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소림통방정안(少林通方正眼) / 少林通方正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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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림통방정안少林通方正眼
여러 편지(諸狀)의 대의大意는 다만 자세하고 소상함(委曲)에 요점을 두었다. 아래에서는 진공眞空 가운데 묘유妙有가 있음을 밝히고 있으니, 이는 진제眞諦의 공空을 밝혀서 속제俗諦의 유有를 깨닫게 하려고 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통방정안通方正眼’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백파 문인 봉기 기록(白波門人 奉琪 錄)
김두재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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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림통방정안少林通方正眼
총목차總目次
1. 화장대 소림굴 선교결사회기華藏臺少林窟禪敎結社會記
2. 사중청규社中淸䂓
3. 영상을 찬탄함(像賛)
4. 또 영상 찬탄 병서(又像賛并序)
5. 대율사대기대용지비명 병서大律師大機大用之碑銘并序
6. 참봉 홍재혁께 답함(答洪叅奉在爀)
7. 최창룡 진사님께 답함(答崔進士昌龍)
8. 여 참판동식께 준 선정의 삿된 견해를 밝힌 글(與呂叅判卞定邪解東植)
9. 참판 김정희金正喜께 답함(答金叅判正喜)
10. 금구金溝 홍재혁洪在爀께 부침(寄洪金溝在爀)
11. 영안부원군 김조순 공께 올린 답서(上永安府院君金公祖淳答書)
12. 영명위永明尉의 답서 앞에 홍 정승께 올린 인장印狀에 대한 답서를 붙이다(永明尉前上洪相印狀 答書附)
13. 일逸 상인上人께 부침(寄逸上人)
14. 화은華隱 장로에게 보낸 답서(答華隱長老)
15. 기봉 장로에게 『선문수경禪文手鏡』에 대하여 읊은 시에 대한 답서읊은 시를 붙여 둠(答奇峰長老吟禪文手鏡詩吟詩附)
(백파) 행장(行狀)
여러 편지(諸狀)의 대의大意는 다만 자세하고 소상함(委曲)에 요점을 두었다. 아래에서는 진공眞空 가운데 묘유妙有가 있음을 밝히고 있으니, 이는 진제眞諦의 공空을 밝혀서 속제俗諦의 유有를 깨닫게 하려고 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통방정안通方正眼’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1. 화장대 소림굴 선교결사회기華藏臺少林窟禪敎結社會記
행주幸州 기정진奇正鎭1) 지음
호남에는 이름난 산과 강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백암白巖의 기이함은 유독 뛰어나서 관람을 하려는 사람들이 그 자취를 따라서 서로서로 찾아들곤 했다. 그 산의 수승함은 곧 산 서쪽에 하나의 골짜기가 있는데, 거기에서 재 하나를 넘어가면 그곳 동쪽에는 다만 푸른 산봉우리가 병풍처럼 빙 둘러서 있는 것이 보일 뿐, 구름과 해를 가려서 냉연冷然히 세상 사람들이 구경하려는 계책을 허여하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관람하려는 사람들은

010_0626_b_01L

010_0626_b_02L1)少林通方正眼

010_0626_b_03L
010_0626_b_04L
諸狀大意只要委曲下明眞空妙有
010_0626_b_05L爲明眞空了俗有故名通方正眼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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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0626_b_07L2)白波門人奉琪錄

010_0626_b_08L3)總目次

010_0626_b_09L
華藏臺少林窟禪敎結社會記幸州奇
正鎭述

010_0626_b_10L中淸䂓像賛
又像賛并序阮堂金
正喜撰

010_0626_b_11L大律師大機大用之碑銘并序阮堂金
正喜撰

010_0626_b_12L洪叅奉在爀
答崔進士昌龍與呂叅
010_0626_b_13L判卞定邪解東植答金叅判正喜

010_0626_b_14L洪金溝在爀上永安府院君金公祖淳
010_0626_b_15L永明尉前上洪相印狀
永明尉答書

010_0626_b_16L寄逸上人答華隱長老答奇峰長老
010_0626_b_17L吟禪文手鏡詩

010_0626_b_18L
行狀

010_0626_b_19L

010_0626_b_20L華藏臺少林窟禪敎結社會記

010_0626_b_21L幸州奇正鎭述

010_0626_b_22L
湖之南多名山水而白巖以奇獨著
010_0626_b_23L觀者轍跡相尋也然其勝迺在山西
010_0626_b_24L一壑及其踰嶺而東則但見蒼巘如屏
010_0626_b_25L蔽虧雲日冷然不與世眼謀是以觀者

010_0626_c_01L일찍이 비용을 적게 들이려는 마음을 먹지 않았고, 머뭇머뭇 거리면서 탐구하고 검토하였다. 저렇게도 신령스러운 비경秘境의 생김새가 흡사 신령한 거북이가 그 사이에 몸을 감추고 있는 것과 같음을 그 누가 알랴.
내가 젊은 시절에 우리 집안에 복이 많아 그 신령한 거북이에게 복을 빌곤 하였었는데, 아침저녁으로 노을과 안개가 서로 이어지곤 했다고 한다. 마침내 여가를 내어 그곳에 가서 유람할 기회가 생겼는데, 그곳 신선이 사는 곳(洞府)을 보니 그리 깊숙하고 은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배에서부터 등에 이르기까지의 거리는 40리쯤 되었는데, 모두가 웅장한 산세에 길게 뻗쳐 있는 숲으로 되어 있어서 저절로 세속의 티끌과 끊어져서 속태를 멀리 벗어나 있었다. 그 깊숙한 오른쪽에는 머리를 드러낸 거북이가 환태幻胎한 듯하고, 폭포수는 휘날려서 거품을 내뿜고 종소리와 풍경소리는 다투어 울려 퍼졌으며, 또 산 서쪽에는 이러한 비경이 없다.
다만 그 가운데 선승禪乘만이 중도에 쇠미해져서 귀에 들리는 것과 눈에 보이는 것으로는 무엇을 가지고 그 도道를 명명命名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승려들은 날마다 게으름만 심해지고 가람은 기울어져 무너질 날이 머지않은 것처럼 보였다.
태세 경인庚寅(1830)년에 백파白坡 노스님께서 미타사彌陁寺지금의 운문사雲門寺로부터 이곳에 와서 산을 탐하고 구름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베어 버릴 수가 없었으므로, 이에 그 문도門徒들에게 공부를 가르쳐서 선禪과 교敎의 취지를 찾는 까닭에 산문을 저버리지 못하고 헤매는 이들에게 크게 베풀어 주었다. 그러고는 다시 모연문募緣文을 띄워 재물을 모아서 법당을 새로 중창하려고 하였다.
화장華藏에는 누대가 있었고 소림少林에는 토굴이 있었으니, 화장대華藏臺는 그 옛터에 짓고 소림굴少林窟은 새로운 터에 지었다. 화장대에서는 아난阿難이 물려준 경전을 연마하였고, 소림굴에서는 달마達摩 대사의 비밀한 가르침을 참구하게 되었으니, 이를 이름하여 선교결사회禪敎結社會라고 한 것이다.
이렇게 이름을 붙인 의미는 선법과 교법에 대하여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게 하려고 한 때문이다. 그러자 사방에서 용상龍象2)들이 스님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하여 줄을 지어 찾아왔는데, 법희선열法喜禪悅3)로 배 불리지 않고 떠나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으며, 그 지방의 스님들조차 존경하고 본받아야 할 대상으로 여겼으니 위대한 일이로다. 지금부터 이 뒤로 영구산靈龜山의 푸른 남기(嵐綠)가 얼마나 많은 사문들을 길러 낼는지 알지 못하겠다.
노스님께서 나에게 이런 사연들을 기록해 달라고 간청하셨다. 내가 들으니 불교에서는 선종禪宗과 교종敎宗, 이 두 종파는 서로 융합하여 소통한 적이 드물다고 하고, 또한 오히려 유생儒生들이

010_0626_c_01L曾不爲之少費蹰躇以探討夫孰知靈
010_0626_c_02L區秘境如靈龜者藏於其間哉余少家
010_0626_c_03L福之於靈龜晨夕煙霞之相及
010_0626_c_04L得乘暇徃遊見其洞府不甚邃密
010_0626_c_05L腹背數四十里皆鉅山長林自然夐越
010_0626_c_06L絕塵若其幽右露頭龜黿幻胎飛泉
010_0626_c_07L噴沫鐘磬爭響又山西之所无也
010_0626_c_08L其禪乘中微耳目所接无以其道名者
010_0626_c_09L緇流日益惰窳伽藍之傾有日矣
010_0626_c_10L庚寅白坡老師來自彌陁今之
雲門
貪山戀
010_0626_c_11L不能割捨乃課其門徒大張禪敎
010_0626_c_12L求所以不負乎山者又發緣鳩財重新
010_0626_c_13L法宇華藏有臺少林有窟坮葺其舊
010_0626_c_14L窟剏其新華藏以演阿難之遺乘少林
010_0626_c_15L以究達摩之密旨名之曰禪敎結社會
010_0626_c_16L命名之義欲其无偏袒於禪與敎也
010_0626_c_17L方龍象之欲請其業者于于而來莫不
010_0626_c_18L飽法喜禪悅而去以爲彼方衲子所矜
010_0626_c_19L偉矣夫未知從今以徃靈龜嵐綠
010_0626_c_20L養得幾箇沙門也老師請我記其事
010_0626_c_21L聞佛之禪敎兩宗罕能融通亦猶儒之
010_0626_c_22L{底}咸豊壬子誌記本(潭陽龍華寺所藏)此通
010_0626_c_23L方正眼當置優曇林下錄之後然此書有白坡亘
010_0626_c_24L璇之書狀及行狀故載亘璇著述之後以下禪源
010_0626_c_25L溯流山史略抄皆有炯之撰故收錄於同處(編)

010_0626_c_26L「白波」二字編者補入目次編者作成補入

010_0627_a_01L특별히 강설하는 것을 받았다고 한다. 두 갈래 길로 나뉘어져 있는데, 이 두 가지 중에 어느 한쪽도 없어지지 않게 하려고 하니, 상인上人4)께서 불교에 얼마나 심취하고 계신지를 알 만하다. 저 혜원慧遠5) 법사의 백련사白蓮社를 어찌 족히 말하겠는가?
그리하여 삼가 그 사적을 서술하여 백열栢悅 스님의 뜻을 붙여 둘 뿐이로다.
2. 사중청규社中淸䂓
하나. 『참상선지叅商禪旨』6)는 바로 우리 부처님과 조사님들께서 전해 주신 선법의 바른 맥락이다. 밖으로는 모든 인연을 쉬고악한 일을 생각하지 않음, 안으로는 마음에 헐떡거림이 없는 가운데선함을 생각하지 않음, 오직 단 하나의 화두話頭만을 들어 온 힘을 기울여서 공부해 나아가서 타파칠통打破漆桶7)하여 자성을 완전히 깨닫는 것이 바로 최상승最上乘의 제일가는 방편이 되기 때문이다. 달마達摩 조사의 진영眞影을 동방의 나라 소림굴에 봉안奉安하는 까닭은 선禪을 공부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을 맑히고 자성을 보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 선종이나 교종의 언구言句들은 비록 그것이 부처님과 조사님의 찌꺼기이라고는 하지만, 지금 이 숙세叔世(末世)를 당면해서는 진실로 제일가는 방편의 표식이 된다. 이 결사회에 들어온 사람은 절대로 무리를 따라 떼 지어 다니면서 머리를 감싸고 미친 듯이 내달린다거나, 예배하고 참회하면서 염불念佛을 한다거나, 온종일 눕지 앉고 오래도록 앉아 있다거나, 탑사에 공양을 올리는 등 유루인과有漏因果의 모습에 집착하는 등의 삿된 행위는 하지 말고, 다만 부처님과 조사님께서 본디부터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요의대승了義大乘인 여실如實한 말씀이나 가르침으로써 평생토록 해야 할 사업으로 삼아서 날마다 생활하는 가운데 차를 마시고 밥 먹는 일처럼 하라.
그렇게 해서 오래도록 수행을 한다면 힘을 얻게 될 것이니, 오직 마음의 종지宗旨가 골수까지 흠뻑 적시게 되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지견知見이 점점 원만해지고 밝아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바람을 맞고 버젓이 앉아 법의 우레를 떨치고 법의 북을 울려서 사람들과 하늘의 안목眼目을 열어 줄 수 있을 터이니, 진정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해야 할 진실하고 올바른 사업이라 할 것이다.
혹시라도 영리한 근기를 지닌 이가 있어서 선의 이치만을 분별하는 지견(義理知見)만이 진정 원만하게 밝아진 연후에야 부처님과 조사님의 말씀에 속는 대상이 되지 않을 것이요, 가르침의 진리를 다 내려놓는다면 『참상선지』는 곧 반드시 물의 흐름을 따라 배를 운행하는 것과 같아서 많은 힘을 들이지 않고서도

010_0627_a_01L特受講說分爲二塗二者之不偏廢
010_0627_a_02L知上人深於佛也彼其遠法師之白蓮
010_0627_a_03L何足道哉謹叙其蹟以寄栢悅之
010_0627_a_04L意云爾

010_0627_a_05L

010_0627_a_06L社中淸䂓

010_0627_a_07L
一叅商禪旨正是佛祖所傳正脉外息
010_0627_a_08L諸緣不思
內心無喘不思
單單提撕話頭
010_0627_a_09L盡力做將去打破漆桶頓悟自性
010_0627_a_10L最上乘第一方便故達摩祖師眞影
010_0627_a_11L安于東方丈少林窟以爲禪學者明心
010_0627_a_12L見性之道也

010_0627_a_13L
一禪敎言句雖是佛祖糟粕當此叔世
010_0627_a_14L實爲第一榜樣入此會者切勿隨群逐
010_0627_a_15L埋頭狂走於禮懺念佛日中長坐
010_0627_a_16L供養塔寺等有漏因果之著相邪行
010_0627_a_17L以佛祖本懷了義大乘之如實言敎
010_0627_a_18L其平生所業之日用茶飯則久久得力
010_0627_a_19L唯心宗旨浹於骨髓佛法知見漸得
010_0627_a_20L圓明矣可以當風大坐振法雷鳴法皷
010_0627_a_21L開鑿人天眼目正是今時之眞正事業
010_0627_a_22L或有利根義理知見眞正圓明然
010_0627_a_23L不爲佛祖言頭所欺放下敎義
010_0627_a_24L商禪旨則必如順水行舟不費多力

010_0627_b_01L곧바로 성현들의 영역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고금古今의 위세 당당한 모든 선사들을 자세히 살펴보건대, 그중 어느 누구를 지목하여 우뚝하게 뛰어나고 뭇 사람들을 초월한 문장가로서의 견벽堅擘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바라건대 이 결사회의 대중들은 오늘부터 이후로는 늙거나 젊거나 영리하거나 아둔함을 따지지 말고, 다만 거룩한 가르침으로써 밝은 거울로 삼아서 스스로의 마음을 비추어 본다면, 곧 틀림없이 여래如來께서 웃음을 머금고 수긍하시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호하는 선신善神들이 기뻐하면서 따라다니며 보호함을 보게 되리라. 이런 까닭에 본사本師의 거룩한 영상을 화장대의 큰 법당에 봉안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이들을 위하여 종지種智의 도를 훈습하게끔 하려는 것이다.
하나. 아침저녁으로 예경禮敬을 하는 것도 역시 말법시대 불제자들의 표치標幟이니, 곧 아침에는 『화엄경』 근본회根本會의 삼보향수해香水海께 복을 빌고, 저녁에는 여러 경전 지말회枝末會의 삼보칠불七佛 등께 예를 올리면서, 이 결사회를 위하여 떳떳한 규율을 바꾸지 말고, 반드시 아침저녁으로 열심히 수행하고 스스로 게으름을 경책하되, 부디 어떤 일을 핑계로 규율의 조장條章을 폐지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말라.
만약 참예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으로 간주하여 낱낱이 꾸짖고 일깨워 주어서 백천생百千生토록 모든 부처님의 회중會中에 다 함께 법의 친구가 되어 선善한 종자를 심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하나. 두 때의 식당작법食堂作法8)도 역시 부처님의 제자라면 성대하게 거행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온 결사회의 늙은 사람이나 젊은 사람 할 것 없이 한결같이 빠지는 일 없이 일제히 한 법당에 나아가서 상단에는 자비하고 높으신 삼보자존三寶慈尊께 공양을 올리고, 중단에는 불법을 옹호하는 성중聖衆들께 공양을 올리며, 하단에는 아홉 친족의 먼저 가신 혼령과 열 종류의 뭇 중생들에게 공양을 올리고 나서, 차례에 따라 자리에 단정하게 앉아서 경을 독송하고 음식을 받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과 조사님이 정하신 총림叢林의 맑은 규칙이요 역시 속가俗家의 3대에 남겨진 가풍이다. 그러니 자질구레한 인연의 일 때문에 법회 대중에 참예하지 않고 미복微服 차림으로 그릇을 들고 왼쪽 오른쪽으로 서로 부딪치면서 맑은 대중들을 흐리게 하거나 혼란스럽게 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말라.
하나. 오계五戒는 비록 그것이 사람과 하늘이 지켜야 할 것이기는 하지만, 원래 부처님의 제자인 대사大師라면 무슨 계율이든 따지지 않고 하나하나 엄격하게 지키는 것이 옳다. 음주飮酒의 한 계율은 오늘날에 있어서 가장 시급하게 지켜야 할 조항이다.
각등各等의 공망空亡이나 승려들의 망신亡身이

010_0627_b_01L而直登聖域矣諦觀古今之雄雄諸師
010_0627_b_02L誰非卓▼((嫈-女)*卂) 超群之文章巨擘耶願此會
010_0627_b_03L自今以後不問老少利鈍直以聖
010_0627_b_04L敎爲明鏡照見自心則必見如來含笑
010_0627_b_05L首肯護法善神歡喜隨護矣是以本
010_0627_b_06L師聖像奉安于華藏坮大法堂以爲敎
010_0627_b_07L學者熏習種智之道也

010_0627_b_08L
一朝暮禮敬亦末法佛子之標幟則朝
010_0627_b_09L福華嚴根本會三寶香水
暮禮諸經枝末
010_0627_b_10L會三寶七佛
以爲此會不易常䂓而須
010_0627_b_11L早暮勤行自責懈怠切勿以有事
010_0627_b_12L條章若有不叅者可謂無慚愧人
010_0627_b_13L一警策以爲百千生諸佛會中同作
010_0627_b_14L法侶之善種也

010_0627_b_15L
一兩時食堂作法亦佛子盛擧則一會
010_0627_b_16L老少一不落漏齊赴一堂上供三寶
010_0627_b_17L慈尊中供擁護聖衆下及九族先靈
010_0627_b_18L十類群生而次第端坐誦經受食
010_0627_b_19L是佛祖之叢林淸䂓亦是俗家之三代
010_0627_b_20L遺風也切勿以小小緣事不叅法衆
010_0627_b_21L而微服執器左右衝突濁亂淸衆也
010_0627_b_22L一五戒雖是人天行元是佛子之大師
010_0627_b_23L則不問何戒一一嚴持爲可飮酒一戒
010_0627_b_24L最爲今日之急務以各等之空亡僧徒

010_0627_c_01L전부 부처님의 말씀을 삼가지 않은 데에서 나온다. 염치廉恥를 돌아보지 않고 어려워함이 없이 마음대로 술을 마셔서 오래도록 취해 깨어나지 못하고, 한평생을 무너뜨리고도 영원히 부끄러워함이 없기 때문이다.
아, 슬프도다. 오늘날 여러 지방에 승려들 중에 산업에 일삼는 범승凡僧들은 우선 놓아두고라도 종사宗師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부처님과 조사님으로부터 전해 내려온 선교禪敎의 사업은 몽외夢外에 놓아 버리고 한결같이 괘념掛念치 않고 있다. 젊은이에서부터 늙은이들에 이르기까지 다만 돈이나 쌀을 제 맘대로 쓰면서 오래도록 술에 취해 실없는 말로 농지거리나 하며, 나의 일생 동안 제일 편리하고도 마땅한 좋은 소식이라고 말한다.
심지어는 앞으로 엎어지고 뒤로 자빠지는 등 사람이 할 일조차 살피지 못하고, 외람되게도 가사袈裟를 걸치고 주책없이 발우를 내밀기를 날마다 이와 같이 하고, 해마다 이와 같이 하고 있다. 청하노니 깎은 머리를 어루만지면서 어찌 부끄러워하지 않는가? 자기 자신은 염라대왕의 면전에서 무쇠방망이를 맞는 일이 먼 훗날 죽은 뒤에 생길 것이다. 먼저 그 재앙이 나를 낳아 준 부모에게 미칠 것이요, 밤낮으로 무간지옥이라는 큰 지옥에서 통곡하게 될 것이다.
아, 슬픈 일이로다. 아픔이 심부心腑를 얽어매니 이미 살아 계셨을 때엔 맛있는 음식을 공양하지 못했고, 다시 돌아가신 뒤에는 극심한 고통만 끼쳐 드렸으니, 그 죄업에 대한 혹심한 벌은 겁劫이 다하여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삼가지 않을 수 있겠으며, 참으로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비록 평생토록 가는 곳마다 엄격하게 금하였건만, 손바닥을 기울여 어떻게 강물을 막겠는가? 사마귀가 큰 수레에 대항하는 격이니 부질없이 스스로 피로만 쌓이는구나. 도리어 꺼리고 싫어 해서 서로 기피함을 당했으니, 여러 지방을 통해 금지하면서 온 힘을 다 쏟아 보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도다. 내 혼자의 힘으로는 이 한 암자조차 어떻게 제어할 능력이 없도다. 또한 하물며 여러 선사들의 진영眞影을 소림굴에 봉안하고 선과 교의 두 회상을 아울러 동쪽과 서쪽에 시설해서 후손들을 위하여 먼저 가신 선사님들을 모시고 청정한 업業을 수행하는 큰 도량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지금부터 이 뒤로 이 결사회에 들어온 사람들은 술 마시는 계율을 엄격하게 지켜서 깨끗하기가 마치 얼음이나 눈처럼 해야 할 것이다. 비록 다른 모든 죄를 범하는 일이 있더라도 술 마시는 계율을 잘 지켜 보호한다면, 다섯 분의 큰 신장神將이 일체를 금지해 막아 줄 것이요, 기필코 저승 관리들도 나쁜 일을 주력해 기록해서 잡아 가는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이는 부처님께서 진실하게 말씀하신 것이니 믿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나. 범어로 승가僧伽라고 하는 것은 이곳 말(중국말)로는 화합和合이라고 한다. 화합에는 여섯 가지 화합이 있다.
첫째는

010_0627_c_01L之亡身都出於不憚佛語不顧廉恥
010_0627_c_02L无難恣飮長醉不惺而壞了一生
010_0627_c_03L無慚愧故也嗟乎今日諸方衲子
010_0627_c_04L業凡僧姑捨以宗師稱名者佛祖傳來
010_0627_c_05L禪敎事業置之夢外一不掛念自少
010_0627_c_06L至老直以舞弄錢米長醉戱謔爲我
010_0627_c_07L一生第一得便宜之好消息甚至於前
010_0627_c_08L倒後傾不省人事而猥著袈裟狂展
010_0627_c_09L鉢盂日日如是年年如是請摩剃頭
010_0627_c_10L胡慚愧自己之閻羅面前喫鐵棒
010_0627_c_11L在死後爲先殃及於所生父母日夜痛
010_0627_c_12L哭於無間大獄嗚呼哀哉痛纒心腑
010_0627_c_13L旣不供甘旨於生前還以遺劇苦於死
010_0627_c_14L酷罰其罪窮刼難盡可不愼歟
010_0627_c_15L不愼歟我雖平生到處嚴禁側掌塞
010_0627_c_16L螗蜋拒轍徒自疲勞還見嫌避
010_0627_c_17L禁諸方一力無奈獨此一庵胡不能
010_0627_c_18L又況諸師眞影俱安少林禪敎兩
010_0627_c_19L並設東西以爲後孫陪先師行淨業
010_0627_c_20L之大道場者乎自今以後入此會者
010_0627_c_21L嚴持酒戒淨如氷雪雖犯諸罪護酒
010_0627_c_22L戒五大神一切禁防必不爲冥司
010_0627_c_23L注所牽也佛是眞實語者可不信耶
010_0627_c_24L一梵語僧伽此云和合而有六和

010_0628_a_01L몸으로 화합하는 것이니 함께 어울려 잘 살아가는 것을 말하고, 둘째는 입으로 화합하는 것이니 서로 다투는 일이 없는 것이며, 셋째는 이익으로 화합하는 것이니 모든 것을 균등하게 나누어가지는 것이요, 넷째는 계로 화합하는 것이니 함께 받들어 행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바른 견해로 화합하는 것이니 다 같이 해탈하는 것이요, 여섯째는 진리로 화합하는 것이니 함께 증득하는 것이다.
만약 승려라는 명칭을 지니게 된 사람이라면, 위와 같은 여섯 가지 화합의 뜻을 지니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도처의 총림叢林에서 비록 승려라는 이름을 가진 백 천의 사람이 있어 같이 살고 있긴 하지만, 또한 말다툼을 하는 이들도 없거든 하물며 몸싸움을 하는 사람이 있겠느냐. 이것이 바로 본사 대교주大敎主께서 법계를 융화하여 한집안으로 만드신 큰 원력願力의 여파餘波이다.
시간적으로는 과거ㆍ현재ㆍ미래의 3제를 다하고 공간적으로는 시방세계 가운데를 두루 다하도록 아홉 종류의 이학異學을 배우는 이들의 아주 탁월한 학문으로서도 미치기조차 어려운 것은 진실로 이 때문이다.
지금 이 결사회 가운데 만약 승려라는 이름을 돌아보지 않고, 지견知見을 같이하지 못해서 혹은 계율을 어기거나 사소한 이권 때문에 말다툼을 하는 이가 있어서 대중들 속에서 분란을 일으키거나, 혹은 몸으로 같이 살지 못하는 데에 이르러서 오고감에 혐오를 품거나 동반자들을 헐뜯고 비방하여 승가의 화합을 깨뜨리는 사람은 곧 다섯 가지 역죄逆罪 중 하나를 지은 사람이다.
아버지를 살해한 죄와 어머니를 살해한 죄와 아라한을 살해한 죄와 부처님의 몸에서 피를 나게 한 죄와 더불어 털끝만큼도 다름이 없다. 그러한즉 자기 염라왕의 무쇠방망이를 어느 길에서 면할 수 있겠으며, 부모님이 먼저 받는 앙화殃禍를 참아 낼 수가 있겠는가.
바라건대 부디 나의 동반자들이여, 각각 여섯 가지 화합이라는 명칭의 의미를 잘 생각해서 비록 어겨야 할 경지에 처하더라도 일체를 다 참고 견뎌서 마음 밭에 부처님의 종자를 다 함께 심어 겁겁劫劫에 똑같은 법의 친구가 되어야 할 것이다.
3. 영상을 찬탄함자신이 직접 지음(像賛自撰)
頭髼鬆兮眼卓朔     머리카락은 더부룩하고 눈은 툭 불거진 그 모습이
此豈老僧眞面目     이 늙은 중의 참다운 면목面目이라네
上拄天兮下拄地     위로는 하늘을 떠받치고 아래로는 땅을 지탱한 것
佛祖元來覔不得     부처님도 조사님도 원래 찾을 수 없었던 것이로다
阿呵呵是甚麽     하하하, 우습구나, 그것이 무엇일까
南北東西唯是我     남북동서에 오직 나 혼자뿐이로다
4. 또 영상 찬탄 병서(又像賛并序)
완당 김정희金正喜9) 지음

010_0628_a_01L身和同住二口和無諍三利和同分
010_0628_a_02L四戒和同奉五見和同解六理和同證
010_0628_a_03L若得僧名者以有六義故到處叢林
010_0628_a_04L雖有百千名同住而亦無口爭者況有
010_0628_a_05L身鬪者乎此是本師大敎主融法界爲
010_0628_a_06L一家之大願力餘波也竪窮三際之內
010_0628_a_07L橫徧十方之中九類異學之卓卓難及
010_0628_a_08L良以是也今此會中若有不顧僧
010_0628_a_09L知見不同戒或違戾口爭小利
010_0628_a_10L亂大衆或至於身不同住懷嫌去來
010_0628_a_11L毁謗同伴以破和合僧者即五逆中一
010_0628_a_12L罪也與殺父殺母殺阿羅漢出佛身血
010_0628_a_13L之罪分毫不殊則自己之閻羅鐵棒
010_0628_a_14L何路可免父母之先受殃禍其可忍乎
010_0628_a_15L願我同伴各思六和名義雖有違境
010_0628_a_16L一切堪忍同種佛種子於心田刼刼同
010_0628_a_17L爲法侶矣

010_0628_a_18L

010_0628_a_19L像賛自撰

010_0628_a_20L
頭髼鬆兮眼卓朔此豈老僧眞面目

010_0628_a_21L上拄天兮下拄地佛祖元來覔不得

010_0628_a_22L阿呵呵是甚麽南北東西唯是我

010_0628_a_23L

010_0628_a_24L又像替并序
阮堂金正喜撰

010_0628_b_01L
내가 옛날 본 달마상達摩像설봉雪峰 도인의 지두화指頭華임에 공양한 적이 있었는데, 누구나 그 그림을 본 사람이면 백파白坡의 영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 기연機緣10)을 매우 이상하게 여겨 외짝 짚신(달마)은 서쪽으로 돌아갔는데 보신報身은 동방의 나라에 현신한 것인가 하고 의심하였다.
옛날 산곡山谷11) 노인은 이백시李伯時12)가 그린 도연명陶淵明13)의 영상이 흡사 자기의 영상과 똑같다고 하였고, 또 진회해秦淮海14)가 간직하고 있던 도연명의 영상이 더욱 근사하게 닮았으므로 인하여 도연명의 영상을 가지고 자신의 영상이라고 우겼다 하더니, 오늘날 달마와 백파는 하나도 아니요 둘도 아니라고 하면서 등불과 등불이 서로 통해 전하고 구슬 그물이 겹겹으로 둘러서 주인과 나그네가 서로 원융圓融하여 걸림이 없을 뿐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추사는 자기가 소장하고 있던 영상을 백파의 영정影幀인 줄로 알고)15) 영구산靈龜山으로 보내 문도門徒들로 하여금 아침저녁으로 공양을 올리라고 부탁하면서, 그 영상 곁에 대신 고기송孤起頌16)을 지어 붙여 주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遠望似達摩    멀리서 바라보면 달마達摩와 같은데
近看卽白坡    가까이서 보니 바로 백파白坡였구려
以有差別     차별差別이 있음을 가지고서
入不二門     불이문不二門에 들어갔으니
流水今日     흐르는 물이 오늘이라면
明月前身     밝은 달은 옛 모습이로세
5. 대율사대기대용지비명 병서(大律師大機大用之碑銘 并序)
완당 김정희 지음
우리 동방의 나라에는 근세에 율사律師가 없었는데, 한 종파의 문중에 오직 백파白坡만이 그 율사에 해당할 만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율사라고 쓴 것이다. 대기大機와 대용大用은 바로 백파가 80년 동안 착수하고 힘을 쏟은 분야이다. 혹 어떤 사람은 기機ㆍ용用ㆍ살殺ㆍ활活을 가지고 지리멸렬하게 천착穿鑿하기도 하지만 이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
무릇 평범한 사람들을 상대하여 다스리는 자는 어느 곳에서건 살殺ㆍ활活ㆍ기機ㆍ용用이 아닌 것이 없다. 비록 팔만대장경이라 하더라도 그중에 단 한 가지 법도 살ㆍ활ㆍ기ㆍ용의 밖으로 벗어나는 것은 없다. 다만 사람들이 이러한 이치를 알지 못하고 망령되이 살ㆍ활ㆍ기ㆍ용을 가지고 백파가 구집拘執한 모습에만 집착하는 것으로 여긴다면, 이는 모두 하루살이가 큰 나무를 흔들려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이것이 어찌 백파를 충분히 아는 것이겠는가.
예전에 백파와 더불어 자못 오고가고 하면서 진실을 가리기 위해 논란을 벌인 적이 있었으나, 이는 곧 세상 사람들이 이 문제를 함부로 떠들어 대는 것과는

010_0628_b_01L
余舊供本達摩像雪峰道人
指頭華
人之見之者
010_0628_b_02L無不以絕坡像其機緣甚异隻履西
010_0628_b_03L報身東現歟昔山谷老人以李伯
010_0628_b_04L時所畫陶淵明像恰與自家像相同
010_0628_b_05L秦淮海所藏淵明像尤逼肖仍以淵明
010_0628_b_06L像爲自家像與今日達摩白坡非一非
010_0628_b_07L燈燈相印珠網主伴重重互相圓
010_0628_b_08L融無碍耳遂擧以屬之靈龜山中作
010_0628_b_09L白坡像使其門徒晨夕熏供題其像
010_0628_b_10L以代孤起之頌云遠望似達摩
010_0628_b_11L看即白坡以有差別入不二門流水
010_0628_b_12L今日明月前身

010_0628_b_13L

010_0628_b_14L大律師大機大用之碑銘并序

010_0628_b_15L阮堂金正喜撰

010_0628_b_16L
我東近無律師一宗唯白坡可以當之
010_0628_b_17L以律師書之大機大用是白坡八十
010_0628_b_18L藉手著力處或有以機用殺活
010_0628_b_19L離穿鑿是大不然凡對治凡夫者
010_0628_b_20L處非殺活機用雖大藏八萬無一法出
010_0628_b_21L於殺活機用之外者特人不知此義
010_0628_b_22L以殺活機用絕坡拘執着相者是皆
010_0628_b_23L蜉蝣㨔樹也是烏足以知白坡也昔與
010_0628_b_24L白坡頗有往復辨難者即與世人所妄

010_0628_c_01L크게 다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오직 백파와 나만이 아는 것이니, 비록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온갖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모두 이해하고 깨닫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어찌 율사를 다시 일어나 오게 하여 서로 마주하고 한 번 웃을 수 있겠는가.
지금 백파의 비면碑面에 쓸 글자를 지음에 있어서 만약 특별히 대기대용大機大用이라는 한 구절을 큰 글씨로 쓰지 않는다면 백파의 비석이라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써서 설두雪竇와 백암白巖 등 백파의 계통을 이은 여러 문도門徒들에게 보여 주려는 것이다.
비명은 다음과 같다.

貧無卓錐     가난하기로는 송곳 꽂을 땅도 없었으나
氣壓須彌     기개는 수미산須彌山을 누를 만하였네
事親如事佛    부모 섬기기를 부처님 섬기듯 하였으니
家風最眞實    가풍家風이 가장 진실眞實하였네
厥名兮亘璇    그의 법명이 긍선亘璇이니
不可說轉轉    전전轉轉함을 말할 수 없네
6. 참봉 홍재혁께 답함홍 참봉이 보내온 편지를 붙여 둠(答洪叅奉在爀 來書附)
홍 참봉이 보내온 편지17)
한 번 이별하고 나서 여러 해가 지났습니다. 아마도 전진前塵이 남애南涯와 북각北角의 사이를 가로막아서 그렇게 된 것 같거니와 다만 꿈을 꾸면 그 속에서 서로 비추곤 할 따름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가운데 지난해 봄에 신령하고도 밝은 심화心畵18)가 제 손 안에 들어왔기에 진중珎重한 마음으로 애지중지 감상해 보았더니, 마니주摩尼珠처럼 맑은 광채가 밑바닥까지 사무칠 뿐만 아니라, 주불麈拂19)께서도 평안하고 아무 일이 없다 하시며, 병석甁錫20) 또한 고달픔이 없는 가운데 밝게 타오르는 한 자루의 촛불 속에 평안히 지내신다 하니, 위안이 되어 흡사 물을 쏟아 내듯이 시원합니다.
편지를 받고 답장(修覆)을 올릴까도 생각해 보았으나, 표치飄褫를 잃어버림으로 인하여 세월이 점점 흘러(荏苒) 오늘에 이르고 나니, 아직도 어떤 물질이 목구멍에 걸린 듯합니다. 홀연히 동제東齊에 활선活禪21)이 이불을 들고 위방委訪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의 일로 인하여 좌우左右22)의 안부(安信)를 대략이나마 듣고 나니, 그 기쁨을 어찌 헤아릴 길이 있겠습니까?
비인鄙人23)은 만 길 깊이의 출렁이는 바다가 너무도 아득하여 그쳐 머물 곳이 없는 신세인지라, 실타래가 얽히고설키듯 등나무 넝쿨과 칡넝쿨이 설키고 얽어맨 듯합니다. 비록 진묵塵墨의 한량없이 많은 겁을 윤전輪轉한다 하더라도 단지 이것은 이러한 하나의 자취일 뿐입니다. 돌아보건대 어찌 귓가에 여러 사람들이 일제히 지르는 소리를 듣는 걸로 만족하다고 여길 수 있겠습니까?
비록 그러하나 주하麈下24)께서는 이미 비천한 견해라 하여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지난번에 서폭書幅에 가득 담은 내용을 천 리 머나먼 곳에까지 펼쳐 보여 주셨으니, 비천한 이 사람도 역시 부득불 일의 형상과 자취를 말해서 그 유과諛寡함을 다하지 않을 수가 없기에, 낱낱이 들어서 조목조목 답하는 것입니다.
또한 바라건대 주하께서는 허심탄회하게 들어 주십시오. 그렇게만 하면 이것이 어찌 주하께서 말씀하셨던 ‘한창려韓昌黎와 태전太顚 스님의 인연25)’에 비하여

010_0628_c_01L議者大異此個處唯坡與吾知之
010_0628_c_02L萬般苦口說人皆不解悟者安得并起
010_0628_c_03L師來相對一笑也今作白坡碑面字
010_0628_c_04L不大書特書於大機大用一句不足爲
010_0628_c_05L白坡碑也書示雪竇白巖諸門徒係
010_0628_c_06L貧無卓錐氣壓須彌事親如事佛
010_0628_c_07L風最眞實厥名兮亘璇不可說轉轉

010_0628_c_08L

010_0628_c_09L答洪叅奉在爀來書附

010_0628_c_10L
一別幾年若隔前塵南涯北角只有
010_0628_c_11L行夢相照不意昨春靈明心畵來墜
010_0628_c_12L手裡珎重愛玩不啻如摩尼珠之精光
010_0628_c_13L徹底也即諗塵拂晏靖瓶錫無惱
010_0628_c_14L然一炷慰恰如瀉擬即修覆而仍失
010_0628_c_15L飄褫迄今荏苒尙如有物在喉忽於
010_0628_c_16L東齋持被之中活禪委訪因此而略聞
010_0628_c_17L左右之安信其喜何可量也鄙人萬丈
010_0628_c_18L滾海茫無止泊縷緖紛縈藤葛罥纒
010_0628_c_19L雖輪轉塵墨無量之刼只箇是這樣一
010_0628_c_20L顧何足提聆於齊聲之耳根也雖然
010_0628_c_21L塵下旣不以鄙見而棄之向有滿幅敷
010_0628_c_22L示於千里之遠鄙亦不得不不事形迹
010_0628_c_23L而罄其諛寡枚擧條答亦望塵下
010_0628_c_24L心而聽之則此豈非塵下所謂黎顚之

010_0629_a_01L유독 옛날의 전미專美한 그 인연보다 우리의 인연이 그만 못하겠습니까?
주하께서 말씀하시기를 “부처님을 좋아하는 것도 좌우만한 이가 없고, 부처님을 배척하는 것도 어르신네만 한 이가 없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어떤 견해를 좋아하는 것이며, 또한 어떤 견해를 배척하는 말입니까?
비천한 이 사람의 견해를 말하자면 부처님을 아는 것도 주하만 한 분이 없으며, 부처님을 알지 못하는 것도 주하만 한 분이 없는 것 같습니다. 천하의 진리가 동쪽이 아니면 서쪽이고, 저것이 아니면 이것일 테니 중간이라는 구절은 안배할 곳이 없을 듯하지만, 자세히 생각해서 그걸 찾아 본다면 역시 그렇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비천한 이 사람은 하나는 좋아하고 다른 하나는 배척합니다. 그 이유는 이런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좋아하는 이유로는 그 맑은 마음과 탐욕을 절제하고 계율戒律을 순수하고 엄격하게 지키며 현전現前에서 항상 실천하는 도이니, 이것은 바로 석씨釋氏께서 말씀하신바 가장 아랫단계의 사람이 공부하는 것이라 하거니와, 비천한 이 사람은 진실한 것 같아서 그런 이유 때문에 이것을 좋아합니다.
배척하는 이유로는 부질없이 치달려 먼 곳까지 달려가 형체를 버리고 현상에 떨어지며 과科 밖에서 그림자만 찾는 도의 문을 배척하는 것이니, 이것은 바로 석씨께서 말씀하신바 가장 윗단계의 사람들이 공부하는 것이라 하거니와, 비천한 이 사람은 허망한 것 같아서 그런 이유 때문에 배척합니다.
그렇다면 좋아하는 것은 피부와 점막에 윤기가 흐르는 것에 지나지 않고, 배척하는 것은 곧 그 골수骨髓가 허하여 일탈한 것과 같나니, 이것은 곧 비천한 이 사람이 감히 말씀드릴 수 없는 이유입니다.
대저 유교와 불교의 도道에 대하여 혹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근본은 똑같은데 지말枝末적인 면이 조금 다르다.”라고 합니다. 대개 이런 말은 그 본바탕은 같으나 활용에 있어서 다르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 또한 옳은 듯하지만, 사실은 잘못된 논리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유교와 불교가 모두 한마음(一心)의 위에서 공부를 하는 것인데, 서로 다른 점은 마음이라고 말하는 것은 같고 마음이라고 말하는 까닭은 다르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유교에서는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의 이理를 가지고 마음으로 삼고, 불교에서는 허령虛靈한 지각知覺의 기氣를 가지고 마음으로 삼습니다. 인ㆍ의ㆍ예ㆍ지는 이의 정精이니 주관하고 바로잡는 지각으로 하여금 어긋난 길로 가지 않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요, 허령한 지각은 기의 묘妙이니 인도하고 돕는 인의仁義로 하여금 운용하는 도구로 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유교에서는 오직 의리義理가 분명하지 못해서

010_0629_a_01L不獨專美於昔也耶塵下云好佛莫
010_0629_a_02L如左右斥佛莫如左右好是何見
010_0629_a_03L是何見以鄙見之則知佛莫如塵下
010_0629_a_04L不知佛亦莫如塵下天下之理不東則
010_0629_a_05L西不彼則此似無中間句安排之地
010_0629_a_06L而諦思而求之則亦有不然者鄙之所
010_0629_a_07L以一好而一斥者其亦有說所以好之
010_0629_a_08L好其淸心節慾精戒嚴律現前常行
010_0629_a_09L之道此是釋氏所云最下工夫而鄙之
010_0629_a_10L所以實而好之者也所以斥之者斥其
010_0629_a_11L空馳遠騖遺形落事科外影探之門
010_0629_a_12L是釋氏所云最上工夫而鄙之所以虛
010_0629_a_13L而斥之者也然則好之者不過皮膜之
010_0629_a_14L敷潤而斥之者乃其骨髓之虛脫
010_0629_a_15L則鄙不敢辭也大抵儒佛之道或謂本
010_0629_a_16L同而末異盖謂其體則同而用則殊也
010_0629_a_17L然此亦似是而實非之論也何者儒釋
010_0629_a_18L俱是用工於一心上而殊不知心之名
010_0629_a_19L而所以言心者異也儒者以仁義
010_0629_a_20L禮智之理爲心釋者以虛靈知覺之氣
010_0629_a_21L爲心仁義禮知理之精也所以主正
010_0629_a_22L乎知覺而使之不差者也虛靈知覺
010_0629_a_23L氣之妙也所以引翼乎仁義而爲之運
010_0629_a_24L用者也故吾儒唯恐義理之不明

010_0629_b_01L지각의 주관이 되지 못할까 두려운 까닭에 마음에 사물의 이치를 깊이 연구하여 사물의 도리를 깨닫는 경지에 이르고자 하며, 불교에서는 오직 사리事理가 어수선하고 소란스러워서 정신적 지각이 번뇌에 더러워질까 두려워하는 까닭에 마음으로 어떤 한 일에 다가가 하나의 이치를 사색해서 정신을 기르는 유일한 길에 서려고 하나니, 이런 주장에 입각해서 말한다면 곧 스스로 그 근본까지도 역시 동일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대저 불교의 학문은 중국으로부터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래로 마음에 대하여 설명한 것이 세 갈래의 학설이 있습니다. 그 처음은 죄와 복의 인과因果로 인하여 천당이나 지옥에 윤회한다는 설이니, 이것은 그 주장하는 학설이 천근淺近한 논리로서 단지 어리석은 중생들에게 의혹을 일으키게 할 수 있는 것이며, 그 중간은 인식하는 마음의 작용이 있어서 자성을 깨닫는다는 학설이니, 이것은 그 주장하는 학설에서 의심을 일으켜 현혹되게 하는 것이어서 족히 중지中智의 사람으로 하여금 의혹하게 할 수 있는 것이며, 그 마지막은 사물로 인하여 자성에 즉卽한다는 학설이니, 이 학설은 술수가 더욱 정밀하고 말도 더욱 미묘해서 아무리 고명高明한 최고의 지혜를 지닌 사람이라 하더라도 역시 함정에 빠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른바 진리에는 더욱 가까운 듯하여 큰 혼란을 일으킬 것이 뻔합니다.
그런 까닭에 첫 번째 항목의 학설은 곧 석씨의 조잡한 흔적이므로 잘못을 깨닫는 일이 쉬우며, 두 번째와 세 번째 항목의 학설은 바로 석씨의 정밀한 진리이기 때문에 그 깨닫기가 더욱 어려운 것입니다.
얼핏 풍문에 들으니, 근일近日에 주하께서는 조용한 곳에 따로 하나의 암자를 지으려 한다고 하더이다. 오직 한 분 사리闍梨를 위하여 밥이나 죽을 공양하고 보양하되 경전의 글은 끊어 여의고 오로지 온 힘을 다 기울여 마음을 관觀하는 법만을 수행하려는 것이라고 하더이다. 이른바 마음을 관한다고 하는 것은 곧 석씨 가풍에서 말하는 선禪을 말하는 것일 겁니다.
대개 선이란 곧 달마達摩께서 말한 “인과因果의 법을 믿지 않아 청정한 지혜의 원만하고 미묘함을 설한 것이다.”라고 한 것이요, 혜능慧能 선사가 말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지 못해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설한 것이다.”라고 한 것이며, 종고宗杲 선사가 말한 “경을 읽고 염불하는 것을 믿지 않고 일없이 인연을 덜어 버리는 것에 힘쓰며 고요히 앉아서 본체를 연구한다.”라고 한 것일 겁니다.
이른바 ‘청정한 지혜와 원만하고 미묘함’과 ‘본래면목’과 ‘고요히 앉아서 본체를 연구한다.’는 학설은 모두 신식神識26)은 생겨나지도 않고 사라져 없어지지도 않는 것이라 여겨 이런 신식이 드러나는 것을 보려고 하는 것일 겁니다.

010_0629_b_01L能爲知覺之主故心欲格物窮理以致
010_0629_b_02L其知而釋氏唯恐事理紛擾爲精神
010_0629_b_03L知覺之累故不欲心泊一事思一裡
010_0629_b_04L專在於養精神一路執此而言之則自
010_0629_b_05L其本而亦不可謂同矣大抵佛學
010_0629_b_06L入中國以來其說心者有三節焉
010_0629_b_07L始也有罪福因果輪回堂獄之說此則
010_0629_b_08L其說淺近只可以惑愚氓蚩隷其中也
010_0629_b_09L有識心見性之說此則其說疑眩足以
010_0629_b_10L惑中智爲士其終也有因物即性之說
010_0629_b_11L此則術愈精而語益妙雖高明上智之
010_0629_b_12L亦可以陷溺矣此所謂彌近理而大
010_0629_b_13L亂眞也所以第一節乃釋氏之粗跡故
010_0629_b_14L其悟非也易第二第三節乃釋氏之精
010_0629_b_15L處故其悟非也爲尤難矣仄聞近日
010_0629_b_16L塵下別搆一庵於寂靜處唯以一闍梨
010_0629_b_17L以供飯粥之養而離斷經文專爲用力
010_0629_b_18L於觀心之法云觀心者即釋氏家所謂
010_0629_b_19L禪也盖禪者即達摩所謂不信因果
010_0629_b_20L而說淨智圓妙慧能所謂不會佛法
010_0629_b_21L說本來面目宗杲所謂不信看經念佛
010_0629_b_22L而務無事省緣靜坐體究者也所謂淨
010_0629_b_23L智圓妙本來面目靜坐體究等說
010_0629_b_24L以神識爲不生不滅而欲見此物之呈

010_0629_c_01L석씨께서 말씀하신 ‘견성見性’이라고 한 것에서 ‘견見’이라는 말은 유교의 가풍에도 역시 있는 말이니, “이 하늘의 밝은 명을 돌아본다.”27)라고 한 말이 그것이요, “마치 서 계시는 곳이 높아 우뚝하다.”28)라고 한 말이 그것이니, 이 모두는 진리에 의거해서 말한 것이지, 어떤 다른 물건이 있어서 드러나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석씨는 그렇지 않으니 “맑은 거울 속에 사물의 현상이다.”라고 말한 것이라거나, “거울 속에 나타난 꽃이다.”라고 말한 것이라거나, “물속에 달”이라고 말한 것이 다 그 형상의 그림자를 지적하여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곧 오직 완전하게 정신 한 가닥만을 길러서 이 물체가 드러나는 것을 보려는 욕망을 기약하는 것에 그 취지가 있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힘써 공부해야 할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무릇 사람의 정신精神과 혼백魂魄은 작용할 때면 흩어지고 가만히 있을 때는 합해지나니, 계속 존재하여 끝나지 않고 여러 번에 걸쳐 쌓이게 되는 지경에 이르러서 그로 하여금 한 일에만 머무르고 한 생각에만 개입하면 쌓여 있던 광명이 혹은 황홀한 사이에 번연飜然히 발연勃然히 발현함이 있으리니, 그 진리도 역시 의례히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저 전염병에 걸린 사람은 정신이 침몰沈沒하고 혼백이 골란汨亂하여 눈은 그 본 것을 베풀 수 없고, 귀는 그 들은 것을 거둘 수가 없어서 하루아침에 땀을 뻘뻘 흘리다가 요행히 조금 나아지게 되나니, 구름이 잔득 끼었을 때의 광명光明도 역시 황홀한 사이에 번연飜然히 발연勃然히 발현함이 있을 터이니 이것이 바로 그 징험입니다.
가령 이런 진리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곧 허망하고 허깨비 같은 광막曠漠한 일을 하면서 만에 하나 요행이 있기를 바라고 있으니, 이미 떳떳한 행위의 바른 진리가 아닙니다. 석씨는 계율을 취하되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삼독三毒이 가장 크다고 하면서, 이에 허망하고 허깨비 같은 광막한 일을 하면서 만에 하나 요행이 있기를 바라는 사람이 고요한 속에서 이를 연구하고 있는데, 그것은 곧 진실로 욕망에서 벗어 나려고 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저 욕망은 탐냄이 아닙니까? 탐냄 또한 삼독의 우두머리가 된다고 하면 성냄과 어리석음도 역시 그 가운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어찌 그 계율이 삼독의 뜻 속에 있다고 하겠습니까? 경문經文이 주하에게는 통발과 덫이겠지만, 저에게는 모래를 헤치면서 금을 가려 내는 도구요, 선지禪旨가 주하에게는 스스로 보배로 여기는 것이지만, 저에게는 문을 바라보면서 달려 가는 것이 될 따름입니다.

010_0629_c_01L露也釋氏之所謂見性也見之爲言
010_0629_c_02L儒者家亦有之曰顧諟天之明命曰如
010_0629_c_03L有所立卓爾皆依理而言也非謂有物
010_0629_c_04L呈露也釋氏則不然曰鑑中像曰鏡
010_0629_c_05L中花曰水中月皆指其形影而言也
010_0629_c_06L此則唯在於完養精神一條而期欲見
010_0629_c_07L此物之呈露者是豈可用工者耶凡人
010_0629_c_08L之精神魂魄用則散存則合存之不
010_0629_c_09L至於積累不令泊一事介一念
010_0629_c_10L光明所聚或有發現於飜然勃然怳兮
010_0629_c_11L惚兮之間其理亦固有之今夫瘟病者
010_0629_c_12L精神沈沒魂魄汨亂目不能施其視
010_0629_c_13L耳不能攝其聽一朝汗出幸而獲差
010_0629_c_14L則雲時光明亦或有發現於飜勃怳惚
010_0629_c_15L之間是其驗也設有是理而乃爲此
010_0629_c_16L虛幻曠漠之事以冀僥倖於萬一者
010_0629_c_17L非常行之正理也釋氏取戒以貪嗔痴
010_0629_c_18L三毒爲最而乃爲此虛幻曠漠之事
010_0629_c_19L冀僥倖於萬一者靜而究之則實出於
010_0629_c_20L慾也慾豈非貪乎貪又爲三毒之首
010_0629_c_21L則嗔與痴亦在其中矣然則烏在其戒
010_0629_c_22L三毒之義乎經文則塵下之所筌蹄
010_0629_c_23L鄙之所以披沙而簡金也禪旨則塵下
010_0629_c_24L之所自珎而鄙之所以望門而走者也

010_0630_a_01L이 위에서 언급한바 석씨께서 말씀하신 가장 낮은 단계의 공부란 저에게는 진실해서 좋아하는 것이 되고, 석씨께서 말씀하신 최상의 공부란 저에게는 허망해서 배척하는 것이 됩니다.
주하께서는 지금 총림叢林에서는 명망이 있고 열랍閱臘도 이미 많으십니다. 게다가 어리석은 승려들은 주하만을 깊이 우러러보면서 성취하기만을 바라고 있으니 어찌 이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주하께서는 중생들을 가련하고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 적지 않아서 사람들을 피하여 한적한 곳을 찾아서 삶을 배척하고 언어문자言語文字에만 매달릴 생각을 가지지 않는다 하시니, 이 또한 주하의 고명高明함이 너무 지나친 폐단입니다.
지금부터라도 다시 법회 자리를 열어서 경을 담론하고 그 뜻을 연설하여 어리석은 스님들로 하여금 은혜에 흠뻑 젖게 하여 마음을 맑히고 욕심을 적게 하는 도를 조금이나마 깨달아서 때를 벗겨 내는 효과에 점점 이르게 한다면, 저 벽을 바라보면서 가부좌를 하고 앉아 마음을 광허曠虛한 가운데 걸어 두고 만에 하나 요행스러운 일이 있기를 바라는 것과는 서로 거리가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부디 비천한 사람이 한 말이라 하여 비천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 가운데 한 가지나 두 가지쯤 취하여 상유지수桑楡之收29)가 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마침 활선活禪을 만나 믿을 만한 인편이라 여겨 보내는 서신이라서 자세한 내용은 이루 다 기록하지 못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다 말씀 드리지 못하고 올립니다.
홍 참봉께 답한 편지30)
서신을 받은 뒤에 더욱더 우러러 보게 되었습니다. 지난번에 편지를 보냈으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답이 없어서 자못 홍교洪喬31)처럼 물속에 편지를 빠뜨렸나 의심하고 있던 차에 뜻밖에 잊을 수 없는 빛나는 편지(華牘)가 이미 다 잊고 올연히 앉아 있는 가운데 갑자기 이르렀습니다.
불자拂子를 얼른 내려놓고 손을 날려 봉투를 열어 읽고 또 외웠으며 외우고 또 읽곤 했습니다. 말마다 친절하였고 구절마다 정이 흠뻑 넘쳐서 불각不覺에 사람들로 하여금 진지眞知의 수행하는 영역으로 인도하여 들어가게 합니다. 그러니 어찌 모과를 던져 이 아름다운 옥(瓊琚)을 얻을 줄 알았겠습니까?32)
그러기에 “바다를 관찰한 사람에게는 물을 말하기가 어렵고, 성인聖人의 문에 노닌 사람에게는 도道를 말하기 어렵다.”라고 한 말이 더욱 믿음이 갑니다. 그러나 스스로 말하거니와 도에 목적을 두고 서로 사귀는 일은 천 년에 한 번 정도 만나기 어려운 일입니다. 어찌 겉껍데기를 장식하는 형적形迹을 가지고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을 드러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의 일은 반드시 마음을 평정하고 저 대도大道의 극치極致를 다할 때까지 천천히 연구해서 정과正科를 삼는다면,

010_0630_a_01L此上所云釋氏所謂最下工夫鄙之所
010_0630_a_02L以實而好之者也釋氏所謂最上工夫
010_0630_a_03L鄙之所以虛而斥之者也塵下今爲叢
010_0630_a_04L林之望而閱臘已高矣痴髠蠢秃之深
010_0630_a_05L仰於塵下而望其成就者何限而塵下
010_0630_a_06L不少憐愍而屛斥索居不以言語文字
010_0630_a_07L爲意者亦塵下高明太過之病也從今
010_0630_a_08L更開法筵談經演義使癡髠蠢秃之軰
010_0630_a_09L得有沾漑稍知淸心寡慾之道而漸至
010_0630_a_10L刮垢之効則與其面壁趺坐掛心於曠
010_0630_a_11L虛之中爲萬一僥倖之事相去還矣
010_0630_a_12L勿以鄙言爲鄙而取其一二以爲桑楡
010_0630_a_13L之收如何如何適逢活禪信便覼縷
010_0630_a_14L至此不宣

010_0630_a_15L
信後益增瞻仰前書迄今無復頗疑流
010_0630_a_16L入洪喬豈意不忘之華牘忽及於已忘
010_0630_a_17L兀坐中乎放下拂子飛手披緘讀而
010_0630_a_18L誦之誦而讀之言言親切句句多情
010_0630_a_19L不覺令人引入於眞知實踐之域矣
010_0630_a_20L知投果得此瓊琚耶益信觀於海者
010_0630_a_21L語水遊於聖人之門者難語道也
010_0630_a_22L自謂道交千載一遇安得外飾形迹
010_0630_a_23L而不露所懷乎今日之事切須平心徐
010_0630_a_24L窮其大道之極致以爲正科雖有

010_0630_b_01L비록 방할棒喝33)을 번갈아 써서 내달리게 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진에嗔恚가 서로 부딪치지 않아서 얻기 어려운 아름다운 깨달음에 부응할 터이니, 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 시비是非의 정은 두텁고 승부의 기질이 높은 것은 정말 그것이야말로 수행하는 사람들의 커더란 병폐일 터이니, 이 또한 삼가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보내온 편지의 뜻을 자세히 살펴보니, 모두 다 옛사람이 만들어 놓은 말에서 흘러나온 것들입니다. 틀림없이 어르신네께서 직접 본 일들은 아닌 것 같습니다. 대개 유생儒生들은 불교의 책을 읽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이나 조사님들께서 몸을 편안하게 하는 참다운 성품의 자리를 알지 못합니다. 그런 까닭에 그 참다운 성품을 잃고 현상에 집착하여 이름만을 따라 경솔하게도 애매하여 분명하지 못한 말을 하거나 농동儱侗34)한 잡스러운 변론을 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니 어찌 뜻이 고명高明한 사람이 역시 이와 같이 거리낌 없이 그 사이에서 팔을 걷어붙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제 먼저 비루한 제 의견을 서술하고 뒤에 배대하여 비교해서 득실得失을 밝히겠습니다.
대저 세 성인35)이 가르침을 베풀어 사람들을 교화함에 있어서 본바탕과 규범은 대동大同하다고 생각합니다. 유교에서는 “고요히 움직이지 않고 있다가(寂然不動)형상形上36) 일단 느끼게 되면 마침내 천하의 일을 통하게 된다(感而遂通)형하形下37).”38)라고 하였고, 노자는 “아무 작용함이 없지만(無爲)진공眞空 하지 않는 게 없다(而無不爲)묘유妙有.”39)라고 하였으며, 부처님은 “항상 고요하면서도(常寂)진공 항상 비추고 있다(常照)묘유.”라고 하였습니다.
‘고요히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말과 ‘아무 작용함이 없다.’는 말과 ‘항상 고요하다.’는 말은 다 형이상形而上이요, ‘일단 느끼게 되면 마침내 천하의 일을 통하게 된다.’는 말과 ‘하지 않는 게 없다.’는 말과 ‘항상 비추고 있다.’는 말은 다 형이하形而下입니다.
형이상이란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진공眞空과 불변不變과 열반涅槃이 바로 그것이니, 이것은 곧 이름을 여의고 현상을 끊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자夫子께서는 “말을 함이 없고자 한다(欲爲無言).”라고 하였고, 달마達摩는 “문자로 성립할 수 있는 게 아니다(不立文字).”라고 하였으며, 육조六祖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지 못한다(不會佛法).”라고 하였습니다.
형이하란 기운을 말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한 묘유妙有와 수연隨緣과 보리菩提라고 한 것이 그것이니, 이는 이름도 있고 현상도 있기 때문입니다. 세 성인께서 이 세상에 출현하셔서 이름을 세우고 현상을 설명하여 가르침을 시설해서 사람들을 교화한 것입니다.
또 이理와 기氣가 원융圓融하게 되면 일시에 앞과 뒤가 없어지는 까닭에 이러한 이와 기가 원융한 곳에 세 종교에서 세운 이름이 같지 않습니다. 유교에서는 ‘일태극一太極’이라고 말하였고, 노자의 도교에서는 ‘천하모天下母’라고 말하였으며, 선교禪敎에서는 ‘일착자一着子’라고 말하였습니다.
불교에서는 경전에 따라 여러 가지 이름이 있으니, 『화엄경』에서는 ‘하나의 법계(一法界)’라는 이름을 붙였고, 『능엄경』에서는 ‘미묘한 진여(妙眞如)’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법화경』에서는 ‘부처님의 지견(佛知見)’이라고 이름을 붙였고, 『원각경』에서는 ‘하나의 원각(一圓覺)’이라고 이름을 붙였으며,

010_0630_b_01L棒喝交馳必不嗔恚相激以副難得之
010_0630_b_02L佳會不亦宜乎是非情厚勝負氣高
010_0630_b_03L正是學者之大病不亦愼㢤第觀來意
010_0630_b_04L盡從古人成語中流出也必非左右自
010_0630_b_05L所見也盖儒者不讀佛書故不知佛
010_0630_b_06L祖安身之眞性處而迷眞失性執相循
010_0630_b_07L率多漫漶儱侗之雜辯矣豈意高明
010_0630_b_08L亦如是無難攘臂於其間也㢤故今先
010_0630_b_09L叙鄙見後方對辨得失也大抵三聖人
010_0630_b_10L設敎化人體䂓大同儒云寂然不動

010_0630_b_11L感而遂通
老云無爲
而無不爲

010_0630_b_12L佛云常寂
常照
寂然不動無爲常
010_0630_b_13L皆形而上者感而遂通無不爲常
010_0630_b_14L皆形而下者也形而上理也
010_0630_b_15L佛謂之眞空也不變也涅槃也此則
010_0630_b_16L離名絶相故夫子欲爲無言達摩不立
010_0630_b_17L文字六祖不會佛法形而下氣也
010_0630_b_18L佛謂之妙有也隨緣也菩提也此則
010_0630_b_19L有名有相故三聖出世立名說相
010_0630_b_20L敎化人也且理與氣圓融一時無前後
010_0630_b_21L此理氣圓融處三敎立名不同
010_0630_b_22L謂之一太極老謂之天下母禪謂之一
010_0630_b_23L着子敎有多名華嚴名一法界楞嚴
010_0630_b_24L名妙眞如法華名佛知見圓覺名一圓

010_0630_c_01L마명馬鳴 보살이 지은 『기신론起信論』에서는 ‘중생의 마음(衆生心)’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다만 중생 일심一心의 법 위에 여러 종류의 의리義理가 있기 때문에 세 가지 종교의 이름이 정립된 것인데, 의리를 따라서 같지는 않지만, 그 법의 본바탕은 모두 다 이 일심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태극이니 천하의 어머니이니 일착자니 하고 말한 것 등은 다 의리에 입각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마명馬鳴이 말한 중생심이란 다만 법의 본체에 입각하여 이름을 정립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많은 학자學者들은 다만 태극太極이 무상無上이 된다는 것만 알고 태극이 바로 어떤 물건인지는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태극에 대해 잘 알면 이 사람은 사람의 분상分上에서 본래부터 스스로 일심을 구족具足한 연후에야 비로소 구경究竟의 극진한 진리를 깨달았다고 할 것입니다. 마치 세상 사람은 단지 물이 귀하다는 것만 알고 그 물이 어떤 물건인지는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물이 바로 파도라는 것을 알 수만 있다면, 파도 위에는 본래부터 축축한 성질을 갖춘 연후에야 비로소 물의 지극한 진리를 다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유자儒者는 “성인(공자)께서는 본천本天이라고 말하고, 석씨釋氏는 본심本心이라고 말한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마음과 하늘을 다르다고 고집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본천이라는 것은 의리義理이고 본심이라는 것은 사욕私慾이니, 이것이 이른바 다만 10이라는 것만 알고, 이오二五가 10이 되는 이치는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어리석지 않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하늘과 일심과 천하의 어머니라는 것이 원래 한 물건이라는 것을 어떻게 안단 말입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가령 유교에서 태극을 가지고 가르침을 시설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할 때, 노자는 천하의 어머니라는 것으로 하고 불교에서는 일심을 가지고 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만약 불교에서 말하는 일심과 노자가 말한 천하의 어머니를 삿된 것이라고 말한다면, 유교에서 말하는 태극이라는 것도 역시 삿된 것일 겁니다.
그러니 올바르다고 하면 다 올바르다고 해야 할 것이요, 삿되다고 한다면 모두 삿된 것이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학자들은 세 분 성인께서 가르침을 베푸신 종취宗趣를 통달하지 못해서 다 함께 사람마다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는 일심인 참다운 성품으로 돌아갑니다.
그런 까닭에 물질적 현상에 집착하고 이름만을 따르며 문장을 따라 천착穿鑿하여 이따금씩 뚜렷한 태도를 밝히지 못하고 우물우물하며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의 잡스러운 말을 만들어 내어 모두 부처와 노자를 배척하고 이단異端을 물리친다는 명분을 세워서 서로서로 팔을 걷어붙이고 자신 있게 담론하며, 파랑새가 날개를 자랑하면서 남쪽으로 날아가려고 도모하는 높은 뜻을 꾸짖는 자라면 눈에 보이는 것이 다 그러할 터이니,

010_0630_c_01L馬鳴菩薩起信論名衆生心也
010_0630_c_02L衆生一心法上有多種義理故三敎立
010_0630_c_03L隨義不同而其法體則都是一心
010_0630_c_04L然則太極天下母一着子等皆約義
010_0630_c_05L立名也馬鳴云衆生心直據法體立
010_0630_c_06L名也世之汎學者但知太極爲無上
010_0630_c_07L而不知太極是何物也能知太極是人
010_0630_c_08L人分上本自具足之一心然後方爲究
010_0630_c_09L竟盡理也如世人但知水之爲貴而不
010_0630_c_10L知水是何物也能知水是波波上本具
010_0630_c_11L之濕性然後方盡水之極理也儒者曰
010_0630_c_12L聖人本天釋氏本心此非心與天別執
010_0630_c_13L故云本天者義理本心者私慾
010_0630_c_14L此所謂但知其十而不知二五者也
010_0630_c_15L不愚哉又安知天與心及天下母元是
010_0630_c_16L一物也哉然則儒以太極設敎爲正
010_0630_c_17L老以天下母佛以一心不可不正也
010_0630_c_18L若以佛老天下母一心爲邪則儒以太
010_0630_c_19L亦邪也正則俱正邪則俱邪也
010_0630_c_20L之學者未達三聖設敎之宗趣 同歸於
010_0630_c_21L人人本具之一心眞性故着相循名
010_0630_c_22L文穿鑿往往做出含糊儱侗之雜說
010_0630_c_23L以排佛老辟畢端爲名而互相揚臂大
010_0630_c_24L矜鶡翼而誚圖南之高者解目皆然

010_0631_a_01L어찌하여 그대의 생각은 진실로 그 가운데에 참예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를 가지고 말하건대 유교에서는 단지 부처와 노자를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한 공자까지도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만약 공자를 안다면 반드시 부처나 노자를 가지고 이단이라고 말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 까닭은 공자孔子께서 노자老子를 보고 교룡(蛟)이라고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교룡이란 사람 가운데 용龍과 같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또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서쪽 지방 나라에 큰 성인이 있다고 하더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단지 유자儒者만이 알지 못할 뿐만이 아닙니다. 불자佛者들이나 노자老者들도 역시 그런 줄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데 어찌 세 분 성인께서 기거하시는 깊은 곳에 함께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어찌 그리도 대도大道를 쓸어 버림이 이와 같이도 심한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또 보시지 못했습니까?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도가 나란히 함께 행하여도 서로 거스르지 않는다. 혹은 물러나 집에 있고 혹은 나아가 벼슬을 하며, 혹은 침묵을 지키고 혹을 말을 하는 등 서로 가는 길은 다르나 돌아갈 목적지는 같고, 백 가지의 생각이지만 한뜻을 이룩한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은 비록 이단異端이라 하더라도 괴이하게 여길 일이 아닙니다.
장자가 말하기를 “하늘과 땅의 완전함이나 옛사람들의 커다란 본체는 보지 못하고 있으니, 올바른 도술은 세상의 학자들에 의해 갈기갈기 찢기게 되어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마치 귀와 눈과 코와 입이 서로 통하지 못하고, 아그배와 배 그리고 귤과 유자가 그 맛이 같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비록 천하를 다스리는 데 쓰기에는 부족하다 하더라도 다 천하에 쓰일 수는 있을 것입니다. 허풍쟁이나 사기꾼이나 궤변을 하는 사람과 혹은 괴이한 것을 말하는 사람이 모두 도道 가운데에서는 통하여 하나가 됩니다. 이것이 곧 이단들이 다 기뻐할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마경維摩經』에 “사리불舍利弗이 이르기를 ‘모든 삿된 소견을 가진 온갖 외도外道들이 모두가 나의 시자侍者입니다. 부처님을 비방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비방했다가 육사六師40)를 따라 떨어져서 곧 음식을 취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만 가지고도 곧 그것이 이단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화엄경』 「입법계품入法界品」에 “한량없고 가없이 많은 모든 선지식善知識이 다 무량겁無量劫 동안 보살도菩薩道를 수행하되 국왕國王과 장자長者와 거사居士와 비구와 비구니와 부인婦人과 동자童子와 외도와 귀신鬼神과 선사船師와 의사와 점쟁이와 향을 파는 사람이 법문法門 아님이 없다. 53선지식 가운데 무염족왕無厭足王41)의 잔인殘忍함과 바수밀녀婆須密女의 음탕婬蕩과 승열선인勝熱仙人의 분신焚身이 다

010_0631_a_01L豈意君實亦叅其中耶以此言之儒者
010_0631_a_02L非但不知佛老亦不知孔子底也若知
010_0631_a_03L孔子底則必不以佛老爲異端也故孔
010_0631_a_04L子見老子曰蛟如人中龍又曰吾聞
010_0631_a_05L西方有大聖人焉非但儒者不知佛者
010_0631_a_06L老者亦不知其然也其如是而安得同
010_0631_a_07L入於三聖人所居之閫隩者哉何其大
010_0631_a_08L道之掃地至於如是之甚也耶又不見
010_0631_a_09L周易曰夫道並行而不相悖或處
010_0631_a_10L或出或嘿或語殊途而同歸一致而
010_0631_a_11L百慮此則雖有異端而不足恠也
010_0631_a_12L子曰不見天地之全古人之大體
010_0631_a_13L術爲天下裂如耳目鼻口之不相通
010_0631_a_14L梨橘柚之不同味雖不足以用天下
010_0631_a_15L可爲天下用恢誕譎怪道通爲一
010_0631_a_16L則可知異端之皆可喜也維摩經謂
010_0631_a_17L利弗曰諸邪見外道皆吾侍者謗佛
010_0631_a_18L謗法隨六師墮乃可取食此則可知
010_0631_a_19L其非異端也華嚴經曰入法界品諸善
010_0631_a_20L知識無量無邊皆於無量刼行菩薩
010_0631_a_21L國王長者居士僧尼婦人童子外道
010_0631_a_22L鬼神船師醫卜及鬻香者無非法門
010_0631_a_23L十三善知識中無厭足王之殘忍婆須
010_0631_a_24L密女之婬蕩勝熱仙人之焚身皆有大

010_0631_b_01L대해탈大解脫의 문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은 곧 삼천세계 중에는 원래 이단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험 삼아 논하건대 세 분 성인께서는 똑같이 주周나라 시대에 출현하셨는데, 마치 해부처님와 달노자과 별공자이 부상扶桑42) 위에 합해 있는 것과 같고, 흡사 강하江河공자와 회수노자와 한수부처가 미려尾閭43)의 연못에 다 모이는 것과 같나니,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그 마음은 똑같은데 그 자취는 다르며, 그 도道는 하나인데 그 가르침은 세 가지일 뿐입니다.
대개 공자는 시방세계 안에서 노니면서 제도를 세워 백성들에게 죄를 범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防民) 심혈을 기울였으니, 아마도 지나치게 고상한 말에 현혹되면 방탕해져서 돌아갈 곳이 없게 될까 두려워한 까닭에 이에 입각하여 가르침을 성립한 것 같습니다.
노자는 시방세계 밖에서 노니면서 세상에 도를 전하는 일이 간절하였으니, 아마도 지극히 은미한 말에 어두워지면 꽉 막혀서 들어가야 할 곳이 없게 될까 두려워한 까닭에 진리眞理를 보여 주어서 저어齟齬하는 이가 없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 무리들이 지리支離하여 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부처님의 가르침이 이미 동쪽으로 옴에 있어서는 이와 같지 않아서 크게는 천지天地를 다 포함하고도 남음이 있고, 자세하게는 가을 터럭 속에 들어가도 간격이 없으며, 모든 꿈속의 말을 빌려다가 이 환인幻人을 가지고 놉니다.
다섯 가지 계율44)과 십선계十善戒45)로 녹원鹿園 안에서 인간 세계와 하늘 세계의 중생들을 개도開導하셨고바로 유교와 동일함, 사선四禪46)과 팔정八定47)으로 취봉산 아래에서 성문승聲聞乘을 건립하셨으며바로 노자의 교와 동일함, 육도六度(육바라밀)와 만행萬行으로 보살의 인因을 심었고, 삼신三身(법신ㆍ보신ㆍ응신)과 사지四智48)로 여래의 과果를 맺었습니다. 율의律儀는 세세細細하여 8만 4천 가지나 되고 묘각妙覺은 중중重重하여 단單49)과 복複50)으로 열두 가지51)가 됩니다.
예경禮經을 음보陰補하는 일은 소왕素王52)도 미처 제정하지 못한 것이요, 도학道學을 경개經開하는 일은 현성玄聖도 말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도가 크게 시행되면 어느 누가 그 은혜를 입지 않겠습니까? 비유하면 마치 큰 바다에서 물고기가 헤엄치고 놀 적에 그 가운데에서 마음대로 출몰出沒하는 것과 같으며, 흡사 넓은 허공에서 새가 날 때에 종으로 횡으로 마음대로 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살과 뼈를 훈습薰習하면 마치 담복화薝蔔花의 향기와 같고, 간과 창자를 관주灌注하면 흡사 감로甘露의 장漿과 같습니다.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이나 문장에 뛰어난 사람도 삼매三昧에 유희하고, 도교의 갓을 쓰고 유생의 복색을 한 사람도 다 보살의 도량입니다. 고금古今을 통하여 현성賢聖의 총명한 변재辯才도

010_0631_b_01L解脫門也此則可知三千界中元無異
010_0631_b_02L端也試甞論之三聖人同出於周
010_0631_b_03L星辰之合於扶桑
之上
010_0631_b_04L江河漢佛之會於尾閭
之淵
010_0631_b_05L偶然也其心則同其跡則異其道則
010_0631_b_06L其敎則三也盖孔子遊方之內
010_0631_b_07L防民也深恐其眩於太高之說則蕩而
010_0631_b_08L無所歸故約之以名敎老子遊方之外
010_0631_b_09L其道世也切恐其昧於至微之辭則塞
010_0631_b_10L而無所入故示之以眞理不無有所齟
010_0631_b_11L齬者此其徒爲所以支離而不合也
010_0631_b_12L佛之敎旣東則不如是大包天地而無
010_0631_b_13L細入秋毫而無間假諸夢語戱此
010_0631_b_14L幻人五戒十善開人天道於鹿園之中
010_0631_b_15L正同
儒敎
四禪八定建聲聞乘於鷲峰之下
010_0631_b_16L正同
老敎
六度萬行種菩薩之因三身四智
010_0631_b_17L結如來之果律儀細細八萬四千
010_0631_b_18L覺重重單複十二陰補禮經素王之
010_0631_b_19L所未制經開道學玄聖之所難言
010_0631_b_20L之大行誰不蒙賜如游魚之於大海
010_0631_b_21L出沒其中如飛鳥之於太虛縱橫皆是
010_0631_b_22L薰習肥骨如薝蔔香灌注肝膓如甘
010_0631_b_23L露漿翰墨文章亦遊戱三昧道冠儒
010_0631_b_24L皆菩薩道場古今賢聖之聦明辯才

010_0631_c_01L역시 온 곳이 있을 것이나, 다만 다른 생生의 일 때문에 그것을 다 잊었을 뿐입니다.이상은 바로 불교와 관련된 것이다.
유자가 불교와 도교를 섭렵涉獵하고는 부천膚淺53)한 한두 가지를 가지고 성인의 가르침을 장엄하게 꾸미니, 이른바 “나의 동산에 있는 오디를 먹었건만 좋은 소리는 보지 못하겠다.”54)라고 한 말과 같습니다.
성인의 말에 “코를 가리고 몰래 향기를 맡는다.”55)라는 것과 세속의 경전에 “키를 키우는 데 도움을 주려고 이삭을 뽑아 올렸다.”56)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 군자君子들이 성리性理에 대한 학설이 글자마다 참답고 진실함을 궁리하였거니와 가슴속에는 오히려 이 물건만 남아 있게 되었으니,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병이 고황膏肓에 이른 사람일 것입니다.
아, 슬픕니다. 대방가大方家57)에 울타리를 걷어 버리고 성학聖學의 바다에 골짝 연못물이 모여듭니다. 그러고 나면 도교의 관을 쓰고 유교의 행장을 차리고 해탈解脫의 법문法門에 함께 들어가며, 글씨를 잘 쓰는 명필이나 글을 잘하는 문장가들이 다 걸림이 없는 자유자재한 행동을 하며, 내지乃至는 꾀꼬리처럼 읊조리고 제비처럼 조잘거리며 시정 사람들이나 하는 한담閒談이나 일삼고 있으니, 절묘絶妙한 천진면목天眞面目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연화장蓮花藏 세계는 범상한 생각으로는 헤아릴 수 있는 게 아니요, 복희宓羲58)와 황제黃帝59) 이상은 부러워할 만할 인물입니다. 시간적으로는 삼제三際의 가운데에 다하고 공간적으로는 시방세계 안에서 두루 하나니, 어떤 기특한 도리道理가 있어서 이 단락의 인연보다 더 낫겠습니까?
아, 슬픕니다. 대미大味는 여러 사람의 입에 부합하지 않고, 대음大音은 많은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러니 내가 어찌 강변할 수 있겠습니까? 이상 여기까지 내 자신의 견해를 서술하여 이미 다 마쳤으니 다음에는 다시 대응하여 변론하시는 답을 기다리겠습니다.
회암晦庵60)이 이르기를 “석씨의 병폐는 정신精神과 혼백魂魄을 가지고 자성自性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61)라고 하였습니다. 과연 자성을 보았다면 허망한 소견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못할 것이며, 이미 허망한 소견이라고 말했다면 자성은 공한 것(性空)이라고 말하는 것 또한 옳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따위의 말을 주장하는 것은 밝은 견해가 아닐 터이니, 아마도 이런 견해는 역시 분명하지 못한 일인 듯합니다.
논평하여 말하겠습니다.
“아마도 일시의 오해인 듯합니다. 불교에서 이르기를 ‘도를 닦는 사람이 진실을 알지 못하는 것은 다만 과거부터 알았던 식신識神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어찌 정신과 혼백을 가지고 자성自性이라 주장하며 마음이이라 고집합니까? ‘자성이 공함을 깨닫지 못하는 것을 허망한 소견(妄見)이라 한다.’고 하였으니, 이미 진공眞空의 이성理性을 보았다면 어찌 허망한 소견이라고 말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보는 주체를 볼 때, 그 주체를 보는 견見은 바로 대상을 보는 주체의 견見이 아니다.’62)라고 하였으니, 어찌 분명하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010_0631_c_01L亦必有所從來特以他生之事而忘之
010_0631_c_02L上來正
是佛敎
儒者涉獵釋老盧淺一二
010_0631_c_03L飾聖敎可謂食我園椹而不見好音
010_0631_c_04L竊香掩鼻於聖言助長揠苗於世典
010_0631_c_05L君子窮性理之說字字眞誠而胷中猶
010_0631_c_06L有此物眞病至於膏肓者也夫
010_0631_c_07L能撤藩籬於大方之家匯淵谷於聖學
010_0631_c_08L之海則道冠儒履同入解脫法門
010_0631_c_09L墨文章皆是神通遊戱乃至鸎吟燕語
010_0631_c_10L市井閒談無非絕妙之天眞面目也
010_0631_c_11L花世界非凡想可擬羲黃以上可足
010_0631_c_12L羨歟竪窮三際之中橫徧十方之內
010_0631_c_13L有什麽奇特道理過於此段因緣
010_0631_c_14L大味不合於衆口大音不人於衆耳
010_0631_c_15L何强卞以駭衆聽上來叙已見已竟
010_0631_c_16L次下更與來意對卞

010_0631_c_17L
晦庵曰釋氏之病錯認精神魂魄爲性
010_0631_c_18L果能見性不可謂之妄見旣曰妄見
010_0631_c_19L不可言性空也此等立言未瑩恐亦
010_0631_c_20L是見得未分明也評曰恐一時之誤也
010_0631_c_21L佛云學道之人不識眞只爲從前認識
010_0631_c_22L豈以精神魂魄爲性爲心耶不見性
010_0631_c_23L謂之妄見旣見眞空理性豈妄見
010_0631_c_24L佛云見見之時見非是見豈不分

010_0632_a_01L
부자夫子가 말한 ‘대개 밝지 못해서 그럴 뿐이다.’라고 한 것이 그것이요, 회암이 또 말하기를 ‘간절히 생각해보건대 근세近世의 학자들은 성인의 문에서 진실한 학문의 근본 차제를 알지 못하고, 부처와 노자의 학설에 빠져서 망령되이 생각하기를 「천지의 만물萬物과 인륜人倫 같은 날마다 활용하는 생활 밖에 특별한 어떤 한 물건이 있는데 공허空虛함이 미묘하여 헤아려 알 길이 없다.」고 하니, 그 마음이 현현연懸懸然하여 요행히 이 물건을 한 번 보고서 극치極致라고 생각한다.’63)라고 하였는데, 일찍이 이 말에 빠지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64)
논평하여 말하겠습니다.
“이 또한 일시적인 오해일 것입니다. ‘대개 천지의 만물과 인륜 같은 날마다 활용하는 것들은 다 형이하形而下65)이다.’라고 하시니, 그럼 형이상形而上66)이란 바로 어떤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부자夫子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무 늙어 황폐해져서 우연히 이 말을 잊어버린 것을 부처와 노자의 학설이라고 생각한다.’고 하였습니다.”
후세의 학자들이 모두 잘 깨달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비록 좌우처럼 고명高明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또한 찡그린 얼굴을 흉내 내지 않는 이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대목을 두고 불교와 도교를 배척하고 이단異端을 물리치는 데 크게 거론하여 이용하고 있습니다. 나는 공자孔子와 맹자孟子의 가르침까지도 장차 쓸어 버려 흔적조차 없어지게 될까 그것이 두렵습니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분별하여 변론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색色이 곧 공空이요, 공이 곧 색이다.’라고 한 것은 노자가 말한 ‘현묘하다(玄).’고 한 것과 똑같은 의미라고 생각하며, ‘현묘한 중에서도 더욱 현묘하다(玄之又玄).’고 한 말은 ‘곧 색이요 곧 공이다(卽色卽空).’라고 한 말과 같은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어찌 특별히 한 물건이 따로 있다고 말하겠습니까?
유자儒者들이 하나를 나누어 둘로 만든다고 하는 것은 이른바 허공을 갈라 두 조각으로 만든다는 말과 같으니, 이는 여기에 떨어졌는데도 스스로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됩니다.
만약 이 양단兩段의 대의大意를 안다면 좌우左右께서 말한 ‘부처님께서는 정신지각精神知覺으로써 마음을 삼기 때문에 본말本末이 다 다르다.’고 한 것이라든지 또한 ‘부질없이 치달려 먼 곳으로 달려간다.’고 하는 것은 분별하여 밝히기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파괴하고 만 것입니다.
또한 귀나 눈으로 미칠 바가 아니기 때문에 믿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미 귀와 눈이 미치는 곳이 아니라고 해서 어찌 감히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곽박郭璞67)은 날의 길흉을 점치는 사람이었습니다. 10년 동안 진晋나라 왕실에서 점을 쳤는데, 마치 부절符節이나 권계券契가 부합하듯 딱딱 들어맞았습니다. 그러니 우리 부처님께서 백만의 많은 겁劫을 기억할 수 없다는 말을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좌자左慈68)는 술사術士였습니다. 위魏나라 도읍에서 모습을 변화시키면 다 사물의 형색과 똑같았으니,

010_0632_a_01L明乎夫子之言盖未瑩耳晦庵又曰
010_0632_a_02L切病近世學者不知聖門實學之根本
010_0632_a_03L次第而溺於佛老之說妄意天地萬物
010_0632_a_04L人倫日用之外別有一物空虛之妙
010_0632_a_05L不可測度其心懸懸然僥倖一見此物
010_0632_a_06L以爲極致未甞不墮於此者評曰亦一
010_0632_a_07L時之誤也葢天地萬物人倫日用皆形
010_0632_a_08L而下者也形而上者是誰之言歟
010_0632_a_09L子耄而荒矣偶忘此言以爲佛老之說
010_0632_a_10L後世學者皆不能覺悟故雖如左
010_0632_a_11L右之高明者亦莫不效嚬而以此節
010_0632_a_12L爲排佛老辟異端之大擧吾恐孔孟之
010_0632_a_13L亦將掃地無迹也雖然不可不卞
010_0632_a_14L佛云色即是空空即是色老云同謂之
010_0632_a_15L玄之又玄即云即色即空則豈別
010_0632_a_16L有一物乎儒者劃而爲二可謂析虛空
010_0632_a_17L作兩片是墮於此而不自知耳若知此
010_0632_a_18L兩段大意則左右所云佛以精神知覺
010_0632_a_19L爲心故本末皆異之說及空馳遠騖之
010_0632_a_20L不待卞而自破也且以非耳目所及
010_0632_a_21L故不信旣非耳目所及安敢不信耶
010_0632_a_22L日者也十年於晋室若合符券
010_0632_a_23L吾佛不能記百萬之多劫耶左慈術士
010_0632_a_24L變形於魏都皆同物巴疑吾佛千

010_0632_b_01L우리 부처님께서 천백 억의 몸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말을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장방長房69)은 병 속에 들어가 놀곤 한다고 하였는데 이것도 사람들은 다 믿었으니, 유마維摩 거사의 열자 남짓한 방(丈室)에 3만 명을 수용하였다는 말이나 겨자 속에 수미산을 받아들인다는 말을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한단침邯鄲枕 위에서 꾼 꿈70)도 사람들은 또한 다 믿었는데, 다보多寶부처님께서 탑에서 5천 년 동안 머물고 있었다는 말을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승기겁을 지나는 것이 마치 손가락을 튕기는 시간만큼 짧다는 말을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모두 믿지 않는다면 좌우께서는 역시 일찍이 어떤 꿈이 있었던가요? 하나의 침상에서 눈을 감고 있다가 잠간이나마 훨훨 날아 본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산과 냇물과 마을이 삼연森然히 형용할 수 있었을 테고, 인물人物이나 기명器皿이 어느 곳인들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 사이에서 부앙俯仰하고 수작酬酌하면서 스스로 한 세상을 이룩한 적이 있었을 테니, 이는 단지 범부의 제6식에 그림자처럼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힘도 오히려 이와 같거늘 하물며 여래의 대원경지大圓鏡智71)나 보살의 여환삼매如幻三昧72)이겠습니까?73)
또한 삼세에 윤회輪回하는 일이 비록 허황되고 이치와는 거리가 멀다고는 하지만, 마치 “문을 연 이가 원래는 문을 닫을 사람이로다.”74)라고 한 사례와 같은 이야기는 세상 사람들이 흔히 아는 사실이니 군더더기 말을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또 인의예지仁義禮智나 허령지각虛靈知覺 같은 것은 곧 심법心法의 위에서 말한 의리義理인데, 이것을 마음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법法과 의義가 같지 않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건성건성 말하는 것일 겁니다.
또한 정지원묘淨智圓妙나 본래면목本來面目이나 정좌체구靜坐體究 등은 바로 진공眞空이니, 그런 때문에 부자께서 말한 ‘내가 아무 말이 없고자 하나’라는 것이라든가 ‘우리의 도는 하나의 방법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관철한다.’라고 말한 뜻과 정녕 같다고 생각합니다.
좌우께서는 본디 불법佛法에 어두운 까닭에 이런 실수의 말이 있었던 것입니다. 고요히 연구해 봄(靜究 : 靜坐體究)을 가지고 삼독三毒의 설이라고 하시니, 이 또한 배를 움켜쥐고 웃음을 견디지 못할 일입니다.
고요히 궁구한다는 말을 어찌 ‘내가 아무 말이 없고자 하나’라는 말이 아니라고 하는 겁니까? ‘안자顔子75)는 온종일 어리석은 사람 같았다.’고 한 말과 여래께서 7일 동안 문을 닫았던 일이나 달마 대사가 9년 동안 면벽한 일이라든가 정명淨名이 문수보살에게 침묵으로 대답한 일은 다 그 취지가 형이상形而上에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바로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공자와 노자 두 성인이 자성을 보아 도를 성취하는 유일한 길의 열반문涅槃門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좌우左右께서는 욕심을 절제하고

010_0632_b_01L百億之化身耶長房壺中之遊人皆信
010_0632_b_02L不信維摩丈室容三萬座與納須彌
010_0632_b_03L於芥中之說乎邯鄲枕上之夢人亦信
010_0632_b_04L不信多寶佛塔 住五千劫耶度僧
010_0632_b_05L如彈指頃之說乎若俱不信左右
010_0632_b_06L亦甞有夢否瞑於一床栩栩然少時也
010_0632_b_07L山川聚落森然可狀人物器皿何所
010_0632_b_08L不有俯仰酬酌於其間自成一世
010_0632_b_09L特凡夫第六識之所影現者其力尙如
010_0632_b_10L況以如來大圓鏡智菩薩如幻三昧
010_0632_b_11L若其三世輪回之事雖云虛遠
010_0632_b_12L開門人是閉門人之類世人多知
010_0632_b_13L必架說且仁義禮智虛靈知覺乃心
010_0632_b_14L法上所說之義理而謂之是心者
010_0632_b_15L知法與義之不同故爲此塗糊之說也
010_0632_b_16L且淨智圓妙本來面目靜坐體究等
010_0632_b_17L是眞空故正同夫子予欲無說及吾道
010_0632_b_18L一貫之意也左右素昧佛法故有此失
010_0632_b_19L言也以靜究爲三毒之說亦不勝奉腹
010_0632_b_20L靜究豈非予欲無言耶顏子之終日
010_0632_b_21L如愚如來之七日掩關達摩之九年面
010_0632_b_22L淨名之嘿對文殊皆是意在於形而
010_0632_b_23L上也此是三世諸佛孔老二聖見性成
010_0632_b_24L道之一路涅槃門也且左右以節慾持

010_0632_c_01L계율을 지키는 등의 현전現前에서 항상 실천해야 할 일을 옳은 일이라 여겨서 그것들만 좋아하고, 부질없이 치달려 먼 곳으로 달려가는 과科 밖에서 그림자만 찾는 도의 문은 그른 것이라 생각해서 배척하시는데, 이것은 바로 주자朱子가 남긴 뜻이라고 하면 이는 아마도 아녀자의 행위일 겁니다. 저것을 이미 이치에 어그러져 바르지 못한 것이라고 한다면 지금 어떻게 그 뜻을 펼칠 수 있겠습니까?
계율을 지키는 등 항상 실천해야 할 것은 사람과 하늘의 유루행有漏行이기 때문에 소승小乘인 성문聲聞 버리기를 짚신짝 벗어 버리듯 하거늘, 하물며 대승大乘을 수행하는 것이겠습니까?
부질없이 치달려 먼 곳으로 달려가는 과科 밖의 문門이라고 한 것은 정녕 세 성인께서 천명天命을 좇아 마음의 안정을 얻었던 곳이기 때문에 제석천帝釋天과 범천梵天의 여러 하늘들이 아무리 칭찬한다 해도 미치지 못하고 천마天魔와 외도外道들이 훼방하려 해도 방법이 없거늘, 하물며 사람과 하늘의 소승이야 어찌 엿볼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고금古今의 많은 선비들이 믿지 못하고 그른 것이라고 배척하는 것은 이치로 보아 당연한 것일 겁니다. 어찌 괴상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모기의 어깨로는 태산泰山을 짊어질 수 없다는 말은 과연 허황한 말이 아닙니다. 또 이 사람이 문자文字를 일삼지 않는 것을 너무나 엄청난 병폐라고 말한 것은 확실히 옥을 다듬어 큰 그릇을 이룩하려고 한 것으로서 사람들로 하여금 헛되이 태어났다가 헛되이 죽는 성념盛念을 없애 주려고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감사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어찌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황금을 내던지고 삼을 짊어지고 가게 하거나(擔麻而棄金),76) 자갈을 거두고 구슬을 버리게 하여(收礫而棄珠) 영원토록 가난에 찌들어 살면서 빌어먹는 아이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까? 우습고도 우스운 일입니다. 어찌 그리도 자기 자신의 식견識見을 돌아볼 줄 모름이 옛사람에 미치지 못하십니까?
학자들은 반드시 도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먼저 상고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도와 거리가 멀어지는 일은 우리의 뜻으로는 예측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반드시 친히 내가 지향하는 바에 대하여 어질다고 여겨서 그것을 따르는 것입니다. 저들이 나에 대하여 어질다고 한다는 말은 이런 주장을 옳다고 여기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도리어 그것이 그르다는 것을 알았으니, 거기에는 틀림없이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저 어진 이가 옳다고 여기는 것을 깊이 생각해 보고 온 힘을 다해 그 진리를 찾아서 발분하는 바가 있기를 희망하는 바입니다.
지금 좌우左右께서는 스스로 사해四海 밖 다른 나라의 학문을 믿어서, 그에 대하여 터득하지 못한 것이 없으십니다. 게다가 문장이 방박旁礴하고 식견識見마저 고매高邁하시니 그 누가 옛날 도정절陶靖節77)ㆍ이태백李太白78)ㆍ진체상陳體常79)ㆍ백향산白香山80)ㆍ소동파蘇東坡81)ㆍ소강절邵康節82) 등 여러 군자君子들에게는

010_0632_c_01L戒等現前常行爲是而好之以空馳遠
010_0632_c_02L騖科外影探之門爲非而斥之此是朱
010_0632_c_03L子遺意則恐是妾婦之行也彼旣理屈
010_0632_c_04L今何可伸戒律等常行人天有漏行故
010_0632_c_05L小乘聲聞棄之如脫履況大乘行者耶
010_0632_c_06L空遠科外門正是三聖人立命處故
010_0632_c_07L梵諸天稱讃不及天魔外道毁謗無
010_0632_c_08L況人天小乘安能窺覷也哉古今
010_0632_c_09L多土之不信非斥理固然也何足恠哉
010_0632_c_10L蚊蚋之肩不任泰山果非虛語也
010_0632_c_11L以此漢不事文字爲太過病者的是
010_0632_c_12L欲玉于成而俾無虛生浪死之盛念也
010_0632_c_13L不勝感荷 其何令人擔麻而棄金
010_0632_c_14L礫而棄珠永作貧窮乞兒耶可呵可呵
010_0632_c_15L何不反顧自己識見不及古人耶學者
010_0632_c_16L必先考乎道之遠者焉道之遠則吾之
010_0632_c_17L志不能測者矣則必親夫賢於我者之
010_0632_c_18L所向而從之彼賢於我者以此爲是矣
010_0632_c_19L而我反見其非則我必有所未盡知者
010_0632_c_20L是故深思彼賢之所是而力求之
010_0632_c_21L則庶幾乎有所發也今左右自恃四海
010_0632_c_22L異方之學無所不曉而文章旁礴
010_0632_c_23L見高邁孰與古之陶精節李太白陳體
010_0632_c_24L常白香山蘇東坡邵康節等諸君子

010_0633_a_01L좌우께서 미칠 수 없을 거라고 감히 말하나이다.
무엇으로 그런 줄 아느냐 하면, 정절靖節은 공명孔明83)에 버금가는 짝이라 할 만한 사람인데도 혜원慧遠84) 법사를 스승으로 삼고 결사結社를 맺어 마음을 밝히고 진리를 통달하였으니 좌우께서 그럴 수 있겠습니까?
태백太白의 시에 말하기를 “나에게 무슨 일로 깊은 산에 사느냐고 묻기에, 대답 없이 웃기만 하니 마음 절로 한가롭네.”라고 하였는데, 이 시구에서 태백은 다만 무한無限함을 얻었기 때문에 형이상의 진공眞空을 밝힌 것이요, “흐르는 물에 복사꽃이 둥둥 떠 아득히 멀어져 가니, 인간 세상이 아니라 별천지로다.”라는 구절은 활발발活潑潑하기 때문에 형이하의 묘유妙有를 밝힌 것이니, 곧 세 성인이 다리를 세우신 곳입니다. 좌우께서는 그럴 수 있겠습니까?
진체상陳體常의 시에 이르기를 “시냇물 소리는 부처님의 설법이요, 산의 모습은 원래 청정한 부처의 법신法身일세.”라고 하였으니, 이는 형이하의 묘유를 말한 것이요, “여산廬山의 참모습(眞面目)을 알지 못하는 것은, 다만 내가 이 산속에 있기 때문일세.”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형이상의 진공眞空을 말한 것입니다. 좌우께서는 그럴 수 있겠습니까?
백향산이나 소동파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소강절의 시에 이르기를 “젊어서는 명예를 구하려고 공자께 몸을 던졌고, 늙어서는 죽음이 두려워 부처를 가까이하였네.”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먼저 능히 세간의 일을 다 깨달아 알고, 그런 연후에 비로소 출세간의 일을 말하리.”라고 하였으며, 또 천문天文을 통하고 지리地理까지 통달하였으니, 소강절만 한 능력을 지닌 자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나 필경畢竟에 귀숙歸宿한 곳은 오직 부처님뿐이었습니다. 그러니 좌우께서는 역시 이에 미칠 수 없을 것은 틀림없는 일입니다.
이미 저와 같을진대 저들이 종사從事하는 일은 도리어 그른 일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찌 뛰어난 재주를 지닌 사람이 좌우께서 아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겠습니까? 비유하면 마치 도요새가 쑥대 사이를 훨훨 날면서도 저 대붕大鵬이 남쪽으로 옮겨 가려는 것을 도리어 그르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까? 참으로 애석한 일입니다.
이상의 일은 잠깐 유가儒家의 달사達士들을 거론한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것을 우리의 가풍에서 말한다면, 중국에는 남양 충南陽忠(慧忠)ㆍ남악 양南岳讓(懷讓)ㆍ마조 일馬祖一(道一)ㆍ백장 해百丈海(懷海)ㆍ임제 현臨濟玄(義玄)ㆍ청원 사靑原思(行思)ㆍ단하 연丹霞然(天然)ㆍ운문 언雲門偃(文偃)ㆍ원오 근圓悟勤(克勤)ㆍ대혜 고大慧杲(宗杲) 등

010_0633_a_01L道左右不能及也何以知之精節可謂
010_0633_a_02L孔明之亞儔而以遠法師爲師結社
010_0633_a_03L明心達理者左右能之乎太白詩曰
010_0633_a_04L問余何事捿碧山笑而不答心自閒句
010_0633_a_05L直得無限故明形上眞空也桃花流
010_0633_a_06L水杳然去別有天地非人間句活潑
010_0633_a_07L潑底故明形下妙有也眞空妙有
010_0633_a_08L三聖人立脚處也左右能之乎陳體
010_0633_a_09L常詩曰溪聲便是廣長舌山色元來
010_0633_a_10L淸淨身句形下妙有也不識廬山眞
010_0633_a_11L面目只爲身在此山中句形眞空也
010_0633_a_12L左右能之乎香山東坡可知而康節
010_0633_a_13L詩曰求名少日投宣聖怕死老年親
010_0633_a_14L釋迦又曰先能了盡世間事然後方
010_0633_a_15L言出世間且通天文達地理能如康
010_0633_a_16L節者有幾乎然畢竟歸宿者唯佛也
010_0633_a_17L左右亦必不可及也旣不如彼而彼
010_0633_a_18L之所從事者反以爲非然則豈有高
010_0633_a_19L而不知左右之所知者耶如彼鷦
010_0633_a_20L翺翔乎蓬蒿之間而笑彼大鵬之
010_0633_a_21L南爲反以爲非者也可不惜哉上則
010_0633_a_22L且擧儒家達士而若其吾家則中國
010_0633_a_23L有南陽忠南岳讓馬祖一百丈海臨濟玄
010_0633_a_24L靑原思丹霞然雲門偃圓悟勤大慧杲等

010_0633_b_01L천백이나 되고, 우리 동방에는 원효元曉ㆍ의상義湘ㆍ보조普照(知訥)ㆍ도선道詵ㆍ나옹懶翁(慧勤)ㆍ무학無學(自超)ㆍ함허涵虛(得通)ㆍ구곡龜谷(覺雲) 내지는 서산西山(休靜)ㆍ진묵震嘿(一玉) 등 여러 노고추老古錐85)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다 눈으로 하늘과 땅을 덮고 가슴에는 온갖 물상을 품은 분들이니, 해와 달도 빛을 낼 수 없음을 부끄러워하고 강물과 바다도 발에 바르는 기름에 지나지 못할 것입니다.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으로 고삐와 굴레를 씌우는 것만으로는 얻지 못하기 때문에 모두 석씨釋氏에게 귀의하는 것입니다. 저 정자程子와 주자朱子 등과 같은 모든 군자들은 다 세속 지혜의 재변과 총명이 넘치는지라, 다만 행식行識만이 한 발자국 앞서 나아갈 뿐이기 때문에 다 함께 형이하인 의리義理와 명상名相의 지해知解에 빠져서 의식이 끊어진 뒤의 형이상인 이름을 여의고 형상을 끊은(離名絶相) 부사의不思議한 진공眞空의 종지宗旨에 이르게 되면, 망연茫然하여 발걸음을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그 방법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마음이 괴롭고 부끄러워 물러납니다. 두레박줄이 짧은 것은 생각하지 못하고 문득 우물물이 말랐다고 말하면서 늘 허황하고 먼 쓸데없는 것이라는 비방만 늘어놓으니, 어찌 백옥白玉에 흠이 있는 경우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경전에서 말한 여덟 가지 어려운 일로 길이 가로막힌다는 말 가운데 일곱 번째 사대부의 교만(士夫者慢)86)과 여덟 번째 세지변총난世智辯聰難87)이 그것입니다. 꼴이나 베어 나르는 아이의 말도 군자는 버리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과연 사대부들이 혈기血氣의 부림을 당하지 않고 능히 마음을 비우고 서로 비추어 본다면, 혹 옥돌을 자르고 줄로 쓸고 끌로 쪼고 갈아 빛을 내는 보충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스스로 도로써 서로 사귀는 사이라 생각하고 진실로 천 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간절히 바라건대 단점을 보호하고 흠집을 감추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까닭에 잠시라도 생각을 머물러 두지 않고 허물을 토해 내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건대 반드시 특별히 상교처相敎處가 있어서 오직 아낌없이 보시하기를 바라나이다.
장차 보주인普州人88)이 될 것 같습니다. 갈등이 너무도 크게 퍼져 나갈 것 같으니 우선 이 일에 대한 논란을 거두겠습니다.
7. 최창룡 진사님께 답함(答崔進士昌龍)
지난여름에 한 번 만나 뵌 뒤로 계속해서 두어 번 서신으로 안부를 여쭈었습니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산문에 사는 촌사람이 격조 높은 선비에게 은총을 내림이 그렇게도 간절하기 그지없나이까? 이 사람을 아끼는 마음이 나의 측근들보다도 더 멀리 벗어나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이 앞의 편지가 도착한 뒤에 그

010_0633_b_01L千百我東有元曉義湘普照道詵懶翁
010_0633_b_02L無學涵虛龜谷乃至西山震嘿等諸大
010_0633_b_03L老古錐皆眼盖乾坤胷抱萬象
010_0633_b_04L月慚其無光河海不過塗足油孔孟
010_0633_b_05L之敎轡勒不得故皆歸於釋氏矣
010_0633_b_06L其程朱等諸君子皆以世智辯聦大多
010_0633_b_07L但行識前一步故俱溺於形下義理名
010_0633_b_08L相之知解而至於識絕後形上離名絕
010_0633_b_09L相不思議眞空宗旨則茫然不知運步
010_0633_b_10L戂㦬而退也不思綆短却謂泉
010_0633_b_11L每多虛遠無用之謗豈非白玉之
010_0633_b_12L有瑕乎故經有八難障道中第七士夫
010_0633_b_13L者慢第八世智辯聦難也芻蕘之言
010_0633_b_14L君子不棄果不爲士夫血氣之所使
010_0633_b_15L虛心相照則或不無切磋琢磨之補矣
010_0633_b_16L自以爲道交實爲千載一遇切不可護
010_0633_b_17L短藏瑕故少不留念括吐敗關也
010_0633_b_18L必別有相敎處唯冀不吝布施也將爲
010_0633_b_19L普州人矣藤葛太蔓姑掇是事

010_0633_b_20L

010_0633_b_21L答崔進士昌龍

010_0633_b_22L
前夏一遭後繼有兩度書問不料山
010_0633_b_23L野見寵於高士若是其勤摯也可見
010_0633_b_24L情愛逈出我右也第其前書却到於後

010_0633_c_01L편지로 인해 소식을 들었는데, 선패仙旆89)가 산을 내려갔다 하더이다. 게다가 저에게는 의지할 만한 황이黃耳90)도 없어서, 한 글자 한 단어의 말로써 은혜에 대한 감사의 뜻조차 아직까지 보내지 못하였습니다.
형편이 비록 저로 하여금 서글퍼 탄식하게 하고 있지만, 깊이 생각해 보건대 곧 과거의 일로 경성에 가는 듯싶으니, 꼭 계수나무 가지를 꺾어 가지고(折桂)91) 귀녕歸寧92)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시기는 눈이 펄펄 내리고 있는 때인데 무늬 옷 입고 춤을 추는 자손이 만들어 올린 맛있는 음식은 근체根蔕가 다 맛이 있으신지 미처 살피지 못했습니다. 영기英氣가 격동하는 곳에 틀림없이 쇠방망이도 뚫을 수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위하慰賀를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보내온 편지에서 보여 준 가운데 저 객기客氣를 소마消磨했다는 설에 대해서는 만일 조대措大93)처럼 무리들 중에 특출하게 뛰어난 힘을 지닌 이가 아니라면, 어찌 능히 그런 경지에 미칠 수 있겠습니까? 이른바 “파도 위에 빈 배가 떠서 높고 낮음을 따라가고, 흐르는 물은 산을 돌고 돌아 굽고 곧음을 따라간다.”라는 말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소식을 듣고 나니 흠탄欽嘆하여 마지못하겠으며, 또한 여기에서 보여 주신 내용 중에 필시 죽은 뱀을 살아 있는 것처럼 다룰 수 있다는 일단의 좋은 인연을 맺고자 한다고 하시니, 산문에 사는 촌놈도 역시 한쪽 손을 내밀어 보주인普州人이 되어 함께 수용受用한다면 무슨 해로움이 있겠습니까? 다만 외부의 사람이 개입하는 것을 즐겨 허락해 주실지 모르겠습니다.
정백자程伯子94)께서 어린 시절에 전렵畋獵을 즐겨 구경하곤 하였는데, 그가 염계濂溪95)를 한 번 보고 난 뒤에는 그의 제자가 되어 가슴에 걸린 응어리를 쓸어 버리고 스스로 이르기를 “객기를 영원히 끊어 버렸다.”라고 하였답니다. 그러나 10년 뒤 홀연히 사냥을 구경할 즈음에는 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옛날에 익혔던 지난날의 일에 의지하여 기회를 타서 일어나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곧 단지 소장消長하는 분량만을 볼 뿐이라고 하는 말만을 본 것이니, 이는 흡사 남에게 권유하여 간취看取하도록 해서 눌러 이길 도리로 삼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진실로 스스로 영원히 끊어 버릴 수 있겠습니까? 스스로 큰 성인이 아니라고 하니 틀림없이 영원히 끊을 리는 없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무엇을 가지고 그런 줄을 아느냐 하면, 정자程子는 융화하여 분별이 없는 자연히 이루어짐(混然天成)을 성취하신 분이건만, 그럼에도 기회를 타서 일어나는 기운만은 아직 면하지 못했었기 때문입니다.
또 더군다나 가섭존자迦葉尊者는 상수上首로 진리를 깨달은 아라한이건만 그럼에도 하늘 신이 음악을 연주하는 때를 당면해서는 자신도 모르는 새에 기쁨에 겨워 어깨를 들썩거렸으니, 그것은 일찍이 춤을 추었던 습기習氣가 발동한 때문입니다.
또 사리불舍利弗 존자는 부처님께서 지혜로는 제일가는 제자라고 칭송한 제자이건만, 그럼에도 햇볕이 쨍쨍 내리쬐던 날 면해免解 할 때에 이르러서는

010_0633_c_01L書之仍聞仙旆之下山又無黃耳之可
010_0633_c_02L隻字片言謝儀尙闕勢雖使然悵
010_0633_c_03L即深想作京科之行其能折桂而歸
010_0633_c_04L寧者乎即未諦此時雪天舞彩餘做味
010_0633_c_05L能知根蔕俱甜之地乎英氣所激必見
010_0633_c_06L鐵鎚之可穿矣慰賀沒量來示中消磨
010_0633_c_07L了那客氣之說如非措大超群拔華之
010_0633_c_08L焉能及此可謂虛舟駕浪隨高隨
010_0633_c_09L流水轉山遇曲遇直者也聞來不
010_0633_c_10L勝欽嘆又此所示必是欲作活弄死蛇
010_0633_c_11L之一段好因緣則山野亦何妨出一隻
010_0633_c_12L作得箇普州人同一受用耶第未知
010_0633_c_13L肯許外人揷手與否也程伯子兒時
010_0633_c_14L觀畋獵一見濂溪之後掃去碍膺之物
010_0633_c_15L而自謂永斷客氣矣然其十年之後
010_0633_c_16L於觀獵之際不覺舊習之依前闖發也
010_0633_c_17L然則只看消長分數之說似是勸人看
010_0633_c_18L以爲制勝之道矣豈可眞自永斷耶
010_0633_c_19L自非大聖人必無永斷之理也何以知
010_0633_c_20L以程子之混然天成而尙未免闖發
010_0633_c_21L之氣也又況迦葉尊者上首入入理羅
010_0633_c_22L而當於天神奏樂之際不覺喜動而
010_0633_c_23L聳肩曾作舞人之習也舍利弗尊者
010_0633_c_24L佛稱智慧第一而至於曝日免解之時

010_0634_a_01L자신도 모르는 새에 성을 내고 분해하면서 폭염 때문이라고 하였으니, 그것은 일찍이 독사毒蛇가 되었었던 습기 때문입니다.
그 밖에도 유교와 불교 사이에 통인通人이나 달사達士들은 오히려 습기에 부림을 당하는 것이거늘 한 장의 편지에 집착하는 사람이 그 얼마나 되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지금 조대措大(書生)께서는 돈연頓然히 소융消融하신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다시는 저 옛날 자첨子瞻처럼 부화浮華96)하지는 않을 터이니, 귀를 막고 방울을 훔친다거나 손과 다리를 다 드러내는 일은 없지 않겠습니까? 더군다나 다시 삼신산三神山 꼭대기의 세 선인仙人이라고 말하는 것도 역시 배안拜鴈함과 같은 것일 겁니다.
가가可呵.97) 이미 가르침의 밝은 말씀이 있어서 마음을 일깨워 주는 흉내조차 다 없어지고 말았으니, 한마디로 말하면 천하에는 다른 도가 없고 성인에게는 두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고요하되 항상 비추며 비추되 늘 고요하다.”라고 하셨고, 노자는 “작용함이 없으되 하지 않는 게 없다.”라고 하셨으니, ‘곧 고요하되 항상 비추는 것이요, 작용이 있으되 함이 없다.’라는 것은 곧 ‘비추되 늘 고요함’과 같은 의미입니다.
공자는 “『주역周易』은 사색함도 없고 작위도 없으며 적연寂然하여 동요하지 않는 것이로되 일단 느끼게 되면 마침내 천하의 일을 통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곧 ‘고요하되 항상 비춘다.’는 의미와 같은 것입니다. 느낌이 없으면 통하지도 못하지만 애당초 고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니, 글에는 이런 내용이 나오지 않았으나 의리상 필연적인 것입니다. 이것이 곧 ‘비추되 늘 고요함’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들을 근거로 하면 세 성인이 하신 말씀들이 은밀하게 서로 부합符合하되 마치 한 입에서 나온 것과 같습니다. 가령 그것을 실천함에 있어서의 고저高低와 발용發用함에 있어서의 우열優劣과 같은 경우는 마음의 때를 말끔하게 씻어 내고 지혜의 눈을 깨끗이 쓸어 없애서 맑게 한 연후에 세 분 가르침의 모든 책들을 다 읽고 날마다 활용하는 사이에 참구한다면 나고 죽음, 재앙과 복의 경계에 대해서는 곧 말을 기다리지 않아도 저절로 머리를 끄덕거릴 것입니다. 내가 어찌 억지소리를 해서 그대의 귀를 놀라게 하겠습니까?
이런 까닭에 예부터 통인通人과 달사達士들이 처음 부처님의 진리를 밝게 알기 이전에는 헐뜯고 욕하며 배척하지 않는 이가 없지만, 선지식善知識을 만나 사실 그대로를 깨달아 이해하는 경지에 이르고 나면, 한결같이 다 참회하고 사과하며 귀복歸服하곤 하였습니다.
비유를 들어 말하자면 한 문공韓文公98)ㆍ이 참정李叅政99)ㆍ양 문공楊文公100)ㆍ이 부마李駙馬(李遵)ㆍ소동파蘇東坡ㆍ백낙천白樂天과 같은 이들이 곧

010_0634_a_01L不覺嗔恚而故曝曾爲毒蛇之習也
010_0634_a_02L外儒釋間通人達士之猶爲習氣所使
010_0634_a_03L而著於章牘者不知其幾許則今此措
010_0634_a_04L大之頓然消融而非復昔日浮華之子
010_0634_a_05L瞻者無乃掩耳偸鈴露出手脚者也耶
010_0634_a_06L況復三神山上三仙人云者亦似拜鴈
010_0634_a_07L可呵旣有敎之之明誨可乏提警之
010_0634_a_08L效嚬一言蔽之曰天下無異道聖人
010_0634_a_09L無兩心也故釋之言曰寂而常照
010_0634_a_10L而常寂老之言曰無爲而無不爲
010_0634_a_11L寂而常照也當照也當有爲而無爲
010_0634_a_12L即照而常寂也孔之言曰夫易無思也
010_0634_a_13L無爲也寂然不動感而遂通即寂而
010_0634_a_14L常照也無感不通而未甞不寂文雖
010_0634_a_15L無而義必然矣即照而常寂也據此則
010_0634_a_16L三聖所言冥相符合而如出一口也
010_0634_a_17L若其履踐之高低發用之優劣則洗盡
010_0634_a_18L心垢廓淸慧目然後看盡三敎諸書
010_0634_a_19L叅於日用之間生死禍福之際則不待
010_0634_a_20L言而自點頭矣吾何强卞以駭君聽
010_0634_a_21L以自古通人達士初於未明佛理之前
010_0634_a_22L莫不詆斥而至於遇善知識如實悟解
010_0634_a_23L之後一皆懺謝而歸服矣如韓文公李
010_0634_a_24L叅政楊文公李駙馬蘇東坡白樂天

010_0634_b_01L그에 해당하는 부류입니다.
공公께서는 총명함과 재주와 재능이 위에 거론한 여러 사람들과 비교해서 우열優劣이 어떠한지를 스스로 고개를 숙이고 스스로 점검해 보십시오. 공 자신이 우세하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감히 잘못을 고치려 들지(雌黃)101) 않겠습니다. 그러나 만약 공이 저들에게 미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면 오늘날 조대措大께서 ‘배척하여 없애야 할 도’라고 말한 것은 진실로 어떤 마음에서 그런 것인지요?
눈 밝은 사람에게도 면전 석 자 앞에는 어둠이 있다는 말처럼 세상에 혹 그런 사람이 있다 해도 어찌 군君께서 진실로 또한 이런 말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지는 업을 초래하지 않으려거든 여래의 바른 법륜法輪을 비방하지 마십시오.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한 토막의 이야기는 아마도 마음을 열고 모든 정성을 나타낸 참다운 마음속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절대 우언寓言이나 사물을 가리킨다는 생각을 짓지 마십시오.
산문의 중이 저 속에서 단지 격외별전格外別傳ㆍ몰파비沒巴鼻ㆍ무자미저일착자無滋味底一着子를 가지고 항상 날마다 쓰고 있는 다반사로 삼아서 비로봉 정상에 높이 오르고 화장세계 보배 경계에 한가롭게 노닐기를 기대합니다. 그렇다면 비록 맹분孟賁102)과 하육夏育103)이라 하더라도 그 의지를 빼앗고 그 도를 막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더군다나 태허太虛를 울리는 모기나 쑥대 속을 나는 메추라기가 엿보아서 모색해 볼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한바탕 웃음이 나옵니다.
8. 여 참판동식104)께 준 선정의 삿된 견해를 밝힌 글(與呂叅判卞定邪解東植)
합하閤下께서 말씀하시기를 “불교 경전에서 말하는 것들이 유교儒敎와 큰 틀에 있어서는 같지만, 뒷세상 사람들이 준칙인 오교五敎에 의지해서 머리를 고치고 얼굴을 바꾸어서 다른 일가一家의 말로 삼아 불교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닌가?”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답하겠습니다.
“유교의 선비들이 불교를 배척하는 것에만 온 힘을 다 기울이는 것은 두레박줄이 짧은 것은 알지 못하고 샘물이 말라 버렸다고 탓하면서 허망하게 애매모호한 말을 지어 이르지 못할 데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어찌 그대는 진실로 이런 말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대개 부처님이란 삼계三界의 중생들을 크게 인도하시는 스승이요 사생四生의 큰 자비하신 어버이로서 3천 가지 위의威儀가 뚜렷하고 분명하며, 8만 가지 세세한 행동 지침까지도 준엄하고 깨끗합니다. 그리하여 한 번 움직이고 한 번 고요함이 중생들을 위한 법칙을 만들지 아니함이 없으며, 한 번 말하고 한 번 침묵함은 저절로

010_0634_b_01L其類也公自低頭點檢看聦明才智
010_0634_b_02L當與數子優劣何如自以爲優則吾
010_0634_b_03L不敢雌黃而若其不及則今日措大之
010_0634_b_04L斥爲可滅道云者是誠何心哉明眼人
010_0634_b_05L有三尺暗者世或有之而豈意君
010_0634_b_06L實亦爲此言也欲得不招無間業莫謗
010_0634_b_07L如來正法輪如上遮一絡索蓋出於開
010_0634_b_08L心見誠之眞情矣切不得作寓語指物
010_0634_b_09L會也山僧這裡但以格外別傳沒巴鼻
010_0634_b_10L無滋味底一着子常爲日用之茶飯
010_0634_b_11L期於高步毘盧之頂𩕳 優遊華藏之寶
010_0634_b_12L則雖謂之賁育莫能奪其志而沮
010_0634_b_13L其道也何況皷太虛之蚊蚋翔蓬蒿之
010_0634_b_14L䳡鷂所能窺覷而摸▼(扌+索)者哉一笑

010_0634_b_15L

010_0634_b_16L與呂叅判卞定邪解東植

010_0634_b_17L
閤下曰佛書所言大同儒敎無乃後
010_0634_b_18L人依準五敎而改頭換面別爲一家語
010_0634_b_19L而名爲佛敎耶答曰儒士之斥佛爲務
010_0634_b_20L不思綆短而以爲泉枯妄作含糊
010_0634_b_21L之說無所不至而豈意君實亦爲此言
010_0634_b_22L蓋佛者三界大導師四生大慈父
010_0634_b_23L三千威儀圓明八萬細行嚴淨一動一
010_0634_b_24L無非爲物作則一言一嘿自然冥

010_0634_c_01L큰 도에 가만히 합해집니다.
이 세상에 79년 동안 머무시면서 3백여 차례 법회에서 가르침을 담론하시었는데, 상제上帝와 여러 하늘들도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합장하고 공경하여 받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염라閻羅와 온갖 신기神祇들까지도 역시 다 명을 받아서 머리에 이고 받들어 공경하였습니다.
공간적으로는 시방세계를 두루 하되 한 글자도 어김이 없었고, 시간적으로는 삼제三際를 다하되 한 도道가 길게 흐르고 있으니, 어찌 다만 진나震那라는 한 나라 안과 접역鰈域의 한 섬 가운데에만 이를 얻어 유포하였겠습니까? 이를 비유하면 솟아오르는 해가 하늘에 걸려 있어 그 광명이 비추지 않는 곳이 없거늘 허망하게 그 광명을 빌려다가 횃불이라고 말하니 어찌 크게 비웃을 일이 아니겠습니까?
‘가령 이른바 5계戒와 10선善은 비록 혹 이를 의지하면 4제諦와 12인연因緣과 6도度(바라밀)에 이를 수 있는 법이라고 합시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경전을 기준으로 삼아 공부를 해야 성취할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교외별전敎外別傳105)이라고 하는 ‘마당 앞에 잣나무(庭前栢樹子)’라든가 ‘개에게도 불성이 있느냐(狗子無佛性)?’라는 등의 아무 단서도 없는 말이나 아무 재미도 없는 말이야 두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말하시는데, 1천 7백 개의 공안公案에서 얻을 수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그 밖에 아홉 종류의 경전106) 가운데에서는 일찍이 언급한 적도 없는데, 여러 하늘이나 귀신들이 감히 틈을 엿보아서 찬탄하거나 헐뜯음으로 미치지 못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로써 알아야만 할 것입니다. 다함이 없는 허공은 본래부터 한 터럭도 헤아려 알 수 있는 것이 아닌데, 끝이 없는 푸른 바다를 어찌 우물 안 개구리가 능히 헤아려 알 수 있겠습니까?
또한 불교는 천상天上과 천하天下에 어느 곳이든 흐르지 않음이 없는데, 저 유교와 같은 경우는 단지 천하에 대해서만도 미치지 못하는 곳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 하늘들도 부처님을 받들어 섬기면서 감히 부처님을 어기지 않는데, 유씨儒氏들도 하늘만을 받들어 섬기면서 감히 하늘을 어기지 못하는 것은 진실로 이런 때문일 것입니다.
옛날에 한 문공韓文公(韓愈)이 『논어論語』에 나오는 ‘화畵’ 자를 지적하여 ‘화畫’ 자로 쓰고는 구본舊本이 틀렸으나 정경正經이라서 감히 고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다만 이와 같이 책 가운데에 글에 대하여 논함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아마도 법을 아는 자가 두렵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손지현孫知縣이 『금강경』 중에서 한 개의 ‘불不’ 자를 삭제하려고 하자 대혜大慧 선사께서 이 말을 깨뜨려 말하기를 “무간無間의 업業을 초래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부처님의 바른 법륜法輪을 비방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예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통인달사通人達士들은 다 유교 경전과

010_0634_c_01L合大道住世七十九年敎談三百餘會
010_0634_c_02L上帝諸天莫不奔走而合掌敬受
010_0634_c_03L羅百祗亦皆受勑而頂載奉持橫徧十
010_0634_c_04L方而隻字無違竪窮三際而一道長流
010_0634_c_05L豈特震那一國之內鰈域一島之中
010_0634_c_06L之而流布者哉其猶杲日麗天光無不
010_0634_c_07L而妄謂借光於爝火者豈不大笑乎
010_0634_c_08L假如所言五戒十善雖或可依而至於
010_0634_c_09L諦緣六度之法果能準何經籍而做出
010_0634_c_10L何況敎外別傳之庭前栢樹子狗子
010_0634_c_11L無佛性等沒巴鼻無滋味奈何他不得
010_0634_c_12L底千七百則公案其於九類諸書中
010_0634_c_13L未甞言而諸天鬼神莫敢窺覷而讃
010_0634_c_14L毁不及者歟是知無盡虛空本非一毛
010_0634_c_15L之所可度也無邊蒼海豈是井蛙之所
010_0634_c_16L能測㢤且佛敎則天上天下無處不流
010_0634_c_17L而若其儒敎則只於天下亦多有不及
010_0634_c_18L之處矣諸天奉佛而不敢違佛儒氏奉
010_0634_c_19L天而不敢違天者良以是也昔韓文公
010_0634_c_20L指論語中畵字爲畵字而不敢改於正
010_0634_c_21L只如此論在書中者蓋識法身惧爾
010_0634_c_22L又孫知縣欲削金剛經中一不字爲大
010_0634_c_23L慧禪師之所破云欲得不招無間業
010_0634_c_24L謗如來正法輪自古通人達士皆於儒

010_0635_a_01L불교 경전 두 경전 가운데에서는 오히려 한 글자 한 글귀를 감히 마음대로 고치지 않았거든, 하물며 어떤 등류의 어리석은 사람이 큰 사견邪見을 내어 유교를 가져다가 아는 체하는 사람(杜撰)이 얼굴을 바꾸어 따로 한 가풍의 말로 삼고는 만세萬世에 믿음을 취하려고 하였겠습니까?
사람은 비록 속일 수 있겠지만 법을 아는 이에게는 역시 두려워할 것입니다. 게다가 위로는 번개같이 빠른 하늘의 살핌이 있고, 옆으로는 화살처럼 빠른 신의 눈이 있음이겠습니까? 또한 비유하면 마치 한고조漢高祖와 당태종唐太宗 같은 창업의 군주는 다 방편으로써 변화에 부응하고 상식을 거슬러서 진리에 합치하였던 사람들입니다.
인생人生이 이 세상에서 나라의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여 절개를 지키다가 의리에 죽으며,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여 살아 계실 적엔 잘 봉양하고 돌아가신 뒤엔 장례를 잘 치르는 일은 원래 신하나 자식이 해야 할 매우 떳떳한 크나큰 법입니다. 그런데 한고조는 풍패豊沛라는 땅에서 굴기屈起하였고, 당태종은 진양晉陽에서 군사를 일으켰으니, 어찌 임금을 배반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 분갱分羹의 일이나 겁부劫父의 일107)이 어찌 불효不孝의 막대함이 아니라 하겠습니까? 수많은 영웅들을 제거하고는 천하에 군림君臨하였고, 부모님을 존향尊享하고 나서 사해四海에 그 영화가 이르렀으니, 그것은 곧 효도의 극대함이라 할 것입니다. 여기에다가 그 무엇을 더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날 만약 정장亭長(오늘날의 마을 이장)이 되어 여산驪山의 부역을 마친 일과 진양晉陽을 지켜서 수나라 왕실에 충성을 다한 일에 있어서는 자기도 역시 장차 보장할 수 없었거든, 능히 대업大業을 성취하여 그 부모를 높이고 드러냄이겠습니까? 이는 올바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마음으로 반드시 상常을 지켜서 만약 대사大事를 이룩하고자 한다면, 권변權變이 아니고서는 틀림없이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가만히 관찰해 보건대 합하閤下께서는 묘년妙年에 자립自立하시어 문득 일체 사람들의 정상에 올랐습니다. 그러니 이른바 학문이 뛰어나고 덕 또한 성취하셨다고 말할 만합니다. 그러니 또한 부귀富貴와 공명功名에 걸려들고 갇힌 바가 되지 말고, 능히 강항强項108) 중에 문득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유화柔和를 지니시기 바랍니다.
이 세간을 벗어날 일대사一大事의 근원을 연구하기를 간절한 바랐으나, 백겁 동안 천 번 생生을 받는 가운데 서원誓願의 힘만으로는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거니, 어떻게 이것을 이룩할 수 있겠습니까?
소요부邵堯夫109)의 시에 “먼저 능히 세간의 일을 다 깨닫고 그런 연후에 비로소 출세간을 말해야 하리.”라고 하였으니,

010_0635_a_01L釋二經中尙不敢擅改一字一句況有
010_0635_a_02L何等愚人生大邪見把來儒敎而杜
010_0635_a_03L撰換面別爲一家語而欲萬世之取信
010_0635_a_04L也㢤人雖可欺而識法者亦惧加以
010_0635_a_05L上有天鑑之迅雷傍有神目之如箭者
010_0635_a_06L且如漢祖唐宗創業之主皆是權以
010_0635_a_07L應變而反常合道之人也人生斯世
010_0635_a_08L忠國君而守節死義竭孝父母而養生
010_0635_a_09L送死元是臣子之大經大法而漢祖之
010_0635_a_10L屈起豊沛唐宗之擧兵晉陽豈不謂之
010_0635_a_11L反君乎又其分羹刼父之事豈非不孝
010_0635_a_12L之大者乎及乎芟刈群雄而君臨天下
010_0635_a_13L尊享父母而榮極四海則爲孝之大
010_0635_a_14L以加此向若爲亭長而終役驪山
010_0635_a_15L晋陽而盡忠隋室則自己亦將不得保
010_0635_a_16L能成大業而尊顯其父母乎是知
010_0635_a_17L正人心必須守常而若欲成大事
010_0635_a_18L權變則必不可得也竊觀閤下妙年自
010_0635_a_19L便在一切人頂𩕳上可謂學之優矣
010_0635_a_20L德之成矣而亦不爲富貴功名所羅籠
010_0635_a_21L能於强項中却有不可思議之柔和
010_0635_a_22L欲究此出世間一大事之根源非百刼
010_0635_a_23L千生之願力所持焉能致是邵堯夫詩
010_0635_a_24L先能了盡世間事然後方言出世間

010_0635_b_01L지혜로운 사람들의 의사意思는 같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노구담老瞿曇(부처님)께서 “문득 세간世間을 관찰해 보면 마치 꿈속의 일과 같다.”라고 하셨으며, 또 “오직 이 하나의 일만이 진실이요, 나머지 둘은 다 진실이 아니다.”라고 하셨으니, 청컨대 채찍을 쳐서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부귀와 공명은 어진 이나 성인도 또한 모면할 수 없는 것이니, 이미 사인士人이 되어 봉록이나 바라보면서 삶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선 틀림없이 구차하게 모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은 것이요 구경究竟의 법이 아닌 줄 깨달아서 이 불법의 문 가운데에서 마음을 돌이켜서 반야般若 지혜의 물로써 더럽게 물든 때를 씻어 없애고, 청정하게 스스로 처신하여 회광반조廻光返照110)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현재 색色을 보고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옷을 입고 밥을 먹을 수 있는 이놈이 무엇인고? 12시(온종일) 가운데 또렷이 맑은 정신으로 의심을 일으켜 어두워지지 않고, 4위의威儀111) 속에서 은밀하고 은밀하게 빛을 돌이켜 스스로를 보라.
이와 같이 오래오래 계속하면 자연히 업루業累가 가벼워지고 깨끗하게 될 것이요, 진로塵勞가 완전히 쉬게 될 것입니다. 그리되면 홀연히 깨어 있으면서 일렁이는 파도 가운데를 잘 살피면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배 구슬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문득 긴 강물을 저어서 소락酥酪을 만들고 대지大地를 바꾸어 황금黃金을 만들어서 다른 사람들도 이롭게 하고 스스로도 유익하게 하되 베푸는 것마다 옳지 아니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료水潦 화상이 이르기를 “백 천 가지 법문法門과 한량없이 많은 미묘한 이치를, 전부 다 한 터럭 끝을 향하여 그 근원을 알았도다.”라고 하였으며, 덕산德山은 “세상에서 온갖 재간을 다 부리더라도 터럭 하나를 태허太虛에 날린 것 같고, 온갖 현묘한 말재주를 다 부리더라도 마치 한 방울의 물을 커다란 골짜기에 던진 것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까닭에 옛 성인들께서 무진장다라니문無盡藏陁羅尼門이며 무진장신통유희문無盡藏神通遊戱門이며 무진장여의해탈문無盡藏如意解脫門이라 하시니, 어찌 참된 대장부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과연 이와 같다면 어찌 다만 나고 죽음의 길 위에서만 힘을 얻겠습니까? 다른 날에 다시 균축鈞軸을 잡아서(재상의 자리에 올라) 임금을 요순堯舜보다 더 위에 이르게끔 하는 것이 마치 손바닥을 가리킴과 같을 것입니다. 허리에 10만 관貫을 차고서 학을 타고 양주楊州에 오르는 것뿐이겠습니까? 그러니 이 어찌 통쾌하지 않습니까? 늘어놓는 말들은 우선 그만두고 한바탕 웃어봅시다.

010_0635_b_01L智人意思同者非耶老瞿曇曰却來觀
010_0635_b_02L世間猶如夢中事又曰唯此一事實
010_0635_b_03L餘二即非眞請著鞭不可忽富貴功名
010_0635_b_04L聖賢亦不能免旣爲士人仰祿爲生
010_0635_b_05L不必苟免而但知夢幻非究竟法
010_0635_b_06L回心此箇門中以般若智水洗滌垢
010_0635_b_07L染之穢淸淨自居回光反照現今能
010_0635_b_08L見色聞聲能着衣喫飯底是箇什麽
010_0635_b_09L十二時中惺惺起疑而不昧四威儀內
010_0635_b_10L密密回光而自看如是久久自然業累
010_0635_b_11L輕淸塵勞頓息忽於覺觀波濤之中
010_0635_b_12L拾得無價寶珠矣便能攪長河爲酥酪
010_0635_b_13L變大地作黃金利他自利無施不可
010_0635_b_14L故水潦云百千法門無量妙義捴向
010_0635_b_15L一毫頭上識得根源去德山云竭世
010_0635_b_16L樞機若一毫置於太虛窮諸玄辯
010_0635_b_17L一滴投於巨壑是以先聖喚作無盡藏
010_0635_b_18L陁羅尼門無盡藏神通遊戱門無盡藏
010_0635_b_19L如意解脫門豈非眞大丈夫之能事乎
010_0635_b_20L果能如是豈獨於生死路上得力異日
010_0635_b_21L再秉鈞軸致君於堯舜之上如指諸掌
010_0635_b_22L可謂腰帶十萬貫騎鶴上楊州
010_0635_b_23L不暢㢤豈不快㢤葛藤姑置是事
010_0635_b_24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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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참판 김정희金正喜께 답함수십 차례나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다만 편지가 온 것 1편 하고 보낸 것 2편만 남아 있다.(答金叅判正喜有數十次徃復而但書來一去二)
김 참판이 보내온 편지112)
이사耳師의 대단한 명성은 이미 10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쌓아 오셨습니다. 반연할 것 없는 사다리가 잇닿아 있어 홀연히 대사의 편지가 제 집에 이르렀으니, 세상 밖의 고거高擧하신 분께서도 역시 세속(俗臼) 속에 사는 한 물건에게까지 관심을 기울여 주시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이와 같이 정중鄭重하게 대해 주시니 정신없이 일찍이 없었던 일을 받들게 되었습니다. 다만 선미先微함을 천양闡揚하시고 병석瓶錫을 먼 곳까지 움직이시니, 세간과 출세간에 진실로 도망할 곳이 없어서 더더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공경을 다하여 읽고 또 읽었습니다.
이 비루하고 변변하지 못한 이 사람을 돌아보건대 이 사람은 숨겨져 있는 광명을 발휘할 수도 없는데, 더군다나 지금 점악苫堊한 종적으로서 또한 감당하지 못할 것은 당인當印을 생각하고 여득如得함을 믿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이에 명사名士의 반열에 끼어 불후不朽하기만을 도모하였으니, 진실로 즐거워하는 것은 몸으로 그것을 위해 노역을 하는 일입니다.
또한 무엇 때문에 강하게 하지 않아야 할 것에 강하게 하여 죽순(笋)113)이나 잉어(鯉)114)에 누를 끼쳤으니, 얼굴이 붉어지도록 부끄러움을 견딜 길이 없어서 마음과 정신이 너무 혼란스러워 이런 꾸밈이 어려웠습니다.
다시 어떻게 해야만 이런 인연의 모임을 얻어 한번 선사의 법담을 들을 수 있을는지요. 편지를 대하고 보니 마음이 답답하여 까치발을 하고 멀리 바라봄을 감내하지 못하겠습니다. 나머지 일들은 우선 그만두어 번거롭게 하지 않으렵니다.
김 참판께 답함1115)
속담 가운데 ‘내가 부를 노래를 사돈이 부른다.’는 말이 있는데, 지금 합하閤下에게서 이를 징험하고 있습니다. 비록 노래를 부르고 싶은 생각이 있긴 했지만, 이미 남에게 빼앗긴 바가 되었으니 그렇다면 웃음을 머금고 입을 다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런데 노래를 부른 사람은 도리어 나에 대하여 혐오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다시 갈등선葛藤禪116)에 들어가서 그 근본을 밝혀 보겠습니다. 이는 내가 노래를 부르려고 하는데 남에게 횡탈橫奪을 당하였다는 의미입니다.
대저 합하閤下께서는 문장이 풍부하고 충만하여 마치 넓은 바다의 일렁이는 파도와 같으시며, 기봉機鋒이 지혜롭고 민첩하며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치는 듯합니다. 게다가 불교의 진리까지 깊이 믿고 선의 취지까지도 매우 좋아하여, 천금千金으로도 그 눈을 놀라게 할 수 없고 팔음八音117)으로도 그 귀를 고칠 수 없으며, 들은 것이 넓을수록 즐거움은 더욱 깊어지고 생각이 완숙할수록 믿음은 더욱 돈독해지기 마련입니다. 지금 논란을 결단하기 위하여 다시 만나게 되니 흠앙하여 감복하나이다. 무엇을 가지고 비유하더라도 부족할 것입니다.
지금 당면한 시기는 상법像法 시대와 계법季法 시대인지라, 천성千聖이 자취를 감추어 시험 삼아 현로玄爐에 넣고 크게 풀무질을 해서 점검해 볼 수가 없어서 부질없이 자신이 본 것만을 가지고 동쪽 서쪽으로 천착穿鑿합니다. 그런 까닭에

010_0635_c_01L答金叅判正喜有數十次徃復而
但書來一去二

010_0635_c_02L
耳師大名已積十年之久無緣梯接
010_0635_c_03L忽枉梵凾不料世外高擧之人亦有注
010_0635_c_04L及於俗臼中一物如是鄭重奉以惝怳
010_0635_c_05L得未曾有第闡揚先微瓶錫遠動
010_0635_c_06L出世間固無所逃尤有欽誦萬萬
010_0635_c_07L此▼(湔/刀) 陋菲薄寔非可發輝潜光況今苫
010_0635_c_08L堊之蹤亦有未敢者想當印諒如得
010_0635_c_09L厠名其間以圖不朽固所樂爲之役
010_0635_c_10L又何以强所不强貽累於笋鯉不勝騂
010_0635_c_11L恧餘心神適撓艱此飾復何以則獲
010_0635_c_12L此緣湊 一聽塵譚臨紙冲悒不任遙
010_0635_c_13L餘姑不煩

010_0635_c_14L
俗說有我歌査唱之語今於閤下驗之
010_0635_c_15L雖有歌意而旣爲人所奪則含笑
010_0635_c_16L杜口可也而歌者反嫌於我故更入葛
010_0635_c_17L藤禪以明其本是我歌而爲人橫奪之
010_0635_c_18L意也大抵閤下文章旁礴波瀾汪洋
010_0635_c_19L機鋒慧捷雷震電掣加以深信佛理
010_0635_c_20L酷好禪旨千金不足驚其視八音不能
010_0635_c_21L改其聽聞愈愽而樂愈深思之熟而信
010_0635_c_22L愈篤於今決難再遇爲之欽服何喩
010_0635_c_23L所可欠者時當像季千聖韜跡不得
010_0635_c_24L試於玄爐大治徒將己見東穿西鑿故

010_0636_a_01L다만 문장에만 치달리고 총명과 지혜만을 자랑하고 뽐내어 스스로 생각하기를 ‘삼교三敎의 전적과 사해四海 다른 나라의 학문까지 나는 다 훤하게 깨달았노라.’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눈앞에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크게 사자후師子吼를 하여 많은 사람들을 호령하고 부처님과 조사님의 격언格言을 꾸짖고 비방하며, 심지어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고까지 하여 모두 녹여 쓸어 없애려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어찌 보지도 못하셨습니까? 『원각경圓覺經』에 “사유심思惟心으로 여래의 원각경계圓覺境界를 헤아리는 것은 비유하면 마치 반딧불을 가져다가 수미산須彌山을 태우려고 하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으며, 『팔양경八陽經』에서는 “말법 시대에 어리석은 사람이 만약 이 경을 듣고는 믿지 않고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말하면, 이 사람은 현세現世에서 백나병白癩病에 걸릴 것이요, 죽어서는 지옥에 들어가서 수없이 많은 고통을 받으면서 영겁永劫토록 이 지옥을 벗어날 기약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덕산德山은 “모든 현묘한 변론을 다 갖추고 있어도 그것은 마치 넓은 허공에 터럭 한 오라기를 날리는 것과 같고, 세상의 중요한 기미를 다 갖추고 있더라도 그것은 마치 큰 웅덩이에 물 한 방울을 떨어뜨리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합하는 고명高明하심에도 불구하고 법을 아는 사람을 보면 두려워하거늘 이와 같이 무엄無嚴한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정말 두렵고도 두려운 일입니다.
법으로 인하여 친해지게 된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어찌 손을 내밀어 이끌어 줄 만한 도가 없겠습니까? 이미 합하께서는 나쁜 냄새를 풍기면서 와서 내게 그 냄새가 배어들게 하였으니, 나도 또한 가서 나쁜 냄새를 풍겨 배어들게 함이 무슨 해로움이 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내가 부르려고 하는 노래를 빼앗아서 제 자신이 부르는 소식입니다. 순리를 거슬러 행동하는 도리가 지금 이와 같습니다.
밖의 형해形骸를 거슬러 생각해 보고서 감추는 일 없이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방棒과 할喝을 번갈아 가한다 해도 이 두 가지 방법이 손해를 끼칠 만한 말이 없으니, 그렇다면 진실로 지금은 마음을 가라앉혀 평정심을 가지고 천천히 연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크게 소리 내어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 늙은이도 역시 가련하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시험 삼아 논해 보려 합니다.
일심법체一心法體의 위에는 본래 불변不變과 수연隨緣의 두 가지 뜻이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마음의 본체는 변하지 않는 것이니, 곧 이름을 여의고 모습을 끊어 소탕하여 남김이 없게 하였기 때문에 억지로 이름을 붙여서 진공眞空이라고 한 것입니다. 유有에 즉卽한 공空이기 때문에 진공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니, 태허太虛의 단공但空과는 같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반야경般若經』에 이르기를 “물질이 곧 공空이다.”라고 하였으니, 만약 마음의 본체가 자성自性을 지키지 못한다면, 인연을 따라서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의 더럽거나 깨끗한

010_0636_a_01L但以馳騁文章誇逞聦慧自以爲三敎
010_0636_a_02L典籍 四海異方之學我悉洞曉眼前
010_0636_a_03L無人作大獅吼號令群品誚謗佛祖
010_0636_a_04L格言甚至於非佛所說欲削掃滅之境
010_0636_a_05L豈不見乎圓覺經云以思惟心
010_0636_a_06L度如來圓覺境界如取螢火燒須彌山
010_0636_a_07L八陽經云末世愚人若聞此經不信
010_0636_a_08L以爲非佛所說者現世得白癩病死入
010_0636_a_09L地獄受無量苦永刼無出期德山云
010_0636_a_10L窮諸玄辯若一毫置於太虛竭世樞機
010_0636_a_11L如一滴投於巨壑今以閤下之高明見
010_0636_a_12L識法者惧至於如是無嚴耶可畏可畏
010_0636_a_13L以法爲親積有年矣豈無垂手接引之
010_0636_a_14L道耶旣放惡氣而來熏何妨還放而去
010_0636_a_15L熏耶此是還奪我歌而自唱之消息也
010_0636_a_16L倒行逆施之道當如是也追念外形骸
010_0636_a_17L而盡言不諱棒喝交加兩無所損之言
010_0636_a_18L則固當平心徐究而啞然大笑曰此老
010_0636_a_19L亦可憐矣誡甞論之於一心法體上
010_0636_a_20L本具不變隨緣二義心體不變則離名
010_0636_a_21L絕相掃蕩無餘故强名曰眞空即有
010_0636_a_22L之空故名眞空也不同太虛之但空也
010_0636_a_23L故般若經云色即是空若心體不守自
010_0636_a_24L隨緣成就世出世間染淨諸法則一

010_0636_b_01L모든 법을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일체의 온갖 법이 천 가지 만 가지로 변화하게 되리니, 억지로 묘유妙有라 이름 붙인 것이다. 공에 즉한 유이기 때문에 묘유인 것이니 상에 집착하는 오로지 유인 것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공이 곧 색이다.”라고 한 것은 불변의 진공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과 조사님이 세간에 출현하심은 바람도 없는데 물결이 일어나는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그러므로 석가세존釋迦世尊께서는 마갈타국摩竭陁國에서 7일 동안 문을 닫으셨고, 달마 대사達摩大士는 소림굴少林窟 속에서 9년 동안 면벽面壁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자탑多子塔 앞에서 자리를 반으로 나누어 앉게 하셨던 순금만 파는 점포(眞金鋪)의 소식이요, 합하께서 말씀하신 바 일묵一默은 걱정이 많다고 한 것입니다.
묘유妙有의 수연隨緣 때문에 부처님과 조사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시었으니 그 은혜가 너무 커서 갚기 어렵습니다. 그런 까닭에 가르침의 법을 설하신 8만의 여러 경전이 있고, 선禪에는 1천 7백 개의 칙則(公案)이 있어서 세간과 출세간에 범부나 성인의 더럽거나 깨끗한 일체의 온갖 법을 환하게 일제히 나타내었으니, 이것이 바로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꽃을 들자 빙그레 웃었던 그 소식이요, 합하께서 이른바 1만 게송은 근심이 적다고 한 것입니다.
또 진공眞空은 이미 이름과 모양을 끊었기 때문에 비록 쇠못의 부리요 무쇠의 혀이기는 하지만, 이야기를 해도 이해할 부분이 없어서 만약 그것을 묘유妙有라고 하면, 곧 이름과 모습이 나란히 나타나기 때문에 또한 천 가지의 이름과 만 가지의 모양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의리선義理禪ㆍ격외선格外禪ㆍ여래선如來禪ㆍ조사선祖師禪ㆍ순금 점포(眞金鋪)ㆍ잡화 점포(雜貨鋪)ㆍ살인검殺人劒ㆍ대기大機ㆍ대용大用ㆍ가리사家裡事ㆍ도중사途中事ㆍ잡아 정함(把定)ㆍ놓아 행함(放行)ㆍ등롱燈籠(內)ㆍ노주露柱(外)ㆍ최초구最初句ㆍ말후구末後句선禪 등 이와 같이 내지는 5계戒ㆍ10선善ㆍ4제諦ㆍ12인연因緣ㆍ6도度ㆍ만행萬行ㆍ6근根ㆍ6진塵ㆍ6식識ㆍ7대大ㆍ18계界교敎 등 허다한 이름과 모양이 서로서로 발휘發揮하여 천만 가지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조계曺溪 대감大鑑118)조사께서 친히 마야摩耶 부인의 배 속에서 비밀한 수기를 받고, 서른여섯 가지 대법對法119)으로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설법규식說法規式」에 이르기를 “나의 이 서른여섯 가지 대법을 만약 잘 이해하여 활용할 줄 알면, 곧 도가 일체 경전의 법을 꿰뚫어서 반드시 서로 마주하고 있는 상대가

010_0636_b_01L切萬法千變萬化故强名曰妙有
010_0636_b_02L空之有故曰妙有也不同着相之但有
010_0636_b_03L故云空即是色以不變眞空故
010_0636_b_04L祖出世無風起浪所以釋迦世尊
010_0636_b_05L竭陁國掩關七日達摩大士少林窟中
010_0636_b_06L面壁九載此是多子塔前分半座眞金
010_0636_b_07L鋪消息也閤下所謂一默患多者也
010_0636_b_08L妙有隨緣故佛祖出世恩大難酬
010_0636_b_09L以敎說八萬諸經禪有千七百則
010_0636_b_10L世出世間凡聖染淨一切諸法炳然
010_0636_b_11L齊現此是靈山會上擧拈花消息也
010_0636_b_12L下所謂萬偈患少者也且眞空則旣絕
010_0636_b_13L名相故雖以釘觜鐵舌也無話會分
010_0636_b_14L若其妙有則名相齊現故又有千名萬
010_0636_b_15L如義理禪格外禪如來禪祖師禪
010_0636_b_16L眞金鋪雜貨鋪殺人劒大機大用
010_0636_b_17L裡途中把定放行燈籠露柱最初句
010_0636_b_18L末後句禪如是乃至五戒十善四諦十
010_0636_b_19L二因緣六度萬行六根六塵六識七
010_0636_b_20L十八界許多名相互相發揮
010_0636_b_21L千變萬化也是故曺溪大鑑祖師親授
010_0636_b_22L密記於摩耶肚裡以三十六對法敎弟
010_0636_b_23L子等說法䂓式曰我此三十六對法
010_0636_b_24L若能解用即道貫一切經法必須相對

010_0636_c_01L출몰出沒하여 곧 양변묘유妙有을 여의고 구경究竟에 이르러서는 두 법이 다 사라져서 다시 갈 곳이 없게 됩니다진공眞空.”라고 하였습니다.
위대합니다. 여기에 이르러서는 비로소 말하기를 “일원一圓의 모양은 원융圓融하여 걸림이 없고 둘이 아닌 큰 도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여래如來께서 3곳에서 특별히 전하신 법120)이요, 서른세 분 조사님께서 병의 물을 다른 병에 쏟아 붇듯이 하여 육조六祖에 이르러서 이 진공과 묘유의 둘이 없는 바른 맥으로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리하여 그것으로써 후세의 선종禪宗에서 법을 설하는 의식儀式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기機와 용用이 서로 마주하여 나오고 사라지곤 하여 곧 단견斷見과 상견常見 두 쪽을 여의는 것이 바로 묘유이고, 구경究竟에 이르러서는 두 법이 다 사라져서 다시 갈 곳이 없게 되는 것이 바로 진공입니다. 먼저 모든 법을 분별하고묘유妙有 뒤에 필경공畢竟空진공眞空을 설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모든 부처님과 여러 조사님께서 왼쪽무無으로도 떨어지지 않고 오른쪽유有으로도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원만히 굴려 부딪히지 않고 정면으로 말해 주어서 일체의 중생들로 하여금 단견과 상견 두 구덩이에 떨어지지 않고 곧바로 보리菩提의 저 언덕에 이르게 하는 법을 설하는 올바른 방식입니다. 다만 임제臨濟의 가풍家風뿐만이 아니라 다섯 종파에서 법을 설하는 규범도 대동소이大同小異합니다.
만약 단지 몸이 있고 말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바로 항상 존재하는 것이라는 견해를 가진 외도外道들이기 때문에 모든 법은 곧 항상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견고하게 고집하면서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법은 존재하는 것인 양 싶어도 사실은 없어지고 마는 것이기 때문에 비록 백 천 겁이 지나간다 하더라도 영원히 벗어날 날이 없을 것입니다. 유교의 후학後學들이 지취를 잃어버리는 것은 대부분이 이런 병폐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 다만 몸도 없는 것이고 말도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곧 결국 끊어져 없어지고 마는 것이라는 견해를 가진 외도입니다. 그런 때문에 모든 법은 바로 본래부터 없었던 것이라는 생각을 견고하게 고집하면서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법은 또한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고 또한 없어지고 마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혹 어떤 사람은 “선과 악은 본래부터 공한 것이니 마음을 죽여 텅 비우고 자리에 앉아야 한다.”라고 하였고, 혹 어떤 사람은 “인과因果가 없다고 믿지 않고 도둑질을 하고 음란한 짓을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이들은 비록 한량없이 많은 겁을 지낸다 해도 역시 거기에서 벗어날 날이 없을 것입니다. 노자의 후학들이 지취를 잃어버리는 것은 대부분이 이런 병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과연 위와 같은 공空에 원전圓轉의 종지宗旨가 있음을 사무치게 깨달으면, 지금까지 전해 오는 허다한 견해見解들이 마치 끓는 물에 얼음이 녹듯 할 겁니다.

010_0636_c_01L出沒即離二邊
至於究竟二法盡
010_0636_c_02L更無去處
偉矣㢤到這裡方曰
010_0636_c_03L一圓融無障碍之不二大道也此是如
010_0636_c_04L來三處別傳卅三祖師如瓶注瓶
010_0636_c_05L至於六祖以此眞空妙有無二正脉
010_0636_c_06L授弟子以爲後世禪宗說法之儀式也
010_0636_c_07L機用相對出沒即離斷常二邊是妙有
010_0636_c_08L究竟二法盡掃 更無去處是眞空
010_0636_c_09L先分別諸法
後說畢竟空
正是
010_0636_c_10L諸佛諸祖不落左不落右圓轉不
010_0636_c_11L正面說去欲使一切衆生不落斷
010_0636_c_12L常二坑直到菩提彼岸之說法正式也
010_0636_c_13L非但臨濟家風五宗說䂓大同小異也
010_0636_c_14L若但有身有說則是常見外道故以爲
010_0636_c_15L諸法是常有堅執不捨而不知諸法
010_0636_c_16L似有實無故雖百千刼永無出頭之日
010_0636_c_17L儒之後學失旨者多有是病也
010_0636_c_18L但無身無說則是斷見外道故以爲諸
010_0636_c_19L是本無堅執不捨而不知諸法
010_0636_c_20L有亦無故或云善惡本空而死心空坐
010_0636_c_21L或撥無因果而行盜行婬雖無量刼
010_0636_c_22L亦無出頭之日也老之後學失旨者
010_0636_c_23L有此病也果能洞曉如上空有圓轉之
010_0636_c_24L宗旨則所來許多見解如湯消氷也

010_0637_a_01L다만 합하께서는 애써 노력한 탓에 박학한 것은 과거 식전識前의 운보運步였고, 의식이 끊어진 뒤에 이르러서는 본분초료本分草料121)입니다.
입도 뻥긋 못했으며 다리를 들어도 들리지 않기 때문에 경론經論의 지취旨趣가 대부분 어물어물 속이거나 흐리멍덩하고 애매하게 하여 격외선格外禪의 지취를 제대로 가리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꿈에서조차 보지 못한 것입니다.
얕고 깊음을 논하건대 비록 모두 함께 이와 같이 분명하게 분별하여 분석한다 하더라도 틀림없이 지견의 알음알이에 장애 받는 바가 되어 마음의 티끌이 더욱 막아 예전 그대로 변화함이 없이 동쪽을 부르면서 서쪽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알고 있으면서도 말하지 않으면 그 잘못은 나에게 있는 것이며, 말을 하였는데 믿지 않는 것은 그 잘못이 저들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또한 갑자기 길에서 서로 만나면 도리어 피하기가 어려운 까닭에 지금 다시 한 조목 한 조목씩 쫓아가면서 상대하여 밝히는 것이 마치 기름이 밀가루에 스며들면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것과 같으니, 머리를 돌린다 한들 또한 어찌 기필하겠습니까? 다만 모든 불자佛子들이 그릇된 것을 꺾고 옳은 것을 드러내어 물려준 법을 보호하여 지키는 것이 직분일 따름입니다.
한 번은 말하기를 “산야山野(백파를 가리킴)께서 말한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한 일은 다섯 종파의 종지宗旨’라고 한 것도 바로 지난날 옛사람의 성어成語 가운데에서 주워 온 것입니다. 결정코 산야께서 자기 마음 가운데에서 터득한 것이 아니니, 그런 때문에 다만 구두선口頭禪일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도대체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과연 진공과 묘유의 둘이 아닌 큰 도를 철저하게 깨달아 알면, 이 큰 도는 곧 세 곳에서 전한 바 다섯 종파를 통해 대대로 전해 내려온 부처님과 조사님의 바른 맥락입니다. 그런 까닭에 자기 밖에 다른 것이 없고 옛사람 밖에 또한 자기도 없습니다. 단지 불도佛道만이 이와 같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공자와 노자 두 성인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같은 자가自家이니, 둘이 아닌 큰 도가 진실로 이와 같습니다.
과연 여래의 말씀이라면 곧 어찌하여 공자 같은 성인께서는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을 도道의 조종祖宗으로 받들어 계승하고,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법도를 드러내 밝혔다.”라고 하였으며, 또 중화中華의 정자程子와 주자朱子, 그리고 우리 동방의 퇴계退溪와 율곡栗谷도 무엇 때문에 공자와 맹자께서 이룩해 놓으신 말씀을 널리 연설하였습니까?
이것은 성현聖賢께서도 역시 다 옛사람들께서 이룩해 놓은 말을 주워 모아서 천하 후세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니, 이를 의지해서 실천 수행해야 할 일관一貫의 큰 도라고 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이런 까닭에 정자와

010_0637_a_01L但閤下强勉博學向識前運步至於識
010_0637_a_02L絕後本分草料開口不得擡脚不擧
010_0637_a_03L經論旨趣率多儱侗塗糊莫卞格
010_0637_a_04L外禪旨實未夢見焉論淺深雖與之
010_0637_a_05L如是分明卞析必爲知解所障心塵轉
010_0637_a_06L依舊喚東作西矣然知而不言
010_0637_a_07L在我矣言而不信曲在彼矣且驀路
010_0637_a_08L相逢難可回避故今更爲逐條對卞
010_0637_a_09L油入糆萬萬難出回頭轉腦亦何可
010_0637_a_10L但盡佛子摧邪顯正護持遺法之職
010_0637_a_11L分而已

010_0637_a_12L
一曰山野所說三處傳心五派宗旨
010_0637_a_13L古人成語中掇拾來者決非山野自心
010_0637_a_14L中所得底故但是口頭禪云者是何言
010_0637_a_15L是何言歟果能徹悟眞空妙有無二
010_0637_a_16L大道則此之大道即三處所傳五派流
010_0637_a_17L芳之佛祖正脉也故自家底外無別
010_0637_a_18L人底外亦無自家底也非但佛道如是
010_0637_a_19L乃至孔老二聖底亦同自家底也不二
010_0637_a_20L大道固如是矣果如來言則何以孔聖
010_0637_a_21L祖述堯舜憲章文武又中華之程朱
010_0637_a_22L東之退栗亦何廣演孔孟成語耶此則
010_0637_a_23L聖賢亦皆掇緝古人成語不可爲天下
010_0637_a_24L後世依而行之之一貫大道也是故程

010_0637_b_01L주자, 퇴계와 율곡이 곧 공자와 맹자요, 공자와 맹자가 곧 삼황三皇과 오제五帝이니, 그런 까닭에 이름하여 일一로 관통한다는 것입니다.
감히 묻겠습니다. 요임금과 순임금 외에 어찌하여 이 공자와 맹자가 있으며, 공자와 맹자 외에 어찌하여 이 정자와 주자, 그리고 또 퇴계와 율곡이 있어서 적적분명的的分明하게 지적해 온 것입니까? 감히 말씀드리건대 여년驢年122)에나 일러 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마땅히 알아야만 할 것입니다. 세 곳에서 특별하게 전한 것이 곧 여러 조사님이 전해 준 것이요, 모든 조사님이 전해 준 것이 곧 다섯 종파가 연설해 주신 것이며, 다섯 종파가 연설해 주신 것이 곧 후학後學들이 깨달아야 할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하는 것이 마치 병의 물을 다른 병에 쏟아 붓듯 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본 것은 곧 부처님과 조사님일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무엇 때문에 이 사람이 얻은 것을 따로 찾으십니까? 이것은 곧 몸이 바다 가운데 있으면서 물을 따로 찾으며, 함원전含元殿123) 안에 있으면서 장안長安을 묻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말씀해 보십시오. 공자와 맹자 밖에 어떤 것이 바로 합하閤下께서 얻은 것입니까? 과연 따로 얻은 것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바로 스승도 없이 스스로 깨달은 것일 겁니다.
옛사람이 말하지 않았던가요? 부처님이 출현하시기 이전에 스승 없이 스스로 깨달았다는 것은 높고 수승하다고 생각하는 견해요, 부처님이 출현하신 이후에 스승 없이 스스로 깨달았다는 것은 모두가 바로 천연외도에 속한 것(盡屬天然外道)이니, 지금은 바로 부처님이 출현하시기 전의 일입니까, 부처님이 출현하신 이후의 일입니까? ‘진속盡屬’이란 두 글자에 대하여 역시 지금 자세히 설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옛사람이 “문장은 작은 재주”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 지경에 이르러서는 마치 태양 아래 외로운 등불과 같나니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정말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섣달 30일 후에 지금까지 일찍이 이와 같은 말을 한 적이 없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한 번은 말하기를 “『화엄경』과 『법화경』은 바로 교적敎迹의 사구死句라서 선문禪門의 상승上乘이 될 수 없고, 소초疏抄나 사기私記도 또한 묘유妙有의 활구活句가 될 수 있다.”라고 하면서 판별하여 두 건의 물건으로 만들어 말하셨습니다.
또 말씀해 보십시오. 누가 이런 말을 만들어서 이렇게 설하였습니까? 이는 곧 합하께서 스스로 장난障難을 만들어서 천착穿鑿하고 미치광이처럼 내달리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뇩보리阿耨菩提라고 이름할 만한 결정적인 법이 없으며, 또한 여래가 설하셨다고 할 만한 결정된 법도 없다.”라고 하셨으니, 이는 모든 법이 근본을 따른 이래로 분명하고 뚜렷하여 하나하나가

010_0637_b_01L朱退栗底即孔孟底孔孟底即三皇
010_0637_b_02L五帝底故名曰一貫也敢問堯舜底外
010_0637_b_03L如何是孔孟底孔孟底外如何是程朱
010_0637_b_04L退栗底的的分明指似來也敢道驢
010_0637_b_05L年可得指去也當知三處別傳底即諸
010_0637_b_06L祖所傳底諸祖所傳底即五派所演底
010_0637_b_07L五派所演底即後學所悟底也故云以
010_0637_b_08L心傳心如瓶注瓶然則此漢所見底
010_0637_b_09L佛祖底也今何別覔此漢所得底耶
010_0637_b_10L非身在海中別覔水含元殿裡問長安
010_0637_b_11L且道孔孟底外如何是閤下所得底
010_0637_b_12L果道別有則是爲無師自悟者也
010_0637_b_13L古不云乎佛前無師自悟高勝見解
010_0637_b_14L佛後無師自悟盡屬天然外道今是佛
010_0637_b_15L前耶佛後耶盡屬二字亦當着眼看
010_0637_b_16L古不云乎文章小藝到這裡如日下
010_0637_b_17L孤燈可不信歟可不信歟臘月三十
010_0637_b_18L日後莫道不曾說來此等語也

010_0637_b_19L
一曰華嚴法華是敎迹死句不得爲禪
010_0637_b_20L門上乘䟽抄私記還爲妙有活句
010_0637_b_21L爲兩件物云者且道誰爲此說此
010_0637_b_22L閤下自作障難穿鑿狂走也佛云無有
010_0637_b_23L定法名阿耨菩提亦無定法如來可說
010_0637_b_24L是知諸法從本以來端端的的一一天

010_0637_c_01L천진天眞한 면목面目이라서, 가는 티끌도 성립되지 못하고마음의 작용이 없어진 곳(心行滅處) 작은 풀도 나지 못합니다말길이 끊어짐(言語道斷). 그리하여 본래부터 모든 부처라고 이름하지도 않았고, 또한 중생이라고 이름하지도 않았으며, 또한 더럽다거나 깨끗하다고도 하지 않았고, 또한 삿되다거나 바르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물질이 곧 공이요, 공이 곧 물질이며, 이 모든 법의 공空한 모습은 생겨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아 미래제未來際가 다하도록 항상 스스로 적멸寂滅하다.”라고 하였습니다.진공眞空
다만 참 성품은 매우 심오하고 극히 미묘하여 자성自性을 지키지 않고 인연을 따라 이루어집니다. 일체의 일과 법묘유妙有에 나아가기 때문에 삿된 사람이 이것을 보면 그것을 삿된 법이라고 말하고, 바른 사람이 이것을 보면 그것을 바른 법이라고 말하나니, 비유하면 마치 금金과 은銀은 본래부터 귀하고 천한 것이 아닌데, 사람들은 이를 귀하다 하고 개들은 이를 천하다고 하는 것과 같으며, 또 비유하면 마치 썩은 쥐는 무수리(鶖)가 보고는 귀하다 하고 봉황이 보면 천하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삿된 사람이 보는 것은 단지 세간법世間法에서만 삿된 것이 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출세간出世間의 삼장三藏과 오교五敎, 격외선의 지취(格外禪旨)까지도 역시 삿된 법이 됩니다. 이런 까닭에 아흔여섯 가지의 외도外道들이 대부분 부처님의 법 가운데에 가로질러 흐르는 것입니다.
바른 사람이 본 것은 다만 출세간의 법만 바른 것이 될 뿐만 아니라, 내지는 세간에서 세상을 다스리는 정교政敎, 시정市井의 한담閒談, 꾀꼬리가 노래하고 제비가 지저귀는 것, 양의 머리를 걸어 놓고 개고기를 파는 것, 사물과 사물의 가고 옴 등이 바른 법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런 까닭에 『능엄경』에서 스물다섯 분 성인이 모두 다 삼과三科(오온五蘊ㆍ십이처十二處ㆍ십팔계十八界)와 칠대七大(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ㆍ공空ㆍ견見ㆍ식識)의 세속제世俗諦의 법 가운데에서 깨달아서 원만하게 통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 세존께서는 새벽 샛별을 보고 깨달으셨고, 원효元曉 대사는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깨달았으며, 영운靈雲 선사는 복사꽃 색을 보고 깨달았고, 향엄香嚴 선사는 대나무 치는 소리에 깨달았으며, 원오圓悟 선사는 닭 우는 소리를 듣고 깨달았고, 보적寶積 선사는 돼지고기 파는 것을 보고 깨달았으니, 이 또한 모두 세속제 속에서 깨달은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삿된 사람이 올바른 법을 설說하면 올바른 법도 다 사邪에 돌아가고, 바른 사람이 삿된 법을 설하면 삿된 법도 다 올바름으로 돌아간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알아야만 할 것입니다. 모든 법은 본래부터 정해진 성정性情이 없어서 견해를 따라 차별을 이루어 마치 사邪와 정正이 있는 듯합니다. 과연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미묘한 진리를 통달할 수 있다면 일어나는 모든 의심이 부서져 내리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대개 사리를 통찰하는 수단이요(活眼手段),

010_0637_c_01L眞面目纖塵不立心行
滅處
寸草不生言語
道斷

010_0637_c_02L本不名諸佛亦不名衆生亦非染淨
010_0637_c_03L亦非邪正也故佛云色即是空空即
010_0637_c_04L是色是諸法空相不生不滅 不垢不
010_0637_c_05L不增不減盡未來際常自寂滅

010_0637_c_06L但以眞性甚深微妙不守自性隨緣成
010_0637_c_07L就一切事法
邪人見之謂之邪法
010_0637_c_08L正人見之謂之正法比如金銀本非
010_0637_c_09L貴賤人以爲貴狗以爲賤又如腐鼠
010_0637_c_10L鶖以爲貴鳳以爲賤故邪人所見
010_0637_c_11L但世法爲邪乃至出世間三藏五敎
010_0637_c_12L外禪旨亦爲邪法是故九十六種外道
010_0637_c_13L多從佛法中橫流也於正人見非但出
010_0637_c_14L世法爲正乃至世間治世政敎市井閒
010_0637_c_15L鶯吟鷰語懸半頭賣狗肉物物拈
010_0637_c_16L無非正法也是故楞嚴二十五聖
010_0637_c_17L悉於三科七大世諦法中悟得圓通也
010_0637_c_18L且世尊見明惺悟元曉飮骨髓悟
010_0637_c_19L雲見色香嚴聞聲圓悟聽鷄寶積見
010_0637_c_20L亦皆世諦中悟去故祖師曰邪人
010_0637_c_21L說正法正法悉歸邪正人說邪法
010_0637_c_22L法悉歸正故知諸法本無定性隨見
010_0637_c_23L成差似有邪正也果能通達如上妙理
010_0637_c_24L則所來諸疑無不撲落也盖以活眼手

010_0638_a_01L죽은 뱀도 살아 있는 것처럼 다루며(活弄死蛇), 흙을 쥐어 금을 만들기(把土成金) 때문이니, 사물과 사물의 가고 옴(物物拈來)이 조사의 뜻 아닌 것이 없으며(無非祖師意), 백 가지 풀끝에 명명백백하고(明明百草頭), 서쪽에서 온 뜻이 명명백백하며(明明西來意), 백억의 살아 있는 석가(百億活釋迦)가 봄바람에 취하여 춤을 추는 것(醉舞春風端)입니다.
이미 온갖 법이 선禪의 지취가 아님이 없으니, 그렇다면 무슨 까닭에 여래如來께서 말씀하신 거침없이 순조롭게 이치에 들어맞는 저 『화엄경』과 『법화경』만이 유독 선의 지취가 아니라고 합니까?
이러므로 알아야만 할 것입니다. 팔만대장경이 본시 모든 부처님께서 자비로 다른 사람을 교화하는 평상적인 사업입니다. 그런 때문에 곧 이것은 모든 부처님이 날마다 사용하는 가운데 천진자연天眞自然한 본분本分의 가풍家風이니, 모든 말과 글귀가 하나하나 확실하고 분명한(端的)지라, 바람이 불어도 들어가지 못하고 물을 뿌려도 가라앉히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진실이 이와 같거니와 다만 참다운 자성은 매우 심오해서 인연을 따라 바뀌는 까닭에 십선인十善人이 보면 사람과 하늘의 가르침이 되고, 이승인二乘人이 보면 소승小乘의 가르침이 되며, 보살이 보면 대승의 가르침이 되고, 일승一乘의 사람이 보면 원돈圓頓의 가르침이 되고, 격외선格外禪을 수행하는 사람이 보면 격외선이 됩니다.
이런 까닭에 『화엄경』에 이르기를 “부처님이 한 음성으로써 법을 연설하시니 중생들이 부류에 따라 각각 이해를 얻네.”124)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부처님이 한 음성’이란 대기大機가 되고, ‘중생들이 부류에 따라 각각 이해한다.’고 한 것은 대용大用이 됩니다. 소초䟽抄와 사기私記도 역시 이와 같습니다.
교기敎機 쪽에서 보면 그것을 교敎라 하고, 선기禪機 쪽에서 보면 그것을 선禪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까닭에 교다 선이다 하는 것이나 사邪다 정正이다 하는 것들은 다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이지 법法에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만 할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조사님이 다시 출현하신다고 해도 틀림없이 이 말을 역시 수긍首肯하시고 손으로 이마를 어루만져 주면서 옷을 벗어 그들에게 입혀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단지 한스러운 일은 이 탁겁濁劫의 세계에 태어나서 아무도 증명해 줄 사람이 없으니, 이것이 바로 보아도 미치지 못하고 말을 해도 그 말이 이르지 못하는 여러 곳에서 합하의 총명한 지혜가 믿음을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무간無間의 업業을 부르지 않고자 한다면 부처님의 바른 법륜法輪을 비방하지 마십시오.
한 번은 말씀하시기를 “염화拈花의 소식을 들어 보이자 오직 가섭迦葉만이 알았고 아난阿難과 대중들은 다 몰랐는데, 누가 이와 같이 역력히 설명하여…….”라고 하셨는데,

010_0638_a_01L活弄死蛇把土成金故物物拈來
010_0638_a_02L無非祖師意明明百草頭明明西來意
010_0638_a_03L百億活釋迦醉舜春風端也旣以萬法
010_0638_a_04L無非禪旨則何以如來所說圓轉稱理
010_0638_a_05L之華嚴法華獨非禪旨耶是知八萬藏
010_0638_a_06L本是諸佛慈悲化人之平常事業故
010_0638_a_07L即是諸佛日用中天眞自然之本分家
010_0638_a_08L言言句句一一端的風吹不入
010_0638_a_09L洒不着也其實如是但以眞性甚深
010_0638_a_10L隨緣轉變故十善人見爲人天敎二乘
010_0638_a_11L人見爲小乘敎菩薩所見爲大乘敎
010_0638_a_12L乘人見爲圓頓敎出格人見爲格外禪
010_0638_a_13L是故華嚴云佛以一音演說法
010_0638_a_14L生隨類各得解佛之一音爲大機也
010_0638_a_15L生各解爲大用也䟽抄私記亦復如是
010_0638_a_16L敎機見之謂之敎禪機見之謂之禪也
010_0638_a_17L是故當知爲敎爲禪爲邪爲正在於人
010_0638_a_18L而不在法也佛祖復出亦必首肯
010_0638_a_19L手摩頂而解衣衣之也只恨生此濁刼
010_0638_a_20L無人證明此是諸方見不及說不到處
010_0638_a_21L而閤下聦慧庶幾可信也欲得不招無
010_0638_a_22L間業莫謗如來正法輪

010_0638_a_23L
一曰擧拈花消息唯迦葉一人知之
010_0638_a_24L難大衆皆不知也誰爲如是歷歷說去

010_0638_b_01L경을 볼 만한 안목을 지닌 분으로서도 분명하게 알지 못한다는 것을 더욱 증험해 주는 것입니다.
『화엄경』에 이르기를 “부처님이 한 음성으로써 법을 연설하시니 중생들이 부류에 따라 각각 이해를 얻네.”라고 하였으니, 『묘법연화경』의 한 수가 바로 사람마다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천진天眞한 면목面目이기 때문에 모든 말과 글귀마다 하나하나 확실하고 분명한 것이니, 본래는 선禪이라고 이름하지도 않았고, 또한 교敎라고 이름하지도 않았으며진공眞空, 다만 중생들이 부류에 따라 제각기 이해하는 까닭에 마침내 천만 가지 다름이 성립된 것입니다묘유妙有.
아난阿難과 대중들은 바로 의리교기義理敎機이기 때문에 7축軸의 경문經文을 단지 가르침으로써 이해하였을 뿐대용大用, 오직 가섭迦葉 한 사람만이 이것은 격외선기格外禪機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홀로 선으로써 깨달은 것입니다대기大機. 부처님 본래의 뜻에 의거하면 선과 교가 상즉相卽하나니 서로 떨어지는 일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영가永嘉께서 “말 없을 때 말하고 말할 때 말 없음이니라.”라고 하였으니, 곧 이것이 여래의 진실한 모습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물질이 곧 공이다.”라는 것은 교敎 밖에 선禪이 없다는 뜻이요, “공이 곧 물질이다.”라는 말은 선 밖에 교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지금 어찌하여 선과 교, 말함과 침묵이 다른 것이라고 고집하여 나누어 두 단段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고집하면서 팔을 걷어붙이는 것입니까?
이런 까닭에 마땅히 알아야만 할 것입니다. 아난阿難 등이 문자를 세운 것도 또한 묘법화이고, 가섭이 문자를 여읜 것도 역시 묘법화입니다. 선은 바로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는 바로 부처님의 말씀이니, 큰 성인이신 부처님께서 어찌 마음과 입이 서로 같지 않음이 있겠습니까?
지금 합하와 같은 고명高明한 식견識見으로도 오히려 이와 같이 몽동瞢憧하여 분별하지 못하시는데, 그렇다면 혹 어떤 사람도 간파해서 사람들이 순조롭게 처리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저 이와 같은데도 도리어 산문의 촌놈을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말하시니 정말 우습습니다. 마치 기杞나라 사람이 하늘이 무너질까 염려하는 것과 같습니다.
전에 말하기를 “아는 건 안다고 말하고 알지 못하는 건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아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째서 가르침의 눈이 똑똑하지 못하고 어리석어 스스로 큰 사자의 목소리라고 일컬으면서 곁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거들먹거립니까? 눈 밝은 사람에게도 눈앞 세 자의 어두움은 있다고 하더니 과연 거짓말이 아닙니다. 우습습니다. 정말로 우습습니다.

010_0638_b_01L云者益驗經眼之未分明也華嚴云
010_0638_b_02L佛以一音演法衆生隨類各得解則妙
010_0638_b_03L法華一着子是人人本具之天眞面目
010_0638_b_04L言言句句端端的的本不名禪
010_0638_b_05L不名敎
但以衆生隨類各解故遂成
010_0638_b_06L千差也
阿難大衆是義理敎機故
010_0638_b_07L七軸經文但以敎解
唯迦葉一人
010_0638_b_08L是出格外禪機故獨以禪悟也
據佛
010_0638_b_09L本意則禪敎相即去離不得也故永
010_0638_b_10L嘉云默時說說時默即是如來眞實相
010_0638_b_11L佛云色即是空敎外無禪也空即是色
010_0638_b_12L禪外無敎也今何別執禪敎語默分爲
010_0638_b_13L兩段而揚臂乎哉是故當知阿難等
010_0638_b_14L立文字亦妙法華迦葉離文字亦妙
010_0638_b_15L法華也以禪是佛心敎是佛語以佛
010_0638_b_16L大聖何有心口之不同耶今以閤下之
010_0638_b_17L高明識見尙如是瞢憧不卞則或恐無
010_0638_b_18L人覷得破入得手去也其如是而還
010_0638_b_19L以山野爲可悶云者可笑杞人之憂天
010_0638_b_20L前云知言爲知不言不知知也
010_0638_b_21L今何敎眼未瑩而自稱大獅吼傍若無
010_0638_b_22L人耶明眼人前有三尺暗者果非虛
010_0638_b_23L語也可呵可呵

010_0638_c_01L
한 번은 말씀하시기를 “진단震旦에서 번역한 경문經文들이 번역한 사람들의 잘못이 많기 때문에 달마達摩가 서역에서 와서 문자文字를 소제掃除해 버리고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또한 그렇지 않습니다. 대개 중화中華 사람들이 부질없이 문자文字와 의리義理만을 숭상하여 필경畢竟에는 자기 자신마저도 구제하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관음보살(觀音大士)이 자취를 보여 출현해 와서 문자를 세우지 않고, 곧바로 사람의 마음을 지적하여 의리義理가 없는 격식 밖의 바른 길을 묵묵히 보여 주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각자 본래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하여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는 두 가지 이로움을 원만하게 성취하여 부처님이나 조사가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곧 큰 성인이 가풍을 관찰하여 가르침을 시설한 것이지 경전을 잘못된 것이라고 여겨 쓸어 없앤 것이 아닙니다.
또 번역하는 도량의 모든 스님들은 종宗과 설說을 겸하여 달통하여 가슴속에 만 가지 변화를 간직하고 천지를 크게 농락하였나니, 그런즉 혹 조금 다름이 있어도 역시 올바른 진리를 어기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러므로 현수賢首ㆍ청량淸凉ㆍ부대사(傅士)ㆍ종경宗鏡 등 여러 선사들도 다 큰 성인의 그림자요 메아리라 할 수 있는데, 끝내 한 글자도 가감加減하지 않았을 것이며 단지 글과 조술祖述에만 의지했을 뿐입니다.
그런 까닭에 한 문공韓文公은 감히 『논어』에서 화畫 자를 고치지 않았고, 손지현孫知縣은 『금강경』에서 한 글자를 삭제하려고 했다가 대혜大慧에게 잡히었으며, 규봉圭峰은 『원각경』에서 한 글자를 고치려고 하다가 늑담泐潭에게 간파당하였습니다. 지금 이러한 매우 잘못된 말이 있는데, 법을 아는 사람을 만나면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정말 두렵고 정말 무서울 것입니다.
한 번은 말씀하시기를 “『능가경楞伽經』의 문자가 간회艱晦함으로써 오조五祖가 『금강경』으로 바꾸었다.”라고 하였는데, 이것 또한 스스로 우매하고 제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어찌 그리도 말의 뜻을 글자로 얽어서 만듦이 비루하기가 이와 같습니까?
사리를 밝게 보는 눈을 가진 조사(活眼祖師)는 스승과 제자가 서로 만남에 화살과 칼이 서로 맞부딪치는 것 같은 부사의不思議한 경계를 만나 번뇌의 속박을 갖춘 범부(具縛凡夫)로서 글의 자구나 따지고 어렵고 쉬운 설론說論이나 찾아 헤매는 사람이 반딧불을 잡아다가 수미산을 태워 버리겠다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또 달마達摩는 두 경전을 함께 부촉하면서 말하기를 “『금강경』과 『능가경』은 바로 나의 심요心要이다.”라고 하였는데, 어찌하여 단지 『능가경』만을 부촉했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오조五祖에 이르러서는 단지 『금강경』만 부촉했다고 말한 것은

010_0638_c_01L
一曰震旦所譯之經文多有譯者之誤
010_0638_c_02L達摩掃除文字以心傳心云者此亦
010_0638_c_03L不然葢以中華徒尙文字義理畢竟
010_0638_c_04L自救不了故觀音大士示跡出來
010_0638_c_05L立文字直指人心默示沒義理之格外
010_0638_c_06L正路使人各自悟得本來面目自他二
010_0638_c_07L圓滿成就爲佛祖師也此乃大聖
010_0638_c_08L觀風設敎非以經誤掃除也且譯場諸
010_0638_c_09L宗說兼通胷藏萬化塊弄天地
010_0638_c_10L或有小異亦不違於正理故賢首淸凉
010_0638_c_11L傅士宗鏡等諸師皆是大聖影響而終
010_0638_c_12L不能加減一字但依文祖述也故韓文
010_0638_c_13L不敢改論語畫字孫知縣欲削金剛
010_0638_c_14L一字而爲大慧捉敗圭峰欲改圓覺一
010_0638_c_15L而爲泐潭勘破也今此多誤之說
010_0638_c_16L胡無識法者惧歟可畏可畏

010_0638_c_17L
一曰以楞伽文字艱晦故五祖易之以
010_0638_c_18L金剛者此亦自昧自欺者也何其措語
010_0638_c_19L鄙陋其如是耶活眼祖師師資會遇
010_0638_c_20L箭鋒相投之不思議境界以具縛凡夫
010_0638_c_21L尋行數墨之文字艱易說論者何以異
010_0638_c_22L於取螢火而欲燒須彌者乎且達摩並
010_0638_c_23L付二經云金剛楞伽是我心要何言
010_0638_c_24L但付楞伽耶至於五祖但付金剛者

010_0639_a_01L이 두 경전의 종취宗趣가 정녕 똑같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한즉 반드시 두 경전을 함께 부촉해 줄 필요가 없었으며, 또한 『금강경』은 바로 대승大乘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관문이므로 세상에서 다 숭상하고 믿기 때문이니, 이것이야말로 곧 얕은 곳에서 의혹이 없는 데에 이르는 단서입니다. 지금 이후로는 부디부디 다른 말씀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한 번은 말씀하시기를 “무착無着ㆍ천친天親ㆍ육조六祖ㆍ소명昭明 등이 말한 것들은 전부 다 망령된 사람의 거짓 핑계이니 결정코 삭제해야 한다.”라고 말하셨는데, 소리를 낮추시오, 제발 소리를 낮추시오. 혹 부처님이나 조사가 눈썹을 찡그리고, 모든 하늘이 눈을 부릅뜰까 두렵습니다.
또 말씀해 보십시오. 여러 선사들의 말 가운데 어느 구절이 부처님의 뜻에 어긋납니까? 혹 한 마디 한 마디의 말과 한 구절 한 구절의 글귀가 낱낱이 다 어긋난단 말인지요? 그 곡절이 있는 곳을 지금 당장 낱낱이 적출摘出해서 확실하고 분명하게 이 늙은 중에게 가져오십시오.
과연 분명하고 확실하게 지적할 수 있겠습니까? 무턱대고 배척하면서 전부 다 망탁妄托이라고만 하시니 오히려 황송할 뿐입니다. 지금 곧 그 말이 그른지 옳은지를 분별하지도 못하고, 또한 부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인지 순응하는 것이지도 물어 보지 않은 채 단지 망탁이라고 해서 깎아내리려 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지 않으면 미치광이라 할 것입니다. 정말로 괴이하고 정말로 괴이합니다.
또한 무착의 십팔주十八住와 천친의 이십칠의二十七疑125)는 다 자씨慈氏(미륵)의 본송本頌을 연설한 것입니다. 자씨께서 직접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두 보살에게 전한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규산圭山과 장수長水 두 스님 중 한 분은 대감大鑑(육조)을 종사로 삼아 선禪의 근원을 사무쳐 통달하였고, 다른 한 분은 낭야琅瑘의 문을 두드려 심요心要를 깨달았습니다.
이 두 가지 논論은 단지 경문에만 의지하여 풀이하였고, 일찍이 한 글자도 옮기거나 고친 일이 없었으니, 어찌 자성을 본 도인이 고서古書의 진실과 거짓을 모르고 소䟽를 쓰고 기記를 썼겠습니까?
소명昭明 태자가 32분分으로 나누어 설명한 것에 대하여 만약 그것을 구분區分하면 조금도 결혈決穴126)하지 않았으니, 어찌 종경宗鏡이 부처님 후신後身으로서 다만 그 부분만을 따라서 강요綱要를 이끌어 오고 송頌을 붙인 것이라 하겠습니까?
육조六祖의 구결口訣에 대해서는 ‘육조께서 본래 글자를 알지 못하셨기 때문에 틀림없이 이것은 거짓으로 기록한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그 말은 또한 범부의 마음으로 성인의 경지를 망령되이 헤아린 것으로서 성당盛唐의 음률(명경明鏡과 보리菩提127)라는 내용의 시)을 보지 못한 처사인 듯합니다.

010_0639_a_01L二經宗趣正同則不必並付且金
010_0639_a_02L剛是入大乘之初門世皆崇信故也
010_0639_a_03L乃至淺無惑之端也伊今以後切勿他
010_0639_a_04L

010_0639_a_05L
一曰無着天親六祖昭明等所說都是
010_0639_a_06L妄人妄托決定可削云者低聲低聲
010_0639_a_07L或恐佛祖皺眉諸天怒目且道諸師
010_0639_a_08L所說中何節違於佛意耶或言言句句
010_0639_a_09L一一皆違耶其所委折處今當一一摘
010_0639_a_10L的的分明呈似老僧來也果能分
010_0639_a_11L明的指斥爲都是妄托猶爲惶悚
010_0639_a_12L乃不卞其說之邪正亦不問佛意之違
010_0639_a_13L直云妄托而欲削者非愚則狂也
010_0639_a_14L可怪可怪且無着十八住天親二十七
010_0639_a_15L皆演慈氏本頌也慈氏親聞佛說
010_0639_a_16L而傳之二菩薩也故圭山長水二師
010_0639_a_17L則宗大鑑而徹禪源 一則叩琅瑘而悟
010_0639_a_18L心要於此二論但依文解之未甞一
010_0639_a_19L字移改豈以見性道人不知古書之眞
010_0639_a_20L而䟽之記之耶昭明三十二分
010_0639_a_21L其區分小不決穴安以宗鏡之佛後身
010_0639_a_22L直隨其分而提綱着頌耶六祖口訣
010_0639_a_23L不識字故必是妄記云者此亦凡心妄
010_0639_a_24L度聖境也不見明鏡菩提之作大有盛

010_0639_b_01L
또 『육조단경六祖壇經』에는 ‘여견如見’ 등 1백여 게송이 있는데, 모두 다 하나하나 땅에 던지면 금성金聲을 내었다고 합니다. 과연 글자를 알지 못했다면 어찌 입만 열면 옥 같은 말을 토해 낼 수 있었겠습니까?
대개 중화中華라는 나라는 부질없이 문자文字와 의리義理만 숭상하고 모든 부처님의 미묘한 진리는 문자와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인 듯합니다. 또한 달마가 남겨 주신 뜻만을 답습하면서 역시 글자를 모른다는 것을 보여 주고 경문을 따라 구결口訣해서 당시 세상 사람들을 구제한 것인데, 그의 문인 법해法海가 육조께서 말씀하신 것을 따라 초집抄集하여 만고에 유포한 것이니, 어찌 보살처럼 큰 성인이신데 문자를 몰랐다고 하겠습니까?
또 석장錫杖을 세우자 샘물이 솟아 나왔고 도구를 전개하여 경계를 진압하였으며 숙명宿命을 알고 다른 사람 마음까지 통했는데 글자를 모를 수 있었겠습니까? 이른바 가는 털은 보면서도 수레에 가득한 섶은 보지 못한다고 하면 누가 그 말을 믿겠습니까? 어리석은 사람 면전에서 꿈을 말하지 말라는 말이 있는데 진실로 이 때문입니다.
부傅대사의 찬영讃詠과 야보冶父의 염송拈頌은 모두 다 교리에 즉卽하여 종지宗旨를 밝힌 것이니, 부처님께서 본래 품고 있었던 마음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모든 선사가 말하기를 “말은 비록 조금 다르지만 밝힌바 종지는 마치 한입에서 나온 것과 같다.”라고 한 것입니다.
지금 곧바로 깎아내려야 한다고 말하셨는데, 어찌 무엄無嚴하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삿되고 바른 두 갈래 길이 이로부터 갈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청컨대 어느 것이 삿된지 어느 것이 옳은지 스스로 판단해 보십시오. 염라대왕의 무쇠 방망이는 금어金魚 찬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니 정말 두렵지 않습니까?
그러나 『간정기刊定記』에 준해 보면 “혹은 금강선金剛仙을 가탁하여…….”라고 한 것 중 ‘혹은 …… 가탁하여’라고 하는 말이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것은 여러 조사님들이 전한 것이지 한 사람이 지어서 만든 것은 아니니, 곧 천하의 공론公論입니다.
그러므로 우주 안에 골고루 퍼뜨려 읽고 설하는 것이 매우 왕성하였는데, 함허涵虛와 같은 활안活眼의 수단手段에 이르러서도 역시 이를 의지하여 풀이하였으니, 함허는 진실로 한 부처님과 다섯 조사의 종자기鍾子期128)와 같은 인물입니다.
지금 말하기를 “함허도 역시 깎아내야 한다.”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삼교三敎의 모든 책들도 다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삿된 견해가 있어서 이보다 더하겠습니까? 한 번 사견邪見에 빠지면, 마치 기름이 밀가루에 스며들면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하는 말은 과연 거짓말이 아닙니다.

010_0639_b_01L唐音律又壇經中有如見等百餘頌
010_0639_b_02L皆一一擲地可作金聲也果不識字
010_0639_b_03L焉能開口吐玉也蓋以中華徒尙文字
010_0639_b_04L義理不知諸佛妙理非關文字故
010_0639_b_05L踵達摩遺意示亦無識而隨文口訣
010_0639_b_06L救當世門人法海隨說抄集流芳萬
010_0639_b_07L豈以菩薩大聖不識文字乎又卓
010_0639_b_08L錫出水展具鎭境知宿命通他心
010_0639_b_09L不能識字乎能察秋毫而不能見輿薪
010_0639_b_10L誰能信之痴人面前不得說夢者
010_0639_b_11L有以也傳士讃詠冶父拈頌皆即敎
010_0639_b_12L明宗暢佛本懷也故諸師所說言雖
010_0639_b_13L小異所明宗旨如出一口今云直削
010_0639_b_14L豈不無嚴乎邪正二途從此可分
010_0639_b_15L自斷看誰邪誰正閻羅鐵棒不怕金
010_0639_b_16L可不惧歟然準刊定記或假託金
010_0639_b_17L剛仙云云或有假託今所傳諸師底
010_0639_b_18L非一人之造端乃天下之公論故徧布
010_0639_b_19L宇內讀說甚盛至如涵虛之活眼手段
010_0639_b_20L亦依而釋之涵虛實爲一佛五師之子
010_0639_b_21L期也今云涵虛底亦可削然則三敎
010_0639_b_22L諸書都可點檢有何邪見過於此者乎
010_0639_b_23L一入邪見如油入糆萬萬難出者
010_0639_b_24L非虛語也

010_0639_c_01L한 번은 말씀하시기를 “『반야경』은 단지 공종空宗129)일 뿐인데, 지금 말한 바를 관찰해 보건대 반드시 정해진 것이 없어서 혹은 공종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혹은 성종性宗130)이라고 말하기도 하며, 또는 선종禪宗이라고 말하기도 하니, 어찌 광망狂妄하게 함부로 혼란스러운 말을 해서 후세에 학문을 하려는 사람들로 하여금 부처님의 본의本意를 잃어버리게 하는 것인가?”라고 말하였으니, 경을 보는 눈이 흐리멍덩하여 다만 한 무늬만 보고 전체 모양은 보지 못한다는 것이 더욱 징험됩니다.
대개 천친天親은 공반야共般若131)를 밝혔기 때문에 단지 공종만을 밝힌 것이어서 소승小乘과 더불어 함께하기 때문이요, 무착無着은 불공반야不共般若132)를 밝힌 것이어서 소승小乘과 함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규산圭山과 장수長水와 소명昭明 태자 등은 모두 돈오頓悟와 점수漸修를 밝혔기 때문에 의리선義理禪이 되고, 육조六祖ㆍ부대사(傅士)ㆍ종경宗鏡ㆍ야보冶父ㆍ함허涵虛 등은 다 교敎에 즉卽하여 종지를 밝혔으며 진공묘유眞空妙有와 본분자성本分自性을 발기하여 선양하였기 때문에 격외선格外禪이 됩니다.
그러므로 『화엄경』에 이르기를 “한량없고 가없는 계경契經의 바다를 한마디 말로 남김없이 다 연설하였구나.”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금강경』 이 한 경전은 단지 공종空宗일 뿐만이 아닙니다. 그래서 또한 성종性宗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한 선종禪宗이라고 말하기도 하는 것이 어찌 불가한 일이겠습니까?
비록 설한 것도 없고 들은 것도 없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역시 여래께서 설하신 법이라고 할 것묘유妙有도 없고, 곧 법을 설하신 것이 아니라고 할 것진공眞空도 없기 때문입니다. 또 “말 없을 때 말하고 말할 때 말이 없다.”라고 한 말은 곧 그것이 여래의 진실한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위에서 말하기를 “결정적인 법도 없고, 여래가 설하셨다고 할 것도 없다.”라고 한 말은 진실로 이 때문이랍니다. 정말 지혜 있는 사람과는 이야기할 수 있어도 바르지 못한 선비와 이야기하는 건 어렵습니다.
한 번은 말씀하시기를 “상고上古 시대에 모든 조사님들이 다 화두話頭를 가지고 사람들을 가르치지는 않았다. 그런 까닭에 화두는 곧 말법 시대에 대혜大慧 등과 같이 성정이 강하고 사나운 사람들이 제멋대로 쓴 것으로 삿된 법이다.”라고 한 것은 바로 합하閤下의 고황膏肓에 미친 가장 치명적이 죽음의 병입니다. 이것은 다만 그 허물이 전적으로 합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머리를 깎은 외도外道의 무리들도 역시 병폐를 지닌 이들이 많습니다. 비유를 들어 말하자면 “백수공부栢樹工夫133)로 그 누가 힘을 얻었나? 연화세계蓮花世界는 다만 이름으로만 들었을 뿐이네.”라고 말한 이들이 있으니, 그것이 어찌 참회懺悔로도 통하지 못할 커다란 사견邪見이 아니겠습니까?

010_0639_c_01L
一曰般若但是空宗今觀所說無有
010_0639_c_02L准定或云空宗或云性亦云禪宗
010_0639_c_03L非狂妄亂說使後學者迷失佛之本意
010_0639_c_04L耶者益驗經眼儱侗只見一斑未見
010_0639_c_05L全豹者也蓋天親明共般若故但明空
010_0639_c_06L宗與小乘共故也無着明不共般若
010_0639_c_07L爲性宗以不共小乘故也圭山長水昭
010_0639_c_08L明等俱明頓悟漸修故爲義理禪也
010_0639_c_09L六祖傅士宗鏡冶父涵虛等皆即敎明
010_0639_c_10L發揚眞空妙有本分自性故爲格
010_0639_c_11L外禪也故華嚴云無量無邊契經海
010_0639_c_12L一言演說盡無餘然則金則壹經非但
010_0639_c_13L空宗亦云性宗亦云禪宗有何不可
010_0639_c_14L雖謂之無說無聞亦無不可以如來所
010_0639_c_15L說法
即非說法故
又默時說說時
010_0639_c_16L即是如來眞實相故上云無有定
010_0639_c_17L法如來可說者良以是也可與智者道
010_0639_c_18L難爲曲士談

010_0639_c_19L
一曰上古諸祖皆不以話頭敎人故
010_0639_c_20L頭乃末世如大慧等剛狼自用者之邪
010_0639_c_21L法云者最是閤下膏肓之死病也此則
010_0639_c_22L非特專咎於閤下今時剃頭外道輩
010_0639_c_23L多有病如云栢樹工夫誰得力蓮花
010_0639_c_24L世界但聞名者豈非不通懺悔之大邪

010_0640_a_01L어쩌다가 합하의 견식見識은 고치기 어려운 말기 증상의 병이 되고 말았습니까?
대개 합하는 상대인上大人이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바른 견해를 가진 사람을 만나지 못해서 본래부터 화두의 큰 뜻에 어두웠기 때문에 이와 같이 칠전팔도七顚八倒134)를 굳게 고집하면서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것일 겁니다.
그러나 의리義理와 경교經敎를 아직도 분명히 구별하지 못하니, 격식 밖 선禪의 지취를 어찌 뚜렷하게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산속 촌놈은 이제 구름 속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합하를 따르려고 한다면, 또한 부처님의 법으로 인정人情을 지어 세상에 아첨하여 사랑이나 취하려는 소인배들의 행색行色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지금 또한 바깥 몸뚱이는 앞 사람이 걸어간 길을 의지하여 전진해 나아가려고 하니 안녕히 계십시오. 선조先祖들의 본분초료本分草料를 잃지 말고 여래의 막대한 은혜를 갚으렵니다.
대저 화두에는 두 가지의 문이 있으니, 첫 번째는 설화문說話門으로서 팔만 장경의 부처님 말씀과 1천 7백 칙則 선禪의 화두 내지는 구류九流 이단異端의 책에 이르기까지 세상을 다스리는 정교政敎의 법과 농사와 장사의 세무細務적인 일과 세간과 출세간의 착하고 악한 일과 더럽고 깨끗한 일 등 일체의 모든 법이 다 의리義理를 가지고 분석하여 설파해 주어서 사람과 하늘에게 깨달음을 열어 주는 까닭에 설화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간화문看話門이니, 위에서 말한 일체의 모든 법 위에 당면하여 모든 법에 끌려다니지 않고 곧 자신의 마음 가운데에서 지혜를 일으켜 촘촘히 빛을 돌이켜 비추어 보고, 또렷또렷하게 깬 채로 의심을 일으켜서 어두워지지 않는 가운데 말하기를 “능히 이와 같이 부모를 부르고 기한飢寒을 알며, 밝고 밝으며 신령하고 신령하여 한 단락이 둥그렇게 될 때에 앞에 나타나는 일념一念으로 이것이 무엇인고?주인공화主人公話 다니고 머무르며 앉고 눕고 하는 이놈은 또 무엇인고? 말하고 침묵하며 움직이고 고요히 있는 이놈은 또 무엇인고?”라 하여 의심해 오고 의심해 가며 보아 오고 보아 가되 마치 고양이가 쥐를 잡듯이 하고마음과 눈이 서로 이어지게 함(心眼相續), 마치 닭이 알을 품듯이 해야 합니다따뜻한 기운이 서로 이어지게 함(暖氣相續).
이와 같이 오래오래 하면 차츰차츰 한 조각을 이루어서 점점 깨달음으로 나아가게 되어, 힘이 덜어져서 의심치 않아도 저절로 의심하고 들지 않아도 저절로 들려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힘을 얻은 곳이랍니다. 의심을 일으켜서 참구하나니 그런 까닭에 간화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010_0640_a_01L見乎何以閤下之見識得此難醫之未
010_0640_a_02L疾耶葢以閤下自上大人時未遇正
010_0640_a_03L見人素昧話頭大意故如是堅執七顚
010_0640_a_04L八倒而不自知也然義理經敎尙未瑩
010_0640_a_05L然格外禪旨豈能甄別山野玆欲放下
010_0640_a_06L雲頭以順閤下則亦未免以佛法作人
010_0640_a_07L阿世取寵之小人行色故今亦外形
010_0640_a_08L依前步珎重去不失先祖本分草料
010_0640_a_09L以報如來莫大之恩也大抵話有二門
010_0640_a_10L一說話門者八萬藏經之佛語千七百
010_0640_a_11L則之禪話乃至九流異端之書治世政
010_0640_a_12L敎之法農商細務之事世出世間善惡
010_0640_a_13L染淨等一切諸法皆以義理分析說破
010_0640_a_14L開覺人天故名說話門也二看話門者
010_0640_a_15L當於如上所說一切諸法上不爲諸法
010_0640_a_16L所轉去即於自心中能起智慧密密
010_0640_a_17L回光而反照惺惺起疑而不昧云能如
010_0640_a_18L是呼父母知飢寒昭昭靈靈一段圓時
010_0640_a_19L之現前一念是箇什麽主人
公話
行住坐臥
010_0640_a_20L也是什麽語默動靜也是什麽疑來
010_0640_a_21L疑去看來看去如㹨捕鼠心眼
相續
如雞
010_0640_a_22L抱卵暖氣
相續
如是久久稍稍成片漸覺省
010_0640_a_23L不疑自疑不擧自擧矣是爲得力
010_0640_a_24L處也以起疑叅看故名看話門也

010_0640_b_01L설화문說話門으로써 부처님의 가르침을 투철하게 깨닫고 종취宗趣를 원만하게 잘 터득하였기 때문에 해解가 되는 것이요, 간화문看話門으로써 간절한 마음으로 참구叅究하여 친히 본분가향本分家鄕에 이르렀기 때문에 행行이 되는 것입니다. 위의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이고, 이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이해하게 하고 실천하게 하는 것은 곧 다른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설화와 간화 두 문門이 둘을 이롭게 하는 이해와 실천을 구족具足하고 있으니, 만일 어떤 사람이든 지혜와 행동(目足)을 갖추는 것은 비유하면 마치 새의 두 날개와 같아서 어느 한쪽이라도 결여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부처님과 조사님의 선禪과 교敎는 화두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입으로 설하는 것화두를 설하는 것(說話)과 마음으로 실천하는 것화두를 보는 것(看話)으로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미묘한 진리가 있다는 것을 통철하게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만약 단지 입으로 설하기만 하고 마음으로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다만 제 자신도 실천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한 다른 사람도 이해와 실천이 서로 호응하는 한 길의 열반문涅槃門이라는 것을 믿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만약 현처顯處에 입각하여 말하면 화두話頭에는 대략 1천 7백 칙則이 있는데, 이 모든 것은 다 삼보三寶의 입 끝에서 나온 것입니다. 불보에서 나온 것이 1백여 칙이 있으니, 이른바 도솔화兜率話ㆍ주행화周行話ㆍ오도화悟道話ㆍ분좌화分座話ㆍ염화화拈花話ㆍ시부화示趺話 등이 그것입니다.
법보에도 역시 수백 칙이 있으니 『화엄경』에 대하여 수십 칙이 있으며, 『법화경』ㆍ『원각경』ㆍ『금강경』ㆍ『능엄경』 등 수십 책의 경전에 대해서도 각각 몇 칙씩이 있습니다.
승보 가운데에는 유마힐維摩詰과 문수보살文殊菩薩, 그리고 가섭迦葉과 아난阿難 등 33분 모든 조사와 그 아래로 남악南岳ㆍ청원靑原ㆍ마조馬祖ㆍ백장百丈ㆍ황벽黃蘗ㆍ임제臨濟ㆍ운문雲門 등 다섯 종파의 모든 조사에도 모두 합해서 1천여 칙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유독 대혜大慧 이후에만 화두가 있다고 하셨습니까? 만약 대혜의 화두가 잘못된 사람이 갖추어 놓은 것이라고 한다면 부처님과 조사님이 남겨 주신 선과 교의 언구言句들도 잘못된 사람이 갖추어 놓지 않은 것이 없을 겁니다. 그러니 조송趙宋 이후에 화두가 처음으로 시행되었다고 하는 주장은 진실로 한바탕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화두를 가지고 한결같이 덮어씌운다면 어찌하여 ‘구자狗子’에게 화두를 가르쳐 그로 하여금 악도惡道를 벗어나게 하지 아니하였는가?”라고 한 말씀은 어쩌면 그리도 거리낌 없이 하는 말이 크게 지나치단 말입니까?
감히 묻겠습니다. 요堯임금과 순舜임금과 주공周孔은 다 인仁과 의義를 가지고 한결같이 덮어씌웠으니

010_0640_b_01L
以說話門洞曉佛法圓善宗趣故爲
010_0640_b_02L解也看話門切心叅究親到本分家
010_0640_b_03L故爲行也上是自利也以是而令
010_0640_b_04L人解之行之則爲利他也故此說看二
010_0640_b_05L具足二利解行如人目足如鳥兩
010_0640_b_06L闕一不可也是知佛祖禪敎無非
010_0640_b_07L話頭也口說
心行
方能洞曉
010_0640_b_08L上妙理若但口說而心不行者非但自
010_0640_b_09L不行亦不信他人解行相應之一路涅
010_0640_b_10L槃門也若就顯處而言話頭畧有千
010_0640_b_11L七百則而悉出於三寶口頭也佛有百
010_0640_b_12L餘則所謂兠率話周行話悟道話分座
010_0640_b_13L話拈花話示趺話等也法亦有數百則
010_0640_b_14L華嚴有數十則法華圓覺金剛楞嚴等
010_0640_b_15L數十本經各有幾則也僧寶中維摩文
010_0640_b_16L殊及迦葉阿難等卅三諸祖下至南岳
010_0640_b_17L靑原馬祖百丈黃蘗臨濟雲門等五宗諸
010_0640_b_18L摠有千餘則也何獨大慧以後有話
010_0640_b_19L1)▼(言+頁)耶若大慧話頭爲誤人具則佛祖
010_0640_b_20L所留之禪敎言句無非誤人具也是知
010_0640_b_21L趙宋以後話頭始行者誠未滿一笑也
010_0640_b_22L且以話頭一以冒之何不敎狗子以話
010_0640_b_23L使之勇脫惡途耶者何其放言太過
010_0640_b_24L敢問堯舜周孔皆以仁義一以2)

010_0640_c_01L그렇다면 어찌하여 인의仁義를 가지고 새나 짐승을 교화하여 군자君子로 만들지 않았습니까? 지금 선방에서 좌선坐禪을 한다고 일컬어 말하는 사람들은 곧 말법 시대의 커다란 병폐라고 하였는데, 어찌 이를 가지고 그 허물을 조사님께 돌릴 수 있겠습니까? 비유하면 마치 이사李斯와 왕망王莽이 어찌 공자와 맹자의 화수禍首에서 나왔으리오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일 겁니다.
대혜 선사의 문하에서 화두를 가지고 깨달아 들어간 사람이 가장 많이 배출되었는데, 우리 동방의 나라에는 보조普照 국사와 진각眞覺 국사 등 활안活眼의 모든 선사들이 『법보단경法寶壇經』을 스승으로 삼았고, 『서장書狀』을 벗으로 삼아서 스스로 날마다 사용하는 차와 밥이라고 생각하고, 또한 널리 동쪽 국토를 교화하여 만세萬世의 모범模範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찌 자신의 총명한 지혜가 멀리 보조 등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음모陰謀하고 꾀어서 장자소張子韶135)를 데려갔다.”라고 말한 것은 합하 스스로의 광망狂妄한 삿된 견해로 성인의 경지를 헤아린 것인 듯합니다. 그 어찌 진리에 들어가신 큰 성인을 사기꾼이라고 음모하여 스스로 커다란 불구덩이로 들어가려 하십니까?
‘여불위呂不韋136)에게 비유한 일’에 대해서는 또한 과거 세상에 어찌 합하와 같은 삿된 견해를 가진 이가 없었겠습니까? 사견과 정견이 뿔처럼 서서 대립하는 일이 어느 세상에나 없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다.
한 번은 말씀하시기를 “사대부의 거만도 오히려 불가한데 하물며 산승山僧의 거만이겠는가?”라고 하셨는데, 그 말은 바로 이것이 내가 부르려고 한 노래를 사돈이 부른다는 구절입니다. 아상我相ㆍ인상人相ㆍ중생상衆生相ㆍ수자상壽者相은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있어서 매우 큰 병이니, 돌아보건대 이 본분납승本分衲僧137)에게도 역시 이런 병이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나의 조각조각 붉은 마음으로 숨길 것 없는 진실한 마음을 다 말하여 제 잘난 체하는 교만한 마음이라고 하신 말에 대하여 제 잘난 체하는 말은 제 잘난 체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다는 것을 절실하게 징험할 수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산속 촌놈에게는 다행히도 과거에 심어 놓았던 인연이 있어서 어릴 때부터 오늘날까지 오랜 세월 동안 부처님과 조사님의 공안公案으로써 날마다 활용하는 일로 삼아 잠시도 빠뜨리지 않고 다반사茶飯事로 여겨 왔기 때문에 비록 칠통漆桶을 타파하여 새로운 경지를 열거나 무생無生을 사무치게 깨닫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여래의 법희식法喜食과 조사의

010_0640_c_01L則何不以仁義化禽獸而爲君子乎
010_0640_c_02L如今禪室中稱曰坐禪者乃末法之大
010_0640_c_03L那可以此歸咎於祖師乎如李斯王
010_0640_c_04L莽之豈出於孔孟之禍首耶大慧門下
010_0640_c_05L以話頭悟入者最多而我東普照眞覺
010_0640_c_06L等活眼諸師以壇經爲師書狀爲友
010_0640_c_07L自以爲日用之茶飯亦以之普化東土
010_0640_c_08L爲萬世之模範也胡不思自己揔慧
010_0640_c_09L不及於普照等耶其以陰謀誘取張子
010_0640_c_10L韶者自是閤下之狂妄邪見取度聖境
010_0640_c_11L其何入理大聖陰謀欺人而自入大
010_0640_c_12L火坑耶其以比之呂不韋者且於前世
010_0640_c_13L豈無如閤下之邪見乎可知邪正角立
010_0640_c_14L無世無之也

010_0640_c_15L
一曰士夫慢尙不可況山僧慢云者
010_0640_c_16L是我歌査唱之節我相人相衆生相壽
010_0640_c_17L者相是佛法之大病顧此本分衲僧
010_0640_c_18L亦有此病耶以我片片赤心盡言不諱
010_0640_c_19L之誠心却謂貢高之慢心益驗我慢之
010_0640_c_20L出於我慢人之口也一言蔽之曰
010_0640_c_21L山野幸以夙種自少至今長以佛祖公
010_0640_c_22L案爲日用不暫闕之茶飯故雖未得打
010_0640_c_23L破漆桶徹悟無生而如來法喜食祖師
010_0640_c_24L「▼(言+頁)」疑「頭」{編}「胃」疑「貫」{編}

010_0641_a_01L선열반禪悅飯을 안목眼目에 싫증을 느낄 만큼 보고 골수骨髓까지 푹 적셔서 첨첨尖尖하고 가득가득 하나의 두피肚皮에 축적하였답니다.
그런 까닭에 지견知見을 원만하게 굴려 마음을 훈습熏習해서 삿되고 올바른 길머리에서 손바닥 속의 사물을 보는 것처럼 분명하게 살필 수 있었고, 발꿈치가 자리를 잡고 확실하게 안정할 수 있었으니, 마치 은으로 된 산 같고 무쇠로 된 벽과 같이 하기를 이미 60년 동안 오래도록 쌓아 왔습니다.
비록 천 길 노사나盧舍那가 끝없는 몸을 나타내어 위로는 색구경천色究竟天에 이르고, 또 큰 광명을 놓아 삼천세계를 통철洞徹하고, 억만 대중들도 역시 다시 이와 같이 하여 그들에게 빙 둘러싸여 법 설함을 본다 하더라도, 만약 그 설하는 법은 보통 날 들었던 것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 조금이나마 있다면 반드시 돌아보지 않아야 할 것인데, 어찌 하물며 귀를 기울이고 우러러보고 몸을 뒤치어 걸음을 옮겨서 다른 사람의 함정에 빠져든단 말입니까?
또 비람풍毘藍風이 불어 수미산須彌山을 거꾸러뜨리고 겁화劫火가 바다 밑바닥까지 통연洞燃한다 해도 역시 작은 부분도 변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합하閤下께서 팔을 휘저으면서 큰소리로 자칭 ‘큰 사자후師子吼’라고 한 것이 3천 리 밖에서 모기나 등에가 미미한 기질로 양양자득揚揚自得하면서 허공을 치며 어지럽고 시끄럽다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간절히 바라건대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나를 교만하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도가 있는 곳에 법도 여연如然할 것입니다. 도가 사대부에게 있으면 사대부가 소중할 것이요, 도가 산승에게 있으면 산승이 소중할 것입니다. 도 때문에 스스로 수승하다고 여기면서 천 길 높은 태산처럼 생각하는 것이 진실로 이와 같습니다. 허유許由138)가 영천頴川에서 귀를 씻은 그 이치가 진실로 그러할 것입니다.
또 지난날 보내온 몇 번의 공안公案이 모든 말과 모든 글귀마다 일일이 올바른 이량理量과는 부합하지 않고, 그런 까닭에 또한 성인의 말씀과 더불어 서로 어긋나지 않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혹 대권보살大權菩薩의 대자비大慈悲한 마음을 의심하여 순리를 거슬러 행동하면서 사람들의 안목眼目을 시험해 보는 것입니까? 아니면 혹 영리한 근기를 가진 중생들이 세속적 지혜인 말재주와 총명함에 장애가 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무간지옥에 들어갈 업보를 구족具足하려는 것입니까?
또한 서로 사귐이 얕은데 말을 깊이 있게 함은 바로 허물을 부르는 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까닭에 감히 여실如實하게 분별하여 설파하지 못하고, 공양을 받을 대상에 대한 모든 절차까지도 역시 우물우물 모호하게 군다는 비판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 2차에 걸쳐

010_0641_a_01L禪悅飯飫於眼目浹於骨髓尖尖滿
010_0641_a_02L滿築一肚皮故圓轉知見熏習心頭
010_0641_a_03L邪正路頭 昭然掌內脚跟牢定如銀
010_0641_a_04L山鐵壁者已積五六十載之久矣雖見
010_0641_a_05L千丈盧舍那現無邊際身上至色究竟
010_0641_a_06L又放大光明洞徹三千界億萬大
010_0641_a_07L亦復如是圍繞說法若其所說
010_0641_a_08L有不合於平日所聞則必不顧見何況
010_0641_a_09L側耶瞻仰轉身移步入他圈樻乎
010_0641_a_10L毘藍風吹倒須彌刼火洞燃海底亦無
010_0641_a_11L小分變去則今日閤下之揚臂大聲
010_0641_a_12L稱大獅吼者何以異於三千里外蚊蚋
010_0641_a_13L微質之揚揚自得而皷虛亂閙也哉
010_0641_a_14L勿以此爲我爲慢道之所在法爾如然
010_0641_a_15L道在士夫則士夫重道在山僧則山
010_0641_a_16L僧重也以道自勝而岳立千仞者固如
010_0641_a_17L是矣許由之洗耳頴川理固然也

010_0641_a_18L
又前日所來幾番公案言言句句一一
010_0641_a_19L不合於正理量故又與聖言量無不相
010_0641_a_20L或疑大權菩薩以大慈悲心倒行
010_0641_a_21L逆施而驗人眼目耶或恐利根衆生
010_0641_a_22L世智辯聦所障具足無間業報耶且交
010_0641_a_23L淺言深是招尤之道故不敢如實卞破
010_0641_a_24L而所供諸節亦未免含糊矣今觀二次

010_0641_b_01L보내온 편지의 가르침을 관찰해 보건대 곧 도리어 이놈을 두고 알아듣지 못하는 삿된 견해를 가진 중생들이라고 생각하여 더욱 간절히 물리치고 배척해서 한결같이 눈멀고 귀먹은 것 같은 그런 이들에게 열어 보여 깨닫게 하려고 그러신 듯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또한 큰 소리로 길이 탄식하면서 먼저 가신 조사님들로부터 전해 내려온 본분초료本分草料를 전부 다 흔들어 뒤집어서 여실하게 어리석은 소견을 바치려 하지만, 단지 한스러운 일은 기연機緣을 만나지 못해서 천 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좋은 소식을 잃고 말았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후.
김 참판께 답함2(又)
보내온 가르침에 이르기를 “오늘날의 일은 오직 직절直截(곧바로 헤아려 판단함)로 말했어야 하며, 위곡委曲하거나 완전宛轉하게 하는 것은 필요치 않으니, 아무리 저촉되고 거슬리는 점이 있다 하더라도 성을 내어 서로 격동하지 말고 평정심으로 천천히 연구한다면 얼마나 다행스럽겠소.”라고 하였는데, 선생께서도 역시 이와 같이 관찰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다행히도 자세한 가르침을 주시면서 “삼가 한 묶음의 향으로써 맑은 공양을 갖추어…….”라 하시니, 대개 이놈의 견해가 비록 보잘것없으나(蔑裂) 다행히도 숙세宿世에 지은 선善한 업으로 인하여 부처님과 조사님의 어구語句를 섭렵涉獵하였기에 삿된 견해의 길머리를 대충은 알고 있답니다. 그러나 항상 한스러운 일은 소리를 감상할 줄 아는 아름다운 총명을 지닌 사람을 만나지 못한 것이랍니다.
보내주신 편지의 뜻은 천 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정말로 기쁜 일이기 때문에 춤을 추며 기뻐함을 이길 수 없습니다. 질문하신 모든 절목節目은 모두 다 부처님과 조사님의 올바른 뜻을 위곡되게 분석分析하셨기에 숨김없이 다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혹 지극한 진리를 연구하고 궁리할 때를 당하여 단지 온 힘을 기울여서 진리를 명백하게 밝혀 보려고 하지만 간혹 무엄하게 말을 내뱉은 곳이 있을 수도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어리석음에서 발생된 것이지 애당초 남과 내가 승부를 내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어찌 합하의 뜻이 이와 같은 노여운 마음을 품고 근엄하게 문책하려는 의도였겠습니까? 지금 이와 같이 말씀하심은 방棒과 할喝을 비교하여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이 반척反擲하시니, 과연 교리에만 의거하여 방과 할을 한 것이라면, 다만 다시 어떤 것들을 들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식양息壤139)이 저기에 있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증득하지도 못했으면서 증득했다고 말하는 것은 곧 최상의 교법과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서 이미 얻은 것처럼 교만하게 우쭐대는 사람(增上慢人)이다. 1천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시더라도 참회가 통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다만 관찰해 보건대 남을 가르치지는 않고 아집我執만

010_0641_b_01L來諭則反以此漢爲頑皮韃邪見衆生
010_0641_b_02L而益切斥斥一似開曉盲聾者然故
010_0641_b_03L亦大聲長吁以先師傳來之本分草料
010_0641_b_04L盡底掀翻如實貢愚而只恨機緣不偶
010_0641_b_05L失此千載一遇之好消息也

010_0641_b_06L
010_0641_b_07L
010_0641_b_08L
來敎曰今日之事唯當直截說去
010_0641_b_09L要委曲宛轉雖有所拂逆毋以嗔恚相
010_0641_b_10L平心徐究幸甚師亦作如是觀
010_0641_b_11L何如何幸有以詳敎之謹以一束炷香
010_0641_b_12L以備淸供云云盖此漢見雖蔑裂
010_0641_b_13L以宿善涉獵佛祖語句觕知邪見路頭
010_0641_b_14L常恨未遇賞音之佳聦矣來意可喜
010_0641_b_15L載一遇故不勝抃躍所問諸節皆以
010_0641_b_16L佛祖正意委曲分析盡言不諱或當
010_0641_b_17L於硏窮至理之際但務盡理明白而間
010_0641_b_18L有放言無嚴處此乃眞誠貢愚之所發
010_0641_b_19L初非人我勝負之心也豈意閤下有此
010_0641_b_20L藏怒之嚴譴今此放言較之棒喝
010_0641_b_21L啻歇后而如是反擲果能依敎棒喝
010_0641_b_22L則第未知更爲何等擧乎息壤在彼
010_0641_b_23L不愧耶佛言未證謂證是增上慢人
010_0641_b_24L千佛出世不通懺悔第觀未敎我執

010_0641_c_01L견고하니 구박범부具縛凡夫가 확실합니다.
삿된 소견을 지닌 외도外道인데 자칭 대권보살大權菩薩이라 하고, 또한 “「등왕각 서문」(왕발 지음)과 「적벽부」(소식이 지음)로 어린아이들과 떡이나 다툼질하고 누워서 아이들이 장난질하는 것이나 구경한다.”라는 등의 말을 하시니, 교만의 산 높이가 수미산須彌山보다 더 높습니다. 눈앞에 아무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교만하여 스스로 크게 사자후를 하면서 성현을 나무라고 비방하며 경전의 가르침을 헐뜯고 배척하며, 스스로 사해四海 안에 오직 나 혼자만이 깨어 있다고 하니, 그 어느 곳에서 다시 이와 같이 자신보다 뛰어난 자에 대해 오히려 자신이 우월하다는 생각을 가진 교만(慢過慢)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나는 마땅히 붓대를 꺾어 버리고 담론을 나누고 싶지 않습니다.
문득 이르기를 “백파白坡가 나에게 절복折伏 당할 것이다.”라고 하시니, 감히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겠습니다. 삿된 소견이 더욱 치성하여 모든 사람들을 속여 현혹하게 하되 못할 짓이 없을 정도로 방자하니, 이야말로 바로 눈먼 한 사람이 많은 장님을 인도하여 불구덩이로 끌고 들어가는 경우라 하겠습니다. 그런 까닭에 다시 갈등선葛藤禪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다만 부처님과 조사님이 전해 주신 공空과 유有를 가지고 구멍 없는 망치를 빙빙 돌리면서 지금까지 전해 오는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의 삿된 견해를 타파打破하고 마구니의 소굴을 깨끗이 소탕하여 부처님의 은혜를 갚아야 하겠습니다.
부디 머리를 흔들고 혀를 내두르지 마시고 평정심을 가지고 천천히 연구하여 빛을 되돌려 돌이켜 비추어 본다면 과연 허물을 뉘우치고 착한 데로 옮아가게 될 것이니, 그러면 역량力量이 있는 대장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른 견해를 가진 사람을 만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니 때가 오거든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부처님 큰 성인께서는 삼량三量140)에 대하여 설하셨습니다. 첫째는 현량現量이니 이는 깨달음(證)입니다. 이 현량에는 진실이 있고 비슷한 게 있나니, 비유하여 말하자면 소나무를 보고 소나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진실한 현량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견해라고 말하며, 소나무를 보고는 회나무라고 말하면 이는 비슷한 현량이라 하는데, 그러므로 삿된 견해라고 말합니다.
두 번째는 비량比量이니 이해함(解)입니다. 이 비량에도 진실이 있고 비슷한 게 있나니, 예를 들어 말하면 담 너머에 보이는 뿔을 보면 문득 그것이 소인 줄 아는 것으로 이는 진실한 비량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견해가 되며, 뿔을 보고 죽순이라고 하면 이는 비슷한 비량이니 삿된 견해라고 말합니다.
세 번째는 성언량聖言量이니 수행하는 사람이 비록 깨달음현량現量과 이해함비량比量이 있다 하더라도 스스로 이게 삿된 것인지 이게 바른 것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부처님의 말씀으로써 서로 비교하여 비추어 보아 부처님의 말씀과 합치하면 바른 깨달음이요 바른 이해이며, 부처님의 말씀에 위배되면 삿된 깨달음이요

010_0641_c_01L堅固的是具縛凡夫邪見外道而自稱
010_0641_c_02L大權菩薩又滕序赤賦小兒爭餠
010_0641_c_03L看兒戱等說慢山之高高於須彌
010_0641_c_04L下無人自作大獅吼誚謗聖賢毁斥
010_0641_c_05L經敎自以爲四海之內唯我獨惺
010_0641_c_06L知何處更有如是之慢過慢哉我當絕
010_0641_c_07L不欲接論却謂白坡爲我所折伏
010_0641_c_08L不敢出一言邪見益熾誑惑諸人
010_0641_c_09L所不至此乃一盲引衆盲入火坑故
010_0641_c_10L更入葛藤禪直以佛祖所傳之空有
010_0641_c_11L轉無孔鎚打破所來斷常邪見而蕩滌
010_0641_c_12L魔穴以報佛恩去也切勿掉頭撓舌
010_0641_c_13L心徐究回光返照果能悔過遷善
010_0641_c_14L謂有力量大丈夫也正見難逢時乎不
010_0641_c_15L可失也

010_0641_c_16L
吾佛大聖說有三量一現量者證也
010_0641_c_17L而有眞有似如見松爲松是眞現量
010_0641_c_18L故爲正見也見松爲檜是似現量
010_0641_c_19L爲邪見也二比量者解也而亦有眞
010_0641_c_20L如隔墻見角便知是牛是眞比量
010_0641_c_21L故爲正解也見角爲笋是似比量
010_0641_c_22L爲邪解也三聖言量者行人雖有證

010_0641_c_23L
自未知是邪是正故更以佛說相
010_0641_c_24L合佛則爲正證正解違佛則爲邪證

010_0642_a_01L삿된 이해입니다. 이것은 곧 삼세 모든 부처님의 말씀으로 영원히 바뀌지 않을 바른 진리입니다.
내가 말씀드린 진공眞空과 묘유妙有, 그리고 묘유 가운데 살활殺活과 기용機用은 바로 부처님과 조사님의 언교言敎 중에 대통강령大統綱領이기 때문에 모든 말과 모든 글귀마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더불어 서로 타합打合하지 않음이 없어서 마치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 같고, 마치 우유를 물에 넣은 것과 같습니다. 그런 까닭에 뿔을 보고는 소인 줄 아는 진실한 비량比量과 같은 것입니다.
비록 소를 본 것은 아니지만 틀림없이 소를 얻을 기약이 있을 것이니, 아무리 현량의 직접적인 깨달음은 얻지 못했다 하더라도 이미 참답고 올바름을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곧 자성을 보아진공眞空 부처를 성취할 것묘유妙有임은 단정코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어르신께서 말하기를 “진공과 묘유와 살활과 기용을 하나하나 배척하고 깨뜨려 버리겠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모든 말과 모든 글귀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음이 없나니, 비유하면 마치 물이 불을 상극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바로 소나무를 보고 회나무라고 말하고 뿔을 보고 죽순이라고 말하는 비슷한 비량이니, 틀림없이 소나무를 보거나 소를 볼 기회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백 천 겁을 공부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자성을 보아 도를 얻는 때는 없을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어르신께서는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을 주장하는 삿된 견해를 지닌 분이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실이 이와 같은데 반대로 참답고 올바른 믿음과 이해를 지닌 이들로서 삿된 소견을 지닌 외도가 되어 소경 방망이(瞎棒)와 눈먼 할(盲喝)을 함부로 가하는 처지이니, 어찌 그대는 삿된 것이 올바른 것을 범할 수 없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까? 정말로 이른바 방망이를 휘둘러 달을 치려고 하는 격이요 대나무쪽을 던져서 점을 치려고 하는 것이니, 이 어찌 서로 미칠 수 있겠습니까. 다만 하늘을 우러러 큰 웃음을 웃을 따름입니다.
첫 번째로 진공과 묘유는 바로 부처님의 말씀이고, 한漢나라 『주역周易』과 송宋나라 『주역』은 바로 유교의 책입니다. 치우친 견해와 국한적인 이해를 가진 모든 유생들이 하필이면 불교와 도교의 책을 가져다가 복희伏羲와 문왕文王과 공자孔子의 정경正經에 회동會同시키고 있습니다. 옛날부터 오늘날까지는 한 번도 비교해서 분별한 일이 없으니 이치가 진실로 그러합니다.
그러나 천하에는 두 도가 없고 성인은 두 마음이 없나니, 세 종교의 성인들은 전부 일관一貫됩니다. 유교에서는 “적막한 가운데 움직이지 않다가도형이상(形上) 일단 감응하게 되면 마침내 이 세상의 모든 일에 통하게 되는 것이다형이하(形下).”라고 말했고, 도교에서는 “아무 작용함이 없으되형이상 작용하지 않음도 없다형이하.”라고 말하였으며, 불교에서는 “항상 고요하면서도형이상 항상 비추고 있다형이하.”라고 말했습니다.
대개

010_0642_a_01L邪解也此乃三世諸佛不易之正理也
010_0642_a_02L我所說眞空妙有及妙有中殺活機用
010_0642_a_03L是佛祖言敎中大統綱領故言言句句
010_0642_a_04L能與佛敎無不打合如出一口如乳
010_0642_a_05L投水故如見角知牛之眞比量也雖未
010_0642_a_06L見牛而必有得牛之期也雖未得現量
010_0642_a_07L親證旣已信解眞正則見性
成佛

010_0642_a_08L斷無疑矣左右所說眞空妙有殺活機
010_0642_a_09L一一斥破故言言句句無不違佛
010_0642_a_10L如水火相克此是見松爲檜見角爲笋
010_0642_a_11L之似現量似比量也必無見松見牛之
010_0642_a_12L期也雖做去百千刼必無見性得道之
010_0642_a_13L時也是故左右必是斷常邪見之外道
010_0642_a_14L其實如是而反以眞正信解者
010_0642_a_15L邪見外道橫加瞎棒盲喝豈不聞邪不
010_0642_a_16L犯正乎可謂掉棒打月接竹點天
010_0642_a_17L得相及但仰天大笑而已

010_0642_a_18L
一眞空妙有是佛說也漢宋諸易
010_0642_a_19L儒書也偏見局解之諸儒何必以佛老
010_0642_a_20L之書會同羲文周孔之正經也古來
010_0642_a_21L俱無對卞理固然也然天下無二道
010_0642_a_22L聖人無兩心三敎聖人都是一貫也
010_0642_a_23L儒云寂然不動
感而遂通
老云無
010_0642_a_24L
而無不爲
佛云常寂
常照

010_0642_b_01L불교의 항상 고요함이란 도교의 함이 없음과 같은 뜻이고 유교의 적연寂然함과 같은 뜻이니, 이는 다 진공을 가리킨 것입니다. 또 불교의 항상 비춤은 도교의 작용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과 같은 뜻이고 유교의 감응하면 통한다고 하는 것과 같은 뜻이니, 이는 다 묘유를 가리킨 것입니다.
곧 이 진공과 묘유는 원융圓融하여 둘이 없는 진리지만, 세 종교에서 정립한 이름은 같지 않습니다. 유교에서는 ‘일태극一太極’이라고 말하였고, 도교에서는 ‘천하모天下母’라고 말하였으며, 불교에서는 여러 가지 이름을 붙이고 있는데, 선종에서는 ‘일물一物ㆍ일착자一着子ㆍ일원상一圓相ㆍ본래면목本來面目ㆍ본지풍광本地風光ㆍ본분가향本分家鄕ㆍ향상일규向上一竅’라고 말하였고, 교종에서는 ‘일법계一法界ㆍ일원각一圓覺ㆍ일불승一佛乘ㆍ일심一心ㆍ불경계佛境界’라고 하였습니다.
이름은 비록 뜻을 따라 천 가지로 다르지만, 법의 본체만은 일관一貫을 벗어나지 않나니, 세 성인이 다시 출현한다 하더라도 틀림없이 수긍하실 것입니다. 또한 어르신 같은 박지범부縛地凡夫들도 역시 부사의不思議한 부처님의 경계를 밟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무슨 까닭에 산승山僧이 복희와 문왕과 주공이 지은 책에 대하여 역시 감히 우러러보고 찬탄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범부와 성인이 서로 가로막아서 소통되지 못하는 까닭에 반드시 범부가 변화하여 성인을 이루는 분수는 없게 되는 것입니다. 세 분 성인께서 가르침을 시설하심에 부질없이 힘만 소비할 뿐 아무 이익이 없을 것이니, 어찌 대단한 사견邪見이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구원도 역시 이와 같을 것이나, 다만 이것은 성현聖賢의 도가 똑같음을 우러러 찬탄하는 것이니, 바로 일관一貫일 뿐입니다. 어찌 일찍이 저 정자와 주자의 도에 대하여 시시비비를 가려 비평하겠습니까?
또한 자신은 옳고 다른 사람은 그르다고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찌 차마 부처님의 진공과 묘유와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으로써 닭이 울고 개가 짖는 금수禽獸의 소리라고 말하겠습니까? 꺼려하지 않고 다 말함이 어쩌면 그리도 절박하답니까? 무엄無嚴하면서도 기탄忌憚할 게 없는 게 다시 이와 같답니까? 부처님을 비방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비방하는 것이 또한 이보다 더 심함이 있겠습니까? 하늘도 두렵지 않고 땅도 두렵지 않아서 그렇게 제멋대로 날뜀이 짝이 없는 겁니까? 바로 어르신께서 스스로 상고해 보면 염라대왕의 무쇠방망이를 어느 길에서 어떻게 벗어나려 하십니까? 그들을 위하여 측은해 하고 슬퍼서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두 번째로 문수보살의 ‘약이 되지 않는 것(不是藥)’이란

010_0642_b_01L佛之常寂老之無爲儒之寂然
010_0642_b_02L指眞空也佛之常照老之無不爲
010_0642_b_03L之感通皆指妙有也即此眞空妙有
010_0642_b_04L圓融無二處三敎立名不同儒云一太
010_0642_b_05L老云天下母佛有多名禪云一物
010_0642_b_06L一着子一圓相本來面目本地風光
010_0642_b_07L本分家鄕向上一竅敎云一法界
010_0642_b_08L圓覺一佛乘一心佛境界也名雖隨
010_0642_b_09L義千差法體不出一貫三聖復出
010_0642_b_10L必首肯也且左右以縛地凡夫亦能無
010_0642_b_11L難蹴踏於不思議之佛境界也何以山
010_0642_b_12L僧於羲文周孔之書亦不敢瞻仰讃嘆
010_0642_b_13L然則凡聖相隔不通故必無轉凡成
010_0642_b_14L聖之分也三聖設敎徒勞無益也
010_0642_b_15L非大邪見耶程朱之援亦復如是
010_0642_b_16L是仰嘆聖賢之道同是一貫而已
010_0642_b_17L甞雌黃其程朱之道耶且自是他非
010_0642_b_18L不是異事而何忍以佛之眞空妙有
010_0642_b_19L常樂我淨謂之雞鳴犬吠之禽獸聲耶
010_0642_b_20L放言不諱何其迫切乎無嚴無忌憚
010_0642_b_21L更有如是者乎謗佛謗法又有甚於此
010_0642_b_22L者乎不怕天不怕地跳浪無雙正是
010_0642_b_23L左右之自考則閻羅鐵棒何路何逃
010_0642_b_24L爲之惻▼(忄+達) 不能已已二文殊之不是藥

010_0642_c_01L그 뜻이 진공을 가리킨 말이니, 진제眞諦와 속제俗諦와 삼제三諦141)의 울타리가 전혀 없다면, 드릴 만한 부분이 없는 까닭에 선재善財 동자의 대답 가운데 이르기를 “산중엔 약 아닌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르신께서는 무슨 까닭으로 ‘약 아닌 것이 없다.’는 말을 가지고 3제 중에 제일의제第一義諦라고 말하였습니까?
‘약 아닌 것이 없다.’는 말이 과연 제일의제(중도제)라고 하면, 달마達摩는 무슨 이유로 이를 깨뜨려 성제聖諦란 없는 것이라고 했겠습니까? 마땅히 알아야만 할 것입니다. ‘약 아닌 것이 없다.’는 말은 바로 삼제 외에 위로 향해 올라가는 진제와 공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깊은 것을 얕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문수보살이 어찌 눈썹을 찌푸리지 않겠습니까? ‘이 약’이란 바로 묘유妙有이기 때문에 비로소 죽이고 살리는 면목이 갖춰져 있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문수보살은 ‘시약是藥’이라는 말을 가지고 대중들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이 약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사람을 살리기도 하리라.”라고 하였으니, 곧 이 묘유 가운데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것이 비로소 진제죽임(殺)와 속제살림(活)가 되기 때문에 아뢰야식(識)과 반야(智)ㆍ범부(凡)와 성인(聖)ㆍ기틀(機)과 작용(用) 등 대대對待의 법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르신께서는 본디 선지禪旨에 어둡기 때문에 ‘약 아닌 것이 없다.’는 말을 가지고 지목하여 진제라고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식識(아뢰야식)을 전환시켜 지智(반야)를 이루고, 범부를 전환하여 성인을 이룬다.”라고 하니, 다만 진제 가운데 어찌 아뢰야식이나 지혜가 있으며 범부와 성인이 있을 것이며, 또 더군다나 진제와 속제를 초월한 진공眞空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약 아닌 것이 없다.’는 말 가운데에도 역시 아뢰야식과 지혜, 범부와 성인이 있다는 것입니까? 이를 어찌 광망狂妄한 견해가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또한 ‘약 아닌 것이 없다.’는 말에는 이름과 모습이 다 없어진 것을 말하기 때문에 한순간의 침묵은 걱정이 많다는 것입니다. 어찌 아뢰야식이나 지혜라는 것 따위가 있겠습니까? 이런 까닭에 ‘약 아닌 것이 없다.’는 말은 바로 진공을 말한 것이니, 그런 까닭에 한순간의 침묵은 걱정이 많다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약’이라는 말은 바로 묘유妙有이기 때문에 일만 게송은 근심이 적다는 뜻입니다. 문수보살이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이 말에 대해서는 틀림없이 머리를 끄덕일 것입니다.
아뢰아식과 지혜(반야), 범부와 성인이 ‘약 아닌 것이 없다.’는 말은 캐어 가지고 온다는 글귀에 해당합니다. 이미 밝고 밝으면서도 분명한 말씀이라는 것을 밝혔건만, 진공과 묘유의 선지禪旨에 대하여 완전히 깜깜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엉터리로 얼버무리는 것입니다. 저것이 이와 같은데도 스스로 선적인 안목을 지닌 대권보살大權菩薩이라고 말하고 다니십니까? 어찌하여 보살님들께 근심을 끼쳐 지옥문 앞에서 눈물을 거두지 못하게 하십니까?

010_0642_c_01L意指眞空全無眞俗三諦之圈樻
010_0642_c_02L則無可呈似分故善財解答云山中無
010_0642_c_03L不是藥者左右何以不是藥者爲三諦
010_0642_c_04L中第一義諦耶不是藥者果是第一義
010_0642_c_05L則達摩何以破云無聖諦耶當知不
010_0642_c_06L是藥者是三諦外向上眞空也今以深
010_0642_c_07L爲淺文殊豈不皺眉乎是藥者是妙
010_0642_c_08L有故方有殺活面目是以文殊以此
010_0642_c_09L是藥示衆云此藥亦能殺人亦能活
010_0642_c_10L即此妙有中殺活方爲眞
010_0642_c_11L有識智凡聖機用等對待之法也左右
010_0642_c_12L素昧禪旨故以不是藥者目爲眞諦
010_0642_c_13L又云轉識成智轉凡成聖但眞諦中
010_0642_c_14L何有識智凡聖又況超眞俗之眞空
010_0642_c_15L是藥中亦有識智凡聖乎此非狂妄見
010_0642_c_16L解耶且不是藥者名相都泯故一默
010_0642_c_17L患多何有識智等是故當知不是藥
010_0642_c_18L是眞空故一默患多是藥者是妙
010_0642_c_19L有故萬偈患小也文殊復出亦必點
010_0642_c_20L頭也識智凡聖於不是藥者採來之
010_0642_c_21L已明明明的的之說全昧眞空妙有
010_0642_c_22L之禪旨故如是胡亂塗糊去也其如是
010_0642_c_23L而自稱有禪眼大權菩薩耶其何貽憂
010_0642_c_24L於菩薩地獄門前淚不收耶

010_0643_a_01L세 번째는 내가 진공眞空에는 본래 묘유妙有를 갖추고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묘유 가운데에는 어느 곳에서나 살殺과 활活이 있으니, 이것이 곧 진공이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면목이라고 말한 것은 곧 1천 성인이 다시 태어나도 바꿀 수 없는 대통강령大統綱領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물질이 곧 공이다(色卽是空)’라고 한 것은 바로 완전한 묘유의 진공이기 때문에 진공 가운데에는 이미 묘유를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공이 곧 물질이다(空卽是色)’라고 한 것이 바로 진공 속의 묘유이기 때문에 묘유 가운데 이미 진공을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卽’ 자의 의미가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진공 속에는 살殺이 없다 해도 되나니 원래 이것은 진공이기 때문이요, 살과 활이 있다고 해도 되나니 본래부터 묘유를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묘유 가운데 살과 활이 있다고 해도 되나니 원래부터 이것은 묘유였기 때문이요, 살과 활이 없다고 해도 되나니 역시 진공을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공空이란 말인가, 유有란 말인가? 또한 공이기도 하고 유이기도 하다는 말인가? 공도 아니고 유도 아니란 말인가? 마치 신통변화神通變化와 같으니 정녕 알 수가 없습니다. 정문頂門의 바른 눈(正眼)을 갖추지 못했으니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아서 가로와 세로를 아울러서 분별해야 할 것입니다.
분별하기 어렵기 때문에 교敎에서는 부사의不思議한 법계라고 말하고, 선禪에서는 구멍 없는 무쇠방망이(無孔鐵鎚)라고 말하며, 또한 무진장無盡藏이라고도 말합니다. 어르신처럼 스스로의 안목眼目이 없고 단지 글을 따라 그 지취를 결정하는 분으로서야 원만하게 굴려 걸림이 없는 불가사의한 경계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유심思惟心을 가지고 여래의 원만한 깨달음의 경계를 헤아리고자 한다면, 그것은 마치 반딧불을 가져다가 수미산을 태우려고 하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으니, 만약 자성自性 가운데에 살과 활이 없다면, 이것은 단지 공일 뿐이기 때문에 단견斷見을 주장하는 외도外道가 될 것이요, 또 살과 활이 자성 밖에 있다고 하면, 이것은 단지 유有이기 때문에 상견常見을 주장하는 외도가 될 뿐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단견과 상견 두 가지의 견해는 예순두 가지 소견의 근본이 되기 때문에 일체의 마군과 외도들은 전부 다 단견이니 상견이니 하는 구덩이로부터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고명高明한 견식見識을 지니신 어르신께서 어찌하여 이 두 구덩이에 빠져서 영원히 그 구덩이를 벗어날 기약이 없음을 감내하려고 하십니까? 정말로 애석한 일입니다.

010_0643_a_01L
三我以眞空本具妙有故妙有中無方
010_0643_a_02L殺活即是眞空本具之面目云者乃千
010_0643_a_03L聖不易之大統綱領也佛云色即是空
010_0643_a_04L是全妙有之眞空故眞空中已具妙
010_0643_a_05L有也空即是色者是即眞空之妙有故
010_0643_a_06L妙有中已具眞空也即字之義不其然
010_0643_a_07L然則眞空中無殺亦得以元是眞空
010_0643_a_08L有殺活亦得以本具妙有故又妙
010_0643_a_09L有中有殺活亦得以元是妙有故無殺
010_0643_a_10L活亦得以亦具眞空故也然則空耶
010_0643_a_11L有耶亦空亦有耶非空非有耶如同
010_0643_a_12L神變定當不得未具頂門正眼未可
010_0643_a_13L以易言也如是縱橫並別也難分故
010_0643_a_14L敎名不思議法界禪名無孔鐵鎚亦名
010_0643_a_15L無盡藏也如左右之自無眼目而但隨
010_0643_a_16L文定旨者安知其圓轉無碍不思議之
010_0643_a_17L境界也故佛云以思惟心測度如來
010_0643_a_18L圓覺境界如取螢火燒須彌山若自性
010_0643_a_19L中無殺活則是但空故爲斷見外道
010_0643_a_20L又殺活在自性外則是但有故爲常見
010_0643_a_21L外道也即此斷常二見爲六十二見之
010_0643_a_22L本故一切魔外都出於此斷常坑也
010_0643_a_23L今以左右之高明見識何忍入此二坑
010_0643_a_24L而永無出期耶可不惜㢤

010_0643_b_01L네 번째는 염화拈華는 곧 현중현玄中玄이니 언설言說이 없는 모습을 지시한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가섭迦葉만이 단지 얼굴을 활짝 펴고 미소를 지었으니, 이는 상근기가 격외선格外禪으로 깨달아 들어간 것입니다. 경문經文은 바로 구중현句中玄이니 언설言說이 있는 모습을 지시指示한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아난阿難과 대중은 경문을 듣고 비로소 깨달았으니, 이는 중근기와 하근기가 의리선義理禪으로 깨달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세 가지 근기가 깨달은 법이 바로 똑같은 일대사一大事의 부처님의 지견知見이기 때문에 정녕 다 같아서 분별이 없습니다. 다만 근기의 영리함과 둔함을 따라서 의리선과 격외선으로 나눠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가永嘉가 말하기를 “말 없을 때 말하고 말할 때 말 없는 것이 바로 여래의 진실한 모습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진실한 모습이 아니라면 말을 하고 침묵하는 것이 진실입니까? 말하고 침묵하는 두 때가 바로 진실한 모습이라면, 어찌 가섭이 깨달은 곳 외에 따로 대중들이 깨닫는 곳이 있다는 말입니까? 만약 말하고 침묵하는 것이 각각 다르다고 하면, 무슨 까닭에 법을 설하지 않고 침묵하는 것이 바로 법을 설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까? 하는 말마다 어쩌면 그리도 오래도록 꿈속에서 헤매면서 깨어나지 못합니까?
다섯 번째는 내가 앞에서 선禪과 교敎가 두 가지가 된다고 한 것을 가지고 선과 교의 사체事體가 각각 다른 것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대개 부처님의 가르침은 만대萬代에 의지해야 할 것이기 때문에 하나하나 세 가지 근기의 사람들이 깨달아야 할 삼승법三乘法을 자세하게 보여 주었으며, 선문禪門의 의취意趣는 일시의 도탈度脫에 있었기 때문에 단도직입적으로 최상의 근기에게 최상승最上乘의 법을 지시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삼승법을 설하셨음에도 근기를 거두기에는 극진하지 못한 점이 있었기 때문에 조사님들께서 특별히 상상上上의 근기를 지닌 중생을 위하여 최상승의 법을 가지고 단독적으로 대하였던 것입니다.
교리는 곧 근기가 영리한지 아둔한지에 따라 그 의리義理를 십분 만족시키기 때문에 사구死句라고 하며, 참선은 바로 의리를 멀리 벗어나서 건립하고 소탕掃蕩하여 걸림 없이 자재自在하기 때문에 활구活句라고 한 것입니다. 이를 가지고 중생들로 하여금 선과 교는 사구와 활구가 같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한 이유입니다.
그런데 지금 선과 교가 하나라고 말한 것은 중생들로 하여금 선과 교의 말함과 침묵함이 같지 않다고 차별하여 고집하는 것을 깨뜨리게 하기 위한 때문입니다. 말함과 침묵함이 비록 다르지만 깨달아야 할 대상 법은 똑같이 일대사一大事이기 때문에 문득 선과 교가 하나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선과 교는 둘이 되어야만 하고, 또한

010_0643_b_01L
四拈華是玄中玄指示無言說相
010_0643_b_02L迦葉但破顏微笑是上根格外禪悟入
010_0643_b_03L經文是句中玄指示有言說相
010_0643_b_04L阿難大衆聞經方悟是中下根義理禪
010_0643_b_05L悟入也若其三根所悟之法同是一大
010_0643_b_06L事佛知見故正同無別但隨根利鈍
010_0643_b_07L分爲義理禪格外禪也故永嘉云默時
010_0643_b_08L說說時默即是如來眞實相此非實相
010_0643_b_09L爲說爲默耶說默二時是眞實相
010_0643_b_10L豈迦葉悟處外別有大衆悟處耶若說
010_0643_b_11L默各別則何云即非說法默是名說法
010_0643_b_12L說何其久夢而不覺耶

010_0643_b_13L
五我於前者以禪敎爲二者以禪敎事
010_0643_b_14L體各別故葢佛敎爲萬代依憑故一一
010_0643_b_15L委示三根所悟之三乘法禪門意在一
010_0643_b_16L時度脫故直截指示上上根最上乘也
010_0643_b_17L以佛說三乘收機未盡故祖師別爲上
010_0643_b_18L上根單明最上乘也以敎是隨根利鈍
010_0643_b_19L義理十成故爲死句禪是逈脫義理
010_0643_b_20L建立掃蕩無碍自在故爲活句也
010_0643_b_21L是令知禪敎死活不同故今以禪敎爲
010_0643_b_22L一者令破別執禪敎語默不同故以語
010_0643_b_23L默雖殊所悟之法同是一大事故
010_0643_b_24L以禪敎爲一也然則禪敎爲二且納隨

010_0643_c_01L근기에 따라 각각 이해하여 받아들이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선과 교가 하나라고 말한 것은 단지 부처님의 뜻이 원융圓融함을 근거로 한 것이기 때문에 이는 곧 천 분 성인이 출현한다 해도 바뀌지 않을 대도大道입니다.
어르신께서는 자어상위自語相違142)하시니, 쇠붙이는 모두 동일한데도 어떻게 백 천 가지 그릇을 만들 수 있겠는가 하면서 광망하게도 큰 거짓말을 하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어찌 보지도 못하셨습니까? 바다를 본 사람에게는 물을 말하기 어렵고, 성인의 도에 노닌 사람에게는 도를 말하기 어렵다고 한 말을 말입니다.
여섯 번째는 경문을 번역함에 있어서 와전된 부분이 있는 것에 대해서는 옳지 않다고 말하지 않으면서, 내가 피력하는 소견에 대해서만 역시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니, 대개 다섯 천축국天竺國의 문자가 비록 같다고는 하지만, 말과 소리가 각각 다릅니다. 비유해 말하면 마치 중화中華(중국)와 초하楚夏의 다름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경經이라는 한 글자를 가지고도 혹은 수투로修妬嚕라 말하기도 하고, 혹은 소달람嗉怛囕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경을 번역하는 사람은 그 경문이 각각 다섯 천축국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거기에서 온 범본梵本이 혹은 같기도 하고 혹은 다르기도 합니다. 그에 따라 당唐나라 말로 번역한 경전도 역시 같기도 하고 혹은 다르기도 하나니, 그것은 이치로 보아 필연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경의 뜻은 일관一貫으로 귀결됩니다.
가령 예를 들어 말하면 오백 비구가 각각 몸을 받은 원인(身因)에 대하여 설하자 부처님께서는 올바르지 않은 진리가 없다고 인정하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경을 번역하는 번역사가 글은 각각 다르지만 제각기 그 뜻은 올발라서 부처님의 뜻과 거의 같으니, 부처님께서 비록 다시 출현하신다고 해도 틀림없이 올바르지 않은 진리가 없다고 인정하리라는 것을 알아야만 할 것입니다.
『반야심경』을 다섯 가지 이름으로 번역한 것도 역시 이와 같아서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구슬을 찾을 뿐일 따름입니다. 그럼에도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께서 말씀하신 것을 감히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경에 이르기를 “관자재보살이 깊이 반야를 실천하실 때에 오온五蘊은 다 공空한 것임을 비추어 보고 일체의 고액苦厄을 벗어났다.”라고 한 그 말의 형세를 관찰해 보면 이 말은 부처님의 말씀임에 틀림없나니, 관세음보살이 티끌을 여의고 자성을 회복한 반야로서 모습을 여읜 수행입니다. 무슨 까닭으로 관세음보살께서 그런 수행에 대하여 스스로 말씀하셨겠습니까?
또한 부처님께서 설하신 반구半句를 번역하여 백십구百十句라고 한 것을 가지고 어찌 그리도 배척한단 말입니까? 기령 예를 들어 말하자면 『법화경法華經』에서 부루나가 범본梵本을 기록함에 있어서 마땅히 “하늘이 사람을 보고 사람이 하늘을 본다.”라고 한 것을 구마라집鳩摩羅什은 윤문潤文하여 “사람과 하늘이 교접交接143)하여 서로 볼 수 있었다.”라고 한 경우와 같은 것인데 말입니다.
다만

010_0643_c_01L機各解故禪敎爲一直據佛意圓融故
010_0643_c_02L此乃千聖不易之大道也左右以爲自
010_0643_c_03L語相違者何以異於金是一也而何爲
010_0643_c_04L百千器之狂大妄說也豈不見乎觀於
010_0643_c_05L海者難語水遊於聖人之門者難語
010_0643_c_06L六經文飜譯之有訛不道不是
010_0643_c_07L於我所見亦有不然者葢以五天竺文
010_0643_c_08L字雖同言音各異亦同中華之楚夏
010_0643_c_09L故經之一字或云修妬嚕或云嗉怛囕
010_0643_c_10L以譯師各從五天來故梵本或同或
010_0643_c_11L所譯唐經亦有同異理必然矣
010_0643_c_12L其經旨同歸一貫也如五百比丘
010_0643_c_13L說身因佛許無非正理故知譯師所譯
010_0643_c_14L文雖各異各其正意大同佛意佛雖
010_0643_c_15L復出必許其無非正理也心經五名
010_0643_c_16L亦復如是更無可疑但其尋珠以爲
010_0643_c_17L觀自在菩薩所說敢道不是何也
010_0643_c_18L云觀自在菩薩行深般若時照見五蘊
010_0643_c_19L皆空度一切若厄觀其語勢必是佛
010_0643_c_20L觀音離塵復性之般若離相行也
010_0643_c_21L以觀音自說其行也且佛說半句譯爲
010_0643_c_22L百十句者何其適斥耶如法華經
010_0643_c_23L那記梵本則當云天見人人見天
010_0643_c_24L什潤文云人天交接兩得相見但其

010_0644_a_01L회문回文과 윤문潤文을 할 때에 오직 성문成文에만 요점을 두었었기 때문에 두세 글자의 증감增減이 없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의취意趣는 틀림없이 범본과 똑같을 것이거늘 무슨 연유로 본구本句를 연설하면서 110구로 부풀려서 허황하고 광대한 글을 만들었느냐고 따지십니까? 무슨 까닭으로 과장科場에서 시부詩賦를 지을 때 부풀리고 허황하게 만든 세속법을 가지고 성인의 말씀에 빗대어서 말합니까?
일찍이 문수보살이 자장율사慈藏律師에게 보여 준 4구게句偈144)를 관찰해 보건대 범본梵本과 당언唐言에는 모두 다섯 글자로 문장이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경전의 게송偈頌도 이에 비교해서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번역하는 사람이 보태서 번역한 것은 아닙니다.
또 팔만대장경 가운데 게송들이 항하의 모래처럼 많을 뿐만 아니라, 비록 부처님 세계에 아주 작은 먼지의 수효로 헤아린다 해도 또한 그 가르침을 다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는 범본에는 모두 다섯 내지 여섯 글자로 된 게송이 없는데, 번역하는 사람이 교묘한 솜씨로 수식하여 함부로 더 추가한 것이겠습니까? 천천만千千萬이라도 반드시 그럴 리가 없습니다.
또 부처님께서 지으신 것을 가지고 한漢나라와 위魏나라 이후에 생겨난 글이라고 하는 것은 더더욱 가소로운 일입니다. 마땅히 마음을 씻고 자세하게 다시 들어 보십시오. 대개 부처님께서 멸도滅度하신 뒤 1천 년이 지나자 부처님의 가르침이 비로소 중국에 유통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저 1천 년 전에 부처님께서는 1천 년 뒤에 생길 일을 미리 취하였겠습니까? 한나라나 위나라 때의 법으로 이 모든 경전의 게송을 지은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때로써 관찰해 보건대 틀림없이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처소를 가지고 논하자면 한 사바세계娑婆世界의 삼천세계 가운데에는 통틀어서 백억의 사천하四天下가 있습니다. 다만 이 하나의 사천하 안에 하나의 남섬부주南贍浮洲가 있고, 그 가운데 3천 7백 개의 나라가 있는데, 큰 나라가 천여 개이고 작은 나라는 2천여 개입니다. 지금 판도版啚(지도) 가운데에 수록되어 있는 것은 단지 천축天竺(인도)과 진단震旦(중국) 두 큰 나라와 1백여 개의 작은 나라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한즉 중국진단震旦의 4주洲는 마치 커다란 바다에 한 방울 물과 같으며, 남섬부주는 사바세계 백억 개나 되는 4주 중에 하나이니, 마치 끝이 안 보이는 커다란 허공에 하나의 먼지와 같을 뿐입니다.
어르신께서는 지금 중국 한漢나라와 위魏나라의 5언言 시와 7언 시를 가지고 망령되게도 삼천세계의 거룩하신 교주敎主이시며 천백 억의 몸으로 변화하시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대장경에 나오는

010_0644_a_01L回文潤文時只要成文不無二三字增
010_0644_a_02L而其中意趣必同梵本何演本句
010_0644_a_03L爲百十句浮虛之廣文耶何以科場中
010_0644_a_04L詩賦之浮虛俗法比擬於聖說乎甞觀
010_0644_a_05L文殊示慈藏律師之四句偈梵本及唐言
010_0644_a_06L皆以五字成文則諸經偈頌准此可知
010_0644_a_07L必非譯者之所加也又八萬藏中偈頌
010_0644_a_08L不啻恒河沙雖以佛刹塵數計之
010_0644_a_09L不能盡敎也此皆梵本無五六字偈
010_0644_a_10L而譯者巧飾妄加耶千千萬必無之理
010_0644_a_11L且以爲佛作漢魏文者尤可笑也
010_0644_a_12L更當洗心諦聽葢佛滅後千年佛法始
010_0644_a_13L通中國則何其千年前佛取其千年後
010_0644_a_14L漢魏時法作此諸經之偈頌耶以時觀
010_0644_a_15L必無其理具以處論之一娑婆三
010_0644_a_16L千界中通有百億四天下但於此一四
010_0644_a_17L天下內一南洲中有三千七百國
010_0644_a_18L大國千餘小國二千餘數也今版啚中
010_0644_a_19L所載者但有天竺及震旦二大國與百
010_0644_a_20L餘介小國而已則中國
之四洲也
010_0644_a_21L一滴之於大海也南洲之於一娑婆百
010_0644_a_22L億四洲也如一塵之於無邊太虛空也
010_0644_a_23L左右今以中國漢魏之五七言妄爲三
010_0644_a_24L千界大敎主千百億化身佛所說大藏經

010_0644_b_01L게송의 저본底本이라고 말씀하시니, 한 터럭으로써 시방의 허공을 재어서 저 광대한 양을 알아보려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어쩌면 그렇게도 다만 쑥대 사이만 알고 남쪽 바다(南溟)의 양을 알지 못한단 말입니까?
또한 해와 달처럼 밝게 증명하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곧 청량국사淸凉國師145)이십니다. 그분은 화엄대보살華嚴大菩薩로서 지혜의 눈이 원만하게 밝아서 눈빛이 밤에도 빛났으며 낮에 보면 깜박거리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국사가 『화엄소華嚴䟽』를 지었는데 「부사의품不思議品」에 이르러 그 가운데 경에서는 ‘일체불一切佛’이라고 말하였고, 청량淸凉께서는 ‘일체제불一切諸佛’이라고 하였으니, 아마도 ‘제諸’자가 탈락한 게 아닌가 의심은 되지만, 감히 그 정경正經은 고치지 않고 단지 소疏 가운데에서는 그 내용만을 가지고 논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큰 보살의 지혜의 눈을 가지고서도 오히려 감히 한 글자도 고치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르신께서는 어찌 감히 모든 경전을 전부 배척하고 하나도 믿지 않는단 말입니까? 그건 경망해서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망령이 들어서 그런 것입니까? 이것이 보잘것없는 작은 재주의 문장을 가지고 성인의 가르침을 차 버려서 무간지옥에 들어가는 업을 짓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 분명하게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비유를 들어 말하면 중화의 마조馬祖(道一)ㆍ임제臨濟(慧照)ㆍ조주趙州(從諗)ㆍ운문雲門(文偃)ㆍ덕산德山(宣鑑)ㆍ단하丹霞(天然) 등 살아 있는 눈을 가지 여러 조사와 내지는 우리 동방의 나라에는 원효元曉ㆍ의상義湘ㆍ나옹懶翁(慧勤)ㆍ보조普照(知訥)ㆍ구곡龜谷(覺雲)ㆍ벽송碧松(智嚴) 등에 이르기까지의 용상대덕龍象大德들도 역시 믿고 받아서 받들어 수행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대범천大梵天과 제석천帝釋天, 염라대왕閻羅大王과 온갖 신기神祇, 수많은 영혼과 수많은 주재主宰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부처님의 유촉遺囑을 받들어 경전을 옹호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중화에서는 삼무三武146)가 불교를 소멸시키려고 하다가 도리어 그들이 재앙을 받아 세 사람 모두 갑작스러운 죽음을 당하였고147) 불교는 더욱 치성하게 일어났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해인사에 불이 났는데 해인사 경내의 모든 법당과 요사는 다 타서 잿더미로 변했는데도 대장전大藏殿만은 우뚝하게 홀로 남았으며, 영각사靈覺寺에 난 불은 산림까지 다 태워 없애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화엄전華嚴殿만은 엄연하게 홀로 서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하늘의 신과 땅의 신이 부처님의 유촉遺囑을 받들어서 부처님의 법을 보호하고 지키는 일에 있어서 가지加持148)의 신통력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었겠습니까? 또한 경전을 번역하는 여러 역경사들이 모두 다 마음을 밝혔고 진리를 통달한 큰 성인이기 때문에 삼명三明149)과 육통六通150)

010_0644_b_01L偈頌之底本者何異於以一毛度量十
010_0644_b_02L方虛空界欲知其廣大量乎何其但知
010_0644_b_03L蓬蒿間而不知南溟之量也哉又有如
010_0644_b_04L日月之明證者淸凉國師以華嚴大菩
010_0644_b_05L慧眼圓明目光夜發晝視不瞬
010_0644_b_06L華嚴䟽而至於不思議品中經云一切
010_0644_b_07L淸凉云一切諸佛恐脫諸字不敢
010_0644_b_08L改其正經而但論在䟽中則以大菩
010_0644_b_09L薩之慧眼尙不敢改其一字也左右
010_0644_b_10L安敢都斥諸經而俱不信乎狂耶妄
010_0644_b_11L此非以文章小藝蹴踏聖敎造無
010_0644_b_12L間業者耶又有明證者如中華之馬
010_0644_b_13L祖臨濟趙州雲門德山丹霞等活眼諸
010_0644_b_14L乃至我東元曉義湘懶翁普照龜谷
010_0644_b_15L碧松等龍象大德亦莫不信受奉行
010_0644_b_16L大梵帝釋閻羅百祗萬靈群宰亦莫
010_0644_b_17L不奉佛遺囑擁護經典故中華則三武
010_0644_b_18L欲滅佛敎而反受其殃三皆暴死
010_0644_b_19L佛敎益熾我東則海印之火局內梵宇
010_0644_b_20L無不爲灰而大藏殿卓然獨存靈覺之
010_0644_b_21L乃至山林無不燋滅而華嚴殿儼
010_0644_b_22L然獨立也若非天神地祗奉佛遺囑
010_0644_b_23L持佛法之加持神力焉能如是且譯經
010_0644_b_24L諸師擧皆明心達理之大聖故三明六

010_0644_c_01L구족具足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삼천세계三千世界를 보되 마치 손바닥에 놓여있는 과실을 보는 것과 같았으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삼세를 보되 모두 눈앞에 있는 것과 같았으며, 허공에 머무르고 다니고 하기를 마치 평지를 밟고 다니는 것과 같았습니다.
만약 부처님과 보살의 권형權形이 아니라면 분명 이는 번뇌를 다 없앤 대아라한大阿羅漢으로서 부처님의 부촉을 받들고 온 자들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이와 같은 모든 성인이 번역한 경전을 뒤에 올 아손兒孫들이 다만 믿어 받고 받들어 실천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늑담泐潭(懷澄)과 대혜大慧(宗杲) 같은 이들은 불자로서 물려받은 부처님의 법을 보호하여 지키는 직분職分을 다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할 만합니다.
지난날의 성인들이 이와 같이 받들어 실천했으니, 후생後生들도 이와 같이 믿어 받는다면, 우리 부처님의 선禪과 교敎의 큰 도가 진묵겁塵墨劫토록 유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믿음이 가는 이야기가 어찌 진정眞正 믿고 이해해야 할 진비량眞比量(올바른 추리에 의한 인식)이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만약 어르신의 말씀과 같다고 하면 팔만장경八萬藏經은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못될 것이니, 틀림없이 한 사람도 믿고 받아서 받들어 실천하고 삼보에 귀의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부처님의 거룩한 가르침은 반드시 땅을 쓸어버리듯이 흔적조차 없어지는 지경에 이르고 말 것입니다.
이 세상 천지간에 어찌 저와 같은 사마외도邪魔外道가 있단 말입니까?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들이 반드시 다 탄식할 것이요, 삼계의 모든 하늘들도 눈을 부릅뜨고 주먹을 불끈 쥘 것입니다. 날아다니는 나방이 등불을 치는 것 같은 그런 이들은 부처님께서도 구원하기 어려우니 정말로 슬픈 일이옵니다.
일곱 번째는 ‘화話와 화두話頭는 같지 않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허공을 갈라서 두 조각으로 만들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대개 1천 7백 칙則의 공안公案이 바로 다 화두입니다. 어찌 그 가운데 삼처화三處話와 타우화打牛話 등은 다만 화話라 말하고 백수栢樹는 화두話頭라고 주장하는 것입니까?
또 의리義理가 있는 것을 가지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부처님의 말씀이고, 의리가 없는 것을 가지고 그것으로 인해 깨달을 수 없는 것은 조사의 문(祖門)의 화두라고 말씀하시니, 스스로 다리를 세울 곳이 없고 평생 익혀 온 재능이나 솜씨는 전부 다 과장誇張되고 박람博覽한 것이므로 항상 농단하는 것임을 알 만합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가지고 의리가 있기 때문에 깨달을 수 있다고 한 것에 대해서 다시 말씀해 보십시오. 자리를 나누어 주어 앉게 함에는 어떤 뜻이 있고,

010_0644_c_01L無不具足三千世界如觀掌果
010_0644_c_02L未三世悉如目前行住虛空如履平
010_0644_c_03L地也若非佛菩薩之權形則的是無漏
010_0644_c_04L大阿羅漢奉佛囑而來者也然則如是
010_0644_c_05L諸聖所譯之經典後來兒孫但信受奉
010_0644_c_06L不亦冝乎泐潭大慧等可謂能盡
010_0644_c_07L佛子護持遺法之職分也前聖如是奉
010_0644_c_08L後生如是信受則吾佛之禪敎大道
010_0644_c_09L可以流通於塵墨刼也如是信話豈非
010_0644_c_10L眞正信解之眞比量耶若如左右所說
010_0644_c_11L則八萬藏經一不可信必無一人信受
010_0644_c_12L奉行歸依三寶者故吾佛聖敎必至
010_0644_c_13L於掃地無跡也世上天地間寧有如許
010_0644_c_14L之邪魔外道也十方諸佛必皆嘆息
010_0644_c_15L三界諸天張目擧拳飛蛾撲燈佛亦
010_0644_c_16L難救可不哀耶

010_0644_c_17L
七以話與話頭不同云者此非析虛空
010_0644_c_18L作兩片耶葢千七百則公案皆是話頭
010_0644_c_19L何於其中三處話打牛話等但名
010_0644_c_20L栢樹話頭耶且以有義理可曉者
010_0644_c_21L爲佛話以沒義理不可曉者爲祖門話
010_0644_c_22L頭者可知自無立脚處而平生伎倆
010_0644_c_23L都是誇張博覽常弄之乎者也若以佛
010_0644_c_24L話爲有義可曉者且道分座何義

010_0645_a_01L꽃을 들어 보임에는 어떤 뜻이 있으며, 양쪽 발을 널 밖으로 내어서 보인 것에는 어떤 뜻이 있고, 개자에 수미산을 받아들인다 함에는 어떤 뜻이 있으며, 하나의 먼지가 시방세계를 머금는다는 것에는 무슨 뜻이 있습니까?
또 무염족왕無厭足王151)이 사람을 죽인 일과 바수밀婆須密152)의 음란한 행위와 승열勝熱153) 바라문의 고행苦行은 모두 다 보살행인데 거기에는 무슨 뜻이 담겨 있으며, 49년 동안 법을 설하셨으나 일찍이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는 것에는 무슨 뜻이 담겨 있으며, 종일토록 둘이 아님을 이야기하였으나 일찍이 한 글자도 거론하지 않았다는 것은 무슨 뜻이 담겨져 있습니까?
『법화경』에 이르기를 “온 세상에 가득한 추자鶖子154)와 같은 사람들과 항하의 모래처럼 많은 보살들이 다 함께 생각하고 같이 헤아려 본다 해도 부처님의 지혜 일부분도 알지 못하리라.”라고 하였으며, 『화엄경』에 이르기를 “허공을 헤아리고 바람을 붙들어 맬 수 있으며 큰 바다의 물을 다 마실 수 있고 온 세계의 티끌들을 다 헤아릴 수 있을지라도 부처님의 무량한 공덕은 다 말할 수 없으리.”155)라고 하였습니다.
또 이르기를 “육상六相156)이 원융圓融하고 십현十玄157)을 구족具足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부처님의 말씀도 또한 의리義理가 없는 것이어서 깨달을 수 없는 화두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 조사님의 말씀을 다만 의리가 없는 것이어서 깨달을 수 없다고 말한다면, 자리를 나누어 줌으로써 진공眞空을 보여 주셨고, 꽃을 들어 묘유妙有를 보여 주셨으며 나란히 두 발을 관 밖으로 내밀어 공空과 유有를 보여 주셨습니다.
모두 쳐부수고유有 모두 쳐부수지 않아서 나란히 공과 유를 보여 주었으며, 부처님의 성품으로 대용大用을 보여 주었고, 부처님의 자성이 없음으로써 대기大機를 보여 주셨으니, 이와 같이 내지는 1천 7백 칙則 화두에 이르기까지는 다만 의리가 없을 뿐만이 아니라, 하나하나 의로義路와 이로理路가 있어서 통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니, 또한 어찌 다만 의로와 이로가 없어서 깨달을 수 없는 것이라고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까닭에 마땅히 알아야만 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팔만대장의 경전과 1천 7백의 조사님의 말씀을 간화문看話門으로 설하면, 곧 하나하나가 다 구멍이 없는 무쇠방망이와 같나니, 이 모두는 다 의로와 이로가 없는 부사의不思議하고 원융圓融한 진실한 법계입니다. 또 설화문說話門으로 설하면 곧 부처님의 말씀이나 조사님의 말씀 하나하나가 다 유有로서 의로와 이로가 있는 것이어서 깨달을 수 있는 길머리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과 조사님의 어구語句가 뜻이 있는 것입니까유구有句, 뜻이 없는 것입니까무구無句, 또한 있기도 하고 역시 없기도 한 것입니까쌍조중도雙照中道,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닙니까쌍차중도雙遮中道? 반야般若는 마치 커다란 불덩어리와 같아서 4면에서 다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진공眞空.
또 있는 것이라고 해도 되고, 없는 것이라고 해도 되며, 또한

010_0645_a_01L花何義示趺何義芥子納須彌何義
010_0645_a_02L一塵含十方何義無厭之殺人婆須之
010_0645_a_03L婬行勝熱之苦行皆爲菩薩行何義
010_0645_a_04L四十九年說未曾說一字何義終日談
010_0645_a_05L不二未甞擧一字何義耶法華云滿
010_0645_a_06L世間之鶖子如恒沙之菩薩盡思共度
010_0645_a_07L莫知少分華嚴云虛空可量風可
010_0645_a_08L大海中水可飮盡刹塵心念可數知
010_0645_a_09L無能盡說佛功德又云六相圓融十玄
010_0645_a_10L具足豈非佛說亦爲沒義理不可曉之
010_0645_a_11L話頭耶且以祖語但爲沒義理不可曉
010_0645_a_12L以分座示眞空拈華示妙有示趺
010_0645_a_13L齊示空有俱打俱不打齊示空有
010_0645_a_14L性示大用無佛性示大機如是乃至千
010_0645_a_15L七百則話頭非但沒義理一一亦有義
010_0645_a_16L路理路之可通又何但云沒義理之不
010_0645_a_17L可曉耶是故當知八萬藏之佛經
010_0645_a_18L七百之祖語以看話門說則一一如無
010_0645_a_19L孔鎚皆是沒義理之不思議圓融眞法
010_0645_a_20L界也以說話門說則佛語祖語一一
010_0645_a_21L皆有有義理可曉之路頭也然則佛祖
010_0645_a_22L語句有義耶
無義耶
亦有亦無耶

010_0645_a_23L
非有非無雙遮
中道
般若如大火聚四面
010_0645_a_24L皆不可入
又有也亦得無也亦得

010_0645_b_01L있기도 하고 역시 없기도 한 것이라고 해도 되고,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라고 해도 되나니, 반야는 마치 시원한 못물과 같아서 4면에서 다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묘유妙有.
그러므로 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렇게 해도 안 되고비유非有, 이렇게 하지 않아도 안 되며비무非無, 이렇게 해도 이렇게 하지 않아도 모두 안 된다비중도非中道.”라고 하였으며, 또 “이렇게 해도 되고, 이렇게 하지 않아도 되며, 이렇게 해도 이렇게 하지 않아도 모두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과 조사님의 어구語句들은 마치 허공을 지나가는 바람과 같아서 모두 다 진실로 있는 것도 아니고진공眞空, 전혀 없는 것도 아니며묘유妙有, 머리도 꼬리도 없고 앞도 뒤도 없어서 마치 신통변화와 같은 것이니 결정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이는 이른바 도리천忉利天에서 도독고塗毒鼓158)를 울리면 이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반드시 다 죽는 것과 같고, 열뇌해熱惱海 가운데 청량당淸凉幢을 본 사람이 어디로 돌아가는지에 대해서는 정수리에 바른 안목을 갖추지 못하였다면 쉽게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 가운데 원만하게 굴려서 걸림이 없는 진정한 믿음과 이해가 이와 같습니다. 미래 세상에 출두出頭하면 현재에 이룩한 것을 수용하게 되나니, 어찌 의심할 여지가 있겠습니까? 또 말씀해 보십시오. 어떠한 기특하고도 수승한 일이 있습니까? 이 단락의 인연이 너무 지나쳤으니, 이는 이른바 넓은 바다에 빠졌는데 방주芳舟를 만난 격이요, 높은 하늘에서 떨어졌는데 신령한 학의 등에 올라탄 격입니다. 경사스러워서 펄쩍펄쩍 뛰며 지극히 기뻐함이 손으로 춤을 추며 어찌 오르겠습니까? 단지 스스로 기뻐할 뿐, 그대에게 줄 수는 없으니 이것이 한탄스럽습니다.
여덟 번째는 『전등록傳燈錄』을 가지고 “삼가三家의 마을 속에서 한 시대 문호門戶의 소아배小兒背들이 과거 시험의 장소에서나 쓰던 것이다.”라고 폄하하여 말했는데, 이는 아마도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한 이후로부터 33조사의 계통을 이은 다섯 종파가 차례차례 전해 주어서 대대로 이어받아 내려온 격외格外의 선문禪文이 여러 지방 각 곳에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뒤에 오는 아손兒孫들이 얻기가 어려운 까닭에 부처님과 조사님으로부터 전해 내려온 상세上世의 가풍家風을 널리 보고 또한 자기가 깨달은 것이 삿된 것인지 옳은 것인지의 여부與否도 분명하게 깨닫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도원道原159) 법사가 33조사 다섯 종파에 차례차례 전해져 내려오는 오가五家160)의 어록語錄들을 모아서 하나의 책으로 만들어 『전등록』이라는 이름을 붙였던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바로 유가儒家에서

010_0645_b_01L有亦無也亦得非有非無也亦得也
010_0645_b_02L若如淸凉池四面皆可入也
故祖師
010_0645_b_03L伊麽也不得
不伊麽也不得

010_0645_b_04L伊麽不伊麽摠不得非中
又云伊麽也得
010_0645_b_05L不伊麽也得伊麽不伊麽摠得然則佛
010_0645_b_06L祖語句如空中風盡非宲有
非都無
010_0645_b_07L
無頭尾無向背如同神變定當不
010_0645_b_08L是可謂忉利天上塗毒鼓聞者必死
010_0645_b_09L熱惱海中淸凉幢見者何歸未具頂門
010_0645_b_10L正眼未可以易言也於佛法中圓轉
010_0645_b_11L無礙之眞正信解其如是矣來生出頭
010_0645_b_12L現成受用何可疑也且道有什麽奇
010_0645_b_13L特勝事過於此段因緣是可謂溺巨海
010_0645_b_14L而遇芳舟墜長空而乘靈鶴慶躍之至
010_0645_b_15L手舞何階只可自怡悅不堪持贈君
010_0645_b_16L是可歎也

010_0645_b_17L
八以傳燈錄爲三家村裡一時門戶
010_0645_b_18L小兒科場之書者葢自三處傳心以後
010_0645_b_19L卅三五宗次次傳授繼繼承承之格外
010_0645_b_20L禪文散在諸方各處故後來兒孫
010_0645_b_21L得普見佛祖傳來之上世家風且自己
010_0645_b_22L所悟之邪正與否亦難分曉故道原法
010_0645_b_23L收錄卅三五宗次次傳來之五家語
010_0645_b_24L集爲一書名曰傳燈錄正同儒家

010_0645_c_01L처음으로 족보族譜를 만들었던 전례와 같은 것입니다.
『광등록廣燈錄』161)과 『속등록續燈錄』162) 등은 곧 도원 법사가 미처 수집하지 못했던 것들로서 그 뒤에 출간된 여러 선사들의 어록語錄을 차례차례 보입補入한 것인데, 각각의 그 종지宗旨는 전부 『전등록』 중 33조사 다섯 종파에 관련된 것이니, 이는 또한 유가에서 족보를 중수重修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뒷세상에 태어날 자손들도 차례차례 보입해야 하겠지만, 각각 그 근본을 살펴보면 시조의 문하에서 나온 것은 동일합니다. 그러나 처음 창출創出하는 것은 어렵고 거듭 보수하는 것은 쉽기 때문에 역시 문서나 글을 정리하여 바로잡는 도가 없지 않으니, 이는 곧 필연한 진리이거늘 무슨 의심할 만한 일이겠습니까?
이런 까닭에 『전등록』은 바로 사천하四天下의 어느 방소에서나 다 통하는 도보都譜입니다. 어찌 한 시대의 문호門戶에서 시비是非나 논란한 책이라고 말하십니까? 또 『전등록』은 사람으로써 주인공을 삼았기 때문에 한 사람이 말한 크고 작고 깊고 얕은 따위의 법이 전부 한 사람의 이름 밑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혹 후학後學들이 그 깊고 얕은 의취意趣를 알기 어려울까 두려워한 까닭에 우리 동방의 나라에서 보조普照 상족上足인 진각眞覺 조사의 자비한 마음이 간절하여 『전등록』 및 여러 가지 기록 가운데에서 그 법의 깊고 얕은 차제次第를 따라 그 뜻을 위주로 하여 부류별로 수합收合하여 하나의 화제 가운데 전부 수록해 편집하고는 그 이름을 『염송拈頌』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후학들로 하여금 그 의취를 쉽게 터득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그 하나의 화제 가운데에서 모든 선사들의 의취를 분명하게 밝혀 주고 있으니, 『염송』을 어찌 금과옥조金科玉條가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또 이 『염송』은 천하의 어록들을 다 수집해 놓은 것인데, 그 가운데에도 중국의 어록이 가장 많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중국에는 이 법문法門이 없습니까? 어쩌면 그렇게도 집안의 추한 일을 밖으로 들추어내서 사람들로 하여금 중중무진重重無盡하게 역逆으로 몰아가는 일이 일어나게 하십니까?
동방의 허공이 서방의 허공과 서로 다르답니까? 어찌하여 그 법의 본체가 그릇된 것인지 바른 것인지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를 살펴보지 않고, 단지 그 방책方册의 크고 작음과 붉고 누런 것만을 책망하여, 저 스스로 설 곳이 없다는 것을 더욱 믿고 다만 다른 사람이 지니고 있는 보배만 헤아리고 있으니 정말로 애석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010_0645_c_01L始修族譜之例也若其廣燈續燈等錄
010_0645_c_02L乃原師所未收者及其後所出之諸師
010_0645_c_03L語錄次次補入者而各其宗旨都是
010_0645_c_04L傳燈中卅三五宗也亦同重修譜時
010_0645_c_05L來所生之子孫次次補入而各其根本
010_0645_c_06L同出於始祖門下也然初創者難重修
010_0645_c_07L者易故亦不無釐正之道也此乃必然
010_0645_c_08L之理也有何可疑是故傳燈正是此
010_0645_c_09L四天下通方之都譜也何爲一時門戶
010_0645_c_10L是非之書乎且傳燈以人爲主故
010_0645_c_11L人所說之大小深淺等法都錄於一人
010_0645_c_12L名下則或恐後學難知其深淺意趣
010_0645_c_13L我東普照上足眞覺祖師慈悲心切
010_0645_c_14L傳燈及諸錄中隨其法休深淺次第
010_0645_c_15L意爲主類類收合都錄於一話中
010_0645_c_16L曰拈頌欲使後學易得分曉其一話
010_0645_c_17L中諸師意趣也拈頌豈非金科玉條耶
010_0645_c_18L又此拈頌都集天下語錄而中國語錄
010_0645_c_19L最多何云中國無此法門耶何其外揚
010_0645_c_20L家醜令人歐逆重重無盡東方虛空
010_0645_c_21L異於西方虛空耶何不察其法體之邪
010_0645_c_22L正同異但責其方册之大小紅黃益信
010_0645_c_23L其自無立處而但數他寶者也可不惜
010_0645_c_24L

010_0646_a_01L아홉 번째는 교敎를 가지고 다만 부처님의 말씀일 뿐이라 하고 선禪을 가지고는 다만 침묵일 뿐이라고 하셨는데, 정녕 이것은 합하閤下의 고황膏肓에 든 치명적인 병입니다.
왜냐하면, 교를 가지고 다만 부처님의 말씀일 뿐이라고 한 것은 항상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견해(常見)이고, 선禪을 가지고 다만 침묵일 뿐이라고 한 것은 끊어져서 없어지고 만다고 주장하는 견해(斷見)이니, 곧 단견과 상견 이 두 가지 견해는 비유하여 말하면 연기를 보고 안개라고 한다거나 뿔을 보고 죽순이라고 하는 사비량似比量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틀림없이 불을 얻거나 소를 얻을 기약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전후해서 전래한 가르침이 110일 뿐만이 아니요, 그 하나하나가 부처님과 조사님의 거룩한 언량言量에 위배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선과 교가 같지 않다고 분별하여 주장하였다면, 곧 이것은 항상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견해와 끊어져서 없어지고 만다고 주장하는 견해의 죽은 견해입니다.
이미 죽은 것이라면 틀림없이 생장生長할 이치가 없는 까닭에 비유하면 마치 물 위에 떠가는 나무가 왼쪽이나 오른쪽 두 곳의 언덕에 걸려서 썩어 없어지고 마는 것과 같으리니, 그렇게 되면 틀림없이 바다에 이르는 날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김 상공金相公께서는 다만 그저 김 상공일 뿐이니, 감히 나귀 해에나 평범한 사람을 개혁하여 성인으로 만든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말씀이나 침묵은 두 가지가 없습니다.
선과 교가 원융해서 선 밖에 교가 없기 때문에 단지 침묵일 뿐만 아니라 역시 말씀도 있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대기大機의 원만한 호응이요, 교 밖에 선이 따로 없기 때문에 단지 말씀일 뿐만 아니라 역시 침묵도 있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대용大用의 지름길입니다. 선과 교가 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에 대기와 대용을 가지런히 시설한 것입니다.
이 삼요三要는 바로 여래께서 꽃을 든 소식이니, 역시 사람마다 다 갖추고 있는 묘유妙有의 면목이기도 합니다. 곧 진공眞空에는 묘유가 있기 때문에 세 가지는 다 공空하여 사실은 유有가 없나니 이것이 바로 진공입니다. 가령 연기를 보고 불인 줄 알며 뿔을 보고 소인 줄 아는 진비량眞比量과 같은 경우라면, 틀림없이 불을 얻고 소를 얻을 기약이 있을 것입니다.
이미 이와 같이 선과 교가 둘이 아님을 진정으로 믿고 이해하여 지금 이미 깨달아 들어갔다면 기필코 좌左묵默에 떨어지지도 않을 것이요, 우右어語에 떨어지지도 않을 것이며, 정면을 향해서 갈 것입니다말씀과 침묵이 둘이 아님(語默無二). 그러므로 구경究竟에는 공과 유가 원융한 부처님 지견知見의 큰 바다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입을 열어 말을 내면 모든 말과 모든 글귀마다 성인의 언량言量에 타합打合하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010_0646_a_01L
九以敎爲但說以禪爲但默正是閤下
010_0646_a_02L膏肓之大病也何也以敎爲但說
010_0646_a_03L見也以禪爲但默斷見也即此斷常
010_0646_a_04L二見如見烟爲霧見角爲笋之似比量
010_0646_a_05L則必無得火得牛之期故前後來敎
010_0646_a_06L啻百十而一一違背於佛祖聖言量也
010_0646_a_07L旣別執禪敎不同則是斷常之死見也
010_0646_a_08L旣死則必無生長之理故如水上之浮
010_0646_a_09L滯着於左右兩岸而朽壞則必無到
010_0646_a_10L海之日也然則金1)金相公只是箇金
010_0646_a_11L相公而已敢道驢年革凡成聖去也
010_0646_a_12L我所見語默無二禪敎圓融禪外無敎
010_0646_a_13L故不但默而亦有說是爲大機圓應也
010_0646_a_14L敎外無禪故不但說而亦有默是爲大
010_0646_a_15L用直截也禪敎無二故爲機用齊施也
010_0646_a_16L此之三要是如來拈花消息亦是人人
010_0646_a_17L本具之妙有面目也即眞空之妙有故
010_0646_a_18L三皆空而無實有是爲眞空也如見烟
010_0646_a_19L知火見角知牛之眞比量則必有得火
010_0646_a_20L得牛之期也旣如是禪敎無二之眞正
010_0646_a_21L信解今已入手則必也不落左
010_0646_a_22L落右正面而去語默
無二
故究竟必入於
010_0646_a_23L空有圓融之佛知見大海也是故開口
010_0646_a_24L發說言言句句無不打合於聖言量也

010_0646_b_01L그러므로 영가永嘉가 이르기를 “말 없을 때 말하고 말할 때 말 없는 것이 곧 바로 여래의 진실한 모습이다.”라고 하였으며, 『금강경』에 이르기를 “어떻게 남을 위해 연설해야 하는가어語, 모습에 집착하지 않고 여여如如하여 움직이지 않느니라묵默.”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곧 법을 설하지 아니함을 이름하여 설법이라 하느니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미 이와 같이 말 없음이 곧 말하는 것이라고 하면, 그 때문에 석가여래釋迦如來의 백억의 몸이 시방세계에 형상을 나누었으니, 앞뒤와 중간을 나누기 어렵다는 뜻으로 이는 바로 대기원응大機圓應이요, 말하는 것이 곧 바로 말 없음이기 때문에 마혜수라摩醯首羅의 세 짝 눈으로 8면을 꿰뚫었으니, 가로와 세로, 아우름과 개별을 나누기 어렵다는 뜻으로 이는 바로 대용전창大用全彰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 말하고 침묵하는 것이 둘이 될 수 없나니, 이것이 바로 꽃을 들자 빙그레 웃은 조사선祖師禪의 종지宗旨입니다. 또한 마조馬祖의 일할一喝과 백장百丈의 대기大機를 얻음과 황벽黃蘗이 대용大用을 얻은 임제종臨濟宗의 가풍家風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하고 침묵하는 것이 둘이 아닌 큰 도가 정녕 하늘을 찌르는진공眞空 긴 칼묘유妙有에 추워서 으슬으슬하고 얼어서 오들오들 떠는 것과 같으며, 가느다란 티끌도 일어나지 못하고마음이 갈 곳이 없음(心行處滅) 한 치의 풀도 나지 않는 것언어의 길이 끊어짐(言語道斷)과 같나니, 어찌해 보려야 어찌해 볼 수 없기 때문에 억지로 이름을 붙여 구멍 없는 무쇠방망이라고 한 것입니다.
지금 이 말하고 침묵하는 것이 둘이 아닌 구멍 없는 무쇠방망이로써 말하고 침묵함이라고 구별하여 고집을 부리는 단견과 상견의 삿된 소견을 때려 부수리니, 어찌 이글거리는 화롯불 위에 한 점의 눈과 다르겠습니까?
대권보살大權菩薩의 허공과 같은 큰 공덕이 석양 바람에 날아가는 듯하니, 어찌 가을바람에 한낱 물거품일 뿐이겠습니까? 가소롭고도 가소롭습니다.
또 말씀해 보십시오. 모기가 날개를 쫑긋 세우고 허공을 찌르면서 수미산須彌山을 거꾸러뜨리겠다고 하니, 어떤 것이 거용곡용距踴曲踴163)하는 용기踴氣입니까? 어찌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자주자주 배를 움켜쥐게 하십니까?
이러므로 마땅히 알아야만 할 것입니다. 4구의 불이 완전히 꺼지고 백 가지 부정의 길이 끊어지면, 신비한 광채가 밝고 밝으며 법의 힘이 높고 높아서, 니건자尼乾子(6사 외도 중 한 사람)의 넋이 녹아내리고 파순波旬의 쓸개가 부서질 것입니다. 번뇌의 도적이 삽연颯然히 무너지고 생사의 마구니가 활이豁爾히 날아갈 것입니다.
생각마다 보리의 마음뿐이니 어찌 애써 방탕한 생각을 떨쳐 버리려는 공부를 할 것이며,

010_0646_b_01L故永嘉云默時說說時默即是如來眞
010_0646_b_02L實相金剛云云何爲人演說不取於
010_0646_b_03L如如不動又云即非說法是名
010_0646_b_04L說法旣如是默即是說故釋迦如來百
010_0646_b_05L億身十方分形前後中際也難分
010_0646_b_06L爲大機圓應也說即是默故摩醯首羅
010_0646_b_07L三隻眼八面通透縱橫並別也難分
010_0646_b_08L是爲大用全彰也故此說默無二正是
010_0646_b_09L拈華微笑之祖師禪宗旨亦是馬祖一
010_0646_b_10L百丈得大機黃蘗得大用之臨濟宗
010_0646_b_11L家風也故此語默無二之大道正如倚
010_0646_b_12L
長劒
寒威威冷秋秋纖塵不立
010_0646_b_13L心行
處滅
寸草不生言語
道斷
奈何他不得故
010_0646_b_14L名曰無孔鐵鎚也今以此語默不二之
010_0646_b_15L無孔鎚撲碎語默別執之斷常邪見
010_0646_b_16L以異於紅爐上一點雪也大權菩薩
010_0646_b_17L虛空之大功德飛去夕陽風何啻秋風
010_0646_b_18L江上一浮漚也可笑可笑且道蛟子
010_0646_b_19L聳翼衝虛欲倒須彌須彌有什麽距踴
010_0646_b_20L曲踴之踴氣耶其何令人數數奉腹乎
010_0646_b_21L是故當知四句之火頓融百非之路斯
010_0646_b_22L神光赫赫法力巍巍尼乾魄消
010_0646_b_23L旬膽碎煩惱賊颯然隳壞生死魔豁爾
010_0646_b_24L飄颺念念菩提心何勞遣蕩之功

010_0646_c_01L곳곳이 모두 안락국이니 반연을 잊으려 힘쓸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빈 배가 물결치는 대로 높고 낮은 데를 따라 흐름과 같고, 흐르는 물이 산굽이대로 굽고 곧음을 따르는 것과 같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믿고 이해하고 이와 같이 실천하면 기회가 찾아올 것이요, 그 이치가 스스로 밝게 드러나 방편문方便門을 완전히 초월하여 곧바로 대각大覺의 성에 오르리니 무슨 의심이 있을 것이며 어떤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합하閤下께서 이를 보시면 마음에 틀림없이 발끈해서 성을 내고 어리둥절하여 의심하실 것이며, 응연凝然히 생각하고 석연釋然히 깨달아서 입을 벌리고 웃으면서 기필코 말하기를 “이 늙은이도 역시 가련한 사람이로다.”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 노승老僧이 아니면 어르신께서는 이렇게 멋대로 지껄이는 말을 들어 보지 못할 것이요, 또 어르신(左右)이 아니면 노승도 역시 이렇게 멋대로 지껄이는 말을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로써 관찰하건대 우리는 그야말로 바로 세속을 벗어난 곳에서 서로 만나는 참다운 좋은 벗인 듯합니다.
보시지 못하셨습니까? 제바달다提婆達多가 많은 겁劫 동안 부처님을 헐뜯다가 살아서 지옥에 빠졌으니, 이것은 순리를 거슬러 행동하면서 사람들에게 감히 부처님을 헐뜯지 않는 대권보살大權菩薩을 보여 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법화경』에 이르기를 “나는 제바달다를 선지식으로 삼았기 때문에 지금 보리를 얻었다.”라고 하였으니, 오늘날 우리는 서로 따져서 묻는 일을 당하여 밖으로는 서로 깨뜨리려는 듯이 보였으나 안으로는 사실 서로 도움을 준 것입니다.
왜냐하면 서로 호응하는 의취意趣를 연구하는 것은 연구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삿된 것은 버리고 바른 데로 돌아가게 하여 함께 여래의 크고 원만한 깨달음의 바다에 들어가서 부처님과 보살님을 반려伴侶로 삼아 화장장엄華藏莊嚴의 바다에서 한가롭게 노닐면서 더할 나위 없는 열반의 즐거움을 수용受用하고 미래 세상이 다하도록 항상 고요하고열반涅槃 항상 비추게보리菩提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대장부가 보리의 마음을 내는 것이 마땅히 이와 같아야만 합니다. 바라건대 부디 이런 관찰을 하여 이 삼매에 들어간다면 어떻겠습니까?
하하. 풀숲을 헤집고 돌아오느라 이슬에 옷이 젖는 줄도 모를 것입니다.
10. 금구金溝 홍재혁洪在爀께 부침재혁의 호는 취구醉裘이다. 답서를 붙여 둠(寄洪金溝在爀號醉裘 答書附)
삼산三山에 머물고 있을 때의 회합이 오래도록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근계近界에서 수레를 내리신 지 이미

010_0646_c_01L處安樂國不假忘緣之力是可謂虛舟
010_0646_c_02L駕浪隨高隨下流水轉山遇曲遇直
010_0646_c_03L如是信解如是行李則時節到來
010_0646_c_04L理自彰頓超方便門直登大覺城
010_0646_c_05L何可疑有何難哉閤下見此想必怫
010_0646_c_06L然而怒惘然而疑凝然而思釋然而
010_0646_c_07L啞然而笑必曰此老亦可憐者矣
010_0646_c_08L然若非老僧左右必無與麽放言處
010_0646_c_09L非左右老僧亦無伊麽放言處以此觀
010_0646_c_10L正是物外相見之眞善友也不見提
010_0646_c_11L婆達多多刼謗佛生陷地獄是倒行
010_0646_c_12L逆施示人不敢毁佛之大權菩薩故法
010_0646_c_13L華云我以提婆達多善知識故今得菩
010_0646_c_14L今日之互相見詰外似相破內實
010_0646_c_15L相扶何也以究其相應之意趣則欲
010_0646_c_16L令捨邪歸正同入如來大圓覺海與佛
010_0646_c_17L菩薩爲伴侶優遊華藏莊嚴海受用無
010_0646_c_18L上涅槃樂盡未來際常寂
常照

010_0646_c_19L不其然乎大丈夫發菩提心當如
010_0646_c_20L是也願作此觀入此三昧如何如何
010_0646_c_21L呵呵草裡橫身歸不覺露濕衣

010_0646_c_22L寄洪金溝在爀號醉裘答書附

010_0646_c_23L
三山住會長在目前近界下車已經
010_0646_c_24L「金」疑衍字{編}

010_0647_a_01L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한 차례 안부를 묻는 편지를 올린 뒤로 지금까지 안부를 여쭙지 못했습니다. 말이 병들고 수레가 망가졌는데도 생각하시어 반드시 위조委照하여 주시니 아랫사람의 심정이 어찌 죄송스러움을 견디겠습니까?
엎드려 생각하건대 그 사이에 도체道體가 함양涵養하시고 커다란 경사를 잇달아 누리셨다 하오니, 구구區區하게 찬앙攢仰하나이다. 어느 날이나 그렇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만, 아무개는 태마太馬(犬馬)의 나이 이미 팔령八嶺164)을 넘겨 그 상태가 험난하니 붓을 들어 어찌 글을 쓸 수 있겠습니까? 지난 인연이 거듭 이어지기를 밤낮으로 크게 기원하였답니다.
저는 어쩔 방법이 없으니 진실로 큰 수행을 찾아본다면 혹 없지 않을 듯하여 한 번 왕림하여 주십사 감히 여쭈옵니다. 저는 저 사이에 있으면서 구름 빗장과 안개 자물쇠를 활짝 열어 놓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일찍이 서울에 갔었을 적에 김 상공相公을 만나 담론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공안公案을 이해하지 못하였는데 지금 섬 안에 다시 밝은 가르침을 드리워 주셨습니다. 다만 공公은 지금 세상에 짝할 이 없는 영재英才입니다. 게다가 불교 경전에 대해서 깊이 그 문턱을 넘으셨기 때문에 그 답서 가운데 어리석은 견해를 정리하여 잘 살펴보신다면 통인달사通人達士들이라 함께 비추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묻고 대답하는 두 사람의 편지를 나란히 태정胎呈하니, 혹 마음을 비우고 작용함이 없는 참다운 즐거움을 음미하면서 저들과 함께 즐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만약 합하閤下가 아니라면 다시 말해 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안부를 전하고 문안을 드림은 그 형편이 진실로 그러합니다.
또한 모과木瓜를 던진 이유는 그 뜻이 좋은 구슬을 얻으려고 한 데에 있었습니다.165) 그런데 과연 이 바위 토굴 속에서 섣달 30일에 노한老漢은 영서靈犀166)처럼 서로 마음이 통하여 어두워지지 않았습니다. 갖추지 못한 채 글을 올리며 삼가 엎드려 생각하옵니다.
홍재혁이 보내온 편지167)
두어 간 선탑禪榻에서 한 번의 채찍질로 판단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왼쪽에서 잡아채고 오른쪽에서 끌어당겨 틈을 도모해 보았으나 짬을 낼 수가 없었습니다. 돌아보건대 이 구절은 주을묵朱乙墨이 속리俗吏의 일임을 진즉 깨닫고 나서 스스로 이와 같이 부끄러워하였다는 것을 가지고 청정한 귓가를 향하여 속삭이듯 말한 것과 같습니다.
송선松禪이 와서 홀연히 은혜로운 편지를 전하기에 도리道履가 증길增吉하시다는 서한을 살피고 나니, 위로가 되며 막혔던 가슴이 탁 트이는 것이 마치 뜨거운 것을 잡으면 찬물에 씻으러 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 내 모습은 너무도 분망奔忙하여 반각半刻도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을 여유조차 없답니다. 게다가 병마저 깊어지니

010_0647_a_01L年所一上奉候尙今闕如馬病車敗
010_0647_a_02L想必委照下情所在曷勝罪悚伏唯
010_0647_a_03L這間涵養道體連享嘏慶區區攅仰
010_0647_a_04L無日不然某太馬之齒已過八嶺
010_0647_a_05L邅其狀筆何可描重續前緣晝宵大
010_0647_a_06L我則無奈尋眞大行或似不無
010_0647_a_07L問一枉在於那間雲扄霧鑰高闢以待
010_0647_a_08L曾於京行與金相公有所談論
010_0647_a_09L案未了今自島中更垂明誨第以此
010_0647_a_10L今世無等之英才而又於佛書
010_0647_a_11L入閫域故於其答中整竭愚解則通
010_0647_a_12L人達士所可同照故問答兩書並以胎
010_0647_a_13L或可虛心咀嚼無爲眞樂與之同
010_0647_a_14L樂乎若非閤下更無饒舌處也替伸
010_0647_a_15L問安勢固然矣且投以木果意在欲
010_0647_a_16L得瓊琚果能慰此巖竇中臘月三十日
010_0647_a_17L老漢耶靈犀不昧不備謹伏惟

010_0647_a_18L
010_0647_a_19L
數間禪榻一鞭可判而左掣右礙
010_0647_a_20L啚睱不得顧此句朱乙墨儘覺俗吏
010_0647_a_21L本自如是愧向淸淨耳根邊細道
010_0647_a_22L松禪來忽攀惠字藉諗道履增
010_0647_a_23L慰豁如執熱者之逝濯也此狀千
010_0647_a_24L奔百忙無半刻淸惺之睱病又侵尋

010_0647_b_01L한결같이 저러한 모양일 뿐입니다. 이국二局을 투시投示하던 중 바쁜 가운데 틈을 내어 잠시 열어 보니, 봉사가 파사시波斯市에 들어간 것 같아서 어느 것이 황금인지 어느 것이 흙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장차 풍경소리 고요하고 촛불도 꽁다리만 남은 깊은 밤에 눈을 비비고 거듭 살펴보았답니다.
지금도 역시 송사를 대하여 눈을 부릅뜨고 싸우는 시끄러운 소리가 온 마당에 가득하다 보니 길게 쓸 수가 없어서 모두 다 그만두고 이만 그칩니다.
11. 영안부원군 김조순 공김조순 공의 호는 풍고께 올린 답서보내온 편지를 붙여 둠(上永安府院君金公祖淳號楓臯 答書附)
가만히 엎드려 생각하건대 외진 산골에 있다 보니, 일찍이 외람되게도 모시지 못했습니다. 삼가 기력과 체력은 한결같이 만안萬安하신지 여쭙지 못하였습니다. 멀리에서 삼가 엎드려 그리워하는 이 마음을 살펴 주시는 정성에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저는 한낱 버려진 물건이라 원숭이와 맹서하고 사슴과 벗을 하면서 장차 풀과 나무로 더불어서 함께 돌아가 기운이 빠져 없어지고 말 뿐입니다. 그러니 어찌 족히 받들어 듣겠습니까? 나아가 아뢸 말씀은 화선和禪께서는 종전에도 후하게 대해 주셨고 불교를 가까이하셔서 책궤를 짊어지고 찾아오시어 가르침을 펴시겠다는 의지를 피력하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성인成人의 성대한 정성에 매우 감격하여 이내 염주拈麈의 대례大禮를 실행하였고, 밝고 고요한 별실別室을 정하여 거기에 기거하도록 하고는 귀를 잡고 일러주시고, 손바닥에 있는 물건을 지적하여 명백하게 보여주어 공부를 성취하는 가운데 한 사람이 되기를 기약하였건만, 다만 스스로 그대에게 팔 남은 용기조차 없는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이제 문안의 행차를 하였으니, 그런 까닭으로 잠시 마음의 뜻을 펴서 불민不敏한 허물을 사과드리나이다.
김조순이 보내온 편지1168)
구름과 산이 가는 길이 다르고 유교와 불교는 문이 다르니, 늙어서 죽는 날까지 서로 묻고 대답을 듣고 하지는 못할 것이지만, 진실로 같은 세상에 살아도 서로 아무런 해로움이 없습니다. 이에 천 리 먼 곳에 살면서 꿈속에서조차 생각지도 못했는데 홀연히 먼저 안부를 물어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 중 의미가 너무도 정성스러웠습니다.
만약 본래부터 서로 알았던 사이이니 비록 화선和禪의 반목蟠木169)이 된다 하더라도 침개針芥170)가 서로 감응하듯171) 하는 것은 역시 선사의 가문에 이른바 지난 과거 세상의 인연이 아니겠습니까?

010_0647_b_01L一是這㨾而已投示二局撥擾蹔閱
010_0647_b_02L殆如瞽者之入波斯市中不知何者
010_0647_b_03L是金是土將欲於鈴寂燈灺之夜
010_0647_b_04L眸重省也今亦對訟擾䀨滿庭
010_0647_b_05L以拖長都閣不戬

010_0647_b_06L

010_0647_b_07L上永安府院君金公祖淳號楓臯答書
010_0647_b_08L

010_0647_b_09L
窃伏窮崖曾未叨陪謹伏未審氣體
010_0647_b_10L候一向萬安遠伏慕區無任下誠之至
010_0647_b_11L某一個棄物盟猿友鹿將與草木同歸
010_0647_b_12L澌盡而已何足奉聞就白和禪乃從
010_0647_b_13L前所厚之親釋而負笈來訪下布敎意
010_0647_b_14L深感成人之盛眷仍行拈塵之大禮
010_0647_b_15L定其明靜之別室以之居處提耳而告
010_0647_b_16L指掌而示之以期其做成箇中人
010_0647_b_17L而但愧自無可賈之餘勇也今作問安
010_0647_b_18L之行故暫伸情旨聊謝不敏之過

010_0647_b_19L
010_0647_b_20L
雲山路殊儒釋異門至老死不相
010_0647_b_21L聞問固無害於並世而生乃於千里
010_0647_b_22L夢想之外忽先致訊辭意深欵
010_0647_b_23L素相識雖曰和禪之爲蟠木針芥相
010_0647_b_24L亦師家所謂夙世因緣者非耶

010_0647_c_01L일찍이 없었던 일을 만남에 놀랍고 기뻐 찬탄합니다.
이놈은 비록 명색이 유생이라고는 하지만 나이가 이순耳順(60)이 임박한지라, 오히려 몸을 편안히 하고 목숨을 보존할 곳조차 알지 못한 채, 머리털이 하얘지도록 명리名利 가운데에서 힘을 다하여 채찍질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 나머지 육근六根과 육진六塵을 다 끊고 마음을 한곳에 모아 수행에 전념하시는 선사를 보았을 때 그 득실得失이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너무도 부끄럽고 부끄럽습니다.
화선和禪의 근기根器는 정고精固하시니 충분히 성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선사께서 자비한 마음으로 따져 물어서 일깨워 주시고, 방棒과 할喝로 경책하면서 꽃을 뽑아 들고 자리를 나누어 앉게 한다면, 다른 날 고족高足들이 스승님의 혜안慧眼을 알아보고는 틀림없이 이 말을 가지고 망령된 말이라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사문結社文은 다행히도 읽어 보게 되었으므로 인하여 보잘것없는 서문이나마 지어 보내 그것으로 먼 곳에서 찾아오신 은근한 뜻에 보답하려 하오니 자세히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쓸 말은 많으나 다 쓰지 못하나이다.
김조순이 보내온 편지2보낸 편지는 분실하였음(又失去書)
화선和禪의 병발瓶鉢(행차)이 끊어졌더니 상인上人의 편지가 들어 있는 함函이 갑자기 이르렀습니다. 기뻐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진실로 진애塵挨에 건몰乾沒한 나그네가 곧 고승高僧을 만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못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봄은 다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는 시절에 경권수불擎拳竪拂하시는 여가에 사대四大가 건강하신지 모르겠습니다. 걱정이 되고 걱정이 됩니다.
소과疏科의 서문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자세히 열람해 보았는데 기봉機鋒과 혜건慧揵의 각근脚跟이 자리를 잡아서 확실하게 정해져서 실사實事의 분상分上에서 얻은 것이 얕지 않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스님들의 전적을 열람한 것도 역시 이미 많습니다. 그러나 일찍이 상인의 조예造詣만 한 것은 보지 못했으니, 어찌 마음에 흔쾌欣快하지 않겠습니까? 이 사람의 서툴게 지은 작품은 다만 흑동동지黑洞洞地에서 더듬어 찾아낸 것인데, 상인 같으신 지혜의 눈으로 한때 착각하여 모래를 가지고 밥이라고 인정한 것일 뿐입니다.
두실斗室 태학사太學士심상규沈尙圭172)가 그 책을 보고는 애지중지하여 가지고 가더니만, 돌려주지 않아서 이번에는 부쳐 줄 수가 없으니 용서하시고 나중에 뺏어 올 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010_0647_c_01L喜讃嘆得未曾有此漢雖名爲儒
010_0647_c_02L年迫耳順尙不知安身立命之地
010_0647_c_03L白名利之中力盡鞭策之餘其視師
010_0647_c_04L割斷根塵專心修行者得失果何如
010_0647_c_05L愧甚愧甚和禪根器精固足以
010_0647_c_06L有就若家師慈悲徵難而牗之
010_0647_c_07L喝而警之拈華分座定堪爲他日之
010_0647_c_08L高足知師慧眼必不以此言爲妄也
010_0647_c_09L結社文幸以寓目仍作小序以答遠
010_0647_c_10L索之勤意粲披爲望不宣

010_0647_c_11L

010_0647_c_12L失去書

010_0647_c_13L
和禪之瓶鉢近止而上人之牘凾遽
010_0647_c_14L則所喜者非他良以塵挨乾沒之
010_0647_c_15L乃得高僧之不忘耳春盡夏肇
010_0647_c_16L未知擎拳竪拂之暇四大得復康健
010_0647_c_17L馳念馳念序文疏科屢回細閱
010_0647_c_18L機鋒慧揵脚跟牢定有以見實事分
010_0647_c_19L上所得不淺此漢閱歷衲緇亦已多
010_0647_c_20L曾未見如上人之造詣者豈不欣
010_0647_c_21L快於心此漢拙搆只是摸▼(扌+索)於黑洞
010_0647_c_22L洞地而上人慧眼一時錯認認沙
010_0647_c_23L爲飯耳斗室太學士沈公
尙圭
見其卷愛
010_0647_c_24L執留不還今次不得付送容俟後

010_0648_a_01L이놈의 근일 광경光景이 이러하니 화선께서 돌아가시면 그때 자세히 알려드리겠습니다. 편자扁字진영전眞影殿이라는 세 글자를 쓴 편액를 써서 보내긴 하지만 본래 나의 서법書法이 매우 서툴러서 상인의 은근한 뜻을 거듭 어기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억지로 도아塗雅해서 보내는 것일 뿐입니다.
운산이 길이 달라서 천 리나 서로 막혀 끊어져 있으니, 나는 이미 남쪽으로 유람할 기약이 없다 말했고, 상인께선 북쪽으로 올 소식이 없다 하시니, 평생토록 서로 만나 보지 못하게 될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섣달 그믐날은 두 곳에 다 이른답니다. 나는 선니宣尼(공자)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못하고, 상인은 여래如來의 법을 저버리지 못하니, 길은 비록 같지 않고 얼굴은 비록 알지 못하지만, 틀림없이 평생토록 마음을 알지 못했던 사이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늘에 있어서는 오직 진리요, 사람에 있어서는 오직 마음일 뿐입니다.
진리는 통달하지 않음이 없고, 마음은 비추지 못할 게 없으니, 상인은 열심히 노력하소서. 계속해서 서로 안부 전하기를 바라며 이만 줄이고 할 말을 다하지 못합니다.
12. 영명위永明尉173)의 답서 앞에 홍 정승께 올린 인장印狀에 대한 답서를 붙이다(永明尉前上洪相印狀答書附)
홍 정승의 휘는 석주奭周이고 호는 연천淵泉인데 행록行錄 서문을 받았음. 영명위의 휘는 현주顯周이고 호는 해거海居인데 묘지墓誌 후서를 받았음. 네 차례의 감사하는 편지를 올렸기 때문에 답서가 있었던 것인데 보낸 편지는 다 잃어버렸으므로 다만 보내온 편지만 3장 붙여 두었다.
홍 정승의 답서1(洪相答書)
용상龍象의 주담麈譚이요 하늘 꽃이 남긴 향기입니다. 오늘날에 이르러 지난 일을 추억해 보고 오히려 속세에 관한 꿈에서 깨어나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뜻하지도 않던 차에 선례禪禮가 홀연히 범계凡界에 떨어졌습니다.
일찍이 없었던 일을 만나고 보니 기쁘기 한량이 없었답니다. 하물며 석장錫杖을 날리셨다가 돌아가시는 길이 편안하셨고, 선황禪況도 매우 좋으시다 하시니 위로가 되었습니다. 말로는 어떻게 비유할 수가 없습니다.
이 가운데 나는 병이 든 데다 나이마저 점점 더해 가니, 단지 더욱더 정신이 희미해질 뿐입니다. 별지의 자세한 내용을 열어서 읽어 보고는 이륜彜倫의 소중함을 찬탄하였습니다. 공문空門에만 국한한 것이 아니라 곧 천서天叙174)와 천질天秩175)은 고금古今을 통해 마멸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010_0648_a_01L褫也此漢近日光景和禪歸當細聞
010_0648_a_02L扁字眞影殿
三字
書送本於書法甚踈
010_0648_a_03L重違上人勤意强此塗雅以去耳
010_0648_a_04L山路殊千里▼(尸*鬲)絕吾言旣無南遊之
010_0648_a_05L上人無北來之便恐遂平生不相
010_0648_a_06L見也然兩到臈月三十日吾不負宣
010_0648_a_07L尼之訓上人不負如來之法道雖不
010_0648_a_08L面雖不識未必非平生之知心
010_0648_a_09L天唯理在人唯心理无不達心无
010_0648_a_10L不照上人其勉旃續當相聞姑縮
010_0648_a_11L不盡

010_0648_a_12L

010_0648_a_13L永明尉前上洪相印狀洪相諱奭周
淵泉受行錄序
010_0648_a_14L永明諱尉顯周號海居受墓誌後上書四
故有答書而失去書故但付來書三張

010_0648_a_15L答書附

010_0648_a_16L洪相答書

010_0648_a_17L
龍象塵譚天花留馥到今追惟
010_0648_a_18L覺塵夢之喚惺匪意禪禮忽落凡界
010_0648_a_19L得未曾有歡喜無量矧審飛錫穩返
010_0648_a_20L禪況深勝其爲披慰匪言可喩
010_0648_a_21L中病與年添祗益睡憒而已另紙縷
010_0648_a_22L縷披覽讃嘆彜倫之重不限空門
010_0648_a_23L乃知天叙天秩亘古今磨滅不得

010_0648_b_01L팔만대장경 가운데 맨 앞에 『대보부모은중경大報父母恩重經』을 들어서 언급한 것도 진실로 이 때문입니다.
또 그 누가 구담瞿曇176)의 가르침을 삼강三綱177)과 오전五典178)의 밖이라고 말하겠습니까? 견속見屬의 두터움에 어찌 열망熱望을 그치겠습니까? 다만 한스러운 일은 폐기하여 버려둔 채 베풀어 줄 힘이 없어 장차 외로이 저버림을 면하지 못하는 일단의 고충苦衷입니다.
만약 본도本道로부터 장계로 보고하는 일이 미치지 못하게 되면, 춘조春曹179)에서 아무리 계달啓達하려고 해도 역시 호소할 길이 없을 터이니, 반드시 먼저 유단儒單부터 얻고 나서 다시 순영巡營에 고발함이 어떻겠습니까?
『불조통재佛祖通載』는 내 평생에 한번 보고 싶어 했던 책이었는데, 지금 다행히 수시垂示해 주시니 참으로 우담발화優曇鉢花를 얻은 것 같을 뿐입니다. 인편이 선 채로 재촉하고 있어서, 긴 이야기로 통고統考할 겨를이 없사오니 선사께서는 살펴 주옵소서.
홍 정승의 답서2(又)
해조음海潮音의 소리를 들은 지 오래되고 멀어지니, 비천한 싹만 부질없이 자라나고 있습니다. 지혜의 바람이 남으로 오매 범자梵字(선사의 편지)가 손안에 떨어졌습니다. 마침내 그 편지를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선황禪況은 여전하시다 하였으므로 펼쳐 본 나머지 따라 기뻐함이 한량없습니다.
대로大老께서 추운 섣달이 되었는데도 주지住持하심에 더욱 강건하시다 하니, 도력道力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이 못난 바탕을 돌아보건대 쇠락衰落이 날로 심해지고 정신과 생각도 날마다 줄어들고 있어서 생기가 없는 모양이 마치 엄자산崦嵫山180) 광경과 같습니다. 다만 스스로 모자라고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편지 가운데 “……. 마음 깊이 근념勤念하지만 간혹 거짓말을 퍼뜨려서 소문이 되어 전해지는 일이 있으니 믿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셨는데, 정말 그와 같다면 역시 한바탕 크게 웃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근래에는 더욱 무너져 내려 전에 비하여 훨씬 심하므로 두 다리는 문 밖으로 몇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지 이미 3년이나 되었습니다. 외면상으로는 정말 좌선坐禪을 성취한 듯하나 다만 한스러운 것은 방촌方寸만 한 마음속에 더러운 먼지가 아교로 붙인 것처럼 굳어져서 바라밀波羅密의 경계를 엿볼 수조차 없게 되었을 뿐입니다.
산나물 한 쟁반뿐이라 은혜를 받음이 진실로 많지만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010_0648_b_01L萬藏中首揭大報父母恩重經良有
010_0648_b_02L以也又孰謂瞿曇之敎自外於三綱
010_0648_b_03L五典也見屬之厚豈歇熱望第恨
010_0648_b_04L屛廢棄置無力可施將不免孤負
010_0648_b_05L此一段苦衷也若未及自本道狀聞
010_0648_b_06L則春曺雖欲啓達恐亦無堦須先得
010_0648_b_07L儒單更控于巡營如何佛祖通載
010_0648_b_08L平生所願寓目者今幸垂示眞不啻
010_0648_b_09L獲見優曇鉢花也便人立促不暇長
010_0648_b_10L語統考禪炤

010_0648_b_11L

010_0648_b_12L

010_0648_b_13L
潮音久邈鄙萌徒積慧風南來
010_0648_b_14L字落手遂諦間者禪況依昔披拂之
010_0648_b_15L隨喜無量大老至之臘住持益
010_0648_b_16L自非道力曷克至斯顧此朽質
010_0648_b_17L衰落日甚神思日耗奄奄如崦嵫光
010_0648_b_18L祗自歉恧而已書中云云深荷
010_0648_b_19L勤念而間有打訛爲聞風傳之不可
010_0648_b_20L若此亦足發一笑也近來頹塌
010_0648_b_21L比前愈加兩脚不出門外數步已三
010_0648_b_22L年矣外面則眞成坐禪但恨方寸之
010_0648_b_23L塵濁膠固无有窺見波羅密境界
010_0648_b_24L山蔬一盤飽惠良多無物可報

010_0648_c_01L단지 포규蒲葵181) 한 줌으로써 미미한 뜻을 조금이나마 표할 따름입니다. 『불조통재』는 이미 사계舍季(막냇동생을 이름)를 통해 부쳐 드렸습니다.
편지 말미에 신신당부한 말씀은 마음속으로는 감히 잊지 않고 있사오나 아무 힘이 없으니 어찌하겠습니까? 병든 끝이라 정신이 혼미하기까지 하여 말로는 자세히 다할 길이 없으니 전부 묵계默契했던 내용을 고찰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선 이만 그치나이다.
영명위의 답서1(永明慰答書)
한 번 이별한 뒤로 어느새 한 해가 지나갔습니다. 점점 늙어 가는 감회가 어찌 어둡고 어둡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생각 밖에 편지를 받아 황급히 펼쳐 보고 난 뒤에 그 기쁨은 마치 방미厖眉182)를 마주 대한 것 같습니다.
하물며 발우와 석장을 가지고 산사로 돌아가셨는데 강녕하시고 평온하시다 하는 말씀을 살피고 나니 간절한 마음으로 멀리에서 경하 드립니다. 보잘것없는 이 사람은 병이 든 데다 나이까지 더해지고 보니 진실로 고민苦悶이 많습니다.
은혜롭게도 『기신론起信論』 8책을 보내 주셨기에 당장 마음을 가라앉히고 연구하고 사색해 보니, 마치 미묘한 깨달음을 얻은 듯합니다. 그리하여 곧 참으로 자비한 생각을 저버리지 않아야겠다고 기약을 했을 뿐입니다.
작년 가을에 편인便人을 보냈었는데 결국은 다른 길을 돌아다니다가 빈손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런 까닭에 쯧쯧 하고 혀를 차고 말았답니다. 또 장차 병이 더 심해지고 나자 곧 전사耑使183)를 보내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 비로소 불문佛門의 공덕이 한량없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차 1포包와 향 20매枚를 보내 드리오니 산중에서 맑은 공양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태지胎紙184)에 대해서는 단지 힘이 미치지 못할까 걱정이 되긴 하겠지만, 어찌 감히 힘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나머지는 되는 대로 글을 쓰다 보니 다 펴지 못하였습니다.
영명위에게 답한 편지185)
아무개는 돈수頓首하고 말씀드립니다.
생령生靈이 복이 없어서 선백씨先伯氏 연천대감淵泉大監(洪奭周)이 갑자기 관사舘舍를 버리셨다 하니, 산야山野에 사는 사람이 어찌 일찍이 진췌시殄瘁詩186)를 읽고 나서 진실로 중생들을 위하여 한을 삼킴을 견딜 길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나라의 기둥이요 대들보이며 생민生民들의 시귀蓍龜187)이신데, 하늘이 그런 사람을 조금 더 세상에 남아 있게 하지 않고 갑자기 해로薤露188)의 노래가 들려 나오게 하니, 깊은 골짜기에 사는 아녀자들까지도 모두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으며, 체악棣蕚189)도 지극히 통곡하나니 어떻게 이 슬픔을 이겨낼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아무개는 일찍이

010_0648_c_01L第用蒲葵一把少表徹意耳通載己
010_0648_c_02L舍季許紙末申囑心不敢忘
010_0648_c_03L如無力何㢤病餘神昏言不能詳
010_0648_c_04L都考默契姑此

010_0648_c_05L

010_0648_c_06L永明慰答書

010_0648_c_07L
一別經歲雲山杳然遲暮之懷
010_0648_c_08L得不黯黯乎料外獲接手簡忙披欣
010_0648_c_09L如對厖眉矧審鉢錫還山康穩
010_0648_c_10L旋切遙賀鄙人病與齒添良多苦悶
010_0648_c_11L惠起信論八册當潜心究索如得妙
010_0648_c_12L則眞不負慈悲之念以此相期耳
010_0648_c_13L昨秋便人果由他路空手而還故
010_0648_c_14L咄咄若將成病即玆耑使之惠
010_0648_c_15L知佛門功德之無量也茶一包香二
010_0648_c_16L十枚送呈可作山中之淸供耶胎紙
010_0648_c_17L但患力不及也豈敢不盡力耶餘下
010_0648_c_18L火胡草不宣

010_0648_c_19L
010_0648_c_20L
某頓首言生靈無祿先伯氏淵泉大監
010_0648_c_21L奄捐舘舍山野爲人何甞讀殄瘁詩
010_0648_c_22L而實不勝爲衆生飮恨況邦國棟楹
010_0648_c_23L民蓍龜天不憗遺遽聞薤露窮遐婦孺
010_0648_c_24L罔不䀌傷棣蕚至慟如何可堪况某曾

010_0649_a_01L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인연을 맺은 여러 생 동안의 문하 사람이었습니다. 어찌 생각지도 않게 미록麋鹿190)도 아직 죽지 않은 해에 용이 죽고 호랑이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을 줄 알았겠습니까?
대감大監께서 중제重制191)의 초상을 당한 이래로 기력이 슬픔으로 인해서 병이 더 심해진 것이 아닌지요? 또 마음속으로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지난번에는 이미 대를 이을 아들이 없었으니 상주喪主는 그 누구를 세웠습니까? 감히 방외方外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밖으로부터 슬픈 일이 연이어져서 너무도 애절하옵기에 우러러 추모하고 몸소 위로합니다.
시간은 총총히 흘러 제대로 걷지도 못할 정도로 늙어 버렸으므로 어찌할 수가 없기에 편지를 올리는 것으로 어리석은 정성을 드리오니 다시금 죄송한 마음만 간절합니다. 다 갖추지 못한 채 삼가 올립니다.
영명위의 답서2
바다와 산이 너무 멀어서 그걸 바라보면 마치 세속 밖의 세상인 듯합니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수자手滋192)를 받고 나니 위로와 기쁨은 물론 또한 깜짝 놀라기도 하였답니다. 근일에 선미禪味가 맑고 고요하시다는 말씀을 살피고 나니, 이는 먼 곳에서 생각하는 이 마음과 딱 들어맞는 듯합니다.
기복朞服에 해당하는 인간의 재앙을 만나 몸에 그 허물이 거듭 쌓이고 형제를 잃은 고통을 당하고 보니 그 정리情理를 헤아려 알 만합니다. 또 돌연한 일을 당하여 완연頑然히 아직까지 남아 있어서 밥을 먹거나 쉬는 일은 평범함을 따르고 온갖 생각이 재처럼 싸늘하게 식어서 다시는 양계陽界에 대한 생각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나머지는 너무도 심란하여 다 쓰지 못하나이다.
13. 일逸 상인上人193)께 부침(寄逸上人)
피차간의 안부는 이미 오가는 사람에게 부촉하여 말로 전하게 하였으니, 번거롭게 말을 끄집어 낼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는 단 한마디 말로써 그대를 위하여 일생 동안 허실虛實하였던 데에 대하여 경계의 일을 말하려고 합니다.
대저 인생이란 한 세상을 사는 것이 마치 망아지가 작은 틈을 지나가듯이 빠르답니다. 우禹194)임금이 촌음寸陰을 아깝게 여긴 것이 진실로 이러한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시험 삼아 이전 옛날 통인달사通人達士들이 실천한 일들을 살펴보면, 어느 누가 도리를 저버리고 세상의 영리를 경영한 사람이 있었던가요?
우리 불가의 과거에 통달한 이들은 헤아려 볼 필요도 없고, 저 대순大舜은 밭 갈고 고기를 잡았으며,195) 중니仲尼(공자)는 양식이 끊어지는 일을 당하였고,196) 안자顏子는 지게미를 싫어하지 않았으며,197) 자방子房(장량)은 병을 핑계 대고 곡식을 먹지 않았고, 도잠陶潜(도연명)은 두미斗米를 받지 않았으며,198) 주자朱子는 보리밥을 달게 먹었습니다. 그 나머지도

010_0649_a_01L受恩庇爲結緣多生門下人豈意於麋
010_0649_a_02L鹿未死之年先聞龍亡虎逝消息耶
010_0649_a_03L審大監遭重制以來氣力得無爲悲疚
010_0649_a_04L所傷損否且窃伏念曩時旣無胤嗣
010_0649_a_05L主喪何位不敢以方外自外悲係萬切
010_0649_a_06L即當昻追躬慰躘踵無奈替伸愚誠
010_0649_a_07L還切罪悚不備謹䟽伏惟

010_0649_a_08L
010_0649_a_09L
海山脩夐望之若世外即於匪意獲
010_0649_a_10L接手滋慰喜若驚仍審近日禪味淸
010_0649_a_11L寔符遠想朞服人殃咎積身荐
010_0649_a_12L遭割半之慟揆以情理且即溘然而
010_0649_a_13L頑然尙在食息隨凡而萬念灰冷
010_0649_a_14L無復有陽界意想耳餘擾甚不戬

010_0649_a_15L

010_0649_a_16L寄逸上人

010_0649_a_17L
彼此安否已付去來人口頭道底不必
010_0649_a_18L煩提而今以一言爲君一生虛實之箴
010_0649_a_19L大抵人生一世如駒過隙禹惜寸
010_0649_a_20L良有以也試觀前古通人達士之行
010_0649_a_21L誰有背道而經營世利吾家先達
010_0649_a_22L不必打數而大舜之耕漁仲尼之絕粮
010_0649_a_23L顏子之不厭糟糠子房之謝病辟穀
010_0649_a_24L潜之不受斗米朱子之甘味麥飯其餘

010_0649_b_01L도를 실천함에 있어서 가난함을 편안히 여기고 괴로움을 즐겁게 생각한 이들은 억으로 한정할 수 없을 만큼이나 많습니다.
또 보지 못했습니까? 소진蘇秦199)과 장의張儀200)는 이익을 위하여 여섯 나라를 돌아다니며 유세遊說를 하다가 그 몸도 보전하지 못했고, 한신韓信201)과 팽월彭越202)은 이익을 위하여 나라를 정벌하다가 그 몸 역시 보전하지 못했으며, 이사李斯203)와 조고趙高204)는 몸을 잃었고, 양기梁冀205)와 장양張讓206)은 집안을 망쳤으며, 나아가 석숭石崇207)은 재물 때문에 몸을 잃었고, 양광楊廣208)은 재물 때문에 나라를 잃었습니다.
이를 말미암아 관찰해 보건대 도를 수행하면서 가난을 편안하게 여긴 사람은 그 이름을 천추千秋에 남기고 이익을 탐하면서 몸을 보양하려던 사람은 몸도 잃고 집안도 망쳤습니다.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임금이 일삼아야 할 업을 버리고 마음에 이익만을 향한다면 옳은 일이라 하겠습니까, 그른 일이라 하겠습니까? 임금이 만약 복이 있는 이라면 비록 산업을 경영하지 않고도 스스로 몸을 보전할 도리가 있겠지만, 복이 없다면 아무리 만방으로 구한다 해도 만에 하나도 얻지 못할 것이며, 마침내는 필부필부匹夫匹夫의 귀의처가 되고 말 것입니다.
헛되이 남섬부제南贍部提에 와서 한 바퀴 돌아치다가 문득 염가노자閻家老子209)를 향하여 가면 밥값을 타산하라 하리니, 날락捺落(지옥)에 들어갈 때에 일찍이 이런 등류의 설법을 들었노라고 말하지 마시게. 이는 바로 대장부가 세상에 처신하는 큰 종지랍니다. 잔질하고 마름질할 수가 있겠습니까?
14. 화은華隱 장로에게 보낸 답서(答華隱長老)
보내 주신 편지에 따져서 물은 것은 이른바 가려운 곳을 긁어 주긴 했으나 또한 상량商量할 곳이 많다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조목조목 분별하여 아뢰겠습니다. 과연 마음을 비우고 음미하고 음미해서 화합和合의 바다로 함께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것을 일러 반진공半眞空의 설이라고 하는데 누가 이런 말을 하였습니까?
대개 사물과 사물이 가고 옴에 조사祖師의 뜻 아닌 게 없습니다. 그러한즉 모든 대지가 바로 사문沙門의 한낱 좌구坐具입니다. 이 하나의 좌구 속 밝음과 어두움이 쌍쌍이 있는 살기殺機와 활기活機라고 한 말후구末後句가 원만하게 갖추어지지 않음이 없으니, 그러면 곧 이 한 좌구 밖에 더 이상 다른 일이 없을 것입니다.
다만 기연機緣을 따라서 차례로 깨달아 들어갈 뿐이니 그런 까닭에 특별히 자리를 반으로 나누어 앉도록 권한 것은 단지

010_0649_b_01L爲道而安貧樂苦者不億而已又不
010_0649_b_02L見蘇張爲利遊說而不保其身韓彭爲
010_0649_b_03L利征伐而身亦未保李斯趙高之亡身
010_0649_b_04L梁冀張讓之亡家以至石崇以財亡身
010_0649_b_05L楊廣以財亡國也由此觀之爲道安貧
010_0649_b_06L遺名千秋爲利養身者敗身亡家
010_0649_b_07L流聞則君方棄捨所業而心欲向利
010_0649_b_08L眞耶忘耶君若有福則雖不營產
010_0649_b_09L而自有保身之道無福則雖萬求而萬
010_0649_b_10L不得矣終爲匹夫匹夫之歸也虛來南
010_0649_b_11L贍部提打一遭却向閻家老子打筭飯
010_0649_b_12L而入捺落時莫道不曾說來此等語
010_0649_b_13L此是大丈夫處世之大宗也其能斟
010_0649_b_14L裁否

010_0649_b_15L

010_0649_b_16L答華隱長老

010_0649_b_17L
來書見詰可謂抓着痒處而亦多商量
010_0649_b_18L今當逐條卞白也果能虛心咀嚼
010_0649_b_19L而同歸和合之海乎其曰半眞空之說
010_0649_b_20L誰爲此語乎葢物物拈來無非祖師意
010_0649_b_21L則盡大地是箇沙門一坐具也此一坐
010_0649_b_22L具中明暗雙雙殺活機之末後句無不
010_0649_b_23L圓具則此一座外更無餘事也但隨
010_0649_b_24L機緣悟入次第故特分半座令坐者

010_0649_c_01L말후구 가운데 암일착暗一着을 보인 것입니다. 이것이 자리를 반으로 나누어 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반자半字는 진실로 친절함이 됩니다.
또 말하기를 “진공眞空은 절반이요 묘유妙有는 완전하다.”라고 하니, 그렇다면 “세존께서는 공空은 소중히 여기고 유有는 천하게 여겼으며, 가섭迦葉은 유에 대해선 능하지만 공에 대해선 어둡다.”라고 한 것은 이른바 배를 움켜쥘 곳이랍니다.
또 자리를 나누어 준 것은 살殺이요 꽃을 든 것은 활活이니, 이를 합하여 진공眞空이라고 말하고 또한 ‘묘유妙有……’라고 말하시니, 또 어쩌다가 잘못에 잘못을 더하고 계십니까?
만약 살殺과 활活을 합하여 진공이라고 하고 또한 묘유라고 말한다면, 어찌 반드시 자리를 나누어 준 것을 가지고는 단지 진금포眞金鋪(오직 한 가지 수행법만 제시함)에 암일착暗一着한 것이 되고, 꽃을 든 것을 가지고는 단지 잡화포雜貨鋪(각각의 근기에 따른 수행법의 제시함)에 명일착明一着함이 되었다고 하십니까?
또한 진공과 묘유가 동일하게 하나의 살활殺活이라고 하면, 부처님께서는 어찌하여 한 개의 살활을 가지고 세 곳에서 따로따로 전하셨으며, 구자龜者는 또한 무슨 까닭에 한 개의 살활을 가지고 세 곳에 분배하였겠습니까?
반드시 알아야만 할 것입니다. 자리를 나누어 준 것은 살의 깊은 경지(殺到底)를 보여 준 것이니, 비록 활도 갖추고는 있으나 나타내지 못하는 까닭에 다만 살이라고 말한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겹겹의 누각은 화장세계華藏世界요, 붉은 비단 장막 안에 진주를 뿌린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활의活義가 있다고 하겠습니까?
꽃을 든 것은 활의 깊은 경지(活到底)를 보여 준 것이니, 비록 살도 갖추고는 있으나 나타내지 못하는 까닭에 다만 활이라고 말한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사오백 군데 화류계의 거리요, 이삼천 군데 풍악 잡히는 누각이로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살의殺義가 있다고 하겠습니까? 문門으로 삼는 것이 같지 않아서 나그네와 주인의 다른 세계가 되고 말았으니, 그 어찌 얼버무리고 조목조목 분별하여 밝힘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또 말하기를 “세존께서 자리에 오르자 가섭도 곧바로 세존의 자리에 오르니, 세존께서 자리 반을 나누어 양보해서 앉기를 허락하였다. ……”라고 한 것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가섭이 이전부터 이미 진공에 대하여 깨닫고 있었기 때문에 세존께서는 단지 자리를 허락하여 지위를 양보한 것일 따름이거늘 어찌 법을 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알아야만 할 것입니다. 세존께서 자리를 반으로 나누어 앉게 한 것(令坐)은 바로 마음을 전한 것입니다. 가섭이 비로소 그 자리에 앉은 것은 깨달아 들어간 것이니 ‘영令’ 자가 어찌 아무 의미가 없는 글자이겠습니까?
또한 문수文殊 등 모든 보살들은 다 자리를 달리하였는데, 그것은 감히 부처님의 자리에 오를 수 없기 때문이거늘 하물며 가섭은 세존의 자리를 반으로 나누어서 곧바로 부처님의 자리에 올랐다는 말을 듣지 못했단 말입니까?

010_0649_c_01L示末后句中暗一着也此非半座耶
010_0649_c_02L則半字實爲親切也又曰眞空半妙有
010_0649_c_03L則世尊吝空賤有迦葉能有暗空云
010_0649_c_04L可謂奉腹處也又分座殺拈花活
010_0649_c_05L合之謂眞空亦謂之妙有云者又何將
010_0649_c_06L錯就錯耶若也殺活合爲眞空亦謂妙
010_0649_c_07L則何必以分座但爲眞金鋪暗一着
010_0649_c_08L以拈花但爲雜貨鋪明一着耶且眞空
010_0649_c_09L妙有同是一殺活則佛何以一介殺活
010_0649_c_10L三處別傳龜者亦何以一殺活分配於
010_0649_c_11L三處耶須知分座示殺到底雖具活而
010_0649_c_12L不現故但名殺也故云樓閣重重華藏
010_0649_c_13L紫羅帳裡撒眞珠有何活義耶
010_0649_c_14L花示活到底雖具殺而不現故但名活
010_0649_c_15L故云四五百條花柳巷二三千處管
010_0649_c_16L絃樓有何殺義耶爲門不同賓主的
010_0649_c_17L別世其何塗糊無卞白乎又曰世尊登
010_0649_c_18L迦葉直上世尊座世尊許半座讓之
010_0649_c_19L云者全不可然則迦葉前已徹悟眞空
010_0649_c_20L故世尊但許座讓頭而已何可謂之傳
010_0649_c_21L法乎須知世尊分座令坐是傳心也
010_0649_c_22L迦葉方坐其座者悟入也令字豈無意
010_0649_c_23L味耶且文殊等諸菩薩皆別座而不敢
010_0649_c_24L登佛座況迦葉不聞世尊處分而直上

010_0650_a_01L그럴 리는 만에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또 피차간에 동일한 법률을 적용시켰기 때문에 ‘자리를 나누었다.……’고 말한 것은 착각이요 틀린 말입니다. 대개 부처님의 자리는 쌍명雙明과 쌍암雙暗210)을 원만하게 갖춘 자리이고, 가섭의 자리는 다만 이것은 쌍암의 자리이니 단지 분동分同일 따름입니다.
부처님의 자리 밖에 가섭의 자리는 없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요, 가섭의 자리 밖에 부처님의 자리가 없다고 하는 것은 기필코 옳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이와 같은 까닭에 동일하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또 다만 반좌半座라고만 말했는데 지금 동률同律이라고 말하신다면, ‘반半’ 자는 어찌 연문衍文이 아니라 하겠습니까? 또 피차彼此가 둘이 아니니 그런 까닭에 한 덩어리의 금(一挺金)이라고 말한다는 것도 역시 옳지 않습니다. 스승과 제자가 따로따로 논했다면 그것이 한 덩어리의 금이 아니겠습니까? 또 스승과 제자가 차별이 있다면 그것은 잡화포雜貨鋪가 아니겠습니까?
비록 한 사람일 따름이지만, 진공을 깨달으면 공겁空劫을 완전하게 초월하여 금시今時에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의 진眞이 홀로 드러나기 때문에 한 덩어리의 금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만약 묘유妙有를 깨달으면 이래도 되지만 온갖 형상이 일제히 나타나나니 그러므로 잡화포雜貨鋪라고 말한 것입니다. 또 제일처第一處는 단지 교敎일 뿐이고, 제이처第二處는 살殺과 활活을 갖추고 있다고 말한 것은 또 무슨 의미입니까? 대개 제일처가 부처님활活께서 앉으시는 자리라면 이것은 곧 활活불佛 중에 살殺좌座일 터이니, 어찌 다만 살이라고만 하겠습니까?
그러나 비록 활活을 갖추고는 있으나 진공眞空으로써 문을 삼았으니, 그런 까닭에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며, 이래도 저래도 모두 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화살 하나로 세 개의 관문을 깨뜨린 것이니, 그러므로 조동종曺洞宗의 종지宗旨가 된 것입니다.
제이처는 하늘에서 꽃비를 내린 것이니, 이는 곧 살殺천天 중에 활活화花입니다. 그러므로 임제종臨濟宗의 종지가 된 것입니다. 제삼처에 이르러서는 위에서 말한 살과 활 두 곳을 따로 보인 것이니, 흡사 이는 격별隔別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다시 일처를 가지런히

010_0650_a_01L萬無其理也且彼此同律故分座
010_0650_a_02L云者錯錯也葢佛座雙明雙暗圓具
010_0650_a_03L之座迦葉座則但是雙暗之座也
010_0650_a_04L分同而已佛座外無迦葉座可也迦葉
010_0650_a_05L座外無佛座必不可也其如是而謂之
010_0650_a_06L同律耶又特云半座而今云同律
010_0650_a_07L半字豈非衍文耶又彼此無二故云一
010_0650_a_08L挺金者亦不可也師資別論則非一
010_0650_a_09L挺金耶且師資差別則爲雜貨鋪耶
010_0650_a_10L雖是一人已悟眞空則全超空刼不落
010_0650_a_11L今時而一眞獨露故可云一挺金也
010_0650_a_12L若悟竗有則伊麽也得而萬像齊現
010_0650_a_13L故云雜貨鋪也又第一處但敎第二處
010_0650_a_14L具殺之活云者又何言耶葢第一處佛
010_0650_a_15L所坐之之則是即活之殺何爲
010_0650_a_16L但殺也然雖具活而以眞空爲門故云
010_0650_a_17L伊麽也不得不伊麽也不得伊麽不伊
010_0650_a_18L麽摠不得則是一鏃破三關故爲曺洞
010_0650_a_19L宗旨也第二處天所雨之華是即殺
010_0650_a_20L之活故謂具殺之活也然雖具殺
010_0650_a_21L而以妙有爲門故伊麽也得不伊麽也
010_0650_a_22L伊麽不伊麽摠得則是分明箭後路
010_0650_a_23L故爲臨濟宗旨也至第三處則上來殺
010_0650_a_24L活二處別示似是隔別故今更一處齊

010_0650_b_01L보여 준 것입니다.
대개 말후구末后句(선禪의 마지막 관문) 가운데에는 살殺과 활活이 원만하게 갖추어져 있어서 일시에 앞과 뒤가 없나니, 정히 사람의 두 다리와 같아서 왼쪽과 오른쪽이 비록 다르지만, 두 발 다 한 사람의 것이기 때문에 지금은 다시 일시에 나란히 보여 주어서 살과 활은 다 같은 한 가지 물건이라는 것을 제시한 것입니다.
육조六祖 대사 아래로 청원靑原 선사에 이르러서 자리를 나누어 준 것은 살이라서 여래선如來禪이 된다 하였는데, 이분이 곧 조동종의 종주가 되었습니다. 남악南岳은 꽃을 든 것은 활이라서 조사선祖師禪이 된다고 하였는데, 이분이 곧 임제종의 종주가 되었습니다.
또 다만 조사 활인검活人劒의 문중門中에 대하여 마조馬祖에 이르러서 백장百丈211) 선사는 큰 틀(大機)212)을 얻었고, 황벽黃蘗213) 선사는 큰 활용을 터득하였습니다.
『설화說話(선문염송설화)』에 이르기를 “한산寒山이 손뼉을 치니, 습득拾得은 싱글벙글 웃는다.”라고 하였으니, 저 가운데에서 단지 살인도殺人刀와 활인검活人劒만을 말해 보십시오.
묻기를 “지금은 왜 단지 활문活門의 아래에서도 역시 살과 활을 갖추고 있다고 말한 것입니까?”라고 하자, 대답하기를 “앞에서는 진공과 묘유는 살이理도 되고 활사事도 된다고 말했으니, 이것이 바로 이理(본체)와 사事(현상)가 걸림이 없는 법계인 것입니다. 지금은 큰 기틀과 큰 활용을 가지고 살과 활로 삼았으니, 이것은 바로 현상과 현상이 걸림이 없는 법계인 것입니다. 대개 단지 현상계 가운데에는 주인이 있고 나그네가 있으며, 본체와 작용이 있습니다. 주인과 본체는 큰 기틀이요, 나그네와 작용은 큰 활용입니다. 반드시 살과 활은 여기에 양중兩重이 있은 연후에 부처님과 조사님께서 실천하신 법체를 알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할 것입니다. 세 곳에서의 살과 활의 대의大意가 어찌 명백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청풍淸風 장로의 통방정의通方正意입니다. 만약 이 취지를 알면 지금까지 품고 있던 온갖 의혹들이 부서져 내리지 않을 게 없을 것입니다. 만약 저 「삼성장三聖章」에서 제2구로써 기틀과 활용의 삼요三要로 삼는다면, 그것은 활안活眼의 수단手段이기에 조條와 장章에 구애받지 않기 때문에 제2구의 방편과 진실의 3구로써 제1구의 삼요로 삼은 것입니다.
장령탁長靈卓도 또한 단지 방편으로써 삼현三玄을 삼요三要로 삼았는데, 정해진 법이 없는 것을 보리菩提라고 말한다고 한 것은 이를 두고 말한 것입니다. 또 격내格內니 격외格外니 하고 논란을 벌이는 것은 흡사 의리義理 격외선의 법체法軆를 분명히 알지 못하는 까닭에

010_0650_b_01L示也葢末后句中殺活圓具一時無前
010_0650_b_02L正如人之雙趺左右雖別而同是
010_0650_b_03L一人故今更一時齊示以示殺活同是
010_0650_b_04L一物也至於六祖下靑原得分座殺
010_0650_b_05L而爲如來禪即曺洞宗主也南岳得拈
010_0650_b_06L華活而爲祖師禪即臨濟宗主也
010_0650_b_07L但於祖師活人劒門中至馬祖一喝
010_0650_b_08L丈得大機黃蘗得大用說話云寒山
010_0650_b_09L撫掌拾得呵呵到這裡只道得箇殺
010_0650_b_10L人刀活人劒也問曰今何於但活門下
010_0650_b_11L亦具殺活也耶答曰前以眞空妙有爲
010_0650_b_12L是理事無碍法界也今以大
010_0650_b_13L機大用爲殺活是事事無碍法界也
010_0650_b_14L但於事中有主有伴有體有用主與
010_0650_b_15L大機也伴與用大用也須知殺活
010_0650_b_16L此有兩重然後可知佛祖行李之法體
010_0650_b_17L三處之殺活大意豈不明白乎
010_0650_b_18L是淸風長老及通方正意也若知此意
010_0650_b_19L則所來諸疑無不撲落也若其三聖章
010_0650_b_20L以第二句爲機用三要者活眼手段
010_0650_b_21L拘條章故以第二句權實三句爲第一
010_0650_b_22L句三要也長靈卓亦以但權三玄爲三
010_0650_b_23L要也無有定法名菩提此之謂也
010_0650_b_24L格內格外之難似是不明義理格外之

010_0650_c_01L이와 같이 혼란을 일으켜 천착穿鑿하는 것입니다.
대개 의리선義理禪이라는 것은 새로이 훈습함(新熏)을 밝힌 것입니다. 『도서都序』, 『절요節要』 등 수행하여 깨닫고 부처를 이룩하는 법은 의리義理에 당연한 일입니다. 일체의 중생들은 모두 다 번뇌로 생사에 속박된 범부(具縛凡夫)이니, 그렇다면 반드시 먼저 깨닫고 나서 뒤에 수행을 하여 악惡을 끊고 선善을 닦아서 자신도 이롭고 다른 사람도 이롭게 하는 것이 됩니다. 자성을 보아 부처님이 된다는 설은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라 해도 바뀌지 않을 목표로 삼을 만한 높은 품격입니다. 그런 까닭에 의리선義理禪이라고 말하는데, 또한 격내선格內禪이라고 말하는 것도 가능한 일입니다.
격외선格外禪이란 본분本分을 밝힌 것입니다. 완벽한 번뇌로 인하여 생사에 속박된 범부로서 스스로 마음이 곧 부처라고 믿고 있거늘 어떻게 깨닫고 닦아서 마침내 부처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그 이유는 부처님을 응당 다시 부처님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바로 본분납자本分衲子214)의 말로 대장경의 가르침 가운데에서 깨닫고 닦아서 부처를 이룩한다는 격식의 말을 멀리 벗어났기 때문에 격외선格外禪이라고 말하는데, 또한 교외별전敎外別傳인 일미선一味禪이라고도 말합니다.
이 격외선 가운데에도 또한 두 가지의 문門이 있으니, 첫째는 진공문眞空門에 입각한 것으로 곧 부처를 만들어 내는 것은 모두 하나의 진공眞空으로서 불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습니다. 그런 까닭에 마음이 곧 부처라고 말한 것이니, 그렇다면 온 대지大地가 한 덩어리의 금(一挺金)입니다. 그러므로 순금 점포(眞金鋪)인 여래선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둘째는 묘유문妙有門에 입각한 것으로 곧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 부처님도 명백하고 분명하며 생겨남도 명백하고 분명하니, 하나하나가 바로 천진면목天眞面目이거늘 어찌 꼭 깨닫고 닦아야만 부처를 이룩한단 말입니까?
부처님과 조사님이 이 세상에 출현하심에 바람이 불지 않아도 파도가 일어났으니, 대장경의 가르친 그 어느 곳에 또한 이런 이야기가 나온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잡화의 점포(雜貨鋪)인 조사선이라고 말한 것이니, 곧 꽃을 든(拈花) 소식입니다.
이런 까닭에 의리선은 단지 새로이 훈습함에 입각한 것이고, 격식 밖의 두 가지 선(여래선과 조사선)은 단지 본분에 입각한 것입니다. 지금은 그 본래 격별隔別이라서 물과 불뿐만이 아니니, 어찌 흐리멍덩하게 분간하지 못하여 제멋대로 말하여 혼란을 야기한단 말입니까?
오계五戒를 받기 위하여 계사戒師를 청하는 가운데 스승에 대한 말은 볼 수가 없다고 하였는데, 이는 곧 옛사람에게서 전해 내려온 말입니다.

010_0650_c_01L法軆故如是胡亂穿鑿也葢義理禪者
010_0650_c_02L明新熏也都序節要等悟修成佛之法
010_0650_c_03L義理當然以一切衆生皆是具縛凡夫
010_0650_c_04L則必須先悟後修斷惡修善自利利他
010_0650_c_05L而見性成佛之說三世諸佛不易之標
010_0650_c_06L故名義理禪亦可夕格內禪也
010_0650_c_07L外禪者明本分也以完是具縛凡夫
010_0650_c_08L而自私即心是佛何須悟修方成耶
010_0650_c_09L佛不應更作佛故也此是本分衲子之
010_0650_c_10L逈出於藏敎中悟修成佛之格言
010_0650_c_11L名格外禪亦名敎外別傳一味禪也
010_0650_c_12L此格外禪中亦有二門一約眞空門
010_0650_c_13L則生佛都是一眞空不增不減故云即
010_0650_c_14L心是佛則盡大地一挺金故名眞金鋪
010_0650_c_15L如來禪即分座消息也二約妙有門
010_0650_c_16L則山是山水是水佛也端端的的
010_0650_c_17L也端端的的一一是天眞面目何必悟
010_0650_c_18L修成佛耶佛祖出世無風起浪藏敎
010_0650_c_19L何處亦有此等說乎故名雜貨鋪祖師
010_0650_c_20L即拈花消息也是故義理禪但約
010_0650_c_21L新熏格外二禪但約本分也今本隔
010_0650_c_22L不啻水火其何儱侗不分胡說亂道
010_0650_c_23L

010_0650_c_24L
五戒請師中不見師之說乃古人傳來

010_0651_a_01L마음으로 헤아려 알려고 생각한다면 『범망경梵網經』 가운데 백억의 석가釋迦가 직접 본신本身 노사나盧舍那 부처님께 계법戒法을 받아서 세계에 유통流通시켰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화상和尙께서 스승이 이를 제지했다고 말씀하신 것은 잘못입니다. 이는 바로 계를 설해 주시는 본사本師인데 어찌 이를 제지하였겠습니까? 두 법사를 바꾸어서 배치한 것은 이것 또한 옛날 사람이 여러 가지로 설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문수文殊의 경우는 바로 세간의 눈이요 또한 일곱 부처님의 조사祖師였으니, 그렇다면 문수로 계사를 삼는 의미가 우세하였기 때문에 바꾸어 배치했던 것입니다.
어찌하여 “계를 설하는 사람이 문수의 지혜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심하게 꾸짖어 말하였는데, 그것은 그 증계證戒 동학同學 등의 스승은 지금 사람들에게도 다 스승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다만 토끼를 쫓다가 옷이 젖는 줄도 몰랐다고 한 말만 알았을 뿐입니다. 이 사천하四天下의 논란에 대해서는 선사께서도 스스로 몽매하다는 증명입니다.
사바세계 가운데에는 백억 개의 사천하가 있으며, 그 하나하나의 사천하마다 해동조선국海東朝鮮國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사바세계에는 비슷한 찰토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그렇다면 해동조선국이라는 말도 비단 백억뿐만이 아니라 또한 한량없고 끝이 없이 많아야 할 것입니다.
만약 이 ‘차사천하此四天下’라는 네 글자가 없다면, 이 남섬부南贍部는 백억이나 되는 사천하 중에 어떤 사천하의 남섬부주에 해당하는 것입니까? 더구나 본 경전 가운데에서도 역시 이 ‘차사천하’라는 네 글자가 있습니까?
만약 여래의 말씀이라면 번역하는 사람이 과연 알지 못하고 문자를 안치하여 이런 중첩된 문장이 생기게 된 것입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또 ‘할喝’이라는 소리에 대한 논란도 역시 생각으론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일一과 다多로 분별하는 별집別執이 아니겠습니까?
경문에 이르기를 “한량없고 끝이 없는 계경契經의 바다를 한마디 말로 연설하여 남김이 없게 하리라.”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한마디 말 가운데에도 오히려 끝없는 계경의 성聲과 명名과 구句와 문文이 있거늘 더군다나 한마디 ‘할喝’ 가운데 어찌 네 마디 할의 다른 소리가 없는 것입니까?
또 『법화경』 가운데 부처님께서 한마디 말로써 사성四聖215)과 육범六凡216)의 소리와 널리 호응한다고 한 가운데 한마디 음성 속에는 본래부터 사성과 육범의 소리를 다 갖추고 있기

010_0651_a_01L之說而想心擬於梵網經中百億釋迦
010_0651_a_02L親受戒法於本身盧舍那而流通於世
010_0651_a_03L界也而和尙師除之云者非也此是
010_0651_a_04L說戒本師何以除之耶二師換配者
010_0651_a_05L此亦古諸般所說而文殊是世間眼
010_0651_a_06L爲七佛祖師則以文殊爲戒師之義爲
010_0651_a_07L故換配也此何深責說戒者不當
010_0651_a_08L文殊之智云者其證戒同學等師今人
010_0651_a_09L皆能當其師乎但知逐兔不覺露濕衣
010_0651_a_10L此四天下之難師亦自昧者也
010_0651_a_11L娑婆世界中有百億四天下一一四天
010_0651_a_12L皆有海東朝鮮國之言也且娑婆同
010_0651_a_13L刹亦無數則海東朝鮮國之言
010_0651_a_14L但百億亦有無量無邊也若無此此四
010_0651_a_15L天下四字則此南贍部於百億四天下
010_0651_a_16L何四天下之南洲耶況本經中
010_0651_a_17L有此此四天下四字耶若如來言則譯
010_0651_a_18L師果不知安文作字而有此重疊之文
010_0651_a_19L思之又喝聲之難亦未之思也
010_0651_a_20L非一多別執耶經云無量無邊契經海
010_0651_a_21L一言演說盡無餘則一言中尙有無邊
010_0651_a_22L契經之聲名句文況一喝中豈無四喝
010_0651_a_23L之別聲乎又法華中云佛以一言
010_0651_a_24L應四聖六凡聲之一音中本具四聖六

010_0651_b_01L때문에 중생의 근기를 따라 널리 호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마디 음성 중에 만약 온갖 소리가 없다면 어찌 널리 호응해 줄 수 있겠습니까? 일과 일 사이에 걸림이 없다는 말은 마땅히 이와 같은 뜻입니다. 또 ‘할喝’은 중화국 사람들의 소리이니 어찌 방언方言의 말에 대하여 논란을 벌일 수가 있겠습니까?
이상에서 변론했던 모든 절목은 진실로 선문禪門의 긍경처肯綮處(요점)이니 정녕 수행하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마음을 두어 분별해서 밝혀야 할 대절大節입니다. 그런 까닭에 어리석은 정성을 다하였습니다. 과연 찾아뵙고 안부를 여쭐 마음이 없는데도 마음을 비우고 이렇게 서로 비추어 보는 것이라면, 진실로 이것은 천 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좋은 인연일 것입니다.
만약 오히려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면 피를 토하도록 울어도 소용이 없으니 입을 다물고 남은 봄을 보내느니만 못할 것입니다. 하하.
15. 기봉 장로에게 『선문수경禪文手鏡』에 대하여 읊은 시에 대한 답서읊은 시를 붙여 둠(答奇峰長老吟禪文手鏡詩 吟詩附)
逐旋揑合成塊字     여기저기에서 긁어 모아 문자 덩어리를 만들었고
呑吐與人作醍醐     삼켰다가 토해 내어 사람들과 제호醍醐를 만들었네.
無文印字還文字     무늬 없는 도장의 글자를 문자로 돌려놓아
因盲活眼揠苗多     눈먼 활안活眼으로 인하여 알묘揠苗217)만 많게 했네

但着文字是常見     단지 문자에만 집착하는 건 바로 상견常見이니
驢年可得成佛去有句   나귀해에나 성불成佛할 수 있을 것일세유구有句
但無文字是斷見     단지 문자가 없다면 그것은 바로 단견斷見이니
焚燒善根可憐生無句   선근善根을 모조리 태울 것이라 가련한 삶이로다무구無句
亦有亦無小兒戱     있다 해도 없다 해도 어린아이 장난 같은 일이니
魑魅魍魎徧大地兩亦句  이매망량魑魅魍魎 도깨비들 대지에 깔렸구나양역구兩亦句
非有非無無脚跟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 하면 각근脚跟이 없음이니
隨風飄蕩何時休雙非句  바람 따라 정처 없이 떠돌 터이라 어느 때 멈추랴쌍비구雙非句

4구를 분별하여 집착하는 까닭에 사면四面이 마치 커다란 불덩어리와 같아서 다 들어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不離文字是活眼     문자를 여의지 못한 것은 바로 활안活眼이요
石人夜聽木雞聲有句   돌로 된 사람은 밤에 나무로 된 닭소리를 듣네유구有句
不卽文字難能手     문자와 합하지 않으면 솜씨를 발휘할 수가 없고
道火不曾燒却口無句   말로 불을 외침은 일찍이 입을 태우지 못한다네무구無句
亦離亦卽圓通門     여의는 것도 합하는 것도 다 원통문圓通門이요
懸崖撒手丈夫兒兩亦句  벼랑 끝에서 잡은 손을 놓는 것이 진정 장부라네양역구兩亦句
不卽不離出格外     합하지도 않고 여의지도 않음은 격외格外를 벗어난 것이요
春花滿地子䂓啼雙非句  봄꽃은 온 땅에 가득한데 자규子規만 울고 있네쌍비구雙非句

4구가 서로 합하는 까닭에 사면이 마치 시원한 못물 같아서 다 들어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010_0651_b_01L凡聲故能隨機普應也一音中若無諸
010_0651_b_02L則安能普應也事事無碍當如是
010_0651_b_03L且喝是中華之聲有何方言之言
010_0651_b_04L論哉

010_0651_b_05L
上來卞論諸節實是禪門肯綮處正是
010_0651_b_06L學者所當留心卞白之大節故竭愚以
010_0651_b_07L果無拜鴈之念而虛心相照則眞
010_0651_b_08L是千載一遇之好因緣也若猶謂不然
010_0651_b_09L則啼得血流無用處不如緘口過殘春
010_0651_b_10L呵呵

010_0651_b_11L

010_0651_b_12L答奇峰長老吟禪文手鏡詩吟詩附

010_0651_b_13L
逐旋揑合成塊字呑吐與人作醍醐

010_0651_b_14L無文印字還文字因盲活眼揠苗多

010_0651_b_15L
但着文字是常見驢年可得成佛去


010_0651_b_16L但無文字是斷見焚燒善根可憐生


010_0651_b_17L亦有亦無小兒戱魑魅魍魎徧大地兩亦


010_0651_b_18L非有非無無脚跟隨風飄蕩何時休雙非

010_0651_b_19L
四句別執故四面如大火聚皆不可入

010_0651_b_20L
不離文字是活眼石人夜聽木雞聲


010_0651_b_21L不即文字難能手道火不曾燒却口


010_0651_b_22L亦離亦即圓通門懸崖撒手丈夫兒兩亦


010_0651_b_23L不即不離出格外春花滿地子䂓啼雙非

010_0651_b_24L
四句相即故四面如淸凉池皆可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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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4구로 된 게송을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지금 이 무늬 없는 도장의 글자가 없으면 문자로 서술하는 일은 끝나고 말 것입니다. 이것은 별집別執의 맹안盲眼입니까, 이것은 상즉相卽의 활안活眼입니까?
과연 이것이 상즉의 활안이라고 한다면 부처님과 조사가 어느 곳에서 존재하느니 없어지고 마느니 하는 격별隔別의 단견이라든가 상견의 견해가 있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는 아무 말 없이 시설示說하였기 때문에 대기원응大機圓應이요, 조사는 설하기는 했으나 설함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대용직절大用直截입니다. 그러니 어찌 가르침 밖에 선禪이 있을 것이며, 선 밖에 가르침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선은 바로 부처님의 마음이요 가르침은 바로 부처님의 말씀이니, 어찌 삼계의 거룩한 성인으로서 마음과 입이 각각 다르다 하겠습니까? 이와 같을진댄 어찌 활안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과연 이것이 별집別執의 맹안盲眼이라고 한다면, 어찌 막대기를 흔들어서 달을 치려고 할 뿐이겠습니까? 쟁기를 가지고 와서 곤륜산崑崙山을 손상하려고 하고 흙덩어리를 들고 하충河衝을 메우려고 하는 것일 테니, 부처님과 조사님의 언교言敎가 이미 은혜가 너무 커서 갚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천경千鏡도 역시 작은 티끌로 큰 산에 보태려는 것입니다.
만약 보아서 사무치면 일생 동안 학문을 참구하는 일을 마치고, 본래 한 청정한 물이 뱀과 소를 따라 사邪가 되기도 하고 정正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그러나 반드시 사인지 정인지를 알고 나면 모두가 눈 속에 꽃일 뿐입니다. 허噓.
백파 행장(行狀)
상제上帝께서 본성本性을 내려 주시니 하민下民이 그 본성을 받자왔습니다. 만물萬物 중에 가장 귀한 이유는 사람에게는 오륜五倫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극한 성인께서는 가르침을 내리시고 대사大士께서는 널리 퍼뜨려 천양하였으므로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존귀한 존재가 되셨습니다.
저 삼학三學(戒ㆍ定ㆍ慧)을 닦고 오히려 하기 어려운 일을 편행偏行하였지만, 쌍수雙修(定慧雙修)라고 해서 어찌 쉬웠겠습니까? 천지간의 기운을 받아 이곳에 와서 미묘한 궤칙을 원만하게 나타내었으니, 어찌 특이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분이 바로 우리 스님이셨습니다.
건륭乾隆(청淸나라 고종高宗의 연호年號) 정해丁亥(1767)년 4월 11일곧 우리 영묘英庙(영조) 44년에 화상께서 호남 무장현茂長縣에서 태어나셨다. 성은 이李씨이고 본관本貫은 전주全州이며 선원璿源에서 갈려 나왔으니 덕흥대군德興大君218)이 11대 할아버지이다.
휘諱는 긍선亘璇이고 호號는 백파白坡이며, 정종正宗의 법을 이어받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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諦觀此四句偈今此無文印字述文字
010_0651_c_02L之貶是別執盲眼耶是相即活眼耶
010_0651_c_03L果是相即活眼則佛祖何處有此有無
010_0651_c_04L隔別之斷常見耶佛則無說示說故
010_0651_c_05L機圓應也祖則說而無說故大用直截
010_0651_c_06L豈敎外有禪禪外有敎耶禪是佛
010_0651_c_07L敎是佛語豈以三界大聖而心口
010_0651_c_08L各別耶其如是而烏可謂之活眼乎
010_0651_c_09L是別執盲眼則何啻掉棒打月操耕來
010_0651_c_10L而欲損崑崙擧土塊而擬塞河衝佛祖
010_0651_c_11L言敎旣恩大難酬則我之千鏡亦是
010_0651_c_12L纖塵足岳也若也見得徹去一生叅學
010_0651_c_13L事畢安知本一淨水隨他蛇牛爲邪
010_0651_c_14L爲正耶然須知邪正都盧眼裡華

010_0651_c_15L

010_0651_c_16L行狀

010_0651_c_17L
上帝降衷下民禀賦最貴乎萬物者
010_0651_c_18L以其有五倫至聖垂誥大士弘闡
010_0651_c_19L尊乎衆庶者以其修三學偏行尙難
010_0651_c_20L雙修豈易間氣斯來妙軌圓現豈異
010_0651_c_21L人哉是我師也乾隆丁亥四月十一日
010_0651_c_22L即我英庙朝
四十四年
和尙示生于湖南茂長縣
010_0651_c_23L李氏貫全州派出璿源以德興大君
010_0651_c_24L爲十一代祖諱亘璇號白坡法嗣正

010_0652_a_01L청허선사淸虛禪師의 25대 법손이시다. 할아버지의 휘는 형삼亨三이고, 아버지의 휘는 종환宗煥이며, 큰아버지의 휘는 천주天柱로 전 유후裕後를 이어 3세에 걸쳐 효행孝行을 갈아 치우지 않았다. 어머니는 김해 김씨로 역시 시부모님에게 효행이 극진하였으니 그 지아비의 짝이 되었다.
화상께서는 효행 가문의 아들로 어머니가 스님을 잉태하였을 때는 태중에서 요동치는 일이 없었고, 강보襁褓에 쌓여 있을 땐 보채는 일이 없어서 어머니로 하여금 수고로움을 끼친 일이 없으셨다.
아침저녁으로 잠자리를 살펴 드리고 문안인사를 드렸으며, 나갈 때는 가는 곳을 고하고 들어와서는 다녀왔다는 보고를 하였으며, 가정의 교훈이 일자一字로 그은 듯하였으니, 참으로 이른바 “효도하고 순종하는 사람은 또한 효도하고 순종하는 자식을 낳나니 처마에서 떨어지는 물과 차이가 없다.”는 말이 여기에서 사실이라는 믿음을 준다. 그러나 불상不常한 일이 있고 무방無方의 도에 합하기도 하였다.
계묘癸卯(1783)년건륭乾隆 50년219) 정묘조正庙朝 7년에 이르러 선운사禪雲寺에서 추경鄒經(원래는 『맹자』라는 책을 말하는데 여기에서는 유경을 말함)을 과송課誦하고 간간이 축전竺典(불경)을 열람하곤 하셨다.
그러다 홀연히 하루는 놀라서 찬탄하며 말하기를 “목련目連은 지극한 고통을 받는 어머니를 구원하였고, 현사玄沙220)는 영락永樂에서 아버지를 득도시켰다 하니, 이야말로 효도의 원遠이라 할 수 있거늘 어찌하여 부모님은 세속의 사랑에 구애되어 머물러 있기를 집착하시면서 출가를 허락하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성을 넘어 출가했다는 옛일을 되밟아 부모님께 고하지 않고 출가하셨다.갑진甲辰(1784)년 4월 초8일
은사 스님의 휘는 시헌詩憲이고 계사戒師 스님의 호는 연곡蓮谷이시다. 이로부터 세속의 경전에는 전혀 뜻을 두지 않고, 곧바로 정법正法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강론하는 자리는 모조리 참석하였고 무시霧市221)에서는 값을 사양하였으며, 진리의 무더기를 깊이 궁리하였고 영인迎刃222)에 뿌리를 내렸다.
경술庚戌(1790)년건륭 57년 정종正宗 14년에 설파雪坡 화상에게서 구족계를 받고, 몇 마디 말을 나누기도 전에 활과 칼끝이 서로 겨누는 것과 같았다. 그러자 화상은 크게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동쪽 나라의 지남침이 네 몸에 달렸으니 부지런히 수행하라.”라고 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안 돼서 화상께서 세상을 떠나셨는데경술년 9월 그믐에 구족계를 받았는데, 이듬해 정월 초3일에 스승이 입적하셨다. 비록 검은 수건을 머리에 걸쳤으나 사실은 스승의 말씀이 귓가에 들리는 듯하니, 스스로 기뻐하면서 저버림이 없어야 할 것이라고 다짐하였다.
나이가 26세에 이르러 띠를 모아 작은 암자를 짓고 거기에 머물면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접대하였다. 깨달음에 대한 이해가 높고 밝으며 변론辨論이 시원시원하였다. 그러나 자신은 허부虛浮하고 광망狂妄한 지혜라서 문의文義의 바다에 골몰하며, 위교僞巧의 정견情見이라 명상名相의 무더기에서 얽혀 있으니, 어느 여가에 선정이 맑아지고 생각이 고요해져서

010_0652_a_01L宗於淸虛禪師爲二五世孫祖諱亨三
010_0652_a_02L考諱宗煥伯諱天柱承前裕後三世
010_0652_a_03L不替孝母金海金氏亦能孝舅姑以
010_0652_a_04L配其夫也和尙以孝家之子懷胎不動
010_0652_a_05L襁褓不啼令萱堂勞未有貽昏晨定
010_0652_a_06L出入告面於家庭訓若畫一眞所
010_0652_a_07L謂孝順還生孝順子簷水不差實信乎
010_0652_a_08L斯矣然有不常之事合無方之道
010_0652_a_09L癸卯乾隆五十年
正庙朝七年
於禪雲課誦鄒經
010_0652_a_10L閱竺典忽一日愕且唶曰目連救母於
010_0652_a_11L極苦玄沙度父於永樂此眞孝之遠
010_0652_a_12L而其奈父母拘於俗愛執留不許何
010_0652_a_13L於是躡踰城古事不告出家甲辰四月
初八日

010_0652_a_14L老諱詩憲戒師號蓮谷自是不留意於
010_0652_a_15L俗典直下手於正法歷叅講肆霧市
010_0652_a_16L讓價深窮義叢盤根迎刃庚戌秋乾隆
五十
010_0652_a_17L七年正宗
十四年
受具於雪坡和尙未及數語
010_0652_a_18L箭鋒相投和尙大悅曰東國指南
010_0652_a_19L乎爾躬勤而行之居無何和尙化去
010_0652_a_20L受具於庚戌九月晦
年正月初三日師入寂
雖墨巾罹首實師言
010_0652_a_21L在耳豈自喜無負年至冠六把茅住
010_0652_a_22L接待方來悟解高明辨論決穴
010_0652_a_23L自謂虛浮狂慧汨沒於文義之海僞巧
010_0652_a_24L情見纒繞於名相之叢何暇澄禪靜慮

010_0652_b_01L망기忘機223)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하고 한탄하였다.
이런 까닭에 당시 나이 45살가경嘉慶 16(1811)년 신미辛未 순종純宗 11년이다에 이미 지난 일은 탓해야 소용없음을 깨달았고, 앞으로 바른 길을 좇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았다. 강론하던 책상을 용감하게 거두고 초산楚山 용문동龍門洞에 띳집을 짓고 선정禪定을 닦으면서 아울러 지혜도 균등하게 하였다.
팔표八表(八方)의 용상龍象(학식이 높은 승려)들이 가르침을 진리로 삼아 학문의 의문점을 밝히고 결단하려고 하였고, 또한 사안師安이 나란히 앞으로 나와서 간청하여 말하기를 “만약 가르침에 대한 글(경전)에 대해서는 물어 볼 곳이 없지 않지만, 선禪의 지취에 이르러서는 장차 흔적도 없게 될 것이니, 어찌 번민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법을 전하여 유통流通하는 것은 바로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니, 스승님께서는 깊이 생각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사양하다가 하는 수 없어서 현문玄門을 거듭 떨치고용문사龍門寺에서 5년 동안 안거安居하였고, 다시 운문사雲門寺에서 선지禪旨를 크게 드날렸다., 다시 후대에 물려주어 전하는 계책을 삼으려 하여 먼저 임제삼구臨濟三句를 가지고 한 시대의 선禪과 교敎를 다 포괄하여 『선문수경禪文手鏡』이라고 하였는데, 여러 가풍의 장소章䟽를 끌어다가 비추어서 말마다 밝게 드러나지 않음이 없게 하였으며 구절마다 자연히 타합打合하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뱀의 발을 그려 넣은 격이 되었으니, 문자를 비록 봉창蜂窓에 비유하긴 하지만 수모水母는 오히려 하목蝦目을 기다릴 뿐이다.
이런 까닭에 『선문염송』의 은밀하고 드러난 수백 칙則 중에 ‘근거가 사라짐을 깨달음(了沒巴鼻)’과 ‘영양이 뿔을 걸다(羚羊掛角)’라는 본분진여本分眞如를 자세하게 풀이하셨으며, 『법보단경』의 요점을 해석하여 33분 조사님의 ‘사람의 마음을 직관함으로써 부처의 깨달음에 도달하는 진리’를 세상에 전한 가업을 분명하게 보여 주셨다.
또한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의 교리에 나아가 종지를 밝힌 해 내기 어려운 수단을 발양發揚하였고, 『고봉선요高峰禪要』의 마음을 분발하여 관문을 통하는 지름길인 종안宗眼을 분명하게 보여 주었다.
또 『작법절차作法節次』를 다시 편집하였고 『기신소기起信䟽記』를 교정 간행하였으니, 세속제世俗諦의 장엄함과 합하여 미묘한 법의 공양을 이룩하지 않음이 없었다.
자리를 잡고 거주하니 신비한 양이 운문사에 나타났고신령한 산인 백양사 사이에 머물러 계심이 백 년에 이따금씩 산문을 벗어나 유람도 하셨는데, 수백 년을 내려오는 동안 양을 보았다는 말은 들은 일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하얀 양이 도량에 내려왔는데, 마치 돼지와 개가 한 장소에 모여 늙은이나 젊은이나 할 것 없이 날마다 항상 보았다., 인연이 있어서 이르는 곳엔 영물인 거북이가 화장세계에 환태幻胎하였다바위 모양이 거북이를 닮았기 때문에 구암龜岩이라고 한다..
부처님 가르침의 은혜를 잊기 어려워 영당影堂을 짓고 선사님의 진영眞影을 봉안하고는 부처님의 제도를 어기지 않고, 법규를 세워서 후세 법손들을 위한 모규模規를 시설하고 또한 인간이 살아가는 도리의

010_0652_b_01L得入於忘機之域乎是以行年四十有
010_0652_b_02L嘉慶十六年辛未
純宗十一年也
悟徃不諫知來可追
010_0652_b_03L勇撤講案結茆於楚山龍門洞習定均
010_0652_b_04L慧矣八表龍象以爲義欲明決學
010_0652_b_05L師安于于而來請曰若其敎文不無
010_0652_b_06L問處至於禪旨將至掃地胡不可悶
010_0652_b_07L傳法流通是報佛恩師其深思焉
010_0652_b_08L不獲已重振玄門龍門五年安居
於雲門大揚禪旨
更欲
010_0652_b_09L貽謀先以臨濟三句括盡一代禪敎
010_0652_b_10L以爲禪文手鏡而拖照諸家章䟽言言
010_0652_b_11L無不昭著句句自然打合仍畫蛇足
010_0652_b_12L文字雖喩於蜂牎水母猶待乎蝦目
010_0652_b_13L以廣釋拈頌密顯數百則了沒巴鼻
010_0652_b_14L羚羊掛角之本分眞如要解壇經的示
010_0652_b_15L卅三祖直指人心見性成佛之世傳家業
010_0652_b_16L金剛五解發揚即敎明宗之難能手段
010_0652_b_17L高峰禪要明示奮志透關之直截宗眼
010_0652_b_18L又作法節次之重編起信䟽記之校刊
010_0652_b_19L無非即世諦之莊嚴成妙法之供養也
010_0652_b_20L卜地而居神羊現形於雲門山之靈有白羊
間百年徃徃
010_0652_b_21L出遊數百年來無有見羊之言矣今有白羊
來遊道場猶如豢犬一會老少日日常見
有緣
010_0652_b_22L而至靈龜幻胎於華藏岩形如龜
故云龜岩
難忘法
010_0652_b_23L建影堂而奉安先師之眞影不違佛
010_0652_b_24L立䂓繩而施設後昆之模䂓且彜倫

010_0652_c_01L소중함도 공문空門(불교)에만 국한하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에는 온 힘을 다하여 공급供給하였고, 돌아가시고 난 뒤에는 명부전 성현께 열 번이나 영혼을 천도하는 재를 올렸으며, 여러 번이나 유원幽原에 부모님의 묘를 이장하였더니아버님의 묘를 네 번 이장하였고, 어머님의 묘를 아홉 번이나 이장하였음, 자연히 지극한 정성은 하늘을 감동시켰는지 필경畢竟엔 명당 자리를 얻게 되었다.
또 할아버님과 아버님 그리고 형님 3대에 걸쳐 행해진 바꿀 수 없는 효행을 수록하기 위하여 우선 미래 세상의 큰 선비인 기학사奇學士정진正鎭에게 행록行錄을 받았고, 그 다음엔 유록대부裕祿大夫 홍부마洪駙馬현주顯周에게 묘지墓誌를 받았으며, 또 좌의정 홍상공洪相公석주奭周와 봉조하奉朝賀 김판서金判書이역履易에게 서문序文을 받았다.
이에 지체 높은 관리 선생들과 최고의 웅유雄儒들이 얼음 속에서 잉어 구함을 다투어 천양하여 등용문登龍門으로 삼았으며, 입으로 비명을 멀리까지 전하고 죽백竹帛에 기록하여 영원토록 전하여그 이름을 『송계효행록松溪孝行錄』이라 함, 정자程子께서 이른바 조상이 선한 일을 했는데 알지 못했다면 밝지 못한 것(不明)이요, 그것을 알고도 전하지 않으면 어질지 못한 것(不仁)이라고 한 꾸지람을 면하기를 바랐다.정자程子가 말하기를 “부모에게 아름다운 일이 있는데 알지 못했다면 밝지 못한 것이요,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드러내지 못했다면 어질지 못함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니 그 누가 우리 부처님의 가르침을 두고 삼경三經과 오전五典을 벗어났다고 말하겠는가? 팔만대장경 가운데에도 『대보부모은중경大報父母恩重經』을 첫머리에 들어 말한 것은 진실로 이 때문이다.
비로소 천서天叙와 천질天秩은 고금古今에 걸쳐 마멸될 수 없는 것임을 알겠도다. 연세가 74세도광道光 20년(1840) 경자庚子 곧 헌종憲宗 6년이다.에 이르러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아직 다 마치지 못함에 대하여 염려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선사先師의 영당影堂 위쪽에 작은 집을 짓고 옛 한곡도인寒谷道人이 도를 닦던 곳에서 세속제의 모든 인연을 한칼에 두 동강 내고는 부처님과 조사님이 전해 주신 간화문看話門의 구멍 없는 쇠방망이를 날마다 사용하고 생활하는 가운데 다반사의 일로 삼아 정해진 목숨이 다하기 전에 대사大事를 분명하게 판단하여 미래 세상에 태어나면 그대로 다 수용할 수 있는 도로 삼으려고 하였다.
해는 함풍咸豊 임자壬子(1852)년금상今上(철종) 3년 4월 24일 미시未時(오후 1시~3시)에 작은 병환을 보이시더니 화정火定224)에 들어갈 것을 나타내셨으니, 동방의 나라에 몸을 응현한 지 86년이요 서쪽 나라 계율을 받은 지 68년이다.
상서로운 기운이 서쪽으로부터 오더니 곧바로 감실龕室 위를 관통하니, 광명이 고리처럼 사방을 빙 둘러서 산속을 널리 비추었다.

010_0652_c_01L之重不限空門是以父母生前盡力
010_0652_c_02L供給至於死後十薦魂於冥聖屢遷
010_0652_c_03L墓於幽原四遷父墓
九遷母墓
自然至誠感天畢竟
010_0652_c_04L明穴有地又收錄祖父兄三世不替之
010_0652_c_05L孝行先受行錄於當世大儒奇學士

010_0652_c_06L次受墓誌於裕祿大夫洪駙馬
又受序
010_0652_c_07L文於左議政洪相公
奉朝賀金判書

010_0652_c_08L於是縉紳先生雄儒巨擘爭闡叩鯉冰
010_0652_c_09L以爲登龍門遠播口銘永傳竹帛名爲
松溪

010_0652_c_10L孝行
庶可免程子所謂不明不仁之責也
010_0652_c_11L程子曰父母有美而不知
不明也知而不現不仁也
孰謂我佛之敎
010_0652_c_12L外於三經五典耶八萬藏中首揭大報
010_0652_c_13L父母恩重經者良有以也始知天叙天
010_0652_c_14L亘古今磨滅不得年至希四道光二十
年庚子即

010_0652_c_15L憲宗六
年也
切以己事未了爲慮別搆小屋於
010_0652_c_16L先師影堂上古寒谷道人行道之處
010_0652_c_17L諦諸緣一刀兩段欲以佛祖所傳之看
010_0652_c_18L話門無孔鎚爲日用中茶飯決期命盡
010_0652_c_19L了辦大事以爲來生出頭現成受用
010_0652_c_20L之道也歲在咸豊壬子今上
三年
四月二十四
010_0652_c_21L日未時示有微恙現入火定應東身
010_0652_c_22L者八十六春服西戒者六十八夏瑞氣
010_0652_c_23L自西而直貫龕上光明環四而普照山

010_0653_a_01L스님의 아름다운 자취를 오래 보전하고 싶어서 선운사禪雲寺에 탑을 세우고, 거룩한 위의를 잊지 않으려고 화장암華藏庵에 탱화를 모시었다.
문인 봉기奉琪는 손을 씻고 향을 사르고 삼가 일생 사업을 한 편의 글로 기록하여 대다수의 사람들이 학업을 닦고 인륜을 밝히게 하려고 할 뿐이다.
왜냐 하면, 계행戒行을 엄격하고 깨끗하게 지켜 자못 부처님의 제도를 따랐고, 선정을 익혀 지혜를 균등히 하여 어리석고 삿됨을 멀리 여의셨으니, 이것이야말로 바로 학업을 수련함이라고 하겠다.
어버이 섬기기를 부처님 섬기듯이 하였으니 진실로 지극한 효행이라 하겠다. 효도는 온갖 행行의 근원이 되니 이 하나를 들어 모든 것의 본보기로 삼을 수 있나니 이는 바로 인륜을 밝힌 것이다. 학업을 수련하는 것은 곧 진실로 승려들의 모해模楷(模範)가 되시고 인륜을 밝힘에 있어서는 역시 세속 선비도 부끄러울 지경이다.
아, 슬프도다. 화상이 비록 이 탁겁濁劫에 편방偏方 밖의 나라에 태어나긴 했지만, 공손히 생각건대 스님의 행덕行德은 높고도 귀하시니, 진실로 고금의 천하 가운데 부끄럽지 않도다.24일 미시未時에 멸도에 들어가니, 그날은 날씨가 청명하여 한 점 구름도 없었으며, 오직 상서로운 기운만이 찬란하게 빛나더니 시간이 지나자 곧 사라졌다. 28일 뼈를 주웠는데 밤에 달빛도 없었고, 또한 안개나 구름이 끼어 가리지도 않았으며, 도량道場이 점점 밝아오자 사람의 그리자가 분명해지고 먼 산까지 소연히 분명해졌다. 경을 펼치고 독경을 하는 때에 이르러서는 밝게 드러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자 대중들은 환희하고 찬탄하면서 곧 단壇을 시설하고 예배하고 염불하며 천 번이나 주위를 돌다가 의식을 끝냈다.

010_0653_a_01L欲壽美蹟竪塔于禪雲不忘尊儀
010_0653_a_02L奉幀于華藏門人奉琪盥手焚香
010_0653_a_03L誌一篇一生事業大都修學明倫而已
010_0653_a_04L何也戒行嚴淨頗順佛制習定均慧
010_0653_a_05L遠離痴邪此是修學也事親如佛
010_0653_a_06L爲至孝孝爲行源擧一例諸此是明
010_0653_a_07L倫也修學乃眞緇侶之模楷明倫亦是
010_0653_a_08L俗士之慚愧嗚呼和尙雖生於此濁刼
010_0653_a_09L偏方之外欽惟行德且尊且貴實不
010_0653_a_10L愧於古今天下之中二十四日未時入滅即日
淸明無一點雲靄唯瑞氣
010_0653_a_11L粲然移時乃消二十八日拾骨而夜無月光又霧
罩雲籠道場漸明人影分明遠山昭然至於展經
010_0653_a_12L讀文無不昭著大衆歡喜讃歎
乃於設壇禮拜念佛千周而畢
  1. 1)기정진奇正鎭 :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 본관은 행주. 초명은 금사金賜, 자는 대중大中, 호는 노사蘆沙. 전라북도 순창 출신. 판중추부사 건虔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재우, 어머니는 안동 권씨로 덕언德彦의 딸이다. 7세에 이미 성리철학의 깊은 이치를 깨우쳤고, 10세에는 경서ㆍ사서 등을 통독하였다. 1828년 향시에 응시하고, 1831년에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임술민란이 일어나자 「壬戌疑策」을 써서 삼정三政의 폐단을 지적하고 이를 바로잡을 방략을 제시하려 했다. 그러나 이 소장을 조정에 제출하려던 중 말미에 이름을 쓰고 과거시험의 답안지처럼 봉하라는 조정의 지시에 상소할 것을 포기하였다.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서양 세력의 침투를 염려한 끝에 그해 7월 흔히 육조소六條疏라 불리는 첫 번째 「丙寅疏」를 썼다. 이는 외침에 대한 방비책으로 여섯 가지를 제시하고, 민족 주체성의 확립을 주장하여 당시의 쇄국정책과 보조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그 뒤에 나타나는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사상은 이 소에 이론적 기초를 두고 있었다. 이 소는 고종에게 받아들여지고, 조정에서 식견이 높이 평가되어 그해 6월 사헌부집의, 7월 동부승지, 8월 호조참의, 10월 가선대부의 품계와 함께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등이 주어졌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동지돈녕부사에 임명되자 이를 사양하는 소장으로 두 번째의 「丙寅疏」를 올렸다. 여기에서는 당시의 국가적 폐습을 준엄하게 비판하고 지도층인 사대부에게 청렴결백한 기풍이 없음을 우려하여 삼무사三無私를 권장하도록 강조하였다. 이어 공조참판ㆍ경연특진관經筵特進官에 위촉되었으나 사양하였고, 1877년 우로전優老典으로 가의대부嘉義大夫가 주어졌다. 그해에 장성 하리 월송月松(지금의 高山里)으로 이사하여 다음 해 그곳에 담대헌澹對軒이라는 정사를 짓고 많은 문인과 함께 거처하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2. 2)용상龍象 : 덕과 학식이 높은 승려를 용이나 코끼리의 위력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3. 3)법희선열法喜禪悅 : 법희法喜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 가르침의 깊은 뜻을 이해하여 큰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즉 귀로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르침의 진정한 뜻을 이해함으로서 비로소 뭐라 말할 수 없는 큰 기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선열禪悅이란 가르침을 들어서 알 뿐만 아니라 자기의 형편․환경․성질․주위 사정 등과 아울러 깊이 생각하고 실천해서 완전히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데서 오는 즐거움이다.
  4. 4)상인上人 : 지덕智德이 갖추어져 있는 불제자 또는 승려僧侶를 높이어 일컫는 말.
  5. 5)혜원慧遠 : 334~416. 중국 동진의 승려. 속성은 가賈이다. 백련사白蓮社라는 염불 결사를 창설하여 중국 정토종의 개조가 되었다.
  6. 6)참상선지叅商禪旨 : 조선 시대 벽암 각성碧巖覺性 대사가 지은 책으로 알려져 있으며 선禪의 취지를 참구하여 헤아려 본다는 뜻이 담겨 있다. 현재는 이 책이 전해지지 않는다.
  7. 7)타파칠통打破漆桶 : 무한 겁 이전부터 쌓인 무명 번뇌가 옻으로 만든 통 속처럼 깜깜한 것을 순간에 깨뜨려서 그 속의 불성佛性을 드러내는 것.
  8. 8)식당작법食堂作法 : 불교에서 의식으로 행해지는 식사 의식으로 공양 때 행해진다. 부처님께 올린 음식을 중생들과 같이 나누어 먹고 부처님의 은덕을 공유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불교가 번성하였던 고려 시대는 식당작법 행사가 번성하였지만 최근에는 주로 영산재靈山齋 의식 때만 행해진다. 식당작법의 의식에서는 오관게五觀偈와 타주打柱가 중요한 행사이다. 오관게는 공양할 음식을 두고 다섯 가지의 마음가짐을 읊는 게이다. 그리고 타주는 바라춤과 법고춤이 이어진다.
  9. 9)김정희金正喜 : 1786~1856. 조선 말기의 문신이며 서화가. 자는 원춘元春, 호는 완당阮堂ㆍ추사秋史ㆍ시암詩庵이다. 북학파의 한 사람으로 실사구시를 주장하였고, 서예에 능하여 추사체를 완성하였다. 1816년에는 북한산 비봉에 있는 석비가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혀냈다. 작품에 「墨竹圖」ㆍ「墨蘭圖」ㆍ「歲寒圖」 등이 있으며, 저서에 『阮堂集』과 『金石過眼錄』 등이 있다.
  10. 10)기연機緣 : 어떤 기회를 통해 맺어진 인연因緣.
  11. 11)산곡山谷 : 황정견黃庭堅의 호號. 중국 북송 시대의 시인이자 서예가. 자는 노직魯直, 호는 산곡山谷ㆍ부옹涪翁. 장시성 홍주분령洪州分零 사람. 치평 4년(1067)에 진사로, 5년 후에 북경 국자감교수가 되었고 이 사이 소식蘇軾과 친교를 맺었다. 원우 원년(1086)에 비서성에 들어가 『神宗實錄』을 편찬하였고 집현교리集賢校理가 되었다. 소성 원년(1094) 장순章淳ㆍ채변蔡卞 등에게 배척당하여 검주黔州와 융주戎州에 연이어 유배되었다. 휘종 때에 대사에 의해 소환되지만 다시 광서성 의주宜州로 유배되어 사망하였다.
  12. 12)이백시李伯時 : 이름은 공린公麟, 호는 용면거사龍眠居士. 송宋나라 때 안휘성安徽省 서주舒州 출신. 원우元祐 연간(1086~1094)에 진사가 되었고, 원부元符 연간(1098~1100)에 어사대부御史大夫에 임명되었다. 학문이 넓고 옛것을 좋아하였으며(博学好古) 산수화와 불상佛像을 잘 그렸다. 만년에는 불교에 귀의하여 계를 받았고 선법禪法에 능통하였으며, 깨끗한 곳을 좋아하여 용면산장龍眠山庄에 숨어 살았다. 그때에 고승高僧들과 어울려 담론하고 아울러 결사염불회를 만들기도 하였다. 소흥紹興 4년(1134)에 죽을 때가 되었음을 알아차리고 재물을 보시하고는 게송을 짓고 염불을 하면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은 86살이고 그의 유묵遗墨이 전해져 세상에 파다하다. 화가들은 그의 화풍을 하나의 법칙으로 삼았다.
  13. 13)도연명陶淵明 : 도잠陶潛. 진晉나라 때 처사處士로 41세 때 팽택령彭澤令으로 있다가 윗사람의 제재가 싫고 전원田園이 그리워 재직한 지 80일 만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4. 14)진회해秦淮海 : 소식蘇軾의 제자인 송宋나라 때 문인 진관秦觀. 자字는 소유少游. 시문에 능했으며 소문사학사蘇門四學士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저서에 『淮海集』이 있다.
  15. 15)( ) 안의 내용은 원문에 없는 것인데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김정희의 『阮堂全集』에 실린 문장을 역자가 인용한 것이다.
  16. 16)고기송孤起頌 : ⓢ ⓟ gāthā. 경전의 서술 형식이 운문체로 된 가타伽陀. 같은 운문체이지만 기야祇夜는 산문체로 된 내용을 다시 운문체로 설한 것이므로 중송重頌이라 하고, 가타는 바로 운문체로 설한 것이므로 고기송이라 한다.
  17. 17)이 소제목은 원문에는 없으나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역자가 보입하였다. 홍 참봉이 백파 스님께 부쳐 온 편지인 듯하다. 대부분 스님의 문집을 보면, 시詩의 원운原韻이나 편지의 원서原書는 뒤에 붙이는 것이 관례인데 여기에서는 앞에 두었으니, 아마도 편집해서 출간하지 않은 필사본 그대로 남아 있던 것이라 그런 듯하다.
  18. 18)심화心畵 : 마음을 나타내는 그림이라는 뜻으로, 문장이나 글씨 등을 이르는 말. 양웅揚雄의 『法言』 「問神」에 “말은 마음의 소리요, 글씨는 마음의 그림이다(言心聲也, 書心畵也.)”라는 구절이 나온다. 여기에서는 아마도 백파 선사의 편지를 이르는 말인 듯하다.
  19. 19)주불麈拂 : 사슴의 긴 꼬리로 만든 불자拂子. 불교에서 수행자가 마음의 티끌과 번뇌를 떨어내는 데 사용되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불구佛具의 하나이다. 여기에서는 백파를 지칭한 말이다. 아래도 마찬가지이다.
  20. 20)병석甁錫 : 승려들이 사용하는 병발甁鉢과 석장錫杖으로 어디로 갈 때에는 항상 지참하는 것이므로 곧 승도僧徒들의 행지行止를 뜻한다.
  21. 21)활선活禪 : 여기에서는 백파 스님의 제자가 아닌가 생각된다.
  22. 22)좌우左右 : 존장尊丈에 대한 경칭敬稱으로 어르신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주로 편지에 상대를 존경하는 뜻으로 쓴다. 이 편지에서 좌우는 홍 참봉을 지칭한 것이다. 편지의 내용에 따라 그 뜻은 달라진다.
  23. 23)비인鄙人 : 여기에서 비인은 홍 참봉 자신을 지칭하는 말이다.
  24. 24)주하麈下 : 위에서 말한 ‘주불麈拂’과 같은 의미이다.
  25. 25)한창려韓昌黎와 태전太顚 스님의 인연 : 당唐나라 때의 선승인 태전당과 한창려(韓愈)가 조주자사潮州刺史로 있을 적에 서로 왕래하며 교분交分이 있었는데, 한유가 조주 자사로 폄척되어 있을 적에 태전이라는 선승이 썩 위인이 훌륭하므로 그를 불러서 같이 노닐고 또 서로 왕래도 하였으며, 그 후 조주潮州를 떠날 적에는 그에게 의복衣服을 남겨 주고 작별을 하였다고 하는 고사를 말한다.
  26. 26)신식神識 : 식識 즉 마음의 작용을 가리키는 별칭. 유정有情 중생이 지니고 있는 심식心識의 작용이 매우 신묘神妙하기 때문에 붙여진 말.
  27. 27)『書經』 「太甲」에 나오는 말.
  28. 28)『論語』 「子罕」에 나오는 말.
  29. 29)상유지수桑楡之收 : ‘아침에 잃은 물건을 저녁에 되찾는다(失之東隅, 收之桑楡.)’는 속담에서 유래한 표현으로, 처음의 실수를 나중에 만회한다는 뜻이다.
  30. 30)이 소제목은 원문에는 없으나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역자가 보입하였다.
  31. 31)홍교洪喬 : 진晉나라 때 은선殷羨이 예장태수豫章太守가 되어 떠날 때 서울 사람들이 부친 편지가 1백여 통이나 되었는데, 석두石頭에 이르러 모두 물속에 던지고는 “뜰 놈은 뜨고 가라앉을 놈은 가라앉아라. 은홍교殷洪喬는 편지나 전달하는 우체부는 될 수 없다.”라고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32. 32)모과를 던져~줄 알았겠습니까 : 『詩經』 「衛風」 ‘모과木瓜’라는 시에 “나에게 모과를 보내주시니, 아름다운 패옥으로 보답 하옵니다(投我以木瓜, 報之以瓊琚.)”라는 내용이 나온다.
  33. 33)방할棒喝 : 선가禪家의 종장宗匠이 학자를 제접하는 방편으로 어떤 이에게는 방을, 어떤 이에게는 할을 쓴다. 방은 덕산德山에서 할은 임제臨濟에서부터 시작되었다.
  34. 34)농동儱侗 :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
  35. 35)세 성인 : 석가모니와 공자와 노자.
  36. 36)형상形上 : 형이상形而上. 이성적 사유 또는 직관에 의해서만 포착되는 초경험적이며 근원적인 영역을 말한다.
  37. 37)형하形下 : 형이하形而下. 형체를 갖추어 나타나 있는 물질의 영역을 말한다.
  38. 38)『周易』 「繫辭傳」上에 나오는 말.
  39. 39)『道德經』에 나오는 말.
  40. 40)육사六師 : 석존 당시에 중인도에서 가장 세력이 크던 6인의 철학자. 종교가의 교파敎派. 부란나가섭富蘭那迦葉ㆍ말가리구사리자末伽梨拘賜梨子ㆍ산사야비라지자刪闍耶毘羅胝子ㆍ아기다시사흠바라阿耆多翅舍欽婆羅ㆍ가라구타가전연迦羅鳩馱迦旃延ㆍ니건타야제자尼犍咤若提子.
  41. 41)무염족왕無厭足王 : 선재동자가 보살의 지혜와 행을 묻기 위해 방문한 18번째 선지식. 그는 선재동자에게 여환해탈문如幻解脫門을 설한다.
  42. 42)부상扶桑:동해의 해가 뜨는 곳에 있다는 신령스러운 나무, 또는 그것이 있다는 곳. 『山海經』 「海外東徑」에 “양곡暘谷에 부상이 있으니 열 해가 멱 감는 곳이다.” 하였고, 「十洲記」에는 “부상은 푸른 바다 가운데 있으니 키가 몇 천 길, 천여 아름인데 해 뜨는 곳이다.” 하였고, 『淮南子』 「天文訓」에 “해가 양곡暘谷에서 돋아 함지咸池에서 목욕하고 부상에서 솟는다.”라고 하였다.
  43. 43)미려尾閭 : 전설에 나오는, 바닷물이 빠져나가는 구멍이다. 『莊子』 「秋水」에 “천하의 물은 바다보다 큰 것이 없으니, 모든 물이 끊임없이 모여도 찰 줄 모르고, 미려로 끊임없이 새어 나가도 마를 줄 모른다.”라고 하였다. 일명 옥초沃燋라고도 한다.
  44. 44)다섯 가지 계율 : 불교도이면 재가자在家者나 출가자出家者 모두가 지켜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생활 규범. ① 살생하지 말 것, ② 도둑질하지 말 것, ③ 음행淫行하지 말 것, ④ 거짓말하지 말 것, ⑤ 술을 마시지 말 것이다.
  45. 45)십선계十善戒 : 나이 어린 남녀 중, 곧 사미沙彌와 사미니沙彌尼가 지켜야 할 열 가지 계율. ① 죽이지 말라, ② 음행하지 말라, ③ 도둑질하지 말라, ④ 거짓말하지 말라, ⑤ 술 마시지 말라, ⑥ 꽃다발을 쓰거나 향을 바르지 말라, ⑦ 노래하고 춤추고 풍류風流 잡히지 말며 일부러 가서 구경하지도 말라, ⑧ 높고 큰 평상에 앉지 말라, ⑨ 때 아닌 때에 먹지 말라, ⑩ 금은 따위의 보물을 갖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46. 46)사선四禪 : 네 가지 선정을 닦는 사람이 태어나는 색계의 네 하늘. 곧 초선천ㆍ제2선천ㆍ제3선천ㆍ제4선천의 총칭. 이 네 하늘에는 모두 18천이 있다.
  47. 47)팔정八定 : 색계의 4선정과 무색계의 4공정空定. 팔등지八等至라고도 한다. 초선정ㆍ이선정ㆍ삼선정ㆍ사선정ㆍ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ㆍ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ㆍ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ㆍ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
  48. 48)사지四智 : 유루有漏의 제8식識을 통해서 얻는 무루無漏의 4종 지혜. 대원경지大圓鏡智ㆍ평등성지平等性智ㆍ묘관찰지妙觀察智ㆍ성소작지成所作智 등.
  49. 49)단單 : 초간혜初乾慧ㆍ난위煖位ㆍ정위頂位ㆍ인위忍位ㆍ세제일위世第一位ㆍ등각等覺ㆍ금강간혜金剛乾慧를 말한다.
  50. 50)복複 : 십신十信ㆍ십주十住ㆍ십행十行ㆍ십회향十廻向ㆍ십지十地를 말한다.
  51. 51)열두 가지 : 초간혜지初乾慧地ㆍ십신十信ㆍ십주十住ㆍ십행十行ㆍ십회향十廻向ㆍ난위煖位ㆍ정위頂位ㆍ인위忍位ㆍ세제일위世第一位ㆍ십지十地ㆍ금강간혜지金剛乾慧地ㆍ등각等覺을 말한다. 즉 위의 단과 복을 합한 것이다.
  52. 52)소왕素王 : 왕위王位는 없으나 왕의 덕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란 뜻으로, 유가儒家에서는 공자孔子, 도가道家에서는 노자老子를 가리킨다. 여기에서는 공자를 말한 것이다.
  53. 53)부천膚淺 : 지식知識이나 말이 천박하거나 또는 생각이 얕음을 말한다.
  54. 54)『佛祖歷代通載』 제20권 「屏山李居士鳴道集說序」에 나온다.
  55. 55)『佛祖歷代通載』 제20권 「屏山李居士鳴道集說序」에 나온다.
  56. 56)『孟子』 「公孫丑」上에 나온다.
  57. 57)대방가大方家 : 학문學問과 견식見識이 높은 사람.
  58. 58)복희宓犧 : 흔히 복희伏犧로 쓴다. 중국 상고 시대의 임금이다.
  59. 59)황제黃帝 : 중국 고대 전설상의 제왕. 삼황三皇의 한 사람으로, 처음으로 곡물 재배를 가르치고 문자ㆍ음악ㆍ도량형 따위를 정하였다고 한다.
  60. 60)회암晦庵 : 주자朱子의 호. 중국 송나라 때 유학자. 주자학을 집대성한 그는 우주가 형이상학적인 ‘이理’와 형이하학적인 ‘기氣’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인간에게는 선한 ‘이‘가 본성으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그러나 불순한 ‘기’ 때문에 악하게 되며 ‘격물格物’로 이 불순함을 제거할 수 있다고 하였다.
  61. 61)『佛祖歷代通載』 제20권 「屏山李居士鳴道集說序」에 나온다.
  62. 62)『楞嚴經』 제2권에 나온다.
  63. 63)주희朱熹의 「中庸章句題解」에 나오는 말인데, 초록抄錄한 때문인지 생략된 부분이 많다.
  64. 64)불교에서 이르기를~없을 것입니다 : 『佛祖歷代通載』 제20권에 나오는 내용으로 이것을 초록抄錄하고 거기에 자기의 견해를 약간 덧붙인 것 같다.
  65. 65)형이하形而下 : 형체를 갖추어 나타나 있는 물질의 영역. 시간과 공간 속에 모양을 갖추고 나타나서 감성적인 경험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
  66. 66)형이상形而上 : 형체가 없어 감각으로는 그 존재를 파악할 수 없는 것으로서 시간이나 공간을 초월한 관념적觀念的인 것.
  67. 67)곽박郭璞 : 227~324. 자字는 경순景純이며 하동 문희현聞喜縣 사람이다. 박학다식博學多識하고, 경학과 고문에 정통하였으며, 『爾雅』ㆍ『山海經』ㆍ『楚辭』 등을 주석하였고, 점성술에도 뛰어났다. 원제 때에 벼슬이 상서시랑尙書侍郞에까지 이르렀으나, 명제 때 왕돈王敦에게 피살되었다. 왕돈이 모반하여 군사를 일으키기 직전에 길흉을 점쳤는데, 곽박이 점괘가 좋지 않음을 핑계로 모반에 찬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그의 시는 14수로 유선시遊仙詩가 주를 이루는데, 현실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나머지 신선의 세계를 추구하고 있다.
  68. 68)좌자左慈 : 위魏나라 때 술사 원방元放의 자字. 술법이 있어서 소를 나뭇가지 위에 올라가 있게 했고, 조조曹操 앞에서 구리 쟁반에 물을 담고 낚싯대를 드리워 조조가 원하는 송강松江의 농어를 낚아 올렸다고 한다.
  69. 69)장방長房 : 후한後漢 사람 비장방費長房을 가리킨다. 일찍이 시장의 아전이 되었는데, 시장에서 약 파는 한 늙은이가 병 하나를 가게 앞에 걸어놓았다가 시장이 파하면 그 병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을 보고 기이하게 여겨 그를 따라 산에 들어가 도술道術을 배웠으나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때 늙은이에게 받은 대나무 지팡이와 부적으로 온갖 도술을 부려 백귀百鬼를 부렸으나 끝내 부적을 잃고 뭇 귀신에게 죽임을 당했다 한다.
  70. 70)한단침邯鄲枕 위에서 꾼 꿈 : 인생의 영고성쇠榮枯盛衰가 모두 꿈결처럼 헛되고 덧없음을 말한다. 이필李泌의 『枕中記』에 “당 현종唐玄宗 개원開元 19년에, 도사道士 여옹呂翁이 한단邯鄲의 여관에서, 노생盧生이란 한 곤궁한 소년이 신세타령하는 것을 보고, 자기 베개를 빌려 주면서 ‘이 베개를 베고 자면 많은 부귀영화를 누리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노생이 그 베개를 베고 잤는데 과연, 꿈속에 청하淸河에 사는 최씨의 딸에게 장가들고 높은 벼슬도 두루 역임하여 부귀영화를 일평생 누리고 살다가 꿈을 깨어 보니 좀 전에 여관 주인이 짓던 좁쌀 밥이 채 익지 않았다. 이에 여옹이 웃으면서 ‘인간 세상의 일도 이 꿈과 마찬가지’라고 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71. 71)대원경지大圓鏡智 : 불과佛果에서 처음으로 얻는 지혜. 대일여래가 갖추고 있는 5지 중의 하나. 일체종지一切種智라고도 한다. 유식唯識에서 4지智 중 하나로 꼽는다. 유루有漏의 제8식을 통해서 얻는 무루無漏의 지혜로서, 만덕萬德을 원만하게 구족하여 모든 법을 깨달아 안 것을 말한다. 거울에 한 점의 티끌도 없이 삼라만상이 그대로 비추어 모자람이 없는 것과 같이, 원만하고 분명한 지혜이므로 대원경지라 한다.
  72. 72)여환삼매如幻三昧 : 요술사가 요술을 부리는 것처럼 작용이 자재한 삼매. 또는 모든 차별 현상은 실체가 없어 허깨비와 같다고 주시하는 삼매.
  73. 73)또한 귀나~보살의 여환삼매如幻三昧이겠습니까 : 『佛祖歷代通載』 제19권에 나오는 내용이다.
  74. 74)왕양명王陽明(王守仁)의 전생과 후생사에 얽힌 이야기 속에 나오는 말. 절강성 금산사金山寺에 선禪을 닦아 생사해탈生死解脫을 자유자제로 할 지경에 이른 선지식이 있었는데 그가 하루는 가사를 착복하고 법당으로 들어가면서 ‘이 문은 열지 말라.’ 하고 들어간 뒤에는 다시 나오지 않고 문을 열라고 하여도 도저히 열리지 않아 오랫동안 문을 못 여는 법당이거니 하였다. 어느 해 봄에 왕양명이 금산사 한 법당 앞에 가서 문을 열려고 하니 안내하던 대사가 그 문은 못 연다고 하면서 전후 사실을 설명하여 주었다. 이에도 왕양명이 문고리를 잡아당겨 보니 문이 벌컥 열리었다. 법당 한쪽 벽에 “오십 년 전의 왕수인, 문을 연 이가 원래는 문을 닫을 사람이로다. 정령이 떠난 뒤 다시 돌아왔으니, 선문에서 말하는 불괴신不壞身임을 알리라.(五十年前王守仁, 開門人是閉門人. 精靈剝後還歸復, 始信禪門不壤身.)”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75. 75)안자顔子 : 공자의 수제자이므로, 현인賢人의 대표로 들었다. 수신修身을 잘하여, 『論語』 「雍也」에 “회回는 석 달 동안 인仁을 어기지 않는다.”라는 평을 받기까지 하였다.
  76. 76)황금을 내던지고~가게 하거나(擔麻而棄金) : 『中阿含經』 제16권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가난한 사람 두 명이 길을 가던 중에 길에 삼(麻)이 있어서 베어 갔는데, 얼마 후에 다시 오니 은이 있었고, 또 다음에 와 보니 금이 있었다. 한 사람은 금과 은을 취하였으나, 다른 사람은 처음과 같이 삼만 취하였다는 이야기로 어리석은 자를 비유한 것이다. 즉 기존에 해오던 일이나 추구해 온 가치관에 문제가 있거나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도 어리석음ㆍ자존심ㆍ기득권ㆍ명예심 때문에 끝까지 고집하고 우기는 경우를 비유한 말이다.
  77. 77)도정절陶靖節 : 정절은 진晉의 처사 도잠陶潛의 시호諡號. 팽택령彭澤令이 된 지 80여일 만에 연말이 되어 상급인 군郡에서 감독하는 관리가 와서는 ‘의관을 정돈하고 맞이하라.’ 하자 ‘어찌 시골의 젊은 애들에게 허리를 굽히겠는가.’라 하고는 그날 즉시 사임하였다고 한다.
  78. 78)이태백李太白 : 701~762. 중국 당나라의 시인 이백李白. 자가 태백太白이며,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이다. 젊어서 여러 나라에 만유漫遊하고, 뒤에 출사出仕하였으나 안녹산安祿山 의 난으로 유배되는 등 불우한 만년을 보냈다.
  79. 79)진체상陳體常 : 이름은 이易, 호는 빙군聘君. 북송 시대 감찰사監察使. 희녕熙寧 초에 과거를 보았고, 숭녕崇寧 연간에 다시 과거를 보아 합격하였다. 감찰사로 재임 중에 왕안석王安石이 추진하는 갑작스러운 변법變法에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그 일이 성공적으로 이룩되자 마침내 관직을 사직하였다. 뒤에 채양蔡襄의 증손인 채추蔡樞와 채계암菜溪岩에서 같이 놀다가 저녁 늦게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금빛 찬란한 관음보살을 보고 은거隱居하여 살다가 선화宣和 8년에 가부좌를 한 채로 서거하였다.
  80. 80)백향산白香山 : 향산은 백거이白居易의 별호. 당唐나라 사람. 자字는 낙천樂天,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ㆍ섭유옹囁嚅翁, 시호는 문文. 한림翰林에 들어가 학사學士가 되고 좌습유左拾遺로 옮겼다가 사회 비판적 시가 문제가 되어 강주사마江州司馬로 좌천되었다. 뒤에 형부시랑刑部侍郞이 되었다가 형부상서刑部尙書로 치사하였다. 만년에 뜻을 시주詩酒에 붙여 취음선생이라 칭하고, 또 향산香山의 중 여만如滿과 향화사香火社를 맺어 향산거사香山居士라 하였다. 문장과 시가 정교하면서도 평이한 것이 특색이다.
  81. 81)소동파蘇東坡 : 동파東坡는 소식蘇軾의 호. 송宋나라 때의 대문호로 자는 자첨子瞻, 시호諡號는 문충文忠이다. 아버지 소순蘇洵, 동생 소철蘇轍과 더불어 삼소三蘇라 불리며, 3부자가 모두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에 속한다. 철종哲宗 때 중용되어 구법파舊法派의 중심적 인물로 활약하였고, 특히 구양수歐陽脩와 비교되는 대문호로서 부賦를 비롯하여 시詩ㆍ사詞ㆍ고문古文 등에 능하였으며, 재질이 뛰어나 서화書畫로도 유명하였다. 그의 문학은 송나라뿐만 아니라, 고려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82. 82)소강절邵康節 : 강절康節은 송宋나라 때의 유학자 소옹邵雍의 시호. 『周易』의 수리數理를 좋아하여 태극太極을 우주의 본체로 보았는데 상수象數의 학문을 중시하였다. 낙양洛陽에 거의 30년이나 살면서 거처하는 곳을 안락와安樂窩로 명명하고 스스로 안락선생安樂先生이라고 불렀다
  83. 83)공명孔明 : 제갈량諸葛亮의 자字.
  84. 84)혜원慧遠 : 334~416. 중국 동진東晉의 승려. 속성은 가賈. 백련사白蓮社라는 염불 결사를 창설하여 중국 정토종의 개조가 되었다.
  85. 85)노고추老古錐 : 노숙老熟한 사가師家에 대한 경칭敬稱으로 쓰인 말인데, 즉 노숙한 사가의 선기禪機가 송곳처럼 예민하다는 데서 온 말이다.
  86. 86)사대부의 교만(士夫者慢) : 팔난八難 중에 ‘사부자만士夫者慢’은 들어 있지 않다.
  87. 87)세지변총난世智辯聰難 : 세상의 지식이나 지혜에 지나치게 밝아 말재주가 뛰어나고 세상일에 총명하여 세상의 지혜를 초월한 불법의 진리를 알아듣지 못하여 수행하는 데 장애가 되는 것.
  88. 88)보주인普州人 : 보주는 도적이 많이 모였던 곳이므로 ‘보주 사람’이라 함은 도적을 가리킨다.
  89. 89)선패仙旆 : 상대의 행차를 높여 부르는 말.
  90. 90)황이黃耳 : 진晉나라 육기陸機의 애견愛犬 이름. 총명하여 사람의 말을 잘 알아들었으므로 육기가 편지를 넣은 죽통竹筒을 그 개의 목에 걸어서 낙양洛陽과 오지吳地의 몇 천 리 길을 오가며 소식을 전하게 했다는 이야기가 『晉書』 권54 「陸機列傳」에 나온다.
  91. 91)계수나무 가지를 꺾어 가지고(折桂) : 절계折桂는 계과桂科라고도 하는데 등과登科와 같은 말이다. 진무제晉武帝 때 극선郤詵이 현량대책賢良對策에서 장원壯元을 하고는, 소감을 묻는 무제의 질문에 “계수나무 숲의 가지 하나요, 곤륜산의 옥돌 한 조각이다(桂林之一枝, 崑山之片玉.)”라고 답변한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晉書』 권52 「郤詵列傳」 참조.
  92. 92)귀녕歸寧 : 보통은 부인이 친정집에 가서 문안하는 것을 가리킨다. 『詩經』 「周南」 ‘葛覃’에 “돌아가서 부모를 문안하리라(歸寧父母)”라고 한 데에서 유래한 말이다.
  93. 93)조대措大 : 원래는 청빈한 선비를 뜻하는 말인데 여기에서는 최 진사를 지칭한 말이다.
  94. 94)정백자程伯子 : 1032~1085. 중국 북송의 유학자 정호程顥. 호는 명도明道이고 자가 백순伯淳이므로 정백자라 한 것이다. 아우 이頥와 함께 이정자二程子로 불리며, 도덕설을 주장하여 우주의 본성과 사람의 성性이 본래 동일하다고 보았다. 저서에 『定性書』, 『識仁篇』 등이 있다.
  95. 95)염계濂溪 : 중국 북송의 유학자 주돈이周敦頤의 호. 자는 무숙茂叔. 화남성 사람.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벼슬의 길에 올랐으나 벼슬이 오르지 않아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학문에만 힘을 기울였다. 저서로는 『太極圖說』ㆍ『通書』 등이 있는데, 이 책은 남송의 주자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학문은 정호ㆍ정이 형제가 이어받았으며, 송학宋學의 시조가 되었다.
  96. 96)자첨子瞻처럼 부화浮華 : 성대중成大中이 지은 『質言』이라는 책에 “소식蘇軾은 『장자莊子』를 배움으로 인해 부화浮華한 데 빠졌다.”라고 한 데에서 인용한 것이다.
  97. 97)가가可呵 : 주로 편지에서 스스로 생각하여도 우습다는 뜻으로 이르는 말.
  98. 98)한문공韓文公 : 당唐나라의 문장가로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인 한유韓愈를 가리킨다. 고문운동古文運動을 주창하였으며, 벼슬은 이부시랑吏部侍郞에 이르렀다. 일찍이 「師說」을 지어 사도師道를 밝혔다.
  99. 99)이참정李叅政 : 송나라 이벽李壁으로 자字는 계장季章이고 호號는 안호雁湖이다. 이도李燾의 아들로 미주眉州 단릉丹棱 사람이다. 소흥紹興 29년(1159)에 출생하여 소희紹熙 원년(1190)에 과거를 보아 진사가 되고, 비서성秘書省 정자正字를 거쳐 예부시랑 겸 직학사원直學士院를 역임하였으며, 참가지정사参加知政事 겸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에 제수되었다. 가정嘉靖 15년(1222)에 64세로 생을 마쳤다. 저서로는 『雁湖集』 100권이 있었는데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100. 100)양문공楊文公 : 양억楊億을 말한다. 자字는 대년大年이고, 건주建州 포성浦城 사람이다. 그의 천성이 영특하다는 소문을 듣고 태종太宗이 11세 된 그를 불러서 비서성秘書省 정자正字를 제수하였다. 진종眞宗이 즉위한 뒤 좌정언左正言에 제수되었다. 훗날 전약수錢若水와 함께 80권에 달하는 『太宗實錄』을 편수하는 데 참여하여 탁월한 솜씨를 발휘하였고, 『冊府元龜』와 『國史』를 편수할 때에도 차례나 체재 등을 모두 그가 정하였다. 벼슬은 호부낭중戶部郞中,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이르렀고 문장이 화려하여 서곤체西昆體라 불렸으며, 대표적인 작품으로 『西昆酬唱集』이 있다.
  101. 101)잘못을 고치려들지(雌黃) : 진나라의 귀족이며 명사인 왕연王衍이 평소에 현묘하고 심원한 철리를 숭상하며 청담을 좋아하여 관리로 등용된 뒤에도 항상 노장 사상에 심취해 있었다. 그가 노장의 오묘한 철리를 논할 때에는 손에 옥 불진佛塵을 들고 차분하고 조용한 어조로 강의했다. 그리고 간혹 해설을 잘못할 때면 그 자리에서 자황雌黃으로 즉시로 고쳤다. 이래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입안에 자황이 있다(口中雌黃).’고 하였다. 당시에는 글을 쓰다가 잘못되면 자황이라는 진노란색 광물을 칠해 지우고 그 위에 다시 썼다. 오늘날의 지우개와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이다. ‘잘못된 것을 바로 정정하는 것’이 자황으로 글자를 지우는 것과 같다는 뜻에서 온 말이다.
  102. 102)맹분孟賁 : 전국 시대 위衛나라 사람. 제齊나라 사람이라고도 한다. 용력지사勇力之士로, 하육夏育과 이름을 나란히 했다. 대단한 완력과 용기를 지닌 인물로, 소의 뿔을 잡아 뽑아낼 수 있었다. 땅에서는 맹수와 마주쳐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지녔고, 물속에서는 교룡蛟龍과의 싸움도 피하지 않았다고 한다. 화가 났을 때는 두 눈이 옆으로 찢어져 기세가 사람을 질리게 만들었다. 길을 가거나 물을 건널 때 아무도 그와 선두를 다투지 못했다. 맹열孟說이라고도 한다. 진무왕秦武王의 사랑을 받던 역사力士라고 한다.
  103. 103)하육夏育 : 주周나라 때 위衛나라 맹사猛士. 용력勇力이 대단해서 천균千鉤의 무게를 들고 살아 있는 소의 꼬리를 뽑았다고 하며, 소리를 지르면 삼군三軍이 모두 놀랐다고 한다. 전박田搏에게 살해당했다. 맹분과 함께 ‘분육賁育’으로 일컬어졌으며 이는 나중에 용사의 범칭이 되었다.
  104. 104)여 참판동식 : 1774(영조 50)∼1829(순조 29). 여동식呂東植. 본관은 함양咸陽이고 자는 우렴友濂이다. 1795년(정조 19)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가주서ㆍ수찬ㆍ부응교ㆍ응교ㆍ사인ㆍ대사간ㆍ이조참의ㆍ동지의금부사ㆍ대사간 등을 지냈다. 1808년(순조 8)에는 경상우도 암행어사로 나간 바 있으며, 사은부사로 청淸나라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오는 길에 죽었다. 1807년 집의로 있을 때는 정조의 묘정廟庭에서 벽파僻派의 지도자인 김종수金鍾秀를 축출할 것을 건의하는 등 김조순金祖淳을 중심으로 한 시파時派의 입장에 섰던 인물이다.
  105. 105)교외별전敎外別傳 : 선종에서 가르침을 전할 때, 부처님이 설한 경전이나 말에 의존하지 않고 사람에서 사람으로 깊고 오묘한 가르침을 전하는 것을 말한다. 달마 대사가 중국에 전한 조사선祖師禪에서는 말이나 글자에 의지하는 교설 외에 따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것이 있다고 말한다. 즉 불교의 진수는 경전의 문구에 의지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직접 체험에 의해서만 전할 수 있다는 뜻이다. 불립문자不立文字와 더불어 선禪의 입장을 나타내는 가장 대표적인 말이다.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말로써 가르침을 준 것을 교내敎內의 법이라 하고, 이에 대해 교외의 법은 부처님의 마음을 직접 다른 사람 마음에 전한 것을 말한다.
  106. 106)아홉 종류의 경전 : 수다라修多羅ㆍ기야祇夜ㆍ가타伽陀ㆍ이제목다가伊帝目多伽ㆍ사다가闍多伽ㆍ아부달마阿浮達磨ㆍ우타나優陀那ㆍ비불략毘佛略ㆍ화가라和伽羅를 말한다.
  107. 107)분갱分羹의 일이나 겁부劫父의 일 : 초한楚漢 시대 항우項羽가 한왕漢王의 아버지 태공太公을 도마 위에 앉히고 삶아 죽이겠다고 협박하면서 항복을 요구하자, 한왕이 ‘우리는 과거에 의형제를 맺었으니, 나의 아버지가 곧 너의 아버지이다. 삶아 죽이거든 국 한 그릇을 나누어 달라.’고 한 데서 인용된 말이다.
  108. 108)강항强項 : 목이 세어 여간하여서는 굽히지 아니함. 강직함을 뜻한다.
  109. 109)소요부邵堯夫 : 송宋나라 때의 유학자 소옹邵雍. 요부堯夫는 소옹의 자字이다. 소옹은 『周易』의 수리數理를 좋아하여 태극太極을 우주의 본체로 보았는데 상수象數의 학문을 중시하였다. 낙양洛陽에 거의 30년이나 살면서 거처하는 곳을 안락와安樂窩로 명명하고 스스로 안락선생安樂先生이라고 불렀다. 저서로는 『皇極經世書』와 『伊川擊壤集』 등이 있다.
  110. 110)회광반조回光反照 :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이나, 불교에서는 자기의 본분本分을 돌아보는 수양修養의 뜻으로 쓴다.
  111. 111)4위의威儀 : 행行ㆍ주住ㆍ좌坐ㆍ와臥의 네 가지 행위를 말한다.
  112. 112)이 소제목은 원문에는 없으나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역자가 보입하였다.
  113. 113)죽순(笋) : 삼국 시대 오吳나라의 효자 맹종孟宗의 고사이다. 맹종의 늙고 병든 어머니가 겨울에 죽순을 먹고 싶어 하자 맹종이 안타까운 마음에 대숲에 들어가서 슬피 울었는데, 갑자기 땅 위로 죽순 두어 줄기가 나왔으므로 가지고 돌아가서 어머니에게 드려 병을 낫게 하였다고 한다.
  114. 114)잉어(鯉) : 진晉나라 때의 효자 왕상王祥의 고사이다. 왕상은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繼母의 학대를 받으며 살았으나 늘 효도를 지극히 하였다. 한번은 추운 겨울날 계모가 산 물고기를 먹고 싶어 하므로 왕상이 얼음을 깨고 직접 들어가 물고기를 잡으려 하자, 얼음이 갑자기 녹으면서 잉어 두 마리가 뛰어 나왔다고 한다.
  115. 1115)이 소제목은 원문에는 없으나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역자가 보입하였다.
  116. 116)갈등선葛藤禪 : 말이 번잡한 것을 갈등이라 한다. 종지宗旨를 알지 못하고 말에만 팔리는 선객禪客을 비방하는 말이다.
  117. 117)팔음八音 : 악기를 만드는 여덟 가지의 재료, 즉 금金ㆍ석石ㆍ사絲ㆍ죽竹ㆍ포匏ㆍ토土ㆍ혁革ㆍ목木을 말한다.
  118. 118)대감大鑑 : 중국 선종禪宗의 제6조 혜능慧能. 대감은 그의 시호이고 육조대사六祖大師라고도 한다. 신수神秀와 더불어 홍인弘忍 문하의 2대 선사로 남종南宗禪의 시조가 되었다. 그의 설법을 기록한 『六祖壇經』이 전해진다.
  119. 119)대법對法 : 대對는 대관對觀 또는 대향對向의 뜻이고, 법法은 임지자성任持自性ㆍ궤생물해軌生物解의 뜻으로 열반 및 4제諦를 가리킨다. 곧 4제의 이치를 대관하여 열반에 대향하는 뜻이다. 이 체體에 2종이 있다. 첫째는 승의대법勝義對法이니 무루無漏의 지혜와 이에 따라 일어나는 심왕心王ㆍ심소心所를 말한다. 이는 무루법無漏法으로 4제의 이치를 대관하여 열반에 대향하는 것이므로 승의대법이라 한다. 둘째는 세속대법世俗對法이니 무루의 지혜를 얻는 자량資糧 방편인 세속의 지혜와 모든 논論들을 말한다. 이들은 승의대법의 방편이 된다는 뜻에서 세속대법이라 한다.
  120. 120)여래如來께서 3곳에서~전하신 법 : 영취산靈鷲山에서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인 것(拈花示衆), 다자탑多子塔 앞에서 자리를 반으로 나누어 앉도록 한 것(分半座), 사라쌍수娑羅雙樹 밑에서 관 밖으로 두 발을 내밀어 보이신 것(槨示雙跗)이다.
  121. 121)본분초료本分草料 : 가장 근본적인 설법으로 학적인 법신을 길러 주는 것이 마치 말먹이 풀과 같다는 뜻이다. 소와 말을 먹일 적에 주는 하루의 일정한 사료飼料를 뜻하는 것으로, 선문禪門에서는 사가師家가 학인에게 불자拂子ㆍ주먹ㆍ방榜ㆍ할喝을 쓰는 데 비유하는 말이다.
  122. 122)여년驢年 : 도충道忠은 “그 시기가 없음을 말한다. 즉 자子ㆍ축丑ㆍ인寅ㆍ묘卯 등의 해는 있지만 나귀(驢)로 이름 지을 해는 없기 때문이다.”(『葛藤語箋』 권5)라고 하였는데, 12지간에 없는 동물 가운데 왜 하필 나귀가 선발되었는가 하는 설명은 없어 이 설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나귀는 개와 더불어 가장 멸시되며 사람들은 즐겨 이를 들어 욕설로 쓰는 일이 많다. 즉, 여년이란 나귀의 나이가 얼마가 되거나 발전이 없는 무의미한 생애를 비유한 말이다. 『祖堂集』에 나귀처럼 나이를 먹어간다든가, 그대에게는 전혀 장래성이 없다는 등의 맥락으로 쓰인 예가 있다.
  123. 123)함원전含元殿 :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長安에 있던 궁궐.
  124. 124)이 인용문은 『維摩經』 제8권에 나오는 내용이다.
  125. 125)무착의 십팔주十八住와 천친의 이십칠의二十七疑 : 불멸 후 약 900년경 무착이 『無著論』 2권을 짓고 『金剛經』을 총 18주위住位로 과판科判하였고, 또 그의 친동생인 세친은 이 『無著論』을 토대로 다시 27의疑로 분류하는 『天親論』을 지었다. 후에 양무제의 아들인 소명태자(501~531)가 다시 이를 32분절로 구분하였는데, 그것이 오늘날까지 『金剛經』의 분류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126. 126)결혈決穴 : 무슨 뜻인지 자세히 알 길이 없다. 혹 ‘혈穴’ 자의 오자가 아닌가 의심스럽다.
  127. 127)명경明鏡과 보리菩提 : “몸은 보리 나무요, 마음은 맑은 거울을 걸어 둔 경대로다(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라는 구절을 함축하여 말한 것이다.
  128. 128)종자기鍾子期 : 음률音律을 잘 아는 사람. 전하여 상대의 심정을 잘 이해하는 지기지우知己之友를 뜻한다. 종자기와 백아伯牙는 모두 춘추 시대 사람으로, 백아는 거문고를 잘 타고 종자기는 거문고 소리를 잘 들었는데, 백아가 일찍이 거문고를 타면서 높은 산에 뜻을 두자, 종자기가 듣고 말하기를 ‘좋다, 험준함이 마치 태산泰山 같구나.’라 하였고, 백아가 흐르는 물에 뜻을 두고 거문고를 타자, 종자기는 또 ‘좋다! 양양洋洋함이 마치 강하江河와 같구나.’라 하여 백아의 생각을 종자기가 다 알아들었다. 그리하여 종자기가 죽은 뒤에는 백아가 자기 거문고 소리를 알아줄 이가 없다 하여 거문고 줄을 끊어 버리고 다시는 타지 않았다고 한다.
  129. 129)공종空宗 : 삼라만상은 모두 참으로 있는 것이라고 고집하는 그릇된 소견을 물리치고, 교화하기 위하여 온갖 것이 모두 공空하다는 교리를 종지宗旨로 한 것.
  130. 130)성종性宗 : 인문과학 본질이나 이치에 대해 설한 가르침.
  131. 131)공반야共般若 : 성문ㆍ연각ㆍ보살을 위해 공통으로 설한 반야.
  132. 132)불공반야不共般若 : 일승一乘의 보살만을 위하여 설한 반야.
  133. 133)백수공부栢樹工夫 : 조주趙州 스님의 ‘뜰 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라는 화두를 말한다.
  134. 134)칠전팔도七顚八倒 : 일곱 번 넘어지고 여덟 번 엎어진다는 뜻으로, 어려운 고비를 많이 겪음을 말한다.
  135. 135)장자소張子韶 : 송宋나라 고종高宗 때 사람으로, 자가 자소子韶이고 이름은 구성九成이며 호는 무구거사無垢居士 또는 횡포거사橫浦居士이다. 벼슬은 예부禮部, 형부刑部의 시랑을 지냈고 경학經學에 전념하여 많은 훈해訓解를 남겼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선학禪學에 조예가 깊어 당시의 고승인 대혜 종고大慧宗杲의 법을 이었으며, 이로 인하여 주자로부터 배척을 받았다.
  136. 136)여불위呂不韋 : ?~BC 235. 전국 시대 말기 위衛나라 복양濮陽 사람. 원래는 양적陽翟의 대상인이었는데, 우연히 조趙나라에 인질로 잡혀 와 있던 진공자秦公子 이인異人(子楚)이 가난하게 지내는 것을 보고는 많은 돈을 투자하여 그의 환심을 샀다. 또한 진秦나라의 태자인 안국군安國君과 자식이 없는 안국군의 부인인 화양부인華陽夫人을 설득하여 서자인 자초子楚를 양자로 삼게 했다. 그 뒤 임신한 애첩을 자초에게 바쳐 아내로 삼게 한 다음, 자초가 장양왕莊襄王이 되자 막후 권력자로 진나라의 정치를 좌우했다. 진나라의 재상이 되어 문신후文信侯에 봉해졌다. 동주東周를 공격해 멸망시키고 삼천군三川郡을 세웠으며, 또 한韓나라와 위魏나라의 상당군上黨郡을 점령하고 북쪽으로 조나라 땅을 공략하여 태원군太原郡을 세웠다. 진시황 영정嬴政이 즉위하자 상국相國을 지내면서 중부仲父로 존중되었다. 다시 한나라와 위나라를 공격해 동군東郡을 세웠다. 집안에 식객이 3천 명에 이르렀고, 가동家僮만 만여 명에 달했다. 진왕 10년 진시황이 친정을 시작한 뒤 면직되어 촉蜀으로 쫓겨났는데, 후환이 두려워 자살했다. 일찍이 빈객을 모아 『呂氏春秋』를 편찬했다.
  137. 137)본분납승本分衲僧 : 새로 닦을 것 없이 본래 부처라고 하는 도리를 깨달아서 그러한 입장을 견지하는 스님.
  138. 138)허유許由 : 중국 상고 시대의 고사高士로서 요堯가 천하를 양보하려 하자 거절하고 기산箕山에 숨었으며, 또 그를 불러 구주九州의 장長으로 삼으려 하자 영수潁水에서 귀를 씻었다 한다. 『莊子』 「逍遙遊」에 “요임금이 허유에게 천하를 물려주려고 하니, 허유는 ‘당신이 천하를 다스려 천하는 이미 잘 다스려졌습니다. 그런데 내가 당신을 계승한다면 나는 장차 명예를 위하라는 말입니까? 뱁새가 깊은 숲에 서식하여도 한 개의 나뭇가지에 의지할 뿐인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돌아가십시오.’라고 하면서 사양했다.”라고 한다.
  139. 139)식양息壤 : 곽박郭璞의 주註에 의하면, 저절로 생장生長하여 영원히 모감耗減되지 않는 토양土壤이라 하였다.
  140. 140)삼량三量 : 첫째 현량現量. 마음이 현재의 현상을 그대로 양지함이니, 안식眼識이 색色에 대함과 같은 것이다. 둘째 비량比量. 현재에 나타나지 않은 경계를 추측해 아는 것이니, 연기를 보고 불이 있는 줄 아는 것과 같다. 셋째 비량非量. 현전한 경계 또는 현전치 않은 경계를 잘못 인식하는 것이니, 환화幻華를 보는 것이나 안개를 연기로 잘못 보고 불이 있는 줄 아는 것과 같다.
  141. 141)삼제三諦 : 공제空諦ㆍ가제假諦ㆍ중도제中道諦(第一義諦).
  142. 142)자어상위自語相違 : 자기가 한 말을 자기가 부인하는 결과가 되게 하는 논법. 예를 들면 “우리 어머니는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자다.”라고 하는 경우이다.
  143. 143)교접交接 : 서로 오가면서 사귀는 것.
  144. 144)문수보살이 자장율사慈藏律師에게~준 4구게句偈 : 자장율사가 선덕여왕 5년(636)에 칙명을 받고 제자 실實 등 10여 명과 함께 당나라로 가서 문수보살이 주석住錫한다는 청량산淸凉山 문수보살상 앞에서 기도 정진하였다. 꿈에 문수보살이 준 범어梵語로 된 게송을 해독치 못하고 있다가 이튿날 아침에 기이한 스님이 와서 해석하되 “일체법을 다 깨달아 알면 자성은 존재하는 것이 없네. 이와 같이 법성을 알면 곧 노사나부처님을 보리라.(了知一切法, 自性無所有. 如是解法性, 卽見盧舍那.)”라고 하였다.
  145. 145)청량국사淸凉國師:?~839. 화엄종華嚴宗의 제4조. 속성은 하후夏候씨이고, 이름은 징관澄觀이며, 자字는 대휴大休이다. 오대산 청량사에 있었으므로 청량대사라 한다. 11세에 보림사寶林寺 패霈 선사에게 출가하여 계율을 온 선사와 담일曇一에게, 삼론종을 현벽玄璧에게, 『起信論』․『華嚴經』을 법장과 법설에게, 천태종을 담연湛然에게 배웠다. 불교의 교학과 내외 백반의 학예를 널리 연구하였는데, 주로 화엄에 관한 저술과 종의를 밝히는 데 힘썼다. 당 정원 12년(796)에 반야삼장이 40권 『華嚴經』을 번역하는 데에 참여하고 뒤에 그 소疏 10권을 지었다. 경을 내전에서 강하는데 그 묘법이 임금의 마음을 청량케 했다 하여 덕종이 청량법사라 하고 교수화상으로 삼았다. 헌종은 화엄법계의 뜻을 물어 활연히 깨닫고 대통청량국사의 호를 내려주었다. 키가 9척 4촌이며 손을 드리우면 무릎 아래까지 닿았다고 한다. 당 개성 4년(839) 3월 6일 나이 102세로 입적하였다. 저서는 『華嚴經註疏』ㆍ『華嚴經隨疏演義鈔』ㆍ『華嚴經略義』ㆍ『法界玄鏡』ㆍ『三聖圓融觀門』 등 4백여 권이 전한다. 사법 제자가 100여 명으로 그 가운데 종밀宗密ㆍ승예僧睿ㆍ보인寶印ㆍ적광寂光을 사철四哲이라 한다. 『宋高僧傳』 권5 및 『佛祖統紀』 권29 참조.
  146. 146)삼무三武 : 북위北魏의 태무제太武帝와 북주北周의 무제武帝와 당나라 무종武宗을 일컫는 말이다.
  147. 147)중화에서는 삼무三武가~죽음을 당하였고 : 북위北魏 태무제太武帝가 불상과 절을 부수고 불경을 불사르며 승려들을 묻어 죽인 적이 있는데, 그는 7년 후 환관들에게 죽임을 당했고, 그의 부자 모두 불행하게 죽었다. 북주北周의 무제武帝는 절과 경전을 훼멸하고 스님을 강제 환속시킨 적이 있는데, 그는 얼마 후 온몸에 악질이 돋고 전신이 썩어 죽었다. 향년 겨우 36살이었고 3년이 안 되어 나라도 망했다. 당 무종武宗이 절을 부수고 멸불滅佛했을 때에도 그해에 단약에 중독되어 사망했는데 향년 불과 32살이었다. 이후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나면서 당나라는 혼란에 빠졌다.
  148. 148)가지加持 : 부처의 대자대비大慈大悲한 힘의 가호加護를 받게 하는 기도.
  149. 149)삼명三明 : 아라한의 지혜에 갖추어 있는 자재하고 묘한 작용. 지혜가 분명히 대경을 아는 것을 명明이라 한다. 6신통神通 중의 숙명통ㆍ천안통ㆍ누진통에 해당하는 숙명명宿命明ㆍ천안명天眼明ㆍ누진명漏盡明이다.
  150. 150)육통六通 : 불교에서 말하는 여섯 가지의 신통력. 육신통이라고도 한다. ① 천안통天眼通. 천안을 얻어 모든 형색을 자유자재로 볼 수 있는 신통력. ② 천이통天耳通. 세간 일체의 좋고 나쁜 말이나 멀고 가까운 소리를 자유자재로 듣는 신통력. ③ 타심통他心通. 남의 마음을 자세하게 아는 신통력. ④ 숙명통宿命通. 과거를 자세하게 아는 신통력. ⑤ 신족통神足通. 신여의통神如意通이라고도 하며 몸을 자재하게 하는 신통력. ⑥ 누진통漏盡通. 자재하여 번뇌를 끊는 신통력을 말한다.
  151. 151)무염족왕無厭足王 : 선재동자가 보살의 지혜와 행을 묻기 위해 방문한 18번째 선지식. 그는 선재동자에게 여환해탈문을 설한다.
  152. 152)바수밀婆須蜜 : 화수밀和須蜜ㆍ바수밀다婆須蜜多ㆍ바수밀다라婆須蜜多羅ㆍ벌소밀달라筏蘇蜜呾羅라 음역하고 천우天友ㆍ세우世友라 번역한다. 북인도 건타라국 사람이다. 불멸 후 600년(56) 가니색가왕 때에 가습미라국에서 『大毘婆沙論』을 편찬하던 제4 결집 때에 상좌上座로 활약하였다. 학식이 풍부하여 당시에 존중히 여기던 법구ㆍ묘음ㆍ각천과 함께 바사사대논사婆沙四大論師의 하나이다.
  153. 153)승열勝熱 : 『華嚴經』 「入法界品」에서 선재동자가 방문한 열 번째 선지식.
  154. 154)추자鶖子 : 부처님 제자 가운데 지혜제일 사리불舍利弗. 사리불다라舍利弗多羅ㆍ사리보달라奢利補怛羅라 음역하고, 사리자舍利子ㆍ추로자鷲鷺子ㆍ신자身子라 번역한다. 또, 아버지가 실사室沙이기 때문에 별명을 우바실사優婆室沙라고도 한다. 마갈타국 왕사성 북쪽 나라那羅 촌에서 태어났다. 이웃의 목건련과 함께 외도 사연沙然을 스승으로 섬기다가, 뒤에 마승 비구로 인하여 석존께 귀의하였다. 자기의 수행에 정진함과 동시에 남을 교화하기에 노력, 불교 교단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인물로 부처님보다 먼저 죽었다.
  155. 155)『華嚴經』의 게송이 여기에는 순서가 뒤바뀌어 있어서 다음과 같이 바로잡는다. “온 세계의 티끌들을 가히 다 헤아릴 수 있고 큰 바다의 물을 가히 다 마실 수 있고 허공을 헤아리고 바람을 붙들어 맬 수 있을지라도 부처님의 무량한 공덕은 다 말할 수 없으리.”
  156. 156)육상六相 : 총상總相ㆍ별상別相ㆍ동상同相ㆍ이상異相ㆍ성상成相ㆍ괴상壞相을 말한다.
  157. 157)십현十玄 : 육상六相의 원리에 의거하여 연기緣起되는 실태實態를 말한 것이다.
  158. 158)도독고塗毒鼓 : 북 표면에 독을 발라 놓은 큰 북인데, 그 북소리를 듣는 사람은 모두 죽는다고 한다.
  159. 159)도원道原 : 송나라 때 법안종法眼宗 승려. 천태 덕소 국사天台德韶國師의 법을 이어 남악南嶽의 제10세世가 되고, 소주蘇州(江蘇) 승천영안원承天永安院에 머물렀다. 『景德傳燈錄』을 지어 진종眞宗 경덕景德 원년(1004)에 바치니 황제가 칙령으로 보관하게 했다. 혹은 이 책은 본래 호주湖州 철관음원鐵觀音院의 스님 공진拱辰이 지은 것인데, 완성한 뒤 경사京師에 가서 바치려고 가는 도중 한 승려와 함께 배를 타고 가다가 보여 주니 밤에 그 승려가 가지고 가 버렸다. 공진이 경사에 도착하니 도원이란 사람이 벌써 진상하여 상을 받은 뒤였다. 때문에 『景德傳燈錄』은 사문 도원이 지은 것이라지만 진위는 판별하기 어렵다.
  160. 160)오가五家 : 임제臨濟ㆍ위앙潙仰ㆍ조동曹洞ㆍ운문雲門ㆍ법안法眼의 오가선五家禪.
  161. 161)광등록廣燈錄 : 30권. 송宋나라 때 이준욱李遵勗이 천성 7년(1029)에 엮은 『天聖廣燈錄』을 말한다. 석가모니불에서 서천이십팔조西天二十八祖와 동토육조東土六祖를 거쳐 남악 회양南嶽懷讓 문하 8세, 청원 행사靑原行思 문하 12세까지, 불법을 계속 이어 온 336명에 대한 행적, 스승과 제자의 인연, 깨달음에 대한 문답, 어록을 정리한 저술이다.
  162. 162)속등록續燈錄 : 30권. 송宋나라 때 의 불국 유백佛國惟白이 건중 정국 원년(1101)에 엮은 『建中靖國續燈錄』을 말한다. 석가모니불에서 서천이십팔조西天二十八祖와 동토육조東土六祖를 거쳐 청원 행사靑原行思 문하 15세, 남악 회양南嶽懷讓 문하 14세까지의 계보와 행적, 공안公案, 게송 등을 정리한 저술.
  163. 163)거용곡용距踴曲踴 : 거약삼백距躍三百 곡용삼백曲踊三百의 준말로서, 거약삼백은 곧장 앞으로 뛰쳐나가며 3번 손으로 치는 것이고, 곡용삼백은 위로 몸을 솟구치면서 3번 손으로 치는 것으로 자신의 몸이 건재함을 보이는 동작이다. 『春秋左傳』 희공僖公 28년에 진문공晉文公의 신하 위주魏犨가 가슴에 부상을 당한 상태에서, 앞으로 뛰며 손뼉을 세 번 치고(距躍三百) 위로 뛰며 손뼉을 세 번 쳐서(曲踊三百) 자신의 몸이 무사함을 과시하여 죽음을 면한 고사가 있다. ‘거용距踴’의 ‘용踴’은 ‘약躍’과 통한다.
  164. 164)팔령八嶺 : 나이의 이칭異稱으로 쓰인 경우는 없는 것으로 보아 ‘영嶺’은 오자誤字인 듯하다. 나이 80을 가리킨 것으로 생각된다.
  165. 165)모과木瓜를 던진~데에 있었습니다 : 이 내용은 『詩經』 「國風」 ‘위풍衛風 제10’ 목과木瓜 3장에 “나에게 모과를 던져 주기에 나는 구슬로 갚았지만, 갚았다고 않는 것은 영원히 좋게 지내려 함이니라(投我以木瓜, 報之以瓊琚, 匪報也, 永以爲好也.)”라고 한 말에서 인용한 내용이다.
  166. 166)영서靈犀 : 영묘한 코뿔소. 그 뿔은 가운데 구멍이 있어서 양쪽으로 서로 통하는데, 이는 백성과 임금 사이에 의사가 서로 소통하고 투합投合함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167. 167)이 소제목은 원문에는 없으나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역자가 보입하였다.
  168. 1168)이 소제목은 원문에는 없으나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역자가 보입하였다.
  169. 169)반목蟠木 : 동쪽 바다에 도색산度索山이 있는데 그 산에서 서식하는 복숭아나무를 말한다. 『海外經』에 나온 것을 『史記集解』에서 배인裴駰이 인용한 구절에 따르면 “동해바다 섬 한 가운데에 도색산이 있고 그 산에는 반목이라는 복숭아나무가 삼천여 리 뻗어 있다. 동해가 항상 파란 것은 그 복숭아나무의 영향 탓이다.”라고 하였다.
  170. 170)침개針芥 : 자석磁石이 쇠붙이를 끌어당기고 호박琥珀이 겨자를 수습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서로 의기투합하는 것을 말한다.
  171. 171)침개針芥가 서로 감응하듯(針芥相感) : ‘침개상감針芥相感’은 침개상투針芥相投와 같은 의미로 높은 하늘에서 바늘을 떨어뜨려 마당에 놓여 있는 겨자씨를 맞히는 것을 말하는데 이 세상에 아주 드문 일이나 있을 수 없는 일을 비유하여 말할 때 쓴다. 불교 용어로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기 어렵다거나, 정법을 만나기 어렵다거나 설령 만났더라도 제대로 받아들여 이해하고 실천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사용한다.
  172. 172)심상규沈象珪 : 1766~1838. 본관은 청송靑松이며 아버지는 이조 참판 심념조沈念祖이고, 어머니는 예천醴泉 권씨權氏로 병조 판서 권도權導의 딸이다. 자는 치교穉敎, 호는 두실斗室 또는 이하彛下이다.
  173. 173)영명위永明尉 : 홍현주洪顯周. 정조의 둘째 딸 숙선옹주淑善翁主와 혼인하여 영명위에 봉하여졌다.
  174. 174)천서天叙 : 군신君臣ㆍ부자父子ㆍ형제兄弟ㆍ부부夫婦ㆍ붕우朋友의 순서이다. 즉 오륜五倫을 말한다.
  175. 175)천질天秩 : 하늘에서 부여해 준 존비尊卑ㆍ귀천貴賤의 높고 낮은 등급의 품질品秩을 말함.
  176. 176)구담瞿曇 : ① 사라드바트라고 하는 옛 선인仙人의 이름으로, 석가족釋迦族의 조상. ② 석가釋迦 종족의 성姓. ③ 도를 닦아 이루기 전의 석가釋迦를 이르는 말. 여기에서는 석가모니를 이르는 말이다.
  177. 177)삼강三綱 : 유교 도덕에서 근본이 되는 세 가지 강목綱目. 임금과 신하, 어버이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로서 곧 군위신강君爲臣綱ㆍ부위자강父爲子綱ㆍ부위부강夫爲婦綱을 말한다.
  178. 178)오전五典 : 사람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의 떳떳한 도리. 곧 부자父子 사이의 친애親愛, 군신君臣 사이의 의리義理, 부부夫婦 사이의 분별分別, 장유長幼 사이의 차서次序, 붕우朋友 사이의 신의信義.
  179. 179)춘조春曹 : 예부禮部, 예조禮曹.
  180. 180)엄자산崦嵫山 : 감숙성甘肅省에 있는 산으로, 전설에 의하면 이곳으로 해가 져서 들어간다고 한다. 만년晩年 또는 노년老年의 비유로 쓰인다.
  181. 181)포규蒲葵 : 포규선蒲葵扇을 가리킨다. 빈랑檳榔의 잎으로 만든 부채인데, 둥그렇게 생겼다.
  182. 182)방미厖眉 : 원래는 흑백이 섞인 눈썹, 백모白毛가 섞인 눈썹, 노인의 눈썹 등의 뜻으로 노인을 가리키는 말이나, 여기에서는 초의草衣 선사를 가리킨다.
  183. 183)전사耑使 : 전耑은 전專과 통하며, 편지에서 쓸 때는 ‘편지나 물건을 전하기 위해 일부러 특별히 사람을 보내는 것’을 뜻한다.
  184. 184)태지胎紙 : 편지 속에 따로 적어 끼워 넣은 종이이다.
  185. 185)이 소제목은 원문에는 없으나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역자가 보입하였다.
  186. 186)진췌시殄瘁詩 : 『詩經』 「大雅」 ‘첨앙瞻卬’에, “사람이 없어지니 나라의 명맥이 끊기고 병들었네(人之云亡, 邦國殄瘁.)”라는 구절에서 인용한 말로 나라의 동량을 잃고 슬퍼한다는 뜻이다.
  187. 187)시귀蓍龜 : 점을 치는 데 쓰이는 시초蓍草와 거북 껍질. 나라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데에 중추적인 역할을 함을 말한다. 여기에서는 홍석주 대감을 가리킨 말이다.
  188. 188)해로薤露 : 사람이 죽었을 때 죽은 자를 애도하는 노래(挽歌)로서 후세에는 만장輓章을 말한다. 『古今注』 중권에, “해로는 사람이 죽었을 때 부르는 노래이다. 한漢나라 초기 제왕齊王 전횡田橫이 나라를 잃고 자살하자, 그의 문도들이 슬퍼하여 인생은 마치 풀에 맺힌 이슬과 같다고 노래한 데서 나온 것이다. 그 가사에 “부추 위에 맺힌 이슬 어이 쉽게 마르나. 말라도 내일 아침 다시 젖는데. 인생은 한 번 가면 언제나 돌아오나.”라고 하였다. 『古今注』 「音樂」 참조.
  189. 189)체악棣蕚 : 형제를 뜻한다. 『詩經』 「小雅」 ‘녹명지십鹿鳴之什 상체常棣’에 “활짝 핀 아가위 꽃, 얼마나 곱고 아름다운가. 이 세상에 누구라 해도, 형제만 한 이가 없나니(常棣之華, 鄂不韡韡. 凡今之人, 莫如兄弟.)”라고 하여 형제의 우애를 뜻한 데에서 나온 것이다.
  190. 190)미록麋鹿 : 노루와 사슴으로 산림이나 초야를 뜻한다. 백거이白居易의 ≺서림사에 묵은 뒤 이른 아침 동림사 만 상인의 법회에 참석하러 가면서 최십이 원외에게 부치다(宿西林寺 早赴東林滿上人之會 因寄崔十二員外)≻라는 시에 “귀양 가며 대궐 떠나매 원난이 멀어지고, 늙어서 여산에 들어가니 미록이 따른다.(謫辭魏闕鵷鸞隔, 老入廬山麋鹿隨.)”라고 하였다. 여기에서는 산문에 살고 있는 초의 선사를 가리킨다.
  191. 191)중제重制 : 대공大功 이상의 상복服喪. 예전에 4촌이나 고모 또는 고종사촌 등 대공친의 상사 때에 아홉 달 동안 입던 복제.
  192. 192)수자手滋 : 아랫사람의 편지.
  193. 193)상인上人 : 지혜와 덕이 갖추어져 있는 부처님의 제자 또는 승려僧侶를 높여 일컫는 말.
  194. 194)우禹 : 하夏의 개국 군주로, 아버지를 이어 홍수를 다스리는 데 공을 세워 순舜을 잇는 천자가 되었다.
  195. 195)대순大舜은 밭~고기를 잡았으며 : 『帝王世紀』에 “순舜이 역산의 기슭에서 밭을 가니 농사꾼들은 서로 밭둑을 양보하게 되고, 뇌택雷澤에서 고기를 잡으니 어부들은 서로 연못을 양보하게 되었으며, 하빈河濱에서 도자기를 빚으니 질그릇을 비뚤어지게 빚는 사람이 없었다.”라고 하였다.
  196. 196)중니仲尼(공자)는 양식이~일을 당하였고 : 공자가 진陳과 채蔡 두 나라 사이를 지나다가 광도狂徒에게 포위를 당하여 7일간이나 식량이 떨어졌던 일을 말한다. 『論語』 「衛靈公」 참조
  197. 197)안자顏子는 지게미를 싫어하지 않았으며 : 『史記』 「伯夷列傳」에 “공자의 70제자 중에서, 공자는 유독 안회를 들어 학문하기를 좋아한다고 하였지만, 회는 자주 굶었고 지게미나 겨도 싫어하지 않았는데 마침내 일찍 죽고 말았다.”라는 말이 나온다.
  198. 198)도잠陶潜(도연명)은 두미斗米를 받지 않았으며 : 도연명이 팽택령彭澤令으로 있다가, “내 어찌 봉급으로 받는 쌀 닷 말 때문에 허리를 굽혀 독우督郵에게 절을 할 것이냐.” 하고 벼슬을 버리고 돌아갔다고 한다.
  199. 199)소진蘇秦 : 전국 시대 변사辯士로 합종合縱을 주장하였다. 본래 낙양雒陽 사람으로 귀곡鬼谷에 살고 있던 종횡가縱橫家 왕허王詡를 사사하였다. 집을 나가 유학한 지 몇 해 만에 크게 곤궁을 당하여 집에 돌아오니, 형제와 형수, 처첩들 모두 비웃었다. 이에 다시 공부하여 6국을 연합하여 6국의 정승이 된 다음 집에 돌아오니, 집안 식구들이 모두 존경하여 감히 쳐다보지 못하였다. 소진은 크게 탄식하며 “이 한 몸이 부귀하면 친척들도 두려워하고 빈천하면 천대하니 하물며 타인이겠는가. 만일 나에게 낙양의 좋은 농토 2경頃이 있었다면 나는 6국의 정승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200. 200)장의張儀 : 전국 시대 위魏나라 사람. 유명한 변사로서 6국을 유세遊說하여 진秦나라를 섬기게 하였다. 합종책合縱策으로 6국의 재상을 겸임했던 소진蘇秦과 함께 수수께끼의 종횡가인 귀곡 선생鬼谷先生에게 종횡의 술책을 배웠다. 위나라의 재상으로 있다가 진秦나라 혜문왕惠文王의 신임을 받아 진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소진이 제齊나라에서 살해되자 6국을 순방, 유세하여 소진의 합종책을 깨고 연횡책連橫策을 성사시켜 6국으로 하여금 개별적으로 진나라를 섬기게 하였다. 혜문왕이 죽은 후 참소讒訴를 당하여 위나라에서 객사하였다.
  201. 201)한신韓信 : 한漢나라의 명장으로 유방劉邦을 도와 천하를 통일한 다음 그 공로로 초왕楚王에 봉해졌으나 뒤에 회음후淮陰侯로 강봉되었다. 국사는 온 나라가 추앙하는 선비란 뜻인데, 소하蕭何는 일찍이 한신을 칭찬하여 둘도 없는 국사라 하였다.
  202. 202)팽월彭越 : 항우項羽를 섬기다 한漢나라에 귀순하여 기공奇功을 세우고 양왕梁王에 봉해졌는데, 한신의 죽음을 보고 두려워한 나머지 병력을 동원하여 자신을 보호하다가 고조高祖의 노여움을 사 마침내 효수梟首되었다.
  203. 203)이사李斯 : 중국 진秦나라의 재상. 자는 통고通古. 초의 상채上蔡(하남성) 사람. 젊었을 때 순자荀子에게 제왕치세의 법술을 배웠다. 진나라 승상 여불위呂不韋의 사인舍人이 되고, 진왕 정政(시황제)에게 신임을 얻어 장사長史가 되었으며 진왕이 천하를 통일하여 황제가 되었을 때 재상으로 임명받았다. 군ㆍ현 제도의 확립, 도량형 설정, 사상의 통일 등은 모두 그의 입안立案에 의한 것이며, 문자를 통일하기 위해 대전大篆에 바탕을 두고 소전을 제정했다. 또 시황제 순회 행차를 항상 수행하여 진의 공덕을 칭송했으며, 역산嶧山ㆍ태산泰山ㆍ낭야대瑯邪台ㆍ지부之䍒ㆍ갈석碣石ㆍ회계會稽 등 6개소의 돌에 각각 새겼다. 이것이 ‘진의 7각석’이며, 그가 썼다고 한다(泰山刻石). 또 옥새를 위해 어충전魚䖝篆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204. 204)조고趙高 : 진秦나라의 환관宦官. 진시황이 죽자 승상 이사와 짜고 조서를 고쳐서 부소扶蘇를 죽이고 차자 호해胡亥를 이세 황제二世皇帝로 세우고 승상이 되어 이사를 무고하여 죽이고, 이세를 속여 조정의 정사를 그르쳐 드디어 진나라를 망하게 했다.
  205. 205)양기梁冀 : 후한 때 안정安定 오씨烏氏(烏氐) 사람. 자는 백거伯車 또는 백단伯丹, 백탁伯卓이고, 양상梁商의 아들이다. 두 여동생을 순제順帝와 환제桓帝의 비로 바쳤다. 처음에 황문시랑黃門侍郞이 되고, 순제 때는 대장군에 임명되었다. 한안漢安 3년(144) 충제冲帝가 죽자 질제質帝를 세웠다. 여동생인 양태후梁太后와 함께 황제를 마음대로 없애고 세웠는데, 특히 8살의 질제가 그를 발호장군跋扈將軍이라 부르자 독살하고, 환제를 세웠다. 이고李固와 두교杜喬를 죽이자 세상이 모두 두려워했다. 한 집안에서 3명의 황후와 6명의 귀인貴人, 7명의 후侯, 2명의 대장군 그리고 공주와 결혼한 사람이 3명이며, 그밖에 고위직에 오른 사람이 57명이나 되었다.
  206. 206)장양張讓 : 후한 때 영천潁川 사람. 십상시十常侍의 지도자로, 영제靈帝 때 환관이 되어 중상시中常寺가 되고, 열후列侯에 봉해지면서 위세를 떨쳤다. 황제를 설득해 천하에 전세田稅 10전錢을 거둬 궁실을 수리하게 했다. 태원太原과 하동河東 등의 목재와 문석文石을 징발하여 주민들의 생활을 어렵게 만들었다. 영제가 그를 두고 ‘장 상시는 내 아버지(張常侍是我公)’라고 말했다. 소제少帝가 즉위하자 대장군 하진何進이 그를 죽이려고 하다가 일이 누설되어 먼저 공격해 하진 등을 살해했다. 원소袁紹가 군대를 보내 환관을 죽이려고 하자 황제를 재촉해 하상河上으로 달아나다가 상황이 급해지자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三國志演義』에서는 그가 황제를 끼고 갖은 모략과 악행을 다 행한 것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후한 말기의 혼란기에 외척 세력의 팽창을 막고 황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한 사람으로 보기도 한다.
  207. 207)석숭石崇 : 자는 계륜季倫, 아명兒名은 제노齊奴. 청주靑州 사람. 산기랑散騎郞과 형주자사荊州刺史 등을 지냈다. 당대의 최고 갑부로서 귀척貴戚 왕개王愷ㆍ양수羊琇 등과 부富를 다투었다. 나중에 조왕趙王 사마륜司馬倫에게 살해되었다.
  208. 208)양광楊廣 : 수양제의 호이다.
  209. 209)염가노자閻家老子 : 염라대왕. 저승에서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이 지은 생전의 선악을 심판하는 왕.
  210. 210)쌍명雙明과 쌍암雙暗 : 쌍명은 쌍으로 긍정한다는 뜻이고, 쌍암은 쌍으로 부정한다는 뜻이다.
  211. 211)백장百丈 : 720~814 혹은 749~814. 중국 당나라 스님. 속성은 왕王씨. 복주福州 장락현長樂縣 사람. 법명은 회해懷海이고 백장은 당호이다. 821년에 대지선사大智禪師, 1108년에 각조선사覺照禪師, 1335년에 홍종묘행선사弘宗妙行禪師라는 시호를 받았다. 20세에 월주越州 대운사에서 서산 혜조西山慧照에게 출가하여 남악南岳의 법조 율사法朝律師에게 구족계를 받고 여강廬江에서 대장경을 열람하였다. 마조馬祖가 남강南康에서 교화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서 6년 동안 섬겨 그의 인가印可를 받고 마조의 법사法嗣가 되었다. 홍주洪州 신오현新吳縣 대응산大雄山에 있으면서 종풍을 선양하니 납자衲子들이 사방에서 모여 들어 마침내 그 절을 백장산 대지성수선사大智聖壽禪寺라 하고, 스님을 백장선사라 부르게 되었다. 회해를 개조開祖로 하여 선풍禪風을 크게 진작하였다. 당나라 원화 9년 1월 15일 95세(『傳燈錄』, 『宋高僧傳』에서는 66세라 함)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저서는 『百丈淸規』 1권, 『百丈懷海禪師語要』 2권, 『語錄』 1권 『百丈廣錄』 1권이 있다.
  212. 212)큰 기틀(大機) : 선가禪家의 용어. 종문의 법체法體를 가리킨다. 대법大法의 묘기妙機라는 뜻으로 곧 활동이 큰 것을 말한다.
  213. 213)황벽黃蘗 : ?~850. 중국 선종의 스님. 복주福州 민현閩縣 사람이며 법명은 희운希運이다. 백장 회해百丈懷海의 제자이며, 임제 의현臨濟義玄의 스승이다. 황벽산黃檗山에 주석하여 황벽 화상이라 불리며 단제선사斷際禪師라는 시호를 받았다. 어려서 홍주洪州 황벽산에서 출가하여 천태산天台山과 경사京師에서 학업을 연마하다가, 뒤에 백장 회해를 찾아가서 그의 법을 이어받았다. 848년 배상국裵相國(裴休)의 청으로 완릉宛陵의 개원사開元寺에 머물면서 4방에서 모여드는 학인들을 제접提接하였다. 850년(당 대중 2) 8월 황벽산에서 입적하였는데 입적한 해를 혹은 849년 또는 855년이라고도 한다. 저서로는 『傳法心要』 1권과 『語錄』이 있다.
  214. 214)본분납자本分衲子 : 새로 닦을 것 없이 본래 부처라고 하는 도리를 깨달아서 그러한 입장을 견지堅持한 납자.
  215. 215)사성四聖 :불佛ㆍ보살菩薩ㆍ연각緣覺ㆍ성문聲聞.
  216. 216)육범六凡 : 십계 안에 있는 여섯 가지 범부의 세계. 지옥地獄ㆍ아귀餓鬼ㆍ축생畜生ㆍ아수라阿修羅ㆍ인간人間ㆍ천상天上이 이에 해당한다.
  217. 217)알묘揠苗 : 『孟子』 「公孫丑」上에 옛날 송宋나라 사람이 자기 곡식의 싹이 쑥쑥 자라지 못함을 걱정하여 곡식의 싹을 억지로 뽑아 올려놓으니, 싹이 다 말라 버렸다는 데서 온 말로서 되지 않을 일을 억지로 하려는 것을 비유한 조장助長의 어리석음을 의미한다.
  218. 218)덕흥대군德興大君 : 1530(중종 25)∼1559(명종 14). 조선 중기의 왕족 이초李岹.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패景伂. 아버지는 중종이며, 어머니는 창빈안씨昌嬪安氏이다. 조선 제14대 왕인 선조의 아버지이다. 1538년 덕흥군德興君에 봉해지고, 1542년에 정인지鄭麟趾의 손자인 판중추부사 세호世虎의 딸과 혼인하였으며, 1559년 병으로 죽었다. 1567년 명종이 후사 없이 죽으니 그의 셋째 아들 하성군 河城君 균均이 즉위하여 선조가 되었고, 1570년 덕흥대원군에 추존되었다. 묘는 의정부시 수락산水落山에 있다.
  219. 219)건륭乾隆 50년 : 정조 7년 계묘년은 건륭 50년이 아니라, 48년이니 착각이 있었던 듯하다.
  220. 220)현사玄沙 : 당나라 말기의 승려. 호는 종일宗一, 자는 사비師備, 속성은 사謝씨이다. 불법을 편 곳의 지명을 별칭으로 삼아 현사라고도 하고, 사씨 집안의 3남이라고 해서 사삼랑謝三郞이라고도 부른다. 복건성福建省 민현閩縣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낚시를 좋아하여 복주福州 남대강에서 배를 띄우고 낚시를 즐겼다. 30살 때 부용산芙蓉山 영훈靈訓 선사에게 출가하여 함통咸通 5년(864) 개원사開元寺 도현道玄 율사律師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수행 초기부터 의식을 절제하면서 극단적인 고행을 했는데, 스승인 설봉 의존雪峰義存은 그를 비두타備頭陀라 부르며 지도했다. 설봉을 따라 상골산에 들어가 수행 정진하던 중 『楞嚴經』을 읽다가 깨달았다. 설봉을 모시며 지내다 매계장梅谿場 보응원普應院에 잠시 머문 뒤 다시 현사산玄沙山으로 돌아와 생애를 보냈다. 왕성한 활동을 했으며, 민왕 왕심지王審知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왕심지가 예를 다하여 안국원安國院으로 초빙한 뒤부터 대중이 모여들었고, 이로써 석두 희천石頭希遷의 종지를 다시 일으킬 수 있었다. 후량後梁 태조 개평開平 2년에 세수 74세, 법랍 45세로 입적했다. 13명의 제자 가운데 나한원羅漢院 계침桂琛 선사가 유명하다. 어록집으로 『玄沙師備禪師語錄』 3권과 『玄沙廣錄』 3권이 있다. 그밖에 『宋高僧傳』과 『祖堂集』ㆍ『傳燈錄』ㆍ『禪林僧寶傳』ㆍ『蓮燈會要』ㆍ『五燈會元』 등에 행장行狀과 어록이 일부 전한다.
  221. 221)무시霧市 : 후한 때 사람 장해張楷가 도술을 잘하여 오리무五里霧를 만들어 홍농산弘農山 속에 은거했는데, 그를 따르는 학자들이 시市를 이루었다는 데에서 일컬은 말.
  222. 222)영인迎刃 : 영인자해迎刃自解의 준말. 대나무를 자를 때 윗부분만 가르면 아래는 칼날 따라 쉽게 갈라지듯이 주요한 문제를 해결하면 그와 관련된 기타 문제는 애쓰지 아니하여도 일이 저절로 해결된다는 뜻이다.
  223. 223)망기忘機 : 세속의 일이나 욕심을 잊고 자기 이해利害를 따지지 않으며 남을 해치려는 마음을 품지 않는 담박하고 순수한 태도를 말한다.
  224. 224)화정火定 : 불도를 닦는 사람이 열반할 때에 스스로 불 속으로 들어가 죽음을 뜻한다.
  1. 1){底}咸豊壬子誌記本(潭陽龍華寺所藏)。此通方正眼。當置優曇林下錄之後。然此書。有白坡亘璇之書狀及行狀故。載亘璇著述之後。以下禪源溯流。山史略抄。皆有炯之撰故。收錄於同處(編)。
  2. 2)「白波」二字。編者補入。
  3. 3)目次編者作成補入。
  4. 1)「▼(言+頁)」疑「頭」{編}。
  5. 2)「胃」疑「貫」{編}。
  6. 1)「金」疑衍字{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