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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9_0677_c_13L서書 용담집龍潭集나는 젊은 시절에 남원南原의 파근사波根寺를 유람하다가 법당을 열고 경을 강설하는 대법사를 만났다. 학도 백여 명이 각각 여러 경전을 들고 차례로 배움을 청하였는데, 하나의 경마다 담당자가 한 사람씩 있어 곁에서 자세히 설명해 주었고, 위로 질문하고 아래로 확인하면서 오묘한 이치를 궁구하고 있었다. 그 장엄한 위의와 제도가 볼만하였기에 나는 감탄하여 말하였다.“이는 우리 유가에는 없었던 일이다. 정부자程夫子께서 ‘삼대三代의 위의威儀가 여기에 있었구나.’ 하고 칭찬하셨다더니,2) 그의 마음이 바로 이런 것이었구나.”법사는 곧 용담 대사 조관慥冠이니, 자는 무회無懷요 남원 사람이다. 당시 우리 종문의 사람이 나와 함께 유람하다가 스님을 한참이나 바라보고는 “당신은 우리 이웃에 살던 김 아무개가 아닙니까?” 하고 물었다. -
009_0677_c_13L書龍潭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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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9_0677_c_15L余於少時。遊南原之波根寺。値大法
009_0677_c_16L師。開堂說經。學徒百餘人。各執諸
009_0677_c_17L經。以次請益。一經有當機一人。在
009_0677_c_18L傍演說。上質下扣。究極穾奧。其
009_0677_c_19L儀度濟濟可觀。余歎曰。此吾儒家所
009_0677_c_20L未有。程夫子稱三代威儀在此者。其
009_0677_c_21L心是歟。法師即龍潭大師慥冠。字無
009_0677_c_22L懷。南原人也。時有吾宗人。與之同
009_0677_c_23L游。熟視師。問之曰。子非吾鄰之金某
009_0677_c_24L{底}乾隆三十三年智異山臺巖庵刊本(東國大
009_0677_c_25L學校所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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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9_0678_a_01L그러자 스님이 깜짝 놀라면서 기뻐하고 옛이야기를 나누었으니, 아마도 이는 스님이 어려서 공거公車3)의 업을 닦고는 과거장으로 달려가 여러 차례 윗자리를 차지하여 동년배들에게 유명하였고, 우리 종문 사람들과 일찍이 함께 연구했었기 때문이리라.스님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19세에 감로사甘露寺에서 삭발하였으며, 호남과 영남을 널리 유행하며 여러 노숙老宿들을 두루 참방하였다. 그 후 명진 대사冥眞大師 수일守一4)이 찾아와 서로 문답을 나누다가 신령한 기틀이 서로 투합하였고, 영원암靈源菴으로 들어가 흙집을 짓고 살면서 원공遠公5)처럼 10년 동안 산을 나가지 않으리라 결심하였다.스님은 이미 내전內典의 종요宗要를 얻었지만 항상 부족한 듯 여겨 문도들을 가르치려 하질 않았다. 하지만 그를 따르는 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결국 고함으로 흩어버리기 어려웠고, 총림의 교주가 되어 무려 수십 년 동안 널리 교화를 펼치자 대중이 자기 양에 따라 강물을 마셨다.6)임오년(1762)에 법랍 44세로 돌아가셨고, 사유闍維7)하던 날 저녁에 사리 5과를 얻어서 감로사와 파근사와 실상사에 나누어 탑을 세웠다. 스님은 평소 시문 짓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때로 저술한 바가 있어도 역시 귀중하게 여지지 않아 산실되고 거의 사라졌다. 그러다 지금 스님의 법제자인 윤장玧藏 등이 약간의 편을 수습하여 나에게 서문을 청하였다. 나는 승려들을 위해 책에 덧붙이는 문장을 지은 적이 없다. 하지만 스님과는 너무 잘 아는 사이라 차마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어 책 말미에 간략히 몇 마디 써서 돌려보낸다.무자년(1768) 8월 하한下澣8)에 담와병부澹窩病夫가 귀촌龜邨의 배이와配爾窩에서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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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9_0678_a_01L耶。師驚喜話舊。蓋師少治公車業。赴
009_0678_a_02L塲屋。屢居上游。有名於儕類。吾宗
009_0678_a_03L人甞與同硏故也。師早失怙。十九祝
009_0678_a_04L髮於甘露寺。遍遊湖嶺。歷參諸老宿。
009_0678_a_05L後從冥眞大師守一。一言而神機相投。
009_0678_a_06L入靈源菴。築土窩以居。以遠公十年
009_0678_a_07L不出山爲期。師旣得內典宗要。而常
009_0678_a_08L若不足。不欲授徒。然從之者如雲。終
009_0678_a_09L難喝散。主敎叢林。凡數十年普化。
009_0678_a_10L大衆飮河隨量。歲壬午。法獵四十
009_0678_a_11L四而終。闍維之夕。得舍利五。分塔
009_0678_a_12L於甘露波根實相諸寺。師平日不喜爲
009_0678_a_13L詩文。時有所述。亦不甚貴重。散佚
009_0678_a_14L殆盡。今師之法胤玧藏等。收拾若干
009_0678_a_15L篇。請序於余。余未甞爲緇徒。作弁
009_0678_a_16L卷之文。而於師相知甚熟。不忍無一
009_0678_a_17L言。略書數語於編末而歸之。
009_0678_a_18L戊子仲秋下澣。澹窩病夫。書于龜
009_0678_a_19L邨之配爾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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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정부자程夫子께서 삼대三代의~하고 칭찬하셨다더니 : 정부자는 송宋나라 유학자 정호程顥를 말한다. 호는 명도明道이다. 삼대의 위의威儀는 하·은·주 삼대의 훌륭한 문화를 뜻한다. 그가 스님들이 공양하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이렇게 칭찬하였다고 한다.
- 3)공거公車 : 공가公家 즉 국가의 거마車馬를 일컫는 말로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뜻한다. 한漢나라 때 과거에 응시하러 가는 사람을 공거에 태워 보냈던 것에서 유래하였다.
- 4)명진 대사冥眞大師 수일守一(1638~1743) : 조선의 승려이다. 16세에 설주산雪住山 용장사龍藏寺로 출가하여 현각玄覺의 제자가 되었고, 19세에 보원寶圓으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 도안道安에게서 화엄華嚴의 일승묘지一乘妙旨와 선가禪家의 심법心法을 얻었다. 그러나 가장 수승한 제일의第一義를 깨닫지 못했음을 스스로 간파하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서 40년 동안 좌선에만 몰두하였다. 그 뒤 새봉璽篈·용담龍潭을 제자로 받아들여 법을 전수하였다.
- 5)원공遠公 : 동진東晉의 승려 여산 혜원廬山慧遠(335~416) 선사를 지칭한다. 여산廬山에 동림사東林寺를 창건하고 백련사白蓮社를 결성해 도속과 어우러져 염불 수행을 하면서 산문 밖을 나서지 않았고, 손님을 전송할 때도 호계虎溪을 넘지 않는 것을 규칙으로 삼았다고 한다.
- 6)대중이 자기~강물을 마셨다 : 스승의 학식이 매우 커서 제자들이 저마다 자기 국량만큼 섭취함을 뜻한다. 『莊子』 「逍遙遊」에 “생쥐가 황하 물을 마심에 제 배의 양만 채울 뿐이다.(偃鼠飮河。 不過滿腹。)”라고 하였다.
- 7)사유闍維 : 섧 jhāpita의 음역으로서 다비茶毘·사비闍毘·사비다闍鼻多라고도 하며, 분소焚燒·연소燃燒로 의역하기도 한다. 시체를 화장하는 것을 말한다.
- 8)하한下澣 : 매월 21일부터 30일까지를 말한다. 당唐나라 때 관리들에게 10일에 한 번씩 목욕하고 세탁하는 휴일을 주었던 것에서 생긴 말이다.
- 1){底}乾隆三十三年智異山臺巖庵刊本(東國大學校所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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