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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疏)

제목정보
장소명 소(疏)
이명
저자정보
찬자 이름원효(元曉)
이명석원효(釋元曉), 대성화정국사(大聖和靜國師), 서당(誓幢), 신당(新幢), 해동(海東)
생몰년617 ~ -686
국적신라(新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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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정보
총록정보 疏二卷 元曉述
찬술방식 술(述)
교감현황
형태정보
권수 二卷
현존정보
서지정보 第一末: 필사본, 太子堂, 1295. 1295년(永仁 3) 사본 / cf. 본 자료는 검토결과 길장(吉藏)의 승만보굴(勝鬘寶窟) 로 확인 [ft.김천학], 대수문고(大須文庫_名古屋市真福寺寶生院)
학술정보
학술논문 李 萬, 新羅 元曉의勝鬘經疏에 관한 硏究- 「一乘章 第五」를 중심으로 -(韓國佛敎學 Vol.44, 2006, 한국불교학회) 바로가기

[장소해제]

장소찬자

원효는 신라 26대 진평왕 39년(617)에 태어나 31대 신문왕 6년(686) 음력 3월 30일 70세로 입적했다. 원효의 속성은 설薛씨이고, 어릴 때 이름은 서당誓幢이다. 압량군押梁郡 불지촌佛地村에서 담날내말談捺乃末의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잉피공仍皮公이고, 원효의 한편 설薛씨 족보에 의하면 원효는 아버지 내옥乃玉과 어머니 갈산葛山 용씨龍氏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사思이다.
원효는 16세에 출가한 후 31세에는 낭지郎智에게 배웠으며 34세(650년)와 45세(661년) 에 도당을 시도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큰 깨달음을 얻고 중국 유학계획을 중지하였다. 667년에 설총薛聰을 낳은 후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라 칭하며 무애가無碍歌를 부르며 전국에 가르침을 펼쳤다. 고선사高仙寺에 머물던 672년에 사복蛇福을 만났고, 이때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686년(神文王6, 70세)에 분황사에서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쓰던 중 제40 회향품廻向品이후 부터 절필하였다. 그 해 경주 3월 30일에 남산南山 혈사穴寺에서 입적하였다. 원효의 행적은 『삼국사기』·『삼국유사』·『송고승전』·「서당화상탑비」 등에 전한다.
대각국사 의천은 원효를 마명보살이나 용수보살의 수준으로 보아 ‘성사聖師’·‘대성大聖’이라 칭송하였으며, 『화쟁론』을 지어 원효를 기렸다. 화쟁사상은 원효 불교 사상의 핵심으로, ‘화쟁은 백 가지 논쟁을 아우르지 못할 것이 없다.(百家之諍無所不和)’ 는 뜻이다. 즉 대승·소승, 성·상, 돈·점의 상호 대립적인 모든 논쟁을 화합하고 아울러, ‘모든 사상가들의 서로 다른 쟁론들을 화해시킨다.’(『열반경종요』)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의천은 또 분황사에 가서 원효를 위해 제문(「祭芬皇寺曉聖文」)을 지었는데, 그 내용에서도 ‘해동교주 원효보살에 짝할 이는 없다.’며 화쟁사상을 극찬하고 있다. 또한 의천은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에도 원효에 관한 기록을 남겼는데 「제분황사효성문祭芬皇寺曉聖文」·「의해동소강금강경경이유작依海東疏講金剛經慶而有作」·「독해동교적讀海東敎迹」·「화쟁론和諍論」·「영통사대각국사비靈通寺大覺國師碑」 등이 전한다.
<동국대학교 계미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