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선문수경(禪文手鏡) / 禪文手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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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수경禪文手鏡
영구산靈龜山 소림굴少林窟에 거처하는 비구긍선亘璇은 편집하고 해설함.
총목차總目次
1. 임제삼구臨濟三句를 그림으로 설명
2. 향상向上하는 본분本分의 진여眞如
3. 향하向下하는 신훈新熏 삼종선三種禪
4. 의리선義理禪 3구 게송
5. 3구를 도표로 표시
6. 의리선義理禪과 격외선格外禪의 구별
7. 말후구末後句와 최초구最初句의 구별
8. 신훈新熏과 본분本分의 구별
9. 죽임(殺)과 살려줌(活)의 구별
10. 원상설圓相說
11. 3성설三性說
12. 3구와 1구가 짝을 이루는 다섯 가지 경우가 다름
13. ‘한 화살로 세 관문을 격파’하는 다섯 가지 경우
14. 『금강경』 4구게에 배당
15. 삼신三身을 세 가지 경우에 배당
16. 오분법신五分法身에 배당
17. 사홍서원四弘誓願에 배당
18. 좌선과 선정 등 네 글자에 배당
19. 문 않고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켜 본성을 보아 성불한다는 달마 대사의 말씀
20. 달마의 삼처전심三處傳心
21. 선실禪室에서 하는 삼배에 대하여
22. 간당看堂틀을 열 번 치는 것에 대하여
23. 훽
24. 『구자무불성화간병론狗子無佛性話揀病論』의 과목을 나누고 해설
25. 선과 교의 핵심은 ‘진공’과 ‘묘유’, ‘완전한 기틀’과 ‘완전한 작용’을 벗어나지 않음
1. 임제삼구臨濟三句를 그림으로 설명
임제 의현臨濟義玄1) 선사가 제시한 3구句2)에는 (석가세존께서) 일생(一代)3) 동안 선禪과 교敎를 통해서 말씀하신 취지가 모두 포괄되어 있으므로, ‘모든 가르침을 간직한 3구(蘊摠三句)’라고 이름 한다. 이런 맥락에서 법해 유정法海惟精4) 선사는 “부처님과 조사께서 수지하여 활용한 것은 이 3구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했고, 환성 지안喚惺志安5) 노노스님6)은 “임제 선사께서 제시한 3구는 임제종臨濟宗의 가풍일 뿐만 아니라, 위로는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010_0514_c_01L[禪文手鏡]

010_0514_c_02L1)禪文手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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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0514_c_04L靈龜山少林窟比丘亘璇集說

010_0514_c_05L總目次

010_0514_c_06L
臨濟三句圖說向上本分眞如向下
010_0514_c_07L新熏三禪義理禪三句頌三句圖示
010_0514_c_08L義理禪格外禪辨末後句最初句辨
010_0514_c_09L熏本分辨殺活辨圓相說三性說
010_0514_c_10L一鏃破三關有五重配金剛四句偈
010_0514_c_11L三身有三重配五分法身配四弘願
010_0514_c_12L配坐禪禪定四字達摩不立文字直指
010_0514_c_13L人心見性成佛說達摩三處傳心
010_0514_c_14L室三拜說看堂十統說無字揀病論
010_0514_c_15L科解禪敎大旨不出眞空妙有大機大
010_0514_c_16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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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0514_c_18L

010_0514_c_19L臨濟三句圖說

010_0514_c_20L
臨濟三句者一代禪敎詮旨無不該攝
010_0514_c_21L故名曰蘊揔三句是故法海惟精禪師
010_0514_c_22L佛祖受用不出此三句喚惺師翁
010_0514_c_23L臨濟三句非特臨濟宗風上自諸
010_0514_c_24L{底}刊年未詳東國大學校所藏本(附作法龜鑑
010_0514_c_25L之看堂論)
目次編者作成補入

010_0515_a_01L아래로는 중생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반드시 감당해야 할) ‘제 몫의 일(分上事)’7)이다. 이것(임제 선사의 3구)을 벗어나서 설법하면 모두 잘못된 말일 뿐이다.”8)라고 했으니,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부처님과 역대의 여러 조사 스님들과, 나아가서는 천하의 선지식들이 남긴 말씀이나 문구 모두 이 3구를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그러므로 선종 문하에서 나온 말이나 문구를 찾아 궁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인천안목人天眼目』9)과 『선문오종강요禪門五宗綱要』10)와 『선문강요집禪門綱要集』11)을 반드시 제일 먼저 구하여 (읽되), 무엇보다 먼저 임제삼구臨濟三句의 ‘의미의 행상(義相)’12)을 궁구한다면 (3구의 의미와 행상에) 환히 밝아져 의심이 사라질 것이다. 그런 다음에 『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13)과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14과 사집四集15) 등에 나오는 말과 문구를 읽을 때에도 이 3구를 사용해서 (그 책의 내용을) 낱낱이 적용하여 대조해 보면, 모든 말과 문구가 마음(心目)16)에 분명하고 환하게 드러날 것이니, 마치 물건을 저울에 올려놓으면 한 치의 눈금도 속일 수 없는 것과 같으리라.
옛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였으니, 이 3구가 선의 문구(禪文)를 측정하는 바른 저울인 줄 알지 못하고, 다만 자기 견해로 글자만을 좇아 어림짐작하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과 조사들께서 하신 ‘말의 핵심(言頭立脚處)’17)을 대부분 제대로 알지 못하고서, 가죽신을 신은 채 발바닥을 긁는18) 것과 같은 잘못을 자주(往往)19) 범하였다.
아, 옛날에 어떤 사람은 겨우 한마디를 잘못 대답하고도 여우의 몸을 받았다던데20) 오늘 이 늙은이(백파 긍선)는 장님이 지팡이로 땅을 더듬거리듯 하니, 어찌 구절구절 잘못이 없으랴! 그러나 (내 자신이) 몸소 지옥에 들어가지 않고서야 어찌 부처님의 은혜를 갚을 수 있겠으며, 진리를 위하여 몸을 버리지 않고서야 하늘까지 가득 찰 죄의 과보인들 어찌 피할 수 있으리오!
(그리하여) 보배 칼을 휘둘러 3구를 감히 도형으로 그려 내어, 선가의 문헌에 나오는 어구의 요점을 모아 분석하였다. 원컨대 동포들과 함께 자신과 모든 부처님과 조사들의 안신입명安身立命하는 경지21)를 한눈에 단박에 알아차려 곧바로 ‘바다같이 드넓고 완전한 깨침의 세계(大圓覺海)’22)에 들어가 오탁五濁23)으로 오염된 세상에서 부처님의 혜명을 이어가기를 바란다.
2. 향상向上하는 본분本分의 진여眞如24)
어떤 객승이25) 임제 선사에게 “참다운 부처와 참다운 법과 참다운 도란 무엇입니까? 선사께 가르쳐 주실 것을 청합니다.”라고 부탁하자, 이 질문으로 인해, 임제 선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처란 마음이 청정한 것이고이 부분은 ‘완전한 기틀(大機)’을 설명한 것임, 법이란 마음이 밝은 것이고이 부분은 ‘완전한 작용(大用)’을 설명한 것임,

010_0515_a_01L下至衆生皆分上事若離此說法
010_0515_a_02L皆是妄說是知三世諸佛歷代祖師
010_0515_a_03L乃至天下善知識所留言句必不離此
010_0515_a_04L三句也是故凡欲尋究禪門語句者
010_0515_a_05L須先求人天眼目五宗綱要禪門綱
010_0515_a_06L爲先究此三句義相昭然無疑
010_0515_a_07L當於拈頌傳燈四集等語句以此
010_0515_a_08L三句一一拖照言言句句了然昭
010_0515_a_09L著於心目如物得秤衡錙銖莫逃矣
010_0515_a_10L古人不然不知此三句是禪文正秤
010_0515_a_11L但將己見隨文斟酌故卛多昧却佛
010_0515_a_12L祖言頭立脚處而徃徃有隔靴搔痒之
010_0515_a_13L失也古人錯答一字尙墮野狐
010_0515_a_14L今日老漢旣以盲杖墑埴安得句句
010_0515_a_15L無謬自惟不入地獄何由能報佛恩
010_0515_a_16L自以爲法忘豈避彌天罪逆橫按
010_0515_a_17L寶劒敢爲圖形三句揔括禪文語句
010_0515_a_18L願與同胞一目頓見自己 [1] 與諸佛祖安
010_0515_a_19L身立命處而直入大圓覺海續佛慧
010_0515_a_20L命於五濁界中矣

010_0515_a_21L

010_0515_a_22L向上本分眞如

010_0515_a_23L
臨濟因僧問如何是眞佛眞法眞道
010_0515_a_24L師開示師云佛者心淸淨是

010_0515_b_01L도란 어느 곳에서나 걸림 없는 청정한이 부분은 기틀(機)을 설명하는 것임이 부분은 작용(用)을 설명하는 것임이다(이 부분은) 기틀(機)과 작용(用)을 아울러 설명한 것임. 이상은 ‘묘유의 삼요(妙有三要)’를 설명한 것임.
이 셋(부처·법·도)은 같은 것으로서 모두 빈 이름26)일 뿐이고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이것은 ‘진공의 한 구멍(眞空一竅)’27)을 설명한 부분임. 〔진정 도를 배우는 사람이라면 한순간도 생각에 끊어짐이 없어야 한다. 달마 대사가 서역에서 이 땅에 온 이래, 타인에게 미혹되지 않는 사람만을 오로지 찾았을 뿐이다. 뒷날 2조 혜가慧可(487~593) 대사를 만났는데,28) (그는) 말 한마디에 알아차려 이전까지 헛되게 공부했음을 비로소 알았다.〕29) 산승山僧이 오늘 본 바,30) (그대는) 부처님이나 조사들과 비교하더라도 차별이 없다.”31)

해설32)
본분의 진여에는 ‘인연을 따르는 속성(隨緣義)’과 ‘불변하는 속성(不變義)’33) 두 가지가 있다. 위의 본문의 할주에 나오는 “묘유의 삼요(妙有三要)”란, 즉 인연을 따르는 속성(隨緣義)·깨달음(菩提)·관조(照)이다. ‘진공의 한 구멍(眞空一竅)’이란, 불변하는 속성(不變義) 또는 열반 또는 고요함(寂)으로도 표현한다.34)
이 진공眞空과 묘유妙有의 두 가지 속성(二義)은 모든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본래면목本來面目이며, 역시 부처님과 조사들께서 안신입명하는 경지이다. 그러므로 (위의 본문에서) “(그대는) 부처님이나 조사들과 비교하더라도 차별이 없다.”라고 대답했다.
3. 향하向下하는 신훈新熏 삼종선三種禪 : 이 대목은 ‘모든 가르침을 간직한 3구(蘊摠三句)’임
“제1구35)에서 깨달으면 조사와 부처36)의 스승이 될 만하고이 경우는 조사선37)이고, 제2구에서 깨달으면 인간계와 천상계의 스승이 될 만하지만이 경우는 여래선38)이고, 제3구에서 깨달으면 제 자신마저도 구제하지 못한다이 경우는 의리선39)이다.”40)

해설
본분 종사는 ‘진공과 묘유’에 해당하는, 달마 대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의도(를 표현하는) 아무것도 안 새겨진 도장으로, 허공에 도장을 찍고, 수면 위에 도장을 찍고, 진흙에 도장을 찍어서41) (달마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을 제대로 아는지) 수행자들을 시험한다.42)
이럴 경우에 만약 상근기가 (이 법문을) 들으면 (아무것도 안 새겨진) 도장을 가지고 허공에 도장을 찍는 것과 같아서, 제1구에서 ‘향하하는 삼요(向下三要)’묘유와 ‘향상하는 한 구멍(向上一竅)’진공을 깨닫되, (이렇게 깨달았다는) 어떤 조짐이나 흔적도 전혀 없어서43) (자기의) 본성을 알아차려 부처가 된다. 그러므로 (위의 본문에서) “부처와 조사44)의 스승이 된다.”라고 했다.
중근기가 (이 법문을) 들으면 (아무것도 안 새겨진) 도장을 가지고 수면 위에 도장을 찍는 것과 같은데, 이 경우에는 두 부류가 있는데45 서로 다르다. 위앙종과 법안종45) 사람들은 ‘삼현三玄’46)유有47)과 ‘본분의 1구(本分一句)47’공空48)만을 (겨우) 터득한다. 한편 조동종 사람들은 ‘방편과 진실의 향상(權實向上)’을 터득하기는 하지만,

010_0515_b_01L心光明是
道者處處無碍淨
010_0515_b_02L齊施上妙
有三要
三即一皆空而無實
010_0515_b_03L此眞空
一竅
山僧今日見處與佛祖不
010_0515_b_04L

010_0515_b_05L
解曰本分眞如有隨緣不變二義
010_0515_b_06L妙有三要即隨緣也菩提也
010_0515_b_07L此眞空一竅即不變也涅槃
010_0515_b_08L寂也此眞空妙有二義是人
010_0515_b_09L人本來面目亦是佛祖安身立命處
010_0515_b_10L故云佛祖不別

010_0515_b_11L

010_0515_b_12L向下新熏三禪此是蘊揔三句

010_0515_b_13L
若第一句薦得堪與佛祖爲師祖師

010_0515_b_14L二句薦得堪與人天爲師如來
第三句
010_0515_b_15L薦得自救不了義理

010_0515_b_16L
解曰本分宗師將此眞空妙有之達
010_0515_b_17L摩西來無文印字印空印水印泥以
010_0515_b_18L驗人時若上士聞則如印印空
010_0515_b_19L得第一句向下三要
及向上一竅

010_0515_b_20L了無朕迹見性成佛故爲佛祖師
010_0515_b_21L中士聞則如印印水而有兩種不
010_0515_b_22L潙仰法眼宗人薦得三玄
010_0515_b_23L本分一句曺洞宗人薦得權實向

010_0515_c_01L‘자기를 존귀하게 여기는 티(尊貴頭角)’49)를 가지고 있어서 그저 ‘진공’의 이치만 겨우 깨달을 뿐 ‘성불’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위의 본문에서) 다만 “인간계와 천상계의 스승이 된다.”라고 했다.
하근기가 (이 법문을) 들으면 (아무것도 안 새겨진) 도장을 가지고 진흙에 도장을 찍는 것과 같아서 흔적과 꿰맨 자국이 그대로 드러나서 단지 ‘유有·무無의 3구’는 깨닫지만 ‘진공’ 속에 (있는) 사람50)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위의 본문에서) “제 자신마저도 구제하지 못한다.”라고 했다. 그런데 어찌 남들의 스승이 될 수 있겠는가!
4. 의리선義理禪 3구51) 게송
아래에서 말하는 삼종선三種禪과 같다. 그래서 “현玄과 요要는 구句에만 있다.”고 했음.52)
1) 제1구53)
“삼요三要의 도장을 찍었다가 떼니 붉게 찍힌 한 점 한 획이 선명하게 드러나, 사량분별할 것도 없이 주체와 대상이 드러난다.”

거평擧評54)
바람 법사(風法師)55)가 말했다.
“(위의 두 문장 중) 첫 문장은 ‘먼저 관조(照)하고첫 문장의 (쉼표) 뒷부분(朱點窄) 나중에 작용(用)하는 것첫 문장의 (쉼표) 앞부분(三要印開)’이며, 둘째 문장은 ‘먼저 작용하고둘째 문장의 (쉼표) 뒷부분(主賓分) 나중에 관조하는 것둘째 문장의 (쉼표) 앞부분(未容擬議)’이다.”56)
(본문의) 두 문장에서 (의미하는 바를) 둘 다 모두 합해서 실천하면 중도를 쌍으로 관조(雙照)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관조와 작용이 동시에 이루어진다. (반면 두 문장에서 의미하는 바) 둘 모두를 하지 않으면(雙遮) 관조와 작용을 동시에 (하지) 않는 것이다. 이상은 관조와 작용의 두 항으로 결합되는 ‘사조용四照用’57)을 기준으로 해서 해석한 것이다.
만약 삼요三要58)에 의거하여 해석하면, 첫 문장은 ‘완전한 기틀(大機)첫 문장의 (쉼표) 뒷부분이 완전하게 호응(圓應)하는 것첫 문장의 (쉼표) 앞부분’이고, 둘째 문장은 ‘완전한 작용(大用)첫 문장의 (쉼표) 뒷부분으로 (일체의 사량 분별을 모두) 곧바로 끊는(直截) 것’첫 문장의 (쉼표) 앞부분이다.
두 문장에서 (의미하는 바를) 둘 다 모두 합해서 실천하면 기틀과 작용을 병행(機用齊施)하는 것이다. 기틀과 작용을 둘 다 함께 떨쳐 버리면(雙拂機用) 향상하는 한 구멍(向上一竅)59)이 된다. 삼요는 곧 묘유妙有이며, 향상向上은 곧 진공眞空이다. 이것이 바로 상근기가 조사선祖師禪을 알아차리는60) 근거이다.
2) 제2구61)
“(진리의 분상에서 보면) 묘희妙喜가 무착無着의 질문62)을 어찌 허용하겠는가만, 구화漚和63)를 베푸는 입장에서 ‘(번뇌의) 물결을 끊어 버리는 기틀(截流機)’을 어찌 저버리겠는가?”

거평擧評
바람 법사가 말했다. “(위의 문장 중 쉼표의) 앞 구절은 ‘진실’을 나타내고, 뒤 구절은 ‘방편’을 나타낸다.”64)
‘본분의 1구句’는 진실이며, ‘신훈의 삼현三玄’은 방편이며, 이 둘을 모두 실천하면 중구中句65)이다.

010_0515_c_01L而俱有尊貴頭角則但見眞空
010_0515_c_02L未得成佛故但爲人天師下士聞
010_0515_c_03L則如印印泥痕縫全彰但悟有無
010_0515_c_04L三句而眞空裏頭人未見故
010_0515_c_05L救不了況爲人師

010_0515_c_06L

010_0515_c_07L義理禪三句頌
如次三禪故云玄
010_0515_c_08L要任 [2]

010_0515_c_09L第一句
三要印開朱點窄未容擬議
010_0515_c_10L主賓分

010_0515_c_11L
風法師云前句先照下三
後用上四

010_0515_c_12L句先用下三
後照上四
二句合爲雙照
010_0515_c_13L中故照用同時雙遮則照用不同
010_0515_c_14L此約四照用釋若約三要
010_0515_c_15L前句大機下三
圓應上四
後句大用下三

010_0515_c_16L直截上四
二句合爲機用齊施
010_0515_c_17L拂機用爲向上一竅三要即妙有
010_0515_c_18L向上即眞空此是上士會得祖師
010_0515_c_19L

010_0515_c_20L第二句
妙喜豈容無着問漚和爭負
010_0515_c_21L截流機

010_0515_c_22L
風云前句現乎實後句示其權
010_0515_c_23L分一句爲實新熏三玄爲權合爲中

010_0516_a_01L구화漚和는 (범어 upāya를 한어로 음역한 것인데) 이곳 말로는 ‘방편’이라 한다. 이것은 즉, ‘방편과 진실의 3구’는 묘유에 해당하고, ‘선종 문하에서 말하는 향상(宗門向上)’은 진공에 해당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중근기가 여래선如來禪을 깨닫는 근거이다.
3) 제3구66)
“무대 위에서 움직이는 꼭두각시를 보아라.67) 그 움직임은 모두 뒤에서 줄을 당겼다 놓았다 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

거평擧評
바람 법사가 말했다. “아라한을 만나면 아라한의 눈높이에 맞추어 말하고, 아귀를 만나면 아귀의 눈높이에 맞추어 말하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의 눈높이에 맞추어 말한다.”68)
(위 본문의 두 문장 중) 첫째 문장은 ‘유有·무無의 3구句’69)에 해당하니, 마치 꼭두각시는 가유假有일 뿐 실체가 없는 것과 같다. 둘째 문장은 왜 실체가 없는지에 대한 이유를 드러낸 것이다.
(본분) 종사께서 보여주신 ‘본분의 삼요’를 (하근기에 속한 사람들은) 그 언어의 흔적에 사로잡혀, ‘(진여를) 신훈하고 (범부와 성인을) 나누는 3구(新薰隔別三句)’70)를 사용해서 (의도를) 깨치려 하고, ‘진공의 한 구멍’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격외선格外禪이라 할 수 없다.
아라한은 회신멸지灰身滅智71)하기 때문에 (저들의 수행은) ‘무구無句’에 빠지며, 아귀는 굶주리고 목말라서 미쳐 날뛰기 때문에 (저들의 수행은) ‘유구有句’에 빠지는 것이지만, 부처님은 중도中道를 증득하셨기 때문에 ‘중구中句’이다. 범부와 성인의 본성이 본래부터 각각 다르다고 여기기 때문에 ‘(범부와 성인을) 나누는 3구(隔別三句)’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하근기에 속한 사람이 그저 의리선만을 이해하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조사선·여래선·의리선의) 삼종선이 모두 3구 속에 있다고 한 것이다.
4) 결론72)
임제 선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무릇 종승宗乘73)을 거량擧量하여 제창提唱할 경우에는74) 한 개의 구句 속에 반드시 삼현문三玄門을 갖추어야 하고 하나의 ‘현玄’ 속에는 반드시 삼요三要를 갖추어야 한다. 거기에는 방편(權)도 있고, 진실(實)도 있으며, 관조(照)도 있고 작용(用)도 있다.75) 그대들은 어떻게 알고 있는가?”라고 하셨다.

염거拈擧
바람 법사가 말했다. “(위의 본문에서 말한) 구句란 언구言句라고 할 때의 구의 의미이니, 구는 말로 설명하여 나누고 구별한다는 뜻이다. (반면에) 현玄은 유현幽玄하다고 말할 때의 현의 의미인데, 현은 나누어 설명할 수 없다. (또) 요要는 분명한 요체라고 할 때의 요의 의미이니, 요에는 잡다함이 없다.
현과 요는 구에 있으며, 방편(權)과 진실(實)은 현에 있으며, 관조(照)와 작용(用)은 요에 있다. (이 개념들은) 저마다 고유한 영역이 있으므로 ‘황폐하게 뒤얽어서(莾鹵)’는 안 된다.”76)

해설77)
(임제 선사께서 위의 본문에서) “한 개의 구句 속에”라고 한 말은, 위에서 말한 3구 중 각각의 한 구78)를 말한다.

010_0516_a_01L句也漚和此云方便此則權實三句
010_0516_a_02L爲妙有宗門向上爲眞空此是中士
010_0516_a_03L會得如來禪

010_0516_a_04L第三句
看取棚頭弄傀儡抽牽全借裡
010_0516_a_05L頭人

010_0516_a_06L
風云逢羅漢說羅漢逢餓鬼說餓
010_0516_a_07L逢佛說佛前句有無三句
010_0516_a_08L傀儡之是假無實也後句出無實所
010_0516_a_09L宗師所示本分三要滯他言迹
010_0516_a_10L以但新熏隔別三句薦得而眞空一
010_0516_a_11L竅則全昧故未名格外禪羅漢
010_0516_a_12L灰身滅智故無句餓鬼飢渴狂走
010_0516_a_13L故有句佛證中道故中句而凡
010_0516_a_14L聖各異故爲隔別三句也此是下
010_0516_a_15L但會義理禪是故三禪皆在三
010_0516_a_16L句中

010_0516_a_17L[結論]
師云大凡擧唱宗乘一句中須具三玄
010_0516_a_18L一玄中須具三要有權有實有照
010_0516_a_19L有用汝等作麽生會

010_0516_a_20L
風云句言句之句句詮差別玄幽
010_0516_a_21L玄之玄玄不可辨要省要之要
010_0516_a_22L不在多玄要在句權實在玄照用
010_0516_a_23L在要各有攸當不應莾鹵

010_0516_a_24L
解曰一句中者上三句中一句也

010_0516_b_01L
내(백파 긍선) 생각을 말하면, 제3구에 해당하는 의리선의 경우 3구의 각 구마다 각각 삼현三玄을 갖추고 있고, 제2구에 해당하는 여래선의 경우 삼현의 각 현玄마다 각각 삼요三要를 갖추고 있다. 즉 제3구에 이미 현玄과 요要를 갖추고 있고, 삼현 속에도 역시 구와 요를 갖추고 있으며, 삼요 속에도 역시 구와 현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3구를 비록 의리선이라고는 하지만 이미 현과 요를 갖추었기 때문에 따로 일삼을 것이 전혀 없다. (또) 삼현을 비록 여래선이라고는 하지만 역시 삼요를 갖추었기 때문에 따로 일삼을 것이 전혀 없다.79) (또) 삼요를 비록 조사선이라고는 하지만 또한 구와 현 속에 (삼요가) 있으니, 일부러 (일삼을 게) 절대로 없다.80)
달리 생각할 것도 없이81) 근본과 지엽도 없으며, 깊음과 얕음도 없으며, 앞과 뒤도 없으며, 솜씨가 좋으니 서투르니 할 것도 없다. 비유하면 마치 귀신의 조화 같아서 핵심을 잡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82) 그러니 필경에 무엇을 조사선이라 할 것이며, 무엇을 여래선이라 할 것이며, 무엇을 의리선이라 할 것인가? 3구와 삼현과 나아가 삼요는 궁극적으로 보면 심원하여 ‘총체적인 하나의 기틀(摠一機)’임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위대하도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뜨거운 번뇌라는 바다에 빠진 모든 중생들의 (번뇌를 식혀 주는) 시원한 진리의 깃발이다. (그런데) 이 깃발을 세우는 것은 (『열반경』에서 말하듯이) 마치 도리천에 있는 ‘독 묻은 북’을 두드려 그 소리를 듣는 자는 모두 죽게 만드는 것과 같다. 이것이야말로 ‘임제종 사람들이 법을 설할 때에 사용하는 표준’83)이니, 어찌하여 구·현·요의 깊음·얕음이 어쩌니, 또는 그 근본·지엽이 어쩌니 하며, 이러쿵저러쿵 (알음알이로) 따지겠는가!
그러므로 육조 대감六祖大鑑84) 선사가 대중들에게 말했다. “나에게 한 물건이 있는데, 그것은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으며,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모양을 그릴 수도 없다. 위로는 하늘을 떠받치고진공 아래로는 땅을 버티고 있으며묘유, 밝기는 태양 같고 어둡기는 칠흑 같다. (일상의) 움직이고 작용하는 속에 항상 있으나, 움직이고 작용하는 속에 수용收用되지는 않는다. 자, 그대들은 이것을 무엇이라 부르겠는가?”85)
임제 선사는 이 진공하고도 묘유한 여러 부처의 법인法印을 가지고, 허공에도 도장을 찍고, 수면 위에도 도장을 찍고, 진흙에도 도장을 찍어, 널리 상·중·하의 세 근기에 맞추어 다 함께 여래의 완전한 원각圓覺86)의 바다에 들어가게 하였다.

010_0516_b_01L第三句義理禪三句每句各具
010_0516_b_02L三玄第二句如來禪三玄每玄各
010_0516_b_03L具三要則三句已具玄要三玄中
010_0516_b_04L亦具句要三要中亦具句玄也
010_0516_b_05L則三句雖云義理禪已具玄要故更
010_0516_b_06L無餘事三玄雖云如來禪亦具三
010_0516_b_07L故更無餘事三要雖云祖師禪
010_0516_b_08L尙在於句玄中故別無特地直下
010_0516_b_09L無本末無深淺無背面無巧拙
010_0516_b_10L同神變定當不得畢竟喚什麽作
010_0516_b_11L祖師禪喚什麽作如來禪喚什
010_0516_b_12L麽作義理禪乎須知三句三玄
010_0516_b_13L三要畢竟㝠然揔一機偉矣哉
010_0516_b_14L是一切衆生熱惱海中淸凉法幢也
010_0516_b_15L此幢之立如忉利天上塗毒皷
010_0516_b_16L之則聞者皆死也此是臨濟宗說法
010_0516_b_17L之標準則何以句玄要深淺本末
010_0516_b_18L議計較也哉
故六祖大鑑禪師示衆
010_0516_b_19L吾有一物無頭無尾名不得
010_0516_b_20L狀不得上柱天
下柱地

010_0516_b_21L如日黑似㓒常在動用中動用
010_0516_b_22L中收不得汝等喚作什麽臨濟將
010_0516_b_23L此眞空妙有之諸佛法印印空印水
010_0516_b_24L印泥而普逗上中下三根同入如

010_0516_c_01L그러니 어찌 그저 “(임제 선사를) 낮도둑놈이라”87)고만 부를 것인가? (나 긍선이 보기에는 임제 선사야말로) “천하 사람들을 짓밟았다.”88)고 말할 수 있겠다.
비록 깊음·얕음과 근본·지엽이 없다고 하지만, 구·현·요로써 나누어 안배한 것은 사람에 따라 근기가 영리하기도 하고 우둔하기도 해서 형편상 어찌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청량 징관淸凉澄觀(738~839) 국사께서 “(어리석음이 가로막으면 같은 법신을 보는 이마다 다르게 보지만, 마음을 통하면 현묘한 뜻이 같게 되니,) 이러니저러니 말하는 것이 부처님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89) 하셨으니, 이야말로 바로 부처님과 조사들의 종자기鍾子期90)와 같은 존재가 아니겠는가!
(‘바람 법사’가 한 해설 중) “(이 개념은) 저마다 고유한 영역이 있으므로 ‘황폐하게 뒤얽어서는(莾鹵)’ 안 된다.”라고 한 말은, 다음 장의 ‘3구를 도표로 표시’한 곳에서 (제1구와 제2구와 제3구)의 세 구句 아래에 배열한 것에 전적으로 의거하여 이름과 그 행상을 자세하게 살펴 배정한 것이니, ‘황폐하게 뒤얽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관조(照)와 작용(用), 기틀(機)과 작용(用), 죽임(殺)과 살려줌(活), 마음(心)과 대상(境) 등은 제1구의 삼요 가운데에 있으며, 방편(權)과 진실(實), 미혹함과 깨달음, 도중사途中事와 가리사家裏事91) 등은 제2구의 삼현 가운데에 있으며, 유有와 무無, 현상(事)과 원리(理), 깨달음(悟)과 닦음(修), 나아가 현과 요 등은 제3구의 3구 가운데에 있으니, 뒤섞어서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치우침(偏)과 바름(正), 긴 세월(古)과 이 순간(今),92) 증득(證)과 교화(化),93) 잡아들임(把)과 놓아줌(放)94) 따위를 자재하게 넘나들며 이쪽저쪽을 자유롭게 쓰는 것과 같은 경우는 ‘바른 안목을 갖춘 사람(活眼者)’의 솜씨라야 하니, 일정한 법칙에 매이지 않아 진흙을 주물러 금덩이를 만든다95)는 의미이다.
수행하는 사람들이 종사께서 하시는 ‘말의 핵심(言頭立脚處)’을 제대로 궁구한다면 분명하게 분별할 수는 있겠지만, 이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그저 바라는 것은 정신을 집중하여 탁마하며 힘을 다해 생각하고 궁리하라는 것뿐이다.
5. 3구를 도표로 표시
본송本頌96)에서 깊은 데서부터 얕은 데로 이른 이유는, 종사들께서 차례대로 상근기·중근기·하근기, 이 세 근기를 널리 지도하려고 그런 것이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서 도표의 순서를 (본송과는 달리 제3구를 앞에 두어) 역순으로 늘어놓은 까닭은 수행하는 사람들이 얕은 데서부터 깊은 데로 나아가는 것에 맞추려고 했기 때문이다.

010_0516_c_01L來大圓覺海何啻但名白拈賊
010_0516_c_02L謂踏殺天下人雖無深淺本末
010_0516_c_03L以句玄要分別差排者隨機利鈍
010_0516_c_04L事不獲已也淸凉所謂云云自他
010_0516_c_05L我何預者正是佛祖爲子期也哉

010_0516_c_06L有攸當不應莾鹵者一依圖中三
010_0516_c_07L句下所配而審定名相不得錯雜
010_0516_c_08L亂用也照用機用殺活心境等
010_0516_c_09L第一句三要中權實迷悟途中家裡
010_0516_c_10L在第二句三玄中有無事理悟修
010_0516_c_11L及玄要等在第三句三句中不應
010_0516_c_12L莾鹵亂用矣若其互用者如偏正
010_0516_c_13L古今證化把放等此是活眼手段
010_0516_c_14L存軌則而把土成金之意也學者
010_0516_c_15L當究其宗師言頭立脚處則庶可辨
010_0516_c_16L而此實不易惟冀留神琢磨
010_0516_c_17L力尋繹矣

010_0516_c_18L

010_0516_c_19L三句圖示

010_0516_c_20L
本頌從深至淺者宗師如次上中下
010_0516_c_21L三士普接也今圖逆次者欲順學者
010_0516_c_22L從淺至深故

010_0516_c_23L
此以三句爲三禪即一愚意見禪
010_0516_c_24L門綱要

010_0517_a_01L
제3구제2구제1구
삼종선三種禪
불조얼자佛祖孼子
1. 의리선義理禪
제 자신도 구제하지 못함
불조적자佛祖嫡子
2. 여래선如來禪
인천사人天師
격외선格外禪
불조적자佛祖嫡子
3. 조사선祖師禪
불조사佛祖師
미입삼처未入三處여래삼처전심如來三處傳心
달마삼전達磨三傳(▲)
살인도殺人刀
1. 분반좌分半座
진금포眞金鋪
1. 제연이단諸緣已斷(▲)
활인검活人劔
2. 거염화擧拈華
2. 멱심부득覓心不得(▲)
살활제시殺活齊示
3. 곽시쌍부槨示雙趺
잡화포雜貨鋪
3. 삼배득수三拜得髓(▲)
단신무본但新無本신훈삼구新熏三句
본분일구本分一句
종문향상
宗門向上
신훈이구新熏二句본분진여本分眞如
격별삼구隔別三句
1. 유구有句
2. 무구無句
3. 중구中句
삼현三玄
1. 체중현體中玄
2. 구중현句中玄
3. 현중현玄中玄
향하삼요向下三要
1. 대기원응大機圓應
2. 대용직절大用直截
3. 기용제시機用齊施
향상일규向上一竅
권실삼구權實三句
권구權句
실구實句
중구中句
향상向上팔식삼분八識三分
1. 견분見分
2. 상분相分
3. 자증분自證分
4. 증자증분證自證分
점수漸修
돈오頓悟
수오일시修悟一時
운문삼구雲門三句
1. 수파축랑隨波逐浪
2. 절단중류截斷衆流
3. 함개건곤函蓋乾坤
별치일구
別置一句
사조용四照用
1. 선조후용先照後用
2. 선용후조先用後照
3. 조용동시照用同時
4. 조용부동시
照用不同時
사事 리理 중中변偏 정正 중中상上사할四喝
1. 금강보검할 金剛寶喝
2. 사자거지할 師子距地喝
3. 탐간영초할 探竿影草喝
4.일할부작일할용할
一喝不作一喝用喝
공功 위位 중中용用 체體 중中상上
상견 단견 중견常見 斷見 中見금今 고古 중中상上
미迷 오悟 중中상上
증익방 손감방 상위방
增益謗 損減謗 相違謗
범凡 성聖 중中상上운문삼구雲門三句
1. 절단중류截斷衆流
2. 수파축랑隨波逐浪
3. 함개건곤函蓋乾坤

∴ ○
도중 가리 일도
途中 家裡 一途
상上

010_0517_a_01L
第三句第二句第一句
三種禪
佛祖孼子
一. 義理禪
佛祖嫡子
二. 如來禪
人天師
格外禪
佛祖嫡子
三. 祖師禪
佛祖師
未入三處如來三處傳心
達磨三傳(▲)
殺人刀
一. 分半座
眞金鋪
一. 諸緣已斷(▲)
活人劔
二. 擧拈華
二. 覓心不得(▲)
殺活齊示
三. 槨示雙趺
雜貨鋪
三. 三拜得髓(▲)
但新無本新熏三句
本分一句

宗門向上
新熏二句本分眞如
隔別三句
一. 有句
二. 無句
三. 中句
三玄
一. 體中玄
二. 句中玄
三. 玄中玄
向下三要
一. 大機圓應
二. 大用直截
三. 機用齊施
向上一竅
權實三句
權句
實句
中句
向上八識三分
一. 見分
二. 相分
三. 自證分
4. 證自證分
漸修
頓悟
修悟一時
雲門三句
一. 隨波逐浪
二. 截斷衆流
三. 函蓋乾坤

別置一句
四照用
一. 先照後用
二. 先用後照
三. 照用同時
4.
照用不同時
事 理 中偏 正 中四喝
一. 金剛寶喝
二. 師子距地喝
三. 探竿影草喝
4.
一喝不作一喝用喝
功 位 中用 體 中
常見 斷見 中見今 古 中
迷 悟 中

增益謗 損減謗 相違謗
凡 聖 中雲門三句
一. 截斷衆流
二. 隨波逐浪
三. 函蓋乾坤

∴ ○

途中 家裡 一途

010_0518_a_01L
방행 파정 중
放行 把定 中
상上살殺 활活 중中불변不變수연隨緣
속제 진제 중도제
俗諦 眞諦 中途諦
제일의제
第一義諦
심心 경境 중中
증證 화化 중中열반涅槃보리菩提
체體 용用 중中
화化 증證 중中사망斯亡고古 금今 중中
삼성三聖
습득 한산 가가소
拾得 寒山 呵呵笑
비로毘盧삼보三寶
진불 진법 진도
眞佛 眞法 眞道
상적常寂상조常照
삼신三身
법신 화신 보신
法身 化身 報身
쌍암雙暗쌍명雙明
삼학三學
계학 혜학 정학
戒學 慧學 定學
쌍수雙收쌍방雙放
오분법신五分法身
계향 혜향 정향
戒香 慧香 定香
해탈향解脫香지견향知見香
진공眞空묘유妙有진공眞空묘유妙有
삼성三聖
한산 습득 가가소
寒山 拾得 呵呵笑
비로毘盧염연기染緣起

정연기淨緣起
청산靑山백운白雲 중中
삼관三關
삼인三印
니인泥印
삼관三關
수인水印
일촉一鏃전후箭後
로路
공인空印
향상向上삼요三要
대기원응
大機圓應
대용직절
大用直截
제시齊施
사료간四料揀
1. 탈인불탈경
奪人不奪境
2. 탈경불탈인
奪境不奪人
3. 인경양구탈
人境兩俱奪
4. 인경구불탈
人境俱不奪
향상向上
삼보三寶
진불 진법 진도
眞佛 眞法 眞道
향상向上
삼신三身
법신 화신 보신
法身 化身 報身
사빈주四賓主
1. 빈중빈賓中賓
삼성三性
1. 편계徧計
2. 빈중주賓中主
1. 편계徧計
3. 주중빈主中賓
2. 의타依他
4. 주중주主中主
3. 원성圓成

010_0518_a_01L

放行 把定 中
殺 活 中不變隨緣

俗諦 眞諦 中途諦

第一義諦
心 境 中
證 化 中涅槃菩提
體 用 中
化 證 中斯亡古 今 中
三聖

拾得 寒山 呵呵笑
毘盧三寶

眞佛 眞法 眞道
常寂常照
三身

法身 化身 報身
雙暗雙明
三學

戒學 慧學 定學
雙收雙放
五分法身

戒香 慧香 定香
解脫香知見香
眞空妙有眞空妙有
三聖

寒山 拾得 呵呵笑
毘盧染緣起

淨緣起
靑山白雲 中
三關
三印
泥印
三關
水印
一鏃箭後

空印
向上三要

大機圓應

大用直截
齊施
四料揀
一.
奪人不奪境
二.
奪境不奪人
三.
人境兩俱奪
4.
人境俱不奪
向上
三寶

眞佛 眞法 眞道
向上
三身

法身 化身 報身
四賓主
一. 賓中賓
三性
一. 徧計
二. 賓中主
一. 徧計
三. 主中賓
二. 依他
4. 主中主
三. 圓成
하荷
미未 택澤 단但입入 종宗 신新격格 명明 무無외外 오悟 본本 선禪 수修
1. 2.
오五 법法 편偏 위潙 원圓파派 안眼 명明 앙仰 명明종宗종宗 본本 종宗 금今지旨 명明 분分 명明 본本 유唯 일一 체體삼三 심心 구句 용用 구句
3.
조曹 초超 동洞 출出 종宗 금今 명明 본本 향向 삼三 상上 구句
4. 5.
운雲 다多 임臨 구具문門 명明 제濟 명明종宗 대大 종宗삼三명明 용用 명明 요要절截 직直 기機단斷 절截 용用
오파개전수
五派皆傳授
오종향상무전
五宗向上無傳
달마서래의達磨西來意건립문자建立文字불립문자不立文字직지인심直指人心견성見性성불成佛
석가세존께서일생 가르치신 선과 교에 해당.일체의 선 문헌에 나오는 깨침·닦음·신훈을 설하는 구절. 나아가 북종北宗의 신수神秀와 일대의 삼장교三藏敎.아래는 모두 교외별전敎外別傳임.일체의 선 문헌에 나오는 위음왕威音王 이전, 그리고 위음왕 이전 및 꿈속이나 생시가 같다는 등의 말.일체의 선 문헌에 나오는 부처라 해도 되고, 조사祖師라 해도 되고, 나아가 모두 상 주기도 하고 모두 벌주기도 하는 등의 구절.일체의 선 문헌에 나오는 산은 산 물은 물이고 주장자柱杖子를 그저 주장자로 부르는 등. 어느 모로 보나 분명하고 핵심적인 구절.
이 ≺도표≻에서 (임제 선사의) 3구를 (조사선·여래선·의리선) 3선禪에 짝지은 것은 ‘어떤 우매한 이(一愚)’97)라고 자칭하는 어떤 법사의 의견인데, 『선문강요집』에 보인다.

010_0519_a_01L
未 澤 但入 宗 新格 明 無外 悟 本 禪 修
一. 二.
五 法 偏 潙 圓派 眼 明 仰 明宗宗 本 宗 今旨 明 分 明 本 唯 一 體三 心 句 用 句
三.
曹 超 洞 出 宗 今 明 本 向 三 上 句
4. 5.
雲 多 臨 具門 明 濟 明宗 大 宗三明 用 明 要截 直 機斷 截 用

五派皆傳授

五宗向上無傳
達磨西來意建立文字不立文字直指人心見性成佛
配一代禪敎一切禪文, 悟修新熏節及北秀與一代藏敎下皆敎外別傳一切禪文, 威音那邊, 更那邊及夢覺一如等一切禪文, 佛也安, 祖也安, 及總賞總罰等一切禪文, 山是山, 水是水, 主丈但喚作主文 [1] 等. 一一端端的的節

010_0519_b_01L
6. 의리선義理禪과 격외선格外禪의 구별
예부터 통설적으로 법法을 기준으로 할 경우는 의리선과 격외선으로 짝짓고, 인人을 기준으로 할 경우는 여래선과 조사선으로 짝짓는다. 이 말은 의리선이 곧 여래선이요, 격외선이 곧 조사선이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다자탑 앞에서) 자리를 나누어 주신’ 여래선이 역시 의리선이 되는데, 삼처전심三處傳心98)이 모두 ‘격외’란 말인가? 게다가 의리선은 ‘격외’라는 (분에) 넘치는 명칭을 받게 되고, 여래선은 도리어 ‘의리’라는 허물 있는 명칭을 받게 되니, 이치는 본래 그런 게 아니다.
용담 조관龍潭慥冠99) 선사는 “일체의 선문禪文은 모두 다 ‘격외’ 도리이다. 그러므로 『선원제전집도서』와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도 역시 ‘격외’ 도리이다.”100)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의리선은 어디에 배치할 곳이 없다. 만약 『금강경』이나 『능가경』을 (가지고 의리선이라고) 지목한다면 이것은 교문敎文이니, 어찌 선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혜암 윤장惠庵玧藏101) 선사는 “삼현 중에 첫 번째 현은 여래선이며, 뒤의 두 현은 조사선이다.”102)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삼현에 이미 (여래선과 조사선) 두 선禪을 모두 배속해 버렸으니, 본분과 향상 그리고 제1구의 삼요와 향상은 또 어떤 법이란 말인가?
연담蓮潭103) 장로長老께서는 (『선문오종강요』에 나오는) ‘어떤 우매한 이(一愚)’104)의 견해에 의거하기는 했지만, “의리라는 말은 (외연이) 넓고, 여래라는 말은 (외연이) 좁다. 여래선의 자신을 ‘존귀하게 여기는 알음알이(尊貴解)’105)는 영지靈知에 가깝기106) 때문에 의리선이라고도 이름 붙일 수 있겠지만, 의리선은 완연하게 ‘알음알이로 따지는 것(義理)’만 있기 때문에 여래선이라고 이름 붙일 수 없다.”107)라고 역시 말씀하셨다.
‘넓다’느니 ‘좁다’느니 하는 설명 역시 천착일 뿐이다. 또한 여래선도 바로 ‘격외’ 도리인데, 어찌 ‘알음알이로 따지는 것’이라는 허물 있는 명칭을 붙일 수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나는 위 세 분의) 주장을 감히 받아들일 수 없다.
나는 (이하에서) 좁은 견해나마 피력해 보겠다. 생각건대, 의리선은 제3구에 해당하니, 새롭게 훈습함(新熏)과 깨달음(悟)과 닦음(修)108)만을 단지 설한다. 거기(의리선)에는 ‘알음알이로 따지는 방법(義路)’과 ‘논리에 의한 방법(理路)’에 의한 ‘형태화된 격식(標格)’만 오로지 있다. 그리하여 범부들은 반드시 ‘깨달음’과 ‘닦음’이 있어야만 ‘성불’할 수 있고, 이치(義理)로 보아도 당연히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의리선이라 부르는 것이다.
근기가 하열하고 겉모양에 집착하는 중생들은 사견에 빠져서, 자신의 뜻을 굽힐 줄 모르므로 교화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부처님과 조사님께서 간절한 노파심에서, 방편이 없는 가운데 방편을 베풀어, 교화의 문으로 나와

010_0519_b_01L義理禪格外禪辨

010_0519_b_02L
古來通談曰約法名義理禪格外禪
010_0519_b_03L約人名如來禪祖師禪此則義理禪即
010_0519_b_04L如來禪格外禪即祖師禪也旣以分座
010_0519_b_05L如來禪亦名義理禪何云三處皆是格
010_0519_b_06L外耶且義理禪得格外之濫名如來
010_0519_b_07L禪還得義理之累名理自不然龍潭曰
010_0519_b_08L一切禪文皆是格外故都序節要
010_0519_b_09L是格外然則義理禪無配處若指金
010_0519_b_10L剛楞伽則彼是敎文何名禪也惠庵
010_0519_b_11L三玄中初玄如來禪後二玄祖師
010_0519_b_12L然則三玄已盡二禪本分及向上
010_0519_b_13L與第一句三要及向上更是何法耶
010_0519_b_14L老雖依一愚亦云義理之言寛如來之
010_0519_b_15L言局以如來禪尊貴解近於靈知
010_0519_b_16L亦名義理禪義理禪完有義理故不得
010_0519_b_17L名如來禪寛局之說亦是穿鑿且如
010_0519_b_18L來禪正是格外安得義理之累名耶
010_0519_b_19L皆未敢聞命
愚伸管見盖義理禪
010_0519_b_20L第三句但新熏悟修之說完有義路理
010_0519_b_21L路之標格則以是凡夫必須悟修成佛
010_0519_b_22L義理當然故名義理禪以下根着相衆
010_0519_b_23L沒溺邪見强剛難化故佛祖老婆
010_0519_b_24L心切無方便中示設方便出來化門

010_0519_c_01L팔상八相으로 성도하심109)을 보이고, 깨달음과 닦음을 통해서 성불하는 법을 널리 연설하셨다. 그러나 깨달음도 닦음도 없는, 본래부터 (자신에게) 간직된 ‘본유本有의 불성佛性’은 (저네들에게) 드러내 보여주지 않으셨기 때문에, 중생들은 다만 깨달음과 닦음이라는 꼭두각시만 알고, 본래부터 (자신에게) 간직된 ‘본유의 불성’을 보지 못했다.
격외선에는 (여래선과 조사선, 두 종류가 있는데), (첫째) 여래선에서는 “마음이 곧 부처이다.”110)라고 말하며, (둘째) 조사선에서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111)라고 말한다. (이렇게 말하면) 부여잡을 단서가 없는 사안(沒巴鼻)112)과 같아서, ‘알음알이로 따지는 격식(義理之格)’을 싹 벗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둘을 모두) ‘격식의리을 벗어난 선(格外禪)’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敎 밖의 다른 방식으로 전하는 ‘한맛의 선(一味禪)’113)이니, (이렇게 할 수 있는 까닭은) 중생들의 ‘지혜와 견해(知見)’가 대단히 뛰어나고 날카로워서 (자신의 불성을) 곧장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고 높은 가르침(最上乘)’을 곧장 보여준 것이다.
이 격외선에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여래선이다.
중근기의 중생들은 ‘삼현의 방편(三玄權門)’으로 ‘본분의 진여’와 ‘향상하는 한 구멍(向上一竅)’을 깨닫는다. 이것 또한 조사 문중의 수행 방법이나 저들이 깨달은 “온 대지가 모두 순금이다.”라는 주장은 “여래께서는 만 가지 법을 총괄하여 말씀하시지만 (결국은) 일심一心을 밝히신다.”는 ‘교화라는 티(敎迹)’114)와 완전히 같다. 그래서 폄하하여 여래선이라 했다. (이렇게 폄하하는 이유는) ‘자신을 존귀하게 여기는 알음알이(尊貴解)’가 있어 그것이 밖으로 돌출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자탑 앞에서 여래께서 가섭에게 자리를 나누어 주신법공法空의 자리(座) 소식’으로서, 법안종·위앙종·조동종 세 종파의 종지이다.
둘째는 조사선이다.
상근기의 중생들은 삼요문三要門에서 ‘향상하는 진공묘유’를 깨닫는다. 이야말로 조사 문중의 차림새(行色)이기 때문에, 조사선이라는 이름을 직통으로 붙인 것이다. 이것은 곧 ‘영산회상에서 여래께서 꽃을 집어 들자(拈華) 가섭이 미소 지은묘유 소식’으로서, 운문종과 임제종 두 종파의 종지이다.
(삼처전심 중) 세 번째의 ‘사라쌍수 아래에서 관 밖으로 두 발을 보이신죽임(殺)과 살려줌(活) 소식’은, (나 긍선이) 생각하기에는, 육조 혜능 스님 이후에는 전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후에는) 다만 ‘선사禪師’라고만 호칭하고 ‘조사祖師’라고는 호칭하지 않는다.115) 그렇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감히 완전하게 확정할 수는 없다.
7. 말후구末後句와 최초구最初句의 구별
말후구末後句116)란 (석가세존께서) 교화의 문으로 나오시어, ‘세 종류의 선’과 그 각각에 대하여 3구를 설해 주신 궁극의 말씀이지만, 그 뜻은 여기(말이나 글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말마다 글귀마다 (그 뜻하는 바가) 한없는 지경까지 이르러,117)

010_0519_c_01L示八相成道廣演悟修成佛之法而未
010_0519_c_02L顯無悟修之本有佛性故衆生但認悟
010_0519_c_03L修之傀儡未見本有之裡頭性也
格外
010_0519_c_04L以如來禪即心是佛祖師禪山是山
010_0519_c_05L水是水之說了沒巴鼻逈出義理之格
010_0519_c_06L故名格
外禪是爲敎外別傳一味禪
010_0519_c_07L以衆生知見猛利可以直截承當故直
010_0519_c_08L示最上乘也
此格外中又有二種
010_0519_c_09L如來禪以中根衆生即於三玄權門
010_0519_c_10L透得本分及向上也此亦祖門中事
010_0519_c_11L其所悟盡大地一挺金之說完同如來
010_0519_c_12L統萬法明一心之敎迹故貶之曰如來
010_0519_c_13L以有尊貴顯角故也即分座法空

010_0519_c_14L而爲法眼潙仰曺洞三宗旨也
二祖
010_0519_c_15L師禪以上根衆生即於三要門透得
010_0519_c_16L向上眞空妙有也正是祖門中行色
010_0519_c_17L直名祖師禪即拈華
消息而爲雲
010_0519_c_18L門臨濟二宗旨也第三示趺
消息
010_0519_c_19L必六祖下未傳故但名禪師未名祖
010_0519_c_20L而亦未敢決定

010_0519_c_21L

010_0519_c_22L末後句最初句辨

010_0519_c_23L
末後句者出來化門示說三禪各三句
010_0519_c_24L而意不在此限言言句句直得無限

010_0520_a_01L‘향상하는 한 구멍(向上一竅)’을 애오라지118) 밝히고자 하셨다. 즉 비록 ‘세 종류의 선’을 전하는 것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그 뜻은 궁극적으로 전할 수 없는 ‘본분의 한 구멍(本分一竅)’에 있다. 그래서 향상하는 진여를 ‘말후구’라고 한다.
예를 들면 세존께서 갓 태어나셨을 때에 “하늘 위, 하늘 아래 ‘나’ 홀로 존귀하다.”라고 하신 것과 같은 경우는, 교화의 문으로 나오시어,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제 몫으로 타고난 참 나(本分眞我)’를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말후구를 세우신 것이다.
최초구最初句119)란 진흙탕에 빠지는120) 등으로 교화하는 자취는 아예 보이시지 않고, 모든 사람마다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진여를 곧바로 보이시는 것이다. 즉 애당초부터 교화 따위는 관계하지 않으시고, ‘본분本分’을 최초로 곧바로 가르쳐 주시기 때문에, 본분진여를 역시 ‘최초구’라고 한다.
예를 들면 저 운문雲門(864~949) 선사가 세존께서 (하신 말씀의 의도를) 간파하고 “(하늘 위, 하늘 아래 ‘내(我)’가 제일 존귀하다고 말씀했을) 당시 내가 만약에 보았다면 한 방 때려121) (개나 먹게 주고는 오로지 천하태평을 도모하고자 했을 것이다.)”122) 운운한 것과 같은 경우이다. 말로는 비록 세존을 배격했지만, 속내는 중생들에게 ‘교화라는 티(化迹)’123)에 얽매이지 말고 본분을 철저히 깨닫게(徹見) 하려고 그런 것이다. 이것(운문 선사의 그 말)은 부처님의 속뜻을 드러낸 것이니, 실로 (운문 선사는) 세존의 지음知音인 셈이다.
또 『금강경』에서 “그때 세존께서……자리를 펴고 앉으셨습니다. 그때 대중 가운데 있던 수보리 장로가 속뜻을 꿰뚫어 알아차리고 말했다. ‘경이롭습니다, 세존이시여!’…….”124)라고 한 것도 역시 같은 뜻이다.
그러므로 구곡 각운龜谷覺雲 선사先師125)께서 말씀하시기를 “말후구라 할지라도 완전한 궁극에 이르면 최초구와 비교해서 다를 게 무엇이냐!”126)라고 하셨다.127)
8. 신훈新熏과 본분本分의 구별
의리선은 깨달음(悟)과 닦음(修)을 통해 부처 되는 것(成佛)만을 그저 밝혔으니, 즉 (의리선에는) 단지 ‘신훈新熏’만 있고 ‘본분本分’은 없으며, (의리선은) 진여 자성을 밝히지 못했기 때문에 부처님과 조사들의 서자이다.128)
여래선 중에서, 위앙종과 법안종 두 종파에서는 ‘삼현의 방편(三玄權門)’을 신훈으로 삼고, ‘1구의 진실(實)’을 본분으로 삼는다. 한편, 조동종에서는 ‘긴 세월(空劫)’을 완전히 초월하면서도 (그렇다고) ‘이 순간(今時)’에도 떨어지지 않고,129) 향상하는 진공眞空을 곧바로 보여주기 때문에 신훈도 아니고 본분도 아니다. 그렇지만 위앙종·법안종·조동종 3종은 모두 다 ‘본분의 자성’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부처님과 조사들의) 적자嫡子이다.
조사선 중에서, (임제종과 운문종) 두 종파에서는 ‘향하하는 삼요’를 신훈으로 삼고, ‘향상하는 진여’를 본분으로 삼는다.

010_0520_a_01L單單要明向上一竅則雖說傳授三禪
010_0520_a_02L意在於最後無傳本分一竅故以向上
010_0520_a_03L眞如名爲末後句如世尊初生時云
010_0520_a_04L天上天下唯我獨尊者是出來化門
010_0520_a_05L人人本分眞我故立末後句也
最初句
010_0520_a_06L斥他拖泥之化跡直示人人本具之
010_0520_a_07L眞如則初不涉化門最初直示本分
010_0520_a_08L以本分眞如亦名最初句如雲門覷破
010_0520_a_09L世尊云我當時若見一棒打殺云者
010_0520_a_10L言雖斥他世尊要使衆生不滯化跡
010_0520_a_11L徹見本分是爲暢佛本懷故實爲世尊
010_0520_a_12L知音也又金剛經世尊敷座而坐
010_0520_a_13L菩提覷破云希有世尊亦此意也
010_0520_a_14L龜谷先師曰末後句至於圓極則與最
010_0520_a_15L初句何以異哉

010_0520_a_16L

010_0520_a_17L新熏本分辨

010_0520_a_18L
義理禪但明悟修成佛則但新無本
010_0520_a_19L明眞如自性故爲佛祖孼子也如來禪
010_0520_a_20L潙法二宗以三玄權爲新以一句
010_0520_a_21L實爲本也曺洞宗全超空劫不落今
010_0520_a_22L直示向上眞空故非新非本也
010_0520_a_23L三宗皆悟本分自性故爲嫡子也祖師
010_0520_a_24L禪二宗以向下三要爲新以向上眞如

010_0520_b_01L만약 이렇게 배당한다면, 여래선에서 말하는 본분과 향상은 단지 진여의 ‘불변不變’ 쪽만을 밝힌 셈이다. 이렇게 되면, 이는 (‘묘유’의 작용은 없고) 오직 ‘진공’하기만 한 것이니, (바둑으로 비유하자면 결정적인) 한 수를 잘못 착수한 꼴이다. (왜냐하면) 조사선에서 말하는 향상하는 본분의 진여에는 ‘불변하는 속성’과 ‘인연을 따르는(隨緣) 속성’130) 모두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진공’과 ‘묘유’를 완전하게 갖추고 있으니, 둘 다 잘못 착수한 것이기도 하고 둘 다 제대로 착수한 것이기도 하다.131)
여기에 말하는 여래선과 조사선의 깊고 얕음은 비록 다르지만, 모두 다 ‘본분의 진여’를 깨달았기 때문에, 모두 부처님과 조사들의 적자이다. 그런데 의리선은 ‘본분의 진여’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서자이다. 그러니 의리선을 가지고 여래선이라고 주장하는 말은 (내가) 공격하지 않아도 저절로 논파된다.
9. 죽임(殺)과 살려줌(活)의 구별
삼처전심132) 중에서, 첫 번째인 ‘분반좌’진공는 살인도殺人刀133)인데, 이것은 (임제의) 3구句 가운데 제2구인 본분 및 향상에 해당한다. 그러니 결국은, 즉 진여의 ‘불변하는 속성’만을 전한 셈으로, 이 경우는 오직 죽임(殺)만 있고 살려줌(活)은 없다. 청원 행사靑原行思134) 선사는 이 법을 얻어 육조 대사의 방계 전법 제자(傍傳)135)가 되었다.
두 번째인 ‘염화미소’묘유는 활인검活人劍인데, (이것은 임제의 3구 가운데) 제1구인 기틀(機)죽임과 작용(用)살려줌과 삼요 및 향상하는 진공죽임과 살려줌에 모두 잘못 착수과 묘유죽임과 살려줌에 모두 제대로 착수에 해당한다. 그러니 결국은, 즉 죽임과 살려줌삼요 둘 모두에 잘못 착수하는 것이기도 하고, 둘 모두에 제대로 착수하는 것‘향상’이기도 하다. 남악 회양南嶽懷讓136) 선사는 이 법을 얻어 육조 대사의 정통 전법 제자(正傳)가 되었다.
죽임 밖에 달리 살려줌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백장 회해百丈懷海137) 선사는 ‘완전한 기틀(大機)’을 얻어서 다른 일삼을 것이 전혀 없었다.138) 이것을 두고 ‘완전한 기틀죽임이 완전하게 호응하는 것(圓應)살려줌’이라고 한다. 한편, 살려줌 밖에 죽임이 없기 때문에, 황벽 희운黃檗希運139) 선사는 ‘완전한 작용(大用)’을 얻어서 다른 일삼을 것이 전혀 없었다. 이것을 두고 ‘완전한 작용이라 하고살려줌 (번뇌를) 빨리 끊음(直截)죽임’이라고 한다.
제1구에 한정해서만, 기틀(機)과 작용(用)이니, 또는 비춤(照)과 작용(用)이니, 또는 죽임(殺)과 살려줌(活)이니 하는 명칭을 붙인다. 그러므로 이 활인검 속에는 죽임과 살려줌을 모두 갖추고 있다. 왜냐하면 깊은 것은 얕은 것을 반드시 포함하기 때문이다.
제2구는 살인도인데, 이것은 다만 죽임이라고만 이름 할 수 있을 뿐, 기틀이니 비춤이니 살려줌이니 하는 이름을 붙일 수는 없다. (독자들은) 자세히 살펴보시오.

010_0520_b_01L爲本也然則如來禪本分及向上但是
010_0520_b_02L不變眞如故唯是眞空暗一着也祖師
010_0520_b_03L禪向上本分眞如具足不變隨緣二義
010_0520_b_04L圓具眞空妙有是爲雙暗雙明也
010_0520_b_05L以此二禪深淺雖殊皆悟本分眞如
010_0520_b_06L俱爲佛祖嫡子義理禪未見本分
010_0520_b_07L爲孼子也以義理禪爲如來禪之言
010_0520_b_08L不攻自破也

010_0520_b_09L

010_0520_b_10L殺活辨

010_0520_b_11L
三處傳中第一分座
殺人刀即三
010_0520_b_12L句中第二句本分及向上則但傳不變
010_0520_b_13L眞如唯殺無活故靑原得之爲六祖
010_0520_b_14L傍傳也第二處拈華
活人劒即第
010_0520_b_15L一句三要及向上眞空殺活
雙暗

010_0520_b_16L殺活
雙明
則具足殺活
雙暗雙明

010_0520_b_17L南岳得之爲六祖正傳也以殺外無
010_0520_b_18L故百丈得大機更無餘事是爲
010_0520_b_19L大機圓應以活外無殺故黃蘗
010_0520_b_20L得大用更無餘事是爲大用直截
010_0520_b_21L至此第一句則名機用也
010_0520_b_22L用也殺活也是故此活人劒中
010_0520_b_23L足殺活以深必該淺故第二句殺人刀
010_0520_b_24L但名殺而未得名爲機也照也活也

010_0520_c_01L
10. 원상설圓相說
ⵈ 이것은 의리선의 ‘유有·무無의 3구’에 해당한다. (이때의 유有는) 완유頑有140)이기 때문에 상견常見141)이고, (이때의 무無는) 완무頑無142)이기 때문에 단견斷見143)이다. 이들은 그저 신훈만을 말하기 때문에 잘못 착수했다고도 할 수 없고 제대로 착수했다고도 할 수 없다.
∴ 이것은 여래선의 ‘방편(權)과 진실(實)의 3구’에 해당한다. 본분의 1구를 사용하여 삼현三玄을 격파하기 때문에 오직 잘못 착수한 점만 있고 제대로 착수한 점은 없다.
○ 이것은 ‘선종 문하에서 말하는 향상(宗門向上)’에 해당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다만 ‘진공’만 있고, ‘미묘한 바탕(妙體)’에는 (‘향하하는 삼요’가) 전혀 없다(無物). (속이 빈) 하나의 동그라미이기 때문에 오직 잘못 착수한 점만 있고 제대로 착수한 점은 없다. ‘이 순간(今)’과 ‘본분’을 완전히 벗어나 있기 때문에 (위 문장에서) “(‘향하하는 삼요’가) 전혀 없다(無物).”라는 표현을 썼다.
ⵗ 이것은 조사선의 삼요三要144) 가운데 첫 번째의 ‘완전한 기틀이 완전하게 호응하는 것(大機圓應)’이다. 기틀(機)을 떠나서는 어떤 작용(用)도 없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과거·현재·미래의 삼세를 모두 아우른다.
ⵈ 이것은 (조사선의 삼요 가운데) 두 번째의 ‘완전한 작용이 전부 드러나는 것(大用全彰)’이다. 작용을 떠나서는 어떤 기틀도 없기 때문에 공간적으로 시방에 가득하다.
 이것은 (조사선의 삼요 가운데) 세 번째의 ‘기틀과 작용을 병행(機用齊施)’하는 것이다. 기틀과 작용을 일시에 모두 갖추었기 때문에 가로세로 (시공간상으로) 어디에도 걸림이 없으니, 곧 (사람이 많이 다니는) 네거리에서 풍류風流를 싸게 파는 것145)과 같다.
이상의 삼요는 잡화포雜貨鋪146)이기 때문에 죽임(殺)기틀과 살려줌(活)작용 둘 모두에 제대로 착수한 것이다.
 이것은 ‘향상하는 진여’이다. 동그라미는 곧 ‘불변’을 의미하고, ‘진공’을 의미하고, ‘고요함(寂)’을 의미하고, ‘열반’을 의미하고, ‘실상반야’147)를 의미하고, ‘견성’을 의미한다. 동그라미 속의 3점은 ‘수연隨緣’을 의미하고, ‘묘유妙有’를 의미하고, ‘비춤(照)’을 의미하고, ‘보리’를 의미하고, ‘관조반야’148)를 의미하고, ‘성불’을 의미한다.
죽임과 살려줌 둘 모두를 잘못 착수한 것은 ○으로 표시했고, 죽임과 살려줌 둘 모두를 제대로 착수한 것은 로 표시했다.

010_0520_c_01L詳之

010_0520_c_02L

010_0520_c_03L圓相說

010_0520_c_04L
ⵈ 此義理禪有無三句頑有故常見
010_0520_c_05L頑無故斷見以但新熏故非暗非
010_0520_c_06L

010_0520_c_07L
∴ 此如來禪權實三句以本分一句
010_0520_c_08L破三玄故唯暗非明

010_0520_c_09L
○ 此宗門向上但是眞空妙體無物
010_0520_c_10L一圓相故唯暗非明以逈超今本
010_0520_c_11L故云無物

010_0520_c_12L
ⵗ 此祖師禪三要中初大機圓應
010_0520_c_13L機外無用故竪窮三際

010_0520_c_14L
ⵈ 此第二大用全彰以用外無機故
010_0520_c_15L橫徧十方

010_0520_c_16L
 此第三機用齊施以機用一時圓
010_0520_c_17L具故縱橫無碍即十字街頭
010_0520_c_18L賣風流上三要是雜貨鋪故
010_0520_c_19L雙明

010_0520_c_20L
 此向上眞如圓相即不變也
010_0520_c_21L空也寂也涅槃也實相般若
010_0520_c_22L見性也裡頭三點即隨緣
010_0520_c_23L妙有也照也菩提也
010_0520_c_24L照般若也成佛也殺活雙暗 ○

010_0521_a_01L
11. 3성설三性說『금강경오가해』의 부傅 대사149)의 게송150)
의리선의 3구는 유와 무를 따로따로 집착하니, 본래 이것은 ‘전육식인 요별식(前六了別識)’151)이다. 따라서 이것은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152)이니, 허망한 알음알이(妄情)이다.
여래선의 ‘본분 1구句’와 ‘향상’에는 아직도 ‘(자신을) 존귀하게 여기는 알음알이(尊貴解)’의 장애가 남아 있으니, 역시 의식의 알음알이(識情)이며, 이것 또한 변계소집성으로 허망한 알음알이이다.
조사선의 삼요는 제8식153)이 심心 등154)견분見分155)이니, 즉 무명업상無明業相156)과 전상轉相157)을 합하여 지칭한 것임과 경계境界상분相分158)이니, 즉 현상現相159), 이렇게 셋(업상·전상·현상)으로 나누어진 것이니, (이 경우의 제8식은) 즉 진眞과 망妄이 화합한 것이다. 비록 ‘전육식인 요별식’과는 다르지만, 그래도 (제8식에는) 아직 미세한 망념의 흐름이 있기 때문에 ‘의타기성依他起性’160)이다. 그러나 만약 저 ‘향상하는 묘유의 삼요’에 의지하여 이 ‘향하하는 삼요’를 일으키면, 이것은 ‘청정해질 수 있는 요인(淨分)’이 된다. 그러나 만약 전육식에 의지하여 마음과 경계의 자취가 제8식 속에 남게 되면, 이것은 ‘오염될 수 있는 요인(染分)’이 된다.
‘향상하는 한 구멍’도 그리고 ‘본분의 진여’161)도 바로 ‘일법계대총상법문의 바탕’162)이기 때문에 ‘원성圓成묘유실성實性진공163)이다. 이 진여로 ‘향하하는 삼요’를 떨쳐 버리기 때문에 (앞의 ‘원상설’164)에서) “전혀 없다(無物).”라고 표현한 것이다.
12. 3구와 1구가 짝을 이루는 다섯 가지 경우가 다름
첫째, 제3구에서는 유有와 무無와 중中이 3구가 된다. 비록 ‘본분의 1구’가 있기는 하지만 숨겨져서 드러나지 않으므로 배우는 사람들이 전혀 알지 못한다. 비유하면 마치 인형극을 보는 사람이 꼭두각시 인형만 보고, 뒤에서 이것을 조정하는 사람을 못 보는 것과 같다. 그래서 다만 ‘3구’만 있다고 했다.
둘째, 제2구에서는 삼현三玄이 3구가 되고, 본분이 1구가 된다.
셋째, 방편(權)과 진실(實)과 중도(中)가 3구가 되고, ‘선종 문하에서 말하는 향상(宗門向上)’이 1구가 된다.
넷째, 제1구에서는 삼요三要가 3구가 되고, 향상하는 한 구멍이 1구가 된다.
다섯째, 향상하는 진공이 1구가 되고, 묘유의 삼요가 3구가 된다.

010_0521_a_01L殺活雙明

010_0521_a_02L

010_0521_a_03L三性說金剛傳
大士頌

010_0521_a_04L
義理禪三句有無別執元是前六了別
010_0521_a_05L故爲徧計妄情

010_0521_a_06L
如來禪本分一句及向上猶有尊貴解
010_0521_a_07L則亦是識情故又爲徧計妄情

010_0521_a_08L
祖師禪三要是第八識心見分即無明
業相轉相

010_0521_a_09L相分即
現相
三分則眞妄和合雖不如前六
010_0521_a_10L了別猶有微細妄念流注故爲依他起
010_0521_a_11L而若依他向上妙有三要起此向下
010_0521_a_12L三要則爲淨分也若依他前六識心境
010_0521_a_13L影在第八則爲染分也

010_0521_a_14L
向上一竅本分眞如正是一法界大捴
010_0521_a_15L相法門體故爲圓成
實性
以此
010_0521_a_16L眞如離向下三要故無物
三句一句
010_0521_a_17L五重不同

010_0521_a_18L
第三句有無中爲三句雖有本分一
010_0521_a_19L隱而不現故學者冥然不知如觀
010_0521_a_20L伎者但見傀儡未見裡頭人故但有
010_0521_a_21L三句也第二句三玄爲三句本分爲
010_0521_a_22L一句也權實中爲三句宗門向上爲
010_0521_a_23L一句也第一句三要爲三句向上一
010_0521_a_24L竅爲一句也向上眞空爲一句妙有

010_0521_b_01L
이상의 다섯 경우 중에서 첫째 경우에는 3구만 있고, 중간 부분의 세 경우에는 3구를 앞에 두고 1구를 뒤에 두었으며, 다섯째 경우에는 1구를 앞에 두고 3구를 뒤에 두었다.
13. ‘한 화살로 세 관문을 격파’165)하는 다섯 가지 경우
첫째, 반조返照하는 지혜를 한 화살로 삼고, 반조해야 할 대상인 삼제三諦166)를 세 관문으로 삼는다. 진실하게 반조하는 경우라면, (관문이) 셋이니 (화살이) 하나니 하는 견해(解)를 내지 않는다. 그러므로 예컨대 “말로 할 적에는 셋이니 하나니 하는 이름이 있지만, 반조할 때에는 셋이니 하나니 하는 견해를 내지 않는다.”고 말한 경우와도 같고, 또 “진리(諦)의 측면에서는 항상 (진제와 속제) 둘이 있지만, 견해에 있어서는 항상 하나이기 때문이다.”167)라고 한 것과 같다.
둘째, 3구 가운데 1구를 한 화살로 삼는다. 구句들 간에 정해진 순서가 없어서 하나를 들어도 전체가 딸려 오니 모든 상대적인 대립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셋째, 위앙종과 법안종의 두 종파에서는 ‘본분의 한 화살’로 ‘삼현의 관문’을 격파하니, 즉 앞의 ‘유·무의 3구’도 역시 한꺼번에 격파된다.
넷째, 조동종에서는 ‘향상의 한 화살’로 ‘방편과 진실의 세 관문(權實三關)’을 격파한다.
다섯째, 조사선에서는 ‘향상하는 한 구멍’으로 ‘삼요의 관문’을 격파한다.
처음의 둘(첫째와 둘째)은 (범부선과 의리선의) 두 선禪에 해당하며, 가운데의 둘(셋째와 넷째)은 여래선에 해당하며, 맨 마지막의 하나(다섯째)는 조사선에 해당한다. 의리선은 본분을 밝히지 못하였기 때문에 ‘한 화살’ 자체는 없고 다만 ‘3구’만 있다. ‘삼현’과 비교하면 완전히 똑같지만 ‘본분’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에 다만 ‘구句’라고만 하고 ‘현玄’이라는 이름을 붙이지는 않았다.
14. 『금강경』 4구게168)에 배당
(『금강경』 4구게 가운데 첫 구절인) “신체적 특징들(凡所有相)”이라는 구절은 삼현三玄169) 중에서는 ‘작용 속에 있는 현(用中玄)’에 해당하고, 의리선의 ‘유구有句’에 해당한다. 또 “모두 헛된 것이니(皆是虛妄)”라는 구절은 ‘바탕 속에 있는 현(體中玄)’에 해당하고, (의리선의) ‘무구無句’에 해당한다. 또 “신체적 특징이 신체적 특징이 아님을 본다면(若見諸相非相)”이라는 구절은 ‘현 속에 있는 현(玄中玄)’에 해당하며, (의리선의) ‘중구中句’에 해당한다.

010_0521_b_01L三要爲三句也五重中初一但三句
010_0521_b_02L中三先三句後一句後一先一句後
010_0521_b_03L三句也

010_0521_b_04L

010_0521_b_05L一鏃破三關有五重

010_0521_b_06L
以返照之智爲一鏃以所觀三諦
010_0521_b_07L三關若當眞實返照之時不作三一解
010_0521_b_08L故如云說時有三名字在返照之時
010_0521_b_09L作三一解又云於諦常自二於解常自
010_0521_b_10L一故以三句中一句爲一鏃則句句
010_0521_b_11L無定次第擧一全收絕諸對待故
010_0521_b_12L潙法二宗以本分一鏃破三玄關
010_0521_b_13L前有無三句亦一時破曺洞宗
010_0521_b_14L向上一鏃破權實三關祖師禪
010_0521_b_15L向上一竅破三要關初二通於二禪
010_0521_b_16L中二如來禪後一祖師禪義理禪
010_0521_b_17L未明本分故無一鏃但有三句與三
010_0521_b_18L玄正同未與本分相應故但名句
010_0521_b_19L名玄也

010_0521_b_20L

010_0521_b_21L配金剛四句偈

010_0521_b_22L
凡所有相句三玄中用中玄及義理禪
010_0521_b_23L有句也皆是虛妄句體中玄及無句也
010_0521_b_24L若見諸相非相句玄中玄及中句也

010_0521_c_01L또 “바로 여래를 보리라(則見如來)”는 구절은 ‘본분의 1구’에 해당한다. 이렇다면 『금강경』의 이 문구는 다만 (임제의 3구 중에서) 제2구인 여래선만을 규명한 것이다.
또 (『금강경』 4구 게송 중에서) 첫 구는 ‘완전한 작용(大用)’을 밝힌 것이고, 둘째 구는 ‘완전한 기틀(大機)’을 밝힌 것이며, 셋째 구는 (완전한 작용과 완전한 기틀을) 모두 밝힌(齊施) 것이며, 넷째 구는 ‘향상하는 한 구멍’을 밝힌 것이다. (이렇게 『금강경』 4구 게송을 해석하면), 이것은 제1구에 해당하는 조사선의 삼요三要를 밝힌 것이다.
그러므로 백장 회해(749~814) 선사는 이렇게 말했다.
“교학敎學에서 하는 말은 모두 세 구(三句), 즉 초보적인 선善·중간 정도의 선·궁극의 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첫째 구에서는 상대에게 선한 마음을 내도록 하며, 둘째 구에서는 선한 마음조차 부수며, 셋째 구에서 비로소 딱 들어맞는 선이라 하는 것이다. 보살은 보살이 아니니, 그래서 보살이라 하는 것이다. 법은 법이 아니며, 법이 아님도 아니다. 모두 이런 유이다.〕170) 만약 (세 선 중에서) 단지 어느 한 구절만을 말하면 중생들을 지옥에 떨어지게 할 것이고, 세 구를 한꺼번에 설명하면 저들 스스로 지옥으로 들어갈 터이니, 그랬다가는 ‘사바교주 석가모니불께서 목표하셨던 일(敎主事)’171)과는 상관없어지고 만다.”172)
『금강경』이 바로 그런 사례에 해당한다. 다만 (4구 게송의) 제3구와 제4구, 이 두 구가 합쳐져서 ‘궁극의 선’이 되었다. (제3구와 제4구의 어느) 한 구만으로는 비록 ‘막음(遮)’제4구이냐 아니면 ‘관조(照)’제3구이냐는173) 서로 같지 않지만, (제3구와 제4구가) 합쳐져서 하나의 ‘중구中句’가 되기 때문이다.
또 육조 혜능 대사는 (제자들에게) 설법을 하는 방식에 대해서 이렇게 시중示衆했다.
“내가 이제 너희들에게 (설법하는) 법을 말해 주어서 근본 종지를 잃지 않게 하리라. 〔먼저 삼과법문三科法門174)과, 움직임과 작용하매 ‘36종의 대대법待對法’175)을 들 것이니, 나고 듦에 두 끝을 여의고〕176) 일체의 법이 자성을 여의지 않고 있음을 설할지니라. 어떤 사람이 와서 너희에게 법을 묻거든, 모두 쌍으로 대답하되 대대법으로 할 것이니, 오고 감이 서로 인因의 관계이지만위의 3구, 마침내는 그 두 법을 모두 없애어 다시 더 갈 곳이 없게 하라제4구.”177) 이것 또한 이 (『금강경』) 4구 게송의 분명한 뜻을 밝힌 것이다.
또 (『금강경』 4구 게송을 ‘사조용四照用’178)에 견주어서 설명하면), 게송의 첫 구는 ‘선先 작용(用)-후後 관조(照)’이고, 둘째 구는 ‘선先 관조(照)-후後 작용(用)’이고, 셋째 구는 ‘관조와 작용이 동시인 것’이고, 넷째 구는 ‘관조와 작용이 모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춘록莊椿錄』179)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반야를 설명하는 경우, 홑으로 바탕(體)만을 기준하여 설명하는 것은 이름(名)을 떠나고 모양(相)을 끊는 것이며제2구, 홑으로 작용(用)만을 기준하여 설명하는 것은 완전한 작용(大用)을 번거롭게 일으키는 것이며제1구, 바탕과 작용 둘 모두를 기준하여 설명하는 것은 진흙으로 만든 소가 달을 보고 울부짖는 경계이며제3구, 바탕과 작용 둘 모두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운 경계이다제4구.”180)
황룡 오신黃龍悟新181)선사는 이렇게 말했다.
“제1구는 맑은 바람이 밝은 달을 지워 버리는 소식이고, 제2구는 밝은 달이 맑은 바람을 지워 버리는 소식이고, 제3구는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이 그대로 뚜렷한 소식이고, 제4구는 맑은 바람도 밝은 달도 없는 소식이다.”182)
여기에서 뒤의 두 구절의 의미는 삼요三要와 사조용四照用이다. 그러므로 경전183)의 말씀도 조사선을 밝히고 있다는 것이 여기에서도 그 의미가 드러난다.
법안 문익法眼文益184) 선사가 “만약 모든 형상이 형상 아닌 줄을 알게 되면 곧 여래를 보지 못한다.”185)라고 한 것은, (『금강경』의) 경문經文을 뒤집어 말하여 조사선을 밝힌 것인데, 비록 의미는 같지만 경문을 보는 견해는 다르다.

010_0521_c_01L見如來句本分一句也此則經文但
010_0521_c_02L明第二句如來禪也
又初句大用二句
010_0521_c_03L大機三句齊施四句向上一竅也
010_0521_c_04L明第一句祖師禪三要也故百丈禪師
010_0521_c_05L敎語皆是三句相連初中後善
010_0521_c_06L即說一句令人入地獄三句一時說
010_0521_c_07L渠自入地獄不干敎主事如金剛般若
010_0521_c_08L是也但三四二句合爲後善一句雖
010_0521_c_09L

不同合爲一中句故也
又六
010_0521_c_10L祖大師示說法䂓曰吾今敎汝說法
010_0521_c_11L失本宗說一切法莫離自性忽有人
010_0521_c_12L問汝法出語盡雙皆取對法來去相
010_0521_c_13L上三
究竟二法盡除更無去處第四

010_0521_c_14L亦明此四句大意也
又初句先用後照
010_0521_c_15L二句先照後用三句照用同時四句照
010_0521_c_16L用不同時故莊椿錄云般若單約體
010_0521_c_17L則離名絕相
單約用則繁興大用

010_0521_c_18L雙約體用則泥牛吼月
雙拂體用
010_0521_c_19L夏暑冬寒
黃龍新禪師云一淸風拂
010_0521_c_20L明月二明月拂淸風三淸風明月
010_0521_c_21L非淸風非明月此後二意是三要及四
010_0521_c_22L照用故經文亦明祖師禪此亦現意也
010_0521_c_23L若法眼所謂若見諸相非相即不見如來
010_0521_c_24L則反着經文明祖師禪意雖同而見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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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착 보살186)이 이 게송의 과목명으로 「색신色身을 얻으려 하는 주住」187)라고 붙인 뜻이 여기에 와서 더욱 분명해졌다. 이것은 즉 “바로 여래를 보리라”라는 마지막 구절로 ‘견성見性’을 삼은 것이고, “색신을 얻으려 함”이라는 과목으로 ‘성불成佛’을 삼은 것이다. 그런즉, 이 4구 게송 속에는 (의리선·여래선·조사선) 세 종류의 선禪이 완전하게 모두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600부에 달하는 『반야경』과 나아가서는 (부처님이 평생 설하신) 선과 교의 대의大義가 여기에 다 포함되지 않음이 없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일곱 가지 보배로 (보시하는) 공덕과 비교하더라도 4구 게송을 (수지 독송하는) 공덕이 배로 더 값지다.”188)라고 했다. 달마 대사는 “『금강경』과 『능가경』이 바로 우리의 심요心要이다.”189)라고 하였으니, 어찌 믿지 않겠는가! 어찌 믿지 않겠는가!
15. 삼신三身190)을 세 가지 경우에 배당
첫째, 보신報身과 화신化身은 삼요三要에 배당되며, 법신法身은 향상하는 한 구멍(向上一竅)에 배당된다.
둘째, 삼신三身 모두가 삼요에 배당된다. (이렇게 배당할 경우) 법신은 기틀(機)에 배당된다. 왜냐하면 본성은 본래 청정하며, 온갖 법이 청정한 본성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한편 화신은 작용(用)에 배당된다. 왜냐하면 일념이라도 사량하는 것이 있으면 이것을 변화라고 이름 하기 때문이다. 한편 보신은 중도(中)에 배당된다. 선 또는 악의 경계를 만날지라도 선과 악에 물들지 않는데, 이럴 수 있는 까닭은 (이 경우에 있어 보신은 자기의 내부로) 화신을 수용하여 법신으로 귀결시키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는) 향상하는 법신이 하나의 구멍(一竅)이 된다
이상에서 말한 두 가지 의미에 대해서는 『금강경』 「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에 나오는 “이것을 진실한 말로 여길 것이다.”191)라는 구절에 대한 함허涵虛192) 스님의 「설의」193)와, 『육조단경』194)을 보시오.
셋째, 삼신三身을 합하면 보현보살의 ‘완전한 작용(大用)’에 배당되며, 향상하는 법신은 문수보살의 ‘완전한 기틀(大機)’에 배당되며, 삼신과 1신을 합하면 ‘중도(中)’에 배당된다. 한편, 삼신도 아니고 1신도 아니며진공, 삼신이기도 하며 1신이기도 하면묘유 이 경우는 ‘향상하는 비로자나불’에 배당된다. (『금강경』 「제30분. 일합이상분一合理相分」에 나오는) “일합상一合相”195을 해석하는 야보冶父 스님 송에 대한 함허 스님의 「설의」196를 보시오.
16. 오분법신五分法身에 배당『육조단경』에 보인다
첫째, 계향戒香 법신은 기틀(機)에 배당된다. 왜냐하면 자신의 마음속에는 본래 어떤 악도 없기 때문이다.

010_0522_a_01L不同也
無着菩薩以此偈科爲欲得
010_0522_a_02L色身住之意到此益明矣此則以即見
010_0522_a_03L如來爲見性以欲得色身爲成佛也
010_0522_a_04L此四句偈圓具三禪故六百部般若
010_0522_a_05L乃至一代禪敎大意無不包含故云
010_0522_a_06L七寶校功四句倍勝達摩云金剛
010_0522_a_07L楞伽是我心要可不信歟可不信
010_0522_a_08L

010_0522_a_09L

010_0522_a_10L配三身有三重

010_0522_a_11L
報化身爲三要法身爲向上一竅
010_0522_a_12L三身爲三要法身機也以性本淸淨
010_0522_a_13L萬法從生故化身用也一念思量
010_0522_a_14L爲變化故報身中也當善惡境不染
010_0522_a_15L善惡是爲收化身歸法身故向上法身
010_0522_a_16L爲一竅也上二義見金剛經希有分
010_0522_a_17L以此爲實下涵虛說誼及六祖壇經
010_0522_a_18L三身合爲普賢大用向上法身爲文殊
010_0522_a_19L大機三身一身合爲中也非三非一
010_0522_a_20L
亦三亦一
爲向上毘盧也見一合
010_0522_a_21L相下冶父說誼

010_0522_a_22L

010_0522_a_23L配五分法身見壇

010_0522_a_24L
戒香法身機也以自心中本無諸

010_0522_b_01L
둘째, 혜향慧香 법신은 작용(用)에 배당된다. 왜냐하면 자성을 벗어나서 밖으로 닦아야 할 어떤 수행도 없기 때문이다.
셋째, 정향定香 법신은 중도(中)에 배당된다. 왜냐하면 선하거나 악한 어떤 대상을 보더라도 자신의 마음이 어지러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육조단경』과는 달리) 정향과 혜향의 차례를 바꾼 이유는 삼요三要의 순서197)를 따랐기 때문이다.
넷째, 해탈향解脫香 법신은 ‘향상하는 진공’에 배당된다. 왜냐하면 자성이 모든 반연을 벗어나서 선도 악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섯째, 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 법신은 진공 중에 본래 간직된 묘용에 배당된다. 왜냐하면 널리 배우고 많이 들어서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기 때문이다.
이상은 육조 대사께서 하신 「전향참회傳香懺悔」198)이다.
첫째의 (계향·정향·혜향의) 세 법신은 달마 대사가 말한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킴(直指人心)”에 배당되며, 넷째의 (해탈향 법신은) “본성을 보아(見性)”에 배당되며, 다섯째의 (해탈지견향 법신)은 “성불한다(成佛)’에 배당된다. 그러므로 육조 대사가 한 말 이외에 달마 대사가 달리 한 말이 있는 것이 아니니, 이것은 마치 이 병에서 저 병으로 물을 옮겨 붓는 것과 같다. (담는 그릇만 다를 뿐, 내용물은 동일하다.)
이 오분향 법신은 사람마다 자신의 자성 가운데 본래부터 간직한 면목이다. 그리고 또 조사들께서 친절하게 가르쳐 주시는 이런 ‘바깥 연(外緣)’을 만나면, ‘(본래의) 인因’199)과 ‘(바깥) 연緣’이 서로 합하기 때문에 틀림없이 발심될 것이다.
그러니 각자 면밀하게 회광반조廻光返照200)하기를 마치 자신의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이 (서둘러서), (자신 속에 본래 간직된) 자성을 훈습하여 일으켜야201) 하리니, 마땅히 그래야 되지 않겠는가? 세월이여! 세월이여!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된다.
17. 사홍서원四弘誓願에 배당『육조단경』202)에 보인다
첫째,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서원은 곧 악惡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마음속에 있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등 일체의 선하지 못한 마음이 바로 자기 마음속에 있는 중생으로서 이것이 삼악도三惡道203)에 떨어지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 마음속에 있는 삼독심三毒心204)을 제도하겠다고 서원하는 것이다.
둘째, 번뇌를 끊겠다는 서원은 곧 선善을 행하려는 생각조차도 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마음을 먹으면) 마음이 ‘삿된 견해’205)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선을 행하려는 생각을 하면) 비록 악업은 짓지 않겠지만 유루의 선善206)에 집착한다. 교학敎學에서 말하는 오계五戒207)·십선十善208)·사성제四聖諦209)·십이인연十二因緣210)·육바라밀六波羅蜜211) 등 온갖 보살행, 나아가서는 선종禪宗에서 말하는

010_0522_b_01L惡故慧香法身用也以不離自性
010_0522_b_02L外修諸行故定香法身中也以覩
010_0522_b_03L善惡境自心不亂故定慧換次者
010_0522_b_04L順三要次第故解脫香法身向上眞
010_0522_b_05L空也以自性解脫攀緣不思善惡故
010_0522_b_06L解脫知見香法身眞空中本具妙用
010_0522_b_07L以廣學多聞自利利他故此是六
010_0522_b_08L祖大師傳香懺悔也
初三身即達摩所
010_0522_b_09L直指人心也四是見性也五是成佛
010_0522_b_10L是以六祖底外無別達摩底
010_0522_b_11L爲如瓶注瓶也此五香法身是人人
010_0522_b_12L自性中本具底面目而又遇此祖師親
010_0522_b_13L切直示之外緣則因緣合故必有所
010_0522_b_14L各自密密廻光返照如救頭燃
010_0522_b_15L發自性不亦宜乎時乎時乎不可
010_0522_b_16L失也

010_0522_b_17L

010_0522_b_18L配四弘願見壇

010_0522_b_19L
度衆生願即不思惡也以自心中
010_0522_b_20L嗔癡等一切不善心是自心衆生是三
010_0522_b_21L惡途之因故願度自心中三毒心也
010_0522_b_22L斷煩惱願即不思善也以心着邪見故
010_0522_b_23L雖不造惡業又着有漏善敎中五戒十
010_0522_b_24L善四諦十二因緣六度萬行乃至禪

010_0522_c_01L(의리선·여래선·조사선 등) 삼종선三種禪과 세 종류의 3구句 등, 일체의 모든 선법善法을 듣는 대로 보는 대로 하나하나 모두 탐내고 집착하며 쉬지 않고 부지런히 다 실천하려 한다면, 비록 깊고 얕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하나같이 모두 (진여 자성을) ‘새로 훈습하여 조성하려는 짓’이며 (진여 자성을 타인으로부터) ‘전수 받으려는 짓거리’212)에 속하며, 타니대수拖泥帶水213)하는 꼴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마다에게 제 몫으로 주어진 청정한 자성’의 입장에서 관찰해 본다면, (이런 수행들은 모두) 부질없이 사려분별하는 번뇌 망상이 아닌 것이 없다. 그러므로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밖을 향해서 무언가를) 치달려 구하려는 번뇌 망상을 끊겠다고 서원해야 한다.
셋째, 법문을 배우겠다고 하는 서원은 본성 체험하기를 서원하는 것이다. 바깥을 향하여 선이나 악 따위를 구하려는 것은 이미 생각조차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신의 본성을 향하여 스스로 무념無念의 지혜214)를 반드시 일으켜서215) 자기의 본성을 관조216)하되 한순간도 우매해지지 않으면 마침내는 자신의 본성을 몸소 체험하여 항상 잡념이 없고 형상이 없는 올바른 법을 항상 하게 될 것이니, 이것을 참다운 배움(眞學)이라고 한다.
넷째, 불佛과 도道를 완성하겠다고 하는 서원은 곧 부처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것은 진공 법문 가운데 본래 갖추어져 있는 묘용이며, (임제 선사가 말한 3구인) 참된 부처이며, 참된 법이며, 참된 도이다. 맨 위와 맨 아래만 거론하였지만 중간을 포괄하려 했기 때문에, 그저 ‘불佛과 도道’라고만 했다.
이 사홍서원은 곧 본분의 납자가 날마다 행하는 몸가짐 속에서 항상 자신의 본성을 여의지 않은 무념無念이며, 또 그것은 형상을 여읜 행원行願이다. 그러므로 육조 대사는 「임종게」217)에서 이렇게 말했다.
차분히 의연하여 선함도 닦지 않고두 번째 서원
당당하여 악 또한 짓지 않으며첫 번째 서원
그윽하여 보고 들음도 모두 끊으며세 번째 서원
초연히 마음에 집착 없도다네 번째 서원
이것이 달마 대사가 전한 ‘아무것도 새겨진 것이 없는 도장(無文印)’이다.
18. 좌선과 선정 등 네 글자에 배당『육조단경』218)에 보인다
(좌선坐禪에서의) ‘좌坐’는 ‘진공眞空’을 뜻한다. 바깥 대상 경계를 보더라도 망념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자성이 흔들리지 않는 것을 ‘좌’라고 한다. ‘선禪’이란 ‘묘유妙有’를 뜻한다. 망념이 없는 지혜로써 흔들리지 않는 자성을 보기 때문에 ‘선’이라고 한다. 이것은, 즉 진공인 당체가 흔들리지 않는 것이 ‘좌’이고, 지혜로 관조하는 것이 ‘선’이라는 뜻이다.

010_0522_c_01L三種禪三三句等一切善法隨聞隨
010_0522_c_02L一一貪着馳求不歇雖深淺不同
010_0522_c_03L皆是新熏傳授邊拖泥帶水事故自本
010_0522_c_04L分淸淨自性上觀之則無非虛妄思想
010_0522_c_05L之煩惱妄想故願斷心中馳求不歇之
010_0522_c_06L煩惱妄想心也學法門願即願見性
010_0522_c_07L旣不思向外馳求之善惡故還向
010_0522_c_08L自性中直須自起無念智慧觀照自性
010_0522_c_09L念念不昧則畢竟親見自性常行無念
010_0522_c_10L無相正法是名眞學也成佛道願
010_0522_c_11L即願成佛也此是眞空法門中本具妙
010_0522_c_12L是爲眞佛眞法眞道而擧上下該中
010_0522_c_13L故但云佛道也此四弘願即本分
010_0522_c_14L衲僧日用四威儀中不離自性之無念
010_0522_c_15L離相行願故六祖臨終偈云兀兀不
010_0522_c_16L修善
騰騰不造惡
寂寂斷見聞
010_0522_c_17L
蕩蕩心無着
此是達摩所傳無文
010_0522_c_18L印也

010_0522_c_19L

010_0522_c_20L配坐禪禪定四字見壇

010_0522_c_21L
坐者眞空也以雖見外境而不起念
010_0522_c_22L自性不動名爲坐也禪者妙有也
010_0522_c_23L以無念智能見不動自性故名爲禪也
010_0522_c_24L此則眞空當體不動爲坐以智觀照

010_0523_a_01L
선정禪定에서의 ‘선禪’은 ‘묘유’의 뜻이다. 왜냐하면 형상(相)219)에 상즉해서 하기도 하고 형상(相)을 떠나서 하기도 하기 때문에 이름 하여 ‘선’이라고 한다. ‘정定’은 ‘진공’을 뜻한다. 왜냐하면 이미 외적인 ‘형상’을 떨쳐 버렸으니 곧 내적인 마음도 흔들리지 않기 때문에 이름 하여 ‘정’이라고 한다.
그러니, 즉 좌선坐禪이란 진공을 말미암아 묘유를 얻는 것이기 때문에, ‘좌’를 떠나 달리 ‘선’이 없다. 한편, 선정禪定이란 묘유를 말미암아 진공이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선’ 밖에 달리 ‘정’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상과 같이 공空과 유有를 둘로 보지 않는 수행이야말로, 곧 납승衲僧220)이 실천해야 할 자성을 여의지 않는 무념삼매無念三昧221)이다
19. 문자를 세우지 않고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켜 본성을 보아 성불한다는 달마 대사의 말씀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不立文字)”는 구절은 (임제삼구 중) 제2구의 ‘본분’ 및 ‘향상’에 배당된다. 이 삼현三玄과 제3구로 문자를 세우고 형상에 집착하여 (밖으로) 내달려 구하기 때문에,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는 것으로써 바깥을 향하여 마구 쫓아가며 ‘알음알이에 의한 논리로 따지는 사견(義理邪見)’을 배척했다.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킨다.(直指人心)”는 구절은 제1구의 ‘향하하는 삼요三要’에 배당된다. 왜냐하면 이 삼요는 제8식 장식藏識이 (업상·전상·현상으로) 3분分된 것222)에 배당되는데, 이것은 곧 모든 사람마다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이라고 했다.
이미 (중생의 마음이) 진眞과 망妄이 화합된 것이라면, (중생은) 범부도 될 수 있고 성인도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달마 조사는 노파심이 간절하여 중국으로 건너오자마자, 중생들이 모두 자기 마음에 간직된 자성은 찾지 않고 바깥으로 미친 듯이 치달리며 ‘알음알이에 의한 논리(義理)’223)와 ‘문자에 의한 알음알이(知解)’만을 공연히 숭상함을 보고는 중생들의 마음속에 ‘(참)마음’은 본래 청정하고 ‘허망한 마음’은 본래 공하다는 이치를 곧바로 가리켜 허망한 마음을 열어젖혀 제거하고 참마음(眞心)을 가리켜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킨다.”라고 한 것이다.
“본성을 본다.(見性)”라는 구절은 ‘향상하는 진공’에 배당된다. 이미 망념은 공하고 마음은 청정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주체(能)와 객체(所), 마음(心)견분見分과 경계(境)상분相分가 당장에 모두 사라져서, ‘향상하는 진공’ 그 자체(當體)가 눈앞에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러므로 “본성을 본다.”라고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열반이다.

010_0523_a_01L禪也禪定者禪是妙有以即相離相
010_0523_a_02L故名禪也定是眞空以旣離外相
010_0523_a_03L內心不動故名定也然則坐禪者
010_0523_a_04L眞空而得妙有故坐外無別禪也禪定
010_0523_a_05L由妙有而眞空現故禪外無別定也
010_0523_a_06L此空有無二之行即是衲僧不離自性
010_0523_a_07L之無念三昧也

010_0523_a_08L

010_0523_a_09L達摩不立文字直指人心見性成佛
010_0523_a_10L

010_0523_a_11L
不立文字者第二句本分及向上也
010_0523_a_12L其三玄及第三句建立文字着相馳求
010_0523_a_13L故不立文字斥其向外亂走之義理邪
010_0523_a_14L見也直指人心者第一句向下三要也
010_0523_a_15L以此三要是第八藏識三分則是人人
010_0523_a_16L本具底故名曰人心旣眞妄和合
010_0523_a_17L可以爲凡可以爲聖故祖師老婆心切
010_0523_a_18L初來中華見諸衆生不求自心向外
010_0523_a_19L狂走虛尙義理文字知解故直指衆生
010_0523_a_20L心中心本淨妄本空之義開除妄心
010_0523_a_21L指示眞心故云直指人心也見性者
010_0523_a_22L向上眞空也旣悟妄空心淨則能所心
010_0523_a_23L

當下俱泯向上眞空當體
010_0523_a_24L露面前故云見性也是爲涅槃

010_0523_b_01L그러므로 달마 대사는 “밖으로는 대상 경계로 향하는 반연을 쉬고경계가 사라짐, 안으로는 마음의 헐떡거림이 없어서마음이 사라짐, 마음이 마치 장벽처럼 되어야자성을 봄 도에 들어갈 수 있다성불을 함.”224)라고 했다. 또, 육조 대사는 “마음이 주체와 객체로 쪼개지면 이미 반야가 아니고, 마음에 주체와 객체로 쪼개짐이 없어야 반야라고 한다.”225)라고 하였다.
“성불한다.(成佛)”는 구절은 ‘향상의 묘유’에 배당된다. 비록 자성을 보았더라도 수행을 통해서 증득하지 않으면, 어느 한 사람도 절대로 진여 자성을 발휘하여 본래의 근원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그러므로 철저히 공하여 어떤 소식도 통하지 못하는 그 자리에서, 몸을 뒤집어 숨을 통하게 하여 하염없는 수행의 꽃을 피워야만, 마침내 ‘삼신三身’을 원만하게 갖춘 부처를 완벽하게 완성한다. 그러므로 “성불한다.”라고 했으니, 이것이 곧 깨달음이다.
20. 달마의 삼처전심三處傳心
1) 제1처226)
달마 대사가 물었다.
“모든 반연을 끊었는가?”
혜가가 대답하였다.
“이미 끊었습니다.”
달마 대사가 말했다.
“단멸斷滅의 상태227)에 빠지지는 않았는가?”
혜가가 말했다.
“단멸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조사가 다시 물었다. “모든 반연을 이미 끊었는데 어찌하여 단멸에 떨
어지지 않는가?”〕228)
혜가가 대답했다.
“밝고 밝아(明明) 어둡지 않고, 또렷또렷하여(了了) ‘변함없는 지각작용(常知)’229)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로는 미치지 못합니다.”230)
『염송설화』에는230 이렇게 말했다. “모든 반연이 이미 끊어진 때에 한 법도 정情긴 세월(古)과 이 순간(今)을 완전히 초월함에 남길 것이 없었다. 밝고 밝아(明明) 어둡지 않고 또렷또렷하여(了了) 변함없는 지각작용(常知)이 있다면,231) 본분사本分事선종 문하의 향상와 체體진공가 있음을 알았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이다. 〔모든 반연이 이미 끊어지고서도 혹은 단멸에 떨어지는 이가 있을지 모르나 지금 2조는 그렇지 않아서 밝고 밝아 어둡지 않고 또렷또렷하여 변함없는 지각작용(常知)이 있으니〕232) 깨달음도 닦음도 모두 없어져서 여래선을 증득한 것이다.”233)
2) 제2처
“부처님의 법인法印을 들려주십시오.”
대사가 대답하였다.
“부처님의 법인은 남에게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라.”
혜가가 다시 물었다.
“저의 마음이 편안치 않으니, 스님께서 편안하게 해 주소서.”
대사가 대답하였다.
“마음을 가져오너라. 편안케 해 주리라.”
혜가가 대답하였다.
“마음을 찾아도 끝내 찾을 수 없습니다.”
달마가 말하였다.
“그대의 마음을 벌써 편안하게(安心) 해 주었느니라.”234)
혜가가 절을 하니, 달마가 물었다.
“너는 어떤 도리를 보았기에 절을 하느냐?”
혜가가 대답하기를,
“밝고 밝아 어둡지 않고, 또렷또렷하여 ‘변함없는 지각작용’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달마가 이르기를,
“이것이 바로 부처님들께서 전하신 심체心體이니, 너는 잘 보호하여 지녀라.” 하였다.
『염송설화』에는 이렇게 말했다. “〔만일 중근기와 하근기라면 이 경지에 주저앉아 모든 일이 끝났다 하겠지만 2조는 그렇지 않아서 또 부처님의 법인法印을 물었고, 그로 인해〕235) 당장에 마음이 편안함을 얻어서 부처님들께서 전하신 심체를 깨달아 얻었다. 그리하여 전에 얻었던 견해가 더욱 맑아져서, ‘밝고 밝아 어둡지 않고, 또렷또렷하여 변함없는 지각작용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한 것이다.

010_0523_b_01L外息諸緣
內心無喘
心如墻
010_0523_b_02L
可以入道
六祖云心有能所
010_0523_b_03L即非般若心無能所是名般若
010_0523_b_04L佛者向上妙有也雖見自性若不
010_0523_b_05L修證更無一人發眞歸源故向此眞
010_0523_b_06L空沒通消息處轉身通氣敷萬行華
010_0523_b_07L圓成三身圓滿佛故云成佛也是爲
010_0523_b_08L菩提

010_0523_b_09L

010_0523_b_10L達摩三處傳心

010_0523_b_11L
祖問諸緣已斷否可曰已斷祖曰
010_0523_b_12L落斷滅否可曰不落斷滅以明明不昧
010_0523_b_13L了了常知故言之不可及說話云
010_0523_b_14L緣已斷時無一法可當情逈超
今古
了了常
010_0523_b_15L知有本分事宗門
向上
與體
一般也
010_0523_b_16L修斯亡故得如來禪

010_0523_b_17L
可問諸佛法印可得聞乎祖曰諸佛
010_0523_b_18L法印非從人得可曰我心未寧乞師安
010_0523_b_19L祖曰將心來與汝安可曰覔心了
010_0523_b_20L不可得祖曰與汝安心竟可禮拜
010_0523_b_21L汝見什麽道理禮拜可曰明明不昧
010_0523_b_22L了了常知祖曰此是諸佛所傳心體
010_0523_b_23L善護持說話云當下安心悟得諸佛所
010_0523_b_24L傳心體前解轉明曰明明不昧了了

010_0523_c_01L마침내 조사선祖師禪을 깨달아 얻고 그 인허印許를 받기까지에 이르렀다. 〔이것이 2조의 2조다운 모습이다.〕”236)
3) 제3처237)
달마 대사가 어느 날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시기가 가까워졌다. 그대들은 제각기 얻은 바를 말해 보라.”
제자들 모두가 저마다 얻은 바를 아뢰었다.238) 마지막으로 혜가가 나와서 절을 세 번 하고묘유, 제자리에 서 있었다진공. 조사가 말하였다.
“너는 나의 골수骨髓를 얻었다.”
그러고는 가사와 법을 전해 주었다.
『염송설화』에는 이렇게 말했다. “종문 가운데 이류(宗門中異類)239)이니, 이는 ‘방에 든(入室)’240) 것이다.”241)
21. 선실禪室에서 하는 삼배에 대하여
시방 세계에 상주하시는 ‘부처님’을 예경하는 것은 완전한 기틀(大機)에 귀의하는 것이며, 시방 세계에 상주하는 ‘달마(dharma : 法)’에 예경하는 것은 완전한 작용(大用)에 귀의하는 것이며, 시방 세계에 상주하는 ‘승가’에 예경하는 것은 기틀(機)과 작용(用) 둘 모두에 귀의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자성삼보自性三寶242)에 귀의하는 것이므로 ‘향상하는 묘유의 삼요’라 한다. 즉, ‘가섭 존자가 부처님의 발에 두 번 절한 것’243)이나, ‘혜가가 달마 대사 앞으로 나와서 세 번 절한 것’244)이 모범 사례이다.
또 이 삼보는 (모든 사람의) 자성 위에 있는 묘유이다. 그러므로 셋(불·법·승)은 바탕(體)을 달리하는 것이 아니니, 즉 이것은 곧 ‘진공의 향성(眞空向性)’245)이다. 또 아침저녁으로 올리는 예경은 바로 불자佛子가 일용으로 평상시에 늘 하는 일이니, 그러므로 이것은 바로 ‘비로자나불의 향상(毘盧向上)’이다.
본분 납승으로서 예경을 하지 않는다면 말할 것이 없지만, 예경을 한다면 반드시 제 마음의 삼보에 예경해야 한다. 어찌 다른 부처님께 예경하여 스스로 삿된 마구니나 외도가 되겠는가? 그러므로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는 사람은 바로 마구니의 권속이다.”246)라고 하였다. (이 대목의 첫 문단에서) 또 삼보에 대하여 모두 “시방 세계에작용(用) 상주하시는기틀(機)”이라고 한 이유는 삼요 속에 각각 삼요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기틀이고, (부처님이) 시방 세계에 두루 하신다는 것은 작용이고, (부처님이) 과거·현재·미래의 삼세에 상주하신다는 것은 기틀이다. 그런즉 백장 선사는 완전한 기틀을 얻어서 달리 일삼을 것이 전혀 없었다. 달마(dharma : 法)는 작용이니, 또한 삼요를 갖추었다. 그런즉 황벽 선사는 ‘완전한 작용’을 얻었기 때문에 일삼을 것이 전혀 없었다.
그러므로 이 삼배야말로 바로 임제종의 종지宗旨요, 활인검의 소식이라 하겠다. 그런 까닭에 달마 조사는 (삼배를) 선가에서 날마다 쓰는 일상 규칙으로 삼아,

010_0523_c_01L常知遂乃會得祖師禪得他印許

010_0523_c_02L
祖一日命門人曰時將至矣盍各言
010_0523_c_03L所得乎諸人各呈所得最後慧可出禮
010_0523_c_04L三拜
依位而立
祖曰汝得吾髓
010_0523_c_05L傳衣付法說話云此宗門異類此則
010_0523_c_06L入室也

010_0523_c_07L

010_0523_c_08L禪室三拜說

010_0523_c_09L
南無十方常住佛歸依大機也南無十
010_0523_c_10L方常住法歸依大用也南無十方常住
010_0523_c_11L歸依齊施也此乃歸依自性三寶
010_0523_c_12L故爲向上妙有三要即迦葉二禮佛足
010_0523_c_13L慧可出禮三拜之榜㨾也又此三寶
010_0523_c_14L自性上妙有故三無別體即是眞空向 [3]
010_0523_c_15L且朝夕禮敬是佛子日用平常事故
010_0523_c_16L正是毘盧向上也本分衲僧不敬則已
010_0523_c_17L敬則須敬自心三寶何敬他佛自作邪
010_0523_c_18L魔外道也故云心外覔佛是魔眷屬
010_0523_c_19L又三寶皆云十方常住以三要
010_0523_c_20L各具三要佛是機也而橫徧十方
010_0523_c_21L用也常住三世機也故百丈得大機
010_0523_c_22L更無餘事法是用也而亦具三要
010_0523_c_23L黃蘗得大用更無餘事故此三拜
010_0523_c_24L是臨濟宗旨活人劒消息故祖師以爲

010_0524_a_01L요컨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절할 때마다247) 부처님과 조사들께서 실천했던 것을 터득하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그러니 이 삼배는 곧 ‘묘유의 3구’이며, 격벽擊壁248)의 한 소리는 곧 ‘진공의 1구’이다. 이상은 ‘설화문說話門’249)의 측면에서 변별한 것이다.
그런데 만약 ‘간화문看話門’의 측면에서 말하면, 절을 할 때마다 천천히 몸을 움직이고 정신을 바짝 차려 회광반조廻光返照하되 “이와 같이 ‘몸을 굽혔다 펴고(折旋)’,250) 고개를 숙였다 우러르고, 창화唱和251)하면서 예배하는 이놈은 무엇인가?” 하고 생각하라.
이와 같이 절할 때마다 살피고 살펴 온 힘을 다해 참구하되, 간절하게간곡하게 비는 모습 정성을 다하여받들어 지키는 모양 절대로 털끝만큼도 (마음이 밖으로) 치달리지 않도록 하라. 이어 예배를 마치고 나서도 바른 생각이 굳게 뭉쳐 한순간도 어둡지 않으면, 점점 한 덩어리가 되어(成片)252) 힘이 덜어짐(省力)253)을 점차적으로 알게 될 것이니, 바로 이것이 (수행에) 힘을 얻는 곳(得力處)이다.
이상의 설화문說話門과 간화문看話門의 두 법문은 마치 사람의 두 눈과 같아서, 어느 한쪽이라도 없어서는 안 된다. 설화문으로써 부처님 법을 환하게 알고 (선문의) 종지宗旨를 능숙하게 잘하며, 간화문으로써 간절한 마음으로 참구하고 참마음(眞心)으로 실천하여, 옛 선지식들께서 몸소 체험한 경지에 직접 도달해야만 한다.254)
22. 간당看堂틀255)을 열 번 치는 것에 대하여256)
처음에 3통統을 치는 것은 의리선이니 ‘유有·무無·중中을 나누는 3구’257)이며, 중간에 (각각) 1통씩 치는 것은 여래선이니 ‘본분의 1구’이며, 맨 나중에 3통을 치는 것은 조사선이니 ‘향하하는 삼요’이다. 그러므로 (내가 「간당론」에서) “한 개의 화살로중간에 각각 1통씩 치는 것 세 관문을 격파하니처음에 3통 치는 것 화살이 날아간 곳이 분명하다맨 나중에 3통 치는 것.”258)라고 했던 것이다.
장군죽비 한 번 치는 소리를 신호로 벽을 향하여 앉는 것은 ‘향상하는 진공’이고, 방선放禪을 알리는 3통은 ‘향상하는 묘유’이니, 이것이 선가禪家에서 행하는 묵언작법默言作法259)인 일행삼매一行三昧260)이다.
예로부터 전해 오는 말 중에 “10통으로써 십악을 물리친다.”261)는 말은 종지를 잃은 듯하다.262)

010_0524_a_01L禪家日用常䂓要使諸人拜來拜去
010_0524_a_02L庶幾透得佛祖行履處此三拜即妙有
010_0524_a_03L三句擊壁一聲即眞空一句也上約
010_0524_a_04L說話門辨

010_0524_a_05L
若約看話門說者每於拜時徐徐動身
010_0524_a_06L抖擻精神回光返照能如是折旋俯仰
010_0524_a_07L唱和禮拜者是什麽物如是拜來拜去
010_0524_a_08L照來照去盡力叅究切切恳禱
拳拳奉持

010_0524_a_09L絕無絲毫走作乃至禮畢正念堅凝
010_0524_a_10L念念不昧則稍稍成片漸覺省力
010_0524_a_11L便是得力處也此說看二門
010_0524_a_12L人目是闕一不可以說話門洞曉
010_0524_a_13L佛法圓善宗旨以看話門切心叅
010_0524_a_14L眞知實踐親到古人親證處
010_0524_a_15L

010_0524_a_16L

010_0524_a_17L看當十統說

010_0524_a_18L
初三統即義理禪有無中三句也
010_0524_a_19L一統即如來禪本分一句也後三
010_0524_a_20L即祖師禪向下三要也故云一鏃

010_0524_a_21L破三關
分明箭後路
將軍竹篦一
010_0524_a_22L向壁而坐者向上眞空放禪三
010_0524_a_23L向上妙有也此是禪家默言作法之
010_0524_a_24L一行三昧也古以十統托破十惡之

010_0524_b_01L『작법귀감』263)에 자세히 밝힌 바와 같으니, 필요한 사람은 거기로 가서 검토하시오.
23. 훽264)
내가 예전에는 ‘喝’의 소릿값(音價)을 몰랐었고, 그렇다고 물어볼 만한 곳도 딱히 없어서 마음이 늘 답답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손상된 『어록』 하나를 얻었는데, (그 책 속에 끼어 있는) 작은 쪽지에 이 ‘훽喝’의 소릿값이 씌어 있었다. 마치 어둠 속에서 등불을 만난 듯하여, 특별히 여기에 기록하여 전한다. 그런데 이 ‘네 종류의 喝’265)마다 그 소릿값이 아마도 틀림없이 다를 터인데, 고증할 방법이 없으니, 참으로 안타깝다.
24. 『구자무불성화간병론狗子無佛性話揀病論』266)의 과목을 나누고 해설267)
≺과도科圖≻
1. 화두 거량하기
2. 병통 골라내기
1) ‘구멍 없는 철퇴’를 밝힘
2) 10종 병통을 널리 분별
(1) 병통 골라내기
≺1≻ 10종 병통 골라내기
① ‘유무有無의 무無’라는 병통 골라내기
가) ‘유무의 3구’로 이해하는 병통을 논파
나) 어린아이는 자성이 없다는 병통을 또다시 논파
다) 향상의 경지는 오염되지 않는다는 병통도 논파
② ‘진정한 무(眞無)의 무無’라는 병통 골라내기
③ 현묘한 도리道理가 있다는 병통 골라내기
④ 이리저리 따져서 궁리하는 병통 골라내기
⑤ 눈썹을 움직이거나 눈을 깜박거리는 것으로 이해하려는 병통 골라내기
⑥ ‘말로 따지는 방법(語路)’ 속에서 ‘살 궁리(活計)’를 찾아야 한다는 병통 골라내기
⑦ 아무것도 일삼지 말아야 한다는 병통 골라내기
⑧ 화두 드는 자체로 수긍하려는 병통 골라내기
⑨ 문자를 끌어들여 체험하려는 병통 골라내기
⑩ 미혹한 채로 깨칠 날을 기다리는 병통 골라내기
≺2≻ 열 가지 병통을 묶어서 넷으로 요약
≺3≻ 네 가지 병통을 묶어서 둘로 요약
(2) 병통 골라내기를 맺음
3) 결론 : ‘이것이 무엇인가’만을 오직 참구할 것
1. 화두 거량하기268)
『구자무불성화간병론』의 본문을 둘로 나누어 해설하겠다. 첫째는 「1. 화두 거량하기」 문단이고, (둘째는 「2. 병통 골라내기」 문단이다.)
천동산天童山 굉지 정각宏智正覺269) 선사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話頭)를 거량(擧)하였다.270)
조주 종심趙州從諗271) 선사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개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272)
선사가 말하였다.
“있느니라(有).”
스님이 다시 물었다.
“있다면 어째서 가죽 부대 속에 들어 있습니까?”
선사가 말했다.
“그가 알면서도 짐짓 범했기 때문이니라.”
(또 다른 때에) 어떤 스님이 조주 선사에게 물었다.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선사가 말하였다.
“없느니라(無).”
스님이 다시 물었다.
“일체 중생이 모두가 불성이 있다 했거늘 개는 어째서 없다 하십니까?”
선사가 말했다.
“그에게는 업식業識이 있기 때문이지!”273)

해설
“천동天童”은 산 이름이니, 곧 정각 선사가 상당하여 설법을 한 곳이다.
“거량하다(擧)”라는 글자는, (맨 처음의 “조주 종심 선사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에서부터) “업식業識이 있기 때문이지.”라고 한 말까지를 풀이한다.
“조주”는 관음원에 거주했던 종심從諗 선사인데 사라왕 여래의 후신이며, 조사의 문중에 세 번 들어갔다고 한다.
“불성이 있느니라.”라고 한 것은 완전한 작용(大用)이고, “불성이 없느니라.”라고 한 것은 완전한 기틀(大機)이니, 즉 이는 곧 조사선의 ‘향하하는 삼요’를 보여준 것이다. 비록 “있느니라.” 또는 “없느니라.”라고 대답했지만 (이 화두의) 의미는 여기에만 국한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한 ‘향상’의 의미를 갖추고 있으니, 즉 진공묘유眞空妙有하고, 무이원융無二圓融한 ‘구멍 없는 철퇴(無孔鐵鎚)’를 모든 사람들의 면전에 갑자기 내놓은 것이다.
“(있다면 어째서) 가죽 부대 속에 들어 있습니까?”라는 말과, “(일체 중생이 모두가 불성이 있다 했거늘) 개는 어째서 없다 하십니까?”라는 말은, 이러저런 대구를 모두 못하게 했다.

010_0524_b_01L似失宗旨廣如作法龜鑑須者徃
010_0524_b_02L

010_0524_b_03L

予曾未知喝聲形容亦無可問處
010_0524_b_04L心常慨然忽得破傷語錄於小片中
010_0524_b_05L有此喝聲如暗得燈特書以傳
010_0524_b_06L四喝形容想必不同無從可考
010_0524_b_07L

010_0524_b_08L

010_0524_b_09L無字揀病論科解

010_0524_b_10L
文分爲二
擧話
010_0524_b_11L
天童擧僧問趙州狗子還有佛性也無
010_0524_b_12L州云僧云爲什麽撞人 [4] 這箇皮帒
010_0524_b_13L州云他知而故犯又僧問趙州狗子還
010_0524_b_14L有佛性也無州云僧云一切衆生
010_0524_b_15L皆有佛性爲什麽狗子却無州云
010_0524_b_16L他有業識在

010_0524_b_17L
解曰天童山名即正覺禪師上堂
010_0524_b_18L擧字釋於識在下趙州觀音院
010_0524_b_19L從諗禪師娑羅王如來後身三入祖
010_0524_b_20L門中有佛性大用無佛性大機
010_0524_b_21L即示祖師禪向下三要也雖云有無
010_0524_b_22L意不在此限故亦具向上則眞空妙
010_0524_b_23L無二圓融之無孔鐵鎚頓放諸人
010_0524_b_24L面前撞入皮帒爲什麽却無皆失

010_0524_c_01L“그가 알면서도 짐짓 범했기 때문이니라.”라는 말과, “그에게는 업식業識이 있기 때문이지.”라는 말은, 자취에 미혹되어 올가미에 얽매인 꼴이다.
(불성을) 수긍하지 않았기 때문에274) 다만 “있느니라.” 또는 “없느니라.”라는 말로 잘못 이해했기 때문에, ‘자기 집(自家所)’275)에 간직된 줄을 모르고, 자취만을 보고 올가미에 얽혀 들어, 도리어 “있느니라.”와 “없느니라.”라고 한 (조주 선사의) 대답을 좇아 대답했다. 그래서 이를 두고 ‘자취에 홀린 수수께끼(迷蹤訣)’라고 하니, 이것은 선사들이 대답하기 어려운 미묘한 수수께끼이다.
2. 병통 골라내기
둘째는 「2. 병통 골라내기」이다. 여기에 세 문단이 있는데, 첫째는 「1) ‘구멍 없는 철퇴’276)를 밝힘」이다.
1) ‘구멍 없는 철퇴’를 밝힘
천동 정각 선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277)

조주는 “있다(有).”고도 하고
조주는 “없다(無).”고도 하니
개의 불성을
천하 사람 분별(分踈)하네.

얼굴 붉히는 것이 말 곧은 것만 못하니,
마음이 곧거든(心眞) 말 거친 것 허물 말라.
7백 갑자를 산 늙은 선사가
나귀 똥으로 만나는 사람마다 (그 사람의) 밝은 눈을 바꿔 버리네.278)

해설
“분별(分踈)하네.”라는 말은 ‘(언어로) 설명한다(分別)’는 말과 같다.
“마음이 곧거든(心眞)”이라고 한 것은 이 말을 하는 의도가 ‘구멍 없는 철퇴’에 있기 때문에 “거친 것 허물 말라.”고 했다. (내가 앞 문단에서) ‘자취에 홀린 수수께끼’라고 한 이유는 그것이 마치 희롱하는 말과 닮았기 때문이다.
“나귀 똥”은 전혀 쓸모없고 매우 천한 물건이기 때문에, 그래서 전혀 쓸모없는 ‘구멍 없는 철퇴’에 비유했다. 10종의 병통(錯解)279)이 비록 ‘말후구末後句’의 소식이기는 하지만, 모두 ‘표층마음(意根)’280)이 요동하는 알음알이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구멍 없는 철퇴(無孔鎚)’로 (그것들을) 하나하나 모두 바꾼 것이다.
조사께서 이미 ‘구멍 없는 철퇴’를 말씀하셨으니, 그렇다면 틀림없이 입을 댈 틈조차 없다.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간절히 바라건대, 말후구 속에서 열 가지 삿된 견해로 이리저리 계교상량하지 말고, 반드시 정신을 차리고 온 힘으로 참구하여 ‘이것이 무엇인가?’ 하고 살피시오. 이것이 ‘무無자 화두’를 단제單提281)하는 것이다.
2) 10종 병통을 널리 분별
과목해설
둘째는 「2) 10종 병통을 널리 분별」하는 부분인데, 여기에 둘이 있다.
첫째는 「(1) 병통 골라내기」이다. 여기에서 다시 셋으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1≻ 10종 병통 골라내기」이다. 이것이 다시 10으로 나누어지니, 첫째는 「① ‘유무有無의 무無’라는 병통 골라내기」이다. 여기에 다시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가) ‘유무의 3구’로 이해하는 병통을 논파」하는 부분이다.

(1) 병통 골라내기

≺1≻ 10종 병통 골라내기

① ‘유무有無의 무無’라는 병통 골라내기

가) ‘유무의 3구’로 이해하는 병통을 논파
출가자이건 재가자이건 어설프게 참구하는 자들은 이 대화에서 오고간 문답을 모두 듣고 나서는 (표면에 드러난) 말만으로 (대화의) 의미를 단정하여,

010_0524_c_01L支對知而故犯及業識在迷蹤盖
010_0524_c_02L覆也以其不能承當但以有無錯解
010_0524_c_03L迷藏自家所示之蹤跡而盖覆之
010_0524_c_04L却順其有無以答故名曰迷蹤訣
010_0524_c_05L此是禪師難能之妙訣

010_0524_c_06L正揀
一正明無孔鎚

010_0524_c_07L
師云趙州道有趙州道無狗子佛性
010_0524_c_08L天下分踈面赤不如語直心眞莫恠
010_0524_c_09L言麁七百甲子老禪伯驢糞逢人換
010_0524_c_10L眼珠

010_0524_c_11L
分踈猶言分別心眞意在無孔鎚
010_0524_c_12L故言麁迷蹤訣似是戱談故驢糞
010_0524_c_13L是無用至賤物故以比無用之無孔
010_0524_c_14L鐵鎚也以十種錯解雖是末後句消
010_0524_c_15L皆未脫意根撞立之識情故以無
010_0524_c_16L孔鎚一一換却也祖師旣云無孔鎚
010_0524_c_17L則必無揷觜分學者切勿以末後句
010_0524_c_18L中十種邪解擬議計較直須抖擻精
010_0524_c_19L盡力提撕看是箇什麽此單提
010_0524_c_20L無字

010_0524_c_21L 廣揀十種病
正揀三正揀
010_0524_c_22L十種病十揀有無之無解三

010_0524_c_23L破有無三句解

010_0524_c_24L
汎叅道俗看此話始終問答隨言

010_0525_a_01L끝내282) ‘유무有無의 무無’로 이해한다. 오조 법연五祖法演283 화상께서 하신283) 게송284)을 보지 못했던가.
조주가 칼끝을 드러내니
찬 서리같이 서슬이 푸르다.
어떤가를 또다시 물으려 하면
그의 몸, 끊어서 두 토막을 내라.
진정 극문眞淨克文285) 화상께서 게송286)을 설하였다.
“업식이 있기 때문이다!” 하니
그 뜻이 깊지 않다 누가 말하랴.
바다가 마르면 바닥이 보이지만
사람은 죽어도 마음을 알 수 없다.
이와 같은 게송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287)

해설
출가와 재가 두 부류들 (중에 적잖은 사람들이) 어설프게 참구한다. 글자만을 해석하는 자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오조 법연 선사께서 말씀하시려는 뜻은, ‘무無’ 자는 바로 ‘살인도’이며 ‘완전한 기틀(大機)’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생각으로 이러쿵저러쿵 비교하고 헤아리며 문답할 여지(分)가 없다는 것이다.
진정 극문 화상께서 말씀하시려는 뜻은, 조주의 의도는 무한한 지경에까지 이르렀기288) 때문에 알 수 없는데, 그것이 어찌 ‘유무有無의 무無’이겠느냐는 것이다.

나) 어린아이는 자성이 없다는 병통을 또다시 논파
둘째는 어린아이는 자성이 없다는 견해를 또다시 논파하는 부분이다.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조주에게 질문을 하는) 이 스님이 속으로 ‘(나는) 어린아이처럼 사람들을 보면 공연히 웃고, 물건을 갖고 놀되 이름도 모른다.’289)라고 하기도 하고, 또 ‘(나는) 마치 개처럼 멀뚱멀뚱하거나 어슬렁거리면서 그저 물이나 풀이나 먹을 생각만 하고, 일체 다른 일에는 아무 생각이 없다’고 생각하며, 이런 것을 좋은 소식이라 여긴다. 그러나 (이 스님 스스로는) 아직 작가 선지식(조주 선사)의 판결(鑑可)이 어떤지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이 스님은) 개를 빙자하여 질문을 만들어 (자신의 생각을 조주 스님께) 드러내 보였다. 그런 까닭에 조주 선사께서 그렇게 대답290)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 혜심이 보기에)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이 스님은 깨달음이) 전혀 사무치지 못했다! (조주 선사가) “없느니라(無).”라고 한 의도는 (나 혜심이 보기에 다음과 같다.) 즉, 경전에서는 “생명이 있는 존재는 불성이 없고, 생명이 없는 존재는 불성이 있다.”291)라고 말한 것과 같다. 또 황벽 희운黃檗希運(?~850) 선사가 “만약 부처가 되어 가는 단계를 밟아 올라가면 생명이 없는 존재라도 불성이 있는 존재가 되며, 부처가 되어 가는 단계를 밟아 올라가지 않으면 생명이 있는 존재라도 불성이 없는 존재가 된다.”292)라고 말한 것과 같다.
또 초제 혜랑招提惠郞293) 선사가 석두 희천石頭希遷294) 선사와 묻고 답했던 것295)과 같다.
혜랑 선사가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석두가 대답했다.
“그대는 불성이 없다.”
혜랑 선사가 물었다.
“고물고물하는 생령生靈들은 어찌 하겠습니까?”
석두 선사가 대답하였다.
“고물고물하는 생령들에게는 오히려 불성이 있다.”
혜랑 선사가 물었다.
“저 혜랑에게는 어째서 없습니까?”
석두 선사가 대답하였다.
“그대가 (불성을) 수긍하지 않기(不肯承當)296) 때문이다.”

(조주 선사가 “없느니라.”라고 대답한 의도는) 이상에서 사례로 든 이야기와 같은 의미가 있다.

010_0525_a_01L定旨決定作有無之無殊不知五祖演
010_0525_a_02L和尙頌云趙州露刃劒寒霜光熖熖
010_0525_a_03L擬欲問如何分身作兩段眞淨和尙
010_0525_a_04L頌云言有業識在 誰云意不深
010_0525_a_05L枯終見底人死不知心如是等頌
010_0525_a_06L可勝數

010_0525_a_07L
道俗二家人汎然叅究也不知字
010_0525_a_08L釋於勝數五祖意無字是殺人刀
010_0525_a_09L大機故無擬心問答分也眞淨意
010_0525_a_10L趙州意直得無限故不可知也豈皆
010_0525_a_11L有無之無耶

010_0525_a_12L
又破嬰兒無性解

010_0525_a_13L
或云這僧自謂得似孩兒見人空解笑
010_0525_a_14L弄物不知名又如狗子蒙蒙瞳瞳
010_0525_a_15L跛挈挈但念水草餘無分別以此爲
010_0525_a_16L好消息然未知作家之鑑可不如何
010_0525_a_17L借狗子設問呈似所以趙州謂直饒
010_0525_a_18L伊麽未徹在答云無者如經云有情
010_0525_a_19L無佛性無情有佛性黃蘗云始踏佛
010_0525_a_20L階梯無情有佛性未踏佛階梯有情
010_0525_a_21L無佛性又如惠朗禪師問石頭如何是
010_0525_a_22L佛性頭云汝無佛性蠢動含靈
010_0525_a_23L作麽生蠢動含靈却有佛性
010_0525_a_24L甲爲什麽却無爲汝不肯承當等之意

010_0525_b_01L
이 스님이 비록 본의는 아니었지만, 개(狗子)의 분상에서 다시 질문했다. “모든 중생이 불성이 있다고 했는데, 왜 개에게는 없다고 하십니까?” 조주 선사도 역시 개를 들어 대답하였다. “개에게는 업식이 있기 때문이다.”
조주의 말은 상대 스님의 뜻을 따라 한 것 같지만, 본뜻은 여기에 있지 않다.

해설
질문한 뜻은 ‘어린아이처럼 무념無念이 되면 틀림없이 불성이 있을 것이다.’라는 것이고, 대답한 뜻은 (그렇더라도) ‘비록 거친 망념은 없더라도 또한 업식業識은 있다.’라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부처가 되어 가는 계단을 밟지 않고, 또 (불성을) 수긍하지 않는다면(不肯承當), 어찌 불성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만약 위 문단과 같이 이해를 하면) 이 또한 의리선에서 말하는 ‘유무有無의 무無’일 뿐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유有’라는 생각을 논파하기 위해서 ‘없느니라.’라고 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무無’라는 생각을 논파하기 위해서 ‘없느니라.’라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다르다.

다) 향상의 경지는 오염되지 않는다는 병통도 논파
셋째는 향상의 경지는 오염되지 않는다는 견해도 역시 논파하는 부분이다.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멀쩡한 개(狗子)에 ‘불성佛性’이라는 두 글자를 끌어들여 오염시켜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천하의 미인) 서시西施297)는 화장할 필요가 없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이것은 마치 산을 보고 산이라 하고 물을 보고 물이라 하며, 주장자를 보고 그저 주장자라 하고 집을 보고 그저 집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그러니 개를 보고 그저 개라고만 부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298) 그래서 조주가 ‘없느니라(無)’라고 한 것이다.”
이상과 같은 잘못된 견해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그러므로 대혜 종고大慧宗杲(1089~1163) 선사는 그런 잘못된 견해를 골라내어, “유무의 무로 해석하지 말라.”299)고 한 것이다.

해설
이것은 비록 ‘향상’의 분상에서 알아차린 것이라고 해도 역시 ‘유무의 무’일 따름이다. (본문의) “이상과 같은 잘못된 견해는……” 이하의 문장은, 위에서 예로 든 세 가지와 같은 잘못된 견해300)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것을 총괄한 것이다.

② ‘진정한 무(眞無)의 무無’라는 병통 골라내기
둘째는 ‘진정한 무(眞無)의 무無’로 이해하는 견해를 골라내는 부분이다.

이미 이렇게 확정하는 것(①)이 허용되지 않자, 또 다음과 같이 잘못 이해한다. ‘유무有無의 (무無’로 이해하는 병통에는) 떨어지지 않지만, ‘진정한 무(眞無)의 무無’이다. 『금강삼매경』에 “만약 무를 떠나서 유를 취하거나, 유를 버리고 공을 좇으면 (이것은 허망한 공이 되니,) 진정한 무가 아니다. 이제 비록 유를 떨쳐 버렸으나 그렇다고 공을 남겨 두지도 않았으니, 이렇게 해야만 모든 법이 ‘진정한 무(眞無)’가 된다.”301)라고 한 말에서의 무無와 같다.
이와 같이 (경전의 말씀을) 엉뚱하게 안배할까 염려하여,

010_0525_b_01L這僧雖非本意且擧狗子分上
010_0525_b_02L問云一切衆生皆有佛性爲什麽狗
010_0525_b_03L子却無趙州亦擧狗子答云爲他有業
010_0525_b_04L識在言似隨他意不在此

010_0525_b_05L
問意如嬰兒無念必有佛性答意
010_0525_b_06L無麁念亦有業識在故未踏佛階
010_0525_b_07L不肯承當何有佛性此亦義理禪有
010_0525_b_08L無之無而但初破有念云無此破無
010_0525_b_09L云無故異也

010_0525_b_10L
亦破向上無染解

010_0525_b_11L
或云好箇狗子上不可用佛性二字染
010_0525_b_12L何故西施不用添脂粉也如見山是
010_0525_b_13L見水是水見拄杖但喚作拄杖
010_0525_b_14L屋但喚作屋何妨見狗子但喚作狗子
010_0525_b_15L故州云如此等邪解不可勝數
010_0525_b_16L大慧揀云不得作有無之無

010_0525_b_17L
此雖向上會而亦是有無之無也
010_0525_b_18L此下揔結如上三解等之邪解無數
010_0525_b_19L

010_0525_b_20L
揀眞無之無解

010_0525_b_21L
旣不許伊麽定又錯解云不落有無
010_0525_b_22L是眞無之無如金剛三昧經云若離無
010_0525_b_23L取有捨有從空而非眞無今雖離有
010_0525_b_24L而不存空如是乃得諸法眞無恐如

010_0525_c_01L병통을 골라내어 ‘진정한 무(眞無)의 없음(無)’이라고 억측해서도 안 된다고 한 것이다.

해설
이것은 (조주 선사가 “없느니라(無).”라고 대답한 것에서의 ‘무無’를) 여래선의 ‘본분 1구’로 생각하는 (잘못된) 견해를 깨뜨린 것이다. 앞에서 말한 의리선302)의 ‘신훈 3구’에 떨어지지 않으므로 ‘진정한 무’는 ‘유’라는 상대가 있는 ‘무’가 아니라고 했다.

③ 현묘한 도리道理가 있다는 병통 골라내기
셋째는 현묘한 ‘말로 하는 논리(道理)’가 있다고 생각하는 견해를 골라내는 부분이다.

이미 이렇게 하는 것(②)이 허용되지 않자, 또다시 현묘한 ‘말로 하는 논리(道理)’303)를 이용하여 알려고 한다. 그러므로 ‘말로 하는 논리(道理)’로 알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병통을 골라낸다.

해설
처음에는 ‘이 순간(今時)의 3구에 떨어지지 말라.’고 하고, 다음에는 ‘긴 세월(空劫)의 1구조차 완전히 초월해야 한다.’고 한 것을, 짐짓 다시 ‘선종 문하에서 말하는 향상’으로 이해하려 든다는 뜻이다.

④ 이리저리 따져서 궁리하는 병통 골라내기
넷째는 이리저리 따져서 궁리하는 견해의 병통을 골라내는 부분이다.

이미 이렇게 하는 것(③)이 허용되지 않자, 또다시 고개를 숙이고 싸늘하게 앉아서 ‘표층마음(意)’을 써서 무언가를 찾으려 한다. 그래서 ‘표층마음(意根)’을 활용하여 사량 분별해서는 안 된다고 병통을 골라낸다.

해설
위에서 이미 3구와 1구와 향상 어디에도 (‘말로 하는 논리(道理)’로 이해하려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자 어디에도 설 곳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고서는 그저 ‘표층마음(意根)’304)으로 궁리한다는 뜻이다.

⑤ 눈썹을 움직이거나 눈을 깜박거리는 것으로 이해하려는 병통 골라내기

다섯째는 눈썹을 움직이거나 눈을 깜박거리는 것으로 이해하려는 견해를 골라내는 부분이다.

앞에서 이미 유무有無의 무無 또는 진정한 무(眞無)의 무無로 이해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고, 또 ‘말로 하는 논리(道理)’로 따져서 판정하려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제는 다시 생각을 이리저리 굴려 ‘말로 하는 논리’로 판정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참으로 옳다고) 집착한다. 그러하고는 옛 스님의 말305)을 들먹거리면서, ‘눈을 껌벅이고 눈썹을 치켜 올리는’ 곳에 분명하고도 분명한 부처와 조사의 완전한 기틀(大機)이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또는 “조사께서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은밀한 작용을 응당 관찰해야 한다.”라고 대답하기도 한다. 또는 “어떤 것이 은밀한 작용입니까?”라고 물으면, 눈을 떴다 감았다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등등으로써 (답변의) 전거를 삼는다. 그러므로 ‘눈썹을 치켜 올리고 눈을 껌벅이는 곳을 향해 둔덕(垜根)을 만드는 병통’을 골라낸다.

해설
이하의 두 병통306)은 조사선의 삼요三要를 통해서 이해하려는 병통을 격파하는 것이다. 이곳(⑤)의 처음에는 ‘완전한 기틀(大機)’로 이해하려는 병통을 격파했다. ‘눈썹을 치켜 올리거나 눈을 껌벅이는 것’은 종사의 은밀한 작용이기 때문에, 마음(心識)으로 따져서 ‘말로 하는 논리(道理)’로 알려고 해서는 안 된다.
‘잡잡眨眨’은 생각을 이리저리 굴리는 모습이니,

010_0525_c_01L此差排故揀 [5] 不得作眞無之無卜度

010_0525_c_02L
此破如來禪本分一句解以不落前
010_0525_c_03L義理禪新熏三句故名曰眞無非對
010_0525_c_04L有之無

010_0525_c_05L
揀玄妙道理解

010_0525_c_06L
旣不許伊麽定又作玄妙道理會 [6]
010_0525_c_07L不得作道理會

010_0525_c_08L
以第一不落今時三句第二全超空
010_0525_c_09L劫一句故更作宗門向上會也

010_0525_c_10L
揀思量卜度解
010_0525_c_11L旣不許伊麽定又低頭冷坐着意搜尋
010_0525_c_12L故揀云不得向意根下思量卜度

010_0525_c_13L
上旣不許三句一句及向上故自無
010_0525_c_14L立處但以意根卜度

010_0525_c_15L
揀揚眉瞬目解

010_0525_c_16L
前旣不許有無眞無會又不許作道理
010_0525_c_17L思量定又認着眼眨眨理會不得底爲
010_0525_c_18L便引古德云瞬目揚眉處明明佛
010_0525_c_19L祖機又有問西來意答云當觀密作用
010_0525_c_20L如何是密作用以目開合示之等爲
010_0525_c_21L故揀云不得向揚眉瞬目處垜 [7]

010_0525_c_22L
此下二解破祖師禪三要解今初破
010_0525_c_23L大機解以揚眉瞬目是宗師密作用
010_0525_c_24L故不可以心識思量理會也眨眨思

010_0526_a_01L마음이 움직이면 눈도 따라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타근垜根’이란 땅 위로 솟아오른 둔덕(垜根)이니, 이는 곧 화살을 받는 터(射堋)307)이다. (이렇게 비유한 이유는) 자성은 원래 (스스로 체험하는 것이지 남에 의해) 전수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 그런데 지금 여기에서 눈썹을 치켜뜨거나 눈을 껌벅거리는 행위는 ‘군더더기로 그러는(特地)’308) 꼴을 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⑥ ‘말로 따지는 방법(語路)’ 속에서 ‘살 궁리(活計)’를 찾아야 한다는 병통 골라내기
여섯째는 ‘말로 따지는 방법(語路)’ 속에서 ‘살 궁리(活計)’를 찾아야 한다는 견해를 골라내는 부분이다.

앞에서 한 말들을 살펴보건대, ‘논리로 따지는 방법(理路)’도, ‘알음알이로 따지는 방법(義路)’도 허용하지 않았으며, 또 ‘(불성의) 작용’을 가지고 판정하려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제는) ‘아무 맛이 없는(沒滋味)’ 말에 의심을 집중하면서, 대뜸 원오 극근圓悟克勤309) 선사가 “언어 문자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제일 큰 병이다.”310)라고 한 말을 끌어들인다. 그러므로 “말로 따지는 방법으로 살 궁리를 해서는 안 된다.”고 병통을 골라낸다.

해설
이것은 ‘완전한 작용(大用)’을 사용하여 (무無자 화두의 참뜻을 이해하려는) 병통을 논파한 것이다.

⑦ 아무것도 일삼지 말아야 한다는 병통 골라내기
일곱째는 ‘아무것도 일삼지 않는 굴레(無事匣)’ 속에 들어가는 병통을 골라내는 부분이다.

이미 이렇게 판정하는 것(⑥)을 허용하지 않자, 또 궁리해서 이렇게 말한다. ‘논리로 따지는 방법(理路)’도, ‘알음알이로 따지는 방법(義路)’도 이미 모두 다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니 (이렇게 마음을 쓰기보다는 차라리) ‘아무것도 일삼지 않음(無事)’만 못하다. 그러고는 덕산 선감德山宣鑒311) 선사가 “매사에 무심하고 마음에 일삼음이 없으면, 텅 비었으면서 신령스럽고 공하면서도 미묘한 작용이 있다.”312)라고 한 말 등을 주장의 근거로 삼는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일삼지 않는 굴레(無事匣) 속으로 날아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병통을 골라낸다.

해설
이것은 ‘향상하는 본분’으로 (무無자 화두의 참뜻을) 이해하려는 병통을 물리치려는 것이다. 이상에서 말한 3종의 선 중에서 ‘논리로 따지는 방법(理路)’도 ‘알음알이로 따지는 방법(義路)’도 모두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궁리를 내어서 이렇게 말한다. ‘신훈新薰’의 측면에서 마음을 쓰는 것은 절대로 ‘본분의 진공’ 상태에서 무심無心하고 아무것도 일삼지 않는(無事) 한가한 도인만 못하다.
‘매사에 무심하고(無心於事)’란 안으로 마음에 헐떡거림이 없다는 뜻이고, ‘마음에 아무것도 일삼지 않음(無事於心)’이란 밖으로 모든 반연을 쉬는 것을 말한다. “텅 비었으면서 신령스럽고 공하면서도 미묘한 작용이 있다.”는 것은, 마음이 장벽처럼 되어야313) 도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다. ‘아무것도 일삼지 않는 굴레’란 그림자처럼 무심無心314)한 상태를 뜻한다.

⑧ 화두 드는 자체로 수긍하려는 병통 골라내기
여덟째는 화두를 드는 그 자체로 (무無자 화두의 참뜻을) 수긍하려는 병통을 골라내는 부분이다.

이미 ‘언어적인 방법(語路)’으로 ‘살 궁리(活計)’를 하려는 것도 허용되지 않고, 또 ‘아무것도 일삼지 않는 굴레(無事匣)’ 속으로 날아 들어가는 것으로 판정하려는 것도 허용되지 않자,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010_0526_a_01L量貌以心動則眼動故垜根地上
010_0526_a_02L突起即射堋也以其自性本無傳
010_0526_a_03L授分今此揚眉瞬目未免特地故

010_0526_a_04L
揀語路活計解

010_0526_a_05L
審前不許理路義路又不許認取作用
010_0526_a_06L向沒滋味底言句上起疑便引圓悟
010_0526_a_07L不疑言句是爲大病故揀云不得
010_0526_a_08L向語路上作活計

010_0526_a_09L
此破大用解

010_0526_a_10L
揀無事匣裡解

010_0526_a_11L
旣不許伊麽定又計云理路義路
010_0526_a_12L不揔許却向伊麽處用心不如無事
010_0526_a_13L如德山云無心於事無事於心虛而
010_0526_a_14L空而妙等爲據故揀云不得颺在無
010_0526_a_15L事匣裡

010_0526_a_16L
此破向上本分解以上三種禪中
010_0526_a_17L路義路旣不揔許故又計云却向
010_0526_a_18L新熏邊用心必不如本分眞空上
010_0526_a_19L心無事閑道人也無心於事內心無
010_0526_a_20L喘也無事於心外息諸緣也虛而
010_0526_a_21L空而妙心如墻壁可以入道也
010_0526_a_22L無事匣影無心

010_0526_a_23L
揀擧起承當解

010_0526_a_24L
旣不許語路上作活計又不許颺在無

010_0526_b_01L
‘화두를 들거나 말거나 어느 때나 모두가 좋은 소식이다.’ 그러면서 불안 청원佛眼淸遠315) 선사가 “(알음알이로) 사량 분별해서 어느 세월에 깨달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사량 분별하지 않으면 끝내 황폐하여 뒤얽힌(莽鹵) 상태가 된다. 사량으로 분별을 하니 마니를 모두 없애버릴 때에, 만 리에 구름이 없으면 (만 리의 허공이) 그대로 드러난다.”316)라고 한 말을 근거로 대고서는, (앞에서 말한 자신의 생각을) 굳게 지키어 버리지를 않는다. 그러므로 ‘화두 드는 그 자체로 (무無자 화두의 의미를) 수긍하려는(承當)’ 병통을 골라낸다.

해설
이것은 (진여는) ‘지금 새로 훈습해야 하는 것(今)’이기도 하고 ‘본래 간직하고 있는 것(本)’이기도 하다는 두 입장을 병행해야 한다는 병통을 물리치는 것이다. 앞의 여섯 가지 병통(①~⑥)은 ‘지금 새로 훈습해야 하는 것(今)’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잘못이고, 일곱 번째의 병통(⑦)은 ‘본래 간직하고 있는 것(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것도 잘못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둘을 동시에 병행하는 것이야말로 좋은 소식이다. 그런 까닭에 『원각경』에는 “그러나 본래 금이지만, 마침내 제련해야 얻을 수 있다.”317)라고 하였고, 육조 대사는 “진여 자성은 본래 갖추어져 있는 것이지만, 반드시 새로 훈습하는 노력이 있어야만 한다.”318)고 했다. 위의 여섯 가지 중에서 ⑥ 속으로 (나머지 다섯 가지를) 포용시켜 나머지 다섯 가지(①~⑤)는 생략했다. 그러므로 (그렇듯이 이곳의 ⑧ 속으로) 이전 일곱 가지를 모두 포용시킨다.
화두를 드는 것은 ‘신훈’이고 화두를 들지 않는 것은 ‘본분’이니, 이것이 바로 ‘지금 새로 훈습해야 하는 것(今)’과 ‘본래 간직하고 있는 것(本)’을 병행하는 것이다.
(불안 청원 선사가 말한) “(알음알이로) 사량 분별해서 어느 세월에 깨달을 수 있겠는가?”라고 한 구절은 ‘신훈’만을 주장하기 때문에 옳지 않고, “그렇다고 사량 분별하지 않으면 끝내 황폐하여 뒤얽힌(莽鹵) 상태가 된다.”라고 한 구절은 ‘본분’만을 주장하기 때문에 옳지 않다는 것이다. “사량으로 분별을 하니 마니를 모두 없애버릴 때에, 만 리에 구름이 없으면 (만 리의 허공이) 그대로 드러난다.”라고 한 두 구절은, (진여는) ‘현재 새로 훈습해야 하는 것(今)’이기도 하고 ‘본래 갖추고 있는 것(本)’이기도 하다는 두 입장을 모두 수행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옳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들은) 이것이야말로 곧 부처와 조사들의 바른 뜻이니, 그러므로 (앞에서 말한 자신의 생각을) 굳게 지켜 버리지를 않는다. 그러나 (나 긍선이 보기에 이런 주장들은) 역시 ‘표층마음(意根)’319)이 우뚝 서 있기 때문에 절대로 ‘구멍 없는 철퇴(無孔鎚)’320)가 되지는 못한다.

⑨ 문자를 끌어들여 체험하려는 병통 골라내기
아홉째는 문자를 (전거로) 끌어들여(引) (무無자 화두의 의미를) 체험(證)하려는 병통을 골라내는 부분이다.

또는 문자를 (전거로) 끌어들여(引) (무자 화두의 의미를) 체험(證)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전거로) 끌어들여 (무자 화두의 의미를) 체험하려고 함’이란, 이상에서 (내가 잘못이라고 물리친) 병통 모두에 다 해당한다.321)

⑩ 미혹한 채로 깨칠 날을 기다리는 병통 골라내기
열째는 미혹한 채로 깨칠 날을 기다리는 병통을 골라내는 부분이다.

이미 이상(①~⑨)에서와 같이 결정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아 어찌할 수가 없게 되자, 참으로 어렵다는 생각을 스스로 내어, ‘지금도 미혹하니 과연 깨칠 날이 있겠는가?’라며 (그냥 지금 이대로) 미혹한 채로 깨칠 날을 기다린다. (그러나 이것은 병통이다.) 그러므로 미혹한 채로 깨칠 날을 기다리는 병통을 골라낸다.
이상에서 거론한 병통 중에서 ⑤의 “눈썹을 치켜뜨거나 눈을 깜박이는 것”에서부터 ⑩의 “미혹한 채로 깨칠 날을 기다리는 병통”까지는, 요즈음 사람들이 제일로 물리치기 어려운 병통이다.

010_0526_b_01L事匣裡定謂欲擧未擧時正是好消息
010_0526_b_02L如佛眼云擬思量何劫悟不思量
010_0526_b_03L終莾鹵欲思不思踏破時萬里無雲常
010_0526_b_04L現露爲據堅執不捨故揀云不得向
010_0526_b_05L擧起處承當

010_0526_b_06L
此破今本雙行解以前六解但新熏
010_0526_b_07L故不可第七解但本分故不可
010_0526_b_08L必須今本雙行正是好消息也故圓
010_0526_b_09L覺云雖復本來金終以銷成就
010_0526_b_10L祖云性雖本有必借新熏前六中
010_0526_b_11L但躡第六以影前五故爲都躡前七
010_0526_b_12L欲擧爲新熏未擧爲本分
010_0526_b_13L爲今本雙行擬思量句但新不可
010_0526_b_14L不思量句但本不可欲思下二句
010_0526_b_15L今本雙行爲好也此是佛祖正意
010_0526_b_16L堅執不捨然亦意根撞立故非無孔
010_0526_b_17L

010_0526_b_18L
揀文字引證解

010_0526_b_19L
又不得向文字引證引證通上諸病

010_0526_b_20L
揀將迷待悟解

010_0526_b_21L
旣不許伊麽定 [8] 無可奈何自生難想
010_0526_b_22L謂即今迷幾時悟得執迷待悟故揀云
010_0526_b_23L不得將迷待悟如上諸病中從揚眉瞬
010_0526_b_24L至將迷待悟是時人難離之病

010_0526_c_01L
해설
만약 격외格外의 입장에 의거한다면, 이 마음이 곧 부처이니, ‘미혹’이나 ‘깨침’이란 본래 (실체가 없어) 공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도리어 미혹한 채로 깨칠 날을 기다리면, 도리어 의리선에 떨어지고 만다.
앞의 네 가지(①~④) 병통은 앞서 말한 (의리선·여래선의) 두 선禪에서 범하기 쉬운 병통이므로, 경우에 따라서는 (그 병통에서) 벗어나기 쉬울 수도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런데 뒤의 여섯 가지(⑤~⑩) 병통은 원래 조사선이며 여래의 정맥(에서 범하기 쉬운 병통)이기 때문에 참으로 벗어나기 어렵다.

≺2≻ 열 가지 병통을 묶어서 넷으로 요약

둘째는 열 가지 병통을 네 가지 병통으로 묶는 문단이다.

자세하게 말하면 열 가지 병통이 있지만, 간략하게 말하면 유심有心과 무심無心, 그리고 언어를 사용하느냐와 침묵만 하느냐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옛사람(대혜 종고 선사)은 “유심有心으로 (무無자 화두를) 깨달아 알려 해도 안 되고, 무심無心으로 (무자 화두를) 깨달아 알려고 해도 안 되며, 언어를 사용해서 (무자 화두의 의미를) 조작하려고 해도 안 되고, 침묵으로 (무자 화두의 의미를) 통하려 해도 안 된다.”322)라고 했다.

해설
열 가지 병통 중에서 ①과 ④와 ⑩은 ‘유심有心’으로 (무無자 화두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병통이며, ②와 ③은 ‘무심無心’으로 (무자 화두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병통이며, ⑥은 ‘언어’를 사용해서 (무자 화두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병통이며, ⑤와 ⑦은 ‘침묵’을 사용해서 (무자 화두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병통이다.
⑧은 네 가지 병통 모두에 해당하니, ‘화두를 들어서 (무자 화두의 의미를 깨치려 하는 것)’은 ‘유심’과 ‘언어’를 사용해서 (무자 화두의 의미를 깨치려 하는) 병통이며, ‘화두를 들지 않고서 (무자 화두의 의미를 깨치려 하는 것)’은 ‘무심’과 ‘침묵’을 통해서 (무자 화두의 의미를 깨치려 하는) 병통이다. ⑨는 역시 네 가지 병통 모두에 해당한다.
옛사람(대혜 종고 선사)은 이 네 가지 병통을 물리쳤으니, 이상에서 (진각 국사께서 10종으로) 병통을 골라낸 의도와 동일하다.

≺3≻ 네 가지 병통을 묶어서 둘로 요약

셋째는 네 가지 병통을 두 가지로 묶는 것이다.

간략하게 말하면, (네 가지 병통은) 생각으로 알 수 있는가 아니면 생각으로 알 수 없는가라는 두 가지 병통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대혜보각선사어록』에서는)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된다.”323)라고 하였고, 또 “이래도 안 되고, 이러지 않아도 안 되고, 그 둘 어느 쪽이 아니어도 안 된다.”324)라고 하였다.

해설
‘유심’과 ‘언어를 사용함’은 ‘생각으로 알 수 있는 큰 활용’이고, ‘무심’과 ‘침묵함’은 ‘생각으로 알 수 없는 큰 기틀’이다. 또 ‘생각으로 알 수 있음’은 곧 ‘향상하는 묘유’이고, ‘생각으로 알 수 없음’은 ‘향상하는 진공’이다. 그런데 역시 이렇게 해서 (무자 화두의 의미를) 알려고 하는 것도 또한 병통이 되기 때문이다.

010_0526_c_01L
若據格外則即心是佛迷悟本空
010_0526_c_02L今還將迷待悟還墮義理禪前四病
010_0526_c_03L是前二禪解故或有易離後六病
010_0526_c_04L元是祖師禪佛祖正脉故實爲難離
010_0526_c_05L

010_0526_c_06L
束十爲四病

010_0526_c_07L
廣而言之則有十種病畧而言之
010_0526_c_08L不出有心無心語言寂默故古人云
010_0526_c_09L不可以有心求不可以無心得不可以
010_0526_c_10L語言造不可以寂默通

010_0526_c_11L
十中一四十爲有心二三爲無心
010_0526_c_12L六爲語言五七爲寂默八通於四病
010_0526_c_13L欲擧爲有心語言未擧爲無心寂
010_0526_c_14L九亦爲通古人破四病故同上
010_0526_c_15L揀意

010_0526_c_16L
[9] 束四爲二病

010_0526_c_17L
畧而言之則不出思議不思議所以道
010_0526_c_18L左來也不是右來也不是又道伊麽也
010_0526_c_19L不得不伊麽也不得伊麽不伊麽揔不
010_0526_c_20L

010_0526_c_21L
有心語言爲思議大用也無心寂默
010_0526_c_22L爲不思議大機也又思議即向上妙
010_0526_c_23L不思議即向上眞空亦得以此
010_0526_c_24L亦爲病故

010_0527_a_01L
(2) 병통 골라내기를 맺음

둘째는 병통 골라내기를 맺는 부분이다.

이렇게 해서, 분명하게 (병통을) 골라내었고,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영리한 사람이라면 이렇게 거량(擧着)하는325) 말을 듣자마자, 눈썹을 흩날리며 어서 가버려서,326) 끝내 빙 돌지 말아야 한다.327)

해설
이상과 같이 “분명하게 (병통을) 골라내었고…….”라는 말 이하에는, ‘부여잡을 단서가 없는 사안(沒巴鼻)328)이나 ‘솔기나 바느질 선이 없는 옷(無楞縫)’329)과 같아 ‘구멍 없는 철퇴’330)의 이치가 저절로 드러나 있다. 이것은 간화문看話門의 소식이다.
만약 설화문說話門의 입장에서 보면, 10종류 병통을 앓는 사람들의 입각처가 하나하나 여기에만 국한되지 않기 때문에 ‘자기 집(家)’331)에 도달하는 소식 아닌 것이 없다.
만약 영리한 사람이라면 말 떨어지자마자 단박에 깨친다. 그렇게만 되면, 아래에서와 같이 의심을 일으켜서 참구하는 일을 절대로 빌릴 필요가 없다.332)
3) 결론 : ‘이것이 무엇인가’만을 오직 참구할 것
셋째는 오직 ‘이것이 무엇인가’만을 들어 참구할 것을 결론적으로 제시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만약 (「(2) 병통 골라내기를 맺음」에서 말한 것처럼) 되지 못하면, 병통이 있고 없고 상관없이, 재미가 있고 없고에 상관없이, (무자 화두 참선을 통해) 힘을 얻고 못 얻고 상관없이, ‘이것이 무슨 말인가’333) 하고 참구하라.

해설
혹 하근기로서 ‘말 떨어지자마자(言下)’ 단박에 깨치지 못했거든, 일체의 시시비비를 모두 따지지 말고, 그저 ‘무無’ 자만을 단제單提하여 ‘이것이 무엇인가?’ 하고 의심을 일으켜야 한다. 이것이 바로 ‘무無자 화두’이다.
모든 화두에는 ‘단제單提’와 ‘전제全提’가 있다. ‘무자 화두’를 예로 들어 말하면, “조주 선사는 왜 (개는 불성이) 없다(無)라고 했는가?”라고 들면, 이것이 바로 전제이며 또는 참의叅意라고도 한다. 그런데 ‘무’ 자만 들어 “이것이 무엇인가?”라고 하면, 그것을 단제라고 하며 역시 참구叅句라고도 한다.
단제는 (마음이) ‘순수하여 한결같아지는 장점(純正益)’은 있지만 사심死心334)에 떨어지는 폐단(死心病)이 있으며, 반면에 전제는 의심이 잘 생기는 장점(起疑益)은 있지만 ‘생각을 어지럽히는 폐단(亂想病)’이 있다.
초학자들은 반드시 단제를 해서 알음알이(念想)를 모두 없애야만, 마침내 전제를 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단제를 먼저 했는데도) 의심이 일어나지 않으면, 조사의 뜻에 계합하지 못한다. 또 (단제와 전제와는 달리) (무자 화두를) ‘근제勤提’하는 방법도 있는데, (무자 화두를 드는) 마음을 쉬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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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結揀

010_0527_a_02L
則明明地揀破明明地現示若是靈利
010_0527_a_03L聊聞擧着剔起眉毛便行終不打
010_0527_a_04L之遶

010_0527_a_05L
如上揀破之言下沒巴鼻無楞縫之
010_0527_a_06L無孔鎚義自現也此是看話門消息
010_0527_a_07L若說話門十種人立脚處一一不在
010_0527_a_08L此限故無非到家消息若是利根
010_0527_a_09L言下便悟則更不假如下起疑叅究
010_0527_a_10L

010_0527_a_11L結示單提叅
010_0527_a_12L
其或未然莫管有病無病莫管有滋味
010_0527_a_13L無滋味莫管得力不得力但提撕看是
010_0527_a_14L箇什麽道理

010_0527_a_15L
或有下根言下未悟一切是非
010_0527_a_16L莫思量單單提箇無字疑云是箇什
010_0527_a_17L是箇無字也一切話頭皆有單
010_0527_a_18L提全提如無字話云趙州因甚道無
010_0527_a_19L名全提亦名叅意單擧無字
010_0527_a_20L是什麽則名單提亦名叅句單提
010_0527_a_21L有純正益而有死心病全提有起疑
010_0527_a_22L而有亂想病初學必須單提念想
010_0527_a_23L都亡方可全提若不起疑未契祖
010_0527_a_24L又有勤提心無間斷

010_0527_b_01L
25. 선과 교의 핵심은 ‘진공’과 ‘묘유’, ‘완전한 기틀’과 ‘완전한 작용’을 벗어나지 않음
고찰해 보건대, 사람의 마음에는 (즉 진여에는) ‘인연을 따르는 속성(隨緣義)’과 ‘불변하는 속성(不變義)’이 있다. 인연을 따르는 속성이란 ‘묘유’이고 ‘보리’이며, 불변하는 속성이란 ‘진공’이고 ‘열반’이다.
인연을 따르는 속성의 측면에서 보면 범부와 성현이 완연히 구분되기 때문에, 부처와 조사께서 (교화로 보여주신 가르침은) 은혜 갚기가 매우 어려울 정도로 귀중한 것이지만, 불변하는 속성의 측면에서 보면 이름 붙일 수도 형상으로 그릴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부처와 조사께서 (교화로 보여주신 가르침은) 바람도 없는데 파도를 일으키는 꼴335)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와 조사들은 처음에는 모든 법法을 분별하여 ‘묘유의 3구’를 밝히시고, 그런 다음에 모든 법이 궁극적으로는 공空하다고 설하여 ‘진공의 1구’를 보여주셨다.
예를 들면, 『금강경』 4구게336) 중에서 앞의 세 구절은 묘유의 3구이고, 마지막 한 구절은 진공의 1구이다. 또 『열반경』 4구게337) 중에서는 “만들어진 모든 것은 무상하다”와 “이것은 생멸법인데”와 “생성 소멸하는 현상이 모두 사라지고 나면”의 세 구절은 묘유의 3구이며, “고요해져서 즐겁게 되리라”는 진공의 1구이다.
또 『대방광불화엄경소』338)의 “가고 돌아옴이 끝없지만”, “움직임과 고요함은 하나의 근원이며”, “중묘衆妙를 머금고도 남음이 있으며”의 세 구절은 묘유의 3구이고, “말과 생각을 초월하여 벗어난 것은”, “오직 법계法界뿐이로구나”라는 두 구절은 진공의 1구이다.
경전이나 논서들의 핵심적인 의미가 그렇지 않은 게 없으며, 나아가 선가禪家의 경우도 어떤 것을 염거拈擧하더라도 조사의 뜻이 아닌 것이 없다. 그러므로 육조 대사가 설법하는 법규를 보여주심에 ‘36종의 대대待對’339)의 방법을 제시한 것은 묘유의 3구를 밝힌 것이며, “마지막으로 (대대待對하는) 두 법法을 모두 제거하여 절대로 더 이상 갈 곳이 없게 하라.”340)고 한 것은 진공의 1구를 보인 것이다.
2조 혜가 대사가 (초조 달마 대사 앞으로) 나와서 삼배의 예를 올린 것은 묘유의 3구이며, 자리에 앉은 것341)은 진공의 1구이다.
임제 선사가 말한 “참 부처, 참 법, 참 도”는 묘유의 3구이며 “이 셋은 같은 것으로 모두 빈이름일 뿐이고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342)라고 한 것은 진공의 1구이다.
또 새벽에 종을 세 망치 치는 것343)과 순당巡堂344)할 때에 세 바퀴를 도는 것과 예경할 때에 절을 세 번 하는 것과 노주露柱 및 등롱燈籠을 소재로 법 거량하는 것345)이나 승당僧堂 및 선당禪堂 등을 소재로 법 거량을 하는 것346)은 모두 묘유의 3구이며, 저녁에 종을 한 망치 내리는 것과 격벽擊壁347)의 한 소리와 비로자나불을 모신 법당 등은 (진공의) 1구이다. 나아가 대지는 삼라만상이 그 위에 펼쳐지기 때문에 (묘유의) 3구이며, 하늘은 아무 형상도 없기 때문에 (진공의) 1구이다.
또 ‘진공’에 대해서는 참으로 언급을 할 여지도 없지만, ‘묘유’ 속에는 역시 이런저런 명칭이나 모양이 있으니 기틀(機)과 작용(用)이 그것이다. 예를 들면, 육조 대사가 제시한 ‘36종의 대대待對’348)는 그 하나하나가 모두 기틀과 작용이 서로 대대하고 있다. 그러므로 “(만약 36대대법待對法을) 쓸 줄 알면 도道가 일체 모든 경전에서 말하는 법法에 관통한다.”349) 그것을 확충하면 산과 물이 대대하고, 용과 호랑이가 대대하고, 바람과 달이 대대하며,

010_0527_b_01L禪敎大旨不出眞空妙有大機大用

010_0527_b_02L
原夫人人自心本具隨緣不變二義
010_0527_b_03L緣者妙有也菩提也不變者眞空也
010_0527_b_04L涅槃也隨緣則凡聖完然故佛祖恩大
010_0527_b_05L難酬不變則離名絕相故佛祖無風起
010_0527_b_06L是以佛祖先分別諸法明妙有三句
010_0527_b_07L後說畢竟空示眞空一句如金剛偈
010_0527_b_08L三句妙有三句後一句眞空一句
010_0527_b_09L槃偈諸行生滅三句寂滅爲樂一句
010_0527_b_10L華嚴䟽徃復無際等三句超言詞句
010_0527_b_11L一句也經論大意無不皆然至於禪
010_0527_b_12L則物物拈來無非祖意故六祖示
010_0527_b_13L說法䂓擧三十六對法明三句究竟
010_0527_b_14L二法盡除更無去處示一句二祖出
010_0527_b_15L禮三拜三句依位而坐 [11] 一句臨濟云
010_0527_b_16L眞佛眞法眞道三句三即一云云一句
010_0527_b_17L又晨鍾三宗巡堂三匝禮敬三拜
010_0527_b_18L燈籠僧堂禪堂等皆三句昏鍾一
010_0527_b_19L擊壁一聲毘盧法堂等一句乃至
010_0527_b_20L地萬象故三句天無形故一句也
010_0527_b_21L眞空實無揷觜分但妙有中亦有許
010_0527_b_22L多名相即機用也六祖所示三十六對
010_0527_b_23L [12] 機用相對故解用則道貫一切經
010_0527_b_24L擴充則更有山水對龍虎對風月

010_0527_c_01L산과 구름, 사람과 대상 경계, 소와 말, 의식과 외물, 소리와 빛깔, 추위와 더위, 움직임과 고요함, 말과 침묵, 들숨과 날숨, 다리를 펴고 오므림 등등의 두두물물이 모두 기틀과 작용으로 대대하지 않는 것이 없다.
이런 사례들을 모두 다 거론하려 한다면 겁劫이 다하도록 해도 모두 열거하기 어렵다. 뛰어난 안목과 솜씨로 흙을 주물러서도 황금을 만드니, 거량(拈)하는 것마다 조사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이 없구나. 하하! (번뇌의 거친) 수풀에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다가 집으로 돌아오고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슬에 옷이 젖었네.350)

010_0527_c_01L山雲人境牛馬心境聲色
010_0527_c_02L動靜語默入息出息展脚縮脚等
010_0527_c_03L頭頭物物無非機用相對也若欲備擧
010_0527_c_04L窮劫難盡以活眼手段把土成金
010_0527_c_05L物物拈來無非祖意也呵呵草裡橫
010_0527_c_06L身歸不覺露濕1) [1]

010_0527_c_07L此下底本有看堂論此文在於作法龜鑑之內
010_0527_c_08L故編者除之
  1. 1)임제 의현臨濟義玄 : ?~867. 당나라 때의 선승. 진주 땅 호타 강 근처에 있는 임제사에 거주하였다. 황벽산 희운 선사의 법을 이었고, 제자로는 삼성 혜연과 흥화 존장 선사 등이 있다. 흥화 존장 문하에서 남원 혜옹→풍혈 연소→수산 성념→분양 선소→자명 초원으로 법맥이 전해진다. 다시 자명 문하에 황룡 혜남과 양기 방회가 나와 임제종의 두 파를 이루어 중국 송·원·명 시대는 물론, 조선과 일본에 큰 영향을 주었다. 삼성 혜연 선사가 편집한 『진주임제혜조선사어록鎭州臨濟慧照禪師語錄』이 세상에 전한다. 본 번역서에서는 『鎭州臨濟慧照禪師語錄』(T47, 495a2~506c28)을 대본으로 하고, 이하에서는 『臨濟錄』으로 표기함.
  2. 2)3구句 : 이하의 「2. 향상하는 본분의 진여」에 소개된다.
  3. 3)일생(一代) : 석가모니불이 최후신最後身을 나타내 사바세계에서 교화하신 마지막 한 생.
  4. 4)법해 유정法海惟精 : 미상.
  5. 5)환성 지안喚惺志安 : 1664~1729. 속성은 정鄭씨이고 자는 삼낙三諾이다. 춘천 출신. 15세에 출가하여 금강산에서 설제雪霽에게 수학. 27세에 직지사의 화엄법회에서 진언震言 강백에게 전강을 받은 뒤 화엄을 강의. 62세에 금산사에 천여 명의 대중을 모아 화엄대법회를 열었는데, 이 일로 무고를 받아 제주도로 유배된 후 7일 만에 입적. 저서로는 『선문오종강요』, 『환성시집』 등이 있다.
  6. 6)노노스님 : 원문은 ‘사옹師翁’. 이 집안의 법계를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태고 보우……청허 휴정(태고 제6대손)→편양 언기→풍담 의심→월담 설제→환성 지안→호암 체정→설파 상언→퇴암 태근→설봉 거일→백파 긍선→혜암 보혜→환옹 환진→월초 거연→경송 은오→운허 용하→월운 해룡. 근자에 절 집안에서는 스승의 스승을 ‘노스님’, 노스님의 스승을 ‘노노스님’으로 호칭한다.
  7. 7)제 몫의 일(分上事) : 분상分上에서의 분分은 ‘본분本分’, ‘제 몫’, ‘자기 자신에게 부여된 요소’의 뜻이며, 상上은 부사이며, 사事란 ‘(자신이 맡은) 일’ 또는 ‘(자신이) 일삼는 것’이라는 뜻. 이 용례는 불교 안팎을 막론하고 당송시대에 생산된 대화체 문헌들 속에 많이 나타난다. 『二程語錄』 권17, “伊川復曰, 子以爲何人分上事. 對曰, 聖人分上事.”; 『祖堂集』 권2 「慧能條」(K45, 249a13), “花云, 向上人分上, 合作摩生.”
  8. 8)이곳에서는 환성 지안 선사가 한 말로 되어 있으나, 『禪家龜鑑』(H7, 645b)에 나온다. 『선문오종강요』에는 약간의 자구 출입이 있다. 물론 의미에는 차이가 없음. 『禪門五宗綱要』(H9, 461c), “上三句三玄, 乃至八捧等法, 非特臨濟宗風, 上自諸佛, 下至衆生, 皆分上事. 若離此說法, 皆是妄語.”
  9. 9)『인천안목人天眼目』 : 6권. 송宋 회암 지소晦巖智昭가 임제·위앙·조동·운문·법안 등 선문 5종의 주장이나 그에 대한 평창 등을 엮은 책. 순희淳熙 15년(1188)에 서문과 함께 간행된 이래, 중국과 한국, 일본 등지에서 여러 번 중간되었고 그때마다 편차가 약간씩 다르다. 예들 들면, 원나라 홍무洪武 원년(공민왕 17년, 1368)에 고려에서 간행된 『인천안목』에는 5가의 순서가 임제·운문·조동·위앙·법안으로 편차되어 있다.
  10. 10)『선문오종강요禪門五宗綱要』 : 1권. 조선의 환성 지안 스님이 편집하고 그의 문인 함월 해원涵月海願 스님이 보補하였다. 숙종 15년(1689)에 간행. 임제·운문·조동·위앙·법안 등 선문 5가의 종요를 모아 엮은 책. 순조 24년(1824)에 백파는 『선문오종강요사기』를 지음.
  11. 11)『선문강요집禪門綱要集』 : 고려의 진정 천책眞靜天頙(1206~?)의 저술이라고 하나 불확실. 본 번역서에서는 『한국불교전서』 제6책(850b~860c)에 실린 조선 중종 26년(1531) 지리산 철굴암 간본을 대본으로 함. 그 목차에 따르면 「삼성장三聖章」, 「이현화二賢話」, 「일우설一愚說」, 「산운편山雲篇」, 「운문삼구雲門三句」 등 5장으로 구성. 앞의 셋은 임제종의 강요이고, 뒤의 둘은 운문종의 강요로서 이들 종파의 핵심만을 밝힘.
  12. 12)의미의 행상(義相) : 제교諸敎 행상行相의 준말로 ‘교상敎相’이라는 용어가 있다. 백파는 그 용어에 대비해서 선문禪文의 ‘소전지의所詮之義’에 관한 행상이라는 뜻으로 ‘의상義相’이라는 신조어를 사용. ‘선판禪判’의 용어이다.
  13. 13)『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 : 30권. 고려의 진각 혜심眞覺慧諶(1178~1234) 선사가 선문의 화두 1,125칙과 이에 대한 후세 선사들의 징徵·염拈·화話·별別·송頌·가歌 등을 채집하여 엮은 책. 이 책에 대해 고려의 각운 선사가 일종의 주석을 붙여 『선문염송설화』(30권)를 지었다. 이 두 종류의 책을 합본하여 한글로 번역한 책으로 다음이 있음. 김월운 역, 『선문염송·염송설화』(전10책)(서울: 동국역경원, 2005)
  14. 15)사집四集 : 조선시대 후기 이후 강원 이력의 교과서로 사용되던 네 종류의 책. 고봉 원묘(1238~1295)의 『고봉화상선요高峰和尙禪要』, 보조 지눌(1158~1210)의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切要幷入私記』, 규봉 종밀(781~840)의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 대혜 종고(1089~1163)의 『대혜종고서장大慧宗杲書狀』이다.
  15. 16)마음(心目) : 눈이 대상을 보듯이, 마음으로 무엇을 관찰하는 기능이 있기 때문에 눈 목目 자를 붙인 것임. 지업석持業釋임.
  16. 17)말의 핵심(言頭立脚處) : 언두言頭에서의 두頭는 접미사. 화두話頭의 두頭와 같은 용례.
  17. 18)가죽신을 신은 채 발바닥을 긁는 : 원문은 ‘격화소양隔靴搔痒’. 핵심을 꼭 찌르지 못하고 언저리만 맴도는 것을 비유. 격화조양隔靴抓痒 또는 격화소양隔靴搔癢으로도 표기. 『景德傳燈錄』 권22(T51, 384a9), “福州康山契穩法寶大師. 初開堂有僧問, 威音王已後次第相承, 未審師今一會法嗣何方. 師曰, 象骨擧手龍谿點頭. 問, 圓明湛寂非師旨, 學人因底却不明. 師曰, 辨得未. 僧曰, 恁麽卽, 識性無根去也. 師曰, 隔靴搔癢.”
  18. 19)자주(往往) : 선어록에 나오는 ‘왕왕往往’이라는 표현은 ① 자주, ② 가끔 두 용례가 있으니 문맥을 잘 살펴서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19. 20)『洪州百丈山大智禪師語錄』(X69, 6c3)에 나오는 고사로 선문에서 많이 인용된다. “수행을 많이 한 사람도 인과에 떨어지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떨어지지 않는다.”고 잘못 대답한 과보로 여우의 몸을 받았다는 이야기. 정답은 “인과에 어둡지 않다.(不昧因果)”라고 한다.
  20. 21)안신입명安身立命하는 경지 : 육체를 편안하게 하고, 목숨을 천명에 맡기는 경지.
  21. 22)대원각해大圓覺海 : 완전한 깨달음. 법성종의 교학 이론에 의하면 ‘원각’은 인연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연적으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닌 것으로, 이것은 중생들이 본래 간직한(本有) 바탕으로 불생불멸한다고 한다. ‘원각’을 주제로 한 경전으로 『원각경』을 꼽을 수 있다. 『화엄경』에서는 ‘일심一心’으로도 표현함.
  22. 23)오탁五濁 : 겁탁劫濁(시대의 혼탁), 견탁見濁(사상의 혼탁), 번뇌탁煩惱濁(각종 번뇌의 혼탁), 중생탁衆生濁(중생의 자질의 혼탁), 명탁命濁(수명의 혼탁). 오탁 사상은 『구사론』, 『아미타경』 등등에도 나오지만 한국에는 『법화경』 「방편품」(T9, 7b22)을 통해 이 내용이 많이 알려져 있다.
  23. 24)향상向上하는 본분本分의 진여眞如 : ‘향상’은 ‘끝없는 초월’의 뜻이다. 예를 들어 향상일로向上一路라고 하면 ‘끝없이 초월해 나아가는 외길’이라는 뜻이다. ‘본분’은 ‘자기 자신에게 본래 간직된 몫’ 또는 ‘천부적으로 나에게 부여된 몫’이라는 뜻으로 ‘신훈新熏’과 상대가 되는 개념이다. 법성종에 속하는 화엄교학이나 남종선 사상에서는 ‘진여’는 본분이지 결코 신훈이 될 수 없다고 한다. 선문禪文의 해독에서는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진여’는 범어 ‘tathātā’의 한역어漢譯語이다. 이 용어는 불교의 역사와 문헌의 문맥 속에서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그것을 다 소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데, 여기서는 본 번역자가 이해하고 또 본 번역에서 사용하는 ‘진여’의 의미를 소개하는 것에서 그치고자 한다. “진여란, 언어나 사유로 해석하기 이전에 자신에게 즉자적으로 주어져 있는 ‘진실한 그 무엇’을 뜻한다.”
  24. 25)이하의 이야기는 『臨濟錄』 「시중 11」(T47, 501c28)에 나온다.
  25. 26)빈 이름 : 원문은 ‘공空’인데, 『臨濟錄』(T47, 502a1)에는 ‘공명空名’으로 표기. 본 번역은 『임제록』에 따랐다.
  26. 27)진공의 한 구멍(眞空一竅) : 일규一竅는 ‘커다란 구멍’이라는 뜻. 진여眞如에서 진眞·속俗, 유위有爲·무위無爲의 모든 법이 나오므로, 진여를 ‘커다란 구멍’에 비유한 것임. ‘묘유삼요妙有三要(묘유의 삼요)’와 짝이 되는 용어. 주 59 참조.
  27. 28)이 만남에 대해서는 본 번역서의 「20. 달마의 삼처전심」 중에서 제2처에 자세히 나오니 참조 바람.
  28. 29)〔 〕 안의 부분은 『선문수경』의 본문에는 없다. 그러나 ‘임제삼구’를 온전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꼭 알아두어야 하기 때문에 『임제록』 원문에 의거 보충한다. 『臨濟錄』(T47, 502a1), “如眞正學道人, 念念心不間斷. 自達磨大師從西土來, 秖是覓箇不受人惑底人. 後遇二祖, 一言便了, 始知從前虛用功夫.”
  29. 30)본 바 : 원문은 ‘견처見處’. 『임제록』 곳곳에 “금일산승견처今日山僧見處” 또는 “금일산승용처今日山僧用處”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때의 ‘산승’은 ‘산골 중’이라는 뜻으로 임제 선사가 자신을 낮추는 겸양어이다. ‘견처’는 ‘본 바’ 또는 ‘안 것’ 등의 뜻이다.
  30. 31)이 부분은 많은 번역서에서 오류를 범하는 곳이다. “산승의 금일 견처는 불조와 다름이 없다.”로 번역하는 것은 오역이다. 이렇게 번역하면 임제 선사 스스로가 자신의 견처가 불조와 동등하다고 뽐내는 말이 된다. 『임제록』에 보이는 임제 선사의 인격은 그렇지 않다. 매우 겸손한 수행자이다. 자신을 ‘산승山僧’이라고 겸칭하는 것부터가 그렇다. “지금 나 임제에게 질문을 하고 있는 당신이야말로 우리 선가에서 그렇게 존중하는 부처나 조사와 비교해서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남에게서 찾지 말고 자신을 살피라는 것이다. 아래의 주에 나오는 생략 부분을 함께 읽어 보면 뜻이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선사들이 가려는 세상』(신규탁, 서울: 장경각, 1998, pp.213~214) 참조.
  31. 32)해설 : 백파 선사 자신의 해설. 일종의 평창評唱임.
  32. 33)인연을 따르는 속성(隨緣義)과 불변하는 속성(不變義) : 백파 선사는 『대승기신론』에서 ‘일심一心’을 설명하는 논리를 채용하여 임제 선사의 말을 해석하고 있다. 『대승기신론』에서는 대승의 성립 근거를 ‘일심’에서 찾고 있으며, 이 ‘일심’을 대승의 법法(dharma)과 의義(artha)의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대승의 의義(artha)에는 ‘인연을 따르는 속성’과 또 어떤 조건 속에서도 ‘불변하는 속성’이 있음을 바닷물의 ‘파도’와 ‘축축한 성질’에 각각 비유하고 있다. 주 130 참조.
  33. 34)백파 선사는 『대승기신론』의 설을 수용하여 진여의 ‘불변의’와 ‘수연의’의 두 속성을 구분했고, 다시 ‘진공묘유’에서 진공을 ‘불변의’에, 묘유를 ‘수연의’에 각각 짝짓고 있다.
  34. 35)제1구 :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에 나오는 「4. 의리선 3구 게송」 참조. 이하에 나오는 제2구와 제3구도 마찬가지.
  35. 36)조사와 부처 : 『臨濟錄』에는 ‘조불祖佛’로 되어 있다. 본 번역은 『임제록』에 따랐다.
  36. 37)조사선 : 달마 조사가 전한 선.
  37. 38)여래선 : 경전 속에서 전하는 선. 아함부 등의 경전은 물론 『화엄경』을 비롯한 각종 대승 경전에서 소개되는 각종 삼매가 다 이런 여래선에 속한다.
  38. 39)의리선 : 경전에 나오는 선 수행도 아니고, 그렇다고 달마 조사가 전한 남종선도 아닌 것으로, 그저 이론적으로 따지는 선.
  39. 40)이 부분도 『臨濟錄』(T47, 502a5)의 내용 그대로임.
  40. 41)허공·수면·진흙에 도장을 찍는다고 했는데, 허공은 질료적인 요소가 전혀 없고, 수면은 그래도 물결이 일고, 진흙은 물렁하지만 자욱이 남는다. 일체의 사량분별 등 흔적이 없는 것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사용한 비유이다.
  41. 42)세 종류의 도장 비유를 상근기·중근기·하근기에 각각 짝짓는 발상은 『大慧普覺禪師法語』(T47, 894b17)에도 보인다.
  42. 43)전혀 없어서 : 이 구문은 ‘了無∼’의 용법. ‘∼가 전혀 없다’의 뜻.
  43. 44)부처와 조사 : 백파 선사는 ‘불조佛祖’라 인용했는데, 『臨濟錄』에는 ‘조불祖佛’로 표기. 임제 선사의 의도는 ‘부처님’보다도 ‘조사’를 더 높이 치려고 그랬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남종선에서는 ‘여래선’보다도 ‘조사선’을 더 높이 친다.
  44. 45)위앙종과 법안종 : 남종선을 오가칠종으로 분류하는데, 위산 영우와 앙산 혜적을 으뜸으로 하는 위앙종, 임제 의현을 으뜸으로 하는 임제종, 조산 본적과 동산 양개를 으뜸으로 하는 조동종, 운문 문언을 으뜸으로 하는 운문종, 법안 문익을 으뜸으로 하는 법안종이 5종이고, 송대에 임제종이 황룡파와 양기파로 나뉘어 7종을 이룸. 5종의 종파의식은 당말 송대 이후에 생긴 것임. 당대唐代에는 그런 의식이 없었음.
  45. 46)삼현三玄 : 이 용어는 『임제록』에 나오기는 하는데, 임제 선사 자신의 구체적인 설명은 없다. 이 용어가 나오는 전후 문맥을 통하여 독자들이 짐작하는 수밖에 없다. 다음을 참조하기 바람. 『臨濟錄』(T47, 497a15), “上堂. 僧問, 如何是第一句. 師云, 三要印開朱點側. 未容擬議主賓分. 問, 如何是第二句. 師云, 妙解豈容無著問, 漚和爭負截流機. 問, 如何是第三句. 師云, 看取棚頭弄傀儡. 抽牽都來裏有人. 師又云, 一句語須具三玄門, 一玄門須具三要. 有權有用, 汝等諸人. 作麽生會. 下座.”
    [번역] 임제 선사가 상당하자 어떤 승려가 물었다. “무엇이 제1구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삼요三要의 도장을 찍었다가 떼니 붉게 찍힌 한 점 한 획이 선명하게 드러나, 사량분별할 것도 없이 주체와 대상이 드러난다.” 그 승려가 물었다. “무엇이 제2구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진리의 분상에서 보면) 묘희妙喜가 무착無着의 질문을 어찌 허용하겠는가만, 구화漚和를 베푸는 입장에서 ‘(번뇌의) 물결을 끊어 버리는 기틀(截流機)’을 어찌 저버리겠는가?” 그 승려가 물었다. “무엇이 제3구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무대 위에서 움직이는 꼭두각시를 보아라. 그 움직임은 모두 뒤에서 줄을 당겼다 놓았다 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 선사가 또 말했다. “1구에 삼현문三玄門을 갖추고 있고, 일현문一玄門에 삼요를 갖추고 있다. 방편(權)도 있고 작용(用)도 있으니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러고는 자리에서 내려왔다.
    예부터 현중현玄中玄(理)·구중현句中玄(智)·체중현體中玄(行)으로 나누고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후인의 해석이고, 임제 선사 자신의 의도와 과연 일치하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음. 참고로, 백파 선사는 ‘삼현’을 ① 用中玄, ② 體中玄, ③ 玄中玄으로 ‘해석’한다. 구체적인 사례는 「14. 『금강경』 4구게에 배당」의 첫째 문단 참조.
  46. 47)유有 : 이때의 유有는 ‘묘유妙有’가 아님을 나타냄.
  47. 48)공空 : 이때의 공空은 ‘진공眞空’이 아님을 나타냄.
  48. 49)자기를 존귀하게 여기는 티(尊貴頭角) : 석가세존 출생 후의 첫 말씀이라고 하는 “天上天下, 唯我獨尊”에서처럼 자기를 존귀하게 여김이 오히려 티가 된다는 말. 「7. 말후구와 최초구의 구별」 주 123 참조. ‘두각頭角’은 원래는 야수의 뿔을 의미하는데, 밖으로 ‘삐져나오는 것’의 뜻. 경우에 따라서는 주 105처럼 두각頭角 대신 ‘알음알이(解)’를 붙여 ‘존귀해尊貴解’로도 표기. 오래된 사당의 재처럼 불씨는 물론 온기조차 완전히 식듯이 ‘자기’라는 티가 온전하게 사라지지 못함을 비판하는 말. 임제종에서는 일체의 사량분별을 완전히 놓아 버릴 것을 주문한다. 해인사의 성철 선사가 보조 선사의 선사상을 비판하는 것도 바로 이런 맥락이다.
  49. 50)‘진공’ 속에 (있는) 사람 : 꼭두각시를 움직이는 무대 뒤에서 조정하는 사람을 지칭. 여기서의 ‘진공’은 꼭두각시를 말함. 다음 장에 나오는 「4. 의리선 3구 게송」 중에서 제3구에 해당함.
  50. 51)임제의 3구句에 대해서는 환성 지안 선사의 『禪門五種綱要』(H9, 459c)에 “風法師云……”으로 소개되어 있다. 백파 선사가 『선문오종강요』에서 이 대목을 인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51. 52)“如次三禪, 故云玄要在句.” 이 부분은 제목이 아니고, 제목을 설명하는 지문임. 「4. 의리선 3구 게송」 결론 부분의 ‘염거’에 나오는 ‘바람 법사’의 말 참조.
  52. 53)이 대목은 『臨濟錄』(T47, 497a15)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上堂. 僧問, 如何是第一句. 師云, 三要印開, 朱點側, 未容擬議, 主賓分.”
  53. 54)거평擧評 : 번역자가 임의로 ‘거평’이라고 과목을 붙였다. 『선문수경』에서 백파 선사 자신의 해설은 ‘解曰’로 시작된다. 그런데 이 부분은 ‘解曰’이 없다. 동국대학교 도서관 소장 목판본에 한 자字 칸을 내려서 시작하는 것으로 볼 때, 임제의 3구에 대해 백파 선사가 몸소 코멘트를 붙인 것임은 분명한데, 형식으로 볼 때에 타인의 말을 거론하여 평한 것이기 때문에 ‘거평’이라고 과목을 붙였다. 즉, 전반부에서는 ‘바람 법사’가 한 말을 ‘거론擧論’했고, 후반부에서는 그 말에 대해 ‘평창評唱’을 했다. 선문禪文을 강의하는 형식의 일종임. 부분은 백파의 하어下語임.
  54. 55)바람 법사(風法師) : 『선문강요집』 「삼성장三聖章」과 「이현화二賢話」(H6, 850b~852c)에 나오는 가상의 인물. 「삼성장」은 ‘청풍淸風 장로’와 ‘보름달 큰스님(皓月上人)’ 사이의 문답 형식으로, 「이현화」는 ‘월 선객月禪客’과 ‘바람 법사(風法師)’의 문답 형식을 빌려, 각각 임제의 3구를 설명하고 있다.
  55. 56)바람 법사 운운하는 내용은 고려 때에 만들어진 『선문강요집』(H6, 851b)과 환성 지안의 『선문오종강요』(H9, 459c)에 각각 나옴. 이하에서 “바람 법사(風法師)” 운운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임.
  56. 57)사조용四照用 : ① 먼저 관조(照)하고 나중에 작용(用)하는 경우, ② 먼저 작용(用)하고 나중에 관조(照)하는 경우, ③ 관조(照)와 작용(用)을 동시에 모두 하는 경우, ④ 관조(照)와 작용(用)을 모두 안 하는 경우. 불교에서는 인도에서부터 ‘絶四句, 離百非’의 경우의 수를 모두 매개해서 설명해야 완전한 설명이라고 한다. 이 대목도 그런 전통을 따른 것임.
    참고로 ‘관조(照)’는 스승이 상대의 기량을 잠자코 살펴보는 지도 방법이고, ‘작용(用)’은 스승이 상대의 기량에 맞추어 언어나 행동으로 지도하는 방법이며, ‘막음(遮)’이란 상대의 언행 일체를 부정하는 지도 방법임.
  57. 58)삼요三要 : ① 대기원응大機圓應, ② 대용직절大用直截, ③ 기용제시機用齊施. 뒤에 나오는 주 144의 본문 참조.
  58. 59)향상하는 한 구멍(向上一竅) : 위의 주 27에서도 나왔듯이, ‘한 구멍(一竅)’은 ‘진여’를 비유한다. 그런데 그 진여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 초월해 간다. 초월해 간다는 그 사실마저 초월해 간다. 이렇게 계속 초월해 가는 것이 ‘향상向上’이다.
  59. 60)조사선을 알아차리다 : 원문은 ‘회득조사선會得祖師禪’. ‘會得’의 해석이 문제인데, ‘동사+得’에서의 ‘得’은 보조동사이다. 조자助字로 보아 해석을 안 하는 학자도 있다.
  60. 61)제2구 : 이 대목은 『臨濟錄』(T47, 497a16)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問, 如何是第二句. 師云, 妙解豈容無著問, 漚和爭負截流機.”
  61. 62)묘희妙喜가 무착無着의 질문 : 『임제록』에는 “묘해妙解”로 표기. 묘희는 문수보살. 무착(821~900)은 당나라 한주 문희文喜 선사. 함통 2년(862) 홍주 관음원에서 앙산 혜적 선사를 만나 심요心要를 깨쳤다 한다. 문수와 무착 두 사람이 중국 오대산에서 대화를 나누었다는 고사가 『宋高僧傳』 권20 「唐代州五臺山華嚴寺無著傳」(T50, 836c5)에 실린 뒤로, 여러 선 문헌에 이 고사를 소재로 많은 법 거량에 등장한다. 대표적으로 『碧巖錄』 35칙 본칙(T48, 173b29)의 다음 이야기가 있다.
    문수가 무착에게 요즈음 어디에 있다가 왔느냐고 묻자, “남방에 있다가 왔습니다.”라고 대답한다. 문수가 또 “남방의 불법은 어떻게 유지되는가?”라고 묻자, 무착은 “말법 시대에 사는 비구들이 계율을 잘 안 지킵니다.”라고 대답한다. 문수가 또 “대중은 몇 명이나 되는가?” 하자, “한 3백 내지는 5백 됩니다.”라고 대답한다. 이번에는 무착이 문수보살에게 묻는다. “이곳은 어떻습니까?” 문수보살이 대답한다. “성인과 범부가 같이 살고, 용과 뱀이 뒤섞여 산다.” 대중은 얼마나 되느냐고 묻자, “前三三, 後三三.”이라고 답한다. “前三三, 後三三.”의 해석은 구구하다. 분명한 것은 ‘셀 수 없이 많다’는 뜻이다.
  62. 63)구화漚和 : 범어 upāya를 음역한 것으로 ‘방편’이라는 뜻.
  63. 64)『禪門綱要集』 「二賢話」(H6, 851c); 『禪門五宗綱要』(H9, 460a).
  64. 65)중구中句 : 유有와 무無를 떠난 중도中道의 말씀.
  65. 66)제3구 : 이 대목은 『臨濟錄』(T47, 497a18)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問, 如何是第三句. 師云, 看取棚頭弄傀儡, 抽牽都來裏有人.”
  66. 67)보아라 : 원문은 ‘看取’인데, v+取의 용례로서 ‘取’는 조자이다.
  67. 68)『禪門綱要集』 「二賢話」(H6, 852b3); 『禪門五宗綱要』(H9, 460a5). 이 말의 유래는 『臨濟錄』(T47, 498b10)이다.
  68. 69)유有·무無의 3구句 : ‘유有’의 입장에서 말하거나 또는 ‘무無’의 입장에서 말하는 3구.
  69. 70)(진여를) 신훈하고 (범부와 성인을) 나누는 3구(新薰隔別三句) : 신훈新薰은 ‘훈습의 방법을 사용하여 진여를 새롭게 조성한다’는 뜻이고, 격별隔別은 ‘수준을 나누어 차별한다’는 뜻이다. 진여자성은 본래 자신에 간직되어 있건만 새롭게 훈습하여 만들려 하고, 부처니 중생이니 하는 수준을 나누는 3구임.
  70. 71)회신멸지灰身滅智 : 몸을 재처럼 싸늘하게 하여 일체의 감각 작용을 정지시키고 또 지혜의 작용을 없앤다는 뜻. 성문승이나 연각승에서는 이것을 최고의 경지라고 하지만, 대승에서는 이런 수행을 경계함.
  71. 72)임제 선사의 결론 부분이므로, 위의 제1구·제2구·제3구와 구별하기 위하여 번역자가 과목을 새로 내었다.
  72. 73)종승宗乘 : 제일로 신봉하는 가르침. 자기 종파의 가르침을 ‘종승宗乘’이라 부르고 남의 종파의 가르침을 ‘여승餘乘’이라 부름.
  73. 74)무릇 종승宗乘을 거량擧量하여 제창提唱할 경우에는 : 이 부분은 『임제록』에는 없다. 백파 선사가 삽입한 부분이다.
  74. 75)관조(照)도 있고 작용(用)도 있다 : 『임제록』 원문에는 본 번역문에 해당하는 ‘유조유용有照有用’ 4자가 없고, 그 앞의 ‘有權有實’이 ‘有權有用’으로 되어 있다.
  75. 76)『禪門綱要集』 「二賢話」(H6, 851b); 『禪門五宗綱要』(H9, 460b).
  76. 77)이하는 백파 선사의 해설임. 독자들은 백파의 해설 방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임제 선사가 한 설법을 먼저 인용하고, 다음에 그것에 대한 옛사람의 이야기를 염거拈擧하고, 그런 다음에 마지막으로 임제의 설법과 ‘바람 법사’의 이야기를 대상으로 백파 자신의 해설을 붙인다. 이것이 일종의 선문禪文 해석 방법임.
  77. 78)각각의 한 구 : 위에서 임제 선사가 거론한 제1구·제2구·제3구 각각의 구句를 지칭. 제1구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님.
  78. 79)따로 일삼을 것이 전혀 없다 : 원문은 ‘갱무여사更無餘事’. 이때 ‘更無∼’는 ‘절대로 ∼이 아니다’라는 강조 부정 어법이고, ‘餘事’는 ‘달리 (수행하느라 무엇인가를) 일삼다’라는 뜻.
  79. 80)일부러 (일삼을 게) 절대로 없다 : 원문은 ‘별무특지別無特地’. ‘特地’는 ‘일부러’, ‘공연히’, ‘군더더기로’라는 뜻의 당송唐宋대의 구어. ‘別無∼’는 ‘절대로∼가(이) 없다’는 강한 부정 어법.
  80. 81)달리 생각할 것도 없이 : 원문은 ‘직하直下’. 당송唐宋대의 구어로 ‘당장에’, ‘바로 밑에서’를 뜻하는 정도 부사임. 이 문장에서는 문맥에 따라 뜻을 풀어서 번역했다.
  81. 82)핵심을 잡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 원문은 ‘정당부득定當不得’. 이때의 ‘定當’은 ‘핵심을 잡다’라는 뜻이고, ‘∼不得’은 ‘∼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표시함. 이런 용례는 『벽암록』, 『고존숙어록』 등의 선 문헌에 많이 나온다.
  82. 83)임제종 사람들이~사용하는 표준 : 원문은 ‘臨濟宗說法之標準’. 임제종에 속한 선사들이 설법할 때에 사용하는 표준이라는 말.
  83. 84)육조 대감六祖大鑑 : 638~713. 성은 노盧씨. 광동성 신주 신흥현 출생. 기주 황매현 동선원의 5조 홍인弘忍 선사는 노盧 행자에게 의발을 전수하여 선종의 6대 조사로 인가하고 ‘혜능慧能’이라 호를 내림. 혜능은 뒷날 광동성 소주와 광주에서 약 40년간 선법을 폈고, 그중 소주 대범사에서 행한 설법을 뒷날 제자들이 편집한 책이 세칭 『육조단경』인데, 한자 불교권에 큰 영향을 끼침. ‘대감大鑑’은 원화10년(815) 당唐 헌종이 내린 시호. 제자로는 남악 회양, 청원 행사, 하택 신회, 남양 혜충 등이 유명함.
  84. 85)『육조단경』의 내용과는 약간 다르다. 『六祖大師法寶壇經』(T48, 359b29), “一日, 師告衆曰, 吾有一物, 無頭無尾, 無名無字, 無背無面. 諸人還識否.” 이 질문에 대해서 하택 신회 선사는 “是諸佛之本源, 神會之佛性.”이라 대답하였고, 남악 회양 선사는 “設似一物, 卽不中.”이라 대답했다고 한다. 백파 선사는 이 구절을 『금강경오가해』의 함허 「설의說誼」(H7, 10c)에서 인용한 듯한데, 그것과도 약간의 자구 출입은 있으나 의미에는 차이가 없다. 함허는 “有一物於此”를 해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六祖云, 有一物, 無頭無尾, 無名無字, 上柱天下柱地, 明如日, 黑似漆. 常在動用中, 動用中收不得者是.”
  85. 86)원각圓覺 :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깨달음. 그 깨달음이란 드넓고 깊어서 그 속에는 모든 것이 다 간직되어 있으므로 ‘바다’에 비유한 것이다.
  86. 87)『景德傳燈錄』 권12 「臨濟義玄條」(T51, 290c22)에서, 설봉 의존 선사가 “臨濟大似白拈賊”이라고 하어下語한 바 있음. 백파 스님이 이 부분을 두고 하는 말인 듯.
  87. 88)천하 사람들을 짓밟았다 : 이 표현은 남악 회양 선사가 제자 마조 도일에게 그의 법손들이 훗날 온 천하에 널리 퍼질 것을 예언하면서 한 말이다. 엄청난 찬사인데, 백파 선사는 이 찬사를 임제 선사에게도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답쇄천하踏殺天下’에서 ‘踏殺’의 번역에 오류가 종종 보인다. 이 경우의 ‘殺’은 ‘죽이다’라는 뜻은 없고 동사의 뒤에 붙어서 의미를 강조하는 조자助字임.
  88. 89)이 말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華嚴經疏』 권12(T35, 598c4), “情隔則法身成異, 心通而玄旨必均, 云云自他, 於佛何預.” 이 구절은 80권본 『화엄경』 「광명각품」에 나오는 문수보살의 게송 즉, “此身無所從, 亦無所積聚, 衆生分別故, 見佛種種身.”에 대한 해설이다. 백파 선사는 “於佛何預”에서 ‘佛’ 자를 ‘我’ 자로 바꾸어서 인용하고 있다. 본 번역에서는 청량 국사의 『화엄경소초』(往字卷, 27하)를 준용했다. 청량 소초를 주무르던 구암사 사문 백파 선사의 솜씨가 여실히 발휘되는 대목이기 때문에 좀 장황하지만 자세하게 주각을 단다. 운허 스님은 문수의 게송을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이 몸은 어느 곳서 온 데도 없고 / 쌓이고 모여 된 것이 아니지만 / 중생들이 분별심을 내는 연고로 / 가지가지 부처님을 보게 되나니.”(이운허 역, 한글대장경42 『화엄부3』, 1966, p.243).
  89. 90)종자기鍾子期 : 상대의 심정을 서로 잘 알아주는 관계를 뜻함. 『열자』 「탕문」에 나오는 고사. 백아는 거문고를 잘 타고, 종자기는 소리를 잘 들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소리를 알아줄 수 있는 사람(知音)’이 없다고 한탄하면서 거문고 줄을 끊었다고 한다.
  90. 91)도중사途中事와 가리사家裏事 : ‘도중사’는 점차적인 수행을 통해서 갖추어 가는 사안. ‘가리사’는 자기 자신 속에 갖추어져 있는 사안.
  91. 92)긴 세월(古)과 이 순간(今) : 문맥에 따라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 ① 본분本分 또는 본유本有가 시간을 초월하여 항상恒常하는 상태를 긴 세월(古)이라 하고, 한편 지금 현재 비로소 만들어지는 것 즉 신훈新熏하는 상태를 이 순간(今)이라 함. ② 긴 시간을 통해 수행하는(修) 것을 말할 때에 긴 세월(古)이라 하고, 한편 지금 당장에 깨닫는(悟) 것을 말할 때에 이 순간(今)이라고 함. 선문답에 상대방이 ‘긴 세월’ 일을 물으면, ‘이 순간’의 일은 어떠냐고 질문하고, 다시 ‘이 순간’의 일을 물으면, ‘긴 세월’ 일을 묻는 식의 문답이 많이 등장함. 주 129 참조.
  92. 93)증득(證)과 교화(化) : 자신의 깨달음을 위하는 것을 ‘증득(證)’이라 하고, 타인의 깨달음을 돕는 것을 ‘교화(化)’라 한다.
  93. 94)잡아들임(把)과 놓아줌(放) : 선문답에서 상대방의 의견에 따라 주는 것을 ‘놓아줌’이라 하고, 반대로 상대방의 입장을 부정하고 고쳐 주는 것을 ‘잡아들임’이라고 한다. 문맥에 따라 그 의미를 잘 살펴야 한다.
  94. 95)진흙을 주물러 금덩이를 만든다 : 원문은 ‘把土成金’. ‘握土成金’, ‘令土成金’, ‘撮土成金’, ‘點土成金’ 등으로도 쓴다. 보잘것없는 것을 가지고 귀중한 것을 만든다는 뜻.
  95. 96)「4. 의리선 3구 게송」을 지칭. 거기에서는 제1구를 먼저 말하고 다음에 제2구, 그 다음에 제3구 순서로 기술했다. 그런데 이곳에서 도표로 그리는 순서는 역순으로 제3구를 먼저 하고 다음에 제2구, 나중에 제1구를 한 것을 말한다. 도표를 볼 때에 유념하기 바람.
  96. 97)어떤 우매한 이(一愚) : 뒤에 나오는 주 104 참조.
  97. 98)삼처전심三處傳心 : 선종에서 만든 전설로서, ① 영산회상에서 하늘에서 떨어진 꽃을 들어 보이자 가섭이 미소 지은 일, ② 다자탑 앞에서 가섭에게 자리를 내어주신 일, ③ 사라쌍수 아래서 관 밖으로 두 발을 내보이신 일.
  98. 99)용담 조관龍潭慥冠 : 1700~1762. ‘월저 도안(태고 9세)→설암 추붕(태고 10세)→상월 새봉(태고 11세)→용담 조관(태고 12세)→규암 랑성(태고 13세)……순천 선암사의 경운 원기(태고 20세)’로 법맥이 전승된다. 용담 선사는 22세에 구례 화엄사에서 상월 선사를 수년간 모셨고 영호남의 명사들을 찾아 선과 교를 겸수했다. 33세에 함양군 지리산에 있는 영원암에 가서 가은암을 짓고 일생을 마치려 했으나, 학자들의 간청으로 여러 곳에서 『선문염송』의 요지와 원·돈의 묘법을 선양하였다. 저서로는 『용담집龍潭集』 1권(H9, 677b~695b)이 전한다.
  99. 100)출전 : 미상.
  100. 101)혜암 윤장惠庵玧藏 : 위에 나오는 용담 조관 선사의 제자. 법계를 보면, ‘용담 조관→혜암 윤장→기암 이준畸庵以懏→제월 의경霽月義敬→응암 치영應庵致永→진응 혜찬震應慧燦(1873~1941, 태고 17세)→철운 종현鐵雲宗玄’으로 전승된다. 선·교를 겸비한 호남 일대의 명문이나 철운 장로 이후 법맥이 끊어졌음.
  101. 102)출전 : 미상.
  102. 103)연담蓮潭 : 1720~1799. 법명은 유일有一. 18세에 출가. 해인사 호암 체정 문하에서 선 수행. 영허·용암·설파·풍암·영해 등을 따라 교학에 통달. 전북 장흥 보림사에서 입적. 사집 사기를 비롯하여 『원각경』, 『능엄경』, 『금강경』 등의 사기 및 『화엄경』 현담기, 유망기 및 『선문염송집』 착병 등 방대한 사기를 남겼고, 『연담임하록』(전5권)이 전한다. 호암 체정(태고 11세)의 제자로 설파 상언(태고 12세)과 연담 유일(태고 12세)이 이름을 날렸다. 다시 설파의 승손 제자로 백파 긍선(1767~1852, 태고 15세)이 이름을 날렸다. 이 문장으로 보아, 백파 선사가 연담 노스님과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03. 104)어떤 우매한 이(一愚) : 『禪門綱要集』 「一愚說」(H6, 863b~856a)에 나오는 가상의 인물. 거기에 이 사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한 노인이 계셨는데 스스로 ‘우매한 사람(愚夫)’이라고 호를 했다. 방안에만 있으면서 고독하게 홀로 지냈다.” 또, “그 사람의 지혜는 따라갈 수 있지만 그 사람의 우매함은 따라갈 수 없다.”
  104. 105)존귀하게 여기는 알음알이(尊貴解) : ‘존귀두각尊貴頭角’이라고도 함. 「3. 향하하는 신훈 삼종선」의 주 49, 주 123의 본문 참조.
  105. 106)영지靈知에 가깝다 : 임제선에서는 알음알이와 영지를 금기시한다. 그런데 ‘영지’라는 개념은 규봉 선사가 하택 신회荷澤神會(670~762)의 선禪 사상을 현창顯彰하면서 하택종과 홍주종을 구별하기 위해서 창안한 개념이다. 이 개념에 대해서는 하택종과 홍주종 서로 간에 종파주의적 오해가 있기 때문에 당대唐代의 선과 송대宋代의 선을 객관적으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 책 참조. 신규탁, 『화엄과 선』 「1. ‘불변’과 ‘수연’의 관계로 회통」(서울: 정우서적), pp.164~189.
  106. 107)출전 : 미상.
  107. 108)깨달음(悟)과 닦음(修) : 백파의 설에 따르면, 본분本分인 불성은 깨달음(悟)과 닦음(修)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불성은 중생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선문수경』에서는 ‘깨달음(悟)→닦음(修)→성불成佛’로 점진적 과정을 거친다는 신훈新熏을 부정하고, 동시에 그런 주장을 하는 기존의 주장들을 비판함.
  108. 109)팔상八相으로 성도하심 : 석가모니의 일생을 여덟 형상의 장면으로 표시한 것. ①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 ② 비람강생상毘籃降生相, ③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④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 ⑤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 ⑥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⑦ 녹원전법상鹿苑轉法相, ⑧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
  109. 110)마음이 곧 부처이다 : 마조 선사가 처음 한 말로서, 선가의 대표적인 법문이 되어 많은 선사들이 다양한 각도에서 이 말을 사용하게 되었다. 『古尊宿語錄』 권1(X68, 3c), “上堂. 龐居士問, 不與萬法爲侶者是什麽人. 師云, 待汝一口噏盡西江水, 卽向汝道. 又問, 不昧本來身, 請師高著眼. 師直下覷. 士云, 一等沒弦琴, 唯師彈得妙. 師直上覷. 士禮拜, 師歸方丈. 居士隨後云, 適來弄巧成拙. 問, 如何是佛. 師云, 卽心是佛.”
  110. 111)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 이 말을 처음 한 것은 당나라의 조산 본적(840~901) 선사로 알려졌다. 그런데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雲門匡眞禪師廣錄』(T47, 547c11)의 다음 구절이다. “上堂云, 諸和尙子莫妄想. 天是天地是地, 山是山水是水, 僧是僧俗是俗.” 산은 산일 뿐이니, 그것을 가지고 이러니저러니 망상부리지 말라는 것이다.
  111. 112)부여잡을 단서가 없는 사안(沒巴鼻) : ‘巴鼻’는 ‘유래’, ‘근거’의 뜻. 주로 부정어 ‘無’나 ‘沒’ 자를 수반하여 선어록에서는 알음알이를 사용해서는 어떻게 해 볼 틈이나 낌새가 없는 것을 비유함. ‘沒巴鼻’ 또는 ‘無巴鼻’로 사용됨.
  112. 113)한맛의 선(一味禪) : ‘一味’는 ‘一指味’의 준말. ‘일지미’란 한 손가락에 음식을 찍어서 음식 전체의 맛을 아는 것. 직접 맛보는 것이 백 마디의 설명보다 음식 맛을 더 사실적으로 알게 한다. 여기에서 유래하여 구구한 설명이 없이 진리를 직접 체험하게 하는 선이라는 뜻으로 전용.
  113. 114)교화라는 티(敎迹) : ‘화적化迹’으로도 표기. 부처는 중생을 교화하고, 또 우리 중생은 부처에게 교화를 받는다는 집착에 빠지는 것을 ‘티’라고 생각했다. 중생이니 부처니 하는 상을 내지 말고, 또 교화라는 상을 내지 말라고 경계하는 말. 뒤에 나오는 주 123 참조.
  114. 115)지금도 각 문중에서 건당建幢 때에 내리는 「조파祖派」에 이런 전통이 남아 있음. 이 「조파」에 의하면, 초조 달마에서 육조 혜능까지는 ‘대사大師’ 칭호를 붙이고, 그 이후는 ‘선사禪師’라고 칭호를 붙인다. 한편 인도의 초조부터 27조까지는 ‘존자尊者’ 칭호를 붙인다. 단, ‘용수 대사’와 ‘마명 대사’는 예외임.
  115. 116)말후구末後句 : 어떤 말을 했을 경우, 그 말이 지향하는 궁극적 의도.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자비심으로 이런저런 말을 많이 하여 자취를 많이 남긴다. 그 말에 빠지면 말후구가 도리어 독이 되지만, 그 궁극적 의도를 알면 약이 된다.
  116. 117)한없는 지경까지 이르러 : 원문은 ‘직득무한直得無限’. 여기에서의 ‘直得∼’은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다’의 뜻.
  117. 118)애오라지 : 원문은 ‘단단單單’. 당송唐宋대의 구어.
  118. 119)최초구最初句 : 상대방의 근기를 고려하지 않고 본분의 이치를 단도직입적으로 제시하는 말. 겉으로 보면 말이 안 되는 듯하지만, 실은 속내를 가장 잘 설명한다.
  119. 120)진흙탕에 빠지는 : 부처님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때로는 흙을 뒤집어쓰시기도 하고, 때로는 물을 뒤집어쓰시기도 한다. ‘타니대수拖泥帶水’라고도 표기. 진리의 차원에서는 말이 있을 수 없지만, 아손兒孫이 잘못될까 염려하여, 자신에게 똥물 튀기는 것을 감수하고 방편을 사용하는 것.
  120. 121)한 방 때리다 : 원문은 ‘일방타쇄一棒打殺’. ‘打殺’에서의 ‘殺’는 강조를 나타내는 조자助字. ‘죽이다’의 의미는 없다.
  121. 122)『雲門匡眞禪師廣錄』 권중(T47, 560b16), “擧. 世尊初生下, 一手指天, 一手指地, 周行七步, 目顧四方云, 天上天下, 唯我獨尊. 師云, 我當時若見, 一棒打殺, 與狗子喫却, 貴圖天下太平.”
  122. 123)교화라는 티(化迹) : ‘敎迹’이라는 용어로도 사용. 앞에 나오는 주 114 참조.
  123. 124)『金剛般若波羅蜜經』(T8, 748c24), “時長老須菩提, 在大衆中, 卽從座起, 偏袒右肩, 右膝著地, 合掌恭敬, 而白佛言. 希有世尊, 如來善護念諸菩薩, 善付囑諸菩薩.” 한글 번역은 다음의 종단 표준본으로 대신함. 『조계종 표준 한문·한글본 금강반야바라밀경(독송본)』(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2007, pp.3~5.) 겉으로 보면 세존께서 아직 한 말씀도 안 하셨는데, 수보리가 세존을 찬탄한 것은 무슨 사연일까? 백파 선사는 바로 이 부분을 거론하는 것임.
  124. 125)구곡 각운龜谷覺雲 선사先師 : 고려 말기의 선승. 이곳의 구곡 선사는 보조 지눌의 제자인 진각 혜심의 제자와 동명이인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태고 보우→환암 혼수→구곡 각운→벽계 정심→벽송 지엄→부용 영관’으로 이어지는 계보의 구곡 각운 선사를 지칭. 백파 스님이 ‘선사先師’라는 칭호를 붙인 것은 본인의 직계 스승이기 때문이다. 태고 문손이라는 계보의식이 백파 당시에도 살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공민왕(재위 1351~1374)이 구곡 각운 선사를 흠모하여 「달마절로도강도達磨折蘆渡江圖」를 써 주었고,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숭신진승 근수지도 도대선사大曹溪宗師禪敎都摠攝崇信眞乘勤修至道都大禪師’라는 법호를 내렸다.
  125. 126)『염송설화집』에서 각운은 이렇게 말한다. “특히 ‘최초구’와 ‘말후구’가 같지는 않지만 실은 하나라는 뜻이다.”(김월운 역, 『선문염송·염송설화』 1 「37. 쌍부雙趺」, 서울: 동국역경원, 2005, p.227).
  126. 127)‘말후구’라도 그 말의 흔적에 휘둘리지 않고 그 말의 궁극적 의도를 알아차리면, ‘최초구’처럼 우리들의 본래면목을 체험하게 해 준다. 이것이 백파의 입장이다.
  127. 128)이 점은 종문宗門의 극칙極則이다. 구곡 각운 시대에 벌써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삼처전심에 대하여 헤아리는 이가 매우 많다. 어떤 이는 ‘오悟’·‘수修’·‘증證’ 세 단락으로 배대하기도 했는데, ‘오’·‘수’·‘증’이란 닦아 나아가는 이가 습기를 연마해 다스리는 일이지, 교외별전의 일은 아니다.”(김월운 역, 『선문염송·염송설화』 1 「37. 쌍부雙趺」, 서울: 동국역경원, 2005, p.227).
  128. 129)긴 세월(空劫)과 이 순간(今時) : 주 92 참조. 공겁空劫은 사겁四劫 중의 1겁. 불교에서는 세계의 생성소멸을 성成·주住·괴壞·공空으로 한 주기를 이루며 계속된다고 한다. 공겁이란 ‘괴겁’이 끝나고 다음의 ‘성겁’이 시작되기 이전 사이의 시간을 말한다. 20중겁의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1중겁’은 사람의 수명이 84,000세에서 백 년을 지나면서 1세씩 줄어서 10에 이르고, 다시 백 년마다 1세씩 늘어서 84,000에 이르는 세월이다.
  129. 130)향상하는 본분의~‘인연을 따르는(隨緣) 속성’ : 『대승기신론』에 따르면, ‘일심一心’ 속에는 불생불멸하는 본래 갖추어진 ‘진여’의 속성도 있지만, 거기에는 ‘번뇌’와 화합하는 ‘생성소멸’의 속성도 있다고 한다. 『대승기신론』의 이런 사상은 법성철학의 핵심적인 형이상학으로 화엄종은 물론 남종선의 심성론과 수행론의 근본 철학이 된다. 주 33 참조.
  130. 131)둘 다 잘못~것이기도 하다 : 원문은 ‘雙暗雙明’이다. ‘명明’과 ‘암暗’은 모두 바둑 용어인데, 정석대로 잘 착수한 것이 ‘명明’이고, 그렇지 못한 것이 ‘암暗’이다.
  131. 132)삼처전심 : 순서에 주의를 할 것. ① 다자탑 앞에서의 분반좌, ② 영산회상에서의 염화시중, ③ 사라쌍수 아래에서의 곽시쌍부. 삼처전심에 대한 해석은 여러 설이 있다. 구곡 각운은 『선문염송설화』에서 여러 설을 소개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김월운 역, 『선문염송·염송설화』 1 「37. 쌍부雙趺」(서울: 동국역경원, 2005, pp.227~228) 참조.
  132. 133)살인도殺人刀 : 선승이 수행자를 지도할 때에 상대를 궁지에 몰아 그를 계발시키는 것을 말함. 반대로 상대방을 자유롭게 하여 지도하는 방법을 활인검活人劍이라 한다.
  133. 134)청원 행사靑原行思 : ?~741. 육조 혜능의 법을 계승하여 남악 회양과 더불어 남종선의 양대 산맥을 이룬다. 청원의 문하에 ‘석두 희천→약산 유엄→운암 담성→동산 양개→조산 본적’ 등이 나와 훗날 ‘조동종’을 형성했다. 한편 청원의 문하에 ‘석두 희천→천황 도오→용담 숭신→덕산 선감→설봉 의존→운문 문언’ 등이 나와 훗날 ‘운문종’을 이루었다. 한편 설봉 의존 문하에는 ‘현사 사비→나한 계심→법안 문익’이 배출되어 훗날 ‘법안종’의 전승을 이룬다. 청원 문하에서 3개 종이 배출.
  134. 135)육조 대사의 방계 전법 제자(傍傳) : 임제종에서는 육조의 적자를 남악 회양으로 보고 있다. 조선시대에 이런 의식이 분명 실재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조동종에 대항하던 의식도 이런 기반에서 기인한다.
  135. 136)남악 회양南嶽懷讓 : 677~744. 육조 혜능의 제자로 청원 행사와 더불어 남종선의 양대 산맥을 이룬다. 남악의 문하에서 마조 도일→백장 회해가 나온다. 다시 백장 회해 문하에서 황벽 희운→임제 의현으로 계승되어 훗날 ‘임제종’의 전승을 만들고, 한편 백장 회해 문하에서 위산 영우→앙산 혜적이 출현하여 훗날 ‘위앙종’의 전통을 만들어간다. 남악 문하에서 2개 종이 배출.
  136. 137)백장 회해百丈懷海 : 749~814. 복건성 복주에 있는 백장산에서 거주하면서 선종 고유의 생활 규범을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문하에 위산 영우 및 황벽 희운과 같은 뛰어난 선승이 배출되어 남종선의 위치를 굳건하게 했다.
  137. 138)일삼을 것이 전혀 없음 : 원문은 ‘갱무여사更無餘事’. ‘更無’는 강조 부정어. ‘餘事’에서의 ‘事’는 수행을 지칭. 돈오니 점수니 일체 인위적인 조작이 필요 없는 것을 말함.
  138. 139)황벽 희운黃檗希運 : ?~850. 재상 배휴裵休의 초청으로 그의 임지인 강서성 종릉에서 선법을 널리 폈다. 이때의 설법을 배휴가 『전심법요』라는 이름으로 출간했다. 문하에 임제 의현이 있다.
  139. 140)완유頑有 : 실체로서의 유有. ‘묘유妙有’의 상대어.
  140. 141)상견常見 : 사람은 죽으나, 자아는 없어지지 않으며, 오온은 과거나 미래에 상주불변하여 그 존재가 끊어지는 일이 없다고 고집하는 그릇된 견해.
  141. 142)완무頑無 : 실체로서의 무無. ‘완공頑空’과 비슷한 말로 ‘진공眞空’에 상대하는 의미.
  142. 143)단견斷見 : 만유는 무상한 것이어서 실재하지 않는 것과 같이 사람도 죽으면 몸과 마음이 모두 없어져서 공무空無로 돌아간다고 고집하는 그릇된 소견.
  143. 144)삼요三要 : 앞에 나오는 주 58 참조.
  144. 145)네거리에서 풍류風流를 싸게 파는 것 : 세속에 중생들과 함께하면서 불조의 귀한 말씀을 널리 전하는 것. 『임제록』(T47, 497a9)에 다음과 같은 상당법어가 있다. “어떤 사람은 (인적이 끊어진) 홀로 드높은 산꼭대기에 있으면서도 몸을 벗어나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사람이 많이 다니는) 네거리에 있으면서도 얽매이지 않는다.”
  145. 146)잡화포雜貨鋪 : 『조당집』 「약산조」(K45, 262a23)에 나오는 말로 “석전은 진금포이고, 강서는 잡화포이다.”라는 말에서 유래. ‘진금포’는 순수하게 금만 파는 가게, ‘잡화포’는 이것저것 진귀한 것을 파는 가게. 전자는 순일 무잡하고 고고한 수행 가풍을 의미하고, 후자는 인심 좋고 넉넉한 가풍을 표현함.
  146. 147)실상반야 : 반야에 문자반야·관조반야·실상반야를 세운다. 실상반야는 모든 법의 실상·무상·공적은 반야가 아니나, 반야의 지혜를 내는 것이므로 이렇게 이름.
  147. 148)관조반야 : 모든 법의 실상을 관조함이 반야 지혜의 작용이고, 관조하는 체體인 지혜는 반야이므로 이렇게 이름. 참고로 문자반야는 문자로 나타낸 『반야경』이 반야의 지혜는 아니나, 반야를 전현詮顯(언어로 드러냄)하는 방편이므로 이렇게 이름.
  148. 149)부傅 대사 : 497~569. 양나라 때의 거사로서 성은 부傅씨이고 이름은 흡翕이다. 쌍림雙林 대사 또는 동양東陽 거사라고도 함. 무주 출신이어서 무주 선혜婺州善慧라고도 부름. 한국 독서계에는 『금강경』에 송頌을 붙인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49. 150)부傅 대사의 게송 : 이 게송은 다음을 지칭. 『金剛般若波羅蜜經 五家解說誼』 권하(H7, 107b~c), “遍計妄計因成執, 迷繩爲是蛇. 心疑生暗(闇)鬼, 眼病見空華(花). 一境雖無異, 三人乃見差. 了茲名不實, 長馭白牛車. 依他依他非自立, 必假衆緣成, 日謝樹無影, 燈來室乃明. 名因共業變, 萬像積微生, 若悟眞空色, 翛然去有名(情). 圓成相寂名亦遣, 心融境亦亡. 去來終莫見, 語默永無方, 智入圓成理, 身同法性常, 證眞還了俗, 不廢示津梁.” 대정신수대장경에 실린 『梁朝傅大士頌金剛經』(T85, 8b27)과 대동소이하나, ( ) 안의 3자 정도의 출입이 보인다.
    [번역] 변계소집성허망하게 계교하면 집착에 떨어져 새끼줄을 뱀이라고 미혹하네. 마음에 의심이 생기면 어리석은 귀신이 생기고, 눈병이 나면 허공 꽃을 본다네. 같은 경계라서 다를 것이 없지만, 보는 사람마다 달리 본다네. 이름이란 실없음을 알면 흰 소를 영원토록 부리리라. 의타기성타자에 의지하는 것이지 자립하는 것이 아니니, 반드시 뭇 인연으로 이루어지며, 해가 지면 나무 그림자는 사라지고, 등불을 켜면 실내가 밝아진다네. 이름이란 공업共業으로 인해 변하고, 만상은 극미極微가 모여서 생기지만, 만약 참된 공과 색을 알면, 유연하게 이름에 속지 않으리라. 원성실성형상도 없애고 이름도 버려서 마음이 사라지면 경계 또한 사라진다네. 가고 옴을 끝내 보지 않으면, 말하건 침묵하건 영원토록 자유롭고, 지혜에 잠겨 진리를 완성하면, 몸은 법성法性처럼 영원하고, 진리를 체험하고 허망을 깨치면, 방편 드러냄을 폐지하지 않으리.
  150. 151)전육식인 요별식(前六了別識) : 전육식은 여섯 번째 식識. 안·이·비·설·신·의 등 ‘여섯 종의 식’과 구별하기 위해 ‘전육식’이라고 명칭한 것임. 제6식, 즉 ‘의식’을 지칭. 한편, 모든 식이 모두 대경對境을 요별하는 작용이 있는데, 거칠게 요별하는 것은 전육식에 한한다. 그 요별하는 행상이 거칠므로 특히 전육식을 요별경식이라 한다.
  151. 152)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 3성性의 하나. ‘변계遍計’는 이리저리 억측(周遍計度)한다는 뜻, ‘계탁計度’은 자기의 감정과 욕망에서 시비선악의 차별적 집착을 일으키는 것. 또 이 집착은 일체 사물에 대하여 주관적 색채를 띠고 보는 것이므로 ‘주변周遍’이라 한다. ‘소집所執’은 변계에 의하여 잘못 보이는 대상, 곧 주관의 색안경을 쓰고서 대상을 올바르게 보지 못하고, 언제든지 잘못 분별하는 것을 변계소집이라 한다. 이 능변계能遍計하는 마음이 소변계所遍計의 법을 망령되이 집착할 적에 그 망정 앞에 나타나는 그림자를 변계소집성이라 한다.
  152. 153)제8식 : 제8아뢰야식.
  153. 154)심心 등 : 번역자가 ‘등等’ 자를 첨가한 이유는, 이어지는 백파의 할주割註에 의한 것임. 번역자는 『대승기신론』에 나오는 ‘업상’과 ‘전상’을 합하여 ‘심心’이라 했다고 독해, 즉 ‘등취等取’로 보았음. 「19. 문자를 세우지 않고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켜 본성을 보아 성불한다는 달마의 말씀」 가운데 “왜냐하면 이 ‘삼요三要’는 제8 장식이 셋(업상·전상·현상)으로 나누어진 것이니”에 대한 주 222 참조.
  154. 155)견분見分 : 객관의 사물이 인식하기 전에 적합하도록 주관에 나타나는 영상인 상분相分을 인식하는 작용. 『기신론』의 ‘전상轉相’에 해당.
  155. 156)무명업상無明業相 : 『기신론』에서 말하는 삼세三細의 하나. 아뢰야식의 근본 동상動相, 곧 주관·객관이 대립하기 이전 주관과 객관이 나뉘지 않은 순수한 동적 상태. 이것은 진여가 무명과 화합하여 차별적인 현상을 내게 되는 첫걸음.
  156. 157)전상轉相 : 『기신론』에서 말하는 삼세三細의 하나. 능견상能見相이라고도 함. 무명업상에 의해 생긴 주관적으로 능히 반연하는 견조見照의 작용.
  157. 158)상분相分 : 『대승기신론』의 ‘현상現相’에 해당.
  158. 159)현상現相 : 『대승기신론』에서 말하는 삼세三細의 하나. 경계상境界相의 다른 이름. 주관의 견조見照하는 작용인 능견상能見相이 일어나면, 반드시 이에 대한 객관의 경계상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것이 ‘현상’이다.
  159. 160)의타기성依他起性 : 자기의 원인만으로 나기는 어렵고 반드시 다른 연緣을 기다려서 나는 물심物心의 모든 현상. 유식론에 의하면 백법 중에 94법은 여기에 딸림. 색법은 인연과 증상연에 의하여 생기고, 심법은 4연에 의하여 생긴다고 한다.
  160. 161)향상하는 한 구멍, 본분의 진여 : ‘향상일규’도 ‘대총상법문체’이며, ‘본분진여’도 역시 ‘대총상법문체’임.
  161. 162)일법계대총상법문의 바탕 : ‘일법계’는 진여를 말한다. ‘일一’은 절대의 일, ‘법法’은 우주 만유, ‘계界’는 체성體性·차별差別·인본因本의 세 뜻 가운데 세 번째 인본의 뜻. 곧 절대 유일한 우주 만유 제법의 근본원인이라는 뜻이다. 또 고래의 전통강원에서 회람되는 『제교행상』에 따르면 ‘대총상법문의 바탕’이란 ‘중생심衆生心’이라고 한다.
  162. 163)원성실성圓成實性 : 3성性의 하나. 원만히 성취한 진실한 자성. 진여를 말한다. 진여의 자체는 우주에 가득하여, 있지 아니한 데가 없고, 생멸 변화하지 않고, 인연으로 성립된 허망한 존재가 아니다. 이 세 뜻을 갖춘 것은 진여뿐이므로 이렇게 이름.
  163. 164)특히 ‘○’을 설명하는 부분 참조.
  164. 165)한 화살로 세 관문을 격파(一鏃破三關) : 이 화두는 운문종 사람들이 많이 거량한다. 그런데 백파는 임제종의 입장에서 이 화두를 거량하는 것이다. 먼저 이 화두의 유래를 보자. 『雲門匡眞禪師廣錄』(T47, 563a23), “示衆云, 天中函蓋乾坤, 目機銖兩不涉春緣, 作麽生承當. 代云, 一鏃破三關.” 운문의 이 말을 호남성 상덕부 무릉현의 덕산德山에 주석하던 원명 연밀圓明緣密 선사는 다음과 같이 ‘3구’로 쪼개었다. “一函蓋乾坤, 二截斷衆流, 三隨波逐浪.” 이것이 유명한 운문종의 ‘덕산삼구’이다.
    그러나 임제종에서는 달리 해석한다. ‘세 관문’이란 안근·이근·설근을 지칭. 의미가 확대되어 일체의 감각기관에 의지한 사량 분별의 뜻으로 사용. 단번에 일체의 사량 분별을 끊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가지고 역대의 많은 선승들이 법 거량을 했다. 대표적으로 ‘흠산일촉欽山一鏃’ 화두가 있다. 이 화두에 대해서는 『선문염송집』을 통해 고려는 물론 조선의 선객들에게 널리 애용되었다. 이 내용을 알아야만 이 대목에 대한 백파의 입장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좀 길지만 그 내용을 소개한다.
    흠산欽山에게 양良 선객이 물었다. “한 화살이 세 관문을 격파할 때가 어떠합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관문 안의 주인을 풀어 놓아 보라.” 양이 말했다. “그렇다면 허물을 알면 반드시 고치는 것이겠습니다.” 선사가 말했다.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는가?” 양이 말했다. “좋은 화살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갑니다.” 그러고는 문득 나가거늘 선사가 불렀다. “이리 오너라, 사리여.” 양이 고개를 돌리거늘 선사가 꽉 붙들고 말하였다. “한 화살이 세 관문을 격파하는 것은 우선 놔두고, 나에게 화살을 쏘아 보아라.” 양이 망설이거늘 일곱 방망이를 때리고 말하였다. “우선 이 친구의 의심을 30년 동안 들어 보아라.”(김월운 역, 『선문염송·염송설화』 7 「915. 일촉一鏃」, 서울: 동국역경원, 2005, p.460). 이 화두에 대하여 『禪門五宗綱要』(H9, 461c~462b)에서 환성 스님은 ‘청산 노인(靑山叟)’의 말을 인용하여 자세하게 해설하고 있다.
  165. 166)삼제三諦 : 공제空諦·가제假諦·중제中諦. ‘제諦’는 진실한 뜻, 허망하지 않은 뜻. 공空·가假·중中과 제諦의 문법 관계는 지업석持業釋.
  166. 167)이 두 인용문의 내용은 『선문오종강요』 「운문종」 부분(H9, 462a~c)에서 환성 지안 선사가 운문종의 입장을 소개한 다음, 운문종과는 달리 임제종의 입장에서 풀이한 내용 중에서 백파가 부분적으로 의취義取한 것임.
  167. 168)『금강경』 4구게 : 『金剛般若波羅蜜經』(T8, 749a24),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則見如來.” “신체적 특징들은 / 모두 헛된 것이니 / 신체적 특징이 신체적 특징이 아님을 본다면 / 바로 여래를 보리라.”(『조계종 표준 한문·한글본 금강반야바라밀경(독송본)』,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2007, p.13).
  168. 169)삼현三玄 : 임제 선사가 말하는 삼현三玄은 주 46 참조.
  169. 170)『선문수경』에는 〔 〕 속 부분을 줄여서 “初中後善”이라고만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부분을 원래대로 넣어서 읽어야만 백파 선사의 의도가 보다 잘 드러나기 때문에 『고존숙어록』 「百丈條」에 의거 보완했다.
  170. 171)사바교주 석가모니불께서 목표하셨던 일(敎主事) : 사바의 교주이신 화신化身 석가모니 부처님이 사바에 와서 일삼으신 일. 부처님의 지견을 열어서 보여주시고 중생들이 깨달아 그 경지로 들게 하는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171. 172)『고존숙어록』 「百丈條」(X68, 8a10), “夫敎語皆三句相連, 初中後善. 初, 直須敎渠發善心. 中, 破善心. 後, 始名好善. 菩薩卽非菩薩, 是名菩薩. 法非法非非法. 總與麽也. 若祇說一句, 令衆生入地獄, 若三句一時說, 渠自入地獄, 不干敎主事.”
  172. 173)막음(遮)과 관조(照) : 주 57 맨 아래 단락 참조
  173. 174)삼과법문三科法門 : 『六祖大師法寶壇經』 「付囑第十」(T48, 360b1)에서 이렇게 말한다. “삼과법문이란 ‘음陰’과 ‘계界’와 ‘입入’을 말하느니라. ‘음’은 오음이니 색·수·상·행·식을 말하고, ‘입’은 십이입이니 밖의 육진인 색·성·향·미·촉·법과 안의 육진인 안·이·비·설·신·의가 이것이요, ‘계’란 십육계이니 육진 육경 육식을 말한다.”(심재열 역, 『역주 육조단경』, 경주: 불국선원, 1986, p.307).
  174. 175)36종의 대대법待對法 : 『六祖大師法寶壇經』 「付囑第十」(T48, 360b9)에서 혜능 대사는 상대해서 법문을 하는 방법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무정물인 바깥 경계를 소재로 설법을 할 때의 오대이고, 둘째는 법상을 소재로 설법을 할 때의 십이대이고, 셋째는 자성의 작용을 일으키게 할 때의 십구대이다. 그 각각은 다음을 참조. ►外境無情(오대):天-地, 日-月, 明-暗, 陰-陽, 水-火. ►法相語言(십이대):語-法, 有-無, 有色-無色, 有相-無相, 有漏-無漏, 色-空, 動-靜, 淸-濁, 凡-聖, 僧-俗, 老-少, 大-小. ►自性起用(십구대) : 長-短, 邪-正, 癡-慧, 愚-智, 亂-定, 慈-毒, 戒-非, 直-曲, 實-虛, 險-平, 煩惱-菩提, 常-無常, 悲-害, 喜-瞋, 捨-慳, 進-退, 生-滅, 法身-色身, 化身-報身.
  175. 176)『선문수경』에는 〔 〕 안의 부분이 생략되어 있다. 이 부분을 원래대로 넣어서 읽어야만 백파 선사의 의도가 보다 잘 드러난다.
  176. 177)『六祖大師法寶壇經』(T48, 360a). 한글 번역은 다음을 인용. 심재열 역, 『역주 육조단경』(경주: 불국선원, 1986), pp.305~306.
  177. 178)사조용四照用 : ① 先用後照, ② 先照後用, ③ 照用同時, ④ 照用不同時. 자세한 설명은 주 57 참조.
  178. 179)『장춘록莊椿錄』 : 미상.
  179. 180)출전 : 미상.
  180. 181)황룡 오신黃龍悟新 : 1044~1115. 임제종 황룡파의 선승. 황룡 조심(1025~1100) 선사에게 참학하여 그의 법을 이었다. 스스로를 ‘사심수死心叟(마음의 작용을 없앤 늙은이)’라고 부르면서 황룡산에서 선풍을 날렸다. 『五燈會元』 권17(X80, 360b).
  181. 182)『人天眼目』(T48, 304b6); 『嘉泰普燈錄』(X79, 325a17).
  182. 183)경전 : 여기서는 『금강경』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에 나오는 4구 게송을 지칭.
  183. 184)법안 문익法眼文益 : 885~958. 중국 당말 오대 때의 선승. 저서로는 『종문십규론』이 있다. 훗날 법안종의 조사로 추앙.
  184. 185)『선문염송·염송설화』 1 「55. 제상諸相」(김월운 역, 서울: 동국역경원, 2005), p.292. 그러나 정작 『법안록』에는 이 구절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종용록』이나 『지월록』 등에서 이 구절이 법안 선사의 말이라고 할 뿐이다.
  185. 186)무착 보살 : 불멸 후 1천 년경의 사람. 북인도 건타라국 출신. 대승 법상 교리를 선양. 저서로 『현양성교론』, 『대승아비달마집론』, 『섭대승론』 등이 있다. 『유가사지론』(110권)과 『대승장엄론』(13권)은 미륵보살의 말을 적은 것으로 전해짐. 『임제록』의 무착(821~900) 스님과 혼동해서는 안 됨.
  186. 187)색신色身을 얻으려 하는 주住 : 무착은 『금강경』을 18주설로 과목을 내었는데, 그중의 한 과목이 「제3. 욕득색신주欲得色身住」이다. 자세한 것은 『金剛般若波羅蜜經 五家解說誼』(H7, 38a) 참조. 참고로 세친은 27단의설斷疑說로 과목을 내었음.
  187. 188)『금강경』 「24. 복지무비분福智無比分」.(『조계종 표준 한문·한글본 금강반야바라밀경(독송본)』,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2007, pp.78~81).
  188. 189)『禪門寶藏錄』 권상(X64, 810b3).
  189. 190)삼신三身 : 법신불法身佛·보신불報身佛·화신불化身佛. 부처란 무엇인가라는 일종의 불신佛身에 관한 이론은 대승불교 시대에 정비된다. 불신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진리 그 자체를 본질로 하는 법신法身이고, 다른 하나는 법신이 변화하여 중생들과 인연에 상응해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응신應身이다. 응신은 다시 두 경우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자신의 발심과 수행에 의해서 그 결과의 되갚음으로 드러나는 보신報身이고, 또 하나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법신 또는 보신이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하여 우리들에게 모습을 나타내는 화신化身이다. 인도 땅에 태어나신 석가모니 부처님은 화신 부처님이다. 화엄종과 정토종과 선종 등을 비롯한 북방불교의 전통에서는 이런 삼신 신앙과 철학에 기초해 있다. 대표적인 법신은 비로자나불이다. 그리고 보신으로는 극락도사 아미타불을 비롯한 노사나불이 있다. 미래에 오실 화신불인 미륵불은 아직 오지 않으셨고, 석가모니 화신불은 이미 입멸하셨으니, 현재 사바세계에는 화신불은 없는 셈이다. 화신으로 오신 석가모니 부처님이 없는 사이에 태어난 우리는 박복하지만, 다행히 이 사이에 여러 보살들이 오셔서 우리들에게 화현化現하신다. 오늘날 누군가가 부처님을 친견했다고 했을 때, 그 부처님은 대개 화신이다. 그러나 수행을 많이 하면 그 되갚음으로 나타나는 보신을 친견하는 사람도 있다. 법신은 오직 부처와 부처만이 서로 볼 수 있다.(신규탁 편역, 『화엄과 선』, 정우서적, pp.113~114.)
  190. 191)이 부분의 번역은 다음의 책을 따름. 『조계종 표준 한문·한글본 금강반야바라밀경(독송본)』(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2007), p.13.
  191. 192)함허涵虛 : 1376~1433. 법호는 득통得通, 계호는 기화己和. 함허는 당호임. 양주 회암사에서 무학 자초를 만나 그 법을 이음. 희양산 봉암사에서 입적. 부도는 경기도 가평 현등사에, 비석은 봉암사에 각각 있다. 저서로는 『원각경소』, 『반야경오가해설의』, 『현정론』, 『반야참문』, 『윤관』 등이 있음.
  192. 193)『金剛般若波羅蜜經 五家解說誼』 「說誼」(H7, 39a~b), “上來問答, 只明得無住無相之義. 若是無住無相之義, 甚深難解, 不近人情. 去聖愈遠, 容有不信, 故問也. 然此固不外乎衆生日用, 亦乃該通過現未來. 由是雖是末世, 如有勝機, 必當生信. 以此無住無相之義, 以爲實然也. 無相是虛玄妙道, 無住是無著眞宗. 若是眞宗妙道, 直是法身向上, 非干向下. 恁麽則, 以此爲實者, 法身向上以爲實也. 法身向上爲實, 則三身皆屬向下, 是權非實明矣. 爲甚如此. 三身皆是對機示現, 畢竟非眞故也. 趙州道, 金佛不度爐, 木佛不度火, 泥佛不度水, 眞佛內裏坐. 眞佛豈不是向上人也, 三佛豈不是三身也. 臨濟道, 入淨妙國土中, 著淨妙衣, 說法身佛. 入無差別國土中, 著無差別衣, 說報身佛. 入解脫國土中, 著解脫衣, 說化身佛. 大惠拈云, 要識臨濟老漢麽, 法身報身化身, 咄哉, 魍魎妖精. 三眼國中逢著, 笑殺無位眞人. 則向上是實, 三身是權. 灼然灼然.”
  193. 194)『육조단경』의 어느 대목을 구체적으로 지시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추측건대 「제5. 傳香懺悔」인 듯함. 한글 번역은 심재열 역, 『역주 육조단경』(경주: 불국선원, 1986, pp.185~192) 참조. 『六祖大師法寶壇經』(T48, 354b12), “善知識, 旣歸依自三寶竟, 各各志心, 吾與說一體三身自性佛, 令汝等見三身了然, 自悟自性. 總隨我道, 於自色身, 歸依淸淨法身佛. 於自色身, 歸依圓滿報身佛. 於自色身, 歸依千百億化身佛. 善知識. 色身是舍宅, 不可言歸. 向者三身佛, 在自性中, 世人總有, 爲自心迷, 不見內性. 外覓三身如來, 不見自身中有三身佛. 汝等聽說, 令汝等於自身中, 見自性有三身佛. 此三身佛, 從自性生, 不從外得. 何名淸淨法身佛, 世人性本淸淨, 萬法從自性生. 思量一切惡事, 卽生惡行, 思量一切善事, 卽生善行. 如是諸法在自性中, 如天常淸, 日月常明, 爲浮雲蓋覆, 上明下暗. 忽遇風吹雲散, 上下俱明, 萬象皆現. 世人性常浮游, 如彼天雲. 善知識, 智如日, 慧如月, 智慧常明. 於外著境, 被妄念浮雲蓋覆自性, 不得明朗. 若遇善知識, 聞眞正法, 自除迷妄, 內外明徹, 於自性中萬法皆現. 見性之人, 亦復如是. 此名淸淨法身佛. 善知識, 自心歸依自性, 是歸依眞佛. 自歸依者, 除却自性中不善心, 嫉妬心, 諂曲心, 吾我心, 誑妄心, 輕人心, 慢他心, 邪見心, 貢高心, 及一切時中不善之行, 常自見己過, 不說他人好惡, 是自歸依. 常須下心, 普行恭敬, 卽是見性通達, 更無滯礙, 是自歸依. 何名圓滿報身, 譬如一燈能除千年闇, 一智能滅萬年愚. 莫思向前, 已過不可得, 常思於後, 念念圓明, 自見本性. 善惡雖殊, 本性無二, 無二之性, 名爲實性. 於實性中, 不染善惡, 此名圓滿報身佛. 自性起一念惡, 滅萬劫善因, 自性起一念善, 得恒沙惡盡. 直至無上菩提, 念念自見, 不失本念, 名爲報身. 何名千百億化身, 若不思萬法, 性本如空, 一念思量, 名爲變化. 思量惡事, 化爲地獄, 思量善事, 化爲天堂. 毒害化爲龍蛇, 慈悲化爲菩薩, 智慧化爲上界, 愚癡化爲下方. 自性變化甚多, 迷人不能省覺, 念念起惡, 常行惡道. 迴一念善, 智慧卽生, 此名自性化身佛. 善知識, 法身本具, 念念自性自見, 卽是報身佛. 從報身思量, 卽是化身佛. 自悟自修自性功德, 是眞歸依. 皮肉是色身, 色身是舍宅, 不言歸依也. 但悟自性三身, 卽識自性佛.”
  194. 197)삼요三要의 순서 : 주 58 참조.
  195. 198)앞에 나오는 주 194의 『육조대사법보단경』 「제5. 傳香懺悔」 부분 참조.
  196. 199)(본래의) 인因 : 위에서 말한 “사람마다 자신의 자성 가운데 본래부터 간직한 면목”을 지칭. 이 대목에서 백파 선사는 ‘내훈內熏’과 ‘외훈外熏’이 서로 부합하는 것을 말하려고 함.
  197. 200)회광반조廻光返照 : 언어 문자에 의지하지 않고, 자기를 회고 반성하여 바로 심성을 조견照見하는 것.
  198. 201)자성을 훈습하여 일으킴 : 진여가 번뇌를 훈습하여 번뇌를 소멸시키는 작용을 말한다. 백파 선사는 진여의 훈습을 인정한다. 백파 선사가 이럴 수 있는 것은 선사의 선禪 사상이 청량 및 규봉의 화엄교학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임.
  199. 202)다음을 참조하시오. 심재열 역, 『역주 육조단경』 「제10. 유통을 부촉하다」(경주: 불국선원, 1986), pp.178~182; 『六祖大師法寶壇經』(T48, 354a).
  200. 203)삼악도三惡道 : 중생은 여섯 갈래(六趣)로 윤회한다고 한다. 이 중 지옥·아귀·축생에 속하는 세 갈래.
  201. 204)삼독심三毒心 : 탐내는 마음,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
  202. 205)삿된 견해 : 인과因果의 도리를 바르지 않게 하는 견해. 오견五見(身見, 邊見, 邪見, 見取見, 戒禁取見) 중의 하나.
  203. 206)유루의 선善 : 과보를 수반하는 선. 이런 선을 닦으면 그 과보를 받기 위하여 다시 환생한다고 한다.
  204. 207)오계五戒 : ① 불살생不殺生, ② 불투도不偸盜, ③ 불사음不邪淫, ④ 불망어不妄語, ⑤ 불음주不飮酒.
  205. 208)십선十善 : ① 불살생不殺生, ② 불투도不偸盜, ③ 불사음不邪淫, ④ 불망어不妄語, ⑤ 불양설不兩舌, ⑥ 불악구不惡口, ⑦ 불기어不綺語, ⑧ 불탐욕不貪欲, ⑨ 불진에不瞋恚, ⑩ 불사견不邪見.
  206. 209)사성제四聖諦 : ① 고성제苦聖諦, ② 집성제集聖諦, ③ 멸성제滅聖諦, ④ 도성제道聖諦.
  207. 210)십이인연十二因緣 : ① 무명無明, ② 행行, ③ 식識, ④ 명색名色, ⑤ 육처六處, ⑥ 촉觸, ⑦ 수受, ⑧ 애愛, ⑨ 취取, ⑩ 유有, ⑪ 생生, ⑫ 노사老死.
  208. 211)육바라밀六波羅蜜 : ① 보시布施, ② 지계持戒, ③ 인욕忍辱, ④ 정진精進, ⑤ 선정禪定, ⑥ 지혜智慧.
  209. 212)남종선의 전통에서는 진여 자성의 ‘본유本有’를 강조하고 ‘신훈新薰’을 비판한다. 즉 진여 자성은 본래 간직된 것이지, 누가 밖에서 전해 주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 체험하는 것이다. 백파 스님도 이런 전통에 서 있다.
  210. 213)타니대수拖泥帶水 : 남을 제도하기 위해서 자신이 일부러 더러운 진흙을 뒤집어쓰기도 하고 물에 빠지기도 하는 등의 말이나 행동. 선종 문하에서는 이런 것이 결국은 모두 상대를 집착에 빠트린다는 것이다. 자신이 직접 견성성불하게 해야지, 설사 부처의 말이라도 그것에 의지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정신. 그렇기는 하지만 아손兒孫을 염려하는 ‘말후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 점은 「7. 말후구와 최초구의 구별」을 참조할 것.
  211. 214)무념無念의 지혜 : 일체의 망념이 사라진 지혜. ‘무심無心’으로도 사용. 무심의 용례는 주 314 참조.
  212. 215)반드시 일으켜서 : 원문은 ‘直須自己~’. 이때의 ‘直須~’는 ‘반드시 ~해야 한다’로 새김. ‘直須~始得’으로 갖추어 쓰기도 한다.
  213. 216)자기의 본성을 관조 : 내훈內熏을 말한다. 법문을 듣는 외훈外熏과 상대되는 말.
  214. 217)『六祖大師法寶壇經』(T48, 362a). 이하의 번역은 다음을 따랐음. 심재열 역, 『역주 육조단경』 「제10. 유통을 부촉하다」(경주: 불국선원, 1986), p.344.
  215. 218)다음을 참조하시오. 심재열 역, 『역주 육조단경』 「제4. 좌선법을 가르침」(경주: 불국선원, 1986), pp.168~171; 『六祖大師法寶壇經』(T48, 352c).
  216. 219)형상(相) : 좌선할 때의 몸가짐이나 호흡이나 또는 선 수행에 필요한 환경 등을 말함. 천태 지자天台智者 대사가 『지관좌선법止觀坐禪法』에서 제시하는 다섯 종의 조건(緣)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217. 220)납승衲僧 : 납자衲子라고도 함. 납의衲衣를 입은 승려. 납의에서의 ‘납衲’은 기웠다는 뜻으로, 세상 사람들이 내어버린 여러 가지 낡은 헝겊을 모아서 누덕누덕 기워서 만든 옷.
  218. 221)무념삼매無念三昧 : 『摩訶般若波羅蜜經』 「法尙品 第八十九」(T8, 423b)에 의하면 ‘살타파륜보살薩陀波崙菩薩’이 획득한 여러 삼매의 하나로 그 명칭은 나타나지만, 이 삼매의 구체적 내용은 불분명. 여기에서는 ‘유’와 ‘무’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문자 그대로 ‘무심無心’한 삼매를 지칭하는 듯.
  219. 222)제8식 장식藏識이 3분分된 것 : 원문은 ‘第八藏識三分’. 백파 선사는 삼요三要를 『대승기신론』에 나오는 제8식의 업상業相·전상轉相·현상現相의 3세細로 나누어 배당하고 있다. 또 백파는 ‘업상’과 ‘전상’을 합쳐서 ‘견분見分’에, 그리고 나머지 ‘현상’을 ‘상분相分’에 각각 배당하기도 한다. 「11. 3성설」의 주 154 참조.
  220. 223)알음알이에 의한 논리(義理) : ‘의義’에는 실제가 아닌 인위적이라는 뜻이 있다. 그리고 ‘리理’란 그 속에 관통하는 규칙 또는 논리를 말한다. 실상實相을 설명하기 위한 인위적인 규칙이란 뜻.
  221. 224)『少室六門』(T48, 370a25), “外息諸緣, 內心無喘, 心如牆壁, 可以入道. 明佛心宗, 等無差誤, 行解相應, 名之曰祖.”
  222. 225)이 대목은 『금강경』 「14.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의 “何以故. 須菩提, 如來說第一波羅蜜, 卽非第一波羅蜜, 是名第一波羅蜜.”(T8, 750b9)에 대한 육조 대감 선사의 『口訣』로서, 『金剛般若波羅蜜經 五家解說誼』(H7, 62b), “口說心不行卽非, 口說心行卽是. 心有能所卽非, 心無能所卽是.” 부분을 지칭하는 듯.
  223. 226)이 대목은 백파 선사가 『선문염송집』 「100. 법인法印」과 그 부분에 대한 『염송설화』를 손에 들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부분이다. 백파의 온전한 의도를 알기 위해서는 해당 부분을 알아야 하는데, 더 깊이 알려는 독자들은 다음의 번역을 참조하기 바람. 김월운 역, 『선문염송·염송설화』 1(서울: 동국역경원, 2005), p.483.
  224. 227)단멸斷滅의 상태 : ‘무기공無記空’ 또는 ‘회신멸지灰身滅智’의 상태. 백파 선사는 ‘사심死心’이라는 용어로도 사용. 주 334 참조.
  225. 228)〔 〕 속 부분은 『선문수경』 원문에는 없지만, 『선문염송집』과 『염송설화』에 근거해서 보충한다. 김월운 역, 『선문염송·염송설화』 1(서울: 동국역경원, 2005), p.483.
  226. 229)변함없는 지각작용(常知) : 위의 김월운 번역에서는 “항상 알기(常知)”로 되어 있으나, 번역자가 이렇게 바꾸었음. 이하도 마찬가지. 훗날 홍주종(임제종 등)에서 하택사의 신회 대사와 초당사의 규봉 선사를 비난할 때에 사용하는 ‘지해知解’와는 구별해야 한다. 이하의 번역도 역시 ‘常知’의 한글 번역어에 해당하는 ‘항상 알기’ 대신 ‘변함없는 지각작용’으로 바꾸었음.
  227. 230)이 대목에 나오는 달마와 혜가의 대화는 『경덕전등록』 「달마편」 주에 나온다. 한글 번역은 다음을 참조. 김월운 역, 한글대장경181 『경덕전등록』 상(서울: 동국역경원, 1970), p.116.
  228. 231)밝고 밝아(明明)~지각작용(常知)이 있다면 : 『염송설화』 원문에는 “明明不昧, 了了常知者”로 되어 있다. 이에 의거하여 고쳐 번역함.
  229. 232)『선문수경』의 원문에는 〔 〕 속의 내용이 생략되었음.
  230. 233)김월운 역, 『선문염송·염송설화』 1(서울: 동국역경원, 2005), p.484.
  231. 234)여기까지의 이야기는 『경덕전등록』(제3권)과 『선문염송·염송설화』(제3권)에 나옴. 한글 번역은 다음을 참조. 김월운 역, 한글대장경181 『경덕전등록』 상(서울: 동국역경원, 1970), p.99; 김월운 역, 『선문염송·염송설화』 1(서울: 동국역경원, 2005), p.472.
    혜가가 절을 하는 부분부터는 구곡 각운의 『염송설화』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염송설화』의 해당 부분(김월운 번역본, p.483)에 의하면 이 이야기는 『조등록祖燈錄』에서 인용한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此是諸佛所傳心體, 更勿疑也.”(T51, 220a2) 구절은 『경덕전등록』 「달마편」 주注에 나온다. “更勿疑也(절대로 의심하지 말라)”와 “汝善護持(그대는 잘 보호해 지녀라)”는 자구의 차이는 있으나 의미는 상호 돕고 있다. 한편, 구곡 각운 당시에 『경덕전등록』을 『조등록祖燈錄』으로도 불렀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임.
  232. 235)〔 〕 속의 내용은 『선문수경』의 원문에는 생략되었으나, 『염송설화』를 기준으로 보충해 넣었다. 한글 번역은 다음을 사용했다. 김월운 역, 『선문염송·염송설화』 1(서울: 동국역경원, 2005), p.484.
  233. 236)김월운 역, 『선문염송·염송설화』 1(서울: 동국역경원, 2005), p.484.
  234. 237)이 대목은 백파 선사가 『선문염송집』 「101. 득수得髓」와 그 부분에 대한 『염송설화』를 손에 들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이다. 백파의 온전한 의도를 알기 위해서는 해당 부분을 알아야 하는데, 더 깊이 알려는 독자들은 다음의 번역을 참조하기 바람. 김월운 역, 『선문염송·염송설화』 1(서울: 동국역경원, 2005), pp.489~506.
  235. 238)위에서 인용한 『경덕전등록』(김월운 역, p.99)과 『선문염송·염송설화』(김월운 역, p.489)에서는 도부道副, 총지總持 비구니, 도육道育 등 세 제자와의 대화가 차례로 나오지만, 백파 선사의 『선문수경』에서는 세 명의 대화는 모두 생략하고, 혜가와의 대화만을 소개한다.
  236. 239)종문 가운데 이류(宗門中異類) : 당唐나라 때 조산 본적(840~901) 선사가 말하는 4종의 이류異類 중에서 네 번째의 이류임. 이류異類는 인간 이외의 생류生類를 말하는데, 수행자를 포함한 중생 일반이라고 해석하기도 함. 결국, ‘이류 속에서의 수행’이란 선사가 수행자나 일반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지도 교화에 힘쓰는 일.
  237. 240)방에 듦(入室) : ① 학인이 수행하는 데 대한 지도를 받기 위해 스승의 방에 들어감. ② 개당開堂이라고도 하니, 선종에서 스승이 학인을 자기의 방으로 불러들여, 아는 바를 말하게 하여 그 견처見處를 시험함. ③ 선종에서 제자가 법사의 방에 들어가 법을 잇는 것. 이것을 입실사법入室嗣法이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교가敎家에서도 행한다. 건당식建幢式이라고도 한다. 법맥을 상속하는 것. 조사실에 들어간다는 뜻. 이 대목에서는 ③의 의미.
  238. 241)김월운 역, 『선문염송·염송설화』 1(서울: 동국역경원, 2005), p.503.
  239. 242)자성삼보自性三寶 : 자기의 본성에 본래 간직된 삼보. 선가의 이런 입장은 『六祖大師法寶壇經』(T48, 354a29)의 다음 구절에서 잘 드러난다. “從今日去, 稱覺爲師, 更不歸依邪魔外道. 以自性三寶常自證明, 勸善知識歸依自性三寶.”
  240. 243)가섭 존자가~절한 것 : 세존의 삼처전심 중의 하나인 곽시쌍부廓示雙趺의 고사에 나온다. 자세한 것은 다음을 참조. 김월운 역, 『선문염송·염송설화』 1(서울: 동국역경원, 2005), pp.225~230.
  241. 244)혜가가 달마 대사~절한 것 : 「20. 달마의 삼처전심」 가운데 제3처에서 혜가가 달마 대사에게 절한 것.
  242. 245)진공의 향성(眞空向性) : 이 구절에 해당하는 목판본을 보면 ‘向’ 자가 ‘句’처럼 보이기도 한다. 본 번역에서는 ‘眞空向性’과 ‘毘盧向上’이 서로 호응하는 구절로 해석했다.
  243. 246)출전 : 미상.
  244. 247)절할 때마다 : 원문은 ‘拜來拜去’. 이때의 ‘~來~去’는 동작의 반복을 나타냄. 다음에 나오는 ‘照來照去’도 같은 용법이다.
  245. 248)격벽擊壁 : 선당에서 간당틀을 한 번 치는 소리를 신호로, 대중이 모두 면벽 좌선하는 행위. 「22. 간당看堂틀을 열 번 치는 것에 대하여」의 주 347 참조.
  246. 249)설화문說話門 : 선문의 도리를 언어로 설명하는 방법. 이와 상대어인 ‘간화문看話門’은 화두를 관찰하게 하는 방법. 『염송설화拈頌說話』의 ‘설화說話’도 이런 뜻에서 붙인 서명書名임.
  247. 250)몸을 굽혔다 펴고(折旋) : 절을 할 때에 몸을 굽혔다 펴는 동작. 예참 의례의 용어임.
  248. 251)창화唱和 : 염불할 때에 소리 내는 방식의 하나. 창화성唱和聲(대중이 함께 소리를 내는 것), 격구성隔句聲(법주와 바라지가 한 소절씩 돌려 가면서 소리를 내는 것), 선후창先後唱(법주가 선창을 하면 남은 대중이 복창하는 것)이 있다.
  249. 252)한 덩어리가 되어(成片) : 타성일편打成一片.
  250. 253)힘이 덜어짐(省力) : 자신에게 갖추어진 자성을 체험하는 일은 내버리고 밖을 향해 깨달음 찾으려고 힘(力)을 소비하고 있는데, 이런 데 소비하는 힘(力)이 줄어드는(省) 것을 말함.
  251. 254)옛 선지식들께서~도달해야만 한다 : 원문은 “親到古人親證處始得”이다. 이 경우는 ‘v+~始得’ 형태의 구문으로, ‘始得’은 문장 끝에 붙어서 동작이나 행위의 당위를 나타냄. ‘須是~始得’, ‘須~始得’, ‘須得~始得’, ‘直須~始得’, ‘~始得’ 등으로도 사용.
  252. 255)간당看堂틀 : 참선방에서 사용하는 일종의 법구法具. 조선에만 있었던 것으로 지금은 사라졌음. 이 법구에 대하여 운허 용하의 『불교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함.
    모양은 높이 한 자 서너 치쯤의 네 기둥을 세우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새재비를 넣어서 길쭉한 입방형을 만들고, 두 기둥 위에 따로 두 널쪽을 두어 잘 흔들리게 한다. 가는 대(竹) 가지 열 개를 다섯 개씩 한 끝에 얽어매어 둘을 만든 것을 ‘간당살’ 또는 ‘선채(禪-)’라고 한다. 입선入禪할 적에는 사미가 간당틀을 내려놓고, 죽비를 세 번 치면 입승이 또 죽비를 세 번을 치고 주장자를 세운다. 사미가 간당살을 들어 ‘초初’ 3통統을 치면, 입승은 주장자를 한 번 구르고, 다음에 사미가 ‘중中’ 1통을 치면 입승이 다시 주장자를 한 번 구르고, 나중에 사미가 ‘후後’ 3통을 치고 간당살을 엇귀어 놓고, 나와서 세 번 절하고 죽비를 세 번 치면 입승도 다시 죽비를 세 번 친다. 이것을 “선을 들인다.”고 한다. 이때부터 대중은 묵언하고 좌선하거나, 경을 본다. 얼마 뒤에 방선放禪할 때가 되어 입승이 죽비를 세 번 치면, 사미는 나와서 간당살을 들어 3통을 치고 또 죽비를 세 번 치고, 입승도 죽비를 세 번 친다. 이것을 “선을 낸다.”고 한다. 이때부터 대중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유로이 행동한다.
  253. 256)이 대목은 선가禪家의 묵언작법默言作法의 하나인 ‘간당 작법’이다. 간당 작법에 관해서는 다음의 문헌이 참고할 만함. 백파 긍선, 『作法龜鑑』 「看堂論」(H10, 606c); 안진호 편, 『석문의범』 「간당론」(서울: 卍商會, 1935), pp.173~176; 李智冠, 「看堂作法에 對한 考察」, 『佛敎學報』 第19輯(서울: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1982), p.58.
  254. 257)유有·무無·중中을 나누는 3구 : 유有와 무無와 중中을 각각 나누는 3구라는 뜻. 격별삼구隔別三句를 말함.
  255. 258)『作法龜鑑』 「看堂論」(H10, 607a)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 “大抵一鏃中一統, 卽如來禪, 卽三句之本分一句. 破三關初三統, 卽義理禪, 理事隔別三句., 分明箭後路後三統, 卽祖師禪三要..” 이곳 『선문수경』에서는 약간 생략했으나 의미에는 큰 차이 없음.
  256. 259)묵언작법默言作法 : 원래 작법作法은 음성과 법구를 활용하여 소리와 동작을 지어서 법요法要를 행한다. 그런데 선가에서는 그런 작법을 죽비를 치거나 간당틀을 쳐서 묵언으로 대신한다. 『일용의식수문기』(김월운 편저, 경기: 중앙승가대학, 1991, p.34)에 실린 편자 미상의 『불가일용작법집佛家日用作法集』(고종 2년, 해인사 간본) 참조.
  257. 260)일행삼매一行三昧 : 어느 경우에나 정직한 마음을 갖는 삼매. 여기에 나오는 ‘일행삼매’는 다음의 경문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 『六祖大師法寶壇經』 「定慧」(T48, 352c), “師示衆云, 善知識, 一行三昧者, 於一切處行住坐臥, 常行一直心是也.”
  258. 261)『作法龜鑑』 「看堂論」(H10, 606c), “亦以十統, 對治十惡之機關. 以初三統, 對其身三殺盜淫, 以身金剛唵)字觀想, 三過卽滅. 以中一統, 對其口四綺妄兩惡, 以語金剛阿字觀想, 四過卽滅. 以後三統, 對其意三貪嗔癡, 以意金剛吽字觀想, 三毒卽滅.”
  259. 262)이런 잘못을 시정하기 위하여 백파 선사는 「看堂論」을 지은 것이다.
  260. 263)백파 선사는 60세에 『작법귀감』 저술을 마친다. 한글 번역은 다음이 있다. 김두재 옮김, 『작법귀감』 「부록 : 간당론」(서울: 동국대학교출판부, 2010), pp.316~326.
  261. 264)본 번역서의 대본인 『한국불교전서』의 목차에는 본 조항을 제목으로 처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번역자가 보기에 본 조항은 전후 여타의 조항과 내용이 다르기 때문에, 또 ‘喝’의 소릿값(音價)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대목이기 때문에 목차에 넣었다. ‘喝’에 대한 기존의 해석은 ① 큰소리를 지르는 의태어, ② ‘할’이라고 소리치는 의성어 등으로 알려졌다.
  262. 265)네 종류의 喝 : 임제 선사가 수행자를 교화하기 위하여 제시한 일종의 교설. ‘喝’에도 수행자의 근기에 따라 여러 가지 방편이 있다고 한다. 이를 넷으로 나눈 것이다. 첫째는 금강왕보검과 같은 ‘喝’, 둘째는 금털 사자와 같은 ‘喝’, 셋째는 탐간영초探竿影草와 같은 ‘喝’, 넷째는 침묵으로 하는 ‘喝’. 사다새의 깃이나 풀 등을 이용하여 물고기를 유인하는 것을 탐간영초라 하며, 선종에서는 종사가 학인을 다루는 기략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263. 266)고려의 진각 국사 혜심(1178~1234) 선사는 『구자무불성화간병론狗子無佛性話揀病論』(H6, 69b~70c)을 지어 ‘무無자 화두’를 참구하는 경우에 생길 수 있는 10종의 병통을 해설한 바 있다. 이 글에 대해 백파 선사가 문단을 나누고 과목을 붙이고 또 해설을 붙이고 있음.
  264. 267)과목을 나누고 해설(科解) : 본문을 내용과 형식에 따라 문단을 나누어 제목을 붙이고 과단科段별로 주석자가 해석을 붙이는 경전의 훈고 형식. 과목만을 모아서 도표로 만든 것을 과도科圖라고 한다.
  265. 268)개에게 불성이 ‘있다’와 ‘없다’고 한 화두를 나란히 소개하는 사례로 송대 만송 선사의 『從容錄』(18칙)을 꼽을 수 있다.
  266. 269)굉지 정각宏智正覺 : 1091~1157. 중국 절강성 영파부 은현에 천동산이 있는데, 송대에 굉지 정각 선사가 1129년부터 이 산에서 선법을 널리 폈다. 굉지는 시호임. 굉지 선사에게는 선종의 공안 100칙을 뽑아 염송한 「굉지송고」가 있는데, 뒷날 만송 행수(1165~1241) 선사가 평창을 붙여 『종용록』으로 세상에 알려짐. 굉지 선사는 시문에 뛰어나 설두와 쌍벽을 이룬다. 묵조선을 선양했다. 문집은 『천동굉지각선사어록天童宏智覺禪師語錄』(전4권) 등이 있다.
  267. 270)이하의 번역은 김월운 역, 『선문염송·염송설화』 4(서울: 동국역경원, 2005, pp.231~232)를 그대로 옮겨 왔다. 백파 선사는 『선문염송집』과 『염송설화』를 손에 쥐고 이 책(『선문수경』)을 쓰고 있는 것이다.
  268. 271)조주 종심趙州從諗 : 778~897. 선종의 계보상으로는, 육조 혜능⟶남악 회양⟶마조 도일⟶백장 회해⟶남전 보원⟶조주 종심. 젊은 시절에는 여러 곳을 다니면서 수행을 했고 나이 80이 넘어서 하북성 서부에 있는 조주 땅의 관음원에 주석하면서 많은 일화를 남겼다. 문집으로 『조주록』이 전한다. 법호는 종심從諗, 시호는 진제眞際 대사이다.
  269. 272)개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 원문은 ‘狗子還有佛性也無’이다. 이 경우 ‘還~也無’는 의문사. ‘~인가?’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좋음.
  270. 273)그에게는 업식業識이 있기 때문이지 : 이 대답의 원문은 ‘爲他有業識在’. 이 경우 문장 끝에 오는 ‘~在’는 단호한 뜻을 드러내는 종결어미 역할을 한다. “그는 업식이 있기 때문이지!”라는 조주의 단호한 말투가 드러난다.
  271. 274)수긍하지 않았기 때문에 : 원문은 ‘不能承當’. ‘皆有佛性’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 ‘不肯承當’으로 사용되는 사례가 많고, ‘能’으로 사용하는 사례는 특별함. 주 296 참조.
  272. 275)자기 집(自家所) : 자신의 본래 모습. ‘가리사家裏事’ 또는 ‘본분사本分事’라고도 함. ‘도중사途中事’와 대비되는 말. 때로는 ‘家’ 한 자만으로도 이 뜻을 표시. 주 331 참조.
  273. 276)구멍 없는 철퇴 : 구멍이 없기 때문에 자루를 끼워 사용할 수도 없고, 운반하기 위하여 걸 고리도 없어서 어찌할 수가 없다. 이런 철퇴의 의미가 선어록에서 ① 쓸모없다는 뜻으로 나귀 똥에 비유되기도 하고, 한편 ② 어떻게 손을 대 볼 수 없어 일체의 사량 분별로 접근할 수 없는 은산철벽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이 대목에서는 ①과 ②를 교묘하게 오버랩(overlab)시키고 있다. 천동 선사는 ①의 의미에 주안점을 두어 사용했고, 백파 선사는 ②의 의미에 무게를 두어 사용.
  274. 277)천동 정각 선사의 송頌은 김월운 역, 『선문염송·염송설화』 4(서울: 동국역경원, 2005, p.235)를 그대로 옮겨 옴.
  275. 278)나귀 똥으로~바꿔 버리네 : 원문은 ‘驢糞逢人換眼珠’. 김월운의 번역에는 “나귀의 똥으로 남의 눈알 바꿔 주네.”라 했다. 내용상에는 차이가 없으나 문맥상 윤문을 했다. ‘眼珠’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제대로 보는 멀쩡한 눈.
  276. 279)병통(錯解) : 원문이 ‘錯解’이니 ‘잘못 이해함’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좋으나, 현재 국내의 선승들 사이에 ‘병통’이라는 용어가 통용되기 때문에 이렇게 번역어를 택했다.
  277. 280)표층마음(意根) : 법성의 교학에서는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의 상주불멸을 인정한다. 이것이 ‘참마음’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육근’과 ‘육경’이 만나서 만들어진 마음인 ‘육식’, 그중에서도 여섯 번째의 ‘의근意根’과 ‘법경法境’이 만나서 만들어진 ‘의식意識’을 ‘참마음’이라고 오인한다. 이곳에 나오는 ‘의근’은 한 찰라 이전의 ‘의식’을 말한다. ‘참마음’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의근’을 ‘표층마음’이라고 번역함. ‘심층마음’인 ‘자성청정심’과 대비해서 ‘표층’이라는 수식을 했음.
  278. 281)단제單提 : 백파 선사는 화두 드는(提) 방법으로 ‘단제單提’와 ‘전제全提’ 두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이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안公案과 화두話頭와의 관계를 알아야 한다. 공안이 어떤 사안에 대한 ‘전체 이야기’라면, 화두는 그 이야기를 구성하는 ‘아주 간단한 한두 마디 이야기’이다. 한 공안 속에는 여러 개의 화두가 들어 있을 수 있다. 이 둘의 관계를 염두에 두면서 다음을 보자. ① 단제單提는 ‘화두’에만 집중하는 것이고 ② 전제全提는 ‘화두를 포함하고 있는 공안 전체’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백파 선사가 이 장 「『구자무불성화간병론』의 과목을 나누고 해설」의 맨 마지막 부분에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부분 이해를 위해서는 백파의 이 해설을 미리 읽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279. 282)끝내 : 원문은 ‘決定’이다. ‘決定’의 다음에 부정어를 수반할 경우는 ‘끝내 ~하지 않는다’의 뜻으로, 한편 긍정어를 수반할 경우에는 ‘끝내 ~이다’의 뜻으로 사용된다. 『조당집』, 『경덕전등록』, 『벽암록』 등에 많이 보이는 구어 용례이다. ‘決定’이라는 두 글자 대신 ‘定’ 자만으로도 사용됨.
  280. 283)오조 법연五祖法演 : 1024~1104. 법맥의 계통은 다음과 같다. 양기 방회→백운 수단→오조 법연→원오 극근→대혜 종고. 오조산五祖山은 5조 홍인 선사(594~674)가 이 산에서 선풍을 날렸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 호북성 황주부 황매현 동북쪽 20리 밖에 있음. 빙무산憑茂山 또는 동산東山이라고도 부름. 송대에는 임제종의 양기파와 황룡파가 이 산에서 선풍을 드날림.
  281. 284)이하의 게송은 김월운 역, 『선문염송·염송설화』 4(서울: 동국역경원, 2005, p.236)의 번역을 그대로 옮겨옴.
  282. 285)진정 극문眞淨克文 : 1025~1102. 법계는 다음과 같다. 분양 선소→자명 초원→황룡 혜남→진정 극문→혜홍 각범. 당시 재상 장상영의 초청으로 강서성 고안현高安縣 동산洞山에 있는 늑담泐潭 땅에서 선풍을 날림. 그 인연으로 늑담 극문이라고도 함. 선어록에 때로는 보봉 극문寶峰克文으로도 표기.
  283. 286)이하의 게송은 김월운 역, 『선문염송·염송설화』 4(서울: 동국역경원, 2005, p.236)의 번역을 그대로 옮겨옴.
  284. 287)『선문염송집』 「417. 불성佛性」의 화두에 대한 게송은 약 19인이 30수에 달하는 염拈, 송頌, 거擧, 평評을 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김월운 역, 『선문염송·염송설화』 4(서울: 동국역경원, 2005, pp.231~244) 참조.
  285. 288)조주의 의도는~지경에까지 이르렀음 : 원문의 ‘趙州意直得無限’ 구문에서, ‘~直得’은 ① ‘~한 지경에까지 이르다’와 ② ‘비록 ~이더라도’의 뜻이 있다. 여기서는 ①의 뜻.
  286. 289)이 이야기는 『선문염송집』 「418. 해자孩子」 화두를 설명한 『염송설화』에 나온다. 김월운 역, 『선문염송·염송설화』 4(서울: 동국역경원, 2005, p.245) 참조.
  287. 290)그렇게 대답 : 때로는 개에게 불성이 ‘있다’고 대답하고, 때로는 ‘없다’고 대답한 것.
  288. 291)경에 이 말은 보이지 않고, 『백장광록』에서 이 말이 경에 있다고 한다. 이후 여러 선사들은 『백장광록』을 보고 경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289. 292)이 말은 『고존숙어록』 권1(X68, 9c1)에 실린 『백장광록』에 나오는 말로서, 백장 회해 선사가 한 말이다. 아마도 혜심 선사가 황벽과 그의 스승 백장을 서로 혼동한 것이 아닌가 한다.
  290. 293)초제 혜랑招提惠郞 : 738~820. 시흥 곡강 사람이고 성은 구양씨. 13세에 등림사의 모模 선사 밑에서 출가하고 20세에 구족계를 받음. 석두의 법을 이었다. 양단梁端 땅의 초제사에서 30여 년을 두문불출하였다. 이로 인해 ‘초제’라는 호를 얻게 되었다.
  291. 294)석두 희천石頭希遷 : 700~790. 광동성 단주 사람이고 성은 진陳씨. 육조 혜능에게서 득도하였고, 이후 혜능이 입적한 뒤에는 청원 행사靑原行思에게서 참학함. 약산 유엄藥山惟儼에게 법을 부촉함.
  292. 295)이하의 문답은 『경덕전등록』 「담주초제혜랑선사조」(T51, 311b5)에 나온다. 한글 번역은 김월운 역, 한글대장경181 『경덕전등록』 상(서울: 동국역경원, 1970), p.536.
  293. 296)수긍하지 않음(不肯承當) : ‘不能承當’으로도 쓰임. 주 274 참조.
  294. 297)서시西施 : 중국 고대 춘추시대 월越나라의 미인이라 함. 당唐나라 때 양귀비와 더불어 미인의 대명사로 쓰임.
  295. 298)좋지 않겠는가 : 원문은 ‘하방何妨’. 당대의 구어. ‘∼하는 것이 어떨까?’ 또는 ‘∼한들 괜찮지 않겠는가?’
  296. 299)대혜 종고 선사는 이 문제에 대하여 『大慧普覺禪師語錄』 권26 「答富樞密」(T47, 921a~c), 「答張舍人狀元」(T47, 941a~c)에서 각각 논의하고 있다.
  297. 300)위에서 예로 든 세 가지와 같은 잘못된 견해 : 가), 나), 다)를 지칭.
  298. 301)『金剛三昧經論』(T34, 967b1)에는 다음과 같다. “如其離無取有, 破有取空. (此爲妄空,) 而非眞無. 今雖離有, 而不存空, 如是乃得諸法眞無故.” 그런데 혜심 선사가 본 책은 『금강삼매경』이 아니고 『만선동귀집』인 듯하다. 그 이유는 『만선동귀집』의 이 단락에서 ‘유무有無’에 대한 다양한 논의를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萬善同歸集』(T48, 983c11)에는 “金剛三昧經云, 若離無取有, 破有取空, (此僞妄空,) 而非眞無. 今雖離有, 而不存空, 如是乃得諸法眞無.”라고 되어 있음. ‘此爲妄空’ 또는 ‘此僞妄空’ 어느 쪽이든 『선문수경』에서는 생략되어 있다.
  299. 302)앞에서 말한 의리선: 「① ‘유무의 무’라는 병통 골라내기」에서 ‘의리선’을 말한 부분을 지칭.
  300. 303)말로 하는 논리(道理) : 실천하여 몸소 자신이 체험하는 것을 강조하는 선사들의 어록 속에서 이 용어는 항상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문맥에 따라 ‘이치’, ‘설명’, ‘조리’, ‘핑계’ 등의 뜻으로 번역할 수 있다.
  301. 304)표층마음(意根) : 주 280 참조.
  302. 305)이 이야기는 남양 혜충(?~775) 국사와 웬 선객 사이의 대화에서 시작되었다. “(남양 혜충 국사가) 어떤 선객에게 물었다. ‘어디에서 오는가?’ 그 선객이 말했다. ‘남방에서 왔습니다.’ 국사가 물었다. ‘남방엔 어떤 선지식이 있는가?’ 그 선객이 말했다. ‘선지식이 퍽 많습니다.’ 국사가 물었다. ‘어떻게 사람들을 가르치던가?’ 그 선객이 말했다. ‘그곳 선지식들은 당장에서 학인들에게 보이기를 마음이 곧 부처요, 부처는 깨닫는다는 뜻이다. 그대들은 이제 모두가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성품을 다 갖추었는데 이 성품은 눈썹을 치켜 올리고 눈을 껌벅이게 한다. 가고 옴에 활용되어 온몸에 두루 했으므로 머리를 만지면 머리를 알고 다리를 만지면 다리가 안다. 그러므로 정변지正遍知라고 한다. 이것을 떠나서는 따로 부처가 없다.…….’ 대사가 이렇게 말했다. ‘만일 그렇다면 선니외도先尼外道의 말과 다를 것이 없다.…….’”(김월운 역, 한글대장경182 『경덕전등록』 하, 서울: 동국역경원, 1971, p.516) 백파 선사는 『선문수경』에서 ‘瞬目揚眉’라고 했지만, 원래는 ‘揚眉瞬目’이다. 의미상 차이는 없음.
  303. 306)두 병통 : ⑤와 ⑥을 지칭.
  304. 307)화살을 받는 터(射堋) : 일부러 흙을 높이 쌓아 화살을 받을 수 있도록 만든 터. 이렇듯이 눈동자를 굴리고 치아를 딱딱 부딪치는 행동은, 평지에 인위적으로 무언가를 쌓는 격이라는 뜻.
  305. 308)군더더기로 그러는(特地) : ‘특지特地’는 ‘일부러’, ‘특별히’, ‘괜히’를 뜻하는 부사어. 여기서는 그럴 필요가 없는데 군더더기로 덧붙였다는 뜻으로 사용.
  306. 309)원오 극근圓悟克勤 : 1063~1125. 임제종 양기파의 선승으로 오조 법연 선사의 제자. 『설두송고』를 강의했는데, 이것이 훗날 『벽암록』이라는 책으로 묶여 지금까지 ‘종문제일서宗門第一書’로 애독되고 있다.
  307. 310)원오 선사의 이 말은 그의 제자인 대혜 종고의 『大慧普覺禪師語錄』(T47, 883a21)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老和尙曰, 也不易爾到這箇田地. 可惜爾死了不能活. 不疑言句, 是爲大病.” 이때의 노 화상은 원오 선사를 지칭한다. 말만 믿고, 그 말의 속내를 의심하지 않는 잘못을 원오 선사께서 지적한 것이다.
  308. 311)덕산 선감德山宣鑒 : 782~865. 『금강경』에 정통하여 ‘주금강周金剛’으로 별명. 덕산의 문하에서 유명한 설봉 의존과 암두 전할이 나왔음.
  309. 312)『五燈會元』 권15 「덕산선감조」(X80, 142b), “上堂, 若也於己無事, 則勿妄求, 妄求而得, 亦非得也. 汝但無事於心, 無心於事, 則虛而靈, 空而妙.”
  310. 313)마음이 장벽처럼 되어야 : 우리의 마음은 대상으로 향하는 지향志向하는 작용이 있다. 이런 작용으로 인해서 대상에 대한 ‘이미지’를 내 마음속에 그려 넣는다. 그러고는 그 ‘이미지’를 대상 자체와 동일하다고 오인하여 갖가지 인식작용을 일으켜, 끝내는 대상 자체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때문에 선종에서는 대상으로 향하는 마음을 쉬라고 한다. 마치 은산철벽이 놓이면 더 이상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듯이 마음이 장벽을 마주한 듯이 일체의 분별을 멈춰야 한다고 한다.
  311. 314)무심無心 : 『대승기신론』의 심식설에 기초한 성종性宗 내에서는 ‘無心’의 의미를 크게 둘로 사용하고 있다. ① 무망심無妄心의 뜻으로 일체의 번뇌를 모두 없애는 행위, 또는 그런 상태. 이런 의미의 무심이 되면 결과적으로 진여만이 오롯하게 남는다. ② 사유 작용을 정지하는 행위, 또는 그런 상태. 이렇게 되면 무생물과 다름없다. 화엄종이나 선종은 모두 성종性宗의 철학에 기반하고 있는데, 이 두 학파는 모두 ①을 높이 치고, ②를 금기시한다.
  312. 315)불안 청원佛眼淸遠 : 1067~1120. 오조 법연 선사의 제자이다. 『벽암록』의 주인 원오 극근과 더불어 임제종 양기파의 선풍을 널리 선양. 서주 용문사에 오래 주석한 인연으로 용문 청원으로도 불린다. 불안은 칙호이다.
  313. 316)『古尊宿語錄』 권28 「舒州龍門佛眼和尙語錄」(X68, 180b22), “上堂. 擬思量, 何劫悟. 不思量, 終莽鹵. 欲思不思踏破時, 萬里無雲常顯露. 常顯露, 妙用恒沙非旦暮. 諸禪伯, 正好休征罷戰, 永息干戈, 傍水倚山, 成就大事. 況是人生易老, 壽命幾何. 或若生死現前, 畢竟將何支準. 不見古德道, 若不安禪靜慮. 到者裏總須茫然. 久立.”
  314. 317)『원각경』 「금강장」(T39, 550a23)의 게송, “喩如銷金鑛, 金非銷故有, 雖復本來金, 終以銷成就, 一成眞金體, 不復重爲鑛.” [번역] 비유하면 금광석을 녹임에, 정금은 녹인 까닭에 생긴 것이 아니다. 그러나 본래 금이지만, 마침내 제련해야 얻을 수 있다. 이렇게 한번 정금이 되면 다시는 광석이 되지 않는다.(신규탁, 『원각경』, 경기: 도서출판 깃발, 2009, p.58)
  315. 318)『육조단경』에 직접적인 문장은 보이지 않지만, 이 점에 대해서는 선종과 화엄종 모두 다음에 인용하는 『성유식론』의 견해를 수용하고 있다. 『成唯識論』(T31, 8a25), “瑜伽亦說, 諸種子體, 無始時來, 性雖本有, 而由染淨, 新所熏發.” [번역] 『유가사지론』에서도 역시 말했다. 모든 종자의 본바탕은 무시이래로 자성이 비록 본유本有이지만, 때로는 물들기도 하고 때로는 정화되기도 하기 때문에 새롭게 훈습시켜야만 (자성이) 드러난다.
  316. 319)표층마음(意根) : 「④ 이리저리 따져서 궁리하는 병통 골라내기」의 주 280 참조.
  317. 320)구멍 없는 철퇴(無孔鎚) : 주 276 참조. 이 중 2가지 뜻 가운데 번역자에게는 ②의 뜻으로 읽힘.
  318. 321)이 대목에서 혜심 선사는 ‘문헌적 근거’를 가지고 화두의 의미를 체험하려 하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문헌적 근거’란 이상의 ①~⑧에서 말하는 모든 경우가 다 해당한다. 그래서 혜심 선사는 다음 문장에서 “모든 병통에 다 해당한다.”고 했다. 문장이 많이 생략되어서 처음 읽을 때에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원문을 소리 내어 읽어 보면 혜심 선사의 저의를 알 수 있다. 현토하면, “引證은 上의 諸病에 通한다.”쯤 될 것이다.
  319. 322)『大慧普覺禪師語錄』 권5(T47, 829b29), “師乃云, 佛法要妙, 離言說相, 離文字相. 離心緣相. 不可以有心求, 不可以無心得, 不可以語言造, 不可以寂默通. 如塗毒鼓, 聞著則腦門百裂. 似猛火聚, 近之則燎却面門.”
  320. 323)『大慧普覺禪師語錄』 권30 「答張舍人狀元」(T47, 941b10), “如僧問趙州, 狗子還有佛性也無. 州云無. 只管提撕擧覺. 左來也不是, 右來也不是.”
  321. 324)『大慧普覺禪師語錄』 권22 「示永寧郡夫人」(T47, 904a9), “一日因老僧陞座, 擧藥山和尙初參石頭. 問石頭云, 三乘十二分敎, 某甲粗亦硏窮, 曾聞南方有直指人心見性成佛, 實未明了, 乞師指示. 石頭云, 恁麽也不得, 不恁麽也不得, 恁麽不恁麽總不得. 藥山不契.”
  322. 325)거량(擧着)하는 : ‘擧着’에서의 ‘着’은 ‘v+着’의 형태로 조자助字임. ‘着’ 대신 ‘著’으로도 사용. 설착說着, 문착聞着, 도착道着 등등의 용례가 있음.
  323. 326)눈썹을 흩날리며 어서 가버림 : 원문은 ‘剔起眉毛便行’이다. 군자는 옳지 못한 말이나 모습이 들리거나 보이면 귀를 씻고 눈을 씻듯이, 참된 수행자라면 남이 하는 말에 귀 기울이지 말고 어서 자리를 뜨라는 것이다. 그것도 눈썹이 휘날릴 정도로 잽싸게 말이다.
  324. 327)끝내 빙 돌지 말아야 한다 : 타인의 말이나 논리에 휘둘리지 말고 중심을 잡으라는 당부이다. 원문은 ‘終不打之遶’. 이 말은 『大慧普覺禪師語錄』 권29 「答張舍人狀元」(T47, 937c12)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左右頻寄聲妙喜, 想只是要調伏水牯牛, 揑殺這猢猻子耳. 此事不在久歷叢林飽參知識, 只貴於一言一句下, 直截承當, 不打之遶爾.” [번역] 당신이 내게 편지를 자주 보내오는 건 수고우를 길들이고 이 원숭이를 죽이고 싶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일은 총림을 오랫동안 편력하면서 선지식을 찾아뵙는 데에 있지는 않습니다. 오직 말 한마디, 한 구절 아래서 딱 부러지게 이해해 빙 돌지 않는 것이 소중하니,…….(장순용 옮김, 『대혜보각선사서·참선의 길』, 서울: 고려원, 1997, p.217).
  325. 328)부여잡을 단서가 없는 사안(沒巴鼻) : 주 112 참조.
  326. 329)솔기나 바느질 선이 없는 옷(無楞縫) : 천의 두 쪽을 맞대고 꿰맨 줄이나 흔적이 없는 옷. 언어나 사유의 흔적이 전혀 없음을 비유함.
  327. 330)구멍 없는 철퇴 : 주 276 참조.
  328. 331)자기 집(家) : 자신의 본래 모습. ‘가리사家裏事’ 또는 ‘본분사本分事’라고도 함. ‘도중사途中事’와 대비되는 말. 『선문수경』에서는 ‘自家所’로도 사용. 주 275 참조.
  329. 332)절대로 빌릴 필요가 없다 : 원문은 ‘更不假如下起疑叅究事’. 이 경우의 ‘更’은 뒤에 ‘不’, ‘不假’, ‘不須’ 등의 부정사를 수반하여, ‘절대로 ~가 아니다’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당송대의 구어 어법.
  330. 333)이것이 무슨 말인가 : 원문은 ‘是箇什麽道理’. 이때의 ‘道理’는 ‘이야기’, ‘말’의 뜻임.
  331. 334)사심死心 : ‘무기공無記空’ 또는 ‘회신멸지灰身滅智’의 상태. 주 227 참조.
  332. 335)바람도 없는데 파도를 일으키는 꼴 : 맨살을 괜히 긁어 부스럼 내는 일.
  333. 336)『금강경』 4구게 : 「14. 『금강경』 4구게에 배당」의 주 168 참조.
  334. 337)법현 역, 『大般涅槃經』 권하(T1, 204c23), “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
  335. 338)『大方廣佛華嚴經疏』 권1 「往復序」(T37, 503a6), “往復無際, 動靜一源, 含衆妙而有餘, 超言思而逈出者, 其唯法界歟.”; 실상사 화엄학림 번역 대중 역, 『華嚴經 玄談』(상권)(서울: 조계종출판사, 2003), p.89.
  336. 339)36종의 대대待對 : 「14. 『금강경』 4구게에 배당」 부분의 주 175 참조.
  337. 340)『六祖大師法寶壇經』 「付囑第十」(T48, 360a28), “忽有人問汝法, 出語盡雙, 皆取對法, 來去相因, 究竟二法盡除, 更無去處.”; 심재열 역주, 『역주 육조단경』(경주: 불국선원, 1986), p.306.
  338. 341)자리에 앉은 것 : 본 번역서의 「20. 달마의 삼처전심」 중에서 제3처의 주 237 본문 참조.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는 『선문염송·염송설화』 1(김월운 역, 서울: 동국역경원, 2005, pp.486~490) 참조. 한편, 제3처에서는 “依位而立”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서는 “依位而坐”라 하였다. 이곳의 ‘坐’는 ‘立’의 착오인 듯하다.
  339. 342)「2. 향상하는 본분의 진여」 참조.
  340. 343)종을 세 망치 치는 것 : 아침 예불 때에 법당 내에 있는 금고金鼓를 세 번 내렸다 올리는 것을 말함. 한편 저녁에는 한 번 내린다. 구체적인 행법은 『통일법요집』(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 서울: 조계종출판사, 1998, p.41) 참조.
  341. 344)순당巡堂 : 승당을 순회하는 것. 순당에는 주지의 순당, 수좌의 순당, 유나의 순당 등 여러 가지 순당이 있고 그 목적 및 작법도 다름.
  342. 345)노주露柱 및 등롱燈籠을 소재로 법 거량하는 것 : 노주는 선원 경내의 둥근 기둥. 등롱은 수레에 켜는 등. 선사들이 이런 물건들을 소재로 다양한 법 거량을 하고 있다. 예를 들면 『碧巖錄』 「제15칙 雲門倒一說」(T48, 155a)의 본칙의 평창에서 원오 선사가 거량한 것과, 『人天眼目』 권2(T48, 310a)에 나오는 “大圓頌 : 平懷常實, 事圓理畢. 露柱燈籠, 無得無失.” 등이 유명하다. 대원大圓은 위산 영우(771~853) 선사 시호이다. 그런데 이 말의 정확한 뜻은 알기 어려움. 다만 생명이 있는 존재와 반대되는 무정물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것임에는 분명.
  343. 346)승당僧堂 및 선당禪堂~거량을 하는 것 :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음.
  344. 347)격벽擊壁 : 간당틀을 한 번 치고(擊), 면벽(壁)하는 것. 주 248 참조.
  345. 348)36종의 대대待對 : 주 175 참조.
  346. 349)『六祖大師法寶壇經』(T48, 360b21), “師言, 此三十六對法, 若解用卽, 道貫一切經法, 出入卽離兩邊, 自性動用.” 이 부분에 대한 기존의 한글 번역은 참 다양하다. 본 번역은 심재열 거사의 번역문을 채택하여 소개한다. “조사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이 36상대법을 쓸 줄 알면 곧 도가 일체 경전의 법을 꿰뚫어 출입함에 곧 양변을 여의어서 온전히 자성을 동용하리다.’”(심재열 역주, 『역주 육조단경』, 경주: 불국선원, 1986, p.311).
  347. 350)목판본에는 이어서 「간당론看堂論」이 실려 있으나 『한국불교전서』 제10책에 따르면 “이 부분은 『작법귀감』 속에 들어 있기 때문에 편집자가 삭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본 번역은 『한국불교전서』를 대본으로 했기 때문에 그에 따라 생략한다. 한글 번역본으로 『작법귀감』(김두재 역, 서울: 동국대학교출판부, 2010)이 출간되었으니, 참고 바람.
  1. 1){底}刊年未詳東國大學校所藏本(附作法龜鑑之看堂論)。
  2. 2)目次。編者作成補入。
  3. 1)此下底本有看堂論。此文。在於作法龜鑑之內故編者除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