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阿毘達磨俱舍論卷第二

ABC_IT_K0955_T_002
027_0461_b_01L아비달마구사론 제2권
027_0461_b_01L阿毘達磨俱舍論卷第二

존자 세친 지음
삼장법사 현장 한역
권오민 번역
027_0461_b_02L尊者世親造
三藏法師玄奘奉 詔譯

1. 분별계품 ②
027_0461_b_04L分別界品第一之二

다시 다음으로 앞에서 설한 18계 중에서 몇 가지가 유견(有見)이고, 몇 가지가 무견(無見)이며, 몇 가지가 유대(有對)이고, 몇 가지가 무대(無對)인가? 또한 몇 가지가 선(善)이고, 몇 가지가 불선이며, 몇 가지가 무기인가?1)
게송으로 말하겠다.
027_0461_b_05L復次於前所說十八界中幾有見無見幾有對幾無對幾善幾不善無記頌曰

이를테면 색 한 가지가 유견이고
열 가지 유색(有色)이 유대이며
이 중의 색과 성(聲)을 제외한 나머지 여덟 가지는
무기이고, 그 밖의 것은 세 가지(선ㆍ불선ㆍ무기)이다.
027_0461_b_08L一有見謂色
十有色有對
此除色聲八
無記餘三種

논하여 말하겠다. 18계 중에서 색계가 유견(有見)이니, 이러한 색과 저러한 색의 차별을 드러내어 나타낼[示現]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뜻에 준하여 그 밖의 것은 무견이라고 설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유견과 무견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027_0461_b_10L論曰十八界中色界有見以可示現此彼差別由此義准說餘無見如是已說有見無見
오로지 색온에 포섭되는 10계만이 유대(有對)인데, 여기서 ‘대’란 바로 장애[礙]의 뜻이다. 유대에는 다시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장애(障礙)와 경계(境界)와 소연(所緣)이 다르기 때문이다.
027_0461_b_13L唯色薀攝十界有對對是礙義此復三種障礙境界所緣異故
장애유대란 열 가지의 색계(즉 유색처)를 말하는데, 그 같은 색 자체는 다른 색이 있는 곳에서는 장애 되어 생겨나지 못하니, 이를테면 손이 손을 장애하고, 혹은 돌이 돌이 장애하며, 혹은 손과 돌이 서로를 장애하는 것과 같다.2)
027_0461_b_15L障㝵有對謂十色界自於他處被礙不生如手礙手或石礙石或二相礙
경계유대란 12계(6근ㆍ6식)와 법계 일부(심상응의 심소)를 말한다. 즉 경계를 갖는 모든 법[有境法]은 색 등의 경계를 [취하는 공능이 있기 때문으로](경계가 부재하면 장애 되어 생겨나지 않음),3) 그래서 『시설론(施設論)』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눈은 물에서는 장애 되어도 육지에서는 장애 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물고기 따위의 눈이 그러하다. 어떤 눈은 육지에서는 장애 되어도 물에서는 장애 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대개의 경우에 따라 설하자면 사람 등의 눈이 그러하다. 어떤 눈은 물이나 육지 모두에서 장애 되는 경우가 있으니, 필사차(畢舍遮, piśāca, 아귀의 일종)나 실수마라(室獸摩羅, śiśumāra, 악어를 말함), 그리고 물고기 잡는 사람[捕魚人]과 하마(蝦蟆) 등의 눈이 그러하다. 어떤 눈은 물이나 육지 어디에서든 장애 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앞서 언급한 것을 제외한 눈(예컨대 맹인의 눈)이 그러하다.4)
027_0461_b_17L境界有對謂十二界法界一分諸有境法於色等境故『施設論』作如是言有眼於水有礙非陸如魚等眼有眼於陸有礙非水從多分說如人等眼有眼俱礙如畢舍遮室獸摩羅及捕魚人蝦蟆等眼有俱非礙謂除前相
027_0461_c_02L또한 어떤 눈은 밤에는 장애 되어도 낮에는 장애 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모든 박쥐나 올빼미 따위의 눈이 그러하다. 어떤 눈은 낮에는 장애 되어도 밤에는 장애 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대개의 경우에 따라 설하자면 사람 등의 눈이 그러하다. 어떤 눈은 낮과 밤 모두에 장애 되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개ㆍ여우[野干]ㆍ말ㆍ표범ㆍ승냥이ㆍ고양이ㆍ이리 등의 눈이 그러하다. 어떤 눈은 밤과 낮 모두에 장애 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앞서 언급한 것을 제외한 눈(예컨대 맹인의 눈)이 그러하다. 이러한 등등의 것을 일컬어 경계유대라고 한다.
027_0461_c_02L有眼於夜有礙非晝如諸蝙蝠鵂鶹等眼有眼於晝有礙非夜從多分說如人等眼有眼俱礙如狗野干馬豹豺狼猫狸等眼有俱非礙謂除前相此等名爲境界有對
소연유대란 심ㆍ심소법이 자신의 소연에 대해서만 [현기(現起)하는] 것을 말한다.5)
027_0461_c_06L所緣有對謂心心所於自所緣
그렇다면 경계와 소연에는 다시 어떠한 차별이 있는 것인가?
만약 그러한 법(즉 색등의 경계)에 대해 이것(즉 6근ㆍ 6식과 심소)이 공능을 갖게 되면, 그것은 이러한 법의 경계가 되었다고 설한다. 그리고 심ㆍ심소법의 경우 그러한 법을 집취하여 일어나므로 그러한 법은 심 등에 대해 소연이 된다고 일컫는 것이다.6)
027_0461_c_07L境界所緣復有何別若於彼法此有功能卽說彼爲此法境界心心所法執彼而起彼於心等名爲所緣
어떠한 까닭에서 안(眼) 등이 자신의 경계나 소연에서 일어날[轉] 때를 설하여 ‘장애를 갖는다[有礙]’고 일컫는 것인가?
이것들은 그러한 것(즉 경계와 소연)을 초월한 다른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다시 여기서 ‘애(礙)’란 바로 화회(和會, nipāta, 낙하의 뜻. 구역은 到)의 뜻으로, 말하자면 안 등의 법은 자신의 경계나 자신의 소연과 화회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
027_0461_c_10L云何眼等於自境界所緣轉時說名有礙越彼於餘此不轉故或復礙者是和會義謂眼等法於自境界及自所緣和會轉故
그런데 마땅히 알아야 할 것으로, 여기(게송)서는 오로지 장애유대에 대해서만 설하였기 때문에 다만 ‘열 가지 유색(有色)이 유대이다’고 말하였으니, 이러한 유색법은 서로가 서로를 장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뜻에 준하여 그 밖의 것은 무대(無對)라고 설할 수 있다.
027_0461_c_13L應知此中唯就障礙有對而說故但言十有色有對更相障故由此義准說餘無對
만약 어떤 법이 경계유대라면 그것은 또한 장애유대인가?
마땅히 4구로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7심계와 법계의 일부인 모든 상응법은 바로 제1구(경계유대이면서 장애유대가 아닌 것)이며, 바로 색 등의 5경은 제2구(장애유대이면서 경계유대가 아닌 것)이며, 안 등의 5근은 바로 제3구(경계유대이면서 장애유대인 것)이며, 법계의 일부인 비(非)상응법은 바로 제4구(양자 모두 아닌 것)이다.7)
027_0461_c_16L若法境界有對亦障礙有對耶應作四句謂七心界法界一分諸相應法是第一句色等五境是第二句眼等五根是第三句法界一分非相應法是第四句
만약 어떤 법이 경계유대라면 그것은 또한 소연유대인가?
마땅히 순후구(順後句)로 분별해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만약 소연유대라면 그것은 결정코 경계유대이다. 그러나 어떤 법은 비록 경계유대이지만 소연유대가 아닌 것이 있으니, 이를테면 안 등의 5근이 바로 그러하다.
이에 대해 대덕(大德) 구마라다(鳩摩邏多)는 다음과 같이 설하니,8)
027_0461_c_20L若法境界有對亦所緣有對耶應順後句謂若所緣有對定是境界有對有雖境界有對而非所緣有對謂眼等五根此中大德鳩摩邏多作如是說
027_0462_a_02L
그곳(소연)에서 마음이 생기하려 하나
다른 것이 장애하여 생기하지 않게 하면
마땅히 알아야 하니, 이것이 바로 유대(有對)이고
무대(無對)는 이와는 반대되는 것임을.9)
027_0461_c_24L是處心欲生
他礙令不起
應知是有對
無對此相違

이는 바로 인정[許]할 만한 것이다. 이와 같이 유대와 무대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027_0462_a_03L此是所許

여기서 설한 열 가지 유대 중에서 색(色)과 성(聲)을 제외한 나머지 여덟 가지는 무기(無記)이니,10) 말하자면 5색근(色根)과 향ㆍ미ㆍ촉경이 바로 그것이다. 즉 그것들은 선ㆍ불선의 성질이라고 기표할 수 없기 때문에 ‘무기’라고 이름한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는 설하기를, “이숙과(異熟果)는 능히 [선ㆍ불선으로] 기표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일컬어 무기라 한다”고 하였는데,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무루는 응당 마땅히 오로지 무기여야 할 것이다.
027_0462_a_04L如是已說有對無對於此所說十有對中除色及聲餘八無記謂五色根觸境不可記爲善不善性故名無記有說不能記異熟果故名無記若爾無漏應唯無記
그 밖의 나머지 10계는 선 등의 3성(性)과 통하는 것이니, 이를테면 7심계(心界, 6식계와 의계)로서 무탐(無貪) 등과 상응하는 것을 선이라고 이름하고, 탐 등과 상응하는 것을 일컬어 불선이라 하며, 그 밖의 것과 상응하는 것을 무기라고 이름한다. 법계의 경우, 이러한 무탐 등의 자성과, 상응하는 것과 등기(等起)한 것과 택멸을 선이라고 이름한다.11) 혹은 탐 등의 자성과, 상응하는 것과 등기한 것을 불선이라고 이름하며, 그 밖의 것을 무기라고 이름한다. 그리고 색계와 성계의 경우, 선ㆍ불선심의 힘에 의해 등기한 신ㆍ어표업에 포섭되는 것을 바로 선ㆍ불선이라 하며, 그 밖의 것은 바로 무기이다.
027_0462_a_08L其餘十界通善等三謂七心界與無貪等相應名善貪等相應名爲不善餘名無記法界若是無貪等性相應等起擇滅名善若貪等性相應等起名爲不善餘名無記色界聲界若善不善心力等起身語表攝是善不善餘是無記

선 등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18계 중의 몇 가지가 욕계의 계(繫)이고, 몇 가지가 색계의 계이며, 몇 가지가 무색계의 계인가?12)
게송으로 말하겠다.
027_0462_a_15L已說善等十八界中幾欲界繫幾色界繫幾無色界繫頌曰

욕계의 계(繫)는 열여덟 가지이고
색계의 계는 열네 가지이니
향ㆍ미와 두 가지 식(識)을 제외한 것이며
무색계는 뒤의 세 가지이다.
027_0462_a_16L欲界繫十八
色界繫十四
除香味二識
無色繫後三

논하여 말하겠다. 계(繫)라고 하는 것은 계속(繫屬), 즉 속박된다는 뜻으로, 욕계에 계박되는 것은 18계 모두이다.
027_0462_a_18L論曰繫謂繫屬卽被縛義欲界所繫具足十八.
색계에 계박되는 것은 오로지 열네 가지로서, 향경(香境)ㆍ미경(味境)과 함께 비식(鼻識)ㆍ설식(舌識)이 제외된다. 향경과 미경을 제외한 것은, 그것이 단식(段食)의 성질이기 때문으로,13) 단식에 대한 욕망을 떠날 때 비로소 거기(색계)에 태어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비식과 설식을 제외한 것은 거기에는 그것의 소연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027_0462_a_20L色界所繫唯十四種除香味境及鼻舌識除香味者段食性故離段食欲方得生彼除鼻舌識無所緣故
027_0462_b_02L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곳에는 마땅히 촉계도 없어야 할 것이니, 그것(촉)은 향경ㆍ미경과 마찬가지로 단식의 성질이기 때문이다.
그곳에 존재하는 촉은 단식의 성질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향ㆍ미의 종류도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할 것이다.
향ㆍ미는 식(食)을 떠나 별도로 수용되는 일이 없지만 촉은 별도로 수용되는 일이 있으니, 그곳에서는 근(根)과 의복 따위를 갖기 때문이다. 즉 그곳에서는 식욕(食欲)을 떠났기에 향ㆍ미가 수용되는 일이 없지만 근과 의복 따위는 존재하기 때문에 촉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027_0462_a_23L若爾觸界於彼應無如香味境段食性故彼所有觸非段食性若爾香味類亦應然香味離食無別受用觸有別用持根衣等彼離食欲香味無用有根衣等故觸非無
그런데 유여사는 설하기를, “이곳(욕계)에 머물면서 그 같은 색계의 정려(靜慮)와 등지(等至)에 의지하여 [천안통을 일으켜 색계의] 색을 보고, 소리를 들을 때 경안(輕安)과 함께 일어나는 수승한 촉이 있어 소의신을 섭익(攝益)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세 가지(색ㆍ성ㆍ촉)는 그러한 정려에서 생겨나 서로 수축(隨逐)할 수 있지만, 향ㆍ미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거기(색계)에는 존재하는 일이 없다”14)고 하였다.
027_0462_b_04L有餘師說此依彼靜慮等至見色聞聲輕安俱起有殊勝觸攝益於身是故此三生彼靜慮猶相隨逐香味不爾故在彼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색계에서는 향ㆍ미가 수용되는 일이 없다고 한다면) 그곳에는 응당 마땅히 비근과 설근도 존재하지 않아야 할 것이니, 향ㆍ미의 경계가 그러한 것처럼 그것도 쓰임새가 없기[無用]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 이 두 근은 그곳에서 쓰임새가 있으니, 말하자면 언설을 일으키고 아울러 소의신을 장엄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027_0462_b_08L若爾鼻舌彼應非有如香味境彼無用故不爾二根於彼有用謂起言說及莊嚴身
만약 그것이 소의신을 장엄하고 언설을 일으키는 용도라고 한다면 다만 의처(依處)만이 있으면 될 것으로, 이러한 두 ‘근(根)’이 무슨 필요가 있을 것인가?15)
그곳에서는 남근(男根)이 없으며 또한 역시 그 의처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두 근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 그것의 의처도 역시 없어야 할 것이다.16)
027_0462_b_10L若爲嚴身及起說用須依處何用二根如無男根亦無依二根無者依處亦無
그곳에서는 가히 남근의 의처가 없다고 할 수 있으니, 그것은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비근과 설근의 의처는 그곳에서 쓸모가 있기 때문에 ‘근’을 떠나 응당 마땅히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027_0462_b_12L於彼可無男根依處彼無用故鼻舌依處彼有用離根應有
비록 쓸모가 없다 할지라도 근이 생겨나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포태(胞胎) 속에 있으면서 응당 죽어야 할 자의 경우가 그러하다.17)
비록 쓸모가 없다고 할지라도 근이 생겨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한 자(포태 속에 있으면서 마땅히 죽을 자)에게 어떠한 까닭에서 근이 생겨날 수 있었던 것인가?
근에 대한 애착[愛]이 있어 수승(殊勝)한 업(業)을 일으켰기 때문이다.18)
027_0462_b_14L有雖無用而有根生處胞胎定當死者有雖無用而非無彼從何因得有根起於根有愛發殊勝業
그러나 만약 [향ㆍ미 등의] 경계에 대한 애착을 떠났다면 근에 대해서도 결정코 그러해야 할 것이다. 즉 그곳(색계)의 유정은 경계에 대한 애탐[貪]을 떠났으므로 [근에 대한 애착도 없을 것이며, 따라서 생겨나게 할 원인이 없으므로] 마땅히 비근과 설근은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혹은 마땅히 그곳의 유정에게도 남근이 역시 생겨난다고 인정[許]해야 할 것으로, 만약 ‘남근은 생겨나지 않으니, [생겨날 경우 소의신이] 누추하기 때문이다’고 한다면, 음장(陰藏)은 은밀한데 어찌 그 용모가 누추하다고 하겠는가?19) 또한 온갖 근이 생겨나는 것은 쓸모가 있기 때문에서가 아니니, 만약 원인의 힘[因力]만 있으면 쓸모가 없더라도 역시 생겨나게 된다. 따라서 그곳에서의 남근이 비록 누추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생기하게 할] 원인이 있다고만 인정되면 그곳에서도 마땅히 생기하여야 한다. 그럼에도 남근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그럴 경우 비근과 설근도 응당 마땅히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20)
027_0462_b_17L若離境愛於根定然彼離境貪應無鼻舌或應許彼男根亦生謂不生由醜陋者陰藏隱密何容醜又諸根生非由有用若有因力無用亦生男根於彼雖爲醜陋設許有因於彼應起男根非有鼻舌應無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계경에서 설하고 있는 바와 어긋나게 될 것이니, “그곳(색계)에서는 4지(支)가 결여되는 일도 없고 온갖 근도 감소되지 않는다”고 논설하고 있기 때문이다.21)(비바사사의 힐난)
027_0462_b_22L便違契經所說彼無支缺不減諸根.
그 같은 온갖 근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들에 따라 설하여 ‘감소되지도 않는다’고 말한 것인데,22) 무슨 허물이 있을 것인가? 만약 그렇다고(비근과 설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인정하지 않을 것 같으면, 남근도 응당 존재한다고 해야 하리라.
027_0462_b_24L隨彼諸根應可有者說爲不減所相違若不許然男根應有
027_0462_c_02L여시설(如是說)은 이러하다.23)‘그곳(색계)에는 비ㆍ설 2근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다만 향ㆍ미가 존재하지 않을 뿐이다. 즉 6근의 애탐은 내신(內身)에 의해 생겨날 뿐 경계에 의해 현기(現起)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같은 남근의 애탐은 음촉(婬觸)에 의해 생겨나는데, 그곳에는 음촉이 없기 때문에 남근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24) 그러므로 색계에는 18계 중에 오로지 열네 가지 종류만이 있다고 하는 이치는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027_0462_c_02L如是說者:鼻舌二根於彼非無但無香味六根愛依內身生非依境界而得現其男根愛依婬觸生婬觸彼無根非有故於色界十八界中唯十四種理得成立
무색계의 계(繫)에는 오로지 뒤의 세 가지만 있을 뿐이니, 이른바 의계와 법계와 의식계가 바로 그것이다. 요컨대 색욕(色欲)을 떠나야 그곳에 태어날 수 있기 때문에 무색계에는 열 가지 색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또한 소의와 소연[依緣]이 없기 때문에 5식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오로지 뒤의 세 가지만이 무색계의 계(繫)인 것이다.
027_0462_c_07L無色界繫唯有後三謂意法及意識界要離色欲於彼得故無色中無十色界依緣無故五識亦無故唯後三無色界繫

3계의 계(繫)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18계 중의 몇 가지가 유루이고, 몇 가지가 무루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027_0462_c_10L已說界十八界中幾有漏幾無漏頌曰

의계ㆍ법계ㆍ의식계는 모두에 통하며
그 밖의 나머지는 오로지 유루이다.
027_0462_c_11L意法意識通
所餘唯有漏

논하여 말하겠다. 의계와 의식계로서 도제(道諦)에 포섭되는 것을 일컬어 무루라 하고, 그 밖의 것을 유루라고 이름한다. 또한 법계의 경우, 만약 그것이 바로 도제와 무위라고 한다면 그것을 일컬어 무루라 하고, 그 밖의 것을 유루라고 이름한다.
그리고 그 밖의 15계는 오로지 유루라고 이름할 따름이다.

이와 같이 유루와 무루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027_0462_c_12L論曰意及意識道諦攝者名爲無漏餘名有漏法界若是道諦無爲名爲無漏餘名有漏餘十五界唯名有漏如是已說有漏無漏
18계 중의 몇 가지가 유심유사(有尋有伺)이고, 몇 가지가 무심유사(無尋唯伺)이며, 몇 가지가 무심무사(無尋無伺)인가?25)
게송으로 말하겠다.
027_0462_c_16L十八界中幾有尋有伺幾無尋唯伺幾無尋無伺頌曰

5식(識)에만 오로지 심(尋)ㆍ사(伺)가 있고
뒤의 셋은 세 가지이며, 그 밖의 것에는 아무것도 없다.
027_0462_c_18L五識唯尋伺
後三三餘無

논하여 말하겠다. 안 등의 5식은 유심유사이니, 심과 사와 더불어 항상 함께 상응하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5식신은 그 행상(行相)이 거칠고 [색 등의] 외문(外門:외적 감각기관)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뜻이 결정적인 사실임을 나타내기 위해 [본송에서] ‘오로지’라고 하는 말을 설한 것이다.
027_0462_c_19L論曰眼等五識有尋有伺由與尋伺恒共相應以行相麤外門轉故顯義決定故說唯言
027_0463_a_02L‘뒤의 셋’이란 바로 의계와 법계와 의식계를 말하는 것으로서, 6근ㆍ6경ㆍ6식 중에서 각기 제일 뒤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이러한 뒤의 세 가지 계는 세 가지 모두와 통한다. 즉 의계와 의식계, 그리고 심ㆍ사를 제외한 상응의 법계(상응법 중 심ㆍ사를 제외한 44심소)로서, 만약 욕계와 초정려 중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유심유사이고, 정려중간에 존재하는 것은 무심유사이며, 제2정려 이상의 온갖 경지 내지 유정천정(有頂天定)에 존재하는 것은 무심무사이다. 법계에 포섭되는 비상응(非相應)의 법과 정려중간의 사(伺)도 역시 이와 같다.26) 그리고 심(尋)의 경우 모든 때에 무심유사이니, 제2의 또 다른 심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다만 사와 상응하기 때문이다.
027_0462_c_22L後三謂是意意識識中各居後故此後三界皆通三品意界意識界及相應法界除尋與伺若在欲界初靜慮中有尋有伺靜慮中閒無尋唯伺第二靜慮以上諸地乃至有頂無尋無伺法界所攝非相應法靜慮中閒伺亦如是尋一切時無尋唯伺無第二尋故但伺相應故
그렇다면 사(伺)의 경우, 욕계와 초정려 중에서는 세 품류 어디에도 포섭되지 않는데, 마땅히 무엇이라고 일컬어야 할 것인가?
이는 마땅히 무사유심(無伺唯尋)이라고 이름해야 할 것이니, 제2의 또 다른 ‘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다만 심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심ㆍ사를 갖는 경지[有尋伺地, 즉 욕계 미지정과 초정려지]에는 네 품류의 법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바, 첫째는 유심유사(有尋有伺)이니, 이를테면 심ㆍ사를 제외한 그 밖의 상응법이 바로 그것이며, 둘째는 무심유사(無尋唯伺)이니, 이를테면 바로 ‘심’이 그러하며, 셋째는 무심무사(無尋無伺)이니, 이를테면 일체의 비상응법이 바로 그러한 것이며, 넷째는 무사유심(無伺唯尋)이니, 이를테면 바로 ‘사’가 그러하다.
그리고 나머지 열 가지 색계에는 심과 사 모두가 존재하지 않으니, 항상 심ㆍ사와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027_0463_a_07L伺在欲界初靜慮中三品不收應名何等此應名曰無伺唯尋無第二伺故但尋相應故由此故言有尋伺地有四品法一有尋有伺謂除尋伺餘相應法二無尋唯伺謂卽是尋三無尋無伺謂卽一切非相應法無伺唯尋謂卽是伺餘十色界尋伺俱無常與尋伺不相應故

만약 5식신이 유심유사라고 한다면 어떻게 그것을 무분별(無分別)이라고 설할 수 있는 것인가?27)
게송으로 말하겠다.
027_0463_a_14L若五識身有尋有伺如何得說無分別耶頌曰

다섯 가지 식을 무분별이라고 설한 것은
계탁(計度)과 수념(隨念) 때문으로,
그것은 의지(意地)의 산혜(散慧)와
의지의 온갖 염(念)을 본질로 한다.
027_0463_a_15L說五無分別
由計度隨念
以意地散慧
意諸念爲體

논하여 말하겠다. 전설(傳說)에 따르면 분별에는 간략히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자성분별(自性分別)이고, 둘째는 계탁분별(計度分別)이며, 셋째는 수념분별(隨念分別)이다. 즉 5식신은 비록 자성분별을 갖을지라도 나머지 두 가지를 갖지 않기 때문에 무분별이라 설한 것으로, 이를테면 다리가 한 개 밖에 없는 말[馬]을 일컬어 다리가 없는 말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28)
027_0463_a_17L論曰傳說分別略有三種一自性分二計度分別三隨念分別由五識身雖有自性而無餘二說無分別一足馬名爲無足
여기서 자성분별은 그 본질이 오로지 바로 심(尋)일 뿐으로, ‘심’에 대해서는 뒤(권제4와 권제12)에 심소를 설하는 도중에 응당 자연히 분별 해석하게 되리라. 그 밖의 두 가지 분별은 순서대로 의지(意地)29)의 산란된 혜[散慧]와 온갖 염(念)을 본질로 한다. 여기서 ‘산란’이란 말하자면 정(定)이 아닌 것으로,30) 바로 의식상응의 산란된 혜를 일컬어 계탁분별이라고 한다. 그러나 만약 정에 있든, 혹은 산란에 있든 의식과 상응하는 온갖 염을 일컬어 수념분별이라고 한다.
027_0463_a_21L自性分別體唯是後心所中自當辯釋餘二分別如其次第意地散慧諸念爲體散謂非意識相應散慧名爲計度分別定若散意識相應諸念名爲隨念分
027_0463_b_02L
이와 같이 유심유사 등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18계 중의 몇 가지가 유소연(有所緣)이고, 몇 가지가 무소연(無所緣)인가?
또한 몇 가지가 유집수(有執受)이고, 몇 가지가 무집수(無執受)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027_0463_b_03L如是已說有尋伺等十八界中幾有所緣幾無所緣幾有執受幾無執頌曰

일곱 가지의 마음과 법계의 반은
유소연이고, 그 밖의 것은 무소연이며
앞의 여덟 가지 계와 아울러 성계(聲界)는
무집수이며, 그 밖의 것은 두 가지와 통한다.
027_0463_b_05L七心法界半
有所緣餘無
前八界及聲
無執受餘二

논하여 말하겠다. 6식과 의계, 그리고 법계에 포섭되는 온갖 심소법을 유소연이라고 이름하니, 능히 경계를 취하기 때문이다. 그 밖의 열 가지의 색계와 법처에 포섭되는 불상응법을 무소연이라고 이름하니, 뜻에 준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027_0463_b_07L論曰六識意界及法界攝諸心所法名有所緣能取境故餘十色界及法界攝不相應法名無所緣義准成故
이와 같이 유소연 등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18계 중에서 아홉 가지는 무집수이니, 말하자면 앞에서 설한 7심계와 법계의 전부 등 이러한 8계와 아울러 성계(聲界)는 모두 무집수이다. 그 밖에 나머지 9계(5색근과 색ㆍ향ㆍ미ㆍ촉)는 각기 두 가지 갈래와 통하니, 유집수이자 무집수이기 때문이다. 즉 안 등의 5근으로서 현재세에 머무는 것을 유집수라고 이름하며, 과거세ㆍ미래세에 머무는 것을 무집수라고 이름한다.
027_0463_b_10L如是已說有所緣等十八界中九無執受前七心界及法界全此八及聲皆無執受所餘九界各通二門謂有執受無執受故眼等五根住現在世名有執受過去未來名無執受
색ㆍ향ㆍ미ㆍ촉의 경우, 현재세에 머무는 것으로서 5근을 떠나지 않은 것을 유집수라고 이름한다. 그러나 만약 현재에 머무는 것이면서도 근을 떠나지 않은 것이 아닌 것과 과거ㆍ미래에 머무는 것을 무집수라고 이름한다. 이를테면 소의신 내부에 존재하는 것이면서도 근(根)과 화합하는 것을 제외한 머리카락ㆍ수염ㆍ손톱ㆍ이빨ㆍ대소변ㆍ눈물ㆍ침ㆍ피 등과 소의신 밖에 존재하는 지(地)ㆍ수(水) 등의 색ㆍ향ㆍ미ㆍ촉과 같은 것은 비록 현재세에 존재하는 것일지라도 무집수인 것이다.
027_0463_b_15L色香味觸住現在世不離五根名有執受若住現在非不離根過去未來名無執受如在身內除與根合髮毛爪齒大小便利涕唾血等及在身外地水等中色香味觸雖在現世而無執受
유집수, 이는 무엇을 뜻하는 말인가?
심ㆍ심소법이 함께 집지(執持)ㆍ포섭하여 의처(依處)로 삼게 되는 것을 유집수라고 이름하니, [심ㆍ심소는 그러한 의처에] 손해와 이익을 끼치면서 일어나고[展轉], 다시 서로가 서로를 따르기 때문이다.31) 즉 온갖 세간에서 [고ㆍ락 등의] 감촉의 느낌[覺觸]이 있다고 설하는 것은 여러 가지 연(緣)이 감촉되어 즐거움 따위를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서로 반대되는 것을 무집수라고 이름한다.
027_0463_b_20L有執受者此言何義心心所法共所執持攝爲依處名有執受損益展轉更相隨故卽諸世閒說有覺觸衆緣所觸覺樂等故與此相違名無執受
027_0463_c_02L
이와 같이 유집수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18계 중에서 몇 가지가 대종성(大種性)이고, 몇 가지가 소조성(所造性)인가?
또한 몇 가지가 적집될 수 있는 것[可積集]이고, 몇 가지가 적집되지 않는 것[非積集]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027_0463_b_24L如是已說有執受等十八界中幾大種性幾所造性幾可積集幾非積集頌曰

촉계 중에는 두 가지가 모두 있고
나머지 아홉 가지 색은 소조이며
법계의 일부도 역시 그러하다.
그리고 열 가지 색만이 적집될 수 있는 것이다.
027_0463_c_04L觸界中有二
餘九色所造
法一分亦然
十色可積集

논하여 말하겠다. 촉계는 두 가지 모두와 통하니, 이를테면 대종(大種)과 소조(所造)가 바로 그것이다. 즉 대종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견고한 성질[堅性, 즉 地] 따위가 바로 그것이며, 소조에는 일곱 가지가 있으니, 매끄러운 성질[滑性] 따위가 바로 그것으로, 이는 대종에 의해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소조’라고 이름하는 것이다.32) 그 밖의 나머지 아홉 가지의 색계는 오로지 소조성이니, 이를테면 5색근과 색 등의 네 경계가 바로 그것이다. 또한 법계의 일부인 무표업색(無表業色)도 역시 오로지 소조일 뿐이다.
그리고 나머지 7심계와 무표색을 제외한 법계 일부는 두 가지 종류(대종과 소조색) 모두가 아니다.
027_0463_c_06L論曰觸界通二謂大種及所造大種有四謂堅性等所造有七謂滑性等依大種生故名所造餘九色界唯是所造謂五色根色等四境法界一分無表業色亦唯所造餘七心界法界一分除無表色俱非二種
그런데 존자(尊者) 각천(覺天)은 ‘열 가지 종류의 색처는 오로지 대종성일 따름이다’고 설하고 있다.33) 그러나 그의 설은 옳지 않으니, 계경에서는 오로지 견고성 등의 4상(相)만을 설하여 대종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34) 나아가 이러한 4대종은 오로지 촉처에 포섭되[고 색ㆍ성ㆍ향 등의 처에는 포섭되지 않]기 때문에, 견고성[堅]ㆍ습윤성[濕] 등은 안근 등에 의해 취해지는 것이 아니[라 신근에 의해 취해지는 대상이]고, 색ㆍ성 등의 경계는 [안근ㆍ이근에 의해 지각되는 것이지] 신근에 의해 지각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시 말해 대종과 색 등의 조색은 그것을 취하는 근(根)도, 포섭되는 처소도 다르기 때문에] 그의 설은 결정코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027_0463_c_12L尊者覺天作如是說十種色處唯大種性彼說不然契經唯說堅等四相爲大種故此四大種唯觸攝故非堅濕等眼等所取非色聲等身根所覺是故彼說理定不然
또한 계경에서 설하기를, “필추(苾芻)들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안처(眼處)는 이를테면 내처(內處)로서 4대종의 소조(所造)로 정색(淨色)이며, 유색(有色)ㆍ무견(無見)ㆍ유대(有對)이다. 내지는 신처(身處)의 경우도 널리 설하자면 역시 그러하다. 또한 필추들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색처는 이를테면 외처(外處)로서 4대종의 소조이며, 유색ㆍ유견ㆍ유대이다. 성처는 이를테면 외처로서 4대종의 소조이며, 유색ㆍ무견ㆍ유대이고, 향ㆍ미의 2처도 널리 설하자면 역시 그러하다. 그리고 촉처는 이를테면 외처로서, 이는 바로 4대종과 4대종의 소조이며, 유색ㆍ무견ㆍ유대이다”35)고 하였다. 이처럼 경에서 오로지 촉처만이 4대종을 포섭하고 그 밖의 유색처는 모두 대종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현시하고 있는 것이다.
027_0463_c_17L又契經說苾芻當知眼謂內處四大種所造淨色有色無見有乃至身處廣說亦爾苾芻當知謂外處四大種所造有色有見有對聲謂外處四大種所造有色無見有香味二處廣說亦爾觸謂外處四大種及四大種所造有色無見有如是經中唯說觸處攝四大種明顯示餘有色處皆非大種
027_0464_a_02L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까닭에서 계경 중에서 “ 안(眼)의 살덩이[肉團] 중에 내적으로 각기 다른 견고성[堅性]과 견고한 종류[堅類]가 있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36)
027_0464_a_02L若爾故契經中言:謂於眼肉團中若內各別堅性堅類乃至廣說
그 경에서는 안근을 떠나지 않은 살덩이(즉 승의근이 아닌 부진근) 중에 견고성 따위가 있다고 설한 것으로서,37) 앞의 사실과 서로 모순되는 허물은 없다. 즉 『입태경(入胎經)』 중에서 오로지 6계(지ㆍ수ㆍ화ㆍ풍ㆍ공ㆍ식)를 설하여 사부(士夫, puruṣa)로 삼은 것은 바로 그것이 능히 사부를 구성하는 근본 실체[本事, mūla sattva dravya]라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사부를 구성하는 실체는] 오로지 그것만이 아니니, 그 경에서는 다시 6촉처(觸處)를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027_0464_a_04L彼說不離眼根肉團有堅性等無相違過『入胎經』中唯說六界爲士夫者爲顯能成士夫本事非唯爾所彼經復說六觸處
또한 [만약 각천이 ‘4대종 이외 별도의 소조색이 없으니, 경에서 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고 한다면, 이러한 『입태경』에서 6계 중 오로지 식(識)만을 설하고 심소를 설하지 않았으므로] 온갖 심소도 응당 마땅히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하기 때문에 [앞의 경증(經證)은 옳지 않은 것]이다. 또한 마땅히 ‘심소는 바로 심이다’고 주장해서도 안 될 것이니,38) 계경에서 ‘상(想)ㆍ수(受) 등의 심소법은 심에 의지(依止)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며,39) 또한 유탐심(有貪心) 따위를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40) 이에 따라 앞에서 설한 바와 같은 온갖 계(界)의 대종과 소조가 차별된다는 뜻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027_0464_a_08L又諸心所應非有故亦不應執心所卽心以契經言想受等心所法依止心故又亦說有貪心等故由此如前所說諸界大種所造差別義成
이와 같이 대종성 등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18계 중에서 5근과 5경의 열 가지 유색계는 바로 적집될 수 있는 것이니, 극미의 취집(聚集)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뜻에 준하여 볼 때 그 밖의 나머지 8계는 적집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극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027_0464_a_11L是已說大種性等十八界中五根境十有色界是可積集極微聚故准餘八非可積集非極微故

이와 같이 적집될 수 있는 것 등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18계 중의 몇 가지가 능히 쪼개는 것[能斫]이고, 몇 가지가 쪼개지는 것[所斫]인가?
몇 가지가 능히 태우는 것[能燒]이고, 몇 가지가 태워지는 것[所燒]인가?
몇 가지가 능히 재는 것[能稱]이고, 몇 가지가 재어지는 것[所稱]인가?41)
게송으로 말하겠다.
027_0464_a_14L如是已說可積集等十八界中幾能斫幾所幾能燒幾所燒幾能稱幾所稱頌曰

말하자면 오로지 외적인 4계(界)만이
능히 쪼개는 것이고, 아울러 쪼개어지는 것이며
역시 태워지는 것이고, 능히 재는 것이나
능히 태우는 것과 재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쟁론이 있다.
027_0464_a_17L謂唯外四界
能斫及所斫
亦所燒能稱
能燒所稱諍

논하여 말하겠다. 색ㆍ향ㆍ미ㆍ촉의 4계는 도끼와 장작 등을 성취하니, 이것을 일컬어 능히 쪼개는 것과 쪼개지는 것이라고 한다.
027_0464_a_19L論曰色香味觸成斧薪等此卽名爲能斫所斫
027_0464_b_02L어떠한 법을 ‘쪼갠다’고 일컫는 것인가?
장작 등의 색취(色聚)로서 서로 핍박하며[相逼] 계속 생겨나는 것[續生]을 도끼 따위가 나누어 잘라 각각의 부분으로 하여금 계속 생기하게 하는 것, 이러한 법을 일컬어 ‘쪼갠다’고 이름한다. 그러므로 신(身) 등의 색근은 ‘쪼개지는 것’이라고 할 수 없으니, 완전히 절단되어 두 개로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신근 등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니, (4)지(支)의 부분이 몸을 떠나게 되면 감관으로서의 기능[根]을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신근 등은 또한 역시 ‘능히 쪼개는 것’도 아니다. 왜냐 하면 그것은 보배로운 구슬의 빛처럼 참으로 청정 미묘하기 때문이다.42)
027_0464_a_21L何法名斫薪等色聚相逼續生斧等分隔令各續起此法名斫身等色根不名所斫非可全斷令成二故非身根等可成二分支分離身則無根故又身根等亦非能斫以淨妙故如珠寶光
능히 쪼개고 쪼개어지는 것이 오로지 외적인 4계(색ㆍ향ㆍ미ㆍ촉)에 해당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태워지는 것[所燒]과 능히 재는 것[能稱] 그 자체도 역시 그러하다. 말하자면 오로지 외적인 4계만을 태워지는 것이라 하고, 능히 재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 등의 색근은 보배로운 구슬의 빛처럼 그 상이 청정 미묘하기 때문에 역시 두 가지 사실에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나 성계(聲界)는 이 모든 사실(능절 등의 여섯 가지 사실)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니, 상속하지 않기 때문이다.43)
027_0464_b_03L如能斫所斫體唯外四界所燒能稱其體亦爾謂唯外四界名所燒能稱身等色根亦非二事以淨妙故如珠寶光聲界摠非不相續故
능히 태우는 것[能燒]과 재어지는 것[所稱]에는 이설(異說)의 쟁론이 있다. 즉 어떤 이는 설하기를, “능히 태우는 것과 재어지는 것은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로지 외적 4계뿐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어떤 이는 다시 설하기를, “오로지 화계(火界)만을 능히 태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재어지는 것은 오로지 무거움[重:촉의 성질 중 하나]뿐이다”고 하였다.
027_0464_b_07L能燒所稱有異諍論謂或有說能燒所稱體亦如前唯外四界或復有說唯有火界可名能燒所稱唯重

이와 같이 능히 쪼개는 것과 쪼개지는 것 등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18계 중의 몇 가지가 이숙생(異熟生)이고, 몇 가지가 소장양(所長養)이며, 몇 가지가 등류성(等流性)이고, 몇 가지가 유실사(有實事)이며, 몇 가지가 일찰나(一刹那)인가?44)
게송으로 말하겠다.
027_0464_b_09L如是已說能所斫等十八界中幾異熟生幾所長養幾等流性幾有實事幾一剎那頌曰

내적인 다섯 가지는 이숙생ㆍ소장양이며
성(聲)으로서 이숙생인 것은 없다.
여덟 가지 무애(無礙)에는 등류와
역시 또한 이숙생의 성질이 있다.
027_0464_b_12L內五有熟養
聲無異熟生
八無礙等流
亦異熟生性

나머지는 세 가지이고, 실(實)은 오직 법계뿐이며
일찰나는 오로지 뒤의 세 가지뿐이다.
餘三實唯法
剎那唯後三

논하여 말하겠다. ‘내적인 다섯 가지’란 말하자면 안(眼) 등의 5계로서, 이것들은 바로 이숙생이며 아울러 소장양이다. 그리고 게송에서 등류성을 설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 이숙생이나 소장양을 떠나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45)
027_0464_b_14L論曰內五卽是眼等五界有異熟生及所長養無等流者離異熟生及所長養無別性故
즉 이숙인(異熟因)에 의해 생겨난 것을 ‘이숙생’이라 이름한 것으로, 이를테면 소에 의해 멍에 지워진 수레를 일컬어 우차(牛車)라고 이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간의 말을 생략해 버렸기 때문에 이같이 설하게 된 것이다.46) 혹은 소조(所造)의 업이 결과를 획득할 때에 이르게 되면 변이[異]하고 능히 성숙[熟]하기 때문에 ‘이숙’이라 이름하였으며, 그것으로부터 결과가 생겨나게 되는 것을 ‘이숙생’이라고 이름하였다.
027_0464_b_17L異熟因所生名異熟如牛所駕車名曰牛車略去中言故作是說或所造業至得果時變而能熟故名異熟果從彼生名異熟生
혹은 그것에 의해 획득된 결과는 원인과는 다른 존재[別類]이면서도 바로 이러한 원인이 성숙된 것이기 때문에 ‘이숙’이라고 이름하였다. 혹은 원인에 대해 일시 결과의 명칭을 설정하고, 결과에 대해 일시 원인의 명칭을 설정한 것과 같으니, 이를테면 계경에서 설하기를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지금의 6촉처(觸處)는 바로 옛날의 지은 소조업이다”고 하였던 것이다.47)
027_0464_b_20L彼所得果與因別類而是所熟故名異熟或於因上假立果名如於果上假立因名如契經說今六觸處應知卽是昔所造業
027_0464_c_02L음식과 자조(資助:몸을 이롭게 하기 위한 塗油나 洗浴)와 수면(睡眠)과 등지(等持) 등의 뛰어난 인연으로서 이익되게 하는 것을 ‘소장양’ 이라고 이름한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범행(梵行)도 역시 능히 장양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다만 감손(減損)시키는 일이 없을 뿐으로 별도의 이익이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장양의 상속이 항상 이숙의 상속을 능히 지키는 것[護持]이니, 이는 마치 외곽이 내성을 방호하는 것과 같다.48)
027_0464_b_24L飮食資助眠睡等持勝緣所益名所長養有說梵行亦能長養此唯無損非別有益長養相續常能護持異熟相續猶如外郭防援內城
성계에는 등류나 소장양은 있지만 이숙생은 없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욕망하는 바에 따라 일어나기 때문이다.49)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마땅히 『시설론(施設論)』에서는 ‘추악어(麤惡語)의 원리(遠離)를 잘 닦았기 때문에 대사(大士)는 범음성(梵音聲)의 상을 감득하였다’고 설하지 않았을 것이다.50)
027_0464_c_05L聲有等流及所長養無異熟生所以者何隨欲轉故若爾不應『施設論』說善修遠離麤惡語故感得大士梵音聲相
그러나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소리는 세 번째 전해진 것[第三傳]에 속하기 때문에 비록 그 같은 업에 의해 생겨날지라도 이숙과는 아니다. 이를테면 그러한 업으로부터 온갖 대종이 생겨나고, 온갖 대종의 인연에 따라 소리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51) 또한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소리는 다섯 번째 전해진 것[第五傳]에 속하기 때문에 비록 그 같은 업에 의해 생겨날지라도 이숙과는 아니다. 이를테면 그러한 업은 이숙의 대종을 낳고, 이것이 전해져 장양의 대종을 낳았으며, 이것이 전해져 다시 등류의 대종을 낳고, 이것이 바야흐로 소리를 낳게 된 것이다.”(이상 유부의 해명)
027_0464_c_08L有說聲屬第三傳故雖由彼生而非異熟謂從彼業生諸大種從諸大種緣擊發聲有說聲屬第五傳故雖由彼生而非異熟謂彼業生異熟大種從此傳生長養大種此復傳生等流大種此乃生聲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신수(身受)는 업에 의해 생겨난 대종으로부터 낳아진 것이기 때문에 이숙과가 아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수(受)가 소리[聲]와 마찬가지로 이숙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는 바로 올바른 이치[正理]에 어긋나게 될 것이다.(세친의 비평)
027_0464_c_13L若爾身受從業所生大種生故應非異熟若受如聲便違正理
‘여덟 가지 무애(無礙, 礙性 즉 공간적 점유성을 갖지 않는 것)’란 7심계와 법계로서, 여기에는 등류와 이숙생의 성질이 있다. 즉 동류인(同類因)과 변행인(遍行因)에 의해 생겨난 것은 바로 ‘등류성’이다. 그러나 만약 이숙인에 의해 인기(引起)되어 생겨난 것이면 이숙생이라고 이름한다. 그리고 온갖 무애의 법은 적집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다시 말해 극미소성(極微所成)이 아니기 때문에 소장양이 아니다.
027_0464_c_15L八無礙者七心法界此有等流異熟生性同類遍行因所生者是等流性若異熟因所引生者名異熟生諸無礙法無積集故非所長養
‘나머지’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그 밖의 나머지 네 가지인 색ㆍ향ㆍ미ㆍ촉으로서, 그것들은 세 가지 모두와 통하니, 이숙생이기도 하고, 소장양이기도 하며, 등류성이기도 하다.
‘실(實)은 오직 법계뿐이다’고 한 것에서, ‘실’이란 바로 견실(堅實)의 뜻이기 때문에 무위를 말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법계에 포섭된다. 그래서 오로지 법계만을 단독으로 ‘유실사(有實事)’라고 이름한 것이다.
027_0464_c_19L餘謂餘四皆通三種有異熟生有所長養有等流性實唯法者實謂無爲以堅實故此法界攝唯法界獨名有實
027_0465_a_02L나아가 의(意)와 법과 의식을 일러 ‘뒤의 세 가지’라고 하였는데, 여섯의 세 가지(6근ㆍ6경ㆍ6식) 중에서 가장 뒤에 설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오로지 이러한 3계에만 1찰나가 있으니, 말하자면 첫 번째 무루지(無漏智)인 고법인품(苦法忍品)은 등류가 아니기 때문에 ‘일찰나’라고 이름한 것이다. 이는 구경(究竟)으로서 등류가 아닌 것을 설한 것으로, 여타의 다른 유위법으로서 등류가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여기서 고법인(즉 무루혜의 심소)과 상응(相應)하는 마음을 일컬어 의계(意界)ㆍ의식계라고 하며, 그 밖의 구기(俱起)하는 법을 일컬어 법계라고 한다.52)
027_0464_c_22L意識名爲後三於六三中最後說故唯此三界有一剎那謂初無漏苦法忍品非等流故名一剎那此說究竟非等流者餘有爲法無非等流苦法忍相應心名意界意識界餘俱起法名爲法界

이와 같이 이숙생 등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여기서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어떤 안계(眼界)로서 일찍이 성취되지 않았던 것이 지금 획득[得] 성취되었다고 한다면, 안식(眼識)도 역시 획득 성취되는 것인가?
또한 만약 안식계로서 일찍이 성취되지 않았던 것이 지금 획득 성취되었다고 한다면, 안계도 역시 획득 성취되는 것인가?
이와 같은 물음에 대해 지금 마땅히 간략하게 답변하리라.
게송으로 말하겠다.
027_0465_a_04L如是已說異熟生等今應思擇若有眼界先不成就今得成就亦眼識耶若眼識界先不成就今得成就亦眼界耶如是等問今應略荅頌曰

안계와 안식계는 단독으로 획득되기도 하고,
함께 획득되기도, 그렇지 않는 등의 경우가 있다.53)
027_0465_a_08L眼與眼識界
獨俱得非等

논하여 말하겠다. ‘단독으로 획득된다’고 함은, 말하자면 혹 안계로서 일찍이 성취되지 않았던 것이 지금 획득 성취되더라도 안식은 그렇지 않은 경우를 말하는 것이니, 이를테면 (태생ㆍ난생ㆍ습생으로서) 욕계에 태어나 점차 안계를 획득할 때와,54) 그리고 무색계에서 몰(歿)하여 제2ㆍ제3ㆍ제4 정려지에 태어날 때가 그러하다.55)
027_0465_a_09L論曰獨得者謂或有眼界先不成就今得成就非眼識謂生欲界漸得眼及無色歿生二三四靜慮地時
혹은 안식으로서 일찍이 성취되지 않았던 것이 지금 획득 성취되더라도 안계는 그렇지 않은 경우를 말하는 것이니, 이를테면 제2ㆍ제3ㆍ제4 정려지에 태어나 안식이 현기(現起)할 때와,56) 그리고 거기서 몰하여 하지(下地)에 태어날 때가 그러하다.57)
027_0465_a_12L有眼識先不成就今得成就非眼界謂生二三四靜慮地眼識現起及從彼歿生下地時
‘함께 획득된다’고 함은, 말하자면 안과 안식의 두 계로서 일찍이 획득되지 않았던 것이 지금 획득 성취되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니, 이를테면 무색계로부터 몰하여 욕계나 범세(梵世,즉 초정려)에 태어날 때가 그러하다.58)
‘그렇지 않다’고 함은 두 가지가 모두 획득되지 않는다는 것으로, 이를테면 앞에서 언급한 것을 제외한 경우가 그러하다.
그리고 ‘등’이라고 함은 [아직 설하지 않은 그 밖의 다른 사실도 포섭한다는 말로서,] 이를테면 만약 안계를 성취하면 안식계도 역시 성취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는 등의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59)
027_0465_a_15L俱得者謂或有二界先不成就今得成就謂無色歿生於欲界及梵世時非者俱非謂除前相等,謂若有成就眼界亦眼識耶
027_0465_b_02L이에 대해서는 마땅히 4구(句)로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60) 제1구는 말하자면 제2ㆍ제3ㆍ제4 정려지에 태어나 안식이 생기하지 않는 경우이다. 제2구는 말하자면 욕계에 태어나 아직 안근을 획득하지 않았거나, 획득하였어도 이미 상실한 경우이다. 제3구는 말하자면 욕계에 태어나 안근을 획득하여 상실하지 않았거나 범세에 태어나거나 제2ㆍ제3ㆍ제4 정려지에 태어나 바로 색을 볼 때가 그러하다. 제4구는 말하자면 앞에서 언급한 온갖 상을 제외한 때가 그러하다. 이와 같이 안계와 색계, 안식과 색계의 획득ㆍ성취에 대해 응당 마땅히 이치에 맞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으로, 이와 같이 아직 설하지 않은 교의를 포섭시키기 위해 게송 중에서 전체적으로 다시 ‘등’이라고 말하게 된 것이다.
027_0465_a_18L應作四句第一句者謂生二三四靜慮地眼識不起第二句者謂生欲界未得眼根及得已失第三句者謂生欲界得眼不失及生梵世若生二三四靜慮地正見色時第四句者謂除前相如是眼界與色界眼識與色界得成就等如理應思爲攝如是所未說義是故頌中摠復言等

이와 같이 획득과 성취 등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18계 중의 몇 가지가 내적인 것[內]이고, 몇 가지가 외적인 것[外]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027_0465_b_04L如是已說得成就等十八界中幾內幾外頌曰

내적인 것은 열두 가지로 안계 등이며,
색계 등의 여섯 가지를 외적인 것이라고 한다.61)
027_0465_b_05L內十二眼等
色等六爲外

논하여 말하겠다. 6근과 6식의 열두 가지를 내적인 것이라고 이름하며, 외적인 것이란 이를테면 그 밖의 색 등의 6경을 말한다.
027_0465_b_06L論曰六根六識十二名內外謂所餘色等六境
아(我) 자체가 이미 존재하지 않는데, 어찌 내외가 있을 것인가?
아집(我執)의 의지(依止)가 되기 때문에 일시 마음을 설하여 ‘아’라고 한다. 그래서 계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는 것이다.
027_0465_b_08L我依名內外謂此餘我體旣無內外何有我執依止故假說心爲我故契經說

‘아’를 능히 잘 조복함으로 말미암아
지자(智者)는 하늘에 태어날 수 있는 것이로다.
027_0465_b_10L由善調伏我
智者得生天

즉 세존께서는 또 다른 곳에서 이를 ‘마음을 조복한다’고 설하고 있으니, 계경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다. 즉
027_0465_b_11L世尊餘處說調伏心如契經言

마땅히 마음을 능히 잘 조복해야 할 것이니
마음을 조복해야 능히 즐거움을 낳을 수 있다.
027_0465_b_12L應善調伏心
心調能引樂

따라서 단지 마음을 일시 가설하여 ‘아’라고 하였다. 그리고 안 등은 이것의 소의(所依)가 되는 것으로, 그 관계가 친근(親近)하기 때문에 이를 설하여 ‘내적인 것’이라고 이름한 것이며, 색 등은 이것의 소연(所緣)이 되는 것으로 그 관계가 소원(疏遠)하기 때문에 이를 설하여 ‘외적인 것’이라고 이름하였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6식은 응당 마땅히 내적인 것이라고 이름해서는 안 될 것이니, 아직 의계(意界)의 단계에 이르지 않은 것은 마음의 소의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62)
027_0465_b_13L故但於心假說爲我眼等爲此所依親近故說名內色等爲此所緣疏遠故說名外若爾六識應不名內未至意位非心依故
의계의 단계에 이를 때에도 6식계[의 체상(體相)]을 상실하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의계의 단계에 이르지 않았을 때에도 역시 의계[의 체상]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이와 다르다고 한다면 의계는 오로지 응당 마땅히 과거세에만 존재해야 할 것이고, 6식은 오로지 현재ㆍ미래세에만 존재해야 할 것이며, 그럴 경우 ‘18계는 모두 삼세와 통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자종(自宗)에 위배되고 말 것이다.63) 또한 만약 미래와 현재의 6식에 의계의 체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과거세의 의계도 역시 마땅히 설정될 수 없을 것이니, 체상은 삼세에 걸쳐 바뀌거나 변이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027_0465_b_17L至意位時不失六識未至意位亦非越意相若異此者意界唯應在過去世六識唯在現在未來便違自宗許十八界皆通三世又若未來現在六識無意界相過去意界亦應不立相於三世無改易故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18계 중의 몇 가지가 동분(同分, sabhāga)이고, 몇 가지가 피동분(彼同分, tat-sabhāga)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027_0465_b_22L已說內外十八界中幾是同分幾彼同分頌曰

법은 동분이며, 그 밖의 나머지는 두 가지이니
자신의 작용[自業]을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다.
027_0465_b_24L法同分餘二
作不作自業
027_0465_c_02L
논하여 말하겠다. ‘법은 동분이다’고 함은, 이를테면 어떠한 하나의 법계도 오로지 동분이 된다는 말이다. 즉 동분이란, 만약 [6]경이 [6]식에 대해 결정적으로 소연이 될 때 식은 그 중에서 이미 생겨났거나(과거ㆍ현재) 생겨날(미래) 법이 되니, 이러한 식의 소연이 되는 경계를 설하여 동분이라고 이름한다. 따라서 어떠한 법계라도 그것에 대해 과거[已]ㆍ현재[正]ㆍ미래[當]에 무변(無邊)의 의식을 낳게 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모든 성자는 결정적으로 일체의 법에 대해 마음을 낳아, 그것은 모두 무아(無我)라고 관찰하기 때문이다.
027_0465_b_25L論曰法同分者謂一法界唯是同分若境與識定爲所緣識於其中已生生法此所緣境說名同分無一法界不於其中已正當生無邊意識由諸聖者決定生心觀一切法皆爲無我
그리고 이 때 그러한 무변의 의식은, 그 자체와 그것과 구유(俱有)의 법을 제외한 그 밖의 일체의 법을 소연으로 한다. 그러나 여기서 제외된 것도 역시 제2찰나 마음의 소연의 경계가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두 찰나의 마음은 일체의 경계를 소연으로 하는 것으로, 두루 소연으로 삼지 않는 것이 없다.64) 그렇기 때문에 법계를 항상 동분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027_0465_c_07L彼除自體及俱有法餘一切法皆爲所緣如是所除亦第二念心所緣境此二念心緣一切境無不周遍是故法界恒名同分
‘그 밖의 나머지는 두 가지이다’고 함은, 말하자면 그 밖의 나머지 17계는 모두 동분이 되기도 하고 피동분이 되기도 한다는 말이다.
027_0465_c_11L餘二者謂餘十七界皆有同分及彼同分
무엇을 일컬어 동분이라 하고, 피동분이라고 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자신의 작용[自業]을 짓고, 자신의 작용을 짓지 않는 것을 말하니, 자신의 작용을 짓는 것을 일컬어 동분이라 하고, 자신의 작용을 짓지 않는 것을 일컬어 피동분이라고 한다. 이를테면 이(17계) 가운데 안계로서 볼 수 있는 색[有見色]을 이미 보았거나 지금 보고 있거나 당래(미래)에 볼 것을 ‘동분안(眼)’이라고 이름한다. 이같이 널리 설하여 내지는 의계의 경우도 각기 자신의 경계에 대해 자신의 작용(곧 知)을 행하는 것을 ‘동분의(意)’라고 마땅히 설해야 할 것이다.
027_0465_c_12L何名同分彼同分耶謂作自業不作自業若作自業名爲同分不作自業名彼同分此中眼界於有見色已正當見名同分眼如是廣說乃至意界各於自境應說自用
그리고 [피동분의 경우]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 Kāśmira)의 비바사사(毘婆沙師)는 설하기를, “피동분의 안에는 단지 네 가지 종류만이 있을 뿐이니, 이를테면 색을 보지 않고 이미 멸하였거나 지금 멸하고 있거나 당래 멸할 것과 불생법(不生法)이 바로 그것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서방(西方,간다라)의 여러 논사들은 다섯 가지 종류가 있다고 설하니, 이를테면 앞의 불생법을 다시 두 가지로 나눈 것이 바로 그것으로, 첫째가 유식속(有識屬)이며, 둘째가 무식속(無識屬)이다.65) 내지는 신계의 경우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며, 의계의 피동분은 오로지 불생법뿐이다.66)
027_0465_c_17L迦濕彌羅國毘婆沙師說彼同分眼但有四種謂不見色已正當滅及不生法西方諸師說有五種謂不生法復開爲二一有識屬二無識屬乃至身界應知亦然意彼同分唯不生法
색계의 경우는 안(眼)을 위해 이미 보여졌거나 지금 보여지고 있거나 당래 보여질 것을 ‘동분색’이라 이름한다. 피동분의 색에는 역시 네 가지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안(眼)에 보여지지 않고 이미 멸하였거나 지금 멸하고 있거나 당래 멸할 것과 불생법이 바로 그것이다. 널리 설하여 내지는 촉계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여 각기 자신의 근에 대해 자신의 작용을 행하는 것이 [‘동분촉’이고, 신(身)에 감촉되지 않고 이미 멸하였거나 지금 멸하고 있거나 당래 멸할 것과 불생법을 ‘피동분의 촉’이]라고 마땅히 설해야 할 것이다.
027_0465_c_22L色界爲眼已正當見名同分色彼同分色亦有四種謂非眼見已正當滅及不生法廣說乃至觸界亦爾對自根應說自用.
027_0466_a_02L그리고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동분안(眼)이나 피동분의 안으로서 만약 어떤 한 대상에 대해 동분이 되면 여타의 다른 일체의 대상에 대해서도 역시 동분이 되며, 피동분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 나아가 이같이 널리 설하여 내지는 의계도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색은 그렇지가 않다. 즉 [어떤 하나의 색은 그것을] 보는 자에 대해서는 바로 동분이 되지만 보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바로 피동분이 되는 것이다.
027_0465_c_25L應知同分及彼同分眼,若於一是同分於餘一切亦同性一彼同分亦如是廣說乃至意界亦色卽不然於見者是同分於不見者是彼同分
그 까닭이 무엇인가?
색에는 이 같은 사실이 있다. 즉 그것이 어떤 한 사람에게 보여지는 것이라면 많은 사람들에게도 역시 보여지는 것이니, 이를테면 달이나 춤이나 씨름 따위의 색을 보는 것과 같다. 그러나 안(眼)에는 이 같은 사실이 없으니, 이를테면 어떤 한 사람의 안근으로써 두 사람이 능히 색을 보는 일이 없다. 즉 안근은 공동으로 쓸 수 없기[不共] 때문에 한 사람의 상속(소의신)에 의지하여 동분과 피동분을 건립하지만, 색은 바로 공동의 대상이기 때문에 다수의 사람들의 상속에 근거하여 동분과 피동분을 건립하는 것이다. 그리고 색계에 대해 설한 것과 마찬가지로 성ㆍ향ㆍ미ㆍ촉 계의 경우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027_0466_a_06L所以者何色有是事一所見亦多所見如觀月儛相撲等眼無是事謂一眼根二能見色不共故依一相續建立同分及彼同色是共故依多相續建立同分及彼同分如說色界聲香味觸應知亦
성계(聲界)의 경우, [한사람에게 들리는 소리는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도 역시 들리기 때문에] 색계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향ㆍ미ㆍ촉의 세 가지 계는 근에 이를 때 비로소 취해지는 것이니, 이는 바로 공동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한 사람 만이 취하지 그 밖의 다른 사람이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67) 따라서 이치상으로 볼 때 응당 마땅히 안계 등과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하지 색계와 같은 것이라고 설해서는 안 될 것이다.
027_0466_a_12L聲可如色香味觸三至根方取不共故一取非餘理應如眼等不應如色說
비록 그 같은 이치가 있을지라도 공동의 대상[共]이 될 수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향 등의 3계는 [그것이 아직 근에 이르지 않았을 때에는] 어떤 한 사람이나 그 밖의 다른 사람 모두에 대해 비식(鼻識) 등을 낳게 할 수 있는, 다시 말해 공동으로 수용될 수 있는 것이지만 안근 등은 그렇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향 등의 3계는 색계의 경우와 같은 경우라고 설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안식 등 6식의 동분은 [자신의 작용을 행하여] 생겨난 것이고, 그것의 피동분은 (필경)불생법이기 때문에 의계(意界)의 경우와 같다고 설해야 할 것이다.
027_0466_a_14L雖有是理而容有共所以者香等三界於一及餘皆有可生鼻等識義眼等不然故如色說眼等六識同分彼同分生不生法故如意界
그렇다면 동분과 피동분의 뜻은 무엇인가?
근ㆍ경ㆍ식 세 가지는 서로 교섭하기 때문에 이를 일컬어 ‘분(分, bhga)’이라고 하였다. 혹은 다시 ‘분’이란 바로 자신의 작용을 행하는 것이며, 혹은 다시 ‘분’이란 바로 생겨난 촉[所生觸]을 말한다.68) 즉 [근ㆍ경ㆍ식 3자가] 동일[同]하게 이 같은 ‘분’을 갖기 때문에 동분(同分)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서로 반대되는 것을 피동분이라고 이름하니, 동분은 아니지만 그러한[彼] 동분과 비교할 때 종류와 ‘분’이 동일하기 때문에 피동분이라고 이름한 것이다.69)
027_0466_a_18L云何同分彼同分義根境識三更相交涉故名爲分或復分者是己作或復分者是所生觸同有此分故名同分與此相違名彼同分由非同分與彼同分種類分同名彼同分

동분과 피동분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18계 중의 몇 가지가 견소단(見所斷, darśanaheya)이고, 몇 가지가 수소단(修所斷, bhāvanāheya)이며, 몇 가지가 비소단(非所斷, aheya)인가?70)
게송으로 말하겠다.
027_0466_a_22L說同分及彼同分十八界中幾見所幾修所斷幾非所斷頌曰

열다섯 가지의 계는 오로지 수소단이고
뒤의 세 가지 계는 세 가지 모두와 통하며
불염법(不染法)과, 제6처가 아닌 것에서 생겨난 법과
색법은 결정코 견소단이 아니다.
027_0466_a_24L十五唯修斷
後三界通三
不染非六生
色定非見斷
027_0466_b_02L
논하여 말하겠다. ‘열다섯 가지의 계’라고 함은 이를테면 열 가지의 색계와 5식계를 말한다. ‘오로지 수소단이다’고 함은 이러한 열다섯 가지의 계는 오로지 수소단이라는 것이다.
027_0466_b_02L論曰十五界者謂十色界及五識界唯修斷者此十五界唯修所斷
‘뒤의 세 가지 계’란 의계와 법계, 그리고 의식계를 말하며, ‘세 가지와 통한다’고 함은 이러한 뒤의 세 가지 계는 각기 세 가지 종류(견소단ㆍ수소단ㆍ비소단)와 통한다는 말이다. 즉 여든여덟 가지 수면(隨眠)과, 그것과 구유(俱有)하는 법과, 아울러 수행(隨行)하는 득(得)은 모두 견소단이고,71) 그 밖의 나머지 온갖 유루법은 모두 수소단이며, 일체의 무루법은 모두 비소단이다.
027_0466_b_05L後三界者意界法界及意識界通三者此後三界各通三種八十八隨眠及彼俱有法幷隨行得皆見所斷諸餘有漏皆修所斷一切無漏皆非所斷
어찌 견소단의 법이 더 이상 없다고 하겠는가? 이를테면 이생성(異生性)과, 악취(惡趣)를 초래하는 신(身)ㆍ어업(語業) 등이 바로 그러한 것으로, 이러한 법은 성도(聖道)와 지극히 상위하기 때문이다.72)
027_0466_b_09L豈不更有見所斷法謂異生性及招惡趣身語業等此與聖道極相違故
비록 그렇다할지라도 이러한 법은 견소단이 아니다. 그러한 법들의 상을 간략히 설할 것 같으면, 이를테면 염오하지 않은 법[不染法]과, 제6에 의해 생겨나지 않은 법[非六生]과 색법은 결정코 견소단이 아닌데 [하물며 이 가운데 염오하지 않은 법의 일부인 이생성이 견소단일 것인가.]73) 즉 그러한 이생성은 바로 불염오 무기성에 포섭되는 것으로, 이미 이욕(離欲)한 자도, 선근을 끊은 자도 오히려 성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생성이 만약 견소단이라고 한다면 고법인(苦法忍)의 단계에서도 응당 이생이어야 하는 것이다.
027_0466_b_11L雖爾此法非見所斷略說彼相謂不染法非六生色定非見斷其異生性是不染污無記性攝已離欲者斷善根者猶成就故此異生性若見所斷苦法忍位應是異生
여기서 제6이란 이를테면 제6 의처(意處)를 말하는 것으로, 이러한 의처와는 다른 것에서 생겨나는 것을 ‘제6처가 아닌 것에서 생겨난 법’이라고 하였다. 곧 이는 바로 안(眼) 등의 5근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는 뜻이니, 바로 5식 등을 말한다. 그리고 색법이란 일체의 신ㆍ어업 등을 말하니,74) 앞서 언급한 제6에 의해 생겨나지 않은 법과 이러한 색법은 결정코 견소단이 아니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이는 4제의 이치[諦理]에 미혹하여 직접 발기(發起)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75)
027_0466_b_16L六謂意處異此而生名非六生是從眼等五根生義卽五識等色謂一切身語業等前及此色定非見斷所以者何非迷諦理親發起故

이와 같이 견소단 등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18계 중의 몇 가지가 견(見, dṛṣṭi)이며, 몇 가지가 비견(非見, adṛṣṭi)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027_0466_b_20L如是已說見所斷等十八界中幾是見幾非見頌曰

안계와, 법계의 일부인
여덟 가지를 설하여 ‘견(見)’이라 이름하며
5식과 함께 생기하는 혜(慧)는
비견(非見)이니, 판단[度]하지 않기 때문이다.
027_0466_b_21L眼法界一分
八種說名見
五識俱生慧
非見不度故

색을 보는 것은 동분의 안근으로
그것을 의지처로 삼는 식(識)이 아니니
전설에 의하면, 은폐된 온갖 색을
능히 볼 수 없기 때문이다.
027_0466_b_23L眼見色同分
非彼能依識
傳說不能觀
彼障諸色故

논하여 말하겠다. 안근은 모두 바로 ‘견(見)’이며, 법계의 일부분인 여덟 가지 종류도 ‘견’이다. 그리고 그 밖의 것은 모두 비견(非見)이다.
027_0466_b_24L論曰眼全是見法界一分八種是見餘皆非見
027_0466_c_02L어떠한 것이 여덟 가지인가?
이를테면 유신견(有身見) 등의 다섯 가지 염오견(染汚見)과 세간의 정견(正見)과 유학(有學:무루지를 성취한 성자)의 정견과 무학(無學:성도를 모두 성취한 성자, 즉 아라한)의 정견이니, 법계 가운데 바로 이러한 여덟 가지가 ‘견’이며, 그 밖의 법계와 나머지 16계는 모두 비견이다.
027_0466_c_02L何等爲八謂身見等五染污見世閒正見有學正見無學正見於法界中此八是見所餘非見
여기서 다섯 가지 염오견의 상에 대해서는 마땅히 「수면품(隨眠品)」 중에서 설하게 될 것이다.76) 그리고 세간의 정견이란, 이를테면 의식상응의 선인 유루의 뛰어난 혜(慧)를 말한다. 유학의 정견이란, 이를테면 유학의 소의신 중의 온갖 무루의 견을 말한다. 무학의 정견이란, 이를테면 무학의 소의신 중의 온갖 무루의 견을 말한다. 이를 비유하자면 한밤중과 한 낮과 구름이 끼었을 때와 구름이 없을 때에 온갖 색상(色像)을 관찰하면 밝고 어둠의 차이가 있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세간의 온갖 ‘견’으로서 염오함이 있거나 염오함이 없는 것과, 유학의 견과 무학의 견, 그 같은 온갖 견의 법상(法相)을 관찰하면 그 밝고 어둠이 동일하지 않은 것이다.77)
027_0466_c_04L身見等五隨眠品中時至當說世閒正見謂意識相應善有漏慧有學正見有學身中諸無漏見無學正見謂無學身中諸無漏見譬如夜分晝分有雲無雲睹衆色像明昧有異如是世閒諸見有染無染學無學見觀察法相明昧不同
어떠한 이유에서 세간의 정견은 오로지 의식과 상응하는 것이라고 한 것인가?
5식과 구생(俱生)하는 혜는 능히 결탁(決度)하지 않기 때문이다.78) 이를테면 먼저 심려(審慮,심사숙고의 뜻)하고 결탁하는 것을 일컬어 ‘견’이라고 한다. 그런데 5식과 구생하는 혜는 이와 같은 공능이 없으니, 무분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5식상응의 혜는] 비견(非見)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에 준하여 그 밖의 염오하거나 염오하지 않은 혜와, 아울러 그 밖의 온갖 법도 비견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79)
027_0466_c_11L何故世閒正見唯意識相應以五識俱生慧不能決度故慮爲先決度名見五識俱慧無如是以無分別是故非見准此所餘染無染慧及諸餘法非見應知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안근도 능히 결탁하지 않는데, 그것을 어떻게 ‘견’이라 이름할 수 있을 것인가?(識見家의 물음)80)
능히 밝고 날카로워[明利] 온갖 색을 관조(觀照)할 수 있기 때문이다.(根見家, 즉 유부 비바사사의 답)81)
027_0466_c_15L若爾根不能決度云何名見以能明利觀照諸色故亦名見
그러나 만약 안근이 본다고 한다면 그 밖의 식(識)이 작용할 때에도 역시 마땅히 보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식견가의 再難)82)
일체의 안근이 능히 현견(現見)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어떠한 안근)이 능히 현견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동분(同分)의 안근이 식과 화합할 때 능히 보는 것으로, 그 밖의 안근은 보는 것이 아니다.83)
027_0466_c_17L若眼見者餘識行時亦應名見非一切眼皆能現見能現見謂同分眼與識合位能見非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응당 마땅히 그것의 능의(能依,주체)인 식이 색을 보는 것이지 안근이 보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 않다. 안식은 결정코 능히 보는 것이 아니다.
027_0466_c_20L若爾則應彼能依識見色非眼眼識定非能見
그 이유는 무엇인가?
전(傳)하여 설(說)하는 바에 따르면, 감추어진 색[障色]을 능히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지금 바로 보건대, 벽 등에 의해 은폐된 온갖 색을 능히 볼 수 없으니, 만약 식이 보는 것이라고 한다면 식은 무대(無對)이기 때문에 벽 등에 의해 장애 받지 않으므로 마땅히 감추어진 색도 보아야 하는 것이다.
감추어진 색에 대해 안식은 발생하지 않는다. 식이 이미 생겨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마땅히 볼 수 있을 것인가?
027_0466_c_21L所以者何傳說能觀障色故現見壁等所障諸色則不能觀若識見者識無對故壁等不礙應見障色於被障色眼識不生旣不生如何當見
027_0467_a_02L안식은 [무대로서 벽 등에 의해 장애 받지 않는데] 그러한 감추어진 색에 대해서는 어째서 생겨나지 않는 것인가? 그렇지만 ‘안근이 보는 것[見]’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우리의 경우, 안근은 유대(有對)이기 때문에 감추어진 색에 대해서는 보는 공능이 없다. 나아가 식과 소의(즉 안근)는 동일한 대상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그러한 감추어진 색에 대해 안식도 발생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대가] 만약 오로지 ‘안식이 보는 것’이라는 사실만을 인정한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그것이 생기하지 않는 것인가?
027_0467_a_02L眼識於彼何故不許眼見者眼有對故於彼障色無見功能識與所依一境轉故可言於彼眼識不生許識見者何緣不起
눈이 어찌 몸(피부)처럼 근(根)과 경(境)이 화합할 때 비로소 대상을 취하는 것이라 하겠으며, 유대이기 때문에 그러한 감추어진 색을 보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파지가(頗胝迦, 수정을 말함), 유리, 운모(雲母), 물 등에 장애 된 것은 어떻게 볼 수 있는 것인가? 그러므로 안근은 유대이기 때문에 감추어진 색에 대해 보는 공능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84)
027_0467_a_05L豈如身根境合方取而言有對故不見彼耶又頗胝迦瑠璃雲母水等所障云何得見是故不由眼有對故彼障色無見功能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대가 주장하는 안식의 경우는 어떠한가?
만약 이러한 처소(어떤 한 대상)에 광명만 차단되지 않으면 그러한 감추어진 색에 대해 안식은 역시 생겨나겠지만, 그러나 만약 이러한 처소에 광명이 차단되어 있으면 감추어진 색에 대해 안식은 생겨나지 않는다. 즉 안식이 이미 생겨나지 않았기 때문에 능히 그것을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경(經)에서 ‘안근이 능히 색을 본다’고 설한 것은 그것이 바로 견(見)의 소의이기 때문에 ‘능히 본다’고 설한 것이다.85) 또한 그 경에서 ‘의근이 능히 법을 인식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의근이 능히 인식하는 것은 아니니, 그것은 과거의 것이기 때문이다.
027_0467_a_09L若爾所執眼識云若於是處光明無隔於彼障色眼識亦生若於是處光明有隔於彼障色眼識不生識旣不生故不能見經說眼能見色者是見所依故說能如彼經言意能識法非意能識過去故
그렇다면 무엇이 능히 인식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의식이니, 의근은 바로 의식의 소의가 되기 때문에 ‘능히 인식한다’고 설한 것이다. 혹은 소의(所依, 안근 또는 의근)에 대해 능의(能依, 안식 또는 의식)의 업을 설한 것이니, 세간에서 ‘평상이나 의자의 소리’라고 설하는 것과 같다.86) 또는 경에서 ‘안근이 인식한 색은 참으로 애호할 만한 것이고 참으로 즐길 만한 것이다’고 말하고 있듯이 실로 이같이 참으로 애호할 만하고 즐길 만한 색이라는 것은 안근에 의해 인식되는 바가 아닌 것이다.87)
027_0467_a_15L何者能識謂是意識意是識故說能識或就所依說能依業世間說牀座言聲又如經言眼所識色可愛可樂然實非此可愛樂色是眼所識
또한 경에서 “범지(梵志)는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안근을 문(門)으로 삼아 오로지 색을 보게 되는 것이다”고 설하고 있는 바와 같다. 그러므로 안식이 안근의 문[眼門]에 의지하여 색을 보는 것임을 알아야 하며, 역시 또한 문이 바로 보는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도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88) 그러니 어찌 경에서 ‘안근으로 보는 것이니, 그것으로 오로지 색을 보게 되는 것이다’라고 설할 수 있었을 것인가?
027_0467_a_19L又如經說梵志當知以眼爲門唯爲見色故知眼識依眼門見不應言門卽是見豈容經說以眼爲見唯爲見色
만약 식(識)이 능히 ‘보는 것[見]’이라면, 무엇이 다시 요별(了別)하는 것이며, ‘견’과 요별의 두 작용은 무엇이 다른 것인가?89)
즉 식이 색을 보는 것을 일컬어 ‘색을 요별한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러한 허물은 없다.] 비유하자면 일부의 혜(慧)를 일컬어 능히 보는 것이라고도 하고, 또한 역시 능히 간택(簡擇)하는 것이라고도 하듯이,90) 이와 마찬가지로 일부의 식도 능히 보는 것이라 이름하지만 또한 역시 능히 요별하는 것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027_0467_a_22L若識能見誰復了別與了別二用何異以卽見色名了色譬如少分慧名能見亦能簡擇是少分識名能見亦能了別
027_0467_b_02L그런데 유여사는 [근견설을] 힐난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약 안근이 능히 보는 것이라고 한다면, 안근은 바로 보는 주체[見者]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본다’고 하는 작용자체가 주체와는 별도로 상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이 바로 보는 작용[見用]인가?”91)
이러한 말은 힐난이 될 수 없으니, 이를테면 식(識)이 능히 요별하는 것이라고 할 경우, 요별의 주체[了者]와 요별의 작용[了用]에 어떠한 다름도 없듯이 보는 것[見] 역시 응당 마땅히 그러함을 함께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027_0467_b_02L有餘難若眼能見眼是見者誰是見用言非難如共許識是能了別然無了了用不同見亦應爾
이에 대해 유여사는 다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안식이 능히 보는 것이다. 다만 이것(안근)은 바로 견(見)의 소의가 되기 때문에 안근 역시 능히 보는 것이라고 일컬은 것이니, 이는 마치 울림의 소의가 되기 때문에 또한 역시 ‘종(鐘)이 능히 울린다’고 설하는 것과 같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안근은 안식의 소의가 되기 때문에 응당 마땅히 ‘능히 인식한다’고 일컬어야 할 것이다.
027_0467_b_05L有餘復言識能見是見所依故眼亦名能見鳴所依故亦說鍾能鳴若爾眼根識所依故應名能識
이와 같은 과실은 없으니, 세간에서도 안식이 바로 보는 것이라고 다 같이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생겨날 때 ‘능히 색을 본다’고 설하지 ‘색을 인식한다’고는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027_0467_b_08L無如是失世間同許眼識是見由彼生時說能見色言識色
『대비바사론』 중에서도 역시 이렇게 설하고 있다. “안근이 획득한 바를 안식이 요별함을 설하여 ‘보여진 것’이라고 이름한다.”92) 그렇기 때문에 다만 안근을 설하여 능히 보는 것이라고 일컫는 것이지 능히 인식하는 것이라고는 일컫지 않는 것이다. 오직 식이 현전(現前)할 때만 ‘능히 색을 인식한다’고 설하니, 비유하자면 태양을 설하여 능히 낮을 만드는 것, 다시 말해 태양이 뜨면 낮이 되는 것이라고 일컫는 것과 같다.93)
027_0467_b_10L『毘婆沙』中亦作是說若眼所眼識所受說名所見是故但說眼名能見不名能識唯識現前說能識譬如說日名能作晝
[이상의 논의에 대해] 경부(經部)의 여러 논사들은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어찌하여 함께 모여 [실재하지도 않는] 허공을 서로 움켜쥐려고 맞붙어 싸우는 것인가? 안근과 색경 등을 반연하여 안식이 생겨나는 것인데, 이러한 것들 중 어느 것을 ‘견(見)’에 대한 주체[能]라 하고 객체[所]라 하겠는가? 그것은 오직 법(法)으로서 인과(因果) 관계일 뿐, 그것들 사이에는 실로 어떠한 작용도 없는 것이다. 다만 세간의 관습[世情]에 따르기 위해 일시 언설을 일으켜 ‘안근을 능히 보는 것’이라 일컫고, ‘안식을 능히 요별하는 것’이라 일컬은 것뿐이니, 세존께서 “지역에 따른 언어적 습관[方域言詞]에 마땅히 견고히 집착해서도 안 되며, 세속의 언어개념[世俗名想]을 견고히 추구해서도 안 된다”고 설하신 것처럼 지자(智者)는 응당 마땅히 여기에 크게 집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94)
027_0467_b_13L經部諸師有作是說如何共聚楂掣虛空眼色等緣生於眼識此等於見孰爲能所法因果實無作用爲順世情假興言眼名能見識名能了智者於中不應封著如世尊說方域言詞不應堅執,世俗名想不應固求
그렇지만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 비바사사(毘婆沙師)의 종의(宗義)에서는 “안근이 능히 보고, 이근이 능히 들으며, 비근이 능히 냄새 맡고, 설근이 능히 맛을 보며, 신근이 능히 느끼며, 의근이 능히 요별한다”고 설한다.
027_0467_b_19L然迦濕彌羅國毘婆沙宗說:眼能見耳能聞鼻能舌能嘗身能覺意能了
색을 볼 때 하나의 눈으로 본다[一眼見]고 해야 할 것인가, 두 눈으로 본다[二眼見]고 해야 할 것인가?95)
여기에는 일정한 기준은 없다.96)
게송으로 말하겠다.
027_0467_b_21L於見色時爲一眼見爲二眼見此無定准頌曰

혹 두 눈[二眼]으로 함께 볼 경우
색을 보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027_0467_b_22L或二眼俱時
見色分明故
027_0467_c_02L
논하여 말하겠다. 아비달마(阿毘達磨)의 여러 위대한 논사(論師)들은 모두 ‘혹 어떤 때에는 두 눈이 함께 본다’고 말하고 있으니,97) 두 눈을 뜰 때는 색을 보는 것이 분명하지만 한 눈만을 뜰 때는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한쪽 눈을 뜨고 한쪽 눈에 뭔가를 접촉시킬 때에는 바로 현전에 두 개의 달 등을 보게 되지만, 한쪽 눈을 막고 한쪽 눈에 뭔가를 접촉시키면 그러한 일도 없다.98) 그렇기 때문에 혹 어떤 때에는 두 눈이 함께 본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소의가 다르다고 해서 인식이 둘로 나누어지는 것은 아니니, [심법은] 방처(方處)가 없이 머무르기 때문에 공간적 점유성을 지닌 색[礙色]과는 다른 것이다.99)
027_0467_b_23L論曰阿毘達磨諸大論師咸言或時二眼俱見以開二眼見色分明開一眼時不分明故又開一眼觸一眼時便於現前見二月等閉一觸一此事則無是故或時二眼俱見非所依別識成二分住無方故不同礙色

만약 이 종(宗, 유부종)에서 안근이 보고, 이근이 들으며, 내지는 의근이 요별한다고 설하였다면, 근이 바로 그 같은 소취(所取)의 경계를 취할 때 직접 접촉해야 하는 것[至]인가, 직접 접촉하지 않아도 되는 것[不至]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027_0467_c_06L若此宗說眼見耳聞乃至意了彼所取境根正取時爲至不至頌曰

안근ㆍ이근ㆍ의근과 그 대상은
접촉하지 않으며, 나머지 세 가지는 이 반대이다.
027_0467_c_08L眼耳意根境
不至三相違

논하여 말하겠다. 안근과 이근과 의근은 직접 접촉하지 않은, 다시 말해 그것과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는 대상[非至境]을 취한다. 즉 안근은 능히 먼 곳의 온갖 색은 볼 수 있어도 눈 속에 넣은 약 등은 능히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근 역시 먼 곳의 소리나 음향은 능히 들을 수 있어도 이근을 핍박하는 것은 능히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안근과 이근이 오로지 직접 접촉한 대상[至境]만을 취한다면 선정을 닦는 자는 응당 마땅히 천안(天眼)과 천이(天耳)의 근을 낳지 못하게 될 것이니, 비근(鼻根) 등의 경우와 같다.100)
027_0467_c_09L論曰眼耳意根取非至境謂眼能見遠處諸色眼中藥等則不能觀耳亦能聞遠處聲響逼耳根者則不能聞若眼耳根唯取至境則修定者應不修生天眼耳根如鼻根等
만약 안근이 직접 접촉하지 않은 색만을 능히 볼 수 있다면, 어째서 멀리 떨어져 있거나 장애를 갖는[有障, 감추어진] 등의 온갖 색을 능히 널리 볼 수 없는 것인가?
027_0467_c_14L若眼能見不至色者何故不能普見一切遠有障等不至諸色
그렇다면 어찌하여 자석은 직접 접촉하지 않은 철(鐵)을 끌어당기는 것이면서도 직접 접촉하지 않은 일체의 철을 끌어당기지 않는 것인가?101) 또한 직접 접촉한 대상만을 본다고 주장할지라도 역시 마찬가지로 이러한 힐난이 적용될 것이니, 어떠한 이유에서 일체의 안약이나 눈에 약을 넣는 산가지[籌, 솔] 등 눈과 직접 접촉한 온갖 색을 두루 보지 못하는 것인가? 또한 비근(鼻根) 등은 능히 직접 접촉한 대상을 취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근과 구유(俱有)하는 일체의 향 등을 능히 취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와 마찬가지로 안근이 비록 직접 접촉하지 않은 대상을 볼지라도 그러한 일체의 대상을 보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이근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
027_0467_c_16L如何磁石吸不至鐵非吸一切不至鐵耶執見至境亦同此難何故不能普見一切眼藥籌等至眼諸色又如鼻等能取至境然不能取一切與根俱有香等如是眼根雖見不至而非一切耳根亦爾
의근의 경우, 무색근(無色根)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공간적인 방처(方處)를 갖지 않는 근이기 때문에 능히 직접 접촉한 대상을 취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주장하기를 “이근은 직접 접촉한 대상과 직접 접촉하지 않은 대상 두 가지 모두를 취하니, 자신의 귓속에서 나는 소리(이를테면 耳鳴)도 역시 능히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027_0467_c_21L意無色故非能有至有執耳根通取至境及不至境自耳中聲亦能聞故
027_0468_a_02L그 밖의 비(鼻) 등의 세 가지 유색근(有色根, 비근ㆍ설근ㆍ신근)은 앞의 것과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오로지 직접 접촉한 대상만을 취한다.
어떻게 비근이 오로지 직접 접촉한 향만을 취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인가?
숨을 멈출 때 냄새를 맡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일러 ‘직접 접촉하는 것[至]’이라고 일컬은 것인가?
이를테면 무간(無間)이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102)
027_0467_c_23L所餘鼻等三有色根與上相違唯取至境如何知鼻唯取至香由斷息時不嗅香故云何名至謂無閒生
그렇다면 또한 제 극미(極微)는 상호간에 접촉[相觸]한다고 해야할 것인가, 접촉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인가?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의 비바사사(毘婆沙師)는 서로 접촉하지 않는다고 설한다.
027_0468_a_03L又諸極微爲相觸不迦濕彌羅國毘婆沙師說不相觸
그 이유는 무엇인가?
만약 제 극미가 전체적[遍體]으로 상호 접촉하는 것이라면, 실유[實物]의 극미 자체가 서로 뒤섞이고 마는 허물이 있게 된다. 또한 만약 부분적으로 접촉하는 것이라면, 극미가 부분을 갖는다는 오류를 낳게 된다. 그러나 제 극미는 세분할 수 없는 것이다.103)
027_0468_a_05L所以者何若諸極微遍體相卽有實物體相雜過若觸一分有分失然諸極微更無細分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 제 극미는 상호간에 접촉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극미와 극미 사이에는 간격이 있어야 할 것인데] 어떠한 까닭에서 서로 부딪쳐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은 다만 극미의 무간에서 생겨나는 것일 뿐이다. 그렇지 않고 만약 상호간에 접촉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면 돌을 치거나 손뼉을 칠 때 극미 자체는 응당 마땅히 서로 뒤섞여[相糅] 버리고 말 것이다.104)
027_0468_a_07L若爾故相擊發聲但由極微無間生故許相觸擊石拊手體應相糅
극미는 상호간에 접촉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취색(聚色)이 서로 부딪칠 때 어떻게 흩어지지 않는 것인가?
풍계(風界)가 섭지(攝持)하기 때문에 흩어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105) 그러나 혹 어떤 경우 풍계는 능히 허물고 흩어지게[壞散] 하는 일이 있으니, 이를테면 겁(劫)이 허물어질 때에 그러하다. 그러나 혹 어떤 경우 풍계는 능히 이루고 포섭하게[成攝] 하는 일이 있으니, 이를테면 겁이 이루어지는 때에 그러하다.106)
027_0468_a_09L不相觸聚色相擊云何不散風界攝持故令不散或有風界能有壞散如劫壞或有風界能有成攝如劫成時
[제 극미가 상호간에 접촉하지 않는 것이라면] 어떻게 ‘세 가지 근(비ㆍ설ㆍ신 근)은 [대상과 어떠한 간격도 없는] 무간이 생겨남으로 인해 직접 접촉하는 대상[至境]을 취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027_0468_a_12L何三根由無間生名取至境
즉 무간으로 말미암아 직접 접촉하는 대상을 취한다고 일컬은 것이니, 말하자면 그 중간에 어떠한 조그마한 조각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화합색(和合色)은 부분을 지니는 것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서로 접촉한다 하여도 여기에는 아무런 허물이 없다.107) 이러한 이치를 인정되기 때문에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의 문의(文意)는 잘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논에서 물어 말하기를, “온갖 ‘이러한 접촉된 존재[是觸物, 곧 화합색]’는 바로 ‘이러한 접촉된 것[是觸]’을 원인으로 삼았기 때문에 생겨났다고 해야 할 것인가, ‘접촉되지 않은 것[非觸, 곧 극미]’을 원인으로 삼았기 때문에 생겨났다고 해야 할 것인가?”고 하였다.108) 그리고 온갖 ‘접촉되지 않은 존재[非觸物]’에 대해 물어보는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109)
027_0468_a_13L卽由無間名取至境謂於中間都無片物和合色許有分故相觸無失由許此毘婆沙文義善成立故彼問言是觸物爲是觸爲因故生爲非觸爲因故生諸非觸物爲問亦爾
그 논에서는 이러한 이치에 대해 일정하게 답하고 있지 않다. 즉 어떤 때에는 ‘이러한 접촉된 것’을 원인으로 삼아 ‘접촉되지 않은 것’을 낳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화합된 물건이 이산(離散)할 때가 그러하다.110) 또 어떤 때에는 ‘접촉되지 않은 것’을 원인으로 삼아 ‘이러한 접촉된 것’을 낳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이산되었던 것이 바로 화합할 때가 그러하다. 또 어떤 때에는 ‘이러한 접촉된 것’을 원인으로 삼아 ‘이러한 접촉된 것’을 낳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화합된 물건이 다시 화합할 때가 그러하다. 또 어떤 때에는 ‘접촉되지 않은 것’을 원인으로 삼아 ‘접촉되지 않은 것’을 낳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향유진(向遊塵)이 동류로 상속하는 때가 그러하다.111)
027_0468_a_18L彼就此理爲不定荅有時是觸爲因生於非謂和合物正離散時有時非觸爲因生於是觸謂離散物正和合時時是觸爲因生於是觸謂和合物復和合時有時非觸爲因生於非觸向遊塵同類相續
그런데 존자(尊者) 세우(世友)는 설하기를, “제 극미가 상호 접촉하게 되면, 이는 즉 응당 마땅히 후념(後念, 후찰나)에 이르도록 지속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하였다.112)
027_0468_a_24L尊者世友說諸極微相觸卽應住至後念
027_0468_b_02L그러나 대덕(大德)은 설하기를, “일체의 극미는 실로 상호 접촉하지 못하며, 단지 그 사이가 무간(無間)이기 때문에 일시 ‘접촉’이라는 명칭을 설정하게 된 것이다”고 하였다.113) 이러한 대덕의 뜻은 참으로 애락(愛樂)할 만한 것이라 할 수 있으니, 만약 이와 다르다고 할 것 같으면 이러한 제 극미는 응당 마땅히 간극(間隙, 틈)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며, 중간이 이미 비었다면 무엇이 그러한 법(5근과 5경)의 작용[行]을 장애하길래 유대(有對)로 인정하는 것인가?114) 또한 극미를 떠나 화합색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화합색이 상호 접촉한다고 하는 즉, 그것은 바로 [화합색 중의] 극미가 접촉하는 것이니, 변애(變礙)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또한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115)
027_0468_b_02L然大德說切極微實不相觸但由無閒假立觸此大德意應可愛樂若異此者諸極微應有閒隙中閒旣空誰障其行許爲有對又離極微無和合色合相觸卽觸極微如可變礙此亦應
또한 극미가 만약 방분(方分, 부피)을 지닌다고 인정할 것 같으면, 접촉하거나 접촉하지 않거나 간에 그것들은 모두 마땅히 방분을 갖는 것이며, 만약 방분을 지니지 않는다고 한다면 설혹 상호 접촉을 인정하더라도 그러한 과실이 없는 것이다.116)
027_0468_b_08L又許極微若有方分觸與不觸皆應有分若無方分設許相觸亦無斯

다시 또한 안 등의 근은 자신의 대상에 대해 오로지 같은 양[等量]만을 취하여, 이를테면 횟불을 빨리 회전시키면 마치 불바퀴[旋火輪]처럼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너무나 빨리 전전(轉傳)하기 때문에 큰 산 따위를 보게 되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대상에 대해 같은 양과 같지 않은 양[不等量]을 모두 취하는 것인가?117)
게송으로 말하겠다.
027_0468_b_10L又眼等根爲於自境唯取等量疾轉故如旋火輪見大山等爲於自境通取等量不等量耶頌曰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비근 등의 세 가지는
오로지 같은 양[等量]의 대상만을 취한다.
027_0468_b_12L應知鼻等三
唯取等量境

논하여 말하겠다. 앞에서 직접 접촉하는 대상[至境]을 취하는 것은 비(鼻) 등의 세 가지 근이라고 설한 바 있다.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것들은 또한 오로지 능히 같은 양의 대상만을 취한다. 즉 [비ㆍ설ㆍ신] 근의 미(微, aṇu)의 양과 마찬가지로 [향ㆍ미ㆍ촉]경의 미의 양도 역시 그러하니, 서로 대칭적으로 화합하여 ‘비’ 등의 식을 낳기 때문이다.
027_0468_b_13L論曰前說至境鼻等三根應知唯能取等量境如根微量境微亦然相稱合生鼻等識故
그러나 안근과 이근은 일정하지 않다. 즉 안근은 색에 대해 어떤 때에는 보다 적은 것을 취하기도 하니, 이를테면 털끝을 보는 경우가 그러하다. 또 어떤 때에는 보다 큰 것을 취하기도 하니, 이를테면 잠시 동안 눈을 떠 큰 산 등을 보는 경우가 그러하다. 또한 어떤 때에는 같은 것을 취하기도 하니, 이를테면 포도나 대추 등을 보는 경우가 그러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근도 모기나 구름 등이 일으키는 여러 가지 작거나 큰 음성(音聲)을 들으니,118) 그것이 응하는 바에 따라 작거나 큰 양의 소리를 취하는 것이다.
027_0468_b_16L眼耳不定謂眼於色有時取小如見毛端有時取大如暫開目見大山等有時取等如見蒲桃如是耳根聽蚊雷等所發種種小大音聲隨其所應小大等量
의근의 경우은 질애(質礙:즉 공간적 점유성)를 갖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취하는 대상의 형태와 양의 차별을 분별할 수 없다.
027_0468_b_20L意無質礙不可辯其形量差別

안(眼) 등 제근의 극미는 어떻게 안포(安布:분포 배열의 뜻)되어 차별되고 있는 것인가?
안근의 극미는 눈동자[眼星] 위에서 횡으로 배열되어 머물고 있으니, 마치 향직화(香荾花:미나리과 식물로, 꽃이 한방면으로 향하고 있음)와도 같다. 또한 맑고 투명한 막에 덮여 있어 분산되는 일이 없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겹겹이 쌓인 둥근 알[丸]과 같은 모양으로 머물며, 그 자체 맑고 투명하기 때문에 마치 파지가(頗胝迦:수정)처럼 서로 장애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027_0468_b_21L云何眼等諸根極微安布差別眼根極微在眼星上傍布而住如香荾花淸澈映覆令無分散有說重累如丸而住體淸澈故如頗胝迦不相障礙
027_0468_c_02L이근의 극미는 귓구멍 안에 있으면서 나선형으로 머무니, 마치 돌돌 말린 자작나무 껍질[樺皮]과도 같다.
027_0468_c_02L耳根極微居耳穴內旋環而住如卷樺皮
비근의 극미는 콧줄기 안에서 뒤쪽[背]을 위로 하고 안쪽[面]을 아래로 하고 있으니, 마치 손톱을 쌍으로 한 것과 같다. 그리고 이상의 앞의 세 가지 근은 횡으로 행도(行度)를 짓고 있기 때문에(배열되어 있기 때문에) 높고 낮음이 없으니, 마치 화만(花鬘)을 쓴 것과 같다.
027_0468_c_03L鼻根極微居鼻頞內背上面下如雙爪甲此初三根橫作行度處無高下如冠花鬘
설근의 극미는 혀 위에 퍼져 있으며, 그 형태는 반달과도 같다. 그런데 전설(傳說)에 따르면, “혀 중앙에 털끝의 양 만한 곳이 [따로] 있어 설근의 극미가 혀 전체에 두루 퍼져 있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119)
027_0468_c_05L舌根極微布在舌上形如半月傳說舌中如毛端量非爲舌根極微所遍
신근의 극미는 몸의 부분 부분에 두루 머물며, 신체형태[身形]의 양과 같다. 그리고 여근(女根)의 극미는 그 형태가 장구와 같고, 남근(男根)의 극미는 그 형태가 골무와 같다.
027_0468_c_07L身根極微遍住身分如身形量女根極微形如鼓𣞙男根極微形如指㧺
또한 안근의 극미는 어떤 때에는 모두가 다 동분이며, 어떤 때에는 모두가 다 피동분이며, 또 어떤 때에는 일부는 피동분이고 그 나머지는 바로 동분이다. 내지 설근의 극미도 역시 그러하다. 신근의 극미로서 모두가 다 동분이 되는 일은 결정코 존재하지 않는다. 내지 극열날락가(極熱捺落迦:날락가는 지옥을 말함) 중에서 맹렬한 불길이 몸을 휘감는다 할지라도, 오히려 무량한 신근의 극미가 존재하고 있으니, 그것은 바로 피동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설(傳說)에 따르면, “만약 신근의 극미가 두루 신식을 낳는다면, [그곳에 떨어진] 몸은 응당 마땅히 산괴(散壞)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고 하였다.120)
027_0468_c_09L眼根極微有時一切皆是同分有時一切皆彼同分有時一分是彼同分餘是同分乃至舌根極微亦爾身根極微定無一切皆是同分乃至極熱柰落迦中猛焰纏身猶有無量身根極微是彼同分傳說身根設遍發識身應散壞.
그러나 신근과 촉경은 각각 하나의 극미를 소의와 소연으로 삼아 능히 신식을 낳는 일은 없다. 왜냐 하면 5식은 결정적으로 다수의 극미를 적집하여야 비로소 그것을 소의와 소연의 존재로 성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치에 따라 역시 또한 극미를 설하여 무견(無見)을 본질로 한다고 일컬은 것이니, 볼 수 없는 것[不可見]이기 때문이다.121)
027_0468_c_16L以無根境各一極微爲所依緣能發身識五識決定積集多微方成所依所緣性故卽由此理亦說極微名無見體不可見故

앞에서 설한 것처럼 식(識)에는 여섯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안식계 내지 의식계가 바로 그것이다. 이 중에서 5식은 오로지 현재만을 소연(所緣)으로 삼고, 의식은 삼세과 삼세 아닌 것[非世:즉 무위법을 말함]을 모두 소연으로 삼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와 같은 여러 식의 소의(所依)도 역시 그러하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어째서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027_0468_c_19L如前所說識有六種謂眼識界乃至意識爲如五識唯緣現在意識通緣三世非世如是諸識依亦爾耶不爾云何頌曰

뒤의 것(즉 제6의식)의 소의는 오로지 과거(즉 의근)뿐이며
5식의 소의는 혹은 두 가지 모두[俱]이다.
027_0468_c_22L後依唯過去
五識依或俱
027_0469_a_02L
논하여 말하겠다. 의식은 무간(無間)에 멸한 의근을 소의로 삼는다.122) 그러나 안(眼) 등 5식의 소의는 혹은 두 가지 모두이다. 여기서 ‘혹은’이라고 하는 말은, 이것도 역시 과거[의 의근]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안근은 이러한 안식과 구생(俱生)하는 소의이며, 이와 마찬가지로 내지 신근은 바로 이러한 신식과 구생하는 소의이니, 그것들은 다 같이 현재세(現在世)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간에 멸한 의근은 바로 과거의 소의이다. 이렇듯 5식신의 소의에는 각기 두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안 등의 다섯 가지 근은 바로 바로 개별적인 소의[別所依]이며, 의근은 5식 모두에 공통하는 소의[通所依]인 것이다.
027_0468_c_23L論曰意識唯依無閒滅意眼等五識所依或俱或言表此亦依過去眼是眼識俱生所依如是乃至身是身識俱生所依同現世故無閒滅意是過去依此五識身所依各二謂眼等五是別所依意根爲五通所依性.
그렇기 때문에 이와 같이 설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만약 바로 안식의 소의성이 되는 것이면, 이것은 바로 안식의 등무간연(等無間緣)이 되는 것인가? 만약 바로 안식의 등무간연이 되는 것이면, 다시 이것은 바로 안식의 소의성이 되는 것인가?
027_0469_a_06L故如是說若是眼識所依性者卽是眼識等無閒緣耶設是眼識等無閒緣者復是眼識所依性耶
마땅히 4구로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제1구는 말하자면 구생(俱生)의 안근이며, 제2구는 말하자면 무간에 멸한 심소의 법계이며, 제3구는 말하자면 과거의 의근이며, 제4구는 말하자면 앞에서 언급한 법을 제외한 것이다.123) 내지 신식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니, 4구 각각에다 마땅히 자신의 근을 설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의식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땅히 앞의 구(句)에 따라 답해야 할 것이다. 즉 이러한 의식의 소의성이 되는 것은 결정적으로 이러한 의식의 등무간연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의식의 등무간연이 되는 것이면서도 의식의 소의성이 되지 않는 것이 있으니, 이를테면 무간에 멸한 심소의 법계이다.
027_0469_a_09L應作四句第一謂俱生眼根第二句謂無閒滅心所法界第三句謂過去意根第四句謂除所說法乃至身識亦爾各各應說自根意識應作順前句荅謂是意識所依性者定是意識等無閒緣是意識等無閒緣非與意識爲所依謂無閒滅心所法界

식(識)은 동시에 두 가지의 연(緣:根과 境)에 의탁하여 생기하는 것임에도 어떠한 이유에서 근만이 소의(所依)라는 명칭을 얻게 되고, 경은 그렇지 않은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027_0469_a_16L何因識起俱託二緣得所依名在根非境頌曰

근(根)의 전변에 따라 식(識)도 변이하니
그래서 안(眼) 등의 근을 소의라고 이름한 것이다.
027_0469_a_17L隨根變識異
故眼等名依

논하여 말하겠다. [본송에서] ‘안(眼) 등’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안 등의 6계를 말하는 것으로, 안 등의 근에 전변(轉變)이 있기 때문에 온갖 식도 변이한다. 곧 근이 증장(增長) 감손(減損)함에 따라 식에 밝고 어둠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색 등이 변화하더라도 식이 달라지게 되는 것은 아니니, 식은 바로 근에 따르지 경에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의라고 하는 명칭은 오로지 안 등의 근에 해당하는 것이지 다른 것(즉 법)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027_0469_a_18L論曰眼等卽是眼等六界由眼等根有轉變故諸識轉異隨根增損識明昧故非色等變令識有異以識隨根不隨境故依名唯在眼等非餘

알려지는 것[所識]은 바로 색 따위임에도 어떠한 이유에서 안식(眼識) 내지 의식(意識)이라 이름하고, 색식(色識) 내지 법식(法識)이라고 이름하지 않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027_0469_a_22L何緣色等正是所識而名眼識乃至意識不名色識乃至法識頌曰

그것과 아울러 불공인(不共因)이기 때문에,
근(根)에 따라 식(識)을 설하게 된 것이다.
027_0469_a_24L彼及不共因
故隨根說識
027_0469_b_02L
논하여 말하겠다. [본송에서] ‘그것’이라 함은, 이를테면 앞에서 설한 ‘안 등을 소의라고 이름한다’는 사실을 말한다. 즉 근은 바로 소의이기 때문에 근에 따라 식의 명칭을 설한 것이다. ‘아울러 불공(不共)’이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안근은 오로지 자신의 안식에만 소의가 된다는 것(즉 不共法)이다. 그러나 색은 다른 이의 안식에도 역시 통하고, 아울러 자신과 다른 이의 의식에도 모두 수용되는 것(즉 共法)으로, 내지 신(身)과 촉(觸)의 관계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027_0469_b_02L論曰彼謂前說眼等名依根是依故隨根說識及不共者謂眼唯自眼識所依色亦通爲他身眼識及通自他意識所取乃至身觸應知亦爾.
이처럼 소의는 수승(殊勝)하고 아울러 불공인(不共因)이 되기 때문에 식의 명칭은 근에 따르는 것이지 경에 따르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마치 북소리나 보리의 싹 따위로 이름하는 것과 같다.124)
027_0469_b_07L由所依勝及不共因故識得名隨根非境如名鼓聲及麥牙等

소의신이 머무는 바에 따라 안근이 색을 본다고 할 때, 소의신과 안근과 색경과 안식의 지(地)는 같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인가?125)
027_0469_b_09L隨身所住眼見色時身眼色識地爲同不
마땅히 이러한 네 가지는 어떤 경우에는 다르고, 어떤 경우에는 같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욕계에 태어나, 만약 자지(自地)의 안근으로써 자지의 색을 보는 경우, 네 가지는 모두 자지에 속한다. 만약 초정려의 안근으로써 욕계의 색을 보는 경우, 소의신과 색은 욕계에 속하지만 안근과 안식은 초정려에 속한다. 그러나 초정려의 색을 보는 경우, 소의신은 욕계에 속하지만 그 밖의 세 가지는 초정려에 속한다.
027_0469_b_10L應言此四或異或同謂生欲界若以自地眼見自地色四皆自地若以初靜慮眼見欲界色身色欲界眼識初定見初定身屬欲界三屬初定
만약 제2정려의 안근으로써 욕계의 색을 보는 경우, 소의신과 색은 욕계에 속하지만 안근은 제2정려에 속하고, 안식은 초정려에 속한다. 그러나 초정려의 색을 보는 경우, 소의신은 욕계에 속하지만, 안근은 제2정려에 속하고, 색과 안식은 초정려에 속한다. 또한 제2정려의 색을 보는 경우, 소의신은 욕계에 속하고, 안근과 색은 제2정려에 속하며, 안식은 초정려에 속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만약 제3, 제4 정려지의 안근으로써 하지(下地)의 색이나, 혹은 자지의 색을 보는 경우에 대해서도 마땅히 참답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027_0469_b_14L若以二靜慮眼見欲界色身色欲界眼屬二定屬初定見初定色身屬欲界眼屬二色識初定見二定色身屬欲界色二定識屬初定如是若以三四靜慮地眼見下地色或自地色如理應
초정려에 태어나, 만약 자지의 안근으로써 자지의 색을 보는 경우에도 네 가지는 모두 같은 지에 속한다. 욕계의 색을 보는 경우에는 세 가지는 초정려에 속하지만 색은 욕계에 속한다. 그러나 만약 제2정려의 안근으로써 초정려의 색을 보는 경우, 세 가지는 초정려에 속하지만 안근은 제2정려에 속한다. 욕계의 색을 보는 경우, 소의신과 안식은 초정려에, 색은 욕계에 속하지만, 안근은 제2정려에 속한다. 또한 제2정려의 색을 보는 경우, 소의신과 안식은 초정려에, 안근과 색은 제2정려에 속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만약 제3, 제4 정려지의 안근으로써 자지의 색이나 혹은 하지(下地) 상지(上地)의 색을 보는 경우에 대해서도 마땅히 참답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027_0469_b_20L生初靜慮若以自地眼見自地色四皆同地見欲界色三屬初定色屬欲界若以二靜慮眼見初定色三屬初定眼屬二定見欲界色身識初定色屬欲界眼屬二定見二定色身識初定眼色二定如是若以三四靜慮地眼見自地色或下上色如理應思
027_0469_c_02L이와 마찬가지로 제2, 제3정려에 태어나 자지(自地)나 타지(他地)의 눈으로써 자ㆍ타지의 색을 보는 경우에 있어서도 마땅히 참답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안근 등을 제외한] 그 밖의 계(界)에 대해서도 역시 마땅히 이와 같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027_0469_c_02L如是生二三四靜慮以自他地眼見自他地色如理應思餘界亦應如是分別
이제 마땅히 이러한 제법의 결정적인 상(相)에 대해 간략히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今當略辯此決定相頌曰

안근은 소의신보다 하지(下地)가 아니며
색과 안식은 안근보다 상지(上地)가 아니다.
색은 안식의 일체 지와 통하며
소의신에 대한 두 가지(색ㆍ안식)도 역시 그러하다.
027_0469_c_06L眼不下於身
色識非上眼
色於識一切
二於身亦然

안근과 마찬가지로 이근도 역시 그러하며
다음의 세 가지는 모두 자지(自地)이다.
그리고 신식은 자지이거나 하지이며
의근은 결정되어 있지 않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027_0469_c_08L如眼耳亦然
次三皆自地
身識自下地
意不定應知

논하여 말하겠다. 소의신과 안근과 색의 세 가지는 모두 다섯 지(地)와 통하니, 이를테면 그것들은 욕계와 4정려 중에 존재한다. 그리고 안식은 오로지 욕계와 초정려에만 존재한다. 여기서 안근을 소의신이 생겨난 지(地)와 비교해 본다면, 혹 어떤 경우 등지(等地)이기도 하고,126) 혹 어떤 경우 상지(上地)이기도 하지만,127) 소의신보다 하지에는 끝내 존재하지 않는다. 색과 안식을 안근과 비교해 본다면, 등지나 하지에는 존재하지만 그 상지에는 존재하지 않는다.128) 즉 하지의 안근은 상지의 색을 능히 볼 수 없기 때문이며, 상지의 식은 하지의 안근을 소의로 삼지 않기 때문이다.129) 색을 안식과 비교해 보면, 등지ㆍ상지ㆍ하지 그 어느 곳에도 존재할 수 있다.130) 그리고 색과 안식을 소의신과 비교해 보면, 색을 안식에 비교하는 경우와 같다.
027_0469_c_09L論曰身眼色三皆通五地謂在欲界四靜慮中眼識唯在欲界初定此中眼根望身生地或等或上終不居下色識望眼等下非上下眼不能見上色故上識不依下地眼故色望於識通等上下色識於身如色於識
이계(耳界)에 대해 널리 설하자면 이 또한 안계와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이근은 소의신보다 하지에 존재하지 않으며, 성(聲)과 이식은 이근보다 상지에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성은 이식에 대해 일체 즉 상ㆍ등ㆍ하지 어느 곳에도 존재할 수 있으며, 두 가지(즉 성과 이식)를 소의신과 비교하는 경우에도 역시 그러하니, 그것이 대응하는 바에 따라 안근과 마찬가지로 널리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027_0469_c_15L廣說耳界應知如眼謂耳不下於身聲識非上耳聲於識一切二於身亦然其所應廣如眼釋
비근과 설근과 신근의 세 가지 경우에는 모두 다 자지(自地)에만 존재한다.131) 그런데 여기서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은, 신근과 촉경은 그 지(地)가 필시 동일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신식을 촉과 신근에 비교해 보면, 혹 어떤 경우에는 자지에 존재하고, 어떤 경우에는 하지에 존재한다. 여기서 자지란 말하자면 욕계나 초정려에 태어나는 경우이며, 위의 세 가지 정려에 태어나는 그것을 일러 하지라고 하였다.132)
027_0469_c_18L鼻舌身三摠皆自於中別者謂身與觸其地必同望觸身或自或下自謂若生欲界初生上三定謂之爲下
그리고 의계(意界)의 네 가지는 일정하지 않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의근은 어떤 때에는 소의신과 의식과 법과 더불어 다 같이 동일한 지(地)에 존재하는 경우도 있으며, 또 어떤 때에는 상지와 하지에 존재하는 경우도 있다. 소의신은 오로지 5지(地:욕계와 4정려)에만 존재하며, 나머지 세 가지(의근ㆍ법ㆍ의식)는 일체(무색계를 포함하는 3계 9지)에 존재하니, 등지(等至)에 노닐거나 수생(受生)할 때 각기 그 상응하는 바에 따라 혹 어떤 경우 동일하기도 하고, 혹 어떤 경우 다르기도 하다.133) 이에 대해서는 뒤의 「분별정품(分別定品)」에서 마땅히 널리 분별하는 바와 같다. 지금은 번거로운 말을 피하기 위해 더 이상 분별하지 않을 것으로, 앞뒤에서 거듭 논술하는 것은 소용도 적을 뿐더러 공만 많이 들기 때문이다.
027_0469_c_21L應知意界四事不定謂意有時與身識法四皆同有時上下身唯五地三通一切遊等至及受生時隨其所應或同或如後定品當廣分別爲捨繁文故今未辯前後再述用少功多
027_0470_a_02L
방론(傍論)을 두루 다 마쳤으니, 이제 마땅히 정론(正論)을 분별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18계는 오로지 6식 중의 몇 가지 식에 의해 인식되는 것인가?
몇 가지가 영원한 것[常]이며, 몇 가지가 무상(無常)한 것인가?
몇 가지가 근(根)이며, 몇 가지가 비근(非根)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027_0470_a_02L傍論已應辯正論今當思擇十八界中誰六識內幾識所識幾常幾無常幾根幾非根頌曰

다섯 가지 외계는 두 가지 식(識)에 의해 인식되며
영원한 것은 법계인 무위이며
법계의 일부는 바로 근(根)이며
아울러 내계의 열두 가지도 역시 그러하다.
027_0470_a_05L五外二所識
常法界無爲
法一分是根
幷內界十二

논하여 말하겠다. 18계 중의 색(色) 등의 5계는 그 순서에 따라 안(眼) 등의 5식이 각기 하나씩 인식하며, 또한 이것들은 모두 의식에 의해 인식된다. 이처럼 5계는 각기 6식 중의 두 가지 식에 의해 인식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사실에 준하여 볼 때, 그 밖의 나머지 13계는 모두 의식에 의해 인식되는 것임을 알 수 있으니, 그것은 5식신의 소연의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027_0470_a_07L論曰十八界中色等五界如其次第眼等五識各一所識又摠皆是意識所識如是五界各六識中二識所識由此准知餘十三界一切唯是意識所識非五識身所緣境故
18계 가운데 어떠한 계도 그 전부가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오로지 법계의 일부인 무위법만이 영원하다. 그리고 이러한 뜻에 준하여 본다면, 무상한 것은 무위법을 제외한 그 밖의 법계와 다른 여타의 [17]계이다.
027_0470_a_12L十八界中無有一界全是常者唯法一分無爲是常義准無常法餘餘界
또한 경에서는 22근(根)을 설하고 있으니, 이를테면 안근ㆍ이근ㆍ비근ㆍ설근ㆍ신근ㆍ의근ㆍ여근(女根)ㆍ남근(男根)ㆍ명근(命根)ㆍ낙근(樂根)ㆍ고근(苦根)ㆍ희근(喜根)ㆍ우근(憂根)ㆍ사근(捨根)ㆍ신근(信根)ㆍ근근(勤根)ㆍ염근(念根)ㆍ정근(定根)ㆍ혜근(慧根)ㆍ미지당지근(未知當知根)ㆍ이지근(已知根)ㆍ구지근(具知根)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아비달마의 여러 대논사들은 모두 경에서 설하고 있는 6처의 순서를 뛰어넘어 명근 다음에 비로소 의근을 설하고 있으니, 유소연(有所緣)이기 때문이다.134)
027_0470_a_14L又經中說二十二根謂眼根耳根鼻根舌根身根意根女根男根命根樂根苦根喜根憂根捨根信根勤根念根定根慧根未知當知根已知根具知根阿毘達磨諸大論師皆越經中六處次第命根後方說意根有所緣故
027_0470_b_02L이상에서 설한 22근은 18계 중 내적인 12계(6근과 6식)와 법계의 일부에 포섭된다. 여기서 법계의 일부란 명(命) 등의 11근과 뒤의 세 가지 중의 일부를 말하니, 이것들은 법계에 포섭되기 때문이다.135) 내적인 12계란, 안 등의 5근은 자신의 명칭과 같은 계에 포섭되고, 의근은 7심계에 모두 포섭되며, 뒤의 세 가지(즉 3무루근을 말함)의 일부는 의계와 의식계에 포섭되는 것이다. 그리고 남근과 여근은 바로 신계(身界)의 일부에 포섭되니, 뒤(본론 권제3)에서 응당 분별하는 바와 같다.
이상과 같은 뜻에 준하여 본다면, 그 밖의 나머지 색 등의 5계와 법계의 일부는 모두 그 본질이 근이 아니다.
027_0470_a_20L如是所說二十二根十八界中內十二界法一分攝法一分者命等十一後三一法界攝故內十二者眼等五根如自名攝意根通是七心界攝後三一分意意識攝女根男根卽是身界一分所攝如後當辯義准所餘色等五界法界一分皆體非根
甲辰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彫造
  1. 1)본론 권제2에서는 18계법을 유견ㆍ무견, 선ㆍ불선 등의 스무 가지 갈래[門]로 분별하고 있다. 즉 온ㆍ처ㆍ계의 제법분별(諸法分別)은 바로 18계에 갖추어진 근 (根)ㆍ경(境)ㆍ식(識)을 밝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제법분별이란 18계에 포섭되는 일체의 만법(萬法)을 여러 관점에서 조명하여 그것의 내포(內包) 외연(外延)을 상세하게 규정하는 논의 방식을 말한다.
  2. 2)장애유대(āvaraṇa-pratighāta)란 공간적 점유성[礙性]을 지니는 색법의 상호 제약적 관계를 말한다.
  3. 3)경계유대(viṣaya-pratighāta)란 인식기능과 그 대상 사이의 제약적 관계를 말한다.
  4. 4)제1구는 물 속에서는 볼 수 있어도 육지에는 볼 수 없는 눈, 제2구는 육지에서는 볼 수 있어도 물 속에서는 볼 수 없는 눈, 제3구는 물과 육지 모두에서 볼 수 있는 눈, 제4구는 물과 육지 모두에서 볼 수 없는 눈.
  5. 5)소연유대(ālambana-pratighāta)란 말하자면 심ㆍ심소와 대상간의 필연적 제약관계로서, 자신의 소연이 부재하면 장애되어 생기하지 않는다.
  6. 6)5근과 심ㆍ심소는 경계에 의해 그 생기가 제약되지만(경계유대), 경계는 또한 심ㆍ심소에 대해 소연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경계유대의 외연이 소연유대보다 넓다.
  7. 7)여기서 비상응법은 열네 가지 불상응행법(본론 권제4 참조), 세 가지 무위법, 그리고 무표색을 말한다.
  8. 8)구마라다(Kumāralāta). 구역에서는 구마라라다(鳩摩羅邏多)로 동수(童受)로 번역된다. 규기(窺基)의 『성유식론술기』에 의하면 불멸 후 100년 무렵에 출세한 경부본사(經部本師)로 일컬어지지만, 여기에는 이설이 많다. 이를테면 『대당서역기』에서는 마명(馬鳴)ㆍ제바(提婆)ㆍ용맹(龍孟) 즉 용수와 함께 당시 네 개의 태양[日]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오늘날에는 대개 마명 용수 내지 『대비바사론』보다는 후대, 세친이나 중현보다는 전대, AD 3세기 후반에서 4세기 전반의 인물로 파악되고 있다.
  9. 9)즉 경부(經部) 조사(祖師) 구마라다는 앞의 3종의 유대를 유부에서처럼 각각 실재적 관계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다만 의식이 생겨나지 않게 하는 것이라는 인식론적으로 이해하였다. 예컨대 청색에 대향(對向)하여 시의식이 생겨나려고 할 때, 이를테면 소리 따위가 이를 장애하여 생겨나지 않게 하면 이를 유대라 하고, 장애함이 없이 생겨나게 하는 것을 무대라고 하였다. 이는 색과 무표색, 심과 심소의 개별적 실재성을 부정하는 경량부로서는 당연한 이론적 귀결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논주 세친도 여기에 동조하고 있기 때문에 ‘이는 바로 인정할 만한 것이다[此是所許]’라고 말한 것이다.
  10. 10)무기(avyākṛta)란 선ㆍ불선 어느 것으로도 언표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기에는 다시 유부무기(有覆無記, nivṛtavyākṛta)와 무부무기(無覆無記, anivṛtavyākṛta)가 있다. 유부무기란 그 자체로서는 무기이지만 번뇌와 상응구기하는 무기이며, 무부무기란 번뇌와 상응하지 않으며, 성도(聖道)를 장애하지 않는 무기로서, 이숙생(異熟生)ㆍ위의로(威儀路)ㆍ공교처(工巧處)ㆍ통과심(通果心) 따위를 말한다. 이를 오로지 무기라고 한 색ㆍ성을 제외한 8계로 분별해 보면, 이숙무기는 전세의 업이 초래한 심신의 과보로서 5근과 향ㆍ미ㆍ촉을 말하며, 위의무기는 행(行)ㆍ주(住)ㆍ좌(坐)ㆍ와(臥)와 같은 위의의 상태에서의 향ㆍ미ㆍ촉을 말하며, 공교무기는 여러 가지 기술을 행하는 상태에서의 향ㆍ미ㆍ촉을 말하며, 통과(혹은 변화)무기는 신통력에 의해 변화를 나타낼 때의 향ㆍ미ㆍ촉을 말한다.(『구사론기』 대정장41,p.35-36)
  11. 11)법계에는 무표색과 마흔여섯 가지 심소, 열네 가지 불상응법, 세 가지 무위 등 총 예순네 가지의 법이 포섭된다. 따라서 여기에는 선의 경우, 그 자체가 선인 자성선(自性善,곧 無貪ㆍ無瞋ㆍ無癡ㆍ慚ㆍ愧)과, 자성선과 상응하는 제 심소의 선[相應善]과, 자성선과 함께 일어나는 불상응행의 선[等起善]과, 그리고 궁극의 선인 무위택멸의 승의선[勝義善]이 있다.(본론 권제13, p.624 참조.)
  12. 12)여기서 계(繫,saṃyukta)란 계속(繫屬)의 뜻으로, 욕계계라고 하면 그것은 욕계의 번뇌에 계박되어 욕계에 소속되어 머무르게 되는 법을 말한다.
  13. 13)단식(段食, 혹은 搏食)은 4식(食)의 하나. ‘단’은 분단(分段)의 뜻. 즉 분활되어 섭취되는 물질적 에너지로서, 향ㆍ미ㆍ촉을 본질로 함. 따라서 이것은 욕계에만 존재하는데, 초정려 근분(近分)의 미지정(未至定)에 의해 욕계의 번뇌를 단진(斷盡)할 때 이를 떠나게 된다.(본론 권제10, p.487 참조.)
  14. 14)선정 중에서 상계의 색을 보고 소리를 들어 소의신에 경쾌 안적한 느낌[輕安觸]이 생겨났기 때문에 색계에 태어날 때에도 이 세 가지는 그대로 따라 쫓아오지만[隨逐], 향ㆍ미는 선정 중에 부재하기 때문에 색계에 태어날 때에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
  15. 15)여기서 ‘의처’는 부진근(扶塵根)으로, 색ㆍ향ㆍ미ㆍ촉으로 이루어진 육단(肉團), 즉 눈에 보이는 코와 혀를 말하며, ‘근’은 공능 그 자체를 뜻하는 승의근(勝義根)을 말한다.
  16. 16)부진근(즉 依處)은 승의근을 돕는[扶]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승의근이 없다면 그것을 돕는 부진근도 역시 없어야 한다는 뜻.
  17. 17)태어나지 못하고 어머니 탯집에서 죽어야 할 아이는 비록 근이 소용없을지라도 6근이 생겨난다.
  18. 18)여기서 수승한 업이란 5근 등을 획득하려고 하는 사업(思業)을 말하는 것으로, 일체의 유위법은 반드시 원인을 갖기 때문이다.
  19. 19)음장(陰藏, kośagatavasti, 혹은 陰馬藏)은 여래의 남근으로, 말의 그것처럼 밖으로 드러나지 않고 은밀하게 감추어져 있다. 32상의 하나. 즉 여래의 음장인 남근은 소의신을 누추하게 하지 않기 때문에 색계에 존재할 수 있다고 인정해야 한다는 힐난.
  20. 20)이상 논주 세친의 해석과 난문으로, 유부 비바사사가 말하듯이 근에 대한 애착이 있어 수승한 업을 일으켰기 때문에 마땅히 포태(胞胎) 속에서 죽을 자에게도 근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남근도 역시 그러해야 하겠지만, 색계에는 성애에 대한 애착이 없기 때문에 남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므로 비근과 설근 또한 마땅히 향과 미에 대한 애착을 떠났으므로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21. 21)『중아함경』 권제39 제154경 『바라바장경(婆羅婆掌經)』(대정장1,p.674중, 한글대장경 중아함경2,p.409). “그 때 세존께서 말씀하기를, 바사타여, 어느 때인가 이 세상은 다 무너진다. 이 세상이 무너질 때 만약 중생이 있으면 그는 황욱천(晃昱天,색계 제2선의 極光淨天)에 태어나는데, 그는 거기서 묘한 빛깔[色]과 생각[意]을 가지고서 일체의 지절(支節)과 온갖 근을 구족하고서.”
  22. 22)계경의 내용은 황욱천에서 당연히 있을 수 있는 근에 대해 말한 것이라는 뜻.
  23. 23)여시설(如是說, evaṃ tu varṇayanti Vaibhāṣikāḥ)이란 비바사사(毘婆沙師, Vaibhāṣika)의 여론(輿論)이라는 정도의 뜻이다.
  24. 24)비바사사는 내적 소의신에 의해 일어난 애탐(자발적 능동적 애탐)과 외적 경계를 조건으로 하여 일어난 애탐(수동적 애탐)을 구별하여, 6근의 애탐은 내적 소의신에 의해 일어난 자발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 생기의 원인으로 외적 경계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남근의 애탐은 외적 경계에 의해 유발된 수동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의 외경이 없는 색계에는 남근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한다.
  25. 25)여기서 심(尋, vitarka)과 사(伺, vicāra)라고 하는 것은, 마음 즉 전5식과 제6식으로 하여금 각기 그들의 대상을 추구[尋求ㆍ伺察]하게 하는 보다 거칠고[麤性] 세밀한[細性] 의식작용으로(본론 권제4, p.185 참조), 욕계와 색계 초정려에는 심ㆍ사의 작용이 있지만 중간정에서는 사만이, 색계 제2정려 이상부터는 심ㆍ사가 없다.
  26. 26)법계 비상응법이란 열네 가지 불상응행과 3무위 및 무표를 말하는데, 이러한 것에는 물론 심작용이 있지 않기 때문에 무심무사이며, 중간정에 있는 사(伺)는 심을 동반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자신 ‘사’이므로 다른 사를 동반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 역시 무심무사이다.
  27. 27)전5식을 보통 무분별(無分別, avikalpika,)이라고 한다. 그런데 5식이 유심유사로서 심ㆍ사의 심소와 상응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째서 그것을 유분별(有分別)이라고 하지 않는가, 다시 말해 5식상응의 ‘심’은 바로 분별(사유작용)이기 때문에 5식을 무분별(불확정적인 사유)라고 할 수 없지 않는가 하는 난문.
  28. 28)여기서 5식은 심(尋)ㆍ사(伺)를 본질로 하는 자성분별(즉 감성적 지각)일 뿐이고, 그것은 혜(慧)를 본질로 하는 계탁분별(즉 추리 판단의 오성적 지각)과 제6식 상응의 염(念)을 본질로 하는 수념분별(즉 기억이나 재인식)에 의해 확실한 사유[有分別, savikalpa]가 된다. 그러나 논주 세친은 경량부설에 따라 심ㆍ사의 개별적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하는 설[傳說]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본론 권제4, p.185 참조.)
  29. 29)의지(意地, mano-bhūmi). 여기서 ‘지’는 소의(所依)의 뜻이므로 ‘의지’란 의(意)로서 소의가 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본문에서의 뜻은 ‘제6의근을 소의로 삼아 상응하는’의 뜻.
  30. 30)선정 중에서는 능히 대상을 재고 헤아릴[計度] 수가 없기 때문이다.
  31. 31)유집수(upātta)란 집수(감각)의 의식작용을 갖는 대종(大種)과 조색(造色)을 말한다. 즉 전5근은 심ㆍ심소의 직접적인 의처(依處,심ㆍ심소의 근거 즉 소의처)가 되고, 성경(聲境)을 제외한 색 등의 4경은 근의 대상으로서 간접적인 의처가 되어 심ㆍ심소와 더불어 손해와 이익을 함께하는 것이다(‘성’을 제외한 이유는 소리는 유집수나 무집수의 대종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본론 권제1, p.17 참조). 이를테면 심ㆍ심소가 우고(憂苦)를 일으켜 감손(減損)될 때 의처도 역시 감손되며, 심ㆍ심소가 희락(喜樂)을 일으켜 이익될 때 의처도 역시 이익된다. 반대로 의처가 만약 좋은 음식 등을 획득하여 이익될 때 심 등도 역시 이익되는 것이며, 나쁜 음식 등을 획득하여 감손되면 심 등도 역시 감손된다.
  32. 32)즉 촉(觸)에는 견(堅)ㆍ습(濕)ㆍ난(煖)ㆍ동(動)을 자상(自相)으로 하는 4대종과, 매끄러운 성질[滑性]ㆍ거친 성질[澁性]ㆍ무거운 성질[重性]ㆍ가벼운 성질[輕性]ㆍ차가움[冷]ㆍ허기짐[飢]ㆍ목마름[渴] 등 일곱 가지 조색이 있다.(본론 권제1, p.18 참조.)
  33. 33)각천(Buddhadeva, 佛陀提婆로 음역됨)은 설일체유부의 유명한 논사. 바사(婆娑)의 4대 평가(評家) 중의 일인. 그에 의하면 열 가지 색계는 4대종의 안포차별(安布差別)로서, 4대종을 떠나 별도의 실체(소조색)가 존재하지 않는다.(『대비바사론』 권제127,대정장27,p.661하)
  34. 34)『중아함경』 권제7 『상적유경(象跡喩經)』(대정장1,p.464하). 이 경에서는 10색계를 대종이라고 설하지 않고 오로지 견ㆍ습ㆍ난ㆍ동의 4상과 4대종만을 설하고 있기 때문에 대종은 오로지 이 네 가지에 국한된다는 뜻.
  35. 35)『잡아함경』 권제13 제322경(대정장2,p.91하). “眼是內入處, 四大所造淨色不可見有對…….”(본론 권제1, p.14 참조.)
  36. 36)『잡아함경』권제11 제273경(대정장1,p.72하). 이는 각천(覺天)의 반증으로, 안근은 ‘견고성[堅, 즉 地]’ 등의 4대종이 결합한 것으로서 안근의 살덩이를 분석하면 그것은 또한 ‘견고성’ 등의 4대종일 따름이라는 뜻.
  37. 37)즉 ‘견고성(堅性)’ 따위는 안근(승의근) 중에는 없고 다만 안의 육단(부진근 즉 눈에 보이는 눈)에 있다는 뜻. 즉 이러한 부진근의 육단은 색ㆍ향ㆍ미ㆍ촉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경에서 ‘안의 육단 중에 견고성 따위가 있다’고 설하였다는 것이다.
  38. 38)『대비바사론』 권제2(대정장27. p.8하)에서 각천(覺天)은 ‘온갖 심소의 본질은 바로 심이다’고 하여 심ㆍ심소 일체설을 주장하고 있다.
  39. 39)『잡아함경』 권제21 제568경(대정장2,p.150상중).
  40. 40)유탐심(sa-rāgādi-citt)이란 말 그대로 ‘탐’을 지닌 마음이란 뜻으로, 이는 바로 ‘탐’과 ‘심’이 개별적 존재임을 나타낸다는 뜻. 이는 유부의 심ㆍ심소의 상응설은 기본 이론으로, 본론 권제4(p.190)에서 상세히 논의하고 있다.
  41. 41)여기서 ‘능(能)’은 바로 그렇게 하는 주체를 말하고, ‘소(所)’는 그렇게 되는 대상을 말 함.
  42. 42)즉 안 등의 색근은 비록 4대 소조색이지만 구슬의 빛처럼 특수한 감관으로서의 기능이 있어 근(根)이라고 한 것이기 때문에, 쪼개고 쪼개지는 등의 범위에 들지 않는다는 뜻.
  43. 43)성계(聲界) 즉 소리는 다른 아홉 가지 유색계처럼 상속하고 속생(續生)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능히 쪼게거나 쪼게어지거나 하는 등의 여섯 가지 사실에 해당되지 않는다.
  44. 44)여기서 이숙생은 전생의 선악업이 초래하는 무기의 과보로서, 5색근과 색ㆍ향ㆍ미ㆍ촉의 4경, 7심계와 법계가 이숙생이다. 이숙생이 선천적인 것이라면 소장양은 음식 등에 의해 장양되는 후천적인 것으로서, 5색근과 5경이 그것이다. 등류성이란 원인과 동류의 성질을 지닌 결과, 즉 등류과를 말하는데, 7심계와 법계가 여기에 해당한다. 유실사(有實事, dravyavat)란 견실(堅實)을 본질로 하는 무위를 의미하므로, 이에 해당되는 것은 법계뿐이다. 그리고 한찰나의 마음만으로 낳아지는 것, 즉 고법지인(苦法智忍)이 일찰나인데, 의계ㆍ의식계와 법계가 이에 해당된다.
  45. 45)안ㆍ이ㆍ비ㆍ설ㆍ신의 5근은 동류인ㆍ등류과로서 전후 상속하지만 전찰나의 동류인도, 후찰나의 등류과도 필경 이숙(선천적)ㆍ장양(후천적)으로 생기 증장하는 5근의 전후상속으로, 이 두 가지를 떠나 별도의 등류성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게송에서 등류성을 설하지 않은 것임.
  46. 46)마치 소가 끄는 수레[牛所駕車]를 우차(牛車)라고 하듯이, 이숙인소생(異熟因所生)에서 ‘인소(因所)’를 생략하여 이숙생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47. 47)6촉처란 6근의 결과로서, 이것을 소조의 업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결과조작[所造]의 원인이 되는 업에 따라 일시 그렇게 칭명한 것이다. 즉 5근은 그것의 원인인 이숙인으로부터 생겨났기 때문에 이숙생이다.
  48. 48)즉 음식 등에 의해 후천적으로 길러진 상속신(소장양의 상속)은 이숙으로서 선천적으로 획득되어진 상속신을 마치 외성이 내성을 방호하듯이 지킨다는 뜻. 이를테면 소장양의 안근은 승의근과 부진근으로서, 그것은 외부에 있으면서 내적이고도 본질적인 이숙생의 승의근을 방호하게 된다.
  49. 49)소리가 이숙생이라고 한다면 현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생겨나야 하겠지만 발성자의 욕망에 따라 생겨나기도 하고 멈추어지기도 하기 때문에 이숙생이 아님.
  50. 50)이는 음성을 이숙과라고 주장하는 독자부(犢子部)와 분별론자(分別論者)의 주장(『대비바사론』 권제118, 한글대장경122,p.411)이다. 즉 부처님은 과거 수행시대 추악어로부터 멀리 떠났기 때문에 그러한 선업력에 의해 범음성을 획득하였다는 뜻. 여기서 범음성은 32상 중의 하나.
  51. 51)과거의 선악업이 제1전, 그러한 업에 의해 생겨난 대종이 제2전, 대종이 인연화합하여 생겨난 소리가 제3전. 즉 소리는 직접적으로는 과거 선악업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현재 대종에 의해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이숙생이 아니라는 뜻.
  52. 52)여기서 그 밖의 고법지인과 구기하는 법이란, 무루 율의(律儀)의 색, 수ㆍ상ㆍ사 등의 상응법, 그러한 법을 획득하게 하는 득(得), 그리고 생(生)ㆍ주(住)ㆍ이(異)ㆍ멸(滅)의 4상을 말한다.(이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4, p.161 참조.)
  53. 53)이 게송은 득(得, prāpti)과 성취(成就, samanvāgama)에 관한 6근ㆍ 6경ㆍ 6식의 관계를 분별한 것이다. 여기서 ‘득’이란 불상응행법의 하나로, 제법을 유정의 상속상에 획득하게 하는 원리이다. 아울러 성취란 이미 획득한 것을 상실하지 않는 힘을 말한다.(본론 권제4, p.119 이하에서 상론.)
  54. 54)이러한 3생의 유정은 처음으로 입태할 때[羯邏藍]에는 안근이 없으며, 그 후 6처위(處位)에 이르면서 점차적으로 획득하는데, 그 때에는 이미 안식을 성취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다시 식을 획득하는 일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4생 가운데 화생은 온갖 근을 단박에 획득[頓得]하기 때문에 제외하였다.
  55. 55)중유(中有)로서 위의 세 정려에 태어날 때에는 색계의 안근을 획득하는데, 거기에는 5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안식을 획득하는 일이 없는 것이다.
  56. 56)이는 위의 세 정려에 태어난 본유(本有)의 경우로서, 이 때 안근은 처음부터 성취되어 있기 때문에 다시 획득하는 일은 없으며, 또한 이러한 상태에는 식이 존재하지 않지만 초정려의 식을 빌려 일으키기 때문에(이를 借起識이라고 함) 이같이 분별한 것이다.
  57. 57)위의 세 정려에서 몰하여 욕계나 초정려에 태어날 때에는 이미 안근이 성취되어 있기 때문에 다시 획득하는 일이 없지만, 안식은 그 때 비로소 획득된다.
  58. 58)무색계에는 안근도, 안식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거기서 몰하여 욕계나 초정려의 범세에 태어날 경우 두 가지를 동시에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59. 59)엄밀히 말하자면 앞의 경우는 일찍이 획득하지 않았던 것을 지금 획득[獲]할 때의 안근과 안식의 관계였다면, 이 경우는 다만 획득하여 상실하지 않을 때, 다시 말해 성취(成就)할 때의 안근과 안식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즉 불상응행법의 하나인 득(得, prāpti)에는 획득(獲, prātilambha)과 성취(samanvāgama) 두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본론 권제4, p.192 참조.)
  60. 60)제1구는 안근을 획득하더라도 안식을 획득하지 않는 경우, 제2구는 안식을 획득하더라도 안근을 획득하지 않는 경우, 제3구는 양자 모두를 획득하는 경우, 제4구는 양자 모두를 획득하지 않는 경우.
  61. 61)6식은 아집(ahaṃkāra)의 의지(依止)가 되기 때문에 ‘아(我)’로 가설할 수 있는데, 그럴 경우 그러한 ‘아’의 소의가 되는 것(親近)을 ‘내적인 것’이라 하고, 소연이 되는 것[疎遠]을 ‘외적인 것’이라고 한다.
  62. 62)즉 앞(본론 권제1, 주62)에서 6식이 과거로 낙사한 것을 의계라 하고 이것만이 마음의 소의가 된다고 하였다.
  63. 63)여기서 ‘자종(自宗)’이란 비바사사(毘婆沙師) 즉 설일체유부의 종의를 말한다. ‘18계는 모두 삼세와 통한다’는 사실은 『대비바사론』 권제71(대정장27,p.367중:한글대장경120,p.484)에 ‘삼세각유십팔계상(三世各有十八界相)’에 근거한 것이다.
  64. 64)즉 법계가 의식의 대상으로서의 동분이 되면 일체법 즉 무변(無邊)의 의식을 낳게한다. 예컨대 어떤 성자가 ‘제법무아(諸法無我)’를 관하였을 경우, 그것은 삼세 일체법에 관한 것으로, 여기에는 그것과 구기(俱起)하는 다양한 심소와, 생(生) 등의 불상응행법이 수반된다. 그리고 의식자체를 포함한 그것들은 그 순간 동분이 되지 않지만, 다음 순간(제2찰나) 반성력에 의해 객관화됨으로써 마침내 일체의 대상은 법동분이 되는 것이다.
  65. 65)유식속불생법(구역 與識相應不生法, vijñānasamāyukta-)이란 식과 근이 모두 갖추어졌지만 연이 결여되어 끝내 생겨나지 않는 법을 말하며, 무식속불생법(구역 與識不相應不生法, avijñānasamāyukta-)이란 근만이 있고 식이 없기 때문에 끝내 생겨나지 않는 법을 말함.
  66. 66)의계 즉 마음은 이미 생겨난 이상 어떤 대상(소연)에 대해 작용한 것이기 때문에 동분이며, 따라서 필경(畢竟) 불생법만이 피동분이 된다.
  67. 67)향ㆍ미ㆍ촉은 감관과 직접 접촉하여야 알려지는 것[合中知]이므로 그 당사자만 알 뿐이지만, 색과 성은 그렇지가 않기 때문이다[離中知]. 이처럼 향ㆍ미ㆍ촉은 공동의 대상이 아니지만 세간에서는 가설적인 개념에 의지하여, ‘우리는 다 같이 이러한 향을 냄새맡고, 다 같이 이러한 미를 맛보며, 다 같이 이러한 촉을 느낀다’고 말하기도 한다.(『현종론』 권제3, 한글대장경200,p.78)
  68. 68)근ㆍ경ㆍ식 세 가지의 교섭이 원만하여 이른바 ‘동분’의 뜻을 각각 갖게 될 때 촉(觸)이 낳아지므로(三事和合觸), 그러한 촉을 ‘분’이라 이름한다는 뜻.
  69. 69)그러한 동분과 비교할 때 종류와 ‘분’이 동일하다고 함은, 말하자면 피동분과 동분은 동일하게 보는 것[同見]이며, 동등한 상[等相]이며, 동일한 처이며, 동일한 계이며, 서로의 근거가 되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속하는 것[相屬]이기 때문에 종류와 ‘분’이 동일하다고 한 것이다.(『현종론』 권제3, 앞의 책)
  70. 70)견소단과 수소단은 견도(見道:무루혜에 의한 4諦 관찰)와 수도(修道:선정을 통한 반복된 관찰)로 끊어지는 법이며, 비소단은 무위택멸처럼 끊어지지 않는 법을 말한다.(본론 권제19, p.862;권제23, p.1055 이하에서 상론)
  71. 71)88수면은 4제 각 행상(行相)에 미혹하여 생겨난 이지적 번뇌 즉 미리혹(迷理惑, 혹은 見惑)으로, 본론 권제19에서 상론된다. 구유법은 이러한 수면과 상응하는 심ㆍ심소와 구생하는 생(生) 등의 4상(相)을 말하며, 수행법이란 이러한 제법을 심상속 상에 획득하게 하는 득(得)을 말한다.
  72. 72)여기서 이생성은 성법(聖法)의 비득(非得)을 자성으로 삼는 자. 즉 이러한 이생성과 결정코 악취(지옥ㆍ아귀ㆍ축생)의 생을 초래할 만한 신ㆍ어업은 성도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에 유신견(有身見)처럼 견소단이 되어야 한다는 난(難). 이는 바사(婆沙)나 칭우(稱友)에 의하면 독자부(犢子部)의 난이지만, 『구사론기』에 의하면 경부(經部)의 난.
  73. 73)즉 유루선이나 무부무기(無覆無記)와 같은 불염오법과 제6 의근에 의해서가 아니라 안 등 전5근으로부터 생겨난 전5식과, 염오하거나 염오하지 않은 유루의 색법 따위는 결정코 견소단이 아니기 때문에 불염오 무기성에 포섭되는 이생성이나 신ㆍ어업 또한 견소단이 아니라는 뜻. 뒤에서 상론하고 있다.
  74. 74)신ㆍ어업은 형색(形色, 신체적 형태)과 어언(語言, 언어적 형태)을 본질로 하기 때문에 색법에 포섭된다.(본론 권제13 주13 참조.)
  75. 75)이생성은 불염오성이기 때문에, 전5식은 무분별이기 때문에, 신ㆍ어업은 무소연성(無所緣性)이기 때문에 4제의 이치에 미혹한 것이 아니며, 따라서 견소단이 아니라 수소단이다.
  76. 76)유신견 등의 5견이란 유신견(또는 薩迦耶見, 소의신을 실유라고 집착하는 견해), 변집견(邊執見, 斷ㆍ常 두 극단에 집착하는 견해), 사견(邪見, 인과의 도리를 부정하는 견해), 견취(見取, 그릇된 견해를 올바른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 계금취(戒禁取, 그릇된 계행을 올바른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를 말하는 것으로, 본론 권제19(p.867)이하에서 상론한다.
  77. 77)즉 다섯 가지 염오견은 유루이면서 번뇌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구름(번뇌)이 낀 한밤(유루) 중에 색상을 관찰하는 것과 같고, 세간의 정견은 유루이지만 번뇌가 없기 때문에 구름이 끼지 않은 한밤 중에 색상을 관찰하는 것과 같다. 또한 유학의 정견은 무루지를 획득하였으나 번뇌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구름이 낀 한 낮에 색상을 관찰하는 것과 같고, 무학의 정견은 더 이상 번뇌가 없기 때문에 구름이 끼지 않은 한낮에 색상을 관찰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78. 78)자성분별만을 본질로 하는 전5식과 상응하는 선혜(善慧)를 어떻게 세간의 정견에 포함시킬 수 있는가 하는 뜻의 물음. 여기서 ‘결탁(決度, saṃtīiraṇa)’은 확인 판단의 뜻이다.
  79. 79)유신견 등의 5견 이외 탐 등과 상응하는 혜나 의식상응의 혜를 제외한 그 밖의 혜, 안근을 제외한 이근(耳根) 등의 모든 근과 일체의 무부무기의 혜, 무학의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 그리고 혜 이외 그 밖의 법계소섭법(法界所攝法)은 심려 결탁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견’이 아니라는 뜻.(『현종론』 권제4, 한글대장경200,p.83 참조)
  80. 80)이하 앞에서 논의한 견(見)의 주체를 감관 즉 안근으로 볼 것인가, 의식 즉 안식으로 볼 것인가, 다시 말해 ‘본다’고 하는 사실을 관조[見]으로 규정할 것인가, 요별(了別)로 규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것으로, 전통적으로 전자를 근견설(根見說), 후자를 식견설(識見說)이라고 하며, 유부에서는 근견설의 입장을 취한다. 『대비바사론』 권제13(대정장27,p.61하)에서는 ‘견’의 주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설(異說)을 전하고 있다. 안식이 색을 본다는 식견설:존자 법구(法救, Dharmatrāta)의 주장. 안식과 상응하는 의식작용으로서 이해ㆍ간택력인 혜(慧)가 본다는 상응혜견설(相應慧見說):존자 묘음(妙音, Ghoṣa)의 주장. 안근과 안식이 화합하여 색을 본다는 화합견설(和合見說):비유자(譬喩者)의 주장. 두 개의 눈은 서로 떨어져 있어 동시에 작용하지 않으므로 하나의 안근이 색을 본다는 일안견설(一眼見說):독자부(犢子部)의 주장. 이에 대해 유부에서는 발식취경(發識取境)의 작용을 갖고 있는 두 개의 눈이 본다고 주장한다.(후술)
  81. 81)여기서 관조(ālocana)란 근이 거울과 마찬가지로 외계대상을 비추어 받아드리는 작용을 말함.
  82. 82)만약 ‘눈이 본다’고 한다면 그밖의 의식, 예컨대 이식(耳識) 등이 작용할 때에도 역시 동시에 작용하게 될 것이라는 뜻. 즉 유부에서는 두 가지의 의식이 동시에 생기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때문에 보는 작용과 듣는 작용은 동시에 일어날 수 없다. 그런데 만약 보는 것이 안식이 아니라 안근이라고 한다면 다른 하나의 식(識)이 의식의 영역을 차지하게 될 때에도 ‘본다’고 하는 작용은 일어날 수 있으며, 따라서 근견설은 자설(自說)을 위배하게 된다. 즉 보는 주체가 눈이라면 그것은 의식활동에 관계없이 동시존재하는 모든 대상을 항상 보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83. 83)예컨대 모든 톱이 항상 자르는 작용을 행하는 것은 아니며 현재 목수와 결합하여 자기 작용을 수행하고 있는 톱만이 자르는 작용을 행하듯이, 모든 눈은 항상 보는 것이 아니며, 안식과 공동하여 현재 자신의 작용을 행하고 있는 눈[同分眼]만이 보는 작용을 행한다는 뜻.
  84. 84)눈은 반드시 대상과 일정한 간격을 유지할 때 비로소 볼 수 있는 이중지(離中知) 즉 비지경(非至境)의 감관이기 때문에 합중지(合中知)의 피부처럼 대상과 직접 접촉할 필요가 없으며, 대상과 직접 접촉할 필요가 없다면 그것이 공간적 점유성을 지니든[有對] 지니지 않든[無對] 관계없다. 따라서 눈이 벽 뒤에 감추어진 대상을 보지 못하는 것은 그것의 유대성으로 인한 불접촉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이다. 이를테면 눈이 수정이나 유리 운모 물 등에 의해 방해받아도 그 뒤에 감추어진 대상을 보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안근이 유대성이기 때문에 감추어진 대상을 볼 수 없다고 한 근견가의 말은 성립할 수 없다는 뜻. 이는 식견가의 재난(再難)이다.
  85. 85)『잡아함경』 권제9(대정장2,p.64상). “眼是門, 以見色故. 耳鼻舌身意是門, 耳識法故.” 여기서 계경의 의미는 눈은 ‘본다’고 하는 사실의 구체적 근거[見所依]가 되기 때문에 눈을 통해 본다는 것이지 눈 자체가 본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므로 보는 주체[見者]는 눈을 근거로 하고 있는 안식이라는 것이다.
  86. 86)소리를 내게 하는 주체[能依]는 사람이지만 그 매개[所依]가 평상이기 때문에 ‘평상의 소리’라고 하듯이, 또는 나무를 자르는 주체는 사람이지만 그 근거가 도끼이기 때문에 ‘도끼가 나무를 자른다’고 하듯이 ‘의근이 능히 법을 인식한다’는 경문은 ‘인식[了別]’이라는 사실의 근거[所依]가 되는 의근에 대해 인식주체인 의식의 주체적 작용[能依業]을 설정한 것이라는 뜻.
  87. 87)참으로 애호하고 즐길만하다는 것은 이미 확인 판단(즉 요별)된 것으로, 그것은 마땅히 식의 작용이라는 경증.
  88. 88)앞의 『잡아함경』에서 눈은 바로 문(門)이라고 하였으므로, 그것은 다만 ‘견’의 방편[門, dvara]일 뿐이라는 뜻. 즉 색은 눈(안근)이 본 것이 아니라 안식이 그것을 방편으로 삼아 본 것으로, 방편 자체가 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89. 89)유부와 같은 범주론적 사유체계에 있어서 하나의 존재[法]는 오직 한 가지 본질과 작용을 갖기 때문에 보는 것 즉 견자(見者)가 식이라면 요별자를 반드시 따로이 설정해야만 한다. 즉 ‘견’이 마음의 감성적 작용이고 요별이 오성적 작용이라면 그 작용의 주체 또한 구별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부의 경우 안근의 본질은 관조이고, 안식의 본질은 요별로서, 각기 개별적 존재인 것이다.
  90. 90)유학의 정견(正見) 따위는 미지의 사실을 추구(推求) 추탁(推度)함이 있기에 ‘견’이라고도 하지만, 동시에 4제법을 간택하는 공능을 갖기도 한다. 여기서 ‘일부’라고 한 것은, 무학의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는 다만 혜일 뿐 ‘견’이 아니기 때문이다.
  91. 91)보광(普光)에 의하는 한 이 같은 물음은 근견가로부터 지적된 ‘하나의 존재가 두 가지 본질적 작용을 갖는 것은 불합리하다’에 대한 식견이사(識見異師)의 반증으로(그러나 法寶에 의하면 이는 독자부의 난이다), 그들에 의하면 안근은 보는 것[見者]이며, 안식은 보는 작용[見用]이다. 즉 보는 것은 눈이지만, 실제적으로 보는 작용을 수행하는 것은 안식이며, 그것은 바로 요별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여기서 편의상 작자와 작용을 차별하였지만, 초기불교이래 작자의 실재성은 부정되므로 ‘본다’고 하는 구체적 사실은 바로 안식에 소속되어야 한다는 것이 본 절의 취지이다.(『구사론기』 권제2 대정장41,p.50상)
  92. 92)『대비바사론』 권제73(대정장27,p.380상:한글대장경120,p.539). “謂世共說, 眼所受境名爲可見.”
  93. 93)즉 ‘본다’고 하는 구체적 사실은 식견가처럼 관조하고 요별하는 것으로 정의될 수 있겠지만, 분석론적 입장에서 본다면 ‘보는 것[見者]’은 어디까지나 안근이다. 그렇기 때문에 안근은 본다고만 할 뿐 인식(즉 요별)한다고는 하지 않는 것이다. 인식이란 오로지 식이 현전할 때만 가능하다. 그러나 식의 현전은 감관[根]과 대상[境]에 의한 부대적 상황일 뿐이므로 ‘인식[요별]’ 역시 ‘본다[見 즉 관조]’는 사실의 부대적 작용일 뿐이다. 마치 태양이 뜨면 저절로 낮이 되는 것처럼 감관과 대상 사이에 ‘본다’고 하는 사실이 성립하면 인식 즉 요별은 자연히 드러나게 된다는 뜻. 이는 근견가의 절충적 해석으로 이해된다.
  94. 94)이상의 근견가(根見家)와 식견가(識見家)의 논의에 대해 경부 즉 경량부(Sautrāntika)는 양자 파기의 중도적 입장을 취한다. 경량부에 의하면 대상[色境]이 생기하는 순간과 눈[眼根]이 작용하는 순간, 의식[眼識]이 일어나는 순간은 각기 시간을 달리하고 있어 동시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시간적으로 계기(繼起)하는 세 가지 존재 사이에 직접적인 작용관계는 이루어질 수 없으며, 실재하지 않는 작용을 놓고서 인식성립의 본질적 요소가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는 것은 마치 실재하지 않아 잡히지도 않는 허공을 쥐고 맞붙어 싸우는 것[摣掣虛空]과 같다. 즉 인식이 일어나고 있을 때에는 그 원인이 된 감관의 찰나, 외계대상의 찰나는 이미 과거하여 더 이상 존재하지도 작용하지도 않으며, 현재 존재하는 것은 오직 대상이 보여지고 있다고 하는 결과로서의 인식 그 자체[法] 뿐이다. 따라서 경량부에서는 인식을 유부에서처럼 동일 순간에 공존하는 감관과 대상, 그리고 의식의 상호작용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대상 즉 의식에 부과된 형상이 원인이 되고, 다음 순간 상속의 결과로서 인식이 생겨난다고 하는 인과의 관계로서 설명한다. 그리고 현재 존재하는 것은 오직 결과로서 드러나는 인식이라는 사실뿐이기 때문에 그것을 주관적 계기나 객관적 계기로 분석하는 것은 인간의 사유나 언어의 습관적 설정일 뿐이며, 인식 그 자체는 주관과 객관으로 나눌 수 없는 하나의 단일한 사실이라는 것이다. 이상 근견과 식견, 그리고 이에 대한 경량부의 논의에 대해서는 권오민,『유부아비달마와 경량부철학의 연구』(서울 경서원,1994) 제2부 제5장 「아비달마 인식론의 중도적 지양」을 참조할 것.
  95. 95)이하 앞의 ‘견론(見論)’에 부수된 방론(傍論)으로, 본 단의 주제인 일안견(一眼見)과 이안견(二眼見)의 문제를 비롯하여, 근과 경의 접촉[至] 불접촉 및 양적인 관계, 극미의 문제, 6식과 그 소의의 시간적 관계, 근이 소의가 되는 이유와 그에 따른 6식의 명칭, 그리고 근ㆍ경ㆍ식의 3계(界) 9지(地) 상에서의 관계 등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96. 96)왜 이 같은 논의가 필요한 것인가? 두 눈 가운데 한 눈을 막거나, 혹은 하나의 눈이 손상되었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다른 한 눈의 ‘견’의 공능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하나의 눈으로도 역시 능히 색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두 눈이 손상되지 않아 함께 뜨게 되면, 두 개의 안근이 동시에 색을 보게 되는데, ‘하나의 눈이 색을 본다’고 하는 뜻은 쉽게 이해될 수 있지만, ‘두 눈이 함께 본다’고 하는 사실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분별 해석하는 것이다.(『현종론』 권제4, 한글대장경200,p.85)
  97. 97)『발지론』 권제1(한글대장경176,p.10), “한 눈을 감고 색을 보면 부정식(不淨識:명료하지 않은 인식)이 일어나며 두 눈을 뜨고 볼 때 정식(淨識:명료한 인식)이 일어나기 때문에 두 개의 눈이 색을 본다.” 이에 따라 『대비바사론』 (권제13초)을 비롯한 모든 유부 아비달마에서는 이 같은 사실을 계승하고 있기 때문에 아비달마 제(諸) 대논사가 모두 말하고 있다고 설하는 것이다.
  98. 98)양쪽 눈을 뜨고 한쪽의 눈등에 손가락을 갖다대어 반쯤 뜨게되면 하나의 달이 둘로 보이기도 하지만, 만약 한쪽을 막고 그렇게 할 경우 두 개의 달도 보이지 않는다는 뜻.
  99. 99)즉 안식의 소의가 두 가지라면, 능의인 안식도 반분되어 역시 두 가지가 되어야 하고, 그럴 경우 동일찰나에 두 가지 인식이 동시에 생겨나야 하는 모순을 범하게 된다. 그러나 그 같은 일은 있을 수 없으니, 식은 색처럼 방처(方處, 부피)를 갖는 것이 아니기에 분할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비바사론』 권제13(대정장27,p.61하)에 의하면 두 개의 눈은 비록 서로 떨어져 있어 동시에 작용하지 않고, 작용 역시 서로 다르지만 그 작용이 빠르게 전이하기 때문에 보는 근거는 달라도 하나의 인식을 일으키는 것으로, 마치 몸의 두 팔이 서로 떨어져 있어도 어떤 사물과 접촉할 때 동시에 감촉하여 하나의 신식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100. 100)이는 승론(勝論, Vaiśeṣika)학파의 지경설(至境說)을 논파한 것이다. 즉 승론에서는 안근은 화(火)를 본질로 하여 멀리 빛을 펼쳐 대상에 이르고, 이근의 경우 소리가 공중을 날아와 귀에 들어온다고 주장하였는데, 그럴 경우 수정자(修定者)가 천안ㆍ천이를 수생(修生)하더라도 천계의 그러한 경계는 너무나 멀고 피차의 성질이 다르기 때문에 취할 수 없다는 뜻.
  101. 101)이는 논주 세친의 답이다. 즉 자석은 직접 접촉하지 않은 철을 끌어당기지만 모든 철을 끌어당기지 않는 것처럼 안근 등도 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모든 대상을 취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
  102. 102)무간(無間, nirantaratva)은 근과 경 사이에 어떠한 간격도 없이 절대적으로 근접한다는 뜻으로, 그것이 바로 ‘직접 접촉한다[至]’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럴 경우 이러한 유색근을 조성하는 원자, 즉 극미 상호간의 접촉 불접촉의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 할 것인데, 이하 이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103. 103)결론적으로 말해 정통유부인 카슈미르의 비바사사(毘婆沙師)들은 극미의 직접적인 상호접촉을 부정한다. 왜냐 하면 만약 극미가 결합한다고 할 때, 그것은 부분적 결합 아니면 전체적 결합이다. 하나의 극미는 통상 사방상하 6개의 극미에 둘러쌓여 최초의 결합을 시작하는데, 그럴 경우 극미는 6부분을 갖게 된다. 그러나 극미라고 하는 것은 더 이상 부분을 갖지 않는 것[無方分]이기 때문에, 그 같은 부분적 결합은 불가능하다. 반대로 극미는 너무나 미세하여 공간을 점유하지 않는다고 하여 7개의 극미가 동일공간에서 전체적[遍體]으로 접촉한다면 결국 구체적인 물질도 하나의 극미 크기 밖에 되지 않을 뿐더러 각 극미의 본질 자체가 뒤섞여 버리고 만다. 따라서 유부에서는 제 극미가 절대적으로 근접하여 그 사이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無間]을 접촉이라 이름하고, 그 실재성을 인정하였던 것이다.
  104. 104)제 극미가 절대적으로 근접하여 어떠한 간격도 없게 될 때 소리가 나게 된다. 그러나 만약 제 극미가 혼연의 일체가 되어버려[遍體觸] 그 사이에 간격이 없다면 도리어 어떠한 소리도 나지 않게 될 것이다는 뜻.
  105. 105)여기서는 제 극미간의 견인력을 풍계에서 구하고 있다. 그런데 앞(권제1)에서 풍계는 운동의 성질[動相]과 물체를 동요하게 하는 작용[長用]을 갖고있다고 하였고, 물체를 인섭(引攝)하여 흩어지지 못하게 하는 작용[攝用] 내지 물체를 능히 보지 저항하게 하는 작용[持用]은 각각 수대(水大)와 지대(地大)의 것이었다.
  106. 106)겁이 허물어질 때는 이 세계가 파괴되는 괴겁(壞劫)의 시기를 말하고, 겁이 이루어지는 때는 이 세계가 성립하는 성겁(成劫)의 시기를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분별세품」 권제12(p.553 이하)에서 상론한다.
  107. 107)이는 유부 이사(異師)의 주장이다. 여기서 화합색은 극미소성(極微所成)의 색. 즉 제 극미 상호간에는 접촉하지 않지만 그러한 극미의 집적에 의해 조성된 분할할 수 있는 현상의 구체적인 색은 상호 접촉한다는 설. 이 같은 견해는 바사(婆沙)에는 보이지 않으나, 『유식이십론(唯識二十論)』 (대정장31,p.76상)에서는 유부정설로 설하고 있다. “迦濕彌羅國毘婆沙師言;非諸極微有相合義, 無方分故 ……但諸聚色有相合理, 有方分故.”
  108. 108)『대비바사론』 권제132 (대정장27,p.184상, 한글대장경123,p. 145).
  109. 109)온갖 ‘접촉되지 않은 존재[非觸物, 극미]’는 ‘접촉되지 않은 것’을 원인으로 삼아 생겨났다고 해야 할 것인가, 바로 ‘이러한 접촉된 것[是觸, 화합물]’을 원인으로 삼아 생겨났다고 해야 할 것인가?
  110. 110)이하 상기 물음에 대해 4구분별로 답하고 있는 바사(婆沙)의 문장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이는 제1구로서, 화합물(이러한 접촉된 것)이 흩어져 극미(접촉되지 않은 것)로 환원될 때가 ‘이러한 접촉된 것’을 원인으로 ‘접촉되지 않은 것’이 생겨나는 경우이다.
  111. 111)향유진(또는 隙遊塵)은 1극미의 7의 7승으로, 이를테면 문틈[隙]으로 들어온 광선에 비쳐 겨우 눈으로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티끌을 말하는데(본론 권제12, p.550 주5 참조), 이러한 미세한 색취[細聚]는 다시 그러한 미세한 티끌을 낳기도 하고, 혹은 더욱더 미세한 것을 낳기도 하여 전후 차별은 있을지라도 다 같이 미세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접촉되지 않은 것을 원인으로 하여 접촉되지 않을 것을 낳는 것으로 분별한 것이다.
  112. 112)세우(Vasumitra), 화수밀(和須蜜) 또는 바소밀다라(婆蘇蜜多羅)로도 음사됨. 십 수명의 세우가 전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설일체유부의 교의를 집대성한 바사(婆沙)의 4대평자 중 일인. 여기서의 그의 주장은, 모든 극미는 순간적으로 출현하여 소멸(찰나생멸)하는 것이기 때문에, 극미가 출현하여 접촉하였다면 그것은 이미 두 찰나에 걸친 것으로, 극미의 접촉은 시간적으로도 불가능하다는 뜻.
  113. 113)대덕(Bhadanta). 이는 위대한 덕행이 있는 사람이란 뜻으로, 특정의 개인에 대한 존칭의 보통명사인지 또는 고유명사인지는 불명. 『대비바사론』에는 대덕의 설이 지금 여기서의 설(권제132, 한글대장경123,p.145)을 포함하여 116회에 걸쳐 언급되고 있는데, 목촌태현(木村泰賢)은 그를 각천(覺天, Buddhadeva)으로, 궁본정존(宮本正尊)은 법구(法救, Dharmatrāta)로 보고 있다. 지금 여기서의 설은 접촉이란 다만 그 중간에 일 극미도 들어갈 여지도 없는 절대적 근접[無間]을 개념적으로 가설(假說)한 것일 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
  114. 114)이는 논주 세친의 평석이다. 즉 그는 ‘접촉’이란 다만 개념상의 설정일 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대덕의 설을 적극 수용하여 실재론에 근거한 앞의 제설을 비판하고 있다. 즉 유부에 의하는 한 제극미는 서로 접촉하지 않지만, 화합색의 상호접촉을 인정하게 되면 결국 그것을 조성한 극미의 상호 접촉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후술) 그리고 만약 제 극미가 서로 접촉하지 않는다면 그것들 사이에는 마땅히 간격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며, 극미들 사이에 간격이 있어 가운데가 비었다면 5근ㆍ5경의 유색근은 공간을 점유하여 타(他)를 장애하며, 따라서 불가침투성(sapratightva, 礙性 혹은 有對)라고 하는 유부종의에 위배되고 만다. 나아가 제 극미의 접촉은 절대적 근접[無間]으로, 그것들 사이에 다른 어떤 하나의 극미도 들어갈 수 없는 극점(極點)이라 하여 불가침투성을 고수한다면 극미보다 작은 극점을 설정함으로 해서 극미는 더 이상 극미가 아닌 것이다. 이 같은 논의는 바로 유부의 ‘촉’의 실재성에 대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115. 115)화합색이 변애로 정의된다면 그 조성원자인 극미도 변애하는 것으로 정의되어야 하듯이, 화합색의 상촉(相觸)이 인정된다면 그것을 조성한 극미 또한 상촉하여야 한다는 난(難).
  116. 116)이는 이상의 접촉 불접촉에 관한 논주 세친의 총평이다. 유부의 경우 극미 무방분(無方分)설을 취하지만 경량부에서는 유방분설을 취한다.(『유부아비달마와 경량부철학의 연구』, p.160-168 참조) 그럴 경우 유방분이라면 더 이상 분석할 수 없는 극소의 색인 극미에도 방분이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일 방분이 서로 접촉하면 다른 방분은 접촉하지 않으므로 극미가 서로 접촉한다고 하든 하지 않는다고 하든 문제될 것이 없다. 즉 이미 유방분이라고 하였으므로 접촉함으로써 극미가 분석될 수 있다는 논란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극미가 무방분이라고 주장할지라도 문제되지 않으니, 원래 방분이 없다고 하는 극미가 서로 접촉한다(즉 無間觸)고 설해도 거기에 방분을 갖는다는 의미는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요컨대 논주 세친의 뜻은 근ㆍ경 화합이라는 인식의 문제에 있어 접촉 불접촉의 논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117. 117)본 단의 주제는 인식[見]의 과정상에서 근과 경의 양적관계에 대한 것으로서, 예컨대 눈이 큰 산을 볼 경우, 눈의 극미와 같은 크기[等量]의 대상을 각각으로 취하여 빠르게 전이함으로서 전체로서의 큰 산을 보게 되는 것인지, 아니면 눈에 자재하는 작용이 있어 대상의 크기에 관계없이 취하는 것인지에 대한 문제이다.
  118. 118)구름이 일으키는 큰 소리란 천둥소리를 말함. 범문에는 ‘구름의 소리(meghaśabda)’로 되어 있다.
  119. 119)‘전설’은 곧 논주 세친의 불신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보광(普光)의 『구사론기』에 의하면 이는 서방의 고덕(高德)이 전하는 의가(醫家)의 설로서, 혀 가운데 설근극미가 없는 지극히 작은 한 지점이 있으니, 그곳이 바로 사혈(死穴,즉 末摩, marman)이라는 것이다.
  120. 120)즉 유부에 의하면 안(眼) 등 제근의 극미는 동시작용[同分]하지만, 신근의 경우 신근과 그 대상이 되는 각각의 극미에 간극(間隙)이 있어 동시에 신식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에 동시작용하지 않는다. 예컨대 눈의 극미는 하나만 작용하여도 전체의 극미가 동시에 작용하지만, 신체의 경우 손끝에 느낌이 있다해서 발끝에도 동일한 느낌이 있는 것은 아니며, 또한 신체 어느 한 극미가 손상되어도 전체의 극미가 손상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경량부는 신근의 극미 역시 동시에 작용한다고 하였다[身根遍發識說]. 그래서 논주 세친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극열지옥에서 신근 전체가 동분의 상태에 놓이게 될 것이고, 결국 신체는 전체로서의 통일을 유지하지 못하여 허물어져 버리고 말 것이다’는 비바사사의 논파를 빌려 논설하였지만, 그것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전설’이라 한 것이다. 이는 결국 앞에서 설한 극미배열[安布差別]에 관한 문제로서, ‘처(處)’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경량부로서는 제극미가 실제적으로 접촉 배열되든, 떨어져 배열되든 무방한 일인 것이다.
  121. 121)즉 1극미는 5식의 소의ㆍ연이 될 수 없고, 반드시 다수의 극미가 취집하여야 비로소 볼 수 있는 것[可見]이 된다. 다만 1극미는 혜안(慧眼)에 의해 알려질 뿐이다.
  122. 122)6식신이 무간에 멸한 것이 의근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과거의 6식이 의근이기 때문에 의식은 오로지 과거 의근을 소의로 삼을 뿐이다.
  123. 123)여기서는 4구의 내용이 생략되어 있다. 제1구는 안식의 소의성이 되면서 등무간연이 되지 않는 것. 구생의 안근은 안식의 소의성이지만 그 자체 심심소가 아니기 때문에 등무간연이 되지 않는다. 제2구는 안식의 등무간연이 되면서 소의성이 되지 않는 것. 즉 과거로 멸해버린 심소는 다음 찰나의 그것에 등무간연이 되지만 소의성은 되지 않는다. 제3구는 안식의 소의성이 되면서 동시에 등무간연도 되는 것. 과거인 의근은 안식의 소의성이 되면서 다음 찰나의 의식의 등무간연이 된다. 제4구는 안식의 소의성도 되지 않으면서 등무간연도 되지 않는 것. 무위나 색 등의 5경, 불상응행법은 소의성이 아니며(다만 소연성일 뿐), 또한 심법도 아니기 때문에 등무간연도 되지 않는다.
  124. 124)북소리는 손과 북이 합하여 생겨나지만 북은 소리의 뛰어난 소의이고 불공인(不共因)이기 때문에 ‘손소리’가 아닌 북소리라고 이름하는 것이며, 보리의 싹은 보리씨앗과 땅 수분 온도 등의 조건에 의해 생겨나지만 그 주요원인에 따라 보리싹이라고 이름한다는 뜻.
  125. 125)이 단에서는 인식의 문제와 관련하여 3계(界)ㆍ9지(地) 상에서의 소의신ㆍ근ㆍ경ㆍ식 네 가지의 관계를 분별하고 있다. 즉 유부에 의하면 욕계에는 18계 전부가 있지만, 색계 초선에 이르면 향ㆍ미와 비식ㆍ설식이 없으며, 제2선 이상 제4선에서는 앞의 네 가지 이외 안ㆍ이ㆍ신 식이 없으며, 다시 무색계에 이르면 앞의 15계가 부재하고 오로지 의ㆍ법ㆍ의식의 3계 만이 남게 된다. 그런데 하지(下地)에 있더라도 선정지(智)나 천안ㆍ천이통에 의해 상지를 인식할 수 있으며, 상지에서도 하지의 인식이 가능하다. 그럴 때 바로 이 같은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126. 126)소의신은 욕계에 있으면서 욕계의 눈으로써 욕계의 색을 보는 경우.
  127. 127)욕계의 눈으로써 색계의 천안을 얻어 색계의 색을 보는 경우.
  128. 128)색과 안식이 안근과 등지라는 것은, 소의신은 욕계에 있으면서 욕계의 안근으로써 욕계의 색을 보는 경우이며, 하지라는 것은 제2정려의 안근으로써 초선의 색을 보는 경우이다. 이 때 색과 안식은 초정려에 속하고, 안근은 제2정려에 속한다.
  129. 129)하지의 안근은 거친 색[麤色]을 보는데 익숙하여 상지의 미세한 색[細色]에 대해서는 ‘견(見)’의 공능이 없으며, 또한 하지의 안근은 뛰어난 작용을 갖고 있지도 않다. 그리고 상지는 자신의 수승한 안근을 갖으며, 하지에 대해 자신의 안식을 갖는다. 그러므로 하지의 안근은 상지의 식에 소의가 되지 않는 것이다.(『현종론』 권제4, 한글대장경200,p. 97)
  130. 130)등지는 욕계의 안식으로써 욕계의 색을 보는 경우이며, 상지는 제2정려의 천안을 획득하고 초정려의 안식을 빌려 제2정려의 색을 보는 경우(이 때 색은 제2정려에 속하고, 안식은 초정려에 속하기 때문에 색은 식의 상지임)이며, 하지는 초정려의 안식으로써 욕계의 색을 요별하는 경우이다.
  131. 131)왜냐 하면 대개 ‘분(分:작용)’이 동일하기 때문이며, 향ㆍ미에 대한 두 가지의 식(즉 비식과 설식)은 오로지 욕계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며, 비근과 설근은 오로지 직접 접촉한 대상[至境]만을 취하기 때문이다.(『현종론』 권제4,한글대장경200,p.98)
  132. 132)제2정려 이상에서 태어나 초정려의 식신을 빌려 상지의 촉경을 느낄 경우, 식신은 신근과 촉경보다 하지임.
  133. 133)소의신이 초선에 태어나 초정려에 들어 초선의 법경을 관할 때는 네 가지는 모두 동일한 지에 존재한다. 그러나 소의신이 욕계에 있으면서 초선에 들어 욕계의 법경을 관할 때, 제1념(念)은 소의신도 의근도 법경도 욕계에 존재하지만 의식만은 초선에 존재하며, 제2념 이후에는 소의신과 법경은 욕계에, 의근과 의식은 초선에 존재한다.
  134. 134)아비달마의 여러 대논사가 설한 것이란 『발지론』(권제14,한글대장경176,p.324)과 『대비바사론』(권제142, 한글대장경123,p.374)을 말하는 것으로, 유부 아비달마에서는 전통적으로 22근을 설정함에 있어 무소연의 색법을 먼저 설하고, 그 후에 의근이나 낙(樂)ㆍ희(喜) 등 유소연의 심ㆍ심소법을 설하고 있다.
  135. 135)뒤의 세 가지란 미지당지근(未知當知根)ㆍ이지근(已知根)ㆍ구지근(具知根)의 3무루근으로서, 무루지의 본질이다. 즉 첫 번째는 견도위의 무루지이고, 두 번째는 수도위의 무루지, 세 번째는 소작이판(所作已辦) 즉 무학위의 무루지이다. 그런데 이러한 세 가지 무루근은 의(意)ㆍ희(喜)ㆍ낙(樂)ㆍ사(捨)ㆍ신(信) 등의 5근을 본질로 하여, 이 중 의근은 법계에 포섭되지 않기 때문에 ‘일부’라고 한 것이며, 나아가 뒤에서 그 일부가 의식에 포섭된다고 설하고 있다. 유부 아비달마에서는 이를 다른 여러 근과 함께 22근으로 정리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3, p.111 이하를 참조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