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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疏)

제목정보
장소명 소(疏)
이명
저자정보
찬자 이름원효(元曉)
이명석원효(釋元曉), 대성화정국사(大聖和靜國師), 서당(誓幢), 신당(新幢), 해동(海東)
생몰년617 ~ -686
국적신라(新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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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정보
총록정보 疏一卷 元曉述
찬술방식 술(述)
교감현황 <安元寫本>: "䟽一卷 元曉述" [元曉: <正保寫本>에 「太賢」].【cf. 朴鎔辰. "『新編諸宗敎藏總錄』의 對校와 校勘 硏究." 『서지학연구』, 67 (2016.09), 177-207.】
형태정보
권수 一卷
현존정보
서지정보 단권: 목판본, [不明], 1711. 1711년(寶永 8) 간본(추정), 중앙승가대도서관(中央僧伽大圖書館)
서지정보 단권: 목판본, [不明], 1711. 1711년(寶永 8) 간본, 용곡대학도서관(龍谷大學圖書館)
서지정보 단권: 목판본, [不明], [不明]. 시기미상, 용곡대학도서관(龍谷大學圖書館)
서지정보 2종문헌합본: 목판본, [不明], 1711. 1711년(寶永 8) 간본, 대정대학도서관(大阪大學圖書館)
서지정보 단권: 목판본, [不明], [不明]. 1658년(明曆 4) 간본, 경도대학도서관(京都大學圖書館)
서지정보 단권: 목판본, [不明], [不明]. 1631년(寬永 8) 간본, 경도대학도서관(京都大學圖書館)
서지정보 단권: 목판본, [不明], 1631. 1631년(寬永 8) 간본, 고야산대학도서관(高野山大學圖書館)
서지정보 단권: 목판본, [不明], [不明]. 1631년(寬永 8) 간본, 대곡대학도서관(大谷大學圖書館)
서지정보 단권: 목판본, [不明], 1658. 1658년(明暦 4) 간본, 대정대학도서관(大阪大學圖書館)
서지정보 단권: 목판본, [不明], 1711. 1711년(寶永 8) 간본, 동북복지대학도서관(東北福祉大學圖書館)
서지정보 단권: 필사본, [不明], 1333. 鎌昌시기(1185~1333) 사본, 선림사(禪林寺_京都)
서지정보 단권: 목판본, [不明], [不明]. 1631년(寬永 8) 간본, 용곡대학도서관(龍谷大學圖書館)
서지정보 단권: 목판본, [不明], [不明]. 1658년(明曆 4) 간본, 철학당도서관(哲學堂圖書館)
연계정보
한문대장경 ◎ 한국불교전서(韓國佛敎全書) 무량수경종요(無量壽經宗要) 원효(元曉) 1권 통일신라 H0012 바로가기
한문대장경 ◎ 大正藏(T37 No.1747) 『兩卷無量壽經宗要』 1卷, 新羅 元曉撰 바로가기
학술정보
단행본 군맹서진, 불이정토론: 원효성사의 양권무량수경종요와 아미타경소해설(서울: 瞿曇, 2006) 바로가기
단행본 대한불교원효종, 『국역원효성사전서』(서울: 제일출판사, 1988)
학위논문 안계현, 신라시대정토왕생사상연구(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 박사학위논문, 1974) 바로가기
학술논문 고영섭, 동아시아 불교에서 정토학과 원효-유심정토와 타방정토의 응축과 확산(원효학연구 13호, 2008, 원효학연구원)

[장소해제]

章疏書名
양권무량수경종요兩卷無量壽經宗要
개요

원효元曉의 『양권무량수경종요兩卷無量壽經宗要』(1권)는 강승개康僧鎧가 번역한 『불설무량수경佛說無量壽經』(2권)의 내용을 중점적으로 집약하고 그 의미를 해석한 책으로 원효 정토사상의 중심교설이 망라되어 있다.
체제와 내용

원효(元曉)의 『양권무량수경종요(兩卷無量壽經宗要)』(1권)는 강승개(康僧鎧)가 번역한 『불설무량수경(佛說無量壽經, [범] Sukhāvatīvyūhaḥ sūtra)』(2권)의 내용을 중점적으로 집약하고 그 의미를 해석한 책으로 원효 정토사상의 중심교설이 망라되어 있다.
원효는 『무량수경』을 ‘보살장교의 격언이고 불토인과의 진전(菩薩藏敎之格言 佛土因果之眞典也)’이라고 극찬한다. 그 가르침의 요체를 담은 원효의 『양권무량수경종요』는 형식적으로는 대의(大意), 경지종치(經之宗致), 약인분별(約人分別), 취문해석(就文解釋)의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실제로 취문해석에 대한 구체적인 해설은 없다. 따라서 본문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대의, 경지종치, 약인분별의 세 부분으로 구성된 『양권무량수경종요』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대의’에는 원효사상의 핵심이 담겨 있다. 원효는 중생의 심성이 융통무애하여 그 체(體)는 언제나 평등하며, 어떤 특별한 상(相)이 있을 수 없으므로, 정토(淨土)와 예토(穢土)는 ‘본래일심’에 있다고 한다. 즉 깨달은 입장에서 보면 예토정국(穢土淨國)이 본래 일심이며, 생사와 열반이 대립되는 극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원효는 서방 극락정토를 어떤 일정한 공간이나 형상으로 국한시켜 보고 있지 않다. 그는 ‘이 경은 보살 장경의 격언이며 불토의 인과의 진전이다.’며, 『무량수경』을 근간으로 하여 정토원생을 대승보살도로써 자리매김하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어 예토와 정국은 본래 일심이다. 생사열반은 宗無二諦임(無此無彼 穢土淨國本來一心. 生死涅槃宗無二諦)’을 깨닫는 것이 대승불도(大乘佛道)의 목적이라 밝힌다.
『대승기신론』의 수도(修道)체계를 바탕으로 한 「수도론」은 『무량수경』의 삼배(三輩, 上·中·下輩) 중 하배인 부정성인(不定性人)의 구제를 논리전개의 주안점으로 두고 있다. 이들 하근기인은 지관행(止觀行)에 의하지 않고 정토원생(淨土願生)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며, 정토에 원생하면 아미타불의 본원력에 의해서 정정취(正定聚)에 들어가 열반으로 인도된다고 한다.
둘째, 원효는 경지종치에서도 『무량수경』의 핵심적 교설을 말하고 있다. 그는 ‘정토의 인과를 종체로 삼고 섭물왕생(攝物往生:어떻게 왕생하게 하느냐 하는 문제의 해명)을 의치로 삼는다.’며 정토와 왕생의 인과에 대해 논술한다. 즉 『무량수경』은 정토의 인과를 밝히고, 섭물왕생에 그 의도가 있다고 한다. 왕생인에 대해 ‘단 여래의 본원력을 승복하기 때문에’라며 본원력의 절대성을 강조한다. 그가 왕생의 정인을 보리심으로 삼은 것은 정토원생의 길을 열반에 이르기 위한 대승의 불도로써 자리매기기 위함이었다.
그는 ‘정토의 인과’에서는 과(果)로서의 정토에는 어떠한 덕이 있는가를 정부정문(淨不淨門)·색무색문(色無色門)·공불공문(共不共門)·루무루문(漏無漏門)의 4개 부문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셋째, 약인분별에서는 정정취·부정취·사정취(邪定聚)의 삼취중생을 설명하고 정토에 왕생할 수 있는 사람을 분별하고 있다. 원효는 『보성론(寶性論)』을 인용하여 정정취를 설명하고, 또한 『유가론(瑜伽論)』에 의거하여 정정취에는 본성정정취(本性正定聚)와 습성정정취(習性正定聚)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무량수경』에서 말한 중생이 태어나는 곳과 관련하여, 부사의지(成所作智)·불가칭지(妙觀察智)·대승광지(平等性智)·무등무륜최상승지(大圓鏡智)의 달성이야말로 정토 구현의 요체임을 강조하고 있다. 원효는 이러한 4지를 모르거나 의심하는 중생을 4의혹 중생이라고 하면서 4지에 대한 상세한 해설을 가하였다.
「약인분별」의 마지막부분에서는 ‘오로지 여래를 우러러보고 일향(一向)히 복신(伏信)하라. 이와 같은 사람은 그의 행품에 따라 저 정토로 왕생하고 변지(邊地)에 태어나지 않는다.’며, 여래사지(如來四智)에 대한 앙신(仰信)으로 정토에 왕생한다고 단언한다.
『무량수경』이 중국에 전래된 후 동아시아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동진(東晋)의 축법광(竺法曠)이 ‘무량수는 정토의 인이다.(無量壽爲淨土之因)’고 한 것이나, 혜원(慧遠)이 여산(廬山)에서 백련사(白蓮社)를 결성하고 염불법문을 홍양한 것 등은 그 단적인 예이다. 일본의 승려 혜은(慧隱)은 당에 구법하러 갔다가 이 경을 가지고 돌아가 왕궁에서 강의하였고, 정토종의 창시자 원공(源空)이나, 정토진종을 세운 친란(親鸞) 등은 전적으로 이 경에 의지하여 타력이행(他力易行)의 종의(宗義)를 펼쳤다. 신라에는 특히 그 영향력이 컸던 것으로 보이는데, 원효의 『양권무량수경종요』나 『무량수경소(無量壽經疏)』(1권), 경흥(憬興)의 『무량수경연의술문찬(無量壽經連義述文贊)』(3권), 현일(玄一)의 『무량수경기(無量壽經記)』(상권 잔존) 등을 비롯하여 원측(圓測)·태현(大賢)·의적(義寂) 등도 『무량수경』의 주소류를 저술하였기 때문이다.
원효의 종요에 앞서 중국의 담란(曇鸞)·영유(靈裕)·혜원(慧遠)·길장(吉藏)의 주소(註疏)가 나왔는데, 원효의 종요는 일심의 근원이 무량수불의 정토라는 매우 독보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따라서 혜원·길장의 주소와 신라의 경흥(憬興)의 『무량수경술문찬』과 더불어 『무량수경』의 4대 주석서로 손꼽힌다. 원효는 화엄을 존중하는 입장에 서 있었으므로 『무량수경』에 대하여 해석할 때도 그 관점에서 벗어나지 않았는데, 그런 부분이 『의천록』에 집록(集錄)되게 된 이유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국대학교 계미향>
장소찬자

원효의 행적은 『삼국사기』·『삼국유사(三國遺事)』·『송고승전(宋高僧傳)』·「서당화상탑비」 등에 전한다. 원효는 신라 26대 진평왕 39년(617)에 태어나 31대 신문왕 6년(686) 음력 3월 30일 70세로 입적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원효의 속성은 설(薛)씨이고, 압량군(押梁郡, 현 경산 자인면) 불지촌(佛地村)에서 담날내말(談捺乃末)의 아들로 태어났다. 내말(乃末)은 내마(柰麻)로 신라 17관등 중 11번째이다. 할아버지는 잉피공(仍皮公)이고, 원효의 어릴 때 이름은 서당(誓幢)이다. 한편 설(薛)씨 족보에 의하면 원효는 아버지 내옥(乃玉)과 어머니 갈산 용씨(葛山 龍氏)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사(思)이다.
원효는 16세이던 632년(善德王 원년)에 출가한 것으로 추정되며, 일정한 스승 없이 홀로 공부하였다. 31세(647년)에는 낭지(郎智)를 찾아가 배웠으며 34세(650년)에는 의상과 함께 요동을 거쳐 중국으로 유학가려다 실패하였다. 그리고 661년(文武王1, 45세)의 두 번째 도당과정에서 큰 깨달음을 얻고 중국 유학의 필요성이 없어져 발걸음을 돌렸다. 667년(文武王7, 51세)에는 요석공주(瑤石公主)와의 사이에서 설총(薛聰)을 낳고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라 칭하며 무애가(無碍歌)를 지어 부르면서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가르침을 펼쳤다. 668년(文武王8, 52세)에는 당의 소정방(蘇定方)이 그려 보낸 난독화(鸞犢畵, 난새와 송아지를 그린 그림)를 풀이하여 즉시 회군하라는 뜻임을 간파하였다.
고선사(高仙寺)에 머물던 672년에 사복(蛇福)을 만났고, 이때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686년(神文王6, 70세)에 분황사에서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쓰기 시작하였으나 제40 회향품(廻向品)까지 쓰고 절필하였다. 그 해 경주 3월 30일에 남산(南山) 혈사(穴寺)에서 입적하였다.
대각국사 의천은 원효를 마명보살이나 용수보살의 수준으로 보아 ‘성사(聖師)’, ‘대성(大聖)’이라 칭송하였으며, 『화쟁론(和諍論)』을 지어 원효를 기렸다. 화쟁사상은 원효 불교 사상의 핵심으로, ‘화쟁은 백 가지 논쟁을 아우르지 못할 것이 없다.(百家之諍無所不和)’ 는 뜻이다. 즉 대승·소승, 성·상, 돈·점의 상호 대립적인 모든 논쟁을 화합하고 아울러, ‘모든 사상가들의 서로 다른 쟁론들을 화해시킨다.’(『열반경종요』)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의천은 또 분황사에 가서 원효를 위해 제문(「祭芬皇寺曉聖文」)을 지었는데, 그 내용에서도 ‘해동교주 원효보살에 짝할 이는 없다.’며 화쟁사상을 극찬하고 있다. 또한 의천은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에도 원효에 관한 기록을 남겼는데 「제분황사효성문(祭芬皇寺曉聖文)」·「의해동소강금강경경이유작(依海東疏講金剛經慶而有作)」·「독해동교적(讀海東敎迹)」·「화쟁론(和諍論)」·「영통사대각국사비(靈通寺大覺國師碑)」 등이 전한다.
<동국대학교 계미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