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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론절요(華嚴論節要)

1. 저자
보조 지눌普照知訥(1158~1210) 속성은 정鄭, 시호는 불일보조 국사佛日普照國師. 8세에 종휘宗輝 선사에게 축발祝髮하고, 25세에 개경 보제사普濟寺에서 실시한 승선僧選에 합격하였다. 이후 창평현(전남 담양) 청원사淸源寺에서 『육조단경』을 열람하다가 깨달은 바가 있었으며, 28세에 하가산 보문사普門寺에서 대장경을 읽던 중 이통현李通玄 장자의 『신화엄경론』을 보다가 더욱 밝게 깨달았으며, 40세에 『대혜어록』을 읽다가 큰 깨달음을 얻었다. 31세가 되던 1188년에 팔공산 거조사居祖寺에 내려가 정혜결사定慧結社를 맺었고, 1190년에 『권수정혜결사문』을 지었다. 1200년에 조계산 송광사松廣寺로 옮겨 결사를 지속하였다.
2. 서지 사항
발행 사항 미상. 수서본手書本. 3권 1책. 일본 가나자와 문고의 필사본을 저본으로 삼아 『신수대장경』 제36권에 수록된 이통현李通玄(635~730)의 『신화엄경론』(이하 『신론』) 및 김지견 교주본(1968)과 대조하여 『한국불교전서』 제4책에 수록. 제3권 끝에 판각과 간행이 제자인 충담沖湛(생몰년 미상) 등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사실과 제1권과 제3권 끝에는 일본의 엔슈(圓種, 1254~1377)가 1295년에 필사본을 발견하여 표점, 교정하였다는 사실이 적시되어 있다.
3. 구성과 내용
1207년 정월 8일(양력 2월 6일)에 쓴 지눌 자신의 서문에 따르면 1185년 하가산下柯山에 은거하고 있던 중 선종의 ‘즉심즉불卽心卽佛’이 진리임을 확신하였지만, 당시 교가敎家로부터 그것은 사사무애事事無礙를 관하는 것만 못하다는 힐난을 받았다. 이에 대장경을 3년간 열람하다가 『화엄경』 「여래출현품」의 ‘미진경권유微塵經卷喩’에 감격했지만, 범부의 초신初信 성취의 길에 대해서는 자세히 몰랐다. 그의 고민을 해결해 준 것은, 『화엄경』에서 범부의 지위로 간주되는 십신위를 대표하는 각수覺首 보살의 이름이 중생의 몸과 분별심이 본래 법계, 부동지불不動智佛, 그리고 문수보살의 지혜와 같음을 함축한다고 해설한 이통현의 『신론』이었다.
본문은 이처럼 지눌에게 교와 선의 일치를 일깨워 준 『신론』의 내용을 요약하는데, 전 3권 가운데 권2의 중반부까지는 40권본 『신론』에서 이통현이 『화엄경』의 핵심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요간料間 7권에 대한 것이다. 여기에는 교판에 해당하는 의교분종依敎分宗과 의종교별依宗敎別, 『화엄경』의 교리적 특징을 밝힌 교의차별敎義差別, 『화엄경』 구성을 10처 10회로 보는 이통현 특유의 견해를 밝힌 회교시종會敎始終 등 10문이 정리되어 있다. 이후에는 『화엄경』의 주요 문장을 해설한 『신론』의 수문해석隨文解釋이 편의에 따라 요약되어 있고, 지눌 자신의 목소리는 네 차례에 걸쳐 “목우자왈牧牛子曰”의 형태로 나타나 있다.
이 책에서 지눌은 이통현이 제시한 주요한 교학 이론들을 대부분 수용하고 있다. 특히 그는 중생들은 부처의 지혜와 질적으로 동일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자각될 만한 속성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 지혜를 갖추고 있음을 모른 채 업을 일으켜 고통을 받다가 그 고통으로 인해 발심하여 깨달음을 얻는다는 이통현의 이론을 강조하고 있다. 이통현은 이러한 마음을 가진 중생의 속성을 ‘땅으로 인해 넘어진 자는 땅을 딛고 일어선다(因地而倒因地而起)’는 비유로 표현하였는데, 지눌 역시 이 책과 『권수정혜결사문』에서 이 비유를 인용하였다. 아울러 그가 경문 해석을 둘러싼 이통현의 일부 오류를 지적하면서도 그것을 최초의 필사자인 광초廣超(생몰년 미상)의 탓으로 돌리고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지눌은 이통현이 공관空觀 및 선정禪定을 비판한 근거인 일진법계一眞法界 및 『화엄경』의 교리를 문수, 보현, 비로자나간의 관계를 통해 설명한 삼성원융三聖圓融 개념은 수용하면서도 중국의 고유한 철학 체계인 『주역』과 음양오행설을 통해 그 구체적인 내용을 해설한 『신론』의 문장들은 대부분 삭제해 버린다. 또한 그는 『신론』에서 『화엄경』 「세주묘엄품」에 나타난 신중神衆들과 수행 계위를 관련시켜 자세히 설명한 부분도 전재하지 않는다. 나아가 지눌은 이통현이 『화엄경』 「입법계품」에 등장하는 여성 선지식을 자비의 화신으로 동일시하면서 비구승이 자비심의 결여를 나타낸다고 본 부분도 인용하지 않는데, 이러한 사례는 그가 『신론』에 나타난 것과 같은 중국적 또는 통속적 상징 체계를 통한 『화엄경』 해석을 수용하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말미에는 이통현의 전기인 〈조화엄경론주이장자행장造華嚴經論主李長者行狀〉이 부기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