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C_IT_K0577_T_002
- 016_0360_a_01L중론 제2권
- 016_0360_a_01L中論卷第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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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수보살 지음
범지 청목주석
요진삼장 구마라집한역
박인성 번역 -
016_0360_a_02L龍樹菩薩造
梵志靑目釋
姚秦三藏鳩摩羅什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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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삼상을 관찰하는 장[觀三相品]35偈 - 016_0360_a_04L觀三相品第七[三十五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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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경전에서 “유위법에는 발생ㆍ머묾ㆍ소멸의 3상(相)이 있다”고 말한다. 모든 사물은 발생에 의해 발생하고, 머묾에 의해 머물며, 소멸에 의해 소멸한다. 그러기에 모든 법이 있는 것이다. - 016_0360_a_05L問曰:經說有爲法有三相:生、住、滅。萬物以生法生,以住法住,以滅法滅,是故有諸法。
- 【답】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3상(相)에는 확정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 3상은 유위(有爲)이면서 유위를 짓는 것인가, 무위(無爲)이면서 유위를 짓는 것인가? 둘 다 맞지 않다. 왜 그러한가?
- 016_0360_a_08L答曰:不爾。何以故?三相無決定故。是三相爲是有爲,能作有爲相?爲是無爲,能作有爲相?二俱不然。何以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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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발생이 유위라면
3상이 있을 것이네.
만일 발생이 무위라면
어찌 유위의 상이라 하겠는가? (1) -
016_0360_a_11L若生是有爲,
則應有三相
若生是無爲,
何名有爲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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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발생이 유위법이라면 발생ㆍ머묾ㆍ소멸의 3상(相)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상반되기 때문이다. ‘상반된다’란,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발생은 발생하는 법(法)과 상응하고 머묾은 머무는 법과 상응하고 소멸은 소멸하는 법과 상응한다. 법이 발생할 때는 머묾과 소멸이 있어서는 안 된다. 마치 밝음과 어둠이 함께하지 않는 것과 같이 상반되는 법들이 일시에 있다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발생은 유위법일 수가 없다. 머묾과 소멸도 이와 같다. - 016_0360_a_13L若生是有爲,應有三相:生、住、滅,是事不然。何以故?共相違故。相違者,生相應生法,住相應住法,滅相應滅法。若法生時,不應有住、滅相違法,一時則不然,如明闇不俱。以是故,生不應是有爲法,住、滅相亦應如是。
- 【문】 만일 발생이 유위법이 아니고 무위법이라면 어떤 과실이 있는가?
- 016_0360_a_19L問曰:若生非有爲,若是無爲,有何咎?
- 016_0360_b_01L【답】 만일 발생이 무위법이라면 어떻게 유위법을 위해 상(相)을 짓겠는가? 왜냐 하면, 무위법은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유위법이 멸한 것이기에 무위법이라고 한다. 그래서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 것을 무위의 상(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 자기의 상이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무[無法]는 법(法)을 위해서 상을 지을 수가 없다. 마치 토끼의 뿔ㆍ거북이의 털 따위가 법을 위해 상을 지을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발생은 무위법이 아니다. 머묾과 소멸도 이와 같다.
- 016_0360_a_20L答曰:若生是無爲,云何能爲有爲法作相?何以故?無爲法無性故,因滅有爲,名無爲,是故說不生不滅,名無爲相,更無自相。是故無法不能爲法作相,如兔角龜毛等,不能爲法作相。是故生非無爲,住、滅亦如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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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상(相)은 모여 있든 떨어져 있든
상을 띠는 일[所相]이 있을 수 없네.
어떻게 동일한 장소와
동일한 시간에 3상이 있겠는가? (2) -
016_0360_b_04L復次,
三相若聚散,
不能有所相,
云何於一處,
一時有三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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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 발생과 머묾과 소멸이 각각 유위법을 위해 상(相)을 짓든, 한데 뭉쳐서 유위법을 위해 상을 짓든 둘 모두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일 각각이 상을 짓는다고 말한다면 동일한 장소에 어떤 상은 있고 어떤 상은 없을 것이다. 발생할 때는 머묾과 소멸이 없고, 머물 때는 발생과 소멸이 없으며, 소멸할 때는 발생과 머묾이 없다. 만일 한데 뭉쳐서 상을 짓는다고 말한다면 서로 상반되는 법(法)인데 어떻게 동일한 시간에 함께하겠는가?
만일 3상에 다시 3상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 016_0360_b_06L是生、住、滅相,若一一能爲有爲法作相,若和合能與有爲法作相,二俱不然。何以故?若謂一一者,於一處中或有有相,或有無相,生時無住、滅,住時無生、滅,滅時無生、住。若和合者,共相違法,云何一時俱?若謂三相更有三相者,是亦不然。何以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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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발생과 머묾과 소멸에
다시 유위의 상(相)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무한이 되네.
없다면 유위가 아니네. (3) -
016_0360_b_13L若謂生住滅,
更有有爲相,
是卽爲無窮,
無卽非有爲。
-
만일 발생ㆍ머묾ㆍ소멸에 다시 유위의 상이 있다고 말한다면, 발생에 다시 발생이 있게 되고 머묾이 있게 되고 소멸이 있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3상은 다시 상이 있게 될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무한이 된다. 만일 다시 (유위의) 상이 없다면, 이 삼상은 유위법이라 하지 못할 것이며 또 유위법을 위해 상을 짓지 못할 것이다. - 016_0360_b_15L若謂生、住、滅更有有爲相,生更有生、有住,有滅。如是三相,復應更有相。若爾,則無窮。若更無相,是三相則不名有爲法,亦不能爲有爲法作相。
- 【문】 그대가 3상이 무한이 된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옳지 않다. 발생ㆍ머묾ㆍ소멸은 유위법이라 하더라도 무한이 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 016_0360_b_19L問曰:汝說三相爲無窮,是事不然。生、住、滅雖是有爲,而非無窮。何以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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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한 발생의 발생[生生]은
그 근본 발생[本生]을 발생하게 하고
발생한 근본 발생은
다시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하네. (4) -
016_0360_b_21L生生之所生,
生於彼本生,
本生之所生,
還生於生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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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6_0360_c_01L
법(法)이 발생할 때는 자체를 포함해서 일곱 법이 함께 발생한다. 첫째는 법, 둘째는 발생, 셋째는 머묾, 넷째는 소멸, 다섯째는 발생의 발생[生生], 여섯째는 머묾의 머묾[住住], 일곱째는 소멸의 소멸[滅滅]이다. 이 일곱 법 중 근본 발생은 그 자체를 제외한 여섯 법을 발생하게 한다. 발생의 발생은 근본 발생[本生]을 발생하게 하고 근본 발생은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한다. 그러므로 3상은 유위법이라 하더라도 무한이 되는 것은 아니다. - 016_0360_b_23L法生時,通自體,七法共生:一、法;二、生;三、住;四、滅;五、生生;六、住住;七、滅滅。是七法中,本生除自體,能生六法,生生能生本生,本生能生生生。是故三相雖是有爲,而非無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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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만일 이 발생의 발생이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한다고 말한다면
발생의 발생은 근본 발생에서 발생하는데
어떻게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겠는가? (5) -
016_0360_c_05L答曰:
若謂是生生,
能生於本生,
生生從本生,
何能生本生?
-
만일 이 발생의 발생[生生]이 근본 발생[本生]을 발생하게 한다면 이 발생의 발생은 근본 발생에서 발생한다고 할 수 없다. 왜 그러한가? 이 발생의 발생이 근본 발생에서 발생하는데 어떻게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겠는가? - 016_0360_c_07L若是生生能生本生者,是生生則不名從本生生。何以故?是生生從本生生,云何能生本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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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이 근본 발생이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한다고 말한다면
근본 발생은 그것에서 발생하는데
어떻게 발생의 발생을 발생할 수 있겠는가? (6) -
016_0360_c_10L復次,
若謂是本生,
能生於生生,
本生從彼生,
何能生生生?
-
또 만일 근본 발생이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한다고 말한다면 이 근본 발생은 발생의 발생에서 발생한다고 할 수 없다. 왜 그러한가? 이 근본 발생은 발생의 발생에서 발생하는데 어떻게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겠는가? 발생의 발생의 법(法)은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지만 지금의 발생의 발생은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없다. 발생의 발생이 아직 자체가 없는데 어떻게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근본 발생은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없다. - 016_0360_c_12L若謂本生能生生生者,是本生不名從生生生。何以故?是本生從生生生,云何能生生生?生生法應生本生,而今生生不能生本生。生生未有自體,何能生本生?是故本生不能生生生。
- 【문】 이 발생의 발생이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 전에도 아니고 후에도 아니게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다. 발생의 발생이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을 뿐이다.
- 016_0360_c_17L問曰:是生生生時,非先非後,能生本生,但生生生時,能生本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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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일 발생의 발생이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한다고 말한다면
발생의 발생도 아직 있지 않은데
어찌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겠는가? (7) -
016_0360_c_19L答曰:不然。何以故?
若生生生時,
能生於本生,
生生尚未有,
何能生本生?
-
만일 발생의 발생이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발생의 발생이) 아직 있지 않다. 그러므로 발생의 발생이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없다. - 016_0360_c_22L若謂生生生時,能生本生可爾,而實未有,是故生生生時,不能生本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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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6_0361_a_01L
만일 근본 발생이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한다고 말한다면
근본 발생도 아직 있지 않은데
어찌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하겠는가? (8) -
016_0361_a_01L復次,
若本生生時,
能生於生生,
本生尚未有,
何能生生生?
-
또 만일 이 근본 발생이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직 (근본 발생이)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근본 발생이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없다. - 016_0361_a_03L若謂是本生生時,能生生生可爾,而實未有,是故本生生時,不能生生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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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등불이 자기를 비추고
다른 것도 비추듯이
발생도 이와 같이
자기를 발생하게 하고 다른 것도 발생하게 하네. (9) -
016_0361_a_05L問曰:
如燈能自照,
亦能照於彼。
生法亦如是,
自生亦生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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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불이 어두운 방으로 들어올 때 사물들을 밝게 비추고 자기도 비추듯이, 발생도 이와 같이 다른 것을 발생하게 하고 자기도 발생하게 한다. - 016_0361_a_08L如燈入於闇室,照了諸物,亦能自照。生亦如是,能生於彼,亦能自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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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등불 자체에 어둠이 없고
(등불이) 놓여 있는 곳에도 어둠이 없네.
어둠을 없애는 것을 비춤이라 하네.
어둠이 없다면 비춤도 없네.(10) -
016_0361_a_10L答曰:不然。何以故?
燈中自無闇,
住處亦無闇,
破闇乃名照,
無闇則無照。
-
등불 자체에 어둠이 없고 밝음이 미치는 곳에도 어둠이 없다. 밝음과 어둠은 상반되기 때문이다. 어둠을 없애기에 비춤이라 한다. 어둠이 없다면 비춤도 없다. 어떻게 등불이 자기를 비추고 다른 것도 비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 016_0361_a_13L燈體自無闇,明所及處亦無闇,明闇相違故,破闇故名照,無闇則無照,何得言燈自照亦照彼?
- 【문】 이 등불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을 때는 비추지 않는다. 또한 이미 발생했을 때도 비추지 않는다. 오직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 자기를 비출 수 있고 다른 것도 비출 수 있다.
- 016_0361_a_16L問曰:是燈非未生有照,亦非生已有照。但燈生時,能自照,亦照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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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어떻게 등불이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
어둠을 없앨 수 있는 것일까?
이 등불이 처음 발생하고 있을 때는
어둠에 미칠 수 없네. (11) -
016_0361_a_18L答曰:
云何燈生時,
而能破於闇?
此燈初生時,
不能及於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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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불이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란 반은 이미 발생했지만 반은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등불 자체가 아직 성취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어둠을 없앨 수 있겠는가? 또 등불은 어둠에 미칠 수 없다. 마치 사람이 도둑을 마주쳤을 때 쫓아낸다고 하듯이. 만일 등불이 어둠에 다다르지 않았는데도 어둠을 없앨 수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 016_0361_a_20L燈生時,名半生半未生,燈體未成就,云何能破闇?又燈不能及闇,如人得賊,乃名爲破。若謂燈雖不到闇,而能破闇者,是亦不然。何以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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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6_0361_b_01L
만일 등불이 아직 어둠에 미치지 않았는데
어둠을 없앨 수 있다면
등불이 이곳에 있을 때
모든 곳의 어둠을 없애리라. (12) -
016_0361_b_01L燈若未及闇,
而能破闇者,
燈在於此閒,
則破一切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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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등불이 힘을 갖고 있어서 어둠에 다다르지 않고서도 어둠을 없앨 수 있다면 이곳에서 타고 있는 등불이 모든 곳의 어둠을 없앨 것이다. (이곳의 어둠에든 모든 곳의 어둠에든) 두 곳에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 016_0361_b_03L若燈有力不到闇而能破者,此處燃燈,應破一切處闇,俱不及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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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등불은 자기를 비추고 다른 것을 비추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만일 등불이 자기를 비추고
다른 것도 비출 수 있다면
어둠도 자기를 어둡게 하고
다른 것도 어둡게 하리라. (13) -
016_0361_b_05L復次,燈不應自照照彼。何以故?
若燈能自照,
亦能照於彼
闇亦應自闇,
亦能闇於彼。
-
만일 등불이 어둠과 상반되기에 자기를 비추고 다른 것도 비출 수 있다면, 어둠 또한 등불과 상반되기에 자기를 덮고 다른 것도 덮을 것이다. 만일 어둠이 등불과 상반되는데도 자기를 덮고 다른 것도 덮을 수 없다면, 등불 또한 어둠과 상반되기에 자기를 비추고 다른 것도 비추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등불의 비유는 잘못된 것이다. 발생의 인연을 타파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 설명하겠다. - 016_0361_b_08L若燈與闇相違故,能自照,亦照於彼;闇與燈相違故,亦應自蔽蔽彼。若闇與燈相違,不能自蔽蔽彼。燈與闇相違,亦不應自照,亦照彼,是故燈喩非也。破生因緣,未盡故,今當更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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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이 발생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자기를 발생하게 하겠는가?
만일 이미 발생한 것이 자기를 발생하게 한다면,
이미 발생했는데 어째서 발생하는 작용을 하겠는가? (14) -
016_0361_b_13L此生若未生,
云何能自生?
若生已自生,
生已何用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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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발생이 스스로 발생하고 있을 때 이미 발생한 것이 발생하는가,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발생하는가? 만일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발생한다면, 법(法)이 없는 것인데 법이 없는 것이 어떻게 스스로 발생할 수 있겠는가? 만일 이미 발생한 것이 발생한다면, 이미 성립한 것이므로 다시 발생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는다. 마치 이미 만들어진 것은 다시 만들어지지 않는 것과 같다. 만일 이미 발생한 것과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발생한다면, 이 둘은 모두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이 있지 않다. 그대는 앞에서 발생은 등불처럼 자기를 발생하게 하고 다른 것도 발생하게 한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옳지 않다. 머묾과 소멸도 이와 같다. - 016_0361_b_15L是生自生時,爲生已生?爲未生生?若未生生,則是無法,無法何能自生?若謂生已生,則爲已成,不須復生。如已作不應更作,若已生,若未生,是二俱不生,故無生。汝先說生如燈,能自生,亦生彼,是事不然。住、滅亦如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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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은 이미 발생한 것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며,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발생하는 것도 아니며,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하는 것도 아니네.
감과 옴에서 이미 답했네. (15) -
016_0361_b_21L復次,
生非生已生,
亦非未生生,
生時亦不生,
去來中已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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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6_0361_c_01L
또 ‘발생’이란, 뭇 연이 화합해서 발생이 있는 것이다. 이미 발생한 것에는 지음[作]이 없기에 발생이 없다.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에도 지음이 없기에 발생이 없다.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도 지음이 없기에 발생이 없다. 발생이 없이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을 얻을 수 없으며,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 없이 발생을 얻을 수도 없다. 어떻게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하겠는가? 이것은 「감과 옴」1)에서 이미 답했다.
이미 발생한 법(法)은 발생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이미 발생한 것이 다시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전개되면 무한이 된다. 마치 이미 지어진 것이 다시 지어지듯이. 또 이미 발생한 법이 다시 발생한다면 어떤 발생에 의해 발생하는 것인가? 이 발생[生相]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는데 이미 발생한 것을 발생하게 한다면, 말한 것을 스스로 어기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발생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는데 그대는 발생을 말했기 때문이다. 만일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을 발생이라 말한다면, 법(法)은 발생한 것이 발생하는 것이거나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발생하는 것일 터인데, 그대는 앞에서 이미 발생한 것이 발생한다고 말했으니, 이것은 확정되지 않는다. 또 마치 이미 탄 것은 다시 타지 않고 이미 간 것은 다시 가지 않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이미 발생한 것은 발생하지 않는다. - 016_0361_b_23L生,名衆緣和合有生。已生中,無作故無生;未生中,無作故無生。生時亦不然。離生法,生時不可得;離生時,生法亦不可得。云何生時生?是事去來中已答。已生法不可生。何以故?生已復生,如是展轉,則爲無窮,如作已復作。復次,若生已更生者,以何生法生是生相?未生而言生已生者,則自違所說。何以故?生相未生而汝謂生,若未生謂生者,法或可生已而生,或可未生而生,汝先說生已生,是則不定。復次,如燒已不應復燒,去已不應復去。如是等因緣故,生已不應生。
-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도 발생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만일 법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면 발생의 연(緣)과 화합할 것이다. 만일 발생의 연과 화합하지 않는다면 법이 발생하지 않는다. 만일 법이 발생의 연과 아직 화합하지 않았는데 발생한다면, 지음[作法]이 없이 짓게 되고, 탐욕이 없이 탐욕을 내게 되고, 증오가 없이 증오하게 되고, 무지[癡法]가 없이 무지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다면 모두 세간의 법을 파괴한다. 그러므로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은 발생하지 않는다. 또 만일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이 발생한다면, 세간의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들이 모두 모든 범부를 생기게 할 것이며, 아직 발생하지 않은 보리(菩提)가 지금 보리의 괴멸하지 않는 법을 생기게 할 것이며, 아라한은 번뇌가 없는데 지금 번뇌를 생기게 할 것이며, 토끼 등은 뿔이 없는데 지금 모두 (뿔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도 발생하지 않는다.
- 016_0361_c_13L未生法亦不生。何以故?法若未生,則不應與生緣和合;若不與生緣和合,則無法生。若法未與生緣和合而生者,應無作法而作,無去法而去,無染法而染,無恚法而恚,無癡法而癡,如是則皆破世閒法,是故未生法不生。復次,若未生法生者,世閒未生法皆應生。一切凡夫未生菩提,今應生菩提;不壞法阿羅漢無有煩惱,今應生煩惱;兔等無角,今皆應生。但是事不然,是故未生法亦不生。
- 016_0362_a_01L【문】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은 발생하지 않는다면, 아직 연[緣]이 없고 지음[作]이 없고 짓는 자[作者]가 없고 시간이 없고 장소 등이 없기 때문에 발생하지 않는 것이다. 만일 연이 있고 지음이 있고 짓는 자가 있고 시간이 있고 장소 등이 있다면 화합하기 때문에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이 발생한다. 그러므로 만일 모든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들은 다 발생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 016_0362_a_01L問曰:未生法不生者,以未有緣,無作、無作者、無時、無方等,故不生。若有緣,有作、有作者、有時、有方等,和合故,未生法生。是故若說一切未生法皆不生,是事不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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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만약 법에 연이 있고 시간이 있고 장소 등이 있어서 화합하기에 발생한다고 한다면, 미리 있어도 발생하지 않고 미리 없어도 발생하지 않고 (미리) 있으면서 없어도 발생하지 않는다. 세 가지는 앞에서 이미 타파한 바 있다. 그러므로 이미 발생한 것은 발생하지 않으며,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도 발생하지 않는다.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도 발생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은 이미 발생한 부분과 아직 발생하지 않은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이 중) 이미 발생한 부분이 발생하지 않으며 아직 발생하지 않은 부분도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앞에서 답한 바와 같다. 또 만일 발생이 없이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할 것이다. 그러나 발생이 없이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도 발생하지 않는다. - 016_0362_a_05L答曰:若法有緣,有時、有方等,和合則生者,先有亦不生,先無亦不生,有無亦不生,三種先已破,是故生已不生,未生亦不生,生時亦不生。何以故?已生分不生,未生分亦不生,如先答。復次,若離生,有生時者,應生時生。但離生,無生時,是故生時亦不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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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일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한다”고 말한다면, 두 가지 발생의 과실이 있다. 하나는 ‘발생한다’할 때의 발생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라 할 때의 발생이다. 둘 모두 옳지 않다. 어찌 두 발생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도 발생하지 않는다. 또 발생[生法]이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면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없다.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없는데 발생이 어디에 의지하겠는가? 그러므로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한다고 말할 수 없다.
이렇게 궁구해 보아도 이미 발생한 것은 발생하지 않고, 아직 발생하지 발생하지 않은 것은 발생하지 않고, 지금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도 발생하지 않는다.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이 성립하지 않고, 발생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머묾과 소멸도 성립하지 않는다. 발생ㆍ머묾ㆍ소멸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유위법이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이미 간 것ㆍ아직 가지 않은 것ㆍ지금 가고 있는 것에서 이미 답했네’라고 말한 것이다. - 016_0362_a_12L復次,若言生時生者,則有二生過:一、以生故名生時;二、以生時中生。二皆不然。無有二法,云何有二生?是故生時亦不生。復次,生法未發,則無生時;生時無故,生何所依?是故不得言生時生。如是推求,生已無生,未生無生,生時無生;無生故,生不成;生不成故,住、滅亦不成;生、住、滅不成故,有爲法不成。是故偈中說:“去、未去、去時中已答。”
- 【문】 나는 이미 발생한 것이 발생한다거나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발생한다거나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한다고 단정해서 말하지 않았다. 그저 연들이 화합하기에 발생한다고 말했을 따름이다.
- 016_0362_a_21L問曰:我不定言生已生、未生生、生時生,但衆緣和合故有生。
-
016_0362_b_01L【답】 그대가 비록 이렇게 말했을지라도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일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이미 성립하지 않는데
어떻게 연(緣)들이 화합하는
그때에 발생을 얻을 수 있겠는가? (16) -
016_0362_a_23L答曰:汝雖有是說,此則不然。何以故?
若謂生時生,
是事已不成,
云何衆緣合,
爾時而得生?
-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타파했다. 그대는 지금 무엇 하러 다시 연들이 화합하기에 발생한다고 말하는가? 뭇 연(緣)이 다 갖추어졌든 다 갖추어지지 않았든 모두 발생과 동일하게 타파한다. - 016_0362_b_02L生時生已種種因緣破,汝今何以更說衆緣和合故有生?若衆緣具足不具足,皆與生同破。
-
만일 법(法)이 뭇 연(緣)에 의해 발생한다면
이는 적멸[寂滅性]이네.
그러므로 발생과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
이 둘은 모두 적멸이네. (17) -
016_0362_b_05L復次,
若法衆緣生,
卽是寂滅性,
是故生生時,
是二俱寂滅。
-
뭇 연(緣)에서 발생한 법(法)은 자성(自性)이 없기에 적멸이다. 적멸이란 이것이 없고 저것이 없는, 상(相)이 없는 것을 말한다. 언설의 길이 끊어져 있고 희론이 소멸해 있는 것이다. 뭇 연(緣)이란 실을 연해서 베가 있고 왕골을 연해서 돗자리가 있는 것 같은 것을 말한다. 만일 실 자체에 확정된 자성[定相]이 있다면 삼에서 나오지 않을 것이다. 만일 베 자체에 확정된 자성 있다면 실에서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실에서 나와 베가 있으며 삼에서 나와 실이 있다. 그러므로 실에도 확정된 자성이 없고 베에도 확정된 자성이 없다. 불[燃]과 장작[可燃] 같은 것도 연들이 화합해서 형성된 것이기에 자성(自性)이 없다. 장작이 있지 않기에 불도 있지 않다. 불이 있지 않기에 장작도 있지 않다. 모든 법(法)이 이와 같다. 그러므로 연들에서 발생하는 법은 자성이 없다. 자성이 없기에 공(空)하다. 아지랑이에 실체가 없는 것과 같다. 그러기에 게송에서 “발생과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 이 둘은 모두 적멸이다”고 말한 것이다.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비록 그대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발생[生相]을 성립시키고자 할지라도 모두 희론이지 적멸인 것은 아니다. - 016_0362_b_07L衆緣所生法,無自性故寂滅。寂滅,名爲無此無彼無相,斷言語道,滅諸戲論。衆緣,名如因縷有布,因蒲有席。若縷自有定相,不應從麻出;若布自有定相,不應從縷出。而實從縷有布,從麻有縷,是故縷亦無定性,布亦無定性。如燃。可燃,因緣和合成,無有自性。可燃無故,燃亦無;燃無故,可燃亦無。一切法亦如是。是故從衆緣生法無自性,無自性故空,如野馬無實。是故偈中說:“生與生時,二俱寂滅。”不應說生時生,汝雖種種因緣欲成生相,皆是戲論,非寂滅相。
- 【문】 삼세의 구별이 확정되어 존재한다. 미래세의 법(法)은 발생의 인과 연들을 얻으면 발생한다. 그런데 왜 발생하지 않는다고 말하는가?
- 016_0362_b_20L問曰:定有三世別異,未來世法得生,因緣卽生,何故言無生?
-
【답】
만일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法)이 있기에
발생한다고 말한다면
이 법이 미리 이미 있는데
어찌 다시 발생을 쓰겠는가? (18) -
016_0362_b_22L答曰:
若有未生法,
說言有生者,
此法先已有,
更復何用生?
-
016_0362_c_01L
만일 미래세에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이 있어서 발생한다면, 이 법은 미리 있는 것인데 어디에 다시 발생을 쓰겠는가? 법이 (미리) 있다면 다시 발생하지 않는다. - 016_0362_c_01L若未來世中有未生法而生,是法先已有,何用更生有法?不應更生。
- 【문】 비록 미래세에 있어서 현재의 상(相)과 같지 않을지라도 그래도 현재의 상이기에 발생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 016_0362_c_03L問曰:未來雖有,非如現在相,以現在相故說生。
- 【답】 현재의 상은 미래세에는 없다. (현재의 상이) 없는데 어떻게 미래세의 발생이 발생하게 한다고 말하겠는가? (현재의 상이) 있다면 미래세의 법이 아니라 현재세의 법이라 해야 할 것이다. 현재세의 법은 다시 발생하지 않는다. 두 가지2) 모두 발생이 없기에 발생하지 않는다.
- 016_0362_c_05L答曰:現在相未來中無。若無,云何言未來生法生?若有,不名未來,應名現在。現在不應更生,二俱無生故不生。
-
또 그대는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하며 또한 다른 것을 발생하게 한다고 말한다. 이제 다시 설명하겠다.
만일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하며
이것이 발생할 것을 갖는다면
어떻게 다시 발생이 있어서
이 발생을 발생할 수 있겠는가? (19) -
016_0362_c_08L復次,汝謂生時生,亦能生彼,今當更說。
若言生時生,
是能有所生,
何得更有生,
而能生是生?
-
만일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을 발생하게 하며 다른 발생을 발생하게 한다면, 이 발생을 어떤 것이 다시 발생할 수 있겠는가?
만일 다시 발생이 있어서
발생을 발생하게 한다면 무한이네.
발생을 발생하게 하는 것 없이 발생이 있다면
법(法)은 모두 스스로 발생하는 것이네. (20) -
016_0362_c_11L若生生時,能生彼,是生誰復能生?
若謂更有生,
生生則無窮,
離生生有生,
法皆能自生。
-
만일 발생이 다시 발생한다면 발생은 무한이다. 만일 이 발생이 다시 발생하게 하지 않아서 스스로 발생한다면, 모든 법들 또한 다 스스로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 016_0362_c_14L若生更有生,生則無窮。若是生更無生,而自生者,一切法亦皆能自生,而實不爾。
-
존재하는 법(法)은 발생하지 않네.
존재하지 않는 법도 발생하지 않네.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법도 발생하지 않네.
이 이치는 앞에서 설명했네. (21) -
016_0362_c_17L復次,
有法不應生,
無亦不應生,
有無亦不生,
此義先已說。
-
무릇 발생이 있다 하면, 존재하는 법(法)에 발생이 있든가 존재하지 않는 법에 발생이 있든가,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법에 발생이 있든가이다. 이것은 모두 옳지 않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했다. 이 세 가지 외에 다시 발생이 있지 않다. 그러므로 발생하지 않는다. - 016_0362_c_19L凡所有生,爲有法有生?爲無法有生?爲有無法有生?是皆不然,是事先已說。離此三事,更無有生,是故無生。
-
016_0363_a_01L
만일 법(法)이 소멸하는 때라면
이때에는 발생하지 않네.
만일 법이 소멸하지 않는다면
이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네. (22) -
016_0362_c_22L復次,
若諸法滅時,
是時不應生
法若不滅者,
終無有是事。
-
또 만일 멸상(滅相)의 법이라면 이 법은 발생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두 상(相)은 상반되기 때문이다. 하나는 멸상이니, 법(法)이 소멸한다는 것을 안다. 다른 하나는 생상(生相)이니, 법이 발생한다는 것을 안다. 두 상은 상반되는 법이므로 동시에 있다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멸상의 법은 발생하지 않는다. - 016_0363_a_01L若法滅相,是法不應生。何以故?二相相違故。一是滅相,知法是滅;一是生相,知法是生。二相相違法,一時則不然,是故滅相法不應生。
- 【문】 만약 멸상의 법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멸상이 없는 법이 발생할 것이다.
- 016_0363_a_05L問曰:若滅相法不應生,不滅相法應生。
- 【답】 모든 유위법은 찰나찰나에 소멸하기에 소멸하지 않는 법이란 없다. 유위법 없는, 확정된 자성의 무위법은 없다. 무위법은 단지 이름[名字]만이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소멸하지 않는 법(法)을 말한다면 절대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 016_0363_a_06L答曰:一切有爲法,念念滅故,無不滅法。離有爲,無有決定無爲法,無爲法但有名字。是故說不滅法,終無有是事。
- 【문】 만약 법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머물고 있을 것이다.
- 016_0363_a_09L問曰:若法無生,應有住?
-
【답】
아직 머물지 않은 법(法)은 머물지 않네.
이미 머문 법도 머물지 않네.
지금 머물고 있는 법도 머물지 않네.
발생이 없는데 어떻게 머묾이 있겠는가? (23) -
016_0363_a_10L答曰:
不住法不住,
住法亦不住,
住時亦不住,
無生云何住?
-
아직 머물지 않은 법(法)은 머물지 않는다. 아직 머묾[住相]이 없기 때문이다. 이미 머문 법도 머물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이미 머묾이 있었기 때문이다. 감이 있기에 머묾이 있다. 만일 머묾이 이미 있었다면 다시 머물지 않는다. 지금 머물고 있는 것도 머물지 않는다. 이미 머문 것과 아직 머물지 않은 것 없이 다시 지금 머물고 있는 것은 있지 않다. 그러므로 또한 머물지 않는다. 이와 같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 머묾을 구해 보아도 머묾을 얻을 수 없다. 그러니 발생이 없다. 발생이 없는데 어떻게 머묾이 있겠는가? - 016_0363_a_12L不住法不住,無住相故,住法亦不住。何以故?已有住故。因去故有住,若住法先有,不應更住。住時亦不住,離住不住,更無住時,是故亦不住。如是一切處求住不可得故,卽是無生。若無生,云何有住?
-
만일 법(法)이 소멸하고 있을 때라면
이것은 머물지 않네.
만일 법이 소멸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네. (24) -
016_0363_a_18L復次,
若諸法滅時,
是則不應住
法若不滅者,
終無有是事。
-
또 만일 멸상의 법이라면 이 법에는 주상(住相)이 없다. 왜 그러한가? 한 법에 상반되는 두 상(相)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멸상(滅相)이고 또 하나는 주상(住相)이다. 동일한 시간 동일한 장소에 주상과 멸상이 있다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멸상의 법(法)에 주상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 016_0363_a_20L若法滅相,是法無有住相。何以故?一法中有二相相違故:一、是滅相;二、是住相。一時一處有住、滅相,是事不然,是故不得言滅相法有住。
- 【문】 만일 법이 소멸하지 않는다면 머물고 있을 것이다.
- 016_0363_b_01L問曰:若法不滅,應有住。
-
016_0363_b_01L【답】 소멸하지 않는 법은 없다. 왜 그러한가?
존재하는 모든 법(法)들은
모두 늙음과 죽음의 상(相)을 갖고 있네.
존재하는 법이 늙음과 죽음이 없이
머물고 있는 것은 정녕 볼 수 없네. (25) -
016_0363_b_02L答曰:無有不滅法。何以故?
所有一切法,
皆是老死相,
終不見有法,
離老死有住。
-
모든 법은 발생할 때 무상(無常)이 항상 좇아다닌다. 무상에 둘이 있다. 늙음과 죽음이다. 이와 같이 모든 법에는 항상 늙음과 죽음이 있기에 머물고 있을 때가 없다. - 016_0363_b_04L一切法生時,無常常隨逐。無常有二名:老及死。如是一切法,常有老死,故無住時。
-
머묾은 자기에 의해서 머물지 않네.
다른 것에 의해서도 머물지 않네.
발생이 자기에 의해서 발생하지 않고
다른 것에 의해서도 발생하지 않듯이. (26) -
016_0363_b_07L復次,
住不自相住,
亦不異相住。
如生不自生,
亦不異相生。
-
또 머무는 법(法)이 있다면 자기에 의해서 머무는가, 다른 것에 의해서 머무는가? 두 가지 모두 옳지 않다. 자기에 의해서 머문다면 상주하는 것이다. 모든 유위법은 연(緣)들에서 발생한다. 만일 머무는 법(法)이 자기에 의해서 머문다면 유위라고 할 수 없다. 만일 머묾이 자기에 의해서 머문다면 법(法)도 자기에 의해서 머물 것이다. 마치 눈이 자기를 볼 수 없듯이 머묾도 그러하다. 만약 다른 것에 의해서 머문다면, 머묾에 다시 머묾이 있는 것이니 이것은 무한이 된다. 또 다른 법(法)에서 다른 것[異相]이 생기는 것을 본다. 다른 법을 연하지 않고서는 다른 것을 얻을 수 없다. 다른 것은 확정된 자성[定性]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것에 의해서 머문다는 것은 옳지 않다. - 016_0363_b_09L若有住法,爲自相住?爲他相住?二俱不然。若自相住,則爲是常。一切有爲法從衆緣生,若住法自住,則不名有爲。住若自相住,法亦應自相住。如眼不能自見,住亦如是。若異相住,則住更有住,是則無窮。復次,見異法生異相,不得不因異法而有異相,異相不定故。因異相而住者,是事不然。
- 【문】 만일 머물지 않는다면 소멸할 것이다.
- 016_0363_b_17L問曰:若無住,應有滅?
-
【답】 소멸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이미 소멸한 법(法)은 소멸하지 않네.
아직 소멸하지 않은 법도 소멸하지 않네.
지금 소멸하고 있는 법도 소멸하지 않네.
발생이 없는데 어떻게 소멸이 있겠는가? (27) -
016_0363_b_18L答曰:無。何以故?
法已滅不滅,
未滅亦不滅,
滅時亦不滅,
無生何有滅?
-
이미 소멸한 법(法)은 소멸하지 않는다. 이미 소멸했기 때문이다. 아직 소멸하지 않은 법도 소멸하지 않는다. 멸상(滅相)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소멸하고 있는 것도 소멸하지 않는다. 둘 없이 다시 소멸하고 있는 것은 없다. 이와 같이 궁구해 보아도 소멸하는 법(法)에는 발생이 없다. 발생이 없는데 어떻게 소멸이 있겠는가? - 016_0363_b_20L若法已滅,則不滅,以先滅故。未滅亦不滅,離滅相故。滅時亦不滅,離二更無滅時。如是推求滅法,卽是無生,無生何有滅?
-
016_0363_c_01L
만일 법이 머문다면
이것은 소멸하지 않을 것이네.
만일 법이 머물지 않는다면
이것도 소멸하지 않을 것이네. (28) -
016_0363_c_01L復次,
法若有住者,
是則不應滅
法若不住者,
是亦不應滅。
-
또 만일 법이 머문다면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주상(住相)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머무는 법이 소멸한다면 두 상이 있게 될 것이다. 주상(住相)과 멸상(滅相)이다. 그러므로 머묾 속에 소멸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마치 태어남과 죽음이 동시에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만약 법이 머물지 않는다면 또한 소멸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주상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주상이 없다면 법이 없다. 법이 없는데 어떻게 소멸이 있을 것인가? - 016_0363_c_03L若法定住,則無有滅。何以故?由有住相故。若住法滅,則有二相:住相、滅相。是故不得言住中有滅,如生死不得一時有。若法不住,亦無有滅。何以故?離住相故。若離住相,則無法,無法云何滅?
-
또
이 법은 이때에,
이때에 있는 대로 소멸하지 않네.
이 법은 다른 때에,
다른 때에 있는 대로 소멸하지 않네. (29) -
016_0363_c_09L復次,
是法於是時,
不於是時滅
是法於異時,
不於異時滅。
-
법에 멸상이 있다면 이 법은 자기 상태에 의해서 소멸하는가, 다른 상태에 의해서 소멸하는가? 두 가지 모두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예를 들어 우유는 우유일 때에 소멸하지 않는다. 우유일 때 있는 대로 우유의 상태가 정해져서 머물기 때문이다. 우유가 아닐 때에도 소멸하지 않는다. 우유가 아니라면 우유가 소멸한다고 말할 수 없다. - 016_0363_c_11L若法有滅相,是法爲自相滅?爲異相滅?二俱不然。何以故?如乳不於乳時滅。隨有乳時,乳相定住故。非乳時亦不滅,若非乳,不得言乳滅。
-
모든 법들의
생상을 얻을 수 없네.
생상이 있지 않으니
멸상도 있지 않네. (30) -
016_0363_c_15L復次,
如一切諸法,
生相不可得,
以無生相故,
卽亦無滅相。
-
또 앞에서 궁구한 바와 같이 모든 법(法)의 생상(生相)은 얻을 수가 없다. 그때에 멸상이 없다. 발생을 타파했기에 발생이 없다. 발생이 없는데 어떻게 소멸이 있겠는가?
만약 그대가 주장하기를 여전히 그치지 않는다면, 이제 다시 설명해서 인과 연들을 파괴하는 것을 타파하겠다. - 016_0363_c_17L如先推求一切法生相不可得,爾時卽無滅相。破生故無生,無生云何有滅?若汝意猶未已,今當更說破滅因緣:
-
만일 법(法)이 존재한다면
이것에는 소멸이 없네.
한 법에 존재와 비존재가
있을 수 없네. (31) -
016_0363_c_20L若法是有者,
是卽無有滅,
不應於一法,
而有有無相。
-
016_0364_a_01L
법이 존재할 때 멸상을 구할 수 없다. 왜 그러한가? 어떻게 한 법에 존재와 비존재가 있을 수 있겠는가? 마치 빛과 그림자는 장소를 같이하지 않는 것과 같다. - 016_0363_c_22L諸法有時,推求滅相不可得。何以故?云何一法中亦有亦無相?如光影不同處。
-
만일 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것에는 소멸이 없네.
마치 제2의 머리가
없기에 자를 수 없는 것처럼. (32) -
016_0364_a_02L復次,
若法是無者,
是卽無有滅。
譬如第二頭,
無故不可斷。
-
또 만약 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멸상이 없다. 마치 제2의 머리와 제3의 손이 없기에 자를 수 없는 것처럼. - 016_0364_a_04L法若無者,則無滅相。如第二頭、第三手,無故不可斷。
-
법은 자기에 의해서 소멸하지 않네.
다른 것에 의해서도 소멸하지 않네.
자기에 의해서 발생하지 않고
다른 것에 의해서도 발생하지 않듯이. (33) -
016_0364_a_06L復次,
法不自相滅,
他相亦不滅,
如自相不生,
他相亦不生。
-
또 앞에서 생상(生相)에 관해 말할 때 발생은 자기로부터 발생하지 않고 다른 것으로부터도 발생하지 않는다고 한 것과 같다. 만일 자기로부터 발생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모든 사물은 뭇 연(緣)에서 발생한다. 손가락 끝이 자기를 만질 수 없듯이, 그렇듯이 발생은 자기로부터 발생할 수 없다. 다른 것으로부터 발생한다는 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발생이 아직 있지 않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부터 발생하지 않는다. 이 발생이 있지 않기 때문에 자체(自體)가 없다. 자체가 없기에 다른 것도 없다. 그러므로 다른 것으로부터 발생한다는 것도 옳지 않다. 소멸 또한 그와 같다. 자기에 의해서 소멸하지 않고 다른 것에 의해서도 소멸하지 않는다. - 016_0364_a_08L如先說生相,生不自生,亦不從他生。若以自體生,是則不然。一切物皆從衆緣生,如指端不能自觸。如是生不能自生,從他生亦不然。何以故?生未有故,不應從他生。是生無故,無自體;自體無故,他亦無,是故從他生亦不然。滅法亦如是,不自相滅,不他相滅。
-
발생과 머묾과 소멸이 성립하지 않기에
유위가 있지 않네.
유위법이 없는데
어떻게 무위가 있을 수 있겠는가? (34) -
016_0364_a_15L復次,
生住滅不成,
故無有有爲,
有爲法無故,
何得有無爲?
-
016_0364_b_01L
또 그대는 앞에서 발생과 머묾과 소멸이 있기에 유위법이 있으며 유위법이 있기에 무위법이 있다고 말했다. 이제 이치에 맞게 궁구해 보건대 3상(相)은 얻을 수가 없다. 어떻게 유위법이 있을 수 있겠는가? 앞에서 상(相)이 없는 법(法)은 없다고 말한 바와 같다. 유위법이 없는데 어떻게 무위법이 있을 수 있겠는가? 무위의 상은 발생하지 않음ㆍ머물지 않음ㆍ소멸하지 않음이다. 유위의 상이 그쳤기에 무위의 상이라 한다. 무위 자체에는 별도의 상이 없다. 이 세 가지 상3)에 의지해서 무위의 상이 있는 것이다. 가령 불[火]에는 뜨거움의 상이 있고 땅[地]에는 단단함의 상이 있고 물[水]에는 차가움의 상이 있지만 무위는 그렇지 못하다. - 016_0364_a_18L汝先說有生、住、滅相故有有爲,以有有爲,故有無爲。今以理推求,三相不可得,云何得有有爲?如先說無有無相法。有爲法無故,何得有無爲?無爲相名不生、不住、不滅。止有爲相故,名無爲相。無爲自無別相,因是三相,有無爲相。如火爲熱相,地爲堅相,水爲冷相,無爲則不然。
- 【문】 만일 이 발생ㆍ머묾ㆍ소멸이 필경 있지 않은 것이라면 어떻게 논서에서 이름을 얻을 수 있는가?
- 016_0364_b_03L問曰:若是生、住、滅畢竟無者,云何論中得說名字?
-
【답】
환영과 같고 꿈과 같고
건달바성(乾闥婆城)과 같이
말한 바 발생과 머묾과 소멸은
그 상(相)이 또한 이와 같네. (35) -
016_0364_b_04L答曰:
如幻亦如夢,
如乾闥婆城,
所說生住滅,
其相亦如是。
-
생상과 주상과 멸상은 확정된 것[決定]이 없다. 범인(凡人)은 탐착(貪著)해서 확정된 것이 있다고 말한다. 성인들께서는 연민을 품고 그 전도(顚倒)를 그치게 하고자 다시 그 탐착된 이름[名字]을 갖고서 말한다. 말[語言]은 동일하지만 그 의도[心]가 다르다. 이와 같이 발생과 머묾과 소멸의 상(相)을 말하는 것이기에 논박이 있을 수 없다. 마치 환영이나 화작(化作)된 것과 같으니, 그 유래하는 바를 물어 따질 수 없으며, 그 속에 슬픔과 기쁨의 표상[想]이 있을 수 없다. 그저 눈에 보이는 것일 따름이다. 꿈에 보이는 것과 같은 것은 실체를 구할 수 없다. 건달바성과 같은 것은 해가 떠오를 때 나타나는 것이기에 실체가 없다. 그저 실체가 없이 이름을 쓰는 것일 뿐이니 오래지 않아 소멸한다. 발생과 머묾과 소멸도 이와 같다. 범부는 분별해서 있다고 하지만 지혜로운 이는 구하고자 하여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 016_0364_b_06L生、住、滅相無有決定,凡人貪著,謂有決定。諸賢聖憐愍,欲止其顚倒,還以其所著名字爲說,語言雖同,其心則異。如是說生、住、滅相,不應有難。如幻化所作,不應責其所由,不應於中有憂喜想,但應眼見而已。如夢中所見,不應求實。如乾闥婆城,日出時現,而無有實,但假爲名字,不久則滅。生、住、滅亦如是。凡夫分別爲有,智者推求則不可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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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행위와 행위자를 관찰하는 장[觀作作者品]12偈 - 016_0364_b_16L中論觀作作者品第八[十二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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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지금 분명히 행위가 있고 행위자가 있고 행위 수단(所用作法)이 있다. 세 가지가 결합해서 과보가 있다. 그러므로 행위자[作者]와 행위[作業]가 있다. - 016_0364_b_17L問曰:現有作、有作者、有所用作法,三事和合,故有果報,是故應有作者、作業。
- 016_0364_c_01L【답】 이제까지 매 장에서 모든 법을 타파했기 때문에 남아 있는 법이 없다. 예를 들어 3상(相)을 타파하는 경우를 보자. 3상이 있지 않기에 유위가 있지 않고, 유위가 있지 않기에 무위가 있지 않다. 유위와 무위가 있지 않기에 모든 법이 있지 않다. 만약 행위와 행위자가 유위라면 유위를 다룰 때 이미 타파되었고 만약 무위라면 무위를 다룰 때 이미 타파되었다. 다시 묻지 않아야 하는데 그대는 집착하는 마음이 깊어 다시 묻고 있다. 이제 다시 답하겠다.
- 016_0364_b_20L答曰:上來品品中,破一切法皆無有餘。如破三相,三相無故,無有有爲;有爲無故,無無爲。有爲、無爲無故,一切法盡無。作、作者若是有爲,有爲中已破;若是無爲,無爲中已破,不應復問。汝著心深故,而復更問,今當復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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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하는 행위자는
실재하는 행위를 하지 않네.
실재하지 않는 행위자는
실재하지 않는 행위를 하지 않네. (1) -
016_0364_c_02L決定有作者,
不作決定業
決定無作者,
不作無定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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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먼저 행위자가 실재한다면 행위가 실재할 것이니, 행위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먼저 행위자가 실재하지 않는다면 행위가 실재하지 않을 것이니, 또한 행위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 016_0364_c_04L若先定有作者,定有作業,則不應作;若先定無作者,定無作業,亦不應作。何以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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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하는 행위에는 지음[作]이 없네.
이 행위에는 행위자가 없네.
실재하는 행위자에게는 지음이 없네.
행위자에게 또한 행위가 없네.(2) -
016_0364_c_07L決定業無作,
是業無作者,
定作者無作,
作者亦無業。
-
만약 먼저 행위가 실재한다면 다시 행위자가 있지 않을 것이다. 또 행위자 없이 행위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다. 만약 먼저 행위자가 실재한다면 다시 행위가 있지 않을 않을 것이다. 또 행위 없이 행위자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실재하는 행위자와 실재하는 행위에는 지음[作]이 있을 수 없다. 실재하지 않는 행위자와 실재하지 않는 행위에도 지음이 있을 수 없다. 왜 그러한가? 본래 있지 않기 때문이다. 행위자가 있고 행위가 있어도 지음이 없거늘, 하물며 행위자가 있지 않고 행위가 있지 않은 경우이겠는가? - 016_0364_c_09L若先決定有作業,不應更有作者,又離作者,應有作業,但是事不然。若先決定有作者,不應更有作業,又離作業,應有作者,但是事不然。是故決定作者、決定作業,不應有作;不決定作者、不決定作業,亦不應有作。何以故?本來無故,有作者、有作業尚不能作,何況無作者、無作業?
-
만약 행위자가 실재하고
또한 행위가 실재한다면
행위자와 행위는
원인이 없는 것에 떨어지고 말리라. (3) -
016_0364_c_17L復次,
若定有作者,
亦定有作業,
作者及作業,
卽墮於無因。
-
또 만약 먼저 행위자가 실재하고 행위가 실재하는데 그대가 행위자에게 지음이 있다고 말한다면, 원인이 없는 되리라. 행위를 떠나 행위자가 있고 행위자를 떠나 행위가 있는 것이니, 인연에 의존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 016_0364_c_19L若先定有作者,定有作業,汝謂作者有作,卽爲無因。離作業,有作者,離作者,有作業,則不從因緣有。
- 【문】 만약 인연에 의존하지 않고서 행위자가 있고 행위가 있다고 한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 016_0364_c_22L問曰:若不從因緣,有作者、有作業,有何咎?
-
016_0365_a_01L
【답】
만약 원인이 없는 것에 떨어진다면
원인도 없고 결과도 없는 것이네.
지음이 없고 행위자가 없고
행위 수단이 없는 것이네. (4) -
016_0364_c_23L答曰:
若墮於無因,
則無因無果,
無作無作者,
無所用作法。
-
만약 지음 등이 없다면
죄와 복이 없네.
죄와 복 등이 없으니
죄와 복의 과보(果報)도 없네. (5) -
016_0365_a_02L若無作等法,
則無有罪福,
罪福等無故,
罪福報亦無。
-
만약 과보가 없다면
또한 열반도 없네.
모든 있을 수 있는 지음이
모두 공허해서 결과가 없게 되네. (6) -
016_0365_a_03L若無罪福報,
亦無有涅槃。
諸可有所作,
皆空無有果。
-
만약 원인이 없는 것에 떨어진다면 모든 법들은 원인이 없고 결과가 없는 것이 된다. ‘발생하게 하는 법’을 원인이라 하고 ‘발생하는 법’을 결과라 하는데 이 둘이 없게 된다. 이 둘이 없기 때문에 지음이 없고 행위자가 없고 행위 수단이 없다. 또한 죄와 복도 없다. 죄와 복이 없기 때문에 죄와 복의 과보 및 열반의 도(道)가 없다. 그러므로 원인이 없는 것에서 생길 수 없다. - 016_0365_a_04L若墮於無因,一切法則無因無果。能生法名爲因,所生法名爲果。是二卽無。是二無故,無作、無作者,亦無所用作法,亦無罪福。罪福無故,亦無罪福果報及涅槃道,是故不得從無因生。
- 【문】 만약 행위자가 실재하지 않으면서 실재하지 않는 행위를 일으킨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 016_0365_a_09L問曰:若作者不定,而作不定業,有何咎?
- 【답】 하나가 없어도 행위를 일으킬 수 없는데 하물며 둘 다 없음이겠는가? 마치 화인(化人)이 허공으로 집을 만드는 것과 같다. 그저 말[言說]이 있을 따름이지 행위자와 행위는 없다.
- 016_0365_a_11L答曰:一事無,尚不能起作業,何況二事都無。譬如化人,以虛空爲舍,但有言說,而無作者、作業。
- 【문】 만약 행위자가 없고 행위가 없다면 지음[所作]이 있을 수 없다. 이제 행위자가 있고 행위가 있으니 지음[作]이 있을 것이다.
- 016_0365_a_13L問曰:若無作者、無作業,不能有所作,今有作者、有作業,應有作。
-
【답】
실재하면서 실재하는 않는 행위자가
두 행위를 할 수 없네.
존재와 비존재는 모순되기 때문에
한 곳에 둘이 있지 않네. (7) -
016_0365_a_15L答曰:
作者定不定,
不能作二業,
有無相違故,
一處則無二。
-
실재하면서 실재하지 않는 행위자가 실재하면서 실재하지 않는 행위를 할 수 없다. 왜 그러한가? 존재와 비존재는 모순되기 때문에 한 곳에 둘이 있지 않다. 존재는 확정된 것[決定]이고 비존재는 확정되지 않은 것[不決定]이다. 한 사람 한 사물에 어떻게 존재와 비존재가 있겠는가? - 016_0365_a_17L作者定不定,不能作定不定業。何以故?有無相違故,一處不應有二,有是決定,無是不決定。一人一事,云何有有無?
-
존재하는 행위자는 존재하지 않는 행위를 하지 않으며,
존재하지 않는 행위자는 존재하는 행위를 하지 않네.
만약 행위와 행위자가 존재한다고 한다면
그 과실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네. (8) -
016_0365_a_21L復次,
有不能作無,
無不能作有,
若有作作者,
其過如先說。
-
016_0365_b_01L
또 만약 행위자가 존재하는데 행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지음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만약 행위자가 존재하지 않는데 행위가 존재한다면 또한 지음이 있을 수 없다. 왜 그러한가? 행위자가 존재하는데 만약 행위가 먼저 존재한다면 행위자가 다시 무엇을 짓겠는가? 만약 행위가 먼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지을 수 있을 것인가? 이와 같다면 죄와 복 등의 인연과 과보를 파괴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존재하는 행위자는 존재하지 않는 행위를 하지 않으며, 존재하지 않는 행위자는 존재하는 행위을 하지 않네. 만약 행위와 행위자가 있다고 한다면 그 과실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네’ 라고 말한 것이다. - 016_0365_a_23L若有作者而無業,何能有所作?若無作者而有業,亦不能有所作。何以故?如先說有中,若先有業,作者復何所作?若先無業,云何可得作?如是則破罪福等因緣果報。是故偈中說:“有不能作無,無不能作有,若有作作者,其過如先說。”
-
행위자는 실재하는 행위를 하지 않네.
실재하지 않는 행위도 하지 않네.
실재하면서 실재하지 않는 행위도 하지 않네.
그 과실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네. (9) -
016_0365_b_07L復次,
作者不作定,
亦不作不定,
及定不定業,
其過如先說。
-
또 실재하는 행위는 이미 타파되었다. 실재하지 않는 행위도 타파되었고 실재하면서 실재하지 않는 행위도 타파되었다. 지금은 일시에 모든 것을 타파하고자 이 게송을 읊은 것이다. 그러므로 행위자는 세 가지의 행위를 짓지 않는다. 이제 세 가지의 행위자 또한 행위를 짓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 016_0365_b_09L定業已破,不定業亦破,定不定業亦破,今欲一時摠破,故說是偈。是故作者不能作三種業,今三種作者亦不能作業。何以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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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자가 실재하든, 실재하지 않든,
실재하면서 실재하지 않든
행위를 하지 못하네.
그 과실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네. (10) -
016_0365_b_13L作者定不定,
亦定亦不定,
不能作於業,
其過如先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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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자가 실재하든, 실재하지 않든, 실재하면서 실재하지 않든 행위를 짓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앞에서 세 가지 과실의 이유를 든 것과 같이 여기서도 말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 행위자와 행위를 구해 보아도 모두 얻을 수 없다. - 016_0365_b_15L作者定不定,亦定亦不定,不能作於業。何以故?如先三種過因緣,此中應廣說。如是一切處,求作者、作業皆不可得。
- 【문】 만약 행위가 없고 행위자가 없다면 다시 원인이 없는 것에 떨어질 것이다.
- 016_0365_b_18L問曰:若言無作、無作者,則復墮無因。
- 【답】 이 행위는 뭇 연(緣)에 의존해서 생긴 것이다. 가명(假名)으로 있다고 하는 것이지 확정된 것[決定]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말하는 바와 같지 않다. 왜 그러한가?
- 016_0365_b_19L答曰:是業從衆緣生,假名爲有,無有決定,不如汝所說。何以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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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에 의존해서 행위자가 있고
행위자에 의존해서 행위가 있네.
행위를 성립시키는 이치가 이와 같으니,
이 밖에 다른 것이 없네. (11) -
016_0365_b_21L因業有作者,
因作者有業,
成業義如是,
更無有餘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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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6_0365_c_01L
행위에 미리 확정된 것[決定]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 의존해서 행위를 일으키고 행위에 의존해서 행위자가 있다. 행위자 또한 확정된 것이 있는 것이 아니다. 행위에 의존해서 행위자라고 하는 것이다. 둘이 화합하기 때문에 행위와 행위자가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화합에 의존해서 생긴 것이라면 자성이 없는 것이다. 자성이 없기에 공(空)하고 공하기에 발생하는 것[所生]이 없는 것이다. 그저 범부가 기억하고 표상해서 분별하는 대로 행위가 있고 행위자가 있다고 말하는 것일 뿐이다. 제일의(第一義)에는 행위가 있지 않고 행위자가 있지 않다. - 016_0365_b_23L業先無決定,因人起業,因業有作者。作者亦無決定,因有作業,名爲作者。二事和合故,得成作、作者。若從和合生,則無自性;無自性故空,空則無所生。但隨凡夫憶想分別故,說有作業、有作者,第一義中無作業、無作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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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와 행위자와 같이
취착(取著)과 취착하는 자도 타파되네.
그리고 모든 법들도
이와 같이 타파되네. (12) -
016_0365_c_06L復次,
如破作作者,
受受者亦爾,
及一切諸法,
亦應如是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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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행위와 행위자는 서로 분리될 수 없으며 서로 분리되지 않기에 확정되지 않으며 확정된 것이 없기에 자성이 없는 것과 같이, 취착과 취착하는 자도 이와 같다. ‘취착(取著)’이란 5온(蘊)의 몸[身]을 말한다. ‘취착하는 자’란(그러한) 사람을 말한다. 이렇듯이 사람을 떠나 5온이 있지 않으며 5온을 떠나 사람이 있지 않으니, 단지 뭇 연(緣)에 의존해서 생기는 것일 따름이다. 취착과 취착하는 자와 같이 그 밖의 모든 법도 이와 같이 타파된다. - 016_0365_c_08L如作、作者,不得相離;不相離故,不決定;無決定故,無自性。受、受者亦如是。受名五陰身,受者是人。如是離人無五陰,離五陰無人,但從衆緣生,如受、受者,餘一切法亦應如是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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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선행하는 존재를 관찰하는 장[觀本住品]12偈 - 016_0365_c_13L中論觀本住品第九[十二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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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어떤 이가 말한다.
안(眼)과 이(耳) 등의 모든 근(根)과
고(苦)와 락(樂) 등의 모든 법,
이와 같은 것들은 누군가에게 속해 있는데
이것을 선행하는 존재[本住]라고 하네. (1) -
016_0365_c_14L問曰:有人言:
眼耳等諸根,
苦樂等諸法,
誰有如是事?
是則名本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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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선행하는 존재[本住]가 있지 않다면
누가 안[眼] 등의 법을 소유하겠는가?
그러니 앞서 선행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네. (2) -
016_0365_c_17L若無有本住,
誰有眼等法?
以是故當知,
先已有本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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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眼)과 이(耳) 등의 모든 근(根)’이라고 한 것은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ㆍ명(命) 등의 모든 근(根)들을 이름한 것이다. ‘고와 락 등의 모든 법’이라고 한 것은 고수(苦受)ㆍ낙수(樂受)ㆍ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ㆍ상(想)ㆍ사(思)ㆍ억념(憶念) 등 심법과 심소법을 이름한 것이다.
어떤 논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앞서서 안(眼) 등의 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선행하는 존재[本住]가 있어서 이 선행하는 존재에 의존해서 안(眼) 등의 모든 근이 증장(增長)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선행하는 존재가 있지 않다면 신(身)과 안[眼] 등의 모든 근은 무엇에 의존해서 증장할 수 있겠는가?” - 016_0365_c_18L眼耳鼻舌身命等諸根,名爲眼耳等根,苦受、樂受、不苦不樂受、想、思、憶念等心心數法,名爲苦樂等法。有論師言:先未有眼等法,應有本住,因是本住,眼等諸根得增長;若無本住,身及眼等諸根爲因何生而得增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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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6_0366_a_01L
【답】
만약 안(眼) 등의 근과
고(苦)ㆍ낙(樂) 등의 법을 떠나
앞서 선행하는 존재가 있다면
무엇에 의해 알 수 있는 것일까? (3) -
016_0366_a_01L答曰:
若離眼等根,
及苦樂等法,
先有本住者,
以何而可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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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안(眼)과 이(耳) 등의 근(根)과 고와 락 등의 법(法)을 떠나 앞서서 선행하는 존재가 있다면, 무엇에 의해 말할 수 있으며 무엇에 의해 알 수 있는 것일까? 바깥의 법(法)인 물단지ㆍ옷 등은 안(眼) 등 근에 의해 알 수 있으며, 안의 법은 고(苦)ㆍ락(樂) 등의 근에 의해 알 수 있다. 경전에서 “괴멸하는 것[可壞]이 색(色)의 특징이고, 느끼는 것[能受]이 수(受)의 특징이고, 인식하는 것[能識]이 식(識)의 특징이다”고 말하고 있다. 그대가 안(眼)과 이(耳), 고(苦)와 낙(樂) 등을 떠나서 선행하는 존재가 있다고 말한다면 무엇에 의해 이 법이 있다는 것을 알아서 말할 수 있는가? - 016_0366_a_03L若離眼耳等根,苦樂等法,先有本住者,以何可說?以何可知?如外法甁、衣等。以眼等根得知,內法以苦樂等根得知,如經中說:“可壞是色相,能受是受相,能識是識相。”汝說離眼耳苦樂等,先有本住者,以何可知,說有是法?
- 【문】 어떤 논사는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것, 보며 눈짓하는 것, 수명, 사유, 고(苦)와 낙(樂), 증오와 애정, 움직임 등이 ‘나[神]’의 특징이다. 만약 ‘나[神]’가 있지 않다면 어떻게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것 등의 특징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안과 이 등의 근(根)과, 고와 락 등의 법(法)을 떠나 앞서서 선행하는 존재가 있다”고 말한다.
- 016_0366_a_09L問曰:有論師言:出入息、視眴、壽命、思惟、苦樂、憎愛、動發等是神相。若無有神,云何有出入息等相?是故當知離眼耳等根、苦樂等法,先有本住。
- 【답】 만약 이 ‘나’가 있다면 몸 안에 있을 것이다. 마치 벽 속에 기둥이 들어 있듯이. 만약 (‘나’가) 몸 바깥에 있다면 마치 사람이 갑옷을 입은 것과 같을 것이다. 만약 몸 안에 있다면 몸은 괴멸할 수 없을 것이다. ‘나’가 항상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가 몸 안에 있다고 말한다면 말만이 있는 것일 뿐 허망해서 진실이 없는 것이다. 만약 몸 바깥에 있어서 몸을 덮는 것이 갑옷과 같다면 몸은 보이질 않을 것이다. ‘나’가 세밀하게 덮고 있기 때문이다. 또 괴멸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몸이 괴멸하는 것을 실제로 본다. 그러므로 고와 낙 등을 떠나 앞서서 여타의 법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 팔을 잘라냈을 때 ‘나’는 움츠러들어 안에 있어서 잘라낼 수 없다고 말한다면 머리를 잘라냈을 때도 움츠러들어 안에 있기에 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죽음이 있다. 그러므로 고와 락 등을 떠나 앞서서 ‘나’가 있다고 한다면 말만이 있는 것일 뿐 허망해서 진실이 없는 것이다.
- 016_0366_a_13L答曰:是神若有,應在身內,如壁中有柱。若在身外,如人被鎧。若在身內,身則不可壞,神常在內故,是故言神在身內,但有言說,虛妄無實。若在身外,覆身如鎧者,身應不可見,神細密覆故,亦應不可壞,而今實見身壞。是故當知離苦樂等,先無餘法。若謂斷臂時,神縮在內不可斷者,斷頭時,亦應縮在內不應死,而實有死,是故知離苦樂等,先有神者,但有言說,虛妄無實。
-
016_0366_b_01L또 만약 몸이 크면 ‘나[神]’도 크고 몸이 작으면 ‘나’도 작은 것이 등불이 크면 밝음도 크고 등불이 작으면 밝음도 작은 것과 같다고 말한다면, 그렇다면 ‘나’는 몸을 따르는 것이기에 상주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몸을 따르는 것이라면 몸이 없을 때 ‘나’도 없을 것이다. 마치 등불이 사라지면 밝음도 사라지듯이. 만약 ‘나’가 무상하다면 안(眼)과 이(耳), 고(苦)와 락(樂) 등과 같을 것이다. 그러므로 안과 이 등을 떠나 앞서서 별도의 ‘나’가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가령 중풍[風狂病]에 걸린 사람이 의지대로 하지 못해서 하지 않아야 할 짓을 하는 것과 같다. 만약 ‘나’가 모든 행위의 주인이라면 어떻게 의지대로 하지 못한다고 말하겠는가? 만약 중풍이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면 ‘나’를 떠나서 따로 하는 짓이 있는 것이리라. 이와 같이 여러 가지로 궁구해 보아도 안(眼)과 이(耳) 등의 근(根)과, 고(苦)와 락(樂) 등의 법(法)을 떠나 앞서서 선행하는 존재가 있지 않다.
만약 안(眼)과 이(耳) 등의 근(根)과 고(苦)와 락(樂) 등의 법을 떠나 선행하는 존재가 있다고 굳이 말한다면 이런 일은 있지 않다. 왜 그러한가? - 016_0366_a_23L復次,若言身大則神大,身小則神小,如燈大則明大,燈小則明小者。如是神則隨身不應常,若隨身者,身無則神無,如燈滅則明滅。若神無常,則與眼耳苦樂等同,是故當知離眼耳等,先無別神。復次,如風狂病人,不得自在,不應作而作。若有神是諸作主者,云何言不得自在?若風狂病不惱神者,應離神別有所作。如是種種推求,離眼耳等根、苦樂等法,先無本住。若必謂離眼耳等根、苦樂等法,有本住者,無有是事。何以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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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안(眼)과 이(耳) 등을 떠나
선행하는 존재가 있다고 한다면
또한 선행하는 존재를 떠나
안과 이 등이 있을 것이네. (4) -
016_0366_b_12L若離眼耳等,
而有本住者,
亦應離本住,
而有眼耳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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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선행하는 존재가 안과 이 등의 근(根)과 고와 락 등의 법(法)을 떠나 앞서서 있다면, 이제 안과 이 등의 근과 고와 락 등의 법도 선행하는 존재를 떠나 있을 것이다. - 016_0366_b_14L若本住離眼耳等根、苦樂等法先有者,今眼耳等根、苦樂等法亦應離本住而有。
- 【문】 둘이 서로 분리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단지 선행하는 존재를 있게 하는 것일 뿐이다.
- 016_0366_b_17L問曰:二事相離可爾,但使有本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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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법(法)에 의해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며
사람에 의해 법이 있다는 것을 아네.
법 없이 어떻게 사람이 있을 수 있으며
사람 없이 어떻게 법이 있을 수 있겠는가? (5) -
016_0366_b_18L答曰:
以法知有人,
以人知有法。
離法何有人,
離人何有法?
-
‘법(法)’이란 안(眼)과 이(耳), 고와 낙 등이다. ‘사람’이란 선행하는 존재이다. 그대가 법이 있기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사람이 있기에 법이 있다는 것을 안다고 말한다면, 이제 안과 이 등의 법이 없이 어찌 사람이 있겠으며 사람이 없이 어찌 안과 이 등의 법이 있겠는가? - 016_0366_b_20L法者,眼耳苦樂等,人者是本住。汝謂以有法故,知有人;以有人故,知有法。今離眼耳等法何有人?離人何有眼耳等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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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6_0366_c_01L
모든 안(眼) 등의 근(根)에
선행하는 존재가 실재하지 않네.
안(眼)과 이(耳) 등의 근(根)들이
각각 다르게 분별하는 것이네. (6) -
016_0366_c_01L復次,
一切眼等根,
實無有本住,
眼耳等諸根,
異相而分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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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안과 이 등의 모든 근과 고와 낙 등의 모든 법에는 선행하는 존재[本住]가 실재하지 않는다. 안(眼)이 색에 의존해서 안식(眼識)이 발생한다. 인과 연들이 화합하기에 안과 이 등의 모든 근이 있다는 것을 알지, 선행하는 존재에 의해 아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게송에서 ‘모든 안 등의 근에는 선행하는 존재가 실재하지 않네. 안과 이 등의 모든 근(根)이 각각 분별하는 것이네’라고 말한 것이다. - 016_0366_c_03L眼耳等諸根,苦樂等諸法,實無有本住。因眼緣色生眼識,以和合因緣,知有眼耳等諸根。不以本住故知,是故偈中說:“一切眼等根,實無有本住,眼耳等諸根,各自能分別。”
-
【문】
만약 안(眼) 등의 모든 근에
선행하는 존재가 있지 않다면
안 등 하나하나의 근이
어떻게 경계를 인식할 수 있겠는가? (7) -
016_0366_c_08L問曰:
若眼等諸根,
無有本住者,
眼等一一根,
云何能知塵?
-
만약 모든 안과 이 등의 모든 근(根)과 고와 락 등의 모든 법(法)에 선행하는 존재가 있지 않다면, 지금 하나하나의 근이 경계를 인식할 수 있겠는가? 안과 이 등의 모든 근에는 사유 작용이 없기에 인식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경계를 인식한다. (그러므로) 안과 이 등의 모든 근을 떠나 다시 경계를 인식하는 것이 있다. - 016_0366_c_10L若一切眼耳等諸根、苦樂等諸法,無本住者,今一一根云何能知塵?眼耳等諸根無思惟,不應有知,而實知塵。當知離眼耳等諸根,更有能知塵者。
- 【답】 만약 그렇다면 하나하나의 근 속에 각각 인식하는 자가 있는 것인가, 한 인식하는 자가 근들 속에 있는 것인가? 둘 모두 과실이 있다. 왜 그러한가?
- 016_0366_c_14L答曰:若爾者,爲一一根中各有知者?爲一知者在諸根中?二俱有過。何以故?
-
보는 자가 듣는 자이고
듣는 자가 느끼는 자라면
이와 같은 근들에는
선행하는 존재가 있을 것이네. (8) -
016_0366_c_16L見者卽聞者,
聞者卽受者,
如是等諸根,
則應有本住。
-
만약 보는 자가 듣는 자이고 듣는 자가 느끼는 자라면, 이 자는 한 ‘나[神]’이다. 이와 같이 안 등의 근들에는 앞서서 선행하는 존재가 있어서 색(色)ㆍ성(聲)ㆍ향(香) 등을 고유하게 인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혹은 눈[眼]으로 소리[聲]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사람이 여섯 감관[六向]을 갖고서 의지하는 대로 보거나 듣는 것과 같다. 만약 듣는 자와 보는 자가 같다면 안 등의 근(根)으로 의지하는 대로 보거나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다. - 016_0366_c_18L若見者卽是聞者,聞者卽是受者,則是一神。如是眼等諸根,應先有本住。色聲香等無有定知者,或可以眼聞聲,如人有六向,隨意見聞。若聞者、見者是一,於眼等根,隨意見聞,但是事不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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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6_0367_a_01L
만약 보는 자와 듣는 자와
느끼는 자가 상이하다면
볼 때 또한 들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가 많을 것이네. (9) -
016_0367_a_01L若見聞各異,
受者亦各異,
見時亦應聞,
如是則神多。
-
만약 보는 자와 듣는 자와 느끼는 자가 상이하다면, 볼 때 또한 들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보는 자를 떠나서 듣는 자가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비(鼻)ㆍ설(舌)ㆍ신(身)에 있어서도 ‘나[神]’는 일시에 행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사람은 하나인데 ‘나’는 많을 것이다. 모든 감관[根]이 일시에 대상[塵]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보는 자와 듣는 자와 느끼는 자가 동시에 작용하지 않는다. - 016_0367_a_03L若見者、聞者、受者各異,則見時亦應聞。何以故?離見者有聞者故。如是鼻舌身中,神應一時行。若爾者,人一而神多,以一切根一時知諸塵,而實不爾,是故見者、聞者、受者不應俱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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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과 이 등의 모든 근과
고와 락 등의 모든 법을
발생하게 하는 대(大)들
그 대(大)들에도 ‘나’가 있지 않네. (10) -
016_0367_a_08L復次,
眼耳等諸根,
苦樂等諸法,
所從生諸大,
彼大亦無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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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약 어떤 사람이 안(眼)과 이(耳) 등의 근들과 고(苦)와 낙(樂) 등의 법들을 떠나 별도로 선행하는 존재가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이미 타파된 것이다. 이제 안과 이 등의 원인인 4대(大)의 경우를 보면, 이 4대에도 선행하는 존재가 있지 않다. - 016_0367_a_10L若人言離眼耳等諸根、苦樂等諸法,別有本住,是事已破。今於眼耳等所因四大,是四大中亦無本住。
- 【문】 만약 안과 이 등의 근들과 고와 락 등의 법들에 선행하는 존재[本住]가 있지 않다면, 그럴 수 있다. 안과 이 등의 근들과 고와 락 등의 법들은 있을 것이다.
- 016_0367_a_13L問曰:若眼耳等諸根、苦樂等諸法,無有本住可爾;眼耳等諸根、苦樂等諸法應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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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만약 안(眼)과 이(耳) 등의 모든 근과
고(苦)와 락(樂) 등의 모든 법에
선행하는 존재가 있지 않다면,
안(眼) 등도 있지 않을 것이네. (11) -
016_0367_a_15L答曰:
若眼耳等根,
苦樂等諸法,
無有本住者,
眼等亦應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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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안(眼)과 이(耳)나 고(苦)와 락(樂) 등의 모든 법S에 선행하는 존재가 있지 않다면, 누구에게 이 안과 이 등이 있겠으며 무엇을 연(緣)으로 해서 있겠는가? 그러므로 안과 이 등도 있지 않다. - 016_0367_a_18L若眼耳苦樂等諸法無有本住者,誰有此眼耳等?何緣而有?是故眼耳等亦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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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眼) 등에는 선행하는 존재가 있지 않네.
지금도 후에도 다시 있지 않네.
삼세(三世)에 있지 않으니
있다거나 없다고 하는 분별이 없네. (12) -
016_0367_a_21L復次,
眼等無本住,
今後亦復無,
以三世無故,
無有無分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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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6_0367_b_01L
또 선행하는 존재[本住]를 사유하고 궁구해 보아도 안(眼) 등보다 이전에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 (동시에) 있는 것도 아니고 이후에 있는 것도 아니다. 삼세에 있지 않다면 발생이 없고 적멸해 있는 것이므로, 논박이 있을 수 없다. 선행하는 존재가 있지 않은데 어떻게 눈 등이 있겠는가? 이와 같이 묻고 답하는 가운데 희론이 사라졌으며 희론이 사라졌으니 모든 법들이 공하다. - 016_0367_a_23L思惟推求本住於眼等,先無,今後亦無。若三世無,卽是無生寂滅,不應有難。若無本住,云何有眼等?如是問答,戲論則滅;戲論滅故,諸法則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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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불과 장작을 관찰하는 장[觀燃可燃品]16偈 - 016_0367_b_04L中論觀燃可燃品第十[十六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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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취착과 취착하는 자가 있다. 마치 불과 장작이 있듯이. 불은 취착하는 자이고 장작은 취착 즉 5온[蔭]이다. - 016_0367_b_05L問曰:應有受、受者,如燃、可燃。燃是受者,可燃是受,所謂五陰。
- 【답】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불과 장작이 모두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과 장작이 한 법(法)4)으로 성립한다고 하든 두 법5)으로 성립한다고 하든 둘 다 성립하지 않는다.
- 016_0367_b_07L答曰:是事不然。何以故?燃、可燃俱不成故。燃、可燃若以一法成,若以二法成,二俱不成。
- 【문】 같음[一法]과 다름[異法]은 일단 제쳐놓더라도, 만약 불과 장작이 있지 않다면 이제 어떻게 같음[一相]과 다름[異相]으로 타파할 수 있겠는가? 마치 토끼의 뿔이나 거북이의 털은 있지 않기 때문에 타파될 수 없듯이. 세간에서 눈에 사물이 실재하는 것이 보여야 이후에 사유할 수 있는 것이다. 마치 금이 있고 난 이후에 달굴 수 있고 두드릴 수 있는 것처럼. 만약 불과 장작이 있지 않다면 같다거나 다르다고 사유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그대가 같음과 다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불과 장작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 ‘있다[有]’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이미 있다[已有]’는 것이다.
- 016_0367_b_09L問曰:且置一異法。若言無燃、可燃,今云何以一異相破?如兔角龜毛,無故不可破。世閒眼見實有事,而後可思惟。如有金,然後可燒可鍛。若無燃、可燃,不應以一異法思惟。若汝許有一異法,當知有燃、可燃。若許有者,則爲已有。
- 016_0367_c_01L【답】 세속의 법을 따라서 언설(言說)하는 것이니 과실이 있을 수 없다. 불과 장작이 같다고 말할 때도 다르다고 말할 때도 (그것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세속의 언설이 없이는 논증할 길이 없다. 불과 장작을 말하지 않고서 어떻게 (그것들의 있다는 것을) 타파할 수 있겠는가? 말하는 일이 없이 주장을 표명할 수는 없다. 가령 어떤 논자가 있음[有]과 없음[無]을 타파하려 한다면 반드시 있음과 없음을 말해야 한다. 있음과 없음을 언표했다고 해서 있음과 없음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세간의 언설을 따르는 것이기에 과실이 없다. 만약 입으로 말했다고 해서 이것이 곧 인정하는 것이라면, 그대가 ‘타파한다’는 말을 하자마자 그 말이 타파되어야 할 것이다. 불과 장작도 이와 같다. (불과 장작이란) 말을 하더라도 (그것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같음[一法]과 다름[異法]으로 불과 장작을 사유한다면 둘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 016_0367_b_16L答曰:隨世俗法言說,不應有過。燃、可燃,若說一,若說異,不名爲受。若離世俗言說,則無所論。若不說燃、可燃,云何能有所破?若無所說,則義不可明。如有論者,欲破有無,必應言有無,不以稱有無故,而受有無。是以隨世閒言說故無咎。若口有言,便是受者,汝言破卽爲自破。燃、可燃亦如是,雖有言說,亦復不受。是故以一異法思惟燃、可燃,二俱不成。何以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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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불이 곧 장작이라면
행위와 행위자는 하나일 것이네.
만약 불이 장작과 다르다면
장작을 떠나서 불이 있을 것이네. (1) -
016_0367_c_02L若燃是可燃,
作作者則一,
若燃異可燃,
離可燃有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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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은 태우는 것[燃]이고 장작은 태워지는 것[可燃]이다. 짓는 자[作者]는 사람이고 지음[作]은 행위[業]이다. 만약 불과 장작이 하나라면 행위와 행위자도 하나일 것이다. 만약 행위와 행위자가 하나라면 도공과 도자기는 하나일 것이다. 행위자는 도공이고 행위는 도자기인데 어떻게 하나이겠는가? 그래서 행위와 행위자가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불과 장작도 하나가 아니다. 만약 하나일 수 없으니 다른 것이리라고 말한다면, 이것 또한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불과 장작이 다르다면 장작을 떠나서 따로 불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장작이다’, ‘이것은 불이다’ 하고 분별하면 곳곳에 장작을 떠나 불이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다름 또한 있을 수 없다. - 016_0367_c_04L燃是火,可燃是薪,作者是人,作是業。若燃、可燃一,則作、作者亦應一;若作、作者一,則陶師與甁一。作者是陶師,作是甁,陶師非甁,甁非陶師,云何爲一?是以作、作者不一故,燃、可燃亦不一。若謂一不可則應異,是亦不然。何以故?若燃與可燃異,應離可燃別有燃。分別是可燃、是燃,處處離可燃應有燃,而實不爾,是故異亦不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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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항상 타오를 것이네.
장작에 의존하지 않고서 생길 것이니
불을 지피는 노력이 없을 것이네.
또한 지음이 없는 불이라 해야 할 것이네. (2) -
016_0367_c_13L復次,
如是常應燃,
不因可燃生,
則無燃火功,
亦名無作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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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약 불과 장작이 다르다면 불은 장작에 의존하지 않고서 항상 타오를 것이다. 만약 항상 타오른다면 스스로 그 본체에 머무는 것이 된다. 인연에 의지하지 않으니 사람의 노력이 공허할 것이다. 사람의 노력이란 불을 지켜서 타오르게 하는 것이다. 이 노력이 지금 분명히 있다. 그러므로 불이 장작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안다. 또 만약 불이 장작과 다르다면 불은 지음[作]이 없을 것이다. 장작을 떠나 불은 어디에서 타오르겠는가? 만약 그렇다면 불은 지음이 없을 것이다. 지음이 없는 불은 있을 수 없다. - 016_0367_c_15L若燃、可燃異,則燃不待可燃而常燃。若常燃者,則自住其體,不待因緣,人功則空。人功者,將護火令燃,是功現有,是故知火不異可燃。復次,若燃異可燃,燃卽無作。離可燃,火何所然?若爾者,火則無作,無作火,無有是事。
- 【문】 왜 불이 인연에서 생기지 않을 때 사람의 노력도 공허하다고 하는가?
- 016_0367_c_22L問曰:云何火不從因緣生,人功亦空?
-
016_0368_a_01L【답】
불이 장작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뭇 연(緣)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네.
만약 불이 항상 타고 있다면
사람의 노력은 공허하게 될 것이네. (3) -
016_0367_c_23L答曰:
燃不待可燃,
則不從緣生。
火若常燃者,
人功則應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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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불과 장작이 다르다면 장작에 의존하지 않고서 불이 있을 것이다. 만약 장작에 의존하지 않고서 불이 있다면 서로 의존하는 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연에서 생기지 않는다. 또 만약 불이 장작과 다르다면 항상 타고 있을 것이다. 만약 항상 타고 있다면 장작[可燃]을 떠나 따로 불이 있는 것이 보일 것이다. 다시 사람의 노력을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 016_0368_a_02L燃、可燃若異,則不待可燃有燃。若不待可燃有然,則無相因法,是故不從因緣生。復次,若燃異可燃,則應常燃;若常燃者,應離可燃別見有燃,更不須人功。何以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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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지금 타고 있는 것을
장작이라 말한다면
그 때는 장작이 있을 뿐인데
어떤 것으로 장작을 태우겠는가? (4) -
016_0368_a_07L若汝謂燃時,
名爲可燃者,
爾時但有薪,
何物燃可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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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먼저 장작이 있어서 지금 타고 있는 것을 장작이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만약 불을 떠나 따로 장작이 있다면 어떻게 지금 타고 있는 것을 장작이라 하겠는가? - 016_0368_a_09L若謂先有薪,燒時名可燃者,是事不爾。若離燃別有可燃者,云何言燃時名可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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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다르다면 다다르지[至] 못하네.
다다르지 못한다면 타지 못하네.
타지 않으니 꺼지지 않네.
꺼지지 않으니 상주할 것이네. (5) -
016_0368_a_12L復次,
若異則不至,
不至則不燒,
不燒則不滅,
不滅則常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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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약 불이 장작과 다르다면 불은 장작에 다다르지 못할 것이다. 왜 그러한가? 서로 의존하지 않고서 성립하기 때문이다. 만약 불이 의존하지 않고서 성립한다면 스스로 그 자체에 머무는 것이 된다. 그러니 어디에 장작을 쓰겠는가? 그러므로 다다르지 못한다. 다다르지 못한다면 장작을 태우지 못한다. 왜 그러한가? 다다르지 않고서 태우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타지 않으면 꺼지지 않으니 자체에 상주할 것이니, 이것은 옳지 않다. - 016_0368_a_14L若燃異可燃,則燃不應至可燃。何以故?不相待成故。若燃不相待成,則自住其體,何用可燃?是故不至。若不至,則不燃可燃。何以故?無有不至而能燒故。若不燒,則無滅,應常住自相,是事不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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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불은 장작과 다르니
장작에 다다를 수 있네.
마치 이 사람이 저 사람에게 다다르고
저 사람이 이 사람에게 다다르듯이. (6) -
016_0368_a_20L問曰:
燃與可燃異,
而能至可燃,
如此至彼人,
彼人至此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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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은 장작과 다르기 때문에 장작에 다다를 수 있다. 마치 남자가 여자에게 다다르게 여자가 남자에게 다다르듯이. - 016_0368_a_22L燃與可燃異,而能至可燃,如男至於女,如女至於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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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6_0368_b_01L
【답】
만약 불과 장작
둘이 모두 서로 떨어져 있다면
그렇다면 불은
저 장작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네. (7) -
016_0368_b_01L答曰:
若謂燃可燃,
二俱相離者,
如是燃則能,
至於彼可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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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불을 떠나 장작이 있고 장작을 떠나 불이 있어서 독립적으로 성립하고 있다면 그렇다면 불이 장작에 다다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불을 떠나서 장작이 있지 않고 장작을 떠나서 불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남자를 떠나서 여자가 있고 여자를 떠나서 남자가 있다. 그러므로 그대의 비유는 잘못되었다. 비유가 성립하지 않으니 불은 장작에 다다르지 않는다. - 016_0368_b_03L若離燃有可燃,若離可燃有燃,各自成者,如是則應燃至可燃,而實不爾。何以故?離燃無可燃,離可燃無燃故。今離男有女,離女有男,是故汝喩非也。喩不成故,燃不至可燃。
- 【문】 불과 장작은 서로 의존해서 있다.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있고 불에 의존해서 장작이 있다. 두 법은 서로 의존해서 성립한다.
- 016_0368_b_08L問曰:燃、可燃相待而有,因可燃有燃,因燃有可燃,二法相待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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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만약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있고
불에 의존해서 장작이 있다면
어느 것이 먼저 확정돼 있기에
불과 장작이 있는 것일까? (8) -
016_0368_b_10L答曰:
若因可燃燃,
因燃有可燃,
先定有何法,
而有燃可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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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성립한다면 또한 불에 의존해서 장작이 성립할 것이다. 이 중에서 만약 장작이 먼저 확정돼 있다면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성립할 것이고, 만약 불이 먼저 확정돼 있다면 불에 의존해서 장작이 성립할 것이다. 이제 만약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성립한다면, 먼저 장작이 있은 이후에 불이 있을 것이니 불에 의존해서 장작이 있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장작이 전에 있고 불이 후에 있기 때문이다. 만약 불이 장작을 태우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장작이 성립하지 않는다. 또 장작은 다른 곳에 있어도 불을 떠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장작이 성립하지 않는다면 불도 성립하지 않는다. 만약 전에 불이 있고 후에 장작이 있다면 불 또한 이와 같은 과실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불과 장작은 두 가지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 - 016_0368_b_12L若因可燃而燃成,亦應因燃可燃成。是中若先定有可燃,則因可燃而燃成;若先定有燃,則因燃可燃成。今若因可燃而燃成者,則先有可燃而後有燃,不應待燃而有可燃。何以故?可燃在先,燃在後故,若燃不燃可燃,是則可燃不成。又可燃不在餘處,離於燃故。若可燃不成,燃亦不成。若先燃,後有可燃,燃亦有如是過。是故燃、可燃,二俱不成。
-
만약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있다면
불은 성립하고 나서 다시 성립하는 것이네.
그렇다면
장작에 불이 없는 것이네. (9) -
016_0368_b_22L復次,
若因可燃燃,
則燃成復成,
是爲可燃中,
則爲無有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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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6_0368_c_01L
또 만약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성립한다고 주장한다면 불은 성립하고 나서 다시 성립하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불은 불 속에 스스로 머문다. 만약 불은 그 자체에 스스로 머무는 것이기에 장작에 의지해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불은 장작에 의지해서 성립하는 것이다. 지금은 불이 성립하고 나서 다시 성립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과실이 있다. 또 장작에 불이 없는 과실이 있다. 왜 그러한가? 장작이 불을 떠나 스스로 그 자체에 머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과 장작이 서로 의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 016_0368_c_01L若欲因可燃而成燃,則燃成已復成。何以故?燃自住於燃中,若燃不自住其體,從可燃成者,無有是事。是故有是燃,從可燃成,今則燃成復成,有如是過。復有可燃無燃過。何以故?可燃離燃,自住其體故,是故燃、可燃相因待,無有是事。
-
만약 어떤 법[法]이 의존함을 성립시킨다면
이 법은 다시 의존함을 성립시키네.
지금은 의존함이 없으니
또한 성립하는 법이 없네. (10) -
016_0368_c_08L復次,
若法因待成,
是法還成待,
今則無因待,
亦無所成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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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약 어떤 법이 의존함을 성립시킨다면 이 법은 다시 본래의 의존함을 성립시킨다. 이와 같이 결정돼 있는 것이니 (의존하는) 두 법이 있지 않다. 예를 들어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성립하고 다시 불에 의존해서 장작이 성립한다. 그러니 둘 모두 확정된 것[定]이 없다. 확정된 것이 없기 때문에 얻을 수가 없다. 왜 그러한가? - 016_0368_c_10L若法因待成,是法還成本因待。如是決定,則無二事。如因可燃而成燃,還因於燃而成可燃。是則二俱無定,無定故,不可得。何以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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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어떤 법이 의존해서 성립한다면
아직 성립하지 않았을 때 어떻게 의존하겠는가?
만약 이미 성립한 것이 의존한다면
이미 성립한 것이 어떻게 의존하겠는가? (11) -
016_0368_c_14L若法有待成,
未成云何待?
若成已有待,
成已何用待?
-
만약 어떤 법이 의존해서 성립한다면 이 법은 아직 성립하지 않은 것이다. 성립하지 않은 것은 있지 않은 것이다. 있지 않은데 어떻게 의존하겠는가? 만약 이 법이 이미 성립했다면 이 성립한 것이 어떻게 의존하겠는가? 이 두 가지6)는 모두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앞에서 불과 장작은 서로 의존해서 성립한다고 말했는데,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 016_0368_c_16L若法因待成,是法先未成。未成則無,無則云何有因待?若是法先已成,已成何用因待?是二俱不相因待。是故汝先說燃、可燃相因待成,無有是事。
-
그러므로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있는 것이 아니네.
의존하지 않고서 있는 것도 아니네.
불에 의존해서 장작이 있는 것이 아니네.
의존하지 않고서 장작이 있는 것이 아니네. (12) -
016_0368_c_20L是故,
因可燃無燃,
不因亦無燃,
因燃無可燃,
不因無可燃。
-
016_0369_a_01L
또 이제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성립하는 것도 아니다. 장작도 이와 같아서, 불에 의존하는 것과 불에 의존하지 않는 것 두 가지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 이 과실은 앞에서 말한 바 있다. - 016_0368_c_22L今因待可燃,燃不成;不因待可燃,燃亦不成。可燃亦如是,因燃、不因燃,二俱不成,是過先已說。
-
불은 다른 곳에서 오지 않네.
불이 타는 곳에도 불은 있지 않네.
장작도 이와 같네.
그 밖의 것은 감과 옴에서 말한 바와 같네. (13) -
016_0369_a_02L復次,
燃不餘處來,
燃處亦無燃,
可燃亦如是,
餘如去來說。
-
또 불은 다른 곳에서 와서 장작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장작 속에도 불은 있지 않다. 장작을 쪼개 불을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장작도 이와 같다. 다른 곳에서 와서 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불 속에도 장작은 있지 않다. 가령 이미 탄 것은 타지 않고, 아직 타지 않은 것은 타지 않고, 지금 타고 있는 것은 타지 않는다. 이 이치는 감과 옴에서 말한 바 있다. - 016_0369_a_04L燃不於餘方來入可燃,可燃中亦無燃,析薪求燃不可得故。可燃亦如是,不從餘處來入燃中,燃中亦無可燃,如燃已不燃,未燃不燃,燃時不燃,是義如去來中說。
-
장작은 불이 아니네.
장작과 다른 곳에 불이 있는 것이 아니네.
불은 장작을 소유하지 않네.
불 속에 장작이 있는 것이 아니네.
장작 속에 불이 있는 것이 아니네. (14) -
016_0369_a_09L是故,
可燃卽非燃,
離可燃無燃,
燃無有可燃,
燃中無可燃,
可燃中無燃。
-
그러므로 장작은 불이 아니다. 왜 그러한가? 앞에서 이미 행위와 행위자가 하나일 때의 과실을 말했기 때문이다. 장작과 다른 곳에 불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항상 타는 등의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불은 장작을 소유하지 않는다. 불 속에 장작이 있는 것이 아니다. 장작 속에 불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다름의 과실이 있기 때문에 세 가지7)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 - 016_0369_a_11L可燃卽非燃。何以故?先已說作、作者一過故。離可燃無燃,有常燃等過故。燃無有可燃,燃中無可燃,可燃中無燃,以有異過故,三皆不成。
- 【문】 무엇 때문에 불과 장작을 말하는가?
- 016_0369_a_15L問曰:何故說燃可燃?
- 【답】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있듯이 취착에 의존해서 취착하는 자가 있다. ‘취착’이란 5온을 말하고, ‘취착하는 자’란 사람을 말한다. 불과 장작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취착과 취착하는 자도 성립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 016_0369_a_16L答曰:如因可燃有燃,如是因受有受者,受名五陰,受者名人。燃、可燃不成故,受、受者亦不成。何以故?
-
불과 장작에 의해서
취착과 취착하는 자를 말하고
물단지나 옷 등
모든 법들을 말하네. (15) -
016_0369_a_18L以燃可燃法,
說受受者法,
及以說甁衣,
一切等諸法。
-
장작이 불이 아니듯이 취착은 취착하는 자가 아니다. 행위와 행위자가 하나라는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또 취착을 떠나 취착하는 자가 있지 않다. 다름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름의 과실이 있기 때문에 세 가지8)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 취착과 취착하는 자와 같이 바깥의 물단지나 옷 등의 모든 법들도 다 위와 같이 말할 수 있다. 발생이 없고 완전히 공하다. - 016_0369_a_20L如可燃非燃,如是受非受者,作、作者一過故。又離受無受者,異不可得故。以異過故,三皆不成。如受、受者外,甁、衣等一切法皆同上說,無生畢竟空。
-
016_0369_b_01L
만약 어떤 사람이 ‘나[我]’의 있음과
법(法)들의 다름을 말한다면
이와 같은 사람은
부처님 가르침의 맛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네. (16) -
016_0369_b_01L是故,
若人說有我,
諸法各異相,
當知如是人,
不得佛法味。
-
그러므로 모든 법은 본래 발생이 없고 완전히 적멸해 있다. 그래서 이 품(品) 끝에서 이 게송을 읊은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들이 ‘나[我]’를 말한다면, 가령 독자부(犢子部)의 무리들은 “색(色)이 곧 ‘나’라고 말할 수도 없고 색을 떠난 것이 ‘나’라고 말할 수도 없다. ‘나’는 제5의 불가설장(不可說藏)에 있다”고 말하고, 살바다부(薩婆多部:說一切有部)의 무리들은 “모든 법에는 다름이 있다. ‘이것은 선(善)이다’, ‘이것은 불선(不善)이다’, ‘이것은 무기(無記)이다’, ‘이것은 유루이다’, ‘무루이다’, ‘이것은 유위이다’, ‘이것은 무위이다’ 하는 등의 다름이다”고 말하는 바와 같은데, 이와 같은 사람들은 모든 법의 적멸성(寂滅性)을 얻지 못한다. 부처님 말씀을 두고서 여러 가지 희론을 지었기 때문이다. - 016_0369_b_04L諸法從本已來無生,畢竟寂滅相,是故品末說是偈:若人說我相。如犢子部衆說:不得言色卽是我,不得言離色是我,我在第五不可說藏中。如薩婆多部衆說:諸法各各相,是善、是不善、是無記,是有漏、無漏、有爲、無爲等別異。如是等人,不得諸法寂滅相,以佛語作種種戲論。
-
11. 최초의 궁극을 관찰하는 장[觀本際品]8偈 - 016_0369_b_12L中論觀本際品第十一[八偈]
-
【문】 최초의 궁극[本際]은 있지 않다. 경전에서 “중생은 생사 윤회한다. 최초의 궁극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중생이 있고 생사가 있다고 말한다. 무슨 이유로 이렇게 말하는가? - 016_0369_b_13L問曰:『無本際經』說:“衆生往來生死,本際不可得。”是中說有衆生,有生死,以何因緣故,而作是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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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위대한 성인께서 말씀하신 바
최초의 궁극은 얻을 수 없네.
생사에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네. (1) -
016_0369_b_16L答曰:
大聖之所說,
本際不可得,
生死無有始,
亦復無有終。
-
성인에는 세 부류가 있다. 첫째는 5신통(五神通)9)의 외도(外道), 둘째는 아라한과 벽지불, 셋째는 신통(神通)을 얻은 대보살이다. 부처님은 세 부류 중에서 가장 높기 때문에 “위대한 성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은 진실한 말이 아닌 것이 없다. 생사에는 시작이 없다. 왜 그러한가? 생사의 최초와 최후를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시작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대가 “만약 최초와 최후가 없다면 중간은 있을 것이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 016_0369_b_18L聖人有三種:一者、外道五神通;二者、阿羅漢、辟支佛;三者、得神通大菩薩。佛於三種中最上,故言大聖。佛所言說,無不是實,說生死無始。何以故?生死初、後不可得,是故言無始。汝謂若無初、後,應有中者,是亦不然。何以故?
-
016_0369_c_01L
시작과 끝이 없는데
어찌 중간이 있겠는가?
그러니 이것에는
전도 후도 동시도 있지 않네. (2) -
016_0369_c_01L若無有始終,
中當云何有?
是故於此中,
先後共亦無。
-
중간과 최후에 의존해서 최초가 있는 것이다. 최초와 중간에 의존해서 최후가 있는 것이다. 최초와 최후가 있지 않은데 어찌 중간이 있겠는가? 생사에는 최초와 중간과 최후가 있지 않다. 그래서 전과 후와 동시를 얻을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왜 그러한가? - 016_0369_c_03L因中、後,故有初,因初、中,故有後。若無初無後,云何有中?生死中無初、中、後,是故說先、後、共不可得。何以故?
-
만약 태어남이 전에 있고
늙음ㆍ죽음이 후에 있다면
늙음ㆍ죽음이 없이 태어남이 있게 되고
태어남이 없이 늙음ㆍ죽음이 있게 되리라. (3) -
016_0369_c_06L若使先有生,
後有老死者,
不老死有生,
不生有老死。
-
만약 늙음ㆍ죽음이 전에 있고
태어남이 후에 있다면
이것들은 원인이 없는 것이 되리라.
태어나지 않은 것에 늙음ㆍ죽음이 있겠는가? (4) -
016_0369_c_08L若先有老死,
而後有生者,
是則爲無因,
不生有老死。
-
태어나고 죽는 중생에게 만약 전에 태어남이 있고 잠시 늙음이 있고 후에 죽음이 있다면, 태어남에는 늙음ㆍ죽음이 있지 않을 것이다. 사물[法]의 태어남에는 늙음ㆍ죽음이 있고 늙음ㆍ죽음에는 태어남이 있는 것이다. 늙음ㆍ죽음이 없이 태어남이 있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또 태어남에 의존하지 않고서 늙음ㆍ죽음이 있게 된다.10)
만약 전에 늙음ㆍ죽음이 있고 후에 태어남이 있다면 늙음ㆍ죽음은 원인이 없는 것이 될 것이다. 태어남이 후에 있기 때문이다. 또 태어남이 없는데 어찌 늙음ㆍ죽음이 있겠는가?11)
만약 태어남과 늙음ㆍ죽음은 전과 후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동시에 성립한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과실이 있다. 왜 그러한가? - 016_0369_c_09L生死衆生,若先生,漸有老,而後有死者,則生無老死。法應生有老死,老死有生,又不老死而生,是亦不然。又不因生有老死,若先老死後生,老死則無因,生在後故。又不生,何有老死?若謂生老死先後不可,謂一時成者,是亦有過。何以故?
-
태어남과 늙음ㆍ죽음이
동시에 함께할 수 없네.
태어날 때 죽음이 있을 것이고
이 둘은 다 원인이 없는 것이 될 것이네. (5) -
016_0369_c_16L生及於老死,
不得一時共,
生時則有死,
是二俱無因。
-
만약 태어남과 늙음ㆍ죽음이 동시라면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태어날 때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사물[法]은 태어날 때에는 있고 죽을 때에는 있지 않은 것이다. 만약 태어날 때 죽음이 있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만약 동시에 생긴다면12) 서로 의존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마치 소의 뿔이 동시에 나오기에 서로 의존하는 일이 없는 것과 같다. - 016_0369_c_18L若生、老死一時則不然。何以故?生時卽有死故。法應生時有,死時無。若生時有死,是事不然。若一時生,則無有相因。如牛角一時出,則不相因。
-
전과 후와 동시
이것이 모두 옳지 않은데
왜 태어남과 늙음ㆍ죽음이 있다고
희론해서 말하는가? (6) -
016_0369_c_22L是故,
若使初後共,
是皆不然者,
何故而戲論,
謂有生老死?
-
016_0370_a_01L
그러므로 태어남ㆍ늙음ㆍ죽음을 사유해 보면 세 가지 모두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발생이 없고 완전히 공하다. 그대는 지금 왜 태어남ㆍ늙음ㆍ죽음을 탐착(貪著)하고 희론(戱論)해서 확정된 상(相)이 있다고 말하는가? - 016_0370_a_01L思惟生老死,三皆有過故,卽無生畢竟空。汝今何故貪著戲論?生老死謂有決定相。
-
원인과 결과,
상(相)과 상을 띠게 하는 법[可相],
느낌과 느끼는 자
등의 모든 법들, (7) -
016_0370_a_04L復次,
諸所有因果,
相及可相法,
受及受者等,
所有一切法,
-
비단 생사에 있어서만
최초의 궁극을 얻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모든 법들도
모두 최초의 궁극이 없네. (8) -
016_0370_a_06L非但於生死,
本際不可得,
如是一切法,
本際皆亦無。
-
또 ‘모든 법들’이란 이른바 원인과 결과, 상(相)과 상을 띠게 하는 것[可相], 느낌[受]과 느끼는 자[受者] 등을 말한다. 모두 최초의 궁극[本際]이 없다. 비단 생사에만 최초의 궁극이 없는 것이 아니다. 간략하게 보여 주고자 생사에는 최초의 궁극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 016_0370_a_07L一切法者,所謂因、果,相、可相、受及受者等,皆無本際。非但生死無本際,以略開示故,說生死無本際。
-
12. 고를 관찰하는 장(觀苦品)10偈 - 016_0370_a_10L中論觀苦品第十二[十偈]
-
어떤 이가 말한다.
자기가 짓는 것이다, 타자가 짓는 것이다,
양자가 짓는 것이다, 원인이 없이 지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고(苦)를 말하네.
결과에 있어서는 모두 옳지 않네. (1) -
016_0370_a_11L有人說曰:
自作及他作,
共作無因作,
如是說諸苦,
於果則不然。
-
어떤 이는 고(苦)를 자기가 짓는 것이라고 말하고, 또는 타자가 짓는 것이라고 말하고, 또는 자기가 짓는 것이면서 타자가 짓는 것이라고 말하고, 또는 원인이 없이 지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과에 있어서는 모두 옳지 않다. ‘결과에 있어서는 모두 옳지 않네’란, 중생은 뭇 연(緣)에 의해 고(苦)에 이르게 되고, 고를 싫어해서 멸하고자 하지만 고의 진정한 연들을 알지 못해서 네 가지 오류13)를 범하므로 “결과에 있어서는 모두 옳지 않네”라고 말한 것이다. 왜 그러한가? - 016_0370_a_14L有人言:苦惱自作,或言他作,或言亦自作亦他作,或言無因作,於果皆不然。於果皆不然者,衆生以衆緣致苦,厭苦欲求滅,不知苦惱實因緣,有四種謬,是故說於果皆不然。何以故?
-
만약 고(苦)를 자기가 짓는 것이라면
연(緣)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닐 것이네.
이 온(蘊)이 있기에
저 온(蘊)이 발생하는 것이네. (2) -
016_0370_a_19L苦若自作者,
則不從緣生,
因有此陰故,
而有彼陰生。
-
만약 고(苦)를 자기가 짓는 것이라면 뭇 연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짓는 것’이란 자성(自性)에서 발생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전세(前世)의 5온[蔭]에 의존해서 후세의 5온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苦)는 자기가 짓는 것일 수 없다. - 016_0370_a_21L若苦自作,則不從衆緣生,自名從自性生,是事不然。何以故?因前五陰,有後五陰生,是故苦不得自作。
- 016_0370_b_01L【문】 만약 이 5온이 저 5온이 된다면 이것은 타자가 짓는 것이다.
- 016_0370_b_01L問曰:若言此五陰作彼五陰者,則是他作。
-
【답】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이 5온이
저 5온과 다르다고 말한다면
그렇다면 타자에 의해
고(苦)가 지어지는 것이라고 말해야 하네. (3) -
016_0370_b_02L答曰:是事不然。何以故?
若謂此五陰,
異彼五陰者,
如是則應言,
從他而作苦。
-
만약 이 5온이 저 5온과 다르고 저 5온이 이 5온과 다르다면, 타자에 의해 지어지는 것이리라. 예를 들면 실이 천과 다르다면 실을 떠나서 천이 있고 실을 떠나서 천이 있지 않다면 천은 실과 다르지 않은 것과 같다. 그렇듯이 저 5온이 이 5온과 다르다면 이 5온을 떠나서 저 5온이 있고 이 5온을 떠나서 저 5온이 있지 않다면 이 5온은 저 5온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고(苦)가 타자에 의해 지어지는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 016_0370_b_05L若此五陰與彼五陰異,彼五陰與此五陰異者,應從他作。如縷與布異者,應離縷有布;若離縷無布者,則布不異縷。如是彼五陰異此五陰者,則應離此五陰,有彼五陰。若離此五陰,無彼五陰者,則此五陰不異彼五陰,是故不應言苦從他作。
- 【문】 자기가 고(苦)를 짓는다면 개체[人]마다 자기가 고를 짓고 자기가 고를 받을 것이다.
- 016_0370_b_12L問曰:自作者是人,人自作苦,自受苦。
-
【답】
만약 개체가 스스로 고를 짓는다면
고를 떠나서 어떤 개체가 있기에
그 개체가 스스로
고를 짓는다고 말하는 것일까? (4) -
016_0370_b_13L答曰:
若人自作苦,
離苦何有人?
而謂於彼人,
而能自作苦。
-
만약 개체가 스스로 고를 짓는다면, 5온의 고를 떠나 어디에 따로 개체가 있기에 스스로 고를 짓는 것일까? 이 개체를 말해야 하는데 말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개체가 스스로 짓는 것이 아니다. 만약 한 개체가 스스로 고를 짓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개체가 고를 지어서 이 개체에게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 016_0370_b_15L若謂人自作苦者,離五陰苦,何處別有人而能自作苦?應說是人而不可說,是故苦非人自作。若謂人不自作苦,他人作苦與此人者,是亦不然。何以故?
-
만약 고(苦)를 다른 개체가 지어서
이 개체에게 주는 것이라면
고가 없는데
어떻게 이 사람이 받는 일이 있겠는가? (5) -
016_0370_b_20L若苦他人作,
而與此人者,
若當離於苦,
何有此人受?
-
만약 다른 개체가 고를 지어서 이 개체에게 준다면, 5온이 없으니 이 개체가 이 사람이 받는 일은 없다. - 016_0370_b_22L若他人作苦與此人者,離五陰,無有此人受。
-
016_0370_c_01L
만약 고를 다른 개체가 지어서
이 개체에게 주는 것이라면
고가 없는데 어떤 사람이 있기에
이 개체에게 준다는 것일까? (6) -
016_0370_c_01L復次,
苦若彼人作,
持與此人者,
離苦何有人,
而能授於此?
-
또 만약 다른 개체가 고를 지어서 이 개체에게 준다고 말한다면, 5온의 고 없이 어떻게 다른 개체가 있기에 고를 지어서 이 개체에게 준다는 것일까? 만약 있다면 그 상(相)을 말해야 할 것이다. - 016_0370_c_03L若謂彼人作苦授與此人者,離五陰苦,何有彼人作苦持與此人?若有者,應說其相。
-
자기가 짓는 고(苦)가 성립하지 않는데
어떻게 타자가 짓는 고가 성립하겠는가?
타자가 고를 짓는다면
또한 자기가 고를 짓는 것이기도 하네. (7) -
016_0370_c_06L復次,
自作若不成,
云何彼作苦?
若彼人作苦,
卽亦名自作。
-
또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그가 스스로 고를 짓는다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리고 타자가 고를 짓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자기와 타자[此彼]는 서로 의존하기 때문이다. 만약 타자가 그 타자에게 고를 짓는다면 또한 자기가 고를 짓는 것이기도 하다. 자기가 고를 짓는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논파했다. 그대가 자기가 고를 짓는다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에 타자가 고를 짓는다는 것도 성립하지 않는다. - 016_0370_c_08L種種因緣,彼自作苦不成,而言他作苦,是亦不然。何以故?此彼相待故。若彼作苦,於彼亦名自作苦。自作苦先已破,汝受自作苦不成故,他作亦不成。
-
고(苦)는 자체가 짓는 것이 아니네.
사물[法] 자체가 사물을 짓는 것이 아니네.
타자는 자체가 없는데
어떻게 타자가 고를 짓겠는가? (8) -
016_0370_c_13L復次,
苦不名自作,
法不自作法,
彼無有自體,
何有彼作苦?
-
또 자체가 고(苦)를 짓는다는 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가령 칼이 스스로를 벨 수 없듯이 사물[法]은 자체가 법을 지을 수 없다. 그러므로 자기가 지을 수 없는 것이다. 타자가 짓는다는 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고(苦) 없이 타자의 자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고 없이 타자의 자성이 있다면 타자가 고를 지을 것이다. 타자 또한 고인데 어떻게 고가 고를 짓겠는가? - 016_0370_c_15L自作苦不然。何以故?如刀不能自割。如是法不能自作法,是故不能自作,他作亦不然。何以故?離苦無彼自性。若離苦有彼自性者,應言彼作苦,彼亦卽是苦,云何苦自作苦?
- 【문】 만약 자기가 짓는 것과 타자가 짓는 것이 옳지 않다면 양자가 짓는 것이리라.
- 016_0370_c_20L問曰:若自作、他作不然,應有共作。
-
【답】
만약 자기나 타자가 고(苦)를 짓는 것이라면
양자가 고를 짓는 것이리라.
자기나 타자가 짓는 일이 없는데
하물며 원인이 없이 지어지는 것이겠는가? (9) -
016_0370_c_21L答曰:
若此彼苦成,
應有共作苦,
此彼尚無作,
何況無因作。
-
016_0371_a_01L
자기가 짓는 것도 타자가 짓는 것도 과실이 있는데 하물며 원인이 없이 지어지는 것이랴? 원인이 없다면 많은 과실이 있다. 행위와 행위자를 타파하는 장에서 말한 바와 같다. - 016_0370_c_23L自作、他作猶尚有過,何況無因作。無因多過,如「破作作者品」中說。
-
비단 고에 대해서만
네 가지 주장이 성립하지 않는 게 아니라
모든 바깥의 사물들에 대해서도
네 가지의 주장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하네. (10) -
016_0371_a_02L復次,
非但說於苦,
四種義不成,
一切外萬物,
四義亦不成。
-
또 불교에서 5취온[聚陰]을 고라고 말하고 있는데도 어떤 외도의 사람들은 고수(苦受)를 고(苦)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비단 고에 대해서만 네 가지의 주장이 성립하지 않는 게 아니라 바깥의 사물들인 대지ㆍ강ㆍ산ㆍ나무 등 모든 법들에 대해서도 (네 가지의 주장이) 다 성립하지 않는다. - 016_0371_a_04L佛法中雖說五受陰爲苦,有外道人謂苦受爲苦。是故說不但說於苦,四種義不成,外萬物地水山木等,一切法皆亦不成。
-
13. 행을 관찰하는 장[觀行品]9偈 - 016_0371_a_08L中論觀行品第十三[九偈]
-
【문】
부처님께서 경전에서 말씀하셨듯이
속이는 것은 허망하게 취한 것이네.
모든 행(行)들은 허망하게 취한 것이기에
이는 속이는 것이네. (1) -
016_0371_a_09L問曰:
如佛經所說,
虛誑妄取相,
諸行妄取故,
是名爲虛誑。
-
부처님께서는 경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속이는 것[虛誑]은 허망하게 취한 것[妄取相]이다. 제일의 진실(眞實)은 열반이니, 허망하게 취한 것이 아니다.”
이 같이 경전에서 말씀하신 까닭에 모든 행(行)들은 속이는 것이며 허망하게 취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 016_0371_a_12L佛經中說:“虛誑者,卽是妄取相。第一實者,所謂涅槃,非妄取相。”以是經說故,當知有諸行虛誑妄取相。
-
【답】
속이는 것은 허망하게 취한 것이라면
이 중에 무엇을 취할 수 있을까?
부처님께서 이와 같은 것을 말씀하셔서
공성의 이치를 보여주고자 하셨네. (2) -
016_0371_a_15L答曰:
虛誑妄取者,
是中何所取?
佛說如是事,
欲以示空義。
-
만약 허망하게 취한 것은 속이는 것이라면 이 행들 중에서 무엇을 취할 수 있을까?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셔서 공성의 이치(空義)를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016_0371_a_17L若妄取相法,卽是虛誑者,是諸行中,爲何所取?佛如是說,當知說空義。
- 【문】 모든 행(行)들이 다 공하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 016_0371_a_19L問曰:云何知一切諸行皆是空?
- 016_0371_b_01L【답】 모든 행(行)들은 허망한 것이기 때문에 공(空)하다. 모든 행들은 발생하고 소멸해서 머물지 않아 자성이 없기 때문에 공하다. 모든 행들이란 5온이다. 행에서 생긴 것이기에 5온은 행이다. 이 5온은 다 허망해서 확정된 상[定相]이 없다. 왜 그러한가? 예를 들면 갓난애 때의 색(色)은 기어다니는 애 때의 색이 아니다. 기어다니는 애 때의 색은 걸어다니는 애 때의 색이 아니다. 걸어다니는 애 때의 색은 어린애[童子] 때의 색이 아니다. 어린애 때의 색은 청년[壯年]일 때의 색이 아니다. 청년일 때의 색은 노년일 때의 색이 아니다. 색과 같은 것은 찰나찰나 (생멸해서) 머물지 않기 때문에 확정된 자성을 분별할 수 없다.
- 016_0371_a_20L答曰:一切諸行虛妄相故空,諸行生滅不住,無自性故空。諸行名五陰,從行生故。五陰名行,是五陰皆虛妄,無有定相。何以故?如嬰兒時色非匍匐時色,匍匐時色非行時色,行時色非童子時色,童子時色非壯年時色,壯年時色非老年時色。如色念念不住故,分別決定性不可得。
- 갓난애 때의 색은 기어다니는 애 때에서부터 나아가 노년까지의 색과 같은가, 다른가? 두 가지 모두 과실이 있다. 왜 그러한가? 만약 갓난애 때의 색이 걸어다니는 애 때의 색에서부터 나아가 노년까지의 색과 같다면, 오로지 이 갓난애 때의 색이 있을 뿐이어서 걸어다니는 애 때의 색에서부터 나아가 노년까지의 색의 구분이 없을 것이다. 또 가령 진흙덩어리 같은 것은 항상 진흙덩어리여서 결코 물단지가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색이 항상 확정돼 있기 때문이다. 만약 갓난애 때의 색이 걸어다니는 애 때의 색과 다르다면, 갓난애는 걸어다니는 애가 되지 않을 것이고 걸어다니는 애는 갓난애가 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두 색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어린애[童子]ㆍ소년(少年)ㆍ청년ㆍ노년의 색이 상속(相續)하지 않을 것이다. 혈연 관계[親屬法)를 상실해서 아버지가 없게 되고 자식이 없게 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오직 갓난애만이 아버지를 얻게 되고 여타의 것 즉 기어다니는 애에서부터 나아가 노년까지는 (상속의) 한 부분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모두 과실이 있다.
- 016_0371_b_05L嬰兒色爲卽是匍匐色,乃至老年色爲異,二俱有過。何以故?若嬰兒色卽是匍匐色,乃至老年色者,如是則是一色,皆爲嬰兒,無有匍匐乃至老年。又如泥團常是泥團,終不作甁。何以故?色常定故。若嬰兒色異匍匐色者,則嬰兒不作匍匐,匍匐不作嬰兒。何以故?二色異故。如是童子、少年、壯年、老年色不應相續,有失親屬法,無父無子。若爾者,唯有嬰兒應得父,餘則匍匐乃至老年不應有分,是故二俱有過。
- 【문】 색이 확정돼 있지 않다고 하지만 갓난애의 색이 소멸하고 난 후 상속해서 다시 발생해서 나아가(=어린애ㆍ소년ㆍ청년) 노년의 색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위와 같은 과실이 없다.
- 016_0371_b_16L問曰:色雖不定嬰兒色,滅已,相續更生,乃至老年色,無有如上過。
- 【답】 갓난애의 색이 상속해서 발생한다면 소멸하고 나서 상속해서 발생하는 것인가, 소멸하지 않고서 상속해서 발생하는 것인가? 만약 갓난애의 색이 소멸했다면 어떻게 상속하겠는가? 원인이 없기 때문이다. 가령 장작과 불이 있다 하더라도 불이 소멸했을 때는(꺼졌을 때는) 상속하지 않는다. 만약 갓난애의 색이 소멸하지 않고서 상속한다면 갓난애의 색은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상주하는 본체[本相] 또한 상속하지 않는 것이다.
- 016_0371_b_17L答曰:嬰兒色相續生者,爲滅已相續生?爲不滅相續生?若嬰兒色滅,云何有相續?以無因故。如雖有薪可燃,火滅故,無有相續。若嬰兒色不滅而相續者,則嬰兒色不滅,常住本相亦無相續。
- 【문】 나는 소멸하거나 소멸하지 않고서 상속해서 발생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머묾이 없이 서로 유사하게 발생하기에 상속해서 발생한다고 말할 따름이다.
- 016_0371_b_23L問曰:我不說滅不滅故相續生,但說不住相似生故,言相續生。
- 016_0371_c_01L【답】 만약 그렇다면 확정된 색이 있고 (색들이 거듭해서) 다시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만 가지의 색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니 또한 상속이 없다. 이렇듯 모든 곳에서 색을 구해 보아도 확정된 상[定相] 없다. 그저 세속의 언설에 의지해서 있는 것일 따름이다. 가령 파초나무[芭蕉樹]는 실체를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다. 단지 껍질과 잎이 있을 따름이다. 이와 같이 지혜로운 이는 색의 상(相)을 구할 때 찰나찰나 소멸하기 때문에 다시 실체의 색[實色]을 얻지 못하므로 색의 형체[色形]나 색의 상[色相]에 머물지 않는다. 서로 유사하게 순차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에 명확하게 구별하기가 어렵다. 가령 등불과 같은 것에서 확정된 색[定色]을 명확하게 구별해 내고자 하더라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색은 자성이 없기 때문에 공하다. 그저 세속의 언설에 의지해서 있는 것이다.14)
- 016_0371_c_01L答曰:若爾者,則有定色而更生,如是應有千萬種色,但是事不然。如是亦無相續,如是一切處求色無有定相。但以世俗言說故有,如芭蕉樹,求實不可得,但有皮葉。如是智者,求色相念念滅,更無實色可得。不住色形色相,相似次第生,難可分別。如燈炎分別定色不可得,從是定色更有色生不可得。是故色無性故空,但以世俗言說故有。
-
수(受)도 이와 같다. 지혜로운 이가 여러 가지로 관찰해 볼 때 순차적으로 서로 유사하게 발생하고 소멸하기 때문에 명확하게 구별해서 인식하기가 어렵다. 마치 물의 흐름이 상속(相續)하는 것과 같다. 그저 거칠게 지각해서[覺] 세 가지 수(受)가 몸에 있다고 말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수(受)도 색과 동일하게 말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15)
상(想)은 이름[名相]에 기인해서 발생한다. 이름이 없이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이름[名字相]을 분별해서 인식하기 때문에 상(想)이라 한다”고 말씀하셨다. 먼저 확정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뭇 연(緣)에서 발생하는 것이기에 확정된 자성[定性]이 없다. 확정된 자성이 없기 때문에 그림자와 형체의 관계와 같다. 형체에 의지해서 그림자가 있는 것이니, 형체가 있지 않다면 그림자도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그림자에는 확정된 자성이 없다. 만약 확정되어 존재한다면 형체 없이 그림자가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뭇 연에서 발생하는 것은 자성이 없기 때문에 얻을 수가 없다. 상(想)도 이와 같다. 단지 바깥의 이름[名相]에 기인해서 세속의 언설에 의지해서 존재할 따름이다.16) - 016_0371_c_11L受亦如是,智者種種觀察,次第相似故,生滅,難可別知。如水流相續,但以覺故,說三受在身。是故當知受同色說,想因名相生。若離名相,則不生,是故佛說分別知名字相,故名爲想。非決定先有,從衆緣生,無定性。無定性故,如影隨形,因形有影,無形則無影,影無決定性。若定有者,離形應有影,而實不爾。是故從衆緣生,無自性故,不可得。想亦如是,但因外名相,以世俗言說故有。
- 016_0372_a_01L식(識)은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 등과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 등에 의지해서 발생한다. 눈[眼] 등의 근(根)들이 상이하기 때문에 식도 상이하다.17) 이 식은 색에 있는가, 눈에 있는가, 그 중간에 있는가? 확정되지 않는다. 단지 발생하고 나서 대상을 인식하고 이 사람을 인식하고 저 사람을 인식한다. 이 사람을 아는 인식은 저 사람을 아는 인식과 같은가, 다른가? 이 두 가지는 명확하게 구별하기가 어렵다. 안식과 이식도 명확하게 구별하기가 어렵다. 명확하게 구별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같다고도 말하고 다르다고도 말하는 것이다. 확정된 구별이 없다. 단지 뭇 연(緣)에서 발생하는 것에 의지해서 눈[眼] 등을 구별하는 것이기에 공하고 자성이 없다. 마치 마술사[伎人]가 구슬 하나를 입 안에 머금고 있다가 뱉어내 사람들에게 보여 줄 때 ‘본래의 구슬과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일까’ 하고 의심을 품듯이, 식(識)도 그와 같은 것이다. 발생하고 나서 다시 발생할 때 본래의 식과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그러므로 식은 머묾[住]이 없기에 자성이 없다. 속이는 것[虛誑]이어서 환영과 같다.18) 모든 행(行)도 이와 같다.
- 016_0371_c_21L識因色聲香味觸等、眼耳鼻舌身等生,以眼等諸根別異故,識有別異,是識爲在色?爲在眼?爲在中閒?無有決定,但生已,識塵,識此人,識彼人,知此人識爲卽是,知彼人識爲異,是二難可分別。如眼識、耳識亦難可分別,以難分別故,或言一,或言異,無有決定。分別但從衆緣生故,眼等分別故,空無自性。如伎人含一珠,出已復示,人則生疑:爲是本珠?爲更有異?識亦如是,生已更生,爲是本識?爲是異識?是故當知識不住故,無自性,虛誑如幻。諸行亦如是。
- 모든 행이란 신행(身行)과 구행(口行)와 의행(意行)이다. 행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청정한 것과 청정하지 않은 것이다. 어떤 것들이 청정하지 않은 것들인가? 중생을 뇌란(惱亂)하게 하는 탐착(貪著) 따위를 청정하지 않은 것[不淨]이라 한다. 중생을 뇌란하게 하지 않는 진실한 말과 탐착하지 않음 등을 청정한 것[淨]이라 한다. 어떤 때는 감소하고 어떤 때는 증가한다. 청정한 행(行)은, 인간[人]이나 욕천(欲天)이나 색천(色天)이나 무색천(無色天)에서 과보를 받고 나면 감소한다. 다시 짓기 때문에 증가라 한다. 청정하지 않은 행(行) 또한 이와 같다. 지옥ㆍ축생ㆍ아귀ㆍ아수라에서 과보를 받고 나면 감소한다. 감소했는데 다시 짓기 때문에 증가라 한다. 그러므로 행들은 증가하기도 하고 감소하기도 하기 때문에 머묾[住]이 없다. 마치 사람이 병에 걸렸을 때 적절하게 병을 잘 다스리면 낫지만 잘 다스리지 않으면 다시 병이 생기는 것과 같다. 모든 행은 이와 같아서 증가하기도 하고 감소하기도 하기 때문에 확정되지 않는 것이다. 그저 세속의 언설에 의지해서 있다고 할 따름이다.19)
- 016_0372_a_10L諸行者,身、口、意。行有二種:淨、不淨。何等爲不淨?惱衆生貪著等名不淨,不惱衆生實語不貪著等名淨,或增或減。淨行者,在人中、欲天、色天、無色天受果報已,則減;還作故,名增。不淨行者亦如是,在地獄、畜生、餓鬼、阿修羅中受果報已,則減;還作故,名增。是故諸行有增有減故不住。如人有病,隨宜將適,病則除愈;不將適,病則還集。諸行亦如是,有增有減故,不決定,但以世俗言說故有。
- 016_0372_b_01L세제(世諦)에 의지하기 때문에 제일의제(第一義諦)를 볼 수 있다. 이른바 무명에 의존해서 모든 행이 있고, 모든 행에 의존해서 식(識)의 집착이 있고, 식의 집착에 의존해서 명색(名色)이 있고, 명색에 의존해서 6입(入)이 있고, 6입에 의존해서 촉(觸)이 있고, 촉에 의존해서 수(受)가 있고, 수에 의존해서 애(愛)가 있고, 애에 의존해서 취(取)가 있고, 취에 의존해서 유(有)가 있고, 유에 의존해서 태어남[生]이 있고, 태어남에 의존해서 늙음과 죽음[老死]ㆍ근심ㆍ비애ㆍ고뇌ㆍ사랑하는데 이별하는 고통[恩愛別苦]ㆍ미워하는데 만나는 고통[怨憎會苦] 따위가 있다. 이와 같은 고(苦)들은 모두 행(行)을 근본으로 삼는다.
- 016_0372_a_21L因世諦故,得見第一義諦。所謂無明緣諸行,從諸行有識著,識著故,有名色,從名色有六入,從六入有觸,從觸有受,從受有愛,從愛有取,從取有有,從有有生,從生有老死、憂悲苦惱、恩愛別苦、怨憎會苦等。如是諸苦,皆以行爲本。
- 부처님께서는 세제에 의지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만약 제일의제를 얻어 진실한 지혜가 생기면, 무명(無明)이 그친다. 무명이 그치기에 여러 가지 행이 일지 않고, 여러 가지 행이 일지 않기에 4제(諦)20)를 볼 때 끊어지는[見諦所斷] 견(見)ㆍ의(疑)ㆍ계금취(戒禁取) 따위가 끊어지고 수습(修習)을 할 때 끊어지는[思惟所斷] 탐욕ㆍ증오ㆍ색염(色染)ㆍ무색염(無色染)ㆍ조희(調戲)ㆍ무명도 끊어진다. 이것이 끊어지기 때문에 하나하나의 분지[分]가 소멸한다. 이른바 무명ㆍ모든 행ㆍ식ㆍ명색ㆍ6입ㆍ촉ㆍ수ㆍ애ㆍ취ㆍ유ㆍ태어남ㆍ늙음과 죽음ㆍ근심ㆍ비애ㆍ고뇌ㆍ사랑하는데 이별하는 고통ㆍ미워하는데 만나는 고통 따위가 모두 소멸한다. 이것들이 소멸하기에 5온의 몸[身]이 완전히 소멸해서 다시 남는 것이 없으니 오직 공성[空]이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공성의 이치를 보여 주고자 “모든 행은 속이는 것이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 016_0372_b_04L佛以世諦故說。若得第一義諦,生眞智慧者,則無明息;無明息故,諸行亦不集;諸行不集故,見諦所斷身、見、疑、戒取等斷;及思惟所斷貪、恚、色染、無色染、調戲、無明亦斷。以是斷故,一一分滅,所謂無明、諸行、識、名色、六入、觸、受、愛、取、有、生、老死、憂悲苦惱、恩愛別苦、怨憎會苦等皆滅。以是滅故,五陰身畢竟滅,更無有餘。唯但有空,是故佛欲示空義故,說諸行虛誑。
- 또 모든 법들은 자성이 없기에 속이는 것이고 속이는 것이기에 공하다. 이렇게 게송을 읊는다.
- 016_0372_b_14L復次,諸法無性故虛誑,虛誑故空。如偈說:
-
모든 법에는 다른 것이 있기에
다 자성이 없다는 것을 아네.
자성이 없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네.
모든 법은 공하기 때문이네. (3) -
016_0372_b_15L諸法有異故,
知皆是無性,
無性法亦無,
一切法空故。
-
모든 법들은 자성이 없다. 왜 그러한가? 모든 법은 비록 발생하더라도 자성에 머물지 않는다. 그래서 자성이 없는 것이다. 가령 갓난애가 확정되어 자성에 머문다면 결코 기어다니는 애가 되지 못할 것이며 나아가 노년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갓난애는 순차적으로 상속하고 다른 것[異相]이 있기에 기어 다니는 애가 현현하고 나아가 노년이 현현한다. 그러므로 ‘모든 법에는 다른 것이 보이기에 자성이 없다는 것을 아네’ 하고 말하는 것이다. - 016_0372_b_17L諸法無有性。何以故?諸法雖生,不住自性,是故無性。如嬰兒定住自性者,終不作匍匐乃至老年,而嬰兒次第相續有異相,現匍匐乃至老年,是故說見諸法異相故,知無性。
- 【문】 만약 모든 법에 다른 것[異相]이 있기에 자성이 없으니 자성이 없는 법이 있다고 한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 016_0372_b_22L問曰:若諸法異相無性,卽有無性法,有何咎?
- 016_0372_c_01L【답】 자성이 없는데 어찌 법(法)이 있겠으며 어찌 상(相)이 있겠는가? 왜냐 하면, 근본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자성을 논파하고자 자성이 없다고 말할 따름이다. 만약 이 자성이 없는 법이 있다면 모든 법이 공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법이 공한데 어찌 자성이 없는 법이 있겠는가?
- 016_0372_b_23L答曰:若無性,云何有法?云何有相?何以故?無有根本故,但爲破性,故說無性。是無性法若有者,不名一切法空。若一切法空,云何有無性法?
-
【문】
만약 모든 법에 자성이 없다면
어떻게 갓난애에서
노년에 이르기 까지 말하겠는가?
그러므로 여러 가지의 다른 것이 있네. (4) -
016_0372_c_04L問曰:
諸法若無性,
云何說嬰兒,
乃至於老年,
而有種種異?
-
만약 모든 법에 자성이 없다면 다른 것[異相]이 없는 것인데, 그대는 다른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모든 법에 자성이 있다. 모든 법에 자성이 없는데 어떻게 다른 것이 있겠는가? - 016_0372_c_06L諸法若無性,則無有異相。而汝說有異相,是故有諸法性。若無諸法性,云何有異相?
-
【답】
만약 모든 법에 자성이 있다면
어떻게 변이가 있을 수 있을까?
만약 모든 법에 자성이 없다면
어떻게 변이가 있을 수 있을까? (5) -
016_0372_c_09L答曰:
若諸法有性,
云何而得異,
若諸法無性,
云何而有異?
-
만약 모든 법에 자성이 확정되어 존재한다면 어떻게 변이[異性]를 얻을 수 있겠는가? 확정되어 존재한다면 변이할 수 없는 것이다. 마치 순금이 변이할 수 없듯이. 또 마치 어둠이 변이해서 밝음이 되지 않고 밝음이 변이해서 어둠이 되지 않듯이. - 016_0372_c_11L若諸法決定有性,云何可得異?性名決定有,不可變異。如眞金不可變,又如暗性不變爲明,明性不變爲暗。
-
이 법이 변이하는 것이 아니네.
다른 법이 변이하는 것도 아니네.
마치 젊은이가 늙은이가 될 수 없고
늙은이도 젊은이가 될 수 없듯이. (6) -
016_0372_c_14L復次,
是法則無異,
異法亦無異,
如壯不作老,
老亦不作壯。
-
또 만약 법이 변이한다면 마땅히 변이의 상(相)이 있을 것이다. 즉, 이 법이 변이하든가, 다른 법이 변이하든가 이다. 이 둘은 옳지 않다. 만약 바로 이 법이 변이한다면 늙은이가 늙은이가 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늙은이가 그대로 늙은이로 되는 것이 아니다. 만약 다른 법이 변이한다면 늙은이는 젊은이와 다른 것이니, 젊은이가 늙은이가 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젊은이는 늙은이가 되지 않는다. 두 가지 모두21)에 과실이 있다. - 016_0372_c_16L若法有異者,則應有異相,爲卽是法異?爲異法異?是二不然。若卽是法異,則老應作老,而老實不作老。若異法異者,老與壯異,壯應作老,而壯實不作老,二俱有過。
- 【문】 만약 법이 변이한다면 어떤 과실이 있는가? 예를 들어 지금 눈에 나이가 어린 사람이 세월이 지나 늙은이가 되는 것이 보이는 경우와 같이.
- 016_0372_c_21L問曰:若法卽異,有何咎?如今眼見年少,經日月歲數則老。
-
016_0373_a_01L
【답】
만약 이 법이 변이한다면
우유가 곧 타락일 것이네.
우유 외에 어떤 사물[法]이 있어서
타락[酪]이 될 수 있겠는가? (7) -
016_0372_c_22L答曰:
若是法卽異,
乳應卽是酪,
離乳有何法,
而能作於酪?
-
만약 이 법이 변이한다면 우유가 곧 타락일 것이어서 다시 인과 연들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우유와 타락은 여러 가지의 다름이 있기 때문에 우유가 곧 타락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법은 변이하지 않는다. 만약 다른 법이 변이한다고 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우유 외에 어떤 사물[物]이 있어서 타락이 되는 것인가? 이와 같이 사유해 보면 이 법이 변이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법이 변이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편벽되이 집착해서는 안 된다. - 016_0373_a_02L若是法卽異者,乳應卽是酪,更不須因緣,是事不然。何以故?乳與酪有種種異故,乳不卽是酪,是故法不卽異。若謂異法爲異者,是亦不然。離乳更有何物爲酪?如是思惟,是法不異,異法亦不異,是故不應偏有所執。
- 【문】 이 법을 논파하고 다른 법을 논파해도 여전히 공한 것[空]이 있다. 공한 것이 곧 법이다.
- 016_0373_a_08L問曰:破是破異,猶有空在,空卽是法。
-
【답】
만약 공하지 않은 법이 있다면
공한 법이 있을 것이네.
공하지 않은 법이 없는데
어떻게 공한 법이 있을 수 있겠는가? (8) -
016_0373_a_09L答曰:
若有不空法,
則應有空法,
實無不空法,
何得有空法?
-
만약 공하지 않은 법이 있다면 서로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에 공한 법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공하지 않은 법을 논파해 왔다. 공하지 않은 법이 없기 때문에 서로 의존하는 일이 없다. 서로 의존하지 않는데 어찌 공한 법이 있겠는가? - 016_0373_a_11L若有不空法,相因故,應有空法,而上來種種因緣破不空法。不空法無故,則無相待;無相待故,何有空法?
- 【문】 그대가 “공하지 않은 법이 없기 때문에 공한 법도 없다”고 말했다. 만약 그렇다면 공한 것[空]을 말한 것이 된다. 다만 서로 의존하는 일이 없으니 집착해서는 안 된다. 상대가 있다면 서로 의존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상대가 없다면 서로 의존하는 일이 없다. 서로 의존하는 일이 없으니 상(相)이 없고, 상이 없으니 집착이 없다. 이와 같다면 공하다고 말하는 것이 된다.
- 016_0373_a_14L問曰:汝說不空法無故,空法亦無。若爾者,卽是說空,但無相待故,不應有執。若有對,應有相待;若無對,則無相待。相待無故,則無相;無相故,則無執,如是卽爲說空。
-
【답】
위대한 성인께서 공성[空法]을 말씀하신 것은
모든 견해를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이네.
만약 공성[空]이 있다는 견해를 갖는다면
부처님들께서 교화하지 못하시네. (9) -
016_0373_a_19L答曰:
大聖說空法,
爲離諸見故,
若復見有空,
諸佛所不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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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6_0373_b_01L
위대한 성인께서는 예순두 가지의 견해들, 무명과 애(愛) 따위의 번뇌들을 타파하기 위해 공성[空]을 말씀하셨다. 만약 어떤 사람이 공성에 대해서 다시 견해를 낸다면 이 사람은 교화할 수 없다. 비유하면 병에 걸린 사람은 약을 복용해야 치유되는데 약으로 말미암아 다시 병이 들면 치유될 수 없는 것과 같다. 불이 장작에서 나왔다면 물로 끌 수 있겠지만 만약 물에서 생겼다면 무엇으로 끄겠는가? 공성이 물과 같을 때 온갖 번뇌의 불을 끌 수 있다.
죄가 무겁고 탐착(貪著)하는 마음이 깊은 사람들은 지혜가 무디기 때문에 공성에 대해서 견해를 내서, 공성이 있다고 말하거나 공성이 없다고 말하는데 있음[有]과 없음[無]으로 인해서 다시 번뇌를 일으킨다. 만약 공성으로 이 사람을 교화한다면 이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영원히 이 공성을 안다. 이 공성을 떠나면 열반의 도(道)가 없다. 경전에서는 ‘공ㆍ무상(無常)ㆍ무작(無作)의 해탈문22)을 떠나서 해탈을 얻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그저 언설(言說)일 뿐이다’라고 한다.” - 016_0373_a_21L大聖爲破六十二諸見及無明、愛等諸煩惱故說空。若人於空復生見者,是人不可化。譬如有病,須服藥可治。若藥復爲病,則不可治。如火從薪出,以水可滅。若從水生,爲用何滅?如空是水,能滅諸煩惱火。有人罪重,貪著心深,智慧鈍故,於空生見,或謂有空,或謂無空,因有無,還起煩惱。若以空,化此人者,則言我久知是空,若離是空,則無涅槃道。如經說離空、無相、無作門得解脫者,但有言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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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합함을 관찰하는 장[觀合品]8偈 - 016_0373_b_09L中論觀合品第十四[八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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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근(根)을 타파하는 장23)에서 봄[見], 봄의 대상[所見], 보는 자[見者]가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이 셋은 다름[異相]이 있지 않기 때문에 합하지 않는다. 합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대해서 이제 설명하겠다. - 016_0373_b_10L說曰:上「破根品」中說見、所見、見者皆不成。此三事無異法故,則無合。無合義,今當說。
- 【문】 왜 이 안[眼] 등 셋은 합하지 않는가?
- 問曰:何故眼等三事無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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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봄ㆍ봄의 대상ㆍ보는 자
이 셋은 각각 다른 곳에 있네.
이렇듯 세 법(法)은 달라서
결코 결합할 때가 없네. (1) -
016_0373_b_13L答曰:
見可見見者,
是三各異方,
如是三法異,
終無有合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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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6_0373_c_01L
봄은 안근(眼根)을 말한다. 봄의 대상[可見]은 색인 경계[色塵]를 말한다. 보는 자는 ‘나[我]’를 말한다. 이 셋은 각각 다른 곳에 있어서 결코 합할 때가 없다. ‘다른 곳’이란, 눈[眼]은 몸 안에 있다. 색은 몸 바깥에 있다. ‘나’는 어떤 이는 몸 안에 있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모든 곳에 편재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합하지 않는다. 또 만약 봄[見法]이 있다고 말한다면 합해서 보는가, 합하지 않고서 보는가? 두 가지 모두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합해서 본다면, 경계[塵]가 있는 곳마다 근(根)이 있고 ‘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합하지 않는다. 만약 합하지 않고서 본다면 근(根)과 ‘나’와 경계가 각각 다른 곳에 있어도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보지 못한다. 왜 그러한가? 가령 안근(眼根)은 이곳에 있기에 먼 곳의 물단지를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두 가지 모두24) 보지 못한다. - 016_0373_b_16L見是眼根,可見是色塵,見者是我,是三事各在異處,終無合時。異處者,眼在身內,色在身外。我者,或言在身內,或言遍一切處,是故無合。復次,若謂有見法,爲合而見?不合而見?二俱不然。何以故?若合而見者,隨有塵處,應有根有我。但是事不然,是故不合。若不合而見者,根、我、塵各在異處,亦應有見而不見。何以故?如眼根在此,不見遠處甁,是故二俱不見。
- 【문】 ‘나’와 의(意)와 근(根)과 경계(塵) 넷이 합하기에 인식 작용[知]이 발생해서 물단지나 옷 등의 사물들을 인식한다. 그러므로 봄과 봄의 대상과 보는 자가 있다.
- 016_0373_c_03L問曰:我、意、根、塵四事合故,有知生,能知甁、衣等萬物,是故有見、可見、見者。
- 【답】 이것은 근을 논하는 품25)에서 이미 타파한 바 있다. 이제 다시 설명하겠다. 그대가 넷이 합하기에 인식 작용[知]이 발생한다고 말했는데 이 인식 작용은 물단지나 옷 등의 사물을 이미 보고 난 후에 발생한 것인가, 아직 보지 않았는데 발생한 것인가? 만약 이미 보고 난 후에 발생한 것이라면, 인식 작용은 아무 쓸모가 없을 것이다. 만약 아직 보지 않았는데 발생한 것이라면, 그렇다면 아직 합하지 않은 것인데 어떻게 인식 작용이 발생하겠는가? 만약 넷이 동시에 합할 때 인식이 발생한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만약 동시에 발생한다면 서로 의존하는 일이 없다. 왜 그러한가? 전에 물단지가 있으면 후에 보고 그리고 나서야 인식이 발생하는 것이다. 동시라면 전과 후가 없는 것이다. 인식 작용이 있지 않기 때문에 봄ㆍ봄의 대상ㆍ보는 자도 있지 않다. 이와 같이 법들은 환영과 같고 꿈과 같아서 확정된 상[定相]이 있지 않다. 그러니 어떻게 합할 수 있겠는가? 합하지 않기 때문에 공하다.
- 016_0373_c_05L答曰:是事「根品」中已破,今當更說。汝說四事合故知生,是知爲見甁、衣等物已生?爲未見而生?若見已生者,知則無用;若未見而生者,是則未合。云何有知生?若謂四事一時合而知生,是亦不然。若一時生,則無相待。何以故?先有甁,次見,後知生。一時則無先後。知無故,見、可見、見者亦無,如是諸法如幻如夢,無有定相,何得有合?無合故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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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染]ㆍ탐욕의 대상[可染]ㆍ
탐욕을 내는 자[染者]도 또한 그러하네.
그 밖의 입처[入]와 그 밖의 번뇌도
또한 이와 같네. (2) -
016_0373_c_14L復次,
染與於可染,
染者亦復然,
餘入餘煩惱,
皆亦復如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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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봄ㆍ봄의 대상ㆍ보는 자가 합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듯이 탐욕[染]ㆍ탐욕의 대상[可染]ㆍ탐욕을 내는 자[染者]도 합하지 않는다. 봄ㆍ봄의 대상ㆍ보는 자의 세 법에 대해서 말한 것과 똑같이 들음[聞]ㆍ들음의 대상[可聞]ㆍ듣는 자[聞者]ㆍ그 밖의 입처[入] 등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탐욕, 탐욕의 대상, 탐욕을 내는 자에 대해서 말한 것과 똑같이 증오ㆍ증오의 대상ㆍ증오하는 자ㆍ그 밖의 번뇌 등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 016_0373_c_16L如見、可見、見者無合故,染、可染、染者亦應無合。如說見、可見、見者三法,則說聞、可聞、聞者餘入等;如說染、可染、染者,則說瞋、 可瞋、瞋者餘煩惱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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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법들이 합하는 것이네.
봄 등에는 다름[異]이 있지 않네.
다름[異相]이 성립하지 않는데
봄 등이 어찌 합하겠는가? (3) -
016_0373_c_20L復次,
異法當有合,
見等無有異,
異相不成故,
見等云何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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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무릇 사물은 모두 다르기 때문에 합한다. 봄 등에서는 다름[異相]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합하지 않는다. - 016_0373_c_22L凡物皆以異故有合,而見等異相不可得,是故無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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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6_0374_a_01L
비단 봄 등의 법에서만
다름(異相)을 얻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 법들에는
다 다름이 있지 않네. (4) -
016_0374_a_01L復次,
非但見等法,
異相不可得,
所有一切法,
皆亦無異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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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비단 봄ㆍ봄의 대상ㆍ보는 자 등의 셋에서만 다름[異相]을 얻을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모든 법들에는 다 다름이 있지 않다. - 016_0374_a_03L非但見、可見、見者等三事異相不可得,一切法皆無異相。
- 【문】 왜 다름[異相]이 있지 않은가?
- 016_0374_a_05L問曰:何故無有異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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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다른 것은 다른 것에 의존해서 다른 것이네.
다른 것은 다른 것을 떠나서 다른 것이 아니네.
어떤 법이 원인에서 나왔다면
이 법은 원인과 다른 것이 아니네.(5) -
016_0374_a_06L答曰:
異因異有異,
異離異無異,
若法從因出,
是法不異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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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말하는 다른 것[異] 이 다른 것은 다른 것에 의존하기 때문에 다른 것[異]이라 한다. 다른 것[異法]을 떠나서는 다른 것[異]이라 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만약 어떤 법이 연(緣)들에서 생겼다면 이 법은 원인과 다른 것이 아니다. 원인이 괴멸하면 결과도 괴멸하기 때문이다. 마치 대들보와 서까래 등에 의존해서 집이 있는 것과 같다. 집은 대들보나 서까래와 다르지 않다. 대들보와 서까래 등이 괴멸하면 집도 괴멸하기 때문이다. - 016_0374_a_08L汝所謂異,是異因異法,故名爲異,離異法不名爲異。何以故?若法從衆緣生,是法不異因,因壞果亦壞故。如因梁椽等有舍,舍不異梁椽,梁椽等壞,舍亦壞故。
- 【문】 만약 확정된 다른 법[異法]이 있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 問曰:若有定異法,有何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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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만약 다름을 떠나서 다른 것이 있다면
여타의 다른 것과 다름이 있는 것이리라.
다름을 떠나서 다른 것은 없네.
그러니 다름이 있지 않네. (6) -
016_0374_a_13L答曰:
若離從異異,
應餘異有異,
離從異無異,
是故無有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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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다름[異]을 떠나서 다른 것[異法]이 있다면 여타의 다른 것과 다름[異法]이 있을 것이다.26) 그러나 실제로는 다름을 떠나서 다른 것[異法]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여타의 것과 다름이 있지 않다. 예를 들어 다섯 손가락이란 다른 것을 떠나서 주먹이란 다른 것이 있다면, 주먹이란 다른 것은 물단지 등의 다른 것[異物]과 다름이 있을 것이다. 지금 다섯 손가락이란 다른 것을 떠나서 주먹이란 다른 것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주먹이란 다른 것은 물단지 등과 다름[異法]이 있는 것이 아니다. - 016_0374_a_16L若離從異有異法者,則應離餘異有異法,而實離從異無有異法,是故無餘異。如離五指異有拳異者,拳異應於甁等異物有異,今離五指異,拳異不可得,是故拳異於甁等無有異法。
- 【문】 우리 학파의 경전에서는 “다름[異相]은 연들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전체의 상[總相]를 분별하기 때문에 다름[異相]이 있고 다름에 의존하기 때문에 다른 것[異法]이 있는 것이다.”고 말한다.
- 016_0374_a_21L問曰:我經說異相不從衆緣生,分別摠相故,有異相,因異相故,有異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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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6_0374_b_01L
【답】
다른 것[異]에 다름[異相]이 있지 않고
다르지 않은 것[不異]에도 있지 않네.
다름이 있지 않으니
이것은 저것과 다르지 않네. (7) -
016_0374_a_23L答曰:
異中無異相,
不異中亦無,
無有異相故,
則無此彼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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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전체의 상[總相]를 분별하기 때문에 다름[異相]이 있고 다름에 의존하기 때문에 다른 것[異法]이 있는 것이다”고 말했다. 만약 그렇다면 다름[異相]은 뭇 연에서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 뭇 연(緣)의 법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다름[異相]은 다른 것[異法]을 떠나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름은 다른 것에 의존해서 있지 독립해서 성립할 수 없다. 지금 다른 것[異法]에는 다름[異相]이 있지 않다. 왜 그러한가? 이미 다른 것[異法]이 있는데 어디에 다름[異相]을 쓰겠는가? 다르지 않은 것[不異法]에도 다름[異相]이 있지 않다. 왜 그러한가? 다름이 다르지 않은 것에 있다면 다르지 않은 것이라 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두 경우 모두27)에 없다면 다름이 있지 않은 것이다. 다름[異相]이 있지 않기 때문에 이 법(法)과 저 법이 또한 있지 않다. - 016_0374_b_02L汝言分別摠相故,有異相,因異相故,有異法。若爾者,異相從衆緣生,如是卽說衆緣法是異相,離異法不可得故,異相因異法而有,不能獨成,今異法中無異相。何以故?先有異法故,何用異相?不異法中亦無異相。何以故?若異相在不異法中,不名不異法。若二處俱無,卽無異相;異相無故,此彼法亦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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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것[異法]이 있지 않기 때문에 또한 합하지 않는다
바로 이 법(法)이 자기와 합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법이 합하는 것도 아니네.
합하는 자도, 지금 합하고 있는 것도,
합함도 모두 있지 않네. (8) -
016_0374_b_11L復次,異法無故,亦無合。
是法不自合,
異法亦不合,
合者及合時,
合法亦皆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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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법(法)은 자체와 합하지 않는다.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
손가락이 자체와 합하지 않는 것과 같다. 다른 법도 합하지 않는다. 다르기 때문이다. 다름이 이미 성립했기 때문에 합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사유해 보건대 합함[合法]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합하는 자[合者]ㆍ지금 합하고 있는 것[合時]ㆍ합함[合法]을 모두 얻을 수 없다. -
016_0374_b_13L是法自體不合,以一故,如一指不自合;異法亦不合,以異故,異事已成,不須合故。如是思惟,合法不可得,是故說合者、合時、合法皆不可得。
中論卷第二
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 1)제2 「감과 옴을 관찰하는 장[觀去來品]」을 가리킨다.
- 2)미래세의 법과 현재세의 법을 말한다.
- 3)발생과 머묾과 소멸을 말한다.
- 4)같은 법이라는 뜻이다.
- 5)다른 법이라는 뜻이다.
- 6)아직 성립하지 않은 것과 이미 성립한 것 두 가지를 말한다.
- 7)불은 장작을 소유한다, 불 속에 장작이 있다, 장작 속에 불이 있다는 세 가지를 말한다.
- 8)여기서 세 가지는 불과 장작, 취착과 취착하는 자, 행위와 행위자를 말한다.
- 9)9)천안통(天眼通)ㆍ천이통(天耳通)ㆍ타심통(他心通)ㆍ숙명통(宿命通)ㆍ신족통(神足通).
- 10)이상 게송 3를 풀이한 것이다.
- 11)이상 게송 4를 풀이한 것이다.
- 12)‘태어남과 늙음ㆍ죽음이 동시에 생긴다면’이라는 뜻이다.
- 13)13)자기가 짓는 것이다, 타자가 짓는 것이다, 양자가 짓는 것이다, 원인이 없이 지어지는 것이다라는 네 가지 오류를 말한다.
- 14)이상 색(色)에 자성이 없다는 것을 논한 것이다.
- 15)이상 수(受)에 자성이 없다는 것을 논한 것이다.
- 16)이상 상(想)에 자성이 없다는 것을 논한 것이다.
- 17)눈 등의 감관들이 상이하기 때문에 인식도 상이하다.
- 18)이상 식(識)에 자성이 없다는 것을 논한 것이다.
- 19)이상 행(行)에 자성이 없다는 것을 논한 것이다.
- 20)고(苦)ㆍ집(集)ㆍ멸(滅)ㆍ도(道).
- 21)바로 이 법이 변이하는 것과 다른 법이 변이하는 것 두 가지를 말한다.
- 22)3해탈문(解脫門)이란 해탈에 이르는 방법이 되는 세 종류의 선정(禪定)을 말한다. 아(我)와 법(法)의 공함을 관하는 것이 공(空)해탈문, 차별의 상(相)을 떠나는 것이 무상(無相)해탈문, 원구(願求)의 생각을 버리는 것이 무원(無願)해탈문 또는 무작(無作)해탈문이다.
- 23)제3 「6근(根)을 관찰하는 장[觀六情品]을 가리킨다.」
- 24)근(根)과 ‘나’와 경계가 합하는 것과 합하지 않는 것 두 가지를 말한다.
- 25)주 14)와 같다.
- 26)이(異)나 이상(異相)은 ‘다름’을, 이법(異法)은 ‘다른 것’을 의미한다. 이 차이를 적용하면 뒤의 응리여이유이법‘(應離餘異有異法)’은 “여타의 다름을 떠나 다른 것이 있을 것이다”가 되어야 하겠지만, 문맥을 통하게 하기 위해 “여타의 다른 것과 다름이 있을 것이다”로 번역하였다.
- 27)다른 것[異法]이나 다르지 않은 것[不異法]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