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경암집(鏡巖集) / 鏡巖稿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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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암고 서鏡巖稿序
세상의 도리가 쇠퇴한 후로부터 기특하고 뛰어난 선비들이 평범한 사람들과 세속에서 함께 달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문득 불가에 귀의하여 자취와 이름을 감추고 사라져서 알려지지 않았다. 반드시 문단의 거장이 한두 마디의 말과 문자로써 그 연기緣起를 증명하고

010_0424_b_19L鏡巖稿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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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世道之下也奇偉非常之士耻與庸
010_0424_b_22L衆人馳逐塵壒之內而輙歸依於釋氏
010_0424_b_23L家裏跡與名晦抑沒無聞必有詞壇
010_0424_b_24L大匠以片言隻字證明其緣起發揮

010_0424_c_01L그 문장을 드러내 준 연후에 도가 법계에 드러날 수 있고 이름이 후세에 전해지는 것이다. 예컨대 도연명陶淵明4)과 혜원惠遠,5) 두보杜甫6)와 민공旻公,7) 한유韓愈8)와 태전太顚, 백거이白居易9)와 여만如滿, 구양수歐陽脩10)와 비연秘演, 소식蘇軾11)과 혜근惠勤의 관계가 이러하다. 만일 당대에 자신을 알아주는 자가 추어올려 주지 않는다면 몸은 깊은 산의 식은 재가 될 것이요, 뼈는 외로운 탑의 차가운 구슬이 되어, 기이한 재주와 뛰어난 능력으로 조용하게 사라질 뿐인 고승들이 몇 분이나 되는 줄 알지 못하겠다.
예전 기축년(1769)에 내가 남쪽으로 유람하다가 청암靑巖의 장실丈室에서 추파 대사를 만나 『수능엄경修楞嚴經』의 월광月光과 수관水觀의 설12)을 논하였다. 다음 해 여름 다시 가야산으로 들어가 추파 대사의 뛰어난 제자 중 법호가 ‘경암’인 스님을 만났는데, 그는 몸과 마음이 맑고 표연하여 도가 있는 스님이었다. 그 산중의 시를 구하여 보니 그 성운聲韻이 담박하여 가야산 운하雲霞의 기운과 어울려 서로 빛났다. 대개 스님은 뛰어난 선비로 선문에 은둔한 자 중에 한 분이었다. 나는 한 번 뵙고 공문의 벗이 되었다. 6년이 지나서 스님이 풍암서실楓巖書室로 나를 방문하여 추파 대사께서 남긴 시권을 열독하며 서로 탄식하고 슬퍼하였다. 이윽고 화산花山(안동)에서 시를 주며 이별하였다. 10년이 지나서 산수의 여러 기문들을 나에게 보내 주어 보이고 바로잡아 주기를 간청하였다. 나는 한창 제자론諸子論을 기초하다가 붓을 던지고, 읽어 보고 나서 그 책을 가리키며 탄식하며 말하였다. “스님의 마음 씀이 더욱 청고淸苦하고 도를 깨우침이 더욱 높으니, 도가 더욱 높을수록 그 시문으로 발휘되는 것이 더욱 넉넉하여 급박하지 않구나. 애석하다. 누가 총림 가운데 이 같은 훌륭한 수재가 있는 줄 알겠는가?”
지금 스님의 법제자 팔관 상인이 나에게 그 서문을 지어 주기를 부촉하였다. 나는 곤궁하고 노쇠하여 필연筆硯에 게으른 지 오래되었는지라

010_0424_c_01L其文章然後可以道彰法界名傳來刼
010_0424_c_02L若陶靖節之于惠遠杜工部之于旻公
010_0424_c_03L韓昌黎之于太顚白香山之于如滿
010_0424_c_04L陽公之于秘演蘇子瞻之於惠勤是也
010_0424_c_05L苟不値當世之知己者爲之推詡則身
010_0424_c_06L爲深山之冷灰骨爲孤塔之寒珠奇才
010_0424_c_07L異能寂然淪滅而已者蓋不知其幾箇
010_0424_c_08L高僧也徃在己丑余南游遌秋公於靑
010_0424_c_09L巖丈室論首楞月光水觀之說翌年夏
010_0424_c_10L再入伽倻得秋公之高足鏡巖其號者
010_0424_c_11L膚神淸冷飄飄有道僧索其山中詩
010_0424_c_12L其聲韻淡泊與伽倻雲霞之氣自相映
010_0424_c_13L蓋所謂奇偉之士而隱於禪者
010_0424_c_14L其一也余一見而定爲空門處 [1] 後六年
010_0424_c_15L師訪余于楓巗書室閱秋公遺卷相與
010_0424_c_16L悲嗟已而花山以詩爲別後十年送示
010_0424_c_17L其山水諸記以求正於余余方草諸子
010_0424_c_18L擲筆而讀之已又指卷欷歔曰
010_0424_c_19L之見 [2] 心益苦而悟道益高道益高而其
010_0424_c_20L發之於詞章者益敷贍不泊 [3] 惜乎夫
010_0424_c_21L誰知叢林中有此好秀才耶今師之法
010_0424_c_22L侶八關屬余爲其序余窮獨衰遲
010_0424_c_23L{底}甲子(純祖四年) 睦萬中書記本(松廣寺圖
010_0424_c_24L書舘所藏)

010_0425_a_01L나의 언어와 문자로 사람을 높일 수가 없다. 그러나 추파 대사의 문집에 대해서는 스님의 간청을 중히 여겨 이미 원고의 발문을 지었으니 그로 인해 요청함이 또한 매우 간절하였다. 나는 스님의 종가宗家에 삼세의 숙연이 있으니 의리상 문장이 뛰어나지 못하다고 하여 사양할 수 없었다.
아, 스님과 같은 이는 거의 옛날의 혜원과 민공 같은 무리이나 나는 도연명과 두보 같은 인물이 아닌 것이 부끄러우니, 스님으로 하여금 끝내 인몰되어 알려지지 않게 하고 식은 재와 차가운 구슬로 적적하게 사라지게 할 뿐일 것인가? 그러나 태전과 여만이 기특한 재주를 품으니 세상에 반드시 한유와 백거이가 있어 지기知己가 되고, 비연과 혜근이 선禪으로 도피하니 세상에 반드시 구양수와 소식이 있어 그 묻혀서 알려지지 않음을 슬퍼하였다. 오늘날에도 세상에 경암을 아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니, 있다면 반드시 슬퍼하고 한마디 말을 하여 주리라. 내가 이것을 쓰고 기다린다.
전임 금릉金陵13)군수 백실白室 유숙지柳肅之14)가 쓰다.

010_0425_a_01L於筆硯久矣其言語文字不能使人軒
010_0425_a_02L然於秋公集重師請而旣爲之跋於
010_0425_a_03L稿因之請又甚勤余於師家有三世
010_0425_a_04L宿緣義不可以不文辭嗚呼如師者
010_0425_a_05L殆古遠旻者流而愧余非陶杜人也使
010_0425_a_06L師終將抑沒無聞冷灰寒珠寂爲淪滅
010_0425_a_07L而止耶然太顚如滿之懷其奇則世必
010_0425_a_08L有韓白爲其知己秘演惠勤之逃於禪
010_0425_a_09L則世必有歐蘇悲其沈埋今世之知鏡
010_0425_a_10L巖者必且有矣有則必且悲之而爲
010_0425_a_11L之一言矣余書此以俟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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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知金陵郡白室柳肅之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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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4)도연명陶淵明(365~427) : 동진東晉의 시인. 이름은 잠潛, 호는 오류선생五柳先生. 연명은 자字이다. 405년에 팽택현彭澤縣의 현령이 되었으나, 80여 일 뒤에 〈歸去來辭〉를 남기고 관직에서 물러나 귀향하였다. 자연을 노래한 시가 많으며, 당나라 이후 육조六朝 최고의 시인이라 불린다. 시 외의 산문 작품에 「五柳先生傳」, 「桃花源記」 등이 있다.
  2. 5)혜원惠遠(334~416) : 동진東晉의 승려. 속성은 가賈. 백련사라는 염불 결사를 창설하여 중국 정토종淨土宗의 개조가 되었다. 저서에 『大智度論要略』 등이 있다.
  3. 6)두보杜甫(712~ 770) : 당나라의 시인. 자는 자미子美, 호는 소릉少陵. 율시에 뛰어났으며, 긴밀하고 엄격한 구성과 사실적 묘사 수법 등으로 인간의 슬픔을 노래하였다. ‘시성詩聖’으로 불리며, 이백李白과 함께 중국의 최고 시인으로 꼽힌다.
  4. 7)두보杜甫와 민공旻公 : 두보의 시에 〈因許八奉寄江寧旻上人〉이 있다.
  5. 8)한유韓愈(768~824) : 당나라의 문인·정치가. 자는 퇴지退之, 호는 창려昌黎.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사륙변려문을 비판하고 고문古文을 주장하였다.
  6. 9)백거이白居易(772~846) : 당나라의 시인. 자는 낙천樂天, 호는 향산거사香山居士·취음선생醉吟先生. 일상적인 언어 구사와 풍자에 뛰어나며, 평이하고 유려한 시풍으로 원진元稹과 함께 원백체元白體로 통칭된다.
  7. 10)구양수歐陽脩(1007~1072) : 송나라의 정치가·문인. 자는 영숙永叔, 호는 취옹醉翁·육일거사六一居士. 당나라 때의 화려한 시풍에 반대하여 새로운 시풍을 열고, 시·문 양 방면에 걸쳐 송대 문학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8. 11)소식蘇軾(1036~1101) : 중국 북송의 문인. 자는 자첨子瞻, 호는 동파東坡.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서화에도 능하였다.
  9. 12)월광月光과 수관水觀의 설 : 『楞嚴經』 권5에, 월광동자月光童子가 부처님을 뵙고 아뢰기를, “과거 항하사겁에 ‘수천水天’이라는 부처님이 나셔서 보살들에게 수관水觀을 닦아 삼마지三摩地에 들라고 가르쳤습니다.”라는 기록이 있다.
  10. 13)금릉金陵 : 지금의 경기도 김포를 가리킨다.
  11. 14)유숙지柳肅之 :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1712~1781)의 문인. 본관 전주. 영조 49년(1773)에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 3등 60위를 차지하였다.
  1. 1){底}甲子(純祖四年) 睦萬中書記本(松廣寺圖書舘所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