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찬자
징연의 생몰년대나 속가의 배경, 출가 후의 활동 등을 직접적으로 전하는 자료는 없다. 그러나 『요사습유(遼史拾遺)』권 16의 「봉복사존승다라니석당기(奉福寺尊勝陀羅尼石幢記)」와 『상집기』의 권두 서명 아래에 ‘연대 봉복사 특진 수태사겸시중 국사 원융대사 사자사문 징연 집(燕臺 奉福寺 特進 守太師兼侍中 國師 圓融大師 賜紫沙門 澄淵 集)’이라는 그의 관직명으로 보아 그가 연경(燕京)에서 황실의 존경을 받으며 활동했던 승려였음을 알 수 있다.
요의 성종(聖宗, 982~1031)·흥종(興宗, 1031~1055)·도종(道宗, 1055~1101) 대는 요 불교의 전성기인데, 특히 징연과 관련하여 흥종과 도종 대의 고찰이 반드시 필요하다. 우선 흥종 대부터 『요장(遼藏)』의 판각이 적극 추진되었고 그것을 저본으로 방산석경(房山石經)이 속각(續刻)되었다. 이 시기에 활동했던 대표적인 승려가 징연, 비탁(非濁, 혹은 非獨), 사효(思孝) 등이다. 징연의 저술로는 남산율종의 창시자인 도선의 『행사초』의 주석서인 『상집기』(14권) 외에 『과(科)』(3권)가 있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징연의 제자로는 비탁(/독)과 사효가 대표적이다. 비탁(/독)의 이름은 율문(律聞)으로 그는 『요장』의 조조(雕造)에도 참여하였으며 『수능엄경현찬과(首楞嚴經玄贊科)』(3권) 등의 여러 저술을 남겼다. 그리고 사효는 의천의 『신편제종교장총록』(이하 『의천록』)에 『십송률』과 관련한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긴 승려이다.
흥종을 이은 도종 대에는 『요장』의 조인의 기본이 완성되었을 뿐 아니라, 요나라 불교의 전성기라고 불릴 만큼 불교계의 활동은 활발하였다. 특히 율학의 연구가 주를 이루었고 화엄학이 뒤를 이었다. 밀교계통의 저술도 대량으로 나타났으며, 당·송 이래로 별 관심을 끌지 못하던 『석마하연론(釋摩訶衍論)』이 칙명으로 번역·주석되었다.
『요사』의 본기(本紀)에 의하면 도종은 즉위 후, 정치보다는 불교연구에 깊이 천착하였는데, 특히 화엄과 밀교에 정통하여 직접 『화엄찬(華嚴贊)』·『화엄경오송(華嚴經五頌)』 등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또한 도종은 의천과도 교류하였는데 『의천록』에 있는 어제(禦制)『수품찬(隨品贊)』(10권, 『원종문류』권 22에 수록)은 도종이 의천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찬한 것이다. (『요사』에 보이는 『화엄수품찬』이 곧 『수품찬』이다.)
도종 대의 승려인 지연(志延)은 『사분율니계략석과(四分律尼戒略釋科)』(1권, 逸),『반야심경과(般若心經科)』(1권, 逸)를 저술하였는데 『의천록』에 제목만 남아 있다. 원통오리대사 선연(?~1118, 圓通悟理大師 鮮演, 70여세에 입적)은 도종 대의 화엄학의 일인자였다. 그의 저술이 『의천록』에는 없지만 『대각국사외집(大覺國師外集)』권 8의 야율사제(耶律思齊)의 글 중에 『화엄경현담결택(華嚴經玄談決擇)』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것이 의천에 의해 고려로 도입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음으로 도필(道弼, 생몰년 미상)의 『연의집현기(演義集玄記)』(6권, 逸), 『연의축기난과(演義逐機難科)』(1권, 逸), 『제종지관(諸宗止觀)』(3권, 逸),『科』(1권, 逸) 등의 저술도 『의천록』에 남아있다.
<동국대학교 계미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