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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

개요

[경명] 금강삼매경 金剛三昧經
[범] Vajrasamādhi Sūtra [장] Rdo rjeḥi tiṅ ṅe ḥdsin gyi chos kyi yi ge

내용

K0521 (T.0273 ) 1권
부처님이 여러 보살과 비구들의 질문에 대하여 일승(一乘) 진실(眞實)에 대하여 설한다. 관행(觀行) 즉 인식과 실천에 관한 모든 기본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법문을 제시함으로써 일미(一味) 즉 무소득(無所得)의 일미를 설한다. 제1 서품(序品) : 부처님이 왕사성 기사굴산에 있을 때였다. 부처님이 대중들에 둘러싸여 일미실상무상무생결정실제본각이행(一味實相無相無生決定實際本覺利行)이라는 이름의 경을 설하고 금강 삼매에 들어 몸과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이때 비구 아가다(阿伽陀)가 부처님이 설한 법의 의의를 게송으로 찬탄한다. 제2 무상법품(無相法品) : 그때에 부처님이 삼매에서 일어났다. 해탈 보살이 부처님에게 일미(一味)의 결정된 진실에 대하여 설법을 청하자, 부처님이 설한다. 보살의 모든 심상(心相)은 본래 무(無)를 근본으로 한다. 그러므로 무상(無相)의 마음은 무심이고 무아이다. 이러한 보살의 마음은 무생(無生)이어서 여래장(如來藏)이며 움직이지 않는다. 보살의 망상은 본래 나지 않으므로 망상을 멈출 것이 없으나, 보살이 공법(空法)을 닦는다면 3계에 머물지 않고 계율의 형식에 머물지 않으며 본성이 금강과 같이 되어 6바라밀을 구족한다. 6바라밀은 무상이고 무위(無爲)이므로 보살로 하여금 능히 해탈하게 한다. 이러한 해탈상(解脫相)은 무상(無相)‧무행(無行)‧무동(無動)‧무란(無亂)‧적정(寂靜)‧열반이지만, 열반상(涅槃相)을 취하지 않는다. 부처님이 이와 같이 설하자, 해탈 보살이 게송으로 부처님이 설한 법의 의의를 찬탄한다. 제3 무생행품(無生行品) : 부처님의 설법을 들은 심왕(心王) 보살이 부처님에게 중생이 어떻게 무유생(無有生)으로 무생인(無生忍)을 얻는가에 대하여 설법을 청하자, 부처님이 설한다. 무생(無生) 법인(法忍)에서 법은 본래 무생이고, 모든 행도 무생이다. 법은 본래 무생이기에 무생인(無生忍)을 얻는다는 것은 허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보살이 적정심(寂靜心)과 무생심(無生心)을 낸다면 그것은 유생행(有生行)이고, 보살이 삼매에 들지 않고 좌선(坐禪)에 머물지 않으면 그것은 무생행(無生行)이다. 보살은 선성(禪性)에 움직임과 고요함이 없다는 것을 알면 이러한 지혜로써 무생의 반야 바라밀을 얻는다. 부처님이 이와 같이 설하자, 심왕 보살이 게송으로 부처님이 설한 법의 의의를 찬탄한다. 제4 본각리품(本覺利品) : 부처님의 설법을 들은 무주(無住) 보살이 먼 곳에서 부처님 가까이 다가와 청정 경계에 들어 몸과 마음을 움직이지 않자, 부처님이 그를 찬탄하였다. 무주 보살이 부처님에게 중생들로 하여금 암마라(庵摩羅)에 들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으로 식(識)을 전(轉)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설법을 청하자, 부처님이 설한다. 모든 부처는 항상 하나의 각(覺)으로써 식을 굴리어 암마라에 들어간다. 왜냐하면 모든 중생의 본각(本覺)도 그와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부처는 항상 하나의 각으로써 모든 중생을 깨우쳐 중생들로 하여금 본각을 얻게 하고, 모든 식이 공적(空寂)하고 무생(無生)함을 깨닫게 한다. 열반에 머문다는 것은 열반의 속박이므로 깨달은 자는 열반에 머물지 않는다. 중생이 깨닫다는 생각을 내지 않으면 마음이 태평하므로 이것이 본각의 이로움이지만 본각의 본래 이익은 깨달음이다. 부처님이 이와 같이 설하자, 무주 보살은 게송으로 부처님이 설한 법의 의의를 찬탄하였다. 제5 입실제품(入實際品) : 대력(大力) 보살이 부처님에게 취하거나 버릴 것이 없는 다섯 가지 공(空)에 대하여 설법을 청하자, 부처님이 설한다. 3유(有)‧6도(道)‧법상(法相)‧명상(名相)‧심식(心識)은 모두 공하여 취하거나 버릴 것이 없다. 보살이 취할 것이 없는 경지에 들어가면 3공에 들어간다. 중생과 불성은 불이(不二) 불이(不異)하다. 그러므로 중생성(衆生性)은 본래 생멸이 없고 생멸성은 본래 열반이어서 성(性)과 상(相)이 본래 진여(眞如)이다. 진여의 상은 10신(信)‧10주(住)‧10행(行)‧10회향(廻向)‧10지(地)‧등각(等覺) 등을 행하는 보살이라야 능히 알 수 있다. 실제(實際)의 법이란 제(際)가 없는 것이므로 무제(無際)의 마음만이 실제에 들어갈 수 있다. 부처님이 이와 같이 설하자, 사리불이 게송으로 부처님이 설한 법의 의의를 찬탄한다. 제6 진성공품(眞性空品) : 사리불이 부처님에게 보살도를 닦아 이름과 형상이 없음을 이룬 보살은 중생들을 위하여 어떻게 설법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설법을 청하자, 부처님이 설한다. 37도품법(道品法)에는 많은 이름이 있으나 뜻은 하나이므로, 여여한 이치가 모든 법을 갖춘다. 또한 법은 얻을 수 없다. 얻을 수 없는 법은 하나의 뜻이므로 글이 없다. 글과 형상이 없는 뜻은 진실한 공성(空性)이다. 공성의 뜻은 여실(如實)하고 여여(如如)하므로 여여한 이치에 머무는 자는 모든 법을 갖춘다. 일천제(一闡提)에서 여래에 이르기까지는 다섯 가지의 지위가 있다. 진여는 공성이므로 공성의 지혜로 모든 번뇌를 태워 평등하게 하면, 등각(等覺)의 3지(地)와 묘각(妙覺)의 3신(身)이 9식(識) 안에서 홀연히 밝아져 그림자가 없게 된다. 모든 선정(禪定)의 관법(觀法)은 헛된 망상이다. 왜냐하면 진여의 모습과 형상은 이미 적멸하였기 때문에 진여로서 진여를 관찰하면 관찰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이와 같이 설하고, 사리불의 청에 의해 둔한 중생으로 하여금 실제(實際)에 들게 하기 위하여 4구(句) 게송을 설한다. 제7 여래장품(如來藏品) : 범행(梵行) 장자가 부처님에게 법의 수는 헤아릴 수 없으나 법상(法相)은 하나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에 대하여 설법을 청하자, 부처님이 설한다. 비유하면 성의 4대문(大門)을 열어 놓으면 모든 문은 하나의 시장에 이르는 것과 같고, 물의 수는 많으나 물이 바다에 들어가면 하나의 물맛에 머물고 모든 물맛을 포섭하는 것과 같다. 법도 이와 같아서 모두 진여에 있으므로 하나의 불도(佛道)이다. 하나의 불도에 머무는 자는 수사(隨事) 취행(取行), 수식(隨識) 취행, 수여(隨如) 취행을 통달하여 여래장에 든다. 법상은 분별하는 것이므로 생멸법이다. 그러므로 분별을 여읜 법은 멸하지 않는다. 이러한 의미를 부처님이 다시 게송으로 설하자, 범행 장자도 게송으로 부처님이 설한 법의 의의를 찬탄한다. 제8 총지품(摠持品) : 지장(地藏) 보살이 부처님에게 대중들의 마음에 있는 의심을 풀어 줄 것을 청하자, 부처님이 설한다. 법상이라는 것은 안과 밖이 모두 공하고, 경계(境界)와 지혜가 모두 본래 적멸(寂滅)하다. 여래가 설한 실상은 진공(眞空)이므로 이러한 법은 집(集)이 아니다. 여실한 법은 무색(無色)‧무주(無住)이고 소집(所集)이 아니며 소집이 아닌 것도 아니다. 공성은 무생이므로 마음도 그러하고, 공성은 불멸(不滅)이므로 마음도 불멸이며, 공성이 무주(無住)하고 무진(無盡)함에 따라 마음도 그러하다. 이러한 공법(空法)을 설하는 것은 모든 현실을 깨뜨리기 위함이다. 부처님이 이와 같이 설하자, 지장 보살이 게송으로 부처님이 중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법을 남김 없이 분별하였다고 찬탄한다. 부처님은 대중들에게 지장 보살을 찬탄하며 그의 명호(名號)를 지니거나 이 불전의 법을 지니는 중생은 많은 공덕이 있음을 설한다. 끝으로 부처님이 불전의 이름을 청하는 아난에게 불가사의(不可思議)라고 부르거나, 섭대승(攝大乘), 금강 삼매, 무량의종(無量義宗)이라고 이름하라 이르고, 이 불전을 받들어 지니는 자의 공덕에 대하여 설하자, 아난을 비롯한 모든 보살과 4부 대중들은 크게 기뻐하며 마음에 결정을 얻고 부처님에게 예를 올렸다. 이 경의 문헌학적 해명은 분명치 않으나 일반적으로 신라에서 재구성된 문헌으로 간주되고 있다. 원효(元曉)가 이에 대한 소(疏)를 저술하였는데, 원효의 소는 중국에 전해져 논(論)으로 개칭되어 금강삼매경론이라고 불릴 정도로 원효의 명성을 떨치게 했던 역저이다. <출처 :『고려대장경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