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大明度經卷第一

ABC_IT_K0009_T_001
005_0897_a_01L대명도경(大明度經) 제1권
005_0897_a_01L大明度經卷第一


남오(南吳) 월지국(月支國) 지겸(支謙) 한역
유옥영 번역
005_0897_a_02L南吳月支國居士支謙 譯

1. 행품(行品)


1. 행품(行品)
005_0897_a_03L行品第一

이와 같이 들었다.
005_0897_a_04L聞如是
어느 때 부처님께서 왕사국(王舍國)의 기계산(其鷄山:靈鷲山)에 유행(遊行)하고 계셨다. 그곳에 셀 수 없이 많은 대비구(大比丘)들이 있었는데 선업(善業:須菩提)이 제자 가운데 제일(第一)이었고, 셀 수 없이 많은 보살 대중들이 있었는데 경수(敬首)가 그 중 상수(上首)였다.
그때는 매월 보름에 있는 재일(齋日)이어서 달이 차 있었다. 부처님께서는 선업(善業) 현자를 초청하고 보살 대중들을 모이게 하고는 선업 현자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기꺼이 보살대사(菩薩大士:菩薩摩訶薩)에게 명도무극(明度無極:般若波羅蜜)에 대해 설명하여, 이로 말미암아 보살 대중들이 대도(大道)를 행할 수 있도록 하라.[스승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법으로 청한 것이지, 음식으로 청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다.]”
005_0897_a_05L一時佛遊於王舍國其鷄山與大比丘衆不可計弟子善業第一及大衆菩薩無央數敬首爲上首時十五齋日月滿佛請賢者善業衆菩薩集會樂汝說菩薩大士明度無極欲行大道當由此始師云請之以法不以飮食也
그래서 추로자(秋露子:舍利弗)는 생각하였다.
‘이 현자가 명도(明度)의 도(道)에 대해 설법하는 것은 단지 자신의 힘에 의한 것일까, 부처님의 성은(聖恩)에 의한 것일까?’
005_0897_a_10L於是秋露子念此賢者說明度道己力所乘佛聖恩乎
이때 선업 현자가 추로자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이에 대답하였다.
“내가 부처님의 제자로서 하는 말은 모두 여래 대사(大士)께서 지으신 성은에 의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것을 그대로 따랐기 때문이니, 법을 배운 현자의 아들과 딸들이 법의 뜻을 얻어 증득하는 것과 같습니다.[본문의 ‘법학(法學)’이란 법을 배우는 것이다. 공에 대해 아는 것≺解空≻ㆍ염원이 없어진 것≺不願≻ㆍ생각이 없어진 것≺無想≻ㆍ적정(寂定)한 것을 일러 ‘법의 뜻을 얻은 것≺得法意≻’이라고 한다. 번뇌가 모두 없어지고 맺힌 것이 풀어져서 도(道)를 얻은 것을 ‘증(證)’이라고 하는데, 증(證)이라는 것은 본래 없는 자리≺本無≻로 돌아온 것을 말한다]. 증득하였다는 것은, 설명한 것[所說]과 가르친 것[所誨]과 말한 것[所言] 모두가 법을 그대로 따라서 어김이 없음을 말하니[‘설명한 것’이란 경(經)의 의미를 풀이하는 것이고, ‘가르친 것’이란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이며, ‘말한 것’은 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는 것을 말한다.]
005_0897_a_12L善業知其意而答曰敢佛弟子所說皆乘如來大士之作所以者何從佛說法故有法學賢者子賢者女得法意以爲證法學學法也不願無想寂定謂之得法意漏盡結解得道謂之證由言證已當還本無矣其爲證所說所誨所言一切如法無諍所說者說經義也所誨者敎誨人也言者廣陳法言也
왜냐하면 여래(如來)의 설법을 좋아하는 사람들인 족성자(族姓子)에 의해 전해오는 가르침은 경전의 뜻과 같아서 어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여(如)’는 사람의 근본과 같다는 것이고, ‘래(來)’는 유래된 것을 말한다. 사람의 근본은 비어 있어 어떠한 번뇌≺泥≻도 존재하지 않으므로 동체(同體)라고 말한다. 부처님께서는 세 가지 법≺三法≻의 공(空)함을 증득하셨는데, 이는 ‘삼계(三界)와 원(願)과 상(想)은 본래 모두 없다’는 것이다. 󰡔안반경(安般經)󰡕에서는, “어떠한 곳으로 돌아가는가? 5음(陰)과 지견(知見)이 없어지는 곳으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여래라고 한다”고 하였다. 부처님께서 청정한 법≺淨法≻을 설하신 이유는, 단지 이렇게 본래 존재함이 없는 적정한 법≺寂法≻과 법의 보시≺法施≻를 좋아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005_0897_a_18L所以者何如來說爲斯樂者族姓子傅相敎如經意無所諍如人本也所由來也人本空無泥曰同體也佛得三法空三界願想滅矣『安般』還爲何等還五陰知見滅處故曰如來矣佛說淨法但爲樂斯本無寂法法施也
005_0897_b_02L선업 현자가 말하였다.
“세존의 가르침을 따라 보살에게 기꺼이 명도무극(明度無極)을 설명할 것이니, 대도(大道)를 행하고자 할 때에는 반드시 이것1)을 근본으로 해야 합니다. 도를 체득하는 것[體道]을 보살이라 하니 이는 공허(空虛)한 것이요,이러한 도를 보살이라 하니 이 또한 공허한 것입니다.[스승께서 말씀하시길 “보살이 마음으로 대도를 실천하여 도를 체득하며 마음에 도를 갖추되, 그 형상을 취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공허(空虛)’라고 한 것이다. ‘이러한 도’는 공(空)하고 염원이 없으며≺不願≻ 생각이 없어진 것≺無想≻을 말한다”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법의 어떠한 모습을 보살이라고 하는가? 부처님의 법 가운데에 법이 있다고 보지 않는 것이 보살입니다.[부처님의 경(經)과 법(法)에 5음(陰:處)과 6쇠(衰:境)와 12연기(緣起)가 있다고 보지 않는 것이 보살이다.]나는 이러한 도(道)에 대하여 보지도 않고 증득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보살과 같아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명도무극도 역시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볼 수 없는데 어떻게 보살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반드시 명도무극에 대해 말해야 합니다.
005_0897_a_21L善業言如世尊敎樂說菩薩明度無極欲行大道當由此始夫體道爲菩薩是空虛也斯道爲菩薩亦空虛也師云菩薩心履踐大欲爲體道心爲道俱無形故言空虛也斯道者謂空不願無想也 何等法貌爲菩薩者不見佛法有法爲菩薩也於佛經法不見五陰六衰十二緣起有菩薩也吾於斯道無見無得如菩薩不可見明度無極亦不可見彼不可見何有菩薩當說明度無極
혹 이와 같이 말하더라도 보살의 의지(意志)는 바뀌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으며 놀라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으므로 힘들어하거나 쉬지도 않게 되며, 싫증을 내거나 어려워하지도 않게 됩니다. 이렇게 미묘한 명도(明度)는 그것2)과 함께 상응하여 일어나거나 행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를 일러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바뀌지 않는다≺不移≻’는 것은 물러서지 않는다는 것≺不退轉≻이다. ‘버리지 않는다는 것≺不捨≻’은 큰 뜻≺大志≻을 저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괴이한 것에 놀라고, 번뇌에 근심한다. 그러나 괴이한 것에 놀라지 않는 것은 깊은 법≺深法≻이기 때문이며, 마음 가운데에 번뇌가 가득 차도 그것으로 인한 고통을 싫어하지 않게 된다. 반드시 기뻐하며 이 법을 받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며, 이러한 법을 받으면 그것을 확실히 배우게 되며, 배우는 것에 대해 피곤해 하거나 힘들어하지 않게 된다. 쉬지 않는다는 것은 게으름을 부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005_0897_b_08L若如是說菩薩意志不移不捨不驚不怛不以恐受不疲不息不惡難此微妙明度與之相應而以發行則是可謂隨敎者也不移不退轉也不捨不廢大志也驚怪怛熱也不驚怪必深法心中不滿熱嫌其爲苦也必歡喜受此法不以恐迫故受此法强學之也以不爲疲不以爲勞也不息者不懈也
또 보살대사가 명도무극을 행할 때에는 반드시 그러한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만약 이러한 가르침을 받은 사람일지라도 ‘나는 도의 뜻[道意]을 알고 있다’고 생각을 내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뜻은 뜻이 아니고 청정한 뜻[淨意]이 아니며, 광명(光明)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005_0897_b_14L又菩薩大士行明度無極當學受如受此者不當念是我知道意以者何是意非意淨意光明
현자 추로자가 말하였다.
“왜 이러한 뜻[意]이 존재하며, 그러한 뜻은 뜻이 아닙니까?”
005_0897_b_16L賢者秋露子曰云何有是意而意非意
선업이 말하였다.
“뜻이 아니라는 것은 존재하기도 하고[有] 존재하지 않기도 하다[無]는 것입니다.[스승께서 말씀하시길 “그러한 뜻은 뜻이 아니라는 것을 배우고 알아야 한다. 더 이상 생각하거나 버릴 것이 없는 것이 바로 뜻≺意≻이고 청정함≺淨≻이다. 광명(光明)이라는 것은 번뇌의 어둠이 더 이상 없다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그런 것을 증득할 수 있겠습니까?[‘그것≺彼≻’이란 그것의 뜻을 말한다. ‘얻을 수 있다는 것≺可得≻’은 뜻이 있는 곳을 얻는다는 말이 아니다.]”
005_0897_b_17L善業若非意者爲有爲無師云當學知是非意以知非意無復想捨卽爲意淨光明者無復塵冥矣也彼可得耶彼意也可得意處不乎
추로자가 말하였다.
“증득할 수 없습니다.[‘할 수 없다≺不可≻’고 말하는 것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不可言無≻는 것이고, 처소를 얻을 수 없다≺不可得處≻는 것이다.]”
005_0897_b_19L不可也言不可者不可言無亦不可得處也
선업이 말하였다.
“만약 뜻이 아니라면[非意] 있는 것[有]도 없는 것[無]도 얻을 수 없으며, 얻을 수 없으니 밝힐 수도 없게 됩니다. 이것과 화합하여 상응하는데 어떻게 이러한 뜻이 있겠습니까? 이러한 뜻은 뜻이 아닙니다.”
005_0897_b_20L善業曰如非有與無不可得不可得不可明合此相應者豈有是意意非意哉
추로자가 말하였다.
“그러한 것은 어떤 것이기에 뜻이 아니라고 합니까?”
005_0897_b_22L如是者何謂非意
005_0897_c_02L선업이 말하였다.
“그것은 무위(無爲)를 말하는 것이며[유위(有爲)는 생사(生死)가 있는 마음이다. 음(陰)이 스스로 생각≺念≻을 일으켜 한 생각을 버리되 단번에 하지 않음이 없는 경지에 이르며, 뜻이 아니라는 것≺非意≻은 이러한 생사에 대한 생각≺想≻이 존재하지 않게 되기 때문에 없다고 하는 것이다.] 잡념(雜念)이 없습니다.[잡념이라는 것은 생각이 경(經)에 있거나 또는 5음(陰)에 대하여 뜻이 한 곳에 정해지지 않았으므로 이것을 잡념이라고 한 것이다. 만약 공(空)과 같은 것으로 결정되어 5음이 일어나지 않게 되면잡념이 없다고 한다.]”
005_0897_b_23L善業曰謂其無爲有爲者謂生死之心陰自起念捨一念一至無不爲己非意者無復有此生死想故曰無也雜念也雜念者想且在經且在五陰意不一定謂之雜念也已如空定不起五陰爲無雜念也
추로자가 말하였다.
“훌륭하고도 훌륭하십니다. 부처님께서 현자를 칭찬하실 때에는 수행이 실로 산이나 못과 같아 제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살은 이러한 위없이 바르고 진실한 도[無上正眞之道]를 받고[선업(善業)은 마음≺意≻으로 그 미묘함을 잘 알고 있어 항상 산과 못의 공함≺空≻과 청정함≺淨≻을 행하였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이렇게 칭찬하신 것이다.] 뒤로 물러섬이 없이[보살은 이러한 것을 받되 마음이 변하거나 물러나지 않으니, 이는 제7지(地)를 증득하여 머무는 보살을 말한다.] 쉼 없이 관(觀)하는데, 명도무극도 이러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쉼 없이 관한다’는 것은 이러한 경(經)의 뜻에 대해 힘들어 하거나 싫증내지 않는다는 말이다.]
005_0897_c_03L秋露子曰善哉善哉佛稱賢者說山澤行實爲第一菩薩受此無上正眞之道善業意解微妙常善於山澤空淨之行故爲佛所稱不退轉菩薩受此意不轉謂菩薩得住第七地也觀而不休明度無極當以知此觀而不休謂惟此經意不疲倦也
제자의 지위를 배우려면 이 경을 듣고 간택하여 취하고 받들어 지녀야 합니다.[제자는 공(空)을 취하여 그 가운데 염원≺願≻이 없으며 생각≺想≻이 없어져 니원(泥洹:涅槃)을 증득하되 부처님의 방편도(權道)인 대비(大悲) 알기를 원하지 않는다.] 연일각(緣一覺:緣覺)의 지위를 배우고[연일각은 부처님의 자비를 증득하기를 희망하며, 선교방편≺善權≻에 대해 집착하지 않고 비밀로 하지 않는다.] 부처님의 지위를 배우려면, 이 경에 대해 잘 듣고[부처님의 지위를 배우는 사람은 자비를 널리 베풀되 도를 증득하려고 하지 않는다.] 간택하고 취하고 받들어 지녀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도무극의 깊고 넓은 도를 밝히는 것이고, 보살대사들이 배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선교방편의 열 가지 힘≺力≻과 두려움 없는 부처님의 법으로 일체지(一切知)를 증득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제도하려고 하는데, 이 경은 광대하여 3학(學:戒ㆍ定ㆍ慧) 중에서 스스로 간택하고 취한다고 말한 것이다.]”
005_0897_c_07L欲學弟子當聞是經擇取奉持弟子趣欲空不願無想得泥洹不望知佛權道大悲也欲學緣一覺地緣一覺者望欲得佛慈悲不著不密於善權也若學佛地當聞是經學佛地者弘慈普濟不中道取證矣擇取奉持所以者何是明度道說法甚廣是爲菩薩大士所學善權十力無畏佛法度人欲一切知言是經廣大在三學者自擇取也
선업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제가 보살이라고 여기는 것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이름 또한 붙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스승께서 말씀하시길 “보살과 그 명칭은 모두 공한 것인데, 어떤 것으로 󰡔명도경(明度經)󰡕을 설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셨다.] 또 천하를 바르게 고치는 것[匡政]도 볼 수 없는 것이며, 그러한 명칭도 있을 수가 없는데, 어떤 것을 보살이 설하는 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도(道)로써 천하(天下)를 바르게 고치려고 집착하는 무리들로 하여금 삿된 견해≺邪見≻를 행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것이다.]
005_0897_c_13L善業白佛言吾以爲菩薩者其不可見名亦不可師云菩薩與名皆空當以何爲之說明度經也又所匡政皆不可見不可得者當何爲菩薩說法欲以道匡政天下著欲之徒使其無爲邪見之行也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저와 만물이 있다는 것에 대해 집착하고 의심하는 것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자신의 몸과 만물이 있다는 것을 모두 의심하는 것이다.] 재물과 그것을 쓰고 소모하는 것은 모두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자신과 만물 모두는 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영원히 보존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단지 명칭만 보살이라고 할 뿐이니, 부처님까지도 명칭일 따름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명칭에 머무르지 않으며[不住] 머무르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非不住].3)[부처님과 보살이 세간에 계신다는 것은 단지 이름만 그러할 뿐이고, 그 법의 내용은 머무르지 않는다. 방편에 의한 집착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005_0897_c_17L如是世尊所疑有吾與物也斯不可得一切所疑謂有吾身與萬物也貨費耗皆非有得吾與萬物皆非已有難可常保也但以名爲菩薩至于佛亦名也然不住不佛與菩薩在世閒但名耳其法意非住也不住者以權著也
왜냐하면 명칭은 얻을 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명칭은 머무르는 것도 아니고 머무르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명칭이란 물속의 달과 같은 것이다.] 만약 보살이 깊은 명도(明度)의 뜻을 설한다면, 그것은 바뀌지도 않고 버려지지도 않으며 피로하지도 않고 쉼도 없으며, 싫어하거나 어려워하지도 않고, 놀라거나 근심하는 것도 없고 두려움을 느끼지도 않게 되니, 체(體)를 깨달음으로써 성(性)으로 들어가게 됩니다.[성(性)과 도(道)가 함께 갖추어진 것은 마치 둘로 나뉜 부계(符契:符信)를 합한 것과 같다.]
005_0897_c_21L所以者何名不可得是故名者非住非不住名者猶水中月像也若爲菩薩說深明度意不移不不疲不息不有惡難不驚不怛以恐受以體解而性入性與道俱如合符契也
005_0898_a_02L이는머무르되 물러서지 않는 것으로, 실로 머무르는 곳이 없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합니다. 또 그 경의 내용은 오묘합니다. 세존이시여[스승께서 말씀하시길 “묘(妙)는 이 경의 내용이 매우 깊고 오묘하다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보살이 명도무극을 닦고 행할 때에는 색(色)에 머무르지 않으며[이 색신(色身)에 머무르는 것에 의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통(痛:受)ㆍ상(想)ㆍ행(行)과 식(識)에도 머무르지 않습니다.[몸이라 일컬어지는 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만약 색을 그쳐서[止] 색(色)과 행(行)을 짓는 것이 된다면[이때에서야 비로소 무신업(無身業)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005_0898_a_02L爲住不退轉應於無處當以知此妙世尊師云妙者此經義甚深妙也菩薩修行明度無極不以色住不倚此色身住也於痛想行不以識住不以名身住也所以者何若止於色造色行是爲甫始主作生無身業也
통ㆍ상ㆍ행을 그침으로써 식을 짓게 되는 것이지[이것은 또 삿된 식≺邪識≻의 행을 지어서 중생(衆生)이 된다는 것이다.] 응하여 받는 것이 아닙니다.[법에 맞게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명도무극은 행을 짓는 일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식(識)은 색과 행을 짓지 않는데, 이는 명도(明度)에 상응하여 받아들이기 위해서이다.] 만약 이것을 받아들이게 되면, 명도무극을 갖추지 못하게 되어 끝내 일체지(一切知)를 증득할 수 없게 됩니다.[이것에 대해서 경(經)에서는 삿된 상(想)과 행(行)이 있는 것이 마치 모발(毛髮)과 같다고 했으니, 명도무극을 갖추지 않으면 결코 부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005_0898_a_07L止痛想行爲造斯又甫欲與造邪識之行始衆生矣非爲應受非如法受也度無極不造行爲應受識不造色行是爲應受明度矣受此其不具足明度無極終不得一切知於斯經中有邪想行如毛髮謂之不具終不得作佛也
추로자가 말하였다.
“보살은 어떤 행으로 명도(明度)를 받아들입니까?”
005_0898_a_11L秋露子曰菩薩何行而受明度
선업이 말하였다.
“색(色)을 취(取)하지 않고[‘취(取)’란 집착을 말하니, 색에 대해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통(痛)ㆍ상(想)ㆍ행(行)ㆍ식(識)을 취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색에는 그것을 받아들일 만한 것이 없고, 통ㆍ상ㆍ행ㆍ식에도 그것을 받아들일 만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러한 색에 받아들일 만한 것이 없어 색이 아니라고 하고, 통ㆍ상ㆍ행ㆍ식에 그것을 받아들일 만한 것이 없어 식(識)이 아니라고 한다면, 명도(明度)의 도(道)에는 그것을 받아들일 만한 것이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받아들이는 것은 마치 그림자를 잡아도 잡을 수 없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명도무극의 행입니다. 그래서 보살대사라고 하는 것이니, 제법(諸法)에는 받아들일 만한 것이 결코 없습니다.[아(我)가 세간에서 받아들이는 것은 마치 꿈과 같고 그림자와 같아서 그것을 잡을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005_0898_a_12L善業曰以不取著也不著於色也不取痛想行識所以者何色無彼受痛想行識無有彼受若此色無彼受爲非色痛想行識無有彼受爲非識明度之道無有彼受所以者何吾受如取影無所得是爲明度無極之行也是名曰菩薩大士諸法無受之定我於世閒所受如夢如影影爲無所得也
장소는 드넓고 크나크며 양(量)에 있어서도 헤아릴 수 없어서, 어떤 제자나 연일각(緣一覺)이든 이를 지닐 수가 없으며[가르침의 범위는 지극히 넓으며 나아갈 도(道)는 지극히 커서, 네 가지 중생들에게 널리 끝없이 재앙을 그치게 하고 참기 어려운 모든 고통을 구제하여 감내하는 마음으로 뜻을 크게 가지게 한다. 그러나 방편을 모르는 제자(弟子)는 부처님이 계시더라도 구경(究竟)에 이르지 못하게 되므로 지닐 수 없다고 한 것이다.] 또 일체지(一切知)도 역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스승께서 말씀하시길 “일체지란 부처님이다. 오직 부처님만이 모르는 것이 없는 경지를 증득하신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상견(想見)이 없기 때문입니다.
005_0898_a_19L場廣趣大而無有量一切弟子諸緣一覺所不能持也敎順之場極廣所趣之道極大四等弘普周遍無極畢央濟衆苦痛難忍甘心進擢志大不權弟子若佛所不能究竟曰不能持矣又一切知亦無彼受師云一切知佛也唯佛得無不知所以者何無想見故
005_0898_b_02L만약 상견이 있다고 하면 궁극에는 이러한 것을 증득할 수 없게 됩니다. 이학(異學)인 선니(先泥)4) 외도가 믿음으로써 일체지(一切知)를 증득하지는 못했으나, 그 선니 외도는 도(道)를 신해(信解)하여 열반을 배워 지혜에 들어갔으며, 또한 색(色)을 취하지도 않고, 통ㆍ상ㆍ행ㆍ식을 취하지도 않고, 색을 따라 지혜로 보지 않고, 내색(內色)을 지혜로 보지 않고, 외색(外色)을 지혜로 보지 않고, 내외색(內外色)을 지혜로 보지 않고, 색과 다른 것[異色]을 지혜로 보지 않았습니다. 통ㆍ상ㆍ행에 대해서도 위에서 설한 것과 같나니, 식(識)을 따르지도 않으며, 내외(內外)라고 하거나 식과 다른 것[異識]을 지혜로 보지도 않았습니다.
005_0898_a_24L若想見者終不得此爲若異學先泥之信不得一切知彼先泥信解學度入慧亦不取色不取痛想行不從色見慧——不內色見慧不外色見慧不內外色見慧不以異色見慧——於痛想行如上說不從識不以內外異識見慧
이와 같이 하여 마침내는 통달하여 그가 믿고 아는 것[信解]에 따라 도의 경지[道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법과 마음[意]으로 헤아려 벗어나면 곧 감수할 것[受]도 없고 얻을 것[獲]도 없게[無獲]5) 되며[‘감수할 것도 없다’는 것은 더 이상 5성음(盛陰)이 있다는 생각≺想≻을 하지 않는 것이고, ‘얻을 것도 없다’는 것은 다시는 죄나 복이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얻어진 것이 없다≺無所獲≻’고 말하는 것이다.] 이미 받아들인 것을 깨달으면 멸도(滅度)를 얻게 됩니다.[‘이미 받아들인 것을 깨닫는다’는 것은 8정도(正道)를 말한다. 그리고 정해(正解)와 정지(正智)라면 마음≺意≻이 이미 받아들인 것을 더 이상 얻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명도(明度)는 알음알이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005_0898_b_07L如是究暢從信解得道地法意作量以爲脫便無受無獲無受不復受五盛陰想無獲無復罪福故言無所獲矣已受解得度滅已受解者謂八正道及正解正智爲意已受無復思想爲已得應義也明度不爲智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아무리 보살이 이러한 도(道)에 있어서 색을 취하지도 않고, 통ㆍ상ㆍ행ㆍ식을 취하지도 않으며, 또 중도(中道)가 아닌 멸도(滅度)라 하더라도 여래의 10력(力)6)과 4무소외(無所畏)7)와 부처님의 열여덟 가지 끊어짐이 없는 법[佛十八不絶之法]을 갖추고 있습니다.[보살은 명도(明度)의 뜻을 얻고 공함을 보아야 비로소 부처님의 일≺佛事≻을 닦게 되며, 부처님은 힘과 두려움 없음과 열여덟 가지 법으로 상호(相好)를 이루셨고 부처님의 국토를 장엄하셨으며, 본원(本願)을 거스르지 않고 시방의 중생을 제도하시므로, 중도(中道)가 아닌 멸도(滅度)이다.]
005_0898_b_11L如是世尊雖菩薩於是道不取色痛想行識亦不中道滅度而具如來十四無所畏佛十八不絕之法也菩薩得明度意見空甫修佛事以其力無畏十八法成相好嚴佛剎不違本願欲度十方不中道滅度也
또 보살대사가 명도무극을 행할 때에는 반드시 어떠한 것이 지혜이고, 어느 것이 명도(明度)이며, 모든 법을 어떻게 밝혀야 따르는 것 없이 얻는 것인지를 잘 관찰하여야 합니다.[스승께서 말씀하시길 “내색(內色)과 외색(外色)과 내외(內外)의 통ㆍ상ㆍ행을 따르는 것을 지혜라고 보지 않는 것이 바로 따르는 것 없이 얻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명도무극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잘 관찰하고 성찰하고 사유하되, 놀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으며, 물러나지 않고 싫증내지도 않아야 합니다. 보살은 이와 같이 쉼 없이 행하여 명도무극을 잘 알아야 합니다.”
005_0898_b_14L菩薩大士行明度無極當以觀此何等是智慧何所爲明度何以明諸法無所從得師云不從內色外色內外痛想行見惠是爲無所從得也是故謂之明度無極如是觀省察思惟不驚不不移不疲如是菩薩爲不中休度無極以知此
추로자가 말하였다.
“보살은 어떻게 그침[休止]이 있다는 것을 알며, 색(色)에 대하여 색의 본성(本性)을 그치게 하며, 통ㆍ상ㆍ행에 대하여 식의 본성을 그치게 하며, 명도무극이 식의 본성을 그치게 한다는 것을 압니까?[색(色)의 본성(本性)에 집착하여 그 집착으로 다시 일어나고, 또다시 일어나는 것으로 5음(陰)이 모두 이와 같다는 것이지, 보살이 5음에 대하여 그침이 있거나, 그 본성(本性)에 집착을 일으킨다는 것은 아니다.] 명도무극은 지혜의 본성을 그치게 합니다.”
005_0898_b_20L秋露子曰何故菩薩知己休止爲如於色休色本性於痛想行休識本性明度無極休識本性色之本性著復著起復起五陰悉爾菩薩於五陰休其本性不著起也明度無極休智本性
005_0898_c_02L선업이 말하였다.
“현자시여, 이와 같이 그 색에 대하여 그치니 색이 그렇게 스스로 그치게 되며[自然][보살은 명도를 배우되 본래 마음에서 분별하여 지혜를 얻고자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는 반드시 이러한 마음을 쉬어야 한다. 이렇게 알고자 하는 생각을 다시는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통ㆍ상ㆍ행에 대해서 그치니 식도 스스로 그렇게 그치게 됩니다. 명도무극에 대해 그치니 식이 그렇게 그치게 되며, 명도무극이 그치니 지혜[智]가 저절로 그치게 됩니다. 이러한 도를 행하는 사람이 지혜를 그치게 되니 지혜가 그렇게 저절로 그쳐지게 되며[5음(陰) 모두를 그치게 하여 저절로 일어나는 것도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양[相]이 그치게 되니 모양도 저절로 그쳐지게 됩니다.”
005_0898_b_24L善業曰如是賢者其於色也休色自然菩薩學明度本心欲分別知望得惠當休是欲知望之想無所復起也於痛想行休識自然明度無極休識自然明度無極休智自然行此道者於智休止智之自然者休矣於五陰中皆休其自起不復起矣相休止相之自然者休矣
추로자가 말하였다.
“훌륭하고도 훌륭하십니다. 그것을 이와 같이 배운다면 반드시 일체지(一切智)를 내게 될 것입니다.[이러한 도(道)를 행하는 사람은 그 하고자 하는 마음을 그쳐야 한다. 이는 곧 마음이 저절로 일어나는 것을 아는 것인데, 이들을 모두 그쳐야 한다는 것이다.]”
005_0898_c_06L秋露子曰善哉善哉其學此者必出一切行此道者休其欲之心卽知心自起者皆休止也
선업이 말하였다.
“그러므로 보살은 이것을 배워 일체지를 내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모든 법에 대하여 벗어나는 것도 없고 일어나는 것도 없기 때문이며, 이와 같이 배우면 곧 부처님의 자리[佛坐]를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이와 같이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생사(生死)를 벗어나 부처님의 일체지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묘하고 어진 이여, 보살이 명도무극을 실천하고 행할 때에 만약 색(色)을 행하여 상(想)의 행(行)이라고 하거나, 색의 그침8)을 행하는 것을 상의 행이라고 하거나, 색의 그치지 않음을 행하면서 상의 행이라고 하거나, 색의 흥성함을 행하면서 상의 행이라고 하거나, 색의 무너짐을 행하면서 상의 행이라고 하거나, 색의 없어짐을 행하면서 상의 행이라고 하거나, 색의 생각함[思]을 행하면서 상의 행이라고 하거나, 색의 공함을 행하면서 상의 행이라고 하거나, 색의 몸이 아님[非身]을 행하면서 상의 행이라고 한다면, 통ㆍ상ㆍ행ㆍ식은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모두 상의 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005_0898_c_08L善業曰然菩薩學此出一切知所以者何其於諸法無出無生如是學故逮得佛坐學如此者必從生死之出成佛一切知矣又妙賢者菩薩履行明度無極若行色爲想行——若行色占爲想若行色不占爲想行若行色興爲想若行色敗爲想行若行色滅爲想行若行色思爲想行若行色空爲想行行色非身爲想行——痛想行識如上說皆爲想行
만약 식(識)이 여기에 있다면 나는 반드시 행하되 행을 얻으려고 할 것이니, 설사 행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와 같이 행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것만이 오직 행일 뿐입니다.[스승께서 말씀하시길 “색(色)에 대해서는 이와 같이 말하고, 통ㆍ상ㆍ행ㆍ식도 색과 같이 말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도(道)는 보살대사를 위한 것이고, 그러한 행으로 상(想)의 행을 얻게 되는 것이며, 선권방편(善權方便) 없이 명도무극을 그치게 됩니다.[이 위의 장(章)에서는 모두 삼계의 생사(生死)는 명도(明度)의 대지혜의 도≺大智之道≻에 합치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005_0898_c_17L若識有是吾當行欲得設有是如是行如是惟爲惟行師云說色如此痛想行識亦如色說也此道爲是菩薩大士爲行得想之行無善權方便以爲休於明度無極此上章皆爲三界生死不合明度大智之道也
추로자가 말하였다.
“보살의 어떤 행이 무상무득행(無想無得行)이어서 선교방편이 있되 명도무극을 그치지 않는 것입니까?”
005_0898_c_21L秋露子曰菩薩何行爲無想無得行有善權方便而不休於明度無極
005_0899_a_02L선업이 대답하였다.
“색(色)을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색을 행하지 않으면서 그치는9) 것이고, 색을 행하지 않으면서 일으키는 것이고, 색을 행하지 않으면서 무너뜨리는 것이고, 색을 행하지 않으면서 멸하는 것이고, 색을 행하지 않으면서 생각하는 것이고, 색을 행하지 않으면서 공한 것이고, 색을 행하지 않으면서몸 아닌 것[非身]입니다. 통ㆍ상ㆍ행ㆍ식은 위에서 말한 것같이 존재하지 않습니다.[스승께서 말씀하시길 “식(識)이 있음으로써 이러한 상(想)이 있음을 아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다.] 나는 마땅히 이러한 행이 존재하지 않는 행을 증득할 것이며, 이러한 행은 오직 이러한 도를 행하는 것일 뿐입니다.
005_0898_c_23L答曰不行色——不行色占不行色興不行色敗不行色滅不行色想不行色空不行色非——身痛想行識如上說不有是師云不以有識知有此想也吾當得行是行不有是此行惟爲行此道
이와 같이 행하는 보살대사는 무상무득행을 하는 것이고, 이는 선권방편이 있되 명도무극을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식(識)에 의하지 않고 명도무극에 이러한 상응함이 있음을 아는 것이다. 이 장(章)에서는 무상무득(無想無得)의 행을 말한 것이다.] 또 보살대사는 명도무극을 행하되 이것에 대해 가까이하지 않는 것[不近]이 불행불근행(不行不近行)입니다.[스승께서 말씀하시길 “보살이 이러한 5음(陰)에 대해 생각하되 의지하거나 가까이하지 않고 행하지 않는 것이 무소행(無所行)이다”라고 하셨다.]
005_0899_a_05L如是行菩薩大士爲無想無得行爲有善㩲方便而不休於明度無不以識知有此相應於明度無極也右此章所說無想無得之行也又菩薩大士行明度無極於此不近爲不行不近行師云菩薩於此五陰念無所依近爲不行者謂無所行也
행하지도 않고 가까이하지도 않고[不行不近][보살이 마음≺意≻으로 가까이하지 않는 행도 역시 불행불근이며, 이것이 진실한 행이다.] 또한 행하지 않으며[不行][이것도 역시 그와 같이 행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행함이 없지 않은 행[不否行]이고, 이것이 가까이하지 않는 행[不近行]이며, 이것이 가까이하지 않으며 행하지 않는 것이고, 이것 역시 행에 대해 가까이하지 않는 것[不近於行]이며, 가까이하지 않음에 대해 행하지 않는 것[不行於不近]이고, 행하지 않음에 대해 행하지 않는 것[不行於不行]이며, 가까이하지 않음에 대해 행이 없지 않은 것[不否行於不近]입니다.[위와 같이 행하는 것을 마음[意]이라 하고, 위의 일[事]도 역시 이러한 마음을 여의지 않는다.]”
005_0899_a_09L不行不菩薩意不近行亦不行不近以爲眞亦不行亦不行如此也斯不否斯不近行斯不近不行斯亦不近於行不行於不近於不行不否行於不近如此上謂意上事亦不離此上意矣
추로자가 말하였다.
“왜 가까이하지 않습니까?”
005_0899_a_13L秋露子曰何故不
선업이 말하였다.
“만약 모든 법에 가까이하지 않고 헤아림[度]을 따르지 않으면, 이를 보살대사라고 합니다.[행(行)에 집착하지 않고 또 행을 끊지 않으면, 생사가 끊어져 니원(泥洹:涅槃)을 이루게 된다. 이 두 가지 뜻을 수호하는 것이 명도를 분명하고 밝게 알 수 있는 선권방편이다.] 모든 법에 대해 헤아림이 없는 선정[定]을 행하되[12인연(因緣)과 같이 모두 공하고, 무상(無想:無想定)과 같이 가까이할 수 있는 것은 집착하지 않고 결박되지 않으므로 증득함이 없는 도(無得道)라고 한다.] 도량은 드넓고 크나크며, 양[量]에 있어서도 헤아릴 수 없어서, 모든 제자나 연일각(緣一覺)이 지닐 수가 없으나, 이러한 선정을 행하는 사람은 속히 무상정진도를 얻게 되어 부처님의 성스러운 뜻에 있어 깨닫지 못할 것이 없게 됩니다.”
005_0899_a_14L善業曰如諸法無所近無從度名菩薩大士不著行亦不斷行者爲生死斷爲泥洹能護此兩意是名爲特曉明度善權也一切諸法無度之定如十二因緣皆空如無想可近者著不縛故無得道也場曠趍大而無有量一切弟諸緣一覺所不能持行斯定者得無上正眞之道爲無不覺乘佛聖
선업이 말하였다.
“이러한 보살대사는 과거의 여래ㆍ지진(至眞)ㆍ등정불(等正佛)로부터 예배를 받게 되며, 이러한 선정을 행하면 그들은 무견(無見)을 받게 되며, 무견을 선정으로 하며, 그러한 선정에 대해 ‘나는 그것을 받았다’거나[스승께서 말씀하시길 “보살은 선정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나는 이미 선정에 들었다’거나 ‘나는 선정에 의지한다’거나 하는 것을 알지 못하게 되며, 이러한 모든 것에 대해 분명하지 않게 됩니다.[뜻(意)으로 그것을 분명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005_0899_a_20L善業曰是菩薩大士受拜於往昔如來至眞等正佛者乃行斯定彼受無見無見爲定其於定者不知吾受師云菩薩於定不作思想也吾已定吾依定也於是中一切不明不以意分明之也
005_0899_b_02L추로자가 말하였다.
“보살은 왜 과거의 여래께 예배를 받습니까?부처가 된 사람은 능히 선정을 볼 수 있다는데, 이것이 선정입니까?[그들이 예배하는 집을 얻었다고 말한다면 어찌 스스로 선정을 보고 이것이 선정이냐고 하겠는가?]”
005_0899_a_24L秋露子曰云何菩薩爲昔如來所說拜當得佛彼能見定是定者乎彼謂以得拜家寧能自見意定爲以定耶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족성자(族姓子)[이러한 경을 배우는 사람을 선남자(善男子)라고 하는데, 바로 이들이다.]로서 명도무극을 행하는 사람은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밝힐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따로 분별하여 알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선정에 든 사람은 생각하는 것도 아니며[非想][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5음(陰)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각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37조도품(助道品)에는 세 가지의 활상(活想)은 있으나 세속상(世俗想)은 없다.]”
005_0899_b_04L答曰不也所以者何如彼族姓子學此經人爲善男子是也行明度無極者爲非不想所以者何無所明故無所別知故也是以定非想非想非五陰想也非不想有三十七品三活想無世俗想也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하고도 훌륭하구나, 선업이여. 산과 못과 같은 행(行)을 으뜸가는 말솜씨로 말하는구나. 보살대사는 마땅히 그것을 배우되 명도무극에 대해서도 이와 같이 배워야 하느니라.[변지(辯智)로 변별하려는 자가 물어오면 곧 만물의 현상은 모두 진리를 밝히는 것이라고 대답해 준다.]”
005_0899_b_07L佛言善哉善哉善業說山澤行爲第一辯菩薩大士當以學此如此爲學明度無極辯智之決者問來卽答事皆明眞矣
추로자가 말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이 배우라고 하셨는데, 지혜의 도를 배우는 사람은 어떠한 법을 배우는 것입니까?”
005_0899_b_10L秋露子曰佛以如此學學智慧道者是爲學何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배운다는 것은 이 보살에게는 배워야 할 어떤 법도 없다는 것이니라. 왜냐하면 이 법에는 실로 알고 밝혀야 할 것이 없으나, 범부와 어리석은 사람은 그것에 다만 집착하기 때문이니라.[스승께서 말씀하시길 “그것을 안다거나 밝힌다는 것은 전적으로 집착하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005_0899_b_12L佛言如此學者是菩薩爲無所法何以故是法不有知明如凡愚人專著者也師云知之明之卽爲專著也
추로자가 아뢰었다.
“이 법에 대해 마땅히 어떤 방법으로 밝히고 알아야 합니까?[배우는 사람으로서, 부처가 되는 것에 대해 ‘어떤 방법으로 이것을 밝히고 아는가?]라고 묻고 싶은 것을 말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땅히 알되 밝히지 않아야 하며, 밝히는 것 없이 그것을 알고 밝혀야 하느니라.[밝힐 것이 없는 선정이야말로 진정한 선정이다.] 범부와 어리석은 사람은 오로지 집착하여 그것을 밝히려고 하기 때문에 그것을 밝히지 못하게 된다. 밝히지 못하기 때문에 장애[礙]라는 양극[兩際]이 생기게 되느니라.[생사(生死)를 벗어나지 않고, 진여(眞如)의 청정함을 알지 못하는 것이 바로 양극이다.] 알지 않고 관찰하지 않고 제법(諦法)을 밝히지 않으며[제(諦)란 4제(諦)를 말한다. 마음은 두 극단에 집착하게 되는데, 고(苦)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고, 수습하여 증득하는 것에 대해 관찰하지 않으며, 모두 없애는 것에 대해 밝히지 않고, 청정한 도에 대해 통달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 바로 밝히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005_0899_b_14L當何用明知此法爲學者問欲得佛者何用明知此佛言當如不明所明知明之謂也無所明定是爲定也凡愚人以專著者欲明故爲不明由不明碍兩不出生死不解淸淨是爲兩際也不知不見不明諦法四諦矣意著二際不知欲苦不見習證不明有盡不達淨道故曰不明也
법에 대해 욕심을 내고[무상정(無想定)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얻어야 되겠다는 생각(想)을 하게 되는 것이며, 그것을 얻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근본을 알게 되면, ‘화복≺福禍≻을 행하는 식(識)이 생긴다’고 한다. 무릇 도(道)를 구하되 무상정을 얻지 못한 사람은 태어날 때마다 복을 받고 부처가 되기를 갈망한다.] 법에 따라 생각을 일으키되, 이름[名]과 모양[色]에 대해 전적으로 집착하게 되는 것은 모두 집착[專著]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이러한 쓰일 곳이 없는 총명(聰明)한 법을 알지 못하게 되며, 알거나 관찰하지 않고[不知見], 또 사유하지도 않으며, 관찰하지 않고 성찰하지 않게 된다.
005_0899_b_19L而欲於不獲無想定故想欲想得之了本曰行福福識生夫欲於道而不獲定者世世受福得佛之望耶從法思欲專著名色以專著故而不知此無所用聰明之法已不知見亦不思惟不觀不省
005_0899_c_02L그러므로 늘 어리석음에 떨어지나니, 이는 곧 이해하지 않거나[不解] 쓰임이 없다[不用]는 데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것이며, 그러므로 이것을 범부와 어리석은 자의 집착이라고 하는 것이니라.[‘법을 따른다≺從法≻’에서 ‘법’이란 심법(心法)을 말한다. 통(痛)ㆍ상(想)ㆍ행(行)ㆍ식(識)은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을 말하는데, 색(色)이라는 욕(欲)의 무리를 따라 5음에 전적으로 집착하여 마음이 삼계(三界)에서 신속하게 생사를 유전하여삿됨과 더러움의 뿌리를 뽑아 없애지 못한다는 법구(法句)로서, “마음은 법의 근본이고, 복과 화는 마음이 지은 행으로 인해 해를 끼치고 죄를 지으며, 식(識)에 5음의 폐해가 생기기 때문에 모두 무념법(無念法)을 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무념법이란 총명에 의하지 않는 법으로, 무상정(無想定)을 얻은 선악(善惡)은 12인연이 모든 근(根)을 소멸하여 다 적정해지는 것과는 달리 생사를 싫어한다”고 하고 있다. 󰡔신환휴인본순진경(神還休人本純眞經)󰡕에서는, “마음이 니원에 들어가는 것은 본래 적정하고 또 적정한 것으로부터 들어가되, 네 가지 영원하지 않은 안반수의≺守意≻의 뜻을 알지 못하고 공(空)에 집착하는데, 이러한 공은 상천(想天)의 부류이다”라고 하며, 󰡔환생사수고무수혜인경(還生死受苦無數慧印經)󰡕에서는, “마치 니원이 상주하는 법≺常住法≻이어서 대애(大哀)의 4등(等)이 움직이게 되는 것과 같이 이것은 공하다고 할 수 없으며, 공하여 니원으로 들어가는 그곳은 본래가 적정하다”고 말하고 있다.]”
005_0899_b_23L故墮愚數便無有信不解不用是故謂之凡愚專著從法心法也痛想行識謂之名地水火風謂之色從欲之徒專著五陰心馳三界佪流生死不能拔邪穢之根『法句』曰心爲法本禍福由心行殃殃罪罪識生五陰所弊故不睹無念法也無念法也無所由聰明之法者獲無想之定善惡不同十二因緣滅諸根都寂厭生死神還休『人本純眞經』心入泥洹從本寂又寂不解四非常守意志著空斯空想天之類矣由還生死受苦無數『慧印經』曰如令泥洹爲常住法大哀四等還爲蠕動謂其不能空空入泥洹處本寂者也
추로자가 말하였다.
“이와 같이 배우되 헤아리는 보살대사는 일체지(一切智)를 배우지 못하게 됩니다.[온갖 지혜를 구하겠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005_0899_c_06L露子曰計如此學菩薩大士不學一切智不起想求衆智矣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배우되 일체지를 배우지 않고, 이와 같이 요해하고 일체지를 배우면[요해한다≺曉了≻는 것은 집착하지 않으며, 끊어짐이 없고, 일으키지 않으며, 없애지 않는다는 것이다.] 능히 모든 법[12부경(部經)에서 설하는 법을 말한다.]에 대해 벗어나게 되느니라.”
005_0899_c_08L佛言如此學不學一切智如是曉了乃爲學一切智曉了者不著不斷不起不滅耶能出一切法謂十二部經法
선업이 말하였다.
“마치 세존께서, ‘이것은 환인(幻人)10)이 일체지를 배운다고 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이미 일체지를 배워 모든 법을 벗어난 것을 직접적으로 말하면 무엇이라고 해야 합니까?”
005_0899_c_10L善業白如世尊言是爲幻人學一切智學一切智乃出諸法如直言之當云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이로 인하여 너에게 물으리니 마음대로 말하라.[스승이 “마음대로 말하라”라고 한 것은, 또한 네가 알고 있는 대로 말하라고 한 말과 같다.]”
005_0899_c_13L佛言吾因是以問汝所安便說師言所安便說如言旦說汝所知也
대답하였다.
“아주 훌륭하십니다.”
對曰甚善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환(幻)과 색(色)은 다른 것이냐?”
005_0899_c_14L佛言云何與色異乎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不也世尊
“환과 통ㆍ상ㆍ행ㆍ식은 다른 것이냐?”
005_0899_c_15L幻與痛想行識爲有異乎
“아닙니다, 세존이시여.[상(想)이 이 경 속에 있다는 것과 행(行)이 이 법과 같다는 것과 마음이 이 경에 있는 곳과 성음(盛陰)이 이미 없어진 것과 생사의 5음을 지녀서 보살도를 이룰 수 있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하는 것이니, 모두 ‘어떻게’에 속하는 것들이다.] 색은 허깨비와 같은 것이고, 통ㆍ상ㆍ행ㆍ식도 허깨비와 같은 것입니다.”
005_0899_c_17L不也世尊云何知想在此經者及行同此法者意處是經者盛陰已滅者持生死五陰成菩薩道者皆云何也色猶幻痛想行識猶爲幻
“선업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가운데 있는 생각과 앎을 밝혀서 5음을 세우고 행하는 것이 보살이니라.”
005_0899_c_18L云何善業明是中想知立行五陰而爲菩薩
대답하였다.
“보살의 학(學)은 환인(幻人)과 같은 것입니다. 이 가운데에서 갖게 되는 것은 환과 같은 것이고, 이것은 바로 5음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식(識)은 환과 같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선업은 옛날에 부처님으로부터 들은 말씀을 인용하여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만약 이러한 식이 6근(根)과 같다면 누가 환(幻)을 삼계(三界)라고 하겠습니까? 이는 마치 삼계가 곧 6근이자 5음이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005_0899_c_19L對曰菩薩學如幻人是中持如幻者卽五陰所以者如佛說識如幻善業說往者所聞佛語引以喩義也此識六根亦然何者意幻爲三界耳如三界卽六根卽五陰
추로자가 말하였다.
“보살은 이것을 듣고 게으른 마음을 내지 않습니까?”
005_0899_c_23L秋露子言薩聞是得無懈怠
005_0900_a_02L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설사 사악한 친구[惡友]로 인해 게으른 마음을 갖게 된다고 하더라도 훌륭한 친구를 만나면 궁극에는 게으르지 않게 되느니라.[식(識)이환(幻)과 같듯이 6근도 역시 환과 같다는 것이니, 마음이 요술을 부려 삼계를 존재하게 한다는 것이다.]”
005_0899_c_24L佛言設爲惡友所必持懈怠若得善友終不懈也若識如幻者六根亦復如幻意所幻化令有三界耳
선업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보살은 사악한 친구를 어떻게 압니까?”
005_0900_a_03L善業白佛何以知菩薩惡友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들은 명도무극을 사모하거나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며, 그것을 버리려고 하거나 형상(形相)과 같은 것에 집착하고, 어리석게도 문식(文飾)에 빠지게 되면, 이러한 깊은 지혜[深智]에 거스르게 되느니라.[스승께서 말씀하시길 “어리석다는 것은 문식(文飾)을 취하려는 생각을 낸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빠지게 된다는 것은 생각하고 취하는 것을 말한다”고 하셨다]. 또 경에서는, ‘이것이 보살에게는 사악한 친구[훌륭한 사람은 명도를 좋아하여 그것에 거스르거나 그것에서 퇴전하지 않는 사람이니, 이도(異道:외도)의 경전을 설하는 사람이 바로 사악한 친구이다.]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고 하였느니라.”
005_0900_a_04L佛言不慕樂明度無極欲棄捨若形相愚占文飾違此深智師云愚者已想取文飾占者想取也說經道當知是爲菩薩惡友善人好明度而違退更爲說異道經是爲惡友也
선업이 아뢰었다.
“어떤 사람이 훌륭한 친구입니까?”
何是善友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한 친구는 명도무극을 아직 일으키지 않은 사람으로 하여금 배울 것을 권하고 가르쳐서 그 사람을 이러한 도에 들어오게 하고, 삿된 행을 드러내서 삿된 것에 대한 해악을 말해 주며, 삿된 행이야말로 바로 삿된 해악이니 이것을 모두 여의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렇게 하는 것이 보살대사가 널리 서원의 갑옷[弘誓之鎧]으로 무장한 훌륭한 친구라는 것을 알아야 하느니라.[‘널리 서원한다≺弘誓≻’는 것은, 보살이 세상의 모든 고통을 참아내어 반드시 불도를 이루고, 궁극에는 중생을 제도하고 12인연을 모두 없애 본래 빈 것≺本無≻으로 돌아가겠다고 스스로 서원하는 것을 말한다. ‘갑옷≺鎧≻’이란 높은 덕행으로 죄를 관찰하는 것이 용사(勇士)가 항상 갑옷으로 몸 전체를 가리고 생명을 보호하고는 시종일관 아무런 두려움 없이 적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것처럼, 보살이 내적으로 청정하게 관하고 8정도≺直≻의 행을 밝혀서, 사악한 마음으로 일어나는 다툼을 없애고 다섯 가지 적을 무너뜨려서, 부처가 되기를 높이 발원하되, 물러서지 않아 세존이 될 수 있으므로, 법의 갑옷≺法鎧≻이라고 한 것이다.]”
005_0900_a_08L佛言未起明度無極者卽勸使學敎誨之令入斯道爲現邪行說邪之害是邪行邪害使遠離此當知是爲菩薩大士弘誓之鎧善友者也弘誓者菩薩自誓忍世衆苦必於得佛濟衆生滅十二因緣還乎本無鎧者德其行高見罪常由壯士以鎧障身全命勢成勝歒終始無畏菩薩內淨視明以八直之行與邪意戰破壞五賊高願取佛不能沮遂成世尊故曰法鎧也
또 여쭈었다.
“도인(道人)을 보살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005_0900_a_15L又問呼道人爲菩薩其句義爲奈何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라는 것은 모든 법을 배우되 장애가 없어야 하며, 장애 없음을 배우되 모든 법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보살이라고 하는 것이니라.”
005_0900_a_16L佛言所謂菩薩者一切諸法學無罣碍已學無碍能出諸法故謂菩
“대사(大士)라는 의미는 어떤 것입니까?”
大士者其義云何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사라는 것은 대중을 모아 화합하게 해 주는 스승[家]이다. 그러므로 대사라고 하는 것이니라.[보살은 삼계에 있어서 마치 금륜왕(金輪王)과 같이 크고 존귀한 존재이다. 대중을 모으고 화합하고 덕을 갖춘 존재가 되어 국가적 지위를 버리는 것은 사문(沙門)이다. 중생들을 대도(大道)로 나아가게 이끌고 나쁜 것은 보여주기 때문에 대사라고 한다.]”
005_0900_a_18L佛言大士者聚大衆爲之合家是故爲大士也菩薩能於三界爲大尊貴若金輪王合聚大衆化之以德身棄國位爲沙門導之以大道示衆欲惡故曰大士
추로자가 말하였다.
“저도 역시 그것을 좋아하여 대사가 되었는데, 몸[身]에 대한 견해, 자성[性]에 대한 견해, 목숨에 대한 견해, 사람에 대한 견해, 장부(丈夫)에 대한 견해, 존재에 대한 견해,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견해, 소멸에 대한 견해, 항상 존재한다는 견해 등의 그러한 큰 견해들을 끊었는데, 어째서 위와 같은 말씀을 하십니까?[스승께서 말씀하시길 “62견(見)이 하나의 견≺一見≻에 속한다”고 하였다.] 법으로 모든 견해에 빠지는 것을 제도(濟度)하기 때문에 대사라고 합니까?[법이란 불법(佛法)을 말한다. 불법으로 62견과 4윤(潤)으로 인해 어리석어지는 것을 제도하므로 도(度)라고 한다.]”
005_0900_a_20L秋露子曰吾亦樂其爲大士者於見見性見命見人見丈夫見有見斷滅見常在爲斷大見何者爲說師云六十二見爲一見潤耳度諸見潤是故爲大士佛法以佛法度六十二見及欲癡之四潤故曰度也
005_0900_b_02L선업이 말하였다.“무릇 대사라고 하는 것은 일체지(一切知)와 같아서 마음은 꼭 같음이 없지만 뜻은 제자나 연일각(緣一覺)과 같은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부처님의 마음이 제자의 것과 다르며, 각각의 부처님은 그 마음이 모두 같다는 것이다.] 그것에 집착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곧고, 번뇌가 없다는 것을 모두 알며[‘그것에’란 생사를 말한다.] 받아들이는 것도 없고 멸하는 것도 없어서[‘받아들이는 것이 없다’는 것은 5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고, ‘멸하지 않는다’는 것은 생사를 버리고 멸도를 구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음이 보살을 크게 비춘다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대사라고 하는 것입니다.[명도를 수지하여 보살을 비추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005_0900_b_02L善業曰夫大士者如一切知意無齊同志於弟子緣一覺如佛意不與弟子各佛齊同也在彼無所以者何悉知意質直無漏在彼者生死也無受無滅無受者不受五陰也無滅者不捨生死求滅之想也以悉知意大照菩薩是故爲大士能持明度敎照菩薩也
추로자가 여쭈었다.
“왜 보살대사는 또 그것을 알고도 집착하는 마음을 내지 않습니까?”
005_0900_b_08L秋露子曰問何故菩薩大士亦彼悉知而意不著
선업이 말하였다.
“마음[意]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다 알고도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005_0900_b_09L善業曰以無意故於彼悉知而無所著
현자 만자자(滿慈子:富樓那)가 말하였다.
“저도 역시 그것을 좋아하여 대사가 되었는데, 다른 사람을 대승에 오르게 하려는 큰 서원의 갑옷[鎧]을 갖고 있는 사람을 바로 대사라고 합니다.[스승께서 말씀하시길 “경법(經法)으로써 하늘과 사람들로 하여금 부처님의 대승(大乘)의 도(道)에 올라갈 수 있게 한다”고 하였다.]”
005_0900_b_10L賢者滿慈子言吾亦樂其爲大士者揖人昇於大乘而有弘誓之鎧是爲大士師云能以經法揖天人使昇佛大乘之道也
선업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큰 서원의 갑옷이란 어떤 것입니까?”
005_0900_b_13L善業白佛何謂弘誓之鎧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은 스스로, ‘나는 마땅히 무앙수(無央數)의 중생이 멸도(滅度)할 수 있게 하리라. 이미 멸도한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은 모두 열반을 얻도록 하고, 멸도할 법조차 없다는 것을 알게 해 주겠다’고 서원한다. 왜냐하면 마음[意]과 법은 이와 같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마술사[幻師]와 그의 제자가 네거리에서 마술로 사람들을 만들어 내어 그 만들어 낸 사람들의 목을 벤다면, 너는 이것을 보고 뭐라고 하겠느냐? 거기에 살해라는 행위와 죽은 사람이 있다고 하겠느냐?”
005_0900_b_14L佛言菩薩束已自誓吾當滅度無央數人已度無量無數人民皆得泥洹知其無法得滅度也所以者何意法如是譬如幻師與幻弟子於四衢道化作人衆以爲化人而斬其首汝知云何彼有所殺有死者乎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005_0900_b_19L不也世尊
“바로 그렇다, 선업이여. 무수히 많은 사람을 멸도했다고 하나 멸도를 얻은 사람은 없느니라. 보살은 이것을 듣고도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으며, 공포를 느끼지도 않고 바꾸거나 버리거나 싫증내지도 않으며 근심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대승으로 올라갈 수 있는 큰 서원이라는 갑옷이 된다는 것이 이러한 것인 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005_0900_b_20L如是善業度無數人爲無有人得滅度也菩薩聞是不驚不怛不以恐受不移不捨不疲而無慘悴是爲有弘誓鎧能昇大乘當以知此
005_0900_c_02L만자자가 말하였다.
“제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생각해 보건대, 제가 얻은 대로라면 이러한 의미는 갑옷을 입지 않은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선업에게‘부처님은 일체 법을 짓지 않으셨다’고 말씀하셨듯이, 모든 법을 짓지 않았다는 것은 곧 중생을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니, 이와 같은 뜻에는 큰 서원의 갑옷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005_0900_b_23L滿慈子曰吾省佛言如我所得當知是義爲無帶甲所以者何如佛告善業造佛一切法無作成諸法者亦無造衆生者如是義者無弘誓鎧
선업이 말하였다.
“속박되지 않는 보살대사에게는 큰 서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색(色)ㆍ통(痛: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에 집착하지 않으며, 속박됨도 없고 해탈됨도 없기 때문입니다.”
005_0900_c_04L善業曰無所束帶菩薩大士爲無弘誓所以者何色痛想行識不著不縛不解故
추로자가 말하였다.
“색ㆍ통ㆍ상ㆍ행ㆍ식이란 어떤 것이기에 집착되지도 않고 속박됨도 없고 해탈됨도 없습니까?”
005_0900_c_06L秋露子曰何如爲色痛想行識而云不著不縛不解
선업이 말하였다.
“색(色)이란 환인(幻人)과 같은 것이기에 집착되지도 않고 속박됨도 없으며 해탈됨도 없는 것입니다. 통ㆍ상ㆍ행ㆍ식은 환인과 같은 것이어서 집착되지 않고 속박됨도 없으며 해탈됨도 없습니다. 존재하지도 않는 색이 집착되지도 않고 속박됨도 없으며 해탈됨도 없으니, 존재하지도 않는 통ㆍ상ㆍ행ㆍ식은 집착하지도 않고 속박됨도 없으며 해탈됨도 없게 됩니다. 5음도 이와 같고 모든 법이 다 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보살로서 서원을 세운 사람에게는 서원이 있지 않습니다.[스승께서 말씀하시길 “‘모든 사람은 있는 그대로이며, 짓는 것이 없다’고 할 때, 이것은 생사(生死) 또한 공(空)하다는 것이며, 도(道)로서의 법도 역시 공하다는 것이다. 공하다고 한 것은 생사를 따르지 않고 그 속에서 부처를 증득한다는 것이다. 부처가 공하고 법이 공하기 때문에 벗어남도 존재하지 않는다. 제법(諸法)을 멸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은 본래 공하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만들어낼 만한 중생도 없다는 것을 말한다”고 하셨다.]”
005_0900_c_08L善業曰色如幻人故不著不縛不解痛想行識爲如幻人不著不縛不解無有之色不著不縛不解無有之痛想行識不著不縛不五陰如是諸法亦然是故菩薩所爲誓者無有誓也師云一切人自然無有作者是爲生死亦空法亦空如空者無有從生死中來得佛者佛空法空故無有出滅諸法者一切人本空故亦無有造作衆生者也
선업이 여쭈었다.
“보살이 대승에 바로 올라간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스승께서 말씀하시길 “대승은 대도(大道)이다”라고 하셨다.] 어떤 것이 대승입니까? 대승을 일으켜서는 어디에 머뭅니까?[대승이 일어나면 어디에 머물게 되는가?] 누가 대승을 세웁니까? 거기로 올라가서는 어떻게 벗어납니까?”
005_0900_c_15L善業問焉知菩薩正昇大師云大乘大道也何謂大乘何乘發住乘發何住孰建大乘斯乘何出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승을 승(乘)이라고 하는 것에는 한량없이 많은 승(乘)이 있는데, 중생이 한량없다는 것이니라.[보살의 법과 생각이 광대하여 일으키고≺興≻ 싣는≺載≻ 데에 한량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종류가 한량없이 많아 보살이 그들을 위해 대비(大悲)의 마음을 일으키므로, 이러한 대승으로 삼계에 있는 성인의 일체지(一切知)에 모여 머물게 되며, 대승을 세우고는 올라가되 벗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생기는 것[生]이 있고 벗어나는 것[出]이 있다면 두 가지 법이 되나, 만약 모든 법에 있어서 일어나지 않고 성취하지 못하고 증득하지도 않으면, 생기지 않은 것이 되기 때문이니, 벗어나는 것도 없게 되느니라.”
005_0900_c_17L佛言大乘之爲乘者爲無量乘爲衆生之無量也菩薩法意廣大興載無量也所以者何人種無量菩薩爲之生大悲意以斯大乘住奏三界聖一切知乃建大乘乘無從出所以者何有生有出則爲二法若不起不致於諸法不得者是爲無所生無從出
005_0901_a_02L선업이 말하였다.
“매우 위대합니다. 그 승(乘)이란 하늘과 사람을 진실되게 하고, 왕이 다스리는 모든 세간을 벗어나게 합니다. 상선(上善)의 업(業)을 타고 올라 허공[空]과 똑같게 하니, 그 크고넉넉함이란 허공과 같이 셀 수 없이 많은 중생들을 다 감싸듯 하고[상선이란 넓게 밝히는 것이다.] 항상 비고 넉넉함으로 끝없이 많은 사람을 제도하여 널리 베풀기 때문에 대승이라고 합니다. 그 거스르는 것[反]을 볼 수 없고, 또 벗어나는 것도 볼 수 없습니다.[부처님은 항상 비어 있기(虛) 때문에 마음이 넉넉하고 한가로워 일≺事≻이 생기지 않으며, 많은 무리들이 와도 그 마음에 거슬림이 없으시다. 대사(大士)도 또한 이러한 것을 배워야 한다.] 이와 같이 승(乘)은 시작을 따르지도 않고 끝도 따르지 않으며 그 중간도 따르지 않아[처음을 따르지 않고도 그 마음을 증득하는 것을 알며, 또 중간을 따르지 않고도 끝 마음을 증득한다는 것이다.] 3도(塗:지옥ㆍ아귀ㆍ축생)에 대해서도 똑같으므로 대승이라고 합니다.”
005_0900_c_24L善業曰大哉斯乘爲天人質王諸世閒出上善業乘與空等裕若空苞容衆生無有量數上善者普明也以虛閑濟人無極而爲遍宣故爲大不見其反亦不見出佛常以虛心閑暇無事群生來者逆其志大士亦當學斯矣如此乘者不從始得不從終得亦不中得不從初知意得亦不從中間及終意得也於三塗等故爲大乘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업이여, 이와 같이 이러한 승(乘)을 행할 수 있기 때문에 보살대사라고 하는 것이니라.[과거ㆍ미래ㆍ현재의 마음을 말한 것이다.]”
005_0901_a_08L佛言如是善業以能行此乘故謂之菩薩大士過去當來現在意等耳
추로자가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현자를 청하셔서 명도무극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대승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아는 단월[檀:施主]이 있겠습니까?[스승께서 말씀하시길 “부처님께서는 본래 공경대부≺卿≻를 청해 와서 명도무극에 대해 설명해 주시려고 했었다. 그런 뒤에 대승의 현상≺事≻을 설명하여 이것을 알게 해 주려고 하셨는데, 추로자는 그 공경대부에 대해 알지 못하니, 이런 질문을 한 것이다”라고 하셨다.]”
005_0901_a_09L秋露子曰佛請賢者說明度無極道大乘者有檀知耶師云佛本請卿令說明度無極耳及說大乘事宜及知此耶秋露子爲不知家問宜知是也
선업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제가 명도무극을 설명해도 허물이 없겠습니까?”
005_0901_a_12L善業白佛說明度無極得無過乎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없느니라. 그 가운데에서 마땅히 증득할 것이니라.”
005_0901_a_13L佛言不也得其中
선업이 말하였다.
“보살대사는 시작에 대해 가까이하지 않으며, 끝에 대해서도 가까이하지 않으며, 그 중간에 대해서도 가까이하지 않습니다.[첫 마음에 가까이하지 않는 도(道)는 끝도 없고 가까움도 없으며, 가고 옴도 없다. 여기서는 3악도에 대한 생각을 말한다.] 색(色)에도 그 끝이 없고[無際], 도(道)에도 그 끝이 없으며, 통ㆍ상ㆍ행ㆍ식의 도에도 모두 그 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보살에게는 가까이함도 없고 얻음도 없으며 앎도 없고 밝힘도 없습니다.[색에 변제가 없고≺無邊≻ 극단이 없는≺無極≻ 이유는 색의 자성이 본래 공하기 때문이다.] 색과 보살은 아는 것이 아니고 밝히는 것이 아니며, 성취하는 것도 아니고 얻는 것도 아니며, 통ㆍ상ㆍ행ㆍ식도 역시 이와 같습니다.[색과 보살은 아는 것이 없으며 생각하는 것이 적으니, 밝힐 것이 없다. 이해하고 생각하되 풀이하지 않으니, 마음이 그 속에서 대지혜를 증득할 수 없으며, 똑같은 뜻≺同義≻을 밝히거나 똑같은 뜻을 얻을 수가 없게 된다.]
005_0901_a_14L善業言菩薩大士不於始近不於終近亦不中近不始意近道不終不近也無去來今三塗想矣色無際道無際痛想行識道俱無是故菩薩無近無得無知無明色所以無邊無極者色之性本空故菩薩不知不明不致不得痛想行識亦如是色與菩薩於是無有知想無有明也了想不解意在其中無可得大智與明同義與得亦同義
005_0901_b_02L일체의 것은 일체의 것에 대하여[‘일체의 것’이란 보살심(菩薩心)을 말한다. ‘일체의 것에 대하여’란 생사에 대치한 법과 도(道)의 법을 말한다.] 앎도 없고 밝힘도 없으며, 성취함도 없고 얻음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보살은 반드시 명도무극을 설해야 하며, 아직 보살을 보지 못하였는데 무엇으로 명도무극을 볼 수 있겠습니까? 보살이란 단지 이름[名]만 그러할 뿐입니다. 마치 나[我]를 나라고 하되 그것에 전적으로 집착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나라는 것은 공허하여 자세히 밝힐 수가 없습니다. 내가 도를 밝힐 수가 없는데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이와 같이 모든 법에 집착함이 없다면 어떤 것을 색(色)이라고 합니까? 색에 일어남이 없고, 견고함이 없는데 어떠한 것을 통ㆍ상ㆍ행ㆍ식이라고 합니까?
005_0901_a_20L都一切於一切都一切謂菩薩心也於一切謂生死治法與道法也無知無無致無得當爲何菩薩說明度無尚不見菩薩何用見明度無極薩者但名耳猶我爲我無可專著者空虛不可審明我不可明道何可如是諸法無有專著何等爲色無生牢固何等爲痛想行識
식에 일어남이 없고 견고함이 없으면 모든 법에 일어남이 없고 견고함이 없게 됩니다. 거기에 온전하게 견고함이 없다는 것은 옳은 법(法)도 아니고 그른 법도 아니어서, 본래 주체[主]가 없는 것임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이곳을 설하면서 또한 다른 곳이 없음을 앎이 없으면, 보살이 도를 수행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생사도 역시 처소(處所)가 없다.]
005_0901_b_04L識無生無牢固諸法無生無有牢固彼無專固者不是法不非了本無主當爲說是處無知亦無異處可得菩薩行道生死亦無處所也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이러한 말을 듣고도 놀라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 것이며, 버리지도 싫증내지도 않고 근심함도 없이 이와 같이 알고 행하는 보살이라야만 바로 도무극(度無極)을 밝힐 수 있게 됩니다. 어찌 하여야 이 경(經)을 행할 때에 이와 같은 법으로 이러한 도(道)를 관찰할 수 있겠습니까? 이때에는 색을 가까이하지 않아야 합니다. 색을 가까이하지 않는 사람은 사라져 없어짐을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있는 그대로의 색[自然色]에 대해서는 색이 아닌 것[非色]은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색에 소모됨이 있다면 그것도 역시 색이 아닙니다. 이렇게 나를 흥성하게 하지 않거나 쇠퇴하지 않게 하는 것은 두 가지가 아닙니다.
005_0901_b_08L如是世尊其聞是言不驚不怛不捨不疲不有慘悴如此知行是菩薩爲能惟明度無極所以者何行此經時以如是法孰觀斯道是時爲不近色不近色者不見滅也所以者何於自然色而不起爲非色若色費耗亦非色來無興衰我者此爲無二事
마치 그것은 색이고 이것은 나[我]라고 하면, 이는 곧 이로 말미암아 나의 색[我色]이라고 하는 것과 같으며, 이렇게 하면 헤아림을 만들어 내게 됩니다. 통ㆍ상ㆍ행ㆍ식을 여법(如法)하게 관찰할 때에는 식(識)을 가까이하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식[自然識]에 대해서는 식이 아니라는 것이 일어나지 않나니, 만약 식에 소모됨이 있다면 그것도 역시 식이 아닙니다. 이렇게 나를 흥성하게 하지 않거나 쇠퇴하지 않게 하는 것은 두 가지가 아닙니다. 마치 그것은 식이고 이것은 나라고 하면 이는 곧 이로 말미암아 나의 식이라고 하는 것과 같으며, 그렇게 하면 헤아림을 만들어 내게 됩니다.[스승께서 말씀하시길 “명도를 관찰하는 것은 색(色)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가까이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라고 하셨다.]”
005_0901_b_15L如爲之色是我卽由是爲我色是爲造計痛想行識如法觀時爲不近識於自然識而不起爲非識若識費耗亦非識來亦無興衰我者此爲無二事如謂之識是我卽由是爲我彼爲造計者師云觀明度爲不起色故言不近也
추로자가 말하였다.
“저는 이 말을 잘 생각해 보니, 그 내용은 보살은 그 마음에 있어서 일어남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일어나지 않는다면 보살은 왜 힘들고 어려운 수행을 하여 중생을 위해 더욱 셀 수 없이 많은 고통을 받는 것입니까?”
005_0901_b_20L秋露子曰吾省是語於義菩薩爲無所起若無起者何故菩薩行艱難行爲衆生更苦無量
005_0901_c_02L선업이 말하였다.
“저는 보살행이 힘들고 어려운 수행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대사(大士)에게는 힘들고 어렵다는 생각이 없습니다. 그것은 도를 행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힘들고 어려운 행을 하되 그것을 고통으로 생각하는 사람은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위해 큰 이익을 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스승께서 말씀하시길 “이러한 제자의 행에는 싫증을 내거나 싫어함이 있어서 생사를 일어나게 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이익으로 이끌어 니원(泥洹)을 증득하게 할 수가 없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마땅히 안온하게 여기고, 행하기 쉽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반드시 안온해야 하며 고통스럽다거나 고생이라는 생각과 힘들고 어렵다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005_0901_b_23L善業曰吾不樂菩薩艱難行而大士者無艱難想以行道也所以者何行艱難苦想者不能爲無量人民建大利也師云此弟子行疲厭生死莫能導利一切人使得泥洹也是以當爲安隱易行之想當爲安隱不當爲苦勞艱難想也
중생을 위해 세울 때에는 중생을 어머니라고 생각하고 아버지라고 생각하며, 형제라고 생각하고 자매라고 생각하며, 아들이라고 생각하고 딸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반드시 이러한 생각을 내어 보살도를 행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에 대해 자신의 친족이라는 생각을 하여 이러한 생각으로 그들을 이끌어야 합니다.[보살도를 행할 때는 모든 것에 대해 다섯 가지 친족을 대하듯 하여 안온하게 이익으로 이끌어야 하니, 어리석음이나 탐냄이나 사랑한다는 생각을 갖지 말아야 한다.] 중생을 자기 자신 대하듯 하고[모든 것에 대해 자기 자신을 대하듯 해야 한다.]
005_0901_c_05L爲衆生建若母想父想弟想姊妹想子想女想當生是想行菩薩道於一切人爲己親想以是想將導之行菩薩道者一切如視五親也但欲安隱導利非有癡貪戀之想衆生爲若己當念一切若己身
일체의 것에 있어서 그 몸[身]에 대해 멀리하거나 가까이하는 것을 분별하지 않으며[보살이 일체의 중생들을 대할 때에는 마음에 천하의 만물에 대해 분별하는 마음을 갖지 않아야 한다. 친한 것은 내(內)이고, 소원(疎遠)한 것은 외(外)이다.] 법이라는 생각과 이 모든 것이 나의 아들이라는 생각을 일으켜야 합니다. 보살은 이렇게 셀 수 없이 많은 고뇌(苦惱)를 제도해야 하되 화내는 마음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법이라는 생각(法想)’이란 선권방편의 대자대비를 말한다.] 만약 그것의 모양을 끊고 마음에 풀리지 않는 독(毒)이 없다면 궁극에는 고(苦)라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됩니다. 이는 마치 현자가 ‘보살은 일으킴이 없으며, 그렇게 일으킴이 없기 때문에 보살이라고 한다’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005_0901_c_09L都一切於身明是外內菩薩都一切持心於一切天下不分別親者爲內疏者爲外矣也爲生法想斯一切爲吾子菩薩當度此無量苦性不有怒意法想者善㩲大悲也被形截心無鬱毒終不爲苦想也賢者言菩薩無起以其無起故爲菩薩
추로자가 말하였다.
“이와 같은 보살은 도(道)ㆍ인(人)ㆍ법(法)에 대하여 일체지(一切知)로부터 일체지법(一切知法)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대해 모두 일으킴이 없습니까?[‘일체지법(一切知法)’이란 부처님께서 모든 경전에서 말씀하신 법을 말한다.]”
005_0901_c_14L秋露子曰云何菩薩而無起者於道人於一切知一切知法亦持無起一切知法佛諸經法也
선업이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불법(佛法)에 있어서 어떤 일으킴도 없습니다.”
추로자가 물었다.
“불법에 있어서 일으킴이 없다면 범인(凡人)과 범인의 법에 대해서도 역시 일으킴이 없는 것입니까?”
005_0901_c_17L善業曰於佛法都無所起在佛法而無起者其於凡人及凡人法亦將無起答曰於凡人法亦無所起
선업이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범인(凡人)과 법에 대해서도 역시 일으킴이 없습니다.”
추로자가 말하였다.
“이와 같이 보살이 도ㆍ인ㆍ법에 있어서 일체지(一切智)에서 범인(凡人)의 법에 이르기까지 모두 일으킴이 없다는 것은 가까이하지 않고 일으키지 않으면서 일체지를 증득한다는 것입니까?[‘범인의 법’이란 생사법을 말한다. ‘모두 일으킴이 없다는 것’은 생각이 적정(寂靜)하다는 것이다. ‘가까이한다는 것’은 장차 수지(受持)한다는 것이고, ‘일으킨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이다.]”
005_0901_c_20L秋露子曰如是菩薩於道人從一切智至凡人法皆無起者爲不近不起得一切智耶凡人法者謂生死法也無起者想寂然也持將也生者念也
005_0902_a_02L선업이 말하였다.
“일어나지 않는 법을 얻으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니, 일어나지 않는다는 생각[念]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 법입니다.[일어나지 않는 법이니 얻으려고 하는 생각도 있지 않다는 말이다.] 여기서는 이 말을 가려 취한 것이니, 부처의 경지를 증득한 사람은 내가 법의(法意)와 다툼이 있다고 여깁니다.[버려야 할 두 가지 법이 없다는 것이다. 선업(善業)이 “모든 법은 다 공하며 지음도 없고 얻음도 없다”고 말한 것을 취하여서 생사가 있다거나 부처를 이룸이 있다는 등의법의 마음에 의해 다툼이 있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005_0901_c_23L善業曰不起之法無欲得要也不起之念亦非有法不起之法無有望欲得之想也可擇取也有得佛者我以爲諍無有二法當捨法善業曰諸法皆空無作無得今言此取是也有生死有得佛斯謂以法意諍
추로자가 물었다.
“어떻게 아직 생기지 않은 법에서 간택하여 법을 생하게 할 수 있습니까?[도(道)를 간택하여 취한다는 것이다.] 생사법이 도에 이르는 것입니까, 생하는 법이 도에 이르는 것입니까?[생사의 법이 도에 이르게 되며, 생겨날 법이 도에 이르게 된다. 묻는 말이다.]”
005_0902_a_03L是如何當從未生法擇已生法乎取道也生死法至生法至乎生死之法至道當生有法至道乎問辭也
대답하였다.
“생하는 법이 어떻게 생하지 않게 되며, 생하지 않은 법[不生法]이 생하게 되겠습니까?[선업은 그것이 어렵다는 것을 설명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선 생사의 법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힐난한 것이다. 니원의 법은 다시 일어난다.]”
005_0902_a_05L答曰云何生法不生而不生法生耶善業欲解其難故先誥之言生死之法不起耶泥洹之法復生
추로자가 말하였다.
“생하지 않는 법은 일어나지 않는 법입니다. 그 법을 좋아하되 일으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좋아하되 일으킨다는 말은 마치 현자께서 좋아하되 반드시 일으키지 않을 필요는 없다고 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005_0902_a_07L秋露子曰不生法者不起法也不起法之語耶樂起語也如賢者樂必不起之不要
선업이 말하였다.
“이와 같이 마땅히 좋아하되 일으키지 않을 필요가 없어야 하고, 현자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저도 기꺼이 말하겠습니다.”
005_0902_a_09L善業曰如是當樂不起不要賢者所樂吾亦樂說
추로자가 말하였다.
“선업(善業)께서 법을 위해 모든 것을 강설하셨지만, 모든 것을 다 말하지는 않으신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묻는 것에 대해서만 대답하셨기 때문입니다. 법의(法意)에 흔들림이 없다면 그 말은 언제나 오묘할 것입니다.”
005_0902_a_10L秋露子如善業爲法都講最不可及所以者何在所問如應答法意不搖其言皆妙
대답하였다.
“이것이 법의(法意)입니다. 모든 불제자들은 묻는 데에 따라 대답하는데,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은 모든 것에 있어서 의탁함이 없기 때문입니다.[선업은 이러한 청정법에 대해서 모두 강설하였고, 추로자는 비교할 수 없는 법≺無比法≻에 대해 모두 강설하였다.]”
005_0902_a_13L答曰是法意也佛諸弟子所問應答意不搖者於一切所猗故也善業於此淸淨法中爲都講秋露子於無比法中爲都講
추로자가 말하였다.
“훌륭하고도 훌륭하십니다. 위에서 말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보살은 왜 모든 법에 의탁하지 않습니까?”
005_0902_a_15L秋露子曰善哉善哉是爲上辯何謂菩薩諸法無猗
대답하였다.
“명도무극일 뿐이니, 보살은 모든 법에 의탁함이 없습니다.[마음은 항상 청정한 것으로, 생사에 의지하지 않는다.]”
005_0902_a_16L答曰是明度無極卽爲菩薩諸法無意常淸淨不在生死諸猗也
추로자가 말하였다.
“일체의 승(乘)에 의탁하지 않으며, 이 경은 어떤 법에도 의탁함이 없습니까?”
005_0902_a_18L不一切乘是經諸法無猗耶
선업이 말하였다.
“승(乘)은 명도무극이기 때문에 모든 법에 의탁하지 않는 것입니다.[다시 풍자≺諷≻나 염송≺誦≻으로 일을 받들어 행하지 않느냐고 물은 것에 대해 이것은 단지 하나만을 지킬 뿐, 생사에 의탁하지 않을 뿐이라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보살은 이렇게 바위 산[方石山]에 있지 않더라도[보살이 수행을 할 때에는 비록 바위에 앉더라도 이 돌이 잘 놓여 있는가를 생각하지 않고도 오래도록 앉아 있을 수 있다. 옛날의 어느 비구는 피구련(披拘連)나무 아래에서 40년 동안 수행을 했어도 그 나무 이름을 알지 못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나무에 의탁하는 마음이 없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선정[默]으로 모든 필요한 법을 취하되 마치 취하지 않은 것과 같이 하고, 이렇게 모든 법을 행하되 그 행에 의탁하지 않았습니다.[‘묵(默)’이란 정(定)을 말한다. 고요한 마음으로 모든 필요한 것을 배운다. 이는 마치 버리겠다거나 성취하겠다는 생각도 없는 것과 같다.]
005_0902_a_19L悉乘明度無極故爲諸法無所猗問言不復諷誦承事行此此但當守一不猗生死而已耶菩薩於是無方石山處菩薩所行時雖坐方石不念此石安好可長坐也昔比丘披拘連樹下四十歲不知樹名者用無猗意在樹也而以嘿取諸法之要如無取焉是爲行諸法而無猗行也嘿者定也以定意學諸要如無去就之想也
005_0902_b_02L만약 보살이 이러한 오묘한 지혜를 설법하되, 의심하지 않고 바라지도 않고 능히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면,이것을 알고 행한다고 합니다. 이미 이와 같이 되었으면 그것을 쉬지 않고 행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은 깊은 법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바라지 않는다’는 것은 도를 행하는 데에 있어서 깨끗하다거나 더럽다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는 말이다. ‘쉬지 않는다’는 것은 그 마음에 손가락 하나 튀기는 동안의 시간이라도 쉬려는 생각을 갖지 않는다는 말이다.]”
005_0902_a_24L若爲菩薩說是奧知不疑不望而能深解是謂知行者已爲不休如是念矣不疑不疑深法也不望不於道行之淨而污其意有所希望也不休其意於道無彈指之閒廢息耳
추로자가 말하였다.
“만약 ‘이러한 행을 그치지 않고 저러한 생각은 그치겠다거나, 만약 이런 생각은 그치고 저런 생각은 그치지 않겠다고 하거나’하는 그러한 생각을 행하되 그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항상 행이 평등하게 될 것이고, 생각이 평등하게 될 것입니다.[스승께서 말씀하시길 “‘그친다’는 것은 똑같고 평등하다는 것이다. 만약 이렇게 정진(精進)하여 행한다면 생사에 대한 생각을 그치게 된다. 만약 5음을 그친다면 이것은 정진으로 행하는 법이다. 대사(大士)께서 도(道)와 생사가 평등하고 생사와 도가 평등함을 행하면 그 법은 모두 공함을 갖추게 되기 때문에 평등하다는 것이다. 평등하게 행함을 버리지 않고, 중생으로 하여금 속히 본래의 청정함을 취하게 하고, 생사의 고통을 참도록 하며, 대도(大道)로 이끌어 주어 이롭게 해 주며, 불도(佛道)가 단절되지 않게 해준다”고 하셨다.]
005_0902_b_04L秋露子曰若不休此行爲休是念休是念爲不休此如其念行而不休是謂常行等念等也師云止也平等也若精進於此行者以爲止生死念若止五陰斯爲精進行法是也大士之行道與生死等生死與道等其法俱空故曰等也等行者不捨衆生疾取本淨也忍生死苦而以大道導利之令佛道不絕也
생각이 평등하고 행이 평등하니, 모든 사람이 항상 이러한 행을 지속[紹]하게 되어 개사(闓士)라고 하는 것입니다.[소(紹)란 지속한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중생들도 역시 이러한 생각과 이러한 행을 그치지 않아야 합니다.[중생도 역시 이러한 법의(法意)를 증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생각은 사람들이 마땅히 저버리지 않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사람들은 도(道)라는 생각을 그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005_0902_b_09L已念等行等者則一切人必常有紹此行而得爲開士者續也如是衆生亦將不休此念此行衆生亦得此法意也所以者人不當廢是念也人不當休廢道念也
선업이 말하였다.
“훌륭하고도 훌륭하십니다, 현자시여. 이렇게 훌륭한 말씀으로 권장하고 도와주시는군요. 현자께서 말씀하신 대로 행이 평등하고 생각이 평등한 것이니, 모든 사람들은 이러한 행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무릇 중생들의 있는 그대로의 생각[自然念]도 역시 있는 그대로이니, 중생의 넓고 넓은 생각[恢廓念]이 드넓은 줄을 알아야 합니다. 중생이 올바로 깨닫지 못한 것[不正覺]은 생각이 올바로 깨닫지 못하고 행도 올바로 깨닫지 못한 것인 줄을 알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행과 생각을 나는 좋아하나니, 보살은 이와 같은 생각과 이와 같은 행에 대해 사유(思惟)해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중생의 마음은 공하고 드넓고 광대하여 끝이 없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이익으로 이끌어 이러한 대도(大道)에 오르도록 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바른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니, 바른 깨달음으로 어리석음에서 깨어나도록 해야 한다.]”
005_0902_b_13L善業曰善哉善哉賢者勸助爲說是致要語如賢者言行等念等助一切人不廢此行夫衆生自然念亦自然當以知衆生恢廓念恢廓當以知此衆生之不正覺而念不正覺行亦不正覺當以知此如是行念吾樂菩薩思惟念此行衆生靈空恢廓廣大無邊故可導利昇此大道一切人不能正覺以正覺開寤之也
明度經卷第一
己亥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彫造

  1. 1)위의 명도무극(明度無極)을 말한다.
  2. 2)보살의 의지를 말한다.
  3. 3)고려대장경 원문에는 ‘부주(不住)’라고 되어 있으나 송(宋)ㆍ원(元)ㆍ명(明) 본에는 ‘비부주(非不住)’라고 되어 있으므로, 내용상 후자를 따라 ‘머무르지 않는 것도 아니다[非不住]’라고 번역하였다.
  4. 4)범어 senika의 역명(譯名)이며, 서이가산니(西儞迦霰尼)라고도 하며, 유군(有軍) 또는 승군(勝軍)이라고도 번역한다.
  5. 5)송ㆍ원ㆍ명 세 본과 궁본에는 ‘무소획(無所獲)’으로 되어 있다.
  6. 6)여래께서 지니신 열 가지 지혜의 힘을 말한다. 이를 간단히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사물의 이치를 아는 지혜의 힘이고, 둘째는 3세의 업보(業報)를 아는 지혜의 힘이며, 셋째는 선정(禪定)에서의 해탈과 삼매를 아는 지혜의 힘이고, 넷째는 일체 중생의 여러 가지를 풀이하여 아는 지혜의 힘이며, 다섯째는 세간에서 중생의 여러 가지 다른 경계를 여실하게 아는 지혜의 힘이고, 여섯째는 모든 중생이 도달하는 곳의 길을 아는 지혜의 힘이며, 일곱째는 정도(正道)의 무루법(無漏法)이 열반에 이르는 행(行)의 원인을 아는 지혜의 힘이고, 여덟째는 천안(天眼)의 장애 없음을 아는 지혜의 힘이며, 아홉째는 숙명(宿命)의 무루(無漏)를 아는 지혜의 힘이고, 열째는 습기(習氣)를 영원히 단절할 줄 아는 지혜의 힘이다.
  7. 7)불ㆍ보살이 설법하실 때 두려운 생각이 없는 것을 말하며, 이에 부처님의 무외와 보살의 무외의 차이가 있다. 먼저 부처님의 네 가지 무외는, 첫째 정등각무외(正等覺無畏)로서, 모든 법을 평등하게 깨달아 다른 사람의 힐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고, 둘째 누영진무외(漏永盡無畏)로서 온갖 번뇌를 끊어 외난(外難)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고, 셋째 설장법무외(說障法無畏)로서 법에 장애되는 것을 설하여 외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고, 넷째 설출도무외(說出道無畏)로서 고통의 세계를 벗어나는 길을 설해서 외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보살의 네 가지 무외는, 첫째 능지무외(能持無畏)로서 교법을 듣고 명(名)ㆍ구(句)ㆍ문(文)과 그 이치를 잊지 않고 남에게 가르치길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고, 둘째 지근무외(知根無畏)로서 대상의 근기가 예리한지 둔한지를 알아서 알맞은 법을 설해 주길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고. 셋째 결의무외(決疑無畏)로서 다른 사람의 의심을 판결하여 적당한 대답을 해 주길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고, 넷째 답보무외(答報無畏)로서 여러 가지 문난(問難)에 대해 자유자재하게 응답하길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8. 8)고려대장경에는 ‘점(占)’이라고 되어 있으나, 아래 주 8)의 예를 따라 ‘지(止)’로 번역하였다.
  9. 9)고려대장경에는 ‘점(占)’이라고 되어 있으나, 송ㆍ원ㆍ명 세 본에는 ‘지(止)’라고 되어 있으므로 그를 따라 번역하였다.
  10. 10)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실제적인 사람이 아닌 존재를 말한다. 예를 들면 사람으로 잘못 본 형상, 신기루로 본 사람의 형상, 영상 매체에 나타난 사람의 형상 같은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