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남악집(南岳集) / 南嶽大師詩集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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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악집南嶽集
남악 태우南岳泰宇
원주용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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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악대사 시집의 서문(南嶽大師詩集序)
기원후 재회 신미년(1751년, 영조 27년) 10월 15일 무인일에, 지리산인 재초가 나에게 편지를 보내와 이르기를 “남악대사비와 부도가 금산사에 세워졌습니다. 이제 남기신 글을 모아 장차 출간하려고 합니다. 원컨대 어르신께서는 아름다운 말씀을 아끼지 마시고 우리 선사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어떠합니까?”라고 하였다. 나는 불교와 서로 맞지 않으니,1) 어떻게 그의 행동을 형상화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저 사우간의 지극히 정성스러운 마음은 사람을 끊임 없이 감동시키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정말로 사양할 수가 없었다.
태고보우太古普遇(1301~1328)2)선사께서 중국에 들어가 하무산에서 석옥 청공淸珙(1272〜1352)3)선사를 뵙고 육조정종(六祖正宗)을 얻어 원나라 말기 고려로 돌아와 현묘한 가르침을 크게 밝혀 말법을 구원하였다.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을 비로소 펼쳐 드날려 우리나라에서 가사를 입은 자는 바로 조계와 임제의 가르침을 따를 수 있었으니, 선종에 공이 있음이 어찌 적다고 하겠는가. 조사의 정법안장이 환암 혼수混修에게 전해졌고, 환암은 구곡 각운覺雲에게 전했고, 구곡은 등계登階에게 전했는데, 등계는 바로 벽송 지엄智嚴의 스승이다. 지엄이 부용 영관靈觀에게 전했고, 부용의 도를 터득한 자는 오직 청허 휴정休靜(1520~1604)4)선사가 가장 걸출하다. 청허는 남악의 오세 스승이다. 청허의 뒤에 편양 언기彦機(1581〜1644)5), 풍담 의심義諶(1592〜1655)6), 월저 도안道安(1638〜1715)7), 설암 추붕秋鵬(1651〜1706)8)이 있었는데, 설암은 바로 남악의 스승이다.
대개 육조 혜능 이래 5종9)으로 분류되었는데, 염화미소拈花微笑와 직지인심直指人心의 전승은 오직 임제종뿐이다. 그러다 석옥선사에 이르러 또 우리나라로 일파가 전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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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9_0561_a_02L1)南嶽大師詩集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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紀元後再回辛未陽月十五日戊寅
009_0561_a_05L異山人在初以書報余曰南岳大師碑
009_0561_a_06L浮屠立於金山寺今方裒集遺文
009_0561_a_07L付剞劂氏願左右毋惜金玉之音
009_0561_a_08L寵榮吾先師如何云而余於竺敎枘
009_0561_a_09L鑿焉惡足以模其行乎然彼師友間
009_0561_a_10L至誠之心有令人感沭不容己者故
009_0561_a_11L不得固辭有曰太古禪師入中國
009_0561_a_12L霞霧山石屋禪師得六祖正宗元末
009_0561_a_13L返本國大闡玄風以捄末法祖師
009_0561_a_14L西來之旨始有所宣揚而東土蒙伽
009_0561_a_15L藜者乃獲襲曹溪臨濟之風其有功
009_0561_a_16L於禪宗也詎淺尠㦲師之正法眼藏
009_0561_a_17L傳于幻庵庵傳龜谷谷得登階
009_0561_a_18L即碧松之師也碧松傳之芙蓉得其
009_0561_a_19L芙蓉之道者惟淸虛禪師爲最傑云
009_0561_a_20L虛南岳之五世師也淸虛之後有鞭
009_0561_a_21L有楓潭有月渚有雪巖雪巖
009_0561_a_22L即南岳之親師也盖六祖之下五宗
009_0561_a_23L分流而其拈花直指之傳惟臨濟宗
009_0561_a_24L爲是而至石屋又傳一派於東土

009_0561_b_01L남악선사에 이르렀는데, 위아래로 수백 년 사이에 서로 계승한 법이 하루와 같았다. 지금 재초가 남악선사를 위해 부도를 세우고 큰 비석을 세워 무궁하게 의를 기리고자 하는데, 이것이 어찌 분수에 넘치는 일이겠는가. 마침내 그 사문이 서로 전한 차례를 기록하여 『남악대사시안』으로 삼는다.
 병암10)이 서한다.

009_0561_b_01L至於南岳上下千數百禩之間其相
009_0561_b_02L繼相承之法猶一日焉今在初之爲
009_0561_b_03L南岳樹浮屠立豊碑頌義無窮
009_0561_b_04L僭踰者㦲遂記其師門相傳之次
009_0561_b_05L爲南岳大師詩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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屛巖序

009_0561_b_07L{底}聖上三十年(乾隆十八年) 頭流實相寺留板
009_0561_b_08L本(國立圖書舘所藏)
  1. 1)서로 맞지 않으니: 예착枘鑿이란 ‘둥근 장부가 네모진 구멍에 들어가 맞지 않는다’는 뜻으로, 쌍방의 사물이 서로 맞지 아니함을 이른다. 『사기史記』
  2. 2)태고보우: 고려 말기 스님으로, 호는 태고太古, 일명은 보허普虛, 속성은 홍, 홍주 사람이다. 13세에 양주 회암사에서 광지에게 출가하고, 가지산하 총림叢林에서 도를 닦았다. 26세에 화엄선華嚴選에 합격하고, 용문산 상원암‧성서城西의 감로사에 고행 정진하였다. 1337년(충숙왕 복위 6) 송도 전단원栴檀園에서 참선하다가 다음 해 정월에 크게 깨달았다. 삼각산 중흥사 동쪽에 태고암을 짓고 있으면서 태고라 호號하고 태고암가를 지었다. 1346년(충목왕 2) 중국에 가서 호주 하무산 석옥청공石屋淸珙의 법을 잇고 우리나라 임제종의 초조初祖가 되었다. 다음 해 본국에 돌아와 용문산 소설암에 있었다. 신돈辛旽이 투기로 속리산에 금고禁錮되었다가, 신돈이 죽은 뒤에 국사가 되었으며 우왕 8년 12월 24일 소설암에서 입적하였다. 세수 82세. 법랍 69세. 시호는 원증圓證이고, 탑호는 보월승공寶月昇空이다. 탑비가 삼각산 태고사 터에 있다.
  3. 3)석옥 청공: 남송말 원대 스님. 임제종 호구파, 석옥은 자字. 속성이 온씨溫氏요, 고봉 원묘高峰原妙의 문하에 투신投身하였으나 끝내 도를 이루지 못하자, 스승은 급암 종신及庵宗信 밑에서 공부할 것을 권유하였다. 우리나라 승려들 중에는 태고 보우와 백운 경한白雲景閑(1298〜1374) 스님 등이 직접 가르침을 받았으며, 특히 보우스님은 조계종曹溪宗의 법맥法脈을 이은 인물이기 때문에 청공의 법을 배웠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이는 태고 보우의 법사法嗣를 임제종臨濟宗의 정맥正脈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4. 4)휴정: 조선 스님으로, 호는 청허, 자는 현응玄應, 속성은 최崔씨, 안주安州 사람이다. 묘향산에 오래 있었으므로 서산대사西山大師라 한다. 9세에 어머니를, 10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안주 목사牧使를 따라 서울에 가서 성균관에서 공부하다가, 같이 배우던 벗 몇 사람과 함께 지리산에 들어가 경전을 뒤적거리다가 선가禪家의 돈오법頓悟法을 얻고, 숭인崇仁에게 출가하였다. 21세에 영관靈觀에게 인가印可를 받고, 마을을 지나다가 낮에 닭우는 소리를 듣고는 크게 깨달은 바 있어 “머리털은 희어져도 마음은 희지 않는 것을, 옛날 사람들이 일찍이 밝혀 놓았지. 이제 닭 울음소리 한 번 듣고는, 대장부의 할 일 모두 끝냈네(髮白心非白 古人曾漏洩 今聞一聲鷄 丈夫能事畢).”라고 하였다. 30세에 선과禪科에 급제하여 대선大選으로부터 양종판사兩宗判事가 되었다. 금강산에 들어가 〈삼몽사三夢詞〉를 지으니 “주인의 꿈 이야기 손에게 말하고, 손의 꿈이야기 주인에 말하네. 지금 꿈 이야기 하는 그 두 사람도 역시 꿈속의 사람인 줄 누가 아느냐(主人夢說客 客夢說主人 今說二夢客 亦是夢中人)?”라고 하였다. 또 〈향로봉시香爐峰詩〉에 “만국의 도성들은 개미 집이요, 고금의 호걸들도 하루살이라. 창에 비친 밝은 달 손의 베개에 끝없는 솔바람이 그대로 풍류(萬國都城如蛭蟻 千家豪傑等醯鷄 一窓明月淸虛枕 無限松風韻不齊).”라고 노래하였는데 무업無業이란 승려가 이 시를 가지고 정여립鄭汝立의 옥사獄事와 관련하여 무고하자 체포되었으나, 선조가 그 억울함을 알고 석방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로 옮겼을 때에 나아가 뵙고 팔도 십육종 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으로 임명되어 제자들로 하여금 각지에서 의승병義僧兵 5천명을 모집케 하여 공을 이루고, 임금을 모셔 서울에 돌아온 뒤 늙음을 핑계로 제자 유정惟政과 처영處英에게 군중 일을 맡기고 산으로 돌아가니, 임금이 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 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 禪敎都摠攝 扶宗樹敎 普濟登階尊者라 호를 내렸다. 금강산‧두류산‧묘향산 등지에 왕래하였으며, 제자는 1천여명인데, 세상에 알려져 이름 난 제자만 70여 명이나 된다. 조선 선조 37년 1월 묘향산 원적암에서 설법하고, 자기의 진영眞影에 “팔십년전거시아 팔십년후아시거(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라 쓰고 나이 85세, 법랍 67년으로 입적하였다. 저서로는 『선교결禪敎訣』‧『삼가귀감三家龜鑑』‧『청허당집淸虛堂集』 8권‧『선가귀감禪家龜鑑』 등이 있다.
  5. 5)편양 언기: 호가 편양당鞭羊堂이며, 속성이 장張씨이고, 죽산竹山 사람이다. 11세에 출가하여 서산대사의 제자였던 현빈玄賓을 따랐다가 뒤에 서산대사의 회하會下에 가서 그 심법을 얻었다. 그 뒤 남쪽으로 가서 널리 선장禪匠을 찾고, 금강산 천덕사天德寺‧구룡산九龍山 대승사大乘寺‧향산香山 천수암天授庵 등에서 개당開堂하여 선교禪敎를 강의하였다. 그의 명성이 사방에 떨쳐 배움을 찾는 자가 끊임없었다. 그의 문하에는 법을 전수한 제자 의심義諶을 비롯하여 인물이 많아서 그 법손이 매우 성하였으므로, 서산대사의 계파 가운데서도 이 편양파의 문손이 가장 성하였다.
  6. 6)풍담 의심: 호는 풍담楓潭이며 성은 류柳씨이고 통진通津 사람이다. 16세에 출가하고 뒤에 편양당鞭羊堂 언기彦機에게 입실하여 그 심법心法을 받았다. 그 뒤 남쪽으로 가서 서산문하의 장로인 소요逍遙‧기암奇巖 등을 찾아보고, 금강산‧보개산寶蓋山 등에서 『화엄경』 등 대승경大乘經을 연구하여 그 음석音釋을 지어 후진을 가르치고 또 많은 사람을 깨우쳤다. 제자로는 상봉 정원霜峯 淨源‧월담 설제月潭 雪霽‧월저 도안月渚 道安 등 매우 많았다.
  7. 7)월저 도안: 성을 유劉씨이고 평양 사람이다. 9세에 출가하여 뒤에 금강산에 들어가 풍담을 따랐으며, 20여년을 가르침을 받고 그 심법을 얻었다. 1664년 묘향산에 들어가 『화엄경』의 대의를 강구하였다. 종풍宗風을 드날릴 적에 청중이 많아서 그 당시에 처음 보는 법회라 하였다. 대승 경전을 간행하여 도속道俗에 펼쳤다. 1697년(숙종 23) 정축옥사 때 명성을 시기한 소인배들의 무고誣告로 구금되었으나 억울함이 밝혀져서 왕명으로 특사되었다가 조정에서 팔도선교도총섭八道禪敎都摠攝의 승직을 내렸으나 사양하였다. 78세에 진불암眞佛庵에서 입적했다. 그는 교敎에서 선禪으로 나아가 선을 참구하고, 또 교를 체득하여 화엄사상을 널리 천명한 화엄대종사로 이름이 높으며, 특히 사람들에게 염불왕생을 많이 권장했다 한다. 저서는 『월저집月渚集』이 있다.
  8. 8)설암 추붕: 법명은 추붕秋鵬, 법호는 설암雪岩이며 성은 김金씨로, 평안남도 강동江東 사람이다. 제자 법종法宗 등이 경종 2년(1722년)에 편집한 『설암잡저雪岩雜著』3권 3책과 『설암난고雪岩亂藁』2권 1책이 전해온다. 대흥사(대둔사) 백설당白雪堂에서 법회를 열었던 때의 기록인 『화엄강회록華嚴講會錄』이 대흥사에 전한다. 홍문관 대제학 이덕수李德壽가 스님의 비명을 지었다. 문인은 34명에 이른다.
  9. 9)5종: 당말唐末에서 송초宋初에 걸친 중국 선종의 다섯 문파로, 임제종臨濟宗‧위앙종潙仰宗‧조동종曹洞宗‧운문종雲門宗‧법안종法眼宗이다. 송대에 임제종파에서 갈라진 황룡파黃龍派와 양기파陽岐派를 합쳐서 7종이라 한다.
  10. 10)병암: 유가계통의 인물인 듯 하나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1. 1){底}聖上三十年(乾隆十八年) 頭流實相寺留板本(國立圖書舘所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