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廣釋菩提心論 卷第二

ABC_IT_K1449_T_002
040_0496_b_01L광석보리심론 제2권
040_0496_b_01L廣釋菩提心論 卷第二


연화계 지음
040_0496_b_02L蓮華戒菩薩造
시호 한역
김치온 번역
040_0496_b_03L西天譯經三藏傳法大師 施護奉 詔譯
040_0496_c_02L
다음으로 여기서는 『비로자나성불경(毘盧遮那成佛經)』에서 말하였다.
“일체지지(一切智智)는 비심(悲心)을 근본으로 삼으니, 비(悲)로부터 대보리심이 발생하고 그런 연후에 모든 방편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보살들은 모든 때에 항상 이 두 가지를 행한다. 보시 등의 방편으로 몸을 나투고 국토를 나투고, 권속과 색상(色相)의 광대한 과보도 두 가지 종류에 포섭되므로 모두 성취할 수 있다. 가령 불세존께서 열반에 머물지 않는 것은 일체로 하여금 바른 지혜를 일으켜 널리 모든 전도(顚倒)를 능히 끊어 없애고자 하기 때문이며, 그러면서도 다시 생사에 머물지 않는 것은 생사를 말미암아 전도가 일어나기 때문이니, 이 때문에 세존께서는 머무름 없는 열반을 성취하는 것이다. 또한 마땅히 알아야 한다. 지혜와 방편은 자상(自相)이 행한 것으로 마땅히 공상(共相)과 훼방의 양변(兩邊)을 멀리 여의어야 한다. 양변을 여의므로 중간의 행한 바가 곧 무애함을 얻는다. 소위 공상과 훼방의 변(邊)이란 말하자면 지혜는 공상의 변을 여의고 방편은 훼방의 변을 여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도 이와 같다.
『성법집경(聖法集經)에서 말하였다.
“만약에 모든 상호(相好)와 색신(色身)이 구족하면 즉시 관하는 자로 하여금 승의락(勝意樂)을 일으키게 할 수 있다. 만일 삼매 중에 법신을 관한다면 승의락을 일으키게 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어떤 이가 말하였다. ‘지혜와 방편은 모든 여래를 생하고 능히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청정한 신해(信解)를 일으키게 하니, 이와 같이 마땅히 알아야 한다.’ 또 어떤 이가 말하였다. ‘세간의 법과 같이 응당 요별하여 알아야 한다. 법도 오히려 응당 버리는데 하물며 법이 아닌 것은 어떠하겠는가? 모습을 취하는 것[取相]을 여의므로 그 모든 전도된 취착심이 끊어지고, 그것이 끊어짐을 말미암은 뒤에야 이것을 설하니, 이것이 진정한 승의락이다. 그 지은 일에 응하지 않고 실로 마음에 의지하여 결정함을 일으킨다.’ 또한 어떤 이는 말한다. ‘일체의 법 중에는 취할 것도 없으며, 또한 버릴 것도 없다. 그것은 취하고 버리는 법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040_0496_b_04L復次此中如『毘盧遮那成佛經』說有一切智智悲心爲根本從悲發生大菩提心然後起諸方便是故諸菩薩於一切時常行此二種所有施等方便現身現土眷屬色相廣大果報二種攝故悉得成就如佛世尊不住涅槃爲令一切起於正慧普能斷除諸顚倒故又復不住生死爲由生死起顚倒故是故世尊成就無住涅槃又復當知慧及方便自相所行應當遠離共相毀謗二邊離二邊故中間所行卽得無㝵所言共相毀謗邊者謂慧離共相邊方便離毀謗邊此中如是如『聖法集經』言若諸相好色身具足卽能令觀者起勝意樂若於三昧中觀法身者卽不能令起勝意樂復有說言慧及方便生諸如來能令他起淸淨信解如是應知又復有言如世間法應當了知法尚應捨何況非法離取相故彼諸顚倒取著心斷由彼斷已此說是爲眞勝意樂不應於彼所作事中而起決定實依止心亦如有說一切法中亦不可取亦不可捨彼取捨法不可得故
혹은 어떤 이는 말한다. ‘보시 등의 모든 행은 생사의 과보를 감응한다. 이 가운데 무엇을 지혜를 여의고 보시 등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하는가? 조그마한 선(善)을 얻어도 기뻐 만족하면서 용감하고 굳센 마음을 일으켜 다시 수승한 선근을 증상하고자 하는 생각을 짓는 것이다.’”
040_0496_c_06L或有說言施等諸行感生死果此中云何謂離於慧而行施等得少分善以爲喜足起勇悍心復作增上勝善根想
『유마힐경』에서 말하였다.
“모든 법은 마땅히 지혜와 방편의 두 가지를 함께 행해야 한다. 보시 등의 모든 행을 만약에 지혜가 포섭하게 되면 곧 바라밀다라는 이름을 얻을 것이지만, 이름이 이것과 다르면 곧 보시 등이 청정하지 않은 것이다.”
040_0496_c_10L如『維摩詰經』說所有一切法應與慧及方便二種俱行施等諸行若爲慧所攝卽得名波羅蜜多名異此卽非施等淸淨
040_0497_a_02L이 가운데에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만약 삼마지에 머물러서 능히 모든 지혜를 일으키면, 가행(加行)이 오로지 주입되어서 저 지은 바를 총괄한다. 말하자면 먼저 일어난 문소성혜(聞所成慧)를 말미암아 근본 종의(宗義)로써 바르게 거두어 지닌 연후에 사소성혜(思所成慧)가 비로소 생기한다. 이 사소성혜 속에서 참다운 뜻[如實義]을 관찰해야 그 관찰한 바가 결정적으로 진실해서 다른 삿되고 허망하여 실답지 않은 전도(顚倒)가 없다. 이와 같이 관하므로 의혹이 그쳐 쉬는 것이며, 바른 지혜가 생겨나서 이치대로 바르게 닦는 것이다. 보리수에서 외도들에게 무아법을 설했듯이, 이 가운데에서 마땅히 사유하고 관찰하면 반드시 바른 인[正因]이 있어 열반과를 얻을 것이다. 이와 다른 것은 모두 외도이며 항상 분별로 인하여 적정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잡아함』 등에서 설하기를, ‘사소성혜 속에서 이치대로 자세하게 관찰한 후에 모든 사물의 참된 자상(自相)을 관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 자상은 승의제 중에서는 곧 생함이 있지 않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아함에서 설한 것과 결정적으로 상응한다.”
040_0496_c_14L此中當知若住三摩地能生起諸慧加行專注㧾彼所作謂由先起聞所成慧以本宗義而正攝持然後思所成慧乃得生起於是思慧中觀察如實義彼所觀察決定眞實無別邪妄不實顚倒如是觀故疑惑止息正智出生如理正修如佛對諸外道說無我法是中應當思惟觀察必有正因得涅槃果異此皆是外道常因分別爲寂靜是故『雜阿含』等說思所成慧如理伺察已應觀諸物有實自相而彼自相勝義諦中卽無有生如是阿含中所說決定相應
『성법집경(聖法集經)』에서 설하였다.
“무생(無生)의 진실은 실제로 별개의 다른 법을 말한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등은 모두 승의제의 무생(無生)에 수순하는 것이다. 이러한 말은 진실이다. 또한 승의의 무생은 곧 무생이 아니니, 저 일체의 행한 바는 모두 과거의 성품이다.”
이 가운데서 또 말한다.
“선남자여, 생멸의 두 법은 필경 모두 세간의 취착(取着)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대비는 세간에서의 온갖 행을 버릴 것을 깨우치기 위하여 생멸 등이 필경에는 조그마한 법도 생겨나지 않는다고 설하는 것이다.”
040_0497_a_04L如『聖法集經』說無生眞實不實謂別異法如是等皆隨順勝義諦無生說眞實又勝義無生卽非無生彼一切所行皆過去性此中又言善男子生滅二法畢竟皆是世間取著是故佛大悲者爲欲警悟世間捨諸所行說生滅等畢竟無有少法可生
또 『성법집경』에서 설하였다.
“무엇을 생함이라 하고, 무엇을 멸함이라고 하는가? 생함이 없음을 생함이라 이름하고, 멸함이 없음을 멸함이라 이름한다.
이 가운데 또 말하기를, “아자문(阿字門)에서 일체의 법은 생멸을 여읜다고 말한다. 이것은 곧 일체법무자성문(一切法無自性門)으로 자성의 공함으로 이루어졌다”라고 한다.
040_0497_a_11L又『聖法集經』說云何生云何滅生名生無滅名滅此中又言阿字門謂一切法離生滅是卽一切法無自性門自性空所成
『성이제경(聖二諦經)』에서 설하였다.
“만일 무생의 평등이라면 곧 일체법의 평등을 얻는다.”
040_0497_a_15L『聖二諦經』說若無生平等卽得一切法平等
『반야바라밀다경』에서 설하였다.
“수보리야, 색과 색의 자성은 공하다. 나아가 식과 식의 자성은 공하다. 자상의 공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상액경(象腋經)』에서 설하였다.
“일체의 성품은 생함을 얻을 수 없다. 생함이 없는 성품 가운데서 어리석은 사람은 그 생함이 있다고 집착한다.”
040_0497_a_17L『般若波羅蜜多經』說須菩提色自性空乃至識識自性空自相空所成『象腋經』說一切性不可得生於無生性中愚者執有其生
040_0497_b_02L『부자합집경(父子合集經)』에서 설하였다.
“저 일체의 법은 모두 다 평등하고 삼세 또한 평등하다. 과거 일체법은 자성(自性)이 여의었고 나아가 현재의 일체법 또한 자성이 여의었다.”
이와 같은 것을 총체적으로 설하면, 저 아함 중의 견고한 뜻과 상응해서 응당 자세히 관찰해 보건대, 이것과 다른 어떤 인(因)은 성립할 수 없다. 이 중에서 이치대로 결정적으로 사유하고 관찰한 후에 요약해서 설하면, 모든 생함의 성품에는 인이 있다고 설하기도 하고 혹은 인이 없다고 설하기도 한다. 여실하게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그것은 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인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 뜻은 무엇을 말하는가? 만약에 인의 성품을 버린다면, 이 차별의 성품이 참으로 드러내 보이기도 하므로 저 인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만약에 법이 생할 때 비로소 일체의 성품이 모든 곳에 두루하다면 어떻게 있지 않다고 하겠는가? 저 성품이 없을 때에는 차별이 없는 경우도 있어서 생겨날 때에도 또한 얻음이 있지 않으므로 저 인이 있지 않다. 이와 같은 것을 총체적으로 설하면, 저 인이 없지 않으면서도 화합할 수 있고, 또한 인이 있지 않으면서도 화합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설한 것에 만일 아(我)가 있다고 계교(計較)한다면 바로 외도가 상인(常因)으로 집착을 일으키는 것이다. 저 성품이 없어야 생함을 얻어서 능히 모든 행을 일으켜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모든 인의 성품이 파괴되었는데 어떻게 능히 모든 행을 생기하는가? 이치대로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외도가 집착하는 아(我) 등은 자체가 역능(力能)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별도의 법에서 버리지 않는 성품을 얻는데, 이미 항상하는 성품[常性]에 집착했다면 남에게 뜻을 지어 일을 이롭게 할 수 없다. 만일 뜻에 이로움이 없다면 상응하는 법을 어기는 것이다. 이 가운데에서 이와 같이 마땅히 알아야 한다. 집착하는 아(我) 등의 일체 역능은 필경에는 모두 공인 것이 마치 석녀(石女)의 아이와 같으니, 저 자성이 없는지라 짓는 일에서 그것들을 성취할 수 없다. 설령 짓는 바가 있다 하더라도 참다운 역능은 없다. 만일 짓는 바가 아니라면 또한 화합이 아니다. 또 일체의 일이 지음 있음을 따르는지라 생겨난 이후의 시기에 결정되는 것과 같다. 만일 역능이 있다면 곧 그 역능은 자성이 따라 구르니, 앞에서 설했듯이 일으켜 지은 일로 화합을 얻는다. 혹 따라 구르지 않음도 앞에서 설했듯이 저 자성이 없고 상인(常因)의 성품이 없어서 결정코 화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무상함 중에는 조그마한 법도 가히 얻을 수 없다.
040_0497_a_21L『父子合集經』說彼一切法皆悉平等三世亦平等過去一切法自性離至現在一切法亦自性離如是摠說彼『阿含』中相應堅固之義應當伺察異此有因卽不能成此中如理決定伺察已要略說者謂諸生性或說有因或說無因如實當知非彼有因彼無因是義云何若捨因性此差別性或有實顯示非彼無因若法生時乃一切性徧一切處云何非有彼無性時或無差別於生時中亦非有得非彼有因如是㧾說彼非無因而得和合亦非有因而得和合如是所說若計有我卽是外道常因起執彼無性得生能起諸行而爲顯示壞諸因何能生起諸行不如理捨故又非外道所執我等自有力能於他別法得不捨性旣執常性不能於他作義利事若無義利背相應法此中如是當知所執我等一切力能畢竟皆空如石女兒彼無自性於所作事中不能成就彼等設有所作無實力能非所作又非和合又如一切事隨有作生已後時決定若有力能卽彼力能自性隨轉乃如前說所起作事而得和合或不隨轉亦如前說彼無自無常因性定不和合是故諸無常無有少法可得
여기서 뜻하는 것은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대혜여, 참되지 않은 공상(共相)이란 이른바 허공ㆍ멸열반(滅涅槃)ㆍ무작자(無作者)ㆍ무성(無性)ㆍ무취자(無取者)의 공상을 말한다. 그러므로 무상이 이 불화합을 평등하게 생하므로 역시 무상이 아니다. 마치 과거와 미래의 두 가지 일의 성품에 역시 생함이 있지 않는데도 화합을 얻는 것과 같은데, 저 화합하는 인의 성품이 없어서 따라 구른다[隨轉]. 만일 동시에 생겨나서 상응하는 바가 있으나 또한 동시에 인이 짓는 자성의 일이 결정되지 않는다면, 저 동시(同時)의 관(觀) 또한 이루어지는 성품이 없으며, 혹 다른 때[異時]의 관도 역시 다른 때가 아니다. 만일 때와 연(緣) 가운데에서 관한다면 그것은 역시 생함도 없고 참됨도 없다. 과거에 만일 생하였다면 화합하는 바가 있다 해도 또한 연이 아니고 생함이 있는 것도 아니다. 저 일체의 아(我)로도 또한 연이 없다. 또한 하나의 찰나 속에 일체의 찰나가 따라 들어오지 않으면, 겁과 찰나의 분량으로도 화합하지 않는다. 마치 미세한 먼지들이 모여 둥근 덩어리가 되는 가운데 또한 극미량의 아(我)도 없이 화합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하나의 덩어리와 하나의 부분 속에서 저 찰나에 모인 덩어리의 성품[蘊聚性]은 화합하지 않고 스스로 생할 수 없으며 인분(因分)도 없다. 만일 이 중에서 저 부분[分]의 성품을 취한다면 곧 자아의 지은 바가 서로 어긋나므로 역시 두 가지 종류는 없다. 만약에 두 부분의 성품이 있다고 한다면 곧 두 종류의 허물이 따라 붙는다.”
이와 같은 것을 총체적으로 설명하면, 일체 세속에서 생한 것은 얻는 성품이 있으나, 승의제 중에서는 참으로 생함이 없으니, 이러한 설명은 아함 등과 더불어 서로 어긋남이 없다.
040_0497_c_03L此中意者如世尊言復次大慧不實共相者所謂虛空涅槃無作者無取者共相是故無常等生此不和合而亦非無常如過去未來二事性中亦非有生而得和合彼無和合因性隨轉若同時生有所相應亦非同時因所作自性事得決定彼同時亦無所成性或異時觀亦非異時若於時中緣中觀者彼亦不生不實過去若生有所和合而亦非緣亦非有生彼一切我而亦無緣又非一剎那中一切剎那隨入劫與剎那分量而不和合如諸微塵合集摶聚是中亦無極微量我而得和合如是一聚一分中彼剎那蘊聚性不和合自不得生亦無因分若於是中取彼分性卽自我所作相違亦無二種若有二分性卽二種過失隨著如是㧾說故一切世俗所生有所得性於勝義諦中而實無生此說不與『阿含』等相
040_0498_a_02L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처럼 모든 생(生)의 성품이 있는 것은 모두가 세속을 말한다. 승의제 중의 생(生)은 자성이 없다. 자성이 없는 가운데서 만약 의혹이 일어나면, 그것을 바로 실제로 세속의 뜻을 일으킨 것이다. 설한 바가 이치 그대로인 것이 불세존의 진정한 승의(勝義)의 즐거움이다. 마치 세상의 벼와 벼 줄기 등처럼 자성과 타성 두 종류 가운데에서 인이 없는 생을 설한다. 이 뜻은 마땅히 그쳐야 하고 이 중에서 의당 이치대로 자세하게 관찰해야 한다. 만일 색과 무색의 저 두 가지 성품이 병기(甁器) 등처럼 그 극미량이라도 색의 성품[色性]을 파괴하지 않는다면, 앞의 분위(分位)에서는 하나의 성품이 아니다. 앞의 분위 중에서 만일 파괴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곧 성립하지 않는다. 또한 극미의 덩어리 중에는 하나의 성품도 다수의 성품도 있는 것이 아니니, 그 하나와 다수의 성품을 여읜다면 어떻게 자성이 있겠는가? 만일 자성이 없다면 이것이 곧 승의인 것이다. 마치 꿈속에서 얻은 색의 상(相)과 색(色)의 성(性)과 같다. 그 뜻을 응당 알아야 하니, 이것이 곧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이다.
040_0497_c_24L如佛所言諸有生性皆謂世俗勝義諦中生無自性無自性中若起疑惑彼卽實起世俗之意所說如理是佛世尊眞勝意樂如世稻稈等自性他於二種中說無因生是義當止中宜應如理伺察若色無色彼之二如缾器等彼極微量不壞色性前分位而非一性前分位中若有所彼卽不成又非極微聚中有一性多性彼一多性離云何有自性若無自性此卽勝義如夢中所得色相色其義應知此卽佛所說
『능가경(楞伽經)』에서 설하였다.
“대혜여, 비유하자면 하나의 큰 코끼리가 파괴되면 미세한 티끌과 같은데, 이 미세한 티끌의 모습 가운데에서 이치대로 자세하게 관찰하면 그의 색성(色性)은 실로 자성이 없다. 또한 색온 중의 푸름 등의 색들처럼 그것이 상대의 장애가 있더라도 자성이 없다. 이와 같이 필경에는 식(識) 외에는 색(色)이 아니니, 이 뜻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040_0498_a_13L如『楞伽經』說復次大慧譬一大象破如微塵於是微塵相中如理伺察之色性實無自性又如色蘊中靑等諸色彼有對㝵而無自性如是畢竟識外非色是義應知
040_0498_b_02L세존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외부에 색들은 없으며 자신의 마음이 나타난 것이다. 저 밖의 푸름 등 갖가지 색의 상은 실제로 상대의 장애[對礙]가 없다. 그리고 모습을 취하고 버리는 것도 또한 상대의 장애가 없다. 하나의 성품과 상응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다수의 성품과 상응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와 다수가 서로 어긋나는데, 어떻게 하나의 성품이 아니라고 하는가? 하나가 모인 색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성품도 다수의 성품도 아니라는 것은 그 뜻을 응당 알아야 한다. 이 중에서 모든 유(有)의 색상(色相)을 자세하게 관찰하면, 자체가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상대의 장애가 없으며, 그 식(識) 또한 실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식의 자상(自相)을 여의기 때문이라서 저 색이 식을 여의고 존재한다고 설하지 않는다. 또한 다시 식의 자상은 갖가지가 실답지 않으니, 이와 같은 이유로 식은 실답지 않다고 설한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식은 마술사[幻士]와 같다고 설하였다. 이와 같은 것을 총체적으로 말하면, 하나의 성품이든 다수의 성품이든 이 성품이라는 것은 모두 공이다. 승의제 중에는 일체의 성품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이 뜻은 결정적이다.
040_0498_a_18L如世尊言外無諸色自心所現彼外靑等種種色相實無對㝵而取捨相亦無對㝵非一性相應亦非多性相一多相違云何非一性以一聚色故非一性非多性者其義應知中伺察諸有色相自體不實故無對彼識亦不實何以故識自相離說彼色離識而有又復識之自相種種不實由如是故說識不實是故佛說識如幻士如是㧾說若一性若多性是性皆空勝義諦中一切性不實此義決定
또 『능가경』에서 설하였다.
“비유하자면 마치 거울 속에 보인 상(像)은 동일한 성품도 아니며 다른 성품도 아닌 것과 같다. 이와 같이 관할 때 이 성품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무슨 까닭인가? 동일함과 다름의 성품[一異性]을 여의기 때문이며, 동일함과 다름의 성품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혹 어떤 사람이 말한다.
“지혜로운 자는 자성이 실제로 얻을 수 없음을 관하니, 이 가운데서 자성이 없음을 드러내 설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설한 모든 것들을 이치대로 자세하게 관찰하면, 이것이 사소성혜(思所成慧)가 실답게 결정한 것이다. 이러한 뜻이 성취되면 이로 말미암아 수소성혜(修所成慧)가 마땅히 생기하게 되는데, 만약에 문소성혜(聞所成慧) 등이 없다면 수소성혜는 이루어질 수 없다.
040_0498_b_07L又如『楞伽經』說譬如鏡中所見之像非一性非異性如是觀時是性非有何以故一異性離故一異性不著故或有說言智者觀自性實不可得中不可顯說無自性故如是等諸有所說如理伺察是爲思所成慧決定如實是義成就由此修所成慧當得生起若無聞等修慧不成
『보운경(寶雲經)』에서 설하였다.
“모든 올바른 수행자는 지혜의 광명이 있다. 중간(中間)에 태어나도 그 올바름은 무너지지 않는다. 지혜의 출생을 말미암아 닦아 지은 것들이 출생하여 성취된다. 비유하자면 땅 속에서 깨끗하지 못한 것이 두루 가득하다면 태어날 모든 존재가 어떻게 능히 생겨나겠는가? 모든 수행도 또한 마찬가지다. 지과(智果)를 밝게 깨달아야 진실의 성품 가운데서 이치대로 이치를 출현하게 된다.”
040_0498_b_15L如『寶雲經』說諸正行者有智光明生中間彼正不壞由智出生諸所修作出生成就譬如地中不淨遍滿有所生云何能生諸修亦然明了智果眞實性中如理出理
040_0498_c_02L『삼마지왕경(三摩地王經)』에서 설하였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여러 종류의 추구함을 일으킨다면, 그 일으킨 마음에 집착함과 의지함이 있다. 그러므로 만약에 저 진실한 수소성혜를 증득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가장 먼저 사마타(奢摩他)를 닦아서 상응하는 수승한 법을 마음에 편안하게 머물도록 하는데, 마치 움직임이 그친 물처럼 해야 한다. 만일 마음에 움직임이 있을 경우 사마타가 아니면 능히 거두어들여 머무를 수가 없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처럼 등인심(等引心)에 머무르면 능히 여실히 안다. 만약에 산란한 마음의 상태라면 이것과 상응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마타를 닦을 때에는 모든 얻을 것과 바라는 바를 버려서 평등함에 머물러야 한다. 체(體) 가운데 고통 등을 다 버려서 없애버리고 청정한 계율에 편안히 머물면서 정진을 일으킨다면 빨리 성취할 것이다.”
여기서도 이와 같다.
040_0498_b_20L如『三摩地王經』說若有人起多種尋而所起心有著有依止是故若欲證彼眞實修慧者應當最初修奢摩他相應勝法令心安住猶如止水心有動非奢摩他不能攝持而住佛所說住等引心能如實知若散心非此相應是故修奢摩他時諸所諸所欲當住平等捨體中苦等而悉除遣安住淨戒發起精進速得成此中如是
『화합해탈경(和合解脫經)』에서 설하였다.
“먼저 보시 등의 수승한 행을 닦고, 다음에 청정한 계를 지님을 닦는다. 그런 연후에 사마타행에 머문다. 만약에 이 사마타에 머물고자 한다면 모든 분위(分位)에 따라야 한다. 먼저 모든 부처님과 보살님들에게 마땅히 귀명(歸命)하고 참회하면서 수희(隨喜)해야 한다. 다음으로 마땅히 대비심을 일으켜 널리 세간을 구제하고자 하는 생각을 내어야 한다. 편안한 자리에 가부좌하고 앉아서 몸을 곧바로 하고 단정히 머무르면 정념(正念)이 현전하고, 삼마지(三摩地)를 끌어 일으키면 상응함이 현전한다. 처음부터 전주(專注)해서 응하는 대로 관찰하고, 더 나아가 여러 종류의 반연하는 바와 평등한 일을 관찰한다. 그리고 번잡한 마음을 거두어들여 고요히 머무르는 것이다. 다시 총체적으로 간략하게 말하면, 색과 무색 두 종류에서 마땅히 산란과 허물을 여의어서 총체적으로 그것과 상응하여 반연하는 바가 수승한 작의(作意) 내지 오온(五蘊)ㆍ십이처(十二處)ㆍ십팔계(十八界)의 모든 일들을 일으키니, 일체 분별하지 않으면 곧 청정함을 얻는다.”
모든 반연하는 바의 행상을 자세히 설한 것은 『화합해탈경』의 제18 상응분(相應分)과 같다.
040_0498_c_07L如『和合解脫經』說先修施等勝上之次復修持淨戒然後住於奢摩他若欲住是奢摩他者隨諸分位諸佛菩薩等先當歸命懺悔隨喜應起大悲心普盡世間生救度想安隱座中加趺而坐直身端住現前正念引發三摩地現前相應從初專注如應觀察乃至多種所緣等事盡收攝繫心靜住復次摠略色無色二種中應當捨離散亂過失㧾彼相應所緣起勝作意乃至蘊處界一切事等悉不分別卽得淸淨所有廣說諸所緣行相如『和合解脫經』第十八相應分
세존께서는 유정의 일들인 색 등의 분별과 일체사(一切事)의 분별을 거두어들이신다. 간략한 가운데 행상(行相)을 자세히 설한 것은 아비달마 등에서 설한 것과 같다.
040_0498_c_21L所有世尊攝有情事色等分別及一切事分別廣行相如阿毘達磨等說
040_0499_a_02L여기에서 뜻하는 것은 그러한 일들을 관찰하고 난 뒤 허물을 여의어 다 섭수함으로서 마음의 상속으로 하여금 수승하게 진행시켜 수행을 증장케 하는 것이다. 혹시 마음에 탐욕 등이 생기면, 이때 마땅히 부정등관(不淨等觀)을 지어서 그쳐서 쉼[止息]을 얻는다. 또한 다시 이전[前]을 넘어서 수승하게 나아가는 마음을 일으키면, 이 부정등관의 온갖 행상(行相)은 번잡함을 두려워해서 또한 그친다. 혹 그 마음이 수승하게 나아가 승의락(勝義樂)을 일으키지 못하면, 또한 이는 산란의 허물이다. 이때에 마땅히 삼마지의 공덕을 관해서 승의락을 일으키면 곧 승의락이 아닌 것을 능히 그쳐 쉬게 한다. 만약 그 때에 혼침과 수면이 생기한다면 마땅히 부처님 등의 공덕인 수승하게 기쁜 일들을 관해야 하나니, 그것은 능히 그쳐 쉴 수 있다. 다시 이와 같이 반연한 것 중에서 응하는 대로 견고하게 거두어서 흩어지지 않으면 곧 상응함을 얻을 것이다. 또한 다시 만일 앞의 마음이 사랑하고 즐거워하고 기뻐함에 따라 뒤의 마음이 높게 들떠서 일어난다면, 이때에는 마땅히 무상등관(無常等觀)을 지어야 한다. 이와 같은 것을 총체적으로 설하면, 반연하는 것 속에서 마땅히 마음을 움직이지 않도록 해서 한결같은 집중으로 고요히 머물러야만 높고 낮은 법을 여의고 평등을 행해서 마음이 청정함을 얻는다. 저 깨달음을 일으킴은 산란 등의 원인이므로 모두 버린다. 혹 어떤 사람이 진실로 깨달음을 일으키면 그 마음을 산란하게 지어도 반연한 것에 움직임이 없으리니, 이와 같아야 바라는 바와 행한 바에 수승한 정(定)이 상응함을 얻을 것이다. 이때에는 마땅히 사마타가 이와 같은 것들을 이룸을 알아야 하며, 모든 사마타의 공상(共相)이 이른바 심일경성(心一境性) 중의 자성임을 알아야 한다. 저 사마타가 반연한 바는 결정코 이와 같으니, 이러한 사마타법은 부처님께서 반야바라밀다 등의 경에서 설하신 것이다.
040_0498_c_24L此中意者於彼等事觀已離過而悉收攝令心相續勝進增修若或心生貪等爾時應作不淨等觀得止息已又復過前起勝進心此不淨等觀思有行相恐繁且止若或彼心不能勝進起勝意樂亦是散亂過失爾時應觀三摩地所有功德起勝意樂卽能止息非勝意樂若時昏沈睡眠生起應觀佛等功德勝喜悅事彼能止息復次如是於所緣中如應堅固攝持不散卽得相應又復若時前心愛樂喜悅隨生後心高擧爾時應作無常等觀如是㧾說於所緣中應使心無動作專注靜住離高下法平等所行心得淸淨彼發悟散亂等因而悉棄若有眞實發悟所作彼心散亂所緣中若無動作如是乃得所欲所行勝定相應爾時當知奢摩他成是等當知一切奢摩他共相謂心一境性中自性彼奢摩他所緣決定如此等奢摩他法佛於般若波羅蜜多等經
040_0499_b_02L다음으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사마타를 닦는 데는 아홉 종류의 법이 있다. 첫째는 제(除)이며, 둘째는 정제(正除), 셋째는 분위제(分位除), 넷째는 근제(近除)이며, 다섯째는 조복(調伏)이며, 여섯째는 지(止)이며, 일곱째는 근지(近止)이며, 여덟째는 일향소작(一向所作)이며, 아홉째는 지지(知止)이다. 이러한 아홉 종류의 행상은 어떠한가? 이 아홉의 법에 두루하는 것을 이름하여 제(除)라 하니, 반연하는 것 중에서 번잡한 마음이 두루 제거되는 것이다. 반연하는 것 중에 상속하여 전전하는 것이 분위제이다. 산란함이 현전하나 모두 꺾어 굴복시키는 것이 근제이다. 산란함을 여의고 다시 수승함이 현전할 때 반연하는 바를 두루 제거하는 것이 조복이다. 만일 애착이 일어날 때 굴복시키므로 이름하여 지(止)라고 한다. 산란과 과실이 현전하면 승의락을 일으키지 않아도 능히 그치므로 근지라 한다. 혼침과 수면 등이 일어날 때 빨리 떠나 보내버리는 것이 일향소작(一向所作)이다. 반연 속에서 움직임이 없음을 얻고 그런 연후에 한결같이 집중하여 그침[止]과 상응함을 얻는다. 이 그침을 얻은 후에 마음이 평등함[捨]에 머물게 되는데, 이것을 지지(知止)라 한다. 이러한 뜻은 성 미륵보살께서 설하신 것과 같다.
040_0499_a_23L復次當知修奢摩他有九種法一除二正除三分位除四近除五調伏七近止八一向所作九知止此等九種行相云何謂徧此九法是卽名於所緣中繫心是爲徧除於所緣中相續而轉是分位除散亂現前而悉摧伏是爲近除散亂離已又復勝前徧除所緣是爲調伏若愛起時故名止若散亂過失現前不起勝意樂而能止故是爲近止若昏沈睡眠等起時速當遣離是爲一向所作所緣中得無動作已然後專注得相應止得彼止已心住於捨是爲知止如是等義如聖慈氏菩薩所說
040_0499_c_02L또한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일체의 삼마지를 닦을 때에 여섯 종류의 과실이 있다. 첫째가 해태(懈怠)이며, 둘째는 반연한 것을 잃어버리는 것[所緣忘失], 셋째는 가라앉는 것[沈下], 넷째는 높이 들뜨는 것[高擧], 다섯째는 깨달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無發悟], 여섯째가 깨달음을 일으키는 것[發悟]이다. 이러한 여섯 가지 과실이 생할 때에 마땅히 여덟 종류로 끊는 행을 일으켜서 대치(對治)해야 한다. 어떠한 것들이 여덟 가지인가? 첫째는 믿음[信]이며, 둘째는 하고자 함[欲]이며, 셋째는 부지런함[勤]이며, 넷째는 가벼워 편안함[輕安]이며, 다섯째는 기억함[念]이며, 여섯째는 바르게 앎[正知]이며, 일곱째는 사유[思]이며, 여덟째는 평등함[捨]이다. 이러한 것들의 대치행상(對治行相)은 어떠한가? 믿음[信] 등의 네 법은 해태를 대치한다. 여기서 뜻하는 것은 삼마지의 공덕으로 요컨대 정신순상(正信順相)을 증대시킴을 갖춤이니, 그에 상응하면 수승한 희망을 일으킨다. 희망할 때에 정진의 행을 일으키고, 일으킨 정진으로 몸과 마음이 용맹해진 후에 경안(輕安)을 얻으니, 이 때문에 대치(對治)인 것이다. 기억[念]은 반연하는 바의 망실(忘失)을 대치하니, 이러한 뜻은 마땅히 알아야 한다. 바르게 아는 것[正知]으로 가라앉는 것과 높게 들뜨는 것을 대치한다. 이른바 올바른 앎으로 바른 관찰을 일으켜서 능히 높고 낮은 두 법을 그쳐 쉬게 하니, 이 때문에 대치인 것이다. 사유[思]는 깨달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대치하니, 이러한 뜻은 마땅히 알아야 한다. 평등함[捨]은 깨달음을 일으키는 것을 대치한다. 앞의 높고 낮음으로 말미암아 그쳐 쉼을 얻은 후에 마음이 정직(正直)에 머무르는 것이 곧 깨달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니, 이 때문에 대치인 것이다. 이와 같은 여덟 가지 단행(斷行)이 여섯 종류의 과실을 대치한 후에야 가장 높은 삼마지 사업이 곧 성취되면서 신족(神足)의 공덕이 이로 말미암아 생겨난다.
040_0499_b_14L又復當知諸修一切三摩地時有六種過失一懈怠二所緣忘失三沈下四高擧五無發悟六發悟此六過失生時當起八種斷行對治何等爲八一信二欲三勤四輕安五念六正知七思八捨此等對治行相云何謂信等四法對治懈怠此中意者以三摩地功德中要具增上正信順相彼相應者起勝希望於希望時發精進行所起精進身心勇悍後得輕安是故對治念對治所緣忘失是義應知知對治沈下高擧謂以正知起正觀能令高下二法止息是故對治對治無發悟是義應知捨對治發悟由前高下得止息已心住正直卽無發悟是故對治如是八斷行對治六種過失已所有最上三摩地事業卽得成就神足功德由此而生
여러 경에서 설하고 있는 것처럼 만일 여덟 가지 단행(斷行)을 구족하면 곧 능히 네 종류의 신족[四種神足]을 일으킬 수 있으니, 심일경성(心一境性)으로 수승하고 높은 사업이 올바른 상응을 얻으면 비로소 선정해탈법문에 증입(證入)하여 일체의 가장 수승한 공덕이 원만하다.
040_0499_c_09L如諸經說若具八斷行卽能發起四種神足所有心一境性勝上事業得正相應乃能證入禪定解脫法門滿一切最勝功德
廣釋菩提心論 卷第二
丁未歲高麗國分司大藏都監奉勅彫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