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동사열전(東師列傳) / 東師列傳第一

ABC_BJ_H0258_T_001

010_0995_a_01L
동사열전東師列傳
동사열전 제1권(東師列傳 第一)
두륜산인 구계 선집 편차頭輪山人 九階 選集 編次
총목차總目次
자서전自序傳
동사열전 제1권
아도화상전阿度和尙傳
원효국사전元曉國師傳
의상조사전義湘祖師傳
자장법사전慈藏法師傳
진감국사전眞鑑國師傳
지증국사전智證國師傳
무염국사전無染國師傳
김대성전金大城傳
낭공대사전朗空大師傳
도선국사전道詵國師傳
혜철국사전慧徹國師傳
보조선사전普照禪師傳
동진대사전洞眞大師傳
대각국사전大覺國師傳
보조국사전普照國師傳
진각국사전眞覺國師傳
진정국사전眞靜國師傳
부암대사전浮庵大師傳
나옹왕사전懶翁王師傳
무학왕사전無學王師傳
동사열전 제2권
태고왕사전太古王師傳
환암국사전幻庵國師傳
원진국사전元禛國師傳
함허선사전涵虛禪師傳
구곡왕사전龜谷王師傳
벽계대사전碧溪大師傳
벽송선사전碧松禪師傳
부용조사전芙蓉祖師傳
경성대덕전敬聖大德傳
청허존자전淸虛尊者傳
사명존자전泗溟尊者傳
진묵조사전震默祖師傳
편양종사전鞭羊宗師傳
소요종사전逍遙宗師傳
풍담종사전楓潭宗師傳
해운선사전海運禪師傳
취여종사전醉如宗師傳
월저종사전月渚宗師傳
신해·보정합전信海普淨合傳
송파대사전松坡大師傳
동사열전 제3권
백암종사전栢庵宗師傳
무용법사전無用法師傳
화악조사전華岳祖師傳
설암종사전雪巖宗師傳
환성종사전喚醒宗師傳
벽하종사전碧霞宗師傳

010_0995_a_01L[東師列傳]

010_0995_a_02L1)東師列傳第一

010_0995_a_03L

010_0995_a_04L頭輪山人九階選集編次

010_0995_a_05L2)總目次

010_0995_a_06L
卷一

010_0995_a_07L
阿度和尙傳元曉國師傳義湘祖師
010_0995_a_08L慈藏法師傳眞鑑國師傳智證
010_0995_a_09L國師傳無染國師傳金大城傳
010_0995_a_10L空大師傳道詵國師傳慧徹國師傳
010_0995_a_11L普照禪師傳洞眞大師傳大覺國師
010_0995_a_12L普照國師傳眞覺國師傳眞靜
010_0995_a_13L國師傳浮庵大師傳懶翁王師傳
010_0995_a_14L無學王師傳

010_0995_a_15L
卷二

010_0995_a_16L
太古王師傳幻庵國師傳元禛國師
010_0995_a_17L涵虛禪師傳龜谷王師傳碧溪
010_0995_a_18L大師傳碧松禪師傳芙蓉祖師傳
010_0995_a_19L敬聖大德傳淸虛尊者傳泗溟尊者
010_0995_a_20L震默祖師傳鞭精宗師傳逍遙
010_0995_a_21L宗師傳楓潭宗師傳海運禪師傳
010_0995_a_22L醉如宗師傳月渚宗師傳信海普淨
010_0995_a_23L合傳松坡大師傳

010_0995_a_24L
卷三

010_0995_a_25L
栢庵宗師傳無用法師傳華岳祖師
010_0995_a_26L雪巖宗師傳喚醒宗師傳碧霞

010_0995_b_01L설봉종사전雪峯宗師傳
상월종사전霜月宗師傳
호암종사전虎巖宗師傳
함월종사전涵月宗師傳
만화강사전萬花講師傳
연해강사전燕海講師傳
영곡강사전靈谷講師傳
나암강사전懶庵講師傳
영파강사전影波講師傳
두륜대사전頭輪大師傳
묵암종사전默庵宗師傳
금주강사전錦洲講師傳
서암선사전瑞巖禪師傳
몽월영홍전夢月泳泓傳
동봉욱일전東峯旭日傳
대인등전전大印燈傳傳
해봉성찬전海峯聲賛傳
동사열전 제4권
연담종사전蓮潭宗師傳
정암선사전晶岩禪師傳
백련선사전白蓮禪師傳
현해선사전懸解禪師傳
완호강사전玩虎講師傳
낭암강사전朗巖講師傳
연파강사전蓮坡講師傳
백파강사전白坡講師傳
양악선사전羊岳禪師傳
은암강사전銀岩講師傳
설곡화상전雪谷和尙傳
용암선백전龍巖禪伯傳
금계선사전錦溪禪師傳
은봉대사전隱峰大師傳
환봉대사전煥峯大士傳
철우선덕전鐵牛禪德傳
화담강사전華潭講師傳
설암선사전雪岩禪師傳
수룡강사전袖龍講師傳
철경강사전掣鯨講師傳
해붕강백전海鵬講伯傳
호의대사전縞衣大士傳
하의대사전荷衣大士傳
초의선백전草衣禪伯傳
송암대사전松庵大師傳
철선강사전鐵船講師傳
대은선백전大隱禪伯傳
성담선백전性潭禪伯傳
인암선백전忍庵禪伯傳
영허강백전映虛講伯傳
낙파선사전洛波禪師傳
설월대사전雪月大師傳
제봉선백전霽峰禪伯傳
허주선백전虛舟禪伯傳
영산선백전影山禪伯傳
원암선백전圓庵禪伯傳
하은선백전荷隱禪伯傳
용호강백전龍湖講伯傳
지봉강백전智峯講伯傳
침명강백전枕溟講伯傳
경월선사전鏡月禪師傳
회산강백전晦山講伯傳
이봉선백전离峯禪伯傳
벽파선사전碧波禪師傳
용운선백전龍雲禪伯傳
화운선사전化運禪師傳
방월선백전傍月禪伯傳
자행선사전慈行禪師傳
청해대사전淸海大士傳
완파대사전玩坡大師傳
만휴선백전萬休禪伯傳

010_0995_b_01L宗師傳雪峯宗師傳霜月宗師傳
010_0995_b_02L虎巖宗師傳涵月宗師傳萬花講師
010_0995_b_03L燕海講師傳靈谷講師傳懶庵
010_0995_b_04L講師傳影波講師傳頭輪大師傳
010_0995_b_05L默庵宗師傳錦洲講師傳瑞巖禪師
010_0995_b_06L夢月泳泓傳東峯旭日傳大印
010_0995_b_07L燈傳傳海峯聲賛傳

010_0995_b_08L
卷四

010_0995_b_09L
蓮潭宗師傳晶岩禪師傳白蓮禪師
010_0995_b_10L懸解禪師傳玩虎講師傳朗巖
010_0995_b_11L講師傳蓮坡講師傳白坡講師傳
010_0995_b_12L羊岳禪師傳銀岩講師傳雪谷和尙
010_0995_b_13L龍巖禪伯傳錦溪禪師傳隱峰
010_0995_b_14L大師傳煥峯大士傳鐵牛禪德傳
010_0995_b_15L華潭講師傳雪岩禪師傳袖龍講師
010_0995_b_16L掣鯨講師傳海鵬講伯傳縞衣
010_0995_b_17L大士傳荷衣大士傳草衣禪伯傳
010_0995_b_18L松庵大師傳鐵船講師傳大隱禪伯
010_0995_b_19L性潭禪伯傳忍庵禪伯傳映虛
010_0995_b_20L講伯傳洛波禪師傳雪月大師傳
010_0995_b_21L霽峰禪伯傳虛舟禪伯傳影山禪伯
010_0995_b_22L圓庵禪伯傳荷隱禪伯傳龍湖
010_0995_b_23L講伯傳智峯禪伯傳枕溟講伯傳
010_0995_b_24L鏡月禪師傳晦山講伯傳离峯禪伯
010_0995_b_25L碧波禪師傳龍雲禪伯傳化運
010_0995_b_26L禪師傳傍月禪伯傳慈行禪師傳
010_0995_b_27L淸海大士傳玩坡大師傳萬休禪伯

010_0995_c_01L응화강백전應化講伯傳
동사열전 제5권
벽담선백전碧潭禪伯傳
퇴은선백전退隱禪伯傳
인곡강백전仁谷講伯傳
남호선백전南湖禪伯傳
문암강백전聞庵講伯傳
영암선백전靈岩禪伯傳
혼성선백전混性禪伯傳
원담선사전圓潭禪師傳
문담강백전文潭講伯傳
쌍월선백전雙月禪伯傳
호봉선백전虎峰禪伯傳
철요선백전鐵鷂禪伯傳
한양선백전漢陽禪伯傳
서암강사전恕庵講師傳
침월선사전枕月禪師傳
금월선사전錦月禪師傳
포운선사전浦雲禪師傳
보운선사전寶雲禪師傳
일여선백전一如禪伯傳
종암강사전鍾庵講師傳
회암선백전悔庵禪伯傳
연호대사전烟湖大師傳
영허선백전靈虛禪伯傳
무위선백전無爲禪伯傳
혜봉선사전惠峰禪師傳
운파선사전雲坡禪師傳
보경선사전寶鏡禪師傳
우담강백전優曇講伯傳
화월선사전化月禪師傳
기봉선사전騎峯禪師傳
환허강백전幻虛講伯傳
함명강백전涵溟講伯傳
설두강백전雪竇講伯傳
경담강사전鏡潭講師傳
용명선사전龍溟禪師傳
영월선사전映月禪師傳
금곡강사전錦谷講師傳
보문선사전普門禪師傳
월여선백전月如禪伯傳
금허선백전錦虛禪伯傳
호월선사전湖月禪師傳
원화강백전圓華講伯傳
상운선사전祥雲禪師傳
덕송선사전德松禪師傳
연주강백전蓮舟講伯傳
화선전華先傳
용파선사전龍坡禪師傳
이침산전李枕山傳
동사열전 제6권
우담강사전雨潭講師傳
혼허강백전渾虛講伯傳
청연강백전淸淵講伯傳
수성선사전壽星禪師傳
보제강백전普濟講伯傳
금성선사전錦城禪師傳
설우대사전雪藕大士傳
응룡선사전應龍禪師傳

010_0995_c_01L應化講伯傳自序傳

010_0995_c_02L
卷五

010_0995_c_03L
碧潭禪伯傳退隱禪伯傳仁谷講伯
010_0995_c_04L南湖禪伯傳聞庵講伯傳靈岩
010_0995_c_05L禪伯傳混性禪伯傳圓潭禪師傳
010_0995_c_06L文潭講伯傳雙月禪伯傳虎峰禪伯
010_0995_c_07L鐵鷂禪伯傳漢陽禪伯傳恕庵
010_0995_c_08L講師傳枕月禪師傳錦月禪師傳
010_0995_c_09L浦雲禪師傳寶雲禪師傳一如禪伯
010_0995_c_10L鍾庵講師傳悔庵禪伯傳烟湖
010_0995_c_11L大師傳靈虛禪伯傳無爲禪伯傳
010_0995_c_12L惠峰禪師傳雲坡禪師傳寶鏡禪師
010_0995_c_13L優曇講伯傳化月禪師傳騎峯
010_0995_c_14L禪師傳幻虛講伯傳涵溟講伯傳
010_0995_c_15L雪寶講伯傳鏡潭講師傳龍溟禪師
010_0995_c_16L映月禪師傳錦谷講師傳普門
010_0995_c_17L禪師傳月如禪伯傳錦虛禪伯傳
010_0995_c_18L湖月禪師傳圓華講伯傳祥雲禪師
010_0995_c_19L德松禪師傳蓮舟講伯傳華先
010_0995_c_20L龍坡禪師傳李枕山傳

010_0995_c_21L
卷六

010_0995_c_22L
雨潭講師傳渾虛講伯傳淸淵講伯
010_0995_c_23L壽星禪師傳普濟講伯傳錦城
010_0995_c_24L禪師傳雪藕大士傳應龍禪師傳
010_0995_c_25L{底}國立圖書舘所藏筆寫本{甲}東國大學校所
010_0995_c_26L藏謄寫本
底本有目次編者改作補入

010_0996_a_01L금파선사전金波禪師傳
월화강사전月華講師傳
호은강사전湖隱講師傳
원해강백전圓海講伯傳
경운강백전擎雲講伯傳
응운강백전應雲講伯傳
구연강백전九淵講伯傳
벽련선사전碧蓮禪師傳
법해강백전法海講伯傳
청담선사전淸潭禪師傳
예암선사전禮庵禪師傳
운담선사전雲潭禪師傳
용월선사전龍月禪師傳
원응강백전圓應講伯傳
호연선사전浩然禪師傳
팔굉선백전八紘禪伯傳
성담강백전聖潭講伯傳
청악선백전淸岳禪伯傳
응암선사전應庵禪師傳
청호강백전靑湖講伯傳
청봉선백전淸峯禪伯傳
취운강백전翠雲講伯傳
자운선사전慈雲禪師傳
금월선덕전錦月禪德傳
환명선사전幻暝禪師傳
회광강백전晦光講伯傳
아도화상전阿度和尙傳1)
아도阿度의 아버지는 위魏나라 사람 아굴마阿崛摩이고 어머니는 고도녕高道寧이다. 그런 까닭에 이름을 아도阿道라고 하였으며, 서경西京 즉 평양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굴마가 사신으로 왔을 때 도녕과 만난 일이 있었는데, 그로 인해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아이가 점점 커가면서 어머니에게 물었다.
“저는 어째서 아버지가 없습니까?”
어머니는 대답하였다.
“위나라 사신이었던 아굴마가 바로 너의 아버지이다.”
아도가 위나라에 들어가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가 위나라 임금께 주달奏達하자 임금이 도첩度牒2)을 주어 승려가 되게 하고는 아도阿度라는 이름을 내렸다.
현창玄暢3) 화상의 문하에 들어가 그의 의발衣鉢(법통)을 전해 받고 아도阿道라 이름하게 되었다. 고국에 돌아와 어머님을 뵈니 그의 어머님이 아도에게 말하였다.
“너는 동경東京(신라)으로 가거라.”
그는 모례毛禮4)라는 사람이 다스리던 선주善州(지금의 선산)를 지나가다가 산에 들어가 암자를 지으니, 눈 속에 오색이 찬란한 도리화桃李花가 피어 있는지라 그 암자의 이름을 도리암桃李庵이라고 하였으며, 모례가 살고 있던 마을의 이름을 도기道起라고 하였다.
왕의 딸이 병이 났는데 아도 스님이 7일 동안 정근精勤해서 그 병이 나았다. 그러자 왕이 매우 기뻐하면서 천경림天敬林(지금의 흥륜사)을 하사하니, 그곳에 암자를 짓고 부처님을 받들어 공양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여덟 개의 큰 가람伽藍과 500개의 선찰禪刹을 차례로 건립하였으며 불법을 크게 퍼뜨리게 되었으니, 그때는 양梁나라 무제武帝 보통普通 8년 정미이고 신라 법흥왕法興王 13년5)이다.

010_0996_a_01L金波禪師傳月華講師傳湖隱講師
010_0996_a_02L圓海講伯傳擎雲講伯傳應雲
010_0996_a_03L講伯傳九淵講伯傳碧蓮禪師傳
010_0996_a_04L法海講伯傳淸潭禪師傳禮庵禪師
010_0996_a_05L雲潭禪師傳龍月禪師傳圓應
010_0996_a_06L講伯傳浩然禪師傳八紘禪伯傳
010_0996_a_07L聖潭講伯傳淸岳禪伯傳應庵禪師
010_0996_a_08L靑湖講伯傳淸峯禪伯傳翠雲
010_0996_a_09L講伯傳慈雲禪師傳錦月禪德傳
010_0996_a_10L幻暝禪師傳晦光講伯傳

010_0996_a_11L[傳]

010_0996_a_12L阿度和尙傳

010_0996_a_13L
阿度者父魏人阿崛摩也母高道寧也
010_0996_a_14L故名阿道西京平壤人也崛摩使來
010_0996_a_15L接對道寧因以有娠生子稍長問母
010_0996_a_16L我何無父母曰魏使阿崛摩是也
010_0996_a_17L入魏逢父父達魏主主賜度牒爲僧
010_0996_a_18L名阿度入玄暢和尙傳衣鉢名曰我
010_0996_a_19L來見母母曰汝徃東京行過善州
010_0996_a_20L地主毛禮家入山結庵雪中開五色桃
010_0996_a_21L名其菴曰桃李毛居村曰道起
010_0996_a_22L有女子病師七日精勤1)▼(疒*(羽/木)) [1] 王大
010_0996_a_23L以天敬林賜之結庵奉供八大伽
010_0996_a_24L五百禪刹次第建立佛法大行
010_0996_a_25L武普通八年丁未新羅法興王十三年

010_0996_b_01L
도리사 뒤에 금수굴金水窟이 있었는데, 아도는 그 굴에 들어가 다시는 나오지도 않았고 사라지지도 않았으니, 그곳이 곧 동토東土(신라)에 사찰이 처음 시작된 곳이다.
남평南平 중봉산中峯山의 「죽림사기竹林寺記」에 이르기를, “신라 눌지왕訥祗王 때 아도 화상이 세운 것이다.”라고 하였다. 동진東晋 목제穆帝 영화永和 12년 병진(356)에 위나라 탁발씨拓拔氏6)의 신하 아굴마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왔는데 여자 고도녕이 그를 시봉하다가 이듬해 정사년(357) 정월에 아들을 낳았다.
간문제簡文帝 함안咸安 2년 임신(372) 열여섯 살 때 위나라로 들어가 아도阿度라는 이름을 받았는데, 현창 화상을 배알하자 다시 아도我道라는 호를 내려 주었다. 어린아이 때의 이름은 아도阿道였다.
동쪽(신라)으로 돌아오니 그때 나이는 열아홉 살이었고, 냉산冷山 아래 모례毛禮의 집에 이르렀을 때에는 사람들이 그를 묵호자墨胡子라고도 불렀다. 그리고 그가 살고 있던 마을을 도개挑開라고 하였는데, 열제列帝 태원泰元7) 2년 눌지왕 경진(440)의 일이다. 태원 5년 신라 소지왕炤智王 계미년(눌지왕 27, 443)에 도리암桃李庵으로 돌아갔다.”석한奭韓의 내마奈麻8) 김용행金用行이 아도 화상의 비碑를 만들어서 도리사에 세웠다.
원효국사전元曉國師傳
원효의 속성은 설薛씨이고 이름은 서당誓幢이며, 신라 압량군押梁郡지금의 경산군慶山郡 불지촌佛地村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어머니가 유성流星이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그로 인해 임신하였으며, 해산할 무렵에는 오색구름이 땅을 덮은 가운데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수나라 양제煬帝 대업大業 10년, 신라 진평왕眞平王 39년 정축(617)의 일이다.
장성해서는 당나라로 법을 구하기 위해 길을 떠났는데, 길을 가던 도중에 무덤들 사이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다. 밤에 목이 너무 말라 물을 퍼 마셨는데, 아주 달고 시원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가서 보니 그 물은 곧 해골에 담겨 있는 물이었다. 갑자기 크게 확연한 깨달음을 얻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마음이 생기면 갖가지 법이 생겨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해골의 물과 깨끗한 물이 서로 다르지 않은 법이로구나. 여래如來 큰 스승님께서 ‘삼계三界가 다 오직 마음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그분이 어찌 우리를 속인 것이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마침내 다시는 스승을 찾지 않고 곧바로 본국으로 돌아와 『화엄경』 주석을 지었다. 언젠가는 상례를 벗어난 이상한 행동을 하면서 거리를 누비며 외쳤다.
“누가 내게 자루 없는 도끼를 주면 하늘을 버틸 기둥을 다듬을 것이다.”
사람들은 아무도 그 뜻을 알아듣지 못했는데,

010_0996_b_01L桃李寺後有金水窟入此不生不
010_0996_b_02L乃東土佛宇之始也南平中峯山竹
010_0996_b_03L林寺記曰新羅訥祇王時阿度所建也
010_0996_b_04L東晋穆帝永和十二年丙辰魏拓拔氏
010_0996_b_05L之臣阿崛摩使高句麗女子高道寧侍
010_0996_b_06L明年丁巳正月生簡文帝咸安二年
010_0996_b_07L壬申年十六入魏賜名阿度謁玄暢
010_0996_b_08L賜號我道兒名阿道東歸時年十九
010_0996_b_09L至冷山下毛禮家時人名之曰墨胡子
010_0996_b_10L名村曰桃開列帝泰元二年訥祇王庚
010_0996_b_11L辰也泰元五年新羅炤智王癸未還桃
010_0996_b_12L奭韓奈麻金用行作阿
度和尙碑立桃李寺

010_0996_b_13L

010_0996_b_14L元曉國師傳

010_0996_b_15L
師姓薛名誓幢新羅押梁郡今之
慶山
佛地
010_0996_b_16L村人也母夢流星入懷因有娠將產
010_0996_b_17L五色雲覆地而生隋焬帝大業十年
010_0996_b_18L羅眞平王三十九丁丑也旣長入唐訪
010_0996_b_19L夜宿2) [2] 渴甚掬飮水甚甘凉
010_0996_b_20L明朝視之乃髑髏也忽猛省歎曰
010_0996_b_21L生則種種法生心滅則髑髏不二如來
010_0996_b_22L大師曰三界唯心豈欺我哉遂不復
010_0996_b_23L求師即還本國䟽華嚴經嘗風顚唱
010_0996_b_24L街曰誰許沒柯斧爲斫支天柱人皆

010_0996_c_01L그때 태종太宗이 그 말을 듣고 말하였다.
“이는 귀한 부인을 얻어 훌륭한 아이를 낳겠다는 뜻이다.”
그때에 요석궁遙石宮에 과부가 된 공주가 있었는데, 원효를 인도하여 그 궁에 들어가게 하여 거기에서 함께 자게 하였더니 과연 설총薛聰을 낳게 되었다.
설총은 태어나면서부터 영민하고 달관達觀하였으며 경사經史에 널리 통달하였다. 그는 신라 십현十賢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방언方言(이두)을 만들어 모든 물명物名에 널리 통해 썼으며, 육경六經을 훈해訓解하였다. 관직은 한림翰林에 이르렀으며, 고려 현종顯宗은 그에게 홍유후弘儒侯라는 명칭을 주었고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도록 했다.
원효 대사는 일찍이 분황사芬皇寺에 머물면서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저술하였는데 제40 「회향품回向品」에 이르러 붓을 놓아 버렸고, 또 『금강삼매경소金剛三昧經疏』를 지어 그 이름을 각승角乘이라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소를 타고 소의 뿔에 경을 걸어 놓고 지었기 때문이다.
이미 입적하고 난 다음9) 설총이 그의 진용眞容을 분황사에 모셨는데, 그때 그 곁에서 예를 올리니 초상(像)이 돌아보았다고 한다.
상주 사불산에 원효암元曉庵과 의상암義湘庵 두 개의 암자 터가 남아 있고, 영변 묘향산에도 척판대擲板臺10)가 있으며, 동래 금정산에는 원효암元曉庵 화엄대華嚴垈가 있고, 해남 두륜산에도 원효대元曉臺와 의상대義湘臺가 있다. 광주 무등산에는 원효암이 있고, 양주 소요산에도 탁석천卓錫泉, 관음송觀音松, 화정和靜 공주의 대궐 터가 남아 있다.
고려 숙종이 ‘화정국사和靜國師’라는 시호를 내렸다.
의상조사전義湘祖師傳
대사의 속성은 김씨11)이고 아버지는 한신韓信이다. 29세에 황복사皇福寺에서 머리를 깎고 얼마 안 있어 중국으로 유학 갈 것을 생각하더니, 마침내 원효와 함께 길을 나서 요동에 이르렀는데 거기에서 붙잡혀 수십 일 동안 갇혀 있다가 돌아왔다.12)
당나라 고종高宗 영휘永徽13) 초에 마침 당나라로 돌아가는

010_0996_c_01L未諭時太宗聞之曰欲得貴婦生賢子
010_0996_c_02L時瑤石宮有寡公主引曉入宮
010_0996_c_03L留宿焉果生薛聦聦生而敏達博通
010_0996_c_04L經史新羅十賢中之一也以作方言
010_0996_c_05L會通物名訓解六經官至翰林高麗
010_0996_c_06L顯宗贈弘儒侯從祀文廟師曾住芬
010_0996_c_07L皇寺述華嚴䟽至第四十回向品絕
010_0996_c_08L3) [3] 又述三昧經䟽名曰角乘言乘牛
010_0996_c_09L掛角作也旣入寂也聰塑眞容芬皇寺
010_0996_c_10L時旁4) [4] 像忽回顧尙州四佛山
010_0996_c_11L有元曉義湘二庵址寧邊妙香山有擲
010_0996_c_12L板臺東萊金井山有元曉庵華嚴垈
010_0996_c_13L海南頭輪山有元曉臺義湘臺光州無
010_0996_c_14L等山有元曉庵楊州逍遙山有卓錫
010_0996_c_15L泉觀音松和靜公主大闕址高麗肅宗
010_0996_c_16L賜和靜國師之號

010_0996_c_17L

010_0996_c_18L義湘祖師傳

010_0996_c_19L
師姓金氏父韓信年二十九依皇福
010_0996_c_20L落髮未幾西圖觀化遂與元曉
010_0996_c_21L出遼東囚閉累旬唐高宗永徽初
010_0996_c_22L「▼(疒*(羽/木))」甲本正誤表作「瘳」「墜」甲本正誤表
010_0996_c_23L作「塚」
「華」甲本正誤表作「筆」「禮」下甲
010_0996_c_24L本正誤表有「於」

010_0997_a_01L당나라 사신의 배를 타고 당으로 들어갔다. 맨 처음에는 양주楊州의 장군 유지인劉至仁의 집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가 관아에 머물기를 간청하고는 아주 융숭하게 공양을 올렸다. 다시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로 가서 지엄智儼14)을 배알하고 입실入室의 허락을 얻었고 『잡화경雜華經』15)의 미묘한 뜻에 대하여 논함에 있어서 의상은 깊숙하고 미세한 부분까지도 철저히 분석하였으니, 비유하면 마치 ‘쪽에서 나온 푸른빛이 쪽의 본래 색깔보다 더 푸르다’고 한 것과 같다.
당나라 고종 함형咸亨 원년 경오(670)에 본국으로 돌아왔다. 의봉儀鳳 원년 병자(676)에 태백산으로 가서 임금의 교지를 받들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했다. 종남산 지엄의 문인 현수賢首가 찬술한 『화엄경수현소華嚴經搜玄䟽』와 편지를 동봉해 보내왔는데 그 편지의 내용은 이러했다.
“서경西京 숭복사崇福寺의 승려 법장法藏16)은 해동 신라국 화엄 법사님께 편지를 올리나이다. 시자侍者가 한 번 서로 이별한 뒤로 30여 년 동안 희망을 기울이는 정성이 어찌 마음에서 떠나오리까? 노을 구름(烟雲)이 만 겹이고 바다와 육지로 연해 있는 길은 천 리나 되어 이 몸이 스님을 다시 만나 뵙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습니다. 가슴속에 품고 있는 그리움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의상은 10개 사찰17)에서 가르침을 전하고 또 「화엄법계도」 및 『화엄약소』를 지었다. 총장總章 원년 무진(668)에 태연히 열반에 들었다. 고려 숙종이 ‘원교국사圓敎國師’라는 시호를 추증했다.
자장법사전慈藏法師傳
스님의 속성은 김씨이다. 신라 진골 출신으로서 소판蘇判18) 무림茂林의 아들이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없자 천부千部 관세음보살 앞에 나아가 자식을 낳게 해 주면 속가를 버리고 출가하여 법法의 바다에 나루가 되게 하겠다고 기도를 하였다. 어머니가 별이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했으며, 석가세존이 오신 날과 같은 4월 초파일에 아이를 낳았다. 이름을 선종善宗이라 했는데, 그는 일찍 부모를 잃고 논밭을 희사喜捨하여 영광사寧光寺19)를 짓고 출가했다.
당나라 태종 정관貞觀 10년, 신라 선덕여왕 인평仁平 3년 병신(636)에 당나라로 들어가 종남산終南山 운제사雲際寺의 원향圓香 선사를 알현했다. 원향 선사가 말하였다.
“너희 나라는 날마다 전쟁이 심하여 백성들이 도탄에 빠진다고 하니, 탑을 세우고 사찰을 지어 산수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진압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자장 스님은 청량산淸凉山 문수보살의 소상塑像 앞에 가서 정성껏 예배를 드린 후 꿈속에서 문수보살로부터 범어로 된 게송을 받았는데, 그 게송은 이러했다.


010_0997_a_01L使船西還㝢載入唐初爲楊州將劉至
010_0997_a_02L請留衙內供養豊贍徃終南山至
010_0997_a_03L相寺謁智儼許爲入室雜華妙旨
010_0997_a_04L1) [5] 幽微藍茜沮本色也唐高宗咸亨
010_0997_a_05L元年庚午還國儀鳳元年丙子歸太白
010_0997_a_06L奉敎旨創浮石寺終南門人賢首
010_0997_a_07L撰搜玄䟽送并奉書曰西京崇福寺僧
010_0997_a_08L法藏致書於海束新羅華嚴法師侍者
010_0997_a_09L一從分別三十餘年傾望之誠豈離
010_0997_a_10L心首加以烟雲萬2) [6] 海陸千里恨此
010_0997_a_11L一身不復再面抱懷戀戀夫何可言
010_0997_a_12L以十刹傳敎又著法界圖及略䟽總章
010_0997_a_13L元年戊辰儼然歸寂矣高麗肅宗贈圓
010_0997_a_14L敎國師之號

010_0997_a_15L

010_0997_a_16L慈藏法師傳

010_0997_a_17L
師姓金氏新羅眞骨蘇判茂林之子
010_0997_a_18L無子就千部觀音前祝曰生子捨作法
010_0997_a_19L海津梁母夢星入懷有娠釋尊同日生
010_0997_a_20L名善宗早喪二親3) [7] 4)5) [8] 寺出
010_0997_a_21L唐太宗貞觀十年新羅善德王三年
010_0997_a_22L丙申入唐謁終南山雲際寺圓香香曰
010_0997_a_23L汝國日尋千戈民陷塗炭可以立塔
010_0997_a_24L立寺鎭山水之逆徃拜淸凉文殊塑像

010_0997_b_01L了知一切法      일체의 법을 깨달아 알면
自性無所有      자성에는 아무것도 존재하는 것이 없다
如是解法性      이와 같이 법의 성품을 이해하면
即見盧舍那      곧바로 노사나盧舍那 부처님을 뵈리라

또 가사 1령領, 그리고 사리 100매枚와 부처님의 머리뼈와 손가락뼈(指節)·구슬(珠)·보배(金)·나뭇잎에 쓴 경전(貝葉經) 등을 주면서 말하였다.
“너희 나라 영취서산靈鷲栖山 아래에 독룡이 살고 있는 못이 있으니, 거기에 금강단金剛壇을 쌓아서 그 용을 편안하게 해 주어라. 그리하면 부처님의 법이 오래 머물 수 있도록 천룡天龍이 옹호해 줄 것이다.”
자장이 배를 타고 신라로 돌아오는데 용왕이 예배하며 말하였다.
“본국 황룡사黃龍寺20)에서 부처님 법을 옹호하고 있는 용은 저의 아들입니다. 나라 남쪽 강 언덕에 절을 짓고 탑을 세워 주시면 제가 동해 용왕과 함께 날마다 세 번씩 가서 탑을 돌고 부처님의 법을 듣고 부처님을 옹호하겠습니다.”
대사가 귀국하여 임금을 배알하고 그간의 일을 아뢰자 왕은 스님을 국통國統에 임명하여 황룡사를 창건하고 탑을 세워 부처님을 봉안했으며, 월정사月精寺·태화사太和寺·대둔사大芚寺를 차례로 건립했다.
축서산 아래에 독한 용신이 살고 있는 못으로 가서 법을 설하여 용을 조복調伏받고 그 못을 메우고는 거기에 단壇을 쌓고 사리와 가사를 봉안하고 그 절의 이름을 통도사通度寺라고 하였다. 이는 곧 불가佛家의 종가宗家인 셈이다.
통훈대부通訓大夫21) 행사헌부行司憲府22) 지평持平23) 유해柳堦가 지은 「비슬산용연사여래사리비毘瑟山龍淵寺如來舍利碑」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신라 스님 자장이 서쪽 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올 때 사리 약간 과顆를 받들고 와서 양주梁州 통도사에 간직해 두었던 것이 무릇 두 상자였는데 각 함마다 각각 2과씩 들어 있었다.
만력萬曆 임진년(1592) 난리에 왜적이 탑을 훼손하고 사리를 꺼냈는데, 송운松雲 대사 유정惟政이 격문檄文을 보내 화복禍福의 형상으로 깨우쳐 주니 왜적이 두려워하면서 그냥 돌아갔다. 송운 대사가 함을 받들고 금강산으로 가서 서산 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에게 여쭈었다.24) 마침내 그 상자는 문인 선화禪和 등에게 주어 태백산 보현사普賢寺에 봉안하게 하고 또 한 함은 송운 대사에게 주어 통도사에 돌아가 탑을 개수하여 봉안하게 하였으니 대개 그 근본을 잊지 않은 것이다.
그때 영남에 새롭게 병란兵亂이 일어나자 대중들은 모두 새나 쥐처럼 흩어져 숨어 버렸으므로 공사를 일으킬 겨를이 없었다. 송운 대사가 어명을 받고 일본에 갈 일이 생겼는데, 송운은 (통도사에 봉안하려고 했던 사리를) 받들어 원불願佛을 삼았다. 얼마 있다가 돌아온 송운은 그 함을 치악산25) 각림사覺林寺에 두도록 했는데,

010_0997_b_01L夢授梵偈曰了知一切法自性無所有
010_0997_b_02L如是解法性即見盧舍那又授袈裟一
010_0997_b_03L舍利百枚佛頭骨指節6) [9]
010_0997_b_04L葉經曰汝國靈鷲栖山下有毒龍所居
010_0997_b_05L築金剛壇以安之佛法久住天龍
010_0997_b_06L擁護泛西海還龍王禮拜曰本國皇
010_0997_b_07L龍寺護法龍即吾子也國南江岸
010_0997_b_08L寺安塔吾與東海龍王日三徃繞
010_0997_b_09L法護佛師歸白王拜爲國統剏皇龍
010_0997_b_10L立塔安佛次建月精太和大芚
010_0997_b_11L栖山下毒龍神池說法調伏塡池築
010_0997_b_12L安舍利袈裟名曰通度寺7) [10]
010_0997_b_13L宗家也通訓大夫行司憲府持平柳堦
010_0997_b_14L8) [11] 毘瑟山龍淵寺如來舍利碑曰羅僧
010_0997_b_15L慈藏西遊奉若千顆而來藏之於梁州
010_0997_b_16L之通度寺者凡兩凾凾各二顆萬曆
010_0997_b_17L壬辰之亂賊毁塔發之松雲大師惟政
010_0997_b_18L移檄以禍福9) [12] 賊懼皃而歸之
010_0997_b_19L雲大師奉詣金剛問於西山大師休
010_0997_b_20L遂以其凾授門人禪和等安於太
010_0997_b_21L白之普賢寺又以一凾付松雲還之
010_0997_b_22L通度令改塔而安之盖不忘本也
010_0997_b_23L10) [13] 11) [14] 衆皆鳥鼠竄未暇興工役
010_0997_b_24L松雲有日域 12) [15] 命之行仍奉以爲願
010_0997_b_25L比還松雲 13) [16] 其凾留在雉岳覺林

010_0997_c_01L그의 제자 청진淸振이 비슬산26) 용연사龍淵寺에 옮겨 봉안하였다. 그 후에 대중들이 탑을 만들어 보관하였다가 1과는 통도사에 돌아가 봉안하고, 1과는 남겨 용연사 북쪽 기슭에 봉안하였다.
통도사에 처음 봉안한 지 940년이 되었으며, 왜적들이 꺼냈다가 그들이 다시 돌려준 지 또 80여 년이 되었는데, 통도사의 옛탑과 비슬산 용연사에 나뉘어 봉안되어 그대로 지내 오고 있다. 명銘은 이러하다.

毘之山鬱鬱      비슬산은 울창하고
洛之水洋洋      낙동강은 넘실대는데
有塔兀然       우뚝 서 있는 저 탑은
釋迦氏舍利之藏    부처님의 사리를 간직하고 있네

숭정崇禎 기원후 병진년(숙종 2, 1676) 4월에 세웠다.”
채팽윤蔡彭胤의 사리탑당나라 정관 17년 계묘(643)에 봉안하여 대청大淸 광서光緖 20년(1894) 갑오에 이르니 1,250년 된 것이다. 비의 비명은 틀림없이 중건할 때에 지은 것이고, 진각眞覺 국사의 ‘사리舍利’와 ‘가사袈裟’라는 제목의 두 시는 고려 때 지은 것이 틀림없다.탑은 세월이 오래되어 조금 기울어졌다. 숙묘肅廟(숙종) 을유년(1465)에 승려 성능性能이 중수重修하려고 탑을 헐었더니, 비단 보자기에 싼 은함銀函에 두골頭骨이 담겨 있었는데, 그 크기는 물동이(盆盎)만 하였다. 비단 보자기도 이미 1천여 년이나 되었건만 썩지 않고 마치 새것과 같았다. 또 작은 뚜껑이 있는 그릇(盒)에 담겨 있는 사리는 광채가 사람의 눈을 부시게 하였다. 다시 비각碑閣을 건설한 뒤 학사學士 채팽윤蔡彭胤이 비문을 지었고 나의 선대부가 글씨를 썼다(我先大夫書). ‘나(我)’란 『동국지東國誌』를 지은 이중환李重煥이고 ‘선대부先大夫’란 중수비重修碑를 쓴 이진휴李震休이다.
「대둔사입문방상량문大芚寺入門房上梁文」에 이르기를, “자장 법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와 새금塞琴 백방포百舫浦에 배를 대어 놓고 정골사리를 모시고 대둔사에 들어갔는데, 그때 먼저 임정기臨井基를 경유하였으므로 임정당臨井堂을 세우고 탑을 쌓아 사리 1매를 봉안하였으며, 99개는 이미 황룡사黃龍寺·월정사月精寺·태화사太和寺·통도사通度寺에 봉안하였기 때문에 배를 대었던 항구의 이름을 백방포라고 한 것이고, 절에 들어갔던 곳을 입문방入門房이라고 한 것이다. 독룡毒龍을 내몰고 주문을 외웠으므로 정진당精進堂이라고 하였고 우물을 파고 집을 지었으므로 임정당臨井堂이라고 하였으며, 우물이 변하고 귀신들이 없어졌기 때문에 학선료鶴仙寮라고 한 것이다. 포구 이름과 절의 이름에 모두 자장 법사의 옛 자취가 어려 있다.”라고 하였다.

010_0997_c_01L其徒淸振移奉於毘瑟山之龍淵寺
010_0997_c_02L後大衆設塔藏之奉一顆還安於通
010_0997_c_03L留一顆安於龍淵之北麓藏之於
010_0997_c_04L通度九百四十餘年賊旣發而還之
010_0997_c_05L又八十餘年分藏於通度之舊塔曁毘
010_0997_c_06L瑟之龍淵自如也銘曰毘之山鬱鬱
010_0997_c_07L洛之水洋洋有塔兀然釋迦氏舍利之
010_0997_c_08L崇禎紀元後丙辰四月立蔡彭胤
010_0997_c_09L舍利塔唐貞觀十七年癸卯奉安至大淸光
緖二十年甲午一千二百五十二年
碑撰
010_0997_c_10L必是重建之時作也眞覺國師舍利14)
010_0997_c_11L [17] 二詩必是麗卉作也塔歲久少傾肅廟乙
僧性能欲重修
010_0997_c_12L毁塔則以銀凾錦褓貯頭骨大如盆盎錦已千餘
不朽如新又有小盒貯舍利光射人目旣改建
010_0997_c_13L碑閣蔡學士彭胤撰我先大夫書我者李重煥著東
國志先者李震休重修碑銘也大芚寺入門房上梁
010_0997_c_14L文曰慈藏法師自唐來泊舟於塞琴百舫浦頂舍
利入大芚時先由臨井基建臨井堂立塔安舍利
010_0997_c_15L一枚九十九介安黃龍月精太和通度故泊舟浦名
百舫入寺處名入門房逐龍誦呪故名精進堂
010_0997_c_16L井建堂故臨井堂井變無靈 15) [18]
仙寮浦名寺名皆慈藏法師之古跡

010_0997_c_17L「柝」甲本正誤表作「析」 「里」甲本正誤表
010_0997_c_18L作「重」
「田」下甲本正誤表有「爲」「寧
010_0997_c_19L光」三國遺事作「元寧」{編}
「光」甲本正誤表作
010_0997_c_20L「元」
「貝金」甲本正誤表作「金貝」「僧」甲
010_0997_c_21L本正誤表作「佛」
「選」甲本正誤表作「撰」
010_0997_c_22L「狀」甲本正誤表作「牀」
「嶺」下甲本正誤表
010_0997_c_23L有「南」
「中」下甲本正誤表有「兵」「御」甲
010_0997_c_24L本正誤表作「銜」
「化」甲本正誤表作「以」
010_0997_c_25L「加沙」甲本正誤表作「袈裟」
「故」下甲本正
010_0997_c_26L誤表有「名」

010_0998_a_01L
진감국사전眞鑑國師傳
스님의 법명은 혜소慧昭이고 속성은 최씨이며, 전주 금마金馬 고을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창원昌元이고 어머니는 고顧씨이다.
어머니가 꿈을 꾸었는데 한 범승梵僧(인도 스님)이 말하기를, “아미녀阿彌女27)의 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면서 인하여 유리병을 주고 갔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안 되어서 스님을 잉태하였다. 스님은 태어날 때에 울지 않았으며, 어릴 때부터 관례冠禮를 치를 나이가 될 때까지 효성이 지극하였다. 집안에 한 말 쌀도 저축함이 없었고 게다가 자그만 땅뙈기도 없이 너무 가난했다. 시장 한 모퉁이에서 소규모 장사를 하여 부모를 공양했으며 부모의 상을 당하자 홀로 흙을 져다가 무덤을 만들었다.
정원貞元(唐 德宗의 연호) 20년(804)에 조공 바치러 가는 사신(歲貢使)을 찾아가 뱃사공이 되겠다고 자청하여 험난한 파도 보기를 평탄한 땅처럼 여기면서 중국에 도착하였다. 창주滄州에 이르러 신감神鑑 대사를 배알하고 그의 제자가 되었다. 대사는 매우 기뻐하면서 “서로 이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다시 만나 너무도 기쁘구나.”라고 하면서 즉시 머리를 깎아 주고 단번에 인계印契를 받게 하였다.
대중들이 서로 일러 말하기를, “동방의 성인을 여기에서 다시 보겠구나.”라고 하였다. 진감 국사의 생김새가 까맣게 생겼기 때문에 대중들은 법명을 부르지 않고 흑두타黑頭陀라고 불렀다.
원화元和(唐 肅宗의 연호) 5년(810)에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 유리단琉璃壇에서 구족계를 받았으니, 그렇다면 거룩하신 어머님이 전에 꾸었던 꿈과 완연하게 들어맞은 것이라 하겠다. 그는 이미 계율에 밝았기 때문에 다시 넓은 학문의 세계로 돌아갔다. 그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 재주가 있어 꼭두서니에서 나온 붉은색이 꼭두서니보다 더 붉고, 쪽에서 나온 푸른색이 쪽보다 더 푸른 것과 같은 인물이었다. 솔방울을 먹으면서 고요하게 지관법止觀法을 연마한 지 3년, 짚신을 삼으면서 부지런히 널리 교화를 베푼 지 3년을 지내고 태화太和 4년(830)에 고국으로 돌아와 상주군尙州郡 노악산露岳山 장백사長栢寺란 절에 주석했는데, 명의名醫의 문전에 병자가 몰리듯이 여러 지방에서 찾아오는 이들이 마치 구름 같았다.
지리산 화개花開 골짜기에 이르러 예전 삼법三法 화상이 머물렀던 사찰 유지遺址에 법당을 찬수纂修하니, 의젓하기가 마치 화성化城28)과 같았다. 거기에 머문 지 수년 사이에 제자의 예를 표하는 이(請益29)者)가 삼대나 볏짚처럼 열을 이루어서 송곳 꽂을 만한 틈조차 없었다.
기이한 경계를 두루 유람하다가 가장 살기 좋고 훤히 트인 곳에 처음으로 옥천玉泉이란 이름으로써 사찰의 문패를 붙였다. 그는 조계曹溪(육조 혜능)의 현손玄孫이므로 육조六祖의 영당影堂도 세웠다.
대중大中(唐 宣宗의 연호) 4년(850) 정월 9일 먼동이 틀 무렵에 이렇게 말하였다.
“온갖 법은 다 공空한 것이니 나는 가려고 한다.

010_0998_a_01L眞鑑國師傳

010_0998_a_02L
師名慧昭姓崔氏全州金馬人也
010_0998_a_03L昌元母顧氏母夢一梵僧曰願爲阿
010_0998_a_04L1) [19] 女之子因以琉璃甖爲寄未幾
010_0998_a_05L生而不啼自丱洎弁志切反哺
010_0998_a_06L無斗儲又無尺壤裨販娵隅爲贍滑
010_0998_a_07L曁鍾囏棘負土成墳貞元二十年
010_0998_a_08L詣歲貢使求爲榜人視險如夷乃達
010_0998_a_09L彼岸至滄州謁神鑑大師2) [20] 軆方
010_0998_a_10L大師怡然曰戱別匪遙喜再相遇
010_0998_a_11L遽令剃染頓受印契徒中相謂曰
010_0998_a_12L方聖人於此復見形貌黯然衆不名
010_0998_a_13L而目爲黑頭陀元和五年受具於嵩山
010_0998_a_14L少林寺琉璃壇則聖善前夢宛若合符
010_0998_a_15L旣瑩戒珠復歸3) [21] 聞一知十茜絳
010_0998_a_16L藍靑餌松實而止觀寂寂者三年織芒
010_0998_a_17L屩而廣施憧憧者三年太和四年來歸
010_0998_a_18L▼(甛/心)錫於尙州露岳長栢寺醫門多方來
010_0998_a_19L者如雲至智異山花開谷故三法和尙
010_0998_a_20L蘭若遺址纂修堂宇儼若化城居數
010_0998_a_21L年間請益者稻麻成列殆無錐地
010_0998_a_22L銓奇境爽塏居最始用玉泉爲榜
010_0998_a_23L溪之玄孫用建六祖影堂大中四年正
010_0998_a_24L月九日詰旦告曰萬法皆空吾將行

010_0998_b_01L탑을 세워 형상(사리)을 간직하지 말고 글로써 자취를 기록하지 말라.”
이렇게 말하고는 앉은 채로 열반에 드니, 세속 나이는 77세이고 법랍法臘은 41년이었다.
국사의 범패 소리는 우아하고 훌륭하여 그 음音이 마치 금이나 옥에서 나는 소리와 같았다. 그리하여 이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집안에 가득했는데 스님은 그들을 가르치는 일에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어산魚山의 미묘한 음악을 익히는 사람들은 다투어 흉내를 내어 가며 옥천사玉泉寺30)의 옛 메아리를 본받고 있으니, 이 어찌 소리로써 중생들을 제도한 교화가 아니겠는가?
헌강왕憲康王(신라 제49대 왕)이 시호를 추증하여 ‘진감선사眞鑑禪師’라 하고 대공영탑大空靈塔을 세우게 하였다. 인하여 스님의 행적을 전각篆刻하게 하여 영원히 기릴 수 있게 하고는 잇달아 쌍계사雙溪寺라는 절의 편액을 내려 주었다.
최고운崔孤雲(최치원)이 비명碑銘을 지어 바쳤다.
지증국사전智證國師傳
스님의 이름은 도헌道憲이고 자字는 지선智詵이며, 속성은 김씨이고 경주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찬환賛環이고 어머니는 이伊씨이다.
어머니의 꿈에 거인이 나타나 이렇게 말하였다.
“저는 승견불勝見佛입니다. 말법세계에 중이 되었지만 성냄 때문에 오래도록 용龍의 세계에 떨어져서 과보를 받았는데 이제야 그 과보가 끝났습니다. 다시 법손法孫이 되기 위해 좋은 인연에 의탁하고자 하오니, 바라옵건대 자비로운 교화를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일이 있은 연후에 임신이 되어 거의 400일이나 되어서 부처님 관정灌頂하는 날 아침에 태어났다. 태어나서 여러 날 동안 젖을 먹지 않고 젖을 먹이려고 하면 울어 대어 목이 쉬려고 하였다. 그러던 차에 홀연히 어떤 도인이 문 앞을 지나다가 이렇게 말하였다.
“아이가 울지 않게 하려거든 어머니가 오신채五辛菜와 비린 것을 먹지 않아야 합니다.”
어머니가 도인이 일러 준 대로 하자 마침내 아무 탈이 없었다.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낳아 주신 어머니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하겠다고 아뢰었으나 그의 어머니는 아직 어리다는 핑계로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부석사浮石寺로 가서 공부를 하다가 17세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당唐 목종穆宗 장경長慶 갑진년(824)에 태어나 희종熙宗 중화中和 임인년(882)에 열반에 드니, 세속 나이는 59세이고 법랍은 43년이었다.
의상儀狀이 크고 높았으며 언어는 웅장하면서도 맑으니, 진실로 이른바 ‘위엄이 있으면서도 사납지 않은 사람’이라는 말이 맞을 듯하다. 잉태해서부터 열반에 들 때까지 기이한 자취와 신비한 이야기가 사람들의 귀를 쫑긋 세우게 한 것이 여섯 가지가 있었고,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놀라게 한 것이 여섯 가지가 있었다.31)
국사는 범체梵體 스님에게서 가르침을 받았고 경의瓊儀 스님에게서 구족계를 받았으며, 혜은惠隱 스님에게 경전의 깊은 이치를 탐구하였고 법제자인

010_0998_b_01L無以塔藏形4) [22] 記跡言竟坐滅
010_0998_b_02L年七十七夏四十一雅善梵唄金玉
010_0998_b_03L其音學者滿堂誨之不倦至今東國
010_0998_b_04L習魚山之妙音者競如掩鼻效玉泉餘
010_0998_b_05L豈非以聲聞度之之化乎憲康大王
010_0998_b_06L追謚曰眞鑑禪師大空靈塔仍許篆刻
010_0998_b_07L以永終譽乃錫題爲雙溪焉崔孤雲作
010_0998_b_08L碑銘而進

010_0998_b_09L

010_0998_b_10L智證國師傳

010_0998_b_11L
師名道憲字智詵姓金氏王都人也
010_0998_b_12L父賛環母伊氏母夢巨人告曰我勝
010_0998_b_13L見佛季世爲桑門以嗔恚故久墮龍
010_0998_b_14L報旣矣爲法孫故托勝緣願弘慈
010_0998_b_15L因有娠幾四百日灌頂之旦誕焉
010_0998_b_16L生數夕不嚥乳糓之則號欲嗄忽有道
010_0998_b_17L過門曰欲兒無聲忍絕蓮腥母從
010_0998_b_18L竟無恙九歲喪父白所生請歸5) [23]
010_0998_b_19L慈其幼不許就浮石寺十七受具
010_0998_b_20L穆宗長慶甲辰生僖宗中和壬寅寂
010_0998_b_21L五十九臘四十三儀狀魁岸語言雄
010_0998_b_22L眞所謂威而不猛者也始孕洎滅
010_0998_b_23L奇蹤秘說聳人耳者六異驚心者六
010_0998_b_24L是發蒙於梵軆禀具於瓊儀探玄於惠

010_0998_c_01L양부楊孚에게 법을 전하였다. 심충沈忠의 청을 받고 희양산曦陽山 봉암사鳳巖寺에 거주하다가 겨울 12월 보름이 지난 3일 뒤에 가부좌를 한 채 대중들에게 가르침의 말을 남기고 조용히 무상無常을 보였다.
조정에서는 그에게 ‘지증智證’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적조寂照’라는 탑호를 내렸으며, 비석에 스님의 행적을 새겨 후세에 전하도록 했다. 최고운崔孤雲이 비명을 지어 바쳤다.
무염국사전無染國師傳
스님의 성은 김씨이고 아버지는 범청範淸이며 할아버지는 주천周川이다. 무열武烈대왕의 8세손이며 달마達磨 조사의 10대 법손이다. 어머니는 화華씨인데 긴 팔이 하늘에서 드리워져 연꽃을 내려 주는 꿈을 꾸고 임신하여 국사를 낳았다.
어릴 때부터 반드시 합장하고 가부좌를 한 채 사람들을 대하였으며, 9세에 불도佛道에 들어가 부석산浮石山 석징釋澄 대덕에게 『화엄경』에 대하여 질문을 하였다.
그 후에 당나라로 들어가 불광사佛光寺에 이르러 여만如滿32)에게 도에 관해 질문하니, 여만이 말하였다.
“내가 수많은 사람을 만나 보았으나 이와 같은 신라 사람은 아주 드물었다.”
마곡 보철麻谷寶徹 스님을 배알하자 보철 스님은 그를 인가하였다.
회창會昌(唐 武宗의 연호) 5년 을축(845)에 귀국하여 웅천熊川 성주사聖住寺에 거주하였다.
당나라 희종禧宗 문덕文德 원년, 진성여왕眞聖女王 2년 무신(888) 11월 17일에 적멸寂滅을 보이시니, 세속 나이는 89세이고 법랍은 65년이었다.
시호를 ‘대낭혜大郎慧’라 하고, 탑호를 ‘백월보광白月葆光’이라 했다. 계원행인桂苑行人 시어사侍御史 최치원崔致遠이 임금의 조서를 받들어 비명碑銘을 지어 올렸다.33)
김대성전金大城傳
대성大城의 성은 김씨이고 경주 모량리牟梁里 사람으로 신라

010_0998_c_01L受默於楊孚受沈忠請居曦陽山
010_0998_c_02L鳳巖寺冬抄旣望之三日趺坐晤言
010_0998_c_03L泊然無常賜謚智證塔號寂照仍許
010_0998_c_04L勒石俾錄狀聞崔孤雲作碑銘而進

010_0998_c_05L

010_0998_c_06L無染國師傳

010_0998_c_07L
師姓金氏父範淸祖周川武烈大王
010_0998_c_08L八代孫達摩祖師十世孫母華氏
010_0998_c_09L覩脩臂天垂授蓮花因有娠而生
010_0998_c_10L必合掌趺對九歲入道問華嚴於浮石
010_0998_c_11L山釋澄大德入唐至佛光寺問道如滿
010_0998_c_12L滿曰吾閱人多矣罕有如是新羅子
010_0998_c_13L麻谷寶徹徹印焉會昌五年乙丑來歸
010_0998_c_14L居熊川聖住寺唐禧宗文德元年眞聖
010_0998_c_15L二年戊申十一月十七日示滅壽八十
010_0998_c_16L臘六十五謚大朗慧塔白6) [24] 葆光
010_0998_c_17L桂苑行人侍御史崔致遠奉詔作碑
010_0998_c_18L銘進

010_0998_c_19L

010_0998_c_20L金大城傳

010_0998_c_21L
大城者姓金氏慶州牟梁里人新羅
010_0998_c_22L「彌」甲本正誤表作「㜷」「身」甲本正誤表
010_0998_c_23L曰衍字
「橫」甲本正誤表作「黌」「以」
010_0998_c_24L下甲本正誤表有「文」
「道」下甲本正誤表有
010_0998_c_25L「母」
「日」甲本正誤表作「月」

010_0999_a_01L신문왕神文王 때의 인물이며, 어머니는 경조慶祖이다. 나면서부터 머리통이 크고 정수리가 평평한 것이 마치 성城과 같아서 이름을 대성이라고 하였다. 태어날 때부터 집이 가난하여 복안福安의 집에 가서 품을 팔아 얻은 밭 몇 이랑으로 의식衣食 등 생계를 꾸려 나갔다.
그때 개사開士34) 점개漸開가 흥륜사興輪寺에서 육륜회六輪會35)를 베풀기 위해 복안의 집에 와서 시주하기를 권하자 복안이 삼베 50필을 바쳤다.
그러자 개사가 이렇게 축원하였다.
“단월檀越께서는 널리 보시하기를 좋아하니 하늘 신이시여, 늘 보호하여 지켜 주시고 하나를 보시하면 그 만 배를 얻게 하시고 안락은 물론 수명도 길게 누리게 하여 주소서.”
어린아이 대성이 그 말을 듣고 뛰어 들어와서 그 어머니에게 말하였다.
“제가 스님이 독송하는 게송을 들었는데 정말로 이치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과거 세상에도 좋은 일을 한 것이 없어서 지금 이 모양으로 가난하게 살고 있으니, 금생에 또 보시를 하지 않으면 다음 세상에서 잘 살기를 어떻게 바라겠습니까? 내가 머슴살이를 해서 얻은 토지를 개사에게 시주하여 뒷날의 영화를 도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어머니가 말하였다.
“참 훌륭한 생각이구나.”
그러면서 곧 개사에게 토지를 희사하였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대성이 죽었다. 그날 밤 재상 김문량金文亮의 집 위쪽 하늘에서 큰소리로 이렇게 외치는 것이었다.
“모량리에 살고 있는 대성이라는 아이를 지금 너희 집에 맡기노라.”
문량이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 사람을 보내 문의해 본 결과 대성은 과연 하늘에서 큰소리가 있었던 그날 죽었다. 이는 곧 효소왕孝昭王 9년 경자(700) 2월 15일의 일이었다. 그날 아내가 아이를 배어 아들을 낳았는데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오른손 주먹을 꼭 쥐고 펴지 않았다. 그런 지 7일 만에 주먹을 폈는데 ‘대성大城’이라는 두 글자가 손바닥에 새겨져 있었다. 그리하여 이름을 대성이라고 지었다. 그러고는 그의 전생의 어머니를 재상의 집으로 맞아들여 함께 부양하였다.
대성은 장성하자 효행이 지극하고 청렴하며 밝은 인품이 세상에 알려졌다. 성덕왕聖德王 조정에서 총관摠管이 되고 효성왕孝成王을 거쳐 경덕왕景德王 때에 이르러서는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36)가 되니 당시 나이 49세였다.
하루는 토함산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곰 한 마리를 잡은 뒤 산 아래 마을에서 자게 되었다. 곰이 귀신으로 변하여 꿈에 나타나 말하였다.
“너는 왜 나를 죽였는가? 나도 너를 잡아먹을 것이다.”
대성이 두려워서 벌벌 떨면서 용서를 빌자 귀신이 말하였다.
“그렇다면 나를 위하여 절을 지어 달라.”
대성이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하고 꿈에서 깨니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곰을 잡았던 그 자리에 절을 짓고 그 절 이름을 웅수사熊壽寺37)라고 하였다.

010_0999_a_01L神文王時人也母慶祖生頭大頂平如
010_0999_a_02L因名大城生來家貧傭賃於福安
010_0999_a_03L之家得田數𤱈以備衣食之資時開
010_0999_a_04L士漸開欲設六輪1) [25] 於興輪寺勸化
010_0999_a_05L至福安家得布五十疋開士祝願曰
010_0999_a_06L檀越好普施天神常護持施一得萬倍
010_0999_a_07L安樂壽命長城兒聞之跳踉而入
010_0999_a_08L其母曰余聞僧誦偈眞可有理我等
010_0999_a_09L定無宿善今亦如此今又不施何望
010_0999_a_10L後報施我傭田於法會以圖後榮如何
010_0999_a_11L母曰乃施田於開士未幾城物故
010_0999_a_12L是日夜天唱其國宰金文亮曰牟梁里
010_0999_a_13L大城兒今托汝家亮驚恠遣人詰之
010_0999_a_14L城果亡與天唱同日時乃孝昭王九年
010_0999_a_15L庚子二月十五日也有娠而生兒右手
010_0999_a_16L握不開七日開拳有雕大城二字
010_0999_a_17L以名焉城迎其前母於第中兼養之
010_0999_a_18L及長孝行廉明獨鳴於世聖德王朝
010_0999_a_19L爲揔管歷孝成王至景德王朝爲大
010_0999_a_20L匡輔國崇祿大夫時年四十九也一日
010_0999_a_21L獵於吐含山捕一熊宿山下村熊變
010_0999_a_22L爲鬼現夢曰汝何殺我我還噉汝
010_0999_a_23L怖懼請容赦罪鬼曰爲我創寺城諾
010_0999_a_24L旣覺流汗立寺於捕熊之地因名熊壽

010_0999_b_01L
경덕왕 10년 신묘(751)에 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佛國寺를 중창하고 다보탑多寶塔과 무영탑無影塔을 조성했다. 또 백운白雲·청운靑雲·연화蓮花·칠보七寶·사성四聖·사미沙彌·반야般若·도살到薩·육도六道 등 13개의 다리를 놓았다.
또한 과거세상(前世)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石佛寺를 지었는데 쇠붙이를 제련하고 돌을 다듬어 감실龕室을 만들고 큰 돌 하나를 정밀하게 다듬어 덮개를 만들어 덮었다. 이윽고 다 완성되었을 때 홀연히 돌이 세 조각으로 쪼개져 버리자 밤중에 천신天神이 내려와 그 감실의 덮개를 다시 만들어 놓고 돌아갔다. 허공에서 큰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큰 믿음을 지닌 대성이여! 걱정하지 말라. 하늘이 감응하여 다시 만든 것이니라.”
대성이 소리가 나는 곳을 따라 남쪽 산마루로 달려가서 천신을 공양하였다. 그런 까닭으로 그 산봉우리의 이름을 향령香嶺이라 하였다. 그 굴 안에 석불을 다듬어 모셨는데 높이와 크기가 굴과 같았다. 이 두 절의 석물石物은 동도東都의 여러 사찰 가운데 이보다 더 훌륭한 것은 없다. 한 몸을 가지고 현재와 과거 세상의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여 봉양한 일은 고금에 아주 드문 일이니 보시를 잘한 징험일 것이다.
혜공惠恭대왕 10년(774) 12월 2일 대성이 죽으니 곧 대력大歷(唐 代宗의 연호) 9년이다. 불국사 사적 중에 나오는 기록이다.
낭공대사전朗空大師傳38)
낭공朗空의 법명은 행적行寂이고 성은 최씨이며, 하남河南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패상佩常이고 할아버지는 전全이며, 어머니는 설薛씨이다.
어머니의 꿈에 어떤 스님이 나타나 말하였다.
“아가씨(阿孃)의 아들이 되고 싶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뒤에 어머니가 임신을 하여 당나라 문종文宗 태화太和 6년(흥덕왕 7, 832) 12월 30일에 출생했다. 기이한 골격이 보통 아이와 달랐으며 책을 대하면 그 근원까지 철저하게 탐구하였고 일을 맡으면 식음까지 잊고 몰두했다. 일찍부터 부처님의 가르침을 깊이 믿어 속세를 버릴 뜻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침내 아버지에게 말씀을 드렸다.
“저의 소원은 출가해서 도를 닦는 것입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여 허락하였다. 낭공은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어 당나라 선종宣宗 대중大中 9년(문성왕 17, 855)에 복천사福泉寺에 가서 구족계를 받고 굴산崛山(오대산)으로 통효通曉 대사를 찾아가 당堂에 올라 입실入室 제자가 되었다.

010_0999_b_01L景德王十年辛卯爲現世父母
010_0999_b_02L創佛國寺造多寶無影兩塔又設白雲
010_0999_b_03L靑雲蓮花七寶四聖沙彌般若到薩六道
010_0999_b_04L等十三橋亦爲前世爺孃始創石佛寺
010_0999_b_05L金鍊石織造石龕而精鍊一大石爲盖
010_0999_b_06L旣已忽然三裂夜中天神來降畢覆而
010_0999_b_07L空唱云大信大城不憂天感而降
010_0999_b_08L城走南嶺供天神故名其峰爲香
010_0999_b_09L其窟內鍊邀石佛高大與窟齊等
010_0999_b_10L此兩寺石物東都諸刹未有加焉
010_0999_b_11L以一身孝養二世父母古亦罕聞
010_0999_b_12L善施之驗也惠恭大王十年十二月二
010_0999_b_13L日大城卒即大歷九年也在佛國寺事
010_0999_b_14L蹟中

010_0999_b_15L

010_0999_b_16L朗空大師傳

010_0999_b_17L
公名行寂姓崔氏河南人也父佩常
010_0999_b_18L祖全母薛氏夢僧願爲阿孃之子
010_0999_b_19L以有娠唐文宗太和六年十二月三十
010_0999_b_20L日生標奇骨有異凡流臨文則總括宗
010_0999_b_21L請業則都忘食甞以深信金言
010_0999_b_22L遺塵俗謂父曰所願出家修道愛而
010_0999_b_23L許之剃染披緇宣宗大中九年投福
010_0999_b_24L泉寺2) [26] 詣崛山通曉大師昇堂

010_0999_c_01L
당나라 의종懿宗 함통咸通 11년(경문왕 10, 870)에 조공을 바치러 가는 사신(脩朝使) 김긴영金緊榮을 따라 바다를 건너 중국에 들어갔다. 상도上都(서울)에 도착하자 의종 황제가 기뻐하며 궁 안으로 불러들여 직접 후하게 대접하고 선물도 주었다. 그 후에 오대산에 이르러 직접 문수보살에게 예배를 하였다.
희종僖宗 건부乾符 2년(헌강왕 1년, 875)에 성도부成都府에 있는 정중사靜衆寺에 이르러 무상無相 대사의 영당影堂에 예배를 드렸다. 무상 대사는 신라 사람이다.
중화中和(唐 僖宗의 연호) 5년(헌강왕 11년, 885)39) 본국으로 돌아와 오대산에 있는 굴령崛嶺(범일 국사)을 배알하니 그가 일찍 돌아온 것을 크게 기뻐했다.
문덕文德 3년(진성여왕 4, 890)40) 4월에 굴산崛山(범일 국사) 대사가 적멸을 보이면서 낭공 대사에게 심인心印을 전하여 부촉하였다.
소종昭宗 천우天佑 3년(892) 가을 9월에 경읍京邑(도성)으로 돌아오니, 국왕이 비전秘殿으로 인도하여 국사를 대하는 예로 대접했다. 오대五代 시대 양梁나라 말제末帝 정명禎明 원년(915)에 실제사實際寺에 머물고 있다가 그 이듬해 봄 2월 12일에 엄연儼然히 열반에 드니, 세속 나이는 85세이고 법랍은 61년이었다.
신덕神德대왕은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를 올리게 하였으며, ‘낭공대사朗空大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호塔號를 ‘백월서운白月栖雲’이라 했다. 그의 제자로는 신종信宗·주해周解·부간符偘 등 500여 명이나 되었다.
비문은 왕명을 받아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서원사 사자금어대翰林學士守41)兵部侍郞書阮事賜紫金魚袋 신臣 최인연崔仁渷42)이 비문을 짓고 김생金生의 글씨를 석단목釋端目 스님이 집자集字하였다. 이 비문을 조사해 보니 봉화군奉化郡 옛 절터에 있었는데, 명나라 무종武宗 정덕正德 4년(중종 4, 1509)에 영천榮川(지금의 영주군) 군수 이황李况43)이 본군本郡 자민루字民樓 아래에 옮겨 세웠다.
임진년~정유년(1592~1597) 연간에 중국(唐) 사람들이 수많은 탁본을 해 갔다. 그 뒤 천사天使(명나라 사신) 웅화熊化가 올 적에 압록강을 미처 건너기 전에 먼저 사람을 보내 비문을 탁본하게 했는데, 비석이 어느 곳에 있는지를 몰라서 다시 명나라 사신에게 물어보고서야 알게 되었다.
그 뒤에 군수가 비석을 땅에 묻고

010_0999_c_01L入室懿宗咸通十一年投脩朝使金緊
010_0999_c_02L利涉大川達于彼岸至於上都
010_0999_c_03L宗皇帝喜徵入內天子厚加寵賚
010_0999_c_04L至五臺親拜文殊僖宗乾符二年
010_0999_c_05L成都府靜衆寺禮無相大師影堂師新
010_0999_c_06L羅人也中和五年來歸本國謁崛嶺
010_0999_c_07L大喜早歸文德三年四月崛山大師示
010_0999_c_08L傳心付囑昭宗天祐三年秋九月
010_0999_c_09L京邑引登秘殿待以國師之禮五代
010_0999_c_10L3)梁末 [27] 禎明元年住實際寺明年春
010_0999_c_11L二月十二日儼然就滅年八十五
010_0999_c_12L六十一神德大王遣使吊祭贈謚曰
010_0999_c_13L朗空大師塔曰4) [28] 栖雲之塔有弟
010_0999_c_14L子信宗周解符偘等五百餘人受命翰
010_0999_c_15L林學士守兵部侍郞書院事賜紫金
010_0999_c_16L魚袋臣崔仁5) [29] 金生筆釋端目集
010_0999_c_17L按此碑在奉化古寺址明武宗正德
010_0999_c_18L四年榮川郡守李况移立於本郡字民
010_0999_c_19L樓下壬丁年間唐人打千百本矣
010_0999_c_20L熊天使化之來未渡江前送人印碑
010_0999_c_21L不知何處更問天使知之其後郡守掩
010_0999_c_22L「回」甲本正誤表作「會」「且」甲本正誤表
010_0999_c_23L作「具」
「梁末」作「梁天」{甲}ㆍ甲本正誤表作
010_0999_c_24L「隨文」
「日」甲本正誤表作「月」「流」甲本
010_0999_c_25L正誤表作「渷」

010_1000_a_01L마구간을 만들어 더러운 것이 묻어서 다시는 손을 댈 수 없게 되었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도선국사전道詵國師傳
스님의 법명은 도선道詵이고 자는 옥룡玉龍이며, 호는 연기烟起이고 성은 최씨이며, 낭주朗州44) 구림촌鳩林村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그의 어머니 최씨가 겨울에 우물 속의 오이를 먹고 아이를 잉태하여 아비가 없이 태어났으므로 어머니의 성을 따라 최씨라 하였다. 낳자마자 숲속에 버렸는데 수많은 비둘기가 젖을 먹여 길러 주었다. 기이하게 여겨서 다시 거두어 길렀는데 그로 인하여 그 숲의 이름을 구림鳩林이라고 하였다.
13세 때 당나라 배를 따라 당나라에 들어갔다. 당나라 일행一行 선사가 일찍이 말하였다.
“고을의 물이 거꾸로 흐르면 나의 도道를 전할 사람이 올 것이다.”
그의 문인 중에 한 사람이 그 말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문인이 달려와 보고하였다.
“오늘 고을의 물이 거꾸로 흐르고 있습니다.”
일행이 그 말을 듣고 곧 위의를 갖추고 문 밖으로 나갔더니, 도선이 갑자기 찾아와 참배하였다. 일행이 말하였다.
“기다린 지 오래되었거늘 왜 이렇게 늦었는가?”
그러고는 서로 크게 기뻐하면서 그를 맞아들여 머물게 하였다. 도선이 그의 술법을 모두 터득하고 떠나가겠다고 아뢰자 일행 선사가 송별하면서 말하였다.
“나의 도가 동쪽으로 가는구나. 조심해서 가게.”
그러고는 꼭꼭 봉한 단서丹書 한 권을 주면서 타일러 말하였다.
“부디 성급하게 열어 보지 말게. 그대에게 왕王씨 가문을 부탁하니 7년쯤 기다렸다가 그 뒤에 열어 보게.”
도선이 송도松都에 도착하여 왕륭王隆45)의 집에 유숙하면서 하늘의 기상을 우러러 관찰하고 지리를 굽어 살펴보고는 찬탄하며 말하였다.
“내년에 틀림없이 귀한 아들을 낳을 터인데 이 아이가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건지게 될 것이다.”
왕륭이 그 말을 듣고 신을 거꾸로 신고 나가서 그를 맞아들였다. 그 이듬해에 과연 고려 태조가 될 왕건王建을 낳았다.
‘은산비隱山碑’에는 대략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일행이 도선 국사에게 부촉하며 말하기를, ‘부처님은 큰 의왕醫王이시다. 부처님의 법으로 몸을 치료하면 재앙과 질병이 다 사라질 것이요, 또한 그 법으로 마음을 치료하면 온갖 번뇌가 다 없어질 것이며, 그 법으로 산천과 토지를 다스리면 흉하고 해로운 일이 길하고 이롭게 변할 것이다. 비보裨補를 시설하는 것은 비유하면 마치 약쑥과 같다. 약쑥은 세상 사람들의 병을 치료하는 좋은 약이 되지만, 아무 병이 없는 사람이 그걸 보면 더러운 흙과 같은 것이어서 아무리 집 뜰 안에 있다 하더라도 채집할 필요가 없게 된다. 그러나 만약 병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지 않다.

010_1000_a_01L爲馬厩糞穢不得下手惜哉

010_1000_a_02L

010_1000_a_03L道詵國師傳

010_1000_a_04L
師名道詵字玉龍號烟起姓崔氏
010_1000_a_05L州鳩林村人也其母崔氏冬喫於井瓜
010_1000_a_06L生無父從母姓生而棄林衆鳩乳
010_1000_a_07L異而復收因名鳩林十三歲隨唐
010_1000_a_08L船入唐唐一行禪師甞曰洞水逆流
010_1000_a_09L則傳吾道者來門人記其言一日門人
010_1000_a_10L走報曰今日洞水逆流矣一行聞之
010_1000_a_11L即具威儀出門外道詵忽來叅行曰
010_1000_a_12L待之久矣何其遲也相與大悅即迎
010_1000_a_13L入留盡得其術而告去別曰
010_1000_a_14L道東矣珎重仍寄一封丹書而誡曰
010_1000_a_15L愼勿速開囑王氏家待七年後開示
010_1000_a_16L到松都宿王隆家仰觀天象俯察
010_1000_a_17L地理歎曰明年必生貴子以救塗炭之
010_1000_a_18L聞之倒屣而出明年果生王建
010_1000_a_19L太祖隱山碑略曰一行囑道詵云
010_1000_a_20L1) [30] 醫王也以之治身則灾病消
010_1000_a_21L之治心則煩惱亡2) [31] 山川土地
010_1000_a_22L凶害變爲吉利裨補之設比如艾也
010_1000_a_23L且艾者爲世良藥無病者見之如糞
010_1000_a_24L雖在家苑無事3) [32] 若有病者

010_1000_b_01L훌륭한 의사를 만나 그 쑥으로 뜸을 뜨면 아무리 뿌리가 깊은 병도 완전하게 치료되는 것이 마치 메아리나 그림자보다 더 빠르다. 비록 만금의 소중한 보배가 있다 하더라도 쑥의 가치에 비교할 수 없는 것은 그 효험이 아주 신속하기 때문이다.
너희 동쪽 나라 삼한의 지세를 살펴보면 많은 산이 험악함을 다투고 몰려드는 물 또한 치달림을 다투고 있다. 그 형세가 용이 다투는 것 같기도 하고 혹은 호랑이가 다투는 것 같기도 하며 혹 새가 날고 짐승들이 달리는 듯하기도 하다. 혹은 저쪽에서 공격해 오는 모습 같기도 하고, 혹은 미약하게 끊어져서 격格에 미치지 못하는 형세도 있다. 이를 비유하면 마치 질병이 많은 사람과 같다.
그런 까닭에 나라가 혹은 아홉 나라가 되기도 하고, 혹은 삼한이 되어 서로 침략하고 정벌하며 전쟁이 그치지 않는다. 도적 떼들이 횡행하고 기후가 고르지 못해서 장마와 가뭄의 피해가 생기는 것 따위가 다 이 때문이다.
그러니 너는 지금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지고 약쑥을 삼아 산천의 폐단을 치료하도록 하라. 그렇게 하면 부족한 것은 보충될 것이고 넘치는 것은 억제될 것이며, 치달리는 것은 멈추게 되고 배반하는 것은 불러들이게 될 것이며, 도적을 방어할 수 있게 되고 싸우는 것은 금지할 수 있게 될 것이며, 선한 일은 세우게 될 것이요 길吉한 일은 드날리게 될 것이니라.
아프고 가려운 병든 지리의 형세를 살펴보아서 혹은 부도浮屠를 세우기도 하고 혹은 탑을 세우거나 절을 짓되 그 숫자가 3,800여 곳에 이르면 너희 나라 산천의 병든 허물이 잠복潛伏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 이 비보의 시설법은 바로 질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지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고 난 뒤에야 너희 삼한은 뭉쳐서 한 나라로 될 수 있을 것이요, 도적들도 변화되어서 새로운 백성이 될 것이며, 비바람이 때에 순응하여 농사가 잘되고 백성들도 화목하고 순박해질 것이다.
그러나 후대의 임금과 신하들이 만일 나라를 잘 다스려 평화롭게 만드는 정치를 모르고 함부로 아무 이익이 없는 일을 해서 나라를 번거롭게 할 수도 있으니, 우선 그런 일부터 제거해 버려서 저 길하고 흉한 것이 어떻게 다른지를 관찰해 보는 것만 같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마치 병든 사람이 저 의사를 잊어버리고 스스로 말하기를, ‘함부로 아무 효험도 없는 약을 먹어서 나의 생명을 쇠잔하게 만드느니 차라리 의원을 물리쳐서 질병을 고쳐야 할지 그렇게 하지 않아야 할지를 관찰해 보는 것만 못할 것이다’라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위태로운 지경에 빠지고 난 뒤에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도선은 당나라 희종僖宗 건부乾符 2년, 신라 헌강왕憲康王 원년 을미(875)에 귀국하였으니 그때의 나이는 49세였다. 그는 조정에 아뢰어 먼저 500여 선종禪宗 사찰을 건립했다.

010_1000_b_01L則不然得善醫者灸之沉痾之頓愈
010_1000_b_02L捷於影響雖萬金之重無得比焉者
010_1000_b_03L以其效之有神驗也汝東國三故群山
010_1000_b_04L竟其險衆水爭其犇或有如龍如虎之
010_1000_b_05L相鬪者或有如禽如獸之飛走者或有
010_1000_b_06L自彼而來攻者或有斷徹而不及者
010_1000_b_07L則多病之人也故或作九故或作三韓
010_1000_b_08L互相侵伐兵革不息盜賊橫行法旱
010_1000_b_09L不調者皆以此也汝今纹佛法爲艾
010_1000_b_10L而醫之於山川則若缺者補之過者抑
010_1000_b_11L走者止之背者招之賊者防之
010_1000_b_12L者禁之善者樹之吉者揚之觀其痛
010_1000_b_13L痒之地勢或豎浮屠或設塔建寺
010_1000_b_14L於三千八百餘所汝國山川病咎無不
010_1000_b_15L潛伏此裨補之設所以爲療病而作也
010_1000_b_16L如此然後汝三韓可渾爲一家盜賊
010_1000_b_17L化爲新民至於風雨順時人民和淳也
010_1000_b_18L後之王臣若不知治平之政妄爲無益
010_1000_b_19L之事以煩家國不如姑去之以觀其
010_1000_b_20L吉凶何異乎病者忘其醫曰妄用無效
010_1000_b_21L之藥以殘吾生不如姑去之以觀其
010_1000_b_22L痊否之歟及其危沒悔之何及哉
010_1000_b_23L唐僖宗乾符二年新羅憲康王元年乙
010_1000_b_24L未來時年四十九告于朝先建五百

010_1000_c_01L당나라 소종昭宗 광화光化 원년, 신라 효공왕孝恭王46) 2년(898) 3월 10일에 문득 열반에 드니 누려온 나이 72세였다.
도갑사道岬寺47)의 비명碑銘은 이경석李景奭48)이 지은 것이다. 구례 연곡사燕谷寺에도 부도 2구가 있는데, 하나는 도선 국사의 부도이고 다른 하나는 그 어머니의 부도이다.
전남 광양군光陽郡 백계산白鷄山 옥룡사玉龍寺에 있는, 고려 최유청崔惟淸49)이 지은 비명은 다음과 같다.
“스님의 속성은 김씨이고 어머니는 강姜씨이다. 어머니의 꿈에 어떤 사람이 맑은 구슬 하나를 주면서 삼키라고 하기에 그 구슬을 삼켰더니 아이를 잉태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부모는 그 아이가 틀림없이 법의 그릇이 될 것이라 확신하고 처음부터 그가 출가할 것을 마음속으로 허락하고 있었다.
나이 15세(842)가 되자 총명하고 영특하였으며 겸하여 기예까지 통달하였다. 월유산月遊山50) 화엄사華嚴寺에 가서 머리 깎고 불경을 읽었는데, 한 해도 채 못 되어 대의大義를 통달하였다. 백천이나 되는 많은 학도들이 모두 놀라고 탄복하며 귀신 같은 총명이라고 하였다. 문성왕文聖王 8년(847) 20세 때의 일이었다.
때마침 혜철慧徹 대사께서 서당 지장西堂智蔵 대사에게 밀인密印51)을 전해 받고, 동리산桐裏山52)에서 법석을 열고 법을 설하시니, 영원한 유익함을 얻으려는 많은 사람들이 스님에게 귀의하였다. 이에 대사께서 선문禪門에 귀의하여 제자가 되기를 청하였다.
도선의 나이 23세(850)에 혜철 대사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헌강대왕憲康大王53)이 그 높은 덕을 공경하여 사신을 보내 맞이하여 한 번 보고는 옛 친구를 본 듯이 기뻐하였다. 스님은 깊은 이치가 담긴 말씀과 미묘한 도리로 왕의 마음을 열어 주곤 했다. 얼마 안 되어 간청하여 본사本寺로 돌아갔다.
제자들을 불러 말하였다.
‘나는 장차 갈 것이다. 장부가 인연을 타고 이 세상에 왔다가 인연이 다 되면 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니 어찌 이 세상에 더 머물겠는가?’
그러고는 문득 적멸에 들었으니, 그때가 광화光化 원년(신라 효공왕 2, 898) 3월 10일이었다. 향년은 72세였다. 절 뒤편 산으로 스님의 사리를 옮기고 사찰 북쪽 산기슭에 탑을 세웠으니 스님의 유언을 따른 것이다.
효공왕이 스님의 입적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특별히 ‘요공선사了空禪師’라는 시호를 하사하였고 탑 이름을 ‘증성혜등證聖慧燈’이라 하였다.

010_1000_c_01L禪刹唐昭宗光化元年新羅孝恭王二
010_1000_c_02L年三月十日奄然而示寂享年七十二
010_1000_c_03L道岬寺碑李景奭作求禮燕谷寺
010_1000_c_04L二浮屠一師浮屠一母浮屠光陽白
010_1000_c_05L鷄山玉龍寺高麗崔惟淸撰碑曰師姓
010_1000_c_06L金氏母姜氏夢人遺明珠一顆使呑
010_1000_c_07L有娠父母知其必爲法器心許出
010_1000_c_08L年至十五頴悟鳳成兼解技藝
010_1000_c_09L祝髮月遊山華嚴寺讀習大經不閱
010_1000_c_10L已通大義學徒百千咸所駭服
010_1000_c_11L爲神聦至文聖王八年年二十矣
010_1000_c_12L慧徹大師傳密印於西堂智藏禪師
010_1000_c_13L開堂演說於桐裡山永益者多歸師
010_1000_c_14L衣禪門請爲弟子年二十三受具於
010_1000_c_15L慧徹大師憲康大王敬其高德遣使
010_1000_c_16L奉迎一見如舊以玄言妙道開發君
010_1000_c_17L未幾歸本寺召弟子曰吾將行矣
010_1000_c_18L乘緣而來緣盡則去理之常也何足
010_1000_c_19L居此乎奄然而寂時光化元年三月十
010_1000_c_20L日也享年七十二遂遷座立塔於寺
010_1000_c_21L之北崗遵遺命也孝恭王聞之悼歎
010_1000_c_22L贈謚曰了空禪師名塔曰證聖慧燈
010_1000_c_23L「太」甲本正誤表作「大」「之」下甲本正誤
010_1000_c_24L表有「治」
「於」下甲本正誤表有「採」

010_1001_a_01L문인 홍적洪寂 등이 돌아가신 스승의 높은 행적이 전해지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표문表文을 올려 비명碑銘 써주기를 청하니, 왕이 곧 서서학사瑞書學士 박인범朴仁範54)에게 명하여 비문을 짓게 하였으나 끝내 돌에 새기지는 못하였다.
고려 현종顯宗이 ‘대선사大禪師’를 추증하였고, 숙종肅宗 임금이 다시 ‘왕사王師’라는 호를 추증하였으며, 공효왕은 ‘선각국사先覺國師’에 봉하였다.
국사께서 전한 음양설陰陽說 여러 편이 세상에 전해지고 있으며, 뒤에 지리를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 책을 근본으로 삼고 있다. 명銘에 이르기를…생략….”55)
천덕天德 2년 경오(고려 의종 4, 1150) 7월 을해 9일 계미에 비를 세웠다.
평론하여 말하기를, “이경석과 최유청의 두 비석이 서로 다른 설이 있으니 어떤 것을 기준으로 해야 할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 부모의 성과 일행에게 배운 기록이 없다.”고 하였다.
혜철국사전慧徹國師傳
스님의 법명은 혜철慧徹(惠哲로도 씀)이고 자字는 청보淸寶이며, 속성은 박씨이고 경주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당나라에 들어가 서당 지장西堂智藏 선사의 법을 이어 받았다. 적조탑명寂照塔銘(문경 봉암사 지증 대사 탑명)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중국에서 돌아온 스님으로는 전에 서술한 북산北山(설악산)즉 도의道義56) 스님과 남악南岳(지리산)홍척洪陟 스님이 있다. 아래로 내려오면서 태안 철太安徹57) 국사와 혜목 육惠目育58)·지력 문智力聞59)·쌍계 소雙磎炤60)·신흥 언神興彦61)·용암 체湧岩軆62)·진구 휴珍丘休63)·쌍봉 운雙峯雲64)·고산 일孤山日65)과 두 나라의 국사를 지낸 성주 염聖住染,66) 그리고 보리 종菩提宗67) 등이 있다.”
「선각국사비문先覺國師碑文」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신라 문성왕文聖王 8년(847)은 도선의 나이 20세 되는 해이다. 그때 혜철 대사께서 서당 지장 선사에게서 밀인密印을 전해 받고, 귀국하여 동리산桐裏山에서 법석을 열고(開堂) 법을 설하니, 영원한 유익함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매우 많이 귀의하였다. 이에 도선이 선문禪門에 귀의하여 제자가 되기를 청하여 나이 23세에 혜철 대사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
경문景文대왕이 ‘적인寂忍’이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등에를 쫓아 버린 고개라는 의미를 지닌 축맹치逐虻峙에 대한 설화는 이러하다.
“전남 곡성 동리산일명 봉두산鳳頭山이라 하기도 함 태안사泰安寺는 혜철 국사가 교화를 편 도량이다. 이 절을 창건할 무렵 온 고을이 모두 모기와 등에의 진지였다. 국사께서 신통력으로 모기와 등에를 쫓아내자 산 오른쪽 고갯마루를 날아 넘어갔다.

010_1001_a_01L門人洪寂等懼先師之景行不傳奉表
010_1001_a_02L乞述乃命朴仁範爲碑文竟未鐫石
010_1001_a_03L麗顯王贈大禪師肅祖加王師恭孝王
010_1001_a_04L封先覺國師師所傳陰陽說數篇世多
010_1001_a_05L後之地理者皆宗焉銘曰云云
010_1001_a_06L德二年庚午七月乙亥九日癸未立
010_1001_a_07L李崔二碑互有異說不可準信
010_1001_a_08L父母姓及學一行爲記

010_1001_a_09L

010_1001_a_10L慧徹國師傳

010_1001_a_11L
師名慧徹字淸寶姓朴氏慶州人也
010_1001_a_12L入唐嗣西堂智1) [1] 禪師寂照塔銘云
010_1001_a_13L東歸則前所叙北山義即道
南岳陟

010_1001_a_14L降太安徹國師惠目育智力聞雙溪
010_1001_a_15L炤神興彥湧岩軆珍丘休雙峯雲孤山日
010_1001_a_16L兩朝國師聖住染菩提宗先覺國師碑
010_1001_a_17L文云文聖王八年年二十矣于時
010_1001_a_18L徹大師傳密印於西堂智藏禪師開堂
010_1001_a_19L演說於桐裡山永益者多歸師摳衣
010_1001_a_20L禪門請爲弟子年二十三受具於慧徹
010_1001_a_21L大師景文大王贈謚曰寂忍逐虻峙說
010_1001_a_22L谷城桐裡山一名鳳
頭山
泰安寺慧徹國
010_1001_a_23L師道場也創建之時擧洞皆是蚊虻之
010_1001_a_24L陣所也國師以神力逐之飛踰於山之

010_1001_b_01L이렇게 하여 비로소 절을 세우니 그 뒤로는 단 한 마리의 모기도 없게 되었으므로 그 고개를 축맹치逐虻峙맹虻은 이 지방의 말로는 ‘매’라 함라고 하였다.”
또 국사의 비와 탑이 절 안에 있는데 엄격하게 잘 보호되고 있다.
함풍咸豊(淸 文宗의 연호) 갑인년~을묘년(1854~1855) 연간에 절 담장이 무너졌는데 수리하지 않고 세월만 끌고 있었다. 그해 여름에 한정 없이 많은 모기들이 천진千陣 만대萬隊로 떼를 지어 골짜기를 가득 메워서 모기 나는 소리가 우렛소리 같아 눈과 코를 뜰 수가 없었다.
대중들이 같은 마음을 합하여 한편으로는 부도가 있는 도량을 보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사의 신당神堂에 고하고 기도를 드리니 모기와 등에가 즉시에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하여 스님들과 마을 사람들은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지혜가 밝은 사람의 자취는 참으로 기이하고 항상하구나.
「태안사법당상량문泰安寺法堂上梁文」은 이러하다.
“나라 남쪽에 이름 있는 산들이 허다한데 동리산이 그중에 하나이다. 신라 이후에 훌륭한 스님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혜철 노스님 같으신 분은 둘도 없는 독보적인 인물이다. 세속 경계와 잘 맞아떨어져서 사원이 비로소 지어지니 국사가 탄생함을 계기로 인사仁祠(절)가 장황하게 되었다. 그것은 아마도 도와 덕망이 깊음으로 말미암아 교화가 저토록 커진 게 아닌가 생각된다.”
보조선사전普照禪師傳
스님의 법명은 체징軆澄이고 속성은 김씨이며, 웅진熊津(충남 공주)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선사는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명문 사대부 집안 출신으로서 그가 태어날 때부터의 기이한 일화가 많다. 우뚝 솟은 산악과 같은 모습, 물이 흘러내리는 듯한 기상, 세속을 버리고 출가한 일, 스승을 찾아서 경전을 배운 일 등 숱한 일들이 그의 비문에 자세하게 새겨져 있으므로 번거롭게 군더더기 말을 할 필요가 없고 그의 생애에 대한 대략만을 말할까 한다.
『전등록傳燈錄』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가지산 도의道義 대사가 서당 지장西堂智藏 선사로부터 심인心印을 전해 받고 돌아와서 우리나라의 제1대 조사가 되었다. 선禪의 진리를 드러내 밝히고 신비한 법을 계발啓發하여 그 법을 염거廉居 선사에게 부촉하고 설악산 억성사憶聖寺에 기거하였다. 제자들에게 조사의 마음을 전하고 스승의 가르침을 열어 보였으니, 저 선의 경계와 올바른 깨달음의 법은 그 연원이 이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체징 대사는 당나라 문종文宗 태화太和 정미년(827)에 가량협산加良峽山 보원사普願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는데,

010_1001_b_01L右嶺因爲建寺厥後無一介蚊子
010_1001_b_02L名其嶺曰逐虻方言
音梅
又國師之碑塔
010_1001_b_03L在於寺內十分嚴守矣咸豊甲寅乙卯
010_1001_b_04L之間墻垣崩落未及修築遷延月日
010_1001_b_05L其年夏無限蚊子千陣萬隊滿谷
010_1001_b_06L成雷鼻眼莫開大衆同心一幷修築
010_1001_b_07L2) [33] 道場一并告祝國師神堂蚊虻
010_1001_b_08L即時屏跡僧人案堵如故異哉常哉
010_1001_b_09L明人之跡泰安寺法堂上梁文曰國之
010_1001_b_10L名山類多桐裡即其一也羅以後韻
010_1001_b_11L釋輩出徹老更無二焉人境相投
010_1001_b_12L宇肇3) [34] 洎國師降誕使仁祠張皇
010_1001_b_13L由道德之深致使敎化之大

010_1001_b_14L

010_1001_b_15L普照禪師傳

010_1001_b_16L
師名軆澄姓金氏熊津人也禪師
010_1001_b_17L聯之胄托軆之異嶽立之貌河潤之
010_1001_b_18L捨俗出家尋師聽經等說載在螭
010_1001_b_19L蚨刻撰不必煩贅而就其大略而言之
010_1001_b_20L則傳燈所錄迦智山道義大師受心印
010_1001_b_21L於西堂爲我東第一祖者也闡明禪理
010_1001_b_22L啓發神法付法廉居禪師居雪山憶聖
010_1001_b_23L傳祖心闢師敎其於禪境正覺之
010_1001_b_24L淵源有自來矣軆澄大師唐文宗

010_1001_c_01L한번 정진하는 도량(壇場)에 들어가면 7일 밤을 도를 수행하였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이상한 꿩이 갑자기 날아들자 “이는 진실로 법왕法王이 장차 나올 징조이다.”라고 하였다.
선사는 보원사를 떠나 염거 선사의 문하로 들어가 거기에 몸을 의탁하고 스승으로 삼았다. 첫 번째로 염거에게서 법을 받은 뒤로 선禪의 현묘한 자취를 탐색하여 그 요체(肯綮)를 터득하였는데, 마치 막혔던 강물이 터지듯 거침이 없었으며 평탄한 길을 가는 것과 같았다. 그리하여 그는 한 마음을 깨끗하게 닦고 영원히 삼계三界를 벗어나기를 갈구했다.
개성開成(唐 文宗의 연호) 2년 정사(837)에 같이 학문을 연마한 정육貞育·처회處會68) 등과 함께 서쪽 화하華夏(唐)로 구법의 길을 떠나 푸른 바다의 격랑激浪을 헤치며 중국으로 건너갔다. 두루 돌아다니면서 많은 선지식을 만나 불법을 강론하고 서로 도를 비교해 보면서 삼오주三五州를 골고루 유람한 끝에 ‘본체와 현상은 다름이 없다(性相無異)’는 것을 깨닫고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조사祖師께서 설하신 가르침보다 더 나을 것이 없는데 왜 멀리까지 와서 이런 고생을 하겠는가?”
그러고는 개성 5년(840) 봄 2월에 평로사平虜使를 따라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때 단월檀越(시주자)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마음을 기울여 발길이 끊어지지 않았으며, 사미沙彌와 법도法徒들이 스님의 선풍禪風을 따르고 용광龍光을 뵙기 위해 전국에서 파도처럼 폭주하여 오히려 남보다 뒤질세라 달려왔다.
마침내 무주武州(전남 광주) 황학黃鶴이라는 절에 머무니 그때가 선종宣宗 대중大中 13년(859)이며, 신라 헌안대왕憲安大王이 즉위한 이듬해이다. 헌안대왕이 스님의 소문을 듣고 그 도를 앙모하여 꿈속에서조차 상상하였다. 선의 가르침을 열어 줄 것을 소원하여 서울로 들어올 것을 간청하였다.
여름 6월에 장사현長沙縣69)무장현茂長縣 부수副守 김언경金彦卿70)에게 차와 약을 예물로 가지고 가서 모셔 오게 하였으나 선사는 굳게 사양하고 서울로 가지 않았다.
그해 겨울 10월에 왕이 다시 도속사道俗使인 영암군

010_1001_c_01L太和丁未歲至加良峽山普願寺受具
010_1001_c_02L一入壇場4) [35] 行道俄有異雉
010_1001_c_03L5) [36] 駙飛是誠法王將興之徵也
010_1001_c_04L自普願寺徃廉居禪師之門托爲師
010_1001_c_05L第一自受法之後探蹟玄妙擘破肯
010_1001_c_06L若決江河如登坦蕩淨修一心
010_1001_c_07L出三界開成二年丁已與同學6) [37] 7)
010_1001_c_08L [38] 處會等路出滄波西入華夏歷抵
010_1001_c_09L而講法叅互而較道周遊三五州
010_1001_c_10L知其性相無異乃曰我祖師所說無以
010_1001_c_11L爲加何勞遠適五年春二月隨平虜
010_1001_c_12L使歸舊國於是檀越傾心釋敎8)▼(足+蓳) [39]
010_1001_c_13L沙彌法徒之趨風龍光波奔之輻湊
010_1001_c_14L恐居後遂次武州黃鶴蘭若時宣宗大
010_1001_c_15L中十三9) [40] 而新羅憲安大王即位之翌
010_1001_c_16L年也大王聆風仰道勞于夢想願闢
010_1001_c_17L禪扉請入京10) [41] 夏六月敎遣長沙縣
010_1001_c_18L茂長
副守金彥卿賚茶藥迎之師固辤
010_1001_c_19L不就冬十月敎又遣道俗使靈岩郡
010_1001_c_20L「藏」甲本正誤表作「證」「居」甲本正誤表
010_1001_c_21L作「屠」
「荊」甲本正誤表作「剏」「霄」甲本
010_1001_c_22L正誤表作「宵」
「耳」甲本正誤表作「爾」
010_1001_c_23L「貝」甲本正誤表作「貞」
「云月」甲本正誤表
010_1001_c_24L作「育」
「▼(足+蓳)」甲本正誤表作「踵」「䙫」甲本
010_1001_c_25L正誤表作「禩」
「糓」甲本正誤表作「轂」

010_1002_a_01L승정僧正71) 연훈連訓과 법사 봉진奉震·풍선馮瑄 등을 보내 윤지綸旨로 선유宣諭하여 가지산사迦智山寺(寶林寺의 전신)로 옮겨 주석할 것을 간청했다. 스님은 마지못해 거주처를 옮겨 산문으로 들어갔다.
김언경이 제자의 예를 베풀고 가까이서 모실 수 있는 입실入室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녹봉祿俸을 덜고 재물을 출연하여 쇠붙이 2,500근을 사서 노사나불盧舍那佛 한 구軀를 만들어 선사가 거처하는 사찰에 간직하게 하였다.
헌강왕은 교지를 내려 망수리望水里 이남에 사는 집에서 금金 160근72)과 곡식 2천 곡斛(10말)을 내도록 하여 절을 장엄하게 꾸미는 일을 돕게 하고 절에는 노비를 하사하였다. 임금이 내린 교지의 내용은 생략한다.
당나라 의종懿宗 함통咸通 신사년(신라 경문왕 1년, 861)에 시방의 모든 사람들에게 시주를 거두어서 이 절을 넓고 크게 만들었다. 중창하는 불사를 마치고 낙성식을 서로 경하하던 날 선사가 자리에 다다르자 선명한 암수 무지개가 법당 안을 꿰뚫고 그 빛이 다시 나뉘어 온 방을 밝게 비추더니 사람들의 얼굴까지 밝게 물들였다. 이는 견뢰堅牢73)라는 땅을 맡은 신이 상서로운 일임을 알리고 사가娑伽라는 하늘 선녀가 상서로움을 나타낸 것이다.
당 희종僖宗 광명廣明 원년(헌강왕 6, 880) 초여름 4월 22일74) 유시酉時(오후 5시~7시)에서 술시戌時(오후 7시~9시) 사이에 천둥 번개가 온 산을 뒤덮었고, 23일75) 밤중(子夜)에는 스님이 머무는 상방上方에 땅이 크게 흔들리더니, 이튿날 동이 틀 무렵에 선사께서 오른쪽 옆구리를 땅에 대고 누운 채 열반에 들었다(右脇卽終).76)
그의 제자 800여 명이 스승의 모습을 추모하면서 널을 부여잡고 통곡하니 그 곡소리가 계곡을 진동했다. 산에서 다비식을 거행하고 탑을 세워 유골을 안치하였다.
중화中和(唐 僖宗의 연호) 3년(헌강왕 9, 883) 봄에 그의 문인 의거義車 등이 스님의 행적을 찬집纂集하여 멀리 궁궐까지 나아가 비석을 세워 글을 새기도록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임금은 진공眞空의 이치를 흠모하고 존사尊師의 마음을 가상하게 여겨 소관 관청에 교지를 내려 시호를 ‘보조普照’라 하고 탑호를 ‘창성彰聖’이라 하도록 하였으며, 사액寺額을 ‘보림寶林’으로 하도록 했다.
아마도 보림이라고 한 것은 원표元表 대덕大德의 옛날 편액을 그대로 이어받아 창건 당시의 내역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 같다. 시호와 탑호와 사호寺號를 빠짐없이 갖추어 하사한 것은 특별히 두터운 은혜를 베풀어 선종禪宗을 표창하기 위한 예우인 듯하다.
동진대사전洞眞大師傳
스님의 법명은 경보慶甫이고 자는 광종光宗이며, 속성은 김씨이고 영암 구림鳩林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010_1002_a_01L僧正連訓法師奉震馮瑄等宣諭綸旨
010_1002_a_02L請移居迦智山寺遂飛金錫遷入山門
010_1002_a_03L金彥卿陳弟子之禮爲入室之賔減俸
010_1002_a_04L出財市鐵二千五百斤鑄盧舍那佛一
010_1002_a_05L以藏禪師所居梵宇敎下望水里南
010_1002_a_06L等宅共出金一百六十斤租二千斛
010_1002_a_07L助克裝飭功德寺隷宣敎省懿宗咸通
010_1002_a_08L辛巳以十方施資廣其禪宇慶畢功
010_1002_a_09L禪師莅焉虹之與蜺貫徹堂內
010_1002_a_10L輝耀室渥移燭人此乃堅牢告祥
010_1002_a_11L迦表瑞也僖宗廣明元年孟夏目月二
010_1002_a_12L十二日雷電一山自酉至戌二十三日
010_1002_a_13L子夜上方地震及天曉右脇即終
010_1002_a_14L子八百人追慕攀號聲動溪谷葬於
010_1002_a_15L1) [42] 塔安厝中和三年春門人義車
010_1002_a_16L纂集2) [43] 遠詣王門請建碑銘
010_1002_a_17L慕眞空之理嘉尊師之心敎所司
010_1002_a_18L謚曰普照塔號彰聖寺額曰寶林
010_1002_a_19L盖寶林者因元表大德所扁舊額而表
010_1002_a_20L其當日創3) [44] 由也謚號塔號寺號之稠
010_1002_a_21L疊贈遺者特加恩厚褒其禪宗之禮也

010_1002_a_22L

010_1002_a_23L洞眞大師傳

010_1002_a_24L
師名4) [45] 字光宗姓金氏靈巖鳩林

010_1002_b_01L아버지의 이름은 양익良益이고 벼슬은 알찬閼粲이며 어머니는 박씨이다.
함통咸通(唐 懿宗의 연호) 9년(경문왕 8, 868) 상월相月음력 7월 재생명哉生明초3일 밤에 그의 어머니가 꿈을 꾸었는데 하얀 쥐가 푸르스레한 유리구슬 하나를 물고 와서 마치 사람처럼 말을 하였다.
“이 물건은 이 세상에서 아주 보기 드문 기이한 보배입니다. 이는 곧 현문玄門77)의 최상의 보배입니다. 틀림없이 부처님의 호념護念이 따를 것이고 밖에 나오면 반드시 찬란하게 빛날 것입니다.”
그 일로 인하여 아이를 잉태하니 임신 기간에 경건한 마음으로 한결같이 재계齋戒하였다. 선사는 여래께서 이 세상에 오셨던 달4월 20일에 태어났다. 스님은 어려서부터 어버이 섬기는 일에 뜻을 두었으나 마음은 부처가 되겠다고 기약하였다. 그의 부모는 어느 날 그에게 말하였다.
“사람이 꼭 하고 싶어 하면 하늘도 따르는 법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스님이 되는 것을 허락했다. 그는 곧바로 부인산사夫仁山寺로 가서 머리를 깎고, 배움의 숲에 깃들어 미처 선禪이라는 산을 즐거워하지 못했다. 빠른 발(迅足 : 禪)이 허공에 머물러도 마음이란 집(宅心 : 敎)에 오히려 머물러 있었다. 어느 날 저녁에 잠이 들었는데 꿈에 금선金仙(부처님)이 그의 머리를 어루만지고 귀를 잡아당겨 방포方袍(가사)를 주면서 말하였다.
“너는 이 옷을 입어라. 그 이유는 몸을 보호하여 수행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이곳은 마음을 닦는 이가 깃들어 있을 곳이 아니니 이곳을 떠나는 게 좋지 않겠는가?”
이에 놀라서 꿈을 깬 스님은 꿈속에서 들었던 말로 인하여 ‘장차 떠나가야 할 때이니 이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는 먼동이 틀 때까지 앉은 채로 기다리고 있다가 아침이 되자 행장을 꾸려 가지고 철새처럼 길을 떠나 곧 백계산白鷄山으로 가서 도승道乘(道詵) 화상을 배알하고 제자가 되기를 간청하였다.
그 후 보살도菩薩道를 닦고 여래의 집(如來家)으로 들어가 심오한 이치를 보는 눈이 일찍 열렸으며, 기미를 아는 마음을 이미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슬기롭지 못하면 부처님의 바른 법을 지킬 수 없고 계율이 아니면 인간의 그릇된 행동을 막을 수 없다.’
그러고는 18세 때 월유산月遊山 화엄사華嚴寺에서 구족계를 받고, 다시 백계산白鷄山으로 가서 도승 대사에게 하직 인사를 드리니 대사가 이렇게 말했다.
“너의 그러한 뜻을 빼앗을 수 없고 형세를 막을 수 없구나. 너는 나를 동쪽 마을에 사는 공구(東家丘)78)로만 알고 있으니 어찌 해 볼 길이 없다.”
대사는 말을 마치고 마침내 웃으면서 그가 떠나겠다는 것을 허락하였다. 스님은 그때부터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배웠는데 일정한 스승을 두지 않고 성주사聖住寺79)의 무염無染 대사, 굴산사崛山寺80)의 범일梵日 대사를 차례로 배알하여 법문을 들었다.
말의 자루(談柄)를 겨우 휘두르기만 해도 현묘한 기미가 분명하게 드러나니, 마침내 경복景福 원년 임자(진성여왕 6, 892) 봄에 펄펄 나는 새처럼 산을 나와 나부끼는 바람처럼 바닷가에 이르렀다.

010_1002_b_01L人也父良益作閼粲5)釋玄可書 [46] 母朴
010_1002_b_02L咸通九年相月
㢤生6)
[47] 夜夢
010_1002_b_03L白鼠7) [48] 靑琉璃珠一顆而來遂人語曰
010_1002_b_04L此物是稀代之奇珎乃玄門之上寶
010_1002_b_05L須護念出必輝光因有娠虔心齋戒
010_1002_b_06L如來出世之月
二十日誕生師志在
010_1002_b_07L其親心期即佛父母乃曰人所欲者
010_1002_b_08L天所從之遂泣而許直徃夫仁山寺落
010_1002_b_09L8) [49] 因棲學藪未樂禪山迅足空留
010_1002_b_10L宅心尙住魂交之夕金仙摩頂提耳
010_1002_b_11L乃授之方袍曰汝其衣之所以衛身而
010_1002_b_12L行乎且此地非心學者栖遲之所去之
010_1002_b_13L不亦宜乎師即以形開因以警戒
010_1002_b_14L爲送之將行時不可失昧爽坐以待
010_1002_b_15L挈山裝鳥逝乃詣白鷄山謁道乘
010_1002_b_16L和尙請爲弟子修菩薩道9) [50] 如來家
010_1002_b_17L覩奧之眼曾開知幾之心旣悟以爲非
010_1002_b_18L無以護其法非戒無以防其違
010_1002_b_19L十有八禀具於月遊山華嚴寺復徃白
010_1002_b_20L鷄山辭大師師因謂曰汝其志不可
010_1002_b_21L勢不可遏汝以吾爲東10) [51] 末如
010_1002_b_22L之何遂笑而聽去自爾遊有泛覽
010_1002_b_23L無常師歷謁聖住無染大師崛山梵日
010_1002_b_24L大師談柄纔揮玄機了見遂於景福
010_1002_b_25L元年壬子春出山翽翽並海飄飄

010_1002_c_01L이에 중국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하여 파도를 능멸하며 바다를 다니는 어느 나그네에게 간청하여 그에게서 배를 같이 타고 가자는 허락을 받아 기쁜 마음으로 함께 가게 되었다.
이윽고 진秦나라 다리를 건너 한漢나라 땅에 이르러 구름 같은 마음으로 도가 높은 이를 찾아 방문하고 유랑하며 스승을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마침내 무주撫州에 있는 소산疎山으로 가서 광인匡仁 화상을 배알하니 광인 대사가 이렇게 말하였다.
“이리 가까이 오라. 그대가 경해鯨海81)의 용의 새끼인가?”
동진 대사는 현묘한 이치가 들어 있는 말을 드날리고 비밀스런 법을 물어 대사가 승당昇堂할 것을 허락하니 그로 인해 입실入室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비로소 목격도존目擊道存82)의 법을 힘입어 이미 심전心傳을 얻게 되자 광인 화상은 크게 기뻐하면서 말하였다.
“동쪽 사람치고 정말 함께 도를 눈으로 이야기할 만한 자는 오직 그대뿐이로다.”
그러고는 마침내 그의 손을 잡고 법등法燈을 전하고 인하여 마음으로 법인法印을 주었다. 동진 대사는 이때부터 승려로서 참다운 사람이면 반드시 찾아뵙고 경계가 절승絶勝한 곳이면 반드시 찾아다녔다. 강서江西로 가서 노선老善 화상을 배알하니, 화상은 동진의 말을 듣고 행동을 살펴보기 위해서 그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흰 구름이 자물쇠가 되어 나그네의 길을 끊는구나.(白雲鎖斷行人路)”
그러자 동진 대사가 화답하였다.
“푸른 산길은 저절로 있는 것이거늘 흰 구름이 어떻게 붙잡을 수 있겠습니까?(自有靑山路。 白雲那得留。)”
화상은 대사가 민첩하게 대답하여 매임이 없고 말을 하되 걸림 없음을 보고 곧 전송傳送하며 말하였다.
“그대가 가는 곳에는 이로움이 있을 것이니 때가 된 연후에 돌아가라.”
때마침 본국으로 돌아가는 배를 만나 동쪽(신라)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천우天佑 18년(경명왕 5, 921)83) 여름에 전주 임피군臨陂郡에 이르니, 그때는 어느새 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로 유통되지 못하고 시국이 이롭지 못하게 된 초기였다.
그 당시 고을(完山)에서 가장 높은 도통都統 태부太傅 견훤甄萱이 만민언萬民堰에 군대를 주둔하고 있을 때였다. 견甄 태부太傅84)는 본래 선근善根을 심었던 사람으로서 장군의 집안에 태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한창 자신의 웅대한 뜻을 펴고자 사로잡았다가 놓아 주는 용병술에 전력을 다하고 있을 때였으나

010_1002_c_01L傾入漢之心乃告凌波之客許之寓
010_1002_c_02L忻以同行已過秦橋旋臻漢地
010_1002_c_03L心訪道浪跡尋師乃詣撫州踈山
010_1002_c_04L匡仁和尙仁若曰格汝鯨海龍子耶
010_1002_c_05L大師玄言遂颺秘說爰諮許以昇堂
010_1002_c_06L因以入室方資目擊旣得心傳仁公
010_1002_c_07L大喜因謂曰東人可目語者惟子
010_1002_c_08L令執手傳燈因心授印自是僧之眞者
010_1002_c_09L必詣境之絕者必搜去謁江西老善和
010_1002_c_10L和尙乃欲聽其言觀其行因謂曰
010_1002_c_11L白雲鎖斷行人路答曰自有靑山路
010_1002_c_12L白雲那得留和尙以大師捷對不覊
010_1002_c_13L颺言無碍乃送之曰利有攸徃時然後
010_1002_c_14L適値歸舟因而東還天祐十八年
010_1002_c_15L達全州臨陂郡而屬道虛行之際
010_1002_c_16L時不利之初11) [52] 有州尊都統㼼12) [53]
010_1002_c_17L統我于萬民堰也 *大13) [54] 本自善根
010_1002_c_18L生於將種方申壯志雖先擒縱之謀
010_1002_c_19L「壘」甲本正誤表作「纍」「行」下甲本正誤
010_1002_c_20L表有「狀」
「之」下甲本正誤表有「之」「慶」
010_1002_c_21L海東佛祖源流作「度」{編}
「釋玄可書」甲本正
010_1002_c_22L誤表曰衍字
「三日明」甲本正誤表作「明三
010_1002_c_23L日」
「御」甲本正誤表作「銜」「來」甲本正
010_1002_c_24L誤表作「采」
「人」甲本正誤表作「入」「衆」
010_1002_c_25L甲本正誤表作「家」
「奧」甲本正誤表作「粵」
010_1002_c_26L「大」甲木正誤表作「太」次同「傅」作「傳」
010_1002_c_27L{甲}次同

010_1003_a_01L동진 대사의 자비한 모습을 뵙고는 흠모하고 의지하는 마음이 갑절이나 늘어났다. 그리하여 찬탄하며 말하였다.
“우리 스님을 만난 것이 비록 늦은 감이 있긴 하지만 제자가 되는 일에 어찌 꾸물대겠습니까?”
이렇게 말하고는 스님을 스승의 예로 정성을 다하여 대우하고 그 가르침을 띠에 새겼다. 마침내 전주의 남쪽에 있는 남복선원南福禪院에 주석하기를 간청하자 대사가 말하였다.
“새들도 나무를 가려서 앉는 법인데 내가 어찌 표주박처럼 한 곳에 매달려 있겠습니까?”
그러고는 백계산白鷄山 옥룡사玉龍寺로 갔는데, 그곳은 옛 스승님께서 도를 즐기셨던 해맑은 집이었고 선정에 안주하셨던 명승지로서 구름 덮인 계곡물이 허공에 걸려 있으며 돌을 베개 삼아 눕고 흐르는 물로 양치질하며 살기에는 아주 적절한 곳이다. 동진 스님은 견훤에게 말하여 옥룡사에 옮겨 살겠노라 하자 태부가 허락하고 그곳에 옮겨 거주하게 하였다.
고려 제2대 의공義恭(惠宗)대왕은 선대의 유풍을 받들고 선대의 뜻을 이어받아 정밀한 마음으로 정진에 힘쓰는 한편 스님을 정성껏 모시다가 홀연히 인간의 몸을 버리고 천상으로 돌아갔다.
문명대왕文明大王85)은 왕위에 오르기 전(陟岡)에는 아름다움을 이루셨고 왕위에 올라서는(莅阼) 거듭 빛나셨다(重光). 연꽃을 엮어서 천축天竺의 유풍을 널리 펴고 거울을 잡고 바다 나라에 풍속을 비추는 등 많은 업적을 이룩했다. 임금께서는 붓을 휘둘러 동진 스님이 머물고 있던 절의 현판을 써서 하사하기도 했다.
정종定宗 3년 태세太歲가 협흡協洽(未, 즉 丁未86))인 4월 20일에 대사가 열반에 들었다. 대사는 열반에 들려고 할 무렵 목욕재계를 이미 마치고 방 앞에서 대중들을 모두 뜰 앞으로 모이게 한 다음 경계하는 말을 남겼으니 내용은 이러했다.
“내 이제 곧 떠나려고 하니 그대들은 잘 머물러 있거라.”
말을 마치고는 방으로 들어가 의자에 기대어 가부좌를 하고는 태연자약한 모습으로 옥룡사 상원上院에서 열반에 드니, 부모로부터 받아 보전하던 몸의 나이는 80세이고 보살계를 받은 지는 62년이었다.
이튿날 스님의 신좌神座를 백계산 감실에 받들어 옮겨 모시고 임시로 돌문을 설치하여 봉함해 두었다. 문명대왕은 스님이 열반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슬퍼하며 하늘이 그를 남겨두지 않음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면서 곧 사신을 보내 친히 쓴 조서弔書를 보내니 그 내용은 이러하다.
“작고하신 옥룡산 선화상禪和尙이시여, 조각달은 하늘에 걸려 있고 외로운 구름은 산마루에 나옵니다. 뗏목을 타고 서쪽으로 건너가 구슬을 움켜쥐고 동쪽 나라 돌아오니 자비의 바람이 만 리 변두리에 불어 오고 선정의 달빛이 구천九天 밖까지 비추게 하신 분은 오직 저의 스승뿐입니다. 그런 까닭에 ‘동진대사洞眞大師’라는 시호를 추증하옵고 ‘보운寶雲’이라는 탑호를 올리나이다.”
그러고는 국가의 가장 솜씨가 뛰어난 석공石工을 명하여 돌을 다듬어서 층층으로 된 돌무덤을 만들게 하여 유골을 모시게 하였다.
그 후 2년이 지난 뒤에

010_1003_a_01L曁謁慈顏倍贍1) [55] 之志乃歎曰遇吾
010_1003_a_02L師而雖晩爲弟子以何遲避席拳拳
010_1003_a_03L書紳慥慥遂請住州之离地南福禪院
010_1003_a_04L大師曰鳥能擇木吾豈2) [56] 乃以白
010_1003_a_05L鷄山玉龍寺者是故師爲樂道之淸齋
010_1003_a_06L乃安禪之勝3) [57] 雲溪空在枕流最宜
010_1003_a_07L遂言於*大傅許之移而住焉義恭
010_1003_a_08L大王奉以遺風繼之先志注精心而亹
010_1003_a_09L祈法力以孜孜奄棄人間已歸天
010_1003_a_10L文明大王陟岡致美莅阼重光
010_1003_a_11L華弘天竺之風握鏡照海邦之俗仍飛
010_1003_a_12L鳳筆佇降象軒越三年龍集協4) [58]
010_1003_a_13L四月二十日大師將5) [59] 6) [60] 浴已訖
010_1003_a_14L房前命衆悉至于庭乃遺戒曰我旣
010_1003_a_15L將行衆其好住言畢入房倚繩床趺
010_1003_a_16L儼然而示滅于玉龍上院存父母體
010_1003_a_17L八十春入菩薩位六十二夏翌日
010_1003_a_18L遷神座於白鷄山7)合龍 [61] 權施石戶封閉
010_1003_a_19L文明大王聞之震悼恨不8)▼(辶*(來+攵)) [62]
010_1003_a_20L使駛吊以書曰故玉龍禪和尙片月遊
010_1003_a_21L孤雲出峀乘桴西泛9) [63] 東歸
010_1003_a_22L慈風吹萬里之邊禪月照九天之外者
010_1003_a_23L惟實吾師矣故追謚洞眞大10) [64] 塔號
010_1003_a_24L寶雲仍令國工攻石封層11) [65] 越二年

010_1003_b_01L문인들이 석실石室을 열고 모습을 보니 그 얼굴이 살아 있는 것과 같았다. 모두 통곡하면서 스님의 육신을 받들어 모셔다가 백계산 동쪽 운암雲巖 산등성이에 탑을 세우고 봉안하였으니, 이는 대사의 유명遺命을 따른 것이다.
대사에게 법을 전해 받은 큰 제자 천준泉遵(泉通) 선사 등이 왕에게 표表를 올려 부디 절묘한 문장(幼婦之文辭)87)으로 비문을 지어 돌아가신 스님의 업적을 기록하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왕이 비답을 내려 “옳은 일이다.”라고 허락하였으니, 어찌 청원하자마자 그렇게 빨리 비석에 새겨질 줄 알았겠는가?
현덕顯德(後周 世宗의 연호) 5년(고려 광종 9, 958)에 김정언金廷彥88)이 비문을 지었다.
대각국사전大覺國師傳
스님의 법명은 후煦이고 자는 의천義天이다. 송나라 철종哲宗의 휘諱가 후煦였으므로 자字인 의천義天을 법명으로 삼았다. 속성은 왕王씨이고 고려 문종文宗 인효왕仁孝王의 넷째 아들이다.
그는 왕자로서의 영화를 사양하고 출가하여 스님이 되어 뒷날 우세승통佑世僧統89)에 봉해졌다. 송나라 철종哲宗 원우元祐 초에 중국에 들어가 도를 물었다. 임금에게 표문表文을 올려 현수賢首의 가르침을 고려에 전하겠다고 간청하였다.
철종은 양가兩街에 칙명을 내려 의천에게 법을 전해 줄 만한 사람을 천거하게 하였다. 그때 승려들은 동경東京(洛陽) 각엄사覺嚴寺의 유성有誠 선사를 천거했는데, 유성 선사는 전당錢唐(浙江省 杭縣) 혜인원惠因院 정원淨源을 자기 대신 천거했다. 철종은 곧 주객원외랑主客員外郞 양걸楊傑90)에게 칙명을 내려 의천을 모시고 혜인원으로 가서 법을 받도록 조치했다. 가는 도중에 여러 사찰에서 의천을 행인行人(외교관)과 동등한 예우로 영접하였다.
이보다 앞서 의천이 송의 서울에 이르렀을 때에 철종은 조회를 마치고 예부상서禮部尙書 소식蘇軾91)에게 칙명을 내려 의천을 모시고 원조 종본圓照宗本 선사를 뵙도록 안내하라고 하였다. 종본 선사는 의천을 맞아 종지宗旨를 가르쳐 보여 주었다.
금산金山의 불인佛印(了元) 선사에게 가서 예를 올리니 선사는 앉아서 의천의 예를 받았다. 양걸이 놀라서 불인 선사에게 이유를 묻자 이렇게 답하였다.
“의천은 다른 나라 스님입니다. 내가 만약 도를 굽히고 세속의 예법을 따라 여러 방면에서 이미 한쪽 눈을 잃은 것처럼 행동한다면 무엇을 가지고 중국의 선법을 보여 주겠습니까?”
조정에서 그 말을 듣자 ‘예를 아는 스님’이라고 생각했다.
혜인원에 이르러 정원淨源과 화엄의 교학에 관하여 토론을 벌이다가 해가 바뀌어서야 끝마쳤다. 천축사天竺寺의 자변慈辨(從諫) 대사를 만나 천태天台 교관敎觀의 도에 대하여 청해 묻고, 영지사靈芝寺의 대지大智 선사를 뵙고 계법戒法 설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고는 그가 저술한 책을 얻어 가지고 귀국했다.
『삼역화엄三譯華嚴』을 베껴서 혜인원의 정원 법사에게 보내니 정원은 장서각을 지어 이를 보관하고 절 이름도 고려사高麗寺라고 바꿨다.

010_1003_b_01L門人等開*合龍覩形面如生乃號
010_1003_b_02L奉色身竪塔于白鷄山東之雲巖崗
010_1003_b_03L遺命也厥有傳法大弟子泉遵禪師等
010_1003_b_04L遂抗表請幼婦之文辭紀先之事業
010_1003_b_05L曰可豈悟號弓逐値勒石顯德五年
010_1003_b_06L金廷彥撰文

010_1003_b_07L

010_1003_b_08L大覺國師傳

010_1003_b_09L
師名煦字義12) [66] 宋哲宗諱煦以字義
010_1003_b_10L天爲名姓王氏高麗文宗仁孝王第四
010_1003_b_11L子也辭榮出家封祐世僧統宋哲宗
010_1003_b_12L元祐初入中國問道上表乞傳賢首敎
010_1003_b_13L敕兩街擧可授之法者以東京覺嚴誠
010_1003_b_14L禪師對擧錢塘惠因淨源以自代
010_1003_b_15L乃勅主客楊傑送至惠因受法諸刹
010_1003_b_16L迎餞如行人禮初至京師朝畢勅禮
010_1003_b_17L部蘇軾館伴謁圓照本禪師示以宗旨
010_1003_b_18L至金山佛印坐納其禮楊傑驚問印曰
010_1003_b_19L義天異國僧也若屈道循俗諸方先失
010_1003_b_20L一隻眼何以示華夏師法乎朝廷聞之
010_1003_b_21L以爲知禮至惠因咨決華嚴閱歲而
010_1003_b_22L及見天竺慈辨請問天台敎觀之道
010_1003_b_23L又見靈芝大智爲說戒法請所著文
010_1003_b_24L還國書三譯華嚴送惠因建閣藏之

010_1003_c_01L진수 정원晉水淨源에게 도를 묻고 제자의 예를 올렸다.
시호를 추증하여 ‘대각大覺’이라 하였다. 그의 문집 18권이 전해지고 있으며, 문인 혜관慧觀은 법성사法性寺 주지를 지냈고, 의천의 영정은 선암사仙岩寺에 모셔져 있다.
보조국사전普照國師傳
스님의 법명은 지눌知訥이고 호는 목우자牧牛子이며, 속성은 정鄭씨이고 어머니는 조趙씨이다. 경서京西의 동주洞州지금의 황해도 서흥西興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국학國學의 학정學正(정9품) 정광우鄭光遇이다.
송나라 고종高宗 소흥紹興 28년, 금나라 해릉왕海陵王(正隆) 3년 무인(고려 의종 12, 1158)에 태어났다. 16세 때 종휘宗暉 대선사에게서 머리를 깎고 25세 되던 해인 임인년(1182)에 나라에서 실시한 승과에 합격했다. 그로부터 얼마 안 되어 창평 청량사淸凉寺92)에 머물렀다. 또 을사년(1185)에는 경북 예천 하가산下柯山 보문사普門寺에 우거하면서 대장경을 열람하기도 했다.
금나라 장종章宗 승안承安 3년93) 무오(1198)에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에 올라가 선관禪觀에 전념하여 깨달음을 얻었다. 승안 5년엔 송광산松廣山 길상사吉祥寺로 옮겨 결사結社를 결성하고 11년 동안 거주하니, 전국의 스님과 속인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성대한 총림叢林을 이루었다.
희종 임금이 칙명을 내려 송광산을 조계산曹溪山으로, 길상사를 수선사修禪社로 고쳐 부르게 했다. 금나라 동해후東海侯(衛紹王) 태안太安 2년 봄 3월 27일에 평소와 같이 설법을 마친 후 열반에 들었다. 7일이 지나 다비를 했는데

010_1003_c_01L名高麗寺至晋水淨源問道申弟子禮
010_1003_c_02L贈謚曰大覺有文集十八卷門人慧觀
010_1003_c_03L爲法性寺住持影在仙岩

010_1003_c_04L

010_1003_c_05L普照國師傳

010_1003_c_06L
師名知訥自號牧牛子姓鄭氏母趙
010_1003_c_07L京西洞州今之
瑞興
人也父國學正光遇
010_1003_c_08L宋高宗紹興二十八年金海陵王三年戊
010_1003_c_09L寅生十六投宗暉大禪師祝髮二十五
010_1003_c_10L壬寅中僧選未幾南遊抵昌平淸13) [67]
010_1003_c_11L [2] 住錫又乙巳遊下柯山寓普門寺
010_1003_c_12L閱大藏經至金章宗承安二年戊午
010_1003_c_13L智異山上無住專禪14) [68] 有契會五年
010_1003_c_14L移居松廣山吉祥寺居十有一年緇俗
010_1003_c_15L雲奔蔚爲15) [69] 勅改松廣山爲曺溪
010_1003_c_16L寺爲修禪社金東海侯太安二年春
010_1003_c_17L三月二十七日如常說法而逝過七日
010_1003_c_18L「依」下甲本正誤表有「歸」「瓠」甲本正誤
010_1003_c_19L表作「匏」
「踐」甲本正誤表作「蹟」「申」甲
010_1003_c_20L本正誤表曰衍字
「徃」甲本正誤表曰衍字
010_1003_c_21L「盥」甲本正誤表作「▼((輿-車)*木)」「合龍」甲本正誤
010_1003_c_22L表作「龕」次同
「▼(辶*(來+攵))」甲本正誤表作「慦」
010_1003_c_23L「瑤」甲本正誤表作「珤」
「寺」甲本正誤表作
010_1003_c_24L「師」
「墜」甲本正誤表作「塚」「天」下甲本
010_1003_c_25L正誤表有「避」
「凉」甲本正誤表作「源」
010_1003_c_26L「規」甲本正誤表作「觀」
「義」甲本正誤表作
010_1003_c_27L「叢」

010_1004_a_01L얼굴 색깔이 마치 살아 있는 사람과 같았다. 다비를 마친 후 큰 사리 30매와 수없이 많은 조그만 사리를 얻었다.
송나라 영종寧宗 가정嘉定 2년(1209) 희종 임금이 스님께서 열반했다는 소식을 듣고 애통해하고 슬퍼하면서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라는 시호와 ‘감로甘露’라는 탑호를 하사했다. 누려 온 나이 53세이고, 스님의 법을 이은 제자는 무의자無衣子 혜심惠諶이다.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이란 책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임인년(1182) 정월에 상도上都에 있는 보제사普濟寺에서 연 담선법회談禪法會에 참석하고 나서 무신년(1188) 이른 봄에 편지를 받고 하가산 보문사普門寺로 갔다. 금나라 장종 명창明昌 원년 경술(1190) 늦봄에, 즉 남송南宋 광종光宗 소희紹熙 원년 공산公山에 은거하고 있을 적에 목우자牧牛子 지눌은 결사문을 쓴다.”
승안承安(金나라 章宗의 연호) 5년 경신(1200)에 공산에서 강남의 조계산으로 옮겨 가서 머물렀다. 금나라 태화泰和(章宗의 연호) 5년 을축(1205)에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을 썼다. 그 후 임자년 정월 월남사月南社에서 대전大全을 다시 인쇄할 때 송운 유정松雲惟政이 교정을 담당하였다.
지눌의 비석과 탑은 송광사松廣寺와 만연사萬淵寺에 있는데 김군수金君綏94)가 지은 것이다. 송광사에 매산梅山의 능견난사能見難思95)가 있으며, 흥국사興國寺와 만연사에 영정이 모셔져 있다.
진각국사전眞覺國師傳
스님의 법명은 혜심惠諶이고 속성은 조曺씨이며 전남 화순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어머니가 어느 해 겨울에 샘물 안에서 오이를 건져 먹고 그를 잉태하여 낳았다. 그 뒤 사람들은 그 우물을 적천跡泉이라 불렀으며, 스님의 호를 무의자無衣子라 했다.
원나라 세조世祖, 금나라 선종宣宗 병술년~정해년(1226~1227) 연간에 문인 진훈眞訓 등과 함께 여러 선사들의 선문禪門의 이야기를 모으고 불·법·승 삼보三寶의 기록을 엮어 『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 30권을 완성했다. 또 『선문강요집禪門綱要集』 1권도 지었다.
금나라 정우貞祐 9년 임오(1222) 중동仲冬(11월)에 양산梁山 취서산鷲栖山 통도사通度寺 계단戒壇과 비각碑閣을 예배하고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와 가사를 제목으로 절구絶句 두 수를 지었는데, 사리라는 제목으로 지은 시는 이러하다.

世尊舍利鎭高壇    세존의 사리 높은 계단 누르고

010_1004_a_01L茶毘顏色如生得舍利大者三十枚
010_1004_a_02L小者無數宋寧宗嘉定二年上聞之痛
010_1004_a_03L賜謚佛日普照國師塔曰甘露
010_1004_a_04L世五十三嗣法沙門無衣子1)惠湛 [70]
010_1004_a_05L結社文曰歲在壬寅正月2) [71] 普濟
010_1004_a_06L寺談禪法會戊申年早春得書徃下柯
010_1004_a_07L山普門寺金章宗璟明昌元年庚戌季
010_1004_a_08L即南宋光宗紹熈元年公山隱居
010_1004_a_09L牧牛子知訥志結社文至承安五年庚
010_1004_a_10L自公山住江南曺溪山金泰和五
010_1004_a_11L年乙丑作初心文後壬字正月月南
010_1004_a_12L社大全重刻松雲惟政校正碑塔在松
010_1004_a_13L廣寺萬淵寺金君紱 [3] 有梅山能見難
010_1004_a_14L興國萬淵有影

010_1004_a_15L

010_1004_a_16L眞覺國師傳

010_1004_a_17L
師名*惠湛 [72] 姓曺氏和順人也母冬取
010_1004_a_18L泉瓜喫因有娠而生名其泉曰跡泉
010_1004_a_19L號曰無衣子元世祖金宣宗丙戌丁亥
010_1004_a_20L與門人眞訓等采集諸師禪門語話
010_1004_a_21L結佛法僧三寶之次錄成拈頌集三十
010_1004_a_22L又作禪門綱要一卷金貞祐九年壬
010_1004_a_23L午仲冬梁山鷲栖山通度寺戒壇碑閣
010_1004_a_24L題舍利袈裟二絕曰世尊舍利鎭高壇

010_1004_b_01L覆釜腰邊有火瘢    엎어 놓은 솥96) 허리 가에 불탄 흔적 보인다
聞黃龍灾塔日     들으니 황룡사 탑이 불에 타던 날
連燒一叚座無間    불길이 번져 한쪽이 다 타버렸네97)

또 가사를 주제로 지은 시는 이러하다.

殷勤稽首敬歸依    은근히 머리 조아려 공경히 귀의하오니
是我如來所着衣    이는 여래께서 입으셨던 가사이기 때문이다
因憶靈山猊座上    인하여 생각건대 영취산 사자좌 위에
莊嚴百福相巍巍    온갖 복덕으로 장엄하신 거룩한 그 모습이여

정산定山(충남 공주시) 유구惟鳩 역사를 고쳐 짓고 단청할 때 관복을 다 벗어 버리고 홀로 낙향하는 사람을 그렸는데, 사람마다 그 그림 속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스님은 그 그림을 보고 절구 한 수를 지었으니 다음과 같다.

壁上何人畫此圖    어느 누가 벽 위에 이 그림을 그렸는가?
諫臣去國事幾乎    간언하던 신하 떠나 나라 일 그르칠 뻔했구나
山僧一見尙惆悵    산승은 한번 보고도 오히려 이렇게 슬픈데
何况當途士大夫    하물며 당시 관청의 사대부야 말해 무엇하랴

간언하던 신하란 고려 의종毅宗 조의 남평南平 문극겸文克謙98)을 이르는 말이다. 그가 임금께 상소를 올렸는데 들어 주지 않자 정언正言과 승선承宣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 마을로 돌아갔었다.
스님은 만연사를 떠나 송광사로 돌아왔다. 나중에 비석과 영각影閣을 세웠다. 연담蓮潭 대사가 스스로 찬贊한 시의 내용은 이러하다.

山明水秀古和州    맑은 산 빼어난 물 옛 화주和州에
五百年前國師誕    오백 년 전 국사께서 탄생하셨네
如今地靈老      지금은 땅의 기운이 노쇠했는가?
生此檐板漢      이와 같은 무식한 사람(擔板漢)99)이 태어나다니
진정국사전眞靜國師傳
스님의 법명은 천책天頙이고 자는 천인天因이며, 호는 내원당內願堂이고 속성은 신申씨이다. 조상은 나라에 큰 공을 세운 경상卿相들이 많이 배출된 집안의 자손으로 20세 때 과거에 급제했다. 그는 아름답고 빛나는 문장으로 온 세상에 이름을 떨쳤으나 어느 날 아침에 갑자기 출가하여 금릉金陵 만덕산萬德山 백련사白蓮社100)에서 연율蓮律 스님에게 머리를 깎고 원묘圓妙 스님의 법통을 이어받았다.
만년에 국사國師가 되었고 백련사에서 용혈암龍穴庵으로 옮겨 거주하였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은 이 스님을 용혈대존숙龍穴大尊宿이라고 불렀다.
원나라 순제順帝 지원至元101) 30년 계사(1293) 11월에 『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 3권을 지었다. 또 『선문강요집禪門綱要集』 1권과 『전홍록傳弘錄』 4권이 세상에 유통되고 있다.
고려 조정에서 스님에게 ‘진정국사眞靜國師’라는 시호를 추증하였으며, 이 스님이 백련사 8대 국사 중 제4세이다.
제자로는 석교도승통 각해원명 불인정조국사釋敎都僧統覺海圓明佛印靜照國師102)가 있고

010_1004_b_01L覆釜腰邊有火瘢3) [73] 黃龍灾塔日連燒
010_1004_b_02L一叚座無間又殷勤稽首敬歸依是我
010_1004_b_03L如來所着衣因憶靈山猊座上莊嚴百
010_1004_b_04L福相巍巍定山惟鳩驛改建丹靑時
010_1004_b_05L4) [74] 脫衣獨行人人皆不知師題一絕
010_1004_b_06L壁上何人畫此圖諫臣去國事5)
010_1004_b_07L [75] 山僧一見尙惆悵何况當途士大夫
010_1004_b_08L諫臣者麗毅宗朝南平文克謙上䟽不
010_1004_b_09L解正言及承宣去萬淵而歸立碑
010_1004_b_10L影閣蓮潭自賛曰山明水秀古和州
010_1004_b_11L五百年前國師誕如今地靈老生此
010_1004_b_12L6) [76] 板漢

010_1004_b_13L

010_1004_b_14L眞靜國師傳

010_1004_b_15L
師名天▼(𤴔+頁)字天因號內願堂姓申氏
010_1004_b_16L本奕世卿相之子二十登第文章震耀
010_1004_b_17L一世而一朝出家於金陵之萬德山白
010_1004_b_18L蓮社落髮於蓮律受鉢於圓妙晩年
010_1004_b_19L襲爲國師白蓮社移住龍穴庵人稱龍
010_1004_b_20L穴大尊宿元順帝至元三十年癸巳十
010_1004_b_21L一月撰禪門寶藏錄三卷又禪門綱要
010_1004_b_22L一卷傳弘錄四卷行于世麗朝贈謚
010_1004_b_23L眞靜國師爲八國師之第四世也
010_1004_b_24L釋敎都僧統覺海圓明佛印靜照國師

010_1004_c_01L손자 제자는 부암 무기浮庵無寄 대선사가 있다. 구례 연곡사燕谷寺와 해남 두륜산頭輪山 북암北庵에 거주하였다. 조선조 정열수丁洌水(정약용)가 서문을 쓰고 찬贊을 지었다. 탑호塔號는 ‘고암杲庵’이라 하였으며, 문집 2권 4편篇이 세상에 전한다.
부암대사전浮庵大師傳
스님의 법명은 운묵雲默이고 자는 무기無寄이며 호는 부암浮庵이다. 만덕산 백련사로 출가하여 불인 정조佛印靜照103) 국사에게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국사에게 도道와 글의 이치를 배운 뒤 과거(승과)에 응시하여 최상급인 상상과上上科에 합격했다. 굴암窟庵의 주지 자리를 얻었으나 이내 버리고 금강산과 오대산 등지를 두루 돌아다니다가 시흥산始興山에 이르러 한 암자를 지었다. 여기에서 『연경蓮經(법화경)』을 독송하고 아미타불을 염念하면서 불화를 그리고 경전을 베끼는 일로 소일하면서 20년을 지냈다.
부처님의 경전과 역대 조사들의 글을 찾아내어 그중의 중요한 사항들을 가려 뽑아 『석가여래행적송釋迦如來行蹟頌』을 지으니 모두 776구이다. 그것을 본문으로 하여 각 구절 밑에 주석을 붙여 만든 두 권의 책이 오늘날 세상에 유통되고 있다.
원나라 문종文宗 천력天歷 원년 무진(고려 충숙왕 15, 1328) 섣달 16일 경오에 간행하여 세상에 유포시켰다.
나옹왕사전懶翁王師傳
스님의 법명은 혜근慧勤(惠勤)이고 처음 법명은 원혜元慧이다. 호는 나옹懶翁이고 머물던 집의 당호堂號는 강월헌江月軒이다. 성은 아牙씨이고 영해寧海(경북 영덕군)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선관서饍官暑 영令이라는 벼슬을 지낸 아서구牙瑞具이고 어머니는 정鄭씨이다.
어머니의 꿈에 황금빛 새매 한 마리가 날아와 머리를 쪼며 알을 떨어뜨렸는데,

010_1004_c_01L孫浮庵無寄大禪師住燕谷住輪山北
010_1004_c_02L本朝丁洌水作序文作贊塔曰杲
010_1004_c_03L文集二卷四篇行于世

010_1004_c_04L

010_1004_c_05L浮庵大師傳

010_1004_c_06L
師名雲默字無寄號浮庵出家於萬
010_1004_c_07L德山白蓮社剃染於佛印靜照國師
010_1004_c_08L道文義赴選席中上上科得窟庵住
010_1004_c_09L持之位遊歷金剛五臺到始興山
010_1004_c_10L一庵誦蓮經念彌陀畵佛書經爲日
010_1004_c_11L用者垂二十年矣搜尋佛典祖文7) [77]
010_1004_c_12L述釋迦行蹟頌凡七百七十六句仍以
010_1004_c_13L本文注于句下書成二卷現行於世
010_1004_c_14L元文宗天歷元年戊辰臘月旣望庚午
010_1004_c_15L刊行流布

010_1004_c_16L

010_1004_c_17L懶翁王師傳

010_1004_c_18L
師名8) [78] 初名元*慧號懶翁室曰江
010_1004_c_19L月軒姓牙氏寧海人也父饍官署令
010_1004_c_20L瑞具母鄭氏母夢金9) [79] 啄頭墮
010_1004_c_21L「惠湛」甲本正誤表作「慧諶」次同「上」下
010_1004_c_22L甲本正誤表有「都」
「聞」下甲本正誤表有
010_1004_c_23L「道」
「盡」甲本正誤表作「畫」「幾乎」甲本
010_1004_c_24L正誤表曰衍字
「檐」甲本正誤表作「擔」
010_1004_c_25L「選」與「撰」通
「慧」甲本正誤表作「惠」次
010_1004_c_26L
「阜」甲本正誤表作「隼」

010_1005_a_01L그 알이 품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회임하여 원元나라 인종仁宗 연우延祐 7년 경신(고려 충숙왕 7, 1320) 정월 15일에 나옹을 낳았다. 아이는 골상骨相이 평상인과 달랐는데 아이가 이미 장성하자 근기와 정신이 영특하고 뛰어났다. 나이 스무 살에 처음 맞은 이웃집 친구의 죽음을 보고는 연세 많은 노인에게 물었다.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
모두 다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스님은 마음속으로 애통해하고 슬퍼하다가 마침내 공덕산功德山 묘적암妙寂庵으로 요연了然 선사를 찾아가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요연 선사가 물었다.
“너는 무슨 일로 머리를 깎았는가?”
나옹이 대답하였다.
“저 삼계三界를 멀리 벗어나 중생들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부디 저에게 법을 열어 보여 주시옵소서.”
요연 선사가 말하였다.
“네가 지금 여기에 왔는데 이 무슨 물건인고?”
나옹이 대답하였다.
“말도 할 수 있고 들을 수도 있는 것이 이렇게 왔습니다. 보려고 해도 그 실체를 볼 수가 없고 찾으려고 해도 어떤 물체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닦아 매진해야 할는지 모르겠습니다.”
요연 선사가 말하였다.
“나도 역시 네 경우와 같아서 아직 그걸 알지 못한다. 여기에서 떠나 나보다 나은 스승을 찾아 정진하도록 하라.”
나옹은 곧 하직 인사를 하고 떠나갔다.
순제順帝 지정至正 14년 갑신(충혜왕 5, 1344)에 회암사會巖寺104)에 이르러 조용한 방 한 간을 마련해 기거하면서 밤낮으로 눕지 않고 앉아서 정진에만 전념하였다. 이 무렵 회암사에는 일본의 석옹石翁 화상이 절에 와서 머물고 있었다. 하루는 화상이 법당에서 내려와 책상을 치면서 말하였다.
“대중들은 이 소리를 들었느냐?”
대중들은 아무도 대답을 하는 이가 없었는데 유독 나옹 대사가 게송을 올려 읊었다.

選佛場中坐      부처를 가려 뽑는 도량에 앉아
惺惺着眼看      또렷한 정신으로 눈여겨보니
見聞非他物      보고 듣는 주체가 다른 물건이 아니라
元是舊主人      본래 저 옛날의 주인이더이다

나옹은 4년 동안 열심히 정진을 하다가 중국으로 건너가고 싶어서 정해년(충목왕 3, 1347) 11월에 발걸음을 내디뎌 북쪽을 향해 길을 떠났다. 무자년(1348) 3월 13일 원나라 서울 연경燕京의 법원사法源寺에 도착하여 그 절에 머물고 있던 인도 스님 지공指空 화상을 처음으로 참배하였다.
지공 대사가 말하였다.
“그대는 어디서 왔는가?”
나옹이 대답하였다.
“고려에서 왔습니다.”
지공이 다시 물었다.
“배로 왔느냐? 육로로 왔느냐?105)
나옹이 대답하였다.
“신통력으로 왔습니다.”
지공이 물었다.
“그러면 여기서 신통을 좀 보여 보라.”
나옹 선사가 앞으로 나아가 손깍지를 끼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자 지공이 말하였다.
“그대가 동해東海를 좇아 왔다 했는데 저 동해 변두리를 모두 보고 왔느냐?”
나옹이 대답하였다.
“만약 보지 못했다면 어떻게 여기에 올 수 있었겠습니까?”
지공이 말했다.
“열두 개의 방자房子를 가지고 왔는가?”
나옹이 대답하였다.
“가지고 왔습니다.”
지공이 물었다.
“누가 그대로 하여금 여기에 오게 했는가?”

010_1005_a_01L1) [80] 入懷中因以有娠元仁宗延祐七
010_1005_a_02L年庚申正月十五日生骨相異常兒旣
010_1005_a_03L機神英邁年至二十見隣友亡
010_1005_a_04L父老曰死何之皆曰不知中心痛悼
010_1005_a_05L遂投功德山妙寂庵了然禪師祝髮
010_1005_a_06L師曰汝爲何事剃髮答曰超出三界
010_1005_a_07L利益衆生請開示師曰2) [81] 此是何
010_1005_a_08L物耶答曰此能言能聽者能來耳
010_1005_a_09L無軆可見欲覔無物可覔未審如
010_1005_a_10L何修進師曰吾亦如汝3) [82] 之知
010_1005_a_11L4) [83] 有餘師於是辭去順帝至正十
010_1005_a_12L四年甲申到檜巖寺宴處一室晝夜
010_1005_a_13L長坐時日本石翁和尙寓茲寺一日
010_1005_a_14L下堂擊床曰5) [84] 聞麽大衆無語
010_1005_a_15L師呈偈曰選佛場中坐惺惺着眼看
010_1005_a_16L見聞非他物元是舊主人勤修四載
010_1005_a_17L欲徃中國丁亥十一月發足向北
010_1005_a_18L子三月十三日至大都法源寺初叅西
010_1005_a_19L天指空和尙空曰汝從甚處來答曰
010_1005_a_20L麗來空曰船來耶6)神通 [85] 來耶答曰
010_1005_a_21L通來空曰現神通看師進前7) [86] 手而
010_1005_a_22L空曰汝從東海來那邊都見來也未
010_1005_a_23L答曰若不見爭得到這裡空曰十二介
010_1005_a_24L房子將來否答曰將得來空曰誰敎儞

010_1005_b_01L
나옹이 대답하였다.
“저 스스로 여기에 왔습니다.”
지공이 물었다.
“무슨 일을 하려고 왔느냐?”
나옹이 대답하였다.
“후세의 사람들을 위해서 왔습니다.”
지공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그를 인정하고 대중들과 함께 수행하게 하였다.
나옹 선사가 하루는 게송을 지어 바쳤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山河大地眼前花    산과 강 그리고 대지는 다 눈앞의 꽃이요
萬像森羅亦復然    삼대처럼 벌려 있는 모든 형상 또한 그러하네
自性方知元淸淨    자성自性이 본래 청정하단 걸 비로소 알았으니
塵塵刹刹法王身    티끌처럼 많고 많은 세계가 바로 법왕法王의 몸인 것을

이 게송을 받아 본 지공이 말했다.
“서천西天(인도)에서 20등급의 인물106)이 나왔고, 동토東土에 72등급의 인물이 나왔는데, 그중에 한 등급을 차지하고 있는 나 지공은 그 속에 전혀 없다.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지공은 없을 것이다. 나는 세상에 출현한 법왕이니 다시 어느 속에 있겠느냐?”
그러자 나옹이 대답하였다.

法王身法王身     법왕의 몸이시여, 법왕의 몸이시여
三天爲主利郡民    삼천三天에 주인 되어 많은 중생 이롭게 하십니다
千劒草提斬佛祖    일천 칼을 뽑아 부처님과 조사祖師를 베니
百陽普遍照諸天    일백 태양이 두루 널리 온 하늘을 비춥니다
吾今識得這消息    제가 지금 저러한 소식을 깨닫고 나니
猶是儂家弄精魂    마치 내 집에서 정혼精魂을 희롱하는 듯합니다
也大奇也大奇     기이하고도 기이한 일입니다
扶桑日月照西天    부상扶桑107)에 해와 달이 서쪽 하늘을 비춥니다

지공이 말했다.
“아버지도 개고 어머니도 개이니 너 또한 개로구나.”
그러자 나옹은 예배하고 물러났다.
그 달에 매화 한 송이가 핀 것을 보고 지공이 게송 한 수를 읊었다.

葉靑花發一樹一    잎 푸른 매화나무 한 그루에 꽃 한 송이 피었으니
十方八面無對一    시방 세계 여덟 방위에 그와 견줄 게 없구나
前事不問後事長    과거 일도 묻지 않았는데 미래 일을 말하니
香氣到地吾帝喜    향기가 이르는 곳에 우리 제왕 기쁨이 넘치겠네

나옹 선사가 화답하였다.

年年此樹雪裡開    해마다 이 매화 눈 속에 피건만
蜂蝶忙忙不知新    벌 나비 너무 바빠 새로 핀 줄 모르더라
今朝一箇花滿枝    오늘 아침 한 개의 꽃이 가지에 가득하니
普天普地一般春    넓고 넓은 천지가 온통 봄이로세

연경 등지를 두루 돌아다니는 동안 나옹의 덕행이 임금에게까지 들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원나라 임금의 뜻을 받들어 연경 광제선사廣濟禪寺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병신년(고려 공민왕 5, 1356) 10월 15일에 개당법회開堂法會를 열었다.
임금이 사신을 보내 금란가사錦襴袈裟와 폐백幣帛을 보냈으며, 태자도 금란가사와 상아象牙로 만든 불자拂子를 보냈다. 나옹은 하사한 금란가사를 입고 향을 뽑아 올려 임금을 위하여 축원하기를 마쳤다.
또다시 향을 뽑아 들고 말하였다.
“이 하나의 판향瓣香으로 서천의 108대 조사 지공 대화상과 평산平山 화상께서 법유法乳를 주신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법좌에 올라 널리 설법하겠습니다.”
원나라 순제 지정至正 17년 정유(공민왕 6, 1357)에

010_1005_b_01L答曰某甲自來空曰爲何事來
010_1005_b_02L爲後人來空然之乃令隨衆師一
010_1005_b_03L作偈呈似云山河大地眼前花萬像
010_1005_b_04L森羅亦復然自性方知元淸淨塵塵刹
010_1005_b_05L刹法王身空曰西天二十等人東土七
010_1005_b_06L十二等人這一等人指空這裡都無
010_1005_b_07L前無人8) [87] 9) [88] 出世法王也再那
010_1005_b_08L10)師有 [89] 答曰法王身法王身三天爲
010_1005_b_09L主利11) [90] 千劒12) [91] 提斬佛祖百陽普
010_1005_b_10L遍照諸天吾今識得這消息猶是儂家
010_1005_b_11L弄精魂也大奇也大奇扶桑日月照西
010_1005_b_12L空曰13)父耶 [92] 也是狗娘也是狗儞亦
010_1005_b_13L是狗師即禮拜而退是月梅花開一萼
010_1005_b_14L空見之作頌曰葉靑花發一樹一十方
010_1005_b_15L八面無對一前事不問後事長香氣到
010_1005_b_16L地吾帝喜師答曰年年此樹雪裡開
010_1005_b_17L蜂蝶忙忙不知新今朝一箇花滿枝
010_1005_b_18L天普地一般春遊歷燕代聞於帝
010_1005_b_19L聖旨住大都廣濟禪寺丙申十月十五
010_1005_b_20L設開堂法會帝遣錦襴袈裟及幣帛
010_1005_b_21L14) [93] 15) [94] 錦襴袈裟象16)手佛 [95] 乃被拈
010_1005_b_22L香祝聖罷又拈香云此一瓣香
010_1005_b_23L爲西天一百八祖指空大和尙平山和尙
010_1005_b_24L用酧法乳之恩陞座普說十七年丁酉

010_1005_c_01L법원사로 돌아가서 지공에게 물었다.
“제자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합니까?”
지공이 대답하였다.
“그대는 그대의 나라로 돌아가서 산이 셋이고 강물이 둘인 사이에 기거하게 되면 저절로 불법이 일어나게 될 것이니라.”
무술년(공민왕 7, 1358) 3월 23일 지공 선사에게 하직 인사를 올리고 고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요양遼陽·평양平壤·동해東海 지역을 두루 지나 오면서 그 지역 사람들의 근기에 맞추어 설법을 하였다.
경자년(공민왕 9, 1360) 가을에 오대산 상두암象頭庵으로 들어가 기거했다. 신축년(공민왕 10, 1361), 왕이 내첨사內詹事(內侍府) 방절方節을 보내 궁중에서 사용하는 말에 태워가지고 도성 안으로 맞아들였다. 10월 15일 나옹이 내삼전內三殿으로 들어가자 임금이 예를 갖추어 올리고 불법의 긴요한 부분을 설해 주기를 간청했다.
나옹의 설법을 다 듣고 나서 임금이 말하였다.
“명성을 듣는 것은 직접 대면하는 것만 못합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만수가사滿繡袈裟와 수정으로 만든 불자를 하사했다. 왕비인 공주(魯國大長公主)도 마노瑪瑙로 만든 불자를 나옹 스님에게 시주하면서 절(神光寺)로 돌아오시라 했다. 11월에 홍건적이 경도京都에까지 쳐들어와 임금이 도성을 버리고 피난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루는 홍건적이 절에 몰려들었다. 나옹은 태연자약하게 그들을 맞아 대하니 적들은 도리어 침향沈香 1편片을 바치고 예배하고 물러갔다.
계묘년(공민왕 12, 1363) 7월에 구월산 금강암金剛庵에 이르니 임금이 내시 김중손金仲孫을 보내 특별히 궁중에서만 쓰는 귀한 향을 하사하였다. 임금은 또 서해도西海道108)의 지휘사指揮使 박희朴曦109)와 안렴사按廉使110) 이보만李寶萬과 해주 목사 김계생金繼生을 보내 나옹 스님에게 그 절에 계속 머물러 있어 달라고 간청하였다.

010_1005_c_01L還到法源寺問指空曰弟子當徃何處
010_1005_c_02L空曰汝還本國擇三山兩水之間居之
010_1005_c_03L則佛法自然興矣戊戌三月二十三日
010_1005_c_04L禮辭指空還於遼陽平壤東海等處
010_1005_c_05L17) [96] 18) [97] 庚子秋入臺山象頭庵居焉
010_1005_c_06L辛丑上遣內詹事方節以內乘馬迎入
010_1005_c_07L城中十月十五日入內三殿備敬已
010_1005_c_08L請說法要上曰聞名不如見面賜滿繡
010_1005_c_09L袈裟水精拂子公主19) [98] 瑪▼(王+甾)拂子施之
010_1005_c_10L還寺十一月紅賊突入京都國家播遷
010_1005_c_11L一日賊輩到寺師對儼然賊以沈香一
010_1005_c_12L片獻之禮拜而退癸卯七月到九月
010_1005_c_13L山金剛庵上遣內侍金仲孫特降內香
010_1005_c_14L又勅西海道指揮使朴曦按廉使李寶
010_1005_c_15L海州牧使金繼生强師復住丙午
010_1005_c_16L「印」甲本正誤表作「卵」「今」下甲本正誤
010_1005_c_17L表有「來」
「來」甲本正誤表作「未」「求」下
010_1005_c_18L甲本正誤表有「之」
「衆」下甲本正誤表有
010_1005_c_19L「還」
「神通」甲本正誤表作「陸」「又」甲本
010_1005_c_20L正誤表作「叉」
「無」下甲本正誤表有「將」
010_1005_c_21L「指」下甲本正誤表有「空」「師有」甲本正
010_1005_c_22L誤表作「有師」
「郡」甲本正誤表作「群」
010_1005_c_23L「草」甲本正誤表作「單」
「父耶」甲本正誤表
010_1005_c_24L作「爺」
「大」甲本正誤表作「太」「亦」下甲
010_1005_c_25L本正誤表有「遣」
「手佛」甲本正誤表作「牙
010_1005_c_26L拂」
「我」甲本正誤表作「機」「化」甲本正
010_1005_c_27L誤表作「法」
「亦」下甲本正誤表有「以」

010_1006_a_01L
병오년(공민왕 15, 1366) 3월에 금강산 정양암正陽庵에 들어갔는데, 정미년(공민왕 16, 1367) 가을에 임금이 교주도交州道(강원도) 안렴사 정량생鄭良生111)에게 명을 내려 나옹에게 청평사淸平寺에 머물러 줄 것을 간청하였다.
홍무洪武(明 太祖의 연호) 경술년(공민왕 19, 1370) 3월에는 원나라 사도司徒 달예達睿가 지공 화상의 영골사리靈骨舍利를 모시고 회암사에 왔다. 3월에 나옹은 지공의 영골에 예를 올리기 위하여 산문을 나섰다. 임금이 최측근 신하 김원부金元冨를 보내 스님을 영접하게 하였다. 나옹은 지공의 영골에 예배를 마치고 나서 성안으로 들어가 광명사廣明寺에서 여름 안거에 들어갔다.
그해 8월 3일 나옹 대사는 궁중에 들어가 재齋를 올렸다. 임금은 측근 신하 안익상安益祥으로 길을 안내하는 보행輔行을 삼아 회암사에 주석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9월에 공부선工夫選을 베풀어 양종兩宗 오교五敎를 널리 모아서 시험을 치게 하고 나옹을 초청하여 주맹主盟(최고 시험관)으로 추대하였다.
16일 시험을 치르는 날 임금은 여러 군君과 양부兩府의 온갖 문무 관료들을 거느리고 직접 시험장에 나와 선禪을 강론하는 여러 덕 높은 스님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자리에는 선사禪師와 강사講師 등 강호의 여러 덕 있는 스님들이 모두 다 모였다. 당시 그 자리에는 설산雪山 국사도 참예하였으므로 나옹은 국존國尊이었던 그를 뵈올 수가 있었다.
신해년(공민왕 20, 1371) 8월 26일 임금이 공부상서工部尙書 장자온張子溫112)을 보내 나옹 스님에게 편지와 도장(印)을 내려 주고 아울러 금란가사와 내외內外 법복法服과 발우 등을 하사하는 한편 ‘왕사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근수본지 중흥조풍 복국우세 보제존자王師大曹溪宗師禪敎都摠攝勤修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普濟尊者’에 봉하였다.
태후太后도 금란가사를 하사하고 말하기를, “송광사는 동방에서 제일가는 도량이다.”라고 하면서 나옹을 송광사에 머물도록 명하고는 내시 이사위李士渭를 보내 보행으로 삼아 28일에 회암사에서 떠나 9월 27일에 송광사에 도착했다.
임자년(공민왕 21, 1372) 가을에 나옹이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송광사는 지공이 말한 산이 셋이 모이고 두 강이 흐르는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회암사로 옮겨가 살겠노라고 간청하였다. 임금은 다시 이사위를 보내 나옹을 회암사로 모시고 오게 하였다. 나옹은 9월 26일 지공의 영골사리를 가져다가 절 북쪽 봉우리에 탑을 세워 봉안했다.
갑인년(1374) 9월 23일 공민왕이 세상을 떠나자 빈전殯殿에 나아가 소참小參을 조정에 올리는 편지와 함께 왕사의 관인官印을 반납했다.
우왕禑王이 즉위하여 다시 주언방周彥邦113)을 보내 궁중에서만 쓰는 향을 내리고 아울러 관인을 보내는 한편

010_1006_a_01L三月入金剛山正陽庵丁未秋上命交
010_1006_a_02L州道按廉使鄭良生請住淸平寺洪武
010_1006_a_03L庚戌三月朝司1) [99] 奉指空靈骨
010_1006_a_04L舍利到檜巖三月師因禮骨出山
010_1006_a_05L遣近臣金元冨迎之禮骨已入城結夏
010_1006_a_06L於廣明寺八月初三日入內齋近臣安
010_1006_a_07L益祥爲2) [100] 請住檜巖寺九月設工
010_1006_a_08L夫選大會兩宗五敎請師主盟十六日
010_1006_a_09L開選席上率諸君兩府文武百僚親幸
010_1006_a_10L臨視禪講諸德3) [101] 衲子悉皆集會
010_1006_a_11L時雪山國師亦赴是會師與國尊相見
010_1006_a_12L辛亥八月二十六日遣工部尙書張子
010_1006_a_13L賚書降印幷賜金襴袈裟內外法服
010_1006_a_14L4) [102] 封爲王師大曺溪宗師禪敎都摠
010_1006_a_15L攝勤修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普濟尊
010_1006_a_16L太后亦獻金襴袈裟謂松廣寺
010_1006_a_17L東方第一道場乃命居之遣內侍李士
010_1006_a_18L爲輔行二十八日發檜岩九月二十
010_1006_a_19L七日到松廣壬子秋偶念指空三山兩
010_1006_a_20L水之記請移錫檜岩上又遣李士渭
010_1006_a_21L迎來檜岩九月二十六日將持空靈骨
010_1006_a_22L舍利安塔于寺之北峯甲寅九月二十
010_1006_a_23L三日上薨詣殯5)殿 [103] 修書還印于朝
010_1006_a_24L今上即位遣內侍周彥邦降內香幷送

010_1006_b_01L그를 다시 왕사로 봉했다.
병진년(우왕 2, 1376) 5월 15일 진시辰時(오전 7시~9시)에 신륵사神勒寺에서 열반에 드니, 세속 나이는 57세이고 법랍은 37년이었다. 사리를 신륵사와 회암사에 각각 봉안하고 시호를 ‘선각禪覺’이라 했다.
탑의 비명은 한산군韓山君 이색李穡114)이 임금의 명을 받들어 지었고, 공신功臣 권중화權仲和115)가 전자篆字로 썼다. 『어록語錄』 2권이 세상에 유통되고, 법을 이은 문인이 48명이나 된다.
무학왕사전無學王師傳
스님의 법명은 자초自超이고 호는 무학無學이며, 속성은 박씨이고 삼기군三岐郡지금의 경남 함안군 삼가三嘉이다.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원나라 진종晉宗 태정泰定 정묘년(충숙왕 14, 1327) 9월 20일에 태어났다. 그가 거처하던 방의 당호堂號는 계월헌溪月軒이다.
「석왕사기釋王寺記」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우리 태조太祖 대왕은 고려 신우辛禑(禑王) 10년 갑자(1384), 즉 명나라 홍무洪武 10년에 금마金馬116)에서 학성鶴城(함경남도 안변군)으로 옮겨와서 살고 있었다. 그는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1만 집의 닭이 일시에 울고, 1천 집에서 다듬이소리가 일제히 울려 왔다. 허름한 집에 들어가 서까래 세 개를 지고 나왔으며, 꽃이 떨어지고 거울이 땅에 떨어져 깨어졌다.
꿈이 하도 이상해서 이웃에 살고 있던 노파를 찾아가서 아까 꾼 꿈 이야기를 하고 꿈 해몽을 부탁했더니 노파가 말하였다.
‘여인이 어떻게 그런 걸 알겠습니까? 여기에서 한 40리쯤 가면 설봉산雪峰山에 작은 토굴이 있는데 거기에 기이한 스님이 살고 있습니다. 그 스님은 솔잎을 먹고 갈포葛布로 만든 옷을 입고 삽니다. 세속 사람들은 그 스님의 얼굴이 까무잡잡하다 하여 흑두타黑頭陀라고 부른답니다. 그 스님은 그 토굴 안에서 좌선을 하고 앉아 꼼짝도 하지 않은 지가 지금 9년째라고 합니다. 그러니 거기에 가셔서 물어보십시오.’
태조는 곧 삼베옷을 입고 지팡이 하나를 짚고 노파가 말해 준 토굴을 찾아갔다. 그러고는 예를 올리고 나아가 여쭈었다.
‘작은 초막을 짓고 사는 속인이 의심스러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찾아왔으니 부디 자비를 드리우사 대답하여 주십시오.’
대사가 말하였다.
‘무슨 일입니까?’
태조가 말했다.
‘밤에 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1만 집의 닭이 일시에 울고, 1천 집에서 다듬이소리가 일제히 울려 왔습니다. 어느 허름한 집에서 서까래 세 개를 지고 나왔으며 꽃이 떨어지고 거울이 땅에 떨어져 깨어졌습니다. 어떤 징험이 있는 것입니까?’
대사가 말하였다.
‘모두 다 국왕이 될 꿈입니다. 1만 집의 닭이 일시에 운 것은 높고 귀한 자리(高貴位)117)에 대하여 경하敬賀한 것이고, 1천 집에서 다듬이소리가 일제히 울린 것은 임금을 모실 사람이 가까이 이르렀음을 알린 것입니다. 꽃이 지면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고 거울이 떨어지면 소리가 나는 법입니다.

010_1006_b_01L印寶再封爲師丙辰五月十五日辰時
010_1006_b_02L寂然而逝6)新勤 [104] 寺也安舍利于神
010_1006_b_03L7) [105] 檜巖壽五十七臘三十七謚曰
010_1006_b_04L塔曰韓山君李穡奉8) [106] 碑銘功臣
010_1006_b_05L權仲和奉敎書篆語錄二卷行于世
010_1006_b_06L門人四十八

010_1006_b_07L

010_1006_b_08L無學王師傳

010_1006_b_09L
師名自超號無學姓朴氏三岐郡今之
三嘉

010_1006_b_10L人也元泰定帝泰定丁卯後九月二十
010_1006_b_11L日生室曰溪月軒釋王寺記云我太
010_1006_b_12L祖大王麗辛禑十年甲子即明洪武十
010_1006_b_13L年也自金馬來寓鶴城而居夢萬鷄
010_1006_b_14L一時鳴千砧一時鳴負三椽落花落
010_1006_b_15L旁有老婆向說夢兆婆曰女人安
010_1006_b_16L去此四十里有雪峰山土窟有異
010_1006_b_17L食松被葛俗穪黑頭陀坐不動出
010_1006_b_18L今九年矣可徃彼問祖即布衣一杖
010_1006_b_19L尋到土窟禮而進曰草屋塵人欲決
010_1006_b_20L疑事願垂慈答師曰何事祖曰夜夢
010_1006_b_21L萬鷄一時鳴千砧一時鳴負三椽而出
010_1006_b_22L落花落鏡有何驗也師曰皆作君王之
010_1006_b_23L夢也萬家鷄聲者賀高貴位也千家
010_1006_b_24L砧聲者報御近當也落花有實也

010_1006_c_01L또 서까래 세 개를 사람이 짊어지면 왕王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대사는 다시 말했다.
‘오늘 일은 절대 조심하고 입 밖에 내어서는 안 됩니다. 이곳에 절 하나를 세우고 그 이름을 석왕사釋王寺118)라고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서둘러 지으려고 하지 말고 3년을 한정하여 500 성현을 시설하고 재齋를 올리면 틀림없이 왕업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거듭 당부하거니와 부디 십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태조는 자리에서 물러나 예를 올리고 말하였다.
‘삼가 가르침을 받자옵니다. 부디 큰일을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대사가 대답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성계는 1년 안에 절을 짓고 3년 동안 재를 올렸는데 아무도 그가 왜 그렇게 하는지 그 이유를 몰랐다.
홍무洪武 무진년(1388) 신우辛禑 14년에 태조로 하여금 도통사都統使로 삼아 요동을 공략하게 했는데, 4월 초에 태조는 의주에서 군대를 거느리고 5월 중에 압록강을 건너 위화도에 이르렀으나 대의大義를 내세워서 회군했다.
홍무 25년 임신(공양왕 4, 1392) 7월 16일에 송경松京(개성) 수창궁壽昌宮에서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고는 곧바로 설봉산 토굴에 거주하던 스님을 찾게 하여 왕사王師로 봉하니 이 스님이 바로 무학無學이다. 그때 무학은 토굴에서 나와 태조를 위해 그 조상들의 묘를 옮기고 나라의 새로운 도읍지를 정하도록 했다.”
『청야만집靑野漫集』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태조가 개국 후에 교지를 내려 무학 대사를 찾으라 하였다. 3도의 방백方伯들은 일시에 같은 길로 무학을 찾아 나섰다. 곡산谷山(황해도 고을)에 이르러 고을 사람들로부터 ‘고달산高達山에 자그마한 암자가 있는데 어떤 고승이 혼자 지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3도 방백들은 추종하던 사람들을 버리고 그 마을로 들어갔다. 소나무 가지에 세 방백의 인수印綬를 걸어 놓고 짚신만 신고 걸어서 갔다. 초암草庵에 이르니 어떤 스님 혼자서 쇠코잠방이(犢鼻褌)를 입고 손수 채마밭의 풀을 매고 있었다. 세 방백이 다가가서 물었다.

010_1006_c_01L鏡有聲也負三椽者乃王字也師曰
010_1006_c_02L今日事愼不出口此地建一刹名釋王
010_1006_c_03L寺爲佳不速成限三年設五百聖齋
010_1006_c_04L則必助王9) [107] 十分謹之祖退席而
010_1006_c_05L禮曰敬受敎矣願助大事師曰唯唯
010_1006_c_06L祖一年內建寺三年內設齋畢人不知
010_1006_c_07L所以也至洪武戊辰辛禑十四年使太
010_1006_c_08L爲都統使攻遼東四月初祖統軍于
010_1006_c_09L義州五月中渡鴨綠江及至威化島
010_1006_c_10L祖擧義回軍也至洪武二十五年壬申
010_1006_c_11L七月十六日即位于松京壽昌宮即尋
010_1006_c_12L雪峰土窟僧封王師此無學也於是
010_1006_c_13L無學出爲太祖遷先墓定王都靑野
010_1006_c_14L漫集云太祖開國後下敎求無學
010_1006_c_15L方伯一時共路索之至谷山聞高達
010_1006_c_16L有一屋數椽只有高僧獨居三方
010_1006_c_17L捨其騶從入其洞掛三印於松枝
010_1006_c_18L芒鞋走步而行抵其草庵有一僧
010_1006_c_19L犢鼻褌手鉏菜田三方伯就前問曰
010_1006_c_20L「徒」下甲本正誤表有「達」「補」甲本正誤
010_1006_c_21L表作「輔」
「潮」甲本正誤表作「湖」「㭗」甲
010_1006_c_22L本正誤表作「盂」
「殿」下甲本正誤表有「小」
010_1006_c_23L「新勤」甲本正誤表作「神勒」「勤」甲本正
010_1006_c_24L誤表作「勒」
「詔」下甲本正誤表有「撰」
010_1006_c_25L「萊」甲本正誤表作「業」

010_1007_a_01L
‘이 암자는 누가 지었습니까?’
대사가 대답하였다.
‘이 늙은 중이 손수 지었습니다.’
다시 물었다.
‘무슨 소견이 있으시기에 여기에 절을 지어 살고 계십니까?’
대사가 대답하였다.
‘저 삼인봉三印峯을 보고 여기에 정했습니다.’
다시 물었다.
‘무슨 까닭에 삼인봉이라고 부릅니까?’
대사가 대답하였다.
‘저 앞에 보이는 세 봉우리가 곧 삼인의 형국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곳에 절을 지으면 세 도의 방백이 고을 안에 있는 나뭇가지에 관인官印을 끌러서 걸어 놓을 것이니 이것이 바로 그 응험입니다.’
세 도의 방백들은 앞으로 달려 나가면서 서로 손을 잡고 말하였다.
‘이 분이 틀림없는 무학 대사일 것이다.’
그들은 무학 대사와 같이 돌아와 장계狀啓를 올렸다. 태조가 매우 기뻐하면서 스승의 예를 갖추어 섬겼다. 그러고는 잇달아 도읍을 정할 장소를 물었다. 무학 대사가 한양에 이르러 말하였다.
‘인왕산을 진산鎭山으로 삼고 백악白岳과 남산南山으로 좌청룡 우백호를 삼아 도읍하십시오.’
그러자 정도전鄭道傳119)이 힐난하며 말하였다.
‘예부터 제왕은 모두 남쪽을 향하고 앉아서 나라를 다스렸지 동쪽으로 향하고 앉아서 나라를 다스렸다는 말을 아직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무학 대사가 말하였다.
‘내 말을 따르지 않으면 200년 뒤에 틀림없이 내 말을 생각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신라 시대 의상 대사가 지었다는 「산수기山水記」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한양에 도읍을 정하려고 하는 이가 만약 스님의 말을 듣고 그대로 따르면 그나마 나라를 길게 보존할 수 있는 희망이 있겠지만, 정鄭씨 성을 가진 사람이 나와서 시비를 걸면 5대도 채 지나지 않아 임금의 자리를 뺏고 빼앗기는 찬탈의 재앙이 일어날 것이요, 겨우 200년쯤 지나면 판탕板蕩120)의 어려움이 이르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이른바 ‘스님’이란 무학 대사를 가리킨 말이고,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이란 정도전을 지칭한 것이다. 의상이 800년 뒤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안 것이 마치 부절符節처럼 꼭 들어맞았으니 어찌 거룩하신 스님이라 하지 않겠는가?
『팔역지八域志』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태조가 승려인 무학 대사로 하여금 도읍할 자리를 정하게 하자 무학은 백운대白雲臺(북한산의 백운대)로부터 산맥을 찾아서 만경萬景에 이르고 그곳에서 서남쪽으로 가다가 비봉碑峰에 도달하니, 큰 돌 하나가 보였는데 그 돌에 큰 글씨로 ‘무학은 산맥을 잘못 찾아 여기에 이르게 될 것이다(有無學誤尋到)’라는 여섯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 여섯 글자는 신라 말의 도선道詵 국사가 세워 놓은 것이었다. 무학 대사는 마침내 길을 바꾸어 다시 만경으로부터 정남쪽으로 가다가 곧바로 백악산白岳山 아래에 이르렀다. 거기에 세 갈래의 산맥이 모여 하나의 들을 이룩하고 있는 것을 보고 드디어 궁궐터를 결정하였다. 그곳은 곧 고려 시대에 왕의 기운을 억누르기 위해서 오얏나무를 심어 놓은 곳이었다.121) 바깥 성곽을 쌓으려고 하면서 주위의 멀고 가까움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데, 어느 날 밤에 천하에 큰 눈이 내려 마치

010_1007_a_01L此庵誰所創也曰老僧手搆之何所見
010_1007_a_02L而卜居耶曰爲彼三印峯也曰何以謂
010_1007_a_03L之三印峰曰當前三峯是謂三印
010_1007_a_04L築室于此當有三道方伯掛印於洞中
010_1007_a_05L樹上是其應也三方伯躍進而執其手
010_1007_a_06L此必無學也與同歸而狀聞太祖
010_1007_a_07L大喜事以師禮仍問定都之地無學
010_1007_a_08L乃至漢陽曰以仁王山作鎭而白岳南
010_1007_a_09L爲左右龍虎鄭道傳難之曰自古
010_1007_a_10L帝王皆南面而治未聞東向無學曰
010_1007_a_11L不從吾言垂二百年當思吾言新羅
010_1007_a_12L義湘大師山水記云擇都漢陽者
010_1007_a_13L1)請請 [108] 信僧言則稍有延存之望若鄭姓
010_1007_a_14L出而是非則不過五世篡奪之禍作
010_1007_a_15L歲纔二百板蕩之難至所謂僧指無學
010_1007_a_16L鄭姓云指道傳也義湘預知八百年之
010_1007_a_17L若合符契豈非聖僧耶八域志云
010_1007_a_18L太祖使僧無學定都邑之地無學自白
010_1007_a_19L雲臺尋脉到萬景西南行至碑峰
010_1007_a_20L一石大刻有無學誤尋到此六字即道
010_1007_a_21L詵所立也無學遂改路從萬景正南行
010_1007_a_22L直到白岳2) [109] 見三脈合爲一坪
010_1007_a_23L定宮城之址即麗時種李處也欲築外
010_1007_a_24L未定周圍遠近一夜天下大雪

010_1007_b_01L단단한 성처럼 바깥쪽은 쌓이고 안쪽은 깎여 성의 형상을 이루었다. 태조가 명을 내려 그 눈 쌓인 곳을 따라 성곽을 쌓게 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성곽이다.”
명나라 태조 홍무 38년, 우리 조선 태조 14년 을유(태종 5, 1405) 9월 11일 적멸을 보였으니 세속 나이는 79세였다.
정해년(1407)에 스님의 영골靈骨을 회암사檜岩寺에 모셨으며, 경인년(1410)에 탑명塔銘을 짓고 지공指空·나옹懶翁·무학 세 존자의 원우院宇를 석왕사에 세우게 하고 편액을 내려 ‘석왕사釋王祠’라 했다.
이곳 석왕사에는 태조·숙종肅宗·영조(英宗) 등 3조朝의 어필御筆이 있고, 또 숙종·영조·정조가 지은 기문記文이 남아 있다. 시호를 추증하여 묘엄존자妙嚴尊者라 했으며, 정조께서 스님의 비명碑銘을 지었다.

010_1007_b_01L城固而外積內削太祖命從雪立城
010_1007_b_02L今城形也明太祖洪武三十八年我太
010_1007_b_03L祖十四年乙酉九月十一日示寂壽七
010_1007_b_04L十九丁亥藏靈骨于檜岩寺庚寅作塔
010_1007_b_05L建指空懶翁無學三尊者院宇于釋
010_1007_b_06L王寺額曰釋王祠祠有太祖肅宗英宗
010_1007_b_07L3) [110] 三朝御筆又有肅英4)王三記贈謚
010_1007_b_08L妙嚴尊者正廟撰碑銘

010_1007_b_09L
東師列傳第一

010_1007_b_10L「請」甲本正誤表作「聽」「山」作「上」{甲}
010_1007_b_11L「宗」甲本正誤表曰衍字「王」甲本正誤表
010_1007_b_12L作「正」

010_1007_c_01L
  1. 1)좀 더 자세한 기록은 『三國遺事』 「阿道基羅」 조항을 참조.
  2. 2)도첩度牒:도패度牌라고도 한다. 예조禮曹에서 발급한 승려의 신분증명서로서, 승려가 죽거나 환속還俗하게 되면 국가에 반납하게 되어 있었다. 이 제도는 납세의무를 피하거나 장정이 함부로 승려가 되는 것을 막아 군정軍丁을 비롯한 인적 자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실시하였다. 당나라에서 전래되어 고려 시대부터 시행하였으며, 조선 시대에는 억불책抑佛策으로 더욱 강화하였다. 고려 시대에는 포布 50필을 바치면 발급하여 주었으며, 조선 시대에는 송경시험誦經試驗에 합격한 자는 정포正布 20필, 양반 자제는 100필, 서인庶人은 150필, 천인은 200필을 바쳐야 발급해 주었다.
  3. 3)현창玄暢 : 성은 조趙씨이며 중국 금성金城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양주凉州 현고玄高 법사에게 가서 출가하여 그의 제자가 되었다. 영명永明 2년(484) 11월 16일 영근사靈根寺에서 생을 마쳤다.
  4. 4)모례毛禮 : 경상북도 일선군一善郡(구미시) 출생. 눌지왕 때 고구려의 승려 묵호자墨胡子가 불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신라에 들어갔으나 탄압이 심하였으므로 집 안에 굴을 파고 그를 숨겨 주었다. 그 후 소지왕 때 승려 아도阿道(我道)와 시자侍者 3인을 집에 머물게 하고 불교 신자가 되었다. 누이 사씨史氏도 아도의 전교로 승려가 되어 영흥사永興寺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5. 5)14년이 옳다. 이차돈異次頓이 순교한 서기 527년에 해당된다.
  6. 6)탁발씨拓拔氏 : 북위北魏 또는 후위後魏 왕조의 성씨. 선비족의 일파.
  7. 7)송나라 문제 17년의 일이다. 태원泰元은 연호를 말하는 듯한데 애초에 이런 연호는 없다.
  8. 8)내마奈麻 : 나말奈末이라고도 한다. 17관등 중 11번째의 계급으로, 32년(유리왕 9)에 두었다는 설도 있으나, 520년(법흥왕 7) 율령 제정 때 둔 것이 더 확실하다. 중나마重奈麻에서 칠중나마七重奈麻까지 7계급이 있다.
  9. 9)‘이미 입적하고 난 다음’이라고만 하고 입적 연대를 밝히지 않았는데 경주 고선사高仙寺 〈서당화상비〉에는 “주나라 수공垂拱(측천무후의 연호) 2년(686) 3월 30일 혈사穴寺에서 생애를 마치니 나이 70세였다.”라고 하였다.
  10. 10)척판대擲板臺 : 경남 양산군 장안면 장안리에 있는 것으로 원효 대사가 당나라 승려를 구제한 전설이 간직되어 있는 척판암이 있다.
  11. 11)『宋高僧傳』 「의상대사전기」에는 박씨로 되어 있다.
  12. 12)『삼국유사』에는 “변방 병사(戍邏)들에게 간첩으로 오인 받아 갇힌 지 수십 일 만에 간신히 석방되어 돌아왔다. 이 사실은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義湘本傳」과 원효 대사의 행장에 나온다.(邊戍邏之爲諜者。 囚閉者。 累旬。 僅免而還事在崔侯本傳。 及曉師行狀等。)”라고 하였다.
  13. 13)영휘永徽 : 당나라 고종이 사용한 연호로서 650년~655년 사이를 말한다.
  14. 14)지엄智儼 : 당나라 때의 스님. 600~668. 화엄종 2조. 호는 운화雲華 또는 지상존자至相尊者이고, 속성은 조趙씨이며, 천수天水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12세에 두순杜順의 문하에 들어가고, 14세에 출가하였다. 법상法常에게 『攝大乘論』을 배우고, 법림法琳에게 가서 연구에 전력하였다. 지정智正에게 『화엄경』을 배우다가 별교일승別敎一乘의 깊은 뜻을 깨우쳤다. 지정의 뒤를 이어 종남산 지상사에 있으면서 화엄종을 드날렸기 때문에 지상 대사至相大師라 불린다.
  15. 15)『雜華經』 : 『화엄경』의 다른 이름.
  16. 16)법장法藏 : 현수賢首. 당나라 승려. 643~712. 화엄종 제3조. 조상은 강거康居 사람이며, 조부 때 중국 장안長安에 왔다. 호는 향상香象, 이름은 법장, 속성은 강康씨. 17세에 태백산에 들어가 수년 동안 경론을 연구하였다. 다시 낙양 운화사에서 지엄에게 『화엄경』을 들었다. 28세에 칙명으로 출가하여 여러 번 『화엄경』을 강하였으며, 53세 때에 인도 스님 실차난타實叉難陀가 우전국에서 『화엄경』 범본梵本을 가지고 와서 번역할 때 그 필수筆受를 맡아 5년 만에 마치니, 이것이 『팔십화엄경』이다. 699년 10월 측천무후의 청으로 불수기사에서 새로 번역된 『화엄경』을 강하여 현수라는 호를 받고, 이로부터 무후의 신임이 두터웠다. 책을 지어 화엄의 교리를 크게 밝히고, 화엄종의 조직적 체계를 이루어 놓았다. 당 선천先天 1년 11월 장안 대천복사에서 70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저서로는 『華嚴經探玄記』 20권·『華嚴五敎章』 3권·『華嚴旨歸』·『遊心法界記』·『金獅子章』·『妄盡還源觀』·『起信論義記』 등이 있다.
  17. 17)10개 사찰은 공산公山 미리사美理寺·지리산 화엄사華嚴寺·북악北岳 부석사浮石寺·가야산 해인사海印寺·웅주熊州 보원사普願寺·계룡산 갑사岬寺·삭주朔州 화산사華山寺·금정산金井山 범어사梵魚寺·비슬산琵瑟山 옥천사玉泉寺·모산母山 국신사國神寺 등이다.
  18. 18)소판蘇判 : 잡찬迊飡. 신라의 17관계官階 중 제3등의 관계로 진골만이 받을 수 있었다.
  19. 19)『삼국유사』에는 영광寧光이 원영元寧으로 되어 있다.
  20. 20)황룡사黃龍寺 :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었던 절. 황룡사皇龍寺와 같다.
  21. 21)통훈대부通訓大夫 : 조선 때 문관의 정3품 당하관의 관계.
  22. 22)행사헌부行司憲府 : 행行은 고려·조선 시대에, 품계와 관직이 상응하지 아니하는 벼슬아치를 구별하여 붙이던 칭호. 관직이 품계보다 낮은 경우에는 관직명 앞에 행行을, 그 반대의 경우에는 수守를 붙였다.
  23. 23)지평持平 : 조선 때 사헌부에 소속된 정5품 관직.
  24. 24)이 비명의 원문에는 “휴정이 탄식해 말하기를 ‘자장은 신인神人이다. 그 처음 봉안한 것은 닫혀 있지 않음이 없었는데 끝내는 드러남을 면하지 못하였다. 대개 비장한 것은 나한테 있는데 나한테 있지 않은 것은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하였다.”라는 내용이 더 있는데 여기에서는 빠져 있어 말이 잘 이어지지 않는다.
  25. 25)치악산雉岳山 : 강원도 원주에 있는 산.
  26. 26)비슬산毘瑟山 : 경상북도 달성군에 있는 산.
  27. 27)아미녀阿彌女 : 선여인善女人과 같은 의미이다.
  28. 28)화성化城 : 법화 7유의 하나. 여러 사람이 보배 있는 곳을 찾아가다가 그 길이 험악하여 사람들이 피로해 하므로, 그때에 길잡이가 꾀를 내어 신통력으로 임시로 큰 성을 나타내서 여기가 보배 있는 곳이라 하니, 모든 사람들은 대단히 기뻐하여 이 변화하여 만든 성(化城)에서 쉬었다. 길잡이는 여러 사람의 피로가 회복된 것을 보고는 화성을 없애 버리고, 다시 보배 있는 곳에 이르게 하였다 한다. 화성은 방편교의 깨달음에, 보배 있는 곳은 진실교의 깨달음에 비유한 것으로 『법화경』 제3권에 나온다.
  29. 29)청익請益 : 이 말은 『논어』 「問政」에 나오는 말인데, 가르침을 청한다는 말로, 제자가 되기를 간청하는 말로 쓰인다.
  30. 30)옥천사玉泉寺 : 지금의 쌍계사雙溪寺를 말한다.
  31. 31)위의 여섯 가지 기이함과 여섯 가지 사람을 놀라게 한 열두 가지 내용은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32. 32)여만如滿 : 마조馬祖의 사법 제자이고 백낙천白樂天의 도우道友이다. 그는 “이와 같은 신라 사람은 드물었다.”고 하고 이어 “뒷날 중국의 선이 쇠락하면, 동이東夷 사람에게 물어야겠구나.(他日中國失禪。 將問之東夷耶。)”라고 하였다.
  33. 33)최치원이 지은 「大朗慧和尙塔碑銘」에 자세한 행장이 전하고 있다.
  34. 34)개사開士 : 중생의 어두운 눈을 여는 사람. 바른 길을 열어 중생을 인도하는 유능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특히 보살을 일컫는 말. 대승의 수행자. 고승의 존칭.
  35. 35)육륜회六輪會 : 고려 시대에 널리 행해졌던 불교 점찰법회占察法會의 하나이다. 점찰은 예언의 법으로 지장보살이 나무쪽을 던져 길흉과 선악을 점치는 법과 참회하는 법으로 이루어진 『占察經』이 근원이다. 『점찰경』을 독송하는 밀교적 경향이 강한 법회가 점찰법회이며,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시대 승려 원광圓光이 점찰보를 만들고 처음 법회를 열었다. 육륜은 육도윤회六道輪迴를 가리키는 말로 생명이 있는 것은 여섯 가지의 세상에 번갈아 태어나고 죽어간다는 사상이다. 육륜회를 하는 방법은 4면으로 된 윷 여섯 개를 사용하여 세 번씩 던진 후 매번 나온 숫자를 합쳐 『점찰경』에 적혀 있는 113가지 결과로 괘 풀이를 얻는 식으로 진행된다.
  36. 36)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 조선 시대 관계官階의 최고관으로, 정1품의 종친宗親·의빈儀賓과 문무신文武臣에게 주는 벼슬이다. 신라 관직에는 없는 것인데 그렇게 표기한 것은 그와 같은 직책이었거나 아니면 잘못 표기한 것으로 생각된다.
  37. 37)웅수사熊壽寺 : 『삼국유사』에는 장수사長壽寺로 되어 있다.
  38. 38)낭공 대사에 대한 기록은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太子寺郎空大師白月栖雲塔碑’에 자세하게 나타나 있다. 이 전기와 차이점이 좀 있으니, 낭공 대사가 본국으로 돌아온 해를 ‘중화 5년’이라 했는데 탑비에는 ‘중화 4년’으로 되어 있으며, 입적 연대도 ‘문덕文德 3년’이 아니라 대순大順 1년(진성여왕 4, 890)이며, 탑비에는 진성여왕 8년(894)으로 되어 있다.
  39. 39)연대의 오류가 아닌가 생각된다. 중화中和라는 연호는 4년에서 끝난다. 그렇다면 여기서 중화 5년이라고 한 것은 아마도 광계光啓(당 희종의 연호) 1년이라 해야 옳을 듯하다.
  40. 40)범일 국사의 입적 연대도 당나라 희종僖宗 문덕文德 3년이 아니라 당 소종昭宗 대순大順 1년(진성여왕 4년, 890)이다. 다른 기록에는 894년(진성여왕 8년)으로 되어 있는 데도 있다.
  41. 41)수守 : 고려·조선 시대에 품계와 관직이 상응하지 아니하는 벼슬아치를 구별하여 붙이던 칭호. 관직이 품계보다 높은 경우에는 관직명 앞에 수守를, 그 반대의 경우에는 행行을 붙였다.
  42. 42)최인연崔仁渷 : 신라 경문왕景文王 8년(868)에 태어나 고려 혜종惠宗 7년에 세상을 떠난 당대의 학자이며 서예가이다. 신라가 망한 뒤 이름을 고쳐 최언위崔彦撝라고 하였으며, 최치원崔致遠·최승우崔承祐와 함께 ‘신라 삼최三崔’로 불렸다.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의 글씨를 썼고, 장효대와 ‘보인탑비’의 비문을 지었다.
  43. 43)이황李况 : 어떤 데는 이항李沆으로 되어 있다.
  44. 44)낭주朗州 : 전라남도 영암군의 옛 이름.
  45. 45)왕륭王隆 : ?~897. 부인은 한씨韓氏. 개성 송악산 남쪽 기슭에서 살았는데 궁예弓裔가 군왕을 자칭하고 일어섰을 때 송악군의 사찬沙粲으로서 군졸을 이끌고 궁예의 휘하에 들어갔다. 궁예는 그를 금성 태수金城太守로 임명하였는데, 그는 송악에 발어참성勃禦塹城을 수축하고 아들 왕건에게 성주城主를 맡겨 달라고 요청하자 왕이 그 말대로 따랐다. 왕건이 고려 태조가 되자 세조위무대왕世祖威武大王으로 추존되었다.
  46. 46)효공왕孝恭王 : 신라의 제52대 왕. 재위 897∼912. 정강왕定康王의 서자. 어머니는 의명태후義明太后 김씨. 비는 이찬伊飡 우겸又謙의 딸 김씨. 907년 견훤에게 일선군一善郡 이남의 10여 성을 빼앗기고도 환락의 세월을 보냄으로써 후삼국을 탄생케 하였다.
  47. 47)도갑사道岬寺 : 전남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월출산에 있는 절.
  48. 48)이경석李景奭 : 조선 인조 때의 문신. 1595~1671. 자는 상보尙輔. 호는 백헌白軒·쌍계雙溪. 병자호란 때 부제학으로 삼전도 한비의 비문을 쓰고, 척화신으로 심양瀋陽에 끌려갔다가 돌아왔다. 영의정을 지냈고, 글씨와 문장에 뛰어났다. 저서로 『백헌집』이 있다.
  49. 49)최유청崔惟淸 : 고려 시대의 문신. 1095~1174.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으나 인종 초 이자겸의 간계로 파직당했다. 이후 다시 돌아와 1132년 진주사가 되어 송나라에 다녀왔으며, 1142년에는 간의대부로서 금나라에 가 책명을 사하고 돌아와 호부시랑이 되었다. 처남들이 참소를 입은 사건에 연루되어 좌천되었다가 다시 중서시랑평장사에 올랐으며, 1172년에 이르러 치사致仕했다.
  50. 50)월유산月遊山 : 지리산의 다른 이름이다. 혹자들은 영암 월출산과 혼동하는 경우가 있으나 월출산의 옛 이름은 월생산月生山이었다.
  51. 51)밀인密印 : 인계印契. 부처님과 보살에게는 각기 본원本願이 있고, 그 본원을 표치하기 위하여 두 손과 열 손가락으로써 여러 가지 모양을 짓는다. 이것이 본원의 인상印象이며, 인계印契이므로 인印이라 하고 그 이치는 비밀하고 아주 깊은 것이므로 밀密이라 한다. 선종에서는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법을 전하는 것을 말한다.
  52. 52)동리산桐裏山 : 전라남도 곡성군과 순천시에 걸쳐 있는 산. 대안사 광자대사비(보물 제275호)와 대안사 광자대사탑(보물 제274호)이 있다. 산봉우리가 봉황의 머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봉두산鳳頭山이라고도 한다. 산기슭에는 태안사泰安寺가 자리 잡고 있는데, 대안사大安寺라고도 한다. 일주문(전남유형문화재 83)의 현판에는 ‘동리산태안사棟裏山泰安寺’라고 되어 있다. 태안사를 둘러싼 산세가 봉황이 즐겨 앉는 오동나무의 줄기 속처럼 아늑하다고 해서 동리산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태안사는 신라 경덕왕 때 창건되었다.
  53. 53)헌강대왕憲康大王 : 신라의 제49대 왕. 재위 875∼886. 경문왕·문의왕후文懿王后의 아들. 비는 의명부인懿明夫人. 즉위하자 문치에 힘썼으며, 876년 황룡사에 백고좌百高座를 베풀어 불경을 강講하게 하였다. 880년 처용무處容舞가 크게 유행하였으며, 서울의 민가는 모두 기와로 덮고 숯으로 밥을 짓는 등 사치와 환락의 시대가 이룩되었으나, 이때부터 신라는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54. 54)박인범朴仁範 : 신라 후기의 학자. 일찍이 당나라에 건너가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 수례부시랑守禮部侍郞을 지냈다. 시문詩文에도 능하여 898년(효공왕 2) 승려 도선의 비문을 지었으며 『東文選』에 그의 시 10수가 전한다.
  55. 55)이 최유청의 비문과 도갑사에 있는 이경석이 지은 도선 국사 비명은 상당한 차이점을 보인다.
  56. 56)도의道義 : 신라에 처음 선禪을 전한 스님으로 가지산문迦智山門의 시조이다.
  57. 57)태안사太安寺의 혜철慧徹 국사이다.
  58. 58)봉암사 적조탑비를 보면 아마도 혜목산惠目山의 현욱玄昱 선사인 듯하다.
  59. 59)지륵사智勒寺의 ▣문▣聞 선사이다.
  60. 60)쌍계사雙磎寺의 혜소慧炤 국사이다.
  61. 61)신흥사神興寺의 충언忠彦 선사이다.
  62. 62)용암사湧岩寺의 각체覺軆 선사이다.
  63. 63)진구사珍丘寺의 각휴覺休 선사이다.
  64. 64)쌍봉사雙峰寺의 술윤述允 선사이다.
  65. 65)고산사孤山寺의 범일梵日 국사이다.
  66. 66)성주사聖住寺의 무염無染 국사이다.
  67. 67)양평 보리사菩提寺의 광종廣宗 선사이다.
  68. 68)처회處會 : 일명 허회虛會라고도 한다.
  69. 69)장사현長沙縣 :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70. 70)김언경金彦卿 : 신라의 서예가. 보조普照의 제자로 병부시랑兵部侍郞·전중대감殿中大監을 역임하였으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글씨를 잘 써서 당대의 명필로 이름이 났다. 특히 행서行書에 능하여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비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碑의 머리에서 7행까지는 김원金薳이 해서楷書로 썼고, 7행의 선禪 자 이하는 김언경이 행서로 썼다.
  71. 71)승정僧正 : 승단을 이끌어 가면서 스님들의 행동을 바로잡는 승직.
  72. 72)비문에는 160근이 160분分으로 되어 있다.
  73. 73)견뢰堅牢 : 대지를 지키고 이를 견고하게 한다는 땅을 맡은 신. 그 모습은 붉은 살빛에 왼손에는 아름다운 꽃을 심은 화분을 받쳐 들고 있다.
  74. 74)비문에는 22일을 ‘순유이旬有二’라 하여 12일로 표기하고 있다.
  75. 75)대사의 비문에는 23일이 13일로 되어 있다.
  76. 76)대사의 비문에는 ‘우협즉종右脇卽終’이 ‘우협와종右脇臥終’으로 되어 있다. 이는 부처님께서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실 때의 모습에서 유래한 말이다.
  77. 77)현문玄門 : 불교 또는 도교를 말한다.
  78. 78)동가구東家丘 : 유가儒家의 성인으로 추앙받던 공자孔子(이름은 丘)도 그가 살던 마을에서는 도리어 알려지지 않아서 그저 동쪽 마을 어느 집에 사는 공구孔丘라고 불리었다는 고사에서 인용한 말. 즉 도승道乘은 자신을 공자에, 동진을 마을 사람에 비유하여 말한 것이다.
  79. 79)성주사聖住寺 : 충청남도 보령군에 있던 절.
  80. 80)굴산사掘山寺 : 강원도 명주군 구정면 학산리에 있던 절. 847년(문성왕 9) 굴산 조사崛山祖師 범일梵日이 창건하여 전교하던 곳. 국보로 부도(제127호)와 당간지주(제128호)가 있다.
  81. 81)경해鯨海 : 동해東海를 이르는 말이며, 여기에서는 당시 신라 땅을 지칭해서 한 말이다.
  82. 82)목격도존目擊道存 : 눈이 마주치는 데 도가 있다는 뜻.
  83. 83)후량後梁 용덕龍德 원년(신라 景明王 5년, 고려 태조 4년)이다.
  84. 84)태부太傅 : 고려 때 삼사에 속한 정1품 관직.
  85. 85)문명대왕文明大王 : 고려 제3대 왕 정종定宗의 시호이다.
  86. 86)정종 3년은 무신이고, 정종 2년이 정미로서 일치하지 않는다.
  87. 87)절묘한 문장(幼婦之文辭) : 조아비曺娥碑에서 유래된 말이다. 즉 조아는 한漢나라 조우曺盱의 딸로서 14세 때에 그의 아버지가 물을 건너다가 익사溺死하였다. 조아는 17일 동안을 부르짖고 울다가 물에 투신했는데, 5일이 지난 후에 죽은 시체가 되어 그 아비의 시체를 끌어안고 물 밖으로 나왔다고 한다. 그 당시에 한단순邯鄲淳이, 조아는 효녀라 일컫고 뇌문誄文을 지었다. 그 후 이 뇌문을 비에 새겼는데, 글씨가 왕희지의 작품이라고 한다. 동한東漢 때 채옹蔡邕이 이 비문을 읽고 뛰어나게 잘 지은 문장이란 뜻으로, “황견유부 외손제구黃絹幼婦外孫虀臼”라는 여덟 글자를 새겼는데, 그 후 삼국시대 조조曺操와 양수楊修가 이 글귀를 읽고서 절묘호사絶妙好辭라는 뜻이라고 해득했다. 그 이유는 황견黃絹이란 색사色絲이니, 절絶 자이고, 유부幼婦란 소녀少女이니 묘妙 자이며, 외손外孫이란 여자女子이니 호好 자이고, 제구虀臼란 수신受辛이니 사辭 자라는 것이다.
  88. 88)김정언金廷彦 : 958년(광종 9) 통직랑 정위 한림학사通直郞正衛翰林學士가 되었고, 975년(경종 즉위년) 광록대부 대승 내봉령 전예부사 참지정사 감수국사光祿大夫大丞內奉令前禮部使參知政事監修國史를 지냈다. 문장에 능하여, 전라남도 광양시 옥룡면 옥룡사지에 있는 옥룡사동진대사보운탑비玉龍寺洞眞大師寶雲塔碑의 비문을 958년(광종 9)에 지었고,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高達寺元宗大師慧眞塔碑의 비문을 975년에 지었으며,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보원사지에 있는 보원사법인국사보승탑비普願寺法印國師寶乘塔碑의 비문을 978년(경종 3)에 지었다.
  89. 89)우세승통佑世僧統 : 우세佑世란 ‘넓은 지혜로 가르침의 근본(本)을 열고 큰 진리(弘眞)로 세상을 돕는다’는 의미의 광지개종홍진우세廣智開宗弘眞佑世라는 별호이고, 僧統은 승려를 다스리는 고위 직책이다.
  90. 90)양걸楊傑 : 자는 차공次公이다. 일찍이 의천義天이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양걸이 명을 받고 관반館伴이 되어 의천과 함께 삼오三吳 지방에 노닐었던 일이 있다.
  91. 91)소식蘇軾:북송北宋 때 정치가·문장가. 자는 자첨子瞻, 호는 동파거사東坡居士. 사천성四川省 미산현眉山縣 출생.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이지적 학자이면서 섬세한 감각의 시인이었다.
  92. 92)창평은 전남 나주와 강원도 창평 등 여러 절이 거론되지만 경기도 가평加平설이 유력하다.
  93. 93)원문에는 2년으로 되어 있으나 3년이 타당하다.
  94. 94)김군수金君綏 : 고려의 무신으로 김부식金富軾의 손자이다.
  95. 95)능견난사能見難思 : 쇠로 만든 그릇인데 원나라에서 지눌에게 하사했다는 전설이 있다. 보면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실제로 어떻게 그렇게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能見難思)는 조선 시대 장인匠人의 말에서 유래되어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혹은 원감국사가 중국에서 가져왔다는 설도 있다.
  96. 96)엎어 놓은 솥 : 금강계단의 윗부분에 안치한 솥뚜껑과 같은 모양을 형용한 말이다.
  97. 97)불길이 번져~다 타버렸네 : 이 부분의 원문 ‘연소일단좌무간連燒一叚座無間’이 『無衣子詩集』의 같은 작품에는 ‘연소일면시무간連燒一面示無間’으로 되어 있다.
  98. 98)문극겸文克謙 : 본관은 남평南平이고, 자는 덕병德柄이다. 1122~1189. 시호는 충숙忠肅이며, 병부상서 공유公裕의 아들이다. 1170년(의종 24) 정중부鄭仲夫의 난 때 죽음을 당할 뻔하였으나, 좌정언 때 직언한 일로 화를 면하였고, 의종 또한 그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였다. 1171년(명종 1) 우승선어사중승右承宣御史中丞이 되자 많은 문신들을 화에서 구하고, 무신들에게는 고사故事의 자문에 응하였다.
  99. 99)담판한擔板漢 : 널따랗고 긴 판때기를 등에 지고 다니는 사람을 말하는데, 이는 사물의 한 면만을 볼 뿐 전체를 보지 못하는 사람을 비유한 말로서 단견에 빠져 있는 사람 또는 바보라는 뜻이다.
  100. 100)만덕산 백련사는 전남 강진에 있다. 그 당시 결사 운동은 만덕산을 중심으로 한 남南 백련결사와 경북 상주 사불산 공덕사功德寺를 중심으로 한 동東 백련결사로 나뉘는데 정명 천인靜明天因이나 진정 국사는 동 백련결사 계열이다.
  101. 101)지원至元 : 지원은 원나라 순제의 연호가 아니라 원 세조世祖의 연호이다.
  102. 102)정조靜照 : 법명은 이안而安이고 백련사 제5세 조사이다. 법호는 석교도승통 각해원명 불인정조국사釋敎都僧統覺海圓明佛印靜照國師이다. 진정 국사가 지은 『湖山錄』에는 석교도총섭 정혜원조 대선사釋敎都摠攝靜慧圓照大禪師라고 되어 있다.
  103. 103)앞의 주 ‘정조靜照’ 참조.
  104. 104)회암사檜巖寺 :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회암리 천보산에 있는 절. 1328년(고려 충숙왕 15) 지공指空이 개산開山하였고 1376년(우왕 2) 나옹이 중창하였다. 1472년(성종 3) 정희왕후의 명으로 정현조鄭顯祖가 3창하였다. 절 북쪽에 왕명으로 1372년 지공의 부도와 1394년 이색李穡이 명銘을 지은 비를 세웠다. 1376년 나옹의 부도와 1381년 이색이 명을 지은 비를 세우고, 1407년 무학無學의 부도와 1410년 변계량卞季良이 명을 지은 비를 세웠다. 그 뒤 폐사되었던 것을 1821년(순조 2) 세 분 화상의 부도와 비를 중수하고, 옛터의 오른쪽에 작은 절을 짓고 회암사라 하였다.
  105. 105)‘육로로 왔느냐?’라는 말은 원문에는 ‘신통래神通來’로 되어 있는데, 갑본 정오표에 ‘신통神通’이 ‘육陸’으로 되어 있다 하였으며, 다른 책에도 그렇게 되어 있으므로 이에 의거하여 번역하였다.
  106. 106)달마대사 이전 28조사를 일컬은 말이다.
  107. 107)부상扶桑:동해의 해가 뜨는 곳에 있다는 신령스러운 나무, 또는 그것이 있다는 곳을 의미하는데, 전轉하여 그 신목이 있는 나라, 해가 뜨는 나라를 지칭한다. 여기에서는 고려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08. 108)서해도西海道 : 경기 황해 일대.
  109. 109)박희朴曦 : 1361년(공양왕 10)에 왕이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서 남쪽으로 옮기니, 그때 공이 충주 목사로 있으면서 왕의 행차를 분수원焚修院으로 맞아들였다. 벼슬은 밀직부사密直府使를 역임하였고 춘성군春城君에 봉군되었다가 춘주春州로 귀양을 갔었다.
  110. 110)안렴사按廉使 : 고려의 지방장관으로 절도사·안찰사로도 불린다. 지금의 도지사.
  111. 111)정량생鄭良生 : 고려 명신. 단성보리찬화공신端誠輔理贊化功臣에 책록되고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에 봉해졌다.
  112. 112)장자온張子溫 : 고려 시대 문신. 공부상서로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 『朝賀儀注』를 가지고 귀국했다. 1371년 밀직사동지사密直司同知事로서 조공의 길이 열린 것을 사례하러 정료위定遼衛에 간 바 있으며, 1374년 공민왕의 고부사告訃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13. 113)주언방周彦邦 :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생몰년은 알려져 있지 않다. 우왕 때인 1386년 부평 부사富平府使를 지냈다.
  114. 114)이색李穡:고려 말의 문신·학자.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정방 폐지, 삼년상을 제도화하고, 김구용·정몽주 등과 강론, 성리학 발전에 공헌했다. 우왕의 사부였다. 위화도 회군 후 창昌을 즉위시켜 이성계를 억제하려 했다. 조선 태조가 한산백에 책봉했으나 사양했다.
  115. 115)권중화權仲和 : 고려 말 조선 초의 학자 겸 문신. 권력에 아부하지 않았고, 고사 및 의학·지리·복서에도 통달했으며, 전서를 잘 썼다. 작품으로는 글씨에 ‘회암사 나옹화상비’, ‘광통보제사비’의 전액篆額 등이 있다.
  116. 116)금마金馬 : 전라북도 익산에 있는 지명.
  117. 117)높고 귀한 자리(高貴位) : 닭 울음소리인 ‘꼬끼오’의 한자 표기이다.
  118. 118)석왕사釋王寺 : 왕이 될 조짐의 꿈을 풀이했다는 의미이다.
  119. 119)정도전鄭道傳 : 1342~1398.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였으며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방원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저서에 『三峰集』과 『經濟文鑑』 등이 있다.
  120. 120)판탕板蕩 : 『詩經』 「大雅」의 〈板〉과 〈蕩〉 두 편이 모두 어지러운 정사政事를 읊은 데서 유래한 말로서 정치를 잘못하여 어지러워진 나라의 형편을 이르는 말이다.
  121. 121)고려 말 당시 성행하던 도참설에 ‘목자득국木子得國(木子는 李, 즉 이씨가 나라를 얻는다)’이라는 말을 따라 왕의 기를 꺾기 위해 오얏나무를 심어 놓고 자라면 꺾어 버리곤 했다고 한다.
  1. 1){底}國立圖書舘所藏筆寫本。{甲}東國大學校所藏謄寫本。
  2. 2)底本有目次。編者改作補入。
  3. 1)「▼(疒*(羽/木))」甲本正誤表作「瘳」。
  4. 2)「墜」甲本正誤表作「塚」。
  5. 3)「華」甲本正誤表作「筆」。
  6. 4)「禮」下甲本正誤表有「於」。
  7. 1)「柝」甲本正誤表作「析」
  8. 2)「里」甲本正誤表作「重」。
  9. 3)「田」下甲本正誤表有「爲」。
  10. 4)「寧光」三國遺事作「元寧」{編}。
  11. 5)「光」甲本正誤表作。「元」。
  12. 6)「貝金」甲本正誤表作「金貝」。
  13. 7)「僧」甲本正誤表作「佛」。
  14. 8)「選」甲本正誤表作「撰」。
  15. 9)「狀」甲本正誤表作「牀」。
  16. 10)「嶺」下甲本正誤表。有「南」。
  17. 11)「中」下甲本正誤表有「兵」。
  18. 12)「御」甲本正誤表作「銜」。
  19. 13)「化」甲本正誤表作「以」。
  20. 14)「加沙」甲本正誤表作「袈裟」。
  21. 15)「故」下甲本正誤表有「名」。
  22. 1)「彌」甲本正誤表作「㜷」。
  23. 2)「身」甲本正誤表曰衍字。
  24. 3)「橫」甲本正誤表作「黌」。
  25. 4)「以」下甲本正誤表有「文」。
  26. 5)「道」下甲本正誤表有「母」。
  27. 6)「日」甲本正誤表作「月」。
  28. 1)「回」甲本正誤表作「會」。
  29. 2)「且」甲本正誤表作「具」。
  30. 3)「梁末」作「梁天」{甲}ㆍ甲本正誤表作「隨文」。
  31. 4)「日」甲本正誤表作「月」。
  32. 5)「流」甲本正誤表作「渷」。
  33. 1)「太」甲本正誤表作「大」。
  34. 2)「之」下甲本正誤表有「治」。
  35. 3)「於」下甲本正誤表有「採」。
  36. 1)「藏」甲本正誤表作「證」。
  37. 2)「居」甲本正誤表作「屠」。
  38. 3)「荊」甲本正誤表作「剏」。
  39. 4)「霄」甲本正誤表作「宵」。
  40. 5)「耳」甲本正誤表作「爾」。
  41. 6)「貝」甲本正誤表作「貞」。
  42. 7)「云月」甲本正誤表作「育」。
  43. 8)「▼(足+蓳)」甲本正誤表作「踵」。
  44. 9)「䙫」甲本正誤表作「禩」。
  45. 10)「糓」甲本正誤表作「轂」。
  46. 1)「壘」甲本正誤表作「纍」。
  47. 2)「行」下甲本正誤表有「狀」。
  48. 3)「之」下甲本正誤表有「之」。
  49. 4)「慶」海東佛祖源流作「度」{編}。
  50. 5)「釋玄可書」甲本正誤表曰衍字。
  51. 6)「三日明」甲本正誤表作「明三日」。
  52. 7)「御」甲本正誤表作「銜」。
  53. 8)「來」甲本正誤表作「采」。
  54. 9)「人」甲本正誤表作「入」。
  55. 10)「衆」甲本正誤表作「家」。
  56. 11)「奧」甲本正誤表作「粵」。
  57. 12)「大」甲木正誤表作「太」次同。
  58. 13)「傅」作「傳」{甲}次同。
  59. 1)「依」下甲本正誤表有「歸」。
  60. 2)「瓠」甲本正誤。表作「匏」。
  61. 3)「踐」甲本正誤表作「蹟」。
  62. 4)「申」甲本正誤表曰衍字。
  63. 5)「徃」甲本正誤表曰衍字。
  64. 6)「盥」甲本正誤表作「▼((輿-車)*木)」。
  65. 7)「合龍」甲本正誤表作「龕」次同。
  66. 8)「▼(辶*(來+攵))」甲本正誤表作「慦」。
  67. 9)「瑤」甲本正誤表作「珤」。
  68. 10)「寺」甲本正誤表作「師」。
  69. 11)「墜」甲本正誤表作「塚」。
  70. 12)「天」下甲本正誤表有「避」。
  71. 13)「凉」甲本正誤表作「源」。
  72. 14)「規」甲本正誤表作「觀」。
  73. 15)「義」甲本正誤表作「叢」。
  74. 1)「惠湛」甲本正誤表作「慧諶」次同。
  75. 2)「上」下甲本正誤表有「都」。
  76. 3)「聞」下甲本正誤表有「道」。
  77. 4)「盡」甲本正誤表作「畫」。
  78. 5)「幾乎」甲本正誤表曰衍字。
  79. 6)「檐」甲本正誤表作「擔」。
  80. 7)「選」與「撰」通。
  81. 8)「慧」甲本正誤表作「惠」次同。
  82. 9)「阜」甲本正誤表作「隼」。
  83. 1)「印」甲本正誤表作「卵」。
  84. 2)「今」下甲本正誤表有「來」。
  85. 3)「來」甲本正誤表作「未」。
  86. 4)「求」下甲本正誤表有「之」。
  87. 5)「衆」下甲本正誤表有「還」。
  88. 6)「神通」甲本正誤表作「陸」。
  89. 7)「又」甲本正誤表作「叉」。
  90. 8)「無」下甲本正誤表有「將」。
  91. 9)「指」下甲本正誤表有「空」。
  92. 10)「師有」甲本正誤表作「有師」。
  93. 11)「郡」甲本正誤表作「群」。
  94. 12)「草」甲本正誤表作「單」。
  95. 13)「父耶」甲本正誤表作「爺」。
  96. 14)「大」甲本正誤表作「太」。
  97. 15)「亦」下甲本正誤表有「遣」。
  98. 16)「手佛」甲本正誤表作「牙拂」。
  99. 17)「我」甲本正誤表作「機」。
  100. 18)「化」甲本正誤表作「法」。
  101. 19)「亦」下甲本正誤表有「以」。
  102. 1)「徒」下甲本正誤表有「達」。
  103. 2)「補」甲本正誤表作「輔」。
  104. 3)「潮」甲本正誤表作「湖」。
  105. 4)「㭗」甲本正誤表作「盂」。
  106. 5)「殿」下甲本正誤表有「小」。
  107. 6)「新勤」甲本正誤表作「神勒」。
  108. 7)「勤」甲本正誤表作「勒」。
  109. 8)「詔」下甲本正誤表有「撰」。
  110. 9)「萊」甲本正誤表作「業」。
  111. 1)「請」甲本正誤表作「聽」。
  112. 2)「山」作「上」{甲}。
  113. 3)「宗」甲本正誤表曰衍字。
  114. 4)「王」甲本正誤表作「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