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삼봉집(三峰集) / 三峯集序

ABC_BJ_H0233_T_001

010_0456_a_01L
삼봉집三峯集
삼봉집 서三峯集 序
만회암晩悔庵 고경古鏡 선사가 한 권의 시집을 손에 들고 와 나에게 말하기를 “이것은 옛 화악華嶽 스님의 저술입니다. 스님은 시 짓기를 좋아하였지만 모으기는 좋아하지 않아 그 저술이 운수산화雲水散花와 같습니다. 그 주머니를 열어 보고 약간의 시구를 얻었으니 참으로 선가禪家의 보주寶珠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서문을 지어 주시어 산문山門에 두도록 하소서.” 하였다.
나는 “시는 선가에서 금기하는 것인데 스님께서는 어찌 지으셨는가. 시는 성령에 근본을 두니 사람들은 스스로 얻어 소리로 삼고 부처님은 그 성품을 보고 성도하셨으니 옛날에 불성, 법성法性이라 한 것은 다만 한 이치이다. 어찌 스님의 시가 법성의 신령함에 맞지 않다고 하겠는가. 그 시는 꾸미지 않았으니 곧 진실신眞實身이 담연하여 허물이 없는 것이요, 자연스럽게 문채가 빛나니 곧 권응신權應身이 화광동진和光同塵하는 것이다. 성품의 원각과 신령의 묘감妙感을 나는 스님에게서 보았다. 이제 고경 선사가 부처님을 돌며 예배하고 참회하며 정혜를 익혀 단속하고 경계하면서 스님의 시에 서문을 청하고 의발기衣鉢記를 지으니 내가 응낙한 것은 바다를 건너 전하기 위함이 아니다.” 하였다. 다만 그 대강을 서술한다.

기사년(1869) 중하仲夏 귤산퇴사橘山退士 이유원李裕元1)


010_0456_a_01L[三峯集]

010_0456_a_02L1)三峯集序

010_0456_a_03L
010_0456_a_04L
晩悔庵古鏡禪手一卷詩集語余曰
010_0456_a_05L此古華嶽師所述也師喜爲詩而不喜
010_0456_a_06L集其所述如雲水散花胠其櫜得若
010_0456_a_07L干句儘禪家寶珠爲我頁一文字以
010_0456_a_08L鎭山門余曰禪家之所禁師胡爲乎
010_0456_a_09L詩本性靈人自得以爲聲佛見其性
010_0456_a_10L而成道古所稱佛性法性止是一理
010_0456_a_11L師之詩安知不合於法性之靈乎其詩
010_0456_a_12L不施雕餙即眞實身之湛然無累也
010_0456_a_13L [1] 即權應身之和光同塵也性之
010_0456_a_14L圓覺靈之妙感余於師見之矣今鏡
010_0456_a_15L禪環繞禮懺習慧束誡以師之詩請文
010_0456_a_16L作衣鉢記余之應非爲航海而傳之也
010_0456_a_17L只書其槩而叙之

010_0456_a_18L
己巳 仲夏 橘山退士 李裕元序

010_0456_a_19L{底}己巳(高宗六年)楊州天摩山寶光社刊本(東
010_0456_a_20L國大學校所藏)

010_0456_b_01L
  1. 1)이유원李裕元 : 1814~1888. 본관 경주慶州. 자는 경춘景春. 호는 귤산橘山·묵농墨農. 시호는 충문忠文. 1845년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자 1865년(고종 2) 좌천되었다가 『대전회통大典會通』 편찬 총재관摠裁官이 되고,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하자 영의정에 올랐다. 1875년 주청사奏請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인천의 개항을 주장하였으나 수구파守舊派의 공격을 받았다. 1882년 전권대신全權大臣으로 일본의 변리공사辨理公使 하나부사 요시타다(花房義質)와 제물포조약에 조인하였다. 저서에 『귤산문고』, 『가오고략嘉梧藁略』, 『임하필기林下筆記』 등이 있다.
  1. 1){底}己巳(高宗六年)楊州天摩山寶光社刊本(東國大學校所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