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충허대사유집(沖虛大師遺集) / 附錄

ABC_BJ_H0227_T_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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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강 상사의 편지(姜上舍書)
죄생罪生203)이 대사의 좌석 아래에 아룁니다. 스님께서는 훌쩍 멀리 떠나 산문에 은둔하길 좋아하고 개울에 깊숙이 엎드려 숨어 사시니, 아마도 세상 사람들이 엿보고 그 빛깔과 소리를 찾으면 어쩌나 두려워하실 것입니다.

010_0354_b_21L附錄

010_0354_b_22L姜上舍書

010_0354_b_23L
罪生白大師座下師趯然遠擧嘉遯山
010_0354_b_24L潛深伏隩或恐世人之窺尋其聲

010_0354_c_01L그러나 수후隨侯의 구슬과 변화卞和의 옥을 궤짝 속에 숨겨도204) 그 상서로운 빛과 아름다운 무늬가 밖으로 드러나는 것은 스스로 가릴 수 없는 법입니다. 따라서 스님은 자취를 감추려 하시지만 명성은 더욱 드러나, 문을 닫고 적정을 지키며 사람과 만나는 일도 드문 저 같은 죄생까지도 스님의 이름을 듣게 된 지가 또 여러 해입니다. 그러나 이 들판의 학은 오래전부터 스스로 속진을 벗어났고 외로운 구름은 산봉우리를 나오려 하지 않으시며 진인과 범부의 길이 달라 서로 만날 길이 없기에, 그저 바람결에 저의 생각을 실어 보내며 추종하는 마음만 항상 간절했습니다.
근래 연탑蓮榻205)을 노음산 관음전으로 옮기셨다고 들었습니다. 저의 임시 거처에서 거리가 멀지 않고 가까운 곳입니다만 물길이 막혀 만날 기회가 적었고, 게다가 죄생 역시 여러 해 상복을 입고 지내는 중이라 직접 선관으로 찾아가 청정한 법도를 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기이한 인연은 한번 놓치면 어느 곳에서 다시 만날지 알 수 없기에 이렇게 편지 한 통을 올려 평소 말씀드리고 싶었던 저의 진심을 담으니, 스님께서 한번 자세히 살펴봐 주십시오.
스님은 이름난 가문의 자손으로 일찍이 성현의 글을 읽으셨으니 명교가 소중하다는 것을 분명히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도 스님은 그 친척들을 버리고 그 벗들과 절교하고서 안신입명安身立命의 땅을 불생불멸의 도량에서 찾았으며, 방편方便을 아버지로 삼고 지혜(智度)206)를 어머니로 삼고 법희法喜를 아내로 삼아 스스로 명교 밖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스님은 천성이 본래 메마르고 담담하기에 그 소란스러운 속진을 싫어하고 그 청정함과 고요함을 좋아하여 그렇게 하셨습니까? 또 모르겠습니다. 스님은 출가할 때에 그 밟았던 경지가 반드시 이와 같은 다음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까?
덩그런 침상 포단에 앉아 지혜의 등불이 깜빡깜빡하다가 눈앞의 경계가 한 생각에 홀연히 마음자리에 도달했을 때, 근심스레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면 어수선한 것이 옛날 그 사람이 아니고, 몇 가락 범패는 예전 성현들의 법다운 말씀이 아니고, 반 폭짜리 납의는 선왕의 법다운 의복이 아니고, 방편과 지혜도 원래 무생無生의 땅에서 베푼 은혜일 것입니다. 머리카락과 피부는 부모님에게서 받은 것인데 또한 그것도 스스로 훼손하였고, 무성하던 머리도 이미 깎았습니다. 일신의 만사를

010_0354_c_01L然而隨和蘊櫝其祥光瑞彩之發
010_0354_c_02L見於外者則自不可掩故師跡欲秘
010_0354_c_03L而名益彰如罪生之閉戸守靜罕與人
010_0354_c_04L接者得聞師之名亦稔矣惟其野鶴
010_0354_c_05L本自離塵孤雲不肯出峀眞凡殊途
010_0354_c_06L遭逢無路徒自因風寄想遡懷恒切
010_0354_c_07L近聞蓮榻移住於露陰之觀音殿距奬
010_0354_c_08L僑不遠而邇而窮涂事少遭際罪生
010_0354_c_09L又纍然在衰絰中不得躬詣禪關獲接
010_0354_c_10L淸範奇緣一失不知後期之在於何地
010_0354_c_11L玆奉一緘庸伸平居願言之忱師試詳
010_0354_c_12L以▼(癶/言)之師以名祖之孫嘗讀聖賢之書
010_0354_c_13L其必知名敎之爲重而師棄其親黨
010_0354_c_14L其朋儕覔得安身立命之地於不生不
010_0354_c_15L滅之場以方便爲父智度爲母法喜
010_0354_c_16L爲妻自作名敎外人物未知師天禀
010_0354_c_17L本來枯淡厭其囂塵樂其淨寂而然耶
010_0354_c_18L又不知師出家之時其所蹈之地必如
010_0354_c_19L是而後可也耶一枕蒲團慧燈明滅
010_0354_c_20L塵一念忽到心頭惕然顧形渾非舊
010_0354_c_21L日樣子數聲梵唄非前聖之法言
010_0354_c_22L幅衲衣非先王之法服方便智度
010_0354_c_23L無生地之恩而髮膚之受於父母者
010_0354_c_24L自毁傷鬆鬆然頭已剃矣一身萬事

010_0355_a_01L모두 허깨비 경계와 푸른 계곡으로 돌려 보지만 가문의 아우들이 꿈속에서 아른아른할 것입니다. 바로 그럴 때, 저는 스님의 마음이 어떨지 압니다. 스님은 분명 슬픔에 젖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 눈물이 줄줄 흘러 옷깃을 적실 것입니다. 스님은 제 말을 듣고 이렇게 말씀하겠지요.
“세상 사람들은 나를 모른다. 그런데 이자가 유독 내 마음을 안단 말인가?”
또 이렇게 말씀하겠지요.
“이자 역시 속세를 면치 못해 이곳에 본래 행복의 땅이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런데 이런 망령된 말을 한단 말인가?”
스님께서 출가하신 후에는 한 가문 사람들이 “이자는 우리 친족이 아니므로 가까이하지 않는다.” 하고, 한 고향 사람들이 “이자는 우리 이웃이 아니므로 교류하지 않는다.”라고 하며, 스님 역시 스스로 멀리하고 스스로 막으면서 그저 종적이 깊지 않으면 어쩌나 이름이 전해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한다니, 이는 모두 잘못입니다. 예로부터 명문거족에서 출가한 자들이 또한 많았으니, 진晉나라의 도징圖澄207)과 혜원慧遠,208) 송나라의 참료參寥209)와 혜근惠勤210) 같은 이들이 바로 그런 자들입니다. 당시에는 승려라는 이유로 그들을 업신여긴 적이 없고, 저 유진장劉眞長211)ㆍ도연명陶淵明ㆍ구양공歐陽公ㆍ소동파蘇東坡 같은 여러 현사들이 모두 그들과 더불어 노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연사蓮社의 모임과 고산孤山의 유람은 천고의 아름다운 일이 되었습니다.
스님께서 공문空門의 법지法旨에 얼마나 조예가 깊으신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서가西家212)에서 경에 밝고 행실을 닦은 사람을 칭할 때면 반드시 책 대사册大師를 거론하고 “책 대사께서 말씀하신 청아한 글과 아름다운 문장이 요즘 널리 전해지고 있는데 이것으로 사람들의 어금니와 뺨을 향기롭게 할 수 있다.”라고들 합니다. 곧 이 명성으로 살펴보건대, 스님은 지금 시대의 도징이고 혜원이고 참료이고 혜근입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지금 시대 풍류를 즐기는 문아文雅213)들 가운데는 꽃비가 내는 곳에서 고상하게 함께 노닐 유진장이나 도연명이나 구양수나 소동파 같은 여러 현사가 없어 그저 천 년 전 연사와 고산에서의 모임이 그 아름다움을 독차지하게 하고 있으니, 이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죄생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지만 타고난 성품이 노둔하고 모자라 둔한 근기를 없애지 못하였으니,

010_0355_a_01L都歸幻境蒼磵門第俙於夢想之中
010_0355_a_02L則于時也吾知師之心其必慽然而悲
010_0355_a_03L自不覺淚淫淫而沾襟也師之聞我言
010_0355_a_04L其將曰世人不知我而是子也惟知我
010_0355_a_05L心云已耶抑將曰是子亦未免俗
010_0355_a_06L識箇中自有樂地而乃有此妄說云已
010_0355_a_07L自師出家之後一門則曰是非我之
010_0355_a_08L族也不與之親一鄕則曰是非我之類
010_0355_a_09L不與之交師亦自疏自沮惟恐蹤
010_0355_a_10L跡之不深名字之或傳是皆過也
010_0355_a_11L來名門鉅族出家者亦多有之如晉之
010_0355_a_12L圖澄慧遠宋之參寥惠勤是耳時未嘗
010_0355_a_13L以緇流卑薄之若劉眞長陶淵明歐陽
010_0355_a_14L公蘇東坡諸賢皆樂與之遊蓮社之會
010_0355_a_15L孤山之遊爲千古之美事師於空門法
010_0355_a_16L吾未知造詣之淺深而世人稱西家
010_0355_a_17L中經明行修者必曰册大師册大師云
010_0355_a_18L已而淸詞麗藻傳詠於時是可以香人
010_0355_a_19L之牙頰則以名聲觀之師今之圖澄也
010_0355_a_20L慧遠也參寥也惠勤也惜乎今之世
010_0355_a_21L風流文雅未有如陶劉歐蘇諸賢與之
010_0355_a_22L翺遊於雨花之地徒使蓮社孤山之會
010_0355_a_23L專美於千載之上是可恨耳如罪生者
010_0355_a_24L少志于學而受性魯下鈍根未除

010_0355_b_01L‘쓴다’는 단어를 외우면 ‘빗자루’라는 단어를 잊어버리고 ‘빗자루’라는 단어를 외우면 ‘쓴다’는 단어를 잊어버린 비구214)나 거의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흙덩이와 석탄가루를 좋아하는 버릇215)은 늙어서까지 없어지지 않아 남은 세월 눈요기라고는 오직 이 희羲ㆍ문文께서 남기신 경216)뿐입니다. 하지만 풀이 매운 오솔길처럼 본바탕이 꽉 막혀 효위爻位와 단상彖象217)에 담긴 오의를 꿰뚫을 수가 없으니, 제가 바로 정程 선생께서 말씀하셨던 ‘책을 읽고 나서도 여전히 이 모양인 사람’218)입니다. 때때로 책을 덮고서 “내 분수는 머리가 허옇도록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일개 촌놈으로 사는 건가 보다.” 하고 길게 탄식할 뿐입니다.
옛사람이 “『능엄경楞嚴經』 1부가 간괘艮卦 하나만 못하다.”라고 하였습니다. 부디 스님께서는 경전을 설하시던 일을 잠시 미루고 64괘의 오묘한 뜻을 깊이 음미해 주소서.
그러면 신비한 식견이 닿고 오묘한 안목으로 밝혀져 효위에 담긴 뜻과 단상의 오묘한 뜻이 분명 그 칼날을 맞이할 것이며, 엉킨 실타래가 풀어질 것입니다. 그런 다음 아름다운 음성을 드리워 길을 잃고 헤매는 저에게 지시하여, 죄생으로 하여금 꿈과 깨달음의 관문에 도달하게 해 주신다면 너무도 다행이겠습니다.
권 진사의 편지(權進士書)
신선과 범부는 아득히 떨어져 지내고 청류와 탁류는 그 물줄기가 다르기에 한 시대를 함께 살면서도 사는 땅은 백 리 길219)이군요. 이름도 이제 처음 들으셨을 텐데, 하물며 그 얼굴을 뵐 수 있을지 논하는 것이겠습니까. 저는 천등산天燈山220) 아래 살며, 월암月巖과는 서로 왕래하면서 매우 좋게 지내는 사이입니다. 간간이 일상적인 말과 사자좌의 법문에서 선정의 마음이 어린 스님의 도운道韻을 익히 들었습니다. 씻은 듯 상큼하고 아득히 뛰어넘어 하늘 밖에서 교교히 빛나시니, 그리워할 수는 있어도 볼 수는 없어 저도 모르게 일어나 재배하고 싶어집니다.
거처에 별일은 없으시겠지요? 우리 스님께서 지으신 「무시옹잠無是翁箴」을 얻어 읽고 나서, 또 「강 상사에게 답한 편지」를 얻어 읽었습니다. 스님의 청정함을 받드는 뜻과 시운의 쓸쓸함과 초탈함이 더욱 돋보였고, 길이 은둔하려는 뜻과 세속을 초월하려는 목표는 과연 예전에 들었던 자들보다 훨씬 더하면 더했지 미치지 못할 것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구구한 천운의 재앙에 대해 우리 스님께 위로의 말씀을 올리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형식과 내용이 함께 나아가고 낙락한 경계에서 노둔하게 움직이는 것을 남몰래 기뻐하였으니,

010_0355_b_01L同毗丘之誦掃忘箒誦箒忘掃者也
010_0355_b_02L其土炭之癖到老未已殘年寓目
010_0355_b_03L是羲文遺經而本地茅塞透不得爻位
010_0355_b_04L彖象之薀奧此正程先生所謂旣讀書
010_0355_b_05L猶是這㨾 [82] 人者也有時掩卷長嘆
010_0355_b_06L自分作白首無聞之一野夫耳古人云
010_0355_b_07L一部楞嚴不如艮之一卦願師移說經
010_0355_b_08L之工潛玩於八八之奧旨則神識所到
010_0355_b_09L竗眼所燭爻位之蘊彖象之奧其必
010_0355_b_10L刄迎而縷解矣然後俯垂好音指示迷
010_0355_b_11L俾罪生得到於夢覺之關幸甚

010_0355_b_12L

010_0355_b_13L權進士書

010_0355_b_14L
仙凡逈隔淸濁異流生同一世地是
010_0355_b_15L宿舂而名且始聞况論其得接眉宇耶
010_0355_b_16L家住天燈下與月巖來徃甚善間常語
010_0355_b_17L及獅座慣聆其禪心道韵灑然超邁
010_0355_b_18L皎皎天外可望而不可見則未常不起
010_0355_b_19L而欲再拜也居無何得吾師所著無是
010_0355_b_20L翁箴讀之已而又得所答姜上舍書
010_0355_b_21L讀之益見師宇奉淸淨意韵凄越
010_0355_b_22L徃之志拔俗之標果與前所聞者
010_0355_b_23L過之而無不及焉者則區區牛斗之厄
010_0355_b_24L有不足爲吾師奉唁而竊喜其辭理俱

010_0355_c_01L육식에 찌든 저희가 틈새로 엿보고 추측할 바가 아닌 점이 있었습니다. 그 잡초가 우거진 땅에서 사는 자들은 진 처사晉處士221)에게 있어 원공遠公222)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한 조주韓潮州223)에게 있어 전로顚老224)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미처 모르는데, 게다가 여기에 한 격格을 늘린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겠습니까?
재주가 없는 저는 연운年運을 이미 놓쳐 어느덧 나이 70에도 세상에 알려지지 못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솥 그릇(鼎器)225)은 훼손되고 뜻을 두었던 업은 쇠락해 일상생활에서의 음식은 실로 고청高聽을 우러르기에 부족하고, 앉아서 상전벽해를 지켜보았지만 신세가 졸렬하며 도원桃源은 아득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훌륭한 스님이나 시승과 함께 구름도 강물도 적막한 물가에서 지팡이 하나로 서로를 따르면서 그들과 더불어 이 몸을 훌쩍 벗어던지고 풍아風雅226)를 요리하며 여생을 보내다가 하얀 뼛가루가 되어 그 사람을 찾아도 찾을 수 없게 하고 싶은 생각입니다.
이렇게 멀리서 고아한 도풍이 들리는데도 왜 이 몸과 살덩이는 날아오르지 못하는 걸까요? 또 고사께서 깃들어 사시는 곳 이웃이 바로 달이 지는 곳 근처라 들었으니, 길을 나서시는 데 밑천이 될 기이한 옥돌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날아도 섬돌을 넘지 못해 먼지 구덩이에서 그저 하늘에 떠가는 흰 구름만 바라보며 탄식하는 이 쑥대밭의 선비를 잠시만 돌아보소서.
산 사람이 세상에 있으면 어디 간들 내 집이 아니겠습니까. 이곳 영가永嘉227)의 산수가 비록 기특한 볼거리는 없어도 혹 선배들이 남기신 향기는 있고, 몇 개월 머무실 곳도 없지 않습니다. 하물며 또 월암 스님이 바야흐로 대조사들의 영당을 지어 공역이 막바지로 향하고 있으니, 진영을 안치할 날짜를 지목해 주셔야지요. 혹 행회幸會의 인연이 되어 결사結社의 고사를 다시 더듬는다면 어찌 천고의 옛 마음으로 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안거 해제가 언제쯤인지 분명히 알면 때맞춰 철쭉 한 송이로 명옥대鳴玉臺228) 위에서 꼬리를 내밀겠습니다. 스님께서 마음을 내실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마침 요양차 천등산에서 지내다가 편지를 전할 사람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외람되게도 방장실 아래에 먼저 편지를 보냅니다. 그렇게 늙어 참선을 하다니 정말 가소롭다며 저를 나무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다 표현하지 못하고 삼가 글을 지어 올리니, 부디 아울러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충허대사유집』 제2권 끝

010_0355_c_01L境落蹇擧有非吾儕葷血所可闖測
010_0355_c_02L其藩域者第未知晉處士之遠公韓潮
010_0355_c_03L州之顚老亦有此長一格價否也若不
010_0355_c_04L佞者年運而徃矣居然作七十無聞之
010_0355_c_05L鼎器毁敗志業衰落日用飮啄
010_0355_c_06L不足仰凂高聽坐閱滄桑身世拙而桃
010_0355_c_07L源杳然則思欲與名緇韵釋一笻相從
010_0355_c_08L於水雲寂寞之濱與之脫略形骸料理
010_0355_c_09L風雅以送餘年而輥到白紛求其人
010_0355_c_10L而不可得者於是逖聞高風何能不色
010_0355_c_11L飛而肉騰耶且聞高棲之地係是月落
010_0355_c_12L旁支必有瑰奇助發之資而顧些蓬蒿
010_0355_c_13L之翰飛不越階悠悠塵土徒有白雲
010_0355_c_14L在天之歎山人在世何徃非家惟玆
010_0355_c_15L永嘉山水雖無奇特之觀亦或有先輩
010_0355_c_16L剩馥不無數朔住卓之地况且巖公
010_0355_c_17L方營大祖影堂功役向殘計指日安幀
010_0355_c_18L倘得因緣幸會更尋結社故事則庸非
010_0355_c_19L千古舊心事耶的知解夏在那間則當
010_0355_c_20L以一躑躅出尾於鳴玉臺上未知師能
010_0355_c_21L有意否適避痘天燈聞有信便猥以
010_0355_c_22L書先于丈室之下不知者譏我以老
010_0355_c_23L而參禪殊可笑也不宣謹狀伏惟統希

010_0355_c_24L
冲虛大師遺集卷之二終

010_0356_a_01L
충허당 기실冲虛堂記實
대사의 어린 시절 자는 응문應文이고, 법휘는 지책旨册이다. 시례詩禮의 집안229) 자손으로 명교名敎230) 출신이며, 만년의 호는 충허당冲虛堂이다. 세거지는 상주尙州이며, 그 계보를 살펴보면 아버지는 흥양興陽 이 공李公이고 어머니는 의령 남南씨이니, 두 분 모두 유현儒賢의 후예라 하겠다.
스님은 경종 원년(1721) 신축 5월 23일에 태어났다. 태어나 2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13세에 아버지를 여의었으며, 25세에 출가하였으니 바로 원릉元陵231) 을축년(1745) 9월 3일이었다. 어려서는 고달프고 성장해서는 외로웠으나 성품이 조용조용하고 재능이 총명하고 영특하였으며, 눈썹과 눈이 그린 것처럼 맑고 수려하였다. 그는 학업에 입문하여 글을 배우자마자 바로 외우고 글을 지어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고, 구태여 어른들이 가르칠 필요가 없어 어른들이 기특하게 여기며 그를 사랑하였다. 이로부터 학문이 나날이 성취되어 책이라면 읽지 않은 것이 없고, 읽었으면 반드시 마음에 담아 완전히 이해한 뒤에야 그만두었다. 『도덕경道德經』과 『남화경南華經』 등의 서적을 특히 좋아하여 자신이 직접 그 문장들을 베껴 썼는데 (글씨가) 기이하고 고아해 완상할 만하였다.
성장하여 약관弱冠232)의 나이가 되자 문장이 풍성하고 아름다워 명성이 자자하였으며, 매번 서당이나 문사들의 모임이나 문단 등 기예를 겨루는 자리에서 반드시 앞자리를 차지하여 당시의 동년배들이 모두 자신은 그만 못하다고 여겼다. 그를 보는 사람들은 감탄하지 않는 자가 없어 “이 아이는 분명 일찌감치 대성하여 가문을 빛내는 자손이 되리라.” 하며 여러 차례 천거했지만 뽑히지 못하였다. 일찍이 스스로 “옛사람들 가운데도 사방으로 유학한 자들이 있었다. 만약 나를 몇 개월이나마 낙하洛下(서울)의 명사들에게서 윤색하게 해 준다면 한 격格을 늘릴 수 있을 텐데.” 하고 탄식하였지만 당시에 아직 가정을 일구지 못해 집안 어른(長者)이 막았으니, 이는 실로 개탄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집에 있을 때면 집안 어른을 곁에서 모시며 하루 종일 꼿꼿이 꿇어앉아 항상 공손하게 응대하였고, 벗들과 교류할 때면 함께 어우러지면서도 휩쓸리지 않아 모두가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품었으니, 단정한 선비가 아니면 그럴 수 있었겠는가. 타고난 성품이 번거롭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아 교결함을 유지하였으며, 초연히 높이 오를 뜻을 품고 있었다.

010_0356_a_01L冲虛堂記實

010_0356_a_02L
大師小字應文法諱旨册詩禮家子
010_0356_a_03L名敎中入晩號冲虛堂世居尙州
010_0356_a_04L其系則考曰興陽李公妣曰宜寧南氏
010_0356_a_05L俱名賢後也師以景廟元年辛丑五月
010_0356_a_06L二十三日生生二歲而失乳十三而孤
010_0356_a_07L二十五而出家實元陵乙丑九月初三
010_0356_a_08L日也幼而㷀苦長而伶俜然性恬介
010_0356_a_09L才聰頴眉眼淸秀如畫甫入學受書
010_0356_a_10L輒成誦屬文多驚人不勞長者之敎
010_0356_a_11L長者奇愛之自是學日就於書無所不
010_0356_a_12L讀必入心融會而後已尤好道德經
010_0356_a_13L南華經等書其手抄文字奇古可玩
010_0356_a_14L逮成童弱冠時詞章贍麗聲譽藹蔚
010_0356_a_15L每於黌塾文會詞垣較藝之所必居前
010_0356_a_16L一時夜流皆自以爲不及人之見
010_0356_a_17L之者莫不嗟賞曰此子必早達大成
010_0356_a_18L當作克家子弟累擧不中嘗自歎曰
010_0356_a_19L古人有遊學四方者若使我數月潤色
010_0356_a_20L於洛下名士則可長一格而以時未有
010_0356_a_21L爲長者沮是誠慨然其居家侍長
010_0356_a_22L者之側終日危坐應對惟謹與朋友
010_0356_a_23L交和而不流咸得其愛敬之心非端士
010_0356_a_24L而然乎素不喜繁華以皎潔白 [83]

010_0356_b_01L
또 출가하고 난 뒤에는 자신이 가문의 흠이 되었다고 수치스러워하면서 오로지 산과 숲이 깊지 않으면 어쩌나, 종적이 혹 드러나면 어쩌나만 걱정하였다. 이런 까닭에 물어도 알 수가 없고, 찾아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출가 후 6년째 되던 해인 경오년(1750)에 노악露嶽 수죽암水竹菴에서 스님을 보았다는 사람이 있었지만 도피하여 그를 만날 수 없었다. 또 그로부터 4년 후 갑술년(1754)에 주남州南의 훌륭한 선비들이 용문龍門 영수사靈水寺에서 많이 모인 일이 있었다. 그들은 스님이 중암中菴에 거처한다는 소식을 듣고 일제히 찾아가 스님을 만났다. 어떤 이는 심하게 꾸짖고, 어떤 이는 깨우치며 달래고, 또 어떤 이는 탄식하고 애석해하며 위로하고 이해하는 자도 있었으니, 이들은 모두 지난날 함께 공부했던 스님의 옛 친구들이었다. 스님은 그 당시 이미 불가의 여러 서적을 학습하여 처음으로 주미麈尾를 잡고 강단에 올랐던 때였으며, 거느린 대중은 육칠십 명 정도였다. 몸을 숨기려고 하였지만 숨길 수 없었고 이름을 지우려고 하였지만 지울 수 없어 이렇게 10년 만에 그를 한 번 만났다.
그 이후로는 조용히 멀리 은둔하여 그 그림자나 메아리조차도 찾을 수 없었다. 그가 머문 곳 가운데 두드러진 곳은 다 팔부八府의 조용한 피신처였으니, 금릉 황악산 능여암能如庵, 호남 지리산 벽송사, 성주 불령산 청암사, 군위 화산 백암白庵, 풍기 명봉산 내원內院, 문경 희양산 동전東殿, 함창 칠봉산 중암中庵이 그곳이었다. 그가 이 상주에서 머문 곳을 말해 보자면 사불산 윤필암潤筆庵, 운달산 중암, 속리산 청계사 내원, 천주산 북장사 경운암慶雲庵, 노악 남장사 중궁암中穹庵과 관음전觀音殿 등지였다.
스님에게는 세 분의 스승이 계셨으니, 시탄時坦은 그의 은사恩師이고, 벽허碧虛는 그의 계사戒師이고, 쌍운雙運은 그의 법사法師이다. 일찍이 스님을 가까이 모셨던 자가 있어 스님의 말씀을 이렇게 암송하였다.
“내 지난날 가슴이 답답하고 뜻을 펼 수 없어 집안 어른께 말씀도 드리지 않은 채 서울로 길을 나섰다. 남장사를 경유하다가 병으로 수죽암에 눕게 되었는데,

010_0356_b_01L然有高擧之志旣又出家之後羞其爲
010_0356_b_02L門戶之玷惟恐山林之不深蹤跡之或
010_0356_b_03L以是尋不得覔不得其後六年庚
010_0356_b_04L人有見師於露嶽之水竹菴者而逃
010_0356_b_05L避莫之接又其後四年甲戌州南名
010_0356_b_06L多會於龍門靈水寺聞師之居中菴
010_0356_b_07L齊進見之或切責之或曉諭之亦或
010_0356_b_08L有歎惜而慰解之者斯皆師之前日同
010_0356_b_09L硏故舊也師於是時已習佛家諸書
010_0356_b_10L始執塵登講壇率衆六七十矣身欲藏
010_0356_b_11L而不可藏名欲掩而不可掩有此十年
010_0356_b_12L一會自其後寂然遠遁盖不得以影
010_0356_b_13L響焉其所住卓凡八府靜僻處若金
010_0356_b_14L陵黃岳之能如也湖南智異之碧松也
010_0356_b_15L星州佛靈之靑庵 [84] 軍威花山之白庵
010_0356_b_16L豊基鳴鳳之內院也聞慶曦陽之東
010_0356_b_17L殿也咸昌七峯之中庵也其在本州
010_0356_b_18L則曰四佛山潤菴 [85] 曰雲達山中庵
010_0356_b_19L俗離之淸溪寺內院曰天柱之北長寺
010_0356_b_20L慶雲曰露岳之南長寺中穹庵觀音殿
010_0356_b_21L等地是已師有三師時坦其恩師也
010_0356_b_22L碧虛其戒師也雙運其法師也嘗有親
010_0356_b_23L於師者誦師之言曰吾昔欝欝不得志
010_0356_b_24L不告長者將向京師路由南長病臥

010_0356_c_01L늦가을에 독리毒痢(이질)가 심했다. 그렇게 겨울을 지나 봄으로 넘어갈 때까지 인간세계와 귀신세계의 관문을 드나들었는데, 오직 평범하고 가난한 스님 한 분만이 나를 불쌍히 여겨 간호하면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태만하지 않았다. 그렇게 육칠 개월 동안 이미 끊어졌던 나의 생명을 이어 주셨으니, 이분은 이른바 서방의 살아 계신 부처님 중 한 분이셨다. 내가 다시 살아나고 보니, 머리카락이 돌돌 말려 다시는 빗질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삭발을 하고는 그 은혜에 감사하며 그분을 스승으로 모셨다.”
그는 수죽암에서 지내다가 전 현감이었던 성 공成公이 역학易學에 밝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가 의심나는 것들을 물었으며, 비용을 지불하고 여러 달 공부하였다. 그 은사는 매우 가난하고 또 일자무식이었지만 특별히 스님을 존중하고 사랑하여 쌀을 구걸하고 돈을 구걸해 공급하면서 정성을 다하였다. 거기에 더해 쌍운당雙運堂에게서 선과 교를 수학하였는데, 스님은 경經과 전傳233)을 많이 읽었던 사람이기에 한번 법문에 올라 8만 4천 법문이 담긴 서적(불경)을 보자마자 하나를 들면 셋을 대답하였고, 부딪치는 곳마다 여유롭게 칼날을 놀렸으며,234) 그 문장이 질펀하고 아득해 자유자재하고 그 명성이 가득 퍼져 밝게 드러났으니, 이른바 청출어람이 바로 이런 사람이었다. 이에 원근의 큰 유학자들과 석학들과 고매한 선사들과 오묘한 승려들이 모두 한번 만나 보기를 원하였고, 몇 해 지나지 않아 자리를 펴고 설법하자 거주하는 생도가 천 명 백 명씩 무리를 이루었다. 갑오년(1774) 이후로는 아도阿睹(눈)의 질병으로 강의를 사양하고 관음암에서 조용히 요양하면서 일상생활의 밥 먹고 차 마시는 일 외에는 그저 침묵하면서 식견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은사를 받들며 정성과 사랑을 다하였고, 하시고자 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그 뜻을 받들어 이루어 드렸으며, 계사와 법사에 대해 때때로 물으며 공경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고, 나아가 돌아가셨을 때에는 세 스승에 대해 동일하게 상복을 입었다.
스님의 한결같은 성품은 본래 자비롭고 진실하고 청렴하고 담박하였으며, 청정함을 좋아하고 남에게 주기를 좋아하였다. 남루하고 동상이 걸린 일꾼이나 걸인을 보면 곧바로 자신의 갖옷과 음식을 나누어 주었고, 또 여러 동료 승려들에게 구걸하여 그것을 주기도 하였다. 일찍이 무술년(1778)에 각자 식사 후 남은 찌꺼기들을 모아서 창밖의 바위에 올려놓고 시험 삼아 까마귀와 까치들을 길들였는데, 새 떼가 처음에는 괴상하게 여기는 듯하다가 나중에는 이것을 먹게 되었다.

010_0356_c_01L水竹盖深秋毒痢跨涉冬春之交
010_0356_c_02L沒人鬼之關獨有一庸僧貧徒哀而救
010_0356_c_03L一心不怠續我已絕之命於六七朔
010_0356_c_04L之間此所謂西方一活佛吾旣再生
010_0356_c_05L髮卷曲不可復理遂乃薙之感其恩
010_0356_c_06L而師之云其在水竹也聞前知縣成公
010_0356_c_07L之明於易學徃質其前所疑者費了
010_0356_c_08L時月工夫其恩師者甚窶且蔑識
010_0356_c_09L於師敬愛丐米乞金供給竭誠俾之
010_0356_c_10L受禪敎於雙運堂師以多讀經傳之人
010_0356_c_11L一登法門纔見八萬書擧一反三
010_0356_c_12L處迎 [86] 文章汪漾以肆聲名洋溢以
010_0356_c_13L所謂靑於藍者是也遠近之鴻儒
010_0356_c_14L碩士高禪竗釋皆願一見不幾年
010_0356_c_15L座說法所居生徒千百成羣自甲午
010_0356_c_16L以後以阿睹之症謝講養靜於觀音
010_0356_c_17L日用瓶鉢之外默然不以識見處也
010_0356_c_18L奉恩師盡誠愛凡所欲爲必承意以成
010_0356_c_19L其於戒與法不廢時問之敬及沒服
010_0356_c_20L師如一性本慈諒康淡好淸淨
010_0356_c_21L施與見傭丐之藍縷皹瘃者輒分其裘
010_0356_c_22L又或乞諸伴禪而與之嘗於戊戌
010_0356_c_23L各聚齋餕之遺屑者置窓外巖上試以
010_0356_c_24L馴烏鵲羣鳥初若怪之後乃食之

010_0357_a_01L이와 같이 10여 일이 지나자 나무에 진을 치고서 가지도 않는 것이 마치 먹이를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 같았다. 이에 스님이 매일 자기 밥을 덜어 그들에게 먹였는데, 떼 지어 날아들어서는 마시고 쪼면서 피하지도 않았다. 스님이 밥을 들고 문을 나서는 것을 보면 서로 다투어 날면서 춤을 추었고, 심지어 밥을 들지 않고 문을 나서도 스님의 머리 꼭대기며 어깨 팔에 떼 지어 내려앉았다. 그렇게 나날이 점점 많아져 먹이는 수가 수천 마리에 이르렀는데, 다음 해 늦은 봄에야 그들을 방사한 후 사람들에게 말하셨다.
“모든 새를 다 길들일 수 있지만 까마귀가 제일 길들이기 쉽고, 까치가 가장 길들이기 힘들다.”
이는 그 옛날에 용을 발우에 담고235) 호랑이 싸움을 말렸던 일236)과 비슷한 유이다. 그가 기심(機)을 잊고 만물과 친숙했던 것이 이와 같았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에서는 귀천貴賤과 친소親疏를 두지 않는 것을 자신의 법칙으로 삼고 한결같이 공손하게 주인처럼 대하였다. 또 서리나 하인이나 노파나 주졸走卒들이 이름을 부르면서 문을 메우면 손을 잡아끌고 맞이하기를 매우 부지런히 하였지만, 벼슬아치나 선비나 지팡이 짚고 가죽신 신은 나그네가 소문을 듣고 방문하면 피하거나 혹은 만나도 자신이 아니라고 하였다. 높은 명성을 싫어하고 낮고 천함을 즐겼으며, 진실로 스스로 버려진 물건을 자처하며 사람 가운데 하나로 계산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따라서 할 일이 없었지만 지팡이가 아름다운 승경지를 찾아가지 않았고, 명성이 있었지만 발꿈치가 권세가나 귀인의 문턱에 닿지 않았다. 일찍이 표충사의 종정이 되었을 때는 겨우 절 한번 하고 돌아왔다. 진양晉陽(진주)의 강 상사와 화산花山(안동)의 권 상사 역시 그의 소문을 듣고 그의 명성을 사랑해, 편지와 시를 주고받은 것이 있지만 스님의 표현과 필적은 높고 오묘한 것을 사모하지 않았다. 본래 비밀처럼 감추려고도 하지 않고 또한 자랑하며 뽐내려고도 하지 않았다. 매번 사람들에게 재촉당한 후에야 억지로 썼지만 그가 붓을 휘갈기면 시는 허허롭고 문장은 자유로웠다. 초서와 예서가 훌륭해 법도와 힘이 극치에 이르렀는데, 황단黃丹으로 검은 종이에 황정黃庭의 백운百韻을 쓴 것은 이것을 얻은 자가 가보로 여길 정도였다. 노년에 과업으로 삼은 것은 포도와 파초 등을 심고 역점과 의약의 방술에 힘쓴 정도였다.
지금 주상께서 즉위하시고 9년째인 을사년(1785) 8월 17일에

010_0357_a_01L是過旬餘屯樹不去似有仰哺之意
010_0357_a_02L師日以己飯分飼之飛集飮喙之不避
010_0357_a_03L見師之持飯出門爭相飛舞而雖無飯
010_0357_a_04L出門羣集於師之頭頂肩臂之上
010_0357_a_05L日漸聚養至數千頭至明年暮春
010_0357_a_06L放之後語人曰凡禽鳥皆可馴而惟
010_0357_a_07L烏易馴惟鵲㝡難馴此與古之藏龍解
010_0357_a_08L虎之事相類而其忘機狎物如此乃若
010_0357_a_09L其接物處己之道則無貴賤親踈一以
010_0357_a_10L恭遜爲主吏胥隷儓婆媼走卒之誦名
010_0357_a_11L而盈門者延接甚勤而冠盖韋布杖屨
010_0357_a_12L過客之聞風而訪問者或避或見則
010_0357_a_13L非其惡高明而樂卑賤實自處以棄物
010_0357_a_14L不欲以人數齒也是故無事而笻不尋
010_0357_a_15L佳勝之地有名而踵不及權貴之門
010_0357_a_16L爲表忠宗正僅一拜而歸如晋陽姜上
010_0357_a_17L花山權上舍亦聞其風而愛其名
010_0357_a_18L書䟽詩韵之酬酢者師之詞華墨跡
010_0357_a_19L1) [6] 高妙而本不欲慳秘亦不欲夸耀
010_0357_a_20L每被人迫而後彊然及其揮洒詩則冲
010_0357_a_21L而文則放善草隷極遵勁以黃丹
010_0357_a_22L黃庭百韵於墨紙者得之者以爲寶
010_0357_a_23L老來課業惟葡萄芭蕉之種曆占醫
010_0357_a_24L藥之方而已當今上即位之九年乙巳

010_0357_b_01L질환을 보이다가 관음전 조실에서 천화하셨다. 이에 원근의 승려 대중들이 애도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사방에서 말을 타고 달려와 제사를 준비하면서 일을 감독한 자가 거의 천 명에 육박하였다. 앞뒤로 문하에서 법을 배운 자는 그 몇백 명인지 알 수도 없고, 거느리고 기른 자만 무려 30여 명이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하지만 작은 살림살이에 가난이 심하여 등진 자와 환속한 자가 거의 대부분이고, 또 불행하게 단명한 자도 있고 돌아가실 때까지 열심히 모신 자도 있었다. 그리하여 재학 중인 자로는 두 사람이 있으니, 하담荷潭과 남파南坡이다. 거느린 자로는 세 사람이 있다. 첫째는 보한普閑이니 기르지 않았는데도 계승한 자이고, 둘째는 승필勝必이니 10년 동안 기른 자이고, 셋째는 우인宇仁이니 아직 이름을 올리지 않은 자이다.
아, 스님은 시례의 가정에서 태어나 명교의 학문을 익혔으니, 행복의 땅이 본래 우리 유가에 있다는 것을 어찌 몰랐겠는가. 그런데도 도리어 친척들과 절교하고 인륜을 저버린 채, 행색을 바꾸고 행실을 훼손하고서 스스로 공환空幻의 문중237)에 몸을 의탁하고 적멸의 뜻에 마음을 잠기게 하는 것을 달게 여겼으니, 도대체 모르겠구나. 저 스님이 어찌 불운한 시기에 태어나 뜻에 그 평정을 얻지 못했던 자이겠는가. 어찌 식견이 투철하지 못해 제 발로 우뚝 서지 못했던 자이겠는가. 그 문장은 고아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고, 지조는 정결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여 결국 세상을 피해 은둔했던 것은 왜일까? 그 역시 우리나라의 학조學祖나 신미信眉의 소문을 듣고, 중국의 문창文暢이나 혜근惠勤238)의 이름을 사모해 이런 일체의 행동을 감행했던 것일까?
하루는 보한 화상이 스님의 문집을 가지고 문전으로 찾아와 말하였다.
“우리 스승의 이름이 사라지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작년에는 진영을 그렸고, 금년에는 이 문집을 판각하여 간행하려 합니다. 일전어一轉語239)로 스님의 일생을 엮어서 붓을 잡은 이들이 채록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스님을 돌아보면 어떤 분이셨습니까? 양쪽을 다 끊었던 분이 아니셨습니까? 앞의 하나를 끊었으니 승려들이 알아야 할 자가 아니고, 뒤의 하나를 끊었으니 유생들이 알아야 할 자도 아닙니다. 행장은 엮어 어디 쓰겠습니까.

010_0357_b_01L八月十七日以疾視化于觀音殿之祖
010_0357_b_02L遠近緇衆莫不悼惜駿奔走來四
010_0357_b_03L設醮蕫事者殆將數千人前後門
010_0357_b_04L下學法者不知其幾百餘率育者
010_0357_b_05L慮三十許以而師之少營爲貧甚
010_0357_b_06L者還者居多亦不幸有短命者至死服
010_0357_b_07L勤者在學惟二荷潭也南坡也在率
010_0357_b_08L惟三曰普閑不育而繼者也曰勝必
010_0357_b_09L十年育者也曰宇仁未及名者也
010_0357_b_10L之師也生於詩禮之庭講乎名敎之學
010_0357_b_11L豈不知樂地爲自有於吾儒家而乃反
010_0357_b_12L絕黨棄倫變形毁行自甘托身於空幻
010_0357_b_13L之門溺心於寂滅之旨抑不知若師者
010_0357_b_14L豈生丁不辰志不得其平者耶識有不
010_0357_b_15L脚不得其立者耶其文章非不高矣
010_0357_b_16L志操非不潔矣而若是之果於遁世何
010_0357_b_17L其亦聞我國學祖信眉之風慕中國
010_0357_b_18L文暢惠勤之名爲此一切行也耶
010_0357_b_19L日普閑和尙齎師之集跋涉至門曰
010_0357_b_20L以吾師之名而沒沒可乎徃年模影眞
010_0357_b_21L今將繡是集之梓乞以一轉語紐師之
010_0357_b_22L始終俾供秉筆者採答之曰顧師何
010_0357_b_23L如人哉非兩截人歟前一截非釋所
010_0357_b_24L知也後一截非儒所知也烏用狀爲

010_0357_c_01L하물며 문집에 두 분 상사와 문답한 편지가 있으니 스님의 실적實蹟은 이 몇 편이면 다 되었고, 노악에 수죽암과 관음전이 있으니 스님의 일생은 이 산 하나면 충분합니다. 한閑이여, 돌아가서 다른 행장이 있나 찾아보십시오. 행장은 엮어 어디 쓰겠습니까.”
그러나 청이 간절하여 이렇게 기록하여 돌려보냈다.
때는 기유년(1789) 춘분 하루 뒤이다. 기록한 자는 누구인가? 이름은 굳이 쓸 필요 없다. 그래서 밝히지 않는다.
「충허당 기실」 끝

010_0357_c_01L况集中有兩上舍問答書師之實蹟
010_0357_c_02L數篇盡之矣露岳有水竹庵觀音殿
010_0357_c_03L之始終此一山足矣閑也歸而求之有
010_0357_c_04L餘狀烏用狀爲然請旣懇玆記以歸
010_0357_c_05L時己酉春分後一日也記之者誰名不
010_0357_c_06L必書遂不名

010_0357_c_07L
冲虛堂記實終

010_0357_c_08L
  1. 203)죄생罪生 : 부모의 거상 중인 자가 자신을 일컫는 말이다.
  2. 204)수후隨侯의 구슬과~속에 숨겨도(隨和蘊櫝) : ‘수隨’는 수후가 뱀을 살려 준 보답으로 뱀에게서 얻었다는 명월주明月珠이고, ‘화和’는 변화卞和가 형산荊山에서 얻었다는 화씨벽和氏璧이다. ‘온독蘊櫝’은 궤짝에 담아 두는 것이다. 『論語』 「子罕篇」에서 자공子貢이 “좋은 옥이 여기 있습니다. 궤짝에 담아 감춰 두었다가 비싼 값을 치를 사람을 찾아 팔겠습니까?”라고 하였다.
  3. 205)연탑蓮榻 : 연꽃으로 아름답게 장식한 좌대이다. 여기에서는 주석駐錫하는 곳을 뜻한다.
  4. 206)지혜(智度) : 지도智度는 곧 지혜바라밀이다. ‘도度’는 ⓢpāramitā의 의역이다. 바라밀다波羅蜜多·바라밀波羅蜜·파라미다播囉弭多로 음역하기도 하고, 도피안到彼岸·도무극度無極·사구경事究竟으로 의역하기도 한다. 고통의 세계인 차안此岸에서 열반의 세계인 피안彼岸으로 건너가는 보살의 수행을 말한다.
  5. 207)도징圖澄 : 불도징佛圖澄(232~348)을 말한다. 서역의 구자국 출신으로 310년(영가 4)에 중국 낙양에 들어왔다. 여러 가지 신이神異를 보여 많은 사람들이 귀의하였으며, 후조後趙의 석륵石勒은 그를 남달리 존경해 아들을 절에 보내 교육시켰다. 석륵이 죽은 뒤 석호石虎가 임금이 되어서도 역시 스승으로 섬겼으며, 대전에 올라 정사에 참여하게 하였다고 한다.
  6. 208)혜원慧遠(335~417) : 동진 때 승려이다. 안문雁門 누번樓煩 출신으로 13세에 이미 육경을 연구하였고 노장학에도 정통하였으며, 21세에 향산정 도안道安을 찾아가 수학하였다. 373년 부비苻丕가 양양襄陽을 공격해 도안을 데려가자 제자들과 함께 여산廬山에 은거하며 동림사東林寺를 창건하였다. 그곳에서 번역과 강론에 열중하며, 당시의 명사들과 백련사白蓮社를 결성해 염불행을 닦았다.
  7. 209)참료參寥 : 참료자參寥子의 약칭으로 소식蘇軾의 절친한 벗이었던 송나라 승려 도잠道潛의 호이다. 운문종 승려 대각 회곤大覺懷璭의 법을 이었다. 소성紹聖 원년(1094)에 소식이 남방으로 유배되자 스님도 연좌되어 벌을 받고 환속하였으며, 건중정국建中靖國 원년(1101)에 사면되어 승적을 회복하였다. 세수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일설에 숭녕崇寧 5년(1106)에 입적하였다고 한다. 생전에 철종이 묘총선사妙總禪師라는 호를 하사하였고, 저서에 『參寥子詩集』 12권이 있다.
  8. 210)혜근惠勤 : 송나라 때 승려로 구양수, 소식 등과 교류하였다.
  9. 211)유진장劉眞長 : 진장眞長은 진晉나라 유담劉惔의 자이다.
  10. 212)서가西家 : 서역에서 건너온 가르침을 신봉하는 집단이란 뜻으로 불가佛家를 말한다.
  11. 213)문아文雅 : 문필文筆이 뛰어난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12. 214)‘쓴다’는 단어를~잊어버린 비구 : 주리반특周利槃特을 말한다. 사위성 출신으로 형은 영특했으나 자신은 매우 노둔해 앞 구절을 외우면 뒤 구절을 잊어버리고, 뒤 구절을 외우면 앞 구절을 잊어버렸다. 이를 안 부처님께서 ‘빗자루로 쓸어라(箒掃)’라는 간단한 언구를 외우게 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아라한을 증득하였다고 한다.
  13. 215)흙덩이와 석탄가루를 좋아하는 버릇 : 글과 문장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습관을 비유하는 말이다. 당나라 때 유종원柳宗元이 최암崔黯에게 답한 편지에서 “무릇 문장이나 글씨를 좋아하는 것은 모두 한쪽으로 치우친 병통이다. 내가 일찍이 속병 있는 사람이 토탄土炭과 시고 짠 것을 매우 먹고 싶어 하면서 얻지 못하면 대단히 슬퍼하는 것을 본 일이 있다.”라고 하였다.
  14. 216)희羲·문文께서 남기신 경 : 『周易』을 말한다. 희羲·문文은 복희伏羲와 문왕文王의 병칭이다. 복희씨가 맨 처음 팔괘八卦를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64괘를 만들었으며, 후에 주나라 문왕이 유리羑里에 갇혀 있으면서 복희씨의 괘마다 괘사卦辭인 단사彖辭를 붙였다.
  15. 217)단상彖象 : 단彖은 『周易』의 괘를 풀이한 괘사로서 주나라 문왕이 지었다고 한다. 상象은 괘사와 효사爻辭를 풀이한 것으로서 주공周公이 지었다고 한다.
  16. 218)정程 선생께서~모양인 사람 : 「集註論語序」에 “정자께서 말씀하셨다. ‘요즘 사람들은 독서를 모른다. 이를테면 논어를 읽을 때 읽기 전에도 이런 사람이고 읽고 난 뒤에도 또 그저 이런 사람일 뿐이라면 바로 이것이 독서를 모르는 것이다.’(程子曰。 今人不會讀書。 如讀論語。 未讀時是此等人。 讀了後又只是此等人。 便是不曾讀。)”라고 하였다.
  17. 219)백 리 길(宿舂) : 『莊子』 「逍遙遊」에 “가까운 교외에 가는 자는 세 끼 밥만 가지고 갔다가 돌아와도 배가 여전히 부르고, 백 리를 가는 자는 밤새도록 양식을 찧어서 준비해야 하고, 천 리를 가는 자는 3개월 전부터 양식을 모아야 한다.(適莽蒼者。 三飡而反。 腹猶果然。 適百里者。 宿舂糧。 適千里者。 三月聚糧。)”라고 하였다.
  18. 220)천등산天燈山 :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와 북후면 경계에 있는 산이다. 옛날에는 대망산大望山이라 하였다.
  19. 221)진 처사晉處士 : 진晉나라 도잠陶潛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의 큰 절의를 존숭하여 『資治通鑑綱目』에서 “진의 처사 도잠이 졸하다.(晉處士陶潛卒)”라고 쓴 데서 온 말이다.
  20. 222)원공遠公 : 여산의 혜원을 말한다.
  21. 223)한 조주韓潮州 : 조주 자사潮州刺史를 지냈던 한유를 말한다.
  22. 224)전로顚老 : 태전 선사太顚禪師를 말한다.
  23. 225)솥 그릇(鼎器) : 정기鼎器는 단약丹藥을 달이는 솥인데, 여기서는 사람의 몸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24. 226)풍아風雅 : 『詩經』의 「國風」과 「小雅」·「大雅」를 병칭한 말이다. 여기서는 그와 같은 시를 뜻한다.
  25. 227)영가永嘉 : 안동의 옛 지명이다.
  26. 228)명옥대鳴玉臺 : 봉정사로 오르는 길목에 있는 정자이다. 퇴계 이황이 후학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던 곳을 기념하기 위하여 조선 현종 6년(1665)에 사림들이 건립한 누각 형태의 정자이다. 옛 이름은 낙수대落水臺였다.
  27. 229)시례詩禮의 집안 : 유교의 가정교육이 잘 이루어진 집안을 뜻한다. 시례는 공자가 일찍이 아들 이鯉에게 시詩와 예禮를 꼭 읽어야 한다고 경계했던 데서 유래하였다.
  28. 230)명교名敎 : 인륜 도덕의 가르침인 유교儒敎를 일컫는 말이다.
  29. 231)원릉元陵 : 영조의 능이다. 곧 영조를 뜻한다.
  30. 232)약관弱冠 : 남자 나이 20세를 일컫는 말이다.
  31. 233)경經과 전傳 : 유가儒家의 전적을 뜻한다.
  32. 234)여유롭게 칼날을 놀렸으며(遊刃) : 난해한 일을 쉽게 해결하거나 난해한 문장을 수월하게 풀어내는 것을 말한다. 『莊子』 「養生主」에서 포정庖丁이 문혜군文惠君에게 소 잡는 방법에 대해 말하면서 “두께가 없는 칼을 두께가 있는 틈새에 넣으니, 널찍하여 칼날을 움직이는 데에 반드시 여유가 있습니다.(以無厚入有間。 恢恢乎。 其於遊刃。 必有餘地矣。)”라고 하였다.
  33. 235)용을 발우에 담고 : 우르빌라 가섭이 부처님을 질투해 독룡이 있는 사당에 묵게 하였는데, 그날 밤 독룡을 항복받은 부처님이 그 용을 발우에 담아 다음 날 우르빌라 가섭에게 보여 주었던 고사가 있다.
  34. 236)호랑이 싸움을 말렸던 일 : 춘추시대 제나라의 승조僧稠 선사가 왕옥산王屋山에서 석장으로 맹호의 싸움을 말렸던 고사가 있다.
  35. 237)공환空幻의 문중 : 불가佛家를 뜻한다. 불교에서는 일체를 공空이고 환幻이라 가르친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지칭하였다.
  36. 238)혜근惠勤 : 송나라 때 소식과 교류하였던 승려이다. 소식이 쓴 시 ≺僧惠勤初罷僧職≻이 전한다.
  37. 239)일전어一轉語 : 선가에서 사용하는 용어이다. 상황을 단박에 전환시킬 한마디, 깨우치는 한마디를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