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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0302_c_04L괄허 선사 유고 문집 서문소백산의 승려 상순尙順이 우리 집에 찾아와서 그의 사숙(叔師) 되는 혜운惠雲 상인의 말을 전하였다.“저희 6대 조사이신 괄허 존자括虛尊者는 선교禪敎에 두루 깊이 통하시고 율행律行이 매우 높은 분입니다.여사餘事로 한 시문詩文은 모두 오묘한 수준에 이르렀고, 여러 명찰 법우法宇의 현판 글씨가 그분의 손에서 많이 나왔습니다.또한 어진 선비나 대부大夫를 따라 노니는 것을 기뻐하여 권청대權淸臺,12) 정해좌丁海左13) 등 여러 선생들과 수창한 시가 남아 있습니다.불행히도 남은 작품이 흩어지고 없어져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약간에 불과합니다.그러나 자취 없이 사라지게 할 수 없어 이제 활자를 구하여 판에 새겨 오래도록 전하고자 하오니, 바라건대 공께서 부디 한마디 글을 책머리에 써 주시기 바랍니다.”나는 그리할 수 없다고 사양하였다.그러나 또한 마음으로 느끼는 바가 있었다.무릇 사람의 정이 오래되면 잊히고, 잊히면 그를 위해 도모할 일이 없어진다.괄허가 입적한 지 이미 오래되었도다.이에 혜운이 남은 원고를 수습하여 길이 전하고자 하는데, 괄허가 내실이 없다면 이 거사가 없었을 것이다.또 이 거사가 있음이 당연하더라도 문손의 돈독한 정성이 없다면 이 거사가 없었을 것이다.어질도다, 혜운이여!이에 그 문집을 열람해 보건대 시운詩韻에 통달하고 지취旨趣가 온후하였으니, 시서詩書를 연찬하고 인의지설仁義之說을 배운 이가 아니라면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가히 전할 만하도다.이 문집 비록 적더라도 어찌 가치를 작게 여길 수 있겠는가? 더구나 스승의 거문고가 소리가 끊어지고(獅絃絶響), 이같이 집성하는 일도 드물어진 때이니만치 더욱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010_0302_c_04L括虛禪師遺集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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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0302_c_06L小白山僧尙順。踵余門。致其叔師惠雲
010_0302_c_07L上人之語曰。我六世祖師。括虛尊者。
010_0302_c_08L通瀜禪敎。律行甚高。餘事詩文。咸臻
010_0302_c_09L其妙。凡 [1] 名藍法宇。板揭之作。多出其
010_0302_c_10L手。又喜從賢士大夫遊。與權淸臺丁海
010_0302_c_11L左諸先生。有唱酬之什。不幸遺篇散逸。
010_0302_c_12L今其存者。若干頁而已。然不可泯也。
010_0302_c_13L方求活字。圖厥壽傳。惟公惠一言於卷
010_0302_c_14L端。余辤不能。然亦有可感者存焉。夫
010_0302_c_15L人情久則忘。忘則無所事。括虛之沒已
010_0302_c_16L久矣。雲乃收拾殘藳。爲不朽計。括虛
010_0302_c_17L而無其實。無是擧也。冝其有是擧也。
010_0302_c_18L微門孫之誠之篤。無是擧也。雲其賢
010_0302_c_19L乎哉。於是閱其集。暢乎其韻。溫乎其
010_0302_c_20L旨。非治詩書學仁義之說者。能爾哉。
010_0302_c_21L其可傳也。玆集雖少。何可少之哉。況
010_0302_c_22L今獅絃絕響。如茲集者尠。尤不可以不
010_0302_c_23L{底}崇禎紀元後五戊子三月。後孫滿船書跋本
010_0302_c_24L(國立圖書館所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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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0303_a_01L상순 스님은 이상의 말을 가지고 돌아가 혜운 스님에게 전하시기를.정해년(1887) 가을 저녁에 방산舫山 허훈許薰14) 쓰다. -
010_0303_a_01L傳也。尙順以是語。歸報雲師。
010_0303_a_02L歲丁亥秋夕。舫山許薰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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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권청대權淸臺 : 권상일權相一(1679~1759). 조선 후기의 학자·문신.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태중台仲, 호는 청대淸臺로 상주 출생이다. 1710년(숙종 36)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역임했다. 『退溪言行錄』을 교열해 간행하고 구강서원鷗江書院을 세워 학문을 진흥했다. 퇴계 이황을 사숙하여 「四七說」을 지어 이기理氣를 완전히 둘로 분리하고, 이理는 본연의 성이며 기氣는 기질의 성이라고 주장했다. 저서로는 『淸臺集』 18권, 『初學指南』, 『觀書近思錄集解』, 『昭代備考』, 『家範』, 『歷代史抄常目』과 『日記』 30여 권이 있다. 시호는 희정僖靖이며 죽림정사竹林精舍와 근암서원近菴書院에 향사되었다.
- 13)정해좌丁海左 : 정범조鄭範祖(1723~180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나주이고, 자는 법세法世, 호는 해좌海左,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1763년(영조 39)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에 등용되고 1768년 지평과 정언을 지낸 후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785년(정조 9) 이후 대사간과 대사성·이조참의·한성부 우윤·대사헌·개성부 유수·이조참판·형조참판을 거쳐 1799년 예문관 제학이 되고, 1800년 실록지사實錄知事로 『正祖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문집에 『海左集』 39권이 있다.
- 14)허훈許薰(1836~1907) : 조선 고종 때의 학자. 본관은 김해, 자는 순가舜歌, 호는 방산舫山이며, 선산에서 출생하였다. 29세에 허전許傳의 집지문인執持文人이 되었는데, 허전은 이익―안정복―황덕길로 이어진 성호학파의 실학을 이은 인물이고, 허훈은 허전의 학통을 이었다. 근대 의병 지도자인 허위許蔿가 그의 아우이다. 이이의 성리설이 이황의 견해와 다른 문제들을 비판했고, 이황의 학문적 정통성을 재천명하며 계승하였다. 성리설과 관련된 글로는 「心說」·「四七管見」이 있고, 실학과 관련된 글로는 「鹽說」·「砲說」·「車說」·「浿水說」·「海潮說」 등이 있다. 한편 이 책 『括虛集』에 서문을 쓴 대사의 후학 함홍 치능涵弘致能(1805~1878)과도 교류가 있어 『涵弘堂集』에 서문과 비명碑銘을 남겼다. 『涵弘堂集』의 간행을 주관한 야산 명원野山明遠은 『野山集』을 남겼는데, 현재 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들의 교류는 19세기 말 유불 간 교류 양상으로 주목된다.
- 1){底}崇禎紀元後五戊子三月。後孫滿船書跋本(國立圖書館所藏)。
ⓒ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 김종진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