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歷代三寶紀卷第二

ABC_IT_K1055_T_002
031_0485_c_01L
역대삼보기 제2권
031_0485_c_01L歷代三寶紀卷第二帝年次前漢新王後漢


비장방 지음
오준호 번역
031_0485_c_02L開皇十七年 翻經學士臣費長房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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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년 ②

제년(帝年)의 두 번째를 말해 보자. 유방(劉邦)의 자는 계(季)이고, 패군(沛郡)의 풍(豊) 지역 사람이다. 그 어머니인 온(媼)이 큰 못에서 쉬고 있을 때 꿈에 신(神)과 교감하여 계를 낳았다. 머리는 용의 얼굴을 했고, 이마는 넓고 평평했다. 관후하고 인자하며 도량이 컸고 아름다운 수염을 지녔으며, 사타구니와 넓적다리 사이에 72개의 검은 점이 있었다. 진(秦)나라의 포악함으로 인해서 그 접혔던 날개를 펼쳤고, 이윽고 강성한 초나라를 병탄함에 드디어 구름의 높고 큰 기운을 떨쳤으니, 전후로 모두 72번의 전투를 거치고야 천하가 마침내 평정되었다. 검은 점의 감응과 그 상서로움이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원래 멀리 주(周)나라를 계승하였기에 이로 인하여 한(漢)이라고 칭하였고, 함양(咸陽)을 장안(長安)으로 개칭하고 도읍을 삼았다. 개벽하여 삼황오제(三皇五帝) 하(夏)ㆍ은(殷)ㆍ주(周)ㆍ진(秦)으로부터 문제(文帝)ㆍ경제(景帝) 전까지는 모두 제왕의 명호로 연도를 표시하고 별다른 연호를 세우지 않았는데, 무제(武帝) 때에 이르러 비로소 연호를 제정하여 건원(建元)이라고 하였다.
원수(元狩:한나라 무제 때의 연호) 2년(B.C. 121)에 곽거병(霍去病)이 흉노를 토벌하였는데, 거연산(居延山)을 지나다 휴도왕(休屠王)을 사로잡아, 황금으로 만든 사람의 형상[金人]을 얻었다. 그 것을 대신(大神)으로 섬겨서 궁전에 나란히 배치하여 향을 사르러 예를 올렸는데, 이것이 바로 불상이 처음 전해진 일이다.
3년에 곤명지(昆明池)를 팠는데, 밑바닥이 모두 새까만 먹 같은 재였다. 무제가 이 일을 동방삭(東方朔)에게 물었다. 동방삭이 답하여 아뢰기를 “신이 알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폐하께서는 서역의 호인(胡人)을 찾아가 문의하셔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후에 장건(張騫)이 대하국(大夏國)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서야 한나라는 비로소 신독국(身毒國)이 존재함을 알았다.
또한 평제(平帝) 때에 대부(大夫)인 유향(劉向)은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전적(典籍)을 열람하는데, 때때로 불경이 있다는 내용을 보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열선전(列仙傳)』을 편찬하면서 “장서(藏書)를 얻고 태사(太史)를 두루 찾아가 열선도(列仙圖)를 비로소 편찬하니, 육대(六代)로부터 오늘에 이르도록 7백여 사람인데, 내가 허실을 점검하여 보니 정확히 백마흔여섯 사람이었다. 그 가운데 일흔네 명이 이미 불경에 나온다”고 하였다. 이로써 추정한다면 어찌 『한시불경목록(漢時佛經目錄)』과 『고록(古錄)』ㆍ『구록(舊錄)』 두 기록과 『도안록(道安錄)』에 실린 열두 현자 등 경(經)의 예가 이것이 아니겠는가? 나머지 단지 일흔두 사람이 있을 뿐으로 『열선전』을 만든 것은 박식한 이가 그 대륜(大倫)을 본 것이라 하겠다. 주나라 때에 불교경전이 유포된 지 오래였으나, 정식(情識)이 미흡하여 귀의하여 믿는 이들이 희소했음을 알 수 있다.
진(秦)이 비록 경전을 태워 없애 버렸으나 한나라가 다시 부흥시켜 출간하였다. 그러므로 유향으로 하여금 장서를 찾아보게 한 것이다. 다시 『열선전』에는 “또한 애제(哀帝) 때 원수(元壽) 연간에 경헌(景憲)이 대월지국에 사신으로 가서 불경을 받아 왔다”고 하였다. 유향이 찾은 것을 징험하면 바로 실제의 기록이다.
왕망(王莽)의 자는 거군(巨君)이고, 원성(元城) 사람으로, 한나라의 대사마(大司馬)가 되어 평제(平帝)를 보필하였다. 원시(元始) 5년 을축(乙丑, 5)에 황제가 붕어하자, 왕망은 선제(宣帝)의 증손자[玄孫]인 영(嬰)을 세워 유자(孺子)라고 호칭하고, 왕망은 승상이 되어 3년을 섭정하였으니, 실제로는 15년이고, 전체적인 햇수로는 18년이지만, 실은 17년에 그친다. 왕망은 경제(景帝)의 제7세손이고 자(字)가 성공(聖公)인 유현(劉玄)에게 멸망당했다. 다시 시원(始元)이라 하였으나, 유현은 즉위한 지 2년 만에 다시 적미(赤眉)에게 죽임을 당했다.
유수(劉秀)의 자는 문숙(文叔)이고, 고조의 9세손이다. 장사(長沙)에서 왕의 뒤를 이을 것으로 정해졌는데, 남양의 백수향(白水鄕)에 거처하였다. 아버지가 제양령(濟陽令)을 지냈으며, 유수가 태어날 때 고을 가운데서 붉은 광명의 상서로운 상이 있었다. 이 해에는 곡식이 풍성하여 한 포기에서 아홉 개의 이삭이 나와서 이로 인해 수(秀:무성하다)라고 이름지었다. 코가 높았고 눈매가 뚜렷했으며, 입이 크고 눈썹이 길었으며, 수염이 아름다웠다. 성품이 착하고 어질며 자애로웠다. 남양에서 흥기하여 적미(赤眉)를 소탕하여 제거하고 마침내 천하를 평정하였다. 이가 바로 후한의 광무제(光武帝)이다.
도읍을 낙양으로 옮겼고, 연호를 건무(建武)로 하였다. 세간의 옛말을 듣건대, 광무가 남양에서 흥기하자, 남양에는 천박한 선비가 없어졌다고 하였으니 언제나 이를 허망한 소리라고 여겼는데, 지금 경에서 설해진 것을 보니 석가모니께서 천축에 출현하시자, 천축에 성인이 많아졌다고 하였다. 바야흐로 이를 징험하면 진실이라 하겠다.
명제(明帝) 때인 영평(永平) 7년에 이르러 명제가 홀연히 신이한 꿈을 꾸고 깨어나 기뻐하면서 사신에게 서쪽으로 행차하도록 명하였다. 이로 인하여 마음에 새겨두고 잊지 않고, 뜻을 복된 경계에서 노닐어 언제나 시간이 날 때마다 아우인 동평왕(東平王)의 처소에 가서 물었다.
“가정생활에 있어서 어떤 것이 가장 즐거운 것인가?”
동평은 몸이 굉장히 커서 허리띠의 길이가 10위(圍)에 이르렀는데, 바로 대답하여 아뢰었다.
“선을 행하는 것이 가장 즐거운 것입니다.”
왕이 이를 칭찬하여 말하였다.
“이 말은 대단히 훌륭하다. 족히 부왕의 중요한 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
후에 사신이 돌아오자 바로 명을 내려 경전을 번역하여 펼치도록 하였으니, 이로부터 근본이 발원하여 지금에 이르도록 흐르고 있다. 법의 바다는 무궁하고 현묘한 가르침의 강물은 마르지 않는다. 전한ㆍ후한 전체와 신왕(新王)에 미치도록 모두 스물여섯명의 임금이고, 그 기간은 425년이다. 제세(帝世)와 동서경(東西京)1)을 기록하였다.
031_0485_c_03L帝年次者劉邦字季沛郡豐人母媼息于大澤夢與神交感而生季首龍顏額隆准寬仁大度美鬚髥左股髀閒有七十二黑子因託暴秦鼓其潛翼旣呑强楚遂奮雲氣前後凡經七十二戰天下乃定黑子之應其瑞在茲旣遠承周因爾稱漢改咸陽曰長安而都之自從開闢三皇五帝秦迄文景前竝以帝王摽年無別立至武帝世始製年名稱建元云狩二年霍去病討匈奴過居延山休屠王獲其金人以爲大神列置於燒香禮之此卽像初至三年鑿昆明池遍於下際悉是灰墨帝以其事問東方朔朔奉答云非臣所知陛下可訪西域胡人其後張騫使大夏還漢始知有身毒國又平帝世大夫劉向自稱余覽典籍往往見有佛經及刪列仙傳云得藏書緬尋太史創撰列仙圖自六代迄到于今七百餘人向撿虛實定得一百四十六人其七十四人已見佛經推此豈非漢時經目及古舊二錄道安所載十二賢者經例是所餘止有七十二人爲列仙此蓋博識睹其大倫將知周時久流釋典情識未洽歸信者稀秦雖爇漢復興出故令劉向搜藏書見更列仙傳云又哀帝世元壽年中景憲使於大月支國受得浮啚經驗向所便實錄矣王莽字巨君元城人漢大司馬翼輔平帝元始五年乙丑帝崩莽立宣帝玄孫嬰號稱孺子爲丞相居攝三年卽眞十五年通數十八年實止十七載莽爲景帝第七世孫劉玄字聖公所滅稱更始元立二年復爲赤眉所殺劉秀字文叔高祖九世孫長沙定王後居乎南陽之白水鄕父爲濟陽令生秀於縣中有赤光之瑞是歲嘉穀一莖九穗名爲秀隆準日角口大眉長面美髭性善仁愛起於南陽除蕩赤眉定天下是爲後漢光武帝焉徙都洛號年建武聞昔世語光武起南陽南陽無賤士常謂此虛誕見今經說釋迦出天竺天竺多聖人方驗斯眞至明帝世永平七年忽感神夢已歡悅命使西行因爾宅心遊志福境嘗從容睱問弟東平王處家居何最樂東平瑰偉腰帶十圍卽奏對爲善最樂帝稱之曰此言甚大可以副王之腰腹後使廻還仍詔宣源發自此流注達今法海無窮河靡竭前後兩漢通及新王合二十六君四百二十五載紀錄帝世東西京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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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前漢)
고제(高帝, B.C. 206~195)12년, 장안을 도읍으로 삼다.
혜제(惠帝)7년
여후(呂后)의 섭정8년
문제(文帝)23년
경제(景帝)16년
무제(武帝)54년
소제(昭帝)13년
선제(宣帝)25년
원제(元帝)16년
성제(成帝)26년
애제(哀帝)6년
평제(平帝)5년
신(新)
왕망(王莽)17년간 장안을 다스리다.
갱시제(更始帝)2년간 장안을 다스리다.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23년, 낙양을 도읍으로 삼다.
명제(明帝)18년, 10년간 역경(譯經)을 하다.
장제(章帝)13년
화제(和帝)17년
상제(殤帝)1년
안제(安帝)19년
순제(順帝)19년
충제(沖帝)1년
질제(質帝)1년
환제(桓帝)21년
영제(靈帝)22년
헌제(獻帝)30년
전한(前漢)
을미고제(高帝) 원년(B.C. 206):유(劉)씨로 이름은 방(邦)이고, 자는 아계(阿季)이며, 요(堯)의 후예이다. 12년간 다스렸다. 장안(함양)을 도읍으로 삼았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지 405년이 지났다.
병신 2년
정유 3년
무술 4년
기해 5년
경자 6년
신축 7년:함양(咸陽)이란 이름을 장안(長安)이라 고치다.
임인 8년
계묘 9년
갑진 10년
을사 11년
병오 12년
정미혜제(惠帝) 영(盈) 원년(B.C. 194):고제(高帝)의 아들로 7년간 통치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지 415년이 지났다.
무신 2년
기유 3년:봄에 장안 6백 리에 걸쳐 남녀 4만 6천 명을 징발하여 장안의 옛 성의 서쪽을 축성하여 30일 만에 마치다. 6월에 다시 제후들이 거느린 12만 명을 징발하여 남쪽을 축성하였다.
전한
경술 4년
신해 5년:정월에 다시 6백 리의 남녀 14만 5천 명을 징발하여 북쪽 면을 축성하였는데, 30일 만에 마쳤다. 여름에 다시 12만 5천 명을 징발하여 동쪽 면을 축성하여 30일 만에 마쳤다. 가을인 9월에 장안성의 동서남북 네 면 모두를 수리하여 마쳤다.
임자 6년
계축 7년
갑인여후(呂后) 원년(B.C. 187):고제(高帝)의 부인으로 8년 동안 섭정하였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지 422년이 지났다.
을묘 2년
병진 3년
정사 4년
무오 5년
기미 6년
경신 7년
신유 8년
임술문제(文帝) 항(恒) 원년(B.C. 179):고제의 서자(庶子)로, 23년간 통치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지 432년이 지났다.
계해 2년
갑자 3년
을축 4년
병인 5년
정묘 6년
무진 7년
기사 8년
경오 9년
신미 10년
임신 11년
전한
계유 12년
갑술 13년
을해 14년
병자 15년
정축 16년
무인 후원(後元) 원년
기묘 2년
경진 3년
신사 4년:『문수사리반니원경』에서는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450년이 되면 문수사리가 설산에 이르러 5백명의 선인(仙人)을 위하여 12부의 경전을 설하고 나서 다시 본래 태어난 땅에서 열반에 들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5월에 관청에 소속되어 있던 노비들을 크게 사면하여 서민으로 만들었다.
임오 5년
계미 6년
갑신 7년
을유경제(景帝) 계(啓) 원년(B.C. 156):문제(文帝)의 아들로, 16년간 통치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지 454년이 지났다.
병술 2년
정해 3년
무자 4년
기축 5년
경인 6년
신묘 7년
임진 중원(中元) 원년
계사 2년
갑오 3년
을미 4년
병신 5년
전한
정유 6년
무술 후원(後元) 원년
기해 2년
경자 3년
신축무제(武帝) 철(徹) 건원(建元) 원년(B.C. 140):경제(景帝)의 아들로, 54년간 통치했다. 이로부터 연호를 세우기 시작했으니, 건원(建元) 원년(元年)이다. 동방삭이 황제께 글을 올리고 스스로 조정으로 나아갔으니, 그때 나이 22세였다. 백성의 나이가 90세 이상이 되면, 그 자손의 부역과 조세 의무를 면제해 주고 그들로 하여금 모시고 부양하게 하였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지 470년이 지났다.
임인 2년:무릉읍(茂陵邑)을 설치하여 군(郡)을 옮기고, 나라의 호걸들을 그곳에 살게 하였다. 백성들을 이주시키고 돈 20만 전(錢)과 전답 2경(頃)을 하사하였다.
계묘 3년
갑진 4년
을사 5년
병오 6년
정미 원광(元光) 원년(B.C. 134)
무신 2년
기유 3년
경술 4년
신해 5년
임자 6년:『외국전(外國傳)』에서는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후 480년에 가리난타(呵利難陁)라고 하는 신통력이 있는 아라한이 있었다. 그는 국왕의 아들로서, 우장국(優長國)의 동북쪽에서 우두전단미륵상(牛頭旃檀彌勒像)을 조성하였는데, 높이가 여덟 길:丈이나 되었다. 솜씨가 뛰어난 장인 3명을 도솔천으로 데리고 올라가 실제의 미륵을 뵙게 한 후에 조성하였으니, 매우 신이한 영험이 있었다”고 하였다.
계축 원삭(元朔) 원년(B.C. 128)
갑인 2년
전한
을묘 3년
병진 4년
정사 5년
무오 6년
기미 원수(元狩) 원년(B.C. 122):10월에 황제가 옹(雍) 지역에 행차하여 고라니와 유사한 발굽이 다섯 개인 하얀 짐승 한 마리를 수렵하고는 연호를 삼았다 한다.
경신 2년:곽거병(霍去病)이 북으로 흉노를 토벌하였다. 거연산(居延山)을 지나던 중 휴도왕(休屠王)을 사로잡았는데, 그가 금인(金人)을 얻어 대신(大神)으로 여겨서 감천궁에 차례로 배열하고 향을 사르러 예배하였다. 이것이 바로 한나라 땅에 불상이 최초로 도래한 일이다.
신유 3년:곤명지(昆明池)를 팠는데, 그 밑바닥이 모두 시커먼 숯으로 되어 있었다. 무제가 동방삭에게 그 연유를 가리도록 문의하자, 동방삭은 “신(臣)이 알 수 있는 일이 아니오니, 폐하께서는 서역의 천축 사람에게 문의하여 보소서”라고 답하였다.
임술 4년
계해 5년
갑자 6년
을축 원정(元鼎) 원년(B.C. 116):6월에 분음(汾陰) 땅의 물속에서 보정(寶鼎)을 얻었다. 솥의 크기는 여덟 자 한 치였고, 높이는 세 자 여섯 치였다. 그래서 이로써 연호를 삼았다고 한다. 옛날 진(秦)나라에서 사람을 보내어 물에 들어가 솥을 찾도록 하였으나 얻지 못하였는데, 한나라 때에 저절로 출현하였으니, 응험이 있으면 드러나고 감응이 없으면 사라지는 신물(神物)이라 할 만하다. 어찌 사람이 찾을 수 있는 것이겠는가.
병인 2년
정묘 3년
무진 4년
기사 5년
경오 6년
신미 원봉(元封) 원년(B.C. 110):정월 갑자 일에 황제가 숭산에 제사를 드리고, 도궁(道宮)을 건립하고 7일 동안 제사를 마친 후에 돌아왔다. 4월에
전한
황제가 한가롭게 지내니, 동방삭 등이 모시면서 한가롭게 있었는데, 홀연히 푸른 옷을 입은 여자가 나타나서 황제에게 이르기를 “지금으로부터 백 일 동안 청정하게 재(齋)를 지내면 7월 7일이 되어 서왕모께서 강림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기약한 날이 되자, 2경(更)에 과연 황제에게 이르렀다.
임신 2년
계유 3년:황제가 솔선하여 서왕모의 말을 받들었으니, 이 해 7월에 재계(齋戒)하고서, 오악도(五岳圖)를 동중군(董仲君)에게 수여하고, 동중군이 올라가 곧 모사하였다.
갑술 4년:황제가 또한 솔선하여 상원부인(上元夫人)의 말을 받들어 4년 7월에 재계하고, 『오제육갑(五帝六甲)』과 『영비십이사(靈飛十二事)』를 이소군(李少君)에게 수여하였는데, 이소군이 올라가서 이를 모사하였다. 이 두 책이 세간에 전해져서 유행한 것은 먼저 두 임금에게 전해서 보존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을해 5년
병자 6년
정축 태초(太初) 원년(B.C. 104):11월 기유에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백량대(柏梁臺)를 태웠다. 이에 『진형도(眞形圖)』와 『육갑오제(六甲五帝)』, 『영비십이사(靈飛十二事)』와 함께 황제가 받은 집결(集訣) 등 모두 4권이 같이 함 속에 있었는데, 모두 불에 타 소실되었다.
무인 2년
기묘 3년
경진 4년
신사 천한(天漢) 원년(B.C. 100)
임오 2년
계미 3년
갑신 4년
을유 태시(太始) 원년(B.C. 96)
병술 2년
정해 3년
무자 무자 4년:3월에 황제가 태산에 행차하여 서왕모에게 제사를 올리고
전한
신령함을 구하였으나, 신의 응답이 없었다.
기축 연화(延和) 원년(B.C. 92)
경인 2년
신묘 3년
임진 4년:정월에 동래(東萊)의 대해(大海)에 행차하여 서왕모에게 제사를 올리고 상원부인(上元夫人)에게 응답을 구하였으나, 강림하지 않았다.
계사 후원(後元) 원년(B.C. 88)
갑오 2년
을미소제(昭帝) 불릉(弗陵) 시원(始元) 원년(B.C. 86):무제의 아들로, 13년을 통치하였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지 524년이 지났다.
병신 2년
정유 3년
무술 4년
기해 5년
경자 6년
신축 원봉(元鳳) 원년(B.C. 80)
임인 2년
계묘 3년
갑진 4년
을사 5년
병오 6년
정미 원평(元平) 원년(B.C. 74)
무신선제(宣帝) 순(詢) 본시(本始) 원년(B.C. 73):무제의 증손으로, 25년간 통치하였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지 530년이 지났다.
기유 2년
경술 3년
신해 4년
임자 지절(地節) 원년(B.C. 69)
전한
계축 2년
갑인 3년
을묘 4년
병진 원강(元康) 원년(B.C. 65)
정사 2년
무오 3년
기미 4년
경신 신작(神雀) 원년(B.C. 61)
신유 2년
임술 3년
계해 4년
갑자 오봉(五鳳) 원년(B.C. 57)
을축 2년
병인 3년
정묘 4년
무진 감로(甘露) 원년(B.C. 53):한편에서는 감시(甘始) 원년이라고도 한다.
기사 2년
경오 3년
신미 4년
임신 황룡(黃龍) 원년(B.C. 49)
계유원제(元帝) 석(奭) 초원(初元) 원년(元年):선제(宣帝)의 아들로, 16년을 통치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지 562년이 지났다.
갑술 2년
을해 3년
병자 4년
정축 5년
무인 영광(永光) 원년(B.C. 43)
기묘 2년
전한
경진 3년
신사 4년
임오 5년
계미 건명(建明) 원년(B.C. 38):한편에서는 건소(建昭) 원년이라고도 한다.
갑신 2년
을유 3년
병술 4년
정해 5년
무자 경녕(竟寧) 원년(B.C. 33)
기축성제(成帝) 오(驁) 건시(建始) 원년(元年):원제의 아들로, 26년간 다스렸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지 578년이 지났다.
경인 2년
신묘 3년
임진 4년
계사 하평(河平) 원년(B.C. 28)
갑오 2년
을미 3년
병신 4년
정유 양명(陽明) 원년(B.C. 24):한편에서는 양삭(陽朔)이라고도 한다.
무술 2년
기해 3년
경자 4년
신축 홍가(鴻嘉) 원년(B.C. 20)
임인 2년
계묘 3년:대부(大夫)인 유향(劉向)이 편찬한 『열선전(列仙傳)』에 이르기를 “74명의 사람이 이미 불경(佛經)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갑진 4년
을사 영시(永始) 원년(B.C. 16)
병오 2년
전한
정미 3년
무신 4년
기유 원연(元延) 원년(B.C. 12)
경술 2년
신해 3년
임자 4년
계축 수화(綏和) 원년(B.C. 8)
갑인 2년
을묘애제(哀帝) 흔(欣) 건평(建平) 원년:원제(元帝)의 손자로, 6년간 다스렸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지 604년째이다.
병진 2년
정사 3년
무오 4년
기미 원수(元壽) 원년(B.C. 2):경헌(景憲)이 월지국에 사신으로 가서 부도경(浮圖經)을 받아 왔다. 부도는 바로 불타(佛陁)이다. 이 어찌 여래의 상속(相續)이 영구한 것이 아니겠는가.
경신 2년
신유평제(平帝) 연(衍) 원시(元始) 원년:애제의 아들로, 5년을 다스렸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지 610년째이다.
임술 2년
계해 3년
갑자 4년
을축 5년
병인 거섭(居攝) 원년(6):왕망이 선제(宣帝)의 증손자인 영(嬰)을 황제로 세웠으니, 그의 호는 유자(孺子)였다. 왕망이 승상이 되어 정사를 섭정하였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지 615년째이다. 왕망이 유자를 폐위시키고, 시호를 유제(幼帝)라고 하였다.
정묘 2년
전한
무진 초시(初始) 원년(8)
신(新)
기사왕망(王莽)이 스스로 황제에 오름 즉위 원년(9):연호를 건국(建國)이라 하였다.
경오 2년
신미 3년
임신 4년
계유 5년
갑술 천봉(天鳳) 원년(14)
을해 2년
병자 3년
정축 4년
무인 5년
기묘 6년
경진 지황(地皇) 원년(20)
신사 2년
임오 3년
계미 갱시(更始) 원년(23):유현(劉玄)의 자는 성공(聖公)이다. 왕망을 멸하고 2년간 다스리다가, 적미(赤眉)에게 피살당했다. 유현은 경제(景帝)의 6세손(世孫)이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지 632년째이다.
갑신 2년
후한(後漢)
을유광무제(光武帝) 수(秀) 건무(建武) 원년(25):이름은 수(秀)이고, 자는 문숙(文叔)이다. 고제(高帝)의 9세손(世孫)으로, 33년간 다스렸다. 낙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지 634년째이다.
병술 2년
정해 3년
무자 4년
기축 5년
후한
경인 6년
신묘 7년
임진 8년
계사 9년
갑오 10년
을미 11년
병신 12년
정유 13년
무술 14년
기해 15년
경자 16년
신축 17년
임인 18년
계묘 19년
갑진 20년
을사 21년:서역의 사거왕(莎車王) 등 열여섯 나라에서 모두 아들을 보내어 받들어 모시게 하고, 지방의 산물을 헌납하였다.
병오 22년
정미 23년
무신 24년
기유 25년
경술 26년
신해 27년
임자 28년
계축 29년
갑인 30년
을묘 31년
병진 중원(中元) 원년(56):2월에 황제가 동으로 순력하여 태산에서 제(祭)를 올리고 그 일을 비석에 새겼는데, 구름이 궁궐의 형상을 이루었다.
후한
양보(梁甫:태산 옆에 있는 산 이름)에서 봉선(封禪:祭祀)을 마치고 돌아오다 노나라 땅을 지나면서 공자 사당에서 제사를 지냈다. 9월에 서울에서 예천(醴泉)이 솟아나니, 이를 마신 이들은 고질병이 모두 나았다.
정사 2년:이 해에 천하 백성의 호수를 헤아리니, 모두 427만 9천644호였고, 인구는 2천1백만 7천820명이었다.
무오명제(明帝) 장(莊) 영평(永平) 원년:광무제의 넷째 아들로, 18년간 통치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지 667년이 지났다.
기미 2년
경신 3년
신유 4년
임술 5년
계해 6년
갑자 7년:이 해에 황제가 금인(金人)이 궁전 뜰에 날아오는 꿈을 꾸었으니, 바로 불상과 불경과 불법의 감응이었다. 사신에게 명하여 서쪽으로 가서 불경을 찾아 구해 오도록 하였다.
을축 8년
병인 9년
정묘 10년:사신이 가섭마등(迦葉摩騰)을 만나 함께 낙양에 돌아왔다. 가섭마등이 바로 『사십이장경』을 번역하였다. 흰 말이 경을 싣고 돌아왔기에 절을 세워 백마사(白馬寺)라고 하였다.
무진 11년:축법란(竺法蘭)이 『불본행경(佛本行經)』 5권을 번역하였다. 『도은거연력(陶隱居年歷)』에서는 이 해에 황제가 금인(金人)을 꿈꾸고 사신을 보냈다고 하니, 이 연수는 여러 사가(史家)에 따라 약간씩 달라서 그 정확한 근거가 끝내 확실하지 않다.
기사 12년
경오 13년:축법란이 『십지단결경(十地斷結經)』 4권을 번역하였다.
신미 14년
임신 15년
계유 16년
갑술 17년
후한
을해 18년
병자장제(章帝) 탄(坦) 건초(建初) 원년:명제의 아들로, 13년간 다스렸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지 685년째이다.
정축 2년
무인 3년
기묘 4년:영평(永平) 초년에 통의랑(通議郞) 반고(班固)가 『한서(漢書)』를 지었는데, 이 해부터 시작하여 모두 20여 년이 걸렸다.
경진 5년
신사 6년
임오 7년
계미 8년
갑신 원화(元和) 원년(84)
을유 2년
병술 3년
정해 장화(章和) 원년(87):조칙을 내려 조포(曺褒)로 하여금 예의(禮儀)를 정하도록 하다. 모두 150편이다.
무자 2년
기축화제(和帝) 조(肇) 영원(永元) 원년:장제(章帝)의 아들로, 17년간 통치하였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지 698년이 지났다.
경인 2년
신묘 3년
임진 4년
계사 5년
갑오 6년
을미 7년
병신 8년
정유 9년
무술 10년
후한
기해 11년
경자 12년
신축 13년:안식국(安息國)에서 사자(師子)를 헌납하였다.
임인 14년
계묘 15년
갑진 16년
을사 원흥(元興) 원년(105)
병오상제(殤帝) 융(隆) 연평(延平) 원년:화제(和帝)의 아들로, 1년간 통치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지 715년째이다.
정미안제(安帝) 우(祐) 영초(永初) 원년:장제(章帝)의 손자로, 19년간 통치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지 716년째이다.
무신 2년
기유 3년
경술 4년
신해 5년
임자 6년
계축 7년
갑인 원초(元初) 원년(114):구진(九眞)ㆍ요외(徼外)ㆍ야랑(夜郞) 등의 나라를 편입시켜서 국경 1천8백 리를 개척했다.
을묘 2년
병진 3년
정사 4년
무오 5년
기미 6년
경신 영녕(永寧) 원년(120):4월 황제가 알자복야(謁者僕射:황제의 손님을 맞이하는 총 책임자)인 유진(劉珍) 등에게 건무(建武:광무제 때의 연호) 이래의 명신전(名臣傳)을 작성토록 하였다.
신유 건광(建光) 원년(121)
후한
임술 연광(延光) 원년(122)
계해 2년
갑자 3년
을축 4년
병인순제(順帝) 보(保) 영건(永建) 원년:안제(安帝)의 아들로, 19년간 통치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지 735년째이다.
정묘 2년:2월에 황제가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현훈(玄纁:폐백에 쓰였던 비단)을 갖추어 남양(南陽)의 번영(樊英)과 황경(黃瓊)과 양후(楊厚) 등을 초빙하였다. 그들이 공거(公車:官廳)에 이르자, 단(壇)을 설치하여 치국의 득실을 묻고 나서, 다시 예로써 환송하였다.
무진 3년
기사 4년
경오 5년
신미 6년
임신 양가(陽嘉) 원년(132)
계유 2년
갑술 3년
을해 4년
병자 영화(永和) 원년(136)
정축 2년
무인 3년
기묘 4년
경진 5년
신사 6년:이때에 장릉(張陵)이 촉(蜀) 땅에서 천사(天師)라 불렸다. 그는 도교의 서적 24권을 저작하였고 도교의 제사 법식을 논하였는데, 도사가 제사를 지내는 것이 여기서 시작됐다.
임오 한안(漢安) 원년(142)
계미 2년
갑신 건강(建康) 원년(144)
후한
을유충제(沖帝) 병(炳) 영가(永嘉) 원년:순제(順帝)의 손자로, 1년간 통치했다. 장릉의 아들 형(衡)이 보사(保師)가 되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지 754년째이다.
병술질제(質帝) 찬(瓚) 본초(本初) 원년:장제(章帝)의 증손으로, 1년간 통치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지 755년째이다.
정해환제(桓帝) 지(志) 건초(建初) 원년:장제(章帝)의 증손으로, 21년간 통치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지 756년이 지났다. 『주사행한록(朱士行漢錄)』에서는 지루가참(支婁迦讖)이 이 해에 『아촉불경(阿閦佛經)』 2권을 번역하였다고 했다.
무자 2년:『고승전(高僧傳)』에서는 안세고가 건초(建初) 2년부터 영제(靈帝) 건녕(建寧) 연간에 이르도록 모두 20여 년 동안 『법구경』등 174부 188권을 번역하였다고 했다.
기축 3년
경인 화평(和平) 원년(150)
신묘 원가(元嘉) 원년(151):『주사행한록』에서는 안세고가 이 해에 『오십교계경(五十校計經)』 2권과 『칠처삼관경(七處三觀經)』 2권을 번역하였다고 했다.
임진 2년:『주사행한록』에서는 안세고가 이 해에 『보법의경(普法義經)』 1권과 『내장경(內藏經)』 1권을 번역하였다고 했다.
계사 영흥(永興) 원년(153)
갑오 2년
을미 영수(永壽) 원년(155)
병신 2년:『주사행한록』에서는 안세고가 이 해에 『인본욕생경(人本欲生經)』 1권을 번역하였다고 했다.
정유 3년
무술 연가(延嘉) 원년(158)
기해 2년
경자 3년
신축 4년
임인 5년
후한
계묘 6년
갑진 7년
을사 8년
병오 9년
정미 영강(永康) 원년(167):『지민도록(支敏度錄)』에서는 안세고가 이 해에 『수행도지경(修行道地經)』 7권 혹은 6권을 번역하였다고 했다.
무신영제(靈帝) 굉(閎) 건녕(建寧) 원년:장제의 현손으로, 22년간 통치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지 777년째이다.
기유 2년
경술 3년:안세고가 경전 번역을 이 해까지 마쳤는데, 단지 한 곳에서만 번역한 것은 아니었다.
신해 4년
임자 가평(嘉平) 원년(172):『주사행한록』에서는 축불삭(竺佛朔)이 이 해에 낙양에서 『도행경(道行經)』 1권을 번역하였고, 도안(道安)은 거기에 주를 달고 서문을 썼다고 하였다.
계축 2년
갑인 3년
을묘 4년:황제가 글을 좋아하여 스스로 『의황편(義皇篇)』 50장(章)을 지었다.
병진 5년
정사 6년
무오 광화(光和) 원년(178)
기미 2년:『지민도록』에서는 지루가참이 7월 8일에 『반야도행품(般若道行品)』 등 10권을 번역하였다고 했다.
경신 3년:『섭도진록(聶道眞錄)』에서는 지루가참이 10월 8일에 낙양에서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 2권과 『보적경(寶積經)』 1권을 번역하였다고 했다.
신유 4년:도위(都尉)인 안현(安玄)이 『법경경(法鏡經)』 2권과 『아함구해(阿含口解)』 1권을 낙양에서 번역하였는데, 엄불조(嚴佛調)가 받아썼다.
임술 5년
계해 6년:축불삭이 낙양에서 『도행경(道行經)』 1권을 번역하였는데, 지루가참
후한
이 통역하여 전하였고 맹복(孟福)ㆍ장련(張蓮) 등이 받아썼다.
갑자 중평(中平) 원년(184)
을축 2년:지요(支曜)가 낙양에서 『성구광명경(成具光明經)』 등의 11부 10권을 번역하였다.
병인 3년:『주사행한록』에서는 지루가참이 2월 8일에 낙양에서 『수능엄경(首楞嚴經)』 2권을 번역하였다고 했다.
정묘 4년:강거(康巨)가 낙양에서 『문지옥사경(問地獄事經)』 1권을 번역하였다. 위(魏)나라 문제(文帝)가 탄생하였다.
무진 5년:『고승전』에서는 『고유마힐(古維摩詰)』 등의 6부경 10권 모두를 임회(臨淮)의 엄불조(嚴佛調)가 낙양에서 번역하였다고 했다.
기사 6년:정월에 연호를 개정하여 광가(光嘉)로 한 원년(189)이다. 10월에 다시 연호를 개정하여 소녕(昭寧)으로 한 원년이다. 12월에 다시 연호를 개정하여 영륭(永隆)으로 한 원년이다.
경오헌제(獻帝) 협(協) 초평(初平) 원년:영제의 아들로, 30년간 통치했다. 2월에 동탁(董卓)이 황제를 협박하여 장안으로 돌아오게 하였고, 원소(袁紹)는 발해에서 병사를 일으켰으며, 손견(孫堅)은 강남에서 병사를 일으켰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지 799년째이다.
신미 2년
임신 3년
계유 4년
갑술 흥평(興平) 원년:『축도조한록(竺道祖漢錄)』에서는 이 해에 강맹상(康孟詳)이 낙양에서 『사제경(四諦經)』 1권을 번역하였다고 했는데, 안세고가 번역한 것과 약간 다르다.
을해 2년
병자 건안(建安) 원년(196)
정축 2년:3월에 사문 축대력(竺大力)이 낙양에서 『수행본기경(修行本起經)』 2권을 번역하였다.
무인 3년
기묘 4년:『고승전』에서는 『흥기본행경(興起本行經)』 등 5부 8권을 모두 강맹상이 번역하였다고 했다.
후한
경진 5년
신사 6년
임오 7년
계미 8년
갑신 9년
을유 10년:임금이 순열(苟悅)에게 『한기(漢記)』를 찬술토록 명령을 내렸다.
병술 11년
정해 12년:『고승전』에서는 『중본기경(中本起經)』 2권을 담과(曇果)와 강맹상이 이 해에 번역하였다고 했다.
무자 13년
기축 14년
경인 15년
신묘 16년:『고승전』에서는 『수행본기경』 2권을 축대력이 이 해에 번역하였다고 했다.
임진 17년
계사 18년
갑오 19년:장릉(張陵)과 손로(孫魯)가 다시 장부(章符)를 만들어서 스스로 사군(師君)이라 칭하고 무리를 이끌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중랑장(夷中郞將)에게 진압되었다.
을미 20년
병신 21년
정유 22년
무술 23년
기해 24년
031_0486_b_14L前漢高帝十二年都長安惠帝 七年呂后攝八年文帝二十三年景帝 十六年武帝五十 四年昭帝 十三年宣帝二十五年元帝十六年成帝二十六年哀帝 六年平帝 五年新王莽十七年治長安更始帝二年 亦長安後漢光武帝二十三年都洛陽明帝十八年十年譯經章帝 十三年和帝 十七年殤帝 一年安帝 十九年順帝 十九年沖帝 一年質帝 一年桓帝二十一年靈帝二十二年獻帝 三十年前漢乙未高帝元劉氏名邦字阿季堯後治十二年都長安佛入涅槃來至此已四百五年丙申丁酉戊戌己亥庚子辛丑改咸陽爲長安壬寅癸卯甲辰乙巳十一丙午十二丁未惠帝盈元高帝子治七年佛入涅槃來至此已四百一十五年戊申己酉舂發長安六百里男女十四萬六千人築長安城舊城西面三十日了六月又發諸侯率一十二萬人築南面庚戌辛亥正月又發六百里男女十四萬五千人築城北面三十日了夏又發一十二萬五千人築城東面三十日秋九月長安城四面一切悉訖壬子癸丑甲寅呂后元高帝后攝政八年佛入涅槃來至此已四百二十二年乙卯丙辰丁巳戊午己未庚申辛酉壬戌文帝恒元高帝庶子治二十三年佛涅槃來至此已四百三十二年癸亥甲子乙丑丙寅丁卯戊辰己巳庚午辛未壬申十一癸酉十二甲戌十三乙亥十四丙子十五丁丑十六戊寅後元元年己卯庚辰辛巳文殊師利般泥洹經云佛滅度後四百五十年文殊師利當至雪山爲五百仙人說十二部經訖還本生地入涅槃五月大赦免官奴婢爲庶人壬午癸未甲申乙酉景帝啓元文帝子治十六年佛入涅槃來至此已四百五十四年丙戌丁亥戊子己丑庚寅辛卯壬辰中元元年癸巳甲午乙未丙申丁酉戊戌後元元年己亥庚子辛丑武帝徹景帝子治五十四年自此始建年號稱建元元年東方朔上書自進時年二十二民年九十已上復子孫令侍養佛入涅槃至此已四百七十年壬寅置茂陵邑徙郡國豪傑居之賜徙民戶錢二十萬田二頃癸卯甲辰乙巳丙午丁未元光元戊申己酉庚戌辛亥壬子外國傳云佛滅度後四百八十年有神通羅 漢名呵利難陁國王之子於優長國東北造牛頭栴檀彌勒像高八丈將巧匠三人上兜率看眞彌勒造然後得成甚有神驗癸丑元朔元甲寅乙卯丙辰丁巳戊午己未元狩元十月帝幸雍獵得一白狩如麇五蹄改元云庚申霍去病北討丐奴過居延山擒休屠王獲其金人以爲大神列置甘泉宮燒香禮之此卽漢地佛像先來也辛酉掘昆明池其下悉是炭墨武帝以問東方朔令辯所由朔答云非臣所知陛下可問西域梵人壬戌癸亥甲子乙丑元鼎元六月汾陰得寶鼎水中鼎大八尺一寸高三 尺六寸故改元云昔秦遣人入水求鼎不得漢乃自出可謂神物有應則彰無感則隱豈人求哉丙寅丁卯戊辰己巳庚午辛未元封元正月甲子帝祭嵩山起道宮齋七日祀訖還四月帝閑居方朔等侍忽見一靑衣女子來告帝云從今去百日淸齋至七月七日西王母許降至期二更果來赴帝壬申癸酉帝先丞王母言以是年七月齋戒以五嶽圖授董仲君董仲君登卽寫受甲戌帝又先承上元夫人言四年七月齋戒以五帝六甲靈飛十二事授李少君登卽寫受此二書傳行世者由先傳此二君所以存矣乙亥丙子丁丑太初元十一月己酉天火焚柏梁臺於是眞形圖六甲五帝靈飛十二事幷帝所受集訣凡四卷共函竝爲火燒失本戊寅己夘庚辰辛巳天漢元壬午癸未甲申乙酉太始元丙戌丁亥戊子三月帝幸太山祠西王母求靈而神不應己丑延和元庚寅辛卯壬辰正月幸東萊大海齋祠西王母上元夫人求應不降癸巳後元元甲午乙未昭帝弗陵武帝子治十三年始元元年佛入涅槃至此已五百二十四年丙申丁酉戊戌己亥庚子辛丑元鳳元壬寅癸卯甲辰乙巳丙午丁未元平元戊申宣帝詢武帝曾孫治二十五年太始元年佛入涅槃來至此已五百三十年己酉庚戌辛亥壬子地節元癸丑甲寅乙卯丙辰元康元丁巳戊午己未庚申神雀元辛酉壬戌癸亥甲子五鳳元乙丑丙寅丁卯戊辰甘露元 一云甘始元己巳庚午辛未壬申黃龍元癸酉元帝奭宣帝子治十六年初元元年佛入涅槃來至此已五百六十二年甲戌乙亥丙子丁丑戊寅永光元己卯庚辰辛巳壬午癸未建明元 一云建昭元甲申乙酉丙戌丁亥戊子竟寧元己丑成帝驁元帝子治二十六年稱建始元年佛入涅槃來至此已五百七十八年庚寅辛卯壬辰癸巳河平元甲午乙未丙申丁酉陽明元 一云陽朔戊戌己亥庚子辛丑鴻嘉元壬寅癸卯大夫劉向刪列仙傳云七十四人己見佛經甲辰乙巳永始元丙午丁未戊申己酉元延元庚戌辛亥壬子癸丑綏和元甲寅乙卯哀帝欣元帝孫治六年稱建平元佛入涅槃來至此六百四年丙辰丁巳戊午己未元壽元景憲使大月支國受得浮啚經浮啚者卽佛陁也豈非如來相續久矣庚申辛酉平帝衍哀帝子治五年稱元始元佛入涅槃來至此六百一十年壬戌癸亥甲子乙丑丙寅居攝元莽立宣帝玄孫嬰號孺子莽爲丞相攝行政事佛入涅槃來至此六百一十五年莽廢孺子謚爲幼帝丁卯戊辰始初元新王己巳莽卽眞 號建國元庚午辛未壬申癸酉甲戌天鳳元乙亥丙子丁丑戊寅己卯庚辰地皇元辛巳壬午癸未更始元劉玄字聖公滅莽治二年爲赤眉所殺玄景帝六世孫佛入涅槃至此六百三十二年甲申後漢乙酉光武帝秀字文叔高帝九世孫立三十三年徙都雒陽號建武元佛入涅槃來至此六百三十四年丙戌丁亥戊子己丑庚寅辛卯壬辰癸巳甲午乙未十一丙申十二丁酉十三戊戌十四己亥十五庚子十六辛丑十七壬寅十八癸卯十九甲辰二十乙巳二十一西域莎車王等十六國悉遣子來入侍奉獻方物丙午二十二丁未二十三戊申二十四己酉二十五庚戌二十六辛亥二十七壬子二十八癸丑二十九甲寅三十乙卯三十一丙辰中元元二月帝東巡太山柴祭刻石有雲氣成宮闕封禪梁甫訖迴過魯祠孔子宅九月醴泉出京師飮者痼疾皆差也丁巳是歲取天下民戶凡四百二十七萬九千六百四十四民口二千一百萬七千八百二十戊午明帝莊光武第四子立十八年號永平元佛入涅槃至此已六百六十七年己未庚申辛酉壬戌癸亥甲子是年帝夢金人飛來殿庭卽佛像經法應也命使西行尋求佛經乙丑丙寅丁卯使還得迦葉摩騰來到雒陽卽翻四十二章經以白馬馱經來卽起白馬寺戊辰十一竺法蘭出佛本行經五卷陶隱居年歷云帝夢金人遣使是此年與諸家小異 據終亦不爽己巳十二庚午十三竺法蘭出十地斷結經四卷辛未十四壬申十五癸酉十六甲戌十七乙亥十八丙子章帝坦明帝子立十三年號建初元佛入涅槃至此六百八十五年丁丑戊寅己卯永平初通議郞班固作漢書訖此年始就凡二十餘載庚辰辛巳壬午癸未甲申元和元乙酉丙戌丁亥章和元詔遣曹襃定禮儀凡一百五十篇戊子己丑和帝肇章帝子立十七年號永元元佛入涅槃至此六百九十八年庚寅辛卯壬辰癸巳甲午乙未丙申丁酉戊戌己亥十一庚子十二辛丑十三 安息國獻師子壬寅十四癸夘十五甲辰十六乙巳元興元丙午殤帝隆和帝子立一年號延平元佛入涅槃至此七百一十五年丁未安帝祐章帝孫立十九年號永初元佛入涅槃至此七百一十六年戊申己酉庚戌辛亥壬子癸丑甲寅元初元九眞儌外夜郞等國內附闢境千八百里乙卯丙辰丁巳戊午己未庚申永寧元四月帝詔謁者僕射劉珍作建武已來名臣傅辛酉建光元壬戌延光元癸亥甲子乙丑丙寅順帝保安帝子立十九年號永建元佛入涅槃至此七百三十五年丁卯二月帝詔有司備玄纁聘南陽樊英及黃瓊楊厚等詣公車設壇席問得戊辰三 失訖還以禮遣之己巳庚午辛未壬申陽嘉元癸酉甲戌乙亥丙子永和元丁丑戊寅己卯庚辰辛巳時有張陵在蜀號天師作道書二十四卷論章醮之法道士章醮起此壬午漢安元癸未甲申建康元乙酉沖帝炳順帝孫立一年號永嘉元張陵子衡爲保師佛入涅槃來至此七百五十四年丙戌質帝瓚章帝玄孫立一年號本初元佛入涅槃至此七百五十五年丁亥桓帝志章帝曾孫立二十一年號建初元佛入涅槃來至此已七百五十六年朱士行漢錄云支婁迦讖此年譯阿閦佛經二卷戊子高僧傳云安世高從建初二年至靈帝建寧中凡二十餘載合譯法句等經一百七十四部一百八十八卷己丑庚寅和平元辛卯元嘉元朱士行漢錄云世高此年譯五十校計經二卷七處三觀經二卷壬辰朱士行漢錄云世高此年譯普法義經一卷內藏經一卷癸巳永興元甲午乙未永壽元丙申朱士行漢錄云世高此年譯人本欲生經一卷丁酉戊戌延嘉元己亥庚子辛丑壬寅癸卯甲辰乙巳丙午丁未永康元支敏度錄云世高此年譯修行道地經七卷或六卷戊申靈帝閎章帝玄孫立二十二年號建寧元佛入涅槃至此七百七十七年己酉庚戌世高譯經至此年方訖非止一處在所卽出辛亥壬子嘉平元朱士行漢錄云竺佛朔此年於洛陽譯道行經一卷道安爲之注序癸丑甲寅乙卯帝好書自造義皇篇五十章丙辰丁巳戊午光和元己未支敏度錄云支婁迦讖七月八日譯般若道行品等十卷庚申聶道眞錄云支婁迦讖十月八日於洛陽譯般舟三昧經二卷寶積經一卷辛酉都尉安玄譯法鏡經二卷阿含口解一卷於洛陽出嚴佛調筆受壬戌癸亥竺佛朔於洛陽譯道行經一卷支讖傳語孟福張蓮筆受甲子中平元乙丑支曜於洛陽譯成具光明等十一部經十一卷丙寅朱士行漢錄云支婁迦讖二月八日於洛陽譯首楞嚴經二卷丁卯康巨於洛陽譯問地獄事經一卷魏文帝生戊辰高僧傳云古維摩詰等六部經合十卷竝臨淮嚴佛調於洛陽出之己巳正月改光嘉元十月改昭寧元十二月改永隆元庚午獻帝協靈帝子立三十年號初平元二月董卓劫帝令遷長安袁紹起兵勃海孫堅起兵江南佛入涅槃至此七百九十九年辛未壬申癸酉甲戌興平元竺道祖漢錄云此年康孟詳於洛陽譯四諦經一卷與世高出者小異乙亥丙子建安元丁丑三月沙門竺大力於洛陽譯修行本起經二卷戊寅己卯高僧傳云興起本行經等五部合八卷竝康孟詳出庚辰辛巳壬午癸未甲申乙酉十 詔遣荀悅撰漢紀丙戌十一丁亥十二高僧傳云中本起經二卷曇果共孟詳此年出戊子十三己丑十四庚寅十五辛卯十六高僧傳云修行本起經二卷竺大力此年出之壬辰十七癸巳十八甲午十九有張陵孫魯更造章符自稱師君率衆反拜爲鎭夷中郞將乙未二十丙申二十一丁酉二十二戊戌二十三己亥二十四歷代三寶紀卷第二帝年次 前漢新王 後漢
  1. 1)서경(西京)은 장안(長安)이고, 동경(東京)은 낙양(洛陽)이다. 바로 장안을 수로로 한 전한(前漢)과 낙양을 수도로 한 후한(後漢)말 아울러 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