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甄正論卷下 ...

ABC_IT_K1078_T_003
033_0124_c_01L견정론 하권


현의 지음
이한정 번역


공자가 말했다.
“선생께서 언변이 하늘을 찌르듯 하시고 말씀이 땅을 울리듯 하시니, 은혜로운 말씀으로 새겨주시는 것이 마치 얼어붙은 계곡에 봄 이슬 내리듯 합니다. 훈도하는 말씀에 가피입어도 연못이 겨우내 얼어 있었기에 미천한 제가 불을 켠다 해도 밝지가 못합니다. 햇볓이 내리 쬐는 것을 대하자 그만 할 말이 없어 꿇어앉은 채로 숨을 삼키고 어깨가 처지나 아직도 의심을 떨구지 못하였습니다. 다시 바라건대 묘하게 풀어주십시오. 영보(靈寶)의 말이 모두 허망한 것이라 하여도 노자의 사적은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상공(河上公)은 신선이 된 사람으로, 예전에 한나라 효문제(孝文帝) 때에 초옥을 짓고 강가에 살았습니다. 효문제가 『도덕경』을 좋아하여 왕공이나 경상(卿相) 및 2천 석(石) 녹봉(祿俸)의 신료(臣僚)에게 모두 읽혔으나, 『도덕경』의 몇 구절을 풀이하지 못하여 황제가 그 뜻을 통하지 못했습니다. 이때 누가 ‘하상공(河上公)이 늘 『도덕경』을 외우니, 아마도 알 수 있으리라’고 말하자, 황제가 뜻을 모르는 구절을 사람을 시켜 하상공에게 묻게 하였으나, 하상공이 도를 기리고 덕을 귀히 여긴다면 멀리서 물어볼 수는 없는 일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에 황제가 친히 강가로 가서 의문나는 것을 물었으나, 하상공은 황제를 보고서도 머리를 쳐들고 높은 데 의지하여 앉아 있었습니다. 마침내 황제가 괴이쩍게 여겨, ‘천하에 왕의 땅 아닌 곳이 없으며, 강기슭에 사는 선비라도 모두 왕의 신하 아님이 없다. 짐이 사람을 살리거나 죽이기도 하고 부귀하게도 하는데, 그대가 덕이 무겁다 하더라도 어찌 이리 거만한가’ 하고 묻자, 하상공이 손바닥을 치며 크게 웃으며 허공으로 수 장(丈)이나 솟아올라 5색의 구름 위에 앉아서 황제를 내려다보며, ‘내가 위로는 하늘에 닿지 않았고 아래로는 땅을 밟지 않았으며, 가운데 있으면서 남에게 신세질 일이 없는데, 폐하가 어떻게 나를 귀하게도 하고 가난하게도 하겠소’라고 말했습니다. 그제서야 황제가 신인(神人)임을 깨닫고 가마에서 내려 재배하고 사과하면서, ‘짐이 부덕한지라, 비록 선대의 대업(大業)을 이었으나, 언제나 조심하면서 늘 떨어지지 않을까 염려하였는데, 성품이 우매하여 성인을 알지 못하였습니다’라고 머리 조아려 허물을 돌이키자, 공이 황제에게 소서(素書) 2권을 주면서, ‘이 책을 잘 읽으면 스스로 의문이 풀리리라. 내가 이 책을 주석한 이래로 천 7백여 년이 지났으나. 대체로 세 사람에게만 전했는데 이제 그대까지 네 사람이 되었으니, 기인(其人:자격이 될 만한 사람)이 아니고는 전하지 말라’고 말하면서 그 사람이 사라졌습니다. 이 같은 신령한 자취에 의하면, 성인이 아니고서야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효문제의 믿음이 지극하였기에 그 정성이 명철(冥徹)을 감동시키자, 태상노군(太上老君)이 이 신인을 시켜 효문제에게 『도덕장구(道德章句)』를 전수한 것입니다. 효문제가 이를 받고 나자 하상공이 회영반진(晦影返眞)하여 상방(上方)으로 돌아갔는데, 이같이 신령함이 완연하여 분명한데도 어떻게 거짓이라 하겠습니까?”
선생이 말했다.
“그대의 이 같은 말도 더욱 허망한 것으로, 길거리에서 흘려들은 말을 어찌 믿을 수가 있겠는가? 그대가 말한 것도 갈현(葛玄)이 『도덕경』의 서문을 지으면서 이 같은 말을 꾸며 넣어 강좌를 현혹시킨 것이나, 둘러댄 것을 깨닫지 못하고서 그대까지 이에 의혹하게 되었구나. 『한서』의 「제기(帝紀)」를 잠깐 보더라도 대체로 행행(行幸)은 기록되지 않은 것이 없는데, 감천궁(甘泉宮)에서 경사(京師)까지 백여 리에 불과하더라도 황제의 행차는 모두 기록해 두었다. 또 경제(景帝) 때에 오(吳)ㆍ초(楚)의 일곱 나라가 반란을 일으켜 태후가 동궁(東宮)에 있을 때에 황제가 찾아가 자문을 구하였는데, 이것도 『상서(尙書)』에는 황제가 동궁을 내왕하였다고 이르고 있다. 또 무제가 5조궁(祚宮)을 순행하면서 하동(河東)에 이르러 후토(后土)에게 제사지낸 것까지 역사에 쓰여 있다. 도사 성현영(成玄英)이 『도덕경』의 소(疏)를 지으면서 하상공은 섬주(陝州) 성남(城南) 3리에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5조궁이나 감천궁에 비해 몇 배나 먼데도, 『한서』는 어째서 이를 말하지 않는가? 하물며 하상공이 앉아서 공중으로 솟구쳐 올라 운기를 타고 올라가면서 황제에게 책을 주어, 『도덕경』을 널리 폈다면, 근교에서 신광(神光)에게 제사지내거나 이씨(李氏) 부인의 일에 비해, 이것이 더욱 빛나는데도 이를 버려두고 기록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이 같은 이치는 있을 수 없다. 또 하상공이 ‘내가 이 책을 주석한 지 천 7백여 년이나 되었다’는 이 같은 말은 더욱 해괴하다. 주(周) 성왕(成王)이 회이(淮夷)를 정벌한 이래로 정전법(井田法)을 시행하여 왕기(王畿) 천 리 이내로 수레를 만 대나 공출하였기에 천자의 만승(萬乘)이 바로 성왕에서 나왔고 성왕 이전에는 만승의 제도가 없었다. 성왕의 재위에 근거하면 주공(周公)이 섭정한 것까지 합치더라도 모두 37년이며, 난왕(赧王)이 진(秦)나라 소양왕(昭襄王)에게 살해당하기까지가 총 8백60년이고, 진나라 소양왕에서 자영(子嬰)에 이르러 항우(項羽)에게 멸망되기까지 합쳐서 50년인데, 한(漢) 고황제(高皇帝)의 재위 12년, 혜제(惠帝)의 재위 7년, 여태후(呂太后)의 섭위(攝位) 8년, 문제의 재위 23년을 합치면, 성왕에게 효문제 말년까지 모두 9백32년이다. 『도덕경』의 ‘어떻게 만승의 주군으로 몸을 천하에 가벼이 하며……’란 구절에 의하면, 노자가 이 경을 설할 때가 성왕 이후다. 본래 경에 주석을 다는 것은 경을 해석하기 위한 것인데 경이 있지도 않았는데 주석이 어찌 먼저 이루어지겠는가? 따라서 천 7백 년 어쩌구 하는 것은 날조이다. 또 하상공의 노자주(老子注)에서 순도하빈(舜陶河濱)이나 주공하백옥(周公下白屋)이라 말하는데, 이같이 주석한 말은 전부 주공 이후인데도, 천 7백 년이라 한 것은 더욱 망령되다. 사적이 이미 날조인데 감응이란 것이 어찌 실답겠는가? 회영(晦影)의 설조차 헛소리인데, 반진(返眞)이란 말은 얼마나 그릇되었겠는가?”
공자가 말했다.
“역사책에 실리지 않았으니 참으로 근거 삼기가 어렵습니다만, 어리석은 소견으로 이같이 현혹되곤 합니다. 노장의 가르침이 그 유래가 오래고 도사의 칭호도 지금에서 이뤄진 것이 아닙니다. 관우(觀宇)와 존용(尊容)이 진설되어 이에 이르렀으며, 이 같은 관(冠)ㆍ월피(月帔)ㆍ운갈(雲褐)ㆍ예상(霓裳)은 눈으로 경험하여 알 수 있는데, 어찌 모두 거짓이겠습니까?”
선생이 말했다.
“노장의 가르침을 내 어찌 일부러 훼손하겠는가마는, 불경과 비교하자면 아주 다른 것이다. 선(善)을 논하는 것이야 길이 같다 하더라도 애쓰는 바가 다르고, 말은 근본에 두더라도 법도가 다른지라 취하는 바도 나눠진다. 노자의 가르침은 자유(雌柔)1)에 두고, 불법의 일은 인과(因果)를 밝히는 데 있었다. 2축(軸)과 7편(篇)의 깊은 이치는 죽음을 잊고서 물상의 경계를 고르게 하는 데 있고, 8만 4천의 법문은 적멸(寂滅)을 계합하여 열반의 경계에 처하는 데 있으며, 수신(修身)과 치국(治國)의 요체는 『도덕경』에서 모두 밝히고, 범부를 버리고 성과(聖果)를 증득하는 것은 반야(般若)의 글에서 드러내었으니, 집착을 버려서 경계를 깨뜨리고 알음알이를 그쳐서 몸을 잊는 것이다. 『도덕경』에 그러한 말이 없지 않더라도, 어찌 행을 세울 수 있겠는가? 그 종지에서 ‘닦는다는 것’은 오직 인간에 있으니 과를 지극히 하여 겨우 수고(壽考:長壽)에 이를 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물상에 따르는 연을 버리고 유(類)에 따라서 법문을 달리하고 기틀에 기인하여 행을 열되, 가까운 데서 먼 데로 들어가고 얕은 곳에서 깊은 데로 들어가면서 한 생각을 돌이켜 진여(眞如)의 과를 증득하여 천지를 그대로 현시하는 것이 밝기가 일월과 같기에, 글을 대강 훑어보면 서로 통하는 데가 있는 것도 같으나, 묘한 이치를 궁구하는 것은 확연하여 완전히 다르다. 또 그대가 도사라는 칭호가 지금에서야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 이 또한 무슨 날조인가? 개벽 이래로 진(晉)나라 말엽에 이르기까지 반곡(斑穀)의 관대(冠帶)를 쓰거나 누런 빛깔의 장삼을 입거나 천존의 상(像)을 세우고 영보의 경전을 읽으면서 도사라 호칭한 적이 없었다. 도사라 칭하는 자들은 광성자(廣成子)ㆍ무광자(務光子)ㆍ소보(巢父)ㆍ허유(許由)ㆍ연자(涓子)ㆍ강조(降棗)의 무리들이2) 시대에 뒤지면서도 왕후나 업신여기고 속세에 어울리지 않으면서 그 뜻을 고상하게 여기는 자들이다. 그 다음으로는 영관(榮冠)과 면체(冕締)를 잃자 수풀이나 개울을 감상하고 자지(紫芝)를 노래하며 스스로 소금(素琴)이나 즐겨 뜯으면서 소일하는 자들도 있고, 말대(末代)에는 비련(飛練)에나 몰두하여 뜻을 술법에 두는 자들도 있는데, 모두 도사라 부른다. 자취는 비록 속가와 달리했으나 의복에는 별다른 제도가 없었다. 한나라 명제(明帝) 때에 불법이 중하(中夏)에 이르자, 오나라 적오년(赤烏年)에 술사(術士) 갈현(葛玄)이 오나라의 군주 손권(孫權)에게 상서(上書)를 올려 ‘불법은 서역(西域)의 전(典)이고, 중국에는 도교가 먼저 있었으니, 이제 그 법을 펼치기 바랍니다’라고 말하여 비로소 하나의 관(館)설치되었는데 이것이 지금 관우(觀宇)의 시초이다. 갈현이 다시 도경(道經)을 날조하면서 태극좌선공(太極左仙公)이라 자칭하면서, 그 조작한 경을 『선공청문경(仙公請問經)』이라 제목하였다. 송문명 등이 그 법을 늘려서 구등재의(九等齋儀)와 칠부과록(七部科籙)을 만들고, 조례와 상향(上香)의 글을 짓고, 행도하고 단찬(壇纂)할 때 옷 입는 것을 규정하고, 의복과 관모와 신발을 제정하고, 예배하고 경행하는 모양을 정했다. 그 도를 행하는 이에게 처음으로 혼인을 금하고 육식과 5신채(辛菜)를 끊도록 하면서, 다시 영보 따위의 경전을 수천 권이나 날조하였다. 뒤에 육수정(陸修靜)이 다시 의복 등의 명칭을 세웠으므로, 월피(月帔)ㆍ성건(星巾)ㆍ예상(霓裳)ㆍ하수(霞袖)ㆍ구광보개(九光寶蓋)ㆍ십절영번(十絶靈幡) 등이 이로부터 제정되었다. 양무제(梁武帝)가 초년에는 육수정 등에게 현혹되어 이를 받들다가, 이것이 구경(究竟)의 법이 아님을 깨닫고 친히 도가를 버리는 글을 지은 것이 『양무제집(梁武帝集)』 안에 보이는데, 그 후에 육수정 등이 북제(北齊)로 도망쳤다. 그때에 단양(丹陽)의 도홍경(陶弘景)이 천성이 박식한 데다 총명이 남보다 뛰어났는데, 도사의 신분을 자처하면서 모산(茅山)의 주양(朱陽)에 머물며 조용히 물러나 무위(無爲)의 생활로 시사(時事)에 간섭하지 않았다. 이때에 호를 정백선생(貞白先生)이라거나 또는 호를 도은거(陶隱居)라 하면서 저술을 많이 지었기에 당대에 널리 퍼졌다. 옷은 도복을 빌려 입었으나 마음속으로는 불법을 공경하여 머무는 곳에 탑도(塔圖)와 불상(佛像)을 이룩하여 몸소 공양하였기에 사람들이 승력보살(勝力菩薩)이라 이름하였는데, 그 탑이 모산의 주양(朱陽) 관우(觀宇)안에 보인다. 지금까지도 까마귀나 때까치 같은 무리들에게 더럽혀지지 않았다. 도홍경이 관모와 의복을 다시 제정하고 관(館)을 관우(觀宇)라 개칭하면서, 황제와 노자의 가르침을 행하였으나, 영보(靈寶)의 법을 날조라 배척하면서 따르지 않고 손수 논(論)을 지어 그릇됨을 논하였다. 홍경이 양무제에게 깊은 신임을 받아 누차 벼슬을 제수 받았으나 결연하게 나아가지 않고 아울러 시를 지어 무제에게 증정한 것이 문집에 들어 있으니, 그 사적이 뚜렷하게 『양사(梁史)』에 빛나는데 그대가 어찌 이에 현혹될 수 있겠는가?”
이에 공자가 “선생님의 이 같은 말씀을 듣고 보니, 마음이 열리고 생각이 깨우쳐져서 식견이 일신되어 미혹이 벗겨지는 것이, 마치 악광천(樂廣天)을 연 듯하고 사방이 트여 안개를 벗어난 듯합니다”라고 말하면서, 그 자리에서 일어나 밑으로 내려가 절을 하면서 사죄하고 이같이 말했다.
“제가 오랫동안 속세의 그물에 빠져서 참다운 통발[網罕]을 깨치지 못하고, 그 이후로 귀는 황화(黃花:道家를 지칭)의 소리에 체하였고 뜻은 백설(白雪:옛날의 曲名)의 연주에 어지러웠기에, 비록 누차 묘하게 풀어주셨어도 아직도 깊은 의심이 맺혀 있습니다. 형지(形智)가 눈멀고 귀먹어 단번에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나, 다행히도 남쪽을 가리키심에 지금 북원(北轅)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영보나 천존이 만약 허망하기가 이와 같다면 그 경의 가르침도 날조되어 편술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체로 거짓되고 망령된 것이나 다시 한 번 가르침을 내려 주십시오. 바라건대 고황(膏肓)에 든 병을 낫게 하시어, 고질이 되는 것을 막아 주십시오.”
선생이 빙그레 웃으며 이같이 말했다.
“그대가 지금에서야 깨달았구나. 아침에 깨달았어도 저녁에 다시 의문이 남아 있다면, 곧 이를 질문하라, 내가 지금 낱낱이 논해 주겠다.”
공자가 말했다.
“불교에는 비구와 비구니의 2부 대중이 있는데 도법 내에도 도사(道士)와 여관(女官)의 두 부류가 있습니다. 피차간에 위의(威儀)를 살펴보면 구족하게 갖추는 것이 부처님의 계율과 같다 하겠으나, 스님들이 2백50계를 받고 비구니는 5백계를 받는데, 지금 도사와 여관이 수지하는 법록(法籙)은 일률적으로 동등하여 증감없이 모두 10계(戒)ㆍ진문(眞文)ㆍ상청(上淸)의 법을 받고 아울러 부록(符籙)의 법을 받으니, 이 같은 법이 어떠한 사람에 의해 전해졌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선생이 말했다.
“도사와 여관에게는 원래 계율이 없었으나, 다시 불가의 10계를 표절하고서 저들의 법인 진문과 상청을 보탰으며, 모두 흰 비단천 가운데에다 부도(符圖)를 그리고 옥자(玉字)를 쓴 것이다. 그 진문에는 모두 세 법이 있는데, 첫 번째가 8경(景)으로 일월과 성신의 형상(形象)을 그려 넣은 것이다. 두 번 째가 오로(五老)로서 오로의 신을 그려 넣은 것이다. 세 번째는 5악(岳)이니, 5악의 산 형태를 그려 넣은 것이다. 이 세 가지는 원래가 각각 따로 받아쓰는 것이라, 한꺼번에 수지할 필요가 없다. 상청(上淸)은 그 가운데에다 상청천 가운데의 관위(官位)와 부도(符圖) 따위를 적어 놓은 것이다. 처음에 10계를 받고 다음에 진문을 받고 뒤에 상청을 받으면 그 법이 갖춰진다. 녹(籙)이란 그 수가 아주 많아서 어떻게 모두 말할 수 있겠는가마는, 간략하게 따져 보면 천 5백 장군과 35대장군 따위의 녹이 있어서, 이 같은 녹을 받게 되면 부적ㆍ금방(禁方)의 술법과 장표(章表)ㆍ초의(醮儀)의 법을 행할 수 있다. 부처님께서 비구니는 여자인지라 그 성품이 애욕에 많이 물들기에 근기에 따라 법을 제정하셨다. 그러므로 스님들보다 갑절이나 많아진 것이다. 그러나 도가의 법록은 대체로 사람이 망령되게 조작한 것이기에 그 근성(根性)을 가리지 못하였는데, 그 때문에 도사와 여관에는 다시 어떠한 차이도 없게 되었다. 이 같은 법이란 것도 장도릉이 그 같은 일을 날조하여 지어낸 것이다.”
공자가 말했다.
“노자도 이와 같은 것을 말하지 않았으므로 이는 날조가 분명한지라 어찌 현혹되겠습니까마는, 도법에는 예전에 계율이 없었는데 도사가 혼인하지 않게 되었으니, 어떠한 전(典)과 기(記)에 근거합니까?”
선생이 말했다.
“도가에는 원래 음욕을 금지하는 계율이 없다. 지금의 도사들이 혼인하지 않은 것은 스님들을 흉내 내어 그리한 것이기에, 하나같이 근거할 게 없다. 그러므로 수나라 때 숭양관(嵩陽觀)의 도사 이파(李播)가 표장(表章)을 올려, ‘도법의 도사에게는 결혼을 금하는 조항이 없으니, 도사들이 처첩(妻妾)을 얻도록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청하였으며, 그 표(表)는 『이파집(李播集)』에서 보여진다.”
공자가 말했다.
“가르침에는 금욕(禁欲)에 대한 과(科)가 없는데, 혼인하는 것이 어찌 그 가르침에 어긋난다 할 수 있겠습니까? 이파가 이와 같이 주청(奏請)한 것은 참으로 타당합니다. 도교에서 종지로 삼는 것은 노자에 뿌리하며, 노자가 주나라에 봉직하다가 나중에 서역으로 갔으므로, 종당에는 출가하여 혼인을 끊었다는 자취가 없습니다. 도사들이 오늘날 출가하는 것은 누구의 가르침에 의한 것입니까?”
선생이 말했다.
“출가의 법은 서역에 근거하는 것이다. 석가가 국왕의 귀한 자리를 버리고, 비빈(妃嬪)에 대한 미련도 버리고 출가하여 도를 닦아 6년간 고행하다가 하루아침에 성불하였으며, 성불하고 나서 교진여(憍陳如) 등을 제도하였다. 이 땅에는 원래 출가라는 싹조차 없었고, 노자도 스스로 부인을 거느리면서 주나라에 사관으로 봉직하였다. 주나라를 떠나 서쪽으로 갔더라도 그 몸이 속인이니, 근본적으로 부인을 버리고 옷을 바꿔 입어 출가하는 형상은 없었다. 그러므로 노자의 아들 이름이 종(宗)이고, 종의 아들 이름은 하(瑕)이며, 위나라에 봉직하여 단간후(段干候)에 봉해졌다가, 나중에 한나라 교동왕(膠東王)의 태부(太傅)가 되었던 것이 각각 「열전」에 남아 있다. 또 『도덕경』에 따르면, ‘자손의 제사가 그치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면 자식이 번성하여 대대로 자손이 단절되지 않는 것을 논하는 까닭에, ‘그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니, 어찌 음욕을 끊을 수 있겠는가? 도사가 오늘날 출가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교를 흉내내는 것이지 별다른 근거는 없다.”
공자가 말했다.
“비록 불법의 출가를 배웠더라도, 본종에는 이 같은 가르침이 없으며, 노자가 혼인을 금하지 않고 경문에서도 자손을 말했으니, 오늘날 불교의 종지를 배웠다 치더라도 아는 이는 진실로 이를 수긍하고 믿습니다. 쇠종을 훔쳐내고서 귀를 가린다 하더라도, 어찌 다른 사람의 견문까지 막을 수 있겠습니까? 망령되게 천존의 자취를 세운 것은 앞서 탄로났고, 경의 가르침을 위조한 것도 이미 겉으로 드러났습니다. 영보는 송문명 등이 찬술한 것이라도, 여타의 경전은 어떤 사람에 의해 지어졌는지 자세히 가려주실 것을 엎드려 부탁합니다. 바라건대 그 근원을 파헤쳐 주십시오.”
선생이 말했다.
“도가의 경은 『도덕경』 2편과 『서승기』 1권을 제외하고도, 다시 『황정내경(黃庭內景)』의 논이 있으며, 다른 여러 경은 모두가 거짓되어 편술된 것이다. 또 『태평경(太平經)』 1백80권은 촉나라 사람 우길(于吉)이 지은 것으로, 이 사람은 그 형적을 잘 가려서 불경을 힘들게 베낀 것이 많지 않고 대부분 제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법도와 음양(陰陽)의 화생(化生) 따위를 설했는데, 모두가 갑자부(甲子部)로 편집되어 그 부질(部帙)을 삼았다. 또 『태청(太淸)』이나 『상청(上淸)』 따위의 경은 모두가 비련(飛鍊)ㆍ황백(黃白)ㆍ약석(藥石) 따위의 법을 기술하는 것으로, 처음에는 5권이었으나, 수나라의 도사 유진희(劉進喜)가 보탠 것을 도사 이중경(李仲卿)이 후술하여 10권을 이루면서, 아울러 불경을 그대로 베껴서 죄와 복을 훔쳐다 삽입한 데다 인과(因果)를 날조하여 불법을 어지럽혔다. 당나라 이래로 익주(益州)의 도사 여흥(黎興)과 풍주(澧州)의 도사 방장(方長)이 『해공경(海空經)』 10권을 함께 지었고, 도사 이영(李榮)이 다시 『세욕경(洗浴經)』을 지어 그 실법(室法)을 무성케 하였다. 도사 유무대(劉無待)가 또 『대헌경(大獻經)』을 지어 『우란분경(盂蘭盆經)』을 모방하였고, 또 『구유경(九幽經)』을 지어 죄와 복의 보응을 분류했다. 나머지는 큰 부질(部帙)이 아니지만 날조된 것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으니, 어떻게 석가(釋迦) 대성이 홀로 법왕이 되시어 서쪽 나라에 교화를 펴고 그 말씀이 동하(東夏)로 전해진 것과 비기겠는가? 열어구(列禦寇)의 설에 따르면, 상(商)나라의 태재(太宰)가 공자에게 묻기를 ‘삼왕(三王)이 성인인가’ 하고 묻자, 공자가 ‘삼왕이 직무에 능하여 지혜와 용기를 갖췄으나 성인인지는 구(丘)도 잘 모르겠다’고 하였다. ‘오제(五帝)가 성인인가’ 하고 묻자, 공자가 ‘오제가 인의(仁義)를 잘 베풀었으나, 성인인지는 구(丘)도 잘 모른다’ 하였고, ‘삼황(三皇)은 성인인가’ 하고 묻자, 공자가 ‘삼황이 때를 잘 썼으나 성인인지는 구(丘)도 잘 모른다’고 하였다. 이에 태재가 놀라서 ‘누가 성인인가’라고 하자, 공자가 ‘내가 듣기로는 서방에 성자가 있는데, 성인이시기에 다스리지 않아도 어지럽지 않고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믿으니, 너무 넓고 커서 백성들이 그에 대하여 이름을 붙일 수 없다’고 대답했다. 선니(宣尼)의 이 같은 말에 비춰 보면, 노자가 서쪽으로 가면서 말한 것과 대체로 같다. 백양(伯陽)과 중니(仲尼)가 이 땅에서 성인이라 일컬어지는데, 두 사람이 모두 서방에 성인이 있었음을 알고 있었으니, 석가의 도가 광대하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공자가 말했다.
“제가 어려서 뜻을 품은 것이 당시에 명예나 훔치려는 것이었기에 한번 담론하면 그 언변을 칭찬받았습니다. 그러나 삼가 고론을 듣고 보니, 어눌한 바보가 창피스럽게 선니(宣尼)의 숭인(崇仞)을 바라보고, 누추한 초가에서 부끄럽게도 정령코 선생님의3) 화락한 얼굴을 뵙게 되니, 마침내 혼미하던 심식(心識)이 깨우쳐졌습니다. 이야말로 구만 리 장천(長天)에 드리운 날개를 활개쳐서 날아오르고, 삼천리 횡해(橫海)에 가로놓인 비늘로 물을 쳐서 나아가는 것을 알겠습니다. 다행히도 입김을 쏘이고서야 그 의혹이 모두 다하였습니다. 초야의 홍유(鴻儒)나 재야의 석학(碩學)들을 살펴보면, 팔짱끼고 기염을 토하는 선비들이 눈썹을 치켜세우고 상대에게 삿대질을 하면서, ‘유가ㆍ도가ㆍ석가의 3교는 하나이니, 모두 선한 이치를 따르기에 셋이 아니다. 자비와 인서(仁恕)가 길은 다르더라도 목적지는 같으며, 만물을 이롭게 하여 제도할 때에 백려(百慮)가 모두 고르다’고 말합니다. 비록 벽계황마(碧雞黃馬)의 변(辯)이라도 이를 분별하지 못합니다. 비록 견백(堅白)이 다르다는 말로도 어찌 이를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매번 이 같은 말을 생각할 적마다 서로의 가슴만 답답해집니다. 청하건대 한번 상세하게 의논해주셔서 온갖 의혹을 없애주시기 바랍니다.”
선생이 말했다.
“그대는 무슨 말을 이리 하는가? 내 일찍이 논을 짓고자 하였으나 서둘러 탈고하지 못하였는데, 그대가 청하기에 내 뜻을 보여주겠노라. 대체로 3교를 그 무리에 따라 분류하면 9류(流)로 자잘하게 나눠지는데, 본래의 자취가 이같이 달라서 이치 또한 갈라진다. 단지 거칠고 얕은 것만이 서로 차이나는 것이 아니라 범부와 성현으로 완전히 현격해진다. 글에 따라서 서로 통용되듯이 보이더라도 이치를 궁구해보면 완전히 같지 않다. 8괘(卦)에서 상(象)을 이루고 6효(爻)로 정위(定位)하며 용도(龍圖)를 펼쳐 호(號)를 정하고 조적(鳥跡)을 관찰하여 서(書)를 지었다. 입덕(立德)과 입언(立言)의 3분(墳)은 삼황(三皇)의 교화를 펴는 것이고, 수훈(垂訓)과 수범(垂範)의 5전(典)은 오제(五帝)의 시책을 드날리는 것이니, 마침내 희대(姬代)의 주문공(周文公)에 이르러 예를 제정하고 악(樂)을 이루었고, 이남(二南)4)의 풍아(風雅)가 융성해졌다. 공보자(孔父子)가 시(詩)를 편수하고 역(易)을 찬술하되 십익(十翼)을 새겨 정미롭게 하였으며, 존귀함과 비천함의 차례를 세우고 군신과 부자의 도를 확정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 다음으로 장유(長幼)와 부부와 친구간의 유별(有別)을 밝히고, 충정을 다해 나라에 봉사하고, 효제(孝悌)를 기려서 가정을 윤택하게 하고, 공손함과 겸양을 쌓아 극기(克己)하고, 인서(仁恕)를 베풀어 만물을 대하고, 신의를 돈독히 하여 교제를 넓히며, 염치와 양보에 힘써 그 행을 짚어가는, 이와 같은 오덕(五德)이 입신(立身)의 이치이다. 문덕(文德)을 펴서 속세를 교화하고, 무공(武功)을 다스려 난리를 누르고, 연사(禋祀)를 닦아 신기(神祇)를 안녕케 하고, 종묘(宗廟)를 숭상하여 조상을 공경하면서, 사냥과 수렵을 늦추도록 인도하고, 그물 놓는 이치를 새로이 하고, 흥겹게 놀면서도 근원을 존중케 하고, 사냥하는 규정을 바르게 하였다. 무참히 살육하는 정전(征戰)의 노고를 치하하고, 축생의 도살을 다스려 천향(薦饗)하며 복을 구하고, 가슴에서 겨드랑이를 꿰뚫어 사냥하는 오락을 거듭하며 어린 목숨의 살가죽을 벗기는 것을 마음 푸는 낙으로 삼는지라, 형법과 예법(禮法)를 일으켜도 도리어 간사함이 일어나고, 부새(符璽)을 얻더라도 구차하게 살아간다. 나라를 빼앗고 왕기(王器)를 훔치게 되면 아비를 해치고 군주를 시해하며, 권력을 다투면서 이권으로 치달으면 종족을 멸하고 이족(夷族)을 없애니, 자비로운 큰 은혜가 없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있다 하나 작은 어짊이기에, 삼세의 인과에 매여서 일생의 화복만을 밝히느라, 여타의 재앙이나 경사를 자손에게 남긴다. 악을 지으면서 선을 닦더라도 도리어 명보(冥報)를 끊기에, 살아 있어도 목숨은 기한이 정해져 있는지라, 끝내는 귀신이 되고 만다. 장수한다 해도 변천(變遷)한다는 기약이 없는데, ‘살리기를 즐기고 죽이기를 싫어한다’고 이르면서 ‘목숨 중하기가 사람이나 축생이 같은데, 자신의 마음에 비추어 어찌 살상할 수 있겠는가?’ 하고 말한다. 그러므로 자공(子貢)이 고삭(告朔)의 양을 죽일 때에 그 울음소리를 듣고 고기를 먹지 않은 것도 자기 마음에 빌미해서, 남의 목숨이라도 생을 아끼는 마음이야 나와 남이 모두 같음을 체득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공구(孔丘)가 산등성이의 까치를 맛보지 않았고, 우정국(于定國)이 형벌을 늦추고, 손숙오(孫叔傲)가 음덕(陰德)을 쌓아 초나라 장왕(莊王) 때에 그 후대가 창성하였으므로, 고문(高門)에서 그 봉작(封爵)을 기다렸다. 항우가 진나라 군대를 전멸시키고, 백기(白起)가 조나라 군병 40만을 구덩이에 묻었으나 두우(杜郵)에게 주살되고 지체[支分]가 오강(吳江) 위에 흩어졌다. 또 화복을 당대에 입기도 하고, 또는 그 영욕이 자손의 몸에도 미치기에 몸으로 짓고 후사가 받는 것이 아비의 보를 받는 것과 동일하다. 업(業)이 그 자손에게 전해지므로 갚은 것은 자기가 아니기에 선왕(宣王)을 쏘아 그 원수를 갚고, 항두(抗杜)가 목숨을 살려준 은혜에 보답하고자 수레를 돌격하였고, 유약(劉約)은 원해(元海)를 따라 수레를 함께 탔었다. 이처럼 유명(幽明)의 교접(交接)을 논하더라도 사람과 귀신이 서로 척지게 되고[讎], 죄와 복의 업연에서 보응(報應)의 윤전(輪轉)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기에 유가와 불가의 현격한 차이도 이로써 명확해진다.
대체로 도가의 가르침은 유가의 이류(異流)로써, 황제(黃帝)가 그 연원을 이루고, 노담(老聃)이 그 옷고름을 풀어서 근본을 궁리하였다. 정(精)을 보하여 기(氣)를 기르고 광채를 감추고 빛을 숨겨서 생을 온전히 하여 해침을 멀리하고 무위(無爲)로 청허(淸虛)를 즐기며 사사로움을 줄이고 욕심을 없애는, 이러한 것이 그 종지이다. 이후로 순박함이 변하여 말대에 이르자 재갈을 나눠매고 각자 달려갔다. 한 가지 무(無)의 이치에서 파생되었으나 3등(等)의 차별을 세웠는데, 상등(上等)은 곡기를 끊고 수명을 늘려 신선이 우화(羽化)하는 것으로 이를 널리 이룬 이가 광성(廣成)의 황제(黃帝)이다. 다음은 부드러움을 지켜서 강함을 경계하여 분별을 잊고 알음알이를 그치는 것으로 백양(伯陽)과 자휴(子休)가 이들이다. 하등(下等)으로는 시대를 멀리하고 영예를 버리고 바위틈에 살면서 계곡물을 마시는 것으로, 허유(許由)와 소보(巢父)가 이들이다. 신선의 자취를 추구해 보면 일마다 헛된 것에 근거한다.
황제의 『본기(本紀)』에 따르면, 황제가 방중술(房中術)을 행하여 도양법(導養法)을 닦고자 72궁녀를 거느렸으며, 91개의 금단(金丹)을 먹고 승정호(昇鼎湖)에서 용을 채찍질하여 날아오르면서 백일등천(白日登天)하였기에, 신하들이 사모하며 의관과 장검과 신발을 거두어 교산(橋山)의 양지에 장사지냈다 한다. 이 같은 말을 징험해보면, 어찌 그런 일이 있으리오. 장례[葬]란 감춘다는 것으로, 옛사람은 죽으면 자손이 이를 애절하게 여겨 그 안택(安宅)의 조짐을 점쳐서 분묘를 좋게 세우고 혼령을 안치하고자 해골을 깊숙이 감추는 것도 겉으로 드러나는 우환을 면하고자 함이다. 그런데 황제가 청룡을 타고 하늘로 솟구쳐 자색 구름을 밟고 위로 올라가면서 만기(萬機)를 사직하고 사해(四海)를 이탈하였으니, 원래 죽지도 않았는데 무슨 이유로 장사지낼 필요가 있었겠는가? 소백(邵伯)과 사목(司牧)에게 땅을 나눠 주어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며, 하물며 우거진 감당(甘棠)이라도 그 덕을 기려 나무를 남겨놓는데5), 더구나 황제는 구오(九五)의 자리에 올랐고 만승(萬乘)의 지존(至尊)에 처하면서 용의 수레를 타고 신선이 되어 올라갔는데, 이는 자리에서 앓다 죽은 것보다 훌륭한 것이다. 만약 신하들이 사모하는 정을 끊을 수 없었다면 의관을 받들어 모셔야지 어찌하여 황제가 남긴 의복을 묻어버리는가? 비록 사모하는 정을 표한다 하더라도, 중자(仲子)가 죽기도 전에 장례에 필요한 거마(車馬)를 보낸 것을 『좌전(左傳)』에서는 예가 아니라 하였는데, 황제(黃帝)가 붕어하지도 않았는데 장사를 지낸 것이 신하로서 어떻게 없는 일을 꾸며내었겠는가? 장사지낸 것은 거짓이 아니나 승천하여 신선이 되었다는 것은 날조로써, 이치를 가늠해보면 그 사적도 알 수 있다. 도리어 여자를 다스려 신선을 구하고자 욕심껏 하여 과(果)를 구하였으므로, 이는 재차 윤회의 경계로 떨어진 것이지, 어찌 해탈의 경계에 올랐겠는가? 설사 실제로 신선을 얻었다 치더라도 종당에는 생사를 여의지 못하는데, 하물며 이러한 방술(方術)을 광성자(廣成子:상고시대의 신선)에게서 받은 것이 아닌가. 수양이란 것은 자신에게 달린 것이지 근본적으로 남이 대신해주는 법이 아니다. 황제(黃帝)의 자취도 이와 같은데, 『신선전』에서 거짓말만 늘어놓은 것은 이미 앞서 논하였기에 번거롭게 다시 말하지 않겠다. 대체로 노자가 가르침으로 삼는 것은 5천 자의 글에 갖추어 있으며, 장주가 논을 부연하여 7편에서 그 요지를 상세히 하였다. 도를 밝히고자, 음양은 천지의 화기(和氣)이고 사시(四時)는 생육하는 이치라는 걸 설명했는데, 말하자면 도에서 1이 생기고 1에서 2가 생기고 2에서 3이 생기고 3에서 만물이 생긴다고 말했다. 엄군평(嚴君平) 등의 풀이에는 ‘1이란 원기(元氣)이다. 말하자면 혼돈(混沌)이 갈라지지 않아 형상을 볼 수가 없고, 형상을 볼 수가 없는 도에서 1기(氣)의 조짐이 생겨나는데, 기가 맑은 것은 하늘이 되고 탁한 것은 땅이 되기에, 이 같은 1기에서 하늘과 땅이 생긴 것이니 1에서 2가 생겼다고 한다. 천지의 화합으로 인하여 음양과 사람이 생겨났으니 2에서 3이 생겨난 것이다. 사람이 음양을 받아 음양이 품휘(品彙)와 동식물의 부류를 생하게 하므로, 이러한 3에서 만물이 생겨났다’고 한다. 그러므로 『주역』에서는, 1음1양을 도라 이르므로 도를 밝히는 것이 곧 음양이다. 음양은 헤아릴 수 없으니 신명(神明)이라 이르고, 이 같은 음양의 이치는 헤아려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이를 신묘(神妙)라 이른다. 이 같은 음양의 이치에 순응하여 그 품성을 안정시켜 분수를 지키고, 유연하게 명리를 떠나 무위(無爲)를 즐기고, 성품을 왜곡시키는 성지(聖智)를 끊고, 분수를 뛰어넘어 듣고 보는 것을 버리고, 묘함을 이끄는 양관(兩觀)과 함께 하여 유무(有無)의 쌍집(雙執)을 없애고, 앞서려는 마음을 좌절시키고, 어지러운 마음을 풀어내어 강용(剛勇)의 억센 줄기를 없애고, 소리와 색에 깊이 물드는 것을 줄여서, 화복이 엎드려 있는 싹을 체득하여, 인자하고 검박하고 겸양하고 물러서는 행을 행하면, 그 수고(壽考)를 다할 수 있어 신체의 환란을 면하게 되므로, 마침내 자손이 창성하여 제사가 끊이지 않는다. 이에 거슬리면 목숨을 일찍 잃어 삶을 상하게 하고 낭패를 부르므로 혈통이 끊어져 그 후사를 잇지 못한다. 그러므로 잘 세워진 것은 뽑히지 않고 잘 감싸주는 것은 벗어나지 않으므로 자손의 제사가 끊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장주는 소 잡는 것으로써 그 생을 온전히 하였고6) 불을 전하듯이 그 목숨을 이어가고, 만물을 고르게 하여 탐욕의 길을 막고, 사지를 잘라 형해(形骸)의 미련을 버리고, 나무 기러기를 만들어 어리석은 지혜로 굳게 지키는 방책을 멀리 하였다. 손가락으로 말을 가르치는 비유로 천지간에 집착하는 소견을 잊게 하고, 변화를 섞어서 나비를 꿈꾸었으나, 한번 요절하면 자식을 잃는 것으로 이어지니 태산이 털끝보다 작다고 하며 크고 세밀한 분별의 허망함을 이같이 드러냈다. 조균(朝菌)이 대춘(大椿)보다 길다고 하여 길고 짧음에 매이는 것도 바야흐로 허상이라 하였다. 이 또한 장주가 속정(俗情)의 망집(妄執)이 생기면, 길고 짧고 곱고 미운 것의 실정에 따라 인아(人我)의 탐욕심을 일으키므로 자신을 이롭게 하고자 만물을 해치면 환난을 초래한다고 풀이한 것이다. 여기서 한 생 내에 이와 같이 전도되면, 수명을 짧게 하여 목숨을 해치고 유(類)에 끌려 몸을 망친다고 논하는 것으로, 미래 명보(冥報)의 이치가 없고, 과거 업연의 이치가 없고, 당대에 선악을 지어서 그 소행에 따라 당대에서 보를 받는다고 하므로 유가의 서책에서 말하는 것과 큰 뜻은 대체적으로 같지만, 이로써 불교와 도가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밝히기에 충분하다.”
공자가 말했다.
“삼교가 현격한 것이 이같이 다르다면, 한 가지 이치라 말하더라도 어찌 같다고 하겠습니까? 이처럼 자휴(子休)가 마음을 재계하여 몸을 잊는 것은 다른 이에게 복을 비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선니가 재계하여 음식을 바꾸는 것이 어찌 인(因)에 근거하여 과(果)를 구하는 것이겠습니까? 설사 도가에서 공양하여 명조(冥助)를 구하고 천존을 날조하여 구제받는 공을 희망하는 것도 어찌 헛된 낭비이겠습니까? 어찌 헛된 낭비이겠습니까? 이리하여 지금 후대에 거의 멸하는 바가 드물겠습니다. 그러나 장표(章表)ㆍ초의(醮儀)의 법과 부적ㆍ금방(禁方)의 술법과 그 행을 비교해 보면 때때로 효험이 있는데, 이 같은 일은 어떠합니까? 청하건대 상세하게 논의해 주십시오.”
선생이 말했다.
“그대의 이 같은 질문은 참으로 일리가 있다. 장표와 초의라는 것은 제사의 부류이니, 기도하는 일은 원래부터 그 내력이 오래된 것으로 오직 장도릉의 법만이 아니라, 황제와 태공의 시대에도 이 같은 술법을 행하였다. 초의란 제사의 별명으로 예전(禮典)에 그 이치를 드러내었듯이 장도릉이 이에 근거해서 닦았다. 그 법을 행하는 것을 제주(祭酒)라 이름하였는데, 이는 속세에서의 술사의 재주이다. 도사가 그 법을 훔쳐다가 자양(資養)을 구하나, 본래가 도교의 종지가 아니다. 이것은 귀도(鬼道)와 신기(神祇)의 이치에 섭수되니, 속제(俗諦)의 허망한 정리(情理)로는 그와 같은 일이 없다고는 못한다. 대체로 사무(邪巫)ㆍ음양(陰陽)ㆍ복서(卜筮)ㆍ교사(郊祀)ㆍ시축(尸祝)의 부류이다. 이 같은 법을 행하는 일은 태상시(太常寺)에서 맡아 하였기에, 승니(僧尼)를 관장하는 사빈시(司賓寺)에 속하지 않는다. 사빈시에 속하는 까닭은 불법은 서쪽 나라에서 전래되어 왔기에 외국의 빈객과 동일한 반열에 처하기 때문이다. 도사는 원래가 빈객이 아니기에 자연히 사빈시의 관할에 속하지 않는다. 또 장표와 초의로써 제사를 행하는 법은 사례시(司禮寺)의 일이다. 단지 사찰에 도관이 짝하게 되자 이로 인해 사빈시에 차츰 귀속된 것이나, 사실로써 이를 논하자면 기(祇)를 교사(郊社)에 합쳐 관할하고 있다. 또 부적이란 귀록(鬼籙)으로, 귀신의 도를 행하여 영험이 있게 하는 것이니, 이 어찌 괴이하지 않겠는가?”
공자가 이에 말끔히 의문을 풀고 나자 기뻐하며 절을 하고서 이같이 사례하였다.
“제가 쓰고 달고 매운 맛에 절은 어물전에 살면서 냄새를 잊었으며, 이에 빠져 뜻을 잃고 세월만 보냈습니다. 지금 빛이 흐려지며 서쪽으로 지는데, 방성(房星)이 나타남에 비로소 미쳐서 동으로 달리지 않는 폐단을 깨달았으니, 아침에 이를 듣고 저녁에 죽더라도 마음에 깊은 위안이 되겠습니다. 앞으로 삼가 명을 받들겠습니다. 다시 청하건대 이 같은 뜻을 받들고자 글로 묶어 스스로 계책하면서 미래에 전하여 저 거꾸로 달려가는 무리의 우매한 습속에 젖은 마음을 개혁시키겠으니, 널리 펴서 선비들이 진여(眞如)의 이치를 이해하도록 바로 기록해서 논을 만들어 여러 후대에 전하겠습니다.”
033_0124_c_01L甄正論卷下 集大白馬寺僧玄嶷撰公子曰先生縱談天之辯震擲地之恩吻所詮寒谷湛其春露勵言所被湯池結其冬冰以僕爝火之末光對曦景之層曜自可銷聲疊足噏氣斂肩沈疑未祛仍希妙釋但靈寶所詮咸歸僞妄老子事迹應不虛誣上公者神仙之人也昔漢孝文皇帝之時結草爲菴居河之濱文帝好道德之經勅王公卿相及二千石咸令習讀老經有數句不解帝莫能通之人言河上公常習讀老經或可解之乃遣使齎所不了義句令問河上公答曰道尊德貴不可遙問帝於是親幸河上詢問所疑河上公見帝抗首高據而坐帝甚怪之乃謂公曰普天之下莫非王土率土之濱莫非王臣朕能令人死生富貴公雖德重何乃自高乎河上公乃撫掌大笑躍於虛空去地數丈坐五色雲氣之上下顧帝余上不至天下不及地中不累人陛下焉能使我富貴貧賤耶帝方悟是神人乃下輦再拜而謝曰朕以不德忝統先業兢兢誡愼常恐廢墜性愚昧不識聖人稽首引過公乃授帝素書二卷謂帝曰熟讀此書所疑自吾注此書以來經今千七百餘年凡傳三人兼子四矣勿傳非其人訖失公所在據此靈迹非聖而誰者以爲文帝篤信精至誠感冥徹君使此神人授文帝道德章句帝旣受訖公乃晦影返眞歸乎上方此之神異炳然顯著豈亦謬焉先生曰子之此言更成虛妄道聽途說焉足可憑子向所論乃是葛玄老經序僞飾此詞誑惑江左因循不令子疑焉竊據漢書帝紀凡有行幸無不載錄至如甘泉宮去京百餘帝每行幸咸悉書之又景帝時楚七國反爲太后在東宮帝時往諮尚書云帝來往東宮閒又武帝幸五祚宮及幸河東祀后土史竝書之案道士成玄英撰老經疏云河上公在陜州城南三里比於五祚甘泉東遠數倍何因漢書不言況河上公躍坐虛空乘御雲氣授書於帝弘明道德比於郊祀神光及李夫人之事此爲盛烈棄而不錄未有斯理又河上公云吾注此書千七百年者此言又妄案周成王伐淮夷之後始制井田之法王畿千里出革車萬乘天子萬乘起自成王成王以前無萬乘之據成王在位通周公攝政共有三十七年至𧹞王爲秦昭襄王所滅八百六十年秦自昭襄至子嬰合五十年爲項羽所滅漢高皇帝在位一十二年惠帝在位七年呂太后攝位八年文帝在位二十三年自成王至文帝末年都有九百三十二年案老經云如何萬乘之主而以身輕天下則明老子當說此經合在成王之後但經爲注本注以釋經經尚未有注何先述千七百年此又虛也又河上公自注老經云舜陶河濱周公下白屋此注語全在周公之後千七百歲益虛誣事迹旣僞感應豈實晦影之妄談返眞之言何矯公子曰史冊不載誠亦難憑以愚管致茲迷惑老莊之教其來以久士之號非秖于今觀宇尊容肅設斯星冠月帔雲褐霓裳目驗可知摠虛也先生曰老莊之教余豈毀耶比擬佛經義理全別論善也則同途而各騖宗也則異軌而分驅老教旨在於雌柔佛法事明於因果二軸七篇之奧義忘得喪於齊物之場八萬四千之法門契寂滅於涅槃之境修身理國之要道德之經具明捨凡證聖之般若之文逾顯至如遣執破境智忘身老經非無其語於行靡立宗所修唯在人閒極果纔登壽考之爲教應物逗緣隨類分門因機啓自近之遠從淺階深起一念心眞如果顯如天地明同日月麤文浮閱似若相參妙理沈硏皎然全異子云道士之號非祇于今者亦何謬自開闢以來至于晉末元無戴斑穀之冠被黃彩之帔立天尊之像靈寶之經稱爲道士者矣所號道士者則廣棘之輩脫落時輕傲王侯與俗不群高尚其志有遺榮冠冕締賞林泉歌紫芝以自調素琴而取逸末代則有性好飛志存術數咸稱道士迹雖異俗無別制漢明帝時佛法被於中夏吳赤烏年術人葛玄上書吳主孫權佛法是西域之典中國先有道教請弘其法始創置一館此今觀之濫觴也葛玄又僞造道經自稱太極左仙公目所造經云仙公請問經宋文明等更增其法造九等齋儀七部科修朝禮上香之文行道壇纂服之衣服冠屨之制跪拜折旋之容其道者始斷婚娶禁薰辛又僞造靈寶等經數千卷後陸修靜更立衣服之號月帔星巾霓裳霞袖九光寶蓋十絕靈幡於此著矣至梁武帝初年爲修靜所惑曾致遵奉後悟非是究竟之法親製捨道之文見在梁武集後修靜出奔北齊其時丹陽陶弘性多博識聰睿過人身爲道士于茅山之朱陽靜退無爲不交時事時號貞白先生又號陶隱居多所著竝行于代躬衣道服心敬佛法所居地起塔圖佛容像親自供養曰勝力菩薩其塔見在茅山朱陽觀于今不爲鳥雀所污弘景重制冠改館爲觀行黃帝老子之教惡靈寶法僞鄙而不行手著論以非之景深爲梁武所器尚頻徵令仕礭乎不拔幷述詩以贈武帝竝入於集迹昭顯光乎梁史子何惑之公子曰旣聞先生此說心開意悟識遷迷如披樂廣之天似廓張超之避席趨下拜首而謝曰僕久沈俗罕悟眞筌耳滯黃花之音志昏白雪之奏雖則屢承妙釋方乃重結深疑形智聾盲一至於此幸蒙南指今從北轅靈寶天尊虛妄若是至於經教莫不僞修凡所謬妄咸請垂誨希愈膏肓永祛沈痼先生怡然而對曰今悟矣亦旦暮而得復坐有疑便問余爲子一一論之公子曰佛教之內有僧尼兩衆道法之中有道士女官二流彼此相望儀備具准佛律僧受二百五十戒受五百戒今道士女官所受法籙槪齊等更無增減俱受十戒眞文上淸之法幷受符籙之事未知此法何人所傳先生曰道士女官元無戒律還竊佛家十戒以充彼法眞文上淸咸以絹素爲之其中畫作符圖及書玉字眞文摠有三法一曰八景畫爲日月星辰之象二曰五老畫作五老之神曰五嶽畫爲五嶽山狀三本各得受不要摠受上淸者其中書上淸天中官位及符圖等初受十戒次受眞後受上淸其法具矣籙者其數甚多不可備說略而詳之有千五百將三五大將軍等籙受此籙者然可行符禁章醮之事佛以尼是女人性多染愛隨機制法故倍多於僧道家法籙凡人妄造旣不識根性所以道士官更無差異此等之法竝是張道陵僞作其事公子曰老子旣不說此定僞何惑法先無戒律道士不娶妻憑何典記先生曰道家無律禁婬欲之事今道士等不婚娶者學僧爲之一無憑據故隋嵩陽觀道士李播上表云准道道士無禁婚娶之條道士等咸請取妻妾其表見在李播集中公子曰教無禁欲之科娶妻豈爽於李播此請誠合其宜且道教所宗宗於老子老子仕周後適西域竟無出家斷婚之迹道士今日出家遵誰之教先生曰出家之法基於西域釋迦棄儲后之貴位捨妃嬪之愛戀出家修六年苦行一朝成佛成佛之後度憍陳如等此土元無出家之兆子本自有妻仕周爲史去周西邁是俗人本無捨妻室易衣服出家之故老子之子名宗宗之子名瑕仕魏封段干後爲漢膠東王太傅各有列又老經云子孫祭祀不輟此論依教修行則息胤繁盛代代不絕故云不豈令斷欲耶道士今日出家本學佛更無別據公子曰雖學佛法出家本宗自無此老子不禁婚娶經文又說子孫日縱學佛宗識者詎肯依信盜鍾掩豈杜他聞妄立天尊迹先彰露造經教又已表明靈寶文明等修經何人所作伏請詳辯冀悉根源先生曰道經除道德二篇西昇一卷又有黃庭內景之論自餘諸經咸是僞又有太平經一百八十卷是蜀人于吉所造此人善避形迹不甚苦錄佛經多說帝王理國之法陰陽生化等事皆編甲子爲其部祑又太淸上淸等經皆述飛鍊黃白藥石等法如本際五卷乃是隋道士劉進喜造道士李仲卿續成十卷竝模寫佛經潛偸罪福搆架因果參亂佛法自唐以來卽有益州道士黎興澧州道士方長共造海空經十卷道士李榮又造洗浴經以對溫室道士劉無待又造大獻經以擬盂蘭盆幷造九幽經將類罪福報應自餘非大部祑僞者不可勝計豈若釋迦大聖獨擅法王施化西國聲流東夏案列禦寇書云商太宰問於孔子曰三王聖者與子曰三王善任智勇聖則丘弗知五帝聖者與孔子曰五帝善用仁義聖則丘弗知曰三皇聖者與孔子曰三皇善用時聖則丘弗知太宰驚曰孰者爲聖孔子曰丘聞之西方有聖者爲聖不治而不亂不言而自信蕩乎民莫得而名焉案宣尼此言老子西昇所說略同伯陽仲尼竝此土稱之爲聖二人咸知西方有聖人明釋迦之道廣矣公子曰僕幼懷志尚早竊當時之譽言談之者以詞令見稱伏聞高論慚蹇訥木賜仰宣尼之崇仞愧環堵之卑陋鄭咸觀子林之宴容悟心識之昏怠是知搏搖九萬垂天之翼方擊水三千撗海之鱗乃運幸承咳疑滯咸盡竊見白屋鴻儒黃冠碩扼腕盱衡之士揚眉抵掌之賓儒道釋典三教是壹咸躋於善無有三慈悲仁恕殊途而同歸利物濟時百慮而齊致雖碧雞黃馬之辯未可分焉離堅合異之詞豈能別矣每思此說交戰于懷請一詳議希除衆惑先生曰子何言之當乎余嘗欲著論未遑削藁因子之請見余之志夫三教群分九流區別本迹斯異義意迺非唯麤淺相懸抑亦凡聖全隔文似涉參互究理居然不同自八卦成象六爻定位披龍圖而紀號觀鳥迹以裁書立德立言三墳暢三皇之垂訓垂範五典旌五帝之謨洎乎姬公制禮作樂隆二南之風雅父修詩述易詮十翼之精微莫不序尊卑定君臣父子之道次長幼明夫婦友于之別盡忠貞以奉國崇孝悌以資家薀恭謙以克己施仁恕以待物敦信義以申交務廉讓以推行此之五德立身之義也敷文德以化運武功以寧亂修禋祀以綏神祇宗廟而敬祖考啓畋漁之漸易著網罟之義導盤遊之源禮摽蒐狩之典截馘斬首效征戰之勞宰犧屠牲薦饗之福貫胸達腋申馳騁之娛命剖肌恣賞心之樂刑禮興而奸詐符璽著而矯僞生盜國竊器者父弒君爭㩲趨利者滅宗夷族無慈悲之大惠有惻隱之小仁昧三世之因果明一生之禍福餘殃宿慶逮乎子孫積惡修善絕於冥報在生之命年有延促之限爲鬼之質壽無遷變之期所云好生惡殺者謂性命之重人畜同之類於己情豈宜傷害故子貢欲去告朔之餼羊聞其聲不食其肉者以己之心體彼之命戀生之志物我皆然故孔丘不味山梁之雉定國之寬刑孫叔敖之陰德霸楚以昌其後高門以待其封項羽之陷秦白起之坑趙卒身死杜郵之下分烏江之上或禍福被於當代或榮辱流於子孫身造受嗣同於見報業子傳酬非自己亦有射宣王以復其怨抗杜回以答其恩申生命胡突以馭車劉約從元海而陪乘此論幽明交接人鬼相讎非罪福之業緣報應之輪轉儒佛懸殊此其明矣夫道之爲教儒之異流黃帝述其濫老聃嗣其弛紐究其本也保精養韜光藏暉全生遠害無爲寂泊淡淸虛少私寡欲此其宗也自後變淳就澆分鑣各騖派一無之理立三等之差上則卻粒延齡飛仙羽化成皇帝是也次則守雌誡剛忘知息伯陽子休是也下則擯代遺榮棲谷飮許由巢父是也推究神仙之事涉憑虛案黃帝本紀帝行房中之術修導養之法御七十二女服九一金丹昇鼎湖策飛龍白日登天臣攀戀收衣冠劍履而葬於橋山之參驗此詞咸成烏有夫葬者藏也先人云亡子孫感戀卜其宅兆修建墳塋安措魂靈藏秘骸骨庶免曝露之患皇帝馭靑龍以沖天躡紫雲而遐上高謝萬機脫屣四海元來不死何因須葬且邵伯司牧分陜遺惠在尚蔽弟甘棠思德留樹況黃帝登九五之位處萬乘之尊馭龍駕以上故勝寢疾而死若群臣攀慕情切合留奉衣冠豈容埋棄帝之遺服申誠戀之志仲子未薨來賵左傳以爲非禮黃帝不崩而葬臣下何苦見必葬不虛昇仙是妄進退之理迹可知且御女求仙恣慾求果更入輪迴之境詎登解脫之場縱令實得神仙終是未離生死何況此術黃帝受之於廣成所修在於一身本非出代之法黃帝之迹如此神仙傳竝虛已具前論不復繁說也夫老子爲教備乎五千之文莊周演詳於七篇之旨所明道者但詮陰天地和氣四時生育之理故云生一一生二二生三三生萬物嚴君平等釋云一者元氣謂混沌未分狀可見於無狀可見道中生一氣兆氣之淸者爲天濁者爲地此一氣生天一生二也因天地和而生陰陽及此二生三也以人稟陰陽陰陽能生品彙動植之類此三生萬物也易云一陰一陽之謂道明道則陰陽陰陽不測之謂神明卽此陰陽之理非測度可知此神妙也能順此陰陽之理安其所稟涯分守雌柔恬淡泊無爲絕矯性之聖智棄越分之聞同徼妙之兩觀泯有無之雙執折銳進之心解釋紛撓之志除剛勇之强梁損聲色之耽染體禍福倚伏之萌行慈儉謙退之行卽得終其壽免於身患子孫昌繁祭祀不輟違於此則夭命傷生招於敗累息胤勦絕其後不嗣故云善建不拔善抱不脫子孫祭祀不輟莊周解牛以全其生傳火而續其命齊萬物以杜健羡之路墮四支以去形骸之戀述木用遣愚智滯守之方喩指馬以忘天地執著之見混變化而夢胡蝶夭壽而延殤子太山小於秋毫則巨細之妄斯顯朝菌長於大椿則脩促之繫方假此竝莊周詮俗情妄執遂有長短姸醜之實而起人我貪惡之心利己損物致招患禍此論一生之內有此顚倒夭齡害命牽累敗身無未來冥報之義過去業緣之理代造善惡之行隨其所行當代受與儒書所說大意略同此足明佛道全別公子曰三教懸殊若此之異一理之說吁可同哉是知子休心齋以忘身非是爲他祈福宣尼潔齋變食豈閞藉因求果設道供以邀冥資之助造天尊以希濟拔之功者虛費哉何虛費哉而今而後庶幾免然章醮之法符禁之術比見行者時有效驗此事如何更請詳議先生曰子之此問誠有理焉且章醮祭祀之流祈禱之事有來自久唯道陵之法黃帝太公時行此術祭之別名禮典先著其義道陵因而修之行其法者謂之祭酒此是俗中術人之技道士竊其法以求資養本非道教之宗此乃涉於鬼道神祇之理俗諦妄情不無其事與夫邪巫陰陽卜筮郊祀尸祝之類也行此法自是太常所司不合隸屬司賓寺管僧尼所以屬司賓寺者爲佛法從西國來同諸外客之例道士元非是自然不合屬司賓寺管又行章醮祭祀之法卽是司禮寺事但以寺觀相對因此遂屬司賓以實而論之祇合郊社所管又符者鬼籙行之於鬼神之所以有驗亦焉足怪焉公子渙焉疑釋欣然而作拜首而謝僕習蓼甘辛居鮑忘臭沈淪弱喪積有歲年今屬頹光西邁之晨方悟非狂東走之弊朝聞夕死有慰深心謹承命矣請遵斯旨書紳自誡傳諸將來使夫倒躓之徒革心於昏昧之弘通之士懸解於眞如之理遂筆削爲論貽諸後代甄正論卷下乙巳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음도(陰道)의 순덕(順德).
  2. 2)소유(巢由)가 소보(巢父)와 허유(許由)의 첫 글자와 끝 글자이듯 연극(涓棘)은 연자부선((涓子部鮮)의 첫 글자인 연((涓)과 사문강조(仕文降棗)의 끝 글자인 조(棗)로 이루어졌음. 여기서 극(棘)은 조(棗)의 착간으로 보인다.
  3. 3)원문은 자림(子林), 여기서 임(林)은 인칭대명사에 붙이는 존칭조사로 군(君)이란 뜻이다. 참고로 국어의 ~님도 임(林)에 어원을 두기에, ~임(任)으로 쓰는 경우는 틀린 것이다. 본문에서는 문맥을 참조하여 ‘선생님’으로 번역해 둔다.
  4. 4)『시경』「국풍(國風)」의 주남(周南0과 소남(召南)을 말한다.
  5. 5)관인(官人)을 사모함이 애절함을 말한다. ‘감당’은 아가위로 주(周)의 대보 소공석(大保召公奭)이 문황(文王)의 정치를 베풀 때 ‘감당수’ 밑에서 쉰 일이 있는데 후세 사람들이 그를 사모하여 그가 쉬었던 나무까지도 사랑했다는 고사이다.
  6. 6)『장자』「양생주(養生主)」에 소 잡는 이야기가 나온다. 소 잡는 포정(庖丁)이 문혜군(文惠君)에게 말했다. “소 잡는 것도 기술이 아니라 도입니다. 뼈와 뼈 사이로 칼날이 지나가므로 소 자신이 죽은 줄도 모릅니다.” 하자 문혜군이 “훌륭하구나. 내가 포정의 말을 듣고 양생(養生)의 이치를 알았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