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花嚴經探玄記卷第一

ABC_IT_K1513_T_001
047_0458_a_02L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 제1권


위국(魏國) 법장(法藏) 한역
노혜남 번역


1. 세간정안품(世間淨眼品) ①

크고 넓은 지혜를 지닌
10신(身)의 노사나불과
모든 법계에 가득 찬
가장 높고 크게 자비스런 어른과
바르고 넓어 때를 여의는 법과
원만히 해탈하게 하는 법륜과
보현(普賢)ㆍ문수(文殊) 등
바다같이 넓은 모임의 큰 보살님께
목숨 바쳐 귀의하옵나이다.

제가 구박지(具縛地)1)에 있으면서
마음으로 큰 법문 듣기를 바라옵나니
원하옵건대 저를 불쌍히 여기시어
염지력(念智力)을 더하게 하여 주옵소서.

이 비밀하게 감추어진 법장을 열어
널리 나와 남을 이익되게 하여지이다.
바라옵건대 법이 오래도록 머물게 하고
저 등불을 전하여 부처님의 은혜를
갚고자 하옵나이다.

생각건대 법성은 허하여 텅 비고 끝이 없어서 보고 듣는 것을 뛰어넘었고,지혜의 넓은 바다는 끝없이 깊어 생각으로 헤아려 알 수 없도다. 아득하고 그윽한 도는 이름이나 말로는 그 끝[際]을 찾기 어렵고 망망한 소범(素範)2)은 상[相見]3)으로 그 근원을 파헤칠 수 없도다.
다만 중생의 근기는 천차만별이니 형상과 말씀을 휘둘러 법계에 가득하게 하고, 마음과 경계는 일미(一味)4)인지라 능소(能所)를 없애며 고요한 경지[寂寥]로 돌아가게 함이로다. 체(體)와 용(用)이 모나지 않고 원융하여 헤아릴 수 없다. 이에 형상이 없는 데서 형상을 나타내어 보임이 마치 양곡(陽谷)5)에서 태양이 떠오르는 것과 같고, 말없는 데서 말을 보이심이 마치 넓은 바다에서 파도가 일어나는 것과 같다. 이러한 까닭으로 처음 연화장세계에서 다함이 없는 깊은 도리의 요점을 연설하시어 상달(上達)6)의 무리를 섭수하고 인도하여 부처님의 경지를 밟게 하셨다.
그러한 뒤에 사바세계의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자비의 구름을 펼치시어 법의 비를 내려 3근(根)7)을 윤택하게 하시고 도의 싹을 키워 한 법에 돌아가게 하였다. 여기에 기연(機緣)의 느낌이 다르기 때문에 성인이 응하여 오는 것도 다르다. 성인이 응하여 오는 것은 다르다고 할지라도 생각으로 헤아려 알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니라.
『화엄경』이란 이 해회(海會)에서 융성하게 담론했던 말씀을 모아놓은 것으로 산왕(山王)을 비춘 지극한 말씀이다. 이치가 넓고 깊어 법계를 다하고 진리의 근원을 사무친다. 넓고 넓은 미묘한 말씀은 허공과 같아 티끌같이 많은 나라에 영향을 끼쳤다.
이에 크고 작은 것을 무너뜨림이 없이 커다란 세계를 감추어 털끝 속에 들어가게 하며, 크고 작은 것을 바꾸지 않고 극미(極微)한 것을 융합하여 법계에 두루 가득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인다라망(因陀羅網)8)은 서로서로 그림자를 비추어 겹겹으로 둘러쳐 있고, 정광(錠光)여래의 파리(玻黎)는 티끌같이 많은 세계를 비추어 은은(隱隱)하다. 하나는 많음과 다르지 아니하여 걸림이 없고, 많음은 하나와 다르지 아니하여 원만하게 통하였도다. 9세(世)를 거두어서 찰나에 들게 하고 한 생각을 펼쳐 긴 세월[永劫]을 다하였다.
3생에 구경(究竟)을 얻어 종자를 견고하게 함으로써 인(因)을 삼고, 10신(信)의 도가 원만한지라 넓은 덕이 나타나 과(果)를 이루었다. 과는 인(因)을 떠나서 다른 과가 없나니, 다섯 가지 지위[五位]를 파생하여 분골을 나누고 인은 과를 떠나서 다른 인이 없나니 10신(身)9)을 총괄하여 이치를 가지런히 하였도다. 이러한 까닭으로 문수보살[覺母]이 제자를 구하러 동쪽의 성[東城:福城]으로 나아가자 6천 명의 비구가 열 가지 눈을 열고, 선재동자가 남쪽 나라로 110성(城)에 선지식을 구하니 일생에 광겁의 과를 이루었도다.
마침내 보리수[樹王]를 넘지 않고 6천(天)에 이르니, 어찌 화장세계를 옮겨 10찰(刹)을 허융(虛融)함이 아니겠는가. 보게(寶偈)10)를 티끌 가운데 보이시어 가지런히 여덟 번의 모임을 빛나게 하였고, 왕주(王珠)11)를 성품의 덕성에서 열어서 7처(處)가 원만히 밝아졌다.
넓고 넓은 갱횡(鏗鋐)12)은 생각을 가로막아 멀리 벗어남이요, 높디높아 밝게 빛남은 보고 들음을 초월하여 귀머거리요 장님이로다.
이러한 까닭으로 노사나불은 해인13) 가운데서 깨달음을 이루어 이칠 일(二七日:14일)만에 설법하셨고, 용수(龍樹)는 마침내 아래로 용궁을 살펴 6백 년 뒤에 드디어 세상에 나타났다.
‘대(大)’는 포함으로써 뜻을 삼고, ‘방(方)’은 궤범(軌範)으로써 공(功)을 삼으며, ‘광(廣)’은 체(體)와 융합[即]하여 용(用)이 두루 가득함이요, ‘불(佛)’은 과(果)가 원만하고 깨달음이 가득함이요, ‘화(華)’는 만행을 꽃피움을 비유한 것이요, ‘엄(嚴)’은 이 본체의 장엄함을 비유함이요, ‘경(經)’은 꿰뚫고 기워서 능전(能詮)의 가르침이 나타나게 됨을 말한다. 법과 사람과 비유를 합쳐 제목을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라고 하였다.
「세간정안품(世間淨眼品)」이란 기세간(器世間) 등 세 가지 세간14)이 때[時]를 환히 비추어 광결조명(光潔照明)함을 맑은 눈에 비유하여 법과 비유를 함께 들어 ‘세간정안’이라 하였다. 말[言語]의 이치는 하나이지만 격류(格類)에 상종하기 때문에 칭하여 ‘품’이라고 한다.
이 경에는 서른네 가지 품목이 있는데 이 품이 처음이 되기 때문에 ‘제일’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대방광불화엄경 세간정안품 제일’이라고 말한 것이다. 나머지 뜻은 아래에서 설명하는 것과 같다.
장차 이 경을 해석하려 함에 대략 열 가지 문[十門]을 분석하려고 한다. 첫째는 가르침[敎]이 일어난 연유를 밝히고, 둘째는 장부(藏部)에 섭수된 것을 밝히고, 셋째는 교를 세우는 차별을 나타내고, 넷째는 가르침을 받을 근기를 가려냄이요, 다섯째는 능전(能詮)의 교체를 분별하는 것이며, 여섯째는 소전(所詮)의 종취를 밝히는 것이요, 일곱째는 경의 제목을 갖추어 해석함이요, 여덟째는 부류(部類)의 전역(傳譯)을 밝히는 것이요, 아홉째는 문의(文義)의 분제(分齊)를 가리는 것이요, 열째는 경문을 따라 해석하는 것이다.
맨 먼저 ‘가르침이 일어난 연유를 밝힌다’는 것은 먼저 총체적으로[總] 밝히고 뒤에 개별적으로[別] 나타내고자 한다.
총(總)이란 무릇 큰 가르침[大敎]이 일어나게 된 그 인연이 한량이 없다. 그러므로 『지론(智論)』의 처음에 반야의 가르침이 일어난 인연을 자세히 분별하였다. 수미산은 일이 없거나 또는 조그만 인연으로 움직일 수 없는 것과 같이 부처님도 또한 이와 같아서 커다란 인연이 있기 때문에 설하는 것이 있다. 이른바 반야바라밀이 세간에 유행하여 많은 중생들[群品]을 널리 유익하게 한 까닭이다. 『법화』에서도 또한 “여래가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위한 까닭에 세상에 출현하셨다”15)고 하였으니, 이른바 불지견(佛知見)에 깨달아 들어가는 방법을 열어 보이신 것이다. 이 경(화엄경)의 끝 부분에서도 “여래(如來)ㆍ응공(應供)ㆍ등정각(等正覺)의 성기(性起)의 바른 법은 생각으로 헤아려 알 수 없다. 무슨 까닭인가. 작은 인연으로써 등정각을 이루어 세상에 출현하여 흥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열 가지의 한량없고 헤아릴 수 없는 백천 아승기의 인연으로써 등정각을 이루어 세상에 출현하여 흥기하였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첫째는 한량없는 보리심(菩提心)을 일으켜 모든 중생을 버리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 등을 자세히 설명하리니, 마땅히 알지니라.
다음 개별적으로 나타내었다는 것에 대하여 간략히 열 가지 뜻을 들어서 다함이 없음을 밝힌다.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이를테면 법이 그러한[法爾]16) 까닭이요, 원력(願力)인 까닭이며, 기감(機感)인 까닭이요, 근본[本]이 되는 까닭이며, 덕(德)을 나타내는 까닭이요, 지위[位]를 나타내는 까닭이며, 개발하는 까닭이요, 견문(見聞)인 까닭이며, 행(行)을 이루는 까닭이요, 과(果)를 얻는 까닭이다.
첫째 ‘법이 그러한 까닭’이라고 한 것은 모든 부처님께서 법이 그러하여 모두 다함이 없는 세계에서 항상 이와 같이 다함이 없는 법륜을 굴리는 것이 마치 대왕의 길이 법이 그러하듯 항상한 규범으로서 머물거나 그침이 없이 미래제를 다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까닭으로 아래에 나오는 「부사의품」에 이르되 “모든 법계의 허공과 같은 세계에 다 털끝으로 두루두루 헤아리고 측량[周遍度量]하여 하나하나의 털끝처럼 많은 곳마다 생각생각에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작은 먼지와 같이 많고 많은 몸을 변화로 나타내고 나아가 미래제의 겁(劫)이 다하도록 낱낱 화불(化佛)17)의 몸마다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이 작은 먼지처럼 많고 많은 머리가 있고, 낱낱 머리마다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이 작은 먼지처럼 많고 많은 혀가 있으며, 낱낱 혀마다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이 작은 먼지처럼 많고 많은 음성을 내어 낱낱 음성마다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이 작은 먼지처럼 많고 많은 수다라(修多羅)를 설하며, 낱낱 수다라마다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이 작은 먼지처럼 많고 많은 법(法)을 설하고, 낱낱의 법 속에서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이 작은 먼지처럼 많고 많은 구신(句身)18)과 미신(味身)을 설한다. 또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이 작은 먼지처럼 많고 많은 겁에 또 다른 구신과 미신을 설함에 있어서 음성은 법계에 충만하여 모든 중생들이 듣지 못한 이가 없었다. 모든 미래제겁이 다하도록 항상 법륜을 굴려 여래의 음성이 다름이 없고 끊어짐이 없고 다하여 없어질 수도 없다”고 하였다.
해석19)하여 이르기를, 이 경문에 준거하여 보면 한 털끝의 처소에서 한 생각 속에 위와 같은 업용(業用)을 내고 나머지 생각생각마다 그 가운데에도 다 이와 같다. 한 털끝의 처소에 이와 같이 생각마다의 업용이 무진(無盡)함과 같이 나머지 낱낱의 털끝마다에도 차례로 허공 법계와 같은 모든 세계에 두루하여 각각 모두 이와 같이 무진무진하다. 이것이 곧 처소는 털끝으로써 법계를 감추고 시간은 찰나로써 겁해(劫海)를 다함이다. 이 처소로 말하자면 단번에[頓] 업용을 일으킴을 밝힌 것이고 이 시간을 말함에 있어서도 항상 업용을 일으킴을 밝힌 것이다. 이는 또한 인연을 기다리지 않고 모든 부처님의 법이 그러함이니, 이 경의 아래 문장에서 설하는 것도 모두 그러하다.
【문】 만약 그러하다면 무슨 까닭에 처소는 오직 여덟 번의 모임뿐이었고, 시간은 이칠 일[二七]에 국한하였는가?
【답】 「노사나품」에서 말하였다.

낱낱 작은 먼지 속에
불국해(佛國海)가 편안히 머무르고
부처님의 자비 구름[佛雲]이 두루 호념하고
가득하여 모든 중생을 덮어주네.

또 말하였다.

한 털구멍 속에
무량의 불찰은
장엄하고 청정하여
광연(曠然)20)하게 안주하며
저 모든 처소의 노사나불은
중해(衆海) 속에서
바른 법[正法]을 연설하였다.

해석하여 이르기를, 하물며 여덟 번 모인 처소에서 시방(十方)의 법계를 갖추어 섭수하지 못하겠는가. 또 「발심품」에서 말하였다.

무량겁이 곧 일념(一念)이며
일념이 곧 무량겁인 줄 안다.

해석하여 이르기를, 하물며 이칠 일 동안의 시간이 무량의 겁해를 섭수하지 못하겠는가.
「부사의품」에 이르기를 “모든 부처님이 하나의 작은 먼지 속에 널리 삼세의 모든 불찰(佛刹)을 나타내며, 하나의 작은 먼지 속에 널리 삼세의 모든 부처님의 자재하신 신력을 나타내며, 하나의 작은 먼지 속에 널리 삼세의 모든 중생을 나타내고, 하나의 작은 먼지 속에 널리 삼세의 모든 부처님의 일을 나타낸다”고 하였다.
해석하여 이르기를, 이 가운데 먼지 속에서 삼세의 모든 전후제겁(前後際劫)을 통괄하는 것이니, 이것은 모든 부처님의 법이 그러하듯 항상 그렇게 설하는 까닭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둘째 ‘원력인 까닭’이라고 한 것은 여래의 근본 원력인 까닭에 이 교법으로 하여금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나타낸 것이다. 이런 까닭에 「노사나품」에서 말하였다.

시방 국토 가운데
일체의 세계해(世界海)에
부처님의 원력이 자재하여
널리 나타내어 법륜을 굴리도다.

또 말하였다.

노사나불의 신력(神力)인 까닭에
모든 세계[刹] 속에 법륜을 굴리고
보현보살 원력의 음성이
모든 세계해에 두루 가득하도다.

해석하여 이르기를, 곧 이 경이 시방의 허공 법계와 같은 모든 세계를 포섭하고 또한 온갖 먼지 속의 모든 국토[刹土] 가운데 동시에 이 경을 설하는 것은 모두가 이 본사(本師)의 원력으로 이룩한 것이다. 이런 까닭에 아래 모든 모임의 첫머리마다 이르기를 “노사나불의 본래 원력인 까닭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운집품(雲集品)」의 게송에 이렇게 말하였다.

한량없고 무수한 겁에도
이 법은 매우 만나기 어렵도다.
만일 들을 수 있다면
마땅히 본원의 힘인 줄 알라.

해석하여 이르기를, 이는 곧 부처님의 원력으로 말미암아 대중으로 하여금 듣게 한 것이다. 또 말하였다.

여래는 세상에 나오지도 않았고
또한 열반에 든 일도 없다.
본래의 큰 원력[大願力]으로써
자재(自在)한 법을 나타내었도다.

셋째 ‘기감(機感)인 까닭’이라고 한 것은 여래는 평등하여 고치거나 바꿀 것이 없지만 중생의 근기에 따라 응하여 와서 몸을 나투어 법을 설하셨다. 여기에 세 가지 뜻이 있으니, 그 하나는 불과(佛果) 색성(色聲)의 청정한 공덕으로써 증상연(增上緣)을 삼아 그 기감(機感)에 응하여 섭화(攝化)를 이룬 것이다. 「운집게」에서 말하였다.

눈[眼]이 있고 일광(日光)이 있으면
능히 미세한 빛깔[色]을 볼 수 있듯이
가장 뛰어난 신력이 있기 때문에
깨끗한 마음으로 모든 부처님을 본다(현신).

「법계품」에서 말하였다.

부처님은 과거의 행(行)에 있어서
한 미묘한 소리[音]를 얻어
피차(彼此)에 무심(無心)하며
능히 일체에 응하시었네(설법).

그 둘은, 불과에는 빛깔이나 소리 같은 거친 모습[麁相]은 없고, 다만 평등한 이지(理智)와 증상(增上)의 원력으로 기감(機感)에 상응하여 형언이 나타남이 있을 뿐이다. 「운집게」에서 말하였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모두 청정하며
마땅히 교화해야 할 곳을 따라서
널리 묘한 색신[妙色身] 나타내셨다.

또 말하였다.

일체 모든 여래께서
불법을 설하심이 없으며
마땅히 교화할 곳을 따라서
그들을 위하여 법을 연설하였다.

그 셋은 위의 두 가지 뜻을 통달하여 유무(有無)에 걸림이 없어서 법계에 맞추어 장애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사나품」에서 말하였다.

불신(佛身)이 모든 법계에 충만하여
널리 모든 중생의 앞에 나타나셨다.
교화를 받을 그릇에 맞추어 가득 채워 주려고
부처님은 일부러 이 보리수 아래에 계시었네.

작은 먼지처럼 많고 많은 부처님 국토
그곳에 부처님은 한 털구멍에 앉아
또한 한량없는 보살 대중이 함께 있어서
각각 보현행을 갖추어 설하였다.

해석하여 이르되, 바로 이것이 이 경에서 설한 분제(分齊)이다.
넷째 ‘근본이 되는 까닭’이라고 한 것은 장차 근기를 좇아 점차로 지말적인 가르침을 베풀고자 하였으므로 마땅히 최초에 먼저 본법(本法)을 보이고 뒤에 이를 의지하여 비로소 말(末)을 일으키려 함을 밝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최초에 이 경법(經法)을 설한 뒤에 곧이어 녹야원 등의 장소에서 점점 지말(枝末) 소승 등의 법을 설하였다. 또 아래 「성기품」에 이르되 “마치 해가 떠오를 적에 먼저 높은 산부터 비춘다”고 한 것 등과 같으니, 아래 입교(入敎) 중에서 인용하여 설명한 것과 같다.
다섯째 ‘덕을 나타내기 위한 까닭’이라고 한 것은 불과(佛果)의 뛰어난 덕을 나타내어 모든 보살들로 하여금 믿고 향하게 하여 증득하게 함을 말한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의과(依果)이니 연화장장엄세계해를 말하는 것이요, 그 둘은 정과(正果)이니 여래의 10신(身)이 3세간(世間) 등에 통함을 말하는 것이니 아울러 아래의 경문과 같다. 이 두 가지 무애를 설명함에 네 구절이 있으니, 첫째는 의(依) 속에 있는 의를 나타냄이니 티끌 속에 찰해를 나타내는 것과 같고, 둘째는 정(正) 속에 있는 의를 나타냄이니 티끌 속에 찰해를 나타내는 것과 같고, 둘째는 정(正) 속에 정을 나타내는 것이니 털구멍 속에 부처 등을 나타내는 것이요, 셋째는 정 속에 의를 나타내는 것이니 털구멍에 세계 등을 나타내는 것과 같으며, 넷째는 의 속에 정을 나타내는 것이니 티끌 속에 부처 등을 나타내는 것과 같다.
이러한 까닭으로 한 문[一門]을 거론함에 따라 곧 일체를 섭수하여 다하지 못할 것이 없나니, 아울러 아래에서 설명하는 것과 같다. 이 과덕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 경을 설한다.
여섯째 ‘위(位)를 나타내는 까닭’이라고 한 것은 보살이 불인(佛因)의 일도(一道)를 수행하여 과에 이르기까지 5위(位)를 갖춤을 나타내기 위한 까닭이다. 여기에 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차제항포문(次第行布門)이니 10신(信)ㆍ10해(解)ㆍ10행(行)ㆍ10회향(回向)ㆍ10지(地)가 원만한 뒤에 비로소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는 은미[微]한 데서부터 드러나는[著] 데에 이르는 점점 나아가는 차례의 계위[階位漸次]를 말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원융상섭문(圓融相攝門)이니, 한 지위[一位] 가운데 곧 모든 전후 좌우의 여러 가지 지위를 섭수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까닭에 하나하나의 지위마다 원만하며 모두 부처님의 지위[佛地]에 이르도록 이 두 가지가 걸림이 없음이니, 아래 경문의 여러 모임에서 자세히 설명하는 것과 같다.
일곱째 ‘개발하는 까닭’이라고 한 것은 중생심(衆生心) 가운데 여래장(如來藏) 성기(性起)의 공덕을 개발하여 모든 보살로 하여금 이것을 의지하여 닦고 배워서 무명을 깨뜨리고 성덕(性德)을 나타내고자 한 까닭이다.
여기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언설(言說)로써 나타내 보여서 있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한 것이요, 다른 하나는 그로 하여금 수행하여 현현(顯現)하게 하기 위함이니, 아래 경문21)에 미진을 깨뜨려서 경권(經卷)을 내는 것 등과 같은 것이니 갖추어짐이 저 설명과 같다.
여덟째 ‘견문인 까닭’이라고 한 것은 다함이 없이 자재한 법문은 오직 이 최고의 지위인 대보살의 경계임을 보여 하위의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이것을 보고 듣게 하여 저 금강의 종자를 성취해서 허물어지거나 다함이 없게 하여 마땅히 구경의 지위에 이르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 또한 「성기품」의 설명과 같다.
아홉째 ‘행을 이루는 까닭’이라고 한 것은 이 넓은 법[普法]을 보여 여러 보살들로 하여금 보현행을 성취하여 일행(一行)이 곧 일체행(一切行)임을 보이기 위함이다. “처음으로 발심했을 때에 문득 정각을 이루어 지혜의 몸[慧身]을 구족하는 것이요, 다른 것을 말미암아 깨닫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며, 또 이르되 “보살은 이 법을 받아 가져서 조그마한 방편을 지어서 빨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한 것이다. 여기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단번에 많은 행[多行]을 성취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보변한 행[普行]을 이루는 것이다. 아울러 아래에서 설명하는 것과 같다.
열째 ‘과(果)를 얻는 까닭’이라고 한 것은 부처님 경지의 지단(智斷)의 과를 얻기 위한 까닭이다. 여기에도 또 두 가지가 있으니, 그 하나는 단과(斷果)이다. 장애를 제거함을 말하는 것이니, 곧 「보현품」에서 일장(一障)과 일체장(一切障)을 밝혔고, 「소상품(小相品)」에서 일단과 일체단(一切斷)을 밝혔다. 자세한 설명은 아래와 같다.
다른 하나는 지과(智果)이니 덕을 이루기 위하여 10신(身)을 구족하여 3세간을 다하고 역순(逆順)으로 자재하여 의정무애(依正無礙)함을 말하는 것으로 「부사의품(不思議品)」 등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이상의 것은 약유(略由)22)이니, 이와 같은 열 가지 뜻이 이 경교(經敎)를 흥기하게 하는 연유가 된다.
두 번째는 장부(藏部)에 섭수된 것을 밝힌 것이니, 대략 열 가지 뜻을 나타내어 거두어 섭수함을 밝혔다. 첫째 3장(藏)을 밝히고, 둘째 소섭(所攝)을 나타내며, 셋째 2장(藏)을 분별하고, 넷째 서로 어김을 해석하며, 다섯째 종류를 열어 보이고, 여섯째 소섭을 결정하며, 일곱째 1부(部)에 거두어 들이고, 여덟째 3부(部)에 거둠이며, 아홉째 혹은 9부(部)요, 열째 열두 가지를 갖춤이다.
첫째 3장을 밝힌다고 하는 것은 일명 수다라(修多羅)라고 하고, 혹은 수투로(修妬路)ㆍ소달람(素呾囕)이라고도 한다. 여기 말로는 계경(契經)이라 하는데 계에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이치에 계합하기 때문이며 근기에 계합하기 때문이다. 경에도 두 가지 뜻이 있으니, 법상(法相)을 꿰뚫기 때문이며 교화할 대상을 섭수하여 지니기 때문이다. 꿰뚫는다[貫穿]는 것은 세친(世親)이 해석하여 말하기를 “의지하기 때문이요, 모습[相]이기 때문이며, 법이기 때문이요, 뜻이기 때문에 이를 꿰뚫음으로써 소달람(素呾囕)이라고 이름한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이곳23)에 있으면서 이것24)을 말미암아 교화할 대상을 위하여 설명할 것이 있으니 이것을 이름하여 의(依)라 하고, 진제(眞諦)와 속제(俗諦)의 모습을 상(相)이라 하며, 10선교법(善巧法)25) 등을 이름하여 법이라 하고, 밀의(密意) 등을 따라서 모든 법을 설명하는 것을 의(義)라고 한다.
또 무성(無性)은 해석하여 꿰뚫고[貫穿] 꿰매는 것[縫綴]이라고 하나니, 풀어 말하면 관천은 계입(契入)의 뜻이요 봉철은 계합(契合)의 뜻이니, 이를테면 성인의 말씀으로써 의리(義理)를 관천하여 흩어지거나 잃지 않게 하며 은몰(隱沒)되지 않게 하고, 봉철 연합함으로써 전표(詮表)를 이루어 오래 머물도록 하는 것이다. 『불지론(佛地論)』에 이르기를 “능히 꿰뚫고 능히 섭수하기 때문에 경이라 한다”고 하였다. 부처님의 거룩한 가르침은 마땅히 설명할 뜻과 교화할 중생을 꿰뚫어 알고 섭수하여 가지므로 이것을 이름하여 계경이라고 한다. 이치에 계합하는 경이라고 하는 것은 의주석(依主釋)26)이다. 계경이 곧 장(藏)이라면 지업석27)이다. 또 『잡심론(雜心論)』에서의 5의(義)는 첫째 용천(涌泉)이요, 둘째는 출생(出生)이며, 셋째는 현시(顯示)요, 넷째는 승묵(繩墨)이며, 다섯째는 결만(結鬘)이다.
바르게 번역하면 선(線)이라 이름한다. 무슨 까닭으로 경을 선이라고 지칭하는가. 선이란 능히 꽃을 꿰는 것이요, 경이란 능히 위(緯)를 가짐이니 의용(義用)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 지방[中國]에서는 경의 이름을 소중히 여기고 선이라고 지칭하는 것을 귀히 여기지 않기 때문에 번역할 때 그 소중히 여기는 것을 따라 선을 없애고 경을 두어 비유를 좇아 이름을 정립하였다.
두 번째로 비나야란 여기 말로는 조복(調伏)이다. 조란 화어(和御)이고 복은 제멸(制滅)이니, 몸[身]과 말[語] 등의 업(業)을 조화하고 공어(控御)하여 모든 악한 행위를 제어하여 조복받고 멸하여 없애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소전(所詮)의 행이니, 말하자면 조복의 장(藏)이다. 혹은 번역하여 멸(滅)이라 한다. 멸에는 세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잘못된 업을 없애는 것이요, 둘째는 번뇌를 없애는 것이며, 셋째는 멸의 과(果)를 얻는 것이다.
혹은 시라(尸羅, śila)라고 하는데, 여기 말로는 청량(淸凉)이다. 3업(業)의 과실과 잘못은 마치 불이 타오르는 것과 같지만 때로는 없앨 수 있기 때문에 청량이라고 한다. 『십송률(十誦律)』에서는 성선(性善)이라고 하였으며 혹은 수신(守信)이라고 하였으니, 옛적에 받은 것을 진실로 능히 가지기 때문이다. 혹은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라고도 하며, 여기서는 수순해탈(隨順解脫)이라고 한다. 계를 지니는 까닭으로 수순하여 해탈에 이르기 때문이요, 또한 별해탈(別解脫)이라고도 한다.
세 번째로 아비달마(阿毘達摩, abhidharma) 장(藏)이라는 것은, 달마는 법을 말하는 것이요, 아비에는 일곱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대법(對法)이니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대향(對向)이니 인지(因智)로써 열반의 과(果)로 나아가기 때문이요, 다른 하나는 대관(對觀)이니 과위의 지혜[果智]가 열반의 적멸을 관하여 증득하기 때문이다. 비록 인지에도 대관이 있다고 하지만 위로 닦아 나아가기 때문에 대향이라고 이름한다.
세친의 『섭론』에 이르기를 “이 법은 무주열반(無住涅槃)을 상대로 해서 모든 진리와 보리분(菩提分) 등의 여러 가지 미묘한 문[妙門]을 설명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인지를 기준으로 하여 설한 것이다. 이는 오직 소전(所詮)일 뿐이다.
둘째 수법(數法)이니, 『양섭론』의 해석에 이르기를 모든 법 중에서 한 법을 따라 혹은 명상(名相)으로써, 혹은 별상(別相)으로써, 혹은 통상(通相) 등으로써 자주자주 이 한 법을 나타내므로 수법이라고 이름한다.
셋째는 복법(伏法)이라고 하니, 저 『논』에 이르기를 “이 법은 모든 말을 항복받을 수 있으며, 세우고 깨뜨리는 두 가지가 가능하여 정설(正說)의 의지 등 방편을 말미암기 때문에 복(伏)이라고 이름한다”고 하였다
넷째는 통법(通法)이니, 이는 계경(契經)의 뜻을 통석(通釋)하기 때문이다. 계경을 법이라 칭하는 것은 이 법이 능히 저기에 통함이니, 이는 곧 법의 통함이다. 『양섭론』에서는 해법(解法)이라고 하는데, 아비달마로 말미암아 수다라의 뜻을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무비법(無比法)이요, 여섯째는 대법(大法)이요, 일곱째는 석법(釋法)이니, 이 세 가지는 오직 소전(所詮)을 기준으로 했을 뿐이다.
또 『순정리론(順正理論)』에 이르기를 “또한 계경을 달마(達摩)라 하는데 논을 잘 결료(決了)하므로 대법(對法)이라 한다”고 하였으니, 이는 곧 교(敎)로서 교를 대하는 것이니 위에서 설명한 통법과 같다. 혹은 마득륵가(摩得勒伽, mātṛkā)라고 하며, 여기 말로는 본모(本母)이니 교와 뜻이 근본이 되고 모태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분별해탈이라고도 하고, 혹은 우바제사(優波提舍, upodeśa)라고도 하며, 여기 말로는 논의(論義)이다. 『잡집』에서는 해석이라고 이름하였다.
이 계경 등 위의 세 가지는 모두 소전을 함섭(含攝)하여 의리를 출생하므로 이를 모두 장(藏)이라고 한다. 『장엄론』 제4에서 말하였다.
“저 세 가지와 이 두 가지를 어찌하여 장이라고 하는가? 답하기를, 섭수함을 말미암기 때문이니 알아야 할 모든 뜻을 섭수하기 때문이다.”
경장은 지업석(持業釋)과 의주석(依主釋)에 모두 통하고 율장과 논장은 의주석일 뿐이니, 소전을 따라 이름하였기 때문이다. 나머지 체성(體性)을 내는 것과 모든 문의 분별은 별도로 말한 것과 같다.
둘째 섭수할 것을 나타낸다는 것은 이 경이 3장 가운데 어디에 속하는가. 혹자는 오직 계경에만 속한다 하니 나머지 둘이 아니기 때문이요, 혹은 두 가지 것에 속한다 하니 의리를 결택(決擇)함은 대법(對法)에 섭수되기 때문이다. 혹은 셋을 다 섭수한다 하니 아랫 글에서 모든 계행을 나타내기 때문이라 하였으니, 이는 동교(同敎)를 기준으로 하여 분별한 것이다. 혹은 아래 경문의 10장(藏)28)에 속한 것이니, 주반(主伴)을 구족해서 다함이 없음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이는 별교(別敎)를 기준으로 하여 말한 것이다.
【문】 삼장은 교(敎)에 의거하고 10장은 뜻[義]을 기준으로 하였는데, 어떻게 뜻으로써 교를 섭수한다 하겠는가?
【답】 만약 소승이라면 교와 뜻이 함께 융합하지 못하고, 삼승은 뜻은 융합하되 교는 융합하지 못하며, 일승은 교와 뜻이 함께 융합하기 때문에 섭수할 수 있다. 의언무분별관(意言無分別觀)29)을 교에 넣어서 포섭하게 한 것 등은 삼승 속에도 이미 있거든 하물며 일승이겠는가. 다만 표소표시(標召表示)는 곧 교에 속하여 섭수함을 보였으니,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셋째 2장(藏)을 분별함을 기준으로 한다는 것은, 이를테면 성문장과 보살장을 말하는 것이다. 첫째 성문의 작은 근기를 기준으로 하여 3장교(藏敎)를 세워 성문의 이(理)ㆍ행(行)ㆍ과(果) 등을 설명하여 보인 것을 성문장이라 하고, 둘째 보살의 큰 근기를 기준으로 하여 3장교를 세워 보살이 행해야 할 법을 설명하여 보인 것을 보살장이라고 한다. 『장엄론(莊嚴論)』 제4에 이르기를, “이 3장은 상하의 승(乘)의 차별을 말미암은 까닭에 다시 성문장과 보살장이라고 설명한다”고 하였다.
넷째 서로 어김을 해석한다는 것에 대하여 이렇게 물었다.
【문】 경30)에 또 이르기를 “연각을 구하는 자를 위하여 12인연을 설한다”라고 하였거늘 어찌하여 연각장이라고 이름하지 않는가?
【답】 모든 연각은 오직 아집만 끊고 오직 생공(生空)31)만을 증득하여 아라한과를 이루고 열반에 듦이 다르지 아니하므로 보살과 비교하여 함께 하승(下乘)이 되기 때문에 별도로 설명하지 않았다.
【문】 평등하게 함께 하열하다면 무엇 때문에 유독 성문장이라고 이름하였는가?
【답】 연각은 부처가 없는 세상에 나와서 가르치는 사람이 없을 수도 있지만 성문을 그렇지 않기 때문에 편벽되게 이름을 얻을 수 있다.
【문】 소승교 중에도 또한 보살승의 법을 설하여 보인 것이 있거늘, 어찌하여 보살장이라고 이름하지 않는가?
【답】 저 종에서는 보살이 끊어야 할 것과 증득해야 할 것과 들어갈 열반 또한 이승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며, 또 보살은 오직 한 분 뿐이요 많지 않기 때문에 설하지 않았다.
【문】 만약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보초삼매경(普超三昧經)』의 「삼장품(三藏品)」과 『입대승론(入大乘論)』에 이르기를 “저 삼승이 곧 3장이 되나니, 첫째는 성문장이요, 둘째는 연각장이요, 셋째는 보살장이다”라고 하는가?
【답】 저 경론 중에 모두 이르기를, “대승 속에 이 3장이 있다”고 하였을 뿐 소승을 말한 것은 아니다.
【문】 이 문장에 의거하면 연각도 장(藏)이 있다. 『장엄론』과 어떻게 회통하여 해석하겠는가?
【답】 앞에서는 이(理)와 과(果)가 다르지 않은 것에 의거하였기 때문에 합하여 말했고, 여기서는 교(敎)와 행(行)이 조금 다른 것을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나누어 말했다. 이러한 까닭에 두 가지 설명이 서로 위배되지 않는다.
다섯째 종류를 연다[開種類]는 것은 성문장에 나아가서 여러 경론을 준거해 보건대 잘못 3종을 열었다.
첫째는 쟁론(諍論)의 성문장이다. 이를테면 계경 가운데 4아함(阿含)과 조복(調伏) 5부(部)32)와 대법(對法)33) 이십(二十)은 서로 어긋나고 다투므로 설명이 같지 않지만, 성인의 과위[聖果]를 방해하지 아니함으로 총체적으로 쟁론장(諍論藏)이라고 이름한다.
둘째는 칭실(稱實)의 성문장34)이다. 유가(瑜伽)의 성문지(聲聞地)와 성문결택(聲聞決擇)에 성문의 행(行)과 위(位)와 과(果) 등을 설명해 보인 것은 모두 진실에 맞추고 이치와 상응하여 파사(婆娑)35)와 모든 다른 논[異論]과 같지 않으며, 보처(補處)36)가 설한 것으로서 모든 이론(異論)으로 다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총체적으로 칭실의 성문장이라고 이름한다.
【문】 여기서 설명하는 것은 이미 소승의 여러 부파와 같지 않거늘, 어찌 성문인에게 두 가지[兩種]가 있는가?
【답】 이것은 교 가운데 성문의 법을 설하는데 이치를 다하고 다하지 못함을 기준으로 하여 둘로 나눈 것이지, 성문에도 차별이 있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셋째는 임시로 세운[假立] 성문장이다. 대승경전 가운데 성문을 인도하여 마음을 돌리게 하기 위하여 세운 법문이다. 또한 성문의 명수(名數)와 같다고 설명하니, 무작사제(無作四諦)와 도품(道品) 등과 같다. 여러 대승경전 속의 설명과 같으므로 번거롭게 인용하지 않겠다. 이미 보살이 배울 것이 아닌 까닭에 이름하여 임시로 세운 성문장이라고 하였다.
【문】 이 가운데 이름은 비록 소승과 같으나 실제로 뜻[義]은 대승이거늘, 어찌 총체적으로 성문장이라고 말하는가?
【답】 다만 이러한 뜻만을 위하여 가립(假立)이라고 이름하였다.
【문】 여러 성문들의 근기가 완숙하여 마음을 돌리면[廻心]37) 배우는 것이 곧 보살장에 섭수될 것이니, 이 가립장(假立藏)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답】 다만 성문이 마음을 돌림에 있어서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뛰어남이고 둘째는 하열함이다. 뛰어난 사람은 한번에 대승에 들어가기 때문에 이 가립장을 힘입지 않지만, 하열한 사람은 오히려 대승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방편으로 저 명수(名數)와 같이하여 쉽게 믿도록 하기 위해서 이 문을 세운 것이다.
제2의 보살장 안에서도 여러 가지 거룩한 가르침에 준거해 보면 또한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소승 속의 보살장이다. 이를테면 보살은 서른네 가지 마음에 의해서 차례로 성불하는 것을 설명하여 보인다. 또한 10지의 행위(行位)를 논하지 않고 그리하여 또 성문 등과 다른 것이 이것이다. 파사ㆍ구사(俱舍)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둘째는 대승 공교(共敎) 속의 보살장이다. 이를테면 보살의 차제의 행위를 설명하여 보인 것이다. 비록 회심(廻心)과 직진(直進)이 같지 아니함이 있다 할지라도 함께 10지 항포(行布)의 점차에 의해서 닦아 불과에 이른다. 유가의 보살지와 대승의 경론 속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셋째는 불공교(不共敎) 속의 보살장이다. 보살이 보현의 행위(行位)에 의하여 5위가 원융(圓融)함을 설명하여 보인 것이다. 이를테면 일위(一位)가 곧 일체위(一切位)이고 일행(一行)이 곧 일체행(一切行)이니, 원극(圓極)의 법계는 걸림이 없이 자재하여 처음과 끝이 다 가지런하여 낱낱 지위[位]마다 원만하게 되어 곧 십불(十佛)을 이루어 주반(主伴)이 구족한 것 등이다.
그러므로 『지론(智論)』에 이르기를 “반야바라밀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공(共)이니 이 『대품경(大品經)』과 나머지 『방등경(方等經)』을 말하는 것이고 여러 성문과 함께 설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불공(不共)이니 『부사의경(不思議經)』을 말하는 것이며, 성문과 함께 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해석하여 말하기를, 이 가운데 대승과 함께하는 소승은 어리석은 법[愚法]이 아니고 소승과 함께하는 대승은 별교(別敎)가 아니다. 그러므로 세 번째 보살장이 있다.
【문】 보살과 성문 2장(藏)이 다르기 때문에 곧 저 두 사람이 각각 따로따로 과(果)를 증득해야 한다. 보살장은 이미 세 가지 지위로 나누어졌으니, 마땅히 세 종류의 보살이 각각 따로 부처가 되는 것인가?
【답】 부처가 되는 것은 오직 한 길뿐이다. 다만 근기가 깊고 얕음이 있어 교설(敎說)이 세 가지로 나뉠 뿐 부처를 이루는 체(體)에 실로 세 가지가 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는 교에 나아가 열어 보인 것이요, 부처님의 체를 기준으로 한 것이 아니다.
【문】 만일 세 가지 설이 모두 이치에 맞는 것이라면 부처님의 체도 세 가지로 이루어져야 하고, 만일 부처가 되는 이치가 오직 하나뿐이라면 나머지 두 가지 설은 거짓이어야만 되지 않겠는가?
【답】 부처가 되는 이치는 오직 하나뿐이라는 데에 세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근본[本]으로써 끝[末]을 따르는 문이니 마치 소승의 설과 같아서 성문과 같기 때문이요, 둘째는 근본을 열어 끝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문이니 마치 공교(共敎)의 설과 같아서 성문과 더불어 서로 마주하여 다른 것을 분별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끝은 다하여 없어지고 오직 근본만 남아있는 문이니 마치 불공교설(不共敎說)과 같아서 이승(二乘)이 귀먹고 눈멀어서 서로 대하여도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체는 원융하며 이 세 가지 뜻을 모두 갖추고 있으니, 그러므로 이 세 가지 설이 각각 다르나 부처님의 경지는 조금도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여기 보살장 가운데에 이 세 가지 종류가 있는 것이다.
여섯째 거두어지는 것을 결정[定所攝]한다는 것은 이 경은 어디에 섭수되느냐 하면 모두가 앞에서 말한 세 가지의 성문장에 섭수되지 않고, 뒤의 세 가지 보살장 가운데 마땅히 오직 뒤에만 섭수된다. 왜냐하면 『지론(智論)』 중에서 별도로 이 경을 가리켜 불공(不共)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혹은 이 세 가지 가운데 오직 처음 하나만 제외하고 뒤의 둘은 모두 섭수하니, 이 경 가운데 보(普)와 별(別)38)을 갖추기 때문이다. 혹은 저 임시로 정립[假立]한 성문장까지도 거두어 들임이니, 경 가운데 또한 4제(諦) 등을 설명하여 밝혔기 때문이다. 혹은 총체적으로 2장(藏)이 거두어 들이는 것과 통하나니, 성문장의 법은 아울러 일승법계(一乘法界)로부터 흘러나온 것으로서 별다른 의미[味]가 없기 때문이다.
일곱째 한 부의 섭수[一部攝]라는 것은 12부(部) 가운데 오직 방광(方廣)한 부에만 거두어지는 것을 기준으로 한 것이니, 『대법론(對法論)』에 이르기를 “모든 유정에게 유익하고 안락하여 의지할 곳이 되기 때문이며 광대하고 매우 깊은 법을 설한 까닭에 이름하여 방광이라 한다”고 하였으며, 또 『유가(瑜伽)』에 말하기를 “성문장 중에는 방광이 없다”고 설한 까닭이다. 혹은 이 경39)의 제목에 이미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덟째 3부에 섭수된다는 것은 기별(記別)과 자설(自說)과 방광(方廣)을 말하는 것이다. 『법화』 가운데 나머지 9부(部)는 소승이라고 설하였기 때문이니, 이 경은 저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직 세 가지만 섭수하게 된다.
아홉째 혹은 9부에 섭수된다고 한 것은, 이를테면 인연과 비유와 논의(論義)는 제외한다. 『열반』의 제3에 이르기를 “대승을 보호하는 사람은 9부를 받아 가진다”고 말하여 앞의 셋을 제외하였기 때문이다.
열째 열두 가지를 갖추었다고 한 것은, 첫째는 계경에 섭수되니 『열반경』에 이르기를 “맨 처음 여시(如是)로부터 마지막 봉행(奉行)에 이르기까지가 계경이다”라고 하였기 때문이요, 둘째는 응송(應頌)이니 아래 경문40)에 중송(重頌)을 갖춘 것과 같기 때문이다. 셋째는 기별(記別)이니 아래 경문에 성불할 것 등을 수기한 것과 같기 때문이요, 넷째는 풍송(諷頌)이니 아래 경문에 곧바로 게송을 설한 것 등과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자설(自說)이니 아래 경문에 선정[定]으로부터 일어나서 곧 본분(本分) 등을 설한 것과 같은 것이요, 여섯째는 연기(緣起)이니 아래 경문에 요청함으로 인하여 설한 것과 같기 때문이며, 일곱째는 비유(譬喩)이니 아래 경문에 비유를 들어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기 때문이요, 여덟째는 본사(本事)이니 아래 경문에 노사나불[盧舍那] 등과 보현이 본래 경험한 본사를 설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아홉째는 본생(本生)이니 아래에 노사나불 등의 본생의 모습[相]을 설한 것과 같기 때문이요, 열째는 방광 한 문[一門]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열한 번째는 희법(希法)이니 아래 경문에 털구멍이 법문을 설함과 자리[座]가 온갖 보배를 내어놓고 주장자가 부처님을 나타낸 것 등과 같고, 열두 번째는 논의(論義)이니 『유가』의 81설(說)과 같다. 이를테면 모든 경전에 쉴 새 없이 질문하고 연구하여 확실하게 한 마달리가(摩怛理迦)41)이다. 일체 요의경(了義經)을 모두 마달리가라고 이름하나니, 이를테면 이곳에서 세존이 스스로 법상을 자세히 분별한 것 등이다. 아래의 경문 중 「명난품(名難品)」 등의 설과 같다. 그러므로 이 경은 12부를 갖추어 포섭하고 있다. 나머지 뜻은 아래의 12부경에서 설한 것과 같다. 장부(藏部)가 섭수하는 것에 대한 설명을 마친다.
세 번째로 교를 세우는 차별을 밝힌다는 것은 대략 열 가지 종류로 말할 수 있다. 첫째 고설(古說)을 서술함이요, 둘째는 시비를 가리며, 셋째는 서역(西域)을 서술하고, 넷째는 서로 어긋남을 회통하며, 다섯째는 현전(現傳)을 밝히고, 여섯째는 권실(權實)을 결정하며, 일곱째는 개합(開合)을 나타내고, 여덟째는 전후(前後)를 가르치며, 아홉째는 뜻에 나아가 교를 나누고, 열째는 이치[理]로써 종지[宗]를 열었다.
첫 번째 것 가운데 예로부터 모든 덕있는 사람들이 교를 세운 것이 여러 갈래이므로 갖추어 나타내기 어렵다. 여기서는 대략 열 사람의 설을 서술하여 귀감을 이루고자 한다.
첫째 후위(後魏)의 보리유지(菩提留支)42)는 일음교(一音敎)를 정립하였으니, 이를테면 일체의 성교(聖敎)는 오직 여래의 일원음(一圓音)의 가르침일 뿐이다. 다만 근기가 각각 다르기 때문에 갖가지로 나누어지나니, 경에 “일우(一雨)가 적신 바”라고 한 것 등과 같다. 또 경에 이르기를 “부처님께서는 일음으로써 법을 연설하셨거늘 중생들은 유(類)를 따라서 각각 이해한다”고 한 것 등과 같다.
둘째 진(陳)나라의 진제(眞諦) 삼장 등이 점(漸)ㆍ돈(頓) 두 가지 교리를 정립하였으니, 이를테면 점진적으로 깨닫는 근기를 기준으로 하면 큰 것은 작은 것을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으로 시설하였으므로 삼승의 가르침을 갖추고 있다. 그러므로 점이라고 이름하였으니, 이는 곧 『열반경』 등이다. 만일 곧바로 돈의 근기[頓機]를 기준으로 하면 큰 것은 작은 것을 말미암지 않는 것으로 시설하였으니, 이는 오직 보살승의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돈이라고 이름하였으니, 이는 곧 『화엄경』 등이다. 뒤에 대원(大遠) 법사 등도 이 설과 같다.
셋째 후위의 광통(光統) 율사는 불타(佛陀) 삼장을 이어받아 3종교를 정립하였으니, 점(漸)ㆍ돈(頓)ㆍ원(圓)을 말한다. 광통 스님이 해석한 뜻은 첫째는 근기가 미숙한 사람을 위하여 먼저 무상(無常)을 설하고 나중에 항상[常]함을 설하였으며, 먼저 공(空)을 설하고 뒤에 불공(不空)을 설한 것 등이다. 이와 같이 점차가 있는 것을 이름하여 점교라고 한다.
둘째는 근기가 익은 무리들을 위하여 한 법문에 일체의 불법을 모두 갖추어 설한 것이니, 말하자면 상(常)과 무상, 공과 불공 등의 이치를 모두 갖추어 설하고 다시는 점(漸)을 말미암지 않기 때문에 돈(頓)이라고 이름한다. 셋째는 부분적으로 부처의 경지에 오른 상달(上達)의 무리를 위하여 여래의 걸림없는 해탈의 구경과덕(究竟果德)으로서 원극비밀(圓極祕密)한 자재의 법문을 설하였기 때문에 원(圓)이라고 이름하니, 곧 이 경은 이 원ㆍ돈에 섭수된다. 뒷날 광통 문하의 준통 스님[遵統師] 등도 모두 이 설을 이어받고 있다.
넷째 제(齊)나라의 대연(大衍) 법사 등이 네 가지의 교리[四宗敎]를 정립하였다. 첫째는 인연종(因緣宗)이니 즉 소승의 살바다부(薩婆多部) 등이요, 둘째는 가명종(假名宗)이니 『성실론(成實論)』과 경부(經部) 등의 설이며, 셋째는 부진종(不眞宗)이니 여러 부(部)의 반야(般若)에서 즉공(卽空)의 이치를 설하여 일체법이 진실되지 않음을 밝힌 것 등이다. 넷째는 진종(眞宗)이니 화엄과 열반에서 법계와 진리와 불성 등을 밝힌 까닭이다.
다섯째 호신(護身) 법사 등은 다섯 가지 교리[五宗敎]를 세웠으니, 이것은 앞의 넷째 종에서 나누어진 것으로 진불성(眞佛性)으로써 진종을 삼았으니 곧 『열반경』 등이고, 다섯 번째는 법계종(法界宗)이라 이름하니 이는 곧 화엄이다. 법계가 자재 무애하다는 법문을 밝히기 때문이다.
여섯째 진(陳)나라의 남악 혜사(南岳慧思) 선사와 지자(智者) 선사 등은 네 가지 교리[四敎]를 정립하였으니, 첫째는 3장교(藏敎)43)이며 소승교라고도 한다. 마치 『법화』에서 “소승의 3장을 배우는 사람을 친근히 하지 말라”고 말한 것과 같으며, 『지론(智論)』에서 소승을 3장이라 말하고 대승을 마하연장(摩訶衍藏)이라 이름한 것과 같다.
둘째는 통교(通敎)이니 또한 점교라고도 한다. 이를테면 대승경전 속에 삼승을 통틀어 설하여 3근(根)에 모두 이익을 주기 때문이다. 또 『대품』 속에서 간혜(乾慧) 등 10지(地)가 삼승을 통틀어 말하는 것 같은 것이 바로 이것이다.
셋째는 별교(別敎)이니 또한 돈교라고도 하는데, 이를테면 모든 대승경전 가운데 설한 법문의 도리가 소승 등에게는 통하지 않는 것이다.
넷째는 원교이니 또한 비밀교라고도 하는데, 이를테면 법계는 자재 구족 원만하여 하나가 곧 일체이고 일체가 곧 하나가 되는 등 걸림이 없는 법문이다. 또한 『화엄경』과 같은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일곱째 당(唐)나라 해동(海東) 신라국의 원효 법사는 이 경의 『소(疏)』44)를 지어 또한 4교를 정립하였다. 첫째는 삼승별교(三乘別敎)로서 4제의 가르침과 같은 것이니 『연기경(緣起經)』 등을 말하고, 둘째는 삼승통교(三乘通敎)로서 『반야경』ㆍ『심밀경(深密經)』 등을 말하며, 셋째는 일승분교(一乘分敎)로서 『영락경(瓔珞經)』ㆍ『범망경(梵網經)』 등을 말하고, 넷째는 일승만교(一乘滿敎)로서 『화엄경』의 보현교(普賢敎)를 말한다. 이 넷의 차별은 그의 『소』에서 해석하고 있는 것과 같다.
여덟째 당나라의 길장(吉藏) 법사는 세 가지 교를 세워 3법륜(法輪)이라 하였다. 첫째는 근본법륜(根本法輪)이니 곧 『화엄경』이 최초에 설한 것임을 말함이요, 둘째는 지말 법륜(枝末法輪)이니 소승 등을 뒤에 설함을 말하는 것이며, 셋째는 섭말귀본법륜(攝末歸本法輪)이니 곧 『법화경』은 40년 뒤의 설법으로 세 가지를 돌려 하나에 들게 한 것을 말하는데, 갖추어 해석함은 그와 같다.
아홉째 양(梁)나라의 광택사(光宅寺) 법운(法雲, 407-529) 법사는 4승교(乘敎)를 세웠으니, 『법화』의 문 앞의 3거(車)를 삼승이라 하고 네거리에서 수여한 대백우거(大白牛車)를 네 번째 승(乘)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문 앞의 우거(牛車)도 또한 양(羊)이나 사슴[鹿]과 같이 함께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장자(長者)가 집안에서 모든 아들을 인도할 때 ‘이 세 수레는 문밖에만 있다. 아들들아, 집을 나오면 수레를 얻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어찌하여 집을 나와서 본래 가리킨 수레가 있는 곳에 갔는데도 얻지 못하였다가 뒤에 다시 찾게 되었는가. 그러므로 이것은 방편[權]으로 양이나 사슴과 같은 것임을 알아야 할지니라. 이것은 대승 가운데 권교방편(權敎方便)의 설이 되기 때문이다. 갖추어진 해석은 그의 『법화경소』와 같다.
열째 당의 강남의 인(印) 법사와 민(敏) 법사 등은 두 가지 교를 정립하였으니, 첫째는 석가경(釋迦經)을 굴곡교(屈曲敎)라고 이름하였다. 중생의 근성을 따라 사견과 집착을 깨뜨렸기 때문이니 『열반경』과 같으며, 둘째는 노사나경(盧舍那經)을 평도교(平道敎)라고 하였는데 법성을 따라서 자재(自在)하게 설하였기 때문이니 『화엄경』과 같다. 그 스님이 이 두 가지 교를 해석함에 있어서 간략하게 네 가지로 구별하였다. 첫째는 주체[主]가 다른 것이니, 이를테면 저것은 석가의 화신이 설한 것이고 이것은 노사나불 10신(身)이 설한 것이다. 둘째는 처소가 다른 것이니, 이를테면 저것은 사바세계의 나무 아래 풀로 된 자리에서 설한 것이고, 이것은 연화장세계의 보배 나무 금색 자리[寶樹金座]에서 설한 것이다. 셋째는 대중이 다른 것이니 저것은 성문과 보살로 더불어 설하였지만 이것은 오직 보살 극위(極位)가 함께 설한 것이다. 넷째는 설한 내용이 다른 것이니 저것은 다만 일방(一方)을 설한 반면, 이것은 시방을 두루 갖추어 다함께 설하였기 때문이다. 더 자세한 해석은 그의 『화엄경소』와 같다.
두 번째로 시비를 가린다고 한 것은, 위의 교를 세운 열 분의 제덕(諸德)은 모두 당시의 법장(法將)으로서 영특함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 혜사 선사와 지사 선사 등은 신이(神異)하고 감통(感通)하여 그들의 자취는 등위(登位)에 참예하여45) 영취산에서 법문을 들었던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46), 법운(法雲) 법사는 이를 의지하여 종(宗)을 열어 『법화』를 강의할 때 하늘이 감동하여 꽃을 비처럼 내린 것 등은 모두 승전(僧傳)에 나타난 것과 같다. 또 이러한 제덕이 어찌 남다른 것을 좋아한 까닭에 거룩한 가르침[聖敎]을 나누었겠는가. 다만 많은 전적을 섭렵하여 모두 알았으나 다른 길을 근기에 맞추어 나타낸 것이니, 말하자면 부득이하여 종지를 열어 서로 다르게 해석하였지만 힘써 성인의 말씀이 각각 그 마땅함에 계합하게 하였던 것이다.
【문】 위의 열 가지 설[十說]은 누가 옳고 누가 잘못되었습니까?
【답】 『성실론(成實論)』에 의하면 “부처님께서 내외, 중간의 말을 설명하여 마침내 선정에 드실 때에 5백 나한이 각각 이 말을 해석하였고, 부처님께서 선정에서 나온 뒤에 함께 세존에게 묻기를 누가 부처님 뜻에 맞습니까?”라고 하였다. 부처님이 말씀하시되 “모두 나의 뜻이 아니니라”라고 하셨다. 모든 사람들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이미 부처님의 뜻에 맞지 않는다면 죄가 되지 않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나의 뜻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각각 올바른 이치에 수순하며 거룩한 가르침이 될 만하니 복이 있고 죄는 없다”고 하셨다. 하물며 이 여러 가지 설은 각각 많고 적은 거룩한 가르침으로써 증거를 삼은 까닭에 온전하게 파기할 수는 없다.
세 번째 서역(西域)의 설을 서술한다는 것은 진제의 3륜(輪)47)과 급다(笈多)의 4교(敎)48)와 파파(波頗)의 5설(說)49) 633)는 『반야등론(般若燈論)』의 역자로서 5교를 정립하였으니, 첫째는 4제교요, 둘째는 무상교이며, 셋째는 관행교요, 넷째는 안락교(安樂敎)이니 『열반경』을 말하고, 다섯째는 수호교(守護敎)이니 정법 수호를 말하는 『대집경』을 말함이다.
은 모두 별도로 설한 것과 같다.
또 법장은 문명(文明) 원년(元年, 684)에 다행히 중천축(中天竺)의 삼장 법사인 지바하라(地婆訶羅)를 만났다. 당나라 말로는 일조(日照)라 하는데 수도의 서쪽에 있는 태원사(太原寺)에서 경전과 논서들을 번역하였다. 법장은 그와 친근하였는데, 그 때 묻기를 “서역의 제덕(諸德)들은 일대(一代) 성교(聖敎)에 대해 권실(權實)을 나눕니까?” 삼장이 대답하되, 근대 천축의 나란타사(那爛陀寺)에는 동시에 두 사람의 덕 높으신 논사가 있었으니 한 분은 계현(戒賢)이고 다른 한 분은 지광(智光)이다. 아울러 신이한 견해[神解]는 보통 사람들을 뛰어넘고 그 명성은 다섯 인도에 드날려 많은 사특한 견해를 무너뜨렸고 다른 부류[異部]들을 조복하여 귀의하도록 하였다. 대승의 학인(學人)은 해나 달처럼 우러러보니 천축에 독보적인 존재로서 각각 한 사람뿐이었다. 이어받은 종지[宗]가 다르기 때문에 교리를 세우는 데 있어서 같지 않았다.
이를테면 계현은 멀리는 미륵(彌勒)50)과 무착(無着)51)을 이어받았고 가깝게는 호법(護法)52)과 난타(難陀)53)를 이어 『심밀(深密)』 등의 경전과 『유가』 등의 논에 의하여 세 가지 교를 세웠다. 말하자면 부처님께서 처음 녹야원에서 소승법을 설하여 생공(生空)54)의 이치를 말씀하셨으나 아직 법공(法空)55)의 이치에 대해서는 말씀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요의(了義)56)가 아니니, 이는 곧 네 가지 『아함(阿含)』 등의 경전이다. 제2시(第二時) 중에 비록 변계소집자성(遍計所執自性)57)에 의거하여 모든 법은 공하다고 설하셨으나 아직 의타(依他)58)와 원성(圓成)59)의 유식의 도리는 설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또한 요의가 아니니, 이는 곧 여러 부(部) 『반야』 등의 가르침이다. 제3시(第三時)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대승의 바른 이치에 나아가 3성(性)60)ㆍ3무성(無性)61) 등 유식의 두 가지 진리[二諦]를 갖추어 설함으로써 비로소 요의라고 말할 수 있으니, 이는 곧 『해심밀경』 등의 경전이다.
또 이 3위(位)는 각각 세 가지 뜻으로써 해석하나니, 첫째는 근기[機]를 섭수하고, 둘째는 교를 설하며, 셋째는 이치[理]를 나타내는 것이다.
또 처음은 오직 성문만을 섭수하고 소승에 대해서만 설하여 생공만을 나타내었고, 두 번째는 오직 보살만을 섭수하며 대승만을 설하여 2공(空)만을 나타내었으며, 세 번째는 모든 근기를 두루 섭수하고 모든 승[諸乘]을 통틀어 말하여 공(空)과 유(有)를 갖추어 나타내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앞의 두 가지는 근기와 교와 이치를 섭수함에 있어서 각각 서로 빠뜨린 것이 있으므로 요의가 아니요, 뒤의 한 가지는 근기에 대해서는 섭수하지 아니함이 없고 교에 대해서는 갖추지 아니함이 없으며 이치에 대해서는 원만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요의라고 한다.
두 번째로 지광(智光) 논사는 멀리는 문수(文殊)62)와 용수(龍樹)63)를 이었고, 가깝게는 제바(提婆)64)와 청변(淸辯)65)을 품수(稟受)하여 『반야』 등의 경전과 『중관』 등의 논에 의거해서 세 가지 교를 세웠다. 이를테면 부처님께서 녹야원에서 모든 소근기[小根]를 위하여 소승법을 설하여 마음과 경계가 함께 있는 것임을 밝히고 제2시(第二時)에는 중근기[中根]를 위하여 법상 대승(法相大乘)을 설하여 경계는 공하지만 마음은 있는 것이라는 유식의 도리를 밝혔다. 근기가 여전히 하열하기 때문에 아직 평등한 진공(眞空)에 들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설명을 하게 된 것이다. 제3시(第三時)에는 상근기[上根]를 위하여 무상 대승(無相大乘)을 설하여 마음과 경계가 함께 공하여 평등한 한 맛[平等一味]이라는 것으로 참다운 요의를 삼았다.
또 이 3위(位)는 세 가지 뜻으로 해석하나니, 먼저 근기를 섭수하는 것이다. 처음 때[初時]에는 이승의 근기만을 섭수하고, 제2시에는 대소의 두 근기를 통틀어 섭수하니, 이 종(宗)에서는 일분(一分)의 이승이 불과에 향하지 못한다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는 다만 보살만을 섭수하여 점(漸)과 돈(頓)에 통하는 것이니, 모든 이승은 다 불과에 향할 뿐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교를 기준으로 하면 처음은 오직 소승만을 설하고, 다음은 삼승에 통하며, 마지막에는 일승뿐이다.
세 번째 이치[理]를 나타내는 것을 기준으로 하면, 처음은 외도의 자성(自性) 등을 깨뜨리기 위한 까닭에 연으로 생긴 법[緣生法]은 결정코 실제로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다음에는 점차로 이승에서 주장하는 연으로 생긴 것은 실제로 존재한다는 집착을 깨뜨려 이 연생을 사유(似有)라고 말한다. 저들은 진공(眞空)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오히려 거짓으로 있는 것[假有]을 주장하고 끌어들인다. 마지막[後時]에 비로소 구경대승(究竟大乘)에 나아가 이 연으로 생긴 것은 곧 성품이 공하여 평등한 일미(一味)로서 2제(諦)를 방애하지 않는다고 설한다. 그런 까닭에 법상 대승의 유소득(有所得) 등은 제2의 교(敎)에 속하는 것이요, 진실한 요의가 아니다. 이 3교의 차례는 지광 논사가 『반야등론석』에서 『소야나마하연경(蘇若那摩訶衍經)』66)을 인용하여 설명한 것과 같다. 여기서는 『대승묘지경(大乘妙智經)』이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예로부터 아직까지 듣지 못한 것이다.
네 번째로는 서로 어긋남[相違]을 회통한다는 것이다.
【문】 이 두 가지 설은 이미 각각 성교(聖敎)라 하나 서로 모순되는 점이 있으니, 화합해서 회통하여야[和會] 합니까, 화합하여 회통할 수 없는 것입니까?
【답】 회통할 것도 없고 회통하지 않을 것도 없다. 먼저 회통할 것이 없다는 말은 이미 이 둘은 모두가 성교(聖敎)이므로 연(緣)을 따라 중생을 이익되게 하거늘 무엇 때문에 회통하기를 기다리겠는가. 곧 저 『지론(智論)』에서의 네 가지 실단(悉檀) 가운데 각각위인실단(各各爲人悉檀)67)이며, 또한 『섭론』의 4의취(意趣) 가운데 중생락욕의취(衆生樂欲意趣)이다. 한 법[一法] 속에서 혹은 칭찬하고 혹은 헐뜯었으니, 이런 까닭에 이 두 가지 설을 억지로 회통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두 번째 회통하지 않을 것도 없다는 것은 두 가지 문이 있다. 첫째는 교가 근기에 응하는 것을 기준으로 한 것이요, 둘째는 근기가 교를 영도(領導)하는 것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앞의 것 가운데 다만 불교의 문에는 요와 불요만 있는데 거기에는 네 가지 지위[四位]가 있으니, 첫째는 근기를 섭수함에 있어서 넓고 좁음[寬狹]을 기준으로 한 것이요. 둘째는 말과 교[言敎]가 모두 없음[具闕]을 기준으로 한 것이며, 셋째는 중생[物]을 이익되게 함에 있어서 크고 작음[大小]을 기준으로 한 것이며, 넷째는 이치를 나타냄에 있어서 얕고 깊음[淺深]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처음 것에서 만일 오직 이승만을 섭수하고 보살은 겸하지 못한다거나, 혹은 오직 보살만이고 이승은 겸하지 못한다면 각각 근기를 섭수함이 좁기 때문에 요의가 아니지만, 만일 넓게 세 근기를 모두 섭수하여 두루 다한다면 비로소 요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것은 만일 오직 소승만을 말하고 대승을 겸하여 말하지 않거나, 혹은 오직 대승만을 설하고 소승교를 겸하지 못한다면 말에 각각 결여된 것이 있기 때문에 요의가 아니지만, 만일 말이 크고 작은 것을 모두 포함하고 삼승을 구족한다면 비로소 요의라고 할 수 있다. 『심밀경』 등은 위의 두 문에 의거했기 때문에 계현이 판단한 것도 또한 도리(道理)가 있다.
셋째 중생을 이익되게 함에 있어서 크고 작은 것을 기준으로 한다는 것은 만일 모든 중생에게 소승의 이익을 얻게 하거나 혹은 모든 유정들에게 대승의 이익을 얻게 한다면 적은 이익을 얻더라도 온전히 구경의 이익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모두가 요의가 되지 못하지만, 만일 모든 중생들과 입적이승(入寂二乘) 모두에게 큰 보리(菩提)의 이익을 얻게 한다면 비로소 요의라고 할 것이다.
넷째 이치를 나타냄에 있어서 얕고 깊다고 한 것은 만일 연기에서 실제로 있는 것[實有]이라고 설하거나, 혹은 실제로는 깨뜨린다 할지라도 오히려 가유(假有)를 주장하면 이미 상(相)을 회통함에 있어서 아직 다하지 못한 것이고 이치[理]를 나타냄에 있어서도 아직 극진하지 못하기 때문에 요의가 아니지만, 만일 연으로 생기는 것[緣生]은 그 성품이 공[性空]하므로 연기를 장애하지 않고 융통하여 둘이 없다고 설한다면, 연(緣)을 회통함이 이미 다하여 이성(理性)이 원만하게 나타난 것이므로 비로소 요의라고 할 수 있다. 저 『묘지경(妙智經)』은 위의 두 문에 의지했기 때문에 지광이 판단한 것도 깊은 도리가 있다.
이러한 까닭에 이 두 가지 학설은 각각 별문에 의거하여 서로 이르지는 못하나니[互不相至], 어찌 서로 어김이 있겠는가.
두 번째는 근기가 교를 영도(領導)하는 것을 기준으로 했다는 것이다.
【문】 두 학설의 3교(敎)는 각각 처음에는 소승을 설했는데 『화엄』을 맨 먼저 설했다는 것은 어떻게 풀이할[會釋] 것인가?
【답】 제덕(諸德)의 말씀에 세 가지 해석이 있다.
첫 번째로 “이 3법륜(法輪)은 차츰 깨달아야 할 근기를 기준으로 하여 말한 것이요, 『화엄』을 맨 먼저 설했다는 것은 단번에 깨달을 만한 근기를 기준으로 하여 말한 것이다”라고 했다. 만일 그렇다면 『밀적력사경』의 “초시(初時)에 삼승법을 갖추어 설했다”고 한 것은 점(漸)에 속한다고 하겠는가, 돈(頓)에 속한다고 하겠는가. 만일 이것이 점교라면 소승만을 설했어야 할 것이고, 만일 이것이 돈교라면 대승만을 설했어야 할 것인데, 저들은 이미 세 가지를 갖추었기 때문에 지극히 위해(違害)가 된다. 이런 까닭에 이 해석도 용납하기 어렵다.
또 하나는 “만일 현료문(顯了門)에 의하면 곧 앞에서와 같이 세 가지 법의 차례가 있지만, 만일 비밀문을 기준으로 하면 곧 모든 학설[諸說]은 동시이다. 만일 그렇다면 곧 초시에는 소(小)는 현(顯)이고 대(大)는 밀(密)이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대는 현이고 소는 밀이 되지 않는가. 또 이 현밀(顯密)을 판단하는 것은 어떤 성교에서 나왔는가. 이치[理]가 이미 맞지 않고 또 성교도 없기 때문에 그것에 의지하여 사용하기도 어렵다.
이 위의 두 가지 해석에서는 이 3법륜을 해석함에 있어서 법을 섭수하는 데 극진하지 못하니, 처음은 점(漸)이요 돈(頓)이 아니며 나중 것은 현(顯)이요 밀(密)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다만 여래의 원음으로 한 번 연설하면 이류(異類)들도 한꺼번에 깨닫게 되나니, 그 때 소(小)에 나아가 결집하면 오직 소승만을 설하고, 대(大)에 나아가 결집하면 대승만을 설하며, 통(通)에 나아가 결집하면 삼승을 모두 설한다고 하니, 만일 그렇다면 하나를 따라서 결집하면 전후가 모두 없어야 한다. 어찌 이와 같은 세 가지 교리의 차례가 있겠는가”라고 한다.
지금 이러한 논란을 풀이하여 문득 두 가지 설을 회통하나니, 널리 여래의 원음으로 설법한 것을 논하건대 크게 두 가지 예가 있다. 첫째는 이 세상에 근기가 결정된 자를 위해 설한 것이요, 둘째는 이 세상에 근기가 결정되지 못한 사람을 위해 설한 것이다.
첫 번째 것에 또 3절(節)이 있으니, 첫째는 혹 어떤 중생이 이 세상에서 소승의 근성으로 결정된 사람에 대해서는 부처님께서 시종 소승만을 설한다고 본다. 소승의 여러 부파[諸部]와 같으니 삼장을 결집하되 총체적으로 대승은 없다. 둘째는 혹 어떤 중생이 이 세상에서 삼승의 근성이 익숙한 사람에 대해서는 부처님께서 시종 삼승만을 설한다고 본다. 이는 『밀적력사경』과 같으니, “부처님께서 처음 녹야원에서 설법할 때에 한량없는 중생들이 아라한과를 얻었고, 한량없는 중생들이 벽지불도를 이루었으며, 한량없는 중생들이 보리심을 발하여 초지(初地)에 안주하였다”는 등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대품』과 『대반야』에서도 또한 이 설법과 같다. 이 뜻에 따라서 보면 후시(後時)에 말한 것은 삼승을 통틀어 갖추어 말한 것이 여러 대승경전에서 말한 것과 같다. 셋째는 혹 어떤 중생이 이 세상에서 일승(一乘)의 근성이 완숙해진 사람은 곧 처음에는 부처님께서 수왕(樹王) 아래 화장세계[華藏界] 속에서 해인삼매[海印定]에 의지하여 오직 보살만을 위하여 다함이 없이 원만하고 자재 무애한 법문[無盡圓滿自在無礙法門]을 연설하여 주반(主伴)을 모두 만족하게 하였는데 나아가 종극(終極)에도 또한 이 설법과 같다고 본다. 이 법 속에는 9세(世)를 통괄하고 전후를 섭수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근기가 결정되지 못한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한 것은 2위(位)가 있다. 하나는 이 세상에서 소승의 근기가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삼승의 지위에 진입할 만한 사람은 곧 처음엔 오직 소승만을 들음으로써 불료(不了)가 되고, 다음에는 오직 대승만 듣게 되는 것도 또한 요(了)가 아니다. 뒤에 삼승을 모두 갖추어 듣고서야 비로소 요의가 된다. 『해심밀경』에는 이러한 근기에 대해서 분별하여 놓았다. 그 둘은, 이 세상에서 소승의 근기가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승의 지위에 진입할 만한 사람은 곧 처음엔 오직 소승만을 설하므로 불료교라 하고 다음에 대소승을 통틀은 것도 또한 요교(了敎)가 아니라고 하며, 뒤에 삼승을 회통하여 하나에 돌아가 오직 일승만을 설해야만 비로소 요교라고 한다. 『묘지경(妙智經)』은 이 뜻에 해당한다. 근기가 결정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서도 이 두 가지 문이 있다. 이러한 까닭에 두 논사[二師]가 각각 한 문씩만 서술한 까닭에 서로 어기지 않았다.
이와 같이 이 세상에서 근기의 결정과 결정되지 못한 것이 있기 때문에 저 교문으로 하여금 혹은 전후가 있으며, 혹은 전후가 없다는 것에 대해서 이에 준거하여 해석해 보면 알 수 있다.
다섯 번째로 현전(現傳)을 밝힌다는 것은 현재의 여러 덕 높으신 분들은 대승에 대하여 스스로 두 가지 학설이 있다. 하나는 삼승의 대승을 세우나니 이 종파에서는 입적이승(入寂二乘)은 결정코 성불할 수 없음을 인정하기 때문에 저 5성(性)의 차별을 기준으로 하여 삼승을 갖추어 설명한다. 다른 하나는 일승의 대승을 세우나니 이 종파에서는 입적의 이승도 함께 성불함을 인정하기 때문에 이 불성이 두루 있다는 것을 기준으로 하여 오직 일승만을 설하고 있다.
앞의 논사68)는 교리를 인용하여 성립하고는 말하기를 『대반야경』 제590권에 말한 것과 같이 “만일 유정의 부류로서 성문승69)에서 성품이 결정된 자는 이 법을 듣고 빨리 자기의 무루지(無漏地)를 증득하고, 독각승에서는 성품이 결정된 사람은 이 법을 듣고 빨리 자승(自乘)에 의하여 출리(出離)함을 얻고, 무상승(無上乘)에서 성(性)이 결정된 사람은 이 법을 듣고 빨리 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를 증득한다. 만일 유정의 무리로서 아직 정성이생(正性離生)70)을 증득하여 들어가지 못했다 할지라도 삼승에서 성(性)이 결정되지 못한 사람은 이 법을 들으면 모두 무상정등각심을 일으키게 된다”고 하였다.
또 『해심밀경』 제2에 이르기를 “나아가 다시 법요를 설하니, 이를테면 상무자성성(相無自性性)과 승의무자성성(勝義無自性性), 나아가 모든 성문승종성(聲聞乘種性)의 유정들도 이 도(道)와 이 행적을 말미암기 때문에 바르게 위없는 안온한 열반(涅槃)을 얻는다. 일체의 성문과 독각과 보살은 모두 이 유일하고 미묘하고 청정한 도[一妙淸淨道]를 한가지로 하며, 모두 이 유일한 구경의 청정[一究竟淸淨]함을 한가지로 하여 다시 제2가 없다. 나는 여기에 의지하였기 때문에 밀의(密意)로 설한다. 오직 일승만 있으며, 일체의 유정 세계 속에 갖가지 유정들의 종성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혹은 둔한 근기[鈍根]의 성품을 가진 것도 있으며, 혹은 중근기[中根]의 성품도 있으며, 혹은 영리한 근기의 성품도 있으므로 유정들은 차별이 있다”고 하였다.
해석하여 이르되, 이것은 삼승이 동일하다고 관하는 무성(無性)의 도를 기준으로 한 까닭에 밀의(密意)로 이것을 설명하여 일승이라 하지만 이실(理實)로는 삼승은 각각 열반을 증득하는 것이요, 똑같은 것이 아니라고 한다.
또 『유가론』 제37에 이르되 “보특가라(補特伽羅)71)로서 성취한 것에 대해서는 대략 네 가지로 설명한다. 성문의 종성이 있는 사람은 성문승으로써 이것을 성취하고, 독각의 종성이 있는 사람은 독각승으로써 이것을 성취하며, 불종성(佛種性)이 있는 사람은 무상승(無上乘)으로써 이것을 성취하고, 무종성(無種性)인 사람은 곧 선취(善趣)로써 이것을 성취한다”라고 하였으며, 『선계(善戒)』와 『지지(地持)』에서도 모두 이 설과 같다.
또 『해심밀경』에 이르기를 “일향취적(一向趣寂)의 성문 종성인 보특가라는 비록 모든 부처님께서 시설한 갖가지의 용맹한 가행방편(加行方便)의 교화와 인도함[化導]을 입었다 할지라도 마침내 도량에 앉아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할 수 없다”라고 하였으며, 심밀해탈도 또한 이 설과 같다.
『십륜경』 제9권에도 “삼승은 각각 결정코 차별한다”고 설하고 있다.
이와 같은 등의 경문은 모두가 소승이 아니라, 곧 대승 속에 삼승의 차별을 허락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까닭으로 각각 삼승의 대승교라고 한다.
두 번째 뒤의 논사72)가 인용하는 저 일승의 대승교라고 하는 것은 『열반경』 33권에 이르기를 “일체 중생에게는 동일하게 불성이 있으니 모두 동일승(同一乘), 동일 해탈, 하나의 인(因)과 하나의 과(果), 동일한 감로(甘露)로서 일체는 마땅히 상락아정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을 일미(一味)라고 이름한다”라고 하였으며, 또 『법화』의 제1권에서 말하였다.

시방 불토 가운데
오직 일승법만이 있으니
둘도 없고 또한 셋도 없어
부처님 방편의 설을 제거한다.

또 이르기를 “처음엔 삼승으로써 중생을 인도하고 그런 연후에 다만 대승으로써 이것을 제도한다”라고 하였다.
또 제3권에 이르기를 “내가 멸도한 뒤에 다시 제자가 있어 이 경을 듣지 못하고 보살이 행하는 것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해서 스스로 얻은 공덕에 대하여 멸도의 생각을 내어서 열반에 들어간다 할지라도 내가 다른 국토에서 부처가 되어 다시 다른 이름을 가졌을 때에 이 사람은 비록 멸도의 생각을 내어서 열반에 들었다 할지라도 저 국토에서는 부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대지도론』 제95권에도 또한 이 설과 같은 내용이 있다.
또 『법화론』에 4성문(聲聞) 가운데에 퇴보리심(退菩提心)과 응화(應化), 이 두 성문은 부처님이 수기를 주셨고 결정(決定)과 증상만(增上慢), 이 둘은 근기가 미숙하기 때문에 보살이 수기를 주어 방편으로 발심하게 한다. 해석하여 이르기를 “이미 다만 미숙하다고만 말하고 무근(無根)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결정코 마땅히 불보리를 얻을 수 있음을 안다”고 하였고, 또다시 이르기를 “방편으로 발심하게 한다”고 말했으니, 이것이 곧 보리심을 낸 것이다.
또 『입능가』의 제2권ㆍ제4권ㆍ제7권에 똑같이 “이승에게는 진실로 열반이 없고 다만 이 삼매의 힘으로 머무르며, 뒤에 반드시 마땅히 무상보리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법화론』에 이르기를 “제4의 사람은 방편으로써 열반의 성(城)에 들게 하기 때문이다. 열반의 성이란 모든 선삼매(禪三昧)의 성이다. 저 성을 지나서 대열반의 성에 들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능가』의 “삼매의 낙(樂)에 머무른다”고 한 것과 같다. 분단을 여의었기 때문에 거짓 열반이라고 말하나 실제로는 그 변역(變易)의 몸이 있다. 그러므로 정토 가운데서 보살도를 행한다.
『승만경』에 이르기를 “모든 이승이 열반을 얻는다고 말한 것은 부처님의 방편이다. 오직 여래만이 반열반을 얻는다”고 하였으며, 또 이 경과 『무상의경(無上依經)』ㆍ『보성론(寶性論)』ㆍ『불성론(佛性論)』에서는 모두 입멸(入滅)의 이승은 삼계 밖에서 변역신(變易身)을 받는다”고 설한다.
또 『밀엄경(密嚴經)』에 “이승은 반드시 꺼진 재처럼 끊어져 영원히 멸함[灰斷永滅]이 없다”라고 말했다.
이와 같은 여러 경문들도 또한 대승으로서 삼승에 결정코 차별이 있다는 것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일승교라 이름한다.
여섯 번째로 권실(權實)을 결정한다는 것은, 혹은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일승은 권(權)이고 삼승은 실(實)이다”라고 하면서 『심밀경(深密經)』의 제1시(第一時)의 교는 오직 성문승만을 발취(發趣)하는 자를 위해서 총괄적으로 성불할 수 없다고 설하고, 제2시(第二時)의 교는 오직 대승만을 발취하여 닦는 자를 위해서 곧 총괄적으로 성불하지 못함이 없다고 설하므로 이 둘은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함이 있기 때문에 모두가 요의가 아니며, 제3시(第三時)의 교는 종성(種性)이 있는 사람은 성불하고 종성이 없는 사람은 성불하지 못한다고 말해야 요의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한 것만 같지 못하다.
『법화』에서는 이미 제2시의 교(敎)에 해당함으로 이는 곧 밀의의 권설이다. 이런 까닭에 『승만경』에서는 일승으로써 방편설을 삼는다. 그러므로 이실(理實)에는 다만 부정종성(不定種性)만을 기준으로 하여 일승이라고 설한다. 『섭론』과 『장엄론』과 『현양론(顯揚論)』 등은 모두 이 해석과 같다.
또 『법화』 제3권에서 “멸도의 생각을 내어서 열반에 들어간다”라고 한 것 등은 『유가』 81권에 의하면 모두가 이 변화의 성문이 입멸을 시현73)한 것이다. 『능가』와 『밀엄』은 모두 이 회석(會釋)과 같다.
『무상의경』과 『보성론』 등은 똑같이 이 결정되지 못한 이승의 보리에 향하는 사람은 증수(增壽)의 변역으로서 입멸하여 다시 일어나 몸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유가』에 본(本)과 전(轉) 2식(識)의 성취와 불성취의 네 구절에 대하여 말한 내용 가운데 제4의, 함께 성취하지 못하는 자를 성문ㆍ독각이라 하고, 무여의열반계(無餘依涅槃界)에 들어가는 때라고 한 것이다. 또 80권에 이르기를 “무여의열반계에는 오직 청정한 진여법계만 있다”고 하였으니, 이러한 여러 경문에 의거해 보면 열반에 들어가고 나서는 몸과 지혜는 다 함께 소멸되고 근(根)과 식(識)은 영원히 없어지거늘 어찌 변역이 있어서 수행하여 성불하겠는가.
이러한 까닭으로 오직 일승만 있다고 말하는 것은 지극한 요의가 아니다. 『심밀경』에서는 제3시에 널리 모든 승(乘)에 발취하는 자를 위해서 설한 것을 요의라고 이름한다. 그러므로 삼승은 이치를 다한 실교(實敎)라고 할 것이다. 또 『심밀』의 제2권과 제4권에 모두 “일승은 곧 밀의의 설”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이것이 방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혹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일승은 실(實)이고 삼승은 권(權)”이라고 한다.
이를테면 『법화경』은 오직 일불승(一佛乘)이고, 『심밀경』의 삼승 뒤에 설한 정성이승(定性二乘)의 멸(滅)도 또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방편으로 셋이라 말하지만 실제로는 오직 하나일 뿐이다.
그러므로 만일 “『법화』는 제2시의 교이고 결정되지 않은 이승을 인도하기 때문에 일체 중생이 모두 다 성불한다고 설하지만 오히려 아직 정성(定性)이 이루어지지 못함을 설하지 않았기 때문에 요(了)는 아니다”라고 말한다. 만약 그렇다면 『법화』의 때는 오히려 아직 정성이승이 있다고 설하지 아니하였는데 무엇에 근거해서 저 논에서는 네 가지 성문을 정립하였는가.
저 정성의 말은 어느 곳으로부터 얻은 것인가. 만일 정성이 있다면 어찌 다 이룰 수 있겠는가. 만일 다 성불한다고 인정하면 어찌 정성이라고 이름하겠는가. 그러므로 정성이라는 말은 앞의 『심밀』에서 말한 것을 거듭 들고, 뒤에 『법화』에 이르러서는 모두 다 성불한다고 밝힌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저 논은 이 경문에 따라 앞의 권설(權說)을 회통하여 뒤의 실교에 돌아가게 함이다.
그러므로 『법화』는 『심밀』의 뒤에 설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묘지』의 3교에도 일승은 삼승의 뒤에 있고 『양론(梁論)』의 정법을 성립하는 세 가지 가운데에도 또한 일승은 뒤에 있으니, 아울러 이 설과 같다. 『법화』에 “멸도의 생각을 내어서 열반에 들어간다”고 한 것 등을 해석하여 변화시현(變化示現)의 멸이라고 한 것은 지극히 교(敎)와 이(理)에 어긋난다.
교에 어긋난다는 것은 만일 이것이 변화의 성문이라면 곧 실로 이 모든 불보살이 어찌 스스로 보인 바 열반에 미혹되어 멸도의 생각을 내겠는가. 만일 이러한 해석을 한다면 그 사람은 아직 경을 읽어보지 못한 사람이다. 이(理)에 어긋난다고 한 것은 만일 열반에 들어가는 것이 영원히 단멸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모든 불보살이 교화해야 할 대상[所化]의 앞에서 열반을 시현할 때 만약 저 교화해야 할 대상의 부정종성이 곧 용맹한 자라면 생사를 두려워하지 아니함으로써 능히 뛰어난 행을 닦지만, 만일 어떤 종류의 성품이 겁약(怯弱)한 자라면 생사를 두려워하여 불보살에게 배워서 먼저 열반에 든 뒤에 보살도를 행하고자 한다면 그대 종파[宗]의 입멸은 이미 일어남이 없는 것이거늘 어찌 저 한 무리의 중생을 그르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곧 중생을 그르치는 것이리니 어찌 인도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또 이 경문이 원래부터 서로 간섭하지 아니함이겠는가.
또 아직 『승만경』의 뜻을 알지 못하고 문득 일승을 결단해서 방편이라고 하겠는가. 저 경전에 이르기를 “만일 여래가 저들의 하고자 하는 것을 따라서 방편을 설하더라도[이승을 말함] 이는 곧 일승으로서 이승이 없고, 이승은 일승에 들어가는 것이다. 일승이라는 것은 제일의승(第一義乘)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저 경전 가운데 널리 이승을 깨뜨리고 말하기를 “열반이 없다”고 했다. 또 이르되 “이 경은 일체의 의심을 끊고 요의를 결정하여 일승도에 들어가는 것이다”라고 하니, 어찌 일승을 방편이라고 말하겠는가.
『해심밀경』에서 “일승은 밀의(密意)이다”라고 말한 것은 곧 아직 『법화』를 설하기 전이기 때문에 그러한 말을 하였다. 그러나 뒤에 『법화』를 설할 때에 미쳐서는 앞에서 말한 삼승은 모두가 방편이라고 회통하였다. 『유가』에서의 전(轉)과 본(本)의 구멸(俱滅)과 『현양(顯揚)』의 6의(義)에서 일승을 설한 것과 『섭론』의 10의(義)에서 일승을 설한 것은 모두 『심밀』과 같이 회통하여 해석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여러 논은 저 경을 따라 지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법화론』에 “결정의 이승도 또한 수기를 받는다”라고 설한 것 등도 이 경을 따라서 지었기 때문이다. 만일 일승을 믿지 아니하여 권(權)을 지키고 실을 어긴다면 매우 불쌍히 여겨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백유경』 제2권에 이르기를 “옛날에 한 마을이 있었는데 왕성(王城)과의 거리가 5유순(由旬)이었다. 마을 안에 감미로운 물이 있었는데 왕은 마을 사람들에게 명령하여 날마다 그 좋은 물을 길어오게 했다. 마을 사람들은 피곤하고 괴로워서 모두 이 마을을 떠나 멀리 가려고 하였다. 그때 그 마을의 촌주(村主)는 모든 사람들에게 타일러 말하기를 ‘너희들은 떠나지 말라. 내가 마땅히 너희들을 위해서 왕에게 아뢰어 5유순의 거리를 고쳐서 2유순으로 만들어 달라고 하여 너희들로 하여금 가까워지게 하여 오고감에 피로함이 없게 하리라’ 하고는 곧바로 가서 왕에게 아뢰었다. 왕은 이 거리를 고쳐서 3유순으로 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나서 매우 기뻐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 거리는 아직도 본래대로 5유순이다.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고 하였다. 비록 이 말을 들었으나 왕의 말을 믿기 때문에 끝내 기꺼이 버리고 떠나지 않았다. 세간 사람들도 또한 이와 같다. 바른 법을 수행하여 5도(道)를 건너서 열반의 성을 향함에 있어서 마음에 게으름을 내어서 문득 버리거나 여의고자 하여 갑자기 생사에 매여서 다시 나아가지 못한다. 여래의 법왕(法王)도 큰 방편이 있어 일승의 법에서 분별하여 삼승이라고 설함에 소승의 사람은 그것을 듣고 기뻐하면서 수행하고 싶다 하여 선(善)을 닦고 덕(德)에 나아가서 생사의 바다를 건너기를 구한다. 뒤에 사람들이 삼승은 없기 때문에 이것이 일승이라고 설함을 듣고도 부처님의 말씀을 믿기 때문에 마침내 버릴 수 없는 것이 저 마을 사람과 같다고 하였으니 이 또한 그와 같도다”라고 하였다.
해석하여 이르되 “이 경은 곧 금구(金口)의 훌륭한 판단으로써 권실(權實)이 드러난 것이다. 모든 설을 쉬어야 할 뿐이다.
일곱 번째로 개합(開合)을 나타낸다는 것은 이 삼승과 일승에 각각 두 가지가 있다. 삼승의 두 가지 중에 하나는 이시(異時)의 삼승이니, 『심밀경』의 초시(初時)는 오직 소승뿐이고 제2시는 오직 대승뿐인 것과 같다. 또 하나는 동시(同時)의 삼승이니, 제3시에서 널리 일체승(一切乘)에 발취(發趣)하는 사람을 위한다는 것 등과 같다. 이 교에서는 일승의 모습은 숨어버리고 삼승의 모습만 드러나므로, 드러난 데에 나아가 총괄적으로 삼승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일승의 두 가지 중에 하나는 다른 것을 깨뜨리고 하나만을 밝혔으니 마치 『법화경』의 이승의 실멸(實滅)을 깨뜨린 것과 『열반경』의 무불성(無佛性)을 깨뜨린 것과 같다. 이 두 가지 모두가 권(權)에 대하여 회파(會破)하고 비로소 일승만을 설한다. 다른 하나는 직체현일(直體顯一)이니, 『화엄경』에서의 이승을 대하지 아니함과 같다. 깨뜨릴 것이 없기 때문에 큰 보살들을 위하여 법계 성불의 의(儀)를 바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처음 『화엄』을 설할 때는 권을 회통할 것이 없었고, 마지막으로 『열반경』을 설할 때는 앞의 모든 권을 회통하였다. 이것이 곧 권을 다하지 않는다면 실을 나타낼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니, 이것이 모두 일승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또다시 열면 각각 세 가지가 있으니, 처음 삼승의 삼이란 첫째 시별종동(始別終同)의 삼이니, 이를테면 처음엔 인(因)을 기준으로 하여 4제(諦)ㆍ연생(緣生)ㆍ6도(度) 등의 다른 것을 닦고 끝에 과(果)를 얻는데 나아가나니, 삼승의 사람은 몸[身]과 지혜[智]를 한꺼번에 멸한다. 이는 마치 『구사(俱舍)』 등에서 설한 것과 같으니, 이것은 초시의 소승교를 기준으로 하여 말한 것이다.
둘째는 시동종별(始同終別)의 삼이니, 이를테면 반야를 같이 듣고 무성(無性)을 같이 관한 삼승의 사람이 각각 자과(自果)를 얻는 것으로 앞에서 인용한 설과 같다. 만약 성제(聖諦)ㆍ연생ㆍ6도의 행이 다른 것에 의거하면 또한 시종각별이라 이름할 수도 있다. 이것은 제2시ㆍ제3시 교의 설이다.
셋째는 근이원동(近異遠同)의 삼이니, 이를테면 『법화』 등에서 처음엔 삼승의 방편으로써 유인하고 나중엔 대승으로써 함께 득도하게 하는 것이다 .일승의 삼이라는 것은, 첫째 존삼(存三)의 일로서 『심밀경』 등에서 설한 것과 같다. 둘째는 차삼(遮三)의 일로서 『법화』 등에서와 같고, 셋째 표체(表體)의 일(一)이니 『화엄』 등에서와 같다.
이러한 까닭으로 통틀어 말하면 4구(句)가 된다. 첫째 혹 오직 삼뿐이고 일이 없으니 『구사』 등에서와 같고, 둘째 혹 오직 일뿐이고 삼이 없으니 『화엄』 등에서와 같으며, 셋째 혹 또한 일이요 또한 삼이니 여기에는 두 가지 지위[二位]가 있다. 하나는 삼은 실(實)이고 일은 권(權)이니 『심밀』 등에서와 같고, 또 다른 하나는 일은 실이고 삼은 권이니 『법화』 등에서와 같다. 넷째 혹은 일도 아니고 삼도 아니니, 이치를 기준으로 하여 말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대반야』 가운데 사리자가 선현(善現)에게 묻기를 “여래가 모든 천자에게 수기를 주는 것은 삼승 가운데 어떤 승이 수기를 받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선현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법상(法相) 가운데에서는 일도 없고 삼도 없다. 어찌하여 묻기를 어떤 승이 수기를 받느냐고 하는가”라고 하였다.
이러한 까닭으로 일승과 삼승에는 존(存)도 있고 민(泯)도 있어서 여러 설[諸說]이 같지 않다. 혹은 오직 이승만을 파한다는 말을 듣고 곧 오직 부정종성(不定種性)만을 기준으로 했다고 말하고, 혹은 이도 없고 삼도 없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곧 대승의 실교도 또한 깨뜨릴 수 있다고 말하며, 혹은 대승은 깨어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곧 대승권교도 또한 존(存)한다고 말한다.
이제 해석하건데 2위(位)가 있으니, 하나는 일[事]을 기준으로 하여 이승의 실멸(實滅)을 깨뜨리는 것이요, 또 하나는 교를 기준으로 하여 대승의 권교를 회통하는 것이다. 대승의 권교에는 입적(入寂)의 이승은 성불하지 못한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승을 깊이 깨뜨리면 곧 삼(三)을 깨뜨리는 것이 된다. 이런 까닭에 이(二)를 깨뜨리는 것과 삼을 깨뜨리는 것은 다 같이 서로 어기지 않는다.
여덟 번째로 교의 전후란 이제 여래의 일대에 걸쳐 말씀하신 것을 분별하건대 시(時)를 기준으로 하여 교를 나타내는 데에 큰 예로 넷이 있으니, 첫째는 본말차별문(本末差別門)이요, 둘째는 의본기말문(依本起末門)이요, 셋째는 섭말귀본문(攝末歸本門)이요, 넷째는 본말무애문(本末無礙門)이다.
처음 가운데 본말동시(本末同時)와 시종일류(始終一類)로서 각각 다른 말[異說]이 없다. 그러나 3위(位)가 있으니, 첫째는 만일 소승 가운데서는 곧 최초에 저 교진나(憍陳那) 등을 제도하였고, 최후에 수발다라(須跋陀羅)를 제도하고 중간에 또다시 오직 소승만을 설하여 소승 근기[小機]만을 이익되게 하였으니, 네 가지 『아함경』과 5부의 율(律)과 『유교경』 등에서 설한 것과 같다. 둘째는 만일 삼승을 기준으로 하면 곧 처음부터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모두 삼승을 설하여 세 가지 근기[三機]를 통틀어 이익되게 하니, 앞에서 인용한 『역사경(力士經)』과 『대반야』 등 모든 대승경전과 같다. 그 가운데 비록 권실이 같지 아니함이 있다 할지라도 모두 삼승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셋째는 만일 일승을 기준으로 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큰 보살을 위해서 일승만을 설했으니, 최초에 『화엄』 등을 설한 것과 같다. 그 속에는 이승에도 통하지 않고 또 9세(世)를 섭수하여 전후를 모두 포함하며 이러한 까닭에 지극하여 다시 이설(異說)이 없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종류는 이미 이 세상에 근기가 정해진 사람에 의지해서 설하여졌으니, 이것은 곧 모든 교가 서로 바라봄[諸敎相望]에 각각 시종(始終)을 통틀어 마침내 전후가 없다.
둘째 의본기말문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네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처음에 큰 보살을 위하여 대승을 설했고, 다음에 중승(中乘)을 설하고, 그 다음에 소승을 설하고, 뒤에 인천(人天)을 설한 것을 말한다.
이 경의 「성기품」에 이르되 “비유하면 해가 뜰 때에 먼저 모든 큰 산왕을 비추고, 다음에 모든 큰 산을 비추고, 다음에 금강보산(金剛寶山)을 비추고 그런 연후에 널리 일체 대지를 비추는 것과 같이, 여래ㆍ응공ㆍ등정각도 또한 이와 같이 무량무변한 법계의 지혜 일륜(日輪)을 성취하여 항상 한량없고 걸림이 없는 지혜 광명을 놓아서 먼저 보살마하살 등의 모든 큰 산왕을 비추고, 다음에 연각을 비추고, 다음에 성문을 비추고, 다음에 결정된 선근의 중생을 비추어 응함에 따라서 교화를 받게 하고, 그런 연후에 일체 중생과 나아가 사정(邪定)까지 모두 비추기 때문에 미래세에 요익이 될 인연을 짓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또 이 품 중에 “삼천세계가 처음 이루어질 때에 먼저 색계의 모든 하늘 궁전을 이루고, 다음에 욕계의 모든 하늘 궁전을 이루며, 다음에 사람의 처소와 나머지 중생들이 거주할 모든 처소를 이루는 것과 같이 여래ㆍ응공ㆍ등정각도 또한 이와 같아서 먼저 보살의 모든 행과 지혜를 일으키고, 다음에 연각ㆍ성문 및 나머지 중생들의 모든 선근을 일으킨다”고 말한 것과 같다
이러한 경문들에 의지하여 부처님께서 초시(初時)에 대(大)를 설하시고 뒤에 점차로 소(小)를 설하셨음을 밝혔다. 법을 기준으로 해서 근본에 의지하여 지말을 일으킴을 밝힌 것이요, 근기를 기준으로 한 것은 아니다. 먼저 대(大)를 배우고 뒤에 소(小)를 배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문】 법은 왜 다르지 않는가?
【답】 소승의 법은 결정코 대승으로부터 나온 것이므로 『문수문경(文殊問經)』에 이르기를 “십팔(十八)과 근본이 이(二)라는 것은 모두 대승으로부터 나온 것이다”라고 말했다. 『보초삼매(普超三昧)』와 『입대승론(入大乘論)』의 뜻도 모두 이와 같다.
셋째 섭말귀본문이라는 것은 『무량의경』에 의하면 초시(初時)에는 소승을 설하고, 다음에 중승(中乘)을 설하고, 후시(後時)에 대승을 설했다. 『해심밀경』에 의거해 보면 초시에는 오직 소승뿐이고 제2시는 오직 대승뿐이며 제3시는 삼승을 모두 갖추었다. 『묘지경(妙智經)』에 의하면 초시에는 오직 소승뿐이고, 다음에는 삼승을 갖추어 말하고, 맨 나중에는 오직 일승뿐이다. 이것이 곧 『무량의경』에서 대(大)를 합하여 소(小)를 열고, 『심밀』 등에서는 소를 합하여 대를 열었으니, 이것을 두고 대승에서 권실을 연다고 말한다.
그러나 『심밀』과 『묘지』는 이미 각각 성교(聖敎)이니, 하나를 취하고 하나를 버리지 못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이 두 경을 합하면 모두 네 가지 문이 되니, 첫째는 초시 소승에서는 두 경이 똑같이 설하였고, 제2시에는 오직 대승뿐인데 이는 오직 『심밀』에서만 설했다. 제3시에는 삼승을 갖추었으니, 이것은 『심밀』의 제3과 『묘지』의 제2이다. 제4시는 오직 일승뿐인데 『묘지』에서만 제3시를 설했다. 이러한 까닭에 마땅히 『묘지경』은 『심밀』의 뒤에 설하여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만일 『묘지경』은 이 땅[此土:중국]에서는 아직도 번역되지 않았다 하여 믿지 않는다면 저 『심밀경』은 이미 제3시의 교에 해당된다. 그러나 정성이승(定性二乘)과 무성유정(無性有情)은 모두 성불하지 못한다고 인정하고 삼승을 구족한 것을 일체승(一切乘)이라고 이름한다면, 이것이 곧 『법화』와 『열반』은 이미 『심밀』 뒤에 설했고 정성이승과 무성천제(無性闡提)도 모두 성불하므로 마땅히 이 제4시를 일승교라 이름하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묘지경』과 일치하여 의심할 것이 없다. 또 처음의 소승교는 『법화』 등에 의지해 보면 부처님 성도 후 삼칠 일(三七日:21일) 동안 설한 것이다. 진제 삼장(眞諦三藏)의 기록74)에 의하면 “부처님이 성도하신 지 7년 뒤에 여러 부(部)의 반야를 설했다” 하니 이것이 제2시의 교이고, 또 이르되 “38년 뒤에 『해절경(解節經)』을 설했다”고 하니 제3시의 교에 해당된다. 이제 『법화경』과 『무량의경』에 의하면 40년 뒤에 『법화』 등을 설했다. 그러므로 이것이 『심밀』의 뒤에 설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진제의 이 말은 반드시 성교(聖敎)가 있으니, 만일 성교가 없으면 어찌 스스로 연수(年數)를 말할 수 있겠는가.
만약 이것을 믿지 못한다면 곧 『열반경』이 가장 나중에 설해진 것이라는 말은 의심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4시(時)는 모두 앞은 권(權)이고 뒤는 실(實)이라 하여 뒤를 가지고 앞을 회통할 때 『법화』와 『열반』에 『심밀』의 삼승을 회통하여 구경의 일승에 돌아가게 해야 그 뜻이 결정된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이 넷은 얕은 데서부터 깊은 곳에 이르기까지 섭말귀본의 점차를 밝힌 것이다.
넷째 본말무애문(本末無礙門)이란 것은 말하자면 처음에 산왕을 비추는 본교(本敎)를 든 것은 본이 아니면 말을 일으킬 수 없음을 밝혔고, 뒤에 큰 바다에 돌아가는 이류(異流)를 나타내는 것은 말을 다하지 아니하면 본에 돌아갈 수 없음을 밝힌 것이다. 이것이 곧 본말(本末)이 서로 비추어 주고 빼앗아 서로 도우니 비로소 중생을 섭수하는 선교(善巧)가 된다.
이러한 까닭에 통틀어 논하면 모두 5위가 있다. 첫째는 근본일승교이니, 이것은 『화엄』에서 설한 것과 같다. 둘째는 밀의(密意)의 소승교요, 셋째는 밀의의 대승교이며, 넷째는 현료(顯了)의 삼승교이다. 위의 셋은 『심밀경』에서 설한 것과 같다. 다섯째 파이(破異)의 일승교로서 『법화』와 『열반」 등에서 설한 것과 같다. 이 위의 4문(門)은 이미 원통무애하니 이는 곧 전후가 무전후에 다름 아니며 무전후가 전후에 다름 아니어서 모두 장애가 없는 것이니, 이에 준거하여 생각해 보라.
아홉 번째는 뜻으로써 교를 나눈 것이다. 교의 종류가 다섯이 있으니, 이것은 뜻에 나아가 나눈 것으로 시(時)와 사(事)를 기준으로 한 것이 아니다. 첫째는 소승교요, 둘째는 대승시교(大乘始敎)이며, 셋째는 종교(終敎)요, 넷째는 돈교이며, 다섯째는 원교이다.
첫째 소승교는 알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시교는 『심밀경』 가운데 제2시와 제3시의 교에서 똑같이 정성이승은 모두 성불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에 지금 이것을 합하여 총괄하여 일교(一敎)라 하였다. 이것은 이미 아직 대승의 법리를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립하여 대승시교라 한다.
셋째 종교란 것은 정성이승과 무성천제(無性闡提)는 모두 마땅히 성불할 수 있다고 하여 비로소 대승의 지극한 말을 다했기 때문에 정립하여 종교라고 하였다. 그러나 위의 두 교는 아울러 지위의 점차에 의지하여 닦아 이루므로 다함께 점교라 이름한다.
넷째 돈교란 것은 다만 한 생각도 생기지 아니함을 이름하여 부처라 하고, 지위의 점차에 의지하여 설하지 않기 때문에 정립하여 돈(頓)이라고 한다. 『사익(思益)』에 말한 것과 같아서 “모든 법의 정성(正性)을 얻은 사람은 한 지(地)로부터 다른 한 지에 이르지 아니한다”고 하였으며, 『능가』에 이르되 “초지가 곧 8지이며 나아가 있는 것이 없거니 어찌 차제가 있으리오” 한 것 등과 또 아래의 지품(地品) 중에 “10지는 오히려 공중의 새의 자취와 같거니 어찌 차별이 있겠는가”라고 하니, 갖추어 말하자면 『제법무행경』 등에서 설한 것과 같다.
다섯째 원교란 것은 일위(一位)는 곧 일체위(一切位)이며, 일체위는 곧 일위라고 밝히니, 이런 까닭으로 10신(信)의 만심(滿心)에 곧 5위를 섭수하고 정각을 이루는 것 등이다. 보현의 법계에 의하면 제망중중(諸網重重)하고 주반구족(主伴具足)하기 때문에 원교라고 이름한다. 이 『경』 등에서 설한 것과 같다.
만약 설한 바 법상 등을 기준으로 하면 처음 소승의 법상은 75가지 법이 있는데 식은 오직 여섯 가지만 있어서 설한 바 법원(法原)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많은 논쟁을 일으키나니, 소승 여러 부의 경론에서 설한 것과 같다.
두 번째는 시교 가운데 널리 법상을 설하고 진성(眞性)은 조금만 설한다. 정립한 백 법(百法)은 결택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서로 위배되거나 다투는 일이 적다. 설한 바 8식(識)은 오직 생멸뿐이고 법상의 명수(名數)는 대부분 소승과 같다. 본래 구경 현묘의 설이 아니니, 『유가』와 『잡집(雜集)』 등에서 설한 것과 같다.
세 번째 종교에서는 법상을 조금 설하고 진성을 널리 설하니 사(事)를 회통하여 이(理)에 따르기 때문이다. 정립한 8식은 여래장에 통하며 연을 따라서 성립하여 생멸과 불생멸을 갖추었다. 또 백 법은 논하지 않았기 때문에 명수는 넓지 않고 또 소승과 같지도 않으며 많은 문[多門]도 없으니 『능가』 등의 경전과 『보성(寶性)』 등의 논에서 설한 것과 같다.
네 번째 돈교 가운데서는 모두 법상을 설하지 않았고 오직 진성만 밝혔으며, 또한 8식 차별의 모습이 없고 모든 존재하는 것은 오직 이 망상이며, 모든 법이 진실하여 오직 말을 끊고 교를 꾸짖어 여의기를 권하고 모습을 헐며 마음을 없애니, 마음을 일으키면 곧 망령된 것이요, 마음을 일으키지 아니하면 곧 부처이다. 또한 부처도 없고 부처 아님도 없으며, 생(生)도 없고 생 아님도 없으니 정명(淨名)이 잠자코 머물러 있으면서 둘이 아님을 나타내 보인 것 등이 바로 그 뜻이다.
다섯째 원교 가운데에 설한 오직 이 무진법계(無盡法界)에는 성해(性海)는 원융하며 연기(緣起)는 걸림이 없어서 상즉상입(相卽相入)함이 인다라망(因陀羅網)이 거듭거듭 끝이 없고 미세하면서도 서로 포용하여 주반(主伴)이 다함이 없는 것과 같다. 십십법문(十十法門)은 각각 법계에 맞도록 갖추어 아래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그런데 이 5교에는 열고 합함이 있으며 또한 5중(重)이 있다. 첫째는 혹은 총괄하여 하나라고 하나니, 이를테면 오직 여래의 일대선교(一大善巧)로써 중생을 섭수하는 방편일 뿐이다.
둘째는 혹은 열어서 둘이 되기도 하니, 이를테면 일승과 삼승의 교이다. 앞의 여러 교 가운데 비록 셋은 존재하고 하나는 없어진 것이 같지 않다고 하더라도 모두가 삼승을 통하여 취입(趣入)한 까닭에 삼승교라고 이름한다. 나중 하나는 다만 본법을 나타내서 이승에 통하지 않기 때문에 오직 하나일뿐이다. 곧 『지론』에서는 공교(共敎)와 불공교(不共敎)라고 이름한다. 이것도 또한 위의 인사(印師) 등이 세운 두 교와 같다.
셋째 혹은 나누어 셋이라고 하니, 소승과 삼승과 일승교를 말하는 것이다. 『지론』에서 이미 이 경을 이승과 더불어 함께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공이라고 이름하니 이것은 곧 일승이다. 『대품』 등은 삼승을 통하여 함께 관해서 이익을 얻는다고 하기 때문에 공교라고 이름하는데, 이것은 곧 삼승이다. 뜻에 따라 보면 네 가지 『아함경』에서는 이미 보살과 같지 아니하면 또한 불공이라고 이름하였으니, 이것은 곧 소승이다.
이 3위(位)에 의해서 『양섭론(梁攝論)』 제8권에 이르기를 “여래가 바른 법을 성립함에 있어서 세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소승을 정립한 것이요, 둘째는 대승을 정립한 것이며[어떤 본에는 ‘삼승’자(字)로 되어 있다], 셋째는 일승을 정립한 것이다. 이 가운데서 세 번째 것이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선성립(善成立)이라고 한다”고 하니, 이것도 또한 위의 『묘지경』에서 설한 것과 같다. 또 진제 삼장의 『부이집소(部異執疏)』 제2권에도 또한 여기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네 번째 혹은 나누어 넷을 만드니,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 번째는 위의 공교 가운데 존삼민이(存三泯二)를 기준으로 해서 두 교를 열었기 때문에 네 가지가 되니, 첫째는 별교소승이요, 둘째는 동교삼승이니 『심밀』 등에서와 같으며, 셋째는 동교일승이니 『법화』 등에서와 같고, 넷째는 별교일승이니 『화엄』 등에서와 같다. 두 번째는 역위(歷位)와 무위(無位)를 기준으로 하여 점ㆍ돈의 두 교를 열었기 때문에 네 가지가 된다. 첫째는 소승교요, 둘째는 점교이며, 셋째는 돈교요, 넷째는 원교이다.
다섯 번째 혹은 나누어 다섯을 만들었으니, 위의 점교에서 다시 시종(始終)의 두 교를 나누었다. 위의 다섯 가지 교는 국집하여 경을 판단한 것이 아니라 다만 여러 갈래[多分]로서 논했을 뿐이다. 위에서 가리킨 것 같은 것은 모든 경론에 통하니, 아울러 알 수 있을 것이다.
열 번째 이치로써 종(宗)을 열면 종에는 곧 열 가지가 있다. 첫째는 법아구유종(法我俱有宗)이니, 인천위(人天位)와 소승 가운데 독자부(犢子部) 등을 말한다. 그들이 3취법(聚法)을 세웠으니, 첫째 유위법(有爲法)이요, 둘째 무위법(無爲法)이며, 셋째 비이취(非二聚)이다. 처음 둘은 곧 법이요, 뒤의 하나는 나[我]이다. 또 5법장(法藏)을 세우니 첫째는 과거요, 둘째는 미래이며, 셋째는 현재요 넷째는 무위이며, 다섯째는 불가설이다. 이것은 곧 나이다. 이는 유위라고도 또는 무위라고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법유아무종(法有我無宗)이니, 살바다(薩婆多) 등을 말한다. 그들은 말하기를 “모든 법은 두 가지에 섭수된 것이니, 하나는 이름[名]이고 다른 하나는 물질[色]이다. 혹은 네 가지에 섭수된 것이니 삼세와 무위이다. 혹은 5법(法)을 세우기도 하니, 첫째는 마음[心]이요 둘째는 심소(心所)이며, 셋째는 색(色)이요, 넷째는 불상응(不相應)이며, 다섯째는 무위이다”라고 하니, 이것은 곧 다만 법만 있고 따로 나란 것은 없다.
셋째는 법무거래종(法無去來宗)이니, 대중부(大衆部) 등을 말한다. 그들은 말하기를 “현재와 무위가 있으니 과거와 미래의 법은 체(體)와 용(用)이 모두 없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넷째는 현통가실종(現通假實宗)이니, 설가부(說假部) 등을 말한다. 그들은 말하기를 “과거ㆍ미래의 2세(世)는 없고, 현재법 가운데서 온(蘊)은 진실하지만 계(界)와 처(處)는 가(假)라고 하여 응함에 따라서 모든 법의 가실(假實)은 일정하지 않다”라고 한다. 『성실론』과 경부(經部)의 별사(別師)도 또한 이러한 부류와 같다.
다섯째는 속망진실종(俗妄眞實宗)이니, 설출세부(說出世部) 등을 말한다. 그들은 말하기를 “세속의 법은 가(假)이니 허망하기 때문이요, 출세간의 법은 실(實)이니 허망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여섯째는 제법단명종(諸法但名宗)이니, 일설부(一說部) 등을 말한다. 일체의 아(我)와 법은 오직 가명만 있고 도무지 실체는 없다고 하니, 이것은 또 초교의 처음과 통한다.
일곱째는 일체개공종(一切皆空宗)이니, 대승초교(大乘初敎)를 말한다. 일체법은 모두 성품이 공하여 정표(情表)를 뛰어넘어 분별할 것이 없다고 설하기 때문이다. 『반야』 등의 경전에서 분별하는 것과 같다.
여덟째는 진덕불공종(眞德不空宗)이니, 종교의 여러 경전에서 설한 것을 말한다. 일체의 법은 오직 이 진여이니 여래장 가운데 실덕(實德)이 섭수되었기 때문에 진체(眞體)가 공하지 않아 성덕(性德)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아홉째는 상상구절종(相想俱絶宗)이니, 돈교 가운데 절언(絕言)으로 나타냄을 말한다. 말을 여읜 이치는 이사(理事)가 함께 없어져 평등하며 생각을 여의기 때문이다.
열째는 원명구덕종(圓明具德宗)이니 별교일승 같은 것을 말한다. 주반구족하여 끝없이 자재하게 나타내는 법문이다.
이상 분교개종(分敎開宗)은 대충 개론만 말했다. 자세히 교(敎)와 이(理)를 인용하여 의상(義相)을 갖추어 밝히는 것은 『별기』75)에서 설명하는 것과 같다.
네 번째로 교소피기(敎所被機)라는 것은 통틀어 10위(位)가 있으니, 그 가운데 앞의 다섯은 그릇이 못 됨[非器]을 가리고 뒤의 다섯은 바로 소위(所爲)를 나타냈다.
앞의 다섯이라는 것은 첫째 진(眞)을 어기므로 그릇이 못 되니, 이를테면 보리심을 내지 않고 출리(出離)를 구하지도 않으며 이 경에만 의지하여 명리만을 구하여 나[我]를 장엄하게 장식하는 사람은 경에서 저의 인연이 아니기 때문에 수행할 그릇이 못 된다. 아래에 이르기를 “명리를 위하여 설법하는 것은 곧 마업(魔業)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깨끗하지 못한 설법은 악도에 떨어진다”라고 한 것 등과 같다.
둘째 바름[正]을 등지므로 그릇이 못 된다. 이를테면 속여서 큰 마음[大心]을 나타내거나 거짓으로 사선(邪善)을 닦아서 가깝게 인천을 감동시키고 마침내 성불하더라도 아비지옥에 떨어져서 다겁(多劫)에 고통을 받을까 염려된다. 제바달다(提婆達多)가 천제의 우두머리가 된 것과 같으며, 또 8대선인(大善人)이 마땅히 불선(不善)을 이룬 것과 같다. 앞의 것은 초시(初時)에 의지한 것임을 알 수 있으나 이것은 종시(終時)에 나아가야 비로소 나타날 것이다. 아래에 이르되 “보리심을 망실하고 여러 가지 선근을 닦더라도 이것은 마업이 된다”라고 하니, 경은 이러한 인연이 아니기 때문에 또한 그릇이 될 수 없다.
셋째 실(實)을 어기므로 그릇이 못 된다. 이를테면 비록 교위(巧僞)는 아니라 할지라도 스스로 아집[執見]에 떨어져서 경문을 취하여 마침내 실정을 벗어난 지극한 가르침을 마음에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그릇이 못 된다. 『지론』에 이르기를 “듣는 것으로 문해(聞解)를 지으려면 듣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또 “소리를 따라서 뜻을 취하면 다섯 가지 과실이 있다”라고 한 것 등과 같다.
이상의 세 가지 위(位)는 모두 평범하고 어리석은 중생의 경계이다. 아래에 이르기를 “이 경은 모든 중생의 손에 들어가지 못하거니와 오직 보살만은 제외된다”라고 하니, 진실로 생각하건대 이 경은 중생에게 유전할 인연이 아니기 때문에 손에 들어가지 못한다.
넷째 협열(狹劣)하므로 그릇이 못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모든 이승(二乘)이 광대한 마음이 없기 때문에 또한 그릇이 못 되는 것이다. 아래 경문에 이르기를 “일체의 성문과 연각은 이 경을 듣지도 않거든 어찌 하물며 받아 가질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며, 또 “사리불 등 5백 성문은 모두 귀머거리나 장님과 같아서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다섯째 권(權)에 집착하므로 그릇이 못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삼승공교(三乘共敎)의 모든 보살 등은 자기 종파 속에 수행이 원만하지 못해서 아직 첫 아승기를 채우지 못하면 또한 그릇이 못 된다. 그러므로 아래 경문에 이르기를 “보살마하살이 비록 무량억(無量億) 나유타(那由他) 겁 동안 6바라밀을 행하여 도품(道品)의 선근을 닦고 익혔으나 아직 이 경을 듣지 못했고, 비록 듣더라도 믿고 받아 가져서 수순하지 못하면 이러한 경우에는 오히려 가명의 보살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문】 『영락경(瓔珞經)』 등에서는 “십천 겁 동안 10신(信)을 수행하여 행이 원만하다”고 하였는데, 무슨 까닭으로 여기에서는 무량억 겁에도 이 경을 믿지 못한다고 하는가?
【답】 저는 다만 항포위(行布位)에서 신(信) 등을 수행하였더라도 이 원융한 보현의 10신에서 하나가 일체를 섭수함에 있어서는 오히려 듣지도 못하고 믿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두 종(宗)이 차별됨을 알아야 한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수행이 이미 그만한 시겁(時劫)을 지나더라도 이 경을 믿지 못하리니 어찌 보살마하살이라고 하겠는가.
그릇이 못 됨을 가리는 것을 마친다.
제2의 소위(所爲)를 나타내는 가운데 다섯 가지를 말하면, 첫째 정위(正爲)라는 것은 이를테면 일승 불공교(不共敎) 가운데 “보기(普幾)보살이 바로 이 경의 소위(所爲)의 그릇[器]이다”라고 하였다. 아래 경문에서 이르기를 “이와 같은 경전은 다만 부사의승(不思議乘)에 오른 보살마하살을 위해서 설한 것이요, 나머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니, 해석하여 말하되 승(乘)이라는 것은 운행하며 옮겨간다는 뜻이다. 만일 별문(別門)에 의지하여 처음으로 운행하여 10신에 이르고 다음에는 옮겨가서 10주에 이르며, 나아가 불과(佛果)에 이르도록 차례로 상승(相乘)해서 피안에 오르는 것을 가사의(可思議)라고 이름한다.
만약 보문(普門)에 의하면 일위(一位)가 곧 일체위인 까닭에 또한 일운(一運)이 곧 일체운이 됨을 부사의승(父思議乘)이라고 이름한다. 이 수레를 타면 10신의 만심(滿心)에서 곧 6위을 얻는 것이 마치 『현수품』 등에서 설한 것과 같다. 또 10주 등의 지위도 모두 이와 같으니, 마치 아래 경문의 모든 회처(會處)에서 설한 것과 같다. 또 선재가 일생 동안 5위 등을 갖춘 것과 같으니, 이는 모두가 보법(普法)으로 서로 거두어들였기 때문이다. 또 「사나품」에 이르기를 “다른 경계에서는 알 것이 아니요, 보현의 방편으로써 들어갈 수 있다”고 하였으며, 또 보현이 대중들을 경계하여 이르기를 “보안의 경계의 청정한 몸을 내가 이제 연설하고자 하노니 그대들은 자세히 들으라”고 말하니, 이와 같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문】 무슨 까닭으로 이 법은 다른 경계에서는 알 것이 아니라고 하였는가?
【답】 노사나부처님께서는 티끌 세계에 두루 계시면서 널리 법계의 모든 중생들의 근기에 응하셨으니, 만일 저 개별의 근기가 스스로의 근기에 칭합한다면 다만 각각 자기가 보는 것만을 보고 자기가 들은 것만을 들으며 다른 사람이 본 것은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들은 것은 듣지 못할 터인데, 이 보현의 근기[機]는 곧 모든 중생이 본 것을 보고 모두가 들은 것을 들으니, 이는 모두 노사나의 능화(能化)의 분제를 다했기 때문에 보안(普眼)의 경계라고 말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마땅히 보(普)ㆍ별(別)의 두 근기는 보ㆍ별의 두 법을 감득하므로 각각 같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둘째 겸위(兼爲)이니, 이를테면 유법(遺法) 가운데 이 다함없는 법을 보고 듣고 믿어 향하여서 금강종(金剛種)을 이루어 마땅히 반드시 이 원융한 보법(普法)을 얻는 것이다. 아래 경문에서 금강을 삼키는 비유와 또 작은 불이 널리 태우는 비유 등과 같다. 아래 경문에서 금강을 삼키는 비유와 또 작은 불이 널리 태우는 비유 등과 같다. 또 도솔천자가 지옥으로부터 나와서 10지의 무생인(無生忍)을 얻고 전전하면서 이익을 주되 다함이 없었던 것 등과 같다. 이것은 모두 옛적에 이 법을 듣고 본인(本因)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또 아래 경문에 이르기를 “비록 큰 바다와 겁이 다하는 불 속에 있다고 할지라도 결정코 믿고 의심함이 없으면 반드시 이 경을 들을 수 있으리라”고 하였다.
셋째 인위(引爲)이니, 이를테면 이것은 앞의 공교 보살이 그의 가르침 가운데에서 오래도록 깊은 견해를 길러서 항포(行布)의 가르침의 근원[敎源]을 끝까지 통하여 마침내 이 보현법계를 얻은 것과 같다. 이미 말하기를 “무량억 나유타 겁 동안 이 경을 믿지 않았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곧 이 겁수를 지나면 반드시 마땅히 믿어서 받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보법을 여의고서는 다시 다른 방법으로는 성불할 수 없기 때문에 경에서 “저는 이 겁수를 지나도 오히려 믿지 못한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문】 만일 저 경지[地]의 앞에서 그러한 겁수를 지나서 반드시 믿고 받는다면 곧 그 지위에서는 두 종(宗)이 다르지 않음을 알겠거늘 어찌 저들이 믿은 10지는 없는가?
【답】 저들의 가르침에서는 항포의 10지가 갖추어져 있어서 점차로 불과(佛果)에 이르게 된다. 저들의 근기를 길러서 완숙한 경지가 되도록 힘써도 지극히 느린 사람은 이 겁수에 이르러서야 결정코 마땅히 믿어 들어갈 것이요, 빠른 사람은 곧 부정(不定)에 의해 준거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넷째 전위(轉爲)이니, 이를테면 모든 이승(二乘)은 근기가 둔하기 때문에 먼저 공교 대승에 돌아 들어가서 이승의 이름을 버리고 보살의 칭호를 얻은 연후에 비로소 이 보현의 법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이 경을 설하는 것은 오직 보살을 위할 뿐이요, 이승을 섭수하지는 않는다. 만일 그렇지 못한다면 나머지 대승경에는 성문 대중을 소피(所被)의 근기라고 하고 또 이승을 이끌어서 그들을 대승에 들게 하였으니, 유독 이 경만은 대중 가운데 성문의 근기는 없고 경문에도 소승을 돌이킨다는 말이 없으니 어떻게 요의심광(了義深廣)의 법을 이루겠는가.
설령 제8회에 성문이 있어도 기대(寄對)하여 법을 나타내기 위하여 귀머거리나 장님과 같다고 표현한다면 이것은 소피(所被)가 아니다. 저 6천 비구는 나한이 아니기 때문에 서로 어기지 않는다. 이런 까닭으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모든 이승은 모두 단번에 보현법계에 들어갈 수 없고, 구경의 설(說)에 의하면 이승이라고 할지라도 공교 보살에 돌아 들어가지 못함이 없으며, 저 보살도 이 보현의 법에 들지 못함이 없다. 이러한 까닭으로 전전(展轉)하여 모두 이 법의 그릇[器]이 아님이 없다.
다섯째 원위(遠爲)이니, 이를테면 모든 범부[凡愚]나 외도와 천제(闡提)에게도 모두 불성이 있지만 업장이 무겁기 때문에 오래도록 수행해야 또한 마땅히 이 법에 들어갈 수 있다. 『불성론』과 『보성론』에 모두 이르기를 “일천제로서 대승을 비방한 인연으로 한량없는 시간 동안 불성이 없다고 설하지만 구경에 청정한 성품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라고 한 것과 같다.
또 이 경에서 “성기(性起)의 큰 나무는 이승과 천제의 두 곳에서는 싹을 내지 못하지만 또한 생성(生性)을 버리지는 않는다”라고 한 것 등과 같으며, 또 해가 생맹(生盲)을 비추는 비유와 같다. 이러한 까닭으로 모든 중생들은 구경에 모두 이 법에 들어오지 못함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보법은 중생이 갖추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래 경문에 이르기를 “보살은 모든 중생들의 몸 가운데 여래의 보리가 있음을 안다”라고 하였다.
【문】 만약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유가』 등의 논에서 “정성이승(定性二乘)과 무성유정(無性有情)은 결정코 부처가 될 수 없다”고 하였는가?
【답】 그것은 교문에 요(了)와 불료(不了)가 있기 때문에 그러한 말이 생겨난 것이다. 만일 소승에 의지하면 모든 중생들에게는 아무에게도 큰 보리의 성품이 없으니, 소승론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만일 대승초교에 의하면 곧 5성(性)의 차별을 두어 일분(一分)은 성(性)이 있고 일분은 성이 없으니, 『유가』등에서와 같다.
만일 종교(終敎)에 의하면 모든 중생들은 다 불성이 있다고 하니, 『열반』 등의 경전과 『불성』 등의 논서에서와 같다. 만약 돈교에 의하면 중생들의 불성은 일미일상(一味一相)으로써 있다고도 말할 수 없고 없다고도 말할 수 없다. 말을 여의고 생각을 끊었으니, 『제법무행경』 등에서의 설과 같다. 만일 원교에 의하면 중생의 불성은 인(因)을 갖추과 과(果)를 갖추어 성(性)도 있고 상(相)도 있어서 원명하게 덕을 갖추었다고 하니, 「성기품」의 여래 보리에서 설한 것과 같다.
다섯 번째로 능전교체(能詮敎體)란 것은 통론컨대 교체는 얕은 데서부터 깊은 데 이르기까지 대략 열 가지 문이 있다. 첫째 언전변체문(言詮辨體門)이요, 둘째 통섭소전문(通攝所詮門)이며, 셋째 변해제법문(遍該諸法門)이요, 넷째 연기유심문(緣起唯心門)이며, 다섯째 회연입실문(會緣入實門)이요, 여섯째 이사무애문(理事無礙門)이며, 일곱째 사융상섭문(事融相攝門)이요, 여덟째 제망중중문(帝網重重門)이며, 아홉째 해인병현문(海印炳現門)이요, 열째 주반원비문(主伴圓備門)이다.
첫 번째 언전변체문(言詮辨體門)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는 소승을 밝히는 것이요, 뒤에는 대승을 나타내는 것이다.
앞의 것 가운데 살바다종(薩婆多宗)에 의하면 제덕(諸德)께서 세 가지로 말한 것이 있으니, 첫째 “다만 명(名)과 구(句)와 문(文)의 신(身)으로써 교체를 삼는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발지론(發智論)』에 이르되 “12부경에서는 무엇으로써 성(性)을 삼는가. 대답하되 명신(名身)과 구신(句身)과 문신(文身)의 차례로 머무른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소리[聲]는 선(善)하기 때문에 이것은 곧 불교의 체(體)이다. 명(名) 등은 무기(無記)이니 이것은 곧 교의 작용이다”라고 했으며, 『파사론(婆娑論)』 제126권에 이르되 “부처님의 가르침이란 무엇인가? 답하여 이르되 부처님의 어(語)ㆍ언(言)ㆍ사(詞)ㆍ평론(評論)ㆍ어음(語音)ㆍ어로(語路)ㆍ어표(語表)가 곧 부처님의 가르침이다”라고 하였다. 나아가 이와 같이 설하는 자는 말하기를 “어업(語業)이 체(體)가 된다. ‘부처님의 말[佛語]이란 것은 어떤 법인가?’ 답하여 말하였다. ‘명신ㆍ구신ㆍ문신을 차례로 항렬(行列)하고 차례로 안포(安布)하며 차례로 연합(連合)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총괄적으로 불교의 작용을 나타낸 것이다”라고 하였다.
해석하여 말하되 평론가의 정의는 음성을 체라고 하고, 경부종(經部宗)에서도 또한 음성으로써 성(性)을 삼는다. 그러므로 『순정리론(順正理論)』 제14권 「파경부(破經部)」에 이르되 “너는 마땅히 명신ㆍ구신ㆍ문신을 세우지 않았으니 곧 소리를 체로 삼는다”라고 했으며, 또 『무성섭론(無性攝論)에 저것을 깨뜨려 말하되 “모든 계경(契經)에서 구(句)ㆍ어(語)를 자성으로 삼는다고 한 것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으니, 처음은 법처(法處)이고 뒤는 성처(聲處)이다. 또 앞의 두 설로 인하여 제덕들이 이를 합취(合取)하여 교의 체로 삼고 나머지는 저곳에서 설한 것과 같다.
대승종(大乘宗)에 나아가면 4구(句)가 있다. 첫째 가(假)를 섭수하여 실(實)을 따르니 오직 소리만을 체로 삼고 명(名) 등은 소리의 굴곡에 의하여 거짓으로 세워 별체(別體)가 없기 때문이다. 『무성섭론』에 이르기를 “큰 서원에 의해서 보살의 소리를 세운다”라고 하였으며, 『잡집론』에 이르기를 “소리를 이끌어서 모든 성인의 말씀이라고 한다”고 했다.
둘째 가(假)를 나누어 실(實)과 다르게 하는 것이다. 명(名) 등으로써 성(性)을 삼는 것이니, 『유식론』 제2권에 이르되 “만약 명구(名句) 등이 소리와 다르지 않다면 법(法)과 사(詞)가 무애하여 경계는 마땅히 다름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셋째 가실(假實)을 합하여 분별하나니, 또한 소리이고 또한 이름이다. 『유마경』에 이르되 “음성과 언어와 문자로써 불사(佛事)를 짓는다”라고 하였으며, 『십지론』에서는 “설하는 자는 두 가지 일[二事]을 가지고 설하고 듣는 사람은 두 가지 일로써 듣는다”고 말했다. 두 가지 일이란 음성과 명자를 말하는 것이다.
【문】 이 종파에 의하면 소리[聲]는 선악을 나타낸다 할지라도 소리는 곧 무기(無記)이다. 또 명ㆍ구ㆍ문의 자성도 무기인데, 어찌 무기를 성교(聖敎)의 체로 삼겠는가?
【답】 만일 유루심(有漏心)이 변하는 것은 무기이지만 만일 불보살이 뒤에 얻은 지혜와 말은 모두 선(善)에 소속된 것이니, 『십지론』에 이르기를 “어떤 일에 의지한다는 것은 음성과 선한 문자[善字]를 말한다”라고 하였다.
넷째 가실(假實)을 모두 없애는 것이니 소리도 아니요, 이름도 아니다. 이것은 곧 공(空)이기 때문이며, 말이 곧 말 없음[無言]이기 때문이다. 『유마』에 이르되 “문자의 성(性)을 여의면 그것이 곧 해탈이다”라고 하였고, 『십지론』에서는 바람[風]을 음성에 비유하고 그림[畫]을 명자에 비유하였으니, 만일 나무와 꽃을 흔드는 바람과 벽 위의 그림이라면 이는 곧 취할 수 있지만, 만약 공중의 바람이나 공중의 그림이라면 모두 취할 수 없다. 대승에서의 소리와 이름도 또한 그러하여 모두 취할 수 없으니, 모양[相]이 다하기 때문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위에서 말한 4구(句)를 하나의 교체라고 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공유무애(空有無礙)를 대승법이라고 이름한다. 이를테면 공(空)이 유(有)와 다르지 아니함은 유는 곧 환유(幻有)이니, 환유는 완연(宛然)하여 전체[擧體]가 곧 공이고 유가 공과 다르지 않으니, 공은 곧 진공이요 진공은 담연하여 온 체가 곧 유이다. 그러므로 공과 유는 털끝만큼도 분별할 것이 없다. 그런 까닭에 『불장경(佛藏經)』에 이르기를 “모든 법이 털끝만큼이라도 공이 아니라고 인정한다면 곧 모든 부처님은 세상에 나오시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했으며, 또 아래에 이르되 “모든 법은 필경에는 공한 것으로써 털끝만한 모양이라도 있을 수 없다”라고 하였으니, 이와 같은 일은 하나만이 아니다.
둘째 통섭소전문(通攝所詮門)이란 다만 앞에서와 같이 능전의 교만을 취할 뿐만 아니라 또한 점점 소전(所詮)의 뜻까지도 통틀어 취하나니, 아울러 이것은 소지소해(所知所解)의 법이기 때문이다. 『유가』 81권에 이르기를 “모든 계경의 체에는 대략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문(文)이요, 다른 하나는 의(義)이다. 문은 곧 소의(所依)이고, 의는 곧 능의(能依)이다. 이와 같은 두 가지를 총괄하여 모든 소지의 경계라고 이름한다”라고 하였다. 해석하여 말하되 “의는 문에 의해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셋째 변해제법문(遍該諸法門)이란 모든 법을 다 교체라고 하는데, 여기에도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유위법이요, 다른 하나는 무위법이니,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깨달음을 얻게 하지 아니함이 없기 때문이다. 아래 경문에서 “화만(花鬘)ㆍ보지(寶地)ㆍ향수(香樹)ㆍ운각(雲閣) 등 법계의 법문이 부처님의 일이 아님이 없다”고 한 것과 같다. 승음(勝音)보살과 앉아 계신 연꽃은 곧 인법(人法)ㆍ교의(敎義)ㆍ행위(行位)ㆍ인과(因果)ㆍ이사(理事)에 통하여 모두 승해행(勝解行)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 모두를 교체라고 하니, 이에 준거하여 생각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넷째 연기유심문(緣起唯心門)이란 것은 위에서 모든 차별이 있는 교법은 다 오직 마음에 나타나는 것이 아님이 없다. 그런 까닭에 이들은 모두 유식으로써 체를 삼는다. 그러나 두 가지 뜻이 있으니, 하나는 본영상대(本影相對)이고 다른 하나는 설청전섭(說聽全攝)이다.
앞의 것은 모든 가르침을 통괄적으로 분별하여 모두 4구가 있다. 첫째는 유본무영(唯本無影)이니 소승교에서와 같다. 유식의 변현(變現) 등이 없기 때문에 달마다라(達摩多羅) 등 여러 논사들은 대부분 이 뜻을 세웠다.
둘째 역본역영(亦本亦影)이니 대승시교에서와 같다. 중생의 마음 밖에 있는 부처에 미묘한 색(色)ㆍ성(聲) 등의 법이 있으니, 이를 듣는 선근이 있는 사람의 증상연(增上緣)의 힘이 부처님의 이타(利他)의 종자에 부딪힘으로 말미암아 그것으로 인(因)을 삼아서 부처님 지혜 위에 문의(文義)의 모습을 내는 것은 본성상(本性相)의 교라고 한다. 부처님의 이 교의 증상연의 힘이 법을 듣는 자로서 유루나 무루의 선근 종자에 부딪힘으로 말미암아 듣는 자의 의식[識] 위에 문의의 모습이 나오는 것을 영상상(影像相)의 교라고 한다. 『이십유식론』에 이르기를 “전전증상(展轉增上)의 힘으로 두 식은 결정을 이룬다”라고 하였다. 호법(護法) 논사 등은 모두 이 뜻을 세웠다.
셋째 유영무본(唯影無本)이니 대승종교와 같다. 중생의 마음을 여의고 불과(佛果)에서도 색신ㆍ언성(言聲)의 사상(事相) 공덕도 없으며 오직 여여(如如)와 여여지(如如智)만 있다. 대비대원으로 증상연을 삼아 그들로 하여금 교화되어야 할 근기가 순숙해진 중생심(衆生心) 가운데 부처님의 색ㆍ성 설법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성교는 오직 중생심의 영상일 뿐이므로 아래 경문에서 말하였다.

모든 여래는
불법(佛法)을 설한 적이 없고
마땅히 교화할 대상에 따라서
법을 연설하셨네.

또 말하였다.

여래의 법신은 부사의하여
색도 없고, 상도 없어 짝할 것이 없네.
색상을 시현하여 중생을 위하시니
시방은 교화를 받아서 뵈옵지 못함이 없다.

이와 같은 일이 하나만이 아니다. 용군(龍軍)ㆍ견혜(堅慧) 등 모든 논사들은 아울러 이 뜻을 세웠다.
넷째 비본비영(非本非影)이니, 돈교 중에서와 같이 마음 밖에 부처의 색 등이 없을 뿐만 아니라 중생의 마음 안에 나타난 부처도 마땅히 그 모양 또한 공하다. 오직 식(識)뿐으로서 별도의 영(影)이 없기 때문이며, 색 등의 성(性)을 여의고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일체는 무언(無言)이요, 무언조차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교는 곧 가르침이 없는 가르침이다. 경에 이르되 “여래는 세상에 나오지도 않았으며 또한 열반한 적도 없다”라고 한 것과 같다. 또 『밀엄경(密嚴經)』에서는 부처님께서 항상 법계에 계실 뿐 세상에 나오신 적이 없다고 한 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용수 등의 종파에서는 대부분 이 뜻을 세웠다.
이 앞의 네 가지 설을 총괄하여 한 교로 함에 있어서 원융무애하여 모두가 서로 방애하지 않고, 각각 성교로써 얕은 데서부터 깊은 데 이르기까지 중생을 섭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의 설청전수(設聽全收)라는 것에도 4구가 있으니, 첫째 불심을 떠나서는 밖으로 교화할 중생도 없거늘 하물며 설할 교가 있겠는가. 이러한 까닭으로 오직 이 불심이 나타난 것일 뿐이다. 이 뜻이 무엇인가 하면, 모든 중생이 별도로 자체가 없고 여래장에 의해서 중생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 여래장은 곧 불지(佛智)를 증득하여 자체를 삼았으니, 이러한 까닭으로 중생의 온몸이 모두 부처님의 지혜의 마음 가운데에 있다.
아래 경문에 이르되 “모든 부처님은 모든 것이 마음을 좇아 구름[轉]을 분명히 아셨다”라고 하였다. 또 이르되 “여래의 보리의 몸 속에 모든 중생이 보리심을 발하여 보살행을 닦아 등정각을 이루었음을 알며, 나아가 모든 중생이 적멸열반함도 또한 이와 같아서 이 모두가 일성(一性)이요, 무성(無性)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이르되 “삼세 일체 겁에 불찰과 모든 법과 모든 근[諸根]과 심ㆍ심법과 모든 허망한 법은 한 부처님의 몸 가운데 이 법이 다 나타난다”고 하였다.
또 『불성론』 제2권 「여래장품」에 이르되 “모든 중생들은 다 여래의 지혜 안에 있기 때문에 장(藏)이라고 이름한다. 여여의 지(智)로써 여여의 경계에 칭합하기 때문이며, 모든 중생들은 결정코 여여의 경계를 벗어난 사람이 있을 수 없고 아울러 여래께서 섭지(攝持)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소장(所藏)이라 이름하고 중생은 여래장이 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까닭으로 부처님의 심지(心智)를 떠나서는 한 법도 얻을 수 없다.
둘째 모두 다 중생의 마음속에 있으니 중생의 마음을 떠나서는 따로 부처님의 덕이 없기 때문이다. 이 뜻은 어떠한가. 부처님은 중생심 속의 진여를 증득하여 성불하셨고, 또한 시각(始覺)은 본각(本覺)과 같기 때문에 총괄하여 중생의 마음 가운데 있다고 하였다. 체를 따라 용을 일으킴으로써 화신을 나타낼 때에도 곧 이 중생심 가운데 진여의 용대(用大)이며 다시 다른 부처님이 없으니, 『기신론』에서 이 뜻을 확실하게 밝히고 있다. 또 아래 경문에서도 말하였다.

만일 사람이
삼세 일체의 부처를 구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이와 같이 관하라
마음이 모든 여래를 만든다.

셋째 한 성교(聖敎)를 따름이 오직 두 마음[二心]에 달렸으니, 앞의 두 가지 설은 서로 떠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중생심 안의 부처는 불심 가운데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고, 불심 중의 중생은 중생심 속에 있는 부처의 설법을 듣는다. 이와 같이 온전히 거두어 설하고 들음이 걸림이 없는 것을 매우 깊은 유식의 도리라고 한다.
넷째 혹은 저 성교는 다함께 두 마음이 아니라 두 가지가 모두 형체를 빼앗아 한꺼번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쌍으로 2위(位)를 융합하면 없어지지 아니함이 없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불심의 중생은 들을 사람이 없기 때문이요, 중생심의 부처에게는 설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둘을 함께 쌍으로 밝혀서 두 모습이 다하기 때문이다.
경에 이르기를 “설법하는 사람은 설할 것이 없고 보일 것도 없으며 또한 법을 듣는 사람은 들을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다”라고 하였으며, 또 아래 경문에 이르기를 “중생이 생기게 한 것은 생긴 것이 아니요, 또 생사 가운데에 유전(流轉)함도 없다”라고 하였다. 또 경에 이르기를 “여래는 설법도 하지 않고 중생을 제도하지도 않는다”라고 한 것이 이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이 네 가지가 하나의 성교에 있어서 원융무애함을 비로소 구경(究竟)이라고 한다.
다섯째 회연입실문(會緣入實門)이라는 것에도 또한 두 가지 뜻이 있으니, 하나는 근본[本]으로써 지말[末]을 거두어들이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상(相)을 회통하여 성(性)을 나타내는 것이다.
처음의 것 가운데 모든 성교는 다 진(眞)을 좇아 흐르기 때문에 진성(眞性)과 항상 다르지 아니하니, 마치 바다가 조수를 일으켜도 짠맛을 잃지 않는 것과 같다. 논 가운데 진여 소류(所流)의 12분교라 한다. 또 이르기를 “가장 청정한 법계를 좇아 교법이 흐른다”고 하였으니, 이러한 까닭으로 근본으로써 지말을 거두어들이는 데는 오직 이 진여뿐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 상(相)을 회통하여 성(性)을 나타낸다는 것은 저 모든 차별이 있는 교법은 모두 다 연(緣)으로부터 일어난다. 연으로부터 일어나기 때문에 반드시 자성이 없고, 자성이 없기 때문에 이것이 곧 진여이다.
그러므로 공상(空相)의 근본이 다하면 진성(眞性)의 근본이 나타나며 오직 이것이 진여이기 때문이다. 경에 이르기를 “모든 법이 곧 진여[如]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아래 경문에서 이르기를 “저 생멸의 법은 여여한 모양[相]이다”라고 하였다.
여섯째 이사무애문(理事無礙門)이라는 것에도 두 가지 뜻이 있으니, 하나는 모든 교법의 전체[擧體]가 진여로서 일의 모양[事相]이 뚜렷이 차별됨을 방해하지 아니함이요, 또 하나는 진여의 전체가 모든 법이 되어 일미담연(一味湛然)하여 평등함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다. 앞의 것은 곧 마치 파도는 물에 즉하지만 움직이는 모양을 방해하지 않는 것과 같고, 뒤의 것은 곧 물이 파도에 즉하지만 습체(濕體)를 잃지 않는 것과 같다. 이 가운데 도리도 또한 그러하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이(理)와 사(事)는 혼융무애(混融無礙)하여 유일무주불이(唯一無住不二)의 법문이 있을 뿐이다. 『유마경』에서 이 뜻을 자세히 나타내었다.
또 이 경에 이르기를 “있지 아니한 것이 곧 있는 것이요, 있는 것이 곧 있지 아니한 것이며, 비상(非相)이 곧 상(相)이요 상이 비상임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으니, 진실로 본래 있지 아니함이 곧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이 유(有)는 곧 비유(非有)이다. 성교도 이 이사무애에 준거하여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일곱째 사융상섭문(事融相攝門)이라는 것에도 또한 두 가지 뜻이 있으니, 하나는 상재(相在)이고 또 다른 하나는 상시(相是)이다.
처음 것 가운데 먼저는 하나[一]가 모든 것[一切] 가운데 있는 것이니, 이를테면 하나의 교법이 사(事)에 있어서 온전히 진리임을 방해하지 않나니 진리는 나머지 일체 사(事) 가운데 두루함으로써 이(理)와 같다. 교사(敎事)도 또한 이(理)와 함께 두루하다. 그러므로 모든 법 가운데 항상 이 하나가 있으니, 이러한 뜻에 의지하기 때문에 하나의 미세한 먼지나 털끝 등의 처소에서도 부처님의 설법이 없는 곳이 없다. 그러므로 이 경에 이르기를 “모든 부처님 국토의 미진 속에 노사나부처님께서 자재력(自在力)을 나타내어 큰 서원의 바다에 음성을 떨쳐 모든 중생들을 조복한다”고 하였다.
두 번째는 모든 것이 하나 가운데 있는 것이니, 이를테면 분제가 없다는 이치[理]는 이미 성품을 고치지 아니해도 온전히 사(事)이다. 이런 까닭으로 일사(一事)가 이(理)를 섭수하여 다하지 못함이 없고, 나머지 사도 이(理)와 같아서 일사의 속에 있다.
이(理)는 제한이 없음으로 나눌 수 없다. 그러므로 일사의 곳을 따라 모두 온전히 섭수된다. 이런 까닭에 일(一) 가운데 항상 일체가 있으니, 이러한 뜻에 의지하기 때문에 이 경에 이르되 “이 연화장장엄세계해(蓮華藏莊嚴世界海)에서 낱낱 미진 속마다 모든 법계를 본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한 법 속에서 많은 법을 알고 많은 법 가운데 한 법을 안다”고 하였다. 만약 갖추어 통설(通說)하면 4구가 있다. 처음은 일(一)이 일 속에 있는 것이니, 이를테면 따로 모든 차별사(差別事) 가운데 하나하나마다 각각 저 한 법이 있다고 설하는 까닭이다. 둘째는 일이 일체 속에 있는 것이니, 이를테면 통틀어 일체는 모두 일을 가진다고 설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일체가 일 속에 있는 것이니, 이를테면 따로 일 속에 일체를 섭수한다고 설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일체가 일체 속에 있는 것이니, 이를테면 통틀어 일체는 모두 일체를 가진다고 설하기 때문이다.
또 이것은 항상 일체를 포함하는 일은 곧 다시 항상 저 일체 속에 있어서 동시에 자재하여 장애가 없는 것이다. 한 방향도 움직이지 않고 시방에 두루하다는 것 등이 모두 이러한 뜻이다. 이것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일체법이 다 교체(敎體)라서 모두 서로서로 거두어들여 원융무애하다고 함은 바로 이 경에서 말하는 교의 체성이다.
두 번째 상시(相是)라는 것은 앞에서는 일이 곧 일체라 하였으니, 이를테면 하나의 교사(敎事)가 이미 온전히 진리이니 진리는 곧 일체의 사(事)가 되기 때문에 이 일(一)은 곧 일체이고, 일체는 곧 일임도 위의 것을 돌이켜 보면 마땅히 알 것이다. 이 경에 이르기를 “만일 일(一)이 곧 다(多)이고 다(多)가 곧 일(一)이라면 의미(義味)는 적멸하여 모두 평등하리라”라고 하였다.
통괄적으로 보면 또한 4구가 있으니, 앞에 것에 준하여 생각해 보라.
진실로 생각건대 이(理)를 온전히 하는 사(事)와 사(事)를 온전히 하는 이(理)는 하나도 아니요, 다른 것도 아니다. 한 문[一門]이 아니라는 것을 말미암기 때문에 상재(相在)할 수 있고, 다른 문[異門]이 아니라는 것을 말미암기 때문에 상시(相是)할 수 있다. 깊이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뜻에 의지하기 때문에 일구(一句)는 곧 일체구(一切句)이어서 궁진(窮盡)할 수 없고 일체도 또한 그러하다. 아래 경문에 이르기를 “일구의 법을 갖추어 자세히 설하려 하면 아승기겁 동안 한다 해도 다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자재한 것이 곧 이 교체이다.
여덟째 제망중중문(帝網重重門)이라는 것에도 또한 두 가지 뜻이 있으니, 먼저 1문(門)을 가리고 뒤에 유비(類比)하여 일체를 나타낸다. 앞의 것 가운데 일구 안에 곧 일체를 갖춘 것과 같이 이 일 가운데 일체요, 또다시 일이 곧 일체이니 이와 같이 중중(重重)하고 중중하고 중중하고 중중하고 중중한즉 다할 수 없다. 총괄하여 이 일구(一句)이다.
두 번째 유비하여 나타낸다는 것은 이와 같은 일구와 나머지 일체구(一切句)의 하나하나까지도 모두 다 그러하다. 이러한즉 무진(無盡)하고 무진하고 무진하고 무진하고 무진하고 무진하고 무진하고 무진하고 무진하고 무진해서 오직 보안(普眼)만이 알 수 있는 것이요, 이 심식(心識)으로 생각하거나 헤아려서 알 수 있는 경계가 아니다. 아래 경문에 이르기를 “저 낱낱 수다라에서 모든 법의 말로는 다할 수 없는 것들을 분별하고 저 낱낱의 모든 법마다 그 가운데 또 말로는 다할 수 없는 모든 법을 설한다”라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하나의 작은 미진 속에 말로는 다할 수 없는 모든 불국토가 있고 저 낱낱 불국토 가운데 다시 말로는 다할 수 없는 불국토가 있다”고 하였다.
해석하여 이르되, 이와 같이 중중함이 인다라망(因陀羅網)과 같다. 이것을 이 경의 원종(圓宗)의 교체라고 말한다.
아홉째 해인병현문(海印炳現門)이라는 것에도 또한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과위(果位)를 기준으로 한 것이니, 앞의 차별이 있는 다함 없는 교법은 모두 여래의 해인정(海印定) 속에서 동시에 환하고[炳然] 원명(圓明)하게 나타나나니 설령 교화되어야 할 근기[所化機]라 할지라도 또한 함께 연기하여 이 가운데에 나타난다. 이런 까닭에 오직 이 삼매해(三昧海)로써 그 교체를 삼는다. 아래 경문에 이르기를 “일체를 시현(示現)하여 남음이 없는 것은 해인삼매의 세력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둘째는 인위(因位)를 기준으로 한 것이니, 요컨대 보현 등의 모든 큰 보살도 비로소 이 선정을 얻어 앞의 업용과 같아서 또한 차별이 없다. 이러한 까닭에 10신(信)이 원만한 곳인 보현위 가운데서도 이 선정을 얻나니, 「현수품」에서 설하는 것과 같다.
열째 주반원비문(主伴圓備門)이라는 것은 이를테면 이 넓은 법의 교는 혼자서 일어나지 않는다. 반드시 주(主)와 반(伴)을 따라서 생기나니, 아래 경문의 보장엄(普莊嚴) 동자가 부처님께서 설하신 『일체법계무구장엄경(一切法界無垢莊嚴經)』을 듣고 세계의 미진 수처럼 많은 수다라로써 권속을 삼은 것과 같다. 이와 같은 등의 경문은 곳곳에 모두 있다.
이 『권속경(眷屬經)』에 두 가지 뜻이 있으니, 하나는 동류(同類)이고 다른 하나는 이류(異類)이다. 첫 번째 동류라는 것은 10주를 설한 것과 같다. 시방에 각각 10찰진수(刹塵數)의 보살이 와서 증명하되 똑같이 법혜(法慧)라고 이름하였고, 우리 부처님의 처소에서도 또한 10주를 설하였는데 대중과 권속과 명(名)ㆍ미(味)ㆍ구(句)의 신(身) 등은 모두 다름이 없다고 했다. 이러한 까닭으로 하나의 10주의 경(經)은 시방에 각각 10찰진수의 수다라로써 권속을 삼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하나의 10주와 같이 나머지 모든 처소에서 설한 10주도 그만한 진수(塵數)의 권속을 섭수하였으니, 10주가 이미 그러하다면 나머지 10행 등의 낱낱 품(品)과 회(會)에도 모두 증법(證法)함이 있다. 수량은 앞의 해석에 준거하면 알 수 있다.
둘째 이류라는 것은 이를테면 일방일계(一方一界)를 따라 한 종류의 근기를 위해서 일회(一會)의 법을 설함에 있어 이미 시방을 통틀어 매듭 지어 같이 설함이 없기 때문에 주경(主經)은 아니다. 그러나 또한 주(主)와 더불어 뛰어난 방편이 되기 때문에 권속이라고 한다. 이러한 까닭에 주경은 반드시 시방 진도(塵道)에서 동시에 함께 설할 수 있으나 반경(伴經)은 그렇지 못해서 방위에 따라 각각 다르다. 이러한 까닭에 하나하나의 주경마다 각각 진수의 권속이 있으니, 이것을 본말(本末)이 서로 도와주고 주반(主伴)이 원만하게 갖추어진다고 말한다.
교체문을 마친다.
여섯 번째로 종취(宗趣)라는 것은 말로 나타내는 것을 종(宗)이라 말하고 종이 돌아가는 곳을 취(趣)라고 한다.
그러나 이 대경의 종취는 분별하기 어렵다. 간략하게 열 가지 설(說)로 서술하여 한 종(宗)을 나타내겠다.
첫째 강남의 인 스님[印師]과 민 스님[敏師] 등은 대부분 인과로써 종지를 삼았으니, 이를테면 이 경 가운데 보살의 행위(行位)의 인을 밝히고 이루어야 할 불과(佛果)의 승덕(勝德)을 나타낸다. 아래 경문에서 설한 것은 이 두 가지를 여의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으로써 종(宗)을 삼았다.
둘째 대원(大遠) 법사는 화엄삼매로써 종을 삼았으니, 인행(因行)의 꽃이 능히 불과(佛果)를 장엄하였다.
이 위의 두 설은 다만 이루어야 할 행덕만을 얻고 의지할 법계를 잃어버린 것이 된다.
셋째 연(衍) 법사에 의하면 걸림이 없는 법계로써 종을 삼았다.
넷째 유(裕) 법사에 의하면 매우 깊은 법계의 심경(心境)으로써 종을 삼았으니, 이를테면 법계문 가운데 의분(義分)으로써 경계를 삼고 모든 부처는 이것을 증득하여 정토를 이루며, 법계는 곧 일심이니 모든 부처는 이것을 증득하여 법신을 이룬다. 이러한 까닭에 초품 안에서 초천(初天)의 왕은 게송으로 찬탄하였다.

끝없이 평등한 묘법계는
모두 다 여래의 몸에 충만하도다.

그리고는 말후에 다시 「입법계품」을 밝혔다. 그러므로 오직 법계로써 종을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위의 두 설은 다만 의지해야 할 법계만을 얻고 이루어야 할 행덕을 잃어버린 것이다.
다섯째 광통 스님[光統師]에 의하면 인과이실(因果理實)로써 종을 삼으니 인과는 곧 이루어야 할 행덕이고 이실은 의지해야 할 법계이다.
이것은 비록 뜻은 갖추었으나 오히려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여섯째 이제 총괄적으로 이름을 찾고 뜻을 상고하건대 인과연기이실법계(因果緣起理實法界)로써 그 종(宗)을 삼는다. 곧 대방광(大方廣)을 ‘이실법계’라 하고, 불화엄(佛華嚴)을 ‘인과연기’라 한다. 인과연기에는 반드시 자성이 없으니 자성이 없기 때문에 이실법계이다. 법계이실에는 반드시 정성(定性)이 없으니 정성이 없기 때문에 곧 인과연기를 이룬다. 이러한 까닭에 이 둘은 둘이 없고 유일무애자재(唯一無礙自在)한 법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으로써 종을 삼는다.
일곱째 별도로 법계를 열어 섭수[開攝]하여 인과를 이루니, 이를테면 보현의 법계를 인이라 하고 사나(舍那)의 법계를 과라고 한다. 이런 까닭에 오직 법계인과로써 종취를 삼는다.
그 가운데서 분별해 보면 10사5대(十事五對)가 있다. 첫째는 소신인과(所信因果)이니, 초회의 「노사나품」 속에 먼저 연화장세계의 과를 밝히고 뒤에 보장엄의 인을 나타낸 것과 같다.
둘째는 차별인과(差別因果)이니, 제2회로부터 「소상품(小相品)」에 이르기까지의 설과 같다. 그 가운데에 처음 25품은 5위(位) 차별의 인을 설했고, 뒤의 3품은 3덕(德) 차별의 과를 설했다.
셋째는 평등인과(平等因果)이니, 「보현품」에서는 평등의 원인(圓因)을 설하고 「성기품」에서는 평등의 만과(滿果)를 설한 것과 같다.
위의 두 문은 곧 생해(生解)의 인과이다.
넷째는 성행인과(成行因果)이니, 「이세간품」 가운데 2천 행법 안에 먼저 인행을 밝히고 뒤에 과행을 나타낸 것과 같다.
다섯째는 증입인과(證入因果)이니, 「입법계품」에서 먼저 기원(祇洹)의 수풀 가운데서 자재의 과를 나타내고 뒤에 선재동자가 증입의 인을 분별한 것과 같다.
인과의 5주(周)에 의하여 일부를 여기에서 마친다. 이러한 까닭에 오직 인과만을 분별하더라도 의지할 것을 잃지 않고 다만 인과로써 종을 삼는다고 말할지라도 이치에는 또한 허물이 없다.
여덟째 인과를 회통하여 법계와 함께한다. 법계의 법문을 대략 나타내면 10사5대(十事五對)가 있다.
첫째는 교의상대(敎義相對)이니, 여기에서 말한 교법을 들어 종을 삼고 뜻이 소전의 의리(義理)를 나타냄을 취(趣)라고 한다. 혹은 이것과 반대되기도 한다. 뜻이 깊고 교가 뛰어남을 분별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이사상대(理事相對)이니, 사법을 들어서 종을 삼고 뜻은 이성(理性)을 취하여 취(趣)로 삼는다. 혹은 이와 반대되기도 하니 이성(理性)에 의지함으로써 비로소 사(事)를 이루기 때문이다.
셋째는 경지상대(境智相對)이니, 소관(所觀)의 경(境)을 들어서 뜻으로 관지(觀智)의 행을 이루게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혹은 이것과 반대되기도 하니 닦아 일으킨 지혜로 하여금 참다운 경계[眞境]를 증득하여 같게 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행위상대(行位相對)이니, 의지해야 할 5위를 들고 뜻으로 여기에 의지하여 승행(勝行)을 닦아서 이루게 하는 것이다. 또는 이것과 반대되기도 하니, 행(行)을 쌓아서 위(位)를 이루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인과상대(因果相對)이니, 저 인을 닦기[修因]를 권하고 뜻은 증과(證果)에 있다. 혹 이것과 반대되기도 하니, 과(果)를 들어서 즐길 것을 권하고 인(因)을 닦게 하기 때문이다.
위의 5대(對)는 일부에 통하니 곳곳마다 다 있기 때문에 따로 속하지 않는다. 이런 까닭으로 오직 법계만을 가리지만 이루어야 할 것을 잃지 않고 다만 법계로써 종을 삼는다고 말하여도 이치에는 또한 어긋남이 없다.
아홉째 법계 인과의 모양을 나누어 나타내 보인[分相顯示] 가운데 또한 10의5문(十義五門)이 있다. 첫째는 무등경(無等境)이니, 곧 이실법계(理實法界)이다. 여기에 두 가지 위(位)가 있으니, 하나는 출전최정법계(出纏最淨法界)이고 또 하나는 재전성정법계(在纏性淨法界)이다. 이 둘은 소신(所信)과 소증(所證)이 되기 때문이다.
둘째는 무등심(無等心)이니, 여기에도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대보리심이니 보현행을 하는 데 의지해야 할 근본이 되기 때문이요, 다른 하나는 신(信)과 비(悲)와 지(智) 등이 행(行)을 따라 일어나기 때문이다.
셋째는 무등위(無等位)이니, 여기에도 또한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차별행이니 각각 별도로 닦기 때문이요, 다른 하나는 보현행이니 하나가 곧 일체이기 때문이다.
넷째는 무등위(無等位)이니, 여기에도 또한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항포차별위(行布差別位)이니 비(比)와 증(證)이 같지 않기 때문이요, 또 하나는 원융상섭위(圓融相攝位)이니 일위가 곧 일체위를 갖추는 까닭이다.
다섯째 무등과(無等果)이니, 여기에도 또한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수생과(修生果)요, 다른 하나는 수현과(修顯果)이다.
이 5문10의(五門十義)는 통괄적으로 이 경의 일부(一部)를 거두어 대략 다하였다. 이러한 까닭으로 갖추어 종을 삼으니, 뜻도 또한 갖추어졌다.
열째 법계와 인과가 쌍으로 융합하고 함께 여읜 것이니, 이를테면 성(性)과 상(相)이 혼융하여 무애자재함이다.
여기에도 또한 10의(義)가 있다. 첫째는 모양을 여읨을 말미암기 때문에 인과는 법계와 다르지 아니하니, 이는 곧 인과는 인과가 아니다.
둘째는 성(性)을 여읨을 말미암기 때문에 법계는 인과와 다르지 아니하니, 이는 곧 법계는 법계가 아니다.
셋째는 성을 여의어도 성을 없애지 아니함을 말미암는 까닭에 법계는 곧 인과이다. 비법계로써 법계를 삼음이다.
넷째는 모양을 여의어도 모양을 무너뜨리지 않음을 말미암는 까닭에 인과는 곧 법계이다. 인과 아닌 것으로써 인과를 삼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모양을 여의는 것이 성을 여의는 것과 다르지 아니함을 말미암는 까닭에 인과와 법계는 모두 없어지고 함께 융합하여 멀리 말과 생각을 초월한다.
여섯째는 무너뜨리지 않음은 없애지 않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인과와 법계는 모두 존재하여 앞에 나타나 난연(爛然)하므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일곱째는 위에서 말한 존(存)과 민(泯)은 또한 다르지 않기 때문에 시청(視聽)을 초월한 법은 항상 견문(見聞)에 통하고 사의(思議)를 끊은 뜻은 언념(言念)에 걸리지 않는다.
여덟째는 법계의 성품은 융합하여 나눌 수 없기 때문에 곧 법계의 과는 법계를 통섭(統攝)하여 모두 다하지 않음이 없다. 인(因)은 의지할 것을 따라서 또한 과(果) 속에 있다. 이러한 까닭에 부처 가운데 보살이 있는 것이다.
아홉째는 법계에 즉하는 인(因)을 섭수한 뜻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보현 가운데 부처가 있다.
열째는 인과의 두 위(位)가 각각 차별을 따르므로 하나하나의 법(法)ㆍ하나하나의 행(行)ㆍ하나하나의 덕(德)ㆍ하나하나의 위(位)가 모두 각각 무진무진한 모든 법문해(法門海)를 총섭하는 것은 진실로 법계를 다 섭수하여 원융하지 아니함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화엄의 무진한 종취라고 말한다. 나머지 뜻은 「지귀(指歸)」76) 등에서 설한 것과 같다.
일곱 번째로 경의 제목에 대한 해석은 대략 열 가지 이름으로 풀이하게 된다.
첫째는 수명(數名)이요, 둘째는 법명(法名)이며, 셋째는 유명(喩名)이요, 넷째는 의명(義名)이며, 다섯째는 덕명(德名)이요, 여섯째는 사명(事名)이며, 일곱째는 개명(開名)이요, 여덟째는 구명(具名)이며, 아홉째는 합명(合名)이요, 열째는 품명(品名)이다.
맨 처음 수명이란 것은 『양섭론(梁攝論)』 제10권의 「승상(勝相)」에 “백천경(百千經)이란 바로 『화엄경』이니, 10만 개의 게송이 있으므로 백천경이라고 이름했다”라고 말한 것에 의지하였으니, 이는 곧 본래의 숫자를 좇아서 지은 이름이다.
둘째 법명이라는 것은 『지도론』의 「촉루품」에 이르기를 “부사의해탈경(不思議解脫經)이라 이름하며 10만 게송이 있다”고 말한 것에 의지하였으며, 또 그 가운데 스스로 이 『화엄』을 가리켰기 때문이다. 진실로 이 경에서 설한 법은 모두 하나가 일체를 섭수하여 부사의해탈 아님이 없기 때문에 그것으로써 이름을 삼은 것이다.
셋째 유명이라는 것은 『열반경』과 『관불삼매경(觀佛三昧經)』에 의거하며 이 경을 『잡화경(雜華經)』이라고 이름한다. 만행교식(萬行交飾)하고 연기집성(緣起集成)하는 비유를 좇아서 이름을 표했으니, 마치 잡화와 같을 뿐이다.
넷째 의명이라는 것은 아래의 「이세간품(離世間品)」에 보살이 매우 묘한 의화(義華)를 출생하는 등 열 가지 뜻의 이름을 세운 것과 같다. 저기에 이르러 마땅히 가리겠다.
다섯째 덕명이라는 것은 「성기품」 끝에 열 가지 뛰어난 덕에 나아가 그 이름을 세웠으니, 또한 저기에 이르러서 마땅히 해석하겠다.
여섯째 사명이라는 것은 화엄이라는 명칭은 범어로는 건나표하(健拏驃訶)라고 이름한다. 건나는 잡화라고 이름하고, 표하는 엄식(嚴飾)이라고 이름한다. 일조 삼장(日照三藏)이 말하기를 “서국에는 별도로 하나의 공양구가 있으니 ‘표하’라고 이름한다. 그 모습은 여섯 겹으로 되어 있고 아래는 넓고 위는 좁으며 화보(華寶)로 장식하였는데 낱낱의 겹마다 그 속에 모두 불상을 봉안했다”라고 하니, 진실로 이 경은 6위(位)가 중첩되어 위마다 성불함으로써 바로 저 일을 유비하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을 세운 것이다. 인천(人天)의 여덟 번 모임[會]도 또한 저것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곱째 개명이라는 것은 이 하나의 이름을 열어서 10사5대(十事五對)를 삼았다. 첫 번째는 통별일대(通別一對)이니, 이를테면 대방광(大方廣) 등은 일부의 통명이요 세간정안(世間淨眼)은 이 당품(當品)의 별목(別目)이다.
두 번째는 통 가운데 교의일대(敎義一對)에 나아감이니, 이를테면 대(大) 등은 곧 소전의 뜻이요 경이라는 한 글자는 능전(能詮)의 교이다.
세 번째는 의 가운데 법유일대(法喩一對)에 나아감이니, 이를테면 대 등은 곧 법이요 화엄은 비유이다.
네 번째는 법 가운데 경지일대(境智一對)에 나아감이니, 이를테면 대 등은 소증(所證)ㆍ소각(所覺)이요, 불(佛)은 곧 능증(能證)ㆍ능각(能覺)이다. 또한 이것은 인법일대(人法一對)이기도 하다.
다섯 번째는 경 가운데 간지일대(簡持一對)에 나아감이니, 이를테면 대(大)자는 능간(能簡)이요 방광(方廣)은 소간(所簡)이니 곧 대는 소와 다름을 밝혔고 실(實)은 권(權)과 다름을 밝혔으며 과(果)는 인(因)과 다름을 밝혔기 때문이다.
여덟째 구명이라는 것은 대(大)에 열 가지 뜻이 있다. 첫 번째는 경대(境大)이니, 이를테면 10연화장(蓮華藏)과 십불(十佛) 3업의 가없는 의정(依正)을 믿어야 할 경계로 삼는 것이니 초회 등에서 설하는 것과 같다.
두 번째는 심대(心大)이니, 이를테면 앞의 큰 경계[大境]에 의해서 큰 마음[大心]을 일으키기 때문이니 「현수품」과 「발심품」에서 설하는 것과 같다.
세 번째는 행대(行大)이니, 이를테면 큰 마음에 의해서 큰 행을 일으키기 때문이니 「이세간품」 등에서 설하는 것과 같다.
네 번째는 위대(位大)이니, 이를테면 큰 행을 쌓아서 큰 지위를 이루기 때문이다. 이는 곧 5위 원통(圓通) 등이니, 제2회로부터 제6회에 이르기까지의 설과 같다.
다섯 번째는 인대(因大)이니, 이를테면 행위(行位)가 넓고 원만하여 생(生)과 요(了)77)가 구경(究竟)이니 「보현품」 등의 설과 같다.
여섯 번째는 과대(果大)이니, 이를테면 연을 따르는 것과 자체의 과덕이 원명(圓明)함이니 「부사의품」 등에서 설하는 것과 같다.
일곱 번째는 체대(體大)이니, 이를테면 대용(大用)은 평등하여 모두 진성(眞性)과 같으니 「성기품」 등에서 설한 것과 같다.
여덟 번째는 용대(用大)이니, 이를테면 생각생각에 중생을 이익되게 하여 단번에 행위(行位)를 이룸이니 「소상품」 등에서 설한 것과 같다.
아홉 번째는 교대(敎大)이니, 이를테면 낱낱의 명구(名句)마다 모두 일체에 두루함이니 아래 통틀어 매듭지음[結通] 등에서 설한 것과 같다.
열 번째는 의대(義大)이니, 이를테면 소전(所詮)이 모두 무변 법계를 다함이며, 하나의 티끌이 시방을 머금고 일념이 9세를 포함하는 것이니 8회 등에서 설한 것과 같다. 이 위의 열 가지 뜻은 하나하나가 모든 법을 통수(統收)하여 다하였으니, 대라고 칭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일곱 가지 뜻이 있으니, 『유가』 등의 일곱 가지 대(大)의 성품과 상응하는 것에 의해서 대의 뜻을 해석한 것과 같다.
또 『열반경』에 의하면 다시 세 가지 뜻으로 대를 해석한다. 경에 이르기를 “말한 바 대라는 것은 상(常)이라고 이름한다”라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대라는 것은 그 성품이 광박(廣博)하다”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능히 대라는 뜻을 세울 수 있음은 대열반(大涅槃)을 이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기신론』에서도 세 가지 뜻으로써 대를 해석하니, 이를테면 체ㆍ상ㆍ용 등이다.
다음 방광(方廣)을 해석함에 있어서도 또한 열 가지 뜻이 있다. 첫 번째는 주변(周遍)이라는 뜻이니, 이를테면 언교(言敎)가 넓어 모든 진방(塵方)에 두루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보설(普說)이라는 뜻이니, 이를테면 일체의 법을 널리 선설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심설(深說)이라는 뜻이니, 이를테면 매우 깊은 법계해를 설하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비섭(備攝)이라는 뜻이니, 이를테면 다함이 없는 중생계를 널리 섭수하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는 광익(廣益)이라는 뜻이니, 이를테면 긴요하게 중생으로 하여금 불보리(佛菩提)의 대이락(大利樂)을 얻게 하기 때문이다.
여섯 번째는 탕제(蕩除)라는 뜻이니, 이를테면 2장(障)과 습기(習氣)를 두루 제거하기 때문이다.
일곱 번째는 구덕(具德)이라는 뜻이니, 이를테면 무변의 모든 승덕(勝德)을 갖추어 섭수하기 때문이다.
여덟 번째는 초승(超勝)이라는 뜻이니, 이를테면 탁월하게 뛰어나 다른 것을 초월하여 유비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아홉 번째는 함섭(含攝)이라는 뜻이니, 이를테면 많은 이류(異類)의 법을 통틀어 섭수하기 때문이다.
열 번째는 광출(廣出)이라는 뜻이니, 이를테면 능히 부처님의 큰 과[大果]를 출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열 가지 뜻은 두 논(論)에서 설한 것과 같다.
『입대승론』에 다섯 가지 뜻이 있다.
첫 번째는 중생을 위해서 대치(對治)의 법을 설하기 때문이요, 두 번째는 온갖 많은 승(乘)이 있기 때문이며, 세 번째는 많은 장엄구가 있기 때문이요, 네 번째는 능히 한량없는 큰 과(果)를 출생하기 때문이며, 다섯 번째는 모든 사견을 끊어 없애기 때문에 비불략(毘佛略)이라고 이름한다.
또 『잡집론』에서 방광(方廣)을 해석한 것이 있으니, 이를테면 보살장(菩薩藏)과 상응하는 말을 방광이라고 이름한다. 모든 유정들이 유익하고 안락하여 의지할 곳이 되기 때문이며, 넓고 크고 매우 깊은 법을 선설한 까닭이다. 또 광파(廣破)라고도 이름하니 모든 장애를 널리 깨뜨릴 수 있기 때문이요, 또한 무비법(無比法)이라고도 이름하니 모든 법이 능히 유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불(佛)의 뜻을 해석함에 있어서도 또한 열 가지가 있으니, 무착불(無著佛) 등과 같다. 경문을 찾아 갖추어 분별해야 한다.
다음에 화엄을 해석하겠다.
【문】 화(華)에 몇 가지 뜻이 있는가? 또 무엇을 나타내기에 꽃으로써 엄식하는가?
【답】 화에는 열 가지 뜻이 있고, 나타내는 것도 또한 그러하다. 첫 번째는 미묘하다는 뜻이니, 이것이 곧 화의 뜻이다. 부처님의 행덕은 추상(麁相)을 여의었음을 나타내기 때문에 꽃으로 엄식한다고 설한다. 아래는 아울러 여기에 준거해 보라.
두 번째는 개부(開敷)의 뜻이니, 행이 꽃피어서[敷榮] 성품을 열어 깨닫는[開覺]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단정(端正)의 뜻이니, 행이 원만하고 덕상을 갖추었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분복(芬馥)의 뜻이니, 덕향(德香)이 널리 풍겨서 자타를 이익되게 하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는 적열(適悅)의 뜻이니, 뛰어난 덕[勝德]의 즐거움을 기뻐하여 싫어함이 없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여섯 번째는 교성(巧成)의 뜻이니, 닦은 덕상이 선교(善巧)로 이루어진 것임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일곱 번째는 광정(光淨)의 뜻이니, 장애를 끊어 영원히 모두 없애서 지극히 청정함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여덟 번째는 장식(莊飾)의 뜻이니, 요인(了因)이 되어 본성을 장엄한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아홉 번째는 인과(引果)의 뜻이니, 생인(生因)이 되어서 불과(佛果)를 일으키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열 번째는 불염(不染)의 뜻이니, 세상에 처하더라도 물들지 아니함이 연꽃과 같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다음에 경(經)자를 해석함에 있어서도 또한 열 가지 뜻이 있으니, 『보운경』의 설과 같다. 나머지 뜻은 위와 같다.
아홉째 합명(合名)이란 것은 대(大)는 곧 당체(當體)를 제목으로 하고 포함을 뜻으로 삼는다. 방(方)은 곧 용에 나아가서 이름을 삼고 궤범(軌範)을 뜻으로 삼으니 곧 방법이기 때문이며, 성품이 치우침[邪僻]을 여의는 것은 곧 방정(方正)하기 때문이다. 능히 중장(重障)을 다스리는 것은 곧 의방(醫方)이기 때문이며, 허공계에 두루함은 방우(方隅)를 다하기 때문이다.
광(廣)이란 곧 체와 용을 합하여 밝히고 주변(周遍)을 뜻으로 삼는다. 이를테면 일체의 처소ㆍ일체의 때ㆍ일체의 법ㆍ일체의 사람에게 주변하지 아니함이 없이 다 중중(重重)하여 제석천의 그물[帝網]과 같다. 이 가운데 우선 하나가 일체를 섭수하는 것에 나아가 대(大)라고 이름하고, 하나가 일체에 두루한 것을 광(廣)이라고 칭한다. 앞을 광이라 하고 뒤를 대라고 하는 것도 또한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다.
방(方)은 곧 광(廣)이요, 대(大)는 곧 방광(方廣)이니, 이는 모두 지업석(持業釋)이다.
이것은 곧 소득(所得)의 법이요, 불은 곧 능득(能得)의 사람이니, 각조(覺照)를 이름으로 하고 과만(果滿)을 뜻으로 삼는다.
이 가운데 인(人)ㆍ법(法)과 경(境)ㆍ지(智)에 상의(相依)와 상즉(相卽)이 있다. 상의라는 것은 지는 경을 의지하기 때문에 방광의 불이란 하승(下乘)의 부처를 가려내는 것이다. 경은 지에 의지하기 때문에 불(佛)의 방광이니 인위(因位)의 법을 가려내는 것이다. 이 둘은 서로 의지해서 각각 유력(有力)ㆍ무력(無力)한 연기의 4구가 있으니, 이것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모두 의주석(依主釋)이다.
상즉이라는 것은 불(佛)은 곧 방광(方廣)이요, 방광은 곧 불이다. 인ㆍ법이 걸림이 없어서 전체가 상즉한다. 공ㆍ유의 4구도 또한 이에 준거해서 생각해 보라. 이것은 오직 지업석일 뿐이다.
이미 부처는 하승이 아니요, 법은 인위(因位)를 뛰어넘고 과덕(果德)은 밝히기 어려우므로 비유에 붙여서 비로소 나타낸다. 이를테면 만덕(萬德)이 구경이요, 양려(瓖麗)78)함은 꽃과 같아 서로서로 번갈아 꾸며서 성품을 나타내는 것을 엄(嚴)이라 칭한다.
여기에 두 가지 문이 있으니, 하나는 여러 덕이 서로 장엄한 것이다. 또한 상의(相依)와 상즉(相卽)이 있는데 각각 4구가 있어 존망구민(存亡俱泯)한다. 이는 모두 지업석이니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이행(理行)을 서로 장엄하는 것이다. 또한 상의와 상즉이 있으니, 먼저 상의의 4구라는 것은 첫째 이(理)는 수(修)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것이므로 곧 행의 꽃[行花]이 성(性)을 꾸미는 것이다.
둘째 행(行)은 이(理)를 따라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곧 이(理)의 꽃이 행을 장엄하는 것이다. 『양섭론』에 이르기를 “이 법신으로부터 흐르지 아니하는 것이 없고, 도리어 이 법을 증득하지 아니하는 것이 없다”고 하였다.
셋째 이(理)와 행이 함께 융합하여 둘이 아니면서 둘이다. 진류(眞流)의 행이 아니면 진(眞)에 계합할 수 없고 진을 꾸미는 행이 아니면 진으로부터 일어나지 못한다. 진실로 체(體)는 행(行)과 융합하여 인(因)을 원만히 하고 행은 진을 포함하여 과(果)를 만족하게 한다. 이런 까닭에 표(標)하여 불화엄(佛華嚴)이 되는 것이다.
넷째 이(理)와 행이 함께 없어져서 둘이면서 둘이 아니다. 이(理)의 행이기 때문에 행이 아니요, 행의 이(理)이기 때문에 이(理)가 아니다. 이것은 곧 능소(能所)가 둘 다 없어져 정(情)을 뛰어넘고 상(相)을 여의어서 엄(嚴)도 아니요 엄 아님도 아니니, 이것을 화엄이라고 말한다. 상즉의 4구로 이(理)와 행(行)을 온전히 거두어들이는 것은 준거하여 생각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법과 비유가 서로 비추어 환히[昭然] 있음을 알 것이다.
나머지는 앞의 해석과 같다.
열째 품명이라는 것은 세간(世間)은 곧 법이요, 정안(淨眼)이란 비유이다. 세(世)라는 것은 곧 때[時]이고 간(間)이란 것은 곧 가운데[中]이다. 때 가운데[時中]에 나타나기 때문에 세간이라고 한다.
세간은 같지 아니하여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기세간(器世間)이며, 의지하는 곳이 된다.
둘째는 지정각세간(智正覺世間)이니, 능화(能化)의 주(主)가 된다.
셋째는 중생세간(衆生世間)이니, 소화(所化)의 기(機)가 된다.
이 품에서는 이 세 가지를 초월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붙인 것이다.
기(器)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장지(場地)의 별처(別處)이고 , 다른 하나는 화장(華藏)의 통처(通處)이다.
지정각(智正覺)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3신(身)과 10신(身)이요, 중생에게도 두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동생(同生)과 이생(異生)79)이다.
정안(淨眼)에는 세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통철(洞徹)의 뜻으로서 기세간에 비유하니 안으로 이치[理]에 통철하기 때문이다. 아래 경문에 이르되 “법계 불가괴(不可壞)의 연화세계해(蓮花世界海)”라고 하였다.
둘째는 현상(現象)의 뜻으로서 지정각을 비유한 것이니, 아래 경문에 이르되 “청정법신은 상(像)으로 나타나지 않음이 없다”고 하였다.
셋째는 조촉(照矚)의 뜻으로서 중생세간에 비유하나니, 아래 경문에 이르되 “마치 정안(淨眼)으로 밝은 구슬을 보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또 만일 통론하자면 이 3세간에 각각 정안의 세 뜻이 있다. 이를 준거하여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또 해석하건대 부처님께서 아직 세상에 나오시기 전에는 잘 인도해 줌이 없기 때문에 장님과 같지만, 여래께서 처음 세간에 나오실 때는 깨끗한 눈[淨眼]이 나타나므로 세간정안(世間淨眼)이라 이름한다. 이런 까닭에 부처님이 열반하신 때를 ‘세간의 눈이 멸했다[世間眼滅]’라고 말했다.
품이란 것은 유(類)이고 별(別)이다.
나머지 뜻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여덟 번째로 부류전역(部類傳譯)이라는 것은 또한 열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항본(恒本)이요, 둘째는 대본(大本)이며, 셋째는 상본(上本)이요, 넷째는 중본(中本)이며, 다섯째는 하본(下本)이요, 여섯째는 약본(略本)이며, 일곱째는 논석(論釋)이요, 여덟째는 번역(飜譯)이며, 아홉째는 지류(支流)요, 열째는 감응(感應)이다.
맨 처음 항본이라는 것은 아래 「부사의품」에 이르되 “일체의 법계 허공계와 같은 세계를 모두 하나의 털로써 두루 헤아려서 하나하나의 털끝의 처소마다 생각생각 가운데 말로는 다할 수 없는 미진 수처럼 많은 몸이 미래제의 겁이 다하도록 항상 법륜을 굴린다”라고 하였다.
해석하여 말하면 이것은 나무의 형상[樹形] 등 이류(異類)의 세계에 통하고 각각 털끝의 처소에서 생각생각에 항상 설하여 휴식함이 없다. 이것은 결집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그 품송(品頌)의 다소를 한정지울 수 없다. 또 하위(下位)가 능히 수지할 것도 아니다.
둘째 대본이라는 것은 아래 해운(海雲) 비구가 수지한 『보안경(普眼經)』과 같다. 수미산을 모은 붓과 4대해수(大海水)의 먹[墨]을 가지고 한 품의 수다라를 쓰더라도 끝까지 다할 수 없다. 이와 같은 품들은 다시 티끌처럼 많은 수를 초과한다. 이것은 모든 큰 보살의 다라니의 힘으로 수지할 것이요, 패엽으로 능히 써서 기록할 것이 아니다.
셋째 상본이라는 것은 결집한 경문 가운데의 상본이다. 그러므로 서역에서 서로 전하는 것이 있다. 용수보살이 용궁에 가서 『대부사의해탈경』을 보니 3본(本)이 있었다. 상본은 10삼천대천세계 미진수와 같이 많은 송(頌)과 4천하 미진수와 같이 많은 품이 있었다고 한다.
넷째 중본이라는 것은 49만 8천8백 개의 게(偈)와 1천2백 품이 있다.
이 위의 두 본은 모두 비장하여 용궁에 두었으니 염부제 사람의 힘으로 수지할 바가 아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전하지 않는다.
다섯째 하본(下本)이라는 것은 10만 송(頌) 38품이다. 용수는 이 하본을 가지고 출현하여 천축에 전했으니, 곧 『섭론』의 ‘백천(百千)’이란 10만을 말하는 것이다. 『서역기』에 이르되 “우전국(于闐國)의 남쪽에 있는 자구반국(遮俱槃國)의 산중에 이 하본이 갖추어져 있다”라고 하였다.
여섯째 약본(略本)이라고 하는 것은 곧 이 땅[此土]에 전한 60권 본이다. 이것은 저 10만 송 가운데 전분(前分)의 3만 6천 송을 요약하여 내놓은 것이다. 근래 대자은사(大慈恩寺) 탑 위의 범본 화엄을 보니 세 부가 있었다. 대략 견주어 보니 이 한본(漢本)과 상당히 유사하며 송(頌)의 수도 서로 비슷하다.
일곱째 논석이라는 것은 용수가 이미 하본을 가지고 나옴으로 인하여 『대부사의론(大不思議論)』을 지었고, 10만 송으로써 이 경을 해석하였다. 지금의 『십주비바사론』은 이 책의 일부분이다. 진조(秦朝)의 야사 삼장(耶舍三藏)은 송으로써 이것을 번역했다. 열여섯 권의 본문은 겨우 제2지(地)에 이르고 나머지는 다 부족하다.
또 세친보살은 『십지론』을 지어서 다만 「십지품」 한 품만을 해석하였다. 위조(魏朝)의 늑나(勒那) 삼장과 보리유지(菩提留支)가 낙양에서 각각 한 본씩 번역하였고, 광통(光統) 율사는 스스로 범문을 해석하고 두 삼장은 임금 앞에 함께 모여서 한 책을 이루었다. 현재 전하는 것은 이것이다.
금강군(金剛軍)보살과 견혜(堅慧)보살은 각각 10지의 해석을 지었지만 이 책은 모두 이 땅에 전해지지 않는다.
또 위조(魏朝)에 이 땅의 고승 영변(靈辯) 법사가 오대산에서 『화엄경』을 머리에 이고 무릎으로 걸으며 은근(慇懃)히 하여 발이 터지고 피가 흘렀다. 드디어 3년이 지나서 명가(冥加)를 입어 해오(解悟)하여 현옹산(顯瓮山)에서 이 경의 논 1백여 권을 지어 현재 세상에 전한다. 뒤에 법사를 조칙으로 불러서 내전으로 들게 하여 식건전(式乾殿)에서 이 대경을 강의하게 하였다.
여덟째 번역이라는 것은 동진(東晋)의 사문 지법령(支法領)이 우전국으로부터 이 3만 6천 게송의 경을 얻고 아울러 북천축의 대승삼과(大乘三果)의 보살 선사(菩薩禪師)이신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를 청하였는데, 이곳 말로는 각현(覺賢)이라고 한다. 속성은 석가씨이니 곧 감로반왕(甘露飯王)의 후손이다. 일찍이 도솔천 미륵 앞에 나아가 의심나는 점을 묻고 진(晋)나라 의희(義熙) 14년 세차(歲次) 순화(鶉火) 3월 10일에 양주(楊州)의 사사공사(謝司空寺)에서 별도로 호정법당(護淨法堂)을 짓고 그곳에서 이 경을 번역하였다. 그 때 당 앞에 연꽃이 가득 핀 한 못이 있었는데, 매일 두 사람의 청의(靑衣) 동자가 못으로부터 호정법당으로 나와서 물을 뿌리고 쓸고 공양을 올리고 저녁에는 못으로 돌아갔다. 서로 전하여 해석하여 이르기를 “이 경은 오래도록 용궁에 있었기 때문에 용왕이 이 경이 전하여 유통됨[傳通]을 경축하여 몸소 급시(給侍)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뒤에 이 일로 인하여 이 절의 이름을 흥엄사(興嚴寺)라고 고쳤다.
사문 법업(法業)과 혜엄(慧嚴)ㆍ혜관(慧觀) 등이 친히 따라서 필수(筆受)하였다. 그 때에 오군(吳郡)의 내사(內史)인 맹의(孟顗)와 우위 장군(右衛將軍) 저숙도(楮叔度) 등이 단월(檀越)의 주체가 되었다. 원희(元熙) 2년(420) 6월 10일에 이르러서야 마쳤다. 대송(大宋) 영초(永初) 2년(421) 12월 20일에 이르러서 범본(梵本)과 다시 교감(校勘)하여 끝마쳤는데 「법계품」 안에 마야부인으로부터 미륵보살 앞에 이르기까지 8, 9장[紙] 정도의 경문이 빠져 있었다. 이제 대당(大唐) 영륭(永隆) 원년(元年, 680) 3월에 천축의 삼장 지바하라(地婆詞羅)가 있었으니, 당에서는 일조(日照)라고 말한다. 이 한 품의 범본이 있어서 법장이 친히 그와 함께 교감하여 이 결문(缺文)에 대하여 조칙을 받들어 사문 도성(道成)ㆍ복례(復禮) 등과 역출(譯出)하여 보완하였다.
아홉째 지류(支流)라는 것은 이 대경은 힘에 따라 수지함으로 나누어져 여러 부[多部]를 이룬 것을 말한다.
『도사경(兜沙經)』 1권, 이것은 제2회의 처음이다.
『보살본업경(菩薩本業經)』 1권, 이것은 「정행품(淨行品)」이다.
또 『소십주경(小十住經)』 1권, 이것은 「십주품(十住品)」이다.
『대십주경(大十住經)』 4권과 『점비일체지덕경(漸備一切智德經)』 4권, 이 둘은 모두 「십지품」이다.
『여래성기미밀장경(如來性起微密藏經)』 2권, 이것은 「성기품(性起品)」이다.
『현무변불토경(顯無邊佛土經)』 1권, 이것은 「수명품(壽命品)」이다.
『도세경(度世經)』 6권, 이것은 「이세간품(離世間品)」이다.
『라마가경(羅摩伽經)』 3권, 이것은 「입법계품(入法界品)이다.
최근에 신도(神都)에서 우전의 삼장과 함께 『화엄수자분(花嚴修慈分)』 1권과 『부사의경계분(不思議境界分)』 1권과 『금강만분(金剛鬘分)』 10권을 번역하였다. 이 분(分)의 번역이 아직 이루어지기 전에 삼장은 세상을 떠났다.
지금 신도에서 다시 우전국으로부터 진상한 화엄 5만 게송 본(本)과 아울러 삼장을 얻어 현재 번역하고 있다. 자은사의 범본과 옛날의 한본(漢本)은 두 책이 꼭 같아서 다름이 없지만 새로운 범본과는 품회(品會)와 문구가 조금 다른 곳이 있다. 분명히 이 대경은 여러 본[數本]이 있는 까닭이다. 이것이 아울러 대경의 지류가 그릇에 따라서 분류(分流)한 것이다.
열째 감응이라는 것은 송나라 임금이 서쪽에서 온 삼장을 청하여 이 경을 강의하게 할 때 그 사람이 안타까워한 것은 방음(方音:방언)을 아직도 통달하지 못함으로써 설하는 것이 뜻을 다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도량에 들어가서 기도하고 청해서 겨우 7일이 지났는데 드디어 “한(漢)나라 머리와 나의 범두(梵頭)를 바꾸었다” 하는 꿈으로 인하여 곧 통달하여 송나라 말을 알아서 강의해 줌에 막힘이 없었다.
또 구롱산(九隴山)의 비구니는 이 경을 공경하고 존중하여 오로지 정성껏 독송[轉讀]하기를 20여 년에 마침내 눈에 털끝의 찰해를 보는 감응을 입었다.
또 오대산의 비구니는 항상 이 경을 외웠는데, 초저녁부터 새벽이 될 때까지 한 부(部)를 마치면 입 속에 광휘(光輝)가 있어 널리 산골짜기를 비추었다.
또 북제(北齊)의 거(炬) 법사는 이 경을 숭상하여 귀중하게 여겼지만 스승에게 수학하지 못하여 오로지 독송하면서 그 뜻을 알려고 기도하였다. 15년 만에 드디어 “선재가 총명해지는 약을 준다”라는 꿈을 꾸고 그로 인하여 곧 깨달아 소(疏) 10권을 지어 강의하기를 50여 번[遍]이나 하였다.
또 정주(定州) 중산(中山)의 수덕(修德) 선사는 정성을 다하여 깨끗함을 지켜서 이 경을 초사(鈔寫)하였다. 뒤에 함을 열자 거기서 빛을 발하여 1백2십 리를 비추었다.
또 엄인(閹人) 유겸지(劉謙之)는 오대산에서 오로지 이 경을 읽음으로 인하여 드디어 장부의 형상을 회복하였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의 일은 매우 많다. 다섯 권의 화엄전(華嚴傳) 속에 자세히 갖추어 설하고 있다.
아홉 번째로 의리(義理)의 분제(分齊)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의해(義海)는 넓고도 깊고 미언(微言)은 호한(浩汗)하므로 간략하게 10문(門)을 들어서 그 강요(綱要)를 밝히겠다. 첫째는 동시구족상응문(同時具足相應門)이요, 둘째는 광협자재무애문(廣狹自在無礙門)이며, 셋째는 일다상용부동문(一多相容不同門)이요, 넷째는 제법상즉자재문(諸法相卽自在門)이며, 다섯째는 은밀현료구성문(隱密顯了俱成門)이요, 여섯째는 미세상용안립문(微細相容安立門)이며, 일곱째는 인다라망법계문(因陀羅網法界門)이요, 여덟째는 탁사현법생해문(託事顯法生解門)이며, 아홉째는 십세격법이성문(十世隔法異成門)이요, 열째는 주반원명구덕문(主伴圓明具德門)이다.
그러나 이 10문은 동일연기(同一緣起)로서 무애원융(無礙圓融)하여 한 문[一門]이 있음을 따라서 곧 일체를 갖춘다. 마땅히 생각해 볼지어다.
첫째 문 가운데에 나아가 열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교의구족(敎義具足)이요, 둘째는 이사(理事)이며, 셋째는 경지(境智)요, 넷째는 행위(行位)이며, 다섯째는 인과(因果)요, 여섯째는 의정(依正)이며, 일곱째는 체용(體用)이요, 여덟째는 인법(人法)이며, 아홉째는 역순(逆順)이며, 열째는 응감구족(應感具足)이다.
중생에게 기감(機感)이 있으면 여래가 응부(應赴)한다. 아래에 이르되 “모든 중생이 즐겨하는 것에 의해서 시현하는 구름[雲]”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10대(對)는 동시에 서로 상응해서 한 연기가 된다. 하나를 따라서 각각 나머지 일체의 뜻을 갖춘다.
초문(初門)이 이미 그러함과 같이 나머지 광협(廣狹) 등의 9문(門)도 다 각각 앞의 10대를 갖춘다. 다만 문(門)을 따르는 것만이 따를 뿐이다. 이런 까닭에 하나하나의 문마다 그 안에 십, 백, 천 등이 있다. 이것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또 하나의 사법(事法) 위에 이 10대를 가릴 수 있으니 나머지는 이에 준거해 보면 알 수 있다. 아래 경문과 같다. 첫째 연꽃의 잎이 견해[解]를 내게 하는 것을 표한 것으로 교(敎)라고 하고 곧 이 소전을 의(義)라고 한다. 아래의 승음(勝音)보살 연화처에서 설한 것과 같다.
둘째 꽃의 모습[相]을 사(事)라 하고 꽃의 체(體)를 이(理)라 한다. 아래에 이르되 “법계 불가괴의 연화세계해(蓮華世界海)”라고 하였다.
셋째 꽃은 소관(所觀)이고 또한 능관(能觀)이다. 이 경에서는 내행(內行)으로써 외사(外事)를 삼기 때문이다.
넷째 행사(行事)의 꽃이 맺어서 위(位)를 이루기 때문이다.
다섯째 인사(因事)의 꽃에 의하여 과(果)를 이루기 때문이다.
여섯째 꽃의 받침은 소의(所依)이고 또한 정(正)에 드는 연고이다. 국토신 등과 같다.
일곱째 꽃의 체는 진(眞)과 같고 용은 기(機)에 응하기 때문이다.
여덟째 온전히 잡아서 사람[人]이 되고 항상 이 법(法)이기 때문이다.
아홉째 역(逆)은 5열(熱)과 같고 순(順)은 10도(度)인 까닭이다.
열째 군기(群機)에 응부(應赴)하고 또 능히 감응[感]하기 때문이다. 한 꽃의 일이 이미 그러함과 같이 나머지 모든 일도 다 이에 준거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법(事法)이 이미 그러하다면 나머지 교의 등의 모든 것도 다 그러하리니, 앞의 것에 준하여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의 10대를 갖춘 것이 이미 그러함과 같이 저 하나의 꽃잎에 앞의 10문을 갖춘 것도 또한 그러하다. 왜냐하면 이 연꽃 잎에 앞의 열 가지 뜻을 동시에 상응하여 구족원만한 까닭이다. 이것이 초문이다.
둘째는 저 꽃잎이 널리 법계에 두루 가득하되 본위(本位)를 무너뜨리지 아니함이니 분(分)은 곧 무분(無分)이고 무분은 곧 분이기 때문에 광협자재(廣狹自在)하여 막힘도 없고 걸림도 없는 것이다. 아래에 이르기를 “이 큰 연화의 잎은 일체의 법계를 널리 덮는다”고 하였다. 이런 까닭에 혹은 오직 넓기만 하여 끝이 없기도 하고, 혹은 분한(分限)이 역연하기도 하며, 혹은 넓기도 하고 좁기도 하며, 혹은 광협이 함께 없어지기도 하고, 혹은 앞의 넷을 갖추기도 하니 이것으로 경계를 알기 때문이다. 혹은 앞의 다섯 가지를 끊으니 이것으로 경계를 행하기 때문이다. 아래는 모두 이것에 준거해 보라.
셋째는 곧 이 꽃잎이 자기 자신을 펼쳐서 널리 모든 법계 속에 들어가고 곧 모든 것을 섭수해서 자기 속에 들어오게 한다. 펼치고 섭수함을 동시에 하되 이미 장애할 것이 없으니, 이런 까닭에 용융(鎔融)하다. 혹은 4구와 6구가 있으니, 앞의 것을 준하여 생각하라. 아래에 이르기를 “한 불토로써 시방을 채우고 또 시방을 하나 속에 넣어도 또한 남음이 없다”라고 하였다.
넷째는 이 한 꽃잎이 자기를 폐하여 다른 이와 같게할 때 전체[擧體]가 온전히 곧 저 모든 법이며, 항상 다른 것을 섭수하여 자기와 같게할 때 온전히 저 모든 것이 곧 자기 몸이다. 일(一)과 다(多)가 상즉하고 혼융하여 장애할 것이 없다. 해(解)와 행(行)의 경계와 다름에 의해서 6구가 있는 것이 앞에서와 같다. 아래에 이르되 “일이 곧 다이고 다가 곧 일[一卽多多卽一]임을 안다”고 하는 것이다.
다섯째는 꽃이 능히 저것을 섭수할 때에는 곧 일은 나타나고 다는 숨는다. 일체가 꽃을 섭수할 때에는 곧 일은 숨고 다는 나타난다. 나타남[顯]과 나타남은 함께 하지 못하고, 숨음[隱]과 숨음도 함께 하지 못한다. 숨음과 나타남, 나타남과 숨음이 동시에 걸림이 없어서 온전히 섭수함[全攝]과 함께함[俱]과 없앰[泯]과 존재[在]함과 없어짐[亡]이 함께 이루어진다. 구수(句數)는 앞에서와 같다. 아래에 이르기를 “동방에서 정수(正受)에 들어감을 보고 서방에서 삼매로부터 일어남을 본다”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여섯째는 이 꽃잎 가운데 미세한 세계[刹] 등의 모든 법이 환하게 밝아서 가지런히 나타나는 것이다. 아래에 이르되 “한 티끌 속에 지극히 작은 국토가 광연(曠然)히 안주한다”라고 하였다.
일곱째는 꽃잎의 하나하나마다 작은 먼지 가운데 각각 다 합하여 가없는 찰해(刹海)를 나타내고, 찰해 가운데 또 작은 먼지가 있고 저 모든 먼지 속에 다시 찰해가 있어서 이와 같이 중중하여 다할 수 없다. 이것은 심식의 사량으로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제석 그물의 천주(天珠)가 투명하게 밝아서 서로서로 그림자를 나타내고 그림자는 또다시 그림자를 나타내어 그리 하고도 다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아래에 이르기를 “인다라망세계(因陀羅網世界) 등과 같다”고 하였다.
여덟째는 이 꽃잎을 보면 곧 다함이 없는 법계를 보는 것으로 이것이 여기에 의탁하여 별도로 표하는 것이 없다. 아래에서 “이 화개(花蓋) 등은 무생법인으로부터 일어난 것이다”라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아홉째는 곧 이 한 꽃은 이미 갖추어 모든 처소에 두루하고 또다시 모든 시간[時]을 포섭했다. 이를테면 삼세가 각각 셋씩 있어서 섭수하여 일념이라고 한 까닭에 10세가 된다. 시간에 따로 체가 없기 때문에 꽃에 의지하여 성립되고 꽃이 이미 걸림이 없기 때문에 시간도 또한 그와 같다. 이러한 까닭으로 아래에 이르기를 “과거 일체 겁을 미래와 지금에 안치하고 미래 일체 겁을 돌리어 과거세에 둔다”라고 하였다. 또 이르되 “무량겁이 곧 일념이고 일념이 곧 무량겁이다”라고 한 것 등이다.
열째는 이 원교의 법은 이치가 홀로 일어남이 없고 반드시 권속이 따라서 생긴다. 아래에 이르되 “이 꽃에 세계해의 작은 먼지처럼 많은 연꽃이 있으니 그것으로 권속을 삼는다”라고 하였으며, 또 “일방(一方)을 주(主)로 하면 시방을 반(伴)으로 하는 것과 같다. 나머지 방소도 또한 그러하다”라고 했다. 이런 까닭에 주(主)와 주, 반(伴)과 반은 각각 서로 보지 못하고 주와 반, 반과 주라야 원만하고 밝게 덕을 갖춘다. 하나의 사화(事華)가 스스로 열 가지 뜻을 띠고 이 열 가지 문(門)을 갖추어 백 문이 되는 것과 같이 나머지 교의(敎義) 등도 또한 여기에 준거하기 때문에 천 문이 된다. 교의 등이 자류(自類)의 10의(義)와 동시(同時) 등의 10문을 바라보므로 이 천 문이 있는 것과 같이 저 동시 등도 또한 자류의 10문과 교의 등을 바라보아 또한 천 문을 이루나니, 이것을 준거하여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문】 무슨 인연이 있어서 이 모든 법으로 하여금 이와 같은 혼융무애함이 있을 수 있는가?
【답】 인연은 한량없어서 갖추어 진술하기 어렵다. 간략하게 열 가지 종류를 들어서 이 무애를 해석하겠다.
첫째 연기가 서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둘째 법성이 융통하기 때문이다.
셋째 각각 유심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넷째 환(幻)과 같아서 실답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섯째 크고 작음이 결정됨이 없기 때문이다.
여섯째 한없는 원인이 생기기 때문이다.
일곱째 과덕(果德)이 원만하고 지극하기 때문이다.
여덟째 승통자재(塍通自在)하기 때문이다.
아홉째 삼매대용(三昧大用)인 까닭이다.
열째 난사해탈(難思解脫)인 까닭이다.
처음 연기가 서로 말미암기 때문이라고 한 것은 대법계 가운데 연기의 법해에는 의문(義門)이 한량없다. 원종(圓宗)에 나아가서 간략하게 열 가지 문을 들어서 앞의 뜻을 해석하겠다. 모든 연기법은 반드시 이 열 가지 뜻을 갖추어야 비로소 연기한다. 그러므로 빠짐이 있으면 곧 이루어지지 못한다.
첫째는 모든 연이 각각 다르다[諸緣各異]는 뜻이니, 이를테면 대연기 가운데 모든 연을 서로 바라보면 반드시 체와 용이 각각 달라서 서로 화잡(和雜)하지 않아야 비로소 연기를 이룬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모든 연은 잡란하여 본연의 법을 잃게 되어 연기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곧 모든 연이 각각 스스로의 일(一)을 지키는 것이다.
둘째는 호변상자(互遍相資)의 뜻이니, 이를테면 이 모든 연은 반드시 서로 변응(遍應)하여야 비로소 연기를 이룬다. 또 일연(一緣)이 다연(多緣)에 변응함과 같음을 말하며 각각 저 다(多)로 더불어 온전하게 일(一)이 된다. 그러므로 이 일은 곧 다개(多箇)의 일을 갖추는 것이다. 만약 이 일연이 다의 일[多一]을 갖추지 못하면 곧 자응(資應)이 두루하지 못하여 연기를 이루지 못한다. 이것이 곧 일일(一一)이 각각 일체의 일을 갖추는 것이다.
셋째는 구존무애(俱存無礙)의 뜻이니, 이를테면 무릇 이 일연은 반드시 앞의 두 가지를 갖추어야 비로소 연기를 이룬다. 반드시 스스로의 일에 머무름으로써 비로소 변응하고 다연에 변응하는 것도 곧 이 일(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유일(唯一)과 다일(多一)은 자재 무애하다. 이 용융(鎔融)으로 말미암아 6구가 있다. 혹은 전체를 온전하게 주(住)함이 곧 유일(唯一)이다. 혹은 전체를 변응함이 곧 다일(多一)이라고 한다. 혹은 함께 존재하고 혹은 같이 없어진다. 혹은 총합하고 혹은 온전히 여의는 것도 모두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이 위의 세 문은 총괄적으로 연기의 본법을 밝히는 일을 마친다.
넷째는 이문상입(異門相入)의 뜻이니, 이를테면 모든 연의 역용(力用)은 서로 의지(依持)하고 서로 형탈(形奪)하기 때문에 각각 전력(全力)과 전무력(全無力)의 뜻이 있어서 연기가 비로소 이루어진다. 논에 말한 것과 같이 “인으로부터 생기지 않고 연으로 생기기 때문이다. 연으로 생기지 않고 인으로부터 생기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만약 각각 오직 유력(有力)뿐이고 무력(無力)이 없으면 곧 다과(多果)의 허물이 있다. 하나하나마다 각각 생기기 때문이다. 만약 각각 오직 무력뿐이고 유력이 없다면 곧 무과(無果)의 허물이 있다. ‘같은 연이 아님으로 해서 함께 생기지 않기 때문이니 이런 까닭에 연기는 반드시 서로서로 의지해서 역(力)과 무력(無力)을 갖춘다. 일연을 궐(闕)할 때는 일체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과 같이 나머지도 또한 이와 같다.
이런 까닭에 일이 능히 다를 가질 때는 일은 유력으로서 능히 다(多)를 섭수하고 다가 일에 의지할 때는 다는 곧 무력으로서 일에 잠입한다. 일의 유력은 반드시 다의 유력과 함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일로서 다를 섭수하지 못함은 있을 수 없다. 다의 무력은 반드시 일의 무력과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다로서 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 없다. 일(一)이 가지고 다(多)가 의지하는 것이 이미 그러한 것과 같이 다가 가지고 일이 의지하는 것도 또한 그러하다. 위의 것을 돌이켜 생각해 보라. 이는 곧 또한 다가 일을 섭수하지 못함이 없고 일이 다에 들어가지 못할 것도 없다. 일이 다를 바라봄에 의(依)가 있고 지(持)가 있으며 전력이 있고 무력이 있어서 항상 다를 온전히 하여 자기 가운데 있게 하며 자기를 잠입시켜 다 가운데 있게 하여 동시에 걸림이 없다. 다가 일을 바라볼 때도 마땅히 또한 그러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구존(俱存)과 쌍민(雙泯)의 두 구절이 걸림이 없는 것도 생각하여 준거해 보라.
다섯째는 이체상즉(異體相卽)의 뜻이니, 이를테면 모든 연이 서로 바라보건대 전체형탈(全體形奪)하여 유체(有體)와 무체(無體)의 뜻이 있어서 연기가 비로소 이루어진다. 만일 하나의 연[一緣]이 빠지면[闕] 나머지도 일어날 수가 없다. 일어날 수 없기 때문에 연의 뜻은 곧 무너지며 이 일연(一緣)을 얻을 때에는 일체로 하여금 일어남을 이룬다. 일어나는 바[所起]가 이루어지므로 연의 뜻이 비로소 성립된다. 이러한 까닭에 하나의 연은 곧 능기(能起)이고 다연(多緣)과 과(果)는 모두 소기이다. 이것이 곧 다는 일을 위하여 이루어짐으로써 다는 곧 무체이고, 일은 능히 다를 지음으로써 일은 곧 유체이다. 일의 유체는 반드시 다의 유체와 함께할 수 없고, 다의 무체는 반드시 일의 무체와 함께할 수 없음을 말미암는다. 이런 까닭에 다가 아닌 일은 있을 수 없고, 일이 아닌 다도 있을 수 없다. 일과 다가 이미 그러한 것과 같이 다와 일도 또한 그러하다. 위를 돌이켜 생각해 보라. 일이 다를 바라볼 때 유체와 무체가 있기 때문에 능히 다른 것을 섭수하여 자기와 같게 하는 것과 자기를 폐하여 다른 것과 같게 하는 것이 동시에 걸림이 없는 것과 같이, 다가 일을 바라볼 때에도 마땅히 또한 그러함을 알아야 한다. 앞의 것에 준거해 보면 이것을 알 수 있다. 구존(俱存)과 쌍민(雙泯) 두 구절의 무애도 또한 이것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여섯째는 체용쌍융(體用雙融)의 뜻이니, 이를테면 모든 연의 법은 반드시 역용(力用)이 교섭하고 전체가 융합해야 비로소 연기를 이룬다.
이런 까닭에 원통(圓通)에도 또한 여섯 구절이 있다.
첫째 체는 용 아님이 없기 때문에 전체[擧體]가 온전히 용이니, 오직 상입(相入)만 있고 상즉(相卽)의 뜻은 없다.
둘째 용은 체 아님이 없는 까닭에 곧 오직 상즉만 있고 상입은 없다.
셋째 체에 돌아가는 용은 용을 장애하지 않고, 용을 온전히 하는 체는 체를 잃지 않는다. 이것이 곧 두 가지가 모두 있어도 장애됨이 없음으로써 또한 입(入)하고 또한 즉(卽)해서 자재하게 함께 나타남이다.
넷째 용을 온전히 하는 체는 체를 없애고 체를 온전히 하는 용은 용을 없애기 때문에 즉(卽)함도 아니고 입(入)함도 아니어서 원융일미(圓融一味)하다.
다섯째 앞의 네 구절을 합쳐서 동일하게 연기하여 함께 존재함을 장애함이 없다.
여섯째 앞의 다섯 구절을 없애서 절대이언(絶待離言)할 때는 성해(性海)에 가만히 합하여 같아진다.
이 위의 세 문은 처음 이체문(異體門)에 의리(義理)를 나타낸 것이니 마친다.
일곱째는 동체상입(同體相入)의 뜻이니, 이를테면 앞의 일연이 갖춘 다일(多一)과 저 일연은 체가 다름이 없는 까닭에 동체라고 이름한다. 또 이 일연이 다연에 응함을 말미암기 때문에 곧 다일이 있고, 소응(所應)의 다연은 이미 상즉하고 상입함으로써 이 다일로 하여금 또한 즉입함이 있게 된다. 먼저 상입을 밝히겠다. 이를테면 일연(一緣)이 유력(有力)하여 능히 다일을 가질 때는 다일은 무력하여 저 일연에 의지한다. 이런 까닭에 일은 능히 다를 섭수하고 다는 곧 일에 들어간다. 일이 입(入)하고 다가 섭수하는 것도 위에 반하여 마땅히 알 수 있다. 나머지 뜻과 나머지 구(句)는 앞에 준거하여 생각해 보라.
여덟째는 동체상즉(同體相卽)의 뜻이니, 이를테면 앞의 일연이 갖춘 다일에도 또한 유체와 무체의 뜻이 있기 때문에 이 또한 상즉이다. 다일의 무체가 본일(本一)을 말미암아 이루어지므로 다는 곧 일이다. 본일이 유체여서 능히 다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일로 하여금 다를 섭수하게 한다. 일의 유(有)와 다의 공(空)이 이미 그러한 것과 같이 다의 유와 일의 공도 또한 그러하다. 나머지 뜻과 나머지 구는 모두 앞에 준거하여 생각해 보라.
아홉째는 구융무애(俱融無礙)의 뜻이니, 이를테면 또한 앞의 체용쌍융(體用雙融)해서 즉입자재(卽入自在)하다고 한 것과 같다. 또한 여섯 구가 있음도 앞에 준거해 보면 알 수 있다.
이 위의 세 문은 앞의 제2의 동체문 가운데 의리를 분별하여 마친다.
열째는 동이원비(同異圓備)의 뜻이니, 이를테면 앞의 아홉 문으로써 총합하면 하나의 대연기가 되기 때문이다. 여러 종류의 의문(義門)으로 하여금 동시에 구족함을 이룬다. 일에 머물러 두루 응함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광협자재(廣狹自在)하고, 체에 나아가고 용에 나아감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상즉과 상입이 있다. 일이 다를 섭수할 때를 현(顯)이라고 함으로 말미암아 일로 하여금 다에 들어가게 함을 은(隱)이라고 한다. 다가 섭수하는 것도 또한 그러하다. 또 용에 나아가서 상입하는 것을 현이라고 하고, 체에 나아가서 상즉하는 것을 은이라 한다. 즉을 현이라고 하고 입을 은이라고 하는 것도 또한 그러하다. 또 이문(異門)의 즉입을 현이라고 하고, 동체로 하여금 은이 되게 한다. 동(同)을 현으로 하고 이(異)를 은으로 하는 것도 또한 그러하다. 또 이문으로써 동체 속에 섭수하여 상입하는 뜻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미세문(微細門)을 나타낸다. 이체의 상입에 동체의 상입을 띠기 때문에 중중무진제망문(重重無盡帝網門)이 있다. 이 대연기의 법은 곧 무애법계의 법문을 말미암는 까닭에 탁사현법문(託事顯法門)이 있다. 이 융통자재를 말미암아 이제 이 법의 위에 의해서 분별하는 시법(時法)도 또한 이것을 따라서 무애자재하므로 10세의 문이 있다. 이 법문은 동일연기하여 서로 띠고 일어남[帶起]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한 문을 따라서 반드시 일체를 갖춘다. 그러므로 주반문(主伴門)이 있다.
이 한 문은 앞의 제3 문 가운데 의리를 분별한 것이다.
이상 열 가지 뜻에 의하여 이 연기상유문(緣起相由門)을 모두 마친다. 나머지 문은 『지귀』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047_0458_a_02L花嚴經探玄記卷第一魏國西寺沙門 法藏 述歸命大智海 十身盧舍那 充遍諸法界無上大慈尊 方廣離垢法 圓滿解脫輪普賢文殊等 海會大菩薩 我在具縛地悕心大法門 唯願見加哀 令增念智力開此祕奧藏 廣益於自他 願令法久住傳燈報佛恩夫以法性虛空廓無涯而超視聽智惠大海深無極而抗思議眇眇玄猷名言罕尋其際茫茫素範相見靡究其源但以機感萬差奮形言充法界心境一味泯能所而歸寂寥體用無方圓融叵測於是無像現像猶陽谷之昇大陽言示言若滄波之傾巨壑是故創於蓮華藏界演無盡之玄綱牢籠上達之流控引令階佛境然後化霑忍土漸布慈雲灑微澤以潤三根滋道牙而歸一揆是知機緣感異聖應所以殊分聖應雖殊不思議一 也 花嚴經者斯乃集海會之盛談照山王之極說理致宏遠盡法界亘眞源浩汗微言等虛空而被塵國於是無虧大小潛巨剎以入毫端未易鴻纖融極微以周法界故以因陁羅網參互影而重重錠光玻瓈照塵方而隱隱一卽多而無礙多卽一而圓通攝九世以入剎那舒一念而該永劫三生究竟堅固種而爲因十信道圓普德顯而成果果無異因之果派五位以分鑣因無異果之因摠十身以齊致是故覺母就機於東城六千疏其十童子詢友於南國百十成以一生遂使不越元呂樹王六天斯屆詎移花藏十剎虛融示寶偈於塵中齊輝八會啓王珠於性德七處圓彰浩浩鏗鋐隔思議而迥出巍巍煥爛超視聽於聾盲是故舍那創陶甄於海印二七之旦爰興龍樹終俯察於虯宮六百年後方顯然卽大以包含爲義方以軌範爲功廣卽體極用周佛乃果圓覺滿花譬開敷萬行嚴喩飾茲本體經卽貫穿縫綴能詮之教著焉從法就人寄喩爲目故云大方廣佛花嚴經世閒淨眼品者器等三種顯曜於時光潔照明況於淨眼法喩合擧故云世間淨眼語言理一格類相從故稱爲品此經有三十四品此品建初故稱第一故言大方廣佛花嚴經世閒淨眼品第一餘義如下說將釋此經略開十門 一明教起所由 二約藏部明所攝 三顯立教差別 四簡所被機五辨能詮教體 六明所詮宗趣 七具釋經題目 八明部類傳譯 九弁文義分齊十隨文解釋初教起所由者先摠弁後別顯 摠者夫大教興因緣無量故智論之初廣辨般若教起緣如須彌山不以無事及小因緣而能令動佛亦如是大因緣故而有所說所謂般若波羅蜜流行世閒廣益群品故也法華亦云如來爲一事因緣故出現于世所謂開示悟入佛知見等此經下云如來應供等正覺性起正法不可思議所以者何非少因緣成等正覺出興于世以十種無量無數百千阿僧祇因緣成等正出興于世何等爲十一者發無量菩提之心不捨一切衆生如是等乃至廣說應知 次別顯者略提十義以明無盡何者爲十 謂由法爾故 願力故  機感故  爲本故 顯德故顯位故 開發故 見聞故成行故得果故 初法爾故者一切諸佛法爾皆於無盡世界常轉如此無盡法輪如大王路法爾常無停無息盡窮未來際是故下文不思議品一切法界虛空等世界悉以毛端周遍度量一一毛端處於念念中化不可說不可說佛剎微塵等身乃至盡未來際劫一一化佛身有不可說不可說佛剎微塵等頭一一頭有不可說不可說佛剎微塵等舌一一舌出不可說不可說佛剎微塵等音聲一一音聲說不可說不可說佛剎微塵等修多羅一一修多羅說不可說不可說佛剎微塵等法一一法中說不可說不可說佛剎微塵等句身味身復不可說不可說佛剎微塵等劫說異句身味身音聲充滿法界一切衆生無不聞者盡一切未來際劫常轉法如來音聲無異無斷不可窮盡解云准此經文於一毛端處於一念中出於如上業用餘念念中皆亦如是如一毛端處如是念念業用無餘一一毛端次第周遍虛空法界等一切世各皆如是無盡無盡此卽處以毛端該於法以剎那盡於劫海謂於此處明頓起業用謂於此時明常起業用此亦不待因緣諸佛法此經下文所說皆爾若爾何故處唯八會時局二七耶舍那品云一一微塵中佛國海安住佛雲遍護念彌綸覆一切又云一毛孔中無量佛剎莊嚴淸淨曠然安住彼一切處盧舍那佛於衆海中演說正法解云況八會處而不該攝十方法界又發心品云知無量劫卽一念一念卽是無量劫解云況二七日時不攝無量劫海不思議品云一切諸佛於一微塵中普現三世一切佛剎於一微塵中普現三世諸佛自在神力於一微塵中普現三世一切衆生於一微塵中普現三世一切諸佛佛事解云此中塵內三世通括一切前後際劫是謂諸佛法爾常說故也 二願力故者謂是如來本願力故此教法稱機顯現是故盧舍那品云十方國土中一切世界海佛願力自在普現轉法輪又云盧舍那佛神力故一切剎中轉法輪普賢菩薩願音聲遍滿一切世界海解云卽是此經該於十方虛空法界等一切世界及諸塵內諸剎土同時說此經者皆是本師願力所致是故下諸會初皆云盧舍那佛本願力故又雲集品頌無量無數劫此法甚難値若有得聞者當知本願力解云此卽由佛願力令衆得聞又云來不出世亦無有涅槃以本大願力顯現自在 三機感故者如來平等無有改易隨應衆生現身說法此有三義一以佛果色聲淸淨功德爲增上緣應彼機感以成攝化雲集偈云眼有日光能見微細色最勝神力故淨心見諸此現身也又法界品云佛於過去行得一微妙音無心於彼此而能應一切此說法也二佛果無有色聲麤但以平等理智增上願力機感相應有形言雲集偈云三世一切佛法身悉淸淨隨其所應化普現妙色身又云一切諸如來無有說佛隨其所應化而爲演說法三通上二義有無無礙以稱法界無障礙故舍那品云佛身充滿諸法界普現一切衆生前應受化器悉充滿佛故處此菩提樹一切佛剎微塵等爾所佛坐一毛孔皆有無量菩薩衆各爲具說普賢行解云正是此經所說分齊 四爲本故者謂將欲逐機漸施末教故宜最初先示本法明後依此方起末故是故最初說此經法然後方於鹿園等漸說枝末小乘等法又下性起品云猶如日出先照高山等如下立教中引說 五顯德故謂顯佛果殊勝之德令諸菩薩信向證得有二種一依果謂蓮花藏莊嚴世界海二正果謂如來十身通三世閒等竝如下文說此二無礙有四句一依內現依如塵內現剎海二正內現正如毛孔現佛等三正內現依如毛孔現剎四依內現正如塵內現佛等是故隨擧一門卽攝一切無不皆盡竝如下說爲顯此果德說是經 六顯位故者爲顯菩薩修行佛因道至果具五位故此亦二種一次第行布門十信十解十行十迴向十地滿後方至佛地微至著階位漸次二圓融相攝門謂一位中卽攝一切前後諸位是故一一位滿皆至佛地二無礙廣如下文諸會所說 七開發故者欲開發衆生心中如來之藏性起功德令諸菩依此修學破無明㲉顯性德故此亦有二種一以言說顯示令知有故二教其修行得顯現如下文破微塵出經卷等具如彼說 八見聞故者示此無盡自在法門唯是極位大菩薩而令下位諸衆生等於此見聞而得成彼金剛種子不毀不盡要當令其至究竟位故也如性起品說 九成行故者謂爲示此普法諸菩薩成普賢行一行卽一切行初發心時便成正覺具足惠身不由他悟又云菩薩受持此少作方便疾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等亦二種一頓成多行二遍成普行竝如下說十得果故者令得佛地智斷果故亦有二種斷果謂除障故卽普賢品明一障一切障小相品明一斷一切斷廣如下說二智果謂成德故具足十身盡三世間逆順自在依正無礙如不思議品等說此上略由顯示如是十義令此經教興起故也第二藏部明攝者略顯十義以明收攝一明三藏 二顯所攝 三辨二藏四釋相違五開種類 六定所攝 七一部收八三部攝九或九部 十具十二 初明三藏者一名修多羅或云修妒路或云素呾囕此云契經契有二義謂契理故合機故經亦二義謂貫穿法相攝持所化故貫穿者世親釋云謂能貫穿故相故法故義故名素呾囕謂於是處由此爲而有所說名之爲依眞俗諦相名之爲相善巧法等名之爲法隨密意等以說諸法名之爲義又無性釋爲貫穿縫綴解云貫穿是契入縫綴是契合義謂以聖言貫穿義理令不散令不隱沒縫綴連合令成詮表令得夂住地論云能貫能攝故名爲經以佛聖教貫穿攝持所應說義及所化生名爲契經契理之經依主釋也契經卽藏持業釋也又雜心五義一涌二出生三顯示四繩墨五結鬘正翻名線故稱經謂線能貫華經能持緯義用相似但以此方重於經名不貴線稱是故翻譯逐其所廢線存經從譬立名 二毘奈耶此云調伏調者和御伏者制滅調和控御身語等業制伏除滅諸惡行故此是所詮行謂調伏之藏也或翻名滅滅有三義一滅業非二滅煩惱三得滅果或云尸羅此名淸涼三業過非猶如火燃戒能息滅故云淸涼十誦律中名爲性善或云守信如昔所受實能持故或云波羅提木叉此云隨順解脫由持戒故順至解脫亦名別解脫三名阿毘達摩藏達摩名法阿毘有七義一名對法此有二義一對向謂因智趣向涅槃果故二對觀謂果智觀證涅槃滅故雖因智亦有對然以仰進修故但名對向世親攝論云此法對向無住涅槃能說諸諦菩提分等諸妙門故此約因智說此唯所詮二名數法梁攝論釋云諸法中隨一法或以名相或以別相或以通相數數顯此一法故名數法三名伏法者彼論此法能伏諸說立破二能由正說依止等方便故故名伏四名通法此能通釋契經義故經稱法此法能通彼卽法之通梁攝論名解法由阿毘達摩修多羅義易解故也五名無比法六名大法七名釋法此三唯約所詮又順正理或契經名爲達摩論能決了名爲對法此卽以教對教同上通法或云摩得勒伽此云本母以教與義爲本爲母亦名分別解說或云優波提舍此云論義雜集中名解釋也此契經等上三種皆含攝所詮出生義理俱名爲藏莊嚴論第四云彼三及此二云何名藏由攝故謂攝一切所應知義也初藏通持業依主後二藏唯依主以從所詮爲名故餘出體性及諸門分別廣如別說 第二顯所攝者此經何藏攝者唯契經攝以非餘二故或二攝以有決擇義理對法收故或三攝下文亦顯諸戒行故此約同教辨或是下文十藏所攝以主伴具足顯無盡此約別教三藏據教十藏約義如何以義而云攝教若小乘教義俱不融三乘義融教不融一乘教義俱融是故得攝如意言無分別觀入教攝等三乘中已有況一乘耶但標召表示卽屬教攝思之可見 第三約辨二藏者聲聞藏菩薩藏初者約聲聞小根立三藏教示聲聞理行果等爲聲聞藏二約菩薩大根三藏教詮示菩薩所行等法爲菩薩藏莊嚴論第四云此三藏由上下乘差別故復說爲聲聞藏及菩薩藏 第四釋相違者問經中亦云求緣覺者說十二因緣何故不名緣覺藏耶以諸緣覺亦唯斷我執唯證生空果成羅漢滅不殊望於菩薩俱是下乘故不別說等俱是下何故獨名聲聞藏以緣覺亦有出無佛世無教者故聲聞不爾故偏得名小乘教中亦有詮示菩薩乘法何不亦名菩薩藏耶彼宗菩薩所斷所證所入涅槃亦與二乘無差別故又以菩薩唯一不多故亦不說若爾何故普超三昧經三藏品及入大乘論說彼三乘卽爲三藏一聲聞藏二緣覺藏三菩薩藏經論中皆云大乘之中有此三藏故非謂小也問卽據此文緣覺有藏與莊嚴論如何會釋前據理果不異故合也此約教行小別故分也是故二說不相違也 第五開種類者就聲聞藏中准諸經論曲開三種一諍論聲聞藏謂契經四阿含調伏五部對法二十互相違諍所說不同不妨聖果是故摠名爲諍論藏二稱實聲聞藏謂如瑜伽聲聞地及聲聞決擇詮示聲聞行位果等皆悉稱實與理相應不同婆娑及諸異論以補處所說非諸異論所能諍故是故摠名稱實聲聞藏此中所說旣與小乘諸部不豈聲聞人有兩種耶此約教中說聲聞法盡理不盡故開爲二非謂聲聞亦有差別三立聲聞藏如大乘經中爲引聲聞令迴心故立法門亦同聲聞名數而說如無作四諦及道品等如諸大乘經中說不能繁引旣非菩薩所是故名爲假立聲聞藏此中名雖同小乘義實是大何得摠說爲聲聞藏只爲此義爲假立諸聲聞人根熟迴心所學卽是菩薩藏收此假立藏於彼何用但聲聞迴心有二一勝二劣勝者一往入大不藉此藏劣猶怖是故方便同彼名數令易信受故立此門第二菩薩藏中准諸聖教亦有三類一小乘中菩薩藏謂詮示菩薩依三十四心等次第成佛亦不論於十地行位仍復不同聲聞等者是也如婆娑俱舍說二大乘共教中菩薩藏謂詮示菩薩次第行位雖說有迴心直進不同俱依十地行布漸次修至佛果如瑜伽菩薩地及諸大乘經論中說三不共教中菩薩藏詮示菩薩依普賢行位五位圓融謂一位卽一切位一行卽一切行圓極法界無礙自在始終皆齊一一位滿卽成十佛主伴具足等故智論云般若波羅蜜有二一者共謂此大品經及餘方等經與諸聲聞共說故二者不共謂不思議經不與聲聞共說故解云此中共大之小非愚法共小之大非別教是故有三菩薩藏也菩薩聲聞二藏別故卽彼二人各別得果菩薩藏中旣分三位應三種菩薩各別成佛成佛唯一但機有淺教說三類匪謂成佛體實有三今就教開不約佛體若三說俱稱理佛體亦成三若成佛理是一二說卽爲虛於一成佛通有三義以本從末門如小乘說以同聲聞故二開本異末門如共教說以與聲聞相對辨異故三末盡唯本門如不共教說二乘聾盲無對異故佛體圓融具斯三義是故三說各異佛無若干是故今菩薩藏中有此三類 第六定所攝者此經何藏攝者俱非前三聲聞藏攝於後三種菩薩藏中正唯後攝以智論中別指此經爲不共故或三類中唯除初一後二俱攝以此經中具普別故或亦通彼假立聲聞藏收以經中亦辨四諦等故或亦摠通二藏所收以聲聞藏法竝依一乘法界所流味無別 故第七一部攝者十二部中或唯約方廣一部所攝對法論說一切有情利益安樂所依處故宣說廣大甚深法名爲方廣又瑜伽說聲聞藏中無方廣故此經題目已顯現故 第八 三部攝者謂記別自說方廣以法華中說餘九部爲小乘故此經非彼故唯三攝 第九或九部攝者謂除因緣譬喩論義以涅槃第三說護大乘者受持九部除前三故 第十具十二者一是契經攝以涅槃經說始從如是終至奉行是契經故二應頌如下文具有重頌故三記別如下文具有記成佛等四諷頌如下文有直說頌等故五自說下文從定起卽說本分等六緣起如下文因請說故七譬喩如下文廣說喩故八本事如下說盧舍那等及普賢本所經本事故九本生如下說舍那等本生相故十方廣一門可知十一希如下文毛孔說法及座出衆寶柱現佛等二論義如瑜伽八十一說謂諸經典偱環硏覈摩怛理迦一切了義經皆名摩怛理迦謂於是世尊自廣分別法相等如下文明難品等說是故此經具有十二部攝也餘義如下十二部經處說藏部攝竟第三明立教差別者略提十類 一敍古說二辨是非 三述西域 四會相違五明現傳六定權實 七顯開合 八教前後九就義分教 十以理開宗 初中古來諸德立教多端難以具顯略敍十家以成龜鏡 一後魏菩提留支立一音教謂一切聖教唯是如來一圓音但隨根異故分種種如經一雨所潤等又經佛以一音演說法衆生隨類各得解等二陳朝眞諦三藏等立漸頓二教謂約漸悟機大由小起所設具有三乘之教故名爲漸卽涅槃等經若約直往頓機大不由小所設唯是菩薩乘教故名爲頓卽華嚴等經後大遠法師等亦同此說 三後魏光統律師承習佛陁三藏立三種教謂漸頓圓光師釋意一爲根未熟說無常後乃說常先空後不空等如是漸次名爲漸教二爲根熟之輩於一法門具足演說一切佛法謂常與無常不空等一切具說更無由漸故名爲頓三爲於上達分階佛境之者於如來無礙解脫究竟果德圓極祕密自在法故名爲圓卽以此經是圓頓所攝後光統門下遵統師等亦皆宗承同於此說 四齊朝大衍法師等立四宗教一因緣宗謂卽小乘薩婆多等部二假名宗謂成實論及經部等說三不眞宗謂諸部般若說卽空理明一切法不眞實四眞宗謂華嚴涅槃明法界眞理佛性等故五護身法師等立五宗教謂此於前第四宗內開眞佛性以爲眞宗卽涅槃等經第五名法界卽花嚴明法界自在無礙法門 六陳朝南嶽思禪師智者禪師等立四教一三藏教亦名小乘教如法華云不得親近小乘三藏學者論中說小乘爲三藏大乘名摩訶衍藏二名通亦名漸教謂大乘經中通說三乘通被三根又如大品中乾惠等十地通三乘者是也名別教亦名頓教謂諸大乘經中所說法門道不通小乘等者是也四名圓教亦名祕密教謂法界自在具足圓滿一卽一切一切卽一無礙法門亦華嚴等是也 七唐朝海東新羅國元曉法師造此經疏亦立四教一三乘別教如四諦教緣起經等二三乘通教謂如般若教深密經等三一乘分教如瓔珞經及梵網等一乘滿教謂花嚴經普賢教釋此四別如彼疏 八唐吉藏法師立三種教爲三法輪一根本法輪卽花嚴經最初所說二枝末法輪卽小乘等於後所說三攝末歸本法輪卽法華經四十年後說迴三入一之教具釋如彼 九梁朝光宅寺雲法師立四乘教謂如法華中臨門三車卽爲三乘四衢道中所授大白牛車卽爲第四乘以臨門牛車亦同羊鹿俱不得故若不爾者長者宅內引諸子時云此三車只在門外子出宅卽應得車如何出已至本所指車所住而不得故後更索耶故知是㩲同羊鹿也是大乘中權教方便說故具釋如彼法華疏中十唐江南印法師敏法師等立二教一釋迦經名屈曲教以逐機性隨計破著故如涅槃等盧舍那經名平道教以逐法性自在說故如花嚴等彼師釋此二教略有四別一主異謂彼釋迦化身所說此是舍那十身所說二處異謂彼說在娑婆世界木樹草座此說在於蓮華藏世界寶樹金座三衆異彼與聲聞及菩薩說此唯菩薩極位同說四說異謂彼但是一方所說要該於十方同說廣釋如彼花嚴疏中第二辨是非者此上十家立教諸德竝是當時法將英悟絕倫如思禪師智者禪師等神異感通迹參登位靈山聽法憶在於今雲法師依此開宗講法華感天雨華等竝如僧傳等所顯又此諸德豈夫好異故分聖教但以解該群典異軫呈根言不得已開宗別釋務令聖說各契其宜問此上十說誰是誰非依成實論佛說內外中閒之言遂卽入定有五百羅漢各釋此言佛出定後同問世尊誰當佛意佛言竝非我意諸人問佛旣不當佛意將無得罪佛言雖非我意順正理堪爲聖教有福無罪況此諸說各有少多聖教爲證是故不可全非棄耳 第三述西域說者眞諦三輪笈多四教波頗五說竝如別又法藏於文明元年中幸遇中天竺三藏法師地婆訶羅唐言日照於京西大原寺翻譯經余親于時乃問西域諸德於一代聖教頗有分判㩲實以不三藏說云近代天竺那爛陁寺同時有二大德論師一名戒賢二稱智光竝神解超倫聲高五印群耶稽顙異部歸誠大乘學人仰之如日月獨步天竺各一人而已以所承宗別立教不同謂 戒賢卽遠承彌勒無著踵護法難陁依深密等經瑜伽等論立三種教謂佛初鹿園說小乘法雖說生空然猶未說法空眞理故非了義卽四阿含等經第二時中雖依遍計所執自性說諸法空然猶未說依他成唯識道理故亦非了義卽諸部般若等教三時中方就大乘正理具說三性三無性等唯識二諦方爲了義卽解深密等經又此三位各以三義釋一攝機二說教三顯理且初唯攝聲唯說小乘唯顯生空二唯攝菩薩唯說大乘唯顯二空三普攝諸機通說諸乘具顯空有故前二攝機教理各互有闕故非了義後一機無不攝教無不具理無不圓故爲了義第二智光論師遠承文殊龍樹近稟提婆淸辯依般若等經中觀等論亦立三教謂佛初鹿園爲諸小根說小乘法明心境俱有第二時中爲彼中根說法相大乘明境空心有唯識道理根猶劣未能令入平等眞空故作是說於第三爲上根說無相大乘辨心境俱空平等一味爲眞了義又此三位亦三義釋先攝機者初時唯攝二乘人機第二通攝大小二機以此宗許一分二乘不向佛果三唯攝菩薩通於漸頓諸二乘悉向佛果無異路故二約教者初唯說小次通三乘後唯一乘三約顯理者初破外道自性等故說緣生法定是實有次卽漸破二乘緣生實有之執說此緣生以爲似有以彼怖畏此眞空故猶存假有而接引之後時方就究竟大乘說此緣生卽是性空平等一味不礙二諦是故法相大乘有所得等屬第二教非眞了義此三教次第如智光論師般若燈論釋中具引蘇若那摩訶衍經說此云大乘妙智經此昔所未聞也 第四會相違者此二說旣各聖教爲矛楯未知爲可和會爲不可耶無會無不會初無會者旣竝聖教隨緣益物何俟須會卽是智論四種悉檀中各各爲人悉檀亦是攝論四意趣中衆生樂欲意趣於一法中或讚或是故二說不須强會二無不會者有二門約教應機二約機領教前中但佛教門了與不有其四位一約攝機寬狹二約言教具闕約益物大小四約顯理淺深初者若唯攝二乘不兼菩薩或唯菩薩不兼二乘各攝機狹故非了義若寬攝三機周盡方了義二者若唯說小不兼說大或唯說大乘不兼小乘教言各有闕故非了義若言苞大小具足三乘方爲了義密經等據上二門戒賢所判亦有道理三約益物大小者若令一切衆生得小乘益或令一切有情得大乘益有得小益不能全令得究竟益俱非了義若能令彼一切衆生及入寂二乘皆當得大菩提益方爲了義四顯理淺深者於緣起隨說實有或雖破實猶存假有旣會相未盡顯理未極故非了義若說緣生卽是性空不礙緣起融通無二會緣旣盡理性圓現方爲了義彼妙智經據上二門智光所判甚有道理是故二說各據別門互不相至豈有相違二約機領教者二說三教各初說小花嚴初說如何會釋諸德三釋一云此三法輪約漸悟機花嚴最初約頓悟機說若爾密迹力士經初時具說三乘法此爲屬漸爲屬頓耶若是漸教應唯說小若是頓教應唯說大彼旣具三極成違害是故此釋亦難用也一云若依顯了門有如前三法次第若約秘密門卽諸說同時爾者卽初時小顯而大密何不以大顯而小密又判此顯密出何聖教理旣不齊復無聖教故難依用此上二釋此三法輪攝法不盡初卽漸而非頓後卽顯而非密一云但是如來圓音一演異類等解就小結集唯說小乘就大結集唯說大乘就通結集具說三乘若爾隨一結集俱無前後何有如此三教次第今解此難便會二說汎論如來圓音說法大例有二一爲此世根定者說二爲此世根不定說初中三節一或有衆生此世小乘根性定者見佛始終唯說小如小乘諸部結集三藏摠無大乘二或有衆生此世三乘根性熟者見佛始終但說三乘密迹力士經佛初鹿園說法之時無量衆生得阿羅漢果無量衆生成辟支佛道無量衆生發菩提心住初地等乃至廣說大品大般若亦同此說以此義准後時所說皆通具此三乘如諸大乘經中所說三或有衆生此世一乘根性熟卽初見佛於樹王下華藏界中依海印定爲菩薩演說無盡圓滿自在無礙法門具足主乃至終極亦同此說以此法中通括九世攝前後故也二爲不定根者有二位一此世小乘根不定故堪可進入三乘位者卽初聞唯小以爲不了次聞唯大亦非是了後聞具三方爲了義解深密經就此根辨二此世小乘根不定故堪可進入一乘位者卽初唯說小爲不了教次通大小亦非了教後會三歸一唯說一乘方爲了妙智經當此意也由根不定有此二門是故二師各述一門故不相違由有如是此世根定及不定故是故令彼教門或有前後或無前後准釋可知 第五明現傳者當今諸德於大乘自有二說一立三乘大乘以此宗許入寂二乘定不成佛是故約彼五性差別具說三乘立一乘大乘以此宗許入寂二乘亦竝成佛故約此佛性遍有唯說一乘前師引教成立云如大般若經第五百九十云若有情類於聲聞乘性決定者聞此法已速能證得自無漏地於獨覺乘性決定者聞此法已速依自乘而得出離於無上乘性決定者聞此法已速證無上正等菩提若有情類雖未證入正性離生而於三乘性不定者聞此法已皆發無上正等覺心又解深密經第二云乃至更說法要謂相無自性性勝義無自性性乃至諸聲聞乘種性有情亦由此道此行迹故正得無上安隱涅槃一切聲聞獨覺菩薩皆共此一妙淸淨道皆同此一究竟淸淨更無第二我依此故密意說言唯有一乘非於一切有情界中無有種種有情種性或鈍根性或中根性或利根性有情差別解云此約三乘同一所觀無性道故密意說此名爲一乘理實三乘各證涅槃非是一也又瑜伽論第三十七云補特伽羅成就者略說四種有聲聞種性以聲聞乘而成就之有獨覺種性以獨覺乘而成就之有佛種性以無上乘而成就之無種性者卽以善趣而成就之善戒地持皆同此說又解深密經云一向趣寂聲聞種性補特伽羅雖蒙諸佛施設種種勇猛加行方便化導終不能令當坐道場證阿耨多羅三藐三菩提深密解脫亦同此說十輪經第九卷亦說三乘各定差別如是等文竝非小乘是大乘中許三差別是故名爲三乘大乘教也二後師引彼一乘大乘教者涅槃經三十三云一切衆生同有佛性皆同一乘同一解脫一因一果同一甘露一切當得常樂我淨是名一味又法華第一云十方佛土中唯有一乘法無二亦無三除佛方便又云初以三乘引導衆生然後但以大乘度脫之又第三云我滅度後復有第子不聞是不知不覺菩薩所行自於所得功德生滅度入於涅槃我於餘國作佛更有異名是人雖生滅度之想入於涅槃而於彼土求佛智惠智度論第九十五亦同此說又法華論中四聲聞內退菩提心及應化此二聲聞佛與授記定及增上慢此二根未熟故菩薩與授記方便令發心解云旣但云未熟不言無根故知定當得佛菩提又復云方便令發心卽是發菩提心也又入楞伽第二第四第七皆同說二乘無實涅但是三昧力住後必當得無上菩提法華論第四人者方便令入涅槃城故涅槃城者禪三昧城過彼城已令入大般涅槃城此同楞伽住三昧樂離分段故假說涅槃而實有彼變易身故於淨土中行菩薩道勝鬘經云言諸二乘得涅槃者是佛方便唯有如來得般涅槃此經及無上依經寶性論佛性論皆說入滅二乘於三界外受變易身又密嚴經中二乘必無灰斷永滅如是等文亦是大乘不許三乘決定差別是故名爲一乘教第六定權實者或有說一乘是權三乘是實以深密經第一時教唯爲發趣聲聞乘者說卽摠無成佛第二時教唯爲發趣修大乘者說卽摠無不成佛此二若過若不及故俱非了義莫若第三時教有種性者無種性者不成方爲了義法華旣當第二時卽是密意權說是故勝鬘經以一乘爲方便是故理實但約不定種性說爲一乘攝論莊嚴論顯揚論等皆同此釋又法華第三生滅度入涅槃等依瑜伽八十一竝是變化聲聞示現入滅楞伽密嚴皆同此會釋無上依經寶性等論竝是不定二乘向菩提者增壽變易非謂入滅更起受身瑜伽說本轉二識成就不成就四句中第四俱不成就者爲聲聞獨覺入無餘依涅槃界時又八十云無餘依涅槃界中唯有淸淨眞如法界依此等文入涅槃已身智俱滅根識永無豈有變易修行成佛是故唯有一乘非極了義深密經中第三時普爲發趣一切乘說名爲了義故知三乘是盡理實教又深密第二第四皆云一乘是密意說故知是權也有說者一乘是實三乘是權謂法華經唯一佛乘是深密經三乘後說定性二乘滅亦不存故方便說三實唯一故若言法華是第二時教引不定二乘故說一切悉皆成佛而猶未說定性不成故非了者若爾法華之時猶未說有定性二乘何因彼論立四聲聞彼定性言從何處若有定性豈得摠成若許摠成何名定性知定性之言牒前深密所說後至法華明悉全成佛是故彼論順此經文會前權說歸後實教故知法華定在深密後說妙智三教一乘在三乘後梁論成立正法三中亦一乘在後竝同此說法華中生滅度想入涅槃等釋爲變化示現滅者極違教理違教者若是變化聲聞卽實是諸佛菩薩豈可迷自所示涅槃乃生滅度之想若作此釋元未讀經違理者若入涅槃是永斷諸佛菩薩於所化前示現涅槃若彼所化不定種性是勇猛者不怖生死能修勝行若有一類性怯弱者怖畏生死學佛菩薩先入涅槃欲於後行菩薩道汝宗入滅旣無有起豈不悞彼一類衆生此乃悞衆生何成引導況復此文無不相干又亦未見勝鬘經意乃輒斷一乘爲方便彼經云若如來隨彼所欲而方便說謂二乘卽是一乘無有二乘二乘入於一乘一乘者卽第一義乘又彼經中廣破二乘云無涅槃又云此經斷一切疑決定了義入一乘道豈說一乘以爲方便解深密經一乘是密意者是未說法華之前故作是說及後說法華時會前三乘皆是方便瑜伽轉本俱滅顯揚六義說一乘攝論十義說一乘皆同深密會釋以此等論隨彼經造故法華論說決定二乘亦受記等是隨此本經造故若不信一乘守權乖實甚爲可愍故喩經第二卷云昔有一聚落去王城五由旬中有好羙水王勅村人常使日日送其羙水人疲苦悉欲移遠此村去彼村主語諸人言汝等莫去我當爲汝白王改五由旬作三由旬使汝得近去來不疲則往白王王爲改之作三由旬衆人聞已便大歡喜有人語言此故是本五由旬更無有異雖聞此言信王語故終不肯世閒之人亦復如是修行正法度於五道涅槃城心生疲倦便欲捨離頓駕生死不能復如來法王有大方便於一乘法分別說三乘之人聞之歡喜以爲易行修善進德求度生後聞人說無三乘故是一乘以信佛語終不肯捨加彼村人亦復如是解云此經卽是金口良斷權實顯然可息諸說耳 第七顯開合者然此三乘一乘各有二種三乘二者一異時三如深密經初時唯小乘第二唯大乘二同時三乘如第三時普爲發趣一切乘等於此教中一乘相隱三乘相顯是故就顯摠名三乘一乘二者一破異明一如法華經破二實滅及涅槃經破無佛性俱是對權會破方說一乘二直體顯一如花嚴經不對二乘無所破故爲大菩薩直示法界成佛儀故是故初說花嚴無權可會終說涅槃會前諸權是卽非盡權無以顯實是俱名一乘又復更開各有三種初三乘三者一始別終同三謂始約因修四諦緣生六度等別就得果三乘之人身智同滅如俱舍等說此約初時小乘教說二始同終別三謂同聞般若觀無性三乘之人各得自果如前所引說若據聖諦緣生六度行異亦得名爲始終各別此是第二第三時教說也三近異遠同三謂法華等初以三乘方便誘引後同以大乘令得度等乘三者一存三之一如深密等說二遮三之一如法華等三表體之一如花嚴等是故通說有其四句一或唯三無一如俱舍等二或唯一無如花嚴等三或亦一亦三此有二位初三實一權如深密等後一實三權如法華等四或非一非三約理絕言故大般若中舍利子問善現如來授諸天子記於三乘中何乘得記善現荅言於法相中無一無三云何問言於何乘得是故一乘三乘有存有泯諸說不同或聞唯破二乘卽謂唯約不定種性或聞無二亦無三卽謂大乘實教亦破或聞不破大乘卽謂大乘權教亦存今釋有二位一約事破二乘實滅約教亦會大乘權教大乘㩲教許入寂二乘不成佛故但深破二乘卽是破三是故破二破三皆不相違 第八教前後者今辨如來一代所約時顯教大例有四一本末差別門二依本起末門三攝末歸本門四本末無礙門初中本末同時始終一類各無異說然有三位一若小乘中卽最初度彼憍陳那等最後度於須跋陁中間亦復唯說小乘唯益小機如四阿含經及五部律遺教等說二若約三乘卽從始至終皆說三乘通益三機如前所引力士經大般若等諸大乘經於中雖有權實不同皆具三乘若約一乘卽從初至極爲大菩薩唯說一乘最初時說花嚴等其中不通二乘復攝九世於前後是故至極更無異說然此三類旣依此世根定者說此卽諸教相望各通始終竟無前二依本起末門者有四類一謂初時爲大菩說大乘次說中乘次說小乘後說人天如此經下性起品云譬如日出先照一切諸大山王次照一切大山次照金剛寶山然後普照一切大地如來應供等正覺亦復如是成就無量無邊法界智惠日輪常放無量無礙智惠光明照菩薩摩訶薩等諸大山王次照緣覺次照聲次照決定善根衆生隨應受化然後悉照一切衆生乃至耶定爲作未來饒益因緣又此品中如三千界初始成時先成色界諸天宮殿成欲界諸天宮殿次成人處及餘衆生諸所住如來應供等正覺亦復如是先起菩薩諸行智惠次起緣覺聲聞及餘衆生一切善根依此等文明佛初時說大後漸說小約法以明依本起末非約根器以無先學大後學小故法豈不別耶小乘之法定從大乘所流出故文殊問經云十八及本二皆從大乘出普超三昧及入大乘論意竝同此三攝末歸本門者依無量義經初時說小乘次說中乘後時說大乘依解深密經初時唯小乘第二時唯大乘第三時具三乘依妙智經初時唯小乘次具三乘後唯一此卽無量義經合大開小深密等合小開大謂於大乘開於權實然深密妙智旣各聖教可取一捨一是故合此二經摠有四門一初時小乘二經同說第二時唯大乘唯深密說第三時具三乘此是深密第三妙智第二第四時唯一乘唯妙智第三時說是故當知妙智經在深密後說若謂妙智經此土未翻而不信者彼深密經旣當第三時教然許定性二乘及無性有情竝不成佛具足三乘名一切乘者是卽法華涅槃旣在深密後說然定性二乘及無性闡提悉皆成佛當知卽是第四時名一乘教是故與妙智經懸會無疑又初小乘教依法華等成道後三七日等說依眞諦三藏記云佛成道七年後說諸部般若是第二時教又云三十八年後說解節經當第三時教今依法華經及無量義經竝云四十年後說法華等故知是深密後說眞諦此說必有聖教若無聖教豈可自作年數若不信此者卽涅槃經最居末後是卽無然此四時皆前權後實以後會前法華涅槃會深密之三乘歸究竟一乘其義決定是故此四從淺至深明攝末歸本之漸次也四本末無礙門者謂初擧照山王之本教明非本無以起後顯歸大海之異流明非盡末無以歸本卽本末交映與奪相資方爲攝生之善巧也故通論摠有五位一根本一乘教此如花嚴說二密意小乘教三密意大乘教四顯了三乘教上三如深密經說五破異一乘教如法華涅槃等說此上四門旣圓通無㝵是卽前後卽無前無前後卽前後皆無障礙思准之耳第九以義分教教類有五此就義分非約時事一小乘教二大乘始教三終教四頓教五圓教初小乘可知二始教者以深密經中第二第三時教同許定性二乘俱不成佛故今合之摠爲一教此旣未盡大乘法理是故立爲大乘始教三終教者定性二乘無性闡提悉當成佛方盡大乘至極之說立爲終教然上二教竝依地位漸次修成俱名漸教四頓教者但一念不生卽名爲佛不依位地漸次而說故立爲頓如思益得諸法正性者不從一地至於一地楞伽云初地卽八地乃至無所有何次等又下地品中十地猶如空中鳥迹豈有差別可得具如諸法無行經等說五圓教者明一位卽一切位一切位卽一位是故十信滿心卽攝五位成正覺等依普賢法界帝網重重主伴具足故名圓教此經等說若約所說法相等者初小乘法相有七十五法識唯有六所說不盡法原多起異諍如小乘諸部經論說二始教中廣說法相小說眞性所立百法決檡分明故無違諍所說八識唯是生滅法相名數多同小乘固非究竟玄妙之說如瑜伽雜集等說三終教中少說法相說眞性以會事從理故所立八識通如來藏緣成立具生滅不生滅亦不論百法名數不廣又不同小亦無多門如楞伽等經寶性等論說四頓教中摠不說法相唯辨眞性亦無八識差別之相一切所有唯是妄想一切法實唯是絕呵教勸離毀相泯心生心卽妄不生卽佛無佛無不佛無生無不生如淨名嘿住顯不二等是其意也五圓教中所說唯是無盡法界海圓融緣起無礙相卽相入如因陁羅網重重無際微細相容主伴無盡十十法門各稱法界具如下說然此五教有開有合亦有五重一或摠爲一謂唯是如來一大善巧攝生方便也或開爲二謂一乘三乘教前諸教中雖有存三泯二不同然皆通三乘趣入故名三乘教後一直顯本法不通二乘故唯是一卽智論中名共教不共教此亦同上印師等所立二教也三或分爲三謂小乘三乘一乘教智論旣將此經爲不與二乘共故名爲不共卽是一乘大品等爲通三乘同觀得益故名爲共卽是三乘義准四阿含經旣不共菩薩亦名不共卽是小乘依此三位梁攝論第八云如來成立正法有三種立小乘二立大乘有本作三乘字三立一乘第三最勝故名善成立此亦同上妙智經說又眞諦三藏部異執疏第二卷中亦同此說四或分爲四有二義一於上共教中約存三泯二開兩教故爲四一別教小乘二同教三乘如深密等三同教一乘如法華等四別教一乘如花嚴等二約歷位無位開漸頓二教故爲四一小乘教二漸三頓教四圓教五或散分爲五於上漸教分始終二教此上五教非局判經但多分而論如上所指通諸經論竝可知 第十以理開宗宗乃有十一法我俱有宗謂人天位及小乘中犢子部等彼立三聚法一有爲法二無爲法非二聚卽初二是法後一是我又立五法藏過去二未來三現在四無爲五不可說此卽是我以不可說是有爲無爲故二法有我無宗薩婆多等彼說諸法二種所攝一名二色或四所攝謂三世及無爲或立五法一心二心所四不相應五無爲此卽但有此法無別有我三法無去來宗謂大衆部等說有現在及無爲以過未法體用俱無故也四現通假實宗謂說假部等彼說無有去來二世於現在法中在蘊爲實在界處爲假隨應諸法假實不定成實論及經部別師亦同此類五俗妄眞實宗謂說出世部等彼說世俗法假以虛妄故出世法實以非虛妄故六諸法但名宗謂一說部等一切我法唯有假名都無實體此又通於初教之始一切皆空宗謂大乘初教說一切法悉皆性空超於情表無分別故如般若等經辨八眞德不空宗謂終教諸經所說一切法唯是眞如如來藏中實德攝故眞體不空具性德故九相想俱絕宗謂頓教中絕言所顯離言之理理事俱泯平等離念十圓明具德宗謂如別教一乘主伴具足無盡自在所顯法門上來分教開宗粗陳挭槪廣引教理具明義相如別記說第四教所被機者通有十位於中前五簡其非後五正顯所爲 前中五者一違眞非器不發菩提心不求出離依傍此經求名求利莊飾我人經非彼緣故非其器下云爲名利說法是爲魔業又如不淨說法墮惡道等二背正非器謂詐現大心僞修耶善近感人天終成佛怨墮阿鼻地獄多劫受苦如提婆達多爲闡提頂如八大善人當成不善前據初卽可知此就終時方顯下云忘失菩提心修諸善根是爲魔業經非此緣故亦非器三乖實非器謂雖不巧僞然隨自執見以取經文遂令超情至教迴不入故成非器地論云聞作聞解不得不聞又如隨聲取義五種過失等此上三位俱是凡愚衆生境界下云此經不入一切衆生之手唯除菩良以此經非是衆生流轉之緣故不入手狹劣非器謂一切二乘無廣大心亦非此器文云一切聲聞緣覺不聞此經何況受持又舍利弗等五百聲聞皆如聾盲不聞不見五守權非器謂三乘共教諸菩薩等隨自宗中修行未滿初阿僧祇亦非此器故下文云菩薩摩訶薩雖無量億那由他劫行六波羅蜜修習道品善未聞此經雖聞不信受持隨順是等猶爲假名菩薩瓔珞經等十千劫修十信行滿何故此中無量億等不信此經以彼但於行布位修行信等於此圓融普賢十信一攝一切未聞信由此故知二宗差別若不爾者修行旣經爾許時劫不信此經何名菩薩摩訶薩也非器竟 第二顯所爲中五者一正爲者謂是一乘不共教中普機菩薩正是此經所爲之器下文云如是經典但爲乘不思議乘菩薩摩訶薩說不爲餘人解云乘者運轉爲義若依別門初運至十信次轉至十住乃至佛果次第相乘以階彼岸名可思議若依普門一位卽一切位亦一運卽一切運名不思議乘乘此乘者十信滿心卽得六位如賢首品等說又十住等位皆亦如是如下文諸會處說又如善財一生具五位等皆是普法相收故也又舍那品云非餘境界之所知普賢方便皆得入又普賢誡衆云普眼境界淸淨身我今演說仁諦聽如是可知何故此法非餘境界以盧舍那周遍塵方普應法界一切群機若彼別機稱自根器但各見己所見聞自所聞皆不見他所見不聞他所此普賢機乃見一切所見聞一切所聞皆盡盧舍那能化分齊故云普眼境也是故當知普別二機感普別二法各不同也二兼爲者謂遺法中見聞信向此無盡法成金剛種當必得此圔融普法如下文吞服金剛喩又小火廣燒喩又如兜率天子從地獄出得十地無生忍轉利益不窮盡等皆由宿聞此法爲本因故下文云雖在於大海及劫盡火中決定信無疑必得聞此經三引爲者謂彼如前共教菩薩彼教中多時長養深解窮徹行布教源卽當得此普賢法界旣云無量億那由他劫不信此經卽知過此劫數必當信受以離此普法更無餘路得成佛故經不說彼過此劫數猶不信故若彼地前過彼劫數必信受者卽知地上二宗不別豈彼所信無十地耶於彼教中具有行布十地漸次乃至佛果長養彼根器務令成熟極遲之者至此劫數定當信入如其疾者是卽不定可准知耳四轉爲者謂諸二乘以根鈍故要先迴入共教大乘捨二乘名得菩薩稱然後方入此普賢法故說此經唯爲菩薩不攝二乘若不爾者餘大乘經有聲聞衆爲所被機亦引二乘令其入大唯獨此經衆無聲聞之機文無迴小之說何成了義深廣之典設第八會有聲聞者爲寄對顯法表如聾盲非是所被其六千比丘非是羅漢故不相違是故當知一切二乘摠無頓入普賢法界依究竟說無有二乘而不迴入共教菩薩無彼菩薩而不入此普賢之法是故展轉無不皆是此法之器五遠爲者謂諸凡愚外道闡提悉有佛性以障重故夂遠亦當得入此法如佛性論及寶性論皆說以一闡提謗大乘因依無量時說無佛性非謂究竟無淸淨性又如此經性起大樹於二乘闡提二處生牙亦不捨生性等又如日照生盲喩等是故當知一切衆生究竟無不皆入此法以此普法衆生具有故下文云菩薩知一切衆生身中有如來菩提等若爾何故瑜伽等論定性二乘及無性有情定不成佛此由教門有了不了故有諸說若依小乘一切衆生摠皆無有大菩提性如小論說若大乘初教卽五性差別一分有性一分無性如瑜伽等若依終教一切衆生悉有佛性如涅槃等經佛性等論若依頓教生佛性一味一相不可言有不可說無離言絕如諸法無行經等說若依圓教衆生佛性因具果有性有相圓明備德如性起品如來菩提處說第五能詮教體者通論教體從淺至深略有十一言詮辨體門二通攝所詮門三遍該諸法四緣起唯心門五會緣入實門六理事無礙七事融相攝門八帝網重重門九海印炳現十主伴圓備門 初中有二先辨小乘後顯大乘前中依薩婆多宗諸德三說一云但名句文身以爲教體故發智論云十二部經以何爲名身句身文身次第住等一云以聲善是佛教體名等無記是教作用婆娑論第一百二十六云佛教云何謂佛語言詞評論語音語路語表是佛教乃至說者語業爲體佛語何謂名身句身文身次第行列次第安布第連合此卽摠顯佛教作用解云評家正義音聲爲體經部宗亦以音聲爲性故順正理論第十四破經部云汝不應立名句文身卽聲爲體又無性攝論破彼云諸契經句語爲自性不應理故初是法處後是聲處亦又因前二說諸德合取以爲教體餘如彼說就大乘宗有四句攝假從實唯聲爲體以名等依聲屈曲假立無別體故無性攝論云依弘誓願立菩薩聲雜集論云成所引聲謂諸聖說二分假異實以名等爲性故唯識論第二云若名句等不異聲者詞無礙境應無別三假實合辨亦聲亦名等摩經云有以音聲語言文字而作佛事十地論中說者以二事說聽者以二事聞謂音聲名字依此宗聲表善惡聲是無記又名文是自性無記何得無記爲聖教體若有漏心變可是無記若佛菩薩後得智說俱是善攝十地論依止何事者謂音聲及善字四假實雙泯聲非名以卽空故言卽無言故維摩云文字性離是卽解脫十地論中風喩音聲畫喩名字動樹葉風及壁上畫是卽可取若空中風及空中畫皆不可取大乘聲名當知亦爾皆不可取以相盡故此上四句爲一教體是故空有無礙名大乘法謂空不異有有是幻有幻有宛然擧體是空有不異空空是眞空眞空湛然擧體是是故空有無毫分別故佛藏經云諸法如毫氂許不空者卽諸佛不出世又下云諸法畢竟空無有毫末相如是非一也 第二通攝所詮門者非但如前取能詮教亦漸通取所詮之義以竝是所知所解法故喩伽八十一云諸契經體略有二種一文二義文是所依義是能依是二種摠名一切所知境界解云以義依文而得顯故 第三遍該諸法門者謂一切諸法悉爲教體此亦二種一有爲法二無爲法以無不能令生開覺故如下文花鬘寶地香樹雲閣法界法門無非佛事如勝音菩薩及所坐蓮花通人法教義行位因果理事摠能發生勝解行故竝爲教體准思可知 第四緣起唯心門者此上一切差別教法無不皆是唯心所現是故俱以唯識爲體然有二義一本影相對二說聽全攝初中通辨諸教摠有四句一唯本無影小乘教以無唯識變現等故達摩多羅等諸論師多立此義二亦本亦影如大乘始教衆生心外佛有微妙色聲等法由聞者善根增上緣力擊佛利他種子爲因於佛智上文義相生爲本性相教由佛此教增上緣力擊聞法者有漏漏善根種子聞者識上文義相生爲影像相教二十唯識論云展轉增上力二識成決定護法論師等悉立此義三唯影無本如大乘終教衆生心佛果無有色身言聲事相功德唯有如如及如如智大悲大願爲增上緣令彼所化根熟衆生心中現佛色聲說法是故聖教唯是衆生心影像故下文云一切諸如來無有說佛法隨其所應化而爲演說法又云如來法身不思議無色無相無倫匹示現色像爲衆生十方受化靡不見如是非一龍軍堅惠諸論師等竝立此義四非本非影如頓教中非直心外無佛色衆生心內所現之佛亦當相空以唯是識無別影故色等性離無所有故一切無言無言亦無故是故聖教卽是無教之教如經云如來不出世亦無有涅槃又密嚴經明佛常在法界不出世等龍樹等宗多立此義此前四說摠爲一教圓融無礙皆不相妨以各聖教從淺至深攝衆生故思之可見第二說聽全收者亦四句一離佛心外無所化衆生況所說教是故唯是佛心所現此義云何謂諸衆生無別自體攬如來藏以成衆生然此如來藏卽是佛智證爲自體是故衆生擧體摠在佛智心中下文云諸佛悉了知一切從心轉又云如來菩提身中悉見一切衆生發菩提心修菩薩行成等正覺乃至見一切衆生寂滅涅槃亦復如是皆悉一性以無性故又云三世一切劫佛剎及諸法諸根心心法一切虛妄法於一佛身中此法皆悉現又佛性論第二如來藏品云一切衆生悉在如來智故名爲藏以如如智稱如如境故一切衆生決定無有出如如境者竝爲如來之所攝持名所藏衆生爲如來藏是故離佛心智無一法可得二摠在衆生心中以離衆生心無別佛德此義云何佛證衆生心中眞如成佛亦以始覺同本覺故是故摠在衆生心中從體起用應化身時卽是衆生心中眞如用大更無別佛起信論中盛明此義又下文云若人欲求知三世一切佛應當如是觀心造諸如來三隨一聖教在二心以前二說不相離故謂衆生心內佛佛心中衆生說法佛心中衆生聽衆生心佛說如是全收說聽無礙是謂甚深唯識道理或彼聖教俱非二心以兩俱形奪不竝現故融二位無不泯故謂佛心衆生無聽者故衆生心佛無說者故兩俱雙辨二相盡故經云夫說法者無說無示亦其聽法者無聞無得又此下文云衆生所生非是生亦無流轉生死中又經如來不說法亦不度衆生如是等是故此四於一聖教圓融無礙方爲究竟 第五會緣入實門者亦有二義一以本收末二會相顯性中以諸聖教皆從眞流是故與眞性常不異海起潮不失鹹味論中名爲眞如所流十二分又云從最淸淨法界等流教法等是故以本收末唯是眞如也二會相顯性者謂彼一切差別教法皆悉從緣起從緣起故必無自性無自故卽是眞如是故空相本盡眞性本現唯是眞如故經云一切法卽如也又下文云彼生滅法如如相也 第六理事無礙門者亦有二義一謂一切教法擧體眞如不礙事相歷然差別二眞如擧體爲一切法不礙一味湛然平等卽如波卽水不礙動相後卽如水卽波不失濕當知此道理亦爾是故理事混融無礙唯一無住不二法門維摩經中盛顯斯義又此經云知非有是有有是非有非相是相相是非相由本以非有爲有是故此有卽是非有聖教准此理事無礙思之可見 第七事融相攝門者亦有二義一相在二相是初中先一在一切中謂如一教法不礙存事全是眞理眞理遍餘一切事中同理教事亦如理遍是故一切法中當有此一依是義故無一微細塵毛等處無佛說教故此經云一切佛剎微塵中盧舍那現自在弘誓願海振音聲調伏一切衆生類二一切在一中謂無分齊理旣不改性而全是事是故一事攝理無不皆盡餘事如理在一事中以理無際限不可分故隨一事處皆全攝也是故一中常有一切依是義故此經云於此蓮花藏莊嚴世界海之內一一微塵中見一切法界又云於一法中解衆多法衆多法中解了一法若具通說有其四句初一在一中謂別說一切差別事中一一各有彼一法故二一在一切中謂通說一切悉有一故三一切在一中謂別說一中攝一切故四一切在一切中謂通說一切悉有一切故又此常含一切之一卽復恒在彼一切同時自在無障無礙不動一方遍十方等是此義思之可見旣一切法悉爲教體皆互相收圓融無礙方是此經教之體性二相是者先一卽是一切謂如一教事旣全是眞理眞理則爲一切事故是故此一卽是一切一切卽一反上應知此經云若一卽多多卽一義味寂滅悉平通亦四句準前思之良以全理之事與全事之理非一非異由非一門故得相在也由非異門故得相是也深思可見依是義故一句卽是一切句而無窮盡一切亦爾下文云欲具演說一句法阿僧袛劫無窮盡如是自在是此教體第八帝網重重門者亦二義先辨一門後類顯一切前中如一句內卽具一切此一中一切復一卽一切如是重重重重重重重重重重則不可窮盡摠是一句二類顯者如此一句餘一切句一一皆爾是則無盡無盡無盡無盡無盡無盡無盡無盡無盡無盡唯普眼所知非是心識思量境界下文云於彼一一脩多羅分別諸法不可說於彼一一諸法中又說諸法不可說又云若於一小微塵中有諸佛剎不可說於彼一一佛剎中復有佛剎不可說解云如是重重如因陁羅網是謂此經圓宗教體第九海印炳現門者亦有二義一約果位如前差別無盡教法皆是如來海印定中同時炳然圓明顯現設所化機亦同緣起在此中現是故唯以此三昧海爲斯教如下文云一切示現無有餘海印三昧勢力二約因位要普賢等諸大菩薩方得此定前業用亦無差別是故十信滿處普賢位中亦得此定如賢首品說 第十主伴圓備門者此普法教不孤起必主伴隨生如下文普莊嚴童子聞佛說一切法界無垢莊嚴經有世界微塵數脩多羅以爲眷屬如是等文處處皆有眷屬經有其二義一同類二異類初同類者說十住十方各有十剎塵數菩薩來證同名法我等佛所亦說十住大衆眷屬名句身等無有異是故當知一十住經十方各有十剎塵數脩多羅等以爲眷屬如一十住餘一切處所說十住皆攝爾許塵數眷屬十住旣爾餘十行一一品會皆有證法數量准釋可知二異類謂隨一方一界爲一類機說一會法旣無結通十方等說故非主經然亦與主爲勝方便爲眷屬是故主經必十方塵道同時同說伴經不爾隨方各別是故一一主經各有塵數眷屬是謂本末相資主伴圓備教體門竟第六宗趣者語之所表曰宗宗之所歸曰趣此大經宗趣難辨略敍十說以顯一宗 一江南印師敏師等多以因果爲宗謂此經中廣明菩薩行位之因及顯所成佛果勝德下文所說不離此二故以爲宗 二大遠法師以花嚴三昧爲宗謂因行之華能嚴佛果此上二說但得所成行德遺其所依法界 三依衍法師以無礙法界爲宗 四依裕法師以甚深法界心境爲宗謂法界門中義分爲境諸佛證之以成淨法界卽是一心諸佛證之以成法身是故初品之內初天王偈讚無盡平等妙法界悉皆充滿如來身末後復明入法界品故知唯以法界爲宗此上二說但得所依法界遺所成行德五依光統師以因果理實爲宗卽因果是所成行德理實是所依法界此雖義具然猶未顯六今摠尋名案義以因果緣起理實法界以爲其宗卽大方廣爲理實法界佛花嚴爲因果緣因果緣起必無自性無自性故卽理實法界法界理實必無定性無定性故卽成因果緣起是故此二無二唯一無礙自在法門故以爲宗七別開攝法界以成因果謂普賢法界爲因舍那法界爲果是故唯以法界因果而爲宗趣中分別有十事五對一所信因果如初會中舍那品內先明蓮華藏世界果後顯普莊嚴因差別因果如第二會至小相品說於中初二十五品說五位差別因後三品說三德差別果平等因果如普賢品說平等圓因性起品說平等滿果上二門是生解因果四成行因果如離世閒品中二千行法內先明因行後顯果行五證入因果如入法界品先祇洹林中現自在果善財童子辨證入因因果五周一部斯畢是故唯辨因果不失所依但以因果爲宗理亦無咎八會因果以同法界法界法門略顯十事五對一教義相對擧此所說教法爲宗意顯所詮義理爲趣或反此以辨義深教勝故二理事相對擧事法爲宗意取理性爲趣或反此以依理性方成事故三境智相對擧所觀境意欲令成觀智行故或反此以令修起智證同眞境故四行位相對擧所依之五位意令依之脩成勝行反此以積行成位故五因果相對勸彼修因意在證果或反此以擧果勸樂令修因故此上五對通於一部處處皆有故不別屬是故唯辨法不失所成但以法界爲宗理亦無違 九法界因果分相顯示中亦有十義五門一無等境卽理實法界此有二位一是出纏最淨法界是在纏性淨法界此二爲所信所證故二無等此亦二義一大菩提心爲普賢行所依本故二信悲智等隨行起故三無等行此亦二義差別行各別修故二普賢行一卽一切故四無等位此亦二義一行布差別位比證不同故圓融相攝位一位卽具一切位故五無等果亦二義一修生果二修顯果此五門十義通收此經一部略盡是故具以爲宗義亦備矣十法界因果雙融俱離謂性相混融無礙自在亦有十義一由離相故因果不異法界卽因果非因果也二由離性故法界不異因果卽法界非法界也三由離性不泯性故法界卽因果非法界爲法界也四由離相不壞相故因果卽法界以非因果爲因果也五由離相不異離性因果法界雙泯俱融迴超言慮也六由不壞不異不泯故因果法界俱存現前爛然可見也七由上存泯復不異故超視聽之法恒通見聞絕思議之義不礙言念也八由法界性融不可分故卽法界之果統攝法界無不皆盡因隨所亦在果中是故佛中有菩薩也九卽法界之因攝義亦爾故普賢中有佛也十因果二位各隨差別一一法一一行一一德一一位皆各摠攝無盡無盡諸法門海者良由無不該攝法界圓融故也是謂花嚴無盡宗趣餘義如指歸等第七釋經題目者略釋十名一數名二法名喩名四義名五德名六事名七開名八具名合名十品名 初數名者依梁攝論第十勝相云百千經者是花嚴經有十萬頌名百千經卽從本數以立其名 二法名者依智度論屬累品云名不思議解脫經有十萬偈又彼中自指是花嚴故良爲此經所說之法皆一攝一切無不悉是不思議解脫故以爲名 三喩名者依涅槃經及觀佛三昧經名此經爲雜華經萬行交飾緣起集成從喩標名猶雜花耳四義名者如下離世閒品出生菩薩深妙義花十義立名至彼當辨 五德名者如性起品末就十勝德以立其名亦至彼當釋 六事名花嚴之稱梵語名爲健拏驃訶健拏名雜花驃訶名嚴飾日照三藏說云西國別有一供養名爲驃訶其狀六重下闊上狹飾以花寶一重內皆安佛像良以此經六位重疊位位成正類彼事故立此名人天八會亦似彼應知七開名者於此一名開爲十事五對一通別一謂大方廣等一部通名世閒淨眼是當品別二就通中教義一對謂大等是所詮義經之一字是能詮之教三就義中法喩一對謂大等是法花嚴爲喩四就法中境智一對謂大等是所證所覺佛是能證能覺亦是人法一對五就境中簡持一對謂大字是能簡方廣爲所簡簡大異小簡實異權簡果異因故也 八具名大有十義一境大謂十蓮花藏及十佛三業無邊依正爲所信境如初會等說二心大謂依前大境起大心故如賢首品及發心品說三行謂依大心起大行故如離世閒品等說四位謂積大行成大位故卽五位圓通等如第二會至第六會來說五因大謂行位普圓生了究如普賢品等說六果大謂隨緣自體果德圓如不思議品等說七體大謂大用平等皆同眞性如性起品等說八用大謂念念益生頓成行位如小相品等說九教大謂一一名句皆遍一切如下結通等說十義大謂所詮皆盡無邊法界如一塵含十方一念包九世八會等說上十義一一統收一切法盡莫不稱大又有七如喩伽等七種大性相應等以釋大義又依涅槃經更有三義釋大經云所言大者名之爲常又言大者其性廣博又云能建大義名大涅又起信論亦以三義釋大謂體相用等次釋方廣亦有十義一周遍義謂言教廣遍諸塵方二普說義謂普宣說一切法故三深說義說甚深法界海故四備攝義謂普攝無盡衆生界故五廣益義謂要令衆生得佛菩提大利樂六蕩除義謂遍除二障及習氣故七具德義謂具攝無邊諸勝德故八超勝義謂獨絕超餘無比類故九含攝義謂通攝衆多異類法故廣出義謂能出生佛大果故然此十義如二論入大乘論一爲衆生說對治法故二有衆多乘故三多莊嚴具故四能出生無量大果故五除斷一切諸耶見故名毘佛略又雜集論釋方廣者謂菩薩藏相應言說名爲方廣一切有情利益安樂所依處故宣說廣大甚深法故亦名廣破以能廣破一切障故亦名無比法無有諸法能比類故次釋佛義亦有十種如無著佛等尋文具辨次釋花嚴花有幾義復何所表以花爲嚴花有十義所表亦爾一微妙義是花表佛行德離於麤相故說花爲嚴下竝准此二開敷義表行敷榮性開覺故三端正義表行圓滿德相具故四芬馥義表德香普熏益自他五適悅義表勝德樂歡喜無厭故六巧成義表所修德相善巧成故七光淨義表斷障永盡極淸淨故八莊飾義表爲了因嚴本性故九引果義表爲生因起佛果故十不染義表處世不染如蓮花故次釋經字亦有十義如寶雲經說餘義同上九合名者大卽當體爲目包含爲方卽就用爲名軌範爲義是方法故性離耶僻是方正故能治重障是醫方故遍虛空界盡方隅故廣卽體用合明周遍爲義謂一切處一切時一切法一切人無不周遍皆重重如帝網此中且就一攝一切名大一遍一切稱廣前廣後大理亦不違方卽是廣大卽方廣皆持業釋此是所得之法佛是能得之人覺照爲名果滿爲義此中人法境智有相依相卽相依者智依境故方廣之佛簡下乘佛境依智故佛之方廣因位法此二相依各有有力無力緣起四句之可見皆依主釋相卽者謂佛卽方廣方廣卽人法無礙全體相卽空有四句亦准思之唯持業釋旣佛非下乘法超因位果德難彰寄喩方顯謂萬德究竟瑰麗猶花互相交飾顯性稱嚴此有二門一諸德互嚴亦有相依相卽有四句存亡俱泯皆持業釋思之可見二理行互嚴亦有相依相卽初相依四句者一理由修顯故卽行花嚴性也二行從理起故卽理花嚴行也梁攝論云無不從此法身流無不還證此法身三理行俱融不二而二非眞流之行無以契非飾眞之行不從眞起良以體融行而因圓行該眞而果滿是故標爲佛花嚴也四理行俱泯二而不二以理之行故非行行之理故非理是卽能所兩亡超情離相非嚴非不嚴是謂花相卽四句理行全收准思可見是知法喩交映昭然有在餘如前釋 十品名者世閒是法淨眼爲喩世者是時閒者是中中顯現故云世閒世閒不同有其三種一器世閒爲所依處二智正覺世閒爲能化主三衆生世閒爲所化此品之內不越此三故立斯名器有二種場地別處二花藏通處智正覺亦二謂三身十身衆生亦二謂同生異生淨眼三義一洞徹義況器世閒內徹理故下文云法界不可壞蓮花世界海二現像義況智正覺下文云淸淨法身無像而不現三照矚義況衆生世閒下文云猶如淨眼觀明珠又若通論此三世閒各有淨眼三義思准可知又釋佛未出世無善導故盲如來創出世間淨眼現名世閒淨眼是故佛涅槃時言世間眼滅品者類也別也餘義可知第八部類傳譯者亦有十義一恒本二大本上本四中本五下本六略本七論釋八翻譯支流十感應 初恒本者下不思議品云一切法界虛空界等世界悉以一毛周遍度量一一毛端處於念念中不可說微塵等身盡未來際常轉法輪解云此通樹形等異類世界各毛端處念念常說無有休息此非可結集不可限其品頌多少亦非下位所能受持二大本者如下海雲比丘所受持普眼經以須彌山聚筆四大海水墨書一品脩多羅不可窮盡如是等品復過塵數此是諸大菩薩陁羅尼力之所受亦非貝葉所能書記 三上本者此是結集文中之上本也故西域相傳龍樹菩薩往龍宮見大不思議解脫經有三本上本有十三千大千世界微塵數頌四天下微塵數品 四中本有四十九萬八千八百偈一千二百品此上二本竝秘在龍宮非閻浮提人力所受持故此不傳 五下本者有十萬頌三十八品龍樹將此本出現傳天竺卽攝論百千爲十萬也西域記說在于闐國南遮俱槃國山中具有此本六略本者卽此土所傳六十卷本是彼十萬頌中前分三萬六千頌要略所出也近於大慈恩寺塔上見梵本花嚴有三部略勘竝與此漢本大同頌數亦相似 七論釋者龍樹旣將下本出因造大不思議論亦十萬頌以釋此經今時十住毘婆娑論是彼一分秦朝耶舍三藏頌出譯之十六卷文纔至第二地餘皆不足又世親菩薩造十地論偏釋十地一品魏朝勒那三藏及菩提留支於洛陽各翻一本光統侓師自解梵文令二三藏對御和會合成一本見傳者是金剛軍菩薩及堅惠菩薩各造十地釋竝未傳此土又魏朝此土高僧靈辯法師於五臺山戴花嚴膝步殷懃足破血流遂經三載冥加解於懸瓮山中造此經論一百餘卷現傳於世後勅請法師入內於式乾殿講此大經八翻譯者有東晉沙門支法領從于闐國得此三萬六千偈經幷請得北天竺大乘三果菩薩禪師名佛馱跋陁羅此云覺賢俗姓釋迦氏甘露飯王之苗裔曾往兜率天就彌勒問疑晉義熙十四年歲次鶉火三月十日於楊州謝司空寺別造護淨法堂於中譯出此經時堂前有一蓮花池每日有二靑衣童子自池之出堂灑掃供養暮還歸池相傳釋云以此經夂在龍龍王慶此傳通躬自給侍後因改此寺名爲興嚴寺沙門法業及惠嚴惠觀等親從筆受有吳郡內吏孟顗右衛將軍褚叔度等爲檀越至元熙二年六月十日出訖至大宋永初二年十二月二十日與梵本再挍勘畢於法界品從摩耶夫人後至彌勒菩薩前所欠八九紙經文今大唐永隆元年三月內有天竺三藏地婆訶羅唐言日照有此一品梵本法藏親共挍勘至此欠文奉勅與沙門道成復禮等譯出補 九支流者謂此大經隨力受持分成多部兜沙經一卷是第二會初菩薩本業經一卷是淨行一品小十住經一卷是十住品大十住經四卷漸備一切智德經四卷竝是十地品如來性起微密藏經兩卷是性起品顯無邊佛土經一卷是壽命品度世經六卷是離世閒品羅摩伽經三卷是入法界品近於神都共于闐三藏翻花嚴修慈分一卷不思議境界分一卷金剛鬘分十卷此分翻未成三藏亡歿今現於神都更得于闐國所進花嚴五萬頌本幷三藏至神都現翻譯其慈恩寺梵本與舊漢本竝同無異新來梵本品會及文句有少不同明此大經數本故也此竝大經支流隨器分流 第十感應宋主請西來三藏令講此經其人恨以方音未通恐說不盡旨乃入道場祈請纔盈七日夢以漢首易己梵頭因卽洞解宋言講授無滯又九隴山尼敬重此經專精轉讀二十餘載感目睹毛端剎海又五臺山尼常誦此經從曛至曉一部斯畢口中光輝遍耀山谷又北齊炬法師崇重此經闕於師受專讀祈解十五餘年遂夢善財授聰明藥因卽開悟造疏十卷講五十餘遍又定州中山修德禪師翹誠護淨鈔寫此經後開函放光照一百二十里又閹人劉謙之因於五臺山專讀此經遂復丈夫形諸如此例事極繁廣具如五卷花嚴傳中說第九顯義理分齊者然義海宏深微言浩汗擧十門撮其綱要一同時具足相應門二廣狹自在無礙門三一多相容不同門四諸法相卽自在門五隱密顯了俱成門六微細相容安立七因陁羅網法界門八託事顯法生解門十世隔法異成門十主伴圓明具德門然此十門同一緣起無礙圓融隨有一門卽具一切可思之就初門中有十義具足一教義具足理事三境智四行位五因果六依正七體用人法九逆順十應感具足謂衆生機感如來應下云一切衆生所樂示現雲然此十對同時相應爲一緣起隨一各具餘一切義如初門旣餘廣狹等九門皆各具前十對但隨門異耳是故一一門中各有十百千等思之可見今且於一事法之上辨此十對餘可准知 如下文一蓮花葉表令生解爲教卽是所詮爲義下勝音菩薩蓮花處說二花相爲事花體是理下云法界不可壞蓮花世界海三花是所觀亦卽能觀以此經中可以內行爲外事故四行事之花結成位故五因事之花攬成果故六花臺所依亦入正故如國土身等七花體同眞用應機故八全攬爲人恒是法故九逆同五熱順十度故十應赴群機亦能感故如一花事旣爾一切事皆准知之事法旣爾餘教義等一切皆然准思可見如具自十對旣爾彼一花葉具前十門亦然何者此蓮花葉具前十義同時相應具足圓滿故是初門也 二卽彼花葉普周法界而不壞本位以分卽無分無分卽分廣狹自在無障無礙下云此大蓮花其葉遍覆一切法界是故或唯廣無際或分限歷然或卽廣卽狹廣狹俱泯或具前四以是解境故或絕前五是行境故下皆准此 三卽此花葉舒己遍入一切法界中卽攝一切令入己內舒攝同時旣無障礙是故鎔融或有四句六句准前思之以一佛土滿十方十方入一亦無餘 四此一花葉廢己同他擧體全是彼一切法而恒攝他同己全彼一切卽是己體一多相卽混無障解行境別六句同前下云知一卽多多卽一 五花能攝彼卽一顯多隱一切攝花卽一隱多顯顯顯不俱隱隱不竝隱顯顯隱同時無全攝俱泯存亡俱成句數同前下云東方見入正受西方見三昧起等 六此花葉中微細剎等一切諸法炳然齊現下云於一塵中微細國土曠然安住 七花葉一一微塵之中各皆竝現無邊剎海剎海之中復有微塵彼諸塵內復有剎海如是重重不可窮盡非是心識思量所及如帝釋網天珠明徹互相影現影復現影而無窮盡下云如因陁羅網世界等 八見此花葉卽是見於無盡法界非是託此別有所表此花蓋等從無生法忍所起等 九卽此一花旣其遍一切處亦復該一切時謂三世各三攝爲一念故爲十世也以時無別體依花以立花旣無礙時亦如之是故下云過去一切劫安置未來今未來一切劫迴置過去世又云無量劫卽一念一念卽無量劫等 十此圓教法理無孤起必眷屬隨生下云此花有世界海塵數蓮花以爲眷屬又如一方爲主十方爲伴餘方亦爾是故主主伴伴各不相見主伴伴主圓明具德如一事花帶自十義具此十門卽爲一百餘教義等亦各准之故成千門如教義等望自類十義及同時等十門有此千門彼同時等亦望自類十門及教義等亦成千門准思可見有何因緣令此諸法得有如是混融無㝵因緣無量難可具陳略提十類釋此無礙一緣起相由故二法性融通故三各唯心現故四如幻不實故五大小無定故六無限因生故七果德圓極故八勝通自在故九三昧大用故十難思解脫故 初緣起相由故者謂大法界中緣起法海義門無量約就圓宗略擧十門以釋前義謂諸緣起法要具此十義方緣起故闕卽不成一諸緣各異義謂大緣起中諸緣相望要須體用各別不相和雜方成緣起若不爾者諸緣雜亂失本緣法緣起不成此卽諸緣各各守自一也 二互遍相資義謂此諸緣要互相遍應方成緣起且如一緣遍應多緣各與彼多全爲一故此一卽具多箇一也若此一緣不具多卽資應不遍不成緣起此卽一一各具一切一也 三俱存無礙義謂凡是一緣要具前二方成緣起以要住自一方能遍應遍應多緣是一故是故唯一多一自在無礙由此鎔融六句或擧體全住是唯一也或擧體遍應是多或俱存或雙泯或摠合或全離皆思之可見此上三門摠明緣起本法竟 四異門相入義謂諸緣力用互相依持互形奪故各有全力無力義緣起方成如論云因不生緣生故緣不生自因生故若各唯有力無無力卽有多果過一一各生故若各唯無力無有力卽無果過同非緣俱不生故是故緣起要互相依具力無如闕一緣一切不成餘亦如是是故一能持多一是有力能攝多多依於一多是無力潛入由一有力必不得與多有力俱是故無有一而不攝多也由多無力必不得與一無力俱故無有多而不入一也如一持多依旣爾多持一依亦然反上思之是卽亦無多不攝一一無不入多者也如一望多有依有持全力無力常全多在己中潛已在多中同時無礙多望於一當知亦爾俱存雙泯二句無礙思准之 五異體相卽義謂諸緣相望全體形奪有有體無體緣起方成以若闕一緣餘不成起起不成故緣義卽壞得此一緣令一切成起所起成故緣義方立是故一緣是能起多緣及果俱是所起是卽多爲一成多是無體一能作多一是有體由一有體必不得與多有體俱多無體必不得與一無體俱是故無有不多之一無有不一之多一多旣爾多一亦然反上思之如一望多有有體無體故能攝他同己廢己同他同時無礙多望於一當知亦爾准前思之俱存雙泯二句無礙亦思之可見 六體用雙融義謂諸緣法要力用交涉全體融合方成緣起是故圓通亦有六句一以體無不用故擧體全用卽唯有相入無相卽義二以用無不體故卽唯有相卽無相入也三歸體之用不礙用全用之體不失體是卽無礙雙存亦入亦卽自在俱現四全用之體體泯全體之用用亡非卽非入圓融一味合前四句同一緣起無礙俱存六泯前五句待離言冥同性海此上三門於初異體門顯義理竟 七同體相入義謂前一緣所具多一與彼一緣體無別故名爲同體又由此一緣應多緣故有此多一所應多緣旣相卽相入令此多一亦有卽入也先䎳相入謂一緣有力能持多多一無力依彼一緣是故一能攝多多便入一入多攝反上應知餘義餘句准前思之八同體相卽義謂前一緣所具多一亦有有體無體義故亦相卽以多一無體由本一成多卽一也由本一有體能作多令一攝多如一有多空旣爾多有一空亦然餘義餘句竝准前思 九俱融無礙義謂亦同前體用雙融卽入自在亦有六句准前應知此上三門於前第二同體門中辨義理竟 十同異圓備義謂以前九門摠合爲一大緣起故致令多種義門同時具足也由住一遍應故有廣狹自在也由就體就用故有相卽相入也由一攝多時爲顯令一入多爲隱多攝亦爾又就用相入爲顯令就體相卽爲隱卽顯入隱亦然又異門卽入爲顯同體爲隱同顯異隱亦爾又由以異門攝同體相入義故現微細門也由異體相入帶同體相入故有重重無盡帝網門也由此大緣起法卽無礙法界法門故有託事顯法門也由此融通自在今依此法上所辨時法亦隨此無礙自在故有十世門也由此法門同一緣起相帶起隨有一門必具一切故有主伴門也此之一門於前第三門中以辨義理上來十義摠是緣起相由門竟餘門如指歸中說花嚴經探玄記卷第一
  1. 1)구박지(具縛地)란 번뇌를 끊지 못하여 온갖 속박을 갖추어 가지고 있는 범부의 경지를 말한다.
  2. 2)소범(素範)이란 깨끗한 법이란 뜻으로 곧 법성(法性)의 이치를 말한다.
  3. 3)상견(相見)이란 상분(相分)과 견분(見分), 즉 반연되는 대상과 능히 반연하는 인식을 말한다.
  4. 4)일미(一味)는 마음이란 중생의 느낌을 말하며, 경계란 느껴지는 대상 즉 부처가 중생들이 바라는 대로 따라 주는 것. 중생의 느낌과 부처의 응함이 하나의 이치라는 뜻. 중생과 부처가 일여(一如)함을 말한다.
  5. 5)양곡(陽谷)이란 고려대장경본에는 ‘陽谷’, 대일본속장경본에는 ‘暘谷’이라 함. 태양이 떠오르는 곳을 말한다.
  6. 6)상달(上達)이란 지엄의 『수현기』에서는 원교(圓敎)는 상달, 즉 부분적으로 부처의 경계에 오른 사람을 위한 가르침이라 하고, 징관의 『현담』에서는 상달이란 10지(地) 이전의 보살이고 부분적으로 부처님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란 10지 보살을 말한다고 한다.
  7. 7)3근(根)이란 상ㆍ중ㆍ하의 세 가지 근기를 말한다.
  8. 8)인다라망(因陀羅網)이란 리그베다의 가장 중요한 신으로 나중에 불법의 수호신이 된 제석천(帝釋天)의 궁전에 그것을 장엄하게 하기 위하여 몇 겹으로 둘러싸인 보배 그물로서 하나하나의 그물코에 보배구슬이 있어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빛을 발하여 서로서로를 비추어 반영하는 관계를 말한다.
  9. 9)10신(身)이란 부처님의 열 가지 몸이다. 「십지품」 제8지에는 해경(解境)의 열 부처님이 있고, 「성기품」에는 행경(行境)의 열 부처님이 있다.
  10. 10)보게(寶偈)란 불경을 칭찬하는 말로 여기서는 「성기품」의 “미진을 파괴하여 이 경권을 내어 중생을 요익케 한다”는 글에 의한 것으로 중생의 번뇌 망상 속에 원만한 부처의 지혜를 갖추어 본래부터 성불되어져 있는 구래성불(舊來成佛)을 비유로써 말한 것이다.
  11. 11)왕주(王珠) 아래는 「성기품」에 여래의 법신인 마니보왕(摩尼寶王)도 또한 이와 같아서 만약 어떤 중생이 보고 듣는 사람은 모두 생사의 고통을 없앤다”고 한 것과 “기이하고 기이하다. 부처님의 구족한 지혜가 중생의 몸 가운데 있거늘 어째서 알지 못하는가. 내가 마땅히 저 중생을 가르쳐 거룩한 도를 깨달아 영원히 망상 전도의 번뇌를 씻어버리고 여래의 지혜가 그 몸 안에 있음을 보아 부처와 더불어 다름이 없음을 깨닫게 하리라”고 한 것에 근거하여 여래의 지혜가 다 이 중생 성덕 본구(衆生性德本具)의 왕주(王珠)가 되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12. 12)갱횡(鏗鋐)이란 원음(園音)이 10계에 두루 가득함을 비유로써 말한 것이다.
  13. 13)60권 『화엄경』은 노사나불이 해인삼매(海印三昧) 중에서 설하시고 부처님 열반 후 600년 만에 용수보살이 용궁에서 찾아내었다는 전설을 말한다. ‘해인삼매’란 진여 본각을 말한다. 망상이 다 없어지고 마음이 깨끗하면 만법의 실상을 볼 수 있는 것이 마치 큰 바다에 천태만상이 나타나지 아니함이 없는 것과 같다.
  14. 14)3종세간이란 기세간ㆍ중생세간ㆍ지정각세간의 세 가지 세간을 말한다.
  15. 15)『법화경』 「방편품」에 나오는 말이다.
  16. 16)일체 모든 부처님의 법이 그러하였던 것과 같이 으레 그렇다는 뜻이다.
  17. 17)화불(化佛)이란 중생의 근기에 따라 변화하여 나타나는 부처를 말한다.
  18. 18)구신(句身)은 범어로 pada:padakāya이다. “제행(諸行)이 무상(無常)하다, 제법(諸法)이 무아(無我)이다”라고 한 것과 같이 구(句)가 둘 이상 모인 것을 말한다. 자성(自性)의 차별인 의리(義理)를 나타내는 것을 구(句)라 하고, 신(身)은 무더기라는 뜻이다.
  19. 19)해석은 위의 경문에 대한 법장의 해석이다.
  20. 20)광연(曠然)이란 넓직하게 텅 빈 모양을 말한다.
  21. 21)여기서는 「성기품」의 ‘파진출경유(破塵出經喩)’를 말한다.
  22. 22)약유(略由)란 『화엄경』을 설한 이유는 많지만 간략하게 열 가지만을 열거하였기 때문에 약유라고 말한다.
  23. 23)경전이 설해진 어떤 장소이다.
  24. 24)경전을 설하는 주인공, 즉 어떤 부처님이다.
  25. 25)10선교법(善巧法)이란 『섭론(攝論)』에는 온(蘊)ㆍ계(界)ㆍ처(處)ㆍ연기(緣起)ㆍ제(諦)ㆍ식(食)ㆍ정려(靜慮)ㆍ무량(無量)ㆍ무색(無色)ㆍ해탈(解脫)ㆍ승처(勝處)ㆍ변처(遍處), 보리문(菩提分)ㆍ무애해(無礙解)ㆍ무쟁(無諍) 등을 열거하고 있다.
  26. 26)의주석(依主釋)이란 뒤의 부분이 앞의 부분에 의하여 제한되는 합성어를 말한다.
  27. 27)지업석(持業釋)이란 의주(依主)의 앞 부분이 형용사, 부사 혹은 그러한 부류로서 뒷 부분이 앞 부분에 의해서 제한되는 합성어를 말한다.
  28. 28)10장(藏)이란 신(信)ㆍ계(戒)ㆍ참(慚)ㆍ괴(愧)ㆍ문(聞)ㆍ시(始)ㆍ혜(慧)ㆍ정념(正念)ㆍ지(持)ㆍ변(辯)의 10장을 말한다. (『탐현기』 6) 여기서 ‘아래 경문’이라 한 것은 「십무진장품(十無盡藏品)」을 말한다.
  29. 29)의언무분별관(意言無分別觀)이란 지엄의 『공목장(孔目章)』에 “시교(始敎)의 시(始)와 종교(終敎)의 종(終)이란 모두 분별과 무분별의 교의(敎義)에 통한다. 무분별의 의(義)란 진여를 증득하는 것이고, 무분별의 교(敎)는 비관(比觀)의 말과 뜻으로 분별할 수 없는 경계로서 대승의 언교(言敎)를 깨닫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30. 30)『법화경』 등을 말한다.
  31. 31)생공(生空)이란 인공(人空), 또는 아공(我空)이라고도 한다. ‘나’란 것이 있다고 하는 주관적인 집착을 깨뜨리는 것이다.
  32. 32)담무덕부(曇無德部)ㆍ살바다부(薩婆多部)ㆍ가섭유부(迦葉遺部)ㆍ미사새부(彌沙塞部)ㆍ파추부나부(婆麁富那部), 즉 5부(部)의 율장을 말한다.
  33. 33)대법(對法)의 이십(二十)이란 소승 20부에 각각 논장(論藏)이 있다는 뜻.
  34. 34)칭실(稱實)의 성문장이란 대승시교의 성문을 말한다.
  35. 35)파사(婆娑)는 파사(婆沙)로 표기하기도 한다.
  36. 36)보처(補處)란 『유가론』은 당래불인 미륵불의 설법임을 말한다.
  37. 37)회심(廻心)이란 성문이 마음을 돌려 대승을 믿게 되는 것을 말한다.
  38. 38)보(普)는 열 가지 다함이 없는 넓은 법을 말하고, 별(別)이란 보법과는 다른 돈교(頓敎)ㆍ종교(終敎)에 의하여 나타내는 법을 말한다. 참고로 동교ㆍ별교와는 다르다.
  39. 39)이 경이란 『대방광불화엄경』을 말한다.
  40. 40)아래 경문이란 『화엄경』의 본문을 말한다. 이하 동일한 예가 많다.
  41. 41)마달리가(摩怛理迦, Mātrkā)란 논장의 별명. 본모(本母) 또는 행모(行母)라고 번역한다. 본(本)이란 이(理)이니, 논장은 이를 내는 어머니가 되므로 본모라고 한다. 또 행법(行法)을 내는 어머니이기 때문에 행모라 하였다.
  42. 42)보리유지(Bodhiruci)의 일음교에 대하여 징관의 『화엄경현담』 권4의 「출현품」의 여래 원음의 열 가지 뜻 가운데 한 가지를 설명하는 데 지나지 않기 때문에 완전한 교판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43. 43)여기서 3장이란 소승 3장을 말한다. 인연 생멸의 4제의 이치를 밝혀 소승을 교화하는 것이 주목적이지만, 한편으로는 보살을 교화하기도 한다.
  44. 44)『화엄경소(華嚴經疏)』를 말한다.
  45. 45)혜사는 10신위(信位)에 머물러 6근(根)이 청정함을 얻었고, 지자는 십신의 방편인 관행즉(觀行卽)을 증득하였다고 일컬어진다.
  46. 46)『속고승전』 권17, 「석지기전」에 의하면 “혜사가 지기를 칭송하여 말하기를 옛날 영취산에서 함께 『법화』를 들었으니 옛날 인연으로 이제 다시 만났다.……영취산의 7보 정토에서 부처의 설법을 들었으므로 혜사가 이르되 ‘네가 아니면 느끼지[感] 못하고 내가 아니면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47. 47)진제의 삼륜[眞諦三輪]이란 『금광명경(金光明經)』에 의하여 전(轉)ㆍ조(照)ㆍ지(持)의 3법륜교를 세운 것이다.
  48. 48)급다의 4교란 달마급다(達摩笈多, Dharmagupta, 590년 중국에 옴)는 『섭대승론』 등에 의하여 4교를 정립하였다. 첫째는 4제교(諦敎)이니 『아함경』 등의 소승경론을 말하는 것이요, 둘째는 무상교(無相敎)이니 『반야경』 등을 말하는 것이며, 셋째는 법상교(法相敎)이니 『능가경』 등을 말함이요, 넷째는 관행교(觀行敎)이니 『화엄경』을 말함이다.
  49. 49)파파의 5설이란 파라파가라밀다라(波羅頗迦羅蜜多羅, Prabhākaramitra, 565-
  50. 50)미륵(彌勒, Maitreya, 270~350경)은 유가파의 개조로서 『유가론(瑜伽論)』 100권ㆍ『대승장엄경론본송』 1권ㆍ『변증변론송(辨中邊論頌)』 등이 있다.
  51. 51)무착(無着, Asaṅga, 310~390경)은 미륵의 제자로서 유가사상을 조직적으로 선양시킨 사람이다. 『현양성교론송(顯揚聖敎論頌)』ㆍ『섭대승론(攝大乘論)』 3권ㆍ『대승아비달마집론(大乘阿毘達磨集論)』 7권 등은 유식에 대한 그의 주된 저서이다.
  52. 52)호법(護法, Dharmapāla, 530~561)은 『성유식론(成唯識論)』 10권ㆍ『성유식보생론(成唯識寶生論)』 5권 등을 지었다. 제자로는 계현이 있다.
  53. 53)난타(難陀, Nanda, 450~530경)는 유식 10대 논사의 한 사람. 종자(種子)설에 대하여 기여한 바가 크다.
  54. 54)생공(生空)이란 인공(人空)ㆍ아공(我空)이라고도 함. 5온으로 이루어진 ‘나’란 본래 없음을 말한 것.
  55. 55)법공(法空)이란 모든 법이 본래 없음을 설명한 것이다.
  56. 56)요의(了義)란 의리(義理)가 완전한 것. 여기에 반하여 의리가 완전하지 못한 것을 불요의(不了義)라고 한다.
  57. 57)변계소집자성(遍計所執自性, parikalpitasvabhāva)이란 허망 분별을 연유하여 가지가지로 사량계교하는 자성과 차별을 말한다.
  58. 58)의타란 의타기자성(依他起自性, paratantrasvabhāva)을 말하는 것으로 여려 가지 인연에 의하여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
  59. 59)원성이란 원성실자성(圓成實自性, parinispannasvabhāva)을 말하는 것으로 여러 가지 법의 진실성인 진여(眞如)를 말한다.
  60. 60)3성(性)이란 변계소집성ㆍ의타기성ㆍ원성실성을 말한다.
  61. 61)3무성(無性)이란 상무성(相無性)ㆍ생무성(生無性)ㆍ승의무성(勝義無性)을 말한다. 이것은 앞의 3성에 의하여 정립된 것이다. 즉 변계소집성은 체상(體相)이 없음이 허공꽃[空華]과 같기 때문에 상무성을 세우고, 인연에 의하여 생하고 자연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생무성을 정립하여 변계소집인 아법(我法)의 성품을 멀리 여읨에 의하여 승의무성이 정립된다.
  62. 62)문수(文殊, Mañjuśrī)는 지혜의 상징으로 역사적인 인물은 아니다.
  63. 63)용수(龍樹, Nāgārjuna, 150~250)는 『중론송(中論頌)』과 『십이문론(十二門論)』과 『대지도론(大智度論)』 등을 지은 중관파의 개조이다.
  64. 64)제바(提婆, Āryadeva, 170~270경)는 용수의 제자로서, 『백론(百論)』 등을 지었다.
  65. 65)청변(淸辯, Bāviveka)은 6세기 중엽에 활동했던 사람. 『반야등론(般若燈論)』 15권과 『대승장진론(大乘掌珍論)』 등의 저술이 있다.
  66. 66)『소야나마하연경(蘇若那摩訶衍經)』은 한역된 적이 없다.
  67. 67)각각위인실단(各各爲人悉檀)이란 사람들의 심행(心行)을 관하여 설법함을 말한다.
  68. 68)계현을 가리킨다.
  69. 69)『고려대장경』에 수록된 『탐현기』는 이 승(乘) 이하 부분이 없고 전혀 다른 경판과 바뀌어 있다. 즉 『고려대장경』 제47권, p.463의 한단 경판은 본 『탐현기』 제10권의 18폭(幅)이 잘못 끼어진 경판임으로 이 부분은 『대일본속장경』본에 의하여 번역하였다.
  70. 70)정성(正性)이란 성도(聖道)를 말하며 생(生)이란 번뇌, 혹은 미숙한 근기를 말하고 이를 뛰어넘는 것을 이생(離生)이라 함. 정성이생(正性離生)이란 견도초(見道初)의 무루인(無漏忍)을 말한다.
  71. 71)보특가라(補特伽羅, pudgala)란 삭취취(數取趣)라 번역함. 유정 또는 중생의 아(我)를 말한다. 중생은 번뇌와 업의 인연으로 자주 6취에 왕래하므로 삭취취라 한다.
  72. 72)지광(智光)이다.
  73. 73)시현(示現)이란 부처님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갖가지 형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74. 74)진제 삼장의 기록이란 『부이집론소(部異執論疏)』를 가리킨 듯하다. 『현담(玄談)』 5권을 참조.
  75. 75)별기란 『화엄경오교장』을 말한다.
  76. 76)『지귀장(旨歸章)』을 가리키는 듯하다.
  77. 77)생인(生因)이란 과(果)를 낳는 인종(因種)으로서 초목의 종자를 초목의 인(因)이라고 함과 같다. 요인(了因)은 보조적으로 사물의 생성을 도와 주는 인연을 말한다.
  78. 78)양려(瓖麗)란 부드럽고 아름다운 것을 말한다.
  79. 79)동생(同生)과 이생(異生)에 대해서 『탐현기』 권2에 밝히고 있다. 소승에서는 성문을 동생, 보살을 이생이라 하고, 시교(始敎)에서는 출가(出家)의 보살과 성문을 동생, 나머지를 이생이라 하며, 종교에서는 보살을 동생, 나머지를 이생이라 하고, 일승(一乘)에서는 법계는 둘이 없는 까닭에 다 동생, 법계는 차별인 까닭에 일체를 다 이생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