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新譯大乘起信論序

ABC_IT_K0623_T_001
017_0701_c_01L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상권
신역대승기신론서(新譯大乘起信論序)
017_0701_c_01L新譯大乘起信論序

무릇 외치는 소리가 같으면 어디에 있든 서로 호응하게 되고, 추구하는 도가 같으면 멀리 떨어져도 저절로 친밀하게 된다[聲同則應, 道合自鄰]1)고 한다. 이 때문에 법웅(法雄)은 불법의 근본 도리를 가르쳐 법자(法子)에게 그 도리를 널리 전할 것을 당부하였고, 공자[素王]2)는 역사 서술의 규범을 전하여 좌구명[素臣]3)에게 역사 서술을 부탁한 것이다. 대개 덕 있는 자는 반드시 뜻을 함께 하는 자가 있어 외롭지 않고, 성인의 가르침도 항상 호응하는 자가 있어 헛된 전달이 없는 것이다.
017_0701_c_02L 夫聲同則應道合自鄰是以法雄命賴宣揚乎法子素王垂範假傳述乎素臣蓋德必不孤聖無虛應矣
『기신론(起信論)』은 대승(大乘)의 가르침이 감춰진 보고[秘典]이다. 부처께서 열반에 드신 후 500여 년이 지나 마명보살(馬鳴菩薩)이 세상에 출현하여 불법을 다시 일으켰다. 마명보살은 당시 인도[五天]에서 ‘사해[四日]’4) 또는 ‘도왕(道王)’으로 불렸고, 물러서지 않는 불법의 바퀴[不退輪]를 굴렸으며 영원한 불법을 깨달아 흔들림이 없는 경지[無生忍]를 이루었다. 또한 모든 부처님의 지인(智印)을 새기고 궁극의 진공(眞空)에 거처하며, 파사(波奢)5)에게 불법의 전파와 부흥을 부탁받고 석가세존[釋尊]으로부터 아득히 이어져온 가르침도 잇게 되었다. 때문에 불법의 요체를 중생에게 잘 설법하였고 속세의 가르침이 잘못됐음을 크게 깨우치게 해서 중생을 불법의 세계로 잘 인도하였으며, 나아가 중생들에게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신앙의 뿌리를 내려주고, 이해하기 어려운 불법의 씨앗을 심고자, 이 대승기신론을 지은 것이다.
017_0701_c_05L『起信論』 者大乘之秘典也佛滅度後五百餘年有馬鳴菩薩出興于世稱四日道王五天轉不退輪建無生銘摠持之智印宅畢竟之眞空波奢付囑蒙釋尊遠記善說法要啓迷津欲使群生殖不壞之信根難思之佛種故造斯論
이 대승기신론을 지은 것은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물을 세상에 내놓은 것이고 가장 뛰어난 대승[上乘]의 가르침을 설명한 것이며, 갠지스 강의 모래알처럼 무수히 많은 불법의 가르침들이 오직 사람의 마음에 있음을 알려서, 모든 부처의 은미한 말씀들이 본래 일심(一心)에서 비롯됐음을 밝힌 것이다. 그리하여 집착을 버려 불법의 진리를 잃지 않고, 청정한 마음을 수행하여 세속의 허상을 잊게 하여서, 적은 경문으로도 많은 불법의 의미를 섭렵하고, 속세의 현상이 허깨비임을 깨달아 깊은 불법의 진리로 들어가게 하였다. 홀로 환하구나! 맑은 하늘에 환히 빛나는 지혜의 달[智月]이여, 도도히 흐르는구나! 불성의 바다로 넘실대며 흘러드는 선법의 강[禪河]이여. 미혹으로 향하는 발길을 돌이켜 불법의 진리로 귀의하는 데 이 대승기신론을 통하지 않음이 없구나.
017_0701_c_12L其爲論也無價寶詮最上乘演恒沙之法門惟在方寸開諸佛之秘藏本自一心執而不喪其眞存修而亦忘其相文而攝多義假名而會深旨落落焉皎智月於淨天滔滔焉注禪河於性返迷歸極莫不由之
이 대승기신론이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해질 때 범문이 모두 두 번 번역되었다. 첫 번째 번역본[初本]은 서인도(西印度) 삼장법사(三藏法師) 파라말타(波羅末陁)의 번역으로, 곧 진제(眞諦)가 양나라[梁] 무제(武帝) 승성(承聖) 3년 세차(歲次)로는 계유(癸酉, 553)년6) 9월 10일 형주(衡州) 시흥군(始興郡) 건흥사(建興寺)에서 양주(揚州) 출신 사문(沙門) 지개(智愷)와 함께 번역한 것이다.
017_0701_c_18L此論東傳摠經二譯初本卽西印度三藏法師波羅末陁此云眞諦以梁武帝承聖三年歲次癸酉九月十日於衡州始興建興寺共揚州沙門智愷所譯
017_0702_a_01L 그리고 현재 이 두 번째 번역본[此本]은, 먼저 우전국(于闐國) 삼장법사(三藏法師) 실차난타(實叉難陁)가 대승기신론 범문(梵文)을 인도에서 가져와 장안에 이르렀고, 또 서경(西京:장안) 자은탑(慈恩塔) 안에서 옛날 범문을 얻게 되어, 실차난타가 의학(義學) 사문(沙門)인 형주(荊州)의 홍경(弘景)ㆍ숭복사[崇福]의 법장(法藏) 등과 함께 대주(大周) 성력(聖曆) 3년 세차(歲次)로는 계해(癸亥)년7) 10월 임오삭(壬午朔) 8일 기축(己丑)에 수기사(授記寺)에서 화엄경(花嚴經)과 대승기신론을 차례로 번역하였다. 사문(沙門) 복례(復禮)가 번역문를 써서 2권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옛 번역과 비교할 때 새로 첨가된 내용도 있고 없어진 내용도 있는데, 이것은 번역자의 뜻이거나 범문(梵文)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017_0701_c_22L本卽于闐國三藏法師實叉難陁梵文至此又於西京慈恩塔內獲舊梵本與義學沙門荊州弘景崇福法藏等以大周聖曆三年歲次癸亥月壬午朔八日己丑於授記寺與『花嚴經』相次而譯沙門復禮筆受開爲兩卷然與舊翻時有出沒蓋譯者之又梵文非一也
무릇 이치가 심오하면 믿기 어렵고 도가 높으면 마도[魔]가 왕성히 일어나니, 더구나 전쟁과 재해가 잇달아 더욱 많이 일어나는 말세에 있어서랴. 그러므로 편견에 사로잡힌 무리들[偏見之流]이 『성유식(成唯識)』8)에 집착하여 이 대승기신론에서 진제[眞:출세간의 진리]와 속제[妄:세속의 진리]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고 한 것을 헐뜯고 깎아내려, 이미 말에서 편견이 형성되었고 그 말을 들을 때마다 편견이 점점 커져서, 대승경전[方等]의 단이슬[甘露]을 바꾸어 독약(毒藥)으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경(經)에 이르기를 “오직 부처와 부처[唯佛與佛]]9)만이 모든 불법[諸法]의 실상(實相)을 남김없이 궁구할 수 있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속세에 연연하는 중생[凡心]이 부처님의 가르침[聖旨]을 번번이 비난하고 평가할 수 있겠는가.
017_0702_a_08L夫理幽則信難尊則魔盛況當劫濁尤更倍增故使偏見之流執『成唯識』誹毀此論眞妄互熏旣形於言遂彰時聽方等甘露翻爲毒藥故經云唯佛與佛乃能究盡諸法實相豈可輒以凡心貶量聖
무릇 진여(眞如)란 모든 만물의 본성이므로, 헤아리기 어려운 업의 작용[業用]을 갖췄고 공허하지 않은 훌륭한 덕[勝德]을 쌓아서, 안으로 세속의 진리[妄法]에 스며들어 생사고락을 싫어하고 열반을 구하게 한다. 그러므로 『승만경(勝鬘經)』10)에 이르기를 “여래장(如來藏)이 있기 때문에 생사고락(生死苦樂)을 싫어하고 열반(涅槃)을 구한다”라고 하였다. 또 경(經)에 이르기를 “악행을 많이 행하여 착한 성품이 전혀 없는 사람[闡提之人]도 미래에 불성의 힘[佛性力] 때문에 착한 성품의 뿌리[善根]가 다시 생겨난다”라고 하였으니, 저 여의보주[淨珠]가 혼탁한 물을 맑게 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승의(勝義:궁극의 이치)가 항상 선하다는 것이니, 태허(太虛)에 선악의 구별이 없다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경(經)에 이르기를 “불성(佛性)은 항상 존재함으로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삼세(三世)에 포섭되지 않는 것이고, 허공(虛空)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삼세(三世)에 포섭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어찌 현상의 공[事空]에 집착하여 부처님의 진리를 일률적으로 만들려 하는가.
017_0702_a_14L夫眞如者物之性也備難思之業蘊不空之勝德內熏妄法令起厭故『勝鬘經』云由有如來藏令厭生死苦樂求涅槃又經云闡提之人來以佛性力故善根還生如彼淨珠能淸濁水是勝義之常善異太虛之無記故經云佛性常故非三世攝空無故非三世攝豈執事空以齊眞
017_0702_b_01L무릇 속제[妄:속세의 진리]를 논의하는 것은 이치에 근거하였기 때문에 불성을 흐리게 하여, 이런 상황에 따라 이러저러한 논의가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경(經)에 이르기를 “그 흘러드는 곳에 따라 여러 가지 맛[種種味]이 난다”고 한 것이다. 또 『능가경(楞伽經)』에서 이르기를 “여래장[如來藏]은 시작도 알 수 없는 때부터 허위(虛僞)와 악습(惡習)이 차츰 스며들게 되어 아뢰야장[識藏]으로 불리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밀엄경(密嚴經)』에서 이르기를 “부처께서 말씀하시길 ‘여래장(如來藏)은 아뢰야(阿賴耶)라 한다’고 하셨으나 ‘어리석은 지혜로는 여래장[藏]이 곧 아뢰야식(賴耶識)인 줄 모른다’라 하였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비록 아직 깨달음의 경계에 이르지 못하였으나 불성의 본체는 깨끗하고, 불성은 변하지 않았으나 속세에서 헤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經)에 이르기를 “그러나 약초[藥]의 진미(眞味)는 산에 그대로 있으니, 하늘에 있는 둥근 달[滿月]과 같은 것이다”11)라고 한 것이다.
017_0702_a_22L夫論妄者依理故迷眞性隨流爲妄漂動故經云隨其流處有種種味又『楞伽經』云如來藏爲無始虛僞惡習所熏名爲識藏『密嚴經』云佛說如來藏以爲阿賴耶惡慧不能知藏卽賴耶識雖在纏而體淨不變性而成故經云然藥眞味停留在山猶如滿月
또 이르기를 “비록 오도(五道)12)에 처하여, 별도로 다른 몸[異身]을 받게 될지라도 이 불성(佛性)이 항상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라고 한 것이다. 만약 진제[眞:출세간의 진리)가 속제[妄:세속의 진리]에 스며들지 못하고 속제[妄]가 진제[眞]에 배어들지 못하면, 진제와 속제가 각각 별도로 존재하니, 어찌 중도(中道)에서 만난다고 하겠는가. 그러므로 양(梁)나라 때 『섭론(攝論)』에서 이르기를 “지혜가 지극히 어둡고 캄캄하다는 것은 출세간의 진리[眞]와 세속의 진리[俗]를 구별하는 데 집착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13)라고 하였다.
017_0702_b_06L又云雖處五道受別異身而此佛性常恒不變若言眞不熏妄妄不熏眞眞妄兩殊豈會中道故梁『攝論』智慧極盲暗謂眞俗別執
지금 이 경은 진제[眞:출세간의 진리]가 속제[妄: 세속의 진리]의 본체가 되고, 속제는 진제를 의지해 만들어졌으니, 불성과 현상[性相]이 모두 융합된 것으로 보고 동일화[一]하는 것과 차별화[異] 하는 것의 두 갈래를 모두 부인한다. 그러므로 『밀엄경(密嚴經)』에 이르기를 “여래청정장(如來淸淨藏)이 세속의 아뢰야식[阿賴耶]이니, 마치 금(金)과 반지[指環]처럼 돌고 돌아 차별(差別)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부처님의 가르침[聖教]이 이처럼 명백하니, 어찌 의심하는가. 진실로 현상[相]에 얽매여 진제[眞]를 거스르고 말단[末]을 탐구하여 근본[本]을 버리며, 말[言]은 법도[規矩]를 벗어나고 행동[動]은 헛된 논리[戲論]를 좇기만 하여, 스스로 부처님의 책망을 초래하니 너무나 슬프도다.
017_0702_b_09L今則眞爲妄體妄假眞成性相俱融一異雙故『密嚴經』云如來淸淨藏世閒阿賴耶如金與指環展轉無差別聖教明白何所致疑良由滯相而乖眞末而棄本言越規矩動成戲論自貽聖責深可悲哉
나는 젊을 때부터 이 대승기신론에 온 마음을 쏟았고, 그 맛을 음미하는 것도 멈추지 않았으며 이것을 읊조리고 암송하는 데 피곤도 잊었다. 그 결과 서툴지만 대승기신론을 20여 회[遍]나 되풀이 전하게 되었다. 비록 아직 부처님의 깊은 가르침을 온전히 궁구하지 못하고 그 경문의 의미를 조잡하게 이해했을지라도, 대승(大乘)의 가르침을 남김없이 밝힌 것은 이 대승기신론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로 여기노라. 바라건대 불심이 굳건한 후학[宗心之士]이 때마다 이 대승기신론을 열람하고 날마다 정진하여 공덕을 이루길 바라노라. 이에 서문을 짓노라.
017_0702_b_15L余少小以來專心斯翫味不已諷誦忘疲課拙傳揚二十餘遍雖未究深旨而麤識文意爲大乘明鏡莫過於此幸希宗心之士時覽斯文庶日進有功聊爲序引云爾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상권
017_0702_b_20L大乘起信論卷上


마명(馬鳴) 지음
실차난타(實叉難陀) 한역
김월운 번역
017_0702_b_21L馬鳴菩薩造大周于闐三藏實叉難陁奉 制譯
017_0702_c_01L

다함이 없는 시방 세계에서
끝없이 큰 불사를 지으시되
한없고 자재하신 지혜로써
세간을 구호하시는 님과
017_0702_b_23L歸命盡十方
普作大饒益
智無限自在
救護世閒尊

그리고 그 분의 본체이며 형상이신
무아의 말씀과 이치인 법과
끝없는 덕을 갖추신 승보로서
부지런히 정각을 구하시는 님께 귀의하옵고
017_0702_c_02L及彼體相海
無我句義法
無邊德藏僧
勤求正覺者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의식을 끊고 삿된 집착 버리며
믿음을 일으켜 부처님의 종자를 잇게 하고자
제가 지금 이 논을 지으려 하옵니다.
017_0702_c_03L爲欲令衆生
除疑去邪執
起信紹佛種
故我造此論

대승의 맑은 믿음을 일으켜 모든 중생의 어두운 의혹과 삿된 집착을 끊고 불종성(佛種性)을 이어서 끊이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 논을 짓는다.
017_0702_c_04L論曰爲欲發起大乘淨信斷諸衆生疑暗邪執令佛種性相續不斷故造此論
어떤 법이 대승의 믿음[信根]을 내는데 이러한 까닭을 설명해야 한다. 설명에는 다섯 구분이 있으니, 첫째는 작인분(作因分)이요, 둘째는 입의분(立義分)이요, 셋째는 해석분(解釋分)이요, 넷째는 수신분(修信分)이요, 다섯째는 이익분(利益分)이다.
017_0702_c_07L有法能生大乘信根是故應說說有五分一作因二立義三解釋修信五利益
이 가운데의 작인에 여덟 가지가 있다. 첫째는 총상(總相)이니 중생들로 하여금 고통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게 하고자 함이요, 이양(利養) 등을 위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는 여래의 근본적인 진실한 이치를 드러내어 중생들로 하여금 바른 견해를 내게 하기 위한 까닭이다.
셋째는 선근(善根)이 성숙한 중생들로 하여금 신심에서 물러나지 않고 대승법을 감당해내게 하기 위한 까닭이다.
넷째는 선근이 미약한 중생들로 하여금 신심을 일으켜 물러나지 않는 경지에 이르게 하기 위한 까닭이다.
다섯째는 중생들로 하여금 업장을 소멸하고 자기의 마음을 조복하여 삼독(三毒)을 여의게 하기 위한 까닭이다.
여섯째는 중생들로 하여금 바른 지관(止觀)을 닦아 범부나 소승들의 허물을 물리치게 하기 위한 까닭이다.
일곱째는 대승법에 대하여 이치에 맞게 생각하여 부처님 앞에 태어나서 끝내 대승의 믿음에서 물러나지 않게 하기 위한 까닭이다.
여덟째는 대승을 믿고 좋아하는 이익을 드러내 보여 모든 중생[含識]에게 권하여 그들로 하여금 향해 돌아오게 하기 위한 까닭이다.
017_0702_c_09L此中作因有八一摠相爲令衆生離苦得樂不爲貪求利養等故二爲顯如來根本實義令諸衆生生正解故三爲令善根成熟衆生不退信心於大乘法有堪任故四爲令善根微少衆生發起信心至不退五爲令衆生消除業障調伏自心離三毒故六爲令衆生修正止觀治凡小過失心故七爲令衆生於大乘法如理思惟得生佛前究竟不退大乘信故八爲顯信樂大乘利益勸諸含識令歸向故
017_0703_a_01L이 모든 말씀과 이치[義]는 대승경전에 이미 갖추어 있다. 그러나 교화를 받을 이의 근기와 욕구가 같지 않고 깨달음을 얻는 반연도 같지 않다. 그러므로 이 논을 짓는다. 이는 다시 무슨 뜻인가? 여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엔 교화를 받을 이의 근기가 뛰어나고 부처님의 모습과 마음도 수승하여 한 음성[一音]으로 끝없는 이치를 열어 연설하기 때문에 논이 필요치 않았지만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뒤엔 어떤 이는 자신의 힘으로 경을 조금만 보고도 많은 이치를 이해하고, 또 어떤 이는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경을 널리 보고서야 바르게 이해하고, 어떤 이는 자신에게 지혜의 힘이 없어 광대한 논설을 두려워하고 간략한 논이 광대한 이치를 품고 있는 것을 좋아하여 바른 수행을 하는 이도 있는데, 나는 이제 마지막 부류의 사람을 위한 까닭에 여래의 가장 수승하고 심히 깊고 끝없는 이치를 묶어서 이 논을 짓는다.
017_0702_c_20L此諸句義大乘經中雖已具有然由所化根欲不同待悟緣別是故造論此復云何謂如來在世所化利根佛色心勝一音開演無邊義味故不須論佛涅槃後或有能以自力少見於經而解多義復有能以自力廣見諸經乃生正解或有自無智力因他廣論而得解義亦有自無智力怖於廣說樂聞略論攝廣大義而正修行我今爲彼最後人故略攝如來最勝甚深無邊之義而造此論
어떤 것이 입의분인가?
마하연(摩訶衍)에 두 가지가 있으니, 유법(有法)1)과 법이다. 유법이란 일체 중생의 마음이니, 이 마음은 일체 세간과 출세간의 법을 포섭한다. 이 마음에 의하여 마하연의 이치를 드러내나니, 이 심진여(心眞如)의 상(相) 그대로가 대승의 체(體)를 보이기 때문이요, 이 심생멸(心生滅)의 인연(因緣)과 상(相)이 능히 대승의 체(體)ㆍ상(相)과 용(用)을 드러내어 보이기 때문이다.
017_0703_a_07L云何立義分謂摩訶衍略有二種法及法言有法者謂一切衆生心心則攝一切世閒出世閒法依此顯示摩訶衍義以此心眞如相卽示大乘體故此心生滅因緣相能顯示大乘體相用故
이른바 법이란 간략히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체대(體大)니, 일체법의 진여가 염(染)에 있건 정(淨)에 있건 그 성품은 항상 평등하여 증감(增減)도 허고 달라짐[別異]도 없기 때문이요, 둘째는 상대(相大)니, 여래장(如來藏)은 본래부터 무량ㆍ무변한 본성의 공덕을 갖추었기 때문이요, 셋째는 용대(用大)니 일체 세간과 출세간의 선한 인과를 내기 때문이다.
모든 부처님께서 본래 타셨던 것[乘]이며 모든 보살이 모두가 이를 타고 부처님의 경지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017_0703_a_13L所言法者略有三種體大謂一切法眞如在染在淨性恒平等無增無減無別異故二者相大謂如來藏本來具足無量無邊性功德故三者用大能生一切世出世閒善因果故一切諸佛本所乘故一切菩薩皆乘於此入佛地故
어떤 것이 해석분(解釋分)인가?
여기에 세 종류가 있다. 말하자면 진실한 이치를 드러내어 보임[顯示實義]과 삿된 집착을 물리침[對治邪執]과 바른 도를 수행하는 모습을 분석한 것[分別修行正道]이다.
이 가운데 현시실의(顯示實義)란 한마음[一心]에 의하여 두 가지 문[二門]이 있으니 마음 그대로가 진여인 심진여문(心眞如門)과 마음 그대로가 생멸인 심생멸문(心生滅門)이다. 이 두 문은 제각기 일체 법을 껴안고 있으니 이들은 서로서로가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017_0703_a_19L云何解釋分此有三種所謂顯示實義故對治邪執故分別修行正道相此中顯示實義者依於一心有二種門所謂心眞如門心生滅門此二種門各攝一切法以此展轉不相離
017_0703_b_01L심진여문(心眞如門)이란 온 법계를 하나로 묶는 큰 법문의 틀인 대총상법문체(大總相法門體)니 이 마음의 본성품은 생멸하지 않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일체 모든 법은 모두가 망념에 의하여 차별이 있는 것이나 만일 망념을 여의면 경계의 차별된 모습은 없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본래부터 언어(言語)의 길이 끊겼고 일체 문자로 드러내어 설명하지도 못하며, 마음으로 반연할 길이 끊겨서 아무런 모습도 없다. 끝내 평등하여 영원히 변함이 없고 파괴할 수도 없어서 오직 일심이기 때문에 진여라 한다. 진여이기 때문에 본래부터 말로 할 수가 없고 분별할 수도 없다. 모든 언어는 거짓일 뿐 진실하지 않나니 다만 망념을 따를 뿐 실체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진여라고 말은 하였으나 이 또한 상이 없나니 다만 모든 언어 가운데의 극치일 뿐이다. 이 말로써 저 말을 물리쳤을 뿐이요 그 본체나 본성에는 물리칠 것도 없고 세울 것도 없다.
017_0703_b_02L心眞如者卽是一法界大摠相法門體以心本性不生不滅相一切諸皆由妄念而有差別若離妄念無境界差別之相是故諸法從本已來性離語言一切文字不能顯說心攀緣無有諸相究竟平等永無變異不可破壞唯是一心說名眞如眞如故從本已來不可言說不可分一切言說唯假非實但隨妄念無所有故言眞如者此亦無相但是一切言說中極以言遣言非其體性有少可遣有少可立
【문】 그렇다면 중생이 어떻게 수순(隨順)하여 깨달아 들어가겠는가?
017_0703_b_13L問曰若如是者生云何隨順悟入
【답】 만일 일체 법을 말하되 말하는 이도 없고 말한 것도 없으며, 일체 법을 기억하되 기억하는 이도 없고 기억한 것도 없음을 안다면 그럴 때를 수순이라 하고, 망념이 다하면 이를 깨달아 들었다 한다.
017_0703_b_14L答曰若知雖說一切法而無能說所說雖念一切法無能念所念爾時隨順妄念都盡爲悟入
017_0703_c_01L또 진여란 것은 언어에 의해 건립되었으나 두 가지는 차별이 있다. 첫째는 진실공(眞實空)이니 진실하지 못한 상을 끝까지 멀리 여의고 진실의 본체를 드러내기 때문이요, 둘째는 진실불공(眞實不空)이니, 본 성품이 끝없는 공덕을 갖추어 자기 본체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진실공이란 본래부터 모든 염법(染法)이 어우르지 못하기 때문이며, 일체법의 차별된 모습을 여의었기 때문이며, 허망한 분별심이 없기 때문이니 이로써 알라. 진여는 형상이 있는 것도 아니며[非有相], 형상이 없는 것도 아니며[非無相], 유상과 무상이 공존하는 것도 아니며[非有無相], 유상과 무상을 모두 배제하는 것도 아니며[非非有無相], 단일한 형상도 아니며[非一相], 차별된 형상도 아니며[非異相], 단일상과 차별상이 공존하는 것도 아니며[非一異相], 단일상과 차별상을 모두 배제한 것도 아니다[非非一異相].
017_0703_b_17L復次眞如者依言說建立有二種別一眞實空究竟遠離不實之相顯實體故二眞實不空本性具足無邊功有自體故復次眞實空者從本已來一切染法不相應故離一切法差別相故無有虛妄分別心故應知眞如非有相非無相非有無相非非有無相非一相非異相非一異相非非一異相
간략히 말하건대 일체 중생의 허망하게 분별하는 마음으로는 접할 수 없기 때문에 공(空)이라 하였으나 사실에 의해 말한다면 망념이란 것도 있지 않고 공의 성품이란 것 또한 공하니, 막아야 할 것이 없으면 막는 이도 따라서 없기 때문이다.
진실불공(眞實不空)이란 망념이 공하여 없음으로써 진심은 항상하여 변치 않고 맑은 법이 원만하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에 공하지 않다는 뜻에서 불공(不空)이라 한다. 그러나 불공의 모습 또한 없는 것이니, 망념의 마음으로 미칠 바가 아니기 때문이며, 망념을 여읜 지혜로 증득할 경지이기 때문이다.
017_0703_c_03L略說以一切衆生妄分別心所不能觸故立爲空據實道理妄念非有空性亦空以所遮是無能遮亦無故言眞實不空者由妄念空無故卽顯眞心常恒不變淨法圓滿故名不空亦無不空相以非妄念心所行唯離念智之所證故
심생멸문(心生滅門)이란 것은 여래장(如來藏)에 의하여 생멸심(生滅心)이 움직이나니 생멸하지 않는 것이 생멸과 화합해서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은 것을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 한다.
이 식에 두 가지 이치가 있으니, 이른바 일제 법을 껴안고, 일체 법을 내는 것이다. 다시 두 가지 이치가 있으니, 첫째는 각의 이치[覺義]요, 둘째는 불각의 이치[不覺義]다.
017_0703_c_09L心生滅門者謂依如來藏有生滅心不生滅與生滅和合非一非異阿賴耶識此識有二種義謂能攝一切法能生一切法復有二種義一者覺義二者不覺義
각의 이치[覺義]란 마음의 으뜸가는 성품[第一義性]으로서 일체 망념을 여윈 모습이다. 일체 망념을 여윈 모습이기 때문에 허공계와 동등해서 두루하지 않은 곳이 없는 법계 그대로의 모습이니 이것이 곧 여래의 평등한 법신[如來平等法身]이다.
이 법신(法身)에 의하여 일체 여래를 본각(本覺)이라 하니 시각(始覺)을 상대하여 본각이라는 명칭을 세운다. 그러나 시각이 될 때가 곧 본각인지라 따로 다른 각(覺)을 세운 것은 아니다.
시각(始覺)이란 것은 본각에 의하여 불각이 있고 불각에 의하여 시각이 있다고 말한다.
017_0703_c_14L言覺義者謂心第一義性離一切妄念相離一切妄念相故等虛空界無所不遍法界一相卽是一切如來平等法身依此法身說一切如來爲本覺以待始覺立爲本覺然始覺時卽是本覺無別覺起立始覺者謂依本覺有不覺依不覺說有始覺
017_0704_a_01L또 마음의 근원을 깨달았으므로 구경각(究竟覺)이라 하고 마음의 근원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구경각이 아님[非究竟覺]이라 한다. 예컨대 범부가 앞생각엔 불각이어서 번뇌를 일으키다가 뒷생각에서 제어하고 항복시켜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한다면 이를 각이라 할 수는 있으나 역시 불각이요, 이승의 무리[二乘人]나 처음으로 발심한 보살들이 생각 있음[有念]과 생각 없음[無念]의 본체와 형상이 다른 것을 깨닫고 거친 분별[麤分別]을 버리면 비슷한 깨달음[相似覺]이라 하고, 법신보살(法身菩薩)이 생각 있음과 생각 없음이 모두 명상이 없는 것을 깨달은 뒤에 중품의 분별[中品分別]을 버리면 상당한 수준의 깨달음인 수분각(隨分覺)이라 하고, 만일 보살의 경지를 초과하여 끝맺는 도[究竟道]가 만족해져서 잠깐 사이[一念]에 상응하여 마음이 처음 일어나는 것을 깨달으면 비로소 각이라 할 수 있는 시각(始覺)이요, 깨달았다는 상도 멀리 여의어 미세한 분별[微細分別]마저 끝까지 다하여 마음의 근본인 성품이 항상 머무르면서 눈앞에 나타나면 이것을 여래의 구경각(究竟覺)이라 한다. 그러므로 경에서 “어떤 중생이 일체 망념이 모습 없는 줄로 관찰하면 이것이 곧 여래의 지혜를 증득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017_0703_c_21L又以覺心源故名究竟覺不覺心源故非究竟覺如凡夫人念不覺起於煩惱後念制伏令不更此雖名覺卽是不覺如二乘人及初業菩薩覺有念無念體相別異捨麤分別故名相似覺如法身菩薩覺念無念皆無有相捨中品分別故名隨分覺若超過菩薩地究竟道滿一念相應覺心初起始名爲覺離覺相微細分別究竟永盡心根本性常住現前是爲如來名究竟覺故經說若有衆生能觀一切妄念則爲證得如來智慧
또 마음이 처음 일어난다는 것은 다만 세속을 따라 말했을 뿐이나 그 첫 모습을 구하면 끝내 얻을 수 없다. 마음도 오히려 있지 않거늘 하물며 처음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일체 중생은 각이라 하지 못하나니, 끝없는 옛적부터 항상 무명과 망념이 있어 이어지면서 잠시도 여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망념이 쉬면 즉시에 마음의 모습인 생(生)ㆍ주(住)ㆍ이(異)ㆍ멸(滅)이 모두가 모습이 없는 것임을 알리니, 한마음의 앞과 뒤가 동시일 뿐 모두가 서로 응하지 못하고 제 성품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알고 나면 시각이란 것도 얻을 수 없음을 아나니 본각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017_0704_a_10L又言心初起但隨俗說求其初相終不可得尚無有何況有初是故一切衆生名爲覺以無始來恒有無明妄念續未曾離故若妄念息卽知心相生住異滅皆悉無相以於一心前後同皆不相應無自性故如是知已知始覺不可得以不異本覺故
또 본각이 염의 분별[染分別]을 따라 두 가지 차별된 모습이 생기나니, 첫째는 지혜의 바탕이 청정한 상[淨智相]이요, 둘째는 부사의하게 중생을 교화하는 작용을 일으키는 상[不思議用相]이다.
017_0704_a_17L復次本覺隨染分別生二種差別相一淨智相二不思議用相
017_0704_b_01L정지상(淨智相)이란 법력의 훈습에 의하여 여실히 수행해서 공행(功行)이 만족해지면 화합식(和合識)을 깨뜨리고 전식(轉識)의 모습을 멸하면 법신의 청정한 지혜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일체 심과 식의 모습[心識相]은 그대로가 무명의 모습이거니와 본각과는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아서 무너지는 것도 아니요, 무너지지 않는 것도 아니다.
마치 바닷물과 파도는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나니 파도가 바람을 인해 움직이지만 물의 성질은 움직이지 않고 바람이 멈출 때엔 파도는 사라지나 물의 성품은 사라지지 않는 것과 같다. 중생도 그러하여서 본래부터 청정한 마음이 무명이라는 바람이 흔드는 까닭에 식(識)의 물결이 일어나나니 이와 같은 세 가지 일은 모두가 형상이 없어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그러나 본성의 청정한 마음은 요동하는 식의 근본이니 무명이 멸할 때에 요동하는 식은 따라서 멸하나 지혜의 성품은 무너지지 않는다.
017_0704_a_19L淨智相者謂依法熏習如實修行功行滿足和合識滅轉識相顯現法身淸淨智一切心識相卽是無明相與本覺非一非異非是可壞非不可壞如海水與波非一非異波因風動非水性若風止時波動卽滅非水性滅生亦爾自性淸淨心因無明風動識波浪如是三事皆無形相非一非然性淨心是動識本無明滅時識隨滅智性不壞
부사의용상(不思議用相)이란 맑은 지혜에 의하여 일체 수승하고도 묘한 경계를 일으키되 항상 끊어짐이 없는 것이니, 이른바 여래의 몸에 한량없고 가장 수승한 공덕을 갖추고서 중생들의 근기에 따라 무량한 이익을 성취하는 모습을 시현하는 것이다.
017_0704_b_06L不思議用相者於淨智能起一切勝妙境界常無斷謂如來身具足無量增上功德衆生根示現成就無量利益
또 각의 모습에는 네 가지 큰 이치가 있어 청정함이 허공 같고 밖은 거울 같으니, 첫째는 진실로 공한 큰 이치[眞實空大義]가 허공 같고 밝은 거울 같음이니, 이른바 일체 마음과 경계의 모습과 그리고 깨달음의 모습을 모두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진실로 공하지 않은 큰 이치[眞實不空大義]가 허공 같고 밝은 거울 같음이니, 이른바 일체 법이 원만히 성취되어 아무도 무너뜨릴 수 없는 성품이며, 일체 세간의 경계의 모습이 모두 그 안에서 나타나되 들지도 않고 나지도 않으며 멸하지도 않고 무너지지도 않는 항상 머무는 한마음이며, 일체 물든 법이 물들이지 못하는 바이며, 지혜의 바탕에 끝없는 무루의 공덕을 구족한 것으로 인(因)을 삼아 일체 중생의 마음에 훈습하기 때문이다.
017_0704_b_09L復次覺相有四種大義淸淨如虛空明鏡一眞實空大義如虛空明鏡一切心境界相及覺相皆不可得故二眞實不空大義如虛空明鏡謂一切法圓滿成就無能壞性一切世閒境界之相皆於中現不出不入不滅不壞常住一心一切染法所不能染智體具足無邊無漏功德爲因熏習一切衆生心故
셋째는 진실로 공하지 않아 장애를 여의는 큰 이치[實不空離障大義]가 허공 같고 밝은 거울 같음이니, 이른바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 두 가지를 영원히 끊고 화합식(和合識)이 멸하며 본 성품이 청정한 경지에서 항상 편안히 머무르기 때문이다. 넷째는 진실로 공하지 않아 시현하는 큰 이치[眞實不空示現大義]가 허공 같고 밝은 거울 같음이니, 이른바 장애를 여읜 법에 의하여 응화(應化)해야 할 계제에 따라 여래 등의 갖가지 빛과 소리를 시현하여 그들로 하여금 모든 선근을 닦게 하기 때문이다.
017_0704_b_18L三眞實不空離障大如虛空明鏡謂煩惱所知二障永和合識滅本性淸淨常安住故眞實不空示現大義如虛空明鏡依離障法隨所應化現如來等種種色聲令彼修行諸善根故
017_0704_c_01L불각의 이치[不覺義]란 끝없는 옛적부터 진여의 법이 하나임을 여실히 알지 못하는 까닭에 깨닫지 못하는 마음[不覺心]이 일어나서 망념(妄念)이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망념이라는 것은 본래 실체가 없는 것이어서 본각을 여의지 않는다. 마치 미혹한 사람이 바른 방위에 의한 까닭에 미혹했으나 미혹이란 것이 자체가 없어서 본래의 방위를 여의지 않는 것과 같다.
중생도 그러하여서 각에 의한 까닭에 불각과 망념이 있어 미혹이 생긴다. 그러나 그 불각은 원래 실체가 없어 본각을 여의지 않는다. 또 불각을 상대하여 진각(眞覺)을 말하거니와 불각이 이미 없으므로 진각 또한 없다.
017_0704_b_23L不覺義者謂從無始來不如實知眞法一故不覺心起而有妄念然彼妄念自無實相不離本覺猶如迷人依方故迷迷無自相不離於方衆生亦依於覺故而有不覺妄念迷生彼不覺自無實相不離本覺復待不覺以說眞覺不覺旣無眞覺亦遣
또 각에 의한 까닭에 불각이 있어 세 가지 모습을 내어 서로 여의지 않는다. 첫째는 무명업상(無明業相)이니 불각에 의하여 마음이 움직이면 업이 된다. 깨달으면 움직이지 않고 움직이면 괴로움이 있으니 과(果)가 인(因)을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는 보는 주체인 능견상(能見相)이니, 마음의 움직임에 의하여 능동적으로 경계를 보는 것이니, 움직이지 않으면 보는 주체도 없다. 셋째는 보이는 대상인 경계상(境界相)이니, 보는 견에 의하여 허망한 경계가 나타나고 견을 여의면 경계도 없어진다.
017_0704_c_07L復次依於覺而有不覺生三種相不相捨離一無明業相以依不覺動爲業覺則不動動則有苦果不離因故二能見相以依心動能見境界不動則無見三境界相以依能見境相現離見則無境
허망한 경계인 연(緣)이 있기 때문에 다시 여섯 가지 모습을 낸다. 첫째는 지상(智相)이니, 이른바 경계를 반연하여 사랑스럽다거나 사랑스럽지 않다는 마음을 내는 것이요, 둘째는 상속상(相續相)이니, 이른바 지혜에 의하여 괴롭다거나 즐겁다는 느낌을 내어 상응함이 끊이지 않는 것이요, 셋째는 집착상(執着相)이니, 괴로움과 즐거움의 느낌이 이어짐에 의하여 집착이 생기는 것이요, 넷째는 집명등상(執名等相)이니, 이른바 집착에 의하여 명칭 등 모든 나열된 현상을 분별하는 것이요, 다섯째는 기업상(起業相)이니, 이른바 명칭 등에 집착함에 의하여 갖가지 온갖 차별된 업을 일으키는 것이요, 여섯째는 업계고상(業繫苦相)이니, 이른바 업에 의하여 고통을 받아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알라. 일체 염법(染法)은 모두가 제 모습이 없는 것이니, 모두가 무명에 의해 생기기 때문이다.
017_0704_c_13L以有虛妄境界緣故復生六種相一智相謂緣境界生愛非愛心二相續相謂依於智樂覺念相應不斷三執著相謂依苦覺念相續而生執著四執名等相謂依執著分別名等諸安立相五起業相謂依執名等起於種種諸差別六業繫苦相謂依業受苦不得自是故當知一切染法悉無有相因無明而生起故
또 각과 불각에는 두 가지 모습이 있으니, 첫째는 같은 모습[同相]이요, 둘째는 다른 모습[異相]이다.
017_0704_c_22L復次覺與不覺有二種相一同相異相
017_0705_a_01L동상(同相)이란 것은 마치 갖가지 토기(土器)가 모두 같은 흙의 모습이듯이 무루(無漏)와 무명(無明)의 갖가지 요술 같은 작용은 모두가 같은 진여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일체 중생은 끝없는 옛적부터 항상 열반에 들었고, 보리는 닦을 수 있는 모습도 아니며 생겨나는 모습도 아니어서 끝내 얻을 수도 없고, 어떤 색상으로도 볼 수 없다. 그러나 색상을 보는 것은 마땅히 알라. 모두가 염(染)을 따르는 요술 같은 작용일 뿐이요, 지혜가 색(色:물질)처럼 공하지 않은 것은 아니니, 지혜의 모습은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으며, 더 많은 것을 경전들에서 말씀하셨다.
이상(異相)이란 마치 갖가지 토기가 제각기 같지 않은 것같이 이 일도 그러하여서 무루와 무명의 요술 같은 작용의 모습이 차별된 것뿐이다.
017_0705_a_01L言同相者如種種瓦器皆同土如是無漏無明種種幻用皆同眞是故佛說一切衆生無始已來入涅槃菩提非可修相非可生相竟無得無有色相而可得見見色相者當知皆是隨染幻用非是智色不空之相以智相不可得故廣如彼說言異相者如種種瓦器各各不同亦如是無漏無明種種幻用相差別故
또 생멸하는 동기인 생멸인연(生滅因緣)이란 이른바 모든 중생이 마음[心]과 뜻[意]과 식(識)에 의하여 움직인다. 이 이치가 어떠한가? 아뢰야식(阿賴耶識)에 의하여 무명과 불각(不覺)이 일어나서 보고[能見] 나타내고[能現] 경계를 취하고[能取境界] 분별하여 상속하는 것[分別相續]을 의(意)라 한다.
017_0705_a_09L復次生滅因緣者謂諸衆生依心意識轉此義云何以依阿賴耶識有無明不覺起能見能現能取境界分別相續說名爲意
이 의(意)에 다시 다섯 가지 다른 이름이 있다. 첫째는 업식(業識)이니 이른바 무명의 힘으로 불각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요, 둘째는 전식(轉識)이니 움직인 마음에 의하여 경계의 모습을 보는 것이요, 셋째는 현식(現識)이니 이른바 일체 경계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니 마치 밝은 거울이 뭇 색상(色傷)을 나타내는 것 같이 현식도 그러하여 다섯 가지 경계가 이르기만 하면 곧 나타나되 전후도 없고 다른 공력을 말미암지도 않는다. 넷째는 지식(智識)이니 이른바 염과 정의 온갖 차별된 법을 분별하는 것이요, 다섯째는 상속식(相續識)이니 이른바 항상 뜻을 지어 상응하기를 끊이지 않아 과거의 선악 등의 업을 잘 간직하여 잃거나 무너짐이 없게 하고, 현재와 미래의 고락 등의 과보를 성숙시키되 어기거나 뛰어넘음이 없게 하고, 이미 지난 일을 흘연히 기억하게 하고, 아직 지나지 않은 일들을 공연히 분별하게 한다.
017_0705_a_13L此意復有五種異名一名業識謂無明力不覺心動二名轉識謂依動心能見境相三名現識謂現一切諸境界相猶如明鏡現衆色像現識亦爾如其五境對至卽現無有前後不由功力四名智識謂分別染淨諸差別法五名相續識謂恒作意相應不斷任持過去善惡等業令無失壞成熟現未苦樂等報使無違越已曾經事忽然憶念未曾經事妄生分別
017_0705_b_01L그러므로 삼계의 일체 법은 모두가 마음으로 제 성품을 삼나니 마음을 여의면 육진(六塵)의 경계가 없다. 무슨 까닭인가? 일체 모든 법은 마음을 주체로 삼아 망념을 좇아 일어났기 때문이다. 모든 분별은 모두가 자기의 마음을 분별하는 것이니, 마음으로는 마음을 볼 수 없고 명상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일체 세간의 경계의 모습은 모두가 중생의 무명과 망념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마치 거울 속의 그림자와 같아서 실체를 얻을 수 없건만 오직 허망한 분별심을 따라 일어난 것뿐이니 마음이 생기면 갖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멸하면 갖가지 법이 멸하기 때문이다.
017_0705_a_23L是故三界一切皆以心爲自性離心則無六塵境界何以故切諸法以心爲主從妄念起凡所分皆分別自心心不見心無相可得是故當知一切世閒境界之相皆依衆生無明妄念而得建立如鏡中像無體可得唯從虛妄分別心轉心生則種種法生心滅則種種法滅故
의식(意識)이란 이른바 일체 범부가 상속식(相續識)에 의하여 아(我)와 아소(我所)를 집착하여 갖가지로 여섯 가지 경계를 취하는 것이니, 각기 다르므로 분리식(分離識)이라고도 하고, 사물을 분별해 알기 때문에 분별사식(分別事識)이라고도 하니, 견(見)과 애(愛) 등의 훈습에 의해 자라난 것이기 때문이다.
끝없는 옛적부터의 무명의 훈습으로 일어난 식(識)은 범부나 이승(二乘)들의 지혜로는 알 바가 아니요, 해행지보살(解行地菩薩)이라야 비로소 배우기 시작하고 법신보살(法身菩薩)이라야 조금 알고 구경지(究竟地)에 이르러도 다 알지 못하고 오직 여래만이 끝까지 분명히 아신다.
017_0705_b_07L意識者謂一切凡夫依相續識執我我所種種妄取六種境界亦名分離亦名分別事識以依見愛等熏而增長故無始無明熏所起識非諸凡二乘智慧之所能知解行地菩薩始學觀察法身菩薩能少分知至究竟地猶未知盡唯有如來能摠明了
이 이치가 어떠한가? 그 마음의 성품이 본래 청정하였으나 무명의 힘 때문에 물든 마음의 모습이 나타났고, 비록 물든 마음이 있으나 항상 밝고 맑아서 변함이 없다. 또 본성이 분별이 없는 까닭에 비록 일체 경계를 두루 내지만 변하고 바뀜이 없다. 하나인 법계를 깨닫지 못한 까닭에 서로 어울리지 못하여 무명의 분별이 일어나서 온갖 물든 마음을 낼 뿐이다. 이러한 이치는 매우 깊어서 헤아리기 어려우니 부처님만이 능히 아실뿐 다른 이의 경계는 아니다.
017_0705_b_14L此義云何以其心性本來淸淨無明力故染心相現雖有染心而常明潔無有改變復以本性無分別故雖復徧生一切境界而無變易以不覺一法界故不相應無明分別起生諸染如是之義甚深難測唯佛能知餘所了
017_0705_c_01L이렇게 생겨난 물든 마음[染心]에는 여섯 가지 다름이 있으니, 첫째는 집착[執]이며, 상응하는 염심[相應染]이니, 성문과 연각과 그리고 신과 상응하는 지위[信相應地]로서 보살이 능히 멀리 여읜다. 둘째는 끊이지 않고 상응하는 염심이니, 신의 지위에 있는 보살이 부지런히 수행하는 힘 때문에 조그만지 여의고 정심지(淨心地)에 이르면 영원히 다해 남음이 없다. 셋째는 분별지(分別智)로서 상응하는 염심이니, 구계지(具戒地)로부터 구혜지(具慧地)에 이르는 사이에 능히 조그만큼 여의고, 무상행지(無相行地)에 이르러야 비로소 멀리 여읜다. 넷째는 현색(現色)이며, 상응하지 않는 염심[不相應染]이니, 이는 색자재지(色自在地)에서 끊어 없앤다. 다섯째는 견심(見心)이며 상응하지 않는 염심이니, 이는 심자재지(心自在地)에서 끊는다. 여섯째는 근본업(根本業)이 상응하지 않는 염심이니, 이는 보살의 구경지(究竟地)와 여래지(如來地)에서 끊는다.
017_0705_b_21L此所生染心有六種別一執相應染聲聞緣覺及信相應地諸菩薩能遠離二不斷相應染信地菩薩勤修力能少分離至淨心地永盡無三分別智相應染從具戒地乃至具慧地能少分離至無相行地方得永盡四現色不相應染此色自在地之所除滅五見心不相應染此心自在地之所除滅六根本業不相應染此從菩薩究竟地入如來地之所除
하나인 법계를 깨닫지 못한다[不覺一法界]는 것은 처음에 신지(信地)로부터 관찰하고 수행을 일으켜서 정심지(淨心地)에 이르러서 조금 여의고, 여래지(如來地)에 이르러서야 바야흐로 영원히 여읜다.
017_0705_c_08L不覺一法界者始從信地觀察起至淨心地能少分離入如來地方得永盡
상응(相應)의 뜻은 마음의 구분이 차별되고 다르며, 염과 정이 구분도 차별되고 달라서 지각하는 주체인 지상(知相)과 경계의 모습인 연상(緣相)이 같은 것이요, 불상응(不相應)의 뜻은 마음[心]과 불각(不覺)이 항상 차별도 차이도 없어서 지상과 연상이 같지 않은 것이다.
017_0705_c_10L相應義者心分別異染淨分別異知相緣相同不相應義者卽心不覺常無別異知相緣相不同
염심(染心)이란 번뇌장(煩惱障)이니 진여를 아는 근본지(根本智)를 장애하기 때문이요, 무명(無明)이라는 것은 소지장(所知障)이니 세간을 건지는 업의 자재한 지혜를 장애하기 때문이다. 이 이치가 어떠한가? 염심에 의하여 한량없는 능취(能取)와 소취(所取)와 허망한 성품을 어기는 것이다. 일체 법의 성품은 평등하고 적멸하여 생기는 모습이 없지만 무명과 불각이 허망되게 각(覺)과 어긴다. 그러므로 일체 세간의 갖가지 경계와 차별된 업용(業用)에 대하여 모두를 여실히 알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017_0705_c_12L染心是煩惱障能障眞如根本智故明者是所知障能障世閒業自在智此義云何以依染心執著無量能取所取虛妄境界違一切法平等之一切法性平等寂滅無有生相明不覺妄與覺違是故於一切世閒種種境界差別業用皆悉不能如實而知
017_0706_a_01L또 생멸의 모습[生滅相]을 분별하건대 두 가지의 차별이 있으니, 첫째는 거친 것[麤相]이니 이른바 상응의 마음이요, 둘째는 미세한 것[細相]이니 이른바 불상응의 마음이다. 추 중의 추[麤中之麤]는 범부의 지혜의 경계요, 추 중의 세[麤中之細]와 세 중의 추([細中之麤]는 보살의 지혜 경계이다. 이 두 가지 모습은 모두가 무명이 훈습하는 힘을 말미암아 일어난다. 그러나 인(因)에 의하고 연(緣)에 의하나니, 인은 불각이요, 연은 망령된 경계[妄境]이다. 인이 멸하면 연이 멸하고 연이 멸하는 까닭에 상응의 마음이 멸하고 인이 멸하는 까닭에 불상응의 마음이 멸한다.
017_0705_c_20L復次分別心生滅相者有二種別麤謂相應心二細謂不相應心麤中之麤凡夫智境麤中之細及細中之菩薩智境此二種相皆由無明熏習力起然依因依緣因是不覺緣是妄境因滅則緣滅緣滅故相應心滅因滅故不相應心滅
【문】 만일 마음이 멸한다면 어떻게 상속하며, 만일 상속한다면 어찌 멸했다 하겠는가?
017_0706_a_04L若心滅者云何相續若相續者云何言滅
【답】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멸한다는 것은 다만 마음의 모습이 멸했을 뿐 마음의 본체가 멸하는 것은 아니다. 마치 물이 바람을 인하여 움직이는 모습이 있다가 바람이 멸하면 움직이는 모습은 멸하나 물의 본체가 멸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물이 멸한다면 움직이는 모습도 끊어지리니 의지하는 주체[能依]와 의지하는 바[所依]가 없기 때문이거니와 물의 본체는 멸하지 않으므로 움직이는 모습은 상속한다.
중생도 그러하여 무명의 힘 때문에 그 마음을 움직이게 하거니와 무명이 멸하기 때문에 움직이는 모습은 곧 멸하나 마음의 본체는 멸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마음이 멸한다면 중생이 끊어지나니 능의도 소의도 없기 때문이거니와 마음의 본체는 멸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의 움직임은 상속된다.
017_0706_a_05L實然言滅者但心相滅非心體滅如水因而有動相以風滅故動相卽滅水體滅若水滅者動相應斷以無所無能依故以水體不滅動相相續衆生亦爾以無明力令其心動無明滅故動相卽滅非心體滅若心滅者則衆生斷以無所依無能依故以心體不滅心動相續
또 네 가지 법이 훈습(熏習)의 이치 때문에 염법(染法)과 정법(淨法)이 일어나서 끊이지 않나니, 첫째는 정법이니 이른바 진여(眞如)요, 둘째는 염인(染因)이니 이른바 무명(無明)이요, 셋째는 망심(妄心)이니, 이른바 업식(業識)이요, 넷째는 망령된 경계[妄境]니 이른바 육진(六塵)이다.
훈습의 이치란 마치 세상의 의복이 본래는 구린내도 아니요 향내도 아니지만 어떤 물건으로 훈습하느냐에 따라 그 향기를 띄는 것같이, 진여인 정법의 성품은 물듦이 아니지만 무명이 훈습하기 때문에 물든 모습이 있고, 무명인 염법은 실로 맑은 업이 없지만 진여가 훈습하기 때문에 맑은 기능인 정용(淨用)이 있다고 말한다.
017_0706_a_13L復次以四種法熏習義故染淨法起無有斷絕一淨法謂眞如二染因無明三妄心謂業識四妄境謂六塵熏習義者如世衣服非臭非香隨以物熏則有彼氣眞如淨法性非是染無明熏故則有染相無明染法實無淨業眞如熏故說有淨用
017_0706_b_01L어떻게 훈습하여 염법이 끊이지 않는가? 이른바 진여에 의하는 까닭에 무명을 일으켜 모든 염법의 원인이 된다. 그러나 이 무명은 바로 진여를 훈습하나니, 이미 훈습한 뒤에는 망념(妄念)이 생긴다. 이 망념이 다시 무명을 훈습하나니, 훈습하기 때문에 진여의 법을 깨닫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망령된 경계의 모습이 나타난다. 망념으로 훈습하는 힘 때문에 갖가지 차별된 집착을 내어 갖가지 업을 짓고 몸과 마음은 갖가지 과보를 받는다.
017_0706_a_20L云何熏習染法不斷所謂依眞如故而起無明爲諸染因然此無明卽熏眞如旣熏習已生妄念心此妄念心復熏無明以熏習故不覺眞法以不覺故妄境相現以妄念心熏習力故生於種種差別執著造種種業受身心等衆苦果報
망경훈습(妄境熏習)에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분별을 늘어나게 하는 훈습[增長分別熏]이요, 둘째는 집착을 늘어나게 하는 훈습[增長執取熏]이다.
망심훈습(妄心熏習)에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근본업식을 증장시키는 훈습[增長根本業熏]이니, 아라한이나 벽지불(辟支佛)이나 일체 보살들로 하여금 생멸의 고통을 받게 하는 것이요, 둘째는 분별사식을 증장시키는 훈습[增長分別事識熏]이니 범부들로 하여금 업계고(業繫苦)를 받게 하는 것이다.
무명훈습(無明熏習)에도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근본훈(根本熏)이니 업식(業識)을 성취시킨다는 뜻이요, 둘째는 견애훈(見愛熏)이니 분별사식(分別事識)을 성취시킨다는 뜻이다.
017_0706_b_04L妄境熏義有二種別一增長分別熏二增長執取熏妄心熏義亦二種別一增長根本業識熏令阿羅漢辟支佛一切菩薩受生滅苦二增長分別事識熏令諸凡夫受業繫苦明熏義亦二種別一根本熏成就業識義二見愛熏成就分別事識義
어떻게 훈습하여 정법(淨法)이 끊이지 않는가? 이른바 진여(眞如)로 무명에 훈습하는 것이니, 훈습하는 인연의 힘 때문에 망념심(妄念心)으로 하여금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의 즐거움을 구하게 한다. 이렇듯 망심으로 싫어하거나 구하는 인연으로 다시 진여를 훈습하나니 훈습하기 때문에 자기의 몸에 진여법이 있어 그 본 성품이 청정함을 스스로 믿고 일체 경계는 오직 마음이 허망하게 움직였을 뿐이어서 끝내 실체가 없는 줄로 안다.
017_0706_b_10L何熏習淨法不斷謂以眞如熏於無以熏習因緣力故令妄念心厭生死苦求涅槃樂以此妄心厭求因緣復熏眞如以熏習故則自信己身眞如法本性淸淨知一切境界唯心妄動畢竟無有
이와 같이 여실하게 알기 때문에 멀리 여의는 법을 닦고 갖가지로 모든 수순하는 행을 일으키되 분별하는 바도 없고 집착하는 바도 없이 무량아승기겁을 지나면 관습의 힘 때문에 무명이 사라지고, 무명이 사라지기 때문에 마음이 일어나지 않고, 마음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경계의 모습이 멸한다. 이와 같이 일체 염인(染因)과 염연(染緣)과 그리고 염과(染果)의 마음 자취[心相]가 모두 사라지면 비로소 열반을 얻어 갖가지 자재한 업용(業用)을 성취했다고 말한다.
017_0706_b_16L以能如是如實知故修遠離法起於種種諸隨順行無所分別無所取著經於無量阿僧祇劫慣習力故無明則滅無明滅故心相不起心不起故境界相滅如是一切染因染緣及以染果心相都滅名得涅槃成就種種自在業用
017_0706_c_01L망심훈습(妄心熏習)에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분별사식훈(分別事識熏)이니 일체 범부와 이승으로 하여금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자기의 능력에 따라 무상도로 향해 나아가게 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의훈(意熏)이니 모든 보살로 하여금 발심이 용맹하여서 머무름 없는 열반[無住涅槃]에 빨리 들어가게 하기 때문이다.
017_0706_b_22L妄心熏義有二種別一分別事識熏令一切凡夫二乘厭生死苦隨已堪能趣無上二意熏令諸菩薩發心勇猛速疾趣入無住涅槃
진여훈습(眞如熏習)에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체훈(體熏)이요, 둘째는 용훈(用熏)이다.
체훈(體熏)이란 이른바 진여가 끝없는 옛적부터 일체 무량한 무루법을 갖추고 있고, 또 헤아릴 수 없는 경계에 대응하는 작용을 갖추고 있으면서 항상 끊임없이 중생들의 마음을 훈습하는 것이다. 이러한 힘 때문에 중생들로 하여금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의 즐거움을 구하되 자기의 몸에 진실한 법이 있음을 스스로 믿고 발심하여 수행하게 한다.
017_0706_c_03L眞如熏義亦二種別一體熏二用熏體熏者所謂眞如從無始來具足一切無量無漏亦具難思勝境界用常無閒斷熏衆生心此力故令諸衆生厭生死苦求涅槃自信己身有眞實法發心修行
【문】 일체 중생이 똑같이 진여를 가지고 있으니 모두가 균등하게 훈습하거늘 어찌하여 믿는 이와 믿지 않는 이가 있는가? 처음 발심함으로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 앞뒤가 같지 않고 한량없이 차별되니 이러한 일체가 모두 균등해야 할 것이다.
017_0706_c_08L若一切衆生同有眞如等皆熏習何而有信不信者從初發意乃至涅前後不同無量差別如是一切悉應齊等
【답】 일체 중생이 비록 균등한 진여를 가지고 있으나 끝없는 옛적부터 무명의 두텁고 엷음이 끝없어 차별됨이 항하의 모래 수효보다 많고, 아견(我見)과 아애(我愛) 등 얽힌 번뇌도 이와 같아서 여래의 지혜라야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믿음 등이 앞뒤로 차별된다.
017_0706_c_12L雖一切衆生等有眞如無始來無明厚薄無量差別過恒沙我見愛等纏縛煩惱亦復如是如來智之所能知故令信等前後差
017_0707_a_01L또 부처님들의 법에는 인도 있고 연도 있나니, 인과 연이 구족하여야 그 일을 끝낼 수 있다. 마치 나무속의 불의 성품 같나니, 이것이 불의 진짜 인[正因]이거니와 만일 아무도 알지 못하거나 설사 안다 해도 아무런 공을 베풀지 않고도 불이 나와 나무를 태우고자 한다면 이는 옳지 않듯이 중생도 그러하여서 비록 진여가 체훈(體熏)하는 정인(正因)의 힘이 있으나 부처님들이나 보살들이나 선지식들의 연(緣)을 만나지 못했거나 설사 만났더라고 수승한 행을 닦지 않거나 지혜를 내지 않거나 번뇌를 끊지 않고도 열반을 얻고자 하면 옳지 못하다.
또 비록 선지식의 연이 있더라도 안에서 진여가 훈습해 주는 정인의 힘이 없다면 역시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구하지 못할 것이요, 반드시 구족하여야 비로소 옳다.
017_0706_c_16L又諸佛法有因有緣因緣具足事乃成辦如木中火性是火正因若無人知或有雖知而不施功欲令出火焚燒木者無有是處衆生亦爾雖有眞如體熏因力若不遇佛諸菩薩等善知識緣或雖不修勝行不生智慧不斷煩惱能得涅槃無有是處又復雖有善知識緣儻內無眞如熏習因必亦不能厭生死苦求涅槃樂因緣具足乃能如是
어떤 것이 구족함인가? 이른바 스스로가 상속하는 가운데 훈습하는 힘과 불ㆍ보살님이 자비로 거두어 주심이 있으면 능히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이 있음을 믿고 모든 선근(善根)을 심어 성숙하게 하고, 여기에 다시 불ㆍ보살께서 보여 주시고 가르쳐 주시고 이롭게 해 주시고 기쁘게 해 주심을 만나면 수승한 행을 닦아 마침내 성불하여 열반에 든다.
017_0707_a_02L云何具足謂自相續中有熏習力諸佛菩薩慈悲攝乃能厭生死苦信有涅槃種諸善修習成熟以是復値諸佛菩薩示教利喜令修勝行乃至成佛入于涅
용훈(用熏)이란 곧 중생들의 바깥 인연[外緣]의 힘이니, 무량한 차별이 있으며 간략히 두 종류를 말한다. 첫째는 차별된 연[差別緣]이요, 둘째는 평등한 연[平等緣]이다.
017_0707_a_07L用熏者卽是衆生外緣之力有無量義略說二種一差別緣二平等緣
차별연(差別緣)이란 이른바 중생들이 처음에 발심하여 성불하기까지 불ㆍ보살 등 모든 선지식이 알맞은 분에 따라 몸을 나투어 보이시는 것이니, 부모ㆍ처자ㆍ권속ㆍ노비ㆍ친우ㆍ원수거나 혹은 천왕의 모습이거나 혹은 사섭(四攝), 혹은 육도(六度), 나아가서는 일체 보리행의 연과 대비(大悲)라고 부드러운 마음과 광대한 복과 지혜로써 갈무리하여 교화해야 할 일체 중생에게 훈습해서 그들로 하여금 보거나 듣게 하고 나아가서는 여래의 형상 등을 마음에 새겨 선근이 자라나게 하는 것이다.
이 연(緣)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가까운 연[近緣]이니 속히 보리를 얻기 때문이요, 둘째는 먼 연[遠緣]이니 오랜 다음에야 비로소 얻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의 차별에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수행이 늘어나는 연[增行緣]이요, 둘째는 도에 드는 연[入道緣]이다.
017_0707_a_08L差別緣者謂諸衆生從初發心乃至成蒙佛菩薩等諸善知識隨所應化而爲現身或爲父母或爲妻子或爲眷屬或爲僕使或爲知友或作怨家或復示現天王等形或以四攝或以六度乃至一切菩提行緣以大悲柔心廣大福智藏熏所應化一切衆令其見聞及以憶念如來等形增長善根此緣有二一近緣速得菩提二遠緣久遠方得故此二差別復各二種一增行緣二入道緣
평등연(平等緣)이란 이른바 일체 불ㆍ보살께서 평등한 지혜와 평등한 지원(志願)으로써 일체 중생을 두루 구제코자 하심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면서 영원히 끊이지 않는 것이다.
017_0707_a_19L平等緣者謂一切諸佛及諸菩薩平等智慧平等志願普欲拔濟一切衆生任運相續常無斷絕
017_0707_b_01L이러한 지혜와 원으로 중생을 훈습하기 때문에 그들로 하여금 모든 불ㆍ보살님을 기억하게 하다가 항상은 뵙거나 혹은 들은 이에게 이익을 주고, 청정한 삼매에 들어 장애를 끊은 분에 따라 걸림이 없는 눈[無礙眼]을 얻고 잠깐 잠깐 사이에 일체 세계에서 평등하게 그리고 훤하게 한량없는 불ㆍ보살님을 뵙게 한다.
017_0707_a_22L以此智熏衆生故令其憶念諸佛菩薩或見或聞而作利益入淨三昧隨所斷障得無㝵眼於念念中一切世界平等現見無量諸佛及諸菩薩
이 체와 용의 훈습[體用熏習]에 두 가지 차별이 있으니, 첫째는 서로가 만나지 못하는 미상응(未相應)이요, 둘째는 서로가 만나는 이상응(已相應)이다. 미상응(未相應)이란 이른바 범부와 이승(二乘)과 초행보살(初行菩薩)이 의(意)와 의식(意識)으로 훈습하되 오직 믿음의 힘에 의하여 수행할 뿐 분별없는 마음으로 수행하지 못하니 진여의 체(體)와 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요, 자재한 업으로 수행하지 못하니 진여의 용(用)과 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017_0707_b_03L此體用熏復有二別一未相應二已相應未相應者謂凡夫二乘初行菩薩以意意識熏唯依信力修行未得無分別心修行未與眞如體相應故未得自在業修行未與眞如用相應故
이상응(已相應)이란 이른바 법신보살(法身菩薩)이 분별없는 마음[無分別心]을 얻나니 일체 여래의 자체(自體)와 상응하기 때문이요, 자재한 업을 말 수 있나니 일체 여래의 지혜의 용과 상응하기 때문이요, 오직 법력에 의해야만 자유로이 수행하나니, 진여를 훈습해서 무명을 멸하기 때문이다.
017_0707_b_08L已相應謂法身菩薩得無分別心與一切如來自體相應故得自在業與一切如來智用相應故唯依法力任運修熏習眞如滅無明故
또 염훈습(染熏習)은 끝없는 예부터 끊어지지 않다가 성불하면 끊어지고 정훈습(淨熏習)은 미래가 다하도록 끝내 금어지지 않나니, 진여법으로 훈습하기 때문에 망심이 사라지고 법신이 드러나서 용훈습(用熏習)이 일어나기 때문에 끊임이 없다.
017_0707_b_12L復次染熏習從無始來不斷成佛乃斷淨熏習於未來畢竟無斷以眞如法熏習故妄心則滅法身顯現用熏習起故無有斷
017_0707_c_01L또 진여의 자체상(自體相)이란 일체 범부와 성문과 연각과 보살과 제불이 조금의 증감(增減)도 없다. 앞 시간에 생기는 것도 아니요 뒷 시간에 멸하는 것도 아니니 항상하고 완벽하다. 끝없는 예부터 본성품은 일체 공덕을 갖추었으니, 이른바 큰 지혜 광명의 이치와 온 법계에 두루 비추는 이치와 여실타계 분명히 깨닫는 이치와 본 성품이 청정한 마음인 이치와 항상하고 즐겁고 자유롭고 깨끗한 이치와 적정해서 변치 않는 이치 등이다. 이렇듯 항하사 수를 지나고, 같지도 다르지도 않고 부사의한 불법이 끊임이 없다. 이러한 이치에 의한 까닭에 여래장(如來藏)이라 하고 법신(法身)이라고도 한다.
017_0707_b_16L復次眞如自體相者一切凡夫聲聞緣覺菩薩諸佛無有增減非前際生非後際滅常恒究竟從無始來本性具足一切功德謂大智慧光明義照法界義如實了知義本性淸淨心常樂我淨義寂靜不變自在義如是等過恒沙數非同非異不思議佛法無有斷絕依此義故名如來藏亦名法身
【문】 위에서 ‘진여는 일체상을 여의었다’고 말하였는데 어찌하여 이제 다시 ‘일체 공덕의 상을 갖추었다’고 말하는가?
017_0707_c_02L上說眞如離一切相云何今說具足一切諸功德相
【답】 비록 진실로 일체 공덕을 갖추었으나 차별된 모습이 없나니, 그 모든 법은 모두가 다 같이 한맛[一味]이며 한 진여[一眞]여서 분별의 모습을 떠난 둘 없는 성품이니 업식(業識) 등의 생멸하는 모습에 의하여 저들 일체 차별된 모습을 세웠기 때문이다.
017_0707_c_04L雖實具有一切功德然無差別相彼一切法皆同一味一眞離分別相無二性故以依業識等生滅相而立彼一切差別之相
그들이 어떻게 세워졌는가? 일체 법은 본래 마음뿐[唯心]이어서 실로 분별이 없건만 불각(不覺) 때문에 분별의 마음이 일어나서 경계(境界)가 있는 것으로 보니, 이를 무명(無明)이라 하거니와 마음의 성품은 본래 맑은 것이므로 진여 그 자리에 대지혜광명(大智慧光明)의 이치를 세운다. 만일 마음의 성품이 경계를 본다면 보지 못하는 모습이 있거니와 마음의 성품이 보는 것이 없으면 보지 못하는 것이 없으므로 진여 그 자리에 법계를 두루 비추는 이치[遍照法界義]를 세운다.
017_0707_c_08L此云何立以一切本來唯心實無分別以不覺故別心起見有境界名爲無明心性本無明不起卽於眞如立大智慧光明義若心性見境則有不見之相性無見則無不見卽於眞如立遍照法界義
마음에 움직임이 있으면 진실되게 아는 것이 아니며, 본 성품이 청정한 것도 아니며,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도 아니며 적정(寂靜)도 아니어서 변함[變異]이며 자유롭지 못함[不自在]이다. 그런 까닭에 항하사 수효를 지나는 허망한 잡염(雜染)이 일어나거니와 마음의 성품은 움직임이 없으므로 그 자리에 진실되게 깨달아 아는 이치[眞實了知義]와 나아가서는 항하사 수효를 지나는 청정공덕상의 이치[淸淨功德相義]를 세운다.
017_0707_c_14L若心有動則非眞了知非本性淸淨非常樂我淨非寂靜是變異不自在由是具起過於恒沙虛妄雜以心性無動故卽立眞實了知義乃至過於恒沙淸淨功德相義
마음에 일어남[起]이 있어 바깥 경계를 분별해 구할 것이 있다고 보면 안의 법[內法]에 부족한 바가 있겠거니와 끝없는 공덕은 그대로가 한마음 제 성품이어서 어떤 다른 법을 다시 구할 것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러므로 만족함이 항하사를 지나되 다르지도 않고 같지도 않고 부사의하며, 모든 부처님의 법은 끊임이 없다. 그러므로 진여라 말하며, 또 여래장(如來藏)이라고도 하며 또는 여래의 법신이라고도 한다.
017_0707_c_18L若心有起見有餘境可分別求則於內法有所不足以無邊功德卽一心自性不見有餘法而可更求是故滿足過於恒沙非異非一不可思議諸佛之法無有斷絕故說眞如名如來藏亦復名爲如來法身
017_0708_a_01L또 진여의 용(用)이란, 이른바 일체 부처님들께서 인지(因地) 때에 큰 자비를 일으켜 모든 바라밀과 사섭(四攝) 등의 행을 닦아 행하고, 중생이 자기 같다고 관찰하여 두루 구제하되 미래 세상이 다하기까지 겁의 수효를 정하지 않으며, 나와 남이 평등함을 여실히 알되 중생이란 상을 짓지 않으셨다.
이러한 큰 방편의 지혜로 끝없는 예로부터의 무명을 멸하고 본래부터 있는 법신을 깨달아 자유로이 부사의한 업[不思議業]을 일으키되 갖가지 자재하고 차별된 작용이 법계에 두루하여 진여와 꼭 같으나 그 용의 모습은 찾을 수도 없으셨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일체 여래는 오직 법신(法身)뿐이기 때문이니 제일의제(第一義諦)에는 세제(世諦)의 경계와 작용이 없건만 다만 중생들의 보고 들음 등을 따르기 때문에 갖가지 작용이 있어 같지 않다.
017_0708_a_01L復次眞如用者謂一切諸佛在因地發大慈悲修行諸度四攝等行物同已普皆救脫盡未來際不限劫如實了知自他平等而亦不取衆生之相以如是大方便智滅無始無證本法身任運起於不思議業種自在差別作用周遍法界與眞如而亦無有用相可得何以故一切如來唯是法身第一義諦無有世諦境界作用但隨衆生見聞等故而有種種作用不同
이 용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분별사식(分別事識)에 의하는 것이다. 이른바 범부나 이승들이 마음으로 보는 바이니, 이를 화신(化身)이라 한다. 이 사람은 전식(轉識)의 그림자가 나타난 것임을 알지 못하므로 밖에서 왔다고 여겨 색(色)의 영역을 취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화신은 한량이 없다.
둘째는 업식(業識)에 의하는 것이니 이른바 모든 보살들이 처음 발심한 뒤로부터 구경지(舊竟地)에 이르기까지 마음으로 보는 바로서 이를 수용신(受用身)이라 한다. 몸에는 무량한 색(色)이 있고, 색에는 무량한 상(相)이 있고, 상에는 무량한 잘 생긴 모습이 있으며, 머무는 의과(依果)에도 무량한 공덕과 장엄이 갖추어졌다. 보는 근기에 따라 무량하고 끝도 없고 가도 없고 끊어짐도 없지만 마음 밖에서 이렇듯이 보지는 않는다. 이 모든 공덕은 모두가 바라밀 등 무루행(無漏行)의 훈습과 부사의한 훈습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서 끝없는 기쁨과 즐거움의 공덕의 모습을 갖추었기 때문에 보신(報身)이라고도 한다.
017_0708_a_12L此用有二一依分別事識謂凡夫二乘心所見者是名化身此人不知轉識影現見從外來取色分限然佛化身無有限量二依業識謂諸菩薩初發心乃至菩薩究竟地心所見者名受用身身有無量色色有無量相相有無量好所住依果亦具無量功德莊嚴隨所應見無量無邊無際無非於心外如是而見此諸功德因波羅蜜等無漏行熏及不思議熏之所成就具無邊喜樂功德相故名報身
017_0708_b_01L또 범부들이 보는 바는 거친 용[麤用]이니 육취(六趣)의 갖가지 차별에 따라 끝없는 공덕의 즐거운 모습이 있으니 이를 화신이라 한다. 처음 수행하는 보살들이 보는 바는 중품의 용[中品用]이니 진여의 실체를 깊이 믿기 때문에 조금만 보아도 여래의 몸은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으며, 끊임도 없어서 오직 마음의 그림자로 나타난 것이라 진여를 여의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이 보살은 아직 미세한 분별을 여의지 못했나니 법신의 지위에 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심지(淨心地)의 보살이 보는 바는 미세한 용[微細用]이니, 이와 같이 차츰 수승해져서 보살의 구경지(究竟地)에 이르면 보는 일이 바야흐로 다한다.
이 보살의 미세한 용을 수용신(受用身)이라 하나니, 업식(業識)이 있기 때문에 수용신이 있다고 보거니와 업식을 여의면 볼 수가 없다. 일체 여래는 모두가 법신이어서 피차가 차별된 색상으로 마주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017_0708_b_01L又凡夫等所見是其麤用六趣異種種差別無有無邊功德樂名爲化身初行菩薩見中品用深信眞如故得少分見知如來身無去無來無有斷絕唯心影現不離眞然此菩薩猶未能離微細分別未入法身位故淨心菩薩見微細用如是轉勝乃至菩薩究竟地中見之方盡此微細用是受用身以有業識見受用身若離業識則無可見一切如來皆是法身無有彼此差別色相互相見故
【문】 부처님의 법신에 갖가지 차별된 색과 모습이 없다면 어떻게 갖가지 색과 모습을 나타내는가?
017_0708_b_12L若佛法身無有種種差別色相云何能現種種諸色
【답】 법신은 색의 실체이기 때문에 갖가지 색을 나타내나니. 이른바 본래부터 색과 마음은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색의 본 성품이 곧 마음의 자성(自性)인 것을 지신(智身)이라 하고 마음의 본 성품이 곧 색의 자성인 것을 법신(法身)이라 한다.
법신에 의해 일체 여래께서 나투신 색신이 일체 처소 어디에나 두루하여 끊임이 없거든 시방의 보살이 자기의 능력과 좋아함에 따라 무량한 수용신과 무량한 장엄국토가 제각기 차별되지만 서로가 장애치 않고 끊임이 없음을 본다. 이렇게 나타난 색신은 일체 중생의 마음ㆍ뜻ㆍ의식으로는 헤아릴 수 없나니, 이는 진여의 자재하고도 심히 깊은 용(用)이기 때문이다.
017_0708_b_13L 以法身是色實體故能現種種色謂從本已來色心無二以色本性心自性說名智身以心本性卽色自說名法身依於法身一切如來現色身遍一切處無有閒斷十方菩隨所堪任隨所願樂見無量受用無量莊嚴土各各差別不相障㝵無有斷絕此所現色身一切衆生意識不能思量以是眞如自在甚深用故
017_0708_c_01L또 중생들로 하여금 생멸문에서 진여문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하여 색 등의 모습이 성취되지 못하는 것으로 관찰하게 하나니, 어떻게 성취되지 못하는가? 이른바 거친 색을 분석하여 차츰 미진(微塵)에 이르고 다시 다른 방법으로 이 미진을 분석한다. 그러므로 거칠거나 미세한 모든 색은 오직 허망한 마음의 그림자일 뿐 실제로 있지 않다. 다른 온법(蘊法)을 추구하여 차츰 찰나(刹那)에 이르나 이 찰나의 상도 달라서 하나가 아니다.
무위(無爲)의 법도 이와 같아서 법계를 떠나서는 찾을 수가 없다. 이와 같이 시방의 모든 법도 모두가 그러한 줄로 알라.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동쪽을 잘못 알아 서쪽이라 여기나 방위는 실제로 바뀌지 않는 것처럼, 중생도 그러하여서 무명의 미혹 때문에 마음이 흔들린다고 여기지만 실은 움직이지 않나니, 만일 움직이는 마음 그대로가 생멸치 않는 것임을 안다면 곧 진여의 문에 들어간다.
017_0708_b_23L復次爲令衆生從心生滅門入眞如門故令觀色等相皆不成就云何不成就謂分析麤色漸至微塵復以方分析此微塵是故若麤若細一切諸唯是妄心分別影像實無所有求餘蘊漸至剎那求此剎那相別非一無爲之法亦復如是離於法界不可得如是十方一切諸法應知悉猶如迷人謂東爲西方實不轉生亦爾無明迷故謂心爲動而實不若知動心卽不生滅卽得入於眞如之門
大乘起信論卷上
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1) 『장단경長短經』 논사(論士) 제7편에는 “무릇 사람은 같은 사물을 보게 되면 서로 보는 것이 같고, 같은 소리를 듣게 되면 서로 듣는 것도 같게 되며, 마음이 추구하는 덕이 같으면 아직 만나지 못했어도 마음으로 서로 친하게 되고, 퍼뜨리려는 도가 같으면 사는 곳이 아무리 달라도 서로 마음으로 호응한다[夫人同明者相見, 同聽者相聞, 德合則未見而相親, 聲同則處異而相應]”라고 하였다.
  2. 2)2) 소왕(素王):공자를 가리킨다. 소왕은 제왕(帝王)의 덕을 지니고도 제왕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성인(聖人)을 이르는 말인데, 후한(後漢) 왕충(王充)의 『논형(論衡)』 초기편(超奇篇)에 “공자는 왕을 하지 않았으니, 소왕의 업은 『춘추(春秋)』에 있다”라고 하였다.
  3. 3)3) 소신(素臣):『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지은 좌구명(左丘明)을 가리키는 말이다. 공자(孔子)를 소왕(素王)이라고 한 데 대하여 좌구명이 공자가 지은 『춘추』의 전(傳)을 지었기 때문에 소신이라고 부른 것이다.
  4. 4)4) 사일(四日):당시 사람들이 고인도(古印度) 동부의 마명(馬鳴), 남부의 제바(提婆), 서부의 용수(龍樹), 북부의 구마라다(鳩摩羅多)를 합쳐 ‘네 개의 해’라고 불렀다.
  5. 5)5) 파사(波奢):파도제파존자(波闍提婆尊者) 또는 협존자(脇尊者)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는 불타의 법계 제10조(祖)로서 숭배한다. 마명보살의 스승이다.
  6. 6)6) 양 무제 승성(承聖) 3년은 계유(癸酉)년이 아니라 갑술(甲戌)년이다. 기록된 내용의 착오인 것 같다.
  7. 7)7) 여기에 기록된 내용이 역사 기록과 일치하지 않는다. 측천무후가 사용한 연호 성력(聖歷)은 3년은 없고 2년까지만 있다. 그리고 성력 2년은 기해(己亥)년으로 서기 699년이다.
  8. 8)8) 성유식(成唯識):중국 유식학(唯識學)의 승려 현장(玄奘)이 인도의 유식학과 관련된 고승 10인의 저술을 한 책으로 엮은 유식학의 기본서이다.
  9. 9)9) 유불여불(唯佛與佛):부처가 몸소 체득한 깨달음은 언어로써 전달할 수 없기 때문에 오직 부처와 부처만이 안다는 뜻이다.
  10. 10)10) 승만경(勝鬘經):대승경전 가운데 『능가경』과 더불어 모든 중생이 여래가 될 바탕을 갖추고 있다는 여래장사상(如來藏思想)을 천명한 경전이다.
  11. 11)11)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권7에는 “비유컨대 설산(雪山)에 한 가지 맛이 나는 약초[一味藥]가 있는데 ‘낙미(樂味)’라고 불렀다. 그 맛은 아주 달콤했으나, 산속 깊은 덤불 아래 있어 사람들이 발견할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그 향기를 맡고 곧 이 땅에 이 약초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아주 오랜 옛날에 전륜왕(轉輪王)은, 이 설산(雪山)에서 이 약초를 만들었다. 곳곳에 나무 대롱[木筒]을 만들어 이 약초와 접하게 했다. 그리고 이 약초가 잘 익었을 때 그 즙이 땅을 따라 흘러나와 나무 대롱 가운데 모이는데 그 맛이 진미〔真正〕였다. 왕이 이미 세상을 떠난 후 이 약초는 혹 시고 혹 짜고 혹 달고 혹 쓰고 혹 맵고 혹 담백한 맛이 났다. 이 약초의 일미(一味)가 그 흘러든 곳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맛이 났기 때문인데, 이 약초의 진미(真味)는 산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뿐이니 마치 하늘에 둥근 달[滿月]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譬如雪山有一味藥,名曰樂味。其味極甜,在深叢下,人無能見。有人聞香,即知其地當有是藥。過去往世有轉輪王,於此雪山為此藥故,在在處處造作木筒,以接是藥,是藥熟時,從地流出,集木筒中,其味真正。王既歿已,其後是藥,或醋、或醎、或甜、或苦、或辛、或淡,如是一味,隨其流處有種種異,是藥真味停留在山,猶如滿月]”라는 내용이 있다.
  12. 12)12) 오도(五道):천상, 인간세상, 지옥, 축생, 아귀의 다섯 세계를 의미한다.
  13. 13)13)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권1에 보면 “지혜가 막혀 지극히 어둡고 캄캄하다는 것은 출세간의 진리와 세속의 진리를 구별하는 데 집착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智障極盲闇, 謂眞俗別執]”라고 하였다.
  14. 1)1) 전진유법(前陳有法)의 준말이니 어떤 사물의 정의를 제시할 때 사물의 부분을 이르는 말이다. 예컨대 물이 시원하다 할 때 물은 유법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