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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6_0582_a_01L대승광백론석론(大乘廣百論釋論) 제2권
- 016_0582_a_01L大乘廣百論釋論卷第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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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천보살 본논 지음
호법보살 주석
현장 한역 -
016_0582_a_02L聖天菩薩本護法菩薩釋
三藏法師玄奘奉詔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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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파상품(破常品) ② - 016_0582_a_04L破常品第一之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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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어떤 이가 집착하기를 열반은 실제로 있는 것이며, 항상하고 즐겁다. 경에 말씀하시기를, “비구들아, 잘 알아라. 열반의 경지가 있으니, 생멸도 없고 형상도 없고, 함이 없어 끝내 안락하니라”고 하였나니, 이것도 역시 앞의 이론과 교리에 의하여 무찌르리라.
또 게송에 이렇게 말했다.
결박과 결박된 원인을 떠나서는
따로 참 해탈이 없나니
내거나 이루는 작용이 없으므로
있더라도 없다고 말해야 되리라
논하건대 앞에서 이미 구족히 말한 모든 구절의 이치는 현량(現量:눈에 보임)의 경계를 초월한 것으로서 말로 따질 때엔 반드시 결과를 낸다는 사실로써 비량(比量:추측)하여 열반의 경계는 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성립시키는데 어떻게 추측하여 실제로 있는 것으로서 항상하고 즐거운 것임을 알겠는가.
만일 능히 낸다고 허락한다면 스스로의 논리에 어기나니, 열반은 결과가 없어 모든 행(行:현실)을 어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열반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다. 설사 실제로 있다고 하여도 스스로 몸에는 수승한 작용을 이루지 못하거니 어찌 해탈이라 하랴.
만일 자기의 몸이 소연(蕭然:초연히) 하고 자재하게 되어 영원히 얽매임을 여읜다면 해탈이라 하겠지만 자기의 몸에는 이런 작용은 없다. 그러므로 설사 있다 하여도 자기 몸에는 이익이 없거늘 어찌 이런 쓸모없는 법의 편이 될 필요가 있으랴.
만일 쓸모가 있다고 허락한다면 유위(有爲)와 같고 이미 쓸모없음을 허락한다면 토끼의 뿔과 같으니, 지혜있는 이들은 결정코 쓸모가 있는 것은 무위요, 쓸모가 없는 것은 실제 있는 것이라고 허락지 않으리라. 그러므로 열반의 본체는 실제로 있지 않은 것임을 안다.
여기에서 번뇌와 수번뇌(隨煩惱)와 순생(順生:생의 차례대로 받는 업의 종류)과 순후(順後:생의 차례를 뛰어넘어 받는 업임)에 결정적으로 받는 업 따위는 모두 속박이라 하는데 이 세력에 의하여 모든 유정들이 오래도록 생사의 넓고 큰 감옥에 갇혀서 온갖 심한 고통을 받나니, 해탈치 못했기 때문이다.
온갖 속박에 의하여 생겨진 5온의 결과를 모두 속박된 바라 하나니, 생겨진 괴로움의 결과는 싸이는 원인에 속해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온갖 속박을 없애는 모든 거룩한 도를 모두 원인이라 하는데 이에 의하여 번뇌와 수번뇌를 영원히 끊고, 모든 업을 짓지 않고, 나중의 괴로움을 부르지 않아 얽매임을 여읜 해탈의 결과를 증득하기 때문이다.
이 해탈의 결과는 속박과 속박된 바와 원인을 떠나서 따로 진실한 본체가 있는 것이 아니니, 이른바 속박에서 벗어날 때에도 속박 이외에 따로 해탈을 증득하는 것이 아니고, 여실하게 갈피[分位]의 차별을 증득해 보았기 때문이다. 즉 나지 않는 것을 해탈이라 한다.
속박된 바도 그러하여서 번뇌의 속박을 떠나 소연히 자재한 갈피의 차별을 해탈이라 할지언정 따로 어떤 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원인도 그러하여서 작용의 차별에서 모든 번뇌를 여의면 해탈이라 하는데 거룩한 도를 떠난 이외에 따로 어떤 법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이 속박과 속박된 바와 원인을 떠나서는 따로 열반이나 해탈이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다.
또 다시 만일 열반이 있다면 반드시 의지할 바가 있으리니, 이 의지한 바에서는 5온이나 ‘나’나 열반에 드는 시간이나를 모두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끝끝내 열반에 이르는 띠엔
5온도 없고 ‘나’도 없으니
열반에 드는 이를 보지 못하거니
어디에 의해 열반이 있으랴
논하건대 남을 없는 열반의 지위에 의하여 앞의 5온이 영원히 사라지고 뒤의 5온이 나지 않으면 그 사이에는 모든 5온의 상속함이 아주 없다. 이미 열반에 드는 이를 보지 못했거늘 무엇에 의하여 진실한 열반에 있다고 말하랴.
만일 그러할 때에도 시설해서 진실한 보특가라(補特伽羅)가 있다고 허락한다면 이내 여래가 멸도한 뒤에 결정코 보는 것이 있으리라는 허물에 빠진다. 만일 그러할 때에 보특가라가 있다고 시설하지 않는다면 도리어 앞에 허물과 같으리라.
열반에 드는 이를 이미 얻을 수 없기에 결정코 진실한 열반이 없나니, 세간에서는 도무지 탐욕 따위가 없는 이에게 탐욕 따위가 있는 것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설사 다시 열반이 의지할 바가 있으므로 의당 탐욕 따위와 같이 그 성품은 무상하리라.
또 만일 열반의 본체가 있는 것이라면 인연의 형상이 있어 알아볼 수 있어야 할 터이니, 마치 빛 따위와 같이 세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 마치 어떤 이가 말하기를 “세존이시여, 만일 열반의 본체가 실제로 있음을 구한다면 생사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열반이라 함은 뭇 형상을 영원히 멸하여 온갖 산란을 여의었기 때문입니다”한 것과 같다.
이 경의 뜻은 온갖 세간의 산란함과 허망한 소견이 모두 영원히 멸하고, 거기에서 일어난 취한 바와 취하는 것의 형상이 영원히 멸함으로써 열반을 증득한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열반은 결정코 온갖 집착 있는 이의 의지하고 반연할 곳이 아니다.
두 구절을 말하면 그의 차례를 알 수 있나니, 열반은 반연할 바 뭇 형상을 영원히 멸했고, 온갖 능동적인 혼란함을 영원히 여의었다. 열반은 이와 같이 뭇 형상과 산란함을 여의었으니, 있음[有]이라 하며 열반을 취하지 말라. 그러나 경에서 열반의 경계 따위가 있다고 말한 것은 열반이 아주 없다는 주장을 깨뜨리기 위함이니, 어떤 이가 집착하기를 “생사는 시작도 마침도 없어서 결정코 열반의 경계 따위가 없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번뇌와 뭇 괴로움의 성한 불이 영원히 꺼져서 열반의 경계에 들면 생멸도 형상도 하염도 없어 끝끝내 안락하다” 하셨으니, 이는 도리를 세워서 생사의 불길이 항상 계속하지만 영원히 꺼질 시기가 없지는 않다는 것을 드러낸 말이다.
뭇 인연에서 생겨서 많은 손해와 번뇌를 주기 때문에 마치 세간의 산림에 붙은 불과 같다. 이른바 생사의 고통이 끝없는 옛적부터 뭇 인연에 의하여 생겨서 끊임없이 상속하거나 어진 벗을 만나 법문을 듣고 수행하여 무루의 거룩한 도가 눈앞에 나타날 때에 온갖 번뇌를 열하고 모든 업을 일으키지 않아 뒷 괴로움이 계속치 않으면 열반이라 한다. 마치 세간에서 장작이 다하면 불이 꺼지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열반의 거룩한 도로써 증득한 바는 끝끝내 적멸하여 온갖 성품과 형상을 여의었고, 온갖 분별과 희론이 영원히 끊였나니, 그 까닭에 경에서 갖가지로 말씀하신 것이 모두가 방편으로 망견의 집착을 제하기 위한 것이니, 지혜 있는 이들은 바르게 깨달아 알지언정 열반이 있다 없다는 등으로 말하지 말라. 만일 생사 위에서 모든 분열을 일으켰으면 쉽사리 방편을 지어서 끊어없앨 수 있지만 열반 위에서 모든 분별을 일으키면 그 병폐는 더욱 깊어져서 고치기 어려우니, 그러므로 있다 없다 따위에 집착되지 말라.
또 다시, 수론(數論)외도는 말하기를 “인과가 다 흩어져 무너지고, 희망이 다 그치면 오직 생각과 신아(神我)만이 얽매임을 떠나 홀로 남나니, 이럴 때를 열반의 해탈이라” 한다 하는데, 그런 집착을 깨뜨리기 위하여 다음의 게송을 말했다.
‘내’가 언젠가 모든 덕을 버리고
애욕을 여의면 무슨 생각 있으랴
논하건대 나타난 경계에 따라 분별하고 수용하는 것을 그대는 생각이라 하고, 이어 그것을 ‘나’라고 집착하는 데 이는 반드시 감관과 경계의 화합을 여의지 못했다. 이러한 두 가지 일은 희망을 여의지 못했으니, 희망을 채우기 위하여 감관과 경계가 화합할 때엔 나타난 경계에 따라 생각은 그를 수용한다.
열반에 들 때엔 희망이 쉬고, 인과가 흩어져 무너지거늘 어찌 생각이 있을 수 있으랴. 이미 생각이 있다면 ‘나’도 있지 않거늘 어째서 그대는 말하기를 “오직 생각과 아(我)만이 얽매임을 떠나 홀로 남으면 그럴 때를 열반이라 한다” 하는가.
만일 그대가 다시 말하기를 “열반에 들 때에 생각은 없으나 ‘나’는 있다 하더라도 옳지 못하다” 그러므로 다음에 이런 게송을 말했다.
만일 ‘내’가 있고 생각이 없으면
그는 아무 것도 없음과 같다
논하건대 그대의 주장은 ‘내’는 생각으로써 성품과 형상을 삼는다고 하는데 열반에 들 때에 생각이 이미 있지 않다면 성품과 형상이 모두 멸하여 아무 것도 있지 않거늘 다시 무엇에 의하여 ‘내’가 있다고 말하리오.
만일 말하기를 “그럴 때에 비록 생각의 작용은 없으나 종자가 있어서 ‘나’의 본체는 남아 있다. 마치 눈이 빛을 보는 것으로 작용을 삼는데 어떤 때에 작용이 멸하나 눈의 본체는 남아 있는 것 같다” 한다면 이것도 옳지 못하다. 만일 의지할 바가 있다면 그럴 일도 있을 수 있으리라. 그 까닭이 무엇이었는가. 공능의 차별을 종자라 하는데 이런 종자는 반드시 남에게 의존한다. 이미 의존한 바가 없는데 어찌 종자가 있겠는가.
전 세상의 모든 행의 공능의 차별에 의하여 일으켜진 의식 위에서 안식(眼識)의 차별된 공능을 내는 것을 눈이라 하는데 이런 눈은 반드시 결정코 아뢰야식(阿賴耶識)이나 4대의 종자에 의존하지만 남음 없는 열반 가운데는 인과가 흩어지고, 희망과 생각이 모두 사라져서 도무지 의지한 바가 없거늘 ‘나’의 본체가 있다고 헤아리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또 집착하기를 “‘나’는 종자인데 이에 의하여 생각의 차별된 공능을 일으킨다” 하면 이 ‘나’는 가장 수승한 것에 포섭되리니, 수승한 공능이 있어 모든 법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또 집착하기를 “‘나’는 종자의 의지할 바인데 이것을 원인으로 삼아 생각의 결과를 일으킨다”하면 이는 스스로의 종지에서 생각이 곧 ‘나’라는 주장을 잃고, 또 생각과 신아의 성품은 게으르고 타락되어 오직 받는 이 뿐이요, 짓는 이가 아니라는 주장을 잃을 것이다.
만일 집착하고 있는 ‘내’가 생각이 아니라면 그대는 지금 이와 같은 ‘나’의 형상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형상을 말하지 않아도 ‘내’가 이루어진다면 온갖 허망한 집착이 모두 이뤄질 것이다. 이에 대해 다시 이런 게송을 말했다.
남음 없음에 ‘나’의 씨가 있으면
결정코 생각을 내거니와
‘나’와 생각이 없어지면
모든 유위는 저절로 없어진다.
논하건대 만일 남음 없는 열반의 경계에 ‘나’의 종자가 있어 영원히 빠지지 않는다면 결정코 눈앞에 나타난 생각을 내리니, ‘내’가 다르지 않기 때문에 마치 앞에 지위와 같다.
만일 생각이 눈앞에 일어난다면 온갖 것이 있거늘 어찌 생사의 얽매임을 벗어난다 하리오. 만일 말하기를 “여기에 비록 ‘나’의 종자가 있으나 뭇 도구가 빠졌기 때문에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하면 이것도 옳지 못하니, ‘내’가 다르지 않기 때문에 앞의 지위와 같으나 뭇 도구가 빠짐은 없다.
또 그대가 집착하기를 “‘나’의 본체는 두루하여 다른 뭇 도구와 항상 함께 상응하나니, 딴 자리가 없기 때문에 마치 자기의 소유와 같다. 어찌 뭇 도구가 궐(闕)하는 바가 있다 하랴. 만일 뭇 도구는 제각기 ‘나’에게 속하였고, 다른 뭇 도구도 항상 함께 상응하나 자기에게 속하지 않았으므로 궐함이 있다” 한다면 이것 또한 옳지 못하다. 장소에 따름이 없기 때문에 항상 함께 상응한다면 어째서 자기에게 속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와 같은 집착은 나중에 널리 무찌르리라.
만일 말하기를 “이 지위는 끝내 적멸하여서 본래부터 ‘내’가 없고, 이제 다시 생각도 없다. 온갖 종자가 의지한 바 없으므로 이내 영원히 멸해서 나중의 몸을 내지 않음이 마치 밖의 종자가 없으면 싹 따위가 나지 못하는 것과 같다” 한다면 이런 것은 끝내 해탈이라 한다.
‘공’도 아니요, 유(有)도 아니요, 아주 없음도 아니요, 항상함도 아니요, 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니요, ‘나’ 있음도 ‘나’없음도 아니요, 물들음도 깨끗함도 아니어서 온갖 희론(戱論)이 끊어졌다. 삿된 소견으로 열반이 없다 하는 것을 막기 위해 참으로 항상함ㆍ즐거움ㆍ‘나’있음ㆍ조촐함이라 하거니와 이런 방편의 말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이미 있음에도 집착하지 않고 없다고도 무시하지 않으면 이것을 바르게 해탈을 알았다 한다.
또 다시 승론(勝論) 외도들이 말하기를 “만일 괴로움과 즐거움 따위의 근본을 영원히 없애고, 온갖 것을 버린다면 오직 ‘나’만이 홀로 존재하여 소연히 자재하고, 하염이 없이 항상 안락하리니, 이것을 열반이라 하거니와 이러한 열반은 결정코 허락할 수 있지만, 만일 괴로움만이 멸하여 ‘내’가 없다면 그것은 아주 없음이니, 어찌 열반이라 하리오.
또 이 열반은 온갖 얽매임을 여의어 자재함으로써 형상을 삼으므로 지혜로운 이들은 기뻐하거니와 본체가 도무지 없다면 무엇을 기뻐하랴. 이는 빈 말뿐이요, 도무지 진실한 이치가 없다. 이런 집착을 깨뜨리기 위하여 다음에 이런 게송을 말했다.
만일 괴로움을 떠나서 ‘내’가 있다면
결정코 열반은 없으리니
그러므로 열반 안에는
‘나’ 따위가 영원히 사라진다.
논하건대 그대가 집착하기를 “온갖 괴로움과 즐거움 따위 법은 모두가 ‘나’의 공덕이니, 아직 다 사라지기 전까지는 항상 스스로의 의지가 되는 ‘나’를 따른다” 하거니와 어떻게 여기서 ‘나’와 여읠 수 있으랴. ‘내’가 다르지 않으므로 의당 앞의 지위와 같아서 그와 상응하리라.
또 괴로움과 즐거움 따위는 남음 없는 가운데서도 영원히 스스로의 의지가 되는 ‘나’를 여의지 못하나니, 그것이 ‘나’의 공덕이기 때문이다. 마치 수효 따위와 같다.
그대가 집착하는 하나의 공덕이나 두루한 공덕은 모두 ‘나’의 공덕이므로 항상 ‘나’와 합하는 것 같이, 괴로움 따위도 그렇다. 어떻게 여읠 수 있으랴. 이와 같이 이 ‘나’는 남음 없는 열반의 세계에서 진리에 쫓기기 때문에 괴로움 따위와도 상응한다. 그러므로 열반은 결정코 있지 않나니, ‘내’가 항상 얽매임을 받아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생사에는 오직 뭇 괴로움이 싸였을 뿐인데 인연의 힘에 따라 끝없이 윤회한다. 무명에 흘려서 허망하게 아집(我執)을 내어 항상 괴로움의 불길에 타진다 하고, ‘나’를 잃을까 두려워하여 해탈을 구하지 않으며, 설사 해탈을 구한다 하여도 증득하지 못하나니, 허망하게 ‘나’를 집착하기 때문에 뭇 고통이 더욱 성한다.
지혜 있는 이들은 참되고 착한 벗에 의하여 뒤바뀜 없이 이와 같은 일을 바로 알고, 성한 큰 괴로움을 없애기 위하여 부지런히 방편을 닦기를 머리에 타는 불을 끄는 것같이 하여 거룩한 지혜의 물을 얻어 자주자주 정수리에 부으면 마치 타든 장작이 다하여 불이 영원히 꺼지는 것같이 되어 고요하고 안락하리니, 이를 열반이라 한다.
이와 같이 생사의 순전한 큰 고통이 훨훨 타오르는 것이 영원히 멸하면 안락한 열반이 되나니, 지혜 있는 사람이라면 뉘라서 좋아하지 않으랴. 어떤 지혜로운 사람이 몸에 큰 병이 걸렸는데 몸이 없어질 것을 두려워하여 이 병을 좋아하겠는가. 오직 어리석은 사람만이 이 짓을 한다.
지옥에 있는 유정들은 비록 갖가지 사나운 불길에 태워지고, 큰 고통이 잠시도 쉬지 않고 닥쳐오건만 그래도 자기 몸에 대하여 깊이 애착을 느끼는 것은 모두가 전에 지은 나쁜 업의 세력에 의하여 무명의 허망한 소견이란 도깨비에 홀려서 ‘나’라는 소견인 번뇌의 근본을 뽑지 못했으므로 그 유정들로 하여금 아주 없어질 것을 두려워하게 된다.
지혜로운 이들은 모든 현실의 상속함은 공하고 ‘내’가 없어서 순전히 큰 괴로움의 무더기이니, 영원히 사라져 없어질 때에 무엇이 두려울 것이 있으랴 하고 관찰한다.
그러므로 만일 ‘나’라는 소견을 여의면 반드시 영원히 사라지는 열반을 좋아한다. 이 까닭에 아주 없다는 것도 버릴 수 있나니, ‘내’가 아주 없다고 보기 때문에 아주 없다는 소견이라 할지언정 괴로움이 없어졌다 하여 아주 없다는 소견이라 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경에 말씀하시기를 “‘나’와 세간이 영원히 사라져 망가졌다고 보기 때문에 아주 없다는 소견이라 한다” 하였다. 세간이라 함은 ‘내 것’이란 일을 드러내나니, ‘나’와 ‘내 것’이 진실로 실체가 있다고 집착하다가 그가 끊였다고 들을 때엔 당장 아주 없다는 소견을 낸다. 만일 집착하는 바가 없으면 아주 없다는 소견도 없다.
오직 집착한바 ‘나’와 ‘내 것’이란 일에 의하여 일으켜진 뒤바뀜은 아주 없음과 항상함, 두 소견뿐이므로 위없는 대사께서 한 쪽에 집착한 소견을 세우신 것이다.
이 허망한 소견은 생사를 쳐 일으키고, 큰 고통의 불길을 더욱 성학 하여 한량없는 어리석은 유정들을 몰아치기 때문에 세존께서 영원히 사라짐을 칭찬하시어 애욕을 여의어 고요함은 가장 수승하고 안락하다 하시므로써 교화할만 한 이들로 하여금 진정한 마음으로 기뻐하게 하셨다. 이와 같이 열반은 없음도 아니요, 있음도 아니어서 묘한 지혜로 증득하는 바이므로 수승한 진리[勝義]라 한다.
또 모든 으뜸가는 진리 가운데서 가장 수승하고 이를 지나서는 다시 구해야 할 수승한 진리가 없기 때문에 수승한 진리라 한다.
또 다시 어떤 이는 말하기를 “항상한 법은 결정코 있나니, 으뜸가는 진리는 남이 없고 멸함도 없으며, 진실히 착하여서 능히 반연이 되어 주어 거룩한 지혜를 내는 작용이 있으므로서이다” 하는데 이것도 옳지 못하니, 으뜸가는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으뜸가는 진리가 진실로 있다면 의당 따위와 같이 뭇 인연에서 나와야 되고, 인연에서 나오지 않았다면 마치 토끼의 뿔과 같아서 본체가 실제로 있지 않으리라.
또 동유(同喩)가 없이는 있다는 원인이 이뤄지지 않나니 설사 원인이 이뤄진다 하여도 항상 머무는 것이 아니다.
또 으뜸가는 진리의 본체가 실제로 있다면 의당 병 따위와 같아서 거룩한 지혜의 경계가 아니리라. 만일 참된 거룩한 지혜가 유위의 경계를 반연한다면 다른 예삿 지혜와 같을지언정, 참된 거룩한 지혜는 아니리니, 번뇌를 끊지 못하고, 열반을 증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으뜸가는 진리의 이치는 ‘공’도 아니요, 있음도 아니요, 항상함도 아니요, 무상함도 아니요, 무상함도 아니니 거기에서 조금이라도 있음의 성품을 구하여도 결정코 얻을 수 없다. 이런 이치를 드러내기 위하여 다음에 이 게송을 말했다.
차라리 세간에서 구할지언정
으뜸가는 진리에서 구할 것 아니니
세간에는 조금 있지만
으뜸가는 진리엔 없기 때문이다
논하건대 세간에 있음의 법은 세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현재에 아는 법이니 빛과 소리 따위요, 둘은 현재에 수용하는 법이니, 병과 옷 따위이다. 이 두 가지는 세상이 모두 있는 줄 아는 것이므로 성립시킬 필요가 없다. 셋은 작용이 있는 법이니, 눈과 귀 따위이니, 그들 끼리끼리의 작용에 의하여 있는 줄 안다. 이 세 가지 법은 세속에서 알고 수용하는 경계이다.
세간에는 다시 세 가지 법이 있으니, 끝내 없음과 3유(有:3계)의 앞 뒤 살피의 없음이다. 이 없음을 간별하기 위하여 조금 있다고 한다. 또 허망한 소견으로 세워진 모든 법을 간별하기 위하여 조그만큼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세속의 세 가지 있음과 세 가지 없음은 으뜸가는 진리에 의해 말하건대 모두가 진실이 아니니 으뜸가는 진리는 있지도 없지도 않는 것이어서 부별과 언어로는 모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세간의 거짓된 현실 안에서 있음의 성품을 구하면 조그만큼은 얻을 수 있지만 으뜸가는 진리 안에서는 있음의 성품을 구하여도 얻을 수 없나니, 이런 세간의 조금의 있음의 성품은 거기에도 있지 않거늘 하물며 다른 있음의 성품이랴.
만일 그렇다면 어찌 이와 같은 조그만큼 있는 세간을 즐거워하랴. 그럴 필요가 없다. 도무지 으뜸가는 진리가 없으니, 세간에는 비록 갖가지 재난과 걱정이 있으나 조그마한 법은 수용할 것이 있거니와 으뜸가는 진리에는 조그마한 법도 없기 때문이니, 무엇을 수용하겠는가.
그렇지 않나니, 세간과 으뜸가는 진리에는 괴로움 있음과 괴로움 없음과 기뻐할 것과 싫어할 것이 있나니, 어느 지혜로운 사람이 물이 소화되지 않아서 큰 병이 이룰 줄 알면서도 다시 더 많이 마시려 하겠는가.
딱하여라. 세간의 어리석고 뒤바뀐 무리는 생사의 뭇 고통이 성한 것을 기ㅃ하고, 으뜸가는 진리의 고요하고 안락함을 싫어하나니, 이런 어리석은 말을 어찌 번거롭게 귀담아 들으랴. 그러므로 지혜로운 이는 부지런히 수행하여 모든 법의 ‘공’을 관찰하여 생사의 괴로움에서는 삿된 소원을 제거하고, 으뜸가는 진리의 즐거움에서는 바른 서원을 닦아야 한다.
이와 같이 세 가지 해탈문(解脫門)을 구족하면 비록 오래도록 생사의 큰 바다에 있더라도 생사의 허물에 물들지 않고, 초연히 해탈하여 유정들을 이롭게 한다. 이에 의하여 경의 이치를 잘 통달하여 방편선교(方便善巧)로써 법의 공함을 증득한 이는 비록 맹렬한 불속에 있으나 타지 않고, 생사의 모습을 나타내나 항상 해탈한다. - 016_0582_a_05L復次,有執涅槃實有,常樂。如契經說:‘苾芻,當知有涅槃界,無生,無滅,無相,無爲,究竟安樂。’此亦依前理教應破。又說頌曰:‘離縛所縛因 更無眞解脫 生成用闕故設有亦名無。’論曰:前已具說諸有句義,越現量境,於諍論時,必以生果,比量安立非涅槃界能有所生。云何比知實有常樂?若許能生,則違自論,涅槃無果,違諸行故。是故涅槃體非實有。設許實有,於自依身,無成勝用,何名解脫?若令己身,蕭然自在,永離繫縛,可名解脫,此於己身,無如是用。是故設有於身無益,何黨如是無用法爲?若許有用,則同有爲。旣許無用,便同兔角,諸有智者定應不許有用無爲,無用實有。故知涅槃體非實有,此中煩惱及隨煩惱,順生後受諸決定業,摠名爲縛,由此勢力,令諸有情,久處生死廣大牢獄,受諸劇苦,不解脫故。諸縛所招五取蘊果,摠名所縛,所生苦果,繫屬集因,不自在故。所有能除諸縛聖道,摠名爲因,由此永斷煩惱、隨眠,不引諸業,不招後苦,證得離繫解脫果故。此解脫果,非離能縛、所縛及因,別有實體,謂從能縛,得解脫時,非能縛外,別證解脫,如實證見分位別故。卽彼不生名爲解脫。所縛亦爾,離煩惱縛,蕭然自在分位差別,名爲解脫,無別有法。因亦如是,作用差別,離諸煩惱,名爲解脫,離聖道外,無別有法。是故離此縛、所縛因,無別實有涅槃、解脫。復次,涅槃若有,必有所依。此所依者,若蘊,若我,般涅槃時,俱不可得。故說頌曰:‘究竟涅槃時 無蘊亦無我 不見涅槃者依何有涅槃。’論曰:住無餘依般涅槃位,前蘊永滅,後蘊不生,其中都無諸蘊相續。旣不見有般涅槃者,依何說有眞實涅槃?若於爾時,亦許施設有其眞實補特伽羅,便墮如來滅後定有見處過失。若於爾時,不施設有補特伽羅,還同前過,般涅槃者旣不可得。是故決定無實涅槃,以於世閒,都未曾見無貪等者有貪等故。設復計有涅槃所依,是則涅槃有所依故,應如貪等,其性無常。又若涅槃體是有者,則有緣相,而可了知,應如色等,不出生死。如說:世尊,若求涅槃體實有者,不出生死。所以者何?言涅槃者,永滅衆相,離諸散動。此經義言,一切世閒散動妄見,皆永離故,彼所發起,所取、能取相永滅故,證得涅槃。是故涅槃決定非是一切有執,所依緣處。有說二句,如其次第,涅槃永滅所緣衆相,永離一切能緣散動。涅槃旣絕衆相散動,不可以有,而取涅槃。然經說有涅槃界等,爲破撥無涅槃者見,有執生死無始無終,決定無有般涅槃界故。佛說:有煩惱衆苦熾火永滅,般涅槃界,無生,無滅,無相,無爲,究竟安樂。此立道理,顯生死火非常相續,永無滅期,從衆緣生,有損惱故,猶如世閒山林熾火。謂生死苦,雖無始來,依衆緣生,相續無斷,若遇善友,聞法修行無漏聖道,現在前時,滅諸煩惱,不起諸業,後苦不續,名曰涅槃。譬如世閒薪盡火滅。然此涅槃,聖道所證,究竟寂滅,離諸性相,永絕一切分別戲論。所以契經種種宣說,皆爲方便,除妄見執。諸有智者應正覺知,勿謂涅槃#是有無等。若於生死,起諸分別,易作方便,令其斷除,若於、涅槃,起諸分別,其病深固,難可救療。是故不應執有無等。復次,數論外道作如是言:‘因果散壞,悕望止息,唯有思我,離繫獨存,爾時名爲涅槃、解脫。’爲破彼執故,說頌曰:‘我時捨諸德 離愛有何思。’論曰:隨所現境,分別受用,汝說名思,卽執爲我,此必不離根、境和合。如是二事,不離悕望,爲滿悕望,根、境和合,隨所現境,思卽受用。般涅槃時,悕望止息,因果散壞,何得有思?旣無有思,我亦非有。云何汝說:唯有思、我,離繫獨存,爾時名爲涅槃解脫?若汝復謂:般涅槃時,雖無有思,而有我在。此亦不然。故說頌曰:‘若有我無思 便同無所有。’論曰:汝宗計我思爲性相,般涅槃時,思旣非有,性相俱滅,更無所有,復依何物,而說有我?若謂爾時,雖無思用,而有種子,我體猶存,譬如眼根見色爲用,有時用滅,而眼體在,此亦不然。若有所依,可有是事。所以者何?功能差別,名爲種子。如是種子必依於他,旣無所依,何有種子?先世諸行功能差別,所引識上,能生眼識差別功能,說名爲眼,如是眼根,必定依止阿賴耶識及四大種,無餘依中,因果散壞,悕望思慮悉皆滅盡,都無所依,而計有我體是種子,理不應然。又若執我卽是種子,由此發思差別作用,此我卽應最勝所攝,有勝功能,起諸法故。又若執我是種所依,由此爲因,能生思果。便失自宗#思卽是我,及失思、我其性懈墯,唯是受者,而非作者。若所執我,非卽是思,汝今應說如是我相。若不說相,而我成者,則應一切妄執皆成。又說頌曰:‘無餘有我種 則定能生思 要無我無思諸有乃無有。’論曰:若無餘依般涅槃界有我種子,不永拔者,則應決定生現起思,我無異故,猶如前位。思若現起,則有一切,何名解脫生死繫縛?若言此中,雖有我種,衆具闕故,思不得生。此亦不然。我無異故,應如前位,衆具無闕。又汝所執我體周遍,與他衆具,恒共相應,無別處故,猶如己有,云何而言衆具有闕?若言衆具各屬自我,雖他衆具恒共相應,不屬己故,言有闕者,此亦不然。處無別故,恒共相應,何不屬已?如是所執,後當廣破。若說:此位究竟寂滅,本無有我,今復無思。一切種子無所依故,卽便永滅,不生後有,如無外種芽等不生。如是卽名究竟解脫。非空非有,非斷非常,非苦非樂,非我無我非染非淨,絕諸戲論。爲止邪見,撥無涅槃故,說眞有常樂我淨。此方便言不應定執。旣不執有,亦不撥無,如是乃名正知解脫。復次,勝論外道作如是言:‘若能永拔苦樂等本,棄捨一切,唯我獨存,蕭然自在,無所爲作,常住安樂,名曰涅槃。’如是涅槃,決定應許若唯苦滅,無有我者,便爲斷壞,何謂涅槃?又此涅槃離諸繫縛,自在爲相,智者欣樂,體若都無,何所欣樂?此有虛言,而無實義。爲破彼執故,次頌曰:‘若離苦有我 則定無涅槃 是故涅槃中我等皆永滅。’論曰:汝執一切苦樂等法,皆是我德,乃至未滅,恒常隨、逐自所依我。云何此中與我相離?我無異故,應如前位,與彼相應。又此樂等,無餘依中,應不永離自所依我,是我德故。猶如數等。如汝所執一德、遍德,是我德故,常與我合,苦等亦然。云何相離?如是此我,於無餘依般涅槃界,理所逼故,亦與苦等諸德相應。是則涅槃決定無有,我恒被縛,不解脫故。生死唯有衆苦聚集,因緣力故,無始輪迴,無明所迷,妄生我執謂我恒爲苦火焚燒,恐失我故,不求解脫。設求解脫,亦不能證。妄執我故,衆苦熾盛。諸有智者依眞善友,無倒了知如是事已,爲欲息滅熾然大苦,精勤方便,如救頭然,得聖慧水,數數灌注,如所燒薪熾然永滅,寂靜安樂,名曰涅槃。如是生死純大苦聚,熾然永滅,安樂涅槃。諸有智人誰不欣樂?誰有智者身嬰重病,恐身斷故欣樂此疾?唯有愚人,能爲是事。如地獄中,諸有情類雖爲種種猛焰焚燒,大苦煎迫時,無蹔廢,而於自身,深愛著者,皆是所作惡業勢力,無明妄見鬼魅所纏,未拔我見煩惱根本,令彼有情怖畏斷滅。智者觀見諸行相續,空、無有我純大苦聚,永斷滅時,何所怖畏?是故若能離於我見,必定欣樂,永滅涅槃。由此亦能捨於斷見,以見我斷,名爲斷見。非唯苦斷名爲斷見。故契經說:見我世閒永斷壞故,名爲斷見。言世閒者,顯我所事執,我我所眞實有體,聞彼斷時,便生斷見。若無所執,則無斷見。唯依所執,我、我所事,所起顚倒、斷常兩見,無上大師立邊執見。由此妄見,擊發生死大苦熾火,令其增廣,逼迫無量無智有情。是故世尊稱讚永滅離欲,寂靜,最勝安樂,令其可化,深心欣樂。如是涅槃,非無非有,妙智所證,名爲勝義。又諸義中,最爲勝故,過此更無所求義故,名爲勝義。復次,有作是說:常法定有,以勝義諦無生,無滅,眞實善,有能爲所緣,生聖智故。此亦不然,非勝義故。若勝義諦是實有者,應如色等,從衆緣生。若非緣生,應如兔角,體非實有。又無同喩,有因不成,設許因成,則非常住。又勝義諦體若是有,應如甁等,非聖智境。若眞聖智,緣有爲境應如餘智,非眞聖智,不斷煩惱,不證涅槃。勝義諦理非空非有,非常非無,常欲於其中,求少有性,定不可得。爲顯此義故,次頌曰:‘寧在世閒求 非求於勝義 以世閒少有於勝義都無。’論曰:世閒有法,略有三種:一現所知法,如色、聲等;二現受用法,如甁、衣等,如是二法,世共知有,不待成立;三有作用法,如眼耳等,由彼彼用,證知是有。如此三法,是入世俗所了受境。世閒復有三種無法,謂究竟無及隨三有前後際無爲。簡此無故,說少有。又簡妄見所立諸法故,言少有。如是世俗三有、三無,依勝義說。皆非眞實,以勝義諦非有非無,分別、語言皆不能及。寧在世閒虛僞事內,欲求有性,少易可得,於勝義諦眞實理中,欲求有性,究竟難得。以此世閒少分有性,於彼尚無,況餘有性?若爾,寧樂如是少有?世閒不須如是。都無勝義,以於世間,雖有種種災患過失,而有少法,可得受用。勝義諦中,無有少法,何所受用?不爾,世閒、勝義,有苦,無苦,可欣厭故,誰有智者,知水不消,成重病苦,更求多飮?哀哉!世閒愚癡顚倒,欣讚生死衆苦熾然,厭毀勝義寂靜安樂,如此癡言,何煩聽受?是故智者當勤精進,觀諸法空,於生死苦,應除邪願,於勝義樂,應修正願。如是具足三解脫門,雖復久居生死大海,而非生死過失所染,蕭然解脫,利樂有情。由此善通契經句義,方便善巧,證法空者,雖處猛焰,而不焚燒,雖現死生,而常解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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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파아품(破我品) ① - 016_0585_b_03L大乘廣百論釋論破我品第二之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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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6_0585_c_02L
또 다시 승론(勝論)외도가 말하기를 “앞에서 말하되 ‘남음없는 열반의 지위에는 5온도 없고, ‘나’도 없다’ 하니, 누구에 의해 열반을 말하리오” 하니 그 이치가 옳지 않음, ‘내’가 결정코 있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없다면 어떤 법에 의하여 ‘나’라는 소견을 일으키랴. ‘나’라는 소견이 없다면 ‘내 것’을 집착하는 소견도 없으리라. 만일 중생들이 끝없는 옛적부터 이와 같은 ‘나’와 ‘내 것’이란 소견을 일으키지 않으면 살가야견(薩迦耶見:몸이 있다는 소견)이 영원히 사라져서 3계의 생사의 뭇 고통을 받지 않는 것 같으리라.
또 마음ㆍ감관ㆍ몸을 반연하여 ‘나’라는 소견을 낸다하지 말지니, 마음ㆍ감관ㆍ몸은 세간에서 ‘나’의 소유라 하기 때문이다.
또 ‘나’와 ‘내 것’은 결정코 다름이 있나니, 속한 바와 붙는 것이 모두 말로 표현할 것에 속하기 때문이다. 마치 천수(天授) 등이 타는 수레 따위와 같기 때문이다.
또 남의 몸을 반연하는 ‘나’라는 소견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나’라는 소견이 마음ㆍ감관ㆍ몸을 반연하여 경계를 삼아서 난다고 한다면 천수와 또 덕수(德授) 등의 소견도 남의 몸을 반연하여 경계를 삼아서 일어남과 같을 것이다.
또 나와 남의 마음 따위에 차별이 있으므로 ‘나’라는 소견을 낸다 하지 말지니, 끝없는 옛적부터 스스로 마음과 감관 따위는 찰나찰나에 뒤바뀌어서 앞뒤가 제각기 다르게 되었지만 모두(앞뒤)를 반연해서 ‘나’라는 소견을 낸다고 허락하기 때문이다.
또 이 ‘나’라는 소견은 현재의 스스로의 마음을 반연하여 경계를 삼지 않나니, 현재에 보이는 일들과 어긋나기 때문이다. 또 과거나 미래의 마음 따위를 반연해서 경계를 삼지 못하나니, 그들은 본체가 없어 마치 허공의 꽃과 같아서 ‘나’라는 소견을 내지 못하고, 현재에 보이는 ‘나’라는 소견을 과거도 미래도 아니기 때문이다.
또 한 몸에 두 마음이 나란히 서지 못하나니, 그러므로 현재의 마음을 반연해서 ‘나’라는 소견을 내지 못한다. 또 마음은 생각생각에 다르게 멸하고, 다르게 나거니, 만일 ‘내’가 없다면 어떻게 기억하고, 의식하고, 익히고, 외우고, 감사하고, 미워하는 일이 있겠는가.
또 마음과 감관 따위는 결정코 ‘나’라는 소견의 반연이 되지 못하나니, 남자나 여자 따위 형상이 여기에는 없기 때문이니, 마치 병 따위와 같다. 그러므로 결정코 진실한 ‘내’가 있다. 이를 반연하여 ‘나’라는 소견을 내면 이 까닭에 나는 대장부라 불린다.
이런 말들은 비록 빈 말은 있으나 진실한 뜻은 없나니,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만일 ‘내’가 있다면 마치 병 따위와 같아서 인연에서 생겼을 것이요, 났다면 결정코 사라질 것이니, 항상 머물지 않는다. 만일 인연에서 나지 않았다면 마치 토끼의 뿔과 같아서 수승한 본체도 작용도 없거늘 어찌 ‘나’라 하겠는가.
또 비록 ‘내’가 있다거나 항상하다고 주장하나 끝내 이유도 비유도 세우지 못하나니, 이유와 비유가 없이 세운 바는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종(宗:주장)만을 세움으로써 성립된다면 온갖 세운 것이 모두 성립되어야 한다. 설사 방편으로써 교묘하게 이유와 비유를 세운다 하여도 세워진바 ‘나’는 그 본체가 항상치 않으리니 온갖 원인 있는 것은 모두가 항상치 않기 때문이다.
또 세워진바 ‘나’는 실제로 있거나 항상 머무는 것이 아니니, ‘나’의 성품은 알 바이기 때문이며, 말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니, 마치 병 따위와 같다.
또 세워진 ‘내’가 실제로 있다면 의당 뒤바뀐 ‘나’라는 소견의 반연할 바가 아닐 것이요, 만일 진실에 맞는 소견이 뒤바뀐 것이라면 온갖 성현들도 모두 뒤바뀌었을 것이나, 온갖 성현들의 지혜는 모두 경계에 맞추어 보는데 모두가 뒤바뀜은 아니었다.
‘나’라는 소견도 그러하여서 뒤바뀜이 아니니라. 만일 그렇다면 ‘나’라는 소견도 거룩한 지혜와 같아서 끝없는 옛적부터 생사의 근본이 되지는 않으리라.
만일 이 ‘나’라는 소견이 진실에 맞추어 알면서도 끝없는 예부터 생사를 끌어 일으킨다면 거룩한 지혜도 생사를 끌어 일으켜서 끝내는 열반을 얻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중생들은 어리석고 뒤바뀌어서 5온의 ‘나’없는 법 가운데서 허망하게 ‘나’가 있다고 집착하고, 그리하여 ‘내 것’이란 집착을 낸다. 이 허망한 집착인 ‘나’와 ‘내 것’이란 소견은 진실의 경지에 맞지 않아 뒤바뀜을 이루기 때문에 3계에서 나고 죽는 뭇 고통을 끌어낸다.
만일 ‘나’없는 5온 안에서 거룩한 지혜와 소견을 일으키어 ‘나’없음과 ‘내 것’ 없음에 통달하면 영원히 사르고 끊고 열반을 증득한다. 그러므로 반드시 ‘나’ 없음을 믿어 받들어야 한다.
또 그대가 말하기를 “마음ㆍ감관ㆍ몸을 세간 사람들은 ‘내 것’이라 하기 때문에 그를 반연해서 ‘나’라는 소견을 내지 못한다” 하거니와 ‘나’도 ‘나’라는 소견의 경계가 아니리니, 세간에서도 말하기를 “‘나’의 소유라 함은 ‘나’는 이런 형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간에서 ‘내 것’이라 말한다” 하여 ‘나’라는 소견의 경계가 아니라 하지 말아야 된다.
‘나’와 ‘내 것’의 현실을 마주 견주어 보건대 인정치 않거나 혹은 딴 물건이 있거나 혹은 딴 물건이 없다.
또 그대가 말한바 속해 있는 바와 속하는 것이 모두 말로써 표현되기 때문이니, 마치 천수 등의 예와 같다. ‘나’와 ‘내 것’이 결정코 다름이 있다면 이 원인은 결정치 못하다. 세간에서도 말하기를 “이들 음식의 맛과 향기는 유달리 다른 것보다 다르다” 하는데 어찌 향과 맛을 떠나서 따로 음식이 있으랴. ‘나’의 ‘내 것’의 소견은 비록 인연과 5온을 갖추었으나 혹은 하나의 온(蘊)을 따로 지박하여 ‘나’를 삼고, 다른 온으로써 ‘내 것’을 삼거나 혹은 안의 온을 통틀어 집착하여 ‘나’를 삼고, 밖의 온으로써 ‘내 것’을 삼으니, 그러므로 세운 바 종취에 상부과(相符過:주장하는 이와 방지하는 이의 이론이 같아져서 흐지부지해지는 것)가 생긴다.
또 그대가 말하기를 “남의 몸을 반연하는 ‘나’라는 소견은 없기 때문에 마음 따위는 ‘나’라는 소견의 경계가 아니라” 한다면 ‘나’도 ‘나’라는 소견의 반연할 바가 아니리라. 남을 말미암아서는 ‘나’도 ‘나’라는 소견도 없기 때문이다.
만일 남을 반연해서는 ‘나’라는 소견을 일으키지 못하고, 스스로를 반연해야 ‘나’라는 소견을 낸다 하거니와 비록 남의 몸을 반연하여 ‘나’라는 소견을 일으키지 않으나 ‘나’라는 소견이 스스로의 믿음들을 반연하는 것이 해로울 것이 무엇이랴.
어리석은 유정들은 평등 ‘공’ㆍ‘나’ 없음의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오직 모든 현실에 대하여 끝없는 예부터 자주자주 ‘나’와 ‘나’라는 소견을 익히고, 나와 남 따위 모든 온법(蘊法)이 상속하는 데서 스스로를 나라고 집착하고, 나와 다르면 남이라 하는데 그 안에는 도무지 ‘나’라는 진실한 성품이 없다.
또 그대가 말하기를 “나와 남의 마음에 차별이 있으므로 ‘나’라는 소견이 반연치 않는다” 하지 말라. 끝없는 예부터 아직까지 스스로의 마음과 감관 따위가 찰나찰나에 뒤바뀌어 앞뒤가 다르건만 모두가 인연 따라 ‘나’라는 소견을 낸다 하거니와 이것도 옳지 못하니, 자기 자신의 앞뒤의 인과가 상속하는데 자기로써 남을 바라보면 인과가 끊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집착하는 ‘나’는 본체는 하나인데 앞뒤에 차이가 없으나 남인 ‘나’(他我:남의 본체)의 형상은 다름이 있다 한다면 ‘나’라는 소견은 스스로 자기 몸 속의 ‘나’라 반연하여 힘과 작용이 다하면 남인 ‘나’를 반연치 않는다.
‘나’도 그러하여서, 자기 몸의 앞뒤가 비록 생각생각에 달라지지만 끝없는 예부터 인과가 끊이지 않음이 마치 등불이나 강물같이 상속하여 거짓으로 하나인 듯 하나니, 어리석은 유정들은 하나의 ‘나’라고 여기고 ‘나’라는 소견을 낸다. 남의몸은 자기에게 대하여 인과가 끊였기 때문에 ‘나’라는 소견을 반연치 않는다.
또 그대는 계교하기를 “‘나’는 나와 남이 비슷하여 모두 두루하고, 모두 항상하여 얽매인 곳이 없다”고 하는데 ‘나’라는 소견은 무슨 까닭에 이를 반연하고 저(항상하고 두루한 ‘나’)는 아니겠는가.
만일 그대가 계교하기를 “‘나’는 얽매인 곳이 있다” 한다면 혹 어디에 태어날 때에 이것과 저것의 차별이 있으리니, 마치 빛 따위와 같이 그 성품이 무상하리라. 그러므로 유위법의 인과의 상속함은 제각기 다르기 때문에 ‘나’라는 소견이 이와 같이 차별되게 하였음을 알 것이다.
또 그대가 말하기를 “‘나’라는 소견이 현재의 제 마음을 반연하여 경계를 삼는 것이 아닌가”한 따위 질문은 모두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자거의 몸을 반연하는 앞뒤의 인과는 상속하면서 거짓되고 하나인 듯이 ‘나’라는 소견을 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제 마음을 반연한다는 허물은 없다.
또 한 몸 가운데 여러 가지 마음 갈피가 있으면서 인과가 서로 엇바뀌는 것을 한 유정이라 한다. 다른 마음갈피 가운데 ‘나’라는 소견을 일으키는데 다른 마음 갈피를 반연하여 ‘나’를 계교하고 따진들 무슨 실수가 있으랴. 그대들이 계교하는 ‘내’가 실제로 있다면 ‘나라는 소견으로 ‘나’를 보는 것은 바른 소견인 듯 하여 허망한 소견이 아닐 것이요, 만일 ‘나’를 보지 못한다면 삿된 소견인 듯 하여서 ‘나’라는 소견은 아니리라.
또 그대가 말하기를 “마음 따위가 생각생각에 달라져서 멸하고 달라져서, 나는데 만일 ‘나’가 없다면 어떻게 기억ㆍ인식ㆍ익힘ㆍ외움ㆍ은혜ㆍ원수 따위가 있을 수 있으리오” 하나 이것도 옳지 못하다.
유정의 몸 안에는 하나하나에 아뢰야식(阿賴耶識)이 있어 한 형태로 상속하면서 모든 법의 종자를 간직하여 잃지 않고, 온갖 법과 엇바뀌면서 인과가 되어 주나니, 훈습(熏習:익힘)의 힘 때문에 이와 같은 기억ㆍ인식ㆍ익힘ㆍ외움ㆍ은혜ㆍ원수 따위 일이 있다. 그대가 주장하는 ‘내’가 항상하여 변함이 없다면 뒷 지위가 앞 지위와 꼭 같으리니,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있다면 항상 있어야 하고, 없다면 항상 없어야 하리니, ‘나’의 본체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나’의 작용만이 변하여 바뀐다고 하지도 말라. 작용은 본체를 여의지 않았으므로 ‘나’도 따라서 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다면 마음 따위는 의당 ‘나’에서 일어나서 결과를 내기 때문에 ‘나’는 항상함이 아닐 것이다.
만일 ‘내’ 마음에 대하여 자라게 하는 작용이 없다고 한다면 어찌 마음이 ‘나’에게 속했다 할 수 있으랴. ‘내’가 항상하다면 마음 따위의 종자를 붙들어 가질 수 없거늘 어찌 기억ㆍ인식 따위의 일이 있을 수 있으랴.
또 그대가 말한 바 이 마음과 감관 따위는 결정코 ‘나’라는 소견의 반연할 바가 되지 못하니, 남자ㆍ여자 따위의 형상은 여기에는 없기 때문에 마치 병 따위와 같다는 것은 이유가 되지 못한다. 남자나 여자 따위의 형상은 현재 있기 때문이다.
또 그대가 주장한바 ‘나’도 ‘나’라는 소견의 반연할 바가 되지 못하니, 남자나 여자 따위 형상이 ‘나’ 안에는 없기 때문에 세운 바 이유는 확정치 못한 것이 된다.
이 이치를 드러내기 위하여 다음의 게송을 말했다.
속의 나[內我]는 남자도 아니요
여자도 아니며 둘 아님도 아니거늘
다만 지혜가 없기 때문에
‘나’를 장부라 할 뿐이다
논하건대 의지하고 있는 몸의 형상에 차별이 있으므로 세속에서는 남자다, 여자다, 둘 아닌 것이다 하거니와 이 몸의 형상은 속의 나에게는 없다. 계교하고 있는 바 나의 본체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또 남자 따위의 형상은 날적마다 바꾸어진다. 또 금생에 변하여 바뀌는 일도 있나니, 별다른 형상을 버리고 다른 형상을 취하는 것을 보나 그대가 집착하는 ‘나’는 항상하여 변하거나 바뀜이 없다. 버릴 것도 취할 것도 없으므로 이런 형상은 없다.
또 남녀 따위 형상은 ‘나’의 본체는 아니나 ‘나’의 공덕이니, ‘나’와 공덕이 합쳐서 남녀 따위의 형상을 낸다고도 하지 말라.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즐거움 따위 공덕 안에는 말하지 않는 바이기 때문이다.
‘나’의 독특한 공덕은 대략 아홉 가지가 있으니, 괴로움ㆍ즐거움ㆍ탐냄ㆍ성냄ㆍ끊임없이 부지런함ㆍ법ㆍ법아님ㆍ행함ㆍ지혜이다. 남녀 따위의 형상은 이 아홉 가지 안에 포섭되지 않은 바이거늘 어찌 이를 ‘나’의 공덕이라 하랴.
또 남녀 따위의 형상은 같고 다름의 성품[同異性]에 포섭되는 것이라고도 말하지 말라. 같고 다름의 성품에 의해서도 ‘나’를 남녀 따위의 형상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같고 다름의 성품은 의지한 바가 결정적이어서 항상하여 의지한 바에 두루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미 항상하고, 남녀 따위의 형상도 형상하다면 버릴 수 없는 것이리니, 언제나 세 가지 형상이 있기 때문이다.
또 남녀 따위의 형상은 두루하여서 온갖 ‘나’와 몸 따위를 표현한다. 어찌 ‘나’에게만 같고 다른 성품에 포섭되랴.
또 같고 다름의 성품의 의지하는 바는 제각기 다르다. 설사 ‘나’만이 같고 다름의 성품에 포섭된다 하여도 어떻게 하나의 ‘나’에 세 가지 같고 다름이 있을 수 있으랴. 하나의 의지할 곳에 여러 가지 같고 다름이 있음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바라사(波羅奢) 나무 하나에 세 가지 같고 다름이 있는데 바라사의 성품과 나무의 성품과 열매의 성품처럼 ‘나’도 그와 같아서 하나의 ‘나’의 본체 위에 세 가지 같고 다름인 남성ㆍ여성ㆍ남성ㆍ여성이 아닌 것이 있다.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바라사의 성품은 바라사에 두루하고, 나무의 성품은 나무에 두루하고, 열매의 성품은 열매에 두루해서 이 세 가지 의지한 바에는 서로 너그럽고 좁음이 있기 때문이다. ‘나’ 위의 세 가지 성품은 모두 ‘나’에게만 두루했을 뿐 의지한 바는 차별이 없으니 어떻게 비유가 되겠는가.
그러므로 끝없는 예부터 자주 익힌 망상 분별에 의하여 일으킨 거짓 형상을 세속에서는 만자 따위라 할뿐이오, 실제로 ‘내’가 있어서 남자 따위의 형상이 된 것은 아니다. 다만 무명ㆍ교만ㆍ망상에 의하여 어리석은 범부들이 말하기를 “‘내’가 장부라 하거나 여자라 하거나 둘 아닌 것이라” 할 뿐이다. 게송에서는 간략히 우선 장부라 했을 뿐이다.
몸 안의 남녀 따위 형상이 있으나 집착하고 있는 ‘나’의 본체에는 남녀 따위의 형상이 없으므로 그대의 비량(比量)은 이뤄지지 않음[不成]과 일정치 않음의 허물이 된다.
만일 그대가 말하기를 “‘나’와 몸 따위에는 모두 남녀 따위의 형상이 있으나 ‘나’는 진실하고 몸 따위는 거짓이라 한다면 이것도 옳지 못하다. 만일 남녀 따위의 형상이 두 곳에 모두 있다면 어째서 하나는 거짓이고 하나는 진실이라” 하겠는가.
그러니 이렇게 주장해야 한다. ‘나’라는 소견은 결정코 실제의 ‘나’를 반연치 않으니, 남녀 따위 형상과 섞이기 때문이다. 마치 몸 따위를 반연하여 일어난 남자 따위의 형상과 섞긴 마음과 같기 때문이라고.
또 ‘나’라는 소견 따위는 실제의 ‘나’를 반연치 않나니, 반연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마치 딴 마음과 같다.
또 ‘나’라는 소견의 경계는 실제의 ‘나’가 아니니, 남자 따위의 형상은 마음으로 반연할 바이기 때문이다. 마치 몸 따위와 같다. 그러므로 그대의 말은 거짓이요, 진실이 없다.
또 다시 순세(順世)의 도는 말하기를 “모든 법과 ‘나’는 4대종으로써 성품을 삼나니 4대종(大種) 밖의 딴 물건은 없다. 즉 4대종이 화합하여 ‘나’와 몸과 마음 따위가 된다. 안팎의 모든 법은 현재의 세상에는 있지만 앞뒤의 세상은 없다. 유정들의 법은 뜬 거품 따위와 같아서 모두가 현재의 뭇 인연에서 나왔을지언정 전생에서 온 것도 아니고 뒷세상으로 가지도 않는다. 몸의 부치들이 화합하여 벌려 세워진 차별을 반연하여 남녀 따위의 마음을 일으킨다. 수용하고 있는 것의 의지하는 바와 ‘내’가 화합하여 ‘나’의 본체로 하여금 남자 따위의 형상을 나타남이 있다.
이 ‘나’의 경계를 반연하여 다시 ‘나’라는 소견을 일으키어, ‘내’가 남자다 여자다 두 가지가 아닌 것이다 한다.
이제 그에게 묻노니, 그대가 말하기를 “4대종이 화합하고 변해서 몸과 감관 따위가 되었다면, 그렇게 이뤄진 안의 4대종의 제 성품은 남자 따위라 하겠는가. 남자 따위가 아니라” 하겠는가.
그들은 의당 대답하기를 아니다. 안과 밖의 4대종의 성품은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4대종의 성품은 안팎의 차이가 없다고 하지만 세워진 형상에는 차별이 있다. 이와 같이 세간에 알려진 모든 형상의 남자 따위의 제 성품의 차별은 모두가 제 마음의 분별에서 일어난 것이어서 실제 물건 가운데는 이런 성품이 있지 않다 하리라.
만일 그렇다면 다음 게송에서 이렇게 말했다.
온갖 대종(大種)가운데
남녀도 없고 두 가지 아닌 것도 아니라면
어떻게 여러 대종 가운데
남녀의 형상 따위가 있으랴
논하건대 만일 4대종의본 성품에 남자ㆍ여자 두 가지 아닌 것이 없다면 어떻게 남자 따위의 형상을 낼 수 있으며, 남녀 따위의 마음은 무엇을 반연하여 일어나랴. 수용(受用)하는 것의 의지하는 바가 ‘나’와 합한다 하지만 어떻게 남자 따위 형상을 나타내랴.
만일 ‘나’에게 남녀 따위 형상이 없다면 어떻게 ‘나’라는 소견으로써 ‘나’는 남자다 여자다 두 가지 아닌 것이다 하라.
만일 본 성품이 없어도 남과 화합한다 하나 마침내는 변하여 딴 형상을 이루지 못하리라. 또 딴 형상이 마음을 내게 하지도 못하리라. 마치 곱고 흰 물건이 다른 빛과 화합하여도 딴 형상을 이루지 못하고 딴 마음도 일으키지 못하는 것 가다. 파지가(頗脂迦) 따위가 딴 물건과 합할 때엔 앞의 것이 사라지고 뒤의 것이 나기 때문에 비유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진실한 ‘내’가 4대종으로써 성품을 삼아 오래도록 머무르면서 남녀 등의 형상이나 아견의 반연할 바가 되는 일은 결정코 있을 수 없다.
또 다시 기론(記論) 외도는 말하기를 “모든 법과 ‘나’는 모두가 세 형상과 화합한다. 이 세 형상에 의하여 모두가 세 가지 마음의 소리를 일으킨다. 무엇을 세 가지 형상이라” 하는가. 첫째는 남자의 형상이니, 능히 모든 법을 내고, 둘째는 여자의 형상이니, 능히 모든 법을 멸하고, 셋째는 두 가지가 아닌 형상이니, 능히 제 자리를 지킨다 한다. 그러나 이것도 옳지 않다. 모든 법과 ‘나’의 본체는 세 가지 형상이 아니거늘 어떻게 세 가지 마음의 소리를 일으킬 수 있으랴.
또 남과 화합으로써 바뀌어 세 가지 형상을 이룬다고는 말하지 말라. 앞에 말한 허물의 형상을 여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법과 ‘나’의 본체가 세 형상이 아니면서도 세 형상과 합하기 때문에 바뀌어 세 가지 형상을 이룬다 한다면 세 형상은 다시 다른 세 형상과 합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세 형상은 세 형상이 아닐 것이며, 세 가지 마음의 소리도 일으키지 못하리라.
또 이 세 형상이 형상 아닌 것과 합함으로써 능히 형상 아닌 것으로 하여금 형상이 되게 한다면 모든 법과 ‘내’가 형상과 합할 때에 세 형상을 형상 아닌 것으로 되게 하리니, 그렇다면 끝내 세 가지 마음의 소리를 일으키지 못하리라.
또 이 세 형상의 공능의 차별은 서로 어기어서 반드시 공존하지 못하거늘 어떻게 한 물건에 세 가지 소리가 있음이 토끼 뿔 따위와 같을 수 있으랴. 남자ㆍ여자 두 가지 아닌 것 따위의 세 가지 소리는 세상이 모두 함께 알고 있는 바이기 때문이다.
또 한 물건 위의 세 형상의 공능이 서로 어기면서도 공존하는 것이라면 온갖 물건에도 모두 세 형상을 갖추었을 것이요, 눈앞에 보이는 소리에는 차별이 있을 수 없으리라.
또 이 세 형상이 진실로 있다면 오직 있는 법에만 의지할 것이요, 없는 법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니라. 그렇다면 세 가지 소리는 두루하지 못했을 것인데 어찌 눈앞에 보는 여러 곳의 말씨는 있는 법 위에 없기도 하고 없는 법 위에 있기도 하랴. 현재에 보는 경계는 비방하지 못한다. 만일 세 형상이 없는데도 세 소리가 있다면 온갖 곳에서도 모두 그러하리라.
또 이 세 형상을 나고 머무르고 멸함에 배대함은 이치에 맞지 않으니, 죽은 자의 죽음과 여자의 남과 두 가지 아닌 것의 나고 죽음을 세상은 눈앞에 보기 때문이다.
또 이 세 형상이 따로 진실한 본체가 없으니, 위에 다시 널리 간추리리라. 그러므로 다만 세속의 말씨에 따라 남자 따위 세 가지 소리의 차별이 있다고 하였거니와 따로 실제 이와 같은 세 형상이 있는 것은 아니다.
외도들은 이와 같은 세 형상이 있다고 집착하여 실제의 ‘나’와 ‘나’라는 소견의 반연할 바에 의존하나니, 이는 뒤바뀐 지혜이다. 내도(內道:불도)는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뒤바뀜이 없다. 그대들은 뒤바뀜 있는 지혜에 의존하지 말라. 뒤바뀜 없는 이와 똑바로 견주어 가릴 때에 바른 주장으로 세워야 하나니, ‘나’라는 소견을 반연하여 실제로 ‘내’가 있다고 증득하기 때문이다.
또 이 ‘나’라는 소견은 ‘나’의 형상을 따라 ‘내’가 있다고 집착하는가. 스스로의 깨달음을 따라서 ‘내’가 있다고 집착하는가. 만일 ‘나’의 형상을 따라서라면 바른 소견이라 할 것이요, 만일 스스로의 깨달음을 따른다면 ‘나’에 반연치 말아야 된다.
또 만일 처음의 것이라면 다음 게송에 이렇게 말하셨다.
너는 ‘나’라고 하지마는 다른 이는 ‘나’라고 아니라하니
그러므로 ‘나’는 일정한 형상이 없다
논하건대 만일 그대의 몸 가운데의 ‘나’의 제 모습이 다른 이의 몸에도 똑같이 있다면 ‘나’의 제 모습에 따라서 ‘나’라는 소견을 일으킬 것인데 어째서 하나의 소견이 온갖 것을 반연치 못하는가. 이미 하나의 소견이 일체의 반연하는 일이 없으므로 ‘나’라는 소견은 ‘나’의 형상을 따르지 않는 것임을 안다.
만일 그대의 몸 가운데의 ‘나’의 제 모습이 다르면 다른 이의 몸안의 나의 제 모습도 달라야 한다. 그대는 나라고 여기지만 다른 이는 아니다 하고, 다른 이가 ‘나’라고 여기지만 그대는 아니다 하리라. 그렇다면 이 ‘나’의 형상은 일정치 않으리라. 이미 일정한 형상이 없다면 일정한 성품도 없을 것이니, 성품과 형상이 일정치 않다면 진실치 않고 항상치 않거늘 어찌 ‘내’가 진실하고 항상하다고 집착하랴.
또 주장하기를 자신의 ‘나’라는 소견은 ‘나’ 스스로의 제 모습을 따라서 일어나지 않나니, 다른 ‘나’의 제 모습을 반연하여 생기지 않기 때문이니, 마치 다른이가 가지고 있는 마음 따위와 같다.
또 자신의 ‘내’가 반연이 되어서 ‘나’ 스스로의 소견을 일으키지 않나니, 그대가 ‘나’라고 허락하기 때문이다. 마치 남의 ‘나’와 같다.
또 모든 ‘나’라는 소견은 결정코 ‘나’를 반연치 않나니, 나와 남의 경계가 서로서로 있다 없다 하기 때문이다. 마치 푸름ㆍ누름 따위를 반연하는 마음 따위와 같다.
또 온갖 ‘나’는 ‘나’라는 소견의 경계가 아니니, 온갖 다른 법에 포섭되지 않는 바이기 때문이다. 마치 온갖 토끼뿔이 없는 것과 같다.
또온갖 ‘나’는 실제로 ‘나’의 성품이 아니니, 이는 알 바이기 때문이다. 마치 온갖 법과 같다. 그러므로 나라는 소견은 실제의 ‘나’를 반연치 않는다. 모든 이들이 계교하는 ‘나’는 진실한 성품과 형상이 없으니, 온갖 지혜로운 이는 아무도 보지 않으려 한다. 오직 어리석은 사람들은 항상 깊이 즐기고 집착하나니, 마치 병든 눈의 경계는 결정코 실제로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라는 소견으로 반연할 바를 삼아 이 ‘내’가 실제로 있고 항상하다고 증득하거나 주장하지 말라.
만일 둘째의 것이라면 다음에 이런 게송을 말했다.
어찌 무상한 것에 대하여
허망한 분별로 ‘나’를 삼음이 아니랴
논하건대 만일 스스로의 깨달음을 따라 ‘내’가 있다고 집착한다면 어찌 다만 무상한 몸 따위만을 반연하여 허망하게 분별하면서 실제의 ‘나’라고 집착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현재에 보는 세간에서는 다만 몸 따위의 앞뒤에서인연에 따르는 지위의 차별을 반연하여 허망하게 계교하기를 “‘나’는 살지다. ‘나’는 여위다 ‘나’는 우승하다. ‘나’는 열등하다. ‘나’는 밝다. ‘나’는 어둡다. ‘나’는 괴롭다. ‘나’는 즐겁다” 하기 때무니다. 몸 따위는 무상하므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만 항상 머무는 실제의 ‘나’에는 이런 차별이 없다. 이로 인하여 추측해 알건대 온갖 ‘나’라는 소견은 모두가 실제의 ‘나’로써 경계를 삼지 않고, 오직 허망한 몸 따위를 반연하여 경계를 삼나니, 스스로의 망상에 따라 깨달음의 지혜를 내기 때문이다. 마치 어두움 속의 새끼줄을 반연하고 뒤바뀐 있는 뱀으로 집착하는 것같다.
또 마치 세간에서 허망하게 분별하여 허공의 꽃이나 둘째의 달이 있다고 집착하는 것은 반드시 먼저부터 세간의 적은 일들을 본 뒤에야 비로소 이런 일이 있는 것 같다. ‘나’라는 소견으로 ‘나’에 집착함도 이러하여서 먼저 생멸하는 5온의 일을 반연한 뒤에야 비로소 결정코 실제의 ‘내’가 있다고 집착한다.
또 마치 꿈 속의 허망한 경계는 먼저 보았든 것과 화합해서 계교한 것인 것 같이 ‘나’라는 소견의 경계도 그러하여서 먼저 여러 5온을 반연한 뒤에야 비로소 화합하여 허망하게 계교하고 헤아린다.
또 온갖 ‘나’라는 소견은 대략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구생(俱生)이요, 하나는 분별(分別)이다. 구생의 ‘나’라는 소견은 끝없는 예부터 안의 원인에 의하여 항상 몸과 함께 하여서 삿된 가르침이나 삿된 분별을 기다리지 않고 멋대로 일어나는 것이므로 구생이라 한다.
여기에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항상 상속함이니, 제7식(識)에서 제8식(識)을 반연하여 자기의 마음의 형태를 일으키어 ‘나’라고 집착하기 때문에 ‘나’라는 소견이라 한다.
둘은 끊임 있는 것이니, 제6식(識)에서 5온(蘊)을 혹은 전체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반연하여 자기의 마음의 형태를 일으키어 ‘나’라고 집착하기 때문에 ‘나’라는 소견이라 한다.
둘은 끊임있는 것이니, 제6식(識)에서 5온(蘊)을 혹은 전체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반연하여 자기의 마음의 형태를 일으키어 ‘나’라고 집착하기 때문에 ‘나’라는 소견이라 한다.
이러한 두 가지 구생의 ‘나’라는 소견은 미세하여 끊기 어려우니, 자주자주 수승한 무아관(無我觀-‘나’가 없다고 관찰하는 방법)을 닦아 익히어야 바야흐로 제해 없앨 수 있다. 분별의 ‘나’라는 소견은 현재 세상에서 밖으로 반연하는 힘 때문에 몸과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삿된 가르침과 삿된 분별을 기다려서야 비로소 일어나는 것이므로 분별이라 한다.
여기에 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삿된 가르침에서 말하는 5온의 형상을 반연하여 자기의 마음을 일으키고 그것을 분별하여 ‘나’라고 여기는 것을 ‘나’라는 소견이라 하고, 둘째는 삿된 가르침에서 말하는 ‘나’의 행상을 반연하여 자기의 마음을 일으키고 그것을 분별하여 ‘나’라고 여기는 것을 ‘나’라는 소견이라 한다.
이와 같은 두 가지 분변의 ‘나’라는 소견은 거칠고 무거워서 끊기 쉬우니, 성제현관(聖諦現觀:견도위 이전에 닦는 관법임)이 처음 나타날 때에 바로 끊어져 없어진다.
이렇게 말한 온갖 ‘나’라는 소견이 마음 밖은 5온의 경계는 있기도 없기도 하거니와 마음 안의 5온의 경계는 모두가 있다. 그러므로 ‘나’라는 소견은 모두가 무상을 반연한다. 모든 5온의 행상을 허망하게도 ‘나’라고 집착한다. 모든 5온의 행상이 인연에서 생겼으므로 이 허환(虛幻)하게 있다. 허망하게도 집착하는 ‘나’는 인연에서 생긴 것이 아니므로 결정코 있지 않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비구들이여, 알아야 한다. 세간의 사문ㆍ바라【문】등이 가지고 있는 ‘나’라는 소견은 모두가 5온을 반연하여 일어났다” 하셨다.
또 다시 이제 모든 소경의 무리에게 따져 묻노니, 공하고 ‘나’없다는 진리에 무슨 잘못이 있기에 억지로 분별하여 ‘내’가 있다고 고집하는가.
만일 온갖 법이 공하여 ‘내’가 없다면 생사와 열반 두 가지가 모두 없을 것이다.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내’가 있음을 말미암아 모든 어리석은 무리는 생사에 집착하여 먼저 부르는 착하거나 착하지 못한 업을 짓고, 나중엔 받아지는 바인 좋거나 나쁜 결과를 받지만 지혜로운 이들은 열반을 좋아하여 먼저는 생사의 괴로운 불길이 타들어오는 것을 보고 발심하여 싫어하기 시작하고, 나중에야 바야흐로 악을 버리고 선을 부지런히 닦아서 바른 해탈을 얻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온갖 것은 모두가 ‘나’를 말미암아서 이루어졌으므로 ‘나’를 짓는 이[作者]라 하고, ‘나’를 받는 이[受者]라 하고, ‘나’를 괴로움에 쫓김이라하여 발심해서 싫어하고 악을 버리고 선을 닦아 열반을 증득한다.
만일 그렇다면 다음에 이런 게송이 있다.
‘나’라 함은 몸과 같은 것
날적마다 번역이 있으니
그러므로 몸을 떠난 ‘내’가 있어
항상 머문다 함은 맞지 않는다
논하건대 만일 ‘내’가 먼저 갖가지 업을 짓고, 나중에 갖가지 과보를 받는다고 한다면 이는 ‘나’의 본체가 변동하는 것이리라. 원인에 반드시 변동이 있다면 결과엔 차별이 있기 때문에 원인이 변동치 않고 결과가 많거나 항상 있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른바 집착하는 ‘내’가 나락가(那落迦:지옥)따위 여러 길과 여러 세계의 삶의 차별에서 갖가지 업을 짓고 결과를 받는다 하면 이는 몸과 함께 날적마다 번역해야 한다. 천수(天授) 등의 몸이 번역이 없으면서도 먼저 선과 악의 두 업을 지었다가 나중에 고와 낙의 두 결과를 받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나’의 본체는 의지한바 몸과 같아서 능히 업을 짓고 결과를 받기 때문에 날적마다 변역이 있다.
변역이 있기 때문에 생멸이 있나니, 생멸에 상응하면 어찌 항상 머무를 수 있으랴.
또 집착하는 바 ‘나’는 몸 따위 유정의 부치의소속을 여의지 못하나니, 본체가 항상치 않기 때문에 마치 의지하고 있는 몸과 같다.
그러므로 ‘나’는 항상 머무르고, 몸을 여의고서도 능히 짓는 이나 받는 이가 되어서 생사에 윤회한다고 집착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몸을 떠나서는 따로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또 다시 어찌하여 이 ‘내’가 능히 모든 업을 짓는가. 만일 몸과 합하기 때문에 짓나니, 이 안의 ‘나’[內我]에 끊임없는[勤勇] 공덕이 있기 때문이다. 이 공덕에 의하므로 몸과 화합해서 모든 업을 일으킨다. 이 공덕의 업은 의지할 몸을 기다려야 하기는 하나 ‘나’에 속한다. 마치 쇠나 돌을 나무 가지에 던지면 무게의 공덕과 상응하기 때문에 요동이 있는데 이 공덕의 작용은 나무 가지를 기다려야 되나, 쇠와 돌에 속하는 것 같다 한다면 그것도 옳지 못하다.
닿아 대할 수 있는 것은 그런 요동의 작용이 있을 수 있지만 그대의 ‘나’는 그렇지 못하거늘 어찌 몸과 합해서 모든 업을 지으랴.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다음 게송에 이렇게 말했다.
만일 법이 닿아 대할 수 없으면
아무런 요동도 없으리라
그러므로 몸이 짓는 업은
명자(命者:중생의 주해)가 짓는 것 아니다
논하건대 온갖 요동을 일으킬 수 있는 업은 결정코 닿아 대할 수 있는 물건을 여의지 않는다. ‘나’는 닿아 대할 수 없거늘 몸과 합한다 하여도 어찌 요동하는 업의 원인이 될 수 있으랴. 마치 잡았을 때에 닿아 대할 수 없으면 아무리 몸과 합하더라도 업을 짓지 못하는 것 같다.
마음과 마음의 법은 오직 바람을 낼뿐인데 바람과 몸이 합해서야 비로소 업을 짓는다. 그러므로 세운 바 원인에 일정치 못하다는 허물은 없으나 이는 비슷한 원인을 말했을 뿐이니, 차례차례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 합할 수 있는 것은 반드시 방위와 부분이 있으니, 두 물건이 맞붙어서 틈없는 것을 합한다 한다. 집착하고 있는 ‘나’ 따위는 임 방위도 부분도 없거늘 어떻게 몸과 합함으로써 업을 짓는다 하랴.
‘나’에게 방위와 부분이 있다고 거짓 말할지라도 실제로 업을 일으키는 능력은 있을 수 없다. 거짓 이름으로 물을 불이라 이야기할 때에 실제의 불이 나서 태우는 작용이 있다고 여기지 말라. 이야기하는 이가 거짓으로 모든 법을 말한다 하여 말하는 이에게 차별이 있음으로써 말한 법이 바뀌어지게 하는 것은 아니다. 법성이 결정된 것이라 함은 앞서 이미 말했다.
이 게송에서 닿아 대할 수 없다함은 방위와 뿐이 없음을 드러내고, 요동이 없다 함은 합함이 없다는 것을 드러낸다.
또 스스로에 요동이 있어야 바야흐로 남을 움직이나니, 마치 쇠나 돌 따위가 스스로가 운동하고서야 원인이 되어서 나무 가지를 흔들리게 하는 것같다.
‘나’는 이미 움직임도 걸리는 형체도 없거늘 어찌 원인이 되어서 의지하고 있는 바를 흔들리게 하리오. 마치 쇠와 돌 따위의 요동치 않는 위치와 같다.
닿아 대할 수 없다. 함은 또 걸리는 형체 없음을 드러내나니, 걸리는 형체가 없으므로 스스로에 요동이 없다. 요동이 없다 함은 움직임의 원인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낸다. 이와 같이 집착하는 바 요동없는 신아(神我:‘나’’는 털끝 하나를 움직일 힘도 없거늘 하물며 업을 지어서 짓는이라 불리우는 일이겠는가. 이미 업을 짓지 않는다면 결과도 없을 것이요, 결과를 받지 않는다면 무엇을 받는 이라 하겠는가.
또 다시 그대가 말하기를 “‘나’를 괴로움에 쫓기어서 발심하여 싫어하고 악을 버리고 선을 닦아서 해탈을 얻는 것이라” 하였으나 이것도 옳지 못하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다음 게송에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항상타면 해칠 수 없거늘
어찌 닦아 지키는 인연이 필요하랴
뉘라서 금강석에 좀 먹을까 봐
무기를 가지고 방지함이 있으랴
논하건대 그대가 주장하는 ‘내’가 이미 변역이 없어 허공과 같이 그 본체가 항상 머문다면 온갖 재앙이 아무도 해치지 못할 것인데 어찌 번거로이 정진하여 막고 지키는 인연을 닦을 필요가 있으랴.
변해 무너짐이 있는 몸은 괴로움에 쫓기고 죄에 물들으니, 의당 막고 보호해야 되겠지만 어느 지혜있는 사람이 금강석은 아무도 무너뜨리지 못할 줄 알면서도 좀이 쓸을까 걱정하여 졸개를 거느리고 작대기를 휘두르며 좀을 쫓겠는가. 오직 어리석은 사람만이 그런 짓을 한다.
변하여 무너지는 물건은 잘 지키어 보호해야 한다.
만일 그대가 말하기를 “목숨을 해칠 수 있으므로 ‘나’도 따라서 해칠 수 있다” 한다면 이것도 옳지 못하다. ‘내’가 이미 항상하다면 따라서 해칠 수 없어야 한다.
또 그대가 계교하기를 “목숨은 세 가지 일이 화합했나니, 몸과 나의 뜻이라” 하는데 ‘나’와 몸이 합했다는 것은 앞에 벌써 깨뜨렸다. 방위와 부분이 없으므로 그대가 계교하는 빛 따위 여러 공덕은 화합하는 이치가 없다.
또 화합한다 함은 별다른 성품이 없는 것이어서, 오직 방위와 부분만이 있어 끊임없이 난다. 이미 별다른 본체가 없다면 무엇을 해친다 하리오. 이것이 설사 해칠 수 있다 하여도 반드시 의지한 바를 따를 것이니, 의지한 바가 항상하다면 어떻게 해칠 수 있으랴. 설사 목숨을 해친다 하여도 나에게 무슨 번거로움이 되랴. 그대가 계교하는 바 ‘나’는 항상하여 걸림없음이 마치 넓은 허공이 추위ㆍ더위ㆍ바람ㆍ비ㆍ우박ㆍ서리에 손해 없는 것 같다. 이런 ‘나’의 성품이 어찌 괴로움이 번거롭힐 수 있으랴.
또 집착하고 있는바 ‘나’는 그 성품이 응연(凝然:요동치 않음)하여 전후에 변함이 없나니, 설사 뭇 악을 여의었다 하여도 무엇이 더하였기에 해탈이라 말하겠는가. 어찌 이 지위에서 착한 법이 느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나’의 성품이 이미 항상하다면 착한 법인들 무슨 변함이 없으므로 다른 법이 난다 하여도 늘거나 줄지 않는다.
이와 같이 해탈은 ‘나’에게 아무런 작용이 엇나니, 그러므로 ‘내’가 항상하여 변함이 없다고 집착하면 생사와 열반, 두 가지 일을 모두 잃고, 공하고 ‘나’없음이면 두 가지 일을 모두 이룬다. -
016_0585_b_04L復次,勝論外道作如是言,前說無餘般涅槃位,無蘊,無我,依誰而說有涅槃者,其理不然。我定有故。若無我者,依緣何法,而起我見?我見若無,執我所見,亦不得有。若異生等從無始來,不起如是我、我所見,應如永滅薩迦耶見,不受三界生死衆苦。又不應說緣心、根、身,發生我見,以心、根、身,世閒說爲我所有故。又我、我所決定有異,所屬、能屬言所詮故。如天授等,所乘車等。又緣他身我見無故,若許我見緣心、根、身爲境生者,應如天授、德授等見,亦緣他身爲境生起。亦不應說自他心等有差別故,我見不緣無始時來,自心、根等剎那展轉,前後各異,而許俱緣,生我見故。又此我見,不緣現在自心爲境,與世現見事相違故,亦不得緣過去、未來心等爲境。彼無體故,如空花等,不生我見,現見有我,非曾當故。又於一身,二心不竝故,不可說緣現自心,而生我見。又心念念異滅,異生,若無我者,云何得有憶,識、習、誦、恩、怨等事?又心、根等決定不爲我見所緣,男女等相此中無故,如甁、盆等。是故決定有眞實我。由此爲緣,發生我見,因斯謂我是大丈夫。如是所說,雖有虛言,而無實義。所以者何?我若是有,應如色等,從緣而生,生定歸滅,則非常住。若非緣生,應如兔角,無勝體用。何名爲我?又雖立我,是有,是常,而竟不能立因,立喩,非無因喩,所立得成。若唯立宗,則得成者,一切所立皆應得成。設復方便,矯立因喩,卽所立我,其體非常,一切有因,皆非常故。又所立我定非實有,常住我性,是所知故,是所說故,如甁、盆等。又所立我,若是實有,應非顚倒我見所緣,若稱實見,是顚倒者,一切聖智皆應顚倒,一切聖智稱境而見,旣非顚倒。我見亦爾,應非顚倒。若爾,我見應如聖智,非無始來生死根本。若此我見,稱實而知。而無始來引生死者,聖智亦應引諸生死,則應究竟不得涅槃。是故異生愚癡,顚倒於五取蘊,無我法中,妄執有我,因執我所,由此妄執我、我所見,不稱實境;成顚倒故,能引三界生死衆苦。若於無我五取蘊中,起聖智見,通達無我,及無我所,永斷生死,證得涅槃。是故定應信受無我。又汝所言,以心、根、身,世閒說爲我所有故,不應緣彼,生我見者,我亦不應是我見境,世閒亦說:我所有,我有如是相。是故不應以世閒說爲我所故,非我見境,我我所事,相望不定,或有別物,或無別物。又汝所言所屬、能屬言所詮故,如天授等。我與我所定有異者,此因不定。世閒亦說如是飮食,所有香味特異於常。豈離香、味,別有飮食?我、我所見雖俱緣蘊,而或別執一蘊爲我,餘蘊爲所,或復摠執內蘊爲我,外蘊爲所故,所立宗有相符過。又汝所言,以緣他身我見無故,心等非是我見境者,我亦應非我見所緣。由於他,我我見無故。若緣他,我不起我見,而緣自我,生我見者,雖緣他身,不起我見,何妨我見緣自心等?無智有情不了平等、空、無我理,唯於諸行,無始數習我、我所見,於自,於他諸蘊相續,執自爲我,異我爲他,其中都無我之實性。又汝所言:亦不應說自他心等有差別故,我見不緣。無始時來,自心、根等,剎那展轉,前後各異,而許俱緣,生我見者,此亦不然。自身前後因果相續,自望於他,因果斷故。如汝所執,我體是一,前後無異,他我相別,我見自緣己身中我,力用斯盡,不緣他我。我亦如是,自身前後,雖念念別,而無始來因果不斷,如燈河等相續,假一,無智有情謂爲一我,而生我見。他身於自,因果斷故,我見不緣。又汝計;我自他相似,皆遍,皆常,無所繫屬。我見何緣緣此,非彼?若汝計我有所繫屬,或有所生,此彼差別,應如色等,其性無常。是故當知有爲因果相續各異故,令我見如是差別。又汝所說,我見不緣現在自心#爲境等難,皆不應理。所以者何?緣自身中前後因果相續假一生我見故。無緣現在自心等過。又一身中,有多心品,因果相屬,名一有情。異心品中,發起我見,緣異心品,計我何失?汝等所計,我是實者,我見見我,應如正見,卽非妄見。若不見我,應如邪見,則非我見。又汝所言,心等念念異滅,異生,若無我者,云何得有憶、識、習、誦、恩、怨等者,此亦不然。有情身中,一一各有阿賴耶識,一類相續,任持諸法種子不失,與一切法,互爲因果熏習力故,得有如是憶、識、習、誦、恩、怨等事。汝所計我,常無變易,後位如前,應無是事。有應常有,無應常無,我體一故。不可說言我用轉變,用不離體,我亦應變。若爾,此我應如色等,體用俱變,則是無常。若言心等皆屬於我,心等轉變,有如是事,故所屬我,亦得其名。若爾,心等應從我起,能生果故。我應非常。若我於心,無生長用,云何得言心屬於我?我旣是常,不能任持心等種子,云何得有憶、識等事?又汝所言,此心、根等決定不爲我見所緣,男、女等相此中無故,如甁等者,此因不成。男女等相身現有故。又所計我,亦應不爲我見所緣,男女等相我中無故。卽所立因,便爲不定。爲顯此義故,次頌曰:‘內我實非男 非女非非二 但由無智故謂我爲丈夫。’論曰:依止身相,有差別故,世俗說爲男、女、非二,此身別相內我中,無。以所計我體是一故。又男等相生生改易。亦見此生有轉變者,捨別異相,取所餘相,汝所執我常無變易,無捨無取故,無此相。亦不可說男女等相,雖非我體,而是我德,我與德合,說爲男等。所以者何?樂等德中,所不說故。我不共德略有九種:一苦,二樂,三貪,四瞋,五勤勇,六法,七非法,八行,九智。男女等相九所不攝。云何而言此是我德?又樂等德遍諸所依,男女等相所依不遍,云何得說此爲我德?又不可說男女等相同異性攝,由同異性,亦得說我爲男女等。所以者何?同異性者,所依決定,常遍所依。我旣是常,男女等相常,應不捨,應一切時常有三相。又男等相遍,表一切我及身等。云何唯我同異性攝?又同異性所依各別,設許唯我同異性攝,云何一我有三同異?不見一依有多同異。亦不可說如波羅奢一樹之上,有三同異,波羅奢性、樹性、實性,我亦如是,一我體上,有三同異,男性、女性、非男女性。所以者何?波羅奢性遍,波羅奢樹性遍,樹實性遍,實此三所依互有寬狹,我上三性皆唯遍我,所依無別,云何爲喩?是故唯依無始數習,妄想分別#所起假相,世俗道中,說爲男等,非有實我,有男等相。但由無明、憍逸、妄想,愚夫自謂我是丈夫,亦有自謂爲女,非二。頌中略故,且說丈夫。以身中有男女等相,所執我體,男等相無故,汝比量因有不成,不定過失。若汝復言:我及身等,雖復皆有男女等相,然我是實,身等是假。此亦不然。若男等相二處皆有,云何得知一假一實?應立量言:我見決定,不緣實我,男女等相所雜糅故。如緣身等,起男等相,所雜糅心。又我見等,不緣實我。有所緣故,如餘心等。又我見境,非是實我,男等相心之所緣故,猶如身等故,汝所言虛,無實義。復次,順世外道作如是言:諸法及我,大種,爲性,四大種外,無別有物。卽四大種和合爲我及身心等。內外諸法現世是有,前後世無,有情數法如浮泡等,皆從現在衆緣而生,非前世來,不往後世。身、根和合,安立差別爲緣,發起男女等心。受用所依,與我和合,令我體,有男等相現。緣此我境,復起我見,謂我是男女及非二。今應問彼,汝說大種和合變異,爲身根等,如是成內大種自性,爲是男等,非男等耶?彼答言:非內外大種性無異故。雖大種性內外無異,然有安立形相差別。如是世閒所知形相,所有男等自性差別,皆是自心分別所起,非實物中,有如是性。若爾,頌曰:‘若諸大種中 無男女非二 云何諸大種有男等相生。’論曰:若四大種本性無有男、女、非二,云何得有男等相生,男女等心?何緣而起?受用所依雖與我合,云何令我男等相現?若我無有男女等相,云何我見,謂我是男、女及非二?若本性無,雖與他合,終不能令轉成餘相。亦不能令生餘相心。如鮮白物雖合,餘色,不成餘相,不起餘心。頗胝迦等餘色合時,前滅後生,不可爲喩。是故決定無有實我,大種爲性,經久時住,有男等相,我見所緣。復次,記論外道作如是言:‘諸法及我,一切皆與三相和合。由此三相,皆能發起三種心聲。何謂三相?一者男相,能生諸法;二者女相,能滅諸法;三非二相,能守本位。’此亦不然。諸法及我體,非三相。云何能起三種心聲?亦不可說與他合故,轉成三相。前所說過不相離故。若法及我,體非三相,三相合故,轉成三相,三相更無餘三相合故,此三相應非三相,應不能起,三種心聲。又此三相與非相合,能使非相,轉成相者,諸法及我,與相合時,應令三相,轉成非相。是則畢竟應不能起三種心聲。又此三相功能差別,更互相違,必應不竝。云何一物得有三聲,如角等物?男、女、非二,三聲所呼,世共知故。又一物上,三相功能更互相違,而得竝者,應一切物皆具三相,不應現見聲有差別。又此三相,若實有者,唯應依止有法非無。是則三聲應不周遍,云何現見諸方言音?有法上無,無法上有?現見境界,不可誹謗。若無三相,而有三聲,則一切處,皆應如是。又此三相,配生、住、滅,理不應然。男死,女生,非二生死,世現見故。又此三相,無別實體,後當廣辨。是故但隨世俗言路,說有男等三聲差別,非別實有。如是三相。外道執有如是三相,依附實我,我見所緣,是顚倒智。內道不執故,無顚倒。汝不應依有顚倒智。與無倒者,正決擇時,立爲定量,以我見緣,證實有我。又此我見,爲隨我相,執有我耶?爲隨自覺,執有我耶?若隨我相,應名正見,若隨自覺,應不緣我。又若初者。頌曰:‘汝我餘非我 故我無定相。’論曰:若汝身中#我之自相,諸餘身中,我亦同有,隨我自相,而起我見,云何一見不緣一切?旣無一見,緣一切我故,知我見不隨我相。若汝身中我自相異,餘身中我自相,復別。汝以爲我,餘則爲非,餘以爲我,汝則爲非,是則此我相,不決定。旣無定相,便無定性,性相不定,非實非常。云何執我眞實常住?又立量言:自身我見,不隨自我自相而起,不緣餘我自相生故,如所餘緣所有心等。又自身我,應不爲緣,發自我見,汝許我故,如他身我。又諸我見,定不緣我,自他境相互有無故。如靑、黃等能緣之心。又一切我,非我見境,諸餘有法所不攝故。猶如一切兔角等無。又一切我,非實我性,是所知故。如一切法,是故我見不緣實我。諸所計我,無實性相,一切智者皆非所見,唯諸愚人恒深樂著,如病眼境,定非實有故。不可以我見所緣,證立此我實有常住。若第二者,頌曰:‘豈不於無常 妄分別爲我。’論曰:若隨自覺,執有我者,豈不但緣無常身等,虛妄分別,執爲實我?所以者何?現見世閒但緣身等前後隨緣分位差別,虛妄計度:我肥,我瘦,我勝,我劣,我明,我闇,我苦,我樂。身等無常,可有是事#常住實我無此差別。由此比知一切我見,皆無實我以爲境界,唯緣虛妄身等爲境,隨自妄想覺慧生故。如緣闇繩,顚倒蛇執。又如世閒虛妄分別執有空華、第二月等,必由先見世閒少事,然後方執有如是事。我見執我,亦復如是,先緣生滅五取蘊事,後方決定執有實我。又如夢中虛妄境界,隨先所見,和合計度,我見境界亦復如是,先緣諸蘊,然後和合,虛妄計度。又諸我見略有二種:一者俱生,二者分別。俱生我見,由無始來內因力故,恒與身俱,不待邪教及邪分別,任運而起故,名俱生。此復二種:一常相續在第七識,緣第八識,起自心相,卽執爲我,名爲我見。二有閒斷,在第六識,緣五取蘊,或摠,或別,起自心相,卽執爲我,名爲我見。如是二種俱生我見,微細難斷,數數修習勝無我觀,方能除滅。分別我見,由現在世外緣力故,非與身俱,要待邪教及邪分別然後方起故名分別此亦二種:一緣邪教#所說蘊相,起自心相,分別爲我,名爲我見。二緣邪教所說我相,起自心相,分別爲我,名爲我見。如是二種分別我見,麤重易斷,聖諦現觀初現行時,卽便除滅。如是所說一切我見,心外蘊境,或有,或無,心內蘊境,一切皆有。是故我見皆緣無常。諸蘊行相妄執爲我。諸蘊行相從緣生故,是虛幻有,妄所執我,非緣生故,決定非有。故契經說苾芻,當知世閒沙門、婆羅門等,所有我見,一切皆緣五取蘊起。復次,今應審問諸瞖盲徒,空無我理有何所失,而强分別固執我耶?若一切法空,無我者,生死、涅槃二事俱失。所以者何?由有我故,諸無智者樂著生死,先造能招善、不善業,後受所感愛、非愛果。諸有智者欣樂涅槃,先觀生死苦火煎逼,發心厭離,後方捨惡,勤修諸善,得正解脫。如是一切皆由我成,我爲作者,我爲受者,我爲苦逼,發心厭離,捨惡修善,證得涅槃。若爾,頌曰:‘我卽同於身 生生有變易 故離身有我常住理不然。’論曰:若我先造種種行業,後方領受種種果報,是則此我體應轉變。因必有轉變,果有差別故,無有道理,因不轉變,而果衆多及非恒有。謂所執我,那落迦等諸趣諸界生差別中,若能造受種種業果,則應同身生生變易。非天授等身無變易,先能造作善、惡二業,後能領受苦、樂兩果。是故我體,同所依身,能造受故,生生變易。有變易故,則有生滅,生滅相應,豈得常住?又所執我,不離身等有情數攝,體非常故,如所依身。是故執我常住,離身,能爲作者及爲受者,生死輪迴,皆不應理。以離身等,無別用故。復次,云何此我能造諸業?若謂與身合故,能造,由此內我,有勤勇德。因此德故,與身和合,起諸作業。此德作業,雖待依身,而屬於我。如以金石,投於樹枝,重德相應故,有搖動,是德作用,雖待樹枝,而屬金石。此亦不然。有觸對物,可有如是動搖作用,汝我不爾。云何身合能造諸業?所以者何?頌曰:‘若法無觸對 則無有動搖 是故身作業非命者能造。’論曰:一切能起動搖作業,決定不離有觸對物。我無觸對,雖與身合,云何能作搖動業因?如所執時,無有觸對,雖與身合,不能作業,心及心法,唯能生風,風與身合,方能造業。故所立因,無不定過,此說近因,非展轉故。又可合者,必有方分,兩物相觸無閒,名合。所執我等,旣無方分,云何與身合故,造業?不可假說我有方分,卽有實起作業功能。勿以假名,說水爲火,卽有實火焚燒作用。由能說人,假說諸法,非能說人有差別故,令所說法,其性轉變。法性決定,前已具論。於本頌中,無觸對者,顯無方分,無動搖者,顯無合義。又自有動,方能動他,如金石等要自有動,方能爲因,令樹枝動。我旣無動,無形㝵故,何能爲因,令所依動?如金石等不動轉位。無觸對者,顯無形㝵。無形㝵故,自無有動。無動搖者顯非動因。如是所執無動神我,尚無能動一毫之力,況能造業,得名作者?旣不造業,卽無有果。若不受果,何名受者?復次,如汝所言,我爲苦逼,發心厭離,捨惡修善,得解脫者,此亦不然。何以故?頌曰:‘我常非所害 豈煩修護因 誰恐食金剛執仗防衆蠹。’論曰:汝所計我,旣無變易,如太虛空,其體常住,一切災苦皆不能害,豈煩精進,修防護因?有變壞身,苦所逼害,罪所塗染,理須防護,誰有智者了知金剛,物無能壞,而恐侵食,率侶執仗,防諸蠹蟲?唯有愚人,或爲是事。可變壞物應加守衛。若汝意謂命可害故,我亦隨害,此亦不然。我旣是常,不應隨害。又汝計命三事和合,謂身、我意,前已遮破。我與身合,無方分故,如汝所計,色等諸德無和合義。又和合者,無別有性,唯有方分無閒而生,旣無別體,復何所害?此設可害,必隨所依,所依旣常,云何可害?設復害命,於我何惱?以汝所計我,常無㝵,如太虛空,寒暑、風雨、霜雹,無損。如是我性,苦何所惱?又所執我,其性凝然,前後無變,設離衆惡,復何所增,而名解脫?豈不此位,善法增耶?我性旣常,善增何益?所執我體,常無改變,餘法雖生,亦無增損。如是解脫於我無用。是故執我常住無變,生死、涅槃二事俱失,若空、無我,二事俱成。
大乘廣百論釋論卷第二
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彫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