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보살계본지범요기(菩薩戒本持犯要記) / 菩薩戒本持犯要記

ABC_BJ_H0015_T_001

001_0581_a_01L
보살계본지범요기菩薩戒本持犯要記
신라국 사문 원효 지음(新羅國 沙門 元曉 述)
보살계본지범요기菩薩戒本持犯要記
보살계란 번뇌의 흐름을 돌이켜 일심一心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큰 나루터이고, 삿된 것을 버리고 바른 데로 나아가는 긴요한 문門이다. 그러나 삿된 것과 바른 것은 넘치기 쉬우며, 죄와 복의 성질은 분간하기 어렵다. 왜 그러한가. 내면은 실제로 삿되지만 밖으로 드러난 행위는 바른 것 같으며, 반대로 드러난 행위는 물든 것 같으나 내면의 마음은 순수하고 깨끗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작은 복업福業을 지었는데도 큰 환난을 만나기도 하고, 마음 작용이 깊고 먼 것을 따르지만 얕고 가까운 것에는 어긋나기도 한다. 그러므로 혼탁에 물든 도인과 사사로움만 따르는 사문은 오래도록 유사한 흔적만을 좇아 참되고 올바름을 잃고 깊은 계를 훼손하며 얕은 행만을 구하게 된다. 이제 얕은 것을 버리고 온전히 깊은 것만을 취하며 유사한 자취를 버리고 진실을 따르고자 하여, 스스로 쉽게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 기記1)의 요점을 별도로 취하였다. 다행히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라면 자세히 살펴 잘 판단하기 바란다.
지범持犯의 요점에는 세 부문이 있으니, 그것은 첫째, 경중문輕重門, 둘째, 천심문淺深門, 셋째, 구경지범문究竟持犯門이다.

제1장 경중문輕重門 : 계를 지키고 범함의 경중을 밝힘
첫 번째 문(경중문)을 다시 둘로 나누니, 첫째, 총괄적으로 지범持犯의 경중을 파악하고, 둘째, 별도로 차이점을 드러낸다.
먼저 총괄적으로 (지범의 경중을) 파악하여 본다. 가볍고 무거운 죄 가운데 그 가닥을 자세히 구분하면 그 수가 팔만 사천이나 되지만 개략적으로 중요한 것만을 들어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달마계본達磨戒本2)이 설한 44계, 둘째, 수다라계본修多羅戒本3)의 사십팔경계四十八輕戒, 셋째, 별해탈계경別解脫戒經4)에서 세운 246경계 등이다. 두 번째의 사십팔경계에는 (소승과) 공통되는 것과 공통되지 않는 것이 있으니, 공통되는 것과 공통되지 않는 것의 형태(相)는 경문에 의거해 알 수 있다.
중계重戒5) 가운데는 모두 열 가지(계상)가 있지만 부류별로는 역시 세 종류가 있다. 먼저 소승과 공통되는 중계는 앞의 네 가지이고,

001_0581_a_01L[菩薩戒本持犯要記]

001_0581_a_02L1)菩薩戒本持犯要記

001_0581_a_03L

001_0581_a_04L新羅國沙門元曉述

001_0581_a_05L
菩薩戒者返流歸源之大津去邪就正
001_0581_a_06L之要門也然邪正之相易濫罪福之性
001_0581_a_07L難分何則或內意實邪而外迹似正
001_0581_a_08L或表業同染而中心淳淨或有作業合
001_0581_a_09L少福而致大患或有心行順深遠
001_0581_a_10L違淺近是以專穢道人剋私沙門
001_0581_a_11L專似迹以亡眞正每剋深戒而求淺
001_0581_a_12L今將遺淺事而全深去似述而逐
001_0581_a_13L爲自忽忘撮要記別幸同趣者
001_0581_a_14L而取決矣持犯之要2) [1] 三門一輕重
001_0581_a_15L二淺深門三明究竟持犯門也

001_0581_a_16L輕重門
初門之內有其二句先卽總判輕重
001_0581_a_17L後以別顯差別言總判者3) [2] 垢罪
001_0581_a_18L細論支別4) [3] 乃有八萬四千
001_0581_a_19L擧其要別有三類或四十四如達摩
001_0581_a_20L戒本所說或四十八如多羅戒本所判
001_0581_a_21L或有二百四十六輕如別解脫戒經所
001_0581_a_22L此第二中有共不共共不共相
001_0581_a_23L文可解重戒之中總說有十論其類
001_0581_a_24L亦有三種或有共小之重謂前

001_0581_b_01L(소승과) 공통되지 않는 중계는 뒤의 네 가지이며, 또 재가 보살의 육중六重은 십중十重 가운데 앞의 여섯 가지이다. 여기에는 (대승과 소승의) 공통적인 계와 공통적이지 않은 계가 합쳐져 있다. 총괄적으로 판단한 경중의 유형은 이와 같다.
다음은 차이점에 대해 살펴보자. 이제 달마계본에 의해 (지범의) 성상性相의 차별을 가리고자 한다. 논(『유가사지론』)은 “어기고 범함(違犯)에는 염오染汚와 염오가 아닌 것, 그리고 연품軟品·중품中品·상품上品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6)라고 설한다. 욕欲과 비悲7)는 비록 짓는 업은 같지만, ‘범함(犯)’과 ‘범함이 없음(無犯)’은 다르다. ‘범함이 있다(有犯)’는 것은 네 가지 원인(四因)에 의하여 범하는 모든 것을 말하고, ‘어기고 범함이 없다(無違犯)’는 것은 세 가지 조건(三緣)에 의하여 짓게 되는 모든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세 가지 조건이란 무엇인가. 마음에 광란이 증장되는 것, 무거운 고통으로 핍박당하는 것, 일찍이 정계율의淨戒律儀8)를 받지 않은 것으로, 이 세 가지 ‘범함 없음(無犯)’은 일체 계에 통한다. 별도의 ‘범함 없음’에 대해서는 논(『유가사지론』)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범함 있음(有犯)’ 중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 중계 가운데는 연품·중품·상품의 세 가지 품류가 있고, 둘째, 경계 가운데는 염오와 염오가 아닌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통하여 말하면, 네 가지 원인 중에 무지와 방일로 인해 범하는 여러 가지 죄는 염오가 아니지만 번뇌가 치성하거나 경만輕慢으로 범하는 여러 가지 죄는 염오라 할 수 있다. 별도로 염오(번뇌로 물듦)와 염오가 아닌 것에 대해 논한 것은 본문에 의거하여 알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그렇지만 한두 가지 논한 것 가운데 초계初戒9)로써 그 계상을 보이고자 한다.

첫 번째 계인 자찬훼타自讚毁他10)에도 네 가지 차별이 있다. 먼저 다른 사람에게 신심을 일으키게 하기 위한 자찬훼타는 계를 범한 것이 되지 않고 복이 된다. 다음 방일과 무기심無記心으로 자찬훼타하면 계를 범한 것이 되지만 염오는 아니다. 또 다른 사람에 대해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있어서 자찬훼타하면 염오이지만 중계를 범하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이익과 공경을 탐하고 구하기 위해 자찬훼타하는 것은 경계輕戒가 아닌 중계重戒를 범한 것이 된다. 네 번째의 경우에는

001_0581_b_01L四也或有不共之重謂後四也
001_0581_b_02L立在家菩薩六重謂十重內在前六也
001_0581_b_03L此中合有共與不共總判輕重義類如
001_0581_b_04L

001_0581_b_05L
若明差別者今依達摩戒本辨其性相
001_0581_b_06L差別文言於有違犯是染非染
001_0581_b_07L中上品應當了知欲悲雖所作業同
001_0581_b_08L而犯無犯異言有犯者謂由四因所
001_0581_b_09L犯諸事無違犯者謂由三緣所作諸
001_0581_b_10L三緣是何謂若彼心增上5) [4]
001_0581_b_11L重苦受之所逼切若未曾受淨戒律儀
001_0581_b_12L此三無犯通一切戒別論無犯如文
001_0581_b_13L廣說於有犯中有其二聚重內應知
001_0581_b_14L耎中上品輕中當識是染非染通而論
001_0581_b_15L6) [5] 若由無知及由放逸
001_0581_b_16L犯衆罪是不染汚若煩惱盛及由輕
001_0581_b_17L所犯衆罪是其染汚別論染不染
001_0581_b_18L亦依本文可知凡說雖然一二論
001_0581_b_19L且就初戒以示其相於一讃毁
001_0581_b_20L四差別若爲令彼7) [6] 信心故自讃毁
001_0581_b_21L是福非犯若由放逸無記心故
001_0581_b_22L讃毁他是犯非染若於他人有愛恚
001_0581_b_23L自讃毁他是染非重若爲貪求利
001_0581_b_24L養恭敬自讃毁他是重非輕第四之

001_0581_c_01L삼품이 있으며, 삼품이 성립되는 이유에 또 두 가지 갈래가 있으니 ‘사실(事)’로 인한 것과 ‘얽어맴의 번뇌(纏)’로 인한 것이다.
먼저 ‘얽어맴의 번뇌’로 인한 것이란 무엇인가. ‘얽어맴의 번뇌’가 현행하는 것은 지나치게 거칠거나 날카롭지 않아서 부끄러운 생각(慚愧)11)을 내면 연품이 된다. 극도로 거칠어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더라도 그것을 공덕이 된다고 보지 않으면 중품이 되고, 도무지 부끄러운 마음이 없고 깊이 애락을 내어 그것을 공덕이라고 보면 상품이 된다.
다음 사실(事)로 인한 것에 대해 살펴보자. 만일 개개인을 폄훼하면 연품에 속하고, 한 집단을 폄훼하면 중품에 속하며, 다중多衆을 모두 폄훼하면 상품에 속한다.
상품 가운데도 그 죄가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어서 이를 따라 분별하기 어려우나 간략히 세 쌍으로 나타낼 수 있다. 이는 불법佛法 안의 사람들이 삼학三學12)에 의지하여 (공부하다가) 불도佛道와 유사한 마사魔事를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마치 사자 몸속의 벌레는 사자의 (죽은) 몸을 갉아 먹지만, 그 나머지(사자를 무서워하는 다른 짐승들)는 감히 갉아 먹지 못하는 것과 같다.13)

첫 번째 쌍은 심학心學에 의한 것으로서 두 종류의 벌레가 불법을 먹어 없애는 것이다. 그 첫째는 탐심이고, 둘째는 교만이다.
먼저 탐심에 대해 살펴보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한가히 정려하여 모든 산란을 떠나 선문禪門으로 마음을 다스리면 마음이 깨끗해져서 마치 지견이 있는 것 같게 된다. 혹은 사신邪神이 그 힘으로 알게 하면 (많이 듣는 것을 막아) 듣는 것이 적으니 사邪와 정正을 구별하지 못하기도 한다. 또 명리와 공경을 억지로 끌어오고자 하여 (자신이) 보는 데 따라 안 것을 다른 사람들도 듣고 알게 함으로써 모든 세상 사람들을 현혹하여 모두가 (자신을) 성인으로 의심하도록 만든다. 이것은 사이비 성인의 행적을 홀로 떨치며 모든 승려들을 억누르고 귀의할 곳이 없도록 하여 불법을 파괴하기 때문에 중죄를 짓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모든 승려의 큰 도적이라 한다.
다음은 교만에 대해 살펴보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001_0581_c_01L有其三品成三之由亦有二途
001_0581_c_02L由事故及由纏故由纏故者若纏現
001_0581_c_03L非極猛利或發慚愧是爲耎品
001_0581_c_04L極猛利無慚無愧未見爲德猶在中
001_0581_c_05L都無慚愧深生愛樂見是功德
001_0581_c_06L名上品由事故者若毁別人是爲耎
001_0581_c_07L若毁一衆卽是中品普毁衆多
001_0581_c_08L爲上品上品之內罪非一端隨其難
001_0581_c_09L略示三雙佛法內人多依三學
001_0581_c_10L似佛道之魔事故猶如師子身內之虫
001_0581_c_11L乃食師子餘無能故第一雙者依於
001_0581_c_12L心學有二類虫食滅佛法一由貪故
001_0581_c_13L二由慢故由貪故者如有一類閑居
001_0581_c_14L8) [7] 離諸散亂攝心禪門由心澄
001_0581_c_15L髣髴有見或由邪神加力令識
001_0581_c_16L時由自少聞不別邪正又欲引致名利
001_0581_c_17L恭敬隨所見識令他聞知耀諸世人
001_0581_c_18L咸疑是聖此由獨揚似聖之迹普抑諸
001_0581_c_19L爲無可歸以破佛法故得重罪
001_0581_c_20L謂諸僧之大賊也由慢故者如有一類
001_0581_c_21L{底}新修大藏經第四十五卷(承應三年刊宗敎
001_0581_c_22L大學藏本){甲}續藏經第一編六十一套第三册
001_0581_c_23L
「有」上有「略」{甲}「重」無{甲}「類」作「數」
001_0581_c_24L{甲}
「誑」作「狂」{甲}「因」下一有「之」{甲}
001_0581_c_25L
「赴」作「起」{甲}「慮」古本作「處」{甲}

001_0582_a_01L오래도록 심산深山에 머물면서 소득심所得心을 가지고 적정업寂靜業을 닦으면 마군이 그 사람의 마음을 알고 그를 움직여 무너뜨리기 위해 공중에서 소리를 내어 그의 수행을 칭찬한다. 이로써 그는 스스로 높다는 만심慢心을 내어 모든 승려들을 두루 억압하면서 “인간 세상에 머무는 자여, 누가 너희들이 행하는 것을 칭찬하겠는가.”14)라고 한다. 이 사람의 죄과는 전자보다 더 무거우니, 이를 보살전다라菩薩旃陀羅15)라고 부른다.

두 번째 쌍은 계학戒學에 의한 것으로서 두 종류의 벌레가 불법을 먹어 없애는 것이다. 그것은 첫째, 삿된 계를 지키는 것이고, 둘째, 바른 계를 지키는 것을 말한다.
먼저 삿된 계를 지키는 사람들에 대해 살펴보자. 한 무리의 사람들은 순수하고 정직하지 않아, 삿된 계를 받들거나 삿된 생각을 하면서도 (고행자로 보이기 위해) 무명옷이나 삼베옷조차 입지 않고 오곡도 먹지 않는다. 그러면서 도리어 자신의 이익과 공경을 탐하여 자신을 칭찬함이 비할 데가 없다. 또 모든 어리석은 무리들을 속여 그들이 모두 자신의 덕을 추앙하기를 바라면서 널리 이적異迹을 나타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억누른다. 이로써 안으로는 진리를 훼손하고 밖으로는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니, 훼손과 혼란의 죄가 이보다 더 큰 것은 없을 것이다.
다음은 바른 계를 지키는 사람들에 대해 살펴보자. 한 무리의 사람들은 성품이 깊지 않아 세상의 추세가 흐트러지고 느슨해졌을 때, 홀로 그 몸을 바로 하여 위의만을 갖추고 스스로를 높이고 타인을 능멸하는 마음을 일으킨다. 이 사람은 불도로 가는 길(乘)이 급한데 계가 느슨한 대중들을 오만한 마음으로 폄훼한 사람이니, 작은 선은 잘 지켰으나 큰 금계禁戒를 어긴 것이다. 복이 변하여 화가 되는 것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은 없다고 하겠다.

‘삿된 계’의 죄는 그와 같다 하더라도, ‘바른 계’를 지키는 것이 왜 죄가 되는가. 이러한 질문을 제기하는 이유는, 만일 한 무리의 사람들이 안으로 모든 얽어맴(번뇌)이 없고, 다른 사람들이 업을 짓는지 어떤지를 보지 않으며, 오직 자신의 마음만을 관찰하여 홀로 바른 계를 지킨다면, 이러한 보살을 무슨 이유로 계를 범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만일 물든 마음이 없다면 앞의 설명에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사람(정계를 지키는 사람)에 대해 좀 더 구분해서 살펴보자. 홀로 깨끗하다고 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다른 모든 승려들은 복전이 아니다.”라고 말하게 함으로써 이양과 존중이 자신에게로만 돌아오게 한다면, 단지 자기만을 제도하는 성문聲聞의 심계心戒를 따르는 것일 뿐, 보살의 광대한 심계에는 역행逆行하는 것이다.

001_0582_a_01L長住深山有所得心修寂靜業魔知彼
001_0582_a_02L可以動壞發空中聲讃其所行
001_0582_a_03L人由是起自高心普抑諸僧住人間者
001_0582_a_04L誰當稱美爾等所行此人罪過重於前
001_0582_a_05L是謂菩薩旃陀羅也第二雙者
001_0582_a_06L於戒學有二類虫食滅佛法一坐邪
001_0582_a_07L二坐正戒坐邪戒者如有一類
001_0582_a_08L非質直或承邪戒或自邪念不衣絲
001_0582_a_09L不食五穀1) [8] 欲貪求利養恭敬
001_0582_a_10L揚無比誑諸癡類希望群愚咸仰己德
001_0582_a_11L普抑一切無異迹者由是內以傷眞
001_0582_a_12L以亂人傷亂之罪莫是爲先也坐正
001_0582_a_13L戒者如有一類性是淺近於世大運
001_0582_a_14L2) [9] 緩時獨正其身威儀無缺便起
001_0582_a_15L自高3)湋池 [10] 之心慢毁乘急戒緩之衆
001_0582_a_16L此人全其4) [11] 以毁大禁轉福爲禍
001_0582_a_17L莫斯爲甚也邪戒之罪應如所說
001_0582_a_18L正戒者何必是罪所以然者如有一
001_0582_a_19L內無諸纏不觀餘人作與不作
001_0582_a_20L察自心獨持正戒如是菩薩何由成犯
001_0582_a_21L若無染心不在前說而於此人
001_0582_a_22L當分別若由獨淨令諸世人普於諸僧
001_0582_a_23L謂非福田利養尊重偏歸於己者雖順
001_0582_a_24L聲聞自度心戒而逆菩薩廣大心戒

001_0582_b_01L그것은 마치 성문의 무상관無常觀 등과 같다고 하겠다. 비록 얕은 가르침에 있어서는 전도顚倒가 아니지만 법신에 대해서는 전도가 된다. 순행順行과 역행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만약 홀로 청정하다고 하더라도, 믿지 않는 사람을 믿게 하고, 믿는 사람을 더욱 증장시키며, 모든 승려들이 평등하게 공양하도록 한다면, 단지 범함이 없을(無犯) 뿐만 아니라 많은 복을 짓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홀로 청정하니 물든 세간에 머물러도 물든 중생들을 억누르지 않을 수 있다고 기대하고, 또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똑같은 공경심을 내도록 하고자 한다면, 마치 해와 달을 머리에 이고 다니면서 어둠을 물리치지 않으려는 사람과 같다고 하겠다. 근기를 아는 대성大聖이 아니라면 그렇게 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다. 이 때문에 옛날 현인이 그 아들을 가르치면서 “삼가 선을 행하지 말라.”라고 하니, 그 아들이 “그러면 악을 행할까요?”라고 대답했다. 이에 아버지가 “선도 행하지 않아야 하거늘 악을 행할까 보냐.”라고 말했다 한다.16)

세 번째 쌍은 혜학慧學에 의한 것으로, 여기에도 두 부류의 자찬훼타하는 사람들이 있다. 첫째는 증익增益과 관련된 사람들이고, 둘째는 손감損減과 관련된 사람들이다.
먼저 증익자增益者에 대해 살펴보자. 한 무리의 사람들은 성품이 바르지 않지만 총명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능가하려고 모든 논서를 널리 익힌다. 제법이 언설을 떠난 것임을 알지 못하고 말을 따라 자성 차별이 있다는 데 집착하여 자신의 명리를 얻기 위해 “나는 삼세제불이 설하시는 말씀을 잘 알고 있다. 만일 내가 아는 것과 다르다면 모두 다 허황된 말이다.”라고 떠든다.
이 사람은 하나의 자찬훼타계에 네 가지 잘못을 범하여 불법을 혼란에 빠뜨리기 때문에 중죄를 짓는 것이다. 곧 그릇된 집착으로 얻을 것이 있다는 견해를 말하는 것은 불타의 본의와 하늘과 땅처럼 멀지만 “나는 불타의 뜻에 가깝다.”라고 말하니, 이것이 첫 번째 전도이다. 불타의 뜻은 매우 깊어 모든 희론이 끊어졌고 일체법에는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어서 자기와 동일하다는 허망한 견해를 끌어들이니, 이것이 두 번째 전도이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전도된 견해를 전파하여 사부대중에게 말하는 것이 세 번째 전도이다. 양극단을 모두 떠나야 한다고 설하는 사람들을 억눌러 자신의 편향된 집착 아래 두는 것이 네 번째 전도이다.

다음은 손감자損減者17)에 대해 살펴보자. 한 무리의 사람들은

001_0582_b_01L似聲聞無常等觀雖於淺事是無顚倒
001_0582_b_02L而於法身卽是顚倒當知此中順逆亦
001_0582_b_03L若由獨淨令諸世間未信5) [12] 信者
001_0582_b_04L增長普於諸僧平等供養者非直無
001_0582_b_05L乃生多福然由獨淨居雜染間
001_0582_b_06L此望得不抑染衆又欲令他生等敬心
001_0582_b_07L猶如頭戴日月而行而欲不却其暗
001_0582_b_08L者矣自非知機大聖尠能得其然也
001_0582_b_09L以是之故古之大賢誡其子云愼莫
001_0582_b_10L爲善其子對曰當爲惡乎親言善尙
001_0582_b_11L莫爲況爲惡乎第三雙者依於慧學
001_0582_b_12L亦有二輩自讃毁他一由增益二由損
001_0582_b_13L由增益者如有一類性是6)斜聽 [13]
001_0582_b_14L爲勝他故廣習諸論不解諸法皆離言
001_0582_b_15L執有如言自性差別爲得名利
001_0582_b_16L如是言我得三世諸佛意說若異此者
001_0582_b_17L皆是漫說此人於一讃毁具四顚倒
001_0582_b_18L以亂佛法故成重罪謂其妄執有所得
001_0582_b_19L去佛意遠如天與地而謂我近佛
001_0582_b_20L是一倒也佛意甚深絕諸戲論
001_0582_b_21L一切法都無所得而引同己妄見
001_0582_b_22L二倒也揚此二倒之見加於四部之上
001_0582_b_23L是三倒也抑諸離邊說者置其偏執之
001_0582_b_24L是四倒也由損減者如有一類

001_0582_c_01L품성이 편협하고 열등하여 선우善友를 가까이하지 않으며 학문을 널리 익히지 않는다. 한 분야의 깊은 경론만을 치우치게 공부하여 그 깊고 내밀한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말에 따라 뜻을 취하여 제법의 의타도리依他道理를 비방하고 부정한다. 이와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삼성三性’18)과 ‘삼제三諦’19)는 단지 교학의 분야로서 무소유 가운데 가명으로 시설한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진실이지만 이와 다른 것은 모두 희론이다.” 이 때문에 홀로 자신의 견해만을 믿고 다른 사람의 말은 수용하지 않는다. 만일 근기가 우둔하고 견문이 짧은 사람을 만나 그가 비판하는 데 빠져들어 그 말을 따르면 “이 사람은 정신이 밝고 정직하다.”라고 말한다. 한편 총명하여 글의 의미를 잘 파악하는 사람을 만나면 교묘하게 자신의 주장을 세우지만 그 (억지) 논리에 빠져들지 않을 때는 “탈락하여 오류에 빠졌다.”라고 비난한다. “마음이 미혹하여 자신의 이해가 어둡고 우둔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므로 내가 비판하는 뜻을 따르지 못한다.”라고 하고, 또는 “그 사람의 마음이 부정하여 나의 뜻에 미치지 못한다.”라고 폄훼하기도 한다. 이것은 마치 집에서 기르는 개가 토끼를 쫓아가지만 멀리 달아나 잡을 수 없게 되자 ‘이미 도망쳐 버렸다.’라고 하고 멈춰 서서 멍하니 돌아보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이러한 손감자는 두 가지 어리석음으로 인해 불법을 폄훼하기 때문에 중죄가 성립된다. 그것은 첫째, 낮은 것을 가지고 높다고 하는 어리석음이고, 둘째, 적은 것을 믿고 많은 것을 비방하는 어리석음이다.
먼저 첫 번째 어리석음에 대해 살펴보자. 이 손감의 견해는 모든 집착 중에 가장 저급하여 외도의 아견我見만도 못하다. 무슨 까닭인가. 이러한 사람은 가장 강한 약을 복용하지만 도리어 그로 인해 중병을 얻게 되는 경우와 같다. 중병의 증상은 마치 병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의술로는 이 병을 고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병을 스스로 감지하기도 어렵다. 이것은 근본무명이 극도로 어둡지만 반야의 밝음과 그 상태가 매우 유사한 것과 같으니, 둘 다 주체도 대상도 없기 때문이다.

001_0582_c_01L性狹劣不近善友不廣學問偏習一
001_0582_c_02L分甚深經論不解密意如言取義
001_0582_c_03L撥諸法依他道理起如是見作如是言
001_0582_c_04L三性三諦但是敎門無所有中施設假
001_0582_c_05L如是解者乃爲眞實異此說者
001_0582_c_06L是戲論由是獨7) [14] 自見不受他言
001_0582_c_07L遇鈍根少聞之人墮其所破從其所言
001_0582_c_08L卽云此人神明正直若値聰明解文
001_0582_c_09L義者巧能立義不墮其破者便言脫失
001_0582_c_10L謂是心惑未識自解昧鈍不能逐破意
001_0582_c_11L謂彼心不正未及我意此猶家狗逐8) [15]
001_0582_c_12L望不能及便謂已超止而顧見此損
001_0582_c_13L減人略由二愚失壞佛法故成重罪
001_0582_c_14L一擧下爲高愚二*特小誹多愚第一
001_0582_c_15L愚者此損減見於諸見中最在底下
001_0582_c_16L亦復不如外道我見其故何耶此人服
001_0582_c_17L最深藥9) [16] 成重病重病之狀極似無
001_0582_c_18L是故更無醫術能治此病亦尠有人
001_0582_c_19L自覺是患猶如根本無明極闇與般若
001_0582_c_20L其狀極似同無能所故俱無能所
001_0582_c_21L「變」作「反」{甲}「慢」作「漫」{甲}「湋池」作
001_0582_c_22L「陵他」{甲}
「不」作「小」{甲}「者」下有「信」
001_0582_c_23L{甲}
「斜聽」作「邪聰」而言古本一作「斜聰」{甲}
001_0582_c_24L
「特」作「恃」次同{甲}「㝹」作「兔」{甲}「變」
001_0582_c_25L作「反」{甲}

001_0583_a_01L무명의 그러한 속성으로 인해 그것을 멸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것처럼, 이 병을 고치는 것도 이와 같이 어렵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게송은 다음과 같다.

爲除有執故      있다는 집착을 제거하기 위해
如來說其空      여래는 공을 설한다.
若人復執空      다시 공에 집착하는 사람은
諸佛所不化      모든 부처도 교화하지 못할 것이다.20)

또 이 견해는 (진리에 대한) 이해가 어두운 데 따른 것으로서 맹목적으로 신심信心을 일으키게 한다. 만일 이 견해에 의해 마음을 닦고 지혜를 밝힌다면 반드시 신심을 잃고 대사견大邪見에 떨어져 무수겁 동안 끝없는 고통을 받을 것이다. 이에 보살은 나머지 다른 사람들이 저 사람(사견인邪見人)을 따르는 것을 가엾게 여겨 다음과 같이 경계했다. “일체 지혜 있고 범행을 같이 실천하는 사람들은 그(사견인)와 함께 교류하지 말아야 한다.”21) 모든 외도가 일으키는 아견도 이치에는 어긋나지만 이러한 폐단은 없을 것이다. 게송은 다음과 같다.

寧起我見 如須彌山  차라리 수미산 같은 아견을 일으킬지언정
不起空見 如毫釐許  털끝만큼의 공견도 일으키지 말지니라.

이 두 가지 연緣22)이 가장 저급하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증상만을 일으키니, 마치 가장 낮은 사미沙彌가 화상和上의 위에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것이 가장 낮은 것을 가지고 가장 높은 것으로 삼는 어리석음이라 하겠다.
다음 두 번째 어리석음에 대해 살펴보자. 불도는 너르고 탕탕하여 방향도 없고 걸림도 없으며 영구히 의거할 곳도 없으므로 해당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일체 다른 견해도 모두 부처의 뜻이다.”라고 하였으니, 백가百家의 설이 옳지 않은 것이 없고 팔만八萬의 법문이 모두 이치에 계합된다. 그러나 견문이 적은 사람은 좁은 소견에 치우쳐, 그와 견해를 같이하는 사람은 (진리를) 얻었다고 하지만, 뜻을 달리하는 사람은 일탈했다고 한다. 마치 어떤 사람이 갈대 대롱으로 하늘을 보면서 그 대롱이 아니면 푸른 하늘을 볼 수 없다고 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이것을 가리켜 ‘적은 것을 믿고 많은 것을 비방하는 어리석음’이라 한다.

경에서 “가난하여 걸식하는 아이가 밤낮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보배만을 헤아린다.”23)라고 설한 것처럼 불타의 말씀에 따라 행하지 않으면서 많이 듣는 것도 이와 같다고 하겠다. 또 “어떤 사람이

001_0583_a_01L故彼無明最難可滅此病難治當知
001_0583_a_02L亦爾如偈說云

001_0583_a_03L
爲除有執故如來說其空

001_0583_a_04L若人復執空諸佛所不化

001_0583_a_05L
又復此見由其解昧漫起信心若依此
001_0583_a_06L修心明利必撥信心墮大邪見
001_0583_a_07L無數刧受無間苦是故菩薩深悲餘
001_0583_a_08L人有隨彼故預誡之言一切有智同梵
001_0583_a_09L行者不應共住一切外道所起我見
001_0583_a_10L雖有乖理而無是患如偈說云

001_0583_a_11L
寧起我見如須彌山

001_0583_a_12L不起空見如毫釐許

001_0583_a_13L
由此二緣最在底下而其不了起增
001_0583_a_14L上慢如似最下沙彌謂居和上之上
001_0583_a_15L是謂擧下爲高愚也第二愚者然佛道
001_0583_a_16L廣蕩無礙無方永無所據而無不當
001_0583_a_17L故曰一切他義咸是佛義百家之說
001_0583_a_18L無所不是八萬法門皆可入理而彼
001_0583_a_19L自少聞專其1) [17] 狹見同其見者乃爲
001_0583_a_20L是得異其見者咸謂脫失猶如有人
001_0583_a_21L葦管窺天謂諸不窺其管內者皆是不
001_0583_a_22L見蒼天者矣是謂恃小誹多愚也
001_0583_a_23L經言譬如貧乞兒日夜數他寶不能
001_0583_a_24L如說行多聞亦如是又言若有人

001_0583_b_01L음욕(婬)·성냄(怒)·어리석음(癡)과 도道를 분별한다면, 이 사람은 하늘과 땅처럼 불도佛道에서 멀어질 것이다.”24)라고 하였다. ‘많이 들어야 소득이 있다’는 견해는 ‘걸식하는 아이’와 가까울 뿐, 불도와는 대단히 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비록 ‘뜻을 얻었다’고 하는 것이 망언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릇되게 명리를 구하는 것이 속인보다 심하니, 이는 치우친 집착에 떨어진 것으로 일이 매우 심각하다 하겠다. 나에게 배우는 사람들은 저들과 달리 명리를 따르지 않고 세속의 일을 버리며, 깊이 불법을 믿어 적정만을 구한다. 오직 분수에 따라 마음을 닦고 청정하게 행하는 것을 즐기니, 이해한 것이 삿되지 않고 바른 것임을 이러한 증거를 통해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유有에 집착하는 것을 증익이라 하고, 무無를 취하는 것을 손감이라 한다. 내가 지향하는 종지는 유와 무를 모두 버려서 비고 고요하여 기댈 데가 없으니, 이것으로 관觀의 대상을 삼는다. 관의 행상이 그와 같으니, 무엇을 잘못이라 할 수 있는가.
명리名利를 따르는 사람들은 불법을 등지고 세속으로 돌아가니, 도리를 상실한들 무엇이 애석하겠는가. 세속의 그물을 끊고 도를 향하여 왔지만 약을 먹은 것이 도리어 병이 되었으니 심히 안타까운 일이다.
한편 자신의 혼미함을 깨달은 사람은 심각하게 혼미한 사람이 아니요, 자신이 우매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극도로 우매한 사람이 아니다. 만일 그대의 마음 씀이 법상法相에 어긋나지 않고 실제로 의타依他의 도리를 비방하여 없애지 않기 때문에 유에 집착하지도 않고 무에 떨어지지도 않는다고 한다면, 그대는 스스로 양 극단을 떠나 깊이 중도에 계합하여 저들 무리에 들지 않는데, 어째서 홀연히 (그곳으로부터) 벗어나려 하는가.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그 가운데에 자신은 옳고 다른 사람은 그르다고 한다면 변집邊執에 떨어진 것이니, 오히려 청정한 지혜가 아니라고 하겠다. 게송은 다음과 같다.

不肯受他法      다른 법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是名愚癡人      어리석은 사람이라 부른다.
諸有戲論者      희론이 있는 자는
皆是大愚人      더 어리석은 사람이다.
若依自是見      자신이 옳다는 견해에 의해
而生諸戲論      모든 희론이 일어나나니
設此爲淨智      그것을 청정한 지혜라고 한다면
無非淨智者      청정한 지혜 아닌 것이 없을 것이다.25)

만일 그대의 견해가 악취공惡取空에 떨어져 연緣이 있다는 것을 부정함은 물론 그것이 없다는 것도 부정하는 것은 극도의 손감견損減見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대는 도에서 가장 멀기 때문에 오히려 ‘거지 아이’와 가장 가깝다고 하겠다. 거지 아이가 “보배가 많은 사람은 부유하고 재산이 적은 사람은 가난하다. 나에게는 많은 보배도 없고

001_0583_b_01L2) [18] 癡及道是人去佛遠猶如天與
001_0583_b_02L是知多聞有所得見與乞兒近
001_0583_b_03L去佛道遠雖曰得意而不忘 [1] 橫求
001_0583_b_04L名利甚於俗人其墮偏執事在灼然
001_0583_b_05L令我學徒與彼一殊不殉名利捐棄
001_0583_b_06L俗事深信佛法專求寂靜唯樂隨分
001_0583_b_07L修心潔行驗知所解非邪是正且復
001_0583_b_08L執有曰增取無曰損我所趣宗有無
001_0583_b_09L俱遣簫然無據以爲所觀觀狀如是
001_0583_b_10L何得爲患逐名利者背道向俗
001_0583_b_11L爲失理何足可惜堪絕世3) [19] 將趣道方
001_0583_b_12L服藥成疾甚爲可傷且覺自迷者
001_0583_b_13L大迷矣知自闇者非極闇矣設使子
001_0583_b_14L之心行不違法相實不誹撥依他道
001_0583_b_15L理故不執有而不墮無者子自離邊
001_0583_b_16L玄會中道不在彼類那忽跳4) [20] 雖然
001_0583_b_17L自是於中而非於他者還墮邊執
001_0583_b_18L非淨智如經偈云不肯受他法是名
001_0583_b_19L愚癡人諸有戱論者皆是大愚人
001_0583_b_20L依自是見而生諸戲論設此爲淨智
001_0583_b_21L無非淨智者設使子之見解墮惡取空
001_0583_b_22L誹撥緣有亦撥其無最極損減而不
001_0583_b_23L自覺者唯子最遠於道乃還近於乞兒
001_0583_b_24L如乞兒云多寶者富少財者貧我無

001_0583_c_01L적은 재산도 없다. 한가하게 의지할 곳도 없으니 나는 가난하지 않다.”라고 말한다면 지금 그대가 말하는 것과 저 거지 아이가 말하는 것이 무엇이 다르겠는가. 많은 것도 없고 적은 것도 없다는 것이 가장 빈궁한 것이며, 유도 무도 모두 부정해 버리는 것이 가장 심각한 손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지고至高의 도는 모호하여 옳고 그름을 구분하기 힘들고, 마음의 움직임은 은밀하여 얻고 잃는 것을 가려내기 어렵다. 오직 숙세에 선근을 심은 사람이라야 성품이 소박하고 정직하며 깊이 아만我慢을 정복하고 선지식을 가까이한다. 이로써 우러러 성전을 의지하고 그것으로 마음의 거울을 삼아 스스로 내면을 자세히 관하고 마음의 움직임을 깊이 살펴야 한다. 이러한 사람이라야 다행히 악취공의 병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이다.
앞서 “모든 부처도 교화하지 못한다.”라고 말한 것은 그들이 내면으로 경각심을 일으켜 이러한 병을 고치도록 하기 위함이다. 결과적으로 이들도 모든 부처의 교화를 입게 되지만, “교화하지 못한다.”라고 말한 것은 스스로 교화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만일 스스로 이러한 마음의 병을 살피려 한다면 어떤 성전에 의지하는 것이 가장 귀감이 되는가.
『해심밀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만일 모든 유정의 본성이 순수하고 올바르지 않다면, 그러한 사람들은 비록 능력이 있어서 버리고 세우는 것을 결택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견해를 취하여 안주하게 된다. 매우 깊은 밀의설密義說을 들으면 진실 그대로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 이러한 법에 대하여 믿음과 이해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의미에 대해서는 언어를 따라 집착한다. “일체법은 결코 자성이 없으며 불생불멸이고 본래 적정하여 자성열반이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생각 때문에 일체법에 대해 무견無見이고 무상無相이라는 견해를 갖게 된다. 일체의 대상을 모두 무상이라고 부정하는 것은 일체법의 삼종성상三種性相도 부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의타기상依他起相과 원성실상圓成實相이 있어야 변계소집상遍計所執相을 시설할 수 있기 때문이다.

001_0583_c_01L多寶亦無少財簫然無據故我非貧
001_0583_c_02L今子所言與彼同焉是知無多無少者
001_0583_c_03L最極貧窮也撥有撥無者最極損減也
001_0583_c_04L然至道昏昏是非莫分心行5)蜜蜜 [21]
001_0583_c_05L失難別唯有宿殖善根禀性質直
001_0583_c_06L伏我慢近善知識者仰依聖典以爲
001_0583_c_07L心鏡自內審觀熟微心行若能如是
001_0583_c_08L之人幸治惡取空病向說諸佛所不化
001_0583_c_09L爲欲令彼自內驚改是故還爲諸佛
001_0583_c_10L所化以不化言使自化故若欲於
001_0583_c_11L此自察心病依何等典最爲明鏡
001_0583_c_12L如深6) [22] 經言若諸有情性非質直
001_0583_c_13L質直類雖有力能思擇廢立而復安住
001_0583_c_14L自見取中聽聞甚深密意之說而無力
001_0583_c_15L能如實解了於如是法雖生信解
001_0583_c_16L於其義隨言執著謂一切法決定皆
001_0583_c_17L無自性決定不生不滅本來寂靜
001_0583_c_18L性涅槃由此因緣於一切法獲得無
001_0583_c_19L見及無相見由是見故撥一切相
001_0583_c_20L爲無相誹撥諸法三種性相何以故
001_0583_c_21L由有依他起相及圓成實相故故遍計
001_0583_c_22L「樣」無{甲}「婬」下有「怒」{甲}「綱」作「網」
001_0583_c_23L{甲}
「赴」作「起」{甲}「蜜蜜」作「密密」{甲}
001_0583_c_24L
「蜜」作「密」{甲}

001_0584_a_01L만약 이 두 상에 대해 무상이라는 견해를 갖는다면, 그 사람은 변계소집상도 부정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삼상三相도 모두 부정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사람은 법에 대해 믿음과 이해를 일으켰기 때문에 복덕을 증장시키기는 하지만 올바른 의미가 아닌 데 집착하기 때문에 지혜를 잃게 되고, 지혜를 잃기 때문에 광대하고 무량한 선법을 잃게 되는 것이다.26)

또 『유가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한 무리의 사람들은 난해한 공성空性과 상응相應하는, 비밀한 의취를 다 드러내지 않은 깊은 경전의 말씀을 듣고 그 설한 의미를 진실 그대로 알 수 없으므로 이치에 어긋나는 허망분별을 일으킨다. 그들은 지혜로운 방편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경전을 이끌어 와서 자세히 살피고 관찰하여 이와 같은 견해를 일으키고 이와 같은 논지를 세운다. 즉, “일체는 오직 가유假有인 것, 이것이 진실이기 때문에 이렇게 관하는 것이 올바른 관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거짓되고 가시설假施設된 것이 의지하는 곳에 오직 사실(事)만은 실제로 있지만, 그것조차도 부정하여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니, 이것은 일체가 허망하고 거짓되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일체가 오직 거짓인 것이 진실이라는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그는 진실과 거짓에 대하여 두 가지 오류를 범한 것이다. 전적으로 존재가 없다고 하는 것은 가장 극단적인 허무론자의 주장임을 알아야 한다. 지혜 있고 범행梵行을 닦는 사람들이라면 이와 같은 허무론자와 함께 머무는 일이 없어야 함은 물론이다. 세존은 이 밀의설에 의거하여 “차라리 한 무리의 아견我見을 일으키는 사람들과 같이할지언정 악취공자와 같이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어떤 사람을 악취공에 떨어진 자라고 하는가.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저것 때문에 공空이라고 하여도 믿지 않고, 이것이 공이라고 하여도 믿지 않는다. 이와 같은 사람들을 악취공자라고 한다. 왜냐하면 저것 때문에 공이면 저것은 실제로 무無이지만 이것이 공이면 이것은 실제로 유有이어야 한다.27) 이러한 도리에 의거하여 공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일체가 전적으로 있는 것이 없다고 한다면 어느 곳의 무엇을 어떻게 공이라고 부르겠는가. 또 ‘저것 때문에 이것이’라는 말이 곧 공을 설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001_0584_a_01L所執相方可施設若於二相見爲無相
001_0584_a_02L彼亦誹撥遍計所執相是故說彼誹撥
001_0584_a_03L三相彼雖於法起信解故福德增長
001_0584_a_04L然於非義起執著故退失智慧智慧
001_0584_a_05L退故退失廣大無量善法瑜伽論云
001_0584_a_06L如有一類聞說難解空性相應未極顯
001_0584_a_07L了密意趣義甚深經典不能如實解所
001_0584_a_08L說義1) [23] 起不如理虛妄分別由不巧
001_0584_a_09L便所引尋思起如是見立如是論
001_0584_a_10L切唯假是爲眞實若作是觀名爲正
001_0584_a_11L彼於虛假所依所處實有唯事
001_0584_a_12L爲非有是則一切虛假皆無何當得有
001_0584_a_13L一切唯假是爲眞實由此道理彼於
001_0584_a_14L眞實及與虛假二種俱謗都無所有
001_0584_a_15L當知是名最極無者如是無者一切
001_0584_a_16L有智同梵行者不應共住世尊依此密
001_0584_a_17L說言寧如一類起我見者不如一
001_0584_a_18L類惡取空者云何名爲惡取空者謂有
001_0584_a_19L沙門或婆羅門由彼故空亦不信受
001_0584_a_20L於此而空亦不信受如是名爲惡取空
001_0584_a_21L何以故由彼故空彼實是無於此
001_0584_a_22L而空此實是有由此道理可說爲空
001_0584_a_23L若說一切都無所有何處何者何故名
001_0584_a_24L亦下應言由此 [2] 於此卽說爲空是故

001_0584_b_01L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악취공에 떨어진 자라고 말한다.28)

이어서 (논은 여기에 대해) 자세히 설하고 있다.
이제 지엽적인 논의를 멈추고 다시 본종을 끝맺는다. 계를 지키고 범하는 것과 계상戒相의 경중輕重은 앞에서 간략히 설한 것과 같다.

제2장 천심문淺深門 : 계를 지키고 범하는 심천을 밝힘
앞서 설명한 자찬훼타의 계에 따라 지니고 범하는 계상戒相의 심천深淺을 밝혀 보고자 한다. 수다라계본에 말하기를 “(보살은) 항상 중생을 대신하여 타인으로부터 심한 폄훼와 굴욕을 당하게 된다. 나쁜 것은 스스로 자신에게 돌아오게 하고 좋은 일은 타인에게 돌려준다. 만약 스스로 자신의 덕을 칭찬하여 드러내고 타인의 좋은 점은 감추어 다른 사람을 폄훼하고 굴욕을 준다면 이것은 바라이죄가 된다.”29)라고 하였다. 이 하나의 글에 얕은 해석과 깊은 해석이 있다. 왜 그러한가?
하사下士(하근기의 사람)는 그것을 듣고 말 그대로 믿고 해석하여, 자신을 폄훼하고 타인을 칭찬하는 것은 반드시 복이 되고, 자신을 칭찬하고 타인을 폄훼하면 반드시 죄가 된다고 알고 있다. 이처럼 한결같이 말만 따라 행동하기 때문에 복(업)을 닦지만 (오히려) 복행은 적어지고 죄업은 많아진다. 그 죄를 버리고자 하여 한 가지 죄를 없애지만 도리어 세 가지의 복이 사라진다. 이것을 식견이 얕은 유정有情이 계를 지니고 범하는 데 있어서의 과오라고 한다.
상사上士(상근기의 사람)는 그것을 들으면 의취를 잡아서 파악하기 때문에, 한 모서리를 들어서 세 곳을 변화시키고 한 문장을 4구句로 판별한다. 이로써 자세히 살펴 변별해도 지나친 일이 없기 때문에 복을 지어도 남는 것이 없고 죄를 지어도 분별할 것이 없다. 이것을 가리켜 계戒를 지키고 범하는 행위를 깊이 이해하였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을 4구로 판단해 보자. 첫째, 자신을 폄훼하고 타인을 칭찬하면 복이 되고 자신을 칭찬하고 타인을 폄훼하면 죄가 되는 경우, 둘째, 자신을 폄훼하고 타인을 칭찬하면 죄가 되고 자신을 칭찬하고 타인을 폄훼하면 복이 되는 경우, 셋째, 폄훼하고 칭찬하기도 하고 칭찬하고 폄훼하기도 하며 혹 죄가 되기도 하고 혹 복이 되기도 하는 경우, 넷째, 폄훼하거나 칭찬하지도 않고 칭찬하거나 폄훼하지도 않으며 혹은 복이 되고 혹은 죄가 되는 경우의 네 가지이다.

제1구의 경우 : 어떤 사람이 굴욕을 당하는 중생을 불쌍하게 생각하여 다른 사람이 받는 굴욕을 자신에게 돌리고자 자신이 받을 영예를 다른 사람에게 밀어 주려는 의도로 자신을 칭찬하고 다른 사람을 폄훼하는 것은 복에 해당된다. 그러나 자신이 그 영예를 차지하고 다른 사람에게 굴욕을 당하게 한다면, 이 경우 자신을 칭찬하고 다른 사람을 폄훼하는 것은 죄가 되는 것이다.
제2구의 경우 : 세간의 풍습을 많이 익히면, 자신을 칭찬하고 타인을 폄훼하는 사람을 미워하고,

001_0584_b_01L名爲惡取空者乃至廣說且止傍論
001_0584_b_02L還結本宗持犯輕重略相如前

001_0584_b_03L淺深門
次第二明持犯淺深者乘前所說讃毁
001_0584_b_04L之戒以顯持犯淺深之相如多羅戒本
001_0584_b_05L常代衆生受加毁辱惡事自向己
001_0584_b_06L好事與他人若自讃揚己德隱他人好
001_0584_b_07L令他受毁辱者是爲波羅夷罪
001_0584_b_08L此一文2) [24] 何者下士聞之齊言
001_0584_b_09L取解自毁讃他必是福業自讀毁他
001_0584_b_10L定爲犯罪如是一向隨言取故將修其
001_0584_b_11L福行少而罪業多欲捨其罪却罪一
001_0584_b_12L而除福三是謂淺識持犯過也上士聞
001_0584_b_13L3)掬) [25] 解意趣擧一隅便以三隅4)
001_0584_b_14L [26] 就一文每用四句而判由是審別無
001_0584_b_15L所濫故無福而5) [27] 無罪而辨是謂深
001_0584_b_16L解持犯德也言四句而判者或有自毁
001_0584_b_17L讃他是福自讃毁他是罪或有自毁讃
001_0584_b_18L他是罪自讃毁他是福或有若毁讃若
001_0584_b_19L讃毁或罪或福或有非毁讃非讃毁
001_0584_b_20L或福或罪第一句者如人深愍衆生受
001_0584_b_21L欲引他所受辱向己推自所應受榮
001_0584_b_22L與他此意自毁讃他是福若欲自受其
001_0584_b_23L令他受辱此意自讃毁他是罪第二
001_0584_b_24L句者如知時世風俗所習多憎自讃毁

001_0584_c_01L자신을 겸양하고 타인을 높이는 사람들을 공경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 다른 사람을 폄훼하면 그 사람이 반드시 나를 욕하고 내가 타인을 칭찬하면 타인도 나를 좋게 평가한다는 것도 알기 때문에, 교묘히 자신이 높아지는 것을 추구하여 자신을 폄훼하고 타인을 칭찬하는 것은 중죄에 해당된다. 만일 타인이 집착하는 것이 진리가 아니면 알아서 버리고, 자신의 내면에서 깨달은 것이 바른 도리이면 응당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서 불법佛法을 건립하고 유정을 요익饒益게 하고자 한다면, 자신을 칭찬하고 타인을 폄훼하여도 (도리어) 커다란 복이 된다.
제3구의 경우 : 한 무리의 사람들은 성격이 변덕스럽고 거짓되어 세간 사람들을 혼란으로 속이고자 다른 사람의 장점을 무시하고 자신의 단점을 덮어서 거짓말로 교란시킨다. 자기의 조그만 장점을 폄훼하여 과오라 하고 다른 사람의 단점을 칭찬하여 공功이라 하며, 자신의 많은 단점을 드러내어 덕이라 하고 다른 사람의 장점을 억눌러 잘못이라 한다.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은 품성이 정직하고 곧아서 세간의 모든 사람들을 개도開導하기 위하여 선을 알고 악을 구별하며 죄를 버리고 복을 닦는다. 이런 뜻이 있기 때문에 말이 올바르고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다. 자신의 잘못을 보면 반드시 뉘우치고 다른 사람의 선을 들으면 곧바로 칭찬한다. 자신의 장점을 깨달으면 장려하고 다른 사람의 죄를 알면 즉시 나무란다. 앞사람의 경우, 폄훼하고 칭찬하며 선양하고 억누르는 것은 결국 속이고 아첨하는 죄가 되지만, 뒷사람의 경우, 나무라고 칭찬하며 장려하고 폄하하는 것은 모두 믿음직한 복이 된다.
제4구의 경우 : 뜻이 고매한 한 무리의 사람들은 성품이 크고 훌륭하며 신심이 자유롭고 진실하여 그 처음과 끝을 알기 어렵다. 화와 복을 합하여 하나로 돌아가게 하고 나와 남을 잊어 둘이 아니게 한다. 그 마음이 항상 안락하며 편안하게 소요하기 때문에 자신을 폄훼하고 타인을 칭찬하지도 않고 자신을 찬양하고 타인을 억누르지도 않는다. 또 한 무리의 열등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성품은 순박하지만 시비를 모르며 콩과 보리조차도 구별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선이 왜 선이 되는가를 알지 못하고 악이 왜 악이 되는지도 모른다. 그의 생각은 항상 혼미하여

001_0584_c_01L他之人每敬自謙揚他之士又知毁彼
001_0584_c_02L彼必呰我我若讃他他還美我由此知
001_0584_c_03L巧求自高自毁讃他是爲重罪
001_0584_c_04L知他人所執非理可捨自內所解是道
001_0584_c_05L應修直欲建立佛法饒益有情自讃毁
001_0584_c_06L是爲大福第三句者如有一類性
001_0584_c_07L多誑僞爲欲誑惑世間諸人6) [28] 他所
001_0584_c_08L覆自所短由此意故作矯亂言
001_0584_c_09L己小長爲過讃他所短爲功揚己多短
001_0584_c_10L爲德抑他所長爲失又有一類禀性
001_0584_c_11L質直爲欲開導世間諸人識善別惡
001_0584_c_12L罪修福由斯志故直言無7) [29] 見自
001_0584_c_13L而必呰聞他善而卽歎覺己德
001_0584_c_14L而還褒知彼罪而直貶前人毁讃揚抑
001_0584_c_15L直是誑諂之罪後士呰歎褒貶並爲忠
001_0584_c_16L直之福也第四句者如有高士性
001_0584_c_17L弘懿放神8) [30] 混禍福
001_0584_c_18L而歸一忘彼我爲無二其神常樂
001_0584_c_19L是處故亦不自毁讃他亦不自揚抑彼
001_0584_c_20L又有下愚禀性純朴莫知是非難別菽
001_0584_c_21L不識善之爲善不了惡之爲惡其意
001_0584_c_22L「趣」無{甲}「深」下有「異」{甲}「掬」作「探」
001_0584_c_23L{甲}
「變」作「反」{甲}「遣/遺」一作「遣」{甲}
001_0584_c_24L
「凌」作「陵」{甲}「僻」作「避」{甲}「苞」作
001_0584_c_25L「抱」{甲}
「兒」作「倪」{甲}

001_0585_a_01L미워하고 좋아하는 것도 잊고, 자기를 겸양하고 타인을 칭찬할 줄도 모르며 자신의 장점을 장려하고 타인의 단점을 폄하하는 일도 없다. 이것은 가장 어리석은 사람의 혼돈스러운 죄가 되고 앞의 경우는 가장 지혜로운 사람의 순박한 복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4구로써 죄와 복을 판단하는 내용이다. 앞의 두 구는 복업이 변해서 무거운 죄가 되고, 죄를 짓는 행위가 다시 큰 선이 되는 경우이고, 뒤의 두 구는 속이는 말과 믿을 수 있는 말은 구분하기 어렵고, 가장 지혜로운 사람과 가장 어리석은 사람의 행적이 다르지 않은 경우이다. 행자가 계를 지니고 범하는 가장 핵심은 자신의 득실得失을 자세히 살피는 것이지 다른 사람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판단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계를 지니고 범하는 심천의 의미가 이와 같다.

제3장 구경지범문究竟持犯門 : 궁극적으로 계를 지키고 범함을 밝힘
비록 앞에서 설한 법문에 의거하여 (계에 대한) 경중輕重의 성격과 심천深淺의 상태를 알았다고 하더라도, 계상戒相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죄와 죄 아닌 것에 대한 두 극단의 집착을 떠나지 않은 사람은 끝까지 계를 지켜 범함이 없도록 할 수 없으며 청정한 계바라밀로 나아갈 수도 없다.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계는 스스로 생生한 것이 아니라 많은 연緣(조건)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결코 계에는 자상自相이 없다. 그러므로 연에 합하여도 계가 아니고(연에는 자성이 없다.) 연을 떠나서도 계는 없는 것이다. 연에 합한 것도 제외하고 연에서 떠난 것도 제외하지만 그 중간도 아니다. 이와 같이 계를 찾아도 영구히 계는 있지 않으니, 그것은 (계의) 자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성립되지 않는데 그 원인이 있다. 비록 여러 연에 의거한다고 하지만 계가 없는 것도 아니다. 토끼의 뿔처럼 아무 원인(因)도 없고 연도 없는 것과는 같지 않기 때문이다.30)
계상을 설한 것처럼 죄상罪相도 그러하다. 계상이나 죄상은 물론 인상人相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여기에서 (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데 의거하여 전혀 아무것도 없다고 본다면, 비록 범함이 없다고 하더라도 영구히 계를 잃어버리니, 그것은 계가 오직 사실(事)이 나타낸 형상이라는 것을 비방하여 부정하기 때문이다. 또 여기에서 계상이 없지 않다는 데 의거하여 계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비록 (계를) 지킨다고 하더라도 지키는 것이 곧 범하는 것이 되니, 그것은 여실한 계상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살이 계행을 닦는 것은 이와 같지 않다. 만일 계를 지키는 주체와 그 대상이 있다고 구별하지 않는다면 계가 오직 사실(事)이 나타낸 형상이라는 것을 비방하고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계를 잃어버리는 큰 과오를 범하는 일은 없다.

001_0585_a_01L常昏忘憎愛故亦無自謙美他復無
001_0585_a_02L自褒貶他此爲下愚渾1) [31] 之罪彼是
001_0585_a_03L上智純朴之福也是謂四句以判罪福
001_0585_a_04L依前兩句則福業2) [32] 作重患罪行更
001_0585_a_05L爲大善尋後二句則誑語與忠談無
001_0585_a_06L上智共下愚同迹是知行者持犯
001_0585_a_07L之要只應微察自之得失不可輒判他
001_0585_a_08L之德患持犯淺深意趣然矣

001_0585_a_09L究竟持犯門
第三明究竟持犯者雖依如前所說法
001_0585_a_10L能識輕重之性兼知淺深之狀
001_0585_a_11L於戒相不如實解於罪非罪未離二
001_0585_a_12L邊者不能究竟持而無犯不趣淸淨戒
001_0585_a_13L波羅蜜其故何耶然戒不自生必託
001_0585_a_14L3) [33] 故決無自相卽緣非戒離緣無
001_0585_a_15L除卽除離不得中間如是求戒
001_0585_a_16L不是有可言自性不成就故而託衆
001_0585_a_17L亦不無戒非如兔角無因緣故
001_0585_a_18L說戒相罪相亦爾如戒罪相人相亦
001_0585_a_19L若於此中依不是有見都無者
001_0585_a_20L謂無犯而永失戒誹撥戒之唯事相故
001_0585_a_21L又於此中依其不無計是有者雖曰
001_0585_a_22L能持持卽是犯違逆戒之如實相故
001_0585_a_23L菩薩修戒則不如是雖不計有能持所
001_0585_a_24L而不誹撥戒之唯事是故終無失戒

001_0585_b_01L(이러한 보살은) 비록 죄와 죄 아닌 것이 없다고 보지 않더라도 계의 실상에는 위배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계를 범하는 작은 죄로부터도 영구히 떠나며, 총명하고 깊은 지혜의 방편으로 삼륜三輪31)을 다 잊고 양 극단에 떨어지지 않으며 마침내 완전한 계바라밀을 성취하게 된다. 경은 “죄도 죄 아닌 것도 얻을 수 없어야 계바라밀을 완성할 수 있다.”32)라고 말씀하셨다. 계본은 “계의 광채는 입으로부터 나온다. 연이 있으니 원인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색色도 아니고 심心도 아니며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며 인과법도 아니다. (이것은) 모든 부처의 본원이며 보살의 근본이다.”33)라고 설한다. 이 가운데 계의 광채라고 하는 것은, 계와 광채가 둘이 아니고 구별이 없으며 청정과 잡염雜染이 동일한 맛이라는 것을 밝히기 위한 말이다. 그러므로 계의 광채를 연으로 하여 계의 실상을 드러내는 것이니, 계에는 자성이 없으므로 다른 연을 빌려야 하기 때문에 연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연이 있다고 하는 말은 실제로 있다는 데에 의거하여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그에 따르는 인因이 없지 않다는 것을 곧바로 드러내는 말이다. 그러므로 (계는) 인이 없는 것이 아니며 인이 없는 계성戒性이 아니니 질애質碍도 아니고 사려思慮도 아니기 때문에 색色도 아니고 심心도 아니라고 말한다. (계는) 단지 색과 심이 아니니 색과 심을 떠나 영구히 얻을 수 없으며 얻을 수 없지만 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비록 계가 없는 것이 아니지만 과果로부터 떠났으니 인이 없는 것이고, 인으로부터 떠났으니 과도 없기 때문에 인과법이 아니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계는 인의 성질이기 때문에 인이 되는 자성은 비록 얻을 수 없지만 불과佛果가 계라는 인에 의거하기 때문에, 모든 부처의 본원이라고 말한다. 또 계는 과의 성질이기 때문에 과가 되는 자성은 비록 얻을 수 없지만, 계의 핵심은 보리심이라는 인에 의거하므로 계를 보살의 근본이라고 하는 것이다.

계상은 이와 같이 깊고 깊어서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것을 아는 것도 이렇게 어려운데 더구나 수행에는 얼마나 더한 어려움이 따르겠는가. 그러므로 앞에서 설명한 행상은 대지보살大地菩薩이 수행할 수 있는 것이지 처음 발심한 보살들의 실천행과는 관련이 없는 것 아닌가.
경 가운데 답한 것이 그대가 질문한 것과 같다. “보살은 초발의初發意 이래 항상 무소득법無所得法을 실천하였으며,

001_0585_b_01L巨過雖不見無罪與非罪而不違逆戒
001_0585_b_02L之實相是故永離犯戒細罪由是巧便
001_0585_b_03L深智方便永忘三輪不墮二邊方趣
001_0585_b_04L具足戒波羅蜜如經言罪非罪不可
001_0585_b_05L得故應具足戒波羅蜜戒本云戒光
001_0585_b_06L從口出有緣非無因非色非心非有
001_0585_b_07L非無無因果法諸佛之本原菩薩之
001_0585_b_08L根本此中言戒光者爲顯戒之與光
001_0585_b_09L無二無別4) [34] 淨雜染同一味故故緣
001_0585_b_10L戒光顯戒實相戒無自性必藉他緣
001_0585_b_11L故曰有緣有緣之言非據是有直顯
001_0585_b_12L不無其所從因故曰非無因非無因戒
001_0585_b_13L非質礙亦非緣慮故曰非色非心
001_0585_b_14L雖非色心而離色心永不可得雖不
001_0585_b_15L可得而非無戒故曰非有非無雖非
001_0585_b_16L無戒而離果無因離因無果故曰
001_0585_b_17L非因果法戒爲因性雖不可得而諸
001_0585_b_18L佛果必藉戒因故言諸佛之本原也
001_0585_b_19L戒爲果性雖不可得而戒要藉菩提心
001_0585_b_20L故言菩薩之根本也戒相如是
001_0585_b_21L甚深難解解之尙難況乎修行故知
001_0585_b_22L如前所說行相唯是大地菩薩所修
001_0585_b_23L關諸新發意所行經中正答知汝問
001_0585_b_24L言菩薩從初發意已來常行無所得法

001_0585_c_01L무소득법에 의해 보시와 지계를 닦고 (내지) 무소득법에 의해 지혜를 닦는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대답의 의도는, 만일 그 행을 일찍이 닦은 적이 없어서 행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지금 닦지 않는다면, 지금 닦지 않기 때문에 후에도 또한 닦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따라서 처음부터 그 어려운 행을 (조금씩) 익히게 하여 수행이 점점 증가하면 어려움은 차차 쉽게 될 것이다. 이것이 새로 수행할 마음을 낸 보살이 지향해야 할 대의大意이다. 궁극적으로 (계를) 지니고 범함을 간략히 밝힌 것이 이와 같다.

仰依聖典了義文      성전의 요의문了義文에 의거하여
粗述戒藏開要門      계율장戒律藏34)을 짓고 요문要門을 여옵니다.
普爲法界燃一燈      널리 법계 위해 한 등불 태우오니
願用傳燈周十方      그 등불 시방에 두루 전해지길 기원하옵니다.
四句三聚戒圓滿      사구四句로 삼취정계三聚淨戒35) 원만하게 성취하니
六意五修爲成辨      육의六意36)와 오수五修37)가 갖추어지옵니다.
遠離二邊滅諸罪      양 극단 멀리 떠나 모든 죄를 멸하고
等飡一味遊方外      평등하게 일미 맛보며 방외38)에 노닙니다.

『지범요기』 1권
관원寬元 2년(1244) 갑진 11월 24일 판각을 마침.
시주를 권한 사람 : 대안사大安寺 승僧 신인信忍, 반야사般若寺 전법륜장轉法輪藏
관영寬永 16년(1638)에 남경 유학 시 동대사東大寺 상생원上生院 고본古本을 베껴 계율의 등불이 무궁하게 전해지도록 한다.
우천용寓泉涌 소비구小比丘 씀.

001_0585_c_01L因無所得法故修布施持戒乃至因無
001_0585_c_02L所得法故修智慧此答意者若使彼
001_0585_c_03L由未曾修難可行故今不修者
001_0585_c_04L不習故後亦不修如是久久彌在其
001_0585_c_05L故令從初仰習其難習行漸增
001_0585_c_06L成其易是謂新行發趣大意究竟持犯
001_0585_c_07L略明如是

001_0585_c_08L
仰依聖典了義文粗述戒藏開要門
001_0585_c_09L普爲法界燃一燈願用傳燈周十方
001_0585_c_10L四句三聚戒圓滿六意五修爲成 [1] [3]
001_0585_c_11L遠離二邊滅諸罪等飡一味遊方外

001_0585_c_12L
持犯要記一卷

001_0585_c_13L
寬元二甲辰十一月二十四日摸功畢
001_0585_c_14L進大安寺僧信忍6)般若寺轉法輪藏

001_0585_c_15L
寬永十六之天南京遊學之時以東大寺
001_0585_c_16L上生院古本書寫旃冀令律灯傳諸無窮
001_0585_c_17L寓泉涌小比丑記焉 [36]

001_0585_c_18L「鈍」作「沌」{甲}「變」作「反」{甲}「緣」下
001_0585_c_19L古本有「託衆緣」{甲}
「明」下有「淸」{甲}「辨」
001_0585_c_20L作「辦」{甲}
「般若寺…寓泉比小丘記焉」四十
001_0585_c_21L八字無{甲}
  1. 1)여기에서 말하는 ‘기記’는 원효의 『梵網經菩薩戒本私記』(H1, 586~604)로 추정된다. 『韓國佛敎全書』 1책에는 상권만이 실려 있다. 하권은 결락되었다.
  2. 2)달마계본達磨戒本 : 여기에서 달마란 아비달마를 줄여서 부르는 말로 곧 불타가 설법한 경을 조직적으로 설명한 논서를 가리킨다. 달마계본이란 ‘논論’이 설하는 계본이라는 의미로서, 대승보살계를 설하는 세 종류의 계본 중 유가계를 설한 『瑜伽師地論』의 계품을 지칭하는 말이다.
  3. 3)수다라계본修多羅戒本 : 수다라란 계경契經을 말한다. 따라서 수다라계본이란 ‘경經’이 설하는 계본 즉 『梵網經』 보살계본을 가리킨다.
  4. 4)별해탈계경別解脫戒經 : 별해탈이란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의 의역으로, 원뜻은 각각의 해탈이며 신身·구口에 따른 각각의 죄를 따로따로 해탈시키기 때문에 별해탈계라 한다. 방비지악防非止惡의 의미가 있다. 별해탈계경은 『四分律』·『五分律』·『十誦律』 등 소승 율장을 가리키는데, 대개 비구 250계를 시설하고 있지만 계본에 따라 다소의 차이가 있다. 원효는 246경계를 취하고 있다.
  5. 5)중계重戒 : 십중금계十重禁戒를 줄여서 부르는 말로 곧 대승 계율이 정한 열 가지 중대한 금계를 말한다. 살생하지 말라(不殺戒), 도둑질하지 말라(不盜戒), 사음하지 말라(不婬戒), 거짓말하지 말라(不妄語戒), 술 팔지 말라(不酤酒戒), 사중의 허물을 말하지 말라(不說四衆過戒), 자신을 칭찬하고 남을 비방하지 말라(不自讚毁他戒), 자기 것을 아끼려고 비방하지 말라(不慳惜加毁戒), 성내지 말고 참회하라(不瞋心不受悔戒), 삼보를 비방하지 말라(不謗三寶戒). 이상 십중금계는 『梵網經』의 말이다.
  6. 6)『瑜伽師地論』 권41, 「戒品」(T30, 516a).
  7. 7)욕欲과 비悲 : 욕欲은 욕락이라고도 한다. 무엇인가를 성취하려고 하는 정신 작용이고, 비悲란 타인의 괴로움을 불쌍하게 여겨 구제하려는 마음가짐이다. 중생과 함께 무량한 즐거움을 누리려 하는 것을 대비大悲라고 한다.
  8. 8)정계율의淨戒律儀 : 불타가 제정한 청정한 계법 또는 청정하게 계를 지키는 것을 가리킨다.
  9. 9)초계初戒 : 달마계, 곧 유가계에서의 첫 번째 계율인 자찬훼타계를 뜻한다.
  10. 10)자찬훼타自讚毁他 : 자찬훼타계自讚毁他戒. 십중금계 중의 하나로 자신의 공을 드러내어 자랑하고 타인의 단점을 끄집어내어 비방하는 것을 말한다. 이 자찬훼타계는 범망계와 유가계에 공통되는 계목으로 『梵網經』에서는 십중계 중 제7계에, 『瑜伽師地論』에서는 사중계 중 제1계에 해당한다.
  11. 11)부끄러운 생각(慚愧) : 참괴는 부끄러운 것을 말한다. 자세히 말하면, 참慚이란 자기 마음 가운데 수치심을 느끼는 것이고, 괴愧란 자기의 죄가 타인에게 노출되어 그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는 것이다.
  12. 12)삼학三學 : 계율戒律·선정禪定·지혜智慧의 약칭이다.
  13. 13)모든 짐승들은 사자가 죽어도 그 위엄을 두려워하여 감히 먹을 생각조차 못하지만 사자 몸속에 생긴 벌레(獅子身虫)는 사자의 시체를 먹는다. 이것은 불법이 외도에 의해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나쁜 비구에 의해 파괴된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14. 14)이는 『大般若經』 권18(T8, 353b)의 “非人念我。 來稱讚我。 我所行者是眞遠離。 住城傍者。 誰當稱美汝。” 가운데 밑줄 친 부분과 맥락이 유사하다. 『大智度論』 권76(T25, 596c)에도 나오는데, 『大智度論』에서는 이 문구를 근거로 “이러한 인연 때문에 나머지 보살마하살을 경시한다.(以是因緣故。 輕餘菩薩摩訶薩。)”라고 설명하였다.
  15. 15)보살전다라菩薩旃陀羅 : 전다라는 주로 전타라라고 쓴다. ⓢ caṇḍāla의 음역으로, 인도의 사성四姓 계급 외에 수렵, 도살 등을 업으로 하는 천민을 가리키며 도자屠者, 살자殺者 등으로 한역한다. 보살전다라란 보살 가운데 가장 천한 보살이라는 의미이다.
  16. 16)이상은 『淮南子』에 나오는 말이다. 『淮南子』는 전국시대 제가의 학설을 집성한 책으로 전한 대에 편찬되었다. 도가의 계열에 속하는 고전이다.
  17. 17)손감자損減者 : 손감損減이란 감소라는 의미이다. 손감자란 법을 완전히 부정하거나 감소시키는 사람을 말한다. 예를 들면, 유와 무에 대한 견해가 다를 경우, 유를 주장하는 것을 증익增益이라 하고 무를 주장하는 것을 손감이라고 한다.
  18. 18)삼성三性 : 법상종에서는 일체법을 세 종류로 나눈다. 그것은 변계소집성·의타기성·원성실성이다. 변계소집성은 의식의 잘못된 판단으로 실재가 아닌 허망한 대상이 실재라고 잘못 집착하여 갖가지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고, 의타기성은 일체법이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상호 의존하여 이루어지는 것임을 가리키며, 원성실성은 잘못된 집착인 변계소집성이 사라진 원만하고 진실한 자성 곧 진여를 말한다.
  19. 19)삼제三諦 : 천태종에서 주장하는 세 가지 진리로 공제空諦·가제假諦·중제中諦를 가리킨다. 이 세 가지 진리는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상즉의 관계라고 한다.
  20. 20)『中論』(T30, 18c). 문장이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21. 21)『瑜伽師地論』(T36, 488c).
  22. 22)두 가지 연緣 : 앞에서 말한 가장 낮은 것을 가지고 가장 높다고 하는 어리석음과 적은 것을 믿고 많은 것을 비방하는 어리석음의 두 어리석음을 가리킨다.
  23. 23)『華嚴經』 권5, 「菩薩明難品」(T9, 428c).
  24. 24)『大智度論』 권6(T25, 107c).
  25. 25)『大智度論』 권1(T25, 60c).
  26. 26)『解深密經』 권2, 「無自性相品」(T16, 695b).
  27. 27)이것과 저것은 서로 대응되는 것으로, 저것을 근거로 한 공인데 저것이 실제로 없는 것이라면, 이것을 근거로 한 공이니 이것은 실제로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28. 28)『瑜伽師地論』 권36(T30, 488a).
  29. 29)『梵網經』(T24, 1004c).
  30. 30)토끼 뿔은 가상일 뿐, 존재 자체가 없는 것이다.
  31. 31)삼륜三輪 : 보시하는 사람, 보시 받는 사람, 보시하는 물품의 세 가지를 말한다. 이 세 가지가 청정해야 참된 보시가 성립된다는 것이다.
  32. 32)『大品般若經』(T8, 218c).
  33. 33)『梵網經』(T24, 1004a).
  34. 34)계율장戒律藏 : 삼장三藏 중 율장의 갖춘 명칭이다.
  35. 35)삼취정계三聚淨戒 : 대승보살의 계법을 가리킨다. 줄여서 삼취계라고도 한다. 섭률의계攝律儀戒·섭선법계攝善法戒·섭중생계攝衆生戒의 세 가지 계를 말한다. 여기에는 대·소승 모든 계가 다 포함되어 있다. 섭률의계란 일체 보살계로서 모든 악을 다 끊고 계율의 나쁜 행동을 그치는 것을 포함한다. 섭선법계란 일체 보리도계를 포섭하여 지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일체 선법을 닦아 익히는 것을 말한다. 섭중생계란 자심慈心으로 일체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36. 36)육의六意 : 대승의 수도修道 육위六位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육위는 십신·십주·십행·십회향·십지·불지 등 여섯 단계의 지위를 가리킨다.
  37. 37)오수五修 : 오력五力을 말하는 것 같다. 실천의 기초 덕목으로 신력信力·정진력精進力·염력念力·혜력慧力·정력定力 등 다섯 가지이다.
  38. 38)방외 : 세상의 바깥이라는 말이다. 즉 세속을 초월한 출세간을 가리킨다.
  1. 1){底}新修大藏經。第四十五卷(承應三年刊宗敎大學藏本)。{甲}續藏經。第一編六十一套第三册。
  2. 2)「有」上有「略」{甲}。
  3. 3)「重」無{甲}。
  4. 4)「類」作「數」{甲}。
  5. 5)「誑」作「狂」{甲}。
  6. 6)「因」下一有「之」{甲}。
  7. 7)「赴」作「起」{甲}。
  8. 8)「慮」古本作「處」{甲}。
  9. 1)「變」作「反」{甲}。
  10. 2)「慢」作「漫」{甲}。
  11. 3)「湋池」作「陵他」{甲}。
  12. 4)「不」作「小」{甲}。
  13. 5)「者」下有「信」{甲}。
  14. 6)「斜聽」作「邪聰」而言古本一作「斜聰」{甲}。
  15. 7)「特」作「恃」次同{甲}。
  16. 8)「㝹」作「兔」{甲}。
  17. 9)「變」作「反」{甲}。
  18. 1)「樣」無{甲}。
  19. 2)「婬」下有「怒」{甲}。
  20. 3)「綱」作「網」{甲}。
  21. 4)「赴」作「起」{甲}。
  22. 5)「蜜蜜」作「密密」{甲}。
  23. 6)「蜜」作「密」{甲}。
  24. 1)「趣」無{甲}。
  25. 2)「深」下有「異」{甲}。
  26. 3)「掬」作「探」{甲}。
  27. 4)「變」作「反」{甲}。
  28. 5)「遣/遺」一作「遣」{甲}。
  29. 6)「凌」作「陵」{甲}。
  30. 7)「僻」作「避」{甲}。
  31. 8)「苞」作「抱」{甲}。
  32. 9)「兒」作「倪」{甲}。
  33. 1)「鈍」作「沌」{甲}。
  34. 2)「變」作「反」{甲}。
  35. 3)「緣」下古本有「託衆緣」{甲}。
  36. 4)「明」下有「淸」{甲}。
  37. 5)「辨」作「辦」{甲}。
  38. 6)「般若寺…寓泉比小丘記焉」四十八字無{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