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大唐大慈恩寺三藏法師傳序

ABC_IT_K1071_T_001
032_0647_a_01L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서(大唐大慈恩師三藏法師傳序)
032_0647_a_01L大唐大慈恩寺三藏法師傳序


수공(垂拱) 4년 앙상(仰上) 사문 석언종(釋彦宗) 한역
김영률 번역
032_0647_a_02L垂拱四年三月十五日仰上沙門釋彦悰述



생각해 보면 우리 석가모니께서 인토(忍土)1)에 태어나시어 처음으로 8정도(正道)2)의 법을 선양하시고 삼보(三寶)의 문호를 열어 삿된 가르침들을 몰아내심으로 말미암아 불교(佛敎)가 생겨났다.
032_0647_a_03L恭惟釋迦氏之臨忍土也始演八正啓三寶以黜群邪之典由是佛教行
방등(方等)3)의 1승(乘)4)과 원종(圓宗)5)의 10지(地)6)를 큰 법[大法]이라 하는 것은 참된 말씀[眞筌]7)이기 때문이고, 화성(化城)8)에서 때 묻은 옷을 입고 사슴 떼를 구제하고 양을 모는 것을 작은 학문[小學]이라 하는 것은 방편의 진리[權旨]이기 때문이다. 선(禪)과 계(戒)와 주술(呪術)에 이르기까지 그 가닥은 만 갈래이지만 혹(惑)을 멸하고 중생을 이롭게 하려는 이치는 한 가지이다.
032_0647_a_06L方等一乘圓宗十地謂之大法眞筌也化城垢服濟鹿馳羊謂之小言權旨也至於禪戒呪術厥趣萬而滅惑利生其歸一揆
이런 까닭에 역대의 성현들이 보배처럼 우러러 모셨던 것이다. 8회의 경[八會之經]9)이 근본이 된다고 한 것은 그 교리가 근본이 되기 때문이고, 3전의 법[三轉之法]10)이 끝이 된다고 한 것은 그 교리가 지말이기 때문이다.
032_0647_a_09L是故歷代英聖仰而寶之八會之經謂之爲本根其義也三轉之法謂之爲末枝其義也
하늘에서 네 가지 꽃이 비 내리고 땅이 여섯 가지로 진동하는 상서가 나타나기에 이르러서는 상투 속의 보배를 풀어놓으시고 품 안의 구슬을 들어 보이시니, 1승(乘)을 들어 3승(乘)11)을 깨뜨리시고 끝을 거두어 근본으로 돌아가게 한 것이다.
032_0647_a_12L曁夫天雨四花地現六動解其髻寶示以衣珠借一以破三攝末歸本者也
『부법장전(付法藏傳)』12)에서는 “성자(聖者) 아난(阿難)13)이 여래의 모든 법장(法藏)을 외워 지니기를 마치 병속의 물을 쏟아서 다른 그릇에 붓듯 하였다”고 하였으니, 이른바 석존(釋尊)께서 한평생 49년 동안에 근기와 때에 맞추어 응하신 교법이라 하겠다.
032_0647_a_14L『付法藏傳』曰聖者阿難能誦持如來所有法藏如甁瀉水置之異卽謂釋尊一代四十九年應物逗機適時之教也
발제하(跋提河)14)에 물이 마르고 견고림(堅固林)15)에 그믐달 그림자 드리워 거룩한 가르침과 깊은 종지가 자칫 사라질 지경이 되었을 때에, 대선배이신 가섭께서 5관(棺)을 이미 가리고 천전(千氈)에 불을 붙이려는 순간에 도착하시어 천인(天人)의 안목이 사라져 창생(蒼生)을 구제할 수 없게 되었음을 개탄하셨다.
그리하여 여러 성자들을 소집하여 거룩한 말씀을 결집하시되 승묵(繩墨)16)을 상고하여 선정의 문을 정하시고 관화(貫花)17)에 나아가 율장 부분을 여시고 우바제사(優婆提舍)18)에 의거하여 논장(論藏)으로 삼으셨다.
032_0647_a_17L逮提河輟潤堅林晦邃旨沖宗於焉殆絕我先昆迦葉屬五棺已掩千㲲將焚痛天人眼滅蒼生莫救故召諸聖衆集結微言繩墨以立定門卽貫花而開律部優波提舍以之爲論
032_0647_b_01L공(空)과 유(有)19)의 도리를 분석하고 단견(斷見)20)과 상견(常見)21)을 드러내어 인수(因修)22)의 도리로써 보이시고 과증(果證)23)의 논리로써 밝히시니, 당대의 중생에게 법보로써 보여주고 미래의 중생에게 궤칙으로 전하기에 충분하므로 귀의하는 무리 모두가 그 도리를 따르게 되었다.
032_0647_a_22L剖析空顯別示之以因修明之以果證足以貽範當代軌訓將來歸向之徒竝遵其義
왕진(王秦)이 사자(使者)로서의 명을 받들어 일광(日光)24)의 꿈을 상고하여 불법을 구하고, 마등[騰]25)과 축법란[蘭]26)이 청에 응하여 채찍을 다그쳐[練影] 경을 전달하기에 이르러 그 후로부터 머리 모습을 바꾸고 마음을 고쳐먹은 나그네가 불법의 아름다움을 하늘 저 밖까지 퍼뜨리고 어려운 경전의 걸리던 이치가 이 땅 안에서 정교하게 번역되었다.
032_0647_b_03L及王秦奉使考日光而求佛蘭應請策練影以通經厥後易首抽腸之賓播美於天外篆葉結鬘之奧譯粹於區中
그러나 지극히 그윽하고도 지극히 신묘한지라 생각하는 이는 가끔 성(性)과 상(相)에 헷갈리고, 황(恍)하고 홀(忽)한지라 이야기하는 이는 간혹 그 시(是)와 비(非)에 어두운 이가 있으니, 하물며 성인과의 거리가 이미 멀어서 들어오는 교법에 결함이 많건만 제각기 길을 달리하여 분주히 수레를 달리고 제각기 다른 가닥으로 방법을 구하고 있을 뿐이니 어찌하랴?
032_0647_b_06L然至賾至神思慮者或迷其性相唯恍唯忽言談者有昧其是非況去聖旣遙來教多闕殊途競別路楊鑣而已哉
법사께서 일찍이 탄생하실 때엔 방에 공생(空生)27)의 감응이 나타났고 휴(觿)를 차는 동자가 되어서는 마음이 묘덕(妙德)28)의 정성에 부합되시었다. 애욕의 바다에는 벗어날 나루터가 없고 깨달음의 경지에라야 마음을 깃들일 곳이 있다 하여, 그리하여 머리를 깎고 문장을 다듬어 이공(二空)29)의 진리를 널리 모으기 위해 낯선 고을 먼 산천을 두루 헤매며 천 리를 누비셨다.
032_0647_b_09L法師懸弭誕辰室表空生之應佩觿登歲心符妙德之誠以愛海無出要之津覺地有拪神之宅故削髮矯翰翔集二空異縣他山載馳千里
그러나 번번이 옛 현인들이 보던 책과 유통시킨 책에는 어(魚)가 노(魯)로 바뀌는 틀린 글자가 많아서 짜증스러웠고, 지난 종장(宗匠)들이 들었던 의문과 전해주는 의문은 시(豕)니 해(亥)니 하는 글자에 현혹되어 개탄스러웠다.
032_0647_b_13L每慨古賢之得本行魚魯致乖痛先匠之聞疑傳疑亥斯惑
그래서 가만히 생각하시기를 음악소리를 담은 나무 밑에는 반드시 금석(金石)의 메아리가 숨어있듯이 5천축(天竺)30)에는 반드시 백 편(篇)의 이치가 갖추어 있으리라 하시고는, 마침내 뜻을 내어 길을 떠나시니 끼니를 잊으시고 험한 길 밟기를 평지와 같이 여기셨다.
만 번의 죽을 고비도 가벼이 여기시어 총령(蔥嶺)과 열하(熱河)를 건너시고 한 말씀을 소중히 여기시어 암라수원[柰苑]31)에 도달하셨다. 취산(鷲山)32)과 후소(猴沼)33)에서는 수승한 행적을 우러르면서 기적을 보았고, 녹야원34)과 가비라성[仙城]35)에서는 묵은 서적에 남아 있는 교학의 자취를 찾으셨다.
032_0647_b_15L竊惟音樂樹下必存金石之五天竺內想具百篇之義遂發憤忘食履嶮若夷輕萬死以涉蔥河一言而之奈苑鷲山猴沼仰勝迹以瞻奇鹿野仙城訪遺編於蠹簡
봄과 가을, 추위와 더위를 겪기 열일곱 해, 눈과 귀로 보고 들은 나라가 무려 130개 나라였는데, 가는 곳마다 우리 황제의 융성한 위엄을 선양하고 그 황후의 권능을 알리셨다. 외도의 도도한 교만을 잠재우고 같은 스승들의 드높은 깃발을 돋우어 주셨다. 이름난 왕들이 고개를 조아리고 훌륭한 도반들이 어깨를 나란히 했으니 만고의 영웅은 오직 법사 한 분뿐이시리라.
032_0647_b_19L春秋寒暑一十七年耳目見聞百三十國我皇之盛烈振彼后之㩲豪偃異學之高輶拔同師之巨幟名王拜首侶摩肩萬古風猷一人而已
032_0647_c_01L법사께서는 그 나라에서 얻은 대승 소승 삼장의 범본(梵本) 총 656부를 모두 큰 코끼리와 날랜 말에 싣고서 길을 나섰으니, 서리를 무릅쓰고 눈발과 싸우며 걷는 길은 하늘이 도와서 잘 뚫렸고 고통스러운 햇볕과 음산한 그늘은 황제의 위엄에 의해 잘 건널 수 있었다.
032_0647_b_23L法師於彼國所獲大小二乘三藏梵本等有六百五十六部竝載以巨象幷諸郵駿蒙霜犯雪自天祐以元亨陽苦陰淫假皇威而利涉
이에 정관(貞觀) 19년(645)에 경성에 도달하시니 승려와 속인들이 모두 나와 영접하였다. 무리들이 성곽을 꽉 메우고 시끌벅적 늘어섰으니 이 또한 당대에 보기 드문 성대함이었다.
천자께 알현하자 그간의 노고를 간절히 하문하시고 이어 유사(有司)에게 명령을 내리시기를 가져온 경전을 번역하여 널리 퍼뜨리라 하셨으니 많은 사람들이 힘써서 공경하여 받든 사실은 일일이 다 기록할 수 없다.
032_0647_c_04L粤以貞觀十有九祀達于上京道俗迎之闐城溢郭鏘鏘濟濟亦一期之盛也及謁見天子勞問慇懃爰命有司曌令宣人百敬奉難以具言
나아가 이름난 가문의 선비가 세속을 버리고 불법으로 귀의하여 먼 길을 왕래하면서 나라 안팎에서 밝히고 드날린 일, 교화의 걸음을 멈추시고 저 세계로 돌아가심이 마치 땔감이 다 타고나서 불이 꺼지는 것 같았던 일, 이러한 일들까지도 이 전기(傳記)에 갖추어 수록되어 있다.
032_0647_c_08L至如氏族簪捐親入道遊踐遠邇中外讚楊息化以歸眞同薪盡而火滅若斯之類則備乎茲傳也
이 전기는 본래 다섯 권이었으니 위(魏) 나라 서사(西寺)에 있던 사문 혜립(慧立)36)이 지은 것이다. 그의 속성은 조(趙)씨이며 빈국공(豳國公) 유인(劉人)이며 수(隋) 나라 기거랑(起居郞)이며 사예종사(司隸從事)인 의(毅)의 아드님이시다.
유(儒)와 석(釋)을 널리 상고하여 문장이 능하고 우아하였으며, 묘한 말솜씨가 구름 일듯하고 좋은 생각이 샘솟듯 하였다. 더구나 정색을 하고 곧은 말을 하실 때에는 위엄을 보이시기에 서슴지 않았으며 물과 불에 뛰어들 일이 있더라도 흔들림이나 굽힘이 없으셨다.
032_0647_c_11L『傳』本五卷魏國西寺前沙門慧立所述立俗姓趙豳國公劉人隋起居郞司隸從事毅之子博考儒釋雅善篇章妙辯雲飛溢思泉涌加以直詞正色不憚威嚴赴水蹈火無所屈撓
삼장의 학행(學行)을 보고 삼장의 형의(形儀)를 흠모하게 되어 우러르는 마음과 찬탄하는 마음이 갈수록 견고하고 갈수록 심원하여져서, 그리하여 그의 사적을 찬술하여 후대에 전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원고를 다듬는 일을 끝내신 후에는 행여 유실될까 염려하시어 땅 속에다 묻어두었기에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032_0647_c_16L睹三藏之學行矚三藏之形儀鑽之仰之彌堅彌遠因修撰其事以貽終古乃削藁云畢慮遺諸美遂藏之地府代莫得聞
그 뒤 몸과 마음에 병이 깊어 목숨이 경각에 달리자 문도들에게 명하여 파내라 하시고 곧 출판하려 하셨지만 바로 입적하시고 말았다. 문인들이 애통해 하면서 슬픔을 이기지 못하는 사이에 이 전기의 원고는 이리저리 흩어졌다.
그 뒤 여러 해 동안 원고를 수소문하고 수집하다가 근래에야 비로소 완전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나에게 서문을 쓰고 편집도 하여 책을 만들라고 조르는 것이다.
032_0647_c_19L爾後役思纏痾氣懸鍾漏乃顧命門徒掘以啓之將出而卒門人等哀慟荒鯁不自勝而此『傳』流離分散他所累載搜購近乃獲全因命余以序之迫余以次之
032_0648_a_01L그러나 내 부족함을 스스로 아는 터라 거절하였더니 또 나에게 말하기를 “불법의 일을 속인들에게 맡길 수야 없지 않습니까? 하물며 꼭 하셔야 할 일을 굳이 사양하시다니요?” 하는 것이다.
내 다시 한 번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물러나와 오랫동안 곰곰이 생각해보고 종이를 펴고 붓을 들기는 하였으나 마음이 영 껄끄럽고 답답하기만 하다. 이제 호랑이와 표범 같이 힘찬 글에 개나 양 같은 보잘것없는 글을 갖다 붙이고 아름다운 옥돌에다 무른 기왓돌을 섞는 것처럼 본문을 이리저리 뒤섞고 모아서 10권으로 만들었다. 뒷날 이 책을 보는 이들이여, 행여나 비웃지 말기를 바란다.
032_0648_a_01L余撫己缺然拒而不應因又謂余曰佛法之事豈預俗徒況乃當仁苦爲辭讓余再懷慚退沈吟久之執紙操翰汍瀾腷臆方乃參犬羊以虎豹糅瓦石以琳璆錯綜本文箋爲十卷庶後之覽者無或嗤焉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大唐大慈恩寺三藏法師傳) 제1권
032_0648_a_06L大慈恩寺三藏法師傳卷第一


혜립(慧立) 언종(彦悰) 한역
김영률 번역
032_0648_a_07L沙門慧立本 譯 彦悰 箋


1. 구씨(緱氏) 집안에서 태어나 서역1)의 고창(高昌)2)에 가기까지
032_0648_a_08L起載誕於緱氏終西屆于高昌

법사(法師)의 이름은 현장(玄奘)이고 속성(俗姓)은 진(陳)이다. 진류(陳留)3) 사람으로 한(漢) 나라 태구(太丘)4)의 현장이었던 중궁(仲弓)5)의 후손이다.
증조부 흠(欽)은 후위(後魏) 때 상당(上黨)6)의 태수(太守)를 지냈으며, 조부 강(康)은 학문이 뛰어나 북제(北齊)에서 국자박사(國子博士)7)의 벼슬에 임명되었고 주남(周南)8)을 식읍(食邑)9)으로 받았다. 그리하여 자손들이 이곳에 터를 잡고 살게 되었는데 구씨(緱氏)10) 사람이라고도 한다.
032_0648_a_09L法師諱玄奘俗姓陳陳留人也漢太丘長仲弓之後曾祖欽後魏上黨太祖康以學優仕齊任國子博士邑周南子孫因家又爲緱氏人也
아버지 혜(慧)는 재주가 뛰어나고 지조가 있었으며, 어려서부터 경술(經術)에 통달하였다. 그는 키가 8척(尺)이나 되고 눈썹이 아름답고 눈에는 광채가 있었으며, 소매 넓은 도포(道袍)를 입고 넓은 띠를 두른 모습이 유학을 좋아하는 학자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곽유도(郭有道)11) 라고들 불렀다. 성품이 침착하고 꾸밈이 없었으며 벼슬을 하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게다가 때마침 수(隋) 나라의 정치가 쇠퇴해가고 있었기에 마침내는 경전 공부에만 몰두하게 되었다.
032_0648_a_13L英潔有雅操早通經術形長八尺美眉明目襃衣博帶好儒者之容時人方之郭有道性恬簡無務榮進加屬隋政衰微遂潛心墳典
주군(州郡)에서 여러 번 효렴(孝廉) 및 사예(司隸)의 벼슬을 내리기도 하고 임금이 명령하기도 했으나 모두 병(病)을 핑계로 거절하며 나아가지 않으니 식자(識者)들이 그를 아름답게 여겼다. 그에게는 아들이 넷 있었는데, 법사(法師)는 바로 그의 넷째 아들이다.
032_0648_a_17L州郡頻貢孝廉及司隸辟命竝辭疾不就識者嘉有四男法師卽第四子也
법사는 어릴 때부터 특출하였고 총명함이 남보다 뛰어났다. 8세 때엔 아버지가 책상 앞에 앉혀 놓고 『효경(孝經)』을 가르치는데, “증자(曾子)가 자리를 피하다[避席]”라는 대목에 이르자 갑자기 옷깃을 여미고 일어났다. 그 까닭을 물으니 이렇게 대답했다.
“증자는 스승의 명(命)을 듣고도 자리를 피해 앉았다고 했는데 저는 지금 자훈(慈訓)을 받들고 있사오니 어찌 편안히 앉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032_0648_a_19L幼而珪璋特達聰悟不群年八歲父坐於几側口授『孝經』至曾子避席忽整襟而問其故對曰曾子聞師命避席奘今奉慈訓豈宜安坐
032_0648_b_01L아버지는 대단히 기뻐하며 그가 반드시 크게 성공할 것임을 알고 집안사람들을 불러 이런 사실을 알리니 모두 축하하며 말하였다.
“이 아이는 자네의 양오(揚烏)12)가 될 걸세.”
그는 어릴 적부터 이처럼 지혜로웠다.
032_0648_a_23L父甚悅知其必成召宗人語之皆賀曰此公之揚焉也其早慧如此
그 뒤로 경전의 깊은 뜻을 다 통달하여 옛것을 사랑하고 현인(賢人)을 숭앙했으며, 고상하고 바른 글이 아니면 보지 않았고 성스럽고 밝은 기풍이 아니면 익히지를 않았다. 어린 아이들과 몰려 놀지 않았고 쓸데없이 시끄러운 거리를 돌아다니지도 않았다. 비록 길거리에 꽹과리나 북소리가 떠들썩하고 온갖 잡다한 놀이를 하며 노래를 부르는 곳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 있어도 그는 집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또 어려서부터 기쁜 안색으로 부모를 봉양할 줄 알았으며 인정이 깊고 순박하며 부지런했다.
032_0648_b_02L自後備通經奧愛古尚賢非雅正之籍不觀非聖哲之風不習不交童幼之黨無涉闤闠之門雖鍾鼓嘈囋於通衢百戲叫歌於閭巷士女雲萃其未嘗出也又少知色養溫淸淳謹
둘째 형인 장첩(長捷)은 먼저 출가하여 동도(東都)13)에 있는 정토사(淨土寺)에 머물고 있었는데, 법사(法師)가 능히 법을 가르치고 전할 만 하다는 것을 알고는 절로 데리고 가서 경전(經典)을 외우고 익히게 했다.
032_0648_b_07L其第二兄長捷先出家住東都淨土寺察法師堪傳法因將詣道場誦習經業
그때 마침 조칙(詔勅)이 내려져서 낙양에서 27명의 승려를 뽑게 되었는데, 당시에 학업이 우수한 자가 수백 명이나 있었고 법사는 어린 소년이라서 거기에 참예할 수가 없었으므로 관청 문 옆에 서 있었다.
032_0648_b_09L俄而有勅於洛陽度二七僧時業優者數百法師以幼少不預取限立於公門之側
그때의 인선 관리(人選官吏)는 대리경(大理卿)14)인 정선과(鄭善果)15)라는 사람으로서 인재를 알아보는 감별력이 있었다. 그가 현장(玄奘)을 보고는 기특하게 여겨 물었다.
“그대는 어느 집 자손인가?”
법사는 집안에 대하여 대답했다.
그러자 또 물었다.
“승려로 뽑히기를 바라는가?”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배움이 얕고 학업이 모자라 시험에 참예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물었다.
“출가하려는 뜻은 무엇인가?”
“멀리로는 여래(如來)를 따르고 가까이로는 유법(遺法)을 빛내고자 하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032_0648_b_11L時使人大理卿鄭善果有知士之鑑見而奇之問曰子爲誰家答以氏族又問求度耶答曰但以習近業微不蒙比預又問出家意何所爲欲遠#紹如來近光遺法
정선과는 그의 뜻을 아주 가상하게 여기고 또 그 재주와 용모를 특별하게 여겼다. 그래서 특별히 법사를 뽑으려고 관리들에게 말했다.
“암송하는 학업이야 쉽게 이룰 수 있지만 인물을 얻기는 어려운 것이다. 만약 이 아이를 뽑는다면 반드시 석문(釋門)의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와 여러 공(公)들은 그가 하늘 높이 날아올라 감로(甘露)를 뿌리며 중생을 구제하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러니 인물을 잃어서는 안 된다.”
지금 살펴본다면 정경(鄭卿)의 말이 헛된 말이 아니었다.
032_0648_b_16L果深嘉其志又賢其器貌故特而取之因謂官僚誦業易成風骨難得若度此子爲釋門偉器但恐果與諸公不見其翔翥雲霄灑演甘露耳又名家不可以今觀之則鄭卿之言爲不虛也
032_0648_c_01L법사는 출가한 뒤에 형과 함께 살았다.
그때 절에는 경 법사(景法師))16)가 『열반경(涅槃經)』을 강의하고 있었는데 법사는 경전에 몰두하여 마침내 침식을 잊을 정도였다. 또 엄 법사(嚴法師)에게 『섭대승론(攝大乘論)』17)을 배웠는데 더욱 좋아하여 연구에 몰두했다. 한 번 들은 것은 다 알았으며, 두 번 본 뒤에는 다시 의심이 없었으므로 대중들은 모두 경탄했다.
그래서 법좌(法座)에 올라 그대로 강술하도록 하니 읽는 억양이나 해석하는 표현이 모두 스승과 똑같았다. 그의 훌륭한 소문과 명성은 이로부터 퍼지기 시작했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13세였다.
032_0648_b_21L旣得出家與兄同止時寺有景法師講『涅槃經』執卷伏膺遂忘寢食又學嚴法師『攝大乘論』愛好逾劇一聞將再覽之後無復所遺衆咸驚異令昇座覆述抑揚剖暢備盡師宗問芳聲從茲發矣時年十三也
그 뒤에 수(隋) 나라가 세력을 잃어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제왕의 도성은 걸(桀)18)과 척(跖)19) 같은 도적들의 소굴이 되었고, 하(河)와 락(洛) 등의 하남 지역은 포악한 폭도들로 들끓었다. 의관(衣冠)을 갖춘 관리들은 다 없어지고 승려[法衆]들도 사라졌으며 백골(白骨)이 거리에 나뒹굴고 굴뚝에는 연기마저 끊어져 버렸다.
032_0648_c_04L其後隋氏失御天下沸騰帝城爲桀跖之洛爲豺狼之穴衣冠殄喪法衆銷亡白骨交衢煙火斷絕
일찍이 왕망(王莽)20)과 동탁(董卓)21)이 반역으로 살상하고, 유연(劉淵)22)과 석륵(石勒)23)이 화북(華北)을 어지럽히는 재앙을 일으켰을 때도 이처럼 백성을 참살하고 나라를 난도질한 적은 없었다. 비록 법사가 나이는 어렸지만 변란이 일어날 것을 마음으로 알고는 이를 형에게 말했다.
“이곳이 비록 부모님이 계시는 곳이긴 하지만 사람이 죽고 화란(禍亂)이 이처럼 심하니, 어찌 이곳을 지키다가 죽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당(唐)의 황제[高祖]가 진양(晋陽)24) 사람들을 데리고 이미 장안(長安)에 계시며 천하 사람들이 부모처럼 의지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형님, 함께 장안으로 갑시다.”
032_0648_c_07L雖王董僭逆之舋石亂華之災刳剒生靈夷海內未之有也法師雖居童幼情達變通乃啓兄曰此雖父母之邑而喪亂若茲豈可守而死也余聞唐帝驅晉陽之衆已據有長安天下依歸如適父母願與兄投也
형은 그의 말을 따라 곧 함께 갔는데 그때가 무덕(武德) 원년(618)이었다. 이때는 아직 나라가 건립된 초창기여서 전쟁이 자주 일어났으므로 손무(孫武)와 오기(吳起)의 병법25) 익히는 것을 급선무로 삼는 시기였다. 그래서 한가하게 유교와 불교의 도를 배우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이 때문에 장안에는 불교의 강석(講席)이 없었으니 법사가 이를 매우 개탄했다.
032_0648_c_13L兄從之卽共俱來時武德元年矣是時國基草創兵甲尚興吳之術斯爲急務釋之道有所未遑以故京城未有講席法師深以慨然
일찍이 수양제(隋煬帝)는 낙양[東都]에다 네 개의 도량(道場)을 세우고 천하의 이름난 승려들을 불러 살게 했었는데 모여든 사람들은 모두가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이 때문에 승려들이 숲속의 나무처럼 많았는데, 그 중에 경(景)ㆍ탈(脫)ㆍ기(基)ㆍ섬(暹)26) 등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러나 말년에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공양하는 시주가 끊어져 많은 승려들이 면촉(綿蜀)27)으로 떠났기 때문에 불법을 아는 사람들이 그곳에 아주 많았다.
032_0648_c_17L煬帝於東都建四道場召天下名僧居焉其徵來皆一藝之士是故法將如林暹爲其稱首末年國亂供料停絕多遊緜知法之衆又盛於彼
032_0649_a_01L이에 법사가 형에게 말했다.
“장안에는 불법(佛法)을 강하는 일이 없으니 시간을 헛되이 보낼 수는 없습니다. 촉나라로 가서 수업(受業)하도록 하십시다.”
형은 그의 말을 따랐다. 그래서 형과 더불어 자오곡(子午谷)28)을 지나 한천(漢川)29)으로 들어가서 마침내 공(空)ㆍ경(景)30) 두 법사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들은 다 도량(道場)의 대덕(大德)으로서 서로 만난 뒤로는 희비(喜悲)를 같이 했다. 법사는 그곳에서 한 달 남짓 머물면서 그들에게 가르침을 받은 뒤에 다 함께 성도(成都)로 떠났다.
032_0648_c_21L法師乃啓兄曰此無法事不可虛度願遊蜀受業焉兄從之又與經子午谷入漢川遂逢空景二法師皆道場之大相見悲喜停月餘從之受學仍相與進向成都
촉나라에서는 여러 대덕(大德)들이 이미 크게 법연(法筵)을 열고 있었다. 여기에서 도기와 보섬 법사의 『섭론(攝論)』과 『비담(毘曇)』, 도진(道震) 법사의 『가연(迦延)』31)을 듣고는 촌음을 아껴가며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부지런히 정진했으므로 2~3년 만에 경전의 모든 분야에 통달하게 되었다.
032_0649_a_03L諸德旣萃大建法筵是更聽基暹『攝論』『毘曇』及震法師『迦延』敬惜寸陰勵精無怠二三年間通諸部
당시에는 천하가 기아로 허덕일 때였으나 그래도 촉(蜀) 지방만은 양식이 풍부했다. 이 때문에 사방의 승려들이 많이 몰려들어 강좌에는 항상 수백 명이 사람들이 모였다. 그 가운데 현장 법사의 이지(理智)와 큰 재주가 가장 뛰어났기 때문에 오(吳)ㆍ촉(蜀)ㆍ형초(荊楚)32)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그를 사모하고 따르는 것이 마치 옛날에 사람들이 이응(李膺)33)과 곽태(郭泰)34)를 흠모하던 것과 같았다.
032_0649_a_06L時天下飢亂唯蜀中豐靜四方僧投之者衆講座之下常數百法師理智宏才皆出其右楚無不知聞其想望風徽亦猶古人之欽李郭矣
법사의 형은 성도(成都)35)의 공혜사(空慧寺)에 살고 있었는데 그 역시 풍채가 훤칠하고 아버지를 닮아 몸집도 컸으며, 불교는 물론 그 밖의 학문까지도 좋아했다. 그는 『열반경』ㆍ『섭대승론』ㆍ『아비담(阿毘曇)』 등을 강의하였는데, 거기에 겸하여 『서전(書傳)』까지 통달했으며 특히 노장학(老莊學)에 밝았다. 그래서 촉나라 사람들이 존경하였고, 총관(總管)36)인 찬공(酇公)37)은 특별히 그를 흠모하고 귀하게 여겼다. 글을 짓거나 말을 함에 있어 깊이가 있고 풍류가 있었기 때문에 남과 교제하거나 범인(凡人)들을 유도하는 것에는 아우보다 뒤지지 않았다.
032_0649_a_10L法師兄因住成都空慧亦風神朗俊體狀魁傑有類於父好內外學凡講『涅槃經』『攝大乘論』『阿毘曇』兼通『書』『傳』尤善『老』『莊』爲蜀人所摠管酇公特所欽重至於屬詞談薀籍風流接物誘凡無愧於弟
그러나 현저하게 뛰어나서 세속의 번뇌에 물들지 않고 팔굉(八紘)38)까지 가서 불교의 현묘한 이치를 연구한 점이나, 우주처럼 넓고 큰 뜻을 세우고 성업(聖業)을 이어받을 마음을 가진 점, 퇴폐한 기강을 바로잡아 일으키고 나쁜 풍속을 없앤 점, 세파에 시달려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천자(天子)를 대하는 자리에서 기품과 절개가 더욱 고상하다는 점에서는 형이 현장 법사를 따라가지 못했다. 이처럼 형과 아우 두 사람의 아름다운 덕업(德業)과 청정한 기질은 비록 여산(廬山)에 살던 혜원(慧遠)39)과 혜지(慧持) 형제40)라 해도 따를 수가 없었다.
032_0649_a_15L其亭亭獨秀不雜埃塵遊八綋窮玄廓宇宙以爲志繼聖達而爲心振頹網包挫殊俗涉風波而意靡惓對萬乘而節逾高者固兄所不能逮然昆季二人懿業淸規芳聲雅質廬山兄弟無得加焉
032_0649_b_01L법사는 만 20세가 되던 해인 무덕 5년(622)41)에 성도에서 구족계를 받고 여름 안거(安居) 때에 율(律)을 배워 5편(篇) 7취(聚)42)의 종지(宗旨)를 한 번에 터득했다. 이리하여 익주(益州)43)에서 경론(經論) 연구를 다 마치고 법사는 다시 장안으로 들어와 뛰어난 종지를 배울 생각이었으나 법률 조식(條式)에 어긋나기도 하고 또 형의 만류도 있어서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032_0649_a_21L法師年滿二十卽以武德五年於成都受具坐夏學五篇七聚之宗一遍斯得益部經論硏綜旣窮更思入京詢問殊旨式有礙又爲兄所留不能遂意
이에 법사는 몰래 상인들과 더불어 일행이 되어 배를 타고 3협(峽)44)을 거쳐 양자강(揚子江)을 건너가서 형주(荊州)45)의 천황사(天皇寺)에 이르렀다. 이곳의 승려나 속인들도 그에 대한 소문을 들은 지가 오래이던 터라 모두들 이렇게 오신 김에 설법을 해달라고 간청했다.
법사가 『섭대승론』과 『아비담(阿毘曇)』을 강의하였는데 여름에서부터 겨울에 걸쳐 각각 세 번씩 강론했다.
032_0649_b_02L乃私與商人結侶汎舟三峽沿江而遁荊州天皇寺彼之道俗承風斯久屬來儀咸請敷說法師爲講『攝論』『毘曇』自夏及冬各得三遍
이때 덕망 높은 황실의 친척이던 한양왕(漢陽王)이 그 지방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법사가 왔다는 말을 듣고 대단히 기뻐하여 몸소 방문하여 알현하였다.
설법하는 날에 왕은 관료들과 승려들을 데리고 왔는데, 이름난 사람들이 모두 강당으로 모여 들었다. 여기에서 질문이 구름처럼 쏟아지고 어려운 질문이 나오기도 했으나, 법사는 일일이 응대하며 해석해 주어 뜻이 이해되지 않는 일이 없었다. 그 중에는 깊이 깨달은 사람도 있어서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으며 왕도 역시 감탄을 그칠 줄 몰라 하였다. 보시(布施)한 것이 산처럼 쌓였으나 하나도 가져가지 않았다.
032_0649_b_06L時漢陽王以盛德懿親作鎭於彼聞法師至甚歡躬身禮謁發題之日王率群僚及道俗一藝之士咸集榮觀於是徵詰雲關竝峯起法師酬對解釋靡不詞窮意服其中有深悟者悲不自勝亦稱嘆無極䞋施如山一無所取
강의가 끝나자 다시 북쪽으로 유람하면서 선덕(先德)들을 찾아 물었다. 먼저 상주(相州)46)에 이르러 혜휴(慧休) 법사를 만나 의심나는 것을 질문했고, 또 조주(趙州)47)에 가서는 도심(道深) 법사를 뵙고 『성실론(成實論)』을 배웠다. 그리고 장안에 들어가서는 대각사(大覺寺)에 머물면서 도악(道岳) 법사에게서 『구사론(俱舍論)』48)을 배웠다.
032_0649_b_12L講後復北遊詢求先德至相州造休法師質問疑㝵又到趙州謁深法師學『成實論』又入長安止大覺寺就嶽法師學『俱舍論』
배우는 것은 모두 단번에 그 뜻을 깨달아 경전의 조목조목을 마음에 새겨두니 비록 나이 많은 노승들이라 해도 그를 따를 수가 없었고, 학문이 깊고 원대하여 은미하게 숨은 뜻까지도 밝혀내므로 대중들이 따를 수가 없었다. 때로는 홀로 깊고 오묘한 뜻을 깨닫는 일도 비일비재하였다.
032_0649_b_16L皆一遍而盡其旨目而記於心雖宿學耆年不能出也至於鉤深致遠開微發伏衆所不至獨悟於幽奧者固非一義焉
당시 장안에는 법상(法常)49)과 승변(僧辯)이라는 두 대덕(大德)이 있었는데, 2승(乘)50)에 대하여 깊이 알았고 3학(學)51)을 행하였으므로 도성의 법장(法匠)이라고 승려나 속인들이 모두 그에게로 모여 들었다. 그들의 도는 중국에 널리 퍼지고 명성은 해외(海外)에까지 알려져 상경하여 그를 따르는 승려들이 구름 같이 많았다.
032_0649_b_19L時長安有常辯二大德解究二乘行窮三學爲上京法匠緇素所歸道振神州馳海外負笈之侶從之若雲
032_0649_c_01L그들은 비록 모든 경전을 갖추고 있기는 했으나 특히 『섭대승론』에만 치우쳐 강의하고 있었다. 법사는 이미 오(吳)와 촉(蜀)에서 배웠던 것이지만 장안에 와서도 그들을 찾아가 또다시 공부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미 깊이 이해하고 있었으므로 단번에 모두 습득해 버렸다.
032_0649_b_22L雖含綜衆經而偏講『攝大乘論』法師旣曾有功吳自到長安又隨詢採然其所有深致亦一拾斯盡
그러자 두 대덕은 크게 칭찬하면서 법사에게 말했다.
“자네는 석문(釋門)의 천리마(千里馬)라 할 수 있으니, 다시 지혜의 해를 밝게 하는 일은 마땅히 그대에게 달려있을 뿐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내가 이미 늙어서 그날을 아마도 보지 못할 것이 두렵구나.”
이때부터 학승들의 보는 눈이 달라졌고 명성이 장안에 자자해졌다.
032_0649_c_02L二德竝深嗟賞謂法師曰汝可謂釋門千里之駒明慧日當在爾躬恨吾輩老朽恐不見也自是學徒改觀譽滿京邑
법사는 두루 다니면서 여러 스승을 뵙고 그 말씀을 자세히 경청하고서는 그 이치를 자세히 고찰해보았다. 그런데 그들은 제각기 종지(宗旨)를 멋대로 해석하고 있어서, 성전(聖典)에 징험해 봐도 또한 숨은 뜻과 나타난 뜻에 다른 곳이 있어서 어느 것을 따라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032_0649_c_05L法師旣遍謁衆師備飡其說詳考其理擅宗塗驗之聖典亦隱顯有異莫知適從
이에 법사는 서방(西方)으로 가서 의혹되는 것을 풀고, 아울러 『십칠지론(十七地論)』을 가지고 와서 모든 의심을 풀기로 맹세하였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52)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 법현(法顯)53)과 지엄(智嚴)54)은 역시 한 시대를 이끌었던 승려로서 모두가 법을 구하고 대중들을 교화하였으니 어찌 그들의 고고한 발자취를 따르지 않거나 위업을 잊을 수 있겠는가. 대장부라면 당연히 그의 뒤를 이어가야 할 것이다.”
032_0649_c_08L乃誓遊西方以問所惑幷取『十七地論』以釋衆疑卽今之『瑜伽師地論』也又言昔法顯智嚴亦一時之士皆能求法導利群生豈使高迹無追淸風絕後大丈夫會當繼之
이에 동료들과 함께 인도로 가고 싶다는 뜻을 상소하였으나, 불허한다는 조칙(詔勅)이 내려와 다른 사람들은 모두 포기했으나 오직 법사만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이미 혼자라도 떠날 것을 결심하고 서방 여행에서 어려움을 견뎌 내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스스로 자기 마음을 시험해 보기로 하고, 인간의 여러 가지 고통을 하나하나 겪어서 이겨 내면서 조금도 물러섬이 없었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탑(塔)에 들어가 지극정성으로 자기 뜻을 피력하면서 성중(聖衆)의 가호와 왕복 여행길에 무사하기를 빌었다.
032_0649_c_12L於是結侶陳表有曌不許諸人咸退唯法師不屈旣方事孤遊又承西路艱嶮乃自試其心以人閒衆苦種種調伏堪任不退然始入塔啓請申其意乞衆聖冥加使往還無梗
처음 법사가 태어날 때 어머니는 법사가 흰 옷을 입고 서방으로 가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어머니가 물었다.
“너는 내 아들인데 지금 어디로 가려 하느냐?”
“법을 구하러 갑니다.”
이것으로 볼 때 서방으로 갈 조짐은 처음부터 이미 있었던 것이다.
032_0649_c_17L初法師之生也母夢法師著白衣西去母曰汝是我子今欲何去答曰爲求法故去則遊方之先兆也
032_0650_a_01L정관(貞觀) 3년(629)55) 가을 8월에 드디어 길을 떠나기로 마음먹는 한편 또 상서로운 일이 있기를 바랐더니 그날 밤 이런 꿈을 꾸었다.
“큰 바다 한가운데 소미로산(蘇迷盧山)56) 있었는데 네 가지 보배로 만들어져 있어서 매우 장엄하고 아름다웠다. 마음으로는 산에 오르고 싶었으나 큰 파도가 일고 있었으며 또 타고 갈 배도 없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않고 이윽고 결심하고 들어갔다. 그러자 갑자기 돌로 된 연화(蓮華)가 발걸음을 따라 파도 위에 솟아나 발을 디딜 수 있게 생겨났다가 잠시 후에 발을 떼면 사라졌다. 그리하여 잠깐 사이에 산 아래에 이르렀는데 산이 험준하여 오를 수가 없었다. 시험 삼아 몸을 힘껏 뛰어보았더니 거센 바람이 불어와 몸을 솟구쳐 산꼭대기에 도착했다. 사방을 둘러보니 환하게 트여서 장애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기뻐하고 있을 때 잠이 깼다.”
이런 꿈을 꾸고서 마침내 길을 떠났으니 이때 법사의 나이 26세였다.
032_0649_c_20L貞觀三年秋八月將欲首塗又求祥瑞乃夜夢見大海中有蘇迷盧山四寶所成極爲嚴麗意欲登山而洪濤洶涌又無舩栰以爲懼乃決意而入忽見石蓮華涌乎波外應足而生卻而觀之隨足而須臾至山下又峻峭不可上試踊身自騰有摶飆颯至扶而上昇到山四望廓然無復擁㝵喜而寤焉卽行矣時年二十六也
그 당시 진주(秦州)57)에 효달(孝達)이라는 승려가 있었는데 장안에서 『열반경』을 배웠으며 공부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그래서 효달과 함께 떠나 진주에 이르러 하룻밤을 지내고, 거기서 난주(蘭州)58) 사람을 만나 그를 따라 난주에 가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리고 관마(官馬)를 끌고 양주(涼州)59)로 돌아가는 사람을 만나 그를 따라 양주에 이르렀고, 거기서 또 한 달가량을 머물렀다. 그리고 그곳 승려와 속인들이 『열반경』ㆍ『섭대승론』 및 『반야경』의 강의를 요청하니 법사는 모두 강의해 주었다.
032_0650_a_06L時有秦州僧孝達在京學『涅槃經』功畢還鄕遂與俱去至秦州停一宿逢蘭州伴又隨去至蘭州一宿遇涼州人送官馬歸又隨去至彼停月餘日道俗請開『涅槃』『攝論』及『般若經』法師皆爲開發
양주는 하서(河西)60) 지방에 있는 도시로서 서번(西蕃)61)과 총우(蔥右)62)의 여러 나라와 접해 있어서 상인들의 왕래가 끊어지지 않는 곳이었다. 법사가 강의를 개설하자 날마다 성황을 이룬 가운데, 그 상인들이 모두 진기한 보물을 시주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감탄하면서 돌아갔다. 그리고 각자 돌아가서는 자기 군장(君長)에게 법사의 훌륭함을 칭찬하며 이렇게 말했다.
“불법을 구하러 서역 바라문국(婆羅門國)63)으로 오려고 한답니다. 이리하여 서역의 여러 도시에서는 법사가 온다는 말을 듣고 환희심을 내어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미리 기다리지 않는 도시가 없었다. 강의가 끝나는 날에는 시주한 보물이 너무 많아서 금이나 은전(銀錢), 말까지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래서 법사는 반은 불전(佛殿)에 공양하고 나머지는 모두 여러 절에 나누어 주었다.
032_0650_a_11L州爲河西都會襟帶西蕃蔥右諸國商侶往來無有停絕時開講日盛有其皆施珍寶稽顙讚嘆歸還各向其君長稱嘆法師之美云欲西來求法於婆羅門國以是西域諸城無不預發歡心嚴灑而待散會之日珍施豐厚金銀之錢口馬無數法師受一半燃餘外竝施諸寺
이 무렵은 당(唐) 나라의 정치가 막 시작되는 때여서 국경도 멀리에까지 미치지 못했으므로 백성들이 나라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금지하고 허가해 주지 않았다.
이때 양주의 도독(都督)64)을 맡고 있던 이대량(李大亮)65)도 이미 엄칙(嚴勅)을 받들어 단호히 출국을 엄금하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이대량에게 이렇게 말했다.
“인도로 가겠다고 장안에서 온 승려가 있습니다. 왜 그러는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대량은 법사가 금지된 칙령을 위반하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법사를 만나 양주에 온 이유를 물으니 법사가 말했다.
“서방으로 불법을 구하러 가고자 합니다.”
이 말을 듣고 이대량은 장안으로 돌아가라고 당부했다.
032_0650_a_19L時國政尚新疆場未遠禁約百姓不許出蕃時李大亮爲涼州都督旣奉嚴勅防禁特切有人報亮云有僧從長安來欲向西國知何意亮懼追法師問來由法師報欲西求法亮聞之逼還京
032_0650_b_01L당시 양주에는 혜위(惠威) 법사가 있었는데 하서(河西) 지방의 지도자로서 도력(道力)과 총명함을 겸비한 사람이었다. 벌써부터 법사의 강의와 논리를 중하게 여기고 있었던 데다가, 또 법을 구하러 간다는 뜻이 있다는 말까지 듣고는 매우 기뻐하였다. 그래서 몰래 혜림(惠琳)과 도정(道整)이라는 두 제자를 보내어 법사가 서역으로 떠날 수 있도록 해주었다.
032_0650_b_01L彼有惠威法師河西之領袖神悟聰哲旣重法師辭理復聞求法之志深生隨喜密遣二弟子一曰惠琳二曰道整送向西
그리하여 현장 법사는 감히 공공연하게 나가지는 못하고 낮에는 잠을 자고 밤길을 걸어 마침내 과주(瓜州)66)에 이르렀다. 이때 과주 자사(刺史)67) 독고달(獨孤達)은 법사가 왔다는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극진히 공양했다. 법사가 서역으로 가는 길을 물으니 어떤 사람이 말했다.
“여기서부터 북쪽으로 50여 리를 가면 호로하(瓠蘆河)68)가 나옵니다. 강의 하류는 넓고 상류는 좁아서 회오리치는 물살이 세고 깊으니 건널 수가 없습니다. 상류로 가면 옥문관(玉門關)69)이 설치되어 있는데 반드시 그곳을 거쳐야만 합니다. 이 옥문관은 서쪽 국경의 요충지[襟喉]입니다. 옥문관 밖 서북쪽에는 다섯 개의 봉화대(烽火臺)가 있는데 그곳에는 감시병이 있습니다. 각 봉화대 사이의 거리는 백 리 정도가 되며 그 중간에는 물과 초목이 없습니다. 그 다섯 봉화대의 북쪽은 곧 막하연적(莫賀延磧)70)이며 이오국(伊吾國)71)의 국경이 됩니다.”
032_0650_b_05L自是不敢公出乃晝伏夜行遂至瓜州時刺史獨孤達聞法師至供事殷厚法師因訪西路或有報云從此北行五十餘里有瓠蘆河下廣上洄波甚急深不可渡上置玉門關路必由之卽西境之襟喉也關外西北又有五烽候望者居之各相去百中無水草五烽之外卽莫賀延磧伊吾國境
이 말을 듣고 법사는 마음이 불안했다. 타고 온 말도 죽어서 달리 계책을 세울 길이 없이 어쩌지도 못한 채 한 달가량을 지나게 되었다. 아직 떠나지도 못하고 있는 사이 양주에서는 또 통첩이 내려졌다.
“현장이라고 하는 중이 서번(西蕃)으로 가려고 한다. 각 지방 주현(州縣)에서는 엄중히 경계하여 체포하도록 하라.”
032_0650_b_13L聞之愁憒所乘之馬又死不知計出沈默經月餘未發之閒州訪牒又至有僧字玄奘欲入西所在州縣宜嚴候捉
그런데 주리(州吏) 이창(李昌)은 불교를 숭상하는 관리였다. 마음으로 이 법사가 현장이 아닐까 의심이 나서 몰래 통첩장을 가지고 가서 말했다.
“스님이 여기에 적힌 분이 아니십니까?”
법사가 머뭇거리며 대답을 못하자 이창이 말했다.
“법사께서 사실대로 말씀하신다면 이 제자가 반드시 도와드리겠습니다.”
032_0650_b_16L州吏李昌信之士心疑法師遂密將牒呈云不是此耶法師遲疑未報昌曰師須實語必是弟子爲啚之
그래서 법사가 사실대로 말하자 이창이 듣고는 매우 드문 일이라며 감탄하며 말했다.
“법사께서 정히 그러시다면 저는 법사를 위해서 이 문서를 찢어버리겠습니다.”
그리고 법사 앞에서 통첩장을 찢어버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법사께서는 어서 떠나십시오.”
032_0650_b_19L法師乃具實而答昌聞深讚希有師實能爾者爲師毀卻文書卽於前裂壞之仍云師須早去
032_0650_c_01L이런 일이 있은 뒤로부터 근심걱정이 점점 더해만 갔다. 따라오던 두 제자 가운데 도정(道整)은 이미 돈황(燉煌)으로 떠났고, 오직 혜림(惠琳)만 남아 있었는데 그도 먼 길을 갈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돌려보냈다. 그러다 마침내 말 한 필을 사긴 했으나 마부가 없어 걱정하다가, 마침 머물고 있는 절의 미륵상 앞에서 간절히 빌었다.
“바라옵건대 마부 한 사람을 얻게 해주시어 옥문관을 지날 수 있도록 해주소서.”
032_0650_b_22L自是益增憂惘所從二小道整先向燉煌唯惠琳在知其不堪遠涉亦放還遂貿易得馬一疋苦無人相引卽於所停寺彌勒像前啓請願得一人相引渡關
그날 밤이었다. 그 절에 호승(胡僧)인 달마(達磨)가 머물고 있었는데, 그의 꿈에 법사가 한 송이 연꽃 위에 앉아서 서방으로 가는 것이었다. 달마가 이를 이상히 여겨 아침 일찍 찾아와서 꿈 이야기를 하니 법사는 출발을 해도 되는 징조라고 마음으로 기뻐하였다.
그러면서도 달마에게 말하였다.
“꿈이란 허망한 것인데 어찌 그런 말을 믿겠습니까?”
032_0650_c_03L其夜寺有胡僧達摩夢法師坐一蓮華向西而去達摩私怪旦而來白法師心喜爲得行之徵然語達摩云夢爲虛妄何足涉言
그래서 다시 절에 들어가 미륵상에게 간청하였더니, 갑자기 한 호인(胡人)72)이 들어와 예불을 하고는 마침내 법사를 따라 주위를 한 번, 두 번, 세 번 돌았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물었다.
“성은 석(石)이고 이름은 반타(槃陀)입니다.”
032_0650_c_06L更入道場禮請俄有一胡人來入禮逐法師行二三帀問其姓名云姓字槃陁
이 호인이 즉시 계 받기를 청하기에 이에 5계(五戒)73)를 주었다. 호인은 매우 기뻐하며 돌아갔다가 잠시 후에 병과(餠菓)를 들고 다시 찾아왔다.
법사는 그가 밝고 건강한 모습에다가 공손하기까지 한 모습을 보고 마침내 자신의 마음을 말했더니 호인은 허락하며 말했다.
“법사께서 다섯 봉화대를 통과할 수 있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032_0650_c_09L此胡卽請受戒乃爲授五胡甚喜辭還少時齎餠菓更來師見其明健貌又恭肅遂告行意人許諾言送師過五烽
법사는 크게 기뻐하며 의복을 팔아서 말을 사고는 떠날 날을 약속했다. 다음 날 과주를 출발하여 해질 무렵에 초원 사이로 들어섰다. 얼마 뒤 그 호인은 다시 붉은 색의 야윈 조랑말을 탄 늙은 호인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함께 뒤따라왔다.
032_0650_c_12L法師大喜更貿衣資爲買馬而期焉明日日欲遂入草間須臾彼胡更與一胡老翁乘一瘦老赤馬相逐而至
법사가 마음으로 불쾌한 마음을 보이자 젊은 호인이 말했다.
“이 노인이 서역 길을 아주 잘 압니다. 이오(伊吾)74)를 30여 차례나 왕복했습니다. 이 때문에 함께 온 것이니, 잘 도와줄 것입니다.”
그러자 노인이 말했다.
“서역으로 가는 길은 험악하며 사막은 멀기만 합니다. 만약에 뜨거운 도깨비 바람을 만나면 죽음을 면할 자가 없습니다. 여럿이 짝을 지어 간다 해도 자주 길을 잃고 헤매는데 하물며 법사께서는 어떻게 혼자 가실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깊이 생각하시고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032_0650_c_15L法師心不懌少胡曰此翁極諳西路來去伊吾三十餘反故共俱來望有平章耳胡公因說西路險惡沙河阻遠鬼魅熱風過無達者徒侶衆多猶數迷失況師單獨如何可行願自斟量勿輕身命
032_0651_a_01L법사가 말했다.
“빈도(貧道)는 대법(大法)을 구하기 위하여 서방으로 떠나려는 것이오. 만약 바라문국(婆羅門國)에 이르지 못한다면 결코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오. 비록 중도에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오.”
노인이 말했다.
“법사께서 반드시 가시고자 한다면 저의 이 말을 타고 가십시오. 이 말은 이미 이오(伊吾)를 열다섯 차례나 왕복했습니다. 튼튼한데다가 길도 잘 알고 있습니다. 법사님의 말은 아직 어려서 먼 길을 횡단하는 것을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032_0650_c_21L法師報曰貧道爲求大法發趣西方若不至婆羅門國終不東歸死中途非所悔也胡翁曰師必去乘我此馬此馬往反伊吾已十五度而知道師馬少不堪遠涉
이에 법사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처음 장안에서 장차 서방으로 가려고 뜻을 세웠을 때 하홍달(何弘達)이라고 하는 점쟁이[術人]에게 점을 친 일이 생각났다. 그는 점을 치고 관상을 보아 적중한 적이 많은 사람이었다.
032_0651_a_02L法師乃竊念在長安將發志西方日有術人何弘達誦呪占觀多有所中
그에게 자신이 인도로 가는 일에 대해 점을 치게 했더니 하홍달이 이렇게 말했다.
“법사께서는 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가실 때의 모습은 옻칠을 한 안장[鞍]에다 금구(金具)를 매단 한 마리의 붉고 야윈 늙은 말을 타고 갈 것입니다.”
032_0651_a_04L法師令占行達曰師得去去狀似乘一老赤瘦漆鞍橋前有鐵
그래서 그 늙은 호인이 타고 있는 말을 보니 야위고 붉은데다가 안장에는 옻칠을 했고 금구가 달렸으니 하홍달의 말과 일치한 것이다. 마음으로 ‘이제 됐구나’ 생각하고 드디어 말을 바꿔 탔다. 호옹(胡翁)은 기뻐하며 예를 올리고 떠나갔다. 이윽고 짐 보따리를 꾸려 젊은 호인과 함께 밤에 출발하여 3경(更) 무렵에 강에 이르니 멀리 옥문관75)이 보였다. 옥문관에서의 거리가 상류로 10리쯤 되는 곳인데 양쪽 언덕의 너비는 한 길 정도이고 그 옆에는 후추나무[胡椒樹]가 무성했다.
032_0651_a_06L旣睹胡人所乘馬瘦赤鞍漆有鐵與何言合心以爲當遂換馬胡翁歡喜禮敬而別於是裝與少胡夜發三更許到河遙見玉去關上流十里許兩岸可闊丈餘傍有胡椒樹叢
호인은 곧 나무를 베어 다리를 놓고 그 위에 풀을 깔아 모래를 덮고는 말을 몰아 건넜다. 법사도 건너게 되자 기뻐하며 짐을 풀고 쉬기로 했다. 법사는 호인과 50보쯤 떨어져서 각자 자리를 깔고 자기로 했다.
032_0651_a_11L胡乃斬木爲橋布草塡沙驅馬而過法師旣渡而喜因解駕停憩與胡人相去可五十餘步各下褥而眠
그런데 얼마 있다가 호인이 칼을 빼들고 일어나 살금살금 법사를 향해 열 걸음 쯤 앞에까지 왔다가는 다시 돌아갔다. 법사는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으나 딴 마음을 갖지는 않았나 하는 의심이 생겨 즉시 일어나 경을 외우고 관세음보살을 마음으로 염했다. 호인이 이런 광경을 보고는 돌아가 눕더니 마침내 잠이 들었다. 하늘이 밝아올 무렵 법사는 그를 불러 깨우고, 물을 길러 얼굴을 씻고 양치질하고 나서 식사를 한 후 출발하려고 하자 호인이 말했다.
032_0651_a_14L少時胡人乃拔刀而起徐向法師未到十步許又迴不知何意有異心卽起誦經念觀音菩薩胡人見已還臥遂眠天欲明法師喚令起取水盥漱解齋訖欲發胡人曰
“저도 가고 싶습니다만, 그러나 갈 길은 함하고도 먼 데다 물도 초목도 없습니다. 오직 오봉(五烽) 밑에 가야 물이 있는데 그 물마저도 반드시 밤을 틈타 물을 훔쳐 와야 합니다. 그런데 한 번 발각되면 그 즉시 죽임을 당할 것이니 차라리 돌아가서 평온하게 사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032_0651_a_18L弟子將前途險遠又無水草唯五烽下有必須夜到偸水而過但一處被覺卽是死人不如歸還用爲安隱
032_0651_b_01L그러나 법사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뜻이 확고했다. 그리고 곧바로 하늘을 한 번 우러러보고는 나아가니 호인은 칼을 빼들고 활에 시위를 메우고는 법사에게 앞서서 가라고 명령했다. 법사는 앞서 가지 않았다. 호인은 혼자서 몇 리 쯤 가다가 멈춰 서서 말했다.
“나는 도저히 더 이상 갈 수 없소. 딸린 가족도 많은데다가 왕법(王法)도 어길 수가 없소.”
032_0651_a_21L法師礭然不迴乃俛仰而進露刃張弓法師前行法師不肯居前胡人自行數里而住弟子不能去家累旣大而王法不可干也
법사가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 마음대로 돌아가라고 하자 호인이 말했다.
“법사는 반드시 실패할 것이오. 만약 잡히어 나까지 끌어들여야만 하는 상황이 된다면 어떻게 하겠소.”
법사가 대답했다.
“비록 이 몸이 잘리고 끊겨 티끌 같이 된다 해도 끝내 당신을 끌어들이지는 않을 것이오.”
이렇게 굳게 맹세하자 호인의 마음이 바로 풀렸다. 법사는 그에게 말 한 필을 주고 수고한 데에 대한 고맙다는 말을 하고 헤어졌다.
032_0651_b_02L法師知其意遂任胡人曰師必不達如被擒捉相引奈何法師報曰縱使切割此身如微塵者終不相引爲陳重誓其意乃止與馬一疋勞謝而別
이때부터 혈혈단신으로 사막을 건너는데 오직 보이는 것이라고는 쌓여 있는 해골과 말의 분뇨뿐인 곳을 계속해서 걸어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얼마 뒤에 갑자기 사막이 꽉 찰 만큼 수백의 군대가 나타났다. 군대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기도 하고 멈춘 것 같기도 했다. 그들은 모두 모피나 털옷을 입고 있었고 낙타나 말을 타고 있는 형상에다 깃발이나 창 같은 것을 들고 있었다.
032_0651_b_06L自是孑然孤遊沙漠矣唯望骨聚馬糞等漸進頃間忽有軍衆數百隊滿沙磧間乍行乍皆裘褐駝馬之像及旌旗槊纛之易貌移質
그런데 그 모습이 아지랑이처럼 아물거리며 순간적으로 천변만화(千變萬化)하였다. 멀리서 볼 때는 분명히 보였는데 가까이 갈수록 희미해졌다. 법사가 처음에 볼 때는 도적의 무리라 여겼지만 점점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아무것도 없는 것을 보고 이것이 곧 요괴(妖鬼)임을 알았다.
그때 공중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이때부터 조금은 안정이 되었다.
032_0651_b_10L儵忽千變遙瞻極著近而微法師初睹謂爲賊衆漸近見乃知妖鬼又聞空中聲言勿怖由此稍安
80여 리를 지나가니 제일봉(第一烽)이 보였으나 감시병에게 들킬까 봐 두려워 사막의 구덩이에 숨어 있다가 밤이 된 다음에 출발했다.
이윽고 제일봉에 도착하여 봉우리 서쪽에서 물을 발견하여 마시고 손도 씻었다. 그리고 가죽주머니에 물을 가득 채우려는데 갑자기 화살 하나가 날아와 무릎 가까이에 꽂히더니 조금 있다가 또다시 화살 하나가 날아 왔으므로 감시병에게 들켰다는 것을 눈치 채고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중이오. 장안에서 왔소. 그러니 당신은 나를 쏘지 마시오.”
032_0651_b_13L經八十餘里見第一烽恐候者見乃隱伏沙溝至夜方發烽西見水下飮盥手訖欲取皮囊盛有一箭颯來幾中於膝須臾更一箭來知爲他見乃大言曰我是僧京師來汝莫射我
그리고서 곧 말을 끌고 봉화대로 다가가니 봉화대 위에 있던 사람 역시 문을 열고 나왔다. 법사를 보고는 승려임을 확인한 뒤 데리고 들어가 교위(校尉)76)인 왕상(王祥)을 만나게 했다. 왕상이 횃불을 비추어 보더니 말했다.
“우리 하서(河西) 지방의 승려는 아니다. 틀림없이 장안에서 온 것 같다.”
그리고는 여행의 목적을 꼬치꼬치 묻자 법사가 말했다.
“교위께서는 양주(涼州) 사람들이 ‘현장이라는 승려가 바라문국으로 법을 구하러 간다’라고 하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까?”
교위는 대답했다.
“현장 법사는 이미 동쪽으로 돌아갔다고 들었는데 어째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까?”
032_0651_b_18L卽牽馬向烽烽上人亦開門而出相見知是僧將入見挍尉王祥祥命爇火令看非我河西實似京師來也具問行意法師報挍尉頗聞涼州人說有僧玄奘欲向婆羅門國求法不答曰聞承奘師已東還何因到此
032_0651_c_01L법사가 말 위에 있던 장소(章疏)와 이름을 보여 주었더니 그는 현장 법사임을 확신하고서 이렇게 말했다.
“서역으로 가는 길은 험하고 멉니다. 법사께서는 결코 거기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법사의 죄도 또한 봐 드릴 수가 없습니다. 나는 돈황 사람이니 법사를 돈황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곳에는 장교(張皎)라는 법사가 있는데, 현인(賢人)을 흠모하고 덕(德)을 숭상하는 분이니 법사를 뵙게 되면 반드시 기뻐할 것입니다. 그곳으로 가시기 바랍니다.”
032_0651_c_01L法師引示馬上章疏及名字彼乃信仍言西路艱遠終不達今亦不與師罪弟子燉煌人欲送師向燉煌彼有張皎法師欽賢尚德見師必喜請就之
법사가 말했다.
“나는 낙양에서 태어나[桑梓]77) 어려서부터 불법을 흠모하였습니다. 장안과 낙양의 법에 밝은 고승을 친견했으며, 오(吳)와 촉(蜀)에서 뛰어난 승려들이 책을 짊어지고 따르는 그들에게서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을 다 배우고 서로 대담하고 토론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평생 존경을 받고 살았소. 그러니 만약 저 자신만 수행을 하고 이름을 내고자 한다면 어찌 시주[檀越]께서 말하는 돈황의 법사 같은 이를 싫어하겠소.
032_0651_c_05L法師對曰桑梓洛陽少而慕道兩京知法之匠蜀一藝之僧無不負笈從之窮其所解對揚談論亦忝爲時宗欲養己修名豈劣檀越燉煌耶
그러나 부처님의 교화와 경전이 완전하지 않고 그 뜻도 제대로 갖추어 있지 않은 것이 한탄스러워서, 그 때문에 목숨을 아끼지 않고 위험을 무릅쓰고 서방으로 가서 유법(遺法)을 구하려고 맹세하였소.
그런데 지금 그대는 서로 격려는 하지는 못할지언정 그저 돌아가라고만 권유하고 있으니, 어찌 괴로움을 싫어하는 사람과 함께 열반(涅槃)의 인(因)을 심을 수 있겠소. 굳이 나를 만류하고자 한다면 차라리 형벌을 내리시오. 나는 절대로 한 발자국도 동쪽으로 옮겨놓음으로써 처음 먹은 마음을 저버리지 않겠소.”
032_0651_c_09L然恨佛化經有不周義有所闕故無貪性命不憚艱誓往西方遵求遺法檀越不相勵專勸退還豈謂同厭塵勞共樹涅槃之因也必欲拘留任卽刑罰奘終不東移一步以負先心
왕상은 이 말을 듣고는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저는 다행히 법사님을 만나 기쁨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법사께서는 피로하실 것이니 날이 밝을 때까지 누워서 기다리십시오. 제가 길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032_0651_c_14L祥聞之憫然弟子多幸得逢遇師敢不隨喜疲惓且臥待明自送指示塗路
그리고 자리를 펴고 편히 쉬시게 하였다. 새벽이 되어 법사가 식사를 마치자 왕상은 사람을 시켜 물과 미숫가루와 빵을 준비하게 하여 직접 10여 리 길을 전송하고는 말했다.
“법사께서는 이 길을 따라 곧장 제4봉으로 가십시오. 그곳에 있는 사람은 마음이 착합니다. 그리고 저의 친족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은 성은 왕이고 이름은 백롱(伯隴)이라 합니다. 그곳에 도착하시거든 제가 법사님을 그곳으로 가라고 해서 왔다고 말씀하십시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법사에게 절을 하고 헤어졌다.
032_0651_c_16L遂拂筵安置至曉法師食訖祥使人盛水及麨餠自送至十餘里師從此路徑向第四烽彼人亦有善心又是弟子骨肉姓王名伯隴至彼可言弟子遣師來泣拜而別
그리하여 제4봉에 이르렀으나 어려운 일을 당할까 두려워 물가에 가서 묵묵히 물만 마시고 지나치려 하였다. 그런데 물가에 이르러 내려가지도 전에 벌써 화살이 날아왔다.
그래서 다시 지난번처럼 큰 소리로 외치며 황급히 봉화대로 향해 걸어갔다. 그도 역시 내려와서 봉화대로 법사를 데리고 들어갔다.
032_0651_c_21L旣去夜到第四烽恐爲留難欲默取水而過至水未下飛箭已至還如前報卽急向之亦下來入烽
032_0652_a_01L봉화대를 지키던 관리의 물음에 법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천축(天竺)78)으로 가기 위해서 여기를 거쳐 지나게 되었고 제1봉의 왕상 교위가 이곳으로 가라고 하여 들르게 되었소.”
그는 이 말을 듣고는 기뻐하면서 법사를 유숙하게 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커다란 가죽 주머니와 말을 먹일 보리까지 주고 전송하면서 말했다.
“법사께서는 제5봉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그곳에 있는 사람은 성품이 거칠어서 딴 생각을 품을까 두렵습니다. 여기에서 1백 리 정도를 가시면 야마천(野馬泉)이 있습니다. 거기서 물을 구하도록 하십시오.”
032_0652_a_01L烽官相問欲往天竺路由於此第一烽王祥挍尉故遣相彼聞歡喜留宿更施大皮囊及馬麥相送師不須向第五烽彼人疏恐生異圖可於此去百里許有野馬泉更取水
거기서부터는 바로 막하연적(莫賀延磧)인데 길이는 8백여 리이며 옛날에는 사하(沙河)라고 불렀던 곳이었다. 하늘에는 새 한 마리 날지 않고 땅에는 달리는 짐승도 없으며 또 물과 초목도 없는 곳이었다.
이때부터는 사방을 돌아보아도 그림자라고는 오직 법사 하나일 뿐이었다. 법사는 관세음보살과 『반야심경(般若心經)』을 마음속으로 염하였다.
032_0652_a_06L從是已去卽莫賀延磧長八百餘里古曰沙河上無飛鳥無走獸復無水草是時顧影唯一但念觀音菩薩及『般若心經』
옛날에 법사가 촉에 있을 때 한 병자를 만났었는데, 병자는 몸에 부스럼이 터져 나와 더러운 냄새를 풍겼고 의복은 다 찢어지고 더러웠었다. 법사는 불쌍히 여겨 절로 데리고 가서 의복과 음식 값을 준 일이 있었다. 이에 병자는 부끄럽고 미안한 생각에 법사에게 이 『반야심경』을 주었는데 법사는 그것을 항상 독송했다.
032_0652_a_09L法師在蜀見一病人身瘡臭穢衣服破污慜將向寺施與衣服飮食之直病者慚愧乃授法師此『經』因常誦習
그때 사하를 건널 때에 여러 기이한 종류의 악귀(惡鬼)들이 그를 둘러싸고 앞길을 방해하여 관음보살을 염송(念誦)했으나 완전히 물러가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반야심경』을 독송했더니 모두 소리를 지르며 흩어졌다. 그러니 위기를 만날 때마다 대사를 구해준 것은 바로 이 경전이라 하겠다.
032_0652_a_12L至沙河閒逢諸惡鬼奇狀異類遶人前後雖念觀音不能令去及誦此經發聲皆散在危獲濟實所憑焉
이때 1백여 리를 가다가 그만 길을 잃어서 야마천을 찾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려고 주머니를 내리는데 주머니가 무거워 실수로 엎지르고 말았다. 천 리를 가는 동안 마실 물을 그만 한꺼번에 다 쏟아버린 것이다. 게다가 길을 잃어 맴돌기만 할 뿐 가야 할 방향을 알 수가 없었다. 이에 동쪽으로 발길을 돌려 제4봉으로 되돌아가기를 결심하고 10여 리쯤 왔을 때 다시 생각했다.
‘나는 처음에 발원할 때 만약 천축(天竺)에 이르지 못한다면 끝내 한 걸음도 동쪽으로 옮기지 않겠다고 했는데, 지금 어째서 되돌아오고 있는가. 차라리 서쪽으로 가다가 죽을지언정 어찌 동쪽으로 되돌아가서 살기를 바라겠는가?’
032_0652_a_15L時行百餘失道覓野馬泉不得下水欲飮袋重失手覆之千里行資一朝斯罄又失路盤迴不知所趣乃欲東歸還第四烽行十餘里自念我先發願若不至天竺終不東歸一步今何故來寧可就西而死豈歸東而生
032_0652_b_01L이에 말고삐를 되돌려 오직 관음(觀音)만을 염송하면서 서북쪽으로 나아갔다.
이때 사방을 돌아보니 망망한 사막일 뿐 인적도 없고, 하늘을 나는 새의 자취도 완전히 끊어졌다. 밤에도 요사스런 도깨비의 불빛이 찬란하기가 마치 무성한 별빛 같았고, 낮이면 거센 바람이 모래를 휘몰아 흩뜨리는 것이 마치 소나기가 쏟아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비록 이와 같은 일을 만나도 마음에 두려움은 없었다. 단지 물이 없어 갈증 때문에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것이 괴로웠다.
032_0652_a_21L於是旋轡專念觀音西北而進是時四顧茫然人鳥俱絕夜則妖魑擧火爛若繁星晝則驚風擁沙散如時雨雖遇如是心無所懼但苦水盡渴不能前
이때에 법사는 4일 밤, 5일 낮 동안 입에 물 한 방울도 적시지 못해 목구멍과 배가 바싹바싹 타들어가도 있었다. 법사는 거의 절명 상태로 더 이상은 나아갈 수가 없게 되어 마침내 모래 위에 누워 사경(死境)을 헤매게 되었지만, 그런데도 잊지 않고 관음을 염하면서 관음보살에게 기도했다.
“현장의 이 여행은 재리(財利)를 구함도 아니며 명예를 바라서도 아닙니다. 단지 위없는[無上] 정법(正法)을 구하려고 가는 것일 뿐입니다. 우러러 생각하건대 보살께서는 자비로우신 생각으로 모든 중생을 고통에서 구원해 주신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괴로워하는 사람을 어째서 모른 채 하십니까?”
032_0652_b_02L是時四夜五日無一渧沾喉口腹乾燋幾將殞絕不復能進遂臥沙中默念觀音雖困不捨啓菩薩曰玄奘此行不求財利無冀名譽但爲無上正法來耳仰惟菩薩慈念群生以救苦爲務此爲苦寧不知耶
이렇게 빌기를 한순간도 그치지 않았더니 5일째 밤이 되자 갑자기 서늘한 바람이 몸에 닿아 찬물에 목욕이나 한 듯이 상쾌해졌다. 그러자 눈이 번쩍 뜨이고 말도 거뜬히 일어섰다. 몸이 회복되자 잠깐 잠도 자게 되었다.
그렇게 잠든 사이에 꿈을 꾸었는데, 여러 길[丈]이나 되는 한 대신(大神)이 창을 잡고 가리키며 말하는 것이었다.
“어찌하여 강행하지 않고 자꾸 잠만 자고 있느냐?”
032_0652_b_08L如是告時心心無輟第五夜半忽有涼風觸身冷快如沐寒水遂得目明馬亦能起體旣蘇息得少睡眠卽於睡中夢一大神長數執戟麾曰何不强行而更臥也
이 소리에 법사는 놀라 깨어나 출발했다. 한 10리쯤 가다가 말이 갑자기 다른 길로 들어섰다. 법사가 아무리 제지해도 말은 돌아서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몇 리를 더 가니 갑자기 몇 이랑이나 되는 푸른 초원이 나타났다. 말에서 내려 풀을 실컷 뜯게 한 뒤 초원을 열 발자국 쯤 가서 한 바퀴 돌아 나오다가 못물을 하나 발견했는데 거울처럼 맑고 깨끗했다. 그걸 마시고 나니 목숨이 되살아나서 사람과 말이 함께 소생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이것은 옛날부터 있었던 물과 초원이 아니라 아마 보살의 자비로 만들어진 듯하였다. 지극한 정성이 신(神)에게 통하면 다 이렇게 되는 것이리라.
032_0652_b_12L師驚寤進發行可十里馬忽異路制之不迴經數里忽見靑草數畝下馬恣食去草十步欲迴轉又到一池甘澄鏡澈卽而就飮身命重全人馬俱得蘇息計此應非舊水草固是菩薩慈悲爲生其至誠通神皆此類也
이곳 초지(草池)에서 하루를 머물고 다음날 물을 가득 담고 말에게 먹일 풀도 뜯어 가지고 출발했다. 다시 이틀이 지나서야 비로소 유사(流沙)를 빠져나와 이오(伊吾)에 이르렀는데, 이와 같은 위태롭고 어려운 일들이 수없이 많아 이루 다 갖추어 서술할 수 없다.
032_0652_b_18L卽就草池一日停息後日盛水取草進發更經兩日方出流沙到伊吾矣此等危難百千不能備序
032_0652_c_01L이오에 이르러서는 어떤 절에서 묵게 되었다. 절에는 중국의 승려 세 사람이 있었는데 그 중에 한 노승(老僧)이 있었다. 그는 옷고름도 여미지 못하고 맨발로 뛰어나와 맞으며 법사를 껴안고 울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오늘 이렇게 고향 사람을 만날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렇게 소리 내어 흐느끼자 법사 역시 마음이 아파 그들과 함께 울었다. 이오는 물론 근처의 호승(胡僧)과 호왕(胡王)이 모두 찾아와서 법사를 배알하였다. 이오왕은 자신의 거처로 법사를 청하여 정중하게 공양하였다.
032_0652_b_21L旣至伊吾止一寺寺有漢僧三人中有一老者衣不及帶跣足出迎抱法師哭哀號鯁咽不能已已豈期今日重見鄕法師亦對之傷泣自外胡僧胡王悉來參謁王請屆所居備陳供養
이때 고창(古昌)의 왕 국문태(麴文泰)79)의 사신이 먼저 와서 이오에 머물고 있었는데 이날 돌아가려다가 때마침 법사를 만나게 되었다. 돌아가서 왕에게 보고 하니 왕이 듣고는 그날로 사신을 보내서 이오왕에게 법사를 고창으로 보내도록 부탁했다. 그리하여 좋은 말 수십 필을 마련하고 중신(重臣)들을 시켜 숙사(宿舍)를 마련하여 환영하도록 했다. 왕의 사신은 10여 일을 머물다가 왕의 뜻을 전하고 은근히 고창에 와주시기를 간청하였다.
032_0652_c_03L高昌王麴文泰使人先在伊吾是日欲還適逢法師歸告其王王聞卽日發使勅伊吾王遣法師來仍簡上馬數十疋遣貴臣驅駝設頓迎候比停十餘日王使至陳王意拜請殷勤
법사의 생각에는 가한부도성(可汗浮圖城)을 경유하여 서방으로 가려고 했는데 고창왕이 이렇게 간청하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드디어 고창으로 떠나 남적(南磧)을 건너 6일 만에 고창의 경계인 백력성(白力城)에 이르렀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법사는 이 성(城)에서 묵으려고 하였으나 관인(官人)과 사신이 말했다.
“왕성(王城)이 가까이 있으니 그냥 가시기 바랍니다.”그래서 여러 번 좋은 말로 바꾸어 타며 전진하였다. 법사가 먼저 타고 온 붉은 말은 그 뒤를 따르도록 했다.
032_0652_c_08L師意欲取可汗浮圖過旣爲高昌所辭不獲免於是遂行涉南磧經六至高昌界白力城時日已暮法師欲停城中官人及使者曰王城在近請進數換良馬前去法師先所乘赤留使後來
그날 밤 닭이 울 무렵에 왕성(王城)에 도달했는데, 문지기가 왕에게 아뢰자 왕이 문을 열어주라고 명하여 법사는 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왕은 신하들과 함께 앞뒤로 촛불을 밝히고, 몸소 궁을 나와 법사를 맞이했다. 후원(後院)으로 들어가 비단 장막으로 둘러쳐진 2층 누각에 앉게 한 뒤 매우 정중하고 공경스럽게 말했다.
“제가 법사의 명성을 듣고서 기뻐 침식조차 잊었습니다. 노정(路程)을 미루어 생각해 보니 법사께서 오늘 밤에 틀림없이 도착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처자와 함께 잠을 자지 않고 경을 읽으며 경건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잠시 뒤에 왕비가 수십 명의 시녀와 함께 와서 예배하였다.
032_0652_c_14L卽以其夜鷄鳴時到王門司啓王王勅開門法師入城與侍人前後列燭自出宮迎法師入後院坐一重閣寶帳中拜問甚厚弟子自聞師名喜忘寢食量准塗路知師今夜必至與妻子皆未眠讀經敬待須臾王妃共數十侍女又來禮
어느덧 날이 샐 무렵이 되자 오랜 이야기 끝에 졸음이 몰려왔다. 왕은 그제야 궁으로 돌아가면서 대궐을 지키는 환관들에게 법사를 숙소로 모시게 했다.
아침에 법사가 일어나기도 전에 왕이 왕비와 함께 문 앞에 와서 예문(禮問)하였는데 왕이 말했다.
“제가 생각하건대 적로(磧路)는 매우 험악한데 법사께서 단신으로 오셨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032_0652_c_21L是時漸欲將曉言久疲倦欲眠始還宮留數黃門侍宿法師未起王已至門率妃已下俱來禮問王云弟子思量磧路艱阻師能獨來甚爲奇也
032_0653_a_01L그리고는 눈물을 흘리며 감탄을 이기지 못했다. 미리 준비해 둔 식사를 마치고 궁궐 옆에 따로 마련해 둔 도량(道場)으로 왕이 법사를 직접 인도하여 머물게 하고는 환관을 보내서 시중들게 하였다.
032_0653_a_02L流淚稱嘆不能已已遂設食解齋訖而宮側別有道場王自引法師居之遣閹人侍衛
고창(高昌)에는 단(彖) 법사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일찍이 장안(長安)에 가서 유학하여 법상(法相)80)에 대해 잘 알았으므로 왕이 그를 귀히 여기고 있었다. 왕은 단 법사를 오게 하여 법사와 서로 만나보게 했는데 조금 있다가 떠났다.
또 국통왕(國統王) 법사라는 나이가 80이 넘는 자가 있었는데, 왕은 그에게 명하여 법사와 함께 거처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머물기를 권하고 서쪽으로 가는 것을 만류하였으나 법사는 듣지 않았다.
032_0653_a_04L彼有彖法師曾學長安善知法相王珍之命來與法師相見少時出又命國統王法師年逾八十共法師同處仍遣勸住勿往西法師不許
법사가 10여 일을 머물고 나서 떠나야겠다고 하자 왕이 말했다.
“이미 통사(統師)를 통해 머무시도록 청했는데 법사의 뜻은 어떠하신지요?”
법사가 말했다.
“여기 머물게 된 것은 참으로 왕의 은혜라고 여깁니다만 여기에 온 것은 본심이 아니었습니다.”
032_0653_a_08L停十餘日欲辭行王曰已令統師諮請師意何如法師報曰留住實是王恩但於來心不可
왕이 말했다.
“제가 선왕(先王)을 모시고 중국 여러 곳을 다닐 때 수 양제(隋煬帝)를 따라 동서(東西) 이경(二京)과 연(燕)ㆍ대(岱)ㆍ분(汾)ㆍ진(晋)81)의 여러 곳을 방문하면서 명승(名僧)들을 친견했습니다만 마음으로 존경할 만 한 분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일찍이 법사의 명성을 듣고부터는 심신(心身)이 즐거워 춤을 추는 듯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법사가 머무시게 된다면 저는 종신토록 공양하면서 이 나라 사람들을 다 법사의 제자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바라건대 법사께서는 이곳 승려들에게 강의를 해주십시오. 비록 수는 많지 않지만 그래도 수천 명은 될 것입니다. 모두 경전을 공부하게 하여 법사의 청중이 되게 하겠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제 마음을 살피시어 서방으로 가실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032_0653_a_10L王曰泰與先王遊大國從隋帝歷東西二京及燕晉之閒多見名僧心無所慕自承法師名身心歡喜手舞足擬師至止受弟子供養以終一身令一國人皆爲師弟子望師講授徒雖少亦有數千竝使執經充師聽伏願察納微心不以西遊爲念
법사가 고맙게 생각하며 말했다.
“왕의 후의(厚意)는 덕이 없는 저에게는 과분합니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공양을 받기 위하여 온 것이 아닙니다. 저는 중국에 법의(法義)가 전파되지 않고 경전의 가르침도 빠진 부분이 적지 않은 것이 안타깝습니다. 이러한 회의를 품고 부처님의 참된 자취를 찾으려는 것입니다.
032_0653_a_17L師謝曰王之厚意豈貧道寡德所當但此行不爲供養而來所悲本國法義未周經教少闕懷疑蘊惑啓訪莫
032_0653_b_01L 그러므로 목숨을 서방에서 마친다 해도 아직까지 듣지 못했던 종지(宗旨)를 청하려 합니다. 방등(方等)82)의 감로(甘露)를 단지 가라(迦維)83)에만 뿌릴 것이 아니라 미언(微言)을 가려 뽑아서 동방 여러 나라에 전하고자 합니다. 파륜(波崙)84)이 도를 물었던 그 의지와 선재동자(善財童子)85)가 벗을 찾던 마음처럼 지금 제 마음은 날이 갈수록 굳어질 뿐인데 어찌 중도에서 그칠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왕의 뜻을 거두시고 공양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032_0653_a_21L以是畢命西方請未聞之旨欲令方等甘露不但獨灑於迦維決擇微言庶得盡沾於東國波崙問道之志善財求友之心只可日日堅强豈使中塗而止願王收意勿以汎養爲懷
왕이 말했다.
“나는 법사를 사모하며 기뻐할 따름이니 반드시 머무시도록 하고 공양할 것입니다. 비록 총령산(蔥嶺山)86)이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 해도 나의 뜻은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나의 우직한 정성을 믿으시고 실속 없다고 의심하지 마십시오.”
032_0653_b_02L王曰弟子慕樂法師必留供養雖蔥山可轉此意無移乞信愚誠勿疑不
법사가 말했다.
“왕의 깊은 마음을 말씀을 안 하신다고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제가 서방으로 가려는 것은 법을 위해서이므로 법을 얻기 전에는 절대 중도에 그만둘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삼가 말씀드리는 것이니 부디 왕께서 이해해 주십시오. 대왕께서는 일찍이 훌륭한 복을 닦아 왕이 되셨는데 이는 단지 백성들이 숭앙해서가 아니라 진실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사리로 보아 돕고 북돋아줘야 하는데도 어째서 장애가 되게 하십니까?”
032_0653_b_05L法師報曰王之深心豈待屢言然後知也但玄奘西來爲法法旣未得不可中停以是敬辭願王相體又大王曩修勝業位爲人主非唯蒼生恃固亦釋教依馮理在助揚豈宜爲
왕이 말했다.
“저도 또한 감히 장애를 주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이 나라에는 이끌어 줄 만한 법사[導師]가 없기 때문에 법사를 머물게 하여 우매한 중생들을 인도하게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법사가 모두 사양하고 허락하지 않자 왕은 곧 얼굴색이 변하고 소매를 걷어 올리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내가 다른 방법으로 법사를 처리한다면 법사가 어찌 떠날 수 있겠소. 이곳에 머물 수밖에 없도록 만들 수도 있고, 아니면 법사를 법사 나라로 돌려보낼 수도 있소. 부디 스스로 잘 생각해 보시오. 내 말을 따르는 것이 오히려 좋을 것이오.”
032_0653_b_10L王曰弟子亦不敢障㝵直以國無導師故屈留法師以引愚迷耳法師皆辭不許王乃動色攘袂大言曰子有異塗處師師安能自去或定相或送師還國請自思之相順猶勝
법사가 대답했다.
“현장이 여기 온 것은 대법(大法)을 위해서입니다. 이제 와서 이렇게 장애를 만났으니, 단지 육체는 왕 곁에 머물 수 있겠으나 정신은 머물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032_0653_b_14L法師報曰玄奘來者爲乎大法今逢爲障只可骨被王留識神未必留也
그리고는 목이 메어 다시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왕 역시 받아들이지 않고 더욱 많은 공양을 바치면서, 매일 음식을 차린 상을 왕이 직접 올렸다. 이렇게 법사는 고창에 머물면서 처음 세운 뜻이 막히게 되자 마침내 결심하고 단식(斷食)을 함으로써 왕의 마음을 움직이려 했다. 이에 단정한 모습으로 앉아 3일 동안 물 한 방울 넘기지 않았다. 4일째가 되자 왕은 법사의 호흡이 점점 멎어가는 것을 보고는 크게 두려운 마음이 일어서 깊이 뉘우치며 머리를 조아려 사죄하였다.
“법사께서 하고 싶은 대로 서방으로 떠나십시오. 이렇게 비오니 부디 어서 아침 식사를 하십시오.”
032_0653_b_16L因嗚咽不復能言王亦不納更使增加供養每日進食王躬捧槃法師旣被停留違阻先志遂誓不食以感其於是端坐水漿不涉於口三日第四日王覺法師氣息漸惙深生愧乃稽首禮謝云任師西行乞垂早
그러자 법사는 진실한 말이 아닐까 봐 걱정하며 왕에게 해를 가리키며 언약을 하라고 요청했다.
왕이 말했다.
“만약 그러시다면 함께 부처님 앞에서 인연을 맺도록 하십시다.”
032_0653_b_23L法師恐其不實要王指日爲言若須爾者請共對佛更結因緣
032_0653_c_01L그리고는 함께 도량으로 들어가서 부처님께 예배하고, 모후(母后)인 장태비(張太妃) 앞에서 함께 법사와 형제가 될 것을 약속하며 이렇게 말했다.
“법사의 뜻대로 법을 구하러 가십시오. 그리고 바라건대 돌아오실 때에는 이 나라에 3년 만 머무시어 저의 공양을 받아주소서. 만약 금생에 성불(成佛)하시면, 원컨대 저는 바사닉왕(波斯匿王)87)이나 빈바사라(頻婆娑羅)88) 등과 같이 법사를 위해 외호(外護)89)하는 단월(檀越)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한 달만 더 머물면서 『인왕경(仁王經)』을 강의해 주십시오. 그러면 그 사이에 법사께서 여행길에 입으실 옷을 마련하겠습니다.”
032_0653_c_01L共入道場禮佛對母張太妃共法師約爲兄弟任師求法還日請住此國三年受弟子供養若當來成佛願弟子如波斯匿王頻婆娑羅等與師作外護檀越仍屈停一月講『仁王經』間爲師營造行服
법사는 이를 모두 받아들였다. 대비도 매우 기뻐하면서 말했다.
“바라건대 법사와 더불어 한 권속이 되어 대대로 서로 도와 나갑시다.”
그러자 법사는 비로소 식사를 했다. 그의 절지(節志)와 굳은 마음이 이와 같았다.
032_0653_c_07L法師皆許太妃甚願與師長爲眷屬代代相度於是方食其節志貞堅如此
그 후에 왕은 일부러 커다란 장막을 치고 강의를 열었다. 천막은 3백여 명이 앉을 수 있었고 대비를 비롯해서 왕과 통사(統師)와 대신 등이 각각 자리를 따로 하여 강의를 들었다. 매번 강의할 때마다 왕이 직접 향로를 들고 와서 법사를 맞아 인도하였으며, 법좌에 오를 때에는 왕이 엎드려 법사로 하여금 매일 딛고 오르게 했다. 이리하여 강의는 끝났다.
032_0653_c_09L後日王別張大帳開講帳可坐三百餘人太妃已王及統師大臣等各部別而聽到講時王躬執香鑪自來迎引將昇法座王又低跪爲蹬令法師躡上日如此講訖
법사를 위해 네 명의 사미(沙彌)를 뽑아 시중들게 했으며, 법복(法服) 30벌[具]을 만들었다. 서역(西域)은 매우 춥기 때문에 면의(面衣)90)ㆍ장갑ㆍ신발ㆍ버선 따위의 여러 가지도 준비했다. 그리고 황금 1백 냥과 은전 3만, 비단과 명주 등 5백 필을 법사의 왕복 20년 동안의 경비로 충당하도록 하였다. 또 말 30필과 일꾼 25명을 지급했으며,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환신(歡信)을 보내어 서돌궐(西突厥)의 섭호가한(葉護可汗)의 아문(衙門)까지 배웅하도록 하였다.
032_0653_c_14L爲法師度四沙彌以充給侍製法服三十具以西土多寒造面衣手衣韤等各數事黃金一百兩銀錢三萬綾及絹等五百疋法師往還二十年所用之資給馬三十疋手力二十五人遣殿中侍御史歡信送至葉護可汗衙
032_0654_a_01L그리고 스물네 통의 편지를 써서 굴지(屈支)91) 등 스물 네 나라에 보내면서 편지 하나마다 비단 한 필씩을 선물로 함께 보내도록 했다. 섭호가한에게는 비단 5백 필과 과일 두 수레를 헌상(獻上)하면서 아울러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이 법사는 나의 동생입니다. 바라문국에 가서 법을 구하고자 하니, 바라건대 가한께서는 법사를 이 몸처럼 어여삐 여겨 주십시오.”
이렇게 고창의 서쪽 여러 나라에 조서를 내려, 오락마(鄔落馬)92)를 번갈아 바꿔 보내서 국경을 나갈 수 있도록 청하였다.
032_0653_c_20L又作二十四封書通屈支等二十四國每一封書附大綾一疋爲信又以綾絹五百疋果味兩車獻葉護可汗幷書稱法師者是奴弟欲求法於婆羅門國願可汗憐師如憐奴仍請勅以西諸國給鄔落馬遞送出境
법사는 왕이 사미(沙彌)와 국서(國書), 비단 등을 보낸 것을 보고, 너무 극진한 전별(餞別)을 부끄러워하여 사의를 표하며 말했다.
“현장이 듣기로는 강해(江海)가 깊어서 이를 건너려면 반드시 배를 타야하고, 중생이 미혹하여서 그들을 인도하려면 진실로 성언(聖言)을 빌려와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래께서는 자식을 사랑하는 대자대비로 이 예토(穢土)에 태어나시어 3명(明)93)의 혜일(慧日)94)을 비추어 이 세상의 유혼(幽昏)을 밝히셨습니다. 자비로운 구름은 멀리 하늘을 덮고 법우(法雨)는 삼천대천세계를 윤택하게 하였습니다. 모든 중생들에게 이익과 안락을 베풀고 나서 응신(應身)95)을 버리시고 진여(眞如)96)로 돌아갔습니다.
032_0654_a_03L法師見王送沙彌及國書綾絹等至慚其優餞之厚啓謝曰奘聞江海遐深濟之者必馮舟楫群生滯惑導之者寔假聖言以如來運一子之大悲生茲穢土三明之慧日朗此幽昏慈雲蔭有頂之天法雨潤三千之界利安已訖應歸眞
그 분이 남기신 가르침이 동방에 들어온 지 6백 년, 가섭마등(迦葉摩騰)97)과 강승회(康僧會)98)는 그 빛을 오(吳)와 낙(洛)에서 떨쳤고, 담무참(曇無讖)99)과 구마라집100)은 그 아름다움을 진(秦)과 양(涼)에 알렸습니다. 그들은 숭고한 가르침을 훼손하지 않고 모두가 뛰어난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멀리 다른 나라 사람이 중국으로 와서 경전을 번역했기에 음과 뜻이 다른 곳이 많습니다.
032_0654_a_10L遺教東流六百餘祀會振輝於吳什鍾美於秦不墜玄咸匡勝業但遠人來譯音訓不同
부처님께서 가신 지가 오래되어 해석하는 뜻이 서로 달라서 마침내 사라쌍수(沙羅雙樹)101) 밑에서 가르치신 불법의 참뜻이 극단의 두 길로 갈라졌습니다. 대승(大乘)의 종지(宗旨)는 둘이 아닌데도 남종(南宗)102)과 북종(北宗)103)으로 쪼개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쟁론(諍論)이 분분한 지가 무려 수백 년이나 되었으나 천하에 의문을 해결할 학자가 없는 듯합니다.
032_0654_a_12L去聖時遙義類差舛遂使雙林一味之旨分成當現二常大乘不二之宗析爲南北兩道紛紜諍論凡數百年率土懷疑莫有匠決
현장은 숙세의 좋은 인연으로 요행히도 어린 나이에 사문이 되어 책 보따리를 짊어지고 스승을 따라다니기 어언 20년이 되었습니다. 이름난 현인(賢人)과 훌륭한 벗들과 함께 묻고 배우며 대승과 소승의 종지(宗旨)에 대해 거의 열람하였으나, 아직도 책을 잡으면 주저하고 경을 받들면 실망하지 않을 때가 없었습니다.
032_0654_a_16L玄奘宿因有慶早預緇門負笈從師年將二紀名賢勝友備悉諮詢大小乘宗略得披覽未嘗不執卷躊躇捧經侘傺
급고독원(給孤獨園)104)을 바라보며 발돋움하였고, 영취산(靈鷲山)105)을 생각하면 마음이 조급했습니다. 그러기에 한 번이라도 배임(拜臨)하여 오랜 의혹을 풀어보는 것이 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짧은 대롱을 통해서는 하늘을 알 수가 없고 작은 벌레가 바다를 헤아리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단지 나의 이 미약한 정성을 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에 여장을 꾸려 길을 따라오다가 마침내 이오(伊吾) 땅에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032_0654_a_19L望給園而翹足想鷲嶺而載懷願一拜臨申宿惑然知寸管不可窺天小蠡難爲酌海但不能棄此微誠是以裝束取路絓塗荏苒遂到伊吾
032_0654_b_01L엎드려 생각해보면 대왕께서는 천지의 순화(淳和)를 받고 음양(陰陽)의 기운을 바탕으로 천하를 다스리는 천자가 되어 백성들을 자식처럼 기르게 되었습니다. 동으로는 중국의 기풍(氣風)에 닿았고 서로는 백융(百戎)의 풍속을 어루만지셨습니다. 누란(樓蘭)106)과 월지[月氏]107)의 땅과 차사(車師)108)나 오랑캐가 넘보던 땅에까지도 다 함께 인(仁)을 베풀어 그 도타운 덕에 젖게 하셨습니다. 게다가 현인을 흠모하고 학자를 사랑하며 선(善)을 좋아하여 자애를 베풀었습니다.
032_0654_a_23L伏惟大王稟天地之淳和資二儀之淑氣垂衣作主子育蒼生東抵大國之風西撫百戎之俗樓蘭月氏之地車師狼望之鄕竝被深仁俱霑厚德加以欽賢愛士好善流慈
그리고 멀리서 온 저 같은 사람도 정성을 다해 맞아 주시어, 머무는 동안 깊고 두터운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불법의 의리를 밝히고자 법연(法筵)을 펴주시고, 또 형제의 인연을 맺어 우애를 돈독히 하였습니다. 아울러 서역 20여 번국[蕃]에 편지를 보내어 주실 뿐 아니라, 따뜻한 의복과 음식까지 주어 전송해 주셨습니다. 또 서방으로의 여행이 외롭고 눈길이 춥고 고될 것을 걱정하시어 사미승 네 사람까지 뽑아서 동행하도록 하셨으며, 법복과 솜모자와 담요와 버선 등 50여 가지 물건과 비단과 금전과 은전 등으로 20년 동안의 왕복 비용까지 마련해 주었습니다.
032_0654_b_05L憂矜遠來曲令接引旣而至止渥惠逾深賜以話言闡揚法義又蒙降結弟季之緣敦獎友于之念幷遺書西域二十餘蕃煦飾殷令遞餞送又愍西遊煢獨雪路凄爰下明勅度沙彌四人以爲侍伴法服緜帽裘毯靴韤五十餘事及綾金銀錢等令充二十年往還之資
엎드려 대하자니 송구스러워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설사 교하(交河)의 물길이 터져 범람한다 해도 이 은혜보다 넘치지는 않을 것이며, 총령(蔥嶺)의 산을 들어 올린다 해도 이 은혜보다 어찌 무겁겠습니까?
032_0654_b_12L伏對驚慚不知啓處決交河之水比澤非多擧蔥嶺之山方恩豈重
현도(懸度)109)와 능계(陵溪)110)가 험난하다 해도 근심이 되지 않고 천제(天梯)111)와 도수(道樹)112)에 참배하는 일이 이제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제가 대왕의 윤허를 얻어 천축에 가게 된다면 이것이 누구의 힘이겠습니까? 이는 왕의 은혜일 것입니다. 그리고 뒷날 여러 스승을 뵙고 정법(正法)을 이어 받게 되면 귀국해서는 그 것을 번역하여 미문(未聞)의 경전을 널리 유포함으로써 여러 삿된 견해의 나무들을 잘라내어 이단(異端)의 구덩이를 메우고 교화(敎化)의 모자람을 보충하여 불문(佛門)의 지남(指南)을 정립하겠습니다. 원컨대 이 미약한 공(功)으로나마 왕의 크신 은혜에 보답하기를 바랍니다. 이제 앞길이 멀어 오래 머물 수가 없습니다. 내일이면 떠날 것을 생각하니 슬픔이 더하여 견딜 수가 없습니다. 삼가 감사의 뜻을 올립니다.”
032_0654_b_14L懸度陵溪之險不復爲憂天梯道樹之鄕瞻禮非晩儻蒙允遂則誰之力焉之恩也然後展謁衆師稟承正法還翻譯廣布未聞翦諸見之稠林異端之穿鑿補像化之遺闕定玄門之指南庶此微功用答殊澤又前塗旣遠不獲久停明日辭違預增悽斷不任銘荷謹啓謝聞
이에 대해 왕이 말했다.
“법사와 저는 이미 형제 사이입니다. 그러니 나라에 있는 모든 것은 나와 법사의 것일 텐데 어찌 고맙다는 말씀을 하십니까?”
032_0654_b_22L王報曰法師旣許爲兄弟則國家所畜共師同有因謝也
032_0654_c_01L떠나는 날에는 왕이 모든 승려들과 대신들과 백성들을 이끌고 성(城)의 서쪽까지 전송을 나왔다. 왕이 법사를 껴안고 통곡하니 승려와 속인들로 모두 슬퍼하며 이별의 울음소리가 교외에까지 넘쳐흘렀다.
032_0654_c_01L發日王與諸僧大臣百姓等傾都送出城西王抱法師慟哭道俗皆悲傷離之聲振動郊邑
왕은 왕비와 백성들은 먼저 돌아가게 하고 자신은 대덕(大德)들과 함께 말을 타고 수십 리 밖에까지 전송하고 돌아갔다. 현장 법사가 지나가는 모든 나라 왕들의 예우는 모두 이와 같았다.
이로부터 서쪽으로 계속 나아가 무반성(無半城)113)과 독진성(篤進城)114)을 지난 뒤에 아기니국(阿耆尼國)115)으로 들어갔다.
032_0654_c_03L勅妃及百姓等還自與大德已下各乘馬送數十里而歸其所經諸國王侯禮重皆此類也從是西行度無半城篤進城後入阿耆尼國舊曰烏耆訛也
大唐大慈恩寺三藏法師傳卷第一
乙巳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1) 감인토(堪忍土) 또는 인계(忍界)라고도 한다. 사바세계(娑婆世界)의 번역으로, 중생이 사는 세계를 말한다.
  2. 2)2) 열반으로 이끌어 주는 여덟 가지의 바른 길을 가리키는 것으로, 정견(正見:바른 견해)ㆍ정사(正思:바른 사유)ㆍ정정진(正精進:바른 노력)ㆍ정념(正念:바른 기억)ㆍ정어(正語:바른 말)ㆍ정업(正業:바른 행위)ㆍ정명(正命:바른 생활)ㆍ정정(正定:바른 명상) 등이다. 8지성도(支聖道)ㆍ8성도분(聖道分)ㆍ8현성도(賢聖道)ㆍ8정성로(正聖路)ㆍ8정법(正法)ㆍ8직도(直道)ㆍ8품도(品道)ㆍ8성도(聖道)라고도 한다.
  3. 3)3) 세 가지 해석이 있다. ①약리(約理)로 해석한 것으로, 방(方)은 방정(方正), 등(等)은 평등이다. 이 뜻에 인하므로 방등은 일체(一切) 대승경(大乘經)의 통명이다. ②약사(約事)로 해석한 것으로, 방은 광(廣)의 뜻이고, 등(等)은 균(均)이라는 뜻이다. ③약사리(約事理)로 해석한 것으로 방은 방법(方法)의 뜻이며, 유문(有門)ㆍ공문(空門)ㆍ쌍역문(雙亦門)ㆍ쌍비문(雙非門) 4문(門)의 방법을 말한다. 등(等)은 평등의 이체(理體)이며 사문의 방법에 의하여 각각 평등의 이(理)에 계합한 것을 방등이라 한다.
  4. 4)4) 성불(成佛)하는 유일의 교(敎)라는 뜻이다. 승(乘)은 부처님의 교법에 비유한 것이다. 교법은 사람을 실어서 열반안(涅槃岸)에 나르므로 수레라고 한 것이다.
  5. 5)5) 대승의 진실 원만한 교의를 종지로 하는 종파를 가리키는 것으로, 예를 들면 화엄이나 천태(天台) 같은 종파는 자칭 원교(圓敎)의 종(宗)이라고 한다. 후세에는 천태종(天台宗)을 부르는 말로 주로 쓰였다.
  6. 6)6) 보살이 수행하여 성불하기까지 총 52단계의 수행 중에서 제41부터 제50 단계까지를 10지라 한다. 10지는 차례대로 초지(初地), 2지, 3지 등으로 부르기도 하고, 제1 환희지(歡喜地), 제2 이구지(離垢地), 제3 명지(明地), 제4 염지(焰地), 제5 난승지(難勝地), 제6 현전지(現前地), 제7 원행지(遠行地), 제8 부동지(不動地), 제9 선혜지(善慧地), 제10 법운지(法雲地)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10지에 이르러서야 보살은 비로소 불성(佛性)을 보며 중생을 구제하고 지혜를 갖추기 때문에, 10성(聖)이라 하며 성인의 칭호를 받는다. 제41 단계에 오르기 전의 보살은 지전(地前)의 보살이라 하며, 마침내 제41 단계에 오른 보살은 등지(等地)의 보살, 10지에 있는 보살은 지상(地上)의 보살이라고 구분하여 부른다.
  7. 7)7) 진전(眞詮)이라고도 쓴다. 전(詮)이란 밝게 드러낸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밝게 드러내는 글을 진전이라고 한다. 『종경록(宗鏡錄)』 제26권에 나온다.
  8. 8)8) 『법화경(法華經)』 7유(喩)의 하나이다. 여러 사람들이 보배 있는 곳을 찾아가는데, 길이 험하여 사람들이 피로해 하였다. 그때에 길잡이가 한 계교를 내어 신통력으로써 임시로 큰 성(城)을 만들어 여기가 보배 있는 곳이라고 말하자, 사람들이 대단히 기뻐하며 그 성에서 쉬었다. 길잡이는 사람들의 피로가 풀린 것을 보고는 그 화성을 없애버리고, 다시 진짜 보배가 있는 곳까지 가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 화성을 방편교(方便敎)의 깨달음에, 진짜 보배가 있는 곳을 진실교(眞實敎)의 깨달음에 비유한다.
  9. 9)9) 『화엄경』의 한역본은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와 실차난타(實叉難陀)의 번역본으로 크게 대분된다. 전자는 번역된 권수가 60권이기 때문에 『60화엄』이라 부르기도 하고, 또한 번역된 시대가 동진(東晋)이므로 ‘진경(晋經)’이라 부르는 반면, 후자는 권수가 80권이라서 『80화엄』 또는 당나라 때의 번역이기 때문에 ‘당경(唐經)’이라 부르고 있다. 그 외에도 반야(般若)가 번역한 『40화엄』이 있으나, 이것은 대본(大本)의 「입법계품」에 해당하는 부분적인 번역이다. 『60화엄』은 칠처팔회(七處八會), 즉 일곱 장소에서 여덟 번의 법회를 한 34품으로 구성되어 있고, 『80화엄』은 칠처구회(七處九會), 즉 일곱 장소에서 아홉 번의 법회를 한 39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화엄경』을 말한다.
  10. 10)10) 부처님께서 성도 하신 후 녹야원에서 성문들을 위하여 고(苦)ㆍ집(集)ㆍ멸(滅)ㆍ도(道)의 4제법(諦法)을 세 단계로 설하였다고 한다. 첫째 4제가 이런 것이다고 제시하여 보여주는 것을 시(示)라 하고, 둘째 4제를 이렇게 관하고 닦으라고 방법을 일러주는 것을 관(觀)이라 하며, 셋째 나는 이렇게 증득했다고 경험을 일러주는 것을 증(證)이라고 한다. 소승법을 설하실 때에 이렇게 세 단계로 법륜을 굴리셨는데, 이런 교수법에 의해 상근기는 시에서 깨닫고 중근기는 관에서, 하근기는 증에서 발심한다.
  11. 11)11) 승(乘)은 타는 수레 따위를 말하는 것이니, “법의 수레를 타고 깨달음의 저 언덕, 즉 피안(彼岸)에 이르게 한다”는 뜻이다. 성문승(聲聞乘)과 연각승(緣覺乘), 보살승(菩薩乘)을 3승이라고 하는데 대하여, 성문승(聲聞乘)과 연각승(緣覺乘)을 2승이라 한다. 대개 1승이란 부처님의 참된 가르침은 유일(唯一)하므로, 이 가르침에 의하여 모든 사람이 한결같이 성불한다는 것이다. 3승은 중생의 성질과 능력에 응하여 성문과 연각과 보살에 각각 고유한 깨달음이 있다는 뜻이다. 즉 대개는 1승(무상대도)이 진실이고, 2승과 3승은 중생의 근기에 따라 일불승에 이르게 하여 성불하게 하는 방편설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12. 12)12) 『부법장인연전(付法藏因緣傳)』 6권을 말하는 것으로, 5세기 북위(北魏)의 승려 길가야(吉迦夜)와 담요(曇曜)가 함께 편찬하였다. 부법장전(付法藏傳) 혹은 부법전(付法傳)이라고 줄여 부르기도 하며, 부법장경(付法藏經)이라고도 한다. 이 책은 부처님이 입멸한 뒤 인도에서의 정법의 부촉(付囑)과 수지(受持), 즉 부법(付法) 상승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부처님이 입멸한 뒤 마하가섭과 아난 등을 거쳐서 사자(師子) 비구에 이르기까지 23조(祖)에 걸친 정법 계승의 인연들을 담고 있는데, 23조의 이름과 순서는, 제1조 마하가섭, 제2조 아난, 제3조 상나화수(商那和修), 제4조 우바국다(優波鞠多), 제5조 제다가(提多迦), 제6조 미차가(彌遮迦), 제7조 불타난제(佛陀難提), 제8조 불타밀다(佛陀蜜多), 제9조 협(脇) 비구, 제10조 부나사(富那奢), 제11조 마명(馬鳴), 제12조 비라(比羅), 제13조 용수(龍樹), 제14조 가나제바(迦那提婆), 제15조 나후라(羅睺羅), 제16조 승가난제(僧伽難提), 제17조 승가야사(僧伽耶舍), 제18조 구마라타(鳩摩羅 ), 제19조 사야다(奢夜多), 제20조 바수반다(婆須槃陀), 제21조 마노라(摩奴羅), 제22조 학륵나(鶴勒那), 제23조 사자(師子) 등이다. 이 책의 내용은 인도 불교사의 정립에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으로서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13. 13)13) 범명은 Ānanda이며, 불타의 10대 제자 가운데 하나이다. 아난타(阿難陀)를 줄여서 아난이라고 부르며, 의역하면 환희(歡喜)ㆍ경희(慶喜)ㆍ무염(無染)이 된다. 불타의 사촌동생으로 출가 후 20년 동안 불타의 상수제자(常隨弟子)였다. 기억력이 좋아서 불타의 설법을 분명하게 기억하였으므로 다문제일(多聞第一)로 알려졌다. 아난은 날 때부터 용모가 단정하여 얼굴이 보름달 같았고 눈은 푸른 연꽃 같았으며 그 몸이 깨끗하게 빛나서 꼭 밝은 거울 같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출가한 후에도 여자들의 유혹에 계속 시달렸는데, 하지만 아난은 지조가 견고하여 범행(梵行)을 끝까지 지켰다고 한다.
  14. 14)14) 중인도 구시나게라국(拘尸那揭羅國)에 있는 아시다발제하(阿恃多跋提河)의 약칭이다. 석가(釋迦)가 이 강의 서안(西岸)에서 입멸(入滅)했다고 하는 강의 이름으로, 발제(跋提)라고도 한다.
  15. 15)15) 사라수림(娑羅樹林)을 말하는 것으로 사라(娑羅)라고도 한다, 범어 śāla를 음역한 것으로, 의역하면 견고(堅固)라는 뜻이 된다, 또 견림(堅林), 쌍수림(雙樹林), 학림(鶴林), 사고사영수(四枯四榮樹)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번역명의집(翻譯名義集)』 제3권에서는 “이 나무가 여름에나 겨울에나 시들지 않고 견고하므로 이름을 이렇게 지었다”고 하였다. 부처님께서 구시나게라성(拘尸那揭羅城) 발제하(跋提河) 물가에서 열반에 들 때에 그 침상의 네 주위에는 각각 한 뿌리의 사라수(娑羅樹) 한 쌍이 있었다고 한다. 이 숲이 바로 부처님께서 열반한 자리이다.
  16. 16)16) 수다라(修多羅)를 한역한 것이다.
  17. 17)17) 경(經)의 산문을 비유하여 경화(敬花)라 하고, 그 게송을 관화라고 한다. 수다라를 선(線)이라 하는데, 선은 꽃을 꿴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18. 18)18) 우바제사(優波提舍)ㆍ우바제사(優婆題舍)ㆍ우바제사(優婆替舍)ㆍ오바제삭(鄔波題鑠)ㆍ오바제삭(鄔波弟鑠) 등으로 쓰기도 한다. 논의(論議), 축분별소설(逐分別所說)이라고 번역한다. 부처님이 논의하고 문답하여 온갖 법의 모양을 명백히 말한 경문이라는 뜻이다.
  19. 19)19) 막는 것을 공이라 하고, 세우는 것을 유라 한다. 유무(有無)와 같은 뜻이다. 제법(諸法)이 인연(因緣) 때문에 생겨나고 존재하므로 유라고 하고, 제법이 인연의 화합으로 생겨나지만 본래 자성이 없으므로 공이라고 한다.
  20. 20)20) 모든 것이 무상하여서 실재하지 않는 것과 같이 사람도 죽으면 몸과 마음이 모두 없어져서 공무(空無)로 돌아간다고 고집하는 그릇된 소견이라는 뜻으로, 상견(常見)과 상대되는 말이다.
  21. 21)21) 2견(見) 가운데 하나로, 사람은 죽어도 자아(自我)는 없어지지 않으며 5온(蘊)은 과거나 미래에 상주불변(常住不變)하여 없어지는 일이 없다고 고집하는 그릇된 견해를 말하며, 단견(斷見)과 상대되는 말이다.
  22. 22)22) 아직 부처가 되기 전의 수행, 즉 성불하려는 지위에서 수행하는 것을 인지(因地)라고 한다. 또는 성불할 수 있는 인(因)을 수행하는 것이다. 본래는 수인(修因)이라고 하여 과증(果證)에 상대되는 말인데 그 어구가 전도되었다. 『자은전(慈恩傳)』 서(序)에 “인수로써 보여주고 과증으로써 밝혀준다”고 하였다.
  23. 23)23) 인위(因位)의 수행에 의해 과지(果地)의 증오를 얻는 것을 말한다.
  24. 24)24) 보살 이름으로 월광보살(月光菩薩)과 함께 약사여래의 양협사(兩脇士)가 되어 왼쪽에서 모시고 있다. 현장(玄奘)이 번역한 『약사경(藥師經)』에 “그 나라에 두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있는데, 하나는 일광편조(日光遍照)이고 또 하나는 월광편조(月光遍照)이다. 이들은 저 무량 무수한 보살들 가운데 우두머리이다”라고 하였다.
  25. 25)25) 가섭마등(迦葉摩騰)을 말한다. 중인도 사람으로 후한 영평(永平) 10년(67)에 축법란(竺法蘭)과 함께 중국에 와서 처음으로 불교를 전했다고 한다.
  26. 26)26) 성은 축(竺), 이름은 법란(法蘭)이다. 중인도 사람으로 한나라 명제(明帝) 영평(永平) 10년(67)에 가섭마등(迦葉摩騰)과 같이 중국에 와서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을 번역한 사람이다.
  27. 27)27) 부처님 10대제자 가운데 해공제일(解空第一), 또는 무쟁제일(無諍第一)이라는 수보리(須菩提)를 말한다.
  28. 28)28) 문수사리보살(文殊師利菩薩)의 한역 이름이다.
  29. 29)29) 2공(空)은 ①인공(人空)과 법공(法空), ②성공(性空)과 상공(相空)을 말한다.
  30. 30)30) 오천(五天)이라고 줄여서 부르기도 한다. 동ㆍ서ㆍ남ㆍ북ㆍ중 오방의 천축(天竺)을 가리킨다. 즉 동천(東天)ㆍ서천(西天)ㆍ남천(南天)ㆍ북천(北天)ㆍ중천(中天)을 말한다. 『서역기(西域記)』에 “5인도의 국경은 주위가 9만 4리나 되며 세 곳이 바다에 연한다. 북은 설산(雪山)으로 넓고 남은 좁으며 모양은 반달과 비슷하다”고 하였다. 여기서 5방의 분배는 지금과는 다르다.
  31. 31)31) 내(柰)라고 하는 것은 암라수원(菴羅樹園), 즉 암라나무 숲에 지어진 정사를 말하는 것이다. 지금은 불사를 내원이라고 부른다. 룸비니라고도 하며 중인도 가비라위성(迦毘羅衛城)에 있었던 숲의 이름이다. 석가모니가 탄생한 장소로서 성지(聖地)이다. 현재 네팔의 남부 타라이 지방에 있는데, 남비니(藍毘尼)ㆍ남비니원(藍毘尼園)ㆍ유비니(流毘尼)ㆍ유미니(留彌尼)라고도 하며, 가애(可愛)ㆍ화향(花香)ㆍ해탈처(解脫處)라고 번역한다.
  32. 32)32) 인도 마갈타국(摩竭陀國) 왕사성(王舍城)의 동북에 있으며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하였다고 하는 산이다. 취령(鷲嶺)ㆍ취봉(鷲峰)ㆍ취암(鷲巖)ㆍ취악(鷲嶽)ㆍ취대(鷲臺)ㆍ영산(靈山)ㆍ영취산(靈鷲山)ㆍ기사굴산(耆闍崛山)이라 하는데, 산정에 독수리가 많아서 왕사성 사람들이 이렇게 불렀다고 한다.
  33. 33)33) 인도의 선후지(獮猴池)를 말한다.
  34. 34)34) 중천축 바라나국(波羅奈國)에서 부처님이 성도한 후 처음 이곳에 와서 4제(諦)의 법을 설하여 교진여(憍陳如) 등 5비구를 제도하였다. 또 예로부터 선인이 처음 법을 설한 곳이라 하여 선인논처(仙人論處), 선인이 주석한 곳이라 하여 선인주처(仙人住處)라 한다. 옛적에 5백 선인이 왕의 음녀들을 보고 욕정이 발하여 신통을 잃고 이곳에 떨어졌다 하여 선인타처(仙人墮處)라고 하며, 많은 사슴이 서식하였다 하여 녹림(鹿林)이라 하고, 또 범달다왕(梵達多王)이 이 숲을 사슴에게 시여(施與)했다고 하여 시록림(施鹿林)이라고도 한다.
  35. 35)35) 부처님이 탄생한 곳이다.
  36. 36)36) 당(唐) 나라 때의 승려(615-?)로, 감숙(甘肅) 진주(秦州) 서남의 천수(天水) 사람이다. 속성은 조(趙), 본명은 자립(子立)이다. 혜립(慧立)은 고종(高宗)이 칙명으로 내린 이름이며, 혜립(惠立)이라고도 부른다.
  37. 1)1) 고대 중국에서는 옥문관(玉門關)과 양관(陽關)의 서쪽 지역을 총칭하여 서역이라고 불렀다. 좁은 의미로는 지금의 신강(神疆)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고, 넓은 의미로는 지금의 신강을 경유하여 갈 수 있는 모든 지역, 즉 중앙아시아, 서부, 인도반도, 유럽동부, 아프리카 북부 등을 두루 지칭한다. 여기서는 전자의 뜻으로 쓰였다.
  38. 2)2) 중국 신강성(新彊省) 지방에 있던 옛 나라 이름이다.
  39. 3)3) 중국 하남성(河南省) 진류현(陳留縣)을 말한다. 지금의 하남성 개봉(開封) 동남쪽에 있다.
  40. 4)4) 태구는 지금의 하남성 영성(永城) 서북쪽에 있다.
  41. 5)5) 동한(東漢) 진식(陳寔)의 자(字)이다.
  42. 6)6)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장치(長治)와 그 주변 지역을 말한다.
  43. 7)7) 국가 교육 기구인 국자감(國子監)에서 유가 경전의 교육을 담당하는 관원이다.
  44. 8)8) 중국 하남성(河南省) 낙양현(洛陽縣)을 말한다.
  45. 9)9)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 왕족이나 공신(功臣), 봉작자 등에게 일정한 지역을 나누어 봉해 주는 제도로, 식봉(食封)이라고도 한다. 중국에서는 진(秦), 한(漢) 시대부터 봉작(封爵)에 따라 채읍(采邑)을 주어 채읍 내의 조세(租稅)를 수취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채읍에 대한 지배권은 거의 없었으며, 당(唐) 나라까지 이러한 형태의 식읍제도가 이어졌다.
  46. 10)10)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언사(偃師) 동남쪽에 있다.
  47. 11)11) 후한의 학자 곽태(郭泰, 128-169), 자는 임종(林宗)이다.
  48. 12)12) 서한(西漢) 양웅(揚雄)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롭기로 이름이 났었다.
  49. 13)13) 수(隋) 양제(煬帝)가 낙양(洛陽)을 동도로 삼았다.
  50. 14)14) 중앙 심판 기구인 대리시(大理寺)의 우두머리이다.
  51. 15)15) 『구당서(舊唐書)』 62권, 『신당서(新唐書)』 100권 「정선과전(鄭善果傳)」에 “정주(鄭州) 영양인(榮陽人)으로, 대리경이 되었다. 당이 흥왕하자 태자 좌서자가 되어 정관(貞觀) 초에 기주(岐州) 및 강주자사(江州刺史)가 되었다”고 되어 있다.
  52. 16)16) 석도기(釋道基)와 동문, 또는 그의 제자인 혜경(慧景)이 아닌가 싶다. 『전(傳)』 14권, 「석도기전(釋道基傳)」에 “그때에 팽문촉루(彭門蜀壘)에 복귀한 혜경과 보섬(寶暹)이라는 자가 있었다”라는 말이 있다.
  53. 17)17) 저자는 무착(無着)이며 진제(眞諦)가 번역하였다. 대승이 불설(佛說)임을 논증하고, 소승보다 뛰어남을 선양하기 위해 아뢰야식설, 삼성설(三性說), 보살의 10지(地), 부처의 3신(身) 등을 정연하게 논하고 있다. 제목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반야 불교 및 유가 불교를 수용하여 대승 불교 전체를 하나의 정연한 조직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아비달마대승경(阿毗達磨大乘經)』의 「섭대승품」을 해석한 것이라고 하지만 『아비달마대승경』은 전해지지 않는다. 이 불전은 법상종(法相宗) 소의 11논 중 하나이다.
  54. 18)18) 걸(桀)은 하(夏) 나라 마지막 황제로, 은(殷) 나라의 주(紂)왕과 함께 폭군의 대표적 인물로 자주 인용된다.
  55. 19)19) 도척(盜跖)의 약칭인데, 춘추 말기의 전설적인 큰 도적이다. 흔히 도척(盜跖)이라고 불린다.
  56. 20)20) 왕망은 기원전 45년에서 기원후 23년까지의 인물로 전한(前漢)의 찬탈자이다.
  57. 21)21) 동탁은 후한 말 군웅(群雄)의 한 사람으로, 소제(少帝)를 폐하고 헌제(獻帝)를 세워 전권을 휘둘렀다.
  58. 22)22) 유연(?-310)은 남흉노 출신으로 5호 16국 중 한의 창시자이다.
  59. 23)23) 석륵(273-332)은 갈족(猲族) 출신으로 후조(後趙)의 창시자이다.
  60. 24)24)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태원(太原) 지역이다.
  61. 25)25) 손(孫)은 손무(孫武)인데, 춘추시대의 군사가이다. 오(吳)는 오기(吳起)를 말하며, 전국시대의 군사가이다. 고대에 이 두 사람의 병술로 용병의 방략(方略)을 대표하였다.
  62. 26)26) 혜경(慧景)ㆍ경탈(敬脫)ㆍ도기(道基)ㆍ보섬(寶暹)을 말한다. 혜경과 보섬은 『전』 14권 「도기전(道基傳)」에 그 이름만 보이고, 경탈(555-617)은 『전』 12권에 「경탈전」이 있다. 급군(汲郡) 사람으로서 『성실론(成實論)』에 통달하였다. 도기(573-637)는 하남 동평(河南東平) 사람으로 『섭론(攝論)』에 통달한 인물이다.
  63. 27)27) 면주(綿州), 즉 사천성(四川省) 면양현(綿陽縣) 동쪽 일대를 가리킨다. 촉(蜀)은 지금의 사천성(四川省) 성도(成都)와 그 주변 지역을 가리킨다.
  64. 28)28)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장안현(長安縣) 서남쪽 백리 거리의 진령산(秦岭山)에 있는 골짜기이다.
  65. 29)29)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남정현(南鄭縣)이다.
  66. 30)30) 혜경(慧景)을 말한다.
  67. 31)31) 가전연(迦旃延)의 『아비담팔건도론(阿毘曇八犍度論)』을 가리킨다. 『아비달마발지론(阿毘達磨發智論)』의 구역(舊譯)이다.
  68. 32)32) 오(吳)는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남부와 절강성(浙江省) 동부 지역을 가리키고, 촉(蜀)은 지금의 사천성(四川省)이며, 형초(荊楚)는 지금의 호북성(湖北省)을 가리킨다.
  69. 33)33) 후한 말기 사람(?-169)이다. 하남윤(河南尹) 어양(漁陽) 태수와 촉군(蜀郡) 태수 및 사교위(司校尉) 등을 역임하였는데, 절개 있기로 소문이 났다. 청렴한 선비의 중심인물이 되어 당고(黨錮)의 옥에 영원히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후한서(後漢書)』 97권에 나온다.
  70. 34)34) 후한의 청은유덕(淸隱有德)한 선비(128-169)로, 하남윤 이응과 교류하여 유명해졌으나 벼슬에 오르지 않아 당고의 옥살이를 면했다. 『후한서』 98권에 나온다.
  71. 35)35) 『전(傳)』에는 익남(益南)으로 되어 있다.
  72. 36)36) 수(隋)와 당(唐) 초엽에 각주에 설치하였던 고급 군정장관을 말한다.
  73. 37)37) 총관(總管) 두탄(竇誕)의 봉작이다.
  74. 38)38) 여덟 방위의 멀고 너른 범위라는 뜻으로, 온 세상을 이르는 말이다. 『회남자(淮南子)』 「지형훈(墬形訓)」에 “팔인(八殥)의 밖에 팔굉(八紘)이 있는데 역시 사방 천 리가 된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는 인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75. 39)39) 중국 동진(東晉)의 승려(334-416)로, 21세에 그의 동생인 혜지(慧持)와 함께 도안 법사 문하로 들어갔다. 병란을 피해 스승과 헤어져 여산으로 들어가 동림사(東林寺)에서 30여 년을 주석하였다. 그 동안 손님을 전송할 때도 호계(虎溪) 이상 산을 내려가는 일이 없었다. 불법홍포에 전념하여 원흥 원년(402) 유유민(劉遺民), 주속지(周續之) 등 230명의 도속들과 함께 결사하여 염불을 행하였다.
  76. 40)40) 은(殷)과 주(周)의 교체기에 광속(匡俗)의 형제 7인이 이곳에 초막을 짓고 선도(仙道)를 닦았던 고사가 있어서, 보통 광속형제(匡俗兄弟)라고 한다. 그래서 여산형제를 광속형제로 보는 설도 있지만, 여기서는 형제의 출가수행을 말하므로 혜원의 형제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77. 41)41) 현장이 무덕 5년(622)에 성도에서 구족계를 받았다는 것은 『전(傳)』ㆍ『행장(行狀)』ㆍ『탑명(塔銘)』의 기록이 모두 일치한다. 그러나 이 해가 『전』이나 『행장』에서 말한 것처럼 만 20세라고 하면 본서 10권에 있는 인덕(麟德) 6년 65세에 목숨을 마쳤다는 설과 맞지 않게 된다.
  78. 42)42) 구족계를 죄과에 따라 5편으로 하고, 그 죄의 성격과 죄의 원인을 7취(聚)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의 총칭이 된다.
  79. 43)43) 지금의 사천성(泗川省) 성도(成都) 일대이다.
  80. 44)44) 중국 양자강에 있는 구당협(瞿塘峽), 무협(巫峽), 서릉협(西陵峽)의 세 협곡을 말한다. 사천성(四川省) 봉절(奉節)에서 호북성(湖北省) 의창(宜昌)에 이르는 사이에 있으며, 옛날부터 항해가 어려운 곳으로 유명하다. 총 길이가 204km에 달한다.
  81. 45)45) 호북성(湖北省) 강릉현(江陵縣)이다.
  82. 46)46)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안양(安陽)이다.
  83. 47)47) 하북성(河北省) 조현(趙縣)이다.
  84. 48)48)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을 말한다. 세친(世親)의 저작으로 후에 현장(玄奘)이 번역하였다. 소승 부파 불교에서 가장 중시되는 논서로, 3세(世) 실유론(實有論)에 입각하여 다른 부파의 교설 및 외도의 주장들을 낱낱이 논파하고 있다. 전체 내용은 게송과 그에 대한 해설들로 구성되어 있다. 다만 마지막 품인 제9 「파집아품(破執我品)」은 게송 없이 논술로만 이루어져 있다.
  85. 49)49) 당나라의 승려(567-645)이다. 남양(南陽) 백수(白水) 사람으로 속성은 장(張)씨이다. 19세에 담연(曇延)에게서 머리를 깎았다. 정관(貞觀) 연간(627-649)에 역장(譯場)의 역경(譯經)에 참여하였다,
  86. 50)50) 대승(大乘)과 소승(小乘)을 말한다.
  87. 51)51) 범어(梵語)로는 tisraḥ śikkhā라고 한다. 불교 공부를 하는 사람이 반드시 닦아야 할 계(戒)ㆍ정(定)ㆍ혜(慧) 3학을 말한다. 3승학(勝學)이라고도 하고, 계정혜삼학(戒定慧三學)이라고도 한다.
  88. 52)52) 미륵(彌勒)의 저술로 후에 현장(玄奘)이 번역하였다. 유가행자(瑜伽行者)의 경(境)ㆍ행(行)ㆍ과(果) 및 아뢰야식설, 삼성설(三性說), 삼무성설(三無性說), 유식설 등을 자세히 논한다. 이 불전은 미륵보살이 무착(無着)을 위해 중천축(中天竺)의 아유사(阿踰闍) 대강당에서 4개월에 걸쳐 매일 밤 강설한 것이라고 한다. 『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毘達磨大毘婆師論)』이 소승 불교의 사상을 대표하고, 『대지도론(大智度論)』이 대승 불교가 발흥하던 시대의 사상을 대표함에 대해서, 대승 불교가 완성되고 있던 시대의 사상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유식 학파의 중도설과 연기론 및 3승교(乘敎)의 근거가 되는 불전이다.
  89. 53)53) 진대(晉代)의 승려로, 평양(平陽) 무양(武陽) 출신이다. 성은 공(龔)씨이다. 세 살 때에 승려가 되어 경전을 연구하다가 경률이 구비되지 못한 점을 느끼고, 동진(東晋) 융안(隆安) 3년(399)에 동학인 혜경(慧景), 도정(道整), 혜응(慧應) 등과 함께 장안을 출발 서역으로 향했다가 불루사(弗樓沙)에서 동행과 헤어져 홀로 펀잡을 지나 불적(佛蹟)을 순례하면서 경률을 쓰기에 힘을 다하였다. 마갈타국에 3년간 머물며 『마하승기율(摩訶僧祗律)』, 『유부율(有部律)』, 『니원경(泥洹經)』, 『잡아비담심론(雜阿毘曇心論)』 등을 구하여 연구하고, 나란타대학에서 2년간 수학하고 석란도(錫蘭島, Ceylon, 실론)에 건너가 2년간 『오분률(五分律)』, 『장아함경(長阿含經)』과 『잡아함경(雜阿含經)』 등을 얻어 가지고 귀환하다가 갖은 고초를 겪으며 해로로 사자국(師子國)을 거쳐 동진(東晋) 의희(義熙) 9년(413)에 청주(靑州)에 돌아왔다. 그 뒤부터 서역 순례승이 많아지면서 경전의 전파와 번역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귀국 후 도량사(道場寺)에서 『마하승기율』 『방등경(方等經)』 『니원경』 『잡아비담심론』 등을 역출하고 뒤에 형주(荊州)의 신사(辛寺)에서 86세로 입적하였다.
  90. 54)54) 중국 동진 시대의 승려(358-437)로, 양주(楮州) 사람이다. 법현과 전후하여 간다라로 건너가 불타선(佛陀先)에게서 수학하고 동문인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를 데리고 장안으로 돌아왔다. 뒤에 남방에서 『보요경(普曜經)』 등 14부를 번역하고 다시 인도로 건너가 간다라에서 목숨을 마쳤다.
  91. 55)55) 본전(本傳) 각 판본의 『전』과 『행장』 등에서는 모두 출발을 정관 3년(629)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광홍명집(廣弘明集)』만은 정관 6년(627)으로 되어 있다.
  92. 56)56) 산스크리트 Sumeru의 음역으로 수미산(須彌山), 수미루(修迷樓), 수미루(須彌樓) 등으로 음사(音寫)하고 묘고산(妙高山)이라 한역한다. 인도 신화 중에 나오는 상상의 산으로 불교에서 채용되었다. 산 정상에 호법신인 제석천(帝釋天)이 산다고 한다.
  93. 57)57)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천수(天水)이다.
  94. 58)58) 감숙성(甘肅省) 여란현(驢蘭縣)이다.
  95. 59)59) 감숙성(甘肅省) 무위현(武威縣)에 있으며, 고장(姑藏)이라고 한다. 하서지방 동쪽 끝에 있는 오아시스로서 동서교류사에 있어 중요한 도시의 하나이다.
  96. 60)60) 지금의 감숙성과 청해성(靑海省)으로 황하의 서쪽 지역이다. 이곳에는 양주(涼州)ㆍ감주(甘州)ㆍ숙주(肅州)ㆍ과주(瓜州)ㆍ사주(沙州) 등 다섯 개의 주요한 오아시스가 멀리 서쪽에 점재(點在)하고 있어 예부터 동서 교통의 중요한 주요로를 형성하고 있었다.
  97. 61)61) 지금의 신강성(新疆省) 서장족(西藏族)을 가리킨다.
  98. 62)62) 총령(蔥嶺) 서쪽, 지금의 동파키스탄 지역을 가리킨다.
  99. 63)63) 인도를 말한다.
  100. 64)64) 당조(唐朝) 전기에 주(州)의 군정(軍政)을 맡던 수장이다.
  101. 65)65) 경조 경양(京兆涇陽) 사람(586-644)으로, 고조(高祖)에게 벼슬하여 무공을 세웠다. 정관(貞觀) 초에 교주자사(交州刺史)를 거쳐 양주 도독(都督)이 되었다. 뒤에 이정(李靖)과 토곡혼(吐谷渾)을 정벌할 때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이 되었다.
  102. 66)66) 감숙성 안서현(安西縣) 동남쪽에 있다. 원래 한나라의 주천군(酒泉郡)이었는데, 원정(元鼎) 6년 주천을 나누어 곽황군(敦煌郡)을 두었고 진나라의 혜제(惠帝)가 다시 두 군을 나누어 진창군을 두었다. 수나라의 개황 3년(583)에 군(郡)을 없애고 과주(瓜州)를 두었다가 또 당나라 무덕(武德) 5년(622)에 과주를 두었다. 후한의 이오로(伊吾路)를 개설한 이래 이오와의 교통 요지로서 번영하였다.
  103. 67)67) 주(州)의 행정 장관이다.
  104. 68)68) 소륵하(疏勒河)를 말한다.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서북부에 있는 강이다.
  105. 69)69) 옛날에 지금의 감숙성안서(安西) 쌍탑보(双塔堡) 부근에 있었다.
  106. 70)70) 이오(伊吾) 과주(瓜州) 사이에 있는 사막이다. 『원화군현지(元和郡縣志)』 40권 「이주편(伊州篇)」에 “동남으로 막하적로(莫賀磧路)를 취한다면 과주에 이르기 9백 리”라는 말이 있다.
  107. 71)71) 신강(新彊) 위그루 자치구 합밀현(哈密縣)이다. 후한 명제(明帝) 영평(永平) 16년(73)에 흉노를 정벌하여 이오로(伊吾盧)의 땅을 빼앗아 의화도위(宜禾都尉)를 두고 둔전을 개설하였다. 뒤에 위(魏)가 이오현을 세웠고, 진(晋)은 이오도위(伊吾都尉)를 두었다. 북위(北魏)와 북주(北周) 시대에는 선선인(鄯善人)이 이 땅에 이주하였는데, 수(隋) 나라 대업 6년(610)에 이 땅을 빼앗아 이오군으로 하였다. 정관 4년(630)에 이주(伊州)를 두었다.
  108. 72)72) 석반타(石槃陀)를 말한다. 호승(胡僧) 달마(達磨) 등 당시 하서지방에는 많은 이란계(系) 사람들이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대(唐代)에는 호(胡)를 이란 사람으로 지칭하였는데 이 책에서는 호를 외국의 총칭으로 하고 있다.
  109. 73)73) 불교에서 재가 신도들이 종신토록 준수해야 할 5조의 계율이다.
  110. 74)74) 서장(西藏)의 동북단에 있는 지명으로, 지금의 합밀(哈密) 땅이다. 약 2백리 거리에 감숙성(甘肅省) 과주(瓜州)와 마주하고 있다. 그 중간은 막하연(莫賀延) 사막이다.
  111. 75)75) 감숙성의 서쪽 끝에 있는 변경이다. 돈황의 서북(西北)쪽 117리에 있는 고관(故關)인데, 여기서 말하는 옥문관(玉門關)과는 다른 것 같다. 현장은 저녁 때 과주(瓜州)를 출발하여 교외에서 호(胡)의 노인을 만났으며 거기서 밤에 출발하여 3경(更) 무렵에 옥문관에 이르렀다고 되어 있어 당시의 옥문관은 과주 북쪽 30~40리 거리에 있었던 것 같다.
  112. 76)76) 당대(唐代)의 말직의 군관이다.
  113. 77)77) 고향을 뜻한다.
  114. 78)78) 인도를 말한다. 인도를 동서남북, 그리고 중으로 나누어 5천축이라고 부른다.
  115. 79)79) 국씨(麴氏)로 무덕 3년부터 정관 14년까지 재위(620-640)한 고창국(高昌國)의 8대왕이다. 『자은전(慈恩傳)』에서 이 부분은 멸망 전 고창의 실태를 나타내고 있으므로 귀중한 자료이다. 문태(文泰)는 당나라의 정토군(征討軍)이 적구(磧口)에 왔을 때 병사(病死)하였고, 그 아들 지성(智盛)이 뒤를 이었으나 곧 멸망하였다.
  116. 80)80) 우주의 일체 사물의 형상과 성질과 명칭과 개념 및 그 함의 등을 말한다.
  117. 81)81) 지금의 하북(河北)ㆍ산서(山西) 등지를 말한다.
  118. 82)82) 대승경전의 총칭이다. 경전에 기록된 내용이 방정(方正)하고 평등하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119. 83)83) 불타(佛陀)의 탄생지인 가유라위성(迦維羅衛城)의 약어이다. 지금의 네팔 다라이 지방의 티로라코트로 추정되고 있다. 불조 석가모니께서 출생한 땅이며,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에 대가섭과 1천 나한이 이곳에서 1차 결집을 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120. 84)84) 살타파륜(薩陀波崙)을 줄인 말로, 상제(常啼)보살로 한역되기도 한다. 『대반야경(大般若經)』 39권 8편에 따르면, 육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명리(名利)를 찾지 않으며 오직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만 구했다고 한다.
  121. 85)85) 선재동자(善財童子)를 말한다. 불보살 가운데 하나이다. 일찍이 문수(文殊)의 가르침을 받아서 53인의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보살을 증득하였다.
  122. 86)86) 파미르 지역을 말한다.
  123. 87)87) 산스크리트 prasenajit의 음사(音寫)로 승군왕(勝軍王)이라는 뜻이다. 석존과 같은 시대의 슈라바스티(śrāvastī:舍衛國)의 왕이다
  124. 88)88) 산스크리트 bimbisāra의 음사로 병사왕(甁沙王)이라고 하기도 하며, 영승왕(影勝王)이라고도 한역한다. 석존시대의 마가다 지역의 국왕이다. 바사닉왕과 빈바사라왕은 기원전 6세기 경 고인도의 국왕인데, 석가모니와 동시대를 살았던 불교의 적극적인 찬조자였다.
  125. 89)89) 불교에 출가한 사람의 친족이나 권속이 출가자가 필요한 물건을 공급하여 출가자가 도업을 닦아 성취하도록 하는 것이다.
  126. 90)90) 예전에 남자가 추위를 막기 위하여 얼굴에 쓰던 쓰개나 여자가 말을 타고 먼 길을 갈 때 얼굴을 가리기 위해 쓰던 쓰개이다.
  127. 91)91) 중국 한(漢) 나라 때에, 신장(新疆) 위구르(維吾爾) 자치구의 고차(庫車) 부근에 있던 나라로, 한나라에 예속된 적이 있으며 남북조 시대 및 당나라 초기에는 불교가 융성하였다. 구자(丘慈) 또는 구자(龜玆)라고도 한다.
  128. 92)92) 역전마(驛傳馬)의 별칭이다. 품종이 뛰어난 말이다. 원음은 밝혀지지 않았다.
  129. 93)93) 범어로는 tri-vidya, 파리어(巴利語)로는 ti-vijjā이다. ①또는 3달(三達)ㆍ3증법(三證法)이라고도 한다. 무학위(無學位)에 도달하여 어리석음을 다 제거하고 3사에 통달하여 걸림이 없는 지명(智明)을 말한다. 숙명지증면(宿命智證明), 생사지증명(生死智證明), 누진지증명(漏盡智證明)을 말한다. ②보살명(菩薩明)ㆍ제불명(諸佛明)ㆍ무명명(無明明)을 말한다. 북본(北本)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제18권에 의하면, 보살명은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고 제불면(諸佛明)은 불안(佛眼)이며 무명명(無明明)은 필경공(畢竟空)이라고 한다.
  130. 94)94) 범어 jñāna-divākara의 한역으로, 햇볕으로 부처님의 지혜가 중생에 두루 비추어 무명(無明)과 생사(生死)와 치암(癡闇)을 깨뜨리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혜광(慧光)ㆍ혜조(慧照) 등과 같은 뜻이다.
  131. 95)95) ①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중생의 근기(根機)에 맞는 모습으로 나타난 부처로, 현신(現身)이라고도 한다. ②삼신(三身)의 하나로, 과거세에 행한 수행의 과보(果報)로 얻는 몸을 이른다.
  132. 96)96) 만유 제법의 실상(實相)을 가리키는 말이다. 만유의 본체로서 있는 그대로의 평등한 진리이자 깨달음 그 자체이며, 모든 법을 갖추고 있는 진실한 모습을 뜻한다. 본래 여(如)라는 말은 ‘같다’는 의미의 술어에 불과하지만 불교에서는 사물의 진수(眞髓)를 가리키는 주어이자 명사로서 쓰인다. 범음(梵音)으로는 부다다타다(部多多他多)라고 한다.
  133. 97)97) 원문에는 등(騰) 한 글자로만 되어 있다. 중천축 사람 카샤파 마탕가(Kāśyapa- mātaṅga)이다. 영평(永平) 10년(67)에 낙양으로 와서 백마사(白馬寺)를 짓고 경전을 번역했다고 한다. 중국에 최초로 불법을 전한 자로 알려져 있다. 축섭마등(竺葉摩騰)ㆍ섭마등(攝摩騰)ㆍ마등(摩騰)이라고도 한다. 『양고승전(梁高僧傳)』 제1권에 나온다.
  134. 98)98) 원문에는 회(會) 한 글자만 있다. 강거국(康居國) 사람 상가발만(Samghavarman)을 말한다. 중국 삼국시대의 불경을 번역하였던 승려(?-280)로 오(吳) 나라에 불교를 전파하였다. 적오(赤烏) 10년(247) 오나라의 서울인 건업(建業)으로 와서 건초사(建初寺)를 건립하였고, 번역집으로는 『육도집경(六度集經)』 등이 있으며 저서에 『법경경주해(法鏡經注解)』 등이 있다.
  135. 99)99) 원문에는 참(讖) 한 글자만 있다. 중천축 사람 달막세마(Dharmarakṣama, 385-433)를 말한다. 선선국(鄯善國)과 돈황을 거쳐 412년에 고장(姑藏)의 북량에 와서 국사(國師)를 맡으며 정치 고문으로도 활약하였다. 『열반경』ㆍ『금광명경(金光明經)』ㆍ『불소행찬(佛所行讚)』 등을 한역하였다.
  136. 100)100) 원문에는 집(什) 한 글자만 있다. 자국(龜玆國) 사람 쿠마라지바(Kumārajīva, 350-409)를 말한다. 전진(前秦)의 부견(苻堅)이 데려갔으나 도중에 전진이 멸망하였으므로 전량(前涼)에 머물다가 401년 후진왕의 부름을 받고 장안으로 갔다. 그가 번역한 경전은 3백 권이나 되며, 문하생이 3천 명이었다 한다. 『중론』ㆍ『백론』ㆍ『십이문론』ㆍ『대지도론』ㆍ『법화경』ㆍ『아미타경』ㆍ『유마경』ㆍ『십송률』 등 많은 중요경전을 번역하여 초기역경과 전도사상 중요한 인물이다.
  137. 101)101) 저본에는 쌍림(雙林)으로 되어 있다.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 밑의 교지를 말한 것이다.
  138. 102)102) 남종선(南宗禪)의 줄임말로 중국의 선종에서 제6조 혜능(慧能, 638-713)을 계승한 수행의 전통이다. 제5조 홍인(弘忍)의 두 제자로부터 유래한 남북 양종 중에서, 장안(長安)이나 낙양(洛陽) 등의 북방에서 번성한 신수(神秀)의 종풍에 대립하여 강남(江南)의 남방에서 성행한 혜능의 종풍을 말한다. 오가칠종(五家七宗)으로 발전하여 융성한 중국 선종의 주류가 되었다. 남종선은 불립문자(不立文字)와 돈오(頓悟)를 표방했다. 수행자가 각기 지니고 있는 불성을 깨달을 때 그대로 부처가 된다는 돈오를 표방하여, 점오(漸悟)를 표방한 신수의 북종선을 압도하였다. 아울러 불립문자의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가르침을 전하는 사제(師弟) 관계를 중시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조사들의 유명한 언행을 공안(公案) 또는 화두(話頭)로 삼아 수행하는 간화선(看話禪)이 유행하면서, 남종선은 조사선(祖師禪)으로 불리게 되었다.
  139. 103)103) 북종선(北宗禪)의 줄임말이다. 중국의 선종에서 신수(神秀, 606-706)를 계승한 수행의 전통이다. 제5조 홍인(弘忍)의 두 제자로부터 유래한 남북 양종 중에서, 강남(江南)의 남방에서 융성한 혜능(慧能)의 종풍에 대립하여 장안(長安)이나 낙양(洛陽) 등의 북방에서 융성한 신수의 종풍이다. 북종선의 특징은 자기 마음을 대상으로 삼아 관찰하는 관심(觀心)과 단계적인 수도를 설하는 점수점오(漸修漸悟)이다. 단계를 밟아 점진적으로 수행하여 성불한다는 북종선의 수행관을 북점(北漸), 이와 반대되는 남종선의 수행관을 남돈(南頓)이라고 한다. 북종선은 초기에는 번성하였으나 나중에는 남종의 우세에 밀리게 되었고, 당나라 중기 이후에는 선종이라 하면 주로 남종을 가리키게 되었다. 북종이라는 명칭은 후세에 신회(神會)가 자신의 계통이 정통임을 주장하기 위해 스승인 혜능이 남방에서 종풍을 떨쳤음에 근거하여 ‘남종’이라 자칭한 데에서 유래한다. 여기에는 남종을 우월시하고 북종을 열등시하는 가치 판단도 함축되어 있다. 이 때문에 북종에 속하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북종이라 칭한 사실은 없고, 오히려 남종이라 칭한 사실도 있다. 명나라 말기에 자율적인 문인화(文人畵)의 전통을 ‘남종화’라고 부르고, 학구적이며 정교하고 장식적인 화풍을 ‘북종화’라고 폄칭했던 것도 여기서 유래한다.
  140. 104)104) 고대 중인도의 교살라국(憍薩羅國) 사위성(舍衛城)의 남쪽에 자리했던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을 말한다. 기수(祇樹)란 기타 태자가 소유했던 수림(樹林)을 뜻하고, 급고독원(給孤獨園)이란 급고독(給孤獨) 장자 즉 수달(須達) 장자가 헌납한 승원이라는 뜻이다. 기원정사(祇園精舍), 기수정로(祇樹精盧), 기타정사(耆陀精舍), 서다림급고독원(誓多林給孤獨園), 기타원(祇陀園), 기원아난빈지아람, 기타바나(祈陀婆那), 기원(祇園), 급고독원(給孤獨園), 고독원(孤獨園) 등으로 불린다.
  141. 105)105) 범어(梵語)의 음을 따서 기사굴산(耆闍堀山)이라고도 하고 뜻으로는 영취산(靈鷲山), 취봉영산(鷲峰靈山)이라 번역한다. 이 산은 중인도(中印度) 마갈타의 서울 왕사성(王舍城) 동북쪽 10리 지점에 있다.
  142. 106)106) 전한시대의 로푸와놀 서북 호반(湖畔)에 있던 나라로, 왕도(王都) 크로라이나를 B.C.77년에 선선(鄯善)이라고 개명(改名)하였다.
  143. 107)107) 중국 전국(戰國) 시대에서 한(漢) 나라 때까지 중앙아시아 아무다르야강 유역에서 활약한 이란계 또는 투르크계의 민족이다. 한(漢) 나라 전적에는 “처음에는 돈황과 기연(菽連) 사이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최근에는 타림 익지일대(益地一帶)를 덮고 있던 큰 세력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144. 108)108) 고창(高昌) 지방의 옛 이름이다. 한나라 시대 이 지방은 차사(車師) 전부와 후부로 나뉘어, 전부는 지금의 투루판 지방의 교하성(交河城)을 도성(都城)으로 하고, 후부는 천산(天山) 북쪽 기슭의 제목살(濟木薩) 부근에 있었다. 고사(姑師)라고도 한다. 전부는 450년 저거씨(沮渠氏)에게 망하고 고창국을 건국했다.
  145. 109)109) 인더스강 상류 길기트로부터 다렐에 이르는 험한 길을 말한다.
  146. 110)110) 능산(凌山)의 계곡을 가리킨다. 능산은 아크스에서 이식클호(湖)로 향하는 패달 고개를 말한다.
  147. 111)111) 중인도 산카샤의 삼도보계(三道寶階)를 가리킨다. 삼도보계는 삼도장제(三道場梯)라고도 한다. 삼도(三道)의 보배계단이란 뜻으로 부처님이 어머니 마하마야(摩訶摩耶)를 위해서 도리천(忉利天)에 올라가 설법을 하시고 하늘을 내려올 때 제석천(帝釋天)이 만든 금과 은과 유리로 만든 세 길의 계단을 말한다.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과 『유마경(維摩經)』에 나온다.
  148. 112)112) 붓다가야의 보리수를 말한다.
  149. 113)113) 잠중면(岑仲勉)ㆍ홍기창씨(嶋崎昌氏) 등은 투루판과 톡슨 사이의 포간(布干)으로 추정한다.
  150. 114)114) 지금의 톡손[特克遜]을 말한다. 현장은 소위 『서주도경(西州圖經)』에 나오는 은산도(銀山道)를 따라 포간으로부터 톡슨을 경유하여 아기니국(阿耆尼國)으로 갔던 것이다.
  151. 115)115) 일명 언기(焉耆) 또는 오기(烏耆)라고도 한다. 지금의 신강(新疆) 위그루 자치구 (自治區) 카라샤르현(客喇沙爾縣)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