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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0323_a_24L괄허 대화상 행장括虛大和尙行狀 -
010_0323_a_24L括虛大和尙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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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0323_b_01L화상의 휘는 취여取如요, 호는 괄허括虛, 성은 여씨余氏이다.시조의 휘는 선재善才로, 송宋나라 조정에서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지냈다.직간하기를 좋아하다 임금의 뜻을 거스른 고로 중화 땅에서 용납되지 못해 바다 건너 동쪽으로 와서 의령宜寧에 거주하였다.고려조에 의령공宜寧公으로 봉해져 자손이 드디어 의령을 관향으로 삼았다(著籍). 아버지 통덕랑通德郞은 휘가 일정日正으로 21세에 안동 권씨權氏를 아내로 맞이하여 용궁龍宮 송동리松洞里 집에서 화상을 낳았다.때는 곧 경묘景廟(경종) 경자년(1720) 9월 17일이었다.화상은 재기가 무리 중에서 뛰어나 경사자집經史子傳을 받자마자 곧바로 암송하였다.선생이 자주 찬탄하기를, “이 아이는 천재로다.반드시 대성하리로다.” 하였다.13세에 사불산四佛山 대승사大乘寺에 들어가 능파 조사凌波祖師에게서 축발祝髮하고 진곡 선사眞谷禪師에게서 구족계를 받았다.비니毘尼(계율)를 엄정히 하여 터럭 하나도 범하지 않아 기년耆年(노인, 장로) 석덕碩德이 서로 찬탄하여 말하기를, “우리들은 이름이 비록 종사宗師이지만 범행梵行(청정행)은 곧 저 사미沙彌에게 부끄럽다.”라고 하였다.교해敎海를 유영함에 오묘한 깨우침이 무리 중에서 뛰어났으니 당시 횡경橫經하는(수업 받는) 무리들이 그보다 앞에 서지 못하였고, 홍장鴻匠 거벽鉅擘들이 모두 불법佛法의 동량棟梁으로 인정하였다.당세에 중히 여김을 받음이 대개 이와 같았다.유력을 마치고는 환암幻庵 장로長老에게서 선법을 전수받았고, 환응喚應 선사禪師에게서 의발을 전해 받았다.청허淸虛로부터는 10세손, 환성喚醒으로부터는 6세손이 된다.교남嶠南(영남)의 고찰을 물병과 석장을 가지고 거의 다 편력하였는데, 의주衣珠를 얻은 납자들을 손가락으로 다 세지 못할 정도였다.그리고 폐허가 된 가람을 흥기시키고 무너진 기강을 떨쳐 일으켰는데, 남쪽의 남장사南長寺와 북쪽의 운봉사雲峯寺가 가장 대표적이다.정묘正廟(정조) 연간에 운봉사의 양진암養眞庵에 방장方丈으로 주석하였다.기유년(1789) 4월 15일에 홀연 지필을 찾더니 게송 두 수를 썼다.
七十年間事 칠십 년간의 인생사
依俙夢中人 꿈속의 사람처럼 아련하여라
澹然同水月 담연하기가 물속의 달과 같으니
何有去來身 어찌 가고 오는 몸이 있으리
幻來從幻去 허깨비로 왔다가 허깨비 따라 가니
來去幻中人 오고 가는 허깨비 속 사람이여
幻中非幻者 허깨비 속에 허깨비 아닌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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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0323_b_01L和尙諱取如。號括虛。姓余氏。始祖諱
010_0323_b_02L善才。爲宋朝諫議大夫。好直諫。忤上
010_0323_b_03L旨故。不容於中華。航海東來。居于宜
010_0323_b_04L寧。麗朝封宜寧公。子孫遂著籍焉。至
010_0323_b_05L二十一世。有通德郞。諱日正。取安東
010_0323_b_06L權氏。生和尙于龍宮松洞里第。即景廟
010_0323_b_07L庚子九月十七日也。才氣絕倫。經史子
010_0323_b_08L傳。纔受即誦。先生頻歎曰。此兒天才。
010_0323_b_09L必有大成。就十三歲。投四佛山大乘寺。
010_0323_b_10L祝髮于凌波祖師。受具于眞谷禪師。嚴
010_0323_b_11L淨毘屍。毫毛不犯。耆年碩德。相與歎
010_0323_b_12L曰。我等名雖宗師。梵行則愧彼沙彌。
010_0323_b_13L其游敎海。神悟出羣。當時橫經之輩。
010_0323_b_14L莫之或先。鴻匠鉅擘。皆許與以佛法棟
010_0323_b_15L梁。其見重於當世者。皆此類也。遊歷
010_0323_b_16L罷。受禪於幻庵長老。傳鉢於喚應禪師。
010_0323_b_17L於淸虛十世。喚惺六世。嵩南古刹。缾
010_0323_b_18L錫殆遍。衲子之得衣珠者。指不可勝屈。
010_0323_b_19L而伽藍之廢者興。綱紀之頹者振。如南
010_0323_b_20L之南長。北之雲峯。其最者也。正廟間。
010_0323_b_21L住雲峯之養眞方丈。己酉四月十五日。
010_0323_b_22L忽索紙筆。書二偈曰。七十年間事。依
010_0323_b_23L俙夢中人。澹然同水月。何有去來身。
010_0323_b_24L幻來從幻去。來去幻中人。幻中非幻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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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0323_c_01L是我本來身 이것이 나의 본래 몸이로다
붓을 던지고 가부좌하고 합장하여 떠나니 세수 70세요, 법랍 57년이었다.평소 문사文辭를 짓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지관止觀의 여가에 말을 토하여 구슬을 이루니 가끔 훌륭한 장구章句가 있었다.그가 지은 시는 아담雅淡 고고高古하였고 입언立言한 것은 높고 깊고 옥처럼 아름다웠다.또 서법書法에 공교로워 불전佛殿과 승료僧寮의 편액이 그 손에서 다수 나왔으니, 지금도 용과 뱀이 살아 움직이는 기운이 있다.대개 그 성정의 바름과 도덕의 오묘함을 얻은 고로 문장과 필법이 공교롭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저절로 공교로웠다.법을 이은 제자가 10여 명으로, 완송 척전玩松陟詮이 골수를 얻은 제자 중 하나이다.여기에서 정봉 경현靜峯景賢이 나왔는데, 염불삼매念佛三昧를 부지런히 닦아 시적示寂하시던 날 산이 울고 계곡이 응하였다.다비하던 날 저녁에는 사리가 영험함을 빛냈으니 실로 희유한 상서였다.여기에서 용계 우홍龍溪宇弘이 나왔고, 여기에서 두암 서운杜巖瑞芸, 경운 이지景雲以祉가 나왔다.두암은 효행孝行과 계검戒檢이 있어 스승 모시기를 어버이 모시듯 하고 몸을 보호하기를 구슬 보호하듯 하여 총림에 이름이 났다.경운은 곧 법문法門의 영수領袖로서 종교宗敎를 크게 천양하였고 겸하여 사한辭翰이 있었으니, 여러 곳에서 사장私藏하고 있는 『사산집史山集』이 곧 그 보배로운 해타이다.두암을 이은 혜운 치민惠雲致敏 역시 절 일을 받드는 데 정성을 다하여 계술繼述(계승)을 잘하였으니 선대의 덕과 닮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오호라, 화상의 전법이 이미 6대에 이르렀고 대대로 재덕을 배출하여 문풍門風이 번성하였으니 모두 화상이 선을 쌓고 남긴 음덕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다.유고遺稿는 두 권인데 오래도록 건연巾衍(책 상자)에 보관되어 있었으나 한 권은 중간에 잃어버렸다.낙중洛中(영남)의 선비들과 대개 일찍이 종유하였는데 권청대權淸臺(권상일權相一), 정해좌丁海左(정범조鄭範祖) 등 여러 선생들로, 주고받은 글이 많으나 지금은 한두 편도 없으니, 곧 잃어버린 권에 실려 있기 때문이다.지난 무인년(1878) 봄에 두암공杜岩公이 남아 있는 한 권을 판에 새겨 오래 전하고자 하여 받아 놓고는 머리말을 나에게 부탁하였다. 돌아가신 스승 함홍 화상涵弘和尙75)P은 -
010_0323_c_01L是我本來身。投筆跏趺今掌而逝。壽七
010_0323_c_02L十。臘五十七。雅不喜爲文辭。止觀之
010_0323_c_03L餘。吐辭成珠。徃徃有章句。其爲詩也。
010_0323_c_04L雅淡高古。立言也。奫崛瑰琦。又工書
010_0323_c_05L法。佛殿僧寮之扁額。多出其手。至今
010_0323_c_06L有龍蛇活動之氣。蓋得其性情之正。道
010_0323_c_07L德之妙。故文章筆法。不期工而自工也。
010_0323_c_08L有嗣法十數。玩松陟詮。得髓之一也。
010_0323_c_09L是出靜峯景賢。勤修念佛三昧。示寂之
010_0323_c_10L日。山鳴谷應。火化之夕。舍利耀靈。寔
010_0323_c_11L希有之瑞。是出龍溪宇弘。是出杜巖瑞
010_0323_c_12L芸景雲以社。杜巖有孝行戒檢。事師如
010_0323_c_13L事親。護身如護珠。有名於叢林。景雲
010_0323_c_14L則法門領袖。大揚宗敎。兼有辭翰。諸
010_0323_c_15L方私藏史山集。即其寶唾也。杜岩之承。
010_0323_c_16L惠雲致敏。亦誠於奉刹。善乎繼述。可
010_0323_c_17L謂克肖厥德者也。嗚呼。和尙之傳。已
010_0323_c_18L至六代。代出才德。門風藹藹。皆和尙
010_0323_c_19L積善遺蔭之所致也。遺稿二卷。久爲巾
010_0323_c_20L衍之藏。一卷則中間見失。於洛中士人
010_0323_c_21L蓋嘗從遊。權淸臺丁海左諸先生。多有
010_0323_c_22L往復之書。而今無一二者。載所失卷中
010_0323_c_23L故也。前戊寅春。杜岩公。以存者一卷。
010_0323_c_24L欲圖壽傳。旣受。弁文於我。先師涵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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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0324_a_01L병환이 들어 일을 다 마칠 수 없었고, 올해 가을에 혜운惠雲이 그 뜻을 따르고자 하여 활자를 구해 얻어서 나에게 행록行錄을 부탁하였다.나는 화상보다 백세 이후에 태어났다.백세 후에 태어나 백세 전의 일을 기록하려 하니 이 또한 어려운 일이로다.그러나 옛날 남헌南軒 장 선생張先生76)은 제갈무후諸葛武侯보다 천백 년 후에 태어났어도 그 일을 기술함에 혐의를 두지 않았다.진실로 전할 만한 일이 있으면 비록 세대가 아득히 멀어져도 잘못으로 여기지 않은 것이다.그러므로 그 대강을 가려 입언을 갖추노니 군자들이여 가려 읽어 주기를.숭정崇禎 기원紀元후 다섯 번째 정해년(1887) 9월 하순에 후학後學 야산 명원野山明遠이 삼가 찬하다. -
010_0324_a_01L和尙。病未克卒業。是歲之秋。惠雲欲
010_0324_a_02L如其志。求得活字。屬不佞以行錄。不
010_0324_a_03L佞後和尙。百歲而生。生於百歲之後。
010_0324_a_04L而欲記事於百歲之前。亦已難矣。然昔
010_0324_a_05L南軒張先生。生諸葛武候 [1] 千百載之後。
010_0324_a_06L記其事。不以爲嫌。苟有可傳之事。雖
010_0324_a_07L世代綿邈。不以爲謬。故撮其槩。以備
010_0324_a_08L立言。君子採擇焉。
010_0324_a_09L崇禎紀元後五丁亥九月下浣。後學
010_0324_a_10L野山明遠謹撰。
010_0324_a_11L
- 75)함홍 화상涵弘和尙 : 함홍 치능涵弘致能(1805~1878)을 지칭한다. 속성은 김金, 자는 운환雲寰이며, 김해 사람이다. 13세에 고운사孤雲寺로 출가하여 구담 화상九潭和尙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평생 행한 바가 ‘참’을 키우는 일이었기에 꾸미는 태도가 없었다고 한다. 고운사에서 법랍 56년, 세수 74세로 입적하였다. 『涵弘堂集』이 전한다.
- 76)남헌南軒 장 선생張先生 : 송나라 유학자인 장식張栻에 대해 학자들이 남헌 선생이라는 존칭을 사용하였다. 그의 『南軒集』 권10에 「荊州石鼓山諸葛忠武侯祠記」가 있다. 여기에 제갈공명에 대한 평가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 김종진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