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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

제목정보
장소명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
이명
저자정보
찬자 이름원효(元曉)
이명석원효(釋元曉), 대성화정국사(大聖和靜國師), 서당(誓幢), 신당(新幢), 해동(海東)
생몰년617 ~ -686
국적신라(新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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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정보
총록정보 十門和諍論二卷
찬술방식 술(述)
교감현황
형태정보
권수 二卷
현존정보
서지정보 권상 잔편(낱장 4면), 해인사사간장인본 합철: 목판본, [不明], [不明]. 해인사수장고려각판(S.048, 총2판)의 후쇄인본, 동국대도서관(東國大圖書館)
서지정보 : 목판, [不明], [不明]. (S.048, 총2판), 해인사(海印寺_慶南陜川)
학술정보
단행본 박태원, 원효의 十門和諍論(세창출판사, 2013) 바로가기
단행본 예문동양사상연구원·고영섭 편저, (한국의 사상가 10인) 원효(서울: 예문서원, 2003) 바로가기
학위논문 김영일, 元曉의 和諍論法 硏究 : 和諍의 實例를 中心으로(東國大學校 大學院 佛敎學科 박사학위논문, 2008) 바로가기
학술논문 고영섭, 芬皇 元曉의 和會論法 탐구(韓國佛敎學 71, 2014, 한국불교학회) 바로가기
학술논문 南東信, 동아시아佛敎와 元曉의 和諍思想(원효학연구 10, 2005, 원효학회) 바로가기

[장소해제]

章疏書名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
개요
원효(元曉, 617~686)의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2권 1책)은 불교의 여러 가지 이론(異論)을 정리하여 대립과 분열을 종식시키고 화합을 이루기 위한 종합서로, 그 중 현재 권상(卷上)의 2판(板), 제9, 10, 15, 16장만이 잔간(殘簡)으로 남아 있다.
체제와 내용

원효(元曉, 617~686)의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2권 1책)은 불교의 여러 가지 이론(異論)을 정리하여 대립과 분열을 종식시키고 화합을 이루기 위한 종합서로, 그 중 현재 권상(卷上)의 2판(板), 제9, 10, 15, 16장만이 잔간(殘簡)으로 남아 있다.
「서당화상비」와 명혜(明惠)의 손제자인 십혜방순고(十惠房順高)의 『기신론본소청집기(起信論本疏聽集記)』에 의하면 세친(世親, [범] Vasubandhu)의 제자인 진나(陣那, [범] Dign?ga)가 당에 왔다가 『십문화쟁론』을 읽고 감탄하였다고 할 만큼 원효의 『십문화쟁론』은 세간의 극찬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것은 일부 잔간에 불과하지만 불교 이론의 상호 배타적 불화와 충돌을 해소시키는 원효 화쟁사상의 관점과 특징을 알 수 있다. 대각국사 의천은 그를 화쟁국사(和諍國師)로 추증하게 하였고(고려 숙종6년, 1101), 그 후 분황사에 화쟁국사비가 건립(명종 대, 1170~1197)되었다.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은 특정 경전에 대한 주석서가 아니라 불교교리 전반에 관한 주해서이므로 본 조항 서술 생략) " 『십문화쟁론』 상권 제9장과 제10장은 공(空)과 유(有)에 관한 관점 충돌의 양상과 그 화쟁을 논하고 있다. 원효는 공과 유는 다르지 않으므로 공, 유에 대한 결정적인 집착을 버리게 하여 공과 유에 대한 쟁론을 화해시킨다.
한편 제15장, 제16장에서는 불성(佛性)의 존재에 관한 보편성(‘일체 중생은 불성을 가지고 있다.’)과 차별성(‘불성이 없는 중생도 있다.’)을 주장하는 두 관점의 충돌 양상과 그 화쟁 이론이 펼쳐진다. 원효는 기본적으로 ‘모든 중생은 불성을 지니고 있다’는 전통적 관점을 지지하는데, 그런 자신의 견해를 주장하기 위해 경증(經證)의 관련 내용에 대한 오해나 해석학적 관점들의 부당성을 비판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자신의 관점의 정당성과 그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수립 하여, ‘불성의 유무’에 대한 논란과 혼란을 해소시킨다. 또한 나머지 한 장은 그 내용을 잘 알아볼 수가 없다.
<동국대학교 계미향>
장소찬자

원효의 행적은 『삼국사기』·『삼국유사(三國遺事)』·『송고승전(宋高僧傳)』·「서당화상탑비」 등에 전한다. 원효는 신라 26대 진평왕 39년(617)에 태어나 31대 신문왕 6년(686) 음력 3월 30일 70세로 입적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원효의 속성은 설(薛)씨이고, 압량군(押梁郡, 현 경산 자인면) 불지촌(佛地村)에서 담날내말(談捺乃末)의 아들로 태어났다. 내말(乃末)은 내마(柰麻)로 신라 17관등 중 11번째이다. 할아버지는 잉피공(仍皮公)이고, 원효의 어릴 때 이름은 서당(誓幢)이다. 한편 설(薛)씨 족보에 의하면 원효는 아버지 내옥(乃玉)과 어머니 갈산 용씨(葛山 龍氏)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사(思)이다.
원효는 16세이던 632년(善德王 원년)에 출가한 것으로 추정되며, 일정한 스승 없이 홀로 공부하였다. 31세(647년)에는 낭지(郎智)를 찾아가 배웠으며 34세(650년)에는 의상과 함께 요동을 거쳐 중국으로 유학가려다 실패하였다. 그리고 661년(文武王1, 45세)의 두 번째 도당과정에서 큰 깨달음을 얻고 중국 유학의 필요성이 없어져 발걸음을 돌렸다. 667년(文武王7, 51세)에는 요석공주(瑤石公主)와의 사이에서 설총(薛聰)을 낳고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라 칭하며 무애가(無?歌)를 지어 부르면서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가르침을 펼쳤다. 668년(文武王8, 52세)에는 당의 소정방(蘇定方)이 그려 보낸 난독화(鸞犢畵, 난새와 송아지를 그린 그림)를 풀이하여 즉시 회군하라는 뜻임을 간파하였다.
고선사(高仙寺)에 머물던 672년에 사복(蛇福)을 만났고, 이때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686년(神文王6, 70세)에 분황사에서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쓰기 시작하였으나 제40 「회향품(廻向品)」까지 쓰고 절필하였다. 그 해 경주 3월 30일에 남산(南山) 혈사(穴寺)에서 입적하였다.
대각국사 의천은 원효를 마명보살이나 용수보살의 수준으로 보아 ‘성사(聖師)’, ‘대성(大聖)’이라 칭송하였으며, 『화쟁론(和諍論)』을 지어 원효를 기렸다. 의천은 또 분황사에 가서 원효를 위해 제문(「祭芬皇寺曉聖文」)을 지었는데, 그 내용에서도 ‘해동교주 원효보살에 짝할 이는 없다.’며 원효의 화쟁사상을 극찬하고 있다. 또한 의천은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에도 원효에 관한 기록을 남겼는데 「제분황사효성문(祭芬皇寺曉聖文)」·「의해동소강금강경경이유작(依海東疏講金剛經慶而有作)」·「독해동교적(讀海東敎跡)」·「화쟁론(和諍論)」·「영통사대각국사비(靈通寺大覺國師碑)」 등이 전한다.
<동국대학교 계미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