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阿毘曇八犍度論卷第二

ABC_IT_K0943_T_002
024_0701_c_01L아비담팔건도론 제2권
024_0701_c_01L阿毘曇八犍度論卷第二


가전연자 지음
승가제바ㆍ축불념 공역
권오민 번역
024_0701_c_02L迦旃延子造
苻秦罽賓三藏僧伽提婆共竺佛念譯


3) 인(人)발거
024_0701_c_04L阿毘曇雜犍度人跋渠第三
한 사람[人]의 생애에는 이 같은 열두 가지 연(緣) 중 몇 가지가 과거이며, 몇 가지가 미래이며, 몇 가지가 현재인가?
또한 세존께서 “무명(無明)이 행(行)에 연(緣)이 되고, 수(受)가 유(有)의 연이 된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무명이 행에 연이 된다’고 함은 무엇을 말하며, ‘수가 유에 연이 된다’고 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무명이 행에 연이 된다’고 하는 것과 ‘수가 유에 연이 된다’고 하는 것에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행이면서 무명에 연하고, 명(明)에 연하지 않는 것이 있는가? 명에 연하고, 무명에 연하지 않는 것이 있는가? 명에도 연하지 않고 무명에도 연하지 않는 것이 있는가?
024_0701_c_05L一人此生十二種緣幾種過去幾種未來幾種現在又世尊言無明緣行受緣有彼云何無明緣行云何受緣無明緣行受緣有有何差別頗行緣無明非緣明緣明不緣無明不緣明不緣無明耶
날숨[出息]과 들숨[入息]은 몸에 의지하여 돈다[廻]25)고 말해야 할 것인가, 마음에 의지하여 돈다고 말해야 할 것인가?
만약 색계의 중생이 몸에 의지하여 마음을 돌린다[展轉相續]면, 마찬가지로 무색계의 중생은 무엇에 의지하여 마음을 돌리는 것인가?
무유중애(無有中愛)는 견제단(見諦斷)이라고 해야할 것인가, 사유단(思惟斷)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024_0701_c_11L出息入息當言依身迴言依心迴耶如色界衆生依身迴心是無色界衆生依何所迴心無有中愛當言見諦斷當言思惟斷
무유(無有)란 어떠한 법을 말하는 것인가?
또한 세존께서 “그가 마음으로 해탈하기를 원한다면 진에(瞋恚)ㆍ우치(愚癡)로부터 벗어나야 마음이 해탈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어떠한 마음이 해탈하는가? 유욕(有欲)의 마음인가, 무욕의 마음인가? 진에의 마음인가, 진에가 없는 마음인가? 우치의 마음인가, 우치가 없는 마음인가?
과거ㆍ미래ㆍ현재의 아직 해탈하지 않은 마음이 해탈한다고 말해야 할 것인가, 이미 해탈한 마음이 해탈한다고 말해야 할 것인가?
024_0701_c_14L無有名是何等法又世尊言彼欲心得解脫瞋恚愚癡心得解脫何等心解脫有欲無有瞋恚無瞋恚有愚癡無愚癡去未來現在未解脫心當言解脫耶已解脫心當言解脫耶
024_0702_a_02L또한 세존께서 “여기에서 염(厭)을 수습하면 무음(無婬)이고, 무음을 수습하면 해탈이며 해탈을 수습하면 니원(泥洹)이다”고 말씀하셨다. 무엇을 가리켜 염이라 하고, 무엇을 가리켜 무음이라고 하는가? 그 무엇을 가리켜 해탈이라 하고 그 무엇을 가리켜 니원이라고 하는가?
또한 세존은 “단계(斷界)와 무음계(無婬界)가 있으며, 진계(盡界)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무엇이 단계이고 무엇이 무음계이며 무엇이 진계인가? 만약 단계이면 그것은 무음계인가? 만약 이것이 무음계이면 그것은 단계인가? 만약 단계이면 그것은 진계인가? 만약 진계라면 그것은 단계인가? 만약 무음계라면 그것은 진계인가? 만약 진계라면 그것은 무음계인가?
024_0701_c_19L又世尊言是當習厭無婬習無婬解脫習解脫泥洹彼云何厭云何無婬云何解脫云何泥洹又世尊言有斷界無婬界有盡界彼云何斷界云何無婬界何盡界若斷界彼無婬界耶設是無婬界彼斷界耶若斷界彼盡界耶盡界彼斷界耶若無婬界彼盡界設盡界彼無婬界耶
또한 세존은 “단상(斷想)이 있으며, 무음상(無婬想)이 있으며, 진상(盡想)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무엇을 단상이라고 하고 무엇을 무음상이라 하며 무엇을 진상이라고 하는가?
이 장에서의 내용을 모두 연설하겠다.
한 사람의 생애에 이 같은 열두 가지 연(緣) 중 몇 가지가 과거이고 몇 가지가 미래이며, 몇 가지가 현재인가?
024_0702_a_06L又世尊言斷想有無婬想有盡想彼云何斷想何無婬想云何盡想此章義願具演說一人此生十二種緣幾種過去幾種未來幾種現在
【답】 두 가지는 과거이니 무명(無明)과 행(行)이다. 두 가지는 미래이니 생(生)과 사(死)이다. 여덟 가지는 현재이니, 식(識)과 명색(名色)과 6입(入)과 갱락(更樂)과 통(痛)과 애(愛)와 수(受)와 유(有)이다.
또한 세존께서 “무명은 행에 연(緣)이 되고, 수(受)는 유(有)의 연이 된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무명은 행에 연이 된다’고 함은 무엇을 말하며, ‘수는 유에 연이 된다’고 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1)
024_0702_a_11L答曰二種過去無明二未來死也八現在名色更樂又世尊言無明緣受緣有彼云何無明緣行云何受緣有
【답】 ‘무명은 행의 연이 된다’고 함은 바로 현재의 행에 대하여는 전생에 지었던 행이 있는 것으로, 그러한 행의 과보[報]로서 금생의 존재[有]를 얻은 것을 나타낸다. 이것을 ‘무명은 행의 연이 된다’고 함이다. ‘수는 유의 연이 된다’고 함은, 바로 현재의 행에 대하여는 이 생에서 지은 행이 있는 것으로, 그러한 모든 행이 받을 과보로서 미래의 존재를 얻게 되는 것을 나타낸다. 이것을 ‘수는 유의 연이 된다’고 한다.
‘무명은 행에 연이 된다’고 하는 것과 ‘수는 유에 연이 된다’고 하는 것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024_0702_a_15L答曰無明緣行者於是現行前世時所作行彼行報今生得有是謂無明緣行受緣有者於是現行於此生所作行諸行受報當得未來有謂受緣有無明緣行受緣有有何差
【답】 ‘무명은 행의 연이 된다’고 함은 바로 현재의 행에 대하여는 전생에 짓고 행하였던 것이 있어, 그러한 행의 과보[報]로서 금생의 존재를 얻은 것으로, 그 같은 행의 연으로서 하나의 결(結) 무명을 설한 것이다. 그리고 ‘수는 유의 연이 된다’고 함은, 바로 현재의 행에 대하여는 금생에서 짓는 행이 있으며, 그러한 행의 과보로서 미래 존재를 얻게 되는 것으로, 그러한 행의 연으로서의 일체의 결을 설한 것이다. ‘무명은 행에 연이 된다’고 하는 것과 ‘수는 유에 연이 된다’고 하는 것의 차별이란 이것을 말한다.
행이면서 무명에 연하고, 명(明)에 연하지 않는 것이 있는가?
024_0702_a_20L答曰無明緣行於是現行前世時所作行彼行報今生得有彼行緣說一結無明受緣有於是現行今生作彼行報當得未來有彼行緣說一切無明緣行受緣有是謂差別頗行緣無明不緣明
【답】 없다.
명에 연하지 않고, 무명에 연하지 않는 것이 있는가?
【답】 이것 역시 없다.
명에도 연하지 않고, 무명에도 연하지 않는 것이 있는가?
【답】 이것 역시 없다.
어째서 없는가?
024_0702_b_02L答曰無也緣明不緣無答曰此亦無也不緣明不緣無明答曰此亦無也何以故無
【답】 이 중생은 아득한 예부터 도(道)를 비도(非道)라고 말해 왔다. 그는 그 이후 인간으로서 행위를 하고 율산(栗散)의 작은 왕이 되고 혹은 변방의 왕이 되고, 나아가 대왕이 되고, 차가월(遮迦越, cakravarti)에 이르러 원하는 것을 자재로이 이루고, 유전 상속하는 만물의 근거[展轉相因]가 되어 다스리지 않는 것이 없게 된다. 이에 따라 인간의 주[人主]가 되어 인간의 세계나 신의 세계, 약초, 수목의 상속성장[展轉生長]을 획득한다. 이는 바로 도를 [비도라고 하는 등] 선행된 마음의 네 가지 연(緣)이 그의 마지막 마음의 하나의 증상연(增上緣)이 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이제 인연(因緣)을 설명하겠다.
행이면서 무명에 연하고, 명에 연하지 않는 것이 있는가?
024_0702_b_04L此衆生從久遠道言非道彼於後時人閒造行作粟散少王或作邊王轉爲大王遮迦越所欲自在展轉相因無所不統得爲人主人界神界藥草樹木展轉生長此是前心四緣彼後心一增上緣復次我今當說因緣頗行緣無明不緣明耶
【답】 있다. 무명보(無明報)2)와 염오행(染汚行)이 그것이다.
행이면서 명에 연하고, 무명에 연하지 않는 것이 있는가?
【답】 있다. 초명(初明)3)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무루행이다.
행이면서 명에도 연하지 않고 무명에도 연하지 않는 것이 있는가?
【답】 있다. 무명보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불은몰무기행(不隱沒無記行)과 초명과 선한 유루행이다.
날숨과 들숨은 몸에 의지하여 돈다고 말해야 할 것인가, 마음에 의지하여 돈다고 말해야 할 것인가?4)
024_0702_b_11L答曰無明報染污行頗行緣明不緣無明答曰除初明諸餘無漏行頗有行不緣明不緣無明答曰除無明報諸餘不隱沒無記行初明善有漏行出息入息當言依身當言依心迴耶
【답】 날숨과 들숨은, 교편(巧便:신역 所應)에 따라 몸에 의지하여 돌기도 하고, 역시 마음에 의지하여 돌기도 한다.
만약 날숨과 들숨이 다만 몸에 의지하여 돌고, 마음에 의지하여 돌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무사상정(無思想定)과 멸진정(滅盡定)에 들어서도 날숨과 들숨은 돌 것이다. 또한 만약 날숨과 들숨이 마음에 의지하여 돌고, 몸에 의지하여 돌지 않는다고 말할 것 같으면 무색계의 사람에게도 날숨과 들숨이 [돌아야 할 것이다]. 만약 날숨과 들숨이 몸에 의지하여서 돌고, 마음에 의지하여 돌아서 교편과 같지 않다고 한다면, 알[卵]이나 모태 내의 피(皮) 막(膜) 전후(轉厚)의 소락(酥酪)과 같은 것, 어미 뱃속에 있으면서 여러 기관[諸根]이 갖추어지지 않았거나 여러 기관이 아직 성숙하지 않은 것에도, 그리고 [마음이 완전히 끊어진] 제4선에 들어서도 날숨과 들숨이 돌게 될 것이다.
024_0702_b_16L答曰出息入息如隨巧便亦隨身迴亦隨心迴若出息入息但依身迴不依心迴者此則入無思想定滅盡定出息入息迴也若出息入息依心迴不依身迴者此則無色界人出息入息也若出息入息依身迴心迴不如巧便此則卵胎皮膜轉厚如酥酪在母腹中諸根未具諸根未入第四禪出息入息迴
024_0702_c_02L날숨과 들숨은 다만 그러한 교편에 따라 몸에 의지하여 돌고, 마음에 의지하여 도는 것이다. 아래로는 마하아비니리(摩訶阿鼻泥梨, mahāvīci-naraka)로부터 위로는 정거천(淨居天)에 이르기까지 그 중간에 존재하는 중생은, 여리 기관이 결여되지 않고 모든 몸의 마디가 완전히 갖추어 진 것만 날숨과 들숨이 그러한 교편과 같이 몸에 의지하여 돌고 마음에 의지하여 도는 것이다.
만약 색계의 중생이 몸에 의지하여 마음을 돌린다면, 마찬가지로 무색계의 중생은 무엇에 의지하여 마음을 돌리는 것인가?5)
024_0702_b_24L但出息入息如其巧便依身迴依心迴下至摩訶阿鼻泥梨上至淨居天於其中閒所有衆生諸根不缺一切支節完具息入息如其巧便盡依身迴依心迴如色界衆生依身心迴如是無色衆生依何等心迴
【답】 명근(命根)과 처소(處所), 그리고 또한 그 밖의 다른 심불상응행6)이다.
무유중애(無有中愛)7)는 마땅히 견제단(見諦斷)이라고 말해야 할 것인가, 사유단(思惟斷)이라고 말해야 할 것인가?
【답】 무유중애는 사유단으로서, 견제단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어떤 이8)는 주장하기를, “무유중애는 혹은 견제단이며, 혹은 사유단이다”고 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가리켜 견제단이라고 하는가?(이하, 대답은 분별론자의 주장)
024_0702_c_07L答曰命根處所亦復有餘心不相應行無有中愛當言見諦當言思惟斷耶答曰無有中愛思惟不得言見諦斷或復有言無有中愛或見諦斷或思惟斷云何見諦斷
【답】 견제소단법인 무유(無有) 중의 모든 음(婬)이니, 이것을 견제단이라고 한다. 무엇을 가리켜 사유단이라고 하는가?
【답】 사유소단법인 ‘무유 중의 모든 음이니, 이것을 사유단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뜻9)에 따르면 무유중애는 사유소단이다. 그러하듯 무유중애는 사유소단인가?(이하 분별론자의 반론)
【답】 그렇다.
만약 이와 같이 주장할 것 같으면 [아직 사유단에 이르지 못한] 수다원(須陀洹)은 능히 이러한 애(愛)를 일으켜 나로 하여금 단괴(斷壞)하거나 죽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024_0702_c_11L見諦所斷法無有中諸婬是謂見諦斷云何思惟斷答曰思惟所斷法無有中諸婬是謂思惟斷如我義有中愛思惟所斷如是無有中愛思惟所斷耶答曰如是若作是說須陁洹能起此愛使我斷壞乃至死
【답】 그렇지 않다.
내가 설명하는 것을 들어보라. ‘무유중애는 마땅히 사유소단이냐’고 하니 그대는 ‘그것은 그렇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마땅히 ‘수다원은 능히 이 애를 일으켜 단괴하거나 마침내는 죽게 해야 한다’고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라고 하니, 그대는 대답하기를 ‘비록 그러한 말이기는 하나 그 뜻은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만약 ‘수다원은 능히 이러한 애를 일으켜 (단괴하거나 죽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할 수 없다면 ‘무유중애는 사유소단이다’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며, 따라서 ‘무유중애가 사유소단이다’고 하는 사실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수다원은 음욕으로서 지옥ㆍ축생ㆍ아귀의 세계를 아직 다하지 못한 자이다’라는 말이 있는가?(이하 應理論者인 논주의 반론)
024_0702_c_17L答曰聽我所說設當無有中愛思惟所彼如是當言須陁洹能起此愛斷壞乃至死答曰雖有此言是義不然不得作是語須陁洹能起此愛無有中愛思惟所斷不應言無有中愛思惟所斷此事不然頗有是言須陁洹婬欲未盡地獄畜生餓鬼耶
024_0703_a_02L【답】 그렇다.
그렇다면 ‘수다원은 이러한 애를 일으켜, 마땅히 이라반나(伊羅槃那:airāvṇa)용왕, 마나사선주(摩那斯善住) 혹은 염부(閻浮:jambu)지옥왕이 될 것이다’고 하는 말이 있는가?
024_0702_c_24L答曰頗有是言須陁洹能起此愛我當作伊羅槃那龍王摩那斯善住若閻浮地獄王
【답】 없다.
내가 설명하는 것을 들어보라 만약 수다원의 애가 아직 지옥ㆍ축생ㆍ아귀를 다하지 못하였다면 마땅히 ‘수다원은 이러한 애를 일으켜, 자신은 이라반나용왕, 마나사선주 혹은 염부지옥왕이 될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대답하기를 ‘비록 그러한 말이기는 하나 그 뜻은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024_0703_a_04L答曰聽我所說若須陁洹愛未盡地獄畜生餓鬼當作是語須陁洹能起此愛我作伊羅槃那龍王摩那斯善住若閻浮地獄王答曰雖有此言是義不然
만약 ‘수다원이 능히 이러한 애를 일으켜 자신은 이라반나용왕, 마나사건주 혹은 염부지옥왕이 될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면 ‘수다원은 욕의(欲意)가 아직 지옥ㆍ축생ㆍ아귀의 도를 다하지 못한 자’라고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수다원의 애는 아직 지옥ㆍ축생ㆍ아귀를 다하지 못하였으며 이 애는 사유단’이라고 하는 사실은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모든 번뇌[纏]가 얽히어 부모를 살해하는 것인데, 이 번뇌는 사유소단으로 수다원도 아직 다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가?
024_0703_a_08L不得作是語陁洹能起此愛我作伊羅槃那摩那斯善住若閻浮地獄王須陁洹欲意未盡地獄畜生餓鬼不得作是語陁洹愛未盡地獄畜生餓鬼此愛思惟此事不然頗作是語諸纏所纏殺父此纏思惟所斷須陁洹未盡耶
【답】 그렇다.
그렇다면 ‘수다원은 능히 이러한 번뇌를 일으키고, 그러한 모든 번뇌를 의해 부모를 살해한다’고 하는 말도 할 수 있는가?
024_0703_a_14L答曰如是頗作是語須陁洹能起此纏諸纏殺父母
【답】 할 수 없다.
내가 설명하는 것을 들어보라. ‘모든 번뇌[纏]가 얽히어 부모를 살해하는 것인데, 이 번뇌는 사유소단으로 수다원도 아직 다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하니, 그대는 대답하기를 ‘그것은 그렇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수다원은 이러한 번뇌를 일으키고, 그러한 모든 번뇌에 의해 부모를 살해한다’라고 말할 수 있느냐고 하니, 그대는 대답하기를 ‘비록 그렇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그것은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024_0703_a_16L答曰不也聽我所說諸纏所纏殺父母此纏思惟所斷須陁洹未盡彼如是語須陁洹能起此纏諸纏殺父母答曰雖有此言是事不然
‘수다원은 능히 이러한 번뇌를 일으키고 모든 전에 의해 부모를 살해한다’고 말할 수가 없다면 ‘모든 번뇌가 얽히어져 부모를 살해하는 것인데, 이 번뇌는 사유소단으로 수다원도 아직 다하지 않았다’고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모든 전이 얽히어져 부모를 살해하는 것인데, 이 전은 사유소단으로 수다원도 아직 다하지 않았다’고 하는 사실은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사유소단의 법인 무유(無有)는 사유소단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답】 그렇다.
‘수다원은 능히 그것을 연(緣)으로 하여 애를 일으킨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024_0703_a_19L不應作是語須陁洹能起此纏諸纏殺父母諸纏所纏殺父母此纏思惟所斷陁洹未盡不得作是語諸纏所纏殺父母此纏思惟所斷須陁洹未盡此事不然頗作是語思惟所斷法無有思惟斷耶答曰如是頗作是語須陁洹能起彼緣愛耶
024_0703_b_02L【답】 그렇지 않다.
내가 설명하는 것을 들어보라. ‘사유소단의 법인 무유(無有)는 사유소단이다’라고 할 수 있느냐고 하니 그대는 ‘그것은 그렇다’고 말하면서, ‘수다원은 능히 그것을 연(緣)으로 하여 애를 일으킨다’고 말할 수 있느냐 하니 그대는 대답하기를 ‘비록 그렇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그것은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마땅히 ‘수다원은 능히 그것을 연(緣)으로 하여 애를 일으킨다’라고 말할 수 없다면 ‘사유소단의 법인 무유(無有)는 사유소단이다’라고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사유소단의 법인 무유는 사유소단이다’고 하는 것은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무유(無有)란 어떠한 법을 말하는 것인가?
024_0703_b_03L答曰不也聽我所說若思惟所斷法無有思惟所斷彼如是語須陁洹能起彼緣愛答曰雖有此言是事不然不應作是語須陁洹能起彼緣愛思惟所斷法無有思惟所斷不得作是語思惟所斷法無有思惟所斷此事不然無有名何等法
【답】 삼계(三界)의 무상함이다.
세존께서 ‘그가 마음으로 해탈하기를 원만다면 에심(恚心)과 치심(癡心)으로부터 해탈한다’고 하셨는데, 그 무엇을 가리켜 마음이 해탈을 얻는다고 하는가?
음(婬)ㆍ노(怒)ㆍ치(癡)가 있는 마음인가, 음(婬)ㆍ노(怒)ㆍ치(癡)가 없는 마음인가?10)
024_0703_b_09L答曰三界無常又世尊言彼欲心解恚心癡心解脫云何心得解脫婬怒癡無婬怒癡
【답】 음ㆍ노ㆍ치가 없는 마음이다.
그런데 다시 ‘음(婬)ㆍ노(怒)ㆍ치(癡)의 마음과 상응하는 그 마음이 해탈한다’고 이와 같이 말하기도 한다.11)
그러나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 마음은 이러한 음ㆍ노ㆍ치 와 서로 합하거나 의지하거나 호응하지 않는 것이지만, 그러한 음ㆍ노ㆍ치가 아직 끊어지지 않았으면 이와 같은 마음은 그러한 음ㆍ노ㆍ치에서 해탈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024_0703_b_12L答曰無婬怒癡有如是言與婬怒癡心相應彼心解彼不應作是語何以故非彼心此婬怒癡相合相依相應彼婬怒癡未如是心不解脫彼婬怒癡
나아가 그러한 음ㆍ노ㆍ치가 끊어졌다면 이와 같은 마음은 그 음ㆍ노ㆍ치로부터 해탈하기 때문이다. 세존께서도 역시 설명하시기를 “해와 달과 다섯 가지 가림[曀], 이를테면 구름ㆍ연기ㆍ안개ㆍ먼지ㆍ아수륜(阿須倫, asura)에 있어서 그 일월은 이 가림과 서로 합하거나 의지하거나 호응하지 않지만, 이러한 가림이 아직 다하지 않으면 마찬가지로 그 일월은 밝지 않고, 뜨겁지 않으며, 광대하지 않고, 청정하지 않다.
024_0703_b_16L彼婬怒癡斷如是心解脫彼婬怒癡世尊亦日月此五煙霧阿須倫彼日月此曀相合相依相應此曀未如是彼日月不明不熱不廣不淨如此曀盡彼日月明熱廣淨
그러나 이러한 가림이 다하면 그 일월은 밝고 뜨거우며 광대하고 청정해진다”고 하셨다. 이처럼 그 마음은 이러한 음ㆍ노ㆍ치와 서로 합하거나 의지하거나 호응하지 않지만, 그러한 음ㆍ노ㆍ치가 아직 끊어지지 않았으면 이 같은 마음은 그러한 음ㆍ노ㆍ치로부터 해탈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음ㆍ노ㆍ치가 끊어졌다면 마음은 그 음ㆍ노ㆍ치로부터 해탈을 얻게 될 것이다.
어떠한 마음이 해탈하는가? 과거인가, 미래인가, 현재인가?12)
024_0703_b_21L如是非彼心此婬怒癡相合相依相應婬怒癡未斷如是心不解脫彼婬怒彼婬怒癡斷心得解脫彼婬怒癡等心解脫過去耶未來耶現在耶
024_0703_c_02L【답】 미래심이 일어나면 바로 그때 해탈하여 다른 어떠한 장애도 없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무애도(無礙道)가 현전에 바로 소멸하고 진지(盡智)가 눈앞에서 반드시 생겨남과 같은 것이니, 만약 그러한 무애도가 소멸하고 나면 진지를 낳게 된다. 이와 같은 미래심이 생겨나면, 바로 그때 해탈하여 다른 어떠한 장애도 없게 되는 것이다.
아직 해탈하지 않은 마음이 해탈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이미 해탈한 마음이 해탈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024_0703_c_02L未來心起卽時解脫無餘障此云如無礙道現前卽滅盡智現在前必若彼無㝵道滅而生盡智如是未來心生卽時解脫無餘障未解脫心當言解脫耶已解脫心當言解脫耶
【답】 이미 해탈한 마음이 해탈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만약 이미 해탈하였다면 해탈한다고 말할 수 없으며, 만약 해탈한다고 할 것 같으면 이미 해탈하였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미 해탈한 마음이 해탈한다’고 하는 것, 이것은 옳지 못한 것이다.
앞서 그대들이 말한 경우[向者]와 동일하게 말할 것이다.(논주의 반론) 세존께서 계경에서 훌륭히 말씀하셨다.
024_0703_c_07L答曰已解脫心當言解脫若已解脫不得言當解脫若當解脫不得言已解脫已解脫心當解脫此事不然向者語世尊善說契經

만약 욕망[欲]을 끊어 남음이 없으면
물속에 든 연꽃과 같으며,
비구가 이러 저러한 것을 멸함은
뱀이 허물을 벗어 버림과 같다.
024_0703_c_11L若斷欲無餘
如入水蓮花
比丘滅此彼
如蛇脫皮去

여기에서 이미 멸하고서 멸한다고 말하는 것인가, 멸하지 않고서 멸한다고 말하는 것인가?
【답】 이미 멸하고서 멸한다고 말하는 것이리라.
만약 이미 멸하였다고 한다면 장차 멸한다고 말할 수 없으며, 만약 장차 멸한다고 할 것 같으면 이미 멸하였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미 멸한 것을 멸한다고 하는 것, 이것은 올바르지 못한 것이다. 또한 앞서 그대들이 말한 경우와 동일하게 세존께서 계경에서 충분히 말씀하셨다.
024_0703_c_13L已滅滅耶不滅滅耶答曰已滅滅也若已滅不得言當滅若當滅不得言已滅已滅當滅此事不然如向者語尊善說契經

만(慢)이 다하면 마음이 저절로 고요해지니
선심(善心)은 모든 번뇌를 벗어난다.
한 번 고요해지면 마음은 산란함이 없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나 피안에 이른다.
024_0703_c_17L慢盡自定意
善心一切脫
一靖居無亂
畏死度彼岸

여기에서 이미 이른 것을 이르렀다고 말하는 것인가, 아직 이르지 않은 것을 이르렀다고 말하는 것인가?
【답】 이미 이른 것을 이르렀다고 말하는 것이리라.
만약 이미 이르렀다고 한다면 장차 이를 것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만약 이를 것이라고 할 것 같으면 이미 이르렀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미 이르렀는데 장차 이른다고 하는 것, 이것은 옳지 못한 것이다. 앞서 그대들이 말한 경우와 동일하게 세존께서 계경에서 훌륭히 말씀하셨다.
024_0703_c_19L已度度耶未度度耶答曰已度度也若已度不得言當度若當度不得言已度已度當度此事不然如向者語世尊善說契經

고라니와 사슴은 수풀에 의지하고
새는 허공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법은 분별(分別)로 돌아가고
진인(眞人)은 적멸로 돌아간다.
024_0703_c_23L麋鹿依林
鳥歸虛空
法歸分別
眞人歸滅
024_0704_a_02L
또한 세존께서 “염(厭)을 수습하면 무음(無婬)을 닦는 것이고, 무음을 수습하면 해탈이며, 해탈을 수습하면 니원(泥洹)이다”고 말하였다. 무엇을 가리켜 염이라고 하는가, 무엇을 가리켜 무욕이라고 하는가, 무엇을 가리켜 해탈이라 하고, 무엇을 가리켜 니원이라고 하는가?
염이란 무엇인가?
【답】 행취처(行臭處)13)가 더럽다[不淨]고 생각하여 항상 그것을 피하며, 잠시 동안이라도 즐거이 바라보지[喜見] 않는 것, 이것을 염이라고 한다.
무욕이란 무엇인가?
024_0704_a_02L又世尊言習厭習無婬習無婬解脫解脫泥洹彼云何厭云何無欲云何解脫云何泥洹云何厭答曰行臭處不淨意常避之暫不喜見是謂厭何無欲
【답】 그러한 염이 음ㆍ노ㆍ치가 없어져 선근과 상응하는 것, 이것을 무욕이라고 한다.
해탈이란 무엇인가?
【답】 그러한 음ㆍ노ㆍ치가 없어져 선근이 마음의 과거해탈ㆍ미래해탈ㆍ현재해탈과 상응하는 것, 이것을 해탈이라고 한다.
니원이란 그 무엇을 말하는가?
【답】 음ㆍ노ㆍ치가 다하여 남음이 없는 것, 이것을 니원이라고 한다.
또한 세존은 “단계(斷界)가 있으며, 무음계(無婬界)가 있으며, 멸계(滅界)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단계란 무엇인가?
024_0704_a_07L答曰彼厭相應無婬怒癡善是謂無欲云何解脫答曰彼無婬怒癡善根相應心已解脫當解脫解脫是謂解脫彼云何泥洹答曰怒癡盡無餘是謂泥洹又世尊言斷界有無婬界有滅界云何斷界
【답】 애결(愛結)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결이 다한 것, 이것을 단계라고 한다.
무음계란 무엇인가?
【답】 애결이 멸한 것, 이것을 무음계라고 한다.
멸계란 무엇인가?
【답】 모든 결법(結法)이 멸한 것, 이것을 멸계라고 한다.
소위 단계란 바로 무음계인가?
【답】 그렇다.
만약 이것이 무음계라면, 이는 바로 단계인가?
024_0704_a_12L除愛結諸餘結盡是謂斷界云何無婬界答曰愛結滅是謂無婬界何滅界答曰諸結法滅是謂滅界謂斷界是無婬界耶答曰如是設是無婬界是斷界耶
【답】 그렇다.
소위 단계란 바로 멸계인가?
【답】 그렇다.
만약 이것이 멸계라면, 이는 단계인가?
【답】 그렇다.
소위 무음계란 바로 멸계인가?
【답】 그렇다.
만약 멸계라면 이는 바로 무음계인가?
024_0704_a_17L答曰如是所謂斷界是滅界耶答曰如是設是滅界是斷界耶答曰如是所謂無婬界是滅界答曰如是設滅界是無婬界耶
024_0704_b_02L【답】 그렇다.
또한 세존께서 “단상(斷想)이 있으며, 무음상(無婬想)이 있으며, 멸상(滅想)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무엇을 단상이라고 하는가?
【답】 애결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결을 멸하는 모든 상[諸想]의 본질[性], 이것을 단상이라고 한다.
무엇을 무음상이라고 하는가?
【답】 애결을 멸하는 모든 상의 본질, 이것을 무음상이라고 한다.
무엇을 멸상이라고 하는가?
【답】 모든 결법을 멸하는 모든 상의 본질, 이것을 멸상이라고 한다.
이상 인(人) 발거 제3을 마친다.
[범본 148수로, 장(長) 16자]
024_0704_a_20L如是又世尊言有斷想有無婬想有滅想彼云何斷想答曰除愛結餘結滅諸想性是謂斷想云何無婬答曰愛結滅諸想性是謂無婬想云何滅想答曰諸結法滅諸想性是謂滅想人跋渠第三竟梵本一百四十八首盧長十六字

4) 애공경(愛恭敬)발거
024_0704_b_03L阿毘曇雜犍度愛恭敬跋渠第四
무엇이 애공경(愛恭敬)인가? 무엇이 공양공경(供養恭敬)인가?
무엇이 신력(身力)인가? 신력은 몇 가지 입(入)에 포섭되며, 몇 가지 식(識)에 의해 인식 되는가?
무엇이 수연멸(數緣滅)인가? 무엇이 비수연멸(非數緣滅)인가? 무엇이 무상인가? 무상과 비수연멸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무엇이 유여니원계(有餘泥洹界)인가? 무엇이 무여니원계(無餘泥洹界)인가?
니원(泥洹, nirvāṇa)이란 학(學)이라고 말해야 할 것인가, 무학(無學), 비학비무학(非學非無學)이라고 말해야 할 것인가?
024_0704_b_04L云何愛恭敬云何供養恭敬云何身身力攝幾入幾識識云何數緣滅云何非數緣滅云何無常無常非數緣滅有何差別云何有餘泥洹界何無餘泥洹界泥洹者當言學耶無學非學非無學耶
또한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는 무학의 계신(戒身), 무학의 정신(定身), 무학의 혜신(慧身), 무학의 해탈신(解脫身), 무학의 해탈지견신(解脫知見身)을 성취하였다”라고 하셨는데, 그 무엇을 가리켜 무학의 계신ㆍ정신ㆍ혜신ㆍ해탈신ㆍ해탈지견신이라고 하는가?
또한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의 구경일 뿐 여러 구경이 있는 것은 아니다”고 하셨는데, 구경이란 어떠한 법을 말하는가?
024_0704_b_10L又世尊言彼成就無學戒身無學定身無學慧身無學解脫身無學解脫知見身彼云何無學戒身定身慧身解脫身解脫知見又世尊言一究竟非衆究竟究竟名是何法耶
또한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모든 이학(異學)에도 실로 장차 모든 수[諸受]를 끊음이 있지만 현법(現法) 중에서는 모든 수를 끊는다고 시설해서는 안 된다. 욕수(欲受)ㆍ계수(戒受)ㆍ견수(見受)를 끊는다고 시설하여도 아수(我受)는 아니다”고 하셨는데, 이 뜻은 무엇인가? 어떠한 이유에서 ‘외도 이학은 현법 중에서 아수를 끊었다’고 시설하지 못하는가?
두 가지 지(智)가 있다. 지지(知智)와 진지(盡智)이다. 무엇을 가리켜 지지라고 하며, 무엇을 진지라고 하는가?
부처님께 귀의하고, 법에 귀의하고, 비구승에게 귀의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에 귀의하여 나아간다 함인가?
이 장에서의 내용을 모두 연설하겠다.
024_0704_b_15L又世尊言有諸異學實當斷諸受於現法中不施設斷一切諸受施設斷欲受戒受見受非我受此義云何以何等故外道異學於現法中不施設斷我受有二智知智彼云何知智云何盡智若歸佛歸法歸比丘僧彼何歸趣此章義願具演說
무엇이 애공경(愛恭敬)인가? 무엇이 공양공경(供養恭敬)인가? 무엇이 신력(身力)인가?
애공경이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무엇을 가리켜 애(愛)라 하고, 무엇을 가리켜 공경(恭敬)이라 하는가?
애란 무엇인가?
【답】 애(愛)와 상애(相愛)와 작애(作愛), 이것을 애라고 한다.
공경이란 무엇인가?
024_0704_b_22L云何愛恭敬云何供養恭敬云何身愛恭敬者彼云何愛云何恭敬云何答曰若愛相愛作愛是謂愛敬云何
024_0704_c_02L【답】 공경을 잘 하고, 공경을 잘 하여 자기를 낮추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떠한 것인가?
【답】 스승을 한결같이 사랑하여 마음이 윤택해지면 그는 공경에 따르는 자이다. 즉 법(法)ㆍ승(僧)ㆍ화상(和上)ㆍ아사리(阿闍利)ㆍ화상과 아사리와 같은 자, 그리고 존중해야 할 모든 범행자(梵行者)를 사랑하여 마음이 윤택해지면 그는 공경을 따르는 자인 것이다. 이와 같이 만약 사랑으로써 그가 공경하면 이것을 애공경이라고 한다. 공양 공경이라 함에 있어, 무엇을 공양이라 하고, 무엇을 공경이라 하는가?
공양이란 무엇인가?
【답】 두 가지 공양이 있으니, 법(法)의 공양과 의식(衣食)의 공양이다.
공경이란 무엇인가?
024_0704_c_03L若恭敬善恭敬善下此云何如一愛師意潤彼由恭敬法和上阿闍梨同和上阿闍梨及諸尊重等梵行者愛意潤彼由恭敬如是若愛彼作恭敬是謂愛恭敬供養恭敬者二供養法供養衣食供養恭敬云何
【답】 공경을 잘 하고, 공경을 잘 하여 자기를 낮추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떠한 것인가?
【답】 스승에게 한결같이 공양하면 그는 공경해 따르는 자이다. 즉 승ㆍ화상ㆍ아사리화상과 아사리와 같은 자, 그리고 존중해야 할 모든 범행자에게 공양하면 그는 공경을 따르는 자인 것이다. 이와 같이 만약 공양으로써 그가 공경하면. 이것을 공양공경이라고 한다.
신력(身力)이란 무엇인가?
024_0704_c_08L若恭敬善恭敬善下此云何如一作供養師彼由恭敬僧和上阿闍梨和上阿闍梨及諸尊重等梵行者供養彼由恭敬如是若供養彼作恭是謂供養恭敬云何身力
【답】 몸에 힘이 있고, 몸에 정진이 있으며, 몸이 강하고, 몸에 방편이 있으며, 몸이 용맹하면, 이것을 신력이라고 한다. 이 같은 신력은 하나의 입처(入處)인 세활(細滑入)14)에 포섭되며, 신식(身識)과 의식(意識)의 두 가지 식에 의해 인식된다. 마치 두 사람의 장부가 서로를 붙잡고 씨름하는 경우와 같다. 즉 한 사람은 힘이 세고 한 사람은 힘이 약할 경우, 힘이 많은 자는 상대를 붙잡으면서 ‘내 힘이 그보다 크다 그는 힘이 나와 같지 않다’고 알며, 또한 힘이 약한 자도 상대를 잡으면 ‘그의 힘이 나보다 크며, 나의 힘은 그와 같지 않다’고 스스로 아는 것이다.
024_0704_c_13L答曰身力身精進身强身方便身勇是謂身力身力攝一入細滑入二識識意識如二壯夫與共相撲一人力一人力劣其多力者捉而知之我力大彼彼不如我其力劣者捉復自知力大我我不如彼
이처럼 고가 힘이 세다는 사실과 약하다는 사실은 다 같이 하나의 입처, 즉 세활입에 포섭되며, 신식과 의식이라는 두 가지 식에 의해 인식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한 사람은 힘이 세고 한 사람은 힘이 약한 두 사람이 있어 그들이 이곳저곳을 붙잡거나 혹은 치거나 혹은 밀거나 혹은 집을 경우, 여기가 붙잡히면 ‘그가 힘이 세다’거나 ‘내가 힘이 약하다’고 아는 것과 같다. 말하자면 그들의 힘이 세고 약함은 다같이 하나의 입처, 즉 세활입에 포섭되며, 신식과 의식이라는 두 가지 식에 의해 인식되는 것이다.
무엇이 수연진(數緣盡:擇滅)인가? 무엇이 비수연진(非數緣盡:非擇滅)인가? 무엇이 무상인가?
수연진이란 무엇인가?
024_0704_c_19L如彼多力少力俱攝一入細滑入二識識身識意識譬如二一人强力一劣彼處處捉若撲若墮若執此捉亦知彼强力此劣如彼多力少力俱攝一入細滑入二識識身識意識云何數緣盡云何非數緣盡云何無常數緣盡云何
024_0705_a_02L【답】 [모든 행이] 다한[盡] 그것이니, 바로 해탈이다. 이것을 수연진이라고 한다.
비수연진이란 무엇인가?
【답】 [모든 행이] 다한 것으로서 해탈이 아닌 것, 이것을 비수연진이라고 한다.
무상이란 무엇인가?
【답】 모든 행이 변이하고 멸진(滅盡)하여 머물지 않는 것, 이것을 무상이라고 한다.
무상과 비수연멸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024_0705_a_02L答曰其盡者是解脫是謂數緣盡非數緣盡云答曰其盡者非解脫是謂非數緣無常云何答曰諸行變易滅盡不是謂無常無常非數緣盡有何差
【답】 무상이란 모든 행이 변이하고 멸진하여 머물지 않는 것이고, 비수연진이란 이미 괴로움이나 환란ㆍ근심과 걱정ㆍ모든 뇌란에서 벗어났으나 욕망의 의식[欲意]15)에 따른 것이 아니며 아직 욕망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상과 비수연진의 차별이다.
무엇이 유여니원계(有餘泥洹界)이며, 무엇이 무여니원계(無餘泥洹界)인가?
유여니원계란 무엇인가?
024_0705_a_08L答曰無常者諸行變易滅盡不住非數緣盡者已脫苦患愁憂諸惱隨欲意未得離欲無常非數緣盡是差別云何有餘泥洹界無餘泥洹云何有餘泥洹界
【답】 만약 집착은 없으나 목숨[壽]을 지속[住]하고, 작용하여 움직이는[活] 4대(大)가 아직 끝나지 않아 그것의 조색(造色)과 5근(根)이 마음에 돌면, 이것을 유여니원계라고 한다. 유여니원계에서는 결사(結使)가 다하여 없어져 피안에 이르며 과(果)의 증득을 취한다. 이것을 유여니원계라고 한다.
무여니원계란 무엇인가?
024_0705_a_12L答曰若無著壽住活四大未沒彼造色五根與心周是謂有餘泥洹界於有餘泥洹界有結使滅盡得到彼岸而取果證謂有餘泥洹界也云何無餘泥洹界
【답】 어떠한 집착도 없으며, 그 밖의 것도 영구히 지나가 버린 완전한 열반으로서 4대가 다하여 없어져서 조색이나 5근이 마음에 돌지 못하는 것, 이것을 무여니원계라고 한다. 무여니원계에서는 모든 결사가 다하니, 이것을 바로 무여니원계라고 하는 것이다.
니원(泥洹)이란 마땅히 학(學)이라고 말해야 할 것인가, 무학(無學) 혹은 비학비무학(非學非無學)이라고 말해야 할 것인가?
024_0705_a_16L答曰無著餘久過去般泥洹四大滅彼造色五根無心可迴旋是謂無餘泥洹界於無餘泥洹界諸結使盡是謂無餘泥洹界泥洹者當言學耶學耶亦非學非無學耶
【답】 니원은 역시 비학비무학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니원은 혹은 학이며, 혹은 무학이며, 혹은 비학비무학이다. 무엇이 학[의 니원]이냐 하면, 학이 획득한 모든 결사(結使)가 다하여 없어져서 피안에 이르러 과의 증득을 취하는 것, 이것을 학[의 니원]이라고 한다.
024_0705_a_21L答曰泥洹亦非學非無學也或有作是言泥洹或是學或是無學或是非學非無學何學答曰學得諸結使滅盡得到彼岸而取果證是謂爲學
024_0705_b_02L무엇이 무학[의 니원]이냐 하면, 무학이 획득한 모든 결사가 다하여 없어져서 피안에 이르러 과의 증득을 취하는 것, 이것을 무학[의 니원]이라고 한다. 무엇이 비학비무학[의 니원]이냐 하면, 유루(有漏)의 사람이 획득한 모든 결사가 다하고 없어져 피안에 이르러 과의 증득을 취하는 것, 이것을 비학비무학[의 니원]이라고 한다.’
우리의 종의[義]에서도 니원은 역시 비학비무학이듯이, 이처럼 니원은 역시 비학비무학인가?(이는 분별론자의 물음으로, 이하는 응리론자와의 대론이다)
024_0705_a_25L云何無學無學得諸結使滅盡得到彼岸而取果證是謂無學也云何非學非無答曰有漏得諸結使滅盡得到彼岸而取果證是謂非學非無學如我義泥洹亦非學非無學如是泥洹亦非學非無學耶
【답】 그렇다.
만약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이전에 세속도로써 욕망[欲]과 진에(瞋恚)를 끊되 영원히 다하여 남김이 없어도 이는 사성제를 닦지 않은 것이며, 만약 4제를 얻고 4제를 비로소 획득하여 아나함(阿那含)을 얻는다면 학이 되는가?
【답】 그렇다.
만약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이전에 세속도로써 모든 결사(結使)가 다하여 없어져서 피안에 이름을 얻어 과의 증득을 취하는 것이 아나함과를 얻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것이 바로 학이 되는 것인가?
024_0705_b_08L答曰如是頗作是說先以世俗道斷欲瞋恚永盡無餘不修四聖諦若得四諦始得四諦阿那含學耶答曰如是頗作是說諸先以世俗道得諸結使滅盡得到彼岸而取果證得阿那含果此是學耶
【답】 그렇지 않다. 마땅히 먼저 세속도로써 모든 결사가 다하여 없어져서 피안에 이르러 과의 증득을 취하는 것이 아나함과를 얻는 것으로, 마땅히 이러한 것을 바로 학이라고 한다면 선행하는 것 역시 바로 학이 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 아나함과를 얻지 못하고 아직 얻지 못한 그때도 이와 같이 학이라고 하는 것, 이것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만약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아라한과(阿羅漢果)의 증득을 향하여 모든 결이 다하여 없어져서 학이 아라한을 획득할 경우 무학이 되는 것인가?
024_0705_b_13L答曰非也若當先以世俗道得諸結使滅得到彼岸而取果證得阿那含果當是學者先亦是學未得阿那含果未得彼時如是學此事不然頗作是向阿羅漢果證諸結盡學得阿羅漢無學耶
【답】 그렇다.
만약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아라한과의 증득을 향하여 모든 결이 다하여 없어져서 학이 아라한과를 획득할 때, 그러한 것이 바로 무학이 되는 것인가?
【답】 그렇지 않다. 만약 아라한과의 증득을 향하여 모든 결이 다하여 없어져서 학이 아라한과를 획득하며, 이것이 바로 무학이라고 한다면 본래의 것도 무학일 것이다. 아직 아라한을 획득하지 못하고, 아직 획득하지 못한 그때를 이와 같이 무학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만약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아라한으로서 결(結)을 다한 무학이 아라한을 상실할 때 학이 되는 것인가?
024_0705_b_19L答曰如是頗作是說向阿羅漢果證諸結盡學得阿羅漢果是無學耶答曰不也若當向阿羅漢果證結盡學得阿羅漢是無學者是無學未得阿羅漢不得彼時如是無學此事不然頗作是說阿羅漢結盡無學失阿羅漢學耶
024_0705_c_02L【답】 그렇다.
만약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아라한으로서 모든 결을 다한 무학이 아라한과를 상실하면 그것이 바로 학인가?
【답】 그렇지 않다. 만약 아라한으로서 결을 다한 무학이, 아라한을 상실하여 획득한 것을 바로 학이라고 할 것 같으면, 본래의 것도 바로 학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직 아라한을 상실하지 않았으며, 획득하지 못한 그때를 이같이 학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어째서인가 니원은 비학비무학으로서 학도 존재하지 않으며 무학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024_0705_b_25L答曰如是作是說阿羅漢諸結盡無學失阿羅彼是學耶答曰不也若當阿羅漢結盡無學失阿羅漢當是學者本亦是學未失阿羅漢不得彼時如是學此事不然何以故泥洹非學非無學不有學不有無學
만약 니원이 비학비무학이면서 학도 있고 무학도 있다고 한다면 이 두 가지 법은 법을 혼란시킬 것이다. 결정된 법이 아니면 허물어지게 될 것이며, 또한 항상 있는 법[住法]도 알 수 없게 될 것이다. 세존께서도 “니원은 비학비무학으로서, 학도 있고 무학도 있다”라고는 말씀하지 않았으며, 다만 니원은 학도 아니고 무학도 아니라고 하셨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언제든지 모든 곳에 있으며 부패하지 않고 변화하지도 않는 법인 니원은 비학비무학인 것이다.
024_0705_c_08L若當泥洹非學非無學有學學有無學此二種法亂法不定法則有壞法亦不可知住法世尊亦不說泥洹非學非無學有學學有無學但泥洹不有學不有無學是故常一切時一切住不腐敗無變易法泥洹非學非無學
또한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그의 무학은 계신(戒身)ㆍ정신(定身)ㆍ혜신(慧身)ㆍ해탈신(解脫身)과 무학의 해탈지견신(解脫知見身)을 성취하였다”고 하셨는데, 무엇을 가리켜 무학의 계신ㆍ정신ㆍ혜신ㆍ해탈신이라고 하는가? 무엇을 무학의 해탈지견신이라고 하는가?16)
무학의 계신이란 무엇인가?
024_0705_c_14L又世尊言無學成就戒身定身慧身解脫身學解脫知見身彼云何無學戒身慧身解脫身云何無學解脫知見云何無學戒身
【답】 무학의 신호(身護)ㆍ구호(口護)ㆍ명청정(命淸淨)[팔등(八等)의 하나]이니, 이것을 무학의 계신이라고 한다.
무학의 정신(定身)이란 무엇인가?
【답】 무학의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 이것을 무학의 정신이라고 한다.
무학의 혜신이란 무엇인가?
024_0705_c_18L答曰無學身護口護命淸淨八等之一是謂無學戒身云何無學定身答曰無學空無想無願是謂無學定身云何無學慧身
【답】 무학의 사유와 상응하고 택법을 소연으로 하는 택법관과 여러 관(觀)에 대한 분별, 이것을 무학의 혜신이라고 한다.
무학의 해탈신이란 무엇인가?
【답】 무학의 사유와 상응하는 마음의 해탈ㆍ과거의 해탈ㆍ미래의 해탈, 이것을 무학의 해탈신이라고 한다.
무학의 해탈지견신이란 무엇인가?
024_0705_c_21L答曰無學思惟相應緣擇法擇觀種種觀分別此謂無學慧身云何無學解脫身無學思惟相應意解脫已解脫當解脫此謂無學解脫身云何無學解脫知見身
024_0706_a_02L【답】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이다.
그리고 무학의 고지(苦智)와 습지(習智)는 무학의 혜신이며, 무학의 진지(盡智:신역 滅智)와 도지(道智)는 무학의 해탈지견신이다. 또한 무학의 고지ㆍ습지ㆍ도지는 무학의 혜신이며, 무학의 진지는 무학의 해탈지견신이다.
또한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의 구경일 뿐 여러 구경이 아니다”고 하셨는데, 구경이란 어떠한 법을 가리키는가?
024_0706_a_02L答曰盡智無生智復次無學苦智習智無學慧身無學盡智道智無學解脫知見身復次無學苦智習智道智無學慧身無學盡智無學解脫知見身又世尊言一究竟非衆究究竟名何等法
【답】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혹은 도(道)가 구경이며, 혹은 니원이 구경이다”고 하셨다.
무엇을 도[의 구경]이라고 하는가?
【답】 다음에서 설명하는 것과 같다.
024_0706_a_07L答曰世尊說或道究竟或泥洹究竟云何爲道答曰所說

만약 도를 알지 못한다면
총명하고 교만한 자도
구경에 이르지 못하며
깨닫지도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한다.
024_0706_a_09L如不知道
一聰明慢
未到究竟
未道御死

여기에서 무엇을 일컬어 니원[의 구경]이라고 하는가?
【답】 다음에서 설명하는 것과 같다.
024_0706_a_11L此道云何泥洹荅曰如所說

구경에 도달한 이는 두려워하지 않고
얽매임이 없으며 후회함도 역시 없다
이미 존재의 가시[有刺]로부터 벗어났으니
이 몸을 마지막[後邊]으로 삼는다.
024_0706_a_12L究竟到不畏
無縛亦無悔
已脫於有刺
此身是後邊

이것이 최고의 필경(畢竟)으로서
식적(息跡)에 있어 이 보다 더 높은 것이 없으며
일체의 상을 다한 것이니
연적(練迹)에 있어 이보다 더 높은 것이 없다.
024_0706_a_14L是謂最畢竟
息迹無有上
盡一切之相
練迹無有上

어느 때 수목건련(數目犍連) 바라문이 부처님의 처소에 와서 이러한 사실을 여쭈었다. “세존 고타마의 모든 사문제자는 이와 같은 가르침과 훈계로써 마침내 구경의 무여니원을 얻었습니까?” 세존께서 깨우쳐주시기를, “목건련이여, 이것은 반드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어서 이러한 니원을 혹은 얻기도 하고, 얻지 못하기도 한다”고 하셨다.
또한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외도나 다른 학문을 공부하는 무리들은 실제로 모든 수[諸受]를 끊음이 있지만 현법 가운데서 모든 수를 끊었다고 시설하지 못한다. 욕수(欲受)ㆍ계수(戒受)ㆍ견수(見受)를 끊었다고는 시설하여도 아수(我受)는 아니다”고 하였다.17)
024_0706_a_15L如彼數目犍連婆羅門往至佛所問如此事一切世尊瞿曇沙門弟子是教如是訓畢究竟無餘泥洹世尊告曰此目犍連不定或得或不得此泥洹又世尊言外道異學實斷諸受於現法中不施設斷諸受施設斷欲戒受見受非我受
024_0706_b_02L이에 대해 어떤 이는 말하기를, “불ㆍ세존께서 작은 법[小法]을 설명하신 것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와 같이 말하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부처는 거짓으로 법을 설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주장하기를, “조금 소멸함을 나타낸 것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이 말하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천인(天人)에게도 역시 아수에 대해서 조그마한 소멸의 증득은 있기 때문이다.
024_0706_a_22L彼有如是說世尊說少法彼不得如是說何以故佛不妄說法復有作是說以現少滅彼不得如是說何以故若見天人於我受中少滅證
그런데 불ㆍ세존께서 모든 이를 위해 널리 법을 설하심에 다함이 없으셨으니, 하늘[天]ㆍ사람에 이르기까지 받들어 행하였다. 그때에 이학(異學)의 범지(梵志)는 부처님께서 설명하신 지(持)ㆍ입(入)ㆍ음(陰)ㆍ개(蓋)ㆍ의지(意止)ㆍ각의(覺意)를 받아들이되 온전히 갖추기도 하고 온전히 갖추지 못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욕수의 명칭을 인정하는[受] 이학의 어떤 범지는 “나도 욕수를 끊는 것에 대해 시설하겠다”고 말하자, 여러 계수ㆍ견수의 명칭을 아는 자는 “나도 계수 견수를 끊는 것에 대해 시설하겠다”고 하였다.
024_0706_b_03L然佛世尊廣爲說法無有極乃至天人奉行於彼有異學梵志受佛語名持入意止覺意具足不具足於彼有異學梵志受欲受名者彼如是說我施設斷欲受戒受見受名者彼如是說我施設斷戒受見受
많은 비구들이 식사 후 운집하여 강당에 들어갈 때 다른 학문을 공부하는 무리들이 많은 범지들과 함께 와서는 다음과 같이 물었다.
“사문 구담(舊曇)은 제자를 위하여 법을 설하기를 ‘마음을 가려[覆] 지혜의 힘을 약하게 하는 5개(蓋)를 끊고, 오로지 4의지(意止)에 전념하고 7각의(覺意)를 닦으라’고 하고, 우리들도 역시 제자를 위하여 말하기를 ‘마음을 가려 지혜의 힘을 약하게 하는 5개를 끊고 오로지 사의지에 전념하고, 칠각지를 닦으라’고 하는데, 우리들과 저 사문 구담 사이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습니까?”
024_0706_b_09L如衆多比丘中食後雲集昇講堂有異學衆多梵志往至如是沙門瞿曇爲弟子如是說法於是斷五蓋覆心慧力羸專四意止修七覺意我等亦當爲弟子如是說法是斷五蓋覆心慧力羸專四意止七覺意此我等與彼沙門瞿曇有何等異
이 바라문은 개(蓋)도 알지 못하는데, 하물며 의지나 각의를 알겠는가?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모든 이를 위해 널리 법을 설하심에 다함이 없으시니, 하늘ㆍ사람에 이르기까지 받들어 행하였다.
그때에 어떤 이학 범지는 부처님께서 설명하신 지ㆍ입ㆍ음ㆍ개ㆍ의지ㆍ각의를 받아들이되 온전히 갖추기도 하고 온전히 갖추지 못하기도 한다. 그리고 거기서 이학의 범지들로서 욕수의 명칭을 인정하는 이는, “나도 욕수를 끊는 것에 대해 시설한다”며 이처럼 말하기도 하고, 그리고 여러 계수ㆍ견수의 명칭을 인정하는 이도, “나도 계수ㆍ견수를 끊는 것에 대해 시설한다”며 이처럼 말하는 것이다.
024_0706_b_16L此婆羅門不識蓋況當識意止覺意然佛世尊廣爲說法無有極至天人奉行於彼有異學梵志受佛語名持入意止覺意具足不具於彼有異學梵志受欲受名者如是說我施設斷欲受諸戒受受名者彼如是說我施設斷戒受
024_0706_c_02L이것은 단제(檀提) 바라문의 경우와 같다. 즉 그의 몸에 심한 종기가 생겨나 뱀처럼 되었으니, 무상하고 실로 괴로운 일이며, 실로 공(空)이며, 실로 무아임에도 그는 두 손으로 몸을 문지르며 말하기를, “고타마시여, 이것은 병이 아니며, 이것은 니원입니다”고 하였다. 이 단제범지는 병 아닌 것도 알지 못하는데, 하물며 니원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인가? 그럼에도 불ㆍ세존께서 모든 이를 위해 널리 설법하셨으며, 천ㆍ인에 이르기까지 이를 받들어 행하였다.
024_0706_b_23L如彼檀提婆羅門身生癰疽如蛇無常實苦實空實無我復以二手摩抆身言此瞿曇不病此泥洹此檀提梵志不識不病況當識見泥洹然佛世尊廣爲說法乃至天人奉行
그들 이학의 범지는 부처님께서 설명하신 지ㆍ입ㆍ음ㆍ개ㆍ의지ㆍ각의를 듣고는 온전히 갖추기도 하고 혹은 온전히 갖추지 못하였다. 여기에서 이학의 범지로서 욕수의 명칭을 인정하는 자는 말하기를 “나도 욕수를 끊는 것에 대해 시설한다”고 하며, 그리고 여러 계수ㆍ견수의 명칭을 인정하는 자도 “나도 계수ㆍ견수를 끊는 것에 대해 시설한다”며 이처럼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슨 뜻인가? 어떠한 이유에서 외도 이학은 [현법 중에서] 아수를 끊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인가?
024_0706_c_04L彼異學梵志聞佛語名持入意止覺意是具足不具足者於彼有異學梵志受欲受名者彼如是說我施設斷欲諸戒受見受名者彼如是說我施設斷我施設斷戒受見受此義云何以何等故外道異學不施設斷我受
【답】 외도와 이학은 기나긴 밤 자기 몸을 집착하고 중생에 집작하고, 사람에 집착하고, 수명에 집착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경우에 그 다문자(多聞者)는 ‘나는 아수를 끊는 것에 대해 시설한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두 가지 지(智)가 있다. 지지(知智:智遍知)와 진지(盡智:斷遍知)이다. 그 무엇을 지지라고 하며, 무엇을 진지라고 하는가?
지지란 무엇인가?
024_0706_c_10L答曰外道異學長夜著己身著衆生著人著壽命彼多聞者非如是時說我施設斷我受有二智知智盡智云何知智云何盡智云何知智
【답】 모든 지(智)ㆍ견(見)ㆍ명(明)ㆍ각(覺)ㆍ수행(修行), 이것을 지지라고 한다.
진지란 무엇인가?
【답】 음(婬)ㆍ노(怒)ㆍ치(癡)가 다하여 남음이 없는 것, 일체의 결(結)이 다하여 남음이 없는 것, 이것을 진지라고 한다.
세존께서 혹은 지지를 말씀하시고 혹은 니원을 말씀하셨는데, 무엇이 지지인가?
024_0706_c_14L答曰諸智見明覺修行是謂知智云何盡答曰婬怒癡盡無餘一切結盡無是謂盡智世尊或說知智或說泥云何知智
【답】 “이 현명한 젊은이는 일체 세간에 대해 충분히 깨달아서, 애(愛)가 괴로움을 낳는 것임을 이미 알고 있으므로 총명하다. 만약 행해야 할 것이면 바로 설명하고, 행할 것이 아니면 설명하지 않는다. 노래를 만들지 않았는데, 만들어지지 않은 노래를 부르는 자는 이미 알고 있으므로 총명하다”라고 설명한 것과 같으니, 이것을 지지라고 한다.
무엇을 니원이라고 하는가?
024_0706_c_18L答曰如所說此賢年少一切世能解若此愛生苦能已智聰明若用行則說不用則不說不作歌誦者能已智聰明此曰知智云何泥洹
【답】 “마땅히 지(智)ㆍ지(知)ㆍ법(法)ㆍ이미 안 자[已知人]를 설명해야 한다”고 말씀한 것과 같다.
무엇이 지(智)인가?
【답】 음ㆍ노ㆍ치가 다하여 남음이 없는 것, 일체의 결이 다하여 남음이 없는 것, 이것을 지라고 한다.
무엇이 지법(知法)인가?
【답】 오성음(五盛陰)이 바로 그것이다.
무엇이 ‘이미 안 자’인가?
024_0706_c_22L答曰如所說當說智知法已知云何智答曰婬怒癡盡無餘一切結盡無餘是曰智也云何知法答曰五盛陰是云何已知人
024_0707_a_02L【답】 누(漏)가 다한 아라한으로, 이것이 니원이다.
‘부처님께 귀의하여 나아간다[歸趣]’고 함은 모두 어디로 귀의하여 나아간다 함인가?18)
【답】 모든 법으로서 실유이고 수상(數想)이 있어, 시설(施設)하고 설어(說語)하고 회전함을 부처라 하고, 그의 깨달음에 귀의하고 나아가는 무학의 법이다.
법에 귀의하여 나아간다 함은 어디에 귀의하여 나아간다 함인가?
024_0707_a_02L答曰漏盡阿羅漢是此泥洹諸歸佛趣彼何歸趣答曰諸法實有數想施設說語迴轉佛者彼覺行歸趣無學法歸法趣者彼何歸趣
【답】 애진(愛盡)ㆍ무음(無婬)ㆍ멸(滅)을 니원이라고 한다. 그것은 여기에 귀의하고 나아감이다.
모든 승(僧)에게 귀의하고 나아간다고 함은 어디에 귀의하여 나아간다 함인가?
【답】 모든 법으로서 실유이고 수상이 있어, 시설하고 설어하고 회전함을 승이라 하고, 그러한 승이 행하고 귀의하고 나아가는 학법과 무학법이다.
이상 애공경품(愛恭敬品) 제4를 마친다.
[범본 373수로, 장 10자]
024_0707_a_06L答曰愛盡無婬滅說泥洹彼此歸趣諸歸僧趣彼何歸趣諸法實有數想施設說語迴轉者彼僧行歸趣學法無學法愛恭敬品第四竟梵本三百七十三首盧長十字

5) 무참괴(無慙愧)발거
024_0707_a_10L阿毘曇雜犍度無慚愧跋渠第五
무엇을 무참(無慙)이라고 하는가? 무엇을 무괴(無愧)라고 하는가? 무참과 무괴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무엇을 참(慙)이라고 하는가? 무엇을 괴(愧)라고 하는가? 참과 괴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무엇을 증(增) 불선근이라고 하는가? 무엇을 미(微) 불선근이라고 하는가?
024_0707_a_11L云何無慚云何無愧無慚無愧有何差別云何慚云何愧愧有何差別云何增不善根云何微
무엇을 욕계 증선근이라고 하는가? 무엇을 미선근이라고 하는가?
만약 마음이 과거의 것이라면 일체의 그 마음은 변이한 것인가? 만약 마음이 변이한 것이라면 일체의 그 마음은 과거의 것인가? 만약 마음이 물들어 더러운 것이라면 일체의 그 마음은 변이한 것인가? 만약 마음이 변이한 것이라면 일체의 그 마음은 물들어 더러운 것인가?
일체의 조(調)는 모두 다 희(戱)와 상응하는 것인가? 일체의 희는 모두 다 조와 상응하는 것인가?
024_0707_a_14L云何欲界增善根云何微若心過去一切彼心變易耶設心變易一切彼心過去耶心染污一切彼心變易耶設心變易一切彼心染污耶一切調盡與戲相應耶一切戲盡與調相應耶
일체의 수(睡)는 모두 다 면(眠)과 상응하는 것인가? 일체의 면은 모두 다 수와 상응하는 것인가?
면(眠)은 마땅히 선하다고 해야 할 것인가? 불선, 혹은 무기(無記)19)라고 해야 할 것인가?
잠잘 때에는 복(福)이 돈다(廻)고 해야 할 것인가? 비복(非福) 혹은 비복비불복(非福非不福)이 돈다고 해야 할 것인가?
꿈[夢]이란 어떠한 법을 말하는 것인가?
5개(蓋)가 모든 개[諸蓋]를 포섭하는가, 모든 개가 5개를 포섭하는가? 모든 개라고 할 때, 그것은 바로 부(覆)인가? 만약 부라면 그것은 바로 개인가?
024_0707_a_19L一切睡盡與眠相應耶一切眠盡與睡相應眠當言善耶不善耶無記耶眠時當言福迴耶非福迴耶非福非不福迴夢名何等法五蓋攝諸蓋諸蓋攝五蓋諸蓋彼是覆耶設覆彼是蓋耶
024_0707_b_02L욕계에 매인 모든 무명사(無明使), 그것은 일체가 불선인가? 만약 모두 불선이라면 그것은 일체가 욕계에 매인 무명사인가? 색ㆍ무색계의 모든 무명사, 그것은 일체가 무기인가? 만약 모두 무기라면 그것은 일체가 색ㆍ무색계의 무명사인가?
온갖 고제(苦諦)ㆍ습제소단(習諦所斷)의 무명사, 그것은 일체가 일체변(一切遍)인가? 만약 모두 일체변이라면 그것은 일체가 고제ㆍ습제소단의 무명사인가? 온갖 진제(盡諦)ㆍ도제소단(道諦所斷)의 무명사, 그것은 비일체변(非一切遍)인가? 만약 모두 비일체변이라면 그것은 일체가 진제ㆍ도제소단의 무명사인가?
024_0707_a_24L諸欲界繫無明使一切彼不善耶諸不善者一切彼欲界繫無明使耶諸色無色界無明使者一切彼無記設諸無記者一切彼色無色界無明使耶諸苦諦習諦所斷無明使切彼一切遍耶設諸一切遍一切彼苦諦習諦所斷無明使耶諸盡諦道諦所斷無明使一切彼非一切遍耶設諸非一切遍一切彼盡諦道諦所斷無明使耶
무엇을 불공무명사(不共無明使)라고 하는가?
무엇을 불공조전(不共調纏)이라고 하는가?
이 장에서의 내용을 모두 연설하겠다.
무엇을 무참(無慙)이라고 하는가? 무엇을 무괴(無愧)라고 하는가?
무참이란 무엇인가?
024_0707_b_11L云何不共無明使云何不共調纏此章義願具演說云何無慚云何無愧云何無慚
【답】 부끄러워할 만한 것[可慙]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꺼려야할 만한 것을 꺼리지 않고, 또한 타인을 꺼리지 않으면서 공경하지도 않고 기꺼이 공경하지도 않으며 잘 왕래하지 않는 것, 이것을 무참이라고 한다.
무괴란 무엇인가?
【답】 만약 부끄러워하지 않고 제대로 부끄러워하지 않고 타인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수치스러워할 만한 일[可羞]을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으며, 타인에 대해 수치스러워하지 않으며, 나쁜 짓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쁜 짓을 하면서도 두려움을 보지 못한다면, 이것을 무괴라고 한다.
무참과 무괴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024_0707_b_13L荅曰可慚不慚可避不避亦不避他不恭不善恭敬不善往來是謂無慚何無愧答曰若不愧不善愧不愧他可羞不羞不羞他不畏惡事惡事不見畏是謂無愧無慚無愧有何差別
【답】 잘 왕래하지 못하는 것이 무참이며, 나쁜 일에서 두려움을 보지 못하는 것이 무괴이다. 무참과 무괴란 이런 차별을 말한다.
무엇을 참(慙)이라고 하는가? 무엇을 괴(愧)라고 하는가?
참이란 무엇인가?
【답】 부끄러워할 만한 것을 부끄러워하고, 꺼릴 만한 것을 꺼리며, 또한 남에게서 물러날 줄을 알고 공경하며, 공경하기를 즐기고 잘 왕래하는 것, 이것을 참이라고 한다.
괴란 무엇인가?
024_0707_b_18L答曰不善往來無慚惡事不見畏無無慚無愧是謂差別云何慚云何云何慚答曰可慚慚可避避可避他恭敬善恭敬善往來是謂爲慚云何爲愧
024_0707_c_02L【답】 부끄러워할 만한 일[可愧]을 부끄러워하고, 수치스러워할 만한 일[可羞]을 수치스럽게 여기며, 타인에 대해 수치스러워하고, 나쁜 짓을 두려워하고, 나쁜 짓을 보고 두려워하는 것, 이것을 괴라고 한다.
참과 괴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답】 잘 왕래하는 것이 참이며, 나쁜 짓이나 그것을 보고는 두려움을 보는 것이 괴이다. 참과 괴란 이런 차별을 말한다.
무엇을 증(增)불선근이라고 하는가? 무엇을 미(微)라고 하는가?
증(增)이란 무엇인가?
024_0707_b_23L答曰可愧愧可羞羞可羞他事畏見惡事畏是謂愧愧有何差答曰善往來慚惡事見惡事怖愧慚愧是謂差別云何增不善根云何云何增
【답】 모든 불선근이 선근을 끊었을 경우, 욕계의 음(婬)을 끊는 최초의 멸하는 시간[滅時]을 증이라고 한다.
미(微)란 무엇인가?
【답】 욕(欲)을 건너 음이 없는 최후의 멸에 있어, 이미 모든 욕을 멸하고 음이 없음을 획득하는 것을 미라고 한다.
무엇을 욕계에 매인 증선근이라고 하고, 무엇을 [욕계에 매인] 미[선근]이라고 하는가?
증[선근]이란 무엇인가?
024_0707_c_04L答曰諸不善根斷善根者斷欲界婬此最初滅時是謂爲增何微答曰度欲無婬最後滅者諸已滅欲得無婬是謂微云何欲界繫增善云何微云何增
【답】 보살이 정법으로 차제를 뛰어넘어 증득을 취할 때 수행하면서 얻는 등지(等智)와 여래가 진지를 획득할 때 음ㆍ노ㆍ치를 다하면서 얻는 선근을 증[선근]이라고 한다.
미[선근]이란 무엇인가?
【답】 선근이 끊어질 때의 최후의 멸에 있어 이미 모든 것이 멸하여 단선근(斷善根)이라고 헤아리게 되는 것을 미[선근]이라고 한다.
모든 마음이 과거의 것이라면 그 마음은 일체가 변이한 것인가?
024_0707_c_08L答曰菩薩於正法越次取證修行得等智若如來得盡智於婬怒癡盡得善根是謂增云何微答曰斷善根時諸最後滅諸已滅得數斷善根是謂微諸心過一切彼心變易耶
【답】 그렇다. 모든 마음이 과거의 것이라면 그 마음은 일체가 변이한 것이다.
마음이 변이한 것이면서 그 마음에 과거 아닌 것이 있는가?
【답】 있다. 미래와 현재의 욕(欲)ㆍ진애와 상응하는 마음이다. 세존께서도 역시 설명하시기를, “만약 도적이 와서 큰 톱으로 신체를 절단한다면, 그가 톱으로 몸을 끊으려 할 때에 마음에 변이가 있게 된다”고 하셨고, 또한 다시 설하기를 “만약 비구들이여, 마음을 변이시키면”이라고 하셨던 것이다.
모든 마음이 물들어 더러운 것이라면 그 마음은 일체가 변이한 것인가?
024_0707_c_13L答曰如是諸心過去一切彼心變易頗有心變易心不過去耶答曰未來現在欲瞋恚相應心世尊亦說若賊來俱鋸刃割截身體彼當俱鋸刃割截身體時心有變易亦復說若比丘變易心也諸心染污一切彼心變易耶
【답】 그렇다. 모든 마음이 물들어 더러운 것이라면 그 마음은 일체가 변이한 것이다.
마음이 변이한 것이면서 그 마음이 물들어 더럽지 않은 일이 있는가?
【답】 있다. 과거의 욕(欲)과 상응하지 않는 마음과 미래 현재의 진애와 상응하는 마음이다. 그래서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약 도적이 와서 큰 톱으로 신체를 절단한다면, 그가 톱으로 몸을 끊으려 할 때에 마음에 변이가 있게 된다”고 하셨던 것이다.
조(調:掉擧)는 일체가 희(戱:惡作)와 상응하는 것인가?
024_0707_c_19L答曰諸心染污一切彼心變易也頗有心變易彼心不染污耶答曰過去欲不相應心未來現在瞋恚相應心尊亦說若賊來俱鋸刃割截身體當俱鋸刃割截身體時心有變易切調與戲相應耶
024_0708_a_02L【답】 어떤 조는 희와 상응하지 않는다.
‘조이면서 희와 상응하지 않는 것’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답】 희(戱)함은 없지만 쉼[息]없고 그침[休]없는 흔들림[調]이 점차 마음을 흔들어 번잡하게 하는 것, 이것을 ‘조이면서 희와 상응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희이면서 조와 상응하지 않는 것’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답】 물들지 않은 마음으로 악회(惡悔)를 짓는 희, 이것을 ‘희이면서 조와 상응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조와 희가 상응한다’고 함은 무엇을 말하는가?
024_0708_a_02L答曰或調不與戲相應云何調不與戲相應答曰不戲不息不休調稍稍調心熾盛是謂調不與戲相應云何戲不與調相應答曰染污心若所作惡悔戲是謂戲不調相應云何調與戲相應
【답】 물든 마음으로 악희를 짓는 희, 이것을 ‘희와 조가 상응하는 것’이라고 한다.
‘조와도 상응하지 않고, 희와도 상응하지 않는 것’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답】 위에서 말한 것을 제외한 것이다.
일체의 수(睡:惛沈)와 면(眠:睡眠)은 상응하는가?
【답】 어떤 수는 면과 상응하지 않는다.
‘수이면서 면과 상응하지 않는 것’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024_0708_a_07L答曰染污心所作惡悔戲是謂調戲相應云何非調非戲相應答曰除上爾所事一切睡眠相應耶答曰或睡不眠相應云何睡不眠相應
【답】 아직 잠들지 않았을 때에는 몸도 유연하지 않고 마음도 유연하지 않아서, 몸도 무겁고 마음도 무거우며, 몸도 어둡고 마음도 어두우며, 몸도 어지럽고 마음도 어지러우며, 몸도 졸리고 마음도 졸려서 졸림에 얽매이는 것, 이것을 ‘수이면서 면과 상응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면이면서 수와 상응하지 않는 것’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답】 물들지 않은 마음으로서 잠자며 꿈꾸는 것, 이것을 ‘면이면서 수와 상응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수와 면이 상응한다’고 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024_0708_a_11L答曰未眠時身不軟心不軟身重心重身瞪瞢心瞪瞢身憒心憒身睡心睡睡所纏是謂睡不眠相云何眠不睡相應答曰不染污心眠夢是謂眠不睡相應云何睡眠相
【답】 물든 마음으로서 잠자며 꿈꾸는 것, 이것을 ‘수와 면이 상응하는 것’이라고 한다.
‘수와도 상응하지 않고, 면과도 상응하지 않는 것’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답】 위에서 말한 것을 제외한 것이다.
면(眠)은 마땅히 선하다고 해야 할 것인가, 불선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혹은 마땅히 무기라고 해야 할 것인가?20)
024_0708_a_16L答曰染污心眠夢是謂睡眠相應何不睡不眠答曰除上爾所事眠當言善耶不善耶當言無記耶
【답】 면은 혹은 선이고, 혹은 불선이며, 혹은 무기이다.
무엇을 선하다고 하는가?
【답】 선한 마음으로 잠자며 꿈꾸는 것, 이것을 선한 것이라고 한다.
무엇을 불선이라고 하는가?
【답】 선하지 않은 마음으로 잠자며 꿈꾸는 것, 이것을 불선이라고 한다.
무엇을 무기라고 하는가?
【답】 위에서 말한 것을 제외한 것이다.
잠잘 때에는 지어진 복(福)이 돈다[廻]고 해야 할 것인가, 지어진 불복(不福)이 돈다고 해야 할 것인가? 혹은 지어진 복과 불복이 돈다고 해야 할 것인가?21)
024_0708_a_18L答曰眠或善或不善或無記云何爲善答曰善心眠夢是謂善云何不善答曰不善心眠夢是謂不善云何無記答曰除上爾所事眠時所作福當言迴耶所作不福當言迴耶所作福所作不福當言迴耶
024_0708_b_02L【답】 잠잘 때에는 혹은 지어진 복이 돈다고 해야 할 것이며, 혹은 지어진 불복이 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지어진 복과 불복이 [함께] 돈다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잠잘 때 지어진 복이 돈다고 맘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답】 이를테면 공속에서 남에게 베풀고, 복을 짓고, 계를 지니고, 재계하는 날[齋日]을 지키는 것, 잠자면서 그 밖의 복심(福心)이 도는 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치 선심의 잠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것을 ‘잠잘 때 지어진 복이 돈다’고 하는 것이다.
잠잘 때 지어진 불복이 돈다고 함은 무엇을 말함인가?
024_0708_a_24L答曰眠時或所作福當言迴或所作不福當言迴或所作福所作不福不當言迴云何眠時所作福當言迴答曰如夢中施與作福持戒守如眠時餘福心迴何以故如善心如是眠時所作福當言迴云何眠時所作不福當言迴耶
【답】 이를테면 꿈속에서 살생하고, 훔치며, 사음하며, 거짓말하고 음주하는 것, 잠자면서 그 밖의 불복심이 도는 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치 불선심의 잠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것을 ‘잠잘 때 지어진 불복이 돈다’고 말하는 것이다.
잠잘 때 지어진 복과 불복이 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함은 무엇을 말하는가?
【답】 이를테면 잠잘 때 비복심과 비무복심이 돌지 않는 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치 무기심의 잠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것을 ‘잠잘 때 지어진 복과 비복이 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꿈[夢]이란 어떠한 법을 가리키는가?
024_0708_b_07L答曰如夢中殺生行邪婬如言妄語飮酒如眠時餘不福心迴何以故如不善心眠如是眠時所作不福當言迴也云何眠時所作福所作不福不當言迴耶答曰如眠時非福心非無福心不迴以故如無記心眠如是眠時所作福所作非福不當言迴也夢名何等法
【답】 잠잘 때에 모든 소연에 모든 심ㆍ심념법이 도는 것[廻:신역 展轉]이다. 그리고 깨어나서는 바로 기억하는 것이다. 여차여차한 것을 나는 공에서 보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5개(蓋)22)가 모든 개를 포섭 하는가, 모든 개가 5개를 포섭하는가?
【답】 모든 개가 5개를 포섭하며, 5개가 모든 개를 포섭하지는 않는다.
무엇 때문에 포섭하지 않는가?
024_0708_b_14L答曰眠時諸緣心心念法迴覺已便憶如說如是如是我見夢五蓋攝諸諸蓋攝五蓋答曰諸蓋攝五蓋五蓋攝諸蓋不攝何等
【답】 무명개(無明蓋)가 있기 때문이다. 세존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무명에 가리우고[覆] 애결(愛結)에 얽매이니[纏], 이와 같은 어리석음[愚]이 이 몸을 획득한다. 총명 역시 이와 같다”고 하셨던 것이다.
만약 개(蓋)라고 하면, 그것은 바로 부(覆)인가?
【답】 혹은 개이면서 부 아닌 것도 있다.
‘개이면서 그것은 부가 아니다’고 함은 무엇을 말하는가?
【답】 과거ㆍ미래의 5개이다. 이것을 ‘개이면서 부 아닌 것’이라고 한다.
‘부이면서 그것은 개가 아니다’고 함은 무엇을 말하는가?
024_0708_b_18L答曰無明蓋世尊亦說無明覆愛結繫如是愚得此身聰明亦如是若蓋彼覆耶或蓋彼不覆云何蓋彼不覆答曰過去未來五蓋是謂蓋彼非覆云何彼非蓋
024_0708_c_02L【답】 5개를 제외한 모든 결사(結使)가 눈앞에 드러나는 것, 이것을 ‘부이면서 개 아닌 것’이라고 한다.
‘개이면서 그것은 부이다’고 함은 무엇을 말하는가?
【답】 5개가 전전하여 눈앞에 드러나는 것, 이것을 ‘개이면서 부이다’고 말하는 것이다.
‘개도 아니면서 그것은 부도 아니다’고 함은 무엇을 말하는가?
【답】 위에서 말한 것을 제외한 것이다.
욕계에 매인 모든 무명사(無明使:隨眼), 그것은 일체가 불선인가?
024_0708_b_23L答曰除五蓋諸結使現在是謂覆彼非蓋也云何蓋彼覆五蓋展轉現在前是謂蓋彼覆何非蓋彼非覆答曰除上爾所事欲界繫無明使一切彼不善乎
【답】 그러하다. 모두 불선이라면 그것은 일체가 욕계에 매인 무명사이다.
욕계에 매인 무명사로서 그것이 불선 아닌 것이 있는가?
【답】 있다. 욕계의 신견(身見)과 변견(邊見)에 상응하는 무명사이다.
색ㆍ무색계의 모든 무명사, 그것은 일체가 무기인가?
【답】 그러하다. 색ㆍ무색계의 모든 무명사, 그것은 일체가 무기이다.
무기로서 그러한 색ㆍ무색계의 무명사가 아닌 것이 있는가?
024_0708_c_04L荅曰如是諸不善一切彼欲界繫無明使頗有欲界繫無明使非彼不善乎欲界身見邊見相應無明使色無色界無明使一切彼無記耶如是諸色無色界無明使一切彼無記也頗有無記非彼色無色界無明使耶
【답】 있다. 욕계의 신견과 변견에 상응하는 무명사이다.
모든 고제(苦諦)ㆍ습제소단(習諦所斷)의 무명사, 그것은 일체변(一切遍)인가?
【답】 그러하다. 모든 일체변, 그것은 일체가 고제ㆍ습제소단의 무명사이다.
고제ㆍ습제소단의 무명사로서 그것이 일체변 아닌 것이 있는가?
【답】 있다. 고제ㆍ습제소단으로서 일체변이 아닌 것과 상응하는 무명사이다.
모든 진제(盡諦)ㆍ도제소단(道諦所斷)의 무명사, 그것은 비일체변인가?
024_0708_c_11L答曰欲界身見邊見相應無明使諸苦諦習諦所斷無明使一切遍耶答曰如是諸一切遍一切彼苦諦習諦所斷無明使頗有苦諦習諦所斷無明使彼非一切遍耶答曰苦諦習諦所斷非一切遍相應無明使諸盡諦道諦所斷無明使一切不一切遍耶
【답】 그러하다. 모든 진제ㆍ도제소단의 무명사, 그것은 비일체변이다.
불일체변으로서 거기에 진제ㆍ도제소단의 무명사가 아닌 것이 있는가?
【답】 있다. 고제ㆍ습제소단의 불일체변과 상응하는 무명사이다.
무엇을 불공무명사(不共無明使)라고 하는가?
【답】 고(苦)를 인가[忍]하지 않고, 습ㆍ진ㆍ도를 인가하지 않는 것이다.
무엇을 불공의 조전(調纏)이라고 하는가?
【답】 불공의 조전이란 없다.
이상 무참괴(無慙愧) 발거 제5를 마친다.
[범본 220수로]
024_0708_c_18L答曰如是諸盡諦道諦所斷無明使非一切彼非一切遍耶頗不一切遍非彼盡諦道諦所斷無明使耶答曰苦諦習諦所斷不一切遍相應無明使云何不共無明使答曰苦不忍習盡道不忍云何不共調纏答曰無不共調纏無慚愧跋渠第五竟梵本二百二十首盧
阿毘曇八犍度論卷第二
  1. 25)전전(展轉)하여 상속(相續)하는 것을 말한다.
  2. 1)무명과 행, 수(受:신역 取)와 유(有)의 인과관계에 대하여 논하는 것이다.
  3. 2)무명보(無明報)란 유신견(有身見)과 변집견(邊執見)을 제외한 욕계 34수면과 그 상응 구유법이 초래하는 이숙(異熟)을 말한다.
  4. 3)현행의 고법지인(苦法智忍)을 말한다.
  5. 4)출입식(出入息)과 그 소의인 심신(心身)의 관계에 대하여 논하는 부분이다.
  6. 5)무색계 중생의 심(心)상속의 근거에 대하여 논하는 것이다.
  7. 6)득(得)ㆍ생(生)ㆍ노(老)ㆍ주(住)ㆍ무상(無常)을 말한다.
  8. 7)신역 무유애(無有愛). 생존의 멸무(滅無)를 욕망하는 망집을 말한다.
  9. 8)분별론자를 가리킨다.
  10. 9)유부의 입장을 말한다.
  11. 10)해탈심의 본성에 대하여 논하는 부분이다.
  12. 11)분별론자의 주장이다.
  13. 12)해탈심의 주체와 삼세의 관계에 대하여 논하는 것이다.
  14. 13)신역 제행(諸行). 곧 고(苦)와 집(集)을 가리킨다.
  15. 14)신근(身根)의 대상이 되는 촉입처(觸入處)의 구역을 말한다.
  16. 15)의락(意樂)이라고도 한다. 즉 목적의식을 말한다.
  17. 16)무학(無學)이 성취한 무루(無漏)의 5신(身:蘊)인 계(戒)ㆍ정(定)ㆍ혜(慧)ㆍ해탈(解脫)ㆍ해탈지견신(解脫知見身)에 대하여 논술하는 부분이다.
  18. 17)외도가 아수(我受:我語取)를 끊었다고 설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19. 18)삼귀취(三歸趣:三歸依)의 참뜻에 대하여 논하는 것이다.
  20. 19)범어로는 avyākṛta. 아직 선(善)이나 악(惡)이 발현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21. 20)면의 삼성(三性) 분별에 대하여 논하는 것이다.
  22. 21)잠자면서 꿈꿀 때의 복(福)ㆍ불복(不福)과 꿈의 자성에 대하여 논하는 것이다.
  23. 22)여기에서 5개(蓋)란 욕탐개(欲貪蓋)ㆍ진에게(瞋恚蓋)ㆍ혼침수면개(惛沈睡眠慨)ㆍ도거악작개(掉擧惡作蓋)ㆍ의개(疑蓋)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