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범해선사문집(梵海禪師文集) / 梵海禪師文集第一

ABC_BJ_H0259_T_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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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해선사문집梵海禪師文集
범해선사문집 제1권(梵海禪師文集 第一)
두륜산 환여 각안 지음(頭輪山 幻如覺岸 著)
총목차總目次
문文 1-32편
자웅종기雌雄鐘記
은적암 산신각 창건기隱跡庵山神閣創建記
화공양기花供養記
청해 관음암 산신각 창건기淸海觀音庵山神閣創建記
옥주 쌍계사 중수기沃州雙溪寺重脩記
노인성기老人星記
대둔사지 약기大芚寺志畧記
수보살계첩 발受菩薩戒牒跋
『사십이장경평과』 발문(四十二章經評科跋)
천불 조성 약기千佛造成畧記
다약설茶藥說
까치가 논에 둥지를 튼 데 대한 해설(鵲巢水田說)
능견난사변能見難思辨
아육왕탑변阿育王塔辨
곡직변曲直辨
축맹치설逐虻峙說
미황사 영허의 화행을 찬미하는 설(美黃靈虛化行說)
순천 주검돌의 대동색설(順天朱黔突大同色說)
오종결의론五種決疑論
대승계 법문大乘戒法門
다구명茶具銘
행장명行藏銘
죽비명竹篦銘
목탁명木鐸銘
주장명柱杖銘
염주명念珠銘
영산 선지식 찬(影山知識贊)
백파 율사 찬白坡律師贊
용운 대사 찬龍雲大師贊
무위 진신 찬無爲眞身贊
자찬自贊
병인년 표충사 축(丙寅表忠祠祝)
범해선사문집 제2권 梵海禪師文集 第二
문文 2-42편
문향각 상량문聞香閣上樑文
두륜산 진불암 법당 상량문頭輪山眞佛庵法堂上梁文
두륜산 신건 영산전 상량문頭輪山新建靈山殿上梁文
두륜산 시왕전 상량문頭輪山十王殿上梁文
두륜산 상원암 신건 칠성전 상량문頭輪山上院庵新建七星殿上梁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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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75_c_01L[梵海禪師文集]

010_1075_c_02L1)梵海禪師文集第一

010_1075_c_03L

010_1075_c_04L頭輪山 幻如覺岸 著

010_1075_c_05L2)總目次

010_1075_c_06L
卷一

010_1075_c_07L
文(一)三十二篇

010_1075_c_08L
雌雄鐘記隱跡庵山神閣創建記
010_1075_c_09L供養記淸海觀音庵山神閣創建記
010_1075_c_10L州雙溪寺重脩記老人星記大芚寺
010_1075_c_11L志畧記受菩薩戒牒跋四十二章經
010_1075_c_12L評科跋千佛造成畧記茶藥說
010_1075_c_13L巢水田說能見難思辦阿育王塔辨
010_1075_c_14L曲直辨逐虻峙說美黃靈虛化行說
010_1075_c_15L順天朱黔突大同色說五種決疑論
010_1075_c_16L乘戒法門茶具銘行藏銘竹篦銘
010_1075_c_17L木鐸銘柱杖銘念珠銘影山知識
010_1075_c_18L白坡律師賛龍雲大師贊無爲
010_1075_c_19L眞身贊自贊丙寅表忠祠祝

010_1075_c_20L
卷二

010_1075_c_21L
文(二)四十二篇

010_1075_c_22L
聞香閣上樑文頭輪山眞佛庵法堂上
010_1075_c_23L梁文頭輪山新建靈山殿上梁文
010_1075_c_24L輪山十王殿上梁文頭輪山上院庵新
010_1075_c_25L{底}新文館發行鉛印本目次編者作成補入

010_1076_a_01L『선문만어』 서禪門謾語序
『두륜당시집』 서頭輪堂詩集序
보제회중 학계안 서普濟會中學禊案序
승족보 서僧族譜序
『제서명수』 서諸書名數序
서씨 동족계안 서徐氏同族契案序
인기 상포계안 서仁基喪布契案序
『동시만선』 서東詩漫選序
『통감사기』 서通鑑私記序
수보살계 계안 서受菩薩戒契案序
고진불 사맹불량안 서古眞佛四孟佛粮案序
『진불암지』 서眞佛庵志序
윤자계안 서潤字契案序
자설혜자계안 서自說慧字契案序
영산전 창건 시주안 서靈山殿剏建施主案序
적광전 등촉계안 서寂光殿燈燭契案序
『불조원류』 서佛祖源流序
강진 고성암 중종 시주안 서康津高聲庵中鐘施主案序
장성 백양산 청류동 중종 시주안 서長城白羊山淸流洞中鐘施主案序
대둔사 무량회 모연 소大芚寺無量會募緣䟽
서산 대사 영각 다례 모연 소西山大師影閣茶禮募緣疏
무안 법천사 가사 및 천등 모연 소(務安法泉寺袈裟及千燈募緣疏)
여산 미륵사 중수 모연 소礪山彌勒寺重修募緣䟽
무량회 중수 모연 소無量會重修募緣䟽
일허 거사에게 부치는 편지(寄一虛居士書)
박노하에게 답하는 편지(答朴蘆河書)
청양 수령【정대림】에게 올림(上靑陽倅【丁大林】)
장연 부사에게 올리다(上長淵府使)
단양 정 사군에게 올리다(上丹陽丁使君)
신 승지에게 올리는 편지(上申承旨書)
신 승지에게 올리는 편지(上申承旨書)
조 판서에게 올리는 편지(上趙判書)
철요 스님에게 부치는 편지(寄鐵鷂師書)
혼허 스님을 위로하는 편지(慰渾虛師書)
허 선달에게 답하는 편지(答許先達書)
신 참판에게 올리는 편지(上申叅判書)
제영각 다례문祭影閣茶禮文
범해 선사 행장梵海禪師行狀
문 1(文 一)
자웅종기雌雄鐘記
원주原州 치악산雉樂山에 큰 절이 있다. 하루는 불존佛尊 수좌가 법당 뒤를 산책하는데, 커다란 뱀 한 마리가 꿩을 잡아 삼키려고 하였다. 이는 바로 도요새와 조개가 서로 다투어 어부가 실로 곁에 있는 줄을 알지 못하는 격이었다.1) 수좌가 지팡이로 꿩을 구해 주었는데, 그날 밤 이경二更(밤 9시~11시)에 흰 모습의 노인이 와서

010_1076_a_01L建七星殿上梁文禪門謾語序頭輪
010_1076_a_02L堂詩集序普濟會中學禊案序僧族
010_1076_a_03L譜序諸書名數序徐氏同族契案序
010_1076_a_04L仁基喪布契案序東詩漫選序通鑑
010_1076_a_05L私記序受菩薩戒契案序古眞佛四
010_1076_a_06L孟佛粮案序眞佛庵志序潤字契案序
010_1076_a_07L自說慧字契案序靈山殿剏建施主案序
010_1076_a_08L寂光殿燈燭契案序佛祖源流序
010_1076_a_09L津高聲庵中鐘施主案序長城白羊山淸
010_1076_a_10L流洞中鐘施主案序大芚寺無量會募緣
010_1076_a_11L西山大師影閣茶禮募緣䟽務安
010_1076_a_12L法泉寺袈裟及千燈募緣疏礪山彌勒寺
010_1076_a_13L重修募緣䟽無量會重修募緣䟽
010_1076_a_14L一虛居士書答朴蘆河書上靑陽倅
010_1076_a_15L上長淵府使上丹陽丁使君上申承
010_1076_a_16L旨書上申承旨書上趙判書寄鐵
010_1076_a_17L鷂師書慰渾虛師書答許先達書
010_1076_a_18L上申叅判書祭影閣茶禮文

010_1076_a_19L
梵海禪師行狀

010_1076_a_20L

010_1076_a_21L1)文(一) [1]

010_1076_a_22L雌雄鐘記

010_1076_a_23L
原州雉樂山有大刹一日佛尊首座
010_1076_a_24L徨於法堂之後一大蟒包雉而欲相呑
010_1076_a_25L此正蚌鷸有爭不知漁父之實在傍
010_1076_a_26L以杖救解雉伊日二更白像老翁

010_1076_b_01L등불 왼쪽에 앉더니 큰 소리로 말하였다. “나는 이 절의 종을 주조한 화주승化主僧이다. 사방의 선인善人에게 모연하여 이 큰 종을 주조하였는데, 종소리가 맑지 않아 죄의 업보를 받아 뱀의 몸으로 생멸하며, 지금까지 한없는 세월을 보냈다. 오늘 다행히 꿩 한 마리를 잡아 점심으로 먹으려고 하였는데, 스님이 자비를 베풀어 구해 주어 나는 줄곧 굶주리게 되었다. 그 대신 반드시 스님을 먹고자 하니 그대의 뜻은 어떠한가. 만일 그렇지 않으려거든 나를 위해 종소리를 울려 이 추한 업보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면 이 또한 자비이리라.” 노인은 말을 마치자 곧 떠나갔다.
수좌가 괴이하게 여기던 차에 이전에 울리지 않던 종이 웅웅 소리를 내며 하늘에 울려 퍼졌다. 가만히 보니 한 쌍의 꿩이 부리로 종을 울리는데 하나는 소리가 크고 하나는 작아서 절주節奏(리듬)가 있었고, 하나는 암컷 소리 하나는 수컷 소리로 자웅의 순서가 있었으며, 하나는 약하고 하나는 힘차서 살활殺活을 드러냈으니 바로 불문에서 법을 짓는 예악이었다. 새벽녘에 노인이 다시 와 고하였다. “나는 종소리의 힘을 입어 뱀의 몸을 벗고 하늘로 오르게 되었소.” 날이 밝아 가서 보니 한 마리 금빛 뱀이 남쪽 회랑 아래에 죽어 있었다. 수좌는 죽은 승려의 예로 그 뱀의 장례를 지내 주었다.
아, 꿩은 몸을 죽여 자신을 구해 준 은혜를 갚았고, 스님은 생명을 구하여 줌으로써 그 보답을 받았으며, 뱀은 스님 때문에 꿩의 생명을 놓아주고 꿩으로 인하여 오랜 괴로움에서 벗어났으니, 일거삼득一擧三得이었다. 각각의 처지는 같지 않았으나 참으로 보기 드문 일이었다. 이 때문에 산을 치악雉樂이라 이름하였고, 타종 소리는 온 나라의 사찰에 퍼지게 되었다.
은적암 산신각 창건기隱跡庵山神閣創建記
곡례曲禮 삼천三千2)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공경하지 아니함이 없는 것’이니 모습도 공손하고 마음도 거경居敬함을 말한다. 정자程子3)는 말하기를 “마음이 전일하여 다른 곳으로 가지 않는 것이 경敬”이라고 하였다.

010_1076_b_01L坐於剪燈之左錚然作聲曰我乃
010_1076_b_02L此寺鑄鐘化主僧也募緣於四方慈善
010_1076_b_03L鑄此大鐘鐘聲不淸反受罪報生滅
010_1076_b_04L蛇趣於今無量劫數而今日幸得一雉
010_1076_b_05L好頓點心矣蒙師慈悲一飢如此
010_1076_b_06L欲代食汝意若何若欲不然爲我打
010_1076_b_07L鐘作聲免此醜報此亦慈悲言畢忽
010_1076_b_08L疑恠之際前者不鳴之鐘舂容振
010_1076_b_09L聲於雲霄之外暗見一雙雉用嘴鳴鐘
010_1076_b_10L一聲大一聲小大小有節一聲雌一
010_1076_b_11L聲雄雌雄有序一宗殺一宗活殺活
010_1076_b_12L有表正是佛門作法禮樂也昧爽老翁
010_1076_b_13L更來告曰我被鳴鐘之力脫身騰空云
010_1076_b_14L平明往見一介金蛇死于南廡之
010_1076_b_15L以亡僧例葬之雉以殺身而報
010_1076_b_16L救身之恩僧以救命而受救命之報
010_1076_b_17L蛇以因僧而捨好生之雉因雉而脫積
010_1076_b_18L劫之苦一擧三得物雖不同曠世一
010_1076_b_19L故以雉樂名其山以打鐘聲布於
010_1076_b_20L一國寺刹云

010_1076_b_21L

010_1076_b_22L隱跡庵山神閣創建記

010_1076_b_23L
禮三千一言蔽之曰毋不敬謂在貌
010_1076_b_24L爲恭在心爲敬程子曰主一無適之

010_1076_c_01L나의 뜻으로는 성효誠孝의 마음이 온전하고 전일하며 변하지 않아 마음에서 일어나고 얼굴에 드러나서, 항상 어느 곳이든 공경을 두지 아니함이 없어서, 나의 부모를 공경할 때에 남의 부모도 공경하며, 집안의 귀신을 공경할 때에 바깥 귀신도 공경하는 것이다. 때문에 경이라는 한 글자가 곡례 삼천을 가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임신년 봄에 해남의 수사秀士 김태희金台禧가 가산을 털어, 고을의 주산主山인 금강산의 은적암隱跡庵 약사전藥師殿 주지 월여月如 스님에게 기부하고 산신각을 건립하여, 부모를 위해 살아 계실 때는 복을 빌고 돌아가신 후에는 영가를 천도하며, 자손을 위해서는 위의가 바르고 성대하며 후손이 면면하게 이어질 계책으로 삼았다.
스님이 부촉을 받고 공인工人을 불러, 한식날 비에 시작하여 꽃바람 불어올 때에 마쳐, 하얗게 벽을 바르고 단청을 수놓았다. 해를 따라 제사를 받드는 것이 집안의 귀신과 다를 바 없었다. 이는 어버이를 봉양하는 공경함이 전일하여, 마음에 뿌리박혀 있고 얼굴에 드러나며 온몸에 퍼져서,4) 사람에게 미치고 귀신에게 이르며, 심지어는 날짐승과 들짐승 온갖 중생 및 이단토괴泥團土塊(진흙 덩어리)와 같은 무정물無情物에게까지 미쳤으니, 어찌 다만 곡례 삼천만 가름한다고 할 것인가. 산신각을 세워 공경을 극진히 하는 것은 효도에 근본 한 것이니, 효를 보고 누가 즐거워하지 않겠는가. 스님은 즐겨 몸으로 일하고, 나는 즐거이 붓으로 일하며, 사람들은 즐겁게 본받고 칭송하니, 산신도 반드시 기쁘게 흠향하고 복을 주리라.
화공양기花供養記
하늘은 비와 이슬의 은택을 베풀고, 땅은 생성하는 권능을 맡는다. 염제炎帝5)는 초목을 북돋아 번성하게 하고, 여이女夷6)는 향기로운 꽃을 맡아 기른다. 『본초本草』7)가 서술되자 달고 쓴 풀이 이해되었고, 『화보花譜』가 지어지자 향기로운 꽃과 냄새나는 꽃이 나뉘게 되었다. 이로부터 화초의 이름이 더욱 드러나서,

010_1076_c_01L謂敬予謂誠孝之心全一無改動於
010_1076_c_02L形於面無在不在無日無之敬我
010_1076_c_03L父母時敬於人之父母敬我內神時
010_1076_c_04L敬於外神是以敬之一言蔽於三千
010_1076_c_05L自可知矣壬申春海南秀士金台禧
010_1076_c_06L其家財附於邑之主山金剛山之隱跡
010_1076_c_07L庵藥師殿之主月如上人處建山神閣
010_1076_c_08L以爲爲父母生前祈福死後薦靈
010_1076_c_09L子孫威儀棣棣瓜瓞綿綿之計上人受
010_1076_c_10L召工人董役於寒食雨覆蕢於花
010_1076_c_11L信風獿墍雪也吳彩繡矣隨年奉祀
010_1076_c_12L無異內神此乃奉親之敬主一無適
010_1076_c_13L根於心睟於面盎於背及於人致於
010_1076_c_14L乃至飛禽走獸蠢動含靈泥團土
010_1076_c_15L塊焉豈但蔽於禮三千哉建閣致敬
010_1076_c_16L本於孝道見孝而誰不樂哉上人樂而
010_1076_c_17L形役焉不佞樂而筆役焉人或樂而食
010_1076_c_18L神必樂而享錫

010_1076_c_19L

010_1076_c_20L花供養記

010_1076_c_21L
天施雨露之澤地掌生成之權炎帝鞭
010_1076_c_22L草木而向榮女夷司芳花而長養本草
010_1076_c_23L述而甘苦解花譜作而薰蕕分自此花
010_1076_c_24L「文一」二字編者補入

010_1077_a_01L혹은 늙은 몸을 기르기 위해 뜰을 채우고, 혹은 신에게 바치기 위해 언덕에 가득 심어, 세상에 두루 퍼지게 되었다.
해남海南의 수사秀士 이보일李輔逸이 영산홍ㆍ해당화ㆍ사철나무를 각각 한 그루씩 캐 보내어 당堂 아래에 옮겨 심고, 김명순金明淳이 목단ㆍ작약ㆍ월계수를 각각 두 그루씩 보내어 섬돌 아래에 옮겨 심으니, 이것이 어찌 꽃 공양이 아니겠는가. 『대일경大日經』에 이르기를 “꽃은 자비로부터 피어나, 괴로움을 제거하고 즐거운 마음을 준다.”라고 하였으니 곧 향ㆍ꽃ㆍ차ㆍ밥ㆍ등의 다섯 공양 중에 두 번째이다. 『영산재의靈山齋儀』에 이르기를 “엎드려 만행화萬行花를 바치옵니다. 목단ㆍ작약ㆍ연화가 존귀한지라, 금전을 아끼지 아니하고 사서 용화회龍華會에 바치오니, 바라옵건대 여러 부처님께서는 가련히 여기시어 이 공양을 받아 주소서.”라고 하였으니 곧 향ㆍ등ㆍ꽃ㆍ과일ㆍ차ㆍ밥의 여섯 법공양 중에 세 번째이다.
착하다. 늙은 몸을 길러 신에게 바치고 남은 정성을, 널리 삼보三寶(불ㆍ법ㆍ승)와 팔부八部8)의 뜰과 언덕에 미쳐, 사시四時에 공양이 끊이지 아니하고 삼제三際(과거ㆍ현재ㆍ미래)에 향기가 무궁하니, 그 공덕이 가상하며 복을 헤아릴 수가 없도다. 때문에 기록하여 본받고자 하는 군자들과 장차 거처할 사문들에게 보인다.
기야祇夜9)를 송하여 이른다.

皇天雨潭     하늘이 비를 내리고
后土生成     땅은 생성하였다
本草辨品     『본초』에서 품목을 분별하고
花譜載名     『화보』에 이름을 실었다
養老滿塢     언덕에 가득하여 늙은이 봉양하고
薦神充庭     뜰에 차서 신께 올린다
虔誠弸中     정성과 공경이 마음 가득하여
寤寐見靈     자나 깨나 신령을 보도다
六列唐儀     여섯 가지는 『당의唐儀』에 열거되었고
五出梵經     다섯 가지는 불경에 나온다
四時供養     사시사철 공양하니
五福圓盈     다섯 가지 복이 원만하도다
有効今爲     오늘날의 공양을 본받아
無限將營     미래에도 한없이 경영하라
劫石消磨     겁석劫石10)은 닳아 없어져도
此花益馨     이 꽃은 더욱 향기로우리

정축년(1877, 고종 14) 봄에 금강산방金剛山房에서 쓰다.
청해11) 관음암 산신각 창건기淸海觀音庵山神閣創建記
명산과 승지勝地가 어느 곳인들 없겠는가마는, 신안神眼이 아니라면 분별할 수 없을 것이다. 고려 시대에 혜일 선사慧日禪師가 이곳에 주석하여

010_1077_a_01L草名益著或養老而充庭或薦神而滿
010_1077_a_02L遍于世也海南秀士李輔逸採送
010_1077_a_03L映山海棠四季各一株移栽於堂下
010_1077_a_04L金明淳採送牧丹芍藥月季各二本
010_1077_a_05L移栽於階除此豈非以花供養乎大日
010_1077_a_06L經云花從慈悲生拔苦與樂意即香
010_1077_a_07L花茶飯燈五供養中第二也靈山齋儀
010_1077_a_08L拜獻萬行花牧丹芍藥蓮花爲尊貴
010_1077_a_09L不惜金錢買獻龍華會惟願諸佛哀憫
010_1077_a_10L受此供養即香燈花果茶飯六法供養
010_1077_a_11L中第三也善哉養老薦神之餘誠
010_1077_a_12L及三寶八部之庭塢四時不絕長供養
010_1077_a_13L三際無窮常氛氳其功可尙其福可量
010_1077_a_14L故記示其欲効之君子將居之沙門
010_1077_a_15L秪夜曰皇天雨潭 [1] 后土生成本草辨
010_1077_a_16L花譜載名養老滿塢薦神充庭
010_1077_a_17L誠弸中寤寐見靈六列唐儀五出梵
010_1077_a_18L四時供養五福圓盈有効今爲
010_1077_a_19L限將營劫石消磨此花益馨丁丑春
010_1077_a_20L書金剛山房

010_1077_a_21L

010_1077_a_22L淸海觀音庵山神閣創建記

010_1077_a_23L
名山勝地何處無之若非神眼不能
010_1077_a_24L辨別也麗朝慧日禪師卓錫于此地

010_1077_b_01L도를 증득하는 장소로 삼았으니 이름이 관음굴이다. 굴은 몇 길쯤의 바위 벼랑인데, 관음보살이 우뚝 서고 남쪽을 순행하는 동자(선재동자)와 해상의 용왕이 좌우로 모시고 서 있다. 또 약간 오른쪽 국내局內에 산신이 새긴 글자 획이 바위 면에 희미하게 드러나 있고, 또 약간 오른쪽으로 관음천觀音泉이 있으니, 참으로 하늘이 만든 명승지이다.
낭주朗州(전라남도 영암) 고달호古達湖의 신사信士 김달룡金達龍이 가재家財를 털어 서봉 상인瑞峰上人에게 부촉하여, 정축년 봄에 국내의 산신암山神巖 앞에 산신각을 세우고, 부모의 명복과 자손의 복을 빌었으니, 이는 반드시 혜일 스님의 영령英靈이 묵묵히 신사와 상인上人을 도와서 다시 드러난 것이다. 관음암觀音巖 앞에는 옛날부터 암자가 있었는데 몇 번이나 중수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산신암 앞에 비로소 새 산신각을 세우고 탱화를 안치하니, 신구新舊의 두 건물이 신안神眼으로 점지한 명승의 도량에 우뚝 서게 되었다. 온 경내가 귀의하고 발원하여 구하는 것마다 모두 얻으니 빈 골짜기에 소리가 전해지는 듯하고, 원하는 것마다 다 이루어지니 맑은 연못에 달이 비치는 듯하여, 비로소 “효자의 효도 다함이 없는지라, 영원히 복을 받으리로다.”12)라는 시가 참으로 까닭 있음을 알겠다.
옥주13) 쌍계사 중수기沃州雙溪寺重脩記
지령地靈이 막히고 트임에 따라 오늘과 옛날의 군郡이 여러 번 변천하고, 사찰의 운세가 닫히고 열림에 따라 오늘과 옛날의 쌍계사雙溪寺가 번갈아 변하였다. 유학이 왕성하고 불법이 쇠잔하게 되자, 외호外護의 인연이 일어나고, 내수內修의 역사가 다투어 펼쳐졌다. 선후先後의 계원들이 여러 해를 지나며 시종 협력하였고, 신구新舊의 성주城主들이 모연하기 전에 원근 지역에 첩지帖紙를 내렸다. 앉아서는 글을 써서 권유하는 데 정력을 쏟았고, 다니면서는 고을의 집집마다 이야기하는 수고로움을 맡았다.

010_1077_b_01L爲證道之所名爲觀音窟也窟可幾仭
010_1077_b_02L巖崖觀音菩薩屹立南巡童子海上
010_1077_b_03L龍王左右侍立又其差右局內山神
010_1077_b_04L所刻字畫微著於巖面又其差右有觀
010_1077_b_05L音泉儘是天所作之名勝處也朗州古
010_1077_b_06L達湖信士金達龍捐其家財囑于瑞峯
010_1077_b_07L上人以丁丑春建山神閣於局內山神
010_1077_b_08L巖前爲父母薦福爲子孫祈福是必
010_1077_b_09L慧師之英靈 [2] 佑於信士上人而重發
010_1077_b_10L之也觀音巖前古有庵未知其幾回
010_1077_b_11L重修而山神巖前始建新閣安幀
010_1077_b_12L舊兩宇巋然於神眼所占名勝之道場
010_1077_b_13L一境之內皆歸依發願而有求皆遂
010_1077_b_14L如空谷之傳聲無願不從若澄潭之印
010_1077_b_15L始知孝子不遺 [3] 永錫爾類之詩良有
010_1077_b_16L以也

010_1077_b_17L

010_1077_b_18L沃州雙溪寺重脩記

010_1077_b_19L
地靈否泰郡內與古郡內之屢遷寺運
010_1077_b_20L閉開雙溪及舊雙溪之迭變儒林盛旺
010_1077_b_21L秪苑凋殘外護之緣騰芳內修之役爭
010_1077_b_22L先後契員始終叶力於經年之久
010_1077_b_23L新舊城主遠近下帖於募緣之前坐而
010_1077_b_24L筆談將作勸誘之精力行而舌話

010_1077_c_01L
허許 순찰사와 이李 선생은 중생의 시주를 인도하였고, 금산錦山과 동산東山은 법당의 연화緣化를 경영하였다. 촉산蜀山의 먼 이역에서도 철을 바쳤고, 등림鄧林14)은 이미 헐벗어졌지만 본부本府에서 벌목을 허여했다. 불佛ㆍ왕王의 양당은 훼손된 것을 곧 보수하고, 첨성실瞻星室은 두 구역으로 늘려 2월 하순에 시작하여 6월 상순에 준공하였다. 수십 년간 경륜하던 일과 4, 5개월 동안의 중요한 일, 크고 작은 정성스러운 도움, 많고 적은 단월의 도움, 노소老小 공장工匠들의 우열과 승속僧俗의 공로 유무는 갑자기 다 말하기 어려운지라, 모두 기문 끝에 열거하여 저 보는 길손으로 하여금 이 성명을 읽을 수 있게 하노라.
노인성기老人星記
「천문지」15)에 이르기를, “노인성老人星은 남극성南極星이라고도 하는데, 항상 추분 새벽에 병방丙方(정남과 동남 사이)에 나타나서 춘분 저녁에 정방丁方(정남과 서남 사이)으로 사라진다. 추분에 남쪽 교외에서 관측하여 매우 밝으면 임금이 장수하고 천하가 안녕하며, 보이지 않으면 임금은 근심이 있게 되고 전쟁과 흉년이 발생한다.”라고 하였다.
경진년(1880, 고종 17) 8월 19일 을묘 추분일 다음 날인 20일 병진일 석양에 무위無爲 사형, 덕암德庵 스님 및 기정奇正 등 4인이 함께 하루의 식량을 지니고 성도암成道庵에 갔다. 삼경三更에 들어가 앉아 허공을 보니 주성主星이 장성張星16)이었다. 21일 정사 새벽에 큰 별이 완도 서쪽 소완도 동쪽에 뜨는 것을 보았다. 얼마 되지 않아 해가 떠오르자 사라졌다. 시를 지어 노래하였다.

舊友昏傾舊友缾  옛 친구 저녁에 옛 벗의 술 따르는데
老人曉得老人星  노인들이 새벽에 노인성을 보았도다
江村作火寒猶煖  강 마을 불을 때어 추위에도 따스하니
假寢通宵役眼靑  밤새도록 잠 못 들고 반갑게 마주하네

임오년(1882, 고종 19) 8월 12일 을축이 추분인데, 23일 병인 새벽에 무위

010_1077_c_01L任戶說之勞身許巡李先引導衆生之
010_1077_c_02L倡囮錦山東山經營殿堂之緣化
010_1077_c_03L山云遠異域貢鐵鄧林已童本府許
010_1077_c_04L佛王兩堂隨毁脩補瞻星一室
010_1077_c_05L衍二區董役於二月之下旬竣功於六
010_1077_c_06L月之上浣數十年經綸之事四五月肯
010_1077_c_07L綮之端大小顧護之殷勤多寡助合之
010_1077_c_08L檀信老少工匠之優劣緇白功勞之有
010_1077_c_09L卒難盡言都列記末使彼見客
010_1077_c_10L此姓名

010_1077_c_11L

010_1077_c_12L老人星記

010_1077_c_13L
天文志曰老人一曰南極常以秋分
010_1077_c_14L之旦見于丙春分之夕沒于丁秋分
010_1077_c_15L候之南郊明大則人主有壽天下安寧
010_1077_c_16L不見則人主有憂兵起歲荒庚辰八月
010_1077_c_17L十九日乙卯秋分二十日丙辰夕陽
010_1077_c_18L同無爲兄師德庵師及奇正四人持一
010_1077_c_19L宿之粮往成道庵三更入坐觀虛主
010_1077_c_20L二十一日丁巳曉頭見大星浮於莞
010_1077_c_21L島西小莞島東未幾日出隱沒吟曰
010_1077_c_22L舊友昏傾舊友缾老人曉得老人星
010_1077_c_23L村作火寒猶煖假寢通宵役眼靑壬午
010_1077_c_24L八月十二日乙丑秋分二十三日丙寅

010_1078_a_01L사형,동산東山 상좌 등 3인이 함께 해림령海臨嶺 위에 오르니, 노인성이 완도 서쪽 소완도 동쪽에 떴다. 바로 동쪽에 혜성이 있었는데 희고 붉은 기운이 곧바로 서쪽을 쏘았다. 그 기운 끝에 큰 별 하나가 있어 작은 여러 별들과 서로 다투는 듯하였다. 얼마 후에 해가 오르자 사라졌으니 길흉이 아울러 나타났다 사라진 것이다. 내려와 본소本所로 들어가자 상원암上院庵과 진불암眞佛庵에서 종이 울렸다.
내가 사형께 말하였다. “이 같은 길성吉星을 형의 나이 67세에, 저는 63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보게 되었으니, 어찌 이리 늦었는가.” 동산東山을 돌아보고 말하였다. “내가 보건대 너는 이르니, 이른 것이 얼마나 다행이며, 늦은 것은 얼마나 불행인가.” 사형은 슬퍼하고 상좌는 기뻐하니, 기뻐하면 길성이요, 슬퍼하면 흉성凶星이로다. 올해 추분은 흐려서 길성을 보지 못했으니 하물며 요기妖氣이겠는가.
대둔사지 약기大芚寺志畧記
전라도 해남현海南縣은 도성都城의 숭례문으로부터 1천7리이다. 백제 시대의 이름은 색금塞琴이요, 신라 때에는 침명浸溟이라 하였고, 고려 때엔 해남海南이라고 하였다. 본조 태종太宗대왕 때에 해진海珍이라 이름하였다가 세종世宗대왕 때에 해남이라 하였다. 오늘날의 별명은 당악棠岳인데, 북쪽은 영암靈巖으로부터 80리, 동은 강진康津으로부터 30리, 서는 진도珍島로부터 100리, 남은 제주濟州로부터 970리 떨어져 있다. 또한 동쪽으로 병영兵營에서 60리, 서쪽으로 수영水營에서 60리 떨어져 있다.
해남 해안문海晏門 남쪽으로 20리 떨어진 곳에 두륜산頭輪山 대둔사가 있는데, 지축地軸에 웅장하게 서려 55리에 걸쳐 자리하여 동쪽을 등지고 서쪽을 향하니 천연의 요새이다. 동쪽은 서기령曙氣嶺, 남쪽은 해림령海臨嶺, 서쪽은 오도령悟道嶺, 북쪽은 구곡수九曲水가 있다. 한 시내가

010_1078_a_01L曉頭同無爲兄師東山上佐三人上海
010_1078_a_02L臨嶺上老人星浮于莞西小莞東正東
010_1078_a_03L有彗星白紅氣直射西其氣端有一大
010_1078_a_04L與諸小星若相戰未幾日昇隱沒
010_1078_a_05L吉凶並現並隱下入本所鐘鳴於上院
010_1078_a_06L眞佛之蘭若吾向兄師曰如此吉星
010_1078_a_07L兄年六十七弟年六十三始見何其
010_1078_a_08L晩也顧東山曰以吾觀之汝則早矣
010_1078_a_09L早何幸矣晩何不幸耶兄則悲佐則
010_1078_a_10L喜者吉星也悲者凶星也今秋
010_1078_a_11L分陰不見吉星況妖氣耶

010_1078_a_12L

010_1078_a_13L大芚寺志畧記

010_1078_a_14L
全羅道海南縣自都城崇禮門一千七
010_1078_a_15L百濟時名塞琴新羅時名浸溟
010_1078_a_16L麗寺名海南本朝太宗大王時名海珍
010_1078_a_17L世宗大王時名海南今之別名棠岳
010_1078_a_18L距靈巖八十里東距康津三十里西距
010_1078_a_19L珍島一百里南距濟州九百七十里
010_1078_a_20L東距兵營六十里西距水營六十里
010_1078_a_21L海南海晏門南距二十里有頭輪山大
010_1078_a_22L芚寺雄盤地軸盤據五十五里背東
010_1078_a_23L向西天作金成東有曙氣嶺南有海
010_1078_a_24L臨嶺西有悟道嶺北有九曲水一水

010_1078_b_01L아홉 굽이를 이루고, 굽이마다 다리를 지어 동구洞口의 입구가 되니, 밖에서 바라보면 그 안에 큰 사찰이 있는 줄 알지 못한다. 두륜과 가련加蓮 두 봉우리가 하늘에 우뚝 솟아 주산主山이 되어 방장산方丈山(지리산), 영주산瀛洲山(한라산)과 서로 백중伯仲이 된다. 산 안쪽에 두 개의 큰 골짜기가 있는데, 왼편은 장춘동長春洞이고 오른편은 금강동金剛洞이다. 두 골짜기가 합치는 곳 중앙에 대둔사가 있는데, 흐르는 배의 형상으로 신라의 고승인 아도阿度17) 화상이 점지한 곳이다.
양무제梁武帝18) 천감天監 13년(514) 신라 법흥왕法興王 15년 갑오년에 아도 화상이 창건하였고, 수隋 대업大業 13년(617) 신라 진평왕眞平王 39년 정축년에 원효元曉 국사가 재건하였다.19) 당唐 개성開成 원년(836) 신라 희강왕僖康王 병진년에 자장慈臧 법사가 세 번째 중건하였고, 당 의봉儀鳳 원년20)(856) 병자년에 의상義湘 조사가 네 번째 중건하였으며, 당 건부乾符 2년(875) 신라 헌강왕獻康王 원년 을미년에 도선道詵 국사가 다섯 번째로 중건하였다. 신라 말부터 우리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의 사적은 고찰할 문헌이 없다. 명明 만력萬曆 31년(1603) 선조대왕 36년 계묘년에 청련靑蓮, 원철圓徹 조사가 병란 후에 다시 건축하였고, 강희康熙 4년(1665, 현종 6) 을사년에 심수心守 비구가 중건하였다.
우리나라 삼국시대부터 사찰의 크고 아름다움이 동국에 으뜸이요, 산이 성곽처럼 둘러 있어 삼남 지방에 유명하였다. 구곡의 긴 흐름은 무이武夷21)라 칭해지고, 사방은 탁 트여 진중秦中22)과 같으니, 우공藕孔의 산천23)이요 호중壺中의 선계仙界24)라 함은 이를 일컫는 것이다. 산과 사찰의 형승形勝과 흥쇠興衰는 중관 해안中觀海眼 대사가 지은 『죽미기竹迷記』 1권과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25)이 지은 『대둔지』 2권에 유전되고 있다.
또한 표충사表忠祠의 서산西山 대사가 입적할 때에 제자들에게 유촉遺囑하여 말하였다. “내가 입적한 후에 의발을

010_1078_b_01L成九曲溪曲曲成橋作洞口路在外
010_1078_b_02L望之不知其內有大刹也有頭輪加蓮
010_1078_b_03L兩峯揷天爲主山方丈瀛洲相爲伯仲
010_1078_b_04L山內有兩大洞左長春洞右金剛
010_1078_b_05L兩洞合谷中央有大芚寺乃行舟
010_1078_b_06L形也即新羅高僧阿度和尙之所占也
010_1078_b_07L梁武帝天監十三年新羅法興王十五
010_1078_b_08L年甲午阿度和尙初創隋大業十三年
010_1078_b_09L羅眞平王三十九年丁丑元曉國師再
010_1078_b_10L唐開成元年羅僖康王丙辰慈藏
010_1078_b_11L法師三建唐儀鳳元年丙子義湘祖師
010_1078_b_12L四建唐乾符二年羅獻康王元年乙未
010_1078_b_13L道詵國師五建自新羅末迄于我朝
010_1078_b_14L事蹟無文可考明萬曆三十一年
010_1078_b_15L祖大王三十六年癸卯靑蓮圓徹祖師
010_1078_b_16L兵亂後更建康熙四年乙巳心守比丘
010_1078_b_17L更建自三韓三國以來寺刹之巨麗
010_1078_b_18L甲於東國山郭之周匝名於三南
010_1078_b_19L曲長流人稱武夷四門高闢便同秦
010_1078_b_20L藕孔山川壺中乾坤此之謂也
010_1078_b_21L山形勝興衰中觀海眼大師所作竹迷
010_1078_b_22L記一卷丁茶山若鏞所作大芚志二卷
010_1078_b_23L流傳且有表忠祠西山大師入寂時
010_1078_b_24L囑弟子等曰今我入寂之後衣鉢傳于

010_1078_c_01L호남도 해남현 두륜산 대둔사에 전하고, 기일에 재를 받들어 한편으로 만고에 충성의 공을 잇게 하고, 또한 천추에 빛나는 자취를 보존하라.” 제자들이 엎드려 말하였다. “문도가 거의 천여 명에 이르고, 또 금강산과 묘향산이 나라 안의 으뜸가는 명승지인데, 어찌하여 두륜산에 전하라 하십니까.” 대사가 이르시기를, “너희는 어찌 나의 뜻을 모르는가. 두륜산은 비록 바다 모퉁이에 치우쳐 있어 명산은 아니나, 세 가지 귀중히 여기는 것이 있다. 첫째는 기이한 화초가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고, 옷감과 곡식이 항상 없어지지 않으니, 내가 보건대 두륜산은 항구 불변의 지역이다. 북쪽에는 월출산月出山이 하늘을 지탱하고, 남쪽에는 달마산達摩山이 지축에 서려 있으며, 동쪽의 천관산天冠山과 서쪽의 선은산仙隱山이 우뚝 마주하여, 바다와 산이 호위하고 골짜기가 깊고 그윽하니, 이는 만세토록 훼손되지 않을 곳이다. 둘째는 왕의 교화가 천리에 떨어져 있어 유사시에 미치지 못하니, 하늘 아래에 임금의 땅이 아님이 없는데도 나라에 대한 충성을 일으키기 어렵다. 나의 공적은 비록 칭할 것이 없으나, 성주聖主의 깊은 은혜를 이것에 의지하여 보고 느낀다면, 후세에 어찌 풍성風聲(교화와 명성)을 세워 어리석고 미혹된 풍속을 깨우칠 수 없을 것인가. 셋째는 처영處英과 여러 제자가 모두 남방에 있고, 내가 처음 출가할 때에 서로 더불어 두류산頭流山에서 법을 들었으니, 이곳은 종통宗統이 귀속되는 곳이라 도리어 중요하지 않겠는가. 이 세 가지 절목節目으로 나의 뜻이 이미 정해졌으니, 너희들은 나의 유촉을 따라 의발과 주상主上이 하사하신 대선사大禪師의 교지敎旨를 두륜산으로 옮겨 소장하라.”라고 하시니 이는 『보장록寶藏錄』 1권에 기재되어 있다.
건륭乾隆 53년(1788) 무신년 우리 정종대왕 12년에 사당을 명하여 세우고, 두륜산은 표충表忠이라 사액賜額26)하고 묘향산妙香山은 수충酬忠이라 하여 사명泗溟 대사와 뇌묵雷黙 선사를 좌우로 배향하였다.

010_1078_c_01L湖南道海南縣頭輪山大芚寺因令奉
010_1078_c_02L齋忌日一以繼萬古忠勤之功一以存
010_1078_c_03L千秋效赫之蹟弟子等俯伏曰門徒將
010_1078_c_04L至千餘又此金剛妙香擅勝邦內
010_1078_c_05L故傳於頭輪哉師曰爾等豈不識俺意
010_1078_c_06L之所在乎頭輪僻在海隅雖非名山
010_1078_c_07L俺有三節爲可重者一則奇花異草
010_1078_c_08L片時光景布帛菽粟亘久不泯我觀
010_1078_c_09L頭輪即是亘長之區北有月出撑極
010_1078_c_10L天柱南有達摩盤結地軸東之天冠
010_1078_c_11L西之仙隱屹然相對海岳衛護洞府
010_1078_c_12L深邃此則萬萬歲不毁之地也一則王
010_1078_c_13L化千里緩急未曁普天之下莫非王
010_1078_c_14L向國忠誠難以興起俺之功績
010_1078_c_15L無可稱聖主深恩憑此觀感則後世
010_1078_c_16L豈無表樹風聲以警愚迷之俗也一則
010_1078_c_17L處英及諸弟子皆在南方即我出家之
010_1078_c_18L相與聞法於頭流此乃宗統所歸
010_1078_c_19L顧不重歟以此三節俺意已定爾等
010_1078_c_20L遵我遺囑送我衣鉢及主上所賜大禪
010_1078_c_21L師敎旨移藏於頭輪山中云云此載寶
010_1078_c_22L藏錄一卷乾隆五十三年戊申我正宗
010_1078_c_23L大王十二年爰命立祠賜額頭輪曰表
010_1078_c_24L香山曰酬忠泗溟雷默左右腏享

010_1079_a_01L7년 지난 갑인년(1794, 정조 18)에 어제御製 서산 대사의 화상畵像과 당명堂銘을 본원本院에 내리시니, 문장이 빛나고 문채가 아름다워 산문山門 만세의 보배가 되었다. 관청에서 제수 품목을 지급하고 복호復戶(세금이 면제된 토지) 5결, 보솔保率(딸린 노비) 30명이 2월과 8월의 중정中丁일(중순의 정일丁日)에 제향을 행하였다.
동치同治 11년27) 신미년(1871, 고종 8)에 복호와 보솔을 환수하자 부득이 절에서 한식과 중구일重九日에 다례만을 행했다. 또 절은 비변사備邊司의 송금산松禁山28)이요, 내궁內宮에는 동백기름을 진상하니, 산은 나라를 위해 축원하는 당상堂上 대가람이 되었다. 정해년(1887, 고종 24) 봄에 복을 비는 산제당山祭堂을 신축하고 해마다 한 번 축원하였다. 산의 그윽함과 절의 장엄은 정다산丁茶山의 「산성론山城論」 1편과 이송파李松坡 희풍喜豊의 「산성론」 1편에 자세하게 기재되어 있다. 또 제주와 서로 바라보는 곳이라, 목사牧使와 판관判官, 대정大靜현감과 정의旌義현감의 네 별성別星(봉명사신奉命使臣)이 입숙하여 부처님께 공양하고 배에 오르는 요로이다.
사찰 안에는 팔도 명승의 비원碑院이 있어 모두 51탑 16비로 사람의 이목을 놀라게 하고 고금에 빛나니, 바로 장계곡張磎谷의 서산대사비西山大師碑, 김우형金宇亨의 풍담의심비楓潭義諶碑, 이덕수李德壽의 월저도안月渚道安ㆍ설암추붕비雪巖秋鵬碑, 홍계희洪啓禧의 환성지안喚惺志安ㆍ호암체정비虎巖體淨碑, 번암樊庵 채제공蔡濟恭의 상월새봉비霜月璽篈碑, 김상복金相福의 함월해원비涵月海源碑, 이충익李忠翊의 연담유일비蓮潭有一碑, 채희암蔡希庵의 대둔사사적비大芚寺事蹟碑, 열수洌水 정약용丁若鏞의 연파혜장비蓮坡慧臧碑, 서유린徐有麟의 표충사비表忠祠碑, 이재彛齋 권돈인權敦仁의 완호윤우비玩虎尹祐碑, 남병철南秉哲의 철선혜즙비鐵船惠楫碑 등이다. 침계루枕溪樓가 있어 소인騷人의 제영題咏이 문미와 동량에 이어져 있으니, 바로 백호白湖 임제林悌,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

010_1079_a_01L越七年甲寅御製西山大師畫像堂銘
010_1079_a_02L降于本院宸藻煒煌繡牋璀璨爲山
010_1079_a_03L門萬世之寶自官劃給祭需復戶五結
010_1079_a_04L保率三十名二八中丁行享矣同治十
010_1079_a_05L一年辛未還收復戶保率不得已
010_1079_a_06L寺中寒食重九茶禮而已且寺係備邊
010_1079_a_07L司松禁山內宮柏油進上山爲國祝釐
010_1079_a_08L堂上大伽藍丁亥春新建祝釐山祭堂
010_1079_a_09L歲一爲祝山之幽閴寺之嚴莊備載於
010_1079_a_10L丁茶山山城論一篇李松坡喜豊山城
010_1079_a_11L論一篇詳矣且濟州相望之地牧使判
010_1079_a_12L官大靜旌義四別星入宿供佛乘船之
010_1079_a_13L要路也寺內有八道名僧碑院凡五十
010_1079_a_14L一塔十六碑皆可驚人眼目騰輝古
010_1079_a_15L乃張磎谷作西山大師碑金宇亨
010_1079_a_16L楓潭義諶碑李德壽月渚道安雪巖秋
010_1079_a_17L鵬碑洪啓禧喚惺志安虎巖體淨碑
010_1079_a_18L蔡樊庵濟恭霜月璽篈碑金相福涵
010_1079_a_19L月海源碑李忠翊蓮潭有一碑蔡希
010_1079_a_20L庵大芚寺事蹟碑丁洌水若鏞蓮坡
010_1079_a_21L慧藏碑徐有麟表忠祠碑權彜齋敦
010_1079_a_22L仁玩虎尹祐碑南秉哲鐵船惠楫碑
010_1079_a_23L有枕溪樓騷人之題咏連楣壓棟
010_1079_a_24L乃白湖林悌石川林億齡玉峯白光勳

010_1079_b_01L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이천梨川 이홍주李弘冑, 천연天然 이석보李奭輔,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송호松湖 백진남白振南, 낙서駱西 윤덕희尹德熙, 열수 정약용, 문암門巖 민철호閔哲鎬, 유산酉山 정학연丁學淵, 백파白坡 신헌구申獻求, 청전靑田 이학래李學來 등의 시이다.
수보살계첩 발受菩薩戒牒跋
운沄 상인은 해남 산일도山一道 산수리山水里 사람이다. 성은 김씨, 본관은 도강道康이며 선호禪號는 설우雪藕이다. 아버지는 추광秋光이요 어머니는 밀양 박씨로서 도광道光 10년(1830, 순조 30) 경인년생이다. 13세에 영암 월출산 도갑사로 출가하여 침송枕松 스님의 장실丈室에서 삭발하고 침월枕月 스님의 단에서 수계하여 나를 따라 유학遊學한 지가 전후로 서너 번이었다. 동치同治 갑자 을축년(1864~1865) 사이에 10명의 개사開士와 함께 두륜산 진불암 불상 앞에서 대승보살계를 받고 인하여 계첩을 받아 보살의 지위와 같게 되어 비구라 칭하게 되었다.
아, 타고난 성품이 온아하며 행동거지가 바르고 조용하니 한 번 보고도 도가 높은 스님임을 알 수 있다. 한 가지 행실이나 작은 게송이라도 들으면 반드시 끌어 훈계로 삼아, 자장子張이 띠에 쓴다든지29) 남용南容이 백규白圭의 시를 세 번 읊는 것30)과 다름이 없었다. 이 때문에 계첩으로 기연機緣을 보이고 종맥宗脈과 선파禪波를 나타내 보여, 한편으로 동방의 선림에 거처하여 허주虛舟(조선 후기 스님) 문하門下의 여러 노고추老古錐(뛰어난 고참 스님)의 법석에서 질의케 하고, 한편으론 서방의 연대蓮臺에 가기 위하여 대은大隱(조선 후기 스님)과 금담金潭(조선 후기 스님)의 여러 노파자老婆子의 공안公案31)을 증득하여 깨치게 하니, 은홍교殷洪喬처럼 부침浮沈하게32) 하지 말고 무휼無恤같이 깊이 품에 간직할지어다.33)
『사십이장경평과』 발문(四十二章經評科跋)

010_1079_b_01L淸陰金尙憲梨川李弘胄天然李奭輔
010_1079_b_02L孤山尹善道松湖白振南駱西尹德熙
010_1079_b_03L洌水丁若鏞門巖閔哲鎬酉山丁學淵
010_1079_b_04L白坡申獻求靑田李鶴來詩也

010_1079_b_05L

010_1079_b_06L受菩薩戒牒跋

010_1079_b_07L
沄上人海南山一道山水里人也姓金
010_1079_b_08L貫道康雪藕其禪號也父秋光
010_1079_b_09L密陽朴氏道光十年庚寅生十三出家
010_1079_b_10L于靈巖月出山道岬寺枕松師室剃染
010_1079_b_11L枕月師壇受戒從不佞而遊者前後三
010_1079_b_12L四度同治甲乙之間與十開士受大
010_1079_b_13L乘菩薩戒於頭輪山眞佛庵佛像前
010_1079_b_14L受戒牒位同菩薩名稱比丘賦性
010_1079_b_15L溫雅進止閒靖一見可知其有道之
010_1079_b_16L人也聞隻行半偈必引爲戒與子張
010_1079_b_17L書紳南容圭復小無上下者也是以牒
010_1079_b_18L以示機緣示宗脉禪派一以爲居東方
010_1079_b_19L禪林質疑於虛舟化門諸老古錐之欛
010_1079_b_20L一以爲往西方蓮臺證悟於大隱金
010_1079_b_21L潭諸老婆子之公案莫作洪喬之沈
010_1079_b_22L藏無恤之懷

010_1079_b_23L

010_1079_b_24L四十二章經評科跋

010_1079_c_01L
이 경의 명칭은 『사십이장경』인데 매 장章의 첫머리에 ‘불언佛言’ 두 글자를 두었다. 혹 ‘불언’ 두 글자가 없는 장이 있어 사람들이 의심하였으나, 예컨대 13ㆍ14ㆍ15장은 문답이기 때문에 답한 곳에 ‘불언’ 두 글자가 있다. 제27장은 ‘불언’ 두 글자가 빠졌다. 제34장의 사문운운沙門云云과 제38장의 불문운운佛問云云은 모두 문답이기 때문에 아래에 ‘불언’ 두 글자가 있다.34) 이와 같이 평론하고 과판科判하나 안목 높은 대인은 반드시 백안白眼으로 보리라.
천불 조성 약기千佛造成畧記
가경嘉慶 16년(1811, 순조 11) 신미년 2월 실화失火로 지장전地藏殿ㆍ팔해당八解堂ㆍ용화전龍華殿ㆍ적조당寂照堂ㆍ천불전千佛殿ㆍ대장전大藏殿ㆍ약사전藥師殿ㆍ가허루駕虛樓가 하룻밤 사이에 다 불에 타서, 본사의 완호玩虎 대사가 스스로 화주가 되어 차례로 세웠다. 정축년(1817, 순조 17)에 상경하여 주선하고 경주 기림사秪林寺로 내려가서 8월 7일에 처음으로 신중단에 마지摩旨35)를 올리고 비로소 화원畵員을 임명하니 경산京山의 화원이 여덟 명이었다. 비로소 불사를 시작하여 거의 석 달에 이르렀는데 그 사이에 상서로운 빛이 나타난 것이 세 번이었다. 10월 18일 첫 번째로 삼백삼십삼불을 점안點眼하니 경산의 화원이 아홉 명이었다. 19일 두 번째로 삼백삼십삼불을 점안하니 영남의 화원이 스물네 명이었다. 20일 세 번째로 삼백삼십삼불을 점안하니 전라도의 화원이 열한 명이었다.
11월 16일 배로 부처님을 모셨는데, 700위는 큰 배에 300위는 작은 배에 실었다. 4, 5일 바람을 기다려 21일에 배를 놓았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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此經名則四十二章而每章初皆安佛
010_1079_c_02L言二字或有無佛言章人皆疑之
010_1079_c_03L第十三四五三章問答也故答處有佛
010_1079_c_04L第二十七章佛言二字落第三十
010_1079_c_05L四章沙門云云及第三十八章佛問云
010_1079_c_06L并皆是問答故下有佛言故如是
010_1079_c_07L評論而科判若高眼大人必以白眼觀
010_1079_c_08L

010_1079_c_09L

010_1079_c_10L千佛造成畧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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嘉慶十六年辛未二月失火地藏殿八
010_1079_c_12L解堂龍華殿寂照堂千佛殿大藏殿藥師
010_1079_c_13L殿駕虛樓一夜燒燼本寺玩虎大士
010_1079_c_14L自作化主以次起立丁丑上京周旋
010_1079_c_15L下慶州秪林寺八月初七日初神衆摩
010_1079_c_16L始作畵員則京山畵員八名也
010_1079_c_17L作佛事幾至三朔而其間放光瑞氣者
010_1079_c_18L三巡也十月十八日第一會三百三十
010_1079_c_19L三佛點眼京山畵員九人也十九日第
010_1079_c_20L二會三百三十三佛點眼嶺南畵員二
010_1079_c_21L十四人二十日第三會三百三十三佛
010_1079_c_22L點眼全羅畵員十一人十一月十六日
010_1079_c_23L侍佛於船頭七百位載大船三百位載
010_1079_c_24L小船四五日待風二十一日放船

010_1080_a_01L동래東萊 오륙도에 이르러 큰 바람을 만나 작은 배는 해안가를 따라 되돌아오고, 큰 배는 표류하여 일본국 장기도長崎島 축전주竺前洲까지 갔으니 바로 11월 29일이었다.
무인년(1818, 순조 18) 6월 17일에 일본에서 배를 출발하여 27일에 동래 부산진 앞바다에 정박하자 동래 부사가 정황을 물었다. 7월 5일 밤에 출발하여 6일에 내관萊館을 지나고 10일에는 완도 원동院洞 대진강大津江에 도착하였다. 15일에 절에 올라 8월 15일 천불의 존상尊相을 봉안하였다. 일본으로 표류한 부처님은 어깨 위에 ‘일日’ 자를 써서 후인들에게 보였다.
다약설茶藥說
백 가지 약이 비록 좋다 하더라도 알지 못하면 쓰지 못한다. 온갖 병이 괴로움이 되니 치료하지 않으면 살지 못한다. 치료하지 않으면 살지 못할 즈음에 치료하여 살리는 방법이 있고, 알지 못해 쓰지 못하는 가운데 알고 쓰는 오묘함이 있다. 사람이 느끼고 하늘이 감응하지 않는다면 약과 병을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임자년(1852, 철종 3) 가을 내가 남암南庵에 거주할 때에 이질 때문에 사지가 힘이 없어 삼시三時를 잊어, 열흘, 한 달이 지나니 스스로 반드시 죽을 것을 알았다. 어느 날 함께 입실한 무위無爲 사형이 어버이를 모시다가 돌아오고, 선참禪懺을 같이한 부인富仁 사제가 스승을 모시다 돌아와서, 머리를 들어서 좌우로 움직여 보니, 삼태三台36)가 제자리를 나누어 잡으니 반드시 살게 될 것을 알았다. 이윽고 사형이 말하기를, “내가 냉차로 어머니가 위태로울 때 구하였으니 급히 달여서 쓰라.”라고 하고 사제가 말하기를, “내가 차 싹을 소장하여 뜻밖의 수요에 대비하였는데 어찌 쓰기 어렵겠는가.”라고 하였다. 그 말대로 달여서 사용하니 한 사발에 배와 가슴이 조금 편안해지고

010_1080_a_01L東萊五六島遇大風小船沿邊還到
010_1080_a_02L大船漂至日本國長崎島竺前洲乃十
010_1080_a_03L一月二十九日也戊寅六月十七日
010_1080_a_04L日本發船二十七日來泊東萊釜山鎭
010_1080_a_05L前洋東萊府問情七月初五日夜發船
010_1080_a_06L六日過萊館十日過統營十三日發船
010_1080_a_07L到長興向日島十四日莞島院洞大津
010_1080_a_08L江中十五日上寺八月十五日奉安
010_1080_a_09L千佛尊相日本漂流之佛肩上書日字
010_1080_a_10L以示來者

010_1080_a_11L

010_1080_a_12L茶藥說

010_1080_a_13L
百藥雖良不知不用百病爲苦不救
010_1080_a_14L不生不救不生之際有救之生之之術
010_1080_a_15L不知不用之中有知之用之之妙非人
010_1080_a_16L感之天應之藥與病爲無可奈何也
010_1080_a_17L予壬子秋住南庵以痢疾委四支
010_1080_a_18L三時奄及旬朔自知其必死矣一日
010_1080_a_19L同入室號無爲兄自侍親而來與同禪
010_1080_a_20L懺名富仁弟自侍師而至擧首左右
010_1080_a_21L三台分位自知其必生矣俄爾兄曰
010_1080_a_22L我以冷茶救母幾危之際急煎用之
010_1080_a_23L弟曰我藏芽茶以待不時之需何難用
010_1080_a_24L如言煎之如言用之一椀腹心小

010_1080_b_01L두 사발에 정신이 상쾌해지며 서너 사발에 온몸에 땀이 흐르고 맑은 기운이 뼈에 스며서 깨끗이 나으니 본래 병이 들지 않은 것 같았다. 이로부터 음식이 점차 나아지고 거동이 날로 좋아져서 6월에 이르러 70리 떨어진 본가本家로 어머님의 기일 제사에 가서 참여하였으니, 때는 청淸 함풍咸豊 2년 임자년(1852, 철종 3) 7월 26일이었다. 듣는 자가 놀라고 보는 자는 지적하였다.
아, 차는 땅에 있고 사람은 하늘에 있으니 천지가 감응한 것인가, 약은 형에게 있고 병은 동생에게 있었으니 형제가 감응한 것인가, 어찌 효험의 신통함이 이와 같은고. 차로 어머니를 구하고 아우를 살렸으니 효제의 도리를 다하였도다. 슬프다, 병이 매우 중하지 않았다면 어찌 반드시 죽을 줄 알았겠으며, 정이 두텁지 않았다면 어찌 꼭 살 줄 알았겠는가. 그 평생의 정분이 어떠한 줄 알리로다. 이를 기록하여 훗날에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도 구하지 않는 무리에게 보이는 바이다.
까치가 논에 둥지를 튼 데 대한 해설(鵲巢水田說)
나는 임자년(1852, 철종 3) 가을에 『좌전左傳』을 빌리기 위하여 송정松汀 이 선생의 집에 가서 인사말을 나누고 앉았다. 때가 한창 큰 가뭄이 들어 높고 낮은 곳이 온통 가련하였다. 선생이 말하였다. “심한 가뭄이 이와 같아서, 집안에 한 섬의 저축도 없고 들엔 조금도 푸른빛이 없으니, 가족의 살길이 전혀 꾀가 없어 노년의 형편이 실로 감당할 수 없는데, 스님은 이러한 근심이 없는가.” 나는 말하기를 “산승의 생활도 전적으로 농부에게 의지합니다. 게다가 농사는 근본이라 근본이 없이 자립한다는 것은 듣지 못했습니다.”라고 하니 선생이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이윽고 선생이 말하였다. “봄에 옥천玉泉에 가서 한 재각齋閣에서 모여 노는데 한 농부가 보습을 메고 소를 끌며 지나가며 말하기를, ‘나는 여기서 나고 자랐는데 처음으로 이상한 일을 보았습니다.’라고 하니 ‘어떤 일인가.’라고 물었다. 농부가 말하기를, ‘들에서 경작하는데 한 쌍의 새끼 가진 까치가

010_1080_b_01L二椀精神爽塏三四椀渾身流汗
010_1080_b_02L淸風吹骨快然若未始有病者矣由是
010_1080_b_03L食飮漸進振作日勝直至六月往叅
010_1080_b_04L母氏忌祭於七十里本家時乃淸咸豐
010_1080_b_05L二年壬子七月二十六日也聞者驚之
010_1080_b_06L見者指之茶在地人在天天地應
010_1080_b_07L藥在兄病在弟兄弟感歟何神效
010_1080_b_08L之如此以茶救母以茶活弟孝悌之
010_1080_b_09L道盡矣傷心哉病不甚重何知必死
010_1080_b_10L情不甚厚何知必生哉可知其平生情
010_1080_b_11L分之如何而記示其後來有可救之道
010_1080_b_12L而不可救之流

010_1080_b_13L

010_1080_b_14L鵲巢水田說

010_1080_b_15L
予壬子秋爲借左傳往松汀李先生家
010_1080_b_16L叙寒暄而坐時方大旱高低盡可
010_1080_b_17L先生曰亢旱如此家無儋石之貯
010_1080_b_18L野無尺寸之靑百口生道萬無一策
010_1080_b_19L老景之實不可堪山人能無此患耶
010_1080_b_20L山夫之生活全依農人况農者本也
010_1080_b_21L無本而立者未之聞也曰然良久
010_1080_b_22L生曰春間往至玉泉聚遊一齋有一
010_1080_b_23L農夫荷耟牽牛而過曰予生斯長斯
010_1080_b_24L初見異物曰何物曰耕於野一雙乳

010_1080_c_01L논머리에 둥지를 틀었는데 완연히 숲속의 둥지와 같았습니다.’라고 하였다.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의아하여 혹은 바람이 불 징조라 하고 혹은 비 올 징조라 하기도 하여, 서로 옳다고 여겨 시끄러움이 그치지 않았다. 내가 말하기를 ‘가뭄의 조짐이다.’라고 하니, ‘어찌 아느냐’고 물었다. 내가 말하기를 ‘까치는 본디 날짐승이라 높은 곳을 좋아하고 낮은 곳을 좋아하지 않으며, 더욱이 습기를 좋아하지 않는데, 논에 둥지를 튼 것은 반드시 가뭄이 들어 물이 없을 징조이다.’라고 하니, 한참을 생각하다 그렇다고 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다고 하기도 하여 서로 웃고 헤어졌다. 오늘에 와서 보면 전날의 예언이 딱 들어맞았다.” 내가 말하였다. “선생이 사물에 부딪혀 이치를 풀어 헤친 것은 영분靈氛의 정전筳篿37)과 요부堯夫의 시귀蓍龜38)라도 충분히 자웅을 겨룰 수 있겠습니다.” 선생이 빙그레 웃었다.
능견난사변能見難思辨
조계산 송광사에 다섯 겹으로 합쳐진 유기鍮器가 있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보조普照국사39) 때에 국왕이 보물로 하사하였다고 하니, 이는 곧 부처님께 공양하고 재를 올릴 때에 쓰는 것이다. 그 모양이 너비가 네댓 치요, 높이는 한 치, 두께는 서너 푼이다. 매우 가볍고 발이 없어 다섯 개가 겹쳐 합해지는데, 바깥 것이 안으로 들어가되 크지 않고, 안쪽 것이 바깥에 합쳐지되 작지 않아서 대소의 구분이 없고, 안팎이 정해지지 않아서 형제인 듯하면서 형제가 아니고, 크고 작은 듯하면서 크고 작지 않아, 매우 보기 어렵고 드문 물건이다. 당시 사람들이 모두 보고 찬탄하여 말하기를 ‘능견난사能見難思’40)라고 불렀으니 실은 작은 유기 쟁반이다.
아육왕탑변阿育王塔辨
『죽미기竹迷記』에 기재된 아육왕阿育王41)탑은 이미 또렷이 위치를 지적하지 않았고, 『만일암지挽日庵志』에 또한 기재되었는데, 뜰 안의 것을 가리킨다. 다산이 쓴 「만일암기문」에 이르기를

010_1080_c_01L巢於水田頭完若林藪之巢坐中
010_1080_c_02L皆疑或曰風兆或曰雨兆互相自是
010_1080_c_03L喧囂不已我曰旱兆何知耶曰鵲本飛
010_1080_c_04L好高而不好低尤不好濕氣而巢
010_1080_c_05L於水田者必是旱而無水之兆也佇思
010_1080_c_06L移時或然或不然相笑而散以今日
010_1080_c_07L觀之前日之口占若合符契曰先生
010_1080_c_08L之觸物解理雖靈氛筳篿堯夫著龜
010_1080_c_09L足可上下者也先生莞爾而笑

010_1080_c_10L

010_1080_c_11L能見難思1) [2]

010_1080_c_12L
曹溪山松廣寺有五合鍮器世傳普照
010_1080_c_13L國師時自國王以寶物賜之此即供佛
010_1080_c_14L設齋時所用者也其爲形廣四五
010_1080_c_15L高一寸厚三四分甚輕無蹄五介合
010_1080_c_16L外者納於內而非大內者合於外而
010_1080_c_17L非小大小不分內外未定若兄弟而
010_1080_c_18L非兄弟若大小而非大小甚難稀有之
010_1080_c_19L物也一時人見而贊之曰能見難思
010_1080_c_20L實則小鍮盤也

010_1080_c_21L

010_1080_c_22L阿育王塔辨

010_1080_c_23L
竹迷記載阿育王塔旣不的指挽日庵
010_1080_c_24L志亦載指其庭中者茶山題挽日庵記
010_1080_c_25L「辦」疑「辨」{編}

010_1081_a_01L“이는 신라 시대 아신阿辛의 잘못이다.”라고 하였다가 그 후에 다시 쓰기를 “잘 살피지 못하여 부끄럽다.”라고 하였다. 남미륵암南彌勒庵 앞 진남대鎭南臺 아래에 왼쪽에는 미륵상이 있고, 오른쪽은 돌이 많아 탑의 형상과 같아,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아육왕탑인데 자암慈庵 장로에 이르러서 보고 예배하였다’고 하였다.
『아육경阿育經』에 이르기를 “왕이 8만 4천의 궁인을 죽이고 또 살육을 행하자 야사耶舍 비구42)가 보고 왕을 교화하니 왕이 곧 믿고 깨닫게 되었다. 왕이 말하기를 ‘이 죄를 어떻게 씻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으니 비구가 말하였다. ‘사람마다 위하여 각각 탑 하나씩을 세워 사리를 봉안한다면 마땅히 죄를 벗을 수 있습니다.’ 왕이 말하기를 ‘어느 곳에 탑을 세워야 합니까?’라고 하니, 비구가 말하기를 ‘곧 신통력을 써 왼손으로 해를 가리면 8만 4천의 빛으로 나뉘어 염부제閻浮提43)를 두루 비출 것이니 빛이 비치는 곳은 모두 탑을 세울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여러 귀신들에게 머무는 곳마다 각각 탑 하나씩을 세우라 명령하니 하루만에 8만 4천의 탑을 이루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옛사람이 송하였다.

育王作丘功非淺  아육왕이 언덕 지은 공 얕지 않으니
衆生奉此福無涯  중생이 이를 받들면 복이 한없으리라

그런즉 이 탑은 8만 4천 탑 가운데 하나로서, 아육왕 자신의 진신탑을 일컫는 것이 아니요, 아육왕이 건립한 여래의 사리탑을 말한다. 또한 만일암의 뜰 가운데 것이 아니고, 남미륵전 진남대 오른쪽에 있는 것이 맞다.
곡직변曲直辨
학인이 처음 강석講席에 유학할 때는 모습이 사랑스럽고 말하고 웃는 것이 어여뻐서, 이 때문에 추위와 더위, 굶주림과 곤궁함을 잊고 가르치고 인도하여 성공을 기약한다. 마음이 곧은 자는 교화하기 쉽고 굽은 자는 어려운데, 곧은 자와 굽은 자가 한 무리에 섞여 있어 그 마음을 알기가 어렵다. 간사한 꾀를 지어 스승을 속이고 친구와 결탁하며, 희로喜怒가 무상하고 행동이 종잡을 수 없으며, 하루 독경하면 이틀을 쉬어 동서로 오고 가며,

010_1081_a_01L此新羅阿辛之誤也厥後更題曰
010_1081_a_02L不察之愧南彌勒庵前鎭南臺下左有
010_1081_a_03L彌勒像右有石多物若塔形人皆曰
010_1081_a_04L阿育王塔至若慈庵長老見則禮拜
010_1081_a_05L育經云王殺八萬四千宮人又行誅
010_1081_a_06L耶舍比丘見而化王王即信悟
010_1081_a_07L罪何贖比丘曰各爲人起一塔下著
010_1081_a_08L舍利當脫罪耳曰何處起塔比丘曰
010_1081_a_09L即以神力左手掩日光作八萬四千道
010_1081_a_10L散照閻浮提所照之處皆可起塔
010_1081_a_11L勅諸鬼神於所住之處各起一塔如是
010_1081_a_12L一日成八萬四千塔古人頌曰育王
010_1081_a_13L作丘功非淺衆生奉此福無涯然則八
010_1081_a_14L萬四千中之一也非謂阿育王之身塔
010_1081_a_15L謂阿育王之所建如來舍利塔也
010_1081_a_16L日庭中者非也南彌勒臺右者是也

010_1081_a_17L

010_1081_a_18L曲直辨

010_1081_a_19L
學人之初遊於講肆也眉目可愛言笑
010_1081_a_20L堪憐以故頓忘寒暑飢困而敎導之
010_1081_a_21L期於成功心直者易化心曲者難化
010_1081_a_22L曲者直者雜於一隊不知其心而倡
010_1081_a_23L謀設奸欺師要朋半喜半怒似飛似
010_1081_a_24L一日讀而二日休東行去而西行來

010_1081_b_01L곧은 자를 거만한 놈이라 지칭하고 부지런한 이를 외도라 욕하는 자는 마음이 굽은 자이다.
그러나 곡직에도 도가 있으니, 태공의 곧은 낚싯바늘44)은 물고기에게까지 사랑이 미쳤고, 길손의 곡돌曲堗45)은 소고기와 술을 허비하지 않았으며, 난정蘭亭의 곡수연曲水宴46)은 시인의 우아한 흥취이니, 이 곡직은 모두 바른 것이다. 진시황의 직도直道47)는 원성이 하늘에 닿았고, 섭공葉公이 물었던 정직한 사람48)은 아버지가 양을 훔쳤다는 악행을 드러나게 하였으며, 심도자心都子가 물었던 기로에서 양을 잃었던 일49)은 분별할수록 의혹만 더욱 심할 뿐이니, 이 곡직은 그릇된 것이다. 곡曲 자가 직直에 붙으면 곧고, 직直 자가 곡曲에 붙으면 그릇되는 법이다.
비유하자면 여러 가지 나무가 한 숲에 무성하게 자라서 위로는 하늘의 해를 가리고 아래로는 땅에 서린 것과 같다. 봄에는 꽃이 산을 비추고 여름에는 잎이 허공에 나부끼며 가을에는 황금색을 뽐내고 겨울에는 흰 눈으로 덮인다. 그중에 곧은 나무와 굽은 나무가 나란히 서서 가지런히 뻗어 있다. 장인이 큰 집을 지으려고 도끼를 잡아 목재를 취하는데, 곧은 것은 도끼나 먹줄을 쓰지 않지만, 굽은 것은 도끼ㆍ먹줄ㆍ규구規矩ㆍ자를 아울러 써서 칼날이 상하고 힘이 든 연후에야 곧은 나무와 유사하게 되어, 들보ㆍ기둥ㆍ서까래 등 그 재목에 따라 집이 이루어지게 된다. 주인이 술과 고기로 위로하면 장인은 솜씨가 졸렬하다고 겸손해한다. 오래지 않아 종전에 굽은 나무는 본디 중심이 곧지 않았기 때문에 도로 휘어져서 기울게 되고, 곧은 나무도 스스로 지탱하지 못하고 그 굽은 것을 따라 기울게 되어, 백금百金의 건물을 하루아침에 잃게 된다. 주인은 나무의 곡직을 알지 못하여 장인에게 원망을 돌리나, 장인인들 굽은 나무에 대해 어찌할 것인가. 산승이 학인을 가르치는 것도 또한 이와 같다.
오호라, 장인이 그 굽은 것을 알고도 버리지 못한 것은 곧은 나무가 적기 때문에 부득이해서 쓴 것이요, 학인을 훈도할 때 그 굽은 것을 알고도 거절하지 않은 것은 곧은 사람이 적어 부득이해서 받아들인 것이다. 장인과 스승은 노고는 같지만

010_1081_b_01L指直爲慢漢辱勤爲外道者心曲者也
010_1081_b_02L然曲直有道太公之直鉤仁及魚鱉
010_1081_b_03L客人之曲堗不費牛酒蘭亭之曲水
010_1081_b_04L詩人雅興此曲直皆直也始皇之直道
010_1081_b_05L怨聲徹天葉公之問攘羊之直躬
010_1081_b_06L父隱惡心都子之問亡羊之曲岐辯
010_1081_b_07L疑惑愈甚此曲直皆曲也曲字附於直
010_1081_b_08L則直直字附於曲則曲譬如衆木
010_1081_b_09L於一林密密長大上蔽天日下盤地
010_1081_b_10L春花映山夏葉搖空秋弄黃金
010_1081_b_11L佩白玉其中有直者曲者叅立齊平
010_1081_b_12L匠人欲搆大厦荷斧而取之直者
010_1081_b_13L1) [4] 斧繩墨而曲者斤斧繩墨規矩
010_1081_b_14L尋引並用而刃缺力疲然後彷彿於向
010_1081_b_15L之直者而棟樑柱梠任其材而成宮
010_1081_b_16L主者以酒肉勞之匠人以拙工謙之
010_1081_b_17L幾向之曲者本心不直故還曲石傾之
010_1081_b_18L直者不可自支隨其曲者而傾之百金
010_1081_b_19L之物一朝失之主者不知木心之曲直
010_1081_b_20L歸怨於匠人匠人之於曲者奈何山家
010_1081_b_21L講人亦復如是嗚呼匠人之知其曲
010_1081_b_22L而不棄者直木小故不得已而用之
010_1081_b_23L講人之亦知其曲而不拒者直人小故
010_1081_b_24L不得已而納之匠人講人勞苦惟均

010_1081_c_01L가는 길은 같지 않다. 어느 날에 한자리에 앉아 한잔 술을 권하면서 웃으며 피차의 시름을 깨뜨려 볼까.
축맹치설逐虻峙說
곡성 동리산桐裏山 태안사泰安寺는 혜철慧徹 국사의 도량이다. 세속에서 전하기를 “절을 창건할 때는 이곳이 온 고을의 모기가 모두 모이는 곳이었다. 국사께서 신통력으로 쫓으니 산의 오른쪽 고개를 넘어 날아갔다. 인하여 절을 세우니 그 후엔 한 마리의 모기도 없어 그 고개를 축맹치라고 하였다.”라고 한다. 또 국사의 비와 부도가 절 안에 있어 대대로 엄하게 지켜 왔다.
함풍咸豊 갑인년(1854, 철종 5)과 을묘년(1855, 철종 6) 사이에 이르러 담이 무너지고 떨어졌는데 미처 수축하지 못하고 세월만 보냈다. 그해 여름이 되자 무수한 모기가 수많은 떼를 지어 골짜기에 가득 차서 우렛소리를 이루니 코와 눈을 뜰 수 없었다. 이에 대중이 마음을 합하고 힘을 펴서 급히 부도와 도량을 수축하고 곧바로 국사의 신당神堂에 가서 고축告祝하니 모기가 즉시 자취를 감추고 스님과 대중들이 예전같이 편안하였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미황사 영허의 화행을 찬미하는 설(美黃靈虛化行說)
영허靈虛의 이름은 의현義玄이다. 무오년 여름 절의 미타전彌陀殿에서 만일회萬日會를 설하여 하루에 네 번씩 정해 높은 소리로 염불하는 것을 일상으로 삼았다. 기사년 가을 무망률誣罔律(무고죄)에 걸려 옥에 들어갔다가 경오년 여름에 풀려났다. 임신년 봄에 모연문募緣文을 들고 행걸行乞하다 진주 창선동昌善洞에 이르렀다. 동지同知 정행득鄭幸得이란 사람이 있어 나이가 70이요 자식이 둘인데, 하나는 향시에 합격하였고 하나는 무과에 급제하였다. 그 집에 들어가 보니 두 명의 권선객이 먼저 앉아 있어

010_1081_c_01L而道則不同何日一席並坐一盃相勸
010_1081_c_02L而笑破此愁城耶

010_1081_c_03L

010_1081_c_04L逐虻峙說

010_1081_c_05L
谷城桐裏山泰安寺慧徹國老道場也
010_1081_c_06L諺傳創寺之時一洞皆是蚊虻聚集之
010_1081_c_07L所也國師以神力逐之飛踰於山之右
010_1081_c_08L因爲建寺厥後無一介蚊子故名
010_1081_c_09L其嶺曰逐虻峙又國師之碑及浮屠
010_1081_c_10L於寺內世爲嚴守矣至咸豊甲寅乙卯
010_1081_c_11L之間墻垣崩落未及修築遷延月日
010_1081_c_12L其年夏無限蚊子千陳萬隊滿谷
010_1081_c_13L成雷鼻眼莫開於是大衆同心宣
010_1081_c_14L亟爲修築浮屠道場即行告祝國師
010_1081_c_15L神堂蚊虻即時屏跡僧人安堵如故
010_1081_c_16L亦異哉

010_1081_c_17L

010_1081_c_18L美黃靈虛化行說

010_1081_c_19L
靈虛名義玄戊午年設萬日會於寺之
010_1081_c_20L彌陁殿日定四分以高聲念佛爲率
010_1081_c_21L己巳秋入誣罔律庚午夏解囚壬申春
010_1081_c_22L荷募緣軸行乞至晋州昌善洞有鄭同
010_1081_c_23L知者名幸得年七十有二子一中鄕
010_1081_c_24L一中武科入其家有二勸善客
010_1081_c_25L「斤」疑「斥」{編}

010_1082_a_01L셋이 함께 동숙하게 되었다. 문득 ‘구걸할 때 함께 다니지 않는다’는 말씀을 생각하여 자신의 권선하는 일을 대략 설파하고 나서 떠나려 하였다. 주인이 안채로 들어가더니 이윽고 두 꿰미의 돈을 가지고 나와 두 손님을 문밖으로 전송하였다. 그러고는 옷 속에서 열세 개의 돈꿰미를 내어 스님에게 말하기를, “이 열세 꿰미의 돈으로 내가 아미타 국토에 태어나도록 축원해 달라.”라고 하고 두 꿰미를 더 주어 노자로 삼게 하니 절을 하여 받고 정례頂禮하고 하직하였다.
감목監牧(진주 목사)의 관할 신지信地 나루터에 이르자 몇몇 포교捕校가 쳐들어와 빼앗아 갔다. 어쩔 수 없이 허탈하게 웃으며 지리산으로 들어가 여기저기 다니며 교화를 행하였다. 그런데 나루터에서 빼앗길 적에 한 사람이 곁에서 보고 목사에게 들어가 아뢰니, 목사가 즉시 맹차猛差(용맹한 포졸들)를 징발하고 포교를 체포하여 엄한 형벌을 내리고 돈을 찾았다. 또한 장정을 심부름꾼으로 뽑아 돈을 짊어지게 하고 보내며 말하기를 “기어이 화주승을 만나 이를 전해 주고, 만일 만나지 못하면 미황사美黃寺에 가서 돈을 맡기고 표를 받아 오라.”라고 하였다. 관의 노예가 자취를 물어 찾았으나 있는 곳을 알지 못하여 곧 미황사로 가서 돈을 바치고 표를 받아 떠나니, 화주 스님이 추후에 절에 도착하였다.
아, 이는 일찍이 없던 일이니, 반드시 정씨의 지극한 정성에 여러 부처님이 감동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목사에게 고하게 하였고, 목사 또한 현재와 미래의 화신불인 것이다. 내가 듣고 기록하여 우리 불문의 나운羅云과 익신翼信의 무리에게 보여 경계를 삼게 하고, 나도 또한 일생의 교훈으로 삼는다.
순천 주검돌의 대동색설(順天朱黔突大同色說)
검돌黔突의 아비는 아전 명부名簿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사람됨이 나약하여 종신토록 직책을 맡지 못하다가 끝내 원통한 마음을 품고 죽었다. 아들 하나가 있는데 이름은 검돌이요 나이는 겨우 17세였다. 그해에 임원을 파견할 때에 관할 이방이 홀로 연청掾廳(아전 집무소)에 앉아 있는데,

010_1082_a_01L坐其家合爲三同宿忽念乞不並行之
010_1082_a_02L以自己勸善事大畧說破因而辭別
010_1082_a_03L主公入其內堂良久出持二緡錢
010_1082_a_04L二客於門外又自衣內出十三緡
010_1082_a_05L僧曰此十三緡爲我祝生彌陁國之願
010_1082_a_06L又二緡備路需拜手而奉頂禮而謝
010_1082_a_07L至監牧信地津頭有數捕校闖出奪去
010_1082_a_08L不得已虛笑而來入智異山邐迤行
010_1082_a_09L盖津頭見奪時有一人傍觀入告
010_1082_a_10L牧官牧官即發猛差捉捕校嚴刊捧
010_1082_a_11L又使丁壯差使負錢而送之曰
010_1082_a_12L逢化主僧傳此也若不逢至美黃寺
010_1082_a_13L附錢受標而來官隷問跡而不知處
010_1082_a_14L直向美黃寺納其錢受其標而去
010_1082_a_15L主追後到寺亦未曾有之事也
010_1082_a_16L以鄭氏之至誠諸佛感動使人告於官
010_1082_a_17L官亦是現在未來之化身佛也予聞而
010_1082_a_18L記之示我羅云翼信輩使之爲戒
010_1082_a_19L亦一生箴訓焉

010_1082_a_20L

010_1082_a_21L順天朱黔突大同色說

010_1082_a_22L
黔突父叅吏案爲人孱弱終身無任職
010_1082_a_23L竟含寃而死有一子名黔突年才十
010_1082_a_24L當其年播任時該吏房獨坐椽廳

010_1082_b_01L검돌의 죽은 아비가 의관을 갖추어 입고 들어와 앉아 평상시와 같이 인사를 나누었다. 이방은 정신이 어지럽고 머리가 곤두서서 귀문鬼門에 들어온 듯하였으나 정신을 가다듬어 묻기를, “그대는 이미 죽었는데 어찌하여 찾아왔느냐?”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요청이 있습니다. 제 자식에게 대동색大同色(대동미를 관장하는 아전)을 맡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이방이 응낙하였다. 4, 5일 후에 다시 와서 요청하자 또한 허락하고, 파방播榜(임원의 발표) 전날에 이르러 다시 와 청하자 전과 같이 허락하였다.
날이 되어 이방이 부사府使에게 사실을 아뢰자 부사가 허락하지 않고 다른 아전들도 허락하지 않아 이방이 망연하여 물러갔다. 부사가 대동색에 당선된 자를 불러 스스로 차정差定(임명장)을 쓰게 하였는데, 곧바로 부사와 붓을 잡은 자가 동시에 기절하여 쓰러졌다가 한참 후에 깨어났다. 이에 검돌을 불러 관을 씌우고 소속케 하여 대동색 차정을 지급하여 관례대로 거행하게 하였다.
다음 해 다시 임원을 파견할 때에 다시 와서 요청하니 전과 같이 맡기었다. 이 해에 부사가 교체되자 그 아비가 다시 이방에게 와서 아들을 위해 호방戶房을 청하자 또한 허락하였다. 신관新官이 믿지 않고 다른 사람을 시켜 호방을 삼았으나, 또 함께 기절하여 쓰러졌다가 한참 후에 깨어났다. 그리하여 호방을 검돌에게 맡겼다.
그해 섣달에 검돌의 아비가 이방에게 와서 사례하기를, “내가 살아 있을 때 비록 관에 소속되었으나 끝내 한 가지 일도 맡지 못하여 철천지한을 가슴에 품었다. 이제 내 아들이 2년간 대동의 임무를 맡고 1년간 호방의 일을 행하여 가산이 풍족하고 처지도 또한 낮지 않게 되어, 살아 있을 때에 맺힌 한이 죽은 후에 비로소 풀렸으니 모두 그대의 은덕이다.”라고 하고 손을 모아 절을 하고는 문득 보이지 않았다. 이방이 또한 정신이 어지럽고 모발이 곤두섰으나 마음을 수습하여 앉았다고 한다.
아아, 살아서는 눈앞의 한 몸도 보존하지 못하다가 죽어서는 오히려 사후에 남긴 자식을 구제하였으니, 세상에서 허무적멸이라고 이르는 자는 여기에 착안해 볼지어다. 드디어 기록하여 귀신이 없다 하여 거만하게 대하는 무리에게 보여 거울을 삼게 한다.

010_1082_b_01L黔突亡父衣冠而入坐寒暄如常吏房
010_1082_b_02L神眩髮竪如入鬼門收神而問曰
010_1082_b_03L已死矣何以相訪曰有所請以吾子
010_1082_b_04L任大同色如何曰諾四五日後更來
010_1082_b_05L請之亦應之至播榜前日更來請之
010_1082_b_06L如前應之至日吏房1) [3] 其實于官
010_1082_b_07L不許他吏亦不許吏房愀然而退
010_1082_b_08L使呼大同色當選者使自書差定即時
010_1082_b_09L府使及執筆者同時昏倒良久蘇生
010_1082_b_10L乃召黔突上冠入屬給大同色差定
010_1082_b_11L如例擧行明年其時更來請如前因
010_1082_b_12L是歲官替職彼更來吏房所爲子
010_1082_b_13L請戶房亦許之新官不信使他人爲
010_1082_b_14L戶房亦俱昏倒良久蘇生又任戶房
010_1082_b_15L於黔突是年終朔突父來謝於吏房曰
010_1082_b_16L吾生時雖曰入屬終不得一介任事
010_1082_b_17L徹天之寃藏諸心腑矣使吾子二年
010_1082_b_18L爲大同之任一年爲戶房之任家產豐
010_1082_b_19L坐地亦不卑生時結寃死後始解
010_1082_b_20L皆君之德也合手鞠躬因忽不見
010_1082_b_21L神眩髮竪收神而坐云生不能保
010_1082_b_22L目前之身死猶能濟身後之子世所謂
010_1082_b_23L虛無寂滅者到此着眼也遂記之
010_1082_b_24L示其慢鬼滅神之徒而爲鑑焉

010_1082_c_01L
오종결의론五種決疑論
혹자가 말하기를 “벽에 쓰인 글과 편액의 글에 자세하지 않은 것을 가르쳐 주시겠습니까?”라고 하여 물어보라고 하였다.
물었다. “이 발우를 보지 못한 지가 4천 년이나 되었다 한 것은 어느 책에 나옵니까?”
대답하였다. “『불조통재佛祖通載』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송나라 오군吳郡 땅의 주영기朱靈期가 고려로부터 돌아갈 때 배가 바람에 표류하게 되었다. 한 고을에 이르니 산사山寺가 있는데 석상石像으로 된 스님 몇이 영기를 불러 말하기를 ‘여기에서 금릉까지 2만여 리인데 배도盃渡 화상50)을 아느냐?’고 물었다. 영기가 안다고 대답하자 북쪽 벽의 바랑 하나와 석장, 발우를 가리키면서 ‘이것이 바로 그의 발우와 기구들이니 이제 취하여 그대에게 맡긴다.’고 하였다. 아울러 책과 청죽장靑竹杖을 주면서 말하기를 ‘배도 화상을 보면 주도록 하라.’고 하였다. 한 사미에게 명하여 전송하게 하였는데, 배에 이르자 사미가 영기에게 명해 죽장을 배 앞쪽 수중水中에 두도록 하였다. 3일 만에 석두회石頭淮에 이르러 죽장을 잃었다. 조금 후에 배도 화상이 와서 발우를 얻고 크게 웃으며 ‘내가 이 발우를 보지 못한 지가 거의 4천 년이 되었다.’고 말하고 공중에 던졌다가 다시 잡고 떠나갔다.”
물었다. “‘매실이 익었구나.’라는 말은 어느 책에 나오는지요?”
대답하였다. “『전등록傳燈錄』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어떤 스님이 대매大梅 화상에게 묻기를 ‘마조馬祖51) 스님을 뵙고 무엇을 얻었습니까?’라고 하니 대매가 말하였다. ‘마조가 나에게 즉심즉불卽心卽佛이라고 말하였다.’ 스님이 말하였다. ‘마조는 근래에 또 비심비불非心非佛이라고 말하더이다.’ 대매가 말하였다. ‘이 늙은이가 사람들을 미혹시키는구나. 너는 비심비불이라고 할지라도 나는 계속 즉심즉불이라 하리라.’ 그 스님이 마조에게 말하자, 마조가 말하기를 ‘매실이 익었구나.’라고 하였다.”
물었다. “‘목서木樨나무의 향기를 맡았느냐?’라는 말은 어느 책에 나오는지요?”
대답하였다. “『전등록』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황룡 사심黃龍死心 선사에게 황산곡黃山谷52)이 경절처徑截處를 지시해 주기를 청하자, 황룡 선사가 말하기를 ‘“제자들아 내가 숨긴다고 여기느냐, 나는 너희에게 숨김이 없노라.”라고 하신 공자의 말씀53)을 태사太師는 평소에 어찌 이해하는가?’라고 물었다. 공이 헤아려 대답하자 황룡 선사가 말하기를 ‘옳지 않다, 옳지 않다.’라고 하니

010_1082_c_01L五種決疑論

010_1082_c_02L
或曰壁書額書未詳者可指示否曰問
010_1082_c_03L來問曰不見此鉢四千年出何書
010_1082_c_04L佛祖通載曰宋吳郡朱靈期自高麗還
010_1082_c_05L舶爲風漂至一洲有山寺見僧數人
010_1082_c_06L皆石像呼 靈期云此去金陵二萬餘里
010_1082_c_07L識盃渡否靈期曰識之指北壁一囊
010_1082_c_08L并錫鉢曰乃其鉢具耳今取附君
010_1082_c_09L書及靑竹杖授之曰見盃渡即付之
010_1082_c_10L令一沙彌送至舶沙彌命靈期以竹
010_1082_c_11L杖置前水中三日而至石頭淮遂失
010_1082_c_12L竹杖有頃渡來得鉢大笑曰我不見
010_1082_c_13L此鉢且四千年矣以擲雲中又接之
010_1082_c_14L乃去問曰看梅子熟矣出何書曰傳
010_1082_c_15L燈錄云有僧問大梅和尙見馬祖
010_1082_c_16L個甚麽大梅曰馬祖向我道即心即
010_1082_c_17L僧曰馬祖近日又道非心非佛
010_1082_c_18L梅曰這老漢惑亂人任汝非心非佛
010_1082_c_19L我只管即心即佛其僧白于馬祖馬祖
010_1082_c_20L梅子熟矣問曰聞木樨香乎出何
010_1082_c_21L曰傳燈錄云黃龍死心禪師因黃
010_1082_c_22L山谷乞指徑截處龍曰秪如仲屍道
010_1082_c_23L二三子以我爲隱乎吾無隱乎爾太史
010_1082_c_24L居常如何理論公擬對龍曰不是不是
010_1082_c_25L「訢」疑「訴」{編}

010_1083_a_01L공이 미혹되고 번민함이 그치지 않았다. 하루는 황룡 선사를 모시고 산행할 때 바위에 계수나무가 성대하게 피었다. 황룡 선사가 ‘목서화의 향기를 맡았느냐?’고 하니 공이 맡았다고 하였다. 황룡 선사가 말하기를 ‘내 너에게 숨김이 없노라.’라고 하자, 이에 공의 마음이 환하게 풀렸다. 북미륵암北彌勒庵 노전爐殿의 편액이 문향각聞香閣인 것은 또한 이 뜻이다.”
물었다. “12종사의 도량은 어느 책에 나옵니까?”
대답하였다. “『대둔지』에 이르기를 풍담 의심楓潭義諶, 취여 삼우醉如三愚, 월저 도안月渚道安, 화악 문신華岳文信, 설암 추붕雪嵓秋鵬, 환성 지안喚惺志安, 벽하 대우碧霞大愚, 설봉 회정雪峯懷淨, 상월 새봉霜月璽篈, 호암 체정虎嵓體淨, 함월 해원涵月海源, 연담 유일蓮潭有一이라고 하였다.”
물었다. “석란산錫蘭山은 어느 책에 나옵니까?”
대답하였다. “『담연집覃硏集』에 이르기를 ‘서역 나라에 사자후국獅子吼國이 있는데 옛날에는 석란산이라 칭하였다.’라고 하였다.”
물었다. “일로향실一爐香室은 어느 책에 나옵니까?”
대답하였다. “『염송집拈頌集』 야보冶父54)의 송에 노래하였다.

獨坐一爐香    화로의 향기 속에 홀로 앉아
金文誦兩行    금문金文55) 두 줄을 읊조리네
可憐車馬客    가련타 거마로 오가는 나그네여
門外任他忙    문밖에 저렇듯 바쁘기만 하구나.56)

물었다. “그렇다면 모두 선가 어록에 나오는지요?”
대답하였다. “그렇다.” 혹자가 “예예.”라고 하고 물러갔다.
대승계 법문大乘戒法門
대개 때와 더러움을 깨끗이 하는 것은 물이 으뜸이요, 가시덤불을 제거하는 것은 불이 첫째이다. 때문에 제삿날과 재를 올리는 때에 몸을 씻고 옷을 세탁하여 일을 행하고, 법석을 설치하고 계를 받을 때도 이마와 팔을 태워 맹서를 맺는다. 몸을 씻고 옷을 세탁함은 현재의 바깥에 물든 것을 제거하는 것이요, 이마와 팔을 태우는 것은 과거 내면의 티끌을 없애는 것이니, 혹 참회하는 마음을 전한다고 이름하고, 혹은 재계하여 불을 받는다고 이름한다. 그런 후에 비구의 이백오십계행戒行과 보살의 오십팔율의律儀를 받는 것이다.
명나라와 청나라의 율의와 계행은 멀어서 자세히 알지 못하나, 신라ㆍ고려ㆍ조선의 위의는 대략 살펴볼 수 있다. 일지一指와 혼허渾虛의 설이

010_1083_a_01L公迷悶不已一日侍龍山行時巖桂盛
010_1083_a_02L龍曰聞木樨花香麽公曰聞龍曰
010_1083_a_03L吾無隱乎爾公釋然北彌勒爐殿額曰
010_1083_a_04L聞香閣亦此意也問曰十二宗師道場
010_1083_a_05L出何書曰大芚志云楓潭義諶醉如三
010_1083_a_06L月渚道安華岳文信雪嵓秋鵬喚惺志
010_1083_a_07L碧霞大愚雪峯懷淨霜月璽篈虎嵓軆
010_1083_a_08L涵月海源蓮潭有一問曰錫蘭山
010_1083_a_09L何書曰覃硏集云西域國有獅子吼國
010_1083_a_10L古稱錫蘭山問曰一爐香室出何書
010_1083_a_11L拈頌集冶父頌云獨坐一爐香金文誦
010_1083_a_12L兩行可憐車馬客門外任他忙問曰
010_1083_a_13L然則皆出於禪家語錄曰然或唯唯而
010_1083_a_14L退

010_1083_a_15L

010_1083_a_16L大乘戒法門

010_1083_a_17L
盖潔垢穢者水爲之首除荆棘者
010_1083_a_18L爲之初故祭日齋時浴身洗衣而行事
010_1083_a_19L法設戒受燒頂燃臂而結盟浴身洗衣
010_1083_a_20L去現在之外染燒頂燃臂滅過去之內
010_1083_a_21L或名懺悔傳心或名齋戒受火
010_1083_a_22L後受比丘二百五十戒行受菩薩五十
010_1083_a_23L八之律儀大明大淸之律行遙未詳知
010_1083_a_24L羅麗朝鮮之威儀粗可明鑑一指渾虛

010_1083_b_01L귀에 쟁쟁하고, 허주虛舟와 영산影山이 전한 것이 곳곳에서 강론된다. 연담蓮潭과 연파蓮坡의 등불은 여전히 타오르고, 퇴은退隱과 화문化門의 심인心印은 여전히 닳지 않았다. 영허映虛와 동화東化는 남북의 노파자요, 초의草衣와 철선鐵船은 고금의 왕노사王老師57)이다. 침명枕溟과 함명涵溟은 법손이 참으로 성대하고, 묵암黙庵과 응암應庵은 등광燈光이 일월처럼 빛나며, 벽담碧潭과 완담玩潭은 곳곳에 법륜을 굴리고, 우담優曇과 원화圓華는 산문마다 선풍을 심었다. 경담鏡潭과 덕송德松은 양악羊岳과 백파白坡의 선원禪源을 지켰고, 혼허渾虛와 청연淸淵은 미봉眉峯과 낭암朗巖의 불심인佛心印을 받들었다. 이들은 모두 인천人天의 안목이요 선해禪海를 건너는 배이다.
사미ㆍ비구ㆍ보살은 깊고 얕음이 같지 않고, 화상ㆍ갈마羯摩ㆍ교수는 말과 침묵이 다르나, 피안과 차안이 모두 인아人我의 위에 있으니, 진불眞佛과 즉불卽佛을 어찌 실상의 세계에서 논하겠는가. 말하고 듣는 이가 다르다고 이르지 말라, 다만 자타自他가 한가지 이치임을 알지니, 이름은 비록 보살이나 지위는 바로 부처로다. 거듭 가타伽陁(게송)를 선설宣說한다.

我不是我     아我가 아가 아니며
人不是人     인人이 인이 아니로다
人我無跡     인아人我의 자취 없어야
眞個導者     참된 스승이 되리라
다구명茶具銘
生涯淸閒     생애가 맑고 한가함은
數斗茶芽     몇 말의 차 싹 때문
設苦窳爐     변변찮은 화로 놓고
載文武火     세고 약한 불 지피네
瓦罐列右     질흙 물병은 오른쪽에
瓷盌在左     자기 사발은 왼쪽에 두고
惟茶是務     오직 차 마시기 힘쓰니
何物誘我     무엇이 나를 유혹하랴
행장명行藏銘
藏則方丈     은거하면 방장산
行乃樹下     행각하면 나무 아래
柱杖一條     주장자 하나에
鉢盂四顆     발우는 네 개라
靑州布衫     청주의 포삼58) 입고
江東米價     강동의 쌀값59) 묻네

010_1083_b_01L之說錚錚在耳虛舟影山之傳處處
010_1083_b_02L弄唇蓮潭蓮坡之燈尙在熾然退隱
010_1083_b_03L化門之印猶不刓獘映虛東化南北
010_1083_b_04L之老婆子草衣鐵船古今之王老師
010_1083_b_05L枕溟涵溟法胤如螽斯詵詵默庵應庵
010_1083_b_06L燈光若日月昱昱碧潭玩潭轉法輪於
010_1083_b_07L處處優曇圓華種柏樹於山山鏡潭
010_1083_b_08L德松守羊岳白坡之禪源渾虛淸淵
010_1083_b_09L佩眉峯朗巖之佛印此是人天1) [4]
010_1083_b_10L禪海舟航沙彌比丘菩薩深淺不同
010_1083_b_11L和尙羯摩敎授語默有別彼岸此岸
010_1083_b_12L都在於人我之上眞佛即佛何論於實
010_1083_b_13L相之邊莫言說聽懸殊第會自他一
010_1083_b_14L名雖菩薩位乃佛陁重宣伽陁曰
010_1083_b_15L我不是我人不是人人我無跡眞個
010_1083_b_16L導者

010_1083_b_17L

010_1083_b_18L茶具銘

010_1083_b_19L
生涯淸閒數斗茶芽設苦窳爐

010_1083_b_20L載文武火瓦罐列右瓷盌在左

010_1083_b_21L惟茶是務何物誘我

010_1083_b_22L行藏銘

010_1083_b_23L
藏則方丈行乃樹下柱杖一條

010_1083_b_24L鉢盂四顆靑州布衫江東米價

010_1083_c_01L髮已種種     백발 이미 성성한데
高心大坐     마음 높여 앉았네
죽비명竹篦銘
進止嚴整     진퇴가 엄명하고
償罰分明     상벌이 분명하여
獅子作吼     사자후 토해 내니
衆獸歛聲     뭇짐승 소리 죽인다
動乃守默     움직이면 침묵 지키고
靜必含情     고요하면 정을 머금어
古人談柄     옛사람의 담병이요
今我口銘     오늘 나의 좌우명이라
목탁명木鐸銘
有口無語     입은 있으나 말은 없어
叩頰有鳴     뺨 두드리면 소리 울린다
象王回顧     상왕이 돌아보자
群毛隱屛     뭇짐승 자취 감춘다
佇門納跡     문에 기다려 자취 들이고
開筵奉迎     법석 열 때 받들어 맞나니
儒比魯聖     유자는 공자에 견주고60)
釋表梵僧     불가에선 범승 나타낸다
주장명柱杖銘
扶身竪柱     몸을 견고히 지탱하니
護法活龍     호법의 살아 있는 용
行李朋友     나그네의 벗이요
坐禪朝宗     좌선하는 이의 으뜸
打破竈靈     부뚜막 귀신 타파하고61)
敲下碓舂     연자방아 두드렸네62)
高支國祚     나라의 복 받들고자
重拈枝松     솔 주장자 다시 든다
염주명念珠銘
手中百八     수중엔 백팔이요
堂內一千     당내엔 일천이라
高聲念數     소리 높여 셈하고
默坐禪詮     묵좌하여 선에 든다
證席呱呱     증명 자리에선 소리 울리고
講筵綿綿     강석 자리에선 끊임없다
長掛身上     항상 몸 위에 걸어
要防邪牽     사특함 방비한다
영산63)선지식 찬 影山知識贊
道富一食     도는 한 끼도 부유하고
行奢三衣     행실은 삼의64)도 사치라
墜間樹下     나무 아래로 떨어지니
窮夫乞兒     궁한 사내요 거지 아이로다
觀音法嗣     관음의 법을 잇고
通度僧隨     통도사의 중을 따라
野野營營     들마다 행각하고
山山之之     산마다 유람했네
龜山投托     구산에 의탁하고
松寺密移     송광사로 가만히 옮기니
阮堂答賛     완당이 답하여 찬하고
梵海喝知     범해가 할하여 알도다
優哉游哉     자유롭게 소요하나니
三家古錐     세 분 노고추로다

010_1083_c_01L髮已種種高心大坐

010_1083_c_02L竹篦銘

010_1083_c_03L
進止嚴整償罰分明獅子作吼

010_1083_c_04L衆獸歛聲動乃守默靜必含情

010_1083_c_05L古人談柄今我口銘

010_1083_c_06L木鐸銘

010_1083_c_07L
有口無語叩頰有鳴象王回顧

010_1083_c_08L群毛隱屛佇門納跡開筵奉迎

010_1083_c_09L儒比魯聖釋表梵僧

010_1083_c_10L柱杖銘

010_1083_c_11L
扶身竪柱護法活龍行李朋友

010_1083_c_12L坐禪朝宗打破竈靈敲下碓舂

010_1083_c_13L高支國祚重拈枝松

010_1083_c_14L念珠銘

010_1083_c_15L
手中百八堂內一千高聲念數

010_1083_c_16L默坐禪詮證席呱呱講筵綿綿

010_1083_c_17L長掛身上要防邪牽

010_1083_c_18L影山知識賛

010_1083_c_19L
道富一食行奢三衣墜間樹下

010_1083_c_20L窮夫乞兒觀音法嗣通度僧隨

010_1083_c_21L野野營營山山之之龜山投托

010_1083_c_22L松寺密移阮堂答賛梵海喝知

010_1083_c_23L優哉游哉三家古錐

010_1083_c_24L「眠」疑「眼」{編}

010_1084_a_01L
백파65)율사 찬 白坡律師贊
敎門木鐸     교문의 목탁이요
禪家龜鑑     선가의 귀감이라
更論機用     다시 대기대용 논하여
重現魚梵     불법을 거듭 밝혔네
塡甐請誨     학인들 가르침 청하고
稻麻受懺     대중들 참회 받으니
止啼老婆     울음 그치는 노파요
濟衆風帆     중생 제도하는 돛배라
了事退广     일 마치고 물러나서
傳燈高枕     법등 전하고 높이 누웠네
碑影並成     비석과 진영 이루었으니
時當降臨     때때로 강림하소서
용운66)대사 찬 龍雲大師贊
元氣胚胎     큰 기운이 잉태하고
世智莊嚴     세상 지혜로 장엄하여
浴川踰城     욕천67)에서 출가하니
曹溪投針     조계에 마음 맞았네
文章有自     문장은 유래가 있고
閥閱載兼     문벌도 겸하였으니
嶺湖執政     영호남의 집정자들이
善惡倍瞻     선악 간에 더욱 우러렀다
七寺興修     일곱 사찰 중흥하고
物貨廉謙     재물도 청렴하였고
內外財豊     내외의 재물 풍성하나
生死用厭     생사를 싫어하였네
禪敎並流     선과 교를 함께 전하니
碑影雙占     비석과 진영 자리했네
무위68)진신 찬 無爲眞身贊
駕洛苗裔     가락의 후예요
臨濟後塵     임제의 자손이라
降生嘉慶     가경 연간에 태어나
剃染壬辰     임진년에 출가하였다
叅八知識     여덟 선지식 참배하고
報四重恩     막중한 사은 갚았도다
被忍辱甲     인욕의 갑옷을 두르고
做無爲人     무위의 참사람 되었다
梅熟蓮香     매실 익고 연꽃 향기 풍겨
善子令孫     훌륭한 자손이 넘쳤다
寂滅爲樂     적멸이 즐거움 되니
眞個法身     참된 법신이로다
자찬自贊
覺者彼岸     각은 피안의 뜻이요
梵王法海     범왕은 불법의 바다
族望鎭海     진해의 이름 있는 집안으로
生長淸海     청해에서 태어나 자랐네
舞歸九曲     춤추며 구곡으로 귀의하여
全仗三衣     오로지 삼의를 의지했네
下嘴誤人     입 놀려 학인들 오도하고
記事迷機     사적 기록함에 기연 미혹했네
貧無卓錐     가난하여 바늘 꽂을 땅 없으나
氣壓須彌     기세는 수미산을 압도하네
懷常氣勝     마음은 항상 기가 넘쳐 나
或恐道微     도가 미약할까 저어하네
就蔭無影     그늘 들면 그림자 사라지고
入火無身     불에 들면 허망한 몸 없도다
尋之無跡     찾아도 자취가 없으니
一段靈神     한 조각의 신령한 빛뿐
병인년69)표충사 축 丙寅表忠祠祝

010_1084_a_01L白坡律師賛

010_1084_a_02L
敎門木鐸禪家龜鑑更論機用
010_1084_a_03L重現魚梵塡甐請誨稻麻受懺

010_1084_a_04L止啼老婆濟衆風帆了事退广

010_1084_a_05L傳燈高枕碑影並成時當降臨

010_1084_a_06L龍雲大師贊

010_1084_a_07L
元氣胚胎世智莊嚴浴川踰城

010_1084_a_08L曹溪投針文章有自閥閱載兼

010_1084_a_09L嶺湖執政善惡倍瞻七寺興修

010_1084_a_10L物貨廉謙內外財豊生死用厭

010_1084_a_11L禪敎並流碑影雙占

010_1084_a_12L無爲眞身贊

010_1084_a_13L
駕洛苗裔臨濟後塵降生嘉慶

010_1084_a_14L剃染壬辰叅八知識報四重恩

010_1084_a_15L被忍辱甲做無爲人梅熟蓮香

010_1084_a_16L善子令孫寂滅爲樂眞個法身

010_1084_a_17L自贊

010_1084_a_18L
覺者彼岸梵王法海族望鎭海

010_1084_a_19L生長淸海舞歸九曲全仗三衣

010_1084_a_20L下嘴誤人記事迷機貧無卓錐

010_1084_a_21L氣壓須彌懷常氣勝或恐道微

010_1084_a_22L就蔭無影入火無身尋之無跡

010_1084_a_23L一段靈神

010_1084_a_24L丙寅表忠祠祝

010_1084_b_01L
夙種善根     숙세에 선근을 심고
早受英質     일찍 영특한 자질 받아서
午鷄一聲     정오의 닭 울음소리에
能事已畢     능사를 이미 마쳤도다
現比丘身     비구의 몸 나타내고
出將軍術     장군의 전술 드러내어
見危七年     칠 년의 위태로움 가운데
成功一日     하루아침에 공적 이루었다
祲照壬辰     임진년 사특한 기운 비추더니
運回戊戌     무술년에 시운이 돌아왔다
營建院宇     전각을 경영하고 건립하여
奉安御筆     임금님의 글 봉안하니
四山崔嵬     사방의 산이 높이 솟고
雙峯崒嵂     두 봉우리는 우뚝하도다
遵其先見     그 선견지명 준수하여
蒙斯後吉     훗날의 복을 받는다
兒輩惹端     소인들 시끄러움 일으키고
爭同蚌鷸     조개와 도요새처럼 다투며
百般誣揑     백방으로 속이고 날조하나
萬事無實     만사가 진실이 없도다
隨尾防矢     꼬리는 화살 막았으나
觸頭墮罼     머리는 그물에 떨어졌다
雄唱雌和     자웅이 서로 창화하여
如兒爭栗     아이가 밤 다투듯 하니
典保無策     계속 보존할 계책 없어
閉門四出     문 닫고 사방을 나섰다
少含淚語     젊어선 눈물 머금어 말하고
老仰天咥     늙어선 하늘 보고 웃누나
香殘寶篆     보전의 향 스러지고
烟消金室     금실의 연기도 사라져
山寂寂寃     산도 적적하게 원망하고
水潺潺咽     물도 잔잔히 오열한다
嗚呼哀哉     오호라 슬프도다
三大禪師     세 분 대선사70)께서는
開方便門     방편의 법문 열어
示波羅密     바라밀을 교시하시고
碎邪見幢     사견의 기치를 깨뜨려
立正法律     바른 법률 세우셨네
行北山移     「북산이문」71)을 돌리시어
掃狂妄踤     미친 무리들 소제하니
山門安閒     산문이 편안하고 한가하며
僧習靜謐     스님의 풍습 고요해졌네
百靈咸樂     온갖 신령 모두 즐거워하고
萬事精一     만사가 순수하고 전일해지니
瑞慶並臻     상서祥瑞가 아울러 이르고
人天共暱     인천이 함께 즐거워하였네
龍象正直     용상이 정직하사
淸聲備悉     맑은 소리 모두 갖추었네

『범해선사문집』 제1권 끝

010_1084_b_01L
夙種善根早受英質午鷄一聲

010_1084_b_02L能事已畢現比丘身出將軍術

010_1084_b_03L見危七年成功一日祲照壬辰

010_1084_b_04L運回戊戌營建院宇奉安御筆

010_1084_b_05L四山崔嵬雙峯崒嵂遵其先見

010_1084_b_06L蒙斯後吉兒輩惹端爭同蚌鷸

010_1084_b_07L百般誣揑萬事無實隨尾防矢

010_1084_b_08L觸頭墮罼雄唱雌和如兒爭栗

010_1084_b_09L典保無策閉門四出少含淚語

010_1084_b_10L老仰天咥香殘寶篆烟消金室

010_1084_b_11L山寂寂寃水潺潺咽嗚呼哀哉

010_1084_b_12L三大禪師開方便門示波羅密

010_1084_b_13L碎邪見幢立正法律行北山移

010_1084_b_14L掃狂妄踤山門安閒僧習靜謐

010_1084_b_15L百靈咸樂萬事精一瑞慶並臻

010_1084_b_16L人天共暱龍象正直淸聲備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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梵海禪師文集 第一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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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도요새와 조개가~못하는 격이었다 : 도요새가 무명조개의 속살을 먹으려고 부리를 조가비 안에 넣는 순간 무명조개가 껍데기를 꼭 다물고 부리를 안 놓아주자, 서로 다투는 틈을 타서 어부가 둘 다 잡아 이익을 얻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어부지리漁父之利의 이야기다. 『戰國策』.
  2. 2)곡례曲禮 삼천三千 : 『曲禮』는 『儀禮』의 다른 이름. 『禮記』 「禮器」에 “기본적인 예의가 3백 가지요, 구체적인 예절이 3천 가지인데, 그 정신은 하나이다.(經禮三百。 曲禮三千。 其致一也。 )”라고 하였다. 또 『中庸章句』 제27장에도 “크고 넉넉하도다. 예의가 3백 가지요, 위의가 3천 가지로다.(優優大哉。 禮儀三百。 威儀三千。)”라는 말이 나온다.
  3. 3)정자程子 : 중국 북송의 유학자로, 형제가 있다. 형 정호程顥(1032~1085)의 자는 백순伯淳, 호는 명도明道. 아우 정이程頥(1033~1107)와 함께 이정자二程子로 불리며 도덕설을 주장하여 우주의 본성과 사람의 성性이 본래 동일하다고 보았다. 저서에 『定性書』, 『識仁篇』이 있다. 아우 정이의 자는 정숙正叔, 호는 이천伊川. 최초로 이기理氣의 철학을 내세우고 유교 도덕에 철학적 기초를 부여하여 형인 정호와 함께 송대 주자학의 근거를 세웠다. 저서에 『伊川先生文集』이 있고, 공저에 『二程全書』가 있다.
  4. 4)마음에 뿌리박혀~온몸에 퍼져서 : 비슷한 표현이 『孟子』에 나온다. “君子所性。 仁義禮智根於心。 其生色也。 睟然見於面。 盎於背。” 『孟子』 「盡心」 上.
  5. 5)염제炎帝 : 좌구명左仇明의 『國語』에서는 강씨姜氏의 시조신始祖神으로 나온다. 때로는 태양신으로 받들기도 하였고, 또 신농神農과 동일시되는 경우도 있다. 고대 중국에는 각지에 불의 신으로 여겨지는 것들이 많이 있었던 것 같은데, 전국시대 말 오행설五行說이 유행함에 따라 신들을 통합하려는 기운이 나타났다. 그때 화신火神들이 염제라는 이름으로 통합된 흔적이 엿보인다.
  6. 6)여이女夷 : 꽃을 맡은 신이다.
  7. 7)『본초本草』 : 양梁나라의 학자 도홍경陶弘景이 6세기 초에 『神農本草經』 3권을 교정하고 다시 주를 가하여 『神農本草經集註』 7권을 저술하였다. 후세의 본초서는 모두 이것을 조술祖述한 것으로서, 송宋의 『證類本草』는 그 발전의 절정을 이루는 것이다. 맨 앞에 10조로 된 총론이 있고 이어서 365종의 약품을 상·중·하의 3품으로 나누어 각각 기미氣味와 약효藥效와 이명異名을 서술한 간단한 약물서이다. 현재의 『神農本草經』은 명나라의 노복盧復, 청나라의 손성연孫星衍 등에 의하여 각각 재편집된 것이다.
  8. 8)팔부八部 : 또는 용신팔부龍神八部. 불법을 수호하는 신장神將들. 천·용·야차·아수라·가루라·건달바·긴나라·마후라가의 8신. 이 가운데서 천과 용이 으뜸이므로 특히 천룡팔부라 한다.
  9. 9)기야祇夜 : ⓢ geya. 응송應頌·중송重頌·중송게重頌偈라 번역하며 12부경部經의 하나이다. 노래의 뜻을 가진 범어 ‘gai’에서 온 중성中性 명사로, 산문散文의 끝에 다시 그 뜻을 거듭 말하는 운문체韻文體의 경이다.
  10. 10)겁석劫石 : 부처가 겁劫의 뜻을 설명하기 위해 비유한 사방 40리里 되는 석산石山으로, 100년마다 사람이 한 번씩 와서 옷깃을 살짝 스치기만 하여 그 석산이 다 닳아 없어지는 기간이 1겁이라 하였는데, 그런 석산도 말세의 겁화劫火를 당하면 삽시간에 소진되어 재만 날린다는 설화에서 나온 것이다.
  11. 11)청해靑海 : 현재의 전라남도 완도.
  12. 12)효자의 효도~복을 받으리로다 : 출전은 『詩經』 「大雅」 ≺旣醉≻이다.
  13. 13)옥주沃州 : 전라남도 진도珍島.
  14. 14)등림鄧林 : 숲을 말한다. 중국 전설에 “과보夸父가 해를 쫓아가다가 8일 만에 목이 말라 황하黃河에서 물을 먹고 부족하여 북쪽 대택大澤으로 물을 마시러 가다가 이르지 못하고 죽었는데, 그가 짚고 간 지팡이가 변하여 등림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山海經』.
  15. 15)「천문지天文志」 : 『後漢書』 志 「天文」을 말한다.
  16. 16)장성張星 : 남방 주작 칠수朱雀七宿 중 한 별자리이다.
  17. 17)아도阿度 : 또는 아도我道·아두阿頭. 고구려 스님. 240~248년(위魏나라 정시 연중)에 위나라 사람 아굴마가 왕명으로 고구려에 왔다가 고도령과 통정하여 아도가 태어났다. 5세에 출가, 16세에 위나라로 가서 현창玄彰에게 수학하고 19세에 귀국하여 다시 어머니 명으로 신라에 갔다. 때는 263년(신라 미추왕 2)으로, 궁궐에 나아가 불교 선전하기를 청하다가 그때 사람들의 미움을 받고 모례의 집에서 3년 동안 은거하였다. 마침 공주가 병이 나서 사방으로 의사를 구할 때에, 스님이 왕성에 들어가 병을 치료하니 왕이 기뻐하며 절을 짓고 불교를 일으키게 하였다. 그때 신라 풍속이 검소하여 초가로 흥륜사興輪寺를 처음 짓고 스님이 설법하니 하늘 꽃이 떨어졌다고 한다. 모례의 누이 사씨史氏도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永興寺를 지었다. 후에 미추왕이 죽으니 백성들이 스님을 해치려 하므로, 모례의 집에 돌아와서 무덤을 만들고 들어가 다시 나타나지 아니하였다고 전한다.
  18. 18)양무제梁武帝 : 중국 남조 양의 초대 황제 소연蕭衍(464~549)으로 502년~549년 재위하였다. 자는 숙달叔達, 묘호는 고조高祖, 시호는 무제武帝. 남제 황실의 방계에 해당된다. 아버지 순지順之는 남제의 고제 소도성의 사촌동생이다.
  19. 19)원효元曉(617~686)는 신라의 고승으로, 속성은 설薛, 속명은 서당誓幢 또는 신당新幢이다. 설총薛聰의 아버지이다. 617년은 원효가 출생한 해로 본문의 기술은 오류가 있는 듯하다.
  20. 20)의봉儀鳳 원년 : 의봉은 당 고종高宗의 연호로 원년은 676년이므로 시대의 선후가 맞지 않다.
  21. 21)무이武夷 : 무이산武夷山은 중국 복건성에 있는 기암절벽과 강이 어우러진 경치 좋은 명산이다. 일찍이 『漢書』나 『史記』에는 무이군武夷君(신선)이 사는 곳으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한대漢代부터는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남송 때 주자朱子는 1183년 54세에 무이산에 정사精舍를 짓고 자연을 벗 삼아 공부하며 지낸 적이 있었다. 이때 그는 무이산의 절경을 읊은 ≺武夷棹歌≻라는 명시를 지어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22. 22)진중秦中 : 섬서陝西 중부의 평원, 즉 관중關中 땅을 말하는데, 춘추전국시대에 진秦나라의 영토였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이다.
  23. 23)우공藕孔의 산천 : 우공은 연꽃 대 속을 가리키는 말로 『雜阿含經』 권16에 아수라阿修羅가 천제天帝와 싸우다가 크게 패하여 상군象軍·마군馬軍·거군車軍·보군步軍의 4군이 모두 우공 속으로 달아나 숨었다고 한다. 일종의 피난처나 은거하기 좋은 곳을 말한다.
  24. 24)호중壺中의 선계仙界 : 『後漢書』 「方術傳」에 다음의 이야기가 나온다. 중국 후한 시대에 비장방費長房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여남현汝南縣의 시장에서 관리인으로 일하고 있었다. 어느 날 비장방은 이상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시장 한 모퉁이에서 영약靈藥을 파는 약장수 할아버지가 한 분 있었는데, 이 할아버지는 언제나 가게 앞에 항아리를 하나 놓아두고는, 시장이 파하면 얼른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 사라지는 것이었다. 시장 사람들은 아무도 그것을 눈여겨보지 않았으나 비장방은 너무도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되어 그 할아버지를 찾아갔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그를 항아리 속으로 안내했다. 항아리 속에는 훌륭한 옥으로 만든 화려한 저택이 장엄하게 솟아 있고, 그 저택 안에는 산해진미가 차려져 있었다. 그는 할아버지와 함께 술과 음식을 마음껏 먹고 나서 다시 항아리 밖으로 나왔다. 이 약장수 할아버지는 하늘에서 지상으로 유배된 선인仙人인 호공이었다. 뒤에 호공이 용서를 받아 천계天界로 돌아갈 때 비장방도 그를 따라갔는데, 선술仙術을 익히는 데 실패하여 지상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25. 25)정약용丁若鏞(1762~1836) : 조선 후기 학자 겸 문신. 사실적이며 애국적인 많은 작품을 남겼고, 한국의 역사·지리 등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여 주체적 사관을 제시했으며, 합리주의적 과학 정신은 서학을 통해 서양의 과학 지식을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주요 저서는 『牧民心書』, 『經世遺表』 등이 있다.
  26. 26)사액賜額 : 임금이 나라에 공이 있는 사람이나 큰 학자의 서원書院이나 사우祠宇에 편액을 써서 내리는 일이다. 이런 경우 대개 토지나 노비 등을 하사하고 제수祭需를 관가에서 마련해 준다.
  27. 27)동치同治 11년 : 동치 11년은 임신년이요, 10년이 신미년이니 착오가 있는 듯하다.
  28. 28)송금산松禁山 : 국가에서 재목을 조달하기 위하여 벌채를 금하고 보호하는 소나무가 잘 자라는 산이다.
  29. 29)자장子張이 띠에 쓴다든지 : 자장이 바른 행동에 대해서 묻자, 공자께서 말을 충신忠信하게 하고 행동을 독경篤敬하게 하라고 하였으며 항상 마음속에 충신과 독경을 주인 삼으라고 하시니 자장이 그 말씀을 띠에 써서 봉행하였다.
  30. 30)남용南容이 백규白圭의~읊는 것 : 『論語』 「先進」에 보면, 남용은 백규의 시 “흰 옥의 티는 닦을 수가 있지만 이 말의 허물은 없앨 수가 없구나.(白圭之玷。 尙可磨也。 斯言之玷。 不可爲也。)”(『詩經』 「大雅」 ≺抑≻)를 하루에 세 차례씩 반복하며 말을 삼가 공자가 그의 형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 주었다.
  31. 31)노파자老婆子의 공안公案 : 늙은 노파가 어린 자식을 생각하듯이 선사가 학인을 간절히 훈도한다는 뜻이다.
  32. 32)은홍교殷洪喬처럼 부침浮沈하게 : 진晉나라 은홍교가 예장 태수豫章太守가 되었을 때 남의 편지 100여 통을 부탁 받아 가지고 가다가, 도중에서 모두 물에 띄워 버리고 말하기를, “뜰 것은 뜨고 가라앉을 것은 가라앉아라. 은홍교가 편지나 전하는 우체부가 되지 않겠다.”라고 하여, ‘홍교척수洪喬擲水’란 문자가 전한다. 부침이란 편지나 글을 제대로 전하지 않거나 지니지 않는 것을 뜻한다.
  33. 33)무휼無恤같이 깊이 품에 간직할지어다 : 춘추 후기에 진나라 대부 조간자趙簡子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큰 아들은 백로伯魯, 둘째는 무휼이었다. 누구를 후계자로 세울지 결정하기가 어려워서 대나무에 훈계하는 말을 써서 주었다. 3년 후에 물어보니 백로는 대나무를 잃었고 무휼은 품속에 늘 간직하여 드디어 후계자가 되었다.
  34. 34)제34장의 사문운운沙門云云과~글자가 있다 : 『四十二章經』의 제34장은 “有沙門夜誦經甚悲。 意有悔疑。 欲生思歸。 佛呼沙門問之。 汝處于家將何何修爲。 對曰。 恒彈琴。 佛言。 絃緩何如。……”라고 되어 있고, 제38장은 “佛問諸沙門。 人命在幾間。 對曰。 在數日間。 佛言。 子未能爲道。……”라고 되어 있는데, 두 장 모두 문답이므로 ‘불언佛言’이 장의 처음에 나오지 않고 중간에 나온다는 말이다.
  35. 35)마지摩旨 : 부처님께 올리는 밥.
  36. 36)삼태三台 : 삼태성三台星은 상태上台·중태中台·하태下台 각각 2개씩 6개로 이루어진 별이다. 이 별들이 제자리를 잡고 있으면 음양이 조화를 이루고 풍년이 든다고 한다. 이런 의미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37. 37)영분靈氛의 정전筳篿 : 영분은 고대 중국 전국시대의 점쟁이로 길흉을 잘 알아맞혔다. 정전은 점칠 때 쓰는 대나무이다. 『楚辭』 「離騷」.
  38. 38)요부堯夫의 시귀蓍龜 : 요부는 소옹邵雍(1011~1077)의 자字. 송宋나라의 학자이자 시인. 도가 사상의 영향을 받고 유교의 역철학易哲學을 발전시켜 특이한 수리철학數理哲學을 만들었다. 그는 음陰·양陽·강剛·유柔의 4원四元을 근본으로 하고, 4의 배수로써 모든 것을 설명하였다. 시귀는 옛사람들이 점칠 때 쓰던 시초와 거북을 가리킨다. 요부의 지혜라는 뜻이다.
  39. 39)보조普照 국사 : 지눌知訥(1158~1210). 고려의 승려로 돈오점수頓悟漸修와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장하였다. 선禪으로써 체體를 삼고 교敎로써 용用을 삼아 선·교의 합일점을 추구했다. 저서에 『眞心直說』, 『牧牛子修心訣』 등 다수가 있다.
  40. 40)능견난사能見難思 : 원뜻은 눈으로 볼 수는 있으나 보통의 이치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을 말한다. 송광사의 쇠로 만든 그릇을 지칭하는 말로도 쓰인다.
  41. 41)아육왕阿育王 : 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제3대 왕. 그의 치세 중에는 불교를 비롯한 갠지스강 유역 고도의 문화가 다른 지방에 급속히 퍼져 문화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또한 불교도들은 그를 이상적 군주로 추앙하였고, 그는 많은 설화를 탄생시킨 주인공이 되었다.
  42. 42)야사耶舍 비구 : ⓢ Yaśas. 야수타耶輸陀·야사타耶舍陀라 음역하고 명문名聞·명칭名稱이라 번역. 중인도 바라내국 장자, 선각의 아들. 인생의 무상함을 통감하고 염세하는 마음을 내어, 집을 떠나 세존에게 와서 교화를 받고 불제자가 되었다. 그의 부모와 아내는 야사의 출가함을 슬피 여겨 세존이 있는 데까지 따라왔다가 부처님의 교화를 받고 불문에 귀의하였다. 부처님 성도하신 후의 첫 우바새(우바이)가 된다.
  43. 43)염부제閻浮提 : ⓢ Jambu-dvīpa. 염부제비파閻浮提鞞波·섬부주贍部洲. 수미사주須彌四洲의 하나. 수미산의 남쪽에 있으며 칠금산과 대철위산 중간, 짠물 바다에 있는 대주大洲의 이름이다. 예주穢洲·예수성穢樹城은 염부나무가 번성한 나라란 뜻이고, 승금주勝金洲·호금토好金土는 염부단금閻浮檀金을 산출하는 나라란 뜻이다.
  44. 44)태공의 곧은 낚싯바늘 : 강태공은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을 가리킨다. 그는 위수渭水 가의 반계磻溪에서 낚시질하다가 문왕文王을 처음 만나 사부師傅로 추대되었다. 뒤에 문왕의 아들인 무왕武王을 도와서 은殷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평정하였다. 낚시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곧은 낚싯바늘을 썼다고 한다.
  45. 45)길손의 곡돌曲堗 : 화재 발생의 염려가 없다는 것을 해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순우곤淳于髨이 이웃집에 손님으로 왔다가 화재의 염려가 있으니 굴뚝을 고치고 옆에 있는 나뭇단을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충고했는데도 그 주인이 말을 듣지 않아, 마침내 불이 난 결과 그 불을 끄느라 머리카락이 타고 이마가 그을렸다는 ‘곡돌사신曲突徙薪’의 이야기가 있다. 『漢書』 권68 「霍光傳」.
  46. 46)난정蘭亭의 곡수연曲水宴 : 난정은 오현吳縣 지방인 회계군會稽郡에 있던 정자 이름. 진晉나라 왕희지王羲之가 회계군 내사內史로 있을 때 당시의 명사 42인과 그곳에 모여 계제사禊祭祀(삼짇날 물가에 가서 흐르는 물에 몸을 씻고 신에게 복을 기원하는 일)를 행한 일로 인해 세상에 유명해졌는데, 주변에 경호鏡湖와 섬계剡溪가 있다. 지금은 그 자리에 천장사天章寺란 절만 남아 있다고 한다.
  47. 47)진시황의 직도直道 : 진시황이 천하 통일을 하고 나서 자신만이 다닐 수 있는 큰 직선 도로를 개설하였다.
  48. 48)섭공葉公이 물었던 정직한 사람 : 섭공이 공자께 말하기를 “우리 고을에 정직한 사람이 있는데 그 아비가 양을 훔치자 아들이 고발하였습니다.” 공자가 말하기를 “우리 고을의 정직한 사람은 그와 다릅니다. 아비는 자식을 위해서 잘못을 드러내지 않으며 자식은 아비를 위해서 잘못을 감춥니다. 정직함이 그 가운데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論語』 「子路」.
  49. 49)심도자心都子가 물었던~잃었던 일 : 다기망양多岐亡羊이란 고사를 차용하였다. 양자楊子의 이웃 사람이 양을 잃어서 그 무리를 다 동원하고 다시 양자의 종까지 동원하여 찾으려 하였다. 이에 양자가 묻기를 “한 마리 양을 잃고 찾으러 가는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많은가?”라고 하자, 그가 말하기를 “갈림길이 많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찾으러 갔다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양자가 “양을 찾았는가?”라고 묻자 “잃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양자가 다시 “어째서 잃었는가?”라고 하자, 그가 말하기를 “갈림길 속에 다시 갈림길이 있어 나는 어디로, 양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기에 돌아오고 말았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심도자가 말하기를 “대도大道는 갈림길이 많아 양을 잃고 학자는 방도方道가 많아 생명을 잃는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列子』 「說符」.
  50. 50)배도盃渡 화상(?~426) : 진晉나라 때의 승려. 기주冀州 사람이라 하나 태어난 해와 이름은 알지 못한다. 항상 나무로 된 술잔을 타고 강을 건넜으므로 사람들이 배도 화상이라고 불렀다. 계율에 구애받지 않고 술도 마시고 고기를 먹었으나 신통력은 대단히 뛰어났다고 한다. 한때 그는 북방의 어느 집에 기숙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그 집에 있던 금불상 하나를 몰래 가지고 집을 나섰다. 주인이 그 사실을 알고는 말을 타고 뒤쫓아 왔으나 아무리 채찍질을 해도 천천히 걸어가는 배도 화상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러다 맹진하孟津河란 강가에 이르자 배도 화상은 나무로 된 술잔을 물에 띄우더니 그걸 타고 건너가 버렸다.
  51. 51)마조馬祖 : 속성俗姓은 마馬씨, 이름은 도일道一. 마조 도일이라고 한다. 한주漢州 습방什邡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처적處寂 밑에 출가해 선禪을 배웠고, 후에 유주渝州 원 율사圓律師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그 후 각지의 성지를 순례하다가, 호남湖南 지방의 남악南岳에 이르러 그곳에 머물며 좌선에 전력을 기울였다. 어느 날 “벽돌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 수 없는데, 어찌 좌선을 하여 성불할 수 있겠는가?”라는 회양懷讓의 말을 듣고서 깨달음을 얻어, 개심하여 회양을 따라 선을 배웠다. 후에 강서江西 지방 각지를 다니며 선의 가르침을 널리 전했다. 766~779년에는 홍주洪州 종릉鍾陵 개원사開元寺에 머물며 가르침을 폈는데, 각지에서 배우려는 이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그 영향이 실로 대단했고, 마침내 홍주종洪州宗을 창립했다.
  52. 52)황산곡黃山谷 : 황정견黃庭堅(1045~1105). 중국 북송의 시인이다. 자는 노직魯直, 호는 산곡山谷 또는 부옹涪翁이며 소식 문하인의 제1인자이다. 23세에 진사에 급제했으나, 국사원國史院의 편수관이 된 이외 관리 생활은 불우했다. 소식의 시학을 계승하였는데, 그의 시는 소식의 작품보다 더욱 내향적이었다. 소식과 함께 소황蘇黃으로 칭해져서 북송 시인의 대표적 존재가 되었다. 12세기 전반은 황정견 일파의 시풍이 세상을 풍미하였는데, 황정견이 강서 출신이었기 때문에 ‘강서파’라 칭해졌다.
  53. 53)공자의 말씀 : 원문은 “子曰。 二三者。 以我爲隱乎。 吾無隱乎爾。”로, 『論語』 「述而」에 나온다.
  54. 54)야보冶父 : 송宋나라 때 선사였던 야보 도천冶父道川(1127~1130). 원래 도천 스님은 군의 집방직執方職에 있다가 동재東齋의 도겸道謙 선사에게 도천道川이라는 호를 받았고, 정인 계성淨因繼成의 인가를 얻어 임제臨濟 스님의 6세손이 된다. 그는 특히 『金剛經五家解』를 통해 자기의 견해를 송으로 표현하였는데, 간결하면서도 한번에 내리치는 듯한 활구가 백미로 평가된다.
  55. 55)금문金文 : 불경을 말한다.
  56. 56)『金剛般若波羅蜜經五家解說誼』 권상(H7, 24b23)에 실려 있다.
  57. 57)왕노사王老師 : 원래는 남전 보원南泉普願(748~834)을 의미한다. 마조 도일馬祖道一의 법제자. 속성은 왕王. 중국 정주鄭州 신정新鄭 사람. 757년(당나라 지덕 2) 대외산大隗山의 대혜大慧에게 업業을 받고, 30세에 숭악嵩嶽에 가서 계를 받았다. 뒤에 마조의 문에 들어가 도를 깨달았다. 795년(정원 11) 지양池陽의 남전에 선원을 짓고, 30년 동안 산에서 내려가지 않았는데 학도가 항상 모여들었다. 학인을 다루는 솜씨가 준엄하여 ‘남전참묘南泉斬猫’와 같은 통쾌한 공안이 있다. 여기서는 훌륭한 선지식을 가리킨다.
  58. 58)청주의 포삼 : 어떤 스님이 조주趙州에게 묻기를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거니와,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 겁니까?(萬法歸一。 一歸何處。)”라고 하니, 조주가 말하기를 “내가 청주에 있을 적에 베 장삼 한 벌을 만들었더니, 그 무게가 일곱 근이더라.(我在靑州。 作一領布衫。 重七斤。)”라고 한 화두話頭에서 온 말이다.
  59. 59)강동의 쌀값 : 학인이 청원 행사淸源行思 스님에게 “무엇이 불법의 대의大意입니까?”라고 묻자, 스님이 이르기를 “여릉廬陵의 쌀값은 얼마이더냐?”라고 대답하였다.
  60. 60)공자에 견주고 : 『論語』 「八佾」에 의義 고을의 관원이, “여러분들 어찌 공자께서 관직이 없으신 것을 근심하시오? 세상이 무도無道한 지 오랜지라, 하늘이 장차 공자님으로 목탁을 삼으시려는 것이오.”라고 한 말이 있는데, 목탁은 곧 정교政敎를 펼 때에 울려서 대중을 깨우치는 것이다.
  61. 61)부뚜막 귀신 타파하고 : 당나라 숭악嵩嶽의 파조타破竈墮 화상. 숭악의 혜안慧安을 섬겼으며, 호를 노안老安이라 한다. 숭악에 한 묘廟가 있었는데, 그 안에는 매우 신령스러운 부뚜막 하나만 있었고 제사가 끊이지 않아 쉴 사이 없이 수많은 생명을 죽이고 삶아 댔다. 하루는 스님이 대중을 데리고 묘에 들어가 지팡이로 부뚜막을 세 번 두드리며 “쯧쯧! 이 부뚜막은 진흙과 기왓장으로 쌓은 것. 성聖은 어디 있고 영靈은 어디서 생기기에 저렇게 생명을 삶는단 말인가?”라고 하고 다시 세 번 두드리니, 부뚜막이 무너졌다. 그때 문득 푸른 옷에 높은 관을 쓴 사람이 와서 스님께 절하자 스님이 “누군가?”라고 물었다. 부뚜막 신(竈神)은 “나는 본래 이 묘의 부뚜막 신으로 오랫동안 업보를 받아 오다가 오늘에야 스님의 무생법문無生法門을 듣고, 이곳에서 벗어나 하늘에 나게 되었기에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하니 스님이 “이것은 네가 본래 가지고 있는 성품으로, 내가 굳이 말한 것이 아니다.”라고 답하자 부뚜막 신은 두 번 절하고 사라졌다. 이 스님은 처음부터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으므로 후세에 파조타라 불렀다.
  62. 62)연자방아 두드렸네 : 육조 혜능六祖慧能(638~713)의 고사. 혜능은 남해南海 신흥新興 사람.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땔나무를 팔아 어머니를 봉양하다가, 어느 날 장터에서 『金剛經』 읽는 것을 듣고 출가할 발심을 하였다. 어머니의 허락을 얻어 당나라 함형咸亨(670~674) 때 소양韶陽으로 갔다가 무진장無盡藏 비구니가 『涅槃經』 독송함을 듣고 그 뜻을 요해하였으며, 뒤에 제5조 홍인弘忍에게 찾아가서 선의 깊은 뜻을 전해 받았다. 676년 남방으로 가서 교화를 펴다가 조계산에 들어가 대법을 선양하였다. 무 태후가 효화 황제의 글을 보내어 초청하였으나 병을 핑계 대고 가지 않았으며, 당 선천 2년 8월에 76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어느 날 5조 홍인 선사께서 연자방앗간에 이르러 혜능이 곡식 찧는 것을 보고 지팡이로 연자방아를 세 번 두드렸다. 혜능이 그 뜻을 알아차리고 삼경에 찾아가니 5조께서 『金剛經』을 구수口授하시고 의발衣鉢을 전수하였다.
  63. 63)영산影山(?∼1883) : 법명은 경순敬淳이며 조선 말기의 선승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전라북도 고창군 선운사禪雲寺에서 삭발하였고, 선방에서 20여 년 참선하여 선의 깊은 뜻을 체득하였다. 선운사·통도사·송광사·해인사 등지에 주석하며 명성을 떨쳤고, 두타행頭陀行을 실천하며 1일1식의 계를 지키다 전라남도 곡성군 관음사觀音寺에서 앉은 채로 입적하였다.
  64. 64)삼의三衣 : 비구가 입는 의복 세 가지. ① 승가리僧伽梨. 중의重衣·대의大衣·잡쇄의雜碎衣라 번역. 9조條부터 25조까지 있으며, 마을이나 궁중에 들어갈 때 입는다. ② 울다라승鬱多羅僧. 상의上衣·중가의中價衣·입중의入衆衣라 번역. 7조가 있으며, 예불·독경·청강·포살布薩 등을 할 때에 입는다. ③ 안타회安陀會. 내의內衣·중숙의中宿衣라 번역. 5조가 있으며, 절 안에서 작업할 때 또는 상床에 누울 때 입는다.
  65. 65)백파白坡 : 백파 긍선白坡亘璇(1767~1852). 12세에 고창 선운사禪雲寺의 시헌 장로詩憲長老에게서 승려가 되고, 용문암龍門庵을 거쳐 영원암靈源庵에 이르러 상언尙彦에게 서래西來의 종지를 배우고, 구암사龜岩寺에서 회정懷情의 법통을 잇고 백양산 운문암雲門庵에서 개당開堂하였다. 백파는 설봉雪峰의 법을 이은 사법 제자이고 퇴암退庵의 손자 제자이며, 설파 상언雪坡常彦의 증손 제자이고 호암 체정虎岩體淨의 현손玄孫 제자이다. 문인들이 선운사에 비석을 세웠으며, 비문은 추사 김정희가 지었는데, 그 전면에 “화엄종주백파대율사대기대용지비華嚴宗主白坡大律師大機大用之碑”라 하였다.
  66. 66)용운龍雲 : 용운 처익龍雲處益(1813~1888). 당호堂號는 경암敬庵이고 속성은 이李씨이며, 곡성谷城 석곡방石谷坊 용계龍溪에서 출생. 15세에 조계산曹溪山 송광사로 출가했으며, 17세에 남일南日 장로에게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이어 기봉奇峯 선사에게 구족계를 받고, 제봉霽峰 선사에게 선참禪懺을 받았으며, 27세에 보봉寶峰 선사의 조실에서 향을 사르고 법통을 이어받았다. 호남 표충사 도총섭湖南表忠祠都摠攝의 관직과 영남 표충사 도총섭領南表忠祠都摠攝의 관직, 또 도내道內의 ‘도총섭’ 직위까지 받아 직무를 수행했다. 대사는 봉은사奉恩寺와 해인사海印寺에서 경전을 간행하는 일을 했으며, 통도사通度寺에서는 계단戒壇을 시설하였고 태고사太古寺 중수를 하였으며, 갈래사葛來寺에 석탑 세우는 불사를 하였고 회암사檜岩寺에서는 산문의 송사를 처리하였으며, 임인壬寅, 1842년에는 송광사의 중창에 화주化主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67. 67)욕천浴川 : 전라남도 곡성의 옛 이름이다.
  68. 68)무위無爲 : 무위 안인無爲安忍(1816~1886). 속성은 김金씨이고 청해淸海 세포細浦에서 출생하였다. 11세에 보타산補陀山으로 출가했다가 16세에 두륜산頭輪山으로 옮겨가 호의縞衣 선사의 조실에서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다. 완해玩海 대사의 계단에서 구족계를 받고 신월信月·철선鐵船·문암聞庵·용연龍淵·화담華潭·초의草衣·인암忍庵·성담性潭·호의縞衣 등 9대 법사의 법연法筵에서 교학을 배웠다. 이어 호의 스님으로부터 법인法印을 전해 받고 초의 스님에게 대승보살계를 받았다. 스님은 호남총섭湖南摠攝의 직에 올라 표충사 수호 임무를 역임하였으며, 성담 스님과 인암 스님의 선석禪席을 물려받고 초의 스님의 다양한 기능을 배워 익혔다.
  69. 69)병인년丙寅年 : 1866년, 고종 3년.
  70. 70)세 분 대선사 : 서산 휴정西山休靜(1520~1604), 사명 유정四溟惟政(1544~1610), 기허당 영규騎虛堂靈圭(?~1592).
  71. 71)「북산이문北山移文」 : 남북조 시대 제齊나라의 주옹周顒이라는 사람이 북산에 은거하며 덕행이 있었는데, 황제가 불러 나가서 벼슬하다가 여의치 못하자, 다시 북산으로 돌아가려 하니, 그와 동지인 공치규孔稚圭라는 사람이 「北山移文」을 지어서 산은 그런 사람이 오는 것을 거절한다는 뜻을 밝혔다. 여기서는 산문을 버리고 나간 요승들이 다시 접근하지 못하도록 한 말인 듯하다.
  1. 1){底}新文館發行鉛印本。
  2. 2)目次。編者作成補入。
  3. 1)「文一」二字。編者補入。
  4. 1)「辦」疑「辨」{編}。
  5. 1)「斤」疑「斥」{編}。
  6. 1)「訢」疑「訴」{編}。
  7. 1)「眠」疑「眼」{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