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사명당대사집(四溟堂大師集) / 四溟集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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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당대사집四溟堂大師集
사명집四溟集 서문
지난 병술년(1586, 선조 19) 여름에 내가 중씨仲氏(許葑)를 모시고 봉은사 아래에 배를 대었다. 그때 한 납자가 옷깃을 펄럭이며 뱃머리에 와서 합장하였는데, 체격이 훤칠하고 용모가 엄숙하였다. 자리에 앉아서 함께 이야기를 해 보니, 말은 간략해도 그 뜻은 심원하였다. 내가 그의 이름을 물어 보니 종봉 유정鍾峰惟政 스님이라고 하였다. 나는 마음속으로 벌써 그에게 친밀감을 느꼈다.
밤에 매당梅堂에서 묵었는데, 그의 시를 또 꺼내어 보았더니, 경쇠 소리처럼 맑고 아름다웠으므로, 중씨가 더욱 감탄하면서 “당나라 구승九僧1)의 반열에 끼일 수 있겠다.”라고 하였다. 그때 나는 아직 어려서 그 묘한 대목을 이해하지는 못하였으나, 개인적으로 마음속에 기억해 두고 감히 잊지 못하였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나 중형仲兄이 세상을 하직하였다. 스님이 오대산에서 와서 슬피 조문하고 통곡을 하였으며,2) 또 만시輓詩를 지은 것을 보아도 괴로워하고 애처로워하는 표현을 구사하였으므로, 죽고 사는 문제를 환히 풀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나 혼자 의심하기를 “스님의 도는 아직 상승上乘의 경지를 깨닫지 못했나 보다.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구저분하게 속인의 희로애락을 본받으려 한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임진년(1592, 선조 25) 겨울에 병란을 피하여 명주溟州로 갔다. 그때 스님이 의병을 규합하여 국난을 구하러 가서, 그 스승을 대신해 군사를 거느리고 누차 마군魔軍을 무찔렀다는 말을 듣고는 또 뛸 듯이 기뻐하였다. 그 뒤에도 스님이 왕명을 받들고 적진에 들어가서 왜적을 타일러 크게 공적을 세웠는데,

008_0045_c_01L[四溟堂大師集]

008_0045_c_02L1)四溟集序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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頃在丙戌夏不佞侍仲氏舟泊奉恩寺
008_0045_c_04L有一衲翩然來揖干艙頭頎乎其身
008_0045_c_05L肅乎其容就坐而與之言則辭簡而旨
008_0045_c_06L不佞問其名曰鍾峰惟政師也
008_0045_c_07L固艶之夜宿梅堂又出其詩則鏗爾
008_0045_c_08L而淸邵仲氏亟加激賞以爲可班於唐
008_0045_c_09L九僧也時不佞尙少雖未解見其妙處
008_0045_c_10L而私識諸中不敢忘焉閱三歲仲兄
008_0045_c_11L捐館舍師自五臺來吊哭之哀且輓以
008_0045_c_12L則苦語悽詞似猶未釋然於死生之
008_0045_c_13L竊自疑師之道猶未悟上乘耶
008_0045_c_14L然則何爲屑屑效俗子悲歡爲乎壬辰
008_0045_c_15L避兵溟州聞師糾義徒徃捍王艱
008_0045_c_16L代其師統衆屢摧魔軍又躍然以喜
008_0045_c_17L其後承命入賊營諭倭懋著功績
008_0045_c_18L{低}東國大學校所藏刊年未詳本(有許端甫序ㆍ
008_0045_c_19L行蹟ㆍ碑銘ㆍ雷默堂跋ㆍ性一跋) {甲}順天松廣
008_0045_c_20L寺所藏刊年未詳本(有許端甫序ㆍ性一跋ㆍ雷
008_0045_c_21L默堂跋卷六卷七缺落) {乙}高麗大學校所藏刊
008_0045_c_22L年未詳本(有許端甫序卷六及雷默堂跋文一部
008_0045_c_23L分缺落) {丙}東國大學校所藏刊年未詳本(有ㆍ
008_0045_c_24L許端甫序) {丁}延世大學校所藏刊年未詳本(有
008_0045_c_25L雷默堂跋序文無有)

008_0046_a_01L그 인품을 상상만 할 뿐 다시 볼 수가 없어서 나 혼자 애를 태웠다.
병신년(1596, 선조 29) 겨울에 내가 괴원槐院(承文院)에 근무할 때에 공무로 수규首揆(영의정)인 서애西厓(柳成龍) 상공에게 갔더니, 스님이 아변峨弁(고위 무관의 모자)에 긴 수염 차림으로 그 사이에 끼어 앉아 있기에 손을 잡고 반갑게 옛일을 이야기하고는 역려逆旅로 물러 나와 당세當世의 일을 이야기하였다.
그가 강개하여 손뼉을 치며 이해 관계를 단호하게 논할 때에는 고인의 절조와 호협의 풍도가 있었고, 안장에 걸터앉아 좌우를 돌아보며 요기妖氣를 숙청할 뜻을 보일 때에는 또 획책嚄唶한 노장의 면모를 떠올리게 하였다.3) 그래서 내가 더욱 공경하고 존중하면서 ‘시문은 단지 여사餘事일 뿐이요, 그 재질은 난세를 크게 구제할 수가 있는데, 상문桑門(불교)에 실각을 하다니 애석한 일이다’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계묘년(1603, 선조 36) 가을에 스님이 조정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여 상원암上院菴의 옛 은거지로 돌아갔다가 감호鑑湖의 별장으로 나를 방문하였다.
그때 나는 세상에서 외톨이가 되어, 우선 내전內典4)을 가져다 보면서 호장한 마음을 달래며 세월을 보내고 있었으므로, 그 집안에서 말하는 명심견성明心見性의 대목에 대해서 나름대로 관견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시험 삼아 한두 가지를 거사擧似5)했더니, 스님이 융회관통融會貫通하고 초오랑예超悟朗詣하여 조계曹溪6)와 황매黃梅7)의 가법을 참으로 얻고 있었다. 나는 그때에야 비로소 스님이 진종眞宗의 묘제妙諦를 투철하게 깨우치고 염화拈花의 밀전密傳을 곧바로 이어받았으며, 난세를 구제한 것도 그 하나의 계통에서 나온 것임을 비로소 알았다.
그리고 스님은 며칠 동안 묘제에 대해서 터놓고 얘기하였으므로 내가 듣지 못했던 것을 더욱 듣게 되었다. 이로부터 스님이 경련京輦(경성)에 오기만 하면 번번이 서로들 왕래하면서 늦게야 알게 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였다.
경술년(1610, 광해군 2) 9월에 스님이 입적했다는 소식을 듣고 글을 지어 조문하고 시를 지어 전송하였으며, 스님의 현묘한 경지를 영원히 접할 수 없게 된 것을 스스로 한하면서 그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였다. 그때에야 나는 스님이 중씨를 애도한 마음이 또한 내가 오늘 스님을 애도하는 마음임을 알았다. 정情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이기에 사람을 이와 같이 잘도 끌어당긴단 말인가.
금년에 스님의 문도인 혜구惠球가 스님의 문집을 가지고 와서 청하기를, “우리 스승님이 지은 시 몇 천 수가 공의 중씨 댁에 있었는데 병화兵火로 소실되었습니다. 이 문집은 근일近日에 수집하였는데, 전체에 비교하면 태산泰山의 터럭 하나와 같습니다. 우리들이 스승님의 은혜를 갚을 길이 없기에 약간의 시문을 모아서 간행하려고 합니다.

008_0046_a_01L其人而不可復見私自勞神丙申冬
008_0046_a_02L佞仕槐院以公事詣首揆西厓相則師
008_0046_a_03L峨弁長胡厠坐其間握手驩然道故
008_0046_a_04L仍退於逆旅談當世務其慷慨抵掌
008_0046_a_05L擘畫利害有古節俠風而據鞍顧盻
008_0046_a_06L志在澄氛則又似嚄唶老將不佞尤敬
008_0046_a_07L重之以爲詩文特餘事而才可以弘
008_0046_a_08L濟艱虞惜也失脚桑門哉逮癸卯秋
008_0046_a_09L師乞身於朝歸上院舊隱訪不佞於鑑
008_0046_a_10L湖墅時不佞畸於世姑取內典以消
008_0046_a_11L磨壯心故於渠家明心見性處忒有管
008_0046_a_12L試擧似一二則師融會貫通超悟
008_0046_a_13L朗詣信得曹溪黃梅家法乃始知妙透
008_0046_a_14L眞宗直嗣拈花密傳其濟世救難者
008_0046_a_15L亦出其一緖也數日劇談妙諦益聞所
008_0046_a_16L不聞自是師到京輦則輒相徃來
008_0046_a_17L相知晩也庚戌九月聞師之入寂
008_0046_a_18L文弔之且祖以詩自恨永違玄賞
008_0046_a_19L之嗟涕乃知師悼仲氏之心亦不佞今
008_0046_a_20L日悼師之念情者何物 [1] 牽人若是
008_0046_a_21L今年其門徒惠球以師之文集來請曰
008_0046_a_22L吾師所著詩幾千首曾在公仲氏許
008_0046_a_23L於兵火此集裒於近日殆泰山毫芒也
008_0046_a_24L吾輩無以報師恩編成若干卷將綉諸

008_0046_b_01L우리 스승님의 문장의 고하와 도道의 심천을 알아서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하여 무턱대고 추켜올리지 않을 분으로는 공만 한 분이 없으니,8) 모쪼록 한마디 말씀으로 빛나게 하여 영원히 썩지 않게 해 준다면, 그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아, 내가 어떻게 차마 스님의 문집에 서문을 쓰겠습니까. 스님의 시는 사림詞林에 영예를 드날렸고, 스님의 공은 또 국가의 재건에 들어 있고, 스님의 도는 이미 범인凡人을 뛰어넘어 여래如來의 경지에 들어갔습니다. 어찌 나의 글을 덧붙인 뒤에야 더 중하게 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형제는 실로 스님과 지기知己의 인연을 맺었으니, 어찌 감히 글이 비루하다고 하여 사양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그 시종始終을 차례로 나열하여 부탁한 뜻을 겨우 메우고, 그리워 잊지 못하는 나의 회포를 함께 덧붙였다.
만력萬曆 임자년壬子年(1612, 광해군 4) 정월에 교산蛟山9) 허단보許端甫는 쓰다.

008_0046_b_01L知吾師之文之高下道之深淺
008_0046_b_02L汙不阿所好者莫如公願以一語侈之
008_0046_b_03L俾永不朽君之惠也不佞曰嗟咨
008_0046_b_04L尙忍叙師文乎師之詩播譽於詞林
008_0046_b_05L之功亦存於重恢而師之道已超入如
008_0046_b_06L來地何待不佞模畫而後增其重也
008_0046_b_07L顧不佞兄弟寔於師有綰帶之雅其敢
008_0046_b_08L以文鄙爲辭乃序列其始終而塞其請
008_0046_b_09L以寓感念之懷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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峕萬曆壬子春 孟蛟山許端甫氏叙
  1. 1)구승九僧 : 보통은 송나라 초기에 시를 잘 지었던 9인의 승려를 총칭하는 말로, 회남淮南의 혜숭惠崇, 검남劍南의 희주希晝, 금화金華의 보섬保暹, 남월南越의 문조文兆, 천태天台의 행조行肇, 여주汝州의 간장簡長, 청성靑城의 유봉維鳳, 강동江東의 우소宇昭, 아미峨眉의 회고懷古를 말한다. 또 그들의 시를 모아 편집한 『九僧詩』라는 시집도 있다. 『宋史』 「藝文志」 8. 그러나 여기서는 만당晩唐 시기에 활동한 9인의 시승詩僧들을 말하는 듯하다. 참고로 명나라 양신楊愼의 『升菴集』 권60 「晩唐兩詩派」 조에 “만당의 시는 두 파로 나뉜다. 하나는 장적張籍을 본받은 자들이니, 주경여朱慶餘ㆍ진표陳標ㆍ임번任蕃ㆍ장효표章孝標ㆍ사공도司空圖ㆍ항사項斯가 그들이요, 하나는 가도賈島를 본받은 자들이니, 이통李洞ㆍ요합姚合ㆍ방간方干ㆍ유부喩鳧ㆍ주하周賀ㆍ구승九僧이 그들이다.(晩唐之詩。 分爲兩派。 一派學張籍。 則朱慶餘陳標任蕃章孝標司空圖項斯其人也。 一派學賈島。 則李洞姚合方干喩鳧周賀九僧其人也。)”라는 말이 나오고, 또 『升菴集』 권73 「唐五書僧」에 “당나라에 시승 아홉 사람이 있었는데, 지금 『구승집』이 전하고 있다.(唐有詩僧九人。 今有九僧集。)”라는 말이 나온다. 또 원나라 방회方回의 『瀛奎律髓』 권10에, 송나라 구준寇準의 〈春日登樓懷歸〉의 시를 평하면서 “구래공寇萊公의 시는 만당의 시를 본받아서 구승九僧의 시체詩體와 서로 유사하다.(萊公詩學晩唐。 九僧體相似。)”라는 말이 나오고, 고려 이숭인李崇仁의 『陶隱集』 권5 「題千峰詩藁後」라는 제목의 글에도 “당나라 『구승집』이 세상에 전해지기에 내가 언젠가 대략적인 내용을 살짝 훑어본 적이 있었는데, 만우卍雨가 얻은 시를 그것들과 비교할 때 어찌 많이 양보해야 할까 보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世傳唐九僧集。 予甞竊窺其梗槩。 雨之所得。 豈肯多讓乎彼哉。)”라는 말이 나온다. 이 구승의 이름은 미상이다. 식자의 교시를 바란다.
  2. 2)스님이 오대산에서~통곡을 하였으며 : 1588년 허균의 중형인 하곡荷谷 허봉許葑이 강원도 금화현 생창역에서 죽었으므로 사명당이 이곳으로 와서 조문하였다.
  3. 3)안장에 걸터앉아~떠올리게 하였다 : 사명당이 젊은이처럼 원기가 왕성하여 용맹을 과시했다는 말이다. 후한의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이 62세의 나이 때문에 출정을 허락받지 못하자, 광무제光武帝 앞에서 ‘말안장에 훌쩍 뛰어올라 좌우를 둘러보면서(據鞍顧眄)’ 자신의 무위를 과시하자, 광무제가 “이 노인네가 참으로 씩씩하기도 하다.(矍鑠哉是翁也)”라고 찬탄했던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馬援列傳」. 획책嚄唶한 노장은 용맹한 백전노장이라는 뜻이다. 획책은 크게 웃고 크게 고함치는 소리를 뜻하고, 노장은 수없이 전쟁터를 누빈 노련한 장수라는 말이다. 전국시대 위나라의 장군으로 10만 대군을 거느렸던 진비晉鄙를 ‘획책숙장嚄唶宿將’이라고 묘사한 기록이 『史記』 「魏公子列傳」에 나온다. 숙장宿將은 노장과 같다.
  4. 4)내전內典 : 불교도의 입장에서 불경佛經을 칭하는 말이다. 그 이외의 서적은 외전外典이라고 한다.
  5. 5)거사擧似 : 들어서 보인다는 뜻의 선림禪林의 용어이다. ‘似’는 ‘示’와 같다. 즉 언어를 가지고 고칙을 제시하거나 물건을 가지고 사람에게 보이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전자前者의 뜻으로 쓰였다.
  6. 6)조계曹溪 : 조계산曹溪山 보림사寶林寺에서 선풍을 떨친 혜능慧能을 말한다. 5조 홍인弘忍의 의발을 전수하였으므로 육조 대사六祖大師라고 칭하기도 한다.
  7. 7)황매黃梅 : 중국 선종 5조인 홍인을 가리킨다. 그는 기주蘄州 황매 사람으로, 7세에 4조 도신道信을 따라 황매 서북쪽 쌍봉산雙峰山의 동산사東山寺로 출가하였고, 나중에 황매 동북쪽 풍무산馮茂山의 진혜사眞惠寺에서 교화를 펼쳤으므로, 세상에서 홍인을 오조 황매五祖黃梅 혹은 그냥 황매라고 일컫게 되었다.
  8. 8)자기가 좋아하는~분이 없으니 : 허균許筠이야말로 사명당을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평가할 수 있는 안목을 지닌 사람이라는 말이다. 참고로 『孟子』 「公孫丑 上」에, 재아宰我와 자공子貢과 유약有若의 지혜가 비록 낮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무턱대고 공자를 추켜올리려는 생각은 가지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汚不至阿其所好)”라고 맹자가 평한 말이 나온다.
  9. 9)교산蛟山 : 허균許筠(1569∼1618)의 호이다. 자字는 단보端甫이다.
  1. 1){低}東國大學校所藏刊年未詳本(有許端甫序ㆍ行蹟ㆍ碑銘ㆍ雷默堂跋ㆍ性一跋) {甲}順天松廣寺所藏刊年未詳本(有許端甫序ㆍ性一跋ㆍ雷默堂跋。卷六卷七缺落) {乙}高麗大學校所藏刊年未詳本(有許端甫序。卷六及雷默堂跋文一部分缺落) {丙}東國大學校所藏刊年未詳本(有ㆍ許端甫序) {丁}延世大學校所藏刊年未詳本(有雷默堂跋。序文無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