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開元釋教錄卷第四 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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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원석교록 제 4 권


지승 지음

1. 총괄군경록 ④

7) 후진(後秦) 시대
진의 요(姚)씨는 상안(常安)에 도읍하고 있었다.후진(後秦)이라고도 한다 요장(姚萇)시호(諡號)는 소무황제(昭武皇帝)이다. 백작(白雀) 원년 갑신(甲申, 384)으로부터 요홍(姚泓)시호가 없다. 영화(永化) 3년 정사(丁巳, 417)에 이르기까지 무릇 3군주(君主) 34년 동안 사문 5인이 번역하여 낸 경(經)ㆍ율(律)ㆍ논(論) 등은 총 94부 624권이다.그 중에서 66부 528권은 그 경본이 현재 있고, 28부 96권은 궐본이다. 『대지도론(大智度論)』 후기(後記)에서 말한 홍시(弘始) 3년 신축(辛丑, 401)을, 왕도규(王道珪)는 경자(庚子, 400)라 하였고, 어떤 책에서는 역시 세재(歲在)를 “신축(401)이다”라고 하였다. 장방(長房)과 견란(甄鸞)도 다시 1년씩의 차이가 있는데, 이제 후기에 의거하여 바로 잡아, 차례로 1년씩 미루었다.

요진(姚秦) 사문 축불념(竺佛念)12부74권. 경ㆍ율ㆍ집
사문 구마라집(鳩摩羅什)74부384권. 경ㆍ율ㆍ논ㆍ집
사문 불야다라(弗若多羅)1부58권. 율
사문 불타야사(佛陁耶舍)4부84권. 경ㆍ율
사문 담마야사(曇摩耶舍)3부 24권. 경ㆍ논

(1) 축불념(竺佛念)
십주단결경(十住斷結經) 10권처음에는 『최승문보살십주제구단결경(最勝問菩薩十住除垢斷結經)』이라고 하였다. 일명 『십천일광삼매정경(十千日光三昧定經)』, 또는 『십지단결경(十地斷結經)』이라고도 한다. 혹은 11권, 또는 14권으로 되어 있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이진록(二秦錄)』ㆍ『고승전』ㆍ『승우록』에 보인다.
보살영락경(菩薩瓔珞經) 12권일명 『현재보경(現在報經)』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혹은 13권, 또는 14권, 또는 16권으로 되어 있다. 부진(符秦) 건원(建元) 12년(376) 7월에 번역되어 나왔다. 『이진록』ㆍ『고승전』ㆍ『승우록』에 보인다.
보살처태경(菩薩處胎經) 5권처음에는 『보살종도술천강신모태설광보경(菩薩從兜術天降神母胎說廣普經)』이라 하였으며, 또한 바로 『태경(胎經)』이라고도 한다. 혹은 4권, 또는 8권으로 되어 있다. 『이진록』ㆍ『고승전』ㆍ『승우록』에 보인다.
중음경(中陰經) 2권『이진록』ㆍ『고승전』ㆍ『승우록』에 보인다.
보살영락본업경(菩薩瓔珞本業經) 2권혹은 바로 『영락본업경(瓔珞本業經)』이라고도 한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록』에 보인다.
비내야율(鼻柰耶律) 10권일명 『계인연경(誡因緣經)』, 또는 『비내야경(鼻柰耶經)』, 또는 『계과인연경(戒果因緣經)』이라고도 한다. 사문 담경(曇景)이 받아썼다. 안공(安公)이 지은 경의 서문에 보면 “부진(符秦) 건원(建元) 14년 임오(壬午, 378) 정월 12일에 번역되어 나왔다”라고 하였다.
출요경(出曜經) 20권또한 『출요론(出曜論)』이라고도 한다. 혹은 19권으로 되어 있다. 부진 건원19년(383)에 번역되어 나왔다. 『이진록』ㆍ『고승전』ㆍ『승우록』ㆍ『보창록』 등 목록에 보인다.
이상은 현재 경본이 있고, 이하는 궐본이다.

지인보살경(持人菩薩經) 3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축법호의 『지인경(持人經)』과 구마라집(鳩摩羅什)의 『지세경(持世經)』과 동본(同本)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대방등무상경(大方等無相經) 5권또한 『대운경(大雲經)』이라고도 한다. 혹은 4권으로 되어 있다. 담무참(曇無讖)의 『방등대운경(方等大雲經)』과 동본이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록』에 보인다.
보살보처경(菩薩普處經) 3권『장방록』에 보인다.
십송비구니계소출본말(十誦比丘尼戒所出本末) 1권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승순(僧純)이 구이국(拘夷國)에서 범본(梵本)을 얻어와 축불념(竺佛念)이 번역하였는데, 문장이 번잡하였으므로, 뒤에 축법태(竺法汰)가 삭제하여 바르게 고쳤다. 『보창록』에 보인다.
왕자법익괴목인연경(王子法益壞目因緣經) 1권혹은 『아육왕식괴목인연경(阿育王息壞目因緣經)이라고도 한다. 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승우록』에 보인다.
이상은 12부 74권이다.『출요경』 이상의 7부 61권은 현재 경본이 있고, 『지인보살경』 이하 5부 13권은 궐본이다.

사문 축불념은 양주(涼州) 사람이다. 스무 살에 출가하였는데, 의지[志業]가 맑고 강건하였다. 밖으로는 온화하고 내면은 밝았으며, 화통하고 영민하고 밝았다. 많은 경전을 외우고 익혔으며, 대략 외전(外典)1)들도 섭렵하였는데, 『창힐편(蒼詰篇)2)』과 『이아(爾雅)3)』의 훈고(訓詁)4)에 더욱 밝고 통달하였다. 어려서부터 여러 곳을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여 풍속을 골고루 보았다. 집안이 대대로[家世] 서하(西河)에 있어서 방언[方語]에 환하게 밝았으며, 중국과 오랑캐 말의 소리와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의학(義學)의 이름은 비록 유명하지 않았으나, 들은 바가 많다는 명성은 크게 드러났다.
부씨(符氏)의 건원(建元) 연간(365~384)에 담마지(曇摩持)ㆍ구마라불제(鳩摩羅佛提)ㆍ승가발징(僧伽跋澄)ㆍ제바난제(提婆難提) 등이 장안(長安)으로 들어왔고, 안공(安公)과 조정(趙政) 등이 그들에게 여러 경들을 번역해 줄 것을 청하게 되었다. 당시의 명덕(名德 : 명성과 덕행이 있는 비구)들도 번역할 수 없었으므로, 대중들은 모두 축불념을 추대하여 명장(明匠)으로 삼았다.
안세고(安世高)와 지겸(支謙) 이후 축불념을 뛰어넘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으니, 부견(符堅)과 요흥(姚興) 2대에 걸쳐 번역하는 사람들의 종주(宗主 )가 되었다. 그러므로 관중(關中)의 승려와 대중들은 모두 함께 그를 칭찬하였다.
축불념은 부견ㆍ요흥 2대 때에 스스로 『십주단결경』 등 12부를 번역하였다.『장방록』에 따로 『십지단결경(十地斷結經)』 10권이 있는데, 잘못이다. 주(住)와 지(地)의 두 가지 뜻에는 구별이 없으며, 이제 십주(十住)를 두고, 십지(十地)는 삭제한다. 뒤에 병이 들어 상안(常安)에서 입적하였는데, 원근(遠近)의 승려와 속인들이 탄식하고 애석해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2) 구마라집(鳩摩羅什)
마하반야바라밀경(摩訶般若波羅蜜經) 40권또한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이라고도 한다. 승우는 “『신대품경(新大品經)』이다”라고 하였다. 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방광경(放光經)』과 같은 동본이다. 혹은 30권, 또는 24권, 또는 27권으로 되어 있다. 홍시(弘始) 5년 계묘(癸卯, 403) 4월 23일에 번역하기 시작하여 6년(404) 4월 23일에 끝마쳤다. 『이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소품반야바라밀경(小品般若波羅蜜經) 10권표제에서는 “『마하반야바라밀경(摩訶般若波羅蜜經)』이다”라고 하였으며, 소품(小品)이라는 글자가 없다. 승우는 “『신소품경(新小品經)』이다”라고 하였다. 『도행경(道行經)』ㆍ『명도경(明度經)』 등과 동본이다. 일곱 번째 번역이다. 혹은 7권으로 되어 있다. 홍시 10년(408) 2월 6일에 번역하기 시작하여 4월 30일에 마쳤다. 『이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 1권또한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이라고도 한다. “부처님께서 사위국(舍衛國)에 계셨다”고 한 것은 첫 번째 번역이다. 원위(元魏)의 보리유지(菩提留支) 등이 번역해 낸 것과 동본이다. 『이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인왕호국반야바라밀경(仁王護國般若波羅蜜經) 2권또한 『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이라고도 한다. 혹은 1권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진(晋)나라 때 법호(法護)와 양조(梁朝)의 진제(眞諦)가 번역한 경과 동본인데, 다르게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은 “『별록(別錄)』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마하반야바라밀대명주경(摩訶般若波羅蜜大明呪經) 1권또한 『마하대명주경(摩訶大明呪經)』이라고도 한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당(唐)나라 때 번역한 『반야심경(般若心經)』과 같은 동본이다. 경의 표제에 보인다.
보살장경(菩薩藏經) 3권일명 『부루나문경(富樓那問經)』, 또는 『대비심경(大悲心經)』이라고도 한다. 지금 『보적경(寶積經)』에 편입되어 있고, 제17회(會)인 「부루나회(富樓那會)」에 해당한다. 홍시 7년(405)에 번역되어 나왔다. 혹은 2권으로 되어 있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법호(法護)가 번역하여 낸 경과 동본이다. 『이진록(二秦錄)』과 『승우록』에 보인다.
선비보살경(善臂菩薩經) 2권지금은 『보적경』에 편입되어 있으며, 제26회(會)에 해당한다. 『법상록(法上錄)』에 보인다.
수마제보살경(須摩提菩薩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보적경』 「묘혜회(妙慧會)」와 같은 동본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자재왕보살경(自在王菩薩經) 2권혹은 보살(菩薩)이란 글자가 없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분신왕경(奮迅王經)』과 동본이다. 홍시 9년(407) 상서령(尙書令) 요현(姚顯)의 제택(第宅 : 살림집과 정자)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승예(僧叡)가 붓으로 받아쓰고, 아울러 서문도 지었다. 『이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장엄보리심경(莊嚴菩提心經) 1권네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법호가 번역한 『보살십지경(菩薩十地經)』과 같은 동본이다. 장방은 “『별록(別錄)』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십주경(十住經) 4권혹은 5권으로 되어 있다. 이 경은 『화엄경(華嚴經)』 「십지품(十地品)」의 이역(異譯)이다. 구마라집과 불타야사(佛陁耶舍)가 함께 번역하며 내었다. 『이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8권『승우록』에서는 “『신법화경(新法華經)』이다”라고 하였다. 처음 7권 27품(品)이었는데, 뒷사람이 「천수품(天授品)」을 더 보태어 28품이 되었다. 홍시 8년(406) 여름에 대사(大寺)에서 번역하였으며, 승예(僧叡)가 붓으로 받아썼고, 아울러 서문도 지었다. 다섯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이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 3권일명 『불가사의해탈경(不可思議解脫經)』이라고도 하며, 혹은 바로 『유마힐경(維摩詰經)』이라고도 한다. 『승우록』에서는 “『신유마힐경(新維摩詰經)』이다”라고 하였다. 홍시 8년(406)에 대사(大寺)에서 번역하였으며, 승조(僧肇)가 붓으로 받아썼고, 승예(僧叡)가 서문을 지었다. 여섯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이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대수긴나라왕소문경(大樹緊那羅王所問經) 4권또한 『설불가사의품(說不可思議品)』이라고도 하며, 또한 바로 『대수긴나라경(大樹緊那羅經)』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지참(支讖)이 번역한 『돈진타라경(伅眞陁羅經)』과 동본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집일체복덕삼매경(集一切福德三昧經) 3권축법호(竺法護)가 번역한 『등집중덕경(等集衆德經)』과 같은 동본인데, 다르게 번역되어 나왔다. 세 번째의 번역이다. 『진적사록(眞寂寺錄)』에 보인다.
사익범천소문경(思益梵天所問經) 4권혹은 바로 『사익경(思益經)』이라고도 한다. 『승우록』에서는 “『사익의경(思益義經)』이다”라고 하였다. 홍시 4년(402) 12월 1일에 소요원(逍遙園)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두 번째의 번역이다. 축법호가 번역한 『지심경(持心經)』과 보리유지(菩提留支)가 번역한 『승사유경(勝思惟經)』과는 모두 동본이다. 『이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지세경(持世經) 4권일명 『법인경(法印經)』이라고도 한다. 혹은 3권으로 되어 있다. 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법호의 『지인경(持人經)』과 같은 동본이다. 『이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제법무행경(諸法無行經) 2권혹은 1권으로 되어 있다. 수(隋)나라 사나굴다(闍那崛多)가 번역한 『제법본무경(諸法本無經)』과 같은 동본이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이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아미타경(阿彌陁經) 1권또한 『무량수경(無量壽經)』이라고도 한다. 홍시 4년(402) 2월 8일에 번역되었으며, 처음으로 번역된 것이다. 당(唐)나라 때 번역한 『칭찬정토경(稱讚淨土經)』과 같은 동본이다. 『이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미륵성불경(彌勒成佛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법호가 번역한 『미륵성불경(彌勒成佛經)』과 동본이다. 홍시 4년(402)에 번역되어 나왔다. 『이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 1권일명 『미륵수결경(彌勒受決經)』이라고도 한다. 처음에는 『대지사리불경(大智舍利弗經)』이라고 하였다. 『미륵래시경(彌勒來時經)』과 동본이다. 네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또한 『미륵성불경(彌勒成佛經)』, 또는 『하생성불경(下生成佛經)』, 또는 『당하성불경(當下成佛經)』이라고도 한다. 『이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문수사리문보리경(文殊師利問菩提經) 1권또한 바로 『보리경(菩提經)』이라고도 하며, 또는 『가야산정경(伽耶山頂經)』, 또는 『보리무행경(菩提無行經)』이라고도 한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가야산정경』과 『상두정사경(象頭精舍經)』 등과 동본이다. 『승우록』의 경도(經圖 : 경의 내력도)에 따로 『보리경(菩提經)』 1권을 기재한 것은 착오이다.
공작왕주경(孔雀王呪經) 1권네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또한 『대금색공작왕경(大金色孔雀王經)』이라고도 한다. 소요원(逍遙園)에 있으면서 번역하였으며, 아울러 결계장법(結界場法)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 장방은 “『별록(別錄)』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수능엄삼매경(首楞嚴三昧經) 3권혹은 2권으로 되어 있다. 또한 바로 『수능엄경』이라고도 한다. 『승우록』에서는 “『신수능엄경(新首楞嚴經)』이다”라고 하였다. 아홉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방등수능엄용복정경(方等首楞嚴經勇伏定經)』과 같은 동본이다. 『승우록』에 보인다.
부사의광보살소문경(不思議光菩薩所問經) 1권또한 다만 『부사의광보살소설경(不思議光菩薩所說經)』이라고도 하며, 또는 『무사의광해동보살경(無思議光孩童菩薩經)』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축법호가 번역한 『무사의해동경(無思議孩童經)』과 동본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화수경(華手經) 13권혹은 화수(華首)라고도 한다. 일명 『섭제선근경(攝諸善根經)』, 또는 『섭제복덕경(攝諸福德經)』이라고도 한다. 혹은 10권, 또는 11권, 또는 12권으로 되어 있다. 홍시 8년(406)에 번역되어 나왔다. 『이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불수반열반약설교계경(佛垂般涅槃略說敎誡經) 1권또한 불림반(佛臨般)이라고도 하며, 일명 『유교경(遺敎經)』이라고도 한다. 『승우록』에 보인다.
천불인연경(千佛因緣經) 1권『법상록(法上錄)』에 보인다.
범망경(梵網經) 2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홍시 8년(406)에 초당사(草堂寺)에서 3천 학사(學士)들이 최후에 번역하여 내었다. 이 1품(品)의 범본(梵本)에는 61품이 있었으며, 모두 번역하여 마쳤다. 융영(融影) 등 3백 인이 일시에 함께 보살 10계(戒)를 받았는데, 승조(僧肇)가 수여(授與)하였다. 경의 앞 서문에 보인다.
불장경(佛藏經) 4권일명 『선택제법경(選擇諸法經)』이라고도 한다. 혹은 3권, 또는 2권으로 되어 있다. 홍시 7년(405) 6월 12일에 번역되어 나왔다. 『이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청정비니방광경(淸淨毗尼方廣經) 1권『문수정률경(文殊淨律經)』과 같은 동본이다. 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법상록(法上錄)』에 보인다.
대지도론(大智度論) 100권혹은 『대지도경론(大智度經論)』, 또는 『마하반야석론(摩訶般若釋論)』이라고도 한다. 혹은 70권, 또는 110권으로 되어 있다. 홍시 4년(402) 여름에 소요원(逍遙園)에서 번역을 시작하여 7년(405) 12월 27일에 끝마쳤다. 『이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중론(中論) 4권또한 『중관론(中觀論)』이라고도 한다. 혹은 8권으로 되어 있다. 홍시 11년(409)에 대사(大寺)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승예(僧叡)가 서문을 지었다. 『이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앞의 『지도론』과 함께 용수(龍樹)보살이 지었다.
십이문론(十二門論) 1권용수보살이 지었다. 홍시 10년(408)에 대사(大寺)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승예(僧叡)가 서문을 지었다. 『승우록』과 『보창록』에 보인다.
백론(百論) 2권제바보살(提婆菩薩)이 지었다. 홍시 6년(404)에 번역되어 나왔다. 승조(僧肇)가 서문을 지었다. 『이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십주비바사론(十住毗婆沙論) 14권혹은 논(論)자가 없기도 하다. 용수보살이 지었다. 혹은 12권, 또는 15권으로 되어 있다. 『장방록』에 보인다.
대장엄경론(大莊嚴經論) 15권혹은 경(經)자가 없기도 하다. 마명보살(馬鳴菩薩)이 지었다. 혹은 10권으로 되어 있다. 『장방록』에 보인다.
발보리심론(發菩提心論) 2권혹은 『발보리심경(發菩提心經)』, 또는 『경론(經論)』이라고도 한다. 『이곽록(李廓錄)』에 보인다.
방우경(放牛經) 1권또한 『목우경(牧牛經)』이라고도 한다.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제46권에서 나온 이역(異譯)이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해팔덕경(海八德經) 1권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법해경(法海經)』과 같은 동본이다. 『법상록(法上錄)』에 보인다.
선비요경(禪秘要經) 3권혹은 『선비요법(禪秘要法)』이라고도 한다. 경(經)자가 없기도 하다. 혹은 4권으로 되어 있다. 지겸(支謙) 등이 번역해 낸 것과 동본이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등지인연경(燈指因緣經) 1권『이곽록』에 보인다.
십송비구계본(十誦比丘戒本) 1권또한 『십송바라제목차계(十誦波羅提木叉戒)』라고도 한다. 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담마지(曇摩持) 등이 번역하여 낸 것과 동본이다. 『승우록』에 보인다.
성실론(成實論) 20권혹은 24권, 또는 16권, 또는 14권으로 되어 있다. 홍시 13년(411) 9월 8일에 상서령(尙書令) 요현(姚顯)의 청으로 번역하기 시작하여 14년(412) 9월 15일에 끝마쳤다. 담구(曇晷)가 받아썼다. 부처님께서 멸도(滅度)하신 뒤 900년에 하리발마(訶梨跋摩)가 지었다. 『승우록』에 보인다.
좌선삼매경(坐禪三昧經) 3권일명 『보살선법경(菩薩禪法經)』이라고도 한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혹은 바로 『선경(禪經)』이라고도 하며, 또는 『선법요(禪法要)』, 또는 『아란야습선법(阿蘭若習禪法)』이라고도 하는데, 이 세 이름은 모두가 같은 경본이다. 홍시 4년(402) 정월 5일에 번역하기 시작하여 9년(407) 윤(閏) 5월에 거듭 교정하여 마쳤다. 『이진록』ㆍ『승우록』ㆍ『보창록』 세 목록에 보인다.
보살가색욕법(菩薩呵色欲法) 1권혹은 『보살가색욕경(菩薩訶色欲經)』이라고도 하며, 혹은 바로 보살가색욕(菩薩呵色欲)이라고도 한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승우록』에 보인다.
선법요해(禪法要解) 2권혹은 『선요경(禪要經)』이라고도 한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승우록』에 보인다.
사유요략법(思惟要略法) 1권혹은 『사유요략법경(思惟要略法經)』, 또는 『사유경(思性經)』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록』에 보인다.
잡비유경(雜譬喩經) 1권홍시 7년(405) 10월에 번역되어 나왔다. 도략(道略)이 수집하였다.
마명보살전(馬鳴菩薩傳) 1권『장방록』에 보인다.
용수보살전(龍樹菩薩傳) 1권『장방록』에 보인다.
제바보살전(提婆菩薩傳) 1권『장방록』에 보인다.
법계체성무분별경(法界體性無分別經) 2권『보적경(寶積經)』 「법계체성회(法界體性會)」와 동본이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법상록』에 보인다.
이로부터 이하는 궐본이다.
대선권경(大善權經) 2권『보적경』 「대승방편회(大乘方便會)」과 같은 동본이다. 네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이곽록』에 보인다.
대방등대집경(大方等大集經) 30권혹은 신(新)자를 덧붙이기도 한다. 혹은 24권으로 되어 있다. 지참(支讖)과 무참(無讖)이 번역하여 낸 경과 동본이다. 『이진록』과 『이곽록』에 보인다.
대방등정왕경(大方等頂王經) 1권법호(法護) 등이 번역하여 낸 경과 동본이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록』에 보인다.
아사세경(阿闍世經) 2권지참(支讖) 등이 번역하여 낸 경과 동본이다. 다섯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섬본기경(睒本起經) 1권또한 바로 『섬경(睒經)』이라고도 한다. 『육도경(六度經)』에서 나온 이역이다. 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이곽록』에 보인다.
청관세음경(請觀世音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축난제(竺難提)가 번역하여 낸 경과 동본이다. 『이곽록』에 보인다.
보망경(寶網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축법호가 번역하여 낸 경과 동본이다. 『이곽록』에 보인다.
칭양제불공덕경(稱揚諸佛功德經) 3권일명 『집화경(集華經)』이라고도 한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홍시 7년(405)에 번역되었다. 『이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관보현보살경(觀普賢菩薩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이곽록』에 보인다.
미증유인연경(未曾有因緣經) 2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법상록』에 보인다.
현겁경(賢劫經) 7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홍시(弘始) 4년(402) 3월 5일에 번역되었다. 법호(法護)가 번역하여 낸 경과 동본이다. 담공(曇恭)이 받아썼다. 『이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일명 『현겁삼매경(賢劫三昧經)』, 또는 『현겁정의경(賢劫定意經)』이라고도 한다. 무릇 세 가지의 이름이 있다. 『승우록』에서는 “『신현겁경(新賢劫經)』이다”라고 하였다.
선신마하신주경(善信摩訶神呪經) 2권『이곽록』에 보인다.
지지경(持地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관불삼매경(觀佛三昧經) 1권『이곽록』에 보인다.
보살계본(菩薩戒本)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록』에 보인다. 지금 이 『보살계본』은 『범망경(梵網經)』 하권이 아닌가 싶다.
문수회과경(文殊悔過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록』에 보인다.
사리불회과경(舍利弗悔過經) 1권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법상록』에 보인다.
십주론(十住論) 10권용수보살이 지었다. 홍시(弘始) 연간(399~415)에 번역하기 시작하였으나, 아직 끝마치지는 못하였다. 제8권의 마지막은 『육도집(六度集)』과 비슷하다. 『이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지금 이 『십주론』은 곧 『십주바사론(十住婆沙論)』이 아닌가 의심된다.
검제죄복경(撿諸罪福經) 10권장방은 “『별록(別錄)』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십이인연관경(十二因緣觀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바수반두전(婆藪盤豆傳)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번경도(翻經圖)』에 보인다.
이상은 74부 384권이다.『제바보살전(提婆菩薩傳)』 이상의 52부 302권은 현재 경본이 있고, 『법계체성무분별경(法界體性無分別經)』 이하 22부 82권은 궐본이다.

사문 구마라집(鳩摩羅什)은 중국말로는 동수(童壽)일명 구마라기바(鳩摩羅耆婆)라고 한다. 외국에서 이름을 짓는 법은 대부분 부모의 이름을 그 근본으로 삼는다. 구마라집의 부친은 구마라염(鳩摩羅炎)이었고, 모친의 이름은 기바(耆婆)였기 때문에 그 두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라고 한다. 천축 사람이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나라의 재상을 지냈는데, 구마라집의 조부(祖父) 구마달다(鳩摩達多)는 재기가 뛰어나서 다른 사람과는 비할 바 없었고, 명성이 나라 안에서 높았다.
아버지 구마염(鳩摩炎)은 총명하고도 아름다운 절개가 있었는데, 장차 재상의 지위를 이으려고 할 때에 사양하고 피하여, 집을 떠나 동쪽으로 총령(葱領)을 넘었다. 구자국(龜茲國) 왕이 그가 영예(榮譽)를 버리고 속세를 떠났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매우 존경하고 사모하여, 몸소 교외(郊外)까지 나가 영접하고 청하여 그를 국사(國師)로 삼았다.
구자국왕에게는 누이동생이 있었다. 그녀의 나이 갓 스무 살이었는데, 사려가 깊고 이치를 잘 알며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그리하여 눈으로 한 번만 보아도 반드시 이해하였고, 한 번만 들어도 곧 외웠다. 또 몸에 붉은 사마귀가 있었는데, 옛 법에 슬기로운 자식을 낳을 것이라 하였다. 여러 나라에서 그녀에게 장가를 들려고 하였으나, 그녀는 그들 모두와는 혼인을 하려 들지 않았다. 그런데 구마염을 한 번 보고 나서는 매우 마음에 들어 하였다. 구자국왕은 이를 듣고 크게 기뻐하면서 구마염에게 억지로 그녀를 아내로 삼게 하였다.
얼마 후에 구마라집을 잉태하였다. 구마라집이 어머니 태 안에 있을 적에 구마라집의 어머니는 깨달음과 총명함이 평소의 배가 되었다. 작리대사(雀梨大寺)에 가서 경(經)을 들었는데, 홀연히 천축의 말을 저절로 통하게 되었다.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에도 깊은 이치를 끝까지 다 궁구해 냈으므로, 대중들이 모두 감탄하고 신이(神異)롭게 생각하였다.
그 절에 달마구사(達摩瞿沙)라는 아라한이 있었는데, 말하였다.
“이것은 필시 지혜로운 아들을 잉태한 것이다.”
그리고 사리불(舍利弗)이 태 안에 있을 적의 증험을 말하였다. 이미 구마라집이 출생하니, 출중하기가 불가사의하였다. 그녀는 구마라집이 출생한 뒤 예전의 천축어를 다 잊어버렸다.
얼마 후에 그의 어머니는 출가하여 도(道)를 닦고 배워서 초과(初果)5)
를 얻었다.
구마라집도 나이 일곱 살에 어머니와 함께 출가하여, 스승에게 경을 배웠는데, 하루에 천 게송[偈]을 암송하였다. 한 게송에는 32자가 있었으니, 모두 3만2천 언(言)이었다. 『아비담[毗曇]』을 암송하여, 이미 그 스승이 전수한 것을 넘어섰고, 그 뜻을 곧 저절로 이해하고 통하여, 그윽한 이치를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당시 구자국 사람들은 구마라집의 어머니를 왕의 누이로서 보호함이 너무도 심했으므로, 그녀는 구마라집을 이끌고 피하였다.
구마라집의 나이 아홉 살 때에 계빈(罽賓)에 도착하여, 덕망이 높은 법사 반두달다(槃頭達多)를 만났다. 바로 그는 계빈국 왕의 사촌 아우였다. 그는 이치에 깊고 정밀하여 큰 기량(器量)이 있었으며, 삼장(三藏)과 9부(部)를 훤히 꿰뚫지 않음이 없었다. 또한 날마다 1천 게송씩을 외웠으며, 이름이 온 나라에 퍼져 있었다.
구마라집은 곧 그를 스승으로 섬기면서, 마침내 그에게서 『잡장(雜藏)』ㆍ『중아함경(中阿含經)』ㆍ『장아함경(長阿含經)』 등을 배워 무릇 4백만 언(言)을 암송하였다.
반두달다는 구마라집과 논의(論議)할 적에는 늘 그의 의론이 깊고 뛰어남에 깊이 탄복하였으며, 그의 명성은 왕에게까지 전해졌다. 왕은 곧 구마라집을 궁중으로 초청하여, 외도(外道)의 논사(論師)들을 모아 놓고 서로 함께 논란하게 하였다.
대화를 처음 할 때, 외도들은 구마라집의 나이가 어리다고 경시하여 말투가 자못 공손하지 못하였다. 구마라집은 그 틈을 타 그들의 기세를 꺾어 버리니, 외도들은 굴복하고 부끄러워하며 말을 못하였다. 왕은 더욱 공경하고 특별히 대우하여 날마다 말린 거위 고기 한 쌍(悉)과 멥쌀ㆍ밀가루 각 세 말[斗]에다 소(酥 : 우유) 여섯 되를 주었으니, 이것은 외국인에게 행하는 상등 공양이었다. 구마라집이 머물고 있던 사찰의 주지도 이에 비구 다섯 사람과 사미 열 사람을 차출하여 운영하고 보살피게 하여 비로 쓸고 물을 뿌리게 하여 구마라집의 제자와 같게 하였으니, 그를 존경하고 숭배함이 이와 같았다.
나이 열두 살이 되어 그의 어머니는 그를 이끌고, 구자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 때에 월지(月氏)의 북쪽 산에 이르렀는데, 그 산에 있던 한 나한(羅漢)이 그를 보자, 기이하게 여기면서 그의 어머니에게 말하였다.
“언제나 이 사미를 수호해야 됩니다. 이 사미가 나이 서른다섯 살이 될 때까지 파계(破戒)하지 않는다면, 불법을 크게 일으키고 무수한 중생들을 제도하는 것이 우바국다(優波毱多)와 다름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계(戒)를 온전히 지키지 못한다면, 능히 큰 일을 할 수 없을 것이고, 다만 지혜가 영특하며 재주 있는 법사(法師)가 될 뿐일 것입니다.”
구마라집은 사륵국(沙勒國)에 이르러 부처님의 발우[鉢]를 머리 위에 이었는데,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발우의 형태는 굉장히 큰데, 어찌 이리도 가벼울까?’라고 하자마자 무거워서 감당할 수가 없어,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그만 발우를 내려놓고 말았다. 어머니가 그 까닭을 묻자 곧 대답하였다.
“저의 마음에 분별이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발우에 경중(輕重)이 있었습니다.”
구마라집은 사륵국에서 『아비담(阿毗曇)』과 『육족론[六足]』의 여러 문(門)과 『증일아함경[增一阿含]』을 배워 암송하였다. 그리고 구자국으로 돌아왔는데, 그의 명성이 온 나라를 덮었다. 그 때에 구자국의 승려 1만여 인은 그를 범부가 아니라고 여기면서, 모두가 받들고 공경하여 감히 그보다 위에 있으려 하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향을 사르는 차례에도 먼저 서지도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4위타(四韋陁:베타)와 5명(明)의 여러 논[諸論]들과 외도의 경서(經書)를 널리 읽었으며, 음양(陰陽)ㆍ성산(星算 : 천문과 산수)도 모두 다 극진히 연구하여 길흉(吉凶)에 묘하게 통달하였으므로, 그의 예언은 부절(符節)6)을 합하듯 딱 들어맞았다.
성품이 소탈하고 활달하여 자잘한 법식에 구애받지 않았으니, 수행자(修行者)들 모두가 이상하게 여겼다. 그러나 구마라집은 마음에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에, 일찍이 그러한 것들을 염두에 둔 적이 없었다.
뒤에 비마라차(卑摩羅叉)로부터 『십송률(十誦律)』을 배웠고, 또 수리야소마(須利耶蘇摩)로부터 대승(大乘)을 물어 전수받았는데, 이에 탄식하면서 말하였다.
“내가 옛날 소승(小乘)을 배운 것은, 마치 사람이 금(金)을 알지 못하고, 놋쇠를 가장 좋은 것으로 여긴 것과 같았다.”
그리하여 대승의 요의(要義)를 널리 구하고, 『중론(中論)』과 『백론(百論)』 두 논과 『십이문론(十二門論)』 등을 배우고 외웠다.
얼마 후 구마라집의 어머니는 구자국을 하직하고 천축국으로 가게 되었다. 구자국왕 백순(白純)에게 말하였다.
“당신의 나라는 얼마 있지 않아 쇠망할 것입니다. 나는 이곳을 떠납니다. 천축에 가서 3과(果)를 증득하도록 해야겠습니다.”
구마라집의 어머니는 이별에 임하여 구마라집에게 말하였다.
“방등(方等)의 심오한 교의의 참 마음[眞丹]을 널리 떨쳐야 하는데, 그것을 동토(東土)에 전하는 것은 오직 너의 힘에 달려 있을 뿐이다. 다만 자기 자신에게만은 이익이 없을 것이니, 그것을 어찌 해야겠느냐?”
구마라집은 대답하였다.
“보살의 도는 중생을 이익하게 하고, 자신의 몸은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만일 반드시 큰 교화를 널리 퍼뜨려 몽매한 세속을 깨닫게 할 수만 있다면, 아무리 끓는 가마솥의 고통을 당한다 하더라도 한이 없을 것입니다.”
이에 구마라집은 구자국에 체류하여 왕의 신사(新寺)에 거주하다가 『대품경(大品經)』을 얻었다. 그리하여 막 책장을 펼치고 읽으려 하는데, 악마[魔]가 와서 경문(經文)을 가렸으므로 백지만 보일 뿐이었다. 구마라집은 이것이 악마의 소행인 줄 알고, 서원하는 마음을 더욱 견고히 지니자, 악마는 사라지고 글자가 나타났으므로, 이에 읽고 익혔다.
뒤에 작리대사(雀梨大寺)에서 대승경(大乘經)을 독송하고 있는데, 홀연히 공중에서 소리가 들렸다.
“그대는 지혜로운 사람이거늘, 어째서 이러한 것을 읽는 것인가?”
구마라집이 대답하였다.
“너는 바로 작은 악마로구나. 마땅히 때가 되었으니 속히 떠나라. 나의 마음은 대지(大地)와 같아 움직이게 할 수 없다.”
구자국 신사(新寺)에 머문 지 2년 동안 대승의 경론들을 널리 독송하였으며, 그 비밀스럽고 심오한 뜻을 훤히 꿰뚫었다.
구자왕은 구마라집을 위하여 금사자좌(金師子座)를 만들고, 대진(大秦)의 비단으로 자리를 깔아, 구마라집으로 하여금 법좌(法座)에 올라 설법하게 하였다.
뒤에 계빈국(賓國)으로 가서 그의 스승 반두달다(槃頭達多)를 위하여 일승(一乘)의 미묘한 이치를 자세히 설하자, 그 스승은 감탄하고 마음으로 복종하여, 곧 구마라집에게 스승의 예를 올리고 말하였다.
“나는 바로 화상(和上)의 소승의 스승이고, 화상은 바로 나의 대승의 스승이십니다.”
서역(西域)의 여러 나라들이 모두 구마라집의 뛰어남에 엎드려 높이 받들었다. 강설(講說)할 때에는 왕들이 법좌 옆에 꿇어 엎드리고, 구마라집으로 하여금 그 위를 밟고 올라가게 하였으니, 그를 소중히 대우함이 이와 같았다. 이미 구마라집의 도(道)는 서역에 떨쳤고, 그의 명성은 동국(東國)에까지 미쳤다.
부씨(符氏) 건원(建元) 13년 정축(丁丑, 377) 정월에 태사(太史)가 임금에게 아뢰었다.
“어떤 별이 외국 영역[分野]에 나타났으니, 덕이 높은 지인(智人)이 중국으로 들어와 보좌하게 될 것입니다.”
부견은 평소에 구마라집의 명성을 듣고 있었으므로, 이에 깨닫고 말하였다.
“짐(朕)이 듣건대, 서역에 구마라집이 있다고 한다. 아마 그 분이 아니겠는가?”
19년(383)에 부견은 효기장군(驍騎將軍) 여광(呂光) 등을 파견하여, 병사 7만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구자국(龜茲國)과 오기국(烏耆國) 등 여러 나라를 정벌하게 하였다. 출발에 임하여 부견은 여광에게 말하였다.
“짐이 들으니 거기에는 구마라집이라는 이가 있어, 법상(法相)을 깊이 이해하고 음양(陰陽)을 잘 알아, 저 학문의 종주(宗主)가 되어 있다고 한다. 짐이 깊이 생각건대, 만일 구자국을 쳐서 이기면, 곧바로 역마를 급히 달려 구마라집을 후송하도록 하라.”
여광의 군대가 아직 이르기 전에, 구마라집은 구자왕 백순(白純)에게 말하였다.
“나라의 운이 쇠하였습니다. 반드시 강한 적이 나타날 것입니다. 경사(京師)의 사람들이 동방으로부터 오면, 삼가 공손히 받들어야 하며 그들의 칼날에 대항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백순은 구마라집의 진언에 따르지 않고 전쟁을 하였다. 여광은 마침내 구자국을 격파하여 백순을 죽이고 구마라집을 사로잡았다.
여광은 성질이 거칠고 오만하였다. 구마라집의 지혜와 도량을 아직 측량하지 못하였다. 다만 그의 나이가 아직 어린 것만 보고, 곧 평범한 사람으로 여겨 그를 희롱하고 핍박하여 그 절개를 이지러뜨리려 하였다. 여광은 구마라집을 소에 태우기도 하고 사나운 말에 태워 떨어지게 하기도 하였으나, 구마라집은 항상 인욕(忍辱)하는 마음으로 일찍이 안색이 변하는 일이 없었다. 그리하여 여광은 부끄럽게 여기면서 그만두었다.
여광이 본국으로 귀환하는 도중에 군사를 산 밑에 주둔시켰다. 장수와 졸개들이 이미 휴식하고 있었는데, 구마라집이 말하였다.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낭패를 당할 것이니, 군사를 언덕 위로 이동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여광은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밤이 되자 과연 큰 비가 내려 갑자기 홍수가 나서 수심이 몇 길[丈]이나 되었고, 죽은 사람이 수천 인이었다. 여광은 비로소 구마라집의 신비한 능력에 더욱 공경하였다.
구마라집이 여광에게 말하였다.
“이곳은 흉하고 망할 땅이므로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돌아올 운수를 미루어 짐작하고 헤아려 속히 돌아가야 합니다. 중도에 반드시 머무를 만한 복된 땅이 있을 것입니다.”
여광은 구마라집의 말을 따랐다. 그리하여 양주(涼州)에 이르러서 부견(符堅)이 요장(姚萇)에게 시해당했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양토(涼土)를 점령하여 웅거하면서 한 지방의 임금이 되었다. 구마라집은 양토에 여러 해 동안 머무르면서 자주 그를 위하여 예언을 하였고, 그 일은 뒤에 모두 그의 말대로 되었다. 그러나 여광의 부자(父子)는 도를 널리 펴지 않는 까닭에, 그 경법(經法)을 널리 쌓아 두고도 선양하고 교화할 방법이 없었다. 부견(符堅)은 이미 세상을 떠나 끝내 서로 대면하지 못하였다.
요장(姚萇)이 구마라집의 높은 명성을 듣고, 마음을 비우고는 내조(來朝)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여러 여씨(呂氏)들은 구마라집이 지혜로운 계책과 많은 지식을 가지고 요씨를 위해 도모할까 두려워하여, 동쪽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요장이 죽고 아들 요흥(姚興)시호는 문조황제(文祖皇帝)이다.이 자리를 잇자, 다시 사신을 파견하여 돈독히 요청하였다.
홍시(弘始) 3년 신축(辛丑, 401) 3월 궁중의 나무에 연리지(連理枝)7)가 생기고, 소요원(逍遙園)의 파[葱]가 변하여 난초[茞]가 되었다. 이것을 아름답고 상서로운 일로 여겨 지혜로운 사람이 들어올 것이라 하였다.
그 해 12월 20일에 구마라집은 상안(常安)에 도착하였다. 요흥은 국사(國師)의 예로써 대우하여 구마라집을 특별히 총애하였다. 마주 대하여 이야기하면 오래 머물러 하루 해가 지나갔고, 미묘한 것을 연구하여 극진한 데까지 나아가서 한 해를 다 보내도록 싫증을 몰랐다.
대법(大法 : 불교)이 동방에 전해진 것은 후한(後漢) 명제(明帝) 때에 비롯되었다. 그로부터 위(魏)ㆍ진(晋) 시대를 거치면서 경론(經論)이 점차로 많아졌다. 그러나 지겸(支謙)과 축법호(竺法護)가 번역해 낸 경론들은, 대부분 문자에 막히고 의미가 규격화된 것이 많았다. 요흥은 젊어서부터 삼보(三寶)를 공경하여 단단히 강설(講說)을 모을 결심을 하고 있었다.
구마라집이 상안에 이른 뒤에, 요흥은 그를 청하여 서명각(西明閣)과 소요원으로 들어오게 하여 여러 경전들을 번역하게 하였다. 구마라집은 이미 경전들을 거의 암송하고 있었고, 궁구하여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 중국말에도 능통하여 음역(音譯)에도 유창하였다. 이전의 옛 번역 경전들을 살펴보면, 경문의 뜻이 지나치게 잘못된 곳이 많았다. 앞선 번역들이 바른 지취(旨趣)8)를 잃은 이유는, 범본(梵本)과 대조하여 번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요흥은 사문 승조(僧肇)ㆍ승략(僧䂮)ㆍ승막(僧邈)ㆍ승예(僧叡) 등 8백여 인을 시켜 구마라집에게 뜻을 묻고 배우게 하여, 다시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을 번역하게 하였다. 구마라집은 범본(梵本)을 가지고, 요흥은 옛날 번역한 경전을 들고 서로 대조하고 교정하였다. 옛날의 번역을 새로운 글로 바꾸어 놓으니, 뜻이 모두 원만하게 소통되었다. 대중들은 모두 마음으로 우러르고 기뻐하며 찬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요흥은 불도가 깊어 그 신행은 오직 잘[善] 할뿐이며, 믿음[信]은 삼계(三界)의 고통을 벗어나는 좋은 나루이며, 세상을 다스리는 큰 법칙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요흥은 뜻을 9경(經)에 의탁하고, 마음을 12부(部)에 노닐게 하여, 『통삼세론(通三世論)』을 저술하여, 인과(因果)의 가르침을 밝혔다. 왕공(王公) 이하가 모두 그의 풍모를 흠앙하고 찬탄하였다. 요흥은 종실(宗室)의 상산공(常山公) 현(顯)과 안성후(安成候) 숭(嵩)이 모두 인연과 업(業)을 독실하게 믿었으므로, 여러 번 구마라집을 상안대사(常安大寺)로 청하여 새로 번역한 경전을 강설하게 하였다.
구마라집은 홍시 4년 임인(壬寅, 402)으로부터 14년 임자(壬子, 412)에 이르기까지 『대품(大品)』ㆍ『소품(小品)』ㆍ『금강경(金剛經)』 등 74부 380여 권을 번역하였는데, 그 모두가 신묘한 근원을 훤하게 드러내고, 그윽한 이치를 빼어나게 잘 나타내었다. 당시 사방의 의학(義學) 사문들이 만 리를 멀다 하지 않고 모여들었다. 이름과 덕망이 빼어난 사람과 재주가 창달한 2공(公)과 도항(道恒)ㆍ승표(僧標)ㆍ혜예(慧叡)ㆍ승돈(僧敦)ㆍ승필(僧弼)ㆍ승조(僧肇) 등 30여 승려들이 전수받고, 그윽한 뜻을 찾아 정밀하게 연구하면서 열심히 궁구하였다. 여산(廬山)의 혜원(慧遠)은 도업(道業)이 오묘한 이였으나, 이에 사람을 보내어 닦은 것을 물었다. 용광사(龍光寺)의 도생(道生)도 지혜와 견해가 미묘한 데까지 꿰뚫은 이였으나, 역시 관중(關中)에 들어와 묻고 전수받았다. 구마라집의 성대한 업적은 위대하고 오래되었으나, 오늘날까지도 모두 우러러보게 되었다.
처음에 사문 승예(僧叡)는 재능과 식견이 높고 밝았으나, 언제나 구마라집을 따라다니면서 옮기어 베끼는 일[傳寫]을 담당하였다. 구마라집은 늘 승예를 위하여 사방의 문체[辭體]를 논하고, 범어와 한자의 같고 다름을 살피고 분별하여 말하였다.
“천축국의 풍속은 문장을 대단히 중시한다. 그 궁상체(宮商體)의 운율(韻律)은 현악기를 들어와야 좋아진다. 무릇 국왕을 알현할 때에는 국왕의 덕을 찬미하는 송(頌)이 있고, 부처님을 뵙는 의식은 부처님의 덕을 노래로 찬탄하는 것을 귀히 여긴다. 경전 속의 게송들은 모두 이러한 형식이 있다. 그러므로 범문을 중국어로 바꾸게만 되면 그 아름다운 문채(文彩)를 잃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대의(大意)를 살렸다 하더라도 문체가 현격하게 다르기 때문에, 마치 밥을 씹어서 남에게 주는 것과 같으므로, 다만 맛을 잃어버릴 뿐만 아니라, 남으로 하여금 구역질이 나게 하는 것이다.”
구마라집은 일찍이 사문 법화(法和)에게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지어 준 적이 있다.

마음의 산이 밝은 덕을 길러
그 향내 1만 유순(由旬)에 퍼지고
난새[鸞]9)
가 외로히 오동나무에서 애절하게 우니
청아한 소리 구천(九天)에 사무치네.

무릇 게송을 10수(首) 지었는데, 문장과 비유가 모두 이와 같았다.
구마라집은 평소에 대승을 좋아하여 대승을 널리 펴는 데에 뜻을 두었는데, 항상 한탄하였다.
“내가 붓을 들어 대승의 『아비담(阿毗曇)』을 저술한다면, 가전연자(迦旃延子)에 비할 바가 아니겠지만, 지금 이 중국 땅에는 학식이 깊은 사람이 없어 여기에서 붓을 꺾노니, 논(論)을 지은들 무엇하겠느냐?”
그리고는 대승 『아비담』을 짓는 것을 처연히 그만두었다. 오직 요흥(姚興)을 위하여 『실상론(實相論)』 두 권을 저술하였다. 내는 말은 문장을 이루어 깎아내어 고칠 것이 없었고, 문장과 비유는 완곡하고 간명하여 현묘하고 심오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구마라집은 사람됨이 영명하고 투철하였으며, 남에게 굽히지 않는 성품이 남달랐다. 또한 기연에 응하여 깨달아 아는 것은 무리 가운데 필적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돈독한 성격으로 인자하고 후덕하였으며, 차별 없이 사람들을 두루 사랑하고, 자신을 비우고 사람들을 잘 가르치되 종일토록 게으르지 않았다.
당시 사문 승예(僧叡)를 요흥이 매우 총애하였는데, 구마라집이 번역한 경은 모두 승예가 이에 참여하여 바로잡았다. 예전에 축법호(竺法護)가 번역해 내놓은 『정법화경(正法華經)』 「수결품(受決品)」에서 “하늘은 사람을 보고[天見人], 사람은 하늘을 본다[人見天]”고 하는 데가 있는데, 구마라집이 이 경을 번역하다가 이 대목에 이르자 말하였다.
“이 말은 범본(梵本)에서와 뜻은 같으나, 다만 말이 실질보다 지나친 점이 있을 뿐이다.”
그러자 승예가 말하였다.
“장차 사람과 하늘이 서로 닿아서 접촉하지 않으면, 사람과 하늘이 서로 만날 수 있겠는가?”
구마라집이 크게 기뻐하면서 말하였다.
“사실이 그렇다.”
승예와 구마라집이 서로 함께 개발하는 것이 모두 이런 종류였다.
일찍이 진승(秦僧) 도융(道融)이 『신법화경(新法華經)』을 강설하는 것을 듣고 구마라집이 찬탄하면서 말하였다.
“불법을 일으킬 사람은 바로 도융 그 사람이다.”
그 때에 갑자기 사자국(師子國)에서 한 바라문(婆羅門)이 나타났는데, 그는 총명하면서 말재주가 있고, 많이 배워 서역의 속서(俗書)는 펼쳐서 외우지 못한 것이 거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 나라 외도들의 종장(宗匠)이 되어 있었다. 구마라집이 관중(關中)에서 크게 불법을 일으키고 있다는 말을 듣고, 곧 분개하여 그 문도들에게 말하였다.
“어찌 석씨(釋氏 : 불교)의 도풍만을 홀로 중국 땅에 전할 수 있겠느냐? 그리고 우리들의 바른 교화의 경전을 동쪽 나라에 전하지 못할 이유가 있는가?”
마침내 낙타를 타고 책을 등에 싣고 상안(常安)으로 들어왔다. 요흥(姚興)은 그의 입과 눈이 능숙한 것을 보고 자못 매혹되었다. 이에 바라문은 요흥에게 말하였다.
“지극한 도에는 방향이 없으며, 각기의 일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지금 진(秦)나라의 스님들과 구변(口辯)의 힘을 겨루어 보려고 일부러 멀리서 왔습니다. 그 가운데서 우수한 사람에게 곧 그 교화를 전하게 하여 주십시오.”
요흥은 곧 이를 허락하였다.
당시 관중에 있는 사방의 승려와 대중들은 그들의 모자람을 느끼고 서로를 쳐다보기만 할 뿐, 감히 상대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구마라집이 도융에게 말하였다.
“이 외도는 총명하기가 보통 사람과 다르니, 말싸움을 하면 반드시 다른 사람들을 이길 것이다. 위없는 큰 도를 얻음은 우리 승도(僧徒)들에게 있는데도, 그에게 굴복한다면 자못 슬픈 일이다. 만일 외도로 하여금 뜻을 얻게 한다면 우리들의 법륜(法輪)의 바퀴축이 꺾일 것이니, 어찌 그렇게 되어서야 되겠는가? 내가 본 바에 의하면 그대 한 사람만이 그를 상대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에 도융은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아도 재주와 힘이 그에게 뒤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서역 외도의 경서(經書)를 다 읽어 보지 못하였다. 곧 비밀스럽게 사람을 시켜 바라문 교도들이 읽는 경전의 제목을 베껴 오게 하여, 한 번 펴 보고는 곧 외웠다.
그 후 날을 정하여 논의(論議)를 하게 되었는데, 요흥이 몸소 그 자리에 나왔고, 공경(公卿)들이 모두 모였으며, 관중의 승단과 대중들도 모두 사방 먼 곳에서 모여들었다.
그때 도융은 바라문과 서로 주고받으며 칼날 같은 언변으로 현묘한 기풍을 날렸으니, 바라문이 미치지 못할 바의 경계였다. 그때 바라문은 스스로 말과 이론으로는 자신이 굴복되었음을 알았으나, 아직도 널리 많은 책을 읽은 것을 과시하려 하였다. 이에 도융은 그가 읽은 책과 통론한 논과 진(秦) 땅의 경전과 역사책의 제목을 나열하니, 진(秦) 땅의 권수와 부수가 세 배나 더 많았다. 이에 구마라집은 그 기세를 타서 조롱하며 말하였다.
“그대는 대진(大秦 : 중국의 나라 이름)의 넓은 학문을 듣지도 못했는가? 어찌하여 갑자기 경솔하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가?”
그 바라문은 마음속으로 부끄러워하고 항복하였다. 그는 도융의 발 아래 머리가 땅에 닿게 절을 하고, 채 열흘이 못되어 그곳을 어쩔 수 없이 떠났다. 상법의 운[像運]10)이 다시 중국 땅에 일어나게 된 것은 구마라집과 도융의 힘이었다.
또 비구 배도(杯度)가 팽성(彭城)에 있었는데, 구마라집이 상안(常安)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나는 그대와 놀고 이별한 지 어언 3백여 년이건만, 이생에는 아득히 만날 기약이 없구나. 내생에 만나는 것이 어찌 이리도 더디단 말이냐?”
구마라집이 임종할 무렵 병을 참으면서, 대중 스님들과 이별을 고하며 말하였다.
“내가 법상(法相)11)을 만나 아직 뜻을 다 펴지 못하였는데, 이제 세상을 떠나게 되었으니, 이 비통함을 무슨 말로 대신하겠는가? 나는 우매한 사람이었는데도 잘못하여 역경(譯經)을 맡게 되었다. 만일 내가 전한 것에 잘못이 없다면, 나를 화장한 후에도 내 혀만은 불에 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는 진(秦)나라 홍시(弘始) 연간(399~415)에 입적하였다. 즉시 소요원에서 외국의 법에 의하여 화장하였다. 장작이 다 타고 시신이 다 없어졌건만, 오직 그 혀만은 재가 되지 않았다. 믿음으로 법을 넓힌 증험이었다.구마라집의 입적에 대해서는 모든 기록이 일정하지 않다. 『고승전(高僧傳)』에서는 “홍시 11년(409) 8월 20일에 상안에서 입적하였다”라고 하였고, 혹자는 7년(405)이라고 하였으며, 혹자는 8년(406)이라고 하였다. 『고승전』을 취하면 11년(409)이 옳다고 하겠으나, 이것은 그렇지 않다. 『성실론(成實論)』 후기(後記)에서 말한 것을 보면, “대진(大秦) 홍시 13년 신해(辛亥, 411) 9월 8일에 상서령(尙書令) 요현(姚顯)의 청으로 이 논(論)을 번역하여 내면서, 다음해 9월 15일에 다 끝마쳤다”라고 하였다. 이 14년(412) 말(末)을 준해 보면, 구마라집은 아직 입적하지 않았다. 또 승조(僧肇)가 진나라 왕 요흥(姚興)에게 『열반무명론(涅槃無名論)』을 올리면서 그 표(表)에서 말하기를 “나는 구마라집 문하(門下)에 있은 지 10여 년입니다”라고 하였다. 만일 구마라집이 4년(402)에 경을 번역하였고, 11년(409)에 입적하였다 하면, 그 동안의 기간은 8년이어서 10년이 다 차지 않았는데, 어떻게 문하에 있은 지 10여년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다만 홍시 연간(399~415)에 입적하였다는 것만을 알 수 있으며, 그 연월일을 확정할 수는 없다 하겠다.
그리고 구마라집이 번역하여 낸 경의 부권(部卷)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있어 다소 일정하지 않다. 『장방록(長房錄)』 중에는 그 수가 더욱 많아 이제 자세히 참고하여 점검해 보면, 이 많은 경들이 따로 파생한[別生] 것이며, 또는 한 경본(經本)에 여러 개의 이름이 있고, 혹은 기록한 이들의 착오로 기재되어 있었다. 그 자세한 것은 아래와 같으므로, 이제 모두 삭제하였다.

십송률(十誦律) 61권『승우록』에서는 “구마라집의 번역이다”라고 하였다. 이전의 58권은 구마라집이 통역度語하였으므로, 구마라집이 바로 번역한 것은 아니며, 마지막 3권은 비마라차(卑摩羅叉)가 이어서 번역하여 뒤에다 붙였다. 이미 나머지의 기록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구마라집의 번역으로 기재하지 않았다.
방광반야바라밀경(放光般若波羅蜜經) 20권장방은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별록(別錄)』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이 『방광반야』의 범본(梵本)과 『대품(大品)』은 동본(同本)이다. 『대품』을 번역할 때에는 요흥(姚興)이 구경(舊經)을 잡고, 구마라집이 신본(新本)을 번역하여 낸 것이다. 만일 『방광반야』를 구마라집이 번역했다 한다면, 그 구경은 어느 경이란 말인가? 그러므로 『대품』은 신본이요, 『방광반야』는 구경(舊經)임을 알 수 있는데, 이 경을 거듭 2본(本)으로 보고 기재하는 것은 지나친 착오다.
반야경론집(般若經論集) 20권장방은 “『오록(吳錄)』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이 『경론집』은 여산(廬山)의 혜원(慧遠)법사가 『대지도론(大智度論)』의 문구가 너무 번거로워서, 초학자들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어 있었으므로, 이에 번거롭고 어지러운 것을 깎아내어 질박한 문장을 근본에 맞게 해서, 20권으로 지은 것이다. 또한 『대지론요략(大智論要略)』, 또는 『석론요초(釋論要抄)』라고도 한다. 이것은 혜원이 『대지도론』의 요점을 간략하게 추린 것이다. 그러므로 구마라집이 따로 번역한 것이 아니다.
선법요(禪法要) 3권하주(下注)에 “먼저 번역한 홍시(弘始) 원년(399)의 책을 거듭 교정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승예(僧叡)가 지은 서문에서도 “먼저 번역한 책을 거듭 교정하였다”라고 하였으므로, 두 가지 이름을 기재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승예가 지은 경 서문에 의거하면, 곧 “『좌선삼매경(坐禪三昧經)』이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아란야습선법경(阿蘭若習禪法經) 2권장방은 “『별록(別錄)』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혹은 경(經)자가 없다. 『좌선삼매경(坐禪三昧經)』과 동본인데, 다르게 번역되어 나왔다. 이제 말하자면 그렇지 않으니, 이는 곧 『좌선삼매경』의 다른 이름別名이다. 그 문구를 찾아보면 처음과 끝이 아주 같다. 이 경은 처음 번역되어 나온 것이며, 교정한 것이 아니다.
낙영락장엄경(樂瓔珞莊嚴經) 1권장방은 “『이곽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경의 후기(後記)에 준하면, 이 경은 담마야사(曇摩耶舍)가 번역하였다. 구마라집의 번역이 아니므로, 이제 담마야사(曇摩耶舍)의 목록에다 기재한다.
실상론(實相論) 1권『고승전』에서는 “구마라집이 요흥(姚興)을 위하여 2권을 지었다”라고 하였다. 이 논은 범본의 번역이 아니기 때문에 기재하지 않는다.
왕고성화불국원행법전경(往古性和佛國願行法典經)혹은 생화(生和)라고 쓰기도 한다. 『문수불토엄정경(文殊佛土嚴淨經)』에서 나왔다.
불경해철시방경(佛𡄇咳徹十方經)
불제화출보살경(佛齊化出菩薩經)
마업경(魔業經)
과거무변광정불토경(過去無邊光淨佛土經)
허공장보살문지경(虛空藏菩薩問持經)
득기공덕경(得幾功德經)또한 『득기복경(得幾福經)』이라고도 한다.
과마법계경(過魔法界經)
태백마왕견신경(太白魔王堅信經)
불제자화마자게송경(佛弟子化魔子偈頌經)
개화마경(開化魔經)
마왕변신경(魔王變身經)『불경해철시방경』 이하 10경은 모두 『대집(大集)』에서 나왔다.
관세음경(觀世音經)『법화경(法華經)』에서 나왔다.
다라니법문육종동경(陁羅尼法門六種動經)
미륵보살본원대시성불경(彌勒菩薩本願待時成佛經)
불변시회신경(佛變時會身經)
동방선화세계불좌진동경(東方善華世界佛座震動經)『다라니법문육종동경』 이하 4경은 모두 『비화경(悲華經)』에서 나왔다.
작왕경(雀王經)
불석위록왕경(佛昔爲鹿王經)
보살신위합왕경(菩薩身爲鴿王經)『작왕경』 이하 3경은 모두 『육도집경(六度集經)』에서 나왔다.
무량락불토경(無量樂佛土經)또한 국토(國土)라고도 쓴다. 『앙굴경(央崛經)』에서 나왔다.
불문아수륜대해유감경(佛問阿須倫大海有減經)『중아함경』에서 나왔다.
불적견천복륜상경(佛跡見千輻輪相經)『잡아함경』에서 나왔다.
불심총지경(佛心惣持經)
수우왕경(水牛王經)
토왕경(兎王經)『불심총지경』 이하 3경은 모두 『생경(生經)』에서 나왔다.
미후여비공희치변경(獼猴與婢共戲致變經)
왕후위강랑경(王后爲蜣蜋經)『미후여비공희치변경』 이하 2경은 모두 『잡비유경(雜譬喩經)』에서 나왔다.
비구응공법행경(比丘應供法行經)승우(僧祐)는 주(注)에서 “「의경(疑經)」에 편입되어 있다”라고 하였는데, 지금도 역시 「의록(疑錄)」에 있다.
이상은 모두 35부 136권이다.

(3) 불야다라(弗若多羅)
십송률(十誦律) 58권홍시(弘始) 6년(404) 10월 17일에 중사(中寺)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이진록(二秦錄)』에 보인다.
이상은 1부 58권이며, 그 경본이 현재 있다.

사문 불야다라는 중국말로는 공덕화(功德華)라고 한다. 계빈국(賓國) 사람이다. 젊어서 출가하여 계행(戒行)으로 칭송받았으며, 삼장(三藏)에 두루 통하였다. 특히 『십송률』 부(部)에 정통하여 외국에서는 그를 스승으로 받들어 모시었다. 당시 모든 사람들이 이르기를 “이미 성과[聖果]12)에 올랐다”라고 하였다.
홍시 10년(408)에 석장(錫杖)을 짚고 관중(關中)으로 들어왔다. 진(秦)나라 임금 요흥(姚興)은 상빈(上賓)의 예로 예우하였으며, 구마라집도 그 계행과 범절을 추종하고, 정중하고 공손한 태도에 각별히 존경하였다. 이에 앞서 경법(經法)은 비록 전해졌지만, 율장(律藏)은 아직 널리 퍼지지 않았다.
이미 불야다라가 이 율부에 능하다는 소문을 듣고, 모두가 다 사모(思慕)하고 있었다. 홍시 6년 갑진(甲辰, 404) 10월 17일에 상안(常安)의 중사(中寺)에 의학사문(義學沙門) 6백여 인을 모아 놓고, 불야다라를 청하여 『십송률』 범본(梵本)을 외우게 하고, 구마라집은 이것을 중국(秦) 말로 번역하였다. 번역의 3분의 2를 끝냈을 때, 불야다라가 병에 걸려 갑작스럽게 세상을 하직하였다. 대중들은 미처 대업(大業)이 끝나기 전에 장인(匠人)13)
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매우 비통해하고 한스러워 했다.
다음에는 서역의 사문 담마류지(曇摩流支)중국말로는 법락(法樂)이다.가 가업을 버리고 불도에 들어가, 오로지 율장(律藏)으로써 명성을 날렸다.
홍시 7년(405) 가을에 관중에 도착하였다. 여산(廬山)의 석혜원(釋慧遠)은 담마류지가 비니(毘尼 : 계율)에 능하다는 말을 듣고, 율부를 완성하기를 희망하였다. 곧 그에게 편지를 띄워 통호(通好 : 좋은 관계)하며 말하였다.
“불교가 흥기하여 먼저 상국(上國)에서 행해지고, 그 갈래가 나뉜 이후로 4백여 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문의 계율에 있어서는 빠진 것이 대단히 많습니다. 지난번에 서역의 도사 불야다라는 계빈 사람인데, 『십송률』 범본을 외우고, 구마라집 법사는 달통한 재주와 해박한 식견을 가지고 이것을 통역하여 전[傳譯]하였습니다. 그런데 『십송률』의 글이 막 절반을 넘기 시작하였을 적에, 불야다라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 중도에서 그치게 되어, 대업을 완성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개탄스럽고 한스러움이 매우 컸습니다.
인자(仁者)께서 이 귀중한 경을 가지고 몸소 이르렀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만날 수 있게 되어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늘의 운수가 이른 것이지 어찌 사람이 만든 일이겠습니까? 생각하건데, 도를 널리 펴고 중생을 감응시키는 때가 되었으니, 도를 묻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인색하지 않으시리라고 믿습니다.
만일 율학의 문도들을 위하신다면, 이 경본을 완성시켜서 청정한 행을 열어 보이고, 그들의 눈과 귀를 씻어 주시어, 처음 참여한 무리들이 위없는 나루를 잃지 않게 해 주십시오. 거룩한 일[勝業]에 참여하려는 자들을 해와 달처럼 밝게 한다면, 이것은 곧 은혜가 깊고 덕이 두터워지리니, 사람과 신(神)들이 함께 감동할 것입니다. 부디 자비를 드리워 제가 이 편지를 보내는 뜻에 어긋나지 않기를 원합니다.”
담마류지는 혜원의 편지를 받고, 요흥의 정성스러운 요청을 받게 되자, 이에 구마라집과 함께 이 『십송률』을 번역하여 마쳤다.
세밀히 연구하고 고증하여 계율의 조목을 조사하여 정했는데도, 구마라집은 오히려 문장이 번거롭고, 잘 되지 못하였다고 여겼다. 구마라집이 이미 입적하였기 때문에 다듬어 정리할 수 없었다.
담마류지는 상안의 대사(大寺)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혜관(慧觀)이 양도(揚都)로 오도록 요청하였다. 담마류지가 말하였다.
“그 땅에는 사람도 있고 법도 있으니, 충분히 세상을 이롭게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마땅히 율의 가르침이 없는 곳으로 가야 됩니다.”
이에 다른 지방으로 돌아다니면서 교화하였는데, 그 뒤에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한다.

(4) 불타야사(佛陁耶舍)
허공장보살경(虛空藏菩薩經) 1권제일 먼저 번역되어 나왔다. 혹은 보살(菩薩)이란 글자가 없기도 하다. 『허공잉경(虛空孕經)』과 같은 동본이다. 이 경은 『대집경(大集經)』의 별분(別分)이다. 삼장(三藏)은 뒤에 외국으로 돌아갔는데, 계빈국에서 이 경을 얻어 상인(商人)에게 맡기어 양주(涼州)로 보냈다. 석도혜의 『송제록(宋齊錄)』과 『승우록』에 보인다.
장아함경(長阿含經) 22권홍시 14년(412)에 번역을 시작하여 15년(413)에 마쳤다. 양주(涼州) 사문 축불념(竺佛念)이 전역(傳譯)하였고, 진(秦)나라 사문 도함(道含)이 받아썼다. 승예(僧叡)의 『이진록』과 『승우록』과 『고승전』 등에 보인다.
사분율(四分律) 60권또한 『담무덕률(曇無德律)』이라고도 한다. 본래 번역한 권수는 45권, 또는 40권, 또는 44권으로 되어 있다. 지금 또한 70권으로 되어 있는 것은, 홍시 10년(408)에 중사(中寺)에서 번역되어 나왔는데, 혜변(慧辯)이 전역(傳譯)하였다. 『진세잡록(晋世雜錄)』과 『승우록』과 『고승전』에 보인다.
사분승계본(四分僧戒本) 1권혹은 승(僧)자가 없기도 한다. 또한 『담무덕계본(曇無德戒本)』이라고도 한다. 『진세잡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이상은 4부 84권이며, 그 경본은 모두 있다.

사문 불타야사는 중국에서는 각명(覺名)이라고 하며, 또는 각칭(覺稱)야사(耶舍)는 곧 명칭(名稱)을 뜻한다. 『고승전』에서는 각명(覺明)이라고 번역하였는데, 뜻이 조금 어긋난다.이라고도 한다. 계빈국 사람이다. 바라문(婆羅門) 종족으로서 세속에 있을 때는 외도(外道)를 섬겼다. 한 사문이 그의 집으로 가서 걸식을 하자, 불타야사의 아버지는 성을 내며 사람을 시켜 사문을 구타하게 하였는데, 갑자기 그 아버지의 손과 다리가 마비되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에 무당에게 물었더니 대답하였다.
“현인(賢人)을 범한 죄로 귀신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즉시 이 사문을 청하여 정성을 다하며 참회하였더니, 며칠 후에 문득 병이 나았다. 이로 인하여 불타야사를 출가시켜 그 사문의 제자가 되게 하였다.
당시 불타야사의 나이는 13세였는데, 한번은 스승을 따라 멀리 행각을 하다가 광야에서 호랑이를 만났다. 스승은 빨리 달아나 피하려 하였으나, 불타야사가 말하였다.
“이 호랑이는 이미 배가 불러 필시 사람을 습격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잠시 후 호랑이는 사라졌다. 그리고 앞으로 가다 보니 과연 호랑이가 먹다 남긴 고기가 보였다. 스승은 속으로 그를 기이하게 여겼다.
나이 15세가 되어 경을 외웠는데, 하루에 5, 6만 언(言)을 암송하였다. 그러나 거주하는 사찰에서 항상 밖으로 분위(分衛 : 걸식)를 나갔기 때문에, 읽고 외우는 일을 중지하게 되었다. 그러자 한 나한(羅漢)이 그의 총명하고 영민한 것을 소중히 여겨, 항상 밥을 빌어다 그를 공양하였다.
19세가 되자 대승과 소승의 경전 수백만 언을 암송하게 되었다. 그러나 타고난 성품이 대쪽같고 오만하여 꽤나 지견(知見)이 있는 것으로 자처하여 자기의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이 많지 않다고 여겼다. 그래서 여러 승려들에게 존경을 받지 못하였다. 다만 행동거지가 아름답고 담소(談笑)를 잘하여 그를 만나본 사람들은 그에 대한 깊은 원한을 잊어버렸다.
나이가 구족계(具足戒)를 받을 때가 되어서도 계단(戒壇)14)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므로 3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전히 사미(沙彌)로 있었다. 외삼촌에게 오명(五明)15)의 여러 논(論)을 배우고, 세간의 법술(法術)을 많이 익혔으며, 27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구족계를 받았다. 항상 독송에 힘써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며, 언제나 단정히 앉아서 뜻을 사유하였고, 시간이 지나가는 것을 깨닫지 못했으니, 그가 오로지 정진함은 이와 같았다.
후에 사륵국(沙勒國)에 이르렀는데, 그 당시 태자는 달마불다(達摩弗多)중국말로는 법자(法子)라고 부른다.였다. 그는 불타야사의 용모가 단아한 것을 보고 지내온 내력을 물었다. 불타야사의 응답이 맑고 그윽한 멋[淸雅]이 있었다. 태자는 기뻐하면서 그를 궁궐로 청하여 공양하고 융숭하게 접대하였다. 구마라집이 뒤에 사륵국에 이르러 불타야사에게 수학(受學)하였는데, 그를 대단히 존경하였다. 구마라집은 어머니를 따라 동쪽으로 돌아갔으나, 불타야사는 그대로 사륵국에 머물렀다. 얼마 후 사륵왕이 죽고 태자가 즉위하였다.
당시 부견(符堅)은 여광(呂光)을 파견하여 구자국을 공격하게 하였다. 구자왕은 급히 사륵국에 구원병을 요청하였으므로, 사륵왕은 몸소 군대를 거느리고 그들을 구하러 갔다. 불타야사로 하여금 남아서 태자를 보필하도록 하고 뒷일을 맡겼다. 그러나 구원병이 아직 도착하기도 전에 구자국이 함락되었으므로, 사륵왕은 돌아와서 구마라집이 여광에게 사로잡혔다는 사실을 자세히 알렸다. 이에 불타야사는 한탄하면서 말하였다.
“내가 구마라집과 서로 만난 지는 오래이지만, 아직 회포를 다 풀지 못했는데, 그가 갑자기 타향의 포로가 되었으니, 어찌 서로 만날 것을 기약하겠느냐?”
불타야사는 10여 년을 머무른 뒤에 왕이 죽고 나자, 구자국으로 가서 법화(法化)16)를 매우 성대하게 하였다. 그때 구마라집은 고장(姑臧)에 있었는데, 편지를 보내 불타야사를 청하였다. 양식을 싸 가지고 떠나려고 하였으나, 나라 사람들이 만류하였으므로 다시 1년여 더 머물렀다. 뒤에 제자에게 말하였다.
“나는 구마라집을 찾아가겠다. 비밀리에 행장을 꾸려 밤중에 출발하여 사람들이 모르게 해야 된다.”
제자가 말하였다.
“내일 아침 추격해 와서 다시 송환되는 것을 면치 못할까 두렵습니다.”
불타야사는 곧 맑은 물 한 사발을 가져다 약을 타서 수십 언(言)의 주문을 외운 뒤에, 제자에게 그 물로 발을 씻게 하고는 곧바로 야밤에 출발하여, 다음날 아침까지 수백 리를 갔다. 그리고는 제자에게 물었다.
“무엇을 느꼈느냐?”
제자가 대답하였다.
“오직 몹시 세찬 바람 소리만 들리고 눈에서 눈물이 나올 뿐이었습니다.”
불타야사는 또 주문을 외운 물로 발을 씻게 하고는 머물러 쉬었다. 다음날 아침 나라 사람들이 그들을 뒤쫓았으나, 거리가 이미 수백 리나 떨어져 미치지 못하였다. 고장에 도착하였으나 구마라집은 이미 상안(常安)으로 들어간 뒤였다.
구마라집은 그가 고장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요흥(姚興)에게 권하여 그를 맞이하게 하였으나, 요흥은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얼마 후에 구마라집에게 명하여 경장(經藏)을 번역하게 하였다. 구마라집이 말하였다.
“교법을 널리 선양하려면 글 뜻을 두루 통달하게 되어야 합니다. 빈도(貧道 : 자신을 낮춘 말)는 비록 경전의 글을 외울 수는 있지만, 아직 그 이치를 잘 알지 못합니다. 오직 불타야사만이 경을 깊이 통달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가 고장에 있으니, 원컨대 조칙을 내리시어 그를 불러서, 한 마디 말을 세 번 상세하게 살피고 나서, 붓을 들어 미묘한 말씀을 빠뜨리지 말게 하시고, 천 년의 세월 뒤에도 신뢰를 받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요흥은 구마라집의 말을 따라 즉시 사신을 파견하여 불타야사에게 후한 선물을 주며 초빙하였다. 그러나 모두 받지 않고 오지 않았으므로, 거듭 편지를 보내 돈독히 회유하였다. 그제야 상안에 도착하니, 요흥이 몸소 나가 영접하고 문안하였다. 그리고는 따로 소요원에 신성(新省)을 세우고 4사(四事)를 공양하였으나, 모두 받지 않고 때가 되면 걸식하여 하루에 한 끼니를 들 뿐이었다.
당시 구마라집은 『십주경(十住經)』을 번역하고 있었는데, 한 달 남짓 동안 의문이 나서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이며 붓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불타야사가 이르고 나서는 함께 검증하여 결정을 하게 되자, 문장의 이치가 바로 잡혀져서 도인과 속인 3천여 인이 모두 다 그 대요(大要)에 알맞음을 감탄하였다.
불타야사는 코밑수염이 붉고 『비바사(毗婆沙)』를 능숙하게 알았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그를 붉은 코밑수염의 비바사라고 불렀으며, 또 구마라집의 스승이었기 때문에 대비바사(大毗婆沙)라고도 호칭하였다. 사부대중의 공양으로 의발(衣鉢)과 침구[臥具]가 세 칸 집에 가득히 찼지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요흥은 그 공양들을 팔아서 성의 남쪽에 절을 지었다.
전에 불타야사가 『담무덕률(曇無德律)』을 암송하였는데, 사례교위(司隷校尉) 요상(姚爽)혹은 요석(姚奭)이라고도 한다.이 불타야사에게 청하여 번역하게 하였다. 요흥은 누락되거나 잘못된 것이 있을까 의심하여, 불타야사에게 시험삼아 강(羌:西域)의 약방문을 각각 40여 지(紙) 가량을 암송하게 하고, 사흘 후에 그것을 암송해 보게 하였는데, 옆에서 책을 잡고 책장을 덮을 때까지 한 글자도 틀리지 않았다. 대중들은 그 기억력이 뛰어남에 탄복하였다.
곧바로 홍시 10년 무신(戊申, 408)에 『사분율(四分律)』과 『장아함경(長阿含經)』 등을 번역하기 시작하여, 15년 계축(癸丑, 413)이 되어서야 비로소 끝마쳤다. 양주(涼州) 사문 축불념(竺佛念)이 진(秦)나라 말로 번역하였고, 도함(道含)이 받아 적었으며, 번역을 다 마치자 역장(譯場)을 해산하였다.
요흥은 불타야사에게 비단 만 필을 보시하였는데, 모두 다 받지 않았다. 축불념과 도함에게는 각각 비단 천 필을 보시하고, 명덕(明德) 사문 5백 인에게도 모두 후하게 보시하였다.
불타야사는 뒤에 계빈으로 돌아갔는데, 그가 어느 곳에서 입적했는지는 알 수 없다.『사분률(四分律)』 서문에는 “임진년(壬辰年, 392)에 진(晋)나라 사문 지법령(支法領)이 서쪽으로 유사(流沙)를 건너 멀리 천축(天竺) 길을 가 우전(于塡)을 지나게 되었다. 마침 담무덕부(曇無德部)의 요체를 체득한 대승 삼장 불타야사를 만났다. 그는 문재가 아름답고 견문이 넓으며, 경ㆍ율을 밝게 정통하였다. 삼장은 방등(方等)을 모두 훤히 암송하였고, 그 나라에서 모든 경전을 널리 수집하여 정사(精舍)에 두었다. 무신년(戊申年, 408)에 처음 진(秦)나라에 들어오자, 진나라 임금 요흥(姚興)이 기뻐하면서 맞이하였다. 곧 그 해에 청하여 율장(律藏)을 번역하게 하였다. 그때 계율을 지닌 사문 3백여 인을 모아서 장안의 중사(中寺)에서 번역하였는데, 곧 지법령의 제자 혜변(慧辯)이 번역하였다”라고 하였다. 그 임진년은 곧 진나라 건초(建初) 7년(392)이고, 무신년은 곧 홍시 10년(408)이다. 또 어떤 이는 “불타야사와 축불념이 지법령이 가지고 온 범본(梵本)을 함께 교감(校勘)한 후에 번역하여 냈다”고하였다. 여러 설들이 조금씩 다른데, 누가 정확한지 자세하지 않다17). 또 승조(僧肇)의 『장아함경』 서문과 『고승전(高僧傳)』에서는 모두 『사분율(四分律)』을 홍시 12년(410)에 번역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아마 부(部)가 다 끝났을 때를 근거하면서 말한 것 같다.

(5) 담마야사(曇摩耶舍)
차마경(差摩經) 1권동진(東晋) 융안(隆安) 연간(397~401)에 광주(廣州)에 도달하여 백사사(白沙寺)에서, 청신녀(淸信女) 장보명(張普明)을 위하여 이 경을 번역하였다. 그러므로 마땅히 『진록(晋錄)』에 편입되어야 한다. 그러나 기록하는 사람에 따라 진(秦)나라에 덧붙인 것도 있다. 『고승전』과 『장방록』에 보인다.
낙영락장엄방편품경(樂瓔珞莊嚴方便品經) 1권일명 『전여신보살문답경(轉女身菩薩問答經)』이라고도 한다. 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축법호(竺法護)의 『순권방편경(順權方便經)』과 같은 동본이다. 『이곽록』에서는 구마라집의 번역이라 하였으나, 경 후기에 준하여 담마야사의 번역이라 하였기 때문에 여기에 옮겨 싣는다.
사리불아비담론(舍利弗阿毗曇論) 22권혹은 논(論)자가 없기도 하다. 혹은 20권, 또는 30권으로 되어 있다. 담마굴다(曇摩崛多)와 함께 석양사(石羊寺)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석도표(釋道標)가 서문을 지었다. 『승우록』과 『보창록』 두 목록과 『고승전』에 보인다.
이상은 3부 24권이다.처음의 1부 1권은 궐본이고, 뒤의 2부 23권은 그 경본이 현재 있다.

사문 담마야사는 중국말로는 법칭(法稱)『고승전』에서는 법명(法明)이라 번역하였으나 뜻이 맞지 않는다.이라고도 한다. 계빈국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여, 14세가 되어서는 불야다라(弗若多羅)도 그를 인정해주어 알아주는 사람이 되었다. 성장하여서는 기백이 높고 시원하였으며, 전아하고 신령스런 지혜가 있었다. 경률(經律)을 두루 보아 훤히 깨닫는 것이 무리에서 뛰어났다. 생각은 팔선(八禪)18)을 닦는데 있었고, 마음은 칠각(七覺)19)을 공부하는[遊學]데 있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그를 부두바태(浮頭婆駄)20)라고 하였다. 산과 호수에서 홀로 수행하면서도 호랑이나 외뿔소를 피하지 않았다. 혼자 거처하여 사유(思惟)하면서 밤과 낮을 잊었다. 일찍이 나무 아래서 수행하며 늘 스스로를 엄하게 꾸짖었다.
“나이 30에 이르도록 아직 과위(果)를 얻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리도 게으른 것이냐?”
이에 여러 날 동안 잠도 자지 않고 먹지도 않으면서, 오로지 정진하고 괴로움을 겪으며 지은 죄를 참회하였다. 이어 꿈에 박차천왕(博叉天王)21)을 뵈었는데, 그가 말하였다.
“사문은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널리 교화하여, 많은 중생을 구제하는 것을 늘 마음에 새기고 있어야 하거늘, 어찌 자질구레한 예절[小節]에 얽매여 홀로 자기만을 좋게 할 뿐인가? 도(道)는 여러 인연을 빌려 다시 때를 기다려서 무르익게 되는데, 분수가 아닌데도 억지로 구하면 죽도록 하여도 증험이 없게 된다.”
꿈에서 깨어나 스스로 생각하여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도를 전수하고자 하였다. 그는 어려움과 위험을 무릅쓰고 여러 나라를 거쳐 진(晋)나라 융안(隆安) 연간(397~401)에 처음으로 광주(廣州)에 이르러 백사사(白沙寺)에 머물렀다.
담마야사는 『비바사율(毗婆沙律)』을 잘 외웠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그를 대비바사(大毗婆沙)라고 하였다.
그때 청신녀(淸信女) 장보명(張普明)이 있었는데, 불법에 대하여 가르침을 청하였다. 담마야사는 그녀를 위하여 부처님 생애의 연기(緣起)에 대하여 설하고, 아울러 『차마경(差摩經)』 1권을 번역해 내었다.
의희(義凞) 연간(405~418)에 상안(常安)으로 갔다. 당시 요흥(姚興)이 신하의 신분으로 제왕의 칭호(稱號)를 함부로 사용僭號]하면서도, 불법을 매우 존숭하고 있었다. 담마야사가 그곳에 이르자 매우 특별하게 예우를 하였다. 마침 천축 사문 담마굴다(曇摩掘多)중국말로 법장(法藏)가 관중(關中)으로 들어왔는데, 동기상구(同氣相求)22)라 완연히 옛 친구들 같았다. 이로써 담마야사와 함께 『사리불아비담론(舍利弗阿毗曇論)』을 번역하였다. 후진(後秦) 홍시 9년 정미(丁未, 407)에 범문(梵文)을 써내기 시작하여, 16년 갑인(甲寅, 414)에 이르러 멈췄다. 경사(經師)들은 점차로 중국말[秦語]을 익히어 스스로 번역하게 되어, 17년 을묘(乙卯, 415)에야 비로소 끝마쳤으니, 모두 22권이었다. 진나라 태자 요홍(姚泓)이 친히 이치의 의미를 관리하였고, 사문 도표(道標)가 그를 위하여 서문을 썼다. 또 『낙영락경(樂瓔珞經)』 1권을 번역하여 냈다.
담마야사는 후에 남쪽 강릉(江陵)에서 노닐다가 신사(辛寺)에 머물면서, 선법(禪法)을 크게 펼쳤다. 편안하게 공부하던 빈객[賓]들이 가시덤불을 헤치고[披榛] 이른 자가 3백여 인이나 되었다. 무릇 도착한 선비나 서민들은 비록 그 전에는 신심(信心)이 없었다 하더라도, 그를 보고 나면 모두가 공경하고 마음으로 따랐다. 담마야사는 스스로 말하길 ‘한 스승과 한 제자가 있어 도를 익혀 모두 아라한[羅漢]이 되었다하니, 전수(傳授)한 사람은 그 이름이 없다’고 하였다.
또한 일찍이 바깥문[外門]에서 문을 닫고 좌선(坐禪)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5인의 사문이 그 방으로 들어가기도 하였다. 또 때로는 사문이 나무 끝에서 날아오는 것을 본 사람도 있었는데, 이런 일이 이따금 있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는 항상 신명(神明 : 신령)과 교유[交接]하면서도 이를 숨기고 어리석은 속인들과 함께 하였다. 비록 도의 자취[道迹]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으나, 그때 사람들은 모두 그는 이미 성과(聖果)23)에 올랐다고 말하였다. 송(宋)나라 원가(元嘉) 연간(424~453)에 서역으로 돌아갔는데, 언제 입적하였는지는 알지 못한다.

8) 서진(西秦) 시대
진(秦)의 걸복(乞伏)씨는 완천(菀川)에 도읍하고 있었다.또한 서진(西秦)이라고도 한다. 걸복국인(乞伏國仁)시호(諡號)는 선렬왕(宣烈王)이다. 건의(建義) 원년 을유(乙酉, 385)로부터 걸복모말(乞伏慕末)시호가 없다. 영홍(永弘) 4년 신미(辛未, 431)에 이르기까지 무릇 4주(主) 47년을 지나는 동안에 사문 1인이 번역한 경과 3진대(三秦代)의 신(新)ㆍ구(舊) 실역(失譯) 경ㆍ율ㆍ논 등은 총 56부 110권이다.그 중에서 32부 79권은 그 경본이 현재 있으며, 24부 31권은 궐본이다.

걸복진(乞伏秦)의 사문(沙門) 석성견(釋聖堅)15부 24권. 경(經)
삼진대(三秦代)의 신ㆍ구의 모든 실역경[新舊諸失譯經]총41부 86권인데, 7부 7권은 구집(舊集)이고, 34부 79권은 새로 덧붙인 것이다.

(1) 석성견(釋聖堅)
나마가경(羅摩伽經) 3권이 경은 『화엄경(華嚴經)』 「입법계품(入法界品)」 일부분의 이역(異譯)이다. 『내전록(內典錄)』에 보인다.
태자수대나경(太子須大拏經) 1권『육도집경(六度集經)』 제2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강릉(江陵)의 신사(辛寺)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유상(庾爽)이 받아썼다. 혹은 『수달나경(須達拏經)』이라고도 한다. 『시흥록(始興錄)』과 『보창록(寶唱錄)』에 보인다. 마땅히 진세(晋世)에 편입시켜야 하나 기록하는 사람에 따라 진(秦)에 덧붙인 것이다.
섬자경(睒子經) 1권일명 『효자섬경(孝子睒經)』ㆍ일명 『보살섬경(菩薩睒經)』ㆍ일명 『불설섬경(佛說睒經)』ㆍ일명 『섬본경(睒本經)』ㆍ『효자은경(孝子隱經)』 등 무릇 여섯 가지 이름이 있다. 네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육도집경(六度集經)』 제2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시흥록』과 『법상록』에 보인다.
마하찰두경(摩訶刹頭經) 1권또한 『관불형상경(灌佛形像經)』이라고도 하며, 또한 바로 『관불경(灌佛經)』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관세불형상경(灌洗佛形像經)』과 동본이다. 『시흥록』에 보인다.
무애제지법무경(無崖際持法門經) 1권일명 『무제경(無際經)』이라고도 한다. 『존승보살소문경(尊勝菩薩所問經)』과 같은 동본이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시흥록』과 『법상록』에 보인다.
연도속업경(演道俗業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지겸(支謙)이 번역한 경과 동본이다. 『법상록』에 보인다.
제공재환경(除恐災患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백연(帛延)이 번역한 경과 동본이다. 『시흥록(始興錄)』ㆍ『보창록』ㆍ『법상록』 세 목록에 보인다.
현수경(賢首經) 1권일명 『현수부인경(賢首夫人經)』이라고도 한다. 『시흥록』에 보인다.
아난분별경(阿難分別經) 1권또한 『아난문사불길흉경(阿難問事佛吉凶經)이라고도 한다. 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시흥록』과 『법상록』에 보인다.
부인우고경(婦人遇辜經) 1권일명 『부우대경(婦遇對經)』이라고도 한다. 『시흥록』과 『법상록』 두 목록에 보인다. 이상의 경들은 현재 있고, 이하는 궐본이다.
방등주허공장경(方等主虛空藏經) 8권또한 『허공장소문경(虛空藏所問經)』, 또는 『권발보살장엄보리경(勸發菩薩莊嚴菩提經)』이라고도 한다. 혹은 5권으로 되어 있다. 이 경은 『대집경(大集經)』 「허공장품(虛空藏品)」의 이역이다. 『진세잡록(晋世雜錄)』과 『법상록』에 보인다. 『나마가경(羅摩伽經)』과 동본이라 하였으나, 아니다.
보살소생지경(菩薩所生地經) 1권일명 『마갈소문경(摩竭所問經)』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조록(趙錄)』에 보이는데, 앞뒤의 어느 조(趙)인지는 모르겠다. 기록한 사람에 따라 서진(西秦)에 덧붙였다. 『시흥록』에 보인다.
패경(孛經) 1권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법상록』에 보인다.
동가섭해난경(僮迦葉解難經) 1권 또한 『동가섭경(童迦葉經)』이라고도 한다. 『구마가섭경(鳩摩迦葉經)』과 동본이다. 승우(僧祐)는 “『장아함경』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유상(庾爽)이 받아썼다. 『시흥록』ㆍ『왕종록(王宗錄)』ㆍ『보창록』ㆍ『지민도록(支敏度錄)』 등 네 목록에 보인다.
칠녀본경(七女本經) 1권또한 『여본심명경(女本心明經)』. 또는 『칠녀경(七女經)』이라고도 한다. 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지민도의 『경론도록(經論都錄)』에 보인다.
이상은 15부 24권이다.『부인우고경(婦人遇辜經)』 이상의 10부 12권은 현재 경본에 있고, 『방등주허공장경(方等主虛空藏經)』 이하 5부 12권은 궐본이다.

사문 석성견은 혹은 법견(法堅)이라고도 하고, 또는 견공(堅公)이라고도 하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기 때문에 모두 나열하여 둔다. 도량이 크고 넓으며 중생을 이롭게 하는 데에 마음이 있었다.
걸복진(乞伏秦)의 태초(太初) 연간(388~408)에 하남국(河南國)에서 건귀(乾歸)시호는 무원왕(武元王)이다.를 위하여 『나마가경(羅摩伽經)』 등 15부를 번역하였다. 성견이 돌아다니면서 교화한 곳을 찾아보면, 가는 곳마다 경을 번역해 냈으며, 일정한 처소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따라서 어느 시대[世代] 목록에 덧붙이는 것이 옳은지 알 수 없었다. 지금은 법상(法上)의 총주(摠注)에 의거하여 걸복(乞伏)의 진 시대[秦世]의 목록에 편입시켜 둔다.

(2) 삼진(三秦) 시대의 신구실역경(新舊失譯經)
사미라경(沙彌羅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오모자경(五母子經)』과 동본이다.
살화살왕경(薩惒薩王經) 1권
아다삼매경(阿多三昧經) 1권혹은 아타阿陁라고도 쓴다.
타현왕경(陁賢王經) 1권
발타회과경(颰陁悔過經) 1권
방등결정(方等決經) 1권
비구이사경(比丘二事經) 1권『승우록』에는 “삼사(三事)”라고 하였다. 이 『비구이사경』 이상의 7부는 『승우록』에서는 “안공(安公)의 『관중이경(關中異經)』에서 나왔다”라고 하였다.
이상은 7부 7권이다.처음의 『사미라경』은 지금 현재 경본이 있고, 나머지는 모두 궐본이다.

『장방록(長房錄)』에는 “이 경들은 모두 사문 승우(僧祐)의 『출삼장집록(出三藏集錄)』과 석도안(釋道安)이 기록한 『관중이경(關中異經)』에 있다”라고 하였는데, 지금은 도로 3진세(三秦世) 때의 목록에 덧붙여 편입시켜서, 모두 번역한 이와 시대와 처소를 알지 못한다. 그리고 『장방록』에는 다시 “범본경(梵本經) 4권각주(脚注)에는 “이 경들은 장안(長安)에서 번역되어 나온 것 같다”라고 하였다.이 있다”라고 하였는데, 후한(後漢)의 실역록(失譯錄)에 이미 있으므로, 여기서 다시 기재하면 중복하여 올리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삭제하여 기재하지 않는다.
이하는 새로 이 목록에 덧붙인다.

천왕태자벽라경(天王太子辟羅經) 1권혹은 천왕(天王)이란 글자가 없기도 한다. 또한 『태자비라경(太子譬羅經)』이라고도 한다.
보살본행경(菩薩本行經) 1권
대진보적유일경(大珍寶積惟日經) 1권
타가라문보살경(墮迦羅問菩薩經) 1권
아난위고도주경(阿難爲蠱道呪經) 1권『구록(舊錄)』에서는 “『아난위고도소주경(阿難爲蠱道所呪經)』이다”라고 하였다. 지금은 이 장경 속에 있는 『마등녀경(摩鄧女經)』이 아닌가 한다.
왕사성영취산경(王舍城靈鷲山經) 1권『구록』에서는 “『왕사성영취산요진경(王舍城靈鷲山要眞經)』이다”라고 하였다.
사도경(思道經) 1권
불재죽원경(佛在竹園經) 1권
법위인경(法爲人經) 1권
도의경(道意經) 1권
아이비구경(阿夷比丘經) 1권
팔덕경(八德經) 1권이 경은 『해팔덕경(海八德經)』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선덕경(善德經) 1권
마하건타유위라진신비구등도경(摩訶揵陁惟衛羅盡信比丘等度經) 1권『구록』에서는 “『진신비구경(盡信比丘經)』이다”라고 하였다.
이상은 14부 14권이다.처음의 『천왕태자벽라경』만이 경본이 있고, 나머지는 모두 궐본이다.

『승우록』에서는 “이 경들은 모두 안공(安公)의 『관중이경(關中異經)』에 있다” 하였으며, 『장방록』 등의 목록에는 궐본이라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승우가 기재한 안공의 『관중이경』은 총 24부 24권인데, 그 가운데 7부는 『장방록』에 나열한 것과 같다. 지금 14경을 다시 실렸음으로 앞의 경까지 합하면 21부다. 나머지 3부는 『장방록』 등의 목록에서 모두 번역한 이[譯主]를 표시하였다. 따라서 여기서는 기재하지 않는다.

대보적경(大寶積經) 1권지금은 『보적경(寶積經)』에 편입되어 있다. 제43회(會)에 해당하는데, 이름을 고쳐서 「보명보살회(普明菩薩會)」라고 한다. 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마하연보경(摩訶衍寶經)』과 『엄불유일마니보경(嚴佛遺日摩尼寶經)』 두 경과 동본이역이다.
도제불경계지광엄경(度諸佛滰界智光嚴經) 1권제일 먼저 번역되어 나왔다. 『불화엄입여래덕지부사의경계경(佛華嚴入如來德智不思議境界經)』과 같은 동본이다. 『구록(舊錄)』에서는 “『여래장엄지혜광명입일체불경계경(如來莊嚴智慧光明入一切佛境界經)』과 같은 동본이다”라고 하였는데, 전혀 다르다.
대비분타리경(大悲分陁利經) 8권또한 『대승비분타리경(大乘悲分陁利經)』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담무참(曇無讖)의 『비화경(悲華經)』과 같은 동본이다.
대금색공작왕주경(大金色孔雀王呪經) 1권다섯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불설대금색공작왕주경(佛說大金色孔雀王呪經) 1권여섯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이 두 경은 동본이다.
대방광여래비밀장경(大方廣如來秘密藏經) 2권『대주록(大周錄)』에서는 “『대방등여래장경(大方等如來藏經)』과 동본이다”라고 하였으나, 아니다.
금강삼매본성청정불괴불멸경(金剛三昧本性淸淨不壞不滅經) 1권또한 『금강청정경(金剛淸淨經)』이라고도 한다. 『장방록』 등의 목록에서는 “오(吳)나라 지겸(支謙)의 번역이다”라고 하였고, 후한(後漢)의 실역(失譯)에 다시 기재되어 있으나, 모두 다 아니다. 지금 그 문구를 찾아보면, 진(秦)나라 때 번역과 같기 때문에 여기에 옮겨 싣는다.
사자월불본생경(師子月佛本生經) 1권『장방록』 등의 목록에서는 “서진(西晋)의 축법호(竺法護)의 번역이다”라고 하였으나, 이제 그 문구를 찾아보면, 이는 축법호의 번역이 아니다. 진(秦)나라 때의 번역과 비슷하기 때문에 여기에 옮겨 싣는다.
십길상경(十吉祥經) 1권
일체지광명선인자심인연불식육경(一切智光明仙人慈心因緣不食肉經) 1권
정업장경(淨業障經) 1권
별역잡아함경(別譯雜阿含經) 20권
출가공덕경(出家功德經) 1권이 경은 『현우경(賢愚經)』에서 간추려 역출한 경이 아니다.
비니모경(毗尼母經) 8권또한 『비니모론(毗尼母論)』이라고도 한다.
살바다비니비바사(薩婆多毗尼毗婆沙) 9권
삼미저부론(三彌底部論) 3권혹은 부(部)자가 없기도 하다. 또한 4권으로 되어 있다.
벽지불인연론(辟支佛因緣論) 2권
십팔부론(十八部論) 1권제일 먼저 번역되어 나왔다. 『부이집론(部異執論)』과 같은 동본이다. 장방 등은 모두 “진제(眞諦)의 번역이다”라고 하였으나, 아니다.
불입열반밀적금강력사애련경(佛入涅槃密迹金剛力士哀戀經) 1권
무명라찰집(無明羅刹集) 1권또한 『무명라찰경(無明羅刹經)』이라고도 한다. 혹 2권으로 되어 있다.

이상 20부 65권은 모두 『입장경(入藏經)』에서 보인다. 이 경들은 진(秦)나라 때에 번역되어 나온 것과 같다.여러 경본에는 모두 진나라 시대 말秦言이라는 글자가 있다. 여러 「실역록(失譯錄)」에 모두 아직 실려 있지 않으므로, 지금 이 「진록(秦錄)」에 덧붙이는 것이니, 빠져 없어지는 것을 면하게 하고 싶어서이다.
앞의 옛 실역경[舊失譯經] 7부 7권과 새로 덧붙인 안공(安公)의 『관중이경(關中異經)』 등을 합하면, 총 41부 86권인데, 모두 3진(秦)의 실역(失譯)에 실어 둔다.

9) 전량(前涼) 시대
전량의 장(張)씨는 고장(姑臧)에 도읍하고 있었다.새로 기재된 다른 목록에는 연대(年代)가 없고 『견란록(甄鸞錄)』에 의하면 대부분 진(晋)의 연호를 따르고 있다. 장궤(張軌)시호(諡號)는 무왕(武王)이다. 영녕(永寧) 원년 신유(辛酉, 301)로부터 천석(天錫)진(秦)에서 표기대장군양주목(驃騎大將軍涼州牧)으로 봉(封)하였다. 함안(咸安) 6년 병자(丙子, 376)에 이르기까지 무릇 8주(主) 76년을 지나는 동안 외국의 우바새(優婆塞) 1인이 경전을 번역하였으니, 4부 6권이다.그 중에서 1부 1권은 현재 경본이 있고, 3부 5권은 궐본이다.

전량(前涼)의 우바새 지시륜(支施崙)4부 6권. 경

(1) 지시륜(支施崙)
수뢰경(須賴經) 1권조위(曹魏)의 백연(白延)과 오(吳)나라 지겸(支謙)과 송(宋)나라 공덕현(功德賢)이 번역해 낸 『수뢰경(須賴經)』과 동본이다. 경 후기(後記)에 보인다. 세 번째 번역되었다. 함안(咸安) 3년(373)에 나왔다.
여환삼매경(如幻三昧經) 2권네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안세고(安世高)와 축법호(竺法護)가 번역한 『여환삼매경(如幻三昧經)』과 『보적경』 「선주의회(善住意會)」 등과 동본이다. 『수릉엄경(首楞嚴經)』 후기(後記)에 보인다. 함안 3년(373)에 번역되어 나왔다.
상금광수경(上金光首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진(晋)나라 축법호의 『대정법문경(大淨法門經)』과 수(隋)나라 야사(耶舍)의 『대장엄법문경(大莊嚴法門經)』과는 동본이다. 함안 3년(373)에 번역되어 나왔다. 『수능엄경』 후기에 보인다.
수릉엄경(首楞嚴經) 2권여덟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한(漢)나라 지참(支讖)과 오(吳)나라 지겸(支謙)과 위(魏)나라 백연(白延)과 진(晋)나라 축법호 등이 번역하여 낸 『수능엄경』과 동본이다. 함안 3년에 번역되어 나왔다. 경 후기에 보인다.
이상은 4부 6권이다.『수뢰경』 1부 1권은 그 경본이 현재 있고, 『여환삼매경』 등 5부 3권은 궐본이다.

우바새 지시륜은 월지(月支) 사람이다. 여러 경전을 널리 알았고, 특히 방등경[方等]을 잘 알았다. 중생을 교화하는데 뜻을 두고, 아직 법을 듣지 못한 곳에 법을 전하였다. 경전을 받들고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가, 양(涼)나라 땅에 도달하였다. 장공(張公)은 그를 만나보고는 존중하게 되었으며, 청하여 경전을 번역하게 하였다.
함안(咸安) 3년 계유(癸酉, 373)진(晋)나라 연호를 따른다.에 양주(涼州) 주내(州內)의 정청당(正廳堂) 뒤 잠로헌(湛露軒)에서 『수뢰경(須賴經)』 등 4부를 번역하여 냈었다. 구자왕(龜茲王)의 세자(世子) 백연(帛延)이 말을 전하고, 상시(常侍) 서해(西海) 조숙(趙肅)과 회수령(會水令) 마역(馬亦)과 내시래(內侍來) 공정(恭政) 3인이 붓으로 받아썼으며, 사문 석혜상(釋慧常)과 석진행(釋進行)이 같이 있으면서 증의[證]하였다. 양주는 저절로 그 언어[辭]에 속했으므로, 문장을 더 꾸미지는 않았다. 『수뢰경』 후기와 『수능엄경』 후기에 나와 있다.전량(前涼) 대(代)에도 다시 경을 번역하여 냈을 것이니, 후배後進들은 그것을 만나게 되면 부디 계속하여 엮고 덧붙일지어다.

16) 북량(北涼) 시대
북량의 저거(沮渠)씨는 처음에 장액(張掖)에 도읍을 정했다가, 나중에는 고장(姑臧)으로 옮겼다. 몽손(蒙遜)시호(諡號)는 무선왕(武宣王)이다.의 영안(永安) 원년 신축(辛丑, 401)으로부터 무건(茂虔)위(魏)에서 하서왕(河西王)으로 봉(封)하다. 승화(承和) 7년 기묘(己卯, 439)에 이르기까지, 무릇 2주(主) 39년을 지나는 동안에, 승려들과 속인 9인이 번역하여 낸 경ㆍ율ㆍ논 등과 아울러 신집(新集)ㆍ구집(舊集)의 실역(失譯)한 모든 경은 총 82부 311권이다.그 중에서 25부 209권은 그 경본이 현재 있고, 57부 102권은 궐본이다.

북량(北涼)의 사문 석도공(釋道龔)2부 12권. 경
사문 석법중(釋法衆)1부4권. 경
사문 승가타(僧伽陁)1부 2권. 경
사문 담무참(曇無讖)19부 131권. 경ㆍ율ㆍ집
안양후(安陽侯) 저거경성(沮渠京聲)1부 2권. 집
사문 부타발마(浮陁跋摩)1부 60권. 논
사문 석지맹(釋智猛)1부 20권. 경
사문 석도태(釋道泰)2부 4권. 논
사문 석법성(釋法盛)1부 1권. 경
신ㆍ구의 모든 실역경총 52부 75권인데, 그 중에서 5부 18권은 구집(舊集)이요, 48부 57권은 새로 덧붙인 것이다.

(1) 석도공(釋道龔)
보량경(寶梁經) 2권지금은 『보적경(寶積經)』에 편입되어 있으며, 제44회(會)에 해당한다. 축도조(竺道祖)의 『하서록(河西錄)』과 『승우록』에 보인다.
비화경(悲華經) 10권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축법호의 『한거경(閑居經)』 및 『대비분타리경(大悲分陁利經)』과 담무참(曇無讖)의 『비화경(悲華經)』 등과 동본이다. 장방은 “『고록(古錄)』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이 경은 먼저 번역된 것을 석도공이 다시 삭제하여 고친 것 같다. 곧 담무참이 번역해 낸 경이 이것이 아닌가 한다.
이상은 2부 12권이다.앞의 『보량경』 1부 2권은 현재 그 경본이 있고, 뒤의 『비화경』 1부 10권은 궐본이다.

사문 석도공은, 마음을 비우고 널리 돌아다니면서 중생을 크게 이롭게 하는 것을 도(道)로 삼았다. 북량의 하서왕(河西王)저거몽손(沮渠蒙遜)의 참호(僭號)이다. 영안(永安) 연간(401~411)에 장액(張掖)에서 저거몽손을 위하여 『보량경』 등 2부를 번역하였다.

(2) 석법중(釋法衆)
대방등다라니경(大方等陁羅尼經) 4권혹은 대(大)자가 없기도 하다. 일명 『방등단지다라니경(方等檀持陁羅尼經)』이라고도 하며, 혹은 바로 『단지다라니경(檀持陁羅尼經)』이라고도 한다. 축도조의 『진세잡록(晋世雜錄)』과 『승우록』에 보인다.
이상은 1부 4권이며, 그 경본이 현재 있다.

사문 석법중은 고창군(高昌郡) 사람이다. 역시 영안(永安) 연간(401~411)에 장액(張掖)에서 하서왕(河西王) 저거몽손을 위하여 『대방등다라니경』 1부를 번역하였다. 보창록(寶唱錄)에서는 “고창군에 있으면서 번역하였다”라고 하였으나, 어느 것이 옳은지는 자세하지 않다.

(3) 승가타(僧伽陁)
혜상보살문대선권경(慧上菩薩問大善權經) 2권일명 『대선권경(大善權經)』, 또는『혜상보살경(慧上菩薩經)』, 또는 『대승방편경(大乘方便經)』이라고도 하는데, 이 네 가지 이름을 가진 경은 모두 같은 경본이다. 다섯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한(漢)나라 엄불조(嚴佛調)와 진(晋)나라 축법호(竺法護)가 번역하여 낸 『대선권경(大善權經)』과 『보적경(寶積經)』 「대승방편회(大乘方便會)」 등과 동본이다.
이상은 1부 2권인데, 궐본이다.

사문 승가타는 중국말로는 요선(饒善)이라고 한다. 서역 사람이다. 중생을 제도하는데 뜻을 두었고, 중생을 교화하고 이끄는 일에 마음을 품고 있었다. 역시 영안(永安) 연간(401~411)에 장액에서, 저거몽손을 위하여 『대선권경』 1부를 번역하였다. 『시흥록』과 『법상록』에 보인다.

(4) 담무참(曇無讖)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40권혹은 36권으로 되어 있다. 다섯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현시(玄始) 3년(414)에 번역하기 시작하여 10년(421) 10월 23일에 끝마쳤다. 그 범본(梵本)에는 3만 5천 게송偈□이 갖추어져 있다. 그러나 지금 번역된 것은 다만 1만여 게송이니, 처음의 3분의 1에 그쳤을 뿐이다. 축도조의 『양록(涼錄)과 『승우록』에 보인다.
대방등대집경(大方等大集經) 30권혹은 바로『대집경(大集經)』이라고도 한다. 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한(漢)나라 때의 지참(支讖)과 요진(姚秦)의 구마라집(鳩摩羅什)이 번역하여 낸 것과 동본이다. 혹은 29권, 또는 31권, 또는 32권, 또는 40권으로 되어 있다. 제일 먼저 번역되어 나온 경을 베끼면서 권(卷)을 나누었다. 그리하여 일정하지 않다. 축도조의 『양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대방광삼계경(大方廣三戒經) 3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보적경』 「삼률의회(三律儀會)」와 동본이다. 『법상록(法上錄)』에 보인다.
비화경(悲華經) 10권네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대비분타리경(大悲分陁利經)』과 같은 동본이다. 축도조의 『하서록(河西錄)』과 『승우록』에 보인다. 승우는 “『별록(別錄)』이다”라고 하고, 혹은 “도공이 번역하여 내었다”라고 하였다. 지금 도공과 지참이 동일한 경본을 두 곳에 모두 실었는데, 아마도 옳지 못한 것이 아닐까 한다.
금광명경(金光明經) 4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18품(品)이 있다. 축도조의 『하서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새로 번역한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과 같은 동본이다. 지금은 8권으로 된 경에 합쳐져 들어가 있다. 이 4권 본은 『산번록(刪繁錄)』에 있다.
대방등대운경(大方等大雲經) 6권일명 『대방등무상대운경(大方等無相大雲經)』, 또는 『대운무상경(大雲無相經)』, 또는 『대운밀장경(大雲密藏經)』, 또는 『방등대운경(方等大雲經)』이라고도 한다. 혹은 4권, 또는 5권으로 되어 있다. 내원사(內苑寺)에서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승예록僧叡』ㆍ『이곽록李廓』ㆍ『승우록僧祐』 세 목록에 보인다.
복중녀청경(腹中女廳經) 1권일명 『부장교녀경(不莊挍女經)』이라고도 한다. 『무구현녀경(無垢賢女經)』과 『전여신경(轉女身經)』 등과 동본이다. 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록』에 보인다.
보살지지경(菩薩地持經) 10권혹은 경(經)자가 없으며, 혹은 논(論)이라고도 한다. 또한 『보살계경(菩薩戒經)』, 또는 『보살지경(菩薩地經)』이라고도 한다. 혹은 8권으로 되어 있다. 『유가론(瑜伽論)』 「본지분(本地分)」의 보살지(菩薩地)에서 나왔다. 축도조의 『하서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우바새계경(優婆塞戒經) 7권혹은 경(經)자가 없기도 한다. 바로 『재가보살계경在家菩薩戒』이다. 혹은 5권, 또는 6권, 또는 10권으로 되어 있다. 현시(玄始) 15년 병인(丙寅, 426) 4월 23일 번역하기 시작하여, 7월 23일에 끝마쳤다. 사문 도양(道養)이 받아썼다. 경 후기(後記)와 『승우록』에 보인다.
보살계본(菩薩戒本) 1권「지지계품(地持戒品)」에서 나왔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대당(大唐)의 현장(玄奘)법사가 번역하여 낸 계본(戒本)과 같은 동본이다. 『별록(別錄)』에서는 “돈황(燉煌)에서 번역되어 나왔다”라고 하였다. 『승우록』에 보인다.
문타갈왕경(文陁竭王經) 1권『중아함경』 제11권에서 나온 이역(異譯)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불소행찬경전(佛所行讚經傳) 5권혹은 경(經)이라 하여 전(傳)자가 없기도 하고, 혹은 전(傳)이라고 하여 경(經)자가 없기도 하다. 마명보살이 지었다. 또한 『불본행경(佛本行經)』이라고도 한다. 『장방록』에 보인다.
이상은 경본이 현재 있고, 이하는 궐본이다.

승만경(勝鬘經) 1권또한 『승만사자후일승대방편경(勝鬘師子吼一乘大方便經)』이라고도 한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록』에 보인다. 송(宋)나라 공덕현(功德賢)이 번역하여 낸 『승만경』과 『보적경』의 「승만부인회(勝鬘夫人會)」와 동본이다.
나마가경(羅摩伽經) 1권네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조위(曹魏)의 안법현(安法賢) 등이 번역해 낸 경과 동본이며, 다만 넓이거나 줄인 것廣略이 다를 뿐이다. 이 경은 『화엄경』 「입법계품(入法界品)」의 일부분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능가경(楞伽經) 4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송(宋)나라 공덕현(功德賢)과 원위(元魏)의 보리류지(菩提留支)와 당(唐)나라 실차난타(實叉難陁) 등이 번역해 낸 경과 동본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수진천자경(須眞天子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서진(西晋)의 축법호가 번역하여 낸 경과 동본이다. 장방은 “『오록(吳錄)』에 보인다”라고 하였으며, 또 “구마라집이 번역하여 낸 경을 재차 번역한 것 같다”라고 하였다.
해룡왕경(海龍王經) 4권혹은 신(新)자를 덧붙이기도 한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축법호가 번역해 낸 경과 동본이다. 현시(玄始) 7년(418)에 번역되어 나왔다. 축도조의 『하서록(河西錄)』과 『승우록』에 보인다.
공덕보광보살경(功德寶光菩薩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보살계단문(菩薩戒壇文) 1권또한 『우바새계단문(優婆塞戒壇文)』이라고도 한다. 승우는 “『보살계우바새계단문(菩薩戒優婆塞戒壇文)』이다”라고 하였다. 『승우록』과 『보창록』 두 목록에 보인다.
이상은 19부 131권이다.『불소행찬경전』 이상의 12부 118권은 현재 그 경본이 있고, 『승만경』 이하의 7부 13권은 궐본이다.

사문 담무참은 담마참(曇摩懺)이라고도 하고, 담모참(曇謨懺)이라고도 하는데, 대개 범음(梵音)을 취한 것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말로는 법풍(法豊)이라고 한다. 중인도(中印度) 사람이며, 바라문(婆羅門) 종족이다.
담무참은 여섯 살 때 부친이 돌아가셔서 어머니가 베 짜는 일[織]로 품을 팔아 담무참을 길렀다.
사문 달마야사(達摩耶舍)중국말로는 법칭(法稱)이라고도 한다.는 도인이나 속인의 종조로서 존경받고, 이양(利養)24)이 풍부함을 보고, 그의 어머니는 그것을 부러워하여, 담무참을 그의 제자가 되게 하였다.
10세 때 동학(同學) 여러 사람과 함께 진언[呪]을 읽었는데, 총명하고 민첩함이 무리에서 뛰어났으며, 하루에 경전을 1만여 언(言)이나 암송하였다.
처음에는 소승을 배웠고, 오명(五明)의 여러 논(論)들을 두루 보았다. 그의 강설(講說)은 변론이 익숙하여 대항하여 겨룰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뒤에 백두선사(白頭禪師)를 만나 함께 논의(論議 : 문답하여 사리를 밝히는 일)를 하였는데, 익힌 업이 이미 다른지라 서로 논쟁한 지 백 일[十旬]이나 하였다. 담무참이 아무리 날카롭게 일으켜 공박하고 힐난하여도, 백두선사는 끝내 수긍하거나 굽히지 않았다. 담무참은 그의 정밀한 논리에 굴복하고는 백두선사에게 말하였다.
“제가 경전을 좀 볼 수 있겠습니까?”
선사는 곧 나무껍질에 쓰인 『열반경(涅槃經)』을 주었다. 담무참은 곧 이 경전을 읽어 보고는, 놀라면서 잘못을 깨닫고 스스로 부끄러워하며 뉘우쳤다.
“좁은[坎井] 식견으로 오랫동안 광대한 대승[大方]의 뜻을 모르고 헤맸구나.”
그리고는 대중을 모아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마침내 대승에 전념하게 되었다. 나이 20세가 되자 대승과 소승의 경전 2백만여 언(言)을 암송하였다.
담무참의 사촌 형은 코끼리를 잘 조련하였다. 그는 왕이 타던 귀가 흰 큰 코끼리를 죽게 하였다. 왕은 진노하여 그의 사촌 형을 죽이고 말하였다.
“감히 유해를 돌보는 사람이 있으면 삼족(三族)을 멸할 것이다.”
그의 친척들은 감히 가서 보는 자가 없었으나, 담무참은 가서 곡(哭)을 하고 그를 장사지냈다. 왕이 진노하여 담무참을 죽이려 하자, 담무참이 말하였다.
“왕께서는 법에 의거했기 때문에 그를 죽였고, 저는 친척이기 때문에 그를 장사지냈습니다. 어느 쪽이나 다 대의(大義)를 어기지 않은 것인데, 어찌하여 진노하시는 것입니까?”
곁에 있던 사람들은 간담이 서늘했으나 담무참의 기색은 태연자약하였다.
왕은 그의 의지와 기개를 기특하게 여겨, 마침내 그를 머무르게 하고, 공양하였다. 담무참은 주술(呪術)을 훤히 이해하여, 행하는 바마다 모두 영험이 있었다. 그래서 서역에서는 그를 대신주사(大神呪師)25)라고 불렀다.
뒤에 왕을 수행하여 산에 들어갔는데, 왕은 목이 말라 물을 찾았으나 구할 수 없었다. 담무참은 은밀히 주문을 외워 돌에서 물이 나오게 하였다. 그리고는 찬탄하여 말하였다.
“대왕의 은택에 감응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마른 돌에서 샘물이 솟아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웃 나라에서 그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왕의 덕을 찬탄하였고, 때에 맞추어 비가 내려 매우 알맞게 혜택을 주니, 백성들은 칭찬하여 노래를 불렀다.
왕은 담무참의 도술을 기뻐하였으며 매우 특별한 은총을 베풀었다. 그러나 얼마 후 왕의 마음이 점차 소홀하여졌고, 그를 대우하는 것도 점점 박해졌다. 담무참은 성을 내며 말하였다.
“나는 마땅히 단지에 물을 담아 못으로 가서, 주문을 외워 용이 단지 속으로 들어가게 하여, 천하를 크게 가물게 해야겠다. 그러면 왕은 반드시 주문을 청할 것이니, 그런 뒤에야 용을 놓아 주어 비를 내리게 하면 대우하는 것이 다르게 될 것이다.”
드디어 단지를 가지고 용을 잡으러 갔는데, 이를 밀고(密告)한 사람이 있었다. 왕은 분노하여 담무참을 잡아들였다. 담무참은 죽음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이에 『대열반경(大涅槃經)』 본(本)의 앞부분 1 협(夾)과 아울러 『보살계경(菩薩戒經)』『지지경(地持經)』이다.과 『보살계본(菩薩戒本)』을 가지고 구자국(龜茲國)으로 도망갔다. 그러나 구자국에서는 대부분 소승만을 배워 『열반경』을 믿지 않았으므로, 드디어 고장(姑臧)으로 가서는 여관에서 머물게 되었다. 그는 경을 잃어버릴까 염려하여 경을 베개 삼아 잤는데,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끌어다 땅 위에다 두었다. 담무참은 놀라서 잠에서 깨어나 이것을 도둑의 소행이라 생각하였다. 이 같은 일이 사흘 밤 동안 계속되고, 공중에서 말이 들렸다.
“이 경은 여래의 해탈(解脫)을 갈무리한 것인데, 어찌하여 그것을 베개로 삼는가?”
담무참은 부끄러움을 깨닫고, 경을 특별히 높은 곳에다 두었다. 그날 밤에 그것을 훔치려는 자가 있었는데, 들려고 하여도 들려지지 않았다. 여러 도둑들이 함께 경본을 들어 올리려 하였으나 도저히 들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담무참이 경을 들어 올렸는데 조금도 무거워하지 않았다. 도둑들은 그것을 보고 담무참을 성인이라 여기고, 모두 와서 엎드려 사죄하였다.
그 당시 하서왕(河西王) 저거몽손(沮渠蒙遜)이 담무참의 명성을 듣고, 불러서 상면하고는 매우 후하게 접대하였다. 저거몽손은 평소에 대법(大法)을 받들어 널리 펴는 일에 뜻을 두었으므로, 담무참을 청하여 경본을 번역 출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담무참은 아직 중국말을 잘 알지 못했고, 또 그를 도와 전역(傳譯)할 이도 없었기 때문에, 이치를 어기게 될까 염려하여 즉시 번역하는 것을 수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담무참은 중국어를 3년 동안 배우고서야 비로소 『열반경』 첫부분 10권을 번역하였다.
이때에 사문 혜숭(慧嵩)과 도랑(道朗)은 하서(河西) 지방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담무참이 경장(經藏)을 펴내자, 서로 깊이 추앙하여 존중하고, 범문(梵文)을 옮겨 바꾼 것을 혜숭이 받아 적었다. 도인과 속인 수백 인이 의심나는 것을 종횡으로 묻고 힐난하였으나, 담무참은 그때그때 알맞게 막힌 것을 해석하였으며, 걸리는 것이 없었다. 혜숭과 도랑 등은 다시 널리 여러 경전들을 번역 출간하기를 청하여, 차례로 『대집경[大集]』ㆍ『대운경[大雲]』ㆍ『비화경[悲華]』ㆍ『지지경[地持]』ㆍ『열반경[涅槃]』 등 총 19부를 번역하였다.
담무참은 『열반경』 본의 품수(品數)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조국으로 돌아가서 찾아서 구하였다. 그때 그는 모친상을 당하였으므로, 1년가량 더 머문 뒤에 우전국(于塡國)에 가서 경본을 얻어, 다시 고장(姑臧)으로 돌아와서, 이어 번역하여 4질(帙)이 되었다.
담무참은 현시(玄始) 3년 갑인(甲寅, 414)에 처음 번역을 시작하여 15년 병인(丙寅, 426)에 끝마쳤다.장방은 “현시 10년(421)에 마쳤다는 것은 『열반경』을 다 번역했을 때이고, 그 밖의 다른 경까지 마친 때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우바새계경(優婆塞戒經)』 후기(後記)에 준하면, “병인년(丙寅年)에 번역되어 나왔다”고 하였으나, 이것은 곧 15년(426) 중간에도 오히려 경을 번역하였다는 것이 된다. 담무참은 의화(義和) 3년 계유(癸酉, 433) 3월에 입적하였으므로, 그 중간 6년간에도 의당 경을 번역하였을 것이나, 기록 중에는 언급이 없기 때문에 자세하지는 않다.
담무참은 일찍이 저거몽손에게 말하였다.
“귀신이 마을에 들어오면 반드시 많은 재앙과 역병(疫病)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저거몽손은 믿지 않고, 몸소 자신이 귀신을 보고 증험하기를 원하였다. 담무참이 즉시 저거몽손에게 주술을 걸자, 저거몽손은 귀신을 보고 놀라며 두려워하였으므로 담무참이 말하였다.
“마땅히 정결히 하고 정성을 다하여 재계(齋戒)하고 신주(神呪)를 외워 역귀(疫鬼)를 쫓아내야 합니다.”
그리고는 3일 동안 주문을 외운 뒤에 저거몽손에게 말하였다.
“귀신은 북쪽으로 떠났습니다.”
그런 뒤에 북쪽 경계 밖에서는 역질로 죽는 사람들이 수만이나 되었다. 저거몽손은 그를 경탄하고 더욱더 공경하면서 예우가 극진하였다.
때마침 위(魏)의 태무황제(太武皇帝)가 담무참의 도술이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사신을 파견하여 맞으려고 하면서, 우선 저거몽손에게 말하였다.
“만일 담무참을 보내 주지 않으면 곧 병사를 내어 공격하리라.”
저거몽손은 스스로 헤아려 보아도 나라가 미약하여 명을 거역하기 어려웠다. 거기다 담무참은 많은 술법이 있으므로, 혹시 위(魏)나라를 위하여 자기를 도모할까 염려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당황하였다. 이에 은밀히 계교를 내어 그를 제거하려 하였다.
처음에는 담무참이 『열반경』을 번역하여 권수(卷數)를 다 정하였는데, 외국 사문 담무발(曇無發)이 말하였다.
“이 경은 품수(品數)가 아직 다하지 못하였습니다.”
담무참은 일찍이 슬퍼하면서, 반드시 거듭 찾아서 번역하겠다는 것을 맹세하였다. 저거몽손은 그가 서역으로 가려는 뜻을 알고, 거짓으로 물자와 양식을 보내고 후하게 보화(寶貨)를 선사하였다.
출발하기 며칠 전에 담무참은 눈물을 흘리면서 대중들에게 작별을 고하며 말하였다.
“나의 업의 과보가 장차 이를 것인데, 뭇 성인들께서도 이를 구할 수는 없다. 본래 나는 마음의 서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 머무를 수 없다.”
출발하여 40리쯤 갔는데, 저거몽손은 자객(刺客)을 보내어 그를 살해하였다. 그 때의 나이 49세였는데, 대중들은 모두가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겼다.
얼마 후 저거몽손의 좌우에는 항상 대낮에도 귀신이 나와 칼로 공격하였다. 저거몽손은 그 뒤 4월에 병으로 죽고 말았다.저거몽손은 의화(義和) 3년(433) 3월에 담무참을 살해하고, 곧 그 해 4월에 병이 들어 죽었으니 진실로 보응(報應)은 헛된 것이 아니어서 마치 그림자가 형상을 따르는 것과 같다. 장방이 “담무참이 세간에 있다가 승화(承和) 4년(436)에 입적하였다”는 것은 잘못이다. 그 의화 3년(433)은 곧 위(魏)의 연화(延和) 2년 계유(癸酉, 433)이다.
처음에 담무참이 고장(姑臧)에 있을 때 장액(張掖)의 사문 도진(道進)이 담무참으로부터 보살계(菩薩戒)를 받으려 하자 담무참은 말하였다.
“우선 허물부터 참회하라.”
이에 도진은 밤낮 7일 동안 정성을 다하고, 8일째 되는 날 새벽에 담무참에게 나아가 계를 받기를 청하자, 담무참은 갑자기 성을 내었다. 도진은 다시 생각하기를 ‘이것은 나의 업장이 아직 녹지 않았기 때문이구나’ 하고, 3년 동안 전력을 기울여 좌선도 하고 참회도 하였다. 도진은 곧 선정(禪定) 중에 석가문불(釋迦文佛 : 석가모니부처님)이 여러 보살들과 함께 자기에게 계법을 주시는 것을 보았다. 그날 밤 같은 장소에 있던 10여 인이 모두 도진이 본 것과 같은 꿈을 꾸었다. 도진이 담무참에게 나아가 그 일을 말하려고 하는데, 아직 십 보 앞에 이르기도 전에 담무참은 놀라 일어나며 외쳤다.
“장하고 장하도다. 이미 계를 깊이 느끼어 터득[感得]하였구나. 나는 마땅히 다시 그대를 위하여 증명하리라.”
그리고는 차례로 불상 앞에서 계상(戒相)26)을 해설하였다.
그 당시 사문 도랑(道朗)은 관서(關西) 지방에서 명예를 떨치고 있었는데, 도진이 계를 감득한 그날 밤에 도랑도 역시 똑같은 꿈을 꾸었다. 이에 도랑은 자신의 계랍(戒臘 : 계를 받은 년수)을 낮다고 여겨 도진의 법제자(法弟子)가 되기를 청하였다. 이리하여 도진에게서 계를 받은 사람들이 천여 인이나 되었다. 이 계법이 전수(傳授)되어 마침내 지금까지 이른 것은, 모두 담무참이 남긴 법도이다.
별기(別記)에 이르기를 “『보살지지경(菩薩地持經)』은 반드시 이파륵(伊波勒)보살이 이 땅에 전래(傳來)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뒤에 과연 담무참이 전하여 번역하였다. 아마도 담무참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보살계경(菩薩戒經) 8권『승우록』과 『장방록』 등의 목록에서는 다 같이 “담무참의 번역이다”라고 하였다. 이제 이 경은 『보살지지경(菩薩地持經)』의 별명(別名)이기 때문에 두 번 싣지 않는다.
허공장경(虛空藏經) 5권『승우록』과 『장방록』 등의 목록에서는 역시 “담무참의 번역이다”라고 하였다. 곧 이 경은 『대집경(大集經)』 「허공장품(虛空藏品)」에서 나누어져 나와 따로 유행한 경이다. 지금은 『별생록(別生錄)』에 실려 있으므로, 여기서는 다시 싣지 않는다.
우바새계본(優婆塞戒本) 1권『보창록(寶唱錄)』에서는 “담무참의 번역이다”라고 하였고, 또 “『우바새계경(優婆塞戒經)』에서 나왔다”라고 하였다. 지금은 역시 『별생록』에 실려 있으므로, 따로 기재하지 않는다.
선신녀경(善信女經) 2권
무위도경(無爲道經) 2권
거사청승복전경(居士請僧福田經) 1권
결정죄복경(決定罪福經) 1권위의 4경은 『장방록』 등의 목록에서 모두 “담무참의 번역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세간의 주석世注에서는 의심스럽다”라고 하였다. 지금은 모두 구록(舊錄)에 의거하여 「의록(疑錄)」에 덧붙여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기재하지 않는다.

(5) 저거경성(沮渠京聲)
선법요해(禪法要解) 2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구마라집(鳩摩羅什)이 번역하여 낸 것과 동본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이상은 1부 2권인데, 궐본이다.

안양후(安陽候) 저거경성은 곧 하서왕(河西王) 저거몽손(沮渠蒙遜)의 사촌 아우이다. 사람됨이 강직하고 지조가 있고, 타고난 성품이 탁 트여 민첩하면서 명랑하였다. 어릴 적부터 슬기가 있고 다른 사람의 본보기가 되었으며, 서책과 기록들을 섭렵하여 담론(談論 : 담화와 논의)을 잘하였다. 어릴 적에 5계(戒)를 받고 내전(內典 : 불경)에 뜻을 기울였다. 여러 경전들을 읽고, 곧 암송하였는데, 항상 ‘학문에 힘쓰고 많이 들어 아는 것은 대사(大士 : 보살)의 성대한 사업이다’라고 생각하였다.
젊을 때 일찍이 유사(流沙)를 건너 우전국(于塡國)에 도착하였다. 거기서 천축의 법사 불타사나(佛陁斯那)중국말로는 각장(覺將)이라 부른다.를 구마제대사(瞿摩帝大寺)에서 만났다. 저거경성[安陽]은 불타사나를 좇아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道義]를 자문 받았다.
불타사나는 본래 대승을 배웠으며, 타고난 재질이 빼어나 5천만 게송[偈□]을 암송하였고, 선법(禪法)을 밝게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서방의 여러 나라에서는 그를 사람 중에 스승[人中師子]라고 불렀다. 안양후는 불타사나에게서 선법(禪法)의 모든 비밀스런 요술을 받아서, 범본(梵本)을 입으로 암송하였다. 동쪽에 있는 양(涼)나라 땅에 돌아와 무건(茂虔) 승화(承和) 연간(433~439)에 『선법요해』 1부를 번역하였다.

(6) 부타발마(浮陁跋摩)
아비담비바사론(阿毗曇毗婆沙論) 60권혹은 『팔건도(八揵度)』라는 글자를 덧붙이기도 한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당역(唐譯) 『대비바사론(大毗婆沙論)』과는 동본이다. 혹은 나누어 84권이 되기도 하고, 혹은 109권이 되기도 한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고, 6백여 년 뒤에 5백 나한應眞들이 지었다. 『승우록』과 『보창록』 두 목록에 보인다.
이상은 1부 60권인데, 그 경본이 현재 있다.

사문 부타발마는 혹은 불타발마(佛陁跋摩)라 하기도 하며, 중국말로는 각개(覺鎧)라고 한다. 서역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품행이 분명하고 곧았으며, 총명함이 무리에서 뛰어났다. 이장(二藏)을 배우고 익혔으며, 특히 『비바사론(毗婆沙論)』을 잘하였다. 항상 이 논(論)을 지녀 독송하면서 마음의 요체[心要]로 삼았다.
승화(承和) 연간(433~439)에 고장(姑臧)에 도착하였다. 이보다 앞서 사문 도태(道泰)는 뜻이 굳세고 과단성이 있어, 젊어서부터 총령(葱嶺) 우측의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비바사론』 범본(梵本) 10만여 게송을 얻어 고장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자리를 비워놓고 마음을 비운 채, 눈 밝은 장인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부타발마가 이 논을 가지고 마음공부을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청하여 번역하게 하였다.
그 당시 저거몽손(沮渠蒙遜)이 이미 세상을 떠나고, 그의 태자 무건(茂虔)이 왕위를 물려받았다. 무건의 승화 5년 정축(丁丑, 437) 4월 중순에 양주성(涼州城) 안의 한예궁사(閑豫宮寺)에서, 부타발마를 청하여 번역하게 하였다. 도태(道泰)가 붓으로 받아 적고, 사문 혜숭(慧嵩)과 도랑(道朗)과 의학승(義學僧) 3백여 인이 문장의 뜻을 바로잡았다. 승화 7년 기묘(己卯, 439) 7월에 비로소 끝마쳤으니, 무릇 1백 권이었다. 사문 도연(道挻)이 서문을 지었다.
얼마 후 위(魏)나라 태무제(太武帝)가 서쪽으로 고장(姑臧)을 정벌하였다. 양(涼) 지방이 멸망하는 난리 통에 경서(經書)와 집기[什物]들이 모두 분탕(焚蕩)질 당하였다. 끝내 40권을 잃어버리고, 오늘날에는 60권만이 남아 있다. 부타발마는 난리를 피하여 서역으로 돌아갔는데, 그가 입적한 곳은 알지 못한다.서문에는 “을축년(乙丑年)에 번역되어 나왔으니 ,곧 저거몽손의 현시(玄始) 14년(425)이다”라고 하였다. 정묘년에 마쳤으니, 곧 현시 16년(427)인데, 목록과 동일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지 자세히 알지 못한다.

(7) 석지맹(釋智猛)
반니원경(般泥洹經) 20권도혜(道慧)의 『송제록(宋齊錄)』과 『승우록』에 보인다. 여섯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담무참(曇無讖)의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과 같은 동본이다.
이상은 1부 20권인데, 궐본이다.

사문 석지맹은 경조(京兆)의 신풍(新豊) 사람이다. 품성이 단정하고 분명했으며, 행실이 맑고 깨끗하였다. 어려서부터 법복(法服)을 입고 학업을 닦는 데에 전념하여, 독송하는 소리가 밤낮으로 이어졌다. 외국의 도인들이 석가의 유적(遺跡)을 말하고, 또 방등(方等)의 여러 경전들이 서역(西域)에 유포되었다는 것을 들을 때마다, 언제나 분발하는 마음을 일으켜 마음은 먼 서역으로 향해 달리고 있었다. ‘만 리도 지척이고, 천 년의 세월도 따라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드디어 요진(姚秦) 홍시(弘始) 6년 갑진(甲辰, 404) 해에 같은 뜻을 품은 사문 15인을 불러 결의하고 장안(長安)을 떠났다. 강을 건너고 골을 넘기를 서른여섯 번 하고, 마침내 양주성(涼州城)에 이르렀다. 서쪽으로 양관(陽關)을 떠나 2천여 리나 뻗친 유사(流沙)로 들어가자, 땅에는 물도 없고 풀도 없었으며, 길에는 행인(行人)들도 끊어졌다. 겨울에는 몹시 춥고 여름에는 너무 더웠다. 사람들이 죽어서 널려 있는 뼈로 가는 길이 표시되어 있었다. 낙타에 양식을 싣고 떠났으나, 이정(里程)이 몹시 힘들고 괴로웠다.
마침내 선선(鄯鄯)ㆍ구자(龜茲)ㆍ우전(于塡) 등 여러 나라를 거치면서 풍속을 두루 살펴보고, 우전국으로부터 서남으로 2천 리를 가서 비로소 총령(葱嶺)에 올랐다. 그러나 도반[同侶 : 벗] 아홉 사람은 중도에 그만두고 돌아갔다. 석지맹은 남은 도반(道伴)과 함께 1천7백여 리를 더 나아가서 파륜국(波淪國)에 이르렀다. 함께 가던 축도숭(竺道嵩)이 또 목숨을 잃어 화장을 하려고 했으나, 갑자기 시신이 있는 곳을 찾지 못하였다. 석지맹은 비탄에 젖어 놀라 신이하게 생각하고, 이에 스스로 남은 네 사람과 함께 힘써 나아가서, 눈 덮인 산을 세 번이나 넘었다.
얼음으로 된 낭떠러지가 하얗게 깔려 백천 길[丈]이나 되었다. 높이 동아줄로 다리를 놓았는데, 그 허공을 타고 건너면서 아래를 보아도 밑이 보이지 않고, 위를 쳐다보아도 하늘이 보이지 않았으며, 추위는 너무도 혹독하여 몸도 영혼도 벌벌 떨렸다.
다시 남쪽으로 천 리를 가서 계빈국(罽賓國)에 이르렀고, 재차 신두하(辛頭河)를 건너자 설산(雪山)들이 벽처럼 우뚝 서 있는데, 앞으로 갈수록 더욱더 심하였다. 아래에는 장기(瘴氣:풍토병)가 많고, 악귀(惡鬼)가 길을 막아 끊었으므로 가던 사람들은 거의 다 죽었다. 그러나 석지맹은 정성스런 마음이 그윽이 사무쳐서 위험한 길을 능히 건널 수 있었고, 마침내 계빈성(罽賓城)에 이르렀다.
이 나라에는 항상 5백의 나한(羅漢)이 머물렀는데, 항상 아뇩달지(阿耨達池)27)를 왕래하였다. 그 중에 큰 덕을 갖춘 한 나한이 석지맹이 온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고 찬탄하였다. 석지맹이 국토에 대해서 물으니, 그를 위하여 사천하(四天下)28)의 일을 말해 주었다. 그 일들은 『석지맹전(釋智猛傳)』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석지맹은 먼저 기사국(奇沙國)에서 부처님의 글이 새겨진 석타호(石唾壺)를 보았으며, 또 이 나라에서 부처님 발우[鉢]도 보았다. 광채는 자줏빛을 띠었는데, 네 가장자리도 모두 그러했다. 석지맹은 향과 꽃을 올리고 발우를 이고 발원하였다.
“발우에 만일 감응(感應)이 있다면, 가벼워질 수도 있고 무거워질 수도 있게 하소서.”
그러자 점점 발우가 무거워져서 끝내는 힘으로 들 수 없었으며, 그리하여 상[案]에 내려놓았는데, 그 때에는 다시 그 무게를 느낄 수 없었다. 그의 도심(道心)이 감응한 바가 이와 같았다.
다시 서남쪽으로 1천3백 리를 가 가유라위국(迦維羅衛國)에 이르러, 부처님 머리카락과 치아, 육계골(肉髻骨 : 정수리 뼈)을 친견하였다. 부처님의 자취가 찬란하게 보존되어 있었고, 또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셨던, 빽빽한 숲과 악마를 항복시킨 보리수(菩提樹)를 보았다. 석지맹은 기뻐하는 마음으로 하루 동안을 공양하였고, 아울러 보개(寶蓋 : 보옥으로 장식된 덮개)와 큰 가사[大衣]로는 항마상(降魔像)을 덮어 주었다. 그는 돌아다니면서 신령스런 불가사의한 일[變異]을 샅샅이 살폈는데, 하늘 사다리[天梯]와 용의 못[龍池]을 본 일 등 이루 다 헤아릴 수도 없었다.
뒤에 화씨성(華氏城)에 이르렀는데, 여기는 아육왕(阿育王)의 옛 도읍지였다. 그곳에는 큰 지혜 있는 바라문(婆羅門)이 있었는데, 이름은 나열(羅閱)이었다. 그는 모든 족속들에게 존숭을 받았고, 법을 널리 폈으므로 왕에게 흠모와 존경을 받았다. 그는 순은으로 된 세 길[丈] 높이의 탑(塔)을 세웠다. 사문 법현(法顯)이 앞서 그의 집에서 6권본 『니원경(泥洹經)』을 얻은 일이 있었다. 그는 석지맹이 그곳에 이른 것을 보고 물었다.
“진(秦)나라 땅에는 대승의 학문이 있습니까?”
대답하였다.
“모두가 대승의 학문을 배우고 있습니다.”
나열은 놀라면서 찬탄하였다.
“희유하고 희유한 일이다. 아마 보살이 가서 교화한 것이 아니겠는가.”
석지맹은 그의 집으로 가서 『니원경(泥洹經)』 범본(梵本) 1부를 얻고, 또 『마하승기율(摩訶僧祇律)』 범본 1부와 그 밖의 경의 범본을 찾아서 얻었다. 그는 유통시킬 것을 서원하고, 이에 곧 되돌아왔다.
갑자년(424)에 천축을 출발하여 동행한 네 분의 스님들은 길에서 세상을 떠났고, 석지맹과 담찬(曇纂)만이 함께 양주(涼州)로 돌아왔다. 그리고 무건(茂虔)의 승화(承和) 연간(433~439)에 『니원경』을 번역하였는데, 20권이 되었다. 석지맹은 송(宋)나라 원가(元嘉, 424~453) 말년에 입적하였다.
내[智昇]가 사문이 기록하여 열거한 행로(行路)를 찾아 돌아다녀보니, 때에 따라 간혹 서로 같지 않았다. 부처님 발우와 정골(頂骨)이 있는 장소도 역시 서로 어긋났다. 아마도 천축으로 가는 길이 한 길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신령한 정골과 발우도 옮길 때, 다른 곳에 옮겨진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전술(傳述)한 것을 보고 들은 지식[見聞]을 그대로 본보기로 삼기는 어렵다.

(8) 석도태(釋道泰)
대장부론(大丈夫論) 2권제바라(提波羅)보살이 지었다. 『번경도(飜經圖)』에 보인다.
입대승론(入大乘論) 2권견의(堅意)보살이 지었다. 당(唐)나라 『구록(舊錄)』에 보인다. 또한 『내전록(內典錄)』과 『번경도』에서도 보인다.
이상은 2부 4권이며, 그 경본이 현재 있다.

사문 석도태는 재주와 민첩함을 타고났고, 충기(冲氣)가 명랑하였으며, 견문을 넓히는 취미가 기이하여, 멀리 다른 나라의 말을 참구하였다. 때때로 중국 땅[漢土]에는 방등(方等)이 이미 갖추어져 있어, 그윽한 종지[幽宗]가 대강 창달하였으나, 오직 3장(藏) 9부(部)만은 익숙하지 못하였다.
그 때문에 석장(錫杖)을 짚고 위험을 무릅쓰면서 총령(葱嶺)의 서쪽까지 이르러, 범문(梵文)의 뜻을 널리 보고 높은 뜻[旨]을 이어받았다. 아울러 『바사론(婆沙論)』 범본 10만여 게송과 여러 경론(經論)을 얻어 동쪽으로 중국[涼土]에 돌아왔다. 마침내 부타발마(浮陁跋摩)를 만나 『비바사론(毗婆沙論)』을 함께 번역하였다.
도태는 그 후에 스스로 『대장부론』 등 2부를 번역하였다.또 『장방록(長房錄)』과 『내전록(內典錄)』 두 목록에서는 “양(涼)나라 때에 다시 사문 담각(曇覺)이 고창국(高昌國)에서 『현우경(賢愚經)』 1부를 번역하였으니, 곧 송(宋)나라 원가(元嘉) 22년(445)에 해당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 말한다면 옳지 못하다. 원가 16년(439) 기묘(己卯, 439)에 양나라는 이미 멸망하여 없어졌는데, 어떻게 22년(445) 을유(乙酉, 445)에 그대로 경을 번역하여 냈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이 두 목록의 기록은 착오임을 알 수 있다. 이제 정매(靖邁)의 경도(經圖)에 의하면, 원위(元魏) 때에 있는 것으로 편집되어 있다. 위(魏)ㆍ송(宋)이 비록 둘 다 송나라의 수도인 건업(建業)에 있었고, 위나라의 도읍이 항안(恒安)이라 하더라도, 지역(地域)으로 논한다면, 합당하므로 『위록(魏錄)』에 속하게 된다.

(9) 석법성(釋法盛)
보살투신아호기탑인연경(菩薩投身餓虎起塔因緣經) 1권『승우록』에서는 “『이신시아호경(以身施餓虎經)』이다”라고 하였다. 경 후기(後記)에 보인다.
이상은 1부 1권인데 그 경본이 현재 있다.

사문 석법성은 고창(高昌) 사람이다. 역시 양(涼)나라 때에 『보살투신아호기탑인연경』 1권을 번역하였다. 그러므로 앞의 고승(高僧) 「담무참전(曇無讖傳)」끝부분에 “그때 고창에는 사문 법성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역시 경을 구하려고 외국을 다녀왔어, 전(傳)한 것이 4권이다”라고 하였다.
그 『보살투신아호기탑인연경』 후기(後記)에는 “그 때에 국왕이 부처님 설법을 들은 뒤, 곧 그곳에다 큰 탑[大塔]을 세웠으니, 이름을 보살투신아호탑(菩薩投身餓虎塔)이라 하였다. 지금도 그 탑이 있는데, 동쪽으로 면한 산 아래에 승방(僧房)과 강당이 달린 정사(精舍)가 있으며, 거기에는 항상 5천의 대중 스님들이 머무르면서 4사(四事)29)를 공양하였다.
법성은 그 때에 온 나라 안의 문둥병자나 미치광이ㆍ귀머거리ㆍ소경ㆍ손발이 오그라진 앉은뱅이ㆍ절름발이 등 온갖 병든 사람들이 모두 이 탑으로 와서, 향을 사르고 등불을 켜며, 향니(香泥)로 땅을 바르고 쓸고 뿌리며, 아울러 머리를 조아려 정성껏 참회하면, 온갖 병들이 모두 낫는 것을 보았다. 먼저 온 사람이 병이 나아서 떠나면 뒤에 다른 이들이 와서 모두 그렇게 하였으므로, 언제나 백여 명이 들끓었다. 귀천을 묻지 않고 모두가 그러하였으므로 끝내 끊어지는 때가 없었다”라고 하였다.
이제 『고승전(高僧傳)』의 글을 자세히 살피고 경 후기 설명을 본다면, 법성이 서역을 돌아다녔던 일은 거짓이 아니다. 또 “몸소 신령스런 탑[靈龕]을 보았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의당 잘못 기록한 것이 아니다. 만일 법성이 스스로 이 경을 번역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경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마침내 그 자신이 서방으로 갔었거늘, 어찌 경교(經敎 : 경의 가르침)를 전하지 않았겠는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자세히 조사하여 밝혀 보니, 그 일이 이에 분명하여졌다. 이제 법성의 번역이므로 이 목록에 편성하여 실은 것이다.

(10) 신구(新舊) 제실역경(諸失譯經)
불퇴전법륜경(不退轉法輪經) 4권일명 『불퇴전경(不退轉經)』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축법호(竺法護)가 번역한 『아유월치차경(阿惟越致遮經)』과 같은 동본이다.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 2권혹은 1권으로 되어 있다.
대인욕경(大忍辱經) 10권
금륜왕경(金輪王經) 1권
현겁오백불명(賢劫五百佛名) 1권
이상은 5부 18권이다.앞의 2부 6권은 경본이 현재 있고, 뒤의 3부 12권은 궐본이다.

『장방록』 등의 목록에서는 모두 “이 경들은 사문 승우(僧祐)의 『신집(新集)』과 석도안(釋道安)의 『양토이경(涼土異經)』에 있다”라고 하였다. 이제는 도로 양 나라 시대(涼世)의 목록에 덧붙여 넣어 번역의 근원을 알지 못[失譯源]한다고 하였다. 시대와 번역한 사람이 있고 없는 것과 권부(卷部)의 많고 적음과 번역하여 낸 처소를 알게 되기를 바란다.
이하는 이 목록에 새로 덧붙인 것이다.

우바이정행법문경(優婆夷淨行法門經) 2권혹은 경(經)자가 없기도 하다. 바로 『정행경(淨行經)』이라고도 한다.
장자법지처경(長者法志妻經) 1권
대애도비구니경(大愛道比丘尼經) 2권또한 『대애도수계경(大愛道受戒經)』이라고도 한다. 『구록(舊錄)』에서는 “『대애도경(大愛道經)』이다”라고 하였다.
삼혜경(三慧經) 1권
보살등행경(菩薩等行經) 1권이 경 이하는 궐본이다.
사무외경(四無畏經) 1권
권변경(權變經) 1권『구록』에서는 “『문수사리권변삼매경(文殊師利權變三昧經)』이다”라고 하였으며, 혹은 바로 『권변삼매경(權變三昧經)』이라고도 한다.
십구화경(十漚惒經) 1권
칠언선리경(七言禪利經) 1권『구록』에서는 “『구화칠언선리경(漚惒七言禪利經)』이다”라고 하였다.
보살십구화경(菩薩十漚惒經) 1권이제 앞의 『십구화경(十漚惒經)』과 같은 경이 아닌가 한다.
병사왕경(甁沙王經) 1권
유무경(有無經) 1권
오백게경(五百偈經) 1권
수야월국빈인경(須耶越國貧人經) 1권『구록』에서는 “『수야월국빈인임척두경(須耶越國貧人賃剔頭經)』이다”라고 하였다.
부목경(浮木經) 1권
배유경(坯喻經) 1권
요괴경(妖怪經) 1권
아반계니원경(阿般計泥洹經) 1권어떤 본에는 『도사계니원경(陶射計泥洹經)』이라고 하였다.
사비상경(四非常經) 1권
오실개경(五失盖經) 1권
요진경(要眞經) 1권
본무경(本無經) 1권
권덕경(勸德經) 1권
십오덕경(十五德經) 1권
부모인연경(父母因緣經) 1권지금의 『부자인연경(父子因緣經)』과 같은 경이 아닌가 싶다
혜행경(慧行經) 1권
미생왕경(未生生經) 1권지금은 『미생원경(未生怨經)』이 아닌가 싶다.
내외무위경(內外無爲經) 1권
도정경(道淨經) 1권
칠사본말경(七事本末經) 1권『구록』에서는 “『칠사본행경(七事本行經)』이다”라고 하였다.
백보삼매경(百寶三昧經) 1권
삼승경(三乘經) 1권
기역술경(耆域術經) 1권『구록』에서는 “『기역사술경(耆域四術經)』이다”라고 하였다.
오개리의경(五盖離疑經) 1권지금은 『오개의결실행경(五盖疑結失行經)』이 아닌가 싶다.
태자지지경(太子智止經) 1권
도덕장경(道德章經) 1권
고상경(苦相經) 1권
수불득도경(須佛得度經) 1권
유경(由經) 1권
분연원국가라월경(分然洹國迦羅越經) 1권
오음사경(五陰事經) 1권
의결법사경(義決法事經) 1권
십사유경(十思惟經) 1권
분별육정경(分別六情經) 1권
삼실개경(三失盖經) 1권
불보삼매경(佛寶三昧經) 1권
법지녀경(法志女經) 1권
이상은 47부 49권이다.오직 처음의 4부 6권만이 경본이 있으며, 그 나머지 모두는 궐본이다.

『승우록』에는 “안공(安公)의 『양토이경(涼土異經)』과 『장방록』 등의 목록에는 궐본이라, 기재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지금 다시 『양록(涼錄)』에 덧붙여 넣는 것은 실역(失譯)으로 생각해서이다. 승우는 “『양토이경』에는 총 59부가 기재되어 있다”라고 하였는데, 그 중 5부는 『장방록』에 이미 기재되어 있고, 지금 다시 47부가 나왔으므로 앞의 것과 합하면 52부가 된다. 나머지는 모두 7부 14권이 있다. 삼가 『장방록』 등의 목록을 살펴보면 모두 근거가 있다. 그러므로 곧 번역한 사람의 이름을 모르는 것[失譯]도 아니다. 이 때문에 이 목록에서는 삭제하여 기재하지 않으며, 이제 그 모든 사항[條件]을 아래와 같이 나열한다.

수보리품경(須菩提品經) 7권『반야초경(般若鈔經)』의 이명(異名)이다. 전진(前秦)의 담마비(曇摩蜱) 번역이다.
문수사리시현보장경(文殊師利示現寶藏經) 2권서진(西晋)의 축법호(竺法護) 번역이다.
칠지경(七知經) 1권혹은 칠지(七智)로 쓰기도 한다. 오(吳)나라 지겸(支謙)의 번역이다.
난용왕경(難龍王經) 1권혹은 『난룡경(難龍經)』이라고도 한다. 또한 『용왕형제경(龍王兄弟經)』의 이명(異名)이다. 오나라 지겸의 번역이다.
아타삼매경(阿陁三昧經) 1권곧 『아다삼매경(阿多三昧經)』의 이명이며, 안공(安公)의 『관중이경(關中異經)』에 이미 실려 있다.
대오탁경(大五濁經) 1권『구록』에서는 “『대오탁세경(大五濁世經)』이다”라고 하였다. 여러 목록에서는 “위경(僞經)이다”라고 하였다. 지금도 역시 거기에 편성되어 있다.
수지문십사장경(首至問十四章經) 1권『구록』에서는 “『수지문불십사의경(首至問佛十四意經)』이다”라고 하였으며, 혹은 “『수지문십사사경(首至問十四事經)』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후한(後漢) 지요(支曜)의 번역이다”라고 하였다. 지금은 추려서 베낀 경抄經이므로 「별생록(別生錄)」에 싣는다.
대방광십륜경(大方廣十輪經) 8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당역(唐譯) 『지장십륜경(地藏十輪經)』과 동본이다. 이 경은 『대집경(大集經)』의「제13분(分)」이다. 양나라 시대涼代의 번역인 것 같은데, 여러 목록에서는 기재하지 않았다. 이제 이 양나라 시대涼代의 마지막에 덧붙여 두니, 없어지거나 빠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신(新)ㆍ구(舊)를 모두 합하면 총 53부 75권인데, 모두 북량(北涼) 시대의 실원(失源)에 기록하여 둔다.
031_1015_a_01L開元釋教錄卷第四 笙庚午歲西崇福寺沙門智昇撰摠括群經錄上之四秦姚氏都常安 亦云後秦起姚萇謚爲昭武皇帝 白雀元年甲申至姚泓無謚永和三年丁巳凡經三主三十四年沙門五人所出經摠九十四部合六百二十四卷於中六十六部五百二十八卷見在二十八部九十六卷闕本准大智度論後記云弘始三年歲在辛丑王道珪云庚子一本亦云歲在辛丑房及甄鸞更差一載今依後記爲正次第排之姚秦 沙門竺佛念一十二部 七十四卷 經律集沙門鳩摩羅什 七十四部三百八十四卷經律論集沙門弗若多羅 一部 五十八卷律沙門佛陁耶舍 四部 八十四卷 經律沙門曇摩耶舍 三部 二十四卷 經論十住斷結經十卷 初云最勝問菩薩十住除垢斷結經一名十千日光三昧定亦云十地斷結或十一卷或十四卷第二出見三秦錄高僧傳僧祐錄菩薩瓔珞經十二卷 一名現在報第二出或十三卷或十四卷或十六卷符秦建元十二年七月出見二秦錄高僧傳僧祐錄菩薩處胎經五卷 初云菩薩從兜術天降神母胎說廣普經亦直云胎經或四卷或八卷見二秦錄高僧傳僧祐錄中陰經二卷 見二秦錄高僧傳僧祐錄菩薩瓔珞本業經二卷 或直云瓔珞本業經初出見長房錄鼻柰耶律十卷 一名誡因緣經亦云鼻柰耶經亦云戒果因緣經沙門曇景筆受見安公經序符秦建元十四年壬午正月十二日出出曜經二十卷 亦云出曜論或十九卷苻秦建元十九年出見二秦錄高僧傳僧祐寶唱等錄上見在已下闕持人菩薩經三卷 第二出與法護持人羅什持世同本見長房錄大方等無相經五卷 亦名大雲經或四卷與曇無讖方等大雲同本初出見長房錄菩薩普處經三卷 見長房錄十誦比丘尼戒所出本末一卷 第三出僧純於拘夷國得梵本佛念爲譯文煩後竺法汰刪改正之見寶唱錄王子法益壞目因緣經一卷 或云阿育王息壞目因緣經第三出見僧祐錄右一十二部七十四卷 出曜上七部六十一卷見在持人下五部一十三卷闕本沙門竺佛念涼州人弱年出家志業淸堅外和內朗有通敏之諷習衆經粗涉外典其蒼雅詁訓尤所明練少好遊方備觀風俗家世西河洞曉方語華戎音義莫不兼釋故義學之譽雖洽聞之聲甚著苻氏建元年有曇摩持鳩摩羅佛提僧伽跋澄提婆難提等來入長安趙政等請出衆經當時名德莫能傳譯衆咸推念以爲明匠自安高支謙之後莫踰於念姚二代爲譯人之宗故關中僧衆咸共嘉焉念於苻姚二代自譯十住斷結等經一十二部長房錄中別存十地斷結經十卷者非也住之與地二義無別今存十住十地刪之後遘疾卒于常安遠近白黑莫不歎惜摩訶般若波羅蜜經四十卷 亦名大品般若經祐云新大品經第三出與放光等同本或三十卷或二十四或二十七弘始五年癸卯四月二十三日出至六年四月二十三日訖見二秦錄及僧祐錄小品般若波羅蜜經十卷 題云摩訶般若波羅蜜無小品字祐云新小品經與道行明度等同本第七譯或七卷弘始十年二月六日出至四月三十日訖見二秦錄及僧祐錄金剛般若波羅蜜經一卷 亦云金剛般若經佛在舍衛國者初出與元魏留支等出者同本見二秦錄及僧祐錄仁王護國般若波羅蜜經二卷 亦云仁王般若經或云一卷第二出與晉世法護與梁朝眞諦譯者同本異出房云見別錄摩訶般若波羅蜜大明呪經一卷 亦云摩訶大明呪經初出與唐譯 般若心經等同本見經題上菩薩藏經三卷一名富樓那問經亦名大悲心經今編入寶積當第十七會名富樓那會弘始七年出或二卷第二出與法護出者同本見二秦錄僧祐錄善臂菩薩經二卷 今編入寶積當第二十六會見法上錄須摩提菩薩經一卷 第二出與寶積妙慧會等同本見長房錄自在王菩薩經二卷 或無菩薩字初出與奮迅王經同本弘始九年於尚書令姚顯第出僧睿筆受幷製序見二秦錄及僧祐錄莊嚴菩提心經一卷 第四出與法護菩薩十地經等同本房云見別錄十住經四卷 或五卷是華嚴十地品異譯什與佛陁邪舍共出見二秦錄及僧祐錄妙法蓮華經八卷 僧祐錄云新法華經初爲七卷二十七品後人益天授品成二十八弘始八年夏於大寺出僧睿筆受幷製序第五譯見二秦錄及僧祐錄維摩詰所說經三卷 一名不可思議解脫或直云維摩詰經僧祐錄云新維摩詰經弘始八年於大寺出僧肇筆受睿製序第六譯見二秦錄及僧祐錄大樹緊那羅王所問經四卷 亦云說不可思議品或直云大樹緊那羅經第二出與支讖伅眞陁羅經同本見長房錄集一切福德三昧經三卷 與竺法護等集衆德經等同本異出第三譯見眞寂寺錄思益梵天所問經四卷 或直云思益經僧祐錄云思益義經弘始四年十二月一日於逍遙園出第二譯與法護持心留支勝思惟竝同本見二秦錄及僧祐錄持世經四卷 一名法印經或三卷第三出與法護持人經等同本見二秦錄及僧祐錄諸法無行經二卷 或一卷與隋崛多諸法本無經等同本初出見二秦錄及僧祐錄阿彌陁經一卷 亦名無量壽經弘始四年二月八日譯初出與唐譯稱讚淨土經等同本見二秦錄及僧祐錄彌勒成佛經一卷 第二出與法護彌勒成佛經同本弘始四年出見二秦錄及僧祐錄彌勒下生經一卷 一名彌勒受決經初云大智舍利弗與彌勒來時經同本第四出亦云彌勒成佛經亦云下生成佛或云當下成佛見二秦錄及僧祐錄文殊師利問菩提經一卷 亦直云菩提經一名伽耶山頂經一名菩提無行經初出與伽邪山頂經象頭精舍經等同本見僧祐錄經圖中別載菩提經一卷者誤也孔雀王呪經一卷 第四出亦名大金色孔雀王經在逍遙園出幷結界場法悉備具房云見別錄首楞嚴三昧經三卷 或二卷亦直云首楞嚴經僧祐錄云新首楞嚴經第九出與方等首楞嚴勇伏定經等同本見僧祐錄不思議光菩薩所問經一卷 亦云不思議光菩薩所說經亦云無思議光孩童菩薩經第二出與竺法護無思議孩童經同本見長房錄華手經十三卷 或爲華首一名攝諸善根經亦名攝諸福德經或十卷或十一卷或十二卷弘始八年譯見二秦錄及僧祐錄佛垂般涅槃略說教誡經一卷 亦云佛臨般一名遺教經見僧祐錄千佛因緣經一卷 見法上錄梵網經二卷 第二出弘始八年於草堂寺三千學士最後出此一品梵本有六十一品譯訖融影等三百人一時共受菩薩十戒僧肇受見經前序佛藏經四卷 一名選擇諸法經或三卷或二卷弘始七年六月十二日出見二秦錄及僧祐錄淸淨毘尼方廣經一卷 與文殊淨律經等同本第三出見法上錄大智度論一百卷 或云大智度經論亦云摩訶般若釋論或七十卷或一百一十卷弘始四年夏於逍遙園出七年十二月二十七日訖見二秦錄及僧祐錄中論四卷 亦云中觀論或八卷弘始十一年於大寺出僧睿製序見二秦錄及僧祐錄兼前智度論竝龍樹菩薩造十二門論一卷 龍樹菩薩造弘始十年於大寺出僧睿製序見僧祐錄及寶唱錄百論二卷 提婆菩薩造弘始六年出僧肇製序見二秦錄及僧祐錄十住毘婆沙論十四卷 或無論字龍樹菩薩造或十二卷或十五卷見長房錄大莊嚴經論十五卷 或無經字馬鳴菩薩造或十卷見長房錄發菩提心論二卷 或云發菩提心經亦云經論見李廓錄放牛經一卷 亦云牧牛經出增一阿含第四十六卷異譯房云見別錄海八德經一卷 第三出與法海經等同本見法上錄禪秘要經三卷 或云禪秘要法無經字或四卷與支謙等出者同本第二出房云見別錄燈指因緣經一卷 見李廓錄十誦比丘戒本一卷 亦云十誦波羅提木叉戒第三出與曇摩持等出者同本見僧祐錄成實論二十卷 或二十四或十六或十四弘始十三年九月八日尚書令姚顯請出至十四年九月十五日訖曇晷筆受佛滅後九百年訶梨跋摩造見僧祐錄坐禪三昧經三卷 一名菩薩禪法經初出或直云禪經或云禪法要或云阿蘭若習禪法三名同是一本弘始四年正月五日出至九年閏五月重校正見二秦僧祐寶唱三錄菩薩呵色欲法一卷 或云菩薩訶色欲經或直云菩薩呵色欲初出見僧祐錄禪法要解二卷 或云禪要經初出見僧祐錄思惟要略法一卷 或云思惟要略法經或直云思惟經第二出見長房錄雜譬喩經一卷 弘始七年十月出道略集馬鳴菩薩傳一卷 見長房錄龍樹菩薩傳一卷 見長房錄提婆菩薩傳一卷 見長房錄法界體性無分別經二卷 與寶積法界體性會同本初出見法上錄 從此下闕大善權經二卷 與寶積大乘方便會等同本第四出見李廓錄大方等大集經三十卷 或加新字或二十四卷與支讖無讖所出者同本見二秦錄及李廓錄大方等頂王經一卷 與法護等出者同本第二出見長房錄阿闍世經二卷 與支讖等出者同本第五譯房云見別錄睒本起經一卷 亦直云睒經出六度經異譯第三出見李廓錄請觀世音經一卷 初出與竺難提出者同本見李廓錄寶網經一卷 第二出與法護出者同本見李廓錄稱揚諸佛功德經三卷 一名集華經初出弘始七年譯見二秦錄及僧祐錄觀普賢菩薩經一卷 第二出見李廓錄未曾有因緣經二卷 初出見法上錄賢劫經七卷 第二出弘始四年三月五日出與法護譯者同本曇恭筆受見二秦錄及僧祐錄一名賢劫三昧經一名賢劫定意經凡三名祐錄云新賢劫經善信摩訶神呪經二卷 見李廓錄持地經一卷 見長房錄觀佛三昧經一卷 見李廓錄菩薩戒本一卷 初出見長房錄今疑此菩薩戒本卽梵網下卷是文殊悔過經一卷 第二出見長房錄舍利弗悔過經一卷 第三出見法上錄十住論十卷 龍樹菩薩造弘始年譯未訖第八末似六度集見二秦錄及僧祐錄今疑此十住論卽十住婆沙是撿諸罪福經十卷 房云見別錄十二因緣觀經一卷 見長房錄婆藪盤豆傳一卷 初出見翻經圖右七十四部三百八十四卷提婆菩薩傳上五十二部三百二卷見在法界體性經下二十二部八十二卷闕本沙門鳩摩羅什秦言童壽一名鳩摩羅耆婆外國製名多以父母爲本什父鳩摩羅炎母字耆婆故兼取爲名也天竺人也家世國相什祖父達倜儻不群名重於國父鳩摩炎聰明有懿節將嗣相位乃辭避出家東度蔥嶺龜茲王聞其棄榮#捨俗甚敬慕之自出郊迎請爲國師王有妹年始二十悟明敏過目必能一聞則誦體有赤黶法生智子諸國娉之竝不行及見炎心欲當之王聞大喜逼以妻焉遂生於什什之在胎其母慧解#倍常往雀梨大寺聽經忽自通天竺語難問之必窮淵致衆咸歎異有羅漢達摩瞿沙曰此必懷智子爲說舍利弗在胎之證旣而生什嶷若神什生之後還#忘前語其母出家修道學得初果年七歲亦俱出家從師受經誦千偈偈有三十二字凡三萬二千言誦毘曇旣過師授其義卽自通解無幽不暢龜茲國以其母王女利養甚多乃攜什避之什年九歲進到罽賓名德法師槃頭達多卽罽賓王之從弟也淵粹有大量三藏九部莫不縷貫亦日誦千偈名播諸國什旣至仍師事之遂誦雜長二阿含凡四百萬言多每與什論議深推服之聲徹於王王卽請入集外道論師相攻難言氣始交外道輕其幼言頗不順什乘其隙#而挫之外道折服愧惋無言王益敬異日給鵝腊一雙粳麪各三斗六升此外國之上供也所住寺乃差大僧五人沙彌十人視灑掃有若弟子其見尊崇如至年十二其母攜還龜茲月氏北山有一羅漢見而異之謂其母言常當守護此沙彌若至三十五不破戒者當大興佛法度無數人與優波鞠多無若戒不全無能爲也正可才明儁詣法師而已什進到沙勒頂戴佛鉢心自念言鉢形甚大何其輕耶卽重不可勝失聲下母問其故答曰我心有分別鉢有輕重耳什於沙勒國誦阿毘曇六足諸門增一阿含及還龜茲名蓋諸國龜茲僧衆一萬餘疑非凡夫咸推而敬之莫敢居上由是不預燒香之次遂博覽四韋陁五明諸論外道經書陰陽星算莫不究曉妙達吉凶言若苻契爲性率達不厲小撿修行者頗非之什自得於心嘗介意後從畀摩羅叉學十誦又從須利耶蘇摩諮稟大乘乃歎曰吾昔學小乘譬人不識以鍮石爲妙矣於是廣求義誦中百二論及十二門等什母辭往天竺謂龜茲王白純曰汝國尋衰吾其去矣行至天竺進登三果什母臨去謂什方等深教應大闡眞丹傳之東土唯爾之力但於自身無利其可如何什曰大士之道利彼亡若必使大化流傳洗悟矇俗雖復身當鑪鑊苦而無恨於是留住龜茲止王新寺得大品經始就披讀魔來蔽文唯見空牒什知魔所爲誓心逾固魔去字仍誦習之後於雀梨大寺大乘經忽聞空中語曰汝是智何以讀此什曰汝是小魔時速去我心如地不可轉也住二年廣誦大乘經洞其秘龜茲王爲造金師子座以大秦錦褥鋪之令什陞而說法往罽賓爲其師槃頭達多具說一乘妙義師感悟心服卽禮什爲師言我是和上小乘師和上是我大乘師矣西域諸國服什神儁咸共崇仰每至講說諸王長跪座側命什踐而登焉其見重如此什道震西域聲被東國苻氏建元十三年歲次丁丑正太史奏有星見外國分野有大德智人入輔中國堅素聞什名乃悟曰朕聞西域有鳩摩羅什將非此耶十九年堅遣驍騎將軍呂光等率兵七萬西伐龜茲及烏耆諸國臨發謂光曰聞彼有鳩摩羅什深解法相閑陰陽爲彼學之宗朕甚思之若剋龜茲卽馳驛送什光軍未什謂其王白純曰國運衰矣當有勍歒日下人從東方來恭承之勿抗其鋒純不從而戰光遂破龜茲殺純獲什光性疏未測什智量見其年尚少凡人戲之什被逼旣至遂虧其或令騎牛及乘惡馬欲使墮什常懷忍辱曾無異色光慚愧而止光還中路置軍於山下將士已休什曰不可在此必見狼狽宜徙軍隴上光不納至夜果雨洪潦暴起水深數丈死者數千光始加敬異什謂光曰凶亡之地不宜淹留推數揆運應速言歸中路必有福地可居光從之至涼州聞苻堅已死割據涼土制命一隅焉什停涼積年數言未然後皆如說呂光父子旣不弘道故薀其經法所宣化苻堅已亡竟不相見萇聞其高名虛心要請諸呂以什智計多解恐爲姚謀不許東入及萇卒子興謚爲文祖皇帝襲位復遣敦請弘始三年歲次辛丑三有樹連理生于廟廷逍遙一蔥變爲茞以爲美瑞謂智人應入其年十二月二十日什至常安興待以國師之禮甚見優悟言相對則淹留終日硏微造盡則窮年忘倦自大法東被始於漢明歷涉魏經論漸多而支竺所出多滯文格義興少崇三寶銳志講集什旣至止請入西明閣及逍遙園譯出衆什率多闇誦無不究達轉解秦言音譯流利旣覽舊經義多乖謬皆由先譯失旨不與梵本相應興使沙門僧肇僧䂮僧邈僧睿等八百餘人諮受什旨令出大品什持梵本興執舊經以相讎挍其新文異舊者義皆圓通衆皆愜服莫不欣讚焉以佛道沖邃其行唯善信爲出苦之良津御世之洪則故託意九經遊心十二乃著通三世論以勖示因果王公已下竝欽贊厥風興宗室常山公顯安成侯竝篤信緣業屢請什於常安大寺講說新經什以弘始四年壬寅至十四年壬子譯大品金剛等經七十四部三百八十餘卷竝暢顯神源發揮幽于時四方義學沙門不遠萬名德秀拔者暢二公乃至道恒僧摽慧睿僧敦僧弼僧肇三十餘僧稟訪精硏務窮幽廬山慧遠道業沖粹乃遣使修問龍光道生慧解洞微入關諮稟盛業久大至今仰則初沙門慧睿才識高朗隨什傳寫什每爲睿論西方辭商略同異云天竺國俗甚重文藻其宮商體韻以入絃爲善凡覲國王必有讚德見佛之儀以歌歎爲尊經中偈頌皆其式但改梵爲秦失其藻蔚雖得大意殊隔文體有似嚼飯與人非徒失味乃令人歐噦也什嘗作頌贈沙門法和云心山育德流芳萬由旬哀鸞鳴孤桐響徹九天凡爲十偈辭喩皆爾雅好大乘志存敷演嘗歎曰若著筆作大乘阿毘曇非迦旃延子比也今在秦地深識者寡折翮於此將何所論乃悽然而唯爲姚興著實相論二卷出言成章無所刪改辭喩婉約莫非淵奧什爲人神情映徹傲岸出群應機領會鮮有其疋且篤性仁汎愛爲心虛己善誘終日無時有沙門僧睿興甚嘉焉所譯經睿竝參正昔竺法護出正法華受決品云天見人人見什譯經至此乃言曰此語與梵本義同但在言過質睿應聲將非人天交接兩得相見乎大喜曰實然而睿與什共相開皆此類也嘗聽秦僧道融講新法華什乃歎曰佛法之興其人也俄而師子國有一婆羅聰辯多學西土俗書罕不披而爲彼國外道之宗聞什在大行佛法乃卽慨然謂其徒寧可偏使釋氏之風獨傳震而令吾等正化之典不洽東因遂乘駝負書遠涉來入常姚興見其口眼便僻頗亦惑而婆羅門乃啓興曰至道無各尊其事今故遠來請與秦捔其辯力隨有優者卽傳其興卽許焉于時關中四方僧衆相視缺然莫敢當者什謂融此之外道聰明殊人捔言必豈可得使無上大道在於吾爲彼而屈良可悲矣若使外道肆情得志則是我等法輪摧豈可然乎如吾所睹在君一人道融自顧才力#不減而彼西域外道經書未盡披讀乃密令人寫婆羅門所讀經目一披卽誦其後剋日將就論義姚興自出公卿皆會關中僧衆四遠必集爾時道融與婆羅門擬相詶抗鋒辯飛玄彼所不逮婆羅門雖自覺知辭理已屈然意猶以廣讀爲誇道融乃列其所讀書幷更通論秦地經史名目卷部三倍多之什仍乘勢因嘲之曰君可不聞大秦廣學那忽輕爾遠來婆羅門心生愧伏頂禮融足旬日之中無何而去像運再顯鳩摩羅什道融力焉又杯度比丘在彭城聞什在常安乃歎曰吾與此子戲別三百餘年杳然未期遲有遇於來生耳什臨終力疾與衆僧告別曰因法相遇殊未盡伊心方復異世惻愴何自以闇昧謬充傳譯若所傳無謬使焚身之後舌不燋爛秦弘始中卒卽於逍遙園依外國法焚尸薪滅形化唯舌不變信弘法之有徵也 什公卒時諸記不定高僧傳云弘始十一年八月二十日卒於常安或云七年或云八年傳取十一爲正此不然也准成實論後記云大秦弘始十三年歲次豕韋九月八日尚書令姚顯請出此論至來年九月十五日訖准此十四年末什仍未卒又准僧肇上秦主姚興涅槃無名論表云肇在什公門下十有餘載若什四年出經十一年卒始經八載未滿十年云何乃言十有餘載故知但卒弘始年中不可定其年月也 然什出經部卷衆說多少不同長房錄中其數彌廣今細參驗多是別生或有一本數名或是錄家錯上具件如左今悉刪之十誦律六十一卷 僧祐錄云是什譯出今以前五十八卷是什度語非什正翻後之三卷卑摩羅叉續出置之於後已備餘錄此不存之放光般若波羅蜜經二十卷 房云第二出見別錄今以放光梵本與大品同譯大品時興執舊經什出新本若言放光什譯舊經何者是耶故知大品爲新放光爲舊重載二本誤之甚也般若經論集二十卷 房云見吳錄今謂此集乃是廬山遠法師以大智度論文句繁積初學難尋乃刪煩翦亂令質文有體撰爲二十卷亦云大智論要略亦云釋論要抄此乃遠公撮略前論非什別翻也禪法要三卷 下注云先譯弘始元年重挍正睿製序旣云先譯重挍不合存其二名准僧睿經序 卽坐禪三昧經是也阿蘭若習禪法經二卷 房云見別錄或無經字與坐禪三昧同本異出今謂不然此卽坐禪三昧之別名也尋其文句首末大同是初出本非挍正者樂瓔珞莊嚴經一卷 房云見李廓錄令准經後記乃是曇摩耶舍所譯非什 翻也今移附彼錄實相論一卷 高僧傳云二卷什爲姚興撰出非梵本傳故闕之也往古性和佛國願行法典經 或作生和出文殊佛土嚴淨經佛謦咳徹十方經佛齊化出菩薩經魔業經 過去無邊光淨佛土經虛空藏菩薩問持經得幾功德經 亦云得幾福經過魔法界經 太白魔王堅信經佛弟子化魔子偈頌經開化魔經 魔王變身經佛謦咳下十經竝出大集觀世音經 出法華經陁羅尼法門六種動經彌勒菩薩本願待時成佛經佛變時會身經東方善華世界佛座震動經陁羅尼等四經竝出悲華經雀王經 佛昔爲鹿王經菩薩身爲鴿王經 雀王等三經竝出六度集無量樂佛土經 亦云國土出央崛經佛問阿須倫大海有減經 出中阿含佛迹見千輻輪相經 出雜阿含佛心摠持經 水牛王經兔王經 佛心等三經竝出生經獼猴與婢共戲致變經王后爲蜣蜋經 獼猴等二經竝出雜譬喩比丘應供法行經 祐注入疑經今亦在疑錄已上都有三十五部一百三十六卷十誦律五十八卷 弘始六年十月十七日於中寺出見二秦錄右一部五十八卷本在沙門弗若多羅秦言功德華賓國人少出家以戒節見稱通三藏而專精十誦律部爲外國師宗時人咸謂已階聖果弘始十年振錫入關秦主興待以上賓之禮羅什亦挹其戒範厚相崇敬先是經法雖傳律藏未闡聞多羅旣善斯部咸共思以弘始六年甲辰十月十七集義學沙門六百餘人於常安中寺延請多羅誦出十誦梵羅什譯爲秦文三分獲二羅遘疾奄然棄世衆以大業未而匠人殂往悲恨之深有踰常痛次有西域沙門曇摩流支秦云法樂棄家入道偏以律藏持名以弘始七年秋達自關中廬山釋慧遠聞支旣善毘尼希得究竟律部乃遣書通好曰佛教之興先行上國自分流以來四百餘年至於沙門德式所闕尤多西域道士弗若多羅是罽賓人諷十誦梵本有羅什法師通才博見爲之傳譯十誦之中文始過半多羅早喪中途而寢不得究竟大業慨恨良深傳聞仁者齎此經自隨甚欣所遇冥運之豈人事而已耶想弘道爲物感時而動叩之有人必情無所若能爲律學之徒畢此經本開示梵行洗其耳目使始涉之不失無上之津參懷勝業者日月彌朗此則惠深德厚人神同感矣幸願垂懷不乖往意支旣得遠書及姚興敦請乃與共譯十誦都畢硏詳考覈制審定而什猶恨文煩未善而什化不獲刪治流支住常安大寺慧觀欲請往揚都支曰土有人有法足以利世吾當更行無律教處於是遊化餘方知所之虛空藏菩薩經一卷 初出或無菩薩字與虛空孕經等同本是大集別分三藏後還外國於罽賓得此經附商人送致涼州見道慧宋齊錄及 僧祐錄長阿含經二十二卷 弘始十四年出至十五年訖涼州沙門佛念傳譯秦國沙門道含筆受見僧睿二秦錄及僧祐錄高僧傳等四分律六十卷 亦云曇無德律本譯四十五卷或云四十卷或云四十四卷今亦有七十卷者弘始十年於寺中出慧辯傳譯見晉世雜錄及祐錄僧傳等四分僧戒本一卷 或無僧字亦云曇無德戒本見晉世雜錄及僧祐錄右四部八十四卷其本竝在沙門佛陁耶舍秦言覺名或云覺稱 耶舍是名稱義高僧傳中翻爲覺明義稍乖也罽賓國人婆羅門種世事外道有一沙門從其家乞其父瞋怒令人歐之父遂手腳攣躄不能行止乃問於筮師對曰坐犯賢鬼神使然也卽請此沙門誠悔過數日便瘳因令耶舍出爲其弟子時年十三嘗從師遠行於曠野逢虎師欲走避舍曰此虎已飽必不侵人俄而虎去前行果見餘肉師密異之至年十五誦經日得五六萬言所住寺常於外分衛廢於誦習有一羅漢重其聰敏恒乞食供十九誦大小乘經數百萬言然性簡傲頗以知見自處謂少堪己師故不爲諸僧所重但美儀止善談笑見者忘其深恨及受戒莫爲臨壇所以向立之歲猶爲沙彌乃從其舅學五明諸世間法術多所通習二十有方受具戒恒以讀誦爲務不釋牒每端坐思義不覺虛中而過其專精如此後至沙勒國時太子達摩弗多秦言法子見其容貌端雅問所從來耶舍詶對淸太子悅之仍請宮內供養遇隆厚羅什後至從其受學相尊敬什隨母東歸耶舍留止頃之王薨太子卽位苻堅遣呂光攻龜茲龜茲王急求救於沙勒王自率兵救之使耶舍留輔太子委以後任救軍未至龜茲已敗王歸具說羅什爲光所執乃歎曰我與羅什相遇雖未盡懷抱其忽羈虜相見何停十餘年王薨因至龜茲化甚盛什在姑臧遣信要之裹糧欲去國人請留復停歲餘後語弟子云吾欲尋羅什可密裝夜發勿使人知弟子曰恐明旦追至不免復還耳耶舍乃取淸水一鉢以藥投中呪數十言與弟子洗足卽便夜發比至旦行數百里問弟子曰何所覺耶答曰唯聞疾風之響眼中淚出耶舍又與呪水洗足住息明旦國人追之已差數百里不及達姑臧而什已入常安什聞其至姑臧勸興迎之興未納頃之命什譯出經藏什曰夫弘宣法宜令文義圓通貧道雖誦其未善其理唯佛陁耶舍深達經致今在姑臧願下詔徵之言三詳然後著筆使微言不墜取信千載也興從之卽遣使招迎厚加贈遺悉不受重信敦方至常安興自出候問別立新省於逍遙園四事供養竝不至時分衛一食而已于時什出十住經一月餘日疑難猶尚未操筆耶舍旣至共相徵辭理方定道俗三千餘人歎其賞要舍爲人髭赤善解毘婆沙故時人號曰赤髭毘婆沙旣爲羅什之師亦稱大毘婆沙四輩供養臥具滿三間屋不以關心興爲貨之於城南造耶舍先誦曇無德律司隸挍尉姚爽或云姚奭請令出之興疑其遺乃試耶舍令誦羌藉藥方各四十餘紙三日乃執文覆之不誤一字衆服其强記卽以弘始十年戊申譯四分律幷長阿含等至十五年癸丑方訖涼州沙門竺佛念譯爲秦言道含筆譯畢解坐興嚫耶舍布絹萬悉皆不受佛念道含布絹各千疋名德沙門五百人皆重嚫施耶舍後還罽賓不知所終 四分序云壬辰之年有晉國沙門支法領西越流沙遠期天竺路經于塡會遇曇無德部體大乘三藏沙門佛陁邪舍才艶博聞明練經律三藏方等皆諷誦通利卽於其國廣集諸經於精舍還以歲在戊申始達秦國秦主姚欣然卽以其年請出律藏時集持律沙門三百餘人於長安中寺出卽以領弟子慧辯爲譯其壬辰年卽秦建初七年也戊申歲卽弘始十年也又有說云耶舍與佛念等共勘法領所將梵本然後翻出衆說少殊未詳孰正又准僧肇長阿含序及高僧傳竝云四分弘始十二年出者此或據部終時說也差摩經一卷 東晉隆安年達廣州在白沙寺爲淸信女張普明譯此應入晉錄隨人附秦見高僧傳及長房錄樂瓔珞莊嚴方便品經一卷 一名轉女身菩薩問答經第三出與法護順㩲方便經等同本李廓錄云羅什譯准經後記云耶舍出故移編此舍利弗阿毘曇論二十二卷 或無論字或二十卷或三十卷共曇摩崛多於石羊寺出釋道摽製序見僧祐寶唱二錄及高僧傳右三部二十四卷 初一部 一卷闕本後二部二十三卷見在沙門曇摩耶舍秦言法稱 高僧傳翻爲法明義乖也罽賓國人少而好學年十四爲弗若多羅所知長而氣幹高爽雅有神慧該覽經律明悟出群陶思八禪遊心七覺時人方之浮頭婆馱孤行山澤不避虎兕獨處思念動移宵日嘗於樹下每自剋責年將三十尚未得果何其懈哉於是累日不寢不食專精苦到以悔先罪乃夢見博叉天王語之曰沙門當觀方弘化曠濟爲懷何守小節獨善而已道假衆緣復須時熟非分强求死而無證覺自思惟欲遊方授道旣而踰歷諸國冒涉艱以晉隆安中初達廣州住白沙寺耶舍善誦毘婆沙律人咸號爲大毘婆沙有淸信女張普明諮受佛法耶舍爲說佛生緣起幷爲譯出差摩經一卷義熙中來入常安時姚興僭號甚宗佛法耶舍旣至深加禮異會有天竺沙門曇摩掘多秦言法藏來入關中同氣相求宛然若舊因共出舍利弗阿毘曇以秦弘始九年丁未書出梵文停至十六年甲寅經師漸閑秦語令自宣譯至十七年乙卯方訖凡二十二卷秦太子泓親管理味沙門道標爲之作序又出樂瓔珞經一卷耶舍後南遊江陵止于辛大弘禪法其有味靖之賓榛而至者三百餘人凡士庶造雖先無信心見皆敬悅自說有一師一弟子修業竝得羅漢傳者失其名又嘗於外門閉坐禪忽有五沙門來入其室又見沙門飛來樹端者往往一常交接神明而俯同矇俗雖道迹未彰時人咸謂已階聖果至宋元嘉中辭還西域而不知所終秦乞伏氏都菀川 亦云西秦從乞伏國仁謚宣烈王 建義元年乙酉至乞伏慕末無謚 永弘四年辛未凡經四主四十七年沙門一人譯經及三秦代新舊失譯經律論等摠五十六部一百一十卷 於中三十二部七十九卷見在二十四部三十一卷闕本乞伏秦 沙門釋聖堅 一十五部 二十四卷經三秦代新舊諸失譯經 四十一部八十六卷七部七卷舊集 三十四部七十九卷新附羅摩伽經三卷 是華嚴入法界品少分異譯見內典錄太子須大拏經一卷 出六度集第二卷異譯於江陵辛寺出庾爽筆受或云須達拏見始興錄及寶唱錄應入晉世隨人附秦睒子經一卷 一名孝子睒經一名菩薩睒經一名佛說睒經一名睒本經一名孝子隱經凡六名第四出出六度集第二卷異譯見始興錄及法上錄摩訶剎頭經一卷 亦名灌佛形像經亦直云灌佛經第二出與灌洗佛形像經同本見始興錄無崖際持法門經一卷 一名無際經與尊勝菩薩所問經等同本初出見始興錄及法上錄演道俗業經一卷 第二出與支謙譯者同本見法上錄除恐災患經一卷 第二出與帛延譯者同本見始興寶唱法上三錄賢首經一卷 一名賢首夫人經見始興錄阿難分別經一卷 亦名阿難問事佛吉凶經第三出見始興錄及法上錄婦人遇辜經一卷 一名婦遇對經見始興法上二錄上見存已下闕方等主虛空藏經八卷 亦云虛空藏所問經一名勸發菩薩莊嚴菩提經或五卷是大集虛空藏品異譯見晉世雜錄及法上錄云與羅摩伽經同本非也菩薩所生地經一卷 一名摩竭所問經 第二出見趙錄未知前後趙逐人附西秦見始興錄孛經一卷 第三出見法上錄僮迦葉解難經一卷 亦云童迦葉經與鳩摩迦葉經同本祐云出長阿含庾爽筆受見始興王宗寶唱支敏度等四錄七女本經一卷 亦名女本心明經亦名七女經第三出見支敏度都錄右一十五部二十四卷 婦人遇辜上十部一十二卷見在方等主下五部一十二卷闕本沙門釋聖堅或云法堅亦謂堅未詳孰是故備列之器量弘利物爲心以乞伏秦太初年間於河南國爲乾歸謚武元王譯羅摩伽等經一十五部尋其聖堅遊化隨處出經旣適無停所知附見何代世錄爲正今依法上摠注入乞伏秦世錄云沙彌羅經一卷 第二出與五母子經同本薩和薩王經一卷阿多三昧經一卷 或作阿陁陁賢王經一卷颰陁悔過經一卷方等決經一卷比丘二事經一卷 祐錄云三事上七部僧祐錄云安公關 中異經右七部七卷初沙彌羅經有本餘者竝闕長房錄云竝是沙門僧祐出藏集錄釋道安所記關中異經今還附入三秦世錄摠爲失譯時代處云房錄復有梵本經四腳下注云似是長安中出 後漢失譯錄中已此中復載旣是重上刪之不存也已下新附此錄天王太子辟羅經一卷 或無天王字亦云太子譬羅經菩薩本行經一卷大珍寶積惟日經一卷墮迦羅問菩薩經一卷阿難爲蠱道呪經一卷 舊錄云阿難爲蠱道所呪經今疑是藏中摩鄧女經王舍城靈鷲山經一卷 舊錄云王舍城靈鷲山要眞經思道經一卷 佛在竹園經一卷法爲人經一卷 道意經一卷阿夷比丘經一卷 八德經一卷今疑是海八德經善德經一卷摩訶揵陁惟衛羅盡信比丘等度經一卷 舊錄云盡信比丘經右一十四部一十四卷 初太子辟羅經有本餘者竝闕僧祐錄云安公關中異經長房等錄竝闕不載祐載安公關中異經摠二十四部二十四卷中七部如房錄中列今更出一十四經通有二十一部餘之三部長房等錄皆摽譯主故此闕之大寶積經一卷 今編入寶積當弟四十三會改名普明菩薩會第三出與摩訶衍寶嚴佛遺日摩尼寶二經同本異譯度諸佛境界智光嚴經一卷 初出與佛華嚴入如來德智不思議境界經等同本舊云與如來莊嚴智慧光明入一切佛境界經等同本者全乖也大悲分陁利經八卷 亦云大乘悲分陁利經第二出與曇無讖悲華經等同本大金色孔雀王呪經一卷 第五出佛說大金色孔雀王呪經一卷 第六出二經同本大方廣如來秘密藏經二卷 大周錄云與大方等如來藏經同本者非也金剛三昧本性淸淨不壞不滅經一卷亦名金剛淸淨經長房等錄云吳支謙譯後漢失譯中復載竝非也今尋文句似秦時譯故移編此師子月佛本生經一卷 長房等錄云西晉竺法護譯今尋文句非是護公所出似秦代譯故移編此十吉祥經一卷一切智光明仙人慈心因緣不食肉經一卷淨業障經一卷別譯雜阿含經二十卷出家功德經一卷 非是賢愚抄出者毘尼母經八卷 亦云毘尼母論薩婆多毘尼毘婆沙九卷三彌底部論三卷 或無部字或云四卷辟支佛因緣論二卷十八部論一卷 初出與部異執論等同本房等竝云眞諦譯者非也佛入涅槃密迹金剛力士哀戀經一卷無明羅剎集一卷 亦云無明羅剎經或二卷右二十部六十五卷竝是見入藏經似是秦時譯出數本經中竝有秦言之字諸失譯錄竝未曾載今附此秦錄庶免遺漏焉通前舊失譯經七部七卷及新附安公關中異經等摠四十一部合八十六卷竝爲三秦失譯云前涼張氏都姑臧 新上餘錄無年甄鸞錄多從晉年號從張軌謚爲武王永寧元年辛酉至天錫秦封驃騎大將軍涼州牧咸安六年景子凡經八主七十六年國優婆塞一人譯經四部合六於中一部一卷見在三部五卷闕本前涼優婆塞支施崙四部六卷經須賴經一卷 與曹魏白延吳支謙宋功德賢所出須賴經同本見經後記第三出咸安三年出如幻三昧經二卷 第四出與安高法護如幻三昧及寶積善住意會等同本見首楞嚴經後記咸安三年出上金光首經一卷 第二出與晉法護大淨法門經隋耶舍大莊嚴法門經同本咸安三年出見首楞嚴經後記首楞嚴經二卷 第八出與漢支讖吳支謙魏白延晉法護等所出首楞嚴同本咸安三年出見經後記右四部六卷 須賴經一部一卷見在如幻等五部三卷闕本優婆塞支施崙月支人也博綜衆經特善方等意存開化於未聞奉經來遊達於涼土公見而重之請令翻譯以咸安三年癸酉從晉年號也 於涼州州內正聽堂後湛露軒下出須賴等經四部龜茲王世子帛延傳語侍西海趙潚會水令馬亦內侍來恭政三人筆受沙門釋慧常釋進行同在會證涼州自屬辭不加文飾也出須賴經後記及首楞嚴經後記前涼之代應更出經後進遇之幸續編附北涼沮渠氏初都張掖後徙姑臧蒙遜謚武宣王永安元年辛丑至茂魏封河西王承和七年己卯凡經二主三十九年緇素九人所出論等幷新舊集失譯諸經摠八十二部合三百一十一卷於中二十五部二百九卷見在五十七部一百二卷闕本北涼沙門釋道龔 二部 一十二卷經沙門釋法衆 一部 四卷經沙門僧伽陁 一部 二卷經沙門曇無讖 一十九部 一百三十一卷經律集安陽侯沮渠京聲 一部 二卷集沙門浮陁跋摩 一部 六十卷論沙門釋智猛 一部 二十卷經沙門釋道泰 二部 四卷論沙門釋法盛 一部 一卷經新舊諸失譯經 五十二部七十五卷五部一十八卷舊集四十八部 五十七卷 新附寶梁經二卷 今編入寶積當第四十四會見竺道祖河西錄及僧祐錄悲華經十卷 第三出與法護閑居經及大悲分陀利曇無讖悲華經等同本房云見古錄似是先譯龔更刪改今疑卽無讖出者是右二部一十二卷 前寶梁經一部二卷見存後悲華經一部十卷闕本沙門釋道龔虛心廣運弘利爲道以北涼河西王蒙遜僭號永安年於張掖爲蒙遜譯寶梁等經二部大方等陁羅尼經四卷 或無大字一名方等檀持陁羅尼經或直云擅持陁羅尼經見竺道祖晉世雜錄及僧祐錄右一部四卷其本見在沙門釋法衆高昌郡人亦以永安年中於張掖爲河西王蒙遜譯大方等陁羅尼經一部寶唱錄云在高昌郡譯未詳孰是慧上菩薩問大善㩲經二卷 一名大善㩲經一名慧上菩薩經一名大乘方便經凡四名本竝同第五出與漢佛調晉法護所出大善㩲經及寶積大乘方便會等同本右一部二卷本闕沙門僧伽陁涼言饒善西域人意存兼濟化誘居懷亦以永安年中於張掖爲蒙遜譯大善㩲經一部見始興錄及法上錄大般涅槃經四十卷 或三十六卷第五譯玄始三年出至十年十月二十三日訖梵本具足有三萬五千偈今所譯者止萬餘偈三分始一耳見竺道祖涼錄及僧祐錄大方等大集經三十卷 或直云大集經第三出與漢世支讖姚秦羅什出者同本或二十九或三十一或三十二或四十卷良由初出卽寫分卷不同見竺道祖涼錄及僧祐錄大方廣三戒經三卷 初出與寶積三律儀會同本見法上錄悲華經十卷 第四出與大悲分陁利經等同本見竺道祖河西錄及僧祐錄祐云別錄或云龔上出今疑道龔與讖同是一經二處竝載恐未然也金光明經四卷 初出一十八品見竺道祖河西錄及僧祐錄與新譯金光明最勝王經等同本今入八卷合經中此四卷者在刪繁錄大方等大雲經六卷 一名大方等無相大雲經一名大雲無相經一名大雲密藏經或云方等大雲經或四卷或五卷於內菀寺譯第二出見僧睿李廓僧祐三錄腹中女聽經一卷 一名不莊挍女經與無垢賢女經轉女身經等同本第三出見長房錄菩薩地持經十卷 或無經字亦云論亦名菩薩戒經又名菩薩地經或八卷出瑜伽論本地分中菩薩地見竺道祖河西錄及僧祐錄優婆塞戒經七卷 或無經字是在家菩薩戒或五卷或六卷或十卷玄始十五年丙寅四月二十三日出至七月二十三日訖沙門道飬筆受見經後記及僧祐錄菩薩戒本一卷 出地持戒品中第二出與大唐奘法師所出戒本等同本別錄云燉煌出見僧祐錄文陁竭王經一卷 出中阿含第十一卷異譯見長房錄佛所行讚經傳五卷 或云經無傳字或云傳無經字馬鳴菩薩造亦云佛本行經見長房錄上見在已下闕勝鬘經一卷 亦云勝鬘師子吼一乘大方便經初出見長房錄與宋功德賢所出勝鬘經及寶積勝鬘夫人會同本羅摩伽經一卷 第四出與曹魏安法賢等所出同本但廣略異是華嚴入法界品少分見長房錄楞伽經四卷 初出與宋功德賢元魏菩提留支唐實叉難陁等所出同本見長房錄須眞天子經一卷 第二出與西晉法護出者同本房云見吳錄又云羅什出似再譯海龍王經四卷 或加新字第二出與竺法護出者同本玄始七年出見竺道祖河西錄及僧祐錄功德寶光菩薩經一卷 見長房錄菩薩戒壇文一卷 亦云優婆塞戒壇文祐云菩薩戒優婆塞戒壇文見僧祐寶唱二錄右一十九部一百三十一卷所行讚上一十二部一百一十八卷見在勝鬘經下七部一十三卷闕本沙門曇無讖或云曇摩懺云曇謨讖蓋取梵音不同故也涼云法豐中印度人婆羅門種讖六歲父亡母以傭織養讖沙門達摩耶舍此言法稱道俗宗敬豐於利養其母羡之故以讖爲弟十歲與同學數人讀呪聰敏出群讀經日得萬餘言初學小兼覽五明諸論講說精辯能詶抗後遇白頭禪師共讖論議習業旣異交諍十旬讖雖攻難鋒起而禪師終不肯屈讖服其精理乃謂禪師曰頗有經典得見不禪師卽授以樹皮涅槃經本讖尋讀驚悟方自慚恨爲坎井之識久迷大方於是集衆悔過遂專業大乘至年二十所誦大小乘經二百餘萬言從兄善能調象騎殺王所乘白耳大象王怒誅之令曰敢有視夷三族親屬莫敢往讖哭而葬之王怒欲誅讖讖曰王以法故殺之我以親而葬之竝不違大義何爲見怒傍人爲之寒心其神色自若王奇其志氣遂留供養讖明解呪術所向皆驗西域號爲大神呪師後隨王入山王渴乏須水不能得讖乃密呪石出水因讚曰大王惠澤所感遂使枯石生泉鄰國聞者皆歎王德于時雨澤甚調百姓稱詠王悅其道術深佳優寵頃之意稍歇待之漸簿讖怒曰我當以罌水詣池呪龍入罌令天下大旱王必請呪然後放龍降雨則見待何如遂持罌造龍有密告之王怒捕讖讖懼誅乃齎大涅槃經本前分一夾幷菩薩戒經地持經也菩薩戒本奔龜茲龜茲國多小乘學不信涅槃遂至姑臧止於傳舍慮失經本枕之而寢有人牽之在地讖驚謂是盜者如此三夕聞空中語曰此如來解脫之藏何以枕之讖乃慚悟別置高處夜有盜之者擧不能乃數過擧之遂不能動明旦讖持經去不以爲重盜者見之謂是聖人悉來拜謝河西王沮渠蒙遜聞讖名呼與相見接待甚厚蒙遜素奉大法志在弘通請令出其經本讖以未參土言又無傳譯恐言舛於理不許卽於是學語三年方譯初分十是時沙門慧嵩道朗獨步河西値其宣出法藏深相推重易梵文嵩公筆受道俗數百人疑難縱撗讖臨機釋滯未嘗留朗等更請廣出餘經謂大大雲悲華地持等兼涅槃經摠十九部讖以涅槃經本品數未足還國尋求値其母亡遂留歲餘後於于塡更得經本復還姑臧續譯成四帙焉讖以玄始三年甲寅創首翻譯至十五年丙寅都訖房云玄始十年訖者此乃涅槃竟時非餘經也准優婆塞戒經後記云丙寅年出此卽十五年中猶出經也讖至義和三年癸酉三月方卒中間六載應更出經錄中不言故未詳也讖嘗告遜云有鬼入聚落必多災疫遜不信躬見爲驗讖卽以術加遜遜見而駭怖讖曰宜潔誠齋戒神呪驅之乃讀呪三日謂遜曰鬼北去旣而北境之外疫死萬數益敬憚禮遇彌崇會魏太武皇帝聞其道術遣使迎請且告遜若不遣讖便卽加兵遜自揆國弱難以拒命兼慮讖多術爲魏謀己進退惶惑乃密計除初讖譯出涅槃卷數已定外國沙門曇無發云此經品未盡讖嘗慨然誓必重尋蒙遜因其行志乃僞資發遣厚贈寶貨發數日乃流涕告衆曰讖業對將至衆聖不能救矣以本有心義不容停行四十里遜密遣刺客害之時年四十九衆咸慟惜焉旣而遜左右常白日見鬼以劍擊遜至四月寢疾而終遜以義和三年三月害讖卽其年四月遇疾而終信哉報應不虛如影之隨形也房云讖在處世承和四年卒者非也其義和三年卽魏延和二年歲在癸酉也初讖在姑臧有張掖沙門道進欲從讖受菩薩戒讖云且悔過乃竭誠七日七夜至第八日詣讖求受讖忽大怒進更思惟但是我業障未銷耳乃戮力三且禪且懺卽於定中見釋迦文佛與諸大士授已戒法其夕同止十餘人皆感夢如進所見進欲詣讖說之未至十步讖驚起唱言善哉善哉已感戒矣當更爲汝作證次第於佛像前爲說戒相沙門道朗振譽關西當進感戒之夕朗亦通夢自卑戒臘求爲法弟於是從進受者千有餘人傳授此法迄至于今皆讖之遺則有別記云薩地持經應是伊波勒菩薩傳來此土後果是讖所傳譯疑讖或非凡也菩薩戒經八卷 祐房等錄竝云讖譯今以是地持之別名故不雙載也虛空藏經五卷 祐房等錄亦云讖譯今以卽是大集虛空藏品析出別行今載別生錄中此不復存也優婆塞戒本一卷 寶唱錄云讖譯復云出優婆塞戒經今亦載別生錄中不別存也善信女經二卷無爲道經二卷居士請僧福田經一卷決定罪福經一卷 上之四經長房等錄皆云讖譯復云世注爲疑今竝依舊附疑此中不載禪法要解二卷 第二出與羅什出者同本見長房錄右一部二卷本闕安陽侯沮渠京聲卽河西王蒙遜從弟爲人强志疏通敏朗有智鑑涉獵書記善於談論稟五戒銳意內典所讀衆經能諷誦常以爲務學多聞大士之盛業也少時嘗度流沙到于塡國於瞿摩帝大寺遇天竺法師佛陁斯那涼言覺將安陽從之諮問道義斯那本學大乘天才秀誦半億偈明了禪法故西方諸國號爲人中師子安陽從受禪法諸秘要術口誦梵本東歸於涼以茂虔承和年中譯禪法要解一部阿毘曇毘婆沙論六十卷或加八揵度字初出與唐譯大毘婆沙論同本或分成八十四卷或一百九卷佛後六百餘年五百應眞造見僧祐寶唱二錄右一部六十卷其本見在沙門浮陁跋摩或云佛陁跋摩涼言覺鎧西域人也幼而履操明聰悟出群習學三藏偏善毘婆沙常誦持此論以爲心要和年中達于姑臧先有沙門道志用强果少遊蔥右遍歷諸得毘婆沙梵本十有萬偈至姑臧側席虛襟企待明匠跋摩遊心此論請爲翻譯遜已薨子茂虔襲位以虔承和五年丁丑四月中旬於涼州城內閑豫宮寺請跋摩譯焉泰卽筆受沙門慧嵩道朗與義學僧三百餘人考正文義至七年己卯七月方訖凡一百卷沙門道挻爲之製序有頃魏太武帝西伐姑臧涼土崩亂經書什物被焚蕩遂失四十卷今唯有六十存焉跋摩避亂西反莫知所序云乙丑歲出卽蒙遜玄始十四年也丁卯歲訖卽玄始十六年也與錄不同未詳何以般泥洹經二十卷 見道慧宋齊錄反僧祐錄第六譯與無讖大般涅槃經等同本右一部二十卷本闕沙門釋智猛京兆新豐人稟性端明厲行淸白少襲法服修業專至諷誦之聲以夜續晝每見外國道人說釋迦遺迹又聞方等衆經布在西域常慨然有感馳心遐外以爲萬里咫尺千載可追也遂以姚秦弘始六年甲辰之歲招結同志十有五人迹長安渡河跨谷三十六所涼州城旣而西出陽關入于流二千餘里地無水草路絕行冬則嚴厲夏則瘴炎人死聚以摽行路驝駝負糧理極辛遂歷鄯鄯龜茲于塡諸國觀風俗從于塡西南行二千里始登蔥嶺而同侶九人退還與餘伴進行千七百餘里至波淪國同旅竺道嵩又復無常欲闍毘忽失尸所在猛悲歎驚於是自力而前與餘四人度雪山冰崖皓然百千餘仞絙爲橋乘虛而過窺不見底不見天寒氣慘酷影戰魂慄南行千里至罽賓國再渡辛頭雪山壁立轉甚於前下多瘴惡鬼斷路行者多死猛誠心冥徹履險能濟旣至罽賓城有五百羅漢住此國中而常往阿耨達池有大德羅漢見猛至止歡喜讚歎猛諮問方土說四天子事具在猛傳猛先於奇沙國見佛文石唾壺又於此見佛鉢光色紫紺四際盡然猛香花供養頂戴發願鉢若有能輕能重旣而轉重力遂不及下案時復不覺重其道心所應如此復西南行千三百里至迦維羅衛國見佛髮佛牙及肉髻骨佛影佛迹炳然具存睹泥洹堅固之林降魔菩提之猛喜心內充設供一日兼以寶蓋大衣覆降魔像其所遊踐究觀靈變天梯龍池之事不可勝數後至華氏城是阿育王舊有大智婆羅門名羅閱宗族弘法王所欽重造純銀塔三丈沙門法顯先於其家已得六卷泥洹及見猛至問云秦地有大乘學不答曰悉大乘學閱驚歎曰希有希有將非菩薩往化耶猛就其家得泥洹梵本一部又尋得摩訶僧祇律梵本一部及餘經梵本誓願流通是便反以甲子歲發天竺同行四僧於路無常唯猛與曇纂俱還涼州以虔承和年中譯出泥成二十卷猛以宋元嘉末卒歷尋遊方沙門記列道路或不同佛鉢頂骨處亦乖爽知遊往天竺非止一路頂鉢靈時屆異土故傳述見聞難以例也大丈夫論二卷 提波羅菩薩造見翻經圖入大乘論二卷 堅意菩薩造見唐舊錄亦見內典錄及翻經圖右二部四卷其本見在沙門釋道泰才敏自天沖氣疏博聞奇趣遠參異言往以漢土方等旣備幽宗粗暢其所未唯三藏九部故杖策冒嶮至蔥西綜覽梵文義承高旨獲婆沙梵本十萬餘偈及諸經東歸於涼遂遇浮陁跋摩翻毘婆沙論泰後自譯大丈夫論等二部 又長房內典二錄云於其涼代復有沙門曇覺於高昌國譯賢愚經一部卽當宋元嘉二十二年也今謂不然元嘉十六年己卯涼國已絕如何二十二年乙酉仍有譯經故知二錄誤也今依靖邁經圖編在元魏之代魏宋雖竝宋居建業魏都恒安以地而論合屬魏錄菩薩投身餓虎起塔因緣經一卷僧祐錄云以身施餓虎經見經後記右一部一卷其本見在沙門釋法盛高昌人也亦於涼譯投身餓虎經一卷故前高僧曇無讖傳末云于時有高昌沙門法盛亦經往外國有傳四其投身餓虎經後記云爾時國王聞佛說已卽於是處起立大塔名爲菩薩投身餓虎塔見在塔東面山下有僧房講堂精舍常有五千衆僧四事供養法盛爾時見諸國中有人癩病及癲狂聾盲手腳躄跛及種種疾病悉來就此塔燒香燃燈泥塗地修治掃灑幷叩頭懺悔百病皆愈前來差者便去後來輒爾常有百餘人不問貴賤皆終無絕時今詳僧傳之文及閱經記之說法盛遊於西域事不虛復云親睹靈龕故應非若非盛之自譯何得著彼經終旣能自往西方豈有不傳經考覈終始事乃分明今爲盛編載斯錄不退轉法輪經四卷 一名不退轉經第二出與竺法護阿惟越致遮經等同本金剛三昧經二卷 或一卷大忍辱經十卷金輪王經一卷賢劫五百佛名一卷右五部一十八卷 前二部六卷見在後三部一十二卷闕本長房等錄竝云是沙門僧祐新集釋道安涼土異經今還附入世目錄爲失譯源庶知時代顯譯有無卷部多少出之處所已下新附此錄優婆夷淨行法門經二卷 或無經字亦直云淨行經長者法志妻經一卷大愛道比丘尼經二卷 亦云大愛道受戒經舊錄云大愛道經三慧經一卷 菩薩等行經一卷此已下闕四無畏經一卷㩲變經一卷 舊錄云文殊師利權變三昧經或直云㩲變三昧經十漚和經一卷七言禪利經一卷 舊錄云漚和七言禪利經菩薩十漚和經一卷 今疑與前十漚和同甁沙王經一卷 有無經一卷五百偈經一卷須耶越國貧人經一卷 舊錄云須耶越國貧人賃剔頭經浮木經一卷 坏喩經一卷妖怪經一卷阿般計泥洹經一卷 一本作陶射計泥洹經四非常經一卷 五失蓋經一卷要眞經一卷 本無經一卷勸德經一卷 十五德經一卷父母因緣經一卷 今疑與父子因緣經同慧行經一卷 未生王經一卷今疑是未生怨經內外無爲經一卷 道淨經一卷七事本末經一卷 舊錄云七事本行經百寶三昧經一卷 三乘經一卷耆域術經一卷 舊錄云耆域四術經五蓋離疑經一卷 今疑是五蓋疑結失行經太子智止經一卷 道德章經一卷苦相經一卷須佛得度經一卷 由經一卷分然洹國迦羅越經一卷五陰事經一卷 義決法事經一卷十思惟經一卷 分別六情經一卷三失蓋經一卷 佛寶三昧經一卷法志女經一卷右四十七部四十九卷 唯初四部六卷有本餘者竝闕僧祐錄云安公涼土異經長房等錄闕而不載今還附入涼錄以爲失譯祐載安公涼土異經摠五十九部於中五部房錄已今更出四十七部通前五十二部餘有七部一十四卷謹按長房等錄皆有所憑卽非失是故此錄刪之不存今具條列之如左須菩提品經七卷 般若鈔經異名前秦曇摩蜱譯文殊師利示現寶藏經二卷 西晉竺法護譯七知經一卷 或作七智吳支謙譯難龍王經一卷 或云難龍經亦云龍王兄弟經異名吳支謙譯阿陁三昧經一卷 卽阿多三昧經異名安公關中異經已載大五濁經一卷 舊錄云大五濁世經群錄云僞今亦編之首至問十四章經一卷 舊錄云首至問佛十四意經或云首至問十四事經亦云後漢支曜譯今爲抄經載別生錄大方廣十輪經八卷 初出與唐譯地藏十輪經同本是大集第十三分似涼代譯群錄不載今附此涼末庶免遺漏耳通新及舊摠五十三部合七十五卷竝爲北涼失源云開元釋教錄卷第四 摠錄之四乙巳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본전(本傳) 이외의 전(傳)을 말한다. 즉, 『공양전(公羊傳)』ㆍ『곡량전(穀梁傳)』을 말한다.
  2. 2)한초(漢初)의 사서(辭書)이다.
  3. 3)13경(經)의 하나이며, 옛 중국의 사전(辭典)으로 19권으로 되어 있다.
  4. 4)경서 따위 고문의 자구(字句)를 해석하는 일이다.
  5. 5)성문(聲聞) 4과의 하나이며, 예류과(預流果)를 말하는데, 욕계ㆍ색계ㆍ무색계의 견혹(見惑)을 끊고 처음으로 성인의 무리에 참여하는 자리를 뜻한다.
  6. 6)옛날, 대나무에 글자를 쓰고 두 조각으로 내어 양자가 하나씩을 가지고, 후일 그것을 맞추어 봄으로써 증거로 삼던 것이다.
  7. 7)가지가 다른 나뭇가지끼리 맞닿아서 하나로 된 것을 말한다.
  8. 8)어떤 일에 대한 깊은 맛. 또는, 그 일에 깃들어 있는 오묘한 뜻을 말한다.
  9. 9)봉황의 한 가지인 영조(靈鳥)로 닭 비슷한데, 털은 붉은 바탕에 오채(五彩)가 섞였으며, 소리는 오음(五音)에 맞는다고 하였다.
  10. 10)석가(釋迦)가 입멸(入滅)한 후 5백 년간의 불교를 정법(正法)이라 하고, 그 후 천 년간의 불교를 상법(像法)이라 함. 부처가 설교한 법은 있으나 사람들의 신앙이 형식화하여 불상(佛像)이나 사탑(寺塔) 등의 건축물을 주로 신앙의 대상으로 하는 시대를 말한다.
  11. 11)불교의 용어로, 모든 법의 모양이나 상태를 뜻한다.
  12. 12)성자(聖者) 되는 수행을 쌓아서 얻은 결과로서의 깨달음, 곧 열반을 뜻한다.
  13. 13)종장(宗匠)이라고도 한다.
  14. 14)스님으로서 계법(戒法)을 전수받는 식단(式壇)이나 戒場(계장)을 뜻한다.
  15. 15)고대 인도의 바라문이 연구한 다섯 가지 명(明). 문학의 성명(聲明), 기술의 공교명(工巧明), 의술(醫術)의 의방명(醫方明), 논리학의 인명(因明), 철학의 내명(內明)을 말한다.
  16. 16) 설법(說法)하여 중생을 교화(敎化)함을 말한다.
  17. 17)『고려대장경』에는 “누가 정확한지 자세하지 않다[未詳孰正]”고 되어 있으나, 『대정신수대장경』에는 어느 왕 때인지 자세하지 않다[未詳孰王]고 되어 있다.
  18. 18)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각각 사선(四禪)을 말한다.
  19. 19)열반에 이르기 위하여 닦는 37가지 도행(道行) 가운데 제6. 칠보리분(七菩提分)ㆍ칠각지(七覺支)ㆍ칠각의(七覺意)이라고도 한다. 불도를 수행하는데, 지혜로써 참되고 거짓되고 선하고 악한 것을 살펴서 골라내고 알아차리는데, 택법각분(擇法覺分)ㆍ정진각분(精進覺分)ㆍ희각분(喜覺分)ㆍ제각분(除覺分)ㆍ사각분(捨覺分)ㆍ정각분(定覺分)ㆍ염각분(念覺分) 7종이 있다
  20. 20)불타발타라의 다른 이름으로, 중국말로 각현(覺賢)이라 부른다.
  21. 21)범어로는 비류박차(毗留博叉), 또는 운비류파차(雲毗流波叉) 하고, 중국말로는 광목(廣目)이라하는데, 눈이 다른 사람보다 광대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수미산 서쪽 백은사(白銀山)에 거주하는 천왕이다.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 중의 하나이다.
  22. 22)같은 기(氣)를 가진 자는 서로 찾아서 모인다는 뜻이다.
  23. 23)성자(聖者) 되는 수행을 쌓아서 얻은 결과로서의 깨달음, 곧 열반을 뜻한다.
  24. 24)이익으로써 몸을 보양(保養)하다는 뜻이다.
  25. 25)부사의한 힘을 가진 스승이라는 뜻이다.
  26. 26)계법의 조규(條規)에 따라 실지로 행할 때에 그 행하는 모양의 여러 가지 차별이 있는 것을 말한다.
  27. 27)염부주(閻浮洲)의 4대하인 긍가ㆍ신도ㆍ박추ㆍ사다의 근원이며, 설산의 북, 향취산의 남쪽에 있다.
  28. 28)수미산의 사방에 있는 4개의 대주(大洲)인데, 남을 섬부주(贍部洲), 동을 승신주(勝身洲), 서를 우화주(牛貨洲), 북을 구로주(瞿盧洲) 등을 말한다.
  29. 29)공양하는 네 가지 물건인데, (1) 의복ㆍ음식ㆍ와구(臥具)ㆍ탕약(湯藥). (2) 의복ㆍ음식ㆍ산화(散華)ㆍ소향(燒香). (3) 방사(房舍)ㆍ음식ㆍ의복ㆍ산화소향 등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