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찬자
당 규기(혹은 기, 632~682)는 경조京兆 장안(현 陝西省 西安市) 출신으로 속성은 위지尉遲이고 자字는 홍도洪道이며 휘諱가 규기이다. 무공武功으로 수봉受封된 귀족 가문 출신으로 부친 위지종尉遲宗은 당의 좌금오장군左金吾將軍, 송주松州 도독都督을 지냈으며 강유현개국공江油縣開國公에 봉해지기도 하였다. 규기는 어려서부터 유교 경전을 배웠으며 문장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9세에 모친을 잃고 슬퍼하다가 출가에 뜻을 두었는데 현장玄裝(602~664년)이 규기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부친의 허락을 받아 17세(648)에 출가시켰다. 그는 먼저 홍복사弘福寺에 머물다가 동년 12월에 현장을 따라 대자은사大慈恩寺로 옮겼다. 23세이던 654년에는 조정의 명으로 대승大僧으로 득도하였으며, 범어를 익혀 2년 후에는 역경에 참여하였다. 664년(麟德元年)에 현장이 옥화궁玉華宮 역장譯場에서 입적하자 역경작업은 중단되어 규기는 다시 자은사로 돌아가 저술활동에 전념하였다. 이후 그는 한 동안 선조의 고향을 유력하거나 강경, 혹은 주석서를 찬술하였다. 또한 오대산에 옥으로 문수상文殊像을 조성하기도 하고, 금자金字 『반야경般若經』을 사경하기도 하였다.
규기는 법상종의 개조開祖로 자은대사, 혹은 삼거법사三車法師라고도 불렸으며 682년(永淳元年, 11월 13일)에 51세로 자은사 번경원翻經院에서 입적하였다. 12월 4일에 번촌樊村 북거北渠에서 장사지냈으며 현장의 묘 가까이에 모셨다. 829년(文宗太和 3年 7월)에 탑을 열어 다비하여 평원平原의 새 탑으로 옮겼다.
<동국대학교 계미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