악구惡口(남을 성내게 할 만한 나쁜 말), 양설兩舌(두말하는 것)이다.
  117. 117)무명주지無明住地 : 오주지五住地의 하나. 근본무명을 말한다. 무명은 모든 번뇌의 소의所依, 소주所住가 되고 또 번뇌를 내는 근본이 되므로 주지라 한다.
  118. 118)『勝鬘經』(T12, 220a).
  119. 119)『大乘起信論疏記會本』 권3(H1, 758b). 다만 논에는 ‘無明力’이 아니고 ‘無明’으로 되어 있다.
  120. 120)“소상所相의 심”은 사상四相이 소의所依로 하는 심을 말한다.
  121. 121)“능상能相의 상”은 사상을 말한다.
  122. 122)수법數法 : 심소유법心所有法 또는 심수법心數法이라고도 한다. 경계의 별상別相을 인식하는 작용이므로 능상지상能相之相이며, 소상지심所相之心의 세細에 비하여 추麤한 것이다.
  123. 123)심왕心王 : 이는 경계의 통상通相을 인식하는 작용이므로 소상지심所相之心이며, 능상지상能相之相의 추麤에 비하여 세細한 것이다.
  124. 124)『중변분별론中邊分別論』 : 진제 한역. 2권. 이 논의 게송 부분은 미륵이 짓고, 장항(산문) 부분은 세친이 지었다. 현장 역 『辯中邊論』과 동본이역이다.
  125. 125)『中邊分別論』 권상(T31, 451c).
  126. 126)『中邊分別論』 권상(T31, 451c).
  127. 127)『瑜伽師地論』 권3(T30, 291b) 참조.
  128. 128)몽념夢念 : 실체가 없이 무명에 의하여 나타나는 허망한 생각이란 뜻이다.
  129. 129)부사의훈不思議熏 : 갖추어서는 불가사의훈不可思議熏이라 한다. 진여가 무명을 훈습하는 것을 말하며, 이는 훈습할 수 없는 곳에 훈습을 하기 때문에 불가사의훈이라 한다. 『楞伽阿跋多羅寶經』 권1(T16, 483a)에는 “부사의훈과 부사의변은 현식의 인이다.(不思議薰及不思議變。 是現識因。)”라고 하였다.
  130. 130)일여一如 : ‘일’은 절대 유일, ‘여’는 꼭 같다는 뜻이니 차별 없이 평등한 것이다.
  131. 131)『合部金光明經』 권1(T16, 364c)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잠을 자다가 꿈에서 큰 강물에 자기 몸이 떠내려가는 것을 보고, 손발을 허우적거려 흐름을 거슬러 오르고자 하여, 그 마음에 긴장을 놓지 않았기 때문에 이쪽 언덕에서 저쪽 언덕에 이르렀다. 꿈에서 깬 후에는 강물에 피안과 차안의 구별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다. 생사의 망상이 다 멸해 버리면 각覺이 청정하여지나 깨달음(覺)의 체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譬如有人於臥寐中。 夢見大水流泛其身。 運手動足逆流而上。 以其心力不懈退故。 從於此岸得至彼岸。 夢既覺已。 不見有水彼此之岸。 生死妄想既滅盡已。 是覺清淨。 不爲無覺。)”라고 하였다.
  132. 132)십신十信 : 보살이 수행하는 계위 52위 중 처음의 10위. 부처님의 교법을 믿어 의심이 없는 지위. 신심信心, 염심念心, 정진심精進心, 혜심慧心, 정심定心, 불퇴심不退心, 호법심護法心, 회향심廻向心, 계심戒心, 원심願心이다.
  133. 133)십해十解 : 십주十住와 같다.
  134. 134)삼현三賢 : 소승ㆍ대승에 따라 구별이 있다. ① 대승은 보살수행의 지위인 십주, 십행, 십회향위에 있는 보살을 말한다. ② 소승은 오정심위五停心位, 별상념주위別相念住位, 총상념주위總相念住位를 말한다. 이들은 성위聖位에 들어가기 위한 방편위이다.
  135. 135)삼승인 : 성문ㆍ연각ㆍ보살을 말한다. 승乘은 물건을 실어 옮기는 것이니, 부처님의 교법이 중생을 실어 열반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 것을 비유한다. 성문승인은 사제四諦의 법문을 듣고 이를 관하여 해탈을 얻는 이, 연각승인은 스승에게 가지 않고 12인연의 이치를 스스로 깨닫는 이, 보살승인은 육바라밀의 법문에 의하여 스스로 해탈하고 남을 해탈케 하여 부처를 이루는 이를 말한다.
  136. 136)십지十地 : 보살수행의 52계위 중 제41위로부터 제50위. 이 10위는 불지佛智를 생성하고 능히 주지住持하여 움직이지 아니하며 온갖 중생을 짊어지고 교화 이익하는 것이 마치 대지大地가 만물을 싣고 이를 윤익潤益하게 함과 같으므로 지地라 이른다. 환희지歡喜地, 이구지離垢地, 발광지發光地, 염혜지染慧地, 난승지難勝地, 현전지現前地, 원행지遠行地, 부동지不動地, 선혜지善慧地, 법운지法雲地.
  137. 137)인人ㆍ법法 : 인아집人我執과 법아집法我執을 말한다.
  138. 138)이공二空 : 아공我空과 법공法空. 즉, 인아집과 법아집을 깨친 것. 아공이란 것은 중생은 오온이 화합한 것이므로 아我라고 할 실체가 없다는 것이고, 법공이란 것은 오온의 자성自性도 공하다는 것이다.
  139. 139)미세념微細念 : 생상生相의 업상ㆍ전상ㆍ현상을 미세념이라 한다. 이는 마음의 극히 미세한 작용이므로 불지佛地에 이르기 전까지는 이를 다 없애지 못한다.
  140. 140)무구지無垢地 : 보살 십지十地 중 제2지. 이구지離垢地라고도 한다. 혹은 보살계위 중 제51위인 등각보살等覺菩薩을 가리키기도 한다. 『四敎儀』 권9(T46, 752c)에 “여섯째, 등각위를 밝히는 것이니, 곧 등각성이다. 보살의 명칭의 측면에서는 등각불지라 하고, 불지의 측면에서는 금강심보살 또는 무구지보살이라고 한다.(六明等覺位。 即是等覺性。 若望菩薩名等覺佛地。 若望佛地。 名爲金剛心菩薩。 亦名無垢地菩薩。)”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두 번째 등각보살의 뜻이다.
  141. 141)방편도方便道 : 방편을 만족한 단계를 방편도라 한다. 여기서 방편이란 진리를 증득하기 위하여 그 전에 닦는 가행을 말하므로 자량위資量位 30심(十住ㆍ十行ㆍ十廻向)을 지나 난煖ㆍ정頂ㆍ인忍ㆍ세제일법世第一法의 순결택분順決擇分을 닦은 가행위까지를 말한다.
  142. 142)무간도無間道 : 방편을 만족한 후 다시 노력 정진한 공이 현저하여 진지眞智를 발하고 번뇌를 모두 끊은 무루지無漏智의 자리를 말한다. 번뇌로 인해 간격間隔되지 않으므로 무간無間이라 한다. 구역에서는 무애도無礙道라고 한다.
  143. 143)구경도究竟道 : 이理의 지극함을 말함. 『대지도론』 권71(T25, 559b9)에서는 “究竟道者 所謂諸法實相 畢竟空”이라 하였다. 여기서는 금강유정을 말한다.
  144. 144)구경도 가운데 방편도라는 것은 제10지의 승진분勝進分 중에서 근본무명을 제거하기 위하여 그대로 관에서 나오지 않고 계속해서 방편을 닦는 것이다. 이 방편이 성만한 최후의 일념이 바로 무간도이다. 『二障義』(H1, 805a) 참조.
  145. 145)『阿毘達磨雜集論』 권10(T31, 742b), 『阿毘達磨集論』 권5(T31, 685c).
  146. 146)세친 석ㆍ진제 역 『攝大乘論釋』 권15(T31, 269b).
  147. 147)만덕이 생멸을 떠나지 않는 것이다.
  148. 148)“비로소 만덕을 이루는 것(始成萬德)”은 『大乘起信論』의 “본래의 고요함에 돌아가게 됨(還歸本靜)”과 『攝大乘論』의 “만덕의 과보를 감득할 수 있게 됨(能感萬德報果)”을 다 포함하고 있다.
  149. 149)상호相好 : ⓢ lakṣaṇa-vyañjana. 용모 또는 형상. ‘상’은 몸에 드러나게 잘생긴 부분이고 ‘호’는 상 중의 세상細相에 대하여 말한다. 이 상호가 모두 완전하여 하나도 모자람이 없는 것을 불신佛身이라 하니, 불신에는 삼십이상과 팔십종호가 있다.
  150. 150)60권본 『華嚴經』 권7(T9, 442b).
  151. 151)복도伏道 : 번뇌를 제복制伏하여 한동안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 삼현보살은 번뇌를 제복할 수는 있으나 아주 끊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상異相은 멸한다.
  152. 152)기사심起事心 : 분별사식分別事識을 말한다.
  153. 153)법단도法斷道 : 멸도滅道ㆍ대치도對治道라고도 한다. 번뇌를 완전히 끊어버려 다시 생겨나지 못하게 하는 계위로 십지보살이 주상住相을 멸하는 단계이다.
  154. 154)근본에 의지하는 마음(依根本心) : 제7식을 말한다.
  155. 155)승발도勝拔道 : 금강유정의 단계이며 생상生相이 다 없어진다.
  156. 156)근본심根本心 : 미세념, 즉 제8식을 말한다.
  157. 157)『合部金光明經』 권1(T16, 363b) 참조.
  158. 158)지혜가 만족함 : 불경계佛境界를 이른다.
  159. 159)금강심金剛心 : 금강유정과 같다.
  160. 160)점차 깨닫는 것(漸覺) : 상사각과 수분각을 말한다.
  161. 161)『인왕경仁王經』 : 2본이 있다. 구본은 구마라집 한역 『仁王般若波羅蜜經』 2권, 신본은 불공 한역 『仁王護國般若波羅蜜多經』 2권이다. 부처님이 16국왕으로 하여금 각각 그 나라를 보호하고 편안케 하기 위해서는 반야바라밀을 수지하여야 한다고 설한 경이다. 예부터 이 경과 『法華經』, 『金光明經』을 호국3부경이라 한다.
  162. 162)복인伏忍 : 『仁王經』에 나오는 5인忍의 하나. 번뇌를 끊지 못하였으나 관해觀解를 익혀 이를 굴복시키고,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지위. 곧 십주, 십행, 십회향의 삼현보살을 말한다.
  163. 163)살바야薩婆若 : ⓢ sarvajña의 음사어. 일체지一切智로 의역한다. 불과佛果에서 일체법을 중득하는 지혜이다.
  164. 164)『仁王般若波羅蜜經』 권하(T8, 832b6)에 “습인에서 정삼매까지는 모두 일체 번뇌를 조복시킨다고 이름하고, 무상의 믿음으로 일체 번뇌를 단멸시키고 해탈지가 생겨나 제일의제를 비추지만 ‘견’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이른바 ‘견’이란 살바야이다.(從習忍至頂三昧。 皆名爲伏一切煩惱。 而無相信。 滅一切煩惱。 生解脫智。 照第一義諦。 不名爲見。 所謂見者是薩婆若。)”라고 하였다. 여기서 ‘습인’은 습종성이니, 곧 복인 가운데 하품에 해당하는 십주를 말하고, ‘정삼매’는 제10지를 말하며, ‘무상신(인)’은 초지를 말한다. 『仁王護國般若波羅蜜多經』 권하(T8, 842b) 참조.
  165. 165)『楞伽阿跋多羅寶經』 권4(T16, 512b).
  166. 166)심법지心法智 : 앞의 육식은 분별사식이며, 여기서 심법지란 육진경계에 대하여 염厭, 흔欣을 일으키는 혜慧의 심수, 즉 제7식을 말한다.
  167. 167)칠법七法 : 전칠식을 말한다.
  168. 168)전제前際 : 삼제三際의 하나. 곧 과거이다.
  169. 169)『勝鬘經』(T12, 222b).
  170. 170)『勝鬘經』(T12, 222b).
  1. 1)「海」上有「唐」{甲}。
  2. 2)「違」作「通」{甲}。
  3. 3)「當」作「審」{甲}。
  4. 1)「免」作「兎」{甲}。
  5. 1)「動」作「感」{甲}。
  6. 1)「明」作「時」{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