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무경집(無竟集) / 無竟集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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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경집無竟集
무경집 서문
불가에서 시는 객진客塵이고 망념이며 장애이다. 그대가 무경 스님한테서 사리가 나왔다고 했는데, 스님은 대개 이른바 육진六塵1)을 뛰어넘고 깨달음을 얻은 이라, 어찌 시를 추구하겠는가? 만일 시로써 법을 설하고 법으로 시를 본다고 말한다면, 시를 짓는 것은 성聲이고 색色이며 향香이니, 소리를 경經으로 여기는 것이 어찌 성공聲空만 하겠으며, 색을 경으로 여기는 것이 어찌 색공色空만 하겠으며, 향을 경으로 여기는 것이 어찌 향공香空만 하겠는가? 저 세 가지가 다 공인데도 지묵紙墨만을 사법師法으로 여긴다면, 귀를 통해 종소리를 듣다가 귀를 지키면서 종을 잊고, 손을 빌려 달을 가리키다가 손가락만 보면서 달을 잃으며, 코를 빌려 전단향栴檀香을 맡는데 코만 찾다가 전단향을 버리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나는 스님이 시를 짓는 것을 알지 못하지만, 과연 금색 팔(金色臂)을 들어 빛나는 주먹(光明拳)을 나타내 보이시는지, 스님의 흉중으로부터 용출하는 시가 과연 그 빛이 성대하여 백 가지 보배 빛(百寶色)을 띠고 있는지 그대는 돌아가서 찾아보라. 시가의 격률로 품평하는 것은 객진 중의 객진이고 망념 중의 망념이며 장애 중의 장애이니 나는 하지 않겠노라.
무경 스님의 고족高足 제자가 찾아와 말을 청하기로 서문을 짓는다.
황마黃馬(무오년, 1738) 1월(孟春)에 약산藥山 오광운吳光運이 쓰다.

일전에 내가 수락산 절에서 놀 적에 (그곳에) 자간 상인慈侃上人이 있었는데 매우 진실하고 문자를 알았으며, 만나 보니 매우 박식하였다. 자주 나의 재거齋居에 들렀으며 제 스승의 무경당고無竟堂稿 세 권을 내보이고 내 글을 간곡히 구했는데, 이는 대개 스승을 위하는 정성이었다.

009_0366_c_01L[無竟集]

009_0366_c_02L1)無竟集序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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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9_0366_c_04L
釋之詩塵也妄也障也爾云竟師
009_0366_c_05L利出盖其所謂超六塵得菩提者
009_0366_c_06L以詩爲如曰以詩說法以法觀詩乎
009_0366_c_07L之生聲也色也香也以聲爲經曷若
009_0366_c_08L聲空以色爲經曷若色空以香爲經
009_0366_c_09L曷若香空彼三者俱空而爾乃破紙墨
009_0366_c_10L爲師法是何異緣耳省鍾守耳而忘
009_0366_c_11L假手指月觀指而失月借鼻聞檀
009_0366_c_12L尋鼻而棄檀乎吾未知師之爲詩也
009_0366_c_13L果擧金色臂眎光明拳者乎詩之從師
009_0366_c_14L胸涌出也其果光昱昱百寶色者乎
009_0366_c_15L可歸而求之若夫評品以詩家格律
009_0366_c_16L乃塵之塵妄之妄障之障吾不爲也
009_0366_c_17L遂爲竟師高足來乞語者序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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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馬孟春藥山吳光運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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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余游水落山寺有慈侃上人者頗淳
009_0366_c_22L實識字迎謁歎甚聞復屢踵余齋居
009_0366_c_23L眎其師無竟堂稿三卷索余文甚勤
009_0366_c_24L{底}戊子陽川許采跋文本(東國大學校所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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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경의 법명은 자수子秀이고 호남인이다. 어려서 병을 앓아 멀리 나다니지 않고 고요히 거처하며 업을 닦았다. 내전內典과 외전外典을 널리 섭렵하고 그 여가에 문사文詞를 지어 자못 사대부들이 명성을 허여하였다. 나는 본래 선을 알지 못하나 유독 이름난 산수에서 놀기를 좋아하여 가끔 가람(精藍)과 고찰에서 소요하기도 하고 머무르기도 했다. 시승이나 훌륭한 스님을 만나면 문득 흔연히 함께 어울리며 시를 노래하였으나, 다만 뛰어나게 뜻에 맞는 이를 보지 못하여 창연悵然히 한스럽게 여겼다.
이제 이 원고를 얻어서 읽어 보았는데 그 시어가 원만하고 창달하여 진실로 좋은 구절이 많고, 여러 문장도 여유 있고 넉넉하였다. 이 시대의 스님들이 지은 시문 가운데서는 처음 보았다. 예로부터 선가로서 문단에서 활약한 자로는 영철靈徹,2) 혜휴惠休,3) 도잠道潛4) 참료參寥(靈休潛寥)의 무리가 으뜸이다. 지난날 희공希公이 동악東岳5)에게, 백곡白谷6)이 동회東淮7)에게 한마디 칭찬하는 말을 들은 것이 진실로 우연이 아니었고, 그 가르침과 인도에 힘입어 그 명성을 얻은 자도 적지 않았다. 만일 스님이 일찍 두 분 같은 귀의처를 얻고 그 가르침을 받아 그 재목을 이루었다면 그 이른 곳이 더욱 초연하여 볼 만했을 것이다. 슬프다. 때를 만나거나 만나지 못하는 것은 천명이니 어찌 스님만 그렇겠는가.
호남은 내가 유람하지 못한 곳이요, 스님도 이미 연로하시다. 그러므로 천 리 밖에 멀리 떨어져 한갓 시문으로만 서로 느끼면서 문득 그 글머리에 간단하게 몇 줄 적는데, 이것으로 어찌 스님의 이름을 무겁게 할 수 있으랴. 바라노니 이에 의탁하여 지난날의 아쉬움을 달랠 뿐이다.
세사歲舍 을묘乙卯(1735) 6월(季夏) 관물 거사觀物居士

옛날 호남에 백곡白谷 스님이 있었는데 시문으로 동회東淮 신공申公에게 알려져

009_0367_a_01L爲師之誠也無竟法名子秀湖南人
009_0367_a_02L少抱疾不遠游居靜修業愽涉內外典
009_0367_a_03L出其餘爲文詞頗有冠盖丈夫賜與名
009_0367_a_04L余素不解禪獨喜游名山水徃徃逍遙
009_0367_a_05L栖宿于精藍古刹其遇詩僧佳釋
009_0367_a_06L欣然與之周旋吟嘯而顧未覩夫傑特
009_0367_a_07L當人意者意悵然以恨也迺今得斯藁
009_0367_a_08L而讀之其韻語圓暢固多佳句諸文
009_0367_a_09L又紆餘該洽今世蔬筍叢中余盖始見
009_0367_a_10L自昔禪家之頡頑藝園若靈休潜寥
009_0367_a_11L之倫尙已即如希公之於岳老
009_0367_a_12L白谷之於東淮其得一言之褒固非偶
009_0367_a_13L而所資於陶鎔噓潤以就其名者
009_0367_a_14L亦豈尠淺也誠使師早得依倚如二公
009_0367_a_15L受其鑪錘而成其材焉則其所底
009_0367_a_16L益超然可觀矣嗟呼遇不遇有命
009_0367_a_17L特師乎哉湖南余所未游師今老矣
009_0367_a_18L落落千里之外徒以文藻相感輙爲題
009_0367_a_19L其卷面寂寥數行又烏足重師名庶幾
009_0367_a_20L托此以償夙昔之恨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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歲舍乙卯季夏觀物居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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昔湖南有白谷師者以詩文見知於東

009_0367_b_01L벼슬아치 사이에서도 명성이 있었다. 내가 세상에 남아 있는 그 시문을 보았는데 호방하고 준일하여 공문空門의 뛰어난 스님임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일찍이 오늘날 어찌 백곡 같은 분이 없을까라고 했지만 다만 신공 같은 분을 만나지 못하여 스스로 드러나지 못한 것이리라.
정사년丁巳年(1737)에 나는 호남의 쌍계사를 여행하였는데, 절에는 이름이 자수子秀라고 하는 노스님이 계셨다. 예스런 모습에 맑은 기운을 지녀서, 함께 이야기해 보고 도를 깨친 분임을 알았다. 나이는 칠십여 세인데 산을 나선 적이 없으며, 불경을 읽고 그 법을 깨달아 날마다 그 무리와 함께 강습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고, 그 나머지를 드러내어 시문을 지으니, 시는 그 모습처럼 청결하고 문장 또한 자못 이치를 이해하였다.
백곡은 비록 문사로 세상에 이름났으나 도의 깊은 경지에 나아갔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다. 이제 스님은 불경에 밝고 마음에 얻은 것을 제자들에게 전수하는 것이 유자가 공자의 도를 서로 전하는 듯하니, 그 도의 선함은 귀할 바 없으나 스님은 이미 불교를 배웠으니 자신의 도를 밝히는 것도 가하리라. 또 시문도 백곡보다 못하지 않으니 그렇다면 스님은 백곡이 능치 못한 것을 지녔고, 백곡이 능한 것을 스님 또한 넉넉히 가졌는데도 세상에서 백곡만을 알고 스님을 알지 못함은 어찌 된 것인가?
스님은 한 번도 서울에 이르러 공경대부의 문하에서 명예를 구한 적이 없으니, 오늘날 신공 같은 분이 있을지라도 스님처럼 명성을 추구하지 않으니 어찌하겠는가? 대저 선은 공적空寂을 귀하게 여긴다. 그러므로 담박하여 이름을 없게 한 후에야 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선을 하면서 이름이 난다면 바른 도가 아니다. 사람들은 혹 스님의 명성이 백곡에게 미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기나, 백곡의 명성이 도리어 선에 허물이 되고, 스님 같은 분은 명성을 즐겨하지 않음을 어찌 알겠는가?

009_0367_b_01L淮申公因以取名縉紳間余見其詩文
009_0367_b_02L之在世者可知其豪放俊逸爲空門中
009_0367_b_03L奇士也余甞以爲今之世亦豈無如白
009_0367_b_04L谷者獨不遇申公不能自拔也歲丁
009_0367_b_05L余遊湖南之雙溪寺寺有一老釋
009_0367_b_06L名子秀者貌古而氣淸與之言知其
009_0367_b_07L爲有道者也其年七十餘未甞出山
009_0367_b_08L讀其書而解其法日夜與其徒講習以
009_0367_b_09L爲娛以其餘發以爲詩文其詩淸潔
009_0367_b_10L如其貌其文亦頗解理白谷雖以文辭
009_0367_b_11L名於世未甞聞深造其道而今師明於
009_0367_b_12L釋氏之書以其所得於心者授其徒
009_0367_b_13L儒者之以孔子道相傳也其道雖不足
009_0367_b_14L師旣學于佛則明其道可也又其詩
009_0367_b_15L不下於白谷然則師有白谷之所不
009_0367_b_16L能者而白谷之所能者師亦有之而有
009_0367_b_17L餘裕也然世知有白谷而不知有師者
009_0367_b_18L何也師未甞一至京洛間以干於公卿
009_0367_b_19L大夫之門今之世雖有如申公者其如
009_0367_b_20L師之不求名何㦲夫禪貴空寂故淡泊
009_0367_b_21L然無其名而後可以爲禪禪而有名者
009_0367_b_22L非其道也人或爲師恨其名不及於白
009_0367_b_23L是豈知白谷之名爲累於禪而如師
009_0367_b_24L不屑爲也然其詩文之在篋者

009_0367_c_01L그러나 상자에 보관된 시문을 끝내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스님은 비록 명성을 좋아하지 않지만 저절로 이른 명성은 또 어찌 피할 것인가? 나는 스님의 시문을 보는 세상 사람들이 스님도 명성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의심할까 두려워하며, 그 원고에 서문을 지어 스님의 뜻이 그렇지 않음을 밝히는 바이다.
정사丁巳(1737) 2월(仲春) 해평海平 윤현동尹顯東 쓰다.


009_0367_c_01L有所不能泯滅者也然則師雖不喜名
009_0367_c_02L其於自至之名又安能逃也余恐世之
009_0367_c_03L見師詩文者疑師之亦好名物序其稿
009_0367_c_04L以明其志之不然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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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巳仲春海平尹顯東識
  1. 1)육진六塵 : 육경六境과 같다. 이것은 마음을 더럽히므로 진塵이라 한다. 육근六根의 대상인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ㆍ법法을 말한다. 1. 색경色境.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상인 모양이나 빛깔. 2. 성경聲境. 귀로 들을 수 있는 대상인 소리. 3. 향경香境. 코로 맡을 수 있는 대상인 향기. 4. 미경味境. 혀로 느낄 수 있는 대상인 맛. 5. 촉경觸境. 몸으로 느낄 수 있는 대상인 추위나 촉감 등. 6. 법경法境. 의식 내용. 관념.
  2. 2)영철靈徹 : 당나라 승려. 교연皎然과 교유했던 도반. 저서에 『율종행원律宗行源』 21권이 있다.
  3. 3)혜휴惠休 : 탕혜휴湯惠休. 남조南朝 송宋의 시인. 생몰년 미상으로 일찍이 출가하여 ‘혜휴 상인惠休上人’이라 불렸다. 현재 11수의 시가 남아 있는데, 〈원시행怨詩行〉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4. 4)도잠道潛 : 송宋나라의 고승高僧. 호는 참료자參寥子. 『참료자집參寥子集』 12권을 남겼다.
  5. 5)동악東岳 : 이안눌李安訥(1571~1637).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자민子敏, 호는 동악東岳. 1607년 홍주목사ㆍ동래부사, 1610년 담양부사가 되었으나 1년 만에 병을 이유로 돌아왔다. 3년 후에 경주부윤이 되었다가 동부승지와 좌부승지를 거쳐 강화부사가 되었다. 어머니의 삼년상을 마치자 인조반정으로 다시 등용, 예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했다. 다음 해 이괄李适의 난에 방관했다는 이유로 유배되었으며,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사면되어 강도유수江都留守에 임명되었다. 1631년 함경도 관찰사가 되었고, 예조판서 겸 예문관제학을 거쳐 충청도 도순찰사에 제수되었으며 그 후 형조판서 겸 홍문관제학에 임명되었다. 병자호란 때에 병중 노구를 이끌고 왕을 호종하다가 병세가 더하여 결국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그는 특히 시작詩作에 주력하여 문집과 더불어 4,379수라는 방대한 양의 시를 남기고 있다. 이렇게 많은 작품을 남겼으면서도 작품 창작에 매우 신중해서 일자 일구一字一句도 가벼이 쓰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시에 대해서 독실히 공부하는 태도를 견지하여 두시杜詩를 만독萬讀이나 했다고 하며, 여기서 입신入神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저서로는 『동악집東岳集』이 있다.
  6. 6)백곡白谷 : 백곡 처능白谷處能(617~1680). 의현義賢에게서 글을 배우다가 15세에 승려가 되었고 신익성申翊聖에게서 경사제자經史諸子와 시문을 배웠다. 지리산 쌍계사雙磎寺의 각성覺性에게 가서 23년 동안 도를 닦고 그 법을 이어 받았다. 현종이 척불정책을 취하면서 비구니를 서울 밖으로 내쫓고 자수원과 인수원을 철폐하며 사찰의 재산을 몰수하고 노비를 빼앗자 이에 항의하는 「간폐석교소諫廢釋敎疏」를 올렸다. 이는 8천 자에 이르는 방대한 글인데 불교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비록 상소문이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현종의 척불정책이 다소 축소되었다. 1680년(숙종 6) 금산사金山寺에서 대법회를 열고 바로 그해에 입적하였다. 저서에 『백곡집白谷集』이 있다.
  7. 7)동회東淮 : 신익성申翊聖(1588~1644).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군석君奭. 호는 낙전당樂全堂ㆍ동회거사東淮居士. 아버지는 영의정 흠欽이다. 선조의 딸 정숙옹주貞淑翁主와 혼인해 동양위東陽尉에 봉해졌고, 1606년 오위도총부부총관이 되었다.
  1. 1){底}戊子陽川許采跋文本(東國大學校所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