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plete Works of Korean Buddhism

선원소류(禪源溯流) / 禪源溯流

ABC_BJ_H0241_T_001
선원소류禪源溯流
백파 문인 설두 유형白坡門人 雪竇有炯
조영미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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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소류禪源溯流
총목차總目次
이 책의 제목에 담긴 뜻
1. 조사선과 여래선
2. 삼처전심
1) 세존의 삼처전심
2) 달마의 삼처전심
3. 살인도와 활인검
4. 선의 전수
5. 삼종선을 논함
6. 삼종三宗과 선종 오파五派
7. 임제삼구臨濟三句와 삼종선
8. 『사변만어』와 『소쇄선정록(선문증정록)』 비판에 앞서 삼종선 개념을 바로잡다
9. 『사변만어』를 설파함
10. 『소쇄선정록』을 변설함
발문 跋
시주질施主秩
이 책의 제목에 담긴 뜻
이 책의 제목에서 선禪은 세 가지 선(三禪)을 아울러 일컬으며, 원源은 향상하는 하나의 통로(向上一竅)1)라는 뜻이다. 이 향상하는 하나의 통로는 최초구와 말후구2) 두 구를 관통하므로 최초구가 향상하는 하나의 통로이면 말후구도 향상하는 하나의 통로임을 알 수 있다. 고덕이 말하기를 ‘말후구가 원만함의 극치에 이르면 최초구와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라 하고 또 ‘말후구를 알고자 한다면 어떤 조짐도 일어나기 이전의 시기를 살펴라.’라고 하였다.3) 소溯에는 소유溯游와 소회溯洄의 두 가지 뜻이 있고, 류流에는 순류와 역류의 두 가지 뜻이 있다. 처음에 이 일(此事)을 곧바로 가리켜 보이고 다음으로 삼구三句를 설하는 경우에는최초구4) 이를 최초구로부터 물이 흐르는 대로 따라가듯이 소유하고 순류한다고 한다. 삼구를 설하고 나서 마지막에 이 일을 결론지어 보이는 경우에는말후구이를 역류하며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소회라고 하니 말후구에 이르러 향상한 것이다.
1. 조사선과 여래선
부처님이 샛별을 보고 법을 깨달았지만 아직 깊은 경계는 아니었기에 수십 일을 유행遊行하고서야 조사의 심인心印을 전해 받았다. 신라의 범일 국사梵日國師5)는 진성왕이 선과 교의 뜻을 묻자 ‘세존이 샛별을 보고 도를 깨달았지만 또한 깨달은 법이 아직 궁극에 이른 경지는 아님을 알고 수십 개월을 유행하며 조사를 찾아뵙고서야 비로소 현묘하고 지극한 뜻을 전해 받았습니다.’6)라고 답하였다. 여래가 깨달은 경지를 여래선이라 하고 조사가 전한 깨달음의 경지를 조사선이라고 한다. 그런 까닭에 여래선이 조사선보다 하열하다.
‘수십 개월’에서의 ‘월’은 청허 선사淸虛禪師의 『선교석禪敎釋』7)에도 ‘월’이라 되어 있는데, ‘일’이라야 맞다.8) 달마 대사는 ‘진귀 조사眞歸祖師9)가 설산에 있으면서 총림의 방장에서 석가를 기다렸네. 조사의 심인을 임오년에 전해 받아 수지하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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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0653_b_02L1)禪源溯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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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0653_b_04L白坡門人雪竇有炯述

010_0653_b_05L
禪者三禪源者向上一竅然向上
010_0653_b_06L一竅通最初末後二句最初句爲向
010_0653_b_07L上一竅可知末後句爲向上一竅者
010_0653_b_08L古德云末後句至於圓極則與最初
010_0653_b_09L何以異哉又云要識末後句
010_0653_b_10L取未生時㴑有㴑游㴑洄二義流有
010_0653_b_11L順流逆流二義謂最初直示此事最初

010_0653_b_12L次說三句則此自最初句㴑游而順
010_0653_b_13L流也若說三句末後結示此事末後

010_0653_b_14L則此逆流而㴑洄至末後句向上也

010_0653_b_15L
佛見明星悟法猶未甚深遊行數十日
010_0653_b_16L傳得祖師心新羅梵日國師因眞聖王
010_0653_b_17L問禪敎兩義答曰世尊見明星悟道
010_0653_b_18L知所悟之法猶未臻極遊行數十月
010_0653_b_19L尋訪祖師始傳得玄極之旨謂如來悟
010_0653_b_20L名如來禪祖師傳底名祖師禪也
010_0653_b_21L是故如來禪劣於祖師禪

010_0653_b_22L
數十月月淸虛禪師禪敎釋亦作月
010_0653_b_23L然當作日達摩云眞歸祖師在雪山
010_0653_b_24L叢木房中待釋迦傳持祖印壬午歲

010_0653_c_01L동시에 조사의 종지를 마음으로 얻었네.’10)라고 하였다. 임오년 섣달 8일에 성도하고, 성도 후에 수십 일이 지나 조사의 심인을 전해 받아 수지하였다면 아직 납월 그믐 전이므로 임오년이다. 그러나 수십 월이 지났다고 하면 임오년이 아니다.
『법화경』에 “나는 앞서서 도량에 앉아, 보리수를 관하고 경행經行하였으며, 삼칠일 동안 이와 같은 일을 사유하였다.”11)라고 하였다. 수십 일을 유행하다가 총림12)의 방장에 이르렀다고 한 말은 『법화경』에서 ‘보리수를 관하고 경행하며 삼칠일 동안 사유하였다.’라고 한 구절을 따른 것이다. 그러므로 『선문보장록』 등 선 문헌에서는 ‘조사를 찾아가 조사의 심인을 전해 받아 수지하였다.’라고 하였고, 경經(『법화경』)에서는 ‘이와 같은 일을 사유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선과 교가 다른 까닭이다.

 여래가 깨달은 경지를 여래선이라 한다: 『보요경』에 ‘보살이 2월 8일에 성도하였으니 인천의 스승이라 한다.’라고 한 내용에 따른다.13)
보살이란 성도 이전을 기준으로 한 호칭이고, 성도 이후를 기준으로 하면 부처님이라는 칭호로 바뀌어 불리니, 이가 석가모니불이다. 2월 8일은 세존이 세상에 출현하신 날로서 주나라 때이다. 주나라는 자월子月(음력 11월)을 한 해의 첫 달(歲首)로 삼았으니 이전 달인 해월亥月에는 임오년이 다하였고 자월에 이르러서는 계미년 정월이므로 축월丑月이 2월이 된다. 그렇다면 그때는 주나라 목왕 3년인 계미년 2월 8일이다. ‘성도成道’라는 말에서 도란 깨달음의 대상인 법을 가리키고 깨달음의 주체인 사람은 여래이다. 이제 ‘깨달음의 대상인 법’과 아울러 ‘깨달음의 주체인 사람’을 기준으로 하여 여래선이라 한다. 여기서 선禪은 깨달음의 대상인 심법心法이다. 인천의 스승(天人師)14)이란, 성도 후에 방편을 시설하여 인천에게 법을 설하였으므로 천인사라 하는 것이다.

010_0653_c_01L心得同時祖宗旨以壬午臘月八日
010_0653_c_02L成道而成道後數十日傳持祖印
010_0653_c_03L則尙在臘月晦前故爲壬午歲若過
010_0653_c_04L數十月則非壬午也法華云我始
010_0653_c_05L坐道場觀樹及經行於三七日中
010_0653_c_06L思惟如是事今數十日遊行至叢木
010_0653_c_07L亦順經中觀樹及經行三七日思
010_0653_c_08L惟也然禪云尋訪祖師傳持祖印
010_0653_c_09L經云思惟如是事此是禪敎之所以
010_0653_c_10L異也

010_0653_c_11L
如來悟底名如來禪者普曜經云
010_0653_c_12L薩於二月八日成道號曰人天師

010_0653_c_13L
菩薩者約成道前而言也若約成道
010_0653_c_14L則轉得佛號是爲釋加牟尼佛也
010_0653_c_15L二月八日者世尊出世與周同時
010_0653_c_16L則周以子月爲歲首前亥月終壬午
010_0653_c_17L至子月爲癸未正月故丑月爲二
010_0653_c_18L即周穆王三年癸未二月八日也
010_0653_c_19L成道道即所悟之法能悟之人
010_0653_c_20L如來而今約所悟之法兼能悟之人
010_0653_c_21L故名如來禪禪是所悟之心法也
010_0653_c_22L人師者以成道後施設方便爲人
010_0653_c_23L天說法故云天人師

010_0653_c_24L{底}光緖十五年幻翁喚眞述記本(서울大學校
010_0653_c_25L所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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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 의현臨濟義玄이 말하였다. ‘제2구에서 알아차리면 인천의 스승이 될 만하다.’
일우一愚15)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여래께서 적멸 도량에서 처음 정각을 이루고 천 장 길이 노사나불의 몸을 드러내시어 41위 법신 대사와 천룡팔부가 일시에 에워쌌으니, 이것이 제2구이다. 그러므로 인천의 스승이라 한 것이다.’16) 처음 정각을 이룬 것이 여래가 깨달은 경지이므로 제2구에서 알아차린 것이라 하였다. 법신 대사와 천룡팔부운운한 것은 정각을 이룬 후에 방편(戈甲)을 시설하고 화엄을 설하신 때17)이므로 인천의 스승이라 한다.
향엄 지한香嚴智閑이 ‘지난해의 가난은 가난이 아니요, 올해의 가난이 진실로 가난이라네.’라고 하자 앙산 혜적仰山慧寂은 ‘여래선이라면 사형師兄이 이해했다고 허여하겠지만, 조사선이라면 꿈에도 알지 못했다.’라고 하였다.18) 일우가 말하였다. ‘이것은 능지能知와 소지所知를 모두 잊고 여래선을 성취한 것이니 인천의 스승으로서의 본보기이다.’향엄이 깨달은 경지는 제2구에서 알아차린 것이므로 여래선을 성취하였다고 하고, 이와 같이 깨닫고서 방편을 시설하였으니 인천의 스승이라 할 만하므로 인천의 스승으로서의 본보기라 한 것이다.19)

 조사가 전한 깨달음의 경지를 조사선이라 한다: 혜가가 달마에게 물었다. ‘이제 정법을 부촉하는 것에 대해서는 묻지 않겠습니다. 석가와 조사(釋祖)20)는 누구에게 전하였고 어디에서 얻은 것입니까?’달마가 말하였다. ‘인도의 여러 조사들이 전하신 말씀 몇 편이 있으니, 이제 그대에게 말해 주리라.’송으로 읊었다. ‘진귀 조사가 설산에 있으면서, 총림의 방장에서 석가를 기다렸네. 조사의 심인을 임오년에 전해 받아 수지하였으며, 동시에 조사의 종지를 마음으로 얻었네.’
진귀 조사는 문수보살이 이와 같이 화현하여 칠불七佛의 조사가 되었으니 이는 법을 전한 사람이고, 설산과 총림의 방중은 법을 전한 곳이며, 임오년은 법을 전한 때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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臨濟云第二句薦得與人天爲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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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愚釋云如來在寂滅場中初成正
010_0654_a_03L現千丈盧舍那身四十一位法身
010_0654_a_04L大士及天龍八部一時圍遶是第
010_0654_a_05L二句故云人天爲師謂初成正覺
010_0654_a_06L即如來悟底是第二句薦得也法身
010_0654_a_07L大師 天龍八部云云成正覺後
010_0654_a_08L施設戈甲說華嚴時也故云人天爲
010_0654_a_09L香嚴曰去年貧未是貧今年貧
010_0654_a_10L直是貧仰山曰如來禪即許師兄會
010_0654_a_11L祖師禪未夢見在一愚云此是能所
010_0654_a_12L二知俱忘成就如來禪爲人天師之
010_0654_a_13L榜樣謂香嚴悟底是第二句薦得
010_0654_a_14L故云成就如來禪如是悟之施設方
010_0654_a_15L便堪與人天爲師故云爲人天師之
010_0654_a_16L榜樣

010_0654_a_17L
祖師傳底名祖師禪者慧可問達摩
010_0654_a_18L今付正法即不問釋祖傳何人得何處
010_0654_a_19L達摩曰天竺則諸祖傳說有篇吾今爲
010_0654_a_20L汝說示頌曰眞歸祖師在雪山叢木
010_0654_a_21L房中待釋迦傳持祖印壬午歲心得同
010_0654_a_22L時祖宗旨

010_0654_a_23L
眞歸祖師文殊菩薩如是化現
010_0654_a_24L七佛祖師也此能傳之人雪山及叢
010_0654_a_25L木房傳法之處壬午歲傳法之時

010_0654_b_01L조사의 심인은 전한 법이다.
전한 법과 아울러 전한 사람을 기준으로 삼는 한에서 조사선이라 한다. 여기서 선은 전하는 대상인 심법을 뜻한다. 조사의 종지란 향상일규를 가리킨다. 사람마다 본래 각각 원만히 성취하여 갖추고 있으며21) 다른 사람에게서 얻은 것이 아니므로 아래로 조사의 심인을 전해 수지할 때에 다만 자기 마음으로 이 종지를 터득할 뿐이다. 임오년에 대해 설명한다. 공자는 ‘하나라의 역수曆數를 행해야 한다.’22)라고 하였는데, 하나라는 인월寅月(음력 정월)을 한 해의 첫 달로 삼았다. 한나라 무제 때 태초력太初曆23)을 만든 이후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하나라 때의 역수를 행하고 있으니 지금 행하고 있는 하나라 역법으로 치면 축월丑月이 임오년 마지막 달인 납월이 된다.
임제 의현이 말하였다. ‘제1구에서 알아차리면 불조佛祖24)의 스승이 될 만하다.’
일우가 말하였다. ‘이 구절에서 알아차리면 비로자나불 이상으로 향상하는 경지(毘盧向上)를 지름길로 밟아서 조사의 심인을 곧장 꿰차리라. 그런 까닭에 불조의 스승이 될 만하다고 한 것이다.’25) 조사의 심인을 곧장 꿰차므로 조사선이라 하고, 비로자나불 이상으로 향상하는 경지를 지름길로 밟는다는 말은 본분사를 깨달았다는 의미이다. 불조를 새롭게 훈습하여 자신의 위풍 아래에 두고 시자로 삼기 때문에 불조의 스승이라 한다.
진성왕이 이미 선과 교의 다른 뜻을 물었는데 (범일 국사는) 세존이 오도悟道한 일로 답하였으니 어찌 교의敎義26)가 아니겠는가?
고덕이 ‘마음에서 얻으면 세간의 거칠거나 미세한 말에 이르기까지 모두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선지이지만, 입에서 잃으면 염화미소拈花微笑도 도리어 교의 자취일 뿐이다.’27)라고 한 말을 들어 보지 못하였는가. 그러므로 세존이 오도한 것은 마음에서 얻은 것이므로 여래선이다.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세존의 오도가 마음에서 얻은 것이 아니란 말인가. 그러므로 진성왕이 설령 선과 교의 다른 뜻을 물었다고는 하지만 속뜻은 진실로 선을 물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어찌 부처님이 49년 동안 설하신 말씀이 교임을 알지 못하였겠는가. 그러므로 범일 국사의 답에서 말한

010_0654_b_01L祖印是所傳之法今約所傳之法
010_0654_b_02L能傳之人故名祖師禪也禪是所傳
010_0654_b_03L之心法也祖宗旨即向上一竅
010_0654_b_04L人本具箇箇圓成不從人得故傳
010_0654_b_05L持向下祖印之時秖自心得此宗旨
010_0654_b_06L壬午歲者孔子曰行夏時夏以
010_0654_b_07L寅月爲歲首自漢武帝太初曆後至
010_0654_b_08L今行夏時以今所行言之故丑月爲
010_0654_b_09L壬午臘月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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臨濟云第一句薦得與祖佛爲師

010_0654_b_11L
一愚云此句下薦得徑踏毘盧向上
010_0654_b_12L直佩祖師心印故云與祖佛爲師
010_0654_b_13L直佩祖師心印故名祖師禪徑踏毘
010_0654_b_14L盧向上則是悟本分故新熏佛祖
010_0654_b_15L立下風爲侍者故云爲佛祖師

010_0654_b_16L
眞聖旣問禪敎兩義則答中世尊
010_0654_b_17L悟道豈非敎義耶豈不聞道
010_0654_b_18L德云得之於心則乃至世間麤言細
010_0654_b_19L皆爲敎外別傳禪旨失之於口
010_0654_b_20L則拈花微笑却爲敎跡然則世尊悟
010_0654_b_21L得之於心故爲如來禪也若謂
010_0654_b_22L不然世尊悟道不得於心耶故知眞
010_0654_b_23L聖雖問禪敎兩義意實問禪豈不
010_0654_b_24L知四十九年說是爲敎也故梵日答

010_0654_c_01L세존의 오도는 여래선을 밝힌 것이고, 조사가 뜻을 전한 일은 조사선을 밝힌 것이다.
세존의 오도나 조사가 뜻을 전한 일이나 모두 마음에서 얻은 것을 선이라고 여긴다면 과연 말한 대로 입에서 잃으면 교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경에 ‘증득한 그대로 화엄을 설하였다.’라고 하였는데, 『화엄경』에서 어떤 법이 여래가 깨달은 법이고 어떤 법이 조사가 전한 법인가?
청풍 법사는 제2구를 해석하기를, ‘이에서 가려낸다면 이체理體(理性)가 변함없음이 끝이 없고 차별적 현상(事相)은 밖이 없이 넓음을 깨달아 바른 지각知覺을 갖추게 된다.’28)라고 하였다. 『염송설화』에서도 ‘교가敎家에서는 사사무애事事無礙를 설하고 선가禪家에서는 사사무애를 실행한다.’29)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사무애理事無礙를 설하는 것은 여래의 깨달은 경지이고 사사무애를 설하는 것은 조사가 전한 경지임을 알 수 있다.
이미 여래선과 조사선이라는 두 이름이 붙게 된 까닭을 알았다면, 말해 보라. 이름의 뜻은 어떠한가? 『염송설화』에서는 다음과 해석하였다.30) “여래선은 산은 산 그대로 좋고 물은 물 그대로 좋으니 법 하나하나가 모두 그대로 진실하다는 견해이고, 조사선은 뿌리까지 통째로 뽑아 버려 잡고서 분별할 수단을 전혀 남기지 않는다.앞의 구절은 법체를 드러내 거론한 것이고, 뒤의 구절은 경법經法과 구별하여 가리킨 것이다.이를테면 『금강경』에서 ‘모든 상을 상이 아니라고 보면 부처님의 뜻을 알게 될 것’이라고 운운한 말은 여래선의 입장을 나타내고, 법안法眼이 ‘만약 모든 상을 상이 아니라고 보면 부처님의 뜻을 알지 못할 것’이라고 (경전과 다르게) 한 말은 조사선의 입장을 나타낸다.앞의 구절은 경문과 다르게 지시한 것이고, 뒤의 구절은 불법과 완전히 구분한 것이다.또한 불법에 드러낼 측면이 있는 것을 여래선이라 하고, 불법에 드러낼 측면이 조금도 없는 것을 조사선이라 한다.”또한 고덕 31)이 ‘하늘이 땅이고 땅이 하늘이니 하늘과 땅이 자리를 옮기고, 물이 산이고 산이 물이니 물과 산이 공’이라고 한 것은 여래선이며, ‘하늘은 하늘이고 땅은 땅이니 언제 자리를 옮긴 적이 있으며, 물은 물이고 산은 산이니 각각이 완연하다.’라고 한 것은 조사선이다.세간의 법에 의거하였다.
2. 삼처전심
세 곳에서 전한 교敎 밖의 종지(敎外傳三處)가 일미선一味禪32)이다. 달마가 이 땅에 찾아온 까닭은 물병을 기울여 다른 물병으로 물을 옮기듯이33) 그 종지를 고스란히 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교외별전이란 무엇인가? 『조문간정록祖門刊正錄』34)

010_0654_c_01L世尊悟道明如來禪祖師傳旨
010_0654_c_02L明祖師禪也世尊悟道祖師傳旨
010_0654_c_03L皆是心得爲禪果如所言其失之於
010_0654_c_04L口爲敎者經云如證說華嚴華嚴中
010_0654_c_05L何法爲如來悟底何法爲祖師傳底
010_0654_c_06L風釋第二句云於此辨得
010_0654_c_07L理性無邊事相無外具正知覽說話
010_0654_c_08L敎說事事無碍禪行事事無礙
010_0654_c_09L知說理事無碍是如來悟底說事事
010_0654_c_10L無礙是祖師傳底也

010_0654_c_11L
已知如來祖師二禪之所以得名且道
010_0654_c_12L名下之義如何說話云如來禪者
010_0654_c_13L山水水法法全眞也祖師禪者和根
010_0654_c_14L拔去了沒巴鼻也上標擧法體
下類指經法
如經云
010_0654_c_15L見諸相非相即見如來云者是如來禪
010_0654_c_16L法眼云若見諸相非相即不見如來云
010_0654_c_17L是祖師禪也上別指經文
下通類佛法
又佛法有頭
010_0654_c_18L角邊謂之如來禪佛法無頭角邊
010_0654_c_19L之祖師禪也又古德云天地地天天地
010_0654_c_20L水山山水水山空云者是如來禪
010_0654_c_21L天天地地何曾轉水水山山各宛然云
010_0654_c_22L是祖師禪也此約
世法

010_0654_c_23L
敎外傳三處是爲一味禪達摩來此土
010_0654_c_24L如水瓶瓶傳敎外別傳者祖門刊正錄

010_0655_a_01L ‘교는 말이 있는 경계에서 말이 없는 경계에 이르는 것이고, 마음은 말이 없는 경계에서 말이 없는 경계에 이르는 경계이다. 말이 없는 경계에서 말이 없는 경계에 이른다면 누구도 그 경계를 무엇이라 규정할 수 없어서 억지로 선이라 일컫는 것일 뿐이며, 이것은 문자로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교 밖의 종지(敎外)라고 한다. 지위와 순서나 점차적 단계를 거치지 않고 불심종佛心宗을 깨달아 가장 빠른 길로 법인을 받으므로 별도로 전한다(別傳)라고 한다.’35)고 하였다.
 일미一味란 무엇인가: 『화엄경소』에 “바다가 비록 광대하지만 짠맛은 동일하다. 또한 모든 약은 한곳에서 찌니 그 맛이 다르지 않다.”36)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일미라고 한다. 여기서 일미란 맛이 없는 맛(無味之味)을 뜻한다. 그러므로 『염송설화』에서 “옛사람이 말하였다. ‘눈앞에 미세한 티끌 하나도 아른대는 모습이 보이지 않고, 맑은 바람과 밝은 달만이 쓸쓸하도다. 담담함 가운데 숨은 맛37)을 그대는 아는가? 이것이 바로 장로長蘆의 일미선이라네.’”38)라고 한 것이다. 진정 극문眞淨克文 선사의 송에 “해인삼매 가운데 삼종세간이 드러나니, 삼종세간이 모두 다함이 없구나. 다함 없는 본성의 바다가 한맛을 머금었으나, 그 한맛 또한 침몰시키는 것이 나의 선이다.”라 하였으니 한맛을 머금었다는 것은 『화엄경소』에서 말한 일미요, 한맛조차 물속에 침몰시키는 것은 바로 장로의 일미선이다.39)
1) 세존의 삼처전심
 삼처전심이란 무엇인가: 상기하였듯이 세존이 깨닫고샛별을 보고 오도한 것나중에 그것을 전해 받았으니조사의 심인을 전해 받아 수지한 것이것으로써 세 곳에서 전한 일을 말한다.
첫째, 다자탑 앞에서 인천에게 설법할 때 가섭이 뒤늦게 이르자 세존이 즉시 자리를 나누어 앉게 하신 일(分座)이다. 자리는 법공法空의 자리40)이므로 살인도殺人刀를 나타낸다. 『염송설화』에서는 다만 ‘살인도로 마음을 전한 것’41)이라 하였고 송으로 읊은 구절은 없다. 우선 여자출정女子出定 공안에서 선정에 들어간 것을 먼저 송으로 ‘겹겹의 누각은 화장세계와 같고, 자라장紫羅帳42) 속에 진주를 뿌린 격이다.’43)라고 한 구절을 끌어와 이 살인도를 읊은 것으로 여겼다. 이 송은 살殺의 뜻을 염롱한 것이다.
두 번째는 영산회상에서 설법할 때 하늘에서 네 가지 꽃비가 내렸는데, 세존이 곧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자 가섭이 미소한 일이다. 꽃은 매우 다양하므로 활인검活人劒을 나타낸다.

010_0655_a_01L敎也者自有言至於無言者也
010_0655_a_02L也者自無言至於無言者也自無言至
010_0655_a_03L於無言則人莫得而名焉故强名曰禪
010_0655_a_04L此非文字所可擬議故曰敎外以不歷
010_0655_a_05L位次階級而悟佛心宗徑受法印故曰
010_0655_a_06L別傳一味者華嚴疏云如海雖廣
010_0655_a_07L一醎味又如衆藥煮之一器其味無別
010_0655_a_08L故云一味然此云一味者無味之味也
010_0655_a_09L故說話云古人云不見纖塵到眼前
010_0655_a_10L風明月兩蕭然淡中有味君知否箇是
010_0655_a_11L長蘆一味禪眞淨禪師頌云海印定中
010_0655_a_12L三種現三種世間皆無盡無盡性海合
010_0655_a_13L一味一味相沉是我禪合一味者是華
010_0655_a_14L嚴疏一味一味相沉處是長蘆一味禪

010_0655_a_15L
三處傳心者世尊如上悟之見星
悟道
受之
010_0655_a_16L傳持
祖印
以是而傳之三處在多子塔前
010_0655_a_17L爲人天說法迦葉後至世尊遂分座令
010_0655_a_18L座是法空座故表殺人刀也說話
010_0655_a_19L但云是殺人刀傳心而無頌句古引
010_0655_a_20L女子出定話中先頌入定云樓閣重重
010_0655_a_21L華藏界紫羅帳裏撒眞珠之句以爲此
010_0655_a_22L殺人刀頌盖此頌拈弄殺義也在靈
010_0655_a_23L山說法天雨四花世尊遂拈花示衆
010_0655_a_24L迦葉微笑花是許多般故表活人劒也

010_0655_b_01L『염송설화』에서는 ‘활인검으로 마음을 전한 것’44)이라 하고, 송으로 ‘사오백 가지 꽃과 버들 핀 마을이요, 이삼천 곳곳에 피리와 거문고 소리 들리는 누각이로다.’45)라고 하였다.
세 번째는 니련하泥蓮河46) 주변 사라쌍수 사이에서 열반에 드신 후에 이레가 지나 가섭이 이르러 관 주위를 세 번 도는 예를 올리자 세존께서 바로 관 밖으로 두 발을 내어 보이신 일이다. 가섭이 예를 갖추어 삼배한 것에 대해 『염송설화』에서는 다만 송으로 ‘무소가 달빛을 즐기다가 뿔에 무늬가 생겼고,어둠 가운데 밝음이 있으니 살 그대로의 활인 소식이다.코끼리는 천둥소리에 놀라 상아에 꽃 그림 새겨진 격이다.밝음 가운데 어둠이 있으니 활 그대로의 살인 소식이다.47)라고 하였다. 비록 살과 활을 나란히 제시하였다는 말은 없다고 하여도 두 발을 내어 보인 뜻이 없지 않으니 살과 활을 나란히 제시하여 나타낸 것이다.
삼처전심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다양한 설이 있다. 원오 극근圜悟克勤이 승勝 수좌에게 준 법어48)에, ‘석가모니49)께서 다자탑 앞에서 당신의 자리를 나누어 앉게 한 것으로 이미 이 심인心印을 친밀히 전한 것이기에 그 뒤 꽃을 들어 보인 것은 두 번째 불필요하게 거듭된 공안이었다. 게다가 금란가사를 전하며 계족산에서 미륵불을 기다리라고 말씀하기까지 했으니, 이 정도면 펼쳐 보인 조리(節文)50)가 대단히 많다.’라고 하였다. 『염송설화』에서는 ‘이는 정통 법맥法脈을 부처님께서 간절하게 직접 전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입증하기 위한 말이었다. 임제로부터 이어진 적통의 후손(嫡孫)인 원오가 어찌 망령되게 거짓으로 떠도는 말을 하려 했겠는가!’51)라고 하였다.
2) 달마의 삼처전심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한 일은 모든 조사가 대대로 이어받아 병에서 병으로 물을 옮겨 붓듯이 고스란히 전하여 달마에게 이르렀고, 달마도 세 곳에서 전했다.
첫째, 달마가 혜가에게 물었다. ‘모든 대상이 끊어져 버렸는가?’ ‘이미 끊어졌습니다.’ ‘끊어져 아무것도 없는 경계(斷滅)에 떨어진 것은 아닌가?’ ‘끊어져 아무것도 없는 경계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모든 대상이 이미 끊어졌다고 하면서) 어떻게 그러한 경계에 떨어지지 않았다고 하는가?’ ‘분명하게 깨어 어둡지 않고, 뚜렷하게 항상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습니다.’『염송설화』에서는 ‘모든 대상이 이미 끊어졌을 때(諸緣已斷) 분별에 들어맞는 법이 하나도 없는 상태였던 것이다. 「분명하게 깨어 어둡지 않고, 뚜렷하게 항상 알고 있다.」라고 한 말은 본분사가 본체와 같다는 이치를 알았기 때문이다.향상하는 자성의 본체깨달음과 수행이 곧바로 사라지면서 여래선을 증득하였다는 말이다.’52)라고 하였다.
둘째, 혜가가 물었다. ‘모든 부처님의 법인法印을 들려주시겠습니까?’

010_0655_b_01L說話云是活人劒傳心又頌云四五
010_0655_b_02L百條花柳巷二三千處管絃樓泥蓮
010_0655_b_03L河畔1) [1] 羅雙樹間入涅槃經七日
010_0655_b_04L迦葉至繞棺三匝世尊遂槨示雙趺
010_0655_b_05L葉作禮三拜說話但頌云犀因玩月紋
010_0655_b_06L生角暗中有明
即殺之活
象被雷驚花入牙明中有暗
即活之殺

010_0655_b_07L雖無殺活齊示之言雙趺意不無表殺
010_0655_b_08L活齊示也

010_0655_b_09L
三處傳心古有多說然圓悟示勝首
010_0655_b_10L座法語云釋迦文多子塔前分座
010_0655_b_11L密授此印爾後拈花是第二重公案
010_0655_b_12L至於付金襴雞足山中候彌勒者
010_0655_b_13L少節文也說話云此爲明證勤親
010_0655_b_14L傳正脉爲臨濟嫡孫豈肯妄爲無實
010_0655_b_15L遊言乎

010_0655_b_16L
三處傳心諸祖相承如缾注瓶至于
010_0655_b_17L達摩達摩亦傳之三處祖問慧可
010_0655_b_18L諸緣斷否可曰已斷祖云莫落斷滅否
010_0655_b_19L可曰不落祖云爲什麽不落可曰明明
010_0655_b_20L不昧了了自知言不可及說話云
010_0655_b_21L緣已斷時無一法可當情明明不昧
010_0655_b_22L了了自知者知有本分事與體一般

010_0655_b_23L自性
以悟修斯亡乃證得如來禪
010_0655_b_24L諸佛法印可得聞乎祖云諸佛法印

010_0655_c_01L‘모든 부처님의 법인은 남에게서 듣지 못한다.’ ‘저의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니 스님께서 편안하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가져오면 그대를 편안하게 해 주겠다.’ ‘마음을 찾았으나 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대에게 이미 마음을 편하게 해 주었구나.’혜가가 예배하였다. 달마는 ‘그대는 어떤 도리를 깨달았기에 절을 올리느냐?’라고 물었고, 혜가는 ‘분명하게 깨어 어둡지 않고, 뚜렷하여 항상 알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염송설화』에서는 ‘그 자리에서 마음을 편안히 하고 모든 부처님이 전한 마음의 본체를 깨달았다. (이 때문에) 앞에서 터득한 이해가 더욱 밝아져 「분명하게 깨어 어둡지 않고, 뚜렷하게 항상 알고 있다.」고 말한 뒤 마침내 조사선을 알아차렸던 것이다.’53)라고 하였다.
셋째, 달마 대사가 하루는 문인들에게 명하였다. ‘때가 다 되어 가니,54) 이제 각자 터득한 것을 말해 보겠느냐?’그때 도부道副는 피부(皮)를, 니총지尼捴持는 살(肉)을, 도육道育은 뼈(骨)를 얻었다. 마지막으로 혜가가 나와 예를 갖추어 삼배를 올리고 자리에 그대로 서 있자 달마는 ‘너는 나의 골수(髓)를 얻었구나.’라고 하였다. 『염송설화』에서는 ‘종문이류宗門異類’라고만 하고 두 가지 선(여래선과 조사선)을 가지런히 얻었다고 말하지 않았으나, 이미 세 번째에서 마음을 전하였음을 허여하였다면 삼배에 뜻이 없지 않으니 두 가지 선을 가지런히 얻었음을 나타낸다. 또 ‘예를 갖추어 삼배를 올리고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던 것’은 전수라는 자취에 구애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염송설화』에서는 ‘예를 갖추어 삼배를 올리고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던 것’에 대해 ‘그 뜻을 대충 넘겨짚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자세히 살펴야 한다.’55)라고 하였다.
『염송설화』에서는 ‘이류異類에는 네 가지가 있다.56) 첫째 왕래이류. 상相이 항상 윤회의 세계로 왕래하는 것을 류類라 하고 성性이 자신의 본질을 잃지 않는 것을 이異라 한다. 둘째 보살이류. 육도로 윤회하는 중생과 흡사한 외형을 가리켜 류類라 하고, 생사윤회와 동화되지 않는 자기 자신은 이異라 한다. 셋째 사문이류. 털옷을 입고 머리에 뿔을 단 모습을 류類라 하고 바뀌지 않는 이치를 분명히 아는 것은 이異라 한다. 넷째 종문이류. 언어로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경계를 가리켜 류類라 하고, 지혜로도 도달하지 못하는 경계는 이異라 한다.’57)라고 하였다. 여기에서의 종문이류는 혜가가 나와 예를 갖추어 삼배를 올리고 뭇사람이 모두 보았으니

010_0655_c_01L匪從人得可曰我心未寧乞師安心
010_0655_c_02L祖云將心來與汝安可曰覔心了不可
010_0655_c_03L祖云與汝安心竟可禮拜祖云
010_0655_c_04L見什麽道理禮拜可曰明明不昧了了
010_0655_c_05L自知說話云當下安心悟得諸佛所
010_0655_c_06L傳心體前解轉明曰明明不昧了了
010_0655_c_07L自知遂乃會得祖師禪祖一日命門
010_0655_c_08L人曰時將至矣盍各言所得乎時道
010_0655_c_09L副得皮尼捴持得肉道育得骨最後
010_0655_c_10L慧可出禮三拜又依位而立祖曰
010_0655_c_11L得吾髓說話但云宗門異類不云二
010_0655_c_12L禪齊得然旣許第三傳心則三拜意不
010_0655_c_13L表二禪齊得也又依位而立者
010_0655_c_14L滯傳受之迹也故說話云出禮三拜
010_0655_c_15L又依位而立之義不得莽鹵直須仔細

010_0655_c_16L
說話云異類有四徃來異類 [1]
010_0655_c_17L常輪廻名爲類性不自失名爲異
010_0655_c_18L菩薩異類形似六道衆生名爲類
010_0655_c_19L自己不同生死名爲異沙門異類
010_0655_c_20L披毛戴角名爲類明得不變易
010_0655_c_21L爲異宗門異類言語能及名爲
010_0655_c_22L智不到處名爲異也此中宗門
010_0655_c_23L異類者意謂出禮三拜衆人皆見
010_0655_c_24L「婆」疑「娑」{編}

010_0656_a_01L언어로 미칠 수 있었으므로 류類라고 생각한다. 스승과 제자가 상견하였을 때 뭇사람이 헤아릴 수 있는 경지가 아니라면 이는 지혜로도 이르지 못하는 경지이므로 이異라고 한다.
3. 살인도와 활인검
『염송설화』에서 세존이 마음을 전한 것에 대해 ‘살인도와 활인검을 전했다.’고 해석한 것은 깨달은 법과 전해 받은 법에 의거하여 이름을 붙인 것이다.스승의 입장에서는 전傳이라고 한다.달마가 마음을 전한 것에 대해서는 ‘여래선과 조사선을 얻었다.’고 해석한 것은 깨달은 사람과 전한 사람에 입각하여 이름을 붙인 것이다.제자의 입장에서는 득得이라고 한다.이름은 비록 다르지만 뜻에는 다름이 없으므로 나는 살殺은 여래의 깨달은 경지이므로 여래선이라 하고, 활活은 조사가 전한 경지이므로 조사선이라 생각한다.
살殺이 여래가 깨달은 경지가 아니고 활活이 조사가 전한 경지가 아니라면 살활의 법이 어디에서 나왔겠는가? 또 여래선이 여래가 깨달은 경지가 아니고, 조사선이 조사가 전한 경지가 아니라면 두 가지 선의 이름은 무엇에 근거하여 붙인 것인가? 그러나 나 스스로 온전하다고 감히 장담하지 못하니, 다른 뜻이 있다면 밝은 눈으로 상세히 지시해 보라.
처음부터 살활을 전한 것 외에 또 전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이것은 사람마다 본래 각각 원만히 성취하여 갖추고 있는 것이니, 각자 그 본분상에 본래 스스로 갖추고 있기 때문에 ‘본분本分’이라고 한다. 전해 받은 본분이 없는 까닭은 다만 스스로 마음으로 터득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동시에 조사의 종지를 마음으로 얻었다.’58)고 한 것이다. 이 조사의 종지란, 향상하는 본분이며 체體도 있고 용用도 있다. 용은 가령 임제가 말한 진불眞佛·진법眞法·진도眞道 따위가 그것이다.59) 체란 셋이면서 하나이니, 모두 공이면서 실유實有가 없는 것이다. 규봉 종밀圭峰宗密은 ‘구리 거울의 질료는 자성의 본체이고, 구리 거울의 밝은 속성은 자성의 작용이며, 나타나는 영상을 밝게 비추는 것은 인연에 따르는 작용이다.’60)라고 하였다.
규봉이 공적空寂을 체로 삼고 영지靈知를 자성의 작용으로 삼은 것은

010_0656_a_01L則是言語所及故名爲類師資相見
010_0656_a_02L非衆人所可測則是智不到處
010_0656_a_03L故名爲異也

010_0656_a_04L
說話釋世尊傳心云傳殺人刀活人劒
010_0656_a_05L約所悟所受之法以立名也在師邊
云傳

010_0656_a_06L釋達摩傳心云得如來禪祖師禪者
010_0656_a_07L能悟能傳之人以立名也在資邊
云得
名雖有
010_0656_a_08L義則無別故余以爲殺是如來悟底
010_0656_a_09L故名如來禪活是祖師傳底故名祖師
010_0656_a_10L

010_0656_a_11L
若殺非如來悟底活非祖師傳底
010_0656_a_12L活之法從何而來又如來禪非如
010_0656_a_13L來悟底祖師禪非祖師傳底二禪
010_0656_a_14L之名據何而立耶然不敢自全
010_0656_a_15L有他意明眼詳示

010_0656_a_16L
上來所傳殺活外又有不傳底此是人
010_0656_a_17L人本具箇箇圓成各其分上本自具
010_0656_a_18L故名爲本分此無傳受分只自心
010_0656_a_19L得而已故云心得同時祖宗旨此祖宗
010_0656_a_20L即向上本分而有體有用用者
010_0656_a_21L臨濟所謂眞佛眞法眞道此也體者
010_0656_a_22L即一皆空而無實有者也圭峯云
010_0656_a_23L銅鏡之質是自性體銅鏡之明是自
010_0656_a_24L性用明所現影是隨緣用

010_0656_a_25L
圭峯以空寂爲體以靈知爲自性

010_0656_b_01L자종自宗에서 이해하는 방식이다. 석두 희천石頭希遷은 다만 공적의 체만 진실이라 인정하였고, 마조 도일馬祖道一(洪州)은 다만 자성의 작용이 인연을 따르는 작용이라는 측면만 진실이라 인정하였다. 구리 거울로 체와 용을 비유한 것은 지금 이 뜻을 끌어온 것이니, 그렇다면 석두와 마조가 도리어 하택 신회荷澤神會에 미치지 못하는 것인가?
규봉은 ‘현교顯敎와 밀교密敎가 비록 다르지만 전한 법의 본체에 다름이 있는 것이 아니다.’61)라고 하였다. 현전顯傳은 설하여 드러내 전하는 방식이며 다만 그 소이연을 알 뿐이다. 밀전密傳은 말없이 친밀하게 딱 들어맞아 직접 그 본체를 증득하는 것이다.62) 이것이 공적영지空寂靈知의 본성이다. 무릇 마음을 가진 이라면 그 누구에게 그것이 없겠는가? 그러나 범부는 이 영지의 본성이 있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택이 말로써 드러내 전한 것을 가리켜 ‘지知라는 한 글자는 온갖 미묘한 이치가 출입하는 문이다.’63)라고 한 것이다. 다만 이 영지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지만 스스로 직접 증득하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 그대로 부처(卽心卽佛)라는 뜻을 알지 못하고 돈오니 점수니 하는 이해에 얽매이는 것이 의리선이다.
청원 행사淸源行思가 ‘성제聖諦64)도 행하지 않았거늘 떨어질 계급이 어디 있겠습니까?’65)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깨달음과 수행의 점차적 단계에 떨어지지 않고 그 본체를 직접 증득한다는 의미이다. 남악 회양南嶽懷讓은 ‘하나의 그 무엇이라 말해도 맞지 않습니다.’66)라 하였는데 이것은 뿌리까지 통째로 뽑아 버려 잡고서 분별할 수단을 전혀 남기지 않은 것으로서 남김 없는 작용(大用)이 눈앞에 실현된 것이며, 이것은 또한 자성의 작용이 인연에 따르는 작용으로 나타난 결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청원과 남악은 그 체와 용을 친밀히 증득하여67) 단번에 여래의 경지로 뛰어넘어 들어간 것이니 이것이 격외선이다. 그러므로 전한 법의 체는 같다고 해도 현교와 밀교가 현격히 다른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보다 더하다.
또 살인도를 진금포眞金鋪68)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향상하는 본분의 체體와 같다. 그러므로 『염송설화』에서는 달마가 첫 번째로 마음을 전한 일화를 해석하여 ‘모든 대상이 이미 끊어졌을 때 분별에 들어맞는 법이 하나도 없는 상태였던 것’이라 하고, ‘분명하게 깨어 어둡지 않고, 뚜렷하게 항상 알고 있다.’는 혜가의 말에 대해서는 ‘본분사가 본체와 같다는 이치를 알았기 때문’이라고 한 것이다.69)

010_0656_b_01L爲自宗所解之法石頭但認空寂
010_0656_b_02L之體洪州但認自性用之隨緣用
010_0656_b_03L銅鏡喩體用今引此義然則石頭洪
010_0656_b_04L反不及荷澤圭峯云顯密雖
010_0656_b_05L非謂所傳之法體有異謂顯傳者
010_0656_b_06L以說顯傳但知其所以然也密傳者
010_0656_b_07L默默密契親證其體也盖此空寂靈
010_0656_b_08L知之性凡有心者其誰無之然凡
010_0656_b_09L夫不知有此靈知之性故荷澤以言
010_0656_b_10L顯傳云知之一字衆妙之門此但
010_0656_b_11L知其有此靈知之性而不自親證故
010_0656_b_12L不知即心即佛之旨滯於頓悟漸修
010_0656_b_13L之解爲義理禪也淸源云聖諦尙
010_0656_b_14L不爲何階級之有此不落悟修階級
010_0656_b_15L親證其體南岳云 [2] 似一物即不中
010_0656_b_16L此和根拔去了沒巴鼻故大用現前
010_0656_b_17L此是自性用之隨緣用然則淸源南
010_0656_b_18L密證其體用一超直入如來地
010_0656_b_19L爲格外禪也故雖云所傳之法體
010_0656_b_20L是同顯密懸殊不啻若雲泥

010_0656_b_21L
又殺人刀亦名眞金鋪此與向上本分
010_0656_b_22L之體一般也故說話釋達摩第一傳心
010_0656_b_23L諸緣已斷時無一法可當情明明
010_0656_b_24L不昧了了自知者知有本分事與體

010_0656_c_01L이러한 경지에서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며, 일체의 대상 경계 하나하나가 모두 참되어 온 세상 전체가 한 덩이 금과 같으므로 진금포라 하고, 또한 분별에 들어맞는 법이 하나도 없는 상태이어서 부처나 조사일지라도 몸을 들여놓을 여지가 없으므로 ‘부처도 때리고 조사도 때릴 것70)이니, 진인眞人71) 앞에서 거짓을 말하지 말라.’72)고 하는 것이다. 때린다는 것은 때려죽인다는 말이다. 불조를 새롭게 훈습한 사람을 때려죽이는 수단이므로 살인도라 한다. 세존이 태어났을 때, 한 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며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 오직 나만이 존귀할 뿐이다.’라고 한 말에 대해 운문 문언雲門文偃이 ‘내가 당시에 그 광경을 보았다면 한 방에 때려죽였으리라.’73)라고 운운한 말이 이 뜻이다.
활인검은 잡화포雜貨鋪74)라고도 한다. 이것은 향상하는 자성의 작용이 인연에 따르는 작용으로 나타난 경우이다. 이 경지에서는 뿌리까지 통째로 뽑아 버려 잡고서 분별할 수단을 전혀 남기지 않으므로 남김 없는 작용이 눈앞에 실현된 상태가 십자가두에서 풍류를 싸게 파는 것과 같으므로 잡화포라고 한다. 또한 부처도 뚜렷하고 분명하며 조사도 뚜렷하고 분명하므로 ‘부처도 안착시키고 조사도 안착시키니, 납승의 배 속은 드넓은 바다와 같다.’라고 하는 것이다. 안착시킨다는 것은 안착시켜 살린다(安活)는 말이니, 불조를 안착시켜 살리는 사람의 수단이므로 활인검이라고 한다. 각각 그 자리에 안착시켜 그 무엇도 전혀 흔들지 못하게 한다는 말이 이것이다.75)
도刀와 검劒을 살과 활에 비유하였는데 사람을 죽이는 칼이야 있지만 도대체 어디에 사람을 살리는 검이 있단 말인가?
옛날에 명장이 병사를 이끌고 오랑캐 땅에 들어갔는데 가뭄을 만나 물이 없자 일군의 병사가 얼마나 죽었는지 모른다. 장군이 검을 빼어 들고 큰 소리로 땅을 가르자 물이 검을 따라 용솟음쳤고, 병사들이 모두 곧장 활기를 얻었다. 장군이 말하였다. ‘이 검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이로써 보건대 어찌 사람을 살리는 검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살인도를 진금포라고도 하니 이것은 체요, 활인검을

010_0656_c_01L一般到這裏山山水水法法全眞
010_0656_c_02L盡大地一挺金故名曰眞金鋪亦是無
010_0656_c_03L一法可當情則佛祖容身無地故云佛
010_0656_c_04L也打祖也打眞人面前休說假謂打
010_0656_c_05L打殺也打殺新熏佛祖之人故云殺人
010_0656_c_06L如世尊初生時一手指天一手指
010_0656_c_07L地云天上天下唯我獨尊雲門云
010_0656_c_08L當時若見一棒打殺云者是也活人劒
010_0656_c_09L亦名雜貨鋪此是向上自性用之隨緣
010_0656_c_10L到這裏和根拔去了沒巴鼻故
010_0656_c_11L用現前是十字街頭賤賣風流故名
010_0656_c_12L曰雜貨鋪亦是佛也端端的的祖也端
010_0656_c_13L端的的故云佛也安祖也安衲僧肚
010_0656_c_14L1) [2] 如海寛謂安安活也安活佛祖之
010_0656_c_15L故云活人劒如各安其位摠不動
010_0656_c_16L着者是也

010_0656_c_17L
以刀劒喩殺活殺人刀可有而何
010_0656_c_18L處有活人劒耶古之名將率兵入
010_0656_c_19L胡地臨渴無水一軍幾死將軍以
010_0656_c_20L劒大呼斫地水隨劒涌兵皆快活
010_0656_c_21L將軍曰此劒亦能殺人亦能活人
010_0656_c_22L以此觀之豈無活人劒耶然殺人刀
010_0656_c_23L亦名眞金鋪是體也活人劒亦名
010_0656_c_24L「裹」疑「裏」{編}

010_0657_a_01L잡화포라고도 하니 이것은 용이다. 체에는 용이 없는 체도 있으므로 (이 경우) 살은 오로지 죽이는 살이지만, 용에 체가 없는 용은 없으므로 활은 반드시 살을 겸비한다. 그러므로 도와 검 두 글자는 그 선법의 우열을 말하고, 진과 잡 두 글자는 그 선법을 단독으로 하는가 겸비하는가를 말한다.
4. 선의 전수
삼십삼조사가 모두 마야부인의 배 속에서 기별記別을 받았으니, 28대 조사는 서천에서 났고 6대 조사는 중국 땅에서 났다. 『부법장인연전』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서천 제27조 반야다라般若多羅 존자가 말하였다. 「우리 부처는 도솔타천에서 내려와 마야부인의 태 속으로 들어갔다. 33 인에게 모두 현기懸記76)를 주며 말하기를, 내게 심법이 있으니 모두 너희에게 부촉한다, 각자 때를 기다려(候時)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전하여 종지를 은밀히 수호하고 단절되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다. 송으로 읊었다. 마야부인 배 속의 전당은, 법계의 본체와 똑같으니, 서른세 명의 조사에게, 동시에 직접 수기 주었네.」’77)
서천이십팔조는 가섭으로부터 달마에 이르기까지의 28조를 가리킨다. 그중 제12조 마명馬鳴보살은 『감자론甘蔗論』과 『기신론』 등을 지어78) 여래장연기종如來藏緣起宗79)을 밝혔기에 법성종法性宗의 종주라 한다. 제14조 용수龍樹보살은 용궁에 들어가 『삼본화엄경三本華嚴經』80)을 보고 하본에서 초출抄出하여 약본 『화엄경』을 갖추어 인간 세상에 퍼뜨렸다. 또 『지도론』 등 수십 부를 지어 아我와 법法이 모두 없음을 밝힌 종宗이므로 공종空宗81)의 종주라 한다.
제22조 마나라摩拏羅 존자가 좌타구파左陀瞿頗 존자를 방계로 배출(傍出)82)한 다음 법을 전해 제납박타提納薄陀 존자에 이르렀는데,83) 그의 호는 지공指空84)이며 서천 108대 조사이다. 제24조 사자師子 존자는 달마달達摩達을 방계로 배출하였다.85) 유자후柳子厚86)가 「남악비南嶽碑」를 지었는데, ‘가섭으로부터 사자존자 24대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잇닿아 전해져 달마에게 이르렀고 5조 홍인弘忍에 이르러서는 더욱 성대해져 신수神秀와 혜능慧能이 나왔다.’고 하였다.

010_0657_a_01L雜貨鋪是用也而以體有無用之體
010_0657_a_02L故殺是單殺用無無體之用故活必
010_0657_a_03L兼殺然則刀劒二字言其優劣
010_0657_a_04L雜二字言其單兼也

010_0657_a_05L
卅三諸祖師受記摩耶肚四七在西天
010_0657_a_06L二三出漢土付法藏傳云西天二十七
010_0657_a_07L般若多羅尊者云我佛從兠率陀天
010_0657_a_08L摩耶胎中與三十三人摠授懸記云
010_0657_a_09L吾有心法摠付於汝各各候時當一
010_0657_a_10L人傳一人密護宗旨勿令斷絕頌曰
010_0657_a_11L摩耶肚裏堂法界體一如卅三諸祖師
010_0657_a_12L同時密授記

010_0657_a_13L
西天四七者自迦葉至達摩爲二十八
010_0657_a_14L於中十二祖馬鳴菩薩造甘蔗起信
010_0657_a_15L等論明如來藏緣起宗故爲法性宗宗
010_0657_a_16L主也十四祖龍樹菩薩入龍宮見三
010_0657_a_17L本華嚴於下本抄出畧本華嚴現行
010_0657_a_18L人間又造智度論等數十部明我法俱
010_0657_a_19L無宗故爲空宗宗主也

010_0657_a_20L
第二十二祖摩拏羅尊者傍出左陀瞿
010_0657_a_21L頗尊者傳至提納薄陀尊者號曰指空
010_0657_a_22L是爲西天百八代祖師也

010_0657_a_23L
二十四祖師子尊者傍出達摩達柳子
010_0657_a_24L厚南嶽碑云自迦葉至師子二十四世
010_0657_a_25L而離離而爲達摩至忍五世而益離離

010_0657_b_01L『역옹패설櫟翁稗說』이익재李益齋의 휘는 제현齊賢, 역옹은 그 별호이다.에 ‘달마달은 사자존자의 방출이다. 그런데 유자후가 달마달을 보리달마라고 생각하여 사자존자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잇닿아 전해져 달마에 이르렀다고 하였다.’87)며 바로잡은 내용이 있다.
규봉은 『원각경약소초』88)에서 제7조 바수밀婆須蜜을 제외하였으므로 불타난제佛陀難提가 제7조이고 사자존자는 제23조, 바사사다婆舍斯多가 제24조이다. 이하로 우바굴優婆掘이 제25조, 바수밀이 제26조, 승가라차僧伽羅叉가 제27조, 보리달마菩提達磨가 제28조이다. 여기서 우바굴은 바사사다의 방출이며 4세에 이르러 보리달마가 있게 된다. (유자후는) 규봉의 이 책에 의거해 배열했던 것이다. 그러나 제6조 미차가彌遮迦가 바수밀에게 말하기를 ‘우리 스승 제다가提多迦가 말씀하셨다. 부처님이 아난에게 「내가 멸도한 후 300년이 지나 바수밀이라고 하는 한 성인이 나타나 선맥禪脈(禪祖)에서 7대 조사가 되리라.」라고 하셨다. 그가 바로 그대이니 법을 부촉하노라.’89)라고 하였다. 그런즉 이미 여래의 현기가 있었고 또한 여러 조사가 전한 설이 있어 응당 바수밀이 제7조가 되어야 맞다. 이미 바수밀을 제7조로 삼았는데, 그 몇 세대 후에 또 바수밀이 있었다는 말인가.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낫다.
동토에 6대 조사가 있으니, 달마 대사로부터 6조 혜능에 이르기까지의 조사이다.
삼십삼조로부터 살과 활로 마음을 전함이 마치 병에서 병으로 물을 고스란히 옮겨 붓듯 하여 제종諸宗의 근본(祖)이 되었으므로 ‘조사祖師’라고 한다. 6조 후로 남악은 활인검을 얻었고 청원은 살인도를 얻어 제종이 제각각 대치하며 섰다.90) 남악 문인은 청원을 종조로 여기지 않고 청원 문인은 남악을 종조로 여기지 않으므로 선사라고 부른다.

010_0657_b_01L而爲秀爲能櫟翁稗說云李益齋諱齊賢
櫟翁其別號也

010_0657_b_02L盖有達摩達者師子之傍出而柳子以
010_0657_b_03L達摩達爲菩提達摩故云至師子而離
010_0657_b_04L離而爲達摩

010_0657_b_05L
圭峯覺鈔除第七婆須蜜故佛陀難提
010_0657_b_06L爲第七獅子尊者爲第二十三祖
010_0657_b_07L舍斯多第二十四此下出優婆掘第二
010_0657_b_08L十五婆須蜜第二十六僧伽羅叉第二
010_0657_b_09L十七菩提達摩第二十八此亦優婆掘
010_0657_b_10L婆舍斯多之傍出而至四世亦有
010_0657_b_11L菩提達摩故圭峯依而編之也然第六
010_0657_b_12L祖彌遮迦謂婆須蜜曰我師提多迦云
010_0657_b_13L佛告阿難吾滅後三百年有一聖人
010_0657_b_14L名婆須密而於禪祖當獲第七其在
010_0657_b_15L汝躬遂付法然則已有如來懸記
010_0657_b_16L有諸祖傳說當以婆須蜜爲第七也
010_0657_b_17L以婆須密爲第七其何後世又有婆須
010_0657_b_18L蜜耶乍可不知

010_0657_b_19L
東土有六祖自達摩至六祖慧能也

010_0657_b_20L
上三十三祖殺活傳心如瓶注瓶
010_0657_b_21L爲諸宗之祖故名爲祖師六祖以下
010_0657_b_22L南嶽得活人劒淸源得殺人刀諸宗
010_0657_b_23L角立如南岳門人不以淸源爲祖
010_0657_b_24L淸源門人不以南岳爲祖故名爲禪

010_0657_c_01L
삼장三藏이 일찍이 별도로 분화한 뒤로 살과 활 또한 나뉘어 전해졌다. 하택은 지해知解를 보존하였기에 의리선이다.
삼장이 별도로 분화하였다: 『도서都序』에 ‘가섭으로부터 우바국다優婆毱多에 이르기까지 모두 삼장을 겸비하여 전하다가, 제다가提多迦 이하로 승가에서 다툼이 일어 율의 가르침이 별도로 행해지게 되었고, 계빈국罽賓國(ⓢ Kāśmīra) 이래로 법난을 만나 경론이 분화되었다.’91)라고 하였다.
세존이 성도한 지 38년에 왕사성으로 가 국왕이 베푼 공양을 마치고 나서 라후라에게 발우를 씻도록 하였는데 실수로 깨뜨려 다섯 조각이 났다. 이에 부처님이 ‘내가 멸도한 후 처음 500년92) 동안은 모든 악비구가 비니장(律藏)을 나누어 오부로 만들리라.’라고 하였는데, 과연 후에 우바국다優婆毱多 문하의 500제자가 각자 한 측면에 기울어진 견해를 고집하며 율장이 오부로 갈라졌다.93)
사자존자는 북천축 계빈국에 있으면서 경론을 전하지 않고, 다만 바사사다에게 마음을 전하고는 곧장 남천축으로 가서 근기에 따라 널리 교화를 펴도록 하였다. 존자가 계빈국에 있을 때, 외도 마목다摩目多와 도락차都落遮 두 사람이 석자釋子의 형상을 빌려 변장하고는 왕궁으로 잠입하여 함께 역모하였으나 역모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왕이 노하여 ‘내가 삼보에 마음으로 귀의하였건만 어찌 해침을 꾀하여 결국에는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게 한단 말인가.’라 하고는 이에 가람을 파괴하고 석중釋衆을 제거하라 명하였고 게다가 스스로 검을 쥐고 존자의 목을 베니 우윳빛 피가 수 척 높이로 솟구쳤다.94)
 살과 활이 나뉘어 전해졌다: 『단경』에 다음과 같은 문답이 실려 있다.95) 남악 회양南嶽懷讓 선사가 숭산으로부터 오자 6조가 물었다. ‘어떤 것이 이렇게 왔는가?’ ‘하나의 그 무엇이라 말해도 들어맞지 않습니다.’ ‘수행에 의지하여 깨닫는가?’ ‘수행하여 깨닫는 일이 없지는 않지만, 오염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바로 뿌리까지 통째로 뽑아 버려 잡고서 분별할 수단을 전혀 남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활인검을 터득한 것이

010_0657_c_01L師也

010_0657_c_02L
三藏曾別化殺活又分傳荷澤存知解
010_0657_c_03L是爲義理禪三藏別化者都序云
010_0657_c_04L迦葉至毱多皆兼傳三藏提多迦以下
010_0657_c_05L因僧起諍律敎別行罽賔國已來
010_0657_c_06L王亂經論分化

010_0657_c_07L
世尊成道八年 [3] 赴王舍城國王齋
010_0657_c_08L令羅睺羅洗鉢因失手破爲五
010_0657_c_09L佛曰我滅後初五百年諸惡皆 [4]
010_0657_c_10L分毘尼爲五部果後優婆毱多
010_0657_c_11L有五百弟子各執一見分律藏爲五
010_0657_c_12L部也師子尊者在北天竺罽賔國
010_0657_c_13L不傳經論但傳心於婆舍斯多令即
010_0657_c_14L抵南天竺隨機演化尊者留罽賔時
010_0657_c_15L外道摩目多都落遮二人盜爲釋子
010_0657_c_16L形狀潜入王宮共爲謀逆事旣敗
010_0657_c_17L王怒曰吾歸心三寶何乃搆害
010_0657_c_18L至於斯即命毁伽藍除去釋衆
010_0657_c_19L自秉劒斷尊者首涌白乳數尺云爾

010_0657_c_20L
殺活分傳者壇經云懷讓禪師自嵩
010_0657_c_21L山來祖曰什麽物恁麽來師云 [5] 似一
010_0657_c_22L物即不中祖曰還可修證否師云修證
010_0657_c_23L即不無汚染即不得

010_0657_c_24L
此乃和根拔去了沒巴鼻故得活人

010_0658_a_01L조사선이다.
6조가 말하였다. ‘이렇게 오염되지 않는 일이야말로 모든 부처님이 소중히 지키신 바이다. 그대가 이미 이렇고 나 또한 그렇다.’
이것은 남김없이 그를 허여한 말이다. 그러므로 (남악은) 6조의 바른 전통(正傳)을 이었다.
청원 행사 선사가 어느 날 (6조에게) 물었다.96) ‘어떤 일에 힘써야 계급 97)에 떨어지지 않습니까?’ ‘그대는 어떤 수행을 해 왔는가?’ ‘성제聖諦도 행하지 않습니다.’ ‘어떤 계급에 떨어졌는가?’ ‘성제도 행하지 않았거늘 떨어질 계급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분별에 들어맞는 법이 하나도 없는 상태이다. 그런 까닭에 살인도를 터득한 것이 여래선이다.
6조는 청원을 큰 그릇으로 여겨 말하였다. ‘그대는 앞으로 한 지방을 나누어 맡아 교화하여 법이 단절되지 않도록 하라.’
비록 큰 그릇으로 여겨 한 지방을 나누어 맡아 교화하라고 당부하였으나,
이것은 반만 긍정한 것이므로 6조의 비정통 전수자가 되었다.
『염송설화』에서는 다음과 같이 평석하였다.98) ‘청원의 경계를 알고자 하는가? 「이렇다 해도 안 되고, 이렇지 않다고 해도 안 되며, 이렇다거나 이렇지 않다거나 모두 안 된다.」는 관점에서 보라. 청원 노선사는 나무로 깎은 나한상처럼 천태산天台山의 화정봉華頂峯에서 좌선을 하다가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나의 한입에 남김없이 삼켰거늘 어디에 교화할 중생이 남아 있겠는가!」99)라고 말했다. 회양 선사의 뜻을 알고 싶은가? 「이렇다고 해도 되고, 이렇지 않다고 해도 되며, 이렇다거나 이렇지 않다거나 모두 된다.」는 관점에서 보라. 회양 화상은 물소로 변하여100) 삼십삼천에 올라가 제석천의 콧구멍을 틀어막은101) 다음 다시 시냇물의 동쪽에서든 서쪽에서든 온몸에 진흙과 물을 묻혔다.102) 세존이 다자탑 앞과 영산회상에서 가섭에게 친밀하게 부촉하였고 가섭은 아난에게 전하였으니 한 세대에 오직 한 사람에게만 전하다가 조계 혜능에 이르러 이 두 대사(남악 회양과 청원 행사)를 얻어 법을 나누어 주었고 그들 각자 가풍을 세웠다.’

010_0658_a_01L祖師禪也

010_0658_a_02L
祖曰此是諸佛之所護念汝旣如是
010_0658_a_03L亦如是

010_0658_a_04L
此是滿口許他故爲六祖之正傳也

010_0658_a_05L
淸源行思禪師一日問云當何所務
010_0658_a_06L不落階級祖曰曾作什麽來師云聖諦
010_0658_a_07L亦不爲祖曰落何階級師云聖諦尙不
010_0658_a_08L何階級之有

010_0658_a_09L
此乃無一法可當情故得殺人刀
010_0658_a_10L來禪也

010_0658_a_11L
祖深器之曰汝當分化一方無令斷絕

010_0658_a_12L
雖深器之當分化一方此是半肯
010_0658_a_13L故爲六祖之傍傳也

010_0658_a_14L
說話云要識淸源麽伊麽也不得
010_0658_a_15L伊麽也不得伊麽不伊麽摠不得看他
010_0658_a_16L老淸源便作木羅漢向天台華頂上打
010_0658_a_17L道三世諸佛被我一口呑盡何處
010_0658_a_18L更有衆生可敎化要識讓師麽伊麽
010_0658_a_19L也得不伊麽也得伊麽不伊麽摠得
010_0658_a_20L看他讓和尙便作水牯牛上三十三天
010_0658_a_21L築着帝釋鼻孔却向溪東溪西和泥合
010_0658_a_22L世尊於多子塔前靈山會上密付
010_0658_a_23L迦葉迦葉傳阿難人傳一人至于曺
010_0658_a_24L得此二大士分付各立家風

010_0658_b_01L
이로부터 살과 활로 나뉘어 전해지며 비로소 두 가지 선(조사선과 여래선)의 우열을 가름하게 되었다.103)

 하택의 지해: 6조가 하루는 대중에게 고하기를,104) ‘나에게 하나의 그 무엇이 있는데,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으며, 이름도 없고 이름자도 없다. 여러분은 알겠는가?’105)라고 하자, 하택 신회 선사가 나아와서는 ‘모든 부처님의 본원이고, 신회의 불성입니다.’라고 하였다. 6조가 ‘너희에게 이름도 없고 이름자도 없다고 하였건만, 무슨 본원이니 불성이니 하느냐?’라고 하였다.
이름도 없고 이름자도 없는 바로 이 자리를 본원이니 불성이니 하고 부른 것이 지해이기 때문에 의리선이라 한다.
(6조는 신회에게) ‘훗날 설령 일가를 이루어 지도자의 위치에 서는 일 106)이 있더라도 다만 지적인 분별이나 근본으로 삼는 무리가 될 뿐이리라.’라고 하였다.
이것은 긍정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 까닭에 (신회는) 6조의 얼자가 되었다.
『법집별행록절요法集別行錄節要』에서 목우자牧牛子 지눌知訥이 말하였다.107) ‘하택 신회는 지해 종사知解宗師이다. 비록 조계 혜능의 적자가 되지는 못하였지만 분별하는 이해(悟解)108)는 고명하였고 진실을 가려내는 판단은 명석했다. 종밀이 그 뜻을 이어받았으므로 이 책에서 더욱 상세히 펼쳐서 밝힌 것이다. 이제 교敎에 의거하여 마음을 깨달은 자에게 번다한 말을 제거해 주고 강요를 골라 뽑아 관심수행觀心修行에 귀감이 되도록 한다. 또한 이 관심수행자가 아직 마음에 품은 집착을 잊고 밝지 못하여 의리에 막힐 것을 우려했기 때문에 마지막에 본분종사가의 경절문徑截門 언구를 간략히 인용하였으니 지견知見이라는 병을 깨끗이 제거해 주기 위해서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하택종의 지해를 의리선이라 하고, 남악과 청원의 살과 활 두 가지 선을 격외라 하는 까닭이다. 어째서인가? 하택종의 지해가 의리선임은 글에 드러나 있다. 살과 활 두 가지 선을 격외선으로 간주하는 근거에 대하여 아래에서 본분종사가의 경절문 언구로써 인용하니, 모두 남악과 청원 문하 여러 선사의 본분사에 관한 것이다.

010_0658_b_01L
自此分傳殺活始有二禪優劣之辨
010_0658_b_02L

010_0658_b_03L
荷澤知解者祖一日告衆曰吾有一物
010_0658_b_04L無頭無尾無名無字諸人還識否
010_0658_b_05L會禪師出云諸佛之本源神會之佛性
010_0658_b_06L祖曰向汝道無名無字便喚作本源佛
010_0658_b_07L

010_0658_b_08L
此於無名無字處喚作本源佛性
010_0658_b_09L知解故爲義理禪也

010_0658_b_10L
他日雖把茆盖頭作得箇知解宗徒

010_0658_b_11L
此是不肯故爲六祖之孽子也

010_0658_b_12L
法集別行錄節要牧牛子曰荷澤神會
010_0658_b_13L是知解宗師雖未爲曺溪嫡子然悟解
010_0658_b_14L高明決擇了然密師宗承其旨故
010_0658_b_15L此錄中伸而明之今爲因敎悟心之者
010_0658_b_16L除去繁辭抄出綱要以爲觀行龜鑑
010_0658_b_17L乃至又恐觀行者未能忘懷虗朗滯於
010_0658_b_18L義理故末後畧引本分宗師徑截門言
010_0658_b_19L1) [3] 要令滌除知見之病

010_0658_b_20L
此以荷澤宗知解爲義理禪以南嶽
010_0658_b_21L淸源殺活二禪爲格外也何也
010_0658_b_22L澤宗知解爲義理禪文見殺活二禪
010_0658_b_23L爲格外禪者下引本分宗師徑截門
010_0658_b_24L言句皆是南嶽淸源門下諸師事也

010_0658_c_01L
5. 삼종선을 논함
고덕이 말하였다. ‘법을 기준으로는 의리선과 격외선이라는 이름으로 나누고, 사람을 기준으로는 여래선과 조사선이라는 이름으로 나눈다.’109)
법을 기준으로 의리선과 격외선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이 격외선 가운데 또한 사람을 기준으로 이름 붙인 여래선과 조사선이 있다는 말이지 두 겹의 선이라는 뜻은 아니니, 사람과 법을 기준으로 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어째서인가? 의리선을 여래선이라 할 수 있는가? 일우는 ‘능지와 소지 두 가지를 모두 잊어야 여래선을 성취한다.’110)고 하였고, 구곡은 ‘깨달음과 수행이 모두 사라지면 여래선을 증득한다.’111)고 하였다. 이는 능지와 소지 두 가지를 모두 잊고 깨달음과 수행이 모두 곧바로 사라진 경지를 여래선으로 여긴 견해이다. 대혜 종고大慧宗杲가 장 시랑張侍郞에게 답하는 글에서112) ‘이치로 통하는 길에 몸을 담그고 자신을 진흙과 물로 더럽히며 남을 가르치는 도리를 알자마자 곧바로 쓸어 없애고자 하였다.’라 운운하고, 또 ‘혜충 국사는 의리선을 설하여 남의 집 자식들을 망쳐 놓았다.’라고 하였다. 이는 이치로 통하는 길에 몸을 담그고 남을 가르치는 것을 의리선으로 보는 견해이다. 그렇다면 의리선과 여래선은 그 뜻이 아주 다르다. 그럼에도 의리선을 여래선이라고 여기는 까닭은 무엇인가?
『염송설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113) ‘규봉이 말하였다. 「선의 온전한 음사어는 선나禪那이고, 한역하면 사유수思惟修 또는 정려靜慮라고도 하는데, 이는 모두 정定과 혜慧를 통칭114)한 말이다.」115) 여기서 말하는 선禪으로 보자면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일미선116)이다. 여래선과 조사선의 다른 점은 무엇인가? 여래선이란 산은 산 그대로 좋고 물은 물 그대로 좋으니 법 하나하나가 모두 그대로 진실하다는 견해이고, 조사선은 뿌리까지 통째로 뽑아 버려 잡고서 분별할 수단을 전혀 남기지 않는다.117)
선나를 의리선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염송에서 활용하는 수단이 아니다. 이 염송에서 밝힌 것은 격외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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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德云約法名義理禪禪 [6] 外禪約人
010_0658_c_02L名如來禪祖師禪

010_0658_c_03L
意謂約法名義理禪格外禪此格外
010_0658_c_04L禪中又約人名如來禪祖師禪也
010_0658_c_05L非謂二種禪約人法有異也何也
010_0658_c_06L若義理禪是如來禪一愚云能所
010_0658_c_07L二知俱忘成就如來禪龜谷云
010_0658_c_08L修斯亡證得如來禪此以能所二知
010_0658_c_09L俱忘悟修斯亡爲如來禪也大慧
010_0658_c_10L答張侍郞書云纔見涉理路入泥入
010_0658_c_11L水爲人底便欲掃除如忠國師
010_0658_c_12L義理禪敎壞人家男女此以涉理路
010_0658_c_13L爲人底爲義理禪也然則義理禪
010_0658_c_14L與如來禪其義逈不同何以義理禪
010_0658_c_15L爲如來禪耶

010_0658_c_16L
說話云圭峯云禪者具云禪那此云
010_0658_c_17L思唯修亦云靜慮斯皆定慧之通稱也
010_0658_c_18L當此看則敎外別傳一味禪且如來禪
010_0658_c_19L祖師禪同別如何如來禪者山山水
010_0658_c_20L法法全眞也祖師禪者和根拔去
010_0658_c_21L了沒巴鼻云云

010_0658_c_22L
意謂禪那是義理禪非此拈頌所用
010_0658_c_23L此拈頌中所明者是格外禪也
010_0658_c_24L「可」疑「句」{編}

010_0659_a_01L예로부터 총림에서는 법을 기준으로 의리선과 격외선을 밝혔다. 또 여래선 운운한 것은, 옛사람이 소위 사람을 기준으로 하여 여래선과 조사선이라 이름 붙인 것이다. 이 또한 격외선 가운데 여래선과 조사선이 있는 것이다. 의리선을 여래선으로 여기기도 하지만 그 의리선은 지금 활용하는 그 여래선이 아니다. 예컨대 도솔화兜率話(『선문염송』 1칙)에서 ‘증득과 교화를 곧바로 사라지게 한다.’118)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여래선이 아니겠는가? 또한 염과 송을 가한 여러 선사들이 법 하나하나가 모두 그대로 진실하다는 뜻을 많이들 밝혔으므로 그것은 의리선이며 여래선이 아님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의리를 가리켜 격格이라 하고, 여래선과 조사선 두 가지 선은 그 격을 벗어난 격외格外이다. 격외와 교외敎外라는 말에는 같은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다. 같은 점은 의리선에도 교외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조문간정록』에 ‘심법은 문자로 헤아릴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교외는 지위와 순서나 점차적 단계를 차례차례 밟아 가지 않고 불심종을 깨달아 법인法印을 곧바로 받기 때문에 별전別傳이라 한다.’라고 한 뜻과 같다.119) 이 격외의 두 가지 선이 교외이다. 규봉이 말하였다. ‘문구를 도로 삼지 말지니, 모름지기 말에 대한 집착을 잊고 뜻을 터득해야 한다. 말의 자취를 잊는 것이 교외이고, 뜻을 터득하는 것이 전심傳心이다.’120)
또 청량 징관淸凉澄觀은 ‘원돈교 위에 별도의 한 가지 종지가 있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말에 대한 집착을 잊고 근본적인 뜻을 알아차리는 종지이다. 어떤 이가 ‘어떤 말을 잊고 어떤 뜻을 알아차리라는 것입니까?’라고 묻자, ‘오교의 말을 잊고 오교의 뜻을 알아차리라는 것이니 선종이 그것이다.’라고 답하였다.121) 이 의리선 역시 교외이다. 다른 점은 의리를 가리켜 격이라 하고, 여래선과 조사선 두 가지 선에만 격외라는 이름을 붙인다.
격외선에는 교적의 자취를 없애고 종지를 밝히는 경우가 있고 교적의 자취 그대로 종지를 밝히는 경우가 있는데, 교적의 자취를 없애어 종지를 밝히는 것은 원래 교외이지만, 교적의 자취 그대로 종지를 밝힘은 의리선에서 언어의 자취를 잊고 뜻을 얻는 것과 어떻게 다릅니까?
고덕이

010_0659_a_01L古叢林所謂約法明義理禪格外禪也
010_0659_a_02L且如來禪云云者古所謂約人名如
010_0659_a_03L來禪祖師禪也此亦格外禪中有如
010_0659_a_04L來禪祖師禪也若以義理禪爲如來
010_0659_a_05L義理禪非今所用如來禪則如兜
010_0659_a_06L率話證化斯亡豈非如來禪耶
010_0659_a_07L拈頌諸師多明法法全眞之義故知
010_0659_a_08L義理禪非如來禪明矣

010_0659_a_09L
然則義理名爲格如來祖師二禪爲格
010_0659_a_10L外也然格外敎外之言或同或異
010_0659_a_11L義理禪亦得敎外之名如祖門刊正
010_0659_a_12L錄云心法非文字所可擬議故云敎外
010_0659_a_13L以不歷位次階級悟佛心宗徑受法印
010_0659_a_14L故曰別傳此格外二禪爲敎外也
010_0659_a_15L峯云不以文句爲道須忘詮得意
010_0659_a_16L詮即是敎外得意即是傳心又淸凉
010_0659_a_17L圓頓之上別有一宗此忘詮會旨
010_0659_a_18L之宗或問忘何詮會何旨答曰忘五敎
010_0659_a_19L之詮會五敎之旨禪宗是也此義理
010_0659_a_20L亦爲敎外也異者義理名格則如
010_0659_a_21L來祖師二禪獨得格外之名

010_0659_a_22L
格外禪有撥敎明宗有即敎明宗
010_0659_a_23L敎明宗元是敎外而即敎明宗與義
010_0659_a_24L理禪之忘詮得意同別如何古德云

010_0659_b_01L‘마음에서 얻으면 삼장십이분교가 모두 교외별전의 선지禪旨’122)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활안活眼의 수단이다. 마음에서 얻으면 일정한 궤칙에 얽매이지 않아123) 흙을 금으로도 만드니 한 글자 한 구절이 조사의 뜻 아님이 없다. 이런 까닭에 교적의 자취 그대로 종지를 밝힘은 격외선이다. 언어의 자취를 잊고 뜻을 얻는 경우는 그렇지 않으니 이름으로써 제법의 자성을 드러내고 구절로써 제법의 차별을 드러낸다면 이름과 구절은 능전能詮이고 자성과 차별은 소전所詮이다.124) 그러므로 저 이름과 구절에서 언어의 자취를 잊고, 설령 자성과 차별의 뜻을 깨닫더라도 아직 자성과 차별에 대한 이해를 잊지 못하였기 때문에 의리선이다. 이 교외라는 말은 비록 세 가지 선을 모두 관통하지만 그 뜻은 현격하게 다르다.
세 가지 선에 모두 ‘선禪’이라고 이름 붙인다면 선의 뜻이 어떻게 다릅니까?
격외의 두 가지 선은 진심眞心을 선으로 삼고, 의리선은 선나禪那를 선으로 삼는다.
 선나를 선으로 삼는다: 『도서』에서 ‘원源은 본각진심本覺眞心125)이다. 이 본각진심을 깨달으면 혜慧라 하고 이를 닦으면 정定이라 하며, 정과 혜를 통칭하여 선禪이라 한다. 선의 온전한 음사어는 선나禪那이고, 한역하면 사유수思惟修 또는 정려靜慮라고도 하는데, 이는 모두 정定과 혜慧를 통칭한 말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마음은 이치(理)이고 선은 실천 수행(行)이다. 그러므로 도리어 마음을 선으로 삼는 선을 배척하고 말하기를 ‘이것은 이치와 실천 수행의 뜻에 도달하지 못하였고 중국어 음인지 인도어 음인지도 구분하지 못했다.’라고 하는 것이다.126)
 진심을 선으로 삼는다: 『조문간정록』에 ‘교란 말이 있는 경계에서 말이 없는 경계에 이르는 것이고, 마음이란 말이 없는 경계에서 말이 없는 경계에 이르는 경계이다. 말이 없는 경계에서 말이 없는 경계에 이른다면 누구도 그 경계를 무엇이라 규정할 수 없어서 억지로 선이라고 일컫는 것일 뿐이다. 혹자는 배워서 알 수 있고, 생각해서 얻을 수 있으며, 익혀서 이룰 수 있다고 한다. 배워서 알고, 생각해서 얻으며, 익혀서 이루는 것을

010_0659_b_01L若人得之於心則三藏十二分敎皆是
010_0659_b_02L敎外別傳禪旨此是活眼手段得之於
010_0659_b_03L不存軌則把土成金一字一句
010_0659_b_04L非祖師意也是以即敎明宗爲格外禪
010_0659_b_05L忘詮得意者不然以名詮諸法自
010_0659_b_06L句詮諸法差別則名句是能詮
010_0659_b_07L性差別是所詮也故於彼名句上
010_0659_b_08L能忘詮雖得自性差別之意然未能忘
010_0659_b_09L自性差別之解故爲義理禪也此敎外
010_0659_b_10L之言雖通三禪其義懸隔

010_0659_b_11L
三禪皆得名爲禪禪義同別如何
010_0659_b_12L格外二禪以眞心爲禪義理禪以禪那
010_0659_b_13L爲禪禪那爲禪者如都序云源者
010_0659_b_14L本覺眞心此本覺眞心悟之名慧
010_0659_b_15L之名定定慧通名爲禪禪者具云禪那
010_0659_b_16L此云思惟修亦云靜慮斯皆定慧之通
010_0659_b_17L然則心是理也禪是行也故返斥
010_0659_b_18L以心爲禪之禪曰此不達理行之旨
010_0659_b_19L不辨華竺之音也以眞心爲禪者祖門
010_0659_b_20L刊正錄云敎也者自有言至於無言者
010_0659_b_21L心也者自無言至於無言者也
010_0659_b_22L無言至於無言則人莫得而名焉故强
010_0659_b_23L名曰禪或謂學而可知思而可得
010_0659_b_24L而可成學而知思而得習而成者

010_0659_c_01L선나라 하고 정려라고 한역한다. 정려란 정신의 움직임을 가라앉히고 단정히 앉아서 온갖 대상에 대한 분별을 그치고 마음을 단속하여 혜를 관하는 일법一法을 이루는 것일 뿐’127)이라 하였다. 세존이 가섭에게 친밀히 전한 도는 아니니, 이것은 진심眞心을 선으로 삼을 뿐 정혜를 선으로 삼는 의리선의 견해는 배척한다.
의리선이 정혜를 선으로 삼는다면 사선팔정四禪八定128)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또 욕계에는 선정이 없고 선정은 상계上界129)에 있는데, 이 계에서는 어떻게 닦고 익히는가?130)
『도서』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131) ‘ 『기신론』에, 「지止를 닦으려면 고요한 심신의 경계에 머물면서 몸을 단정히 하고 뜻을 바르게 하여 호흡법이나 형색에 의지하지 않아야 하며, 더 나아가 오로지 마음뿐이며 밖의 경계가 없다고 알아야 한다.」132)라고 하였다. 『금강삼매경』에 「선은 곧 움직임이나, 움직이지도 않고 선에 머물지도 않아야 무생의 선정이다.」133)라고 하였다. 『법구경』에 「온갖 삼매를 배운다면, 그것은 움직임이지 좌선이 아니다. 마음이 경계를 따라 흐르니, 어떻게 선정이라 할 수 있겠는가!」134)라고 하였다. 『정명경』에 「멸진정滅盡定135)에서 일어나지 않고 온갖 위의威儀를 드러내지만 삼계 그 어디에도 몸과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연좌宴坐입니다.」136)라고 하였다.’이것이 본래 종지와 본분 교리의 일행삼매一行三昧137)이다.
이것이 의리선에서 닦아 터득하는 경계이다. 뜻은 비록 원만하고 미묘하지만 여전히 교의敎義에 속할 뿐이다. 이 일행삼매는 이름도 없고 이름자도 없는 경계에서 본원이니 불성이니 하고 부르는 알음알이와 같다.138)
아호 대의鵝湖大義 선사가 답하였다. ‘법사는 단지 욕계에 선정이 없음을 알 뿐, 선계에 욕欲이 없음은 알지 못하는구나.’법사가 ‘어떤 것이 선입니까?’라고 묻자, 선사는 손으로 허공에 점을 찍었다.139)
이것은 격외선에서 실천 수행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일정한 궤칙에 얽매이지 않아140) 잡히는 대로 바로 활용하는 방법이며, ‘분명하게 드러난 온갖 현상에 지극히 분명하게 조사의 뜻이 나타나 있다.’141)라는 말뜻과 같다.

010_0659_c_01L之禪那此云靜慮靜慮者澄神端坐
010_0659_c_02L息緣束心助成觀慧之一法非世尊迦
010_0659_c_03L葉密傳之道此以眞心爲禪斥其義理
010_0659_c_04L禪之以定慧爲禪也

010_0659_c_05L
義理禪若以定慧爲禪與四禪八定
010_0659_c_06L何異又欲界無禪禪在上界此界如
010_0659_c_07L何脩習耶

010_0659_c_08L
都序云起信云若修止者住於靜
010_0659_c_09L端身 [7] 正意不依氣息形色乃至唯
010_0659_c_10L心無外境界金剛三昧云禪即是動
010_0659_c_11L不動不禪是無生禪法句云若學諸
010_0659_c_12L三昧是動非坐禪心隨境界流云何
010_0659_c_13L名爲定淨名云不起滅定現諸威儀
010_0659_c_14L不於三界現身意是爲宴坐此是本宗
010_0659_c_15L本敎一行三昧

010_0659_c_16L
此義理禪之所修得也然義雖圓竗
010_0659_c_17L猶屬敎義也此一行三昧如無名無
010_0659_c_18L字處喚作本源佛性之解也

010_0659_c_19L
大義禪師答云法師只知欲界無禪
010_0659_c_20L知禪界無欲法師云如何是禪師以
010_0659_c_21L手點空

010_0659_c_22L
此格外禪之所行得也此是不存軌
010_0659_c_23L把得便用如明明百草頭明明
010_0659_c_24L祖師意也

010_0660_a_01L
6. 삼종三宗과 선종 오파五派
방계傍系에서 삼종법三宗法이 나오고, 갈라져서는 오파선五派禪으로 퍼졌다. 상相을 설함에 내외의 차별이 있지만 이치를 회통하면 중심과 주변의 차별이 없다. 삼종이란, 4조 문하에서 방계로 우두 법융牛頭法融이 나왔는데 지해知解의 측면에서는 일체가 모두 무無이고 실천의 측면에서는 마음을 쉬어 일으키지 않으니 이것이 공종空宗142)이다. 5조 문하에서 방계로 대통 신수大通神秀가 나왔는데 지해의 측면에서는 일체가 모두 망념이고 실천의 측면에서는 마음을 조복하여 망념을 소멸하니 이것이 상종相宗143)이다. 6조 문하에서 방계로 하택 신회가 나왔는데 지해의 측면에서는 모든 상은 상이 아니라는 것이고 실천의 측면에서는 닦음이 없이 닦으니 이것이 성종性宗144)이다.
돈점에 짝짓는 경우를 보면, 『도서』에 다음과 같은 주장이 있다. ‘돈오돈수란 가장 뛰어난 지혜를 가진 사람이 근성과 욕망欲望(樂欲)이 모두 수승하여 하나를 듣고도 천 가지를 깨달아 대총지大摠持를 얻으며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고 과거와 미래가 모두 단절된다는 설이다. 더 나아가서 일의 자취 측면에서 말하면 우두 법융 대사와 같은 부류가 해당한다.’145) 그러므로 세 가지 돈(頓悟頓修, 頓修頓悟, 修悟一時)에 짝지을 수 있다. 신수종神秀宗은 깨달음과 수행이 모두 점이므로 세 가지 점(漸修頓悟, 頓修漸悟, 漸修漸悟)에 짝짓는다. 하택종荷澤宗은 돈오하여 마음이 본래 청정하고 망령됨이 원래 없으므로 깨달음에 의지하여 닦고 찰나마다 익혀 자연히 백천삼매를 점차적으로 얻으므로 돈오점수에 짝짓는다.146)
앞의 삼종의 법어는 『도서』와 『법집별행록절요과목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科目幷入私記』147)에 의거하였다.
 오파: 청원 행사가 석두 희천, 약산 유엄, 운암 담성에게 전하여 동산 양개, 조산 탐장에 이르러 조동종을 이루었는데, 그 종지는 향상向上을 밝혀 공겁을 훌쩍 뛰어넘어 금시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148) 남악 회양이 마조 도일, 백장 회해, 황벽 희운에게 전하고 임제 의현에 이르러 임제종을 이루었는데, 그 종지는 기용機用을 밝혀 마른하늘에 천둥 벼락 치고 평지에 파도를 일게 하는 것이 특징이다.149)

010_0660_a_01L
傍出三宗法分流五派禪說相有內外
010_0660_a_02L會義無中邊三宗者四祖下傍出牛頭
010_0660_a_03L法融解則一切皆無行則休心不起
010_0660_a_04L是爲空宗

010_0660_a_05L
五祖下傍出大通神秀解則一切皆妄
010_0660_a_06L行則伏心滅妄是爲相宗

010_0660_a_07L
六祖下傍出荷澤神會解則諸相非相
010_0660_a_08L行則無脩而修是爲性宗

010_0660_a_09L
若配頓漸都序云頓悟頓修者此說上
010_0660_a_10L上智根性樂欲俱勝一聞千悟得大摠
010_0660_a_11L一念不生前後際斷乃至且就事
010_0660_a_12L迹而言如牛頭融大師之類是也故以
010_0660_a_13L頓三對可以配之也神秀宗以悟修皆
010_0660_a_14L故以漸三對配之荷澤宗以頓悟心
010_0660_a_15L本淨妄元空依悟而修念念修習自然
010_0660_a_16L漸得百千三昧故以頓悟漸脩配之也

010_0660_a_17L
上三宗法語依都序及別行錄也

010_0660_a_18L
五派者淸源傳石頭希遷藥山惟儼
010_0660_a_19L雲巖曇晟至洞山良个曺山耽章
010_0660_a_20L爲曺洞宗宗旨明向上全超空刼
010_0660_a_21L落今時

010_0660_a_22L
南嶽傳馬祖道一百丈懷海黃蘗希運
010_0660_a_23L至臨濟義玄是爲臨濟宗宗旨明機用
010_0660_a_24L靑天轟霹靂平地起波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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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송설화』에 ‘세존이 다자탑 앞과 영산회상에서 가섭에게 친밀하게 부촉하였고, 가섭은 아난에게 전하여 한 세대에 오직 한 사람에게만 전하다가 조계 혜능에 이르러 남악과 청원 두 대사를 얻어 법을 나누어 부촉하였고 그들은 각기 다른 가풍을 세웠다. 두 대사는 각기 그들의 후손을 얻어 법을 이었는데 임제臨濟와 동산洞山에 이르러 이 도가 세상에 크게 유행하였다. 그 종파에 근원이 있고 그 지류에도 뿌리가 있으니 배우는 이들은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150)라고 하였다.
마조가 방계로 천왕 도오, 용담 숭신, 덕산 선감, 설봉 의존에게 전하였고 운문 문언에 이르러 운문종을 이루었는데, 그 종지는 온갖 번뇌(衆流)를 절단截斷함을 밝혀 칼끝에 오히려 살아날 길이 있으며 철벽에는 파고들어 갈 문이 없다151)는 것이 특징이다.152) 백장이 방계로 위산 영우, 앙산 혜적에게 전하여 위앙종을 이루었는데, 그 종지는 체용體用을 밝히는 데 있으며 조각난 비석은 옛길에 쓰러져 있고 무쇠 소는 소실에서 잠자는 듯하다.153) 설봉이 방계로 현사 사비, 나한 계침에게 전하였고 법안 문익에 이르러 법안종을 이루었는데, 그 종지는 유심唯心의 도리를 밝히는 데 있으며,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와 달빛 드리운 물결에 이르기까지 그 모두가 진심眞心을 드러내고, 푸른 대나무와 노란 꽃도 미묘한 진리를 분명하게 나타낸다.154)
위의 오종 법어에 대해서는 『인천안목』과 『선가귀감』, 『선문오종강요』에 의거하였다.
위의 삼종과 오파를 삼선三禪에 짝지으면 삼종은 의리선에 짝지을 수 있다. 즉 우두종은 무구無句, 신수종은 유구有句, 하택종은 중구中句이다.
우두 법융은 본래 무사無事임을 환히 깨달아 알아 깨달음과 수행이 모두 돈頓이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깨달음과 수행에 대한 이해에 걸려 있었기 때문에 의리선이 된다.
남악 회양은 ‘수행하여 깨닫는 일이 없지는 않다.’고 하였는데 어찌 이에 깨달음과 수행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것이겠는가?
이 말은 6조가 ‘수행에 의지하여 깨닫는가?’라고 물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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說話云世尊於多子塔前靈山會上
010_0660_b_02L密付迦葉迦葉傳阿難人傳一人
010_0660_b_03L至于曺溪得南嶽淸源二大士分付
010_0660_b_04L各立家風二大士得其孫至于臨濟
010_0660_b_05L洞山斯道大行天下其派有源
010_0660_b_06L枝有本學者不得莽鹵

010_0660_b_07L
馬祖傍傳天王道悟龍潭崇信德山宣
010_0660_b_08L雪峯義存1) [4] 門文偃是爲雲門
010_0660_b_09L宗旨明截斷 [8] 鋒有路䥫壁無門
010_0660_b_10L百丈傍傳潙山靈佑仰山慧寂是爲潙
010_0660_b_11L仰宗 [9] 宗旨明體用斷碑橫古路鐵牛
010_0660_b_12L眠少室

010_0660_b_13L
雪峯傍傳玄沙師備羅漢桂琛至法眼
010_0660_b_14L文益是爲法眼宗宗旨明唯心風柯
010_0660_b_15L月渚現露眞心翠竹黃花宣明妙法

010_0660_b_16L
上五宗法語依人天眼目及禪家龜
010_0660_b_17L鑑五宗綱要也

010_0660_b_18L
上三宗五派若配三禪三宗可以配義
010_0660_b_19L理禪而牛頭宗是無句神秀宗是有句
010_0660_b_20L荷澤宗爲中句也

010_0660_b_21L
牛頭雖了達本來無事悟修皆頓
010_0660_b_22L有悟脩之解故爲義理禪也南岳
010_0660_b_23L修證即不無豈無悟脩之解耶
010_0660_b_24L此因六祖還可修證否之問不獲

010_0660_c_01L어쩔 수 없이 (남악 회양이)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대답 바로 다음에 ‘오염되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으니 (남악 회양에게) 무슨 깨달음과 수행에 대한 이해가 있다고 하겠는가!
오파를 격외 이선二禪에 짝지을 수 있다. 법안종은 유심惟心의 도리를 밝혔으므로 여래선 실구實句에, 위앙종은 체용體用을 밝혔으므로 권실삼구權實三句에 짝짓는다. 조동종은 종문의 향상向上하는 종지를 밝혔다. 앞의 삼종은 여래선이다. 운문종은 남김 없는 작용을 가장 빠르게 실현하는 길(大用直截)을 밝혔고, 임제종은 기용機用과 삼요三要를 밝혔으니, 이 이종二宗은 조사선이다.
위앙종과 법안종 이종二宗은 남악 문하에서 나왔으니 응당 조사선의 종풍인데, 여기서 밝힌 종지를 보면 여래선이라 하니, 어째서인가?
조사선에는 대기대용大機大用의 수단이 있고 대기와 대용은 살활殺活의 수법이다. 그러므로 『염송설화』에서 ‘백장은 마조의 대기를 터득했고, 황벽은 마조의 대용을 터득했다.’라 하고 ‘이렇게 결정적인 전기가 되는 순간을 맞아서는 옛사람도 그저 사람을 죽이는 칼(殺人刀)이요 사람을 살리는 검(活人劒)이라고 말했을 뿐이다.’155)라고 하였다.156) 따라서 대기는 살인도요, 대용은 활인검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위앙종과 법안종 이종二宗은 대기를 얻어 살인도를 밝혔으므로 여래선의 종풍이다.
‘종宗’이라고 한 것은 조사선을 알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만 여래선을 종풍으로 한다는 뜻에서 종이라 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앙산이 향엄에 대해 ‘여래선이라면 사형師兄이 이해했다고 인정하겠지만, 조사선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157)라고 한 것이다. 『염송설화』에서는 ‘법안이 「만약 모든 상을 상이 아니라고 보면 부처님의 뜻을 알지 못할 것이다.」라고 한 것은 조사선이다.’158)라고 하였다. 만약 조사선을 알지 못하였다면 어찌 이런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앞에서는 모두 상相을 설한 것이다.

 이치를 회통하면 다음과 같다: 『도서』에서는 다음과 말하였다. ‘선과 교를 모두 잊으면 심心과 불佛이 모두 고요해질 것이니,

010_0660_c_01L已而言之也故次云染汚即不得
010_0660_c_02L有何修證之解耶

010_0660_c_03L
五派可以配格外二禪而法眼宗明惟
010_0660_c_04L故配如來禪實句也潙仰宗明體用
010_0660_c_05L故配權實三句也曺洞宗明宗門向上
010_0660_c_06L上三宗爲如來禪雲門宗明大用直
010_0660_c_07L臨濟宗明機用三要此二宗爲祖師
010_0660_c_08L禪也

010_0660_c_09L
潙法二宗出於南岳門下則當爲
010_0660_c_10L祖師禪宗而今所明宗旨爲如來禪
010_0660_c_11L何也祖師禪中有大機大用
010_0660_c_12L用是殺活也故說話云百丈得大機
010_0660_c_13L黃蘗得大用到這時節古人只道
010_0660_c_14L得箇殺人刀活人劒故知大機即是
010_0660_c_15L殺人刀大用即是活人劒也然則潙
010_0660_c_16L法二宗得大機明殺人刀故爲如來
010_0660_c_17L禪宗言宗者非不知祖師禪但宗
010_0660_c_18L如來禪故云宗也故仰山對香嚴云
010_0660_c_19L如來禪即許師兄會祖師禪未夢見
010_0660_c_20L說話云法眼云若見諸相非相
010_0660_c_21L即不見如來云者是祖師禪若不知
010_0660_c_22L祖師禪豈有是言耶上皆說相也

010_0660_c_23L
若會義都序云禪敎雙忘心佛俱寂
010_0660_c_24L「雪」疑「雲」字之誤{編}

010_0661_a_01L모두 고요해지면 생각마다 모두 부처요, 한 생각도 부처의 마음 아닌 것이 없고, 두 가지를 모두 잊으면 구절마다 모두 선이요, 한 구절도 선禪과 교敎 아닌 것이 없다.이것은 선과 교를 회통한 말이다.이와 같이 하면 자연히 민절무기泯絶無寄의 주장을 듣고 아집의 분별을 깨뜨려야 한다고 알며, 또 식망수심息妄修心의 주장을 듣고는 자기의 훈습된 번뇌를 단절해야 한다고 안다. 집착하는 분별의식을 깨뜨려 진성眞性이 나타나면 곧 모든 분별을 끊어 없애는 것(泯絶)이 바로 진성을 드러내는 근본이며, 훈습된 번뇌를 단절하여 불도가 이루어지면 곧 마음을 닦는 것(修心)이 성불하는 수행이다.’159)이 말은 삼종160)을 회통한 말이다.대혜가 말하였다. ‘지해가 일어날 때마다 알아차려서 지해를 짝(동류)으로 삼고 지해를 방편으로 삼아 지해에서 평등한 자비를 실천하고 지해에서 대불사大佛事를 짓는다면 이 지해가 곧 해탈의 장이요 이 지해가 곧 생사를 벗어나는 수단이다.’161)이것은 지해를 회통한 말이다.

이상은 이치를 회통하여 설명하였다.
7. 임제삼구臨濟三句와 삼종선
臨濟頌三  임제가 삼구를 읊었으니
三禪在句  세 가지 선이 그 구 가운데 있다네
老師爲手  백파 노사께서 『선문수경』 지어
拖照揚宗  종풍을 맘껏 비추어 거양하였네

『선가귀감』과 『선문오종강요』에서도 한결같이 말하였다.162) ‘임제삼구는 단지 임제만의 종풍이 아니라 위로는 모든 부처로부터 아래로는 중생에 이르기까지 모두의 본분사이다. 여기에서 벗어나 법을 설한다면 모두 망령된 말일 뿐이다.’그런 까닭에 백파 노화상은 이 삼구를 선문의 수경으로 여기고 제가의 장소章疏를 마음껏 비추고 그 제가의 종풍을 발양하신 것이다.
백파 노사의 속성은 이李씨이고 본관은 전주이며 왕족에서 갈려 나왔는데(璿源) 덕흥대원군(1530~1559, 선조의 부친)이 11대조이다. 휘는 긍선이고 호는 백파이다. 청허 휴정淸虛休靜 노화상에게서 선종의 법을 이어받았으며 25세손이다. 선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현묘한 뜻을 남김없이 얻었기에 사람들은 ‘조사가 다시 오셨다.’고 하였으니 그 견해가 달마 조사와 같았기 때문이다(同祖).

010_0661_a_01L俱寂即念念皆佛無一念而非佛心
010_0661_a_02L忘即句句皆禪無一句而非禪敎此會
禪敎

010_0661_a_03L如此則自然聞泯絕無寄之說知是破
010_0661_a_04L我執情聞息妄修心之言知是斷我習
010_0661_a_05L執情破而眞性顯即泯絕是顯性
010_0661_a_06L之宗習氣斷而佛道成即修心是成
010_0661_a_07L佛之行此會
三宗
大慧云若知知解起處
010_0661_a_08L以知解儔侶以知解爲方便於知解
010_0661_a_09L上行平等慈於知解上作大佛事
010_0661_a_10L此知解便是解脫之場即此知解便
010_0661_a_11L是出生死之處此會
知解

010_0661_a_12L
上會義也

010_0661_a_13L
臨濟頌三句三禪在句中老師爲手鏡
010_0661_a_14L拖照揚宗風

010_0661_a_15L
禪家龜鑑五宗綱要皆云臨濟三句
010_0661_a_16L非特臨濟宗風上自諸佛下至衆生
010_0661_a_17L皆分上事若離此說法皆是妄說也
010_0661_a_18L故老和尙以此三句爲禪文手鏡
010_0661_a_19L拖照諸家章疏發揚其諸家之宗風
010_0661_a_20L老師姓李氏貫全州派出璿源
010_0661_a_21L以德興大院君爲十一代祖諱亘璇
010_0661_a_22L號白坡法嗣禪宗於淸虛老和尙
010_0661_a_23L二五世孫大開禪門盡得奧旨故
010_0661_a_24L人稱祖師重來此見解同祖老師常

010_0661_b_01L노사께서 일찍이 그 거처하던 방의 편액에 ‘소림굴少林窟’이라 쓰고, 자는 ‘소림수少林叜’라 하였으니 이는 달마 조사와 같게 되기를 바라는 칭호이다.
완당阮堂 김정희金正喜 선생은 평소 달마상을 얻어 가지고 있었는데 그 상이 노사(백파)의 상과 지극히 닮았으므로163) 이 달마상을 노사의 상이라 여기고 그 상 옆에 ‘신발 한 짝만 신고 서쪽으로 돌아갔지만, 보신報身은 동쪽에 드러내셨구려. 멀리서 보면 달마와 같은데, 가까이에서 보니 백파로세. 차별이 있지만, 불이문에 들었구나. 흐르는 물이 오늘의 몸이요, 밝은 달은 과거세의 몸이로다.164)’라고 썼다. 이 상도 달마와 같다. 이 삼절三絶165)이 있어 천고의 세월을 발돋움하고 바라보며, 모범이 될 법도를 후손에게 남겼으니 그 누가 은혜를 입지 않겠는가.166)
임제에게 학인이 물었다. ‘무엇이 참된 부처이며 참된 법이며 참된 도입니까? 스님께서 가르쳐 주십시오.’ ‘불佛이란 마음이 청정한 것이요,대기법法이란 마음의 광명이요,대용도道란 어느 곳에서나 장애가 없는 청정한 광명이니,대기와 대용을 나란히 제시하였으니 앞의 그 묘유이다.세 가지가 하나이며 모두 공일 뿐 참으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진공산승임제가 자신을 이른 말이 금일 터득한 견해는 불조와 다르지 않다.이 진공과 묘유가 바로 부처와 조사가 몸과 마음을 의지하는 지점이기 때문에 불조와 다르지 않다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167)
이것은 향상일규向上一竅를 밝힌 것이다.향상이란 아래의 삼구를 살펴 말한 것이다. 일규는 일물과 같은 말이나 여전히 조금 모자람이 있다. 그런 까닭에 회양 화상이 ‘하나의 그 무엇이라고 말해도 딱 들어맞지 않습니다.’라고 한 것이다.조사의 무늬 없는 도장(無紋印字)은 교학에서의 동체삼보同體三寶168)와 같다. 무늬는 없으나 체성體性을 같이하므로 세 가지가 곧 하나이며 모두 공이어서 실체가 없다. 이것이 진공眞空이다. 도장과 삼보가 하나이면서 셋이니 세 가지 면목이 없지 않다. 이것이 묘유妙有이다. 이렇게 세 가지와 하나가 어김없이 일치하고 공空과 유有가 원만하게 융합한 경계에 대해서 삼교 각각이 이름을 붙인 것이 다르니, 유교에서는 하나의 태극太極이라 하고, 도교에서는 천하모天下母라 하고, 불교에서는 이름이 많은데,

010_0661_b_01L題額其所居室曰少林窟字曰少林
010_0661_b_02L此稱號同祖也金阮堂先生
010_0661_b_03L供本達摩像與老師像極肖因以達
010_0661_b_04L摩像爲老師像題其像側曰隻履
010_0661_b_05L西歸報身東現歟遠望似達摩
010_0661_b_06L看即白坡以有差別入不二門
010_0661_b_07L水今日明月前身此像亦同祖也
010_0661_b_08L有此三絕聳觀千古垂裕後昆
010_0661_b_09L不蒙賜

010_0661_b_10L
臨濟因僧問如何是眞佛眞法眞道
010_0661_b_11L師開示師云佛者心淸淨是
法者
010_0661_b_12L心光明是
道者處處無碍淨光是

010_0661_b_13L齋示 [10]
妙有
三即一皆空而無實有
山僧
010_0661_b_14L臨濟
自謂
今日見處與佛祖不別此眞空妙有
是佛祖安身
010_0661_b_15L立命處故云
與佛祖不別

010_0661_b_16L
此明向上一竅向上者在下三句而言也
竅者如云一物也然猶較些
010_0661_b_17L故讓和尙云
[11] 似一物即不中
即祖師無紋印字
010_0661_b_18L敎中同體三寶也無紋及同體故三
010_0661_b_19L即一皆空而無實有是爲眞空印字
010_0661_b_20L及三寶故一即三不無三般面目
010_0661_b_21L是爲竗有也此三一相即空有圓融
010_0661_b_22L三敎立名不同儒謂之一太極
010_0661_b_23L老謂之天下母佛有多名敎則起信

010_0661_c_01L교학의 예를 들면 『기신론』에서는 중생심衆生心이라 한다. 이 대위大位가 인因에 있는 것을 『원각경』에서는 일원각一圓覺이라고 하고 『법화경』에서는 불지견佛知見이라 한다. 이 대위가 과果에 있는 것을 『화엄경』에서는 일법계一法界라 하고 『능엄경』에서는 묘진여竗眞如라고 한다. 이것이 인과 과를 다 통하는 것을 선에서는 일착자一着子라고 하니169) 이것이 곧 향상일규이다.
만약 제1구에서 알아차리면 불조의 스승이 될 만하다.조사선제2구에서 알아차리면 인천의 스승이 될 만하다.여래선제3구에서 알아차리면 자기도 구제하지 못한다.의리선
이것은 세 가지 선을 아래로 향하면서 밝힌 것이다.향하向下는 앞의 일규一竅를 살펴 한 말이다. 삼선은 삼구에서 알아차린 법이다.원오 극근이 말하였다. ‘작가가 삼요인三要印170)을 가지고청풍 법사가 말하였다. ‘조사의 심인心印을 또한 모든 부처님의 법인法印이라고도 한다. 이제 삼요를 무늬로 삼으므로 삼요인이라 하지만, 실제는 무늬 없는 도장(無紋印字)이다.’171) 허공에 찍고제1구물에 찍고제2구진흙에 찍어제3구상대를 시험한다.’청풍 법사는 ‘이것은 사가師家의 입장에서 한 말’172)이라고 하였다. 가령 성문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사제四諦를 설하고, 연각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십이인연을 설하며, 보살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육바라밀을 설하는 것과 같다.173) 대혜가 말하였다. ‘상사上士가 도에 대해 들으면 도장을 허공에 찍는 것과 같고, 중사中士가 도에 대해 들으면 도장을 물에 찍는 것과 같으며, 하사下士가 도에 대해 들으면 도장을 진흙에 찍는 것과 같다.’174) 청풍 법사는 ‘이것은 손님(賓家)의 입장에서 설한 것’175)이라고 하였다. 이를테면 ‘부처님은 동일한 음성으로 법을 설하시지만 중생은 각자의 근기에 따라 제각각 이해한다.’176)는 말과 같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구句’란 제일·제이·제삼으로 나누었기 때문에 구라 한 것이지, 언구라고 할 때의 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제3구에 이르러 널리 베푼 연후에야 비로소 언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청풍 법사는 ‘종사가 법을 설하는 것은 마치 나무 사람이 노래하며 손뼉 치는 것과 같으니 진실로 머뭇거리며 헤아려서는 안 된다. 어리석은 이의 식견이 거칠고 경박하여

010_0661_c_01L謂之衆生心此大位在因圓覺謂之
010_0661_c_02L一圓覺法華謂之佛知見此大位在
010_0661_c_03L華嚴謂之一法界楞嚴謂之竗眞
010_0661_c_04L此通因果也禪則謂之一着子
010_0661_c_05L即此向上一竅也

010_0661_c_06L
若第一句薦得堪與佛祖爲師祖師

010_0661_c_07L二句薦得堪與人天爲師如來
第三句
010_0661_c_08L薦得自救不了義理

010_0661_c_09L
此明向下三禪向下者在上一竅而言也
禪者三句下薦得之法也

010_0661_c_10L圓悟云作家漢將三要印風云祖師心印
亦名諸佛法印
010_0661_c_11L今以三要爲文故稱三
要印其實無紋印字

010_0661_c_12L
印空第一
印水第二
印泥第三
以驗人
010_0661_c_13L風云此在師家邊說如云爲求聲聞
010_0661_c_14L說四諦爲求緣覺者說十二因
010_0661_c_15L爲求菩薩者說六波羅蜜也
010_0661_c_16L慧云上士聞道如印印空中士聞
010_0661_c_17L如印印水下士聞道如印印泥
010_0661_c_18L風云此就賔家邊云如云佛以一音
010_0661_c_19L演說法衆生隨類各得解也然則此
010_0661_c_20L云句者爲分一二三故云句非言
010_0661_c_21L句之句也至第三句旁施午設然後
010_0661_c_22L方爲言句也故風云宗師說法
010_0661_c_23L木人唱拍實不可擬議凡愚識見麄

010_0662_a_01L알맹이 없는 말뿐인 말177)에 무엇이 있다고 오인하기 때문에 언구라고 하는 것일 뿐이다.’178)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청풍 법사는 제1구를 설명하여 ‘백장은 마조의 대기를 터득했고, 황벽은 마조의 대용을 터득했으니, 혁연하게 임제의 본종이 되었다. 이 기틀로 깨달으면 곧바로 위음왕불이전의 경계와 비로자나불 이상으로 향상하는 경지179)에서 대총지를 터득하기 때문에 불조의 스승이 될 만하다.’180)라고 하였다. 제2구에 대해서는 ‘여기에서 분별하여 알아차리면 본질적인 도리(理性)가 끝이 없고 사물의 상에 밖이 없이 넓으며 바른 지각을 갖추기 때문에 인천의 스승이 될 만하다.’181)라고 하였다. 제3구에 대해서는 ‘나와 그대가 설하기도 듣기도 하며 묻기도 답하기도 한 이 상황이 이미 제3구에 떨어진 것이다.’182)라고 하였다. 이 설명 가운데 비록 세 가지 선이라는 말은 없지만 뜻은 알아차릴 수 있다.
일우는 제1구를 설명하기를 ‘만약 이 구에서 알아차린다면 비로자나불 이상으로 향상하는 경지를 지름길로 밟아서 조사의 심인을 곧장 꿰차리니 그런 까닭에 불조의 스승이 될 만하다.’183)라고 하였다. 또 말하였다. ‘임제의 적손인 풍혈 연소風穴延沼가 법좌에 올라앉아 말하였다. 「조사의 심인은 그 형상이 무쇠 소의 기틀과 같다. 제1구는, 찍고 떼면 도장 무늬가 남고 그대로 두면 도장 무늬가 문드러진다. 그렇다면 찍고서 떼지도 않고 그대로 두지도 않아야 한다고 하면 찍는 것이 옳은가, 찍지 않는 것이 옳은가?」184) 이것은 삼요를 드러낸 것이다. 마지막에 노피盧陂 장로를 두 차례 불자로 때린 것은 삼요를 활용한 것이다. 백장과 황벽은 마조의 일할에서 대기와 대용을 터득하였으니 기틀에 딱 들어맞았던 것이다.’185) 제2구에 대해서는 ‘향엄은 「지난해의 가난은 가난이 아니요, 올해의 가난이 진실로 가난이라네.」라고 하였고, 앙산은 「여래선이라면 사형이 이해했다고 인정하겠지만, 조사선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고 하였다. 이것은 능지와 소지 두 가지를 모두 잊고 여래선을 성취한 것이니 인천의 스승으로서 모범이 된다.’186)라고 하였다. 제 3 구에 대해서는 ‘낙초지담落草之談187)으로 상대를 가르치고 병에 따라 약을 주는 방법이니 이는 사정이 부득이해서이다. 만약 이 구절에서 알아차린다면 지견이 치우치고 막혀 공행功行이 원만하지 못하기 때문에

010_0662_a_01L只認得口頭聲色謂之言句
010_0662_a_02L風釋第一句云百丈得大機黃蘗得
010_0662_a_03L大用赫然爲臨濟本宗此機所入
010_0662_a_04L直在威音已前毘盧向上得大摠持
010_0662_a_05L故與佛祖爲師釋第二句云於此辨
010_0662_a_06L得見理性無邊事相無外具正知
010_0662_a_07L故與人天爲師釋第三句云
010_0662_a_08L與子一說一聽一問一答早落第三
010_0662_a_09L此中雖無三禪之言可以意得也
010_0662_a_10L一愚釋第一句云若向此句下薦得
010_0662_a_11L徑踏毘盧向上直佩祖師心印故云
010_0662_a_12L與佛祖爲師又云臨濟嫡孫風穴上
010_0662_a_13L堂云祖師心印狀似鐵牛之機
010_0662_a_14L第一句去則印住住則印破只如
010_0662_a_15L不去不住印則是不印則是是顯
010_0662_a_16L三要末後打盧陂兩拂子是用得三
010_0662_a_17L百丈黃蘗於馬祖一喝得大機
010_0662_a_18L大用是當機釋第二句云香嚴云
010_0662_a_19L去年貧未是貧今年貧直是貧仰山
010_0662_a_20L如來禪即許師兄會祖師禪未夢
010_0662_a_21L見在此是能所二知俱忘成就如來
010_0662_a_22L爲人天師之榜樣釋第三句云
010_0662_a_23L落草爲人隨病與藥乃事不獲已也
010_0662_a_24L若向此句下薦得知見偏滯功行不

010_0662_b_01L자기도 구제하지 못한다고 한 것이다.’188)라고 하였다. 제2구에 대한 설명에서는 여래선이라는 말을 썼지만, 제1구와 제3구는 그림자처럼 드러내고자 했기 때문에 조사선·의리선이라고 말하지 않은 것이다.
학인이 물었다. ‘제1구란 어떤 것입니까?’임제가 말했다. ‘삼요의 도장을 찍고 떼니 붉은 무늬점이 분명히 나타난다. 이에 대하여 분별하기도 전에 주·객이 갈라지리라.’
청풍 법사가 말하였다. ‘앞의 구절은 먼저 비추고앞의 구절에서 뒤의 세 글자 朱點窄나중에 작용하는 것이며,앞의 구절에서 앞의 네 글자 三要印開. 문장은 비록 먼저 작용하고 나중에 비추는 순서로 되어 있지만, 뜻인즉슨 먼저 붉은 무늬점이 있어야 이것이 위쪽에 삼요의 도장을 찍을 수 있기 때문에 먼저 비추고 나중에 작용한다고 푼 것이다.뒤의 구절은 먼저 작용하고뒤의 구절에서 뒤의 세 글자 主賓分나중에 비춘다는 것이다.뒤의 구절에서 앞의 네 글자 未容擬議. 이것 역시 문장 자체는 비록 먼저 비추고 나중에 작용하는 순서로 되어 있지만, 뜻인즉슨 먼저 주인과 손님이 있은 연후에라야 분별을 허용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먼저 작용하고 나중에 비춘다고 푼 것이다.189)
두 구절이 합해져 한 쌍으로 중도를 비추므로 비춤과 작용을 동시에 하는 것이 되고, 한 쌍으로 둘 모두 차단한다면 비춤과 작용을 동시에 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사조용四照用에 근거하여 비춤과 작용을 풀어 밝힌 것이다.190) 비춤은 안과 통하고 작용은 밖으로 드러난 것이 마치 봉화가 성안에서 변고를 급히 알려 변방에서 전쟁에 철저히 대비함과 같다.191)
숭재혜가 말하였다. ‘제1요는 대기가 원만히 응하는 것이고, 제2요는 대용이 곧장 발휘되는 것이며, 제3요는 대기와 대용이 나란히 시행되는 것이다. 대기와 대용을 모두 떨어 버리는 것이 향상일규이다. 대용이 곧장 발휘된다고도 하고 대용이 온전히 드러난다고도 한다. 한계가 없는 상태에 이르러 단지 단순 명쾌할 뿐만 아니라 향상일규 또한 이 가운데 있기 때문에 온전히 드러난다고 한 것이다. 대기와 대용이란, 예를 들어 기관이 하나의 기관을 건드리기만 하여도 100가지 기관이 모두 일어나는 것과 같다. 건드리지도 않고 일어나지도 않는 바로 그때를 대기라고 한다. 대기는 원만히 응함(圓應)을 뜻으로 삼으니 대기가 곧 용이다. 이미 건드리고 일어나고 난 이후의 시기를 대용이라고 한다. 대용은 곧바로 근원에 이름(直截)을 뜻으로 삼으니 대용이 곧 기機이다.’192) 이 대기를 제외하고서 대용은 없으며, 대용을 제외하고서 대기는 없다. 하나를 들어 전부를 거두어들일 뿐 더 이상 여타의 경우란 없다. 그런 까닭에 『염송설화』에서

010_0662_b_01L故云自救不了此第二句有如
010_0662_b_02L來禪之言第一第三句欲爲影現故
010_0662_b_03L不言祖師禪義理禪也

010_0662_b_04L
僧問如何是第一句師云三要印開朱
010_0662_b_05L點窄未容擬議主賔分

010_0662_b_06L
風云前句先照下三
後用上四字文雖先
用後照意則先
010_0662_b_07L有朱點此上方開三
要印故云先照後用
後句先用下三
後照
010_0662_b_08L上四字此亦文雖先照後用意則先有
主賓然後未容擬議故云先用後照
二句
010_0662_b_09L合爲雙照中故爲照用同時雙遮則
010_0662_b_10L爲照用不同時也此約四照用釋言
010_0662_b_11L照用者照通於內用現於外如烽
010_0662_b_12L火警急城中興戎塞上崇齋惠云
010_0662_b_13L第一要大機圓應第二要大用直截
010_0662_b_14L第三要機用齊施雙拂機用爲向上
010_0662_b_15L一竅也大用直截亦名大用全彰
010_0662_b_16L以直得無限非但直截乃至向上一
010_0662_b_17L亦在此中故云全彰言機用者
010_0662_b_18L如機關觸一機而百關俱發正當不
010_0662_b_19L觸不發之時謂之大機大機以圓應
010_0662_b_20L爲義是大機即用也旣觸旣發之時
010_0662_b_21L謂之大用大用以直截爲義是大用
010_0662_b_22L即機也此機外無用用外無機
010_0662_b_23L一全收更無餘事也故說話云

010_0662_c_01L‘백장은 대기를 얻었을 뿐이지만 더 이상 대용이 필요하지 않았으며, 황벽은 대용을 얻었을 뿐이지만 결코 대기가 필요하지 않았다. 만약 「대기 중에 대용이 있고, 대용 중에 대기가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꿈엔들 백장과 황벽의 경계를 알겠는가.’193)라고 하였다. 그렇기에 ‘요要는 요점을 찌른다고 할 때의 그 요이니, 요점은 번다한 데에 있지 않다.’194)고 한다.
학인이 물었다. ‘제2구란 어떤 것입니까?’임제가 말했다.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어찌 무착無著 선사의 물음을 용납할 것인가. 그러나 방편이 어찌 번뇌를 끊은 근기(문수)와 상충되겠는가.’
청풍 법사가 말하였다. ‘앞의 구절은 실實을 드러내었고 뒤의 구절은 권權을 제시한 것이다. 방편문(權門)에서 삼현이라는 명칭을 세웠으니 명칭은 실제(진실)의 손님이다.’195) 백파 노사는 이에 근거하여 두 겹으로 삼구를 세웠다. 첫째, 삼현을 삼구로 삼고본분을 일구로 삼았으니이것은 방편을 열어 진실을 드러낸 것(開權顯實)이다.196) 둘째, 삼현이라는 권과 일구라는 실을 권실삼구로 하였으니 이것은 방편 그대로 진실을 밝힌 것(卽權明實)이다.
일우가 말하였다. ‘앞 구절의 실은 체중현體中玄이며, 다음 구절의 권은 구중현句中玄이다. 두 구절이 합해져 현중현玄中玄이 된다. 이것은 삼현을 권실로 삼은 것이니 방편을 모아 진실을 드러낸 것(會權顯實)이다.197) 그러나 삼현이라는 말은 외설外說에도 있다. 『주역』에서는 유위에 한정된 현玄, 노자의 경우는 무위에 한정된 현玄, 장자의 경우는 유위와 무위를 통합한 현玄인데, 임제가 이것을 빌려 단지 삼현이라고 했을 뿐이다.’198)
고탑주古塔主199)가 처음 그 명칭을 세워 첫째 체중현, 둘째 용중현用中玄 또는 구중현, 셋째 의중현意中玄 또는 현중현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체體와 용用을 대대로 삼는다면 현중현은 앞의 두 가지보다 더 현묘하므로 현중현이 중中이 된다. 만약 구句와 의意를 대대로 삼는다면 이 두 현은 체 가운데서 흘러나온 것이므로 체중현이 중이 된다. 이제 체體·구句·현玄200)을 순서대로 삼은 것은 앞뒤로 가리고 생략하여(影畧)201) 서로 중이 됨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가령 체와 구로써 제3 의중현을 감추고

010_0662_c_01L丈得大機更不要大用黃蘗得大用
010_0662_c_02L更不要大機若道大機中有大用
010_0662_c_03L用中有大機何曾夢見百丈黃蘗
010_0662_c_04L要省要之要要不在多

010_0662_c_05L
如何是第二句妙喜豈容無着問
010_0662_c_06L漚和爭負截流機

010_0662_c_07L
風云前句現乎實後句示其權就此
010_0662_c_08L權門立三玄名名實之賔老師依
010_0662_c_09L立兩重三句謂一以三玄爲三句
010_0662_c_10L 以本分爲一句 此開權顯實也
010_0662_c_11L二以三玄權一句實爲權實三句
010_0662_c_12L即權明實也一愚云前句實體中玄
010_0662_c_13L後句權句中玄二句合爲玄中玄
010_0662_c_14L以三玄爲權實是會權顯實也然三
010_0662_c_15L玄之言外說有之謂易約有爲玄
010_0662_c_16L約無爲玄莊約有無爲玄臨濟借此
010_0662_c_17L而只云三玄而已古搭主始立其名
010_0662_c_18L一體中玄二用中玄亦名句中玄
010_0662_c_19L三意中玄亦名玄中玄此以體用爲
010_0662_c_20L則玄中玄玄於前二故玄中玄
010_0662_c_21L爲中也若以句意爲對則此二玄爲
010_0662_c_22L體中所流故體中玄爲中也今以體
010_0662_c_23L句玄爲次者意謂前後影畧欲現互
010_0662_c_24L爲中也如以體句影第三意中玄

010_0663_a_01L제1 체중현을 드러내어 중이 된다. 또한 체와 현으로써 제2 용중현을 감추고 제3 현중현을 드러내어 중이 된다. 구句에도 중의 뜻이 있으니, 구가 아니면 체와 현을 드러낼 수 없다. 그러므로 세 가지 모두에 중의 뜻이 있다면 앞뒤의 중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그런 까닭에 푸른빛이 도는 흰색을 검푸른색 창蒼이라 하고, 검푸른색 창蒼을 현玄이라 하는 것이다.202) 현은 그윽하고 현묘하다는 뜻의 현으로서 현은 분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옛사람은 운문의 삼구를 동산의 오위편정五位偏正에 짝지었다.
 운문의 삼구: 운문이 대중에게 ‘하늘과 땅이 어김없이 들어맞고(函蓋乾坤), 한눈에 핵심을 헤아리며(目機銖兩), 어떤 인연과도 교섭하지 않는(不涉萬緣) 경지를 한 구절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라고 물었는데, 대중이 아무 대꾸도 없자 운문 스스로 대신하여 말하였다. ‘한 발 화살로 세 겹의 관문을 뚫는다(一鏃破三關).’203) 후에 덕산 연밀德山緣密이 운문의 그 말을 고쳐서 삼구를 만들었는데, ‘하늘과 땅이 어김없이 들어맞는 구절(函蓋乾坤句), 모든 번뇌 망상의 흐름을 끊는 구절(截斷衆流句), 물길이 흐르는 대로 따르고 쫓아가는 구절(隨波逐浪句)’이라고 하였다. 보안 산도普安山道가 또한 일촉파삼관一鏃破三關 외에 별도의 한 구절을 내놓았다.204)
청산 사는 늙은이(靑山叜)가 푼다. 함개건곤函蓋乾坤은, 삼라만상 내지 불조의 작용에 이르기까지 함凾과 그 뚜껑이 딱 들어맞듯 하여 실오라기나 터럭조차 새어 나가지 못하기 때문에 일체가 건립되는 소식이 모두 이 구에 속하니 바로 용구用句이다. 절단중류截斷衆流란, 크고 작은 산들처럼 무수한 경계들이 하나하나의 티끌일 뿐이요 현묘한 작용에 이르기까지 봄날 얼음이 녹고 굽지 않은 기와가 부서지듯 일체를 쓸어버리는 소식이 이 구에 속하니 바로 체구體句이다. 수파축랑隨波逐浪이란, 세우기도 하고 휩쓸어 버리기도 하며 일체가 두루 응하는 소식이어서 물결을 따르고 파도를 따르지 않음이 없으므로 중구이다. 또한 함개건곤은 체와 용이 서로 잘 어울려 만남이 마치 함과 그 뚜껑이 딱 들어맞듯 하므로 중구이다. 절단중류는 손님과 주인이 묻고 답함이 모두 시절인연에 맞으면서도 간섭하지 않으니

010_0663_a_01L現第一體中玄爲中也又以體玄
010_0663_a_02L第二用中玄現第三玄中玄爲中也
010_0663_a_03L句亦有爲中之意謂非句無以現體
010_0663_a_04L與玄也故三皆有爲中之意則不可
010_0663_a_05L分前後中也故云靑白爲蒼蒼黑爲
010_0663_a_06L玄幽玄之玄玄不可辨是以古
010_0663_a_07L配雲門三句洞山五位偏正

010_0663_a_08L
雲門三句者雲門示衆云凾葢乾坤
010_0663_a_09L目機銖兩不涉春緣一句作麽生承
010_0663_a_10L衆無對自代云一鏃破三關
010_0663_a_11L德山密遂離其語爲三句曰凾盖
010_0663_a_12L乾坤截斷衆流隨波逐浪普安道
010_0663_a_13L又一鏃破三關外別置一句靑山叜
010_0663_a_14L釋云凾盖乾坤者萬像森羅乃至
010_0663_a_15L佛祖作用此凾盖中不漏絲髮故
010_0663_a_16L一切建立底時節摠屬此句即用句
010_0663_a_17L截斷衆流者堆山積嶽一一塵
010_0663_a_18L乃至玄竗作用冰掃瓦解一切
010_0663_a_19L掃蕩底時節摠屬此句即體句也
010_0663_a_20L隨波逐浪者建立掃蕩一切普應底
010_0663_a_21L時節非無隨波逐浪故爲中句也
010_0663_a_22L又凾盖乾坤者體用相會如凾盖之
010_0663_a_23L相稱故爲中句也截斷衆流者
010_0663_a_24L主問答皆是春緣而旣云不涉

010_0663_b_01L체구이다. 수파축랑은 손님도 있고 주인도 있으며 갖추지 못한 법이 없음이 마치 한눈에 핵심을 헤아려 가벼우면 가벼운 대로 무거우면 무거운 대로 따르고 빈 배가 물결 따라 흐르듯이 높으면 높은 대로 낮으면 낮은 대로 따르는 것과 같으니 용구이다. 또한 함개건곤은 체가 만덕을 갖추고 있으므로 체구이다. 수파축랑은 물결 흐르는 대로 높았다 낮았다 하고 한눈에 경중을 헤아려 남김 없는 작용을 눈앞에 드러내므로 용구이다. 절단중류는 체와 용이라는 두 방편이 모두 시절인연에 맞아 중中을 함께 쌍으로 비추되 또한 간섭하지 않으면서 중中을 함께 쌍으로 차단하여 부정하기도 하니 중구이다. 그런즉 이 삼구에는 모두 중의 뜻이 있으므로 삼현의 현을 변별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또 한 발 화살로 세 겹의 관문을 무너뜨린다는 일촉파삼관에도 세 가지 뜻이 있다.205) 첫째, 삼구 가운데 일구가 한 발 화살의 구句이다. 구句에는 정해진 차제가 없어 하나를 들면 전체가 그것에 거두어져206) 모든 대립의 짝(待對)을 절단하니 삼구가 서로 바꾸어 가며 중심이 된다. 일우는 권과 실을 삼현의 뜻으로 삼았다. 둘째, 삼구를 반조하는 대상인 세 겹의 관문으로 삼고, 반조하는 지혜를 한 발 화살로 삼는다. 이에 대해 청풍 법사는 실實을 일구로 삼고 방편문(權門)에서 삼현의 뜻을 세웠다 셋째, 진실을 마주하여 반조하는 경우에는 셋이니 하나니 하는 이해를 일으키지 않으므로 별도의 한 구절을 두고, 이 별도의 한 구절을 한 발 화살로 삼는 것이 종문의 향상이다. 종문의 향상으로써 공겁을 완전히 뛰어넘어본분일구금시에 떨어지지 않는다.신훈삼현그러나 이미 ‘한 발 화살을 쏘아 세 겹의 관문을 쳐부수어도, 화살이 지나간 흔적은 분명히 남는다.’207)고 하였으니 제1구의 삼요가 그것이다.
 동산의 오위편정: 체구는 정위正位인 군위君位로서 본래 그 무엇도 없는 공계空界에 속한다. 용구는 편위偏位인 신위臣位로서

010_0663_b_01L爲體句也隨波逐浪者有賔有主
010_0663_b_02L無法不具如目機銖兩隨輕隨重
010_0663_b_03L虛舟駕浪隨高隨下故爲用句也
010_0663_b_04L又凾葢乾坤者體具萬德故爲體句
010_0663_b_05L隨波逐浪者隨波逐浪之高下目機
010_0663_b_06L銖兩之輕重是大用現前故爲用句
010_0663_b_07L截斷衆流者體用二門皆是春緣
010_0663_b_08L則爲雙照中又云不涉則爲雙遮中
010_0663_b_09L故爲中句也然則此三句亦皆有爲
010_0663_b_10L中之義故如三玄之玄不可卞也

010_0663_b_11L
又一鏃破三關有三義三句中一
010_0663_b_12L爲一鏃句句無定次第擧一全
010_0663_b_13L絕諸待對如三句互爲中也
010_0663_b_14L一愚之以權實爲三玄之義也
010_0663_b_15L三句爲所照三關以返照之智爲一
010_0663_b_16L此風法師之以實爲一句就權門
010_0663_b_17L立三玄之義也若當眞實返照之
010_0663_b_18L不作三一解故別置一句此以
010_0663_b_19L別置一句爲一鏃即宗門向上以宗
010_0663_b_20L門向上全超空刼本分
一句
不落今時也
010_0663_b_21L新熏
三玄
然旣云一鏃破三關當有分明
010_0663_b_22L箭後路第一句三要是也

010_0663_b_23L
洞山五位偏正者體句即正位君位
010_0663_b_24L屬空界本來無事用句即偏位臣位

010_0663_c_01L만물이 무수한 형상을 이루고 있는 색계에 속한다. 중구는 정중래正中來로서 임금이 신하를 보듯 평등한 마음으로 이理를 등지고 사事로 나아가는 것(背理就事)208)이다. 본분구本分句는 편중지偏中至로서 신하가 임금을 향해 충성을 다하듯 사事를 버리고 이理로 들어가는 것(捨事入理)이다. 종문宗門의 향상구(向上)는 겸중도兼中到로서 임금과 신하가 도리에 합하여 갖가지 인연과 하나로 어울려 응하지만 특정한 무엇에 떨어지지 않으니 편과 정이 자유롭게 자리를 맞바꾼다(回互).209) 대혜는 오위편정도五位偏正圖를 설명하였다. 첫째 정중편正中偏◓,흑(정위)을 이분하여 그중 일분은 백(편위)둘째 편중정偏中正◒,백을 이분하여 그중 일분은 흑셋째 정중래☉. 언구란 언구는 모두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서 무엇인가를 불러내니 정위로부터 오지 않은 것이 없다.210) 넷째 편중지▼(◉반전모양). 마치 사람이 집으로 돌아가는데 아직 이르지 못했지만 곳곳마다 집인 경우와 같다. 다섯째 겸중도●. 앞의 4위를 모두 아울러 정위로 돌아가니 자유롭게 맞바꿀 수 있음(回互)을 알 수 있다.211) 운문의 삼구를 알면 동산의 편정에 관한 설이 삼현 가운데 현임을 준하여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간화결의론』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선문에도 또한 여러 종류의 근기가 있으므로 입문하는 양상도 매우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오로지 마음과 식識이 있을 뿐이라는 도리에 의거하여 체중현에 들어가니 이 최초의 현문에는 원교圓敎에서 내세우는 사사무애事事無礙의 이론이 있다. 마치 끝없는 불국토의 경계에는 자타가 털끝만큼의 간격도 없고, 십세 고금의 시작과 끝이 현재의 찰나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 근기의 사람들은 오랫동안 불법에 대한 지견을 마음에 담아 두고 있어서 그것에서 깨끗하게 벗어나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본분사에 따라 대응하여 지견을 깨끗하게 떨쳐 버리고 구중현으로 들어가 최초의 현문에서 생기는 불법에 대한 지견을 타파한다. 곧장 지름길로 이르는 문(徑截門)과 같으니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마삼근麻三斤 등의 화두가 그것이다. 그러나 아직 지견을 깨끗하게 떨쳐 버렸다는 분별을 잊지 못해 여전히 생사의 세계에서 자유자재하지 못하기 때문에 세 번째 현중현을 세우니 양구良久·묵연默然·방棒·할喝 등의 작용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삼현문을 시설한 까닭은 본래 남아 있는 병통으로 말미암은 것이지만,

010_0663_c_01L是色界萬物成形中句即正中來
010_0663_c_02L視臣背理就事本分句即偏中至
010_0663_c_03L臣向君捨事入理宗門向上即兼
010_0663_c_04L中到君臣道合冥應諸緣不隨諸
010_0663_c_05L然偏正亦回互故大慧說五位
010_0663_c_06L偏正圖正中偏◓二分黑
一分白
偏中正
010_0663_c_07L二分白
一分黑
正中來☉凡有言句
010_0663_c_08L無中唱出無不從正位中來偏中
010_0663_c_09L至▼(◉반전모양)如人歸家未到而至兼中到
010_0663_c_10L兼前四位皆歸正位也回互可
010_0663_c_11L見此雲門三句洞山偏正之說
010_0663_c_12L三玄之玄准知也

010_0663_c_13L
然看話決疑論云禪門亦有多種根
010_0663_c_14L入門稍異或有依唯心惟識道理
010_0663_c_15L入體中玄此初玄中有圓敎事事無
010_0663_c_16L礙之詮如無邊刹境自他不隔於毫
010_0663_c_17L十世古今始終不離於當念
010_0663_c_18L此人長有佛法知見在心不得脫灑
010_0663_c_19L或有依本分秖對灑落知見入句中
010_0663_c_20L破初玄門佛法知見如徑截門
010_0663_c_21L前柏樹子麻三斤等是也然未忘灑
010_0663_c_22L落知見猶於生死界未得自在故
010_0663_c_23L立第三玄中玄如良久默然棒喝作
010_0663_c_24L用等是也是以三玄施設本由遣病

010_0664_a_01L옛 조사들의 근본 종지에서 보면 아직 옳지 않다.’212) 그런 까닭에 『선문오종강요』에서는 이에 근거하여 ‘체중현은 삼세가 한 찰나와 같다는 것이고, 구중현은 경절언구徑截言句213)와 같고, 현중현은 양구나 방·할 등과 같은 것이다.’214)라고 하였다. 그러나 고탑주가 이름을 붙인 본래의 뜻에는 맞지 않는 듯하다. 어째서인가? 만약 입문의 깊이를 분별하여 품평한다면(差排) 그윽하고 현묘하여 변별하지 못한다는 뜻이 없어지고 말기 때문이다. 잘 생각해 보라!
학인이 물었다. ‘제3구란 어떤 것입니까?’임제가 말했다. ‘무대 위에서 움직이고 있는 꼭두각시를 보라. 밀거나 당기거나 모두 그 뒤에서 조작하는 사람의 손에 달려 있다.’
청풍 법사는 ‘ 「부처를 만나면 부처의 경지를 말하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과 어울리게 말하며, 아귀를 만나면 아귀의 수준에서 말한다.」는 이 말이 바로 꼭두각시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겠으며, 그 뒤에서 조작하는 사람은 바로 임제 자신이다.’215)라고 하였다. 또 말하였다. ‘작가가 삼요인조사의 무늬 없는 도장을 가지고 허공에 찍어 버리니 어떤 자취도 없어짐朕은 짐眹으로 써야 맞다.삼요라 한다.제1구216) 물에 도장을 찍어 문채가 (사실은 없지만) 있는 듯하니 이름을 바꾸어 삼현이라 한다.제2구무른 진흙에 도장을 찍어 흔적이 온통 드러나니 이름을 바꾸어 삼구라 한다.제3구’그러므로 제1구가 삼요요, 제2구가 삼현이다. 고덕이 이름을 나열하고 그것을 해석하면서 제3구를 삼구라 한 것은 다만 삼구라는 말이 있는 것일 뿐이고 삼구라는 이름은 없다고 하였다. 백파 노사가 삼구를 설한 뜻인즉슨 부처는 중도를 증득하였으므로 중구이고, 나한은 몸을 사회고목死灰枯木처럼 만들고 지혜의 작용을 없애 버렸으므로 무구이며, 아귀는 기갈로 인해 미친 듯이 내달리므로 유구라는 것이다.217) 그런즉 범부와 성인 간에 현격하게 유무의 차별이 있으므로 격별삼구隔別三句218)라 한다. 그러므로 구句라는 것은 언구라 할 때의 구이며, 구는 만물의 차별된 양태를 나타낸다.
이 유무는 진공과 묘유 및 단견과 상견과 어떻게 다른가?

010_0664_a_01L若望上祖初宗即未可也故五宗綱
010_0664_a_02L依此云體中玄三世一念等
010_0664_a_03L中玄徑截言句等玄中玄良久棒
010_0664_a_04L喝等然似非古撘主立名之本意
010_0664_a_05L若以入門深淺分別差排無幽
010_0664_a_06L玄不卞之義也思之

010_0664_a_07L
如何是第三句看取棚頭弄傀儡
010_0664_a_08L抽牽全借裏頭人

010_0664_a_09L
風云逢佛說佛逢羅漢說羅漢逢餓
010_0664_a_10L鬼說餓鬼此非弄傀儡耶裏頭人
010_0664_a_11L是臨濟自謂也又云作家漢將三要
010_0664_a_12L祖師無
紋印字
向虛空裏撘破了無朕迹
010_0664_a_13L朕當
作眹
直名三要第一
向水上撘却
010_0664_a_14L有文彩轉名三玄第二
向爛泥裏撘
010_0664_a_15L痕縫全彰轉名三句第三
然第一
010_0664_a_16L句三要第二句三玄古德列名釋之
010_0664_a_17L而第三句三句但有三句之言無三
010_0664_a_18L句之名老師義說三句謂佛證中道
010_0664_a_19L故爲中句羅漢灰身滅智故爲無句
010_0664_a_20L餓鬼飢渴狂走故爲有句也然則凡
010_0664_a_21L聖懸隔有無差別故名爲隔別三句
010_0664_a_22L故云句言句之句句詮差別

010_0664_a_23L
此有無與眞空竗有及斷常見

010_0664_b_01L
『화엄경소』 추자권48에, ‘조건에 따라 일어나므로 유이고 조건에 따라 일어나므로 공이며, 자성이 없으므로 유이고 자성이 없으므로 공이다. 자성이 없이 조건에 따라 일어나기 때문에 공이라면 무견無見·단견斷見의 공이 아니니잘못을 가려냄진공眞空이다옳음을 드러냄. 자성이 없이 조건에 따라 일어나므로 유라면 유견有見·상견常見의 유가 아니니잘못을 가려냄이것이 환유幻有이다옳음을 드러냄.’219)라고 하였다.
앞에서 진공과 묘유가 유무와 단상斷常의 견해와 다름을 판별하였다. 초鈔에서 ‘유무의 견해가 곧 단상의 견해’220)라 하고, 소疏에서 왜 거듭하여 이렇게 덧붙인 것인가? 여기에는 깊은 뜻이 있다. 단상의 견해에는 삿된 종지가 많아 오리사五利使221)는 변견邊見에 속하지만 그 유무의 견해는 바른 법을 통섭한다. 공상空相과 유상有相을 취하기만 하면 이치에 들어맞지 않는 것은 유무의 견해 때문이다. 이런 유무의 견해에서 궁극적으로 영원히 벗어남은 오직 대보살의 경지일 뿐이니 이로써 유무의 견해가 단상의 견해와 다름을 판별할 수 있다.222) 선문에서 유무의 견해는 곧 유무에 대한 치우친 견해이다. 유무에 대한 치우친 견해에서 멀리 벗어나야 격외의 두 가지 선(二禪)이다.
(임제) 선사가 말하였다. ‘무릇 종승宗乘(선의 극치)을 거창하고자 하면, 일구에 삼현을 갖추어야 하고 일현에 삼요를 갖추어야 하니, 현도 있고 요도 있으며, 권도 있고 실도 있으며, 조도 있고 용도 있다. 그대들은 이 뜻을 어떻게 이해하는가?’223)
이상의 내용들은 『선문강요집』에 이미 상세히 나와 있다. 이제 다시 나의 견해로 하나의 뜻을 더하여 드러내겠다. 대개 본송本頌224)에는 다만 제1구·제2구·제3구라는 말만 있을 뿐, 구句·현玄·요要라는 말은 없다. 그런데 지금 문득 구 가운데 현이 있고 현 가운데 요가 있다는 설이 나타났다. 구 가운데 구는 비록 앞의 송 삼구 가운데 일구一句와 비슷한 듯하지만 송에 처음부터 현과 요라는 말은 없다. 그런데 지금 느닷없이 현과 요를 언급한다면 현은 제2구 가운데 삼현이고 요는 제1구 가운데 삼요가 된다.

010_0664_b_01L別如何華嚴秋字四十八疏云
010_0664_b_02L生故有緣生故空無性故有
010_0664_b_03L性故空無性緣生故空則非無見斷
010_0664_b_04L見之空
爲眞空也
無性緣生故
010_0664_b_05L則非有見常見之有
是幻有也
010_0664_b_06L
上辨眞空妙有異於有無斷常之
010_0664_b_07L見也鈔云然有無見即斷常見
010_0664_b_08L何重牒此有深意斷常之見多是
010_0664_b_09L邪宗即五利使邊見所攝其有無
010_0664_b_10L通涉正法但取空有相未有契
010_0664_b_11L爲有無見此有無見究竟遠離
010_0664_b_12L唯大菩薩此辨有無見異於斷常見
010_0664_b_13L然此禪門中有無見即有無解
010_0664_b_14L若遠離有無解爲格外二禪也

010_0664_b_15L
師云大凡擧唱宗乘一句中須具三玄
010_0664_b_16L一玄中須具三要有玄有要有權有實
010_0664_b_17L有照有用汝等作麽生會

010_0664_b_18L
此上諸節禪門綱要已詳之而今更
010_0664_b_19L以己意進顯一義盖本頌但有第
010_0664_b_20L一第二第三句之言無句玄要之言
010_0664_b_21L而今忽有句中有玄玄中有要之說
010_0664_b_22L以句中之句雖似上頌三句中一句
010_0664_b_23L旣頌無玄要之言而今忽言玄要
010_0664_b_24L玄是第二句中三玄要是第一句中

010_0664_c_01L그렇다면 제3구에만 유독 삼구가 없는 것인가? 청풍 법사는 ‘요는 요점을 찌른다고 할 때의 요이고, 현은 유현하다는 뜻의 현이며, 구는 언구言句의 구’225)라고 하였다. 이 언구의 구가 어찌 제3구의 삼구가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이 말은 일구란 제3구의 삼구 가운데 일구를 뜻함을 알아야 한다. 또 청풍 법사는 제1구·제2구를 해석하고 제3구에 이르러 말하기를 ‘나와 그대가 설하기도 듣기도 하며 묻기도 답하기도 한 이 상황이 이미 제3구에 떨어진 것’226)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제3구 가운데 현과 요를 갖추고 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이 가운데 최초구와 말후구 두 구의 뜻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대개 최초구와 말후구에 대한 설은 중간 삼구에서 말한 것이다. 앞에서 말한 진불·진법·진도묘유이 세 가지는 곧 하나이며 모두 공이니진공이것이 바로 조사의 무늬 없는 도장이라는 뜻이다. 최초에 이 일(此事)을 곧바로 드러내 보였기 때문에 이를 최초구라 한다.
이 종사(청풍 법사)는 바로 이와 같은 무늬 없는 도장을 가지고 허공에 찍고제1구물에 찍고제2구진흙에 찍는다제3구. 물이 흐르는 대로 따라가듯이 소류溯流하고 순류順流하며 차례대로 삼구를 설한다. 호월皓月 선객이 ‘일찍이 담당 덕붕澹堂德朋227)이 「3을 세 번 더하면 3 곱하기 3이 9인 것과 같이 부처에서 부처로 대대로 전하고 조사에서 조사에게로 전수하였다.」고 한 그 말이로군.’228)이라고 한 말과 같다. 이제 ‘구 가운데 현을 갖추고 현 가운데 요를 갖추어야 한다.’는 말은, 숭재혜가 ‘모름지기 구句·현玄·요要 세 가지가 필경에는 완전히 한 덩이로 모두 하나의 기틀임을 알아야 한다.’229)고 말한 그 뜻이니, 이것이 진공이다. ‘현도 있고 요도 있으며, 권도 있고 실도 있으며, 조도 있고 용도 있다.’는 말은, 청풍 법사가 ‘현과 요는 구에 있고, 권과 실은 현에 있으며, 조와 용은 요에 있으니 각각에 타당함이 있다.’230)라고 말한 그 뜻이니, 이것이 묘유이다. 이 진공과 묘유에 대해 먼저 삼구를 설하고 마지막에 물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듯이 소회溯洄하고 역류逆流하여 결론지어 이 일(此事)을 보였으므로 이를 말후구라 한다. 청풍 법사는 ‘아홉을 셋으로 묶고, 셋을 하나로 묶지만,

010_0664_c_01L三要也然則第三句中獨無三句耶
010_0664_c_02L風云要省要之要玄幽玄之玄
010_0664_c_03L言句之句此言句之句豈非第三句
010_0664_c_04L三句耶故知此言一句者是第三句
010_0664_c_05L三句中一句也又風釋第一句第二
010_0664_c_06L至第三句云吾與子一說一聽
010_0664_c_07L問一答早落第三句此非第三句中
010_0664_c_08L具玄要耶然此中具最初末後二句
010_0664_c_09L之義盖最初末後之說在中間三句
010_0664_c_10L而言也謂上眞佛眞法眞道
三即
010_0664_c_11L皆空者
即祖師無紋印字最初
010_0664_c_12L直示此事故謂之最初句也此宗師
010_0664_c_13L將此無紋印字印空第一
印水第二

010_0664_c_14L印泥第三
㴑游而順流如次說三句
010_0664_c_15L如月禪客所謂甞聞澹堂云見三
010_0664_c_16L下三三三如九佛佛相傳祖祖授
010_0664_c_17L受者也今句中具玄玄中具要者
010_0664_c_18L崇齋惠云須知句玄要三事畢竟冥
010_0664_c_19L然摠一機此眞空也有玄有要
010_0664_c_20L權有實有照有用者風云玄要在句
010_0664_c_21L權實在玄照用在要各有攸當
010_0664_c_22L竗有也此眞空妙有以先說三句
010_0664_c_23L後㴑洄而逆流結示此聿 [12] 故謂之末
010_0664_c_24L後句也如風云束九爲三束三爲一

010_0665_a_01L하나도 거두지 않는다.’231)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대들은 이 뜻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라고 한 말은 서 있는 그 자리에서 바로 알아차리도록 한 것이니 이 또한 마음에 터득할 만한 여지가 있다는 뜻이다. 최초구와 말후구, 이 두 구는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같은 점은 말후구를 알고자 하면 미생시未生時232)를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다른 점은 말후구는 삼구를 총괄하여 간추려 말한 것이라는 점이다. 『염송설화』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대혜가 말하였다. 「궁극적인 한 구절233)은 말로 표현하기 이전에 벌거벗은 알몸을 모조리 드러냈으니 하늘과 땅 그 어디에나 있고 소리와 색이 모두 그것이다. 황면노자黃面老子234)는 이 결정적인 한 구절(一着子)을 얻고서 말하기를, 도솔천을 떠나기도 전에 이미 왕궁에 강림하였고 모태에서 태어나기도 전에 중생제도를 이미 마쳤다고 하였다.」 이것이 말후구의 결정적인 한 구절이다. 말후구의 결정적인 한 수라 하면 옳지만, 말후구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산을 가리키며 「산인가?」라고 물었을 때 「산」이라 답하면 옳다. 산에 있는 풀, 나무, 흙, 바위 등을 모두 들어 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중의 바위 하나를 가리며 「산인가?」라고 물었을 때 「산」이라 답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어찌 산중의 바위 하나를 들어 산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235)
그러므로 고덕이 ‘말후구가 원만함의 극치에 이르면 최초구와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236)라고 하였으니, 원만함의 극치에 이른 연후에는 같다는 말이다.237) 이것은 교학에서 처음에는 일승一乘화엄에 의지하여 삼승三乘아함, 방등, 반야을 연 다음 법화에 이르러 삼승을 모아 일승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 또 『기신론』에서 처음에는 일심一心에 의지하여 이문二門을 일으키고 그런 후에 이문이 다르지 않음을 밝혀 일심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 아래 도표에서 (임제의) 본송을 제시한다. 종사는 최초구로부터 시작하여 깊은 곳에서 얕은 곳에 이르며 상중하 삼사三士를 두루 접한다. 반면 이 도표에서는 차례를 바꾸어 배우는 이들이 얕은 곳에서 시작하여 깊은 곳에 이르러 말후구를 깨닫게 하고자 하였다.

010_0665_a_01L一亦不收者也故云汝等作麽生會
010_0665_a_02L此是欲令立地搆取此亦心得有分
010_0665_a_03L然最初末後二句或同或異
010_0665_a_04L欲識末後句看取未生時此同
010_0665_a_05L異者末後句者摠約三句而言
010_0665_a_06L說話云大慧云末後一句子
010_0665_a_07L前露裸裸盖天盖地盖聲葢色
010_0665_a_08L面老子得箇一着子便道云未離
010_0665_a_09L兜率已降王宮未出母胎度人已
010_0665_a_10L畢云云此是末後句之一着子也
010_0665_a_11L是末後句之一着則可謂是末後句
010_0665_a_12L則不可指山而問焉曰山乎曰山則
010_0665_a_13L山有草木土石皆擧之也指山
010_0665_a_14L中之一石而問焉曰山乎曰山則不
010_0665_a_15L何得擧山之一石稱山云者哉
010_0665_a_16L故古云末後句至於圓極則與最初
010_0665_a_17L何以異哉意謂圓極然後同也
010_0665_a_18L此如敎中初依一乘
開三乘阿含
般若

010_0665_a_19L至法華會三乘歸一乘也又如起信
010_0665_a_20L初依一心起二門後明二門不二
010_0665_a_21L歸一心也

010_0665_a_22L
下圖示本頌宗師自最初句從深至
010_0665_a_23L上中下三士普接也此圖逆次
010_0665_a_24L欲使學者從淺至深悟末後句也

010_0665_b_01L
제3구제2구제1구
 이 구절에서 알아차리면 자기도 구제하지 못한다. 이 구절에서 알아차리면 인천의 스승이 될 만하다. 이 구절에서 알아차리면 불조의 스승이 될 만하다. 자성 셋 그대로 하나이니 모두 공이다.
  진불眞佛
  진법眞法
  진도眞道
여래가 샛별을 보고 오도한 것을 여래선이라고 한다.조사의 심인을 전해 받아 수지한 것을 조사선이라고 한다.조사의 종지는 다만 자기 마음으로 터득하는 것일 뿐이다.
여래삼전如來三傳
◆달마삼전達摩三傳
1. 자리를 나누어 앉게 하신 일(分座)은 살인도殺人刀를 나타내며, 진금포眞金鋪라고도 한다.
◆1. 모든 대상이 이미 끊어졌다는 문답에서 여래선을 얻었다.
2. 꽃을 들어 보이신 일은 활인검活人劍을 나타내며, 잡화포雜貨鋪라고도 한다.
◆2. 마음을 찾았으나 찾지 못했던 인연에서 조사선을 얻었다.
3. 관 밖으로 발을 내보이신 일은 살과 활을 나란히 제시하여 나타낸 것이다.
◆3. 삼배하고서 골수를 얻었다.
 부처와 조사도 전하지 못한다.
 하택이 본원이니 불성이니 운운한 것은 의리선이다.청원은 계급에 떨어지지 않아 여래선을 얻었다.살인도남악은 하나의 그 무엇이라고 말해도 딱 들어맞지 않는다고 하여 조사선을 얻었다.활인검 육조 이하로는 전하지 않았다. 향상하는 한 길은 전할 곳이 없다.
 
격외선이라고도 한다.
 
삼인三印
 도장을 진흙에 찍으면 온통 흔적이 뚜렷이 드러나는 것과 같다.
 이름을 바꾸어 삼구라고 한다.
 도장을 물에 찍으면 문채가 있는 듯하지만 결국은 남지 않는 것과 같다.
 이름을 바꾸어 삼현이라고 한다.
 도장을 허공에 찍으면 아무 흔적도 남지 않는 것과 같다.
 이름을 바꾸어 삼요라고 한다.
 무늬 없는 도장

010_0665_b_01L
第三句第二句第一句
 此句下薦得自求不了 此句下薦得爲人天師 此句下薦得爲佛祖師 自性 三卽一皆空
  眞佛
  眞法
  眞道
如來見星悟道名如來禪傳持祖師心印名祖師禪祖師宗旨秪自心得
如來三傳
◆達摩三傳
分座殺人刀亦名眞金鋪
◆一 諸緣已斷得如來禪
拈華活人劍 亦名雜貨鋪
◆二覓心不得 得祖師禪
示趺殺活齊示
◆三 拜得髓
 佛祖不傳
 荷澤作本源 佛性爲義理禪淸源不落階級得如來禪
殺人刀
南岳一物不中得祖師禪
活人劍
 六祖下不傳 向上無傳
 
名格外禪
 
三印
  如印印泥痕縫全彰
轉名三句
 如印印水似有文彩
 轉名三玄
 如印印空了無朕迹
 直名三要
 無紋印字

010_0666_a_01L
임제 의현이 제시한 삼구
 아귀를 만나면 아귀의 수준에서 말한다.
 나한을 만나면 나한과 어울리게 말한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의 경지를 말한다.
권실삼구
권權이 권문權門에서 삼현이라는 이름을 세운다.
실實권과 실의 향상사조용四照用
1. 비춤을 먼저하고 작용을 나중에 함.
2. 작용을 먼저하고 비춤을 나중에 함.
3. 비춤과 작용을 동시에 함.
4.비춤과 작용을 동시에
하지 않음.
(범부와 성인을) 나누는 삼구
 유구有句
 무구無句
 중구中句
신훈삼현
新熏三玄
 체중현
體中玄
 구중현
句中玄
 현중현
玄中玄
본분일구
本分一句
종문향상
宗門向上
삼요三要
 대기가 원만히 응함.
 대용이 곧장 발휘됨.
 대기와 대용이 나란히 시행됨.
 향상하는 하나의 통로
규봉 종밀(圭山) 삼종三宗
 식망수심종息妄修心宗
 민절무기종泯絶無寄宗
 직현심성종直顯心性宗
운문 문현
삼구
 절단중류
截斷衆流
 수파축랑
隨波逐浪
 함개건곤
函蓋乾坤
 한 발 화살로 세 겹의 관문을 뚫다. 별도로 설정하는 한 구절 화살이 지나간 길이 뚜렷이 남아 있다.진여眞如 진공眞空
   묘유妙有
진속삼제眞俗三諦
 속제俗諦
 진제眞諦
 제일의제第一義諦
동산의 편정오위偏正五位
 정正 군위君位
 편偏 신위臣位
 정중래正中來 군시신君視臣
 편중지偏中至 신향군臣向君
 겸중도兼中到 군신합도君臣道合
사할四喝
 금강왕의 보검과 같은 할
 바닥에 웅크린 금털 사자와 같은 할
 물고기를 유인하는 수단과 같은 할
하나하나의 할이 할로서의 작용을 하지 않는 할
천태 삼지삼관三止三觀
 수연지가관隨緣止假觀
 체진지공관體眞止空觀
 중도지중관中道止中觀
대혜의 편정도偏正圖
 정중편正中偏 ◓
 편중정偏中正 ◒
 정중래正中來 ☉
 편중지偏中至▼(◉반전모양)
 겸중도兼中到 ●
삼성三聖
 문수대지文殊大智
 보현대행普賢大行
 지행양존智行兩存
비로자나 이상으로 향상하는 길
사빈주四賓主
1. 빈중빈賓中賓
 학인이 본분을 깨닫지 못하였다.
2. 빈중주賓中主
 학인이 본분을 깨달았다.
3. 주중빈主中賓
 종사가 본분을 깨닫지 못하였다.
4. 주중주主中主
 종사가 본분을 깨달았다.
사요간四料揀
 사람은 빼앗고 경계를 빼앗지 않는다.
 경계를 빼앗고 사람은 빼앗지 않는다.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다.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지 않는다.본지풍광本地風光
사법계四法界
 사事
 이理
 이사중理事中
이무애법계
理無礙法界
사무애법계
事無礙法界
이사무애법계
理事無礙法界
이사쌍망理事雙忘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일진법계一眞法界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은 문자를 건립한 것이다.불립문자不立文字직지인심直指人心견성見性
성불成佛

010_0666_a_01L本頌三句
 逢餓鬼說餓鬼
 逢羅漢說羅漢
 逢佛說佛
權實三句
權就此權門立三玄名
權實向上四照用
先照後用
先用後照
照用同時
照不同時
隔別三句
 有句
 無句
 中句
新熏三玄
  體中玄
  句中玄
  玄中玄
本分一句宗門向上三要
 大機圓應
 大用直截
 機用齊施
 向上一竅
圭山三宗
 息妄修心宗
 泯絶無寄宗
 直顯心性宗
雲門三句
截斷衆流
隨波逐浪
函蓋乾坤
 一鏃破三關別置一句 分明箭後路眞如 眞空
   妙有
眞俗三諦
 俗諦
 眞諦
 第一義諦
偏正五位
 正 君位
 偏 臣位
 正中來 君視臣
 偏中至 臣向君
 兼中到 君臣道合
四喝
 金剛寶劍喝
 獅子踞地喝
 探竿影草喝
一喝不作一喝用喝
天台三止三觀
 隨緣止假觀
 體眞止空觀
 中道止中觀
大慧偏正圖
 正中偏 ◓
 偏中正 ◒
 正中來 ☉
 偏中至▼(◉)
 兼中到 ●
三聖
 文殊大智
 普賢大行
 智行兩存
毘盧向上
四賓主
賓中賓
 學者無鼻孔
賓中主
 學者有鼻孔
主中賓
 宗師無鼻孔
主中主
 宗師有鼻孔
四料揀
 奪人不奪境
 奪境不奪人 人境兩俱奪 人境俱不奪本地風光
四法界
 事
 理
 理事中
理無礙法界
事無礙法界
理事無礙法界
理事雙忘事事無礙法界一眞法界
 達摩西來意建立文字不立文字直指人心見性
成佛

010_0667_a_01L
 부처님이 일생 동안 설한 실천으로서의 선禪과 이론으로서의 교敎에 배대함.
 일대선교一代禪敎는 오수신훈悟修新熏 등.
 일체의 선문禪文은 위음왕불 저편에서 다시 저편이며, 몽각일여夢覺一如 등이다. 일체의 선문을 각기 그 자리에 앉히면 모두 부동착不動着이며 또한 모두 상을 주어야 하고 모두 벌을 주어야 한다는 것 등이다. 일체의 선문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며, 주장자는 다만 주장자라 부를 뿐이라는 것으로 하나하나가 뚜렷하고 분명하다는 것 등이다.

010_0667_a_01L
 配一代禪敎
 一代禪敎悟修新熏等
 一切禪文威音那邊 更那邊及夢覺一如等 一切禪文各安其位摠不動着及摠賞摠罰等 一切禪文山是山水是水主杖但喚作主杖 一一端端的的等

010_0667_b_01L
고덕이 ‘활구活句에서 알아차리면 불조의 스승이 될 만하지만, 사구死句에서 알아차리면 자기도 구제하지 못한다.’238)고 하였는데, 이 삼구와는 어떻게 다른가?
『선가귀감』에 ‘화두에는 구절(句)과 뜻(意)이라는 두 가지 문이 있다. 구절을 궁구하는 것(參句)은 경절문徑截門239)의 활구를 가리키니, 마음으로 헤아릴 길도 전혀 없고 말을 따라 쫓아갈 길도 없어서 모색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뜻을 궁구하는 것(參意)은 원돈문圓頓門240)의 사구를 가리키니, 이치로 통할 길도 있고 말을 따라 쫓아갈 길도 있어서 듣고 이해하고 생각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241)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활구에서, 상근기는 제1구를 알아차려 불조의 스승이 되고 중근기는 제2구를 알아차려 인천의 스승이 된다. 예컨대 방온龐蘊이 처음에 석두를 찾아가 ‘만법과 더불어 짝이 되지 않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라고 묻자 석두가 손으로 방온의 입을 틀어막았던 예와 같다. 마침내 여래선을 깨닫고 난 후에 이번에는 마조를 찾아가 ‘만법과 더불어 짝이 되지 않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라고 묻자 마조가 ‘한입에 서강의 물을 모두 들이켜면 말해 주겠다.’라고 말해 주어 더하여 조사선을 깨달았다.242) 그렇다면 동일하게 한 구절을 참구하지만 깨달음에는 선후와 깊이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고덕이 다만 ‘불조의 스승이 될 만하다.’라고 한 말은 깊은 것을 들어 낮은 것을 아우른 것이다.243)
근래에 중부자中孚子 초의 의순草衣意恂이 지은 『사변만어四辨漫語』에서는 ‘제2구는 죽이지도 살리지도 않는 구절’244)이라고 하였다. 말해 보라. 활구가 참구이고 사구는 참의라면, 참구와 참의 사이에서 어떻게 참구해야 살리지도 죽이지도 않는 구절이 되는가? 이것은 그 뜻을 깊이 헤아리지 않고 경솔하게 발언한 말일 뿐이다. 또 옛날에 삼선론三線論245)이 있는데, 태공선太公線은 태공의 낚싯줄을 가리키지만 그 뜻은 여기에 한정되지 않으므로 제1구이다. 허공선虛空線은 제2구이고, 지렁이선(蚯蚓線)은

010_0667_b_01L
古德云活句下薦得與佛祖爲師
010_0667_b_02L死句下薦得自救不了與此三句
010_0667_b_03L同別如何禪家龜鑑云話頭有句
010_0667_b_04L意二門叅句者徑截門活句也
010_0667_b_05L心路 [13] 語路無摸𢱢故也叅意者
010_0667_b_06L圓頓門死句也有理路有語路
010_0667_b_07L聞解思想故也然則活句下上根薦
010_0667_b_08L得第一句與佛祖爲師中根薦得
010_0667_b_09L第二句與人天爲師也如老龎初叅
010_0667_b_10L石頭云不與萬法爲侶者是什麽人
010_0667_b_11L頭以手掩其口遂悟得如來禪後
010_0667_b_12L叅馬祖云不與萬法爲侶者是什麽
010_0667_b_13L祖云一口吸盡西江水來又悟得
010_0667_b_14L祖師禪也然則豈非一叅句之下
010_0667_b_15L有先後深淺有異耶故古德但云
010_0667_b_16L佛祖爲師者擧深該淺也近中孚子
010_0667_b_17L所著四辨漫語云第二句是不死不
010_0667_b_18L活之句且道活句是叅句死句是
010_0667_b_19L叅意則叅句叅意之間如何叅之爲
010_0667_b_20L不死不活之句耶此不究其意率爾
010_0667_b_21L而發言耳

010_0667_b_22L
又古有三線之論謂太公線者太公
010_0667_b_23L之垂釣是意不此限故爲第一句
010_0667_b_24L虛空線者是第二句蚯蚓線者

010_0667_c_01L제3구이니 모두 알 수 있다.
8. 『사변만어』와 『소쇄선정록(선문증정록)』 비판에 앞서 삼종선 개념을 바로잡다
有箇閒長  어떤 한가한 장로들이
述成語與  『사변만어』와 『소쇄선정록』을 지었네
逐條說又  그 조목 따라 설파說破하고 변설辨說하리니
或恐認魚  행여 물고기 눈을 명주로 오인할까246) 염려해서라네

근래에 중부자 초의가 『사변만어』를 지었다. 네 가지 주제에 대한 변설(四辨)이란 의리선과 격외선, 여래선과 조사선, 살인검과 활인검, 진공과 묘유에 관한 것이다.247) 만어漫語를 변설한다는 말에서 만어란 허황한 말이라는 뜻으로 스스로 겸손하게 표현한 말이다.
또 우담 홍기優曇洪基의 『소쇄선정록掃灑先庭錄(선문증정록禪門證正錄)』이 있는데, 이는 『선문수경』에서 (백파가) 선사先師 문안의 뜰을 더럽힌 것을 자신이 먼지를 쓸고 물을 뿌려 깨끗이 하겠다는 뜻에서 지은 책이다. 이 책은 4절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삼처전심은 선문禪門의 원류로서 근원이 맑으면 지류도 맑다. 둘째, 의리선·격외선, 여래선·조사선은 선문의 이름으로서 이들 이름이 바르게 서면 실상도 바르게 드러날 것이다. 셋째, 살인도와 활인검은 선에 붙인 이름의 극치로서 이름이 극치에 이르면 실상도 극치에 다다른다. 넷째, 삼구와 일구는 선문에 본래 있는 어구(文彩)로서 근본에 통달하면 지말에도 통달한다.’248)라고 하였다. 스스로는 깨끗하고 바름이 지극함에 이르렀다고 여기고, 『선문수경』은 깨끗하고 바름이 지극함에 이르지 못했다고 여긴다는 뜻이다.
이것이 제목의 뜻과 4절의 명목을 세운 의미인데 이미 지나치게 손을 대고 조작하여 잘못된 점이 매우 심하다. 또한 그 글(『선문수경』)의 뜻에서 『사변만어』와 『소쇄선정록』 모두 시비를 가리려는 마음이 크고 승부를 가르는 데 기세가 뻗쳐 그 의미는 제대로 궁구하지도 않고서 온통 내쳐 깨뜨리는 데만 힘썼으니 삿된 이해로 어지러이 여기저기 뒤섞어 물고기 눈과 밝은 구슬(明珠)을 혼동했다고 할 만하다. 그러므로 이제 그 『사변만어』를 설파하고 그 『소쇄선정록』을 변설하여 ‘사변만어설’,설說이란 병산거사 이순보李純甫249)의 『명도집설鳴道集說』250)에서의 설과 같은 의미이다.‘소쇄선정록변’이라 제목을 붙였다. 모든 종문의 글을 익힌 것은 아니니, 다만 통달한 사람의 고찰을 기다리며 먼저 바른 뜻을 푼다.
선의 개념에 대해 그 핵심을 드러내어 밝힌 정의에는 차이가 있다. 고덕이 ‘선은 부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의 말이다.’251)라 하였고, 또 ‘사람이 마음에서 얻으면 삼장십이분교

010_0667_c_01L第三句皆可知

010_0667_c_02L
有箇閒長老述成語與錄逐條說又辨
010_0667_c_03L或恐認魚目

010_0667_c_04L
近有中孚子著四辨漫語四辨者
010_0667_c_05L理格外禪如來祖師禪殺人活人劒
010_0667_c_06L眞空妙有辨漫語者汗漫之語
010_0667_c_07L自謙也又有優曇子述掃灑先庭錄
010_0667_c_08L謂禪文手鏡汚穢先師之門庭自爲
010_0667_c_09L掃灑之意也錄有四節三處傳心
010_0667_c_10L禪門之源源淸則流淸義理格外
010_0667_c_11L如來祖師禪禪門之名名正則
010_0667_c_12L實正殺人刀活人劒禪名之極
010_0667_c_13L名極則實極三句一句禪門之本
010_0667_c_14L有文彩本達則末達謂自爲淸正極
010_0667_c_15L以手鏡爲不爲淸正極達之意也
010_0667_c_16L此則題意與四節立名早是斧鑿太
010_0667_c_17L且其文中辭意語與錄皆是非情
010_0667_c_18L勝負氣高不究其義全務斥破
010_0667_c_19L可謂邪解亂轍魚目渾珠也故今說
010_0667_c_20L其語辨其錄名曰四辨漫語說說者
如屏
010_0667_c_21L山李純甫
鳴道集說
掃灑先庭錄辨不是全門之
010_0667_c_22L第竢通人之攷先釋正義

010_0667_c_23L
禪有詮旨之異古德云禪是佛心
010_0667_c_24L是佛語又云若人得之於心則三藏十

010_0668_a_01L내지 저잣거리의 쓸데없는 말이나 앵무새와 제비의 지저귐까지도 모두 교외별전의 소식이지만, 선지禪旨252)를 입에서 잃고 나면 염화미소도 도리어 교의 자취일 뿐이다.’253)라고 하였으니, 이는 선지를 개괄한 말이다. 또 고덕이 말하였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활등처럼 설하셨고 조사들은 활시위처럼 설하셨다.’254) 또 말하였다. ‘교란 여러 불보살이 남긴 경론이고, 선이란 여러 선지식이 말씀하신 구절과 게이다.’이것은 선의 도리(禪詮)255)를 개괄한 말이다. 즉 여러 선가에서 서술하여 밝힌 것은 선의 도리(禪詮)이고, 선지禪旨는 이름과 상相을 떠나 있어256) 마음이 향해 갈 곳이 도리어 없으니 언어로 표현할 길이 어찌 있겠는가. 이 경계에서는 삼세제불과 역대 조사들도 잠자코 침묵257)할 도리밖에 없다.
이제 선의 도리(禪詮)에 근거한 설에 세 종류가 있다. 첫째 조사선, 둘째 여래선, 셋째 의리선이다.먼저 특징을 드러내고 아래에서 해석하겠다. 특징은 법의 깊이에 따른 것이고, 해석은 깨달음의 선후에 따른 것이다.
 여래선: 『보요경』에 ‘보살(석가세존)이 2월 8일에 샛별을 보고 도를 깨달았으니 천인사라 하며, 깨달은 도리가 여래의 깨달음이므로 여래선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깨닫고 난 후에 무기와 같은 여러 방편을 시설하여 천인天人에게 설법하였으므로 천인사라 한다. 임제가 ‘제2구에서 알아차리면 인천의 스승이 될 만하다.’라고 한 말에 대해 일우는 ‘여래는 적멸도량에서 처음 정각을 이루고오도천 길 길이의 노사나 몸을 드러내셨으니 41위 법신 대사와 과거세에 근기가 성숙한 천룡팔부에게 한순간에 둘러싸여 마치 구름이 달을 감싸는 듯했다화엄시를 설하였으니, 이것이 무기와 같은 여러 방편을 시설하였다는 뜻이다.는 장면258)이 제2구이다. 그러므로 인천의 스승이 될 만하다고 한 것이다.’259)라고 해석하였다.
 조사선: 달마가 말하였다. ‘진귀 조사가 설산에 있으면서, 총림의 방장에서 석가를 기다렸네. 조사의 심인을 임오년에 전해 받아 수지하였고, 동시에 조사의 종지를 마음으로 얻었다네.’260) 이것은 조사가 전한 것이므로 조사선이라 한다. 임제가 ‘제1구에서 알아차리면 불조의 스승이 될 만하다.’라고 한 말에 대해

010_0668_a_01L二分敎乃至市井閑談鶯吟鷰語
010_0668_a_02L是敎外別傳禪旨失之於口則拈花微
010_0668_a_03L却爲敎迹此約禪旨也又古德云
010_0668_a_04L諸佛說弓祖師說弦又云敎也者
010_0668_a_05L佛菩薩所留經論禪也者諸善知識
010_0668_a_06L述句偈此約禪詮也然則諸家所述
010_0668_a_07L是禪詮也若其禪旨離名絶相心行
010_0668_a_08L尙無處言語豈有途到這裏三世諸
010_0668_a_09L歷代祖師嘴盧都地

010_0668_a_10L
今依禪詮說有三種祖師禪
010_0668_a_11L來禪義理禪上標下釋標約法之
深淺釋約悟之先後
如來
010_0668_a_12L禪者普曜經菩薩於二月八日見明
010_0668_a_13L星悟道號曰天人師以所悟之道
010_0668_a_14L如來悟底故名如來禪悟後施設戈甲
010_0668_a_15L爲天人說法故云天人師也臨濟云
010_0668_a_16L第二句薦得與人天爲師一愚釋云
010_0668_a_17L如來在寂滅場中初成正覺
現千丈
010_0668_a_18L盧舍那身四十一位法身大士 及宿
010_0668_a_19L世根熟天龍八部 一時圍遶如雲籠
010_0668_a_20L說華嚴時
是施設戈甲
是第二句故云人天爲師
010_0668_a_21L祖師禪者達摩云眞歸祖師在雪山
010_0668_a_22L叢木房中待釋迦傳持祖印壬午歲
010_0668_a_23L得同時祖宗旨是祖師傳底故名祖師
010_0668_a_24L臨濟云第一句薦得與祖佛爲師

010_0668_b_01L일우는 ‘이 구절에서 알아차리면 비로자나불 이상으로 향상하는 경지261)를 지름길로 밟아서 조사의 심인을 곧장 꿰차리라. 그런 까닭에 불조의 스승이 될 만하다고 한 것이다.’262)라고 해석하였다.
그런즉 이 두 가지 선은 깨달음에서는 선후가 있고, 각자 다르게 나누어 가진 몫에서는 깊이의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범일 국사는 ‘세존이 샛별을 보고 도를 깨달았지만 깨달은 법이 아직 궁극에 이른 경지는 아님을 스스로 알고 수십 일을 유행하며 다시 조사를 찾아뵙고서야 비로소 현묘하고 지극한 뜻을 얻을 수 있었다.’263)라고 하였다.
세존이 이와 같이 도를 깨닫고 나서 도를 전해 받고서는 이를 세 곳에서 전하였다. 첫 번째 자리를 나누어 주신 일(分座)은 살인도이며 진금포眞金鋪라고도 한다. 이는 여래가 깨달은 경지를 전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염송설화』에서는 혜가가 (달마를 만나) 모든 대상에 대한 집착을 끊었다(斷緣)고 한 첫 번째 인연을 해석하면서 ‘여래선을 얻었다.’264)고 하였다.
두 번째 꽃을 들어 보이신 일(拈花)은 활인검이며 잡화포雜貨鋪라고도 한다. 이는 조사가 전한 도리를 전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염송설화』에서는 혜가가 마음을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覔心不得)는 두 번째 인연을 해석하면서 ‘조사선을 얻었다.’265)고 하였다. 그러므로 여래선과 조사선은 살과 활의 관계이다. 다만 여래선과 조사선이라 구별한 것은 깨달음을 보인 사람인가, 도리를 전한 사람인가에 따라 붙인 이름일 뿐이다. 살인도와 활인검 그리고 진금포와 잡화포라 한 것은, 깨달은 법과 전한 법에 따라 비유적으로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 가운데 도刀와 검劒 두 글자는 살과 활의 우열을 말한 것이고, 진眞과 잡雜 두 글자는 살과 활 가운데 어느 한 가지만 오롯이 하는가 아니면 둘을 겸비하는가를 기준으로 말한 것이다.
세존이 발을 내보인 세 번째 일화(示趺)에 대해서 『염송설화』에 비록 살과 활을 가지런히 제시하였다는 말은 없지만266) 두 발을 보인(雙趺) 뜻이 없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살과 활을 가지런히 제시한 경우이다. 혜가가 삼배하고서 달마로부터 ‘골수를 얻었다.’는 말을 들은(三拜得髓) 세 번째 인연에 대해 『염송설화』에 비록 두 가지 선을 가지런히 얻었다는 말은 없지만267) 삼배한 뜻이 없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두 가지 선을 가지런히 얻은 경우이다.
가섭으로부터 전해져 서천이십팔조와 중국 6대 조사에 이르기까지 한 세대에 한 사람에게 전하였으니268) 도刀와 검劒을 아울러 활용하며 살과 활에 자재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왕자의 보검을 가지고 본분의 수단을 발휘하여 사람을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며

010_0668_b_01L一愚釋云此句下薦得徑踏毘盧向上
010_0668_b_02L直佩祖師心印故云與祖佛爲師然則
010_0668_b_03L二禪悟有先後自分深淺也故梵日
010_0668_b_04L國師云世尊見明星悟道自知所悟之
010_0668_b_05L猶未臻極遊行數十日復尋訪祖
010_0668_b_06L始傳得玄極之旨世尊如上悟之受
010_0668_b_07L以是而傳之三處第一分座殺人
010_0668_b_08L亦名眞金鋪是傳如來悟底也
010_0668_b_09L說話釋慧可第一斷緣云得如來禪
010_0668_b_10L二拈花活人劒亦名雜貨鋪是傳祖
010_0668_b_11L師傳底也故說話釋第二慧可覔心不
010_0668_b_12L得云得祖師禪然則如來禪祖師禪
010_0668_b_13L即是殺活而但如來禪祖師禪者就能
010_0668_b_14L悟能傳之人以立名也殺人刀活人劒
010_0668_b_15L眞金鋪雜貨鋪者約所悟所傳之法
010_0668_b_16L譬以立名也於中刀劒二字言其殺活
010_0668_b_17L之優劣眞雜二字言其殺活之單兼也
010_0668_b_18L世尊第三示趺說話雖無殺活齊示之
010_0668_b_19L雙趺意不無是殺活齊示也慧可
010_0668_b_20L第三三拜得髓說話雖無二禪齊得之
010_0668_b_21L三拜意不無是二禪齊得也自迦
010_0668_b_22L傳至西天四七唐土二三人傳一
010_0668_b_23L刀劒並用殺活自在此所謂持王
010_0668_b_24L子寶刀用本分手段殺人活人得大

010_0668_c_01L대자재함을 얻었다는 의미이다.269) 그러므로 두 가지 선에 우열이라는 구분은 있지 않다. 6조 이후로부터 살과 활을 나누어 전했으니, 예컨대 남악 회양은 활인검을 얻었고, 청원 행사는 살인도를 얻었다. 또 다섯 종파로 나누어져 이 도가 천하에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그 종파에 근원이 있고 그 지류에도 뿌리가 있다.270)
 의리선: 하루는 6조가 ‘나에게 하나의 그 무엇이 있는데, 이름도 없고 이름자도 없다. 여러분은 어떻게 부르겠는가?’라 하니 하택이 ‘모든 부처님의 본원이고, 신회의 불성입니다.’라고 하였고, 6조는 ‘내가 너희에게 이름도 없고 이름자도 없다고 하였건만, 무슨 본원이니 불성이니 하고 부르느냐! 훗날 설령 일가를 이루어 지도자의 위치에 서는 일이 있더라도 271) 다만 지적인 분별이나 근본으로 삼는 무리가 될 뿐이리라.’라고 하였다.272) 지해知解가 곧 의리이므로 의리선이라 부르게 되었다.
임제는 ‘제3구에서 알아차리면 자기도 구제하지 못한다.’고 하였고, 고덕은 ‘사구死句에서 알아차리면 자기도 구제하지 못한다.’273)고 하였다. 『선가귀감』에서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사구를 뜻을 궁구하는 것(參意)이라고도 하니 여기에는 말을 따라 쫓아갈 길도 있고 이치로 통할 길도 있다.’274) 말을 따라 쫓아갈 길이 있다면 말로는 완전히 다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275) 사구이고, 이치로 통할 길이 있다면 의리가 완연하기 때문에 의리선이라 한다. 또한 대혜가 장 시랑張侍郞에게 답하는 글에서 ‘이치로 통하는 길에 몸을 담그고 자신을 진흙과 물로 더럽히며 남을 가르치는 도리를 알자마자 곧바로 쓸어 없애고자 하였다.’라고 운운하고, 또 ‘예컨대 혜충 국사는 의리선을 설하여 남의 집 자식들을 망쳐 놓았다.’고 하였는데,276) 이치로 통하는 길에 몸을 담그고 남을 가르치는 것이 의리선이다. 제3구를 해석하면서 청풍 법사는 ‘나와 그대가 설하기도 듣기도 하며 묻기도 답하기도 한 이 상황이 이미 제3구에 떨어진 것’277)이라 하였고, 일우는 ‘낙초지담落草之談278)으로 상대를 가르치고 병에 따라 약을 주는 방법’279)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제3구가 의리선이 되는 까닭이다.
앞에서 살과 활 두 가지 선을 격외선이라고도 하였으니, 이는 살과 활 두 가지 선은 의리의 규범을 벗어났다는 뜻이다. 그런 까닭에 옛사람이 ‘법을 기준으로는 의리선·격외선이라 하고, 사람을 기준으로는 여래선·조사선이라 한다.’고 한 것이다.

010_0668_c_01L自在者也故無有二禪優劣之分矣
010_0668_c_02L六祖已還分傳殺活如南嶽得活人劒
010_0668_c_03L淸源得殺人刀又分爲五派斯道大行
010_0668_c_04L天下其派有源其枝有本義理禪者
010_0668_c_05L一日祖曰吾有一物無名無字汝等
010_0668_c_06L喚作什麽荷澤云諸佛之本源神會
010_0668_c_07L之佛性祖曰向汝道無名無字便喚
010_0668_c_08L作本源佛性他日雖把茆盖頭作得箇
010_0668_c_09L知解宗徒知解是義理故名爲義理禪
010_0668_c_10L臨濟云第三句薦得自救不了
010_0668_c_11L德云死句下薦得自救不了禪家龜
010_0668_c_12L鑑釋云死句亦名叅意有語路義路
010_0668_c_13L意謂有語路則語忌十成故謂之死句
010_0668_c_14L有義路則義理宛然故謂之義理禪也
010_0668_c_15L又大慧答張侍郞書云纔見涉理路
010_0668_c_16L泥人 [14] 水爲人底便欲掃除如忠國師
010_0668_c_17L說義理禪敎壞人家男女此以涉理路
010_0668_c_18L爲人底爲義理禪也其釋第三句風云
010_0668_c_19L吾與子一說一聽一問一答早落第三
010_0668_c_20L一愚云落草爲人隨病與藥此第
010_0668_c_21L三句所以爲義理禪上殺活二禪
010_0668_c_22L名爲格外禪以殺活二禪爲義理標格
010_0668_c_23L之外也故古云約法名義理禪格外禪
010_0668_c_24L約人名如來禪祖師禪意謂約法名義

010_0669_a_01L법을 기준으로는 의리선·격외선이라 하고, 이 격외선에서 다시 사람을 기준으로 여래선·조사선이라 한다는 뜻이지 두 종류의 선을 말한 것이 아니니, 사람과 법을 기준으로 함에 다름이 있을 뿐이다. 예컨대 『염송설화』에서는 다음과 같이 해설하였다.280) ‘규봉 종밀圭峯宗密(圭山)은 「선의 온전한 음사어는 선나禪那이고, 한역하면 사유수思惟修 또는 정려靜慮라고도 하는데, 이는 모두 정定과 혜慧를 통칭한 말이다.」라고 하였다.앞의 의리선이다.여기서 말하는 선禪으로 보자면 교외별전의 일미선이다.이 『염송설화』의 해석에 의거해 보면 교라는 격에서 벗어나 별도로 전한 것이 선이다.말해 보라. 여래선과 조사선의 다른 점은 무엇인가? 여래선이란 산은 산 그대로 좋고 물은 물 그대로 좋으니 법 하나하나가 모두 그대로 진실하다는 견해이고, 조사선은 뿌리까지 통째로 뽑아 버려 잡고서 분별할 수단을 전혀 남기지 않는다.앞의 격외선 가운데 또한 여래선과 조사선 두 가지 선이 같지 않다는 의미이다.’그러므로 의리선과 격외선이 비록 다르지만 전한 법의 본체는 하나이다. 친밀히 전하고 마음으로 받았기에 이치로 통하는 길도 없고 말을 따라 쫓아갈 길도 없는 것이 격외선이며, 지해가 뚜렷이 존재하여 말을 따라 쫓아갈 길도 있고 이치로 통하는 길도 있는 것이 의리선이다. 『능엄경』에 ‘지견에 지견(知)을 세우는 작용은 무명의 근본이요, 지견에 어떤 지견(見)도 덧붙이지 않으면 이것이 바로 열반이다.’281)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규봉은 ‘단지 현교顯敎와 밀교密敎가 다를 뿐이지 전한 법의 본체에 차이가 있다는 말은 아니다.’282)라고 하였다.
앞에서는 바른 뜻을 해석하여 마쳤고 이하에서는 삿된 견해를 깨뜨린다. 먼저 『사변만어』의 논의를 설파한다.
9. 『사변만어』를 설파함
 『사변만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니, 부처도 안착시키고 조사도 안착시킨다는 설은 조사 문하(祖門)에만 있는 언구들이므로 조사선이라 한다.’283) 『선문수경』의 견해 제기라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조사선은 본래 특정한 언구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란 말인가!284)앞에서 제기한 『선문수경』의 견해 비판
 설두 유형의 설파:이것은 선의 도리에 의거한 것이다. 『염송설화』에서도 ‘(법안法眼이) 「만약 모든 상을 상이 아니라고 보면 여래의 뜻을 알지 못할 것이다.」라고 한 말은 조사선의 입장을 뜻한다.’285)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것은 언구로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란 말인가? 감히 묻건대, 존사尊師는 무엇을 조사선이라 생각한 것인가? 목소리를 낮추고 낮추어야 할지니 문자286)에 매달릴까 염려스럽다. 그 선지禪旨가 이름과 상을 떠난 것이라면 누가 조사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말인가.

010_0669_a_01L理禪格外禪就此格外禪又約人名如
010_0669_a_02L來禪祖師禪也非謂二種禪約人法有
010_0669_a_03L異也如說話云圭山云禪者具云禪
010_0669_a_04L此云思惟脩亦云靜慮斯皆定慧
010_0669_a_05L之通稱也上義
理禪
當此看則敎外別傳一味
010_0669_a_06L禪也當此拈頌而看則是
敎格之外別傳禪也
且道如來禪祖
010_0669_a_07L師禪同別如何如來禪者山山水水
010_0669_a_08L法法全眞也祖師禪者和根拔去
010_0669_a_09L沒巴鼻也上格外禪中又如
來祖師二禪不同
然義理格外之
010_0669_a_10L雖殊所傳之法體一也以密傳心
010_0669_a_11L沒理路語路則爲格外禪顯存知
010_0669_a_12L有語路理路則爲義理禪也如楞嚴
010_0669_a_13L知見立知是無明本知見無見
010_0669_a_14L則涅槃云云也故圭峯云但顯密有殊
010_0669_a_15L非謂所傳之法體有異上釋正義竟
010_0669_a_16L破邪解先說四辨漫語

010_0669_a_17L
語云山是山水是水佛也安祖也安
010_0669_a_18L之說是祖門中所有言句故名曰祖師
010_0669_a_19L擧禪文
手鏡
然則祖師禪本以言句得名
010_0669_a_20L
說曰此依禪詮也說話亦云
010_0669_a_21L見諸相非相即不見如來云者是祖師
010_0669_a_22L此非以言句爲名耶敢問尊師以何
010_0669_a_23L爲祖師禪耶低聲低聲恐上紙墨
010_0669_a_24L其禪旨離名絕相孰敢立名

010_0669_b_01L
『사변만어』: ‘여래선에 대해 「하나하나의 법마다 온전히 진실하다.」는 말은 또한 조사 문하의 일이지만 여래가 「만법을 통괄하여 일심을 밝힌다.」287)고 말씀하신 교의 자취와 완연히 같기 때문에 그것을 폄하하여 여래선이라 한다.’288)백파의 견해 제기고 하였다.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도록 그 누가 이를 폄하하여 여래라는 이름을 붙였단 말인가! 289)백파의 견해 비판
 설두 유형의 설파: 이것은 호로虎老의 말이다. 삼십삼조사가 살과 활의 방편으로 마음을 전하며 한 세대에 한 사람에게 전하기를 마치 이쪽 병의 물을 저쪽 병에 고스란히 옮겨 붓듯이 하였다. 그러므로 살과 활 모두 조사 문하의 일이며 두 가지 선에 우열의 구분이란 없다. 남악과 청원에 이르러 살과 활을 나누어 전하였기에 비로소 두 가지 선의 이름이 나오게 된 것이다. 살은 여래가 깨달은 경지이므로 여래선이라 한다. 여래가 이와 같이 깨달은 인연은 화엄의 도리를 증득한 뒤 설하면서 ‘만법을 통괄하여 일심을 밝힌다.’고 한 말과 같으니 이것이 화엄의 분명한 요지이다. 그러므로 ‘여래선에 대해 「하나하나의 법마다 온전히 진실하다.」는 말은 조사 문하의 일이지만 여래가 「만법을 통괄하여 일심을 밝힌다.」고 말씀하신 교의 자취(敎迹)와 완전히 일치하므로 폄하하여 여래선이라 한다.’고 한 것이다. 세존은 깨달은 법이 아직 궁극에 이른 경지는 아님을 스스로 알고 다시 조사를 찾아뵙고서야 비로소 현묘하고 지극한 뜻을 전해 받았다.290) ‘활’은 조사가 전한 현묘하고 지극한 뜻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활이라는 이름을 세운 것은 조사선의 경우에 한한다. 그러니 폄하하여 (여래선이라) 한 말에 무슨 잘못이 있는가. 노사(백파)는 선사先師의 뜻을 등지지 않고자 그대로 따라서 전한 것이다. 이것은 청량이 ‘(경전에 집착하여 도리어) 통할 만한 여지가 거의 없기에 여러 가지 뜻을 모아 해석해 주었을 뿐 그들이 (경의 취지를) 가볍게 여겨 훼손하도록 유도하려던 의도는 아니다.’291)라고 했던 말과 같다.
 『사변만어』: ‘여래선을 격외선으로 삼아, 분좌分座에 짝짓고는 구곡龜谷의 뜻이라 하였는데’백파의 견해 제기구곡의 『염송설화』에 분좌를 가리켜 여래선이라 지목하여 말한 대목이 있는가! 292)백파의 견해 비판
 설두 유형의 설파: 구곡은 세존이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한 일에 대해서는 살인도와 활인검을 전했다고 풀었고,293) 혜가가 (달마로부터)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해 받은 일에 대해서는 여래선과 조사선을 얻었다고 풀었다.294) 부처와 조사가 마음을 전한 일이

010_0669_b_01L
語云如來禪法法全眞之言亦是祖門
010_0669_b_02L中事完同如來統萬法明一心之敎迹
010_0669_b_03L故貶之云如來禪 從古以來孰敢貶
010_0669_b_04L之如來以立此名耶 說曰此是虎老
010_0669_b_05L之言意謂卅三祖師殺活傳心人傳一
010_0669_b_06L如瓶注瓶故殺活皆是祖門中事也
010_0669_b_07L無有二禪優劣之辨矣至南嶽淸源
010_0669_b_08L傳殺活故始立二禪之名以殺是如來
010_0669_b_09L悟底故名爲如來禪而如來如是悟之
010_0669_b_10L以如證說華嚴統萬法明一心
010_0669_b_11L華嚴大旨也故云如來禪法法全眞之
010_0669_b_12L亦是祖門中事完同如來統萬法明
010_0669_b_13L一心之敎跡故貶之云如來禪世尊旣
010_0669_b_14L自知所悟之法猶未臻極復尋訪祖帥 [15]
010_0669_b_15L始傳得玄極之旨則活是祖師所傳玄
010_0669_b_16L極之旨也故立活爲祖師禪邊謂之貶
010_0669_b_17L有何過耶老師不欲背先師之意
010_0669_b_18L依而傳之此淸凉所謂小有可通即爲
010_0669_b_19L會釋不欲使人輕毁者也

010_0669_b_20L
語云以如來禪爲格外禪配之分座
010_0669_b_21L謂之龜谷義 龜谷說中有以分座
010_0669_b_22L爲如來禪之言乎 說曰龜谷釋世尊
010_0669_b_23L三處傳心云傳殺人刀活人劒釋慧可
010_0669_b_24L三處傳心云得如來禪祖師禪佛祖傳

010_0669_c_01L한 병의 물을 다른 병으로 고스란히 옮겨 붓듯이 하였다고 이미 말하였으니, 세존은 처음에 살인도로 마음을 전했고 혜가는 처음에 여래선을 얻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살의 방편을 여래선으로 삼은 것이 어찌 구곡의 뜻이 아니겠는가! 여래선이 이미 살인도라면 격외라고 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이 대목에 이르러 눈여겨보니 그(초의 의순)의 낯 두께가 3척이나 되는구나.
 『사변만어』: ‘여래선을 격외선이라 하고 또 이 제2구는 방편 그대로 진실을 밝힌다.’백파의 견해 제기고 하였다. 무릇 방편 그대로 진실을 밝힌다는 말은 삼현이라는 방편의 무기를 시설하여 편의에 따라 손을 쓰며 말 한마디 한마디를 아끼면서 격格이 정해진 법도를 완성한다는 뜻이니 이것을 격외라고 할 수 있겠는가! 295)백파의 견해 비판
 설두 유형의 설파: 임제가 ‘제2구에서 알아차리면 인천의 스승이 될 만하다.’하였고 또 송으로 ‘문수보살이 어찌 무착無著 선사의 물음을 용납할 것인가? 그러나 방편이 어찌 번뇌를 끊은 근기(문수)와 상충되겠는가.’라고 읊었다. 청풍 법사는 이를 해석하여 ‘앞의 구절은 실實을 드러내었고 뒤의 구절은 권權을 제시한 것이다. 이 권문權門(방편문)에 의거하여 삼현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296)라고 하였다. 생각건대 알아차린 경지가 실實이고, 알아차린 뒤에 삼현이라는 방편의 무기를 시설하여 인천의 스승이 된 경지가 권權이다. 이미 ‘방편을 제시하여 진실을 드러내었다.’고 한다면, 방편을 제시하였을 때 삼현이라는 방편의 무기를 시설한 것이므로 격格이 정해진 법도를 완성한 것이고, 진실을 드러내었을 때는 방편이 아니니 어찌 격외가 아니겠는가! 이를테면 법화(천태종)에서 방편 그대로 진실을 밝힌다고 하는데, 법화는 방편인가, 진실인가? 참!
 『사변만어』: ‘제3구에는 다만 신훈新熏만 있고 본분이 없다는 뜻을 멋대로 판단하여 의리선이라 하며, (백파는) 일우의 설에 근거하여 기준으로 삼았다.’297)백파의 견해 제기고 하는데 일우의 말에 의리선이라는 명칭이 있기나 한가!298)백파의 견해 비판
 설두 유형의 설파: 임제가 ‘제1구에서 알아차리면 불조의 스승이 될 만하고, 제2구에서 알아차리면 인천의 스승이 될 만하며, 제3구에서 알아차리면 자기도 구제하지 못한다.’고 하였고, 또 고덕은 ‘사구에서 알아차리면 자기도 구제하지 못한다.’299)고 하였다. 『선가귀감』에서는

010_0669_c_01L旣云如瓶注瓶則世尊第一殺人刀
010_0669_c_02L傳心是慧可第一得如來禪也然則以
010_0669_c_03L殺爲如來禪豈非龜谷義耶如來禪旣
010_0669_c_04L是殺人刀則可不謂之格外耶到此着
010_0669_c_05L眼看面皮厚三尺

010_0669_c_06L
語云以如來禪爲格外禪又云是第二
010_0669_c_07L即權明實 夫即權明實者施設
010_0669_c_08L三玄戈甲隨宜下手言言堪愛完成
010_0669_c_09L格則是可謂之格外乎 說曰臨濟云
010_0669_c_10L第二句薦得爲人天師又頌云妙喜
010_0669_c_11L豈容無着問漚和爭負截流機風釋云
010_0669_c_12L前句現乎實後句示其權就此權門
010_0669_c_13L立三玄名意謂薦得底是實也薦得
010_0669_c_14L施設三玄戈甲爲人天師底是權
010_0669_c_15L旣云示權現實示權之時施設三
010_0669_c_16L玄戈甲故完成格則現實之時不是
010_0669_c_17L權也豈非格外耶如法華謂之即權明
010_0669_c_18L法華是權耶實耶

010_0669_c_19L
語云以第三句但新無本之義獨判爲
010_0669_c_20L義理禪言依一愚爲凖 一愚說中
010_0669_c_21L有義理禪之名字乎 說曰臨濟云
010_0669_c_22L一句薦得爲佛祖師第二句薦得
010_0669_c_23L人天師第三句薦得自救不了又古
010_0669_c_24L德云死句下薦得自救不了禪家龜

010_0670_a_01L‘사구를 가리켜 뜻을 궁구하는 것(參意)이라고도 하니 말을 따라 쫓아갈 길도 있고 이치로 통할 길도 있다.’300)고 풀었다. 생각건대 말을 따라 쫓아갈 길이 있다면 말로는 완전히 다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사구이고, 이치로 통할 길이 있다면 의리가 완연하기 때문에 의리선이라 한다. 또 대혜가 장 시랑張侍郞에게 답하는 글에서301) ‘이치로 통하는 길에 몸을 담그고 자신을 진흙과 물로 더럽히며 남을 가르치는 도리를 알자마자 곧바로 쓸어 없애고자 하였다.’라고 운운하고, 또 ‘혜충 국사는 의리선을 설하여 남의 집 자식들을 망쳐 놓았다.’라고 하였다. 이치로 통하는 길에 몸을 담그고 남을 가르치는 것이 의리선이다. 청풍 법사는 ‘나와 그대가 설하기도 듣기도 하며 묻기도 답하기도 한 이 상황이 이미 제3구에 떨어진 것’302)이라고 하였다. 일우는 제3구에 대해 ‘낙초지담으로 상대를 가르치고 병에 따라 약을 주는 방법’303)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제3구가 어찌 이치로 통하는 길에 몸을 담그고 사람들을 가르치는 수단이 아니겠는가. 대개 삼구를 세 가지 선에 배대한 것은 임제의 본의이다. 그러므로 일우는 그것을 짝지으면서 다만 제2구를 드러내 여래선에 짝지은 것이다. 제1구와 제3구는 그림자처럼 드러내고자 했기 때문에 조사선·의리선이라고 말하지 않았으니, 글을 해석하는 격식(體容)이 그러했을 뿐이다. 대충 익혀서야 사자는 사람을 물고 개는 흙덩이를 쫓아간다는 이치를 어찌 알 리가 있겠는가.
 『사변만어』: ‘자리를 나누어 앉은 것(分座)에 담겨 있는 살殺은 오로지 살만 있을 뿐 활活이 없고, 꽃을 들어 보인 것(拈花)에 담겨 있는 활은 살도 겸비하고 있다.’304)백파의 견해 제기고 하였는데 살과 활, 체와 용 그리고 기와 용은 다만 명칭이 다를 뿐이다. 만약 기와 용, 살과 활, 체와 용에 분명히 통달한다면 또한 다른 예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기용이란 대기와 대용을 뜻한다. 대기는 원만하게 응함(圓應)을 법도로 삼는 대용의 기틀이며, 대용은 곧바로 근원에 이르는 것(直截)을 법도로 삼는 대기의 활용이다.305) 대기와 대용이 서로 의존하며 떨어지지 않는 관계처럼 살과 활 또한 이와 같다. 그러므로 살을 전하면서 함께 활을 전하고, 활을 전하면서 함께 살을 전했음을 알 수 있다. 비유하자면 사람의 수족은 용이요, 온몸은 체인 것과 같다. 수족을 들면 온몸이 저절로 거기에 거두어지니, 전신을 들면서 어찌 수족은 버리겠는가. 고덕이 말하였다.306)

010_0670_a_01L鑑釋云死句亦名叅意有語路理路
010_0670_a_02L意謂有語路則語忌十成故謂之死句
010_0670_a_03L有理路則義理完然故謂之義理禪也
010_0670_a_04L又大慧答張郞書云纔見涉理路
010_0670_a_05L泥入水爲人底便欲掃除如忠國
010_0670_a_06L說義理禪敎壞人家男女此以涉理
010_0670_a_07L路爲人底爲義理禪也風云吾與子
010_0670_a_08L一說一聽一問一答早落第三句
010_0670_a_09L愚釋第三句云落草爲人隨病與藥
010_0670_a_10L然則第三句豈非涉理路爲入 [16] 底耶
010_0670_a_11L以三句爲三禪是臨濟之本意故一愚
010_0670_a_12L配之但第二句現配如來禪第一句
010_0670_a_13L第三句欲爲影現故不言祖師禪義理
010_0670_a_14L釋文之體容爾也泛學安知獅子咬
010_0670_a_15L韓獹逐塊

010_0670_a_16L
語云分座之殺單殺無活拈花之活
010_0670_a_17L活兼於殺 夫殺活體用與機用特名
010_0670_a_18L異也若明達於機用殺活體用亦可以
010_0670_a_19L例知也所言機用者大機大用也
010_0670_a_20L以圓應爲義大用之機大用以直截
010_0670_a_21L爲義大機之用機用互相資殺活亦
010_0670_a_22L復如是故知傳殺兼活傳活兼殺
010_0670_a_23L如人之手足用也全身體也擧手足
010_0670_a_24L全身自收擧全身手足其捨諸古德

010_0670_b_01L‘달마 대사가 인도로부터 와서 전한 소식은 특별히 이 일(此事)을 제창提唱하기 위함이었다. 다만 말로 표현하기 이전에 송골매가 구름을 뚫고 솟아오르듯이 깨치고, 언구의 의미 밖에서 대붕이 날갯짓하듯이 훌쩍 속박을 벗어나고자 할 뿐이다.307) 가장 빠른 길308)로 모든 단계를 뛰어넘으며 어떤 점차적 단계에도 떨어지지 않는다.309) 왕자의 보검을 쥐고 본분의 수단으로써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며 자유자재한 경지를 누린다. 사람을 죽이는 이상 반드시 사람을 살리기도 해야 하고, 사람을 살리는 이상 반드시 사람을 죽이기도 해야 한다.310) ’라고 하였다. 오로지 죽이기만 하거나 오로지 살리기만 한다면311) 뛰어난 솜씨가 아니다. 만일 (세존께서) 자리를 나누어 앉게 한 데에 (백파의 말대로) 참으로 살殺만 있다면 세존은 뛰어난 솜씨가 없었던 것이며, 청원靑原이 오로지 살만 전하고 활의 방식을 몰랐다면 청원 또한 뛰어난 솜씨가 없었다는 결과가 된다.312)백파의 견해 비판
 설두 유형의 설파: 대기와 대용으로 말하자면, 대기와 대용은 서로 돕는 관계이다. 대기를 벗어난 대용은 없으므로 ‘백장은 마조의 대기를 터득하였을 뿐이지만 그 이상 달리 할 일이 없었으며’, 대용을 벗어난 대기는 없으므로 ‘황벽은 마조의 대용을 터득하였을 뿐이지만 그 이상 달리 할 일이 없었다.’313)고 하는 것이다. 살과 활의 관계는 그렇지 않으니, 만약 살과 활을 함께 겸하여 쓸 경우에는 결코 깊이에 차이가 없어야 한다. 깊이에 차이가 없다면 가섭에게 전했던 그 한 곳에서 전한 것으로도 족했을 터인데, 어찌하여 세 곳에서 나누어 전했겠는가. 『염송설화』에서는 살인도와 활인검을 전했다고 하였는데, 도刀와 검劒 두 글자를 달리 씀으로써 이미 우열을 나눈 것이다. 또한 진금포와 잡화포라 구별하였는데, 진眞과 잡雜 두 글자는 그 의미하는 바가 어디에 있는 것인가? 또한 체에는 작용이 없는 체(無用之體)가 있으므로 체만 오로지함이 있지만, 작용에는 체가 없는 작용(無體之用)이 없으므로 작용에는 반드시 체를 겸해야 한다. 비유하자면 사람의 온몸은 체이고 움직임은 용인 것과 같다. 온몸이 아무 일 없이 한가로울 때는 다만 오로지 체일 뿐이다. 하지만 움직임을 일으킨다면 용이니 체에 의지하여 작용을 일으키므로 반드시 체를 겸해야 한다. 『사변만어』에서 ‘수족은 용이요 온몸은 체’라 하였다. 이미 온몸을 체로 삼았다면 수족은 몸이 아닌 것인가? 수족을 용으로 삼는다면 아무 일 없고 한가한 때에도 수족은 작용을 하는가? 나도 모르는 새 한번 웃고 만다. 게다가 고덕의 글을 인용하기는 하였지만 고덕의 뜻은 제대로 알지 못했다. 단지 그 글(『선문수경』)의 뜻을 살펴보면 살활이 법의 본체이며 살활을 함께 겸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010_0670_b_01L祖師西來特唱此事只貴言前鷹
010_0670_b_02L句外鵬搏直拔超昇不落階級
010_0670_b_03L王子寶刀用本分手段殺人活人
010_0670_b_04L大自在旣殺得人須活得人旣活得
010_0670_b_05L須殺得人若只單殺單活非好手
010_0670_b_06L若分座果是單殺是世尊非好手
010_0670_b_07L淸源但傳殺而不知活則淸源亦非
010_0670_b_08L好手 說曰盖機用機用相資機外無
010_0670_b_09L故百丈得大機更無餘事用外無
010_0670_b_10L故黃蘗得大用更無餘事殺活則
010_0670_b_11L不然若殺活相兼必無深淺若無深
010_0670_b_12L傳之迦葉一處便足如何分傳三
010_0670_b_13L處耶說話云傳殺人刀活人劒刀劒
010_0670_b_14L二字已分優劣又云眞金鋪雜貨鋪
010_0670_b_15L眞雜二字其意安住且體有無用之體
010_0670_b_16L故有單體用無無體之用故用必兼體
010_0670_b_17L譬如人之全身體也動用用也
010_0670_b_18L若全身無事閒處則是單體也起來動
010_0670_b_19L用則是用而依體起用故必兼體也
010_0670_b_20L語云手足是用全身是體旣以全身爲
010_0670_b_21L手足非身耶若以手足爲用無事
010_0670_b_22L閒處時手足亦爲用耶不覺發一笑
010_0670_b_23L又引古德之文而不知古德之義第觀
010_0670_b_24L其文義非謂殺活法體殺活相兼

010_0670_c_01L조사는 살도 갖추고 활도 갖추어 대자재한 수단을 쓴다는 말이다. 그런데 초의는 만약 오롯이 살만 쓰거나 오롯이 활만 쓴다면 좋은 솜씨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사람과 법에 다름이 있는데, 어찌하여 사람이 법을 비난할 수 있는가. 이 점을 미루어 증험하면, 글을 보는 눈이 여전히 밝지 못하여 사람들을 절로 부끄럽게 만든다.
 『사변만어』: ‘임제종과 운문종은 조사선에 짝짓고, 조동종과 위앙종과 법안종은 여래선에 짝짓는다.’백파의 견해 제기라고 한 말을 제기하고, 이는 다만 『인천안목』 한 책만을 보고서 선문 오종五宗의 우열을 잘못 판단한 결과로 이처럼 심하게 도치된 황당무계한 주장을 한 것이다.314) 위앙종과 관련된 여러 칙의 인연을 인용하는 까닭은 위앙종의 굴욕을 씻어 주기 위해서이다.315) 더하여 앙산은 아난존자의 후신後身316)으로서 서천의 아라한들이 (앙산을 만나고는 그를) 소석가小釋迦라 불렀다.317)백파의 견해 비판
 설두 유형의 설파: 이것이 과연 『인천안목』에 의거하여 결론을 내린 것이라면, 『인천안목』에 본래 어찌 황당무계함이 없겠는가라는 말이 되고 만다. 그 서문에 ‘내 개인의 생각으로 논단한 것이 아니니, 세상에 널리 유행하도록 함에 무슨 책망할 일이 있겠는가.’318)라고 하였다. 이미 개인의 생각으로 억측해 논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으니 공의公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청허 휴정淸虛休靜과 환성 지안喚惺志安 두 대노고추大老古錐가 『선가귀감』과 『오종강요집』을 모두 이(『인천안목』)에 의거하여 펴내신 것이다. 또 주석에서 ‘임제종은 기용機用을, 운문종은 절단截斷을, 조동종은 향상向上을, 위앙종은 체용體用을, 법안종은 유심唯心을 밝혔다.’319)고 하였으니, 오종의 우열이 어찌 분명하지 않은가. 그런즉 노사老師(백파)의 견해가 황당무계하다고 여긴다면 『인천안목』, 『선가귀감』, 『오종강요집』 모두 황당무계함이 심한 것이 된다. 노사는 명성을 구한 적이 없었고 온통 글을 쓰는 데 힘을 기울였으며 불법을 알지 못한 채 늙어 죽을까 두려워하였다. 약간의 어록을 섭렵하고서 초의가 말하듯이 박람한 것처럼 과장하면서 모두 노사가 황당무계함이 심했다고 한다면 누가 그것을 믿겠는가. 미치지 않았으면 속이는 짓이다.
 ‘앙산은 아난존자의 후신으로서 서천의 아라한들이 (앙산을 만나고는 그를) 소석가小釋迦라 불렀다’는 초의의 주장에 대해:

010_0670_c_01L祖師具殺具活得大自在之手段若只
010_0670_c_02L單殺單活非好手之意也然則人法有
010_0670_c_03L如何以人難法耶推此驗之文眼
010_0670_c_04L猶未瑩然令人自愧

010_0670_c_05L
語云以臨濟雲門二宗配祖師禪以曺
010_0670_c_06L洞潙仰法眼三宗配如來禪 此但看
010_0670_c_07L人天眼目一書妄判五宗之優劣如此
010_0670_c_08L倒置無稽之甚更引潙仰宗數則因緣
010_0670_c_09L爲潙仰宗雪屈又云仰山是阿難後身
010_0670_c_10L又西天羅漢呼爲小釋迦 說曰此判
010_0670_c_11L果依人天眼目人天眼目初豈無稽耶
010_0670_c_12L其序云非余胷臆之論俾行於世
010_0670_c_13L何誚焉旣云非臆論可知有公議也
010_0670_c_14L故以淸虛喚惺二大老古錐於禪家龜
010_0670_c_15L五宗綱要皆依而編之又注云
010_0670_c_16L濟宗明機用雲門宗明截斷曺洞宗明
010_0670_c_17L向上潙仰宗明體用法眼宗明唯心
010_0670_c_18L五宗優劣豈不分明乎然則若以老師
010_0670_c_19L爲無稽之甚人天眼目禪家龜鑑
010_0670_c_20L宗綱要皆爲無稽之甚也此老求名
010_0670_c_21L少日全事翰墨不知佛法怕死老年
010_0670_c_22L涉獵如干語錄如是誇張愽覽皆以老
010_0670_c_23L謂之無稽之甚誰其信乎非狂則
010_0670_c_24L仰山是阿難後身西天羅漢呼爲小

010_0671_a_01L수보리는 청룡타불靑龍陀佛의 후신인데320) 어찌하여 성문이 되었으며, 종경 연수宗鏡延壽 선사는 아미타불의 후신인데321) 또한 어떻게 법안의 문인이 되었는가. 대개 불법 문하에서 본문本門은 높으나 적문迹門은 낮은 경우322)는 있으나 아난의 후신으로서 아라한들에게 소석가라 불렸다는 것은 맞지 않으니 이러면 종문에서 고하로 설정한 뜻을 의심스럽게 만든다. 또한 수칙의 인연을 끌어들여 위앙종이 조사선을 이해했다고 밝히는 데 뜻을 두고 있다. 청원 행사가 살인도를 얻었다는 설을 천하 사람이 허여하는 이유는, 여릉 지방의 쌀값을 질문한 예는 허다하기 때문이니 그런 까닭에 조사선이다. 법안이 ‘만약 모든 상을 상이 아니라고 보면 부처님의 뜻을 알지 못할 것이다.’라고 운운한 말 역시 조사선이다. 대개 살의 방편을 철저하게 쓰면 살 가운데 활을 갖추기 마련이므로 제 종파에서 조사선을 마음껏 드러내지만 그 근본 종지로 삼지는 않는다. 근본 종지라고 하면 다른 법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한 법을 종지로 삼아야 한다. 그러므로 조동종에서는 향상을, 위앙종에서는 체용을, 법안종에서는 유심을 밝힌 것이니 모두 여래선을 근본 종지로 한다.
 『사변만어』: ‘일심의 본체에 본래 불변不變과 수연隨緣323)이 갖추어져 있다. 일심의 변하지 않음(不變)은 이름도 상도 모두 끊어 차별상을 남김없이 쓸어 없앤 것이므로 진공眞空이라 한다. 일심이 인연에 따라 움직이면(隨緣) 만법을 건립하며 무수히 변화하므로 묘유妙有라고 한다.’324)백파의 견해 제기라고 한 말을 제기하고 말하였다. 인연을 따라 존재하는 허위虛僞의 이름과 차별상이 있다 하고 그것을 묘유라고 하였으니, 아, 이것이 어찌 될 법이나 한 소리인가. 그렇다면 유有란 허위의 유가 되므로 공空 역시 단공斷空의 공이 되고 만다. 이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명과 체를 자세히 궁구하지 않고 진심과 망심의 차이를 신중히 살피지 못하여 진심과 망심의 이치에 모두 어둡고 공과 유에 모두 밝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도의 외도들은 본래 불법의 영향 속에 있다가 공과 유 두 가지 뜻을 잘못 이해하여 점차로 변한 결과 62가지 견해에 이르고 96종류325)로 나누어지게 되었다.326)백파의 견해 비판
 설두 유형의 설파: 지금 강설하는 도량에서 비록 사집四集을 배우는 학인들이라도 모두 유 그대로의 공이 진공이요,

010_0671_a_01L釋迦云者須菩提是靑龍陀佛後身
010_0671_a_02L以爲聲聞宗鏡延壽禪師是阿彌陀佛
010_0671_a_03L後身亦何爲法眼門人耶盖佛法門中
010_0671_a_04L有本高迹下之事不可以阿難後身
010_0671_a_05L漢呼爲小釋迦難其宗門之高下也
010_0671_a_06L所引數則因緣意明潙仰宗之會得祖
010_0671_a_07L師禪淸源之得殺人刀天下所其許者
010_0671_a_08L而問廬陵米價是許多般故爲祖師禪
010_0671_a_09L法眼所謂若見諸相非相1) [5] 如來云
010_0671_a_10L亦是祖師禪也盖以殺到底則殺
010_0671_a_11L中具活故諸宗或弄現祖師禪也然非
010_0671_a_12L其所宗也言宗者非不知餘法但以
010_0671_a_13L一法爲宗也故曺洞宗明向上僞仰宗
010_0671_a_14L明體用法眼宗明惟心皆宗如來禪也

010_0671_a_15L
語云一心體上本具不變隨緣二義
010_0671_a_16L不變則離名絕相掃蕩無餘故名曰眞
010_0671_a_17L心隨緣則建立萬法千變萬化
010_0671_a_18L名曰妙有 以隨緣所有虛僞名相
010_0671_a_19L之妙有烏乎可哉此則有是虛僞之有
010_0671_a_20L空亦斷空之空此非他由其不究名
010_0671_a_21L而率爾于眞妄眞妄一昧空有遂
010_0671_a_22L西天外道本在佛法中錯解空有
010_0671_a_23L二義轉至六十二見分成九十六種
010_0671_a_24L說曰今之講場雖四集學人皆知即有

010_0671_b_01L공 그대로의 유가 묘유임은 알고 있다. 노사께서 어찌 단공斷空과 완유頑有를 진공과 묘유라 생각하셨겠는가. 노사께서는 ‘일심이 인연에 따라 움직이면(隨緣) 만법을 건립한다.’고 하셨으니 이미 진심이 인연을 따라 만법이 된다면 만법이 곧 진심이므로 묘유인 것이다. 비유하자면 금으로 그릇을 만들면 그릇마다 모두 금인 것과 같다. 그런 까닭에 『법화경』에 ‘이 법이 법의 위치에 머무니 세간의 차별상도 변함없이 머문다.’327)라고 하였다. 화엄종에서는 오염의 연기와 청정의 연기(染淨緣起)가 모두 법계연기라고 간주하였다.328) 이미 ‘세간의 차별상도 변함없이 머문다.’고 하였고 ‘오염의 연기와 청정의 연기가 모두 법계연기’라고 하였을진대 어찌 묘유가 아니겠는가. 이것은 교설을 끌어 증명한 것이고, 선의 입장에서 표현하면 옛말에 ‘하늘은 하늘이고 땅은 땅이니 언제 자리를 바꾼 적이 있으며, 물은 물이고 산은 산이니 각각이 완연하다.’329)라고 한 말을 들 수 있다. 또 ‘하나하나가 딱 들어맞으니’330)라고 한 말이 어찌 묘유가 아니겠는가. ‘공과 유에 어두워 외도가 되었다.’라고 한 말은 그 의도가 바로 노사(백파)라고 지목하려는 데 있으니, 낯을 하늘로 향하고 침을 뱉으면 본인에게 떨어진다는 것조차 모르는 꼴이다. 『원각경』에 ‘가없는 허공은 원각(一心)이 드러난 것’331)이라고 하였다. 한 사람은, 허공은 원각(一心)이 드러난 것이니 허공은 거짓된 대상의 그림자이므로 완유頑有라 하였다.중부자 초의의 소견이 이와 같다.한 사람은, 허공은 깨달음 그대로가 드러난 것이니 허공 그대로 깨달음이므로 묘유라 하였다.백파 노사의 견해가 이와 같다.이 중부자 초의의 비판이 바름을 그릇되게 만든 것이라는 사실은 제방의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그런즉 세간과 출세간의 일체 만법이 그대로 진심이므로 묘유라고 하는 것이 외도인가? 허위이며 체가 없으므로 망유妄有라고 하는 것이 외도인가? 털끝만 한 차이지만 하늘과 땅 사이 간격만큼이나 벌어지고 말았다.
이상으로 『사변만어』의 논리를 설파하였고, 아래에서는 『소쇄선정록(선문증정록)』의 논리를 변설한다.
10. 『소쇄선정록』을 변설함
 『소쇄선정록(선문증정록)』: 『소쇄선정록』은 4절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삼처전심三處傳心은 선문의 원류이니 근원이 맑아야 지류도 맑다고 하였다.332) 달마의 삼처전심과 관련하여서는, 마음을 찾아도 찾을 수 없었다(覔心不得)는 인연은 첫 번째로 살인도로 마음을 전한 것으로 삼고,

010_0671_b_01L之空爲眞空即空之有爲妙有也老師
010_0671_b_02L豈以斷空頑有爲眞空妙有耶老師云
010_0671_b_03L心隨緣則建立萬法旣眞心隨緣爲萬
010_0671_b_04L則萬法即是眞心故爲妙有也
010_0671_b_05L如以金作器器器皆金也故法華云
010_0671_b_06L是法住法位世間相常住華嚴以染淨
010_0671_b_07L緣起皆爲法界緣起旣云世間相常住
010_0671_b_08L染淨緣起皆爲法界緣起豈非妙有耶
010_0671_b_09L此引敎而證以禪言之古云天天地地
010_0671_b_10L何曾轉水水山山各完然又云一一端
010_0671_b_11L端的的豈非妙有耶昧空有爲外道云
010_0671_b_12L意以老師謂之外道不知仰面唾天
010_0671_b_13L還着於本人圓覺經云無邊虛空
010_0671_b_14L所顯發一二 [17] 虛空是覺之所顯發謂虛
010_0671_b_15L空是虛僞緣影故爲頑有也中孚子所
見如此

010_0671_b_16L云虛空覺即是顯發謂虛空即覺故爲
010_0671_b_17L妙有也老師所
見如此
以此判爲邪正諸方所
010_0671_b_18L共知者也然則世出世間一切萬法
010_0671_b_19L是眞心故謂之妙有是外道耶虗僞無
010_0671_b_20L故謂之妄有是外道耶毫釐有差
010_0671_b_21L天地懸隔上說四辨漫語竟下辨掃灑
010_0671_b_22L先庭錄
錄有四節一云三處傳心是禪
010_0671_b_23L門之源源淸則流淸至於達摩三處傳
010_0671_b_24L以覔心不得爲第一殺人刀傳心

010_0671_c_01L삼배하고 골수를 얻었다(三拜得髓)는 인연은 두 번째로 활인검으로 마음을 전한 것으로 삼으며, 웅이산에 신발을 남겨 두었다(熊耳留履)는 일화는 세 번째로 살과 활을 함께 제시해 마음을 전한 것으로 삼았다. 곽시쌍부槨示雙趺 일화를 인용하여, (세존이) 니련하 부근에서 관 밖으로 두 발을 보이신 일과 (달마가) 웅이산에 일찍이 신발 한 짝을 남겨 두었던 일은 세 번째 마음을 전한 것이라 하였다.333)
신발 한 짝을 남긴 공안(隻履話 : 『선문염송』 103칙)에 대해, 옛사람은 ‘한 짝은 6대의 조사들에게 전했고 다른 한 짝은 6대의 조사들에게 전하지 않았다.’334)고 하였다. 무딘 도끼를 전한 공안(鈯斧話 : 『선문염송』 149칙)에 대한 『염송설화』 평석에서는 청원이 한쪽 발을 평상에서 떨어뜨리자 석두가 절을 올린 장면에 ‘한쪽 발을 떨어뜨린 행위는 건추犍椎를 잡거나 불자를 꼿꼿이 세우는 방식과 마찬가지인가? 법을 전하는 방법에는 본래 유래가 있다. 사라수 아래에서 (세존이) 관 밖으로 두 발을 내보인 인연(『선문염송』 37칙)과 웅이산에서 (달마 대사가) 관에 짚신 한 짝을 남겨 둔 일화(『선문염송』 103칙)는 열반에 들어간 뒤에 보인 생성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 결정적인 한 수이다.’335)라고 하였고, ‘석두가 절을 올린 것은 견해가 스승과 비슷했던 것일까, 지혜가 스승을 넘어섰던 것일까?336) 여기에도 법을 전수한 유래가 있다. 사라수 아래에서 세존께서 가섭에게 본보기가 되어 주었고, 각각 터득한 경지를 말했을 때 달마가 혜가에게 본보기가 되어 주었다. 6대 이후 청원이 석두에게 또한 최초의 본보기가 되어 주었으니 그렇지 않은가?’337)여기까지 『소쇄선정록(선문증정록)』 인용이다.라고 하였다. 이를 논증하여 설파해 보겠다. 옛 해석에 ‘모든 대상에 대한 집착을 끊었다(諸緣已斷)는 일화는 마음을 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전등록』에 싣지 않고 다만 골수를 얻었다는 이하에 주석으로 붙였을 뿐이며, 『선문염송』에서도 싣지 않았지만 『염송설화』에서 다만 편의에 따라 법인 공안(法印話 : 『선문염송』 100칙)에서 서술한 것’338)이라고 한다.

 설두 유형의 변설: 무릇 법을 전한다는 것은 스승과 제자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의견을 주고받으며339) 서로 반대편에서 쏜 화살촉이 허공에서 맞부딪히듯 동등한 수준이 된 연후에라야 전하고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신발을 남긴 일화는 그에 해당하지 않는다. 달마가 입적한 후 3년이 지나 위나라 사신 송운宋雲이 서역에서 돌아오는 길에 총령葱嶺에서 달마가 손에 신발 한 짝을 들고 가는 것을 보았다고 조정에 돌아와 아뢰므로 탑을 열어 보니 관 속에 이미 신발 한 짝이 있었다고 한다.340) 그렇다면 이때 누가 법을 전한 것인가? 이것이 법을 전했다고 하는 논리가 옳지 않은 이유이다. 가섭은 세존이 발을 보이신 때에 삼배의 예를 올려 자기의 깨달음을 드러내 보였지만, 혜가는 달마가 신발을 남긴 때에 깨달음을 드러내 보인 자취가 없으니

010_0671_c_01L以三拜得髓爲第二活人劒傳心以熊
010_0671_c_02L耳留履爲第三殺活齊示傳心引示趺
010_0671_c_03L話云泥蓮河畔槨示雙趺熊耳山前
010_0671_c_04L曾留隻履此是第三傳心云云隻履話
010_0671_c_05L古人云一箇六代傳一箇六代不傳
010_0671_c_06L云云鈯斧話釋淸源垂下一足石頭禮
010_0671_c_07L拜云垂下一足拈槌竪拂一般耶傳法
010_0671_c_08L自有來由娑羅樹下槨示雙趺熊耳
010_0671_c_09L山中棺留隻履則入涅槃後不生不
010_0671_c_10L滅底一着也禮拜者見與師齊耶
010_0671_c_11L過於師耶亦有來由娑羅樹下迦葉作
010_0671_c_12L榜樣各言所得時慧可作榜樣六代
010_0671_c_13L以後石頭亦作榜樣云云引字
至此
以證之
010_0671_c_14L仍破古義云斷緣非傳心故傳燈不載
010_0671_c_15L而但註脚於得髓下拈頌亦不載而說
010_0671_c_16L話但因便叙於法印話中云云

010_0671_c_17L
辨曰夫傳法者師資兩人眉毛撕結
010_0671_c_18L鋒相投然後謂之傳之受之而今留履
010_0671_c_19L不然達摩示寂後三載魏使宋雲自西
010_0671_c_20L域回路於葱嶺途中見達摩手携隻履
010_0671_c_21L而去來奏啓塔視之棺中曾留隻履
010_0671_c_22L則伊時誰其傳法耶此爲傳之之不可
010_0671_c_23L迦葉於示趺處三拜作禮呈己所悟
010_0671_c_24L而慧可於留履處無呈悟之跡何謂之
010_0671_c_25L「見」上疑脫「不」{編}

010_0672_a_01L어떻게 법을 얻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법을 받았다고 하는 논리가 옳지 않은 이유이다. 또한 마음은 본래 형상이 없으므로 전수할 그 당시에 일에 의탁하여 법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예컨대 세존이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한 것과 같다. 첫 번째 분좌分座에서 좌는 법공좌法空座341)이므로 살인도를 드러낸 것이다. 두 번째 염화拈花에서 꽃은 매우 다양하므로 활인검을 나타낸다. 세 번째 발을 내보인 것(示趺)에서 두 발이 상징하는 의미가 없지 않으니 살과 활을 가지런히 보였음을 나타낸다. 달마가 세 곳에서 (혜가에게) 마음을 전한 예를 보면, 첫 번째 모든 대상이 이미 끊어져 분별에 들어맞는 법이 하나도 없다고 하였으므로 이것은 여래선을 얻은 것이다. 두 번째 마음을 찾아도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은 뿌리까지 통째로 뽑아 버려 잡고서 분별할 수단을 전혀 남기지 않은 경계이므로 조사선을 얻은 것이다. 세 번째 삼배하고서 골수를 얻었다는 말을 듣게 된 일화에서 삼배에 담긴 의미가 없지 않으므로 앞의 두 가지 선을 가지런히 모두 얻었다는 뜻이다. 이 해석은 대단히 분명하니 누가 감히 시비를 벌이겠는가. 묵암 최눌默庵最訥도 이와 같이 설명하고 판각하여 전하였으니 이제까지 전해져 온 것이 통설임을 응당 알아야 한다. 신발을 남긴 것을 세 번째로 마음을 전한 것으로 간주한다면, 그것은 단지 한 짝 신발일 뿐이니, 어찌 살과 활을 가지런히 썼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살과 활을 가지런히 썼다고 하는 논리가 옳지 않은 이유이다. 먼저 (우담 홍기優曇洪基가) 세 곳을 규정한 것이 옳지 않음을 변설하고, 다음으로는 (『염송설화』의) 글을 끌어와 인증한 대목이 옳지 않음을 변설하겠다.

 세존이 발을 보이신 공안(『선문염송』 37칙)에서의 곽시쌍부槨示雙趺: ‘자명慈明342) 이 이 부마李駙馬(李遵勗)343)에게 부친 편지에서 두 발을 그려 보여 준 것344)은 왕래하며 서로 만나 보았다는 뜻인가? 사람마다 발 아래에 가라앉지도 않고 들뜨지도 않는345) 한 가닥 살아날 길이 있다는 뜻인가? 신령한 근원346)은 맑고 고요하여 옛날도 지금도 없으며, 미묘한 본체는 완벽하게 밝거늘 어찌 태어나고 죽음이 있단 말인가? 그런 까닭에 니련하 부근에서 관 밖으로 두 발을 내보이셨고, 웅이산에서 일찍이 한 짝 신발을 남긴 것이니 이것이 바로 세 번째로 마음을 전한 것이다.’347) 내가 생각건대 발을 내보인 것은 왕래하며 만났다는 뜻은 아니며, 사람마다 발 아래에 가라앉지도 않고 들뜨지도 않는 한 가닥 살아날 길을 준 것이다.

010_0672_a_01L得法耶此爲受之之不可也且心本無
010_0672_a_02L故傳受之際托事而顯法如世尊三
010_0672_a_03L處傳心則第一分座座是法空座故表
010_0672_a_04L殺人刀也第二拈花花是許多般故表
010_0672_a_05L活人劒也第三示趺雙趺意不無故表
010_0672_a_06L殺活齊示也達摩三處傳心則第一諸
010_0672_a_07L緣已斷無一法可當情故得如來禪也
010_0672_a_08L第二覔心不得和根拔去了沒巴鼻
010_0672_a_09L得祖師禪也第三三拜得髓三拜意不
010_0672_a_10L故二禪齊得也此是大段分明孰敢
010_0672_a_11L雌黃默庵老亦如是說之登梓傳之
010_0672_a_12L知是從前傳來之通談耳若以留履爲
010_0672_a_13L第三傳心只是一隻履而已何謂之殺
010_0672_a_14L活齊示耶此爲殺活齊示之不可也
010_0672_a_15L辨按定三處之不可次辨引文爲證之
010_0672_a_16L不可

010_0672_a_17L
示趺話云槨示雙趺者慈明示李駙馬
010_0672_a_18L書中畵雙足則往來相見之意耶人人
010_0672_a_19L脚跟下有不沉不掉地一條活路耶
010_0672_a_20L源湛寂無古無今竗體圓明何生何
010_0672_a_21L所以泥蓮河畔槨示雙趺熊耳山
010_0672_a_22L曾留隻履此是第三傳心意謂此
010_0672_a_23L示趺非往來相見之意與人人脚跟下
010_0672_a_24L不沉不掉地一條活路也是古德所言

010_0672_b_01L고덕이 ‘생성하지도 소멸하지도 않는 결정적인 한 수’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생성하지도 소멸하지도 않는 결정적인 한 수인 것은 세 번째로 전한 심법이기 때문이다. 어째서인가? ‘신령한 근원은 맑고 고요하여 옛날도 지금도 없으며, 미묘한 본체는 완벽하게 밝거늘 어찌 태어나고 죽음이 있단 말인가.’라 운운한 말은, 고덕이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혼을 위해 생성하지도 소멸하지도 않는 결정적인 한 수를 보인 것이다. 처음 두 구는 생성하지도 소멸하지도 않는 결정적인 한 수를 들어 나타낸 것이고, 다음 두 구는 생성하지도 소멸하지도 않는 상相을 이끌어 내어 제시한 것이다. 세존이 발을 보이고 달마가 신발을 남긴 것이 모두 생성하지도 소멸하지도 않는 상이다.
그러므로 둔한 도끼 공안(鈍斧話)에 대한 『염송설화』의 평석에서 ‘청원이 한쪽 발을 평상에서 떨어뜨린 행위는, 건추를 잡거나 불자를 꼿꼿이 세우는 방식과 마찬가지인가? 법을 전하는 방법에는 본래 유래가 있다. 사라수 아래에서 (세존이) 관 밖으로 두 발을 내보인 인연과 웅이산에서 (달마 대사가) 관에 이미 짚신 한 짝을 남겨 둔 일화는 열반에 들어간 뒤에 보인 생성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 결정적인 한 수이다.’348)라고 한 것이다. 발을 떨어뜨린 행위가 건추를 잡거나 불자를 꼿꼿이 세우는 것과는 같지 않고, 법을 전하는 방법에는 본래 유래가 있다는 말은 세존이 살과 활을 가지런히 제시하여 마음을 전한 것이 바로 생성하지도 소멸하지도 않는 결정적인 한 수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살 또한 생성하지도 소멸하지도 않는 결정적인 한 수이며, 활 또한 생성하지도 소멸하지도 않는 결정적인 한 수이다. 그러므로 지금 한 발을 늘어뜨린 행위는 살인도를 전한 것이며, 생성하지도 소멸하지도 않는 결정적인 한 수이다.
그러므로 ‘법을 전하는 방법에는 본래 유래가 있다.’라 하고 결론지어 ‘열반에 들어간 뒤에 보인 생성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 결정적인 한 수이다.’349)라고 한 것이니, 발을 내보이고 신발을 남긴 것은 단지 생성하지도 소멸하지도 않는 상을 보인 것일 뿐이다. 만약 발을 내보이고 신발을 남긴 것도 마음을 전한 증표로 여긴다면 청원은 단지 살인도를 얻은 것일 뿐이니 세상 사람들 모두 이 점을 인정할 것이다. 그렇다면 한 발을 늘어뜨린 행위 또한 살과 활을 가지런히 제시한 것인가? 『염송설화』에서 석두가 예배한 것을 평석하면서, ‘견해가 스승과 비슷했던 것일까, 지혜가 스승을 넘어섰던 것일까? 여기에도 법을 전수한 유래가 있다. 사라수 아래에서 세존께서 가섭에게 본보기가 되어 주었고, 각각 터득한 경지를 말하였을 때 달마는 혜가에게 본보기가 되어 주었으며, 6대 이후 청원이 석두에게 또한 본보기가 되어 주었다.’350)라고 하였다. 이것은 예배가 본보기로서 같음을 밝힌 것이지, 터득한 법이 같음을 밝힌 말이 아니다. 만약 터득한 법이 같음을 밝힌 것이라고 말한다면

010_0672_b_01L不生不滅之一着而此不生不滅之一
010_0672_b_02L爲第三所傳之心法也何也靈源
010_0672_b_03L云云古德爲孤魂示不生不滅之一着
010_0672_b_04L而初二句票擧不生不滅之一着下二
010_0672_b_05L引示不生不滅之相以示趺留履
010_0672_b_06L皆是不生不滅之相也故鈍斧話釋
010_0672_b_07L源垂下一足云拈槌竪拂一般耶傳法
010_0672_b_08L自有來由娑羅樹下槨示雙趺熊耳
010_0672_b_09L山中曾留隻履則入涅槃後不生不
010_0672_b_10L滅底一着謂此垂足非拈槌竪拂一般
010_0672_b_11L傳法有由世尊殺活齊示傳心是不生
010_0672_b_12L不滅底一着則殺亦是不生不滅底一
010_0672_b_13L活亦是不生不滅之一着也故今垂
010_0672_b_14L下一足傳殺人刀不生不滅底一着也
010_0672_b_15L故票云傳法有由結云入涅槃後
010_0672_b_16L生不滅之一着然則此示趺留履但示
010_0672_b_17L不生不滅底相而已若以此示趺留履
010_0672_b_18L爲證傳心淸源之但得殺人刀世皆許
010_0672_b_19L則此垂下一足亦爲殺活齊示耶
010_0672_b_20L說話釋石頭禮拜云見與師齊耶智過
010_0672_b_21L於師耶亦有來由娑羅樹下迦葉作
010_0672_b_22L榜樣各言所得時慧可作榜樣六代
010_0672_b_23L已後石頭亦作榜樣此亦證禮拜作榜
010_0672_b_24L樣之同非謂證得法之同若謂是證得

010_0672_c_01L석두 또한 살과 활을 가지런히 제시하였다는 말인가?
가섭이 예배를 올렸을 때(세존이 곽시쌍부하였을 때)가 세 번째로 마음을 전한 것이다. 그런데 『소쇄선정록(선문증정록)』에서는 혜가가 삼배하여 골수를 얻은 것을 두 번째로 마음을 전한 것이라고 하였으니, 어찌 그들이 얻은 경지가 똑같다고 할 수 있겠는가. 다만 고덕은 ‘총령에서 달마와 마주쳤는데, 손에 신발 한 짝을 들고 있었다.’고 하였고, 『염송설화』에서는 웅이산에서 관 속에 신발 한 짝을 남긴 것에 대해, 신발 남긴 것을 마음을 전한 것으로 여긴다고 말한 것이 아니고, 다만 들고 간 신발이나 남긴 신발이나 모두 생성하지도 소멸하지도 않는 상을 보이는 증표일 뿐이라고 본 것이다.351) 그런 까닭에 척리 공안(隻履話)에서 손에 신발 한 짝을 들고 혼자 바삐 걸어가고 있었던 것들고 간 것과 또 텅 빈 관에 신발 한 짝을 남겨 둔 것남겨 둔 것에 대해 옛사람은 ‘한 짝은 6대의 조사들에게 전하였고,신발을 남겨 둔 것다른 한 짝은 6대의 조사들에게 전하지 않은 것신발 한 짝을 들고 간 것352)이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한 짝만 전한 것을 법을 전한 것으로 여겼다는 말이 아니라, 다만 그 신발을 남겨 둔 것이 또한 생성하지도 소멸하지도 않는 상을 보인 증표일 뿐이라는 말이다. 그런 까닭에 이에 대해 고덕은 ‘신령한 근원은 맑고 고요하여 옛날도 지금도 없으며, 미묘한 본체는 완벽하게 밝거늘 어찌 태어나고 죽음이 있단 말인가? 그런 까닭에 니련하 부근에서 관 밖으로 두 발을 내보이셨고, 웅이산에서 일찍이 한 짝 신발을 남긴 것이니 이것이 바로 세 번째로 마음을 전한 것이다.’353)라고 평석한 것이다. 이는 신발 한 짝을 들고 간 일을 말한 것이다. 무진거사의 송에 ‘(벽관 수행한 9년의 공뿐만 아니라, 아득히 지난 겁 자체도 텅 비었다네.) 웅이산 탑묘 열자 남은 신발 한 짝, 시방 전체에 원통한 이치 드러났네.’354)라고 한 구절은 신발을 남긴 일을 읊은 것이다.
그 자취가 비록 다르다고는 하지만 그 뜻은 같다. 생각건대, 신발 한 짝을 들고 간 것이나 신발 한 짝을 남겼던 것의 자취는 비록 다르지만 그것 모두가 생성하지도 소멸하지도 않는 뜻을 보였다는 점에서는 같다. 그런즉 척리 공안(隻履話)에는 한마디로 법을 전한 뜻은 없으며 단지 생성하지도 소멸하지도 않는 뜻을 설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곽시쌍부 공안에서 니련하 부근에서 관 밖으로 두 발을 내보였다는 것과 웅이산에서 일찍이 신발 한 짝을 남긴 것 모두가 생성하지도 소멸하지도 않는 상을 보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생성하지도 소멸하지도 않는 마음의 본체를 세 번째로 마음을 전한 인연으로 보는 까닭이다. 이하에서는 옛 뜻을 논파한 논리가 옳지 않음을 변설하겠다.

 혜가가 모든 대상에 대한 집착을 끊었다(斷緣)는 어구를 『전등록』이나 『선문염송』 등에서 모두 싣지 않았다고 한 점: 생각건대 선문의 어구는 여러 문헌에 산재해 있다. 혹 이 내용의 글은 시작은 있으나 끝이 없거나

010_0672_c_01L法之同石頭亦得殺活齊示耶迦葉作
010_0672_c_02L是第三傳心而錄以三拜得髓
010_0672_c_03L第二傳心豈可謂之所得同耶第其古
010_0672_c_04L德云葱嶺途中手携隻履今說話云
010_0672_c_05L熊耳山前棺留隻履者非謂以留履爲
010_0672_c_06L傳心但證其携底留底皆示不生不滅
010_0672_c_07L之相也故隻履話手携隻履翩翩獨
010_0672_c_08L
又空棺一隻革屣存焉者
古人
010_0672_c_09L一箇六代傳
一箇六代不傳

010_0672_c_10L非謂以一箇傳爲傳法但證其留底
010_0672_c_11L示不生不滅之相也故此云古德云
010_0672_c_12L靈源湛寂至隻履此言携去地也
010_0672_c_13L盡居士頌熊耳塔開留隻履十方全體
010_0672_c_14L現圓通此言所留地也其迹雖異
010_0672_c_15L義即同意謂携地留地之跡雖異其示
010_0672_c_16L不生不滅之義即同也然則隻履話
010_0672_c_17L一言傳法之意但說不生不滅之義也
010_0672_c_18L故知示趺話云泥蓮河畔1) [6] 雙趺
010_0672_c_19L熊耳山前曾留隻履皆示不生不滅之
010_0672_c_20L而以此不生不滅之心體爲第三傳
010_0672_c_21L心也下卞其破古義之不可

010_0672_c_22L
斷緣語句傳燈拈頌俱不載者夫禪
010_0672_c_23L門語句散在諸文或此文有始無終
010_0672_c_24L「亦」疑「示」{編}

010_0673_a_01L혹 저 내용의 글은 끝은 있으나 시작이 없거나 하여 마치 대장경이 서序·정종正宗·유통流通의 삼분三分355)을 체계적으로 갖추고 있는 것과는 같지 않다. 이런 까닭에 기록하거나 글을 모으는 자가 그 보고 들은 내용을 따라 기록하고 모은 것일 뿐이다. 『전등록』이나 『선문염송』에 법인法印과 득수得髓 두 공안의 기연 어구가 실린 까닭은 기록하고 모았기 때문이다. 『전등록』에서 주注에 별기로 인용한 것 또한 그 본 바를 따라서 기록하였음을 밝힌 것이지, 마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각주로 가리킨 것이다.
별기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달마 대사가 처음 소림사에 거처할 때에 2조에게 법을 설하면서 다만 「밖으로 모든 대상에 대한 집착을 쉬고, 안으로는 마음에 헐떡임이 없어져서 마음이 장벽과 같아져야 비로소 도에 들어갈 수 있다.」라고만 가르쳤다. 2조가 갖가지로 마음을 말하고 성품을 말하고 도를 이야기하고 이치를 이야기해 보았지만 모두 딱 들어맞지 못했다. 달마는 그 잘못을 차단하기만 하고 무념의 심체를 말해 주지 않았다. 혜가가 「저는 이미 온갖 대상 경계에 대한 집착을 쉬었습니다.」라고 하자 달마는 「단멸에 떨어지지는 않았는가?」라고 물었고, 「떨어지지 않았습니다.」라고 답함에 「무엇으로써 단멸에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가?」라고 묻자 「뚜렷하게 스스로 알고 있지만 말로는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습니다.」라 답하였으며, 이에 달마 대사는 「이것이 바로 모든 부처님께서 전한 마음의 본체이니 더 이상 의심하지 말라.」라고 하였다.’356) 이미 ‘이것이 바로 모든 부처님께서 전한 마음의 본체’라고 하였으니, 어찌 마음을 전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기주記主(뛰어난 책을 지었거나 조사祖師가 지은 책을 풀이한 사람)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혜가의 단연斷緣 문답은 응당 마음을 전한 일화임을 알 수 있다.
또 『도서』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달마는 훌륭한 방편으로 문자를 잘 가려 마음을 전했으니357) 그 이름을 높이 드러내고 그 본체를 묵묵히 보였다.358) 벽관으로써 모든 대상 경계에 대한 집착을 끊도록 일깨운 것이다. 혜가가 모든 대상 경계에 대한 집착을 끊었다고 하자 달마는 「단멸에 떨어지지 않았는가?」라고 물었고 혜가는 「단멸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라고 답하였다. 달마가 다시 「무엇으로써 단멸에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가?」라고 묻자 혜가는 「뚜렷하게 스스로 알고 있지만 말로는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습니다.」라고 답하였고, 이에 달마는 곧 인가하며 「이것이 바로 자성청정심이니 다시는 의심하지 말라.」라고 하였다.’359) 바로 인가하면서 이미 ‘이것이 바로 정성청정심’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마음을 전한 것이 아니겠는가!
또 『서장』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2조가 갖가지로 마음을 말하고 성품을 말해 보였지만 모두 딱 들어맞지 못하다가 하루는 홀연히 깨닫고서는

010_0673_a_01L或彼文有終無始非如藏經之序正流
010_0673_a_02L通三分具足也是以錄者集者隨其
010_0673_a_03L見聞而錄之集之如傳燈錄拈頌集
010_0673_a_04L見法印得髓二話之機緣語句錄之集
010_0673_a_05L之也傳燈錄中注引別記者此亦明其
010_0673_a_06L隨見而記之也非謂非傳心故註脚指
010_0673_a_07L之也記云師初居少林爲二祖說法
010_0673_a_08L秖敎曰外息諸緣內心無喘心如墻
010_0673_a_09L可以入道二祖種種說心說性說
010_0673_a_10L道說理俱不契師秖遮其非不爲說
010_0673_a_11L無念心體可曰我已息諸緣師曰莫落
010_0673_a_12L斷滅去否可曰不落師曰以何驗之云
010_0673_a_13L不斷滅可曰了了自知言不可及
010_0673_a_14L此是諸佛所傳心體更勿疑也旣云
010_0673_a_15L此是諸佛所傳心體豈非傳心耶故知
010_0673_a_16L記主不知是誰而應以此斷緣爲傳心
010_0673_a_17L又都序云達摩善巧揀文傳心
010_0673_a_18L擧其名默示其體喩以壁觀永絕諸
010_0673_a_19L絕諸緣時斷滅否不斷滅
010_0673_a_20L以何證驗云不斷滅了了自知言不
010_0673_a_21L可及師即印云此是自性淸淨心
010_0673_a_22L勿疑也旣是印云此是自性淸淨心
010_0673_a_23L豈非傳心耶又書狀云二祖種種說心
010_0673_a_24L說性俱不契一日忽然省得白曰

010_0673_b_01L「비로소 모든 대상 경계에 대한 집착을 그쳤습니다.」라고 하자 달마가 「단멸에 빠진 것은 아닌가?」라고 물었고 「아닙니다.」라고 하자 「어째서인가?」라고 물으니 혜가는 「뚜렷하게 스스로 알고 있지만 말로는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습니다.」라고 답하였다. 이에 달마는 「이것이야말로 예로부터 모든 부처와 모든 조사께서 전한 마음의 본체이니 그대가 이미 이를 터득한 이상 다시는 의심하지 말라.」라고 하였다.’360) 이미 ‘이것이야말로 예로부터 모든 부처와 모든 조사께서 전한 마음의 본체’라고 말하고 ‘그대가 이미 이를 터득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어찌 마음을 전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규봉과 대혜가 모두 이 혜가의 단연 문답을 마음을 전한 일화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염송설화』에서는 단연斷緣 문답, 모든 부처님의 법인法印에 대한 문답, 골수를 얻게 된 문답 등 세 문답의 기연을 모두 합하여 삼처전심으로 보았으나 단연 문답을 바로 단독으로 서술하지 않았을 뿐이다. 또 『염송설화』에서는 단연 문답을 평석하기를 ‘뚜렷하게 스스로 알고 있다고 한 말은 본분사를 안다는 것이니 여래선을 증득한 것’이라 하였고, 모든 부처님의 법인에 대한 문답을 평석하면서는 ‘앞에서 터득한 이해가 더욱 밝아져 뚜렷하게 스스로 알고 있다고 말하고 조사선을 얻은 것’이라고 하였다.361) 그렇다면 이 두 가지 선은 뚜렷하게 스스로 알고 있어 얻은 것이다. 조사선만 유독 마음을 전한 것이고, 여래선은 마음을 전한 것이 아니란 말인가! 그런 까닭에 두 가지 선이 모두 마음을 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다만 ‘앞에서 터득한 이해가 더욱 밝아졌다.’고 말한 까닭은 두 가지 선의 깊이를 나눈 것일 뿐이다.
아, 그자는 다만 삼처전심이 선문의 연원인 줄만 알고 삼처전심에 또한 그 연원이 있음은 알지 못하였다. 만약 제일 살인도가 여래가 깨달은 경지를 전한 것이어서 그것을 여래선이라 하고, 제이 활인검은 조사가 전한 깨달음의 경지를 전한 것이므로 조사선이라 한다는 점을 안다면 결코 이처럼 많은 말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어찌 또 이하에서 지루하게 말을 늘어놓은 것인가.이하 세 개의 절에서 지루하게 말을 늘어놓은 것은 이 제1절에서부터 잘못 해석한 때문이다.‘일의 시작362)을 결정함에서부터 어긋나 마침내는 남쪽 월나라로 가려고 하면서 수레를 북쪽으로 돌리고 만다(適越而北轅).’363)는 말을 들어 보지 못하였던가.
 『소쇄선정록(선문증정록)』: 『소쇄선정록』 제2절에서는 의리선과 격외선, 여래선과 조사선은 선문의 이름으로서 이들 이름이 바르게 서면 실상도 바르게 드러날 것이라 하였다.
『염송설화』를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을 폈다. ‘규봉 종밀圭峯宗密이 「선의 온전한 음사어는 선나禪那이고, 한역하면 사유수思惟修

010_0673_b_01L息諸緣達摩曰莫成斷滅否
010_0673_b_02L作麽生了了自知言不可及
010_0673_b_03L乃從上諸佛諸祖所傳心體汝今旣得
010_0673_b_04L更勿疑也旣云此乃從上佛祖所傳心
010_0673_b_05L汝今旣得豈非傳心耶故知圭峯
010_0673_b_06L大慧亦皆以此斷緣爲傳心也故說話
010_0673_b_07L合斷緣及法印得髓三段機緣爲三處
010_0673_b_08L傳心非以斷緣因便叙之也又說話
010_0673_b_09L釋斷緣云了了自知者知有本分事
010_0673_b_10L得如來禪釋法印云前解轉明曰
010_0673_b_11L了自知得祖師禪然則二禪皆以了
010_0673_b_12L了自知得之而祖師禪獨爲傳心
010_0673_b_13L來禪不爲傳心耶故知二禪皆爲傳心
010_0673_b_14L而但前解轉明云者分二禪之深淺耳
010_0673_b_15L嗚呼此子但知三處傳心爲禪門之源
010_0673_b_16L不知三處傳心亦有其源也若知第一
010_0673_b_17L殺人刀是傳如來悟底故名爲如來禪
010_0673_b_18L第二活人劒是傳祖師傳底故名爲祖
010_0673_b_19L師禪則必不如是饒舌如何又有向下
010_0673_b_20L文長也向下三節文長
此第一節錯解
豈不見差決擇
010_0673_b_21L於發軔終適越而北轅

010_0673_b_22L
錄第二節義理禪格外禪如來禪祖師
010_0673_b_23L是禪門之名名正則實正引說話
010_0673_b_24L圭峯云禪者具云禪那此云思唯

010_0673_c_01L또는 정려靜慮라고도 하는데, 이는 모두 정定과 혜慧를 통칭한 말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의리선이다. 「여기서 말하는 선禪으로 보자면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일미선이다.」라고 한 것은 격외선이다. 이는 앞서 옛 총림에서 법을 기준으로는 의리선·격외선이라 한다는 말이다. 또한 「여래선과 조사선의 다른 점은 무엇인가? 여래선이란 산은 산 그대로 좋고 물은 물 그대로 좋으니 법 하나하나가 모두 그대로 진실하다는 견해이고, 조사선은 뿌리까지 통째로 뽑아 버려 잡고서 분별할 수단을 전혀 남기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옛 총림에서 사람을 기준으로는 여래선·조사선이라 한다는 말이다.’364)
또 『선문강요집』을 끌어와 다음과 같이 주장을 폈다. ‘ 「비춤과 작용은 요要로서 제1구에 해당하며, 권權과 실實은 현玄으로서 제2구에 해당하고 또한 제3구에 해당한다.」여기까지 인용라고 하였으니, 제1구만 오직 격외이므로 요에 해당하고, 제2구와 제3구는 똑같이 의리義理이므로 함께 권과 실에 해당한다.’또 제1구를 설명하기를 ‘세존이 가섭에게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한 것을 첫머리의 표지로 한 까닭은 이 공안으로 교외별전의 종지를 세우기 위해서이며,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한 것이 모두 제1구에 있으므로 교외敎外이다.’라고 하고 제2구에 대해서는 ‘ 「여래가 적멸도량에서 처음 정각을 이루자 법신 대사와 천룡팔부가 일시에 에워쌌으니 이것이 제2구이다. 그러므로 인천의 스승」이라 하니 이 여래선은 교내敎內이다.’라고 하였다.365)

 설두 유형의 변설: 대개 여래가 깨달은 경지를 여래선이라 하고, 조사가 전한 깨달음의 경지를 조사선이라 한다. 이는 깨닫거나 전하는 주체가 되는 사람을 기준으로 하여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렇게 전해져 33세 남악이 활인검·조사선을 터득하였고, 청원은 살인도·여래선을 터득하였으며, 하택은 본원이니 불성이니 하여 의리선에 속하게 되었다. 이 의리선에 상대하여 앞의 살과 활, 두 가지 선에 또한 격외선이라 이름 붙인 것이다.
 격외라는 이름을 붙인 까닭: 고덕이 말하였다. ‘마음에서 얻으면

010_0673_c_01L亦云靜慮斯皆定慧之通稱此義
010_0673_c_02L理禪也當此看則敎外別傳一味禪
010_0673_c_03L格外禪也此上古叢林所言約法名義
010_0673_c_04L理禪格外禪也且如來禪祖師禪同別
010_0673_c_05L如何如來禪者山山水水法法全眞
010_0673_c_06L祖師禪者和根拔去了沒巴鼻
010_0673_c_07L古所言約人名如來禪祖師禪也
010_0673_c_08L引綱要云照用是要當第一句權實
010_0673_c_09L是玄當第二句又當第三句云引字
至此

010_0673_c_10L一句獨爲格外故獨屬於要第二句第
010_0673_c_11L三句同爲義理故同屬於權實又云
010_0673_c_12L第一句云世尊迦葉三處傳心所以首
010_0673_c_13L此个公案以立敎外別傳之宗此三
010_0673_c_14L處傳心皆在第一句故爲敎外也
010_0673_c_15L二句如來在寂滅場中初成正覺法身
010_0673_c_16L大士及天龍八部一時圍繞是第二句
010_0673_c_17L故云人天師此如來禪爲敎內云云

010_0673_c_18L
辨曰盖如來悟底名如來禪祖師傳底
010_0673_c_19L名祖師禪此約能悟能傳之人立名也
010_0673_c_20L以此傳之三十三世南岳得活人劒祖
010_0673_c_21L師禪淸源得殺人刀如來禪荷澤喚作
010_0673_c_22L本源佛性爲義理禪也然對此義理禪
010_0673_c_23L上殺活二禪亦得名爲格外禪也
010_0673_c_24L以得格外之名者古德云若人得之於

010_0674_a_01L세간의 거칠거나 미세한 말에 이르기까지 모두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선지이지만, 말에서 종지를 잃어버리면 염화미소도 도리어 교의 자취가 될 뿐이다.’366) 그러므로 친밀히 전하고 마음으로 전해 받은 데에는 이치로 모색할 길도 없고 말을 따라 쫓아갈 길도 없기 때문에 격외선이라 함을 알아야 한다. 만약 지해를 보존하여 가지고 있는 경우에는, 이치로 모색할 길도 있고 말을 따라 쫓아갈 길도 있는 것이므로 의리선이라 한다. 이것은 의리義理가 있느냐 없느냐를 기준으로 하여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염송설화』에서 ‘규봉 종밀이 교외별전의 일미선이라 하였다.’고 거론한 말은, 옛 총림에서 ‘법을 기준으로 하여서는 의리선·격외선이라고 한다.’는 뜻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앞서 격외선 중의 여래선과 조사선, 두 가지 선이 같지 않다고 한 것은 이는 깨닫거나 전하는 주체가 되는 사람을 기준으로 하여 이름을 붙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염송설화』에서 ‘말해 보라! 여래선과 조사선의 다른 점이 무엇인가?’라고 한 말은 옛 총림에서 ‘사람을 기준으로 하여서는 여래선·조사선이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런즉 마땅히 세 가지 선인 것이지, 두 종류의 선이라고 말한 게 아니며 사람과 법을 기준으로 함에 차이가 있는 것일 뿐이다.
 의리선을 여래선이라 하는 주장에 대해: 『염송설화』에서는 ‘모든 대상에 대한 집착이 이미 끊어졌을 때 분별에 들어맞는 법이 하나도 없는 상태였던 것이다. 「분명하게 깨어 어둡지 않고, 뚜렷하게 스스로 알고 있다.」라고 한 말은 본분사를 알았기 때문에 깨달음과 수행이 곧바로 사라지면서 이에 곧 여래선을 증득하였던 것이다.’367)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의리선 또한 분별에 들어맞는 법이 하나도 없는 상태요, 또한 본분사를 알아 깨달음과 수행이 곧바로 사라진 것인가? 만약 이와 같다면 의리선이라 해서는 안 된다.
『선문강요집』에서 ‘비춤과 작용이 요要로서 제1구에 해당한다.’고 한 것은 비춤과 작용이 모두 활이라야 제1구라는 의미이다. 단지 활일 뿐 살은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살이 또한 제1구에 해당하며, 제1구만 오로지 격외선이라 하겠는가. 청원이 살인도를 얻었다고 모두가 인정하는 까닭은 조동종인 청원 문인들이 그 종지에서 제2구가 종문의 향상사向上事임을 밝혔기 때문이다. 종문의 향상사가

010_0674_a_01L則乃至世間麁言細語皆爲敎外別
010_0674_a_02L傳禪旨失之於口則拈花微笑却爲
010_0674_a_03L敎迹故知密傳心受沒理路語路則
010_0674_a_04L名爲格外禪若存知解有理路語路
010_0674_a_05L名爲義理禪此約沒義理有義理
010_0674_a_06L立名也故說話云圭峯云云至敎外
010_0674_a_07L別傳一味禪者古叢林所謂約法名義
010_0674_a_08L理禪格外禪也上格外禪中又有如來
010_0674_a_09L祖師二禪之不同此約能悟能傳之人
010_0674_a_10L以立名也故說話云且道如來禪祖
010_0674_a_11L師禪同別如何云云者古所謂約人名
010_0674_a_12L如來禪祖師禪也然則合爲三禪非謂
010_0674_a_13L二種禪約人法有異也若以義理禪
010_0674_a_14L爲如來禪說話云諸緣已斷時無一
010_0674_a_15L法可當情明明不昧了了自知者
010_0674_a_16L有本分事以悟修斯亡乃證得如來禪
010_0674_a_17L然則義理禪亦是無一法可當情又知
010_0674_a_18L有本分事悟脩斯亡耶若如是則不
010_0674_a_19L可謂之義理禪也綱要云照用是要
010_0674_a_20L當第一句者照用皆活則第一句
010_0674_a_21L爲活而無殺何以殺亦屬於第一句
010_0674_a_22L第一句獨爲格外禪耶淸源之得殺人
010_0674_a_23L所共許者而曺洞以淸源門人
010_0674_a_24L宗旨明第二句宗門向上宗門向上

010_0674_b_01L바로 청원이 터득한 살인도이다. 그러므로 (『선문강요집』에서) ‘제2구에서 알아차리면 인천의 스승이 될 만하다.’고 한 것이다. 그 알아차린 경지가 바로 종문의 향상사이니, 이것이 어찌 격외가 아니겠는가! 『염송설화』에서 ‘여래선이란 깨달음과 수행이 곧바로 사라지면서 본분사가 본체와 같은 종류임을 아는 것’368)이라 한 평석은, 이 본분과 향상의 본체가 같음이 여래선이라는 뜻이니 어찌 격외가 아니겠는가! 그런 까닭에 제2구 여래선이 의리선 제3구와 같다고 해서는 안 된다.
제2구와 제3구, 두 구가 똑같이 의리선이라면 임제가 무엇 때문에 두 가지 구로 나누어 설했단 말인가. 다만 알아차린 뒤에 삼현이라는 방편의 무기를 시설하여 격格이 정해진 법도를 완성하면369) 제3구에 삼구의 면목이 있는 것과 같을 뿐이다. 그러므로 ‘또한 제3구에 해당한다.’고도 한 것이지만, 다만 비슷하기만 할 뿐이지 참으로 제3구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제1구에서 삼요를 곧바로 밝힌다. 요는 요점을 찌른다고 할 때의 그 요이니, 요점은 번다한 데에 있지 않다. 마치 도장을 허공에 찍으면 아무 흔적도 남지 않는 것과 같다. 제2구에서는 이름을 바꾸어 삼현이라 한다. 현玄은 그윽하고 현묘하다고 할 때의 그 현이니 현은 분별할 수 없다. 마치 도장을 물에 찍으면 문채가 있는 듯하지만 결국은 남지 않는 것과 같다. 제3구에서는 또 이름을 바꾸어 삼구라고 한다. 구는 언구라고 할 때의 그 구로서 구는 만물의 차별된 양태를 나타낸다. 마치 도장을 진흙에 찍으면 온통 흔적이 뚜렷이 드러나는 것과 같다.’370)고 한다. 그렇다면 구·현·요의 깊이에 차이가 있음이 대단히 분명하니, 어찌 삼현을 제3구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선문강요집』에서 ‘세존이 가섭에게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한 것을 제1구’라 운운한 대목371)은 대충 흉내만 내서는 간파하기가 진실로 어렵다. 이제 본문을 자세히 인용하고 아울러 주석을 달아 이해를 쉽게 하고자 한다. 『선문강요집』의 본문은 아래와 같다.
학인이 물었다. ‘불조가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경지를 온전한 기용機用으로 알아차리는 것이 삼구에서 벗어나지 않고 온전한 기용으로 알아차리는 것에 이미 차별이 있으니, 불조가 자유자재로 활용한 경지는 또한 하나가 아닙니다. 삼구에서 다시 고칙 공안을 들어 일거에 나머지 의심을 쓸어 없애 주십시오.’372)


010_0674_b_01L淸源之所得殺人刀也故云第二句薦
010_0674_b_02L爲人天師其薦得底此宗門向上
010_0674_b_03L豈非格外耶說話云如來禪以悟
010_0674_b_04L修斯亡知有本分事與體一般意謂
010_0674_b_05L此本分與向上之體一般則如來禪
010_0674_b_06L非格外耶故不可以第二句如來禪
010_0674_b_07L爲義理禪第三句也若二三兩句同爲
010_0674_b_08L義理禪則臨濟如何別說兩句耶但三
010_0674_b_09L玄悟後 [18] 施設戈甲完成格則則有若
010_0674_b_10L第三句三句面目故云又當第三句
010_0674_b_11L然但相似而已非眞屬於第三句也
010_0674_b_12L在第一句直明三要要省要之要
010_0674_b_13L要不在多如印印空了無朕迹在第
010_0674_b_14L二句轉名三玄玄幽玄之玄玄不可
010_0674_b_15L如印印水似有文彩在第三句
010_0674_b_16L轉名三句句言句之句句詮差別
010_0674_b_17L印印泥痕縫全彰然則句玄要之深淺
010_0674_b_18L甚自分明豈可以三玄屬於第三句耶
010_0674_b_19L綱要以世尊迦葉三處傳心爲第一句
010_0674_b_20L云云者泛學實難看得今具引本文
010_0674_b_21L並爲註脚俾爲易解文云僧問佛祖受
010_0674_b_22L全機薦得不出三句全機薦得
010_0674_b_23L有差別佛祖受用亦不是一於三句中
010_0674_b_24L復擧古之公案頓祛餘疑

010_0674_c_01L
물음의 뜻은, 부처와 달마(禪祖)가 자유자재로 써먹은 경지가 삼구에서 각각이 동일하지 않다면 고칙 공안으로 삼구의 차별을 분명히 제시해 달라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답에서, 부처의 공안을 제기하여 부처가 자유자재로 써먹은 경지를 밝히고, 달마의 공안을 제기하여 달마가 자유자재로 써먹은 경지를 밝힌 것이다. 그렇다면 삼구에는 본래 두 겹의 유사한 공안이 있는 것이 된다.

일우가 답하였다.373) ‘임제의 적손 풍혈 연소風穴延沼가 법좌에 올라앉아 「조사의 심인은 마치 무쇠 소의 기틀과 같다.」고 한 것은 제1구이다. 「도장을 찍고 떼면 도장 자국이 남고, 도장을 찍은 채로 있으면 도장 자국이 뭉개진다. 가령 찍고서는 떼어서도 안 되고 찍은 채로 있어도 안 된다면 찍는 것이 옳은가, 찍지 않는 것이 옳은가?」 이것은 삼요이다. 마지막에 노피盧陂 장로를 불자로 두 차례 때린 것은 삼요를 활용한 것이다. 백장과 황벽이 마조의 일할에서 대기와 대용을 터득한 것은 기機에 해당한다.’

이것은 달마의 제1구 공안이다. 삼요가 곧 활의 수단이니 제1구는 오로지 활만 쓴 것이다.

세존이 가섭에게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한 것을 첫머리의 표지로 한 까닭은 이 공안으로 교외별전의 종지를 세우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부처의 제1구 공안으로서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한 것은 살과 활의 수단이다. 그러므로 제1구 가운데 살과 활을 모두 갖춘 것이다.

여래가 적멸도량에서 처음 정각을 이루고 나서 천 길 길이 비로자나불의 몸을 드러내고 41위 법신 대사와 천룡팔부가 일시에 에워싼 것은 제2 구이므로 인천의 스승이 될 만하다고 하였다.

이것은 부처의 제2구 공안이다. 앞에서 이미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한 것을 제1구라 하였다. 여래가 깨달은 경계인 살 또한 제1구에 속한다. 그런데 지금 제2구라 한 것은

010_0674_c_01L
問意佛及禪祖之受用於三句中
010_0674_c_02L不是一則以古之公案明示三句差
010_0674_c_03L別云云故答中擧佛之公案明佛之
010_0674_c_04L受用擧禪祖公案明禪祖受用
010_0674_c_05L則三句中自有兩重公案也

010_0674_c_06L
一愚答曰臨濟嫡孫風穴上堂云祖師
010_0674_c_07L心印狀似鐵牛之機即第一句去則
010_0674_c_08L印住住則印破只如不去不住印則
010_0674_c_09L不印則是是三要末後打盧陂兩
010_0674_c_10L拂子是用得三要百丈黃蘗於馬祖
010_0674_c_11L一喝得大機大用是當機

010_0674_c_12L
此是禪祖第一句公案而三要即活
010_0674_c_13L然則第一句是單活也

010_0674_c_14L
世尊迦葉三處傳心首標此个公案
010_0674_c_15L立敎外別傳之宗旨也

010_0674_c_16L
此是佛之第一句公案而三處傳
010_0674_c_17L即殺活也然則第一句中具殺活
010_0674_c_18L

010_0674_c_19L
如來在寂滅場中初成正覺現千丈盧
010_0674_c_20L舍那身四十一位法身大士天龍八部
010_0674_c_21L一時圍繞是第二句故云人天爲師

010_0674_c_22L
此是佛之第二句公案也上旣以三
010_0674_c_23L處傳心爲第一句則如來所悟底
010_0674_c_24L殺亦屬於第一句故今第二句但約

010_0675_a_01L다만 깨달은 후에 방편이라는 무기를 시설한 것을 기준으로 하는 까닭에 여래선이라는 언급 없이 단지 인천의 스승이 될 만하다고 한 것이니 화엄시華嚴時를 설한 것이다.

수산주의 송에 「초심으로서 도를 깨닫기 이전에는, 시끌벅적한 경계에 있어서는 안 된다. 종소리 듣고 곧장 알아차렸더라도, 북소리 듣고 바로 전도되리라.」374)라고 하였다. 이것은 곧 제2구에서 노파심으로 상대를 절박하게 가르친 경우이다. 향엄에 이르러서는 「분별에 들어맞는 법이 하나도 없는 상태였다.」375)라고 말한다. 또 (향엄은) 「지난해의 가난은 가난이 아니요, 올해의 가난이 진실로 가난이라네.」376)라고 하였고, 앙산은 「여래선이라면 사형이 이해했다고 인정하겠지만, 조사선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377)라고 하였다. 이것은 능지能知와 소지所知 두 가지를 모두 잊고 여래선을 성취한 것이니 인천의 스승으로서 모범이 된다.
이것은 바로 달마의 제2구 공안이다. 앞에서 이미 삼요의 활을 제1구 조사선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제2구를 여래선이라 한 것이니 여래선은 살의 수단에 대응한다.
여래가 보리수 아래에서 하열한 응신을 나타내고 낡아 해어진 더러운 옷을 입고 49년 동안 근기에 따라 법을 설한 것이 제3구이다.
이것은 부처의 제3구 공안이다. 앞서 이미 화엄시를 설한 것을 제 2 구로 삼았으므로 지금은 물러나 삼승을 설한 것을 제3구로 삼은 것이다. 그러므로 제2구와 제3구가 모두 ‘교내敎內’가 된다.
학인이 향엄에게 「도란 어떤 것입니까?」라고 묻자 향엄이 말하였다. 「고목 구멍에서 소리가 윙 난다.」378) 석상이 말하였다. 「여전히 정감을 띠고 있는 상태와 같다.」 학인이 「도의 경지에 있는 사람은 어떻습니까?」라고 묻자 향엄이 말하였다. 「해골 속의 눈동자와 같다.」379) 석상이 말하였다. 「여전히 식識을 지니고 있는 상태와 같다.」 이것은 곧 제3구에서 이러하거니 저러하거니 말을 아무렇게나 바꾸어 하는 시절이다.380)
이것이 달마의 제3구 공안이다. 이미 ‘이러하거니 저러하거니 말을 아무렇게나 바꾸어 하는 시절’이라고 하였으니 의리선이다.

010_0675_a_01L悟後施設戈甲是故無如來禪之言
010_0675_a_02L但云人天爲師即說華嚴時也

010_0675_a_03L
修山主頌云初心未入道不得閙浩浩
010_0675_a_04L鍾聲裏薦取鼓聲即顚倒此乃向第二
010_0675_a_05L句中老婆爲人也乃至香嚴云無一
010_0675_a_06L法可當情又云去年貧未是貧今年貧
010_0675_a_07L直是貧仰山云如來禪即許師兄會
010_0675_a_08L祖師禪未夢見在此是能所二知俱忘
010_0675_a_09L成就如來禪爲人天師之榜樣也

010_0675_a_10L
此是禪祖第二句公案而上旣以三
010_0675_a_11L要活爲第一句祖師禪故今以第二
010_0675_a_12L爲如來禪如來禪是殺也

010_0675_a_13L
如來於木菩提樹下現劣應身着蔽垢
010_0675_a_14L四十九年隨機說法是第三句

010_0675_a_15L
此是佛之第三句公案而上旣以說
010_0675_a_16L華嚴爲第二句故今以退說三乘
010_0675_a_17L爲第三句也故第二第三句皆爲敎
010_0675_a_18L內也

010_0675_a_19L
僧問香嚴如何是道嚴云枯木裡龍吟
010_0675_a_20L石霜云猶帶喜在僧云如何是道中人
010_0675_a_21L嚴云髑髏裏眼睛霜云猶帶識在此乃
010_0675_a_22L向第三句中東說西說底時節

010_0675_a_23L
此是禪祖第三句公案而旣云東說
010_0675_a_24L西說底時節則爲義理禪也

010_0675_b_01L
앞에서 부처와 조사가 각각 자유자재로 활용한 경지를 인용한 두 겹 공안과 이를 풀어서 짝지은 주석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뜻을 알 수 있다. 부처의 공안은 처음부터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한 것을 제1구로 삼는다. 그런 까닭에 화엄시를 설한 것은 제2구이고 물러나 삼승을 설한 것은 제3구라 한 것은, 교敎의 기틀을 끌어들여 선으로 들어가기 위한 의도이니 이것은 선문(禪宗 法門)의 근본적인 뜻은 아니다. 달마의 공안은 조사선의 활을 제1구로, 여래선의 살을 제2구로, 의리선을 제3구로 삼는다. 이것이 선문의 근본적인 뜻이다. 두 겹의 공안은 대단히 분명하니, 어찌 뒤섞어 활용할 수 있겠는가. 만약 두 겹의 공안으로 나누어 설하지 않는다면 일우는 스스로 한 말이 모순되는 과오를 면치 못하게 된다. 어째서인가? 먼저, 기용機用을 제1구로 하면 기용은 오롯이 활의 수단을 쓰는 것인데, 이어서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한 것을 제1구로 하면 제1구는 살과 활을 모두 갖춘 것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 그대로 허용해서는 안 되니, 번뇌의 숲에서 멋대로 뒹굴게 되리라.
 『소쇄선정록(선문증정록)』: 『소쇄선정록』 제3절에서는 살인도와 활인검은 선에 붙인 이름의 극치로서 이름이 극치에 이르면 실상도 극치에 다다른다고 하였다. 이에 살과 활을 나누지 않고 오로지 제1구 가운데 두었다. 또 읍좌 공안(揖坐話 : 『선문염송』 618칙)을 인용하면서, ‘제2구에 이르면 수많은 소식이 있겠지만 제1구를 기준으로 하면 다만 사람을 죽이는 칼과 사람을 살리는 검만 있을 뿐이다.’381)라고 하였다.382) 고불 공안(古佛話 : 『선문염송』 1008칙)에서는 ‘제2기第二機에서 들어 보여야 한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이것은 단지 저 살인도·활인검을 말한 것일 뿐이며, 부득이하여 (중근기를 위해) 제2기에서 시설하면 격格이 정해진 법도를 완성하니, 체體·용用·중中의 삼구와 같다.’라고 하였다.383) (『선문염송』 147칙과 119칙을 인용하고서)384) 또 말하기를 ‘기용機用이 모두 활이니 대기大機를 활로 삼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고, 더하여 ‘기용은 단지 활이고 살과 활의 본체가 다르지 않기 때문에 살이 있으면 살이 활에 따라붙는다.’라고 하였다.385)

 설두 유형의 변설: 살인도와 활인검을 각각 진금포와 잡화포라고도 한다.

010_0675_b_01L
詳看上所引佛祖受用兩重公案及註
010_0675_b_02L其意可知也意謂佛之公案旣以
010_0675_b_03L三處傳心爲第一句故以說華嚴
010_0675_b_04L第二句以退說三乘爲第三句者
010_0675_b_05L引敎機而入禪也此非禪門正義也
010_0675_b_06L祖公案以祖師禪活爲第一句以如
010_0675_b_07L來禪殺爲第二句以義理禪爲第三
010_0675_b_08L句者此是禪門正義也兩重公案
010_0675_b_09L段分明安得雜用若不分說兩重公案
010_0675_b_10L一愚未免自語相違之失也何也初以
010_0675_b_11L機用爲第一句機用單活也次以三
010_0675_b_12L處傳心爲第一句第一句具殺活也
010_0675_b_13L不得放過草裏橫

010_0675_b_14L
錄第三節云殺人刀活人劒禪名之極
010_0675_b_15L名極則實極乃云不分殺活獨在於第
010_0675_b_16L一句中又引揖坐話云至第二句
010_0675_b_17L許多消息若約第一句則但殺人刀活
010_0675_b_18L人劒而已也古佛話云向第一句 [19] 提持
010_0675_b_19L則只道得箇殺人刀活人劒也不得已
010_0675_b_20L向第二機施設則完成格則如體用中
010_0675_b_21L三句又云機用皆活也以大機爲活者
010_0675_b_22L非也又云機用但活而殺活體無二
010_0675_b_23L有殺而殺付焉云云

010_0675_b_24L
辨曰殺人刀活人劒亦名眞金鋪雜貨

010_0675_c_01L도刀와 검劒 두 글자는 살과 활의 우열을 말한 것이고, 진眞과 잡雜 두 글자는 살과 활을 오로지 하나만 쓰거나 겸비하는 차이를 말한 것이다. 활인검은 조사가 전한 깨달음의 경지이므로 조사선이라 하며 제1구에 있다. 청풍 법사는 ‘이 기틀로 깨달음에 들어가면 곧바로 위음왕불이전의 경계에서 비로자나불의 경지로 향상하고 곧장 조사의 심인을 꿰차기 때문에 불조의 스승이 될 만하다.’386)라고 하였다. 이 제1구 활인검에 기용이 있다. 기용은 살활이고 이 살활은 곧 제1구 활인검 가운데 갖추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백장百丈 재참 공안(再參話 : 『선문염송』 181칙)에서 ‘백장은 마조의 대기를 터득했고, 황벽은 마조의 대용을 터득했다.’고 하고, ‘이렇게 결정적인 전기가 되는 순간을 맞아서는 옛사람도 그저 「사람을 죽이는 칼(殺人刀)이요 사람을 살리는 검(活人劒)이다.」387)라고 말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388) 대용을 활인검으로 삼고 대기를 살인도로 삼았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 백장 재참 공안을 인용하면서는 대기를 살로 삼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지 않은 것인가. 진실로 읍좌와 고불, 두 칙 공안은 제1구에서 살과 활을 밝히는 것이 옳다. 이 기용은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한 살인도와 활인검이 아니기 때문에 제1구 활인검을 또한 잡화포라고도 하는 것이다. 이 활인검 잡화포 가운데 어찌 살인도 진금포가 없겠는가? 그러므로 제2처에서 살인도로 마음을 전한 것은 여래가 깨달은 경지이므로 여래선이라 함을 알아야 한다. 제2구에서 이 살은 오롯이 죽이기만 하는 살이므로 진금포라고 한다. 그렇다면 제1구가 활인검이 되고 제2구는 살인도가 됨이 분명하다. 어째서 제1구만 유독 살과 활을 갖추었다고 말하는가? 설령 대기가 살이라고 해도 이 활 가운데 갖추고 있는 경지이므로 기용이 모두 활이다. 그런데 저들은 대기를 살로 삼는 것은 잘못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제1구에는 전혀 살의 뜻이 없는데 어떻게 제1구 가운데 살을 갖추었다고 말하는가? 억지로 살을 갖추었다고 하고자 했기 때문에

010_0675_c_01L刀劒二字言其殺活之優劣眞雜
010_0675_c_02L二字言其殺活之單兼也然活人劒
010_0675_c_03L是祖師傳底故名祖師禪而在第一句
010_0675_c_04L風法師云此機所入直在威音已
010_0675_c_05L毘盧向上直佩祖師心印故與祖佛
010_0675_c_06L爲師此第一句活人劒中有機用
010_0675_c_07L用是殺活此殺活即第一句活人劒中
010_0675_c_08L所具底也故再叅話云百丈得大機
010_0675_c_09L黃蘗得大用到這時節古人只道得箇
010_0675_c_10L殺人刀活人劒以大用爲活人劒以大
010_0675_c_11L機爲殺人刀明矣何不引此再叅話而
010_0675_c_12L遽云以大機爲殺者非也耶故揖坐古
010_0675_c_13L佛二話第一句中所明殺活亦是此機
010_0675_c_14L非三處傳心之殺人刀活人劒也
010_0675_c_15L此第一句活人劒亦名爲雜貨鋪此活
010_0675_c_16L人劒雜貨鋪中豈無殺人刀眞金耶
010_0675_c_17L知第二處殺人刀傳心是如來悟底
010_0675_c_18L名如來禪而在第二句中此殺是單殺
010_0675_c_19L名爲眞金鋪也然則第一句爲活人
010_0675_c_20L第二句爲殺人刀明矣何云第一
010_0675_c_21L獨具殺活耶雖大機爲殺是活中
010_0675_c_22L所具底故機用皆是活也而彼云以大
010_0675_c_23L機爲殺者非也然則第一句全無殺意
010_0675_c_24L何云第一句中具殺耶欲强爲具殺

010_0676_a_01L살활의 본체가 다르지 않다고 한 것이다. 본래 활이 있어야 살이 활에 따라붙는 것이다. 감히 묻건대 살이 어느 편에 따라붙는다는 말인가? 살의 수단을 쓴다는 것은 살과 활로 동시에 마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제시하였지만 몸을 의탁할 곳이 없는데 저 활이라는 집에 의탁해 품팔이한다는 것인가? 다만 꼿꼿한 등뼈로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389)를 부릴 줄만 알다가 어느새 이마를 땅에 붙이고 굴복하는 신세가 되어 버린 지경이다.
 『소쇄선정록(선문증정록)』: 『소쇄선정록』 제4절에서 삼구三句와 일구一句는 선문禪門에 본래 갖추고 있는 어구(文彩)로서 근본에 통달하면 지말에도 통달한다고 하였다. 일우가 ‘셋이라는 것은 체와 용 등 세 가지 면목이 그것이다. 제1구에서 활용하면 하나하나에서 모든 대립의 짝을 끊었기 때문에 현을 바꾸어 요라 한다. 제2구에서 시설하면 격格이 정해진 법도를 완성하므로 요를 바꾸어 현이라고 한다.’여기까지 인용390)라고 한 말 등을 인용하고 말하였다. ‘체·용·중이 삼구의 본래 이름이며, 삼현과 삼요는 그 깊이에 따라 이름을 달리한 것이다.’또 말하기를 ‘일구란 하나하나에서 모든 대립의 짝을 끊었으니 하나를 들면 전체가 거두어지므로 셋이 곧 하나이고, 하나는 셋을 벗어나 있지 않다.’라고 하였다.391) 「산운편」에서의 ‘배우는 자들이 저 삼구라는 틀에 구애되어 철저하게 꿰뚫지 못하고서 도리어 운문이 자신을 속였다고 여기니, 이를 관문이라 하는 것이 또한 당연하지 않겠는가. 영리한 자라면 제기한 말을 듣자마자 곧바로 속속들이 꿰뚫어 보고 몸을 일으켜 곧바로 떠나갈 것이니, 운문인들 무슨 「한 발 화살로 세 겹의 관문을 뚫는다.」는 따위의 말을 할 필요가 있었겠는가.’여기까지 인용392)라는 말을 인용하고 ‘이로써 보면 하나가 세 가지를 벗어나 있지 않다고 한 말을 알 수 있다.’393)고 하였다.

 설두 유형의 변설: 청풍 법사는 ‘무릇 조사의 심인心印을 제불의 법인法印이라고도 하니, 삼요三要를 무늬로 삼기 때문에 삼요인三要印이라 한다.’394)라고 하였다. 이 도장을 제1구에서 활용하는 것은 마치 도장을 허공에 찍으면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는 것과 같으므로 삼요라고 한다. 제2구에서 활용하는 것은 마치 도장을 물에 찍으면 물결을 이루는 듯하므로 이름을 바꾸어 삼현이라 한다. 제3구에서 활용하는 것은 마치 도장을 진흙에 찍으면 흔적이 전부 드러나는 것과 같으므로

010_0676_a_01L云殺活體無二故有活而殺付焉敢問
010_0676_a_02L殺付於何邊耶提示殺來也殺活同是
010_0676_a_03L傳心而無寄身之所附傭於他活家耶
010_0676_a_04L但知鐵脊撑天不覺▼(囱+頁)門着地

010_0676_a_05L
錄第四節云三句一句是禪門之本有
010_0676_a_06L文彩本達則末達引一愚云所謂三者
010_0676_a_07L體用等三般面目是也向第一句用得
010_0676_a_08L則一一絕諸待對故轉玄名要向第二
010_0676_a_09L句施設則完成格則故轉要名玄等說
010_0676_a_10L引字
至此
體用中即三句之本名三玄三
010_0676_a_11L即深淺之異名又云一句者一一
010_0676_a_12L絕諸待對擧一全收故即三是一
010_0676_a_13L不在三外引山雲篇云學者泥他三句
010_0676_a_14L䂓模透不得徹則反以雲門謾人
010_0676_a_15L謂之關不亦宜乎靈利漢纔聞擧着
010_0676_a_16L下透徹剔起便行雲門何消道个一鏃
010_0676_a_17L破三關之說云引字
至此
觀此可知一不在
010_0676_a_18L三外云云

010_0676_a_19L
辨曰風法師云夫祖師心印亦名諸佛
010_0676_a_20L法印以三要爲文故稱三要印以此印
010_0676_a_21L向第一句用得則如印印空了無朕
010_0676_a_22L故直名三要向第二句用得則如
010_0676_a_23L印印水完有 [20] 文彩故轉名三玄向第
010_0676_a_24L三句用得則如印印泥痕縫全彰

010_0676_b_01L이름을 바꾸어 삼구라고 한다. 이것이 임제의 본래 뜻이며, 원오나 대혜도 모두 이와 같이 말하였다. 그런 까닭에 이 세 가지 도장은 그 작용이라는 측면에서 전혀 흔적을 남기지 않거나, 물결을 이루거나, 흔적을 온통 드러내거나 하는 등의 본래 순서에 따라 그 이름을 붙인 것이다. 곧바로 삼요라 이름 붙이기도 하고, 이름을 바꾸어 삼현이라고도 하고, 또 이름을 바꾸어 삼구라고도 하니 다만 본래 순서일 뿐이다. 하지만 실제 조사의 심인 가운데 본래 갖추고 있는 것은 삼요이다. 그런즉 삼요는 본래 갖추고 있는 문채이다. 그런데 어째서 체·용·중 삼구를 본래 갖추고 있는 문채라 하는 것인가? 이런 견해를 가리켜 강퍅하고 불손하다고 하는 것이다.
일우가 질문한 뜻은 이러하다. ‘학인이 묻자 임제는 「일구에 삼현을 갖추고, 일현에 삼요를 갖추어야 한다.」395)라고 하였으니, 구절 하나마다 반드시 현과 요를 갖추어야만 한다. 그런데 이제 청풍 장로가 삼요를 제1구에 배속하고 삼현을 제2구에 배속한다면 임제의 뜻과 어그러지지 않겠는가?’청풍 법사가 답하였다. ‘셋이란 체·용·중 세 가지 면목 바로 그것이다. 제1구에서 활용한다면 하나하나에서 모든 대립의 짝을 끊어 버리기 때문에 현을 바꾸어 요라 하고, 제2구에서 시설하면 격格이 정해진 법도를 완성하므로 요를 바꾸어 현이라 한다. 하지만 세 가지는 본래 조금도 자리를 옮겨 바꾸지 않는다.’396) 학인이 이미 ‘구 가운데 현을 갖추고 있고 현 가운데 요를 갖추고 있다.’는 말에 한정하여 물었기 때문에, 답변에서도 체와 용을 기준으로 말하였으니 체와 용은 제2구 삼현이지만, 구가 아니면 체와 용을 말할 수 없기 때문에 구 가운데 현을 갖추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또한 이 체·용·중을 제1구에서 활용하면 모든 대립의 짝을 끊어 버리기 때문에 현을 바꾸어 요라 하는 것이니 이것이 현 가운데 요를 갖추고 있다는 말뜻이다. 그러므로 세 가지가 본래 조금도 자리를 옮겨 바꾸지 않으니 현과 요를 제1구와 제2구 두 구에 나누어 배속해도 그 뜻이 서로 어그러지지 않는다. 그런즉 문장이 대단히 이해하기 쉽건만, 어째서 체·용·중을 삼구의 본래 이름이라고 하는가? 또한 이 삼구가 모든 대립의 짝을 끊어 버리므로 셋이 곧 하나인 것이다.

010_0676_b_01L轉名三句此是臨濟之本意亦是圓悟
010_0676_b_02L大慧之所共言者也故此三印言其功
010_0676_b_03L則了無朕迹宛成文彩痕縫全彰
010_0676_b_04L自有次序立其名也直名三要轉名
010_0676_b_05L三玄又轉名三句亦自有序而其實
010_0676_b_06L祖師心印中本具之三要也然則三要
010_0676_b_07L是本有之文彩何以體用中三句爲本
010_0676_b_08L有文彩耶此所謂强愎不遜者也盖一
010_0676_b_09L愚意僧問臨濟旣曰一句中具三玄
010_0676_b_10L一玄中具三要則每句必具玄要今長
010_0676_b_11L以三要屬第一句以三玄屬第二句
010_0676_b_12L得無與臨濟乖戾乎所謂三者如體
010_0676_b_13L用中三般面目是也向第一句用得
010_0676_b_14L一一絕諸待對故轉玄名要向第二句
010_0676_b_15L施設則完成格則故轉要名玄而三
010_0676_b_16L本不移易謂僧旣約句中具玄
010_0676_b_17L中具要而問故答中約體用而言體用
010_0676_b_18L是第二句三玄而非句無以言體用
010_0676_b_19L云句中具玄也又此體用中向第一句
010_0676_b_20L用得則絕諸待對故轉玄名要此玄
010_0676_b_21L中具要也然三者本不移易則以玄
010_0676_b_22L分屬第一第二兩句其義不相乖戾
010_0676_b_23L然則文甚易曉何以體用中爲三句
010_0676_b_24L之本名耳又此三句絕諸待業 [21] 故即

010_0676_c_01L
『선문강요집』의 「산운편」을 인용하여 말한다. 「산운편」에서는 ‘운문이 법어를 내리면서 「하늘 중심에서 하늘과 땅이 어김없이 들어맞고(函蓋乾坤), 한눈에 핵심을 헤아려 알며(目機銖兩), 어떤 인연과도 교섭하지 않는(不涉萬緣) 경지를 한 구절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라고 물었는데, 대중이 답이 없자 운문이 스스로 대신해 「한 발 화살로 세 겹의 관문을 뚫는다.」고 하였다.’397)라는 법어에 대해 ‘하늘 가운데 한 구절로 말미암아 이하 세 구절을 분별한다면 삼구가 모두 일구이며, 하나하나에서 모든 대립의 짝을 끊어 버린다. 영리한 자라면 곧장 투철하게 꿰뚫으리니, 운문이 무슨 「한 발 화살로 세 겹의 관문을 뚫는다.」고 말할 필요가 있었을까.’라고 하였다.398) 그런즉 「산운편」에서는 ‘모든 대립의 짝을 끊어 버리기 때문에 삼구가 곧 일구요, 이 가운데서 모든 대립의 짝을 끊어 버리기 때문에 현을 바꾸어 요라 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대립의 짝을 끊어 버린다는 말 자체는 비록 같지만 그 뜻은 다름을 알아야 한다. 어째서 이 가운데서 모든 대립의 짝을 끊어 버린 것을 일구라고 하는가? 삼구와 일구에 본래 문채가 갖추어져 있다고 말하는가? 그저 다른 사람의 학식399)을 파 뒤질 줄만 알았지 가풍을 마음껏 활용400)하는 방법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소쇄선정록』에서 4절로 나누어 전개한 내용을 보면 모두 잘못 인용한 글에 대한 천착이 그치지 않아 말할 수 없이 어수선하다. 혹 알기 쉬워 생략하고서 말하지 않은 것인가. 삿된 이해와 난잡한 생각들에 대해서는 사안을 반드시 결정지어야 한다. 세상에서 흔히 하는 말로 맹인이 지팡이로 땅을 두드리듯 하였으니 안목을 갖춘 이에게 비웃음을 사고 말리라. 닭 울음소리를 흉내 내어 본들 지음知音을 속이기는 어려운 법이다. 이러한 견해로 경론을 강론한다면 조계 남사嵐絲의 얼마나 많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랴! 아이고, 아이고!
무릇 학자란, 지혜의 눈이 진실하여 이치의 하늘을 꿰뚫어 보며 본래 자기가 서 있는 자리를 굳게 지켜 실제實際의 경계를 확고하게 밟고 있은 다음에라야 여러 불보살이 남긴 경론과 여러 선지식이 지은 구절이나 게송偈頌을 두루 보아도 문구에 휘둘리지 않고 문구를 마음껏 부릴 수 있어 마침내 치우치지도 다르지도 않은 중도로 돌아갈 수 있는 법이다.
『사변만어』와 『소쇄선정록』 모두 눈을 붙이고 볼 만한 점도 없고 그것이 위치한 방향도 결정할 만한 점이 없으며 근거도 없이 그저 남의 말을 따라 내달리기만 하였다.

010_0676_c_01L三是一引山雲篇而言盖山雲篇
010_0676_c_02L謂雲門垂語云天中凾盖乾坤目機銖
010_0676_c_03L不涉春緣一句作麽生道衆無語
010_0676_c_04L自代云一鏃破三關謂由天中一句
010_0676_c_05L分別下三句則三句摠是一句一一絕
010_0676_c_06L諸待對也若靈利漢直下透徹雲門何
010_0676_c_07L消道介一鏃破三關然則山雲篇絕諸
010_0676_c_08L待對故三句即一句此中絕諸待對
010_0676_c_09L轉玄名要也故知絕諸待對之言雖
010_0676_c_10L其義異也何以此中絕諸待對爲
010_0676_c_11L之一句三句一句是本有文彩耶
010_0676_c_12L會搜人底蘊不知賣弄家風

010_0676_c_13L
第觀錄說四節皆誤爲引文穿鑿不已
010_0676_c_14L眩亂莫甚然或易知其非畧而不言
010_0676_c_15L若邪解亂轍事須決之此所謂盲杖擿
010_0676_c_16L貽笑具眼假雞聲韻難謾知音者
010_0676_c_17L以此見解講得經論曺溪嵐絲
010_0676_c_18L却幾箇眼目蒼天蒼天

010_0676_c_19L
大凡學者慧眼眞正徹見義天脚跟
010_0676_c_20L牢定踏着實地然後遍看諸佛菩薩
010_0676_c_21L留經論諸善知識所述句偈不爲文句
010_0676_c_22L所使使得文句竟歸於不偏不二之中
010_0676_c_23L而今四辨漫語掃灑先庭錄皆眼
010_0676_c_24L沒着落莫定方隅脚無立處隨言走

010_0677_a_01L진실의 땅과 이치의 하늘401)에서 어떻게 해야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인가. 『사변만어』는 취지는 비록 아무렇게나 꾸며 댔다고는 하나 문장은 휘황찬란하여 사람들이 가까이 두고 보면서 즐기게라도 만들지만, 『소쇄선정록』은 취지도 온통 지리멸렬하고402) 문장 또한 온통 칡덩굴처럼 얽혀 있어 그 글의 내용을 받아들일 수도 없고 그 득실을 따져 밝힐 만한 가치도 없다. 또한 의리義理로 말하자면, 이 사람은 침명 한성枕溟翰醒 화상(1801~1876)에게서 법을 배웠고 그대로 따라 선을 전해 받았다. 침명 화상은 백파 노화상에게서 법을 배웠고 또 선을 받았다. 그렇다면 백파 노화상은 그의 선사先師이다. 그런즉 선사에게 설령 작은 흠결이 있다면 그것을 깨뜨려 부수고 모름지기 예악禮樂은 남김이 마땅한 일이지, 스스로 자기의 덕을 존숭하고 선현을 멸시해서는 안 될 일이다. 이 『소쇄선정록』의 주장은 말이 도에 맞지 않는 데다가 조금도 거리낌이 없으니, 어찌 참을 수 있으랴. 유교에서는 군사부일체라 하는데 일체의 뜻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두 사람은 사문난적이요 불가의 역손逆孫이라 할 만하다. 옛 대의를 바로잡아 세우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나의 동료(同儕)들이 이 경책을 후손들의 영원한 법규로 삼기를 바란다.

以此所修功  이것으로써 공을 닦아
自他同一日  자타가 매일같이 하여
速成無上道  무상도를 속히 이룰지니
般若波羅密  반야바라밀

이를 경찬慶讚403) 회향한다. 회향에는 세 가지404)가 있는데, 하나는 자신의 선근善根을 다른 사람에게 회향하는 것이니 중생회향이고, 둘째는 원인을 과보에 회향하는 것이니 보리회향이며, 셋째는 지혜를 이치에 회향하는 것이니 실제회향이다. 보리는 ‘각覺’이라 한역하고 또는 ‘도道’라고도 한역한다. 도가 곧 보리이다. 반야般若에서 ‘반般’은 자계字界405)이다. (반般에) 나자那字를 붙인 경우에는 ‘지智’라고 한역하는데 이때 지는 후득지後得智이다. (반般에) 야若 자를 붙인 경우에는 ‘혜慧’라 하는데 이때 혜는 근본지根本智이다. 지금 말하는 반야는 근본지이며 진실로 이치를 깨달은 지혜이다. 이치가 열반이고 열반은 피안이다. 바라밀은 피안도彼岸到라 한역하는데

010_0677_a_01L其於實地義天如何行得見了然
010_0677_a_02L四辨漫語義雖杜撰文則炫燿令人
010_0677_a_03L愛玩而所謂掃灑先庭錄義皆十零百
010_0677_a_04L文亦七藤八葛不可取其文義
010_0677_a_05L足覈其得失且以義理言之此子學法
010_0677_a_06L於枕溟和尙仍爲受禪枕溟和尙
010_0677_a_07L法於白坡老和尙又爲受禪則白坡老
010_0677_a_08L和尙即渠之先師也然則先師設有小
010_0677_a_09L其所斥破須存禮樂不可自尊己
010_0677_a_10L下視先賢今此錄說發言不道
010_0677_a_11L所顧忌是可忍乎斯文云君師父一
010_0677_a_12L一體之義安在1)二子可謂斯文之
010_0677_a_13L亂賊佛家逆孫 [7] 扶昔大義古今同然
010_0677_a_14L願我同儕以此警策俾爲後昆之永規

010_0677_a_15L
以此所修功自他同一日速成無上
010_0677_a_16L般若波羅密

010_0677_a_17L
此慶讃回向回向有三回自向他
010_0677_a_18L是衆生回向回因向果是菩提回向
010_0677_a_19L回智向理是實際回向也菩提此云
010_0677_a_20L亦云道道是菩提也般若者般是
010_0677_a_21L字界若加那字此云智智是後得智
010_0677_a_22L若加若字此云慧慧是根本智今般
010_0677_a_23L若是根本智故證理也理是涅槃
010_0677_a_24L槃是彼岸也波羅蜜此云彼岸到順此

010_0677_b_01L이것의 방언方言을 따라 도피안到彼岸이라 한다.406)

010_0677_b_01L方語云到彼岸也
  1. 1)향상일규向上一竅는 향상일로向上一路와도 통하는 말로, 궁극의 이치를 꿰뚫어 볼 수 있는 경계를 말한다. 『碧巖錄』 36칙 「頌評唱」(T48, 174c19), “거기에 더하여 본분을 남김없이 그대로 들어 보이는 결정적인 때와 향상하는 하나의 통로가 있음을 알아야 비로소 본분의 자리에 편안히 앉을 수 있다.(更須知有全提時節向上一竅, 始解穩坐.)”;『禪門拈頌說話』
    c16), “운문에게 어떤 학인이 물었다. ‘최초구란 어떤 것입니까?’ ‘구구는 팔십일.’ ‘향상하는 유일한 길은 어떤 것입니까?’ ‘구구는 팔십일.’ ‘이以 자로는 이루지 못하고 팔八 자는 옳지 않다고 하니, 어떤 글자가 그렇습니까?’ ‘구구는 팔십일.’(雲門因僧問, ‘如何是最初一句?’ 師云, ‘九九八十一.’ 又問, ‘如何是向上一路?’ 師云, ‘九九八十一.’ 又問, ‘以字不成, 八字不是, 未審是什麽字?’ 師云, ‘九九八十一.’)”;『雲門廣錄』 권중(T47, 559b2), “깨달았다는 의식 지각조차 잊게 되었을 때 그 깨달음이 곧 불성이다. 이를 할 일을 모두 마친 무사인無事人이라 부른다. 여기에 더하여 향상하는 하나의 통로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直得忘知於覺, 覺卽佛性矣. 喚作無事人. 更須知有向上一竅在.)”
  2. 2)말후구末後句 : 말후末後는 궁극究極의 뜻으로, 궁극적이고 결정적ㆍ결론적인 한마디.
  3. 3)고덕이 말하기를~라고 하였다 : 『禪門拈頌說話』 1칙(H5, 7a13), “암두는 ‘덕산이 말후구를 이해하지 못했다.’라고 하였고, 대혜는 ‘세존께서 말후구의 한 수를 터득했다.’라고 말하였으나, 세존과 덕산이 제시한 한순간의 방편을 진실이라 여긴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것에 잘못을 돌린 이유는 말후구를 원만하게 완성하려는 의도인 것이다. 궁극적인 도리(末後)를 원만하게 완성하므로 말후구라 하지만 원만함의 극치에 이르면 최초구와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말후구를 알고자 한다면 어떤 조짐도 일어나기 이전의 시기를 살펴라.’라고 한다.(巖頭謂德山不會末後句, 大慧謂世尊得末後句之一著, 非以世尊德山一期方便爲實. 然而歸咎, 只要圓成末後句也. 以末後圓成, 故曰末後句, 至於圓極, 則與最初句, 何以異哉! 故曰, ‘要識末後句, 看取未生時.’)”;『禪文手鏡』 「末後句最初句辨」(H10, 520a15), “故龜谷先師曰, 末後句至於圓極, 則與最初句, 何以異哉!” 백파 긍선, 신규탁 옮김, 『선문수경』, p.77 참조.
  4. 4)원문에는 ‘ 최초구 ’가 번역문인 ‘다음으로 삼구三句를 설하는 경우에는(次說三句)’ 구절 앞에 있는데, 번역상 이곳이 맞을 듯하다.
  5. 5)범일 국사梵日國師(810~889) : 사굴산문闍崛山門을 개창한 시조. 태화太和 연간(827~835)에 당나라에 건너가 선지식을 참방한 후에 염관 제안鹽官齊安에게서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는 가르침을 받고 깨침이 있었으며 이후 약산 유엄藥山惟儼을 찾아가
    년에 귀국하였고 현재 강원도 강릉인 명주溟州 굴산사崛山寺에 주석하며 40여 년 동안 불도를 드높였다. 진성여왕이 선禪과 교敎의 뜻을 묻자 ‘진귀조사설眞歸祖師說’을 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하에서 진귀조사설을 아무 비판도 없이 고스란히 수용하여 조사선의 근거로 삼고, 나아가 여래선과 대비하여 우월하다고 선전하는 방식은 조사의 선법과 정면으로 배치한다.
  6. 6)『禪門寶藏錄』 권상(X64, 810a15), “후에 성을 뛰어넘어 설산에 머물던 중에 샛별을 보고 도를 깨쳤으나, 깨친 그 법이 아직 궁극에 이른 경지는 아님을 알고 수십 개월을 유행하며 조사들을 찾아다니다가 진귀 대사로부터 현묘하고 지극한 뜻을 전해 받았다. 이것이 바로 교외별전이다.(後踰城往雪山中, 因星悟道, 旣知是法未臻極, 遊行數十月, 尋訪祖師, 眞歸大師, 始傳得玄極之旨. 是乃敎外別傳也.)”;『禪敎釋』(H7, 654c11).
  7. 7)『禪敎釋』(H7, 654c8). 청허 선사의 기술이 아니라 『梵日國師集』의 인용으로 되어 있다.
  8. 8)수십 개월에서의~일이라야 맞다 : 『朝鮮佛敎通史』 下編 「雪山眞歸是佛祖師」(B31, 612a19).
  9. 9)진귀 조사眞歸祖師 : 부처님에게 교외별전의 조사선을 전했다고 하는 전설의 조사. 우리나라에만 이 설이 전한다. 고려 진정국사眞靜國師 천책天頙(1206~1277?)의 『禪門寶藏錄』에 최초로 보이는데, 이 책에서는 『達磨密錄』에서 인용한 것으로 밝히고 있다. 『達磨密錄』은 달마를 가탁한 위서僞書로서 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존재 여부도 의심스럽다. 『정선 휴정』(p.336) 주석 15 참조.
  10. 10)『禪門寶藏錄』 권상(X64, 807c3), “달마 대사가 말하였다. 내게 인도의 여러 조사들이 전하신 말씀 몇 편이 있으니 이제 그대에게 말해 주리라. 송으로 읊었다. 진귀 조사가 설산에 있으면서 총림의 방장에서 석가를 기다렸네. 조사의 심인을 임오년에 전해 받아 수지하였으며, 동시에 조사의 종지를 마음으로 얻었네. 달마밀록 (達磨曰, 我卽五天竺諸祖傳說有篇, 而今爲汝說示. 頌曰, 眞歸祖師在雪山, 叢木房中待釋迦. 傳持祖印壬午歲, 心得同時祖宗旨. 達磨密錄 )”;『朝鮮佛敎通史』 上編(B31, 311a16) 참조. 『朝鮮佛敎通史』 下編 「雪山眞歸是佛祖師」(B31, 612a10), “조사선이란 무엇인가? 부처가 성도한 후에 설산에서 진귀 조사를 찾아뵙고 조사의 심인을 전해 받아 수지하고 조사의 종지를 얻었으므로 조사선이라 한다.(祖師禪者, 佛成道後, 訪見雪山眞歸祖師, 傳持祖印, 得祖宗旨, 名祖師禪.)”
  11. 11)『法華經』 권1 c4). 『白雲和尙語錄』 권상(H6, 642b7), “석가노자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최정각最正覺을 이룬 다음 각수覺樹에서 일어나 마갈제국摩竭提國으로 돌아가 삼칠일 동안 문을 닫고 아무 말씀도 하지 않은 채 이와 같은 일을 사유하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모든 법의 적멸상寂滅相은 언어로 드러낼 수 없으니, 나는 차라리 법을 설하지 않고 빨리 열반에 들리라.’(釋迦老子, 於菩提樹下, 成最正覺, 爰起覺樹, 歸于摩竭提國, 三七日掩關杜詞, 思惟如是事, 道‘諸法寂滅相, 不可以言宣, 我寧不說法, 疾入於涅槃.’)”
  12. 12)총림叢林 : 『翻譯名義集』 권3(T54, 1100b7), “바나( ⓢ vana)의 바른 음사어는 ‘반나飯那’이고, 한역어는 ‘림林’이다. 나무가 울창한 숲을 ‘림林’이라고 한다.(婆那, 正言飯那, 此云林. 叢木曰林.)”
  13. 13)『景德傳燈錄』 권1 「釋迦牟尼佛」(T51, 205b23), “그러므로 『보집경』에서 ‘보살이 2월 8일에 샛별이 뜨는 순간 성불하면서 천인사라 불렸다.’라고 하였다. 당시 30세였으며, 이때는 주나라 목왕 3년인 계미년이었다.(故普集經云, 菩薩於二月八日明星出時, 成佛號天人師. 時年三十矣, 卽穆王三年癸未歲也.)”
  14. 14)인천의 스승(天人師) : 천상계天上界와 인간계人間界에 속하는 유정有情의 스승. 정법正法으로 인간과 천중天衆을 이끄는 무상無上의 스승이라는 의미에서 부처님을 일컫는 말.
  15. 15)일우一愚 : 청풍 법사淸風法師 천책天頙이 어리석은 자라는 뜻에서 겸칭謙稱으로 스스로를 일컬은 호칭으로 보았다. 천책의 시호는 진정국사眞靜國師이다. 초의 의순, 김영욱 옮김, 『선문사변만어』, pp.16~17 주석 3 참조.
  16. 16)『禪門綱要集』 a6);『禪門四辨漫語』 「二禪來義」(H10, 827a7).
  17. 17)화엄을 설하신 때(華嚴時) :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뒤 21일 동안 『華嚴經』을 설하신 시기.
  18. 18)『禪門拈頌說話』 598칙(H5, 463c1), “향엄이 ‘지난해의 가난은 가난이 아니요, 올해의 가난이 진실로 가난이라네. 지난해에는 송곳 꽂을 땅이 없었지만, 올해는 송곳조차도 없구나.’라고 읊은 게송에 대해 앙산이 말하였다. ‘여래선은 사형이 이해했다고 인정하겠지만, 조사선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향엄이 다시 ‘나에게 하나의 기틀이 있으니, 눈을 깜박거려 그것을 보이노라. 만일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이가 있다면, 특별히 그를 사미라고 부르리라.’라는 게송 한 수를 들려주자 앙산이 말하였다. ‘기쁘다! 사형이 조사선을 이해했구나.’(香嚴頌云, ‘去年貧未是貧, 今年貧始是貧. 去年無卓錐之地, 今年錐也無.’ 因仰山云, ‘如來禪, 卽許師兄會, 祖師禪, 未夢見在.’ 師又呈偈云, ‘我有一機, 瞬目示伊. 若人不會, 別喚沙彌.’ 仰云, ‘且喜! 師兄, 會祖師禪也.’)”
  19. 19)『禪門綱要集』 a12), “후에 앙산이 향엄에게 물었다. ‘그대가 요즘 터득한 견지는 어떠한가?’ ‘제가 터득한 것에 따르면 분별에 들어맞는 법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대는 어찌 분별에 딱 들어맞는 법이 하나도 없음을 아는 사람(能知者)까지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다른 날에 향엄이 또 게를 올렸다. ‘지난해의 가난은 가난이 아니요, 올해의 가난이 진실로 가난이라네.’ 앙산이 말했다. ‘여래선은 사형이 이해했다고 인정하겠지만, 조사선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능지와 소지를 모두 잊고 여래선을 성취하여 인천의 스승이 된 본보기이다.(後仰山問, ‘子近日見處如何?’ 云, ‘據某甲見處, 無一法可當情.’ 仰云, ‘你豈無能知無一法可當情者?’ 異日又呈偈曰, ‘去年貧未是貧, 今年貧直是貧.’ 仰云, ‘如來禪, 卽許師兄會, 祖師禪, 未夢見在.’ 此是能所二知俱忘, 成就如來禪, 爲人天師底榜㨾也.)”
  20. 20)석가와 조사(釋祖) : 불조佛祖와 같은 말. 『禪門寶藏錄』 권중(H6, 470b2), “중국 선종의 제2조인 혜가 대사가 달마 대사에게 물었다. ‘이제 정법을 부촉받는 것에 대해서는 묻지 않겠습니다만, 석가와 조사는 누구에게 법을 전했으며 어디에서 그것을 얻었는지에 대해 자비로운 마음으로 자세히 말씀해 주셔서 후인들에게 본보기를 세워 주십시오.’(唐土第二祖惠可大師, 問達磨, ‘今付正法卽不問, 釋祖, 傳何人, 得何處, 慈悲曲說, 後來成規.’)”
  21. 21)인인본구개개원성人人本具箇箇圓成은 인인구족개개원성人人具足箇箇圓成이라고도 한다. 누구나 불성을 원만하게 갖추고 있음을 뜻한다. 『圓覺經夾頌集解講義』(X10, 242b20), “사람마다 본래 각각 원만히 성취하여 갖추고 있어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세 가지에 차별은 없다. 그런 까닭에 마치 병에 물이 가득 차 있어서 다시 더할 필요가 없는 것과 같다고 하는 것이다. 부처마다의 도가 나란하고, 법 하나하나가 다 평등하다.(人人具足箇箇圓成,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所以道, 如缾已滿, 更不再添. 佛佛道齊, 法法平等.)”
  22. 22)하나라에서 인월寅月로 한 해의 첫 달을 삼았던 역법歷法을 시행해야 한다는 뜻이다. 『論語』 「衞靈公」에 “行夏之時”라 하였다.
  23. 23)태초력太初曆 : 한나라 때의 역법. 무제武帝 때(B.C. 104년) 제정되어 이후 역법의 기준이 되었다. 하력夏曆의 10월인 건해월建亥月을 한 해의 첫 달로 하던 것을 고쳐서 하력의 정월正月인 건인월建寅月을 한 해의 첫 달로 하였다.
  24. 24)불조佛祖 : 원문은 ‘祖佛’이다. ‘조사인 부처’, ‘부처라는 조사’라는 말로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으며 부처라는 의미에서 ‘祖佛’과 ‘佛祖’ 두 단어를 다르게 보지 않고 번역하였다.
  25. 25)『禪門綱要集』 c5), “학인이 물었다. ‘제1구란 어떤 것입니까?’ 노숙이 위세를 떨치며 일할을 내지르자 학인이 놀라며 어리둥절하였다. 노숙이 큰 소리로 말하였다. ‘이것이 달마 대사가 처음 왔을 때의 면목이다. 이 구절에서 알아차리면 비로자나불 이상으로 향상하는 경지를 지름길로 밟아서 조사의 심인心印을 곧장 꿰차리라. 그런 까닭에 제1구에서 알아차리면 불조의 스승이 될 만하다고 한 것이다.’(僧問, ‘第一句如何?’ 宿振威一喝, 僧矍然. 宿厲聲曰, ‘此是達摩初來底面目. 若向此句下薦得, 徑踏毘盧向上, 直佩祖師心印. 故云第一句薦得, 與祖佛爲師.’)”
  26. 26)교의敎義 : 『禪家龜鑑』(H7, 636b8), “교의는 불변과 수연隨緣 또는 돈오와 점수 등에 선후가 있지만, 선법은 화두라는 한 생각 가운데 불변과 수연, 성性과 상相, 체體와 용用 등의 두 가지 대대가 원래부터 한꺼번에 있어서 두 가지가 같다는 생각도 떠나고 같지 않다는 생각도 떠나며, 같다는 생각이 옳기도 하고 옳지 않기도 하다. 그러므로 종사들은 법에 근거하되 말에서는 벗어나 곧바로 한 생각을 가리켜 보이고 저 자신의 본래 성품을 깨달아 성불하게 할 뿐이다. ‘교의에 대한 집착을 놓아 버린다.’라고 한 말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敎義者, 不變隨緣, 頓悟漸修, 有先有後;禪法者, 一念中, 不變隨緣, 性相體用, 元是一時, 離卽離非, 是卽非卽. 故宗師, 據法離言, 直指一念, 見性成佛耳. 放下敎義者以此.)” 『정선 휴정』(p.98) 참조.
  27. 27)『禪家龜鑑』(H7, 635c6), “마음에서 얻은 자는 비단 길거리에서 하는 이야기도 법의 요체를 잘 말하는 것이라 여길 뿐만 아니라 제비의 지저귐에서도 실상에 깊이 통달한다. 그러므로 보적寶積 선사는 곡하는 소리를 듣고 몸과 마음이 기쁨에 넘쳐 솟아올랐고, 보수寶壽 선사는 주먹다짐하는 광경을 보고 본래면목을 활짝 깨달았다는 이야기도 이러한 연유에서 나온 것이다.(得之於心者, 非但街談善說法要, 至於鷰語, 深達實相也. 是故, 寶積禪師, 聞哭聲踊悅身心, 寶壽禪師, 見諍拳開豁面目者, 以此也.)” 『정선 휴정』(pp.85~86) 참조.
  28. 28)『禪門綱要集』 a12), “이에서 가려낸다면 이체理體(理性)가 변함없음이 끝이 없고 차별적 현상(事相)은 밖이 없이 넓음을 깨달아 바른 지각知覺을 갖추게 된다. 이것이 바로 제2구에서 알아차리면 인천의 스승이 된다는 것이다.(於此辨得, 見理性無邊, 事相無外, 具正知覺. 此所謂第二句薦得, 與人天爲師者也.)”
  29. 29)『禪門拈頌說話』 1칙(H5, 6a24), “곧 선가禪家에서는 사사무애事事無礙를 실행하고, 교가敎家에서는 사사무애를 이론적으로 설한다. 교가에서는 설하기만 하고 실행하지 못하나, 선가에서는 하나의 기틀과 하나의 경계에서 본분을 포착하는 순간 바로 활용한다.(禪行事事無礙, 敎說事事無礙也. 敎家但說而行不得, 禪家一機一境上, 把得便用.)”
  30. 30)『禪門拈頌說話』 「禪門拈頌集序」(H5, 1b13).
  31. 31)고덕의 말은 다음에 보인다. 『金剛般若波羅蜜經五家解說誼』 권하(H7, 77a18), “중생과 부처라는 분별이 함께 침몰하고 나와 남이라는 분별이 모두 사라진다. 하늘이 땅이고 땅이 하늘이니 하늘과 땅이 자리를 옮기고, 물이 산이고 산이 물이니 물과 산이 공이다. 비록 그러하나 법 하나하나가 본래의 자리에 안착하고 있으니, 누가 등롱을 노주露柱라 부를 것인가. 이와 같으니 움직여서는 안 된다. 움직이면 30방을 맞으리라.(生佛幷沈, 自它俱泯. 天地地天天地轉, 水山山水水山空. 雖然如是, 法法本來安本位, 誰喚燈籠作露柱. 伊麽則不應動著. 動著則三十棒.)”
  32. 32)일미선一味禪 : 조사선을 가리킨다. 귀종 지상歸宗智常의 문답에 보인다. 『禪門拈頌說話』 256칙(H5, 241b12), “귀종에게 한 제자가 하직 인사를 함에 ‘어디로 가는가?’라고 묻자, ‘여러 선문을 돌아다니며 오미선五味禪을 배우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여러 선문에 오미선이 있다면 나의 이곳에는 다만 일미선이 있을 뿐이다.’ ‘일미선이란 무엇입니까?’ 이에 귀종이 곧바로 때리자,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말해 보라! 말해 보라!’라고 하니 제자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려 하는데 귀종이 다시 때렸다.(歸宗, 因小師辭, 乃問, ‘甚處去?’ 云, ‘諸方學五味禪去.’ 師云, ‘諸方有五味禪, 我這裏只有一味禪.’ 僧云, ‘如何是一味禪?’ 師便打. 僧云, ‘會也, 會也.’ 師云, ‘道! 道!’ 僧擬開口, 師又打.)” 여기서 오미선은 갖가지 맛을 고루 갖춘 다양한 선법 또는 차별된 갖가지 선을 총괄적으로 가리키며, 어떤 맛에도 기울지 않는 일미선과 대칭을 이루며 이 공안의 주 소재로 등장한다.
  33. 33)물병을 기울여~물을 옮기듯이 : 여사병수如寫甁水ㆍ조조사병祖祖瀉甁ㆍ사병瀉甁 등이라고 한다. 40권본 『大般涅槃經』 권40(T12, 601b26).
  34. 34)『禪門寶藏錄』에 인용된 책이다. 이 책에 인용된 글과는 앞뒤 구절 배치에서 차이가 있다. 『禪門寶藏錄』(X64, 808a11), “且夫敎外別傳, 卽佛佛祖祖所共法也. 以是法非文字所可擬議, 故曰敎外. 以不歷位次階級, 而悟佛心宗, 徑受法印, 故曰別傳. 敎也者, 自有言至於無言者也;心也者, 自無言至於無言者也. 自無言而至於無言, 則人莫得而名焉, 故強名曰禪. 世人不知其由, 或謂學而可知, 思而可得, 習而可成.”
  35. 35)『禪家龜鑑』(H7, 635b17), “그러므로 선과 교 두 가지 모두의 근원은 세존이시고, 선과 교가 각각 갈라지게 된 것은 가섭과 아난에서이다. 말이 없는 경계에서 말이 없는 경계에 이르는 것이 선이요, 말이 있는 경계에서 말이 없는 경계에 이르는 것이 교이니, 마음은 선법禪法이요 말은 교법敎法이다. 즉 법은 비록 한맛이지만 견해는 하늘과 땅 사이만큼이나 엄청난 차이가 있으니, 이것이 선과 교가 두 갈래 길로 갈라진 이유이다.(然則禪敎之源者, 世尊也, 禪敎之派者, 迦葉阿難也. 以無言至於無言者, 禪也;以有言至於無言者, 敎也. 乃至心是禪法也, 語是敎法也. 則法雖一味, 見解則天地懸隔, 此辨禪敎二途.);『禪敎訣』(H7, 657b8), “선禪은 부처의 마음이고 교敎는 부처의 말씀이다. 교란 말이 있는 경계에서 말이 없는 경계에 도달하는 것이고, 선이란 말이 없는 경계에서 말이 없는 경계에 도달하는 것이다. 말이 없는 경계에서 말이 없는 경계에 도달하면 누구도 그 경계를 무엇이라 규정할 수 없어서 억지로 ‘마음’이라고 일컫는 것일 뿐인데, 세상 사람들은 그 연유도 모르고서 ‘배워서 알고 생각해서 터득한다.’고 말하니, 참으로 근심스러운 일이다.(然禪是佛心, 敎是佛語也. 敎也者, 自有言至於無言者也;禪也者, 自無言至於無言者也. 自無言至於無言, 則人莫得而名焉, 强名曰心, 世人不知其由, 謂學而知, 思而得, 是可愍也.)” 『정선 휴정』(p.82, p.362) 참조.
  36. 36)법의 평등함을 비유한 말이다. 『大方廣佛華嚴經隨疏演義鈔』 권54 「十地品」(T36, 425b4), “일미란 비유이다. 바다가 비록 광대하지만 짠맛은 동일한 것과 같고, 또한 모든 약은 한곳에서 찌니 그 맛이 다르지 않은 것과 같다.(一味是喻. 如海雖廣同一鹹味, 亦如衆藥煮之一器其味無別.)”;『大般涅槃經』 권8 「如來性品」(T12, 652b6), “불성도 이와 같으니 번뇌에 덮여 있기 때문에 중생이 보지 못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바닷물은 비록 똑같이 짠맛이지만 그중에는 최상의 빼어난 맛의 물이 있어서 그 맛이 우유와 같고, 또 비유하자면 설산雪山이 비록 갖가지 공덕을 성취하여 온갖 약을 많이 생산하지만 독초도 있는 것과 같다. 모든 중생의 몸도 이와 같다. 비록 사대로 이루어진 독사와 같은 종류도 있지만 그중에는 묘약대왕妙藥大王도 있다. 불성이란 만들어 낸 법이 아니라 단지 번뇌라는 바깥 티끌(客塵)에 덮여 있는 것일 뿐이다.(佛性亦爾, 煩惱覆故, 衆生不見. 譬如大海雖同一鹹, 其中亦有上妙之水, 味同於乳, 譬如雪山雖復成就種種功德, 多生諸藥, 亦有毒草. 諸衆生身, 亦復如是. 雖有四大毒蛇之種, 其中亦有妙藥大王. 所謂佛性, 非是作法, 但爲煩惱客塵所覆.)”
  37. 37)담담한 가운데 숨은 맛(淡中有味) : 아무 맛도 감지하지 못하므로 분별하거나 말로 표현할 대상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從容錄』 23칙(T48, 242c7), “비록 ‘담담한 가운데 맛이 숨어 있다.’고 하지만, 이는 아무 맛도 없는 맛이니 그 맛이 항상 변함없어 모든 분별(情)과 말(謂)을 묘하게 넘어섰다. 정情이라는 글자는 마음 심心을 따랐고 위謂라는 글자는 말씀 언言을 따랐다. 이 경계에 이르면 언어로 표현할 길이 끊어지고 마음이 움직일 여지가 완전히 소멸한다.(雖曰, ‘淡中有味.’ 斯乃無味之味, 其味恒然, 妙超情謂. 情字從心, 謂字從言. 到此言語道斷, 心行處滅.)”
  38. 38)『禪門拈頌說話』 256칙(H5, 242a7).
  39. 39)『禪門拈頌說話』 256칙(H5, 242a9), “또 옛사람이 ‘해인삼매 가운데 삼종세간이 드러나니, 삼종세간이 모두 다함이 없구나. 다함 없는 본성의 바다가 한맛을 머금었으나, 그 한맛 또한 침몰시키는 것이 나의 선이다.’라 하여 한맛조차 물속에 던져 버린 것이 바로 장로의 일미선이라 하였다. 이것이 장로가 말한 그 일미선이다.(又古人云, ‘海印定中三種現, 三種世間皆無盡. 無盡性海含一味, 一味尙沈是我禪.’ 則一味尙沈處, 是長蘆一味禪也. 此是長蘆所謂一味禪也.)”;『禪門寶藏錄』 권상(X64, 808b10), “열 분 부처 머무는 도량이 하나의 해인이요, 삼종세간이 모두 그곳에 있네. 다함 없는 본성의 바다가 한맛을 머금었으나, 그 한맛 또한 침몰시키는 것이 나의 선이다. 진정 극문 화상의 송 (十佛壇場一海印, 三種世間總在焉. 無盡性海合一味, 一味相沈是我禪. 眞淨文和尙頌 )”
  40. 40)법공法空의 자리 : 『禪文手鏡』 「義理禪格外禪辨」(H10, 519c13), “자리를 나누어 주신 법공의 자리 소식은 법안종ㆍ위앙종ㆍ조동종 세 종파의 종지이다.(卽分座 法空座 消息, 而爲法眼潙仰曹洞三宗旨也.)” 백파 긍선, 신규탁 옮김, 『선문수경』, p.73 참조.
  41. 41)『拈頌說話』의 평석과는 차이가 있다. 『禪門拈頌說話』 37칙(H5, 51a5), “세존께서 당신의 자리를 나누어 앉도록 했다:착각이다! 남을 죽이려면 반드시 살인도殺人刀를 써야 하는 법인데, (그렇게 하지 못했으니) 잘못이 적지 않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이 함정 속에 들어가서 뚫고 나와야 비로소 교외별전의 정통 법맥이 가섭의 능력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世尊分座令坐:錯! 殺人須是殺人刀, 漏逗也不少. 雖然如是, 向者窠窟裏透得, 方知別傳正脉沒分外.)”
  42. 42)자라장紫羅帳 : 자색紫色의 얇은 명주로 만든 막. 귀인의 거처에 드리운 장막. 향상向上하는 하나의 관문을 비유하기도 한다.
  43. 43)『禪門拈頌說話』 32칙 설화에 나오는 다음 내용을 생략한 것이다. 『禪門拈頌說話』 32칙(H5, 45a17), “여인이 선정禪定에 들어 있을 때는 검소한 상태로부터 사치스러운 상태로 들어간 것과 같다. 이것은 황금으로 땅을 삼고 백은으로 벽을 삼으니, 곧 겹겹의 누각은 중첩된 화장세계華藏世界와 같고 자라장 속에 진주를 뿌린 격이다. 여인이 선정에서 나왔을 때는 사치스러운 상태로부터 검소한 상태로 들어간 것과 같으니, 이것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며, 주장자는 원래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고, 백반은 원래 쌀알로 지어졌으며, 사고師姑는 원래 여인이 비구니가 된 것이라는 등의 말과 통한다.(女子入定時, 從儉入奢, 黃金爲地, 白銀爲壁, 則樓閣重重花藏界, 紫羅帳裡撒眞珠也. 女子出定時, 從奢出儉, 山是山水是水, 柱杖元來木頭造, 白飯元是米粒做, 師姑元是女人做.)”
  44. 44)이 부분도 『拈頌說話』의 평석과는 차이가 있다. 『禪門拈頌說話』 37칙(H5, 51a11), “세존께서 영산靈山에 계실 때 하늘에서 네 가지 꽃이 비 오듯이 내렸는데, 한 잎 두 잎을 시작으로 천 잎 만 잎이 어지럽게 떨어졌다. 세존께서 그들 꽃 중 한 송이를 집어 들고 대중에게 보이셨다(拈花示衆):착각이다! 남을 살리려면 반드시 활인검活人劒을 써야 하는 법인데 어지럽게 만든 잘못이 적지 않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복잡하게 얽힌 이 말 속에 들어가 그것을 씹어 부수어야 비로소 정법안장正法眼藏이 가섭에게 전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世尊在靈山, 天雨四花, 一片兩片, 千片萬片, 繽紛而下. 世尊拈花示衆:錯! 活人須是活人釰, 狼藉也不少. 雖然如是, 向這葛藤裏咬破, 方知正法眼藏付囑有在.)”
  45. 45)『禪門拈頌說話』 37칙(H5, 51a17), “ ‘나에게 정법안장이 있으니 그것을 가섭에게 전한다.’라고 한 부처님의 말씀은 ‘사오백 가지 꽃과 버들이 핀 마을에, 이삼천 곳곳이 피리와 거문고 소리 울리는 누각이로다.’라는 소식이다. ‘하나로 화합된 상(一合相)은 포착할 수 없다.’라고 말한 수보리須菩提는 30방을 맞을 잘못을 저지른 셈이다.(吾有正法云云, 四五百條花柳巷, 二三千處管絃樓. 一合相不可得, 須菩提好與三十捧.)”
  46. 46)니련하泥蓮河 : 니련선하尼連禪河라고도
    년간의 고행 끝에 고행의 무의미함을 깨닫고 이 강에서 목욕하고 나서 소 치는 여자 수자타에게서 우유 공양을 받았다고 한다.
  47. 47)『禪門拈頌說話』 37칙(H5, 51a22), “세존께서 관 밖으로 두 발을 내보이셨다:착각이요, 착각이로다! 무소가 달빛을 즐기다가 뿔에 무늬가 생겼고, 코끼리는 천둥소리에 놀라 상아에 꽃 그림 새겨진 격이니, 잘못이 적지 않다. 비록 이러하기는 하지만 이 구덩이 속에서 뛰쳐나와야 비로소 다비한 이후의 품品이 세상에 유통되리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世尊槨示雙趺:錯, 錯! 犀因翫月紋生角, 象被雷驚花入牙, 敗闕也不少. 雖然如是, 向者圈圚裏跳得出, 方知茶毗後品流通去在.)”
  48. 48)원오 극근圜悟克勤이~준 법어 : 이에 대한 『禪門拈頌說話』 4칙(H5, 13a8)의 평석은 다음과 같다. 원오 극근의 이 법어에 대해 『拈頌說話』에서는 정혜 초신定慧超信이 읊은 “은밀히 전하고 자리 나누어 앉았다 하니, 정면에다 침 뱉어 주기에 딱 맞는 짓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 그대로 놓아둔 까닭에, 자손들이 재앙을 당하지 않을 수 없었네.(定慧信頌, 密傳分半座, 正好驀面唾. 不伊麽且放過, 子孫未免遭殃禍.)”라는 송과 함께 “정혜의 송과 원오의 법어는 (드러난 사실) 그 이상으로 향상하는 하나의 통로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定慧頌, 圓悟法語, 更須知有向上一竅.)”라고 풀었다.
  49. 49)석가문釋迦文은 석가문불釋迦文佛이라고도 하며, 석가모니불을 뜻한다. 문文은 모니牟尼와 통용되며 대유大儒라는 뜻을 함의한다.
  50. 50)절문節文은 본래 절도 있는 예절이나 의식 또는 핵심만 추리고 생략한 문구 등을 뜻하지만, 잘 처리하는 것 또는 사리에 따라 핵심에 들어맞게 조정한 조리條理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51. 51)『禪門拈頌說話』 37칙(H5, 50c20).
  52. 52)『禪門拈頌說話』 100칙(H5, 106a17), “내가 이제 자세히 분석해 보면, 모든 대상이 이미 끊어졌을 때 분별에 들어맞는 법이 하나도 없는 상태였던 것이다. ‘분명하게 깨어 어둡지 않고, 뚜렷하게 항상 알고 있다.’라고 한 말은 본분사가 본체와 같다는 이치를 알았기 때문이다. 모든 대상이 끊어지고 나면 아무것도 없는 그 경계(斷滅)에 떨어지는 사람도 있지만 2조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분명하게 깨어 어둡지 않고 뚜렷하게 항상 알고 있었으니, 깨달음과 수행이 곧바로 사라지면서 여래선을 증득하였던 것이다.(吾今辨柝去也. 諸緣已斷時, 無一法可當情. 明明不昧, 了了常知者, 知有本分事, 與體一般也. 諸緣旣斷, 或有落斷滅者, 今二祖則不然. 明明不昧, 了了常知, 則悟修斯亡, 乃證得如來禪也.)”;『禪文手鏡』 「達摩三處傳心」(H10, 523b13).
  53. 53)『禪門拈頌說話』 100칙(H5, 106a22), “그는 다시 모든 부처님의 법인에 대하여 묻고는 그 자리에서 마음을 편안히 하고 모든 부처님이 전한 마음의 본체를 깨달았다. (이 때문에) 앞에서 터득한 이해가 더욱 밝아져 ‘분명하게 깨어 어둡지 않고, 뚜렷하게 항상 알고 있다.’고 말한 뒤 마침내 조사선을 알아차리고 달마의 인가를 받았던 것이다. 이것이 2조가 2조가 된 이유이다.(又問, 諸佛法印, 當下安心, 悟得諸佛所傳心體. 前解轉明曰, ‘明明不昧, 了了常知.’ 遂乃會得祖師禪, 得他印許. 此所謂二祖之爲二祖者也.)”;『禪文手鏡』 「達摩三處傳心」(H10, 523b23).
  54. 54)때가 다 되어 가니 : 입적할 때가 다가왔다는 말 또는 서천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이다.
  55. 55)『禪門拈頌說話』 101칙(H5, 110b10), “나와서 예를 갖추어 삼배를 올리고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던 것:종문에서 말하는 이류異類로 살아가는 경지이다. 이는 방에 들어간(入室) 지위이다. 나와서 예를 갖추어 삼배를 하고 또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던 뜻을 대충 넘겨짚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자세히 살펴야 한다.(出禮三拜依位而立者:宗門中異類. 此則入室也. 禮三拜, 又依位而立之義, 不得莽鹵, 直須子細.)”
  56. 56)이류異類에는 네 가지가 있다(四種異類) : 남전 보원南泉普願이 이류중행을 강조한 이래 조산 본적曹山本寂이 네 가지로 정리하였다. 왕래이류往來異類는 지옥ㆍ아귀ㆍ축생ㆍ아수라 등의 세계로 자유롭게 왕래하는 것, 보살동이류菩薩同異類는 다른 이류 속으로 들어가 그들을 구제하며 이타행을 행하는 것, 사문이류沙門異類는 자신의 본분사를 밝혀 독립한 자유로운 사람, 종문중이류宗門中異類는 향상의 경계에 빠져서 머물지 않고 자유자재한 작용을 드러내는 것을 뜻한다. 『曹山本寂語錄』 권하 「四種異類」(T47, 543b23) 참조.
  57. 57)『禪門拈頌說話』 219칙(H5, 221b10), “이류:본체가 다른 것을 이異라 하고 동일하지 않은 것을 류類라 하는가? 왕래이류往來異類의 맥락에서 보면, 본성이 항상 윤회의 세계로 왕래하는 것을 ‘류’라 하고 본성이 자신의 본질을 잃지 않는 것을 ‘이’라 한다. 보살동이류菩薩同異類의 맥락에서 보면, 육도로 윤회하는 중생과 흡사한 외형을 가리켜 ‘류’라 하고, 생사윤회와 동화되지 않는 자기 자신은 ‘이’라 한다. 사문이류沙門異類의 맥락에서 보면, 털옷을 입고 머리에 뿔을 단 모습을 ‘류’라 하고 바뀌지 않는 이치를 분명히 아는 것은 ‘이’라 한다. 종문이류宗門異類의 맥락에서 보면, 모든 형식의 언어를 가리켜 ‘류’라 하고, 지혜로도 도달하지 못하는 경계는 ‘이’라 한다. 결론적으로 ‘이’는 무차별, ‘류’는 차별을 나타낸다. 이류중행이란 ‘이’와 ‘류’가 둘이 아닌 경계에서 살아간다는 뜻인가? 차별은 무차별의 자성으로부터 일어나니 ‘이’는 차별이고 이런 까닭에 다른 곳(異處)이란 (이곳과 다른) 저편(那邊)을 가리키므로 현재 살아가는 이곳은 ‘류’라는 뜻인가? 모두 틀렸다. 종합하여 말하면 차별을 당면하고도 차별이라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류라는 말을 단어별로 나누어 풀면 ‘이’는 무차별이고 ‘류’는 차별이다. 이 때문에 ‘이’에 대하여 물으면 ‘류’가 무엇이냐고 묻지 않는 것이다. 이 공안에서 말하는 이류는 사문이류인가? 아니면 종문이류인가? 남전이 대중에게 준 법문까지는 종문이류에 해당하고, 그 이하에서 활용한 부분은 사문이류에 해당한다. 만일 수행자의 눈으로 본다면 선후와 깊이의 차이가 뚜렷하겠지만 남전과 조주의 안목으로 파악한다면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하는 구별도 없거늘 어떻게 사문과 종문을 가려내겠는가!(異類者, 體別爲異, 非一爲類耶? 往來異類, 性常輪迴, 名爲類;性不自失, 名爲異. 菩薩同異類, 形似六道衆生, 名爲類;自己不同生死輪迴, 名爲異. 沙門異類, 披毛戴角, 名爲類;明得不變易, 名爲異. 宗門異類, 一切言語, 名爲類;智不到處, 名爲異. 則異則無差別, 類則差別也. 異類中行者, 異與類不二之中行也耶? 差別從無差別自性上起來, 則異者差別, 所以異處指那邊, 卽今行李處是類耶? 皆非也. 合而言之, 當差別而不名差別也. 故異類別開, 則異是無差別, 類是差別, 故問異則不問如何是類. 此話所謂異類, 沙門異類耶? 宗門異類耶? 示衆是宗門異類, 下所用是沙門異類. 若約行李人邊, 先後深淺歷然, 南泉趙州分上把得, 便用無可不可, 何揀於沙門宗門哉!)”
  58. 58) 『禪門寶藏錄』 권상(X64, 807c2)
    참조.
  59. 59)『臨濟語錄』(T47, 501c25), “도를 배우는 이들이여, 진불眞佛은 형상이 없고, 진도眞道는 일정한 격식이 없으며, 진법眞法은 바탕이 되는 모양이 없다. 이 세 법은 혼융되어 한곳에 화합하여 있어 분별해도 구분할 수 없으니 아득하여 종잡을 수 없는 업식을 가진 중생이라 부른다.(道流, 眞佛無形, 眞道無體, 眞法無相, 三法混融和合一處, 辨旣不得, 喚作忙忙業識衆生.)”
  60. 60)『中華傳心地禪門師資承襲圖』(X63, 35a22). 자성에 본래 갖추고 있는 작용(自性本用)과 인연에 따라 반응하는 작용(隨緣應用)을 설명하기 위해 구리 거울(銅鏡)을 비유로 삼았다.
  61. 61)주석 282 참조.
  62. 62)규봉의 말부터 여기까지는 다음의 대의와 통한다. 『禪門四辨漫語』 「二禪來義」(H10, 827a15), “종지를 주고받는 방법이 말에 의지하거나(顯) 말 이외의 수단에 의지하거나(密)에 따라 두 선禪의 이름이 나뉘며, 전수하는 법의 본체가 두 가지인 것은 아니다.(由其授受之顯密, 而有二禪之名, 非所傳之法體有二也.)” 초의 의순, 김영욱 옮김, 『선문사변만어』, p.130 참조.
  63. 63)『都序』 권상(T48, 402c28), “공적한 마음에 앎의 작용(靈知)이 있어 어둡지 않으니, 이 공적에서 나오는 영지가 너의 참된 본성이다. 미혹하면 미혹한 대로, 깨달으면 깨달은 대로 마음에는 본래 스스로 영지가 갖추어져 있으니, 조건에 의하여 생기지도 않으며 대상을 원인으로 일어나지도 않는다. ‘지知’라는 이 한 글자는 온갖 미묘한 이치가 출입하는 문이다.(空寂之心, 靈知不昧, 卽此空寂之知, 是汝眞性. 任迷任悟, 心本自知, 不藉緣生, 不因境起. 知之一字, 衆妙之門.)”
  64. 64)성제聖諦 : 성인이 깨달은 진리. 불법佛法의 요체. 진성眞性ㆍ진제眞諦와도 통한다.
  65. 65)『禪門拈頌說話』 147칙(H5, 149b3), “청원 행사 선사가 6조에게 물었다. ‘어떤 일에 힘써야 계급에 떨어지지 않습니까?’ ‘그대는 어떤 수행을 해 왔는가?’ ‘성제聖諦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계급에 떨어졌는가?’ ‘성제도 행하지 않았거늘 떨어질 계급이 어디 있겠습니까?’ 6조가 그를 큰 그릇으로 여겼다.(淸源行思禪師, 問六祖, ‘當何所務, 卽不落階級?’ 祖曰, ‘汝曾作什麽來?’ 師曰, ‘聖諦亦不爲.’ 祖曰, ‘落何階級?’ 師曰, ‘聖諦尙不爲, 何階級之有?’ 祖深器之.)”;『景德傳燈錄』 권5 「靑原行思傳」(T51, 240a19).
  66. 66)『禪門拈頌說話』 119칙(H5, 127a22), “남악
    조에게 법을
    조가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숭산에서 왔습니다.’ ‘어떤 것이 이렇게 왔는가?’ ‘하나의 그 무엇이라고 말해도 딱 들어맞지 않습니다.’ ‘수행에 의지하여 깨닫는가?’ ‘수행하여 깨닫는 일이 없지는 않지만, 오염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오염되지 않는 일이야말로 모든 부처가 소중히 지키신 바이다. 그대가 이미 이렇고 나 또한 그렇다.’(南嶽懷讓禪師, 初參六祖, 祖問, ‘甚處來?’ 曰, ‘嵩山來.’ 祖曰, ‘是什麽物伊麽來?’ 曰, ‘說似一物即不中.’ 祖曰, ‘還假修證不?’ 曰, ‘修證即不無, 汚染即不得.’ 祖曰, ‘秪此不汚染, 是諸佛之所護念. 汝旣如是, 吾亦如是.’)”
  67. 67)친밀히 증득하여(密證) : 밀密은 친밀親密의 뜻으로, 밀증密證은 현실의 자기가 진실한 자기 또는 본래면목을 철저히 깨달아 서로 간격이 없는 상태, 또는 은밀하여 남들이 알 수 없는 경계를 증득하였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68. 68)진금포眞金鋪 : 순금만 진열하여 파는 가게. 순수한 선풍禪風만을 거양하는 곳을 비유하는 말. 또는 엄정한 수단을 오롯이 쓰는 경우를 비유하기도 한다.
  69. 69)『염송설화』에서는 달마가~한 것이다 : 앞의 주석 52 참조.
  70. 70)부처도 때리고~때릴 것 : 부처가 되었건 조사가 되었건 그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본분을 고수하는 입장. 『禪門拈頌說話』 672칙(H5, 516b13), “방장에 들어오는 것을 보자마자 방을 내리쳐 때렸다:어디에도 물들지 않은 한 자루 생짜의 몽둥이로 부처가 와도 때리고 조사가 와도 때리는 수단을 말한다.(入門便棒者, 一條白棒, 佛來也打, 祖來也打也.)”;『密菴語錄』(T47, 960c22), “그런 까닭에 덕산은 한 자루 생짜 몽둥이를 들고서 부처가 와도 때리고 조사가 와도 때린다고 했던 것이다.(所以德山據一條白棒, 佛來也打, 祖來也打.)”
  71. 71)진인眞人 : 임제가 말한 무위진인無位眞人과 같은 말. ‘무위’란 범성凡聖ㆍ미오迷悟ㆍ상하귀천上下貴賤 등 어떤 틀이나 격식 또는 일정한 자리에 속박되지 않고 자유롭게 기틀을 발휘함을 함의한다.
  72. 72)『續傳燈錄』 권5 「智海本逸傳」(T51, 498a21), “입을 열어도 옳고 입을 닫아도 옳으니 눈 아래에 코를 붙여도 무방하다. 입을 열어도 잘못이고 입을 닫아도 잘못이니 눈과 코를 모두 집어낸다. 부처도 때리고 조사도 때릴 것이니 진인 앞에서 거짓을 말하지 마라. 부처도 안착시키고 조사도 안착시키니 납승의 배 속이 바다처럼 드넓다.(開口是合口是, 眼下無妨更著鼻;開口錯合口錯, 眼與鼻孔都拈却. 佛也打祖也打, 眞人面前不說假;佛也安祖也安, 衲僧肚皮似海寬.)”
  73. 73)『禪門拈頌說話』(H5, 7c14), “내가 당시에 그 광경을 보았다면, 한 방에 때려죽이고 개에게 먹이로 주어서 천하의 태평을 도모했을 것이다.(我當時若見, 一棒打殺, 與狗子喫却, 貴圖天下大平.)”
  74. 74)잡화포雜貨鋪 : 진금포眞金鋪와 상대되는 말. 선풍禪風이 순수하지 못함을 비유한다. 또는 근기에 따라 다양한 방편을 활용하는 경우를 비유하기도 한다.
  75. 75)다음의 취지와 통한다. 『禪門拈頌說話』
    a2), “납승은 주장자를 보고 주장자라 할 뿐이며, 갈 때는 가기만 하고 앉아 있을 때는 앉아 있기만 하니 그 무엇도 흔들지 못한다.(衲僧見拄杖, 但喚作拄杖;行但行, 坐但坐, 摠不得動着.)”
  76. 76)현기懸記 : 앞일을 예언하거나 기록하여 나타내는 것. 미래기未來記 또는 참기讖記라고도 한다.
  77. 77)『付法藏因緣傳』에서는 이와 같은 내용을 찾지 못하였다. 『禪門寶藏錄』 권상(X64, 807c12);『禪敎釋』(H7, 654c3) 참조.
  78. 78)마명馬鳴보살은 『감자론甘蔗論』과~등을 지어 : 『佛祖綱目』 권13(X85, 577a21), “馬鳴造甘蔗論十萬偈, 又造起信等論.”
  79. 79)여래장연기종如來藏緣起宗 : 『楞伽經』ㆍ『密嚴經』ㆍ『寶性論』ㆍ『起信論』 등을 가리킨다. 종래 화엄종의 교판론인 오교판五敎判 대신 사교판四敎判을 설정하여 『起信論』을 포함하여 부각한 점이 특징이다. 『大乘起信論義記』 권상(T44, 243b23), “일체의 경론은 대소승을 통틀어 근본적 종지에 네 가지가 있다. 수상법집종은 소승의 제부諸部이며, 진공무상종은 『대반야경』 등의 경 가운데 중관中觀 등의 논論에서 설한 것이고, 유식법상종은 『해심밀경』 등의 경과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등의 논에서 설한 것이며, 여래장연기종은 『능가경』과 『밀엄경』 등의 경과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ㆍ『구경일승보성론究竟一乘寶性論』 등의 논에서 설한 것이다.(一切經論, 通大小乘, 宗途有四. 隨相法執宗, 卽小乘諸部是也;眞空無相宗, 卽般若等經, 中觀等論, 所說是也;唯識法相宗, 卽解深密等經, 瑜伽等論, 所說是也;如來藏緣起宗, 卽楞伽密嚴等經, 起信寶性等論, 所說是也.)”
  80. 80)『삼본화엄경三本華嚴經』 : 3본 『大不思議解脫經』을 가리킨다. 이것이 『華嚴經』의 모태가 되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문자로 전하는 이 경과 함께 사바세계에 전해지지 않은 상본과 중본의 『大不思議解脫經』과, 10만 게로 이루어져 사바세계에 전해진 하본의 『大不思議解脫經』 등 3본을 일컫는다. 이들 3본 이외에 전하는 약본略本이 현존하는 60권본 『華嚴經』 등이다.
  81. 81)공종空宗 : 유종有宗의 상대어. 일체공一切空ㆍ반야개공般若皆空을 주장하는 종파 또는 종지宗旨. 용수龍樹ㆍ제바提婆 등의 중관학파를 가리킨다. 중국에서는 법상종法相宗에 대하여 삼론종三論宗을 가리킨다. 『華嚴一乘敎義分齊章復古記』 권1(X58, 321b19), “일체가 모두 공이라고 보는 종을 대승시교라 한다. 일체 제법이 모두 참된 공이라고 설한다.(一切皆空宗, 謂大乘始敎. 說一切諸法, 皆悉眞空.)”
  82. 82)방출傍出은 바른 계통(正系)이 아닌 유파流派를 말한다. 곁에서 나왔거나 출생했다는 뜻으로, 방출蒡出ㆍ방출旁出 또는 방계傍系라고도 한다.
  83. 83)『朝鮮佛敎通史』 下編 「檜巖寶鳳指空來遊」(B31, 678a10), “서천 제22조 마라나 존자의 방출 좌타구파 존자가 전하여 제납박타 존자에게 이르렀다.(西天第二十二祖摩拏羅尊者, 傍出左陀瞿頗尊者, 傳至提納薄陀尊者.)”
  84. 84)지공指空(1289~1363) : 『朝鮮金石總覽』 권상 「寧邊安心寺指空懶翁舍利石鐘碑文」, “지공의 한역 이름은 선현禪賢이고 부친의 휘는 만滿이다.(指空, 名禪賢, 父諱, 滿.)”
  85. 85)『景德傳燈錄』 권2 「師子比丘」(T51, 215a23), “師子尊者, 付婆舍斯多心法信衣爲正嗣, 外傍出達磨達四世二十二師.”
  86. 86)유자후柳子厚 : 당나라 중기의 문인인 유종원柳宗元(773~819). 자후子厚는 자이며, 유하동柳河東ㆍ유유주柳柳州 등의 별칭으로도 불린다.
  87. 87) 『櫟翁稗說後集』, “유자후의 「남악비」에 ‘가섭으로부터 사자존자 24대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잇닿아 전해져 달마에게 이르렀고, 달마로부터 5조 홍인弘忍에 이르기까지 더욱 성대하게 이어져 신수神秀와 혜능慧能이 나왔다.’고 하였다. 하지만 『전등록』을 살펴보니, 사자존자는 바사사다에게, 바사사다는 불여밀다에게, 불여밀다는 반야다라에게, 반야다라는 보리달마에게 전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니 어떻게 사자존자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잇닿아 전해져 달마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겠는가. 달마달은 사자존자의 방출이다. 유자후가 달마달을 보리달마로 잘못 생각한 것이다.(柳子厚, 南嶽碑云, ‘由迦葉, 至師子二十四世, 而離離而爲達摩, 由達摩, 至忍五世, 而益離離而爲秀爲能.’ 按傳燈錄, 師子傳婆舍斯多, 婆舍斯多傳不如密多, 不如密多傳般若多羅, 般若多羅傳菩提達摩. 何得云至師子而離離而爲達摩哉. 有達摩達者, 師子之傍出也. 柳子蓋以達摩達爲菩提達摩也.)”
  88. 88)『圓覺經略疏鈔』 권4(X9, 862b15) 이하 참조. 『圓覺經大疏釋義鈔』 권3(X9, 531c14)에도 동일한 기사가 수록되어 있지만 보리달마가 달마다라達磨多羅로 되어 있는 등 몇 가지 상위점이 있는 것으로 보아 『圓覺經略疏鈔』의 인용이 분명하다.
  89. 89)『景德傳燈錄』 권1 「彌遮迦傳」(T51, 208a25), “제6조 미차가가 말했다. ‘나의 스승 제다가께서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 예전에 북인도를 지나다가 아난에게, 내가 멸도한 뒤 300년이 지나면 성은 바라타, 이름은 바수밀이라는 성인이 이 땅에 태어나 선맥禪脈(禪祖)에서 일곱째 조사가 되리라고 하셨다.」 부처님께서 그대에게 수기를 주신 것이니 그대는 출가해야 한다.’(師曰, ‘我師提多迦說. 「世尊昔遊北印度, 語阿難言, 此國中吾滅後三百年, 有一聖人, 姓頗羅墮, 名婆須蜜, 而於禪祖當獲第七.」 世尊記汝, 汝應出家.)”
  90. 90)이하에서 살殺과 활活로 나누어 각각 여래선과 조사선에 배대하였지만, 합당한 근거가 보이지 않는 무리한 논리이다.
  91. 91)『都序』 권상(T48, 400b10), “경經은 부처의 말이며 선禪은 부처의 뜻이다. 모든 부처의 마음과 입은 결코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모든 조사들이 대대로 계승하였지만 그 근본은 부처가 친히 부촉한 뜻이며, 보살이 논을 지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불경을 널리 알리기 위함이었다. 하물며 가섭에서 국다에 이르기까지 널리 전하여 모두 삼장三藏을 겸하였음에랴. 제다가 이후로 승가에서 다툼이 일어 율의 가르침이 별도로 행해지게 되었고, 계빈국 이래로 법난을 만나 경과 논이 분화되었다.(經是佛語, 禪是佛意. 諸佛心口, 必不相違. 諸祖相承, 根本是佛親付, 菩薩造論, 始末唯弘佛經. 況迦葉乃至毱多弘傳皆兼三藏. 提多迦已下, 因僧諍, 律敎別行, 罽賓國已來, 因王難, 經論分化.)”
  92. 92)500년 : 오오백년五五百年의 설에
    ,500년을 다섯 단계의 500년으로 나누어 구분하고 그 각각의 다섯 시기마다 가지는 특징이 다르다는 주장이다.
  93. 93)『翻譯名義集』 권4(T54, 1113a22);『釋氏要覽』 권중(T54, 279a11);『楚石梵琦禪師語錄』 권9(X71, 593b12) 등 참조.
  94. 94)『景德傳燈錄』 권2 「師子比丘傳」(T51, 215a7);『朝鮮佛敎通史』 中編 「特書臨濟宗之源流」(B31, 482b1) 등 참조.
  95. 95)宗寶本
    b19);『禪門拈頌說話』 119칙(H5, 127a23).
  96. 96)이하의 문답에 대해서는 앞의 주석 65 참조.
  97. 97)계급 : 수행하는 점차적 단계. 또는 미오迷悟ㆍ범성凡聖ㆍ고하高下 등의 상대적이고 차별적인 대립을 설정하여 분별하는 망상.
  98. 98)『禪門拈頌說話』 147칙(H5, 150a17), “6조가 그를 큰 그릇으로 여겼다:청원淸源이 아니었다면 6조는 결코 큰 그릇으로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청원의 경계를 알고자 하는가? ‘이렇다 해도 안 되고, 이렇지 않다고 해도 안 되며, 이렇다거나 이렇지 않다거나 모두 안 된다.’는 관점에서 보라. 청원 노선사는 나무로 깎은 나한상처럼 천태산天台山의 화정봉華頂峯에서 좌선을 하다가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나의 한입에 남김없이 삼켰거늘 무슨 교화할 중생이 남아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바로 이럴 때 말후구는 어떻게 이해할까? 회양懷讓 선사의 뜻을 알고 싶은가? ‘이렇다고 해도 되고, 이렇지 않다고 해도 되며, 이렇다거나 이렇지 않다거나 모두 된다.’는 관점에서 보라. 회양 화상은 물소로 변하여 삼십삼천에 올라가 제석천의 콧구멍을 틀어막은 다음 다시 시냇물의 동쪽에서든 서쪽에서든 온몸에 진흙과 물을 묻혔다. 바로 이럴 때 바른 법을 보는 눈(正法眼藏)은 어디에 있는가? 이 두 대사大士는 그들이 제시한 법인法印 그대로 본보기가 되었다. 세존께서는 다자탑 앞과 영산회상에서 가섭에게 친밀하게 부촉하였고, 가섭은 아난에게 전하여 한 세대에 오직 한 사람에게만 전하다가 조계 혜능에 이르러 이 두 대사에게 법을 나누어 주게 되었고 그들은 각기 다른 가풍을 세웠다. 두 대사는 그들의 후손으로 법을 이었는데 임제臨濟와 동산洞山에 이르러 이 도가 세상에 크게 유행하였다. 그 종파에 근원이 있고 지류에도 뿌리가 있으니 배우는 이들은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祖深器之者, 非淸源, 六祖終不深器之. 要識淸源麽? ‘伊麽也不得, 不伊麽也不得, 伊麽不伊麽摠不得’, 看也. 老淸源便作木羅漢, 向天台華頂上打坐, 道‘三世諸佛, 被我一口呑盡, 何處更有衆生可敎化!’ 當伊麽時, 末後句作麽生會? 要識讓師麽? ‘伊麽也得, 不伊麽也得, 伊麽不伊麽摠得’, 看也. 讓和尙, 變作水牯牛, 上三十三天, 築著帝釋鼻孔, 却向溪東溪西, 和泥合水. 當伊麽時, 正法眼藏, 在什麽處? 此二大士, 如其法印作榜㨾. 世尊於多子塔前, 靈山會上, 密付迦葉, 迦葉傳阿難, 人傳一人, 至于曺溪, 得此二大士分付, 各立家風. 二大士得其孫, 至于臨濟洞山, 斯道大行天下. 其派有源, 其枝有本, 學者不得莽鹵也.)”
  99. 99)청원이 처음 한 말은 아니다. 다음 문답에서 빌려 온 말이다. 『景德傳燈錄』 권27 「諸方雜擧徵拈代別語」(T51, 435a14), “어떤 노스님(誌公)이 사람을 시켜 남악 사대南嶽思大 선사에게 말하기를 ‘어찌 산에서 내려와 중생을 교화하지 않고 하늘만 보면서 무엇 합니까?’라 하자 사대가 말했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나의 한입에 남김없이 삼켰거늘 무슨 교화할 중생이 남아 있겠습니까!’ 현각玄覺이 이 문답을 징徵했다. ‘말해 보라! 사대의 그 말은 산꼭대기에서 하는 말인가, 산 아래에서 하는 말인가?’ (有老宿, 令人傳語思大禪師, ‘何不下山, 敎化衆生, 目視雲漢, 作麽?’ 思大曰, ‘三世諸佛, 被我一口呑盡, 更有甚衆生可敎化!’ 玄覺徵云, ‘且道! 是山頭語? 山下語?’ )”
  100. 100)물소로 변하여 : 죽어서 물소가 되어 시주의 빚을 갚겠다던 남전 보원南泉普願의 이류중행異類中行이 대표적이다. 『禪門拈頌說話』 219칙(H5, 221a9) 참조.
  101. 101)삼십삼천에 올라가~콧구멍을 틀어막은 : 운문 문언雲門文偃의 말을 활용하였다. 『雲門廣錄』 권중(T47, 555a4), “운문이 부채를 집어 들고 말했다. ‘부채가 훌쩍 삼십삼천에 뛰어올라 제석천의 콧구멍을 틀어막고, 동해의 잉어는 이것을 한 방 맞더니 물동이를 기울인 듯이 비를 쏟아 붓는구나. 알겠는가?’(師拈起扇子云, ‘扇子勃跳上三十三天, 築著帝釋鼻孔, 東海鯉魚打一棒, 雨似盆傾相似. 會麽?’)”
  102. 102)다시 시냇물의~물을 묻혔다 : ‘삼십삼천에 올라가 제석천의 콧구멍을 틀어막았다.’라는 말이 어떤 방편도 허용하지 않는 방식이라면, 그 이하는 방편을 시행하며 갖가지 현상에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을 말한다.
  103. 103)이렇게 여래선과 조사선의 득실과 우열을 나누는 의식 자체가 조사선 일반의 지향성과 배치되는 이념적ㆍ종파적 편견에 불과하다. 조사선에서 이들 두 선법은 써먹고 버리는 다양한 소재 중 하나일 뿐이며, 선의 유형을 나누어 보는 방법도 버리기 때문이다. 『圜悟語錄』 권15(T47, 782c6), “여래선과 조사선이라 나누지만 어찌 이런 두 종류가 있으랴!(如來禪, 祖師禪, 豈有兩種!)”;『大慧語錄』 권20(T47, 895c7), “바로 이럴 때 여래선도 아니고 조사선도 아니며, 심성선도 아니고 묵조선도 아니며, 방할선도 아니고 적멸선도 아니며, 과두선도 아니고 교외별전의 선도 아니며, 오가종파의 선도 아니다.(正當恁麽時, 不是如來禪, 不是祖師禪, 不是心性禪, 不是默照禪, 不是棒喝禪, 不是寂滅禪, 不是過頭禪, 不是敎外別傳底禪, 不是五家宗派禪.)”
  104. 104)이하의 문답에 대해서는 『禪門拈頌說話』 111칙(H5, 121b3) 및 주석 272 참조.
  105. 105)宗寶本 『壇經』과 『禪門拈頌說話』에는 약간 다르게 제시되어 있다.
    b29), “나에게 하나의 그 무엇이 있다.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으며, 이름도 없고 이름자도 없으며, 뒤도 없고 앞도 없다. 여러분은 알겠는가?(吾有一物. 無頭無尾, 無名無字, 無背無面, 諸人還識否?)”;『禪門拈頌說話』 111칙(H5, 121b3), “6조가 하루는 대중에게 말했다. ‘하나의 그 무엇이 위로는 하늘을 떠받치고 아래로는 땅을 지탱하면서 옻칠과 같이 시커멓다. 그것은 항상 움직임 속에 있는데 움직이는 그 순간에는 잡아들이지 못한다. 그대들은 그것을 무엇이라 부르겠느냐?’(六祖, 一日謂衆曰, ‘有一物, 上柱天下柱地, 黑似柒. 常在動用中, 動用中収不得. 汝等諸人, 喚作什麽?’)”
  106. 106)파묘개두把茆蓋頭는 파모개두把茅蓋頭와 같은 말로, 띠풀로 머리를 덮다, 띠풀로 초암草庵을 짓고 머리 위를 덮음으로써 비바람을 막는다는 뜻이다. 스스로 독립하여 대중을 이끄는 지위가 되거나 일가의 종사가 된다는 뜻이다.
  107. 107)『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H4, 741a5).
  108. 108)분별하는 이해(悟解) : 지식에 근거한 이해와 분별. 또는 제법실상의 이치를 깨달음. 여기서는 전자의 뜻에 가깝게 쓴 것으로 보았다.
  109. 109)『禪文手鏡』 「義理禪格外禪辨」(H10, 519b2);『禪門四辨漫語』 「格外義理辨」(H10, 827c22).
  110. 110)『禪門綱要集』 a17).
  111. 111)『禪門拈頌說話』 100칙(H5, 106a18), “모든 대상이 끊어지고 나면 아무것도 없는 그 경계(斷滅)에 떨어지는 사람도 있지만 2조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분명하게 깨어 어둡지 않고, 뚜렷하게 항상 알고 있었으니, 깨달음과 수행이 곧바로 사라지면서 여래선을 증득하였던 것이다.(諸緣旣斷, 或有落斷滅者, 今二祖則不然. 明明不昧, 了了常知, 則悟修斯亡, 乃證得如來禪也.)”
  112. 112)이하에 인용된 문구는 대혜의 말이 아니라, 장 시랑의 말을 대혜가 편지에서 언급한 말이다. 대혜는 혜충 국사가 의리선을 폈다고 보지 않았다. 『書狀』 「答張侍郞狀」(T47, 937b10), “시랑께서는 스스로 터득하여 홀연히 벗어난 경지를 궁극적인 법도로 생각하여, 이치로 통하는 길에 몸을 담그고 자신의 몸을 진흙과 물로 더럽히며 남들을 가르치는 도리를 알자마자 곧바로 모든 것을 쓸어 없애고 자취마저 소멸시키고자 하였습니다. 내가 엮은 『정법안장』을 읽어 보고는 ‘임제 문하에는 기봉이 뛰어난 암주가 여러 명 있는데 어째서 받아들여 편집하지 않았습니까? 반대로 혜충 국사의 경우는 의리선을 설하여 남의 자녀들을 망쳐 놓았으니 반드시 삭제해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左右以自所得, 瞥脫處爲極則, 纔見涉理路, 入泥入水爲人底, 便欲掃除, 使滅蹤跡. 見宗杲所集正法眼藏便云, ‘臨濟下有, 數箇菴主好機鋒, 何不收入? 如忠國師, 說義理禪, 敎壞人家男女, 決定可刪.’)”
  113. 113)『禪門拈頌說話』 「禪門拈頌集序」(H5, 1b11).
  114. 114)정定과 혜慧를 통칭 : 정과 혜 중 어느 하나가 빠지면 선禪이 아니다. 내용적으로 이 둘이 완비되어야 바른 뜻이 되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정려靜慮’의 ‘정靜’은 ‘정定’, ‘려慮’는 ‘혜慧’와 상응한다. 종밀은 『圓覺經略疏註』 권상(T39, 527a23)에서도 같은 맥락을 나타내었다. “전해지는 법은 정과 혜를 벗어나지 않는다. 오悟와 수修 그리고 돈頓과 점漸에서 정도 없고 혜도 없으면 어리석음에 불과하며, 어느 한편만 치우쳐서 닦으면 무명의 삿된 견해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를 함께 운용해야 양족존兩足尊이 된다.(然所傳法, 不出定慧. 悟修頓漸, 無定無慧, 是狂是愚;偏修一門, 無明邪見. 此二雙運, 成兩足尊.)”;『飜譯名義集』 권4(T54, 1126c18), “다나연나:한역하면 정려靜慮이다. 『바사론』에서는 정定이라 했지만, 정과 혜는 평등한 것이니 여타의 정에서 이 중 하나가 결여되면 정려라고 하지 않는다. 정靜은 정定이고 려慮는 혜慧이다.(馱那演那:此云, 靜慮. 婆沙論, 此定. 定慧平等, 餘定缺少, 不名靜慮. 靜卽定也, 慮卽慧也.)”
  115. 115)『都序』(T48, 399a18) 참조.
  116. 116)앞의 주석 32 참조.
  117. 117)잡고서 분별할~남기지 않는다(沒巴鼻) : 파비巴鼻란 소의 코에 꿰어 소를 마음대로 이끌어 가기 위한 고삐와 같은 수단이다. 이러한 수단이 전혀 없는 상태를 몰파비라 한다. ‘산은 산, 물은 물’이라 하건, 어떤 경전의 말씀을 인용하건 선어禪語로 여과되면 모두 잡고 의지할 분별의 수단이 전혀 없는 몰파비가 된다. 몰자미沒滋味와 통하는 말이다. 몰파비의 경계는 화두 공부가 절정에 이른 소식이다.
  118. 118)『禪門拈頌說話』 256칙(H5, 6c5), “그런데 여기서는 ‘세존은 도솔천을 떠나기도 전에 이미 왕궁에 강림하였고, 모태에서 태어나기도 전에 중생제도를 벌써 마쳤다.’라고 하였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오고 간 자취가 전혀 없고, 증득과 교화를 곧바로 사라지게 하였다. 이처럼 법도에 얽매여서는 안 되며, 말을 들었으면 그 종지를 이해해야 한다.(今旣未離至已畢, 則始終一貫, 初無去來, 證化斯亡. 須是不立規矩, 承言會宗始得.)”
  119. 119)『禪門寶藏錄』 권상(X64, 808a11).
  120. 120)『圓覺經大疏釋義鈔』 권3(X9, 531a3).
  121. 121)청량 징관淸凉澄觀은~라고 답하였다 : 『禪門寶藏錄』 권상(X64, 809b11).
  122. 122)『禪家龜鑑』(H7, 635b24), “그러므로 누구든 말에 얽매여 근본을 잃어버리면 염화미소의 소식도 모두 교의 자취에 불과하지만, 마음에서 깨달으면 세간의 온갖 거칠고 자질구레한 말들도 모두 교외별전의 선지禪旨가 된다.(是故, 若人失之於口, 則拈花微笑, 皆是敎迹;得之於心, 則世間麤言細語, 皆是敎外別傳禪旨.)”
  123. 123)일정한 궤칙에 얽매이지 않아(不存軌則) : 주석 140 참조.
  124. 124) 이름과 구절은~차별은 소전所詮이다 : 경전의 의리를 나타내는 문장이나 어구가 능전이라면, 그 설명되는 내용 또는 그것이 가리키는 뜻은 소전이다.
  125. 125)본각진심本覺眞心 : 본원각성本源覺性과도 통하는 말. 본래 가지고 있는 청정한 성품 및 근본무명을 떠나 본래 해탈한 마음.
  126. 126)이상의 『都序』 인용은 책 제목인 ‘禪源諸詮集都序’에서 선원禪源의 뜻을 밝히고 있는 대목이다. 『都序』 권상1(T48, 399a18), “선禪은 인도 말이며 온전한 음사어는 선나禪那이다. 한역하면 사유수思惟修 또는 정려靜慮라고도 하는데, 이는 모두 정定과 혜慧를 통칭하는 말이다. 원源이란 모든 중생이 지니고 있는 본각진성本覺眞性을 뜻하며 불성佛性 또는 심지心地라고도 한다. 깨달음을 ‘혜’라 하고 닦음을 ‘정’이라 하며, 정과 혜를 통칭하여 ‘선나’라고 한다. 이러한 속성이 선의 본원이므로 선원이라 한다. 또한 ‘선나이행禪那理行’이라고도 이름 붙인 까닭은 이것의 본원이 선리禪理요 분별을 잊고 선리에 합치하는 것이 선행禪行이기 때문에 이행理行이라 한 것이다. 하지만 이제 모아 놓은 제가의 저작들에는 선리는 많이 말하였지만 선행에 대해서는 말한 것이 적으므로 선원으로 제목을 붙였다. 요즘 진성眞性만을 선으로 간주하는 자는 이행의 뜻에 통달하지 못해서이며 더욱이 중국어 음인지 인도어 음인지도 분간하지 못해서이다.(禪是天竺之語, 具云禪那. 中華翻爲思惟修, 亦名靜慮, 皆定慧之通稱也. 源者, 是一切衆生, 本覺眞性, 亦名佛性, 亦名心地. 悟之名慧, 修之名定, 定慧通稱爲禪那. 此性是禪之本源, 故云禪源. 亦名禪那理行者, 此之本源是禪理, 忘情契之是禪行, 故云理行. 然今所集諸家述作, 多談禪理少談禪行, 故且以禪源題之. 今時有但目眞性爲禪者, 是不達理行之旨, 又不辨華竺之音也.)”
  127. 127)『禪門寶藏錄』 권상(X64, 808a11).
  128. 128)사선팔정四禪八定 : 색계의 사선四禪과 무색계의 사정四定을 합하여 일컫는 말.
  129. 129)상계上界 : 색계와 무색계. 이를 상이계上二界라고도 한다.
  130. 130)욕계에는 선정이~닦고 익히는가 : 『景德傳燈錄』 권7 「鵝湖大義傳」(T51, 253a7), “또 물었다. ‘욕계에는 선정이 없고 선정은 색계에 있는데 이 땅에서 무엇에 의지하여 선을 세운 것입니까?’ ‘법사는 단지 욕계에 선정이 없다는 것만 알 뿐, 선계에 욕欲이 없다는 것은 모르는구나.’ ‘어떤 것이 선입니까?’ 아호가 손으로 허공에 점을 찍으니 법사는 대답이 없었다.(又問, ‘欲界無禪, 禪居色界, 此土憑何而立禪?’ 師云, ‘法師只知欲界無禪, 不知禪界無欲.’ 法師云, ‘如何是禪?’ 師以手點空, 法師無對.)”;『禪門寶藏錄』 권중(X64, 811c4).
  131. 131)『都序』(T48, 405b26).
  132. 132)『大乘起信論』 권2(T32, 590b25).
  133. 133)『金剛三昧經』 「無生行品」(T9, 368a14).
  134. 134)『法句經』 「普光問如來慈偈答品」(T85, 1435a21).
  135. 135)멸진정滅盡定 : 상想과 수受를 비롯하여 모든 심작용心作用이 일어나지 않는 선정. 무소유처無所有處의 염오를 여읜 성자가 적정을 희구하므로 들어가는 선정.
  136. 136)『維摩詰所說經』 「弟子品」(T14, 539c20), “夫宴坐者, 不於三界現身意, 是爲宴坐;不起滅定而現諸威儀, 是爲宴坐.”
  137. 137)일행삼매一行三昧 : 오로지 하나의 행에 마음을 기울여 닦고 익히는 삼매. 협소하게는 좌선坐禪이나 염불念佛을 가리키기도 한다. 敦煌本
    b15), “일행삼매는 하루 어느 시각에서든지 가거나 머물거나 앉았거나 누워 있거나 항상 곧은 마음을 행하는 것이다. 『정명경』에 ‘곧은 마음이 도량이며, 곧은 마음이 정토이다.’라 하였다.(一行三昧者, 於一切時中, 行住坐臥, 常行直心是. 淨名經云, ‘直心是道場, 直心是淨土.)”; 『菩提達摩南宗定是非論』 『神會和尙遺集』(p.308), “이 무념은 반야바라밀이며, 반야바라밀은 일행삼매이다.(是無念者, 卽是般若波羅密, 般若波羅密者, 卽是一行三昧.)”
  138. 138)이 일행삼매는~알음알이와 같다 : 宗寶本
    c3) 참조.
  139. 139)앞의 주석 130 참조.
  140. 140)부존궤칙不存軌則은 보통 ‘남김 없는 작용이 눈앞에 실현되어 어떤 법도에도 얽매이지 않는다(大用現前, 不存軌則.)’라는 상용구로 쓰인다. 일정한 격식이나 법식, 규칙에 속박되지 않고 여탈자재하고 살활자재하며 무위무작無爲無作의 작용을 발휘함을 뜻한다.
  141. 141)방거사龐居士와 그 딸 영조靈照의 문답에 나오는 말. 『禪門拈頌說話』 309칙(H5, 270b15), “방거사가 앉아 있다가 딸 영조에게 물었다. ‘옛사람은 「분명하게 드러난 온갖 현상에 지극히 분명하게 조사의 뜻이 나타나 있다.」고 하였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노장님께서 머리가 희어지고 이가 누렇게 변할 때까지 살도록 겨우 이런 견해나 지으시는군요.’ ‘너라면 어떻게 말하겠느냐?’ ‘분명하게 드러난 온갖 현상에 지극히 분명하게 조사의 뜻이 나타나 있습니다.’(龐居士坐次, 問靈照云, ‘古人道, 「明明百草頭, 明明祖師意.」 你作麽生會?’ 照云, ‘這老漢, 頭白齒黃, 作這箇見解.’ 居士云, ‘你作麽生?’ 照云, ‘明明百草頭, 明明祖師意.’)”
  142. 142)앞의 주석 81 참조.
  143. 143)상종相宗 : 제법의 현상을 주요 연구 대상으로 하는 불교 종파. 당나라 때 현장玄奘이 전한 유식설唯識說에 근거하여 성립된 학파이다. 법상종法相宗이라고도 한다. 현장이 한역한 『成唯識論』을 주요 사상적 근거로 삼고 여타의 유식 관계 경론을 함께 참조하여 연구함으로써 성립된 체계적인 사상을 가진 종파를 법상종이라고 한다.
  144. 144)성종性宗 : 규봉 종밀圭峯宗密이 교판한 대승 삼종 중 하나. 법성종法性宗이라고도 한다. 모든 중생의 마음이 결코 번뇌와 미혹을 끊음으로 말미암아 청정한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본래부터 청정하다고 주장한다.
  145. 145)『都序』 권하1(T48, 407c23) 참조.
  146. 146)세 가지~돈오점수에 짝짓는다 : 규봉 종밀의 칠대돈점七對頓漸 참조.
  147. 147)『法集別行錄節要科目幷入私記』(H10, 204a8).
  148. 148)그 종지는~것이 특징이다 : 『禪家龜鑑』(H7, 644c13), “조동의 종지를 알고자 하는가? 부처와 조사가 태어나기 이전의 공겁까지 벗어난 소식이니, 정위正位나 편위偏位 중 어디에도 떨어지지 않고 유와 무를 자유롭게 오가는 기틀이다.(要識曹洞宗麽? 佛祖未生空劫外, 正偏不落有無機.)”;『洞山良价語錄』(T47, 520b7);『人天眼目』 권3 「曹洞宗」(T48, 313c8);『五家宗旨纂要』 권중(X65, 266b5).
  149. 149)그 종지는~것이 특징이다 : 『禪家龜鑑』(H7, 644c8), “임제의 종지를 알고자 하는가? 마른하늘에 벼락 치고 펀펀한 땅에 물결을 일으킨다.(要識臨濟宗麽? 靑天轟霹靂, 平地起波濤.)”;『人天眼目』 권2 「臨濟門庭」(T48, 311b8) 및
    c5).
  150. 150)『禪門拈頌說話』 147칙(H5, 150b5). 앞의 주석 98 참조.
  151. 151)칼끝에 오히려~문이 없다 : 『人天眼目』 권2(T48, 313b11).
  152. 152)그 종지는~것이 특징이다 : 『禪家龜鑑』(H7, 644c16), “칼끝에 오히려 살아날 길이 있고 철벽에는 파고들어 갈 문이 없다.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말들을 뒤집어엎어 드러내고 고착된 범상한 견해들을 여지없이 잘라 내 버린다. 번개같이 빨라서 사량 분별로는 미칠 수 없고, 불길처럼 거세게 타오르니 어찌 한곳에 안주하는 것을 용납하겠는가! 운문의 종지를 알고자 하는가? 주장자는 하늘 높이 뛰어오르고 잔盞 속에서는 여러 부처가 설법한다.(劒鋒有路, 鐵壁無門. 掀翻露布葛藤, 剪却常情見解. 迅電不及思量, 烈焰寧容湊泊! 要識雲門宗麽? 柱杖子跳上天, 盞子裏諸佛說法.)”;『人天眼目』 권2 「雲門門庭」(T48, 313b3).
  153. 153)그 종지는~잠자는 듯하다 : 위앙종에 대한 오조 법연五祖法演과 설당 도행雪堂道行의 평가를 취한 말. 『人天眼目』 권6 「五宗問答」(T48, 330c14), “위앙종:오조는 ‘조각난 비석이 옛길에 나뒹군다.’고 하였고, 수산首山은 ‘서로의 기틀이 암암리에 원만하게 합하였다.’고 하였으며, 정당正堂은 ‘눈앞에 다른 길은 없다.’고 하였고, 호국護國은 ‘앞으로 밀지도 않지만 뒤로 물러나지도 않는다.’고 하였으며, 설당은 ‘뿔 없는 무쇠 소가 소실에서 잠을 잔다.’고 하였다.(潙仰宗:祖云, ‘斷碑橫古路.’ 山云, ‘暗機圓合.’ 堂云, ‘目前無異路.’ 國云, ‘推不向前, 約不退後.’ 雪云, ‘無角鐵牛眠少室.’)”;『禪家龜鑑』(H7, 645a2), “스승이 부르고 제자가 화답하여 아버지와 아들이 일가를 이룬 격이다. 옆구리에는 글자를 새기고 머리에는 뿔이 높이 솟아났으며, 방 안에서 학인을 점검하면 사자의 허리마저도 끊어진다. 사구四句도 여의고 백비百非의 방법도 버리고 한 방으로 모두 부숴 버리며, 두 개의 입에 혀 하나도 없이 굽이굽이 구슬을 잘도 꿴다. 위앙의 종지를 알고자 하는가? 조각난 비석은 옛길에 나뒹굴고, 무쇠 소는 소실에서 잠을 잔다.(師資唱和, 父子一家. 脇下書字, 頭角崢嶸, 室中驗人, 獅子腰折. 離四句絶百非, 一搥粉碎, 有兩口無一舌, 九曲珠通. 要識潙仰宗麽? 斷碑橫古路, 鐵牛眠少室.)”
  154. 154)그 종지는~분명하게 나타낸다 : 『禪家龜鑑』(H7, 645a8), “말 속에 여운이 남아 있고, 구절 속에 칼날이 감추어져 있다. 청정한 의식(髑髏)으로써 항상 세계와 접하고, 코로 가풍을 모색한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와 달빛 드리운 물결에 이르기까지 그 모두가 진심眞心을 드러내고, 푸른 대나무와 노란 꽃도 미묘한 진리를 분명하게 나타낸다. 법안의 종지를 알고자 하는가? 바람은 조각구름을 불어 산 너머로 돌려보내고, 달은 흐르는 물에 섞여 다리 아래를 지나네.(言中有響, 句裏藏鋒. 髑髏常干世界, 鼻孔磨觸家風. 風柯月渚, 顯露眞心, 翠竹黃花, 宣明妙法. 要識法眼宗麽? 風送斷雲歸嶺去, 月和流水過橋來.)”
  155. 155)마조의 할이 사람을 죽이는 칼이 되기도 했다가 사람을 살리는 검이 되기도 하며 자유자재로 긍정과 부정을 맞바꾸어 가며 학인을 이끄는 대기대용大機大用이었다는 의미이다.
  156. 156)『禪門拈頌說話』 181칙(H5, 182a22), “그렇다면 백장과 황벽은 모두 마조의 일할一喝을 빈틈없이(親) 이어받은 것이다. 왜 그런가? 황벽이 ‘만약 마조의 법을 잇는다면, 훗날 우리의 후손들을 망칠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은 다른 뜻이 아니라 다만 대용만을 밝혔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만약 마조의 일할을 빈틈없이 이어받지 않았다면, 어떻게 대기대용이라고 하겠는가? 그러므로 백장은 대기만 얻었을 뿐이지만 더 이상 대용이 필요하지 않았으며, 황벽은 대용만 얻었을 뿐이지만 더 이상 대기가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수단이라곤 전혀 모르는 사람들은 말하기를 ‘대기 중에 대용이 있고, 대용 중에 대기가 있다.’라고 한다.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떻게 꿈엔들 백장과 황벽의 경계를 알겠는가? 이렇게 결정적인 전기가 되는 순간을 맞아서는 옛사람도 그저 ‘사람을 죽이는 칼(殺人刀)이요 사람을 살리는 검(活人劒)이다.’라고 말했을 뿐이다.(然則百丈黃蘗, 莫不親承馬祖一喝. 何故? 黃蘖云, ‘若承嗣馬祖, 已後喪我兒孫.’ 此無他, 但明得大用故云耳. 若不親承馬祖一喝, 何名大機大用? 故百丈只得大機, 更不要大用;黃蘖只得大用, 更不要大機. 有一般無巴鼻地道, ‘大機中有大用, 大用中有大機.’ 若伊麽, 何曾夢見百丈黃蘗? 到這時節, 古人, 只道得箇殺人刀活人劔.)”
  157. 157)앞의 주석 18 참조.
  158. 158)앞의 주석 30 참조.
  159. 159)『都序』 권하(T48, 407b1), “三敎三宗, 是一味法. 故須先約三種佛敎證三宗禪心, 然後禪敎雙忘, 心佛俱寂, 俱寂卽念念皆佛, 無一念而非佛心, 雙忘卽句句皆禪, 無一句而非禪敎. 如此則自然聞泯絶無寄之說, 知是破我執情, 聞息妄修心之言, 知是斷我習氣. 執情破而眞性顯, 卽泯絶是顯性之宗, 習氣盡而佛道成, 卽修心是成佛之行.”
  160. 160)삼종三宗 : 종지나 방법에 따라 선을 세 가지로 나눈 것. 종밀宗密은 식망수심종息妄修心宗ㆍ민절무기종泯絶無寄宗ㆍ직현심성종直顯心性宗 등으로 분류하였다. 『都序』 권상2(T48, 402b17), “선의 삼종은 첫째 식망수심종, 둘째 민절무기종, 셋째 직현심성종 등이다.……식망수심종:중생이 비록 본래부터 불성을 가지고 있지만 무시이래의 무명이 덮고 있어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생사로 윤회한다고 주장한다.……그러므로 반드시 종사의 언교에 의지하여 대상을 등지고 마음을 관하여 망념을 그쳐야 한다. 망념이 다하면 깨닫게 되어 알지 못하는 것이 없게 된다.……민절무기종:범부와 성인 등의 법이 모두 몽환과 같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 본래 공적하여 지금에 와서야 없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선의 이치를 참구한다는 이들은 모두 이러한 말을 궁극적 경지에 이른 것이라 하지만 이 종파는 다만 이 말만을 법으로 삼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른다. 하택ㆍ강서ㆍ천태 등의 문하에서도 이 도리를 말하지만 종지로 삼지는 않는다. 직현심성종:일체법은 유이거나 공이거나 모두 진성眞性일 뿐이라고 주장한다.(禪三宗者, 一, 息妄修心宗, 二, 泯絶無寄宗, 三, 直顯心性宗.……初, 息妄修心宗者, 說衆生雖本有佛性, 而無始無明覆之不見故, 輪迴生死.……故須依師言敎, 背境觀心, 息滅妄念. 念盡卽覺悟, 無所不知.……二, 泯絶無寄宗者, 說凡聖等法, 皆如夢幻, 都無所有, 本來空寂, 非今始無.……汎參禪理者, 皆說此言, 便爲臻極, 不知此宗不但以此言爲法. 荷澤江西天台等門下, 亦說此理, 然非所宗. 三, 直顯心性宗者, 說一切諸法, 若有若空, 皆唯眞性.)”
  161. 161)『書狀』 권26 「答富樞密」(T47, 921b1), “예로부터 큰 지혜를 가진 이들은 지해를 짝으로 삼고 지해를 방편으로 삼으며, 지해에서 평등한 자비를 행하고 지해에서 갖가지 불사를 행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마치 용이 물을 만나 의기意氣가 충천하고 호랑이가 산에서 맹위를 떨치듯이 언제든 지해를 번뇌로 여기지 않았으니 지해가 일어날 때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지해가 일어난 때를 알고 있다면 이 지해가 곧 해탈의 장이며 생사를 벗어날 순간이기도 합니다. 이미 해탈의 장이요 생사를 벗어날 순간이라면 지해 자체는 적멸하며, 지해가 적멸하고 보면 지해인 줄 알아챈 자도 적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從上大智慧之士, 莫不皆以知解爲儔侶, 以知解爲方便, 於知解上行平等慈, 於知解上作諸佛事. 如龍得水, 似虎靠山, 終不以此爲惱, 只爲他識得知解起處. 旣識得起處, 卽此知解, 便是解脫之場, 便是出生死處. 旣是解脫之場, 出生死處. 則知底解底當體寂滅, 知底解底旣寂滅, 能知知解者, 不可不寂滅.)”
  162. 162)『禪家龜鑑』(H7, 645b24), “이와 같은 법은 비단 임제의 종풍일 뿐만 아니라 위로는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아래로는 중생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본분에 갖추고 있는 것이니, 이것을 벗어나 법을 설하면 모두 망령된 말일 뿐이다.(此等法, 非特臨濟宗風, 上自諸佛, 下至衆生, 皆分上事, 若離此說法, 皆是妄語.)”;『禪門五宗綱要』(H9, 461c10);『禪文手鏡』 「臨濟三句圖說」(H10, 514c20).
  163. 163)완당阮堂 김정희金正喜~지극히 닮았으므로 : 중국의 설봉雪峯이 그린 달마 대사 그림이 완당 김정희의 집에 들어왔는데, 보는 사람들마다 백파와 비슷하다 하였다고 한다. 『朝鮮佛敎通史』 「白坡大師略傳」;『阮堂全集』 권6 「白坡像贊 竝序」 참조.
  164. 164)흐르는 물이~과거세의 몸이로다 : 흐르는 물이나 매월 차고 기우는 달이나 변화하는 존재인 동시에 항상 그러한 존재이기도 하다. 물은 흘러가 다시 돌아오지 않지만 눈앞에 흐르는 물은 늘 그대로인 듯 생생하고, 달은 매일 밤 뜨지만 날마다 달마다 크기와 높이를 달리하며 변해 간다. 이렇게 일정한 듯하지만 변화하는 물상에서 달마와 백파의 닮은 모습을 떠올린 시구로 보인다.
  165. 165)삼절三絶 : 달마 대사, 백파 긍선, 완당 김정희, 세 사람을 일컬은 말로 보인다.
  166. 166)『朝鮮佛敎通史』 下編 「白坡手鏡配對三句」(B31, 772a12), “有此三絶, 聳觀千古, 垂裕後昆, 孰不蒙賜云云, 此乃白坡法孫雪竇有炯和尙, 讚美其師之言也.” ‘수유후곤垂裕後昆’은 후손에게 덕행을 많이 남겨 준다는 뜻이다. 『書經』 「仲虺之誥」, “의로 일을 바로잡고 예로 마음을 바로잡아 후세에 덕행을 남겨 주어야 한다.(以義制事, 以禮制心, 垂裕後昆.)”
  167. 167)『臨濟語錄』(T47, 501c25), “ ‘도를 배우는 이들이여, 진불眞佛은 형상이 없고, 진도眞道는 일정한 격식이 없으며, 진법眞法은 바탕이 되는 모양이 없다. 이 세 법은 혼융되어 한곳에 화합하여 있어 분별해도 구분할 수 없으니 아득하여 종잡을 수 없는 업식을 가진 중생이라 부른다.’ ‘진불ㆍ진법ㆍ진도란 어떤 것입니까? 가르쳐 주십시오.’ ‘불佛이란 마음이 청정한 것이요, 법法이란 마음의 광명이요, 도道란 어느 곳에서나 장애가 없는 청정한 광명이니, 세 가지가 하나이며 모두 헛된 이름일 뿐 참으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참되고 바르게 도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한 생각하는 찰나마다 마음에 틈이 생기거나 끊어짐이 없을 것이다. 달마 대사가 인도에서 온 이래로 단지 남의 말에 유혹되지 않는 사람만을 찾았을 뿐이다. 후에 2조를 만났는데 2조가 한마디 말에 깨닫고는 이전까지 쓸데없는 공부를 하였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산승이 지금 보인 견처見處는 불조와 다르지 않다. 제1구에서 터득하면 불조의 스승이 될 만하고, 제2구에서 터득하면 인천의 스승이 될 만하며, 제3구에서 깨달으면 자기 자신도 구제하지 못한다.’(‘道流, 眞佛無形, 眞道無體, 眞法無相. 三法混融, 和合一處, 辨旣不得, 喚作忙忙業識衆生.’ 問, ‘如何是眞佛眞法眞道? 乞垂開示.’ 師云, ‘佛者, 心淸淨是;法者, 心光明是;道者, 處處無礙淨光是, 三卽一, 皆是空名而無寔有. 如眞正學道人, 念念心不間斷. 自達磨大師從西土來, 秖是覓箇不受人惑底人. 後遇二祖, 一言便了, 始知從前虛用功夫. 山僧今日見處, 與祖佛不別. 若第一句中得, 與祖佛爲師;若第二句中得, 與人天爲師;若第三句中得, 自救不了.’)”;『禪文手鏡』 「向上本分眞如」(H10, 515a23).
  168. 168)동체삼보同體三寶 : 일체삼보一體三寶 또는 동상삼보同相三寶라고도 한다. 세 종류의 삼보(同相三寶ㆍ別相三寶ㆍ住持三寶) 중 하나. 곧 불법승 삼보는 그 명칭은 분명히 셋이지만 그 체성體性은 하나임을 밝힌 것이다. 『大乘義章』 권10(T44, 657a4), “일체란 무엇인가? 이를 나누어 분석하면 대략 세 가지 뜻이 있다.……둘째, 상相을 깨뜨리고 공의 이치에서 삼보를 논하면, 사事는 다르지만 체體는 공이어서 다르지 않으므로 일체라고 하며, 또한 동체라고도 한다.(一體如何? 於中分別, 略有三義.……二, 就破相空理以論三寶, 事別體空不殊, 故名一體, 亦名同體.)”
  169. 169)이렇게 세~일착자一着子라고 하니 : 『少林通方正眼』(H10, 630b20), “또한 이理와 기氣의 원만한 융합은 동일한 시간으로서 전후가 따로 없기 때문이다. 이 이理와 기가 원만하게 융합한 자리는 삼교에서 개념을 세운 것이 다르니, 유교에서는 일태극一太極이라 하고, 도교에서는 천하모天下母라 하고, 선종에서는 일착자라 한다. 교학에는 여러 개념이 있는데, 『화엄경』에서는 일법계一法界, 『능엄경』에서는 묘진여妙眞如, 『법화경』에서는 불지견佛知見, 『원각경』에서는 일원각一圓覺이라고 한다.(且理與氣圓融, 一時無前後故. 此理氣圓融處, 三敎立名不同, 儒謂之一太極, 老謂之天下母, 禪謂之一着子. 敎有多名, 華嚴名一法界, 楞嚴名妙眞如, 法華名佛知見, 圓覺名一圓覺.)”
  170. 170)이 세 가지 도장의 비유는 원오의 스승 설두 중현雪竇重顯이 제기한 적이 있다. 『雪竇語錄』 권5 「宗門三印」(T47, 702b15) 참조. 원오는 다른 곳에서 보인 문답에서 이 뜻을 다시 나타낸다. 『圜悟語錄』 권7(T47, 744b17), “ ‘하나의 도장을 진흙에 찍는다는 것은 어떤 뜻입니까?’ ‘발꿈치 아래에 문드러진 골동품을 밟고 있구나.’ ‘하나의 도장을 물에 찍는다는 것은 어떤 뜻입니까?’ ‘입만 적시려다 온몸이 물에 빠져 버리는 격이다.’ ‘하나의 도장을 허공에 찍는다는 것은 어떤 뜻입니까?’ ‘머리 뒤로 만 길 크기의 원만한 광명이 생겼구나.’ ‘이 세 가지는 하나의 도리입니까? 아니면 서로 다른 뜻입니까?’ ‘요모조모 점치듯이 헤아리고 있구나!’(進云, ‘如何是一印印泥?’ 師云, ‘脚跟下爛骨董地.’ 進云, ‘如何是一印印水?’ 師云, ‘沒嘴浸却.’ 進云, ‘如何是一印印空?’ 師云, ‘腦後圓光萬丈長.’ 進云, ‘爲復一理? 爲復二義?’ 師云, ‘且鑽龜打瓦!’)”;『碧巖錄』 25칙 「本則評唱」(T48, 166a6), “만일 작가 선지식에게 가서, 삼요어三要語로 허공에 도장을 찍고, 진흙에 도장을 찍고, 물에 도장을 찍어서 그(작가 선지식)를 시험하면, 곧 모난 나무로 둥근 구멍을 막는 듯하여 들어맞을 리가 없을 것이다.(若到作家面前, 將三要語, 印空印泥印水驗他, 便見方木逗圓孔, 無下落處.)” 세 가지 선법을 어느 유형으로 확정 짓지 않고 모두 평등하게 자료로 수용하는 방식이 삼종선의 틀에서 시종일관 우열 관계를 유지하는 이 논쟁자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납자의 풍모이다.
  171. 171)『禪門綱要集』 b8), “風曰, ‘夫祖師心印, 亦名諸佛法印. 今以三要爲文, 故稱三要印, 其實則達摩所傳無文印字也.’ ”
  172. 172)『禪門綱要集』 a20).
  173. 173)『法華義疏』 권8(T34, 572b19), “그때 회좌에 두 종류의 근연根緣이 있었다. 하나는 성문을 구하는 부류이고 다른 하나는 연각을 구하는 부류이다. 성문을 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사제법四諦法을 설하고, 연각을 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십이인연법을 설한다. 그러므로 『법화경』 「신해품」에서 ‘은밀하게 두 사람을 파견한다.’라고 한 말은 이것을 말한 것이다.(時坐有二種根緣. 一求聲聞, 二求緣覺. 爲求聲聞, 說四諦;爲求緣覺, 說十二因緣. 故信解品云, ‘密遣二人.’ 卽其事也.)”
  174. 174)『大慧語錄』 권20 「示無相居士」(T47, 894b17), “상사가 도에 대하여 들으면 마치 도장을 허공에 찍는 것과 같고, 중사가 도에 대하여 들으면 마치 도장을 물에 찍는 것과 같으며, 하사가 도를 들으면 마치 도장을 진흙에 찍는 것과 같다. 이 도장과 허공ㆍ물ㆍ진흙은 차별이 없지만 상ㆍ중ㆍ하의 차별된 사람들로 인하여 차별을 두는 것일 뿐이다. 가령 지금 이 도를 가장 빠른 길로 깨닫고자 한다면 도장까지 모조리 부수어 버린 다음에 와서 나를 만나라.(上士聞道, 如印印空;中士聞道, 如印印水;下士聞道, 如印印泥. 此印與空水泥, 無差別, 因上中下之士故, 有差別耳. 如今欲徑入此道, 和印子擊碎, 然後來與妙喜相見.)”
  175. 175)『禪門綱要集』 a22).
  176. 176)『維摩詰所說經』 「佛國品」(T14, 538a4), “부처님께서는 동일한 음성으로 법을 설하지만, 중생은 부류에 따라 각각의 방식으로 이해한다.……부처님께서는 동일한 음성으로 법을 설하지만, 중생들 각각이 이해한 수준에 따라 듣는다.(佛以一音演說法, 衆生隨類各得解.……佛以一音演說法, 衆生各各隨所解.)”
  177. 177)구두성색口頭聲色은 내용이 없이 말뿐인 말, 입으로만 설명하고 알맹이가 없는 것을 말한다. 성색은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등 여섯 가지 객관 대상에서 이 두 가지를 들어 대표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正法眼藏』 권3(X67, 625a11), “대위수가 말하였다. ‘가련타, 저 학인은 상대(鳥窠道林)의 구두성색으로 평생을 감당할 수 있다고 오인하고 있을 뿐, 자기의 광명이 천지를 뒤덮고 있는 것은 알지 못하는구나.’(大潙秀云, ‘可惜, 遮僧認佗口頭聲色以當平生, 不知自己光明, 蓋天蓋地.’)”
  178. 178)『禪門綱要集』 a2), “아, 어리석은 이는 식견이 거칠고 가벼워서 알맹이가 없는 말뿐인 말을 진실의 언구라고 여기기 때문에 향상구向上句니, 나변구那邊句니, 정구正句니, 승구勝句니 하는 등의 말을 듣기라도 하면 마음속으로 그것을 기특하게 여겨 특별한 법이라 생각한다. 어찌 불조와 선지식이 말한 언구 하나하나가 목인이 노래하고 손뼉 치거나 타오르는 화로에 떨어진 한 점 눈송이와 같아서 진실로 분별할 수 없음을 알 수나 있겠는가.(噫, 凡愚識見麤浮, 只認得口頭聲色, 謂之言句, 故見說向上句, 那邊句, 正句, 勝句之類, 心奇特之, 將謂別法. 夫豈知祖佛善知識, 所發言句一一, 如木人唱拍, 烘爐點雪, 實不可擬議.)”
  179. 179)비로자나불 이상으로 향상하는 경지(毘盧向上) : 더 이상의 지위가 없는 비로자나불의 경지 또한 타파하여 그에 머물지 않는 본분사를 나타낸다.
  180. 180)『禪門綱要集』 c4).
  181. 181)『禪門綱要集』 a12).
  182. 182)『禪門綱要集』 a14).
  183. 183)『禪門綱要集』 c7).
  184. 184)『景德傳燈錄』 권13 「風穴延沼傳」(T51, 302b22), “풍혈이 또 영주의 아내衙內로 가서 법좌에 올라앉아 대중에게 말하였다. ‘조사의 마음 도장(心印)은 무쇠 소의 기틀과 흡사해서 찍었다 떼면 문양이 남고 찍은 그대로 있으면 문양이 문드러진다. 가령 떼지도 않고 그대로 있지도 않아야 한다고 하면 찍어야 옳은가, 찍지 않아야 옳은가? 말해 볼 사람 있는가?’ 그때 노피盧陂 장로가 나와서 물었다. ‘제가 무쇠 소의 기틀을 가지고 있으니 스님께서는 도장을 찍지 마시기 바랍니다.’ ‘고래를 낚아서 바닷물을 맑게 만드는 일에 익숙했었는데 도리어 진흙 모래 속에서 몸을 굴리는 개구리를 보니 안타깝구나.’……노피 장로가 우두커니 생각에 잠겨 있자 풍혈이 할을 내지르고 말하였다. ‘장로는 어째서 망설임 없이 말하지 못하는가?’ 노피 장로가 무언가 말하려고 하자 풍혈이 불자로 한 대 때리며 말하였다. ‘화두를 기억하고는 있는가? 한번 말해 보라.’ 노피가 입을 열려는데 풍혈이 또 불자로 때렸다.(師又赴郢州衙內, 昇座, 示衆云, ‘祖師心印, 狀似鐵牛之機, 去卽印住, 住卽印破. 秖如不去不住, 印卽是, 不印卽是? 還有人道得麽?’ 時有盧陂長老出問, ‘學人有鐵牛之機, 請師不搭印.’ 師云, ‘慣釣鯨鯢澄巨浸, 却嗟蛙步馱泥沙.’……陂佇思, 師喝云, ‘長老何不進語?’ 陂擬議, 師打一拂子云, ‘還記得話頭麽? 試擧看.’ 陂擬開口, 師又打一拂子.)”;『碧巖錄』 38칙
    c9), “풍혈 연소가 영주의 아내에서 상당법문을 하였다. ‘조사의 심인은 무쇠 소의 기틀과 흡사해서 떠나면 각인이 남고, 바른 명령을 행하라. 잘못되었다. 머물면 각인이 파괴된다. 잘못을 다시 범하면 용서하지 않는다. 바른 명령이 행해지는 때를 지켜보라. 찰! 바로 때렸다. ’(風穴在郢州衙內, 上堂云, ‘祖師心印, 狀似鐵牛之機, 去卽印住, 正令當行. 錯. 住卽印破. 再犯不容. 看取令行時. 拶! 便打. ’)”;『圜悟語錄』 권5(T47, 733c26), “ ‘조사의 마음 도장(心印)은 그 특징이 마치 무쇠 소의 기틀과 같아서 찍고 떼어 내면 도장 무늬가 남고, 그대로 두면 도장 무늬가 부서진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본분을 깨닫지 못한 납승은 어떻게 찍어야 합니까?’ ‘바로 사리闍黎 그대 자신이다.’ ‘모든 조사들의 콧구멍이 모두 화상의 한 꼬챙이에 뚫렸지만 화상 자신의 콧구멍은 어떤 사람에 의하여 뚫립니까?’ ‘불과佛果를 비방하지 마라.’(進云, ‘祖師心印, 狀似鐵牛之機, 去卽印住, 住卽印破. 只如無鼻孔衲僧, 作麽生印?’ 師云, ‘便是闍黎.’ 進云, ‘天下祖師鼻孔, 盡被和尙一串穿却, 未審和尙鼻孔被什麽人穿?’ 師云, ‘莫謗佛果好.’)”
  185. 185)『禪門綱要集』 c17).
  186. 186)『禪門綱要集』 a14).
  187. 187)낙초지담落草之談 : 운문 문언의 말에 따른다. 숲(草)은 번뇌 망상의 경계를 나타낸다. 이곳에 떨어져서 전하는 이야기(落草之談)란 그 번뇌의 경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그 수준에 맞도록 기준을 낮추어서 전하는 말을 가리킨다. 번뇌의 경계에서 벗어나 본분사를 직접 가리킨다는 뜻의 출초담出草談과 대칭되는 말이다. 『雲門廣錄』 권중(T47, 554a4), “옛날부터 덕이 높은 스님들은 모두 자비심 때문에 번뇌의 숲에 떨어져서 전하는 이야기를 두었으니, 사람들이 하는 말에 따라 그 사람의 수준을 파악했던 것이다. 만일 번뇌의 숲을 벗어나는 이야기라면 이렇게 하지 않는다. 이렇게 한다면 이는 쓸모없이 거듭 해설하는 말이 될 뿐이다.(古來老宿, 皆爲慈悲之故, 有落草之談, 隨語識人. 若是出草之談, 卽不與麽. 若與麽, 便有重話會語.)” 『정선 공안집』 1(p.517) 주석 10 참조.
  188. 188)『禪門綱要集』 a7).
  189. 189)『禪門綱要集』 b17).
  190. 190)『禪文手鏡』 「義理禪三句頌」(H10, 515c11).
  191. 191)『禪門綱要集』 b14), “비춤은 안을 비추어 통하고, 작용은 밖으로 작용하여 드러난 것이 마치 봉화가 성안에서 변고를 급히 알려 변방에서 전쟁에 철저히 대비함과 같다.……비춤과 작용은 요要이며 제1구에 해당하고, 권權과 실實은 현玄이며 제2구에 해당하고 또 제3구에도 해당한다.(照, 照通於內, 用, 用現於外, 如烽火耿急城中, 興戎塞上.……照用是要, 當第一句, 權實是玄, 當第二句, 又當第三句.)”
  192. 192)『禪門綱要集』 b20);『禪門四辨漫語』(H10, 822c3).
  193. 193)『禪門拈頌說話』 181칙(H5, 182a23).
  194. 194)『禪門綱要集』 b4), “청풍 법사가 말하였다. ‘구句는 언구라고 할 때의 구이니 구는 차별을 설명한 것이다. 현玄은 유현하다는 뜻의 현이니 현은 분별할 수 없는 것이다. 요要는 요점을 찌른다고 할 때의 요이니 요는 번다한 데에 있지 않다. 현과 요는 구에 있고, 권權과 실實은 현에 있으며, 조照와 용用은 요에 있다. 각각 마땅한 점을 가지고 있으니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風曰, ‘句言句之句, 句詮差別;玄幽玄之玄, 玄不可辨;要省要之要, 要不在多. 玄要在句, 權實在玄, 照用在要. 各有攸當, 不應莾鹵.’)”
  195. 195)『禪門綱要集』 c11).
  196. 196)천태종天台宗의 근본 교설인 개권현실開權顯實을 말한다. 근기根機를 기준으로 밝히면 개삼현일開三顯一이라 한다. 곧 삼승三乘이라는 방편교를 열고 나서 일승一乘의 진실을 드러내는 맥락을 가리킨다. 개근현원開近顯遠 또는 개적현본開迹顯本이라고도 한다. 이는 모든 방편의 교법(迹門)은 구원성불久遠成佛이라는 본문本門을 가리키는 말이며, 『法華經』 전체의 교설을 천태의 관점에서 압축적으로 나타낸 법이다.
  197. 197)앞 구절의~드러낸 것이다 : 이 구절은 『禪門綱要集』에 보이지 않으며 달리 전거를 찾지 못하였다.
  198. 198)『禪門綱要集』 c18).
  199. 199)고탑주古塔主 : 천복 승고薦福承古(?~1045)를 가리킨다. 운문 문언의 말에서 홀연히 깨달았으나 명성을 구하지 않고 운거 도응雲居道膺의 탑이 있는 곳에 거처하였다. 사방에서 배우는 이들이 몰려들었고 승고를 고탑주라 불렀다.
  200. 200)체體ㆍ구句ㆍ현玄 : 『法集別行錄節要私記解』(H9, 560b3), “옛날의 선사가 판석한 체體ㆍ구句ㆍ현玄 세 가지는 모두 제2구 가운데 일이다. 삼구로 말하자면 불조가 제시한 것은 교이기도 하고 선이기도 하며 모두 제3구 가운데 일이다.(古師所判, 體句玄三, 皆第二句中事也. 若以三句言之, 佛祖所示, 若敎若禪, 皆第三句中事也.)”
  201. 201)영략影畧은 영략호현影略互顯의 줄임말로, 한편에서 생략한 것을 다른 한편에서 드러내고, 다른 한편에서 생략한 것을 한편에서 드러냄으로써 양쪽을 비추고 합하여서 전체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말하는 방식이다. 『俱舍論記』 권1 「分別界品」(T41, 33a1), “광光과 명明이 한 쌍의 대를 이룰 경우 명은 은은한 빛을, 광은 눈부신 빛을 함의한다. 명에 치우쳐 말하더라도 그 은은한 빛으로써 눈부신 빛을 드러내는 것이다. 영影과 암闇이 한 쌍의 대를 이룰 경우 영은 옅은 어둠을, 암은 짙은 어둠을 함의한다. 암에 치우쳐 말하더라도 그 짙은 어둠으로써 옅은 어둠을 드러내는 것이다.(光明爲一對, 明輕光重. 偏言明者, 擧輕以顯重;影闇爲一對, 影輕闇重. 偏言闇者, 擧重以顯輕.)”
  202. 202)『禪門綱要集』 c14), “청풍 법사가 말하였다. ‘어떤 이가 삼요인三要印을 물에 찍으면 완연히 물결을 이루니 이름을 바꾸어 삼현이라 한다. 현은 정색正色이 아닌 색이 뒤섞인 것이다. 푸른빛이 도는 흰색을 검푸른색 창蒼이라 하고, 검푸른색 창蒼을 현玄이라 한다. 푸른빛과 흰색과 검은색, 세 가지가 뒤섞여 볼 수는 있으나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을 가지고 비유하여 현이라 한 것이다.’(風曰, ‘或提三要印, 直向水上搭却, 宛成文彩, 轉名三玄. 玄雜壞色. 靑白爲蒼, 蒼黑爲玄, 三者混然可見而不可變之之比也.)”
  203. 203)『禪門綱要集』 b2). 『碧巖錄』 56칙 「本則評唱」(T48, 190b15), “이 공안에서는 마음속에 터럭 끝만큼의 도리라도 지어내어 이리저리 분별하는 생각을 품어서는 안 되며 말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하나의 구절로 세 관문을 쳐부술 수 있어 화살 쏜 결과를 거두게 될 것이다. 옳으니 그르니 다투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끝내 찾을 수 없다.……‘화살이 지나간 길이 뚜렷이 남아 있다.’고 한 말은 과녁을 맞히고자 한다면 화살이 날아간 뒤에 그 지나간 흔적이 남을 것이라는 뜻이다. 말해 보라! 어떤 것이 화살이 지나간 뒤에 남은 흔적인가? 반드시 저 스스로가 정신을 차려야만 한다.(這箇公案, 須是胸襟裏不懷些子道理計較, 超出語言之外. 方能有一句下破三關, 及有放箭處. 若存是之與非, 卒摸索不著.……的的分明箭後路, 若要中的, 箭後分明有路. 且道! 作麽生是箭後路? 也須是自著精彩始得.)”;『禪門拈頌說話』
    b15);『人天眼目』 권2 「三句條」(T48, 312a7).
  204. 204)『禪門綱要集』 「雲門三句」(H6, 858a13). 『禪門拈頌說話』
    b19), “덕산 원명 연밀의 송:건곤과 만상들, 지옥 그리고 천당, 만물 낱낱에 모두 진실 그대로 드러나고, 낱낱의 존재 어디에도 상처 하나 없도다. 하늘과 땅이 어김없이 들어맞다.;산악처럼 크고 무거워도, 낱낱이 모두 티끌이라. 그 이상 현묘한 도 말하려 들면, 얼음 녹고 기와 부서지듯 꺾이리. 모든 번뇌 망상의 흐름을 끊다.;뛰어난 말솜씨와 입담으로 묻고, 높거나 낮거나 모자라지 않구나. 또한 병에 적절하게 주는 약처럼, 병증 진단도 시기 알맞아야 하리. 물길이 흐르는 대로 따르고 쫓아가다.;당사자가 제기해 외친 그것, 삼구가 어찌 모두 감싸리오? 누군가 무슨 일이냐 물으면, 남악과 천태라고 대답하리라. 삼구에서 벗어나 별도로 설정하는 한 구절 (德山圓明密頌, ‘乾坤幷萬像, 地獄及天堂, 物物皆眞現, 頭頭惣不傷. 凾蓋乾坤.;堆山積嶽來, 一一盡塵埃. 更擬論玄妙, 氷消瓦解摧. 截斷衆流.;辯口利舌問, 高低惣不虧. 還如應病藥, 診候在臨時. 隨波逐浪.;當人如擧唱, 三句豈能該? 有問如何事, 南岳與天台. 三句外別置一句 ’)” 『人天眼目』 권2 「普安道頌三句」(T48, 312a13)에는 덕산 연밀의 송이 아니라 보안 산도의 송으로 실려 있다. 『看話決疑論』(H4, 734c6), “그러므로 보안 산도 선사는 운문(昭陽)의 이러한 뜻을 이어받아 삼구 이외에 별도로 한 구절을 두고서 ‘당사자의 입장에서 본분을 들어 표현하자면 삼구로 어찌 모두 갖출 수 있겠는가! 본분사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남악과 천태」라고 대답할 것이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천태와 남악 등과 같은 맛없는 이야기(화두)가 삼구 안에 있으면 병통을 타파하는 말에 그치지만, 삼구 밖에 있으면 병통을 타파하는 것이라 하지 않으며, 본분사를 온전히 제기하라고 전한 말인 것이다. 그러므로 장로 종색은 ‘나는 어떤 때는 반으로 찢고 셋으로 쪼갰지만 종문의 본분사를 제기한 적은 없었다. 이제 찢어진 반 토막을 하나로 묶고 쪼개진 셋도 없애어 본분사를 온전히 들어 보일 것이다.’라 하였고, 또한 ‘운문 대사는 어떤 때는 삼구 안에서 법을 설하였고, 어떤 때는 삼구 밖에서 종지를 제기했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알라. 옛사람은 하나의 본보기가 되는 화두를 삼구 안에서 병통을 타파하는 말로 삼기도 했고, 혹은 삼구 밖에서 종지를 온전히 제기하는 구절로 삼기도 했던 것이니, 어찌 요즘 사람들이 경절문의 화두를 오인하여 마치 실타래처럼 꼬인 복잡한 말로 만드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然普安道禪師, 承昭陽之意, 立三句外, 別置一句曰, ‘當人如擧唱, 三句豈能該! 有問如何事, 南嶽與天台.’ 然此天台南嶽等, 無味之談, 在三句內, 則爲破病之言;在三句外, 則非謂破病, 乃全提此事言也. 故長蘆師云, ‘山僧, 有時裂半拆三, 未嘗擧着宗門中事. 如今紐半破三, 全提此事去也.’ 又云, ‘雲門大師, 有時三句內說法, 有時三句外提綱.’ 以是故知, 古人亦以一例話頭, 或爲三句內破病之言, 或爲三句外全提之句, 豈可足怪今時人認徑截門話頭, 成絡索者耶!)”;『從容錄』(T48, 275a27).
  205. 205)‘한 발의 화살’은 과녁에 적중하는 화살처럼 핵심을 찌르는 한마디 말이다. 곧 ‘한 구절로 도에 빈틈없이 딱 들어맞는 것’과 같다. 『禪門綱要集』 「雲門三句」(H6, 858b5), “일촉파삼관에는 세 가지 뜻이 있다. 첫째, 반조하는 지혜를 한 발 화살이라고 하니, 진실로 반조하는 경우에는 셋이니 하나니 하는 이해를 지어내지 않는다. 그러므로 ▣▣을 설할 때는 셋이라는 이름을 쓰지만 반조할 때는 셋이니 하나니 하는 이해를 지어내지 않는다고 하는 것과 같다. 둘째, 삼구 가운데 ▣▣로 본다면 구절마다 일정한 차제가 없어서 하나를 들면 전부 거두어지며 모든 대대를 끊는다. 그러므로 셋째로 별도로 한 구절을 둔 것으로 보면 삼관三關을 시설한 것이 자연히 사라지므로 함개건곤函蓋乾坤ㆍ절단중류截斷衆流ㆍ수파축랑隨波逐浪 가운데 어느 것이 왼쪽이고 오른쪽이며 어느 것이 중간이란 말인가?(一鏃破三關者, 有三義. 一, 返照之智▣一鏃, 若當眞實返照之時, 不作三一解. 故如云, 說▣▣三名字, 在返照之時, 不作三一解. 二者三句中▣▣看, 則句句無定次第, 擧一全收, 絶諸待對. 故三者▣置一句看, 則三關施設, 自然消落故, 然則凾蓋乾▣截斷衆流隨波逐浪, 以何爲左右, 以何中間?)”;『禪門手鏡』 「一鏃破三關有五重」(H10, 521b6).
  206. 206)거일전수擧一全收는 거체전수擧體全收ㆍ거체전섭擧體全攝이라고도 하며 거체전진擧體全眞과도 통하는 말이다. 하나를 들면 여타의 일체가 그것에 다 거두어들여져 포섭된다는 말이다.
  207. 207)귀종 지상歸宗智常의 게송에 나오는 구절. 『景德傳燈錄』 권29 「歸宗至眞禪師智常頌一首」(T51, 451c25) 참조.
  208. 208)배리취사背理就事는 구체적 현상인 색色 또는 사事가 근본적 도리인 공空 또는 이理와 다르지 않으므로 무차별의 이理로부터 차별의 사事로 전개하는 것을 말한다.
  209. 209)체구는 정위正位인~자리를 맞바꾼다(回互) : 이상은 군신오위君臣五位로 푼 내용이다. 동산 양개洞山良价가 정正(平等)과 편偏(差別)을 조합하고 이理를 정위正位에, 사事를 편위偏位에 대응시켜 정위각편正位却偏ㆍ편위각정偏位却正ㆍ정위중래正位中來ㆍ편위중래偏位中來ㆍ상겸대래相兼帶來 등 다섯 가지로 불법의 대의를 정리한 오위설五位說을 그 법사인 조산 본적曹山本寂이 계승하여 정중편正中偏ㆍ편중정偏中正ㆍ정중래正中來ㆍ편중지偏中至ㆍ겸중도兼中到로 다시 이름 붙이고 임금과 신하를 비유로 이를 새롭게 제창한 것이다. 군君은 정위, 신臣은 편위에 해당한다. 『曹山本寂語錄』 권상(T47, 536c24), “학인이 오위군신의 요지를 묻자 답하였다. ‘정위는 공계로서 본래 하나의 그 무엇도 없고, 편위는 색계로서 무수한 형상이 있으며, 정중편은 이理를 등지고 사事로 나아감이요, 편중정은 사事를 버리고 이理로 들어가는 것이요, 겸대는 갖가지 인연에 감응하지만 어떤 유위에도 떨어지지 않으니 오염도 청정도 아니며 정위도 편위도 아니다. 그러므로 텅 비어 현묘한 대도요 집착이 없는 진실한 종지라 한다.’(師因僧問五位君臣旨訣, 師曰, ‘正位卽空界本來無物;偏位卽色界有萬象形;正中偏者, 背理就事;偏中正者, 舍事入理;兼帶者, 冥應衆緣, 不墮諸有, 非染非淨, 非正非偏. 故曰, 虛玄大道, 無著眞宗.)”
  210. 210)모든 말은 궁극적으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지로부터 나오므로 구절이 없는 것으로부터 구절이 있다고 한다.
  211. 211)『正法眼藏』 권3(X67, 631c16), “부모로부터 태어나지 않은 공겁이전, 혼돈이 아직 나뉘지 않은 때의 실정을 정위라고 한다. 흑을 2분 하여 그중 1분은 백인 권상圈相으로 정중편을 삼는다. 도리어 백의 자리로 와서 흑을 설명하지만 흑을 침범하지도 않는다. 흑을 침범한다면 금기에 저촉되는 것이다. 다시 동산의 정중편에 대한 송의 구절을 인용하여, ‘삼경 초야 달 밝기 전’이라 한 것은 회호回互함을 말한다. 다만 삼경이라고만 하였지만, 삼경은 흑이고 초야도 흑이며 달 밝기 전 또한 흑이다. 흑을 말하지 않았으나 ‘삼경 초야 달 밝기 전’이라 하였으니 회호하며 금기에 저촉되지 않았다. 백을 2분 하여 그중 1분은 흑인 권상으로 편중정을 삼는다. 도리어 흑의 자리로 와서 백을 설명하지만 백의 소식을 침범하지 않는다. 편중정 송에 ‘날 밝은 줄 모르고 늦잠 잔 노파가 옛 거울을 비추어 보노라.’라고 한 것은 밝음과 백을 말하지 않았으나 날 밝은 줄 몰랐다는 말과 옛 거울을 말하여 밝음과 백이 회호하며 금기에 저촉되지 않았다. 날 밝은 줄 몰랐다는 것은 어둠 가운데 밝음이요 옛 거울 또한 어둠 가운데 밝음이다. 노파의 머리털은 희니, 머리털이 희다고는 말하지 않았지만 노파를 가리키므로 백은 그 가운데 있다. 백과 회호하기 때문이다. 또 정중래를 설명한다. 송에 ‘무無에는 유有로 통하는 길이 있지만 모든 오염된 티끌과 떨어져 있다.’라고 하였다. 혹은 ‘티끌을 벗어나 있다.’라고도 되어 있다. 모든 언구는 어느 것이나 말이 없는 경지 속에서 나오니 미묘한 근본 도리를 그 사이에 끼고 있다. 정위로부터 오지 않는 것이 없으니 밝거나 어둡거나, 오거나 가거나 모두 종지와 통하는 뜻을 묘하게 그 사이에 끼고 있다. 일위一位가 모두 이 다섯 가지를 갖추고 있는 것이 마치 손에 달린 다섯 손가락이 적지도 남아돌지도 않는 것과 같다. 겸중지는 흑과 백을 겸하고 편과 정을 겸하여 지극한 것이다. 왜 지극하다고 하는가? 마치 사람이 집으로 돌아가는데 아직 이르지 못했지만 곳곳마다 집인 경우와 같다. 특별히 행할 업은 집으로 가는 길 곳곳에 있으니 남에게 전하는 일도 회호하며, 미묘함은 본체 앞에 있다. 겸중도는 앞의 네 가지(四位)를 겸한다. 모두 미묘한 도리를 끼고 정위로 돌아간다. 송에 ‘마땅히 도탄 속으로 돌아가 앉아야 하리라.’라고 하였으니 또한 흑을 말하며 흑과 회호하고, 흑을 말하지 않았지만 도탄이라 한 말에 드러나 있다.(父母未生空劫已前, 混沌未分事, 謂之正位. 以二分黑一分白圈兒爲正中偏. 却來白處說黑底, 又不得犯著黑字. 犯著黑字卽觸諱矣. 更引洞山頌云, 正中偏, ‘三更初夜月明前.’ 謂能回互. 只言三更, 三更是黑, 初夜是黑, 月明前是黑. 不言黑而言三更初夜月明前, 是能回互不觸諱;以兩分白一分黑圈兒爲偏中正. 却來黑處說白底, 而不得犯白底消息. 云, 偏中正, ‘失曉老婆逢古鏡.’ 不言明與白, 而言失曉與古鏡, 是能回互明與白字而不觸諱. 蓋失曉是暗中之明, 古鏡亦是暗中之明. 老婆頭白, 不說白而言老婆, 白在其中矣. 能回互白字故也;又說正中來. 頌云, 正中來, ‘無中有路隔塵埃.’ 或云, ‘出塵埃.’ 謂凡有言句, 皆無中唱出, 便自挾妙了也. 無不從正位中來, 或明或暗, 或至或到, 皆妙挾通宗. 凡一位皆具此五事, 如掌之五指無少無剩;兼中至, 謂兼黑兼白, 兼偏兼正而至. 何謂至? 如人歸家未到而至. 別業乃在途, 爲人邊事亦能回互, 妙在體前;兼中到, 謂兼前四位. 皆挾妙而歸正位. 謂之‘折合歸來炭裏坐.’ 亦是說黑處而回互黑字, 不道黑而言炭.)”;『人天眼目』 권3(T48, 316c8);『五家宗旨纂要』 권중 「洞宗偏正五位」(X65, 266b20).
  212. 212)『看話決疑論』(H4, 734b15).
  213. 213)경절언구徑截言句 : 말이나 구절 등의 무수한 우회의 방편을 다 끊어 버리고 근원으로 가는 가장 빠르고 간명하며 적절한 방법이라는 뜻. ‘경절’은 직절直截ㆍ첩경捷徑(지름길) 등과 같은 뜻이다. 『정선 휴정』(p.235) 주석 440 참조.
  214. 214)『禪門五宗綱要』(H9, 460a11);『禪家龜鑑』(H7, 645a21).
  215. 215)『禪門綱要集』 b2), “裡頭人, 豈臨濟自謂歟. 逢佛說佛, 逢羅漢說羅漢, 逢餓鬼說餓鬼者, 豈棚頭弄傀儡歟.”
  216. 216)『禪門綱要集』 b8), “호월皓月 선객이 물었다. ‘제1구란 어떤 것입니까?’ 청풍 법사가 말하였다. ‘조사의 심인을 제불의 심인이라고도 한다. 이제 이 삼요를 무늬로 삼으므로 삼요인이라 하나, 실제는 달마가 전한 무늬 없는 도장이다. 어떤 이가 이 도장을 들어 허공에 찍으면 어떠한 자취도 없으므로 삼요라고 한다.’(月問, ‘第一句如何?’ 風曰, ‘夫祖師心印, 亦名諸佛法印. 今以三要爲文, 故稱三要印, 其實則達摩所傳無文印字也. 或提此印, 向虛空裏搭破, 了無朕迹, 直名三要.’)”
  217. 217)『禪文手鏡』 「義理禪三句頌」(H10, 516a12), “아라한은 회신멸지灰身滅智하기 때문에 ‘무구無句’에 빠지며, 아귀는 굶주리고 목말라서 미쳐 날뛰기 때문에 ‘유구有句’에 빠지지만, 부처님은 중도中道를 증득하셨기 때문에 중구中句이다. 범부와 성인의 본성이 본래부터 각각 다르다고 여기기 때문에 ‘(범부와 성인을) 나누는 삼구(隔別三句)’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하근기에 속한 사람이 그저 의리선만을 이해하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조사선ㆍ여래선ㆍ의리선의) 삼종선三種禪이 모두 삼구에 있다.(羅漢灰身滅智, 故無句;餓鬼飢渴狂走, 故有句;佛證中道, 故中句. 而凡聖各異, 故爲隔別三句也. 此是下士, 但會義理禪. 是故三禪, 皆在三句中.)” 백파 긍선, 신규탁 옮김, 『선문수경』, p.55 참조.
  218. 218)격별삼구隔別三句 : 백파白坡의 임제삼구臨濟三句에 대한 해석. 임제의 삼요三要와 삼현三玄이 각각 제1구와 제2구에 구비되지만, 제3구는 나한羅漢ㆍ아귀餓鬼ㆍ불佛 등이 무구無句ㆍ유구有句ㆍ중구中句 등으로 서로 분리되어 차별화(隔別)되기 때문에 격별삼구라고 한다. 곧 임제삼구 중 제3구를 백파는 하근중생下根衆生이 근본을 모르고 문자 논리에 잡힌 것이라는 뜻에서 격별삼구라고 하였다. 백파는 『禪文手鏡』에서 임제삼구가 선禪과 교敎의 취지를 모두 갖추고 있다고 높이 평가하고, 그에 대하여 자신의 상세한 해석을 내렸다. 제1구는 조사선의 경지로 사량분별思量分別에 의한 언어의 통로를 용납하지 않는 것이고, 제2구는 여래선의 경지로 방편에서 진실에 드는 것을 말하며, 이것도 조사선과 마찬가지로 격외선格外禪이라고 한다. 그러나 제3구는 언어에 걸린 상태로 새로운 집착을 만들어 낼 뿐 근본을 상실한 논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본분을 실참實參하는 격외선이 아니라 문자상의 이론으로 선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의리선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가산불교대사림』 ‘격별삼구隔別三句’ 항목 참조.
  219. 219)『大方廣佛華嚴經疏』 권14 「菩薩問明品」(T35, 604b22), “연기법에 모두 네 가지 뜻이 있다.……네 번째, 자성이 없으므로 공이라는 것은 곧 일체가 공이어서 자성이 없다는 그 뜻이다. 이런 까닭에 자성이 없이 조건에 따라 일어나므로 공이라면 무견ㆍ단견의 공이 아니니 진공이다. 자성이 없이 조건에 따라 일어나므로 유라면 상견ㆍ유견의 유가 아니니 환유이다. 환유는 불유不有의 유이고 진공은 불공不空의 공이다. 불공의 공이기 때문에 진공眞空이 아니다. 불유의 유이기 때문에 실유實有가 아니다. 공도 아니고 유도 아닌 것이 중도의 뜻이다.(緣起之法總有四義.……四, 無性故空, 卽一切空無性是也. 是以無性緣生故空, 則非無見斷見之空, 爲眞空也. 無性緣生故有, 則非常見有見之有, 是幻有也. 幻有卽是不有有, 眞空卽是不空空. 不空空故, 名不眞空. 不有有故, 名非實有. 非空非有, 是中道義.)”
  220. 220)『大方廣佛華嚴經隨疏演義鈔』 권32(T36, 242a28).
  221. 221)오리사五利使 : 사使는 번뇌의 이칭. 사람의 마음을 부린다는 뜻이다. 열 가지 번뇌 가운데 탐진치만의貪瞋癡慢疑(根本煩惱)는 성질이 둔하므로 오둔사五鈍使라고 하고 나머지는 상대적으로 오리사五利使라 하는데, 유신견有身見ㆍ변집견邊執見ㆍ사견邪見ㆍ견취견見取見ㆍ계금취견戒禁取見 등이 그것이다.
  222. 222)『大方廣佛華嚴經隨疏演義鈔』 권32 「光明覺品」(T36, 242a23), “조건에 따라 존재하는 유(緣有)는 확정된 자성을 가진 유가 아니거늘 하물며 자성이 없는 유를 근거로 하여 어떻게 유라고 확정할 수 있겠는가!……조건에 따르고 자성이 없으니 마치 환술로 나타난 사람(幻化人)과 같다. 환화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환술로 나타난 것은 진실은 아니기 때문에 환유幻有라고도 하고 묘유妙有라고도 한다.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 비유非有를 유라고 하기 때문에 묘유라고 한다. 단상의 견해가 유무로부터 비롯되었다면 유무의 견해가 곧 단상의 견해이다.……소疏에서는 왜 거듭하여 이렇게 덧붙인 것인가? 여기에는 깊은 뜻이 있다. 단상의 견해에는 삿된 종지가 많아 오리사가 변견에 포섭되지만 그 유무의 견해는 바른 법을 통섭한다. 단지 공상空相과 유상有相만으로는 이치에 들어맞지 않는 것은 유무의 견해 때문이다. 이런 유무의 견해에서 궁극적으로 영원히 벗어남은 오직 대보살의 경지일 뿐이다. 그러므로 『정명경』에 ‘법을 설하지만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네. 인연으로 제법이 생겨날 뿐’이라 한 것이다.(今從緣有, 非定性有, 況由無性有, 豈定有耶!……從緣無性, 如幻化人. 非無幻化人, 幻化人非眞, 故云幻有, 亦名妙有. 以非有爲有, 故名妙有. 然斷常見旣由有無, 則有無見卽斷常見.……疏, 何重牒? 此有深意. 斷常二見, 多是邪宗, 卽五利使, 邊見所攝, 其有無見, 通涉正法. 取空有相, 未能契理, 爲有無見. 此有無見, 究竟遠離, 唯大菩薩. 故淨名云, ‘說法不有亦不無, 以因緣故諸法生.’)”
  223. 223)『臨濟語錄』(T47, 497a19). 『人天眼目』 권1 「三玄三要」(T48, 301c24), “선사께서 말씀하셨다. ‘대체로 종승을 주창컨대 하나의 구절에 삼현문을 갖추고 하나의 현문에 삼요를 갖추어야 하니, 권도 있고 실도 있으며, 비춤도 있고 작용도 있다. 그대들은 이 뜻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후에 분양 선소汾陽善昭 화상이 이 말씀을 제기하고 말하였다. ‘어느 것이 삼현삼요의 구절인가?’(師云, ‘大凡演唱宗乘, 一語須具三玄門, 一玄門須具三要, 有權有實, 有照有用. 汝等諸人, 作麽生會?’ 後來汾陽昭和尙, 因擧前話乃云, ‘那箇是三玄三要底句?’)”
  224. 224)임제 의현이 제시한 삼구를 말한다. 『臨濟語錄』(T47, 497a15), “上堂, 僧問, ‘如何是第一句?’ 師云, ‘三要印開朱點側, 未容擬議主賓分.’ 問, ‘如何是第二句?’ 師云, ‘妙解豈容無著問, 漚和爭負截流機.’ 問, ‘如何是第三句?’ 師云, ‘看取棚頭弄傀儡, 抽牽都來裏有人.’ ”;같은 책(T47, 502a5), “若第一句中得, 與祖佛爲師;若第二句中得, 與人天爲師;若第三句中得, 自救不了.”
  225. 225)앞의 주석 194 참조.
  226. 226)앞의 주석 182 참조.
  227. 227)담당 덕붕澹堂德朋(?~1167) : 득명得明이라고도 한다. 절굿공이가 대나무 마디를 가르는 소리를 듣고 깨달았다고 하여 죽통화상竹筒和尙이라고도 부른다. 1153년에 숭선사崇先寺에 주지로 있을 때에 자녕전慈寧殿에 들어가 자녕태후慈寧太后를 위해 심요心要를 두 회에 걸쳐 설하고 법의를 하사받았다.
  228. 228)『禪門綱要集』 c4), “호월 선객이 말하였다. ‘일찍이 담당 덕붕이 「3을 세 번
    이 9인 것과 같이 부처에서 부처로 대대로 전하고 조사에서 조사에게로 전수하였다.」고 한 말을 들었는데 이것을 말한 것이군요.’ 청풍 법사가 말하였다. ‘아홉을 셋으로 묶고, 셋을 하나로 묶지만, 하나도 거두지 않는다. 불조가 장차 무엇으로써 전수하겠는가. 숭재혜는 「모름지기 구ㆍ현ㆍ요 세 가지가 필경에는 완전히 한 덩이로 모두 하나의 기틀임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내가 저 눈먼 자 이야기를 한 것은 옛사람과 만나 보고자 해서이다.’(月云, ‘嘗聞澹堂云, 「見三下三, 三三如九, 佛佛相傳, 祖祖授受」, 夫斯之謂矣.’ 風曰, ‘束九爲三, 束三爲一, 一亦不收. 佛祖將奚以傳受. 崇齋惠云, 「須知句要玄三事, 畢竟㝠然在一機.」 山僧道箇瞎, 欲與古人相見.’)”
  229. 229)앞의 주석 228 참조. 『禪門綱要集』 a13);『禪文手鏡』 「義理禪三句頌」(H10, 516b15).
  230. 230)앞의 주석 194 참조.
  231. 231)앞의 주석 228 참조. 『禪門四辨漫語』(H10, 822b13), “삼요는 조照가 되거나 용用이 되고, 삼현은 권權이 되거나 실實이 되며, 삼구에는 얕은 뜻도 있고 깊은 뜻도 있다. 나아가 하나의 진실을 세 가지로 펼쳐 놓거나 세 가지를 중첩하여 아홉 가지로 늘리고, 아홉 가지를 세 가지로 묶거나 세 가지를 거두어 하나의 진실로 만들기까지 한다. 대체로 이러한 종류가 모두 제3구에서 이치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설명 방식을 버리고 제3구가 될 방법은 없으며, 제3구가 아니면 앞의 두 구절에서의 현과 요를 펼쳐 보일 도리도 없다. 이것이 이 구절(제3구)의 이름을 바꾸어 ‘삼구’라 하는 이유이다.(蓋三要之爲照爲用, 三玄之爲權爲實, 三句之有淺有深. 乃至開一爲三, 疊三爲九, 束九爲三, 收三爲一. 凡此之類, 皆第三句之所詮也. 捨此所詮, 無以爲第三句, 非第三句, 無以宣示上二句之玄要. 此其所以轉名此句爲三句者也.)” 초의 의순, 김영욱 옮김, 『선문사변만어』, pp.65~66 참조.
  232. 232)미생시未生時 : 어떤 조짐도 발생하지 않아 분별할 차별성이 전혀 없는 상태의 소식. 구체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기 이전의 일로서 어떤 언어나 사유 방식으로도 나타내거나 알아차릴 수 없으며 모색할 모든 수단이 끊어진 경지.
  233. 233)말후일구자末後一句子는 모든 구절에 걸리지 않고 자유자재하게 당사자의 본분을 발휘하는 속박 없는 말, 또는 궁극적인 화두 자체를 나타내는 구절을 뜻한다.
  234. 234)황면노자黃面老子 : 부처님을 가리킨다. 부처님의 몸은 황금색의 금색신金色身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칭호이다. 황면구담黃面瞿曇ㆍ황면노黃面老ㆍ황두대사黃頭大士ㆍ황두노黃頭老ㆍ황두黃頭 등이라고도 한다.
  235. 235)『禪門拈頌說話』 1칙(H5, 6c8), “대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궁극적인 한 구절은 말로 표현하기 이전에 벌거벗은 알몸처럼 그 실상을 모조리 드러내었으니, 하늘과 땅 그 어디에나 있고 소리와 색이 모두 그것이다. 황면노자는 이 결정적인 한 수(一著子)를 얻고서 「도솔천을 떠나기도 전에 이미 왕궁에 강림하였고, 모태에서 태어나기도 전에 중생제도를 벌써 마쳤다.」라고 했던 것이다.’ ‘중생제도를 벌써 마쳤다.’라는 이것이 곧 말후구를 나타내는 한 수인 것이다. 곧 이것을 가리켜 말후구를 나타내는 한 수라고 하면 옳지만, 말후구 자체라고 하면 옳지 않다. 산을 가리키며 ‘산인가?’라고 물었을 경우 ‘산’이라 대답하면 옳다. 산에 있는 풀과 나무와 흙과 돌을 모두 들어서 산이라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속의 돌 하나를 가리키며 ‘산인가?’라고 물었을 경우 ‘산’이라 대답하면 옳지 않다. 어떻게 산의 돌 하나를 들어서 산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쓸 수 있겠는가!(大慧云, ‘末後一句子, 聲前露倮倮, 蓋天蓋地, 蓋聲蓋色. 黃面老子, 得箇一著子, 便道云云.’ 已畢則此, 是末後句之一著子也. 謂是末後句之一著則可, 謂是末後句則不可. 指山而問焉曰山乎, 曰山則可. 山有草木土石, 皆擧之也. 指山中之一石, 而問焉曰山乎, 曰山則不可. 何得擧山之一石稱山云者哉!)”;『大慧語錄』 권 8(T47, 842c8).
  236. 236)이 구절은 이 책 서문 격인 글에서도 이미 언급되었다. 앞의 주석 3 참조.
  237. 237)『禪門拈頌說話』 1칙(H5, 6c20), “궁극적인 뜻은 무엇일까? ‘이치가 극치에 이르러 분별과 말(情謂)을 잊었는데, 어떤 말로 비유하고 견줄까? 결국 가을밤의 달은, 움직이는 그대로 눈앞의 시냇물에 떨어진다.’ 비록 결정적인 한 수를 벗어나서 별도로 말후구를 찾더라도 도리어 옛 성인의 뜻을 완전히 등지는 결과가 되지 않겠는가! 옛사람이 ‘말후구를 그대에게 설하노니, 밝음과 어둠이 서로 짝이 되는 소식이라네.’라고 한 말을 모르는가? 그렇다면 최초구와 말후구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은 어떤 것일까? 종사인 선지식이 최초구 속에서 학인의 근기를 점검하려면 도리로는 전혀 통하지 않는 한 구절을 말해 줄 수밖에 없다. 이미 도리로는 전혀 통하지 않는 이상 분명하게 밝힐 여지가 없으므로 배우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제한된 인식으로 무위無爲ㆍ무사無事라 이해하는 경우도 있고, 어떤 이는 더욱 높이 착안하여 종문의 향상이라는 관점에서 주재하는 존재로 여기는데, 대혜가 한 수(一著)라고 한 말이 그것이라 착각한다. 그 나머지 중근기와 하근기의 무리들은 다만 모든 것을 법신法身이라 오인할 뿐이고, 또는 대상 세계로 내려와 그것이 하나의 색色으로 평등한 현상(一色邊事)이라 착각하지만 타당하지 않다. 그러므로 말후구를 가지고서 얕은 곳에서 시작하여 깊은 곳에 이르는 방식으로 깊고 또 더 깊은 곳에 이르러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법에 대한 미세한 속박까지 쓸어 없애고 법인法印을 짊어지도록 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암두는 ‘덕산이 말후구를 이해하지 못했다.’라고 하였고, 대혜는 ‘세존께서 말후구의 한 수를 터득했다.’라고 말했으나, 세존과 덕산이 제시한 한순간의 방편을 진실이라 여긴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것에 잘못을 돌린 이유는 말후구를 원만하게 완성하려는 의도인 것이다. 궁극적인 도리(末後)를 원만하게 완성하므로 말후구라 하지만 원만함의 극치에 이르면 최초구와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말후구를 알고자 한다면 어떤 조짐도 일어나기 이전의 시기를 살펴라.’라고 한다.(畢竟如何? ‘理極忘情謂, 如何話諭齊? 到頭霜夜月, 任運落前溪.’ 雖然離一著外, 別討末後句, 又却不是大辜負先聖哉! 不見古人道, ‘末後句爲君說, 明暗雙雙的時節.’ 且如最初句末後句, 同別如何? 宗師善知識, 若向最初句中對機, 則不過下得沒道理的一句. 旣沒道理, 而無辨白故, 學者以己之局量, 或有作無爲無事會, 或有高著眼, 向宗門向上, 作主宰者, 大慧所謂一著也. 其餘中下之流, 只認得箇法身, 又下而悟得一色邊事, 亦未可定. 則不如末後句, 從淺至深, 以至於深之又深, 使學者, 蕩盡微細法縛, 荷擔法印之爲愈也. 巖頭謂‘德山不會末後句’, 大慧謂‘世尊得末後句之一著’, 非以世尊德山一期方便爲實. 然而歸咎, 只要圓成末後句也. 以末後圓成, 故曰末後句, 至於圓極, 則與最初句, 何以異哉! 故曰, ‘要識末後句, 看取未生時.’)”
  238. 238)『臨濟語錄』(T47, 502a5), “若第一句中得, 與祖佛爲師;若第二句中得, 與人天爲師;若第三句中得, 自救不了.”의 말을 근거로 하여 후대에 사구와 활구의 개념을 덧붙여 재구성한 것이다. 『眞覺國師語錄』(H6, 34b23), “다만 활구를 참구할 뿐 사구를 참구해서는 안 된다. 활구를 참구하여 알아차린다면 영겁토록 잊히지 않을 것이나, 사구에서 알아차린다면 자기 자신조차 구제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불조의 스승이 되고자 하는 이라면 모름지기 활구에서 깨달아야 할 것이다.(但參活句, 莫參死句. 活句下薦得, 永劫不忘, 死句下薦得, 自救不了. 若要與祖佛爲師者, 須明取活句.)” 『圜悟語錄』 권11(T47, 765b13), 『大慧語錄』 권14(T47, 870b4), 『看話決疑論』(H4, 737a8), 『禪家龜鑑』(H7, 636b16) 등에 보인다.
  239. 239)경절문徑截門 : 무수한 우회의 방편을 다 끊어 버리고 근원으로 가는 가장 빠르고 간명하며 적절한 방법. 화두를 공부하는 간화看話의 방법을 가리킨다. ‘경절’은 직절直截ㆍ첩경捷徑 등과 같은 뜻이다. ‘경절’이라는 말은 『碧巖錄』ㆍ『書狀』 등에서 간화선을 묘사하는 말로 나오기는 하지만, 이를 간화선과 직접 연결하여 사용한 것은 지눌知訥이 처음이다. 『看話決疑論』(H4, 733a20), “경절문의 맛없는 말(화두)을 듣자마자 지해知解라는 병에 걸리지 않고 바로 귀착점을 알게 되니, 이것을 일러 하나를 듣고 천 가지를 깨달아 대총지大摠持를 얻었다고 한다.(纔聞徑截門無味之談, 不滯知解之病, 便知落處, 是謂一聞千悟, 得大摠持者也.)”;『眞覺國師語錄』 「孫侍郞求語」(H6, 40a11), “이 밖에 화두를 살피는 ‘간화’라는 하나의 문이 있으니 이것이 가장 빠른 길입니다. 지관과 정혜는 화두 하나만 들면 자연히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此外有看話一門, 最爲徑截. 止觀定慧, 自然在其中.)” 『정선 휴정』(p.102) 주석 70 참조.
  240. 240)원돈문圓頓門 : 교학상 최고의 이치에 해당한다. 주로 사사무애事事無礙를 근본 도리로 삼는 화엄종의 원돈일승圓頓一乘을 말한다. 교판론으로 보자면 원교圓敎와 돈교頓敎에 해당한다. 『圓頓成佛論』(H4, 730a14) 참조. 『정선 휴정』(p.102) 주석 71 참조.
  241. 241)『禪家龜鑑』(H7, 636b19). “아직 근본을 꿰뚫지 못해 관문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은 참구하는 것이 참의하느니만 못하고, 근본을 꿰뚫어 관문을 통과한 사람은 참의하는 것이 참구하느니만 못하다.(未透底人參句不如參意, 透得底人參意不如參句.)”라고 한다. 뒤의 구절은 반드시 그렇다기보다는 관문을 통과한 사람에게는 참의든 참구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로 보아야
    칙 「本則評唱」(T48, 223b28), “부산 원록 공이 말하였다. ‘아직 근본을 꿰뚫지 못한 사람이 구절을 참구하는 것은 뜻을 참구하는 것만 못하지만, 근본을 꿰뚫은 사람은 뜻을 참구하는 것이 구절을 참구하는 것만 못하다.’(浮山遠錄公云, ‘未透底人參句不如參意, 透得底人參意不如參句.’)” 『정선 휴정』(p.102) 참조.
  242. 242)방온龐蘊이 처음에~조사선을 깨달았다 : 『龐居士語錄』 권상(X69, 131a11), “당나라 정원 초에 석두 선사를 배알하고 물었다. ‘만법과 더불어 짝이 되지 않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석두가 손으로 방거사의 입을 틀어막자 이때 막힘없이 크게 깨달았다. 하루는 석두가 물었다. ‘그대는 나를 만난 이후 일상사가 어떠한가?’ ‘제게 일상사에 대하여 물으신다면 저는 당장에 할 말이 없어집니다.’ ‘그대가 그런 줄 알고 내가 물어본 것이다.’ 방거사가 마침내 다음과 같은 게송을 바쳤다. ‘일상사에 특별한 점은 없으니, 나 스스로 짝하여 함께할 뿐이라네. 모든 현상에서 취하거나 버리지 않고, 어떤 곳에서나 어긋나는 일도 없다네. 주색과 자색은 누가 이름을 붙였을까! 산악에는 한 점의 티끌조차도 없노라. 신통 그리고 묘용이여! 물 긷고 땔나무 나르는 일이로다.’ 석두가 게송의 뜻을 인정하고 물었다. ‘그대는 승僧이 되고자 하는가, 아니면 속俗으로 살고 싶은가?’ ‘바라시는 뜻을 따르고 싶습니다.’ 결국 출가시키지 않았다. 방거사는 후에 강서로 가서 마조 대사를 뵙고 물었다. ‘만법과 더불어 짝이 되지 않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대가 한입에 서강의 물을 모두 들이켜면 말해 주겠다.’ 방거사는 이 말을 듣자마자 현묘한 뜻을 곧장 알아차렸다. 마침내 ‘마음을 비우면 급제하여 돌아가리라.(心空及第歸.)’라는 구절의 게송을 읊고 머물렀다.(唐貞元初, 謁石頭禪師, 乃問, ‘不與萬法爲侶者, 是甚麽人?’ 頭以手掩其口, 豁然有省. 一日, 石頭問曰, ‘子見老僧以來, 日用事作麽生?’ 士曰, ‘若問日用事, 卽無開口處.’ 頭曰, ‘知子恁麽, 方始問子.’ 士乃呈偈曰, ‘日用事無別, 唯吾自偶諧. 頭頭非取捨, 處處沒張乖. 朱紫誰爲號! 丘山絶點埃. 神通幷妙用! 運水與搬柴.’ 頭然之曰, ‘子以緇耶素耶?’ 士曰, ‘願從所慕.’ 遂不剃染. 居士後之江西參馬祖大師, 問曰, ‘不與萬法爲侶者, 是什麽人?’ 祖曰, ‘待汝一口吸盡西江水, 卽向汝道.’ 士於言下頓領玄旨. 遂呈偈, 有心空及第之句, 乃留駐.)”;『禪門拈頌說話』 161칙(H5, 162c8).
  243. 243)방온의 이 공안에 대해 『禪門拈頌說話』 161칙 설화에서는 다음과 같이 평석하였다. 『禪門拈頌說話』 161칙(H5, 164a3), “그다음에 마조에게 던진 똑같은 질문은 이미 터득한 자신의 견해를 보여 주고 물은 것이다. 옛사람은 ‘처음에 석두를 친견하고는 눈앞의 대상 경계와 단번에 하나가 되었고, 뒤에 마조를 친견하고는 다시 본심과 부합한 것이다.’라고 하였다.(次問馬祖者, 呈似已見也. 古人云, ‘初參石頭, 頓融前境;後參馬祖, 復印本心.’)”
  244. 244)『禪門四辨漫語』(H10, 821c23), “제2구는 언어와 사유가 허용되지 않는 경계를 분별하여 해석하는 것이니 말을 일으키자마자 참된 종지는 감춰지기 때문에 이것은 사구도 아니고 활구도 아닌 구절이다. 이 구절을 깨달은 자는 말로 드러낸 가르침의 방편에 따라 말을 떠난 실상을 깨닫는다. 그런 까닭에 인계와 천계의 스승이라 한다.(第二句, 分釋未容擬議處, 言說乍興, 眞宗將隱, 此不死不活之句. 薦此句者, 因言敎之方便, 悟離言之實相. 所以爲人天之師也.)” 초의 의순, 김영욱 옮김, 『선문사변만어』, pp.57~58 참조.
  245. 245)삼선론三線論의 정확한 근원은 찾지 못하였다. 『禪門拈頌說話』에 태공선太公線과 구인선蚯蚓線 두 가지를 다음과 같이 들었다. 『禪門拈頌說話』
    a7), “ ‘설령 물어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내가 제시한 한 가닥의 길에는 여전히 조금 미치지 못한다.’라고 한 말:한 가닥의 길에는 두 종류가 있다. 지렁이가 남긴 한 가닥 흔적으로는 소식을 서로 막힘없이 통하고, 태공이 보여 주는 한 가닥 길로는 귀천을 나누고 존비를 가른다. 여기서는 태공이 제시한 한 가닥의 길이다. 남전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본분의 핵심을 푸는 최상의 열쇠를 들어 보인 것이다. 그러므로 (운문은) ‘남전은 걸음마다 높이 오를 줄만 알았다.’라 하고, ‘향적세계’라고도 평가하였다. 만약 정통의 혈맥마저 짓밟아 없앤다면 어떤 천신도 꽃을 바칠 길이 없을 것이며, 성인이 깨달은 경지도 모두 텅 비워 버린다면 마구니와 외도가 몰래 엿볼 수 있는 문이 없을 것이다.(直饒云云者, 一線道有二種. 蚯蚓一線地, 信息相通也. 太公一線道, 分貴賤辨尊卑也. 此爲太公一線道也. 南泉伊麽道, 拈起上頭關捩子. 故云, ‘南泉只知步步登高.’ 又云, ‘香積世界.’ 若踏正脉, 諸天奉花無路;聖解皆空, 魔外潛覷無門.)”
  246. 246)물고기 눈을 명주로 오인할까 : 장어목작명주將魚目作明珠라고 한다. 비슷한 일부분을 보고 그것을 전부라거나 진실이라고 오인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247. 247)『禪門四辨漫語』 「序」(H10, 820b6), “의리선과 격외선, 조사선과 여래선, 살활과 기용機用, 진공과 묘유 등은 모두 마음을 근거로 하여 나타나는 것들이다.(義理格外, 祖師如來, 殺活機用, 眞空妙有, 皆由心而現出.)” 초의 의순, 김영욱 옮김, 『선문사변만어』, p.31 참조.
  248. 248)『禪門證正錄』 「禪門證正錄幷序」(H10, 1137a24), “夫三處傳心, 禪門之源, 源淸則流淸;義理禪格外禪, 如來禪祖師禪, 禪門之名, 名正則實正;殺人刀活人劒, 禪門之喩說機關, 喩極則法極;三句一句, 禪門之本有文彩, 本達則末達也.”
  249. 249)이순보李純甫(1177~1223) : 자는 지순之純, 호는 병산거사屏山居士. 양양襄陽(지금의 하북성 양원陽原) 출신. 금나라 승안承安 연간에 진사進士를 지냈다. 세 번 한림翰林에 발탁되어 들어갔으며 황제의 총애를 받았다. 산문散文에 공교하였으며 문풍은 웅기간고雄奇簡古하여 노동盧同ㆍ이하李賀의 풍모가 있었다고 평가된다.
  250. 250)『명도집설鳴道集說』 : 『諸儒鳴道集』의 배불론을 비판한 책. 『諸儒鳴道集』은 『鳴道集』이라 약칭하기도 하는데 배불숭유排佛崇儒의 대표적 논저로서 주돈이周敦頤ㆍ사마광司馬光ㆍ장재張載ㆍ정이程頤ㆍ정호程顥ㆍ장구성張九成ㆍ양시楊時ㆍ장식張栻ㆍ사현도謝顯道ㆍ유안세劉安世 등 송나라 때 대유大儒들의 논설이 수록되어 있다. 이순보는 어릴 때 유학을 공부하였으나 29세에 불교를 공부하기로 발심하고 당시 선종의 고승인 만송 행수萬松行秀 문하에서 선을 익혔다. 불교를 배척하는 풍조가 점차로 만연하자 『鳴道集說』을 지어 유학자들의 배불론을 논파하였다. 유불도 삼가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논하고 있지만 주요 입론의 근거는 불교가 중심이며, 송대 불교사상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설說’ 자를 붙인 의미가 바로 이 『鳴道集說』에서의 ‘설’과 같이 비판적 의미를 담고 있다는 뜻이다.
  251. 251)혜심慧諶은 『看話決疑論』 「跋文」(H4, 737b13)에서 “아, 근고近古 이래로 불법이 대단히 쇠약해져서 혹은 선을 근본으로 삼아 교를 배척하며, 혹은 교를 받들며 선을 비난한다. 이는 선이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며, 교는 선을 포착하는 벼리요 선은 교를 통괄하는 벼리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噫, 近古已來, 佛法衰廢之甚, 或宗禪而斥敎, 或崇敎而毁禪. 殊不知, 禪是佛心, 敎是佛語, 敎爲禪網, 禪是敎網.)”라 주장하였고, 선교 일치의 전형을 보인 종밀宗密은
    b10)에서 “경經은 부처님의 말씀이고,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다. 부처님의 마음과 입은 결코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經是佛語, 禪是佛意, 諸佛心口, 必不相違.)”라고 하였으며, 휴정休靜은
    b5)에서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교라 함은 말이 있는 것으로부터 말이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며, 선이라 함은 말이 없는 경지에서 말이 없는 경지로 이르는 것이다.(然禪是佛心, 敎是佛語也. 敎也者, 自有言, 至於無言者也 ; 禪也者, 自無言, 至於無言者也.)”라고 하였다. 『정선 휴정』(p.367) 참조.
  252. 252)선지禪旨 : 선의 핵심적인 뜻. 선사들의 말이나 행위에 들어 있는 선법의 요지. 『禪家龜鑑』(H7, 635b9), “세존께서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하신 것은 선지禪旨이고, 전 생애에 걸쳐 설하신 일체의 가르침은 교문敎門이다. 그러므로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이다.(世尊三處傳心者, 爲禪旨;一代所說者, 爲敎門. 故曰, ‘禪是佛心, 敎是佛語.’)”
  253. 253)마음에서 깨달은 것을 언어라는 방편으로 표현할 때 선禪의 진실을 전할 수 있지만, 말 자체에 의존해서는 깨달을 수 없음을 나타낸다. 앞의 주석 27 참조.
  254. 254)고려 때 천책天頙이 지은 『禪門寶藏錄』의 다음 글에서 인용한 말이다. 『禪門寶藏錄』 권상 「禪敎對辨門」(X64, 808b4), “모든 부처님께서는 활등처럼 설하셨고 조사들은 활시위처럼 설하셨다. 활시위처럼 설하였다는 말은 선문에서 현묘한 길을 곧장 전하면서 언설을 빌리지 않고 근본이 되는 마음의 본체를 곧바로 가리켜 보이는 양상이 활시위가 곧은 것과 같다는 뜻이다. 교문의 경우에 일승은 곧은 길이고 삼승은 굽은 길이므로 근본이 되는 마음의 본체를 곧바로 들어서 마음에 보여 준 것과 같지 않다. 왜 그러한가? 일승교에서 설한 것은 일마다 걸림이 없는 법계(事事無礙法界)의 모든 존재가 원만하게 융합되어 있다는 뜻이다. 일마다 걸림이 없는 이 법계는 한맛의 법계로 귀결되고, 이 한맛의 법계가 남긴 흔적조차 떨쳐 버려야 비로소 조사들이 제시한 일심이 드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교설은 곧지 않음을 알 수 있다.(諸佛說弓, 祖師說絃. 說絃者, 禪門正傳玄路, 不借言說, 直示宗本心體, 如弓之絃. 若敎門, 則一乘是直路, 三乘是曲路, 不如直擧宗本心體, 示於心念之中. 何故? 一乘敎中所說者, 事事無礙法界圓融, 此事事無礙法界, 方歸一味法界, 拂此一味法界之跡, 方現祖師所示一心. 故知諸敎不直.)”;『禪家龜鑑』(H7, 636a18), “모든 부처님께서는 활등처럼 설하셨고 조사들은 활시위처럼 설하셨다. 부처님께서는 걸림 없는 법을 설하시어 한맛으로 귀결시키지만, 이 한맛의 자취조차 떨쳐 버려야 비로소 조사들이 제시한 일심이 드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뜰 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 같은 화두는 용궁의 대장경에는 있지 않다.(諸佛說弓, 祖師說絃. 佛說無礙之法, 方歸一味, 拂此一味之迹, 方現祖師所示一心. 故云, 庭前栢樹子話, 龍藏所未有底.)” 『정선 휴정』(pp.95~96) 주석 58 참조.
  255. 255)선전禪詮은 선의 사리事理로, 선에 대한 구체적이고 다양한 설명을 말한다. 『百丈淸規證義記』 권8 「講堂規約」(X63, 501c21), “선禪과 교敎는 두 가지가 아니다. 교는 선에 대한 해설이요, 선은 교의 골수이다. 문자의 뜻에 집착하여 해설을 고수하면 선도 교가 되고, 문자의 뜻에서 벗어나 마음과 하나가 되면 교 또한 선이라 한다.(夫禪之與敎, 非有二也. 敎爲禪詮, 禪爲敎髓. 執文義而守詮, 禪亦爲敎;離文義而契心, 敎亦名禪.)”
  256. 256)『禪敎釋』(H7, 655c11), “결:원교圓敎에는 걸림이 없는 연기(無礙緣起)에 대한 분별이 있고, 돈교頓敎에는 명名을 떠나고 상相을 끊은 경지에 대한 분별이 있지만, 선문禪門에는 더듬어 찾을 것도 없고 포착하기 위한 어떤 수단도 없다.(訣曰, 圓敎有無礙緣起之解, 頓敎有離名絶相之解, 禪門無摸沒巴鼻.)”
  257. 257)취로도嘴盧都는 자로도觜盧都ㆍ자골도觜骨都라고도 한다. 입을 다물고 잠자코 침묵하는 모습을 말한다.
  258. 258)여래는 적멸도량에서~듯했다는 장면 : 이상은 『天台四敎儀』(T46, 774c23)에서 돈교頓敎인 『華嚴經』의 ‘頓’의 뜻에 대한 묘사를 인용하였다. 초의 의순, 김영욱 옮김, 『선문사변만어』, p.129 주석 18 참조.
  259. 259)『禪門綱要集』 a6);『禪門四辨漫語』 「二禪來義」(H10, 827a7).
  260. 260)앞의 주석 10 참조.
  261. 261)앞의 주석 179 참조.
  262. 262)앞의 주석 25, 183 참조.
  263. 263)앞의 주석 6 참조.
  264. 264)『禪門拈頌說話』 100칙(H5, 106a18), “모든 대상이 끊어지고 나면 아무것도 없는 그 경계(斷滅)에 떨어지는 사람도 있지만 2조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분명하게 깨어 어둡지 않고 뚜렷하게 항상 알고 있었으니, 깨달음과 수행이 곧바로 사라지면서 여래선을 증득하였던 것이다.(諸緣旣斷, 或有落斷滅者, 今二祖則不然. 明明不昧, 了了常知, 則悟修斯亡, 乃證得如來禪也.)” 앞의 주석 52 참조.
  265. 265)『禪門拈頌說話』 100칙(H5, 106a21), “중하 근기의 무리였다면 이 경계에서 눌러앉아 본분사를 벌써 마쳤다고 여겼겠지만 2조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다시 모든 부처님의 법인에 대하여 묻고는 그 자리에서 마음을 편안히 하고 모든 부처님이 전한 마음의 본체를 깨달았다. (이 때문에) 앞에서 터득한 이해가 더욱 밝아져 ‘분명하게 깨어 어둡지 않고, 뚜렷하게 항상 알고 있다.’고 말한 뒤 마침내 조사선을 알아차리고 달마의 인가를 받았던 것이다. 이것이 2조가 2조가 된 이유이다.(其如中下之類, 於此坐着, 便以爲能事已畢, 二祖卽不然. 又問, 諸佛法印, 當下安心, 悟得諸佛所傳心體. 前解轉明曰, ‘明明不昧, 了了常知.’ 遂乃會得祖師禪, 得他印許. 此所謂二祖之爲二祖者也.)” 앞의 주석 53 참조.
  266. 266)『禪門拈頌說話』 37칙 설화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禪門拈頌說話』 37칙(H5, 51a22), “ ‘세존께서 관 밖으로 두 발을 내보이셨다’는 것:착각이요, 착각이로다! 무소가 달빛을 즐기다가 뿔에 무늬가 생겼고, 코끼리는 천둥소리에 놀라 상아에 꽃 그림 새겨진 격이니, 잘못이 적지 않다. 비록 이렇기는 하지만 이 구덩이 속에서 뛰쳐나와야 비로소 다비한 뒤의 품品이 세상에 유통되리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世尊槨示雙趺:錯, 錯! 犀因翫月紋生角, 象被雷驚花入牙, 敗闕也不少. 雖然如是, 向者圈圚裏跳得出, 方知茶毗後品流通去在.)”
  267. 267)『禪門拈頌說話』 101칙 설화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禪門拈頌說話』 101칙(H5, 110b12), “ ‘너는 나의 골수를 얻었구나.’라는 말:깊고 또 깊은 경지이다. 이는 직접 법을 이음으로써 입실했다는 말이니, 가업을 이을 만하기 때문에 가사를 전하고 법을 부촉한 것이다.(汝得吾髓者, 深之又深也. 此則親承入室, 克紹家業故, 乃傳衣付法也.)”
  268. 268)앞의 주석 98 참조. 『禪門拈頌說話』 147칙(H5, 150b6), “세존께서는 다자탑 앞과 영산회상에서 가섭에게 친밀하게 부촉하였고, 가섭은 아난에게 전하여 한 세대에 오직 한 사람에게만 전하다가 조계 혜능에 이르러 이 두 대사에게 법을 나누어 주게 되었고 그들은 각기 다른 가풍을 세웠다. 두 대사는 그들의 후손으로 법을 이었는데 임제臨濟와 동산洞山에 이르러 이 도가 세상에 크게 유행하였다. 그 종파에 근원이 있고 지류에도 뿌리가 있으니 배우는 이들은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世尊於多子塔前, 靈山會上, 密付迦葉, 迦葉傳阿難, 人傳一人, 至于曺溪, 得此二大士分付, 各立家風. 二大士得其孫, 至于臨濟洞山, 斯道大行天下. 其派有源, 其枝有本, 學者不得莽鹵也.)”
  269. 269)『眞覺國師語錄』(H6, 34c4), “골수에 사무치도록 본원을 깊이 깨닫는다면 왕자의 보검을 쥐고서 본분의 수단을 활용하여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며 크게 자유자재한 경지가 될 것이다. 반드시 이러한 수단을 밝게 알아야 한다. 사람을 죽인 이상 반드시 살려야 하고, 사람을 살렸다면 반드시 다시 죽여야 한다. 오로지 죽이기만 하거나 오로지 살리기만 하는 것은 좋은 솜씨가 아니다.(蓋徹骨徹髓, 深證本源, 持王子寶刀, 用本分手段, 殺人活人, 得大自在也. 須明取者个手段. 旣殺得人, 須活得人, 旣活得人, 須殺得人. 若只單殺單活, 卽非好手也.)”
  270. 270)6조 이후로부터~뿌리가 있다 : p.61, pp.63~67 참조.
  271. 271)일가를 이루어~일이 있더라도(把茆蓋頭) : 앞의 주석 106 참조.
  272. 272)『禪門拈頌說話』 111칙(H5, 121b3), “6조가 어느 날 대중에게 말하였다. ‘하나의 그 무엇(一物)이 위로는 하늘을 떠받치고 아래로는 땅을 지탱하면서 옻칠마냥 시커멓다. 그것은 항상 움직임 속에 있는데 움직이는 그 순간에는 잡아들이지 못한다. 그대들은 그것을 무엇이라 부르겠느냐?’ 신회라는 사미가 대중 속에서 나와 말하였다. ‘모든 부처님의 본원이고, 신회의 불성입니다.’ 6조가 몇 차례 방을 휘둘러 때리고서 말하였다. ‘내가 하나의 그 무엇이라고 불러도 맞지 않는다고 했건만, 어찌 본원이니 불성이니 하고 부르느냐! 그대가 이후에 설령 일가를 이루어 대중을 이끄는 위치에 서는 일이 있더라도 지적인 분별이나 근본으로 삼는 무리가 될 뿐이리라.’(六祖, 一日謂衆曰, ‘有一物, 上柱天下柱地, 黑似柒. 常在動用中, 動用中収不得. 汝等諸人, 喚作什麽?’ 沙彌神會, 出衆曰, ‘諸佛之本源, 神會之佛性.’ 祖遂打數棒曰, ‘我喚作一物尙自不中, 那堪喚作本源佛性! 汝已後, 設有把茅蓋頭, 只作得个知解宗徒.’)” 앞의 주석 105 참조.
  273. 273)앞의 주석 238 참조.
  274. 274)앞의 주석 241 참조.
  275. 275)십성十成은 충분하고 완전함을 뜻한다. 어기십성語忌十成은 말을 남김없이 다하여 완전함을 얻으려 하면 오히려 그르치고 진실을 획득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언어에 온전히 담아 표현하기 불가능함을 함의하는 선어이다. 『禪林僧寶傳』 권7 「九峯道虔傳」(X79, 506c3), “말로써 남김없이 다 드러내기를 꺼리지만 전혀 쓰지 않으려 하지는 않고, 마음의 작용은 범하기를 꺼려서 오염되려 하지 않는다.(語忌十成, 不欲斷絶. 機忌觸犯, 不欲染汙.)”
  276. 276)대혜가 장~고 하였는데 : 앞의 주석 112 참조.
  277. 277)앞의 주석 182, 226 참조.
  278. 278)앞의 주석 187 참조.
  279. 279)앞의 주석 188 참조.
  280. 280)앞의 주석 113, 126 참조.
  281. 281)『首楞嚴經』 권5(T19, 124c6), “부처님이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인식 기관과 그 대상은 동일한 근원이요, 속박과 해탈은 다른 점이 없다. (이들을 차별되게 인식하는) 식識의 본성은 허공에 핀 꽃처럼 허망한 것이다. 아난아, 대상으로 말미암아 지견을 일으키고 인식 기관으로 인하여 상相이 생기니, 상과 지견은 독립적인 본성이 없기에 하나로 묶여 서로 의지하는 갈대와 같다. 이 때문에 그대가 지금 지견에 지견을 세우는 작용은 무명의 근본이요, 지견에 어떤 지견도 덧붙이지 않으면 이것이 바로 열반으로서 번뇌가 없이 진실하고 청정하거늘 어떻게 이 속에다 다른 것을 또 받아들이겠는가?’(佛告阿難, ‘根塵同源, 縛脫無二. 識性虛妄, 猶如空花. 阿難, 由塵發知, 因根有相, 相見無性, 同於交蘆. 是故汝今, 知見立知, 卽無明本;知見無見, 斯卽涅槃, 無漏眞淨, 云何是中, 更容他物?’)”;『禪門拈頌說話』 51칙(H5, 62c10).
  282. 282)『禪門四辨漫語』 「二禪來義」(H10, 827a14), “답한다. ‘종지를 주고받는 방법이 말에 의지하거나(顯) 말 이외의 수단에 의지하거나(密)에 따라 두 선禪의 이름이 나누어지며, 전수하는 법의 본체가 두 가지인 것은 아니다.’(答曰, “由其授受之顯密, 而有二禪之名, 非所傳之法體有二也.)” 초의 의순, 김영욱 옮김, 『선문사변만어』, p.130 참조.
  283. 283)정확히 일치하는 구절은 찾지 못하였으나 다음을 지목한 것으로 보인다. 『禪文手鏡』(H10, 519a), “一切禪文, 佛也安祖也安, 及總賞總罰等.”
  284. 284)『禪門四辨漫語』(H10, 821c1), “또한 ‘이러저러한 언구들은 오로지 조사의 문안에만 있는 언구들이므로 조사선이라 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조사선은 본래 특정한 언구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란 말인가!(又曰, ‘某某等言句, 是祖門中所有之言句, 名曰祖師禪.’ 然則, 祖師禪, 本以言句得名耶!)” 초의 의순, 김영욱 옮김, 『선문사변만어』, p.52 참조.
  285. 285)『禪門拈頌說話』 「禪門拈頌集序」(H5, 1b16).
  286. 286)문자(紙墨) : 지묵紙墨은 종이와 먹으로, 문자를 뜻하기도 한다. 『禪林僧寶傳』 권13 「大陽警玄傳」(X79, 518c22), “대양 경연大陽警延이 말하였다. ‘말을 사양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에 매달릴까 염려스러울 뿐입니다.’(延曰, ‘道卽不辭, 恐上紙墨.’)”;『禪家龜鑑』(H7, 644a14), “말하지 마라, 말하지 마라! 문자에 매달릴까 염려스럽다.(不道, 不道! 恐上紙墨.)”
  287. 287)정확히 일치하는 경전의 구절은 찾지 못하였다. 『茶松文稿』(H12, 680a15), “伏聞統萬法明一心, 釋迦氏之稱性眞理.”;묵암 최눌默庵最訥(1717~1790)의 『華嚴逐難』 마지막 쪽에 “統萬法明一心, 依一心該萬有.”, 또 백용성白龍城 대종사의 『歸源正宗』에 “蓋釋氏之敎 統萬法明一心者也ㅣ니라.”라는 구절이 실려 있기는 하다.
  288. 288)『禪文手鏡』 「義理禪格外禪辨」(H10, 519c9), “중근기의 중생들은 삼현의 방편(三玄權門)으로 본분과 향상일규向上一窺를 꿰뚫는다. 이 또한 조사 문중의 일이나, 저들이 깨달은 ‘대지 전체가 한 덩어리 금’이라는 이치는 여래가 ‘만법을 통괄하여 일심을 밝힌다.’라고 하신 교의 자취(敎迹)와 완연히 일치하므로 그것을 폄하하여 여래선이라 한다.(以中根衆生, 卽於三玄權門, 透得本分及向上也. 此亦祖門中事, 以其所悟, 盡大地一挺金之說, 完同如來‘統萬法明一心’之敎迹, 故貶之曰如來禪.)” 백파 긍선, 신규탁 옮김, 『선문수경』, pp.72~73 참조.
  289. 289)『禪門四辨漫語』(H10, 821c3), “또한 ‘하나하나의 법마다 온전히 진실하다는 말은 조사문 안의 일이지만 여래의 말씀과 완전히 일치하므로 깎아내려 여래선이라 한다.’고 하였다.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도록 그 누가 이러한 이름을 세웠다는 이유로 여래를 깎아내렸던가!(又, ‘以法法全眞之言, 亦是祖門中事, 完同如來說, 故貶之云如來禪.’ 從古以來, 孰敢貶之如來以立此名乎!)” 초의 의순, 김영욱 옮김, 『선문사변만어』, p.52 참조.
  290. 290)세존은 깨달은~전해 받았다 : 앞의 주석 6 참조.
  291. 291)『大方廣佛華嚴經隨疏演義鈔』 권27(T36, 203c26), “但己著在經小有可通, 卽爲會釋, 不欲使人輕毀聖敎耳.”
  292. 292)『禪門四辨漫語』(H10, 821c6), “또한 여래선을 (조사선과 함께) 격외선으로 삼아 분좌分座에 배속하고는 구곡이 세운 뜻이라 하였지만, 구곡의 말에 분좌를 가리켜 여래선이라 지목한 부분이 있던가!(又以如來禪爲格外禪, 配之分座, 謂之龜谷義, 龜谷說中, 有以分座, 指爲如來禪之言乎!)” 초의 의순, 김영욱 옮김, 『선문사변만어』, p.52 참조.
  293. 293)앞의 주석 41 및 『禪門拈頌說話』 37칙 본칙 설화 참조.
  294. 294)앞의 주석 52 및 『禪門拈頌說話』 100칙 본칙 설화 참조.
  295. 295)『禪門四辨漫語』(H10, 821c8), “또 ‘여래선은 (임제삼구에서) 제2구로서 방편(權) 그대로 진실(實)을 밝힌다.’고 하였다. ‘방편 그대로 진실을 밝힌다.’는 말은 삼현三玄이라는 창과 갑옷을 마련하여 갖추고 편의에 따라 손을 쓰며, 말 한마디 한마디를 아끼면서 격格이 정해진 법도를 완성한다는 뜻인데, 이것을 두고 격을 벗어났다고 할 수 있는가? 이는 다른 사람이 밖에서 공격을 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한 말로 자신을 공격한 것이다.(又曰, ‘如來禪, 卽第二句, 卽權明實.’ 夫卽權明實者, 施設三玄戈甲, 隨宜下手, 言言堪愛, 完成格則, 是可謂之格外乎? 此非他人之外攻, 還以自語自攻也.)” 초의 의순, 김영욱 옮김, 『선문사변만어』, pp.52~54 참조.
  296. 296)『禪門綱要集』 c9), “호월 선객이 물었다. ‘제2구란 어떤 것입니까?’ 청풍 법사가 연이어 세 번 할을 내지르고 물었다. ‘몇 번인가?’ ‘세 번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실도 아니고 권도 아니다. 임제가 이 구에 대해 답하여 「문수보살이 어찌 무착無著 선사의 물음을 용납할 것인가? 그러나 방편이 어찌 번뇌를 끊은 근기(문수)와 상충되겠는가.」라고 하였다. 앞의 구절은 실實을 드러내었고 뒤의 구절은 권權을 제시한 것이다. 이는 권문(방편문)에 의거하여 삼현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름은 옛사람이 말했듯이 실의 손님이다.’(月問, ‘第二句如何?’ 風連下三喝云, ‘是幾耶?’ 月云, ‘三也.’ 風曰, ‘然則非實也權也. 臨濟答此句云, 「妙喜豈容無着問, 漚和爭負截流機.」 前句現乎實, 後句示其權. 就此權門, 立三玄名, 名者古所謂實之賓也.’)”;『禪文手鏡』 「義理禪三句頌」(H10, 515c22).
  297. 297)『禪文手鏡』 「義理禪格外禪辨」(H10, 519b22), “나의 좁은 소견을 말해 보겠노라. 의리선은 제3구로서 다만 신훈新熏과 오수悟修의 설일 뿐이다. 완연히 의미로 이해하는 길(義路)과 도리로 이해하는 길(理路)의 격식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범부는 반드시 오수하여야 성불할 수 있으니 그 의리가 당연하므로 의리선이라 한다.(愚伸管見, 蓋義理禪, 以第三句, 但新熏悟修之說. 完有義路理路之標格, 則以是凡夫, 必須悟修成佛, 義理當然, 故名義理禪.)” 백파 긍선, 신규탁 옮김, 『선문수경』, p.70 참조.
  298. 298)『禪門四辨漫語』(H10, 821c12), “또 (임제삼구에서) 제3구에는 신훈만 있고 본분이 없다는 뜻을 멋대로 판단하여 의리선이라 하였다. 백파는 ‘일우一愚의 설에 의지하여 그것을 기준으로 삼았다.’고 했지만, 일우의 말에 의리선이라는 이름이 있었던가? 세상에서 일우의 책을 읽어 본 사람이 오로지 이 노인 한 분뿐이었단 말인가? 그런가, 그렇지 않은가? 한번 자세히 따져 보겠다.(又於第三句中, 以但新無本之義, 獨判之, 爲義理禪. 言依一愚爲準, 一愚說中, 曾有義理禪之名字乎? 世間讀一愚書者, 惟此老一人耳? 然耶不耶? 試詳論之.)” 초의 의순, 김영욱 옮김, 『선문사변만어』, p.54 참조.
  299. 299)앞의 주석 238 참조.
  300. 300)『心法要抄』(H7, 650a8), “모름지기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활구를 참구해야 하며 사구를 참구해서는 안 된다. 활구로 알아차린다면 부처나 조사의 스승이 될 자격이 있지만 사구로 알아차리면 저 자신도 제대로 구제하지 못할 것이다. 활구란 경절문이다. 이는 마음으로 미칠 수 있는 길도 없으며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길도 없으니 모색할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사구란 원돈문이다. 이는 도리로 모색할 수 있는 길도 있고 마음으로 헤아릴 수 있는 길도 있으니 들어서 이해하고 생각할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大抵學者, 須參活句, 莫參死句. 活句下薦得, 堪與佛祖爲師;死句下薦得, 自救不了. 活句者, 徑截門也. 沒心路, 沒語路, 無摸故也. 死句者, 圓頓門也, 有理路, 有心路, 有聞解思想故也.)” 앞의 주석 241 참조. 『정선 휴정』(p.284) 참조.
  301. 301)앞의 주석 112 참조.
  302. 302)앞의 주석 182 참조.
  303. 303)『禪門綱要集』 a7), “問. ‘第三句如何?’ 曰, ‘落草爲人, 隨病與藥. 乃事不獲已也.’ ” 앞의 주석 188 참조.
  304. 304)『禪文手鏡』 「殺活辨」(H10, 520b11), “삼처전심에서, 첫 번째 ‘분좌’ 진공 는 살인도殺人刀로서 삼구 중 제2구인 본분과 향상에 해당한다. 다만 변하지 않는 진여眞如만을 전할 뿐이니 살殺만 있고 활活은 없기 때문이다. 청원 행사가 이 법을 얻어 6조의 비정통 전수자가 되었다. 두 번째 ‘염화’ 묘유 는 활인검活人劒으로서 삼구 중 제1구인 기틀(機) 살殺 과 작용(用) 활活 과 삼요 및 향상하는 진공 살과 활을 한 쌍으로 어둡게 감춤 과 묘유 살과 활을 한 쌍으로 밝게 드러냄 에 해당한다. 살과 활을 모두 갖추고 삼요 살과 활 모두 어둡게 감추거나 모두 밝게 드러낸다. 향상 남악 회양이 이 법을 얻어 6조의 정통 전법 제자(正傳)가 되었다.(三處傳中, 第一分座 眞空 殺人刀, 卽三句中, 第二句本分及向上. 則但傳不變眞如, 唯殺無活故. 靑原得之, 爲六祖傍傳也. 第二處拈華 妙有 活人劒, 卽第一句, 機 三要及向上眞空 殺活雙暗 妙有 殺活雙明 . 則具足殺活, 三要 雙暗雙明. 向上 故, 南岳得之, 爲六祖正傳也.)” 백파 긍선, 신규탁 옮김, 『선문수경』, p.80 참조.
  305. 305)대기는 원만하게~대기의 활용이다 : 앞서 숭재혜의 말에서도 나왔다. 앞의 주석 192 참조.
  306. 306)원오 극근圜悟克勤이 한 말이다. 원오의 어록 세 부분에서 인용하고 있는데 임의로 글자를 고치고 이 글의 논지에 맞추기 위해 윤색을 가했다. 초의 의순, 김영욱 옮김, 『선문사변만어』, p.43 주석 6 참조.
  307. 307)달마 대사가~할 뿐이다 : 『圜悟語錄』 권15 「示諸禪人」(T47, 784b25)의 내용에 해당한다. 뒷부분은 “다만 말의 속박을 벗어나 체득하고, 기틀 밖에서 알아차리고자 할 뿐이다.(只貴言外體取, 機外薦取.)”라고 되어 있다. 초의 의순, 김영욱 옮김, 『선문사변만어』, p.44 주석 8 참조.
  308. 308)가장 빠른 길(直拔) : 경직徑直과 같은 뜻이다.
  309. 309)가장 빠른~떨어지지 않는다 : 『圜悟語錄』 권15 「示遠猷奉議」(T47, 785c16)에 나오는 다음 단락의 대의를 요약 발췌한 내용이다. “예전부터 가로질러 가는 하나의 지름길은 가장 빠른 길로 모든 단계를 뛰어넘었으니 이것보다 나은 방법이 없었다. 곧바로 사람들의 마음을 가리켜 그 본성을 보고 성불하는 길이 그것이다. 다만 이 마음은 아득히 깊어서 성인과 범부 사이에 놓인 계급조차도 벗어나 있을 뿐이다.(從上徑截一路, 直拔超昇無出. 直指人心, 見性成佛. 但此心淵奧, 脫去聖凡階級.)” 초의 의순, 김영욱 옮김, 『선문사변만어』 p.44 주석 10 참조. 보통은 “말로 드러내기 이전에 알아차리고, 구절로 표현되지 않는 뜻을 깨친다.(言前薦得, 句外承當.)”라고 한다. 여기서는 응돌鷹突ㆍ붕박鵬搏 등의 비유를 덧붙여 언어의 관념과 수행의 단계를 넘어서 단번에 궁극의 경지에 이르는 뜻을 나타냈다. ‘응돌’은 매가 허공에서 직선으로 돌진하여 먹이를 낚아채듯 재빠르게 알아차림을 비유하고, ‘붕박’은 『莊子』 「逍遙遊」에 나오는 붕새가 구만리 상공으로 날아오르듯이 말에 속박되지 않고 자유롭게 운신함을 비유한다. 『정선 선어록』
    참조.
  310. 310)왕자의 보검을~해야 한다 : 『圜悟語錄』 권14 「示華藏明首座」(T47, 778b6) 참조. 살殺과 활活을 겸비해야 한다는 논거가 되는 인증이다. 초의 의순, 김영욱 옮김, 『선문사변만어』, p.44 주석 11 참조.
  311. 311)앞의 마지막 구절에 이어 “만일 오로지 어느 한편만 시행한다면 그곳으로 치우쳐 기울어지게 된다.(若只孤單則偏墮也.)”라고 한 원오의 말을 살활殺活이라는 주제가 분명하게 드러나도록 바꾸었다. 초의 의순, 김영욱 옮김, 『선문사변만어』, p.44 주석 12 참조.
  312. 312)『禪門四辨漫語』(H10, 820c17), “기틀과 활용이라는 말은 대기大機와 대용大用을 뜻한다. ‘대기란 원만하게 응하는 것을 법도로 삼는 대용의 기틀이며, 대용은 곧바로 근원에 이르는 것을 법도로 삼는 대기의 활용이다.’ 원만하게 응하는 것은 활용인데 기틀이 그것을 얻어 법도로 삼는다고 한 말은 무슨 까닭에서인가? 기틀은 활용이 아니면 기틀이 될 수 없으니, 기틀이 기틀이 되는 이유는 원만하게 응하는 활용의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곧바로 근원에 이르는 것은 기틀인데 활용이 그것을 얻어 법도로 삼는다고 한 말은 무슨 까닭에서인가? 활용은 기틀이 아니면 활용이 될 수 없으니 활용이 활용이 되는 이유는 곧바로 근원에 이르는 기틀의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가지를 번갈아 가며 말함으로써 서로 의존하고 떨어지지 않는 기틀과 활용의 관계를 나타낸 것이다. 기틀과 활용의 관계가 이와 같은 것처럼 살殺과 활活이 서로 의존하며 떨어지지 않는 관계 또한 이와 같다. 그러므로 살을 전하더라도 반드시 활을 겸비하고 활을 전하더라도 반드시 살을 겸비한다는 진실을 알아야 하니, 이것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치이다.……여기서 백파가 ‘자리를 나누어 앉은 것에 담겨 있는 살은 오로지 살만 있을 뿐 활이 없고, 꽃을 들어 보인 것에 담겨 있는 활은 살도 겸비하고 있다.’라고 하였지만, 결단코 이러한 이치는 없다. 단독이면 모두 단독이고 겸비하면 어느 편이나 겸비하는 법인데 그 어찌 (분좌의) 살은 활을 겸비하지 않고 (염화의) 활만이 살을 겸비한단 말인가? 비유하자면 사람의 한 몸에서 손발은 작용이고 온몸은 본체인 것과 같다. 손발을 들어 작용이라 말하면 온몸은 저절로 그 작용에 거두어지거늘, 온몸을 들어 본체라고 말한들 어찌 손발을 버리는 것이 되겠는가?(所言機用者, 大機大用. 大機, 以圓應爲義, 大用之機;大用, 以直截爲義, 大機之用. 夫圓應是用也, 機得而爲義者, 何也? 機非用則不得爲機, 所以爲機者, 以有用之圓應也. 直截是機也, 用得而爲義者, 何也? 用非機則不得爲用, 所以爲用者, 以有機之直截也. 故交互而言之, 以現機用之相資不離也. 機用如是, 殺活之相資不離, 亦復如是也. 故知, 傳殺必兼於活, 傳活必兼於殺, 此必然之理也.……今言, ‘分座之殺, 但殺無活;拈花之活, 活兼於殺.’ 斷無是理. 單則俱單, 具則同具, 其何以殺不兼活, 活獨兼殺? 譬如人之一身, 手足用也, 全身體也. 擧手足而言用, 全身自收;擧全身而言軆, 手足其捨諸?)” 초의 의순, 김영욱 옮김, 『선문사변만어』, pp.40~45 참조.
  313. 313)앞의 주석 156 참조.
  314. 314)『禪門四辨漫語』(H10, 824b23), “후인들이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인천안목』 한 권만 읽고 나서 두 종파의 우열을 헛되게 판정 지은 결과로 이처럼 심하게 도치되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後人都不知此, 而但看人天眼目一書, 妄判二宗之優劣, 如此倒置無稽之甚也.)” 초의 의순, 김영욱 옮김, 『선문사변만어』, p.89 참조.
  315. 315)『禪門四辨漫語』(H10, 824b23), “지금부터 다섯 종파의 어록에 수록된 여러 칙의 인연을 인용하는 까닭은 오로지 위앙종이 뒤집어쓴 이상과 같은 굴욕을 씻어 주기 위해서이다.(今引五宗語錄所載數則因緣, 一爲潙仰宗雪屈.)” 초의 의순, 김영욱 옮김, 『선문사변만어』, p.90 참조.
  316. 316)전거는 알 수 없다. 초의의 자의적 평가로 보인다. 초의 의순, 김영욱 옮김, 『선문사변만어』, p.86 주석 78 참조.
  317. 317)『禪門四辨漫語』(H10, 824b3), “하물며 앙산仰山은 제2조 아난존자의 후신後身으로서 서천의 아라한들이 수시로 (문수보살에게) 특별히 법을 물으러 찾아왔다가 (앙산을 만나고는 그를) 소석가小釋迦라 부르기까지 하였는데 오히려 여래선의 향상하는 종지를 몰랐다고 하는가! 아, 안타깝다! 보잘것없는 말이 도를 해치는구나.(況且仰山是第二祖阿難尊者後身, 西天羅漢, 時時特來問法, 呼謂小釋迦, 然猶不知如來禪之向上! 嗚呼, 苦哉! 小言之害道也.)” 초의 의순, 김영욱 옮김, 『선문사변만어』, p.86 참조.
  318. 318)『人天眼目』 권1(T48, 300a15), “旣非予胸臆之論, 俾行於世, 有何誚焉.”
  319. 319)『禪文手鏡』(H10, 519a), “一法眼宗明唯心 偏明本分一句 ;二潙仰宗明體用 圓明今本三句 ;三曹洞宗明向上 超出今本三句 ;四雲門宗明截斷 多明大用直截 ;五臨濟宗明機用 具明三要 .”
  320. 320)진제眞諦의 설. 『法華文句記』 권1상(T34, 160c19), “용타불龍陀佛에 대하여 진제는 ‘수보리는 동방의 청룡타불이다.’라고 풀었다.(言龍陀佛者, 眞諦云, ‘須菩提, 是東方靑龍陀佛.’)”
  321. 321)『禪祖念佛集』 권상(B32, 542c22), “영명 연수 선사 선사는 법안의 3세이다. 「만선동귀집서萬善同歸集序」에 선사를 가리켜 아미타불의 화신이라 하였다. (永明延壽禪師 師法眼三世也. 同歸序, 稱師爲阿彌陀佛化身. )” 「萬善同歸集序」에는 보이지 않는다.
  322. 322)본문本門은 높으나~낮은 경우 : 본문本門은 겉으로 드러난 현상의 본질이 되는 것, 근원적인 것, 진실된 것 등을, 적문迹門은 본질적인 것이 겉으로 드러난 모습, 부수적인 것, 방편적인 것 등을 뜻한다. 『大方廣佛華嚴經疏』 권27(T35, 704b23), “부처님께서 보살이 된다면 이는 본은 높지만 적은 낮은 것이다.(若佛爲菩薩, 則本高迹下.)”;『大方廣佛華嚴經隨疏演義鈔』 권47(T36, 372b19), “ 『화엄경소』에서 ‘본적구고 혹은 본적구하’라고 한 것은 대략 사구를 이룬다. 부처님께서 화신으로서 부처님이 된 것은 본과 적이 모두 높은 것이라 하고, 보살이 화신으로서 보살이 되는 것은 본과 적이 모두 낮은 것이라 한다. 보살 내에서 계위로 서로 보는 경우에도 그 안에 다시 높고 낮음이 있음을 알 수 있다.(疏或俱高俱下者, 略成四句. 佛化爲佛, 本迹俱高, 菩薩化爲菩薩, 本迹俱下. 就菩薩中, 以位相望, 亦有高下可知.)” 『가산불교대사림』 ‘본적이문本迹二門’ 항목 참조.
  323. 323)불변不變과 수연隨緣 : 『大乘起信論』의 기반이 되는 사유 구조이다. 불변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진여문眞如門이고 수연은 생성과 소멸이 발생하는 생멸문生滅門인데 이것을 일심이문一心二門이라 한다. 초의 의순, 김영욱 옮김, 『선문사변만어』, p.164 주석 73 참조.
  324. 324)『禪文手鏡』 「禪敎大旨不出眞空妙有大機大用」(H10, 527b2).
  325. 325)인도 외도들의 견해와 종류를 총괄한다. 『正法華經』 권5(T9, 95c29);『賢劫經』 권 1(T14, 6c17) 등 참조. 초의 의순, 김영욱 옮김, 『선문사변만어』, p.173 주석 92 참조.
  326. 326)『禪門四辨漫語』 「眞空妙有辨」(H10, 830a3), “최근에 육은노인(백파)이라는 분이 인연을 따라(隨緣) 존재하는 허위의 이름과 차별상들을 독단적으로 ‘묘유’라고 판별하였다. 아, 될 법이나 한 소리인가!……영명 연수永明延壽는 이렇게 말한다. ‘진심과 망심은 각각 성性과 상相을 가지고 있다. 또한 진심은 밝은 앎(靈知)과 고요하게 비추는 작용을 마음으로 삼고, 텅 비지 않고 머무름도 없는 것을 본체로 삼으며, 실상實相을 상으로 삼는다. 이는 공이 묘유의 공이기 때문에 유도 진공의 유라는 뜻이다. 망심은 육진六塵이라는 대상의 그림자를 마음으로 삼고, 자성이 없는 것을 본체로 삼으며, 대상에 올라타고 일으키는 사유분별을 상으로 삼는다. 이는 유가 허위의 유이기 때문에 공 또한 단공의 공이라는 뜻이다. 이와 같이 대상에 대한 분별에 의해 깨치거나 아는 망심에는 원래 그 자신의 본체는 없고 다만 눈앞의 대상(塵)이 경계를 따라 있거나 없을 뿐이다. 경계가 다가오면 (대상도) 발생하고 경계가 물러나면 소멸하여 대상마다 마음마다 각각 자신의 독립된 본성(自性)은 없고 오로지 (오거나 가고 생성하거나 소멸하는) 인연의 작용일 따름이다.’ 이와 같이 대상의 그림자에는 이름만 있고 실체가 없거늘 어떻게 묘유라 할 수 있겠는가! 이는 다른 이유가 아니니, 그들이 이름과 본체를 바르게 궁구하지 않은 채 우리를 진심과 망심으로 이끌어 진심과 망심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하나같이 침침하도록 만들고, 공과 유 어느 편에 대해서도 모두 어둡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인도의 외도들은 본래 불법의 영향 속에 있다가 공과 유 두 가지 뜻을 잘못 이해하여
    가지 견해에 이르고 96종류로 나누어지게 되었다.(近有六隱老人, 以隨緣所有虛僞名相, 獨辦之爲妙有. 烏乎, 可哉!……永明云, ‘眞心妄心, 各有性相. 且眞心以靈知寂照爲心, 不空無住爲體, 實相爲相. 此則空是妙有之空故, 有是眞空之有也. 妄心以六塵緣影爲心, 無性爲軆, 攀緣思慮爲相. 此則有是虛僞之有故, 空亦斷空之空. 如此緣慮覺了能知之妄心, 元無自軆, 但是前塵隨境有無. 境來則生, 境去則滅, 境境心心, 各自無性, 唯是因緣而已.’ 如此緣影之有名無軆者, 焉得謂之妙有哉! 此非他由, 其不究名軆, 而率你于眞妄, 眞妄一昧, 空有遂暗. 西天外道, 本在佛法中, 錯解空有二義, 轉變至於六十二見, 分成九十六種.)” 초의 의순, 김영욱 옮김, 『선문사변만어』, pp.169~173 참조.
  327. 327)『法華經』
    b10).
  328. 328)『華嚴經探玄記』 권13(T35, 344a29), “법계연기에는 간략하게 세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번뇌 망상에 오염된 법에 따르는 연기이고, 둘째는 청정한 법에 따르는 연기이며, 셋째는 오염과 청정을 합하여 설하는 연기이다.(法界緣起, 略有三義. 一, 約染法緣起, 二, 約淨法, 三, 染淨合說.)”
  329. 329)『朝鮮佛敎通史』 下編 「雪山眞歸是佛祖師」(B31, 613a9), “又古德云, ‘天地地天天地轉, 水山山水水山空云者, 是如來禪;天天地地何曾轉, 水水山山各宛然云者, 是祖師禪也. 此約世法.
  330. 330)『禪文手鏡』(H10, 519a), “一切禪文, 山是山水是水, 主丈但喚作主文等, 一一端端的的節.”
  331. 331)『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T17, 914c13).
  332. 332)앞의 주석 248 참조.
  333. 333)『禪門證正錄』 「達摩三處傳心」(H10, 1137c2), “첫 번째는 마음을 찾았으나 찾을 수 없었다는 장면이다. 『염송설화』에서는 ‘모든 부처님의 법인(諸佛法印)을 깨달아 조사선을 알아차렸으니, 이것이 2조가 2조가 된 이유’라고 하였다. 두 번째는 2조가 삼배하고 달마에게서 골수를 얻었다는 말을 들은 장면이다. 『염송설화』에서는 ‘이는 직접 법을 이음으로써 입실했다는 말이니, 가업을 이을 만하기 때문에 가사를 전하고 법을 부촉한 것’이라고 하였다. 세 번째는 손에 신발 한 짝을 들고 있었다는 장면이다. 『염송설화』에서는 ‘6대의 조사들에게 전했다.’고 하였다. 『전등록』 「달마장」에서는 여래의 삼처전심과 같이 보았으니, 차례대로 ‘첫 번째는 마음을 찾았으나 찾을 수 없었다는 것, 두 번째는 삼배하고 골수를 얻었다는 것, 세 번째는 웅이산에 신발을 남겨 둔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중국에 마음을 전한 근원이다. 이상은 불조가 세 곳에서 전한 것으로서 모두 제1구이며 조사선이고 격외선이다. (一, 覔心了不可得. 說話云, ‘悟得諸佛法印, 會得祖師禪, 所謂二祖之爲二祖者也.’;二, 三拜得髓. 說話云, ‘親承入室, 克紹家業, 故傳衣付法也.’;三, 手携隻履. 說話云, ‘此六代傳也.’ 故傳燈錄達摩章中, 同如來三處傳心. 而次第釋云, 第一覔心不得, 第二三拜得髓, 第三熊耳留履云. 此爲震旦傳心之源也. 此上佛祖三傳, 皆第一句祖師禪格外禪也. )”
  334. 334)『禪門拈頌說話』 103칙(H5, 112b5), “손에 신발 한 짝을 들고 혼자 바삐 걸어가고 있었다, 텅 빈 관 속에는 가죽신 한 짝만 남아 있었다:옛사람이 말하였다. ‘한 짝은 6대의 조사들에게 전하였고, 다른 한 짝은 6대의 조사들에게 전하지 않았다.’(手携隻履翩翩獨逝, 又空棺一隻革履存焉者, 古人云, ‘一箇六代傳, 一箇六代不傳也.’)”
  335. 335)『禪門拈頌說話』 149칙(H5, 152c16), “한쪽 발을 평상에서 떨어뜨렸다:건추를 잡거나 불자를 꼿꼿이 세우는 방식과 마찬가지인가? 법을 전하는 방법에는 본래 유래가 있다. 사라수 아래에서 (세존이) 관 밖으로 두 발을 내보인 인연과 웅이산에서 (달마 대사가) 관에 짚신 한 짝을 남겨 둔 일화는 열반에 들어간 뒤에 보인 생성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 결정적인 한 수이다.(垂下一足者, 拈槌竪拂一般也耶? 傳法自有來由. 娑羅樹下, 槨示雙趺;熊耳山中, 棺留隻履. 則入涅槃後, 不生不滅底一著也.)”
  336. 336)『臨濟錄』(T47, 506a4)에는 위산潙山의 말로 “견해가 스승과 비슷하면 스승의 덕을 반감하게 되고, 견해가 스승을 넘어서야 비로소 법을 전수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見與師齊, 減師半德;見過於師, 方堪傳授.)”라고 실려
    칙(T48, 151c11)에는 백장百丈의 말로 인용된다.
  337. 337)『禪門拈頌說話』 149칙(H5, 152c22), “절을 올렸다:견해가 스승과 비슷했던 것일까, 지혜가 스승을 넘어섰던 것일까? 여기에도 유래 법을 전수한 유래 가 있다. 사라수 아래에서 세존께서 가섭에게 본보기가 되어 주었던 것이 인도의 28대 조사 중 최초였다. 각각 터득한 경지를 말했을 때 달마가 혜가에게 본보기가 되어 주었던 것도 중국의 6대 조사 중 최초였다. 6대 이후 청원이 석두에게 또한 최초의 본보기가 되어 주었으니 그렇지 않은가?(禮拜者, 見與師齊耶, 智過於師耶? 亦有來由. 傳法來由 娑羅樹下, 世尊之迦葉作榜㨾, 西乾四七之最初也. 各言所得時, 達摩之惠可, 亦作榜㨾, 東震二三之最初也. 六代已後, 淸源之石頭, 亦作最初榜㨾, 不其然乎?)”
  338. 338)『禪門證正錄』 「達摩三處傳心」(H10, 1137c1), “달마는 2조에게 ‘너는 다만 밖으로 모든 대상에 대한 집착을 쉬고 안으로는 마음에 헐떡임이 없어져 마음이 장벽과 같은 경지에 이르러야 도道에 들어갈 수 있다.’라고만 설하였다. 이 일단의 문답에서는 다만 제2구 여래선을 증득한 것이지 제1구 조사선에 들어간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선록 등에서 빼 버리고 싣지 않았지만 방편인연으로 사람들에게 이 일을 알게 하려고 ‘삼배하고 골수를 얻었다.’는 일화 아래에 각주를 붙였을 뿐이다. 그 후 조계 진각국사가 고칙 공안 1125칙 및 여러 조사들의 염拈과 송頌 등 핵심이 되는 말씀을 채집하여 30권을 만들었다. 여래 삼처전심을 차례대로 수록하고 달마의 삼처전심에서는 ‘모든 대상에 대한 집착을 끊었는가?’라는 문답은 빼 버리고 싣지 않았다. 이 점은 우리 동방의 염송원록拈頌元錄과 중국의 전등원록傳燈元錄이 부절을 맞춘 듯 다름이 없다.(初師謂二祖曰, ‘汝但外息諸緣, 內心無喘, 心如墻壁, 可以入道’云. 此一段問答, 但證得第二句如來禪, 不入於第一句祖師禪. 故拔去不載, 而但方便因緣, 使人知之, 註脚於三拜得髓下. 已而曹溪之眞覺國師, 採集古話一千一百二十五則, 幷諸師拈頌等要語錄成三十卷. 於如來三傳, 次第錄之, 於達摩三傳, 而其諸緣斷否問答, 亦拔去不載. 此吾東方之拈頌元錄, 與中華之傳燈元錄, 冥符無差也.)”;같은 책, 「第三殺人刀活人劒說」(H10, 1142a15), “ ‘모든 대상이 끊어졌는가?’라는 문제를 두고 달마와 혜가가 나눈 문답은 달마가 혜가에게 처음 법을 전한 장면이지만 『염송설화』에서는 이미 여래선에 짝지었다. 또 여래가 처음 법을 전한 ‘분반좌’ 일화를 『염송설화』에서는 이미 살인도에 짝지었다. 그러므로 ‘모든 대상이 끊어졌는가?’라는 문답이 달마가 처음 법을 전한 장면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전등록』에서 그것을 빼 버리고 싣지 않았으며 『염송설화』에서는 마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는 취지를 분명하게 밝혔지만 살인도를 여래선으로 잘못 본 것이다.(蓋諸緣斷否問答, 爲達摩初傳, 而說話旣配如來禪. 又如來初傳分半座, 說話旣配殺人刀. 故不知其諸緣斷否問答, 非達摩初傳, 故傳燈拔去不載, 而說話明辨非傳心之義, 誤以殺人刀, 爲如來禪.)” 『염송설화』의 취지를 살펴보면 첫 번째로 마음을 전한 때인가 아닌가가 논점의 핵심은 아니다. 『염송설화』에서는 제연이단諸緣已斷 문답과 법인法印 문답을 놓고 선후를 따지며 제연이단 문답이 법인 문답보다 앞서 있었다면 혜가가 점기漸機가 된다는 주장을 깨뜨리고 수행 과정이 점차적이라는 점을 허물로 여길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돈頓과 점漸을 놓고 벌이는 세태의 잘못을 짚는 데 초점이 있다. 제연이단 문답이 먼저 있었고 이에서 터득한
    조는 이에 주저앉지 않고 이어 법인 문답에서 조사선을 알아차림으로써 2조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 『염송설화』의 취지이다.
  339. 339)미모시결眉毛撕結은 미모시결眉毛廝結로도 쓴다. 시廝는 ‘상相’ 또는 ‘호互’와 같은 말이다. 서로 마주하고 의견을 주고받을 정도로 수준이 같거나 아주 긴밀한 관계 또는 마주 앉아 어떤 문제를 두고 대결한다는 뜻이다.
  340. 340)『景德傳燈錄』 권3 「菩提達磨傳」(T51, 220b4), “달마 대사가 입적하던 그해(495년) 12 월 28일, 웅이산에서 장례를 치르고 정림사에 탑을 세웠다. 3년 뒤에 위나라의 송운宋雲이 왕명을 받고 서역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총령에서 달마 대사를 만났는데, 손에 신발 하나를 들고 옷자락을 펄럭이며 홀로 가고 있었다. 송운이 ‘스님! 어디 가십니까?’라고 물으니 ‘서천으로 가네.’라 하고, 다시 송운에게 ‘그대의 임금(孝明帝)은 이미 세상을 떠나셨네.’라고 하였다. 송운이 그 말을 듣고 망연해 하며 달마 대사와 작별하고 동쪽으로 달려와 조정에 이르러 일의 결과를 보고하였는데, 효명제는 이미 서거한 뒤였고 후사를 이어 동혼후東昏侯가 즉위해 있었다. 송운이 앞서의 일을 상세히 아뢰자 임금이 명하여 달마 대사의 무덤을 파 확인해 보도록 했는데, 빈 관 안에 짚신 하나만 남아 있었다.(其年, 十二月二十八日, 葬態耳山, 起塔於定林寺. 後三歲, 魏宋雲, 奉使西域廻, 遇師于葱嶺, 見手攜隻履, 翩翩獨逝. 雲問, ‘師何往?’ 曰, ‘西天去.’ 又謂雲曰, ‘汝主已厭世.’ 雲聞之茫然, 別師東邁, 曁復命, 卽明帝已登遐矣, 逮孝莊卽位. 雲具秦其事, 帝令啓壙, 唯空棺一隻革履存焉.)”
  341. 341)법공좌法空座 : 모든 법이 공空이라는 이치에 근거한다는 뜻이다. 『法華經』에 나오는 ‘여래좌如來座’를 가리킨다. 『祖庭事苑』 권2(X64, 327c21), “법공좌 : ……여래실如來室이란 모든 중생의 큰 자비심을 가리키고, 여래의如來衣란 유화한 인욕심을 말하며, 여래좌如來座란 일체법이 공이라는 이치를 가리킨다.(法空座 : ……如來室者, 一切衆生大慈悲心是;如來衣者, 柔和忍辱心是;如來座者, 一切法空是.)”
  342. 342)자명慈明 : 석상 초원石霜楚圓의 호.
  343. 343)이 부마李駙馬(李遵勗) : 부마는 관직명으로 부마도위駙馬都尉의 약칭이다. 석문 온총石門蘊聰(谷隱蘊聰)의 재가 제자이자 『天聖廣燈錄』의 편자인 이준욱李遵勗을 가리킨다.
  344. 344)자명慈明이 이~준 것 : 『石霜楚圓語錄』(X69, 194c23), “장章과 개介라는 두 대사가 도위都尉의 편지를 가지고 석상의 처소에 찾아왔다. 석상이 답장을 하면서 편지지 뒷면에 두 발을 그리고 발 아래에 두 대사의 이름을 써서 도위에게 부치자 도위가 다시 게송으로 답장했다. ‘흑호 휘날리며 천 리를 달려오자, 황금의 관(金槨)에서 두 발을 보이시네. 인천의 대중 모두 헤아리지 못하는데, 붉은 수염의 오랑캐(부처님)에게 인사를 올리네.’(因章介二大師, 持都尉書至師. 師有書復, 於書後畫兩隻脚, 脚下書二大師名, 寄都尉, 都尉復以頌答, ‘黑毫千里餘, 金槨示雙趺. 人天都不測, 珍重赤鬚胡.’)”
  345. 345)가라앉지도 않고 들뜨지도 않는 : 지관止觀을 방해하는 혼침昏沈과 도거掉擧 등 두 가지 병통이 없다는 뜻. 혼침(ⓢ styāna)은 마음을 가라앉게 하여 관觀(ⓢ vipaśyana)을 방해하는 마음 작용(心所)이고, 도거는 마음을 들뜨고 불안정하게 만들어 지止(ⓢ śamatha)를 방해하는 마음 작용이다.
  346. 346)신령한 근원(靈源) : 심령心靈. 넓은 의미의 마음을 나타낸다.
  347. 347)『禪門拈頌說話』 37칙(H5, 50b12).
  348. 348)앞의 주석 335 참조.
  349. 349)앞의 주석 335 참조.
  350. 350)앞의 주석 337 참조.
  351. 351)앞의 주석 335 참조.
  352. 352)앞의 주석 334 참조
  353. 353)앞의 주석 347 참조
  354. 354)『禪門拈頌說話』 103칙(H5, 112b2), “無盡居士頌, 非關壁觀九年功, 歷劫悠悠當處空. 熊耳塔開留隻履, 十方全體現圓通.” 그 설화는 다음과 같다. “제1구와 제2구:9년 동안의 공력뿐만이 아니라 아득히 지난 겁도 지금 이 자리에서는 고요할 뿐이라는 뜻을 표현하였다. 제3구와 제4구:‘신령스러운 근원이 맑고 고요하여 옛날도 없고 지금도 없다.’고 운운한 말과 같다.(非但九年功, 歷劫悠悠, 當下寂然也. 熊耳塔開云云者, 靈源湛寂, 無古無今云云.)”
  355. 355)삼분三分 : 삼분단三分段ㆍ삼분과경三分科經ㆍ삼단부동三段不同 등이라고도 한다. 경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해석하는 방식이다. 동진의 도안道安이 창안하여 송나라 이후 성행하였다. 서분序分은 본 경에서 일으킨 인연으로서 서설序說에 해당하고, 정종분正宗分은 본 경 서술의 핵심부로서 본론에 해당하며, 유통분流通分은 본 경의 덕과 영향 등을 들어 그 유통을 권하는 부분으로서 결론에 해당한다.
  356. 356)『景德傳燈錄』 권3 「菩提達磨傳」(T51, 219c27);『禪門拈頌說話』 100칙(H5, 105c21).
  357. 357)간문전심揀文傳心은 문자를 잘 선택하여 마음을 전한다는 말로, 문자에 집착하는 자들을 교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적절한 문자를 선택하여 본래의 길로 유도하는 것을 이른다.
  358. 358)그 본체를 묵묵히 보였다 : 묵전심인默傳心印이라고 한다. 먼저 말해 주지 않고 스스로 깨치도록 유도하여 궁극적 경지에 이른 뒤에라야 인가하는 방식을 말한다. 주석 359 참조.
  359. 359)이 글에 이어 『都序』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都序』 권상2(T48, 405b8), “만약 답이 들어맞지 못하면 다만 잘못을 차단하여 다시금 관찰하게 하며 끝내 상대에게 먼저 지知라는 글자를 알려 주지 않고 스스로 깨달아 진실을 증험하고 그 본체를 친히 증득하기를 기다린다. 그런 연후에 인가하여 여타의 다른 의혹을 끊도록 한다. 그러므로 이를 가리켜 묵묵히 심인心印을 전한다고 한다. ‘묵默’이라 말하는 까닭은 다만 지知 자를 말하지 않는다는 뜻이지 전혀 말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선종의 6대가 서로에게 전한 방식이 모두 이와 같았다.(若所答不契, 卽但遮諸非, 更令觀察, 畢竟不與他先言知字, 直待自悟方驗實, 是親證其體. 然後印之令絶餘疑. 故云, 默傳心印. 所言默者, 唯默知字, 非總不言. 六代相傳, 皆如此也.)”
  360. 360)『書狀』 「答劉寶學」 권27(T47, 925b18).
  361. 361) 『염송설화』에서는 단연斷緣~라고 하였다 : 『禪門拈頌說話』 100칙(H5, 106a19), “ ‘분명하게 깨어 어둡지 않고 뚜렷하게 항상 알고 있다.’라고 한 말은 본분사가 본체와 같다는 이치를 알았기 때문이다. 모든 대상이 끊어지고 나면 끊어져서 아무것도 없는 그 경계(斷滅)에 떨어지는 사람도 있지만 2조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분명하게 깨어 어둡지 않고 뚜렷하게 항상 알고 있었으니, 깨달음과 수행이 곧바로 사라지면서 여래선을 증득하였던 것이다. 중ㆍ하 근기의 무리였다면 이 경계에서 눌러앉아 본분사를 벌써 마쳤다고 여겼겠지만 2조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다시 모든 부처님의 법인에 대하여 묻고는 그 자리에서 마음을 편안히 하고 모든 부처님이 전한 마음의 본체를 깨달았다. (이 때문에) 앞에서 터득한 이해가 더욱 밝아져 ‘분명하게 깨어 어둡지 않고 뚜렷하게 항상 알고 있다.’고 말한 뒤 마침내 조사선을 알아차리고 달마의 인가를 받았던 것이다. 이것이 2조가 2조가 된 이유이다.(明明不昧, 了了常知者, 知有本分事, 與體一般也. 諸緣旣斷, 或有落斷滅者, 今二祖則不然. 明明不昧, 了了常知, 則悟修斯亡, 乃證得如來禪也. 其如中下之類, 於此坐着, 便以爲能事已畢, 二祖卽不然. 又問, 諸佛法印, 當下安心, 悟得諸佛所傳心體. 前解轉明曰, ‘明明不昧, 了了常知.’ 遂乃會得祖師禪, 得他印許. 此所謂二祖之爲二祖者也.)”
  362. 362)일의 시작(發軔) : ‘인軔’은 수레를 정지시키는 나무로, 발인發軔은 수레바퀴에 괴었던 이 나무토막을 풀어서 움직이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로부터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을 이에 비유한다.
    a12), “배우는 자들이 왕왕 시작부터 결택함에서 어긋나 마침내 남쪽 월나라로 가려다가 북쪽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學者往往, 差決擇於發軔, 終適越而北轅.)”
  363. 363)남쪽 월나라로~돌리고 만다(適越而北轅) : 사자성어로 북원적월北轅適越ㆍ북철남원北轍南轅ㆍ북원적초北轅適楚 등이라고 한다. 남쪽으로 가려 하면서 정작 수레 멍에는 북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말이다. 행위와 목적 또는 말과 행동이 상반됨을 비유한다. 전혀 쓸모없거나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것을 일컫기도 한다.
  364. 364)앞의 주석 113 참조.
  365. 365)『禪門證正錄』 「第二 如來禪祖師禪 義理禪格外禪說」(H10, 1139c9), “또 말하였다. (『선문강요집』에서) ‘비춤과 작용은 요要로서 제1구에 해당하며, 권權과 실實은 현玄으로서 제2구에 해당하고 또한 제3구에 해당한다.’라고 하였다. 이 제1구만이 격외이므로 조용照用의 요要를 유독 제1구에 짝짓고, 제2구와 제3구는 비록 가假와 실實에서 다름이 있지만 한가지로 의리가 되기 때문에 권실權實의 현玄에 짝지어야 한다.……세존이 가섭에게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한 것을 첫머리의 표지로 한 까닭은 이 공안으로 교외별전의 종지를 세우기 위해서이며,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한 것은 모두 제1구 조사선의 심인에 해당하며 모든 교敎의 격을 벗어나 별도의 방법으로 전하는 종지로 간주한다. 제2구 여래선은 여래가 증득하고 설한 교내敎內의 의리이므로 이하에서는 ‘여래가 적멸도량에서 처음 정각을 이루고 천 장 길이 노사나불의 몸을 드러내자 41위 법신 대사와 과거세에 근기가 성숙한 천룡팔부가 일시에 둘러싸니 마치 구름이 달을 감싸는 듯했다는 장면이 바로 제2구이다. 그러므로 인천의 스승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세 곳에서 전한 일 가운데 제1구 조사선은 교외의 격외선이고, 제2구 여래선은 교내의 의리선이다. 이와 같이 분명한데 어찌하여 제2구 여래선을 격외선이라 하는가.(又云, ‘照用是要, 當第一句, 權實是玄, 當第二句, 又當第三句.’ 此第一句, 獨爲格外, 故以照用之要, 獨配之, 第二句第三句, 雖假實有異, 同爲義理, 故以權實之玄, 合配也.……世尊迦葉, 三處傳心, 所以首標, 此個公案, 以立別傳之宗者也, 此三處傳心, 總屬於第一句祖師禪心印, 以爲格外別傳之宗旨. 然則其第二句如來禪, 卽如來所證所說之敎內義理, 故次下卽云, ‘如來, 在寂滅場中, 初成正覺, 現千丈盧舍那身, 四十一位法身大士, 及根熟天龍八部, 一時圍繞, 如雲籠月, 是第二句. 故云人天爲師.’ 然則三傳之第一句祖師禪, 爲敎外之格外禪, 第二句如來禪, 爲敎內之義理禪. 如彼分明, 奈之何, 以第二句如來禪爲格外禪.)”
  366. 366)앞의 주석 27 참조.
  367. 367)앞의 주석 361 참조.
  368. 368)앞의 주석 52 참조.
  369. 369)앞의 주석 295 참조.
  370. 370)앞의 주석 170, 194 참조.
  371. 371)『禪門綱要集』 c17~855a2).
  372. 372)『禪門綱要集』 c11).
  373. 373)이하 모두 일우의 답변이다. 별도로 인용 표시는 하지 않겠다. 『禪門綱要集』 c17~855b2).
  374. 374)『宗門拈古彙集』 권39(X66, 228c16);『禪門拈頌說話』
    b4). 『拈頌說話』에서는 다음과 같이 평석하였다. 『禪門拈頌說話』
    b8), “ ‘초심으로서 도를 깨닫기 이전에는, 시끌벅적한 경계에 있어서는 안 된다.’라고 한 말:반드시 성색聲色을 떠나야 한다는 뜻이다. ‘종소리에 곧장 알아차렸더라도, 북소리 듣고 바로 전도되리라.’라고 한 말:종소리와 북소리를 비추듯이 받아들여 알아차리면 종소리와 북소리에서 곧바로 전도된다는 뜻이다. 마주친 소리와 색은 소리와 색 그대로가 아니기 때문이다.(初心至閙浩浩者, 直須離却聲色也. 鍾聲裏云云者, 影略鍾聲皷聲裏薦取, 鍾聲皷聲卽顚倒也. 則當聲色, 非聲色也.)”
  375. 375)『禪門拈頌說話』 586칙(H5, 453a18), “앙산이 어느 날 향엄을 만나서 물었다. ‘요즘 사형의 견지는 어떠신가?’ ‘나의 견지에 따르면 진실로 분별에 딱 들어맞는 법은 하나도 없습니다.’(仰山一日見香嚴, 乃問, ‘近日師兄見處如何?’ 嚴云, ‘據某甲見處, 無一法可當情.’)” 『拈頌說話』의 평석은 다음과 같다. 『禪門拈頌說話』 586칙(H5, 453b17), “ ‘나의 견지에 따르면 진실로 분별에 딱 들어맞는 법은 하나도 없소.’라고 한 말은 대나무에 돌조각이 부딪힌 경계, ‘한 번 부딪히는 소리에 모든 앎 잊고 나니, 더 이상 닦을 필요가 없노라.’라는 소식을 가리킨다.(據某甲見處無一法可當情者, 擊竹處, 一擊忘所知, 更不假修治云云也.)”
  376. 376)여기서 가난(貧)은 무일물無一物의 경지를 말한다.
  377. 377)앞의 주석 18 참조.
  378. 378)고목은 말라 죽은 나무이며, 용음龍吟은 바람이 불어서 고목나무의 구멍을 울리는 소리를 말한다. 고목리용음枯木裏龍吟은 망상이 모두 말라 죽은 경계에서 용과 같은 남다른 견해가 살아난다는 상징이다. 『拈頌說話』에서는 이하의 향엄의 말까지 아울러 다음과 같이 평석하였다. 『禪門拈頌說話』 601칙(H5, 468b8), “고목 속에서 울리는 용울음소리란 알갱이 없는 허튼소리를 뜻하고, 해골 안에서 움직이는 눈동자란 비추어 보는 기능이 없다는 뜻이다. 곧 ‘잠정적으로 사람이라고 한 그것(해골)이 무엇을 근거로 살아 있겠는가?’라는 반문이다.(枯木裏龍吟者, 虛聲也. 髑髏云云者, 無照燭也. 則道, ‘是假名人, 從何立耶?’)”
  379. 379)촉루髑髏는 죽은 사람의 두개골이다. 촉루리안청髑髏裏眼睛은 시체에 눈동자가 박혀 있은들 볼 수 없듯이 분별이 완전히 죽어 고요의 극치에 이른 경계를 상징한다. 바로 그러한 때에 진실을 간파하는 안목이 살아 움직일 수 있다는 의미이다.
  380. 380)『禪門綱要集』 a24), “이것은 대단한 솜씨의 종사가 제3구에 발을 딱 붙이고서 이러니저러니 자재하게 소식을 펼치는 때이다.(此乃大手宗師, 向第三句中, 四棱着地, 東說▣說底時節.)”
  381. 381)『禪門拈頌說話』 618칙 육왕 개심育王介諶의 소참小參에 대한 설화의 평석이다. 『禪門拈頌說話』 618칙(H5, 482c8), “ ‘어떤 때는 미혹과 깨달음을 함께 거두고 어떤 때는 미혹과 깨달음을 함께 놓아 버린다.’라고 한 말 : 중간을 묘사한 말이다. 제2구에 이르면 수많은 소식이 있겠지만, 제1구를 기준으로 하면 다만 사람을 죽이는 칼과 사람을 살리는 검만 있을 뿐이다. 임제가 휘두른 한 대의 방에는 이와 같은 소식이 있는데 그것을 가리켜 ‘잉어가 용으로 변화한다.’라고 한다.(迷悟雙收云者, 約中間言也. 至第二句, 有許多消息, 若約第一句, 則但殺人刀活人劒而已也. 臨濟一條棒, 有如是等消息, 所謂變化魚龍也.)”
  382. 382)『禪門證正錄』 「第三 殺人刀活人劒說」(H10, 1140c19).
  383. 383)『禪門證正錄』 「第三 殺人刀活人劒說」(H10, 1140c21). 『禪門拈頌說話』
    b10), “ ‘몇 번째 기틀인가?’라고 한 말:대체로 학인을 가르침에는 세 등급 기틀 중 한 기틀을 쓰고, 온전한 기틀을 그대로 드러내는 일은 벌이지 않는다. 구절로 보면 세 등급 속에 모두 삼구가 들어 있다. 삼구란 인人과 경境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곧바로 상근기를 가르치며 제1기에서 들어 보이면 구절마다 하나하나에 온전히 제기되어 있다. 온전히 제기되어 있다면 ‘삼구를 벗어난 일구’나 ‘일구에 삼구가 모두 갖추어진다.’거나 ‘삼구가 일구에 귀착된다.’거나 ‘삼구와 일구가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거나 하는 따위의 주장이 모두 군더더기 말에 불과하여 어느 것도 특별한 사안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실은 두 구절에 불과하며 중간 구절이라는 말도 아무 효력이 없다.……마지막에 ‘남산에서 구름이 일어나니 북산에서 비가 내린다.’라고 한 말:이 말로써 옛사람은 그렇게 적절한 소식을 전할 수 있게 되었던 까닭에 사람을 죽이는 칼과 사람을 살리는 검에 대해서만 말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한 줄의 끈 縚의 음은 刀 은 30푼 나간다.’라는 말은 ‘남산에서 구름이 일어나니 북산에서 비가 내린다.’라고 한 말보다 못하다. 어쩔 수 없이 중근기를 위해 제2기에서 시설하면 격칙格則을 완성한다. 체體와 용用의 구절을 예로 들면 체 안에 용이 있고 용 안에 체가 있다. 또한 중간구를 따르면 체와 용을 함께 거두고(收) 체와 용을 함께 놓아두지만(放), 사실은 삼구를 벗어나지 못한다. 비록 격칙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삼구를 한꺼번에 시설한다. 하열한 근기에게 자세하게 가르쳐 주고자 제3기 중에서 가르침을 주니, 수많은 차별과 지위를 시설하지만 그것도 삼구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이는 몇 번째 기틀인가?’라고 물었던 것이다.(第幾機者, 大凡接人, 有三等機之機, 非全機機事也. 如句焉, 於三等中, 皆有三句. 三句者, 人境是也. 故直接上根, 向第一機提持, 則句句一一全提. 旣是全提, 則‘三句外一句’, ‘一句該三句’, ‘三句歸一句’, ‘三一不相涉’之論, 皆爲剩語, 非是別事也. 然則其實不過兩句, 所謂中間句者, 亦無所得力矣.……下云南山起雲北山下雨者, 以此所以古人到這時節, 只道得个殺人刀活人釰. 然則‘一條縚 音刀 三十文’之言, 不如‘南山起雲北山下雨’也. 不得已爲中根, 向第二機施設, 則完成格則. 如體句用句, 體中有用, 用中有體. 且約中間, 體用雙收, 體用雙放, 其實亦不出三句. 雖然未離格則, 三句一時施設也. 曲爲下劣之根, 向第三機中接得, 則施設許多差別地位, 亦不離三句也. 故云, ‘是第幾機?’)”
  384. 384)설두 유형은 이 부분은 생략하고 자세히 인용하지 않았지만, 147칙은 청원 행사淸源行思가 6조에게 ‘어떤 일에 힘써야 계급에 떨어지지 않습니까?’라고 물으며 나눈 문답을 소재로 한 공안이고, 119칙은 남악 회양南嶽懷讓이 6조와의 문답에서 ‘하나의 그 무엇이라고 말해도 딱 들어맞지 않습니다.’, ‘수행하여 깨닫는 일이 없지는 않지만, 오염시킬 수도 없습니다.’라고 답한 이야기를 소재로 한 공안이다. 두 사람 모두 6조의 인가를 받게 된 문답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후대에 이 문답을 가름하면서 청원은
    조의 비정통 전수자(傍傳)가 되었고, 남악은 활인도를 얻고 6조의 바른 전통(正傳)이 되었다고 평가된다. 살과 활의 관계를 거론하고자 우담 홍기가 이 문답을 거론한 것이다.
  385. 385)정확히 일치하는 대목은 찾지 못하였다. 『禪門證正錄』 「第三 殺人刀活人劒說」(H10, 1141b23), “또 제1구에서 삼구를 동시에 시행하거나 일구를 동시에 시행하지 못하거나 모두 하지 못하는 것을 살이라고 하고 모두 시행할 수 있는 수단을 활이라고 하였으니 대기大機를 살로 삼고 대용大用을 활로 삼은 것이 아니다. 『염송설화』에서 대기와 대용이라 한 부분에 살과 활을 동시에 두기도 하지만 대기와 대용은 활의 수단일 뿐이며 살과 활의 본체는 둘이 아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이렇게 거론한 것이다. 이를테면 마조의 일할一喝에 백장이 사흘 동안 귀가 먹고 이 이야기를 들은 황벽은 자신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는 일화에 대해 후에 앙산이 ‘백장은 대기를 얻었고 황벽은 대용을 얻었다.’고 구분하여 말한 것과 같다.(又第一句中, 同時三句, 不同時一句, 總不得者, 謂之殺, 摠得者, 謂之活, 則非以大機爲殺, 大用爲活也. 說話中, 有機用處, 或有殺活, 然機用但活, 而殺活体無二故, 因便擧之. 如馬祖一喝, 百丈三日聾, 黃蘗不覺吐舌, 後來仰目辨曰, ‘百丈得機, 黃蘗得用也.’)”
  386. 386)『禪門綱要集』 c5).
  387. 387)우담 홍기가 대기와 대용, 살과 활을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였다면, 설두 유형은 이들의 관계를 구분하는 관점을 견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 인용한 백장百丈 재참再參 공안에 국한하여 보면, 마조의 할이 사람을 죽이는 칼이 되기도 했다가 사람을 살리는 검이 되기도 하며 자유자재로 긍정과 부정을 바꾸어 가며 학인을 이끄는 기용機用이라고 평가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다만 어느 수단을 오롯이 쓰는가, 아니면 상대의 근기와 상황에 따라 두 수단을 맞바꾸며 의식을 뒤흔드는 전략을 쓰는가 등에서 차이가 나고, 이 수단을 수용하는 사람에 따라서도 평가가 달라질 뿐이다.
  388. 388)앞의 주석 156 참조.
  389. 389)철척鐵脊은 생철로 만든 기(鐵幢)를 등골뼈에 비유한 말로, 철척탱천鐵脊撑天은 등뼈를 꼿꼿이 세우고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를 뜻한다.
  390. 390)『禪門綱要集』 b14).
  391. 391)『禪門證正錄』 「第四 三句一句說」(H10, 1142b22).
  392. 392)『禪門綱要集』 a3).
  393. 393)『禪門證正錄』 「第四 三句一句說」(H10, 1142c19).
  394. 394)『禪門綱要集』 b8).
  395. 395) 『臨濟語錄』(T47, 497a15), “법좌에 올라앉자 어떤 학인이 물었다. ‘제1구는 어떤 것입니까?’ ‘삼요의 도장을 찍고 떼니 붉은 무늬점이 분명히 나타난다. 이에 대하여 분별하기도 전에 주ㆍ객이 갈라지리라.’ ‘제2구는 어떤 것입니까?’ ‘문수보살이 어찌 무착無著 선사의 물음을 용납할 것인가? 그러나 방편이 어찌 번뇌를 끊은 근기(문수)와 상충되겠는가!’ ‘제3구는 어떤 것입니까?’ ‘무대 위에서 움직이고 있는 꼭두각시를 보라. 밀거나 당기거나 모두 그 뒤에서 조작하는 사람의 손에 달려 있다.’ 임제는 다시 ‘1구의 말에는 반드시 삼현문을 갖추고 일현문에는 반드시 삼요를 갖추어야 방편도 있고 작용도 있게 된다.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라 말한 뒤 법좌에서 내려왔다.(上堂. 僧問, ‘如何是第一句?’ 師云, ‘三要印開朱點側, 未容擬議主賓分.’ 問, ‘如何是第二句?’ 師云, ‘妙解豈容無著問? 漚和爭負截流機!’ 問, ‘如何是第三句?’ 師云, ‘看取棚頭弄傀儡. 抽牽都來裏有人.’ 師又云, ‘一句語須具三玄門, 一玄門須具三要, 有權有用. 汝等諸人, 作麽生會?’ 下座.)”
  396. 396)『禪門綱要集』 b10).
  397. 397)『人天眼目』 권2
    a7);『禪門拈頌說話』
    b15).
  398. 398)『禪門綱要集』 b2ㆍ856c15).
  399. 399)저온底蘊은 저온柢蘊이라고도 한다. 오랜 연구로 깊이 쌓은 학식을 뜻한다.
  400. 400)매롱賣弄은 뽐내다, 자랑하다, 과시하다라는 뜻으로도 쓰이지만, 여기서는 마음껏 활용하다라는 의미로 보았다.
  401. 401)진실의 땅과 이치의 하늘(實地義天) : 진실과 이치의 기준을 하늘과 땅으로 상징한 말. 『注大乘入楞伽經』 권3(T39, 454a6), “삼三은 삼 자체가 아니니 일성一性이 원만하고, 일一은 일 자체가 아니니 삼성三性이 갖추어져 있다. 거두고 펼침에 아무것도 잃지 않고 숨고 나타남에 항상 그대로이다. 일도 아니고 삼도 아니니 ‘진실의 땅’에서 성性과 상相의 차별을 모두 없애고, 삼이면서 일이니 ‘이치의 하늘’에서 모든 차별을 밝게 펼친다.(三非三而一性圓, 一非一而三性具. 卷舒不失, 隱顯常如. 非一非三, 泯性相於實地;而三而一, 耀行布於義天.)” 초의 의순, 김영욱 옮김, 『선문사변만어』, p.31 주석 8 참조.
  402. 402)십령백락十零百落은 보통 칠령팔락七零八落이라고 한다. 이리저리 흩어지고 산산조각이 난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지리멸렬하다’로 번역하였다.
  403. 403)경찬慶讚 : 경전이나 부처님의 덕을 칭송하는 것.
  404. 404)이를 아울러 삼종회향三種廻向이라고 한다. 『大乘義章』 권9(T44, 636c22), “회향이란 무엇인가? 자신의 선법善法을 돌이켜 다른 사람에게로 향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회향이라고 한다. 회향에 다른 점이 있으니 회향 자체는 하나이나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보리회향, 둘째 중생회향, 셋째 실제회향이다. 보리회향이란 일체의 지혜로운 마음을 구하는 것이다. 자신이 닦은 일체의 선법을 돌이켜 보리와 일체의 덕을 구하는 뜻에 향하는 것을 보리회향이라고 한다. 중생회향이란 중생을 깊이 생각하는 마음이다. 중생을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이 닦은 일체의 선법을 돌이켜 다른 사람에게 주기를 원하는 것을 중생회향이라고 한다.……셋째 실제회향이란 유위법을 싫어하고 실제를 구하는 마음이다. 유위법을 없앴기에 실제를 구하는 뜻에 향하여 자신의 선근으로 평등하고 여실한 법성을 돌이켜 구하므로 실제회향이라고 한다.(言迴向者, 迴己善法, 有所趣向, 故名迴向. 迴向不同, 一門說三. 一, 菩提迴向, 二, 衆生迴向, 三, 實際迴向. 菩提迴向者, 是其趣求一切智心. 迴己所修一切善法, 趣求菩提一切種德, 名菩提迴向;衆生迴向者, 是其深念衆生之心. 念衆生故, 迴己所修一切善法, 願以與他, 名衆生迴向……;三, 實際迴向, 是厭有爲, 求實之心. 爲滅有爲, 趣求實際, 以己善根, 迴求平等如實法性, 名實際迴向.)”
  405. 405)자계字界 : ⓢ dhātu를 한역한 말. 동사의 어근語根을 말한다. 어계語界ㆍ자원字元ㆍ자체字體라고도 한다. 『金剛新眼疏經偈合釋』(X25, 240c8), “반야의 바른 한역어는 혜慧이다. 『지도론』에 ‘인위因位로는 반야라 하고, 과위果位로는 지智라 한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혜는 지智의 인因이고, 지는 혜의 과果라는 뜻이다. 『금강경찬요소』에 ‘ 『대품경』에 따르면 야若 자는 지와 혜, 두 가지 뜻에 통한다. 그러므로 지와 혜는 이름의 뜻은 다소 다르지만 그 본체의 성품은 다름이 없다.’라고 하였다. 『금강경간정기』에서는 ‘자계와 자연字緣을 밝힌다. 야若 자는 자계이고 반般 자와 나那 자는 모두 자연이다. 반 자를 자연으로 삼아 야 자를 도우면 혜라 하고, 나 자를 자연으로 삼아 야 자를 도우면 지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일반적으로는 나누지 않으니 지가 곧 혜이고 혜가 곧 지이다. 그런 까닭에 반야 두 글자를 한꺼번에 번역하여 지혜라고 한다.(般若, 正翻爲慧. 智度論云, ‘因位名般若, 果位名智.’ 是則慧爲智之因, 智爲慧之果. 纂要疏云, ‘若依大品經, 若字通智慧二義. 故智與慧, 名義少殊, 體性無別.’ 刊定記釋云, ‘此明字界字緣. 若字是字界, 般那都爲緣. 若以般爲緣助於若字, 則名爲慧;若以那爲緣助於若字, 則名爲智.’ 常途亦有不分, 以智卽是慧, 慧卽是智. 故般若二字, 一往翻爲智慧.)”;『金剛經纂要刊定記』 권2(T33, 184b17).
  406. 406)『金剛般若經疏論纂要』(T33, 155c6), “바라밀은 피안도라 한역하는데, 도피안이라 하는 것이 옳다. 생사의 차안을 떠나 번뇌라는 흐름의 한복판을 건너 열반의 피안에 이른다는 뜻이다. 열반은 원적 또는 멸도라고도 한역한다.(波羅蜜者, 此云彼岸到, 應云到彼岸. 謂離生死此岸, 度煩惱中流, 到涅槃彼岸. 涅槃, 此云圓寂, 亦云滅度.)”
  1. 1){底}光緖十五年。幻翁喚眞述記本(서울大學校所藏)。
  2. 1)「婆」疑「娑」{編}。
  3. 1)「裹」疑「裏」{編}。
  4. 1)「可」疑「句」{編}。
  5. 1)「雪」疑「雲」字之誤{編}。
  6. 1)「見」上疑脫「不」{編}。
  7. 1)「亦」疑「示」{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