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가산고(伽山藁) / 月荷上人文集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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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하 상인 문집 서
나는 보령補嶺에 유배되어 깊은 연못을 마주하듯 살얼음판을 걷듯 전전긍긍하며 살고 있는 처지이다. 게다가 안으로는 부질없는 육근六根에 갇히고, 밖으로는 기세계器世界에 국한된 신세이다. 돌아보건대, 어찌 사람과 법 두 가지가 모두 공하고, 마음과 경계가 쌍으로 적멸하겠는가! 그런데 석자 희겸喜謙이 덕암德庵 화상 인연으로 지팡이를 짚고 찾아와서는 합장하며 예를 표하고 두 번 절하면서 말하였다.
“월하月荷는 저의 스승이십니다. 드러내지 않으셨을 뿐 깨치신 분이기에 그 행적을 엮었고, 이것이 그 원고입니다. 선생님께서 한 말씀 해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내가 그의 행장을 살펴보았더니, 대사의 법명은 계오戒悟이고, 안동安東이 본관인 권씨權氏였다. 그의 어머니가 달을 품는 꿈을 꾸고서 임신하였고, 태어나서는 겨우 열한 살에 팔공산八公山에서 머리를 깎았으며, 가지산伽智山에서 세수 77세 법랍 66년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화장을 하자 세 차례나 큰 광명이 쏟아져 곧장 서방을 가리켰으며, 남녀의 승려와 속인들이 무더기로 이를 구경하고 감탄하였다 한다.
그의 유고를 열람하고는 대사가 스승답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따름이다. 문장 하나하나 게송 하나하나가 심기心機에서 쏟아져 나온 것이었으며, 손님을 말미암아 주인을 깨닫고

010_0758_c_09L月荷上人文集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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余謫補嶺臬惴若淵冰而內爲浮根所
010_0758_c_12L外爲器界所局顧安得人法二空
010_0758_c_13L心境雙寂哉釋者喜謙因緣德庵和尙
010_0758_c_14L杖錫而登門合爪禮而再拜曰月荷吾
010_0758_c_15L師也惟不章是惺狀其行而斯其稿
010_0758_c_16L願乞夫子之一言余按其狀則師之法
010_0758_c_17L名戒悟本以安東之權其母夢月而姙
010_0758_c_18L生纔十一歲落髮于八公山示寂于伽
010_0758_c_19L智山世壽七十七法臘六十六旣闍
010_0758_c_20L大放光明直指西方者三緇白男
010_0758_c_21L聚觀咨嗟云閱其穚則師之爲師
010_0758_c_22L可知也已一章一偈自出機抒因客
010_0758_c_23L{底}壬字(哲宗三年) 南基怕跋文本 (東國大學
010_0758_c_24L校所藏)

010_0759_a_01L속진俗塵을 말미암아 공空을 깨달으며, 무명의 미혹을 완전히 맑히고 법성의 본체를 완전히 드러낸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수염과 눈썹, 그리고 담담한 미소를 마치 패엽貝葉12)과 향등香燈 사이에서 마주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긴 하지만 이 책을 저 글자 없는 진실한 경전과 비교한다면 어찌 대사를 많은 말씀을 남긴 분이라 하기에 충분하겠는가. 돌아보건대, 뜨거운 번뇌 속에서 내뱉는 나의 말들이 또 어찌 대사를 중요한 인물로 만들기에 충분하겠는가. 많은 진신搢紳13) 선생들이 대사와 노닐었으니, 끌어다가 책의 첫머리에 올리고 싶은 분이 있겠지 싶었다. 그래서 문득 사양하며 말하였다.
“집안에 계신 부처님을 공양한 것14)은 실로 사문의 공덕을 의지한 것입니다. 어찌 이른바 묵명유행墨名儒行15)이겠습니까? 인륜의 상도를 잃지 않은 분이시군요! 염주나 돌리고 면벽하면서 사람들과 교류를 단절하고 기강을 파괴하는 자들과 이분을 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 노릇도 못 하면서 부처가 될 수 있는 자가 어찌 있겠습니까? 유자와 불자가 같건 다르건 간에 오로지 사람이 사람답고 도가 도다워야 옳습니다.”
나는 희겸의 부탁을 가상히 여겨 결국 글을 써서 돌려보냈다.
임자년(1852) 1월에 해곡 노인海谷老人 이기연李紀淵16) 쓰다.

010_0759_a_01L悟主因塵悟空無明之惑淨盡法性
010_0759_a_02L之體全彰其鬚眉淡笑若將可接於貝
010_0759_a_03L葉香燈之間矣雖然斯編也較諸無字
010_0759_a_04L眞經則何足以爲師多也顧余熱惱之
010_0759_a_05L又何足以爲師重也搢紳先生
010_0759_a_06L與師遊有欲引而進之於門墻者則輒
010_0759_a_07L謝曰供養在家佛實賴沙門功德
010_0759_a_08L所謂墨名儒行不墜彛倫者歟此不可
010_0759_a_09L與數珠面壁絕人壞紀者比也焉有
010_0759_a_10L不能爲人而能爲佛者乎儒釋之同不
010_0759_a_11L惟是人其人道其道可也余嘉其
010_0759_a_12L喜謙之請遂書而還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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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子首春海谷老人李紀淵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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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2)패엽貝葉 : 불경佛經을 뜻한다. 고대 인도에서 패다라貝多羅 나뭇잎을 종이 대신 사용했던 것에서 기인하였다.
  2. 13)진신搢紳 : 홀笏을 꽂고 큰 띠를 드리운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높은 벼슬아치를 말한다.
  3. 14)집안에 계신 부처님을 공양한 것 : 월하 대사가 출가한 승려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노모를 모시고 살면서 효성을 지극히 했던 것을 두고 한 말이다.
  4. 15)묵명유행墨名儒行 : 묵가墨家를 자칭하지만 실재 행실은 유자儒者라는 뜻이다.
  5. 16)이기연李紀淵(1783∼?)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국京國이다. 할아버지는 동지의금부사 명중明中이고, 우의정 지연止淵의 동생이다. 1805년(순조 5)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가 되고, 1815년 홍문록에 등록되었다. 1822년 대사성에 이어 이조참의·대사간·한성부좌윤을 지냈으며, 1828년 강원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831년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진하였고, 1833년 우승지·공조판서를 거쳐 1835년(헌종 1) 우참찬이 되었다. 1836년 평안도관찰사, 1837년 대사헌에 등용되었으며 예조판서로 안핵사按覈使를 겸하였다. 1838년 이조판서가 되고, 1839년 호조판서가 되었으나 1840년에 탐학하다는 탄핵을 받아 향리로 추방되었고, 뒤에 죄가 가중되어 고금도에 유배되었다. 1849년(철종 1)에 풀려나와 다시 한성부판윤·황해도병마사·경상도관찰사·판의금부사·형조판서 등을 지냈다.
  1. 1){底}壬字(哲宗三年) 南基怕跋文本 (東國大學校所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