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대혜도경종요(大慧度經宗要) / 大慧度經宗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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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혜도경종요大慧度經宗要
대혜도경종요大慧度經宗要
석원효 지음(釋元曉撰)

이 경을 여섯 문단으로 나누어 설명하겠다. 제일 먼저 대의를 서술하고, 다음은 경의 종지를 드러내고, 세 번째로 제목을 해석하고, 네 번째로 (경을 설하시게 된) 인연을 밝히고, 다섯 번째로 전체 가르침 중 어디에 해당하는지를 밝히고, 여섯 번째로 문장을 풀이하겠다.

제1편 대의를 서술함(述大意者)
제일 먼저 대의를 서술한다. 무릇 반야(波若)1)가 지극한 길이라지만 길도 길 아님도 없고, 지극함도 지극하지 않음도 없다. 말쑥하여라, 고요하지 않은 것이 없구나. 태연하여라, 씻어 버리지 못하는 것이 없도다. 이로써 참된 모양(實相)은 (정해진) 모양이 없기 때문에 (그) 모양이 아니라 할 것이 없고, 참된 비춤(眞照)은 밝힘이 없기 때문에 밝히지 못함도 없다는 것을 알겠다.
밝힘이 없고 밝히지 못함도 없다면 누가 어리석음의 어둠을 없애고 지혜의 밝음을 얻겠는가? 모양이 없고 (그) 모양이 아닌 것도 없다면 어찌 가설된 명칭을 파괴하고 참된 모양을 설명하겠는가? 그렇다면 가설된 명칭과 허망한 모양이 참된 성품 아닌 것이 없지만 네 가지 변재(四辨)2)로도 그 모양을 설명할 수 없으니, 실상반야實相般若란 그윽하고 또 그윽한 것이도다. 탐욕의 물듦과 어리석음의 어둠이 모두 지혜의 밝음이지만 다섯 가지 눈(五眼)3)으로도 그 비춤을 발견할 수 없나니, 관조반야觀照般若란 덜어 내고 또 덜어 내는 것이도다.

지금 이 경은 반야를 종지로 삼나니, 설함도 없고 보여 줌도 없으며 들음도 없고 얻음도 없으면서 온갖 희론獻論을 끊는 격언格言이다. 보여 주는 것이 없기 때문에 보여 주지 않는 것도 없고, 얻는 것이 없기 때문에 얻지 못하는 것도 없다. (그래서) 육바라밀의 온갖 보살행이 여기에서 원만해지고, 다섯 가지 눈의 온갖 공덕이 이것으로부터 생성되니, 보살의 요긴한 곳간이요, 모든 부처님의 참된 어머니이시다.
이런 까닭에 위없는 법왕께서 이 경을 설하려 하시면서 반야를 존중해 친히 스스로 자리를 펴시자 하늘이 네 가지 꽃(四華)4)을 비처럼 뿌려 공양하였고, 대지가 여섯 종류로 진동하여 놀라고 기쁘게 하였으며, 시방의 대사大士5)들이 가장 변방에 계시던 분들까지 멀리서 찾아오시고, 두 세계의 모든 하늘이 높은 곳에서 광명을 비추면서 멀리서 내려왔으며,6)

001_0480_a_01L[大慧度經宗要]

001_0480_a_02L1)大慧度經宗要

001_0480_a_03L

001_0480_a_04L釋元曉撰

001_0480_a_05L
將說此經六門分別初述大意次顯經
001_0480_a_06L三釋題名四明緣起五者判敎
001_0480_a_07L者消文

001_0480_a_08L第一述大意者
夫波若爲至道也無道
001_0480_a_09L非道無至不至蕭焉無所不寂泰然無
001_0480_a_10L所不蕩是知實相無相故無所不相
001_0480_a_11L照無明故無不爲明無明無不明者
001_0480_a_12L滅癡闇而得慧明無相無非相者豈壞
001_0480_a_13L假名而說實相斯則假名妄相無非眞
001_0480_a_14L而四辨不能說其相實相般若
001_0480_a_15L之又玄之也貪染癡闇皆是慧明而五
001_0480_a_16L眼不能見其照觀照波若損之又損之
001_0480_a_17L今是經者波若爲宗無說無示無聞
001_0480_a_18L無得絶諸獻論之格言也無所示故
001_0480_a_19L所不示無所得故無所不得六度萬行
001_0480_a_20L於之圓滿五眼萬德從是生成菩薩之
001_0480_a_21L要藏也諸佛之眞母也所以無上法王
001_0480_a_22L將說是經尊重波若親自敷坐天雨四
001_0480_a_23L華以供養地動六變而警喜十方大士
001_0480_a_24L最在邊而遠來二界諸天下高光而遐

001_0480_b_01L상제常啼가 7년 동안 서 있으면서 골수가 부러지는 것도 돌아보지 않고,7) 하천河天이 한자리에서 그것을 듣고 곧바로 보리를 성취하리라는 수기를 얻었던 것이다.8)
나아가 요임금이나 순임금 같은 분들은 온 천하를 뒤덮었고, 주공이나 공자 같은 분들은 뭇 신선들의 으뜸이시다. 하지만 (그런 분들조차) 오히려 여러 하늘이 가르침을 베풀면 감히 하늘의 법칙을 거스르지 않았다. 이제 우리 법왕의 참된 경전인 『마하반야바라밀경』을 모든 하늘이 받들고 우러러 믿으면서 감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기지 않고 있다. 이로써 추론해 보면 그들9)과는 거리가 아득하니, 어찌 같은 태양 아래에서 함께 논의할 수 있으랴! 이 경전은 네 구절의 게송만 믿고 배워도 그 복이 허공보다 드넓어 갠지스의 모래알 수만큼 몸과 목숨을 바친다 해도 (그 공덕을) 비유할 수 없으며, 비방하는 생각을 한 번만 일으켜도 그 죄가 오역죄五逆罪보다 무거워 천겁의 세월을 무간지옥에 떨어진다 해도 오히려 갚을 수 없는 것이다.

‘마하반야바라밀’이란 말은 모두 인도 말이니, 이 땅의 말로 옮기면 대혜도大慧度이다. 아는 것이 없고 알지 못하는 것도 없기 때문에 ‘지혜(慧)’라 하고, 도달할 곳이 없기 때문에 도달하지 못할 곳도 없기에 ‘건너간다(度)’고 한다. 이와 같기 때문에 하지 못하는 것이 없어서 위없이 큰 사람(無上大人)10)을 낳을 수 있고, 가없이 큰 과보를 드러낼 수 있다. 이런 뜻 때문에 ‘대혜도’라 한다. ‘경經’이란 말은 영원하다(常)는 뜻이고, 법칙(法)이라는 뜻이다. 영원한 성품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선대와 후대 성현들의 영원한 길이며, 법의 모양은 끝끝내 공하기 때문에 물결을 거슬러 근원으로 돌아가는 참된 법칙인 것이다.
이 경은 600권이고 16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부분 400권을 초분初分으로 삼고 있는데, 초분에 78품이 있고 그 가운데 맨 앞에서 경이 시작된 인연을 밝혔다. 따라서 ‘초분연기품제일初分緣起品第一’이라 하였다.

제2편 경의 종지를 드러냄(顯經宗者)
두 번째로 경의 종지를 드러낸다. 이 경은 바로 반야로 으뜸을 삼는다. 통틀어 말하면 반야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문자반야(文字波若)이고, 둘째는 실상반야(實相波若)이고, 셋째는 관조반야(觀照波若)이다. 지금 이 경은 뒤의 두 가지를 으뜸으로 삼는다. 왜 그런가. 문자는 단지 설명 도구인 가르침이기 때문이고, 뒤의 두 가지가 설명 내용인 뜻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 으뜸가는 뜻을 드러내기 위해 대략 세 문단으로 나누겠다.

001_0480_b_01L常啼七歲立之不顧骨髓之摧河天
001_0480_b_02L一座聞之便得菩提之記至如唐虞之
001_0480_b_03L蓋天下周孔之冠群仙而猶諸天設敎
001_0480_b_04L不敢逆於天則今我法王波若眞典
001_0480_b_05L天奉而仰信不敢違於佛敎以此而推
001_0480_b_06L去彼遠矣豈可同日而論乎哉爾乃信
001_0480_b_07L受四句福廣虗空捨恒沙之身命所不
001_0480_b_08L能況起謗一念罪重五逆墮千刼之無
001_0480_b_09L猶不能償者也所言摩訶般若波羅
001_0480_b_10L蜜者皆是彼語此土譯之云大慧度
001_0480_b_11L無所知無所不知故名爲慧無所到故
001_0480_b_12L無所不到乃名爲度由如是故無所不
001_0480_b_13L能生無上大人能顯無邊大果以此
001_0480_b_14L義故名大慧度所言經者常也法也
001_0480_b_15L性無所有故先賢後聖之常軌也法相
001_0480_b_16L畢竟空故反流歸源之眞則也此經六
001_0480_b_17L有十六分在前四百以爲初分初分
001_0480_b_18L之內有七十八品於中在前明起經之
001_0480_b_19L故言初分緣起品第一

001_0480_b_20L第二顯經宗者
此經正以波若爲宗
001_0480_b_21L而言之波若有三一文字波若二實相
001_0480_b_22L波若三觀照波若今此經者後二爲宗
001_0480_b_23L所以然者文字但是能詮敎故後二是
001_0480_b_24L其所詮旨故今欲顯是宗義略作三門

001_0480_c_01L첫째로 실상을 밝히고, 둘째로 관조를 밝히고, 셋째로 두 가지 반야를 합쳐서 밝히겠다.

제1장 실상반야의 특징을 밝힘(明實相般若相者)
먼저 실상반야의 특징을 밝힌다. 모든 법의 참된 모양은 설명하는 사람마다 다르다.

이런 주장이 있다.
의타기자성依他起自性11)에 대한 변계소집자성遍計所執自性12)은 드러낼 만한 것이 영원히 없다. 진여眞如가 바로 참된 모양이니, 의타기성依他起性은 실제 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가사지론』에서 “만약 명언훈습名言熏習13)의 생각으로 만들어진 식識이 색色 등의 모양과 현상을 반연하여 색 등의 성품이라고 헤아렸다면, 마땅히 알라. 그런 성품은 실물實物로서 있는 것도 아니고, 승의勝義14)로서 있는 것도 아니다. 이는 오직 변계소집자성일 뿐이니, 가설로서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만약 명언훈습의 생각으로 만들어진 식을 버린다면, 그 색 등의 모양과 현상 같은 인연들은 언어적 설명을 벗어난 성품이다. 이 성품이 바로 실물로서 있는 것이고, 이것이 승의로서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15)고 하고, 나아가 자세히 설명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의타기성도 공하고, 진여 역시 공하다. 이와 같아야 비로소 모든 법의 참된 모양이다. 아래 (경의) 문장에서 “색色은 존재하는 것이 없으며, 얻을 수 없다. 수受·상想·행行·식識도 존재하는 것이 없으며, 얻을 수 없다. 나아가 법의 성품이나 진실한 세계 같은 것들도 존재하는 것이 없으며, 얻을 수 없다.”16)고 말한 것과 같다. 또 “(사리불이 물었다.) 모든 법의 참된 모양은 어떻게 있습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모든 법은 존재하지 않지만 이렇게 있다.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을 무명이라 한다.”17)고 하고, 나아가 자세히 설명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의타기성은 있기도 하고 공하기도 하다. 세속제世俗諦로 보면 있고, 승의제勝義諦로 보면 공하기 때문이다. 그 공하다는 것이 곧 진여이니, 진여는 공하지 않다. 이와 같은 것을 모든 법의 참된 모양이라 한다. 아래 (경의) 문장에서 “세속법에 따랐기 때문에 업보가 있다고 말했지만 제일의제에서는 업도 없고 과보도 없다.”18)고 말한 것과 같다. 『유가론』에서도 “승의에서 보면 승의마저도 없다.”19)고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진제와 속제라는) 두 가지 진리의 법문은 가설일 뿐이지 (모든 법의) 참된 모양은 아니다. 진제도 아니고 속제도 아니고 있음도 아니고 공함도 아닌 이와 같은 것이라야 비로소 모든 법의 참된 모양이라 할 수 있다. 아래 (경의) 문장에서 “얻을 것이 있다는 것과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이 평등하니, 이것을 ‘얻을 것 없음(無所得)’이라 한다.”20)고 하고,

001_0480_c_01L一明實相二明觀照三者合明二種般若

001_0480_c_02L初明實相般若相者
諸法實相說者不同
001_0480_c_03L有義依他起自性上遍計所執自性
001_0480_c_04L無所顯眞如是爲實相依他起性實不
001_0480_c_05L空故瑜伽論云若諸名言熏習之想所
001_0480_c_06L建立識緣色等相事計爲色等性當知
001_0480_c_07L此性非實物有非勝義有唯是遍計所
001_0480_c_08L執自性當知假有若遣名言熏習之想
001_0480_c_09L所建立識如其色等相事緣離言說性
001_0480_c_10L當知此性是實物有是勝義有乃至廣說
001_0480_c_11L或有說者依他性空眞如亦空如是
001_0480_c_12L乃爲諸法實相如下文言色無所有不
001_0480_c_13L可得受想行識無所有不可得乃至如
001_0480_c_14L法性實際無所有不可得又言諸法實
001_0480_c_15L相云何有諸法無所有如是有是事不
001_0480_c_16L名爲無明乃至廣說故或有說者
001_0480_c_17L他起性亦有亦空世俗故有勝義故空
001_0480_c_18L空卽眞如眞如不空如是名爲諸法實
001_0480_c_19L如下文云世俗法故說有業報第一
001_0480_c_20L義中無業無報瑜伽論云於勝義上
001_0480_c_21L無勝義故或有說者二諦法門但是假
001_0480_c_22L而非實相非眞非俗非有非空如是
001_0480_c_23L乃名諸法實相如下文云有所得無所
001_0480_c_24L{底}續藏經第一編三十八套二冊

001_0481_a_01L『대지도론』에서 “만약 전도顚倒가 조금이라도 실체가 있다면 제일의제 역시 실체가 있어야만 할 것이다.”21)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여러 논사들의 주장 가운데 어떤 것이 진실입니까?
여러 논사들의 주장이 모두 진실이다. 왜 그런가. 모두 성스러운 경전의 말씀으로서 서로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고, 모든 법의 참된 모양이 온갖 희론戲論을 끊어 도무지 그렇다 할 것이 없고 그렇지 않다 할 것도 없기 때문이다. 『석론釋論』22)에서 하신 말씀과 같다.

一切實一切非實  일체가 진실이고, 일체가 진실이 아니며
及一切實亦非實  나아가 일체가 진실이면서 또한 진실이 아니고
一切非實非不實  일체가 진실이 아니면서 진실이 아닌 것도 아니니
是名諸法之實相  이것을 모든 법의 참된 모양이라 하네.23)

이를 검토해 보겠다.
여기에서 말한 4구24)가 바로 (모든 법의) 참된 모양이라면 그 차례와 마찬가지인 앞의 네 가지 주장도 허용된다. 집착을 떠나서 말하면 합당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집착을 가진 자가 말씀 그대로를 취한다면 파괴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참된 모양이 아니다. 4구를 벗어나고 끊어야 파괴할 수 없을 것이니, 이와 같아야 비로소 모든 법의 참된 모양이라 할 수 있다. 『광백론廣百論』의 게송에서 하신 말씀과 같다.

有非有俱非    있다, 없다, 있으면서 없다,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라는
諸宗皆寂滅    온갖 주장이 모두 사라지니
於中欲興難    이에 대해 힐난하고 싶어도
畢竟不能申    끝내 논리를 펴지 못하리라.25)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 『대반야경』에 의거하면 여래장如來藏이 실상반야가 된다. 아래 「이취분理趣分」에서 하신 말씀과 같다.

그때 세존께서 다시 일체 유정이 머무르고 유지해 온 장법藏法(여래장)이라는 여래의 모습에 의거하여, 모든 보살을 위해 반야바라밀다가 일체 유정이 머무르고 유지해 온 보편하고 원만한 이취理趣(도리, 나아갈 곳이라는 뜻)인 승장勝藏(뛰어난 보배를 담은 창고, 곧 여래장)에 대한 법문이라는 것을 널리 설하였다. (이 법문은) 말하자면, 일체 유정이 모두 여래장如來藏이니 보현보살의 자체自體가 (일체 유정에게) 보편하기 때문이고, 일체 유정이 모두 금강장金剛藏이니 금강장보살이 깨끗이 씻었기 때문이며, 일체 유정이 모두 정법장正法藏이니 (일체 유정이) 모두 바른 말씀을 따라 구르기 때문이고, 일체 유정이 모두 묘업장妙業藏이니 모든 사업事業에 있어서 가행加行(후천적인 실천행)이 이를 의지하기 때문이란 것이었다.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일체) 유정이 머무르고 유지해 온 깊고 깊은 이취인 승장에 대한 법을 설하신 뒤에 금강수보살에게 말씀하였다.

001_0481_a_01L得平等是名無所得論云若顚倒少許
001_0481_a_02L有實者第一義諦亦應有實故諸師
001_0481_a_03L所說何者爲實諸師說皆實所以然
001_0481_a_04L皆是聖典不相違故諸法實相絶諸
001_0481_a_05L戲論都無所然無不然故如釋論云
001_0481_a_06L切實一切非實及一切實亦非實一切
001_0481_a_07L非實非不實是名諸法之實相案云
001_0481_a_08L說四句是實相者如其次第許前四說
001_0481_a_09L離著而說無不當故若有著者如言而
001_0481_a_10L無不破壞故非實相離絶四句不可
001_0481_a_11L破壞如是乃名諸法實相如廣百論頌
001_0481_a_12L

001_0481_a_13L
有非有俱非諸宗皆寂滅

001_0481_a_14L於中欲興難畢竟不能申

001_0481_a_15L
或有說者依此大般若經以如來藏爲實
001_0481_a_16L相般若如下理趣分中言爾時世尊
001_0481_a_17L依一切住持藏法如來之相爲諸菩薩
001_0481_a_18L宣說般若波羅蜜多一切有情住持遍滿
001_0481_a_19L甚深理趣勝藏法門謂一切有情皆如
001_0481_a_20L來藏普賢菩薩自體遍故一切有情
001_0481_a_21L金剛藏以金剛藏所灌灑故一切有情
001_0481_a_22L皆正法藏 [1] 皆隨正語轉故一切有情
001_0481_a_23L妙業藏一切事業加行依故佛說如是 [2]
001_0481_a_24L住持甚深理趣勝藏法己告金剛手菩

001_0481_b_01L
“만약 이와 같이 보편하고 원만한 반야의 이취인 승장에 대한 법문을 듣고서 믿고 이해하여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닦아 익히는 자가 있다면, 그는 능히 승장의 법성을 통달하여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보리를 빨리 증득하리라.”26)

『보성론寶性論』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無始世來性    시작 없는 세상부터 있어 온 성품이
作諸法依止    모든 법이 의지하는 바탕이 되나니
依性有諸道    이 성품을 의지해 모든 도가 있고
及證涅槃果    나아가 열반의 과보를 증득한다.27)

(이 게송을 그 아래) 산문에서 이렇게 해석하였다.

이 게송은 어떤 뜻을 밝힌 것인가? “시작 없는 세상부터 있어 온 성품”이란 『승만경勝鬘經』에서 “모든 부처님 여래는 여래장에 의지한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모든 중생은 처음 시작이 없다.”고 말한 것은 (그 시작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성품”이라 말한 것은 『성자승만경聖者勝鬘經』에서 “세존이시여, 여래장이란 바로 법계장法界藏이고, 출세간법신장出世間法身藏이고, 출세간상상장出世間上上藏이고, 자성청정법신장自性淸淨法身藏이고, 자성청정여래장自性淸淨如來藏입니다.”28)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29)

이 다섯 구절30)을 의거해 『섭대승론攝大乘論』과 『불성론佛性論』에서는 다섯 가지 뜻으로 무상無相을 해석하였다. 『현식론顯識論』에서는 “성품이라 말한 것에 본래 다섯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자성의 종류라는 뜻이고, 둘째는 원인이라는 뜻이고, 셋째는 생긴다는 뜻이고, 넷째는 파괴되지 않는다는 뜻이고, 다섯째는 비밀스럽다는 뜻이다.”31)라고 하며, 나아가 자세히 설명하였다.

지금 이 『대반야경』에서 “일체 유정이 모두 여래장이니 보현보살의 자체가 보편하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은, 이 보살이 마음먹기를 “모든 유정은 오직 하나의 법계로서 별개의 유정이란 없다.” 하고는 이러한 도리에 의거해 오랜 세월 익히고 닦았음을 말한다. 따라서 자기 마음이 변화해 모든 유정에게 보편하게 되었고, 그들을 자기 몸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보살이 분수에 따라 관찰하는 마음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모든 여래께서 원만하게 관찰하시는 마음이겠는가! 따라서 “모든 유정이 다 여래장에 포섭되므로 여래장이라 한다.”고 이와 같이 해석한 것이다.
『불성론』에서 “일체 중생이 모두 여래의 지혜 속에 있고, 모두가 여래께서 거두시는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여래께서 거두시는 중생을 여래장이라 말한 것은 여래께서 거두시는 것을 여래장이라 하기 때문이다.”32)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금강장보살이 깨끗이 씻었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무엇인가. 불지佛地33)에서 얻는

001_0481_b_01L薩云若有得聞如是遍滿波若理趣勝
001_0481_b_02L藏法門信解受持讀誦修習則能通達
001_0481_b_03L勝藏法性藏 [3] 速證無上正等菩提如寶
001_0481_b_04L性論云無始世來性作諸法依止依性
001_0481_b_05L有諸道及證涅槃果長行釋言此偈明
001_0481_b_06L何義無始世來性者如經說云諸佛如
001_0481_b_07L依如來藏說諸衆生無 [4] 本際不可得
001_0481_b_08L [5] 所言性者如聖者勝鬘經云世尊
001_0481_b_09L來藏者是法界藏出世間法身藏出世
001_0481_b_10L間上上藏自性淸淨法身藏自性淸淨
001_0481_b_11L如來藏依此五句攝大乘論及佛性論
001_0481_b_12L以五義釋無相論云所言性者自有五
001_0481_b_13L一自性種類義二因義三生義
001_0481_b_14L不壞義五祕密義乃至廣說今此經云
001_0481_b_15L一切有情皆如來藏普賢菩薩自體遍故
001_0481_b_16L謂此菩薩意爲一切有情唯一法界
001_0481_b_17L無別有情由此道理長時熏修是故自
001_0481_b_18L心變異遍諸有情以爲自體如是菩薩
001_0481_b_19L隨分觀心尙能如是況諸如來圓滿觀心
001_0481_b_20L是故諸有情皆爲如來藏所攝名如來藏
001_0481_b_21L如是釋也如佛性論云一切衆生皆在
001_0481_b_22L如來智內皆爲如來之所攝持故說所
001_0481_b_23L攝衆生爲如來藏如來所攝名如來藏
001_0481_b_24L以金剛藏所灌灑故者謂佛地所有

001_0481_c_01L대원경지大圓鏡智34)와 상응하는 정식淨識에 포함된 종자가 변화하여 모든 유정이 되기에 이를 등류과等流果35)로 삼는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깨끗이 씻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일체 유정이) 모두 바른 말씀을 따라 구르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무엇인가. 보현보살이 변화해 모든 유정이 될 때에는 자신의 바른 말을 따라 다른 것으로 변화해 태어난다. 따라서 모든 유정이 다 바른 법이라는 것이다.
“모두 묘업장이다.”라는 것은 무엇인가. 여래장 자체 내에 훈습하는 힘이 있기 때문에 모든 유정에게 두 가지 업이 생기니, 괴로움을 피하는 것과 즐거움을 찾는 것이다. 모든 착한 사업에 있어서 일체 가행加行의 착한 마음이 다 (선천적으로 얻은) 이 두 가지 업을 의지해 생긴다. 따라서 “모든 사업에 있어서 가행이 이를 의지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도리에 의거해 ‘묘업妙業’이라 하였다.

제2장 관조반야의 특징을 밝힘(明觀照般若相者)
다음은 관조반야의 특징을 밝힌다. 『대지도론』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모든 보살이 처음 발심한 순간부터 일체종지一切種智를 구하기까지, 그 사이에 모든 법의 참된 모양을 아는 지혜가 바로 반야바라밀이다.36)

총괄하여 설명하면 그렇지만 이것을 다시 나눠 보면 아래 『대지도론』의 문장처럼 여러 설명들이 같지가 않다. 이제 그 가운데 간단히 네 가지 주장만 간추려 보겠다.37)

첫째,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무루無漏38)의 혜안慧眼이 바로 반야바라밀의 특징이다. 왜 그런가. 모든 지혜 가운데 첫째가는 지혜를 반야바라밀이라 하는데, 무루의 혜안이 바로 첫째이기 때문이다.

둘째,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반야바라밀은 유루有漏39)의 지혜이다. 왜 그런가. 보살은 보리수 아래에 도착해서야 결사結使40)를 끊는다. 그에 앞서 비록 큰 지혜가 있고 한량없는 공덕이 있지만 모든 번뇌가 끊어진 것은 아니다. 따라서 보살의 바라밀은 바로 유루의 지혜이다.

셋째,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보살의 유루와 무루의 지혜를 통틀어 반야바라밀이라 한다. 왜 그런가. 보살은 열반을 보면서 부처의 길을 걷는다. 이런 일 때문에 이것은 무루여야 마땅하다. (또한) 결사를 아직 끊지 못했고 일을 아직 완수하지 못했기 때문에 유루라고 해야 마땅하다.

넷째,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이 반야바라밀은

001_0481_c_01L大圓鏡智相應淨識所攝種子變異爲諸
001_0481_c_02L有情以爲等流果故言所灌灑故皆隨
001_0481_c_03L正語轉故者普賢菩薩變爲諸有情時
001_0481_c_04L隨自正語變異生故諸有情皆是正法
001_0481_c_05L皆妙業藏者以如來藏自內熏習力
001_0481_c_06L生諸有情二種業謂避苦求樂諸善
001_0481_c_07L事業一切加行善心皆依此二業生
001_0481_c_08L言一切事業加行依故由此道理名爲
001_0481_c_09L妙業

001_0481_c_10L次明觀照般若相者
如論說云諸菩薩
001_0481_c_11L從初發心求一切種智於其中間知諸
001_0481_c_12L法實相慧是波若波羅蜜總說雖然
001_0481_c_13L中分別如下論文諸說不同今於其中
001_0481_c_14L略出四義一有人言無漏慧眼是般若
001_0481_c_15L波羅蜜相何以故一切慧中第一慧
001_0481_c_16L名波若波羅蜜無漏慧根 [6] 是第一故
001_0481_c_17L有人言般若波羅蜜是有漏慧何以故
001_0481_c_18L菩薩至道樹下乃斷結使先雖有大智
001_0481_c_19L有無量功德而諸煩惱未斷是故菩
001_0481_c_20L薩波羅蜜是有漏智慧三有人言菩薩
001_0481_c_21L有漏無漏智慧總名波若波羅蜜何以
001_0481_c_22L菩薩觀涅槃行佛道以是事故應是
001_0481_c_23L無漏以未斷結使事未成辦故應名有
001_0481_c_24L四有人言是波若波羅蜜不可得相

001_0482_a_01L있다거나 없다거나 영원하다거나 무상하다거나 공하다거나 실재한다거나 하는 특징을 찾을 수 없다. 이 반야바라밀은 중衆41)·계界42)·입入43)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며, 유위有爲도 아니고 무위無爲도 아니며, 법도 아니고 법이 아닌 것도 아니며, 가질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으며, 생기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다. 있다 없다 등의 4구를 벗어났기에 맞닥뜨린다 해도 손댈 곳이 없으니, 비유하면 불꽃은 네 방향 어디에서도 만질 수 없는 것과 같다. 손을 태우기 때문이다. 반야바라밀 역시 마찬가지로 만질 수 없으니, 사견邪見이라는 손이 타기 때문이다.

앞에서 여러 사람이 반야바라밀을 설명했는데, 어떤 것이 진실입니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각각 이치가 있으니, 모두 진실이기 때문이다. 경에서 500비구가 각각 양 극단과 중도의 뜻을 설명하자 부처님께서 ≺모두 도리가 있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가장 마지막 대답이 진실이다. 왜 그런가. 깨뜨릴 수 없고 무너뜨릴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법이 있다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모두 허물이 있어 타파할 수 있다. 없다고 말한다 해도 역시 타파할 수 있다. 이 반야바라밀에는 있는 것도 없고, 없는 것도 없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는 것도 없고, 이와 같은 말조차도 없다. 이것을 적멸하고 걸림이 없으며 희론이 없는 법이라 한다. 따라서 깨뜨릴 수 없고 무너뜨릴 수 없으니, 이를 가장 수승해 그보다 나은 것이 없는 진실한 반야바라밀이라 한다. 전륜성왕이 모든 적을 항복시키고도 자신을 높이지 않는 것처럼, 반야바라밀 역시 마찬가지로 모든 언어의 희론을 능히 타파하지만 또한 깨뜨린 것이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이상은 『대지도론』) 제11권의 딱 중간쯤에 나온다.

검토해 보겠다.
이 가운데 앞쪽의 세 가지 주장은 자취에 의거해 진실을 드러낸 것이니, 초지初地 이전과 십지十地에서의 반야를 통틀어 취하여 유루와 무루를 뜻에 따라서 설명하였다. 네 번째 주장은 십지에서의 무분별지無分別智만 드러낸 것이니, 실상을 증득하고 모든 희론을 끊으며 4구를 훌쩍 뛰어넘고 다섯 가지 상相44)을 멀리 벗어난 것이다. 따라서 ‘가장 마지막 대답이 진실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렇게 가장 수승한 것을 선택한다면 이와 같이 말하겠지만 일체 지혜를 모조리 포섭하는 것은 아니다.

001_0482_a_01L若有若無若常若無常若空若實是波羅 [7]
001_0482_a_02L波羅蜜衆界入所不攝非有爲非無爲
001_0482_a_03L非法非非法不取不捨不生不滅出有
001_0482_a_04L無四句適無所著譬如火炎四邊不可
001_0482_a_05L以燒手故波若波羅蜜亦如是不可
001_0482_a_06L以邪見手燒故問曰上種種人說波
001_0482_a_07L若波羅蜜何者爲實答曰有人言各各
001_0482_a_08L有理皆是實故如經說五百比丘各各
001_0482_a_09L說二邊及中道義佛言皆有道理有人
001_0482_a_10L末後答者是實所以者何不可破不
001_0482_a_11L可壞故若有法如毫釐許有者皆有過
001_0482_a_12L失可破

001_0482_a_13L
若言無亦可破是波若波羅蜜中有亦
001_0482_a_14L無無亦無非有非無亦無如是言說亦
001_0482_a_15L是名寂滅無礙無戲論法是故不可
001_0482_a_16L破不可壞是名眞實波若波羅蜜最勝無
001_0482_a_17L過者如轉輪聖王降伏諸敵而不自高
001_0482_a_18L波若波羅蜜亦如是能破一切語言戲論
001_0482_a_19L亦不有所破出第十一2) [8] 卽中案云
001_0482_a_20L此中前三義者依迹顯實通取地前地
001_0482_a_21L上波若有漏無漏隨義而說第四義者
001_0482_a_22L唯顯地上無分別智證會實相絶諸戲
001_0482_a_23L超過四句遠離五相故言末後答者
001_0482_a_24L爲實是就最勝作如是說而非盡攝一

001_0482_b_01L따라서 ‘모든 주장에 다 도리가 있다.’고 말한 것이다.
아래 (『대지도론』의) 문장에서 “반야바라밀은 모든 지혜를 포함한다. 왜 그런가. 보살은 부처의 도를 구할 때에 모든 법을 배워 모든 지혜를 얻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성문과 벽지불과 부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한다. 이런 지혜에 세 가지가 있으니, 유학有學과 무학無學과 유학도 아니고 무학도 아닌 것이다. 유학도 아니고 무학도 아닌 지혜란 간혜지乾慧地45)·부정관不淨觀46)·안반安般47)·욕계에 얽힌 사념처四念處48)·난법煖法·정법頂法·인법忍法·세제일법世第一法49) 등이다”50)라고 하고, 나아가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다.

제3장 두 가지 반야를 합쳐서 밝힘(合明二種般若)
세 번째로 두 가지 반야를 합쳐서 밝힌다.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두 가지라고 가설하였지만 주체(能)와 대상(所)을 벗어났기에 결국엔 차이가 없다. 왜 그런가. 보살이 반야를 수행할 때에 일체 모든 법의 성품과 모양을 추구해 보지만 나도 나 없음도 영원함도 무상함도 생성도 소멸도 있음도 공함도 이와 같은 일체를 도무지 얻을 수 없다. (따라서) 취하는 대상인 모양을 어떤 것도 얻지 않고, 취하는 주체인 견해를 어떤 것도 일으키지 않는다. 이때 모든 모양과 견해를 멀리 떠나 모든 법의 참된 모양을 평등하게 증득하니, 둘도 없고 차별도 없으며,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생성도 없고 소멸도 없으며, 있는 것도 아니고 공한 것도 아니다. (따라서) 일체 언어의 길을 훌쩍 뛰어넘고 일체 마음 쓸 곳을 영원히 끊는데, 어떻게 그 가운데 두 가지 반야가 있겠는가. 다만 일체 모든 법이 한결같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모든 법의 참된 모양’이라고 억지로 이름을 붙이고, 일체 분별을 벗어나지 못하는 게 없기 때문에 또한 ‘무분별지’라고 부르는 것뿐이다.
지혜가 없으면 참된 모양이 아니고, 참된 모양이 없으면 지혜가 아니다. 『대지도론』에서 “보살은 일체 모든 법이 영원함도 아니고 무상함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나 없음도 아니고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니라는 등등으로 관찰하며, 이런 관찰 역시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이것을 보살이 행하는 반야바라밀이라 한다. 이것은 일체 모든 관찰을 버리고, 일체 언어를 없애고, 일체 마음 작용을 떠나면 본래부터 생겨남도 없고 소멸함도 없어 열반의 모습과 같다는 뜻이다. 모든 법이 또한 이와 같나니,

001_0482_b_01L切智慧故言諸說皆有道理如下文云
001_0482_b_02L波若波羅蜜攝一切智慧所以者何
001_0482_b_03L薩求佛道時應學一切法得一切智慧
001_0482_b_04L所謂求聲聞辟支佛佛智慧是智慧有
001_0482_b_05L三種學無學非學非無學非學非無學
001_0482_b_06L智者如乾慧地不淨安般欲界繫四念處
001_0482_b_07L [9] 法頂法忍法世第一法等乃至廣說

001_0482_b_08L第三合明二種般若
由非一故假說二
001_0482_b_09L而離能所畢竟無異所以然者菩薩
001_0482_b_10L修行般若之時推求一切諸法性相若我
001_0482_b_11L若無我若常若無常若生若滅若有若空
001_0482_b_12L如是一切都無所得不得一切所取 [10]
001_0482_b_13L不起一切能取之見是時遠離一切相
001_0482_b_14L平等證會諸法實相無二無別無始
001_0482_b_15L無終無生無滅非有非空超過一切語
001_0482_b_16L言之路永絶一切心行之處云何於中
001_0482_b_17L有二般若但一切諸法無不同然是故
001_0482_b_18L强名諸法實相一切分別無所不離
001_0482_b_19L故亦名無分別智無智而非實相無實
001_0482_b_20L相而非智如論說云菩薩觀一切諸法
001_0482_b_21L非常非無常非我非無我非有非無等
001_0482_b_22L亦不有是觀是名菩薩行般若波羅蜜
001_0482_b_23L義捨一切觀滅一切語言離一切心行
001_0482_b_24L本已來不生不滅如涅槃相諸法亦如

001_0482_c_01L이것을 모든 법의 참된 모양이라 한다.”고 하며, 나아가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다.

관조반야에 혹 세 부분51)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만약 견분見分이 있다면 왜 ‘봄이 없다’고 말했습니까? 만약 견분이 없다면 왜 ‘관조觀照’라는 이름을 붙였습니까? 자증분自證分이 있어 자체를 자각하는 것이라면 이 지혜의 본체는 참된 모양과 같지 않은 것입니다. 어떻게 ‘둘도 없고 차별도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만약 견분도 없고 자증분도 없다면 허공과 같으니 ‘지혜’라 부를 수 없습니다.
‘이 지혜에는 견분見分은 있고 상분相分은 없다.’는 주장이 있고, ‘이 지혜에는 상분도 없고 견분도 없으며 오직 자증분自證分만 있어 자체를 지각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만약 차별이 있다는 입장에서 (셋을) 구분했다면, 세 부분은 모두 없는 것이다. 만약 차이가 없음을 의지해 (셋을) 가설했다면, 세 부분은 모두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곧 이 평등 속에서는 모양이 없는 것이 상분이 되고, 봄이 없는 것이 견분이 되며, 특별히 자체를 지각하는 것도 없지만 자체를 지각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이와 같이 자증분은 지각하지 못하는 것이 없으니, 모든 법의 참된 모양이 자기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자증분은 견분 아닌 것이 없다. 참된 모양을 본다는 것은 바로 보이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보이는 것이 있으면 진실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견분은 참된 모습 아닌 것이 없다. 이와 같이 세 부분은 그저 한 맛일 뿐이다.’
만약 이와 같이 설명한다면 봄이 있다고 하건 보지 못한다고 하건 장애도 없고 걸림도 없으니 곧 이것이 해탈이다. 만약 보는 주체를 설정하면 곧 ‘있다’는 극단에 떨어지고, 만약 견분이 없다고 하면 곧 ‘없다’는 극단에 떨어지며, 양 극단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곧 결박당하게 된다.
『대지도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若人見般若    만약 사람이 반야를 본다면
是卽爲被縛    이것은 곧 결박당하는 것
若不見般若    반야를 보지 못한다 해도
卽亦名被縛    이것 역시 결박당했다 하네.
若人見般若    만약 사람이 반야를 본다면
是則得解脫    이것은 곧 해탈을 얻은 것
若不見般若    반야를 보지 못한다 해도
則亦得解脫    이것 역시 해탈을 얻은 것.52)

여기까지가 두 번째 경의 종지를 드러냄이다.

제3편 제목을 해석함(釋題名者)
세 번째, 제목을 해석한다. ‘마하摩訶’는 위대하다(大)는 뜻이고, ‘반야般若’는 지혜(慧)라는 뜻이며,

001_0482_c_01L是名諸法實相乃至廣說觀照般
001_0482_c_02L若有三分不若有見分何言無見
001_0482_c_03L無見分何名觀照有自證分證自體者
001_0482_c_04L則此智體不同實相云何得言無二無
001_0482_c_05L若無見分亦無自證則同虗空不得
001_0482_c_06L名慧有義此智有見無相有義此智
001_0482_c_07L無相無見唯有自證證於自體或有說
001_0482_c_08L若就有別開分三分俱無若依無異
001_0482_c_09L假說三分俱有謂卽於此平等之中
001_0482_c_10L相爲相無見爲見無別自證非不自證
001_0482_c_11L如是自證無所不證諸法實相無非自故
001_0482_c_12L故此自證無非是見見實相者是無所
001_0482_c_13L有所見者不見實故故此見分無非
001_0482_c_14L實相如是三分只是一味若如是說
001_0482_c_15L見不見無障無礙卽是解脫若存能見
001_0482_c_16L卽墮有邊若無見分則墮無邊不離邊
001_0482_c_17L卽爲被縛如論偈云

001_0482_c_18L
若人見般若是卽爲被縛

001_0482_c_19L若不見般若卽亦名被縛

001_0482_c_20L若人見般若是則得解脫

001_0482_c_21L若不見般若則亦得解脫

001_0482_c_22L
上來第二顯經宗竟

001_0482_c_23L第三釋題名者
摩訶言大般若云慧
001_0482_c_24L「三」一作「之」

001_0483_a_01L‘바라밀波羅蜜’은 저쪽 언덕에 이른다(到彼岸)는 뜻이니, 『대지도론』의 설명과 같다.
이 이름을 해석하면서 곧 세 문단으로 나누니, 처음은 ‘위대하다’(에 대한 해석)이고, 다음은 ‘지혜’(에 대한 해석)이고, 마지막은 ‘저쪽 언덕에 이른다’(에 대한 해석)이다.

제1장 ‘위대하다’의 뜻(所言大者)
‘위대하다’는 단어를 총괄적으로 설명하겠다. 무릇 존재하는 모든 위대한 일과 위대한 법과 불가사의한 신통력과 위엄스런 덕은 모두 반야가 완수하는 것이다. 이러한 뜻 때문에 위대하다고 부르는 것이다. 아래 (『마하반야바라밀경』) 문장의 말씀과 같다.

반야바라밀은 위대한 일을 하기 때문에 일으키고, 불가사의한 일을 하기 때문에 일으키고, 지칭할 수 없는 일을 하기 때문에 일으키고, 한량이 없는 일을 하기 때문에 일으키고, 비교할 수 없는 일을 하기 때문에 일으킨다. 왜 그런가. 반야바라밀이 나머지 다섯 바라밀을 포함하고, 내공內空과 나아가 유법무법공有法無法空까지53) 포함하고, 사념처와 나아가 팔성도八聖道까지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 깊은 반야바라밀은 부처님의 십력十力과 나아가 일체종지까지 포함한다. 비유하면 관정식을 마친 왕은 그 나라에서 가장 높기에 모든 공무를 대신들에게 위임하고 국왕은 일없이 안락하게 지내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수보리여, 성문법이건 벽지불법이건 보살법이건 불법이건 일체가 모두 반야바라밀 가운데 있기에 반야바라밀이 능히 그런 일들을 완수할 수 있는 것이다.54)

이외의 사항들도 자세히 설명하였다.

이것을 낱낱이 구별해 논한다면 그 양이 너무 많을 것이다. 이제 그 요점만 간추려 네 가지 뜻만 간략히 풀이하겠다. (위대하다고 부르는 까닭은) 뛰어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고, (불법을) 많이 듣게 되기 때문이고, 위대한 인물을 낳기 때문이고, 큰 과보를 주기 때문이다.
뛰어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위대하다고 한다는 것은, 모든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능히 배우기 때문에 불가사의하고 수승한 신통력을 가진다는 것이다. 『경』에서 “하나의 털로 삼천대천 국토에 있는 모든 수미산을 들어 다른 방위의 한량없는 아승기 국토 너머로 던지면서도 (그 안에 있는) 중생들을 괴롭히지 않(는 방법을 배우)고 싶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55)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불법을) 많이 듣게 되기 때문에 위대하다고 한다는 것은, 모든 보살이 반야를 배우기 때문에 과거와 미래의 일체 모든 부처님께서 설하시는 가르침을

001_0483_a_01L羅蜜者名到彼岸如論說也將釋此名
001_0483_a_02L卽作三門先大次慧後到彼岸

001_0483_a_03L所言大者
總而言之凡諸所有大事大
001_0483_a_04L不可思議神力威德皆是般若之所成
001_0483_a_05L以是義故名之爲大如下文云
001_0483_a_06L若波羅蜜爲大事故起不可思議事故
001_0483_a_07L不可稱事故起無有量事故起無等
001_0483_a_08L等事故起何以故波若波羅蜜中含受
001_0483_a_09L五波羅蜜含受內空乃至有法無法空
001_0483_a_10L含受四念處乃至八聖道分是深般若
001_0483_a_11L波羅蜜中含受佛十力乃至一切種智
001_0483_a_12L譬如灌頂王國土中尊諸有官事皆委
001_0483_a_13L大臣國王安樂無事如是須菩提所有
001_0483_a_14L聲聞辟支佛法若菩薩法若佛法一切皆
001_0483_a_15L在般若波羅蜜中般若波羅蜜能成辦
001_0483_a_16L其事乃至廣說別而論之乃有衆多
001_0483_a_17L撮其要略釋四義有勝力故得多聞故
001_0483_a_18L生大人故與大果故有勝力故名爲大
001_0483_a_19L謂諸菩薩能學般若波羅蜜故有不
001_0483_a_20L思議殊勝神力如經言欲以一毛擧三
001_0483_a_21L千大千國土中諸須彌1) [1] 擲過他方無
001_0483_a_22L量阿僧祗2) [2] 國土不嬈衆生者當學
001_0483_a_23L般若波羅蜜故得多聞故名爲大者
001_0483_a_24L諸菩薩學般若故過去未來一切諸佛所

001_0483_b_01L이미 말씀하신 것이건 앞으로 말씀하실 것이건 모두 두루 듣게 된다는 것이다. 『경』에서 “과거 모든 부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과 현재 모든 부처님께서 지금 말씀하시는 것과 미래 모든 부처님께서 앞으로 말씀하실 것을 듣고, 듣고 나서 자기를 이롭게 하고 또한 다른 사람도 이롭게 하고 싶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56)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대지도론』에서 (이 문장을 해석하며) 말하였다.
“보살에게 삼매가 있으니, 그 이름이 관삼세제불삼매觀三世諸佛三昧이다. 이 삼매에 들어가면 삼세의 모든 부처님을 빠짐없이 뵙고 그분들의 설법을 듣게 된다.”57)

과거와 미래 모든 부처님의 음성이 현재에 이르기 때문에 보살이 듣게 되는 것입니까? 음성은 현재에 이르지 않지만 삼매의 힘으로 이미 사라지고 아직 생기지 않은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만약 (과거와 미래 부처님의) 그 음성이 현재에 이른다면, 어떻게 이미 사라진 것이 현재에 다시 생겨나고, 어떻게 아직 생기지도 않은 것이 현재에 먼저 나타날 수 있습니까? 만약 (과거와 미래 부처님의) 그 음성이 현재에 이르지 못한다면 그 음성은 이미 사라졌거나 아직 생기지 않은 것입니다. 아직 생기지 않았거나 이미 사라졌다는 것은 곧 소리가 없다는 것인데, 어떻게 없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까?
저 과거와 미래의 (부처님) 음성이 현재에 이르지 않는다 해도 능히 들을 수 있으니, 삼매의 힘 때문이다. 마치 장애물 너머의 색色이 물건에 막혀 있다 해도 천안天眼의 힘 때문에 볼 수 있는 것과 같다. 과거와 미래의 (부처님) 음성 또한 그렇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니, 비록 시간에 간격이 있지만 능히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있었던 음성과 앞으로 있을 음성을 듣게 된다는 것은 이미 사라졌거나 아직 생기지 않아서 없는 소리를 듣는다는 게 아니다. 만약 저 과거와 미래 모든 부처님의 힘 때문에 음성이 현재에 이르러 들리는 것이라면 범부나 이승도 모두 들을 수 있어야 할 것이며, 그건 반야삼매의 힘을 말하는 건 아니다. 따라서 이 경에서 ‘이미 말씀하신 것과 앞으로 말씀하실 것’이라 하였으니, 앞으로 말씀하실 것이란 곧 앞으로 있을 음성이고, 이미 말씀하신 것이란 곧 과거에 있었던 음성이다.

보살도 현재에서 과거와 미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데, 부처님은 왜 음성을 현재에 이르게 하지 못합니까? 이르게 할 수 있다고 해도 앞에서 제기한 힐난58)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니, (사라진 것이) 다시 생겨나고 (시간의) 순리를 거스르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부처님께서 (음성을 현재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고 누가 말하던가? 다만 (현재에) 이른 것을 듣는다면 그건 반야의 힘은 아니라고 말했을 뿐이다. 마땅히 알라. 모든 부처님께서 굴리시는 법륜의 음성은 삼세에 보편하여 이르지 못하는 곳이 없나니, 이르는 것과 이르는 곳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001_0483_b_01L說言敎已說當說皆得遍聞如經言
001_0483_b_02L去諸佛已說現在諸佛今說未來諸佛當
001_0483_b_03L欲聞聞已自利亦利他人當學般若
001_0483_b_04L波羅蜜論曰菩薩有三昧名觀三世諸
001_0483_b_05L佛三昧入是三昧 3) [3] 見三世諸佛
001_0483_b_06L其說法過去未來諸佛音聲至現在
001_0483_b_07L菩薩得聞耶聲不至現而三昧力能
001_0483_b_08L聞己滅未生音耶若彼音聲至現在者
001_0483_b_09L云何已滅重生於現云何未生先現於
001_0483_b_10L若彼音聲不至今現則彼音聲已滅
001_0483_b_11L未生未生己滅卽是無聲云何得聞於
001_0483_b_12L無聲耶彼過未音雖不至今而能得
001_0483_b_13L三昧力故如障外色雖物所隔而能
001_0483_b_14L得見天眼力故過未音聲當知亦爾
001_0483_b_15L時有隔而能得聞得聞曾有當有之聲
001_0483_b_16L非聞己滅未生之無若彼過未諸佛力
001_0483_b_17L聲至於今而令聞者凡夫二乘皆得
001_0483_b_18L聽聞非謂般若三昧之力故此經言
001_0483_b_19L說當說當說卽是當有之音已說卽是
001_0483_b_20L曾有之聲菩薩現能聞於曾當佛豈
001_0483_b_21L不能令聲至今若能令至不離前難
001_0483_b_22L生逆理不應理故誰言諸佛不能令
001_0483_b_23L但說聞至非般若力當知諸佛法輪
001_0483_b_24L音聲遍於三世無所不至能至所至

001_0483_c_01L『화엄경』에서 하신 말씀과 같다.

譬如章文字    비유하자면 문장과 문자가
悉入一切數    모조리 일체 중생에게 들어가지만
所入無所入    들어가도 들어간 것이 없으니
法輪亦如是    법륜 또한 이와 같다네.
如來轉法輪    여래께서 굴리시는 법륜은
三世無不至    삼세에 이르지 못하는 곳 없지만
所轉無所轉    굴려도 굴리신 것이 없으니
求之不可得    찾아도 얻을 수가 없다네.59)

과거와 미래의 음성이 현재에 이른다고 해도 (사라진 것이) 다시 생기는 것이 아니고, 또한 (시간의) 순리를 거스르는 것도 아니다. 왜 그런가. 부처님께서 삼세의 아득한 겁에 일어나는 일들을 아시는 건 곧 극히 짧은 한 생각 사이지만 겁을 단축하는 것도 아니고, 또한 생각을 길게 늘이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마땅히 알아야 한다. 저 (과거와 미래의 부처님) 음성이 현재에 이른다 해도 (사라진 것이) 다시 생기거나 (시간의) 순리를 거스르는 과실은 없다. 저 『화엄경』에서 하신 말씀과 같다.

無量無數劫    한량없고 수없는 겁이
卽是一念頃    곧 한 생각 사이라네.
亦不令刦短    그렇다고 겁을 단축하지도 않나니
究竟刹那法    구경에는 찰나의 법이라네.60)

나머지 논의들은 일단 멈추고 본래 주제로 돌아가 서술하겠다.

위대한 인물을 낳기 때문에 위대하다고 한다는 것은, 네 종류의 위대한 인물이 모두 반야로부터 태어나기 때문이다. 『대지도론』에서 설명하신 말씀과 같다.
“일체 세간에서 시방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제일 위대하고, 다음으로 보살과 벽지불과 성문이 있다. 이 네 종류의 위대한 인물이 모두 반야바라밀로부터 태어난다. 따라서 위대하다고 한다.”61)
큰 과보를 주기 때문에 위대하다고 한다는 것은, 일체 중생에게 능히 가없고 다함없는 과보를 주기 때문이다. 『대지도론』에서 설명하신 말씀과 같다.
“또한 중생에게 한량없고 다함없으며 영원히 변하거나 부서지지 않는 큰 과보를 줄 수 있으니, 이른바 열반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위대하다고 한다. 나머지 다섯 가지62)는 그럴 수 없기 때문에 위대하다고 부르지 않는다.”63)
이 네 가지 뜻에 의거해 반야를 위대하다고 한다. 여섯 가지 해석법(六種釋)64) 중 이것은 유재석有財釋65)이다.

제2장 ‘지혜(慧)’의 뜻(釋慧義者)
두 번째로 지혜의 뜻을 해석한다. 완전히 이해한다는 뜻이 지혜의 뜻이니, 알아야 할 경계 일체를 완전히 알기 때문이다. 앎이 없다는 뜻이 지혜의 뜻이니, 아는 것이 있는 자는 참된 모습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파괴한다는 뜻이 지혜의 뜻이니, 모든 법의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성품과 모양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001_0483_c_01L可得故如華嚴經言譬如章文字悉入
001_0483_c_02L一切數所入無所入法輪亦如是如來
001_0483_c_03L轉法輪三世無不至所轉無所轉求之
001_0483_c_04L不可得雖去來音至於今現而非重生
001_0483_c_05L亦非4) [4] 所以然者佛知三世長遠
001_0483_c_06L之刧卽是極促一念之頃而不令刧促
001_0483_c_07L亦不令念長是故當知彼聲至今無重
001_0483_c_08L生逆理過失如彼經言無量無數刧 [11]
001_0483_c_09L是一念頃亦不令刧短究竟刹那法
001_0483_c_10L5) [5] 還述本宗生大人故名爲大者
001_0483_c_11L四種大人皆從般若而得生故如論說
001_0483_c_12L一切世間中十方三世諸佛是第一大
001_0483_c_13L次有菩薩辟支佛聲聞是四大人皆由
001_0483_c_14L般若波羅蜜生故名爲大與大果故名
001_0483_c_15L之爲大者能與一切衆生無邊無盡果
001_0483_c_16L如論說言復次能與衆生大果報
001_0483_c_17L量無盡常不變壞所謂涅槃故名爲大
001_0483_c_18L餘五不能故不名大依是四義般若名
001_0483_c_19L六種釋中是有財釋

001_0483_c_20L第二釋慧義者
解了義是慧義能了一
001_0483_c_21L切所知境界故無知義是慧義有所知
001_0483_c_22L者不知實相故破壞義是慧義壞一切
001_0483_c_23L「山」下經有「王」「諸」下經有「佛」「皆」
001_0483_c_24L一作「悉」
「過」一作「逆」「乘」疑「剩」

001_0484_a_01L파괴하지 않는다는 뜻이 지혜의 뜻이니, 가설된 명칭을 파괴하지 않고 참된 모양을 증득하기 때문이다. 멀리 벗어난다는 뜻이 지혜의 뜻이니, 집착하고 있던 일체 모양을 영원히 벗어나기 때문이다. 벗어나지 않는다는 뜻이 지혜의 뜻이니, 일체 법의 모양을 증득하고 깨닫기 때문이다. 또한 벗어남이 없고 벗어나지 않음도 없다는 뜻이 반야의 뜻이니, 일체 법에 도무지 벗어날 것이 없고 벗어나지 않을 것도 없기 때문에 있다. 파괴함도 없고 파괴하지 않음도 없다는 뜻이 반야의 뜻이니, 일체 법에 끝끝내 파괴할 것이 없고 파괴하지 않을 것도 없기 때문이다. 앎이 없고 알지 못함도 없다는 뜻이 반야의 뜻이니, 알아야 할 것이 없고 알지 못할 것도 없다는 것을 얻기 때문이다. 뜻도 없고 뜻이 아닌 것도 없다는 뜻이 반야의 뜻이니, 어떤 뜻도 얻지 못하고 뜻 아닌 것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뜻은 『대지도론』에서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것이 열 가지 반야의 뜻이다. 만약 경계와 지혜가 하나가 아니라는 주장을 따를 경우, 고요히 비춤(觀照)을 지혜라 부르는 것은 지업석持業釋66)이고, 참된 모양(實相)을 지혜라 부르는 것은 의주석依主釋67)이다. 주체와 대상이 다르지 않다는 측면에 의거한다 해도 역시 하나의 실상반야이니, 이것도 지업석이다.68)

만약 저 반야라는 단어를 이 땅의 말로 지혜라 번역한다면 왜 『대지도론』에서는 이 두 가지가 걸맞지 않는다고 하였습니까? 예를 들면 아래 (『대지도론』) 문장에서 “지칭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겠다. 지혜라는 단어로 지칭하지만 반야의 참된 모양은 너무도 깊고 지극히 무겁다. (하지만) 지혜(라는 단어)는 가볍고 얇다. 따라서 지칭할 수 없다. 또 반야(의 범주)는 다양한데 지혜(의 범주는) 적다. 따라서 지칭할 수 없다. 또 반야의 이익은 광범위하니, 성취하지 못하더라도 능히 세간의 과보를 주고 성취하고 나면 도의 과보를 준다. 구경의 완전한 앎이기 때문에 그런 단어로 지칭한다면, 반야바라밀에는 영원함이건 무상함이건 진실이건 허구이건 있음이건 없음이건 지칭할 수 있는 앎이 없다. 이와 같은 등등이 지칭할 수 없다고 한 뜻임을 알아야 한다.”69)고 하였습니다.
이 『대지도론』 문장의 뜻은 지혜라는 단어가 반야의 본체를 지칭하지 못함을 바로 밝힌 것이지, 반야라는 지칭이 지혜라는 단어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왜 그런가. (『대지도론』) 문장에서 “지혜라는 단어로 지칭하지만”이라 한 것은 지혜라는 단어로 지칭할 수 있음을 거론한 것이다.

001_0484_a_01L法可言性相故不壞義是慧義不壞假
001_0484_a_02L名而證實相故遠離義是慧義永離一
001_0484_a_03L切取著相故不離義是慧義證會一切
001_0484_a_04L諸法相故復次無離無不離義是般若
001_0484_a_05L於一切法都無所離無所不離故
001_0484_a_06L壞無不壞義是般若義於一切法永無
001_0484_a_07L所壞無所不壞故無知無不知義是般
001_0484_a_08L若義由得無所知無所不知故無義無
001_0484_a_09L非義義是般若義不得一切義不得非
001_0484_a_10L義故如是等義如論廣說如是十種般
001_0484_a_11L若之義若約境智非一之義觀照名慧
001_0484_a_12L是持業釋實相名慧是依主釋若依能
001_0484_a_13L所無二之門亦一實相般若亦持業釋
001_0484_a_14L若彼般若之名此土譯言慧者何故
001_0484_a_15L論說此二不稱如下文云不亦 [12] 稱者
001_0484_a_16L名智慧般若之實相甚深極重智慧輕
001_0484_a_17L是故不能稱又般若多智慧少故不
001_0484_a_18L能稱又般若利益處廣未成能與世間
001_0484_a_19L果報成已與道果報又究竟盡知故名
001_0484_a_20L般若波羅蜜無能稱知若常若無常
001_0484_a_21L若實若虗若有若無如是等不可稱義
001_0484_a_22L應知此論文意正明智慧之名不稱
001_0484_a_23L般若之體非謂般若之稱不當智慧之
001_0484_a_24L何者文稱名智慧者是擧能稱名爲

001_0484_b_01L“반야의 참된 모양은 너무도 깊고 지극히 무겁다.”고 한 것은 반야의 본체가 언어를 벗어나고 사려를 끊은 것임을 드러낸 것이다. “지혜(라는 단어)는 가볍고 얇다.”고 한 것은, 지혜라는 단어가 언어와 사려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이 단어로는 본체를 지칭할 수 없음을 밝힌 것이다. 또 “반야(의 범주)는 다양한데 지혜(의 범주는) 적다.”고 한 것은, 반야의 본체가 한량없고 가없으며 아는 것과 증득하는 것도 한량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지혜라는 단어는 한계가 있고 분량이 있으며, 지칭할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이 오직 하나의 단어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범주가) 적은 단어로는 다양한 (범주의) 본체를 지칭할 수 없다.
그 다음에 “반야의 이익은 광범위하다.”고 한 것은, 반야의 본체가 이롭게 하는 곳은 광범위하여 지혜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임을 밝힌 것이다. 따라서 “지칭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그 다음에 “구경의 완전한 앎이기 때문에 그런 단어로 지칭한다면”이라 한 것은, 지혜의 본체는 “완전한 앎”이라는 단어로 지칭할 수 있지만 반야의 본체에는 도무지 알았다고 할 것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말하자면 영원함이나 무상함이나 진실이나 허구나 있음이나 없음 등 이와 같은 일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칭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또 “완전한 앎”은 본체와 모양이 해석되기 때문에 단어로 그 본체와 모양을 지칭할 수 있다. 하지만 반야의 모양은 알 수 있는 자가 없으니, 영원함이나 무상함 등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도리로 인해 지칭할 수 없다. 이런 네 가지 뜻으로 지칭할 수 없음을 풀이하였으니, 이것은 명칭과 본체가 서로 걸맞을 수 없음을 드러낸 것이다.

반야의 본체가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완전한 앎”이라는 단어로 지칭할 수 없다면, 곧 앞의 해석에서 “앎이 없다는 뜻이 지혜의 뜻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무지無知라는) 이 단어가 반야의 본체를 지칭할 수 있습니다.
“앎이 없다.”는 단어 역시 (반야의) 본체를 지칭하지 못한다. 바로 이것은 부정하는 표현이라서 적극적으로 제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저 앎을 부정할 뿐이지 없음을 표방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너무도 깊고 지극히 무겁다.”는 말은 그 본체를 거론한 것이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제시할 수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제시할 수 있으므로 지칭할 수 없는 게 아닙니다. 만약 “너무도 깊다.”는 단어로도 지칭할 수 없다면, 왜 이 말은 바로 본체를 거론한 것이라고 하였습니까?
“너무도 깊다.” 등의 말 역시 부정하는 표현이다. 얕고 엷은 것을 부정할 뿐 깊은 것을 얻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말 역시 본체를 지칭하지 못한다. 이처럼 논주論主의 의도는 반야의 본체로 향하면서 이 말을 하고,

001_0484_b_01L智慧般若甚深極重者是顯般若之體
001_0484_b_02L離言絶慮智慧輕薄者是明1)般若 [6] 之名
001_0484_b_03L不離言慮是故此名不能稱體又般若
001_0484_b_04L多智慧少者般若之體無量無邊所知所
001_0484_b_05L證無限量故智慧之名有限有量能稱
001_0484_b_06L能知唯一名故是故少名不稱多體
001_0484_b_07L言般若利益處廣者是明般若之體利
001_0484_b_08L益處廣智慧之名所不能詮是故言不
001_0484_b_09L可稱次言究竟盡知名稱者是明智慧
001_0484_b_10L之體名稱於盡知而般若體都無所知
001_0484_b_11L謂常無常虗實有無如是一切不可得故
001_0484_b_12L是故言不可稱又釋盡知體相故得以
001_0484_b_13L名稱其體相而般若相無能知者常無
001_0484_b_14L常等不可得故由是道理故不可稱
001_0484_b_15L是四義釋不可稱是顯名體不得相稱
001_0484_b_16L般若之體無所知故盡知之名不得
001_0484_b_17L稱者則如前釋言無知義是慧義
001_0484_b_18L名可稱般若之體無知之名亦不稱
001_0484_b_19L直是遮詮不能表示故但遮於知
001_0484_b_20L表於無故若爾甚深極重之言是擧
001_0484_b_21L其體故能表示能表示故非不可稱
001_0484_b_22L甚深言亦不稱者何謂此言是擧體耶
001_0484_b_23L甚深等言亦遮詮但遮淺薄不得深
001_0484_b_24L是故此言亦不稱體然論主意向般

001_0484_c_01L반야라는 명칭으로 나아가 “가볍고 엷다.”는 말을 한 것이다. 이런 뜻을 드러내기 위해 “본체를 거론한다.”고 말한 것이지, “너무도 깊다.”는 말이 반야의 본체를 지칭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와 같다면 앞서 열 가지 뜻으로 풀이한 반야라는 명칭은 모두 그 반야의 본체를 지칭하지 못하고, 또한 반야의 업을 지칭하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것은 지업석이다.”라고 말했습니까?
반야는 그러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명칭도 합당하지 않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모든 명칭이 합당할 수 있다. 또 지업석이라 한 것도 일단 가설한 것이지 실제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제3장 ‘저쪽 언덕에 이른다到彼岸’의 뜻(釋到彼岸義者)
세 번째로 ‘저쪽 언덕에 이른다’의 뜻을 해석한다. ‘저쪽 언덕에 이른다’에 여러 가지 뜻이 있는데, 이 『마하반야바라밀경』과 『대지도론』에 의거해 간단히 네 가지 뜻만 추려 보겠다.

첫째, 생사의 이쪽 언덕에서 열반의 저쪽 언덕에 이르기 때문에 ‘저쪽 언덕에 이른다’고 한다. 『대지도론』에서 “삼승의 사람들이 이 반야로써 저쪽 언덕인 열반에 이르러 일체 근심과 고통을 없앤다. 이런 뜻 때문에 바라밀이라고 한다.”70)고 해석한 것과 같다.

둘째, 모습이 있는 이쪽 언덕에서 모습이 없는 저쪽 언덕에 이르기 때문에 ‘저쪽 언덕에 이른다’고 한다. 『대지도론』에서 “이 반야바라밀 등으로 물질과 마음 두 법을 추구하면 (모조리) 파괴되어 굳건하고 참된 것을 얻을 수가 없다. 이런 뜻 때문에 바라밀이라 한다.”71)고 해석한 것과 같다.

셋째, 가득 차지 않은 지혜인 이쪽 언덕에서 구경의 지혜인 저쪽 언덕에 이르기 때문에 ‘저쪽 언덕에 이른다’고 한다. 『대지도론』에서 “저쪽 언덕을 모든 지혜의 극단을 다한 지혜라 하고, 파괴할 수 없는 모양이라 한다. 파괴할 수 없는 모양이란 곧 여여如如·법성法性·실제實際이니, 그것은 참되기 때문에 파괴할 수 없다. 이 세 가지 사항이 반야 가운데 포함되기 때문에 바라밀이라 한다.”72)고 해석한 말씀과 같다.

넷째, 이쪽저쪽 언덕이 있다는 것에서 저쪽이쪽 언덕이 없다는 것에 이르기에 이르는 곳이 없기 때문에 ‘저쪽 언덕에 이른다’고 한다. (『마하반야바라밀경』의) 아래 문장에서 “이쪽저쪽 언덕으로 건너지 않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이라 한다.”73)고 하고,

001_0484_c_01L若體而發此言就般若名說輕薄言
001_0484_c_02L顯是意故言擧體非謂甚深之言能稱
001_0484_c_03L般若之體也若如是者前以十義釋
001_0484_c_04L般若名皆不稱2) [7] 般若之體亦不稱於
001_0484_c_05L般若之業云何而言是持業釋般若
001_0484_c_06L非然故不當諸名而非不然故能當諸
001_0484_c_07L又持業釋且是假說非謂實然故不
001_0484_c_08L相違也

001_0484_c_09L第三釋到彼岸義者
到彼岸義乃有衆
001_0484_c_10L依此經論略出四義一者從生死
001_0484_c_11L此岸到涅槃彼岸故名到彼岸如論釋言
001_0484_c_12L三乘之人以是般若到彼岸涅槃滅一切
001_0484_c_13L憂苦以是義故名波羅蜜二者從有相
001_0484_c_14L此岸到無相彼岸故名到彼岸如論釋
001_0484_c_15L是般若波羅蜜等以色心二法推求
001_0484_c_16L破壞不得堅實以是義故名波羅蜜
001_0484_c_17L從未滿智此岸到究竟智彼岸故名到
001_0484_c_18L彼岸如論釋言彼岸名盡一切智慧邊
001_0484_c_19L名不可破壞相不可破壞相者卽是
001_0484_c_20L如法性實際以其實故不可破壞是三
001_0484_c_21L事攝入般若中故名波羅蜜四者從有
001_0484_c_22L此彼岸到無彼此岸無所到故名到彼
001_0484_c_23L如下文言此彼岸不度故名般若波
001_0484_c_24L「般若」疑「智慧」「實」一作「其」

001_0485_a_01L『금고경金鼓經』에서 “생사와 열반이 모두 허망한 견해이다. 이를 남김없이 건널 수 있기 때문에 바라밀이라 한다.”74)고 하신 말씀과 같다.

이 네 가지 뜻 중 첫째와 셋째는 원인 가운데서 결과를 설명했으니, 이것은 유재석有財釋이다. 둘째와 넷째는 이미 도달한 것을 설명했으니, 이것은 지업석持業釋이다. 만약 이 ‘대혜도’라는 제목을 설명의 주체로 지목한다면 이것은 의주석依主釋이다.

제4편 경을 설하시게 된 인연을 밝힘(明說經內緣者)
네 번째로 경을 설하시게 된 인연을 밝힌다. 『대지도론』에 이런 질문이 나온다.
“부처님께서는 어떤 인연으로 『마하반야바라밀경』을 설하셨습니까? 아무 일이 없거나 나아가 작은 인연 때문에 스스로 말씀을 꺼내시지 않는 것이 모든 부처님의 법입니다. 비유하면 수미산왕은 아무 일이 없거나 나아가 작은 인연 때문에 요동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 어떤 큰 인연들이 있었기에 부처님께서 이 경을 설하셨습니까?”75)
이에 대한 대답에 수많은 인연들이 나오는데, 이제 그 요점만 취해 여섯 가지 인연으로 요약하겠다. 첫째는 보살행을 자세히 보여 주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모든 하늘의 요청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이고, 셋째는 모든 사람의 의심을 끊어 주고 싶어서이고, 넷째는 중생의 병을 치료해 주고 싶어서이고, 다섯째는 제일의제第一義諦를 말씀해 주고 싶어서이고, 여섯째는 모든 논의사論議師들을 굴복시키고 싶기 때문이다.

제1장 보살행을 자세히 보여 주기 위해서(爲廣示菩薩行者)
첫째, 보살행을 자세히 보여 주기 위해서다. 『대지도론』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다.

부처님께서는 삼장三藏에서 갖가지 비유들을 자세히 인용해 성문들을 위하여 설법하셨지만 보살도는 설하지 않으셨다. 오직 『중아함中阿含』 「본말경本末經」76)에서 부처님이 미륵에게 미래에 부처가 될 것이라고 수기하신 것만 있고, 역시 갖가지 보살행을 설하지는 않으셨다. 이제 미륵 등을 위해 모든 보살행을 자세히 말씀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경을 설하신 것이다.77)

제2장 모든 하늘의 요청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爲不違諸天請者)
둘째, 모든 하늘의 요청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다. 『대지도론』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다.

그때 보살이 보리수 아래에서 마귀 무리를 항복시키고는 위없는 깨달음을 얻었다. 이때 삼천대천세계의 주인인 범천왕 시기尸棄를 비롯한 색계의 모든 하늘들과 석제환인釋提桓因을 비롯한 욕계의 모든 하늘들이 다들 부처님 계신 곳으로 찾아와 법륜을 굴려 달라고 청하였다. (부처님) 역시 과거의 서원을 기억하고 계셨고 또한 너무도 자비로웠기 때문에 그 청을 받아들여 법을 설하셨다.

001_0485_a_01L羅蜜金鼓經云生死涅槃皆妄見能度
001_0485_a_02L無餘故名波羅蜜此四義中第一第三
001_0485_a_03L因中說果是有財釋第二第四說其已
001_0485_a_04L是持業釋也若以此大慧度之名目
001_0485_a_05L能詮者是依主釋也

001_0485_a_06L第四明說經內 [13] 緣者
如論說云問曰
001_0485_a_07L以何因緣故說摩訶般若波羅蜜經
001_0485_a_08L佛之法不以無事及小因緣而自發言
001_0485_a_09L譬如須彌山王不以無事及小因緣而動
001_0485_a_10L今有何等大因緣故佛說是經答中廣
001_0485_a_11L出衆多因緣今撮其要略出六因一爲
001_0485_a_12L廣示菩薩行故二爲不違諸天請故
001_0485_a_13L爲欲斷諸人疑故四爲欲治衆生病故
001_0485_a_14L五爲欲說第一義諦故六爲欲伏諸論
001_0485_a_15L議師故
初爲廣示菩薩行者
如論說言
001_0485_a_16L佛於三藏中廣引種種譬喩爲聲聞說法
001_0485_a_17L而不說菩薩道唯中阿含本業 [14] 經中
001_0485_a_18L記彌勒當得作佛亦不說種種菩薩行
001_0485_a_19L今欲爲彌勒等廣說諸菩薩行故說是經

001_0485_a_20L二爲不違諸天請者
論說言爾時菩薩
001_0485_a_21L菩提樹下降魔衆已得無上覺是時三
001_0485_a_22L千大千世界主梵天王名尸棄及色界
001_0485_a_23L諸天等釋提桓因及欲界諸天等皆詣佛
001_0485_a_24L請轉法輪亦念本願及大慈悲故

001_0485_b_01L모든 법 가운데 가장 깊은 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이다. 그래서 이 경을 설하신 것이다.78)

제3장 모든 사람의 의심을 끊어 주고 싶어서(爲欲斷諸人疑者)
셋째, 모든 사람의 의심을 끊어 주고 싶어서다. 『대지도론』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다.

부처님이 일체지一切智를 얻지 못했다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다. 왜 그런가. 모든 법은 한량없고 수도 없는데, 어떻게 한 사람이 모든 법을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부처님께서 반야바라밀에 머물면서 참된 모양이 허공처럼 청정하며 한량없고 수없는 법 가운데서 스스로 정성스런 말씀을 꺼내셨다.
“내가 바로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니, 모든 중생의 의심을 끊어 주고 싶구나.”
그래서 이 경을 설하신 것이다.79)

검토해 보겠다. 여기에서 꺼내셨다는 ‘정성스런 말씀’은 거짓이 없는 말씀을 뜻하니, 긴 혀를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세상 사람들이 긴 혀를 가진 자에 대해 다들 알고 있는 것과 같다. 세속의 전적에서 ‘혀가 길어 코를 덮으면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렇게 비량比量으로 증명하는 도리에 의거해 여래께서 하신 말씀이 거짓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여래에게는 일체지가 있어 이것으로 중생의 의심을 끊어 없애신 것이다.

제4장 중생의 병을 치료해 주고 싶어서(爲欲治衆生病者)
넷째, 중생의 병을 치료해 주고 싶어서다. 『대지도론』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모든 중생이 결사結使라는 병에 괴롭힘을 당하는데, 시작이 없는 아득한 세월부터 이를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늘 외도의 나쁜 스승들에게 속아 왔다. 내가 이제 세상에 나와 큰 의사가 되어 온갖 법의 약들을 모았으니, 그대들은 복용하도록 하라.’ 그래서 이 경을 설하신 것이다.80)

제5장 제일의제를 말씀해 주고 싶어서(爲欲說第一義諦者)
다섯째, 제일의제를 말씀해 주고 싶어서다. 『대지도론』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다.

부처님께서 제일의실단第一義悉檀을 말씀해 주고 싶었기 때문에 이 『반야바라밀경』을 설하신 것이다. 네 가지 실단悉檀81)이 있으니,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세계실단世界悉檀이고, 둘째는 각각위인실단各各爲人悉檀이고, 셋째는 대치실단對治悉檀이고, 넷째는 제일의실단第一義悉檀이다. 이 네 가지 실단이 일체 십이부경과 팔만사천 법장을 포함하며, 모두 진실이라서 서로 위배되지 않는다.
세계실단이란 다음과 같다. 존재하는 법은 인연이 화합했기 때문에 있는 것이지 이와 구별되는 성품이란 없다. 마치 수레가 끌채·바퀴살·축·바퀴 테가 화합했기 때문에 있는 것이지 이와 구별되는 수레란 없는 것과 같다. 사람 또한 마찬가지이다. 오중五衆(오온)이 화합했기 때문에 있는 것이지 이와 구별되는 사람이란 없다.

001_0485_b_01L請說法諸法甚深者般若波羅蜜是
001_0485_b_02L是故說此經
三爲欲斷諸人疑者
論云
001_0485_b_03L有人疑佛不得一切智所以者何諸法
001_0485_b_04L無量無數云何一人能知一切法佛住
001_0485_b_05L般若波羅蜜實相淸淨如虗空無量無數
001_0485_b_06L法中自發誠言我是一切智人欲斷一
001_0485_b_07L切衆生疑以是故說此經案云此中發
001_0485_b_08L誠言者謂不妄語有長舌故喩如世共
001_0485_b_09L知有長舌者如世典云舌長覆鼻必不
001_0485_b_10L妄語依此比量證成道理證知如來所
001_0485_b_11L言非妄是故如來有一切智以是斷除
001_0485_b_12L衆生疑也
四爲欲治衆生病者
論云
001_0485_b_13L切衆生爲結使病之所煩惱無始已來
001_0485_b_14L無人能治常爲外道惡師所誤我今出
001_0485_b_15L爲大醫王集諸法藥汝等當服以是
001_0485_b_16L故說此經
五爲欲說第一義諦者
論云
001_0485_b_17L佛欲說第一義悉檀相故說是般若波羅
001_0485_b_18L蜜經有四種悉檀何者爲四一者世界
001_0485_b_19L悉檀二者各各爲人悉檀三者對治悉檀
001_0485_b_20L四者第一義悉檀此四悉檀攝一切十
001_0485_b_21L二部經八萬四千法藏皆是實不相違
001_0485_b_22L世界悉檀者有法從緣和合故有
001_0485_b_23L別性如車轅輻軸輞和合故有無別事 [15]
001_0485_b_24L人亦如是五衆和合故有無別人也

001_0485_c_01L
경에서 “한 사람이 세상에 출현하면 많은 사람이 제도를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부처님께서는 『이야경二夜經』에서 “부처가 도를 얻은 밤부터 열반에 드는 밤까지, 이 두 밤의 사이에 설한 경의 가르침은 일체가 모두 진실이며 전도되지 않은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진실로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사람 등에게 설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사람 등은 세계실단에는 있고, 제일의실단에는 없는 것이다. 여여·법성·실제는 세계실단에는 없고, 제일의실단에는 있는 것이다. 사람 등도 마찬가지로 제일의실단에는 없고, 세계실단에는 있는 것이다. 왜 그런가. 오중의 인연이 있기 때문에 사람이 있다고 한 것이다. 이는 한 사람의 두 번째 머리나 세 번째 손처럼 그럴 인연이 없는데도 가설된 명칭이 있는 것과는 다르다.
이와 같은 특징을 (가진 가르침을) 세계실단이라 한다.
각각위인실단이란 무엇인가. (부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 씀씀이를 살펴 법을 설하고, 똑같은 사안에 대해 어떤 경우에는 허락하고 어떤 경우에는 허락하지 않으신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경에서는 “다양한 과보를 받는 업 때문에 다양한 세간에 다양하게 태어나 다양한 접촉을 하고 다양한 느낌을 받게 된다.”고 설하시고, 또 다른 경82)에서는 “접촉하는 사람도 없고, 느낌을 받는 사람도 없다.”고 설하셨다. 앞의 것은 단견斷見을 가진 사람을 위해 하신 말씀이고, 뒤의 것은 상견常見을 가진 사람을 위해 하신 말씀이다. 이와 같은 특징을 (가진 가르침을) 각각위인실단이라 한다.
대치실단이란 무엇인가. 법이 있다지만 대응해 다스린다는 면에서 있는 것이지 참된 성품을 추궁해 보면 없다. 예를 들면 부정관不淨觀은 욕심의 병을 잘 대응해 치료한다. 하지만 성냄의 병에는 좋다고 할 수 없으니, 대응해 치료하는 법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자비로운 마음이 성냄(을 다스리기)에는 좋지만 욕심(을 다스리기)에는 좋은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특징을 (가진 가르침을) 대치(실단이)라 한다.
제일의실단이란 무엇인가. 일체 법의 성품과 일체 논의와 일체 시비를 낱낱이 깨뜨릴 수 있지만 모든 부처님이나 벽지불이나 아라한이 행한 진실한 법은 깨뜨릴 수도 없고 부술 수도 없다. 또 (앞의) 세 가지 실단에서 통하지 않던 것도 여기에서는 모두 통한다.83)

(『대지도론』에서는) 이외의 사항들도 자세히 설명하였다.

검토해 보겠다.
통틀어 말하면 일체 교문敎門이 두 가지 종지를 벗어나지 않으니, 이른바 이제二諦이다. 다만 세제世諦에 많은 차별이 있다.

001_0485_c_01L如經說言一人出世多人蒙度又佛
001_0485_c_02L二夜經中說佛從得道夜至涅槃夜
001_0485_c_03L二夜中間所說經敎一切皆實而不顚
001_0485_c_04L若實無人者云何說人等答曰
001_0485_c_05L等世界故有第一義故無如如法性實
001_0485_c_06L世界故無第一義故有人等亦如是
001_0485_c_07L第一義故無世界故有所以者何五衆
001_0485_c_08L因緣有故有人非如一人第二頭第三
001_0485_c_09L手無其因緣而有假名如是等相名世
001_0485_c_10L界悉檀云何各各爲人悉檀觀人心行
001_0485_c_11L而爲說法於一事中或聽或不聽如經
001_0485_c_12L中說雜報業故雜生世間得雜觸得雜
001_0485_c_13L又餘經說無人得觸無人得受前爲
001_0485_c_14L斷見人後爲常見人如是等相名爲各
001_0485_c_15L各爲人悉檀云何爲對治悉檀有法
001_0485_c_16L對治卽有實性則無如不淨觀於欲病
001_0485_c_17L是善對治於瞋病中不名爲善非對
001_0485_c_18L治法如是慈心於瞋是善於欲非善
001_0485_c_19L是等相名爲對治云何名第一義悉檀
001_0485_c_20L一切法性一切論議一切是非一一可破
001_0485_c_21L諸佛辟支佛阿羅漢所行眞實法不可破
001_0485_c_22L不可壞且於三悉檀中所不通此中皆
001_0485_c_23L乃至廣說案云總而言之一切敎門
001_0485_c_24L不出二宗所謂二諦但於世諦有多差

001_0486_a_01L따라서 그 가운데서 (위인실단과 대치실단) 두 가지가 갈라져 나오며, 이 두 가지 외의 것들은 모두 첫 번째에 속한다.
가운데 두 가지 실단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통틀어 말하면 위인실단치고 대응해 다스리지 않는 것이 없고, 대치실단 역시 사람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똑같은 사안에 대해 ‘있다’ 또는 ‘없다’로 다르게 말씀하셨으니, 이것은 사람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위인(실단)이라 한다. (이것은) 병이 다르기 때문에 별도의 약을 준 것이 아니니, 똑같은 사안이기 때문에 대치(실단이)라 하지 않는다.
만약 별도의 법으로 다른 병을 다스렸다면 병도 구별되고 약도 다르다. 따라서 대치(실단이)라 한다. (이것은) 하나의 사안에 대해 사람 따라 다르게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런 것은 위인(실단)이라 하지 않는다. 이 두 가지를 제외하고 세속의 일을 말씀하신 것은 모두 세계실단에 포함된다.

모든 부처님의 설법치고 사람을 위하지 않은 것이 없고, 중생의 병을 대응해 치료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왜 처음과 마지막 두 가지 실단은 위인(실단)이라 하지 않고 대치(실단이)라 하지 않습니까?
통틀어 말하자면, 여래께서는 질문이 있을 때에 그저 세속의 가설된 명칭을 곧장 보여 주기도 하셨고, 또 승의의 참된 모양을 곧장 드러내기도 하셨다. 이와 같은 두 가지는 (보여 주신) 진리 때문에 다른 것이지, 사람 때문에 다른 것이 아니고 병 때문에 다른 것도 아니다. 따라서 처음과 마지막 두 가지를 따로 수립하였다.

만약 ‘사람 등이 세제에서 존재하는 것은 한 사람에게 두 번째 머리가 있다는 것과는 같지 않다.’고 말한다면, (사람은) 온蘊·계界·처處에서 어떤 법에 포함됩니까? 또 만약 사람이 존재한다면, 곧 이것은 ‘내가 있다.’는 것이니, 독자부犢子部84)에서 수립한 주장과 무엇이 다릅니까?
살바다종薩婆多宗85)에서는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한 사람의) 두 번째 머리처럼 온·계·처의 법에 포섭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한다. 독자부에서는 ‘실제로 사람과 법이 존재하며 서로 똑같지도 않고 분리되지도 않는다. 비록 온·계·처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다섯 번째 불가설장不可說藏86)에는 해당된다.’고 주장한다.
이제 대승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인연 때문에 있으나 별도의 성품은 없다. 물질과 마음 등의 법이 모두 또한 마찬가지다. 만약 실제로 사람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면 이는 억지로 더하는 극단(增益邊)이고, 만약 사람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 억지로 줄이는 극단(損減邊)이다. 대승은 그렇지 않다. 인연 따라 존재한다고 보기 때문에 억지로 줄이는 극단을 벗어나고, 별도의 성품은 없다고 보기 때문에 억지로 늘리는 극단을 벗어난다.

001_0486_a_01L故於其中分出二 1) [8] 此二之餘
001_0486_a_02L屬初一中二悉檀有何界 [16] 通而言之
001_0486_a_03L爲人悉檀無非對治對治悉檀亦是爲
001_0486_a_04L然於一事中有無異說是由人界 [17]
001_0486_a_05L故名爲人不由病異以授別藥唯一
001_0486_a_06L事故不名對治若說別法以治異病
001_0486_a_07L別藥異故名對治非於一事中爲人異
001_0486_a_08L故於中不名爲人除此二*種說世
001_0486_a_09L俗事皆是世界悉檀所攝諸佛說法
001_0486_a_10L無不爲人無非對治衆生病者云何
001_0486_a_11L初後二種悉檀不名爲人不名對治
001_0486_a_12L通相而言有如來問但爲直示世俗假
001_0486_a_13L又爲直顯勝義實相如是二種由諦
001_0486_a_14L故異不由人異不由病別是故別立初
001_0486_a_15L後二也若說人等世諦故有非如一
001_0486_a_16L人第二頭等者蘊界處中何法所攝
001_0486_a_17L若有人卽是有我何異犢子部所立耶
001_0486_a_18L薩婆多宗說無有人如第二頭蘊界
001_0486_a_19L處法所不攝故犢子部說實有人法
001_0486_a_20L卽不離雖蘊界處之所不攝而在第五
001_0486_a_21L不可說藏今大乘說因緣故有而無別
001_0486_a_22L色心等法皆亦如是若實有人
001_0486_a_23L增益邊若都無人是損減邊大乘不
001_0486_a_24L從緣有故離損減邊無別性故

001_0486_b_01L온·계·처에서 어떤 법에 포함되는가. 심불상응행온心不相應行蘊87)에 포함되며, 스물네 가지 중 중생동분衆生同分88)에 포함된다. (그리고) 법계法界와 법처法界에 포함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나머지 논의들은 일단 멈추고 본래 주제로 돌아가 서술하겠다.

제6장 모든 논의사들을 굴복시키고 싶어서(爲欲伏諸論議師者)
여섯째, 모든 논의사들을 굴복시키고 싶어서이다. 『대지도론』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다.

장조범지長爪梵志 등 대논의사大論議師들로 하여금 부처님 법에 믿음을 일으키게 하려고 이 경을 설하신 것이다. 그들이 만약 4구를 끊고 벗어난 제일의법이라는 반야의 향기를 맡지 못했다면 작은 믿음도 오히려 얻지 못했을 것이다. 하물며 도의 과보를 얻었겠는가.89)

(『대지도론』에서는) 이외의 사항들도 자세히 설명하였다. 장조범지가 논의한 인연90)을 여기서 자세히 설명해야 마땅하지만 그 나머지 여러 인연들은 논에서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다. 경을 설하신 인연을 간략히 서술하면 이상과 같다.

제5편 가르침을 판별함(判敎者)
다음은 다섯 번째로 가르침을 판별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판별하는 방법에 서로 다른 여러 주장들이 있다. 이제 우선 두 가지 주장만 간략히 드러내 옳고 그름을 가려 보겠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하나의 가르침이 두 길을 벗어나지 않으니, 첫째는 돈교頓敎이고, 둘째는 점교漸敎이다. 점교에 다섯 시기가 있다. 첫째는 사제교四諦敎이고, 둘째는 무상교無相敎이고, 셋째는 억양교抑揚敎이고, 넷째는 일승교一乘敎이고, 다섯째는 상주교常住敎로서 얕은 것에서 깊은 것으로 차례대로 설하신 것이다. 이제 이 경을 비롯한 모든 반야의 가르침은 두 번째 시기에 해당하며, 무상교라고 부른다.91)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세상을 벗어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세 종류에 지나지 않는다. 이른바 경에서 말한 세 가지 법륜이니, 『해심밀경解深密經』에서 하신 말씀과 같다.

승의생 보살勝義生菩薩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께서는 첫 번째 시기에 바라니사波羅泥斯의 선인타처仙人墮處인 시록림施鹿林에 계시면서 오직 성문승聲聞乘에 발심하여 나아가는 자들만을 위해 사제四諦의 형식으로 바른 법륜을 굴리셨습니다. 비록 이것이 매우 기이하고 매우 드문 것이긴 하지만 이 법륜은 그것보다 나은 것이 있고 그것을 포용하는 것도 있습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뜻을 아직 완전히 드러내진 못한 것이며, 이것은 온갖 논쟁거리가 되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예전 두 번째 시기에 오직 대승大乘에 발심하여 나아가고 닦는 자들만을 위해 ‘모든 법은 공하여 자성이 없고, 생성도 없으며 소멸도 없다. (이렇게) 본래 고요한 자성이 열반이다.’라는 것에 의지하여

001_0486_b_01L增益邊蘊界處中何法攝者心不相應
001_0486_b_02L行蘊中攝二十四中衆生同分攝當知
001_0486_b_03L法界法處所攝且止 *乘 [9] 還述本宗

001_0486_b_04L六爲欲伏諸論議師者
論云欲令長爪
001_0486_b_05L梵志等大論議師於佛法中生信故說是
001_0486_b_06L彼若不聞般若氣分離絶四句第一
001_0486_b_07L義法小信尙不得何況得道果乃至廣
001_0486_b_08L長爪梵志論議因緣此中應廣說
001_0486_b_09L餘諸緣廣如論說說經因緣略述如是

001_0486_b_10L次第五判敎者
分判佛敎諸說不同
001_0486_b_11L且略出二說平章是非有人說言一化
001_0486_b_12L敎門不出二途一者頓敎二者漸敎
001_0486_b_13L敎之內有其五時一四諦敎二無相敎
001_0486_b_14L三抑揚敎四一乘敎五常住敎從淺至
001_0486_b_15L漸次而說今此經等諸般若敎在第
001_0486_b_16L二時名無相敎 [18] 有說者出世敎門
001_0486_b_17L過三品所謂經說三種法輪如解深密
001_0486_b_18L經言勝義生菩薩白言世尊初於一時
001_0486_b_19L在波羅泥斯仙人墮處施鹿林中唯爲
001_0486_b_20L發趣聲聞乘者以四諦相轉正法輪
001_0486_b_21L是甚奇甚爲希有而是法輪有上有容
001_0486_b_22L是未了義是諸諍論安足處所世尊在
001_0486_b_23L第二時中唯爲發趣修大乘者依一
001_0486_b_24L切法空無自性無生無滅本來寂靜自性

001_0486_c_01L은밀한 형식으로 바른 법륜을 굴리셨습니다. 하지만 이 법륜 역시 그것보다 나은 것이 있으며, 이것은 온갖 논쟁거리가 되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이제 세 번째 시기를 맞아 널리 모든 승乘에 발심하여 나아가는 자들을 위해 ‘모든 법은 공하여 자성이 없고, 생성도 없고 소멸도 없다. (이렇게) 본래 고요한 자성인 열반 역시 자성이 없는 성품이다.’라는 것에 의지하여 완전히 드러내는 형식으로 바른 법륜을 굴리셨습니다. 이보다 나은 것은 없고 이것을 포용하는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뜻을 완전히 드러낸 것이니, 온갖 논쟁거리가 되기에 충분한 것이 아닙니다.”92)

지금 이 『대품반야경』을 비롯한 모든 『반야경』은 다 이 두 번째 법륜에 포함된다.93)

이 두 논사의 주장 중 어느 것이 진실입니까?
두 가지 가르침과 세 가지 법륜이 하나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며, 또한 모두 도리가 있다. 하지만 그들의 교판이 이 『대품반야경』 등을 모두 (다섯 시기 중) 두 번째 시기로 분류하고 (세 가지 법륜 중) 두 번째 법륜에 포함시킨 것은 이치상 절대로 그렇지 않다. 경과 논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이 『대지도론』의 「석필정품釋畢定品」에서 말씀하셨다.

수보리는 『법화경法華經』에서 ‘만약 부처님이 계신 곳에서 작은 공덕이라도 짓고 나아가 웃고 장난치면서 한 번이라도 나무불南無佛하고 불렀다면, (그는) 조금씩 성장해 반드시 미래에 부처가 되리라.’고 하신 말씀을 듣고, 또 『마하반야바라밀경』 「아비발치품阿鞞跋致品(불퇴품不退品)」에서 ‘물러나는 자도 있고 물러나지 않는 자도 있다.’고 하신 말씀도 들었다. 『법화경』에서 하신 말씀에 따르면 (성불이) 확정된 것인데, 다른 경에서는 물러나는 자도 있고 물러나지 않는 자도 있다고 설하셨다. 그래서 이제 (『반야경』을 설하시는 자리에서 사라불이 보살은) 성불이 확정되었는지 확정되지 않았는지를 질문한 것이다.94)

(『대지도론』에서는) 이외의 사항들도 자세히 설명하였다. 이로써 이 경을 설한 시기가 『법화경』 이후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두 번째 시기에 제시하셨다는 주장은 도리에 맞지 않다.”95)

만약 이 경을 『법화경』 뒤(에 설해진 것으)로 판별한다면, 이런 주장은 『인왕경仁王經』에서 “그때 대중이 각자 서로에게 말하였다. ‘크게 깨달으신 세존께서는 전에 이미 우리 대중을 위해 29년 동안 『마하반야摩訶般若』, 『금강반야金剛般若』, 『천왕문반야天王問般若』, 『광찬반야바라밀光讚般若波羅蜜』을 말씀하셨다. 오늘 여래께서 큰 광명을 비추시니, 어떤 일을 하려고 이러는 것일까?’”96)라고 하신 말씀과 어떻게 회통하여 이해해야 합니까?97)
마하반야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가지로 많으니,

001_0486_c_01L涅槃以隱密相轉正法輪而是法輪
001_0486_c_02L亦是有上是未了義是諸諍論安足處所
001_0486_c_03L世尊於今第三時中普爲發趣一切乘者
001_0486_c_04L依一切法空無自性無生無滅本來寂
001_0486_c_05L自性涅槃無自性性以顯了相轉正
001_0486_c_06L法輪無上無容是其了義非諸諍論安
001_0486_c_07L足處所今此大品幷諸般若皆是第二
001_0486_c_08L法輪所攝是二師說何者爲實
001_0486_c_09L二種敎門三種法輪是就一途亦有道理
001_0486_c_10L然其判此大品經等皆屬第二時攝第
001_0486_c_11L二法輪者理必不然違經論故如此論
001_0486_c_12L釋畢定品言須菩提聞法華經說若於
001_0486_c_13L佛所作小 [19] 功德乃至戲咲一稱南無佛
001_0486_c_14L漸漸必當作佛又聞阿鞞跋致品中有
001_0486_c_15L退不退如法華經中 [20] 畢定餘經說有退
001_0486_c_16L有不退是故今問爲畢定爲不畢定
001_0486_c_17L至廣說以是驗知說是經時在法華後
001_0486_c_18L卽示第二時者不應道理也若判此
001_0486_c_19L經在法華後者是說云何通知仁王經
001_0486_c_20L爾時大衆各相謂言大覺世尊前已
001_0486_c_21L爲我等大衆二十九年說摩訶般若金剛
001_0486_c_22L般若天王問般若光讚般若波羅蜜
001_0486_c_23L日如來放大光明斯作何事摩訶般
001_0486_c_24L「種」一作「宗」

001_0487_a_01L초기의 말씀에 해당하는 것도 후기의 말씀에 해당하는 것도 있다. 『대지도론』에서 “이 『마하반야바라밀경』은 2만 2천 게송이고, 『대반야경』은 10만 게송이다. 저 용왕의 궁궐이나 아수라궁 또는 천궁에 있는 것들은 천억만 게송이다.”98)라고 하고, 나아가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다. 이러한 뜻 때문에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99)

또 이 『대지도론』에서 “또 두 종류의 설법이 있다. 하나는 논쟁하는 것이고, 둘은 논쟁이 없는 것이다. 논쟁하는 것은 나머지 경들과 같은 것들이다. 이제 논쟁이 없는 것을 밝히고 싶어 이 『마하반야바라밀경』을 설하신 것이다.”100)라고 했다.
이것으로써 지금 이 경이 세 번째인 (부처님의 뜻을) 완전히 드러낸 법륜이란 걸 확실히 알 수 있으니, 온갖 논쟁거리가 되기에 충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경 등을 두 번째 법륜을 제시한 것으로 판별한다면, (이 경은) 논쟁거리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지도론』에서 “이것은 논쟁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았어야 한다.101)

또 이 『마하반야바라밀경』에서 “삼승의 보리를 찾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하고, 또 “반야바라밀 가운데 비록 얻을 수 있는 법이 없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삼승의 가르침이 있다.”102)고 하며 나아가 자세히 설명하신 것과 같다. 『해심밀경』에서도 역시 “일체 성문과 독각과 보살이 모두 하나의 오묘하고 청정한 도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마땅히 알라. 이 경은 저 세 번째인 널리 모든 승乘에 발심하여 나아가는 자들을 위해 완전히 드러내는 형식으로 바른 법륜을 굴리신 것이다. 그러나 저 두 번째 법륜을 굴리시며 하신 말씀들은 오직 대승에 발심하여 나아가고 닦는 자들만을 위한 것이다. 어떻게 이 경을 저 두 번째 법륜에 포함시킬 수 있겠는가.103)

또 이 『마하반야바라밀경』의 「여화품如化品」에서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약 생멸이 있는 법이라면 (그건) 변화變化와 같은 것이다. 만약 법이 생성도 없고 소멸도 없다면 이른바 속이는 모양이 없는 열반이니, 이런 법은 변화가 아니다.”
그러자 수보리가 말했다.
“부처님 말씀대로라면 일체 모든 법은 성품이 공하여 성문이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나아가 모든 부처님께서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떻게 열반이라는 하나의 법만은 변화와 같지 않다고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렇다. 모든 법은 성품이 항상 공하니라. (하지만) 만약 새롭게 마음을 일으킨 보살이 ‘일체 법은 모두 성품이 공하며 나아가 열반까지도 역시 모두 변화와 같다.’는 말을 듣는다면 곧 놀라고 두려운 마음이 들 것이다.

001_0487_a_01L非一衆多有在前說有在後說如論
001_0487_a_02L說言此經二萬二千偈大般若十萬渴
001_0487_a_03L若龍王宮阿修羅宮天宮中者千億萬偈
001_0487_a_04L乃至廣說以是義故不相違也又此論
001_0487_a_05L復次有二種說法一者諍處二者無
001_0487_a_06L諍處諍處者如餘經今欲明無諍處故
001_0487_a_07L說是摩訶般若波羅蜜經以此證知
001_0487_a_08L此經者同於第三顯了法輪非諸諍論
001_0487_a_09L安足處故而判此經等示第二法輪
001_0487_a_10L卽此經爲諍論處不應謂論說是無諍
001_0487_a_11L又此經言欲求三乘菩提當學般若波羅
001_0487_a_12L又言波若波羅蜜中雖無法可得
001_0487_a_13L有三乘之敎乃至廣說如解深密經中
001_0487_a_14L亦言一切聲聞獨覺菩薩皆是一妙淸淨
001_0487_a_15L當知此經同彼第三普爲發趣一切
001_0487_a_16L乘者以顯了相轉正法輪而彼第二法
001_0487_a_17L輪中言唯爲發趣修大乘者何得以此
001_0487_a_18L屬彼第二又此經如化品言若法有生
001_0487_a_19L滅者如化若法無生無滅所謂無誑相
001_0487_a_20L涅槃是法非變化須菩提言如佛所說
001_0487_a_21L一切諸法性空非聲聞作乃至非諸佛
001_0487_a_22L云何涅槃一法非如化佛言如是如
001_0487_a_23L一切法性常空若新發意菩薩聞一
001_0487_a_24L切法皆是性空乃至涅槃亦皆如化心卽

001_0487_b_01L이런 새롭게 마음을 일으킨 보살들을 위해 생멸하는 것은 변화와 같고 생멸하지 않는 것은 변화와 같지 않다고 분별한 것이니라.”
수보리가 말했다.
“세존께서는 새롭게 마음을 일으킨 보살로 하여금 어떻게 이 성품의 공함을 알게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법이 먼저는 있다가 지금은 없는가?”104)

이런 문장들이 증명하고 있으니, 이 경에서 말씀하신 열반이란 법 역시 자성이 없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하지만 저 두 번째 법륜에서는 ‘일체 모든 법이 생성도 없고 소멸도 없으며, (이렇게) 본래 고요한 자성이 열반’이란 건 말씀하셨지만 열반도 자성이 없는 성품이란 건 말씀하지 않으셨다. 세 번째 (부처님의 뜻을) 완전히 드러낸 법륜에서 ‘일체 모든 법이 생성도 없고 소멸도 없으며, 나아가 열반도 자성이 없는 성품’이란 걸 말씀하셨다. 이로써 이 경의 종지는 두 번째 법륜을 뛰어넘어 세 번째 법륜과 같음을 알 수 있다.105)

또 『화엄경』에서 말씀하셨다.

生死及涅槃    생사와 열반
是二悉虛妄    이 둘 모두 허망하나니
愚智亦如是    어리석음과 지혜도 이와 같아
二皆無眞實    두 가지 모두 진실이 없다네.106)

이제 이 『마하반야바라밀경』에서는 (수보리가 여러 천자들에게) ‘색色·수受·상想 등은 환상과 같고 꿈과 같으며, 나아가 열반마저도 환상과 같고 꿈과 같다. 만약 열반보다 훌륭한 법이 있게 된다 해도 나는 그것 역시 환상과 같고 꿈과 같다고 말하리라.’107)고 하였다. 마땅히 알라. 이 경은 저 『화엄경』과 같아 이보다 나은 것은 없고, 이것을 포용하는 것도 없다. 다만 그 가르치는 방법이 각각 다르거나 같을 뿐이다.
다섯 번째, 교판을 간략히 서술하면 이상과 같다.

제6편 문장 풀이(消文)
여섯 번째, 문장풀이이다. 『대지도론』에 의거해 자세히 해석하였다.108)

대혜도경종요 끝.

001_0487_b_01L驚怖爲是新發意菩薩故分別生滅者
001_0487_b_02L如化不生滅者不如化須菩提言世尊
001_0487_b_03L云何令新發意菩薩知是性空佛告須
001_0487_b_04L菩提諸法先有今無耶以是文證當知
001_0487_b_05L此經說涅槃法亦無自性而彼第二法
001_0487_b_06L輪中言一切諸法無生無滅本來寂靜自
001_0487_b_07L性涅槃不言涅槃無自性性第三了義
001_0487_b_08L法輪中言一切諸法無生無滅乃至涅槃
001_0487_b_09L無自性性以是故知今此經宗超過第
001_0487_b_10L同第三也又華嚴經云生死及涅槃
001_0487_b_11L是二悉虗妄愚智亦如是二皆無眞實
001_0487_b_12L今此經云色受想等如幻如夢乃至涅
001_0487_b_13L槃如幻如夢若當有法勝涅槃者我說
001_0487_b_14L亦復如幻如夢當知此經同彼華嚴
001_0487_b_15L上無容究竟了義但其敎門各各異一
001_0487_b_16L第五判敎略述如之

001_0487_b_17L第六消文依論廣釋

001_0487_b_18L
大慧度經宗要終

001_0487_b_19L「乘」疑「剩」
  1. 1)반야(波若) : ⓢ prajñā. 반야般若·파야波若·반라야般羅若·발랄야鉢剌若 등으로 음역된다. 이 책에서도 음역어로 반야般若와 파야波若가 혼용되고 있다. 편의를 위해 한글음을 ‘반야’로 통일하여 번역하였다.
  2. 2)네 가지 변재(四辨) : 사무애지四無碍智·사무애변四無碍辯·사무애해四無碍解라고도 한다. 불보살의 걸림 없는 말솜씨를 뜻한다. 불보살은 법에 자유자재하고(法無碍辯), 뜻에 자유자재하고(義無碍), 표현에 자유자재하고(辭無碍), 즐겁게 이야기함에 자유자재하다(樂說無碍).
  3. 3)다섯 가지 눈(五眼) : 지혜의 성숙도에 따른 안목의 차이를 다섯 가지로 구분한 것으로서, 육안肉眼·천안天眼·혜안慧眼·법안法眼·불안佛眼을 말한다.
  4. 4)네 가지 꽃(四華) : 네 가지 색깔의 연꽃으로서, 청련화靑蓮花·적련화赤蓮花·백련화白蓮花·홍련화紅蓮花를 말한다.
  5. 5)대사大士 : ⓢ mahāsattva. 보살의 미칭.
  6. 6)두 세계의~멀리서 내려왔으며 : 두 세계는 욕계와 색계를 말한다. 『摩訶般若波羅蜜經』 권1(T8, 218a)에서 “그때 수타회천首陀會天, 범중천梵衆天,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 화락천化樂天, 도솔타천兜率陀天, 야마천夜摩天, 삼십삼천三十三天, 사천왕천四天王天 및 삼천대천세계의 사람과 사람 아닌 것들이 온갖 하늘나라 꽃과 하늘나라 영락과 하늘나라 연못의 향수와 하늘나라 가루 향과 하늘나라의 파란 연꽃, 빨간 연꽃, 하얀 연꽃, 분홍 연꽃과 하늘나라의 향기로운 나뭇잎을 가지고 부처님 처소로 찾아왔다.”고 하였다.
  7. 7)상제常啼가 7년~돌아보지 않고 : 상제常啼(ⓢ Sadāprarudita)는 살타파륜薩陀波崙으로 음역하기도 한다. 담무갈보살曇無竭菩薩이 삼매에서 깨어나 반야바라밀을 설하길 기다리면서 상제보살이 7년 동안 앉거나 눕지 않고 서 있었다는 이야기가 『摩訶般若波羅蜜經』 「常啼品」과 「法尙品」에 나온다.
  8. 8)하천河天이 한자리에서~얻었던 것이다 : 하천河天은 갠지스의 여신을 말하며, 항가제바恒伽提婆로 음역하기도 한다. 갠지스의 여신이 법좌에 단 한 번 참석하고는 곧바로 수기를 받은 이야기가 『摩訶般若波羅蜜經』 권18 「河天品」(T8, 349b)에 나온다.
  9. 9)그들 : 요·순·주공·공자를 비롯한 유교의 성현들을 지칭한다.
  10. 10)위없이 큰 사람(無上大人) : 부처님을 뜻한다.
  11. 11)의타기자성依他起自性 : ⓢ para-tantra-svabhāva. 의타기성依他起性이라고도 한다. 유식종唯識宗에서 건립한 삼성三性의 하나. 다른 연에 의지하여 발생한 일체 현상의 모든 법을 지칭한다. 이 의타기성은 유위법有爲法에 속한다. 100법 중 6무위六無爲를 제외한 94법이 모두 의타기성에 포섭된다.
  12. 12)변계소집자성遍計所執自性 : ⓢ parikalpita-svabhāva.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라고도 한다. 유식종에서 건립한 삼성의 하나. 범부가 망정妄情을 바탕으로 의타기성의 법을 두루 계착하여 “내가 실제로 존재하고, 만물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망령되게 집착하는 성품. 망령되게 집착하는 성품에서 나타난 현상들은 망정 속에서만 겨우 존재할 수 있고, 실제 이치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망정에 사로잡혔을 때는 있지만 이치로는 없는 법(情有理無之法)’이라 칭한다.
  13. 13)명언훈습名言熏習 : 3종 습기의 하나로 명언종자名言種子·명언습기名言習氣·등류습기等流習氣라고 칭하기도 한다. 말과 문자의 영향으로 형성된 종자를 말한다.
  14. 14)승의勝義 : ⓢ paramārtha. 제일의 진실이라고도 한다. 세속의 반대말로서 최승진실의 도리인 열반, 진리를 뜻한다.
  15. 15)『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권74(T30, 708c).
  16. 16)『大般若波羅蜜多經』 권55(T5, 314c).
  17. 17)『摩訶般若波羅蜜經』 권3(T8, 238c).
  18. 18)『摩訶般若波羅蜜經』 권7(T8, 271c). 취의 요약.
  19. 19)『瑜伽論』에서 인용하였다고 밝혔으나 확인할 수 없다. 『大乘掌珍論』 권하(T30, 274b)에서는 이를 상응논사相應論師의 주장으로 소개하고 있다.
  20. 20)『摩訶般若波羅蜜經』 권21(T8, 374a).
  21. 21)『大智度論』 권83(T25, 643a).
  22. 22)『석론釋論』 : 『大智度論』을 『摩訶般若釋論』·『大智釋論』·『釋論』·『智度論』·『智論』·『大論』이라 칭하기도 한다.
  23. 23)『大智度論』 권1(T25, 61b).
  24. 24)4구 : 4구분별四句分別의 줄임말. 긍정, 부정, 종합긍정, 종합부정의 네 가지 언명 방식을 말한다.
  25. 25)『廣百論本』 권1(T30, 186c).
  26. 26)『大般若波羅密多經』 권578 「般若理趣分」(T7, 990b).
  27. 27)『究竟一乘寶性論』 권4(T31, 839a).
  28. 28)『勝鬘師子吼一乘大方便方廣經』(T12, 222b).
  29. 29)『究竟一乘寶性論』 권4(T31, 839a).
  30. 30)이 다섯 구절 : 『勝鬘經』에서 여래장을 두고 “법계장法界藏, 출세간법신장出世間法身藏, 출세간상상장出世間上上藏, 자성청정법신장自性淸淨法身藏, 자성청정여래장自性淸淨如來藏”이라 한 것을 말한다.
  31. 31)『顯識論』(T31, 881c).
  32. 32)『佛性論』 권2(T32, 796a).
  33. 33)불지佛地 : 보살 수행의 최종 계위인 십지 중 열 번째 지위를 가리킨다.
  34. 34)대원경지大圓鏡智 : ⓢ ādarśa-jñāna. 크고 둥근 거울이 일체 형상을 고스란히 비추고 나타내듯이 일체 법을 사실 그대로 비추고 나타내는 부처님의 지혜를 가리킨다. 유식종의 설명에 의하면, 성불한 후 번뇌가 지혜로 전환되는데 그중 제8아뢰야식阿賴耶識이 전변한 청정지淸淨智가 곧 대원경지이다.
  35. 35)등류과等流果 : ⓢ niṣyandaphala. 의과依果·습과習果라고도 한다. 오과五果의 하나로 동등한 원인에서 유출되는 결과를 말한다. 원인과 결과의 성질이 같은 종류이기 때문에 등류等流라 칭한다. 즉 선한 원인에서 선한 결과가 발생하고, 악한 원인에서 악한 결과가 발생하고, 무기無記인 원인에서 무기의 결과가 발생하는 것이다.
  36. 36)『大智度論』 권18(T25, 190a).
  37. 37)아래에 서술된 네 가지 주장과 문답 등은 『大智度論』 권11(T25, 139c)에서 발췌한 것이다.
  38. 38)무루無漏 : ⓢ anāsravaḥ. 유루有漏의 대칭. ‘루漏’는 누설漏泄을 뜻하며, 번뇌煩惱의 이칭이다. 탐욕과 분노 등의 번뇌가 눈과 귀 등 육근六根의 문을 통해 밤낮으로 쉬지 않고 누설되기 때문에 ‘루漏’라 칭한다. 또 누락漏落의 뜻이 있으니, 번뇌가 능히 사람을 삼악도三惡道에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이를 바탕으로 번뇌가 있는 법을 유루有漏라 칭하고, 열반과 보리 등 번뇌의 오염을 벗어난 청정한 법을 무루無漏라 칭한다.
  39. 39)유루有漏 : ⓢ sāsrava. 무루無漏의 대칭.
  40. 40)결사結使 : 번뇌의 이칭. 모든 번뇌가 중생을 결박하여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결結’이라 칭하고, 중생을 부리며 괴롭히기 때문에 ‘사使’라 칭한다. 결結에 아홉 가지가 있고, 사使에 열 가지가 있기 때문에 구결십사九結十使라 칭한다.
  41. 41)중衆 : ⓢ skandha. 온蘊·음陰·취聚로 번역하기도 한다. 적취積聚·유별類別을 뜻하며, 일체 유위법을 다섯 가지 종류로 구별한 것을 오중五衆(ⓢ pañca-skandha)이라 한다. 오중은 색중色衆(ⓢ rūpa-skandha)·수중受衆(ⓢ vedanā-skandha)·상중想衆(ⓢ saṃjñā-skandha)·행중行衆(ⓢ saṃskāra-skandha)·식중識衆(ⓢ vijñāna-skandha)이다.
  42. 42)계界 : ⓢ dhātu. 층層·근기根基·요소要素·기초基礎·종족種族 등 여러 가지 뜻을 함유하고 있다. 각종 범주의 호칭으로 사용된다. 예를 들면 육근六根과 육경六境과 육식六識을 합해 십팔계十八界라 칭하고, 지地·수水·화火·풍風·공空·식識을 합해 육계六界라 칭하며,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를 합해 삼계三界라 칭한다. 여기에서는 삼과三科의 하나로 십팔계를 뜻한다.
  43. 43)입入 : ⓢ āyatana. 구역에서는 입入이라 하고, 신역에서는 ‘처處’라 하였다. 육근과 육경을 합해 십이입이라 한다. 즉 근根과 경境이 서로에게 스며들어 식識을 발생시키기에 ‘입入’이라 한다.
  44. 44)다섯 가지 상相 : 『攝大乘論』 권하(T31, 128a)에서 “무분별지의 자성은 다섯 가지 상을 벗어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다섯 가지 상이란 무엇인가. 첫째 사유가 아니라는 상을 벗어났기 때문이고, 둘째 각관覺觀의 영역이 아니라는 상을 벗어났기 때문이고, 셋째 상想과 수受와 소멸한 적정을 벗어났기 때문이고, 넷째 색의 자성을 벗어났기 때문이고, 다섯째 진실한 뜻에 대한 다른 분별을 벗어났기 때문이다.(無分別智自性。 應知離五種相。 五相者。 一離非思惟故。 二離非覺觀地故。 三離滅想受定寂靜故。 四離色自性故。 五於眞實義離異分別故。)”라고 하였다.
  45. 45)간혜지乾慧地 : 보살의 초발심에서부터 순인順忍을 얻기 전까지를 간혜지라 한다. 간혜乾慧는 메마른 지혜라는 뜻으로 지혜는 깊으나 아직 선정의 물에 깊이 젖어들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
  46. 46)부정관不淨觀 : ⓢ a-śadhā-smṛti. 부정상不淨想이라고도 한다. 오정심관五停心觀의 하나. 자신과 타인의 육체가 추하고 더러운 것임을 관찰하여 탐욕의 번뇌를 멸하는 관법이다.
  47. 47)안반安般 : ⓢ ānāpāna. 안나반나安那般那의 약칭. 출입식념出入息念을 말한다. 수식관數息觀 또는 수식관隨息觀이라고도 한다.
  48. 48)사념처四念處 : ⓢ catvāri smṛty-upasthānāni. 사념주四念住·사의지四意止·사지념四止念이라고도 한다. 삼십칠도품三十七道品의 하나.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해 잡념과 망상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고 관찰을 통해 진리를 체득하는 네 가지 방법이다. 집중 대상에 따라 신념처身念處·수념처受念處·심념처心念處·법념처法念處로 구분하고, 각각의 부정不淨·고苦·무상無常·무아無我를 관찰한다.
  49. 49)난법煖法·정법頂法·인법忍法·세제일법世第一法 : 이를 사선근四善根 또는 사선근위四善根位라 한다. 사제四諦의 이치를 명확히 보는 견도見道에 들어가기 직전의 위가 이 사선근위이다. 따뜻한 지혜의 불길에 다가가 번뇌가 타버리고 선근이 나타나는 단계를 난위煖位라 하고, 불안정한 선근 가운데 최상의 선근이 나타나는 단계를 정위頂位라 하고, 사제의 이치를 명확히 알아 선근이 확고해지는 단계를 인위忍位라 하고, 유루법 중 최상의 선근을 낳는 단계를 세제일위世第一位라 한다.
  50. 50)『大智度論』 권18(T25, 191a).
  51. 51)세 부분 : 견분見分·상분相分·자증분自證分을 말한다. 법상종法相宗에서는 사람의 인식작용을 구성하는 심식心識에 견분見分과 상분相分의 두 가지, 혹은 여기에 자증분自證分을 더한 세 가지, 혹은 여기에 증자증분證自證分을 더한 네 가지 분위分位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 각각 이분설二分說, 삼분설三分說, 사분설四分說이라 하며, 이 가운데 삼분설이 가장 대표적이다. 주관인 마음에 인식되는 객관의 형상을 상분, 상분을 인식하는 주관의 마음작용을 견분, 견분을 인지하는 작용을 자증분이라 한다.
  52. 52)『大智度論』 권18(T25, 190c).
  53. 53)내공內空과 나아가 유법무법공有法無法空까지 : 십팔공을 말한다. 십팔공은 내공內空·외공外空·내외공內外空·공공空空·대공大空·제일의공第一義空·유위공有爲空·무위공無爲空·필경공畢竟空·무시공無始空·산공散空·성공性空·자상공自相空·제법공諸法空·불가득공不可得空·무법공無法空·유법공有法空·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이다.
  54. 54)『摩訶般若波羅蜜經』 권15(T8, 328a).
  55. 55)『摩訶般若波羅蜜經』 권1(T8, 219c).
  56. 56)『摩訶般若波羅蜜經』 권1(T8, 220c).
  57. 57)『大智度論』 권34(T25, 308c).
  58. 58)앞에서 제기한 힐난 : 앞에서 “만약 (과거와 미래 부처님의) 그 음성이 현재에 이른다면, 어떻게 이미 사라진 것이 현재에 다시 생겨나고, 어떻게 아직 생기지도 않은 것이 현재에 먼저 나타날 수 있습니까?”라고 문제를 제기하였다.
  59. 59)『大方廣佛華嚴經』 권35(T9, 628a).
  60. 60)『大方廣佛華嚴經』 권33(T9, 609b).
  61. 61)『大智度論』 권18(T25, 191a).
  62. 62)나머지 다섯 가지 : 반야바라밀을 제외한 다섯 바라밀을 뜻한다. 『대지도론』에서 “나머지 다섯 바라밀은 그렇질 못하니, 반야바라밀을 겸비하지 못한 보시 등은 겨우 세간의 과보만 줄 수 있다. 따라서 위대하다고 부를 수 없다.(餘五波羅蜜不能爾。 布施等離般若波羅蜜。 但能與世間果報。 是故不得名大。)”고 한 것을 요약해 인용하였다.
  63. 63)『大智度論』 권18(T25, 191a).
  64. 64)여섯 가지 해석법(六種釋) : 두 개 이상의 단어가 합성된 범어의 복합어를 해석하는 여섯 가지 방법이다. 육합석六合釋·육이합석六離合釋·육석六釋이라고도 한다. 먼저 각각의 단어를 분리해 해석하고(離釋), 재차 종합하여 그 뜻을 해석한다(合釋). 여기에 의주석依主釋·지업석持業釋·유재석有財釋·상위석相違釋·대수석帶數釋·인근석鄰近釋이 있다.
  65. 65)유재석有財釋 : 다재석多財釋이라고도 한다. 두 개 이상의 단어가 합성된 복합어가 형용사 기능을 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大乘法苑義林章』 권1의 해석에 의거하면, 자기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자기가 소유한 재물을 이름 대용으로 쓰는 것이라 하였다. 예를 들면 ‘키가 큰 사람(長身之人)’을 ‘큰 키(長身)’라고 지칭할 때, ‘큰 키’라는 말이 그 사람의 대칭代稱으로 쓰이는 것과 같다. 이 문장에서 유재석이라 한 것은 ‘위대한 것’이라는 말이 ‘반야’의 대칭으로 쓰인다는 뜻이다.
  66. 66)지업석持業釋 : 동의석同依釋이라고도 한다. 앞 단어가 뒷 단어를 수식하는 관계로 해석하는 방법이다. 앞 단어는 형용사나 부사 혹은 동격의 명사로 해석되고, 뒷 단어는 명사가 된다. 예를 들면 ‘고산高山’을 높은 산이라고 해석하는 것과 같다. ‘관조반야觀照般若’를 지업석으로 풀면 ‘고요히 비추는 지혜’가 된다.
  67. 67)의주석依主釋 : 의사석依士釋·속주석屬主釋·즉사석卽士釋이라고도 한다. 앞 단어를 명사나 명사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고, 뒷 단어는 소유격으로 해석한다. 예를 들면 ‘왕신王臣’을 왕의 신하로 해석하는 것과 같다. ‘실상반야實相般若’를 의주석으로 풀면 ‘참된 모양의 지혜’, 즉 참된 모양에서 발생하는 지혜가 된다.
  68. 68)이것도 지업석이다 : ‘실상반야實相般若’를 지업석으로 풀면 ‘참된 모양인 지혜’가 된다.
  69. 69)『大智度論』 권70(T25, 551c).
  70. 70)『大智度論』 권84(T25, 479a).
  71. 71)『大智度論』 권84(T25, 479a).
  72. 72)『大智度論』 권84(T25, 479a).
  73. 73)『摩訶波羅蜜經』 권3(T8, 236b).
  74. 74)『合部金光明經』 권3(T16, 374a). 『金鼓經』은 『金光明經』의 다른 이름.
  75. 75)『大智度論』 권1(T25, 57c).
  76. 76)『중아함中阿含』 「본말경本末經」 : 부처님께서 미륵에게 수기한 내용은 현재 『中阿含』 「王相應品」 ≺說本經≻.(T1, 510c)에 수록되어 있다.
  77. 77)『大智度論』 권1(T25, 57c).
  78. 78)『大智度論』 권54(T25, 443c).
  79. 79)『大智度論』 권1(T25, 58a).
  80. 80)『大智度論』 권1(T25, 58c).
  81. 81)실단悉檀 : ⓢ siddhānta. 성취成就·종宗·이理 등으로 번역한다. 중생을 인도해 깨달음을 완성시키는 교법을 뜻한다.
  82. 82)다른 경 : 『大智度論』에서는 『破群那經』이라 하였다.
  83. 83)『大智度論』 권1(T25, 59a).
  84. 84)독자부犢子部 : ⓢ Vāṭsī-putrīyāḥ. 소승 20부의 하나. 발사불지리여부跋私弗底梨與部·바추부라부婆麤富羅部·가주자제자부可住子弟子部 등으로 칭하기도 한다. 불멸 후 약 300년경에 일체유부一切有部에서 갈라져 일파를 형성하였으며, 중생에게 실아實我가 있다고 주장하여 여러 불교 학파로부터 비판받았다. 『俱舍論』 「破我品」에서 “불법 가운데 외도外道이다.”라며 통렬히 배척하였다.
  85. 85)살바다종薩婆多宗 : ⓢ Sarvāsti-vādin. 소승 20부의 하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라고도 하고, 유부有部·유종有宗·설인부說因部(ⓢ Hetu-vidyāḥ)라 칭하기도 한다. 실아實我는 없지만 법은 존재하고, 삼세三世가 실제로 존재하며 법체法體 역시 항상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일체 만유를 5위 75법으로 구분하였다. 『大毘婆沙論』과 『發智論』·『六足論』 등이 이 종파의 교리를 서술한 것이며, 『俱舍論』도 대부분 이 종파의 교리를 밝히고 있다.
  86. 86)불가설장不可說藏 : 독자부에서는 일체 만유를 과거過去·미래未來·현재現在·무위無爲·불가설不可說의 오장五藏으로 구분하고, 모두 실제로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생사윤회의 주체로서 보특가라補特伽羅(ⓢ pudgala)를 상정하고, 이는 오온五蘊과 부즉불리不卽不離의 관계에 있으며 불가설장에 해당한다고 주장하였다.
  87. 87)심불상응행온心不相應行蘊 : 심불상응행법心不相應行法이라고도 한다. 『俱舍論』에서는 여기에 14법이 있다 하였고, 대승유식종에서는 24법이 있다고 하였다.
  88. 88)중생동분衆生同分 : 중동분衆同分·동분同分이라고도 한다. 타 집단과 구별되는 특정 집단이 공유하는 요소이다.
  89. 89)『大智度論』 권1(T25, 61b).
  90. 90)장조범지가 논의한 인연 : 사리불의 외삼촌이자 유명한 논사였던 장조범지가 불법에 귀의한 인연은 『大智度論』 권1(T25, 61b)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91. 91)이상은 이교오시설二敎五時說에 의거해 『반야경』을 점교의 제2시로 판별한 것이다. 이교오시설은 남북조南北朝 시대 구마라집의 제자였던 혜관慧觀에 의해 주창되었으며, 이것이 중국에서 교상판석의 시초가 되었다.
  92. 92)『解深密經』 권2(T16, 697a).
  93. 93)이상은 『解深密經』의 삼시설三時說에 의거해 『般若經』을 제2시로 판별한 것이다. 『解深密經』에 소개된 이 삼시설은 계현戒賢(ⓢ Śīlabhadra)과 지광智光(ⓢ Jñāna-prabhā)으로 이어졌으며, 당나라 현장玄奘이 이를 계승해 부처님의 일대교설을 유교有敎·공교空敎·중도교中道敎로 구분하는 법상종法相宗의 교판으로 수립하였다.
  94. 94)『大智度論』 권93(T25, 713b).
  95. 95)『法華經』은 오시설의 구분에 따르면 제4시 일승교一乘敎에 해당하고, 삼시설의 구분에 따르면 제3시 중도교中道敎에 해당한다. 이상에서는 “사리불이 보살의 성불 확정 여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것으로 보아 『摩訶般若波羅蜜經』은 『法華經』 이후에 설해진 것이다.”라는 『大智度論』의 주장을 바탕으로 『摩訶般若波羅蜜經』을 제2시로 구분한 것이 부당함을 지적하였다.
  96. 96)『佛說仁王般若波羅蜜經』 권상(T8, 825b).
  97. 97)『妙法蓮華經』 권5 「從地踊出品」(T9, 41c)에서 미륵보살이 부처님에게 한 질문에 “여래께서는 태자 시절 석가족의 궁궐을 나와 가야성에서 멀지 않은 도량에 앉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셨고, 그로부터 이제 40여 년이 흘렀습니다.”라고 한 구절이 나온다. 따라서 『法華經』을 설한 시기는 성불 후 40여 년 이후가 된다. 이를 “29년 동안 『摩訶般若經』 등을 설하셨다.”고 한 『仁王經』의 말씀과 대조할 때, 『摩訶般若經』은 『法華經』 이전에 설해진 것이 된다고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98. 98)『大智度論』 권100(T25, 756b).
  99. 99)『摩訶般若波羅蜜經』이 『法華經』 이전에 설해진 것임을 추측케 하는 경증經證을 제시하자, 이에 대해 『摩訶般若』에 여러 가지가 있음을 밝힘으로써 의혹을 해명하였다. 이하 예상되는 난문들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였다.
  100. 100)『大智度論』 권1(T25, 62b).
  101. 101)이상은 『摩訶般若波羅蜜經』이 구경究竟의 요의설了義說이 아니라는 주장에 대한 반론이다.
  102. 102)『摩訶般若波羅蜜經』 권8(T8, 279c).
  103. 103)이상은 『摩訶般若波羅蜜經』이 대승인만을 위한 가르침이라는 주장에 대한 반론이다.
  104. 104)이상은 『摩訶般若波羅蜜經』 권26 「如化品」(T8, 416a)에서 발췌 정리하여 인용한 것이다.
  105. 105)이상은 『摩訶般若波羅蜜經』이 자성열반自性涅槃을 밝혔을 뿐이고 자성열반의 무자성성無自性性은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요의가 아니라는 주장에 대한 반론이다.
  106. 106)『大方廣佛華嚴經』 권10(T9, 464c).
  107. 107)『摩訶般若波羅蜜經』 권8(T8, 276b).
  108. 108)필사자가 원문을 누락시킨 것으로 추측된다.
  1. 1){底}續藏經。第一編三十八套二冊。
  2. 2)「三」一作「之」。
  3. 1)「山」下經有「王」。
  4. 2)「諸」下經有「佛」。
  5. 3)「皆」一作「悉」。
  6. 4)「過」一作「逆」。
  7. 5)「乘」疑「剩」。
  8. 1)「般若」疑「智慧」。
  9. 2)「實」一作「其」。
  10. 1)「種」一作「宗」。
  11. 1)「乘」疑「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