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선문재정록(禪門再正錄) / 禪文再正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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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재정록禪文再正錄
법주사 사문 서진하法住寺 沙門 徐震河
조영미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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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재정록禪文再正錄

예로부터 선을 담론함1)에 사람을 기준으로 하거나 법을 기준으로 하는데, 각각에 두 가지가 있다. 의리義理와 격외格外는 법을 기준으로 한 명칭이고, 여래와 조사는 사람을 기준으로 한 명칭이다. 이와 같이 두 짝으로 세운 근거에 대해서는 여러 설들이 같지 않다.2)

백파 긍선 노장은 모두 그르다고 여기고 두 짝의 기준을 나누고 합하여 재배열하였다. 특히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여 말하기를, ‘선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조사선, 둘째 여래선이며, 이 둘을 합하여 격외선이라 한다. 셋째는 의리선이다.’ 3)라 하고, 임제삼구臨濟三句를 모범 기준(規矩準繩)으로 삼아 차례대로 세 가지 선(三禪)에 짝지었다. 임제 의현臨濟義玄이 말하였다. ‘제1구에서 알아차리면 불조의 스승이 될 만하고, 제2구에서 알아차리면 인천의 스승이 될 만하며, 제3구에서 알아차리면 스스로도 구제하지 못한다.’ 4) 5) 그 삼구를 나누어 짝지은 기준이 이미 세 종류의 근기에 맞춘 것이므로 당연히 이와 같이 된 것이다. (백파는) 옛날에 두 짝으로 붙인 명칭에서 사람을 기준으로 한 분류는 합하고 법을 기준으로 한 분류는 나누었다. 그런데 격외가 곧 여래와 조사의 법이라는 것은 알겠으나, 의리는 누구의 법인지 모르겠다. 범부의 법인가, 성현의 법인가? 사람을 기준으로 한 분류는 상관없이 하나의 법을 헛되이 세워 의리선이라 한 논리는 각각 사람과 법으로 나누어 네 가지 선(四種禪)으로 논의함만 도리어 못하다. 어째서 법에 근거한 하나의 선과 사람에 근거한 두 가지 선을 두어 사람과 법이 일치하지 않게 되는 과오를 범한 것인가?6)
부처나 조사가 번뇌의 세계에 떨어져 그것에 맞게 전하는 방편의 말7)을 의리선이라 한다면 의리는 별다른 법이 아니라, 본래 여래의 법이요 조사의 법임이 분명하다. 임제가 세 종류의 근기에 대응시켜 삼구라는 명칭을 붙이고 법문을 제시하였으니 각 구절에 따라 응하는 대상도 달라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말을 할 때는 하나의 구에 반드시 삼현三玄을 갖추어야 하고 하나의 현에 삼요三要를 갖추어야 하니, 여기에는 현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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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_0868_a_02L1)禪文再正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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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_0868_a_04L忠淸北道 報恩郡
011_0868_a_05L法住寺 沙門 徐震河述

011_0868_a_06L
古來談禪約人約法各有二種義理
011_0868_a_07L格外約法名者如來祖師約人名者
011_0868_a_08L立此兩重諸說之同異白坡老總非之
011_0868_a_09L開合兩重特申己見云禪有三種
011_0868_a_10L祖師禪二如來禪合名格外禪三義
011_0868_a_11L理禪將臨濟三句爲準繩而如次配於
011_0868_a_12L三禪臨濟云若第一句薦得堪與祖佛爲師
二句薦得堪與人天爲師第三句薦得
011_0868_a_13L救不
其三句之配旣對三根故理應如
011_0868_a_14L古之兩重立名約人則合之約法
011_0868_a_15L則開之是知格外乃如來祖師之法
011_0868_a_16L未委義理是何人之法爲凡夫法耶
011_0868_a_17L爲賢聖法耶若無約人而空立一法
011_0868_a_18L爲義理禪反不如各開人法爲四種禪
011_0868_a_19L胡乃一法二人有人法不齊之失耶
011_0868_a_20L若以佛祖落草之談爲義理禪則義理
011_0868_a_21L不是別法自是如來之法也祖師之法
011_0868_a_22L明矣臨濟爲對三根立三句名
011_0868_a_23L示法門隨句應異云何大凡下語
011_0868_a_24L句中須具三玄一玄中須具三要有玄

011_0868_b_01L요도 있으며, 방편도 있고 진실도 있으며, 비춤도 있고 작용도 있다.’ 8)라고 하였는가.
청풍 법사淸風法師는 총석에서 ‘구句란 언구라고 할 때의 그 구이다. 현玄과 요要는 구에 있고, 제3구 권權과 실實은 현에 있으며, 제2구 조照와 용用은 요에 있다. 제1구 각각 마땅한 점을 가지고 있으니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9)라고 하였다. 별석에서는 제1구와 제2구를 해석하고 제3구에 이르러서는 ‘나와 그대가 지금 설하기도 듣기도 하며 묻기도 답하기도 한 상황이 앞에서 제1구와 제2구를 해석한 말을 가리킨다. 이미 제3구에 떨어진 것이다.’ 10)라고 하였다. 또 ‘삼요의 도장을 물렁한 진흙에 찍을 경우 그 흔적이 온통 뚜렷이 드러나는 것과 같으므로 이름을 바꾸어 삼구라 하는데 현과 요도 함께 그 가운데 있다.’ 11)라고 하였다. 이에 따르면 격외 가운데 갖추어진 법 여래선과 조사선 두 가지 선(二禪) 을 제외하고는 별도로 의리라는 법은 없다. 다만 언구에 다름이 있을 뿐이다. 어찌하여 여래선과 조사선 두 가지 선을 유독 격외에 짝지은 것인가? 날마다 쓰면서도 알지 못하는 경우 12)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나의 좁은 견해를 말해 보겠다. 의리와 격외에 모두 두 가지 선(조사선과 여래선)을 갖추고 있다. 의리와 격외는 갖추는 주체(能具)로서의 선이고, 여래와 조사는 갖추어지는 대상(所具)으로서의 선이다. 능구能具는 허명虛名(虛位)으로서 다만 지시하는 주체 스승 와 깨닫는 당사자 제자 라는 측면을 따라서 이름을 붙인 것이고, 소구所具는 지시한 가르침 스승 과 깨달은 가르침 제자 을 따라서 법의 본체 측면에서 이름을 붙인 것이다. 따라서 소구를 능구라고 일컬어서는 안 된다.
종사는 근기에 적합하게 이끌어 갈 때 말의 자취를 늘어놓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는 도리로 전혀 통하지 않는(沒道理) 한 구절을 내놓거나, 어떤 경우에는 잠깐 침묵하거나(良久) 방棒이나 할喝과 같은 방법으로 제기하는데 영리한 자는 곧바로 알아차리고 자신이 깨달은 경계를 드러내 보이니 많은 말이 필요 없이 미소 짓거나 손을 들어 그에 응한다. 이 근기가 전해 받은 법은 정식情識이나 말로는 표현하거나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의리라는 격을 벗어나 있기 때문에 격외선이라 한다. 만일 노파심 때문에 현玄이니 요要니 이야기하며 그 뜻을 자세히 다 말한다면 배우는 이가 말에 얽매여 이해를 일으키게 된다.13) 혹은 배워서 알고, 생각해서 터득하며, 익혀서 이룬다면14) 이 근기가 전해 받은 법에는 완연히 명名과 상相,

011_0868_b_01L有要有權有實有照有用淸風法師
011_0868_b_02L捴釋中云句言句之句玄要在句第三

011_0868_b_03L權實在玄第二
照用在要第一
各有攸當
011_0868_b_04L不應莽鹵別釋第一第二句至第三句
011_0868_b_05L吾與子卽今一說一聽一問一答
011_0868_b_06L指上初二
句所釋
早落第三句了也又云如將三
011_0868_b_07L要印向爛泥裏搭却痕縫全彰轉名
011_0868_b_08L三句玄要在其中據此則除却格外中
011_0868_b_09L所具之法如來祖
師二禪
別無義理之法但爲言句
有异也

011_0868_b_10L何以如來祖師二禪獨配於格外可謂
011_0868_b_11L日用而不知者也

011_0868_b_12L
請陳管見夫義理格外中皆具二禪
011_0868_b_13L義理格外是能具如來祖師是所具
011_0868_b_14L之禪能具虛位而但從能示能悟
011_0868_b_15L邊立名所具卽就所示所悟法體上
011_0868_b_16L立名不可所將具 [1] 卽目能具謂宗師
011_0868_b_17L對機之時不陳言迹或下沒道理之
011_0868_b_18L一句或良久棒喝之類擧之伶利漢直
011_0868_b_19L下承當呈其悟地不用多言或微笑
011_0868_b_20L擧手而應之此機傳受之法非情識言
011_0868_b_21L辭之所可議度直超義理之格故名格
011_0868_b_22L外禪若以老婆心說玄談要曲盡其
011_0868_b_23L學者隨語生解或學而知思而得
011_0868_b_24L習而成則此機傳得之法完有名相

011_0868_c_01L그리고 이치에서 그 요지를 밝히는 자취가 남게 되니 공훈功熏을 들여 닦아서 증득하는 길이라 할 만하므로 이를 의리선이라 한다.

그러므로 이 전수한 법은 동일하지 않다. 종사가 상대의 안목을 시험하고자 하여, 때로는 자취를 찾지 못하도록 (의도적으로) 숨기고 덮어 버리거나15) 번뇌의 풀숲에 떨어져서 법을 설하기도 하는데 근기가 날카로우면 그 자취에 얽매이지 않고 곧장 격외로 들어가 깨닫지만, 설령 방이나 할로 지시하는 방편을 쓰더라도 근기가 둔하면 의리에 떨어져 들어가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고덕은 ‘말에 얽매여 이해를 일으킨다면 염화미소拈花微笑도 도리어 교의 자취가 될 뿐이고, 마음에서 터득하면 세간의 언어도 모두 교외별전敎外別傳의 뜻이 된다.’ 16)라고 하였다. 그런 까닭에 깨달은 법의 본체 조사선과 여래선 두 가지 선 에서는 본래 격외와 의리가 다르지 않지만, 다름이 있는 까닭은 전수한 측면을 따라서 이름을 붙였기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즉 사구死句와 활구活句라는 명칭과 마찬가지로 명칭은 다르지만 뜻은 같다. 그러므로 고덕이 ‘사구에서 알아차리면 자기도 구제하지 못하지만, 활구에서 알아차리면 불조의 스승이 될 만하다.’ 17)라고 한 것이다. 『선가귀감』에 ‘사구란 뜻을 궁구하는 것(參意)이니 말을 따라 쫓아가는 길도 있고(語路) 이치로 통하는 길(理路)도 있기 때문이다. 활구란 다만 구절을 궁구하는 것(參句)이다.’ 18)라고 하였다. 『염송설화』에서도 ‘말이 없어도 말에 대한 관념이 남아 있으면 사구요, 말로 표현하여도 어떤 집착의 흔적도 없으면 활구이다.’ 19)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선을 익히는 자는 화두를 참구할 때 다만 격외의 도리를 참구해야지 의리로 들어가려 해서는 안 된다. 격외와 의리에 대한 구분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여래선과 조사선 두 가지 선은 무엇에 근거하여 이름을 붙인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백파 긍선은 말하였다. ‘최상의 근기를 대하고 하나하나의 언구에서 잡고서 분별할 수단을 전혀 남기지 않으니 영원히 금시와 본분이라는 번뇌의 마음에서 벗어나 있어 부처도 안착시키고 조사도 안착시킨다는 따위와 같다. 이것은 조사 문하(祖門)에서만 사용하는 언구이므로 조사선이라 한다. 혹은 중간의 근기를 대해서는 언구를 지시하되 방편 그대로 진실을 밝히니 이 둘을 분별하기 어려워 부처도 물리치고 조사도 물리치지만 하나하나의 법마다 온전히 진실하다는 따위와 같다.

011_0868_c_01L理詮旨之迹可借功熏修證之路故名
011_0868_c_02L義理禪也然此傳受之法不可一同
011_0868_c_03L宗師欲試眼目或迷蹤盖覆落草說去
011_0868_c_04L根利則不滯其迹卽入格外而悟去
011_0868_c_05L以棒喝示之根鈍則墮落義理而得入
011_0868_c_06L古德云隨言生解則拈花微笑
011_0868_c_07L爲敎迹得之於心則乃至世閒言語
011_0868_c_08L皆爲敎外別傳之旨故知所悟之法體
011_0868_c_09L
本無格外義理之異所以有異
011_0868_c_10L傳授邉立名也卽與死句活句之名
011_0868_c_11L異義同故古德云死句下薦得自救
011_0868_c_12L不了活句下薦得與祖佛爲師禪家龜鑑
作云
011_0868_c_13L句者亦名叅意有語路理路故活句者但叅句也
說話又云無語中有語名死句有語中無語名爲
011_0868_c_14L活句
故習禪者看話時但叅格外
011_0868_c_15L莫入義理也

011_0868_c_16L
格外義理之辨如上所釋未委如來祖
011_0868_c_17L師二禪據何而立名白老云若對上
011_0868_c_18L一一言句了沒巴鼻永脫今本頭
011_0868_c_19L如佛也安祖也安之類此但祖門中
011_0868_c_20L所用之言句故名祖師禪或對中機
011_0868_c_21L所示言句卽權明實了不可辨如佛
011_0868_c_22L也打祖也打而法法全眞之類此亦祖
011_0868_c_23L{底}日本國江田俊雄氏所藏筆寫本

011_0869_a_01L이 또한 조사 문하에서의 일이지만 하나하나의 법마다 온전히 진실하다는 말은 여래가 설한 「만법일심萬法一心」20)이라는 말과 완전히 같다. 그런 까닭에 그것을 폄하하여 여래선이라 한다.’ 21)라고 하였다. 이것은 다만 조사선과 여래선, 이 두 가지 선의 법의 본체가 같지 않음에 따라 구분한 것이지 사람을 기준으로 하여 이름을 붙인 본의를 분명히 말한 것은 아니다.
설두 유형雪竇有炯(1824~1889)은 ‘여래가 깨달은 법이므로 2월 8일 밤에 샛별을 보고 깨달은 것 여래선이라 하며, 여래가 깨닫고 나서 진귀 조사眞歸祖師22)를 찾아가 법을 전해 받았으므로 조사선이라 한다.’ 23)라고 하였다. 설두 노장은 두 가지 선(二禪)을 그 연원에 따라 변별하였으니 스승(백파 긍선)을 넘어선 견해가 있지만 여래선을 석가의 깨달음에만 연원을 두고 조사선의 경우에는 다만 진귀 조사에게 전해 받은 일에 그 연원을 한정하였다. 그러나 이 법은 삼세의 불조에게 통용되는 선이 아니다.

나는 이 두 가지 선의 이름이 언제 비롯하였는지 알지 못하겠으나, 글을 상세히 살펴보면 역시 임제삼구에서 나왔다. 어째서인가? 그 제1구에 대해서는 ‘부처와 조사의 스승이 될 만하다.’ 하고, 제2구에 대해서는 ‘인천의 스승이 될 만하다.’ 하였다. 인천의 스승이 어찌 여래가 아니겠으며, 부처와 조사의 스승이 어찌 조사가 아니겠는가. 제2구의 법에서 깨달으면 견성성불할 뿐이지만, 제1구의 법에서 깨달으면 모든 부처의 스승이 될 수 있으므로 조사라 한 것이다. 진귀를 조사라 칭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이것이 법으로 사람을 명명하고 사람을 기준으로 (선의) 이름을 지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설두 노장의 앞의 말은 사람이 법을 우선한다. 사람이란 여래와 조사이고 법은 선이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법이 사람을 우선한다. 선법에 따라 부처도 되고 조사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의주석依主釋과 의사석依士釋 두 가지 풀이가 다르다.24) 세 부류의 근기에 짝지어 보면 격외에서 깨달았다고 해도 번뇌(頭角)25)가 있는 경우는 여래선의 중근기이고, 해오解悟하였다는 장애마저 없는 경우는 조사선의 상근기이다. 의리선에도 비록 여래와 조사라는 법의 본체가 있기는 하지만 모두 정식에서 깨달아 닦은 것이기 때문에 통틀어 하근기일 뿐이다. 선문禪文에서 ‘교외별전의 일미선一味禪’ 26)이라고 흔히들 말하는데, 그렇다면 교외와 격외가 어떻게 다른가?

011_0869_a_01L門中事以法法全眞之言完同如來所
011_0869_a_02L萬法一心之言故貶之名如來禪
011_0869_a_03L但辨二禪法體之不同的未言約人立
011_0869_a_04L名之本意也雪老云如來所悟之法
011_0869_a_05L二月八夜
星悟道故
名如來禪如來悟道已
011_0869_a_06L訪眞歸祖師所傳得底故名祖師禪
011_0869_a_07L此老則卞得二禪所從之淵源有超師
011_0869_a_08L之見而以如來獨當釋迦祖師但爲
011_0869_a_09L眞歸此法非三世佛祖通用之禪也
011_0869_a_10L則未知二禪之名始自何時以視文
011_0869_a_11L詳之亦自臨濟三句中出來何也
011_0869_a_12L第一句云與佛祖爲師第二句云
011_0869_a_13L天爲師人天師豈不是如來佛祖師
011_0869_a_14L豈非祖師乎盖悟得第二句法則但見
011_0869_a_15L性成佛而已悟得第一句法方爲諸佛
011_0869_a_16L之師故云祖也眞歸之稱祖
亦以此也
此非以法名
011_0869_a_17L人約人立名之有證處乎然則前老所
011_0869_a_18L人勝於法人則如來祖師
法則禪也
愚則法勝於
011_0869_a_19L人也禪能作佛作祖故也
主依士二釋之有異
若配三根雖格
011_0869_a_20L外中悟有頭角者是如來禪中根也
011_0869_a_21L解㝵亦亡則是祖師禪上根也義理禪
011_0869_a_22L雖有如來祖師之法體皆情識上悟
011_0869_a_23L修故捴爲下根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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禪文多云敎外別傳一味禪敎外之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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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파는 세 가지 선(三禪)에서 여래선과 조사선 두 가지 선을 가리켜 교외별전으로 보았다. 백파의 견해로는 교외와 격외가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요지를 밝히고 이치를 의론하는 자취를 교敎로 여기고, 반면 현상(事)과 이치(理)가 원융하게 일치하고 시간과 공간에서 걸림이 없는 시처무애時處無礙,27) 삼세가 곧 일념이요 만법이 일심이라는 등을 교외敎外로 여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원돈교圓頓敎 가운데 육상십현六相十玄28) 이 여래선에 의거하여 삼현三玄이라는 말이 있게 된 것이다. 의 이치에 불과하다. 비록 깨달음과 수행이 곧바로 사라져 성인의 지혜로나 범부의 식識29)으로나 헤아릴 수 있는 경계가 아니더라도, 어찌 교敎의 격식(格) 밖을 뛰어넘을 수 있으랴!
만약 이러한 것을 교외별전의 일미선으로 삼는다면 화엄회상의 보살이란 보살은 모두 법을 전하기에 적합한 근기일 것이니, 어찌 열반회상에 이르러 유독 가섭에게만 법을 부촉하고 나머지 대중은 다 어찌할 줄 몰랐겠는가. 이미 ‘일미’라고 해 놓고서 다시 여래와 조사라는 두 가지 법의 차별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 것인가? 설두 유형 설두파雪竇坡의 후손 은 같고 다름을 변별하여 말하였다. ‘교외와 격외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같은 점은 여래선과 조사선은 원래 교외이고 의리선도 교외라고 부를 수 있다는 점이다. 『간정록』30)에 「심법心法은 문자로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교외라 한다.」라고 하였다. 의리 또한 헤아리고 분별하는 마음이기 때문에 심법이다. 또한 규봉 종밀(圭山)은 「문구를 도로 삼지 말지니, 모름지기 말에 대한 집착을 잊고 뜻을 터득해야 하며 뜻을 얻었다면 그것이 교외전심敎外傳心이다.」31)라고 하였다. 다른 점은 의리만이 격格이고, 여래선과 조사선 두 가지 선은 격외格外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점이다.’ 32) 설두 유형은 ‘교외’를 넓은 명칭으로 ‘격외’는 협소한 명칭으로 사용하고, 또한 설명한 경전 문구는 교敎라 하고 설명한 뜻은 교외敎外라 하였으니, 단지 문자가 교라는 것만 알고, 요지를 밝히고 이치를 의론하는 것이 교라는 점은 오히려 몰랐던 것이다. 인용한 글이 비록 규봉 종밀의 설에 근거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이 선사 규봉 종밀 가 밝힌 것은 의리에 대한 지해知解에 불과할 뿐이니, 의리에서 증득한 것을 선이라고 할 수 있다면 어찌 별전의 선이라 할 수 있겠는가!
또한 화엄종의 교법에서 보면 이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를

011_0869_b_01L格外同別如何白老卽指三禪中
011_0869_b_02L來祖師二禪爲敎外別傳此老則敎外
011_0869_b_03L與格外無別也然則以詮旨義理之迹
011_0869_b_04L爲敎以事理融卽時處無㝵三世一
011_0869_b_05L萬法一心等爲敎外而此不過圓頓
011_0869_b_06L敎中六相十玄依此如來禪
有三玄之言
之理雖悟
011_0869_b_07L修斯亡卽非聖凡識智之所可度量
011_0869_b_08L能超出於敎格之外若以此爲別傳一
011_0869_b_09L味之禪花嚴菩薩皆爲傳法之機
011_0869_b_10L至湼槃會上獨付囑於迦葉餘衆則悉
011_0869_b_11L皆罔措也旣云一味又何有如來祖師
011_0869_b_12L二法之差別耶雪老卽雪竇
坡之孫
卞同別云
011_0869_b_13L外格外或同或異同者如來祖師二禪
011_0869_b_14L元是敎外而義理禪亦名敎外刊正
011_0869_b_15L錄云心法非文字所可擬議故云敎外
011_0869_b_16L義理亦思量心
亦云心法
又圭山云不以文句爲道
011_0869_b_17L須忘詮得意得意則是敎外傳心也
011_0869_b_18L异者唯義理名格二禪獨得格外之名
011_0869_b_19L此老則敎外之名寬格外之名狹又能
011_0869_b_20L詮之文爲敎所詮之旨爲敎外只知文
011_0869_b_21L字爲敎尙迷詮旨義理之爲敎也引文
011_0869_b_22L雖依圭山之說而此師
所明不過義
011_0869_b_23L理之知解可以證於義理之爲禪何足
011_0869_b_24L爲別傳之禪也又以花嚴中理事無㝵

011_0869_c_01L여래선에 짝짓고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를 조사선에 짝짓는다. 이와 같다면 화엄은 여래선과 조사선 두 가지 선을 모두 갖춘 것이니 화엄이 곧 교외가 된다. 그렇다면 어찌 영산회상에서 꽃을 집어 든 일(拈花微笑)을 별전의 표준으로 삼을 수 있겠는가? 일우一愚와 이현二賢의 해석과 크게 어그러진다. 「일우설一愚說」에서는 ‘여래가 화엄시에 설한 것을 임제의 제2구에 짝짓는다.’ 33)라고 하였고, 「이현화二賢話」에서는 제2구를 풀면서 ‘이에서 분별하면 이체理體(理性)는 끝이 없고 차별적 현상(事相)은 밖이 없이 넓음을 깨달아 바른 지각을 갖추어 인천의 스승이 될 만하다.’ 34)라고 하였다. 이 논의에 근거하여 억지로 사법계四法界를 제2구에 짝지으면 이법계는 체구體句, 사법계는 용구用句, 다른 두 무애법계는 중구中句가 된다. 하나의 진실한 법계는 향상向上이다. 또 진정 극문眞淨克文의 송에, ‘다함없는 본성의 바다가 한맛을 머금었으나 이것이 하나의 진실한 법계이다. 그 한맛 또한 침몰시키는 것이 나의 선’ 35)이라 한 구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모두 선문禪文의 법도로 삼기에 부족하다.

내 자세히 살펴보건대, 종사가 종지를 세움에 다름이 있는 까닭은 각자 자기의 종지를 교외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에 근거하면 조사선만이 교외이다. 여래선에도 격외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지만 교설의 자취에서는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 그러한가? 교에는 세 층의 깊이가 있으니, 첫째는 설명하는 수단으로서의 문자, 둘째는 문자 안에서 설명되는 의리를 갖춘 종지, 의리선에도 일부분 이런 뜻이 있다. 셋째는 말이나 생각으로 전혀 통하지 않는 종지이다.
여래선은 능能과 소所가 모두 사라지고 말과 생각이 모두 끊어진 바로 그 소식 이외 그 무엇도 아니다. 문헌으로 증명한다. 『염송설화』에 ‘교외별전이라고 한다면 삼구가 곧바로 사라져도 여전히 옳지 않다.’ 36)라고 하였다. 일우(천책)는 임제의 제1구를 해석하여 ‘교외별전의 종지’라 하였지만37) 제2구에 대해서는 이런 언급이 없다. 순덕 선사順德禪師38)는 ‘일미법계一味法界의 자취조차 떨쳐 버리고 조사가 보인 일심을 드러내야 한다.’ 39)라고 하였다. 청량국사는 ‘원돈교圓頓敎 위에 별도로 하나의 종파가 있다.’ 40)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조사선이 아니고 유독 교외일 뿐이겠는가! 일우와 이현의 해석은 앞에서 인용한 삼현 가운데 체중현體中玄에 대해 삼세가 일념이라든가, 향엄 지한香嚴智閑이 대나무 소리를 듣고 깨달은41) 따위와 같다. 비록 진실로 분별에 딱 들어맞는 법은 하나도 없다(無一法可當情)42)고 이해하더라도

011_0869_c_01L法界配如來禪事事無㝵法界配祖
011_0869_c_02L師禪若爾花嚴皆具二禪華嚴便是
011_0869_c_03L敎外何至靈山拈花枝而爲別傳之標
011_0869_c_04L準也大違一愚二賢之釋一愚說中以如
來說華嚴時
011_0869_c_05L臨濟第二句二賢話作第二句云於此辨得見理性
無邊事相無外具正知覺爲人天師若依此而强配
011_0869_c_06L四法界於第二句理法界卽體句事法界即用
二無碍法界卽中句一眞法界卽向上也

011_0869_c_07L眞淨頌無盡性海含一味卽一眞
法界
一味
011_0869_c_08L [2] 沉是我禪之句何以通之皆未足
011_0869_c_09L爲禪文準繩以愚詳之宗師立宗有异
011_0869_c_10L各以自宗爲敎外據實則唯祖師禪
011_0869_c_11L爲敎外雖如來禪亦得格外之名
011_0869_c_12L未脫敎迹何者敎有三重淺深
011_0869_c_13L詮文字文內所詮義理之旨義理禪亦
有一分在

011_0869_c_14L亡言絕慮之旨今如來禪不過能
011_0869_c_15L所俱亡言思俱絕之消息故也以文證
011_0869_c_16L說話云若是敎外別傳三句斯亡
011_0869_c_17L尙猶不可一愚釋臨濟第一句云是敎
011_0869_c_18L外別傳之宗至第二句中卽無此言
011_0869_c_19L順德禪師云拂一味法界之迹亦現祖
011_0869_c_20L師所示一心淸涼國師云圓頓之上
011_0869_c_21L別有一宗此豈不是祖師禪獨爲敎外
011_0869_c_22L一愚二賢之釋如上引之三玄中
011_0869_c_23L體中玄云三世一念等香嚴聲竹悟道
011_0869_c_24L之類雖無一法可當情之解只是圓敎

011_0870_a_01L단지 원교 가운데 하나의 진실한 법계의 체일 뿐이다. 이것이 어찌 여래선 또한 교내敎內43)에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미 교내에 있건만 어찌하여 격외라 하는가?

격에는 두 종류가 있다. 이것은 옛사람이 나눈 것이 아니다. 하나는 의리의 격이고, 다른 하나는 교의 격이다. 그것은 원교 가운데 육상십현의 이치이다. 비록 인과의 일정한 방식과 완성된 격칙格則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더라도 본래 정식으로 사량하여 알 수 있는 경계가 아니며, 의미로 통할 길도 없고 이치로 이해할 길도 없기 때문에 격외라 한다. 여래선이 이미 교의 자취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면 별전에 합치하지 않으니 조사가 어찌 그것을 가져다 활용함으로써 선기禪機를 그때마다 적절하게 대하겠는가! 그러한 까닭에 삼십삼조사가 모두 삼장三藏을 겸한 것이다. 이 원돈의 이치는 비록 조사 문하에서의 별전의 정종正宗은 아니지만 교승敎乘 가운데서는 가장 궁극의 이치이다. 이 원만한 기틀을 끌어와 선종에로 들어갈 수 있으므로 가져와 쓰는 것이다. 이미 조사 문하의 법이라 하였으므로 교라는 이름을 바꾸어 선이라 하고 그것을 폄하하여 여래선이라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선에서 깨달으면 인천의 조사가 될 수 있을 뿐 불조의 스승은 되지 못한다.
옛사람44)이 ‘분별을 잊고 이치에 들어맞는 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교敎에 의지하여 이치에 들어맞는 것’이라 한 말은 여래선을 가리킨다. ‘둘째는 선禪에 의지하여 이치에 들어맞는 것’이라 한 말은 조사선을 가리킨다. 『염송설화』에서도 ‘교가敎家에서는 사사무애를 설하고 선가禪家에서는 사사무애를 실행한다.’ 45)라고 하였다. 따라서 선문禪文에서 ‘교에 입각하여 종지를 밝힌 것은 여래선이고, 교를 뿌리 뽑고 종지를 밝힌 것은 조사선’ 46)이라 한 말을 알 수 있다. 이와 같다면 여래선으로는 교에 의지하여 종지를 밝혀 의리로 들어갈 수 있지만, 조사선은 교를 벗어나 별도의 방법으로 전하는데(敎外別傳) 어떻게 의리로 들어갈 수 있겠는가? 앞에서 말하지 않았는가! 종사가 노파심에서 자신의 온몸에 진흙과 물을 묻히는 것도 감수하며 갖가지 방편을 쓸 경우에 근기가 대단히 영리한 자에게는 원돈법조차 쓰지 않고 곧장 삼요인三要印을 가지고 이 말 저 말로 어떻게 말하더라도 언어 문자가 지나치게 많은 지경이 되므로 별전의 종지가 도리어 의리 가운데 떨어지고 만다.

011_0870_a_01L中一眞法界之體此豈不是如來禪亦
011_0870_a_02L在敎內乎旣在敎內何云格外盖格
011_0870_a_03L有二種此古人之
不分者
義理之格敎格
011_0870_a_04L彼圓敎中六相十玄之理雖未脫亡因
011_0870_a_05L果之䂓模完成格則元非情識之所思
011_0870_a_06L量境絕義路沒理路故亦名格外也
011_0870_a_07L如來禪旣未脫敎迹未入別傳祖師何
011_0870_a_08L取用之以對禪機耶所以然者卅三
011_0870_a_09L諸祖皆兼三藏這圓頓之理雖未爲
011_0870_a_10L祖門中別傳之正宗是敎乘中最極之
011_0870_a_11L引彼圓機可進入於禪宗故亦取
011_0870_a_12L而用之旣爲祖門中法故轉敎爲禪
011_0870_a_13L貶之名如來禪故悟此禪者只得爲人
011_0870_a_14L天師未爲佛祖師故古德云忘情契
011_0870_a_15L理有二依敎契理此指如來禪
011_0870_a_16L依禪契理卽指祖師禪也說話又云
011_0870_a_17L敎說事事無碍禪行事事無碍故知禪
011_0870_a_18L文中卽敎明宗者是如來禪撥敎明
011_0870_a_19L宗者是祖師禪也若爾如來禪依敎
011_0870_a_20L明宗或可入於義理中祖師禪則是敎
011_0870_a_21L外別傳亦何入於義理耶前不云乎
011_0870_a_22L宗師以老婆心拖泥帶水時根亦有稍
011_0870_a_23L利者不用圓頓法直將三要印指東
011_0870_a_24L畫西葛藤太多故別傳之旨還墮義

011_0870_b_01L
그러므로 종사가 종지를 세우고 법을 보이는 방편과 학인이 법을 얻고 깨달음에는 각기 여러 종류가 있다. 종사의 경우에는 의리와 격외라는 각각의 종지에 모두 통달하여 법의 본체를 제기하거나 여래와 조사를 각각 겸하여 (펼치는 방편이) 하나에 한정되지 않는다. 학인의 경우에는 의리를 따라 점차로 격외로 들어가는데, 혹은 의리를 빌리지 않고 곧바로 격외로 들어가거나, 혹은 의리에 막혀 격외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깨달은 법의 본체가 또한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사선을 깨달은 자는 여래선도 알지만, 여래선을 깨달은 자가 반드시 조사선을 아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염송설화』에서 2조를 찬탄하여 ‘만약 중ㆍ하 근기의 부류였다면 이 경계 여래선을 가리킨다. 마치 양 무제가 교가의 궁극을 담은 깊은 도리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조사의 뜻을 알지 못했던 것과 같은 예이다. 에 눌러앉아 곧 본분사를 마쳤다고 여겼을 것이다.’ 47)라고 하였다.

선이 심법心法인 이상 종사가 법을 드러냄에 설령 범부의 번뇌 경계에 떨어져 일러 주는 방법(落草之談)을 시설하여 한갓 한 구절의 게를 남겼다 하더라도 이것은 원래 교승의 서책이나 의리義理의 참의參意48)는 아니다. 교학에서 경전을 읽고 뜻을 취하는 것과 비교하여 그 특징이 어떻게 다른가? 여기에는 같은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다. 같은 점은 예로부터 종사가 교가의 글을 읽고 도를 깨달은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종밀이 ‘한 두루마리 책에서 이치의 하늘이 환히 밝아졌다.’ 49)라고 한 예가 그것이다. 다른 점은 대강대강 실속 없이 배우는 무리들이 단지 글귀에 매달려 글줄이나 쫓는 것을 귀하게 여길 뿐 ‘이것은 무슨 도리일까?’라고 궁구해야 할 그 문제는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는 측면이다. 그런 까닭에 선과 교(禪講)50)에 다름이 있게 된 것이니 설령 교가의 전적을 읽고 터득한 부분이 있다 해도 그것은 단지 여래선의 소식일 뿐이다. 교와 별도의 방법으로 전하는 종지가 어찌 온갖 유형의 교법 안에 있겠는가? 『염송설화』에서 말하였다. ‘선이란 무엇인가? 규봉은 「온전한 음사어는 선나禪那(ⓢ dhyāna)이고, 한역하면 사유수思惟修 또는 정려靜慮라고도 하는데, 이는 모두 정定과 혜慧를 통칭한 말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선문염송』을 가리킨다. 말하는 선禪으로 보자면 교외별전의 일미선一味禪이다.’ 51) 그렇다면 여래선과 조사선의 차이는 무엇인가? 여러 조사들이 모두 이에 근거하여 비판하기를 ‘교외가 격외라면 교외 가운데 또한 여래선과 조사선이라는 두 가지 선이 있는 것’ 52)이라고 하였다.

011_0870_b_01L理中也故宗師之立宗示法學人之得
011_0870_b_02L法悟入各有多種宗師則有義理格外
011_0870_b_03L之各宗俱通者所擧法體亦有如來祖
011_0870_b_04L師之各兼不一學人則有從義理而漸
011_0870_b_05L入格外或不假義理直入格外或滯
011_0870_b_06L在義理不進格外者所悟法體亦然
011_0870_b_07L不同然悟祖師禪者亦知如來禪
011_0870_b_08L悟如來禪者未必知祖師禪故說話讃
011_0870_b_09L二祖云其如中下之流於此指如來禪也
如梁帝已知
011_0870_b_10L敎家極妙窮玄
會得祖師意之類
坐着便以爲能事已畢
011_0870_b_11L禪旣心法宗師示法設有落艸
011_0870_b_12L留句偈則元非敎乘之簡牘而其義理
011_0870_b_13L之叅意與敎學之看經取意其相何如
011_0870_b_14L此則或同或异同者古來宗師多有
011_0870_b_15L閱敎悟道者如圭山云一軸之中
011_0870_b_16L天朗曜者是也異者汎學輩只貴循行
011_0870_b_17L數墨捴不管他是甚道理所以禪講
011_0870_b_18L有异設或閱敎有得處只是如來禪
011_0870_b_19L消息已耳別傳之旨何在敎乘之內耶
011_0870_b_20L或曰說話云禪者圭峯云具云禪那
011_0870_b_21L此云思惟修亦云靜慮斯皆定慧之通
011_0870_b_22L稱也當此指拈
看則敎外別傳一味禪也
011_0870_b_23L且如來禪祖師禪同別如何諸師皆依
011_0870_b_24L此判云敎外卽格外敎外中又有如來

011_0870_c_01L
그대들은 바로 이전의 이 문구를 어떻게 보는가? 이상과 같은 판단은 응당 다음과 같은 뜻일 것이다. ‘처음에서부터 「정定과 혜慧를 통칭한 말이다.」라는 대목까지는 여래선을 끌어들였고, 「여기서 말하는」 이하에서는 조사선을 가리켰으며, 「그렇다면」 이하에서는 같고 다른 점을 변별한 것이다.’ 설두 유형은 이렇게 푼다. ‘처음에서부터 「정定과 혜慧를 통칭한 말이다.」라는 대목까지는 의리선에 배대하고, 「여기서 말하는」 이하는 격외선에 배대한다.’ 53) 이보다 앞에서는 고총림의 말로서 법을 기준으로 의리선과 격외선이라 이름을 붙인 것이고, 「그렇다면」 이하는 또한 위의 격외선에서 두 가지 선으로 나누는 방식이니 이것은 사람을 기준으로 이름 붙인 것이다.
경전에 ‘세존께서는 샛별을 보고 깨닫고 나서 마갈타국에서 문을 닫아걸고 사유하며 인연에 따라 수행하여 이레 동안 스스로 법락을 누렸다.’ 54) 사유수를 증득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대주 혜해大珠慧海는 ‘무릇 선사라면 그 핵심을 뽑아내어 곧바로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야 하니, 선의 고요한 경계에 안주해 보지 않았다면 이 문제를 당면하고 누구나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다.’ 55) 정려를 증득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또한 『염송설화』에서는 『대반열반경』을 인용하여 ‘성문은 정定이 많고 혜慧가 부족하여 불성을 알지 못하고, 보살은 혜가 많고 정이 부족하여 불성을 알지 못하지만, 여래만은 정과 혜를 평등하게 구현하여 불성을 분명히 깨달았다.’ 56) 정과 혜를 증득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런 까닭에 우리나라 보조국사는 『정혜결사문』을 지었던 것이다. 이로써 알라! 정과 혜라는 두 수행 조목을 어찌 의리선에만 한정할 수 있겠는가. 설령 의리선이라 해도 의리 가운데의 여래선인 것이다. 『소쇄선정록掃灑先庭錄(선문증정록禪門證正錄)』에서는 ‘처음에서부터 규봉 종밀이 일미선이라 한 말까지는 고총림에서 법을 기준으로 의리선과 격외선이라 이름 붙인 것을 가리키고, 여래 운운한 그 이하는 옛사람이 사람을 기준으로 여래선과 조사선이라 이름 붙인 것을 가리킨다.’ 57)라고 하였다. 법과 사람을 기준으로 하였기 때문에 이름을 붙임에는 다름이 있지만 그 실질은 같다. 조사선만 격외로 여기고 여래선은 여전히 의리로 간주한다. 다만 조사선과 여래선 두 가지 선을 세우고 격외와 의리에 배대할 경우 어긋나고 국한된 점이 있기 때문에 설두 유형에게 논파당한 것이다. 이와 같이 보아야 법규(文法)가 타당하다.

또한 백파 긍선은 여래선과 조사선 두 가지 선을 여래의 삼처전심三處傳心에 나누어 짝지어 ‘자리를 나누어 앉은 것(分半座)은 여래선이고, 꽃을 들어 보인 것(擧拈花)은 조사선이며, 관 밖으로 두 발을 내어 보인 것(槨示雙趺)은 두 선을 나란히 보인 것이다. 이것은 구곡 각운龜谷覺雲의 생각이다.’ 58)라고 하였는데, 『염송설화』에서는 삼처전심을 다만 살인도와 활인검에 짝짓기는 하였지만 여래선이나 조사선을 말하지는 않았다.59) 달마의 삼처전심을 이미 여래선과 조사선 두 가지 선에 배대하였기 때문에

011_0870_c_01L祖師二禪也子何看得此文敢判如斯
011_0870_c_02L卽應之曰從初至通稱引如來禪
011_0870_c_03L此下指祖師禪且如下合卞同別
011_0870_c_04L雪云從初至通稱配義理禪當此下配格外禪
古叢林所言約法名義理禪格外禪且如下又上
011_0870_c_05L格外中分二禪
此約人名者也
經云世尊因見明星悟道
011_0870_c_06L於摩竭陁國掩關思惟因行緣行
011_0870_c_07L如是七日自受法樂證思惟
修也
大珠云
011_0870_c_08L禪師者撮其樞要直了心源若不安
011_0870_c_09L禪靜慮到這裡捴須茫然證靜
又說話
011_0870_c_10L引湼槃云聲聞定多慧少不見佛性
011_0870_c_11L菩薩慧多定少不見佛性唯如來
011_0870_c_12L慧等學明見佛性證定
故我國普照國
011_0870_c_13L集定慧結社文是知定慧之學
011_0870_c_14L獨爲義理禪也設爲義理禪是義理中
011_0870_c_15L如來禪也先庭錄則從初圭山云云至一味禪
古叢林所言約法名義理禪格外禪
011_0870_c_16L且如來云云下古所言約人名如來禪祖師禪也
但約法約人立名有异其實同也唯祖師禪爲格外
011_0870_c_17L如來禪猶爲義理但立二種禪其格外義
理之配有所違局故爲雪翁之所破也
如此看
011_0870_c_18L文法甚便也

011_0870_c_19L
又白老將如來祖師二禪分配如來三
011_0870_c_20L處傳心云分半座如來禪擧拈花
011_0870_c_21L師禪槨示雙趺二禪齊示此是龜谷
011_0870_c_22L老之意說話作三處傳心中雖但配殺
011_0870_c_23L人刀活人釰不云如來禪祖師禪作達
011_0870_c_24L摩三處傳心旣配如來祖師二禪故爲

011_0871_a_01L똑같이 나열하여 배대한 것이다. 『염송설화』에서는 이미 삼처전심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가리켜 ‘체體ㆍ용用ㆍ중中이라는 삼구의 틀에 배대하는 자가 있는데 나는 그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삼구는 본보기가 되는 법도이다. 교외별전이라고 한다면 삼구가 곧바로 사라져도 향상 여전히 옳지 않거늘, 하물며 본보기가 되는 법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야 말할 여지가 있겠는가!’ 60)라고 하였다. 이 체ㆍ용ㆍ중이라는 말이 어찌 임제의 제2구의 소식이 아니겠는가. 또한 일우는 임제 제1구에 대해 ‘세존이 가섭에게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한 것을 첫머리의 표지로 한 까닭은 제1구이기 때문이다. 이 공안으로 교외별전의 종지를 세우기 위해서였다.’ 61)라고 하였다.
이에 따르면 삼처가 모두 제1구 가운데 있다. 그렇다면 분반좌分半座(分座)는 살인도로서 제1구 가운데 대기大機를 가리켜 말한 것이고, 염화拈花는 활인검으로서 대용大用을 가리켜 말한 것이며, 곽시쌍부槨示雙趺(示趺)는 기용機用을 아울러 제시한 것 묵암 최눌默庵最訥(1717~1790)도 「화엄품목」에서 이와 같이 배대하였다. 고래로 이미 이런 본본기가 되는 분류의 틀이 있었다. 이 된다. 어떻게 그런 줄 알 수 있는가. 백장이 마조를 다시 찾아갔던 인연을 소재로 한 공안(再參話)의 『염송설화』에서 ‘백장은 대기를 얻었고, 황벽은 대용을 얻었다. 이렇게 결정적인 전기가 되는 순간을 맞아서는 옛사람도 그저 「사람을 죽이는 칼(殺人刀)이요 사람을 살리는 검(活人劒)이다.」라고 말했을 뿐이다.’ 62)라고 하였다. 임제가 서로 다르게 대응한 세 학인 모두를 때렸던 인연을 소재로 한 공안(揖坐話)의 『염송설화』에서는 ‘제2구에 이르면 수많은 소식이 있겠지만, 제1구를 기준으로 하면 다만 사람을 죽이는 칼과 사람을 살리는 검만 있을 뿐이다.’ 63)라고 하였다. ‘고불古佛이 노주露柱와 몸을 섞었는데, 이는 몇 번째 기틀인가?’라고 제기하고 스스로 답한 운문의 공안(古佛話)을 다룬 『염송설화』에서는 ‘제1기에서 들어 보이면 사람을 죽이는 칼과 사람을 살리는 검에 대해서만 말할 뿐이다. 어쩔 수 없이 제2기에서 시설하면 격格이 정해진 법도를 완성하니, 예컨대 체ㆍ용ㆍ중 삼구와 같다.’ 64)라고 하였다. 이 살활의 방법이 어찌 기용의 다른 이름이 아니겠는가. 그런즉 살인도와 활인검에서 도刀와 검劔 두 글자는 단單과 겸兼을 비유한 것이다. 도刀는 사람을 죽이기만 하지만 검劔은 살리기도 죽이기도 하므로 체에는 불변의 체가 있고 용에는 체가 없는 수연이 없음을 비유한 것이다. 용은 반드시 체를 겸하므로 도刀와 검劔으로써 그 살殺과 활活을 나눈 것이다. 설두 유형은 ‘제1구에서 밝힌 살과 활은 다만 기機와 용用일 뿐이며, 저 삼처전심에서의 살과 활이 아니다.’ 65)라고 하였다. 이에 살과 활을 두 짝으로 세웠으나 『염송설화』 한 책에는 이미 살과 활은 없고, 여래선과 조사선 두 가지 선에 분명히 짝지었으니 어찌 이것의 살과 활이 삼처에서의 살과 활이 아님을 결정지은 것인 줄 알겠는가. 만약 도刀와 검劔의 살과 활을 말한다면 그 체는 자연히 다르다. 검劔의 살과 활은 단지 하나의 종파에서 쓰는 방식일 뿐, 살도 검劔이요 활도 검劔이다. 어찌 양민을 억눌러 천민을 만드는 것66)을 도刀라 하겠는가. 두 가지 선이 서로 뒤섞여 잘못된 것이다.

011_0871_a_01L同例配之說話旣斥謬解云有以體用
011_0871_a_02L中三句配之者余以爲不可三句是䂓
011_0871_a_03L若是敎外別傳三句斯亡
尙猶不
011_0871_a_04L而况未離䂓模者哉此體用中之言
011_0871_a_05L豈非臨濟第二句中消息耶又一愚作
011_0871_a_06L臨濟第一句云是世尊迦葉三處傳
011_0871_a_07L所以首標爲第一
句故
此介公案以立敎
011_0871_a_08L外別傳之宗也據此三處皆在第一句
011_0871_a_09L中也然則分座殺人刀指第一句中大
011_0871_a_10L機而言也拈花活人釰指大用而言也
011_0871_a_11L示趺機用齊示默庵品目亦如是配
古來已有牓樣也
安知
011_0871_a_12L其然再參話云百丈得大機黃蘗
011_0871_a_13L得大用到這時節古人只道得箇殺人
011_0871_a_14L刀活人釰揖坐話云至第二句有許
011_0871_a_15L多消息若約第一句則但殺人刀活人
011_0871_a_16L釰而已古佛話云直向第一機提持
011_0871_a_17L則只道得箇殺人刀活人釰不得已
011_0871_a_18L第二機施設則完成格則如體用中三
011_0871_a_19L句也此之殺活豈不是特機用之異名
011_0871_a_20L然則刀釼二字喩其單兼刀但殺人釼亦殺亦
活故喩體有不變之體用無無體之隨緣用必
011_0871_a_21L兼體故以刀釼分其殺活也雪翁云此第一句中
所明殺活特機用而已非彼三處傳心之殺活乃立
011_0871_a_22L兩重殺活而說話一部旣無殺活的配如來祖師二
安知此之殺活決非三處之殺活耶若如所言
011_0871_a_23L刀釼之殺活其體自异釼中殺活只是一家之用
亦釼活亦釼也豈可壓良爲賤刀也有二禪相濫之

011_0871_b_01L
일우는 삼처를 모두 제1구에 짝지었고 『염송설화』에서는 살과 활에 짝지었지만 결국은 서로 일치한다. 어째서 살과 활을 가지고 여래선ㆍ조사선이라 한 것인가. 삼처를 두 가지 선에 나누어 짝지으면 타당하지 않은 점이 많다. 일우는 제2구를 여래가 화엄시에 설한 것에 짝지었고, 세존이 샛별을 보고 도를 깨닫고 나서 여래선 이레 동안 사유하며 스스로 법락을 누렸는데, 이 법을 적멸도량에서 근기가 성숙한 보살에게 전했다고 하였다.67) 화엄을 연설한 것은 모두 법계를 깨닫게 한 것이다. 이미 전수를 마쳤고 화엄회상에서 이승회二乘會가 있었으니 가섭 또한 이미 법계를 증득한 상태이다. 삼처에서 또 가섭에게 전하였다면 어찌 교외별전의 도이겠는가. 다만 중첩된 설일 뿐이다.

기機와 용用을 살과 활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바꾸어 두 가지 선에 나누어 짝짓는다 하더라도 두 가지 선이 어찌 오로지 죽이기만 하거나 오로지 살리기만 하는 것이겠는가. 조사선이 활活이고 용用이라 한다면 무슨 까닭에 제1구에 살과 활, 기와 용 등 삼요三要라는 이름을 모두 갖추었다고 하는가. 여래선이 살殺이고 기機라 한다면 무슨 까닭에 제2구에 체와 용, 권權과 실實 등 삼현三玄의 이름을 모두 갖추었다고 하는가. 용과 권 일우는 권과 실을 헤아려 말하기를 ‘권교와 실교이니 제2구가 교종(敎內)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68)라고 하였다.이 어찌 활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삼성장三聖章」에서는 삼현을 삼요로 풀면서 함께 나열하여 짝지었으니69) 여래선이 오로지 죽이기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제2구는 방편(權) 그대로 진실(實)을 밝힌다고 하고서 그 방편을 버리고 그 진실만을 오로지 취하고, 제1구에 사조용四照用이 있다고 하고서 그 다름을 버리고 동시同時를 오로지 취하였다. 한 번은 살을 세웠다가 한 번은 활을 세우니 어찌 이름을 세움이 이렇듯 가지런하지 않은 것인가. 백파는 매번 『선문수경』에서 허공, 일물 등의 조목을 여래선에 짝지었다.70) 만약 그렇다면 무슨 까닭에 대혜는 세 근기를 삼인三印에 짝지을 때 허공을 조사선에, 물을 여래선에 짝지은 것인가.71) 차라리 모르는 게 낫다.
그런 까닭에 기와 용 그리고 체와 용이 이름만 조금 다르고 본체는 실제로 같으니 모두 일심상에서의 변하지 않는 측면(不變)과 인연에 따라 움직이는 측면(隨緣)72)이라는 뜻임을 알아야 한다.

011_0871_b_01L
一愚之以三處捴配第一句說話
011_0871_b_02L之配殺活極爲相符何將殺活爲如
011_0871_b_03L來祖師二禪也若以三處分配二禪
011_0871_b_04L則有多未便一愚作第二句中亦配
011_0871_b_05L如來說花嚴時世尊因見明星悟道已
011_0871_b_06L卽如
來禪
七日思惟自受法樂爲傳此法
011_0871_b_07L於寂滅場中與根熟菩薩演說花嚴
011_0871_b_08L皆令證入法界已傳授了也華嚴末會
二乘會迦葉亦已證法界也

011_0871_b_09L三處中又傳於迦葉則豈爲敎外別傳
011_0871_b_10L之道自是重疊之說已耳若將機用異
011_0871_b_11L名之殺活分配二禪二禪豈是單殺
011_0871_b_12L單活耶若道祖師禪是活是用則何
011_0871_b_13L以第一句中具有殺活機用等三要之
011_0871_b_14L如來禪是殺是機則何以第二句中
011_0871_b_15L具有體用權實等三玄之名用之與權
011_0871_b_16L一愚計權實云乃權實敎
明知第二句是敎內也
豈不是活底故三
011_0871_b_17L聖章中釋三玄以三要同例配之
011_0871_b_18L可以如來禪爲單殺也若云第二句卽
011_0871_b_19L權明實捨其權而單取其實第一句
011_0871_b_20L有四照用而捨其不同單取同時
011_0871_b_21L一立殺一立活何立名之不齊乎白老每
於禪文
011_0871_b_22L空天一物等事便配如來禪若然者何以大慧
以三根配三印時以空配祖師禪以水配如來禪乎

011_0871_b_23L乍可不知故知機用軆用名但小異
011_0871_b_24L軆則實同皆一心上不變隨緣之義

011_0871_c_01L다만 여래선은 일심의 자취에서 벗어나지 못해 교의 틀(敎格)에 막히기 때문에 교에 근거하여 체와 용 등의 이름을 세우는 것이다. 조사선에서는 곧바로 존귀를 초월하고 잡고서 분별할 수단을 전혀 남기지 않기 때문에 교를 벗어난(敎外) 수단으로써 기와 용 그리고 살과 활 등의 이름을 세우는 것이다. 그 깨달은 법의 본체에서는 여래와 조사가 모두 일심이다. 여래선의 경우에는 다만 변하지 않는 체는 있지만 인연을 따르는 용은 없다. 이 마음을 깨달은 자가 어찌 인천의 스승이 될 수 있으리오. 부처와 조사가 마음 전하기를 병을 기울여 다른 병에 물을 고스란히 옮겨 붓듯이,73) 달마가 세 번에 걸쳐 마음을 전한 일을 예로 삼아 세존의 삼처전심에 똑같이 짝짓는데, 어찌 달마에게만 유독 세 곳에서 전한 예가 있고 다른 조사들에게는 삼처에서 전했다는 말이 전혀 없단 말인가. 그 전한 법은 같지만 전한 곳이 같지 않을 뿐이다.
세존은 화엄회상에서 열등한 근기에게 증득한 여래선 그대로의 법을 이미 설하였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상근기에게 삼처에서 살과 활 그리고 기와 용의 법을 별도로 전한 것이다. 달마는 2조가 본래 교의 기틀(敎機)인 까닭에 처음에 ‘모든 대상이 끊어져 버렸는가?’라 묻고 여래선을 전하였다.74) 그다음에 (2조가) 모든 부처님의 법인에 대하여 묻자 조사선을 전하였다.75) 마지막에는 예를 갖추어 삼배를 함에 ‘나의 골수를 얻었다.’고 허여하고는 이내 가사를 전하고 법을 부촉하였다.76) 달마가 전한 것은 부처와는 다르다. 어찌 ‘삼처’라는 동일함을 가지고 아울러 이선二禪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함부로 천착해서는 안 될 것이다.

어찌 변석卞釋할 여지를 남겨 두겠는가마는, 백파 긍선白坡亙璇이 선문의 수경을 모아 『선문수경』을 만들고, 중부자中孚子 초의 의순草衣意恂이 『사변만어』를 지었으며, 우담 홍기優曇洪基 선사가 『소쇄선정록(선문증정록)』을 기술하고, 설두 유형雪竇有炯 노한이 『선원소류』를 기술하여 각각이 그 훌륭함을 다하였으니 다시 덧붙이지 않겠다. 다만 몇몇 의심스러운 대목을 가려내 결정짓고 네 분의 뒤를 이었을 뿐이다. 자신을 존중하고 현인을 질투하거나, 보이는 대로 함부로 근거도 없이 지어내지 않았으니77) 법은 응당 이와 같아야 한다. 옛 가르침에만 오로지 마음을 쏟는다면 모순을 면치 못하리니 달통한 사람이 그 마땅한가 여부를 따져 보기를 바란다.

011_0871_c_01L由如來禪則未脫一心之迹滯在敎格
011_0871_c_02L依敎而立軆用等名祖師禪則直超
011_0871_c_03L尊貴了沒巴鼻故以敎外機用殺活等
011_0871_c_04L立名也其所悟法軆如來祖師皆是
011_0871_c_05L一心若如來禪但有不變之体無隨
011_0871_c_06L緣之用悟此心者烏得爲人天師也
011_0871_c_07L若佛祖傳心如瓶注瓶以達摩三處之
011_0871_c_08L作爲例同配於世尊之三處何以達摩
011_0871_c_09L獨有三處之傳諸祖㪅無三處之言
011_0871_c_10L所傳之法同也傳處不可一同也世尊
011_0871_c_11L於華嚴會上爲劣機已說如證如來

011_0871_c_12L法故於末後爲上根三處別傳殺活機
011_0871_c_13L用之法也達摩則二祖本是敎機故
011_0871_c_14L問諸緣已斷傳如來禪次因諸佛法印
011_0871_c_15L之問傳祖師禪末後因禮三拜許得
011_0871_c_16L吾髓乃傳衣付法達摩所傳則與佛
011_0871_c_17L豈以三處之同共作二禪耶不可
011_0871_c_18L胡亂穿鑿也其餘卞釋白老集禪文手
011_0871_c_19L中孚子著四辨漫語優曇師述掃洒
011_0871_c_20L先庭錄雪竇老述禪源㴑流各盡其美
011_0871_c_21L不可復贅只摭數疑處決之續諸四家
011_0871_c_22L之後然非尊己嫉賢隨見杜撰法應
011_0871_c_23L如是專門舊學不免矛盾唯通人
011_0871_c_24L其當否也
  1. 1)담선談禪은 선에 관한 담론을 말한다. 『事物紀原』 「道釋科敎部」, “ 『보림전』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 때 가섭에게 「나의 청정한 법복法服을 그대에게 전한다.」라고 말씀하셨다. 가섭이 아난에게 그것을 전하고 28대가 되어 달마에까지 이르렀다. 양나라 보통 연간(520~527)에 달마는 남천축으로부터 바다를 건너 중국 광주에 이르렀고, 후에 숭산 소림사로 가서 머물던 중 혜가에게 법을 전하였다. 중국의 담선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談禪:寶林曰, ‘佛涅槃時, 造迦葉曰, 「吾淸淨法服以付汝.」 迦葉傳阿難, 二十八代, 至達磨. 梁普通中, 自南天竺泛海, 至廣州, 後止崇山, 住少林寺, 傳惠可. 中國談禪, 自此始也.)”
  2. 2)두 짝으로~같지 않다 : 백파 긍선白坡亙璇(1767~1852)은 이러한 구분에 동의하지 않는 입장이고, 반면 초의 의순草衣意恂(1786~1866)은 동의하는 입장이다. 『禪文手鏡』 「義理禪格外禪辨」(H10, 519b1), “예로부터 일반적으로 ‘법을 기준으로는 의리선ㆍ격외선으로 나누고, 사람을 기준으로는 여래선ㆍ조사선으로 나눈다.’ 그렇다면 의리선은 여래선이 되고 격외선은 조사선이 된다. 이미 세존이 다자탑 앞에서 가섭에게 자리를 나누어 준(分座) 여래선을 의리선이라 한 이상 어찌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한(三處傳心) 일을 모두 격외라 할 수 있겠는가! 이런 논리대로라면 의리선은 격외라는 외람된 이름을 얻게 되거나, 여래선은 도리어 의리라는 누명累名을 얻게 되고 마니 그런 이치란 있지 않다.(古來通談曰, ‘約法名義理禪格外禪, 約人名如來禪祖師禪.’ 此則義理禪卽如來禪, 格外禪卽祖師禪也. 旣以分座如來禪, 亦名義理禪, 何云三處皆是格外耶! 且義理禪得格外之濫名, 如來禪還得義理之累名, 理自不然.)”;『禪門四辨漫語』 「格外義理辨」(H10, 827c15), “옛날에는 단지 ‘격외’라는 말만 있었지 ‘격외선’이라는 명칭은 없었고, ‘의리’라는 말만 있었지 ‘의리선’이라는 명칭은 없었다. 중고中古 시대 종사들이 배우는 이들을 깨우치려고 비로소 ‘말에 의한 가르침에 따르지 않고 마음으로 마음을 전하는 것을 조사선이라 한다.’라고 했던 것이다. 이러한 전수 방법은 교敎의 격식(格) 밖으로 멀리 벗어나므로 격외선이라 해도 된다. 말을 꺼내 뜻(義)을 설명하거나 말에 의지해서 도리(理)를 깨닫는 것을 여래선이라 한다. 이것은 말에 의한 교설(言敎)이나 뜻과 도리(義理)로 말미암아 깨닫기 때문에 의리선이라 해도 된다. 이것이 바로 격외선과 의리선이라는 명칭을 세우게 된 유래이다. 그러므로 전수하는 사람을 기준으로 해서는 여래선과 조사선이라는 이름으로 분류하고, 전수하는 법을 기준으로 해서는 의리선과 격외선이라는 이름으로 분류한다. 이것이 전통적으로 총림叢林에서 전래된 일반적인 설이며 그 뜻과 도리로 보아도 온당하여 아무 결함이 없다.(古者, 但有格外之言, 未有格外禪之名;但有義理之言, 未有義理禪之名. 中古師家欲曉學者, 而始言之曰, ‘凡不由言敎, 以心傳心, 謂之祖師禪.’ 此之傳受, 逈出敎格之外, 亦可名格外禪. 凡開言而說義, 因言而證理, 謂之如來禪. 是由言敎義理而悟入, 亦可名義理禪. 此格外禪義理禪之所以立名之始也. 故約人名如來禪祖師禪, 約法名義理禪格外禪. 此乃古叢林傳來之通談, 其於義理, 穩涉無欠.)” 백파 긍선, 신규탁 옮김, 『선문수경』, p.68, 초의 의순, 김영욱 옮김, 『선문사변만어』, pp.137~138 참조.
  3. 3)백파는 조사선ㆍ여래선ㆍ의리선을 삼선三禪으로 규정하였다. 『禪文手鏡』 「義理禪三句頌」(H10, 515c7), 같은 책 「義理禪格外禪辨」(H10, 519c8) 참조.
  4. 4)『臨濟語錄』(T47, 501c25), “ ‘도를 배우는 이들이여, 진불眞佛은 형상이 없고, 진도眞道는 일정한 격식이 없으며, 진법眞法은 바탕이 되는 모양이 없다. 이 세 법은 혼융되어 한곳에 화합하여 있어 분별해도 구분할 수 없으니 아득하여 종잡을 수 없는 업식을 가진 중생이라 부른다.’ ‘진불ㆍ진법ㆍ진도란 어떤 것입니까? 가르쳐 주십시오.’ ‘불佛이란 마음이 청정한 것이요, 법法이란 마음의 광명이요, 도道란 어느 곳에서나 장애가 없는 청정한 광명이니, 세 가지가 하나이며 모두 헛된 이름일 뿐 참으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참되고 바르게 도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한 생각하는 찰나마다 마음에 틈이 생기거나 끊어짐이 없을 것이다. 달마 대사가 인도에서 온 이래로 단지 남의 말에 유혹되지 않는 사람만을 찾았을 뿐이다. 후에 2조를 만났는데 2조가 한마디 말에 깨닫고는 이전까지 쓸데없는 공부를 하였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산승이 지금 보인 견처見處는 불조祖佛와 다르지 않다. 제1구에서 터득하면 불조의 스승이 될 만하고, 제2구에서 터득하면 인천의 스승이 될 만하며, 제3구에서 깨달으면 자기 자신도 구제하지 못한다.’(‘道流, 眞佛無形, 眞道無體, 眞法無相. 三法混融, 和合一處, 辨旣不得. 喚作忙忙業識衆生.’ 問, ‘如何是眞佛眞法眞道? 乞垂開示.’ 師云, ‘佛者, 心淸淨是;法者, 心光明是;道者, 處處無礙淨光是, 三卽一, 皆是空名而無寔有. 如眞正學道人, 念念心不間斷. 自達磨大師從西土來, 秖是覓箇不受人惑底人. 後遇二祖, 一言便了, 始知從前虛用功夫. 山僧今日見處, 與祖佛不別. 若第一句中得, 與祖佛爲師;若第二句中得, 與人天爲師;若第三句中得, 自救不了.’)”
  5. 5)『禪文手鏡』 「向下新熏三禪 此是蘊揔三句」(H10, 515b12), “若第一句薦得, 堪與佛祖爲師 祖師禪 ;第二句薦得, 堪與人天爲師 如來禪 ;第三句薦得, 自救不了 義理禪 .”
  6. 6)사람을 기준으로~범한 것인가 : 백파가 조사선ㆍ여래선ㆍ의리선의 셋으로 구분한 기준에 대한 원초적인 문제 제기이다. 애초에 이와 같이 셋으로 구분하고서는 이를 사람과 법을 기준으로 다시 짝지으면 의리선에는 ‘사람’이라는 기준이 적용되지 않는다. 초의 의순이 사람을 기준으로 조사선과 여래선, 법을 기준으로 격외선과 의리선으로 나누었던 것보다 못하다는 주장이다.
  7. 7)낙초지담落草之談은 번뇌의 풀에 떨어져서 하는 이야기라는 뜻으로, 중생이 사는 번뇌의 세계에 어울려서 그 수준에 맞는 말을 한다는 의미이다. 『圜悟語錄』 권11(T47, 761b11), “비록 번뇌의 세계에 떨어져 그것에 맞게 이야기하더라도 틀림없이 번뇌의 세계 안에 속박을 뚫는 길이 있어야 한다.(雖則落草之談, 也須草中, 有通身之路.)” 본서 p.101 『선원소류』 주석 187 참조.
  8. 8)『臨濟語錄』(T47, 497a19), “한 구절의 말에는 삼현三玄의 문을 갖추어야 하고, 하나의 현문에는 삼요三要를 갖추어야 한다. 여기에 방편(權)도 있고 작용(用)도 있으니 그대들은 어떻게 이해하는가?(一句語須具三玄門, 一玄門須具三要. 有權有用, 汝等諸人, 作麽生會?)”;『人天眼目』 권1 「三玄三要」(T48, 301c24);『禪門四辨漫語』(H10, 823b23).
  9. 9)『禪門綱要集』 「二賢話」(H6, 851b4), “청풍 법사가 말하였다. ‘구句는 언구라고 할 때의 구이니 구는 차별을 설명한 것이다. 현玄은 유현하다는 뜻의 현이니 현은 분별할 수 없는 것이다. 요要는 요점을 찌른다고 할 때의 요이니 요는 번다한 데에 있지 않다. 현과 요는 구에 있고, 권權과 실實은 현에 있으며, 조照와 용用은 요에 있다. 각각 마땅한 점을 가지고 있으니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風曰, ‘句言句之句, 句詮差別;玄幽玄之玄, 玄不可辨;要省要之要, 要不在多. 玄要在句, 權實在玄, 照用在要. 各有攸當, 不應莾鹵.’)”;『禪文手鏡』 「義理禪三句頌」(H10, 516a20).
  10. 10)『禪門綱要集』 「二賢話」(H6, 852a14).
  11. 11)『禪門綱要集』 「二賢話」(H6, 852a16).
  12. 12)일용이부지日用而不知는 『周易』에서 비롯한 성구이다. 『周易』 「繫辭傳」, “음과 양이 번갈아 바뀌며 반복하는 작용을 도라 한다. 지속하여 이어 가는 것이 선善이요, 갖추고 있음이 성性이다. 인자仁者는 이를 인仁이라 하고, 지자知者는 이를 지知라 하며, 백성들은 날마다 쓰면서도 알지 못한다. 그런 까닭에 군자의 도가 드문 것이다.(一陰一陽之謂道. 繼之者善也, 成之者性也. 仁者見之, 謂之仁;知者見之, 謂之知;百姓日用而不知. 故君子之道鮮矣.)” 자기가 가지고 노는 물건의 이름조차 모른다는 농물부지명弄物不知名과도 통한다. 자기 자신이 언제나 사용하고 있는 본분(弄物)의 실마리조차 모르는 어리석은 자를 일컫는다.
  13. 13)말에 얽매여~일으키게 된다(隨語生解) : 『百丈廣錄』 古尊宿語錄 1(X68, 7c19), “중생이 또한 남의 말을 따라 이해를 일으키니, 이익은 적고 손실은 많다.(衆生又隨語生解, 益少損多.)”
  14. 14)『禪門寶藏錄』 권상(X64, 808a11), “교외별전敎外別傳이란 부처에서 부처로, 조사에서 조사로 이어지며 함께한 법이다. 이 법은 문자로 표현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므로 ‘교외’라 하고, 지위의 차제나 계급을 점차적으로 밟아 가지 않고 불심종을 깨달아 법인을 곧장 내려 주므로 ‘별전’이라 한다. 교란 말이 있는 경계에서 말이 없는 경계에 이르는 것이고, 마음이란 말이 없는 경계에서 말이 없는 경계에 이르는 경계이다. 말이 없는 경계에서 말이 없는 경계에 이른다면 누구도 그 경계를 무엇이라 규정할 수 없어서 억지로 선이라고 일컬은 것일 뿐이다. 세상 사람들이 그 연유를 알지 못한 채 배워서 알 수 있다거나, 생각해서 얻을 수 있다거나, 익혀서 이룰 수 있다고 잘못 생각한다. 선나禪那는 정려靜慮라고 한역한다. 정려란 정신의 움직임을 가라앉히고 단정히 앉아서 온갖 대상에 대한 분별을 그치고 마음을 단속하여 혜慧를 관하는 일법一法을 이루는 것일 뿐이다. 어째서인가? 세존이 입멸하실 때 가섭에게 은밀히 전하여 33세대에 이르도록 지속적으로 이어져 끊어지지 않았지 않은가! 따라서 달마가 전한 법은 교에 의지하여 선을 익히도록 하는 것이 아니며, 곧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 본성을 보고 성불하도록 하는 길이었던 것이다. 조문간정록 (且夫敎外別傳, 卽佛佛祖祖所共法也. 以是法非文字所可擬議, 故曰教外;以不歷位次階級, 而悟佛心宗, 徑受法印, 故曰別傳. 敎也者, 自有言至於無言者也;心也者, 自無言至於無言者也. 自無言而至於無言, 則人莫得而名焉, 故強名曰禪. 世人不知其由, 或謂學而可知, 思而可得, 習而可成. 謂之禪那, 此云靜慮. 靜慮者, 澄神端坐, 息緣束心, 助成觀慧之一法耳. 何故? 世尊於垂滅之時, 而密傳於迦葉, 以至三十三世累累而不絶乎! 是故達磨所傳者, 非借敎習禪者也, 乃直指人心見性成佛之道也. 祖門刊正錄 )”;『禪敎訣』(H7, 657b8), “선禪은 부처의 마음이고 교敎는 부처의 말씀이다. 교란 말이 있는 경계에서 말이 없는 경계에 도달하는 것이고, 선이란 말이 없는 경계에서 말이 없는 경계에 도달하는 것이다. 말이 없는 경계에서 말이 없는 경계에 도달하면 누구도 그 경계를 무엇이라 규정할 수 없어서 억지로 ‘마음’이라고 일컫는 것일 뿐인데, 세상 사람들은 그 연유도 모르고서 ‘배워서 알고 생각해서 터득한다’고 말하니, 참으로 근심스러운 일이다.(然禪是佛心, 敎是佛語也. 敎也者, 自有言至於無言者也;禪也者, 自無言至於無言者也. 自無言至於無言, 則人莫得而名焉, 强名曰心, 世人不知其由, 謂學而知, 思而得, 是可愍也.)”
  15. 15)의도적으로 숨기고 덮어 버리거나(迷蹤蓋覆) : 『禪文手鏡』 「無字揀病論科解」(H10, 524c1), “ ‘개가 알고서 고의로 불성을 범하였다~업식이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자취를 찾지 못하도록 덮어 버리는 수법이다. 조주에게 질문한 학인이 (말뜻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단지 있느니 없느니 분별하며 잘못 이해하였으므로 조주 스스로가 자신이 보여 준 말의 자취를 찾지 못하도록 숨기고 덮어 버리고서 도리어 그가 잘못 이해하고 있느니 없느니 하는 말에 따라 대답해 준 것이다. 그러므로 자취를 잃게 하는 비결이라 한다. 이것은 선사들도 능히 활용하기 어려운 깊고 미묘한 비결이다.(‘知而故犯, 及業識在’, 迷蹤蓋覆也. 以其不能承當, 但以有無錯解故, 迷藏自家所示之蹤跡, 而蓋覆之, 却順其有無以答. 故名曰, 迷蹤訣. 此是禪師難能之妙訣.)” 백파 긍선, 신규탁 옮김, 『선문수경』, p.130 참조.
  16. 16)『禪家龜鑑』(H7, 635b24), “그러므로 누구든 말에 얽매여 근본을 잃어버리면 염화미소의 소식도 모두 교敎의 자취에 불과하지만, 마음에서 깨달으면 세간의 온갖 거칠고 자질구레한 말들도 모두 교외별전의 선지禪旨가 된다.(是故, 若人失之於口, 則拈花微笑, 皆是敎迹, 得之於心, 則世間麤言細語, 皆是敎外別傳禪旨.)”;같은 책(H7, 635c6), “마음에서 얻은 자는 비단 길거리에서 하는 이야기도 법의 요체를 잘 말하는 것이라 여길 뿐만 아니라 제비의 지저귐에서도 실상實相에 깊이 통달한다. 그러므로 보적寶積 선사는 곡하는 소리를 듣고 몸과 마음이 기쁨에 넘쳐 솟아올랐고, 보수寶壽 선사는 주먹다짐하는 광경을 보고 본래면목을 활짝 깨달았다는 이야기도 이러한 연유에서 나온 것이다.(得之於心者, 非但街談善說法要, 至於鷰語, 深達實相也. 是故, 寶積禪師, 聞哭聲踊悅身心, 寶壽禪師, 見諍拳開豁面目者, 以此也.)”
  17. 17)『圜悟語錄』 권11(T47, 765b12), “그런 까닭에 ‘혀를 짓눌러 버리고 별도로 견해를 짜내되, 활구를 참구하고 사구를 참구하지 마라. 활구에서 알아차리면 영겁토록 잊히지 않겠지만, 사구에서 알아차리면 자기 자신도 구제하지 못한다.’라고 하는 것이다.(所以道, ‘坐却舌頭, 別生見解, 他參活句, 不參死句. 活句下薦得, 永劫不忘;死句下薦得, 自救不了.’)”;『禪家龜鑑』(H7, 636b16). 본서 p.130 『선원소류』 주석 238, 『정선 선어록』 주석 284 참조.
  18. 18)『禪家龜鑑』(H7, 636b19), “화두에는 구절과 뜻이라는 두 가지 문이 있다. 구절을 궁구한다(參句)는 것은 경절문徑截門의 활구를 가리키니, 마음으로 헤아릴 길도 전혀 없고 말을 따라 쫓아갈 길도 없어서 모색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뜻을 궁구한다(參意)는 것은 원돈문圓頓門의 사구를 가리키니, 이치로 통할 길도 있고 말을 따라 쫓아갈 길도 있어 듣고 이해하고 생각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話頭, 有句意二門. 參句者, 徑截門活句也, 沒心路, 沒語路, 無摸故也. 參意者, 圓頓門死句也, 有理路, 有語路, 有聞解思想故也.) 본서 p.131 『선원소류』 주석 241, 『정선 휴정』(p.102) 참조.
  19. 19)『禪門拈頌說話』 1219칙(H5, 816b2).
  20. 20) 본서 p.150 『선원소류』 주석 287 참조.
  21. 21)『禪文手鏡』(H10, 515b11) 이하의 요지이다. 『禪門四辨漫語』에 더 요약적으로 제시되어 있으므로 이 책을 인용한다. 『禪門四辨漫語』(H10, 821a1), “육은노인이 말하였다. ‘선에는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조사선이다. 최상의 자질을 갖춘 사람(上根)에게 전하기 위한 것이므로 한마디 한마디의 말이 마치 허공에 도장을 찍는 것과 같다. 그것은 마치 영양이 뿔을 나뭇가지 위에 걸고 자면서 발자국을 숨기는 것과 같아서 더듬을 도리가 전혀 없고 추적할 흔적도 없다. 뿌리까지 통째로 뽑아 버려 잡고서 분별할 근거를 전혀 남기지 않고 영원히 근본적인 번뇌 망상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산은 산이요 근본 기틀 물은 물이며, 남김 없는 작용 부처도 안착시키고 조사도 안착시킨다. 이상은 오로지 조사의 문 안에만 있는 언구들이므로 조사선이라 한다. 둘째는 여래선이다. 중간의 자질을 갖춘 사람(中根)에게 전하기 위한 것이므로 한마디 한마디의 말이 마치 물에 도장을 찍는 것과 같다. 현재의 차별(今)과 본래의 무차별(本) 그리고 도리와 흔적 등이 남아 있는 듯하지만 방편(權) 그대로 진실(實)을 밝히니 이 두 가지를 분별하여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며, 부처도 물리치고 조사도 물리치지만 하나하나의 법마다 온전히 진실하다. 이 또한 조사문 안의 일이지만, 하나하나의 법마다 온전히 진실하다는 말은 여래가 「모든 법을 총괄하여 한가지 마음을 밝힌다.」고 설한 말씀과 완전히 일치하므로 깎아내려 여래선이라 한다. 본분을 깨달아 저편에 서 있는 사람을 존귀하다고 생각하는 집착에서 벗어난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六隱老人曰, ‘禪有三種. 一祖師禪. 對上根故, 一一言句, 如印印空. 如羚羊掛角, 沒義理, 沒蹤跡. 和根拔去, 了沒巴鼻, 永脫根本頭角故. 山是山, 大機 水是水, 大用 佛也安祖也安. 但此祖門中所有之言句, 故名祖師禪. 二如來禪. 對中根故, 一一言句, 如印印水. 似有今本, 義理朕跡, 而卽權明實, 了不可辨故. 山非山, 水非水, 佛也打祖也打, 而法法全眞. 此亦祖門中事, 以法法全眞之語, 完同如來所說, 「統萬法明一心」之言, 故貶之云如來禪. 以未脫本分那人尊貴頭角故也.’)” 초의 의순, 김영욱 옮김, 『선문사변만어』, pp.46~48 참조.
  22. 22)진귀 조사眞歸祖師 : 본서 p.26 『선원소류』 주석 9 참조.
  23. 23)『禪源溯流』(H10, 668a11), “여래선:『보요경』에 ‘보살(석가세존)이 2월 8일에 샛별을 보고 도를 깨달았으니 천인사라 하며, 깨달은 도리가 여래의 깨달음이므로 여래선이라 한다.’라고 하였다.……조사선:달마가 말하였다. ‘진귀 조사가 설산에 있으면서, 총림의 방장에서 석가를 기다렸네. 조사의 심인을 임오년에 전해 받아 수지하였고, 동시에 조사의 종지를 마음으로 얻었다네.’ 이것은 조사가 전한 것이므로 조사선이라 한다.(如來禪者:普曜經, ‘菩薩於二月八日, 見明星悟道, 號曰天人師, 以所悟之道, 是如來悟底, 故名如來禪.’……祖師禪者:達摩云, ‘眞歸祖師在雪山, 叢木房中待釋迦. 傳持祖印壬午歲, 心得同時祖宗旨.’ 是祖師傳底, 故名祖師禪.)”
  24. 24)의주석依主釋과 의사석依士釋~풀이가 다르다 : 범어에서 합성어를 해석하는 여섯 가지 방식(六合釋) 중의 하나. 보통 의주석依主釋을 의사석依士釋이라고도 하며 또는 즉사석卽士釋ㆍ속주석屬主釋이라고도 하는데, 이 둘의 해석이 다르다고 한 연유는 알지 못하겠다. 예를 들어 ‘산사山寺’라고 할 경우에 이는 ‘산지사山之寺’의 뜻으로서 앞의 구절은 범문梵文 문법의 하나인 격格에 해당하고 뒤의 구절은 소유격으로 해석하는 방식이다.
  25. 25)번뇌(頭角) : 번뇌가 일어난다는 두각생頭角生과 같은 말. 『碧巖錄』 95칙 「垂示」(T48, 218a19), “부처가 있는 곳에는 머물지 말지니, 머물면 뿔이 나리라. 부처가 없는 곳은 급하게 달려서 지나갈지니, 달려서 지나가지 않으면 번뇌의 잡초가 한 길만큼 자라리라.(有佛處不得住, 住著頭角生;無佛處急走過, 不走過, 草深一丈.)”
  26. 26)본서 p.37 『선원소류』 주석 32 참조.
  27. 27)시처무애時處無礙 : 『華嚴經探玄記』 권3(T35, 160b21), “아홉 번째, 시처무애. 하나의 국토에서 삼세의 겁을 모두 나타내거나, 일념 중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국토를 나타내는 것이니, 이와 같이 걸림이 없는 것을 말한다.(九, 時處無礙. 謂或於一刹, 現三世劫, 或一念中, 現無量刹, 如是無礙.)”
  28. 28)육상십현六相十玄 : 십현육상이라고도 한다. 육상六相의 원융圓融함과 법계法界 십현연기十玄緣起의 교의를 아울러 이르는 말. 육상은 화엄종의 교의에서 각각의 사물에 있다고 간주하는 여섯 가지 상相으로서 이 육상이 원융하여 상호 의존적이면서도 각각에 장애가 되지 않음을 뜻한다. 총상總相ㆍ별상別相ㆍ동상同相ㆍ이상異相ㆍ성상成相ㆍ단상壇相을 가리킨다. 십현은 십현문十玄門 또는 십현연기十玄緣起라고도 하며, 화엄종에서 세운 사종법계 가운데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의 상을 열 가지 방면에서 드러낸 것이다. 이 뜻에 정통하면 『華嚴經』의 유현幽玄한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 하여 ‘현문玄門’이라고 한다. 동시구족상응문同時具足相應門ㆍ광협자재무애문廣狹自在無礙門ㆍ일다상용부동문一多相容不同門ㆍ제법상즉자재문諸法相卽自在門ㆍ은밀현료구성문隱密顯了俱成門ㆍ미세상용안립문微細相容安立門ㆍ인다라망법계문因陀羅網法界門ㆍ탁사현법생해문託事顯法生解門ㆍ십세격법이성문十世隔法異成門ㆍ주반원명구덕문主伴圓明具德門 열 가지이다.
  29. 29)성인의 지혜로나 범부의 식識(聖凡識智) : 백파 긍선이 식識과 지智를 변별하여 설한 『識智辨說』이라는 책이 있다. 식識은 분별이 있는 생멸심으로 삼계를 윤회하게 하는 근본 원인인 데 반해 지智는 무분별의 불생멸심으로 세간을 뛰어넘어 성불에 이르게 하는 길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가산불교대사림』 ‘식지변설’ 항목 참조.
  30. 30)천책天頙의 『禪門寶藏錄』에 인용된 『祖門刊正錄』을 말한다.
  31. 31)『圓覺經大疏釋義鈔』 권3(X9, 531a2), “이심전심이란 달마 대사의 말이다. 2조 혜가 화상이 ‘이 법은 어떤 경전에 쓰여 있습니까?’라고 묻자, 달마 대사는 ‘나의 법은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하며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비록 스승의 언설에 따르더라도 문구를 도 자체로 삼지 않는다는 뜻이다. 말에 대한 집착을 잊고 뜻을 터득해야 하니, 뜻을 터득하였다면 그것이 바로 마음을 전한 것이다.(以心傳心者, 是達磨大師之言也. 因可和尙諮問, ‘此法有何敎典?’ 大師答云, ‘我法以心傳心, 不立文字.’ 謂雖因師說, 而不以文句爲道. 須忘詮得意, 得意卽是傳心.)”
  32. 32)『禪源溯流』(H10, 659a9), “그러므로 의리를 가리켜 격格이라 하고, 여래선과 조사선 두 가지 선은 그 격을 벗어난 격외格外이다. 격외와 교외敎外라는 말에는 같은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다. 같은 점은 의리선에도 교외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조문간정록』에 ‘심법은 문자로 헤아릴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라고 한 뜻과 같다. 그러므로 교외는 지위와 순서나 점차적 단계를 차례차례 밟아 가지 않고 불심종을 깨달아 법인法印을 곧바로 받기 때문에 ‘별전別傳’이라 한다. 이 격외의 두 가지 선이 교외이다. 규봉이 말하였다. ‘문구를 도로 삼지 말지니, 모름지기 말에 대한 집착을 잊고 뜻을 터득해야 한다. 말의 자취를 잊는 것이 교외이고, 뜻을 터득하는 것이 전심傳心이다.’(然則義理名爲格, 如來祖師二禪爲格外也. 然格外敎外之言, 或同或異. 同者, 義理禪亦得敎外之名. 如祖門刊正錄云, ‘心法非文字所可擬議.’ 故云, 敎外以不歷位次階級, 悟佛心宗, 徑受法印, 故曰別傳. 此格外二禪, 爲敎外也. 圭峯云, ‘不以文句爲道, 須忘詮得意. 忘詮卽是敎外, 得意卽是傳心.’)”
  33. 33)『禪門綱要集』 「一愚說」(H6, 854c22), “세존이 가섭에게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한 것을 첫머리의 표지로 한 까닭은 이 공안으로 교외별전의 종지를 세우기 위해서이다. 여래가 적멸도량에서 처음 정각을 이루고 나서 천 길 길이 비로자나불의 몸을 드러내고 41위 법신 대사와 과거세에 근기가 성숙한 천룡팔부에게 일시에 둘러싸여 마치 구름이 달을 감싸는 듯했다는 장면이 제2구이며, 그런 까닭에 인천의 스승이 될 만하다고 한 것이다.(世尊迦葉, 三處傳心, 所以首摽, 此介公案, 以立敎外別傳之宗者也. 如來在寂滅場中, 初成正覺, 現千丈盧舍那身, 四十一位法身大士, 及宿世根熟, 天龍八部, 一時圍繞, 如雲籠月, 是第二句, 故云人天爲師.)”
  34. 34)『禪門綱要集』 「二賢話」(H6, 852a12).
  35. 35)『禪門拈頌說話』 256칙(H5, 242a9), “또 옛사람이 ‘해인삼매 가운데 삼종세간이 드러나니, 삼종세간이 모두 다함이 없구나. 다함없는 본성의 바다가 한맛을 머금었으나, 그 한맛 또한 침몰시키는 것이 나의 선이다.’라 하여 한맛조차 물속에 던져 버린 것이 바로 장로의 일미선이라 하였다. 이것이 장로가 말한 그 일미선이다.(又古人云, ‘海印定中三種現, 三種世間皆無盡. 無盡性海含一味, 一味尙沉是我禪.’ 則一味尙沈處, 是長蘆一味禪也, 此是長蘆所謂一味禪也.)”;『禪門寶藏錄』 권상(X64, 808b10), “열 분 부처 머무는 도량이 하나의 해인이요, 삼종세간이 모두 그곳에 있네. 다함없는 본성의 바다가 한맛을 머금었으나, 그 한맛 또한 침몰시키는 것이 나의 선이다. 진정 극문 화상의 송 (十佛壇場一海印, 三種世間總在焉. 無盡性海合一味, 一味相沈是我禪. 眞淨文和尙頌 )” 본서 p.39 『선원소류』 주석 39 참조.
  36. 36)『禪門拈頌說話』 37칙(H5, 50c2), “삼구는 본보기가 되는 법도이다. 하지만 진실로 교외별전이라면 거기에는 삼구가 곧바로 사라져도 오히려 옳지 않거늘 하물며 본보기가 되는 법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야 말할 여지가 있겠는가!(三句, 是矩模也. 若是敎外別傳, 三句斯亡, 尙猶不可, 而況未離矩模者哉!)”
  37. 37)『禪文剛要集』에서 ‘제1구를 가리켜 교외별전’이라 한 정확한 대목은 찾지 못했다. 다만 『禪門四辨漫語』에 위와 같은 내용이 보인다. 『禪門四辨漫語』 「二禪來義」(H10, 27b17), “일우는 이 별도의 방법으로 전하는 종지를 임제의 제1구에 짝지었지만 또한 직접 (조사선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은 채 다만 풍혈風穴의 말만 인용하여 은근히 가리켰을 뿐이다. 이 방법으로 종문의 법도를 잃지 않았던 것이다.(今一愚, 以此別傳之宗旨, 配臨濟第一句, 亦不直書名字, 只引風穴語而暗道之. 此正不失宗門之典則也.)” 초의 의순, 김영욱 옮김, 『선문사변만어』, pp.132~133 참조.
  38. 38)순덕 선사順德禪師 : 경청 도부鏡淸道怤(868~937)의 사호賜號이다.
  39. 39)『禪門寶藏錄』 권상(X64, 808b4), “모든 부처님께서는 활등처럼 설하셨고 조사들은 활시위처럼 설하셨다. 활시위처럼 설하였다는 말은 선문에서 현묘한 길을 곧장 전하면서 언설을 빌리지 않고 근본이 되는 마음의 본체를 곧바로 가리켜 보이는 양상이 활시위가 곧은 것과 같다는 뜻이다. 교문의 경우에 일승一乘은 곧은 길이고 삼승三乘은 굽은 길이므로 근본이 되는 마음의 본체를 곧바로 들어서 마음에 보여 준 것과 같지 않다. 왜 그러한가? 일승교一乘敎에서 설한 것은 일마다 걸림 없는 법계의 모든 존재가 원만하게 융합되어 있다는 뜻이다. 일마다 걸림 없는 이 법계는 한맛의 법계로 귀결되고, 이 한맛의 법계가 남긴 흔적조차 떨쳐 버려야 비로소 조사들이 제시한 일심이 드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교설은 곧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순덕선사록 (諸佛說弓, 祖師說絃. 說絃者, 禪門正傳玄路, 不借言說, 直示宗本心體, 如弓之絃. 若敎門, 則一乘是直路, 三乘是曲路, 不如直擧宗本心體, 示於心念之中. 何故? 一乘敎中所說者, 事事無礙法界圓融. 此事事無礙法界, 方歸一味法界, 拂此一味法界之跡, 方現祖師所示一心. 故知諸敎不直. 順德禪師錄 )” 본서 p.138 『선원소류』 주석 254, 『정선 휴정』(p.95) 주석 58 참조.
  40. 40)『禪門寶藏錄』 권상(X64, 809b11), “ 『화엄경소』에 ‘원돈교圓頓敎 위에 별도로 하나의 종파가 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말에 대한 집착을 잊고 근본적인 뜻을 알아차리는 종지이다. 누군가가 「어떤 말을 잊고 어떤 뜻을 알아차리라는 것입니까?」라고 묻자, 「오교五敎의 말을 잊고 오교의 뜻을 알아차리라는 것이니 선종이 그것이다.」라고 하였다. 현각 선사 교외수선장 (如華嚴疏云, ‘圓頓之上, 別有一宗.’ 此亡詮會旨之宗. 或問, ‘亡何詮, 會何旨?’ 答, ‘亡五敎之詮, 會五敎之旨, 禪宗是也.’ 玄覺禪師敎外竪禪章 )”;『華嚴經疏』 권2(T35, 512c4), “(돈교에서) 단번에 언어가 끊어진 경계를 드러내는 이유는 별도로 모든 상념을 벗어난 한 부류의 근기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니, 선종에 해당한다.(頓顯絶言, 別爲一類離念機故, 卽順禪宗.)” 『정선 휴정』(p.346) 주석 56 참조.
  41. 41)향엄 지한香嚴智閑이~듣고 깨달은 : 향엄이 풀을 베다가 날아간 돌조각이 대나무에 부딪혀서 난 소리를 듣고 깨우친 인연. 소리를 듣고 도를 깨닫는다는 문성오도聞聲悟道를 대표한다.
  42. 42)앙산 혜적仰山慧寂과 향엄 지한의 문답 가운데 나오는 말. 『禪門拈頌說話』 586칙(H5, 453a18), “앙산이 어느 날 향엄을 만나 물었다. ‘요즘 사형의 견지는 어떠신가?’ ‘나의 견지에 따르면 진실로 분별에 딱 들어맞는 법은 하나도 없소.’ ‘그대의 견지는 여전히 대상 경계에 머물러 있군.’ ‘내 견지는 고작 이것에 불과한데, 사형은 어떠시오?’ ‘그대는 분별에 딱 들어맞는 법이 하나도 없음을 아는 사람(能知者)까지 없다는 사실을 어찌 모르는가!’ 위산이 두 사람의 문답을 듣고 말하였다. ‘적자寂子(앙산 혜적)가 이다음에 세상 사람들을 몹시 어리둥절하게 만들겠군.’(仰山一日見香嚴, 乃問, ‘近日師兄見處如何?’ 嚴云, ‘據某甲見處, 無一法可當情.’ 師云, ‘你解猶在境.’ 嚴云, ‘某甲只如是, 師兄又作麽生?’ 師云, ‘你豈無能知無一法可當情者!’ 潙山聞云, ‘寂子, 已後疑殺天下人去在.’)” 이 책 설화에서는 “ ‘나의 견지에 따르면 진실로 분별에 딱 들어맞는 법은 하나도 없소.’라 한 말은 대나무에 돌조각이 부딪힌 경계, ‘한 번 부딪히는 소리에 모든 앎 잊고 나니, 더 이상 닦을 필요가 없노라.’라는 소식을 가리킨다.(據某甲見處無一法可當情者, 擊竹處, 一擊忘所知, 更不假修治云云也.)”라고 하였다. 『景德傳燈錄』 권11 「仰山傳」(T51, 283b8), 『仰山語錄』(T47, 584a16) 등에는 앙산과 그 사제師弟 쌍봉雙峰 사이의 문답으로 실려 있다. 본서 p.194 『선원소류』 주석 375 참조.
  43. 43)교내敎內 : 선종에서 언어 문자를 법의 근거로 삼지 않고 이심전심ㆍ교외별전 등을 표방하는 것에 비해 경률론 등의 교법에서 경전에 의한 가르침에 의지하는 것을 교내라 한다.
  44. 44)『禪門寶藏錄』 권상(X64, 809b5), “망상을 잊고 이치에 들어맞음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교敎에 의거하여 이치에 들어맞는 것이다. 예컨대 대승보살의 경우와 같다. 즉 부처가 소승을 설하였지만 소승에 얽매이지 않고 대승을 설하더라도 대승에 얽매이지 않으며, 이치를 설하고 현상을 설하였지만 그 이치나 현상에 얽매이지 않으며, 공을 설하고 색을 설하였지만 그 공이나 색에 얽매이지 않으며, 진제眞諦와 속제俗諦를 설하였지만 그 진제나 속제에도 얽매이지 않은 것과 같으니, 오승五乘 제법의 한 글자 한 글자, 한 구절 한 구절이 가명假名이라는 것을 무너뜨리지 않고 원융하게 이해한다. 두 번째는 선禪에 의거하여 이치에 들어맞는 것이다. 부처가 대승을 설하였지만 본래 대승이란 없는 것이고 부처가 소승을 설하였지만 본래 소승이란 것도 없으며, 부처가 이치와 현상을 설하였지만 본래 그 이치와 현상이란 것도 없으며 삼승십이분교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러하다. 삼계의 모든 법은 새가 허공을 날아가지만 끝내 아무런 흔적이나 자취를 남기지 않는 것과 같다.…… 현각 선사 교외수선장 (忘情契理有二義. 一, 依敎契理者. 如大乘菩薩, 佛說小乘, 不滯小乘, 雖說大乘, 不滯大乘;說理說事, 不滯理事;說空說色, 不滯空色;說眞說俗, 不滯眞俗, 五乘諸法, 一一字一一句, 不壞假名, 圓融融會. 二, 依禪契理者. 佛說大乘, 本無大乘, 佛說小乘, 本無小乘;佛說理事, 本無理事;乃至三乘十二分敎. 三界所有法, 如鳥飛空, 永無蹤跡.…… 玄覺禪師 敎外竪禪章 )”
  45. 45)『禪門拈頌說話』 1칙(H5, 6a21), “옛사람의 말에 ‘화엄의 교설이 아니면 이치를 남김없이 설할 수 없다. 다만 배우는 자들이 문자로 드러난 뜻과 이치에 골몰한 끝에 분별을 잊고 마음을 깨닫지 못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런 까닭에 달마 대사가 인도로부터 와서 인심을 곧바로 가리켜(直指人心), 본성을 보고 부처가 되도록 한 것(見性成佛)이다. 곧 선가禪家에서는 사사무애事事無礙를 실행하고, 교가敎家에서는 사사무애를 이론적으로 설한다. 교가에서는 설하기만 하고 실행하지 못하나, 선가에서는 하나의 기틀과 하나의 경계에서 본분을 포착하는 순간 바로 활용한다.(古人云, ‘非是華嚴, 說理未盡. 但學者, 汨沒文字義理, 不能忘意了心.’ 所以達磨西來, 直指人心, 見性成佛. 則禪行事事無礙, 敎說事事無礙也. 敎家但說而行不得, 禪家一機一境上, 把得便用.)” 본서 p.34 『선원소류』 주석 29 참조.
  46. 46)다른 문헌에서는 찾지 못하였고 『禪源溯流』에 보이는데 그 뜻은 위와는 다르다. 즉 이 책에서는 ‘교에 입각하여 종지를 밝힌 것(卽敎明宗)이 격외선’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문제를 제기하였다. 『禪源溯流』(H10, 659a22), “ 󰃅 격외선에는 교적의 자취를 없애고 종지를 밝히는 경우가 있고 교적의 자취 그대로 종지를 밝히는 경우가 있는데, 교적의 자취를 없애어 종지를 밝히는 것은 원래 교외이지만, 교적의 자취 그대로 종지를 밝힘은 의리선에서 언어의 자취를 잊고 뜻을 얻는 것과 어떻게 다릅니까? 󰂼 고덕이 ‘마음에서 얻으면 삼장십이분교가 모두 교외별전의 선지禪旨’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활안活眼의 수단이다. 마음에서 얻으면 일정한 궤칙에 얽매이지 않아 흙을 금으로도 만드니 한 글자 한 구절이 조사의 뜻 아님이 없다. 이런 까닭에 교적의 자취 그대로 종지를 밝힘은 격외선이다. 언어의 자취를 잊고 뜻을 얻는 경우는 그렇지 않으니 이름으로써 제법의 자성을 드러내고 구절로써 제법의 차별을 드러낸다면 이름과 구절은 능전能詮이고 자성과 차별은 소전所詮이다. 그러므로 저 이름과 구절에서 언어의 자취를 잊고, 설령 자성과 차별의 뜻을 깨닫더라도 아직 자성과 차별에 대한 이해를 잊지 못하였기 때문에 의리선이다. 이 교외라는 말은 비록 세 가지 선을 모두 관통하지만 그 뜻은 현격하게 다르다.(問, 格外禪, 有撥敎明宗, 有卽敎明宗, 撥敎明宗, 元是敎外, 而卽敎明宗, 與義理禪之忘詮得意, 同別如何? 答, 古德云, ‘若人得之於心, 則三藏十二分敎, 皆是敎外別傳禪旨’, 此是活眼手段. 得之於心, 不存軌則, 把土成金, 一字一句, 無非祖師意也. 是以卽敎明宗, 爲格外禪也. 忘詮得意者, 不然, 以名詮諸法自性, 句詮諸法差別, 則名句是能詮, 自性差別是所詮也. 故於彼名句上, 而能忘詮, 雖得自性差別之意, 然未能忘自性差別之解, 故爲義理禪也. 此敎外之言, 雖通三禪, 其義懸隔.)”
  47. 47)『禪門拈頌說話』 100칙(H5, 106a18), “모든 대상이 끊어지고 나면 끊어져서 아무것도 없는 그 경계(斷滅)에 떨어지는 사람도 있지만 2조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분명하게 깨어 어둡지 않고 뚜렷하게 항상 알고 있었으니, 깨달음과 수행이 곧바로 사라지면서 여래선을 증득하였던 것이다. 중ㆍ하 근기의 무리였다면 이 경계에서 눌러앉아 본분사를 벌써 마쳤다고 여겼겠지만 2조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다시 모든 부처님의 법인에 대하여 묻고는 그 자리에서 마음을 편안히 하고 모든 부처님이 전한 마음의 본체를 깨달았다. (이 때문에) 앞에서 터득한 이해가 더욱 밝아져 ‘분명하게 깨어 어둡지 않고 뚜렷하게 항상 알고 있다.’고 말한 뒤 마침내 조사선을 알아차리고 달마의 인가를 받았던 것이다. 이것이 2조가 2조가 된 이유이다.(諸緣旣斷, 或有落斷滅者, 今二祖則不然. 明明不昧, 了了常知, 則悟修斯亡, 乃證得如來禪也. 其如中下之類, 於此坐着, 便以爲能事已畢, 二祖卽不然. 又問, 諸佛法印, 當下安心, 悟得諸佛所傳心體. 前解轉明曰, ‘明明不昧, 了了常知.’ 遂乃會得祖師禪, 得他印許. 此所謂二祖之爲二祖者也.)” 본서 p.184 『선원소류』 주석 361 참조.
  48. 48)참의參意 : 본서 p.131 『선원소류』 주석 241 참조.
  49. 49)『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略疏』 「序」(T39, 524b21), “나는 선법은 남종南宗에서 만났고 교법은 『원각경』에서 만났는데, 일언지하(南宗禪)에 마음이 확 트이고 한 축 책(『圓覺經』)에서 의리의 하늘이 밝아졌다.(禪遇南宗, 敎逢斯典, 一言之下, 心地開通, 一軸之中, 義天朗耀.)”
  50. 50)선강禪講은 선과 교, 선종과 교종, 또는 선수행자와 경전을 강설하는 자를 말한다. 교종에서는 경전을 강설하므로 ‘강講’이라 한다.
  51. 51)『禪門拈頌說話』 「禪門拈頌集序」(H5, 1b11).
  52. 52)『禪源溯流』(H10, 658c23), “예로부터 총림에서는 법을 기준으로 의리선과 격외선을 밝혔다. 또 여래선 운운한 것은, 옛사람이 소위 사람을 기준으로 하여 여래선과 조사선이라 이름 붙인 것이다. 이 또한 격외선 가운데 여래선과 조사선이 있는 것이다. 의리선을 여래선으로 여기기도 하지만 의리선은 지금 활용하는 그 여래선이 아니다. 예컨대 도솔화兜率話(『선문염송』 1칙)에서 ‘증득과 교화를 곧바로 사라지게 한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여래선이 아니겠는가? 또한 염과 송을 가한 여러 선사들이 법 하나하나가 모두 그대로 진실하다는 뜻을 많이들 밝혔으므로 의리선이 여래선이 아님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의리를 가리켜 격格이라 하고, 여래선과 조사선 두 가지 선은 그 격을 벗어난 격외格外이다. 격외와 교외敎外라는 말에는 같은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다. 같은 점은 의리선에도 교외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조문간정록』에 ‘심법은 문자로 헤아릴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라고 한 뜻과 같다. 그러므로 교외는 지위와 순서나 점차적 단계를 차례차례 밟아 가지 않고 불심종을 깨달아 법인法印을 곧바로 받기 때문에 ‘별전別傳’이라 한다. 이 격외의 두 가지 선이 교외이다.(上古叢林, 所謂約法, 明義理禪格外禪也. 且如來禪云云者, 古所謂約人名如來禪祖師禪也. 此亦格外禪中, 有如來禪祖師禪也. 若以義理禪爲如來禪, 義理禪非今所用如來禪. 則如兜率話, ‘證化斯亡.’ 豈非如來禪耶? 又拈頌諸師, 多明法法全眞之義, 故知義理禪, 非如來禪, 明矣. 然則義理名爲格, 如來祖師二禪爲格外也. 然格外敎外之言, 或同或異. 同者, 義理禪亦得敎外之名. 如祖門刊正錄云, ‘心法非文字所可擬議.’ 故云, 敎外以不歷位次階級, 悟佛心宗, 徑受法印, 故曰別傳. 此格外二禪, 爲敎外也.)”
  53. 53)앞의 주석 52 참조.
  54. 54)『法華經』 권1 「方便品」(T9, 9c4), “나는 앞서서 도량에 앉아, 보리수를 관하고 경행하였으며, 삼칠일 동안, 이와 같은 일을 사유하였다.(我始坐道場, 觀樹亦經行, 於三七日中, 思惟如是事.)”;『十地經論』(T26, 124a11), “어째서 처음 이레 동안은 설법하지 않으셨는가? 사유행과 인연행 때문이니 본래 남을 이롭게 하기 위해 성도하신 까닭이다. 어째서 이레 동안 사유하며 설법하지 않으셨는가? 스스로 대법락을 누리심을 드러내신 까닭이다.(何故不初七日說? 思惟行因緣行故, 本爲利他成道. 何故七日思惟不說? 顯示自樂大法樂故.)”
  55. 55)『景德傳燈錄』 권28 「大珠慧海傳」(T51, 441b4), “선사라면 그 핵심을 뽑아내어 곧바로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야 하니, 나타내거나 숨기거나 거두거나 펼치면서 종횡 어디로나 자재하게 대상에 응한다. 현상과 이치를 모두 고르게 깨쳐 단박에 여래의 경계를 보고, 생사의 문제를 깊은 뿌리까지 통째로 뽑아 버려 눈앞에 드러난 삼매를 얻는다. 선의 고요한 경계에 안주해 보지 않았다면 이 문제를 당면하고 누구나 넋을 잃을 수밖에 없다.(夫禪師者, 撮其樞要, 直了心源, 出沒卷舒縱橫應物. 咸均事理, 頓見如來, 拔生死深根, 獲見前三昧. 若不安禪靜慮, 到遮裏總須茫然.)”
  56. 56)『禪門拈頌說話』 203칙(H5, 203b4), “정과 혜를 평등하게 공부하여 불성을 분명히 본다고 하는데, 이 도리는 어떤 것인가:성문은 정이 많고 혜가 부족하여 불성을 알지 못하고, 보살은 혜가 많고 정이 부족하여 불성을 알지 못하는데, 오로지 여래만이 정과 혜를 평등하게 구현하여 불성을 분명히 깨달았다는 뜻이다.(定慧云云者, 聲聞, 定多慧少, 不見佛性;菩薩, 慧多定少, 不見佛性;唯如來, 定慧等學, 明見佛性也.)” 『大般涅槃經』에 나오는 다음 내용을 이렇게 변용하여 관습적으로 쓴다. 『大般涅槃經』 30권(T12, 547a12), “십주보살은 지혜의 힘이 많고 삼매의 힘이 적기 때문에 불성을 분명하게 보지 못한다. 반면 성문과 연각은 삼매의 힘이 많고 지혜의 힘이 적은 그 인연 때문에 불성을 보지 못한다. 세존이신 부처님만이 정과 혜를 평등하게 갖추기 때문에 불성을 분명하게 보아 또렷하고 어떤 장애도 없다.(十住菩薩, 智慧力多三昧力少, 是故不得明見佛性;聲聞緣覺, 三昧力多智慧力少, 以是因緣, 不見佛性;諸佛世尊, 定慧等故, 明見佛性, 了了無礙.)”
  57. 57)『禪門證正錄』 「第二 如來禪祖師禪 義理禪格外禪說」(H10, 1140a21), “ 「선문염송집서禪門拈頌集序」에서 ‘선의 온전한 음사어는 선나禪那이며 한역하면 사유수思惟修 또는 정려靜慮라고도 하는데, 이는 모두 정과 혜를 통칭한 말이다.’라 하고, 이것은 법을 기준으로 의리선이라 한 것이며, 이름만 나타낸 것이고 뜻을 풀이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禪으로 보자면 교외별전의 일미선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법을 기준으로 격외선이라 한 것이며, 이름만 나타낸 것이고 뜻을 풀이한 것은 아니다. 뜻을 푼다. ‘삼승과 일승의 가르침이 깊이에서는 비록 다르지만 모두 정과 혜를 닦아서 깨달음으로 들어가므로 의리선이라 한다. 이제 이 「선문염송집서」를 살펴보니 오직 제1구 교외별전 일미선이 근본이며, 깊은 것은 반드시 얕은 것을 갖추기 때문에 또한 제2구 의리선이 있는 것이다. 이하에서 「그렇다면 여래선과 조사선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 여래선이란 산은 산 그대로 좋고 물은 물 그대로 좋으니 법 하나하나가 모두 그대로 진실하다는 견해이고, 조사선은 뿌리까지 통째로 뽑아 버려 잡고서 분별할 수단을 전혀 남기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사람을 기준으로 여래선ㆍ조사선으로 나눈 것이니 이름을 나타내고 뜻을 풀이한 것이다. ’(說話序云, ‘禪者具云禪那, 此云思唯修, 亦云靜慮. 斯皆定慧之通稱也.’ 此約法名義理禪, 但票名不釋義也. ‘當此看則敎外別傳一味禪也.’ 此約法名格外禪, 但票名不釋義也. 釋曰, ‘三乘一乘之敎, 淺深雖異, 皆修定慧而證入, 故謂之義理禪. 當此拈頌看, 則唯第一句敎外別傳一味禪爲主, 深必該淺, 故亦有第二句義理禪也. 次下云, 「且如來禪祖師禪, 同別如何? 如來禪者, 山山水水, 法法全眞也, 祖師禪者, 和根拔去, 了沒巴鼻也.」 此約人名如來禪祖師禪, 卽票名而釋義也. ’)”
  58. 58)『禪文手鏡』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고, 『禪門四辨漫語』에 실린 글이 위의 글과 내용상 더 일치한다. 『禪文手鏡』 「義理禪格外禪辨」(H10, 519c8), “격외에 또 두 가지 있다. 첫째는 여래선이다.……자리를 나누어 주신(分座) 법공좌法空座 소식으로서 법안종ㆍ위앙종ㆍ조동종 세 종파의 종지이다. 두 번째 조사선이다.……이야말로 바로 조사 문안의 행색이므로 곧바로 조사선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곧 영산회상에서 세존이 가섭에게 꽃을 들어 보이신(拈華) 묘유妙有 소식으로서 운문종과 임제종 두 종파의 종지이다. 세 번째 관 밖으로 두 발을 내어 보인(示趺) 살활殺活 소식으로서 생각건대 6조 이하에서는 전하지 않았으므로 다만 선사라고만 부르고 조사라고는 하지 않는데, 감히 결정지어 말하지는 못하겠다.(此格外中, 又有二種. 一, 如來禪,……卽分座 法空座 消息, 而爲法眼潙仰曹洞三宗旨也;二, 祖師禪……正是祖門中行色, 故直名祖師禪. 卽拈華 妙有 消息, 而爲雲門臨濟二宗旨也;第三示趺 殺活 消息, 想必六祖下未傳, 故但名禪師, 未名祖師, 而亦未敢決定.)”;『禪門四辨漫語』(H10, 820c10). “ ‘삼처전심 중에서 자리를 나누어 앉은 것(分座)은 살殺을 전했고, 꽃을 들어 보인 것(拈華)은 활活을 전했으며, 관 밖으로 발을 내어 보인 것(示趺)은 살과 활을 평등하게 보여 주었다. 이상은 구곡龜谷의 주장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자리를 나누어 앉은 것에는 오로지 살의 방법만 있고, 꽃을 들어 보인 것에는 활과 더불어 살도 겸비하고 있다.’라고 한 백파의 말은 구곡의 말에는 없는 내용이다.(‘三處傳心中, 分座傳殺, 拈花傳活, 示趺殺活齊示. 此龜谷老之言.’ 今分座之但殺, 拈花活之兼殺, 龜谷說中無之.)”;같은 책(H10, 821c6), “또한 여래선을 (조사선과 함께) 격외선格外禪으로 삼아 분좌分座에 배속하고는 구곡이 세운 뜻이라 하였지만, 구곡의 말에 분좌를 가리켜 여래선이라 지목한 부분이 있던가?(又以如來禪爲格外禪, 配之分座, 謂之龜谷義, 龜谷說中, 有以分座, 指爲如來禪之言乎?)” 백파 긍선, 신규탁 옮김, 『선문수경』(pp.72~74), 초의 의순, 김영욱 옮김, 『선문사변만어』(p.40, p.52) 참조.
  59. 59)『염송설화』에서는 삼처전심을~말하지는 않았다 : 『禪門拈頌說話』 37칙(H5, 51a5), “세존께서 당신의 자리를 나누어 앉도록 했다(分座令坐):착각이다! 남을 죽이려면 반드시 살인도殺人刀를 써야 하는 법인데, (그렇게 하지 못했으니) 잘못이 적지 않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이 함정 속에 들어가서 뚫고 나와야 비로소 교외별전의 정통 법맥이 가섭의 분수를 벗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세존께서 그들 꽃 중 한 송이를 집어 들고 대중에게 보이셨다(拈花示衆)’:착각이다! 남을 살리려면 반드시 활인검活人劍을 써야 하는 법인데 어지럽게 만든 잘못이 적지 않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복잡하게 얽힌 이 말 속에 들어가 그것을 씹어 부수어야 비로소 정법안장正法眼藏이 가섭에게 전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가섭이 미소 지었다고 하지만, 지음知音(가섭)이 안 다음에는 또 누가 알겠는가? 정법안장이 이 눈먼 나귀 편에서 소멸할지 누가 알았겠는가!……‘세존께서 관 밖으로 두 발을 내보이셨다(槨示雙趺)’:착각이요, 착각이로다! 무소가 달빛을 즐기다가 뿔에 무늬가 생겼고, 코끼리는 천둥소리에 놀라 상아에 꽃 그림 새겨진 격이니, 잘못이 적지 않다. 비록 이렇기는 하지만 이 구덩이 속에서 뛰쳐나와야 비로소 다비한 뒤의 품品이 세상에 유통되리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世尊分座令坐, 錯! 殺人須是殺人刀, 漏逗也不少. 雖然如是, 向者窠窟裏透得, 方知別傳正脉沒分外.……世尊拈花示衆, 錯! 活人須是活人釰, 狼藉也不少. 雖然如是, 向這葛藤裏咬破, 方知正法眼藏付囑有在. 迦葉微笑, 知音知後更誰知? 誰知正法眼藏, 向這瞎驢邊滅却!……世尊槨示雙趺, 錯, 錯! 犀因翫月紋生角, 象被雷驚花入牙, 敗闕也不少. 雖然如是, 向者圈圚裏跳得出, 方知茶毗後品流通去在.)”
  60. 60)『禪門拈頌說話』 37칙(H5, 50c1), “또한 본체(體)와 작용(用)과 중中이라는 삼구의 틀에 삼처를 배대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그 방법은 옳지 않다고 본다. 삼구는 본보기가 되는 법도이다. 하지만 진실로 교외별전이라면 거기에는 삼구가 곧바로 사라져도 오히려 옳지 않거늘 하물며 본보기가 되는 법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야 말할 여지가 있겠는가!(又有體用中, 三句配之者, 余以爲不可. 三句, 是矩模也. 若是敎外別傳, 三句斯亡, 尙猶不可, 而況未離矩模者哉!)”
  61. 61)『禪門綱要集』 「一愚說」(H6, 854c22). 『禪門四辨漫語』 「格外義理辨」(H10, 828a4), “일우는 삼처전심을 합하여 조사선으로 여기고 임제의 제1구에 짝지었다. 그런데 (백파는) 자리를 나누어 앉은 것은 오로지 살만 있을 뿐 활이 없다고 보고 여래선으로 간주하여 제2구에 짝지었고, 대중에게 꽃을 들어 보인 것은 살과 활을 겸비하였다고 보고 조사선으로 간주하여 제1구에 짝지었다. 이것은 말은 일우의 설에 근거하면서 뜻은 일우의 설에 반하는 것이 아닌가?(一愚以三處傳心, 合爲祖師禪, 而配臨濟第一句. 今以分座, 爲但殺無活, 以爲如來禪, 配第二句;以拈花示衆, 謂兼殺活, 以爲祖師, 配第一句. 此非言則依於一愚, 而義則反於一愚耶?)” 초의 의순, 김영욱 옮김, 『선문사변만어』, pp.139~140 참조.
  62. 62)『禪門拈頌說話』 181칙(H5, 182b1), “만약 마조의 일할一喝을 빈틈없이 이어받지 않았다면, 어떻게 대기대용大機大用이라고 하겠는가? 그러므로 백장은 대기만 얻었을 뿐이지만 더 이상 대용이 필요하지 않았으며, 황벽은 대용만 얻었을 뿐이지만 더 이상 대기가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수단이라곤 전혀 모르는 사람들은 말하기를 ‘대기 중에 대용이 있고, 대용 중에 대기가 있다.’라고 한다.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떻게 꿈엔들 백장과 황벽의 경계를 알겠는가? 이렇게 결정적인 전기가 되는 순간을 맞아서는 옛사람도 그저 ‘사람을 죽이는 칼(殺人刀)이요 사람을 살리는 검(活人劒)이다.’라고 말했을 뿐이다.(若不親承馬祖一喝, 何名大機大用? 故百丈只得大機, 更不要大用;黃蘖只得大用, 更不要大機. 有一般無巴鼻地道, ‘大機中有大用, 大用中有大機.’ 若伊麽, 何曾夢見百丈黃蘗? 到這時節, 古人, 只道得箇殺人刀活人劔.)” 본서 p.88 『선원소류』 주석 156 참조.
  63. 63)『禪門拈頌說話』 618칙(H5, 482c9), “제2구에 이르면 수많은 소식이 있겠지만, 제1구를 기준으로 하면 다만 사람을 죽이는 칼과 사람을 살리는 검만 있을 뿐이다.(至第二句, 有許多消息, 若約第一句, 則但殺人刀活人劒而已也.)”
  64. 64)『禪門拈頌說話』 1008칙(H5, 707b10), “ ‘몇 번째 기틀인가?’라고 한 말:대체로 학인을 가르침에는 세 등급 기틀 중 한 기틀을 쓰고, 온전한 기틀을 그대로 드러내는 일은 벌이지 않는다. 구절로 보면 세 등급 속에 모두 삼구가 들어 있다. 삼구란 인人과 경境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곧바로 상근기를 가르치며 제1기에서 들어 보이면 구절마다 하나하나에 온전히 제기되어 있다. 온전히 제기되어 있다면 ‘삼구를 벗어난 일구’나 ‘일구에 삼구가 모두 갖추어진다.’거나 ‘삼구가 일구에 귀착된다.’거나 ‘삼구와 일구가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거나 하는 따위의 주장이 모두 군더더기 말에 불과하여 어느 것도 특별한 사안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실은 두 구절에 불과하며 중간 구절이라는 말도 아무 효력이 없다.……마지막에 ‘남산에서 구름이 일어나니 북산에서 비가 내린다.’라고 한 말:이 말로써 옛사람은 그렇게 적절한 소식을 전할 수 있게 되었던 까닭에 사람을 죽이는 칼과 사람을 살리는 검에 대해서만 말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한 줄의 끈 縚의 음은 刀 은 30푼 나간다.’라는 말은 ‘남산에서 구름이 일어나니 북산에서 비가 내린다.’라고 한 말보다 못하다. 어쩔 수 없이 중근기를 위해 제2기第二機에서 시설하면 격칙格則을 완성한다. 체體와 용用의 구절을 예로 들면 체 안에 용이 있고 용 안에 체가 있다. 또한 중간구를 따르면 체와 용을 함께 거두고(收) 체와 용을 함께 놓아두지만(放), 사실은 삼구를 벗어나지 못한다. 비록 격칙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삼구를 한꺼번에 시설한다. 하열한 근기에게 자세하게 가르쳐 주고자 제3기 중에서 가르침을 주니, 수많은 차별과 지위를 시설하지만 그것도 삼구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이는 몇 번째 기틀인가?’라고 물었던 것이다.(第幾機者:大凡接人, 有三等機之機, 非全機機事也. 如句焉, 於三等中, 皆有三句. 三句者, 人境是也. 故直接上根, 向第一機提持, 則句句一一全提. 旣是全提, 則三句外一句, 一句該三句, 三句歸一句, 三一不相涉之論, 皆爲剩語, 非是別事也. 然則其實不過兩句, 所謂中間句者, 亦無所得力矣.……下云‘南山起雲北山下雨’者:以此所以古人到這時節, 只道得个殺人刀活人釰. 然則‘一條縚 音刀 三十文’之言, 不如‘南山起雲北山下雨’也. 不得已爲中根, 向第二機施設, 則完成格則. 如體句用句, 體中有用, 用中有體. 且約中間, 體用雙收, 體用雙放, 其實亦不出三句. 雖然未離格則, 三句一時施設也. 曲爲下劣之根, 向第三機中接得, 則施設許多差別地位, 亦不離三句也. 故云是第幾機.)”;『禪源溯流』(H10, 675b18), “(『소쇄선정록(선문증정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고불 공안(古佛話 : 『선문염송』 1008칙)에서는 ‘제2기에서 들어 보여야 한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이것은 단지 저 살인도ㆍ활인검을 말한 것일 뿐이며, 부득이하여 (중근기를 위해) 제2기에서 시설하면 격格이 정해진 법도를 완성하니, 체ㆍ용ㆍ중의 삼구와 같다.’라고 하였다. (『선문염송』 147칙과 119칙을 인용하고서) 또 말하기를 ‘기용機用이 모두 활이니 대기大機를 활로 삼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고, 더하여 ‘기용은 단지 활이고 살과 활의 본체가 다르지 않기 때문에 살이 있으면 살이 활에 따라붙는다.’라고 하였다.(古佛話云, ‘向第一句[第二機의 오기]提持.’ 則只道得箇殺人刀活人劒也, 不得已向第二機施設, 則完成格則, 如體用中三句. 又云, 機用皆活也, 以大機爲活者, 非也. 又云, 機用但活, 而殺活體無二故, 有殺而殺付焉云云.)” 본서 p.199 『선원소류』 주석 383 참조.
  65. 65)『禪源溯流』(H10, 675c11), “그런데 어찌하여 이 백장百丈 재참 공안(再參話 : 『선문염송』 181칙)을 인용하면서는 대기를 살로 삼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지 않은 것인가. 진실로 읍좌揖坐와 고불古佛, 두 칙 공안은 제1구에서 살과 활을 밝히는 것이 옳다. 이 기용은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한 살인도와 활인검이 아니기 때문에 제1구 활인검을 또한 잡화포雜貨鋪라고도 하는 것이다. 이 활인검 잡화포 가운데 어찌 살인도 진금포眞金鋪가 없겠는가? 그러므로 제2처에서 살인도로 마음을 전한 것은 여래가 깨달은 경지이므로 여래선이라 함을 알아야 한다. 제2구에서 이 살은 오롯이 죽이기만 하는 살이므로 진금포라고 한다. 그렇다면 제1구가 활인검이 되고 제2구는 살인도가 됨이 분명하다. 어째서 제1구만 유독 살과 활을 갖추었다고 말하는가? 설령 대기가 살이라고 해도, 이 활 가운데 갖추고 있는 경지이므로 기용이 모두 활이다. 그런데 저들은 대기를 살로 삼는 것은 잘못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제1구에는 전혀 살의 뜻이 없는데 어떻게 제1구 가운데 살을 갖추었다고 말하는가? 억지로 살을 갖추었다고 하고자 했기 때문에 살활의 본체가 다르지 않다고 한 것이다. 본래 활이 있어야 살이 활에 따라붙는 것이다. 감히 묻건대 살이 어느 편에 따라붙는다는 말인가? 살의 수단을 쓴다는 것은 살과 활로 동시에 마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제시하였지만 몸을 의탁할 곳이 없는데 저 활이라는 집에 의탁해 품팔이한다는 것인가? 다만 꼿꼿한 등뼈로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를 부릴 줄만 알다가 어느새 이마를 땅에 붙이고 굴복하는 신세가 되어 버린 지경이다.(何不引此再參話而遽云, 以大機爲殺者非也耶. 故揖坐古佛二話, 第一句中所明殺活亦是. 此機用, 非三處傳心之殺人刀活人劒也, 故此第一句活人劒, 亦名爲雜貨鋪. 此活人劒雜貨鋪中, 豈無殺人刀眞金耶? 故知第二處殺人刀傳心, 是如來悟底, 故名如來禪. 而在第二句中, 此殺是單殺故, 名爲眞金鋪也. 然則第一句爲活人劒, 第二句爲殺人刀, 明矣. 何云第一句, 獨具殺活耶? 雖大機爲殺, 是活中所具底, 故機用皆是活也. 而彼云以大機爲殺者非也. 然則第一句, 全無殺意, 何云第一句中具殺耶? 欲强爲具殺, 故云殺活體無二, 故有活而殺付焉. 敢問殺付於何邊耶? 提示殺來也, 殺活同是傳心, 而無寄身之所, 附傭於他活家耶? 但知鐵脊撑天, 不覺䪿門着地.)”
  66. 66)압량위천厭良爲賤은 평민의 자녀를 사들여 노비로 만든다는 말로, 갖가지 관념에 물들기 이전의 온전한 모습이 분별의 틀에 들어가면서 오히려 하찮게 변질된다는 뜻으로 쓴다.
  67. 67)『禪門綱要集』 「一愚說」(H6, 855a2), “如來在寂滅場中, 初成正覺, 現千丈盧舍那身, 四十一位法身大士, 及宿世根熟, 天龍八部, 一時圍繞, 如雲籠月, 是第二句, 故云人天爲師.”
  68. 68)『禪門綱要集』 「一愚說」(H6, 854c4), “제1구에 한정해서 논한다면 요要를 먼저 하고 현玄을 뒤에 하는 것이 당연한 듯하다. 하지만 먼저 강요綱要를 들면 현은 반드시 그에 따르게 된다. 어찌 특별히 그것을 든 후에라야 현을 밝히겠는가. 하물며 보통의 경우 삼구를 논할 때 삼현三玄과 권실權實을 먼저 하고 삼요三要와 조용照用을 뒤에 하여 갖추어 말하는 것은 진실로 마땅하다. 종승宗乘(宗敎)에 본래 삼현이니 삼요니 하는 설이 없었는데 임제가 저 바깥의 설을 빌려 와 비로소 이름을 붙이고 가풍을 드러낸 것이다. 연이어 권실과 조용 등을 들어 증거를 삼았으니 이런 까닭에 옛것을 들어 지금의 것을 밝히는 것이다. 권실은 권교權敎와 실교實敎요, 조용은 종승에서 예부터 써 온 말이다.(若止論第一句, 則先要後玄, 少似當然. 然先擧綱要, 則玄必從之. 何更特擧然後明玄. 況此汎論三句, 先三玄權實, 後三要照用, 而備言之, 固其冝也. 宗敎本無三玄三要之說, 臨濟借他外說, 始立名言, 以顯家風. 連擧權實照用爲證, 所以擧古明今. 權實乃權實敎, 照用蓋亦宗敎中古語.)”
  69. 69)『禪門綱要集』 「三聖章」(H6, 851a5), “ ‘구 가운데 이미 현과 요의 뜻을 갖추었다면 다만 삼요만을 말하고 삼현을 말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제1구에서는 방편을 쓰지 않고 바로 이 삼요인을 오롯이 제기하기 때문이다. 요는 현의 강요이다. 요를 말하면 현 또한 그 가운데 있다. 그러므로 현과 요가 일구 가운데 갖추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問, ‘句中, 旣具玄要之旨, 只言三要, 不言三玄, 何也?’ 答. ‘第一句則, 不施戈甲, 單提此印故也. 然要是玄之綱要也. 則言要而玄亦在其中矣. 則可云玄要備在於一句中也.’)”
  70. 70)『禪文手鏡』에서 이와 관련한 언급을 찾지 못하였다.
  71. 71)정확한 전거를 찾지 못하였다. 다만, 대혜가 상중하 세 근기의 차별에 따라 삼인三印이 갈라질 뿐이라는 견해를 밝힌 대목은 다음과 같다. 『大慧語錄』 권20(T47, 894b17), “상사가 도를 들으면 도장을 허공에 찍는 것과 같고, 중사가 도를 들으면 도장을 물에 찍는 것과 같으며, 하사가 도를 들으면 도장을 진흙에 찍는 것과 같다. 이 도장 자체는 허공과 물과 진흙에 따라 아무 차별도 없으며 상중하 근기로 인하여 차별이 생길 뿐이다. 이제 이 도에 가장 빠른 길로 들어서고 싶다면 도장을 산산이 부수어 버려라. 그런 다음에 나, 묘희를 찾아와 맞서 보라.(上士聞道, 如印印空;中士聞道, 如印印水;下士聞道, 如印印泥. 此印與空水泥無差別, 因上中下之士故, 有差別耳. 如今欲徑入此道, 和印子擊碎. 然後, 來與妙喜相見.)”
  72. 72)진여眞如는 모든 법의 근거로서 생성과 소멸을 넘어서 상주하므로 ‘불변’이라 하고, 이러한 불변의 본질을 지니면서도 염染ㆍ정淨의 인연에 따라 움직이며 삼라만상을 드러내므로 ‘수연隨緣’이라 한다. 법성종法性宗의 공통된 설이며, 화엄종의 법계연기설法界緣起說에도 널리 적용된다. 『정선 휴정』(p.76) 주석 16, 본서 p.165 『선원소류』 주석 323 참조.
  73. 73)여병주병如甁注甁은 일기수사일기一器水瀉一器라고도 한다. 다른 병으로 물을 옮기면서도 한 방울도 흘리지 않는다는 사병무유瀉甁無遺와도 같은 말이며 줄여서 사병瀉甁이라고도 한다. 스승이 제자에게 친밀하게 법을 전하며 한 치의 실수나 남김도 없이 철저하고 고스란히 전함을 비유한다.
  74. 74)『禪門拈頌說話』 100칙(H5, 106a18), “모든 대상이 끊어지고 나면 아무것도 없는 그 경계(斷滅)에 떨어지는 사람도 있지만 2조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분명하게 깨어 어둡지 않고 뚜렷하게 항상 알고 있었으니, 깨달음과 수행이 곧바로 사라지면서 여래선을 증득하였던 것이다.(諸緣旣斷, 或有落斷滅者, 今二祖則不然. 明明不昧, 了了常知, 則悟修斯亡, 乃證得如來禪也.)” 본서 p.44 『선원소류』 주석 52, p.71 주석 111, p.140 주석 264 참조.
  75. 75)『禪門拈頌說話』 100칙(H5, 106a22), “그는 다시 모든 부처님의 법인法印에 대하여 묻고는 그 자리에서 마음을 편안히 하고 모든 부처님이 전한 마음의 본체를 깨달았다. (이 때문에) 앞에서 터득한 이해가 더욱 밝아져 ‘분명하게 깨어 어둡지 않고, 뚜렷하게 항상 알고 있다.’라고 말한 뒤 마침내 조사선을 알아차리고 달마의 인가를 받았던 것이다. 이것이 2조가 2조가 된 이유이다.(又問, 諸佛法印, 當下安心, 悟得諸佛所傳心體. 前解轉明曰, ‘明明不昧, 了了常知.’ 遂乃會得祖師禪, 得他印許. 此所謂二祖之爲二祖者也.)”
  76. 76)『禪門拈頌說話』 101칙(H5, 107c11), “달마 대사가 하루는 문인들에게 명하였다. ‘때가 다 되었거늘, 어찌 각자 얻은 것을 말하지 않느냐?’ 그때 도부道副가 대답하였다. ‘제 견해로는 문자에 집착하지도 않고 문자를 떠나지도 않는 것을 도의 작용으로 삼습니다.’ 달마가 말하였다. ‘너는 나의 피부(皮)를 얻었다.’ 니총지尼摠持가 말하였다. ‘제 견해로는 경희慶喜존자가 (부처님께서 환술로 보여 준) 아촉불국토를 보았지만 한 번 보면 다시 볼 필요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달마가 말하였다. ‘너는 나의 살(肉)을 얻었다.’ 도육道育이 말하였다. ‘사대四大는 본래 공이고 오음五陰은 실체로 있지 않으니, 제 견해로는 분별에 들어맞는 법은 하나도 없습니다.’ 달마가 말하였다. ‘너는 나의 뼈(骨)를 얻었다.’ 마지막으로 혜가가 나와서 예를 갖추어 삼배를 올리고 자리에 그대로 서 있자 달마는 ‘너는 나의 골수(髓)를 얻었구나!’라 하고 곧 가사를 전하고 법을 부촉하였다.(達磨大師, 一日命門人曰, ‘時將至矣, 盍各言所得乎?’ 時有道副對曰, ‘如我所見, 不執文字, 不離文字, 而爲道用.’ 祖曰, ‘汝得吾皮.’ 尼摠持曰, ‘我今所解, 如慶喜見阿閦佛國, 一見更不再見.’ 祖曰, ‘汝得吾肉.’ 道育曰, ‘四大本空, 五陰非有, 而我見處, 無一法可當情.’ 祖曰, ‘汝得吾骨.’ 最後慧可, 出禮三拜, 依位而立. 祖曰, ‘汝得吾髓!’ 乃傳衣付法.)” 이 칙 설화에서는 ‘골수를 얻었다’는 말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석하였다. 같은 책(H5, 110b12), “너는 나의 골수를 얻었구나:깊고 또 깊은 경지이다. 이는 직접 법을 이음으로써 입실했다는 말이니, 가업을 이을 만하기 때문에 가사를 전하고 법을 부촉한 것이다.(汝得吾髓者, 深之又深也. 此則親承入室, 克紹家業故, 乃傳衣付法也.)”
  77. 77)두찬杜撰은 시문을 지을 때 근거도 없이 임의로 지어내거나 조작하는 일을 말한다. 이 말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송나라 때 두묵杜默이 지은 시에 음률이 맞지 않는 것이 많아서 당시 사람들이 법식에 맞지 않는 것을 ‘두묵이 지은 것’이라는 뜻에서 두찬이라 하였다는 설이다.
  1. 1){底}日本國江田俊雄氏所藏筆寫本。