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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기(義記)

제목정보
장소명 의기(義記)
이명
저자정보
찬자 이름혜원(慧遠)
이명석혜원(釋慧遠), 수원(隋遠), 대원(大遠), 소원(小遠), 원법사(遠法師), 북원(北遠), 혜원(惠遠), 원공(遠公), 정영법사(淨影法師)
생몰년523-523.12.36 ~ 592.02.20-593.02.13
국적수(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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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정보
총록정보 溫室經義記一卷 慧遠述
찬술방식 술(述)
교감현황 <安元寫本>: "溫室經義記一卷 惠遠述" [惠: <正保寫本>에 「惠」, <元祿刊本>,<大正藏本>에 「慧」, <韓佛全本>에 「惠」, 案 「慧」].【cf. 朴鎔辰. "『新編諸宗敎藏總錄』의 對校와 校勘 硏究." 『서지학연구』, 67 (2016.09), 177-207.】
형태정보
권수 一卷
현존정보
서지정보 단권: 목활자본, 昌原府匡廬山萬興寺, 1743. 1743년(寬保 3)識語 목활자본, 경도대학도서관(京都大學圖書館)
연계정보
한문대장경 ◎ 大正藏(T39 No.1793) 『溫室經義記』1卷, 隋 慧遠撰 _部別 : 經疏部七 _冊512 _ 聯關資料:No.701 _【原】寬保三年刊宗敎大學藏本, 【甲】大日本續藏經. 바로가기
한문대장경 ◎ 新纂卍續藏(X37 No.667) 『溫室經義記』 1卷, 隋 慧遠撰 _部別 : 中國撰述 大小乘釋經部三十五 小乘經並聖賢集疏 - 『卍大日本續藏經』 第一編 第 59 - 『卍續藏經』 (新文豐版) 第 59冊

[장소해제]

장소찬자

수隋 혜원慧遠(523~592)의 속명은 이자李仔이고 조적祖籍은 돈황敦煌이며 세거世居는 건흥군建興郡 고도高都(현 山西 晉城市)이다. 523년(北魏正光4), 장음사藏陰寺 주지 담시曇始가 좌선 중에 그의 탄생을 예언하였다. 2세에 부친을 잃고 6세에 담시가 머물던 장음사로 출가하였으며 13세에 정식으로 삭발하고 혜원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그는 매우 총명하였는데 같은 해에 유명한 고현곡사古賢穀寺(晉城市)의 승사僧思선사가 혜원을 보고 제자로 청하자 담시는 혜원을 그에게 보내어 3년 만에 큰 성과를 보았다. 16세에 심율사湛律師를 따라 수도 업鄴으로 가서 대소승경론을 널리 읽었으며, 담은曇隱율사에게서 『사분률四分律』을 배웠다. 다시 고도로 돌아와 옛 집에 도량을 세워 강경講經 설법하고 주소注疏류를 찬하였다.
혜원은 협석사硤石寺(현 古青蓮寺)를 창건한 후 주周 무제武帝의 폐불廢佛을 만나 태항산太行山에 은거하며 수행하였다. 3년 후 무제가 사망하자 혜원은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의 주지가 되었으며 587년(隋文帝開皇7)에는 전국의 유명한 6대 고승 중 하나로, 통관으로 선임되어 입경, 대흥선사大興善寺 주지가 되었다.
중국불교사에서는 그를 “승중지룡僧中之龍”·“제수태두齊隋泰鬥”·“소왕疏王”·“석의고조釋義高祖”라고 부르며 여산廬山 혜원慧遠과 그를 “불문이원佛門二遠”이라고도 한다. 또 그는 지론종地論宗의 대표 인물로 천태天台 지의智顗, 가상嘉祥 길장吉藏과 함께 ‘수隋의 3대사大師’중의 하나이다. 수 문제文帝가 창건(583)한 정영사淨影寺에 머물렀으므로 정영사 혜원, 정영 혜원이라고도 불린다. 수 문제의 보호로 건흥建興·정주定州·상당上黨 등에서 강의하고 서경西京으로 돌아와 황제에게도 강의하자 황제는 그를 흥선사에 머물게 하였으며 이어 정영사를 세워 주었다. 587년(開皇7)에는 대덕으로 칙봉하였으며 592년에는 역장의 주지로 임명하였다. 그는 지론종 남도파에 속하였고 만년에는 담천曇遷에게서 『섭대승론攝大乘論』을 배워 제 학을 모두 익혔기에 세칭 ‘석의고조’라 하였다. 그 후 592년에 정영사에서 70세로 입적하였다. 저술로는 『대승의장』외에도 『십지경론의기十地經論義記』(14권)·『십지경론의기十地經論義記』(7권)·『대반열반경의기大般涅盤經義記』(20권)·『법화경소法華經疏』(7권)·『유마경의기維摩經義記』(4권)·『승만경의기勝鬘經義記』(3권)·『무량수경의소無量壽經義疏』(1권) 등 20부 100여 권이 있다. 그중 『대승의장』은 불교의 백과사전으로 불리며 수·당의 불교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동국대학교 계미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