章疏書名
성유식론요의등초成唯識論了義燈抄
개요
『성유식론요의등초』 권4의 잔존 부분을 현존하는 혜소의 『성유식론요의등』 권4와 비교하면 글자의 출입은 일부 있지만, 내용은 동일하다. 그러므로 이 문헌의 제명에 비록 ‘초抄’라는 글자가 있긴 하지만, 내용상 혜소의 『성유식론요의등』 권4와 동일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혜소의 『성유식론요의등』은 『성유식론과 『성유식론술기』 가운데 난해한 문구를 주석함과 동시에 유식론에 대한 원측圓測, 도증道證, 보광普光, 현범玄範 등의 견해를 논박하는 문헌이다. 이는 『성유식론술기』를 제외한 말소末疏 중 유식삼소唯識三疏의 하나에 해당한다.
체제와 내용
혜소는 『성유식론』을 주석하여 『요의등초』를 찬술하였는데 ‘요의’는 ‘佛의 지혜가 밝은 것’이라는 뜻이고 ‘요의등’은 ‘유식의 뜻을 밝힌다’는 말이다. 또한 ‘불법(佛法)의 도리가 현료하게 다 설해진 경’을 ‘요의경’이라 한다. 즉 ‘진실하고 극진한 구경의 진리를 말씀한 경전’이라는 뜻이다.
『요의등초』는 초능변(初能變)의 심소상응문(心所相應門), 수구문(受俱門), 삼성문(三性門), 심소상례문(心所相例門), 인과비유문(因果譬喩門), 단사문(斷捨門)의 뜻을 해석하고 있다.
『요의등초』는 유식 삼소(唯識三疏) 중의 하나로 대정장 43책에 수록되어 있다. 本書는 『성유식론』의 이설(異說)을 파척하고 원론정의(原論正義)를 천명한다. 찬자인 혜소는 법상종(法相宗)의 제 2조로, 그는 우선 규기의 설을 본받아 서술하고 원측(圓測)·원의(圓義)·보광(普光)·혜관(慧觀) 등의 이의(異義)를 비판하고 있다. 혜소는 구체적인 법명을 밝히지 않고서 서명운(西明雲)·요집운(要集雲)·유설(有說, 즉 窺基)·유석(有釋, 즉 圓測)·유인운(有人雲, 즉 普光)·유해(有解, 즉 慧觀)·유운(有雲, 즉 玄範)·미상결(未詳決, 즉 義寂) 등으로 표현하며 그들의 이설을 파척하고 있다. 『요의등초』는 유식론의 주소(注疏) 가운데서 가장 난해하다는 평을 받는다.
혜소의 『요의등초』는 규기의 『성유식논술기(成唯識論述記)』의 주장을 배척한 서명사 원측(圓測)의 주장을 반박한 글로 유명하다. 원측은 호법의 유식을 중관(中觀)으로 융합하려고 한 반면, 규기 일파는 호법의 유식을 절대적으로 간주한 데서 양자의 갈등이 비롯되었다. 법상종은 마음에 비친 사물의 모습은 허구가 아니라 고유한 본성을 지니는 실재라는 유상유식(有相唯識)의 입장이며, 규기의 『성유식논술기』를 근본주소(根本註疏)로 하고 규기의 『장중추요(掌中樞要)』, 혜소의 『요의등초』, 지주의 『성유식론연비』를 유식의 3소라 하여 중시하였다.
<동국대학교 박인석>
장소찬자
혜소(慧沼, 혹 惠沼, 惠照, 651~714)는 당의 법상종 2조로 속성(俗姓)이 유(劉)씨이고 이름은 현(玄)이다. 원적(原籍)은 팽성(彭城)이었으나 후에 산동성(山東省) 하남(河南) 치주(淄州)로 옮겼으므로 그를 치주소(淄州沼)라고도 부른다. 15세에 고종과 측천무후 사이에 아들(후의 睿宗)이 태어나자 그의 기복(祈福)을 위한 도첩(度牒)을 할 때 출가하여 현장(玄裝, 602~664)의 문하가 되었다. 혜소는 여법하게 수신(修身)하여 계율(戒律)을 어기지 않아 ‘소사리(沼闍梨)라고도 불렸으며 청년시절에 이미 경장에 박통(博通)하여 『법화경』·『반야경』·『열반경』 등을 강의하였다.
33세이던 672년부터 규기(窺基, 632~682)의 문하에 들어가 유식학을 전공했다. 그는 규기문하에서도 군계일학의 자질을 보여 ‘산동일변조(山東一遍照)’로 불렸다. 규기의 입적(682년) 후 혜소는 20여 년간 여러 곳을 유행, 강경(講經)하면서 『요의등초』 등을 저술하였다. 혜소는 또 만년에 의정(義淨)과 보리유지(菩提流支)가 장안(長安) 대천복사(大薦福寺)와 숭복사(崇福寺)에서 역경을 할 때 참여하였다. 의정이 710년에 대천복사에서 『욕상공덕경(浴像功德經)』·『근본설일체유부비구니비나야(根本說一切有部苾芻尼毗奈耶)』·『유식보생론(唯識寶生論)』 등의 경율론 삼장을 역경할 때 혜소는 문강(文綱), 승장(勝莊) 등과 함께 증의를 맡았다. 711년의 『칭찬여래공덕신주경(稱贊如來功德神?經)』·『능단반야론송론(能斷般若論頌論)』 등을 번역할 때에도 역시 증의를 맡았다. 혜소는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을 주석하여 『금광명최승왕경소』를 찬하였는데 의정이 702년에 그 경전을 새로 번역하자 바로 주석서를 찬술한 것이다. 혜소는 714년 12월 17일에 세수 64세로 입적하였다.
혜소는 규기·지주(智周, 668~723)와 더불어 법상종의 삼조(三祖)로 일컬어지며, 『요의등초』·『성유식론장중추요(成唯識論掌中樞要)』(규기)·『성유식론연비(成唯識論演秘)』(지주)를 유식삼소(唯識三疏)라고 한다. 혜소의 가장 대표적인 제자는 지주, 지봉(智鳳), 현방(玄昉) 등이다. 현존하는 혜소의 저작은 『요의등초』외에도 『금광명최승왕경소(金光明最勝王經疏)』(10권)와 『십일면신주심경의소(十一面神呪心經義疏)』(1권), 『인명입정리론의찬요』(1권), 『능현중변혜일론(能顯中邊慧日論)』(4권), 『법화현찬의결(法華玄贊義決)』(1권), 『인명입정리론의단(因明入正理論義)』(2권), 『대승법원의림장보궐(大乘法苑義林章補闕)』(8권, 그 중 4, 7, 8권 현존) 등, 10종 40권이 있다.
<동국대학교 박인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