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C_IT_K1079_T_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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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_0135_a_01L십문변혹론 중권
석복례 지음
김두재 번역
6. 반경찬도문(反經贊道門)1)
【稽疑】 제바달다가 뒤에 여래(如來)가 된 것은 곧 보살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보살이면서 남에게 제 아비를 죽여 달라고 권유하였습니까? 만약 업장과 맞아 떨어져서 해한 것이라고 한다면 틀림없이 스스로 아사세왕을 해쳤어야 하는데 어째서 남에게 권유하기를 기다려서 해쳤으며, 만약 업장에 따라 해친 것이 아니라면 보살은 애초부터 해칠 마음이 없어야 하고 마땅히 남에게 권유하여 해치게 하지도 않았어야 할 것입니다. 성인의 설교(說敎)가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辯惑】산이 스스로 높아진 것이 아니라 그렇게 높게 된 까닭은 못이 낮기 때문이요, 여름이 스스로 더운 것이 아니라 덥게 된 까닭은 겨울이 춥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물과 불이 서로 혁신(革新)시켜 변화가 생기고 소금과 매실이 서로 섞여서 공효(功效)가 나타납니다. 서로 섞여서 상대방을 달라지게 하였지만 공효가 되는 것은 크기가 같으며, 서로 혁신시켜서 상대방을 바꾸어 놓았지만 변화에 있어서는 모두 순종합니다.
그런 까닭에 가부(可否)는 서로를 구제하고 손익(損益)은 서로를 이루어 주어 그 길은 달라도 돌아가는 곳은 같으니, 어찌 이러한 길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대체로 큰 방편을 지닌 보살은 생각할 수 없는 경지에 머물러 있어서 사물에 맞추어 노닐면서 사람들의 이해(利害)를 따라 방종한 마음을 움직이되 자기의 득실(得失)은 잊어버립니다. 남이 이익되는 일이라면 비록 자신이 손해가 되더라도 실천하고 남에게 해가 되는 일이라면 자기에게 아무리 이득이 있더라도 하지 않습니다.
큰 지혜[大智]는 마치 어리석은 듯하다는 말은 옳은 말이지만 반대가 되는 것 같아 이것을 보는 사람들은 비방하거나 헐뜯고 이 말을 듣는 이들은 의혹을 일으킵니다. 그렇다면 범부(凡夫)의 행위엔 착하지 못한 것과 착한 것이 있고 성인의 도(道)는 더러 거스르기도 하고 때로 순종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범부의 행위는 좁아서 착하지 못하거나 착한 것으로 시대를 가르치기엔 부족하고, 성인의 도는 넓어서 거스르거나 순종하는 것으로 사물을 모두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순응해서 사물을 바로잡아 주는 이는 문수(文殊)와 같은 분이요, 거슬러서 남을 바로잡는 이는 조달과 같은 무리입니다.
의혹이 되어 말하였습니다.
“순응하는 것으로 사람들을 교화한다는 것은 오래도록 그 말을 일삼아 왔거니와 거스르는 것으로 세속을 가르친다는 것은 들어왔던 것과 너무도 다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이에 대해 해석해 드리겠습니다.
“나를 흥기시키는 사람은 상(商)이구나”2)라고 공자가 말했습니다.
대체로 선(善)을 드러내서 악(惡)을 나타내고 악을 드러내서 선을 밝히는 것은 필연적인 분수요, 어그러뜨릴 수 없는 이치입니다. 그런 까닭에 성인이 권도(權道)를 써서 이미 악을 드러냈으므로 선은 저절로 밝혀지게 된 것입니다. 악함을 드러내어 사람들로 하여금 안으로 살피게 하고 선함을 밝혀 사물로 하여금 그와 같아지기를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착한 사람과 같아지기를 생각하게 하였으니 이미 선을 권장한 것이요, 안으로 살펴보게 하였으니 또한 악한 것을 지양시킨 것입니다. 순응해서 도를 널리 편 것도 지양하고 권장한 것이요 거슬러서 일을 시행한 것도 지양하고 권장한 것이니, 지양과 권장이 이미 고르게 되었으니 우열(優劣)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사리(師利)가 성인이라는 말을 듣고는 곧 머리를 땅에 대어 마음껏 공경했으나, 제바달다가 보살이라고 말하면 성이 나서 주먹을 불끈 쥔 채 마음을 평정하지 못하니, 이것은 아마도 조삼모사(朝三暮四)와 같은 것이요3) 또한 다섯은 알고 열은 모르는 것으로서 가히 교화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될 뿐이니, 어찌 교화의 이치까지 아는 사람이라고 하겠습니까?
공자(孔子)가 말했습니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거기엔 틀림없이 나의 스승이 있을 것이다. 그 중 착한 사람을 선택하여 그를 따르고, 그 중 착하지 못한 사람을 보고는 스스로의 악을 고칠 수 있다.’4)
남의 선행을 보고 스승으로 삼는다는 이런 이치는 오래도록 드러날 것입니다. 중니(仲尼)가 이미 선(善)을 칭찬하여 사람들을 깨우쳐 주었다면 조달(調達)이 어찌 착하지 않은 방법을 썼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경에서 제바달다(提婆達多)를 선지식으로 삼았기 때문에 나로 하여금 육바라밀(六波羅蜜)을 구족하게 하였다고 말한 것이 바로 그 이치입니다.”
어떤 사람이 또 말하였습니다.
“도에 순응해서 선(善)을 권장하지 못한다면 반드시 정상적인 방법과 반대되는 것으로써 권장해야 할 것이요, 도를 순응해서 악을 지양시키지 못한다면 반드시 정상적인 방법과 반대로 하여 악을 지양시켜야 하겠지만, 지금은 순응하여 교화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넉넉하거늘 어찌 반대되는 일로써 교화하려 합니까?”
이에 대해 해석하겠습니다.
“대체로 하늘과 땅은 덮어주고 실어주며 4계절은 만물을 생성(生成)시킵니다. 여름의 기운이 장성하면 언덕의 보리가 시들해지고, 가을바람이 서늘해지면 바위틈의 계수나무가 더욱 향기를 풍깁니다. 봄날이 더디 온다고 해서 국화꽃을 오래도록 피어 있게 할 수는 없고, 겨울 서리가 매섭게 춥다고 해서 어찌 소나무의 절개를 꺾어 흔들어 부러지게 할 수 있겠습니까?
대체로 크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사물을 운용하는 것은 하늘과 땅이 덮어주고 실어주는 것과 같으며, 기미를 인(因)하여 교화를 베푸는 것은 4계절이 생성시켜주는 것과 같으나 품성(稟性)으로 깨닫는 정도가 각기 달라서 여러 가지 사물이 번영하고 시드는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비유를 인하여 이해할 수 있어서 거의 얕음을 따라 깊은 데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말하였습니다.
“악한 짓을 하여 사람들을 교화할 수 있다고 한다면 악한 사람이 악한 짓을 해도 역시 교화할 수 있겠습니까? 악한 사람이 이미 교화시킬 수 있다면 어찌하여 착한 사람을 이용해서 교화하였겠습니까?”
이에 대해 해석하겠습니다.
“악한 사람이 역죄를 지으면 결과가 혹 먼 훗날에 나타나게 되어 받아들이지 않겠지만, 대사(大士:菩薩)가 방편을 행하면 과보가 당장에 나타나 틀림없이 징험이 있을 것입니다. 당장에 나타나면 이는 반드시 볼 수 있어서 사물이 이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하여 능히 고치겠지만 먼 훗날에 나타난다면 기억이 어둡고 막막하여 알기 어려우므로 사람들이 요행히 면하기를 기대할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악한 사람은 남을 교화할 수 없으며, 반드시 큰 방편[大權]을 기다려서야 교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달이 처음부터 끝까지 행한 일들은 방편과 실제를 다 함께 분별할 수 있는 것이니, 그런 까닭에 경전에서 ‘악한 친구는 마치 이 방편이라는 이름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논(論)에 이르기를 ‘대빈(大賓)이 비로소 실제가 된다’ 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영취산(靈鷲山) 회상에서 천왕(天王)에게 십호(十號)의 존칭으로 수기(授記)하셨고, 『내국경(柰國經)』에서는 지옥(地獄)을 삼선(三禪)의 즐거움에 견주어 말했습니다. 지극한 어짐[至仁]이 버려지지 않았으니 마땅히 영숙(穎叔)5)과 동일하고, 작은 악함도 범함이 없었으니 어찌 반숭(潘崇)6)이 되겠습니까? 부왕(父王)의 정해진 업이 바뀌지 않음으로 인하여 기어이 그의 반역을 당하게 되었으니 부처님 제자가 그것으로 인하여 권유한 것이 있었으며, 그가 재앙을 당하는 것을 보여주었으니 이것은 실상입니다. 일찍이 사람에게 권유하지 않았다면 방편이었다고 하겠지만 사람을 시켜 권유함을 보였고 이미 사람을 시켜 권유한 것을 보았다면 또한 사람으로 하여금 재앙을 당하는 것도 보게 한 것입니다. 재앙이 권유에서 생겨난 것이니, 권유함을 중지하면 재앙도 쉬어질 것입니다. 권유하였기 때문에 재앙을 두려워하는 것을 보았다면 재앙이 두려워서라도 권유를 중지했어야 할 것이므로 이것은 조달의 권유이지 사람을 시켜 권유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시켜서 권유한 것이 아닌 까닭에 권유는 곧 권유이면서 권유하지 않은 것이 됩니다. 방편으로 권한 것은 오히려 권한 것이 아니니 실제로 권유함이 없었다면 어떻게 권유함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바로 석류(錫類)7)의 뜻이 본래 온전한 것이요 동악(同惡)8)의 의심이 풀릴 만한 것입니다. 인(仁)하다 해서 돌이킬 수 있다면 네 사람 모두를 스승으로 삼을 만하고 행할 수 없는 도를 행할 수 있다면 일승(一乘)을 타고 통달할 것이다. 자하(子夏)도 이미 묵묵히 알았거늘 사리(師利)가 일찍이 무엇 때문에 의심하였겠습니까? 굳기가 돌 같거니, 어찌 종일토록 기다리겠습니까.”
7. 관업구사문(觀業救捨門)9)
【稽疑】 빈바사라(頻婆娑羅)왕이 먼저 부처님을 공양하였었는데 부처님께서 위제희(韋提希:빈바사라 왕후) 부인을 보았을 때는 빈바사리왕은 유폐(幽廢)되어 있었지만 아직 죽지는 않았습니다.
부처님의 크게 자비한 신통력으로는 겨자[芥子]에도 오히려 수미산(須彌山)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하던데 어째서 빈바사라왕을 구제하지 않고 그로 하여금 해를 당하게 하였으며, 아사세(阿闍世)왕에 이르러서는 종창이 생겼을 때 특별히 신비한 광명을 비추어 주셨고 장차 지옥으로 들어가야 할 사람을 마침내 목숨을 늘려주셨으니, 역자(逆子)에겐 어째서 다행스럽게도 유독 목숨을 늘려 주었으며 어진 아비[賢父]에게는 어째서 그렇게도 유독 목숨을 늘려주지 않았습니까?
오직 빈바사라왕은 과(果)을 증득한 어진 왕이니 마땅히 구원해 주어야 하는 데도 구원해 주지 않았고, 아사세왕은 적신(賊臣)이며 역자(逆子)이니 마땅히 구원해 주지 않아야 하는데도 구원해 주었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장래 사람들을 권장할 것이며 무엇으로써 사람들에게 보이렵니까? 전복되어 부지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저 아들이 아비를 마음대로 죽이는 것을 두고 부처님께서는 무엇을 하셨습니까?
【辯惑】대체로 업장[業]의 이치는 참으로 큽니다. 너무 심오하여 예측할 수도 없고 넓어서 끝을 다할 수도 없습니다. 또 너무도 작고 미세하며 면면(綿綿)한 조화의 소식입니다. 형상이 없어 보이지도 않으며 소리가 없어 들리지도 않습니다. 형상도 없고 소리도 없는 가운데에서 중생[庶類]들이 생겨나는데 생(生)의 궁극을 명(命)이라 말하고 습기[習]가 이루어지면 성품[性]이라고 말합니다.
그 본체는 없는 것 같으면서 있고 그 작용은 빠르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빠릅니다. 바야흐로 오면 물리칠 수 없고 또한 떠나가면 머물게 할 수도 없습니다.
천지(天地)의 넓음과 음양(陰陽)의 신령함[靈]과 같은 데에 이르러서는 해와 달이 위에서 곧게 비추고 아래에서는 산천(山川)의 기강이 잘 다스려져 있습니다. 또 어둡고 밝은 것이 다르게 성립되는 것을 세상 물정이라 하고 동물과 식물이 길은 다르지만 널리 퍼져 있는 것을 사람들은 모두 보면서도 그렇게 된 까닭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혹은 자연(自然)에서 미루어 보기도 하고 더러는 조화(造化)에 붙여 보기도 하며, 혹은 애초에 원기(元氣)에서 생겼다고 말하기도 하고 더러는 반고(盤古:太古)에서부터 점점 자라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며, 혹은 중간에 신(神)과 내[我]가 있고 곁에서 숱한 물질이 생겨났다고 말하기도 하고, 더러는 위에 범천(梵天)이 있고 아래에는 군류(群類:萬物)가 있다고 고집하기도 하며, 혹은 어두운 것이 자성(自性)이 되어 형상이 없는 것을 따라 형상이 있는 것으로 변한다고 말하기도 하고, 더러는 본체는 곧 미세한 티끌로서 변화하지 않는 것을 따라서 변화하는 것을 만들어 낸다고 헤아리기도 하니, 이것은 다 그 근본은 잃어버리고 그 말단에서 혼미해진 까닭이요, 그 근원에 대해서 깜깜하고 그 말류(末流)에 미혹된 탓입니다.
그런 까닭에 다른 견해들이 어지럽게 치달리고 다른 감정이 다투어 일어나는 것이니, 어찌 업(業)으로 인하여 마음이 일어나고 마음은 업의 작용이 된다는 것을 알겠습니까?
업이 마음을 이끌어서 형체를 받고 마음은 업을 따라서 경계를 만드니 6도(道)에 오르내리면서 재료를 만들면서도 뛰어넘지 못하고, 이의(二儀:하늘과 땅)에 오르내리면서 이렇게 쪼개지고 나누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업을 인하여 몸을 받고 몸은 다시 업을 지으며, 마음을 따라서 경계를 만들고 경계는 다시 마음을 내어 시작도 없고 끝남도 없으니, 비유하면 돌고 도는 수레바퀴와 같아서 공(空)한 것도 아니요 존재하는 것도 아니어서 비유하면 환화(幻化)와 같은 것입니다.
사생(四生:胎ㆍ卵ㆍ濕ㆍ化)은 쉽게 늘어나고 삼계(三界:欲界ㆍ色界ㆍ無色界)는 근본으로 돌아가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업(業)은 선과 악으로 나뉘어 흐르고 보(報)는 괴로움과 즐거움으로 다르게 나타납니다. 선행을 쌓으면 경사스러운 일을 남기나니 선행을 하면 그 때문에 즐거움이 이르고, 악행을 쌓으면 재앙을 남기나니 악한 짓을 하면 그 때문에 괴로움이 쌓이기 마련입니다.
마치 그림자가 형체를 따라 굽게 나타나거나 곧게 나타나는 것과 같아서 아무리 이주(離朱:離婁)10) 같은 사람이 먹줄로 바로잡으려 해도 그 정확함에는 비교할 수 없으며, 메아리가 소리를 따라서 크고 작아지는 것과 같아서 아무리 사광(師曠)11) 같은 사람이 거문고의 줄을 고른다 해도 그 균등함에는 비유할 수가 없습니다.
형상이 곧은데 그림자가 기울어진 것은 보지 못했으니 어찌 선행을 닦는 데에 괴로운 과보가 있겠으며, 소리가 작은데 메아리가 들려왔다는 말은 듣지 못했으니 어찌 악업을 이루고서도 즐거운 과보가 있겠습니까? 또한 밭을 힘써 가꾸면 곡식이 밭에 가득하고 농부가 때를 어기면 가시가 들에 널려있게 됨과 같아서 가령 밭을 가는데 그 일을 경솔하게 하거나 김을 매는데 그 업을 멸렬(滅裂)하면 피나 강아지풀 같은 잡초가 없기를 바라지만 마당과 같아지고 언덕처럼 될 것이니, 물속에서 벽려(薜荔)를 캐고 나뭇가지에서 부용(芙蓉)을 따려는 행위와 같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습니다.
“선(善)은 복의 시작이 되고 악(惡)은 바로 죄의 근원이 됨이 마치 그림자나 메아리가 어김이 없는 것과 같고, 밭 갈고 김매면 보답이 따르는 것 같다고 하니 공경하여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빈바사라왕은 착한 일을 했는데도 거꾸로 화(禍)를 당해 죽었으며, 아사세왕은 악함을 쌓았는데도 그로 인하여 복을 받았습니까?”
이에 대해 해석하겠습니다.
“이 얼마나 훌륭한가? 그대의 질문이여, 그대는 업(業)을 지으면 과보[報報)가 있다는 말만 들었지 과보에는 시기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군요.
대체로 업에 과보가 감응하는 데에는 세 가지 때가 있어서 그 시기가 같지 않습니다. 현보업(見報業)이 있나니 이 몸이 업을 짓고 바로 그 몸이 받는 것이요, 생보업(生報業)이 있나니 지금의 몸이 업을 지어서 다음 생에 받게 되는 것이며, 후보업(後報業)이 있나니 이 생에서 미처 다 받지 못한 것을 후후생(後後生)에 마침내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맨 처음 것은 벼나 콩의 종류와 같으니 시간이 지나면 곧 익게 마련이고, 다음은 보리와 밀 같은 곡식이니 해가 바뀌어야 비로소 익게 되며, 마지막은 복숭아와 자두 같은 것이라서 여러 해가 물러가야 마침내 열매가 맺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까닭에 옛날엔 부지런했으나 지금은 게으른12) 사람은 들에는 거두어들일 가을 곡식이 없으나 집안에는 해마다 쌓아두었던 곡식이 가득하며, 예전엔 게을렀으나 지금 부지런한 사람은 아침엔 몇 알의 양식도 없으나 저녁엔 양식이 남아 비축할 수 있으니, 어찌 부지런한 사람의 부족함을 보고서 저렇게 부족한 까닭은 예전에 게을러서가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겠으며, 게으른 사람이 넉넉한 것을 보고 이렇게 넉넉한 것이 예전에 부지런해서가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형상으로써 그 뜻을 거듭 펴주기를 바라기에 다시 일을 빌어 그 이치를 밝히겠습니다.
어떤 두 사람이 서로 이웃에 살면서 집을 지은 일이 있는데 한 사람은 먼저는 기술이 부족했지만 뒤에는 솜씨가 좋아졌고, 다른 한 사람은 먼저는 기술이 좋았으나 나중엔 그 솜씨가 사라졌다고 합시다. 먼저 기술이 부족했던 사람은 집을 너무 누추하게 짓고 그 안에 기거하면서 기술을 익혀서 기술이 이루어지자 솜씨가 좀 더 좋아지기를 생각하였고 이미 솜씨가 좋아져서는 그 졸렬했던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으며, 먼저 솜씨가 훌륭했던 사람은 집을 아주 정갈하게 짓고 그 안에 살면서 스스로 제 몸만 보양하였고 보양이 지나쳐 본업을 그만두었으며 이미 본업을 그만두고 나서는 그 솜씨마저 잃어버렸다고 합시다.
아무리 그 솜씨를 잃어버렸다고 해도 그 집은 오히려 정밀하고, 비록 그 졸렬함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그 거처는 오히려 누추합니다. 세월의 차례가 면면히 옮겨가고 비바람이 몰아쳐 오래된 집이 이미 무너지고 마침내 새로 집을 짓는데 이르러서는 곧 솜씨 좋은 이와 졸렬했던 사람이 세운 것은 정밀하고 누추함이 다시 뒤바뀔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이야기하면 몸이란 마음의 집이요, 업(業)의 과보[果]입니다. 업이란 마음의 작용이요 몸의 원인[因]입니다. 솜씨 좋은 이와 졸렬한 이가 서로 교체된 것은 선과 악을 다시 익힌 것에 해당하고 옛 집을 새로 얽어 지은 것은 전생의 몸이 후세에 태어난 것입니다.
빈바(頻婆)왕은 비록 지금은 실수한 행실이 없지만 예전에 착하지 못한 업이 있었고, 아사세(阿闍世)왕은 비록 현재에는 악한 사람으로 보이지만 과거엔 착한 업을 닦았던 것입니다. 착하지 않았던 까닭에 재앙을 만나고 착한 업을 닦았던 까닭에 수명이 연장된 것이니 그 이치를 잘 살펴보면 무슨 괴상함이 많겠습니까?”
보내온 편지에 논란하여 말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선 크게 자비한 신통력으로써 겨자씨에도 오히려 수미산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하는데 어째서 빈바왕을 구제하지 못하여 그로 하여금 살해당하게 하셨습니까?”
이에 대해 해석하겠습니다.
“대체로 업장엔 결정된 것이 있고 결정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결정되지 않은 것은 쉽게 바꿀 수 있어서 그 업장을 없앨 수 있지만 결정된 것은 바꾸기 어려워서 그 과보를 꼭 받아야만 합니다.
빈바왕의 경우는 결정된 업장이었으니 어떻게 구제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훌륭한 의원이라도 수명이 다한 사람을 고칠 수는 없고, 자비로운 어머니라 해도 구금(口噤)병이 든 자식에겐 젖을 먹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겐 업이 있고 물질에는 마음이 없으니 마음이 없으면 내 마음이 능히 제어할 수 있어서 큰 산도 때로는 작은 곳에 들어가게 할 수 있으며 업이 있으면 그 업장이 주인이 되어 명이 짧아도 늘여서 오래 살게 할 수 없습니다.
지금 곧 마음이 없는 것으로서 마음 있는 것에 예를 들고 업장이 있는 것을 가지고 업장이 없는 것과 같게 하려고 하니 북쪽으로 가려는 수레가 남쪽으로 가는 것과 같아 서로의 거리가 또한 점점 멀어지지 않겠습니까?”
또 말하였습니다.
“역자(逆子)에 대해서는 어찌 다행하게도 유독 목숨을 늘여주었으며, 어진 아비에 대해서는 어찌 불행하게도 유독 목숨을 늘려주지 못했습니까?”
이에 대해 해석하겠습니다.
“『열반경(涅槃經)』을 상고해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빈바사라왕이 비부라산(毘富羅山)에 가서 유행(遊行)하면서 활 쏘고 사냥할 적에 넓은 들판을 두루 돌아다녔으나 하나도 얻은 것이 없었으며, 오직 한 신선을 보았는데 다섯 가지 신통을 구족하고 있었다. 곧바로 측근 신하들에게 칙명을 내려 그를 죽이게 하였더니, 그 신선이 맹세하여 말하기를 ‘나도 미래에 또한 마땅히 이와 같이 네 목숨을 해치겠노라’고 하였다.”
또 경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아사세왕에게 ‘당신은 옛날에 이미 비바시(毘婆尸)부처님에게서 처음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의 마음을 내었었습니다’ 고 말씀하셨다.”
이것에 대하여 가만히 생각건대 마음이 치달려서 발광(發狂)하거나 방자하고 사납게 다섯 가지 신통력으로 크게 행동하였으나, 일곱 부처님이 계시던 초기에 그러한 행동을 그치고 마음을 돌렸습니다. 혹은 과거의 선행을 잃지 않고 참회하였으므로 수명이 늘어나게 되었고 혹은 남은 재앙이 다 사라지지 않아서 살역(殺逆)을 당하여 비명(非命)에 죽게도 된 것입니다. 비명에 죽은 것은 방자하고 사나웠기 때문이니, 어찌 이것을 아무 허물도 없으므로 수명을 늘려야 한다고 하겠습니까? 처음에 마음을 귀의하였으나 어찌 다행스러움이 있다고 말하겠습니까?
바라노니 세 가지 과보의 이치를 따라13) 마땅히 한 구석의 의혹을 돌이키십시오.
또 말하였습니다.
“빈바사라는 과(果)를 증득한 어진 왕이니 마땅히 구제해야 할 터인데도 구제해주지 않았고, 아사세왕은 적신(賊臣)이요 역자(逆子)이니 구제해 주지않는 것이 당연하건만 구제해 주었습니까?”
이에 대해 해석하겠습니다.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서 말하기를 “빈바사라는 일곱 겹이나 되는 실내(室內)에 유폐(幽閉)되었는데도 스스로 그 안에서 증득해 나아가서 아나함(阿那含)을 이루었다” 하였으며, 아울러 여러 경론에 말하기를“아나함은 불환(不還)이라고 말한다. 다시는 욕계(欲界)에 환생(還生)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였습니다.
『열반경』에서 말하기를 “아사세왕은 오직 현재만 보고 미래는 보지 못하였으므로 부왕에게 아무 허물도 없는데 제멋대로 역해(逆害)를 가하였기 때문에 마음에 후회와 번뇌를 일으켜 온몸에 종창[瘡]이 생겼다”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만약 기바(耆婆)의 말을 따르고 순종하지 않으면 다음 달 7일에 아비지옥(阿鼻地獄)에 떨어질 것이다” 하였습니다.
대체로 남몰래 울분을 품었으나 최상의 과위에 오르면 비록 겉모습은 흉하지만 안으로는 길(吉)하며, 눈이 어두워져도 하열한 세계를 초월하면 비록 이름은 죽었다고 해도 실상은 산 것이니 구제해 주면 곧 도리어 손해를 끼지는 것이 되고 그대로 맡겨두면 저절로 유익하게 될 것입니다.
몸에 종기가 나고 마음에 번열이 생겨 회향(廻向)할 길을 모르거나 업장이 깊고 과보가 가까이 다가와 장차 니리(泥犁:地獄)의 성에 떨어질 지경 같은 데에 이르러서는 구제해 주면 이익이 되지만 방임해 버리면 손해가 됩니다. 이것이 곧 관찰해 보고 꼭 구제해 주어야 할 것이면 구제해 주어서 이익이 되게 하고, 관찰해 보아 마땅히 버려야 할 것이면 버려서 이익이 되게 하는 것이거늘 그대는 ‘꼭 구제해 주어야 할 일인데 구제해 주지 않고 구제해 주시 않아야 할 것인데 구제해 주었느냐?’고 말하였으니, 성인의 마음이 아무리 미묘하다 하지만 그것을 아는 데에 어찌 걸림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결정된 과보는 받아야 하고 바꿀 수 없으며 업은 범하기 어려운 것이 분명하지만 중한 죄는 뉘우치면 가벼워지고 행동은 바꿀 수 있음이 분명합니다.
행동은 고칠 수가 있으므로 악한 사람이 선으로 옮길 때에는 일을 시작할 때처럼 하고, 업은 범하기 어려우므로 착한 사람이 악행을 멈출 때에는 끓는 물을 만지듯이 해야 합니다. 악을 지양하고 선을 행하면 부끄러운 마음이 이르게 되리니, 이것은 대개 덕으로 인도해야지 어떻게 형벌을 가하여 가지런하게 되겠습니까?
부자(父子)가 모두 이미 도에 진입하였으니, 어떻게 거꾸로 된 것을 잡아주지 않겠습니까? 또 어질고 어리석은 이가 모두 교화를 따르는데, 어떻게 와서 권유하지 않겠습니까? 나를 알아주는 이가 드물면 나는 귀한 사람일터이니, 그 이치가 또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8. 수교억양문(隨敎抑揚門)14)
【稽疑】 열반장문(涅槃章門)에서 여러 품(品)을 총괄하면서 『열반경』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부처가 되기 어렵다고 해놓고 공덕(功德)을 찬양하는 곳에서는 어째서 『반야경(般若經)』과 『법화경(法華經)』보다 가볍게 여겼습니까? 만약 『반야경』에서 집착을 버려야 한다고 했기 때문에 우월하다고 한다면 『열반경』에서는 반 게(半偈)를 위하여 몸까지 버렸는데,15) 어째서 『반야경』만 못하단 말입니까? 만약 『법화경』이 대승(大乘)을 증득할 수 있어서 우월하다고 한다면 『열반경』은 크게 공(空)한 것으로써 그 문을 삼았는데 어떻게 『법화경』보다 열등하단 말입니까? 법문(法門)은 둘이 아니거늘 어째서 둘이라고 합니까?
【辯惑】진신(眞身)은 적정(寂靜)한 것인데 어찌 언설(言說)이 존재할 것이며, 지극한 이치는 희미(希微)한 것이라서 본래 성품[性]과 모양[相]이 없습니다.
비록 언설이 없다지만 언설의 도리를 어기지 아니하며, 아무리 성품과 모양이 없다 해도 성품과 모양의 요체[津]가 됩니다.
비유컨대 밝은 거울은 아무 작용도 없지만 형제가 오면 그 형상이 나타나며, 깊은 골짜기는 흔들리지 않지만 소리가 미치면 메아리가 가득 찹니다.
그렇다면 많은 소리는 들쭉날쭉 같지 않지만 골짜기가 없으면 메아리가 이를 수 없으며, 모든 물질이 끊임없이 오고 가지만 거울이 없으면 어떻게 그 형상을 나타내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형체와 소리는 느낌[感]이 되고 거울과 골짜기는 호응[應]함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감응(感應)이 한 번 무너지면 보고 듣는 것도 아울러 잃게 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여래는 무연대자(無緣大慈:평등한 대자비)가 있으신 분이시니 부사의한 큰 원[弘願]은 맑은 거울과 깊숙한 골짜기와 같고, 중생은 훈습(熏習)의 종자가 있으니 보리의 마음을 내는 것은 마치 여러 가지 형제나 많은 소리와 같은 것입니다.
옥호(玉毫)가 밝으셔서 32상(相)이 나타난 것은 거울 속의 형상과 같은 것이요, 금구(金口)를 열어서 12부(部) 경전을 펴신 것은 골짜기 속의 메아리와 같은 것입니다. 바라원(波羅苑) 안에서 고(苦)ㆍ집(集)ㆍ멸(滅)ㆍ도(道)를 밝힌 것에서부터 견고림(堅固林)에서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을 설하신 때까지 그 사이에 8장(藏:불법을 8종으로 나눈 것)을 다 열었고 삼승(三乘)이 다투어 치달렸습니다.
감로(甘露)의 맛은 다르지 않고 대운(大雲)의 윤택함도 구별이 없으나 작은 풀과 큰 풀이 받는 것에는 적고 많음이 있으며 인연 있는 이와 인연 없는 이가 복종함에는 삶과 죽음이 있습니다. 점돈(漸頓:점교와 돈교)에 어느덧 백 가지 생각이 따르고 반만(半滿:소승과 대승) 때문에 여러 문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본래 그 근원에 있어서는 일치(一致)하지 않음이 없으니, 그런 까닭에 그 근본으로부터 관찰해 보면 스러져서[泯然] 평등하며 끝에서부터 관찰해 보면 들쭉날쭉 무성하여[森然] 동일하지 않습니다.
동일하지 않는 까닭에 각각의 이해가 다르고 평등한 까닭에 하나의 소리입니다. 하나의 소리이기 때문에 법문은 둘이 아니며, 이해가 각기 다르기 때문에 가르침의 흔적은 하나가 아닙니다.
6도(度:육바라밀)의 법을 연설하고 사절(四絶:四句分別)의 이치를 말씀하신 일 같은 것도 곧 유(有)로써 공(空)을 밝힌 것이고, 그 공에 의지하여 행(行)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이것이 반야의 이치입니다.
일곱 가지 비유를 들어 밝히고 세 가지 법의 평등함을 밝힌 것과 같은 것은 두 가지를 깨뜨려서 하나에 돌아가게 한 것이며 작은 것을 돌이켜 큰 것을 따르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법화의 취지입니다
삼점(三點:法身ㆍ般若ㆍ解脫)의 오묘함을 널리 말하고 사덕(四德:常ㆍ樂ㆍ我ㆍ淨)의 미묘함을 열은 것과 같은 것은 다른 손님이 그 집안의 보배를 꺼내오고 새내기 의사가 오래된 젖[乳]을 사용한 것이니 이것이 열반의 이치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대승의 비밀한 창고[府]이며 방등(方等)의 미묘한 문이니 현성(賢聖)이 우러러 멈추는 높은 산이요 경론(經論)의 조종(朝宗)이 되는 거대한 바다입니다. 이것을 증득한 사람은 모두 먼 경지에 이를 수 있지만 그것을 잃어버린 사람이라면 어찌 진흙탕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아까 보낸 편지에 논하여 말하기를 “『열반경』을 의지하지 않으면 부처를 이루기 어렵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어지신 그대는 『법화경』이나 『반야경』을 의지하지 않고도 부처를 이룰 수 있다고 말하려고 한 것입니까?
그렇다면 『법화경』은 바로 모든 경전의 왕이요 『반야경』은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인데, 누가 어미도 없이 자식을 잉태하는 것을 보았으며 왕 없이도 사람을 통솔하는 것을 보았다고 하십니까? 우세하고 하열함이 없는 이치를 단연코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보낸 편지에 논하여 말하기를, “무슨 까닭에 공덕을 찬양하는 곳에서 『반야경』이나 『법화경』보다 가볍게 다루었느냐?”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때를 따른다는 이치는 바뀌는 사물에 그 항상함을 지키지는 말고 오직 알맞은 것을 따라 변해야 하며, 취하거나 버림에 있어서는 올바른 견해를 갖는 것이 반드시 귀하니, 그래서 화타[和:華陀]16)와 편작[扁:扁鵲]17)은 병에 따라서 약을 주고, 공수자[班:公輸子]18)와 공공[倕:共工]19)은 사물에 따라 기술을 베풀었으니 어찌 춥고 더운 것이 변하지 않으며 규구(規矩)에 항상함이 있겠습니까? 더구나 쓰인 글[成文]을 자세히 살펴보건대, 당신의 주장과 다름이 있는 것이겠습니까?
경에 이르기를 “상어(上語)도 또한 훌륭하고 중하(中下)도 또한 훌륭하여 금강(金剛) 보배의 창고가 만족하여 결함이 없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모든 약 가운데 제호(醍醐)가 제일인 것과 같다”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마치 해가 솟아올라서 1천 광명(光明)을 뿜어내는 것과 같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비유하면 숱한 냇물이 모두 바다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이 경전을 수행하면 곧바로 열 가지 일의 공덕을 구족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나눠진 흐름[分流:支流]은 험난함을 시설하였으나 바다는 온갖 골짜기의 왕이 되고 늘어선 별들[列曜]이 문채를 이루지만 해가 하늘에서 삼광(三光)의 주인이 되며 금강(金剛)은 보배 중에 제일이요 제호(醍醐)는 약 가운데 최상이듯이 세 경전의 말씀이 모두 훌륭하니 어느 글귀의 뜻이 현묘하지 않겠으며, 열 가지 일을 성취하게 되니 무슨 공업(功業)인들 갖추어지지 않았겠습니까?
그 비흥(比興)이 저와 같고 저 칭양(稱揚)이 이와 같아서 고요하면서도 자세히 헤아렸고 진실하면서도 이미 경솔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열반경』과 같이 범본(梵本)의 게송이 3만을 넘었건만 진단(震旦)에서 번역한 것은 겨우 십천(十千)만을 내놓아 법의 거울을 열었으나 온전하지 못하고 현묘한 구슬을 얻었으나 겨우 반밖에 되지 않음이겠습니까?
의혹하여 말하였습니다.
“가르침의 자취가 하나가 아닌데 법문(法門)은 둘이 아니라고 하면서 공덕(功德)의 유무(有無)를 분별하고, 경본(經本)의 광략(廣略)을 밝히는 데 있어서는 이연(怡然)히 이치를 따른 것이라고만 하였습니다. 다만 높고 낮아 서로 기울고, 길고 짧아 서로 형상이 다를 뿐이라고 한다면, 이미 『법화경』에서 이 경이 제일이라고 하였는데 다른 경전은 그 다음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열반경』에서 이 경이 가장 뛰어나다고 하였으니, 다른 경전은 낮고 열등하지 않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반야경』에서 이 법문은 불가사의(不可思議)하다고 하였으니, 다른 법문은 사의(思議)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뜻이 분명하지 못하여 앞에 생겼던 의혹이 다시 떨쳐 일어납니다.”
이에 대하여 해석하겠습니다.
“대체로 큰 냇물을 건너는 데 필요한 것은 배와 노가 제일이요, 넓은 대륙을 싣고 치달리기에는 수레와 말이 제일이며, 기거하는 데 편안한 것은 궁실이나 사관(寺觀)이 제일입니다.
아무리 물과 육지의 위치가 다르고 동정(動靜)에 적당한 곳이 다르다지만 온 나라가 한 사람에 그치는 것이 아니요, 구주(九州)가 한 지역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까닭에 찬란한 배[畫艗]20)와 좋은 노가 두루 흘러내려도 그치게 할 수 없고 등구(騰駒)처럼 아름다운 수레가 치달려도 그치게 할 수 없으며 치봉(跱鳳)처럼 화려한 거처에 기거해도 어찌 폐지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곧 배와 노가 일찍이 최고가 되지 않음이 없고 수레와 말도 일찍이 제일이 되지 않음이 없으며 궁실과 사관이 일찍이 최고가 되지 않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물가 마을[水鄕]에 국한된 사람은 수레를 얻으면 곧 깨지고 오로지 산과 들판에서만 사는 사람은 배를 주면 곧 쪼개버리고 맙니다. 몸이 마루를 내려가지 않는 사람은 배와 수레가 쓸모가 있다고 말하지 않으며, 마음으로 힘쓰고 수행에 매진하는 사람은 큰 동량의 집이 적절한 것임을 알지 못하나니, 이와 같은 사람과 어찌 함께 도에 대해 말할 수 있겠습니까?
공자가 말하기를 ‘사람에게 친애(親愛)를 가르치는 데에는 효도보다 더 좋은 것이 없고 사람에게 예순(禮順)을 가르치는 데에는 공경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21)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법상(法象)은 천지(天地)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저명(著明)엔 해와 달보다 더 큰 것이 없다’22)고 하였으니, 이 또한 각각 그 이치를 따라서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고들 말하고 또한 보다 더 큰 것이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모든 경전에서 제일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마도 이러한 유(類)를 따라 가다보면 명백해질 것입니다.” - 033_0135_a_01L十門辯惑論卷中 集大慈恩寺沙門釋 復禮 撰反經贊道門第六稽疑曰:提婆達多後爲如來者,則是菩薩也。豈有菩薩而勸人害父乎?若業合害者,闍王必應自害,何爲待勸而害也?若業非害者,菩薩初無害心,不應勸人令害也。聖人設教何至斯哉?辯惑曰:山非自高,所以高者澤下。夏非自暑,所以暑者冬寒。故水火相革而變生,鹽梅相糅而功著。相糅也者相異也,爲功則大同。相革也者相反也,在變則咸順。故可否相濟,損益相成,殊途而同歸,何莫由斯道?詳夫大權菩薩住不思議,應物而遊,從人之利害,放情而動。忘己之得失,人之利矣。己雖失而行之,人之害矣。己雖得而違之,而大智若愚,正言似反。見之者誹毀,聞之者聽瑩。然則凡夫之行,有否有臧;聖人之道,或逆或順。凡夫之行褊,否臧不足以訓時;聖人之道弘,逆順咸可以匠物。順而匠物者,文殊之等也。逆而匠物者,調達之流也,惑曰:順以化人久事斯語,逆而教俗深異所聞。將以書紳,希更指掌。釋曰:起予者商也。聊爲子言之。夫善著則顯惡,惡著則明善。必然之分,其理不忒。故聖人之用權道也。惡旣著矣,善自明矣。惡著俾人之內省,善明使物之思齊。思齊旣可以勸善,內省又可以止惡。順而弘道者,亦以止勸也。逆而行事者,亦以止勸也。止勸旣均矣,優劣可得乎?而人聞師利是聖人,卽扣頭申敬,謂達多爲菩薩,卽扼腕不平。斯蓋朝三暮四,識五迷十。可爲受化之人耳,安知爲化之理哉!孔子曰:‘三人行,必有我師焉。’擇其善者而從之,其不善者而改之。人善爲師,茲理久著仲尼旣稱善誘矣調達何用不臧耶故經云由提婆達多善知識故令我具足六波羅蜜。卽其義也。惑人又曰:若順道不能勸善也,可須反經以勸之。順道不能止惡也,可須反經以止之。今順而爲化,旣足矣,何用反而爲化乎釋曰夫二儀覆載四序生成夏氣長羸,隴麥以之憔悴;秋風凄緊,巖桂以之芳菲。春日遲遲,未可使菊華榮曜;冬霜凛凛,詎能遣松貞搖落?惟夫大悲運物,若兩儀之覆載;因機設教,猶四序之生成。稟悟各殊,似數物之榮悴,智者因喩而得解,庶幾沿淺及深乎?又曰:爲惡可以化人者,惡人爲惡亦化乎,惡人若已能化者,何用善人爲化乎?釋曰:惡人爲逆,果或賖而未受,大士行權,報在今而必驗。今則斯須可睹物,恐怖而能悛,賖則冥寞難知。人僥倖而冀免,故惡人不足以化物,必俟大權爲化焉。然調達始終行事,權實雙辯。經云:惡友猶是權名。論曰:大賓方爲實稱,故鷲山會上天王記十號之尊。奈國經中,地獄比三禪之樂。至仁不遺應同穎叔,小惡無犯,豈作潘崇?固以父王定業,不移必遇其逆。佛弟因之有勸示,受其殃實也,未始勸人權也。令人見勸,旣令人見勸也。亦令人見殃也。殃生於勸,勸止則殃息,見勸故怖殃,怖殃而止勸。斯則調達之勸,欲令人不勸耳。令不勸故勸,則勸爲不勸乎?權有勸尚爲不勸,實無勸,安得有勸哉?此迺錫類之義本全,同惡之疑可息,仁而能反,兼四子以爲師,非道可行。駕一乘而通達,子夏旣其默識,師利曾何致疑,介如石焉,豈俟終日矣?觀業救捨門第七稽疑曰:頻婆娑羅首供養佛,佛見提希之時,頻婆幽而未死。以佛大悲神力,芥子尚納須彌,如何不救頻婆,令其遇害?至於闍王瘡痏,特照神光,將入地獄,遂延遐壽。於逆子何幸獨得延齡,於賢父何幸獨不延也?但頻婆證果賢王也,應救而不救之;闍王賊臣逆子也,不應救而救之。何以勸將來?何以示人子顚而不扶焉?用彼相任,子害父,佛何爲哉!辯惑曰:夫業之爲理也,大矣哉!深焉不測,廣焉不極,眇眇緜緜,變化消息夷兮無形,希兮無聲。無形無聲,庶類以生,生極之謂命,習成之謂性。其體也,若無而有;其用也,不疾而速。方其來也,不可排;方其謝也,不可止。至若天地之廣,陰陽之靈,日月貞明於上,山川紀理於下。幽顯異致而云爲,動植殊途而布濩。人咸見其然也,而莫知所以然也。故或推之於自然,或付之於造化,或言始生於元氣,或云稍長於盤古,或謂中有神我,傍興衆物,或執上有梵天,下生群類,或道冥爲自性,從無形而變有形,或計體是微塵。從不化而生,所化斯皆失其本而迷其末,昧其源而惑其流。所以異見紛馳,殊情競擧,豈知業因心起,心爲業用,業引心而受形,心隨業而作境?六道昇降,財成而不越;二儀上下,剖判而斯分。然則因業受身,身還造業,從心作境,境復生心,無始無終。譬之於輪轉,非空非有;喩之於幻化,四生易其滋漫,三界難以歸根。然而業之以善惡分流,報之以苦樂殊應。積善餘慶,爲善所以致樂;積惡餘殃,作惡所以階苦。若影隨形而曲直,雖離朱督繩,不能比其定。若嚮隨聲而大小,雖師曠調軫,未可喩其均。不見形直而影斜,豈有善修而報苦?不聞聲小而嚮著,詎有惡成而果樂?亦猶田畯勉職,黍稷盈疇,農夫失時,茨棘徧野。借使耕而鹵莽其事,耘而滅裂其業欲望,不稂不莠,如坻如京。採薜荔於水中,搴芙蓉於木末也。或曰:善爲福始,惡是罪源,同影嚮之無違,類耕耘之有報。敬聞命矣。何迺頻婆,爲善翻以禍終,阿闍積舋,仍蒙福末?釋曰:不亦善乎,而問之也!子聞業之有報也,未聞報之有時也。夫業之感報有三時不同焉。有見報業者,此身作業,卽身而受也。有生報業者,今身造業,次生而受也。有後報業者,此生未受,後後生方受也。初猶禾菽之類也。經時卽熟焉。次猶䅘麰之等也。易歲乃登焉。後猶桃李之輩也。積年方實焉。故昔勤今墯者,野無秋實之望,家有歲積之盈。昔墯今勤者,朝無數粒之資,夕有餘糧之畜。豈可以見勤者,不足謂不足非始於惰乎?見墯者,有餘謂有餘非始於勤乎?冀以象而申意,更借事而明理。曰有二人相與爲鄰,築室焉。一人先拙而後巧,一人先巧而後廢。先拙者,築室甚陋,居而習伎,伎成而思巧#旣巧而變其拙矣。先巧者,築室甚精#居而自養,養過而業廢,旣廢而失其巧矣。雖失其巧,其屋尚精焉。雖變其拙,其居猶陋焉。及乎歲序,緜移風雨飄浸,舊宇旣廢,新搆聿興,卽工拙所營,精陋復反矣。因斯而談,身者心之宅而業之果也。業者心之用而身之因也。工拙相代者,善惡更習也。舊宇新搆者,前身後生也。頻婆雖今無遺行,而昔有不臧。阿闍雖現是惡人,而往修善業。不臧所以遇禍,修善所以延齡。其致可尋,何足多怪?來論曰:以佛大悲神力,芥子尚納須彌,如何不救頻婆,令其遇害?釋曰:夫業有決定也者,有不定也者。不定則易轉其業可亡,決定則難移其報,必受。頻婆定業也,如何可救乎?故良醫不能愈命盡之人,慈母不能乳口噤之子矣。然則人而有業,物也無心。無心則我心能制。山大或可入於小。有業則彼業爲主,命促不可引而長。今乃以無心而例有心,將有業而齊無業。北轅適越相去不亦漸遙哉!又曰:於逆子何幸獨得延齡,於賢父何幸獨不延也?釋曰:按涅槃經,頻婆娑羅往於毘富羅山,遊行射獵,周徧曠野,悉無所得,唯見一仙五通具足,卽勅左右而令殺之。其仙誓言;我於未來亦當如是而害汝命。又云:佛語闍王,汝昔已於毘婆尸佛,初發阿耨菩提之心,竊以馳騁發狂肆虐於五通之上景行,行止歸心於七佛之初。或宿善不亡,因懺浣而延壽。或餘殃未殄,遭殺逆而非命,非命由乎肆虐,詎是無辜延壽?始乎歸心,寧稱有幸。請修三報之理,當反一隅之惑。又曰:頻婆得果賢王也。應救而不救之。闍王賊臣逆子也。不應救而救之。釋曰:觀無量壽經云:頻婆娑羅幽閉,置於七重室內自然增進成阿那含。諸經論竝云;阿那含者,名爲不還。更不還生欲界故,涅槃云,阿闍唯見現在,不見未來,父王無辜,撗加逆害,心生悔熱,徧體生瘡。又云:若不隨順耆婆語者,來月七日墮阿鼻獄。詳夫幽憤而昇上果,雖外凶而內吉。冥目而超下界,雖名死而實生。救之則翻損,任之則自益。至若身瘡而心熱,罔知迴向之路;業深而報近,將墜泥犂之城。救之則爲益,任之則爲損。斯則觀其所應救。救之以爲益,察其所應捨,捨之以爲利,而曰應救而不救之,所不應救而救之。聖心雖微知之何陋矣?然定報受之而不易,明業之難犯也。重罪悔之而以輕,明行之可革也。行可革,惡人遷善於濫觴;業難犯,善人止惡於探湯。惡止善行,卽有恥且格,斯蓋導之以德也。豈若齊之以刑也?父子咸已進於道,何顚不扶乎?賢愚竝可從於化,何來不勸乎?知我者希則我貴矣。在旃在旃。隨教抑揚門第八稽疑曰:涅槃章門摠括群品,不依涅槃恐難成佛。何爲讚功德之處,輕於般若、法花乎?若以般若捨執著爲優,則涅槃爲半偈捨身,豈劣於般若也?若以法花證大乘爲優,則涅槃以大空爲門,豈劣於法花也?法門不二,何爲二之哉?辯惑曰:眞身寂靜,豈存言說?至理希微,本亡性相。雖無言說,不違言說之道;雖無性相,而爲性相之津。譬夫明鏡無爲,形來而像著;幽谷不撓,聲及而嚮盈。然則衆籟參差,無谷不能以致嚮;群物絡繹,無鏡何若而生像?故知形聲爲之感,鏡谷爲之應。感應一虧,視聽兼失矣。竊以如來有無緣大慈,不思弘願者,明鏡幽谷也。衆生有聞熏習之種,發菩提之心者,群形衆聲也。玉毫明而三十二相著鏡中之像也。金口發而一十二部宣谷中之響也。自波羅苑內,明苦集滅道,堅固林中,說常樂我淨。其閒八藏,咸闡三乘。競馳甘露之味不殊,大雲之澤無別。然而小草大草受之者少多,有緣無緣服之者生死。漸頓於焉百慮,半滿所以多門。本乎其源莫非一致。故自本而觀也,泯然平等矣。自末而觀也,森然不同矣。不同所以各解,平等所以一音。一音故法門以之不二,各解故教迹以之非一。若乃演六度之法,談四絕之理,卽有以明空。依空而起行,斯般若之爲義也。明六種譬喩,辯三法平等,破二以歸一,迴小以從大,斯法花之爲旨也。弘三點之奧,闡四德之妙,異客出其家珍,新醫用其舊乳。斯涅槃之爲致也。此竝大乘之秘府,方等之妙門。賢聖仰止之崇山,經論朝宗之巨海。得之者咸可以致遠,失之者誰能以不泥?來論云:不依涅槃,恐難成佛。仁欲謂不依法花、般若,而可成佛者乎?然則法花是衆經之王,般若爲諸佛之母,孰見無母而孕子,無王而統人哉?義無優劣,斷可知矣。來論又云,何因讚功德之處,輕於般若、法花乎。夫以隨時之義,沿革不可守其常。唯變所適取捨,必貴存其會。和扁隨病而授藥,班倕任物而施巧,豈寒溫不變,規矩有恒哉?況尋繹成文有異來旨?經云:上語亦善,中、下亦善,金剛寶藏滿足無缺。又云:如諸藥中醍醐第一。又云:‘亦如日出,放千光明。又云:譬如衆流皆歸於海。’又云:修行是經卽得具足十事功德。夫以分流設險,海君爲百谷之王,列曜成文日天作三光之主。金剛寶中之第一,醍醐藥中之最上。三語僉善,何句義而非玄,十事以成,何功業而不備?其比興也如彼,其稱揚也如此。靜而詳校諒已非輕,矧如涅槃梵本偈逾三萬,震旦所譯纔出十千。法鏡開而未全,玄珠得而方半也。惑曰:教迹非一,法門不二,辯功德之有無,明經本之廣略,怡然理順矣。但高下相傾,長短相形。旣法花云此經第一,餘經得非其亞乎?涅槃云此經尊勝,餘經得非卑劣乎?般若云此法門不可思議,餘法門得非可思議者乎?斯義不明,前疑復振也。釋曰:夫以利涉大川,舟楫爲之最;載馳廣陸,車騎爲之先。燕處超然,宮觀爲之長,雖水陸殊位,動靜異宜,而萬國非止一人也,九州非止一地也。故畫鷁芳橈周流而莫輟,騰駒繡轂馳騁而未已。跱鳳華居寢處而寧廢,斯則舟楫未嘗不爲最,車騎未嘗不爲先,宮觀未嘗不爲長也。其有局於水鄕者,得車卽破之。專於山野者,與舟卽剖之。身不下堂者,莫辯舟車之所用。心務行邁者,罔知棟宇之所適。若斯人者何足與言於道哉!孔子曰:‘教人親愛,莫善於孝,教人禮順,莫善於悌。’又曰:‘法象莫大乎天地,著明莫大乎日月。’此亦各隨其義,以稱莫善也。以云莫大也。諸經言乎第一者,盍亦從此而明歟?十門辯惑論卷中丙午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 1)불도를 반대하거나 찬양한다는 내용이다.
- 2)『논어』, 「팔일(八佾)」편에 “나를 흥기시키는 사람은 상(商)이로구나[起予者商也]”라는 말이 나온다. 상은 공자 제자 자하(子夏)의 이름. 성은 복(卜), 이름은 상(商), 자하는 그의 자(字)이다.
- 3)저공(狙公)이 원숭이게 상수리를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 주겠다고 하니 화를 내자 그럼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 주겠다고 하니 기뻐했다는 고사. 즉 당장 보이는 차이만을 알고 결과가 똑같음을 모른다는 뜻이다.
- 4)『논어』, 「술이(述而)」편 제21장에 나오는 말이다.
- 5)춘추전국시대의 향인(鄕人)으로서 영곡(穎谷)에 봉해졌던 사람 영고숙(穎考叔)을 말한다.
- 6)춘추전국시대 초(楚)나라 성왕(成王) 때에 세자였던 상신(商臣)의 스승이 되어 상신을 꾀어 성왕을 시해하고 상신을 왕으로 세운 인물이다.
- 7)그 자손으로 하여금 대대로 선행을 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시경』 「대아(大雅)」편 ‘문왕지십(文王之什)’ 장의 기취(旣醉)라는 시에 “좋은 아들 끊이지 않아 길이 선행을 행하라[孝子不匱 永錫爾類]”라는 데에서 나온 말이다.
- 8)공동으로 악한 일을 한다는 말이다. 『춘추(春秋)』 소공(昭公) 13년(年) 조항에 “더불어 좋아할 것도 없는데 누구와 함께 악한 일을 행한단 말인가[無與同好 誰與同惡]”라는 말에서 인용한 것이다.
- 9)복을 받을 착한 행위인가 화를 입을 악한 행위인가에 따라서 구원될 수도 있고 구원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내용이다.
- 10)황제(黃帝) 헌원(軒轅)씨 때의 사람이라고도 하며, 또는 춘추 시대의 사람이라고도 함. 백 걸음 밖에서도 털끝을 분간했다는 시력(視力)이 좋은 사람.
- 11)춘추전국시대 진(晉)나라의 악사(樂師). 자는 자야(子野). 소리를 잘 분별하여 길흉(吉凶)을 점쳤다고 한다.
- 12)고려대장경 원본에는 ‘타(墮)’자로 되어 있다. 문맥이 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수대장경의 각주에 의하면 “송(宋)ㆍ원(元)ㆍ명(明)ㆍ궁(宮) 본에 ‘타(墮)’자는 타(惰)자로 되어 있다”고 하였기에 역자도 이를 따라 번역하였다.
- 13)고려대장경 원본에는 ‘청수삼보지리(請修三報之理)’라 하여 닦을 수자로 되어 있다. 의미가 미흡하고 신수대장경 각주에 의하면 “송ㆍ원ㆍ명ㆍ궁본엔 ‘수(修)’자가 ‘수(隨)’자로 되어 있다”고 하였으므로, 이 뜻이 더 명확한 것 같아 역자도 이를 따라서 번역하였다.
- 14)설교하는 목적에 따라서 어느 경을 내세우고 어느 경을 내세우지 않는가가 다르다는 뜻이다.
- 15)석존이 과거세에 설산에 들어가 보살행을 수행할 때 나찰(羅刹)이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하면서 반게(半偈)를 읊고 끝나자 보살은 후반부를 들려주면 자신의 몸을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나찰은 후반부의 반게 즉 생멸멸이(生滅滅已) 적멸위락(寂滅爲樂)을 마저 읊었다고 한다.『열반경』十四.
- 16)후한(後漢) 때의 명의(名醫), 자는 원화(元化), 위(魏)나라 조조(曹操)의 시의(侍醫)가 되었으나 뒤에 노여움을 사서 죽임을 당함. 원래 화타(華陀)인데 여기에서는 화(和)자로 표기하였으니 아마도 음이 같아서 그렇게 표기한 것이 아닌가 싶다.
- 17)춘추전국시대의 명의.
- 18)공수반(公輸班) 또는 공수반(公輸般)이라 한다. 춘추전국시대 노(魯)나라 사람으로 솜씨 좋은 목수였다.
- 19)순(舜)의 신하로 솜씨 좋은 공인이었다. 또는 순임금 때 백공(百工)의 일을 관장하던 관리.
- 20)고려대장경 원본에는 ‘익(鷁)’자로 되어 있다. 신수대장경 각주에 의하면 “송ㆍ원ㆍ명본에는 ‘익(鷁)’자가 ‘익(艗)’자로 되어 있다”고 하였으므로 뜻에 좀 더 부합되는 것을 따라 번역하였다.
- 21)『효경(孝經)』 「광요도(廣要道)」 장에 나오는 글이다. 원문에는 ‘교인(敎人)’이 ‘교민(敎民)’으로 되어 있다.
- 22)『주역』 「계사(繫辭)」 상편 제11장에 나오는 말, “법상은 천지보다 더 큰 것이 없고 변통엔 사시보다 더 큰 것이 없으며 저명엔 일월보다 더 큰 것이 없다[法象 莫大乎天地 變通莫大乎四時 著明 莫大乎日月]”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