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극암집(克庵集) / 克庵集後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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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암집 후서克庵集後叙
옛날에 뜻을 품고서도 명과 어긋난 경우에는 답답하고 실심하여 불교에 왕왕 은거하여 세상을 마치는 경우가 있었다. 팔공산의 도사 극암 또한 그러하다. 극암은 우리 고향 사람이다. 명문가에서 태어나 청명한 기운이 있고 큼직한 재주를 안아서 크게는 사방을 경영할 만하고 작게는 가문의 지위를 잃지 않을 수 있는데, 불행히도 어려서 고아가 되고 흩어져 의지할 데 없어서 출가하여 산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법사에게 경전 공부를 하고 현묘한 이치를 통달하여 선정에 들었다. 선사의 이전 의지사依止師161)는 근원이 있고 후에는 극암만이 있을 뿐이다.
내가 기성箕城162)을 다스릴 때163)에 천주사天柱寺에 유람 갔더니, 70여 세 되는 한 노인이 빛나는 얼굴과 흰 이로 갈건야복葛巾野服을 한 채 늠름하게 문에서 맞았다. 그 모습을 보니 마른 매미가 허물을 벗고 학이 이슬을 경계하는164) 듯하여 세상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물어보니, ‘극암’이라고 하며, 팔을 잡아끌어 인연(素舊)165)을 말하였다. 자리를 잡고 앉아 사육신 일에 이야기가 미쳤는데 극암은 『노릉지魯陵誌』166)를 매우 익숙하게 암송하였다. 그리고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눈물을 흘리고 목이 메어 했다. 나는 내 상태로 사람을 짐작하니, 어찌 이유 없으리오. 아, 감동한 것은 충성스런 분노니, 임금 위한 의리다. 감격한 것은 신세이니, 나를 위한 탄식이다.
시문 몇 편이 있으니 신이함과 기운이 있어 세련되고 정묘했다. 팔공산의 산천초목과 구름, 바위, 새와 짐승들 등 각각 형상을 갖춘 것들을 마음에 얻어 시에 부친 것이니, 시에 어찌 속세(烟火)의 말투가 있겠는가. 애석하다. 극암공은 어려서 고아 되어167) 집안을 잊었으니, 이 팔공산과 함께 잊은 것인가. 몸에 피차가 없으니, 여기서 오래 머무른 것인가, 장차 고향으로 돌아갈 것인가. 나는 조금 늦게 관직을 그만두고 일엽편주와 짚신으로 내키는 대로 산과 강을 다닐 텐데, 극암공이 보고 싶으면 팔공산 난야정사蘭若精舍(사찰)에서 찾으면 볼 수 있을까.
기유년(1909) 황화절黃花節168) 상완上浣169) 주당籀堂 박해령朴海齡이 제오헌制五軒 달 아래에서 쓰다.

011_0586_c_26L克庵集後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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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之有懷其志而畸於命者佗傺坎壈
011_0587_a_02L𨓏𨓏隱於浮屠以終世公山道士克庵
011_0587_a_03L亦是已克庵吾鄕人也生裔名家
011_0587_a_04L淸明之氣抱奇偉之才大可以經營四
011_0587_a_05L小之不失爲門戶地而不幸少孤窮
011_0587_a_06L仳離無所依出家入山受經於法師
011_0587_a_07L通玄入定師之前止師而爲源脈
011_0587_a_08L惟克庵也余守箕之秋游天柱寺
011_0587_a_09L老人年七十餘華顏皓齒葛巾野服
011_0587_a_10L凌兢而迎于門見其貌如枯蟬蛻塵
011_0587_a_11L鶴警露非人世上色相問之曰克庵
011_0587_a_12L把臂道素舊定坐語及六臣古事能誦
011_0587_a_13L魯陵誌甚習因愀然含悲睫涕梗咽
011_0587_a_14L吾以吾中人其豈爲無從而惡夫所感
011_0587_a_15L忠憤也爲君義也所激者身世也
011_0587_a_16L爲我歎也有詩文若干篇神來氣來
011_0587_a_17L工緻精妙八公山山川草木雲石鳥獸
011_0587_a_18L之各一具象者得之心而寓之詩
011_0587_a_19L豈烟火口氣歟嗟哉克公弱喪而忘其
011_0587_a_20L抑與此公山而并忘乎身無彼此
011_0587_a_21L其久留於斯乎將歸去兮故山乎
011_0587_a_22L當小晩休紱扁舟草屨隨意於山水之
011_0587_a_23L思欲見克公覔之於八公蘭若精舍
011_0587_a_24L可得也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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歲己酉黃花節上浣籀堂朴海齡書
011_0587_a_26L于制五軒月下
  1. 161)의지사依止師 : 그 문하에 있으면서 학업을 받거나 이치를 탐구하며 따라 모시던 스승을 일컫는다.
  2. 162)기성箕城 : 칠곡 가산산성架山山城의 별칭이다.
  3. 163)내가 기성箕城을 다스릴 때 : 『承政院日記』 순종 4년(1910) 7월 18일조에 칠곡 군수 박해령을 상주 군수에 임명한다는 기록이 있다.
  4. 164)학이 이슬을 경계하는 : 8월이 되어 이슬이 내리면 학이 소리를 내어 울면서 살기 좋은 다른 곳으로 옮겨 가라고 서로 경계한다고 한다. 『藝文類聚』 권90.
  5. 165)인연(素舊) : 소구素舊는 오래 사귄 친구(舊交)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문맥상 둘이 관계된 옛 일을 말하는 듯하다.
  6. 166)『노릉지魯陵誌』 : 조선 인조 때 윤순거尹舜擧(1596~1668)가 영월 군수로 있을 때, 노릉제를 마치고 군아에 소장된 『魯陵錄』을 기본으로 하여 저술한 능기陵記이다.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하고 구신들을 타도했던 전말과 단종의 분묘와 기타 문신들의 사적 등을 기록하였다.
  7. 167)어려서 고아 되어(弱喪) : 약상弱喪은 『莊子』 「齊物論」의 “죽음을 싫어하는 것이 어려서 고아가 되어 고향에 돌아갈 줄을 모르는 것과 같지 않은지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予惡乎知惡死之非弱喪而不知歸者耶。)”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8. 168)황화절黃花節 : 중양절. 9월 9일.
  9. 169)상완上浣 : 초하루부터 초열흘까지의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